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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연구 2008 봄호 제31권 제1호(통권 110호) pp. 327~358. 硏 究 論 文 북한의 고구려 유적 연구 현황 및 성과 * 백 종 오 ** 1) Ⅰ. 머리말 Ⅱ. 성곽 Ⅲ. 고분 Ⅳ. 사찰 및 기타 Ⅴ. 유물 Ⅵ. 맺는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I. 머리말 북한의 고구려유적에 대한 고고학 발굴은 1949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벽 화고분 3기에 대한 조사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안악3호분은 그 규모나 내용에 있어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후 주인공 문제가 학계의 쟁점이 되었다. 한 국전쟁으로 중단되었던 고구려 유적 조사는 평남 순천 요동성총(1953) 발굴 이후 활발히 진행되었으나 대부분의 조사가 평남 일대의 석실분과 벽화분 등 고분유적 에 한정되었다. 그러다가 1957년에 태천 농오리산성이 발견되어 처음으로 산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또 이해를 기점으로 전후 복구사업과 경제개발에 따른 구제발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독로강유역 적석총, 태성리 고분군 등이 대 표적이다. 이러한 자강도 일대의 고분 조사는 1960년대까지 진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자강도의 서해리, 법동리, 송암동 등 많은 적석총과 석실분, 그리고 남포 약 * 이 논문은 2007년 충주대학교 교내학술연구비의 지원을 받아 수행한 연구임. ** 충주대학교 교양과정부 전임강사, 역사고고학 전공(jopaek@cjnu.ac.kr).

328 정신문화연구 제31권 제1호(2008) 수리벽화분(1958) 등도 조사되어 고구려 무덤의 발전ᆞ변화양상을 파악하는데 있 어서 풍부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1) 이 시기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성과 내지 변화로는 대성산성과 안학궁지의 발 굴조사와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남 일대의 집중적인 조사를 들 수 있다. 이처럼 1950년대 중반부터 활발히 이루어진 발굴조사는 고분유적에 편중된 경향이 있지 만 압록강 유역일대에 분포한 적석총과 로남리유적으로 대표되는 주거지, 야철지 등 생활유구 뿐만 아니라 평양 일대의 고분을 발굴하여 고구려 초기의 문화상을 밝히는데 기초 자료를 제공하였다. 2) 1950년대 후반 시작되어 1970년까지 연차적으로 진행된 대성산성과 안학궁에 대한 발굴은 고구려 도성체계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되었으며 1960년대 북한고 고학의 분야를 넓히는 역할을 하였다. 3) 즉 초기 고분에 집중되었던 조사의 영역은 도성을 포함하는 성곽유적으로 확대되어 백마산성(1965), 청해토성(1967) 등이 발 굴되었다. 특히 1965년에 집중된 산성 답사는 산성 연구의 단초가 되었고 이후 북 한 고고학의 중점적인 한 분야가 되는 초석이 되었다. 이외에도 1960년대 후반에 는 박천군 일대 유적조사(1967), 고구려 고분조사(1967) 등 유적에 대한 현황 조 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70년대에 들어와 수산리벽화분(1971)을 시작으로 진 파리10호분(1974), 덕흥리벽화분, 지경동고분(1976), 우산리고분(1977) 등 주목할 만한 고분 발굴이 이루어졌다. 진파리10호분의 조사는 정릉사지(1974)의 발굴조사 와 더불어 그동안 전설로만 인식되었던 동명왕릉의 실체를 규명하는 계기가 되었 다. 덕흥리벽화분은 안악3호분의 발굴에 버금가는 유적으로서 조사를 통해 확인된 벽화와 묵서, 내부구조, 피장자 문제 등 고구려 연구의 촉매가 되었다. 또 성현리 토성(1976), 대흥산성(1979) 등 성곽에 대한 조사도 꾸준히 진행되었다. 이중에서 대흥산성의 조사는 황해도 일대의 고구려산성이라는 점에서 고구려 방어체계에 대 한 연구를 진척시키는 자료가 되었다. 한편 자강도 초산군 위원군(1974), 평남 숙 천군ᆞ증산군(1976), 남포시ᆞ대동군ᆞ온천군ᆞ평원군(1977), 자강도 송원군ᆞ만포 1) 한창균, 1950년대의 북한 고고학 연구, 白 山 學 報, 53( 白 山 學 會, 1999), 206~210쪽. 2) 하문식, 북한의 유적답사와 고고학계 연구동향, 白 山 學 報, 64( 白 山 學 會, 2002). 3) 한창균, 1960년대의 북한 고고학 연구, 白 山 學 報, 55( 白 山 學 會, 2000), 40~45쪽.

북한의 고구려 유적 연구 현황 및 성과 329 시(1978), 평남 안주군ᆞ개천군(1979) 등지의 지표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 같은 1970년대의 고구려 유적 조사는 고구려사의 강조를 통한 主 體 思 想 의 강화 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4) 대흥산성 조사 후 황해도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1980년 대에는 장수산성과 도시유적(1985~1988), 고현리토성(1988), 구월산성(1989) 등의 산성과 봉산군 토성리절터(1987) 등이 조사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과 관련하여 진출루트와 방어체계, 지배양상 등을 밝히는 좋은 자료가 되었다. 특히 장수산성을 중심으로 한 주변의 도시유적 조사는 끊임없이 논의의 쟁점이 되 어왔던 南 平 壤 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였으며, 이와 관련하여 안 악3호분의 주인공이 고국원왕일 것이라는 북한학계의 학설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에서는 농오리산성(1980), 안주성(1982), 안학동석 실분(1988) 등이 조사되었으며, 이밖에 대동강 나무다리(1980), 청호동 나무다리 (1982)나 고산동 우물(1986) 등은 특기할 만한 발굴성과라고 하겠다. 1980년대의 또 다른 특징은 이전시기 활발하게 진행되어온 적석총에 대한 조사가 급격히 감소 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한편 압록강 유역의 련무리2호분(1988)과 운평리고분 군(1990)의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이들 고분은 전방후원형의 봉분모양으로 밝혀져 남한이나 일본에서 보이는 전방후원분의 기원 문제 해명에 있어서 커다란 실마리 를 제공하였다. 1990년대 이후 북한 고고학계의 주요 활동은 산성에 대한 조사에 집중되었다. 이 시기 흘골산성(1991)을 비롯하여 가응산성, 수양산성, 풍천읍성, 연안읍성, 오 누이성(1992), 평양성(1993~1996), 학성산성, 봉세산성, 온정리고성(1994), 청암동 토성(1997)등이 조사되었다. 이와 같이 북한 전역의 산성이 조사된 것은 1980년대 일어난 고구려의 방어체계에 대한 연구의 확대현상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고분의 4) 북한의 고구려사 인식과 고고학계 동향에 대해서는 琴 京 淑, 北 韓 의 高 句 麗 史 認 識, 北 韓 硏 究, 15( 大 陸 硏 究 所, 1994); 金 希 燦, 北 韓 의 高 句 麗 遺 蹟 發 掘 과 그 成 果, 高 句 麗 硏 究, 12( 高 句 麗 硏 究 會, 2001), 428 431쪽; 朴 京 哲, 最 近 北 韓 學 界 의 高 句 麗 史 硏 究 動 向 에 관한 小 考, 白 山 學 報, 46( 白 山 學 會, 1995); 朴 京 哲, 北 韓 의 古 代 ᆞ 中 世 史 認 識 틀에 관한 一 考 察, 史 叢, 47( 高 大 史 學 會, 1998); 朴 性 鳳, 北 韓 의 高 句 麗 史 硏 究 動 向 과 특성, 東 方 學 志, 65( 延 世 大 學 校 國 學 硏 究 院, 1990); 李 鮮 馥, 北 韓 考 古 學 界 의 動 向, 北 韓 硏 究, 15( 大 陸 硏 究 所, 1994); 하문식, 대동강문화 론에서 본 북한 학계의 연구경향, 단군학연구, 14(단군학회, 2006) 참조.

