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석사학위청구논문 조선후기의 살창고쟁이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Sal-chang-go-jaeng-yi in the Later Chosun Dynasty) 2005년 2월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가정교육전공 金 海 暻 - i -
교육학석사학위청구논문 조선후기의 살창고쟁이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Sal-chang-go-jaeng-yi in the Later Chosun Dynasty) 2005년 2월 지도교수 趙 又 玄 이 논문을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 ii -
본 논문을 김해경의 석사학위 논문으로 인준함 2005년 2 월 일 주심 부심 부심 - iii -
목 차 Ⅰ. 서론----------------------------1 1. 연구의 의의와 목적-------------------------1 2. 연구내용 및 방법--------------------------2 Ⅱ. 조선후기 사회와 여성 속옷------------3 1. 조선후기 사회상과 여성---------------------3 2. 조선후기 여성 속옷------------------------8 (1) 예와 속옷------------------------------8 (2) 속옷의 종류 ---------------------------11 1) 다리속곳과 월경포----------------------11 2) 속속곳------------------------------12 3) 속바지-------------------------------12 4) 단속곳-------------------------------14 5) 너른바지-----------------------------15 6) 속치마-------------------------------16 (3) 속옷의 기능----------------------------18 1) 신체보호-----------------------------18 2) 신체의 청결유지-----------------------19 3) 의복의 형태유지-----------------------20 4) 성적 표현----------------------------20 Ⅲ. 살창고쟁이 형태와 민속-------------22 1.살창고쟁이의 개념----------------------- --22 (1) 고쟁이와 살창--------------------------23 (2) 문헌 속의 말군과 고쟁이------------------23 - i -
2. 살창고쟁이 유물 고찰-----------------------25 (1) 살창고쟁이 유물분류---------------------25 (2) 유물의 세부 고찰------------------------28 1) 뒤여밈 바지형 고찰---------------------28 ➀ 뒤여밈 바지A(앞)----------------------28 ➁ 뒤여밈 바지A(뒤)----------------------29 ➂ 뒤여밈 바지B(뒤)----------------------30 ➃ 뒤여밈 바지C(뒤)----------------------31 2) 살창고쟁이 고찰-----------------------32 ➀ 앞뒤 트임형--------------------------32 가. 당 없는 앞뒤트임형A------------------32 나. 당 없는 앞뒤트임형B------------------35 다. 당 있는 앞뒤트임형-------------------36 ➁ 옆트임형----------------------------37 ➂ 뒤가 트인 뒤여밈 바지형----------------40 가. 뒤여밈형A--------------------------40 나. 뒤여밈형B--------------------------41 다. 뒤여밈형C--------------------------42 라. 뒤여밈형D--------------------------43 3. 살창고쟁이 형태와 기원풍속 -----------------44 (1) 살창고쟁이의 형태-----------------------44 (2) 살창고쟁이에 담긴 기원 풍속---------------45 Ⅳ.살창고쟁이의 기능 및 특징------------49 1. 살창고쟁이의 기능-------------------------49 (1) 구조적 특징----------------------------49 (2) 심리적 특징----------------------------50 (3) 기능적 특징----------------------------51 2. 살창고쟁이의 특징-------------------------52 - ii -
Ⅴ. 결론----------------------------54 Abstract----------------------------57 참고그림----------------------------61 참고문헌----------------------------67 - iii -
그림목차 1. 속속곳, 복식류명품도록, 고려대박물관, 1990, p.96 2. 속속곳, 우리옷과 장신구, 설화당, 2003, p.281 3. 개성속바지, 우리옷의 발자취, 국립민속박물관, 2003,p.59 4. 안동김씨 속바지, 속옷2000, (주) 좋은 사람들, p.20 5. 누비속바지, 우리옷의 발자취, 국립민속박물관, p.60 6. 속바지, 복식류명품도록, 고려대박물관, p.97 7. 무 없는 옆트임바지, 안동지역전통복식, 안동대박물관, 1996, p.59 8. 공주흰색단속곳, 기증유물도록, 궁중유물전시관, 1997, p.46 9. 단속곳, 조선양반 생활의 멋과 미, 국립민속박물관, 2003p.160 10. 명주단속곳, 우리옷과 장신구, 설화당, p.272 11. 단속곳, 안동지역전통복식, p.58 12. 단속곳, 우리옷의 발자취, p.60 13. 백주고, 악학궤범, p.599 14. 표문대구고, 악학궤범, p.610 15. 군, 악학궤범, p.619 말군, 악학궤범, p.642 16. 말군, 속옷, 2000, p.3 17. 백주말군, 속옷, 2000, p.4 18. 뒤여밈 바지A(앞), 안동지역전통복식, 1996, p.52 19. 뒤여밈 바지A(뒤), 안동지역전통복식, 1996, p.52 20. 뒤여밈 바지B(뒤), 안동지역전통복식, 1996, p.53 21. 뒤여밈 바지C(뒤), 안동지역전통복식, 1996, p.53 22. 삼베살창고쟁이, 석주선박물관 소장 23. 살창고쟁이, 생활 속에 담긴 우리 옷의 발자취, 2003, p.60 - iv -
24. 살창고쟁이, 우리 옷과 장신구 p.279 25. 살창고쟁이 세부도식도, 우리 옷과 장신구 p.278 26. 살창고쟁이, (주) 좋은 사람들, 속옷2000, p.31 27. 뒤여밈 살창고쟁이A, 안동지역전통복식, 1996, p.54 28. 뒤여밈 살창고쟁이B, 안동지역전통복식, 1996, p.55 29. 뒤여밈 살창고쟁이C, 안동지역전통복식, 1996, p.55 30. 뒤여밈 살창고쟁이D, 문경새재박물관도록, 1999 31. 살창고쟁이 세부 명칭도 속옷2000, (주) 좋은 사람들, p.31 32. 살창고쟁이 도식도, 안인실, 조선시대 여자바지연구, 단국대 대학원 석사논문, 2001, p.37 33. 살창고쟁이 마르기, 안인실, 조선시대 여자바지연구, 단국대 대학원 석사논문, 2001, p.37 34. 세계속옷 역사전 출품 살창고쟁이 치수도 속옷2000, (주) 좋은 사람들 표목차 1. 살창고쟁이 유물표 1 2. 살창고쟁이 유물표 2 3. 살창고쟁이 세부 치수, 안인실, 조선시대 여자 바지연구 단국대 대학원 석사논문, 2001, p.37 4. 살창고쟁이 세부 치수 및 도식도 윤현진, 조선후기 여자 속옷에 관한 연구, 인하대 대학원 석사논문, 2001 - v -
국문초록 조선시대 후기 미인도에 나타난 여인들의 섬세하고 정교한 의복실루엣은 그 속에 착용된 속옷에 대하여 다양한 문제점을 제공한다. 평면으로 재단 된 옷을 착용하여 하후상박의 다양한 입체적인 실루엣을 표현하기 위해서 는 속옷의 중요성이 비중 있게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는 조선후기 여자 하의속옷을 살펴보고 조형성에 있어서 독특한 구조를 갖는 살창고쟁이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연구의 방법으로는 고문헌과 단행본, 학위 논문, 학회지 등을 활용 하였 고 유물자료는 박물관의 유물도록을 중심으로 실물조사를 겸하였다. 살창고쟁이는 생김새가 독특한 만큼 이름도 다양하다. 다리고쟁이, 문어 고장주우, 가새고장주우 등이다. 말기가 달린 허리부분을 군데군데 네모 나게, 혹은 둥글게 파내어 연결한 모양의 바지이다. 바지 부분은 삼베로 만들어졌고 구멍을 내고 남은 여러 개의 다리를 앞 부분에서 조금씩 겹쳐 단 모습을 볼 수 있다. 트임의 형태로 분류하면 세 가지로 할 수 있는데 앞뒤 트임형, 옆 트임형, 그리고 뒤가 트인형으로 분류하였다. 살창고쟁이의 가장 큰 장점이자 기능은 실용성이다. 안동은 지금도 종가 집이 많기로 유명하다. 그만큼 예법도 까다롭다. 아무리 더워도 옷을 격 식에 맞게 입어야 했다. 살창고쟁이는 한여름 더울 때 가장 안쪽에 입었 다. 그 위에 뒤트임 바지를 입은 후 항라나 모시로 된 얇은 단속곳을 입 었다. 삼베로 만들었기 때문에 땀이 묻어나지 않으며 움직일 때 제법 시 원한 느낌이 났다. 또한 풀을 먹여 빳빳하게 만들어 입어 볼륨감을 주면 겉옷의 형태유지에 아주 큰 역할을 하였다. 비록 창구멍이 나있으나 교묘한 바느질과 겹침의 미학으로 인해 결코 맨 살이 보이지 않았다. 고쟁이 위로 또다시 몇 개의 속옷을 입었으므로 창 구멍이 바람구멍 역할을 충분히 하지는 못했지만 바른 몸가짐을 위해 일 상적으로 많은 속옷을 입고 있어야 하는 여성들에게 구멍이 있는 옷을 입 었다는 심리적인 만족감은 한여름 더위를 이길 수 있게 하였다. 살창고쟁이는 반드시 어머니가 몇 벌 지어주거나 아니면 자신의 것 중 - vi -
입지 않은 것을 꼭 챙겨 주었다. 살창고쟁이는 대개 두 가지 기원이 담겨 있는데 하나는 창구멍으로 신부 의 흉이 새어 나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집살이를 시원하게 하라는 친정어머니의 소망이다. 창구멍 하나에 신부의 흉 하나씩 나가란 뜻으로 여러 개의 창구멍을 내는 게 보통이다. 보통 7개나 10개의 구멍을 뚫었 는데 이는 당시의 칠거지악과 삼종지도를 따라야하는 풍속 때문이었다. 이미 시집살이를 겪은 어머니들은 딸들을 혼인 시키면서 자신보다는 나 은 시집살이를 하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되도록 딸의 부족함이 덜 드러나고 딸의 허물을 문제 삼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담겨 있는 것 이다. 출토유물에서의 살창고쟁이는 개당고 형태인데 새색시가 초야을 치룰 때 까지 입고 있어서 처녀의 피가 묻어 있는 것이 안동박물관 소장의 출토 복식으로 나오고 있다. 초야 때 입었던 속옷은 반드시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 당시의 유교사회 에서의 여인의 정절과 순결을 표시하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그것을 수의 로 혹은 보공(시신을 관 속에 안치한 후 빈틈을 채우기 위해 넣는 것을 말함)을 위한 옷으로 사용되어 무덤까지 가지고 간 것이다. 살창고쟁이의 형태는 독특하게 생겼지만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 로 입혀진 이유는 가장 안쪽에 입는 옷이기 때문이다. 겉옷이 아니기 때 문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고 더위를 피할 수 있다는 실용성이 우선되 었기 때문이다. 살창고쟁이가 처음부터 수월한 시집살이를 하고자 한 기원을 위해 생겨 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냥 더위를 피하기 위해 생겼지만 더위를 피하니 시집살이도 좀 수월하게 하자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시집살이 가 수월 해 지지는 않았겠지만 이것을 입었으니 수월해지지 않을까하는 심리적 위안은 들었을 것이다. 부단한 노력과 인내가 요구되는 옷차림과 몸가짐에 대한 제약 등이 살창 고쟁이에게 이러한 의미가 부여되도록 하였고 보다 쉽게 사람들에게 수용 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안동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이유는 삼베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적 특색과 안동 지역의 기후적 특성, 이곳에 있는 많은 반가와 엄격한 옷차 림의 제약 등이 있을 것이다. - vii -
하지만 이제는 많은 속옷을 입던 종부들도 더 이상 그 속옷들을 기억하 지 못한다. 이미 시대에 맞춰 간소화 되어버린 속옷들이 남아 있을 뿐이 다.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고 그 자체의 모습으로 너무나 많은 의미를 가 지고 있는 살창고쟁이는 지금은 그 존재조차 잊혀져 버린 하나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혼인하는 새색시의 복잡한 심정을 담았던 옷, 찌는 듯한 날씨 속에서 비 밀스런 시원함을 안겨 주었던 살창고쟁이. 과학적이면서도 당시 여인들의 작은 일탈과 소망을 담은 살창고쟁이의 연구는 그 잃어버린 많은 의미를 우리에게 되새기게 해줄 것이므로 앞으로도 계속 되어야 한다. - viii -
Ⅰ. 서론 1. 연구의 의의와 목적 조선시대 후기 미인도( 美 人 圖 )에 나타난 여인들의 아름다운 항아리 실 루엣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 이러한 항아리 대유행 하였다. 보통 복식의 유행은 그 시대의 사회상에서 유래된다. 복식을 연 구하려면 먼저 그 시대의 사회상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 이다. 서양( 西 洋 )에서는 인위적으로 만든 도구 등을 사용하여 실루엣을 표현했 으나 그와는 달리 조선시대에서는 많은 속옷을 입어 보다 자연스럽고 아 름다운 곡선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평면으로 재단된 옷을 입체의 곡선으로 만들려면 겉옷을 받치는 밑 옷의 중요성이 강조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하후상박( 下 厚 上 薄 )의 실루엣이 유행을 하여 상의는 꼭 맞고 치마는 반대로 속옷을 겹겹이 입어 풍성하게 보이고 치마폭을 넓 게 만들어서 주름을 잡아 풍만함을 강조하였다. 속옷은 예로부터 생리위생이나 기후 환경 등 생활조건에 적응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 이외에도 의복의 아름다운 실루엣의 형성을 위한 즉, 자신 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기위한 심미적인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후기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조되던 시기였다. 특히 복식의 유행이 기생에 의해 선도되면서 평민계급의 여인들뿐 아니라 양반계급의 여성들 까지 편승하는 현상, 즉 복식의 상향 전파( 服 飾 의 上 向 傳 播 )가 대두되었 다. 기생들은 외모에 무척 민감하였기 때문에 복식에도 관심이 많았고 또 한 복식과 속옷의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본 논문은 속옷 중에서도 하의의 종류, 그리고 특히 이 시대에 등장하게 된 특이한 속옷인 살창고쟁이를 왜 만들어 입었으며 다른 속옷과는 달리 속옷에 의미를 두게 되었는지 알아보겠다. 살창고쟁이는 안동 인근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창을 가지고 있 는 고쟁이이다. 형태와 그 형태에서 유래된 이름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리고 살창 - 1 -
