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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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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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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 복지 Issue & Focus 이 글은 시간에 대한 (저출산)정책적 관점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주 출산연령층(20~49세)의 경활동 특성에 따른 가사노동시간 3) 의 차이를 분석하고 정책적 함의를 도출하고자 함 우선 가사노동시간의 성별 차이를 살펴보고, 여성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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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연구 2002-19 동북아 한민족 과학기술자를 활용한 남북한 과학기술협력 방안 연구 The S&T Cooperation with North Korea through the Korean Scientist Network in North-East Asia 이 춘 근 배 영 자 과학기술정책연구원 SCIENCE & TECHNOLOGY POLICY INSTITUTE

서 언 지난 10여 년 간,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질서가 크게 변화하였다. 한 소수교와 한중수교로 체제와 이념을 넘어선 경제협력이 시작되었고, 최 근에는 여러 가지 난제에도 불구하고 북일 대화가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 동안 지역 협력의 최대 장애가 되었던 북한도 변화를 보여, 남 북한 과학기술협력이 태동,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 안에서 남북한을 잘 이해하는 동북아 한민족 과학기술자들이 새롭 게 부각되었다. 이들은 장기간에 걸쳐 상당히 심도 깊고 다양한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을 추진해 왔다. 따라서, 동북아 질서 재편과 함께 우리와 상당히 가까워진 지역 내 한민족 과학기술자들을 활용해 현재보다 더욱 효과적인 남북한 과학기술협력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시각 하에서 재중, 재일동포들의 대북한 과학기술협 력 동향을 비교, 분석하고, 이를 근거로 이들을 포함한 새로운 차원의 남 북한 과학기술협력 방안들을 모색해 본 것이다. 본 연구자들은 이 과정 에서 경험이 풍부한 재중, 재일동포들을 심층 면담하고 남북한 당사자들 과의 공동세미나를 통해 체화된 경험을 습득하였다. 본 연구자들은 연구 수행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준 과학기술부와 통일 부 관계자들, 성실하게 남북한 공동세미나를 주선해 준 재일본조선인과 학기술협회 황철홍 회장과 회원들,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회원들, 북한 과학원 홍종휘 국장과 관계자들, 한국자생식물이용기술개발사업단 과 과학기술정보연구원 관계자들, 자료 정리를 도와준 강호제, 김상준 군 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 있다. 끝으로 본 연구보고서에 수록된 내용은 모두 연구자들의 견해이며, 연구원의 공식 견해가 아님을 밝혀 둔다. 2002년 11월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원 장 최 영 락

i 목 차 요 약 1 제1장 서 론 25 제1절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25 제2절 연구 방법, 내용 및 범위 28 제 2 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32 제1절 재중동포들의 이주 역사와 특성 33 제2절 재일동포들의 이주 역사와 특성 40 제3절 동북아 질서 재편과 한민족 위상 변화 53 제4절 동북아 한민족 사회 비교 56 제 3 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과학기술 역량 60 제1절 재중 동포들의 과학기술 역량 60 제2절 재일동포들의 과학기술역량 71 제3절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과학기술 역량 비교 86 제 4 장 동북아 한민족들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 89 제1절 북한의 대외 과학기술협력 정책과 해외동포 89 제2절 재중동포들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 92 제3절 재일동포들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 102 제4절 동북아 한민족들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 비교 132

ii 제 5 장 동북아 한민족과학자들을 활용한 남북한 과학기술협력 135 제1절 새로운 시도 135 제2절 요약 및 결론 153 제3절 정책적 시사점 155 참 고 문 헌 161 부 록 (부록 1) 중앙과학기술통보사 소개 자료 167 (부록 2) 통일과학기술심포지움 북한측 발표자료 175 1. 중앙과학기술통보사의 정보봉사 활동에 대하여 175 2. 과학기술정보봉사체계 광명 179 3. 유용성분에 대한 화학적 연구 185 4. 우리 나라 식물지 작성을 위한 연구에서 이룩된 성과와 제기되는 과업 188 (부록 3) 재일동포 초청 전문가 워크숍 194 1. 북한의 고분자화학공업 (주현돈) 194 2. 생물농학분야에서의 대북한 협력 경험 (박준영) 200 3. 고온초전도재료 분야에서의 대북한 공동연구 경험 (황철홍) 207 (부록 4) 科 學 技 術 에 게재된 주현돈 박사의 글 과학원 창립 50주년에 즈음하여 216 (부록 5) 인민대학습당이 총련에 보낸 편지 과학기술도서의 리용정형에 대하여 226 Summary 233 Contents 239

iii 표 목 차 <표 1-1> 주요 방문, 접촉 기관 29 <표 2-1> 지역별 한민족 동포 32 <표 2-2> 일본과 만주 지역으로의 한민족 이동(1910-1945) 35 <표 2-3> 간도지역의 한민족 인구 추이(1910-1944) 36 <표 2-4> 재중동포의 지역별 분포(1990년) 38 <표 2-5> 연변지역의 민족별 인구 분포(1953-1990) 39 <표 2-6> 1990년도 민족별 산업 구조(%) 40 <표 2-7> 해방 이전의 재일동포 거주자 변동 추이 41 <표 2-8> 전쟁 말기의 한민족 강제 연행자 수 42 <표 2-9> 해방 후 남한으로의 재일동포 귀국 상황 44 <표 2-10> 재일동포 규모 변화 추이 48 <표 2-11> 재일동포들의 본적지 분포 49 <표 2-12> 재일동포들의 북송 현황 50 <표 2-13> 재일동포들의 연도별 취업 분포 변화 52 <표 2-14> 동북아 한민족들의 사회적 특성 비교 57 <표 3-1> 연변 조선족학교 실태(1993년) 61 <표 3-2> 연변대학의 최근 몇 년간 과학기술활동 추이 64 <표 3-3> 연변대학의 SCI와 EI 논문 투고 동향 65 <표 3-4>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회원의 지역별 분포 68 <표 3-5>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화원들의 소속기관 분포 68 <표 3-6>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회원들의 학위 취득 분포 69 <표 3-7> 재일동포 자녀들의 취학 현황(1988.4.1) 72 <표 3-8> 조선대학교 이공학부 교과과정 74

iv <표 3-9> 조선대학교 졸업생들의 박사학위 취득현황(1962-1985) 75 <표 3-10> 오사카경제법과대학의 학생수 변화 76 <표 3-11> 오사카경제법과대학의 교수 수 변화 76 <표 3-12> 오사카정보컴퓨터전문학교(OIC)의 학과 개편 78 <표 3-13> 재일본조선인과학기술협회의 전문위원회와 연구회 82 <표 3-14> 재일본조선인과학기술협회 학술보고회 발표 동향 83 <표 3-15> 조선대학과 오사카지부의 논문 발표 동향 84 <표 3-16> 재일본조선인과학기술협회 학술발표회 참가자 동향(%) 84 <표 3-17> 동북아 한민족들의 과학기술 역량 비교 86 <표 4-1> 중국에서 개최된 경제협력분야 남북한 학술발표회 100 <표 4-2> 중국에서 개최된 과학기술분야 남북한 학술발표회 101 <표 4-3> 성인 남자 북송교포의 직업 분포 105 <표 4-4> 재일본조선인과학기술협회의 화학분야 대북한 공동연구 107 <표 4-5> 정밀화학-조국과의 공동연구 사업보고서 주요 내용 109 <표 4-6> 재일본조선인과학기술협회의 생물농학분야 대북한 공동연구 110 <표 4-7> 재일본조선인과학기술협회의 재료반도체분야 대북한 공동연구 112 <표 4-8> 오사카경제법과대학의 대북한 공동연구 115 <표 4-9> 북한 철산 모나즈 광석의 성분 분석 수치 127 <표 4-10> 국제화학합영회사의 설비비와 기술료 투자 예측 127 <표 4-11> 일본에서 개최된 경제, 과학기술분야 남북한 학술발표회 130 <표 4-12> 동북아 한민족들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 비교 132 <표 5-1> 남북한 과학기술교류 활성화를 위한 해외동포초청 워크숍 138 <표 5-2> 통일과학기술심포지엄의 남한측 대표단 140 <표 5-3> 통일과학기술심포지엄의 북한측 대표단 141 <표 5-4> 통일과학기술심포지엄 발표 논문 142 <표 5-5> 북한 과학원 직속 연구소 145 <표 5-6> 북한 과학원 함흥분원 146 <표 5-7> 북한 과학원 생물분원 148

v <표 5-8> 북한 과학원 경공업분원 148 <표 5-9> 북한 과학원 석탄분원 149 <표 5-10> 북한 과학원 철도분원 149 <표 5-11> 북한 과학원 건설건재분원 150 <표 5-12> 북한 과학원 수산분원 150 <표 5-13> 북한 과학원의 기타 분원과 중요 부속기관 151 그림목차 <그림 1-1> 연구의 주요 내용과 구성 30 <그림 3-1>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의 조직 67 <그림 3-2>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회원들의 출생연도 분포 70 <그림 3-3> 재일본조선인과학기술협회의 연혁 80 <그림 3-4> 재일본조선인과학기술협회의 조직 81 <그림 5-1> 북한 과학원과 재일조선인과학기술협회의 이메일 경로 143 <그림 5-2> 중앙과학기술통보사의 조직 152

요약 1 요 약 1. 연구개요 및 방법 연구개요 지난 10여 년 간,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질서가 크게 변화하였음. 한소수교와 한중수교로 체제와 이념을 넘어선 경제협력이 시작되 었고, 최근에는 여러 가지 난제에도 불구하고 북일 대화가 지속적 으로 추진되고 있음. 그 동안 지역 협력의 최대 장애가 되었던 북한도 변화를 보이기 시 작하였고, 이 안에서 남북한 경제협력과 과학기술협력이 태동, 발전 하여 몇 건의 성공적인 사례를 도출하였음. 동북아 질서 재편 속에서 남북한을 잘 이해하는 동북아 한민족 과 학기술자들이 새롭게 부각되었음. 이들은 장기간에 걸쳐 상당히 심 도 깊고 다양한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을 추진해 왔음. 따라서, 동북아 질서 재편과 함께 우리와 상당히 가까워진 지역 내 한민족 과학기술자들을 활용해 현재보다 더욱 효과적인 남북한 과 학기술협력을 추진할 필요가 있음. 본 연구는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재중, 재일동포들의 대북한 과학 기술협력 동향을 비교, 분석하고, 이를 근거로 이들을 포함한 새로 운 차원의 남북한 과학기술협력 방안들을 모색해 본 것임.

2 연구방법 국가 간의 과학기술협력은 그 추진 주체별, 성격별로 상당히 다양 한 유형이 있고 상황에 따른 가변성도 크므로, 이론화 작업이나 방 법론 도출이 극히 어려운 실정임. 여기에 북한 연구의 특성상 직접 적으로 응용할 원전 자료가 극히 부족한 것도 큰 문제가 되고 있음.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가시적으로 드러난 동북아 한민족 과학기술 자들의 사회적 특성과 대북한 과학기술협력 동향을 유형별로 정리 하고, 이를 재중동포, 재일동포, 남한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으로 구분해 비교, 분석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음. 이와 함께, 동북아 한민족 과학기술자들을 포함한 남-북-해외동포 의 양자간, 3자간 과학기술협력과 공동심포지엄을 시도함으로서, 분석 결과의 타당성과 활용 가능성을 검증하였음. 국내 자료의 부족을 보완하고 보다 현실감 있는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북한과의 과학기술협력 경험이 풍부한 재중, 재일동포들을 심 층 면담하고 관련자료들을 입수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이들을 전문 가로 활용하였음. 연구범위 본 연구에서 사용한 동북아시아 는 일반적으로 한반도와 일본, 중 국의 동북삼성(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러시아 극동지역, 몽골 등을 광범위하게 지칭하는 말임.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재중동포와 재일동포에 치중하고 러시아 극 동지역과 몽골은 제외하였음. 러시아 극동지역과 몽골의 한민족 동

요약 3 포, 특히 과학기술자들의 분포가 적고 지역 내의 대북한 과학기술 협력도 거의 없기 때문임. 2.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우리 민족의 규모는 20세기 초의 2천만 정도에서 1995년의 7천3백 만으로 3.5배 이상 증가하였고, 이 중 7.2%에 해당하는 522만 명이 세계 140여 개 국에 분산되어 살고 있음. 본 연구의 주요 관심 영역인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등 동북삼성 위주의 중국과 동경,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각 지역에는 각 각 192만, 65만 정도의 한민족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음. 재중동포들의 이주 역사와 특성 재중동포 사회는 1840년경부터 이주를 시작해 역사가 길고 농경지 를 중심으로 생활해 해방 이후에도 정착율이 높으며 북한 출신이 많은 특성을 가지고 있음. 해방 이후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으로 고도의 자치를 누리면서 민족 문화와 민족교육을 발전시켜 왔고, 규모 면에서도 해외동포 중 가장 많은 190만 명 이상을 유지하고 있음. 그러나 최근의 동북아질서 재편과 함께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동포 사회가 급속히 와해되고, 남한 사회와 한족 사회로 동화되는 모습 을 보이고 있음.

