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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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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 점프의 생체역학적 연구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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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심층-양화1리-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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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11] 의과대학 소식지_OK(P)

Transcription: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1. 朝鮮王朝의 政治 經濟基盤 2. 兩班儒敎政治의 進展 3. 東北 西北界의 收復 4. 王權의 確立과 制度의 完成 5. 經國大典의 編纂과 頒行

1. 大藏經의 雕版 1. 朝鮮王朝의 政治 經濟基盤 (1) 高麗末期의 社會 政治情勢와 改革派의 成長 1) 高麗末期의 社會 政治情勢 1392년 7월 17일 群臣의 추대를 받은 58세의 武將 李成桂가 王位에 오름으로써 朝鮮王朝는 그 첫발을 내딛게 된다. 高麗에서 朝鮮으로의 王朝交替는 儒家들이 항상 理想으로 그려오던 中國古 代 歷史的이라기보다는 傳說的인 것이지만 의 禪讓에 미치지는 못하였으나 近代 이전의 세계 정치사상 유례가 드문 평화적 왕조 교체였다. 그러나 朝鮮王朝의 開創이 이렇듯 平和裡에 이루어졌다 고 해서 사회적 변혁이 수반되지 않은 단순한 停滞 속에서의 왕조 교체에서 그친 것은 아니며, 어떠한 陣痛도 경험하지 않고 시종일 관 순풍만을 안고 치달려 온 것만도 아니었다. 朝鮮王朝의 건국과 정은 先建國 後改革이라는 일반적인 건국과정과는 달리 先改革 後建國이라는 역코오스를 취하였기 때문에 이미 先改革을 통하여 평화적 왕조교체의 터전이 닦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개혁이 처음 부터 건국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기보다는 개혁과정 중에서, 개혁 의 결과로서, 그리고 개혁의 완결을 위하여 建國이 나타났던 것이 었다. 여기에 朝鮮王朝建國의 특색이 있다. 그러면 朝鮮王朝는 언제부터, 어떠한 개혁과정을 거쳐서 건국에 이르렀는가. 흔히 禑王 14년(1388)의 遼東공격과 李成桂의 威化 島回軍을 朝鮮王朝開創의 제일보라고 한다. 이 사건이 李成桂 일 파로 하여금 정치적 실권을 장악케 하여 그들의 주도하에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한 결정적 계 - 17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기가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新王朝建國의 주체세력의 개혁 운동은 이보다 앞서서 이미 恭愍王代부터 시도되었다는 것을 유 의할 필요가 있다. 다만 恭愍王代의 개혁은 개혁의 주도권이 체질 이 다른 僧侶 출신의 辛旽에게 장악되어 李朝建國의 주체세력은 부차적 구실밖에 하지 못했고, 그나마 保守貴族세력의 반발로 성 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지만, 개혁의 이념과 목표에 있어서는 禑 王 14년 이후의 그것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왕 조 성립의 선행과정으로서의 개혁운동을 체계적으로 계기적으로 이해하려면 禑王 14년 이후의 개혁을 공민왕대의 개혁과 유기적 으로 관련시켜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恭愍王代 이후 의 개혁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사회 정치정세에 대한 개괄적인 검토가 먼저 필요하다. 10세기 초에 건국되어 11세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한 高麗 는 12세기 중엽부터 中央集權的 統治體制가 무너지기 시작하여 武臣執權時代(12세기 후반 13세기 중엽)와 蒙古干涉時期(13세 기 중엽 14세기 중엽)를 거치면서 集權體制의 붕괴는 더욱 加速 化되어 갔다. 그리하여 14세기에 이르면 高麗王朝의 초기체제는 거의 붕괴되고 그에 따라 사회적 모순이 격화되어 高麗는 피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한다. 이 시기의 사회적 모순은 기본적으로 貴 族 官僚 寺院 및 豪勢家들에 의한 土地兼併의 진전, 즉 農莊의 확대로 빚어진 것으로서, 이로 인하여 밑으로는 農民經濟의 파탄 農民 을 초래하여 농민과 지주 및 통치계급과의 계급적 알력 을 격화시켰으며, 위로는 국가 재정수입을 감소시키고 高 麗政府의 중앙집권을 약화시켜 그 정치경제군사력을 극도로 蜂起 허약하게 만들었다. 農莊의 主人들은 국가에 대한 諸般負擔을 회 피하고 그 대신 良民을 그들의 농장에 끌어들여 私民化시키며, 耕 - 18 -

1. 大藏經의 雕版 作農民에 대하여는 地代=租穀을 징수하는 이외에 각종 雜物과 人 力을 임의로 수탈하여, 농민은 그가 신분적으로 良民이든지 奴婢 든지 상관없이 사회경제적으로는 農奴的인 처지에서 農莊主의 무 제한한 경제적 수탈과 압박에 신음하고 있었던 것이다. 土地兼併에 의한 農莊의 확대는 국가가 지배할 수 있는 公田의 감소를 가져옴으로써 新進官僚에 대한 田地(收租地)와 祿棒의 지급 이 어려워졌다. 따라서 신진관료들은 대토지 소유자인 權門勢族에 대하여 불만을 품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권문 세족의 권력독점으로 인하여 정치적으로도 여러 가지 제한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증진을 위해서도 개혁의도를 품을 가 능성이 많았다. 麗末의 개혁파 관리들이 대부분 권력과 경제력이 미 약한 이들 신진관리들이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14세기 중엽의 恭愍王代 이후로 農莊의 확대는 더욱 촉진되었 다. 공민왕대에는 紅巾賊의 侵寇로, 다음 禑王代에는 倭寇의 침구 로 戰亂이 계속되고, 그에 따라 戰功者들에게 대량의 功臣田이 지 급되어 공민왕 一代에 지급된 功臣田만도 약 2만7천 結이나 되었 다. 전란의 계속은 농촌의 황폐와 농민의 流亡을 초래하고 流民들 은 다시금 勢家의 農莊에 흡수됨으로써 농장의 발달을 더욱 촉진시 켜 주었다. 게다가 禑王代에는 保守反動政治가 강화되어 정치기강 은 극도로 문란해지고 권세가들에 의한 폭력적인 土地兼併이 자행 되어 사회적인 모순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격화되었다. 이렇듯 14세 가 중엽 이후에는 대내적인 모순 위에 대외적인 시련까지 겹쳐지게 됨 으로써 高麗國家는 극도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더우기 이 시기에는 中國大陸에서의 元 明 交替에 따른 震動의 여파가 고려 에까지 미쳐옴으로써 고려국가의 대외적 시련은 더욱 가중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高麗 말기의 사회 정치정세는 안으로는 農莊의 확 - 19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대로 인한 내적 모순의 격화, 즉 국가재정의 파탄과 中央集權 체제 의 붕괴, 농민과 지배계급과의 계급적 알력, 大土地所有者階層(權 門勢族)과 中小土地所有者階層(新進官僚)과의 모순 대립, 그리고 밖으로는 元 明 紅巾賊 倭寇 등 외세와의 민족적 시련이 격화 된 시기로서 특징지울 수 있을 것이다. 2) 恭愍王代의 改革과 失敗 大土地私有의 진전으로 인한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계급과 계층 상호간의 알력을 완화하려는 노력은 이미 13세기 중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몽고군 침입으로 江 華로 遷都하였던 고려정부는 高宗 44년(1257)에 관료의 생활보장 을 위하여 祿俸 대신 토지를 分給해 주는 祿科田制度를 마련하였 다. 뒤이어 元宗 12년(1271)에는 京畿道에 국한하여 祿科田을 設 定하고 科에 따라 토지를 분급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糊 塗策에 지나지 않았고, 權勢家 農莊主들의 저항에 부딪혀 제대로 시행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 제도는 계속 추진되어 忠烈 忠穆王代에도 祿科田지급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祿科田제도는 이렇듯 불철저한 상태에서 끝나고 말았지만, 그 취지에 있어서는 고려 초기의 田柴科제도나 고려 말기의 科田法과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서 科田制度의 先驅라고도 할 수 있다.1) 土地兼併을 억제하 고 王權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忠宣王에 의해서도 시도되었다. 그 는 귀족들이 불법적으로 소유한 토지와 노비를 推刷하여 本主人에 게 돌려주는 등 일련의 개혁정치를 시도하였으나, 몽고와 결탁된 權門世族의 반대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집권기간 을 단축시키는 결과만을 가져오고 말았다. 1) 深谷敏鐵 高麗朝祿科田考. 朝鮮學報 48辑 (1968) 閔賢九 高麗의 祿科田. 歷史 學報 53 54 合輯 (1972) - 20 -

1. 大藏經의 雕版 무너진 집권체제를 복구 강화하고, 대내적 대외적 모순을 극 복 시정하려는 노력은 14세기 중엽의 恭愍王代(1351 74)에 이 르러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2) 이때의 개혁은 두 단계로 구분된 다. 제 1단계 개혁은 공민왕 즉위 후 同王 5년(1356)에 이르는 기간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개혁의 기본방향은 元의 간섭으로부터 고려의 자주권을 회복하려는 데에 집중되었다. 奇轍 盧頙 權謙 등 親元派 귀족의 제거, 元의 간섭기구이던 行省의 폐지, 元의 年 號(至正) 사용의 폐지, 元에 의하여 變改된 정치기구의 高麗舊體 制로의 복귀, 元에 강점되었던 舊領의 탈환 등이 그것이었다. 이 같은 일련의 개혁으로 고려국가는 자주성 회복과 집권체제의 정 비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자주성 회복과 집권체제의 정비정책은 안으로 귀족세력의 저항과 밖으로 紅巾賊 및 倭寇의 침구로 인하여 커다란 시련에 부딪히게 되었다. 홍건적 및 왜구의 침입은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키고 사회를 불안에 빠뜨렸으며, 그들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武人들의 지위가 상승되고 軍功者에 대한 포상으로 功臣田 지급과 官爵(添設職)除授가 남발되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農莊발달이 더욱 촉진되고 職事 없이 虛職만을 가진 閑良官이 대거 배출되어 京 外에 散居하면서 國役을 기피하고 土地集積에만 여념이 없었 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이 대두한 武人세력의 일부와 殘餘 附 元세력이 결탁하여 공민왕을 제거하고 그에 의하여 개혁된 통치 체 제를 元 간섭하에 變改된 구체제로 다시 환원시키려는 책동이 일어 났다. 그리고 이러한 보수반동적 책동은 中國대륙에서 漢族國家 明 의 興起로 수세에 몰린 元이 失勢를 만회하려고 고려의 附元輩와 2) 恭愍王代에 이루어진 一連의 改革에 관하여는 閔賢九 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 上 下, 歴史學報 38輯 40輯 (1968) - 21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결탁하여 공민왕의 자주적 개혁을 적극적으로 저지시키려 한 데에 도 一因이 있었다. 親元勢力의 저항으로 마침내 공민왕을 도와 反 元親王운동에 앞장 섰던 수명의 功臣이 제거되고, 對元 외교관계가 재개되었으며, 정치기구가 元 간섭하의 변개된 체제로 복구되었다. 親元勢力은 공민왕 12년에 공민왕의 行宮인 興王寺를 습격하여 王 을 살해하려고까지 하였으나, 崔瑩 등 武將의 신속한 출병으로 공 민왕 살해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金鏞 등 이 사건을 계획한 附元輩 는 誅殺되었다. 元은 자신의 武力으로 反元勢力을 제거하고 親元政 權을 수립하기 위하여 元에 왔었던 親元分子 崔濡에게 1만 명의 군 사를 주어 출병케 하였으나, 이도 역시 崔瑩 慶千興 李成 桂 등 무장의 善防으로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공민왕 12년에서 13년 초에 걸친 이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附元勢力의 책동은 분쇄되고 그대신 그들을 진압하는 데 공로를 세운 崔瑩 慶千興 吳仁澤 등 무장들의 지위가 급속도로 상승되어 그들은 새로운 정치적 실권자 로 등장하였다. 이들 신흥 武將勢力은 고려국가의 자주성 회복과 국권수호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왕권 및 중앙집권 체제의 강화라는 또 다른 측면에 있어서는 도리어 부정적 인 작용을 하였다. 農莊의 급속한 확대, 添設職 濫授로 인한 閑良官 의 확대,3) 合坐機關인 都評議使司의 확대 등이 무신들의 권력확대 와 병행하여 나타난 것으로서, 이러한 사태진전에 따라 왕권과 집 권체제는 더욱 약화되어 갔다. 이제 왕권 및 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해서는 武將세력의 제거와 土地兼併의 정리, 閑良官에 대한 적절한 통제, 그리고 고려 본래 의 儒敎的 中央集權的 官僚體制를 정비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3) 高雜末期에는 添設職 檢校職 退職官吏 등을 散官 閑散官 또는 閑良官이라 고 불렀다. 閑良에 관하여는 千寬宇 随末鮮初의 閑良, 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및 韓永愚 麗末鮮初 閑良과 그 地位, 韓國史硏究 4 (1969) - 22 -