고쟁이에 담긴 기원들과 여성에 있어서 살창고쟁이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 고 있는지 알아보겠다. 유물로 발견된 살창고쟁이에 대해 어떤 것들이 있 는지 조사하고 그 내용에 대해 알아보겠다. 2. 연구내용 및 방법 연구의 자료로는 고문헌과 단행본, 학위 논문, 학회지, 풍속화 등을 활용 하였으며 유물자료는 발표된 연구 자료를 중심으로 정리, 조사 하고자 한 다. 고문헌은 조선왕조실록, 경제육전, 악학궤범, 조선여성의 역사 등이 있으며 유물자료는 발표된 연구보고서를 중심으로 정리하여 하의속옷의 종류와 구성, 착장모습 등을 살펴보았다. 또한 조선시대 풍속화에 나타난 속옷의 모습도 알아보았다. 살창고쟁이는 석주선박물관, 안동대박물관, 이화여대박물관, 고려대박물 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을 중심으로 된 연구 자료를 이용하였다. 연구방법으로는 문헌고찰과 관찰법을 썼으며 훼손을 우려하여 유물의 실 측 등은 불가능하여 전시물 등을 관찰하고 그 전에 유물 실측을 하여 발 표한 문헌자료를 이용하였다. 연구내용은 조선후기 여성의 속옷문화를 분석하기 위해, 첫째, 조선시대 유교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복식과의 관계, 복식규제 ( 服 飾 規 制 )에 나타난 여성의 복식, 여성의 사회인식변화에 따른 복식의 변화를 다루고자 한다. 둘째, 예와 속옷의 개념에 대해 보고자 한다. 셋째, 조선후기 여자하의속옷의 유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살창고쟁이에 대해서는 첫째, 그 독특한 형태와 그와 비슷한 말군에 대해 알아보고 둘째, 살창고쟁이 유물에 대하여 알아보고 셋째, 살창고쟁이와 그에 담긴 기원과 풍속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 2 -
Ⅱ. 조선후기 사회와 여성 속옷 고려시대 여성은 가정 안에서 지위가 인정되었고 사회 활동이 상당히 보 장되었다. 당시 호적을 보면 여성도 남편이 죽으면 호주가 되어 상속 등 재산권을 행사하였다. 또 이혼 할 때에는 가지고 온 재산을 다시 가지고 갔으며 재가를 해도 아무차별이 없고 자식을 낳아도 사회적인 구별이 없 었다. 1) 부모에게 재산을 상속 받을 때도 남녀의 차별이 없었고 부모의 제사도 아들딸이 돌아가면서 지냈으며 경비도 공동으로 부담했다. 2) 이는 조선시 대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16세기까지도 양자제도가 일반화되지 않을 정도 로 남성 위주의 가계계승 의식보다 혈족의식이 강하였으며 그에 따라 재 산 및 상속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조선중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것이 조 선후기에 와서 크게 변화하였다. 3) 1. 조선후기 사회상과 여성 조선후기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임진왜란( 壬 辰 倭 亂 )과 병자호란( 丙 子 胡 亂 )이다. 이 양란으로부터의 충격과 혼란은 사회의 구조 적 모순을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전쟁의 혼란과 불안정 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갈등이 표출되었고 사회제도와 계층 구조가 문란 해져 새로이 제도를 정비해야 했다.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조선왕조는 가정이 평안하고 가부장적인 체 제가 정비되어 있을 때 국가의 안정도 이뤄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가정의 풍속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4) 양반층에서 봉건사회 해체기로 불리는 18세기 이후는 가부장권이 보다 강화되는 시기였고 문중( 門 中 )이나 동족( 同 族 )으로 대표되는 부계 집단의 1)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1996 2) 한미라 외, 한국인의 생활사, 일진사, 2004, p.134 3)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1996 4) 한미라 외, 한국인의 생활사, 일진사, 2004, p.136-3 -
결합이 강화되었다. 모든 상속재산은 적자인 아들에게만 상속되었고 아들 이 없으면 그 전에는 딸이나 외손이 상속 받아 봉사하던 것이 양자를 들 여 가문을 이어 나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여성은 경제권과 봉사 의 의무도 없어져 출가외인이 되고 남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게 돼 가정 에서 남성의 생활을 뒷받침하는 내조자로서 굳어져갔다. 5) 부계혈통의 순수성을 보장하고 양반으로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 성의 정절과 순종도 더욱 강요되었다. 그러므로 인해 남아선호사상이 더 욱 뿌리내리게 되었다. 여기에는 양반들의 경제력 저하도 한 몫을 더하였는데 17세기 중반이후 양반의 경제력은 전반적으로 정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생 산력의 발전으로 생산량의 총체적 수치는 증가했으나, 그 혜택의 대부분 은 소수의 지주들에게 돌아갔고, 정치권력 또한 서울 거주의 문벌 가문에 편중되면서 양반 중에는 기본 생활조차 지탱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속출하 게 되었다. 재산을 여러 명에게 분산시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아들, 그것도 맏아들에게만 재산이 상속되고 책임도 따라가게 되었다. 6) 양반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결국에는 양인과 다를 바 없는 처지 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 것이다. 이에 양반들은 특권층으로서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성리학적 이념을 전면에 내세워 더욱 보수화의 길로 나갔다. 그러나, 중 하층에서는 산업과 경제의 발전과 함께 자유를 추구, 자유 로운 활동을 전개하면서 경제적으로 풍요하게 되었다. 새로운 양반 작인이 등장하고, 서민 지주와 부농의 성장에 맞추어 한 편 에서는 빈농과 임노동자가 나타났다. 천민과 노비 가운데에서도 재력을 바탕으로 양반으로까지 신분 상승한 자들이 나타났다. 물질적인 풍요시 대라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역관( 驛 官 ) 중인( 中 人 ) 등 돈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몰려들었고, 이들 일부의 생활은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유흥문화에 빠져 기방을 장악하기도 했다. 여성들의 생활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데 당시 여성들의 복식에서 외 출 시 쓰개치마로 가려야 했던 통례가 가체위에 쓰개치마를 접어 묶어 올 5) 세종 때만 하더라도 남성과 여성의 상속권이 동등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중기 이후 장자에게 만 재산을 몰아서 상속하는 양상이 일반적이 된다. (이영자, 조선 여성의 역사, 여성학 교재 편 찬 위원회 엮음, 동국대 출판부, 1986) 6) 이배용 외,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1999, p.19-4 -
리는 약식으로 대체되고, 길이가 짧은 저고리의 유행으로 가슴을 드러내 놓고 다니는 등 풍속의 변화가 생기면서 하층여성으로부터 내외법이 서서 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는 여성에 대한 통제가 느슨했음을 보여주는 예이 다. 그러나, 이는 조선후기에 여성의 경제적인 권위가 축소되는 것과는 이율 배반적인 현상이다. 7) 또한, 많은 속옷과 치마의 착용과 치마를 잡아 올려 허리띠로 묶어 속 바지를 노출하는 착장방식의 등장은 속옷을 겉옷만큼 중요한 복식으로 인 식하여 부를 과시하는 또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복식행동은 기녀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유흥문 화와 함께 기녀의 복식행동은 제약이 적어 기녀들은 개성을 마음껏 표출 할 수 있었다. 8) 이 시대의 기녀의 복식에 짧은 저고리, 가리개용 허리띠, 속옷이 보이는 거들 치마 등은 이전에 비해 더욱 과감하게 나타나, 그녀들의 자유분방함 이 나타난다. 기녀들의 복식이 전 계급의 여성들에게 유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계 급 변동이란 거대한 변화가 존재하고, 계급에 걸친 여성 복식 유행의 등 장은 기방의 중인 계층이 출입할 수 있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중인계급이 기방에 드나들자 사대부와는 달리 기녀들에게 남편을 빼앗기 기 싫은 평민 여성들이 곧바로 기녀의 복식을 모방하여 착용했을 것으로 가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보급되기 시작한 풍속화 역시 이러한 경향을 부채질하게 되었다. 풍속화가 보급되기 시작하자 이를 접 하게 된 양반계급의 여인들까지 합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조선의 복식제도에 대하여 알아보자. 거의 대부분의 문헌에 서 조선시대의 복식제도는 겉옷만을 다루고 속옷에 대하여서는 거의 논외 7)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법적으로 상위계급에게만 적용되던 유교적 규율이 당시의 계급적인 변동 에 의해 하위 계급에게 널리 전파되었다. 따라서 모든 계급에 걸쳐 여성들의 경제적 권리는 줄 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화적인 부분에서는 상대적으로 근대적인 양상이 표출되며 기존의 중세적 질서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변화는 변환기적인 양가성 ambiguity의 표출로 이해 될 수 있다 고 하였다. (임우근준, 전통적 여성 이미지의 재해 석, 서울대 석사, 2000, p.68) 8) 한미라 외, 한국인의 생활사, 일진사, 2004, p.223-5 -
( 論 )로 하고 있다. 9) 내외복( 內 外 服 )이라는 이중구조로 신분과 계절에 따 라 용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복제에는 복식을 법적으로 보호하거나, 법적 제재를 하는 양면성이 있 다. 조선 초기의 복제는 복식의 색이나 문양에 대한 규제의 성격이 강해 신분계급의 구별과 위계질서를 확립하여 신생국가로서 사회체제의 확립을 위한 조치로 이해된다. 여성 복제는 의복의 형태, 색채, 소재, 문양 그리고 장신구에 관한 것이 다. 조선 중 후기에는 가체를 중심으로 하여 수식을 포함한 장신구, 의 복의 형태 등에 대한 금지가 집중적으로 출현하여 사치풍조의 문제점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사치풍조를 규제함으로써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10) 복제의 제정이나 사치금제( 奢 侈 禁 制 )는 유교적 신분관념과 미풍양속의 검약주의를 바탕으로 하며, 세종, 성종, 영조, 정조 등의 왕조에서 더욱 많이 출현했다. 11) 특히 속옷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기는 영조와 정조 로 사치품에 대한 논의가 가장 많은 시기이기도 하다. 속옷과 직접적으로 관련한 내용은 미비하나, 속옷과 관련되어지는 내용 은 소재와 장신구 즉 가체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여성 두발양식( 頭 髮 樣 式 )은 가체를 사용하여 높게 틀어 올린 고 계로 12) 이는 삼국시대의 풍습이 조선으로 이어진 것이다. 왕권이 강화되 고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가체가 점차 커지고 각종 장신구로 화려 하게 치장하였다. 여기에 조선의 통치이념이자 예와 체면을 중시하는 유 교사상이 결합하면서 고계는 곧 부와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어, 세도 가에서는 과시의 수단으로 일반 시민들은 상류층 모방의 풍조로 허례와 허식을 낳게 되었다. 가체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던 영 정조 시대에는 조선의 중흥기라 할 만큼 강화된 왕권 하에서 정치 사회 문화면에서 매우 발전되고 안 정된 사회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9) 조효순, 조선조 후기 여성복식과 개량논의, 복식 제4호, p. 5 10) 금기숙, 조선복식미술, 열화당, 1994, p.148 11) 이경자, 우리 의생활의 전통양식-전통적 생활양식의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p.24 12) 한미라 외, 한국인의 생활사, 일지사, p. 221-6 -