4 동북아 한민족들의 사회적 특성 비교 구 분 재중동포 재일동포 이주 기간 장기(50-160년) 중기(50-90년) 이주 역사 집단 이주 조선 말기, 일제 초기 일제 말기 출신 지역 북한 위주 남한 위주 해방직전 규모 170만 236만 해방직후 귀국 높은 정착율(100만) 낮은 정착율(56만) 규모(1995년) 해외동포 중 1위(192만) 3위(65만) 법적 지위 중국인 외국인(영주권) 사회적 특성 민족 문화 유지, 발전 취약 정치적 특성 고도의 자치 억압(참정권, 사회보장, 직업선택 등 차별) 집단 거주지 연변조선족자치주 오사카, 동경 등 대도시 직업 농업, 1차산업 위주 서비스업 위주 대규모 이주 90년대 이주(20만) 5, 60년대 북송(10만) 최근 동향 남한과의 유대 강화 남북대화, 통일 강조 (조총련) 재일동포들의 이주 역사와 특성 재일동포들은 한일합방 이후 주로 이주해 역사가 짧고 하급노동에 종사해 해방 이후의 정착율이 낮으며 절대 다수가 남한 출신인 특 성을 가지고 있음. 해방 이후, 일본의 억압을 받으면서 외국인 신분으로 각종 차별을 받으며 민족의 단합과 민족교육을 유지해 왔음. 단, 민단계와 조총 련계가 대립하고 10만명 정도가 북송하기도 하였음.

요약 5 그러나 최근의 동북아질서 재편과 함께 동포 사회가 축소되고 일본 으로 귀화하는 청년들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음. 북한의 곤란으로 조총련계는 더욱 급속히 감소하고 있음. 동북아 질서 재편과 한민족 위상 변화 90년대 초반 이후 북한의 우호동맹국인 소련과 중국이 한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동북아 질서에 구조적인 변화가 발생하기 시 작하였음. 남북한간에도 1991년 말의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 력에 관한 합의서 채택과 2000년 6월의 남북정상을 통해 민족분단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공동 발전을 이루기 위한 기본 틀을 마련하였음. 이러한 대화와 교류의 진전은 동북아 지역에서 새로운 다자간 협력 을 모색케 하는 계기가 되었음. 북한도 신의주 특별행정구와 금강 산 관광특구 지정, 개성공단 육성, 남북한 철도 연결 등을 통해 이 러한 조류에 동참하고 있음. 9.11테러와 핵문제를 계기로 더욱 악화된 북미관계, 일본인 납치 문 제,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 등이 지역 내의 갈등 요인으로 남아 있으 나, 이 안에서도 동북아 국가 간의 경제교류 확대로 지역 내 상호의 존성이 증대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음. 지역 내 대화와 교류의 진전으로 재중동포, 재일동포들의 위상이 크게 부상하였음. 앞으로 북한을 포함한 다자간 협력이 추진될 경 우 이들이 중심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생각됨.

6 3.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과학기술역량 재중동포들의 과학기술 역량 재중동포들은 중국 정부의 민족 자치 허용과 지원으로 북한의 도움 없이 오랫동안 큰 규모의 민족교육과 민족 고급인력 양성을 추진할 수 있었음. 그러나 연변대학이 사범계 위주로 개편하고 지역 내의 과학기술 발 전이 지연되면서 이공계 교육이 크게 위축되고 말았음. 이 위에 교 육비와 연구비 투입이 낮고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세대간 단절까지 겹쳐 최근까지 우수한 연구성과가 잘 나오지 않고 있음.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등의 민족 과학기술단체도 회원 수는 많으나 결집력이 약하고 민족 고유의 연구 활동은 지극히 취약한 형편임. 재일동포들의 과학기술 역량 재일동포들은 일본 정부의 억압 속에서도 북한의 장기적인 교육비 지원과 자체 역량으로 상당한 규모의 민족교육과 민족 고급인력 양 성을 추진해 왔음.

요약 7 동북아 한민족들의 과학기술 역량 비교 구 분 재중동포 재일동포 민족 교육 국가 정책 국민교육, 우대조치 외국인교육, 억압 규 모 대규모(20만), 최근 축소 소규모(최대5만), 최근 축소(1.5만) 북한의 지원 거의 없음 장기적 지원(최근 축소) 대 학 수 민족대학 1개(연변대학) 민족대학 1개(조선대학) 민족 대학 동포 대학생 7,000명 이상(연변대학) 1,100명 정도(조선대학) 학과 분포 사범계 위주 이공계 취약 사범계, 인문사회계 위주 이공계 취약 교 육 비 취약, 최근 개선 취약 연구 성과 취약 취약 국가 정책 엄격 제한 불간섭 민족 과학 기술 단체 역 사 짧은 역사(1989년) 긴 역사(1958년, 1985년) 규 모 대규모(2,000여명), 단결력 취약 소규모(400여명), 단결력 우수 남북 지원 남한 지원(취약) 북한 지원(취약) 학술 활동 취약 활발, 최근 저하 지구 활동 취약 활발, 최근 저하 세 대 세대별 단절(문화대혁명) 청년세대로의 교체 그러나 이들 역시 최근 들어 민족교육 규모의 축소, 조선대학의 교 육비와 연구비 투입 저하, 이공계 학생 수 감소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음. 재일본조선인과학기술협회는 45년 정도의 오랜 역사와 세계 최고 수준인 일본의 과학기술 환경 속에서 활발한 분과 활동과 지구 활 동을 전개해 왔음. 단 이 협회도 최근 들어 청년 세대로의 교체와 함께 결집력과 재정 등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음.

8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에 미치는 영향 재중동포들은 민족 자체의 결집된 역량이 부족해 대북한 과학기술 협력을 추진하는데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고, 내륙 지역의 수준 높은 과학기술자들도 자발적으로 북한을 지원할만한 재정적 여유 를 가지고 있지 못함. 재일동포들은 동포 상공인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북송으로 형성된 친인척 관계, 자발적인 의지 등이 더해져 상당히 활발한 대북한 과 학기술협력을 추진할 수 있었음. 단, 재일동포들도 제한적인 동포 과학자 규모와 재정 능력 등으로 북한의 주력 분야인 중화학공업 전반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데는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음. 4. 동북아 한민족들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 북한의 대외 과학기술협력 정책과 해외동포 북한은 대외 과학기술협력에서 북한의 구체적 실정에 맞추는 원칙, 기술적 의존성을 없애고 자체의 과학기술 발전을 강화하는 원칙, 최신의 성과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소수 국가에 한정하지 않는 원칙 등을 고수하고 있음. 이러한 원칙에 따라 추진되는 대외 과학기술협력에는 과학기술위 원회를 설립해 상시 운영하는 형식과 일회성 협력을 통해 북한의 자원을 지원하는 형식의 2가지 주요 형식이 있음.

요약 9 이런 정책 하에서도 북한은 김일성의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 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는 구호 아래 일찍부터 해외동포 과학자들 과의 과학기술 협력을 강화해 왔음. 또한, 이들의 성장을 위해 상당한 경비를 지원하고, 우수 연구자들 은 북한 과학원의 겸임연구원으로 위촉하거나 각종 학위, 학직, 칭 호를 수여해 북한과 연계된 연구를 수행하도록 하였음. 최고 지도자들의 관심에 따라, 북한 과학원에 해외동포를 담당하는 2국을 설치하고 이들과의 연계를 강화해 나가고 있음. 북한의 각종 과학기술대회에 해외동포 과학자들이 초청되고 이들의 의견이 과 학기술 정책 수립에 비중 있게 반영됨. 재중동포들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 재중동포들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은 양국의 정부간 협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개인적으로 북한을 지원할 만한 동기와 자생력도 부족한 실정임. 따라서 민족 단체들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은 인력교류와 소규모 의 학술지 제공, 지역적 우세를 이용한 학술세미나가 대부분을 차 지하고 있음. 공동연구는 극히 부족한 실정임. 특히 북한과의 교류가 조선과학기술총연맹에 집중되어 있고, 북한 의 과학기술 연구를 주도하는 과학원과는 거의 교류를 추진하지 못 하고 있음. 현재 북한의 이광호 과학원장이 조선과학기술총연맹 회장을 겸임 하고 있으나 연맹에서는 직접적인 연구를 수행하지 않으므로 상호

10 교류에 뚜렷한 한계를 노출하고 있는 것임. 동북아 한민족들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 구 분 재중동포 재일동포 중개기관 정부간 협력에의 참여 직접 협력 지원체제 전담기구 정부간 협력위원회 해외동포 전담부서(2국) 연락체계 정부간 연락, 동포단체 연락망 미비 조총련과 직접 연락 과협과 직접 연락 자생력 자생적 대북지원 취약 자생적 대북지원 활발 협력 유형 협력주체 협회 주도, 대학 취약 대학, 협회 모두 활발 인력교류 공동연구 기술이전 학술지 지원 학술세미나 취약 (협회 차원의 년 1회 정도 북한 방문) 민족간 공동연구는 거의 없음 민족간 기술이전은 거의 없음 미흡, 협회차원의 지원 (연간 약 10종) 다수 (지리적, 교통 편리) 활발 (각 공동연구자별로 연 2회 이상 북한 방문) 수십 년에 걸쳐 상당히 다양한 공동연구 수행 수십년에 걸쳐 상당히 다양한 기술이전 수행 활발, 한책회와 대중적 활동 (수십만 권) 소수 (국교 미수립, 교통 불편) 성공 사례 극히 미흡 극히 풍부 북한의 대응 일상적 대우 우대 (국기훈장, 학위학직, 명예칭호) 재일동포들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 재일동포들은 스스로 상당한 열의와 자생력을 가지고 긴밀한 연락 체제와 전담기구를 통해 장기적인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을 추진하 였음. 이에 따라, 인력교류와 공동연구, 기술이전, 학술지 제공 등에서 타

요약 11 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공동연구 경험과 인맥을 구축하고 있고, 그 동안 상당한 성공사례를 도출하였음. 협력 대상도 북한의 핵심 기관인 과학원을 주축으로 각 분원과 산 하 연구소, 대학, 공장, 기업소 등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고 협 력 범위도 극히 넓음. 다만 북일간의 국교가 없고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북한이 참여하는 학술 세미나는 재중동포에 비해 미흡한 실정임. 그러나 이것도 북 일 수교 가능성의 증대와 항공사의 취항 준비에 따라 가까운 시일 내에 개선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됨. 북한의 대응 북한은 해외동포들과의 과학기술협력에서 항상 재일동포를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고 이들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해 왔음. 각종 대회 에 재일동포 과학자들을 초청하고 최고 지도자들이 대표단을 면담 하며, 북한 방문도 공식 일정보다는 업무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음. 이와 함께 조총련에 대한 경비 지원에서 재일동포 과학자들의 대북 한 협력 사업에 일정 부분이 배정되도록 하였음. 해외동포를 담당 하는 과학원 제 2국의 업무가 재일동포 위주로 편성된 것도 이 때 문임. 그러나 북한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북한의 상황 악화가 재일 동포들의 대북 협력에 큰 어려움을 준 것도 사실임. 90년대 중반,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면서 협력 사업의 대부분을 북한의 식 량난, 에너지난 타개로 전환한 것도 큰 영향을 미쳤음.

12 최근에는 북한의 실리 중시로 북한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 는 사업은 대폭 정리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음. 이와 관련해 북한 은 그 동안의 해외동포 과학기술협력 사업이 실리를 거두는 데 다 소 미흡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음. 이런 경향은 재일동포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하고 있음. 이념 이 퇴색하고 현실적인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동포 사회에 실제적인 이익이 되지 않으면 더 이상 대북 협력을 추진하지 않으려는 분위 기가 확산되고 있음. 5. 동북아 한민족 과학기술자들을 활용한 남북한 과학기술협력 이상의 연구에서 남북한 과학기술협력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 해서는 학술세미나 개최에서 다소 유리한 재중동포들을 활용하는 한편, 북한과의 공동연구와 기술협력 경험, 인맥이 풍부한 재일동 포들을 현재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음.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추가적으로 해외동포, 특히 그 동안 협력에 소극적이었던 조총련계 재일동포들과의 협력 가능성과 타당성을 검증하고, 이를 통해 북한 과학원과 교류하는 방안을 추진하였음. 그 유형은 전문가 활용과 해외동포 세미나, 이들을 활용한 남북한 과학기술협력 심포지엄, 기관 동향 파악 등임. 전문가 활용 먼저, 이들로부터의 논문 투고를 들 수 있음. 과학기술정책연구원에