330 정신문화연구 제31권 제1호(2008) 경우에는 석실분이 대부분이며 소수의 벽화분이 있을 뿐 적석총에 대한 조사는 아 예 없어 주목된다. 이처럼 1990년대 이후의 조사는 산성과 석실분에 집중되고 있 다. 특기할 만 한 점으로는 평양성 조사를 통해 고구려 후기의 長 安 城 의 실체를 어느 정도 밝히게 되었다는 점, 온정리고성과 철령유적(1994) 등 강원도에 대한 고구려 유적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최근 2000년대의 주요 성과로는 평양 덕산토성(2002)과 남포 태성리3호벽화분 (2001)과 평양 금옥리 벽화분ᆞ문화리1호분(2002), 연탄 송죽리 벽화분(2002) 등 을 포함한 고분유적의 발굴을 들 수 있다. 덕산토성은 평양시 온정구역 광명동 일 대에 위치하는 토성으로 고조선을 포함한 고구려, 고려 문화층으로 이루어져 있음 이 확인되었다. 5) 태성리3호분에서는 관에 장식하였던 금제 유물이 출토되어 무덤 의 주인공과 축조연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송죽리 벽화분은 벽화가 그려진 적석총으로서 유례가 없을 뿐더러 머리에 은박을 싼 관 못과 은제 비녀 등 이 출토되어 주목되었다. 한편 평양 문화리1호 석실봉토분에서는 2개체분의 인골 이 발굴되었으며 금동 귀걸이를 비롯한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밖에 발굴된 고분으로는 평양 령천리 고분(2001), 남포 우산리4호분ᆞ평양 순창리 고분(2002), 평양 청계동 고분(2003), 만포 미타리 고분(2004)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이 북한 학계에서는 해방이후 최근까지 고구려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꾸준히 진행시키고 있으며 이들 성과는 고구려 고고학을 상당한 수준 까지 올려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북한에서 고구려사가 중요시되는 것은 고구려가 고조선의 계승국이며 이후 발해와 고려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정통국가라 는 북한의 정통론적 사관과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북한 고구려 고고학의 연구동향과 성과를 성곽, 고분, 사찰 및 기 타유적 등으로 나누어 기술한 후 각 유적 출토유물에 대한 연구경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시기별 연구 성과를 비교해 봄으로써 북한학계와 고구려사 연구의 변 화과정을 추적할 것이다. 이를 통해 연구현황 집성은 물론 연구시기별 특징을 얻 어낼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이 결과를 남북한 학술교류의 기초 자료로 이용하는 것 5) 북한학계에서 고조선, 고구려, 고려의 계승관계에 대한 최근 경향은 다음 문헌이 참고된다. 김은택, 고구려는 고조선의 계승국, 력사과학, 2004-3(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4), 40~43쪽; 하문식, 북 한 학계의 고조선 연구 경향, 白 山 學 報, 74( 白 山 學 會, 2006).

북한의 고구려 유적 연구 현황 및 성과 331 이 가능하리라 본다. 이러한 북한학계의 고구려 고고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남북한의 좀더 원활한 정보 공유와 함께 학술 교류를 기대해 본다. II. 성곽 1. 분포 북한지역에 남아있는 고구려 산성의 정확한 수는 아직까지 파악되지 못하고 있 으며 학자마다 그 수 또한 각기 다르다. 북한학계의 경우 가장 먼저 구체적인 수 를 언급한 채희국은 현지답사를 통하여 26기라고 하였으며 6) 조선전사 에서는 54 개소로 파악하였다. 7) 손영종은 북한지역에 분포한 고구려 산성을 98개소로 보아 점차적으로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8) 한편 일본의 東 潮, 田 中 俊 明 등은 44 개소로 추정하였으나 9)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중복되는 유적과 구체적으로 고구려의 성임이 거의 확실시 되는 유적의 경우 대부분 북한의 평안도와 평양일대, 그리고 황해도 일대에 집중하고 있다. 먼 저 평안도 일대의 산성들은 대부분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통하는 교통로 상에 배치되어 있다. 즉, 압록강 하류에서 의주-용천-염주-동림-곽산-정주-안주-숙천-평 양으로 연결되는 해안교통로와 의주-구성-태천-영변-개천-순천-성천-평양으로 통하 는 내륙교통로 상에 해당한다. 10) 해안교통로 상에 분포하는 산성으로는 백마산성, 걸망성, 용골산성, 릉한산성, 안주성, 청룡산성 등이 있으며 내륙교통로 상에는 농 오리산성, 철옹성, 청룡산성, 흘골산성 등이 자리하고 있다. 평양일대는 안학궁과 대성산성을 중심으로 사방위에 분포하는데 청암동토성, 청 호동토성, 고방산성 등의 보조성이 기본적인 방어선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외곽으로는 북쪽의 청룡산성, 남쪽의 황주성과 휴류산성, 동쪽의 흘골산성, 남 6) 채희국, 고구려역사연구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85), 145~146쪽. 7)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조선전사(3) (사회과학종합출판사, 1991). 8) 손영종, 고구려사(2)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7), 90~94쪽. 9) 東 潮 ᆞ 田 中 俊 明, 高 句 麗 の 歷 史 と 遺 跡 ( 中 央 公 論 社, 1995). 10) 남일룡, 중세 우리나라 서북지방의 성 방어체계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95).

332 정신문화연구 제31권 제1호(2008) 쪽의 황룡산성 등이 배치되어 평양성의 외곽 방어선을 구축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고조선 시기의 청암동토성을 중심에 두고 지탑리토성, 성현리토성, 황대성이 배치되는 양상은 고구려 시기에 수도 평양을 방어하기위한 위성들의 배치와 유사 하다는 점이 관찰되었다. 즉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시기 토성들은 고구려 시기 산 성의 위치와 유사한데 황룡산성 가까이에 성현리토성이, 휴류산성 근처에 지탑리 토성, 흘골산성 주변에 황대성이 위치하고 있다. 이처럼 대동강유역의 고대성곽들 은 평양의 수도인 왕검성을 보위하기 위한 위성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이해되며 이런 성곽 방어체계는 중세 성곽 건축의 기초가 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11) 다음으로 가장 많은 고구려 산성이 분포하는 황해도 일대의 경우는 황해에서 예성강을 거쳐 평양에 도달할 수 있는 주요 교통로와 해안지역에 집중 배치하고 있다. 즉 평양에서 서울로 통하는 황주-봉산-서흥-평산로 상에 황주성, 휴류산성, 대 현산성, 태백산성 등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분포하고 있다. 또 평양에서 서해안의 해 주로 통하는 길목에는 장수산성과 수양산성 등이 있다. 12) 이 밖에 강원도와 함경도 일대는 적은 수의 산성이 축조되었으며 주로 해안에 분포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도면 1> 평양일대 고구려 유적 분포도 11) 남일룡, 대동강류역 고대성곽의 성격, 조선고고연구, 1999-1(사회과학원출판사, 1999), 27쪽; 백종오, 북한학계의 고조선 성곽 연구 동향, 단군학연구, 14(단군학회, 2006), 354쪽. 12) 徐 日 範, 北 韓 地 域 高 句 麗 山 城 硏 究, 檀 國 大 學 校 博 士 學 位 論 文 (1999), 184~185쪽.