소재에 관한 논의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라능단( 紗 羅 綾 緞 )은 중국산이 대부분으로 수입품이기 때문에 사치규제의 품목으로 논의된다. 이는 사치 현상을 억제하려는 조정의 정책이 오히려 다양한 직물의 생산 및 사용을 억제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방법이 되어 면작은 활발하나 양잠은 쇠퇴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견직물은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中 宗 實 錄 11년의 내용에는 사능단( 紗 綾 段 )을 겉옷에 모두 금단하는 일 을 의논하였는데, 겉옷까지 금제하면 복식의 규모가 없기 때문에 사족의 부녀는 남편의 관직에 따라 리의만 금제한다는 내용과 중종실록 23년에 속옷이라면 흑 명주와 흑 비단 생초를 입어도 입을 만하겠지만 겉옷에 있어서는 너무 가늘어서 속옷이 다 밖으로 나타나 사람의 눈에 뚜렷이 비 치나니 이것은 당나라 물건이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이 와 같은 일은 마땅히 금해야 할 것이다 라 하여 사라능단은 비치는 소재 이며 속옷과 겉옷에 모두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사치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사라능단을 금지하나, 겉옷만 관직에 따 라 사용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사라능단은 혼수품으로 많이 사용되어 세종, 성종, 연산군의 기록에서 혼인 사치 규정으로 논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치풍조는 나라에서 금지령을 내릴 정도로 심각한 사회 문제였으나 쉽 게 고쳐지지 않았다. 13) 사라능단이 장막과 요, 안석과 유개아등에서도 사 용되어질 정도로 애용 받았고, 당시 속옷이 노출되어지면서 겉옷의 역할 을 하여 사치 품목으로써 속옷에도 사라능단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여자복식은 하후상박의 구조가 두드러져 저고리의 길이는 짧 고 소매통이 좁아지며 하체는 항아리형 실루엣을 이루는 형태였다. 이러 한 실루엣을 이루기 위해 하의에 많은 속옷을 입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13) 조효순, 한국복식풍속연구사, 일지사, pp. 283-289 - 7 -
2. 조선후기 여성 속옷 (1) 예와 속옷 조선시대의 중요한 가치인 예( 禮 )의 실천은 의관( 衣 冠 )을 정제한 복식 생활로부터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예가 모든 여성에게 엄격했던 것은 아니고 양반 여인에게는 엄격 했지만 일반 서민과 천민에 게는 그리 많은 제약은 두지 않았다. 예는 오로지 양반에게만 적용되었 다. 천민녀는 다리속곳과 속속곳, 그리고 속바지까지만 입었고 서민녀는 여 기에 단속곳까지만 입을 수 있었다. 이 위에 치마를 입었기 때문에 서민 들 사이에서는 겉속곳이라 부르기도 했다. 천민녀와 서민녀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부리단에 다른 천을 덧대 튼튼하게 만들고 거치적거리지 않 도록 주로 통이 좁은 바지를 입었으며 밑단을 접거나 끈으로 묶었다. 양반녀는 속속곳, 속바지와 단속곳에 예장용으로 너른바지를 입었으며 속치마도 몇 겹씩 입어야 했다. 위아래가 같은 색은 입지 않았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저고리가 미색이면 자주치마를 받쳐 입었으며 자주색 고름은 남편이 있음을 상징 했고 저고리 소매 끝에 남색 끝동을 달아 아들이 있 음을 의미하는 등 자신의 위치를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14) 그 외 특수한 신분으로 기녀가 있는데 기녀는 천민이었지만 그 상대 계 급이 양반이었기에 복식은 양반계급을 따르는 등 복식에서만은 자유로운 신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적으로 여성의 전통적( 傳 統 的 )인 생활상( 生 活 相 )을 성 리학( 性 理 學 )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려 하였고, 이는 복장문제에까지도 영 향을 미쳤다. 생활에 연관된 대표적인 법은 내외법인데 내외법( 內 外 法 )은 남녀간의 자유스러운 접촉을 금하는 행동 규제법( 規 制 法 )으로, 여자는 임의로 문 밖 출입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가까운 친척 외의 사람과 접촉해서는 안된다. 는 것이 이 법의 주요내용이다. 15) 14) 이연자, 천년의 삶으로 이어온 종가 이야기, 컬쳐라인, 2001 15) 한미라 외, 한국인의 생활사, 일지사, 2004, p. 134-8 -
경제육전( 經 濟 六 典 ) 에는 양반 부녀는 부모, 친형제자매, 친백숙고( 親 伯 叔 枯 ), 친외숙, 이모를 제외하고는 가서 볼 수 없게 하였으며, 이를 어 기는 자는 실행으로 논한다고 하였다. 즉 여자들은 3촌까지의 친척 외의 사람을 방문 할 수 없도록 한 것이 당시의 제도였던 것이다. 16) 이 외에도 세종 연간( 年 間 )에는 남녀는 길을 달리하고 또한 저자도 함 께 하지 않을 것, 남자와 여자는 대청을 달리할 것 등의 건의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7) 이러한 엄격한 내외법은 남녀칠세부동석 ( 男 女 七 世 不 同 席 ) 이라는 엄격 한 유교윤리의 처신법에 따라 여자는 이미 10세가 되면 나다니지 말라는 여성의 외출제한으로 이어졌다. 여성들이 평상복으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저고리와 치마를 착용하 였으며, 피치 못해 외출 시에는 외간 남자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도록 쓰 개치마, 너울 등을 착용하였으며 양반녀는 반드시 가마를 타야 했다. 18) 이렇듯 당시의 지배층들이 여자들의 생활을 철저히 폐쇄적( 閉 鎖 的 )으로 한 의논은 물론 그들이 유교적인 의미에서의 정절을 여자들이 지켜야할 최우선적인 덕목으로 간주하였고, 이러한 사회의 윤리관은 다양한 속옷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전 19) 에서는 속옷을 속에 입는 옷의 총칭, 속에 받 쳐 입는 옷, 속옷의 용도는 겨울의 방한용, 여름의 땀받이용, 옷의 자태를 우아하게 보이기 위한 맵시용, 내외법( 內 外 法 )에 의하여 생겨난 내외용( 內 外 用 )등이 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속옷은 기후와 한복의 구성상 여러 겹 껴입어야 하는 복식의 구조면에서 겉옷과 속옷의 착의에 따라 속옷이 정의 될 수 있다. 겉옷과 속옷은 서로 대응하는 말로 겉옷은 외의( 外 衣 ) 또는 표의( 表 衣 ), 16) 조선시대생활사, 한국고문서학회, 역사비평사, 1997, p.121 17) op.cit. p.187 18) 한미라 외, 한국인의 생활사, 일지사, 2004, 1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웅진출판, 1997, p.829 두산세게백과사전, 두산동아, 1996, p.543 한국세계대백과사전, 동서문화, 1995, p.864 김영숙, 한국복식문화사전, 미술문화, 1998, p.248 동아 새국어사전. 두산동아. 2004. p.1363-9 -
속옷은 내의( 內 衣 ), 내복( 內 服 ), 단의( 單 衣 ), 설복( 褻 服 ), 친의( 襯 衣 )라 한 다. 20) 그러나 속옷의 의미를 엄격하게 구별하면 가장 피부와 닿는 내친의 ( 內 親 衣 )에 해당하는 속옷과, 겉옷과 내친의 사이에 받쳐 입는 중의( 中 衣 ) 로서의 친의( 襯 衣 )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속옷이 아주 다양해졌는데, 맵시용뿐만 아니라 내외 용, 땀받이용 등으로, 다른 민족복식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은데 속 적삼, 가리개용 허리띠, 다리속곳, 속속곳, 속바지, 단속곳, 대슘치마, 무 지기, 너른바지 등이 있었다. 겉옷에 의해 가려진 속옷은 겉옷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요소이나 속옷 도 개인의 미적 욕구는 물론 사회의 윤리관( 倫 理 觀 )과 밀접한 관계가 있 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의 살을 절대로 타인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라는 당 시의 관습 21) 때문에 신체를 은폐하기 위한 정숙성을 수반하는 다양한 하 후성의 속옷이 착용되었다. 속옷이 남성복식에서보다 여성복식에서 더 다양함을 보이는 것은 여성들 에게 폐쇄된 생활을 강요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하나의 실증이기 도 하다. 그러나, 조선 중 후기 경에는 속옷인 속바지를 노출시키는 착장 형태 가 나타나게 된다. 당시 속바지의 노출은 당시의 윤리관의 영향을 덜 받 았던 기녀들이 은밀한 속옷을 드러냄으로써 선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 고자 했던 의도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22) 상의 속옷은 길이만 짧아졌을 뿐 별 변화가 없어 본문에서는 다루지 않 았다. 이제 여자 하의 속옷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알아보고 조선후기 사회에 서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살창고쟁이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살창고쟁 이는 당시 시대상 때문에 생겨서 입기 시작하였는데 다른 속옷과는 달리 특이한 모양과 속옷 자체에 여러 의미가 담기는 등, 특별한 의미의 속옷 20) 김영숙, 한국복식문화사전, 미술문화, 1998, p.248 21) 유희경, 한국복식사연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5, p.499 22) 윤현진, 조선후기 여자 속옷에 관한 연구, 인하대대학원 석사논문, 2001, p.9-10 -
이다. (2) 속옷의 종류 1) 다리속곳과 월경포 다리속곳은 내곤( 內 褌 )이라고 하며 한복에서는 가장 기초가 되는 속옷 이다. 다리속곳의 명칭에서 속곳 이란 용어는 조선후기에 생겨난 용어 이므로 다리속곳 또한 조선후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생각된다. 다리속곳은 2편( 片 )의 천을 꿰매어 허리에서 묶도록 한 것이다. 즉, 홑 겹의 긴 감을 허리띠에 달아 차게 되어 있는 것이다. 23) 다리속곳의 착용은 허리말기를 가슴까지 바싹 올려 입어도 가랑이 밑이 10cm이상의 여유가 생기는데, 이 정도의 분량이면 옷의 구속을 받지 않 고, 활동 할 수 있으며, 몸에 달라붙지 않고 통풍도 잘되어 용변 시에도 일일이 허리끈을 풀지 않고 쉽게 해결 할 수 있어 기능적 위생적 능률 적이다. 또한 속속곳이 크기 때문에 자주 빨 수 없으므로 이러한 조그만 것을 만 들어 입어 요즈음의 속 팬티 역할을 했으리라고 짐작되어 실용성을 보여 준다. 24) 여자들의 필수품으로 다리속곳과 비슷하나 아기 기저귀와 같은 형태의 월경포가 있다. 월경포는 서답, 개짐, 기저귀, 빨래, 걸레 등으로 부르기 도 했으며, 여름용은 삼베, 기타 계절용은 무명이나 광목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운 경우에는 헌옷을 뜯어 적당한 크기로 접거나 듬성 듬성 누벼 사용하기도 했다. 25) 몸에 꼭 맞게 고정되고 밑을 두텁게 해야 하기 때문에 접는 방식을 많이 사용했다. 세탁 후 함부로 널어 말릴 수 없어 아기 기저귀와 함께 널거나 그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23) 윤현진, 조선후기 여자 속옷에 관한 연구, 인하대 대학원 석사논문, 2001, 재인용 24) 조효순, 한국복식풍속사연구, 일지사, 1988, pp.226-231 25) 박주애, 우리나라 서민녀의 일상복에 관한 민속학적 연주(조선조말~1950년대), 대한 가정학회 28(4), 1990, p.11-11 -
2) 속속곳 <그림1~2> 유물에서는 형태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속속곳과 단속곳의 구분이 어렵 지만, 바지 안에 입었기 때문에 크기가 다소 작고, 바지나 단속곳에 비해 무명이나 광목, 삼베 등 거친 천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대개는 옥양목, 무명, 광목 등의 무명으로 만들었고 약간 고급의 소재로 는 명주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무명은 땀을 잘 받아들이고 통기도 잘되며, 빨래하기가 쉽고 질기며 보온도 잘 되므로 가장 위생적이고 경제 적이었다고 한다. 26) 기능상으로 속속곳은 다리속곳 위에 착용되나 피부와의 접촉이 더 많기 때문에 피부에서의 분비물을 흡수하고, 속바지 착용 시 속바지의 공간을 채워 주어 속바지의 형태를 만들어 준다. 그 형태는 전후( 前 後 )가 폐고식 閉 股 式 )으로 옆으로 여밈을 따로 내었 으며, 부리는 넓고, 전후에 삼각형의 당( 襠 )이 있다. 속속곳은 한 쪽 다리를 넓게(대부분 오른쪽 바지통) 만들기도 하는데, 이는 용변 시 벗지 않고도 단속곳의 부리 - 속바지의 트임 - 속속곳의 부리를 통하여 요강을 넣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고쟁이라는 여름용 홑바지를 입는데 통풍이 잘되는 베나 굵은 모시, 광당포를 사용하기도 하였고, 겨울에는 굵은 면포를 사용하였다. 27) 고쟁이 중에서 안동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있는데 살창고쟁이가 그것이다. 살창고쟁이는 고쟁이의 허리말기 부분에 숭덩숭덩 구멍을 내어 살창을 만든 것으로 한여름에 입었으며 살창이 있어 통풍이 잘 되었다. 주로 삼베로 만들어 풀을 먹였기 때문에 겉옷의 형태유지에 큰 역할을 하 였다. 3) 속바지 <그림3~7> 속바지는 허리통보다 더 넓은 부리의 속곳류의 바지와는 달리 배래가 곡선 28) 으로 되면서 발목으로 좁아지는 형태로 바지통이 넓은 속속곳은 26) 조효순, 조선후기 복식의 풍속사적 연구, 세종대 박사, 1986, p.303 27) 유희경, 한국의 복식, 한국문화재보호협회, p.216-12 -