1. 大藏經의 雕版 文官 養成의 필요성 등이 요청되었다. 공민왕 14년(1365)에 무명 의 僧 遍照(뒤에 辛旽으로 改名)가 최고 실권자로 등용되면서 착 수된 일련의 개혁정치는 이러한 요청에 부응하여 나타난 것으로서 공민왕 집권 초기의 개혁이 주로 고려국가의 민족적 모순을 극복 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때의 개혁은 민족 내부의 모순, 즉 대내적 모순을 완화,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최고의 실권자이던 崔 瑩과 그 밖의 武將세력을 정권에서 배제한 다음 새로운 실권자로 서 등장한 辛旽에 의하여 추진된 개혁정치는 대략 다음과 같다. 서, 권세가들이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公私田의 토지를 본 첫째는 田民推整事業으로 대표되는 사회 경제상의 개혁으로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良民으로서 강제로 노비로 된 자와 남의 노 비를 탈취한 것에 대해서는 이를 본래의 상태로 환원시켜 주었다. 둘째는 閑良官(散官)에 대한 통제강화이다. 공민왕대에 들어서 서 급속히 팽창된 添設官을 비롯하여 檢校職 同正職 退職官吏 등 職事 없이 職銜만을 갖고 있는 수많은 閑良官을 軍事編制 속에 포함시켜 京城에서 宿衞임무를 맡게 한 것이 그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外方에 거주하면서 軍役을 회피하고 國家支配力의 약화를 틈타서 土地兼併 農民收奪 良民強占 官令의 거역 등 갖가지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그들을 居京宿衞 케 한 다는 것은 군사력의 증강은 물론이요 그들의 지방사회에서의 불 법행위를 막을 수 있는 이중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辛旽의 집권기에 나타난 제 3의 혁신은 儒敎의 진흥 및 儒敎政 治의 지향이니, 成均館 교육의 강화와 과거제도의 개혁 강화가 그것이었다. 유교는 高麗國初 이래로 중앙집권적 관료정치의 지도 이념이 되어 왔으나, 무신집권 시대와 몽고 간섭시기를 거쳐 오면 서 유교이념에 입각한 文治主義的 中央集權的 관료체제가 붕괴 - 23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되면서 유교이념 그 자체도 점차 퇴색해 버리고 다만 그 문학적 기능 詞章만이 유지되어 왔으며, 그에 따라서 科舉시험에 있어서 도 詞章이 중요시되었고, 과거제도 그 자체도 귀족 문벌정치에 눌려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13세기 말에 이르러 性 理學이 수입되었으나, 몽고 간섭하의 변태된 풍토 속에서는 정치 이념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몽고 간섭시기 이후로 꾸준히 성장하여 온 민족적 자각 과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지향한 개혁에의 의지가 공민왕대의 개혁기를 맞이하여 다시금 개혁의 이념적 지주로서 儒敎(性理學) 진흥의 필요성을 제고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改革政治의 이념으 로서의 儒敎는 종전과 같은 詞章 중심일 수는 없었다. 과거제도를 詞章 중심에서 經學 중심으로 개혁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뒷날 조선왕조를 개창시킨 진보적 儒臣세력이 대부분 공민왕 이후 개 편 강화된 科擧를 통과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퍽 흥미로운 일이 다.4) 이상 辛旽 집권기에 추진된 일련의 개혁은 요컨대 儒敎理念에 입각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의 재건이라는 하나의 목 적에 귀일되는 것으로서, 그 기본이념에 있어서는 朝鮮王朝를 건 국한 개혁파 儒臣의 이념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辛旽의 개 혁은 잠정적인 성공을 거두는 데 그치고 말았다. 武將세력을 비롯 한 舊家世族의 반발이 너무나 강한 데 비하여 개혁의 추진세력은 너무나 미약하였다. 林樸 鄭夢周 金容九 李崇仁 尹紹宗 鄭 道傳 등 少壯儒臣들이 공민왕 辛旽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해 주는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아직 4) 李朝建國의 主動的 役割을 한 主要人物의 科擧合格年代는 다음과 같다. 鄭道傳 (恭愍王 11年). 趙浚(恭愍王 23年), 南誾(恭愍王?年), 南在(恭愍王 20年) 趙璞 (禑王 8年), 鄭擢(禑王 8年), 鄭摠(禑王 2年), 吳蒙乙(禑王 6 年). - 24 -

1. 大藏經의 雕版 미약하였다. 더우기 개혁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승려 출신의 辛 旽과 이들 儒臣들과는 체질상 차이가 있었고, 辛旽은 만년에 이르 러 개혁 방향이 國利民福보다는 자기 일신의 권력확대에 기울어 졌기 때문에 공민왕과도 충돌되었다. 결국 辛旽은 공민왕 20년에 국왕 살해 혐의로 제거되고 孤立無援에 빠진 공민왕 자신도 권세 가와 타협하여 타락된 생활 끝에 피살되고 말았다. 공민왕과 辛旽 의 몰락은 개혁에 참여했던 少壯儒臣들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기도 하였다. 武將 및 舊家世族의 옹립 속에 10세의 소년 禑가 즉 위하면서 李仁任 일파의 극단적인 부패정치가 자행되고 少壯儒臣 들은 일시 정계에서 몰려났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대세의 흐름 속에서 이들은 다시금 정계에 복귀되어 착실히 그들의 정치적 세 력을 성장시켜 갔으며. 禑王代에 새로이 官界에 등장한 新進儒臣 및 일부 진보적인 무장과 연결되어 마침내 확고한 정치세력을 형 성하게 되는 것이다. 3) 改革派의 性格 공민왕대 이후로 조선왕조 개창에 이르기까지 근 반 세기간 보 수 귀족세력과 갈등하면서 개혁을 추진시켜 간 개혁파 인물들은 체질에 있어서 보수귀족과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개혁파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해서 그 모두가 같은 입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 요, 온건한 개량노선을 지지 하는 측과 急進的 積極的 改革路線 을 지지하는 측이 있어 서로 간에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또한 개 혁이 진행됨에 따라 高麗王朝 테두리 속에서의 개혁을 주장하는 파와 易姓革命을 주장하는 파와의 분열 대립이 발생하기도 하였 다. 대체로 온건론자들은 전자에 속하고, 급진론자들은 후자에 속 하였다. 朝鮮王朝開創은 결국 후자의 궁극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 - 25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이었다. 전자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로는 李齊賢 李穡 鄭夢周 權近(나중에는 적극파로 전향) 등을 들 수 있고, 후자의 대표적 인물로는 鄭道傳 趙浚 尹紹宗 南誾 南在 趙仁沃 趙璞 鄭 擢 등 儒臣과 무장 李成桂를 들 수 있다. 이들 양파의 인물들은 국초 이래 世世로 권력과 경제기반을 닦 아온 世臣大族이나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토지를 集積한 대토지 소 유자 등 權門世家에 속하는 관리들이 아니라 대부분 지방의 中小 地主的 土着的 생활기반을 가진 豪族 내지 鄕吏(戶長)계열의 지 방 세력가로서 내려오다가 고려 중기 무신란 이후 또는 고려 말기 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관계에 등장하여 士族家門으로 성장된 新興 士族의 후예들이라는 것과5) 가문을 배경으로 門蔭에 의하여 宦路 에 오른 것이 아니라, 대부분 儒學을 깊이 공부하고 科擧를 통하여 학문실력으로써 관리가 된 學者官人 즉 최고의 儒敎的 知性을 갖 춘 엘리트 官人이라는 점에서는 피차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정치적 지위 경제력 이념상의 차이가 있었다. 온화개량파는 대체로 급진개혁파보다 정치적 연륜이 오래 고 따라서 정치적 지위도 높았으며, 경제적으로도 후자보다는 우 월한 위치에 있었다.6) 이에 비하여 급진개혁파의 대부분은 경제 5) 온건개량파의 대표적 인물인 李穡은 韓山郡 鄕吏 李自成의 孫子로서 父 李穀 때부터 士族이 되었으며, 李齊賢은 慶州戶長의 後孫으로서 父 李瑱으로부터 뚜 렷한 士族으로 향상되었다. 鄭夢周는 迎日縣 鄕吏의 後孫으로 仁宗朝의 鄭襲明 으로부터 士族이 되었다. 급진적 개혁파의 巨頭인 鄭道傳은 奉化戶長 鄭公美의 4代孫으로서 3代祖인 鄭英粲으로부터 官人身分이 되었고, 趙浚도 6代祖인 趙椿 代로부터 벼슬길에 오른 비교적 미미한 家門의 후예이다. 그밖에 開國功臣中에 서 戶長家門의 후예에 속하는 者로는 安景恭(3代祖부터 出仕) 李濟 李稷(둘 다 3 代祖부터 出仕) 등이 있다. 그러나 南誾 南在 趙璞 鄭擢 鄭摠 등은 家門이 비교적 좋은 편에 속하여 모두가 豪族이나 戶長系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 다. 李佑成 高麗朝의 吏에 대하여, 歷史學報 23輯 (1964) 參照 6) 온건개량파의 대표자인 李穡의 경우를 보면, 그는 공민왕 12年의 辛丑扈從功臣 에 1등으로 책봉되어 100결의 功臣田을 받았다. - 26 -

1. 大藏經의 雕版 력이 미약하였으며,7) 공민왕대에 功臣田이 대량으로 지급될 때에 도 거의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념상으로도 전자는 儒學者이면서도 佛敎에 대하여 타협적 태도를 보여 주어 불교를 철저히 배격하는 후자의 태도와는 구별되었다. 한편 性理學에 대한 이해 태도에 있 어서도 전자가 좀더 理에 편중되고 治人보다 修己에 역점을 두고 관념적 윤리적 측면에 치중하였던 데 반하여 후자는 主理이면서 도 氣를 중시하고 修己보다 治人에 역점을 두며, 물질적 정치경 제적 측면 특히 富國強兵을 위한 정치 경제적 개혁에 관심이 많 고, 또한 孟子의 王道政治思想과 民本理念, 그리고 周禮에 입각하 여 儒 敎的 理想國家를 건설하고자 하는 데 큰 관심을 두었다. 후 자는 이와 같은 자신의 性理學을 實學8) 또는 正學으로 자처하고 佛敎를 異端으로서 철저히 배격하였으며, 이조국가 개창 후에 있 어서도 지배적 이데올로기로서 15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을 위한 일련의 개혁정치의 이념적 支柱가 되었던 것 이다. 온건파와 급진파는 초기에 權門世族의 土地兼併에 반대하는 데 있어서는 보조를 같이하였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급진파에 의하 여 추진된 전면적인 토지개혁과 新王朝 開創공작에는 반대하였다. 7) 예컨대 鄭道傳은 父 鄭云敬이 家無宿貲 妻子未免飢寒 이라 할 정도로 가난 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南在 역시 어렸을 적에 집이 가난하여 一奴 一馬 밖에 없었다 고 한다. 田制改革運動의 先鋒에 섰던 趙浚은 父의 性品이 淸白하고 榮利를 不慕하였다고 한 것이나 兄弟가 여섯이나 되며, 또 田制改革에 그토록 熱意를 보였던 점 등을 고려하면 그의 經濟力이 대개 어떠하였으리라는 것이 짐작 된다. 鄭道傳의 經濟的 條件에 관해서는 韓永愚 三峰 鄭道傳 硏究, 韓國文 化硏究叢書 12 (1973) 緒論 參照 8) 實學이란 용어는 麗末의 性理學(朱子學)者들이 性理學 자체를 麗代 詞章 중심 의 儒學 및 佛敎와 대비하여 實學이라고 불렀으므로 改良派 性理學者나 急進的 改革派 性理學者나 모두 實學者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李朝 後期의 소위 實學者 와 體質的으로 相通하는 面은 急進改革派 性理學者가 훨씬 가깝다고 하겠다. 韓㳓劤 李朝 實學의 槪念에 대하여 (1961) pp. 363 373-27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그리하여 온건파는 마침내 급진파에 의하여 대부분 정치적으로 제 거 되지만 급진파의 급진적 개혁은 온건파 및 舊家世族의 견제작 용으로 적지 않이 타협과 후퇴를 면키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다음에 급진적 개혁파의 領袖로서 마침내 新王朝의 君王으로 추대된 무장 李成桂는 어떠한 사람인가. 그는 공민왕대 이후 계속 되는 전란 속에서 수많은 무공을 세워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신흥무장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비슷한 경력과 비 슷한 공로로써 역시 광범한 국민적 신망을 모으고 있던 다른 무 장, 예컨대 崔瑩 등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첫째 寒微한 가문 의 출신이었다. 그의 祖先 가운데서 高麗의 중앙관인으로 출세하 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의 부친대로부터 비롯될 만큼 그의 家系는 寒微하였다. 그러나 그는 비록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먼 조 상은 全州지방의 豪族이었던 것 같고, 뒤에 永興으로 移居한 뒤로 는 永興지방을 근거로 동북지방에 부식된 그의 토착적 지반 은 매우 강한 편이었다. 그것은 그의 주로 군사적 지반이지만 4代祖로부터 닦여진 것으로서 이성계는 이러한 토착적 지반을 십 분 이용하여 남보다 뛰어난 무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며, 그가 어느 다른 무장보다도 막강한 세력을 옹위하게 된 까닭도 이러한 토착적 지반에 의존하는 바가 많았다. 그의 출신성분상의 이러한 특징은 그의 체질을 反貴族的 農民地主的 입장에 가깝게 하였으 며, 이러한 체질이 급진적 개혁파 儒臣들과 연결될 수 있는 조건 을 부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한 한갓 애국 애족에 투철 한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전략가이며 자제력과 포용력이 큰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그가 공민왕 10년(1361)에 東北面의 일개 武弁(上萬戸)으로 起身한 이래 江界萬戶 朴儀叛亂軍의 진압(1361), 開京을 침범한 紅巾賊의 소탕(1362), 동북지방에 침입한 北元의 - 28 -

1. 大藏經의 雕版 納哈出(1362)과 女眞의 三善 三介軍의 격퇴(1364), 崔濡에 이끌린 元兵의 격퇴(1364), 2차에 걸친 元의 東寧府(滿洲 開原지방)에 대한 공격(1370), 江陵 德源 江華 智異山 雲蜂 등지에서의 倭寇의 섬멸(1372 80) 등 남북의 침략자들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 한 무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애국심과 뛰어난 전략, 그리 고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애국적 農民軍士의 협조 때문이었다. 그 는 당시 고려사회가 안고 있던 대외적 시련과 대내적 모순에 대해 서도 이를 정확히 통찰하고 있었으며, 이를 극복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한 적극적인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개혁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것이 또한 같은 애국적인 무장이면서도 보수적 기질이 농후하여 적극적 개혁을 반대하던 崔瑩이나 그 밖의 무장들과 다 른 점이었으며, 개혁파 儒臣과 연결되는 또 하나의 조건을 부여하 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장 이성계와 儒臣세력이 결합되고 李成桂가 新王으로 추대된 데에는 또 다른 객관적 정세를 무시할 수 없다. 당시의 객 관적 사회 정치정세는 무장 李成桂나 儒臣들 가운데서 어느 한쪽 의 힘만으로는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다 시 말하면 당시의 긴박한 대외적 시련이나 舊家世族의 반발에 효율 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는 李成桂 같은 국민적 신망이 두텁고 탁월 한 무장의 힘을 필요로 하였고, 개혁의 이념적 지주를 수립하고 개 혁을 실천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하여는 진보적이며 행동적인 지식 인 계층, 신흥 儒臣세력의 협력을 절대로 필요로 하였다. 실제로 이 두 세력을 빼놓고는 개혁을 추진할 만한 또 다른 세력은 없었다. 그리고 이 두 세력이 효율적으로 연계를 맺고, 또 그들이 농민대중 의 이익을 어느 정도 옹호하는 입장에서 있어서 그들의 지지를 얻 을 수 있었던 데에 개혁이 성공을 거두게 되는 기본요인이 있었다. - 29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4) 改革派의 改革理念 개혁파 관리들이 田制改革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을 추진시키고 조선왕조를 건국한 것은 단순히 그들 자신의 계급적인 이해관계, 다시 말하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추종자들의 절박한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 이상의 사회개혁 내지 사회혁명적인 성격을 찾아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9) 그러나 이것은 피상 적인 관찰이다. 물론 麗末의 개혁과 新王朝의 개창이 피지배계급인 농민세력이 주체가 되어 지배계급을 넘어뜨리고 새로운 農民政權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사회혁명이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개혁의 주체 가 농민이 아닌 지배층의 관리들이요. 개혁의 목표가 農民政權의 수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官人支配國家 건설에 있었기 때 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거기에 사회개혁적인 요소가 없거나 농 민의 이익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개혁파의 개혁목적은 직접적으로는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에서 출발하 였다고 보겠으나, 그것이 목적의 전부는 아니었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사회정의의 실현과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의지와 동경이 흐르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理想社會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여 그것은 尚古的 유교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의 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3대(夏 殷 周) 사회를 기본 모 델로 하고 여기에 중국 역 대의 제도와 고려 초기의 제도를 損 益 참작하여 유교적 理想國家를 재현하려는 것이었다. 이제 개혁 파의 대표적 이론가이며, 朝鮮 초기의 문물제도를 성립시킴에 있 어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鄭道傳 趙浚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 9) 李相佰 李朝建國의 硏究 (1954) - 30 -