북한의 고구려 유적 연구 현황 및 성과 333 이와 같은 고구려 성곽의 분포는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파 악된다. 장수왕 15년(427)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면서 평양을 중심으로 한 새로 운 도성방어체계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평양을 중앙에 두고 사방에 관문의 역할을 하는 위성산성을 배치하였고 남쪽의 백제와 신라에 대비하고 동시에 남진루트를 확보하기 위한 산성들을 황해도의 해안과 교통로 상에 축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포양상은 임진강 이남의 남한지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고구려 성곽 배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임진강 이남에서 한강유역에 이르는 고구 려 성곽의 분포를 보면 주요 교통로를 따라 線 狀 또는 環 狀 으로 배치하였으며 주 요 거점이 되는 산성 주변에는 위성보루를 두고 있다. 이를 통해 방어의 극대화를 꾀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현항 먼저 최근까지 조사된 고구려성곽을 발굴유적과 답사유적으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발굴유적] 태천 농오리산성(1957, 1980), 대성산성과 안학궁성(1958~64, 1967~70), 대 성산성 연못지 7개소(1963), 피현 백마산성(우마성, 1965~66), 대성산성 구룡 못, 청해토성(1967), 온천 성현리토성(1976~79), 개성 대흥산성(1979), 장수산 성과 도시유적(1985~88), 삼천 고현리토성(1988), 구월산성(1989), 성천 흘골 산성(1991), 단천 가응산성(1992), 해주 수양산성, 과일 풍천읍성, 연안읍성, 태탄 오누이성(1992), 평양성(1993~96), 안변 학성산성, 연안 봉세산성, 고성 온정리고성(1994), 평양 청암동토성(1997), 평양 덕산토성(2002) [답사유적] 곽산 릉한산성, 정주읍성, 영변 철옹성, 봉산 휴류산성, 남포 황룡산성, 해주 수양산성, 서흥 대현산성, 평산 태백산성, 배천 배천산성(1965) 三 國 史 記 에 따르면 고구려는 장수왕 15년(427) 평양으로 천도하였고 평원왕

334 정신문화연구 제31권 제1호(2008) 28년(586)에는 장안성으로 이도하였다. 13) 그러나 평양성과 장안성의 구체적인 위 치에 관해서는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의 해석에 많은 문제점들이 해결되지 않아 통 일된 견해를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의 魏 存 成 은 평양천도 이전 기록에 나오는 平 壤 에 대해서는 대동강유역이 아닌 집안지역이라는 견해를 주장하면서도 오늘날의 평양지방의 가능성 또한 樂 浪 의 멸망 이후이므로 가능하다고 하였다. 14) 일본의 경우는 평양지역의 대성산성과 청암동토성ᆞ안학궁성에 대해 주목하였는데 특히 대성산성과 청암동토성을 평양 지역 초기의 王 都 이고 586년에 옮긴 장안성이 평양성이며 안학궁성은 7세기의 이 궁이라는 關 野 貞 의 견해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15) 이에 대한 남한의 차용걸은 동천왕 21년(247) 평양성의 축성과 고국원왕 4년(334)의 증축, 평양 동쪽의 黃 城 에 대한 기록, 고국원왕대 백제의 평양침공, 광개토대왕의 평양 巡 下 와 장수왕대 의 천도에 이르는 장기간의 경영이 자연스럽게 도읍지로서의 여건이 갖추어진 것 16) 으로 보았다. 북한에서는 장안성을 현재의 평양시에 있는 복합식 성곽으로 보 고 대성산성과 안학궁성을 평양성으로 보고 있다. 17) 대성산성은 북쪽의 국사봉, 동쪽의 장수봉과 을지봉, 남쪽의 소문봉으로 둘러싸 인 谷 地 를 포함하는 전형적인 고로봉식의 산성이다. 성은 동서 2.3km, 남북 1.7km로 둘레가 7km를 넘으며 계곡부분은 삼중의 석축 성벽을 쌓아 견고히 하였 다. 산성에서는 모두 20여개에 달하는 문지가 있으며 특히 남문은 길이 20m, 너 비 13.5m, 높이 1.5m의 축대를 쌓아 문루를 지었는데 이곳에서 전형적인 고구려 와당이 20여종 출토되었다. 건물지로는 국사봉 정상의 장대터와 더불어 여러 개의 각루터가 확인되었다. 특히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지에서 는 불경이 들어있는 石 函 이 출토되었으며 탄화된 곡식이 수습된 창고터, 잉어못과 구룡못 주변에서는 축대가 쌓인 건물터가 남아있다. 이밖에 성에서는 65개의 치가 확인되었고 170여 개소에 달하는 연못터 등이 조사되었다. 대성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안학궁성은 내부 면적이 37만m2에 달한다. 한변의 13) 三 國 史 記 高 句 麗 本 紀 平 原 王 28 年 條. 14) 魏 存 成, 高 句 麗 初 中 期 的 都 城, 北 方 文 物, 1985-2(1985). 15) 關 野 貞, 高 句 麗 の 平 壤 城 及 び 長 安 城 に 就 いて, 朝 鮮 の 建 築 と 藝 術 ( 岩 波 書 店, 1941), 345~370쪽. 16) 차용걸, 高 句 麗 의 都 市 와 城 郭, 高 句 麗 의 考 古 文 物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1996), 402쪽. 17) 채희국,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관한 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1965).

북한의 고구려 유적 연구 현황 및 성과 335 길이가 610m 정도로 동 서벽이 서쪽으로 약간 틀어져있고 남ᆞ북벽이 정확한 동서방향이어서 평면형태가 菱 形 에 가깝다. 성벽의 바깥으로는 대성산 소문봉에서 발원한 3개의 소하천이 남쪽으로 흘러 동 서의 것은 각각 동벽과 서벽을 따라 조 성된 垓 字 로 흐르며 중앙의 1줄기는 북벽의 입수구를 통해 성내로 들어와 남벽 동 측의 출수구로 빠져나간다. 문지는 남벽에 3개소, 동ᆞ서ᆞ북벽에 각 1개소가 남 아있는데 남문지는 고구려 성곽의 일반형으로 나타나는 삼문 형식임을 알 수 있 다. 성벽은 국내성과 마찬가지로 석재를 약간씩 벽체 안쪽으로 물려쌓아 계단식을 이루도록 하였다. 성벽과 해자 사이의 공간에는 낮은 두둑을 두어 돌을 깔거나 쌓 아 길을 만들었다. 이러한 통로는 성벽 안쪽에도 2m 가량의 너비로 조성되었다. 성내에는 5개의 건물지군이 남북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가장 중심이 되 는 건물의 경우 전면이 87m에 이른다. 고구려의 마지막 도성인 장안성으로 비정되고 있는 평양성은 동ᆞ남쪽의 대동 강과 서남쪽의 보통강, 북쪽의 모란봉, 만수대, 청류벽 등 자연 지세를 최대한 활 용하여 축조되었다. 성내부가 모두 4개 구역으로 구분되는 성벽의 총연장이 23km, 성내부 전체면적이 1,185만m2에 이른다. 북성은 북쪽의 험준한 산에 위치 하며 내성의 서남쪽으로는 보통문, 정양문으로 이어지는 중성과 그 남쪽의 평지를 에워싼 외성(나성)으로 이루어진다. 성벽은 대부분 동일한 축성수법을 보이고 있 다. 지반을 깊이 파내고 진흙과 자갈을 섞어 다진 후 돌을 쌓았고 암반인 경우는 암반을 다듬어 직접 석축하였다. 체성은 너비가 4~5m, 높이가 5~9m 정도인데 지 형에 따라 높이와 너비를 달리하였다. 장안성을 이루는 4개의 성곽은 대부분 고구 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졌으며 축성과 관련하여 5개의 城 石 刻 字 가 발견되어 직접적 인 자료가 되고 있다. 다음으로 농오리산성은 평북 태천군 용산리의 산성산(해발 292m)에 축조된 고 로봉식 산성이다. 둘레는 2km로 남문안쪽 100m 되는 지점의 자연암벽에 석각문 이 새겨져 있다. 석각문은 乙 亥 年 八 月 前 部 小 大 使 者 於 九 婁 治 城 六 百 八 十 四 間 (을 해년 8월 전부의 소대사자가 구루에 684칸의 성을 쌓았다)로 모두 3행 29자가 확 인되었다. 여기에서 을해년은 4세기 후기로 보는 채희국의 견해, 유리왕 34년(15) 으로 보는 손량구의 견해, 양원왕 11년(555)으로 보는 민덕식의 견해 등 시기적인 차이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 성곽 중에서 평양성과 함께 축성에 관

