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1. 言論의 活動 2. 民族敎育 3. 民族史學 4. 現代文學
1. 言論의 活動 1. 言論의 活動 3 1운동은 韓國民族의 드높은 예지와 누구도 억누를 수 없는 강 인한 독립정신의 소산이었다. 특히 그 투쟁 방식에 있어 순전한 자유 의사의 표시를 주축으로 한 무기없는 無抵抗主義를 택했다는 것, 그 리고 대중전달기관인 민간신문 없는 시대에 있어 면밀한 계획 아래 전국적으로 총권기하여 일제히 독립 만세를 부르짖고 나섰다는 것 등은 일찌기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世界弱少民族의 독립 운동사상 주목할만한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러한 대규모의 3 1운동에 부닥쳐 당황한 日本은 군대를 동원하여 그 진압에 나섰고 잔혹한 살륙을 감 행한 후 겨우 6개월이 지나서 종식을 보았다. 이 사이에 上海에는 大 韓民國 臨時政府가 세워졌다. 이러한 韓國民族의 격렬한 독립정신은 日本 위정자들의 가슴을 서늘케 하였고 世界弱少民族을 크게 고무하 였다. 뿐만 아니라 日本政府는 세계여론의 비판과 식민통치의 무능 력을 날카롭게 비난하는 국내 여론에 부딪쳐 마침내 韓國民族에 대 한 식민정책의 급전환을 가져 올 밖엔 도리가 없었다. 졸렬하기 그지 없었던 武斷政策의 시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른바 文化政策이라 일컫는 회유정책으로 자주독립을 부르짖고 나선 韓國民族을 무마하 려 한 것이다. 즉 첫째, 꽁꽁 묶었던 言論 出版 集合 結社등의 자유를 어느 정 도 풀어 주므로써 韓國人의 환심을 살 수가 있다. 둘째, 공개적인 言論으로 말미암아 韓國人의 사상 동태를 파악 할 수가 있다. 따위의 실리적인 이점을 계상한 것이었다. 새로나 타난 海軍系의 總督齋藤 實은 韓日合併이 후 엄중하게 금지되었 - 1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던 言論 出版 集會 結社 등에 대한 제한된 자유를 다시 韓國 東亞日 報(發行兼編輯人 李相協), 朝鮮日報(同 芮宗錫), 時事新聞 人에게 허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920년 1월 6일자로 (同 李東雨)등 세 新聞의 발행이 허가되었다. 여러 新聞發行申請 者 중에서 위의 세 新聞만이 허가된 까닭은 각 방면의 세력균형을 취한 것으로 되었으나 그 실은 總督府당국의 다음과 같은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첫째, 發行兼編輯人들의 성분, 그 배후를 엄밀히 검토하였다는 것, 이들은 總督府 機關紙 每日申報의 전 편집주임을 역임했 거나 친일단체의 중견들이었다. 新聞紙法에서 발행 겸 편집인은 新聞의 발행권을 행사하는 가장 중요한 관건을 쥐고 있는 자이다. 둘째, 民族主義陣營과 親日派陣營의 비율을 1對 2로 정하여 韓 國人의 여론을 親日傾向으로 몰고 갈 것. 그러기 위해서는 社長에 朴泳孝, 株主代表로 金性洙를 내세운 東亞日報를 民族主義陣 營의 하나로 쳤고, 社長 趙鎭泰를 내세워 大正實業親睦會1)를 모 朝鮮日報와, 閔元植을 會長으로한 新日本主義를 표방 하고 나선 國民協會 를 모체로 한 時事新聞등을 親日派陣營 체로 한 2) 의 다른 하나로 쳤다. 셋째, 여기에 다시 總督府機關紙 每日申報를 합쳐 1對3의 1) 大正實業親睦會는 한국인을 위주로 한 會員들간의 相互意思의 疏通을 꾀하는 동시, 情誼를 敦篤히하며 精神修養하는 것을 目的으로 한다는 要旨로서 이미 武斷政治下인 1916년 12월 29일 創立된 親日단체이다. 會長에는 男爵 閔泳綺로 登錄되었고 副會長은 趙鎭泰였다. 會維持費로서 250名의 會員이 매월 1圓씩 據 出하고 그 밖에 必要에 따라 臨時 會費로서 經费을 支出하게 되어 있었다. 2) 國民協會는 1919년 1월 18일 閔元植의 主動으로 결성된 新日本主義를 들고 나온 急進的인 親日團 이 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融和-致를 目的으로 삼았고 B 本議會에 대해 選S法의 朝鲜旌行을 촉구하는 請願S를 내어 한국인의 參政權 을 主張하였다. 절성 당시 會員數는 198명으로 總留府당국에 보고하였다. 1921 년 2월 16일 閔元植이 東京에서 民族主義者 梁槿煥에게 被殺되자 後任會長으로 金明濬이 취임, 植民統治가 終熄를 告할때까지 이를 이끌고 왔다. - 12 -
1. 言論의 活動 비율로 民族主義陣營을 열세로 떨어뜨릴 것, 이는 韓國人의 민족 사상과 독립정신을 作爲的으로 억압배제하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韓國人발행의 한국말 民間 日刊新聞은 3종으로 못박았 다. 1920년 당시 韓國人의 총인구 16,697,017명에 대하여 總督府 機關紙까지 합쳐서 한국말 日刊紙는 겨우 4종에 지나지 않았음에 반하여 韓國에 移住한 日本人 326,8723)명에 대하여 日文日刊新 聞은 20種에 올라 있었다. 부당성과 부조리한 것이 植民統治이고 보면 허용된 세 民間新聞만이라도 제대로 확보해 나가는 것이 당 시 韓國言論界에 부과된 임무일밖엔 별 도리가 없었다. (1) 各紙의 背景과 性格 1) 東亞日報의 경우 韓國人에게 新聞發行을 허용한다는 정보를 재빨리 입수한 總督 府 機關紙 毎日申報편집주임 李相協은 그해 9월 전기 신문사 를 사임하고 새로히 新聞創刊운동에 나섰다. 먼저 유력한 협력자 로 金性洙를 손꼽아 이내 崔斗善을 통해 신문사업에 투자할 것을 요청하였다. 첫 회답은 비관적이었다. 당시 金性洙는 中央學校와 京城紡織을 인수하여 손을 뻗힌지 얼마 아니 되었던 때였다. 그러 나 그후 측근자들과 다시 숙고한 끝에 마침내 신문사업에도 적극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이리하여 1920년 1월 14일 정식으로 株式會社 東亞日報社의 發 起人總會를 열고 株式모집은 전국적으로 변져 갔다. 이때 총자본금 을 100만원 (2萬株)으로 하고 우선 3,500株(1株當 50원)로 하되 제1회 불입금은 1株 12원 50전으로 하였다.4) 이때 株主發起人은 다음과 같이 전국의 有志 78명이었고 그 대표는 金性洙였다. 3) 朝鮮年鑑 p.278, 1945. 京城日報社刊 4) 東亞日報 1920년 4월 1일字 - 1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朴泳孝, 金棋中, 高允默, 李台健, 金弘祚, 金泳澤, 吳熙源, 李忠健, 高厦柱, 鄭海魯, 張斗鉉, 金舜善, 朴昌鎭, 殷成雨, 劉世冕, 李應魯, 金孝澤, 朴夏馹, 高光馹, 文尙宇, 金秉圭, 高光駿, 金永福, 許 杰, 金箕東, 張春梓, 任冕淳, 李承駿, 崔 浚, 安熙濟, 李象德, 崔浚晟, 朴容喜, 金雨英, 孫永暾, 李鍾淳, 李鳳和, 金時龜, 尹相殷, 李康賢, 羅弘錫, 尹炳浩, 康邦鉉, 尹顯泰, 邊光鎬, 李鐵煥, 朴琪圭, 李觀魯, 李鍾和, 洪鍾轍, 李孝健, 文永斌, 金衡圭, 李慶世, 金宗元, 李 雲, 成元慶, 金榮洙, 李相協, 張熙鳳, 鄭鳳洙, 李載爀, 張德俊, 徐孟洙, 鄭載源, 金 煜, 李鍾浩, 玄俊鎬, 鄭忠源, 孫秀文, 李炳穆, 金昇默, 崔演武, 李定烈, 朴正植, 池榮璡, 張德秀, 金性洙 한편 大正實業親睦會에서도 趙鎭泰 閔泳綺 芮宗錫 등이 주동 이 되어 朝鮮日報社組合을 1919년 10월부터 결성하여 신문창간에 도 時事新聞창간 준비를 서둘렀다. 위에서 보듯이 東亞日報 의 경우 株式會社體임에 반하여 朝鮮日報는 組合體이며, 時事 新聞역시 同類의 것이었다. 이리하여 1920년 3월5일 朝鮮日 報는 韓帝國이후 10년만에 韓國人 민간신문으로서의 첫 등장을 보 았고 그해 4월 1일에는 東亞日報 時事新聞이 동시에 창간호 발벗고 나섰으며 또 國民協會의 閔元植 金明濬 金九 李東雨등 를 내놓았다. 민간 세 신문은 제각기 창간 취지문을 통해 社是를 밝혀 독자 대 중의 획득을 노렸다. 朝鮮日報의 경우는 뒤떨어진 새 문명을 급속히 받아들여 이를 향상시키겠다는 新文明 진보의 주의를 들고 나왔음에 대해 東亞日報는 제1차 세계대전직후 널리 풍미한 民主主義的인 기풍에 발맞춰 人類의 共存을 위한 理想과 그 방향제 - 14 -
1. 言論의 活動 시를 다짐하는 동시, 民族의 表現機關과 理想의 指示機關을 자임하 고 나섰다. 한편 時事新聞은 韓國人의 新日本主義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 各紙의 성격과 주장은 그 윤곽이 뚜렷 해졌다. 이리하여 3紙는 言論機關으로서 韓國人民에게 그 첫 선을 보이게 되었으나 그 취지 내지 편집방침과 인원구성 등에서 부터 오는 차이는 자연 紙面製作에 그대로 반영되어 讀者大衆의 購讀支 持率에 현격한 차를 가져왔다. 日帝下 민간지 창간 초창기에 있어 東亞日報는 단연 다른 2個紙를 앞서고 달렸다. 그것은 창간사에서 밝혔듯이 朝鮮민중의 표현기관으로 自任, 民主主義를 지지한다, 文化主義를 제창한다는 3大 社是를 들고 나와서 박력있게 지면을 꾸였기 때문이다. 3 1 운동에서 완전독립을 쟁취못했다는 좌절감에 사로잡혔던 당시의 韓國民族에게 同報는 정신적인 매력있는 거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同報는 다른 두 新聞을 제쳐놓고 韓國民族 가슴속 깊이 파 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제 그 例證으로 同報의 논설을 들수가 있다. 世界改造에 劈頭하여 朝鮮의 民族운동을 論하노라(제2호), 첵코스로바기아民族의 建國운동(제5호), 愛蘭문제의 由來(제 7호) 등으로 弱少民族의 동향과 방향을 밝히는 동시에 조선총독부 豫算을 論함(제 6호) 조선인의 교육용어를 日本語로 강제함을 廢止하라(제9호) 統治權의 根本義는 何在오(제16호)등으로 식민통치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조선父老에 게 告함(제3호) 假明人頭上에 一棒(제36호) 각지 靑年會에 寄하노라(제54호)등의 논설을 펴고 나서 젊은이 신문의 기백을 뚜 렷히 나타냈다. 그러나 同報의 이러한 논조는 일부 儒林들의 격노를 샀고 嶺南 및 湖南지방에서는 한때 不買同盟운동까지 벌어졌다. - 15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이에 대해 同報는 假明人頭上에 一棒과 儒敎의 眞髓(제45호 -제48호)란 논설을 전후 4회에 걸쳐 실어 전일 표현에 있어 일 부 과격했던 점을 사과하는 동시에 儒敎의 참된 목적을 설명 부연 하여 儒林을 포함한 전체 동포의 결속을 호소하였다. 여기서 다시 東亞日報의 창간 당시의 진영을 되새겨 볼 필요 가 있겠다. 그것은 아직 株式會社로서의 創立總會도 갖기 전에 大株 主 金性洙의 전폭적인 협찬으로써 신문사업의 첫 발을 내디딘 東 亞日報 를 씩씩한 논조와 편집모습으로 꾸며 낸 사람들이 누구일 까 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다. 社長은 甲申政變때의 주동자 의 하나인 朴泳孝였고 編輯監督에는 大韓帝國時代의 皇城新聞 大韓每日申報의 總務이던 梁起譯이었고 主幹에는 당년 26세의 張德秀, 그리고 論說班에는 張德秀李相 協張德俊(30세)秦學文(27세)金明植朴一秉등이었다. 編輯 社長이던 柳瑾과 역시 陣營에는 編輯局長에 당년 28세의 李相協, 政治經濟部長겸 學藝 部長에 秦學文, 通信部長겸 調查部長에 張德俊, 社會部長겸 整理 部長에 李相協이었고 記者로서는 高羲東 金井鎭 金炯元 金泰 登 金東成 廉尚變 李昇圭 邊鳳現 徐承孝 申相雨 申佶求 崔榮穆 韓基岳 柳光烈 李瑞求등이었다. 그리고 大株主인 30歲 의 金性洙는 營業局의 한 社員으로서 그 이름을 남겨 두었을 뿐이 었다. 이렇듯 30未滿의 젊은 新進氣銳들로 구성된 同報는 靑年新 聞으로서의 기백이 흐르고 넘쳤다. 그러나 東亞日報는 1920년 9월 25일 總督府당국으로부터 마침내 無期停刊의 탄압을 받고 말았다. 그 직접 원인은 同日字 논 祭祀問題를 再論하노라(2)에서 日本의 3種 神器라 일컫는 劍鏡璽등을우상숭배의 표본이라고 비평했기 때문이다. 이때 설 總督府警務當局은 安寧秩序를 방해했다 하여 新聞紙法 第21條를 - 16 -
1. 言論의 活動 적용, 無期停刊의 行政處分을 했다. 그리고 이유로서 이렇게 주장 하였다. 표면상으로 獨立를 선동하는 것은 避하나 항상 引例를 他 國에서 취하여 교묘히 反語 隱語를 써서 獨立思想의 선전에 힘 쓰고 있는 형적이 현저하며 혹은 羅馬의 흥망을 말하여 朝鮮의 부흥을 說하고 혹은 埃及의 現情을 말하여 一波萬波로 마침내 朝鮮의 獨立을 說示하고 愛蘭문제를 說하여 朝鮮의 人心을 자 극하며 英國에 대한 반역자를 찬양하여 반역심을 자극하는 등 일일히 그 실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또 總督政治의 비판을 하는데 힘쓰지 아니하고 근본적으로 總督 政治를 부정하고 악의적인 추단를 내리어 總督政治에 대한 일반의 我帝國臣民의 신념의 中樞인 劒鏡璽에 대해 無理解한 妄說을 들고 (중략) 東亞紙의 言論은도저히 統治의 근본방침과 相容 되기 어려워 이에 부득이 發行을 금지하게 된 까닭이다. 위와 같이 東亞日報는 그후 1921년 1월 10일 停刊이 해제 오해를 깊게 함에 노력하고 있던 중 (중략) 우상숭배를 論할때 5) 될때까지 3개월 남짓한 정간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것도 창간한지 불과 9개월도 못 되었을 때 일이라 同社員들은 물론 韓國 국민들의 충격은 매우 컸다. 왜냐하면 암흑했던 우리 사회의 炬火 가 되며 지침이었으며 聾啞의 嘆을 免케 하였던 민족의 대변기관인 東亞日報가 강권에 의해 無期發行停止가 되었기 때문이다. 재정적으로 아직 확고한 지반을 세우기도 전에 言論機關의 생 명인 발행을 정지당했음으로 받은 同報의 타격이 어느 정도로 심 각했던가는 정간이 해제된지 41일만에야 겨우 복간되었다는 사실 로써 능히 알 수가 있다. 5) 京城日報 1920년 9월 26일字 - 1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뒤늦게나마 다시 속간하게 된 것은 洪增植의 주선으로 이룩된 閔泳達의 5,000원 투자에 힘입은 바 절대하였다. 그후 株式會社 東亞日報社 創立總會6)를 1921년 9월 14일(總株主 256명)에 갖 고 다음과 같이 取締役 및 監査役을 선출하였다. 李 雲張德秀金瓚永宋鎭禹李相協成元慶 張斗鉉鄭在瑗愼九範金性洙 監查役 玄俊鎬張熙鳳朴容喜李忠健許 憲 取締役 그리고 取締役會議에서는 다시 社長에 宋鎭禹, 副社長에 張德秀 (主筆兼務). 專務에 愼九範, 常務에 李相協(編輯局長兼務)등을 선 출하였다. 이리하여 東亞日報는 보강된 새로운 진용으로 씩씩 한 발디딤을 뻗혔다. 이때 宋鎭禹는 社長취임의 소감을 이렇게 피 력하였다. 元來 本報는 1黨 1派의 政略上施設이 아니다. 13道를 網 羅한 400여 株主의 共同經營이며 1人 1家의 私論偏見이 아니 라 2千萬 民衆의 公議 公論을 表現하는 機關이외다. (中略) 그러나 2千萬 民衆으로 같이 立하며 起하며, 같이 怒하며 같이 喜하며 같이 哀하며 같이 樂하려 하는 -片의 微誠만 가 지고 本社의 美良한 從僕이 되려 하오니 諒察하소서7) 그후 東亞日報는 宋鎭禹의 적극적인 新聞經營政策으로 말 미암아 日帝와의 투쟁속에서 성장 발전을 꾀할 수가 있었다. 2) 朝鮮日報의 境遇 한편 朝鮮日報가 국민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음은 그 조직 체가 大正實業親睦會라는 親日단체였다는 것과, 財政的 토대인 組 合株의 모집에 뒤졌다는 것, 그리고 編輯陣容이 열세하였다는 것 6) 古下 宋鎭禹先生傳 pp. 162-163, 1965. 東亞日報社出版局刊 7) 前揭書 p.165-18 -
1. 言論의 活動 과, 처음 實業新聞을 指向했었다는 것 등에 기인된다. 그러나 朝鮮日報를 고찰할 때 먼저 생각할 것은 1924년 8월 말일을 한계로 一線을 그어야 되겠다는 점이다. 그것은 同報가 1924년 9 월 13일부터 民族主義者들 손에 넘어와서 오늘의 토대를 굳혔기 때문이다. 그러면 親日系列에서 경영하던 시절의 朝鮮日報의 朝鮮日報의 略史를 우선 들추어 보자. 이미 지적했듯이 同報는 大正實業親睦會가 경 영한 것이다. 그 陣容도 대체로 同系列에서 선출되었음이 특징이 다. 社長에 同會副會長인 趙鎭泰이며 副社長겸 發行人 芮宗錫, 編 輯局長 崔崗, 編輯部長에 崔援植, 政治部長에 金彰桓, 記者로는 方 漢旻 崔國鉉 金東澈 崔楠8)등이었다. 이때 同報는 4面, 10段制를 채용하여 먼저 紙面構成에 있어 4 東亞日報에 비해 손색이 있었고 겸하여 論說 및 記事내용에 있어서도 이른바 穩健한 編輯方針때문에 面 12段制를 채택한 생기가 없으므로 독자획득에 있어 뒤떨어졌다. 이리하여 社內에 자연 온건파와 과격파로 나눠질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하여 總督府당국은 전자를 여서는 親日派라 했고 후자에 대하 排日派라 평했으나 이 두파사이에 파쟁이 생겨 1920년 8월 14일 趙鎭泰, 芮宗錫 등이 퇴진하고 8월 15일에는 劉文焕이 새로 社長에 취임하였다. 發行人名義도 崔崗이 겸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同報의 論調는 硬化되기 시작하여 최초의 방침과는 정반대로 기적적으로 이른바 확실히 不穩記事를 실리게 되었다. 이는 東亞日報의 인기를 본받았음이 뻔하다. 그것은 첫째로 新聞經營상 민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어야만 되겠다는 것이 작용 되었고, 둘째로는 사실을 사실대로 대 담하게 보도하겠다는 新聞 8) 朝鮮日報五十年史(1970) pp. 263-264 同社 - 19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記者정신이 크게 또한 작용되었다고 보겠다. 마침내 同報는 1920 년 8월 27일자 自然의 化란 論說로 말미암아 總督府당국으로 부터 1주일간의 發行停止의 行政處分을 받았다. 즉 同論說은 舞文 曲筆이라 규정하고 新聞紙法 第21條(安寧秩序를 妨害)를 적용한 것이다. 물론 同報는 그해 9월 5일자로 다시 續刊하는 동시 同紙上엔 愚劣한 總督府당국자는 何故로 우리日報를 停刊시컸나뇨라는 계속적인 論說로서 第1回分을 발표,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러자 總督府당국은 즉각 同報에 대해 이번에는 無期發行停止의 行政處 分을 했다. 續刊되자마자 그날로 또 다시 停刊處分이란 매우 흥분 된 상태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재차 停刊 의 원인이 된 同報 論說 愚劣한 총독부당국자는 何故로 우리 日 報를 停刊시켰나뇨 의 要旨를 들어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前略) 總督政治의 攻擊, 이는 吾人이 가장 大膽하게 實 行한 것으로 當局者가 嫌忌하는 점이리라. 그러나 當局者여 誠心으로 생각해 보라. 吾人은 何故로 侃侃諤諤의 論을 提携 하고 壓迫 虐待를 받으면서도 去益政治의 批判攻擊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냐를, 이는 즉 吾人은 아직도 半島의 主權을 승인하면서 衷心으로부터 施政의 改善을 希望하는 誠意가 있 는 所以가 아니겠는가. 가장 聰明한 當局者는 스스로 回顧 反省하라. (中略) 當初 當局이 朝鮮人에게 新聞을 許可하여 言論을 容認한 本 義는 朝鮮人에게 自由를 附與하는 것이 아니라 壓迫을 加하 려 하며, 民意의 暢達을 구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阿부을 求 하려 하는 것이었는가. 果然 그렇다면 當局의 所謂 文化政治는 亦是 極히 奇怪한 것 - 20 -
1. 言論의 活動 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未完) 사실 9) 朝鮮日報는 창간이후 1920년 8월 27일까지 總督府당 국으로부터 紙面을 압수당하기 전후 23回이며 發行人이 戒責당하 기 10數回에 올랐다. 이러한 기록은 東亞日報가 창간된지 月餘 에 이미 5回의 압수를 당하였고 다시 第1次 無期發行停止된 1920 년 9월 25일까지에는 10數回에 걸쳐 發賣禁止를 당한 것을 앞지르 는 것이었다. 그후 朝鮮日報는 1920년 11월 5일 停刊이 해제되어 다시 續刊되었으나 發行人名義를 이번에는 權丙夏로 바꾸었다. 그러나 朝鮮日報는 여전히 답보상태를 지속하여 재정도 매우 어렵게 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1921년 4월 18일 宋秉峻이 정식으로 社主 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왕년 韓日合併을 宣言한 一進會의 頭目 이며 또 親日新聞이었던 國民新報의 社長이기도 한 이름난 親日派頭目이다. 그가 이제 覆面을 벗어 던지고 직접 同報경영에 발벗고 나섰던 것이다. 그는 먼저 社屋을 三角洞 71에서 水標洞 43으로 옮겨 社勢擴張을 꾀하였다(창간은 貫鐵洞 249번지의 社 屋에서 냈다). 즉 1921년 11월 2일 輪轉機를 구입하여 이제까지 의 平版印刷에서 오는 애로를 타개했으며 새 活字의 채용(1922년 5월 16일부터)과 年中無休制의 실시(그해 9월 21일부터)하였고 1923년 여름에는 劉文煥을 물리치고 宋秉唆 자신이 社長자리에 앉는 동시에 副社長으로 南宮萬, 編輯局長에 鮮于日을 각각 맞이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강화책도 親日紙라는 본질적인 성격을 벗 어날 수는 없었고 재정난은 더욱 우심해만 갔다. 왜냐하면 論調의 빈약성으로 말미암아 독자가 늘지 않았기 때문 이었다. 그것은 東亞日報論說의 경우 總督府당국으로도 지적했 9) 諺文新聞差押記事輯紙 朝鮮日報편 1932. 朝鮮總督府警務局圖書課 - 2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듯이 隱語와 反語로서 韓國의 獨立思想을 고취하여 민족의 나갈 바 진로를 제시하였음에 반하여 朝鮮日報의 경우는 日本의 植民統治를 전제로 한 論陣을 폈기 때문이다. 또한 編輯方針에 있 어서도 전자의 경우, 이를테면 美國議員團의 來韓에 앞서 特派員 을 직접 北京 奉天등지로 파견하여 주체성있는 취재활동을 하는 데 반하여 후자의 경우 매우 미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 한데서 오는 차이는 하나가 民族紙라는 인상이 짙었음에 비하여 또 다른 하나는 자연 親日紙라는 낙인을 독자대중으로부터 찍힐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저돌적인 성격의 宋秉畯도 드디어 그 版權을 申錫雨에게 8만5천원에 賣渡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1924년 9월의 일이다. 이로부터 朝鮮日報의 성격은 民族紙로 급전환되어 그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즉 신문경영에 경험이 없는 申錫雨는 그해 4월 宋鎭禹와 경영 및 편집에 있어 의 견대립으로 말미암아 東亞日報를 사퇴한 신문제작의 전문가인 李相協을 비롯하여 開城의 崔善益등과 같은 강력한 理事陣을 구 성하였다. 이때 崔善益은 약관 21세의 젊은이로서 이미 孤兒事業 에도 손을 뻗치고 있었다. 安在鴻 曺偰鉉 白寬洙 李相協 崔善益 金東成 愼九範 그 리고 社長에는 民族指導者로서 민중의 추앙의 대상이었던 李商在 를 추대하고 申錫雨는 副社長으로 앉았다. 李相協 자신은 顧問으 로서 편집일체에 관한 총지휘를 했다. 이때 혁신된 朝鮮日報는 朝鮮民衆의 新聞이란 표어를 자 신 있게 내걸고 紙面刷新을 단행하였다. 그것은 첫째 女記者를 기용 하여 婦人欄의 충실을 기하는 동시에 女性문제를 많이 다루게 하였 고, 둘째 連載漫畵 멍텅구리를 창설하였으며, 셋째 短評欄인 八面鋒의 창설, 넷째 1924년 11월 23일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 22 -
1. 言論의 活動 朝夕刊 6面制(夕刊 4面, 朝刊 2面)를 단행하는 등의 紙面制作에 새로운 기풍을 불러 일으켰다. 또 한편으로는 침체상태에 빠졌던 민중의 흥을 돋우기 위한 變裝美人찾기와 無線電話放送(지금의 라디오放送)을 시설, 優美館으로 독자대중을 무료로 초대한 후 연 예 프로를 전달하는 따위로 서울의 인기를 독차지 하였다. 이렇듯 맹렬한 기세로 朝鮮日報는 民族紙로서의 면목과 성가 를 높혀 가기만 하였다. 그것은 첫째 李相協과 의견을 같이 했던 閔 東亞日報의 優秀記者가 朝鮮日報로 자리를 옮겼고 그후 柳光烈韓基岳. 李瑞求등도 역시 혁신 朝鮮日報社로 뛰어 들어 편집진용이 사뭇 강화되었음에 반하여 東亞日報는 泰瑗 李炯元등 경험있는 유능한 記者를 일시에 대량으로 빼앗겨 자연 紙面制作에 朝鮮日報의 이러한 진출은 자 연 이제까지 독무대격이었던 東亞日報를 제압할 기세이었다. 커다란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혁신 朝鮮日報社의 초창기의 편집진용은 다음과 같다. 編輯局長 閔泰瑗, 論說委員 安在鴻 金俊淵 辛日鎔, 編輯部 金丹冶林元植崔恩喜, 地方部에 洪悳裕洪南杓朴憲永 金松殷 李相喆 孫永極, 社會部 金炯元 金達鎭 鄭寅翼 金在鳳 한편 1922-3년대부터 밀어 닥친 社會主義思潮는 혁신된 朝 鮮日報 紙面을 장식하게 되어 어느듯 同報는 社會主義新聞이란 평을 받게끔 되었다. 그러므로 종시 民族主義色彩로 일관하는 東亞日報에 비해 朝鮮日報는 새로운 맛을 풍겼다. 이러한 社會主義思想의 潮流는 己未년 31독립만세운동에 실 패한 韓國의 일부 지식층에게 하나의 매력으로 받아 들여졌다. 그 것은 弱少民族의 主權回復을 위해서는 민족자체의 힘만으로는 거 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제1차세계대전후 - 2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나타난 蘇聯은 弱少民族의 해방을 돕겠다 하여 韓國의 민족운동 자에게도 그 손이 이미 뻗히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ML黨의 黨 首였던 金俊淵의 述懷談과 같이 된 것 10)에 獨立운동의 한 수단으로 채택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당시 知識分子들이 점 차로 社會主義思想에 기울어져 갔다는 것은 부인못할 사실이나 日本 植民統治에 항거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1925년 4월 서울 雅叙園에서 극비밀리에 朝鮮共產黨이 결성되어 이에 가담한 일부 意識分子를 빼어 놓고서는 거의가 위 에서 지적한 범주에 속했었다. 이에 대해 柳光烈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였다. 共產主義가 新聞社에 침투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1922 3년쯤에 共產主義가 들어 왔는데 처음에는 共產主義를 過激 派로만 알았읍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獨立이 되어야 된다 이렇게 主張해 왔기 때문에 民族主義者와의 區分이 分明치 않 았어요 11) 朝鮮日報는 1925년 9월 8일 자 朝刊에 朝鮮과 露國과의 政治的 關係란 제목의 사설에서 조 선의 해방은 오직 사회혁명에 있다 고 주장했다. 이것은 日本 이러한 새 思潮에 발맞추어 나간 과 蘇聯 두 나라가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서울에 蘇聯領事館이 설 치되어 샤드바놉領事의 착임을 계기로 다루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당국으로부터 無期停刊의 行政處分을 당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筆者 辛日鎔의 구속과 輪轉機의 압수 등의 司法處 分까지 받았다. 이러한 總督府당국의 태도는 언론탄압의 가혹성을 나타낸 것으 로서 言論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약진도상에 있던 朝鮮日 10) 金俊淵 나의 人生回顧錄, 實話 1954년 11월호 11) 柳光烈 우리나라 新聞의 어제 오늘, 東亞日報 1961년 4월 2일字 - 24 -
1. 言論의 活動 報 로서는 더욱 큰 타격이었다. 出資者인 申錫雨 崔善益과 그리고 金東成 安在鴻 등은 停刊 解除운동에 나섰으며 이에 대하여 總督府당국은 社會主義的인 新 聞을 만들어서는 안될 것과 社會主義記者를 도태할 것을 요구하 였다. 이리하여 停刊중에 당국에서 지목한 辛日鎔 金丹冶 朴憲 永 林元植 등 이른바 赤派記者를 도태하는 동시에 李相協系의 白派記者를 포함한 다음의 13명을 대량 馘首하였다. 즉 그리고 營業局員인 姜禹烈洪鍾悅崔容均皮敎卨鞠採鎭, 金炯元 金松殷 柳光烈 徐範錫 孫永極 崔國鉉 李鍾鼎, 동시에 顧問制度를 폐지하여 李相協, 張斗鉉, 愼九範 등도 물러 나게 되었다. 1925년 10월 19일 停刊이 해제, 續刊되었으나 申錫 雨 金東成 安在鴻 등은 解雇된 白派記者側으로부터 맹렬한 공 격을 받았다. 解雇記者들이 집단적인 馘首反對의 결의와 태도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후 朝鮮日報는 1927년 2월에 서거한 李商在의 뒤를 이 어 申錫雨가 社長이 되었으나 이미 재정적으로 곤경에 빠져 1928 년 9월 安在鴻에게 물려 주었다. 그후 그 자리에는 잠시 兪鎭泰가 앉았다가 다시 曺晚植社長시 대를 거쳐 1933년 3월 21일 方應謨가 이를 인수할 때까지 版權 을 에워싼 우여곡절은 격심하였다. 1933년 7월 10일 30만원의 全額拂込의 株式會社 수속을 완료 하는 동시 方應謨는 정식으로 社長에 취임하였다. 이어 그해 9월 그는 다시 20만원에 全額拂込의 증자를 단행하는 동시에 李光 洙 朱耀翰 徐椿 咸尚勳등 새 진용으로 紙面 강화에 힘썼다. 朝夕刊 12面制의 솔선단행을 비롯하여 취재용 飛行機및 自動車 購入 그리고 太平路에 새 社屋의 건립 出版部의 신설 한글통 - 25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朝鮮日報의 지반은 굳게 안 정되었다. 이로부터 경쟁지인 東亞日報와 정면으로 각축전을 일 철자법의 채용 등으로 비로소 벌리기 시작하였고 때로는 격렬한 경쟁의식의 과열로 말미암아 兩紙간에는 지면을 통한 공방전까지 빚어낸 바 있었다. 方應謨 財團의 등장이야말로 民族紙로서의 朝鮮日報의 성가 를 높이게 한 최대의 원동력이 되었음은 명기할 일이다. 朝鮮中央日報의 경우 여기서 먼저 밝혀 둘 것은 時事新聞을 비롯한 時代日報 中 外日報 中央日報그리고 朝鮮中央日報등을 한 항목으로 묶어 3) 기술하는 까닭을 말해야 되겠다. 첫째는 제한된 지면에 장황히 각 新聞別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편의상의 조치이고, 둘째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總督府당국은 韓國人에게 日刊新 聞을 셋으로 제한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題號와 경영자는 달랐어도 總督府당국으로서는 행정적 으로 3종의 신문중의 하나로서 다루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서이다. 時事新聞은 이미 지적했듯이 新日本主義를 표방하는 國民協 會의 閔元植이 경영 주재한 것이었으나 1921년 2월 16일 東京 鐵 道호텔에서 民族主義者 梁槿煥에게 저격 피살되자 이내 휴간끝에 폐간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韓國人경영의 일간지는 둘로 줄어 들 었다. 己未년 독립만세운동으로 被囚되었다가 출옥하여 週刊紙 東明을 경영하던 崔南善은 同紙主幹인 秦學文과 더불어 새로 일간지인 時代日報창간운동에 적극 나섰다. 이것이 總督府당국 의 허가하는바 되어 1924년 3월 31일자로 마침내 창간 제1호를 내놓았다. 崔南善은 처음 드리는 말이라 하여 창간사를 이렇 게 썼다. - 26 -
1. 言論의 活動 낫자! 북돗자! 기르자! 그리고 길고 깁게 리를 박자! 이 것 밧게 우리의 살 길은 다시 업슴을 에 새겨 긔억하 자! 동포여! 부로여! 형뎨여! 자매여! 울자! 울자! 싸우자! 싸우자! 누가 인생은 웃음 그것만이라 하고만은 그것만이라 하드냐! 낫자면 괴로워야 한다. 북돗고 기르랴면 한층 더 괴 로울 것을 압서 짐작하여야 한다. 허물며 길고 깁게 리를 박으랴 함일소냐! 울어야 한다. 피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남을 것이 무엇이냐고는 뭇지 마라. 뭇는 그야말로 가장 어리석기 때문이다. 삼월 삼십일일! 이날을 우리는 긔억하자. 어느해 어느 세긔에 서든지 이날을 긔억하자. 이날이 낫는 목숨이 얼마나 만흐랴. 이날에 낫는 아들. 이날에 점지될 손자가 얼마나 만흐랴. 그 러면 이날을 긔렴하고 이날이 시대일보의 무궁할 그 목 숨에 비롯한 첫날임을 한 잇지 말자. 시대일보를 우리의 아들과 가티 기르고 우리 의 손자와 한가지 목숨을 니어 배달의 씨가 풍길 그 까지 이와같이 창간된 時代日報(發行人秦學文)는 署名社說制를 그리하야 이 실시하였으며 또 경제부를 두어 證券時勢등 경제기사를 다루는데 힘썼다. 이러한 편집태도와 당시 崔南善개인의 드높은 성망등이 원인되어 同報의 인기는 매우 컸으며 발행부수는 2만부에 올랐 다.12) 同報 창간 당시의 진용은 아래와 같았다. 社長兼 主幹 崔南善, 編輯局長 秦學文, 營業局長 李庭熙, 論說 班 朱鍾健 卞榮晚 安在鴻 李時穆, 社會部長 廉想涉, 同記者 12) 趙容萬 六堂 崔南善 p.196 1969. 三中堂 - 2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玄鎭建 羅彬 金達鎭 柳志永, 經濟部長 金喆壽, 同記者 魯秀 甲 李健赫 그러나 3개월후 극도의 재정난으로 말미암아 崔南善은 普天敎 의 車京錫으로부터 3만원을 받아13)들인것이 발단이 되어 판권소 동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것은 普天敎측으로부터 인사권을 주장하 였고 나아가서는 發行人名義까지 李成英으로 변경하고 말았기 때 문이다. 이에 놀란 사원들이 社友會를 결성 하여 사회의 공기인 신문을 개인이나 宗門의 전유물도 떨어뜨릴 수 없다고 일어났다. 이리하여 崔南善 秦學文등은 그해 9월 1일 각각 그 자리에서 물 러났다. 이때 社會主義者들은 崔南善聲討會까지 열고 社會公器를 일개 邪敎에 팔아 넘겼다고 맹공격을 하였다. 그후 社友會와 普天敎측 간의 절충과 同社發起人會의 노력으로 1925년 4월 새로 趙俊鎬가 發行人이 되어 續刊하였으나 역시 재정난으로 1926년 여름 마침 내 폐간하고 말았다. 이때 재빨리 새로 中外日報의 발행허가원을 總督府에 내놓은 朝鮮日報顧問을 사임한 李相協이었다. 1926년 9월 18일 발행허가가 되자 李相協은 安熙濟李佑植 등 嶺南人士의 투자를 얻어 그해 11월 15일 中外日報를 창간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것은 역시 재정난을 면치 못해 1930년 10월 13일부터 마침내 輪轉機가 쉬게 되었다. 이어 盧正一, 金賛成등이 당국의 허가를 얻어 1931 中央日報를 창간하였으나 이내 1932년 10월 31일 崔善益洪璔植尹希重등에게 版權을 이양하였다. 同 년 11월 27일 이번에는 報는 1933년 2월 출옥한 呂運亨을 새로 社長으로 맞이하고 동 3월 부터 題號도 朝鮮中央日報로 고쳤다. 13) 崔埈 韓國新聞史 p.241 1960. 一潮閣 - 28 -
1. 言論의 活動 朝鮮 東亞와 마찬가지로 朝夕刊 12面制를 단행하는 동시에 변 절자들에 대한 筆誅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獨立宣言에 署名한 33 인중의 한 사람인 崔麟과 朴熙道등이 그 대상인물로 된것은 이때 의 일이다. 그리고 역시 他紙와 같이 出版部를 두고 각종 잡지를 발간하였으나 1937년 11월 5일 마침내 당국으로부터 발행권취소 를 당하였다. 그것은 孫基禎선수의 사진중 그 유니폼에서 日章旗 를 말소하여 東亞日報가 발행정지되자 同報도 이미 日章旗를 말소한 바 있음이 밝혀져 자진 휴간의 형식을 취하여 정간중 역시 재정난으로 말미암아 재기불능으로 전기와 같이 版權이 취소되었 다. 그후 발행정지가 해제된 東亞 朝鮮 兩紙도 1940년 8월 10일 강제폐간되어 民間신문 없는 言論暗黑期로 돌입하였다. 이상 日帝下 민간 3紙의 歷程을 살펴 볼때 공통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의 하나는 한결같이 민간 3紙가 언론탄압을 받았다는 점이다. 언 東亞日報 朝鮮日報는 각각 4회, 中外日報및 朝鮮中央日報가 또한 론기관의 사형선고에 해당되는 발행정지만 하여도 각 1회이었다. (2) 民族言論의 展開 1) 政府없는 民族에 形態없는 政府의 所任 植民통치 아래 韓國人의 민간신문의 움직임은 한 말로 해서 침략 세력에 대한 끈질긴 항쟁이었다. 억압과 탄압이 있으면 그때마다 그대로의 반발을 가져왔고 또 거꾸러져 가면서도 다시 재기의 길을 밟았다. 이렇듯 불굴의 투지는 韓國언론계의 전통적인 저항정신을 확립하였다. 물론 이는 韓帝國시대로부터 이어 받은 하나의 유산 으로 거기에는 당위성이 개재되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것은 - 29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첫째, 新聞 스스로의 사명감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 둘째, 韓國民族의 강력한 시대적인 요구가 가로 놓여져 있었다 는 것 등이다. 韓國 민간신문의 재등장은 앞에서 보았듯이 韓國 전체민족의 피의 댓가로 쟁취한 것이었던 만큼 韓國人의 전체문제에 충실할 밖에 없었다. 더구나 정치적인 무대를 갖지 못한 異民族의 植民統 治아래에서 민간신문은 고민하는 韓國民族의 정신적인 보루이며 투쟁적인 거점이 되었다. 이러한 韓國민간신문에 부과된 사명과 민족적인 요구는 자연 그 紙面제작에 있어 이를 반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민간신문은 기본적으로 韓國人의 주장과 요구를 올바로 내세우고 이를 관철하는데 그 주력을 기울려야 할 운명에 놓여져 있었다. 다만 그것이 植民통치라는 질곡속에서 제대로 충분히 발 휘할 수가 없었던 것 뿐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문제는 물론 완전 한 성취를 볼 수 없었으나 그러나 그 주장만은 민간신문의 존재로 말미암아 부르짖을 수 있었다. 특히 정신적인 문제, 이를테면 민족문화의 보존과 그 앙양에는 항상 민간신문들이 그 앞장을 서서 이를 끌어 올렸고 또 뒤밀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첫째, 전체 韓國人의 의사를 자기의 언어와 문장으로 공개표시 하는 길을 터놓았고 이를 토대로 韓國의 얼을 굳혀 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민간신문이 나타나자 재빨리 시도한 것의 하나로 檀 君影幀을 널리 현상을 부쳐 공모한 사실이다. 韓國民族의 宗祖로 우리 槿域에 나라를 세운 제 1인자로 널리 전해 알려진 사실을 다 시 한번 되새겨 오래 기리려는데 그 뜻을 두었던 것이다. 또 檀君 의 탄강한 聖地로 전승되어 온 白頭山에 登山隊를 조직하여 그 등 반체험을 기록하여 신문에 연재하여 민족정신의 진작을 꾀하는 - 30 -
1. 言論의 活動 등 정신문화의 앙양에 이바지하는 것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가하 면 1922년말, 당시 약관 23세로 一等飛行士의 면허를 따낸 安昌 南 飛行士의 故國訪問飛行을 서울에서 주최하여 韓國 민중의 사 기를 북돋았다. 이 바람에 크게 감격한 민중 사이에는 어느듯 떴다 봐라 安昌南. 굽어 봐라 嚴福童 이란 俗謠가 한동안 전 국적으로 유행하였다. 이처럼 민간신문이 막대한 경비를 들여 가 면서 일개 飛行士의 故國訪問飛行을 거족적으로 주최한 것은 韓 國人의 긍지와 자신을 불러 넣는데 그 뜻이 있었다고 하겠다. 노 력 분투만 하면 제2, 제3의 安昌南을 얼마든지 내 놓을 수가 있다 는 가능성을 실지로 보여 주는데 그 노림이 있었다. 그러므로 당 시 이것을 주최한 東亞日報는 그해 11월 22일자 社說에서 그러면 今回 本社主催의 一回飛行이 幾多의 飛行家를 產出 할것이며 積年 安君의 奮鬪的 精神이 無數한 科學者를 表現하 여 20世紀 科學世界에 萬丈의 氣焰을 吐한 者도 安君이며 半萬 年 沈默을 破하여 16億人의 生活舞臺에 一道 光明을 添한 者도 安君이라 하여 韓國 민중의 분투정신과 과학 개발을 위해 고무하는 바가 컸다. 한편 민간신문은 東京에 留學중인 학생들로 조직된 學友會주최 로 東京留學生夏期巡回講演會를 적극 뒤밀었다든가, 間島 東 京 쌘프랜시스코 하와이 블라디보스톡 등의 해외동포를 위안 하는 在外同胞慰問會를 발기하여 이를 전국적으로 전개하는 따위 도 크게 기록할 만한 일이다. 전기 學友會의 夏期巡回講演會는 1920년 7월 上旬부터 17일까지 大邱馬山咸安晋州統營公州禮山淸州鳥致院天安 에 걸쳐 東萊를 비롯한 釜山 釜山鎭 蔚山 金海 慶州 密陽 - 3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등지에서 學端講演을 강행하였다. 이를 신문이 후원하여 열렬히 뒷받침하였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다시 18일에는 서울 團成社에 서 張德秀司會로 개회되어 金度演(慶大生)이 朝鮮產業의 將來에 대하여 란 제목으로 강연이 진행중 돌연 임석경관의 中止令이 내 려 장내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강연 중지 이유는 保安法 제2條 不穩의 言辭을 用하여 治安을 素亂함이 頗多하였다는 것 이다. 이리하여 19일이후 沙里院平壤元山群山光州등지에 의 서 가질 강연회의 계획도 모두 중지되고 강연단은 강제해산되었 다. 이때 學友會강연단은 團長에 金俊淵(東京帝大)이고 단원은 전기한 金度演을 비롯하여 䄵洙朴錫胤朴定根徐 棒金松殷林世熙申東起韓在 謙李東濟 등이었다. 金鍾弼 崔元淳 尹昌錫 高志英 李琮根 朴勝喆 卞熙鎔 金 14) 한편 재외동포위문회는 국내 동포들로 하여금 해외에서 고생하 는 교포를 위한 교포애를 불러 일으키는 동시에 또한 해외교포들 도 국내동포를 생각하고 더욱 조국애를 굳히도록 하는데 그 뜻을 두고 기획된 것으로 이 역시 민간신문사가 전국의 주요도시를 찾 아 다니면서 幻燈과 講演會를 열어 賛助金을 모집하였다. 이 모임 에서는 萬國記者大會에 참석하여 副議長에 당선되었고 그후 다시 美國 워싱턴에서 열린 軍備縮小會議를 취재하고 귀국한 金東成記 者의 활동모습과 국제회의의 실황 및 해외교포들의 활동상황등이 幻燈映畵로 상영되었고 강연은 宋鎭禹, 張德秀, 金東成등이 담당 하였다. 제1차로부터 제5차에 이르는 전후 10개월에 걸친 이 재 외동포위문을 위한 全朝鮮 순회 환등영사 대강연회는 총청취자 6 만여명의 성황을 이루웠다. 여기서 얻어진 입장료 3만 5천여원은 14) 東亞日報 1920년 6월 26일字 - 32 -
1. 言論의 活動 경비를 공제한 나머지 3만1천여원을 해외의 각종 교육기관과 학 생단체에 분배하였다.15) 이처럼 민간신문은 사회 제반사에 대해 정부 없는 민중에 대해 형태 없는 정부와 같은 지도계몽적 역할을 도맡았었다. 2) 民族文化의 先鋒將 植民통치하란 특수성을 띤 민간신문의 존재에는 영리적이기보 다 먼저 민족적 公器性이 항상 앞섰다. 韓國의 일반민중들도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 들였다. 그러므로 각 민간신문사에서는 이러한 自矜과 포부를 가지고 민족을 대표하여 여러가지 문화사업에 손 을 뻗쳤다. 朝鮮日報 東亞日報등 兩紙가 경쟁적으로 전개 한 한글보급운동으로 나타난 문맹퇴치운동을 비롯한 각종의 體育 大會 文學 美術 音樂 演劇 映畵 出版 科學등 광범위하게 각 분야에 걸친 수많은 여러 사업을 일으켜서 사회에 이바지한 바 공적은 절대하였다. 특히 紙上을 통해 이러한 각종 사업을 소개 보도하여 민중계몽을 고취하는 등 뜻있고 다채로운 활동을 전 깨 한 점이 라든가 또 各紙가 상호간의 경쟁심을 북돋아 한층 더 열 을 가해간 것 같은 사실은 잊을 수 없는 일의 하나이다. 그러나 資本主義體制下에 있어서의 신문사자체의 각종 사업 중 에는 신문경영상 일종 이윤획득에 있었음도 사실이다. 이리하여 당 시로서는 민간신문들이 민중을 대표하여 각종의 사업을 기획하고 모임을 일으키는데 대해 일반 민중들은 조금도 의아심을 갖는 일 없이 당연한 것으로 지지하였다. 1925년 乙丑年 장마로 一大 水害 가 일어났을때 민간신문들은 솔선하여 罹災民구호에 손을 뻗혀 위 문금과 구호의류등의 모집에 열중하였고 이 에 따라 자연 민중들도 15) 東亞日報社史卷一, p.203 1975. 同社 - 3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열렬한 동포애를 불러 일으켰다. 또 이른바 滿洲事變으로 말미암아 在滿 1백만 동포의 생활이 근저로부터 뭉그러지려했을 때라든가 忠武公 李舜臣將軍의 墓地가 사소한 借金때문에 公賣될 위기에 부 딪쳤을 때, 이러한 때마다 민간신문들은 손수 나서서 민중에게 호 소하여 구제금 또는 의연금을 모집하여 전체민족의 이름으로 어려 운 일에 대처해간 공적 역시 컸다. 朝鮮體育會의 창설을 적극 뒷받침한 민간신문들은 제각기 각종 의 體育大會를 주최하였다. 이를테면 全朝鮮女子庭球大會를 비롯 한 中等學校野球리그戰 全朝鮮氷上大會 全朝鮮水泳競技大會 京城 平壤蹴球戰 全朝鮮女子籠球 및 排球大會 全朝鮮力技大會 등이 그 일례이다. 이처럼 민간신문들은 각종 체육을 극력 장려하 여 韓國의 남녀 젊은이들의 체력과 정신력의 함양을 꾀하였다. 특 히 모든 면에서 엄격한 차별을 둔 植民통치아래에서 유독 스포츠 만은 동등한 조건속에서 경쟁할 수 있는 분야이었던만큼 자연이 방면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어 갔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孫基 禎선수의 1936년 여름 베르린 올림픽大會에서 마라톤에 우승한 사실이다. 일개 고교생이었던 약관선수가 그것도 세계 신기록으로 제패했다는 사실이다. 韓國 젊은이들의 긍지와 자부심에 한층 빛 을 가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민간신문들이 이 사실을 크게 보도 하였음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3) 出版 雜誌의 發刊 1) 開闢社와 漢城圖書의 出現 1920년에 들어서자 新聞과 마찬가지로 出版, 雜誌의 발간도 허 용되었다. 물론 이러한 出版활동은 大韓帝國시대에 제정된 出版法 - 34 -