요약 13 서는 격월간지 과학기술정책 등을 통해 국내 최초로 재중, 재일동 포들의 상세한 대북한 과학기술 협력 경험을 원고로 받은바 있음. 다음으로 재중, 재일동포들로부터의 자료 수집을 들 수 있음. 특히, 북한에서 학위를 취득한 학자들의 논문과 동포 과학기술단체 회지, 학술발표회 논문집, 보도자료 등은 대북한 과학기술협력 연구에도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음. 자문도 중요한 전문가 활용 수단중의 하나임. 북한의 자료들은 대 부분이 정확한 통계나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고 있으므로 수십 번 북한을 왕래하면서 심도 깊게 북한을 이해하고 있는 해외동포들 의 자문은 문제해결과 정확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음. 재중, 재일동포들은 현지 사정과 인맥에 밝아 사업 자문에도 상당 히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음. IMRI 처럼 북한에 진출하면서 현지 사정에 밝은 재일동포 사업가와 협력한 것이 좋은 실례임. 해외동포 세미나 과학기술정책연구원에서는 남북한 과학기술협력을 연구하면서 2번 에 걸쳐 중국 북경에서 재중동포, 재일동포 초청 워크숍을 비공개 로 개최하였음. 첫 번째 워크숍은 포괄적인 주제로 전반적인 협력 동향과 시사점을 도출하는데 주력하였고, 두 번째 워크숍은 현재 남북한 공동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농약분야를 중심으로 보다 전문적인 각도에서 북한 과의 공동연구 경험을 교류하는데 주력하였음. 이 과정에서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재중, 재일동포들의 대북한 과학

14 기술협력 동향과 시사점들을 상당 수 도출할 수 있었고, 재일동포 들이 재중동포들보다 더욱 심도 깊은 대북한 공동연구를 수행해 온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음. 해외동포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발표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음. 과학 기술정책연구원 북한과학기술연구회에서는 2002년 3월에 과학기술 정보연구원과 공동으로 해외동포 초청 워크숍을 개최하였음. 2002년 10월에는 과학기술정보연구원과 공동으로 재일본조선인과 학기술협회의 황철홍 회장을 포함한 임원진 5명을 초청하고, 기간 중에 북한과학기술연구회 제5차 전문가 워크숍을 비공개로 개최하 여 이들의 대북한 공동연구 경험을 청취하였음. 2002년 10월 말에는 한국과학사학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조선 대학교 임정혁 교수(재일본조선인과학기술협회 연구부장)를 초청 해, 재일동포 과학자들과 북한과의 공동연구에 대한 자문을 받기도 하였음. 남-북-재일동포들의 통일과학기술심포지엄 개최 재일동포들과의 교류가 깊어지면서, 이들을 포함한 직접적인 남북 한 과학기술교류를 추진하였음.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은 재일본조선 인과학기술협회와 3자간 심포지엄 개최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 하고, 구체적인 일정과 주제를 논의하였음. 이후, 여러 가지 우여곡절 속에서도 과학기술부의 지원으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2002년 10월 5, 6일간 동경에서 최초로 남북한 과학기술자들이 참여하는 통일과학기술심포지엄 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게 되었음.

요약 15 심포지엄 주제는 한반도 자생식물과 과학기술정보 교류로 결정하 였고, 우리측 대표단에 동 분야에서 국내 최고 수준의 역량과 자체 재정 조달 능력을 가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자생식물이용기술개발 사업단과 과학기술정보연구원을 포함시켰음. 북한측에서도 해외동포와의 협력을 총괄하는 과학원 2국 국장을 단 장으로 하는 5명의 원로 학자들이 참가하여, 심포지엄과 이후의 대 화에서 상당히 심도 깊고 책임 있는 논의를 할 수 있었음. 통일과학기술심포지엄의 북한측 대표단 순 구 분 성 명 소속 및 직위 1 단 장 홍종휘 과학원 2국 국장(해외동포 담당) 2 김동사 과학원 참사(농업, 생명 담당) 3 단 원 리용재 과학원 생물분원 식물연구소 4 리상설 과학원 중앙과학기술통보사 박사원 원장 5 권재정 과학원 중앙과학기술통보사 처장 발표자들의 논문 내용은 남북한 과학기술협력을 염두에 두고 서로 에 대한 소개와 협력의견 제시 등으로 구성되었고, 질의응답과 토 론도 이를 검증하는 선에서 전개되었음. 따라서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의미 있는 대화를 할 수 있었음.

16 통일과학기술심포지엄 발표 논문 구 분 논 문 제 목 정 혁 : 자생식물이용기술개발사업단의 연구 성과 및 향후 전망 남 한 박종욱 : 한반도 종합식물지 발간사업 경과보고 김태중 : 과학기술정보연구원의 과학기술정보사업 소개 한선화 : 실시간 해외정보 수집 및 평가체계 북 한 리용재 : 우리나라의 식물지 작성에서 이룩된 성과와 제기되는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 김동사 : 고려인삼을 비롯한 몇 가지 특산식물의 유용 성분에 대한 화학적 연구 리상설 : 중앙과학기술통보사의 정보봉사 활동에 대하여 권재정 : 과학기술정보 봉사체계 광명 에 대하여 심포지엄 준비 과정에서 북한과학원 2국과 재일본조선인과학기술 협회 사이에 이메일이 정식 개통되었음. 이로서 이전에 팩스를 통 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던 북한과의 연락이 이메일을 통해 원활히 이루어지게 되었음. 재일본조선인과학기술협회에서는 본 심포지엄과 임원단 방한 세미 나 결과를 모아 2002년 12월에 협회지 과학기술 의 특집호를 발행 하기도 하였음. 과학기술정책연구원과 재일본조선인과학기술협회에서는 통일과학 기술심포지엄의 지속적인 개최와 두 가지 발표 주제에 관한 구체적 인 협력 지원을 추진하고 있음. 본 심포지엄과 후속 연구를 통해 북한 과학원 산하 연구소들과 중

요약 17 앙과학기술통보사의 상세한 조직 체제를 파악할 수 있었음. 이 역 시 후속 협력과 일정 수립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됨. 본 심포지엄을 통해 그 동안 열세를 보였던 공동 세미나 분야에서 의 재일동포 활용이 가능함을 입증하였고, 북한이 재일동포들의 요 청에 상당히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음. 6. 정책적 시사점 동북아지역 동포들에 대한 인식 전환과 범부처 차원의 지원 그 동안 분단된 국내 문제를 투영한 해외동포 정책으로 북한과 가 까웠던 재중동포와 조총련계 재일동포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거의 없었음. 그러나 북한을 포함한 동북아 지역에서의 다자간 협력 실현을 목전 에 두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이들에 대한 관 심과 연구, 지원을 범부처 차원에서 추진해야 할 것임. 이런 지원은 이들을 국내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로 인식하는 차원에 서 벗어나 이들이 처한 현실을 반영하고 당면한 문제들을 실제적으 로 해결해 주는 차원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임. 그동안 재중, 재일동포들은 그 어떤 동포들보다 분단된 조국으로 인한 반목과 투쟁, 그로 인한 어려움과 실망 등을 많이 겪어 왔고, 여기에는 우리의 책임도 큼. 이제 성숙한 동포 정책으로 이들의 아 픔을 씻어 주고 자라나는 청년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어야 할 것임.

18 범부처 차원의 지원에는 지역 내 동포들의 법적 지위문제, 재산권 문제, 출입국 관리문제, 교육 문제, 국제결혼 문제, 취업문제 등이 모두 포함될 수 있을 것임. 동북아 한민족들의 과학기술역량 확대 지원 동북아 지역의 민족대학들이 사범계 위주로 편성되고 외부 지원이 줄어들어 과학기술 교육에 특히 취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므로, 이들에 대한 과학기술 교육 지원과 학문 후세대 양성 차원에서의 국내 유학 확대가 필요함. 특히, 지금까지 소홀했던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에게도 화합 차원에 서 특별 프로그램을 통해 선별하여 문호를 개방할 필요가 있음. 현 재 중소학교들을 시작으로 점차 북한식 교육이 폐지되고 상당수의 민단계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으므로 국가 차원에서 이를 지원할 명 분이 생겼다고 볼 수 있음. 이와 함께 동북아 지역 내 한민족 대학 교수들과 연구원들의 연구 능력 개선을 지원할 필요가 있음. 여기에는 이들에 대한 학술정보 제공, 국내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의 연수기회 확대, 출연연구소 연합 대학 등에의 초청기회 부여, 지역 내 한민족 과학기술자들의 양성 을 염두에 둔 특별 프로그램 설치 등을 들 수 있음. 조총련계의 재일본조선인과학기술협회 등도 대북한 과학기술협력 차원에서 국내 연구 과제에의 참여를 허용하고 이들의 경험을 유익 하게 활용할 필요가 있음.

요약 19 동북아 한민족들의 과학기술자 네트웍 확충 동북아 질서 재편 속에서 새롭게 그 의미가 부각되고 있는 동북아 지역에 대한 연구를 강화하고, 한민족과학기술자 네트웍 구축 차원 에서 지역내 한민족 과학기술자들과의 연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음. 여기에는 북한을 포함하는 지역 내 다자간 학술단체들을 지원하고 이 안에 과학기술의 역할을 확대하거나 새로운 과학기술 관련 학술 단체 형성을 지원하는 방안이 포함될 수 있음. 이 안에 지금까지 연계가 부족했던 조총련계 재일동포를 포함시키 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음. 이를 통해 남북관계 고착 시를 대비 한 완충지대를 형성하고 공동으로 청년 인력들을 양성하여 지역 내 에서 반목을 극복하고 화합하는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음. 또한, 통일과학기술심포지엄 등 성공적으로 개최된 남-북-해외동 포 학술 세미나를 지원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유사한 심포지엄이 개 최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음. 가칭 남북과학기술협력센터 설립과 공식 협력 창구 개설 현행 남북 과학기술협력은 공식적인 창구 없이 개별적인 차원에서 수행되고 있고, 우리의 과학기술부와 출연연구소 기능을 겸비한 중 추기관인 북한 과학원과의 협력이 전무함. 이에 비해 재중, 재일동포들은 공식 경로를 통해 북한 과학원과 장 기적이고 포괄적인 과학기술협력을 추진하고 있고, 북한 과학원에 서도 2국을 설치하여 관련 업무를 전담하고 있음.

20 우리도 가칭 남북과학기술협력센터 등을 설립해 관련 정보 수집과 확산, 동북아 지역을 포함한 대북한 협력방안 연구, 협력 조정, 교육 과 훈련, 북한 과학원과의 공식창구 개설 등을 추진할 수 있음. 이 센터는 정부출연기관이나 정부 조직 내에 설립하고 법적 근거와 기금을 마련하면 좋을 것임. 센터가 설립되면 장관급 회담이나 해 외동포들을 활용해 북한 과학원과의 공식 협력창구 개설을 추진할 수 있음. 단, 핵문제 등으로 정세가 극히 불안정하므로 당분간은 북한과학기 술연구회 등 기존의 조직과 인력, 창구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좋 을 것으로 생각됨. 과학기술협력기금 공동 조성 동북아 지역 내 한민족 과학기술자 양성과 이들을 포함한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을 내실 있게 추진하기 위해 가칭 남북한 과학기술협 력 기금 등을 공동으로 조성하고 효과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음. 기금은 현재 운용되고 있는 대외협력기금을 참고로 하여, 정부출연 금, 정부투자기관 출연금, 대북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경제단체나 기업의 출연금, 타 기금으로부터의 출연금, 기타 수익자금 등으로 구성하면 될 것임. 기금의 운영은 실리를 중시하는 북한의 최근 동향과 자본주의 운영 방식에 익숙한 우리의 기법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선에서 추진하면 좋을 것임.

요약 21 즉, 남북 당사자, 해외동포들이 참여하는 공식적인 관리 기구를 두 되, 협력 과제 책임자들과 우수한 성과를 달성한 연구자들에게 상 당한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안을 추진할 수 있음. 북한의 실정을 고려한 과학기술협력기본계획의 공동 수립 재중, 재일동포들과 비교해 볼 때 우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북한의 실정을 고려한 대북한 협력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임. 따라 서 협력 과정에서 북한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관 련 정보 수집에도 극히 많은 문제점들을 노출하고 있음. 이에 비해 재중, 재일동포들은 북한의 실정에 맞는 과제들을 북한 의 적극적인 참여 하에 추진하고 있고, 관련 분야에서 상당한 경험 과 인맥을 축적하고 있음. 따라서 우리도 북한의 현실을 보다 깊이 탐구하고 이에 기초한 협력 방안을 추진할 필요가 있음. 북한에서는 곧 새로운 과학기술발전 5개년계획 (2003-2007) 을 추 진할 것이라 함. 그 내용은 첫째, 전력, 석탄 등의 에너지산업과 금 속, 기계, 화학 등의 기간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인민경제의 기술적 개건, 둘째, 식량문제 해결 중심의 인민생활 개선, 셋째, IT, BT, 신 소재 중심의 첨단과학과 기초과학 등임. 경제를 살리는 막중한 업무를 과학기술계가 지고 있는 만큼, 북한 과학원 산하 연구소들도 이의 실현에 전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임. 따라서 우리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도 5개년계획 등 북한 과학원의 새로운 당면 연구과제에 맞추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임. 이를 위해 남북한 당사자들과 해외동포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남 북과학기술협력기본계획 을 수립하는 것도 좋을 것임. 이를 통해 북한 과학원과 공식적이고 실제적인 교류를 추진할 수 있을 것임.