336 정신문화연구 제31권 제1호(2008) 한 기록을 남긴 몇 안되는 성이라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청룡산성은 평남 평성시 자모리 청룡산(해발 559m)을 중심으로 축성된 고로봉 식 산성이다. 내성과 외성의 이중구조로 내성은 둘레 5.3km이고 외성은 6.3km이 다. 특히 외성은 남쪽의 산능선에 12개의 보루로 연결된 점이 주목된다. 이런 양 상은 임진강유역이나 한강유역 등 경기북부지역의 고구려 보루와 깊은 관련이 있 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장수산성은 황남 신원군 아양리에 있는 장수산의 주봉인 하니봉(해발 710m)을 중심으로 7개의 산봉우리를 연결한 고로봉식산성이다. 둘레는 10.5km이 다. 성벽을 축조한 구간은 6km이고 나머지 절벽으로 된 구간은 자연지세를 그대 로 이용하였다. 내성과 외성의 이중구조인데 내성은 서쪽 골안을, 외성은 동쪽의 큰 골안을 둘러막아 쌓았다. 성안의 대표적인 건물터는 행궁터이다. 행궁터는 동 서 35m, 남북 13m, 높이 3.2m의 기단위에 축조되었으며 그 규모는 전면 7칸, 측 면 4칸의 건물로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50m 지점에 못재등마루에는 직 경 4m의 반원형 망루터가 있다. 이 망루터에서는 장수산성 남문 앞의 아양리 일 대가 잘 조망된다. 이들 시설물의 배치는 환도산성안의 궁전지와 그 상태가 매우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성아래 신원도시유적은 아양리 소재지를 중심으로 동쪽 은 재령강을 건너 월당리의 전지역에 걸쳐 있고 서쪽으로는 성재마을 일대, 남쪽 은 운대천을 지나 장동, 탑골 일대, 북쪽은 장수산성 외성 남쪽 일대까지이다. 현 재까지 알려진 범위는 남북 4.5km, 동서 4km의 구간이다. 이 도시유적의 방위시 설로서 평지성인 아양리토성과 도마동토성이 있다. 이 산성은 三 國 史 記 에 백제 근초고왕(371)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한 기사 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때 고국원왕이 전사한 평양은 장수산성을 말하 며 이곳을 중심으로 남평양이 경영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발굴결과 산성에서 출토 된 고구려 기와와 벽돌이 산성 아래의 아양리토성의 건물지에서 나온 고구려기와 와 永 嘉 七 年 (313) 명문전과 재질이나 형태가 같은 데서도 증명된다고 하였다. 따 라서 장수산성의 구조나 성내시설, 산성과 평지성의 방어체계, 성아래 아양리와 월당리의 도시유적, 주변의 대규모 고분군과 안악지방의 왕릉급 고분 등과의 관계 에서 볼때 장수산성은 일반적인 방어성이나 군현성이 아니라 도성체계를 갖춘 4 세기대의 別 都 나 副 首 都 의 유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18)

북한의 고구려 유적 연구 현황 및 성과 337 3. 연구동향 및 성과 해방후 북한의 본격적인 고구려 성곽연구는 1960년대 부터이다. 즉 1958년부터 대성산성과 안학궁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4개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1965년부터 1967년까지 태백산성, 백천산성, 장수산성, 대현산성, 서곡산성 등에 대한 유적 답 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 시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학자로는 채희국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고구려 산성의 축조 배경과 시기, 방법 등에 관한 연구 논문이 발표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평양성에 대한 관심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사연구 활동을 바탕으로 1970년대에 들어서는 유적에 대한 조 사연구보다는 그간의 자료를 종합하는데 비중을 두었다. 대성산성과 안학궁 발굴 조사에 대한 종합보고서가 출간되었으며 19) 고구려 산성과 도성, 그리고 궁궐에 대 한 체계적인 연구서인 고구려문화 와 조선고고학개요 등이 발행되었다. 그리고 최희림은 고구려 평양성 을 통해 평양성에 대한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기도 하였 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70년대의 고구려사 연구의 최대 성과물로 평가되는 조 선전사 고구려편의 발간이 주목된다. 20) 이렇게 일단락되었던 1960년대까지의 조사연구는 1980년대에 들어 다시 한 번 활발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황주성, 걸망성, 장수산성, 고현리토성 등 모두 10여 곳 에 달하는 고구려 산성이 발굴되었다. 아울러 주체사상 의 강화와 관련하여 민족 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많은 연구논문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산성의 방어체계와 분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5년 채희국에 의해 출간된 고구려역사연구 는 북한지역 뿐만 아니라 만주일대와 남한지역을 모두 포 함하는 고구려 성곽을 대상으로 하여 분포와 종류, 성곽의 구조, 방어체계 그리고 역사적 배경 등 매우 폭넓고 깊이 있는 북한학계 최초의 고구려 성곽 연구서로서 의미가 크다. 21) 1990년대에는 고구려 산성에 대한 조사연구 범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주 18) 지승철, 장수산의 력사와 문화 (사회과학출판사, 2001), 85~88쪽, 130~145쪽 참조. 19) 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 및 민속학강좌, 대성산의 고구려유적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3). 20)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조선전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9). 21) 채희국, 앞의 책(1965).

338 정신문화연구 제31권 제1호(2008) 요 유적으로는 신원 장수산성, 연안 봉세산성, 성천 흘골산성, 단천 가응산성, 안 변 학성산성, 고성 온정리고성 등이 있다. 이중에서 장수산성은 북한내에서 고구 려의 南 平 壤 과 관련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을 만큼 커다란 수확이었다. 22) 한편 이와 관련하여 황해도 일대의 방어체계에 관심을 둔 연구가 최창빈과 김경찬 등에 의해 진행되었다. 23) 비록 김경찬의 연구가 조선시대의 유적까지 다루고 있어 고구 려 방어체계에 대한 부분 다소 빈약하다고 하겠으나 그동안 편중되었던 서북방어 체계에 대한 연구경향에서 벗어나 그 범위를 확대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III. 고분 <도면 2> 북한지역 고구려 벽화분 분포도 1. 분포 고구려 고분은 중국 동북지 방과 북한지역을 포함하는 넓 은 범위에 분포한다. 이들 고분 은 시기와 지역, 규모 등에 따 라 적석총과 석실봉토분, 벽화 분 등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먼 저 적석총의 분포지는 자강도 자성 조아리ᆞ서해리ᆞ송암리 고분군, 초산 만호동ᆞ운평리ᆞ 연무리고분군 등이 있으며, 적 석총과 석실봉토분이 함께 분 출처: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사계절, 2000) 재편집. 22) 리승혁, 장수산성의 축조형식과 연대에 대하여, 북한의 최근 고구려사 연구 (고구려연구재단, 2004), 232~244쪽. 23) 최창빈, 4세기말~5세기초 고구려의 국남7성과 국동 6성에 대하여, 력사과학, 1990-3(과학백 과사전출판사, 1990); 김경찬, 황해남도 지방의 해안방어성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2-4 (사회과학출판사, 1992), 29~33쪽; 김경찬, 구월산 일대의 지역성방어체계, 김일성종합대학학 보, 1993-4(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93).