1. 大藏經의 雕版 여 개혁파의 개혁이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피고자 한다.10) ㄱ. 政治에 대한 改革理念 개혁파 관리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통치체제는 한마디로 강력 한 중앙집권적 관료제였다. 그런데 그러한 통치체제는 다음과 같 은 특징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 ① 우선 정치는 君主나 어떤 개인의 恣意에 의하여 행해져서는 안 되며, 일정한 憲章法典을 토대로 하여 법치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法은 권력을 토대로 한 實定法이 아니라 천지자연의 법칙과 부합되는 일 종의 自然法이어야 하며, 倫理規範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따라서 法治를 지향하되 법만능정치가 아 니라 윤리를 토대로 한 法治體制가 이루어져야 한다. 倫理에서 가 장 기본이 되는 것은 仁으로서,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 仁을 체득 하는 것이 德이요, 仁을 대인관계에서 표현하는 것이 愛이 다.11) 따라서 政治倫理의 기본은 仁政 德治 愛民 民本 爲民 등으로 표현되며. 이를 한마디로 王道政治라고도 한다.12) ② 天地自然의 法則(天心天命)을 받들어 그것을 인간사회에 서 代行하는 자가 君主이며, 君主의 역할을 나누어 담당하는 者가 臣下(관리)이다.13) 따라서 君主와 관리는 일반백성(民)보다 존귀 10) 鄭道傳의 政治 經濟 哲學思想에 관해서는 韓永愚 前揭書 參照 11) 鄭道傳 朝鮮經國典(上) 正寶位條 聖人之大寶曰 位 何以守位 曰 仁 仁 愛乃仁之所發 於是 正其心以趙乎仁 推其愛以及於人 仁之體植 爲心德之全 立而 仁之用行矣 12) 鄭道傳 經濟文鑑下 縣令 夫民者 國之本也 古者 方制四海 而天子列爵頒 祿 非爲臣下 皆以爲民也 故聖人一動作 一施設 一命令 一法制 必本於民 故擇 其人以牧養之 重其任以付責之 假其權以安固之 厚其祿以寵利之 上之責史 一本 於民 吏之報上 一本於民 則民重矣 國之本而君之天 鄭道傳 朝鮮經國典 上 版籍 民者 爲人君者知此義則其 者 不可不至矣 所 以愛民 13) 鄭道傳 朝鮮經國典 上 官制 人君 代天工治天民 不可以獨力爲之也 於是設官 分職 布于中外 博求賢能之士以共之 - 31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한 위치에 있으나, 그들은 백성 위에 君臨하는 존재가 아니라 백성 들을 어린아이(赤子)처럼 보호하고 기르고 사랑하고 경제생활을 안정시켜 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君主의 하늘 14)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君主는 天命의 代行者이지만 天命 天心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民心 에 의하여 바뀔 수도 있기 때문에 만약 君主가 자기의 의무와 책임 인 仁政을 저버려 민심을 잃게 되면 天心 天命이 바뀌고, 天心 天命이 바뀌면 君主는 교체될 수도 있다. 이것이 곧 易姓革命이다. 그러므로 君主는 無限絕對的이며 神聖不可侵의 권력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民을 존중하고 民心 民意를 중요시하며, 君主權의 상대성과 제한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民에 의한 통치자의 교체가 제 도적으로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 다. 易姓革命의 근본 요체는 통치자의 善政을 촉구하는 경계경보의 의미가 강하다. ③ 統治體制는 周禮 六官制度를 기본 모델로 하여 이를 현실에 맞게 재조정한 것으로서 宰相(侍中 1人 또는 약간명)을 정점으로 하여 宰相 밑에 행정 실무관서로서 六部(六曹)를 두고, 六部 아래에 각 衙門을 기능에 따라 分屬시켜, 이들은 상하의 명령계통에 의하 여 실무를 집행하는 질서정연한 피라미트형의 階層制를 이룬다.15) 民者 園之本而君之天 (趙)浚又率 同列條 陳時務曰 謹按周禮 天官家宰 以卿一人掌邦之六典 以佐王治邦國 其司徒以下 各以其職聽屬焉 而六卿之屬 又有 三百六十 是則三百六十之屬 統於六卿 而六卿又統於家宰也 臣等願以六典之 事 歸之六部 以各司分屬乎六部 宰臣 自侍中己下 提綱於上 六部判書 各 以其職 聽命於下 如是則簡以制繁 卑以聽尊 上下相維 大小相統 如網擧而目 張 領挈而裘順君相優游於上而百職奔走於下 敎令易行 政事易擧也 鄭道傳 經濟文濫 上 宰相 周官 大宰之職 掌建邦之六典 以佐王治邦國 近按 六 典 六卿之職也 冡宰無所不通 自百而歸之六 自六而歸之一 擧其網而衆目張 所 操者至简 所居者至易 而所制者至衆 上下相統 內外交應 本末具備 大小畢擧 14) 鄭道傳 朝鮮經國典 版籍 15) 高麗史 列傳31 趙浚傳 - 32 -

1. 大藏經의 雕版 宰相은 최고의 행정책임자인 동시에 정책결정자로서 밑으로는 百 官을 통솔하고 萬民을 다스리며, 위로는 국왕과 대등한 위치에서 국왕과 더불어 정책을 議定하고 천지자연의 陰陽을 조화시키는 등 광범한 통치의 실권을 장악한다.16) 君主는 宰相보다 上位에 있으나 실제의 권한은 재상을 임면하고 재상과 정책을 議定하는 일 밖에 없다.17) 정책을 의정하는 데 있어서는 君主의 專斷이 용 납되지 않고, 군주는 재상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며, 재상은 군주 의 잘못을 과감히 반대 시정하는 이른바 獻可替否 正君 格君을 본직으로 삼아야 한다.18) 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는 재상 이 외의 관리가 合坐해서는 안되며, 따라서 60 70여 명의 宰臣 樞 臣 三司官員이 合坐하여 政務를 의결하는 당시의 都評議使司 체 제는 지양되어야 한다.19) ④ 宰相 다음으로는 言論과 監察의 기능을 맡은 臺諫의 기능을 현재보다 강화하여 위로는 君主와 宰相의 失政失德을 자유스럽 게 비판 탄핵하여 그 잘못을 바로잡고, 밑으로는 百官의 비행을 규찰하여 그 탈선행위를 방지하게 한다. 특히 諫官의 언론자유를 최대로 보장하고, 諫官 이외의 臣下와 士 庶人 商工人 등 모든 백성에게도 言路가 개방되어야 한다.20) 16) 鄭道傳 經濟文鑑 上 宰相 宰相之職 上則調和陰陽 下則撫安黎庶 內以平章 百姓 外以鎭撫四夷 國家之爵賞刑罰 所由關也 天下之政化敎令 所由出也 殿陛之 上 論道德而佐一人 廟堂之上 執陶甄而宰萬物 17) 鄭道傳 朝鮮經國典 上 治典 人主之職 在論一相 同 宰相年表 人主 之職 在擇一相 百執事以下 不與也 高麗史 列傳 趙浚傳 浚又率同列條陳 時務曰 人主之職 論相而已 18) 鄭道傳 經濟文鑑 上 宰相 人主之職 在論相 人主以論相爲職 宰相以正君爲職 苟當論相 求其適己而不求其正己 取其可愛而不取其可畏 則人主失其職矣 當 正君者 不以献可替否爲事而以趨和承意爲能 不以經世宰物爲心而以䆟身固寵爲術 則宰相失其職矣 同 相業 格君 引君當道 献可替否 19) 高麗史 列傳 趙浚傳 浚又率同列陳時務曰 宰臣 樞密之合坐 始於事元 之 初至于近代 坐都堂與國政者 至六七十人 官職之濫 古未有也 願自今 非論道經 邦 變理陰陽 正己以正百官者 不許兩府 20) 鄭道傳 經濟文鑑 下 諫官 古者 諫官無定員而言路益廣 古者 上而公 卿大夫 下而至於土 庶 商 贾 百工之賤 莫不得以諫 是擧天下 皆諫諍也 - 33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⑤ 宰相臺諫 다음으로는 武官과 軍士를 중시강화하여 수도 치안과 궁성경비 및 국방을 강화함으로써 내란으로부터 정권을 보호하고 외침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는 데 만전을 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軍權을 중앙에 집중하여 國軍體制를 확립하고, 외방의 국방군을 교대로 上京케 하여 수도 및 궁성경비를 맡게 함 으로써 국방과 치안을 동시에 담당하게 한다. ⑥ 끝으로 백성을 직접 통치하는 守令制度를 강화하여 무엇보 다도 수령의 質을 높임으로써 백성에게 폐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守令의 임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생산력을 높이어 백성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는 일이며. 그와 동시에 백성들을 休 養 生息케 하여 民口를 중대시키고, 백성의 교육강화, 그리고 禮 俗의 성립이 중요한 임무이다.21) 수령은 백성의 부모로서 백성의 경제생활을 자식처럼 돌봐 주어야 한다. ⑦ 한편 臣權의 특권화세습화분권화를 막고, 관리의 부정 불법행위를 막기 위하여 監察制度(司憲府.監司 등)를 비롯하여 相 避制度, 임기의 제한. 관리의 성적 평가제도, 시험에 의한 官吏 선 보장(科田祿俸지급) 등 여러 제도를 둔다. ⑧ 모든 국민은 良人과 奴婢로 대별된다. 전자는 신분상 자유인 발제도(科擧 吏科 및 取才), 관리의 地方居住 금지, 관리의 생활 으로서 庶人이라고도 하고, 후자는 자유를 갖지 못한 부자유인이 요 무권리한 인간으로서 백성(民)이라 불리지 못한다. 양인은 능 종사해야 하는데, 工商은 利를 추구하는 賤職이요 산업의 기본 력과 소질에 따라 士 農 工 商의 네 가지 직업 중 어느 하나에 21) 鄭道傳 經濟文鑑 下 監査 考課法 最 田野闢(三分五釐) 戶口增(三分五 釐) 學校興(三分五釐) 禮俗成(三分五釐) 獄訟平(二分) 盜賊息(二分) 差役均(一 分) 賦歛節(一分) 衣食足而知禮義 則自不犯法而趨事矣 故其分數 以次而降 - 34 -

1. 大藏經의 雕版 인 농업에 저해되는 점이 있어 이를 되도록 억제하고 士 農을 장 려한다. 士는 儒學을 연구 실천하고 후학에게 儒學을 가르치는 것을 業으로 하는 지식층으로서, 관리는 이들 士에서 선발하는 것 이 원칙이지만, 士와 農은 엄격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 면 士도 관리가 되기 전까지는 생업으로서 農을 하거나 後世敎育 의 보수로서 살아가야 하며, 농민자제도 鄉校에 입학하거나 晝耕 夜讀하여 儒學을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리는 결국 이들 지식층인 士와 農에서 선발되어야 하며, 관리선발의 기준은 가문이나 세력이 아니라 학문실력을 위주로 하여 그것을 공개 경 쟁시험에 의하여 평가 선발하는 것이다. 관리로서 갖추어야 할 실력은 전문적인 기술이 아니라 고도의 인문적 교양을 의미하며, 윤리 철학 역사 문학이 중심을 이룬다. 그러나 醫官 譯官 天文官 등 전문적 기술을 요하는 技術官도 필요하며, 이들은 인문 적 교양보다도 전문지식을 테스트하여 선발한다. 그러나 인문적 순으로 약간의 등차를 두어 文治主義 내지는 학술정치도덕정치 교양을 가진 文官을 가장 우위에 두고, 그 다음에 武官 技術官의 체제를 확립한다. 이상 개혁파 관리들이 추구하는 정치이념 내지 정치형태는 근 대의 정치이념과 관료제도에 매우 가까운 것으로서 이러한 이념 에 입각하여 건설된 李朝國家는 그만큼 근세국가로서의 면모를 풍부히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ㄴ. 經濟에 대한 改革理念 개혁파 관리의 경제사상 역시 尙古的 儒敎의 경제이념이 기저 를 이루는 것으로서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仁政과 王道政治의 근본목적은 國民의 經濟生活의 안정에 있 다. 국민의 경제생활이 안정되지 않고서는 王道政治는 실현될 수 - 35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없으며, 백성들은 恒心을 가질 수 없어서 예절이나 倫理道德을 지 킬 수도 없게 될 것이다.22) 한편 흉년이 들었을 때 빈민을 구제하 고,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운영할 물질적 기반을 구축하며, 強兵 을 육성할 군량미의 확보가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國家의 재정 수입이 증대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최소한도 3년간 소비할 수 있는 양곡을 항시 備蓄하고 있어야 국가구실을 할 수 있다. 요 컨대 富國強兵과 民生安定이 政治 經濟改革의 궁극의 목표이다. ②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富의 원천인 農業을 장려 하여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농민을 토지에 安着시켜 놓으며. 농업 에 저해가 되는 상업과 수공업을 억제한다. 그리고 고려 말의 사 회적 모순을 격화시킨 기본요인이 되는 토지제도의 문란을 근본 적으로 개혁하여 위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향으로 토지를 재 분배해야 한다. ③ 土地鹽場山場漁場鑛山 등 주요 국가자원에 대한 國 有와 私有를 조화시켜 公益과 私益을 다같이 도모하고, 다만 토지 만은 필요에 따라 국가 각 기관 왕실 또는 각종 公役 담당자에게 재분배한다. 그러나 토지소유권을 완전히 양도해서는 안 되며, 소 유권의 일부인 收租權 또는 耕作權만을 기한부로 위양하여 國有 와 私有가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 ④ 토지의 재분배는 計民授田을 원칙으로 하여 모든 백성에게 民口數에 따라 토지를 분배하여 줌으로써 토지를 안 가진 사람이 없게 하고 土地兼併과 并作制(小作制)에서 오는 빈부의 격차를 해소한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농민을 가족노동 또는 소비노동에 의하여 경영할 만한 정도의 自營農으로 만듦으로써 地主小作制에 衣食足而知禮義 同 朝鮮經國典 上 衣食足而知廉恥 倉廩實而禮義興 太平之 22) 鄭道傳 經濟文鑑 下 監司 考課法 農桑 農桑 衣食之本 王政之所先 業基於此矣 - 36 -