바지 속에 구겨져 들어간다. 부리가 좁아 아랫부분 또는 뒤에 트임 29) 이 있다. 단속곳의 넓은 부리 사이로 바짓부리가 드러나 보일 수 있기 때문 에 속속곳 보다는 고급 소재를 사용하였다. 바지 중에 개성속바지는 허리 옆에 아귀가 있는데 이는 개성지방과 강화 도바지의 특징이다. (그림 3) 바지가 여자들의 속옷으로 착용된 것은 조선 여자들의 활동성과도 관계 된다. 동양문화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은 활동적인 바지를 입고 노동에 종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활동하는 남자를 상징하기도 했다. 18C 후반의 김홍도 작품에서도 서민여성의 일하는 모습에서 바지의 노 출을 찾아볼 수 있는데, 빨래터 에서 왼쪽 여성의 치마 밑으로 올린바 지에서 통이 넓어진 바지의 형태를 찾을 수 있다. 우물가 에서 물동이를 들고 여성과 우물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여성의 바지와 점괘 에 등장한 여인의 바지에서 부리 단에 윗부분과 다른 천을 댄 것을 볼 수 있다. 행상 에서 여인의 무릎 밑에서 끈으로 묶었다. 서민여성들은 일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주로 통이 좁은 바지를 입었고, 밑단을 접거나 끈으로 묶었다. 서민여성 외에도 풍속화에는 다른 계층의 여성이 바지를 노출하였다. 이 들의 신분은 기녀인데, 기녀는 양반계층과 같은 복식을 착용하였으나, 외 출 시에는 바지를 노출한 모습이다. 단오풍정( 端 午 風 情 ) 에서 그네를 타려고 하는 여인의 노출된 바지, 월하정인( 月 下 情 人 ) 의 쓰개치마 쓴 여인의 바지의 곡선은 작은 신과 이어져 배래가 곡선으로 된 바지를 착용한 것 같다. 월야밀회( 月 夜 密 會 ) 와 이부탐춘( 嫠 眈 春 ), 춘야밀회 의 여인들 이 착용한 풍성한 거들 치마 아래로 부리가 좁은 바지가 보이는데, 특히 이부탐춘, 주유청강, 거문고 줄매기의 여인들이 착용한 넓은 바지통은 풍 28) 박춘순의 바지의 문화사 에서는 곡선형 바지배래를 안동김씨 출토바지 이 후인 19C 말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 박춘순, 바지의 문화사, 민속원, 1998, p. 253 29) 한복의 구성은 평면제도에 의한 사각 패턴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활동하는 사람이 착용 시에는 동작에 필요한 여유분을 옷 자체의 품을 넓혀 주든지, 절개로써 해 결하여야 한다.(한복의 트임에 관한 연구, 김영자, 제5회 아시아 복식학술회의 발 표논문초, 복식 10호 p.94) - 13 -
성한 치마와 연결되어 바지가 치마를 넓게 퍼지는 실루엣의 받침옷으로도 착용된 것을 볼 수 있다. 기녀와 일부 양반가의 여성들의 노출된 바지는 서민여성의 바지와는 달 리 바지통이 넓고 풍성하다. 서민여성들과는 달리 노동에 종사하지 않았 기 때문에 심미적인 것을 더욱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속바지는 재봉형식에서 홑바지, 겹바지, 솜바지, 누비바지로 나뉘는데 이 것은 계절에 따라 다른 것으로, 소재에서도 여름에는 모시나, 베 종류로 홑으로 하여 입었고, 봄, 가을에는 명주로 겹바지를 지어 입었으며, 겨울 에는 명주에 솜을 두어 누비바지를 지어 입었는데 이 누비바지는 춘추용 으로 많이 입었다. 30) 누비바지 31) 는 두 겹의 옷감사이에 솜을 두어 윗부분은 폭 넓게 누비고 무릎 아래 선은 곱게 누볐다. 곱게 누빈바지는 누비가 심 역할을 하였고, 또한 솜을 넣었기 때문에 보온 역할을 하였다. 4) 단속곳 <그림8~12> 내의( 內 衣 ), 즉 속옷의 용어는 고의( 袴 衣 ), 리의( 裏 依 )와 바지로 불리 웠는데, 속곳 단속곳 등은 조선후기의 우리말 표기로 된 호칭으로서 속 곳의 용어는 리의 - 속옷 - 속곳으로, 단속곳은 단속의 - 단속옷 - 단속 곳으로 불려진 것이다. 단속곳은 속바지 위에 착용되어 반가( 班 家 )에서는 상시 착용하기도 했 지만 서민층에서는 혼례 때와 같이 성장을 할 때 입었던 옷이기도 했다 고 한다. 30) 유희경, 한국복식사연구, 이화여자대학교출판사, 1977, p.498 31) 호남의 산간지방에서 누비바지를 명( 命 )바지라고 하는데 이 누비바지가 명바지가 되 는 이유는 그 누비는 올올이 또 골골이 장수를 상징하는 실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다. 누비는 올의 폭, 누비는 땀의 길이에 따라 그 누비는데 소요되는 실의 길이에도 큰 차이가 난다. 촘촘하고 조밀할수록 실이 많이 들고 실이 많이 든다는 것은 실의 길이 가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이 긴 만큼 장수의 유감도 높다고 생각했다. 그 러므로 소요된 실의 양 에 따라 세꾸리 명바지, 다섯꾸리 명바지하는 명칭이 붙어 꾸 리의 수에 따라 효오의 분량을 특정하기도 하였다.(박덕미, 한국의생활문화에 나타난 속어, 경희대, 1998, pp.44-45) - 14 -
속바지와 같이 밑에 대는 당( 襠 )의 형태에 따라 명칭이 분류되어 삼각당 의 갈모느제속곳과 장방형당의 토시느제속곳이 있다. 32) 서민 부녀자들에게는 단속곳을 가장 겉에 착용하여 이 위에 치마를 입기 도 하였기 때문에 서민들 사이에서 겉속곳이라 불려지기도 했다. 단속곳은 바지통이 넓고 밑이 막힌 속옷으로 치마 바로 밑에 입는 속옷 이었기 때문에 다른 속옷에 비해 비교적 고급 소재를 사용했다. 색상은 늘 소색을 사용한다. 우리 옷은 계절에 관계없이 의복의 형태가 같기 때 문에 계절별로 소재만 달리하여 입었다. 겨울에는 명주, 삼팔, 자미사 등으로 하였고 여름에는 모시, 왜사, 아사, 항라, 생고사, 생노방 등으로 하였으며 또한 여름 단속곳은 백이로, 겨울 단속곳은 호아서 바느질하고 단을 풀로 붙였다. 당항라( 唐 亢 羅 )는 정련을 하지 않은 생사로 짠 직물로 평직( 平 )과 여직 ( 絽 織 )을 세 번이나 다섯 번, 혹은 일곱 번 간격으로 엇갈려 짰기 때문에 가로로 줄무늬가 보인다. 따라서 시원하고 깔깔한 느낌이 들어 주로 봄 가을이나 여름철의 소재로 사용되었다. 33) 가랑이가 무척 넓어서 겉치마를 입는 모양과 같았고 겉치마 실루엣 형성 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화여대박물관 소장의 명주단속곳은 옆선의 안쪽에 덧단을 대고 박았 다. 또한 단속곳 밑바대 부분에 힘을 받도록 안쪽에 천을 덧대어 두 겹이 다. 길이는 101cm이고 허리둘레는 91cm이다. 34) (그림 10) 5) 너른바지 너른바지의 명칭은 후기에 생겨난 것으로 문헌에서는 그 변화모습을 찾을수 없고, 한국전통복식사연구( 韓 國 傳 統 服 飾 史 硏 究 )에서 고복남은 명 주솜너른바지를 명주유광바지라 표현하였다. 바지통이 넓은 단속곳을 넓 은바지라 지칭한 것이 넓은바지>너른바지로 변한 것으로 생각된다. 35) 32) 안동지역전통복식도록, 안동대박물관, 1996, p. 56 33) 이경자 외, 우리옷과 장신구, 설화당, 2003, p. 273 34) 이경자 외, 우리옷과 장신구, 설화당, 2003, p. 272 35) 윤현진, 조선후기 여자 속옷에 관한 연구, 인하대 대학원 석사논문, 2001, 재인용 - 15 -
너른바지는 단속곳의 일종으로 주로 상류층에서 정장할 때 하체를 풍성 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밑받침 옷으로서 단속곳 위에 착용하였다. 이것은 단속곳과 바지를 겹쳐 놓은 것 같은 가랑이가 넓은 것으로 겹으 로 되어 있으며 앞은 막히고 뒤가 터져 있다. 밑은 따로 달지 않고 터지 지 않도록 약 2cm의 정네모꼴을 마름모꼴이 되도록 반으로 접어 달아서 튼튼하게 하였다. 옛날에는 주로 양단 4폭으로 하였다고 하므로 가랑이가 70cm나 되는 넓은 것이었다고 하겠다. 36) 너른바지는 특수층에서만 입던 것으로 일반화되지는 않았는데 양반 계급 에서는 대사가 있을 때 의례히 이것을 입었다. 서민층에서는 이와 같은 너른바지를 착용하지 못하였고 오늘날에 있어서 옛 풍습을 찾는 가정에서는 혼수에 이를 넣어주고 있다고 한다. 6) 속치마 치마는 폭을 붙이고 주름을 잡아 허리에 매어 입는 여자들의 하의로 문헌에 상( 裳 )또는 군( 裙 )으로 표현되어 있다. 남자들이 입는 경우도 있 었는데 대개 중국에서 유래된 예복인 면복이나 조복 제복에 딸린 것으 로 상이라 부른다. 치마는 형태에 따라 의례용과 평상용으로 구별하여 의례용은 치마의 길 이가 길지만 앞 중심 부분은 짧게 처리하여 보행 시 불편이 없도록 하였 고, 평사용은 치마주름이 넓고 길이가 짧다. 유물의 치마는 길이가 78~112cm까지 나타나는데, 당시 반가부녀는 저 고리길이가 길고 치마를 바닥에 닿게 착용하였고, 치마의 폭은 10폭 이상 을 연결하여 310~500cm의 넓은 폭이 되게 하였다. 37) 이러한 넓은 폭의 치마 안에는 바지류의 속옷 외에도 무지기 치마와 대 슘치마를 착용하였는데, 이러한 치마류는 겉치마를 보정하는 기능을 가지 고 있다. 반가녀의 예복용 치마를 구분하여 겉치마인 대란( 大 襴 ) 스란치마, 속옷 36) 유희경, 저고리와 친의류, 한국의 복식, 1982, pp. 213~215 37) 윤현진, 조선후기 여자 속옷에 관한 연구, 인하대 대학원 석사논문, 2001, 재인용 - 16 -
은 무지기, 대슘치마로 나누는데 본 연구에서는 속옷인 무지기와 대슘치 마로 나누었다. ➀ 무지기 ( 無 足 依 ) 특수복의 하나로 상류 계급에서 정장 시 치마 밑에 입는 속치마의 하나 이다. 모시 12폭으로 잔 외주름을 잡아 3층 혹은 5층, 7층으로 길이가 다른 것을 한 허리에 단 것으로 겉치마를 부하게 버티기 위한 것이었으며 현대의 페티코트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무지기의 명칭은<청장관전서( 靑 莊 館 全 書 )>에는 무족( 無 足 ), <오주연문 장전산고(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 무죽상( 無 竹 裳 ) 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 무리 많이 끼어 입어도 오히려 부족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그만큼 부녀자들은 이 속치마를 많이 끼어 입었으니, 부인들은 십 여 개 씩, 그리고 젊은 여인들이라도 5~6겹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을 만큼 끼어 입고도 만족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 무색( 無 色 )의 치마 단에 빛깔이 각각 다른 여러 개의 치마를 짧은 것부터 차례로 한 말기에 달아 착용하기도 하였는데, 무지개모양을 이루 어 무지기 라는 이름도 생겼다. 38) 무지기는 3층의 삼합무지기, 5층의 오합무지기, 7층의 칠합무지기가 있 었으며, 가장 긴 길이가 무릎아래정도이며 다음 층과의 간격은 5~10cm 였다. 주름은 단까지 주름을 세워 만든 것도 있고, 보통치마 같이 위에 주름만 잡아 하나의 허리에 층을 합쳐 달기도 하였으며 나이가 지긋한 사람은 분 홍색 단색으로 층층이 물들이고 나이 젊은 사람은 단 마다 색을 다르게 하여 연두, 분홍, 노랑의 순서로 엷게 들였으며, 연뽕무지기라고도 하며 사철에 걸쳐 모시를 사용하였다. ➁ 대슘치마 치마의 용어에서 스란단을 한 층으로 댄 것은 스란치마, 스란단을 두층 38) 한미라 외, 한국인의 생활사, 일지사, 2004, p. 220-17 -
붙인 것을 대란치마라고 한다. 이는 예복용 겉치마로 치마에 수나 금박으 로 스란단을 만들고 치마에 붙인 것이다. 속옷에서 대슘치마는 장식단이 아닌 치마 밑단에 백비를 만들어 붙여 자 연스럽게 퍼지게 하였다. 대슘치마는 궁중에서 여자들의 정장 시에 착용 했다고 하는데, 예복인 원삼과 활옷의 착용 시 대슘치마를 착용하여 겉치 마인 대란 스란치마의 단을 넓게 퍼지게 받쳐주는 역할을 하였다. 대슘치마의 구성은 모시 12폭으로 끌리지 않을 정도의 길이로 치마를 만들고, 창호지나 백비를 높이 3~4cm정도, 치마폭 길이로 하여 모시로 싸고 이를 치마 아랫단에 붙이는 것이다. 치마를 착용 시 허리는 무지기로 버티고 아래는 대슘치마로 버티었다. 무지기 위에 대슘치마를 입으면 가슴에서부터 땅에 닿을 정도의 겉치마가 곡선으로 자연스럽게 퍼지어 정리되고 풍성하게 감싸주었다. 대슘치마의 백비는 서양의 후프 역할을 하여, 넓게 퍼진 치마의 밑단은 그대로 서도 앉은 것 같고, 앉아도 선 것 같은 자세를 갖게 하였다. 여름에 안동지역에서 다리속곳 다음에 입은 것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독특한 형태의 살창고쟁이이다. 살창고쟁이는 홑겹으로 만들어져 주로 여 름에 입혀졌으며 더위 때문에 주로 삼베로 만들어 졌다. 허리말기 부분에 살창이 나 있는 이 고쟁이는 뒷부분에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3) 속옷의 기능 조선시대 특히 후기에는 하후상박의 실루엣이 유행하게 돼 속옷의 기능이 더욱 더 강조되는 시기이다. 속옷의 기능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신체보호와 신체의 청 결유지 그리고 조선후기 때 가장 강조 되었던 의복의 형태유지, 마지막으 로 성적표현 등을 들 수 있다. 1) 신체보호 기후변화와 주위환경 변화에 대하여 인체의 생리적 기능을 돕기 위해 체 - 18 -
온을 알맞게 조절 해 주는 보온을 담당 한다는 점에서 속옷의 역할이 크 다고 본다. 그래서 신체의 보온과 보호를 위해 속옷을 많이 껴입고 솜을 집어 넣어 만들거나 누비를 만들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는 겨울의 추위를 막기 위한 방한용 위주의 속옷이 많이 발달했 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겉옷인 한복은 여름에는 상관 없지만 겨울에는 전혀 보온이 되지 않기 때문에 속옷의 역할이 더욱 강조 될 수밖에 없었다. 2) 신체의 청결유지 피부는 자체에서 배출되는 땀, 피지, 때, 혈액, 배설물, 타액 등의 오염에 의해 또, 외부로부터는 티끌, 토사, 오염된 물, 곰팡이, 세균 등에 의하여 오염된다. 겉옷은 외부로부터의 오염을 막고 속옷은 내부로부터의 오염을 흡수해서 끊임없이 피부를 청결히 유지하는 작용을 한다. 39) 그러나 조선시대 여성들은 항아리 실루엣 모양의 겉옷을 받치기 위해 속 옷을 몇 겹씩 껴입어야 했기 때문에 더위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한여름 에도 몇 겹씩 입은 속옷 때문에 땀을 많이 흘려 속옷이 다 젖어도 대놓고 빨지도 널지도 못했으니 가슴가리개에서 곰팡이가 필 지경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한밤중에 시댁식구들 몰래 빨아 뒷마당에 널어 새벽에 다 마르지도 않은 것을 걷어 다시 입어야 했으니 여인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의 종류와 가짓수도 많아 자주 빨 수는 없었지만 가장 안에 입는 다리 속곳을 자주 빨아 그나마 피부청결을 유지 할 수 있었고 속속곳은 주로 삼베로 만들어 풀을 먹였기 때문에 빳빳하게 부풀어 피부와 최소한으로 닿게 만들어 입었다. 그래서 그나마 인체의 분비물을 흡수하여 피부를 청결하게 보존하여 쾌 적함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속옷으로는 월경포 (혹은 서답), 다리속곳, 속속곳, 그리고 고쟁이를 들 수 있다. 39) 조성교 외, 의복과 환경,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002, p.184-19 -