북한의 고구려 유적 연구 현황 및 성과 339 포하는 지역은 자강도 만포, 위원, 초산 시중군 고분군, 평양 대성산성과 신원 장 수산성 일대 고분군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고분군은 초대형 적석총이나 벽화분이 없이 대부분 중ᆞ소형급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석실봉토분만이 분포하는 지역 은 청천강 유역의 박천 남단동고분, 초장동고분, 대동강 유역의 순천과 평성, 평양, 대동, 강서, 용강, 남포 일대의 고분군, 재령강 유역의 대청, 안악, 월정리, 복사리 고분 등이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 고분은 그 형태에 따라 분포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즉 적석총이 중심군을 형성하는 고분군보다 적석총과 석실봉토분이 함께 분 포하는 고분군의 범위가 더욱 확대되고 있으며 이보다는 석실봉토분으로만 구성된 고분군이 가장 넓은 분포권을 보여준다. 24) 2. 현황 고구려 고분의 발굴현황 25) 을 벽화분, 적석총, 석실봉토분 등으로 분류하여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벽화분 발굴유적] 안악 안악1~3호분(1949), 순천 요동성총(1953), 평양역전벽화분(1954), 룡강 대안리1호분(1955), 중산 가장리벽화분(1956), 강서 태성리1~2호분(1957), 강 서 보림리11호분, 남포 약수리벽화분(1958), 평양 고산동7ᆞ10호분(1958~ 61), 안악 복사리벽화분(1959), 대동 팔청리벽화분(1960), 중화 진파리1ᆞ4호분 (1960), 평양 장산동1ᆞ2호분(1962), 남포 수산리벽화분(1971), 안악 봉성리1ᆞ 2호분(1973), 평양 동명왕릉 (1974), 남포 덕흥리벽화분(1976~77), 대동 덕화 리1ᆞ2호분(1976), 남포 우산리1~3호분, 보산리벽화분(1977), 룡흥리1호분 (1981), 평원 운룡리벽화분(1983), 순천 동암리벽화분(1985), 평원 청보리벽화 분(1986), 평양 안학동7ᆞ9호분, 로서동1호분(1988), 안악 평정리, 월정리벽화 분(1989), 평양 고산동20호분(1990), 순천 용봉리벽화분(1996), 남포 용호리1 호분(1997), 안악 로암리벽화분(1998), 한월리벽화분(1999), 남포 태성리3호분 (2001), 평양 금옥리1호분, 연탄 송죽리벽화분(2002), 평양 청계동4~5호분(2003) 24) 姜 賢 淑, 高 句 麗 古 墳 硏 究, 서울 大 學 校 博 士 學 位 論 文 (2000), 48~50쪽. 25) 金 希 燦, 앞의 논문 (2001), 438~447쪽, <표 3> 고구려유적 발굴조사 일람표 참조.

340 정신문화연구 제31권 제1호(2008) [적석총 발굴유적] 시중 심귀리적석총 16기, 로남리적석총 13기, 로남리 남파동적석총 1기, 풍천 리적석총 3기, 연상리적석총 2기(1957~), 평양 대성산적석총 3기(1958~1961), 자성 조아리, 서해리, 법동리, 송암리 적석총 21기(1959~60), 평양 안학동적석 총 4기(1988), 만포 연하리적석총 1기(1990), 평양 금옥리적석총 12기(1995), 만포 미타리적석총 1기(2004) [석실봉토분 발굴유적] 은산 남옥리고분 3기, 황주 순천리고분 1기, 은파 대청리1호분(1954), 대동 화 성리쌍곽분(1956), 강서 태성리고분 3기(1957), 시중 심귀리고분 24기, 로남 리고분, 풍천리고분 (1957~), 강서 보림리고분 39기, 후산리고분 6기(1958), 평양 대성산고분 9기(1958~61), 대관 대안리고분 2기(1959), 자성 법동리 하 구비고분 3기(1959~1960), 수안 산북리고분 2기(1964), 송림 석탄리고분 1기 (1965), 동명왕릉 부근 고분 11기(1974), 설매동고분 5기, 평성 지경동고분 (1976), 남포 룡흥리고분 6기(1981), 평양 안학동고분 8기, 로서동고분 5기, 순천 룡악동고분, 초산 련무리고분(1988), 신원 백학동, 대청리, 탑동, 양지동 고분(1990), 대동 덕화리3호분, 증산 석다리고분 3기(1994), 평양 금옥리고분 30기, 평양 호남리 불당골 4호분(1995), 순천 북창리1ᆞ2호분(1996), 온천 마 영리고분, 성현리고분 11기, 평원 양교리고분 2기, 남포 덕흥리 2~4호분, 삼묘 리고분, 옥도리 동우동, 소산, 애원리고분(1997), 안악 로암리고분, 판육리고 분, 월지리1ᆞ2호분(1999), 평양 령천리고분, 덕천 남양리고분 23기(2001), 남 포 우산리4호분, 평양 문화리1호분 및 4기, 순창리고분 3기(2002), 평양 표대 부락고분 2기, 평양 청계동고분 7기(2003), 만포 미타리고분 1기(2004) 이상과 같이 발굴된 고구려 고분을 알아보았다. 이들 고분은 고구려의 평양 천 도 이전에는 벽화분을 중심으로 한 중ᆞ소형급의 고분군이 군집을 형성하였다. 대 동강 하류에서 대성산성을 거쳐 북쪽의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서 평성ᆞ순천ᆞ평 원 그리고 대동강 하구에서 남쪽의 재령강 유역을 따라 안악 일대까지 폭 넓게 분 포하고 있다. 순천 일대에는 요동성총과 동암리고분, 천왕지신총 등이 대표적으로 모두 생활풍속도 벽화이며 사신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동강 하류의 대동, 강서, 용강 일대의 평야와 구릉지는 벽화분의 최대 분포지이며 벽화 내용은 묘주

북한의 고구려 유적 연구 현황 및 성과 341 단독 초상화가 그려진 생활풍속도에서부터 사신도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26) 이들 벽화분은 석실봉토분과 함께 나타나는데 이 일대에서 적석총의 보고 예는 없 다. 재령강 유역에는 복사리, 월정리, 대청리, 평정리에서 석실봉토분이 남아 있으며 신원군 주변에서 석실봉토분 수 백기가 확인되었다. 이처럼 평양일대 고분군은 석실 봉토분을 주요 묘제로 구성하며 벽화분을 중심으로 군집을 이루는 점이 특징적이다. 평양 천도 이후에는 대성산성과 안학궁의 동쪽지역을 중심으로 벽화분이 나타 나며 주제는 사신도를 중심 소재로 하고 있다. 그 예로 동명왕릉을 들 수 있는데 적석총과 벽화분의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대성산성 동쪽의 노산리, 내리, 호남리, 토포리 등에서 같은 양상을 보여주는데 벽화는 개마총처럼 사신도의 비중 이 커지거나 호남리벽화분, 내리벽화분처럼 사신도 일색으로 변화하고 있다. 27) 이 와같이 평양 천도 후 벽화분은 분포지역도 축소되고 벽화내용과 고분구조에서 뚜 렷한 변화양상이 나타난다. 즉 생활풍속도를 대신해 사신도가 차츰 부각되기 시작 하며 주변의 순천, 평성, 평원 일대에서는 벽화분이 줄어들고 있다. 다음으로 최근 발굴된 순천 동암리벽화분과 안악 평정리고분을 소개한 후 북한 고고학의 단초로 작용한 안악3호분의 묘주 문제에 대해 살펴보겠다. 먼저 동암리 벽화분은 두칸 구조로 봉분의 중심에 무덤칸을 마련한 새로운 구조형식이 주목된 다. 28) 앞칸은 동서 2.2m, 남북 3.6m, 높이 2.8m이고 안칸은 동서 3.9m, 남북 3.7m, 높이 3.6m이다. 천장은 3단 평행고임 위에 2단의 삼각고임을 하고 뚜껑돌 을 덮었다. 벽화는 안길과 무덤칸에 모두 그려졌는데 앞 칸에는 주인공초상을 비 롯하여 실내생활을 주제로 한 생활풍속그림이 대부분이다. 인물그림은 묘주의 초 상과 그와 관련된 인물들, 조리하는 인물들, 두레박으로 물을 붓는 인물들이다. 행 렬그림은 의장기를 들거나 렬을 지어가는 인물들, 말을 탄 인물들, 개마와 개마무 사, 북을 치거나 교예하는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이외 환두대도나 창을 든 인물, 투구를 쓴 인물, 사냥터로 가는 모습과 사냥하는 장면 등이 있다. 안칸에는 장식무 늬와 별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들 그림 중 저고리와 바지에 바둑판무늬를 놓은 것 26) 姜 賢 淑, 앞의 논문(2000), 81~84쪽. 27) 姜 賢 淑, 위의 논문(2000), 85~86쪽. 28) 리창언, 동암리 벽화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1988-2(사회과학출판사, 1988), 37~46쪽; 리창언, 동암리 벽화무덤의 년대, 조선고고연구, 1989-3(사회과학출판사, 1989), 21~23쪽.