22 남북한, 해외동포 공동연구 추진 대북한 협력에서 풍부한 경험과 인맥을 가지고 있는 동북아 한민족 과학기술자들을 포함한 남북한 공동연구를 추진할 필요가 있음. 여 기에는 재일동포들의 대북한 공동연구에 한국이 동참하거나 중국 과 북한간의 정부간 공동연구에 한국이 참여하는 방법이 포함될 수 있을 것임. 재일동포들의 경우 경비 부족이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단 위 과제나 기금 차원에서 우리가 연구비를 제공하고 이들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에 참여할 수 있음. 중국의 경우에는 한국과학재단과 중국자연과학기금위원회 사이에 협력관계가 있으므로, 이를 활용해 남북중 공동연구를 추진하고 재 중동포를 참여시키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음. 산학연협력 차원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과 교류 장소 확보 동북아 한민족 과학기술자들이 각 분과별로 활동하고 있으므로 이 들 분과와 유사한 출연연구소 연구이사회, 산하 연구소, 기업연구소 들과의 연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음. 이를 통해 출연연구소별로 해외 한민족 과학자들과의 연계를 강화 하고 이들을 활용한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을 전문분야별로 활발하 게 추진할 수 있을 것임. 이와 함께 본 연구를 통해 입수된 북한 과학원 산하연구소들과 주 력 연구 과제들을 분류하여 국내 출연연구소 분포와 비교, 분석하 고, 각 연구이사회와 연구소별로 협력이 가능한 대상 기관들을 정 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음.

요약 23 이를 통해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 단기적으로 공동 연구를, 장기적 으로는 통일을 대비한 협력 방안을 추진할 수 있음. 이 때, 최근 북 한이 주력하고 있는 개성공단과 신의주 특구, 금강산 관광특구 등 을 교류 장소로 적극 활용하는 방안을 찾으면 좋을 것임.

제1장 서 론 25 제1 장 서 론 제 1 절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냉전이 와해된 지난 10여 년 간,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질서가 크게 변화하였다. 1990년의 한소수교와 1992년의 한중수교는 체제와 이념을 넘어선 경제협력을 가능케 하였고, 이후 이들 국가와의 무역과 인력 교 류가 큰 폭으로 확대되었다. 그 동안 동북아 지역 협력의 최대 장애가 되었던 북한도 변화를 보이 기 시작하였다. 1991년 12월의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 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 채택과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을 계 기로 남한 민간기업들의 대북한 진출과 교류가 큰 폭으로 확대되었다. 최근에는 납치범과 핵문제 등의 난제에도 불구하고 수교를 염두에 둔 북 일 대화가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북한이 고난의 행군 이후 중국과 남한에 크게 의존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현재, 중국과 한 국은 서로에게 제3위의 교역 상대국이 되었고, 중국은 한국의 제2대 투 자 대상국이 되었다. 또한, 중국은 북한의 가장 중요한 교역 상대국일 뿐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지원에서도 북한이 가장 크게 의존하는 국가가 되었다. 남북한 교류에서도 남한은 북한의 제2대 교역 상대국이 되었고, 식량 등 민간 차원의 인도적 지원과 관광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러한 대화와 교류의 진전은 동북아 지역에서 새로운 다자간 협력을 모색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이 적극성을 보인 UNDP의 두만강개 발계획 과 한국, 일본의 환동해경제권구상, 다자간 또는 양자간의 지역 내 투자와 자유무역지대 설치, 특구 설치 등이 그것이다. 비록, 지역 내 국가들의 특이한 정치체제와 이해관계, 북한 핵문제 등으로 아직 뚜렷한

26 성과는 없지만, 철도 연결과 신의주 특구, 개성공단 등 향후 남북관계의 진전 여부에 따라 크게 확대될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하겠다. 다양한 교류와 협력 속에서, 마지막 보루인 북한을 잘 이해하는 수백 만의 재중, 재일동포들이 새롭게 부각되었다. 이들은 지역 내 사정에 익 숙하고 우리와의 정서와 언어가 일치해, 그 동안 현지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최근에는 남한의 경제력 상승과 함께 수 십만의 동포들이 정착지를 떠나, 현지에 진출한 남한 기업이나 국내 업 체에 취직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북한에 친인척이 있고 장기간의 교류로 북한 사정에 익숙하므로, 북한을 포함한 다자간 협력에도 큰 역 할을 할 것이 기대되고 있다. 동북아지역 내 교류와 다자간 협력, 동포들의 중요성 확대는 남북한 과학기술 협력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 서 에 과학기술분야의 협력을 명시하고 있지만, 그 동안 이 분야는 경제 협력만큼 크게 확대되지 못했다.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몇 건 의 협력 사례를 만들었으나, 좁은 분야와 인원에 편중된 협력으로 단체 간 과열이 빚어지고 정치 변동에 자주 휘말리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협 력 내용에서도 단기간의 접촉과 인력 양성에 치우쳐, 다양하고 심도 깊 은 과학기술 협력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특히 우리의 과학기술부와 출연연구소 기능을 겸비한 북한과학원과의 협력이 거의 전무하여 책임 있는 당사자들간의 교류가 이루어지지 못했 다. 현재의 남북한 과학기술협력은 공식 창구 없이 해외에 진출해 있는 북한의 무역회사나 북한을 왕래하는 외국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진 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우리 정부에서도 북한의 현실과 수요를 반 영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대북한 과학기술협력 정책을 수립하지 못하 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돌파구를 최근 동북아 질서 재편과 함께 새롭게 부각된 재중, 재일동포 과학자들로부터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장기간에 걸쳐 상 당히 심도 깊고 다양한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을 추진해 왔다. 여기에는 150여 년의 이주 역사와 재일동포 북송 등을 통한 친인척 관계의 형성,

제1장 서 론 27 정치적으로 북한에 치우친 민족교육과 동포 과학기술 단체들의 활동 등 이 큰 영향을 미쳤다. 북한도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는 구호 아래 일찍부터 해외동포 과학자들과의 협력을 강화하였고, 이를 통해 다 양한 분야에서 상당한 성과를 달성하였다. 여기에는 우리와 달리 북한의 중추기관인 과학원과 농업과학원, 대학, 기업 등이 총 망라되어 있고, 협 력 내용에서도 북한의 현실과 수요를 종합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북한 과학원에 해외동포를 전담하는 2국이 설치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동북아 질서 재편과 함께 우리와 상당히 가까워진 지역 내 한 민족 동포들을 활용해 현재보다 더욱 다양하고 효과적인 남북한 과학기 술협력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또한, 북한 과학원과 해외동포를 포함한 공식적인 협력 창구를 개설하고, 이를 통해 북한의 수요를 반영한 장기 적이고 안정적인 협력 정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장기간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을 추진 해 온 동북아 한민족 과학기술자들의 협력 동향과 성공 모델을 탐색하고 이들을 포함한 다자간 과학기술협력과 공식창구 개설을 시도하며, 이를 근거로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남북한 과학기술협력 방안들을 간략히 모 색해 본 것이다. 연구 내용은 본 연구원에서 과학기술부 과제로 수행중인 북한의 최근 과학기술동향 조사분석 연구 와 연동되어, 대북한 과학기술 협력에 대한 이해 증진과 종합적인 협력정책 수립에 활용된다. 따라서 정태적인 체제 문제를 넘어서서 동태적인 협력 메커니즘과 이주 역사, 지역 내 정치질 서 재편과의 연관성 등을 분석하는데 주력하였다. 또, 선행연구들에서 연 구한 분야들은 가급적 제외하고, 새로운 연구 내용과 방법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부수적으로, 본 연구의 결과를 날로 중요해지는 지역 내 한민족 과학기술자 네트웍 구축에 활용하는 방안도 염두에 두었다.

28 제 2 절 연구 방법, 내용 및 범위 1. 연구 방법 국가 간의 과학기술협력은 그 추진 주체별, 성격별로 상당히 다양한 유형이 있고 상황에 따른 가변성도 크므로, 이론화 작업이나 고유의 방 법론 도출이 극히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동북아 지역은 정치, 경제체제 와 지나온 역사, 분단 상황, 최근의 급격한 질서 재편 등이 상황 예측에 큰 장애가 되어, 이러한 연구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여기에 북한 연 구의 특성상 직접적으로 응용할 원전 자료가 극히 부족한 것도 큰 문제 가 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가시적으로 드러난 동북아 한민족 과학기술자 들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 동향을 유형별로 정리하고, 이를 재중동포, 재 일동포, 남한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으로 구분해 비교, 분석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또한, 문헌분석을 통해 지역 내 정치, 경제적 특성과 이주 역 사, 민족교육과 과학기술 역량 등이 한민족 과학기술자들의 대북한 과학 기술협력에 미친 영향들을 비교, 분석하고, 동북아 질서 재편 속에서 향 후 진로도 예측해 본다. 이와 함께, 이들을 포함한 남-북-해외동포의 양 자간, 3자간 과학기술협력을 시도함으로서, 분석 결과의 타당성과 활용 가능성을 검증한다. 국내 자료의 부족을 보완하고 보다 현실감 있는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북한과의 과학기술협력 경험이 풍부한 재중, 재일동포들을 심층 면담하 고 관련자료를 입수하였다. 또한 이들을 포함한 북한 당사자들과의 공동 세미나를 통해 체화된 경험을 습득하고 필요한 경우 이들을 전문가로 활 용하였다. <표 1-1>에 본 연구 수행 중 방문한 중국, 일본 내 기관들과 공동세미나를 통해 접촉한 북한 기관들을 간단히 소개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면담한 국내외 전문가들은 수십 명을 넘어서므로 일일이 거론하지 않는다.

제1장 서 론 29 <표 1-1> 주요 방문, 접촉 기관 지역 기 관 연변대학 중 국 발해대학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조선대학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일 본 오사카정보컴퓨터전문학교(OIC) 재일본조선인과학기술협회 국제고려학회 한책회 조선과학원 2국(해외 담당) 북 한 조선과학원 식물학연구소 조선과학원 중앙과학기술통보사 2. 연구 내용 및 구성 <그림 1-1>에 본 연구의 주요 내용과 구성을 나타내었다. 제1장 서론 에 이어 제2장에서는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지역 내 한민족의 이주 역사와 민족적, 사회적 특성을 살펴보았다. 재중동포와 재 일동포는 조선 말기와 일제시기에 집중적으로 지역 내에 이주하였고, 해 방 후의 남북한 분단과 6.25전쟁, 최근의 동북아 질서 재편 등에 따라 그 사회적 특성이 크게 변화하였다.

30 <그림 1-1> 연구의 주요 내용과 구성 제1장 서 론 제2장 제3장 한민족사회 발전 과학기술 역량 배경 이주 역사 민족 교육 사회적 특성 대학 교육 최근의 변화 관련 협회 중일 비교 사회적 특성 과학기술 역량 제4장 대북한 협력 대북한 협력 인력 교류 동향 공동 연구 기술 이전 자료 제공 제5장 결론 및 시사점 검증 새로운 시도 결론 요약 및 결론 시사점 시 사 점 제3장에서는 역시 대북한 과학기술 협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지역 내 한민족들의 과학기술 역량을 재중동포와 재일동포로 나누어 비교, 분석 하였다. 민족의 과학기술 역량에는 현지 정부의 과학기술체제와 수준, 민 족교육, 민족 과학기술단체 활동 등이 큰 영향을 미친다. 본 연구에서는

제1장 서 론 31 이들 지역 한민족 과학기술자들의 규모와 연령별, 학위별, 직업별 분포, 학술활동 등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제4장에서는 이들의 대북한 과학기술협력 동향을 분석하였다. 한민족 과학기술자들은 전술한 정치적 특성과 과학기술 역량 변화에 따라 시기 별로 다양한 대북한 과학기술 협력을 전개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이들 협력 동향을 유형별, 지역별로 구분하여 비교, 분석함으로써, 바람직한 다자간 과학기술협력 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어서 제5장에서는 이상의 연구 결과를 검증하기 위해 지역 내 한민 족 과학기술자들이 참여하는 몇 가지의 다자간 협력을 시도하고, 이를 요약, 정리하였다. 마지막으로, 동북아시아 한민족 과학기술자들이 참여 하는 새로운 남북한과학기술 협력을 위한 몇 가지 정책 대안들을 제시하 였다. 3. 연구 범위 본 연구에서 사용한 동북아시아 는 일반적으로 한반도와 일본, 중국 의 동북삼성(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러시아 극동지역, 몽골 등을 광 범위하게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재중동포와 재일동포 에 치중하고 러시아 극동지역과 몽골은 제외하였다. 러시아 극동지역과 몽골의 한민족 동포, 특히 과학기술자들의 분포가 적고 지역 내의 대북 한 과학기술협력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이 가까운 시일 내 에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므로, 범위를 축소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으 로 생각된다.