3) 의복의 형태유지 겉옷의 외관은 속옷의 모양에 크게 좌우된다. 특히 조선후기 때와 같이 항아리 실루엣을 만들려면 많은 속옷을 껴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양처 럼 기구를 이용하지 않고 속옷을 중첩함으로서 자연스러운 실루엣이 나타 나도록 했다. 속바지는 주로 삼베로 만들어 풀을 먹여 빳빳하게 만들었고 폭이 넓은 바지를 입은 뒤 바지부리가 좁은 바지를 그 위에 입어 바지 속을 정리하 면 볼륨감이 더욱 살았다. 그 위에 다시 폭이 넓은 너른바지를 입고 속치마인 무지기를 몇 겹 입어 서 형태유지를 하였다. 무지기는 아무리 입어도 양이 차지 않는다라고 할 정도로 많이 입었다. 또한 예장용으로 밑단에 반비를 단 대슘치마를 입으면 서도 앉은 것 같 고 앉아도 선 듯한 실루엣이 완성되었다. 의복의 형태유지에 이용되었던 속옷은 속바지와 단속곳, 너른바지, 속치 마 등이 있었다. 4) 성적( 性 的 ) 표현 조선시대 여성에게 있어 속옷의 진정한 역할은 성적 표현이다. 조선전기 와는 달리 여성의 경제권이 모두 남자에게 예속되어 있는 후기에 항아리 실루엣이 유행하게 된 것은 하체 즉 둔부를 강조 해 남자들의 시선을 잡 고자 하는 여성들의 필요에 의해 생긴 것이다. 하체를 강조하려면 속옷을 많이 입어야만 했고 그것도 모자라 치마 밑으 로 속옷이 보이게끔 연출하여 입었다. 이는 기생 계층이 더욱 더 심했는 데 천민이면서도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옷을 입을 수 있었던 까닭에 양반 과 부유한 중인계급의 눈길을 끌 수 있었고 그로 인한 위기의식을 느낀 서민녀들이 기녀복식을 모방, 점차로 전 계급의 여인들로 퍼져 나가게 되 었다. 치마를 착용할 때 풍성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하의에 속하는 속옷류를 많 이 껴입게 되었고 이는 유교주의적 관점에서 강조하던 정숙함을 표현하여 - 20 -
은폐의 미덕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치마 아래로 드러나는 단속곳과 바지는 조선시대 여인의 폐쇄적인 복장과는 반대로 오히려 노출을 함으로 해서 선정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인체를 노출하기 위한 목 적보다는 가려진 부분이 들여다보이는 은폐에 대한 역설적 노출로 은밀한 정서의 표출이다. 40) 즉 여자복식의 하의에 나타나는 특징은 속옷의 착용으로 은폐 시키고 거 들치마의 착장으로 속옷을 노출함으로써 보일 듯 말 듯 한 상태에 대한 기대감으로 연결되어 개방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살을 절대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되었던 당시의 습관 속에서 속옷 을 은근히 노출하는 것만으로도 인체를 직접적으로 노출하는 것에 비할 만큼 파격적인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다. 이것은 감추려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어 이성으로부터 호기심을 불 러일으키는 은밀한 정서의 표출로 조선후기의 성적 표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속옷의 기능별로 알아보았다. 여자하의( 下 衣 )에는 다리속곳, 고 쟁이 (여름용 홑바지) 혹은 속속곳, 속바지, 단속곳, 속치마로 분류하는데, 착용방법은 다리속곳은 가랑이를 감싸고 양옆으로 다리가 나온 후 착용되 며, 고쟁이와 속속곳은 다리속곳 다음에 착용되고, 그 위에 속바지, 단속 곳, 너른바지와 속치마를 착용한다. 이들 모두는 가슴이나 가슴 바로 아래에서 말기를 묶었다. 속속곳과 속 바지를 가슴까지 올려 묶고 그 바로 아래에 단속곳과 속치마를 묶은 뒤 치마를 그 아래에 오게 묶으면 자연히 상체는 단단히 조여지게 되고 하의 는 풍성하게 풍만함을 갖게 되었다. 이 때 말기를 겹으로 하면 상체가 오히려 더 두꺼워 질 수 있으므로 주 로 홑으로 만들어 입었다. 이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쟁이의 하나인 살창고쟁이에 대 하여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40) 이귀례, 조선시대 풍속화의 에로티시즘을 이용한 패션디자인, 광주대학교 산업대학원 석사논문, 2003, p. 40-21 -
Ⅲ. 살창고쟁이 형태와 민속 1. 살창고쟁이의 개념 아래의 그림은 1998년도 전승 공예전 입선 작품으로 살창고쟁이의 독특 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허리말기와 허리말끈, 살, 창구멍, 배래와 바지부리로 구성되어 있다. 각 명칭을 그림에다 표시해 보았다. <그림 31> 살창고쟁이 세부 명칭도, 속옷2000, (주)좋은 사람들, p.31-22 -
(1) 고쟁이와 살창 고쟁이는 치마 안에 입던 바지모양의 속옷으로 단속곳 밑, 속속곳 위에 입었는데 남자의 바지와는 형태가 다르며 밑이 터져 있고 허리끈이 달려 있어 용변에 편리하였다. 이런 바지에 허리말기 아랫부분을 군데군데 네모나게, 혹은 둥글게 숭덩 숭덩 파내어 살과 창이 생기도록 만든 것이 살창고쟁이이다. 창구멍의 개수는 유물에서 다양하게 발견되는데 7개, 혹은 10개, 12개 그리고 각 부리마다 7개씩 하여 14개 등이 발견되는데 각각에도 상징적 인 의미를 둔 것으로 생각된다. 창구멍이 있어 한여름에 입었을 때 통풍이 되도록 하였고 주로 삼베로 만들었기 때문에 시원한 느낌이 들었으며 풀을 먹여 입으면 당시에 유행 하던 항아리 실루엣의 형태유지에 밑바탕 역할을 할 수 있었다. (2) 문헌의 말군과 고쟁이 <그림13~17> 여름에 모시, 생모시, 생노방, 당항라, 모시항라, 광당포, 베, 안동포 등 을 홑으로 하여 시원하게 만들어 고쟁이를 만들어 입었는데 이 고쟁이란 말은 <고려도경> 공장조에 나오는 저상과 비슷한 것으로 말군 (오군) 또 한 여기서 나왔다. 남자바지와는 달리 여자바지를 고쟁이라고도 했다는 기록은 나와 있으나 언제부터 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양쪽으로 다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가랑이가 나뉘어져 있는 형태의 하의는 고지 고이 두 계통의 어휘가 있 고 한자어로는 고의( 袴 衣 ) 경의( 脛 衣 ) 각의( 脚 衣 )로 표기 했고 고쟁이 도 같은 어원으로 본다. 41) 조선시대 후기에는 바지부리가 좁고 밑이 트였 으며 홑으로 된 것을 고쟁이라 불렀다. 전후 개량식 바지를 가래바지, 뒤 만 트여 있는 것은 풍차바지라고 한다. 42) 살창만 없을 뿐 뒤여밈 살창고쟁이와 형태는 물론 착용 방법도 비슷한 말군은 어느 때부턴가 속옷의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반가의 여인들이 말 4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디지털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42) 박춘순, 바지의 문화사, 민속원, 1998, p. 257-23 -
을 타고 갈 때 치마 위에 입기도 하였다. 말군의 형태에 대해서는 폭이 넓고 뒤가 터진 바지라는 설과 어깨 끈(말 기 말이)이 있는 폭이 넓은 바지라는 2가지 설이 있다. 세종 3년 6월에 말군을 입지 않고 말을 탄 양갓집 부녀가 기생으로 오 인 받아 망신을 당한 기록으로 보아 양반층 부녀가 말을 탈 때에는 반드 시 말군을 입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태종 9년과 12년에 궁녀와 여기 이외의 대소부녀를 수종하는 여종은 말 군을 못 입게 하라는 상소가 있었고, 세종 11년 2월에 대소부녀를 수종 하는 여종은 말군을 입지 못하게 하자 는 사헌부의 계를 광화문과 도성의 각 문에 걸었다는 것을 보면 신분에 따라 착용을 제한하였음을 알 수 있 다. 43) 인조장렬후( 仁 祖 莊 烈 后 ) 가례도감의궤( 嘉 5 都 監 儀 軌 )에는 중궁( 中 宮 )의 백색 화문릉으로 만든 겹으로 된 말군과 시녀 상궁 기행나인의 백색 명주로 만든 말군이 보인다. 말군이 나와 있는 자료로는 악학궤범( 樂 學 軌 範 )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악 공복인데 통 넓은 바지로 뒤가 갈라지고 어깨에 걸치는 끈이 달려있다. 조선시대 연향 때 여기( 女 伎 )나 연화대무를 추는 동녀( 童 女 )가 입었다. 여기가 입은 말군은 처용이 입은 군과 거의 같은 까닭인지 광해 2년 복 각본에는 말군의 척수가 기입되었는데 그 척수는 처용이 입은 군의 척수 와 같다. 백주고, 표문대구고, 군, 그리고 말군이 악학궤범에 나오는데 백주고, 표 문대구고, 군은 남자가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뒤여밈바지와 같은 형태이 나 차이점은 바지부리가 모아져 있다는 것과 버선을 만들어 달았다는 것 등이다. 그 외에는 뒤여밈바지와 흡사하다. 43) 악학궤범Ⅱ, 민족문화추진회, 1982, p. 198-24 -
2. 살창고쟁이 유물 고찰 8개의 살창고쟁이 유물을 고찰하였는데 형태는 모두 4가지로 당( 襠 ) 없 는 앞뒤트임형이 가장 먼저 나오고 그 다음은 당 있는 앞뒤트임형이다. 그 다음은 온양박물관에 소장 중인 것으로 밑이 막히고 옆이 트인 옆트임 형이다. 마지막으로 주로 안동대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앞이 막히고 뒤가 트여 있는 뒤여밈 형태이다. (1) 살창고쟁이 유물분류 유물 1과2는 1880년대 유물로 14개의 창과 16개의 살을 가지고 있으며 삼베로 만들어 졌으며 소장처는 석주선박물관이다. 형태는 고쟁이에 허리 말기에 살창이 있는 형태이다. 유물3은 20C전기 유물로 12개의 살창을 가지고 있으며 이화여대박물관 에서 소장하고 있다. 유물1,2와 달리 당이 있는 형태이다. 삼베로 만들어 졌다. 유물4는 1930년대 유물로 10개의 살창이 있으며 삼베로 만들었고 온양 민속박물관 소장에서 소장중이다. 삼베로 만들어 졌으며 허리말기는 무명 으로 되어있다. 유물 5~8까지는 형태가 뒤여밈으로 5부터 7은 20C전기 유물로 안동대 박물관에서 소장중이고 유물8은 문경새재박물관에 소장중이다. 유물5는 14개의 창과 16개의 살로 만들어 졌으며 삼베로 만들었다. 유 물6은 오른쪽에 5개의 창과 왼쪽은 4개의 창으로 이루어졌으며 각의는 고운 삼베로 만들고 허리말기와 말끈은 명베로 만들어 달았다. 유물7은 12개의 살창으로 되어 있으며 각의는 거친 삼베로, 허리말기와 말끈은 명베로 만들어졌다. 유물8은 문경새재박물관에 소장 중인데 1930년대까지 착용되었던 것으 로 기증품이다. 12개의 살창을 가지고 있으며 삼베로 만들어졌다. 이 유물들을 간단히 표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25 -
<표1> 살창고쟁이 유물표 1 1 2 3 4 형태 명칭 당 없는 앞뒤트임 살창고쟁이 당 없는 앞뒤트임 살창고쟁이 당 있는 앞뒤트임 살창고쟁이 옆트임 살창고쟁이 살창수 14개의 창 16개의 살 14개의 창 16개의 살 12개의 살창 10개의 살창 소재 삼베 삼베 삼베 삼베 허리말기:무명 시대 1880년대 1880년대 20C전기 1930년대 소장처 석주선박물관 석주선박물관 이화여대 박물관 온양민속 박물관 - 26 -
<표2> 살창고쟁이 유물표 2 5 6 7 8 형태 명칭 뒤여밈 살창고쟁이 뒤여밈 살창고쟁이 뒤여밈 살창고쟁이 뒤여밈 살창고쟁이 살창수 14개의 창 16개의 살 오른쪽5개창 왼쪽 4개 12개의 살창 12개의 살창 소재 삼베 각의:고운삼베 허리말기, 끈: 각의:거친삼베 허리말기, 끈: 삼베 명베 명베 시대 20C 전기 20C 전기 20C 전기 1930년대 소장처 안동대박물관 안동대박물관 안동대학교 박물관 문경새재 박물관 - 27 -
(2) 유물의 세부고찰 이제부터 논하는 바지들은 살창고쟁이는 아니지만 살창만 없을 뿐 뒤여 밈 살창고쟁이와 형태는 물론 착용법도 같고 살창고쟁이보다 시대별로 먼 저 입혀졌기 때문에 살창고쟁이에 앞서 고찰하고자 한다. 1) 뒤여밈 바지형 고찰 유물 3개를 고찰하였다. 모두 안동대박물관 소장으로 앞이 막히고 뒤가 터져 있으며 허리말끈을 돌려 앞에서 매듭지었다. ➀ 뒤여밈 바지A(앞) 44) <그림 18> <그림 27> 뒤여밈바지A(앞), 안동대박물관 소장 20세기 전기의 것으로 바지 길이는 102cm, 허리말기는 88.5cm이고 바 지부리는 40cm로 안동시 와룡면 지내 1동 홍씨의 것이다. 초야에 신부가 입었던 속바지를 싸 두었다가 죽은 후 가지고 간다는 속 44) 안동대학교박물관 소장 - 28 -
설이 전해지는데, 이 명주바지가 초야를 치른 신부의 것이라고 한다. 옛 조상들은 신체발부는 수지부모 했다는 의식관을 가지고 있었다. 내 몸이지만 전부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 양반층은 남녀 할 것 없 이 관례를 지낸 후에는 죽을 때까지 나체가 되는 법이 없었다. 목욕 할 때나 성생활 할 때도 조상가림이라 하여 어느 한 부위만은 옷을 입거나 버선을 신거나 하는 것이 법도였다. 명주 겉감에 무명으로 안을 넣은 겹바지이다. 45) 겹바지인걸로 보아 혼례 는 겨울에 치러 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➁ 뒤여밈 바지A(뒤) 46) <그림 19> <그림 28> 뒤여밈바지A(뒤), 안동대박물관소장 앞 1번 바지의 뒤 모양이다. 47) 45) 안동대학교박물관, 안동지역전통복식, 1996, p.52 46) 안동대학교박물관 소장 - 29 -
➂ 뒤여밈 바지B(뒤) 48) <그림 20> <그림 29>뒤여밈바지B(뒤), 안동대박물관 소장 바지 길이가 108.8cm이고 허리말기는 103.3cm고 바지부리는 50cm이 다. 뒤가 트인 흰 모시 겹바지로 물항나 안을 넣어 곱게 바느질 하였다. 앞 중심에서 뒤 중심으로 좌우 각각 무가 달렸다. 49) 47) 안동대학교박물관, 안동지역전통복식, 1996, p.52 48) 안동대학교박물관 소장 49) 안동대학교박물관, 안동지역전통복식, 1996, p.53-30 -
➃ 뒤여밈 바지C(뒤) 50) <그림 21> <그림 30>뒤여밈바지C(뒤), 안동대박물관소장 뒤여밈 바지로 길이 100cm, 허리말기 99.3cm, 바지부리 40.8cm이다. 쑥색 가죽에 백색 안을 넣어 만든 뒤트임 겹바지이다. 51) 50) 안동대학교박물관 소장 51) 안동대학교박물관, 안동지역전통복식, 1996, p.53-31 -