1. 大藏經의 雕版 서 파생되는 지주의 중간수탈과 빈부의 격차를 없애고 농민경제 를 안정시켜 그들의 재생산을 보장해 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광범 한 自營農經濟에서 창출되는 잉여를 국가가 租稅로서 수취하여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키는 이중의 효과를 거둘 수 있게 한다.23) 그리고 국가가 이처럼 직접 收租하는 토지를 公田이라고 부른다. ⑤ 한편 국가는 王子를 비롯하여 現職官吏閑良官(軍役을 지 는 자에 한함)鄕吏胥吏 등 公役을 담당하는 자에게는 경작노 동에 종사하지 못하고 公役을 지는 댓가로 收租地를 지급하여 一 代에 한하여 지배하도록 하며, 국가의 제기관에도 收租地를 지급 하여 제반 경비에 충당하도록 함으로써 機關別 經费别 獨立會計 制를 채택하도록 한다. 국가가 이렇듯 개인 또는 공공기관에 收租 權을 위양한 토지를 私田이라고 부른다. ⑥ 私田京畿의 원칙에 의하여 私田은 京畿에 한하여 지급하고 外方은 公田으로 한다. 이것은 私田의 지나친 팽창을 억제하고, 私田受給者의 租稅收取를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⑦ 公私田을 막론하고 收租率은 10분의 1로 한다. 什一稅는 농민의 재생산을 보장하고 국가의 재정수입도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稅制이다. ⑧ 국가재정의 용도는 첫째 왕실의 경비조달(上供), 둘째 國用 (제사빈객전렵상황), 세째 관리의 녹봉지급(職事를 가진 官 吏에 한함), 네째 군량미, 다섯째 빈민구제를 위한 義倉과 빈민의 의약 공급을 위한 惠民典藥局 등으로 구분된다. ⑨ 君主는 私經濟를 가져서는 안 된다. 천하의 인민과 토지와 23) 鄭道傳 朝鮮經國典 上 經理 古者 田在於官而授之民 民之所耕者 皆其所授之 田 天下之民 無不受田者 無不耕者 故贫富強弱 不甚相過 而其田之所出 皆入於公 家 而國亦富 殿下在潜邸 蓋欲盡取境內之田 屬之公家 計民授田 以復古 者田制之正 - 37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財寶가 모두 군주의 소유이므로 군주는 따로 사유재산을 가질 필 요가 없다. 그러므로 군주가 필요로 하는 모든 物資는 국가기관을 통하여 공적으로 지급되어야 한다. 다만 君主의 사치와 낭비를 막 기 위하여 왕실경비의 지출권은 재상이 장악해야 한다.24) ⑩ 국가수입과 지출은 量入爲出의 원칙에 의하여 수입을 기초 로 하여 지출을 조정하며, 절약저축을 통하여 國富를 달성한다. 이상 열거한 經濟理念의 골자는 요컨대 국가에 의하여 강력히 통제되는 안정된 自營農經濟의 건설에 있는 것으로서 이러한 경 제체제야 말로 王道政治 내지는 仁政의 전제이자 목적이라고 믿 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의 물질 적 토대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개혁파의 개혁이념 가운데서 핵심을 이룬다고 볼 수 있는 政治 經濟理念의 개략을 소개하였거니와 이러한 이념이 개 혁의 실천과정에 서 적지 않은 수정 과 후퇴를 가져왔던 것은 사 실이었다. 그것은 반개혁파 세력의 집요한 저항과 개혁파 자신의 계급적 한계성에서 연유된 것이다. (2) 改革의 進行過程과 新王朝의 開創 1) 李成桂 一派의 寶權掌握(禑王代) 공민왕대의 개혁이 실패로 끝나자 정권은 다시 보수 귀족세력의 손으로 넘어갔다. 守侍中(副首相) 李仁任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세 력은 기왕에 획득한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토대를 보전하고 그 24) 鄭道傳 朝鮮經國典 上 上供 人君 專土地之廣 人民之衆 其所出之賦 何莫非 己 分之所有 凡國之經費 何莫非己分之所用 故曰 人君無私蔵 飲膳衣服 所以 供王之奉養也 匪頒 所以供王之赐與也 是數者 今皆謂之上供 考之周禮 各置 司存 以掌其出入會計之数 尙慮人主侈心之生而費之無節 掌吏肆其姦欺而失於 滲漏 於足 以冡宰 摠而制之 雖似人主之私用 實通於有司之經理 - 38 -

1. 大藏經의 雕版 것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개혁파 관리들을 관직에서 몰아내고 권력 을 독점하였다. 그들은 1374년에 공민왕이 살해된 후 10세의 소 년 禑를 王位에 앉힘으로써 이미 專權의 기틀을 마련해 놓았던 것 이다. 그들은 국민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고, 뇌물을 받고 관작을 팔며, 소송사건을 뇌물에 따라 처결하고, 권세가의 무능한 아동을 무더기로 科擧에 입격시키는 등 탐학무도한 부패정치를 자행하였 다. 그 중에서도 李仁任의 심복이던 廉興邦 林堅味 등의 탐학은 가장 심하여 그들이 불법적으로 빼앗은 토지는 山川을 경계로 할 지경이었으며, 一田의 主人이 7 8인이 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土地兼併이 자행되었다. 이에 이르러 국가재정은 더욱 파탄되고 권세가와 新興儒臣의 대립은 그 극에 달하였으며, 농민생활은 극 도로 피폐하여 당시 개혁파의 표현을 빌면 끓는 물 속에 빠져 있 는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禑王 이후로 倭寇의 침입이 격증되어 인민생활은 더욱 파탄에 이르렀다. 인민들은 군인으로 징발되어 왜구소탕전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일반농민들은 전란과 지 주의 횡포를 피하여 사방으로 유랑하거나 부패타락한 지방관과 지 주를 습격하기도 하고, 또 다른 권세가의 농장에 투탁하여 그 隷民 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노비들도 사회의 혼란을 틈타 자신의 신분 해방을 위하여 도망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李仁任 일당의 보수 귀족세력은 禑王 14년에 이르러 그 黨與의 일인인 廉興邦이 改革派儒臣의 한 사람이던 趙胖(뒤에 개국공신이 됨)의 토지를 강탈한 사건을 계기로 하여 崔瑩 李成桂 등 武將세 력에 의하여 제거되었다. 崔瑩은 李成桂와 비슷한 경력의 新興軍閥 의 하나로 辛旽의 개혁정치하에서는 王權강화에 저해되는 세력으 로서 일시 정계에서 소외될 정도로 보수적 체질이 농후한 인물이었 으나 공민왕과 辛旽이 몰락하고 또 시대가 武將의 출현을 요구하게 - 39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되면서 다시금 정계에 복귀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최영은 이성계와는 체질적으로 구별되는 인물이지만 李仁 任 일파의 극단적인 부패정치에는 반대하는 청렴결백하고 애국적 인 武人이었다. 그가 李仁任 일파의 제거에 이성계와 협력한 것은 이 까닭이었다. 최영과 이성계는 이인임 일파를 몰아낸 후 각기 侍 中과 守侍中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고 권세가들이 불법적으로 점탈 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본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리하여 비록 불철저한 것이긴 하지만 공민왕대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최초 의 개혁이 武將에 의하여 시도된 것이었다. 최영과 이성계는 이인임 일파의 제거에는 뜻을 같이하였으나, 대내 대외정책에 있어서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최영은 대내적으 로는 온건한 개량정치를 주장하고 대외적으로는 親元反明태도를 견지하였다. 이러한 최영의 태도가 급진적 혁신정치와 反元親明을 지지하는 이성계파와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다. 양자 의 체질상의 차이는 明의 고려에 대한 태도가 경화되면서 對明 긴 장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를 둘러싸고 급기야 의견충돌을 가져 왔다. 高麗와 明은 공민왕 18년부터 通交관계를 맺어오다가 禑王 초에 이인임 일파에 의하여 일시 親元政策이 실시되면서 明의 신 경을 자극하여 明은 무리한 歲貢을 요구하여 오고 高麗使臣의 入 明을 거절하는 등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禑 王 14년에는 鐵嶺 이북의 고려강토를 元의 영토였다는 이유로 그 반환을 요구하여 왔다. 明의 이러한 일련의 고압적인 태도와 무리 한 요구는 고려인의 거족적인 불만을 유발하였다. 특히 鐵領 이북 지역에 대한 반환요구는 고려 君臣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서는 최영 일 파와 이성계 일파 사이에 의견이 엇갈렸다. 전자는 明과의 실력대 - 40 -

1. 大藏經의 雕版 결, 즉明의 對高麗 前進基地인 遼東지방을 공격함으로써 明의 압 력을 배제하자고 주장했고, 후자는 이에 반대하였다. 이성계가 요 동공격을 반대한 것은 그 명분과 이상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고려 의 전쟁 능력과 전쟁시기, 그리고 전쟁효과 등 가장 현실적인 문제 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에서였다. 즉 ①고려는 군량미군사규모 등에 있어서 明과 대결할 만한 전쟁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약소국 이다. 약소국 고려가 강대국인 明에 대항한다는 것은 국가를 보전 하는 상책이 아니다. ②전쟁시기를 여름철(4 월)로 잡은 것은 잘 못이다. 여름은 농사철이므로 이 시기에 전쟁을 벌이면 농사를 망 칠 뿐만 아니라 농민의 호응을 받기가 어렵다. ③거국적으로 대군 을 원정시키면 그 틈을 타서 倭寇의 침입이 증대할 것이니 이것은 마치 바깥 도적을 잡기 위하여 다른 도적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것과 다름 없다. ④지금은 바야흐로 장마철이므로 전투하기에 가 장 불편할 뿐 아니라 전염병으로 군사들이 희생될 우려가 크다. 이성계가 출병을 반대한 이유는 이상 네 가지였다. 사실 당시 고려의 국내사정에 비추어 볼 때 이성계의 판단은 옳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전 쟁 반대론은 그 자신만의 獨見이라기보다는 범국 민적인 여론이기도 하였다. 對明強硬論者인 최영과 그의 압력에 눌린 禑王에 의하여 전쟁준비가 강행되고, 이해 4월에 전국에 징 병령이 내려졌을 때, 이에 대한 中 外 백성들의 원망은 李仁任 일파의 부패정치에 대한 원망보다도 심하였다. 결국 최영은 여론 을 무시하고 요동공격을 강행하였으며, 이성계도 마지못하여 右軍 의 지휘관으로서 원정군에 참여하였으나 출정 반대의 소신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때 出征軍의 최고사령관은 최영, 左軍의 지휘관 은 曹敏修였고 出征軍士는 약 10만이었다. 禑王 14년 5월 출정군 이 압록강 중류 威化島에 이르렀을 때 이성계는 드디어 回軍을 결 - 41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정하였고, 이러한 그의 결정은 휘하 장병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 다. 이성계에 영도된 출정군사는 공격목표를 바꾸어 전쟁 주창자 인 최영 일파의 제거에 두었고, 이해 6월에 그들은 최영 지지군사 의 약간의 저항을 받으면서 開京을 점령하였다. 李成桂의 위화도 회군으로서 정세는 일변되었다. 최영은 체포되 어 流配되고 李成桂가 右侍中에, 曹敏修가 左侍中에 각각 임명되 었으나 실권은 농민군사와 개혁파 儒臣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게 된 이성계의 수중에 장악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明에 대 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明도 강압적인 태도를 누그러뜨리 고 鐵嶺衞 반환요구도 포기함으로써 양국간의 긴장관계가 해소되 었다. 한편 이성계는 李仁任 일파에 의해 추대되 고 요동공격에 찬성하는 등 보수 귀족세력과 밀착된 禑王을 폐위시키고 그 대신 宗室 중에서 제삼의 인물을 간택하여 옹립하려 하였으나 左侍中 曹敏修와 名儒 李穡 등 反李成桂派의 고집으로 禑의 아들 昌이 王 位를 이었다. 昌은 이때 나이 겨우 9세로서 李仁任과 인척관계에 있었고, 曹敏修는 또한 李仁任의 당여로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昌을 옹립한 것이었다. 그러나 曹敏修는 오래지 않아 李成 桂派의 탄핵으로 실각되고 그대신 李穡이 侍中에 올랐다. 이색은 이성계 일파와 대립관계에 있었으나 정치적 군사적 실권은 이성 계 일파에 의하여 장악되었다. 2) 田制改革運動(昌王代) 위화도 회군 이후 李成桂에 의하여 실권이 장악되자 그동안 李 仁任 崔瑩 등 보수파의 득세로 위축되어 있던 개혁파 儒臣들이 다 시금 頭角을 나타내어 이성계를 중심으로 재결집되었다. 이 때 이 성계 휘하에 모여든 개혁파 관리의 면모를 살펴보면 이미 공민왕대 - 42 -