342 정신문화연구 제31권 제1호(2008) 은 이전에 보이지 않던 양식이다. 평정리벽화분은 동서 1.75m, 남북 2.45m이고 무덤칸벽 높이 1.4m의 단칸구조 이다. 29) 무덤칸벽 위에는 3단의 평행고임이 남아있고 바닥에는 관대가 있다. 벽화 는 회죽을 3번 바른 다음 그 위에 그렸는데 동, 서, 북벽에만 그리고 남벽과 안길 은 그리지 않았다. 벽화내용은 고분 주변 월암산과 구월산의 경치를 검은색만을 사용하여 원근수법을 잘 지키며 그렸다. 지금까지 알려진 벽화분 중 순수 산악만 그린 벽화는 평정리벽화분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월정리벽화분은 남북 2.74m, 동서 2.5m이고 높이 2.14m의 크기를 가진 단칸구조이다. 30) 바닥에는 관대가 있고 천장은 3단의 평행고임과 2단의 삼각고임을 한 다음 뚜껑돌을 덮었다. 벽화내용은 주름치마 입은 여자, 얼굴, 평상, 구름과 고사리무늬, 연꽃무늬 등의 회벽조각들이 대부분이다. 이 월정리벽화분의 구조와 벽화내용은 안악1호분과 공통성이 많다. 그리고 고구려 고분 연구의 현안문제를 안고 있는 유적이 1949년에 발굴된 안 악3호분이다. 이 고분은 문화유물보존위원회에 의해 발굴되었다. 31) 내부의 벽화는 벽면과 천장에 가득히 그려졌는데 주인공 생전의 생활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무 엇보다 전실 서측실 입구 남측의 인물상 위에 묵서된 68자의 명문이 있어 고구려 고분연구에 매우 중요한 유적이 되었다.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화13년 10월 무자 삭26일 계축일, 사지절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태수, 전에는 창려현토방태수였던 도향후 유주요동평곽 도향경상리 동수 의 자는 안인데 나이 69세로 죽었다[( 永 ) 和 十 三 年 十 月 戊 子 朔 卄 六 日 ( 癸 ) 丑 使 持 節 都 督 諸 軍 事 平 東 將 軍 護 撫 夷 校 尉 樂 浪 ( 舊 ) 昌 黎 玄 遼 東 平 郭 ( 都 )( 鄕 ) 敬 上 里 冬 壽 字 ( ) 安 年 六 十 九 薨 官 ]. 帶 方 太 守 都 鄕 ( 侯 ) 幽 州 무덤 주인공과 관련하여 도유호 등의 발굴보고자는 묵서명에 근거하여 冬 壽 의 무 덤으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전주농, 박윤원, 주영헌 등의 주장으로 미천왕릉설이 통설 이 되었다. 32) 이후 1990년대에 들어와 발굴 초기에 리여성과 김일출 등에 의해 제기 29) 한인호, 평정리 벽화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1989-2(사회과학출판사, 1989), 17~19쪽. 30) 한인덕, 월정리 고구려벽화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1989-4(사회과학출판사, 1989), 41~ 43쪽. 31)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안악제3호분발굴보고 (과학원출판사, 1958b).

북한의 고구려 유적 연구 현황 및 성과 343 되었던 고국원왕릉설이 손영종에 의해 재등장하였고 최근에는 정설화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고국원왕릉설을 뒷받침하는 유적으로 장수산성을 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북한은 장수산성 발굴조사를 통해 그 일대가 4세기 고구려의 남평양이라는 것을 밝히고 371년의 대 백제 전투 현장 또한 남평양이었으므로 고국원왕이 전사한 곳 이 바로 장수산성 일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왕릉을 만들고 안장하였다는 견해이다. 물론 이러한 학설 변화는 다분히 북한사회의 특수성과도 관련이 있다고 하겠으나 주목할 만한 주장으로 생각된다. 3. 연구동향 및 성과 북한지역에 소재하는 고구려 적석총의 형식 분류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연구자 로는 정찬영, 주영헌, 리정남 등이 있다. 정찬영은 1957년부터 실시된 압록강 중류 지역의 로남리 남파동고분 발굴 결과를 토대로 1961년 고구려 적석총에 관하여 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33) 그는 고구려 적석총을 切 石 기단의 유무를 기준으로 무 기단적석총과 기단적석총으로 형식을 분류하였는데 기단의 유무에 관계없이 모든 적석총은 계단형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주영헌은 1962년 고구려 적석 무덤에 관한 연구 에서 기단과 곽실, 묘실의 유 무를 기준으로 하여 무기단적석무덤, 기단적석무덤, 곽실적석무덤, 묘실적석무덤 등 4유형으로 분류하였다. 34) 무기단적석무덤은 심귀리고분군의 조사 자료를 근거 로 들었으며 기단적석무덤은 외형에 계단이 있고 내부에 곽실이나 묘실이 없는 것 으로 한정하였다. 또 곽실적석무덤은 연도가 없는 수혈식 곽만을 갖춘 형식을 포 함하고 묘실적석무덤은 연도와 현실을 갖춘 고분의 형식으로 태왕릉, 장군총, 절 천정총 등을 예로 들었다. 이러한 주영헌의 형식분류 방법은 1975년에 발간된 고구려문화 에 영향을 주 었다. 35) 즉 적석총을 수혈식적석무덤과 횡혈식적석무덤으로 대분류한 다음 수혈식 32)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미천왕무덤 (과학원출판사, 1966). 33) 정찬영, 고구려 적석총에 관하여, 문화유산, 1961-5(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 1961). 34) 주영헌, 고구려 적석무덤에 관한 연구, 문화유산, 1962-2(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 1962). 35)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고구려문화 (사회과학종합출판사, 1975), 86~88쪽.