2) 살창고쟁이 고찰 살창고쟁이는 트임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분류하였다. 모두 세가지의 형 태로 앞 뒤 트인형, 옆 트인형, 그리고 뒤가 트인형으로 하였다. ➀ 앞뒤 트임형 앞뒤 트임형도 당이 없는 것과 있는 것, 2가지로 분류하였다. 가. 당( 襠 ) 없는 앞뒤 트임형A 52) <그림 22> 이 유물은 1880년대 것으로 삼베로 만들어 졌다. 구멍을 내어 주름의 분량도 없애고 통풍이 잘 되도록 고안되었다. 바느질 기법은 손바느질로 수직감침질, 숨은 뜨기, 온박음질 그리고 홈질이 이용되었다. 한쪽 바지통에 7개의 창구멍과 8개의 살이 있어 전체적으로 14개의 창 구멍과 16개의 살이 있고 U자의 창을 위쪽에서 모아지면서 바지의 중간 부분이 볼륨이 생긴 이 살창고쟁이는 길은 안동포 폭 38.5cm 3폭에 18cm폭을 더하여 통이 130.5cm이다. <표3> 살창고쟁이 세부치수 (단위 cm) 부 분 치 수 길 이 105 폭 수 4폭 통너비 130.5 밑위길이 60 밑아래길이 65 밑너비 상/하 9.5/20 부 리 22.5 말기길이/너비 96 10.5 끈길이/너비 67 6.5 61 6.5 뒤트임 60 당 옆트임 - 가랑이 - <그림 32> 삼베살창고쟁이실측도 52) 석주선박물관 소장 - 32 -
<그림 33> 살창고쟁이 마르기 (마르기) 삼베 34cm너비, 길이 1,000cm, 부리쪽 안단 순창포 길이 70cm, 너비 26cm의 삼베가 소용된다. 긴 길 - 길이 (105cm+시접 5cm), 너비 34cm 2장 중간 길 - 길이 (98cm+시접 5cm), 너비 34cm 2장 짧은 길 - 길이 (60cm+시접 4cm), 너비 34cm 2장 말기 - 길이 (96cm+시접 61cm), 너비 (10.5cm+시접 4.5cm) 1장 끈 - 길이 (67cm+시접 2cm), 너비 (6.5cm+시접 0.8cm) 1장 길이 (61cm+시접 2cm), 너비 (6.5cm+시접 0.8cm) 1장 바느질 순서는 폭을 잇고, 배래, 부리를 완성한다. 창과 살을 만들어 길 과 말기를 연결한 뒤 말기와 끈은 달아 완성한다. 솔기와 솔기는 0.5cm 온박음질로 되었고 식서와 푸서는 온박음질에 푸 서시접을 정리해서 감침질로 되어 있다. 폭을 이을 때는 양쪽 가랑이의 이음을 서로 대칭이 되도록 폭 잇기를 한 다. 제일 긴 길 두장을 박음질하여 이은 후 말기와 연결된 부분에 길이 18cm, 너비 11cm의 창 부분을 남기고 0.4cm 온박음질을 한다. 나머지 길도 부리 부분에서 8.2cm를 남기고 연결한다. 작은 길을 앞 중심으로 해서 대칭이 되도록 4폭씩 2개의 가랑이를 잇는다. - 33 -
<그림22> 삼베 살창고쟁이, 석주선박물관소장 배래는 이음선이 없이 뒤쪽 길을 연장하여 대각선으로 접어서 앞쪽으로 연결했다. 옷감 손실이 없이 직선 재단으로 이어졌으면서도 배래의 엇선 으로 착용 시 신축성이 있도록 되어 있다. 뒷 트임의 솔기는 식서부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식서와 너비의 푸서가 만날 때 푸서 쪽의 시접을 0.5cm 안쪽으로 접어 넣어서 식서 겉과 푸서 겉을 0.4cm로 온박음질 한다. 길은 안동포로 만들고 부리는 순창포로 하였다. 두 옷감의 질감이나 색 상을 달리하여 직선으로 재단하고 옆의 이은 부분은 배래의 대각선을 이 용하여 꺾어서 연결하였다. 부리 시접을 박고 안단을 올리기 전에 길과 안단을 속에서 양쪽을 한 올 씩 떠서 들뜨지 않도록 속감침질을 해준다. 겉에서 보면 양쪽으로 한 올 씩 고정되어 보인다. 단을 올려 감침질로 고정 시킨다. 통 한쪽에 7개의 창을 만든다. 간격을 정해 위치를 정한 다음 재단하여 창 위쪽에 말기와 만날 시접만큼을 미리 박음질 한 뒤 시접을 접어 넣어 시침 해 둔다. 창들을 모두 감침질로 고정한 다음 창살이 모자라는 곳에 기둥을 덧대어 준다. 말기는 홑이고 길과 연결할 때 쌈솔로 바느질하여 말기 옆선과 위쪽의 너비를 완성하였다. 말기 위쪽은 한 땀 상침으로 굵은 목면실로 1.8cm 간격으로 한 땀씩 떠서 고정하였다. - 34 -
끈의 아래쪽은 식서, 푸서 위쪽은 0.5cm 감침질로 처리 하였다. 53) 출토 복식에 홑고름들 중에서 이렇게 푸서로 둔 고름들이 종종 있었다. 끈은 말기가 완성된 뒤 겉에서 0.8cm 들어가 끈을 고정한 뒤 위에서 온 박음질로 고정시킨다. 나. 당 없는 앞뒤 트임형B 54) <그림 23> <그림 23> 살창고쟁이, 석주선박물관 소장 바지 길이는 100cm, 허리둘레는 90.5cm이고 1880년대 것이다. 베로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14개의 창구멍과 16개의 살이 있다. 창은 직사각형 으로 내었다. 밑이 뚫린 개당고형이며 양쪽 가랑이가 허리말기 부분에서 서로 조금 씩 겹쳐 있을 뿐 연결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다. 바느질 기법은 손바느질로 수직감침질, 숨은 뜨기, 온박음질 그리고 홈 질이 이용되었다. 53) 안인실, 조선시대 여자바지 연구, 2001, p.37, 54) 국립민속박물관, 생활 속에 담긴 우리 옷의 발자취, 2003, p.60, - 35 -
다. 당 있는 앞뒤 트임형 55) <그림 24> 바지 길이는 84cm이고 허리둘레가 70.4cm이다. 삼베로 만들어 졌으며 오려낸 부분이 더 이상 터지지 않도록 작은 천을 대어 힘을 받도록 만들 었다. 56) 허리말기의 끈은 3.3cm폭에 길이 71cm이며 시접은 0.8cm이다. 시접은 말아서 감침질하였다. 오른쪽 옆트임이며 트임 밑에 조그만 삼각무가 달 려 있고 시접은 1cm이다. 길과 말기의 연결 시접은 0.9cm이고 창구멍의 시접은 말아서 감침질하 였다. 좌우 가랑이에 바지 밑을 가름솔로 달고 좌우의 가랑이를 여미면 밑이 서로 겹쳐지도록 허리의 같은 위치에 달았다. 배래의 시접은 쌈솔로 넘겨서 감침질 했다. 바지부리는 단을 내어 겉으로 0.2cm 정도만 살짝 보이게 하고 나머지는 안으로 넘겨 감침질한 후 바지부리를 따라가며 세 땀 상침하여 아름답게 장식했다. 단 너비는 2.3cm이다. <그림 24> 살창고쟁이,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55)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56) 이경자 외, 우리 옷과 장신구, 2003, pp. 278~ 279-36 -
( 다번) 살창고쟁이의 도식도 <그림 25> 57) <그림 25> 살창고쟁이도식도, 우리옷과 장신구, p278 ➁ 옆 트임형 58) <그림 26> 10개의 살창이 있는 살창고쟁이로 착용 시 뒤쪽에 오른쪽의 트임이 있 으나 여밈은 왼쪽이다. 바지통은 34cm의 삼베를 3폭으로 연결하여 85cm이다. 앞판의 가운데를 중심으로 반폭을 마주대고 2폭을 이었다. 앞판의 가운데 시접은 통솔이고 바지폭의 연결 시접은 식서가 만나 0.6cm땀/0.6cm띰의 홈질로 하였으며 시접의 방향은 착용 시 오른쪽이다. 57) 이경자 외, 우리옷과 장신구, 설화당, 2003, p. 278 58)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 37 -
<표 4> 살창고쟁이 세부 치수 및 도식도 살창의 너비는 0.2~1cm의 간격으로 허리 말기와 연결되어 있는데 뒷 판 의 살창이 서로 엇갈려 있다. 바지 배래는 통솔인데 바지통의 겉을 마주대고 시접을 반으로 접어 완성 선에서 한꺼번에 반박음질 후 시접의 위를 감침질로 하였다. 시접의 방향 은 앞이다. 가랑이 부분의 안 쪽에 대었고 시접을 안으로 접어 감침질 하 - 38 -
였다. 허리말기는 무명을 사용하여 92 10.5cm로 하였다. 살창과 허리말기를 한꺼번에 겉에서 0.2cm땀/1.5cm땀의 시침질을 하였다. 허리끈은 무명의 홑으로 앞 끈 90 4.5cm, 뒤 끈 92 5.5cm이다. 끈의 아래는 식서이고 위는 푸서로 0.4cm의 시접분에 3땀/cm의 감침질로 하 였다. 허리말기 부분에 7cm를 대어, 0.4cm 안쪽에서 2땀 상침 하였다. 59) 이 바지는 대략 1930년대까지 착용하였으며 이 후 앞이 막히고 뒤만 트 인 개화고장주가 나오면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 26> 살창고쟁이,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59) 윤현진, 조선후기 여자속옷 연구, 2001, p.63-39 -
➂ 뒤가 트인 뒤여밈 바지형 앞이 막히고 뒤가 트여 있으며 허리말끈을 뒤에서 여며 돌려 앞에서 매 듭 지어 입었다. 가. 뒤여밈형A 60) <그림 27> <그림 27>뒤여밈 살창고쟁이, 안동대박물관소장 20세기 전기의 것으로 바지 길이 106.2cm, 허리말기 90.4cm, 바지부리 42cm로 예천군 본동의 고씨 유물이다. 한쪽 각의의 허리부분에 5~7개 정도의 직사각형 기둥을 잘라내어 잘라 낸 부위의 가장자리를 곱게 감치고 남은 기둥을 허리말기에 달아 뒤트임 바지를 만든다. 이 고쟁이는 한 각의에 7개의 구멍과 8개의 기둥이 있다. 61) 말기 부분은 한 땀 홈질 하였다. 60) 안동대학교 박물관 소장 61) 안동대학교박물관, 안동지역전통복식, 1996, p.54-40 -
나. 뒤여밈형B 62) <그림 28> <그림 28>뒤여밈 살창고쟁이, 안동박물관소장 이 뒤여밈 살창고쟁이는 20세기 전기의 것으로 바지 길이는 94cm, 허리 말기 92 9.3cm, 바지부리 44cm로 예천군 본동 고씨의 것이다. 고운 삼베로 각의를 만들고 허리말기와 끈을 명베로 만들었다. 복부에서 사타구니까지의 중심선을 꿰맨 흔적이 있다. 63) 창구멍은 오른쪽 5개, 왼쪽 4개로 직사각형이며 곱게 말아서 감침질 하 였다. 62) 안동대학교 박물관 소장 63) 안동대학교박물관, 안동지역전통복식,1996, p.55-41 -
다. 뒤여밈형C 64) <그림 29> <그림 29> 뒤여밈 살창고쟁이, 안동박물관소장 20세기 전기의 것으로 바지 길이는 93.3cm, 허리말기는 96cm, 바지부 리 24cm이다. 거친 삼베로 각의를 만들고 허리말기와 끈을 거친 명베로 만들었다. 65) 창은 직사각형으로 말아서 감침질 하였으며 가운데 부분의 창을 촘촘히 달고 한가운데 두개의 창은 겹쳐지게 달았으며 밖으로 갈수록 벌어지게 달았다. 바지부리는 한 땀 상침으로 처리 했다. 64) 안동대학교 박물관 소장 65) 안동대학교박물관, 안동지역전통복식, 1996, p.55-42 -
라. 뒤여밈형D 66) <그림 30> <그림 30> 뒤여밈 살창고쟁이, 문경새재박믈관 소장 삼베로 만들어 졌으며 현재 칠순의 할머니가 기증한 것으로 할머니가 여 섯 살 때 친정어머니가 만들어 준 것이라 한다. 12개의 살창을 가지고 있 다. 67) 66) 문경새재박물관 소장 67) 문경새재박물관도록, 문경시, 1999, p. 122-43 -
3. 살창고쟁이 형태와 기원 풍속 살창고쟁이는 경상도 안동의 민속복 68) 으로 생김새가 독특한 만큼 이름 도 다양하다. 살창고쟁이, 살창고장주우, 다리고쟁이, 문어고장주우, 가새 고장주우 등이다. (1) 살창고쟁이의 형태 말기가 달린 허리부분을 군데군데 네모나게, 혹은 둥글게 파내어 연결한 모양의 바지이다. 생김새가 독특한 만큼 이름도 다양하다. 살창고쟁이, 살 창고장주우, 다리고쟁이, 문어고장주우, 가새고장주우 등이다. 고장주우 혹은 꼬장주는 바지라는 안동지역의 방언이고 살창처럼 생겼다 하여 (혹은 창살) 살창고쟁이, 다리고쟁이나 문어고장주우는 바지말기가 달린 부분의 구멍 난 모양이 문어다리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졌으며 가세 고장주우는 가위로 바지의 윗부분을 잘라 냈기 때문에 붙여졌다. 또는 창 구멍이 난 옷이 바로 살에 닺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살창고쟁이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앞 뒤 트인 당 없는 바지형이 가장 먼저 나오고 그 다음은 당이 있는 앞 뒤 트인 바지형이다. 그 다음 은 온양박물관에 소장 중인 것으로 밑이 막히고 옆이 트인 바지형이다. 마지막으로 주로 안동대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앞이 막히고 뒤가 트여 있 는 뒤여밈 형태이다. 각종 바지 형태의 살창고쟁이는 주름 양쪽 끝을 말기에 달고 가운데 부 분을 말아서 구멍을 나게 하여 주름 부위의 구멍은 손으로 말아서 곱게 감쳐 통풍이 잘 되도록 한 바지이다. 뒤여밈 살창고쟁이는 뒤여밈 바지와 형태가 비슷하지만 말기가 달리는 부분에 여러 개의 구멍을 낸 것이 특징이다. 바지 부분은 삼베로 만들었 다. 구멍을 내고 남은 여러 개의 다리를 앞부분에서 조금씩 겹쳐 단 모습 을 볼 수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살창고쟁이는 거의 모두 삼베로 만든 것이지만 바지만 68) 안동대학교박물관, 안동지역전통복식, 1996-44 -
삼베로 하고 말기는 성글게 짠 무명으로 만들어 단 것도 있다. 여자바지 연구 69) 의 유물(석주선 박물관 소장)은 삼베로 만들고 부리 쪽 안단은 순 창포로 만들어 졌다. 그러면 왜 이런 독특한 살창고쟁이를 만들어 입었을까? 우선 안동지방의 기후에 대해 알아보자. 안동지역은 태백산맥의 지맥이 동서방향으로 횡단하여 북쪽에는 봉수산 미면산 연점산 등 높은 산지가 솟아 있고, 남서쪽은 보문산 백자봉 갈라산 등의 산지가 병풍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북동쪽은 높고 남서쪽은 비교적 낮다. 기후는 남부내륙형 기후에 속해 한서의 차가 심하고 강수량은 다소 적은 편이다. 연평균 기온은 11.9 C, 8월 평균기온 24.1 C, 1월 평균기온 -0.6 C이고 강수량은 연평균 1,014mm이다. 70)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은 분지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운이 밖으 로 빠져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매우 덥다. 살창고쟁이의 가장 큰 장점은 실용성이다. 안동은 지금도 종가집이 많기 로 유명하다. 그만큼 예법도 까다롭다. 아무리 더워도 옷을 격식에 맞게 입어야 했다. 살창고쟁이는 한여름 더울 때 가장 안쪽에 입었다. 그 위에 뒤트임 바지 를 입은 후 항라나 모시로 된 얇은 단속곳을 입었다. 삼베로 만들었기 때 문에 땀이 묻어나지 않으며 움직일 때 제법 시원한 느낌이 났다. 고쟁이 위로 또다시 몇 개의 속옷을 입었으므로 창구멍이 바람구멍 역할을 충분 히 하지는 못했지만 바른 몸가짐을 위해 일상적으로 많은 속옷을 입고 있 어야 하는 여성들에게 구멍이 있는 옷을 입었다는 심리적인 만족감은 한 여름 더위를 이길 수 있게 하였다. (2) 살창고쟁이에 담긴 기원 풍속 여성들은 어린 나이부터 어머니에게 바느질을 배우게 된다. 그러다 혼처 가 정해지고 혼수로 옷감을 받게 되면 자신의 옷은 물론 예단도 손수 짓 69) 안인실, 조선시대 여자바지 연구, 단국대대학원, 2001 70) 두산세계대백과, 네이버 검색 - 45 -