1. 大藏經의 雕版 에 辛旽의 개혁정치에도 참여했던 鄭道傳 尹紹宗 등을 비롯하여 30 40대의 소장관리로서 주로 言官 또는 宰樞 등의 요직에 임 趙浚 趙仁沃 南誾 南在 趙璞 鄭擢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명되어 관직의 핵심 부분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鄭道 傳과 趙浚은 李成桂의 두 팔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특히 鄭道傳은 우왕대에 이미 이성계를 찾아가 혁명을 결의하였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개혁이념을 실현할 힘과 戰列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정력적으로 추진된 일련의 개혁 가운데 에서 가장 역점이 두어지고 또 가장 먼저 착수된 것은 田制改革 운동이었다. 田制의 문란이야말로 당시 고려사회가 내포하고 있던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모순의 근본원인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이었다. 田制改革運動은 昌王 즉위 년(1388) 7월 大司憲 趙 浚의 上疏로 시작되어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3년 뒤인 恭讓 王 3년(1391) 5월의 科田法 제정으로 일단락되는데 초기의 개혁 이념과 科田法 내용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어 田制改革이 初志대로 일관되지 못한 것을 보여 주고 있다. 禑王 14년 7월 趙浚에 의하여 올려진 田制改革 上疏를 계기로 하여 諫官 李行, 版圖判書 黃順常, 典法判書 趙仁沃, 右常侍 許應 등이 잇달아 전제개혁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전제개혁 운 동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들의 주장과 입장은 피차 대동소이 한 것으로서 그들은 한결같이 토지제도의 문란이 그 극에 달하여 民生이 도탄에 빠지고 국가수입이 허 갈되고 군량미가 부족하며, 官吏(士大夫)에게 지급할 祿俸을 제대로 못 주며 風俗이 퇴폐되었 음을 개탄한 다음, 富國強兵과 民生의 안정, 그리고 풍속의 순화를 위해서 田制를 전면적으로 개혁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들이 제시 한 田制改革의 기본방향과 기본이념은 이미 개혁파의 經濟理念에 - 43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서 살핀 바와 같이 의 실시 ①토지의 공유화 ② 均田制의 실시 ③什一稅法 ④ 농민에 대한 불법적 수탈(兼併 및 横斂)의 엄금 등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것은 均田制의 문제로서, 다시 말하면 토지를 누구에게 어떤 조건으로 재분배하 느냐 하는 것이다. 이제 田制改革案의 대표라 할만한 趙浚의 안은 다음과 같다. 現職官僚에게 祿科田柴 지급 ① ②王子現職官吏閑良官(前職官 吏 添設官 檢校官 등) 守節하는 官吏의 妻에게 口分田 지급(1 代에 한함), 단 閑良官 중에서 在京者에게만 口分田을 주되 그 대 신 五軍에 소속시키고, 在外者는 軍田을 주어 充役시킨다.25) ③投 ④軍人(府兵)에게 軍田(20세에 받아서 60세에 반납), ⑤鄕吏津鄕所部曲莊處의 吏, 院館 의 直에게 外役 田(1代), ⑥城隍鄕校紙匠墨尺水汲刀尺 등에게 位田, ⑦百姓으로서 附籍되어 差役되는 자와 公私賤人으로 서 差役되는 자에게 白丁代田(戶當 1結씩) ⑧京城에 있는 裨補寺 刹에 寺社田, ⑨驛에 驛田(1代), ⑩守令에게 外祿田, ⑪각 관청에 化人에게 投化田(1 代), 公廨田을 각각 지급하자는 것이다. 즉 그들이 주장하는 均田制는 唐나라식 均田制가 아니라 土地國有를 전제로 하여 그 일부 토지 의 收租權을 국가의 公役을 담당하고 있거나 그럴 자격을 가진 개 인 또는 각 기관에 分給하자는 것이며, 公廨田 寺社田을 제외하 고는 모두 일대에 한하여서만 收租權을 지배하도록 하자는 것이 다. 그리고 收租率은 公田(國家收租地) 私田(個人 또는 公共機關 收租地)을 막론하고 1결당 20斗로 하자고 주장한다. 한편 趙浚은 國家財政의 곤핍, 특히 軍糧米 확보의 시급성을 강 조하여 田制改革 이전의 임시 비상조처로서 私田으로부터 3년간 39 25) 韓永愚 麗末鮮初 閑良과 그 地位, 韓國史硏究 4 (1969) pp. 38-44 -

1. 大藏經의 雕版 국가가 收租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 李成桂를 비롯한 鄭道傳 등 改革派官吏의 지원과 합의를 거쳐서 제시된 것으로 보이는 趙浚의 田制改革案은 조정의 世臣舊族에게 커다란 충격과 파문을 던져 주었다. 都堂에서 그의 안이 논의된 결 烈權近柳伯濡가 반대하였으며, 鄭夢周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 과 鄭道傳 尹紹宗이 이를 찬성했고, 李穡 李琳 禹玄寶 邊安 였다. 都堂에서는 결국 반대의견이 우세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百 官會議에 회부되었으나 찬성자보다 반대자가 더 많았다. 아직도 개혁파 관리는 숫적으로 劣勢에 있었다. 대토지 소유자들은 田制改 革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경제지반이 흔들릴 것을 꺼려하여 집요하 게 반대하였다. 이제 개혁을 추진시키기 위하여는 반대파의 거물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田制改革의 반대자이며 昌王 옹립시에 이성계와 대립을 보인 左侍中 曺敏修가 개혁파의 탄핵으로 유배되 었다(昌王 즉위년 7월). 그리고 그 대신 李穡이 門下侍中(首相)이 되고 李成桂가 守門下侍中(次相)이 되었다(8월). 그러나 李成桂는 비록 직위는 이색 아래에 있었으나 中外軍事都摠을 겸하여 전국의 軍事權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권은 여전히 李成桂 一派가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李穡은 공민왕 초에는 온건한 改良主義 者로서 田制의 문란을 바로잡을 것을 주장한 일도 있고, 또 개혁파 관리의 대부분이 그의 門下에 있었던 터로서 철저한 보수파는 아 니었으나 공민왕 12년에 功臣田을 받고 그의 정치적 지위가 확고 해지면서 차차 보수파로 기울어져서 마침내는 田制改革을 반대하 고 개혁파와 정치적으로 대립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렇듯 趙 浚의 田制改革案은 일단 좌절되고, 그가 제의한 임시 비상조처로 서의 私田租 公收문제도 昌王 즉위년 8월에 私田租의 2분의 1만을 公收하기로 敎令이 내려졌다가 다음달에 그것마저 철회됨으로써 - 45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李成桂 일파는 이에 조금 도 굴하지 않고 군사적 실권과 대중의 지지를 밑받침으로 하여 田 制改本을 단행하기 위한 기초작업에 착수하였다. 昌王 즉위년 8월 부터 시작된 各道의 量田事業(土地測量 및 土地所有 實態調査事 業)이 그것이었다. 이 量田事業은 다음해 昌王 원년(1389 己已)에 일단락되었다. 이를 己已年量田이라고도 한다. 昌王 원년 8월에 趙浚은 두번째 田制改本 上疏를 올렸다. 이번 상소에서는 주로 田制改革에 반대하는 世臣巨族의 이기적 태도를 비난한 다음 토지재분배의 구체적 방안으로서 京畿의 토지를 士大 夫(現職官吏 및 閑良官)로서 京城에 거주하면서 王室을 侍衞하는 者에게 지급하여 그들의 생계를 보장해 줄 것과 그밖에 外方의 토 지는 모두 국가에서 몰수하여 王室 祭祀 祿俸 軍需 등 國家經 費에 충당하는 公田으로 만들 것을 주장하였다. 이번 상소의 특징 은 요컨대 士大夫에 대한 토지지급과 전국토지의 國有化(公田化) 를 촉구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田制改革 운동의 일차적인 목적이 民生安定에 있기보다는 士大夫의 생활보장과 국가수입의 증대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 그것은 田制改革을 완강히 반대 하는 일부 부유한 士大夫와의 타협이라고도 보여진다. 그리하여 동년 9월에는 宗室 文武班 前職官吏 중에서 科田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가 선정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士大夫 중에서 科田을 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을 가려낸 것이다. 科田受給 대상자 선정의 기준은 京城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시위하느냐 안 하느냐에 있었 다. 다시 말하자면 宗室이건 현직관리건 閑良官이거나를 막론하고 京城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시위하면 科田을 주고 外方에 거주하는 자에게는 科田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王室을 侍衞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현직관리인 경우에는 관직생활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 - 46 -

1. 大藏經의 雕版 이요 閑良官인 경우에는 五軍의 군사편제 속에 편입되어 赴京宿衞 하는 것을 의미한다. 閑良官을 赴京宿衞케 하려는 것은 이미 恭愍 王代의 改革에서도 추진된 것으로서 그 정책이 이제 다시 田制改 革 운동과 결부되어 추진되고 있는 것이 다. 閑良官의 赴京宿衞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이지만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이 다. 공민왕대 이후 급작히 팽창된 閑良官은 지방에 散居하면서 한 편으로 國役을 회피하고, 地方官을 능욕하며 농장을 확대시키고 농민을 억압 수탈하는 등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와 民生安定에 역 행되는 갖가지 폐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군사체 제 속에 편입시켜 居京宿衞케 하는 것은 중앙집권 체제의 강화와 군사력의 증강, 농장확대의 억제, 民生의 안정 등 다방면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그들의 생계를 국가가 보장하여 회유하는 방안도 되는 것이다. 赴京閑良官에 대한 科田지급은 그 후 科田法에 반영되어 法制化되기에 이르렀다.26) 3) 科田法의 成立(恭讓王代) 위화도 회군 이후 李成桂 일파에 의하여 추진되기 시작한 田制 改革 운동이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에 착실한 진전을 보여 量田事 業이 거의 매듭을 짓게 됨으로써 전국 토지의 국유화가 눈앞에 다 가오고, 士大夫에 대한 토지 재분배가 실현 직전에 닥쳐오자 다급 해진 대토지 소유의 舊家世族들은 마지막 저항을 꾀하게 되었다. 그들은 앞서 李成桂에 의하여 몰려난 禑와 舊家世族에 의하여 옹 립된 昌王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이성계 일파를 정계에서 몰아낼 음모를 꾸미었다(昌王 元年 11月).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 26) 韓永愚 上揭論文 P.48. 한편 閑良官에게는 科田이 지급되지 않고 일률적으로 軍田만이 지급되었다고 보는 見解도 있다. 千寬宇 麗末鮮初의 閑良. 李丙燾博士 華甲紀念論叢 (1956) - 47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되어 도리어 舊家世族의 잔존세력이 대거 숙청되는 결과를 가져왔 다. 이 사건은 崔瑩의 甥姪인 金紵 등이 李成桂 살해의 하수인역을 맡았고 또 그의 고백으로 많은 連累者가 처벌되었기 때문에 세칭 金貯의 獄 이라고도 한다. 李成桂 일파는 차제에 반개혁파 세 력을 철저히 제거하기 위하여 隅昌 부자를 辛旽의 자손이라는 이유를 들어 폐출 살해하고, 앞서 위화도 회군 이후 유배되었던 崔 瑩을 사형에 처하고, 李穡 李琳 邊安烈 禹玄寶 禹仁烈 禹洪 壽 王安德 등 반개혁파의 거두들을 관직에서 축출하였다. 昌王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는 神宗의 7대손이며, 李成桂의 姻戚이기도 한 定昌君 搖이니 이가 고려의 끝왕인 恭讓王이다. 공양왕은 李成 桂 일파의 추대에 의하여 옹립되었으나 왕으로서는 무능한 인물이 었다. 李派는 개혁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이런 인 물을 추대하였던 것 같다. 공양왕이 즉위한 후 반 년 뒤인 공양왕 李琳禹仁烈鄭地李崇仁權近禹玄寶權仲和慶補崔公 2년(1390) 5월에는 소위 尹彛 李初의 陰謀사건을 계기로 李穡 哲 등 구세력의 領袖들이 대부분 下獄됨으로써 개혁의 저지세력이 거의 제거되었다. 尹彛 李初의 음모사건이란 이 두 사람이 明皇 帝에게 李成桂가 明을 침범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李成桂에 의 하여 실각된 재상들이 明의 高麗 토벌을 희망한다고 보고한 사건 을 말한다. 공양왕 즉위 후 반개혁파 세력이 제거되면서 田制改革 운동은 한층 순탄하게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공양왕 원년 12월 현재 兩界 地方과 海濱 海島지방을 제외한 6道의 量田事業이 완료되어 6道 의 實田(개간되어 있는 땅) 약 50만 결이 臺帳에 등록되어 일단 국유화되었으며, 그 중에서 13만 결을 上供과 國用을 위한 國家收 租地로, 10만 결을 祿俸支給을 위한 國家收租地로 각각 책정하고, - 48 -

1. 大藏經의 雕版 京畿를 文宗朝의 舊制를 따라 13縣에서 44縣으로 대폭 확장하여 그 10만 결의 土地를 士大夫居京者(동년 9월에 선정된 자일 듯)의 科 田으로 지급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外方의 17만 결은 軍田(外方에 (寺院)外役田(鄕吏)外官職田(外官)廩給田 등으로 지급하기로 거주하여 充役된 閑良官) 津田(津尺) 院驛田(院主 驛吏) 寺田 책정하였다. 그러나 科田은 京畿 토지의 부족으로 토지를 규정의 액 수대로 다 못 받았거나 전혀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던 것 같고, 더 우기 軍需에 충당할 軍資田은 전혀 책정되지 못하였다. 이제 이것을 趙浚의 제 1 차 전제개혁안에 제시된 토지지급 대 상자와 비교해 보면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 趙浚의 1차 안에서는 軍資 軍糧米의 확보를 전제개혁의 가장 시 급한 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데 반하여 실제로 토지 재분배 과정에 서는 軍資보다도 王室經費 祿俸 士大夫 등을 위한 토지를 1차 적으로 책정하고 있다는 점, 둘째 제 1 차 안에서는 軍田을 府兵 (一般 軍士)에게 지급하도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府兵 아닌 閑 良官에게만 지급되고 있다는 점, 세째 제 1 차 안에서는 귀화인에 대한 投化田, 백성과 公私賤人 중의 差役者에 대한 白丁代田의 지 급이 제시되었으나 그것이 제외되어 버렸다는 점 등이다. 이것은 요컨대 군인과 백성 천인에 대한 배려가 처음과 달라졌다는 것 을 뜻한다. 군인에 대한 배려가 소홀해진 것은 昌王代 이후 倭寇 의 침략이 거의 종식되고 對元 明 관계도 정상화됨으로써 민족 적 모순이 크게 완화된 데 一因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差役되 는 백성과 천인에 대한 토지지급이 제외된 것은 토지의 부족이나 舊家世臣의 방해공작에도 원인이 있겠으나 개혁파 관리의 계급적 한계성에도 一因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공양왕 원년 12월 현재 토지 재분배는 거의 일단락된 - 49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科田은 京畿의 地境을 확장했음에도 불구 하고 토지가 부족하석 定額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 있고 그들은 부 족액을 外方에서 지급받으려고 희망하였다. 특히 外方에서 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巨室의 舊臣들이 科田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 같 다. 따라서 그들의 불평은 대단하였다. 공양왕 원년 12월에 大司 憲 趙浚 등은 제 3 차로 田制改革에 관한 상소를 올려 舊臣들의 불평을 비난하고 私田을 京畿 이외의 외방에 지급하는 것을 엄금 하여 私田京畿의 원칙을 준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趙浚 등의 이번 상소는 이미 개혁된 것에 대한 舊臣들의 불평을 봉쇄하려는 데 목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昌王 원년 9월에서 공양왕 원년 12월 사이에 科田 의 재분배는 거의 일단락되고 이제 남은 것은 外方의 토지를 용도 별로 수량을 책정하여 분할하는 것과 개혁의 뒷처리를 매듭짓는 일이었다. 공양왕 2년(1390) 1월에 新田籍을 반포하고 이어서 동 년 9월에는 舊田籍을 불태워 버림으로써 개혁파에 의하여 작성된 새 토지대장만이 유일한 법적 효력을 갖게 된 것이다. 구전적이 며칠 간이나 걸쳐 시가에서 불태워지고 있을 때 恭讓王과 舊臣들 은 눈물과 탄식으로써 이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개혁파 관 리들은 환희와 기쁨에 넘쳐 있었을 것이다. 동년 11월에는 마지막 으로 外官 鄕吏 驛吏 津尺 院主의 外祿 外役田과 豊儲倉(供 上)과 廣興倉(祿俸)에서 收納할 國家收租地의 수량을 결정함으로 써 토지 재분배는 완전히 일단락되었다. 공양왕 2년 12월에 李成桂는 侍中(首相)에 오름으로써 명실상 부한 정권의 제일인자가 되었다. 그동안 이성계는 실권을 장악하 고 있으면서도 首相의 자리는 舊臣에게 맡겨져 있었으나 金紵事 件과 尹彛 李初 사건을 계기 로 舊臣들이 대부분 下獄 또는 유찬 - 50 -