344 정신문화연구 제31권 제1호(2008) 적석무덤은 다시 무기단적석무덤과 기단적석무덤으로, 횡혈식적석무덤은 곽실적석 무덤과 묘실적석무덤으로 각각 소분류하였다. 이러한 분류는 곽실의 구조형식을 기준으로 하여 주목되지만 무기단 무곽실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은 한계가 있다. 36) 정찬영은 1973년 기원4세기의 고구려 묘제에 관한 연구 를 통해 종전의 견해 를 수정하였다. 37) 즉 적석총을 돌간돌무덤, 돌각담무덤 그리고 돌기단무덤 등 3유 형으로 재분류하였다. 이후 1977년에 나온 조선고고학개요 에서는 切 石 문제를 기준으로 사용하여 정찬영의 설을 반영하였다. 38) 이에 따르면 고구려 고분은 우선 돌각담무덤과 돌간흙무덤으로 대분류된다. 이중 돌각담무덤은 막돌돌각담무덤과 切 石 돌각담무덤으로 소분류하고 다시 전자는 강자갈 서남향 곽실돌각담무덤과 산 자갈 동향 곽실돌각담무덤으로, 후자는 수혈식곽실돌각담무덤, 무덤안길곽실돌각 담무덤, 돌간곽실돌각담무덤 등으로 각각 세분류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압록강과 장자강유역에 위치한 고분조사를 통해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 입지, 각 유형별 고분들의 분포 범위, 적석총과 석실분 의 구조 형식과 변천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39) 주요유 적으로는 심귀리고분군, 서해리고분군과 이형의 련무리고분, 운평리고분군, 송암리 고분군 등이 있다. 심귀리고분군은 자강도 시중군에 위치하는데 장자강의 충적대지에 모두 약 180 기가 분포하고 있다. 조사 결과, 그 형식에 따라 입지가 구분되어 그 선후관계를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우선 무기단적석총은 강턱과 둔덕진 곳에 해당하고 봉토석실분은 무기단적석총의 뒤쪽인 강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리고 기단식적석총은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강변에는 기단적석총이 없 고 석실봉토분이 있는 뻘에는 적석총이 없었으며 봉토석실분은 밀집한 군에서 멀 리 떨어져 뻘 깊숙이에 입지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고구려의 고분 형 식이 무기단식적석총-기단식적석총-석실봉토분으로 변화한 양상을 보여주는 유적 으로서 의의가 크다. 36) 姜 仁 求, 平 壤 學 界 의 高 句 麗 古 墳 조사연구 성과 분석, 北 韓 의 韓 國 學 硏 究 成 果 分 析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1991), 57~103쪽. 37) 정찬영, 기원4세기까지의 고구려 묘제에 관한 연구, 고고민속논문집, 5(사회과학출판사, 1973). 38)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조선고고학개요 (사회과학종합출판사, 1977), 220~231쪽. 39) 정찬영, 압록강, 독로강유역의 고구려유적 발굴보고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90).

북한의 고구려 유적 연구 현황 및 성과 345 또 자강도 자성군에 위치한 서해리고분군은 강자갈만을 이용한 적석총과 산자 갈만을 이용한 적석총이 입지를 달리하여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전자의 경우는 15기 정도가 남아있는데 강변 가까운 모래 둔덕 위에 분포하며 서향한 곽실과 방 형의 봉분을 하였다. 후자는 비교적 경사가 급한 산비탈에 위치하며 남향 또는 동 남향으로 차이를 보여주었다. 이형 고분은 봉분형태에 있어서 특이한 구조를 한 경우로서 일본에서 조사된 四 隅 突 出 形 과 前 方 後 圓 形 의 원형이 될법한 고분을 말한다. 먼저 사우돌출형으로는 1988년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자강도 초산군에 있는 련무리2호분 40) 을 들 수 있 다. 고분은 압록강과 장자강이 합류하는 부근의 압록강 남안 언덕 위에 위치한다. 고분의 분구 형태에 있어서 모서리에 일정한 면적의 돌을 깔아 돌출시키고 있는 데, 고분을 조사한 리정남은 동해안 연안의 일본 시네마현 등에서 주로 발견되는 사우돌출형고분과 같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다음으로 전방후원형에 해당하는 운평리고분군 41) 은 자강도 초산군에 있는 무기 단적석총으로 전체 모양이 동서로 긴 장타원형에 서쪽으로 방향의 부석층이 시설 되어 있다. 한편 운평리 2지구 35호분과 4지구 6호분의 내부 바닥에서는 관재부재 로 추정되는 암키와들이 출토되었다. 모두 청회색 경질의 암키와로 배면에는 문양 을 시문하지 않았으며 두께는 2~2.5cm 정도이다. 이들 고분의 연대가 B.C. 3~2세 기로 추정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기와의 사용시기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 가된다. 42) 그리고 자강도 자성군에 위치한 송암리고분군은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 위원회에서 보고하였는데 33호분, 88호분, 106호분 등이 전방후원형의 봉분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43) 이러한 전방후원형은 무기단적석총으로 장축을 산기슭과 나란하게 동서로 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비록 남한이나 일본에서 보 이는 전방후원분과의 차이점이 있지만 축조시기가 앞서는 것은 물론 당시 문화의 40) 리정남, 자강도 초산군 련무리2호무덤 발굴중간보고, 조선고고연구, 1989-4(사회과학출판사, 1989), 44~49쪽. 41) 리정남, 운평리 고구려무덤떼 제4지구 돌각담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1990-1(사회과학 출판사, 1990), 35~42쪽. 42) 윤광수, 기와를 통하여 본 삼국문화의 공통성, 북한의 최근 고구려사 연구 (고구려연구재단, 2004), 94~95쪽. 43)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조선유적유물도감(2): 고구려편 (평양, 1990).

346 정신문화연구 제31권 제1호(2008) 전파 양상으로 볼 때도 일본 적석총계 전방후원분의 기원 문제 해명에 있어서 커 다란 실마리를 제공하였다고 여겨진다. 44) IV. 사찰 및 기타 고구려의 대표적인 사찰유적은 1974~75년에 걸쳐 발굴된 정릉사지이다. 정릉사 는 평양 력포구역 룡산리에 위치하고 있는 고구려 시기의 사찰로 동명왕릉과는 불 과 150m 정도 떨어져있다. 발굴조사결과 밝혀진 정릉사의 남북길이는 132.8m, 동 서길이 223m로 면적이 3만m2에 이른다. 사지에서는 18개의 건물터와 건물을 구분 하는 회랑터가 조사되었다. 사역은 회랑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데 남북으로 늘어선 회랑에 의해 5개 구역으 로 나누어진다. 사지의 중심구역이 1구역이고 동쪽에 3구역과 5구역이, 서쪽에 2 구역과 4구역이 있다. 1구역은 8각 목탑지를 비롯하여 금당지와 강당지, 중문지, 종루지 등 10여개의 건물지와 회랑으로 구성된다. 중앙의 목탑지를 중심으로 동ᆞ 서ᆞ북쪽에 각각 건물지가 배치되어 1탑 3금당식의 전형적인 고구려 가람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1구역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10호 건물지에서는 일자 형태의 온돌을 갖춘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한편 탑지의 남쪽으로는 바닥에 자갈을 깐 연 도시설이 중문지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머지 2~5구역에서도 건물지가 드러났으나 정확한 양상을 파악하기 힘든 상태였다. 다만 2ᆞ3구역에서 확인된 원형의 벽돌시 설물은 직경이 4.6m로 연못 시설물로 추정되었다. 45) 주목되는 점은 정릉사지의 건물이 모두 땅을 원형으로 파서 돌과 진흙을 섞어 3~5단으로 쌓은 후에 방형 또 는 원형의 주춧돌을 놓은 점이다. 출토된 유물로는 우선 定 陵, 陵 寺 라고 명문을 새긴 토기를 통해 사지의 정 확한 명칭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 태왕릉과 장군총 주변에서 출토된 연화문와당 과 동일한 문양의 와당이 출토되어 정릉사의 창건시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와 44) 姜 仁 求, 앞의 논문(1991), 57~103쪽; 리창언, 최근에 조사발굴된 압록강류역의 돌각담무덤들에 서 주목되는 몇가지 문제, 조선고고연구, 1991-3(사회과학출판사, 1991), 41~44쪽. 45) 한인호, 조선중세 건축유적연구 (사회과학출판사, 1995), 75쪽.