32 제 2 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우리 민족의 규모는 20세기 초의 2천만 정도에서 1995년의 7천3백만으 로 3.5배 이상 증가하였고, 이 중 7.2%에 해당하는 522만 명이 세계 140 여 개 국에 분산되어 살고 있다. <표 2-1>은 지역별 한민족 동포 수를 나타낸 것이다. 본 연구의 주요 관심 영역인 중국과 일본에 전체 해외동 포의 절반 이상이 거주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2-1> 지역별 한민족 동포 지 역 동포수(명) 체류자수(명) 총 계 비중(%) 계 2,663,115 90,805 2,723,920 52.1 아시아 태평양 일 본 659,323 37,488 696,811 13.3 중 국 1,926,017 14,381 1,940,398 37.1 기 타 47,775 38,936 86,711 1.7 계 1,817,238 147,512 1,964,750 37.5 미주 미 국 1,661,034 140,650 1,801,684 34.4 캐나다 71,241 1,791 73,032 1.4 중남미 84,963 5,071 90,034 1.7 계 486,481 40,750 527,231 10.1 유럽 독립국가연합 459,026 2,119 461,145 8.8 독 일 17,494 11,708 29,202 0.6 기 타 9,961 26,923 36,884 0.7 중 동 340 9,016 9,356 0.2 아프리카 1,171 2,145 3,316 0.1 총 계 4,938,345 290,228 5,228,573 100 자료 : 해외교포문제연구소(1996), 세계의 한민족-편람, 통일원, p.11

제2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33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등 동북삼성 위주의 중국과 동경,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각 지역에는 각각 192만, 65만 정도의 한민족 동포들 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재중, 재일동포는 조선 말기와 일제시기에 집중 적으로 지역 내에 이주하였고, 해방 후의 남북한 분단과 6.25전쟁, 최근 의 동북아 질서 재편 등에 따라 그 사회적 특성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본 장에서는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이들 지역 동 포들의 이주 역사와 규모, 사회적 특성 등을 살펴본다. 제1절 재중동포들의 이주 역사와 특성 1) 1. 조선 말기의 초기 이주 재중동포(조선족) 사회는 여타 동포 사회보다 일찍 형성되었고 규모가 가장 큰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구 만주지역과 유사한 지역인 길림 성, 요녕성, 흑룡강성의 동북삼성에 집중되어 있고, 이중에서도 구 간도 지역인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전체의 1/3이 밀집되어 있다. 기록상으로 중국에 한민족이 처음 이주한 것은 압록강 상류지역이 1840년경, 간도지역이 186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만주족들이 청나 라를 건설하면서 이 지역을 봉쇄해 사람들의 이주를 막았다. 그러나 조 선 말기의 대 흉작으로 생활이 어려워진 접경지역 주민들이 감시를 피해 이 지역에 이주하면서 황무지가 개척되기 시작하였고,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봉금령을 해제한 1875년부터는 한족들도 대거 이주하기 시작 하였다. 초기에 이주한 한민족 수는 약 77,000명이라고 한다. 이후 한민족의 이동이 북으로 이어져 1910년경에는 만주 지역에 거주 하는 한민족이 간도지역 15만을 포함해 총 2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1) 권태환(1996), "세계의 한민족-중국", 통일원, pp.41-54와 조룡호 등(1997), 21세기로 매진하는 중국조선족 발전방략연구, 료녕민족출판사, pp.15-177 등에서 정리

34 1860년-1910년 사이에 인구증가가 매우 미미하였던 한반도 사정에 비해 만주지역의 한민족 인구는 거의 3배로 증가한 것이다. 같은 기간에 이 지 역에 거주하는 한족 인구도 거의 2배로 증가하여 5만 명 정도가 되었다. 당시의 주요 한민족 거주지는 압록강 상류 지역과 용정 인근의 해란강 유역, 두만강 중하류의 접경지역이었다. 2. 일제시기의 대규모 이주 1910년의 한일합방으로 한민족의 만주지역 이동에 커다란 전환이 발 생하였다. 이전의 가난으로 인한 원시적 이동이 일제 탄압에 대한 저항 과 수탈로부터의 탈피 등으로 전환되면서 그 규모와 분포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함경도와 평안도 등의 접경지역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이주민이 유입되었고, 거주 지역도 내륙지역으로 크게 확산되 었다. 특히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1915-1920년 사이에 남성 위주로 상당히 많은 한민족들이 이들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에 따라 만주 지역에 거 주하는 한민족 수는 10년 사이에 2배 이상 증가하여, 1920년 말에는 46만 명 정도에 달하게 되었다. 이주 민족의 증가로 지역 내에 자급자족이 가 능한 상당 규모의 한민족 사회가 형성되고 이들간의 공동체 의식도 강화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만주 지역으로의 한민족 이동 규모가 크게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930년의 만주지역 한민족 수는 61만 명으로 10년 전에 비해 15만 명 정도의 증가에 그쳤고, 이 중 50% 이상이 현지 출생에 의한 자연증가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남녀간의 차이도 상당히 완화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일본 정부가 염가의 노동력을 원하는 일본 내 제조업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민족들의 일본 이주를 허용했기 때 문이라고 한다. 2) 2) 당시의 재일동포 이주 동향은 제2절의 관련부분 참조

제2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35 <표 2-2>에 일제 시기 일본과 만주 지역으로의 한민족 이동 규모를 나타내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으로의 이주가 대폭 증가하고 만주지역으로의 이주가 급격히 감소한 것을 알 수 있다. <표 2-2> 일본과 만주 지역으로의 한민족 이동(1910-1945) 연 도 일 본 (명) 만 주 (명) 1910-1915 970 150,074 1916-1920 33,976 174,595 1921-1925 138,290 24,200 1926-1930 200,330 101,404 1931-1935 262,424 175,511 1936-1940 456,483 565,229 1941-1945 739,244 - 자료 : 권태환(1996), "세계의 한민족-중국", 통일원, p.49 한만도 남부 지역의 이주민들이 일본을 향함에 따라 만주지역 이주민 들은 다시 평안도와 함경도 등 압록강과 두만강 접경지역 주민들로 채워 지게 되었다. 이들의 주요 거주지도 이전과 유사하게 간도지역에 집중되 었다. <표 2-3>은 간도지역의 한민족 인구 추이를 나타낸 것이다. 1920 년대 만주지역 이주자 증가율이 둔화되는 가운데, 간도 지역에의 집중 현상이 심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1930년대에는 만주지역으로의 한민족 이동이 다시 큰 활기를 띠기 시 작하였다. 이것은 농민들의 경제적 파탄과 세계적 공황으로 일본으로의 노동력 이동이 억제되고, 대신 일제의 만주 침략과 함께 이 지역에 한민 족을 강제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동양척식회사가 한민족 이민을 지원하기 시작한 1936년경부터 한반도 각 지역에서 만주지역으로의 이 주자가 크게 증가하였다.

36 <표 2-3> 간도지역의 한민족 인구 추이(1910-1944) 연도 인구수(명) 성장율(%) 성비(%) 재중민족비율(%) 간도 총인구비율(%) 1910 150,000 - - - 68.2 1912 163,000 - - 68.4 76.9 1922 323,806 6.89-62.8 82.0 1926 356,016 2.43-65.7 80.5 1930 394,937 2.59 112.4 65.1 70.4 1935 469,461 3.46 109.2 56.8 75.6 1940 616,019 5.72 107.9 42.5 72.6 1941 611,728-0.70 109.8 42.4 73.6 1944 631,733 0.80-38.9 - 자료 : <표 2-2>와 동일, pp.48 이에 따라 1930년대에 만주지역의 한민족 인구가 2배 이상 증가하였 고, 주요 거주지역도 간도지역을 넘어 만주전역과 내몽고 등으로 확산되 었다. 집단 이동으로 경상도마을, 전라도마을 등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 었고, 흩어져 살던 동향 출신 이주자들이 이들 지역에 집결하는 현상도 나타나게 되었다. 집단거주지의 형성에 따라 간도지역에는 함경도 출신이, 여타 길림성 지역과 흑룡강성에는 함경도와 기타 남한지역 출신이, 요녕성에는 평안 도와 경상도 출신 등이 주로 거주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반 도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집단 주거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초기 이주자가 가까운 지역에 정착하고 후기 이주자들은 내륙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 크게 변화하였다. 일 본은 징병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대규모의 한민족들을 징용으로 동원하여 일본에 보냈다. 이에 따라 만주지역으로의 한민족 이 동이 급격히 억제되어, 자연증가를 제외하면 인구 이동으로 인한 증가가 거의 사라질 정도가 되었다.

제2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37 3. 해방 이후의 귀국 1945년의 해방과 이어진 국공 내전은 재중동포 사회에 커다란 변동을 가져 왔다. 해방 직후 만주지역으로부터 귀국한 한민족은 약 70만 명이 고, 이중 남한으로 이주한 민족은 약 40만 명 정도라고 한다. 해방 당시 170만 명에 달했던 재중동포 수가 1949년의 중국 건국 시까지 약 100만 명 정도로 줄어든 것이다. 권태환(1996)은 1953년의 중국 인구센서스 자 료를 토대로, 당시 간도지역 거주자의 25% 정도인 15만명이, 기타 만주 지역은 50%에 달하는 55만명이 귀국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것은 만주지역 거주자 중, 비교적 늦게 이동하여 간도 이외 지역에 분산 거주하던 남한 출신 동포들이 월등히 많은 비율로 귀국했음을 나타 내 주는 것이다. 접경지역에서 이주한 초기 정착자들은 생활의 터전인 농경지를 가지고 대규모로 공동 생활을 하고 있었고, 현지에서 출생한 자녀들로 2세대, 3세대를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귀국자가 적었다. 6.25전쟁 전후, 구 팔로군 출신 동포들의 인민군 편입과 민간인 참전 등으로 인한 한민족 이동도 약 1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방 이후의 혼란기에는 연변지역에 친인척을 가지고 있는 약 2만 명 정 도의 접경지역 동포들이 다시 중국으로 들어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들어 온 한민족 동포들은 현재 연변 인구의 4%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을 전후해 북한 지역으로 도피한 동포들도 있었으나 그 규모 는 그리 많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4. 재중동포 사회의 형성 및 발전 1949년 10월 1일,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 공화국(중국) 성립이 선포되었다.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사회주의 중국의 성립은 만주지역 한민족(조선족) 동포들의 정체성과 동포사회 발전에 커 다란 영향을 미쳤다.

38 중국 정부의 토지개혁은 70% 정도가 농민으로 구성된 재중동포들의 큰 환영을 받아 농경지를 중심으로 동포들의 공동체 의식이 강화되는 계 기가 되었다. 중국정부는 지역을 개간했을 뿐 아니라 항일전쟁과 반 국 민당 투쟁에도 적극적이었던 재중동포들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에 따라 한민족의 구심점인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고, 천여 개의 민족학교가 세워졌으며, 연길시에는 민족교육의 모태인 연변대학이 설립되었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던 재중동포 사회는 1966-1976년의 문화대혁명으 로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연변지역의 재중동포들은 높은 교육열로 한족에 비해 지식인 비율이 높았고 노동을 천시하는 기풍과 접경지역 거 주의 특성을 가져 더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따라 상당수의 동포들이 한 족으로 전환하거나 지역을 떠나 성장이 지연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1970년대부터는 중국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인구 성장이 더욱 크 게 억제되었다. 소수민족들은 2명의 자녀까지 낳을 수 있으나 재중동포 들은 타민족들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정부정책에 호응해 주류인 한족보 다도 출산율이 낮았다. 3) <표 2-4>는 1990년의 재중동포 분포를 나타낸 것이고, <표 2-5>는 연변지역의 민족별 인구 동향을 나타낸 것이다. <표 2-4> 재중동포의 지역별 분포(1990년) 지 역 인 구 (명) 비율(%) 총 계 1,923,361 100.0 계 1,868,377 97.1 동북삼성 계 1,183,567 61.5 길 림 성 연 변 821,479 42.7 흑 룡 강 성 454,091 23.6 요 녕 성 230,719 12.0 기 타 지 역 54,984 2.9 자료 : <표 2-2>와 동일, p.81로부터 정리 3) 鄔 滄 萍 (1996), 轉 變 中 的 中 國 人 口 與 發 展 總 報 告, 高 等 敎 育 出 版 社, pp.286-307

제2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39 구 분 총 인 구 (명) <표 2-5> 연변지역의 민족별 인구 분포(1953-1990) 한 족 조 선 족 기타민족 인구 비율(%) 인구 비율(%) 인구 비율(%) 1953 926,207 346,427 37.4 557,279 60.2 22,501 2.4 1964 1,294,629 643,855 49.8 623,136 48.1 27,638 2.1 1982 1,871,508 1,073,979 57.4 754,706 40.3 42,823 2.3 1990 2,079,902 1,187,262 57.1 821,479 39.5 71,161 3.4 자료 : <표 2-2>와 동일, p.83으로부터 정리 연변지역에의 집중 정도가 높은 상황에서 1964년경부터 지역 내 한족 인구가 조선족을 추월하였고, 90년대 들어서는 거의 1.5배 수준에 도달한 것을 알 수 있다. 4) 재중동포들의 낮은 출산은 거의 규범화되어 80년대부 터는 재생산 수준 이하가 되었고, 2020년 이후에는 오히려 인구가 급격 히 감소할 것이라 한다. 재중동포들의 지역 내 기반 약화는 한족들의 유 입 증가와 한중수교 이후의 대대적인 타 지역으로의 재중동포 이동으로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5. 산업과 직업구조 재중동포 사회의 형성은 본질적으로 농업이주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민족산업 구조에서도 농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동북삼성이 중화학공업 지대로 육성되고 개혁개방으로 3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재중동포들의 산업과 직업분포도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표 2-6>은 1990년의 민족별 산업구조를 나타낸 것이다. 조선족의 1 차산업 종사자 비율이 여전히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나 중국 전체나 한족, 소수민족 평균보다는 월등히 낮고, 2차와 3차산업 종사자 비율이 4) 초기 인구 분포에서 한족의 비율이 37%를 넘는 것은 중국 정부가 연변 북부 지역의 한족 밀집 지역을 조선족자치주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40 크게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동북삼성 지역의 각 민족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재중동포들이 주변 지역의 공업화 추세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표 2-6> 1990년도 민족별 산업 구조(%) 조선족 구 분 중국 전체 한족 소수민족 계 남 여 1차산업 72.36 71.47 83.42 52.92 51.96 54.08 2차산업 15.18 15.86 6.77 22.07 23.50 20.34 3차산업 12.44 12.65 9.80 25.00 24.52 25.57 기 타 0.02 0.02 0.01 0.01 0.02 0.01 자료 : <표 2-2>와 동일, p.190으로부터 정리 특히 조선족들은 교육열이 높아 제조업 종사자 비율이 20%를 넘어섰 고, 과학연구와 기술서비스 분야도 5%를 넘어서고 있다. 이런 경향은 한 중수교 이후의 서비스업 증가와 함께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단, 최근 중국 내부의 유통망 개선으로 연해주 지역의 우수 상품들이 유입되면서 자치주 지역 내 민족산업이 크게 쇠퇴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제 2 절 재일동포들의 이주 역사와 특성 1. 초기 이주 재일동포 사회는 재중동포 사회와 상당히 다른 경로를 통해 형성되었 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이주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의 산 물로서 강압에 의해 형성되었고, 정착 이후에도 법적, 사회적으로 상당한 차별을 받아 왔다는 것이다.