1. 大藏經의 雕版 됨으로써 首相의 자리가 그에게 돌아온 것이다. 다음해(공양왕 3 년, 1391) 정월에는 軍政을 개혁하여 종래의 五軍의 制를 폐하고 三軍 都摠制府를 신설하여 京 鄕의 軍事를 統督케 하고 李成 桂 趙浚 鄭道傳이 각각 都摠制使 左軍摠制使 右軍摠制使가 됨으로써 兵權을 개혁파가 완전히 장악하였다. 三軍에는 일반 군 사뿐만 아니라 科田을 받은 閑良官까지도 소속시킴으로써 李成桂 일파는 閑良官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게도 되었다. 三軍都摠制府 설립의 의의는 병권의 장악보다는 閑良官에 대한 통제권 장악에 더 큰 의의가 있었다. 이로써 이성계 일파는 위화도 회군 이래로 정치 군사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전제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구세력의 몰락과 신세력의 경제기반을 닦아 놓았으 며, 국가수입의 증대와 농민생활의 향상을 가져올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놓았다. 그 위에 在野官人 세력까지도 포섭 통제케 됨으 로써 그들이 목표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의 건설을 위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기초를 다져놓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政治的 經濟的 軍事的 改革의 성과를 총체 적으로 마무리하여 법제화한 것이 공양왕 3년 5월의 科田法 공포이 다. 科田法의 내용을 간추려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土地支 ①宗室(大君諸君元尹)現職官吏(一 九品. 權務官)閑良官(前職官吏添設官檢校官同正官) 중에서 京城 給規定을 살피면 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侍衞하는 자에 한하여 京畿의 토지로써 科田 을 지급한다.27) 科田은 직위의 고하에 따라 18등급으로 나누어서 최고 150結에서 최하 10結에 이르는 차등을 둔다. 科田을 받은 閑 良官은 三軍摠制府에 소속되어 宿衞해야 한다. ②京城에 거주하 여 王室을 侍衞하지 않는 6道의 閑良官에게는 資品(職位)의 고하를 고 27) 註 (26) 參照 - 51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려하지 않고 그가 본래 소유하고 있던 토지(本田)의 다소에 따라 토지가 많았던 자에게는 10결, 토지가 적었던 자에게는 5결을 주 되, 이를 外方의 토지에서 지급하고 軍田이라고 부른다. 군전을 받 은 자가 京城에 올라와서 三軍摠制府에서 宿衞하면 科田을 지급한 다.28) ③寺院外官鄕吏津尺驛吏官工匠, 29) 기타 서민으로 서 公役을 담당하는 자30)에게도 토지를 각각 지급한다. ➃庚午年 에 賜與된 功臣田(回軍功臣田)만은 科外로 자손에게 상속할 수 있 ⑤公私賤人工匠(私工匠)商人賣ト盲人巫覡倡伎僧 尼 등은 본인은 물론 자손에게도 受田을 불허한다. ⑥軍資用으로 다. 軍資寺田을 두고, 兩界와 己已년(昌王 원년)에 量田되지 못한 海 ⑦왕실경비를 위하 여 陵寢田倉庫田宮司田을 둔다. ⑧끝으로 科田法 규정에는 빠졌 으나 國用(祭祀賓客備荒田役 등)을 위한 豊儲倉位田과 祿俸 을 위한 廣興倉位田, 京中各司의 胥吏의 祿料를 주기 위한 各司 濱 海島 新開墾田 등은 장차 軍需에 충당한다. 位田 등이 있었다. 그리하여 개혁파 관리들이 처음에 의도했던 대 로 計民授田의 원칙, 즉 일반백성(농민)까지도 포함하는 균등한 토지 재분배를 달성하지는 못하여 토지분배의 불균등에 대한 불평 이 일어나고, 전제개혁의 책임을 맡고 있던 鄭道傳 자신도 境內의 토지를 모두 公家(國家)에 귀속시켜 計民授田함으로써 옛날의 올바 른 토지제도를 복구하려 하였으나 舊家世族의 비방과 방해로 말미 암아 斯民이 至治의 은택을 입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다31)고 자인하 였으며, 分田이 고르지 못하다는 원망이 모두 나에게 돌아왔다32)고 (恭讓王)3年 5月 都評議使司上書 請定給科田 受軍田者 赴京從仕 則許以科受京畿之田 29) 同上 六道實田 計數作丁 丁各有字號 載之于籍 拘收公私往年田箱 盡 行檢履 覈其眞爲 因舊損益 以定陵寢 倉庫 宮司 軍資寺及寺院 外官職田 廩給田 鄕津 驛吏 軍 匠 雜色之田 28) 高麗史 食貨志一 祿科田 法 30) 鄭道傳 朝鮮經國典 上 經理 31) 同上 - 52 -

1. 大藏經의 雕版 하면서 자기의 職責을 사양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관료 기타 公 役을 가진 자에 대한 收租地分配는 어느 정도 충족되었으며, 外方의 광범한 脫稅地가 公田化됨으로써 국가수입의 증대를 가져온 것은 田制改革의 중요한 성과의 하나였다. 다음에 科田法의 租稅規定을 보면 ①公田私田을 막론하고 경 작자는 收租者에게 1結마다 30斗의 租를 바치기로 한다. 그러나 흉작의 정도에 따라 租額을 등차적으로 감하게 되어 있어 30斗란 완전 풍년이 들었을 경 우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②豊凶의 조사는 公田인 경우에는 국가관리가 담당하되 三審制를 채택하며, 私田인 ③私田에서는 1結마다 2斗씩을 稅로서 국가에 바쳐야 한다. 단 왕실 소속 私田과 公廨田(各司位田)功 경우에는 田主가 自審한다. 臣田은 예외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세규정은 趙浚이 제 1차 안에서 제의 한 1結당 20斗의 액수보다는 높아졌으나 대체로 10 분의 1稅의 理想에 가까운 것이며, 당시에 관행되던 并作制에 있 어서의 2분의 1稅나 法定收租率이던 2분의 1(私田)이나 4분의 1 (公田) 보다는 훨씬 경감된 것이다. 이로써 耕作者(농민)는 일단 법적으로는 과거의 2분의 1 또는 4 분의 1의 중세에서 해방됨으로 써 재생산을 보장받게 된 것이다. 요컨대 조세율에 있어서는 개혁 파의 理想이 거의 실현되어 民生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으 며, 이것이 또한 田制改革의 또 하나의 성과인 것이다. 물론 그렇 다고 해서 당시 광범하게 慣行되고 있던 并作制가 완전히 철폐되 었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科田法에서는 耕作者에 대한 田主 의 임의수탈(橫敛)을 엄격히 금지하고 경작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여러 규정을 마련하고 있어 적어도 并作制에 있어서 半收(2분의 1 稅)가 묵인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32) 高麗史 列傳 琢道傳傳 - 53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한편 科田法에서는 收租者(田主)가 경작자(佃客)의 所耕田을 임의로 빼앗거나 耕作者가 자기의 경작지를 임의로 매매 양여할 수 없게 하여 收租者의 경작자에 대한 권리침해와 경작자의 收租 者에 대한 권리침해를 다 같이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 작자의 경작능력이 부족하거나 중단되어 토지가 황폐될 때에는 收租者의 의견을 들어 처분한다고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收租者 의 권리 보장이 더욱 중요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끝으로 科田法에서는 토지국유의 원칙을 고수하고 土地兼併 및 사유지의 발생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토지 관리 규정을 두고 있 다. 즉 위에서 언급한 경작권 보호규정도 그러한 취지와 관련이 있거니와 科田, 기타 有役人에게 지급한 토지를 본인당대 또는 役 을 지고 있는 기간에 한하여 기한부로 지배하게 한 것. 토지를 지 배할 자격을 상실한 자가 계속해서 그 토지를 지배할 때 제삼자로 하여금 이를 고발케 한 것, 그리고 公私田을 침탈하거나 타인의 토지를 誣告 또는 무고한 죄명을 씌워 橫奪하는 자를 엄벌에 처하 도록 한 것 등이 그것이다. 단 科田은 受田者가 사망한 뒤 그 妻 가 守節하는 경우에는 夫의 科田의 전부 또는 반을 守信田의 명목 으로 지급하고, 科田受田者의 본인과 妻가 모두 사망하고 고아가 된 자녀가 있을 때에는 그 자녀에게 父의 科田을 恤養田의 명목으 로 주어 성인이 될 때까지 지배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노동력이 없는 士大夫의 妻子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科田法에는 私田의 총량을 현재 이상으로 늘이지는 않고 현재 이 하로 줄이지도 않기 위하여 단음과 같은 세 가지 규정을 두고 있 다. ①私田을 京畿 이내에서만 지급한다. 즉 私田京畿의 원칙, ② 공양왕 3년 현재로 규정의 토지를 다 받지 못했거나 앞으로 새로 이 관리가 되어 私田을 받을 사람에게는 몰수된 토지(私田)로서 - 54 -

1. 大藏經의 雕版 재지급하고 公田(國家收租地)을 떼어 주지는 않는다. ③일단 私田 으로 정해진 토지는 비록 국가에 몰수되는 경우라도 이를 公田으 로 하지는 않는다. 이상과 같은 토지 관리규정은 고려시대에 토지 제도 문란의 기본원인이 土地兼併과 私田의 세습화, 그리고 사전 의 外方支給에 있었음에 비추어 다시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으 려는 의도에서 취해진 조처이다. 그러면 科田法 성립으로 일단락된 고려 말기의 전제개혁은 결 론적으로 어떤 성과를 가져온 것인가. 개혁파 관리들이 본래 목표 ③농민생활의 안정 ④軍糧米의 확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볼 때 ④를 제외하고 로 하였던 ①국가재정의 안정 ②관료의 생활보장 는 어느 정도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국가재정면에 서 볼 때 고려 말의 광대한 脫稅地(隱結)가 量田事業에 의하여 국 가의 토지대장에 등록되고 국가가 그것을 관리 收租하게 됨으로 써 국가수입이 훨씬 증대되었다. 한편 농민경제의 측면에서 보면 비록 并作制度를 완전히 철폐하여 自營小農經濟를 확립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并作에 있어서의 分半地代制(半收)가 금지되 고, 收租率이 전반적으로 경감되었으며, 田主의 경작농민에 대한 무제한한 횡렴과 토지의 탈취 등 권리침해가 억제됨으로써 농민 의 지위는 종전보다 훨씬 향상되고 농민의 재생산이 보장되고 농 민경제의 안정이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관리의 생활안정은 전제개혁의 제1차적 목적이라고 하겠거니와 그것은 동시에 전제개혁이 가져온 최대의 성과이기도 하였다. 300結의 토지를 받아야 할 재상이 입추의 땅도 받지 못하던 불합 리한 상태가 제거되고 그들은 자기의 職品에 상응되는 응분의 토 지를 받게 되었고 赴京宿衞하는 閑良官에게도 토지가 지급됨으로 써 그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그들이 지방 세력가로 성장되는 것 - 55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을 억제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전제개혁의 성과는 鄭道傳 이 뒷날 술회한 바와 같이 비록 옛날의 이상적 전제를 이루지는 못 했으나, 고려시대의 문란된 전제에 비한다면 말할 수 없을 만 큼 좋아진33) 것이었다. 4) 佛敎排斥運動과 朝鮮王朝의 樹立 科田法 제정으로 전제개혁이 일단락됨으로써 개혁파의 정치적 경제적 개혁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그러나 개혁은 끝난 것 이 아니었다. 그들이 목표로 하는 유교이념에 입각한 강력한 중앙 집권적 관료제 국가의 건설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많은 과제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기왕에 개혁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일정한 사후대책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과제 중에서도 가장 긴급하고 중요 한 것은 寺院經濟의 해체와 寺院 및 구세력의 이데올로기인 불교의 추방이었다. 舊家世族은 몰락되었으나 그들의 지도이념인 불교는 여전히 사상계를 지배하였으며, 佛敎寺院은 거대한 경제력(土地)과 노동력(避役者)을 가지고 여전히 국가재정을 침해하고 國役 담당 자를 감소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었다. 전제개혁에도 불구하고 軍 需 軍資田의 확보에 실패한 주원인이 寺院經濟의 해체가 이루어 지지 못한 데에 있었다. 科田法에서는 다만 僧侶의 受田금지와 사 원에 대한 토지기탁 금지규정을 둠으로써 사원경제의 확대를 막는 데 그쳤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국가재정(특히 軍資) 및 國役 者의 증대를 위해서는 사원경제의 해체가 불가피하였고 개혁파의 지도이념인 유교 이데올로기의 확립을 위해서는 불교의 배척이 불 가피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斥佛運動은 공양왕 3년 5월에 天災 地 變이 발생하여 왕이 신하들에게 널리 대책을 건의하라는 명령이 내 33) 鄭道傳 朝鮮經國典 上 經理 - 56 -