1. 言論의 活動 에 준거하여 허가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제 1920년 9월말 현재로 出版法에 의한 국문 잡지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開闢 京城 李敦化, 曙光 同 李秉祚, 槿花 同 金鳳杓, 學生界 同 吳天錫, 學生之友 同 朴永鎭, 廢墟 同 高 敬相, 共濟 同 趙誠焞, 修養 同 高敬相, 새벗 同 韓 錫源, 서울 同 張道斌, 新靑年 同 李鼎燮, 文友 同 李 秉祚, 至氣今至 同 李顯奎, 家庭新聞 同 任英宰, 新半 島 同 吳宗燮, 새소리 同 盧泳鎬, 開拓 仁川 吳天錫 16) 위와같이 政治, 時事문제를 다루지 않는 文藝, 修養, 어린이들 의 읽을거리 등 무난한 잡지만이 出版法에 따라 허용되었다. 그리 고 각종 종교관계의 잡지가 16개, 天一藥報와 같은 각종 商報 類가 10개였다. 한편 1919년 12월에 들어서자 工友俱樂部(崔宗焕 金大明), 維新 會(高義駿 金尙默), 朝鮮經濟會(朴泳孝 崔鎭)등의 새 단체가 출현 하였고 이어 1920년에는 다음과 같은 10개 단체가 허용되었다. 國民協會(閔元植 金丸), 大東斯文會(鄭萬朝 魚允迪), 勞動大會 (金光濟 李說鍾), 商務硏究會(金光熙 魏洪奭), 革新團(劉得信 盧 俊鐸), 儒道振興會(尹用求 鄭鳳時), 商務協會(鄭民和 李鍾赫), 朝鮮靑年聯合會(吳祥根 張德秀)17) 그러나 허용된 출판, 잡지, 단체 등은 그 성격과 구조상으로 보 아 대체로 2:3의 비율로서 親日系의 우세한 진출을 가져왔다. 이 는 齋藤總督의 言論政策의 일면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사회현상으로서는 오래간만에 손수 서적과 잡지 16) 開闢 1921년 1월호 17) 同上 - 35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를 만들 수 있다는 기쁨에서 투자 내지 기부금을 내는 인사가 많 았다는 점이다. 그 좋은 실례가 開闢社와 漢城圖書株式會社의 등 장이다. 開闢社는 天道敎人인 博川의 崔宗植이 1천원, 邊君恒이 5백원을 기부한 것을 그 기금으로 하여 李敦化 朴達成 李斗星 등이 1919년 12월 20일에 조직한 것으로 첫 사업으로 학술, 종교, 문 예등의 開闢을 발간하였다. 同社는 1922년 9월 出版部를 신설 하여 잡지와 일반서적의 출판에도 손을 뻗히기 시작하였다. 특히 開闢을 비롯하여 부녀층을 대 상으로 한 婦人(1922.6.1창간), 소년소녀 잡지로 어린이(1923.3.1 창간), 학생을 대상으로 한 學生(1929.3.1창간), 그리고 開闢이 강제폐간되자 1926년 11월 1일부터 대중잡지 別乾坤을 창간하 잡지발행에 있어서는 언론잡지로서 는 등 한때 잡지왕국을 이룩하였다. 이제 開闢社의 진용을 살펴 보면 거의가 天道敎人으로 구성되 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斌李在賢車相瓚金起氵塵崔宗植朴達成朴君實朴承喆 (在獨逸)方定焕(在日本)李宇明(在中國)張晦根(在美國) 吳世昌 權東鎭 崔麟 閔泳純 洪光鎬 李敦化 李斗星 金玉 18)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실례로서는 자본금 30만원의 株式體로 1920년 5월에 漢城圖書株式會社가 등장된 사실이다. 일시에 이처 럼 다액의 기금이 출판사업에 투자되었다는 것은 실로 日帝下 韓 國出版史上 처음되는 일이다. 이 획기적인 출판사업에 대한 뜨거 운 의욕은 西北出身의 인사들이 그 주류가 되어 이룩되었다. 이들 우리의 진보와 문화의 增長을 위하여 종시 노력하기로 自任 함이란 포부와 열의로서 同會社를 창립하였다. 이제 漢城圖書株 은 18) 開闢 1923년 1월호 - 36 -
1. 言論의 活動 式會社의 幹部陣容을 보면 社長에 李鳳夏, 專務에 李鍾駿, 取締役 에 韓奎相 張道斌 朴泰鍊, 監查役에 韓潤鎬 許憲, 顧問으로는 金允植 梁起鐸, 그리고 相談役에는 金相殷 金淋炳 金焕 劉壎 燮 李達元 李鍾麟 李忠健 李恒鎭 林祐敦, 出版部長에는 張 道斌이 각각 취임하였다. 서울主幹에 張道斌, 學生 界主幹에 吳天錫, 編輯員에 金焕田榮澤金成龍盧子泳, 雜 誌記者에 金億劉賢淑 外 6名과 囑託으로 金東仁崔八鏞 外 13 編輯陣容으로서는 月刊言論雜誌 名의 知名人士를 기용하였다. 이리하여 이듬해인 1921년부터는 理想村을 비롯하여 朝鮮大地圖그리고 데모스테네 스 짠따크 루쏘등의 傳記物등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鄭然圭作 한편 동년 7월에는 또 하나의 株式體의 朝鮮圖書株式會社가 資 本金 25만원으로서 발족되었다. 이는 이제까지 각각 書廛을 가지 고 판매와 출판을 겸하여 온 기성 출판인들이 통합되어 이루어진 도서도매와 출판을 겸한 새로운 조직체이다. 同社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益亨, 監查役 金相冀南廷哲, 그리고 編輯顧問에는 金明植南 社長 池松旭, 專務 洪淳弼, 支配人 金元祐, 取締役 南宮濬 盧 廷哲 등이다. 한편 天一書館 翰南書林 廣益書館 德興書林 永昌書館등이 역시 출판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애국심에 불타오른 韓國의 젊은 이들은 출판에 뜻을 두고 이 방면에 투자하는 정열은 날로 가중해 갔다. 그러나 新聞紙法 出版法 制令第 6號 및 그후의 治安維持 法 朝鮮不穩文書臨時取締令등 韓國人의 언론 출판활동을 제한 통제하는 여러 법규로 말미암아 出版 雜誌界는 결코 평탄치는 않았다. 그것은 원고의 사전 검열이란 가혹한 애로를 돌파하지 않 - 3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으면 아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성한 출판의욕도 總督府 警務局圖書課의 까다로운 검열관계로 결국 일반적인 서적출판은 극도로 제한되어 그 수가 매우 적었다. ㄱ. 1922. 3년대의 出版傾向 이 무렵에 어떠한 종류와 내용의 책들이 출판되었는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당시의 總督府당국의 검열기준과 방향을 엿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1922년중에 출판된 것. 크롬웰傳, 世界名婦傳-이상은 漢城圖書, 宋淳蘷著 奇人 奇事錄-文昌社, 靑年의 獨立生活-廣韓書林, 成功立身法, 偉人成功의 徑路-이상은 廣韓書林, 朴氏溯源錄-太華書館, 金 祐民著 朝鮮正音文典-朝鮮圖書, 朝鮮之偉人-開闢社出版部, 李光洙作 無情-廣益書林, 朴容奐作 黑眞珠, 톨스토이著 나 의 懺悔, 입센作 人形의 집-이상은 漢城圖書, 方定焕編著 사 랑의 선물-開闢社出版部, 金泳俌作 戯曲集 사랑의 무덤-廣益書 館, 宋完植著 現代勞働問題-永昌書館, 現代思想各論, 靑年 讀本-太華書館, 짠발잔 이야기-博文書館, 朴哲魂作 疑問永昌書館, 金明植編 露西亞革命史와 레닌-新生活社 出版部. 1923년중의 출판된 것 鄭鑑錄(正本)-東洋書院, 批難鄭鑑錄眞本-槿花社, 鮮于全 著 朝鮮의 土地兼併과 그 對策-三光堂, 李章薰編 文獻便考新舊書林, 奇聞世界--啓文社, 玄哲譯 하므레트-博文書館, 閔牛步譯 무쇠탈-東亞日報出版部, 李光洙 開拓者-興文館, 玄鎭健作 墮落者-朝鮮圖書, 盧春城作 反抗-漢城圖書, 타고 아作 金億譯 기탄자리-平壤以文館, 靑春의 사랑 사랑의秘 密 最後의 사랑-이상 京城書館, 사랑의 꿈-永昌書館, 林圭 - 38 -
1. 言論의 活動 日本語學音語篇-朝鮮圖書, 朴玄寰著 提要東洋史-興文館, 칼맑스著 民衆社譯 賃金, 勞働及 資本-民衆社, 十大思想家 어이켄哲學 섹스피아와 그 生活-이상은 朝鮮圖書, 安廓著 朝 鮮文明史-滙雁東書館, 李敦化著 人乃天開闢社出版部 著 19) 이상과 같이 1922년 및 1923년에 출간된 서적이란 대개가 傳 記物을 비롯하여 識緯物, 文藝物, 飜案戀愛小說 및 戀愛書翰集, 古 典物과 칼 맑스의 著作物, 그리고 露西亞革命과 레닌 등 몇개의 이데올로기物 등으로 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곧 總督府 당국의 검열이 가혹함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다. 민족적인 思想物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은 당시의 출판사로 서는 기획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을 말해 주는 좋은 증좌이다. 왜 냐하면 설혹 그러한 것은 출판기획하여 원고집필이 완료되었어도 검열에 걸려 출판이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韓國人의 출판은 일체 전기한 바와 같이 出版法에 의해 總督府警務局圖書課의 사 전 검열을 받아야 되었고 이를 통과하였을 때만 출판을 허가했다. 이러한 관계로 韓國人의 출판물은 자연 그 내용이 저조할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韓國 人의 민족사상과 애국심을 북돋아 주는 저술은 엄중히 억제하면 서도 노동문제라든가 칼 맑스 및 레닌 등의 사상과 革命史의 저 술에는 비교적 관대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이었던가. 이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日本의 정치동향을 참작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日本은 그때 共產革命을 이룩한 蘇聯과 정식으로 국교관계를 맺고 外交使節團을 서로 교환하고 있었으며 그후 서울에도 蘇聯 領事館의 설치를 인정하였었다. 그러므로 日本국내에서는 蘇聯에 제1호 19) 崔埈 韓國의 出版硏究, 서울大學校新聞硏究所學報 1964-39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대한 관심이 점차로 높아 갔고 이데올로기적이라기 보다도 학구 적인면에서 칼 맑스와 레닌의 저서를 번역출판하는 것을 묵인하 는 경향이 질었다. 이러한 풍조는 곧 韓國에도 파급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總督 府의 검 열당국도 아직 이에 관한 체험이 없었던 까닭으로 초창기 에는 비교적 관대했을 뿐이다. ㄴ. 활발성을 되찾은 雜誌 그러면 잡지의 상황은 어떠하였던가. 일반서적과는 달리 韓國人 의 잡지는 매우 활발하였고 또한 투쟁적인 현상을 보여 주고 있었 다. 그것은 정기성을 띠고 있어 계속적으로 발행되었다는 것과 또 다루는 내용이 비교적 다양다색하여 일반서적에 비해 매우 동적 인 성격을 스스로 지니고 있었다는데 그 최대의 원인을 찾아 낼 수가 있겠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인은 1922년 후반기부터 일부 韓國민간인 경영의 여러 잡지에 대해서도 新聞紙法에 의한 출판 을 허가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리하여 잡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에 걸친 시사문 제를 다각적으로 논급할 수가 있게 되어 자연 활발성을 띨 수 있 게 되었다. 더구나 오랫동안 억압당하여 오던 韓國人들의 의사, 주장 및 사상은 이러한 잡지를 통하여 비로소 발현하게 되었다는 事實이다. 그러나 소위 文化政策도 對韓國人의 언론조종면에 있 어서는 대체로 세단계를 두고 조작되었음을 간과할 수가 없다. 잡지는 종교, 학술, 문예 및 業界誌등으로 국한되었으며 더구나 이것이 出版法에 의해 허가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원고의 사전검열의 강행과 시사문제를 일체 못다루게 하는데 그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표면상으 로는 韓國人에게 의사표시의 기회를 준것 같은 효과를 거두는 반 - 40 -
1. 言論의 活動 면에 실제적으로는 언론자유의 길을 막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더 구나 出版法의 조문에도 없는 행정적인 제한조치를 취하여 잡지 창간을 허가하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總督府當局이 잡지창간을 허가할때 반듯이 계재내용와 항목을 지정한 일이다. 이 허가항목을 이탈하였을 때에는 곧 발매 금지 및 발행정지등의 처벌규정이 적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도로 제한된 언론을 전개하기 위해 계 속 잡지발간허가를 신청하는 자가 그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이 목을 끌고 나타난 것은 旬刊誌인 新生活이었다. 이것은 朴熙道가 海州의 李承駿으로부터 1만5천원의 투자를 얻 고 西洋人宣敎師 白稚悳을 편집겸 발행인으로 하여 1922년 3월15 일 出版法에 따라 創刊號를 내었으나 발행당일로 總督府當局의 忌 諱에 저촉되어 발매금지 되었다. 開闢의 창간호가 밟은 전철 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것이 되었다. 이것은 기백있는 잡지가 발족하 는데 있어서 마치 의무적인양 치러야 할 이른바 당국의 탄압 이란 첫 선물이기도 하였다. 新生活이 이처럼 창간호부터 탄압의 세례를 받은 것은 同 誌의 편집목표부터가 주목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同誌는 대중의 자유사상과 평등 문화를 외치고 나왔으며 파괴 로부터 건설, 개조와 혁신등의 신생활 신운동을 내세우고 나섰다. 新生活이 부르짖고 나온 구호는 확실히 韓國人 사회에 새 로운 파문을 던진 주목할만한 일이었다. 그것은 민족적인 전통과 인습에 도전하였고 日本統治에 반발하 여 社會主義 경향으로 돌진할 것을 암시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同誌는 당시 잡지계의 왕자인 가치를 높이 내세우고 나왔다. - 41 - 開闢과는 대조적인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新生活창간호는 어떠한 편집내용 그러면 발매금지를 당한 을 들고 나왔었던가. 이제 그 목차와 집필자를 알아 보기로 하자. 新生活 新紀元의 第1年 第 1日의 나의 所望 姜邁 自由思想과 賢母良妻主義 辛日鎔 重生하자 金元璧 生活의 不安 李星泰 民衆精神의 一考察 鄭佰 社會運動의 先驅者의 出來를 促함 申伯雨 金剛山遊記 春園 社會罪는 何 솔뫼 대개 이상과 같은 내용과 집필진으로서 新生活은 그 출발 을 보았다. 그러나 잡지 편집자들의 열렬한 의욕도 당국의 검열에 걸려 그때마다 원고의 삭제, 몰수, 혹은 발매금지등의 언론탄압을 받아 험란한 길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므로 韓國人의 新聞 雜誌 記者의 조직체인 無名會에서 는 1922년 1월 26일 臨時總會를 열고 신문과 잡지에 대한 검열 및 허가제의 철폐를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이를 總督府당국에 요 구하였다. 한편 이무렵 韓國人 사회에서는 언론자유를 외치고 이를 요구 하는 여론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이에 대하여 總督府當局의 답변은 종시 치안을 방해한다는 것 으로 일관되었다. 이때 東亞日報는 1922년 1월 17일자 社說에서 치안방해의 정도의 한계를 밝힐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처럼 韓國人사회 에서는 언론 출판의 자유를 부르짖는 소리는 높아만 갔다. 그러 나 總督府當局은 이에 외면을 계속하였다. 따라서 韓國人의 언론, - 42 -
1. 言論의 活動 출판의 자유는 국내에서는 계속하여 봉쇄당하였다. 그 반면 海外 여러나라로 이민 혹은 망명한 韓國人들의 언론활 동은 활발하였다. 신문 및 잡지들의 활약이 바로 그것이다. 1919 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후 上海에서 수립된 大韓民 國 臨時政府에서는 獨立新聞을 창간하였고 한편 同臨時政 府公報 를 발행하여 국내동포를 위해 內地로 계속 발송하였다. 한편 美國에서도 각종 신문과 잡지등이 발행되었고 北京 天津 黑河 間島등 中國大陸의 각처에서도 간행물들이 발행되어 국내 동포들의 국민여론을 환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日本에서도 이미 여러가지의 잡지가 나오고 있었으나 1922년 12월 15일에는 鄭昌先 崔承萬 金永鎭 崔元淳등의 집 필로 文化新聞-月 2회刊-이 창간되어 국내로 발송된 후 조 국의 질식상태에 빠져 있던 언론계를 위해 공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海外에서 발행된 출판물들은 總督府당국의 엄중 한 단속으로 말미암아 日本에서 발행된 것은 발매금지가 되었고 그밖에 다른 외국에서 출간된 것은 모조리 물수당하고마는 형편 이었다. ㄷ. 民族主義와 社會主義와의 分裂時代 韓國人사회에서 부르짖고 나온 언론자유의 외침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러던 중 總督府當局은 1922년 5월 親日團體인 國民協 時事評論을, 그리고 31독립선언문을 기초하 여 복역후 출옥한 崔南善과 秦學文에게 동년 9월 週刊誌 東明를 會에 대해 月 刊誌 각각 新聞紙法에 의해허가하였다. 國民協會長兼 社長인 閔元植을 時事新聞은 이어 경영난에 떨어지자 전기한 바와 같이 결국 月刊誌로 전환한 것이다. 이에 자극된 開闢을 비롯한 新天地 朝鮮之光그리고 新生活등이 일제히 新聞紙法에 잃은 - 4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의한 發行許可의 변경운동을 맹렬히 일으켰다. 開闢을 新聞紙 法에 의해 발행하도록 변경허가하였고 新天地 朝鮮之光 新 生活도 마찬가지로 이를 허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親日系인 平 壤의 大東同志會의 鮮于 (竹/洵)에게도 새로 月刊誌 共榮과 週刊紙 大東新報를 新聞紙法에 의한 발행권을 허용하였다. 이리하여 韓國人 경영의 전기한 잡지들은 비로소 정치시사 總督府當局은 마침내 1922년 9월 15일, 우선 평론을 할 수 있게 되어 아연 그 활기를 띠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정치 시사 학술 등의 평론이 허용되자 韓 國人 민간경영잡지계에는 새로 社會主義경향의 논문과 언론이 고개 를 들고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새 경향은 이미 1920년 1월 朴重華 朴珥圭등이 주동이 되어 조직 한 朝鮮勞動共濟會의 창립 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同會는 그해 4월 月刊誌 共濟를 창간하여 회원들간의 교양 계몽에 손을 뻗혔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노동단체가 처음으로 발 족했다는데 의의가 있을 정도밖에 아니 되어 별로 커다란 관심거리 는 못되었다. 이와 때를 전후하여 吳祥根 張德秀등이 주동이 된 朝鮮靑年聯合會가 1920년 3월에 결성되어 그 기관지로서 我 聲 를 발행하고 민주주의 문화운동의 실력양성를 목적하여 강력 히 전면에 나타났다. 共濟와 我聲은 비록 4호까지밖에 각 각 계속치는 못하였으나 벌써 民主主義對 社會主義의 대립상을 엿 보여 주어 앞으로 민족의 독립운동 내지 사상운동의 단조롭지 않음 을 예견케 하였다. 이리하여 1921년에 들어서자 韓國사회의 일부에서는 막연하나 마 점차로 社會主義가 번지기 시작하였고 이어 다음해에는 民族 主義와 분렬하기 시작했다. 민족주의 진영의 여러 단체들은 민족 - 44 -
1. 言論의 活動 전체의 취할바 길을 모색하는데 열중하였다. 이를테면 이미 1920 년 6월 26일 尹致昭댁에서 李商在외 91명의 발기로 조직되어 회 원 320명을 가졌던 朝鮮敎育協會에서는 청년들의 교육문제와 자 질향상운동에 나서고 있으며 1923년 1월 23일에는 朝鮮物產獎勵 會(理事長 兪星濬)를 조직하여 다음과 같은 3大口號를 내세우고 민족의 생활향상을 적극 꾀하였다. 즉 1. 입자! 朝鮮人의 짠 것을 2. 먹자! 朝鮮人의 만든 것을 3. 쓰자! 朝鮮人의 손으로 된 것을20) 이는 韓國人의 생활개선을 비롯하여 산업장려와 자작자급의 3 大指標를 제시한 것으로 크게 의의가 있었다. 왜냐하면 직접적으 로는 日帝下 韓國人의 살 길을 명시, 실천하는 것이오, 간접적으 로는 日本植民統治에 대한 저항운동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同會에서는 產業界를 기관지로 발행하여 산업장려에 힘썼다. 다시 同 4월에 들어가서는 李商在를 정점으로한 전국의 유수한 민족주의자들이 발기인이 되어 民立大學期成準備會를 조 직하고 民立大學의 설치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植民地敎育機關에 불만을 가졌던 당시 韓國指導者 들의 반항적인 표현이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總督府 經營의 官立學校에서는 입학자에 관해서 韓國人을 차별대우하였 으며 그 敎授科目 내용에도 민족교육을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民立大學設立運動은 總督府當局의 탄압으로 그 실현을 볼 수는 없었다. 위와같은 韓國人사회의 동향과 현상은 그대로 잡지편집면에 반 영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0) 東亞日報 1923년 1월 25일字 - 45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즉 各誌의 논조는 점차로 열을 더해 갔고 개중에는 社會主義경 新生活이었다. 新 聞紙法에 따라 편집된 週刊誌 新生活第11號는 露國革命 五 周年 紀念號로 특집 발행되었으나 1922년 11월 12일 總督府當 향이 짙은 편집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은 局에 의해 곧 압수되었고 이어 同第12號도 계속 압수되었다. 동시 에 同社社長 朴熙道와 印刷人 盧基禎 양인은 1922년 11월 22일 구속 검거되었다. 뿐만이 아니라 同社의 印刷機에 대해 封印押收하 는 한편 다시 執筆者인 金明植 金思民 辛日鎔 兪鎭熙등을 검거 기소하였다. 1923년 1월 8일의 공판에서는 전원에게 징역 2년 6개월 내지 1년 6개월의 有罪判決이 있었고 新生活은 무기발행금지의 행 정 처분을 당하였다. 이로서 韓國최초의 社會主義 硏究雜誌는 철 저한 탄압을 받았다. 新生活은 처음 旬刊으로 발행되었으나 검열관계로 정기성을 지키기 어려워 月刊으로 고쳤고 그후 新聞紙法으로 발행할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新聞紙型의 週刊誌가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부터 總督府당국은 社會主義경향의 잡지에 대해 가차없 는 탄압을 가하고 나섰다. 이는 民族主義경향의 잡지에도 적용되 었다. 그 예로서는 白大鎭집필의 논문을 실은 日本爲政者에게 與하노라란 新天地(1922년 11월호)에도 발매금지와 동시에 필자를 검거 기소한 것이 그것이다. 이 일연의 사실은 요컨데 總 督府당국이 언론정책을 일부분 수정 변경한 것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일부 잡지를 新聞紙法으로 허용하여 韓國人 사회의 언론을 물어 주는 대신에 植民統治에 반대 혹은 방해 되는 것은 단호히 처벌 탄압한다는 것이다. - 46 -
1. 言論의 活動 이러한 수법은 이제까지의 出版法으로써 사전 검열하여 그 수록 내용을 미리 억제하던 것에 비하면 적극성을 띤 유동적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방법은 사실 전자에 비하여 후자가 훨씬 교 활한 것이었다. 그것은 전자의 경우 압수라는 행정처분이 고작이 었으나 후자의 경우에는 행정처분에 다시 사법처분까지 가하는 잔 혹한 처벌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社會主義 경 향은 朝鮮之光(發行人 金東爀)과 開闢에도 침투되어 그후 점차로 그 지면을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923년 이후 더욱 짙어만 갔다. 이점에 관하여 民主主義를 제창하고 民族代辯을 자임하고 나선 당 시의 東亞日報는 앞날의 韓國思想界를 전망하는 1922년 10월 3 일자 社說에서 吾人은 本來부터 民族主義와 社會主義 兩大思想에 對하여 더욱 硏究할 必要가 有하며 될 수 있는대로 協助가 有한 것을 覺悟하노라. 그 理由는 頑固한 民族主義는 往往히 排他思想을 挑發하며 (中略) 또한 過激한 社會主義는 往往히 階級僧惡와 同 族分裂의 憂慮가 不無하도다. 적어도 同族相愛와 人道的色彩를 띤 社會主義가 아니면 虛無慘擔한 黑幕을 연출할 것도 豫想하 라고 지적한 후 양대사상의 장단과 시대와의 적부 는 바이다 를 심각히 연구하여 그 美를 취하고 그 劣을 버릴것을 경고하였 다. 그러나 이미 社會主義경향으로 다듬질 한 각종의 단체와 구룹 간에는 치열한 헤게모니 다툼과 암투가 계속되었으며 더구나 기 성세력체인각종 民族主義團體에 대해서도 저돌적인 도전행위로 나와 부질없는 민족 분열을 조장하였다. 그러므로 민족분렬과 암투투쟁을 크게 걱정하는 층도 없지 않 - 4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아 왕년의 西 南 少論의 당파싸움과 같은 투쟁이 다시금 나타나서는 아니 되겠다는 경고와 또한 통탄하는 소리도 높았다. 이점에 관하여 新民公論(1922년 11월호)는 痛哭할 我社會의 分裂과 鬪爭이 란 제목의 논문으로 경종을 울린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와같이 1923년 10월이후 1925년 사이는 韓國出版界의 성장 발전과정상 社會主義運動의 자연발생시기이며 구태어 말한다면 組合主義的인 經濟運動을 한 때라 하겠다. 그러나 이 시기에 社會主義로 기울어졌던 사람들 중에는 대개가 民族主義의 변형된 연장으로 삼고 나갔던 것이다. 朝鮮日報특파원으로서 모스크바에 다녀온 후 ML黨의 거두 로 검거되어 囹圄生活을 한 바 있는 金俊淵은 후일 당시의 사상 적인 경로를 이렇게 말하였다. 당시의 世界情勢로 보아서는 日本과 對遮的인 관계에 있는 소련과 握手하는 것이 우리의 目的을 達成하는 捷徑이라는 것 을 우리 朝鮮靑年들은 생각하게 되었고 더군다나 내 自身이 생 각하게 되었다 21) 이상과 같은 술회담은 그때 韓國 젊은이들의 사상적 움직임의 배경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1923년이후 새로 나타 난 社會主義경향의 文藝誌로는 李赤曉 李活 宋影등이 焰群의 창간을 들 수가 있다. 그러나 民族主義진영에서는 李光洙주재의 朝鮮文壇과 廉想涉의 靈臺가 나왔다. 1924년의 일이다. 이어 新文藝, 廢虛以後, 性愛, 數理界, 少年世界, 어린 벗, 半島少年등과 1925년에는 일부 北星會系員들로 된 一月會의 기 관지로 社會運動을, 李如星安光泉이 社會科學硏究誌로 思想 運動을 각각 창간하였다. 그리고 또 李晟焕의 朝鮮農民, 鄭國鉉 21) 金俊淵 前揭書 - 48 -
1. 言論의 活動 새벗, 李載禹의 相助, 金世映의 佛日, 權相老의 佛敎, 生長, 崔泰瑢의 天來之聲, 黎明, 普聲, 新民, 民生, 少年週報등이 나왔다. 특히 朝鮮文壇은 方仁根의 개인투자로 창간된 것으로서 1927 의 년 4월호(通卷 20卷)를 마지막으로 재정난 때문에 자진휴간하기까지 民族主義文學을 위해 공헌한 바가 실로 컸다. (4) 1) 開闢의 發行禁止 開闢과 現代評論 계급적인 색채를 노골적으로 나타내면서 등장한 것은 1926년 文藝運動이다. 이는 朝鮮프로레타리아藝術同盟(俗稱 카프)의 기관지로서 부르죠아이데올로기의 극복을 들고 나왔 다. 예를 들면 文學에 超越意識과 現代的인 意義(朴英熙), 文 學과 階級(朴衡秉)따위였다. 그러나 당국의 엄한 검열관계로 2월 창간된 1927년 1월 겨우 第3호를 내놓고 폐간할 밖에는 없었다. 카프는 그 후 1927년 12월 第三戰線과 합쳐서 藝術運動을 창간하였 으나 계속되지 못하였다. 時鍾, 4월에는 農民, 5월에는 東光, 8월에는 平凡, 그리고 11월에는 文 藝時代등이 각각 창간되었다. 특히 東光은 同友會(후일의 興士團)에서 발행한 것으로서 이에 앞서 民族主義진영에서는 1926년 1월에 民族主義진영의 유력한 언론기관으로 각광을 받고 등장하였다. 同 誌는 4.6倍版(그후 국판으로 변경)의 새 체제에 한글 철자법으로 용어를 통일하여 그 특징을 보였다. 이리하여 東光은 한글철 자법으로 통일된 최초의 잡지이었다. 그러나 出版法에 의거하여 - 49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허가된 까닭으로 정치, 시사의 평론을 할 수가 없었고 다만 수양 과 계몽을 위주로 한 기사로만 내용을 메꿀 수 밖에는 없었다. 民族的 肉體改造運動(金昌世), 合 同과 分離(安昌浩), 藝術評價의 標準(李光洙)의 편집내용을 同誌의 창간호를 보면 들고 나와 社會主義의 傾向文學 및 그 평론태도에 일침을 가하였고 특히 민족분리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었다. 집필진으로서도 安昌 奎趙炳玉鄭寅普白性郁金億李容卨金允經李允宰廉 相涉朱耀翰吳天錫朱耀燮金基鎭 등을 망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해 8월 1일 開闢은 總督府당국으로부터 발행금지 란 행정처분을 받아 1919년 31독립운동의 쟁취물인 同誌는 영 浩를 비롯하여 徐載弼 金麗値등의 海外亡命人士와 崔南善 權悳 영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것은 韓國雜誌界에 가장 큰 타격 을 준 불상사로서 韓國사회를 새삼 놀라게 하였다. 왜냐하면 開闢은 天道敎 敎人들이 경영한 가장 오랜 역사 를 가진 종합잡지로서 1923년이후부터 社會主義思想에 관한 논문 을 부분적으로 실려 오기는 했으나 民族主義진영 만이 아니라 전 체 韓國사회의 전통있는 잡지였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開闢8월호는 滌暑號로 특집되었으나 혁명사상을 선전했다 하여 總督府당국으로부터 新聞紙法 제21조를 적용, 드 디어 발행금지의 처분을 당하였다. 이리하여 7개년동안 민족문화 의 향상을 위해 공헌이 많았던 開闢은 사라지고야 말게 되었 다. 同誌는 창간된 이래 通卷 72호로서 사라질 때까지 전후 33회 에 걸쳐 압수와 동시에 발매금지를 당하였다. 그중에 1회는 50원의 罰金刑을 받았고 또 1회는 1925년 8월 第62號가 압수되자 다시 號外로 발행한 것이 문제가 되어 발행정 지를 받았다가 3개월후에 비로소 해제되어 속간하였다. 이제 - 50 - 開
1. 言論의 活動 關 의 언론투쟁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압수 및 발매금지를 당한 號數를 년대별로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1920년-창간호, 임시창간호, 제6호 1921년-제9호, 제12호, 제16호 1922년-제19호, 제26호, 제27호 1923년-제34호, 제39호, 제44호 1924년-제45호, 제46호, 제47호, 제49호, 제50호, 제53호 1925년-제54호, 제56호, 제57호, 제58호, 제59호, 제60호, 제62호, 同號外(이때 발행정지당함) 제63호, 제64호 1926년-제67호, 제69호, 同號外, 제70호, 제72호 위와같이 開闢은 7개년동안 通卷 72호를 내는중 33회에 걸쳐 압수와 발매금지를 당하므로 말미암아 입은 재정적인 타격 이 얼마나 컸던가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開闢社 는 불굴의 정신적인 투지로서 同誌를 계속 발행하여 왔었으나 드 디어 발행금지라는 결정적인 탄압을 받고야 말았다. 이는 新生活이 무기발행금지된 이후 두번째 일이었다. 그러 나 同誌의 發行人 李斗星, 編輯人 李敦化 그리고 編輯主幹인 金起 纏은 子息은 죽었으나 產母는 여전히 健在하다 22)고 지를 발행할 결의를 표시하였다. 이리하여 1926년 11월 대신에 계속 잡 開闢 別乾坤을 창간하였다. 이로서 開闢社는 이미 발행하고 있던 각종 잡지와 서적의 출판등으로 여전히 굴지의 언론출판의 기관으로 계속되었다. 開闢誌의 강제폐간으로 말미암아 1926년 8월 현재에 이르 러서는 新聞紙法에 의한 잡지는 朝鮮之光을 비롯한 時事評 論과 李覺鍾의 新民등 세가지로 줄어 들었다. 22) 李鍾洙 朝鮮雜誌發達史, 新東亞 1934년 5월호 - 5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그러나 朝鮮之光 도 재정난과 원고검열난으로 허덕여가면서 겨우 1931년까지 그 명백을 유지해 갔으나 그 대신 편집내용은 자연 활기가 없고 저조함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27년에 의한 現代評論을 1월에 창간하였다. 이는 開闢이 없어진 들어서자 河駿錫 趙俊鎬 李憲寧 李灌鎔등은 새로 新聞紙法에 공백을 메꾸는데 큰 소임을 지니고 나타났다 하겠다. 同誌의 집필 진도 매우 짜임새 있는 것으로 자연 사회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現代大勢의 大觀(李灌鎔), 中國革 命과 政治的 價値(安在鴻), 朝鮮人의 今日問題(金俊淵), 朝 鮮人經濟의 數字的 槪觀(李肯鍾), 朝鮮農村問題硏究(河駿錫), 個人主義와 社會主義(李順鐸), 맑스時代의 歐洲社會變遷(朴 衡來), 自治運動에 對한 社會學的 考察(白南雲), 新幹會의 任務(洪命憙) 등으로서 편집내용과 그 경향을 알 수가 있겠다. 그 후 1928년 3월 5일 現代評論은 마침내 廢刊屆를 내었다. 同誌 창간호의 차례를 보면 이제 1927년으로부터 1931년 5월까지 사이에 나타난 새 잡지의 이름을 대충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927년 : 朝鮮語學會의 한글, 洪鍾仁의 白雉, 아이생활 新興科學, 金敎臣의 聖書朝鮮, 開城의 思潮, 光活, 妓 生들의 長恨, 노동야학, 백합화, 勞動運動 1928년: 基督敎의 新生, 한빛, 文藝, 朝鮮運動, 理論鬪爭, 崔南善의 怪奇, 白熊 公州. 生의 聲 海 州. 朝鮮週報, 如是, 新聞硏究, 朝鮮詩壇 1929년: 梁柱東의 文藝公論, 京城帝大法文學部學友誌인 新 與, 金東煥의 三千里, 朝鮮文藝, 解放 新小說의 改題, 基督敎系의 農民生活, 槿友會의 槿友, 李鍾麟의 衆聲. 1930년; 藝術一般雜誌, 大衆公論, 全武吉의 大潮, 朴 - 52 -
1. 言論의 活動 詩文學, 音樂과 詩, 鐵筆, 白頭山, 新趣味, 朝鮮物產獎勵會會報, 一千동무 實生活, 카프의 大衆訪 群 旗 1931년 ; 產業勞動, 宋奉瑀의 批判, 我等開闢社의 慧星(그후 第一線으로 改題). 龍喆의 23) 1931년 3월 서울의 7個 雜誌社代表들은 언론출판의 권위신장, 경영상의 협조, 회원간의 친목을 목적으로 朝鮮雜誌協會를 결성 하고 다음과 같은 7개항목을 결의하였을때 總督府당국은 이를 또 한 묵인하고 더구나 出版法에 의한 잡지에 대해 어느정도의 정치 시사문제를 다루어도 무방하다는 태도로 나왔다. 결의사항이란 (1) 검열제도를 철폐할것 (2) 新聞紙法을 범위확장할 것 (3) 時間 制限의 규정을 철폐할 것 (4) 一部削除로서 全文削除로 된다든가 또는 出版의 불허가에 의한 징계적 수단을 철폐할 것 (5) 人物評을 허가할 것 (6) 검열시일을 단축케 할 것 (7) 편집기술에 속하는 기사취급방법에 간섭하는 것을 철폐할 것 등이었다. 2) 各新聞社의 雜誌刊行 1931년 6월 第6代總督으로 취임한 宇垣一成은 민심파악을 위 한 정책의 일환으로 自力更生과 心田開發이란 두 슬로건을 내세 웠다. 그러나 그는 韓國各地에서 族出한 젊은이들의 각종 단체를 탄압하였고 또 무수한 강습소등을 폐쇄시켰다. 더구나 그가 취임한지 불과 한달도 못되어 滿洲에서 韓國人과 中國人사이에 충돌된 萬寶山事件이 일어나 國內로 비화 확대되었 다. 이를 이용하여 韓國民族의 시선과 관심을 바깥으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이리하여 日本은 그해 9월 소위 滿洲事變을 일으켜 軍國主義一 23) 金根洙 韓國雜誌概觀및 號别目次 pp. 175-607 1973. 韓國學硏究所 - 5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路로 다름질 쳤다. 이를 계기로 日本은 철저한 左翼탄압으로 나왔 음으로 共產主義者들은 완전히 지하로 잠입할 밖에 없었고 社會主 義경향의 논조도 또한 저조할 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배경 아래에서 東亞日報社는 1931년 11월 새로 종합지인 新東亞를 창간하였다. 원고난에 겹치는 검열난, 그리고 재정난에 허덕이던 것이 당시 民間雜誌들이 공통적으로 받은 3대 고통이었으나 新聞 新東亞는 비교적 이러한 고통을 제거해 가면서 편집을 할 수 있었다. 新東亞의 출현은 다른 민간인들의 잡지 社를 모체로한 를 압도하게 되었고 그후 各誌들은 자연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 다. 더구나 이에 더 박차를 가한 것은 朝鮮中央日報社가 1933년 11월 中央을, 다시 1935년 11월에는 朝鮮日報社에서 朝 光 등의 종합잡지를 각각 창간한 사실이다. 이리하여 韓國의 종합 잡자는 전기 세 新聞社가 경영한 3잡지가 패권을 장악하고 말았다. 다시 東亞日報社에서는 1934년에 女性雜誌인 新家庭을, 朝鮮 少年中央을, 그리고 朝鮮日報社에서는 1936 년 3월에 女 性등을 내어 新聞社經營의 잡지시대를 가져왔다. 中央日報社에서는 이 바람에 宗敎團體에서 경영하는 것이라든가 株式會社경영의 것, 기타 學術誌와 같은 것 이외에는 존속하기 힘들게 되어 갔다. 이러한 현상은 이제까지의 韓國雜誌가 뚜렷한 대량의 독자를 확보치 못한데 기인되는 것으로서 대중속 깊이 뿌리를 박지 못했 음에 있다 아니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커다란 원인은 당시의 韓 國讀書界가 日本出版物에 의해 침식되었다는 점이다. 각종 日本 出版物의 침투도는 그 비중이 매우 컸었다는 사실이다. 여기다가 다시 시국의 급변에서 오는 중압감이 또한 커 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지가지의 악조건속에서도 여전히 간 할적이나마 각종의 잡지는 나왔다가는 살아지고 또 나오는 것 - 54 -
1. 言論의 活動 이었다. 이제 이를 년대별로 대충 들어 보면 아래와 같다. 한글, 新朝鮮, 文學建設, 新興 映畵, 第一線, 東方評論, 또 1933년에는 카톨릭靑年, 野 談, 金若水의 大衆, 朝鮮文學, 學燈, 哲學등을 들수 있 고, 1934년에 正音, 震檀學報, 劇藝術, 形象, 新人文學, 文藝創造, 다시 1935년에는 四海公論, 元世勳의 中央時報, 野談등이, 그리고 1936년에는 鑛業朝鮮, 朝鮮農民, 延禧詩 蘊, 普專學生등이 나왔다. 그러나 宇垣總督의 뒤를 이은 第7 代總督 南次郞은 1936년 8월에 취임하자마자 이른바 內鮮一體라 1932년에는 朝鮮語學會의 는 구호를 내걸고 나왔다. 이는 朝鮮軍司令官을 역임한 現役陸軍大 將인 總督으로서 韓半島와 韓國민족을 이른바 皇土化와 皇民化 를 시켜야 한다는 결의표명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1940년을 고 비로 하여 言論, 出版界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모든 분야와 더불어 軍國 日本의무모한 侵略戰時體制로 급변되어만 갔다. 1939년 2월에 文章은 總 25호를 마지막으로 살아져야만 했 다. 그것은 總督府당국의 강제명령으로 이른바 國語常用이라하 나타난 李台俊의 여 日本語로 편집을 해야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같은해 10월 人文評論은 總 16호를 낸 후 1941년 11월 日本語로 된 國民文學으로 改題하여 이른바 皇 에 창간된 역시 文藝誌인 崔載瑞의 道文學誌로 전환하였다. 이에 앞서 전일의 新生活誌사장이었던 朴熙道는 솔선 日本語 東洋之光을 창간하여 이목을 끌었고, 이어 1941년 2월에 는 梁在廈의 春秋를 비롯한 각종 잡지가 점차로 그 내용을 軍國 로된 調로 편집하였고 日本人 집필의 글은 원문 그대로 日本語로 수록하 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博文出版社의 新時代, 大東亞등도 그 - 55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뒤를 따랐다. 그러나 軍國 日本의 이러한 민족 고유의 언어와 문자 의 사용을 억압하고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韓國민족의 슬기와 끈질긴 노력은 계속 민족문화 확보에 집중되어만 갔다. 그 좋은 하 나의 본보기는 이러한 악조건아래에서도 韓國語辭典의 地下出版 이 성행되었다는 것과 창립이래 계속 적자운영이었던 漢城圖書 株式會社의 각종 출판물이 그 어느때 보다도 많이 팔려 크게 흑자 를 내었다는 사실등으로 이를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5) 文盲退治運動 민간 신문의 등장은 한글의 보급과 文盲退治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신문발행으로 韓國人대중의 읽기운동에 강력한 자극을 주 었고 이에 따라 문맹퇴치 역시 자연 병행하게 되었다. 이미 지적 되었듯이 신문이 여러 문화분야에 걸쳐 많은 공헌을 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이 文字普及 및 문맹퇴치운동에서 이룩한 공헌은 더욱 빛나는 대목의 하나이다. 1925년 9월 현재의 통계로 나타난 각종의 남녀 단체는 도합 4.470개로 되어 있다. 물론 이 통계는 당시의 朝鮮總督府 朝鮮史 料 제20집에 수록된 것으로 서울의 각단체의 본부 및 그 지회등 을 합친것이나 이중에서 靑年會는 447개이고 宗敎靑年會는 306 개, 그리고 종교類似단체가 1,474개로 되어 있다. 그후 1927년 2 월 민족단일결사인 新幹會와 역시 그해 5월에 결성된 槿友會등의 출현으로 그중의 많은 청년단체가 이에 통합 흡수되었다. 이들 청 년 단체가 또한 민간신문과 보조를 맞춰 문맹퇴치운동에 정력을 기울렸음도 기록할만 하다. 文字普及운동을 먼저 조직적으로 밀고 나온 것은 朝鮮日報社가 - 56 -
1. 言論의 活動 1929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실시한 제1회 歸鄕男女學生文字普 及運動 을 들어야 되며 뒤이어 나타난 또 하나는 1931년 여름부 學生夏期브나로드運動이다. 즉 전 자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가르치자! 나 아는 대 로란 口號가 박힌 한글원본책을 대량으로 인쇄 배포하여 그 교 터 시작한 東亞日報社의 재로 삼았고 보급운동에 우수한 성적을 올린 남녀 학생들에게는 상금을 주기도 하였다. 후자의 경우 역시 여름 방학을 이용한 남 녀학생을 동원한다. 배우자 ㄱㄴ부터란 구호로 전국으로 전개 된 글장님없애기 운동으로 그 규모와 조직은 가장 짜임새가 있었 다. 그것은 글자를 가르키는 學生啓蒙隊로부터 學生講演隊, 學生 記者隊등으로 구성되었고 이밖에 지방유지들은 이에 참가를 희망 하는자를 위한 別動隊도 되어 한글공부 日用計算法등의 인쇄물을 배포하였다. 사실 글장님 없애기 운동의 선구는 東亞日 報社라 할수가 있다. 그것은 1928년 3월에 이미 同報창간 8주년 기념 사업으로 대대적으로 이 운동을 준비 추진중 總督府당국의 중지령때문에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두 新聞社의 문자보급운동의 연도별 통계를 보면 朝鮮의 文字 보급운동 참가학생 수강자 1929년 409명 2,849명 1930년 900명 10,567명 1931년 1,800명 20,800명 1934년 5,079명 不明 東亞의 브 나로드운동 참가학생 수강자 1931년 423명 9, 492명 1932년 2,724명 41,513명 1933년 1,506명 27,352명 1934년 1,094명 20,601명 이 지음 基督敎에서도 하기 아동성경학교란 모임을 각 교회마다 열어 한글 가르키기운동에 적극 참여한 업적 또한 적지 않았다. 1928년 당시 文盲者 80퍼센트를 가르치고 있을때 민간신문들이 한 - 5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결같이 그 타파운동을 크게 벌이게된 것을 너무나 당연한 노릇이 었다. 그것은 모든 단절로 정체, 그리고 곤욕과 부진을 일소하고 분연히 일어나서 자아를 회복하는데 그 기본이 되기때문이다. 그러나 總督府 당국은 1935년에 이르러 민간신문사들의 文字 普及운동을 또다시 중지시켰다. 그러나 한글은 그후 계속 교회와 주일학교를 통해 번져만갔다. 崔 埈 2. 民 族 敎 育 (1) 日帝의 敎育政策과 民族敎育 19세기 말 門戶開放이 이루어진 이래 韓國에 대한 열강의 세 력 다툼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또 이로 인하여 韓國의 內政이 갈 피를 잡기 힘들만치 어지러웠었다는 것은 오늘날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어려운 때에 韓國의 선각자들은 이미 저들 열강앞에서 韓國이 너무나도 무력하다는 사실과 함께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었던 것이니, 그것은 다름아닌 더 늦기전에 韓 國도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 교육을 새로이 해야 하겠다는 것이 었다. 이것은 특히 신흥 日本이 淸日戰爭과 露日戰爭을 통하여 東西洋의 兩大國을 제압함에 이르러 더욱 더 확고한 신념이 되었 고, 따라서 우리 사회를 근대화하여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새로운 교육의 보급에서 찾고자 했던 것 이다. 그리하여 1910년 韓日合邦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국내 에서는 대대적인 교육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교육운 - 58 -