제2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41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 일본에 거주하는 동포는 수백 명에 불과하였 고, 이들 대부분이 유학생으로서 장기 거주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이후,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본의 수출산업이 활기를 띠 자 저임금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반도로부터 이주하는 동포들이 나타나 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규제 등으로 초기에는 그 수가 많지 않아, 합병 후 10년이 지난 1920년의 재일동포 수가 30,175명에 그쳤다. 당시 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동포가 20만을 넘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수가 이주한 것을 알 수 있다. 5) 이런 상황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게 변화하였다. 일본경제의 불 황 속에서 저임금 노동자 수요가 증가하고 1922년에 조선인의 이주에 대 한 규제가 철폐되면서 일본 내의 동포 수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 다. 1923년의 관동대지진과 이후의 재 규제에도 불구하고 이런 추세가 지속되어 1930년에는 일본거주 동포 수가 298,091명에 달하게 되었다. 연 도별 재일동포 거주자 변동 추이를 <표 2-7>에 정리하였다. <표 2-7> 해방 이전의 재일동포 거주자 변동 추이 연 도 거주자 수(명) 연 도 거주자 수(명) 1905 303 1930 298,091 1910 790 1935 625,678 1915 3,989 1940 1,190,444 1920 30,175 1944 1,936,843 1925 133,710 1945.8 2,363,262 자료 : 姜 徹 (2002), 在 日 韓 國 朝 鮮 人 史 總 合 年 表, 雄 山 閣, p.734에서 정리 재일동포 수는 193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1929년에 시작된 세계적인 대공황의 여파로 실업문제가 심각해지고 노동운동이 격화되자 일본 정부는 이들의 활동을 억압하는 한편, 대륙 침략을 통해 그 탈출구 를 모색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한반도에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가 5) 이문웅(1996), 세계의 한민족-일본, 통일원, pp.51-74에서 정리

42 건설되고 많은 농촌 인력들이 동원되었으며, 만주지역에도 계획적으로 동포들을 이주시켰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피폐된 상황을 탈출하려 는 수많은 농민들이 일본으로의 이주를 지속해, 중일전쟁이 발발된 1937 년에는 그 수가 735,689명에 달하게 되었다. 2. 전쟁 기간의 강제 이주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의 태평양전쟁 발발은 재일동포 사회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 왔다. 일본 정부는 1938년의 국가총동원령 과 1939 년의 노동력 동원계획 을 공포하고 심한 육체노동과 재해가 빈발하는 탄광, 광산 등에 동포들을 강제로 연행, 배치하기 시작하였다. <표 2-8> 은 당시의 한민족 강제 연행자 수를 나타낸 것이다. <표 2-8> 전쟁 말기의 한민족 강제 연행자 수 연도 석탄광산 금속광산 토목공사 공장, 기타 계 1939 24,279 5,042 9,379 38,700 1940 35,431 8,069 9,898 1,546 54,944 1941 32,099 8,988 9,540 2,865 53,492 1942 74,576 9,483 14,848 13,100 112,007 1943 65,208 13,660 28,280 15,089 122,237 1944 85,953 30,507 33,382 130,462 280,304 1945 1,000 2,000 3,000 6,000 계 318,546 75,749 107,327 166,062 667,684 자료: 朴 鐘 鳴 (1999), 在 日 朝 鮮 人 ( 弟 2 版 ), 明 石 書 店, p.91 광산지역 배치자가 전체의 60% 정도에 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 전체 탄광 노동자의 30% 이상이 한민족이었고, 환경이 열악한 홋 가이도 지역은 50%가 한민족이었다. 이 중 8천명 이상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제2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43 1944년부터 본격화된 국민징용과 징병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해방 전까 지 국민징용으로 연행된 한민족 동포는 265,896명이고, 일본군에 동원된 한민족도 1944년까지 229,934명에 달했다. 이밖에 군 경리부요원, 포로감 시요원 등 후방 근무에 동원된 동포들도 145,010명에 달했다. 사할린과 남양지역에 동원된 동포들을 포함하면 1939-1945년 기간에 강제 연행된 한민족이 724,787명이고, 여기에 군인, 군속 등을 합치면 100만명을 넘어 선다고 한다. 이에 따라 해방 직전의 재일동포 규모가 재중동포를 넘어 서 236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재중동포들이 북한 주민 위주로 구성된 것에 비해 재일동포들은 절대 다수가 남한 지역 출신이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재일동포 수의 급속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경상남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남도, 경상북도 등 남한 출신자 비율이 1923년의 79.8%에서 1938년의 81.2%로 확대되고 있 었다. 지역별로도 도쿄 인근 지역에는 경상도 출신들이, 오사카 인근 지 역에는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남도 출신들이 많이 이주하였다. 이 비율은 오늘날까지도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6) 주요 거주지는 오사카, 도쿄, 교토, 나고야, 고베, 요코하마, 후쿠오카 등의 대도시 지역에 집중되었다. 강제연행자 중 상당수는 탄광지대인 후 쿠오카, 야마구치, 홋카이도 등에 집중적으로 배치되기도 하였다. 이들 재일동포들은 대부분이 잠시 머무는 체류자였기 때문에 기반을 잡고 오래 산다는 의식이 거의 없었다. 초기 이주로 장기간 체류한 동포 들도 이런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농사일을 하던 사람 들이 일본의 도시로 이주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단순노동, 육체노동 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전쟁 기간 중 일본 내에서 섞여 살아 한민족 특유의 공동체 문화를 형 성하지 못했고, 생활 습관의 차이와 일본인들의 편견, 차별로 주거 문제 해결이 어려웠으므로 도시 인접 마을에 집단 거주하면서 빈민가를 형성 하는 경우가 많았다. 6) 이문웅(1996), 세계의 한민족-일본, 통일원, p.70

44 3. 해방 직후의 귀국 1945년 8월 15일, 감격스런 해방을 맞자 236만 재일동포들이 앞다투어 귀국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정부의 책임 회피와 여건 미비, 귀국선 침몰 사건 등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1945년 9월 2일부터 시작된 연합군 총사령부의 지원 등을 통해 1946년 3월까지 90만 이상이 남한으 로 귀국하였고, 그 이후에도 지속적인 귀국 행열이 이어졌다. <표 2-9> 는 일본 정부가 공식 발표한 해방 후의 재일동포 귀국 동향을 나타낸 것 이다. <표 2-9> 해방 후 남한으로의 재일동포 귀국 상황 기 간 사세보 하카다 센자키 마이즈루 하코다테 기타 계 1945.8-1946.3 55,306 425,713 320,517 25,676 86,271 26,955 940,438 1946.4-12 286 69,107 9,917 3,385 205 82,900 1947 8,392 8,392 1948 2,822 2,822 1949 3,482 3,482 1950 2,294 2,294 계 72,582 494,820 330,434 29,061 86,476 26,955 1,040,328 자료 : 姜 徹 (2002), 在 日 韓 國 朝 鮮 人 史 總 合 年 表, 雄 山 閣, p.732 총 귀국자가 1,040,328명으로 나타나 있으나 이후의 잔류 인원과 비교 해 보면 공식적으로 파악되지 않은 귀국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보 인다. 1946년이 되면서 귀국자 수가 현저히 줄어들자 맥아더 사령부는 조선인, 중국인, 유구인, 대만인의 등록에 관한 각서 를 통해 3월 1일까 지 귀국 희망 여부를 등록하고 이를 소홀히 하면 귀국 권리를 잃게 된다 고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등록된 결과를 보면, 재일 조선인 총수가 647,006명이고 이

제2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45 중 79%가 귀국을 희망한다고 하였다. 이를 해방 직전의 통계와 비교해 보면 해방 직후부터 이듬해 3월까지의 8개월 동안에 약 150만 정도의 재 일동포가 귀국한 것이 된다. 1949년 5월에 한국정부가 발표한 귀국자 수 는 1,414, 258명이었다. 같은 기간에 북한 지역으로 공식 귀국한 사람은 1947년 3월 사세보를 통해서 233명, 1948년 6월 역시 사세보를 통해 118명, 합계 351명으로 알 려져 있다. 재중동포에 비해 재일동포의 남한지역 출신자 비율이 압도적 으로 높았으므로 희망자 대부분이 고향을 찾아 남한 지역으로 귀국한 것 이다. 7) 귀국 희망자 모두가 귀국한 것은 아니었다. 1946년의 귀국 희망자 중 16% 정도만이 귀국하고 총 56만 여명이 일본에 잔류하였다. 이들이 잔 류를 선택한 이유는 본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혼란과 귀국 시 휴대 가 능한 돈과 물품의 제한 때문이라고 한다. 해방 직후, 이들의 주 거주지였던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지역에서는 좌익세력과 군경간의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고 갑작스런 귀국자 증가로 각종 경제적, 사회적 문제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런 사정으로 귀국자 중 에서 다시 일본으로 밀항하는 동포들이 발생하였고, 이들로부터 소식을 들은 상당수 동포들이 귀국을 단념하게 된 것이다. 휴대품 제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맥아더 정부는 귀국자가 소지할 수 있는 돈을 1천엔으로 제한하고 휴대할 수 있는 물품도 1인당 250파운 드로 제한하였다. 1천엔은 당시 가치로 담배 20갑을 살 수 있는 금액에 불과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가 이 조항을 가혹하게 적용하자, 귀국하면 빈손으로 다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 생활 기반이 있 거나 부양가족이 있는 상당수 동포들이 귀국을 단념하게 되었다. 7) 姜 徹 (2002), 在 日 韓 國 朝 鮮 人 史 總 合 年 表, 雄 山 閣, p.732

46 4. 재일동포 사회의 형성 및 발전 재일동포 사회의 형성과 발전이 그리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 다. 남북 분단은 재일동포들의 정치적 선택에 영향을 미쳐 이들이 타국 땅에서 분열하고 대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안에서 북한을 지지하는 단체는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을 시발로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 재 일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로 이어졌고, 한국을 지지하는 단체는 조선 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을 시발로 신조선건설동맹(건동), 재일본조선거 류민단(민단),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한국민단)으로 이어졌다. 1945년에 가장 먼저 결성된 조련은 재일동포들의 재산 문제와 외국인 등록문제, 교육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대중적 기반을 착실히 구 축하였다. 이에 비해 1946년에 건동과 건청이 연합해 결성한 민단은 재 일동포의 귀국을 전제로 중립적 입장에서 자치 활동을 했고, 한국 정부 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여권업무와 북송문제, 민주화, 한일회담 등에서 마 찰을 빚기도 하였다. 남북한 정부의 교민정책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북한은 초기부터 재일동 포를 내국인과 동일시하고 조총련 대표를 최고인민회의에 참가시켰으나, 한국은 1980년 제5공화국 헌법에서야 재외국민 보호조항을 삽입하였고 참정권도 극히 제한하였다. 또한 북한이 1957년에 615,580달러를 교육비 로 보낼 때 겨우 22,000달러를 보낼 정도로 재일동포들의 현안문제 해결 에도 소극적이었다. 남한의 재외동포 정책이 거주국에서의 적응과 안정된 생활을 정착시 키는데 있는 반면, 북한은 적극적으로 이들을 동화시키고 북한사회에 편 입시키려 했던 것이다. 특히 높은 교육열을 가진 재일동포 사회에 적극 개입해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각종 교육비와 장학금을 지원해 줌으로서 지식인과 청년학생, 여론 주도층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1957년 4월 19일의 제1차 지원부터 2001년 4월 19일의 제147차 지원까 지 북한에서 지원한 교육비와 장학금은 총 44,603,963,000엔에 달하고 있 다. 이런 상황에서 재일동포의 절대다수가 남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상