1. 大藏經의 雕版 려진 것을 계기로 촉발되었다. 이때 斥佛運動의 선봉에 선 것은 개 혁파의 핵심인물이며, 대표적 斥佛理論家인 鄭道傳이었으며, 그 밖 에 金子粹(大司成) 金貂(成均博士) 許應(郞舍) 鄭摠(吏判) 朴 礎(成均生員) 등이 이에 가세하였다. 그들은 국가경제와 國役의 견 지에서 불교사원의 폐단을 신랄하게 비판 공격하고 寺院田地와 사원노비의 몰수를 주장하며, 일반백성이 승려가 되는 것을 엄금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중에서도 鄭道傳의 주장은 가장 격렬하여 斥 佛만이 아니라 李穡 禹玄寶 등 改良派人士의 축출과 사형까지도 아울러 주장하였다. 이것은 개혁파 관리들이 불교세력 뿐만 아니 라, 급진적 개혁에 반대해 온 개량파 세력을 차제에 완전히 제거하 려는 의도를 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사실 寺院經濟의 폐단이나 각종 불교행사의 폐단, 그리고 불교도 의 타락 등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비단 이때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공민왕 초에 李穡 등 개량파 유학자에 의하여 寺刹의 濫立과 승려의 과다 등이 비판되었고 辛旽의 개혁정 치 시기에 있어서도 유교가 장려, 진흥되면서 그에 따라 鄭夢周 朴尚衷 金容九 李崇仁 權近 등 成均館儒臣들을 중심으로 불교 에 대한 비판이 점고되어 갔다. 그러나 이들의 비판은 불교의 末弊 를 지적하고 그 시정을 요구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것이요 불교 자 체를 이론적으로 철저히 배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불교에 대 해서도 사회개혁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온건한 개량 주의의 입장에 머물러 있었으며, 고려시대의 대부분의 儒者들이 그 러하듯 불교에 대한 취미나 好尚조차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斥佛運動이 좀더 적극적인 단계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은 급진적 개혁파가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昌王代 이후부터이며, 이때부터 田制改革운동이 본격화되면서 斥佛운동도 그와 병행되어 활기를 - 57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띠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斥佛運動에 참여한 사람은 趙仁沃 趙浚 尹紹宗 成石璘 등으로서 그들은 불교의 末弊를 비판 공격 하는 데 그치지 않고 佛敎의 敎理 자체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데 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불교와의 이념투쟁이나 사원경 제의 해체보다는 政治的 權力을 장악하고 있던 舊臣세력의 타도가 급선무이었기 때문에 斥佛운동은 제 2선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 었다. 그러므로 공양왕 3년 5월에 科田法이 성립됨으로써 舊臣세 력의 經濟的 基盤을 붕괴시키는 데 일단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斥 佛운동은 비로소 본격화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즉 이제부터 개혁 파 세력은 舊體制의 이념적 지주인 불교를 몰아내고 寺院經濟를 해체하기 위한 제 2단계 改革운동에 돌입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斥佛운동이 격화될수록 舊勢力의 揚佛운동도 그에 못지 金琠(前典醫副正)鄭士调(前戶曹判書) 않게 열렬하여 마침내 儒 佛抗爭을 초래하게 되었다. 공양왕 3년 6월에 등 在野舊臣들은 鄭道傳 등의 斥佛운동을 立國의 근본을 알지 못하는 狂儒의 所行 이라고 비난하고 불교의 장려와 진흥을 역설하는 항의서를 제출 하였다. 斥佛운동에는 鄭道傳 등 改革派관리 이외에 成均館儒生들 이 이에 加勢하였고 揚佛운동에는 그동안의 개혁과정에서 경제적 으로 몰락되고 정치적으로 소외된 수많은 在野舊臣들이 참여하여 新 舊势力의 대립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격심하였다. 그러나 공양 왕 자신이 斥佛운동보다는 揚佛운동편에 호의적 태도를 보임으로 써 斥佛운동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도리어 改革派쪽이 궁지에 몰리는 형세를 빚기도 하였다. 斥佛운동이 장벽에 부딪히자 改革派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져서 舊勢力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국왕에게 강경히 요구하였다. 舊臣 들은 昌王옹립에 진력했고, 禑王의 復位를 꾀하였으며, 尹彛 李 - 58 -

1. 大藏經의 雕版 初 등을 明에 보내어 출병을 요청하는 등 다섯 가지 중죄를 지었 다는 것이 改革派의 舊臣응징의 명분이었다. 그러나 공양왕은 중 도적 改良主義者인 鄭夢周의 의견을 좇아 舊勢力에 대한 미봉적 인 처벌로서 改革派의 言論을 봉쇄하려 하였다. 이러한 공양왕과 정몽주의 태도는 改革派의 노골적인 반감을 사게 되고, 특히 정몽 주와 改革派와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정몽주는 反元 親 明政 策, 曹敏修의 배척, 공양왕 옹립 등에 있어서는 대체로 개혁 파와 보조를 같이해 왔으나 그의 기본태도는 어디까지나 改良主 義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急進的 改革派와는 일정한 간격이 있었 다. 따라서 그는 田制改革 논의에 있어서도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 하였고, 斥佛운동에 있어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항상 新 舊勢力의 갈등 속에서 중간적인 路線을 지켜왔던 것이다. 그 러나 田制改革 이후 改革派의 승리가 굳어지고 개혁파의 舊勢力 에 대한 탄압이 노골화되자 그는 마침내 개혁파와 완전히 결별하 여 적대관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개혁파를 제거시킴 으로써 급진적 개혁을 저지시키려는 의도를 품게 되었다. 공양왕 4년(1392) 3월 李成桂는 海州에서 사냥하는 도중에 落 등 舊臣세력은 왕에게 상소하여 鄭道傳趙浚南誾尹紹宗南 在趙璞 등 改革派의 核心人物을 탄핵하고 그들을 遠方으로 몰 馬하여 중상을 입었다. 이때를 이용하여 鄭夢周와 金震陽 李擴 아내는데 성공하였다(동년 4월). 李成桂 일파는 일대 위기에 처하 였다. 이제 그들은 국왕의 裁決을 통한 합법적인 운동으로서는 舊 臣세력의 제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비상수단을 썼다. 그리하여 改革派의 최대의 政敵 鄭夢周는 李成桂의 第五子 李芳遠 등의 습격을 받고 쓰러졌다. 鄭夢周의 피살로 형세는 급전 되어 遠方에 몰려났던 改革派官吏들이 다시 소환되어 내외의 重 - 59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職에 포열되고 鄭夢周 추종세력이 대거 몰려났다. 이로써 李成桂 一派는 실권을 되찾고 반대세력은 거의 제거되었다. 최고 정무기 관인 都評議使司는 李成桂 일파에 의하여 독점되고 공양왕은 孤立 無援의 상태에서 실권 없는 王座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해 7월에 李芳遠 南誾 등은 비밀리에 趙仁沃 趙浚 鄭道傳 趙璞 등 50여 명의 관리들과 협의하여 李成桂 王位추대공 작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먼저 都評議使司의 결의를 거쳐 추대공 작을 합법화시킨 다음 王大妃(恭愍王 定妃)에게 요청하여 공양왕 을 폐위시키고 그가 내놓은 玉璽(國璽)를 들고 李成桂를 찾아가서 왕위에 오르기를 간청하였다. 李成桂는 자신의 不德을 이유로 여 러 차례 거절하다가 마침내 이 를 수락하니 이로써 34왕, 475년의 王業을 지켜온 高麗王朝는 종말을 고하고 朝鮮王朝의 개창을 보게 되었다(7월 17일). 朝鮮王朝의 建國방식은 이렇듯 群臣에 의한 推戴형식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武力征服의 과정을 통하여 정치 적 지역적 통일을 이룩하는 王朝交替의 일반적 방식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것은 新王朝建國의 主體勢力이 평화적이며, 文治主 義的인 儒敎의 王道政治 이념에 고도로 세련된 學者官吏들이었다 는 점과, 그들이 舊體制 舊勢力을 무너뜨리고 개혁을 추진시켜 나가며 권력을 집중해 간 방법이 면밀 주도하고 단계적이어서 武 力을 쓰지 않더라도 王朝交替가 가능한 시기에 이르러 李成桂를 추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改革派文臣과 李成桂의 체질이 그 만큼 전진적이며, 그들의 政略이 매우 탁월하였음을 뜻하는 것이 다. 그러나 한편 개혁파 세력의 승리는 그들을 추종한 농민군사의 지지와 협조를 얻어서 가능하였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실로 李 成桂 권력의 기초는 군사력에 있었으며, 그를 추종하던 군사는 舊 - 60 -

1. 大藏經의 雕版 體制 舊勢力에 의해서 고난을 당하던 농민출신인 것이었다. 그리 고 고려 후기 이래의 줄기찬 농민봉기가 개혁을 유도한 근본요인 의 하나가 되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의 승리와 신왕조의 건국은 동시에 농민대중의 일정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 다. 여기에 조선왕조 건국의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3) 政治維新과 宰相中心體制의 整備(太祖代) 1) 國號 國都 國憲의 新定 改革派 儒臣들이 李成桂를 新王으로 추대한 것은 단순히 권력 장악에만 목적이 있기보다는 미진한 개혁을 완수하여 자신들의 포부인 儒敎理念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官僚國家를 건설하기 위한 확고한 기반을 닦고자 하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新王朝 開 創을 새로운 政治維新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 다. 그러므로 新王朝 開創과 더불어 정치유신을 위한 일련의 제도 개편이 뒤따르고 정치유신의 기본강령이 작성되는 등 새 왕조의 기초를 다지는 여러 시책이 마련되었다. 國號의 개정, 國都의 新 定, 朝鮮經國典의 찬진 등이 그것이다. 太祖 李成桂는 즉위 직후 國號를 그대로 高麗라 하였다. 그러나 곧 국호개정에 착수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國號인 朝鮮을 후보로 선정하여 明帝의 승인을 얻어 새 왕조의 國號로 결정하였다. 朝鮮 이라는 명칭은 古朝鮮의 後繼者라는 자부심과 사명감에서 선정된 것이다.34) 古朝鮮은 檀君朝鮮과 箕子朝鮮으로 대표되며, 전자는 中國과 같은 시기에 건국된 自主國家로서 萬里의 大國이며. 후자 는 중국의 周나라와 동등한 文化國家라는 점에서 각각 커다란 自 34) 國號制定의 動機에 관해서는 韓永愚 三峰 鄭道傳硏究(1973) 三章 5節 參照 - 61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負心을 주었다. 그리하여 太祖 2년 2월부터는 朝鮮이라는 國號를 정식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한편 태조 이성계는 開京의 壽昌宮에서 즉위하였으나 開京은 舊 勢力의 본거지로서 전통적 세력기반이 강인하게 남아 있을 뿐만 아 니라 새 왕조의 면목과 人心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서도 新國都의 건설 경영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더우기 風水地理說에 의하면 開 京은 이미 地德이 쇠하여 新王朝의 장래에 불길하다는 것이었다. 新都의 후보지로는 公州 鷄龍山 부근, 京畿의 毋岳(현재 서울의 新 村洞 延禧洞 일대), 그리고 고려의 南京이던 漢陽이 물망에 올랐 으나, 태조 3년 9월에 鄭道傳의 의견을 받아들여 최종적으로 漢陽 을 新國都로 정하고 다음달 10월에 遷都를 단행하였다. 新都의 건 설사업은 遷都 후에 본격적으로 진척되어 만 2년 뒤인 太祖 5년 9 (北嶽)駱山南山仁旺山을 연결하는 全長 약 17 의 都城이 築造되었으며, 都城의 出入門으로서 崇禮門(南)肅靖門(北)興 仁門(東)敦義門(西) 등 四大門과 四小門이 준공되었다. 월까지 宗廟 社稷 宮殿(景福宮) 등 國都로서의 基本營造와 白嶽 한편 太祖 4년(1395) 6월에는 漢陽府를 漢城府라 개칭하고, 또 뒤에는 都城으로부터 10里 안쪽의 連接地를 城底十里라 하여 漢城府에 포함시키고, 5년 4월에는 都城內와 일부 都城外 지역을 5 部 52 坊으로 구획하였다. 漢陽으로 도읍을 옮긴 지 5년 만인 定宗 원년(1399)에 이른바 王子亂이 일어남을 계기로 開京으로 일시 도읍을 옮기게 되었으나, 太宗 5년에 다시 漢城으로 되돌아 옴으로써 이 뒤부터 漢城은 朝鮮王朝의 國都로서 확정되었다. 특 히 太宗 5년의 再遷 이후로 여러 가지 都邑의 附帶施設이 급속도 로 정비되고, 王族 現職官吏를 비롯하여 科田을 받은 閑良官과 각종 侍衞軍士 御用商工人 公私奴婢 등과 그들의 가족들이 이 - 62 -

1. 大藏經의 雕版 주하게 됨으로써 인구의 급속한 팽창을 보게 되어 한성으로 도읍 을 옮긴 지 약 40년 뒤인 世宗朝에는 약 20만의 인구를 포용하 는 대도시로서 성장되었다. 그리하여 漢城은 명실공히 조선왕조 의 國都로서 政治 經濟 文化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國號 國都의 개정으로서 새 왕조의 면모를 새롭게 함과 동시에 新政權의 안정에 장애가 되는 舊王族과 高麗의 遺臣에 대한 처우도 당면과제의 하나가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에는 王朝交替에 대한 舊 臣의 반발심을 완화시키고 평화적 易姓革命의 有終의 美를 거두기 위해서도 舊王族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하고 온건한 태도로 임하였 다. 그리하여 太祖 원년에, 앞서 原州에 유배되었던 廢王(恭讓王) 을 恭讓君에 封하여 杆城으로 더 멀리 보내는 데 그치고, 高麗 太 祖의 廟인 崇義殿을 京畿의 麻田으로 옮기고 麗初 7왕의 廟도 같이 모시게 하여 폐왕의 동생과 아들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 다. 그 밖의 왕씨일족은 江華島와 巨濟島에 이주시키고 뒤에는 巨 濟岛에 있는 王氏를 出陸시켜 등용할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太祖 3년에 일부 遺臣들이 王氏와 연결하여 新王朝의 장래를 誣惑한 사건을 계기로 정부의 태도는 갑자기 경화되어 폐 왕과 그 아들을 교살하고, 출륙이 허용되었던 왕씨를 다시금 海島 로 추방하였으며. 그 일부를 海中에서 침몰 살해하였다. 그 밖에 내륙에 숨어 있던 王氏의 잔족을 색출 처단하여 前朝의 王孫은 거의 멸족되다시피 되었다. 그러나 太宗代에 이르러 정권이 안정 되고 후환의 염려가 없어지게 되자 恭讓君을 승격하여 王으로 追 封하고 王氏의 殘族에 대한 탄압도 중지하였다. 한편 高麗遺臣에 대하여서도 대체로 관용의 태도를 견지하여 그들을 되도록 新政權에 회유 포섭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 63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遺臣들이 新王朝에 포섭되어 벼슬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 중에는 끝끝내 不服하고 향리에 퇴거하는 측도 적지 않았다. 이들에 대하 여는 정상에 따라 鄕吏나 驛吏로 신분을 격하시키기도 하고, 그 후손의 벼슬길을 막기도 하였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죽음을 내리 기도 하였다. 그러나 산림에 은거하여 충절을 지키면서 隱士로 지 내는 사람은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앞서 李成桂 一派와 대립되어 遠地에 유배되었던 李穡은 개국 후에 풀려 나와 韓山伯 에 피봉되어 李王朝에 臣服하였으나 얼마 뒤에 의문의 횡사를 하 였다. 그밖에 吉再 元天錫 趙狷 南乙珍 등 저명한 遺臣들은 李 成桂가 내려준 벼슬을 끝내 사양하고 산림이나 초야에 은거하면 서 高麗에 대한 충절을 굽히지 않았으나, 이들에게는 별다른 처벌 이 내려지지 않았다. 한편 新王朝 개창에 주동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개혁파 관리들은 새 왕조의 政治維新을 추진시킴에 있어서 國家政治의 기준이 될만 한 永世不變의 憲章法典을 成文하기에 부심하였다. 國家政治의 대 원칙을 성립하려는 노력은 이미 고려 말기에도 시도되어 공양왕 4 년에 鄭夢周에 의하여 新定律이 撰進된 일이 있으나 그의 정치이 념은 改革派의 그것과는 간격이 있었으므로 改革派관리들에게 별 다른 영향력을 주지 못했다. 朝鮮王朝 건국 후에 개혁파의 대표적 이론가이며 주동인물인 鄭道傳은 자신이 이상으로 품어 온 儒敎的 정치이념을 성문화하여 朝鮮經國典이라 이름하고 太祖 3년에 왕에 게 찬진하였다. 이것은 鄭道傳 자신의 사견을 피력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아직 官撰法典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 로 조선왕조 건국 전후의 문물제도의 제정에 있어서 그의 역할과 영향력이 가장 컸으므로 朝鮮經國典은 官撰法典에 못지 않은 영향 력을 가졌던 것이 다. 이것이 母體가 되어 太祖 6년에는 최초의 官 - 64 -