2. 民族敎育 동은 곧 韓國 新敎育史上 民族敎育의 방향을 그어준 획기적인 사 건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말해서 1905년 乙巳條約으로 부터 1910년 合邦까지 6년 동안에 일어난 국내에서의 교육운동은 韓國 現代史에 있어서 하나의 계몽기를 마련해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日帝가 우리의 국권을 유린하고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명백해지자 우리 민족은 日帝에 대하여 한편으로 義兵을 중심으 로 한 무장항쟁을 벌이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교육을 통한 開 化文明운동을 일으켰는데, 무력항쟁이 日本 군부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면서 부터는 후자의 길, 즉 교육운동의 가치를 더욱 더 깊 이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 무렵에 韓國 전역에 걸쳐서 私學이 크 게 일어나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기울어 져가는 國運을 바로 잡고 사회적인 모든 병폐를 일소하는 수단 방 편으로서 우리 민족이 교육의 광범한 보급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學會畿湖學會嶠南學會關東學會와 같은 민중의 지도적인 단 따라서 安昌浩 李昇薰 李東輝와 같은 선각자와, 그리고 西北 체와 宗敎團體가 중심이 되어 大救國敎育運動이 전개되었다. 결 국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른 당시의 교육운동, 私學의 발흥은 사 실상 범국민적인 것이 되었다. 이 시기에 설립된 私立學校의 수 가 전부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으나, 合邦直前인 1910년 7월 1일 현재 大韓帝國 學部에서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學部의 인가를 받은 私立學校의 수가 2,240校에 달하고 있다.1) 이 통계는 그보다 2년 전에 私立學校令이 내려져 다수의 學校가 1) 1910年 7月 1日現在 學部에서 調査한 全國學校數(官報 第4,756號 隆熙 4年 1910 8月 13日刊 彙報欄 所載) - 59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폐쇄된 뒤의 것이다. 따라서 폐쇄된 學校까지 합친다면 상당수에 달하였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종전에 漢文을 가르치던 書堂이 學校나 義塾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新學問을 가르치고 都市마다 夜學校와 講習會가 생겨 新敎育의 보급을 촉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물론 교육기관으로서의 규모와 시설을 별로 갖추지 못했을지 몰라도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에 그처럼 맹렬한 교육 운동이 민간인들에 의하여 일으켜졌었다는 것은 문화적인 一大事 件으로서 특기할만한 일인 것이다. 서울의 養正義塾 普成學 校 徽文義塾 進明女學校 明新女學校 平安道의 五山學校 大成學 校 등이 다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이 같은 私學의 발흥이 外勢, 즉 이 시 기의 日帝의 침략에 의해서 자극되었을 뿐 아니라 하루속히 우리 사회를 近代化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해야 되겠다는 진지한 민족의 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私學의 교육정신이나 교육내용이 처 음부터 정치적 색채를 띄게 되었음은 어찌할 수 없었던 추세였 다. 한편 이렇게 무수한 私學이 애국심을 앙양하는 동시에 排日사 상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음을 본 統監府는 마침내 1908 년 8월에 私立學校令을 공포해서 私學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 를 가하게 되었는 바 이로써 당시 救國運動의 일환으로 전개되던 私立學校 敎育은 그 본래의 사명을 다 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合邦 이후엔 급기야 문을 닫지 않을 수 없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욱 혹심한 억압과 본격적인 통제의 예고에 불 과했다. 1910년 合邦이 성립되자 日帝는 우리 민족에 대한 철저 한 植民政策에 의거하여 교육 방침을 수립 실천했던 것이니 이 시기의 民族敎育의 형세가 얼마나 곤경에 처했었던가는 여기서 - 60 -
2. 民族敎育 긴 설명을 따로이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日帝의 韓國 植民統 治 36년간의 행적으로 보건데 그들은 韓國人의 민족성을 말살하 고 또 문화를 파괴함으로써 日本人의 노예로 만들며 경제적으로 는 우리를 착취하여 自國의 부강을 도모하고 또 이 나라를 中 國 大陸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음이 명백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植民地政策에 맞춰 總督府의 교육방침도 수립되었고 또 실천에 옮겨졌던 것으로서, 그 내용은 日帝 지배하에서 전후 4차 에 걸쳐 공포된 소위 朝鮮敎育令에 의해 명시되고 있다. 이 朝鮮敎育令이란 것은 韓民族의 同化라는 日帝의 커다란 목표로 지향하는 과정에서 그때 그때 형편에 따라 韓國 民族敎育의 내용 을 세부적으로 변경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나 이로 말미암아 民族 敎育運動의 형태에도 변화를 가져 오게 하였던 만큼 그 내용을 여 기에 간단히 설명해 들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본다. 제1차 朝鮮敎育令은 初代 總督 寺內正毅에 의해 1911년 8월에 공포된 것으로서 이는 日帝統治 초기에 속하는 10년 동안에 행해 진 교육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어 같은 해에 普通學校 高等普通學校 女子高等普通學校 實業學校 私立學校의 規則등 관계 법규가 공포되었고, 1915년에 가서 專門學校規則이 비로소 공포되었다. 全文 30條로 된 전기 朝鮮敎育令의 핵심은 韓國人을 모두 皇民化하고 時勢 民度에 맞는 교육을 한다는 취지하에 日 本語敎育과 實利敎育에 치중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로써 韓國 학 생들은 日本 臣民化의 토대가 되는 日本語와 근로교육 실과교육 의 전수에 힘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朝鮮敎育令은 私立學校 敎育의 근본적인 規制 조항을 條文 제1조와 제28조에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私立學校 에 대한 감독을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하여 1908년 統監府시대의 - 6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私立學校令을 개정, 私立學校規則을 공포하더니 다음엔 이것으로 서도 私學을 官 公立學校처럼 철저하게 통제할 수 없다고 보았 는지 1915년에는 改正私立學校規則을 또 다시 공포하는 등, 私學 통제의 농도를 최대한으로 짙게 하고자 했었다. 이 改正私立 學校 規則에 의거하여 당국은 여지껏 어느 정도는 治外法權에 속 해 있 던 外國 宜敎師 경영의 基督敎系 학교를 포함한 일체의 私 學에 대하여 적극적인 취체의 손을 면칠 수가 있게 되었다. 제2차 朝鮮敎育令은 3 1운동의 폭발에 자극되어 1922년 2월 에 공포된 일종의 융화적인 방법에 의한 植民地 교육 정책의 표현 이었다. 즉 우리 민족의 거족적인 봉기에 당면한 日本 당국자들은 결국 武力으로써 韓民族을 통치할 수 있다는 그들의 안일한 생각 에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종래의 武斷政策 을 완화, 소위 文化政治를 표방하고 나섰던 것이다. 齋藤 實 總督 이 새로이 부임하면서 나온 이 文化政治의 미명하에 여하튼 日帝 統治 초기에 공포 수단으로 채용되었던 憲兵警察制가 폐지되 고 韓國人 官吏의 등용문이 약간 열리게 되었으며, 또 어느 정도의 言論 集會의 자유가 허용되어 東亞 朝鮮 등 민간 신문 및 잡지 가 창간되기에 이르렀고, 몇몇 민간단체의 조직도 생기게 되었다. 특히 軍國主義的인 심볼로서 관리와 교원의 허리에도 칼을 차도 록 되어 있던 종래의 규칙을 폐지하여 자못 부드러운 정책을 시행 했던 바 전기 제2차 朝鮮敎育令만 해도 朝鮮統治 초기에 자기네 교육제도 보다도 훨씬 저급이었던 韓國의 敎育制度를 소위 자기 네 본토의 교육제도에 준거하여 뜯어 고쳤다고 하는 커다란 변화 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韓國人에 대한 차별대우를 없애겠다는 것 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들의 말로는 韓國의 民度가 이제 높아졌기 때문에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한다 하였으나 실은 3 1독립운동으 - 62 -
2. 民族敎育 로 팽배해진 韓國人희 反日感情 완화에 主眼을 둔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때의 文化政治는 외견상 온건하고 부드 러운듯 하면서도 실은 한층 더 음험하고 교활한 방법에 의한 同化 政策에 불과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나마 1927년 12월 齋藤 實의 후임으로 山梨半造가 韓國에 오자 寺內時代의 소위 民度에 맞는實科敎育 방침으로 환원되어 다시금 교육침체의 시기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즈음 日本은 그 제국주의적 야망을 아시아 大陸에 펴기 위해 滿洲事變 中日戰爭 太平洋戰爭을 도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그들은 韓國을 兵站基地化하여 人的 物的 資源供給源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쓰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韓國人에 대한 교육 도 大陸侵略戰爭을 지원하는 방편이 되게 하였으니, 國體明徵, 內鮮一體, 忍苦鍛鍊이라는 슬로우건을 내걸어 교육의 기본방침 으로 삼고 학생들을 전적으로 戰爭物資의 생산, 國防施設의 건 설, 日本軍에 대한 봉사사업에 동원하고 소위 志願兵제도를 만 들어 그들을 戰場으로 유도하였다. 이같은 사정에 응하여 당시 의 總督 南 次郞은 1937년 10월에 皇國臣民誓詞를 제정, 朝 鮮의 학교, 관공서, 회사 등에서 朝會때마다 이를 외우게 함으로 써 소위 皇國臣民化敎育을 극도로 강화하였다. 1938년 3월에 공 포된 제3차 朝鮮敎育令은 이같은 시정 방침의 토대 위에서 정해 진 것이었다. 이 敎育令에 의해 학교에서는 우리 글이 완전히 폐지되고 그 대신 日本語의 상용이 강요되었고 1940년에는 內鮮一體라는 미 명하에 우리의 성명을 日本式으로 創氏케 하기까지 하여 이에 응 하지 않은 사람의 입학, 진학을 허가하지 않기도 했다. 이 교육 제도의 수정으로 日本은 종래의 韓國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를 정 - 6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정하는 양 학교 명칭을 小學校, 中學校 등으로 통일시켰으나 이 것은 다만 형식상의 조치요 실질상의 차별은 여전히 남아 있었 다. 그들은 이처럼 韓國人에 대해서 강요한 희생의 댓가로 형식 적인 대우를 해주면서 민족말살정책을 지체없이 수행해 나간 것 이다. 민족교육의 자율성이 이토록 짓밟히고 日帝의 간악한 民族同化 政策에 더 없이 유린되던 국내의 각급 학교들은 그나마 1941년 太平洋戰爭의 발발로 최악의 수난을 겪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專門學校 이상은 1년 더 빨리 大東亞共榮圈 확립 및 臨戰奉公에 매진케 한다는 구실하에 수업년한을 4년에서 3년으로 단축하였는 데 이는 동년 5월에 日本閣議에서 결정한 韓民族에 대한 徵兵제 도의 실시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1943년 4월에는 종래 의 敎育令을 근본적으로 개정하여 제4차 朝鮮敎育令을 공표 시행 하게 되었는데 소위 皇國의 道에 따를 國民鍊成에 목적을 두 고 각급 학교의 學制改革을 단행, 국가 유용의 인물을 鍊成한다고 했다. 이어 1945년 5월엔 學徒의 決戰態勢 확립을 위해 이른 바 戰時敎育令이 내려져 학생과 교육기관은 일제히 太平洋戰 후 수행에 동원되었다. 이 동안에 民族敎育 내지 私學은 극도의 탄압 을 받게 되었다. 韓國語의 교수와 사용이 금지됨은 물론 日本語의 교수가 강화되고 韓人교원의 추방과 日本人 교원의 대량 진출로 私學은 사실상 日人의 손에 강점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民族敎育 내지 私學은 日帝統治下 36년간에 있어서 가장 혹심한 수난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날로 강화되어 온 그들의 탄압 속에 서도 수시로 民族敎育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니, 즉 統 監府時代에서부터 시작하여 日帝統治 초기에 해당하는 1900-1910년대의 각종 民族敎育機關(밋숀系 學校를 포함한 私 - 64 -
2. 民族敎育 立學校, 專門學校 등)의 성장, 3 1독립운동이 있은 후 日帝의 소 위 유화정책을 이용하여 크게 일어난 1920년대의 勞動夜學會 職 業敎育 文盲退治의 브나르드운동 및 民立大學設立運動, 그리 고 역시 20년대 후반기에 싹터 1930년대의 전 기간과 194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크게 事業을 벌였던 朝鮮語學會의 활동은 日帝의 植民地 統治下에서 모진 탄압을 무릅쓰고 韓國民族이 자주적 주 체적으로 民族의 장래를 전망하면서 그 당시 벌였던 一大 民族運 動 文化運動이었음을 오늘날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准公 私立學校 立普 計 計 合計 府 通學 道別 專門 高等 實業 普通 校 高等 實業 普通 各種 宗敎 漢城府 4 2(女) 3 9 18 1 1(女) 2 1 67 23 95 113 京 畿 1 6 7 12 139 44 195 202 種別 官公立學校 忠 忠 全 慶 北 南 北 北 慶 黃 平 平 2 2 4 40 7 51 53 4 4 3 2 67 17 89 93 2 4 6 2 4 41 30 77 83 2 5 7 7 14 19 7 47 54 南 海 南 北 2 7 9 4 6 74 17 102 110 2 2 7 102 149 258 261 3 3 6 159 255 423 426 4 4 5 251 115 372 376 江 原 咸 南 咸 北 1 3 4 5 2 3 5 9 2 3 5 10 1 3 16 59 計 4 86 70 1 3 1 1 2 3 54 2 33 4 42 46 171 15 198 203 58 68 7 90 1,228 755 2,152 2,238 이 統計에서 私立學校중 各種은 學會나 有志들이 세운 것이고, 宗敎는 宗敎團體에서 세운 것이다. 勿論 宗敎團體라고 하면 大體 로 基督敎 敎會가 이에 해당되었다. 地域的으로 關西地方에 많은 數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 地方에 敎會가 많이 세워져 있었기 - 65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때문이다. (2) 民族敎育機關의 成長 舊韓末 爲政者들도 근대적인 敎育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 렇기 때문에 1886년 헐버어트(Homer B. Hulbert) 등 美國敎師 3 인을 초빙하여 育英公院을 설치한 바 있고, 甲午更張 뒤에는 敎育 詔書를 내려(1895년과 1899년 兩次에 걸쳐 내림) 본격적으로 교육 사업의 추진을 다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895년 4월의 漢城 師範學校官制를 비롯해서, 外國語學校官制, 中學校官制 등 여러學 校官制와 規則이 제정되고, 실제로 小學校 中學校 師範學校 稱됨)小學校貞洞小學校齋洞小學校養士洞小學校校洞小學 外國語學校 등이 세워졌다. 水下洞小學校 壯洞(뒤에 梅洞으로 改 校 등 官立小學校가 서울에 설치된 것은 이 때였으며, 이 밖에도 지방 觀察府 소재지와 기타 府郡에 50여의 公立小學校가 설립되 었다. 이들 學校의 설립은 비록 당시의 정부가 충분한 財政的 지 원을 해주지 못하고 또 新敎育에 대한 一般國民의 이해가 부족하 여 별반 눈에 띌만한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역시 수 천 년래의 舊敎育을 국가에 의해서 탈퇴해 보려 한 노력이었다는 점 에서 기억할만한 일이다. 이렇게 새로운 교육을 위한 발돋움을 위해 정부가 힘을 기울이 고 있을 때 민간인들 가운데에서도 새 시대에 눈을 뜬 선각적인 人士들이 따로이 敎育機關을 설치하였으니 1895년의 興化學校를 비롯하여 1901년의 洛淵義塾, 1902년의 牛山學校, 1904年의 靑 山學院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학교들 또한 경제적 기초가 박약한 외에 너무 시세에 부응하여 정규적인 교육보다는 - 66 -
2. 民族敎育 外國語 위주의 교육을 시행했기 때문에 그 수명이 길지를 못했다. 한편, 이 무렵엔 韓國 민간인에 의해 私立學校가 세워진 것 이외 에도 宣敎師들에 의해 설립되는 학교의 수가 급증했으니 일찌기 1380년대에 시작된 培材, 梨花, 儆新 등의 男女學校에 이어 京鄕 各地에 적지 않은 수의 밋숀系 학교가 서게 되었다. 그 중요한 것만 들더라도 1894년의 平壤 光成學校(監理敎派)와 崇德學校(長老敎派), 1895년의 서울 貞信女學校(長老敎派)와 東 萊 一新學校(長老敎派), 1896년의 平壤 正進學技(監理敎派)와 서 울 攻玉學校(監理敎派), 1897년의 平壤 崇實學校(長老敎派), 1898 년의 서울 培花學校(南監理敎派)와 載寧의 明信學校(長老敎派) 및 平壤 盲啞學校(監理敎派), 1903년의 平壤 崇義學校(長老敎派)와 元山 樓氏學校(監理敎派) 및 木浦 貞明學校(長老敎派), 1904년의 開城 好壽敦學校(南監理敎派)와 元山 進誠女學校(長老敎派), 그 리고 1905년의 公州 永明學校(南監理敎派)등이 있다. 이들 밋숀 系 學校들은 당시 정부나 민간인에 의해서 설립된 학교들과 달리 女學校가 많다는 것이 이채로웠다. 이 학교들은 재정적인 기반이 비교적 튼튼하고 또 정통적인 교육을 목적으로 하였던 만큼 그 수 명이 길어 오늘날에까지 계속되면서 번창한 학교가 적지 않은 것 이다. 이처럼 舊韓末에 정부나 종교단체, 그리고 민간유지들이 새로운 교육을 통하여 이 나라를 국제사회의 一員이 되도록 늦게나마 심 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1905년 保護條約의 체결로 韓國에는 日人 의 統監府가 서게 되고, 따라서 우리 정부의 모든 정책 수립과 중 요 행정사무가 실제로 日人들의 지배를 받게 되자 民族敎育도 정 상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없게 되었다. 統監府가 설치되자 정부 각 분야에 걸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 6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물론 敎育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統監府에서는 學制의 정리와 普通敎育확장을 서둘렀다. 즉, 종래의 小學校는 普通學校로 개칭 했으며. 그 수업년한을 4년으로 단축시키는 동시에 재래의 中學 校는 高等學校로 고쳐 그 수업년한을 3년 내지 4년으로 하였고, 각급 학교를 學期制, 學級制를 조직화하여 학생, 학급의 定員制 를 실시한 것이다. 이 밖에도 새로 師範學校令 實業學校令 外 國語學校令 등을 제정, 기왕에 있던 學制를 대폭 개편하였다. 普通學校 擴張事業은 우선 임시 교육 확장비 50만원 가운데서 410,773원을 普通學校 확장 또는 신설에 충당하였다.2) 그리하 여 이 初等敎育機關 확장 제1기 계획사업으로 1906년에는 서울 에 官立學校 9개와 地方 道所在地와 기타 都市에 公立學校 13개 도합 22개소를 설치 (1910년에 官立普通學校는 漢城師範學校의 부속 학교가 된 安洞普通學校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漢城府에 移管되어 公立學校가 됨)하였고, 제2차 계획으로 1907년에는 開城 仁川 安城 淸州 등에 28교를 추가 개설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이 듬해인 1908년에는 제3차 계획에 의해 靈岩 古阜 宣川 江 華 驪州등에 9교를 증설하게 되었다. 더우기 다음 해에는 신설된 釜山實業學校에 釜山普通學校를 병설, 이로써 1906년에서 1909 년까지의 기간중에 官立 1, 公立 59, 도합 60개교가 설치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밖에 私立學校로서 學部가 인정하는 학교에 대 해서도 보조를 해준 補助指定普通學校라는 것이 1910년까지 전 국에 41교나 되었다. 그러나 이와같은 普通敎育의 확장, 정확히 말한다면 公立學校의 확충을 꾀한데에는 統監府에서의 목적이 있 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日本人의 주도하에 운영되고, 또 日本語를 주요 과목으로 가르치려는 학교를 갖기 위해서였다. 2) 學部編 韓國敎育, (1906) p.4-68 -
2. 民族敎育 결국 植民政策을 용이하게 실시하기 위하여 취해진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日帝의 속셈은 누구나가 다 뻔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韓國民들은 公立學校를 불신하게 되고 자제 들 을 취학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데 비하면 私立學校의 경우는 아주 달랐다. 앞서도 말했듯 이 이미 국운이 쇠하고 있음을 통감하여 하루속히 신학문을 보급, 국가와 민족을 近代化함으로써 구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선각자 들에 의해서 여러곳에 私立學校가 세워진 바 있거니와 일단 치욕 의 保護條約이 체결되자 더욱 더 민족적인 감정과 시대적 요청에 자극을 받아 그야말로 민간에 의한 一大 敎育救國運動이 전개하 게 되었다. 그리하여 韓國 歷史上 일찌기 보지못했던 私學의 전성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私立學校에서는 民族精神의 고취와 體力의 연마가 무엇보다도 강조되고 있었다. 학교에서 사용된 교과서가 그러하였으며, 교정 에서는 태극기가 날리웠고 모든 집회에선 애국가가 불리워졌을뿐 더러, 교내활동을 위시해서 토론회, 강연회 같은데서는 서슴치 않 고 親日政府를 통박하고는 했다. 이 에 統監府는 이 토록 排日 民族的인 색채가 질은 私學에 대하여 통제를 가하는 조치를 취했 던 것이니 이것이 1908년의 私立學校令이었다. 결국 모든 私立學校로 하여금 學部의 인가를 받도록 하고, 당국 의 비위에 거슬리는 교과서를 쓸 수 없도록 마련한 이 私立學校令 은 그 때까지 수에 있어서 범람하고, 질적으로 排日民族的인 私立 學校를 당국이 통제하게 된 최초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때의 통 제는 그래도 統監府에 대한 민간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별반 엄격 한 것이 못되었다. 私學에 대한 가혹한 정도의 탄압은 1910년 合 邦이 이루어진 이후에 본격화하였다. - 69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日帝가 우리나라를 강압적으로 병합하여 植民政治를 시작하자 그들은 소위 一視同仁이라는 미명하에 영토적으로는 內地 延長主義 를 내걸고 韓國民族의 문화를 말살하여 日本人으로 만 드는 民族同化政策을 강력히 촉진하였다. 그들은 이 목적 달성을 위해 한 편으로는 武斷政治를 감행 했을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 는 교육의 수단을 빌었던 것이다. 日帝植民地 統治의 제1단계에 해당하는 1910년대의 교육방침은 初代 總督 寺內가 1911년 8월 朝鮮敎育令을 공포하고 실시한 무렵에 행한 다음과 같은 담 화에 잘 나타나 있다. 帝國敎育의 大本은 일찍 敎育에 關한 勅語에 明示되어 있는 바로서, (中略) 朝鮮敎育의 본의도 여기에 있다. 생각컨데 朝鮮 은 아직 內地와 事情이 같지 않다. 그러므로 그 교육은 특별히 힘을 德性의 함양과 國語(日語)의 보급에 힘써서 帝國臣民으로 서의 자질과 품성을 갖추게 하여야 한다. 만일 空理를 論하고 實行을 멀리하며, 勤勞를 싫어하고 安逸에 흐르며, 質實敦厚의 美俗을 버리고 輕俳浮薄의 惡風에 빠지는 것과 같은 일이 있다 면 이것은 교육의 本旨를 배반할 뿐 아니라 마침내 자기 一身을 그르치고 累를 국가에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실시하 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時勢와 民度와에 맞게 함으로써 良美한 효과를 얻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3) 당시의 政務總監 山縣伊三郎도 역시 8월에 있은 普通學校 敎育 講習會 석상에서 이와같은 훈시를 하고 있다. 朝鮮人은 陛下가 愛撫하는 帝國臣民이다. 따라서 그 敎育이 內地人 敎育과 같이 忠良한 帝國臣民을 기르는 데 있음은 물론 이다. 4) 3) 朝鮮敎育會 朝鮮敎育法規則例規大全, (1927) p.60-70 -
2. 民族敎育 이로써 日本 植民政治의 敎育方針이 忠良한 國民 을 기르고 時勢와 民度에 맞는 敎育을 한다는 것이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 는 바 이 같은 내용은 朝鮮敎育令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었다. 즉 忠良한 國民의 양성을 기한다는 뜻에서 日本語를 강요하고 日本人 敎師를 고용케 하며 교과서를 통제하고 韓國人 敎師와 학 생의 사상을 감시하는 따위의 일에 주력했을 뿐 아니라, 다시 民 度에 맞는 敎育 이라는 구실하에 日本人의 學制와는 달리 普通學 校를 3년 또는 4년, 高等普通學校를 4년, 女子高等普通學校를 3 년, 그리고 專門學校를 3년 내지 4년이라고 하는 열등한 제도를 만들어 韓國人에 대한 교육적 차별을 자행했던 것이다.5) 日本人 위 정자들이 一視同仁운운 하면서도 韓國人 교육에 대하여 얼마나 무성의하고 차별적이었는가는 당시 韓國내의 日本人교육 상황 과 비교해 보면 그 진상이 확연히 들어날 것이다. 즉, 日本人의 통계에 의거하여 연구한 것을 보면6) 1919년에 韓國人 아동을 위 한 公立普通學校가 482校였음에 대하여 日本人 아동을 위한 小學 校는 380校가 있었는데, 학생 수로 보면 朝鮮人 아동 84,306명에 日本人아동은 42,732명이었다. 그런데 1920년의 韓國 인구가 약 1,700만이었던 데 대해서 在韓 日本人의 수가 약 35만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취학연령 추정들을 적용하여 계산하면 韓國人 아동의 취학률은 3.7%가 되는 데 비하여, 日本人 아동의 그것은 91%를 초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엄청난 차별대우로 日本人의 호언장담이 한낱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 韓國人들은 그 반발로 公立普通學校에 자녀 를 보내기를 꺼려하여 그 보다는 차라리 舊式機關인 書堂에 보내 4) 高橋濱吉 朝鮮敎育史考, (1927) p.397 5) 吳天錫 韓國新敎育史, (1964) pp.244-252 6) 李萬珪 韓國敎育史 下卷, (1947) pp. 188-189 - 7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는 사례가 많아지기까지 하였다. 日本人 위정자가 韓國人에 대한 교육을 등한히 하였음이 분명 한 것은 舊韓末의 學部를 內務部의 一局으로 격하한 사실에서도 족히 알 수 있겠거니와, 그들이 특히 진력했다고 하는 公立普通學 校 교육만 하더라도 1912년의 4월말 현재에서 1919년 5월말 현 재까지의 통계에 따르면 328校에서 482校로 증가된 데 지나지 않으니7) 이는 1년에 겨우 20校가 늘었음을 보이고 있는 바 그들 의 저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중시했다는 普通敎育機 關이 이러하니 中等敎育機關의 형편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따로 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한편, 私立學校는 이 기간에 혹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舊韓末 특히 統監府時代에 敎育救國運動으로서 전국 각처에서 일어나 韓國人의 민족의식을 크게 고취하였던 私 學을 武斷政治를 주도한 寺內總督이 그대로 방관할리가 없었다. 官 公立은 그들이 관리하고 있으므로 안심이 되었지만 私立學校 는 韓國人이나 西洋人이 경영하고 있으니, 그 감시를 위해서는 통 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私立學校에 대한 단속이 필요하 다고 본 寺內는 1908년의 私立學校令을 개정하여 1911년, 드디 어 私立學校規則을 공포함으로써 私立學校에 대한 감독을 일 층 강화하게 되었다. 이 私立學校規則과 朝鮮敎育令에 의하여 私立學校는 여러가지 로 법적인 제약을 받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私學의 교원도 日語 에 통달해야 한다는 規則제10조에 의해 日本人 敎師를 받아 들이도록 강제했을 뿐 아니라 同 6조, 9조에 의거 日帝統治 이전 에 출판되어 교과서로 쓰던 韓國의 歷史, 地理, 혹은 민족정신에 7) 大野謙一 朝鮮教育管見, 朝鮮敎育會 (1936) p.68-72 -
2. 民族敎育 자극을 줄만한 책들은 모두 판매를 금지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 은 수법으로 해서 금지된 책 종류는 50가지가 넘었고, 책 수는 수십만권이나 되었다고 한다.8) 日帝의 이같은 부당한 요구에 항거하다가 私立學校 경영자는 이에 굴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학교를 폐쇄하는 조치를 취한 이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이 압력에 견디다 못해 官 公立으로 넘기고 만 사례도 허다했다. 밋숀系 學校들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 다. 이들에 있어서는 聖經을 가르치지 못하고 또 종교의식을 행하 지 못할 바엔 차라리 학교의 문을 닫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서 당국에 강경한 항의도 제출해 보았으나 이 무렵에는 그 뜻을 이루 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가혹한 私學탄압은 1915년 다시 改 正私立學校規則 을 공포함에 이르러 더 한층 강화되었으니 私立 中學校를 高等普通學校로 校名을 변경케하는 조항을 삽입하여 학 교인가를 새로이 받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악랄한 방법으로서 그들 의 지시에 순응치 않을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私學 은 1910년의 1,793校가 1915년엔 1,154校로 줄어들게 되었고, 1919 년에는 742校로 떨어지는 실정이 되었다.9) 결국 이렇게 위축일로 의 私立學校는 1919년 이후에도 수년은 그 수가 계속 감소되어 절반이하로 떨어져 버렸는데 私立學校가 다시 소생하는 데는 3 1 운동이라는 역사적인 의거가 필요했던 것이다. 總督府는 1915년 私立學校規則과 함께 專門學校規則도 공포, 동년 4월 1일부터 시행했다. 이 規則의 적용으로 당시 유일한 民 間高等敎育機關인 普成專門學校와 밋숀系의 세브란스, 崇實, 梨 花등은 校名을 개칭하고 各種學校로 격하되었다. 이를테면 普成 8) 孫仁銖 韓國近代敦育史, (1971) p. 109 9) 吳天錫 前揭書, p.273-7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專門學校가 普成法律商業學校로 된 것과 같은 경우이다. 한편 專門學校規則에 따라 官立은 쉽게 專門學校로 승격될 수 가 있었으니, 즉 1904년에 발족한 農商工學校(1906년 農林學校) 는 1918년에 水原農林專門學校로, 1895년에 法官養成所로 출발한 京城專門學校(1911)는 1916년에 京城法學專門學校로, 1899년에 설립된 京城醫學校는 1916년에 京城醫學專門學校로, 그리고 1906 년에 창설된 工業傳習所는 1916년에 京城工業專門學校로 각각 승 격된 것이다. 반면, 私立은 規則제3조 2항에 財團法令을 구 성한 후에 專門學校로서의 수속을 밟아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쉽 게 專門學校로 승격될 수가 없었다. 당시의 학교들은 延禧專門 學校를 제외하고는 모두 舊韓國時代에, 즉 학교설립에 재단이 필요치 않은 때에 생겼기 때문에 專門學校로의 튼튼한 재단을 갖추고 있지를 못했던 것이다. 延禧專門學校만 하더라도 財團法人 조직에 적지 않은 곤란을 겪은 후 美國 北長老敎 南北監理敎 카 나다宣敎部聯合委員會의 합작으로 專門學校를 유지 경영할 聯合 財團을 이루게 됨으로써 1917년 4월에 總督府로부터 私立延禧專 門學校基督敎聯合財團法人의 설립허가를 받을 수가 있었다. 이어 세브란스도 같은 해 5월에 醫學專門學校로서의 인가를 받았다. 그 러나 普成, 崇實, 梨花 등은 學校財政上 10년간의 유예기간인 1925년까지 財團구성을 위해 여러모로 애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普成專門이 財團法人의 설립허가를 얻은 것이 1921년, 梨花女專, 崇實專門이 財團法人인가를 얻은 것은 1925년이었다. 물론 總督府가 財團法人의 조직을 改正私立學校規則에서 규정 하고 나온 것은 학교의 내용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 이었겠으나, 日帝의 저의가 韓國人을 위한 私學의 高等敎育機關을 억제하려는데 있었음은 그 때 사정상 부인치 못할 사실이고 보면, - 74 -
2. 民族敎育 이같은 정치성을 고려할 때는 그것은 예의 私學탄압으로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든 조건을 구비한 학교에 대해서도 財團法人 허가를 거부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私學機關에 대해서 는 同 規則 이 여간 압력을 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갖은 억압을 무릅쓰고 이 시기의 각종 民族私學機關들은 (밋숀系 敎育機關과 더불어) 이 나라 敎育의 암흑기를 헤쳐나가고자 사력 을 다해 분투 노력했던 것이다. (3) 民立大學 設立運動 合邦이래 日帝가 韓國에 대하여 행한 교육의 기본방침은 제1차 忠良한 國民을 植民地的 정치경제체제에 朝鮮敎育令에서 명시한 바 日本帝國에 대한 육성함으로써 民族同化를 추진하며 대응하는 실용적인 簡易敎育을 행하는 데 있었으므로 처음부터 韓國人을 위한 敎育機關을 日本人을 위한 그것과 같지 않게 차별 을 두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 있었다. 授業年限만 하더 라도 日本人의 그것에 비해 짧게 하여 普通學校 입학에서 韓國人 의 최고교육기관인 專門學校 졸업까지 11년내지 12년에 지나지 않았을 뿐더러, 교육내용의 정도도 전체로서의 日本人의 그것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의 것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總督府가 韓國人 을 위한 高等敎育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의도가 없었으리라는 것 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이러한 태도는 前章에서 私 立專門學校들을 인가해 주기 이전에 그들에 관한 무거운 부담을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 崇實學校는 1907년에 이미 大學部를 가지고 있어 舊韓國政府로부터 崇實大學 으로 인가가 난 터요, 儆新學校도 1915년에는 감리교캐나다長老 - 75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敎宣敎會와의 聯合으로 現 延世大學의 전신인 大學部를 설치하고 있었을 뿐더러 梨花學堂 역시 1910년에 大學部를 개설하였던 만 큼 당시 朝鮮敎育令에 大學에 관한 規定이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가 너무도 확실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어리석은 忠良한 國民이나 양성하면 된다는 日帝 당국자들의 생각이 1919년 3.1운동이라는 획기적인 민족독 립운동의 발발로 부득이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日本 당국이 3.1독립운동을 결국 무력에 의해 진압은 하였으나 여기서 나타난 韓國民族의 거대한 힘을 그대로 고압적인 武斷政治로 눌러 가기 만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유화적인 文化政海로 통치 방법을 일단 바꾸고 東亞 朝鮮 등 韓國語 신문 잡지의 간 행허가, 일부 韓國人 人士의 행정참여, 敎育의 개혁 등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특히 敎育의 개혁으로 새로이 제정된 學校制度의 주요 특징을 보면 普通學校로부터 專門學校에 이르기까지의 各 學校의 授業年限, 교육내용을 日本 國內와 같은 정도로 수준을 올 리고, 새로이 大學 및 그 豫備敎育의 길을 열고 師範學校를 신설 했으며, 종래 普通學校 취학에서 최고의 교육을 마칠 때까지의 年 限이 11년 내지 12년이었던 것을 16년 내지 17년으로 해서 法令 上으로는 日本人과 차등이 없도록 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1922년 改正朝鮮敎育令의 공포로 敎育에 대한 總督 府의 방침이 크게 전환을 하여 韓國에 비로소 大學설치가 인정되게 되었다. 전기 敎育令 제12조는 專門敎育은 專門學校令에, 大學 敎育 및 그 豫備敎育은 大學校令에 의한다. 단 專門學校의 설립 및 大學豫科의 교원자격에 관해서는 朝鮮總督이 이를 정한다 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규정에 응하여 당국은 소위 京城帝國大 學 설치를 서두르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獨立運動事件 이후에 - 76 -
2. 民族敎育 폭발한 韓國人의 교육열(일찌기 敎育救國運動이 크게 번진 合邦당 시 보다도 더 높았다)과 특히 사회유지들에 의해 강력히 전개되고 있던 民立大學 설립운동에 자극을 받았던 것이었다. 이 民立大學 설립운동은 3 1운동 이후의 민간인에 의한 교육진흥운동이었기도 하였지만 사실상 그 뿌리는 더욱 깊어서 舊韓末에까지 소급되는 것 이었다. 韓國人이 韓國人 자신의 손으로 大學을 설립 운영하고자 한 최 초의 운동은 舊韓末에 전국적으로 번져간 國債報大運動에서 발전 된 것이었다. 統監府가 설치되고 伊藤博文이 統監으로 부임하자 그는 우선 소위 施政改善이 필요하다 하여 日本으로부터 1,300만 원을 借款하게 했는데, 이를 보상해 야 한다는 생각에서 民族主義 者들을 중심으로 1909년 전국적으로 모금운동이 일어나게 되었 다. 그러나 國債報償運動이 1910년 合邦과 동시에 무의미해짐으 로써 좌절되자 尹致昊 南宮檍 朴殷植 盧伯麟 梁起鐸 등의 제 안에 따라 그 때까지 모인 600만원을 기금으로 해서 민간인이 경 영하는 大學을 설립하기 위한 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 寺內總督에 게 大學설립의 인가를 신청하였다. 그러나 寺內總督 統治時代의 정책이 高等敎育을 제한하는데 있었던 만큼 이 신청이 각하될 것 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 첫번째 民立大學 설립운동이 실패한 후 1920년대에 와서 이 운동은 다시 한번 크게 일어났다. 누차 말했듯이, 그리고 누구나 알고 있듯이 3 1운동을 계기로 韓國 사회에서는 여러가지 民 族運動이 재연되었다. 이와 같은 민족적 각성으로 해서, 1920년 대 전반에 설립된 단체만 해도 朝鮮靑年聯合會 朝鮮勞動共濟 會 物產獎勵會 愛國婦人會 朝鮮敎育會 등 100여개에 달했는 바, 民立大學運動은 이 중에서 바로 朝鮮敎育會가 주도한 것이 - 7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었다.10) 朝鮮敎育會는 1920년 6월 23일 韓圭卨, 李商在 등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사회유지 다수가 참가한 가운데 조직된 것으로서, 韓國 人의 민족적인 자각을 촉구하고, 교육을 통해서 착실한 민족적인 역량을 배양함으로써 장차의 國權回復을 목적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사회에서 크게 일어난 교육진흥운동의 중추적인 존재였던 이 朝鮮敎育會는 순전히 韓國사람의 재력과 노력으로 교육사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하에 1922년 1월 李商在를 대표로 발기인이 구성되어 朝鮮民立大學期成準備會를 결성하였다. 이 期成準 備會에서는 집행위원들을 京鄕 각지에 보내 民立大學의 취지를 선전하고 발기인 보급을 위해 활약케 했다. 이 운동에 대하여 처 음부터 열렬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기관은 東亞日報, 朝鮮日報등 의 言論紙였는데, 이때 東亞日報는 民立大學의 期成-委員派遣 에 대하여 라는 社說을 통해 다음과 같이 그 활동을 격려하여 거 족적인 지원을 호소한 바 있다. 吾人의 體面, 朝鮮人의 生命保持가 此大學 期成에 係하여 存 한다 하여도 결코 과언이 아니니, 보라 此 民立大學은 첫째 民 衆의 힘으로써 하는 最高學府이며, 둘째 民衆의 理想으로써 하 는 最高結晶이라. 此 民衆에 기본한 최고학부의 발달로 인하여 朝鮮人의 科學이 發達할 뿐만 아니라, 조선민중을 위하여 化하 는 發達이 실로 朝鮮人 所有의 文化가 될지며, 此 民衆的 理想 의 最高結晶이 그 價値를 發揮함으로 인하여 朝鮮人의 前進方 向은 비로소 과학에 기본한 확실성을 有하게 될지니, 此로 思하 고 또 此를 念하매 民立大學의 期成은 單히 吾人에게 지식을 줄 10) 民立大學 設立運動에 대해서는 阿部 洋. 日本統治下 朝鮮의 高等教育, 思想, 東京, 1971年 7月號, pp.56-77와 孫仁銖, 前揭書 pp.176-194를 参照할 것. - 78 -