제2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47 당수의 지식인들이 북한을 지지했던 것이다. 5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재일동포 북송도 이런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 재일동포들의 국적과 법적 지위 문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정부 가 재중동포들을 중국 국민으로 대우하고 고도의 자치를 허용한 것과 달 리 일본정부는 강압에 의해 동포들을 강제 이주시켰으면서도 이들의 법 적 지위와 처우 보장에는 극히 냉담하였다. 오히려, 1952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하는 시점에서 재일동포들의 일본국적을 일방적으로 박 탈하고 영주 자격만을 부여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재일동포들은 납세를 비롯한 각종 의무는 수행하면서도 선 거와 직업선택, 사회보장, 민족교육 등에서는 극도의 차별을 받게 되었 다. 일본으로의 귀화정책이 있으나 이 안에도 차별이 많고, 귀화는 곧 이 제까지 자신을 억압해 왔던 집단으로의 굴욕적 편입을 의미하기에 동포 들이 선택하기 어려웠다. 결국 90년에 달하는 이주 역사와 일본 내 출생 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재에도 상당수의 재일동포들이 한국 국적이나 북한 국적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런 상황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표 2-10>은 재 일동포 수의 변동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1947년말 일본의 외국인 등록 자 수는 639,368명이었고, 이중 93.6%인 598,507명이 한민족 동포들이었 다. 이 규모가 50년이 지난 2000년에도 약 4만 명이 증가하는데 그치고 있다. 60년대에 10만 명 정도가 북송 길에 올랐고, 최근 들어 동포 3세대, 4세대가 증가하고 일본인과의 결혼이 늘어나면서 각종 명목으로 일본 국 적을 취득하는 동포 수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48 <표 2-10> 재일동포 규모 변화 추이 연 도 동포수(명) 연 도 동포수(명) 1947 598,507 1975 647,156 1950 544,903 1980 664,536 1955 577,682 1985 683,313 1960 581,257 1990 687,940 1965 583,537 1995 666,376 1970 614,202 2000 635,269 자료 : 姜 徹 (2002), 在 日 韓 國 朝 鮮 人 史 總 合 年 表, 雄 山 閣, p.732 일본 내에서 동포간의 결혼은 1955년의 81.4%에서 2000년의 20.6%로 크게 저하하였고, 대신 일본 남성과 동포 여성의 결혼 비율이 이의 2.5배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동포 남성과 일본 여성의 결혼 비율도 동포끼리의 결혼 비율을 앞지르고 있다. 1952-2001년 간 일본으로 귀화한 동포도 총 254,103명에 달하고 있다. 8) 동포간의 대립도 최근 들어 크게 약화되고 있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 제고와 민주화, 북한의 침체와 정권 승계, 고난의 행군 등으로 재일동포 사회에서도 북한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기가 어려워졌다. 또한, 대립의 주 역이었던 동포 1세대들이 사라지고 현지 정착과 민족 화합, 통일을 중시 하는 청년세대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재일동포 중 한국 국적 보유자의 비율이 1950년의 7.4%에서 1969년의 51%로 역전되었고, 최근에는 3/4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남한에 고향을 둔 재일동포들의 고국 방문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 다. <표 2-11>은 재일동포들의 본적지별 분포를 나타낸 것이다. 98% 이 상이 남한 출신이고 이 중에서도 경상남북도와 제주도가 전체의 70% 이 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002년 월드컵과 여행 자유화 등으 로 재일동포들의 고국 방문이 증가하면서 이들에 대한 조총련과 북한의 8) 姜 徹 (2002), 在 日 韓 國 朝 鮮 人 史 總 合 年 表, 雄 山 閣, p.746

제2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49 통제력도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북한도 이를 인정하고 재일동포 사업을 변화된 현실에 맞게 전환할 것 을 지시하고 있다. 주요 내용은 재일동포들의 실정과 상공인들의 이익 실현에 관심을 가지고 문제점들을 해결하는데 주력하며, 자라나는 청년 들이 조총련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이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차세대 지도자로 양성하는 것 등이다. 최근에는 중등 이하의 조총련계 민족학교 에서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와 정치적 구호를 철거하는 조치까지 취하고 있다. 9) <표 2-11> 재일동포들의 본적지 분포 남 한 북 한 기타 미상 합계 서울 50,107 평양 126 부산 23,195 평남 825 광주 1,724 평북 472 대전 1,430 자강 19 경기 19,201 황해 725 강원 4,498 황남 33 충북 10,134 황북 17 충남 11,943 개성 27 4,737 1,761 635,269 전북 11,327 함남 824 전남 46,331 함북 371 경북 140,453 양강 8 경남 195,959 제주 109,222 계 625,324 계 3,447 자료 : 姜 徹 (2002), 在 日 韓 國 朝 鮮 人 史 總 合 年 表, 雄 山 閣, p.732 9) 김정일(2000), 재일본조선인운동과 총련의 임무, 조선로동당출판사, pp.156-170

50 5. 재일동포 북송 조총련의 민족교육 강화와 북한의 교육비 송금은 남한 출신이지만 북 한에 호의를 가지게 된 많은 재일동포들이 북송으로 이어졌다. 북송은 재일동포들의 대북 의존도를 심화시킨 대 사건이었다. 이들의 북송 현황 을 연도별, 국적별로 정리하여 <표 2-12>에 나타내었다. <표 2-12> 재일동포들의 북송 현황 연 도 계 조선인 동반가족 일본인 중국인 1959 2,942 2,717 225 1960 49,036 45,094 3,937 5 1961 22,801 21,027 1,773 1 1962 3,497 3,311 186 1963 2,567 2,402 165 1964 1,822 1,722 99 1 1965 2,255 2,159 96 1966 1,860 1,807 53 1967 1,831 1,723 108 1971 1,318 1,260 58 1972 1,003 981 22 1973 704 1974 479 1975 379 1976 256 1977 180 1978 150 1979 126 1980 40 38 2 1981 38 34 4 1082 26 24 2 1984 30 계 93,340 * 국적란의 공백은 정확한 통계 미상인 경우임 자료 : 金 英 達 等 (1994), " 北 朝 鮮 歸 國 事 業 關 係 資 料 集 ", 新 幹 社, p.341

제2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51 조총련은 1958년 8월 15일의 해방 13주년 기념식에서 희망자는 누구나 수속서류와 조총련에서 발행하는 증명서로 북송이 가능케 할 것을 건의 하였다. 이에 북한측이 적극 동조하고 10) 일본 정부도 커다란 문제 거리 를 해결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이를 암묵적으로 지지하였다. 한국과 민 단 측이 적극 반대하였으나 만성적인 실업과 민족차별에 신음하던 상당 수 동포들의 북송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북송은 북한의 제1차5개년계획이 한창이던 1959년에 시작되어 1년 만에 5만 명을 넘어섰으나 북한의 소식과 이들에 대한 대우가 알려지면 서 급속히 줄어들었고, 1967년 이후에는 3년간 중단되기도 하였다. 이후 1971년에 재개되었으나 그 수가 많지 않았고, 1984년 이후에는 단체 북 송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 때 형성된 북송동포와 재일동포들의 친인척 관계는 이후의 대북 협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6. 산업 및 취업 구조 재일동포들은 대부분이 농촌에서 강제 이주되어 단순노동에 종사했고 해방 이후에도 외국인 신분으로 취업에서 큰 차별을 받아 전문직에의 진 출 기회가 적었다. 1952년의 일본정부 통계를 보면 피조사자 535,804명 중 61.3%가 무직이었고, 주요 산업 취업자는 상업 5.8%, 공업 4.6%, 토목 건축 3.7% 등에 불과하였다. 11) 이후 일본 경제가 발전하면서 판매, 운수, 노무, 서비스업 등의 취업 비율이 크게 증가하였다. <표 2-13>은 재일동포 취업자들의 직업별 분 포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최근 들어 취업자 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재 일동포의 전체 규모가 감소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2000년도 의 전체 교포 대비 취업자 비율은 48.38%로 일본인의 49.62%와 비슷하 지만 직업 분포에서는 일본인보다 제조업과 운수통신업, 서비스업이 적 10) 김일성(195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재일조선동포들의 참다운 조국이다, 김일 성(1997), 재일조선인운동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조선로동당출판사, pp.64-74 11) 吳 圭 祥 (1992), 在 日 朝 鮮 人 企 業 活 動 形 成 史, 雄 山 閣, p.69

52 고 건설업과 도매, 소매, 음식업 등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표 2-13> 재일동포들의 연도별 취업 분포 변화 1985 1990 1995 2000 농림어업 1,246 926 760 858 광업 420 361 338 304 건설업 32,986 36,568 40,912 34,891 제조업 55,686 56,005 47,281 40,544 전기가스수도업 56 83 159 171 운수통신업 11,715 13,133 13,851 13,311 도소매음식업 81,087 79,345 79,889 79,813 금융보험부동산업 15,602 19,893 17,995 15,338 서비스업 41,070 50,320 60,172 62,189 기 타 3,252 4,756 5,266 8,461 합계 243,120 261,390 266,623 255,880 자료 : 在 日 本 朝 鮮 人 商 工 聯 合 會 (2002), 同 胞 經 濟 硏 究, 弟 6 号 특히 도매, 소매, 음식업에서 일본인을 월등히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최근 서비스업 종사자가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재일동포 상당수가 기간산업에서 배제되어 서비스업에 종사하거나 소규모 자영업에 종사하 고 있기 때문이다. 동포들이 운영하는 기업들도 경공업 분야의 임가공 중심이고 제조업 은 자본력과 기술, 마케팅, 인력 등에서 상당히 취약한 상황이다. 동포상 공인들은 국적 문제로 금융혜택에서도 배제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민 족금융기관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90년대 중반에 이들 기관의 예금고가 5조엔 규모를 넘어섰지만 최근 들어 민족산업 침체와 부실 운영, 대북 송 금과 이로 인한 일본정부의 조사 등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2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53 제 3 절 동북아 질서 재편과 한민족 위상 변화 1. 동북아 질서 재편 1989년 9월, 몰타에서 미국의 부시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 이 정상회담을 가진 이후, 국제관계는 소위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제질서가 미국과 소련의 양 축을 중심으 로 하는 양극체제에서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EU,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역할이 병존하는 다극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냉전기간, 동북아에서는 미국, 일본, 한국의 자유주의 진영 3각 관계와 소련, 중국, 북한의 사회주의 진영 3각 관계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 다. 그러나 탈냉전 속에서 90년대 초반 이후 북한의 우호동맹국인 소련 과 중국이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동북아 질서에 구조적인 변 화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남북한간에도 1991년 말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여 민족분단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기 본 틀을 마련하였다.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과 이어진 김일성 사망, 1998년 미사일위기 등의 난제가 있었지만, 남북한은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에서 통일의 원칙과 방안에 관한 상호이해를 증진시 키고 민족의 화해와 번영을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할 것을 합의하였다. 세계적인 탈냉전 추세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각종 요인들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과 거의 역사적 유산들과 최근 9.11테러와 핵문제를 계기로 더욱 악화된 북 미관계, 일본인 납치 문제,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 탈북자 증가 등이 지역 내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12) 그러나, 이 안에서도 동북아 국가 간의 경제교류 확대로 지역 내 상호 의존성이 증대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현재, 중국과 한국 12) 박건영 외(2002) "한반도 평화보고서", 한울.