는 것이 일반적이다. 살창고쟁이는 반드시 어머니가 몇 벌 지어주거나 아 니면 자신의 것 중 입지 않은 것을 꼭 챙겨 주었다. 반가 여성의 옷차림은 혼인을 계기로 무척 복잡 해 진다. 옛날에는 옷감 이 귀하였기 때문에 갓 시집 온 새색시가 옷을 해 입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하물며 속옷을 시댁에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평생 입을 속 옷을 친정어머니와 함께 만들어 준비 해 갔다. 다리바지라꼬 참 포시라운 거 요래 찧어 가조고 모시로 또 모시 아이만 안동포나 뭐 갈포나 이래가주고 하는데 우리 어른분네는 모두 이걸 입으셨다꼬. 시원하라꼬. 여 배 있는데 시원하라꼬. 난도 저른 바지 시집 올 때 하나 해가주고 왔딘데. 안 입어서 글치 하기는 다 해가주고 왔다꼬. 그때는 입을라고 해왔지. 이래 허리(말기) 달아 가주고 하지. 맹 예전에 시댁에 가만 입는다꼬 그냥 여름에 시원하라꼬. 그렇게 마이 입으이께네. 여 이른 데가 뻥 하잖아. 그러이께네 말하자만 바람 들어가라꼬 그랬어. 치마 밑에다 잔뜩 입고 더우니까. 상락 김씨댁 종부 71) 살창고쟁이는 대개 두 가지 기원이 담겨 있는데 하나는 창구멍으로 신부 의 흉이 새어 나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집살이를 시원하게 하라는 친정어머니의 소망이다. 조선시대의 여인들의 삶은 무척 고달팠다. 이미 시집살이를 겪은 어머니 들은 딸들을 혼인 시키면서 자신보다는 나은 시집살이를 하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되도록 딸의 부족함이 덜 드러나고 딸의 허물을 문제 삼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시집살이를 하며 답 답한 가슴이 창구멍을 통해 뚫리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어디에다 하소 연 할 수도 없는 일을 어머니가 주신 살창고쟁이를 입고 위로 받을 수 있 는 것이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무조건적인 순종을 통해 시집식구들과의 화목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내훈> 72) 이란 여훈서를 보면 우선 며느리 는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해야 했고 시부모의 명령에 순종해야 했다. 71) 조희진, 선비와 피어싱, 도서출판 동아시아, 2003, p. 36 72) 세조의 큰며느리이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쓴 교훈서다. 며느리를 미워하여 내 쫓았는 데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손자 연산군에게 머리를 받혀 절명하는 불행을 겪는다. 박영규, 조선의 왕실과 외척, 2003, p..213-46 -
또한 제사나 손님접대를 비롯하여 대소사를 일일이 시부모에게 여쭈어 의 논해야 했고 시부모가 너희 방으로 가라고 명하지 않는 한 감히 물러 갈 수도 없었다. 심지어 부부 생활까지도 어른들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시집 식구들을 상전처럼 섬겨야 했고 항렬이 낮은 시댁 여자아이에게도 존대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힘들고 서러운 것은 바로 시어머니와의 갈등이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가부장제의 권위주의에 있었다. 시어머니 역시 힘겨운 시집살이를 겪으며 이제 어느 정도 가족 내에서 지 위를 확보 해 놓았는데 새로 들어 온 며느리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로 느껴졌다. 또한 그 동안의 자신의 한을 자기보다 약한 존재인 며느리에게 풀고자 하는 심리도 있었다. 시어머니의 행동이 부당하다고 해도 일단 시어머니 는 어른으로써 그 권위를 부정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며느리는 심한 스트 레스를 받았다. 73) 남편은 시집 간 여자에게 매우 필요한 존재였지만 남편은 시집 식구와의 관계 때문에 사실상 별 도움이 되지 않았고 또한 사랑으로 결합된 처지도 아니었기 때문에 부부관계가 쉽게 조화를 이루지도 못했다. 이러한 시집살이는 칠거지악으로 여실히 나타나는데 칠거지악이란 소위 아내를 일방적으로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의 죄목으로 시부모에게 순 종치 않음, 아들을 못 둠, 음란함, 투기가 있음, 말이 많음, 도벽이 있음 등이다. 당시 여성의 목표는 시집에서 쫓겨나지 않고 견디는 길 밖에 없 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이혼은 가문의 수치로 여겨 양반의 이혼은 이루어지 지 않았지만 이혼보다 더한 수치를 안고 여자들은 살아야 했다. 시집식구 들의 온갖 구박을 받아야 했고 남편의 축첩을 용인해야 했으며 친정에는 출가외인이라고 외면 받아야 했다. 74) 여성들의 고된 시집살이는 조선중기 이후 성리학의 영향으로 인해 고착 된 가부장제와 남존여비사상의 산물이었다. 75) 73) 변연홍, 19 20C 여자 저고리 길이 변천요인, 인하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1, p.40 74) 한미라 외, 한국인의 생활사, 일지사, 2004, p.114 75) 변연홍, 19 20C 여자 저고리 길이 변천요인, 인하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1, pp.40~41-47 -
살창고쟁이는 꼭 새색시만이 입었던 옷은 아니고 다만 혼인날 처음 입었 던 경우가 상당히 많다. 혼례날은 여자에게 처음으로 완벽하게 옷을 갖추어 입어야 하는 날이 다. 모든 속옷을 다 갖추어 입고 혼례복을 입은 다음 혼례식를 하게 된 다. 지금이야 예식장에서 두 세시간정도로 간단히 예식이 끝나지만 옛 혼 례식은 거의 하루 종일 걸렸다. 신부는 모든 옷을 다 입고 하루 종일 긴장 속에 지내야 했다. 그 때문에 제일 속에 살창고쟁이를 입고서 이것을 입었기 때문에 더워도 참을 수 있 다는 심리적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옛 조상들은 신체발부는 수지부모 했다는 의식관을 가지고 있었다. 내 몸이지만 전부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 양반층은 남녀 할 것 없 이 관례를 지낸 후에는 죽을 때까지 나체가 되는 법이 없었다. 혼인 첫날 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목욕 할 때나 성생활 할 때도 조상가림이라 하여 어느 한 부위만은 옷을 입거나 버선을 신거나 하는 것이 법도였다. 76) 그래서 가장 안쪽에 입었던 것은 밑이 열린 개당고 형태인 것이 많았고 아니면 뒷여밈으로 부리만 꿰 맨 것, 이 두 가지 형태의 살창고쟁이가 입혀졌다. 초야 때 입었던 속옷은 반드시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 당시의 유교사회 에서의 여인의 정절과 순결을 표시하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순결의 의미 이자 증거물로서의 의미는 여인뿐 아니라 그 집안에도 아주 중요했다. 혼례는 집안과 집안의 문제지 결코 당사자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순결치 못한 여인은 혼례를 할 수 없었고 설사 혼례를 했다 해도 소박맞 거나 목숨을 내놔야 했다. 얼마나 많은 여인이 정절을 강요받았고 그에 따른 구속도 얼마나 많았는지. 초야를 치른 살창고쟁이(혹은 바지)는 빨지 않고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안방 반닫이 아래 가장 안쪽에 보관 했다. 그러다 저세상으로 갈 때 함께 가지고 갔다. 77) 그것을 수의로 혹은 보공(시신을 관 속에 안치한 후 빈틈 을 채우기 위해 넣는 것을 말함)을 위한 옷으로 사용되어 무덤까지 가지 고 간 것이다. 76) 이규태, 한국인의 생활문화 2, 2000,p.197 77) 조희진, 선비와 피어싱, 도서출판 동아시아, 2003, p.40-48 -
Ⅳ. 살창고쟁이의 기능 및 특징 1. 살창고쟁이의 기능 살창고쟁이의 기능은 모두 3가지 정도로 요약 할 수 있는데 구조적, 심 리적, 마지막으로 기능적 특징으로 나눌 수 있다. (1) 구조적 특징 살창고쟁이의 형태의 구조적 특징은 말기가 달릴 허리부분을 군데군데 네모나게 또는 둥글게 파내어 창구멍을 만들고 뒤가 훤히 트여 있어, 혹 은 밑이 터져 있어 앞에서 양쪽 다리를 끼워 입으며 각각의 바지통은 말 기로만 연결될 뿐 서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가랑이 앞부분에 있는 두 서너 개의 다리는 서로 겹쳐 있어 맨살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또 중심에 가까울수록 말기에 달린 여러 개의 다리를 서 로 조금 씩 겹치거나 다닥다닥 붙여 놓았다. 그래서 구멍이 숭덩숭덩 뚫 려 있는 민망한 옷이지만 결코 속이 보이지 않았다. 삼베로 만들었기 때문에 땀이 묻어나지 않으며 움직일 때 제법 시원한 느낌이 났다. 살창고쟁이는 구조적으로 아주 독특하게 생겼으며 또한 대단히 아름다운 작품이기도 하다. 1998년 안동지역 살창고쟁이를 고증하여 이태옥 소장 이 만든 살창고쟁이가 대한민국 전승공예전에서 입선을 한 것만 보더라도 우리 선조들의 미적 감각을 알 수 있다. 78) <그림 31> 또한 2000년 9월 22일부터 24일까지 열린 세계속옷 역사전 에서 고증 제작되어 패션쇼에 출품 된 살창고쟁이의 아름다움은 전 세계를 깜짝 놀 라게 했다. 그 때 출품 된 살창고쟁이의 도식화를 첨부한다. 79) <그림 34> 살창고쟁이는 트임의 위치가 어디 있는지에 따라 분류 할 수도 있고 혹 78) 좋은 사람들, 속옷 2000, 2000, p.31 79) 2000년 인하대 한국복식연구실에서 고증제작 한 것임 - 49 -
은 여밈의 위치에 따라 분류 할 수도 있는데 본 논문에서는 트임의 위치 에 따라 분류하였다. 앞 뒤 트인 당 없는 구조의 살창고쟁이는 가장 오래된 구조로 고쟁이에 살창을 만든 형태이다. 가슴까지 올라오게 되서 착용하는 것과 허리부분 에서 착용하는 것 등, 다소의 크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다음은 옆이 트인 바지형 구조로 온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앞 뒤쪽을 재단하여 붙인 형으로 당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트임이 있는 반 대쪽으로 허리말끈을 돌려 매듭지어 입었다. 마지막으로 뒤가 트이고 뒤에서 여며 앞에서 매듭지어 입은 구조의 바지 형이 있다. 주로 안동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문경새재박물관에서도 전시되어 있는 유물이 있다. (2) 심리적 특징 살창고쟁이의 가장 큰 특징은 옷에 의미 있는 기원이 담겨 있다는 것이 다. 살창고쟁이는 대개 두 가지 기원이 담겨 있는데 하나는 창구멍으로 신부의 흉이 새어 나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집살이를 시원하게 하 라는 친정어머니의 소망이다. 그러면 창구멍의 의미는 무엇일까? 왜 여러 개를 만들었을까? 거기에는 이러한 추론이 가능하다. 신부의 흉이 새나가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면 창구멍 하나하나가 신부의 흉을 뜻하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신부의 흉을 책잡혀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소박을 받는 것 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칠거지악이 있었는데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경 우, 자식을 못 낳는 경우, 행실이 음탕 할 경우, 질투를 하는 경우, 말이 많아 가족 간에 이간질을 시키는 경우, 도둑질을 하는 경우. 그리고 나쁜 병이 있는 경우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이 외에도 삼종지도를 강조 해 이 모든 것을 흉 거리로 만들었다. 삼종 지도란 출가 전에는 아버지를 좇고 출가해서는 남편을, 그리고 남편 사후 에는 아들을 좇는다는 도로서 종교보다도 더욱 강한 지상명령이었다. 80) 흉이 잡힐 경우 그 처벌은 가혹했다. 아무 경제권도 없는 여성들은 내쫓 80) 김혜영, 기녀복식을 중심으로 본 조선후기 여성복식의 연구, 배재논총 제2권, 1997, p.7-50 -
기면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친정에서도 출가외인이라 받아 주지 않았고 재혼도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자결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이유로 살창고쟁이의 창구멍을 처음에는 아무 의미 없이 만들다 가 점차로 7개나 10개로 또는 한 쪽에 일곱 개씩 14개의 창구멍을 만들 지 않았을까 추론 해 볼 수 있다. 살창고쟁이가 처음부터 수월한 시집살이를 하고자 한 기원을 위해 생겨 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냥 더위를 피하기 위해 생겼지만 더위를 피하니 시집살이도 좀 수월하게 하자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시집살이 가 수월 해 지지는 않았겠지만 이것을 입었으니 수월해지지 않을까하는 심리적 위안은 들었을 것이다. 부단한 노력과 인내가 요구되는 옷차림과 몸가짐에 대한 제약 등이 살창 고쟁이에게 이러한 의미가 부여되도록 하였고 보다 쉽게 사람들에게 수용 이 되었을 것이다. (3) 기능적 특징 마지막으로 살창고쟁이는 삼베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이유가 살창고 쟁이가 안동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동지역이 삼베와 안동포의 생산으로 유명하고 한여름에 유달리 기온이 높은 지역적 특성과 또한 양반의 종가집이 많이 모여 있는 등 예가 중시 되는 지역이라는 점이 살창고쟁이를 많이 만들어 입은 배경이 되었을 것 이다. 삼베에 풀을 먹여 빳빳하게 만들어 입으면 볼륨감을 더할 수 있기 때문 에 항아리 실루엣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속옷이며 항아리 실루엣의 형태 유지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가장 안 쪽에 입었기 때문에 신체 청결에 중요하였고 창구멍이 있어 통 풍이 잘되도록 만들었다. 비록 여러 속옷을 껴입어 그리 만족스러운 통풍 이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51 -