2. 民族敎育 뿐만 아니라, 科學에 기본하여 發展할 生命을 吾人에게 부여하 는 것이 되는도다. 이 實로 吾人에게 生命을 확보하고 권리를 창작하는 근본 도리가 되지 아니할까. 바라건대 朝鮮兄弟는 金 錢이 乏하다 하고, 實力이 無하다 하여 此大事業에 共力을 피지 말지어다 11) 전국 각지에 파견된 위원들의 활동을 통해 民立大學運動이 대 단한 힘을 가지고 번져가자 각처의 사회유지들의 열성이 이만 저 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23년 3월 29일 오후 1시 서울 기독교 중앙청년회(Y.M.C.A)에서 전국각지로부터의 1,000명이 넘는 참 가자들로 民立大學期成會發起總會가 열리게 되고 드디어 同期成 會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 날 선출된 中央執行委員에는 李商 李昇薰曹炳漢金譯高元勳姜仁澤韓龍雲崔麟曺 晚植命星濬宋鎭禹兪鎭泰李甲成玄相允許憲 등 30명 이, 監查委員에는 李達元金潤焕李鳳夏 등 7명이, 그리고 會金 保管委員에는 金性洙金炳魯張斗鉉 등 7명이 각각 선출되었으 在 며 總會 제2일(30일)과 3일(31일)에는 각종의 事業計劃을 의결 民立大學 發起趣旨書를 발표함으로서 끝냈다. 이 發起趣旨書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吾人의 運命은 如何히 개척할까? 政治냐, 外交냐, 產業이 하고 냐, 물론 此等事가 모두 다 必要하도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急務가 되고 가장 先決의 必要가 있으며 가 장 힘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기에 不能하도다 그런데 敎育에도 계단과 종류가 有하여 民衆의 普遍的 知識은 此를 보통교육으로써 능히 수여할 수 있으나, 그러나 심원한 지 식과 蘊奥한 學理는 此를 高等敎育에 期치 아니하면 不可할 것 11) 1922年 12月 16日字 - 79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은 說明할 필요도 없거니와 사회 최고의 批判을 求하며 有能有 爲의 人物을 養成하려면 최고학부의 존재가 가장 필요하도다. 그 뿐만 아니라 大學은 人類의 進化에 실로 막대한 관계가 有하 나니, 文化의 發達과 生活의 向上은 大學을 待하여 비로소 企圖 그러므로 今에 吾人 朝鮮人도 할 수 있고 획득할 수 있도다 世界의 一隅에서 文化民族의 一員으로 他人과 肩을 兼하여 吾 人의 生存을 유지하며 文化의 창조와 향상을 기도하려면 大學 의 설립을 捨하고는 更히 他道가 無하도다. 그런데 輓近 數 3年 以來로 各地에 向學이 울연히 勃興되어 학교의 設立과 교육의 시설이 頗히 可觀할 것이 多함은 實로 吾 人의 고귀한 자각으로서 生來한 것이다. 그러나 유감되는 것 은 우리에게 아직도 大學이 無한 일이다. 물론 官立大學도 不遠 에 開校될 터인즉 大學이 全無한 것은 아니나, 그러나 半島文運 의 장래는 결코 一個의 大學으로 만족할 바 아니오, 또한 그처 럼 量大한 사업을 우리 民衆이 직접으로 영위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義務라 할 수 있도다. 그러므로 吾等은 玆에 感한 바 有 하여 감히 萬天下同胞에게 향하여 民立大學의 설립을 제창하노 니, 형제 자매는 來하여 賛하여 進하며 成하라 12) 한편, 同發起總會에서 의결된 民立大學設立計劃에 의하면, 第1 期에는 資本金 400만원으로 垈地 5만평을 사서 교실 10棟과 大 講堂 1棟을 짓기로 하였고, 法科 文科 經濟科 理科의 4個 大 學 및 大學豫科를 두기로 하였으며, 第2期에는 資本金 300만원으 로 工科를 신설하고 理科와 기타 各科를 충실히 함을 목표로 하 며, 第3期 事業으로는 資本金 300만원으로 農科와 醫科를 설치하 기로 한 것이다. 12) 東亞日報, 1923年 3月 30日字 - 80 -
2. 民族敎育 이와같이 民立大學期成會가 결성되어 事業計劃이 서게되자, 될 수록 속히 地方部를 조직, 자본금 1천만원을 모금해야만 했다. 그래서 1923년 4월 2일에는 第1回 中央執行委員會를 개최하여 委員長과 常務委員을 선출했다. 委員長엔 李商在, 常務委員엔 兪 星濬 李昇薰韓龍雲兪鎭泰高龍焕洪性偰姜仁澤韓仁 鳳이었다. 그 후, 이들은 京鄕 各地로 순회 강연에 나서 民立大學 設立運動의 정신을 민중에 설명하는 한편, 地方部의 설립을 촉구 晋州安城光州公州新義州鐵原宣川孟山寶城鎭南 浦定州密陽廣州 등 100여개소에 民立大學期成會地方部가 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 해가 끝날 무렵에는 牙山 黃州 咸興 조직되었는데, 멀리는 滿洲, 奉天과 美國 하와이에서도 모금운동 이 일어났다. 이로 보아서도 당시 東亞日報가 이 民立大學 설립 운동을 民衆文化運動의 先驅니, 最初의 가장 큰 民衆運動이 니 하는 표현을 쓴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가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이토록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고, 또 민중의 열렬한 호 응을 얻은 民立大學 설립운동이 성공하지 못하고 중도에 좌절되 고 말았으니 여기엔 몇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그 첫째는 이 운동 이 단순히 敎育運動이라기 보다는 政治運動 民族運動이 大學設 立이라고 하는 敎育運動의 형태로 표현된 데 지나지 않았기 때문 에, 總督府가 여기엔 정치적 의도와 不穩思想이 내포되어 있다고 판단,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로 방침을 세우는 한편 期成會의 基金 募集活動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제약을 가하였다. 總督府로서는 韓國을 쉽게 통치하기 위해 韓國人이 자각에 입각해서 주체적이 며 자주적으로 민족적 大學을 설립하려고 하는 기도에 대해서는 設立運動 초기부터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 8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그들은 日本의 東洋大學이 서울에 分校를 개설하겠다는 신청을 總督府에 내자 오히려 이에 협력하는 편이 어떻겠는 가고 회유하 는가 하면 뒤에 大學令에는 이러한 分校 설립을 인정할 근거라는 것이 없어 分校 開設의 조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당 시의 齋藤 總督과 水野 政務總監은 韓圭卨, 李商在등 朝鮮敎育會 간부를 불러 東洋大學의 分校를 설립하느니 보다는 官立綜合大學 설립을 위한 제1단계 조치로서 서울에 있는 官立醫科專門學校를 朝鮮醫科大學으로 만드는 쪽이 좋을 것 같아 總督府에서 이를 검 토중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民立大學運動이 실패하게 된 둘째 이유는 그 시기의 국내사정도 용이하지 않았던 점이다. 즉 期成會의 조직과 이의 활동은 대단한 바 있었으나 실상 基金募集이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全羅道地方에서는 150만원 이상의 돈이 각출되는 등 성적이 좋은 곳도 있었으나, 1923년 전국에 大洪水가 일어나고, 1924년에는 南部에 극심한 旱災가 발생한 데 이어, 또 7월에는 大 洪水가 일어나니 이재민 구호문제가 더 다급해졌을 뿐 아니라 잇 달아 흉작으로 말미암아 모금 상태가 매우 저조하게 되었던 것이 다. 따라서 民立大學期成會가 발기된 1년 뒤인 1924년에 모인 돈 은 100만원도 미달이오, 그 이듬해 乙丑년 大洪水에는 약 1억원의 피해가 생기고 647명의 익사자가 나는 등 자연적 재해는 民立大學 設立運動에도 적지 않은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같은 韓國內의 사정보다도 역시 이 民立大學設立運動 을 좌절시킨 가장 큰 원인은 앞서 말한 정치적인 데 있었으니 당 시 日帝當局은 韓國人 여론을 고려하여 文化政治를 표방하고 나오기는 했어도 여전히 植民地政策을 밀고나가야 하는 대원칙이 있었으므로 소위 忠良한 臣民을 육성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 - 82 -
2. 民族敎育 하는 데는 韓國人에 의한 高等敎育機關을 허용해서는 안되었던 것 이다. 따라서 日帝는 韓國民族의 高等敎育에 대 한 요구는 어느정 도 받아들여야 하겠으면서도 효과적인 식민지 교육체제를 유지해 야 한다는 二律背反的인 처지에서 官立大學의 설립에 손을 대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京城帝國大學의 개설은 韓國民間人들에 의한 民立大學 설립운동에 자극을 받아 이루어진 것임이 명백하 였다.13) 民立大學 설립운동을 좌절시킨 總督府는 결국 한편으로 韓國民 의 민심수습책으로, 또 한편으로는 大學敎育機關 설치에 대한 韓 國民族의 열의에 자극을 받아 1922년의 改正朝鮮敎育令의 規 定에 의거 1923년 12월 京城帝國大學創設委員會를 설치하고 1924년 5월 京城帝國大學官制를 공포하게 되었다. 그리고 같 은 해 豫科를 개설, 1926년 4월에 이르러 마침내 法文學部와 醫學 部를 열어 학생을 모집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41 년에는 戰時禮制에 응할 수 있도록 理工學部를 증설하였다. 그러 나 이 大學은 본시 韓國民의 고등교육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긴 것이 아니었던 것이므로 韓國人의 불만은 여전하였다. 무엇보다도 韓國에 설치되었으면서도 韓國 학생에게 대해선 그 문 호가 아주 좁게 제한되었다는 것이다. 朝鮮總督府 學務局에서 편 찬한 朝鮮諸學校一覽에 나온 통계에 의하면, 1926년으로부터 1941년 사이에 學部건, 豫科이건 韓國人 학생은 全學生數의 30%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는 京城帝國大學만이 아니라 당시의 官公立專門學校에 공통된 현상이었던 것이다. 이같이 韓國人 학생 의 官公立高等敎育機關 진학에 대한 제약의 기능을 한 것은 入學 13) 이 點에 關해서는 台北帝國大學의 成立事情과 比較한 前記 阿部 洋외 論文을 參考할 것 - 8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試驗制度였다. 물론 當局者는 試驗에 있어서의 內鮮人 無區別 이라는 원칙을 강조하고 있었으나 시험이 日本語로 행해지는 관계 로 그 원칙 자체부터 불공평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학생의 입학에 서 뿐만 아니라, 敎職員 채용에 있어서도 韓國人은 차별을 당해 京城帝國大學一覽(1941년판)에 의하면 韓國人 敎職員은 열손 가락으로 헤일 정도였다. 이처럼 京城帝國大學이 설립되고도 韓國人의 교육열을 만족시 키지 못하고 오히려 불쾌감을 가져다 주게 되자 韓國사람들은 總 督府에 대하여 高等敎育機關의 증설 또는 확충을 요구하는 한편, 그들 자신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私立 또는 民立高等敎育機關의 설립 내지 충실에 힘을 쏟게 되었다. 그리하 여 민간인에 의한 大學設立運動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는 바, 여기 에는 두가지 계통이 있었음을 본다. 그 하나는 基督敎宣敎會 계통 에서 추진한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韓國人 유지들에 의한 것이 었다. 基督敎 宣敎會 계통의 움직임을 보면, 우선 民立大學 설립운동 이 크게 일어나고 1922년의 改正朝鮮敎育令에 大學에 관한 規定 이 삽입되자 梨花女學堂을 聯合基督敎女子大學((Union Women s Christian College)으로 승격시키려는 운동이 있었고,14) 또 이미 專門學校로서의 인가를 받았던 延禧專門學校 및 세브란스醫學 專 門學校가 協成神學校와 합해 綜合大學을 설립하고자 한 일이 있 었으나15) 總督府의 방침이 京城帝國大學 이외에는 어떠한 大學의 신설도 일체 인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으므로 결국 모두가 좌절 되고 말았다. 14) 梨花女子大學校 梨花八十年史, (1967) p. 144 15) 孫仁銖 前揭書, p. 198-84 -
2. 民族敎育 이와 더불어 앞서 1926년, 그 절정에 도달했다가 침체되고만 民立大學期成會의 운동을 韓國의 민간 유지들이 다시 부활시켜 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겼다. 즉 1926년 3월 서울의 유지 20여 명이 民立大學期成會의 在京幹部와 이같은 운동을 다시 일으킬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고 李鍾麟 朴勝喆 崔元淳 具滋玉 韓 基岳 安在鴻 洪性偰 李甲成 등을 代表委員으로 선정 하였던 것이나 이번에도 總督府의 압력과 자금난으로 더 발전을 보지 못 하고 실패로 끝난 것이다. 이에 中央執行委員이었던 李昇薰은 五 山學校를 확장하여 農科大學을 세울 계획으로 崇實專門學校 敎授 李勳求의 협력을 얻어 1926년 總督府에 認可申請을 내었으나 그 해에 일어난 6.10만세 사건으로 실패하게 되었다.16) 한편 民立大學期成會會金保管委員이던 金性洙도 독자적으로 大 學을 설립해 볼 의도로서 1931년으로부터 1년여에 걸쳐 歐美 各 國의 大學施設 운영상황을 시찰하고 귀국했으나 總督府의 기본방 침이 韓國人에게는 大學설립을 인가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음을 알고는 大學의 신설을 단념, 普成專門學校의 경영을 인수하였다. 당시 普專은 극심한 재정난으로 학교경영이 위기에 처해 있었음 으로 金性洙의 인수로 그 후 민족계 최고학부로서의 튼튼한 기반 을 구축해 갔다. 그는 또한 民立大學 설립의 초지를 관철하고자 다시 1940년에 普成專門學校의 大學昇格을 계획 추진했지만 總督 府에서는 이를 허락치 않았다. 결국 이와같이 하여 1920년대 이래 줄기차게 기도됐던 민간인 에 의한 大學設立運動은 그때마다 좌절되어 1945년 解放이 될 때 까지도 韓國內에는 京城帝國大學 이외엔 단 한 개의 民立 또는 私 立大學이 존재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우기 1930년대에 들어서서 16) 阿部 洋 前記 論文 參照 - 85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中日戰爭이 발발한 이후로는 總督府의 戰時體制에 맞춰 교육에 있어서의 민족적인 색채의 불식과 철저를 극한 皇民化運動으로 그나마 민족계 혹은 밋숀계 私立專門學校들의 校名까지도 개칭되 는 등 이들 私立高等敎育機關은 日帝의 전쟁 수행을 위한 완전한 희생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4) 勞動夜學會와 文盲退治運動 1920년대의 民族敎育史上 특기할만한 事件으로는 前章에서 서 술한 民立大學設立運動이 있지만, 이 밖에 勞動夜學會의 보급을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전자가 우리 사회의 지도적인 인물 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했는데 비해서 후자는 勞動者 農民을 위주 로 한 민중계몽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그 운동의 방향이 근 본적으로 달랐고, 또 한편으로는 전자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실 패로 끝난 운동이었음에 비하여, 후자는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나 타내었다는 점이 또한 달랐다. 일찌기 日帝의 침략에 의해 민족의 운명에 검은 구름이 뒤덮고 있던 시기에 우리의 선각자들이 국권회복의 첩경으로 국민대중을 하루 속히 각성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교육사업에 투신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었다. 이 敎育救國運動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私立學校들이 雨後竹苟처럼 일어났거니와 이 러한 私學의 발흥은 어디까지나 1900년대와 1910년대가 전성기 였다. 따라서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있어서의 교육을 통한 민 족운동은 그 공을 당시 전국 각처에 퍼져나간 勞動夜學會에 돌려 야 할 것이다.17) 17) 이 時期의 勞動夜學의 역할에 대해서는 姜東鎭 日帝支配下의 勞動夜學, 歷史 學報 第46輯(197啤 8月) pp. 1-37參照할 것 - 86 -
2. 民族敎育 그렇다면 勞動夜學이 1920년대 전에는 존재하지를 않았던가? 勞動夜學의 시작은 1910년대 이전으로 소급한다. 다만 그 수가 적었을 뿐이었다. 가장 일찌기 설립된 勞動夜學은 1907년, 즉 隆 熙 2년에 馬山에 세워진 것으로서 玉鱗焕이 설립자인 동시에 校 長이요, 具聖傳 李瀅宰 金宰植 등이 敎師가 되어 地方의 勞動 者 農民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쳤다. 1921년 7월 10일에는 馬山 勞動夜學創立14週年記念行事가 있었음을 東亞日報(1921.7.16)가 보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사만 오래였을 뿐 아니라 그 운영 또한 다른 勞動夜學의 모범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때는 勞動夜學의 萌芽期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요, 勞動夜學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역시 3 1운동 이 있은 후인 1920년대에 들어와서였던 것이다. 이 시기는 세계적 으로도 러시아革命과 被壓迫民族들의 解放투쟁이 전개되는 때였으 므로 우리 국민의 정치적 각성도 대단히 앙양되어 있었다. 선진적 인 지식인이나 대중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어 있 어서 勤勞大衆을 民族解放運動에 참여케 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私立學校나 書堂으로서는 불가능하고 새로운 大衆的인 교육기관 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이 무렵 국내의 社會運動 또한 활 발히 전개되기 시작했으니, 韓國史上 최초의 全國的 勞動者 조직 朝鮮勞動共濟會 勞動大會그리고 朝鮮勞動聯盟會 朝 鮮勞農總同盟과 같은 大同團結된 전국적인 노동자의 조직체가 인 생겨나서 勞動者의 勞動爭議, 農民들의 小作爭議가 전례 없이 앙 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勞農運動의 비약적인 발전속에 서 勞動者 農民의 주체적인 각성과 당시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大衆敎育의 필요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합치되어 1920년대에 勞 動夜學運動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 8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떠나서도, 당시 日帝가 우리나라에 세운 公立普通學校의 수용능력이 너무도 제한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학비가 너무 비싸서 가난한 우리의 勞動者나 農民 또는 都市 貧民 들에게는 거리가 먼 세계였던 것이다. 따라서 규모나 시설은 빈 약하더라도 우리의 근로대중의 형편에 맞는 초등교육기관이 실제 로 반드시 있어야만 했었다. 이러한 사정이 당시 농촌과 都市를 가리지 않고 勞動夜學이 쏟아져 나오게 된 요인의 하나였다고 보 겠다. 이와같이 볼 때 勞動夜學運動은 日帝의 植民地 敎育政策에 대항하면서 敎育의 기회균등을 얻지 못했던 韓國의 勤勞大衆을 위해서 선진적 지식인이 창도하고 勤勞大衆이 주체가 된 新文化 啓蒙運動의 일환으로서 전개된 민족적인 大衆敎育運動이었다고 하겠다.18)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馬山勞動夜學을 위시하여 晋州 陜川 鐵原 釜山 寶城 등지의 勞動夜學은 이미 合邦을 전후한 시기에 설립된 것이었지만, 1920년대에는 雨後竹筍처럼 세워져 이 시기 의 東亞日報 朝鮮日報 등 民族紙의 地方소식란에는 매일같이 勞 動夜學의 설립을 알려주는 기사가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1920년 부터 1925년까지 사이에 설립된 주요 勞動夜學의 수만해도 113 校나 된다. 이들 夜學校는 거의 전부가 무료였기 때문에 그 운영 은 대부분 地方有志의 경제적 협력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사실상 勞動夜學은 대개가 이들 地方有志의 발기로서 설립된 것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 勞動組合 같은 단체의 발기로 지방유지의 후원을 얻어 설치 운영되고 있던 것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민 족의식과 민중계몽에 뜻있는 이들 有志의 협력 없이는 勞動夜學 의 유지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敎員들도 대부분이 지방유지청년 18) 姜東鎭 前揭 論文 p.10-88 -
2. 民族敎育 들로 구성되어 무보수로 봉사하는 희생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 았다. 교원, 학생이 모두 다채로웠으니 勞動夜學 가운데는 農民 勞 動者 都市貧民들의 子弟로서 公立普通學校에 가지 못하는 學齡 兒童이나 또는 學齡超過兒童을 수용하던 곳, 勞動組合員이나 勞 動者 자신을 교육하던 곳, 기타 樵夫나 牧童만을 받아 가르치거 나 婦人들만을 상대로 하던 곳 등 여러 종류가 있었으며, 지방유 지 청년들이 敎員이 된 夜學校가 가장 많았으며, 그 외에도 公立 普通學校 現職訓導, 勞動組合幹部들도 학생의 지도에 나서고 있 었다. 교원들의 지적 수준과 자격은 이렇게 다양했지만 이들이 모두 노동운동 내지 농민운동에 관심이 많은 정의감에 불타던 청 년들이요, 또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던 애국적인 청년들이었 기 때문에 당시의 젊은 勤勞者에게 대단히 좋은 영향을 끼쳐주었 다. 이들이 1920, 30년대에 전개된 일련의 노동운동에서 많은 영 향력을 행사한 것은 新聞에 게재된 많은 기사로 밝혀져 있는데, 그 한 예로는 1921년 9월 25일부터 29일에 걸쳐 일어났던 釜山 埠頭勞動者 5,000여명의 총파업에서는 釜山 瀛州洞에 있던 勞動 夜學敎員들이 배후에서 宜言文, 要求事項등의 문서를 작성해 주 고 전략을 짜주다가 日警에게 체포되어 형벌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곧 이 시기의 勞動夜學이 민중의 계몽과 민족운동에 얼마 나 직결되어 있었고, 따라서 日帝支配下의 대중교육에 있어 얼마 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 다 할 것이다. 이처럼 민족적인 색채가 짙었기 때문에 그 곳에서 가르치는 주 요 과목도 朝鮮語였다. 일반적인 교육과정으로는 물론 朝鮮 語, 日本語, 算術, 漢文이 있었고 곳에 따라서는 漢文대신 習字나 - 89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修身 또는 書簡文이라는 것을 가르치거나 美術, 珠算을 과하는 학교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 어디에서건 日本語아닌 우리말을 가 지고 수업을 하고 우리말을 가장 중시했다는 것은 그 당시의 公 立普通學校의 분위기와 비교할 때 아주 대조적일 뿐 아니라 그 의미 또한 적지 아니 컸다. 교육과정이 간단하고 수업년한도 1년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 내용이 빈약했음은 사실이지만, 夜 學敎育이 속성교육인데다 夜學生들의 연령이 일반적으로 학령을 넘긴 시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교육내용은 비교적 높은 수준의 것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日帝支配下에서 보통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未就學兒童 들과 成人들을 위한 중요한 교육기관이던 이 勞動夜學도 1925년 부터는 여러가지로 난관이 앞에 가로 놓이게 되었다. 그 중의 하 나는 재정상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日帝 當局의 탄압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勞動夜學의 대부분은 지방유지들의 지원으 로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보호없이 자생적인 교육기관 으로서 그 재정적인 기초가 매우 약했던 것이다. 그런데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전반기에 걸쳐서 경제적 인 불황이 계속되게 되니, 경비조달이 어렵게 되고, 이에 따라 문 을 닫지 않을 수 없는 夜學會도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勞動夜學 의 경영난을 일반에게 주지시켜 그 재건을 돕도록 호소한 東亞 朝鮮 兩紙의 역설에 호응하여 다시 再建運動이 전개되기도 하고, 勞動夜學의 敎師나 校長의 호소에 답하여 찬조금이 들어 오기도 하였으나 그러나 勞動夜學이 성하던 1920-1925년의 상황에 비 해선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그 무렵에 민족교육의 문제를 둘러싸고 대 중교육의 문제와 民立大學設立運動에 대하여 항간에 논쟁이 벌어 - 90 -
2. 民族敎育 지고, 勞動夜學을 비롯한 대중교육을 중시한 社會運動家들이 거액 의 돈을 들여 한개의 大學을 설립하겠다고 하는 소위 民族改良主 義者들의 이상론을 어째서 그토록 공박하였는가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19) 그러나 勞動夜學會의 보급을 더욱 촉진할 수 없었던 중요한 이 유는 夜學校의 재정 문제보다도 그 무렵 노골화되기 시작한 日帝 의 勞動夜學에 대한 탄압 때문이었다. 勞動夜學에 대한 日帝의 탄 압은 韓國人의 反日民族運動의 전개 과정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 었다. 즉 韓國의 노동운동 및 농민운동은 1925년을 전후하여 크 게 고조되어서 1925년에는 朝鮮共産黨이 결성되기까지 했는데, 日帝는 이를 단속하기 위해서 노동운동을 포함한 일체의 國內 社 會運動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1925년 이전에 는 당국이 民族的인 색채가 질은 勞動夜學에 대해서 주목을 했었 어도 治安維持에 별 장애가 없는 한 放任主義的 태도를 취했던 것 이 1925년을 轉期로 탄압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日帝의 勞動夜學 에 대한 탄압은 1930년대에 가서는 훨씬 더 강화되어, 敎員에 대 한 查察을 행하고, 비위에 거슬리면 불온한 사상을 가졌다고 해서 勞動夜學을 폐쇄 또는 敎員을 검거 투옥하기도 했다. 이러한 탄압 하에서 勞動夜學의 적지 않은 수가 문을 닫게 되었으며 문을 닫지 않은 勞動夜學도 계속적인 유지를 위해서는 종래의 민족적인 성 격을 청산해 분위기를 바꾸어야만 하였으니. 其實 강습소에 불과 한 것이 되고만 것이다. 1930년대에는 日帝가 소위 一面一校主義란 표어를 내걸고 初等敎育機關을 확충한다고 했지만 그들이 세운 초등교육기관에 19) 당시 民族改良主義者와 社會運動者間의 相反된 見解에 대해서도 姜東鎭 前揭 論文 pp. 30-31參照 - 9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수용된 韓國人 아동이 全學齡兒童의 2활 5분弱으로 대부분의 아 동이 公立普通學校 敎育을 받지 못한 실정이었으니, 이런 때를 당 하여 특히 勞動夜學이 수난을 당했다는 것은 우리의 아동교육, 민 족교육에 있어서 매우 애석한 일이었다 아니할 수 없다. 지금까지 주로 1920년대에 성행한 대중계몽운동으로서의 勞動 夜學의 보급에 대하여 기술했거니와, 이 勞動夜學이 상설교육기관 의 형태를 취한 것이라면, 放學期間을 이용하여 문맹퇴치의 교육 朝鮮日報의 사업은 하나의 年例行事, 또는 그야말로 하나의 캠 페인의 형태를 취한 것이었다. 31운동 직후에 창간된 전기 두 新聞은 日帝統治下에서 音樂美術演劇文學科學體育 운동, 문화운동을 대중계몽운동의 일환으로서 전개한 東亞日報 20)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민족 문화운동, 계몽운동을 선도하였지 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의의있는 사업으로서 民族敎育史上 영구히 잊을 수 없는 것은 한글보급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을 주도하였던 일이다. 文字普及運動을 제일 먼저 일으킨 신문사는 朝鮮日報로서 1926 년 여름에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표어 아래 夏季放學으 로 귀향하는 中等이상의 男女學生을 동원, 전국 각처에서 문맹퇴 치에 힘쓰도록 하였는데, 東亞日報도 1931년 여름 방학때부터 이 와같은 사업을 좀 더 강력하게 추진하여 학생계몽운동 봉사활동 의 바람을 크게 일으켜 놓았다. 東亞日報에서는 처음에 계몽운동 을 브나로드운동이라 불렀다. 이는 19세기의 帝政 러시아 지 식 계급이 농민, 노동자속으로 들어가서 민중운동을 지도하던 것 을 가리켜 민중에게로라는 뜻에서 채용했던 것이나, 뒤에는 20) 文盲退治運動에 대해서는 中央敎育硏究所에서 編纂한 한국의 민주적 발전 과 성인교육의 과제 (1966年 9月刊) 속에 들어있는 李光麟 한국 독립운동의 성인 교육적 역할-1905년 이후의 한국의 성인교육 을 參照 - 92 -
2. 民族敎育 이 이름부터가 민중이 모르는 외국어라하여 단순히 계몽운동 이라고 고쳐 쓰게 되었다. 여하튼 이 운동을 주도한 東亞日報는 당시 社告와 社說을 통해 학생들의 협력을 호소했는데, 1931년 7월 16일자 社告의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여름은 쉬는 때, 그러나 학생 여러분, 여러분은 夏休 일부, 가령 일주일간을 베어 고향의 동포를 위하여 공헌하심이 있으 려 하지 아니합니까? 가령 ① 글을 모르는 이에게 글을 주고 ② 위생지식이 없는 이에게 위생지식을 주고, 이러한 일을 아 니 하시렵니까? 당신의 일주일 노력이면 당신 고향의 문맹이 소멸될 것이요, 당신 1주일의 노력이면 당신의 故里에 위생사 상이 보급될 것입니다. 문자의 보급과 민족 보건운동의 철저, 이것은 조선의 중대사인 동시에 학생 여러분의 공헌을 열망하 는 바입니다. 물론 이 두가지 일 밖에도, 가령 ① 음악, 연극 ② 협동조합 등의 선전훈련, 기타 여러가지로 학생 보나로드운동이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등의 오락, 社說 역시 학생들의 민족과 사회를 위한 봉사 사업에 주저없이 참여할 것을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있다. 만인의 복리를 위하여 자기 1개의 이해와 고락을 희생할 것이다. 우리는 보수 안 바라는 노역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史 上의 新興民의 학생을 보라. 그들은 명예와 이익은 안중에 없 고, 오직 끓는 열과 성의에서 자아의 민족을 사랑하고 자아의 사회를 위하여 희생, 봉공을 한다 이같이 숭고한 뜻과 열의에 충만된 브나로드운동은 농촌 인구 의 7-9할이 문맹이고, 비위생적인 상태에 놓여있던 당시에 하나 의 훌륭한 민중계몽운동이었으며, 조직적인 교육운동이었다고 할 - 9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수 있을 것이다. 한 강습소의 학생 수가 최소 5명에서 최고 905명 에 이르렀고, 강습 日數는 最短 5일에서 最長 51일까지 계속되었 다고 하는 이 운동의 4년간의 통계는 아래와 같다. (講習隊員 總數) 제1회 423 제2회 2,724 제3회 1,506 제4회 1,098 제1회 142 제2회 595 제3회 315 제4회 274 (禁止 或은 中止處所) 제1회 11 제2회 79 제3회 84 제4회 59 제1회 9,492 (講習地數) (講習生數) 제2회 41,153 제3회 27,352 제4회 20,601 이 통계를 보아도 대단히 혁혁한 성과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맹퇴치운동이 이러한 성과를 얻는 데는 朝鮮語學 會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문자보급운동 을 위한 한글 교재가 朝鮮語學會에 의해서 편집되었던 것임은 물 론이려니와, 대개 사립학교 교원으로 있던 語學會 會員들이 솔선 해서 전국을 순회하며 한글강습회를 열기까지 했던 것이다. 李允 宰 李秉岐 金允經 崔鉉培 張志暎 李熙昇 등 10여명의 語學 - 94 -
2. 民族敎育 者들이 이 때의 강사진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계몽활등이 점차 맹열해져서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되어 가자 總督府의 감시가 엄격해지고 종국엔 대규모 순회 강습 이나 문맹퇴치운동도 금지한다는 명령이 내려졌으므로 민족교육 운동으로서의 문맹퇴치운동도 종언을 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다룬 勞動夜學이나, 문맹퇴치운동은 모두가 우리사회의 가장 불우한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개한 계몽운동이요, 교 육운동이었는데 이것은 日帝 植民地 治下의 암흑기에서 행한 매우 의의있는 민족교육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에 관련하여 나라없는 민족의 불우한 학생, 또는 일반인을 위해서 베풀어졌던 직업교육 내지 기술교육에 대해 잠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라를 빼 앗겼다 하더라도 그 민족은 생업에 종사해야만 하며, 또 어느 때 고 그의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日帝가 우리 민족에게 생활의 근거를 마련해 주고 그 장래 의 번영을 위해서 필요한 교육을 베풀어 줄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물론, 日帝統治 初期에 소위 民度에 맞는교육을 해야 한다는 구실 밑에 실용적인 교육을 한다고 했고, 또 1930년대에 와서 宇垣 總督의 農村振興과 勤勞主義敎育이라는 구호아래 生活主義的인 實 業敎育이 강조되는 등 이 나라에서 직업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인 식되도록 노력한 바가 없지 않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 목적하는 바가 달랐던 것이다. 말하자면 통치 초기에 日帝는 우리 민족에 게 고등지식을 제공하게 되면 비판력이 자라나서 쉽사리 통제하 기가 어려울 터이므로 먹을 것을 주어 안심시키면서 부림을 잘 받는 사람으로 키우겠다는 정책의 일환으로 실용적인 교육을 강 조했던 것이다. 그리고 30년대의 교육정책은 마치 우리 농촌의 更 生을 지향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고자 했으나, 其實 韓國농민의 購 - 95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買力을 향상시켜 경제적인 착취를 자행하고 國際聯盟에서의 탈퇴 로 목전에 다가온 전쟁에 필요한 물자생산을 촉진시키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사실상 민족의 역량을 구축하기 위한 생활교육 내지 직업교육 또는 기술교육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舊韓末에 韓國이 日本의 침략을 받으면서 근대적인 지식 의 위력에 눈을 떠 새로운 학문. 새로운 교육을 요망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결국 西洋의 과학과 그 문명을 뜻한 것이었다. 따라서 韓國은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서라도 상당수의 기술학교가 세워졌 어야만 했으나 日本의 植民地로 전락하게 됨으로써 이와 같은 일 을 성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韓國의 기술교육 은 日帝下에서 형편없이 초라한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그러나 중등학교 수준의 몇몇 밋숀系 사립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간단한 기술교육 또는 實科敎育을 베풀었다고 하는 것은 재미 있 는 일이다. 처음엔 培材學堂이나 平壤의 崇實學校工業所(Anna Davis School)에서 처럼 일종의 自助獎學기관과 같은 것으로서 출발했던 것이지만 뒤에 가서는 서울의 儆新學校木工部 機械部 (John D. Wells Trade School)의 경우와 같은 본격 적인 직업학 교로 발전이 되었다.21) 재봉일, 또는 염색자수광우리 만드는 일 따위를 한 후 삯일을 儆新學校木工部 機械部도 원래는 同校의 實科로서 견습기간에 맡아하게 하는 지극히 수준이 낮은 상태의 것이었다가 職業學校 로 독립되면서부터 양재점과 협동하여 재봉일 뜨개질 염색 재 단 메리야스 제조 등의 기술을 가르치고 6개월간의 훈련이 끝나 21) 이러한 밋숀系 學校의 職業敎育에 대해서는 Horace H. Underwood, Modern Education in Korea, International Press, New York, 1926, pp. 110-119參照 - 96 -
2. 民族敎育 는대로 숙련공으로서의 자격증을 수여하였다. 이 학교를 특히 Trade School이라고 했던 것은 학교에서 주판, 산수, 한문, 그리고 초보적인 簿記등을 가르쳤던 때문인 듯 하다. 이 밖에 특별히 기혼여성이나 젊은 과부들을 위해 만들어진 開 城의 好壽敦實科學校(Holston Institute)에서는 약간의 일반교육 과 더불어 實科敎育을 베풀었으며, 카톨릭의 베네딕트敎團에서 세 운 元山의 기술학교에선 가구제조를 주로 하는 목공일을 가르쳤 다. 그러나 기술교육 내지 직업교육의 소임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 룩한 학교는 松都高等普通學校實業場과 Y.M.C.A 技術學校였다. 松都高普는 紡織科를 설치하고 기술교육을 강력히 추진했는데, 여기엔 美國에서 이미 방직업에 대한 실지 경험을 쌓은 디일(C.H. Deal)의 공이 컸다. 그는 1915년에 來韓하였는데 불과 4년이 지 난 1919년에는 同校의 紡織科에서 생산한 직물을 極東地區에서 년 2만弗이 넘는 매상고를 올렸다. 전부 전기로 조정하게 되어 있 는 20여대의 직조기계를 비롯한 새로운 설비를 갖춘 공장시설 때 문에 이 紡織科는 당시 국내에서 손꼽히는 방직공장으로 알려졌 었다. 한편 Y.M.C.A 技術學校도 1906년에 來韓한 죠지 그렉 (George Gregg)에 의해 설립된 후 많은 技術人을 길러 내었다. 인쇄술과 장농 고리 만들기, 사진술, 그리고 비누, 양초 등의 제조 에 관한 교육을 베품으로써 여기 출신들 가운데는 뒤에 자전거 자동차수리업 인쇄소 사진관 등 당시 새로 일어나고 있던 新式 職業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5) 朝鮮語學會의 活動 朝鮮語學會는 교육기관이라기 보다는 學術硏究機關이라고 생각 - 9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되어 日帝治下에서의 민족교육과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 의아하게 여길 사람이 혹 있을지 모르나. 본시 語文運動이라는 것이 강렬한 민족의식을 배양하여 효과적인 국민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게 한다는 점과 실제로 朝鮮語學會라는 것이 3 1運動 이후 소위 文化政治기간에 민족의 활로를 문화면에서 타개하려는 의도 하에서 조직되어 앞서 말한 勞動夜學會나 문맹퇴치운동과 같은 민중계몽운동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을 갖고 있을 뿐더러, 특히 日 帝의 압력이 최고조에 달한 1930년대와 1940년대 초의 활동을 통해 당국의 마지막 탄압을 받은 民族團體였다는 점에서 民族敎 育史上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 수 없다.22) 李常春申明均金允經任暻宰崔斗善李昇圭李奎昉朴淳龍 등 156명의 私立學校 國語敎員들에 의해서 창립된 朝鮮語硏究 會였다. 朝鮮語硏究會는 朝鮮語의 정확한 法理를 연구하여 朝鮮語學會의 前身은 1921년 12월 3일 張志暎 李秉岐 權悳奎 (會則 제2조) 2세 국민교육에 이바지 하자는 목적에서 창립되어 매월 한번씩 月例會를 열어 會員끼리 돌려가며 연구결과를 발표하 고, 또 이에 대해 토론도 행하면서 民族固有의 語文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이 硏究會에서는 1927년 2월 10일 同人誌로 한글 을 창간했는데, 이것은 그 뒤 재정난으로 휴간되었다가 1932년 5월에 속간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 간행되고 있는 것이다. 朝鮮語硏究會가 그 명칭을 朝鮮語學會로 개칭한 것은 1931년 1월 10일이었는데, 그 뒤 朝鮮語學會의 이름으로 많은 사업이 추 진되었는 바, 日帝下 國內 私立敎育機關에서 쓰던 한글교재의 보 22) 朝鮮語學會의 설립과 그 활동에 대해서는 金允經, 한글학회와 한글운동의 역사, 庸齋 白樂濬博士 還甲記念 國學論叢(思想界社, 1955年刊) pp. 1-141과 李熙昇, 國語를 지킨 罪로-朝鮮語學會事件 韓國現代史 第5卷(新丘文化社. 1969 年刊), pp 375-412 參照 - 98 -