54 은 서로에게 제3위의 교역 상대국이 되었고, 중국은 한국의 제2대 투자 대상국이 되었다. 또한, 중국은 북한의 가장 중요한 교역 상대국일 뿐 아 니라 정치적, 경제적 지원에서도 북한이 가장 크게 의존하는 국가가 되 었다. 남북한 교류에서도 남한은 북한의 제2대 교역 상대국이 되었고, 식 량 등 민간 차원의 인도적 지원과 관광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관 계가 되었다. 13) 특히, 그 동안 동북아 국가들간의 교류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북 한이 크게 변하고 있다.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북한은 경제적 어려움 을 해소하고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몇 개의 유럽연합 국 가들과 국교정상화를 실현하였고, 미국, 일본 등과의 관계 개선도 모색하 였다. 국경 개방으로 중국 등과의 변경 무역도 크게 확대되었다. 또한, 경제운영에서의 실리를 강조하고 이를 가로막는 구습들을 철폐 하며, 제한적이지만 체제를 개방하여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해 국내 경기를 회복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02년 7월의 경제관리 개 선과 이어진 신의주 특별행정구, 금강산 관광특구 지정, 개성공단 육성, 남북한 철도 연결과 금강산 육로관광 추진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대화와 교류의 진전은 동북아 지역에서 새로운 다자간 협력을 모색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이 적극성을 보인 UNDP의 두만강개 발계획 과 한국, 일본의 환동해경제권구상, 다자간 또는 양자간의 지역 내 투자와 자유무역지대 설치 등이 그것이다. 비록, 지역 내 국가들의 특 이한 정치체제와 이해관계, 북한의 체제문제, 북미관계 등으로 아직 뚜렷 한 성과는 없지만, 철도 연결과 특구 등 향후 남북관계의 진전 여부에 따 라 크게 확대될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하겠다. 13) 대외경제정책연구원(2002), "남북한 및 중국간의 경제협력 활성화를 위한 실천과제 및 전망", p.3과 日 本 經 濟 産 業 省 (2002), 通 商 白 書 2002 참조

제2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55 2. 동북아 한민족들의 위상 변화 탈냉전 이후 국가 간의 교류와 협력의 기회가 증대하면서 지역내 한민 족간의 교류와 연계가 크게 확대되었다. 한중수교 후 양국 간의 경제협 력이 증가하면서 남한 사람들의 중국 방문이 활성화되고 기업들도 대거 중국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상당수의 재중동포들이 중국에 진출한 남한 기업들에 취직하였다. 이들은 지역 내 사정에 익숙하고 우 리와의 정서와 언어가 일치해, 현지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들에게 큰 도 움이 되었다. 최근에는 남한의 경제력 상승과 함께 10여만의 재중동포들이 남한에 들어와 각종 근로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 역시 부족한 남한의 일손 보충에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북한에 친 인척이 있고 장기간의 교류로 북한 사정에 익숙하므로, 북한을 포함한 다자간 협력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 기대되고 있다. 교류를 어렵게 하는 요인들도 많다. 국내에 들어온 재중동포들은 불법 체류와 각종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 되어 한민족 동포들의 단합에 어려움 을 주기도 하였다. 재중동포들의 국내 유입이 단시일 내에 줄어들 것 같 지 않으므로 이런 문제들은 앞으로도 얼마동안 지속적으로 발생할 것이다. 한중 수교 이후의 대대적인 재중동포 이동도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 다. 노동 연령층의 대대적 이주로 토지를 근간으로 농업에 종사하던 재 중동포 사회가 와해되고 민족 교육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중국 내 타지역으로 이동한 한민족들은 급속하게 현지의 한족 사회에 동화되고 있고, 앞으로 이런 경향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북한을 탈주해 중국으로 넘어온 수만 내지 수십만의 탈북자들도 중요 한 변수 중의 하나이다. 탈북자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것은 남북한 간, 한중간의 당면 문제뿐 아니라 향후 동북아 질서 속에서 한민족간의 교류를 활성화하는데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결국 이들도 북한 과 중국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고, 향후 어느 곳에서 정착하는가 에 따라 그 역할이 상당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56 재일동포들의 성향도 크게 변화하고 있다. 북한의 고립과 경제난으로 조총련계 조직이 축소되면서 그 사업 방식들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이 것은 세대교체로 등장한 청년들이 실용적 판단 기준을 가지고 북한을 바 라보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밝은 미래를 전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다. 이에 따라 각종 민족학교 내에서 북한의 입장이 퇴색하고 재일동포 들의 당면 과제에 기초한 정책들이 강화되고 있다.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과 2002년 월드컵의 한일 공동개최, 최근의 북 일수교회담 등은 이들의 정치적 입장과 통일에 대한 관점도 크게 변화시 켰다. 이전의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통일 한국의 미래를 그려보고, 그 안 에서 자신들의 밝은 미래를 전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 동안 일본 땅 에서 받은 엄청난 억압과 시련, 울분을 해소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재인 식하며, 일본 내에서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훌륭한 토대가 될 것이다. 사카다 미기오( 坂 田 幹 男 )는 최근의 동북아 질서 재편을 통해 이 지역 이 그 동안의 소외와 주변부성을 극복하고 새롭게 세계 경제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평가하고, 이 안에서 지역 내 한민족 동포들 이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 전망하였다. 북한을 포함한 동북아 국 가들간의 다자간 교류 확대는 이러한 전망이 그리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 라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14) 제 4 절 동북아 한민족 사회 비교 1. 동북아 한민족 동포들의 사회적 특성 비교 <표 2-14>는 앞에서 논의한 재중동포, 재일동포들의 이주 역사와 사 회적 특성을 정리한 것이다. 14) 坂 田 幹 男 (2001), 北 東 アジア 經 濟 論, ミネルヴァ 書 房

제2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57 <표 2-14> 동북아 한민족들의 사회적 특성 비교 구 분 재중동포 재일동포 이주 기간 장기(50-160년) 중기(50-90년) 이주 역사 집단 이주 조선 말기, 일제 초기 일제 말기 출신 지역 북한 위주 남한 위주 해방직전 규모 170만 236만 해방직후 귀국 높은 정착율(100만) 낮은 정착율(56만) 규모(1995년) 해외동포 중 1위(192만) 3위(65만) 법적 지위 중국인 외국인(영주권) 사회적 특성 민족 문화 유지, 발전 취약 정치적 특성 고도의 자치 억압(참정권, 사회보장, 직업선택 등 차별) 집단 거주지 연변조선족자치주 오사카, 동경 등 대도시 직업 농업, 1차산업 위주 서비스업 위주 대규모 이주 90년대 이주(20만) 5, 60년대 북송(10만) 최근 동향 남한과의 유대 강화 남북대화, 통일 강조 (조총련) 재중동포 사회는 이주 역사가 길고 정착율이 높으며 북한 출신이 많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에도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으로 고 도의 자치를 누리면서 민족 문화와 민족교육을 발전시켜 왔고, 규모 면 에서도 해외동포 중 가장 많은 190만 명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동북아질서 재편과 함께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동포 사회가 급속 히 와해되고, 남한 사회와 한족 사회로 동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재일동포들은 이주 역사가 짧고 정착율이 낮으며 절대 다수가 남한 출 신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 일본의 억압을 받으면서 외국인 신 분으로 각종 차별을 받으며 민족의 단합과 민족교육을 유지해 왔다. 단, 민단계와 조총련계가 대립하고 10만명 정도가 북송길에 오르기도 하였

58 다. 그러나 최근의 동북아질서 재편과 함께 동포 사회가 축소되고 민단 계로 전환하거나 일본으로 귀화하는 청년들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2.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에 미치는 영향 재중동포들은 농경지를 중심으로 자립적인 동질집단을 형성해 강한 정착지 지향성을 가지고 있고 북한에 의지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있 다. 또한 중국 정부의 보호와 통제를 받아 중국을 조국으로 인식하고 북 한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 왔다. 이러한 성향은 장기간의 이주 역사로 북한과의 혈연관계가 멀어지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북한과 갈등을 겪으 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최근에는 한중 교류의 진전과 탈북자들의 급증으 로 친북 성향이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 따라서 재중동포들은 대북한 과학기술협력에 대한 특별한 동기를 기 질 수 없었고, 민족 단체를 통한 협력 의사를 표시할 수도 없었다. 연변 조선족자치주 내의 민족산업도 국유기업에 속해 자유롭게 북한을 지원 할 수 없었다. 재중동포들의 대북한 협력은 통역 등으로 정부 차원의 협 력에 참여하거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실질적인 이익이 발생하는 경우 등 으로 한정되고 있다. 이에 비해 재일동포들은 분단 이전의 한국을 조국으로 여기고 일본에 는 단기간 체류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강한 귀소 본능을 가지고 고국의 경제 발전과 분단 상황 등에 극히 민감한 반응을 보여 왔다. 특히 냉전 기간에는 남북 대립과 투쟁이 그대로 재일동포 사 회에 이전되어 현지에서 남과 북을 대변하고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 다. 90년대 이후에는 냉전이 해소되고 남북 대화가 진전되면서 재일동포 사이에서도 대립을 넘어 서로 화합하려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재일동포들은 자발적으로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기원하며 힘 을 다해 이를 지원해 왔다. 대부분이 남한 출신임에도 교육비 등으로 북 한의 지원을 받은 지식인들은 이에 보답하기 위해 북한과의 협력에도

제2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59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50, 60년대의 북송을 통해 형성된 친인척 관계는 이후의 대북한 협력 확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80년대 이후 상당 수의 동포 상공인들이 대북 경제 협력에 나선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 한 것이다.

60 제 3 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과학기술 역량 과학기술협력의 범위와 심도는 협력 당사자들의 과학기술 역량에 비 례하고, 과학기술 역량은 현지 정부의 과학기술체제와 기술 수준, 민족교 육, 민족 과학기술단체 활동 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본 장에서는 대북한 과학기술 협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지역 내 한민족들의 과학기술 역량을 재중동포와 재일동포로 나누어 비교, 분석한다. 제 1 절 재중 동포들의 과학기술 역량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들의 자치와 민족교육, 민족산업을 존중하고 이 들이 중화민족의 일부분으로 단결하여 국가를 위해 봉사하도록 유도하 고 있다. 재중동포들도 이 안에서 일찍부터 민족교육을 발전시키고, 그 동안의 노력을 통해 상당수의 고급 인재를 양성해 왔다. 연변조선족자치 주와 각 지역의 자치현, 밀집지역에서는 우리 언어와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민족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대학입시도 우리말로 된 시험지로 치르고 있다. 본 절에서는 먼저 동북삼성 지역의 민족교육 상황을 개괄하고, 이어서 재중동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연변대학과 발해대학, 중국조선족과학 기술자협회를 중심으로 이들의 과학기술 역량을 분석해 본다. 1. 민족교육 재중동포 이동이 본격화하기 전인 1993년의 통계를 보면 연변지역에

제3장 동북아 한민족사회의 과학기술 역량 61 만도 소학교 337개(이중 민족연합학교 136개)에 83,898명, 중학교 83개 ( 48개)에 33,644명, 고등학교 18개( 3개)에 8,439명, 사범학교 1개에 1,243명, 중등전문학교 7개에 1,891명, 대학교 4개에 3,312명의 학생이 재 학하고 있었고, 연변을 제외한 길림성 산재지구에는 소학교 252개에 23,315명, 중등학교 32개에 14,457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표 3-1>은 1993년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교육 실태를 나타낸 것이다. <표 3-1> 연변 조선족학교 실태(1993년) 학교수 교직원수 구 분 민족연합 재학생수 계 학교 계 전문교원 소학교 337 136 83,898 5,055 4,153 중학교 초중 83 48 33,644 2,627 4,417 고중 18 3 8,439 881 사범학교 1 1,243 129 91 중등전문학교 7 1,891 509 265 대학교 4 3,312 1,005 자료 : 국제고려학회 등(1995), 중국조선족교육의 현황과 전망, 연변대학출판사, p.274 이밖에 요녕성에는 소학교 152개( 52개)에 18,468명, 중학교 19개에 6,995명, 고등학교 11개에 2,236명, 사범학교 1개에 505명이 재학했고, 흑 룡강성에는 소학교 380개에 34,975명, 중학교 49개와 고등학교 19개에 16,925명, 사범학교 1개에 893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내몽고자치구에는 1992년 통계로 소학교 25개에 1,541명, 중학교 3개와 고등학교 1개에 761 명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동북삼성의 각 민족학교에서 해마다 6,000명 정 도의 고등학교 졸업생이 배출되고, 이 중 2,000명 정도가 각종 고등교육 기관에 진학해 한족의 진학율을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교육의 앞날은 그리 밝지 않다. 90년대 들어 농촌에 거주 하던 동포들이 대대적으로 도시와 연해주 신흥공업지구, 한국 등지로 이

62 동하면서 학생수가 대폭 감소해, 민족학교의 기반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여기에 중국어와 외국어를 모두 공부하면서 학습 부담이 가중되고, 민족 특성상 영어보다 일본어를 선호하면서 첨단기술 관련학과에의 진 학과 체계적인 학습, 기술 습득, 국제교류 등이 날로 어려워지고 있다. 각 종 교재와 학습 교보재 부족, 높은 수준의 교원 부족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2. 연변대학 연변대학은 중국이 건국하기 이전인 1949년 3월 20일에 연변지역의 동 포들이 연합해 설립한 민족대학이다. 설립 당시, 정경학과 41명과 역사지 리학과 38명, 어문학과 44명, 수학물리학과 30명, 화학학과 24명, 토목건 축학과 25명, 전기기계학과 30명, 농림학과 18명, 축목수의학과 17명, 계 367명의 신입생을 받았고, 별도로 연변의과전문학교의 학부생 58명, 전 수생 53명을 전입시켜 연변대학 의학부를 형성하였다. 전반적으로 이공 계를 중시한 종합대학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5) 그러나 대학의 운영 방향은 이듬해인 1950년 1월 8일, 동북인민정부의 연변대학 대학, 학과 조정방안 지시에 의해 크게 바뀌고 말았다. 이 지 시에 의해 연변대학의 기본 운영방침은 중등학교 교원 양성 임을 천명 하고, 문, 리, 공학부를 사범학부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후 순차적으로 농 학부분과 의학부분이 분리해 독립단과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재중동포들의 자체 역량에 의한 과학기술인력 양성이 크게 위축되고, 수 준 높은 과학기술자는 타지의 한족 대학에서 양성되고 졸업 후에도 이들 지역에 배치되게 되었다. 대학의 면모는 1996년, 중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연변대학과 연변농학 원, 연변의학원, 연변사범전과학교, 예술학원 연변분원이 합병하고 해외 합작대학인 연변과학기술대학이 병입되면서 다시 크게 변화하였다. 현재 15) 孫 東 植 (1999), 延 邊 大 學 大 事 記, 延 邊 大 學 出 版 社, p.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