1. 大藏經의 雕版 撰法典으로서 經濟六典이 趙浚 등에 의하여 찬집되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그후 다시 몇 차례 수정 보완되어 世祖 成宗朝에 이르러 마침내 經國大典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法典 편 찬 사업은 고려시대에 볼 수 없던 현상으로서 이것은 조선왕조가 처음부터 獨自的인 憲章法典에 입각한 法治國家로서 출발하고 있 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2) 宰相中心의 中央集權的 官僚體制의 정비 新王朝가 개창되면서 李成桂 추대공작에 참여한 50 여 명의 신 하들은 각기 공적에 따라 3등으로 구별되어 開國功臣에 封해지 고,35) 그들에게 수십 結 내지 수백 結의 功臣田과 賜田이 지급되었 으며, 수십 명의 노비 가 하사되는 등 여러 가지 恩典이 베풀어졌 다. 그리하여 開國一等功臣에 封해진 趙浚 같은 이는 富貴를 감당 하기 어렵다고 말할 정도로 그들은 부귀를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일부는 王子 宗親과 더불어 諸道의 軍士에 대한 統帥 權을 分掌하여 마치 私兵처럼 지배하였으며, 高官要職에 임명되어 最高 政務機關인 都評議使司를 구성하는 高位官人은 대부분 開國 功臣으로 채워졌다. 都評議使司는 본래 忠烈王 5년(1279)에 都兵 35) 開國功臣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一等功臣에 裵克廉 趙浚 金士衡 鄭道 傳 南誾 李濟 李和 鄭熙啓 李之蘭 張思吉 趙仁沃 南在 趙璞 鄭 擢 鄭摠 吳蒙乙 金仁赞 등 17名이 피봉되고 이들에게는 각각 220 150결의 土地와 30 15口의 노비가 하사되었다. 二等功臣에는 尹虎 供吉旼 劉敞 李 敏道 趙英珪 趙胖 趙溫 趙琦 張湛 鄭龍壽 朴苞 趙狷 黃希碩 등 13 名이 피봉되어 100結의 功臣田과 10口의 奴婢가 각각 下賜되었다. 끝으로 開國三 等功臣에 피봉된 자는 다음의 22 名이다. 安景恭 金稇 吳思忠 李稷 李舒 柳爰廷 李懃 高呂 趙英茂 李伯由 李敷 金輅 孫興宗 沈孝生 張至 和 咸傅霖 韓尙敬 任彥忠 黃居正 張思靖 韓忠 閔汝翼. 이들에게는 70 結의 田地와 7口의 노비가 하사되었다. 그후 太祖 7年 12月에 李芳遠 李芳毅 李芳幹 등 세 王子가 一等功臣에 追錄되어 開國功臣은 도합 55名으로 확정되었 다. 이들 開國功臣의 性分을 살펴보면 改革派儒臣 이외에 李成桂의 姻戚과 心服 武將이 다수 참여하고 있고 麗末에 都評議使司를 구성하고 있던 重臣들과 六曹의 長官 및 各官衙의 高級官人이 거의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 65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馬使가 개칭된 것으로 고려 전기의 都兵馬使와는 달리 고려 후기의 都兵馬使와 고려 말기의 都評議使司는 그 기능이 확대되어 國家庶 務를 의결하는 상설기구로 변하였던 것이다.36) 여기에는 본래 最 高政務 機關의 기능을 담당하던 宰府(門下省)의 高位官人 이외에 軍政과 王命出納을 관장하는 樞府(中樞院)의 高位官人, 그리고 錢 穀(財政)을 관장하는 三司의 重臣까지 참여하여 都評議使司는 이 를테면 政治 經濟 軍事 담당관리의 연합체제와 같은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러한 都評議使司 체제 속에서 조선왕조가 탄생되었고 개국 후에도 그 체제가 그대로 답습되었으며, 開國功臣이 그 구성 원이 됨으로써 국초의 정치는 실질적으로 開國功臣과 그들의 연합 체인 都評議使司를 중심으로 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開國功臣의 지나친 권력 부력증대와 兵權分掌, 그리고 都評議 使司의 지나친 권력집중 등은 모두가 改革派 관리가 목표로 하는 宰相 중심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들 이 목표로 하는 관료체제는 국왕과 재상을 정점으로 하여 一元的 으로 그리고 等次的으로 계층화되고, 기능별로 분권화된 피라미트 형의 체제를 의미한다. 開國功臣의 권력증대와 都評議使司 체제는 逆피라미트형의 기형적 관료체제를 초래하였으며, 지방군에 대한 私兵的 統率體制는 兵權의 중앙집중과 公兵化를 저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처럼 지나치게 비대해진 都評議使司의 기능을 분산 독 립시키고 私兵의 公兵化를 이룩하며, 權臣化된 開國功臣세력을 스 스로 억압하여 계층적이며, 기능분화된 관료체제를 지향한 개혁의 필요성이 절감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은 開國一等功臣에 봉해 진 鄭道傳을 주축으로 하여 추진되어 나갔다. 太祖 2년에 義興三軍府가 설립된 것은 都評議使司의 기능을 약 112 36) 邊太燮 高麗都堂考, 高麗政治制度史硏究 (1971) pp. 93-66 -

1. 大藏經의 雕版 화시킨 첫 조처였다. 鄭道傳을 수반으로 義興三軍府가 설치되어 軍政이 여기에 귀속되면서 中樞院의 軍政기능은 유명무실해지고 都評議使司의 기능 가운데서 軍政이 탈락되어 오로지 政務만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 이를테면 政務機關과 軍政機關이 분리 독립된 것이었다. 定宗 2년(1400)에는 약화되 어 가던 都評議使司의 변화에 박차를 가하여 都評議使司의 명칭 도 그 기능과 일치시켜 議政府로 개칭하고, 그 구성원에서 三軍府 (中樞院의 後身)의 요원을 제외시킴으로써 議政府를 명실상부한 재상들만의 政務機關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義興三軍府의 설치는 兵權의 中央集中을 위한 조처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恭讓王 3년 1월에 三軍都總制 府가 설립되면서 李成桂 일파가 형식상 兵權을 장악하였으나 國防 軍의 기간을 이루는 地方軍에 대한 統帥權은 여러 將帥(節制使) 개 개인에게 위임되어 국군으로서의 성격이 미약하고 각 절제사의 私 兵的 성격을 농후히 띠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李成桂가 장악 하고 있던 실제적인 군사력은 그 자신이 대외 항쟁을 통하여 키워 온 토착적인 휘하군사들 뿐이었다. 따라서 건국 직후 李成桂는 麗 末의 私的 統帥者들을 해임시키고 지방군에 대한 통수권을 王子 宗親 일부 開國功臣에게 分掌케 하였으나. 一元的인 지휘체제가 성립되지 못하여 각 典兵者의 私兵的 성격을 면하기 어려웠으며, 이것은 도리어 王子 宗親 功臣의 권력 확대를 가져오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한편 李成桂는 즉위한 다음달에 자신의 토착적 휘 하군사를 義興親軍衞라는 명칭으로 좌우의 二衞를 구성하고, 고려 말의 八衞의 中央軍을 이어 받아 이를 전자와 합쳐서 十衞를 설치 하였다. 이 十衞가 형식상 국초의 중앙군의 기간을 이루었으나, 八 衞는 거의 명목뿐이요 실제에 있어서는 義興親軍衞가 중앙군의 핵 - 67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義興親軍衞의 지휘권은 鄭道傳과 王 子 宗親에게 위임되어 왕실의 사병적 성격을 면치 못하였다. 太祖 2년에 義興三軍府가 설립된 것은 이처럼 私兵的 성격을 띤 중앙군과 지방군을 모두 여기에 귀속시킴으로써 일원적인 지휘체 제를 확립하고 명실상부한 國軍體制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義興 三軍府에는 정규군사뿐만 아니라 赴京侍衞하는 閑良官과 成衆愛馬 로 불리는 각종 侍衞軍士까지 귀속되어 그 책임자(判事)가 된 鄭道 傳은 가장 강력한 실권자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鄭道傳은 그가 이 상으로 생각하는 軍事制度인 府兵制를 확립하기 위하여 모든 軍士 를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이원화시키되 통수권은 義興三軍府에 모 두 一元化시키고 지방군은 교대로 상경하여 京城을 宿衞케 하였다. 그러나 이러 한 府兵制를 확립하기 위하여는 私兵의 혁파가 전제되 어야 하는 것이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義興三軍府가 설치 되면서 陣法訓鍊이 강행되기 시작한 것은 군사훈련을 통한 精兵育 成에도 목적이 있었으나, 이를 통하여 私兵의 領屬관계를 해체시켜 그들을 公兵化하는 계기를 만들려는 데도 목적이 있었다.37) 陣法 訓鍊은 太祖 4년 이후에는 對明관계가 악화되면서 遼東征伐계획과 관련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義興三軍府의 설치를 계기로 추진된 兵 權集中政策은 鄭道傳과 私兵統帥者와의 격심한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마침내 太祖 7년 8월에 이른바 鄭道傳亂을 유발 시켜 그를 非命에 죽게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鄭道傳에 의한 병권 집중은 일단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太祖 원년에는 鄭道傳의 의견을 좇아 人官補吏法을 정하여 文 武官吏를 선발 임용하는 원칙을 수립하였다. 즉 관리선발의 문호 를 文科.武科.醫科 譯科 陰陽科.史科.門蔭의 7종으로 구분하여 60 37) 陸軍本部編 韓國軍制史, 近世朝鮮 前期篇 pp. 59-68 -

1. 大藏經의 雕版 이를 7科라 하였다. 이 중에서 門蔭을 제외한 나머지 6과는 모두 시험제도로서 특히 武官을 선발하는 武科와 胥吏를 선발하는 吏 科는 李朝 특유의 제도이다. 이처럼 시험제도를 강화시킨 것은 官 吏의 質을 향상시키고 능력중심의 인재 등용제도를 지향하기 위 한 것이었다. 한편 胥吏는 일정한 임기를 마치면 流品官(文班)으 로 승진하여 胥吏도 당당한 初入仕職의 하나가 되었다.38) 中央集權體制를 강화시키기 위한 대책은 지방제도면에서도 나 타났다. 고려시대에는 地方官(守令)의 品秩이 대체로 낮은 데다가 그나마 모든 州縣에 파견되지 못하고 일부 규모가 큰 州縣(牧.都 護府 등)에만 파견되어 이를 主縣 또는 界首官이라 불렀으며, 나 머지 州縣들은 主縣에 영속되어 간접적으로 중앙정부와 연결되었 다. 뿐만 아니라 지방관을 감독하고 중앙의 政令을 이들에게 전달 하는 중간적 行政長官으로서 按察使(兩界에는 兵馬使)가 각 도에 파견되었으나, 그들은 專任官이 아닌 임시파견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행정적 기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행정의 실질적인 중심단위는 主縣의 界首官이었고 그 밑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하면서 지방사회를 지배한 것은 土着鄕吏였다.39) 따라서 국가는 지방에 대한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지방사회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시책은 麗末에서부터 강구되기 시작하여 공양왕 원년에는 각 도의 行政 長官으로서 專任의 觀察使를 두었고, 공양왕 4년에 일시 按廉使가 부활되었으나, 太祖 2년에 다시 觀察使로 복귀하여 관찰사제도는 李朝地方制度의 한 특성을 이루게 되었다. 관찰사 專任制度는 중 38) 韓永愚 李朝初期의 上級胥吏 成衆官, 東亞文化 10 (1971) 39) 尹武炳 高麗時代 州府郡縣의 領屬關係와 界首官, 歷史學報 17 18 輯(1962) 邊太燮 高麗按察使考, 高麗政治制度史硏究 (1971) - 69 -

Ⅰ. 兩班官僚國家의 成立 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의 강화를 가져왔다. 한편 수령의 質 과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수령의 品秩을 參上官(六品官) 이상으 로 높이고, 무능한 胥吏들 가운데서 守令이 되는 것을 막고, 덕망 있고 유능한 士人을 천거하여 임용하는 등 일련의 조처가 개혁파 가 집권하던 昌王代 이후부터 추진되어 나갔으며, 太祖대부터는 屬縣(守令不在縣) 鄕 所 部曲 등 守令에 의하여 직접 통제되 지 못하는 지역들을 혁파하여 主縣에 통합시키고, 戶口를 기준으 로 郡縣을 재조정하는 등 郡縣制度의 개편사업이 착수되었다.40) 그리고 郡縣制度의 재개편은 土着鄕吏의 세력지반을 붕괴시킴으 로써 그들을 단순한 지방행정의 使役人의 위치로 전락시키는 효 과도 가져와서 中央集權體制는 한층 강화되어질 수 있었다.41) 이 러한 일련의 지방제도의 개편작업은 太祖대 이후 계속적으로 추 진되어 대체로 世祖대에 이르러 일단락되었다. 3) 自主的 實利追求의 對明關係 李成桂 일파는 麗末에 舊勢力과의 투쟁, 몽고 세력의 배제. 倭 寇 및 紅巾賊과의 抗爭 등 급박한 대외적 시련과 대내적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中原의 新興漢族國家인 明과는 긴장관계를 해 소하기 위하여 親明政策을 표방하였으며, 그 결과 양국간에는 대 체로 우호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고, 그것은 민족적 시련을 극복하 고 대내적 개혁을 추진시키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朝鮮王朝가 건국된 뒤에도 親明政策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太祖 代에는 朝鮮側의 활발한 北進政策과 遼東收復政策이 明의 신경을 자극하여 양국간에 갈등이 있었으나, 조선측은 표면적으로 明을 40) 世宗實錄 卷 60 世宗 16年 11月 壬辰 太祖 先革支縣 定爲州都之額 愼簡 賢能 以差遣之 41) 李成茂 朝鮮初期의 鄕吏, 韓國史硏究 5 (1970) - 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