2. 民族敎育 급은 물론이려니와 때에 따라서는 語學會 會員들이 전국을 순회하 면서 한글의 보급에 앞장서기도 한 것은 前章에서도 언급한바와 같다. 이 밖에도 1935년에는 語學會가 자매기관으로 날아다니는 사 書出版館 이라는 것을 만들어 盧良根의 동화집 람, 金允經의 朝鮮記念圖 朝鮮文字 及 語學史를 간행했는데, 이는 허례 를 삼가고 그에 드는 과대한 비용을 아껴서 그 돈으로 좋은 출판 물이 있으면 간행한다는 語學會의 갸륵한 뜻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朝鮮語學會가 무엇보다도 가장 정력을 기울여 추진한 사업은 朝鮮語辭典의 편찬이었다. 이 국어사전의 편찬은 단지 학 술적인 업적이나 또는 韓國고유의 문화를 유지 보존하는 데만 기여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으로써 민족정신을 신장하고 앙양시 킬 수 있다는 점에서 여간 의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우기 日帝 의 우리문화 말살정책에 대항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할 수 있는 기 회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사업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9년 한글 기념일에 朝鮮敎育會會館에서 한글기념 식을 가진 다음 전국 각처의 有志 198명의 발기로 朝鮮語辭典編 大會를 조직, 본격적 인 국어사전편찬사업에 들어 갔는데 同編纂 會의 사전편찬취지서의 1절을 여기 引用해 둔다. 일찌기 문화개발에 유지(有志)한 민족들은 언어 및 문학의 정리와 통일을 급무로 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과거의 모든 문 명 민족이 제각기 자기 어문의 표준을 확립하기 위하여 표준어 와 표준 문자를 제정하며, 동시에 표준사전을 편성하여 어문의 통일을 도모하였고 (中略) 그러므로 금일 언어를 소유하고 문 화를 소유한 민족으로서는 사전을 가지지 않은 민족이 없다. 그 러하나 우리 조선민족은 언어를 소유하고 또 문자를 소유하면 서 도 금일까지에 아직 사전 한 권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므 - 99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로 조선의 언어는 극단으로 문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요, 또 조 선 민족의 문화적 생애는 금일과 같은 황폐를 이루게 된 것이 다. (中略) 금일 세계적으로 낙오된 조선민족의 갱생할 첩로 (捷路)는 문화의 향상과 보급을 급무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이요, 문화를 촉진하는 방편으로는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의 정리와 통일을 급속히 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를 실현 할 최선의 방책은 사전을 편성함에 있는 것이다. (下略) 23) 그러나 사전편찬사업이란 그렇게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따라 서 허다한 난관이 가로 막고 있었다. 이 난관중에는 경비문제도 있었지만, 그 보다도 더 큰 문제는 사전을 편찬하는데 있어서의 기초작업이 하나도 되어 있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朝鮮語學 會에서는 사전편찬의 기초가 되는 맞춤법의 통일과 표준어의 査 定 및 外來語표기법의 작성을 우선 서두르게 되었으며, 그 결과 1933년 한글 반포 487회 기념일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 정 발표하였고, 1936년 한글날에는 표준말 査定을 완료, 발표하 였으며. 다시 1940년엔 전후 10년동안의 연구와 숙의끝에 外來 語 표기법을 통일, 사회에 발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전 편찬의 기초작업을 끝냈으나, 재정적인 난관 이외에도 당시의 우 리 국어에 대한 日帝 當局의 탄압이 급격히 심해져서 사전편찬의 민족적 사업을 완수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도 촉박했다. 이때의 사 정을 朝鮮語學會 會員의 한 사람이었던 李照昇은 이렇게 밝혀주 고 있다. 당시 이 땅에서는 총독 南 次郞이 민족문화말살정책을 감 행하면서 그 시책의 일환으로 우리 국어에 대한 탄압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전편찬 관계자들도 미구에 닥쳐올 탄압을 23) 前記 李熙昇 論文 p.385에 引用되어 있는 것을 轉載 - 100 -
2. 民族敎育 예감하고 편찬사업을 급속히 추진하기로 하여 밤에도 일을 하 였으며, 원고를 빼앗기거나 잃어버릴 경우를 생각하여 두벌씩 원고를 만들기로 하였다. 그리고 먼저 끝난 원고는 大東出版社 의 협력을 얻어 인쇄에 넘기기로 하였다. 과연 관계자의 예감은 적중되어 소위 조선어 학회사건이 조작되어 우리 한글 운동은 큰 수난을 겪게 되었다. 24) 이와같이 語學會 會員들의 노고로 사전편찬의 준비작업이 그대 로 진척되어 가는 도중에 소위 조선어학회사건이 발생, 語學會는 일대수난을 겪게 되었다. 이는 물론 처음부터 日帝 當局의 날조된 조작극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朝鮮語學會의 활동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日帝는 滿洲事變에서 시작 한 中國本土에 대한 침략과 나아가서는 美國 英國을 상대로 한 太平洋戰爭에 임하면서 戰時體制로의 전환을 단행, 韓國에 대한 植民地 경영에 이를데 없이 무자비한 수단을 다 동원하였으니 韓 國語교육의 폐지와 日本語의 常用 강요, 創氏改名, 神社參拜의 실 시, 東亞日報 朝鮮日報 등 民間紙의 폐간 및 韓國語서적의 출판 금지 등을 단행했다. 한편, 戰時라는 구실하에 1936년에는 朝鮮思 想犯保護觀察令을 만들어 민족운동자들을 要視察人이라고 해서 항상 감시하고 1940년에는 思想犯豫備拘禁令을 내려 독립운동혐 의자를 예비구속할 수 있는 법적 조처를 마련해 놓았다. 뿐만 아 니라 소위 國民總力聯盟이니, 혹은 臨戰報國團이 니 하는 것을 만 들어 민족지도자들을 전향시켜서 日帝에 협력, 親日輿論을 환기시 키는데 앞장서게까지 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극심한 日帝의 탄압으로 민족정신은 거의 질식상태에 빠져 있었으니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은신하여 지조를 지킬 24) 同上 p. 389-10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수 있었을 따름이다. 朝鮮語學會도 말하자면 이 극소수의 志士들 의 단체였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제 이 얼마 안되는 극소수의 人 士들도 日帝 當局은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결국 그들의 허무맹랑 한 조작에 의해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회원들에게도 검거의 선풍이 불어 닥쳤다. 이 검거는 1942년 10월 1일의 제1차 검거로 시작해서 1943년 1월초의 제3차 검거까지 확대되었는데, 李 重 張志暎李允宰崔鉉培李克魯李熙昇鄭寅承韓澄 金法麟李秉岐李萬규安在鴻李仁金度演徐珉濠 등 29 華 명이 同事件에 직접 관련된 사람으로 구속되었고, 약 50명이나 되 는 사람이 證人으로 소환되어 피의자나 다름없는 가혹한 심문과 학대를 받았다. 이 朝鮮語學會 관련자들에 대한 검거는 당국의 조작극이었으니 검거이유가 떳떳치는 않았다. 日帝統治에 복종치 않는 民族主義者 들이라는 귀찮은 존재들로 보인터에, 마침 전쟁도 그들에게 매우 불리해졌던 때인만큼 韓國의 民族主義者들이 이제는 하나의 공포 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처단하고자 한 데에 이유가 있었던 것 같 다. 이 사실은 구속자 중 12명을 정식재판에 회부하면서 豫審終結 決定의 판결문을 발표한 속에 나타난 기소이유서를 보아도 알만 한 일이다. 본건 조선어 학회는 대정(大正) 8년(1919) 만세소요사건의 실패에 비추어, 조선의 독립을 장래에 기약하는 데는 문화운동에 의하여 민족정신의 환기와 실력 양성을 급무로 삼아서 대두된 소 위 실력 양성 운동이 그 출발의 봉오리였음에 불구하고 드디어 용두사미에 그쳐서 그 본령(本領)을 충분히 발휘 하지 못하였더 니, 그 뒤를 받들어 소화(昭和) 6년(1931) 이래로, 피고인 李克 魯를 중심으로 하여 문화운동 중 그 기초적 중심이 되는 위에서 - 102 -
2. 民族敎育 말한 바 어문운동의 방법을 취하여 그 이념으로써 지도이념을 삼아가지고 겉으로 문화운동의 가면을 쓰고 조선독립을 목적한 실력양성단체로서, 본건이 검거되기까지 10여년이나 오랜동안 조선 민족에 대하여 조선의 어문운동을 전개하여 온 것이니 시 종일관 진지하고 변치 않은 그 활동을 조선어문에 쏠리는 조선 인심의 기민(機敏)에 부딛쳐서 깊이 그 마음속에 파고들어 조 선어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일으키고, 여러 해를 거듭해 내려 오며 편협한 민족관념을 북돋아서 민족 문화의 향상, 민족의식 의 앙양 등 그 기도하는 바 조선독립을 위한 실력신장의 수단을 다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 25) 결국, 朝鮮語學會는 일종의 獨立團體라고 보아 그 회원들과 관 계자들을 獨立運動者들로 다루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事件의 最 終判決宣告가 내려진 것이 1945년 1월 18일, 그리고 고등법원에 서의 공판일자를 8월 12일로 결정하여 재판의 완료를 보지도 못 하고 3년을 끈 다음 8.15解放과 더불어 자연히 사건이 해소됨으 로서 피의자들도 석방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朝鮮語學會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던 사전편찬의 일도 재 개되어 1947년부터 1957년 10월에 이르는 만 10년간의 노고끝에 우리말사전 全 6권을 완성 간행하게 되었거니와 朝鮮語學會가 日 帝統治下에서도 그 가장 혹심한 탄압기간을 통하여 민족문화의 향상, 민족의식의 앙양 을 도모하여 전개한 활동은 그야말로 日 帝植民地下 민족교육의 최후의, 그리고 절정을 이룬 거사였다. (6) 民族敎育發展의 意義 이상에서 筆者는 1910년 韓日合併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日帝 25) 同上 pp.401-402에 引用되어 있는 것을 轉載 - 10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末에 이르기까지 植民地統治下에서의 민족교육의 면모를 알아 보 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 第1章에서는 韓末의 開化 및 近代化運動 으로서 생겨난 私學機關과 日帝의 統監府設置 이후 救國運動, 國 權回復運動으로서 일어난 私學, 즉 民族敎育機關이 合邦이 이루 어진 다음 日帝統治 초기의 교육정책에 따라 어떻게 시련을 겪어 야 했는가를 살펴 보았으며, 아울러 總督府의 민족동화정책과 교 육에 있어서의 민족차별주의라고 하는 상호 모순된 路線이 어떻 게 병행되어 나갔는가를 서술하였다. 第2章과 3章은 3.1운동이라 고 하는 거족적인 민족운동을 통해 日帝 당국의 강압적인 武斷政 治를 폐기시키고 외견상으로나마 그들의 植民地統治方式의 수정 을 불가피하게 만든 이후, 소위 文化政治기간을 이용하여 크 게 대두한 민족문화운동이 교육운동, 민중계몽운동으로 표현된 사 례를 다루었는데, 특히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民立大學을 설립하 려는 줄기찬 노력과 대중교육운동으로서의 勞動夜學 문맹퇴치 운동, 그리고 일부 밋숀系 學校에서 실시한 직업교육에 초점을 두 었다. 民立大學設立運動과 문맹퇴치운동은 실제상으로 민족교육 의 발전에 혼선을 가져 왔었다고 볼 수도 있고, 또 당시 그렇게 생각했던 이들도 없지 않았으나 넓게 생각하면 오히려 우리 민족 와 역량의 개발을 위해서 여러 각도에서, 그리고 여러 차원에서 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여하튼 1920년대에 절정에 이른 民立大學設 立運動과 그리고 勞動夜學, 문맹퇴치 운동 등 대중교육운동은 合 邦 이전 私學興盛期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교육열을 앞지르는 바 있었는데 이는 日帝의 민족교육에 대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족 이 그들의 교육에 同化되지 않는 산 증거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 니라 이 시기의 민간의 힘과 교육수준이 大學을 요망할 정도로 성 - 104 -
2. 民族敎育 장했다고 하는 것은 일찌기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전국 각처 에서 불타오르던 私學運動이 그 토대가 된 것이니, 이런 점에서 볼 때 민족교육은 日帝 植民地下에서도 면면히 그 명맥을 유지하 고 공고히 해나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第4章은 역시 1920년대에 생겨나서 日帝 末期까지 존속하며 문화활동을 통한 민족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다가 日帝 當局의 박해로 수난을 당한 朝鮮語學會의 사업과 同學會의 사건을 서술 해 보았다. 끝으로 日帝支配下에서의 민족교육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보아 취급한 이상의 몇 가지 문화운동, 교육운동이 목표로 했던 방향을 규정하는 일을 빼놓을 수는 없다. 앞에서 설명한 私立學校의 경 영, 民立大學設立運動, 勞動夜學會, 文盲退治運動 및 朝鮮語學會 의 활동 등 일련의 교육문화운동이 日帝治下에서 의미한 바는 우 선 그것이 反日 民族獨立運動과 직결된 애국적인 활동이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운동 하나 하나가 처음엔 당국에 의해 허용되다가도 제대로 발전되어 커다란 힘을 갖게 되면 번번 히 박해를 받고 좌절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 한 日帝의 탄압밑에서도 민족적인 의지는 꺾이지를 않아 1945년 8월 조국의 해방과 동시에 그 힘을 과시할 수가 있었다. 일찌기 미국의 史學家 죠지 맥큔(George M. McCune)는 日本의 支配가 韓國人의 지도력을 억압하고 행정에 책임을 지는 잠재적인 능력을 약화시키기는 했으나, 韓國人의 민족정신 만은 결코 말살시킬 수 없었다. 26) 고 했는데, 이는 언제 생각해도 옳은 판단이었다. 그러면 韓國人 의 그와같은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것인가? 그것 26) Korea Today,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50, p. 27-105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은 日帝의 갖은 탄압밑에서도 우리 민족이 本 論文에서 다루는 바 와 같은 교육과 문화운동을 통해 민족운동, 救國운동을 끈질기게 벌여왔던 데 있었다고 밖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이 사실은 민 족교육의 성장과 더불어 外面化한 韓國 학생들의 항일 민족투쟁 에 의해서도 실증되는 바, 3.1운동을 기점으로 해서 6.10만세 운 동, 光州學生事件, 그리고 1930년대의 전국에 걸친 抗日學生民族 解放運動 등은 모두가 日帝의 식민지교육에 대항한 민족교육의 영향이었다. 둘째로 日帝下에서 의 교육 문화운동은 우리가 식민지하에 있 었기 때문에 정부의 주도가 아닌, 사회인사나 학생들, 혹은 언론이 앞장선 하나의 사회 운동으로 뻗어 나갔다는 점인 바, 이것은 민족 교육에 좋은 전통을 남겨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1920년 대 이후에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교육 문화운동이 노동운동 농민 운동 청년운동 여성운동 등 일련의 사회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전개되었던 만큼 선진적인 人士들의 이같은 사회운동에 대 한 日帝당국의 탄압과 함께 교육 문화운동도 타격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타격을 받으면서도 당시에 있었던 각종의 교육 문화운동이 민족교육에 끼친 영향은 日本人들이 官公立學校 를 통해 베푼 식민지교육보다도 훨씬 심대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민족교육의 발단이 舊韓末의 開化運動의 사명을 띄 고 民族近代化를 지향하려한 데 있었고, 日帝 식민지하에서는 교 육구국운동과 직결되고 있었던 만큼, 그것이 항상 계몽적인 수준 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하는 점이다. 계몽적인 교육 문화운동이 란 어쩔 수 없이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하향식방법을 취하기 마련인데, 교육의 이상은 본시 이러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 이 아래로부터 민중의 권리로서 자각되어 행해지는 데 있는것이 - 106 -
3. 民族史學 니, 여기서 우리는 아직 새로운 교육의 경험이 부족한터에 그 나 마 외적 압력에 의해 교육의 자율성이 박탈당한 이 시기의 민족교 육의 한계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어려운 조건에서나마 韓國 민족은 어떻게든지 자주 적 주체적인 입장에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여 이를 통해서 내적 으로 축적된 교육충동이 조국의 光復과 더불어 크게 폭발함으로 써 解放이후 韓國敎育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오게한 중요한 계 기를 마련한 것이다. 李光麟 3. 民 族 史 學 이 節을 대함에 있어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점에 유념하고자 한다. 첫째, 이 節이 취급되는 시기이다. 그 시기는 韓末에서 日帝强 占期에 걸쳐 있다. 그간에 民族史學이 어떻게 연구되어 학문적인 체계를 잡아갔으며, 그것은 당시에 있어서 어떠한 민족사적 의미 를 갖게 되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둘째, 이 節의 제목인 民族史學이 어떤 내용을 뜻 하는가 하 는 점이다. 논자에 따라서는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節名의 의미를 韓國人에 의한 韓國史硏 究 로 단순화시켜 논지를 전개시키고자 한다. 이 때 韓國人에 의 한 民族史學은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의식을 일정하게 공 통적으로 갖고 있었다. 韓末 日帝强占期에는 日本人에 의한 韓國 史硏究도 성행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업적과 결과가 어떠 하든, 韓國人 이외의 손에서 이루어진 韓國史硏究는 여기에서 취 - 10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급되지 않는다. 셋째, 외세의 침투와 강압으로 일관된 이 시기에 있어서 民族史 學=韓國史硏究는 소극적으로는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수호한다 는 차원에서 해석되어질 수도 있으나 적극적으로는 당시의 외세 에 결연히 항거하려는 민족의식의 고취 내지는 민족운동의 전개 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民族主義史家들에게 韓國史硏究는 독립 운동의 방편이었고 바로 독립운동, 그것이었다고까지 지적된다. 이러한 몇가지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시기의 韓國史硏究를 보면 韓國史學史에서 한 시기를 劃할 중요성이 부각되어진다. 외세의 침투로 인하여 자주에의 시련이 닥아오는 19세기 말, 여기에 대처 하려는 자세는 왜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하는 역사 인식의 심화를 가능케 하였다. 獨立協會를 중심으로 자주화의 실 천운동이 성숙하였을 때나, 민간단체들을 중심으로 敎育自强運動 이 활발히 전개되었을 때에 역사의식이 높아지고 자기 역사에 대 한 연구(교육)열이 상승하였으며, 日帝의 强占과 더불어 이러한 의식은 더욱 고조되어 갔던 것이다. 韓國史學史에서는 바로 이러 한 역사의식과 역사연구열을 바탕으로 근대역사학이 성립되는 것 이 또한 주목되어서 좋을 것이다. 1910-1920년대의 강렬한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했던 歷史學은 1930년대에 이르면 史觀과 方法論을 달리하는 여러 유파로 분화 되고, 따라서 民族史學은 이들 여러 유파를 복합적으로 수용하면 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節에서 취급될 내용을 다음과 같이 미리 간단히 이해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民族史學의 胎動 국가 자주의 시련으로 이 시기의 歷史學은 민족적 자각을 위한 - 108 -
3. 民族史學 방편으로 환기 고조되었고 愛國啓蒙思想의 중요한 소재와 내용이 되었다. 애국계몽이 그 중요한 임무였던만큼 자주성 고양에 역점 을 두고 교과서 등을 통하여 民族史敎育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 랬던만큼 日帝 統監府와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한편 뜻있는 선각자들은 민족전통의 계승을 위하여 민족적인 古典간행에 열을 올렸다. 朝鮮光文會가 발족되는 것은 이 때다. 民族史學의 成立 日帝 强占期에 들어서면 日帝는 그들 어용학자들을 동원, 그들 의 朝鮮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소위 植民史觀을 안출하기에 광분한다. 이에 대하여 朴殷植 申采浩 南宮檍 등은 韓國史의 연구와 보급이 국권회복 독립투쟁의 중요 방편임을 인 식하고 民族史연구에 정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전통적인 역사 연 구방법을 답습한 것이 아니고, 植民史學에 대항할 역사의식과 방 법론을 확대 심화시켰던 것이다. 이 결과 韓國의 소위 근대역사학 의 성립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民族史學의 分化 1920년대 말기부터 民族史學은 사관과 방법론을 달리하는 여 러 유파가 형성된다. 흔히 民族主義史學, 實證主義史學 및 唯物史 觀 (社會經濟史學으로도 불리어진다)으로 3대별 된다. 1930년대 에 접어들면 日本의 소위 근대사학에 자극 받았고 근대교육에 접 했던 少壯史學者들을 중심으로 근대적인 학회를 조직하여 학술활 동을 전개하게 된다. 震檀學會의 成立과 활동이 그것이다. 그러나 日帝의 民族抹殺政策으로 1940년대에 이르면 民族史學은 표면상 으로는 거의 침묵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대체로 이와 같은 전체적인 이해를 가지고 韓末日帝下의 民族 史學의 발전과정을 개관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제3期의 - 109 - 民族史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學의 分化 에 대하여는 지면 관계상 후일 別稿를 통하여 詳論하 려 한다. (1) 民族史學의 胎動-韓末의 歷史學 1) 歷史認識의 變化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民族史學의 성립발전은 이 시기의 대 내 대외적인 상황과 깊은 관련이 되어 있다. 그 대내 대외적인 상황은 안으로 봉건사회의 제 질서를 개혁해야 하고 밖으로 외세 의 침투에 자주독립을 확고하게 해야 하는 당위적인 과업수행을 촉구하고 있었다. 봉건적인 구질서가 외세의 농간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거니와 특히 이들 이 서로 야합했을 때 민족적 모순이 심화될 것은 너무나 뻔한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19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日本을 비롯한 帝國主義 국가들의 韓 國침략은 이 민족적 모순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의식을 가진 지식인들과 민중들은 민족적 위난을 깊이 의식 하고 반봉건 반외세의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안으로 봉건적인 사회체제의 개혁을 부르짖고 밖으로 斥洋斥倭의 기치를 들고 당 시 외국가적 위기를 구하고자 한 東學農民革命이 그 단적인 예가 될 것이며, 그 후에 일어난 잇단 義兵활동도 그러한 차원에서 이 해하여야 할 것이다. 日帝의 韓國침략이 노골화하는 20세기에 들어서면 韓國人의 이 에 대처하는 양상은 義兵활동의 무력투쟁을 택하는 직접 대결의 방식과, 교육 언론 식산 등을 통한 민중계몽 자강실력배양의 방식으로 크게 나누어지게 되었다. 교육 언론 등 민중계도의 방 - 110 -
3. 民族史學 식을 취할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 民族史에 대한 환기가 아 닐 수 없다. 역사를 통한 민중계몽이 韓末 愛國啓蒙思想의 큰 비 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韓末, 외세의 침략에 직면하여 국가적 위난의 적신호가 울려지 고 있을 때 지식인 사이에서는 그러한 현실에 대한 역사적 통찰과 분석이 민족적 자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本國은 檀君 4천년의 神聖한 나라요 5백년의 敎化에 薰沐된 民族으로서 이제 沈溣할 지경에 이르니 長嘆息할 바라. 1) 고 하여, 자기 현실에 대한 역사적 통찰을 하였는가 하면 만약 自强의 術을 窮究할진대 다름 아니라, 敎育을 振作함 에 있으며, 殖產興業함에 있으니 이 自强의 目的을 貫徹할라 치면 不得不 먼저 그 國民精神을 배양하여 檀君箕子 以來 四 千年 韓國精神으로 二千萬人의 뇌수에 들어부어 한 호흡 한 순 간이라도 自國의 정신을 잊지 않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主權回 復의 活氣를 지으리라 2) 고 하여 당면하고 있는 민족적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방책도 역시 역사에서 찾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역사에 대하여 애국심을 배양하기에는 본국사기를 불가불 읽을 것이요 문명 연원을 연구하기에는 각국의 옛적 사기를 불가불 읽을 것이다. 국가의 흥하고 망하는 이치도 이에 있으며 영웅호걸의 행적도 이에 있으며 대개 역사란 자는 만가지 학의 근원이요 근세사 기란 자는 또 역사 중에 가장 긴요한 연고니라. 못난 자는 가로 되 오늘날 한국의 대세를 살펴 보건대 인정에 적당케 하여 정긴 1) 鄭寅琥 初等 大韓歷史 序文 2) 大韓自强會 趣旨文 - 11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하게 만든 세계사기 한 권이 없으니 어찌 하리오. 하나니 가로 되 이것은 서적계의 흠절이라 할찌나 지금에 각종으로 발간한 서양사기이니 동양사기이니 하는 것을 숙독하면 또한 세계대세 의 일반을 미루어 헤아릴 것이오 국민의 전도에도 이로운 일이 많으리라 하노라 3) 하는 태도를 지니게 되었고, 그들에게는 역사란 국가흥망의 이치 와 민족성쇠의 이치가 모두 여기에 있어서 사람들의 희미한 뇌수 를 변통없이 깨닫도록 하는 것이었다. 역사는 이제 과거의 어떤 사실을 나열하는 데 그치는 단순한 과거로서 머무를 수는 없었다.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꼭 필요한 학문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역사에 대한 바로 이러 한 인식이 韓國史연구로 視角을 돌렸을 때, 연구방법 서술태도 사관 등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종래 전근대사회의 역사학 은 編年體的인, 혹은 紀傳體的인 서술방식을 취하여 지배자가 자 기합리화 내지 정치의 자료를 구하는 교훈적 실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회고적이요 과거지향적인 역사인식 태도로서는 당 시의 급박한 상황과 중첩된 문제를 제대로 분석하여 해결을 시도 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사회발전을 인과관계 위에서 분석하고 종합하는 근대역사학에 눈뜨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역사서술 에 있어서 編年體 紀傳體의 전통적 서술방식을 지양하는 것을 의미하였고 국가민족 민중 중심의 발전적 또는 발생적 역사일 것을 목표로, 역사를 발전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이 를 실증적 비판적으로 서술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 이다.4) 이제 역사는 현재 자기의 왜 그렇게 된 것을 냉엄하게 因果的 3) 大韓每日申報 1908年 7月 16日字 4) 金容燮 韓國 近代歷史學의 成立, 知性 2권 3호 p.23-112 -
3. 民族史學 으로 밝히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것도 무비판적으로 史料를 나열 하던 방법을 지양하고 비판적, 발전적으로 서술하는 태도를 가져 야 했으며, 나아가서는 당시 중첩되고 심각했던 모든 난제들을 해 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진통과 개혁을 겪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 는 歷史的 방향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韓末의 民族主義的인 愛國啓蒙史觀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5) 韓末의 역사인식 내지 연구방법 등에 변화를 촉진시킨 요인의 하나는 日本人 學者들의 韓國史연구일 것이라 생각된다. 日本에서는 1887년 東京大學에 史學科가, 1889년에 國史科가 설 립되었고 史學科의 주임으로 獨逸人 리쓰(Riess)를 맞아들였다. 그는 랑케 (Ranke)의 제자로서 20대의 젊은 학자였다. 1889년에 는 회원 40명으로 史學會를 조직하고 史學會雜誌(1892년에 史 學雜誌 로 改稱함)가 발간되어, 소위 근대적 학문방법으로 歷史學 硏究에 임하고 있었다. 淸日戰爭(1894) 전후의 시기는 韓國問題 가 그들 朝野의 관심을 모으고 있을 때로서 학계도 韓國을 주시하 구와 함께 활발해졌다. 이 때 林泰輔의 朝鮮史(1892) 吉田東 伍의 日韓古史斷(1894)등이 출간되었고, 史學雜誌에서는 1890년대에 管政友那珂通世白鳥庫吉 등의 韓國史 관계 논문들이 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朝鮮史硏究는 언어 지리 법제면의 연 발표되고 있었다.6) 20세기에 들어서면 日帝의 韓國침략음모가 노골화되면서 이 침 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해주는 韓國史연구 및 사관이 등장하 5) 韓末의 愛國啓蒙史觀에 대하여는 金泰永 開化思想家 및 愛國啓蒙家들의 史觀, 讀書生活 1976년 6월호 참조 6) 이 때 발표된 논문들은 거의 韓國古代史에 관한 것으로, 管政友의 高句麗好太王 碑銘考, 那珂通世의 高句麗古碑考 朝鮮古史考, 白鳥庫吉의 朝鮮古傳說考 朝 鮮古代諸國名稱考 朝鮮古代地名考 朝鮮古代王號考 朝鮮古代官名考등이 있었다. - 11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고 있었다.7) 滿鮮史觀 日鮮同祖論 韓國史의 停滞性 등에 관한 주장이 그것이다. 이들의 韓國史연구 및 주장들은 무력침략만큼이 나 중대한 日帝의 침략행위였던 것이다. 韓末의 韓國史연구자들은 日本人들의 저러한 연구에 다소간 자극 을 받았던 것 같이 보인다. 후술할 玄采의 東國史略이 林泰輔의 朝鮮史를 편역했다고 하는 것이나, 申采浩가 日本人 학자들을 두고 狹隘한 天性이 朝鮮을 誣하기에만 急하여 公平을 缺함 이 라고 지적한 데서 그 점을 살필 수 있다. 당시 金澤榮의 歷史輯 略에서나 張志淵의 大韓疆域考에서는 日本書紀를 採入할 8) 정도가 되었던 것도9) 바로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韓末의 역사인식 및 역사학은 이렇게 시대상황과 더불어 변화 되고 있었으며, 당시의 국사교육과도 관련하여 애국계몽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2) 古典復刊과 歷史硏究 韓末의 韓國史연구자들은 역사연구를 그들의 주된 임무로 삼았 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주로 당시의 선각자들로서 언론 교육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의 역사연구 활동은 대체로 몇가지 방면에서 크게 나타나고 있었다. 古典복간과 저술활동 및 역사교육이라 해서 좋을 것이다. 먼저 당시의 古典복간사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화지식인들 의 思想的 系譜가 實學思想에 연결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 다. 燕巖 朴趾源 茶山 丁若鏞 阮堂 金正喜의 영향은 대단하였 고, 특히 丁若鐘과 朴趾源에 대한 연구열이 고조되고 있었다.10) 7) 旗田巍 日本における 朝鮮史硏究の傳統, 日本人の朝鮮觀 所收 8) 申采浩 朝鮮上古史 丹齋申采浩全集 上 p 49 9) 申采浩 朝鮮上古史 同 p.46 年前 金澤榮의 歷史輯略과 張志淵의 大韓疆域考 에 神功女主 18年에 新羅征服과 垂仁主 2年에 任那府 設置 등을 모두 日本 書紀 에서 採入하여 그 宏博을 자랑하였으나 - 114 -
3. 民族史學 이러한 상황 속에서 實學者들의 저술이 복간되거나 이들 저술을 토 대로 한 업적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때에 복간된 古典은 燕 牧民心書 欽欽新書 雅言覺非등이 있었으 며, 張志淵은 茶山의 我邦疆域考를 증보개정하여 大韓疆域 考로 출간했던 것이다. 巖集 과 茶山의 이렇게 實學연구를 기반으로 한 상황에서 韓國史에 대한 연구 저서도 나타났다. 大東歷史와 金澤榮의 歷史輯 略그리고 林泰輔의 朝鮮史와 朝鮮近世史를 번역편집하여 만든 玄采의 東國史略을 들 수 있고, 시대사의 성격을 며는 것으 로 黃玹의 梅泉野錄, 鄭喬의 大韓季年史등을 지적할 수 있다. 大東歷史는 崔景煥이 편집하고 鄭喬가 評閱한 것으로, 출간 通史類로서는 崔景焕 鄭喬의 되기는 光武 9년인 것 같으나, 그보다 먼저 獨立協會 회원들에게 자주적인 韓國史를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李想榮이 쓴 서문에는 우리 東方은 宇宙萬國 自主獨立國의 하 나 라 하였고, 鄭喬의 서문에는, 이 책이 獨立協會 회원들에게 많 이 읽혀졌으나 약 8년간 출간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 역 사책은 獨立을 위해서 저술(出)되었었으나, 獨立協會員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刊行되지 못했으니 이 또한 기이하다 라 고 지적하였던 것을 보면 大東歷史의 史學精神이 독립심 고취 에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11) 그랬던 만큼 몇몇 가문의 족보를 인용해 서 까지 국가의 정통성을 밝히는 데에 집착하였던 것이다.12) 10) 金泳鎬 開化思想의 形成과 그 性格, 한국사 16國史編纂委員會刊 pp.247274 11) 崔炳憲의 大東歷史跋文 雖有金富軾徐居正之著作 多證於支那班馬等史 故反失獨立之權 此書一出 四千載古蹟 的確有據 若其重系統也 嚴纂逆也 明是 非也 褒忠節也 詳典章也 獨立國權 於是有補焉 이 참고가 된다. 12) 大東歷史 編纂에 참고한 資料들은, 東史綱目 東國通鑑 東史會綱 箕子 - 115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歷史輯略역시 1905년에 간행되었다. 저자 金澤榮은 學部에서 출판한 東國歷代史略편찬에 참여하였고 東史輯略을 편찬한 바도 있었다. 그는 바로 이러한 역사편찬의 경험을 살려 歷史輯 略을 간행하였던 것이다. 歷史輯略은 滄江 金澤榮이 玄采의 권고를 받아서 시작하였던 것 같다. 당시 역사편찬에 있어서 體制不立에 고심하고 있던 13) 玄采는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이요, 學部에서 同役하고 있던 金澤榮 東國史略이 國 漢文 混用書임에 비하여 純漢文으로 된 歷史輯略은 많은 引 用書를 갖고 있다. 그런 이유로 해서인지는 몰라도 歷史輯 略을 두고 이 시기의 역사서로서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고 지 에게 많은 격려를 주고 받았을 것이다. 玄采의 14) 적하기도 한다.15) 그러나 이러한 지적에는 무리가 있다. 인용서목 三國遺事를 新羅 崔致遠 撰 혹은 高 麗僧 一然의 撰이라 하였고, 東史古記(우리는 이 책의 명칭을 여 기에서 처음 듣는다)의 찬자를 高麗僧으로 알려져 있는 新羅 僧 無 函이라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본서의 실증정신 한계를 노출하 는 것이다. 일찌기 丹齋 申采浩도 지적한 바 있지만, 歷史輯 略은 日本書紀 등에 나타나는 古代日本의 朝鮮침략과 그 경영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그가 日本人 近藤瓶城 撰의 國史略 을 제시하면서 金澤榮은 16) 17) 을 무비판적으로 옮겨놓은 데서 이러한 문제점이 나타난 것이 아 誌 鮮于氏先王遺事記 淸州韓氏譜 幸州奇氏譜 延安車氏譜 輿地勝覽 文獻備考 支那諸史 日本史之類 등이다. 13) 金澤榮 歷史輯略自序 凡前後之役 皆吾友玄采白受所勸發者也 14) 歷史輯略의 引用書目은 三國遺事 東史古記 三國史 高麗史 東國通鑑 麗 史提綱 東史綱目 疆域考 東史世家 四郡志 渤海考 文獻備考 燕嚴集 中京誌 近藤瓶城撰의 國史略 등이며 小小한 인용서는 기록하지 않았다고 한다. 15) 金容燮 韓國近代歷史學의 成立, 知性 2권 3호 pp. 25-26 16) 申采浩 朝鮮上古史 同 p.46. 주 9 참조 17) 歷史輯略 上 권3 pp. 84-88 사이에 神功后의 침략기사가 그 한 예다. - 116 -
3. 民族史學 닌가 생각되며,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당시 學部 學政參與官으로 있던 弊原坦의 서문이 권두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생각된 歷史輯略은 이 시기 역사서의 한 표본으로서 그 방면의 저서로서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저술 답게 수많은 자료를 다. 그러나 18) 매우 합리적으로 편집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시기에는 번역사서가 많이 출간되고 있었다. 이것은 제국주 의자들의 침략으로 인한 열강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 淸에서 입수된 萬國通鑑이나 學部 간행(1896)의 萬國略 史 를 통하여 世界史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는 가능하였으나 역사가들은 이보다 外國史의 번역 간행을 서둘렀던 것이다. 玄采 는 그중 가장 대표적인 譯述家였다. 한 것처럼 林泰輔의 東國史略은 앞에서 지적 朝鮮史를 편역한 것으로 그 自序에 이전에 내가 學部에서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歷史를 편 집한 것이 數部인데 매양 軆制가 不立하여 閱者로 하여금 책을 보면서 迷茫케 하고 悔愧케 함이 얼마나 심했던고. 근래 日本人 林泰輔는 史學家로서 더욱이 我國에 致力하여 朝鮮史7册을 著述하였는데 三國으로부터 本朝에 이르기까지 모두 확실한 證 據를 갖고 있으며, 또한 각기 分門 別類하여 사람으로 하여 금 한번 읽고 瞭然케 하니 진실로 가히 써 外人이 歧視한 것이 아님을 알겠다. 이에 또한 번역한다. 19) 고 한 바와 같다. 그가 林泰輔의 것을 편역한 동기는 자신이 역사 편찬 활동에서 매양 느꼈던 體制不立을 극복하려 한 것으로 이는 그의 방법론적인 반성에서 출발한 것이라 보여진다. 18) 金容燮 上揭論文 19) 玄采 東國史略 自序 曩予傭譯于學部 歷史之編輯爲數部 毎苦軆制不立 使閱 臨卷迷茫 悔愧孰甚 今日本人林泰輔史學家也 尤致力於我國 著有朝鮮史七册 自 三國以至本朝 皆確有證據 又各分門别類 令人一讀瞭然 實大不可以外人岐視之 也 玆又譯之 - 11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玄采의 史學精神에 대하여는 그의 東國史略의 自序와 本文 속에 어렴풋이 보인다. 전에는 日本이 韓國에서 배워가지 않은 것 이 없을 정도였으나 지금은 日本의 문명이 우리 옛날의 것을 훨씬 능가하며, 日本은 이름을 천하에 떨쳐 世人들이 英國 獨逸에 비 견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약소국인 波蘭 埃及 印度됨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는 정치부패 기강퇴이 頑陋成習함에 있다고 지 적한다.20) 그리고 東西洋人을 막론하고 자기나라의 역사, 심지어 는 我韓事蹟까지 國人들에게 보이고 있으나 오직 우리나라만 그렇 게 하지 못하여 그 치욕이 심하다고 지적하면서 지금부터라도 我 韓史를 읽게 한 후에 萬國史를 읽게 하여 兵刑農工 등 실천 사업 어찌 몇년 안되어 우리 또한 舊日의 文化를 회 복하고 엄연히 獨立國의 面目을 이룰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라 에 힘쓰게 하면 고 하였다.21) 따라서 그의 史學精神의 일면이 역사를 통한 문화회 東國史略이 朝鮮史를 완역한 것이 아니고, 抄譯增補하여 편역한 것이지만 朝鮮史가 침략적 植民史觀으로 일관한데 반하 여 東國史略은 民族主義史觀으로 점철된다고 지적된다. 東 國史略은 朝鮮史와는 달리 檀君을 역사적인 존재로 인식하였 고, 朝鮮史에서 중시한 4郡 문제와 소위 任那日本府 등에서 史 복 독립국가성취 등 민족적인 희망에 두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22) 20) 玄采 東國史略 自序 向者羅麗濟時 豈不曰日人野狉而我固文明者耶 逎自衣服車 馬宮室 以至文章制度各般技藝 莫不師我 則我式至于今誇耀我者 何莫非我出耶 而 日本之文明 則大勝於我之舊日 且夫日本則馳名天下 世人比之於英德等國 乃我則 不免爲波蘭爲埈及爲印度 同居一洲同生一世 一則龍驤虎賁睥睨寰宇 一則龜縮雌伏 羞見他人其得失其榮其辱固何如哉 乃猶忮心尚存頑陋成習 頓不自悟久而益迷 政治 敗腐人民魚肉 紀綱頽弛國脉已喪 21) 玄采 東國史略 自序 無論東洋之人知其梗概乃歐羅巴各史家莫不載諸藍本 以示 國人 雖我極諱極微之事莫不指的宣露小不藏匿 皆以捨短取長爲事 乃我則自蔽其目 自錮其心 并其自國史而亦不知 乃向他人而徵我譜系 恥孰甚焉 辱亦何如 自告我國 內諸公之爲人父兄者曰 自今請將通鑑史略等古書束之高閣 使挾册童子一讀我韓史 然後 又讀萬國史以廣見聞而認情形 尤致力於兵刑工農工等實踐事業 無怠無荒儘心 做去則 安知不幾年而我又不能後我舊日文化 儼然作獨立國面目耶 22) 金泰永 開化思想家 및 愛國啓蒙家들의 史觀, 讀書生活 1976년 6월호 - 118 -