2. 살창고쟁이의 특징 종부로서 혹은 반가의 딸로서 사는 조선시대 여인들이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고, 또한 편하게 움직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신분적인 위치에 서 보았을 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법을 지키느라 여름에도 겹버선 을 신고 있어야 했고 치마 밑으로는 속치마를 시작으로 온갖 속옷을 입었 기 때문에 행동하는 데에 상당한 제약이 따랐다. 81) 옛날에는 속속곳 입히지, 질다란 고쟁이두 겹바지야, 종아리가 비친다구. 속속곳 입었는데 무슨 종아리가 비치우? 모시루다 겹으로 대서 겹바지 해서 입히지, 또 거기다 단속곳 입지, 그러니 땀밖에 더 나겄수. 이규숙 구술, 이 계동마님이 먹은 여든 살 중에서 82) 치마 속에 몇 겹의 속옷을 겹쳐 입고 여름을 나야하는 일은 반가의 여성 들에게 대단히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방 편으로 말기가 달릴 허리부분을 군데군데 네모나게 또는 둥글게 파내어 연결한 독특한 모양의 바지를 만들었다. 살창고쟁이이가 바로 그것이다. 형태는 뒤가 훤히 트여 있어, 혹은 밑 이 터져 있어 앞에서 양쪽 다리를 끼워 입으며 각각의 바지통은 말기로만 연결될 뿐 서로 떨어져 있다. 가랑이 앞부분에 있는 두 서너 개의 다리는 서로 겹쳐 있어 맨살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또 중심에 가까울수록 말기에 달린 여러 개의 다리를 서 로 조금 씩 겹치거나 다닥다닥 붙여 놓았다. 살창고쟁이의 형태는 독특하게 생겼지만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 로 입혀진 이유는 가장 안쪽에 입는 옷이기 때문이다. 겉옷이 아니기 때 문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고 더위를 피할 수 있다는 실용성이 우선되 었기 때문이다. 다라고재이라고 저래 쭉쭉 끼 입어. 삼베로도 하고. 저른 거 여름에 저래 뻐끔뻐끔하지. 겨울게는 그래 뻐끔뻐끔하게 안 해. 여름에는 이거 81) 임재해 외, 민속문화의 지역적 특성을 묻는다, 2000, p.283 82) 조희진, 선비와 피어싱, 도서출판 동아시아, 2003, p. 32, 재인용 - 52 -
(살창고쟁이)를 제일 안에, 속에다 입어야지. 한산 이씨댁 종부 83) 삼베로 만들었기 때문에 땀이 묻어나지 않으며 움직일 때 제법 시원한 느낌이 났다. 고쟁이 위로 또다시 몇 개의 속옷을 입었으므로 창구멍이 바람구멍 역할을 충분히 하지는 못했지만 바른 몸가짐을 위해 일상적으로 많은 속옷을 입고 있어야 하는 여성들에게 구멍이 있는 옷을 입었다는 심 리적인 만족감은 한여름 더위를 이길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창구멍은 바람구멍 역할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는 시집살이를 수월 하게 하라는 친정어머니의 소망까지 담고 있다. 구멍으로 신부의 흉이 나 가고 시원하게 시집살이를 하라는 소망이었다. 소재는 안동지역의 특산물로 많이 생산되는 삼베와 안동포가 많이 쓰였 다. 시원한 느낌도 더위를 피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풀을 먹여 입으면 겉옷의 형태유지에 아주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83) 조희진, 선비와 피어싱, 도서출판 동아시아, 2003, p. 34-53 -
Ⅴ. 결론 조선후기에 해당하는 17세기 중반은 사회적으로 유교( 儒 敎 )의 이념이 정 착된 시기이고, 경제적인 발전에 의해 국가적으로 풍요한 시대였다. 18세기 이후는 가부장권이 보다 강화되는 시기였고 문중이나 동족으로 대표되는 부계 집단의 결합이 강화되었다. 모든 상속재산은 적자인 아들 에게만 상속되었고 아들이 없으면 그 전에는 딸이나 외손이 상속 받아 봉 사하던 것이 양자를 들여 가문을 이어 나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여성은 경제권과 봉사의무가 없어져 출가외인이 되고 출가하여 시댁의 자손생산 의무만 남아 가정에서 남성의 생활을 뒷받침하는 내조자 로의 역할만 굳어져갔다. 부계혈통의 순수성을 보장하고 양반으로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 성의 정절과 순종도 더욱 강요했다. 양반녀에게는 어느 때보다 정숙성이 강조되었고, 그와는 반대로 천민인 기녀를 포함한 중인이상의 여성들은 좀더 자유로운 일상생활과 복식행동 을 하였다. 당시 여자복식은 하후( 下 厚 )의 형태를 이루는 항아리 실루엣 이 유행하였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속옷의 역할이 중요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여자 속옷을 분류하면 상의( 上 衣 )인 가리개용 허리띠, 속적삼, 속저고리와 하의( 下 衣 )인 다리속곳, 속속곳, 속바지, 단속곳, 너른바지, 무 지기, 대슘치마가 있다. 다리속곳은 가장 기초가 되는 하의이고 월경포는 여성의 필수 속옷이다. 속속곳은 피부와 접촉면이 많아 통기성과 흡수성이 좋은 삼베와 무명을 주로 사용하며, 속바지 안에 착용되어 실루엣을 형성한다. 속바지는 계절 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되었는데 홑바지, 겹바지, 누비바지, 살창고쟁이 등 이 있으며 모든 여성들이 착용했다. 넓은 바지통과 부리로 좁아지는 곡선 형 배래는 둔부를 부풀린 실루엣을 형성했다. 단속곳은 서민층에서는 치마 밑에 착용하기도 했으며, 부드러운 소재를 사용한다. 너른바지는 양반층의 예장용 바지로써 바지통이 매우 넓다, 속치마로 무지기와 대슘치마가 있는데, 모두 예장용으로 치마 길이가 다 른 무지기 치마는 둔부를 부풀릴 뿐만 아니라 단에 염색을 하여 아름다움 을 더했다. 대슘치마는 가장 겉에 착용되어 속옷의 실루엣을 정리하고 단 - 54 -
에 백비를 대어 아랫단을 퍼지게 하였다. 이들 속옷은 모두 가슴까지 끌어 올려 입거나 가슴 바로 아래 입었다. 다리속곳은 가슴까지 끌어 올려 입어도 활동이 편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 으며 그 다음에 입었던 고쟁이나 속속곳은 가슴에다 말기로 묶었으며 그 밑으로 단속곳과 속치마 말기를 묶었다. 그렇게 입다보면 자연히 가슴을 동여 매개되었고 치마부분은 더욱 더 풍만하게 보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항아리 실루엣이 만들어져 더욱 더 에로틱한 인체선을 강조 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 여자속옷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면, 유교사회에서 인체선을 감추고 겹겹이 착용하여 형성된 은폐성과 노출된 속옷으로 인체의 간접적 인 선을 강조한 노출성, 그리고 속옷의 트임을 가진 구조와 속옷의 제작 시 사용된 다양한 바느질법 그리고 계절에 따른 소재와 구성에서 나타나 는 기능성 등이다. 종부로서 혹은 반가의 딸로서 사는 조선시대 여인들이 자신이 원하는 옷 을 입고, 또한 편하게 움직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신분적인 위치에서 보았을 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법을 지키느라 여름에도 겹버선을 신고 있어야 했고 치마 밑으로는 속치마를 시작으로 온갖 속옷을 입었기 때문에 행동하는 데에 상당한 제약이 따랐다. 치마 속에 몇 겹의 속옷을 겹쳐 입고 여름을 나야하는 일은 반가의 여성 들에게 대단히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방 편으로 말기가 달릴 허리부분을 군데군데 네모나게 또는 둥글게 파내어 연결한 독특한 모양의 바지를 만들었다. 살창고쟁이의 형태는 뒤가 훤히 트여 있어, 혹은 밑이 터져 있어 앞에서 양쪽 다리를 끼워 입으며 각각의 바지통은 말기로만 연결될 뿐 서로 떨어 져 있다. 삼베로 만들었기 때문에 땀이 묻어나지 않으며 움직일 때 제법 시원한 느낌이 났다. 또한 구멍이 있는 옷을 입었다는 심리적인 만족감은 한여름 더위를 이길 수 있게 하였다. 살창고쟁이는 대개 두 가지 기원이 담겨 있는데 하나는 창구멍으로 신부 의 흉이 새어 나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집살이를 시원하게 하라는 친정어머니의 소망이다. 조선시대에는 칠거지악이 있었는데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경우, 자 - 55 -
식을 못 낳는 경우, 행실이 음탕 할 경우, 질투를 하는 경우, 말이 많아 가족 간에 이간질을 시키는 경우, 도둑질을 하는 경우. 그리고 나쁜 병이 있는 경우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이 외에도 삼종지도 를 강조 해 이 모든 것을 흉 거리로 만들었다. 흉이 잡힐 경우 그 처벌은 가혹했다. 아무 경제권도 없는 여성들은 내쫓 기면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친정에서도 출가외인이라 받아 주지 않았고 재혼도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자결하는 일이 많았다. 살창고쟁이가 처음부터 수월한 시집살이를 하고자 한 기원을 위해 생겨 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냥 더위를 피하기 위해 생겼지만 더위를 피하니 시집살이도 좀 수월하게 하자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시집살이 가 수월 해 지지는 않았겠지만 이것을 입었으니 수월해지지 않을까하는 위안은 들었을 것이다. 출토유물에서의 살창고쟁이는 개당고( 開 襠 袴 ) 형태인데 새색시가 초야을 치룰 때까지 입고 있어서 처녀의 피가 묻어 있는 것이 안동박물관 소장의 출토 복식으로 나오고 있다. 초야 때 입었던 속옷은 반드시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 당시의 유교사회 에서의 여인의 정절과 순결을 표시하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순결의 의미 이자 증거물로서의 의미는 여인뿐 아니라 그 집안에도 아주 중요했다. 혼례는 집안과 집안의 문제지 결코 당사자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살창고쟁이가 특히 안동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이유는 삼베가 많이 생 산되는 지역적 특색과 유달리 더운 여름날의 기후와 이곳에 있는 많은 반 가와 엄격한 옷차림의 제약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살창고쟁이를 입지 않는다. 혼인을 한 후 많은 속 옷을 입던 종부들도 더 이상 그 속옷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미 시대에 맞춰 간소화 되어버린 속옷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고 그 자체의 모습으로 너무나 많은 의미를 가 지고 있는 살창고쟁이는 지금은 그 존재조차 잊혀져 버린 하나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혼인하는 새색시의 복잡한 심정을 담았던 옷, 찌는 듯한 날씨 속에서 비 밀스런 시원함을 안겨 주었던 살창고쟁이. 과학적이면서도 당시 여인들의 작은 일탈과 소망을 담은 살창고쟁이의 연구는 그 잃어버린 많은 의미를 우리에게 되새기게 해줄 것이므로 앞으로도 계속 되어야 한다. - 56 -
Abstract A study on the Sal-chang-go-jaeng-yi in the Later Chosun Dynasty Hae-Kyoung Kim Have you ever seen the beautiful silhouette of the beauties from the beauty portraits of the Chosun dynasty? How many hidden underwears were needed to express the beautiful shape? In order to make clothes which were tailored in two-dimension into four-dimension curve, the importance of underwears which support the garment should be stressed. This thesis is mainly a study on the Sal-Chang-Gojaeng-Yi with chang holes, which are found around Andong area. Why the chang hole was needed and the reason why mom gave to the bride and why she took it to the grave. The study will be conducted by the method of studying ancient documents, monographs, doctoral thesis, and journals. And as about antique materials, previously published studies will be studied and used. Sal-Chang-Gojaeng-Yi has various names due to its unique appearance, they are also called Da-Ri-Gojaeng-Yi, Moon-O-Gojang-Joo or Kasae-Kojangjoo. It is a trousers of which the waist part with Malki clipped in rectangular or round shape in some places and sewn together. Gojang-Joo or Kojang-Joo is Andong dialect for trousers and Da-Ri Gojaeng-Yi or Moon-O-Gojang-Joo Kase-Gojang-Joo are names which were given due to the resemblance of the shape of the hole of the trousers Malki part to the Octopus(Moon-O means Octopus). Kase-Gojang-Joo is the name which was given because the upper part of the trousers was clipped with scissors(kase means - 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