3. 民族史學 朝鮮史에서는 壬辰倭亂을 마치 왜군의 승전보처럼 꾸며 놓은 데 반하여 東國史略에서는 우리의 접 眼을 달리하고 있으며, 첩상황을 상세히 기술한 것은 물론, 특히 민중의 자의에서 우러난 의병활동을 상세히 기록하여, 민족적 저항정신을 의식적으로 고 하였던 것이다. 東國史略역사서술면에 있어서 종래의 정치 전쟁사 위주에 취 23) 서 발전된 서술을 가졌다고 지적된다. 제도 교법 문학 기예 산업 풍속 등의 사회 경제 문화적인 면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민족주의적인 요소와 역사체제의 정립, 역사서술의 다양성 등이 그 후의 韓國史서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이 점에서 東國史略의 史學史的 위치도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24) 위에서 살핀 通史 외에 韓末時代史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梅 大韓季年史가 있다. 梅泉野錄의 저자 黃玹(梅泉 1855-1910)은 韓末 憂國詩人으로 이 기록을 통하여 智異山求禮 泉野錄 과 의 鄕邸에서 17年間(1894-1910) 倭人侵略의 推移를 주시하며, 국 운을 걱정했던 단아한 學人 25)이었다. 이 기록은 儒敎史觀의 근 간이 되는 通鑑綱目 春秋筆法에 기초를 두면서 근대사의 현실인 식에도 중점을 두고 있으며, 黃玹은 이 기록에서 외세의 침략과 정을 인식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鄭喬의 大韓季年史 도 동시대의 것을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黃玹과는 달리 鄭喬는 일찌기 獨立協會會員으로서 회원들에게 國史를 가르치기 위하 여 大東歷史를 校閱한 적이 있었다. 역사에 대단한 흥미를 가 진 그가, 國亡해가는 장면을 역사적 현실로 목격하였을 때 붓을 들 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침략세력에 대한 항 23) 金泰永 開化思想家 및 愛國啓蒙家들의 史觀, 讀書生活 1976년 6월호 24) 盧秀子 白堂玄采硏究, 梨大史苑 제8집 p.85 25) 供以燮 黄玹의 歷史意識, 淑大史論 제4집 p.15-119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거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梅泉野錄과 함께 주체적인 역사의식을 가졌다고 생각된다. 위에 열거한 역사서들은 강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 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東國史略을 제외하고는 체제 나 서술면에 있어서 거의가 編年體的 나열의 차원을 극복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역사학적인 방법은 특수연구에 나타나고 있었다. 我國衣冠制度考 朝鮮儒敎觀(후 에 朝鮮儒敎淵源으로 擴大改題함) 朝鮮佛敎觀 이 그러한 것이었다. 이러한 논설들은 韓末의 각종 잡지신문에서 잘 취급되 張志淵의 일련의 논설들 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韓末의 역사학은 역사 의 식면에 있어서나 그 방법론에 있어서 명실공히 근대적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미흡한 상태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3) 朝鮮 光文會의 復刊事業 외세, 특히 日帝의 침략이 노골화하는 19세기말 20세기초에 들 어서면서 민족적 각성과 자기역사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되었 고, 이것이 당시 敎育興國 사조에 반영되면서 國史敎科書 편찬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1905년부터 官立學校에서 朝鮮史 敎育이 폐지되고, 統監府설치와 더불어 半植民地敎育이 강화됨에 따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敎科書 및 서적들에 대한 출판금지 및 압수조치가 취해지고 있었다. 이 때 가장 많이 압수된 서적은 國史敎科書 등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26) 日帝는 韓國史의 교육을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 로 韓國史에 대한 금압정책을 썼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日帝가 1910년 韓國을 강점하고서 다음과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 外 26) 金成俊 舊韓末의 國史教育에 대하여, 大東文化硏究 제8집, 白淳在 枚科書編 纂, 한국사 제20권 (국사편찬위원회刊) - 120 -
3. 民族史學 國人 記者는 쓰고 있다. 合併即時 韓國歷史를 記述한 書籍을 沒收하여 一炬에 던져 버렸고, 또한 書舖 및 私家를 不問하고 組織的으로 家家戶戶를 大捜索하여 韓國史蹟을 記述한 것에 관계가 있으면 隻字半簡이 라도 반드시 焚燬하였으며, 감히 韓國歷史册 一卷을 藏置한 자 가 있어도 犯罪가 되었다. 내가 韓國에 있을 때 韓國人이 本國 의 歷史를 읽은 罪로서 30日間 拘囚되었고, 罰받은 자가 심히 많아 내가 친히 그들을 만나 이야기 나눈 바가 있다. 27) 여기에다 日本人들은 해마다 韓國의 진귀한 책과 國寶級 文化 財를 수집하여 日本으로 반출해갔다. 더구나 1910년은 국권이 강 탈되는 해여서 이러한 현상은 더하였다. 뜻있는 사람이라면 이러 한 현상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珍籍이 자취를 다 감추기 전에 이들을 복간해 두어야겠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朝鮮光文會의 창립 이 그것이다. 新文館을 경영해 왔고, 그 이듬해부터는 少年 을 발간해 은 崔南善은 玄采朴殷植張志淵柳瑾李寅承金敎 獻崔誠愚 등과 더불어 1910년 修史 理言 立學을 三大 標幟로, 朝鮮古典의 수집과 간행을 목적으로 하여 光文會를 창설하였다. 우리 大韓으로 하여곰 少부의 나라로 하라. 그리하 랴 하면 能히 이 責任을 堪當하도록 그를 敎導하여라 고 외침 1907년 이래 28) 29) 崔南善이 만 20세 되던 해에 이 목적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이 일을 발기하였던 것이다. 그는 大韓으로 하여금 소년의 그 첫째 밑거름으로 朝鮮古來의 文書記錄을 收聚 하고 보존하는 운동을 시작하였다고 하면서 少年독자들에게 나라로 하려는 27)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pp.228-229 28) 柳瑾 李寅承 新字典, 序文(光文會刊) 29) 少年 발간 취지문의 일절 - 12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찬조를 구한 적이 있었다.30) 이러한 그의 뜻은 광고형식으로 少 年 에 게재한 趣旨文에도 나타나 있다. 今에 古文이 日노 散亡하고 族粹가 日노 衰頹하야 五千年性 聖先哲의 赫赫한 功烈은 그 光이 晦하고 皇皇한 述作은 그 響 이 消하며 億萬代 後孫來裔의 久遠한 靈能은 그 源이 渴하고 深切한 覺思는 그 機가 絕하려 하며 또 한편으론 天下萬世에 朝鮮士의 眞面目과 朝鮮人의 眞才智가 永遠히 隱藏하고 埋沒 하려 하니 이는 事光懷遠의 誠이 特深殊切한 朝鮮人의 可히 忍 하고 能히 堪치 못할 大罪惡 大悲痛일 뿐더러 抑하건댄 一天下 通 永劫에 一般學界의 大損失 大恨嘆일지니 참 義氣男兒와 篤 志學者의 尋常看過치 못할 一大危機라 할지라 이에 不侫幾個人 이 力微資薄함을 自知치 못함이 아니오나 奮發코 冒進하야 人 의 未敢을 敢히 하고 世의 所求를 應코자 함은 懷徃念後에 自不 能己하난 情이 有함이라 玆에 그 方法과 書目을 開列하야 大聲 自鳴하오니 吾儕의 苦衷을 諒하시난 滿天下의 志士 仁人은 惠 然響應하시면 朝鮮古文明과 世界學界를 爲하야 幸甚幸甚이겟사 少年제3년 외히다. 31) 83권에는 朝鮮光文會의 규정을 광고형식으로 밝히고 있는 바, 光文會의 목적과 방법은 第一條 本會는 朝鮮舊來의 文獻 圖書中 重大하고 緊要한 者 를 收集 編纂開刊하야 貴重 文書를 保存傳布 으로 目的 第二條 本會는 上條의 目的을 達 기 爲 야 各家名著와 內 外秘藏을 온갖 方法으로 入手 야 가장 短少 時日에 가장 僅 少한 代價로 가장 稀貴 圖書를 가장 精密 게 活印 或 石印 30) 少年 제4년 2권 p.11에 보이는 朝鮮光文會의 廣告 31) 少年 제3년 8권 朝鮮光文食廣告 - 122 -
3. 民族史學 야 加入 會員에게 特廉 實費를 受 고 定期 或 無定期로 配布.32) 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목적하에 光文會는 朝鮮의 史記 地誌 典章 憲謨 歌辭 詩文 經傳 兵事 民業 敎學 藝術 風俗 傳記 畵像 地圖 등을 광범히 수집하고 엄밀히 선택하여 배포하려 하였다. (規定 二章 3條) 光文會에서는 180여종의 古典을 重刊할 계획을 세 웠으나 실제 간행된 것은 20종에 불과하였다.33) 光文會는 그들의 趣旨 規約 및 第1期刊行物旣定書目錄을 발표 하면서 대단한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그것은 思하라 何者가 萬戶必備의 要書가 아니며 千金難購의 珍籍 이 아니냐 本會의 計劃이 成就 後에는 朝鮮에 珍書란 것이 絕 無 것이오 本會刊行物이 發布된 後에는 朝鮮學界의 面目이 爲 야 一變 리라. 34) 32) 少年 제3년 8권의 광고에 보이는 目錄은 다음과 같다. (이 중 고딕체가 실제 간행된 것임) 33) 少年 제3년 8권의 광고에 보이는 目錄은 다음과 같다. (이 중 고딕체가 실제 간행된 것임) 一. 第一期刊行旣定書目錄 歷史類 東國通鑑 東史綱目 三國史記 四郡志 渤海考 渤海世家 三國遺事 東國兵鑑 興王肇聚 燃黎室記述 地理類 擇里誌 山水經 道里表 山經表 金剛山記 風土類 東國歲時記 洌陽歲時記 朝鮮風俗考異 海東諸國記 語韻類 東言解 訓蒙字會 類合 雅首覺非 三韻聲彙 物名攷 歌詞類 龍飛御天歌 經學類 尙書補傳 文學類 松穆館集 夏園詩鈔 四家詩集 二十一都懷古詩 兵事類 兵學通 經濟類 山林經濟 敎訓類 海東小學 彙纂類 芝峯類說 星湖僿說 熱河日記 全集類 益齋故藁 栗谷全書 李忠武公全書 林忠愍實記 梅月堂集 二. 第一期中特別增刊書旣定目錄 大東韻玉 增補輿地勝覽 東史纂要 海東名臣錄 亂中雜錄 磻溪隨錄 其他地 圃若干 이 밖에 海東繹史 中京志 東京雜記 京都雜記 海東名將傳 黨議通略이 간 행 되었다. 34) 少年 제3년 8권 - 12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고 한 바와 같다. 光文會가 공언한 바와 같이 그들은 東國通鑑 熱河日記를 비롯한 古典을 복간하였고, 柳瑾李寅承 편집의 新字典을 간행하였으며, 周時經 주도하에 우리말사전간행을 준비하였다. 이와 함께 光文會의 업적으로 손꼽히는 것은 소위 6전소설의 간행이라고 지적된다. 35) 光文會의 사업으로 20종의 古典이 복간되었고, 珍籍 발굴작업 또한 활발히 전개되었다. 1911년 5월에 발간된 少年제 4년 2 권에 朝鮮光文會 명의의 求書광고가 보이는 바, 여기에 나열된 求 書들은 대부분 新羅 高麗代의 것으로, 우리가 이미 잔존하지 않 은 것으로 인정하는 책들이지만,36)이로써 당시의 古典 발굴의욕 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아마도 併呑 후에 日帝의 저같은 文化抹殺政策에도 불구하고 史學을 비롯한 민족문화의 연 구가 계속되고 또 가능하였던 것도 이러한 문화계승 운동과 관련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1910-20年代의 史學 (2) 民族史學의 成立 韓末의 역사학은 외세의 韓國침략과정과 맞먹는 시기에 발전하 고, 국사인식을 심화시켜 국권을 유지하고 외세의 압제로부터 독 립하려는, 주로 민중계몽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식 과 역할은 1910년 이후 日帝强占期에 들어서서 더욱 고조되었다. 韓末의 역사학이 의식면에서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렬한 것임에 35) 趙容萬 六堂 崔南善 p.114 36) 少年 제4년 2권 朝鮮光文會의 求書廣告에는 金大問의 雞林雜傳 花郎世記 高僧傳, 崔致遠의 新羅殊異傳, 朴寅亮의 古今錄, 李齊賢의 高麗史略, 鄭鱗趾의 高麗史, 金寬毅의 編年通錄, 閔漬의 編年綱目, 金寬毅외 王代宗錄, 李齊賢의 世代編年, 洪灌의 編年通載, 李穡의 古今金鏡錄, 鄭可臣의 金鏡錄의 冊名이 보 인다. - 124 -
3. 民族史學 도 불구하고 체제와 연구방법론에서는 전대의 것을 답습하고 있 었다. 거기에 비하여 1920년대 이후의 民族主義史家들은 의식면 에서 뿐만 아니라 방법론에 있어서도 근대 역사학적인 체계를 보 완하고 있었다. 韓國의 근대 역사학은 1920년대의 소위 民族主義 史家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併呑 이후 日帝는 韓國의 역사서적을 모아 불사르고 韓國史독 자들에게 형벌을 가하였으며, 韓國史 교육을 금지시키고 日帝 植 民地化에 필요한 제반 수단을 강구하고 있었다.37) 소위 武斷政治 라고 하는 鐵拳 恐怖政治를 자행하면서 민족교육을 하는 사립학 교들을 폐쇄시키고, 식민교육을 위하여 공립학교를 증설 확대시키 고 있었다. 1910년대에 書堂이 증가하는 이유는 식민지교육에 대 한 반발에 있을 것이다. 併呑을 전후하여 그간 국내에 언론 문필활동을 하던 愛國啓蒙 的인 史家들이 망명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張志淵 朴殷植 金澤 榮 申采浩 등이 망명 하고, 玄采와 나중에 보게 될 南宮檍 등은 국내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들은 망명생활을 하면서, 혹은 국내에 서 國史연구를 통한 애국독립운동에 나섰다. 1920년대에 들어서 면 우리는 朴殷植 李能和 安廓 崔南善 申采浩 南宮檍과 그 들의 업적들을 대하게 된다. 1) 朴殷植의 國史硏究38) 白巖(혹은 謙谷 大白狂奴) 朴殷植(1859-1926)은 韓末 日帝 强占 37) 洪以燮 植民地的 史觀의 克服, 亞細亞 1969年 3月號 38) 朴殷植에 대하여는 다음 글들이 참고가 된다. 檀國大學校附設 東洋學硏究所 發行 : 朴殷植全書 上 中 下 1975. 외솔회 刊 나라사랑 제8집(1972)-白巖朴殷植先生特輯號 洪以燮 朴殷植의 韓國痛史와 韓國獨立運動之血史, 韓國史의 方法 1968. 姜萬吉 韓國痛史, 韓國의 名著 1969. 金容燮 韓國近代歷史學의 成立, 知性 1972年 3月號 李萬烈 朴殷植-民族史學의 기틀, 中央 1974年 12月號 - 125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한 인물이다. 그는 皇城新聞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또 上海 臨 時政府 기관지인 독립신문사장으로 활약한 언론인이었고, 漢 城師範學校 교사西北協成學校長 등을 역임한 교육자였으며, 독 립운동 단체인 同濟社 총재臨時政府 大統領 등을 역임한 독립 期에 있어서 유학사상 언론 교육 사학 독립운동에 크게 공헌 운동가며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초기 40여세까지 朱子學을 수학하였으나, 서울에 올라와 獨立協會 등에 관여하고 여러 명사 둘과의 학문적 교유에서 세계관이 확대되며, 당시 민족이 처했던 위난을 타개하려고 활동하면서, 종래 朱子學 일변도의 사상 학문 을 陽明學에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併呑 후 그가 中國으 로 망명하기 직전에 光文會에 관계하면서 卷)에 少年(第四年 第三 王陽明實記를 발표한 것은 그 간에 그가 연구한 陽明學 결과를 소개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朴殷植은 皇城新聞 대한매일신보등 언론활동에 종사하면서 교육 자강 등에 관한 논설을 폈고 뒤에서 볼 申采浩와 함께 항일 구국의 언론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한매일신보에서의 朴殷植의 논 평과 공박은 日人들의 걱정거리가 되었고, 日人들은 우체국에 부 탁하여 朴殷植의 글이 실린 신문을 京外에 배달치 못하도록 하는 한편 그를 日本軍司令部에 수감하기까지 하였다. 朴殷植의 國史에의 관심은 이러한 시기에 주어졌다. 國史를 통 하여 민족적자각과 민중계몽을 시도하려는 의도에서였다. 西 대한매일신보등에 보이는 國史에 관한 友 西北學會月報 와 글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國史연구가 본격화되는 것은 1911년 滿 洲 中國으로 망명하면서부터이다. 이 해 가을 高句麗의 古都요 渤海의 유적지이기도 한 桓仁縣에로의 망명생활을 계기로 그는 국 권 잃은 슬픔을 國史연구를 통하여 달래 보려 하였다. 1912년 3월 - 126 -
3. 民族史學 경 桓仁을 떠나기까지 朴殷植은 東明王實記 淵蓋蘇文傳 明 臨答夫傳 등을 집필 혹은 구상한 것 같으며, 이 때 민족사를 연구하 려는 강한 역사의식이 아마도 檀君숭배의 大倧敎에로 그를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그는 1920년까지 北京 上海 香港 海蔘 威 등을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한편 國史연구에 정력을 기울였다. 1914년 上海에서 安義士重根傳과 韓國痛史를 완성하여 후자를 이듬해에 발간하였으며, 1918년에는 러시아령 雙城 韓族公報를 주관하는 한편 渤海史 金史를 역술 하고 李儁傳을 저술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 독립에 대한 확신을 갖고 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하기 시 子에서 작하여 이듬해 이를 간행하였다. 이 무렵 위인전으로 完史라고 스 李忠武舜臣傳을 저술하였다. 이들 저술 중 韓國 痛史와 韓國獨立運動之血史는 史學史的으로 크게 평가되는 스로 자부한 것이다. 韓國痛史는 쇠망해가는 50여년간(大院君 집권-1911)의 韓 國近代史를 日帝의 침략이라는 면에 촛점을 맞추어 쓴 것이다. 緖 言에서 朴殷植은, 朝鮮이 4,300여년의 역사를 가진 君子의 나라로 서 日本에 文化를 波及시켰으며, 日本의 飮食 衣服 宮室과 宗 敎 學術이 모두 韓國에서 간 것으로 日本이 일찌기 스승의 나라 로 섬겼으나 현재는 종(奴)으로 삼았다고 지적하고, 그 植民統治 가 다른 어느 나라에 비해서 보더라도 韓國에서만큼 심한 곳은 없 다고 설파하였다.39) 이러한 상황에서 韓國痛史를 쓰는 목적을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라는 가히 滅할 수 있으나 歷史는 가히 滅할 수 없으니, 대개 나라는 形이나 歷史는 神이기 때 39) 朴殷植 韓國痛史 緒言 昔日之文化 波及於極東三島 彼之飲食衣服宮室出於 我矣 教宗興學術 出於敎矣 故彼嘗師之矣 而今乃奴之耶 以此觀之 古今亡國之 慘孰有甚於韓者乎 - 12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形은 훼파되었다고 하나 神은 가히 홀 로 存在하지 못하겠는가. 이것이 痛史를 만드는 所以이다 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서 國史, 形神의 관계를 다음 몇가지 문이다. 지금 韓國의 40) 史例를 들어서 설명하였다. 神(史)이 存在하여 不滅하면, 形(國)은 때 맞춰 復活한다. 그 러나 이 책(編)은 甲子 이후 50年史에 불과하니 어찌 우리 四 千年歷史全部의 神(史)을 만족하게 전하겠는가. 이것은 吾族이 吾祖를 생각하고 잊지 않는 것이다. 대저 예루살렘이 비록 멸망 하여 유태인들이 異國에 流離하였으나, 他族에 同化되지 않고 지금까지 2천년간 능히 유태민족의 칭호를 잃지 않은 것은 능히 그 조상들의 가르침을 保全하였기 때문이요, 印度가 비록 망하 였으나 婆羅門은 능히 그 祖敎를 堅守하여 써 復興을 기다리고 있다. 멕시코 같은 나라가 스페인에 망함에 敎化文字가 모두 滅하여 지금 사람들이 비록 생존해 있으나 읊는 바, 행하는 바, 사모하는 바가 모두 스페인의 文化요 스페인의 豪傑들인즉 멕시 形이 비록 존재한다 하더라도 神은 이미 全滅 한 것이다. 여기서 朴殷植이 痛史를 쓴 것은, 비록 이 책이 國亡의 과정 코 인종이 41) 을 기술한 역사라 하더라도 민족의 神(史)를 보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凡例에서 痛史를 서술한 방법에 대하여 밝히고 있다. 멀리 근세의 新史들이 취한 체제와 방법을 모방하여, 역사적 사건 을 따라 章을 이루었다. 그리고 사건기술에 있어서는 내용서술과 논평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기에 앞서서 논 평을 제시하기도 하고 사실을 밝힌 후에 그 결과로 일어나는 사실 을 附論하기도 하였다. 그리하고서도 미진한 것은 按說이라고 하 40) 朴殷植 韓國痛史 緒言 41) 朴殷植 韓國痛史 緒言 - 128 -
3. 民族史學 는 附記方法을 써서 자세히 설명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朴殷植이 취한 역사저술방식 및 체제는 근대역사 역사적 사실의 발달 과정을 인과관계의 면에서 분석비판종합해 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朴殷植은 근대 역사학의 방법을 도입 하여 痛史를 서술 하였고, 근대역사학적 방법과 체제에 입각한 痛史로써 日帝의 韓國침략과정을 밝혔던 것이다. 韓國痛史는 全 三編이다. 第一 編은 본서의 緒說에 해당되는, 韓國의 地理之大綱과 歷史之 大槪를 서술하였다. 역사의 대개를 서술함에 있어서, 朴殷植은 檀君箕子衛滿朝鮮과 三韓三國(高句麗百濟新羅의 順) 高麗 및 朝鮮으로 구분서술하였고, 朝鮮관계 서술은 총 34行 중 壬辰倭亂 부분이 13行을 차지하였다. 이는 痛史가 기본적으로 학이 취하고 있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즉 42) 日帝의 침략을 서술하는 것인만큼 倭亂부분이 그 전제로서 중요하 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第二編은 大院君攝政에서 俄館播遷 후 列 國에게 각종 이권을 탈취당하였던 때 까지를 51章에 나누어 서술 하였다. 第三編은 大韓帝國의 성립 즉 國號大韓爲獨立帝國에서 부터 그후의 日帝의 침략과정을 서술하고 1911년의 소위 105人事 件까지를 취급하였던 것이다. 朴殷植이 이 國亡의 역사를 서술한 것은 日帝의 침략과정을 폭 로하는 데에 그 목적의 하나가 있었겠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 이 기본적으로는 亡國民에게 자기역사를 환기시켜 국권회복의 밑 거름을 제공하는 데에 더 큰 목적이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朴殷植 痛史의 緒言에서는 神이라 하였고 結論에서는 魂이라 하였으며, 神또는 魂이 망하지 않 은 한 나라의 역사를, 는 한 그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43) 그는 痛 42) 金容資 上揭論文 43) 朴殷植 韓國痛史 緒言 - 129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史의 結論에서 渤海에 文士가 많았고 후에 1만여명이 高麗에 망명 해왔으나 결국 渤海史를 남기지 못했다고 탄식하고, 柳得恭의 말을 인용. 海渤史를 쓰지 않은 것으로 高麗가 부진함을 알겠다고 한 말 을 어찌 믿지 못하겠는가라고 하였다.44) 따라서 그것이 어떠한 내 용을 서술하든 간에 진정한 國史는 국권회복의 소망과 연결되는 것 이었으며, 이 소망때문에 朴殷植은 韓國痛史를 쓰고, 이 소망을 현 실적인 국권회복 자주독립의 신념으로 구체화하기 위하여 韓國獨 立運動之血史를 펴냈던 것이다. 血史의 緒言에서 국권회복의 자신에 넘쳐 있었다. 그는 血史를 쓴 동기를, 나는 한결 같이 吾國이 반드시 光復의 날을 맞을 것과 日 朴殷植은 本이 장래에 반드시 敗할 것이라는 것을 自信하였으므로 비록 顚沛 流離 飢寒 病苦 중에서도 일찌기 일종의 樂觀을 갖지 않음이 없었다. 단지 때의 遲早를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믿는 바로써 말하더라도 무엇으로써 吾國이 반三 시 光復할 날이 있으리라는 것을 믿을 것인가. 45) 라 하여 스스로 반문하고, 자신의 이 신념을 역사를 통하여 구체 화시키고 있었다. 이 점은 당시의 세계사에서 대개 나라끼리 경쟁하는 세대에 弱者가 强者에게 併合되는 것은 자주 보인다. 만약 그 人種의 資格이 서로 같고, 宗敎歷 史言文風俗에 國魂이 滅하지 않은 자는 一時的으로 併合된 다 하여도 종내에는 分離 獨立하는 것이니 이것은 역시 世界國 史에서 많이 보이는 것이다. 46) 라고 주장하고. 따라서 檀君 이래 타족보다 충의 도덕 문학 종 44) 朴殷植 韓國痛史 結論 45) 朴段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緒言 46) 朴段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緒言 - 130 -
3. 民族史學 교 등 국혼이 강한 우리 나라는 반드시 광복의 날을 맞을 것이라 고 하였다. 朴殷植은 이러한 소망과 신념을 우리민족의 독립투쟁 血史를 집필했던 것이다. 血史는 痛史와 표리관계에 있다고 지적된다. 痛史 사를 통하여 때맞춰 보여주려고 이 에서 보이는 日帝 침략에 대항하여 피의 독립운동을 한 기록이 바 로 血史의 주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血史는 상하 두편으 로 되어 있고. 下編에 부록이 첨부되어 있다. 25章으로 된 上編은 1884년의 소위 甲申政變 이후의 日帝의 침략과정과 併合이후의 朝 鮮 總督府의 식민 수탈통치를 폭로하였고, 31章으로 된 下編에서 는 3.1운동을 중심으로 한,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 사실을 서술하여 血史의 본론에 해당되며, 부록에는 日帝의 식민수탈통치와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에 대한 세계여론을 수록했다. 上編에서 日帝 痛 史의 이 시기의 기록과 거의 중복되므로 상당 부분의 痛史를 요약정리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같은 내용의 기록이라 하 더라도 痛史에서의 평가를 血史에서는 수정 혹은 보충하고 있 는 바, 가령 東學亂에 대한 관점이 痛史에서는 소극적이었지만 血史에서는 대개 그 동력이 兩班의 압제와 관리들의 탐익에 분격하여 일어났은 즉 그것은 곧 吾國 平民革命이다 라고 한 의 침략과정을 폭로한 부분 중 第15章의 105人事件까지는 47) 것 등이다. 朴殷植의 역사에 관한 저서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 밖에 도 있으며 역사계몽을 위하여 쓴 글까지 합치면 상당수에 이른다. 그러나 그의 史學精神을 이해하는 데는 痛史와 血史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업적들에 나타난 朴殷植의 사학을 우 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47)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p.7-13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첫째, 그의 史學精神 내지는 그의 역사서술의 목표라 할 것이다. 그것은 魂(神) 중심의 역사요, 따라서 그의 역사서술은 역사를 읽 는 자들이 民族精神(魂)을 잃지 않게 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 다. 그는 國敎 國學 國語 國文 國史를 魂으로, 錢穀 車乘 城 池 船艦 器械를 魄으로 보고 이 두 종류는 국가와 민족에 다 같 이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려나 더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魄 보다 정신적인 魂이었다. 그러므로 魂의 소재처라 할 수 있는 國 敎 國史가 망하지 아니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 던 것이다. 그는, 인류가 이 지구상에 살면서 야만, 生番의 누를 벗어나서 국가제도를 이뤄야하는데, 도덕 논리 정교 법제를 갖춘 것은 역사만한 것이 없으며, 역사가 존재하는 곳에는 國魂이 존재하는 바라고 주장하였다.48) 그는 그 주장을 中國과 突厥(터어 키) 및 주위 여러나라의 예를 들어 이를 논증하려 하였다. 중국의 魂은 文學에 依托해 있고, 突厥의 魂은 宗敎에 依托 해 있다. 중국은 때때로 匈奴鮮卑氐羌金源蒙古 등에 겁탈된 바 있으나 五千年 文學의 淵源이 不絕함으로 他族에 同 化되지 않고 결국 능히 他族을 同化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突厥 은 國勢가 寢弱하고 土地는 날로 줄어들어 列强의 歷制를 받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一億萬 敎徒의 힘이 아직 강하여 그 다 시 떨침을 可冀할 수 있으니 이는 魂이 강한 나라이다. 그러나 鮮卑 契丹 蒙古같은 나라는 바야흐로 그 盛할 때에는 능히 大地 를 정복하고 위엄이 天下에 진동하였으나 武力이 한번 무너지자 國命이 다해버렸으니 이는 魄이 강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49) 이 글에서도 그는 물질적인 魄보다 정신적인 魂 즉 민족의식 48) 朴殷植 韓國痛史 結論 49) 朴殷植 韓國痛史 結論 - 132 -
3. 民族史學 민족정신을 강조하고 있음이 보이며, 그의 사학 또한 이와 결부되 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가 내세우고 있는 우리 민족의 우수 성 및 日本과 조화될 수 없는 이유에 관해서는 血史緒言에 밝 혀져 있다. 痛史의 凡例에서 近世新史의 체제를 따라 서술한다고 밝힌 바 있지만, 이점은 血史에서도 둘째 역사서술체제이다. 이미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史學은, 韓末의 愛國啓蒙史學 이 정신적으로 근대사학의 민족주의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만 서 술방법에 있어서는 전근대적이라고 하는 점을, 일단 극복한 것이 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痛史와 血史의 章名들이 시사해주는 시대구분가치평가 등이 주체 적이며 진보적인 요소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한 진지한 역사가가 술회했다는, 우리 近代史를 연구해 보면 해 볼 수록 기준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깨닫고 痛史와 血史의 白巖을 연구상의 스승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50)는 소회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그의 史學은 민족주의적 사학정신과 近世新史의 방법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일정하게 英雄史觀을 갖고 있었음을 지적치 端士建國志를 譯述하고, 泉蓋蘇文傳 夢拜金太祖 金庾信傳 安義士重根傳 李儁傳 東明王實記 明臨答夫傳및 李忠武舜臣傳을 쓴 것은, 英雄崇拜論 내지는 않을 수 없다. 朴殷植이 英雄待望論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국권이 강탈되어 가 는 상황에서 독립투쟁을 위해서는 영웅주의적 사고가 요청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英雄史觀은 泉蓋蘇文傳의 緒論에 잘 나 타나 있었다. 그는 과거 500년간 儒林派와 貴族黨 때문에 소위 상등 50) 金泳鎬 解題, 朴殷植全大 上 所收 - 13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사회에서 英雄을 숭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영웅을 박멸하였다고 지적하고 당시와 같은 급박한 국가적 위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거 영웅을 숭배할 만하고 현재 영웅을 갈망할 만하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大抵 英雄은 邦國의 干城이요 人民의 司令이어늘 英雄을 冷淡히 待遇하는 것은 國의 干城을 毁棄하고 民의 司令을 蔑視 함이니 어찌 生存의 基礎와 活動의 舞臺를 得하리요. 此는 吾國 과 吾民의 今日 此境에 陷溺한 바로다. 然則 英雄의 精神이 存하며 不存하는 것은 即 其國人思想界에 在한 것이니 今日 吾 人의 思想이 如何한가. 目下 情景이 過去英雄을 崇拜할 만하고 現在英雄을 渴望할 만하도다. 於是乎 三寸秃筆로 此를 述하여 社會諸君의 一覽을 供하노니 四千年 歷史에 第一指를 乘하는 英雄魂이 復活할련지 우리도 남과 같이 自由鍾을 擊振하자면 우리 先民의 精神點으로써 우리 腦力을 滋養하여야 可한 줄로 思惟하노라. 51) 朴殷植에게서 보이는 英雄史觀은 韓末 愛國啓蒙史家들이 공통 적으로 가졌다는 의미에서 이 당시로서는 시대적 사조였던 것 같 이 보이며, 이 점에서 다음에 볼 丹齋 申采浩도 예외는 아니었 다. 이러한 英雄主義가 독립투쟁에 있어서 일정한 보탬이 되었으 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이것은 이들 英雄史觀論 者들의 역사의식의 한계라고 지적치 않을 수 없다. 이들의 史觀 이 영웅들의 행위를 역사발전의 중요한 動因으로 보고있기 때문 이다. 朴殷植에게 있어서 이러한 英雄史觀은 血史의 집필 전 후에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민족혼 중심의 역사의 식의 유교의 復活論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과 더불어, 이 英 51) 朴殷植 泉蓋蘇文傳 緒論 - 134 -
3. 民族史學 雄史觀도 白巖史學의 문제점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라 생각 한다. 2) 申采浩의 民族主義史學 丹齋 申采浩(1859-1936)는 韓末 日帝下에 걸쳐 韓國史연구에 매진한 사학자였다. 당시 역사연구에 관심을 가졌던 많은 사람들 이 그랬듯이, 申采浩 또한 처음부터 전적으로 국사연구에 종사한 것은 아니다. 그는 韓末 1890년대 후반 獨立協會에 가입하여 개혁 운동에 나서기도 하였고,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言論 自强運 動을 펴기도 하였으며 1910년 후에는 滿洲 中國 등지로 망명하 며 독립투쟁에 헌신하였다. 그의 國史 연구는 韓末 日帝下의 국 권상실의 쓰라림 속에서 이를 극복하려는 사상적 기반으로서 취해 졌던 것이다. 그의 史學은 韓末 외세의 침략기에는 自强主體思想 의 근간으로서, 日帝下에서는 독립투쟁의 방편으로서 성장 발전 해 갔던 것이다. 申采浩는 앞서의 朴殷植보다는 20여년 후배이면 서도 그와 같은 환경과 목적을 가지고 역사연구에 임하였으며, 이 들의 역사의식은 모두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과 강렬한 민족의식의 고양 그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丹齋史學은 우리나라의 전통적 역사학으로서의 실학파 역사학 및 韓末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 하고 朴殷植의 역사학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그 이전의 전근대적 인 요소를 극복하고 우리 역사학의 정통을 계승하여 그것을 근대 역사학으로 훌륭하게 성취시킨 것이었다고 지적된다.52) 申采浩의 國史에 대한 연구와 國史를 통한 민중계몽은, 그가 1905년 皇城新聞의 論說委員에서 1906년 大韓毎日申報의 主筆로 초빙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 때의 申采浩를 두고 安在鴻은 이렇 52) 金容姿 上揭論文 p.35-135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게 썼다. 그는 國政의 得失을 痛論하였고 時流人物의 長短을 褒眨하 였고 더군다나 當時 思想의 污濁과 道義의 低下를 憤慨하야 그 病因의 밑동인즉 國家史統이 바로 잡히지 못함과 民族正氣가 두드러지지 아니하였음에 있는 것임을 똑바로 보았을 새 문득 先儒史學의 歪曲됨과 價値의 顚倒와 是非의 錯誤됨을 歷論하 니 이에서 申丹齋는 當時 儼然한 國民思想改革의 急先鋒이었 었다. 53) 伊太利建國三傑傳을 譯述 발행함을 필두로 하여 일련의 英雄豪傑들의 傳記類의 역사물을 연재 혹은 단행본 으로 서술하였다. 1908년의 聖雄李舜臣과 乙支文德1909 년의 東國巨傑 崔都統傳이 그것이다. 이들 英雄豪傑들의 傳 丹齋는 1906년 記를 통하여 丹齋가 목표했던 것은 국민주의 혹은 민족의식을 고취 시키려는 것이었고, 이는 朴殷植과 그외 韓末愛國啓蒙史家들에게서 일정하게 보여지는 사조였던 것이다. 韓末 저 국가위난의 시기에. 英雄崇拜論的인 사조는 당시 自强獨立思想의 기반이 되었다.54) 歷史와 愛國心의 關係라고 하는 歷史評論과 讀史新論(이것은 1910년 少年 제3년 제8권에 國史私論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음)을 발표하였다. 歷史와 愛國心의 關係에서 이 무렵 申采浩는 53) 安在鴻 序文-申丹齋의 朝鮮史卷頭에 적음, 朝鮮上古史 所收 1948. 54) 安在鴻은 申丹齋學說私K-尊貴한 그의 史學上의 業蹟, 朝光 2卷 4號(1936. 4)에서 崔都統傳에서 그 國民主義的 혹은 民族思想的인 意識을 가장 잘 表明 한 바이니 그 初期의 著作중에 代表的인 者의 하나라고 보겠다. 그리고 乙支文 德 에서 漢種族과의 關係, 李忠武公傳에서 海洋方面에 向한 그 意識 및 感情을 잘 發露한 것으로 보아 妥當한 바이다. 朝鮮人은 前代史에 있어 國民的으로 4-5 世紀동안 漢種族에게 政治的으로 對等되지 않는 地位에 繼續하여 왔던 바이 니 이러한 封建的 弱少民族으로서의 生活을 한 그들이 自己貶下的 또는 事大 思想的인 慣性的 形態에 沈溺하고 있었음에 向하여 丹齋가 新興國民主義的 또 는 民族思想的 先驅로서 그 啓蒙的 乃至 革新的인 思潮를 多分으로 豉吹宣揚한 功績은 비록 그 過積的 形態임에 不計하고 그는 歷史的으로 確實히 偉大한 몫을 본 것이다 라고 하였다. - 136 -
3. 民族史學 는, 我二千萬의 귀와 눈, 손 다리 목 뇌 毛毛髮髮 血血涙涙로 하여 금 愛國토록 하기 위하여는 오직 歷史로써 할 것이라고 전제 하고 歷史가 旣無하면 亡國에 必至하리라고 설명한 후 歷史가 없 으면 愛國心이 어느 곳에서도 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讀史新論은 叙論과 第一編 上世의 10章에서 끝나고 있지만, 이것은 후일 발표된 그의 古代史體系의 根幹이 이미 이 때에 형성 되었다는 의미에서 대단히 중시하여야 할 것이다.55) 日帝의 强占 이후 그는 中國으로 망명하여 망명지의 어려운 여 건 속에서 國史연구에 몰두하였다. 1920년대 전후하여 그의 主著 朝鮮上古史(1926년에 완성되고 1931년에 朝鮮日報 지상에 연 재됨) 朝鮮上古文化史(1931년에 朝鮮日報에 연재됨) 朝鮮史硏究 草(1920년대 초에 쓰여지고, 1925년에 東亞日報 지상에 연재되었으며, 洪命熹鄭寅普의 노력으로 1929년에 단행본으로 발행됨 )등이 완성되었 고, 이 무렵 그의 獨立鬪爭思想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朝鮮革命 宣言이 발표되었다. (1922년경) 이들 저서 중 먼저 발간된 朝鮮史硏究草 는 연구논문집으로, 저 유명한 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 여기에 수록되어 라할 있다. 이는 소위 高麗 中期의 妙淸의 亂을 그린 것으로, 申采浩는 이로써 朝鮮에서 郞家의 獨立思想이 儒家의 事大思想에 패배하게 되어 그 후 韓國史의 방향을 事大主義的인 데로 전환시키게 되었 다고 주장하였다. 朝鮮上古史는, 朝鮮史硏究草가 논문집임에 비하여, 원래 通史 朝鮮史로서 계획된 것이었으나 그 내용이 三國時代 말에서 55) 崔南善는 國史私論을 少年에 轉載하면서 이는 純正史學의 產物로 보아 주 기는 너무 輕率하고 그렇다고 純然히 感情의 結晶이라고만 하기도 바르지 못 한지라. 그러므로 科學的 正確에는 幾多의 未備가 있을지오 라 하였다. 그러나 후일 崔南善의 史學을 보면 이 論文에서 敎示받은 바가 큰듯, 丹齋史學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 - 13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끝나고 있으므로 해방 후 安在鴻이 단행본으로 발간할 때 朝鮮 上古史 로 이름붙인 것이다 이 책은 적어도 두가지 면에서 그 가 치를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는 여기에 나타난 그의 上古史 인식체계가 종래의 史書와는 달리 扶餘 高句麗中心의 體系라는 總論에 나타난 그의 역사이론 및 역 사방법론 때문이다. 그는 總論서 辯證法的 발전논리에 입각한 점이요 또 하나는 제1편 근대적인 역사이론을 전개하고 역사연구에 있어서 史抖批判 및 實證的 방법을 심화시켰던 것이다. 그는 역사를 我와 非我의 鬪爭의 記錄이라고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歷史란 무엇이뇨? 人類社會의 我와 非我의 鬪爭이 時間부 터 發展하며, 空間부터 擴大하는 心的 活動의 狀態의 記錄이니 世界史라 하면 世界人類의 그리되어 온 狀態의 記錄이며 朝鮮 史라 하면 朝鮮民族의 그리 되어 온 狀態의 記錄이니라. 무엇을 我라 하며 무엇을 非我라 하느뇨? 깊이 팔 것 없 이 얕이 말하자면 무릇 主觀的 位置에 선 자를 我라 하고 그 外 에는 非我라 하나니 이를 테면 朝鮮人은 朝鮮을 我라 하고 英 露法美 等을 非我라 하지만 英美法露 等은 각기 제나라를 我 라 하고 朝鮮은 非我라 하며 無產階級은 無產階級을 我라 하고 地主나 資本家 等을 非我라 하지만 地主나 資本家 等은 각기 제 붙이를 我라 하고 無產階級을 非我라 하며 이뿐 아니라 學 問에나 技術에나 職業에나 意見에나 그 밖에 무엇에든지 반드 시 本位인 我가 있으면 따라서 我와 對峙한 非我가 있고 我의 中에 我와 非我가 있으면 非我 中에도 我와 非我가 있어 그리하 여 我에 對한 非我의 接觸이 煩劇할 수록 非我에 對한 我의 奮 鬪가 더욱 猛烈하야 人類社會의 活動이 休息될 사이가 없으며 - 138 -
3. 民族史學 歷史의 前途가 完結될 날이 없니니 그러므로 歷史는 我와 非我의 鬪爭의 記錄이니라. 56) 申采浩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我와 非我의 모순상 극 관계에서 파악하려 하였고, 이 점 헤겔(Hegel)류의 소박한 辯 證法的 논리가 도입되어 있는 것으로 주목되고 있다.57) 그의 표 현을 빌면, 이러한 모순 상극관계가 바로 我와 非我의 鬪爭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투쟁관계가 시간적인 상속성과 공간적인 보 편성을 가져야만 역사발전에 작용하는 것이라 보고, 어떠한 사건 이라 하더라도 이 두 상속성과 보편성을 알지 못할 때에는 역사로 서 채취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그가 거론한 모순관계는 허다하였지만, 그의 역사서술에서 핵심 을 뚫고 있는 것은 민족적 모순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라 할 것이 다. 이 점에서 申采浩의 역사이해에는 우리 민족을 我의 위치에 두고 非我인 다른 민족과의 투쟁을 서술하는, 소위 투쟁사적인 성 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 점은 그가 韓國史연구를 독립투 쟁의 한 방편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점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민족 과의 투생 즉 對外抗爭史야말로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가 초기에 李舜臣 乙支文德 崔瑩 등 대 외항쟁에 뛰어난 인물들을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마도 이런 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朝鮮上古史總論에 보이는 그의 역사이론에는 역사학의 객 관성을 대단히 중요시한 점이 보인다. 그에 의하면, 역사학이란 모순 관계의 상극투쟁을 통하여 사회가 진보하는 과정을 客觀 的 으로 서술하는 것이었다. 역사는 역사기술자의 뜻에 따라 변 56) 申采浩 朝鮮上古史 總論 57) 柳洪烈 申采浩, 韓國近代人物百人選 - 139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개되거나 史實이 첨삭되어서도 안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하여는 史料의 수집 선택과 거기에 대한 비판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역사연구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實證主義方法을 제시 심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역사이론에 입각하여 前史를 비판하였다. 그의 비 三國史記등 韓國史書와 魏略등 中國史書에 걸쳤으며, 金富軾安鼎福 등 韓國史家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역사이론을 도 판은 입했다는 日本人 史家들에 이르기까지 매섭게 때렸던 것이다. 특 히 과거의 事大主義 史家들은 역사의식의 결핍과 지 문화와 전 통에 대한 주체적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民族史의 실체를 크게 왜 곡시켰다고 지적하였던 것이다. 西郭雜 錄 海上雜錄등의 野史에서 많은 것을 인용하고, 神誌秘 詞 海東秘錄 古記 등을 자주 거론중시하는 점이다. 이 史料批判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申采浩가 점은 그의 사학이해에 중요한 열쇠가 되며, 韓國史學史에서 숨겨 져 있는 道家史學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申采浩가 국내외의 기존 史書에 대하여 위와 같은 태도를 취하 고 있었으므로 기존 史書를 토대로 하여 구축된 韓國史 이해와는 입장을 달리 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다음과 같이 古代史의 인 식에서 특이하게 나타나고 있다.58) 첫째 종래의 古代史인식이 新羅 중심이었는데 申采浩는 그것을 扶餘 高句麗 중심의 역사인식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역사를 我와 非我의 鬪爭의 記錄으로 파악한 그의 사학정신 과도 상통한다. 왜냐하면 高句麗 중심의 역사인식이 곧 高句麗의 58) 丹齋의 古代史認識에 대하여는, 李萬烈 申采浩-古代史認識의 轉換點, 中央 1975年 5月號에 설명되어 있다. - 140 -
3. 民族史學 대외항쟁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점은 곧 申采浩가 처했던 韓末 日帝下의 植民地的 상황의 철폐라고 하는 민족적 과제와도 상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古代史의 역사무대의 확장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주로 三國 이전의 上古史에서 보이는 그의 민족주의적인 웅혼한 모습 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의 扶餘 高句麗 중심의 역사는 과거 유교 적 史家들을 비롯한 植民史觀論者들이 강조해온 韓半島 중심의 역사무대를, 滿洲 遼東半島 및 遼西지방의 中國 東北地帶를 중심 으로 한 역사무대로 확대시킨 것이다. 여기서 그의 漢郡縣의 韓半 島外 存在說이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申采浩는 1920년대까지의 國史學에서 하나의 신 기원을 이룩한다고 하겠다. 그에게 와서 國史學은 근대적 역사이 론을 갖추게 되었고 民族主義史學의 위치를 굳혔기 때문이다. 申 采浩의 이와같은 史學史的 위치를 朝鮮後期의 實學者 韓末의 愛 國啓蒙史家 白巖 朴殷植 丹齋 申采浩로 연결되는 학적 계보로 맥락지으면서 이를 근대 민족사학으로 파악하려고도 하고 있다59). 그러나 申采浩의 史學도, 朴殷植과 같이, 민족운동의 방편으로 서의 史學이었기 때문에 교설적 성격이 강할 뿐아니라60) 민족의 식의 지나친 역사에의 투영이 역사서술과 그 가치평가에 지나치 게 노출되어 史學의 객관성을 잃게 한 점도 없지 않다. 그가 민족 의 고유성을 지나치게 고집하여 역사를 我와 非我의 투쟁사로만 인식한 것은 문제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61) 또 그가 독립투쟁 중 의 망명객이기도 했기 때문에 엄격한 사료비판과 實證 및 서술의 신중성 등이 갖추어졌을까 하는 데에는 문제점이 없지 않을 것이 59) 金容燮 上揭論文 60) 金哲竣 丹齋史學의 位置-韓國史學史에서 본 丹齋史學, 나라사랑 3輯. 1971 61) 李基白 民族史學의 問題, 韓國史의 反省 所收 - 14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다.62) 이러한 점들은 丹齋史學의 이해와 발전적 계승을 위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라 생각된다. 3) 國內에서의 歷史硏究 朴殷植과 申采浩가 해외에서 독립운동과 國史연구 등으로 활약 하고 있던 1920년대에 국내에서 國史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던 분 으로 우리는 南宮檍 崔南善 李能和 安廓 등을 대할 수 있다. 翰西 南宮檍(1863-1939) 은 韓末 開化派 官僚로 활약한 인물 이지만, 그 보다는 오히려 민간단체를 통하여 自强救國運動을 일으 킨 것이 더 눈에 뜨인다. 그는 일찌기 獨立協會의 首席總務로 尹 致昊 李商在와 더불어 獨立協會를 주도해간 실질적 인물이었고, 독립신문발간에는 한글판의 周時經과 함께 英文版발간의 실질적인 책임자이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獨立協會 기관지로서 皇城新聞의 社長으로서 자주 자강의 언론투쟁을 벌였고 1907 년에는 大韓協會의 會長職을 맡기도 하였다. 국권이 상실된 뒤 그는 국내에 남아 있으며 교육종교활동을 통하여 日帝에 항거 의 하였다. 그의 교육목적은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있었고, 그의 十字架黨독립운동으로 복 역 하기도 한 그는, 그를 취조한 日人 檢事의 말대로 철저한 朝 鮮 獨立運動家이며 극렬한 民族主義者로 일생을 마쳤다. 종교적 기원은 朝鮮의 독립이었다. 63) 62) 朝鮮史硏究草(1929)의 洪命憙가 쓴 序文에 丹齋로부터의 書簡을 소개하고 있는 바, 丹齋 스스로가 그 편지 속에서 資料도 不足되고 平日의 硏究도 너무 粗率하만 것이 자꾸 自覺됩니다. 더욱 前日의 部分的 論文이나마 輕率히 쓴 것이 後悔됩니다 라고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점은 충분히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63) 南宮檍에 관하여는 다음 論考가 있다. 金世漢 不屈의 얼-翰西 南宮檍先生의 生涯 1960. 나라사랑 제11집 1973. 南宮勇權 翰西 南宮檍思想의 考察-그의 敎育思想을 中心으로一. 關東大學 論文 集 4輯 1976. - 142 -
3. 民族史學 그의 중심이 조국의 독립에 있었던 만큼 그는 國史에 무관심할 수 가 없었다. 그는 교단에서 틈틈이 國史를 가르쳤고. 이를 체계화하여 東史略 朝鮮이야기(原名 朝鮮니 약이)를 저술, 印札紙 로 수십부를 복사해냈다. 東史略은 印札紙로 836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것으로 南 宮檍이 1924년에 36부를 복사하여 비밀리에 배포했던 韓國通史이 다. 제1권 檀君朝鮮에서 新羅末, 제2권 高麗時代, 제3권 朝鮮初에 서 哲宗까지, 제4권은 韓末, 도합 4권으로 되어 있으며 附記로서 朝鮮이야기는 1929년 4월에 역시 印札紙로 20여부 복사하여 지방에 배포한, 총 1,290폐이지의 國史槪說書이다. 아마도 東史 略이 성인들을 위한 것이라면. 朝鮮이야기는 학동들을 위하여 東史略을 이야기체로 풀어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시대 구분 도 東史略과 비슷하다. 3 1운동의 세세한 기록이 실려 있다고 한다.64) 南宮檍의 이들 일련의 저서들은, 비록 널리 覽讀된 것은 아니지 만, 史學史的으로 볼 때 중시해야 할 것 같다. 朴殷植申采浩의 첫째 日帝의 武斷 收奪統治 下에서 비밀리에 저술 반포되었 다는 점이다. 國史연구가해외에서 이루어졌던 것과는 대조가 되며, 申采浩의 저술이 東亞 朝鮮日報에 연재되었 고 다음에 볼 타인의 저작들이 公刊된 것에 비하여 南宮檍의 것이 지하에서 끝내 햇빛을 보지 못한 것은 단순히 그 내용의 불실이었 던 때문인지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1920년대의 韓國史의 通史化 작업의 결실로서는 南宮 檍의 두 저작만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朴殷植의 두 秀作이 斷時代史의 성격을 벗어난 것은 아니며, 申采浩가 通史化 64) 金世漢 上揭書 pp. 253-256 - 14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하려고 처음 의도했던 朝鮮史도 결국 시대사로서의 朝鮮上 古史 에 머물렀던 것에 비하면, 南宮檍의 저서들은 당시 수준으로 서는 力作으로 평가해야 할 通史였다고 생각된다. 그는 시대구분 懲惡을 강조하고, 그 始末의 明細를 證著하려는 태도로 이를 집필했던 것이다. 이는 그의 勸善懲惡的 史學精神實證的인 연구 된 各卷을 君王部 政治部 文藝部 節義部 등으로 나누고, 勸善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셋째는 그의 주체적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 은 그의 朝鮮이야기自序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일부를 옮기 면 다음과 같다. 謹稽컨대 我東의 載籍이 早히 唐堯와 并時하여 稽古의 資 가 延綿不絕하여 零星泯滅의 嘆을 能免하더니 우리 朝鮮에 이 르러서는 崇儒獎學하신 效果로 傳紀翰章의 屬이 汗牛充棟하였 으니 著顯한 그 績은 綺與盛哉로다. 然이나 一大遺憾인 것은 彼 史家로 著名한 金富軾 權近 徐居正 輩가 하도 慕華主義에 偏傾 하여 그 記事로 論의 志趣를 觀컨대 自國은 夷狄으로 自處하고 中華를 服從하여 古來로 우리 檀君族의 固有한 才氣와 性格의 雄壯 發越함은 抹殺不振케 하니 鳴呼悲夫로다. 然則 오늘 兒童 의 敎鞭을 執한 우리들의 義務는 如何라야 其可할까 思不得己 하여 이제 朝鮮이야기라는 童話一篇을 纂述하오니 其製는 數三 ①檀君族의 固有한 才質을 修復코자 함이요 ②古人의 慕華主義의 誤見을 打開코자 함이요 ③學童의 自國歷 史的 趣味를 興起코자 함이라. 의 이유가 있는데 이 自序에서 우리는 獨立協會 이후 자강 독립운동에 일관한 南 宮檍의 자주사상을 엿보게 된다. 그는 주체적 역사의식의 고양을 위하여 역사를 쓰고, 당시 日帝支配 下의 비주체적 상황을 극복하 - 144 -
3. 民族史學 려 하였다. 그의 역사서 술이 소위 韓日合邦에서 絕筆하고 三一運 動記로 곧 바로 이어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國史는 민족독립의 희망으로 연결되어졌던 것이다. 南宮檍의 역사연구와 거의 동시대인 1920년대 전후의 國史연 구는 李能和 安廓 崔南善에게서도 보인다. 朝鮮佛敎通史를 비롯하여 朝鮮基督 及外交史 朝鮮道敎史 朝鮮解語花史 朝鮮女俗考등의 李能和(1868-1945)는 敎 저서와 많은 유고를 남겼다. 이들 저술들은 우리 나라의 종교 민속사 연구에 빼놓지 못할 업적들이다. 總督府의 朝鮮史編修會에 관여 한 바 있는 그의 저서들의 연구서술방법은 전근대적인 요소가 많 으며, 따라서 그의 저술들은 대부분이 자료의 충실한 수집과 정리 에 치중해 있는 셈이다. 日本大學출신으로 광범위한 새 지식을 구사하여 의욕적인 분류사를 계획하였으며 改造論에 이어 朝鮮文明史 朝鮮文學史등을 남겼다. 安廓은 당시 崔南善은 일찌기 新文化運動에 앞장 섰었고, 朝鮮光文會를 주도 하며 民族古典의 복간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뒤 丹齋의 영향과 日 本學者들의 자극을 받아 國史연구를 본격화시켰던 것 같다. 그는 開闢창간호에 檀君及其硏究를 발표한 이래 古代 史에 관한 많은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 不咸文化論( 朝鮮 及 朝鮮民族1호, 1928)에서는 그의 해박한 지식을 구사하여 民 族主義史觀을 피력하고 있다. 당시 今西龍小田省吾 등 많은 日 本 학자들이 檀君에 관한 기록을 부정하고, 喜田貞吉金澤庄三郞 등이 日鮮同祖論을 부르짖고 있을 때, 그의 不威文化論은 日鮮同祖論을 정면으로 뒤집어 놓은 내용이었다. 1920년 65) 65) 旗田巍 朝鮮史入門 p.28-145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그러나 그의 檀君硏究나 不咸文化論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朝鮮精神의 부활이었고, 따라서 그의 韓國史觀은 지 극히 관념적이요 종교적일 수 밖에 없었다.66) 이러한 점은 朴殷 植의 朝鮮魂申采浩의 郞家思想등과 상통하는 점인 듯 하 다. 그러나 崔南善의 朝鮮精神은 朴殷植이나 申采浩에게서처럼 역 사를 통하여 이지적으로 민족의 저력을 구체화하여 확신하는 단 계에 이른 것이 아니고, 韓國민족의 역사적 현실과는 유리된 지극 히 관념적이요 낭만적이었다.67) 그러기 때문에 不咸文化論 이 발표된 바로 그 해 그의 민족주의 이념이 절정에 달했을 대 그는 朝鮮史編修會委員으로 들어갔고(1928), 얼마 안 있어 그의 朝鮮歷史(1931)에서는 비관론적인 역사의식이 日帝 總督府의 비치기 시작하였다.68) 이것은 역사를 통하여 민족의 저력을 이지 적으로 확신하지 못했던 그의 관념적인 민족주의가 한계점에 이 르렀을 때, 민족적인 저 비극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앞에서 본 李能和 安廓 崔南善은 朴殷植이나 申采浩 南宮檍 처럼 日帝에 대한 강열한 적대의식을 기초로 하고 민족의 독립을 목표로 하여 國史를 연구한 것은 아닌 것같다. 그러나 日帝下 라는 상황에서 그것도 국내에서 韓國史를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 민족에 대한 사명감이나 문화 전통에 대한 애착심이 없고 서는 불가능하였을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史學도 國 史연구를 통한 민족의 독립에 일정하게 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李萬烈 66) 李基白 上掲論文 67) 李基白 上掲論文 68) 金容燮 上揭論文 - 146 -
4. 現代文學 4. 現 代 文 學 (1) 時代와 對象 1910년에서 乙酉(1945)解放까지의 기간은 소위 植民地時代로 규정될 수 있다. 이 기간을 韓國史 속의 연속성의 처지에서 보면 국가관념이 제거된 민족단위만의 역사전개라 할 수 있다. 이 진술 은 3 1운동 후 성립된 臨政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인될 수 있는 일에 속한다. 民族만의 역사전개라 했을 때, 이 큰 테두리의 설정 속에서 보면 곧 韓國史의 破行性에 직 면된다. 文學이나 藝 術이 바로 韓國史 자체와 대응계에 놓인다는 것은 많은 논란이 예 상됨에도 불구하고 승인될 수가 있을 것이다.1) 특히 이 경우 文 學이란 文字行爲의 일환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言語가 고 유하게 지닌 역사성과 사회성의 측면은 예술성이란 명목으로 문 학이 갖는 장르, 감화적 표현의 문제를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植民地라는 특수 공간의 의미를 捨象하고 논리를 전개 하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문학이 하나의 言語的 實體이면서 동시에 가치개념의 일종이라 면, 거기에는 현재적 판단의 입장이 가로 놓인다. 사실 자체의 기 술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은 이 때문이다. 역사가 써 보태 는 것일 수 없고 다시 씌 어져야 한다는 命題를 승인하는 한 史觀 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고려해 두어야 할 점은 1) 문학과 사회의 對應關係에 대한 논의는 문학이 지닌 역사성의 측면과 예술상의 측면의 갈등에 해당된다. 문학은 시대를 反映하면서도 그것을 超越하는 部分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 14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文學史의 獨自的 法則性 내지 용어가 어떤 범위까지 적용될 수 있 는가에 대한 것이다. 가령 장르라든가 표현의 감응력, 視點, 文體, 樣式 등의 개념은 거의 文學 독자의 적용 범위에 속하지만 계급주 의라든가 민족주의, 개인과 사회, 파시즘, 근대 등등의 용어 개념 은 문학쪽의 적용 범위가 현저히 좁다. 뿐만 아니라 진보의 개념 도 원칙적으로 문학에서는 技巧라든가 視點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는 하나, 앞에서도 적었듯이 이 기간이 민족만의 역사전개라는 특수한 空間이라는 사실에 비하면, 이러한 문제들은 적극적인 의미를 띄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 문제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시기의 韓國文學은 다음 몇가지 관점에서 정리, 기술될 수가 있을 듯 하다. 첫째, 文字行爲의 확산으로서의 장르별 문학전개를 고찰할 수 있다. 만일 이 기간의 文學이 흔히 新文學으로 불리듯 發生史的 의미를 다소 포함하고 있음이 사실이라면 그 장르선택의 조건을 검토함으로써 다른 문화영 역과의 연결점을 드러낼 수 있으며, 또 한 장르가 文學의 고유한 양식인 이상 최소한도의 文學史的 意味 網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民族語의 훈련과 그 표현력의 탄력성 획득이 갖는 영역의 점검이 장르별로 검토될 수가 있을 것이다. 셋째는 저항과 창조의 等質性 파악이라는 문제가 가로 놓인다. 동시에 여기에는 傳統志向性과 모더니티志向性의 辨證法的 파악 이 결부되어 있다. 이 두가지 문제 중 전자는 韓國思想史의 이념 에 속하는 것이며 후자는 文化生成原理에 속하는 것이다. 이상 몇가지 문제점이 비교적 거칠지 않게 부각되기 위해서는 물을 것도 없이 實證的 바탕이 놓여 있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 148 -
4. 現代文學 (2) 3 1運動과 民族의 應戰力 1919년 3.1운동 직후 日本의 海軍大將 齋藤實이 서울에 부임한 것은 그 해 8월인데 이 제3대 總督은 취임 즉시 민정안정을 위한 諭告文을 발표하였는 바 그 속에는 (1) 憲兵警察制 廢止 (2) 官 吏의 制服改革 (3) 民意暢達과 文化및 福利增進 등의 개혁안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武斷政治에서 文化政治에로 전환 운운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가 日本政府에 2個師團 증 원을 요청한 사실을 보면 그 文化政治가 더욱 강화된 武斷政治의 연속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2) 齋藤이 東亞日報 朝鮮日報 時代日報등 민간신문을 허가한 것은 다음 두가지 사실의 결 과로 인정된다. 그 하나는 3.1운동이 강력한 韓民族의 민족주의의 處女性임을 들 수 있다. 적어도 이 운동은 韓民族 全階層이 참여한 民族動員 이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여파가 中國의 5.4운동에도 연결된다 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 속한다. 이 민족적 에너지의 분출 과 그 잠재력의 인식은 日本으로 하여금 군대를 4個師團으로 늘 이게 하였고, 동시에 최소한도의 불만 출구를 마련해 놓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逆으로 보면 불만표출은 日本으로 하여금 불 만의 소재와 그 불만분자들의 움직임을 한 눈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日本의 국내문제와 관련되어 있 다. 1次大戰 후 급격히 세계열강 대열에 끼게 된 日本은 문화 및 사상의 측면에서 西歐와의 同質化를 목표로 하게 된다. 그것은 철 저한 西歐 帝國主義의 추구와 거기에 논리적으로 대응되는 러시 2) 山邊健太郞 日本統治下の朝鮮, 岩波新書 pp.112-113 - 149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아혁명 이후의 계급주의 사상을 동시에 수용한다는 의미를 내포 한다. 帝國主義의 한 이면으로서의 古典的 資本主義의 상승은 1920년경 벌써 노동자 농민등의 방대한 세력권을 형성케 하며이 는 天皇制와 마르크스사상의 공존을 불가피하게 만든다.3) 이러한 日本 국내 사정이 植民地에 적용될 때는 어떠한 방향에 놓일 것인 가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는 제국주의 식민지경영이라 는 일반성과 日本式 지배 방식이라는 특수성에서 파악되어져야 할 것이다. 소위 文化政策에로 표면상 전환되었다고 하는 3.1운동 이후의 日本 식민지정책은 그들 입장에서 볼 땐 불가피하게 취해 진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 지배방식이 가령 英國의 印度지배 방식과 현격한 차이가 있는 혹독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근본적으 로는 韓國民族의 主體性, 그 문화적 힘의 집요, 투철함을 반증하 는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韓國民族의 입장에서 볼 때 3 1운동은 민족적 측면과 국가적 측면의 합일을 의미하고, 憲法制定權力으로서 의 正統性과 창조성 으로서 사상적 규정이 가능하지만4) 또 다른 형태의 武斷政治에 대처해 나가야 했던 국내에 있어서는 그 저항의 측면을 동시에 내 포케 한 것이다. 국가로서의 神的인 것이 이미 숨어버린 空間에 있어서는 이처럼 저항과 창조의 개념이 等質性을 떨 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 곳에 民族語가 놓여 있었고 그를 둘러싼 思惟의 저층이 이 시대의 文學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3) 장르 選擇의 條件 文學에 있어서의 장르란 基本型(Gattung)과 變型(Art)으로 大 3) 遠山茂樹外 昭和史(新版), 岩波新書 제1章의 2 참조. 長谷川泉 近代日本文學評 論史 제3章 4참조 4) 이는 大韓民國 憲法 前文이 증거하고 있다. - 150 -
4. 現代文學 別된다. 대체로 文學史의 기술가능성은 독자적 법칙성 유무의 검 토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 독자적 법칙성의 한 양식이 소위 장 르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文學史의 기술은 한갖 社會學의 侍 女로 전락된다. 여기서 법칙성이라 함은 古今東西의 文學이 최소 한도 抒情樣式 叙事樣式 劇樣式에 각각 포함된다는 점에서 발단 된다. 인간이 자기를 언어로써 드러내는 방법은 이 세가지 基本 型에는 다양한 變型이 나타나는데 이는 그 시대와 사회적 조건에 의한 제 약성에 기인된다.5) 이 제약성에 의한 變種을 地方性쟝르 (vernacular genre)라 통칭한다. 만일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한다 면, 그리고 앞에서 암시한 韓國近代文學이 다소 발생사적 의미를 내포한다면 1920년대 초기 韓國文學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사실 들을 설명할 수가 있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泰西文藝新報(1918)에서 金億 黄錫禹 등의 西歐상징시 소개 및 자작詩들이 나타난다. 그 西歐詩의 번역 집성이 澳惱의 舞蹈(1921)인 것이다. 泰西文藝新報의 새로운 기풍에 이어 創造(1919)의 金東仁朱耀翰田榮澤金換, 廢墟(1920) 의 廉想涉吳相淳金現永金億, 蓄薇村(1921)의 黃錫禹卞榮魯, 白潮(1922)의 朴鍾和朴英熙李相和玄鎭健羅彬南宮璧, 金 星(1923)의 梁柱東柳葉白基萬李章熙 등의 文人배출에서 우리 는 이 시대의 문학상의 한 특질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것 은 詩장르(抒情樣式)의 선택에 현저히 기울어져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기간 속에는 金東仁 廉想渉 玄鎭健 羅彬 등의 소설가 도 포함되지만 엄격히 말해 그것을 叙事樣式이라 보기는 여러 가 5) E. Staiger Grundbegrifte der Poetik, dtv참조. W. Kayser Das sprachliche Kunstwerk, Francke X 참조 - 15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지 난점이 따른다.6) 이러한 詩장르 선택의 조건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는 장르선 택의 개인적 이유와 사회적 이유가 동시에 포함된다. 이 경우 개 인적 이유란 이 무렵 文人들의 연령상의 미숙성과 기질적 편향성 을 지칭한다. 대부분 東京留學生 출신인 이들 문인들은 10代에 留 學을 했으며, 그러한 정신연령에서 문학을 선택했으며, 따라서 개 인과 사회의 관계개념에 놓이는 叙事樣式 선택이 거의 불가능 한 것이다. 문제는 이 개인적 측면보다 詩쟝르 선택의 사회적 대응관 계에 있다. 장르 이론에 의하면 장르의 근저에는 인간묘사의 일정 한 型, 성격 묘사의 일정한 방법이 가로 놓여 있다. 만일 인간이 그 발전에 있어 줄거리의 도움에 의해 완결된 성격으로 표출할 경 우에는 叙事文學이 선택되며, 만일 인간이 자기의 개개의 상태, 체험으로 生의 자각에 의거할 때는 詩가 선택된다.7) 순간적 체험 이상을 한 사회가 혼란, 미숙상태에 있다면 詩장르 선택에 偏向되 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일 이러한 일반원리를 믿는다면 20년대 초기 韓國文學이 詩에 偏向된 이유가 해명된다. 3.1운동 이전을 지배한 프랑스 상징파 詩의 世紀末的 퇴폐사상에다 3.1운동 이후 짙은 패배주의는 청년들로 하여금 허무주의에 함몰케 한 것으로 白潮파의 병적인 몽환, 病室에의 도피를 뜻한다. 月灘 朴鍾和의 黑房秘曲, 朴英 熙의 幻影의 黃金塔을 위시 李相和의 나의 寢室로등이 볼 수가 있다. 그 대표적인 양식이 이에 속한다. 한 사회에 있어 개인의 나아갈 地平이 보이지 않을 때 꿈의 세계로 함몰한다는 것은 앞의 순간적 知覺에만 의존할 수 6) 이들의 작품이 小說이기는 하나 매우 간략한 단편이라는 점, 그것도 현저히 心情告白的인 수필에 가까운 것이다. 7) 치모프예프 文學理論(日譯), 제2권 p.276 靑木書店 - 152 -
4. 現代文學 밖에 없는 증거일 수 있다. 그러나, 3 1운동 이후 2,3년을 두고 韓民族은 日帝植民地政策에 대해 서서히 그 웅전력을 형성한다. 그 웅전력의 양상을 사회적 측 朝鮮勞動共 濟會(1920.4) 칼톱會(1920.6)朝鮮物產獎勵會(1920.7) 朝鮮靑年會聯合會(1920.12) 서울靑年會(1921.1) 高麗共產黨 (1921.5) 朝鮮勞農聯盟(1922.10) 民衆社(1923.9) 衡平社(1923. 면으로 보면 많은 단체조직에서 가장 선명히 엿볼 수 있다. 4) 등등을 위시, 1926년까지 警務局에서 발표된 사상단체수는 靑 年團體 1,092, 政治團體 338, 노동단체 182, 衡平단체 130으로 되 어 있다.8) 이러한 사실은 이미 지도자적 發想인 啓蒙主義가 그 시효를 잃고 민중 중심의 운동으로 전환된 증거일 수 있다. 1924年에 至하야 思想運動 勞動運動 靑年運動 衡平運動 學生運動 女性運動이 맹렬하야 朝鮮에도 社會運動의 陣容이 布 이에 轉換期를 넘는 朝鮮의 社會運動이 小數 思想家 張되고 의 論을 떠나 農村에서 工場에서 街路에서 實際運動이 展開될 것이니 곧 社會運動의 民衆化이다. 9) 이러한 民衆化의 운동 방향은 日帝의 조직적 수탈의 응전력에 놓이고 그 尖銳한 양상이 소위 小作爭議라 할 수 있다. 小作爭議라 는 이 용어는 단순한 地主 對 小作農民의 합법적 투쟁이라는 의미 와는 다르다. 8할 이상이 농민이었던 당시에 있어서는 小作爭議 자체가 전 계급적이며 전 사회적이라 할 수 있고, 또한 그 투쟁대 상이 근본적으로는 東拓이나, 직접적으로 韓國人 地主와의 관계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 나타나는 地主 및 舍音의 횡포는 거 의 韓國人 자신이라는 점은 간과될 수 없다. 그들이 日本 자본주의 8) 李錫台 社會科學大辭典, 附錄 p.16 文友書館 9) 赤城山人 朝鮮社會運動概觀 東亞日報 1925.1.1.日字 - 15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의 촉수에 의해 비호되었다는 것, 그것을 견제할 국가적 통제가 없 었다는 점이야말로 궁핍화 일변도의 직접적 원인으로 보인다. 左右로 挾攻을 당하는 朝鮮農村은 그 自作小農家가 年復年 으로 沒落하여 現今은 2割에 不過한 地主輩를 위하여 대체 로 보면 收獲한 穀物의 半分以上의 小作料는 常例가 되고 그밖 에도 地税 肥料代 舍音料 斗量夥多 水利稅 出浦料 등을 일일이 精算하면 小作人의 所得은 空이 될 것이다. 10) 이러한 상태에서 死亡率의 다수, 死產病者 등등으로 농촌의 황 폐화를 초래함이 必至였다. 이를 벗어나는 방법 중의 하나가 老를 扶하고 幼를 携하여 氷霜이 凛烈한 시베리아, 滿洲, 日本 등지를 流離漂泊하는 참상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文學도 종래의 啓蒙主 義가 그 실효를 잃게 됨이 必至인 것이다. 만일 이러한 사회변동 을 두고, 앞의 地平이나 方向性이 드러난 상태라고 규정될 수가 있다면 비로소 여기서 叙事樣式, 소위 小說이 선택될 수가 있으 며, 대체로 그 시기를 1925년 전후라 볼 수 있을 것이다. (4) 民族主義文學과 프롤레타리아文學 1) KAPF의 組織 프롤레타리아文學의 對他意識化에 의해 民族主義文學이 형성되 었다는 것은 여러가지 점에서 뚜렷하며, 이 사실은 또한 1920년 대 韓國文學을 파악하는 한 기본항의 의미를 가진다. 李光洙와 崔南善, 이들에 대립적으로 등장했던 金東仁, 그리고 金東仁과 대립관계에 있었던 廉想涉 등이 연합전선을 펴 民族主 義文學으로 결속되었다는 것은 프로문학 세력의 時流性 내지 可 10) 小作人은 團結하라, 東亞日報 社說 1922.8.2. 日字 - 154 -
4. 現代文學 畏로움을 반증하는 것이다. 白潮파의 唯美主義 자체 내의 파괴에서 발단된다. 구체적으로 白潮3호(1923)에서 八峯 프로문학의 초기 형태는 정작 화려한 金基鎭이 참가하면서이다. 八峯은 日本留學에서 大正期 데모크 래시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그 사상은 두 갈래로 보인다. 하나 는 19세기말의 러시아 小說 및 브나로드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日本의 씨뿌리는 사람이라는 잡지와 그에 연하는 H. 바르뷔스의 클라르테운동이다. 이 두 사상은 함께 문학의 사회주의였지 마르크 스사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民衆藝術에 가까운 개념으로 봄이 타당 하다. 이 위에 당시 사상계를 휩쓸던 계급주의 사상이 결부될 수 있 었다. 앞에서 우리는 1924년 무렵 韓國社會運動이 현저히 民衆化로 기울었음을 지적하였고, 또한 이 사실이 문학에 있어 小說의 선택가 능성을 의미한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것은 한 개인이 사회를 발견 할 수 있는 地平이 떠올랐음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1924년에서 1925년 사이에 나타난 새로운 作品詳을 들 수가 있다. 붉은 쥐, 趙明熙의 땅속으로, 李益相의 狂亂, 朱耀翰의 殺人, 李箕永의 가난한 사람들, 崔鶴松의 飢餓와 殺戮등의 作品群은 종래의 小說과는 매우 다른 것이며 이를 두 金基鎭의 고 朴英熙는 新傾向派라 불렀다. 신경향파문학이란 目的文學의 일 종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연발생적 문학이라 봄이 타당하다. 素 材를 궁핍한 것에서 구하는 것, 地主 對 小作人의 對立構成, 放火 와 殺人으로 결말을 짓는 것 등의 창작의 공식성은 자연주의적 技 法의 영향이기는 하나, 어떤 뚜렷한 투쟁목적을 내세운 것은 아니 었다. 그러나 이 자연발생적인 신경향문학이 조만간 목적의 식의 문학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피지배계급의 국제성 의 증대와 비평가의 이데올로기 지도력에 관련된다. 이 점을 살피 - 155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려면 먼저 카프의 조직력을 살펴 보는 일이 필요하다. 카프조직이 二元的이라는 사실이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 하나는 焰群社이며 파스큘라(PASKYULA)系가 그 다른 하나 이다. 전자는 1922년 9월 李赤曉 李浩 金紅波 崔承一 沈大燮(薰) 金斗洙 金永八 宋影 朴世永 등으로 조직된 프로문학 단체이다 解放文化의 연구 및 운동을 목적으로 함으로 되어 있다. 잡지 焰群은 未刊으로 되고 말았으며 이 단체는 사회적 그 강령은 으로 알려지지 않은 좌익문학청년집단에 해당된다. 한편 파스큘라 는 1923년 朴英熙 安夕影 金炯元 李益相 金基鎭 金福鎭 延鶴年 의 頭文字를 따서 명명한 것이며 중견문인단체라 할 수 있다. 이 두 단체가 결합된 것이 이른바 카프이다. 카프는 朝鮮 프롤레타 리아 藝術家 同盟 (Korea Proletaria Artista Federation 약칭이 며 日本의 NAPF, 러시아의 RAPF와 병칭되는 계열이라 할 수 있 다. 카프 결성년대는 1925년 8월 23일이며 1935년 5월 21일 해 益相朴容大李赤曉李相和金鎾金福鎭安夕影宋影 崔承一沈大燮趙明熙李箕永朴八腸金陽 등이며 그 사회 적 거취가 뚜렷해진 것은 1926년 文藝運動이 발간된 이후이 체되게 된다.11) 초기 멤버는 朴英熙 金八峯 李浩 金永八 李 다. 카프의 변모과정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ㄱ. 1차 방향 전환 1927년 방향전환을 시도한 것은 맹원 확장과 자연발생단계에 서 목적의식을 뚜렷이 드러내기 위함에서였다. 이 단계는 소위 第 三戰線派라 불리는 東京支部의 소장파 趙重滾 金斗錯 韓植 洪 ㄴ. 2차 방향 전환 曉民 李北滿 등의 수용과 관련된다. 11) 金允植 韓國近代文藝批評史硏究, 한얼문고 제1부 제1장 2를 참조 - 156 -
4. 現代文學 1931년 극좌적 노선을 선명히 드러낸 단계를 두고 말한다. 前 黨의 文學이라는 두 명제로 이 衛의 눈으로 事物을 보라 와 단계가 요약된다. 이미 소장 강경파 林和가 서기장으로서 실권을 장악했으며 舊派인 朴英熙 金八峯 등은 온건파로 소외된다. ㄷ. 제1차 검거 1931년 2월 無產者사건, 地下村사건 등에 의해 수십명 이 기소된 바 있다. ㄹ. 제 2차 검거 1934년 2월에서 12월까지 新建設社사건으로 全州에서 다수 가 검거된 것이며 이듬해 겨울 집행유예로 전원 석방된다. 이미 이 때는 객관적 정세가 카프의 이데올로기를 용납하지 않았고, 또한 轉 向論이 속출하는 바, 朴英熙 白鐵 등의 전향선언이 충격적이었다. ㅁ. 해 산 1935년 5월 金南天 林和 金八峯 등의 협의 하에 해산계가 제출되어 카프는 해체된다. 이 카프에 대한 고찰은 日本, 中國 등 과 비교 연구될 수 있는 문제점이 놓여 있다. 2) 저항과 창조의 갈등 식민지 궁핍화에 대한 문학적 응전력이 小說과 評論의 선택을 강요하게 되었음은 이 시대의 특징으로 볼 수가 있다. 이 문제는 이른바 解釋學的 성찰에 관계된다. 즉 극단적인 탐미주의적 病室 의 문학에서 어떻게 극단적인 계급사상의 문학으로 전환될 수 있 었는가의 물음에는 문학 고유의 해석이 요청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白潮전후의 퇴폐적, 탐미적 경향을 식민지 지식인이 선택할 수 있었던 예술적 저항의 일종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月灘의 도피적 詠嘆調의 詩 懷月의 도피적 푸르스름한 象牙 - 15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塔 속의 詠嘆 이라고 八峯이 공격하였지만 그것은 매우 피상적 관찰로 이해된다. 만일 이 唯美主義的 경향을 도피적이라고 치부 한다면 이들이 곧 계급사상으로 전환된 이유를 문학적으로 설명 하기, 어렵게 된다. 이들의 의식구조는 절망과 저항의 복합이며 이 속에 詩가 놓임으로써 美學的인 요소를 담을 수가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 白潮파멸 직후 계급사상의 도입은 절망이 제거되 고 저항만이 선택되었음을 뜻할 수도 있다. 여러가지 논란이 가능 하기는, 하나 절망과 저항 사이에 詩가 놓임으로써 美學的 요소가 구제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文學이라 할 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사상만이 선택 될 때 남는 것은 저항 일변도 일 것이다. 따라서 남는 것은 미학적 요소쪽이 아니라 이 데올로기쪽으로 된다. 그 이데올로기 속에 小說과 評論이 놓여 있 었다는 것은 사태를 현저히 단순화시키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고 찰하기 위해서는 문제적 개인으로서의 시인 李相和를 들 수가 있 다. 나의 寢室로에서 보여주는 唯美主義的 상태에서 李相和는 詩를 남겼다. 그러나 그가 카프에 가담하고 이데올로기를 전면으 開闢誌 에서 우리는 그의 評論을 목도할 수 있는 것이다. 유명한 詩 빼 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3)를 전후하여 그가 詩作生活을 로 받아들이게 되자 그는 詩와 함께 評論을 선택한다. 포기하기에 이른 것은 시사함이 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詩만 포기함이 아니라 評論까지도 포기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절 망에 저항이 합일되었을 때 美學的 요소가 성립되었다고 할 때 여 기서 저항만이 남게 될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경우라면 문학의 대열에서 떠나게 된다. 아무리 이데올로기나 저항이 위대 하더라도 이미 그것이 문학과는 거리가 멀다는 자각은 李相和로 하여금 문학 전체를 포기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게 된다. 이 사정은 - 158 -
4. 現代文學 朴英熙나 金八峯에 있어서도 해당될 듯하다. 그들이 詩에서 출발 하여 隨筆, 小說, 評論 등으로 차례차례 시험하다가 결국 評論으 로 굳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評論이란 散文의 한 영역이기는 하나 文學 쟝르의 고유한 의미와는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봄이 타당하 다. 美學의 영역이 아니라 논리이며 설득력에 속한다. 그 논리가 이데올로기의 도그마로 뒷받침될 때 지도력의 발휘로 나서게 된 다고 한다면 1920년대 중반기 韓國文學의 저항과 창조의 갈등은 단선적 파악으로 간단히 처리되지 않는 난점이기도 하다.12) 한 사회의 앞에 地平이 드러날 때 비로소 작가는 순간적 체험쪽이 아니라 완결된 사건을 행위의 측면에서 포착할 수가 있다는 일반론 萬歲前 (1923)을 쓴 것이 중요해진다. 金東仁의 감자, 玄鎭建의 貧妻 에 의거한다면 廉想渉의 초기의 詩와 評論을 버리고 등이 小說史에 놓이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그러나 이 20년대를 커버하는 小說의 웅전력은 崔曙海와 趙抱石으로 대표시킬 수가 있다. 계층적 문제를 고려할 때, 이 무렵 대부분의 문인 지식인이 日 本留學生 출신임에 대해 崔曙海는 겨우 小學校 중퇴의 독학수업 자이다. 이 점이 바로 그의 문학이 體驗的 양상으로 민중에 밀착 故國, 脫出記, 해돋이등은 체험문학에 속하는 중요작품이며, 대표작 紅焰도 이 작가의 北 될 수 있었던 중요 이유이다. 間島 체험과 분리시킬 수 없다. 작가 崔曙海의 小說史的 중요성은 植民地 韓國民族의 궁핍화 현상을 가장 선명히 드러내었다는 점 이며, 국내적인 것과 함께 滿洲중심의 민족의 참상을 함께 드러냈 었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저항과 창조의 갈등을 가장 많이 극복한 것에 해당된다. 그리나 그의 작품이 살인과 방화라는 공식성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자연발생적인 상태에서 도달된 가 12) 金允植 韓國文學史論攷 제3부 4 참조 法文社 - 159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장 철저한 경지의 崔曙海的 小說作法이 목적의식기에 접어든 프 로文學에 그대로 적용되었다는 사실은 프로문학의 취약성을 드러 낸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프로문학의 취약성을 극복한 것이 趙明熙(抱石)의 東江 이다. 1920년이래 洛 朝鮮大衆의 거짓없는 人生記錄이다. 이 만큼 감격으로 가득찬 小說文學이 있었던가 라고 金八峯이 찬탄했듯이 작품은 프로문학의 제 1기와 제2기를 구분하는 작품 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 작품은 植民地의 한 지식인이 마을의 組合運動의 한계에 부 딪쳐 滿洲로, 中國으로 나가 투쟁을 벌이지만 거기서도 파벌의식 과 기타에 의해 좌절되고 끝내 옥살이를 하다가 고향인 東江 마을 로 돌아와 죽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이른 겨울의 어둔 밤, 멀리 바다로 통한 낙동강 어구에는 고 기잡이 불이 근심스러이 졸고 있고, 강기슭에는 찬 물결의 울리 는 소리가 높아질 때다. 방금 차에서 내린 일행은 배를 기다리 느라고 강언덕 위에 옹기종기 등불에 얼비쳐 모였다. 그 가운 데에는 청년회원, 형평사원, 여성동맹원, 사람, 단체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동저고릿바람에 흰 모자 비스듬히 쓰고 보따리 든 촌사람, 검정두루마기, 구지레한 양복 혹은 루바시카 입은 사람, 짜켓 위에 짧은 머리털이 다 팔 다팔하는 단발랑, 혹은 그대로 틀어 얹은 신여성, 인력거 위에 앉은 병인, 그들은 감옥의 미결수로 있다가 병이 위중한 까 닭으로 보석 출옥하는 박성운이란 사람을 고대 차에서 받아서 인력거에 실어 가지고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다. 13) 이 작품에는 초기 프로문학의 도식성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고, 13) 趙抱石 洛東江 pp. 10-11 建設出版社 - 160 -
4. 現代文學 강물과 뱃노래의 흐름으로 인해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叙事詩的 空間이 획득되어 있다. 특히 白丁 딸 로사의 사랑은 이 작품에 높 은 밀도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편의 한계를 극대화시 켰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詩的 분위기에 압도되어 散文기능의 발휘를 저해하고 있다. 이는 이 작가가 원래 타고르 詩에 경도된 바 있는 詩人이었던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타고르류의 신낭만 파냐 고리키류의 사실주의냐의 갈림길에서 이 작가가 후자를 택 했을 때 보인 것이 이 작품이다. 비록 부족하기는 하나 이 시대의 일단을 낙동강이 커버할 수 있었다는 것은 詩와 小說의 선택 조건을 한꺼번에 성찰케 하는 것이다. 3) 限界狀況으로서의 詩 1920년 중반기 이후의 시는 金素月과 韓龍雲으로 대표시킬 수 있다. 이미 소설 선택이 가능해진 이 시대에 다음과 같은 詩壇자 체의 비판이 나왔다는 것은 우연일 수 없다. 詩壇의 詩作이 현재의 朝鮮魂을 朝鮮말에 담지 못하고 남 의 魂을 빌어다가 옷만 朝鮮것을 입히지 않았는가 疑心한다. 다 시 말하면 洋服입고 朝鮮갓 쓴 것이며 朝鮮옷에 日本 를 신은 것이란 말이다. 게다 먼저 우리는 잃어진 朝鮮魂을 찾아야 文壇의 새로운 樹立은 이러한 기초 위에서 시작되 어야 할 것이다. 될 것이다. 14) 西洋詩 번역으로써 가장 앞장섰던 金億의 이러한 자체반성은 다음 두가지 사실과 직결된다. 그 하나는 같은 해 丹齋 申采浩 浪人의 新年漫筆( 동아일보 1925.1.2)이며 다 른 하나는 朱耀翰의 아름다운 새벽(1924), 卞榮魯의 朝鮮 의 新文學 비판인 14) 金億 詩壇一年 東亞日報 1925. 1. 1 日字 - 16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의 마음 (1924)등의 詩集이 이미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러한 반성 의 결실이 金素月의 진달래꽃(1925), 韓龍雲의 님의 沈默 (1926) 이라는 두 詩集이다. 이러한 결실은 앞에서 적었듯 개인과 사회의 관계개념을 포착하는 散文의 주류적 영역과 대응된다. 이미 앞의 地平이 드러났을 때도 계속 詩를 선택해 나갔을 때 그것이 의미를 띠려면 詩人 자신이 限界人間의 자리에 놓여야 한다고 한 다면, 金素月 韓龍雲 등이 그 전형에 속할 것이다. 이 한계인간 성이 바로 민족의 심층구조에 깊이 뿌리박힘으로써 특별한 응전 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 金素月에 있어서 그것은 民謠的 리듬, 토 착적 정서인 恨의 세계로 집약되며 그 대표적인 것이 진달래꽃, 접동새, 초혼, 무덤등이다. 민족의 情恨이 가장 절실히 형 상화된 작품의 하나로 접동새를 들 수가 있다.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津頭江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津頭江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津頭江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이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 162 -
4. 現代文學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잊어 참아 못잊어 夜三更 남 다자는 밤이 깊으면 이山 저山 옮아가며 슬피웁니다15) 만일 이 시대가 역사의 상승기였더라면 金素月의 이러한 작품은 과거지향성으로 말미암아 중요성이 상실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시 대 자체가 韓民族으로 볼 때는 朝鮮心으로 표상된 과거지향의 잠재적 에너지로 相接되었기때문에 그의 詩는 후세로 내려올수록 民族詩人的인 풍모를 띠어 민족유산 계승의 문제점을 제시한다.16) 한편 韓龍雲의 詩는 님이라는 상징 위에 놓인다. 이 임이 란 이 시대 韓民族의 암묵상태의 기호일 수 있다. 그 자신이 승려 라는 점과 함께 이 님의 상징이 한계인간성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또 金素月 韓龍雲이 함께 당시 詩壇의 주류였던 近代志向 性과는 대립되는 큰 주류인 것이다. 특히 韓龍雲의 詩는 散文詩의 가락, 타고르와의 영향 관계, 여성적 편향, 納辯의 시적 승화 등으 로 하여 님의 沈默이라는 독보적 존재로 군림하고 있다. 17) 불교측의 해석 차이도 있어 아직도 영향 관계, 禪의 詩的 관여 여 15) 素月詩集, pp.28-29 正音社 16) 金素月硏究, 心象 1974.10 참조 17) 韓龍雲全集, 解說 참조 新丘文化社 - 16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부는 미해결로 남아 있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朝鮮心의 발로가 詩的 승화를 거쳐 형상화할 수 있는 것 을 이론적으로 따질 땐 詩라는 쟝르의 본질에 관련된다. 叙情樣式 이란 叙事樣式이나 劇樣式과는 달라서 추억 想起 回想에 속하 며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이고, 따라서 生의 순간적 지각인 것이 다.18) 그것은 意味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리듬의 울림에서 직접적으로 인간의 영혼에 충격한다. 문학 쟝르 중에서 동적 파악 이 가장 적게 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일 이러한 전제를 승인 한다면 한 개인이나 민족의 한계상황은 그 자체가 다분히 詩的인 셈이다. 이로 볼진댄 1920년대 중반 이후에 나타난 프로詩는 다 분히 非詩的인 상태에 놓이지만, 한편 그것은 또한 그 시대에 알 맞는 양식의 일종일 수도 있다. 4) 文學評論의 政論性 1920년대 韓國文學이 중반기부터 小說과 評論이 주조적이었음 은 앞에서 이미 지적하였다. 評論이란 어떤 특정한 시대와 사회 가 폐쇄적인 상황에 놓일 때, 政論性을 띠면서 문학 및 문단의 방 향 제시에 임할 수가 있다. 植民地 상황에서는 그 정치적 폐쇄라 는 불만의 放水路 몫을 文學評論이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은 평론 의 큰 의의라 할 수 있다. 評論이 독자 및 작가의 창작 방법, 문 단 방향제시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문학의 정치적 관심을 뜻하며, 이 비평의 政論性은 프로문학에서 현저하 였다. 開闢지와 朝鮮之光, 中外日報등을 거점으로 한 프로문 학 비평은 朴英熙金八峯權九玄李甲基白鐵林和金南天 18) E. Staiger 前揭書 - 164 -
4. 現代文學 尹基鼎 韓曉 安含光 宋影 등에 의해 전개되었고, 그 내용 항목 은 카프의 외부로 향한 것과 내부로 향한 것으로 대별시킬 수가 있다. 그 어느 쪽이나 논쟁의 형식을 띠었다는 것은 실천 과정의 한 특징인 셈이다. ㄱ. 자체내의 논쟁 프로문학 자체내의 논쟁은 (가) 內容形式 논쟁 (나) 목적의식론 (다) 아나키스트와의 논쟁 (라) 대중화론 (마) 농민문학론 (바) 창작방법론 등이 포함된다. (가)는 초기의 강경론자 朴英熙와 온 건파 金八峯 간의 소설 창작에 관한 것이며 통칭 소설건축논쟁이 라고도 한다. 초기 프로문학의 소설은 형상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 고 투쟁의식만을 직선적으로 노출시킴으로서 작품이전의 상태에 머물기가 예사였다. 이 소박한 상태를 관념화하면 내용위주성으로 된다. 마르크스주의 문학에서는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는 원칙 에 의거하는 것이기도 하나 그것은 많은 중간항을 필요로 하는 一元論인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인식의 바탕없이 투쟁내용만을 담는 것이 예술이냐 아니냐의 여부를 두고, 논쟁을 벌인 것은 그 만큼 소박한 단계로 평가된다. 실상 이 논쟁은 마치 카프조직의 내분인 듯한 인상을 줄 우려성 때문에 전략적 차원에서 중단된 다.19) 즉 金八峯이 양보하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 의 해결은 그 후 오래도록 극복되지 못한다. 이유는 그러한 내용 형식의 一元性을 실증해 줄만한 프로문학의 거작이 끝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쟁과 그 결산은 日本 프로문학과 직결 되어 있었고 따라서 自生的 역 량과는 相距가 있다. (나)의 목적의 식론은 자연발생적 단계에서 이데올로기를 선명히 드러내는 것에 로 방향 전환을 뜻하는데 이는 (가)속에 일부 포함된다. (다)는 목 19) 金八峯 韓國文壇側面史, 思想界 연재 終回 pp. 199-200 - 165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적의식으로 방향 전환한 27년 이후 카프 자체내의 무정부주의 분자를 제거하는 논쟁이라 규정된다. 크로포트킨에 의해 이론화 된 아나키즘은 黨에 예속되는 일체의 문학행위를 부정하며, 자연 적 내부법칙 즉 상호부조론에 의한 자유연합에만 집단성의 의미 가 있다는 주장이다. 金華山 李鄕 등이 아나키스트 논객이었으나 이미 대세가 이 소수파의 의미를 압살시켰다. (라)(마)(바)는 세 부적으로 각각 항목화가 가능하나, 근본적으로는 창작방법론으로 귀착된다. 카프가 목적의식으로 방향 전환을 감행한 1927년 이후 의 창작은 무엇보다도 농민이나 대중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되었 다. 카프문인들이 계급의식을 내세우면서도 여전히 관념적이며 지식인만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 장 큰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대중을 위하는 길은 대중이 우선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실상 이 문제를 두고, 카프에는 두 가지 이론이 대립되었다. 즉 대중에 영합해야 하느냐, 아니면 대 중보다 앞서서 혁명노선을 견지하느냐가 표면화되었다. 전자는 金八峯의 통속소설론으로 대표된다. 우리는 처음부터 작용할 수 없고 성장할 수도 없는 것을 가지고 프로藝術이라고 하지는 우리 오빠 와 화로같은 詩가 또한 그러한 방향의 가능성으로 지적하였다. 않았다 고 봄으로써 쉽게 쓸 것을 주장하고, 林和의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소장파 강경론자들에 의해 타협주의로 규탄 받는다. 林和 金南天 趙重滾 등은 金八峯의 대중화론을 무장해 제론으로 간주, 혁명성의 포기는 프로문학 자체의 포기로 보았다. 이 갈등문제는 目的文學으로서의 프로문학의 가장 아픈 난관 중의 하나였다. 이상이 프로문학 자체내의 문제점들이었다. 비평가의 주장이 압 도적이었고, 창작이 이에 따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무렵의 비평 - 166 -
4. 現代文學 은 힘과 권위가 있었다. 文學 바깥의 이데올로기가 그 권위를 보 장해 주었기 때문이다.20) ㄷ. 民族文學과 프로文學의 논쟁 민족주의 문학이라 했을 때 프로문학과 대립된 당시의 모든 문학 이라 규정된다.21) 프로문학 이전에는 따라서 민족주의 문학이란 개 념은 성립될 수 없으며, 또한 프로문학 퇴조이후 역시 민족주의문학 이란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 프로문학의 對他意識化에서 민족주의 문학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민족주의문학 속에는 民 族主義派 折衷派 海外文學派가 함께 포함된다. 左翼的 文藝運 動의 出發이 右翼派란 것을 規定해 주었고, 宣傳布告함으로써 소극 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대립을 느꼈을 따름이지 集合的 團體로서 의 의식적 깃발을 가지지 않은 것 이라고 함은 이 때문이다. 편의상 1930년 무렵의 문단 판도를 살펴 보면, 右派에 (가) 순 수예술지상주의 金東仁 (나) 통속적 모더니스트 崔獨鵑 등 (다) 심리해부적 리얼리스트 廉想渉 (라) 민족적 인도주의 李光洙 등 으로 분류되어 있다.22) 이 중에서도 그 이데올로기적 거점을 다 朝鮮人의 要求에 응하니까 朝鮮 民族的이 아닐 수 없으며, 따라서 朝鮮人에게 읽혀져 이익을 주려는 것은 바로 民族的이라고 그가 주장할 때 그것은 매우 추 소 분명히 한 것은 李光洙이다. 상적인 상태에 놓여진다. 누구든지 朝鮮民族을 배반하지 아니하는 한에서는 그가 어 떠한 主義 어떠한 階級에 속한 것을 물론하고 그는 朝鮮民族에 包含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世代가 와서 곤경과 民族的 모든 20) 金允植 韓國近代文藝批評史硏究, 한얼문고 제1부 제1장 21) 민족주의문학이라 했을 땐 民族文學이라는 뜻과는 다르다. 전자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의거한 것이며, 따라서 범민족문학의 하위개념에 속한다. 22) 鄭寅燮 朝鮮文壇에 呼訴함, 朝鮮日報 1931. 1. 3-15 - 16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言語 生活狀態 習俗등 가 消滅되기까지는 民族的結 紐는 絕對的이다. 差異 23) 李光洙의 이러한 주장은 다음 두가지 점에서 비판될 수 있다. 그 하나는 비록 논리 이전의 心情的 상태이기는 하나 계급사상의 세계적 연대성을 민족주의와 동위개념으로 둘 수 없다는 태도가 견지되어 있다. 즉 李光洙에 있어서의 민족주의문학은 상위개념이 며 그 하위개념 속에 프로문학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韓 國의 프로문학이 日本 프로문학의 支部的 상태의 측면이 있었다 는 사실, 또 中野重治의 비나리는 品川驛을 두고 林和 등이 同志愛的 착각을 일으켰다는 사실 등의 허망성과 관련된다.24)과 연 문학이나 사상이 민족을 초월할 수 있는가를 이 시대에는 일단 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상위개념으로서의 민족주의 문 학을 내세운 李光洙의 견해는 고려될 수 있다. 둘째로 그러면 실 천적인 면에서 李光洙의 이러한 朝鮮主義가 현상옹호주의에 빠져 들어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 문 학사상의 뿌리 없는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 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 문학 역시 설사 상위개념으로 그 것을 설정했다 할지라도 現象追隨主義的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토착 브르조아지의 日帝와의 결탁을 수락하는 것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현상추수주의가 문제성을 띠는 것은 당시의 植民地政策에 이바지하는 측면을 종국에는 내 포하게 된다는 사실에 연유된다. 植民地 기간의 傾斜가 길어질수 록 이 점이 선명해지며, 마침내는 皇道文學에 야합한 것은 李光沫 자신이었던 것이다.25) 23) 李光洙 余의 作家的 態度, 李光洙全集 16卷 p.195 三中堂 24) 金允植 林和硏究, 韓國近代文藝批評史硏究 附錄 참조 25) 林鍾國 親日文學論, 참조 平和出版社 - 168 -
4. 現代文學 이른 바 折衷派는 梁柱東에 의해 주장된 것이다. 민족주의와 계 급주의를 等位槪念으로 보고 이를 절충하려는 태도를 지닌 절충 파는 그것이 얼마나 소박한 추상론에 불과하였던가를 우리는 新幹會해체과정에서 선명히 엿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 절충 파의 이론은 다분히 그 철학이 없다는 현상론으로 귀착된다. 실상 이보다는 海外文學派와 프로문학의 대립이 훨씬 중요성을 띤다. 세칭 해외문학파란 1927년 東京유학생 중심으로 서울에서 海外 文學 이라는 문예지를 발간함으로써 발단된다.26) 그 주요인원은 孫宇聲金晋燮李瑄根李軒求鄭寅燮金珖燮徐 恒錫張起悌金翰容咸逸敦李炳虎咸大勳 등이며 이들은 異河潤 외국문학을 대학에서 전공한 자들이다. 이들이 귀국하여 본격적으 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30년 이후로 볼 수 있으며 이들의 성격 은 딜레탕티즘 혹은 문화적 敎養主義로 규정된다. 그들 대부분이 신문사 문화부를 장악하여 세련된 문화의 안목을 지닌 편집인의 劇藝術硏究會(1931)등에 가담하여 아마 튜어리즘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 詩文學(1930) 文藝 月刊 (1931)등 서정시운동에 가담했다는 것 등등 관심의 확대 성격을 띠었다는 점, 에서 그 교양주의를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해외 문학파로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외국문학을 전공한 것으 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문성을 발휘하지 못한 사실을 지 적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 두가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자신들의 솔직한 고백대로 西歐의 근대문학에 조예가 없 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당시 문단의 지적 미숙성을 들 수가 있다. 그들은 외국문학쪽보다 韓國文壇에의 참여를 목적으로 했던 것이고 따라서 관심의 확대가 따르지 않을 수 없었고, 이와 반비 26) 金允植 海外文學派攷, 蓮圃 異河潤先生華甲論文集 참조 - 169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례하여 어느 한 분야를 심화시킬 수가 없었다. 이러한 딜레탕티즘 이 저널리즘을 장악하면서 커다란 세력권을 형성하게 되자 위협 을 느낀 것은 프로문학쪽이었다. 林和와 李軒求와의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林和의 공격은 해외문학파가 브르조아문학파라는 점에 있었다. 쁘띠 브르조아 인텔리 그룹이라 공격한 林和에 반론을 제 기한 李軒求의 논점은 문화유산의 다양성에 있었다. 이 논쟁에서 주목되는 것은 해외문학파가 종래의 민족주의문학파와 그 이데올 로기의 기반을 같이 한다는 점, 그리고 이 시대가 프로문학 퇴조 를 앞둔 과도기적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5) 30年代 文學의 應戰力 ㄱ. 轉形期와 文壇의 再編成 1931년에 일어난 東北事變은 天皇制 軍國主義로서의 日本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음을 뜻하며, 이를 계기로 中 日戰爭(1937) 太平 祥戰爭에로 치닫는 파시즘의 傾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세계 공황이 파급되었을 때 이를 침략을 통해 타개키 위해 소위 東北事 變을 일으키고 1932년 滿洲는 關東軍 지배하에 놓이며 공산당의 전향이 잇따르고 日本 국내에 있어서의 자유주의적 사상단체가 탄 압을 면치 못하며, NAPF(KOPF)의 해산을 몰고 왔다.27) 천황기 관설파기(1935), 2.26사건(1936)등의 강경파시즘은 자유주의 문 화 옹호문제와 표리의 관계에 놓인다. 이 자유주의의 위협은 西歐 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으로서, 독일, 이태리의 파시즘의 반달리즘의 위협 아래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자유지식인들의 문화옹호국제 작가대회 (1935)등이 결성되고, 불안사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세계적 불안사조와 파시즘의 대두라는 조건과, 이에 연하 27) 長谷川泉 前揭書 - 170 -
4. 現代文學 는 日本의 植民地政策이 韓國에 있어서는 新幹會해체를 비롯 治安維持法 강화와 함께 KAPF 일차검거로 나타나고, 이어서 全 州事件으로 확대되고, 형식상으로만 존속한 KAPF해산이 초래된 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카프문인들은 전향 혹은 위장전환으로 변 모된다. 이 객관적 정세의 악화는 韓國文學의 새로운 응전력을 모색하 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민족주의문학이 프로레타리아문학 이 데올로기에 의해 對他意識化에서 발단된 것이고 이 두 이데올로 기의 대립 갈등은 일종의 변증법적 지양의 의미를 띨 수가 있었으 나, 이미 프로문학이 탄압에 의해 표면적 모습이 사라질 때 민족 주의문학 역시 자동적으로 그 의미를 상실하기에 이른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문단의 재편성을 불가피하게 만든 다. 그 새로운 측면을 項目化해 보면 순문학적 경향, 역사물, 농민 소설, 모더니즘, 카프전향자들의 자기고발적인 모랄론, 그리고 리 얼리즘의 방법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ㄴ. 純粹文學의 擡頭와 그 意義 보통 순문학 혹은 순수문학이라 말할 때 韓國에서는 시전문지 詩文學(1930)에서부터로 보고 있다. 이 잡지는 3호로 종 간 되었다. 朴龍喆金永郞異河潤鄭芝溶 등이 동인으로 활동 28) 한 이 잡지의 성격은 창간호 편집후기에서 엿볼 수 있다. 우리는 詩를 살로 새기고 피로 쓰듯 쓰고야 만다. 우리의 詩는 우리의 살과 피의 맺힘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詩는 지나는 걸음에 슬적 읽어치워지기를 바라지 못하고 우리의 詩는 한말 를 求한다. 이것이 오직 하나 우리의 傲慢한 宜言이 로 외여지기 趙演鉉 韓國現代文學史, 人間社 28) 白鐵 朝鮮新文學思潮史, 現代篇 白楊堂 - 17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다. 민족의 言語가 발달의 어느 정도에 이르면 國語로서의 존 재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文學의 형태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文 學의 成立은 그 民族의 言語를 完成시키는 길이다. 29) 이 선언에서 보듯 詩는 言語의 肉化라는 점, 오직 言語로만 쓴 다는 것, 그리고 詩로 인해 그 민족의 言語를 완성시킨다는 것등 은 한 마디로 언어의 창조라는 측면으로 집약된다. 오늘날 안목으 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러한 주장이 당시로서는 지극히 傲慢 한 宣言 으로 되었던 이유 속에 순수문학의 시대적 역사적 제약 성의 의미가 놓여 있다. 이 사정은 20년대 중반 이후를 풍미한 프 로詩를 전제로 했을 때 비로소 그 의의를 찾아낼 수 있다. 프로詩 의 과도한 政論性에 의해 분노와 선전을 동반한 전투적 이데올로 기 일변도에 대한 대립의식으로 詩文學이 출발되었다는 것이 그 시대적 이유이다. 물을 것도 없이 프로詩와 같이 목적의식의 詩도 엄연히 詩로서 존재할 수 있고 따라서 그 존재의의를 갖는 다. 즉 프로詩를 非詩라든가 선전삐라라고 몰아세울 수 없다. 그 것이 詩냐 非詩냐의 판가름은 그 민족의 역사적 비견이 결정하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문학은 다른 예술과는 달라서 언어가 지닌 역사성과 사회성에서 분리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객 관적으로 볼 때도 詩文學파의 순수시에 대한 견해도 한 일면 적 사실에 불과한 것이다. 프로문학에 대한 반동으로 제기된 것에 의의가 있는 詩文學 파로 대표되는 순수문학은 詩에 국한되었다는 점, 그 詩는 言語 의 창조에 있으며 따라서 脫이데올로기에 놓인다는 것으로 요약 될 수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정시의 선택을 의미하며, 그 서정시는 본질적으로 他를 의식하지 않는 개인의 측면이며. 29) 詩文學 창간호 後記 - 172 -
4. 現代文學 음향을 통한 魂의 직접적 충격에 놓인다. 金永郞의 대표작 四 行小曲七首 ( 詩文學 창간호)가 이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뵈지도 않는 입김의 가는 실마리 새파란 하늘 끝에 오름과 같이 대숲의 숨은 마음 기혀 찾으려 삶은 오로지 바늘끝같이 ( 四行小曲 첫首)30) 이 詩에서 보듯 음향효과와 언어의 유동성이 전부이며 他의 의 식이 철저히 배격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이 시문학파의 계층적 이데올로기가 토착 브르조아지라는 점은 깊은 성찰을 요한다.31) 소위 카프와 격렬히 대립했던 海外文學派가 이들과 그 계층적 이 데올로기를 같이 했고. 詩文學이후의 文藝月刊(1931)에 대거 참여하는 사실로도 이 점이 확인된다. 한편 객관적 정세 악화와 더불어 散文의 영역에서도 순문학이 큰 세력으로 재편성된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이는 이른 바 九人會로써 대표된다. 1933년 李鍾鳴金幽影李泰俊李無影 李孝石柳致眞金起林鄭芝溶趙容萬 등 9인으로 조직 된 친목 단체이며, 후에는 朴泰遠李箱朴八陽金裕貞金換泰 등이 가 담된다. 당시의 한 지적에 의하면 九人會의 無性格 이 거론 32) 되어 있거니와, 이 멤버 속에는 다양하게 시인 소설가 극작가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대개가 당시로서는 문단의 중견 실력파라는 공 30) 詩文學창간호 p.7 31) 그것은 어차피 文藝社會學의 理論이 요청된다는 뜻이다. 32) 白鐵 邪惡한 藝苑의 雰圍氣, 東亞日報 1933.10.1. - 17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통된 특질을 갖고 있다. 이 중 소설가로는 李泰俊 李孝石을 일단 검토해 둘 필요가 있다. 도시와 유령(1928)으로 문단에 등장한 이래 兪鎭 午와 더불어 同伴者 작가로 활동하였고, 이 무렵의 대표작은 露領 近海(1931)를 꼽을 수 있다. 동반자 작가란 카프에 가담하지는 李孝石은 않았으나, 그 이념에 동조하는 작품경향을 띤 작가를 지칭한다. 그가 동반자적 경향을 청산하고 순문학적 작가로 전향한 것은 豚(1933)이라는 단편에서부터이며, D.H.로오렌스에 경도되어 粉女(1936), 메밀꽃 필 무렵(1936), 花粉(1939)등 많은 장 단편을 발표하였다. 돼지의 교접 행위를 통해 잠재의식 속에 내재 해 있는 인간의 性的 본능을 다룬 豚을 위시하여 粉女등을 통 해 보여주는 그의 작가적 본질은 소위 섹스문제에 일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섹스문제가 로렌스에서처럼 생명의식으로 승화되기보 다는 花粉에서 보여주듯 맹목적 동물성에 머물고 만 것이다. 이 점은 부질없는 그의 美文的 文體와 밀접히 관련된다. 植民地 지식인이 이런 맹랑한 美文과 性的 맹목성에 함몰되었다는 것은 散文의 배반과 다름없고 따라서 이를 두고 순문학이라 한다면 거 기에는 마땅히 비판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33) 한편 이 순문학 범주에 드는 李泰俊의 경우는 애상적 무드를 띤 소멸의 美學을 안고 있다. 봉건적 풍속과 植民地 수탈정책이 라는 二重의 重荷를 감당한 폐쇄사회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아 무런 의지도 제출하지 못하는 패배주의적인 인물을 즐겨 그리는 이 작가의 기질은 다분히 결벽주의 혹은 귀족취미에 속한다. 골 동품적인 취미를 본질로 하는 이 작가에게서 우리는 두개의 미덕 을 발견할 수는 있다. 그 하나는 不遇先生 福德房 孫巨 33) 鄭明煥 李孝石論, 創作과 批評 3권 4-5호 참조 - 174 -
4. 現代文學 富 등에서 나타나는 소멸되어 가는 韓國的 인간상을 藝道의 차원 으로 포착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李秉岐 鄭芝溶 등의 기질과 동질적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앞에서 적은 소위 결 벽주의를 들 수 있다. 이 결벽주의는 그가 구사한 문체와 밀접히 관계된다. 鄭芝溶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언어의 절약, 알맞는 언어 선택은 단편소설의 예술적 측면을 가능케 한 점이 지적될 수 있다. 달밤을 들 수 있다. 이 언어에의 지대한 관 심은 필경 그로 하여금 文章講話라는 저서를 낳게 하였고 그 가 주간한 문예지의 명칭을 文章이라고 결정할 수 있게 한 것 그 대표적인 예로 이다. 그런데, 그 언어에 대한 종교적 신앙이 소위 朝鮮語라는 데 그의 중요성이 있다. 이렇게 보아온다면 李泰俊의 소설은 형식주 의로 규정될 수가 있을 것이다. 해방 후 그가 문학보다 朝鮮語의 守護에 주력했다고 말한 것은 어느정도 인정될 수 있는 일이다.34) 이 韓國的인 소멸의 미학의 배경에는 또한 30년대에 크게 신장 한 한글운동과 고전 탐구열이 놓여 있다는 점, 민족주의 문학의 이데올로기에 이어진 역사소설과도 또한 연결된다. ㄷ. 農村文學의 樣相 韓國에 있어서의 日帝의 植民地 수탈 곧 궁핍화현상은 1920년 대에 이미 격심하여 수많은 小作爭議를 일으켰고 끝내 滿洲, 間 島, 日本 등에로의 유랑민의 증가를 드러 내었었으며 1930년 총 인구 2천백만 중 도시 인구가 5.6% 농촌인구가 94.4%를 차지하 고 있었고, 沈熏의 常綠樹가 발표된 1935년의 경우엔 도시 인구 7.1% 농촌 인구 92.9%를 보여 준다. 이 압도적인 농촌 문제 와 관련 1930년을 전후하여 일부 지식층에서 문맹 퇴치운동 혹은 브나로드(민중 속으로)운동을 전개한다. 김현 韓國文學史, 民音社 34) 金允植 - 175 - 아는 것이 힘, 배워야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조선일보가, 브나로드운동을 1931 년 동아일보가 각각 전개한 바 있는데 이 운동은 결국 젊은 산다 는 구호를 1926년 학생층의 방학을 이용한 한글강습회와 연결된다. 소위 농촌계몽운 동이라는 것이 이러한 시대적 의미에서 빚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지식층의 의무감에 의한 위로부터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제약성이 주어졌다. 이 농촌계몽은 농민이 待期階層이 아니라 엄연히 생활계층이라는 점에서 그 한계가 놓인다. 소설에 있어서 이 농촌계몽의 문제가 작품으로 나타난 것은 브 동아일보에 연재된 李光洙의 흙 (1932)을 먼저 들 수 있다. 작품 흙은 브나로드운동의 허망 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한 예로 삼을 수 있다. 흙을 검토한 나로드운동의 시범작으로 다면 전형적인 삼각연애소설을 알아낼 수 있고 그 소설적 흥미의 촛점이 도시의 부잣집 딸 윤정선 쪽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허숭과 시골 처녀 유순과의 관계는 다만 도시적인 것의 부각에 공 헌하는 한 요소에 불과한 것이라고 본다면, 바로 이러한 플로트의 설정 자체가 지식층의 어설픈 농촌계몽의 이데올로기상의 헛점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비하면 沈熏의 常綠樹는 보다 농촌 계몽 소설에 접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소설적 성공은 崔容 信이라는 모델이 후광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가 있다. 그 뒤에는 또한 聖書朝鮮誌의 金敎臣 등의 속죄양의식 에 연결된다.35) 그러나 이 작품도 엄밀하게 따지면 농민의 자기 방위의식을 극복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실상 常綠樹에 있 어서 주인공이 농민에 어느 정도 밀착될 수 있은 것은 주인공이 여자라는 것, 基督敎의 배경 그리고 사랑과 농촌운동의 갈등을 보 인 점에 있는 것일 뿐 그 이상의 가능성을 넘어서지 못했다. 李箕 35) 前揭書 - 176 -
4. 現代文學 永의 장편 故鄕(1933)은 농촌소재로서의 농촌문학의 단계를 넘어선 농민문학에 다소 접근한 유일한 예외이다. 형준이라는 東 京유학생이 농촌인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면서 야학운동, 조 합운동, 소작인운동을 주도적으로 벌리는 이 작품은 주인공이 농 민이 되어 다른 농민들과 일치된 자리에 섰다는 점으로 하여 여타 의 농촌소설들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주인공 형준이 東京留學 인 텔리라는 점에서, 그리고 농민에 동화되기는 하였으나 지도자적인 위에서의 계몽이라는 점으로 하여 농민의식을 體認한 것으로 보 기 어렵다는 점이 그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36) 이상과 같은 농촌소설은 농촌을 소재로 한 지식인 작가의 주관 적 계몽소설임을 확인할 수 있어 진정한 농민소설의 경지에 이르 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30년대 많이 씌어진 역사소설 端宗哀史 李舜臣 元曉大師, 金東 仁의 大首陽, 朴鍾和의 錦杉의 피등의 역사소설은 진정한 과 대응된다. 李光洙의 역사적 사실의 문학적 형상화의 차원에는 훨씬 미달한 심정적 차원 에 머문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상에 대한 선연한 애착이 작가정신 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洪命熹의 林巨正이 보다 본질적으로 된다. 즉 역사적 소재를 비판할 능력과 풍속 파악력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할 맨 한갓 소재에 대한 주관 적 해석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농촌소설에서 이 한계점은 농 민의 자기방위본능에 직결되어 있다. 외부 혹은 위에서의 계몽이 이 농민의 자기 방위본능에 자리하지 못한다면 한갓 분노의 대상 으로 전락되고 만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문학적 방법을 우리는 金裕貞의 소설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땡볕, 봄봄, 금 산골등의 세계는 작가와 거리감을 소멸시키는 따는 콩밭, 36) 金允植 韓國文學史論攷, 前揭書 제2부 6 참조 - 177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유모아의 수법과 韓國古典小說의 수사학의 문맥으로 하여 농민의 세계를 포착 형상화한 유일한 예에 속한다.37) 설사 그것이 소멸 의 미학에 속한다 할지라도 문학에서는 보다 확실한 응전력의 하 나로 평가된다. 한편 李無影의 自傳的 農民小說도 그 몇 작품은 기억될 수가 있다. ㄹ.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1930년대 초엽 프로문학의 퇴조와 순수문학의 대두가 문단 재 편성을 불가피하게 했음은 앞에서 지적하였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카프소속 문인들이 전향에 임하면서 모랄의 문제에 스스로 고뇌 하는 과정에서 반영된다. 金南天의 自己告發論, 李源朝의 모랄論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미 대두된 순수문학과 카프붕괴 의 문학적 재건을 종합 통일 지양하려는 자리에서 西歐의 근대문 학 도입의 몫을 맡은 비평가로 崔載瑞의 主知主義文學論을 들 수 現代 主知主義의 文學理論建設-英國評壇의 主 流(1934.8), 批評과 科學(1934.8)등을 기점하여 소위 西歐 있다. 崔載瑞의 근대문학의 새로운 면모와 그 문화 및 문학의 재건이 본질적으로 소개되었으며, 金起林 李敭河 李源朝 등의 전공자들이 이에 뒤 따랐다. 海外文學派가 이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딜레탕 티즘과는 다른 측면이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主知主義文學論이란 주로 영문학쪽의 이론으로서, 그 상위개념 은 新古典主義이며, 하위개념 속엔 이미지즘이 놓인다. 낭만주의 적 세계관을 극복한 T.E.흄의 불연속적 세계관은 T.S.엘리오트, I.A.리챠즈, H.리드 등에 의해 구체적으로 전개되었으며 詩에 있 어서 그 영향이 金起林 鄭芝溶 등에 의해 나타났다.38) 그들의 Ⅱ 37) 申東旭 韓國現代文學論 의 4 참조, 博英社 38) 崔載瑞 文學과 知性, 人文社 참조 - 178 -
4. 現代文學 詩는 知的 方法과 視覺的 이미져리, 共感覺 등을 구사하는 것이며 그 성공적인 예를 鄭芝溶에서, 그 실패의 예를 金起林의 詩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韓國에서는 모더니즘이라 부른다. 金起林의 장시 氣象圖(1936), 鄭芝溶의 詩集(1936)등은 그 성과이며, 韓國詩의 한 단계 근대시에 접근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모더 니즘이 脫이데올로기에 속하는 풍자와 윗트와 언어감도에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문학적으로 평가된다. 한편 李箱으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 내지 신심리주의의 문학방 법을 또한 문제로 삼을 수 있다. 李箱은 鄭芝溶의 도움으로 가 톨릭 靑年 (1933)誌에서 출발하여 매우 기발한 작품을 써서 문 단의 화제를 모았는데 연작시 꼽을 수 있다.39) 烏瞰圖(1934)를 그 대표작으로 그의 방법은 언어가 지닌 역사성과 사회성 곧 日 常性의 차단에서 독특한 순수창조의 세계를 여는데 있다. 한편 三四文學에서도 초현실주의 방법이 시도되었다. 이상과 같은 여러 방법들을 통털어 그 세계관 위에서 볼 때 모 더니즘으로 규정할 수가 있다. 인간의 본질이 혼자 있음에 있 다는 것, 인간이 날 때부터 자기 외의 인간들과는 관계를 이를 수 없고, 인간 존재의 목표와 기원을 원리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세계관에 바탕을 둔 예술을 모더 니즘이라 할 수 있고40) 인간의 현존재가 被投性임을 주장한 하이덱거 칠학에 연결되는 이 세계 관은 브르조아사회의 예술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점 을 李箱의 小說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植民地의 폐쇄된 사회에서 의 한 지식인의 실존이 날개, 終生記등에서 보듯 골방의 식과 만남의 불가능성에 놓여 있음은 그 예술적 기반이 모더니즘 39) 金允植 韓國近代作家論攷, 李箱論 참조 40) G. Lukács Die Gegemvartsbedentung des Kritischen Realismus, Essay? über Realismus, Luchterhand S. 482. ff. - 179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의 전형을 드러내는 것으로 평가된다. 날개이기는 커녕 李箱이 결 국 두더지로 화해 버린 것은 날카롭게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朴泰 遠의 川邊風景, 仇甫氏의 一日도 이 계보에 든다. 41) 이와는 달리 우리는 리얼리즘에 입각한 예술을 들 수 있다. 그 세계관의 기반은 모더니즘의 그것과 정반대에 놓인다. 즉, 인간 의 실존이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서 규정될 수 있다는 입장에 설 때 그 예술을 리얼리즘이라 할 수 있다면, 이 조건에 가장 합당 한 작가로 우리는 廉想渉의 三代(1932), 蔡萬植의 太平天下 (1937)를 들 수 있다. 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소설로서의 파악이 이러한 리얼리즘의 관점에 설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한다면 植民地 韓國社會의 응전력과 현실의 예술적 달성은 이에서 비로소 가능했다고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三代나 太平天 下라 는 이 두 장편은 각각 祖父(舊韓末), 父(開化期), 子(1930년대)의 세 世代를 가족사적인 관점에서 그린 것이며, 또한 내만 빼고는 다 망해라 라는 중산층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전자는 보수주의적 입장에서, 후자는 진보주의적 입장에서 30년대 韓國社 會의 구조적 모순을 가장 확실하게 포착하고 있다. 廉想涉은 歲前 에서도 그랬지만 萬 三代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편 견없이 통찰하고 있으며, 蔡萬植에 있어서는 진보에의 의지가 세련 된 풍자 속에서 생생히 포착되어 있다.42) 개인과 사회의 인식이 비 로소 가능하게 된 30년대 중기 이후의 韓國文學은 이로 인해 압도 적으로 산문계 예술이 그 주류에 놓일 수가 있었다. 6) 서릿발과 어둠속에 익은 思想 中 日戰爭(1937)을 계기로 더욱 강경해진 日本 帝國主義는 김현 韓國文學史, 前揭書 41) 金允植 42) 上揭書 - 180 -
4. 現代文學 文章 人文 評論의 폐간을 몰고 왔고, 日本語로만 써야 되는 國民文學 1940년에 創氏改名 실시, 朝鮮 東亞日報 폐간, (1941. 11)이 창간된다. 1941년 12월 對美 선전포고, 1943년엔 朝鮮文人報國會의 결성에 이른다. 이미 이 상황에서는 大東亞 共榮圈에 입각한 皇道文學으로서의 新體制文學만이 남을 뿐 韓國 文學은 잠정적으로 소멸된다. 흔히 이를 암흑기라 부르기도 한다. 內鮮一體라는 정책에 의해 韓國語 말살에 직면했을 때, 그가 계속 작가이기 위해서는 붓을 끊든가, 親日文學43)에 임하는 두가지 길 文章지와 人文評論이 아직도 대립하고 있 던 1930년에서 1940년까지 韓國文學은 암흑기를 앞두고 兪鎭午 밖에 없게 된다. 林和등과 金東里 중심의 新人層간에 격렬한 世代論爭이 벌어졌거 니와, 그 표면상의 논점은 作家精神의 純粹 非純粹에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朝鮮的인 것의 옹호와, 시대적인 것의 수용간의 갈등 으로 볼 수가 있다.44) 그 시대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던 人文評 論 파의 崔載瑞가 皇道文學의 이론분자로 등장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이 자리에서, 李光洙(香山光郞)를 회장으로 하는 朝鮮文人報 國會 의 간부들 이름을 나열한다든가, 親日文學의 양상을 거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면 차디찬 장수산 겨울 한밤내 45) 를 지키려는 의지와, 서릿발의 思想이 이 시대를 비추이고 있기 때문이다. 三角山이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고 한강물이 용솟음 치는 환상과, 뱃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어 종로 네거리를 울리겠다 43) 이 용어는 세가지로 나눠 볼 수가 있다. 하나는 소위 新體制文學에의 野合 을 뜻하고, 둘째는 日本에 대한 이해와 애착을 뜻할 수 있고, 세째는 日語로 작품을 쓴 것을 뜻할 수 있다. 金大植 韓國作家의 日本語作品, 文學思想 통권 24호 참조. 44) 金允植 韓國近代文藝批評史硏究 제2부 6장 참조 45) 鄭芝溶 白鹿潭, 長壽山 p.12. 文章社 오오 견듸랸다 차고 凡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長壽山 속 겨울 한밤내- - 181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는 환상46)속에 죽어간 文人이 엄연히 있기 때문이다. 매운 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끝난 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서다 어데다 무릎을 끓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47) 이 詩는 陸史 李源祿의 絕頂전문이다. 이 서릿발의 사상이 수사학의 차원이 아님을 안다는 것은 문학을 안다는 뜻과 동질적 일 수가 있다. 그것은 身命을 바친 자의 노래인 것이고 絕命地의 逆說이다. 한편, 植民地時代 韓國詩의 여성적 偏向性48)을 西歐的 교양 체험으로 극복한 尹東柱의 어둠에 대한 인식에서 우리는 문 학이 시대에 대한 증언이면서 동시에 역사의 先取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가장 섬세한 생명의 인 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 인식때문에 문학이나 예술의 선택이 부끄러움의 인식으로 향하는 것이다. 46) 沈熏 그날이 오면, 이 작품은 C.M. Bowra Poetry and Politics Cambridge Univ. p.34속에 세계적 저항시의 하나로 거론되어 있다. 47) 李陸史 曠野 pp.26-27, 螢雪出版社 金允植 韓國近代作家論攷 前揭書 중 李 陸史論 絕命地의 꽃 참조 48) 이 용어에 대해서는 金允植 近代韓國文學硏究 10章 참조 - 182 -
4. 現代文學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王朝의 遺物이기에 이다지도 복될까 나는 나의 懺悔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滿二十年 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래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懺悔錄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1942.1.24)49) 이 詩는 尹東柱의 懺悔錄의 전문이거니와, 이미 이 시기에 까지 이르렀을 때는 文學보다는 言語, 즉 韓國文學의 死守보다 선 행하는 것이 韓國語의 死守라는 명제가 기본항으로 놓인다. 다소 49) 尹東柱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pp. 56-57 金允植 輯國近代作家論攷 중 尹東 어둠 속에 익은 思想 참조 柱論 - 183 -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혼란이 있기는 했으나 乙酉解放(1945.8.15)이후의 현실을 포착할 수 있었던 문학적 능력은 이 어둠 속에서도 無名火로 잠재적 능력 이 키워졌던 그 역량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金允値 - 1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