북한의 고구려 유적 연구 현황 및 성과 347 관련하여 북한에서는 창건시기를 4세기 말~5세기 초로 보는 동시에 정릉사를 三 國 史 記 에 나오는 광개토왕 2년(392)에 창건된 평양 9 寺 의 하나로 보고 있다. 46) 또한 정릉사에서 150m 거리의 정릉(동명왕릉=진파리10호분)은 석실봉토분으로 연대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릉사의 조성년대도 비슷한 시기로 추정하였다. 그러면서 정릉과 정릉사는 고구려의 평양 천도를 전후한 시기 에 옮겨놓은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의 무덤과 그를 위한 사찰로 보고 있다. 47) 최근 중앙의 8각탑을 중심으로 북쪽에 중금당, 동ᆞ서 양쪽에 동금당과 서금당, 종루와 경장각, 강당과 내전, 회랑 등을 새롭게 복원하였다. 48) 그러나 콘크리트 구 조물을 이용 건물을 세우고 목탑지가 확인되었음에도 석탑을 조성하여 원형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다음으로 기타유적을 살펴보면, 시중 로남리 주거지와 야철지(1957~), 대동강 나무다리(1980), 청호동 건축지유적(1980~81), 고산동우물(1986), 철령 기마모형 출토 유적(1994) 등이 있다. 이중 대동강 나무다리는 안학궁에서 남쪽으로 4km 되는 대동강변에서 발굴되었다. 49) 다리는 기본골조와 보조골조, 바닥깔판 등이 드 러났는데 모두 굵은 각재와 판자를 견고하게 짜서 축조하였다. 다리의 길이는 375m이며 너비는 9m이다. 이 나무다리는 고구려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대규모의 다리유적으로 주목된다. 앞으로 백제 웅진기 때 금강에 설치되었다고하는 熊 津 橋 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V. 유물 북한의 고구려 유물에 대한 연구 동향은 기와류, 토기류, 금속류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46) 한인호, 위의 책(1995), 74쪽. 47) 주영헌, 주요 고구려 벽화무덤의 주인공문제에 대하여, 高 句 麗 壁 畵 古 墳 ( 朝 鮮 畵 報 社, 1985), 14~18쪽. 48) 전제헌, 정릉사 행궁건물의 원상복원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5-1(사회과학출판사, 1995), 32~35쪽. 49) 김재용, 고구려의 목조건축물-대동강나무다리, 대성산일대의 유적을 통하여 본 고구려의 강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5), 83~87쪽.

348 정신문화연구 제31권 제1호(2008) 1. 기와류 먼저, 기와 연구는 남한보다 몇 년 앞서 시작되었고 그 경향 역시 현지의 자료 를 대상으로 실시하였기 때문에 같은 시기 남한의 연구보다 생동감 있고 정밀한 연구가 가능하였다. 북한에서 처음으로 고구려 기와에 관심을 보인 것은 채희국으 로 1964년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관한 연구 에서 1958~1961년까지 진행 된 대성산성과 안학궁성 등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발굴 결과를 바탕 으로 와당에 대한 형식 분류를 시도하였다. 50) 이 글에서는 기와의 태토와 문양구 성의 차이를 유적의 주요한 시기편년 자료로 사용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형 식 분류에 사용된 와당 가운데는 안학궁성만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유물이 포함 된 것으로 보이므로 보다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1973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대성산의 고구려유적 을 발간하였다. 51) 이 책에는 대성산성과 안학궁성 등 앞서 언급한 연구성과와 이후 추가로 이루어진 조사성과 를 총망라하여 정리하였다. 그간에 연구된 성과를 보다 진전시켜 기술하였는데 출 토유물에 대한 사진과 도면, 유구와 유물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었다. 1980 년대에 들어와서는 정릉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축적된 자료를 바탕으로 5 세기 고구려가 사용한 기와의 종류를 구별하였다. 52) 와당의 문양에 대해 19종으로 세분하였고 평기와의 문양에 대해서도 주목하여 승문, 선문, 점문, 화뢰문, 화염문, 격자문, 능형문 등으로 분류를 시도하였다. 이후 김영진은 2002년 고구려유물편 에서 각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의 수치를 분석하여 궁전용 기와의 크기가 사원용 보다 큰 것으로 보았으며 와당에 새겨진 무늬를 집계하여 식물문, 기하문, 환상문 등 크게 3종류로 분류하였다. 53) 또한 각 유적에서 출토된 와당의 문양을 비교하여 문양의 변화양상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암키와의 문양을 분석하여 승문, 석문, 격자문 등이 고구려 기와의 주요 문양임을 언급하였다. 2004년 들어 리광희와 윤광수의 논고가 여러 편 발표되었다. 리광희 50) 채희국,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관한 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1965). 51) 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 및 민속학강좌, 대성산성의 고구려유적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3). 52) 金 日 成 綜 合 大 學 編, 五 世 紀 の 高 句 麗 文 化 ( 雄 山 閣, 1985). 53) 김영진, 고구려유물편 (사회과학출판사, 2002), 182~221쪽.

북한의 고구려 유적 연구 현황 및 성과 349 는 청암동토성에서 새로 발견된 수기와의 년대 에서 최근에 발굴된 청암동토성 출토품 중 수막새와 수키와를 대상으로 편년설정을 시도하였다. 54) 연화문 수막새 를 10종류로 분류한 후 삼국의 양식과 비교 편년하였는데 이전에 고구려만을 강 조하던 것과 달리 고려시대까지 폭넓게 시기구분한 점이 특징적이다. 같은 해 윤 광수는 기와를 통하여 본 삼국문화의 공통성 의 논고를 발표하였다. 55) 이 글에서 는 먼저 삼국에서 사용된 기와의 종류를 설명하였고 삼국간 와당 문양의 비교를 통해 고구려-백제, 고구려-신라 사이의 공통점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 문양의 유사 성이나 변화상으로 볼 때, 고구려의 선진문화가 백제와 신라로 전파되었음을 밝히 고 삼국 문화의 공통성을 이룩하는데 있어서 고구려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윤광수는 기와를 문화양상 파악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 고구려 문화 중심의 삼국 문화 형성을 강조하였다. 또 그 다음해 안학궁터의 기와에 대하여 라는 글을 통 해 안학궁이 427년부터 586년까지 고구려의 왕궁이었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출토 된 기와류를 가지고 고찰하였다. 56) 대상은 일반기와, 마루기와, 지붕장식물 등으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는데 이들 기와류가 다른 유적에서는 유사한 예가 없는 독특한 양상을 띠게 된 점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의 고구려 기와 연구는 남한의 연구와 비교해 볼 때 다소 평면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최신 발굴자료가 연구성과에 신속 히 반영되고 기와 문양의 시기적인 변천과 유적의 시기적인 변천과정을 연결하려 는 노력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남한학계와 유사한 흐름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초기의 연구가 와당에 집중되어 있다가 최근 들어 평기와까지 연구범위가 확대 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남북한 학계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57) 54) 리광희, 청암동토성에서 새로 발견된 수기와의 년대, 조선고고연구, 2004-1(사회과학출판사, 2004), 16~19쪽. 55) 윤광수, 앞의 논문(2004), 94~112쪽. 56) 윤광수, 고구려기와의 종류와 형태, 조선고고연구, 2004-4(사회과학출판사, 2004), 21~25쪽; 윤광수, 안학궁터의 기와에 대하여, 대성산 일대의 유적을 통하여 본 고구려의 강성 (과학백 과출판사, 2005), 25~37쪽. 57) 고구려 기와 연구에 대해서는 백종오, 고구려 기와의 성립과 왕권 (주류성, 2006) 참조.

350 정신문화연구 제31권 제1호(2008) 2. 토기류 북한에서의 고구려 토기에 대한 연구는 발굴보고서를 통한 유물의 개별적인 기 술에 그치고 있을 뿐 종합적인 연구 성과는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58) 이 는 다른 분야에 비해 완형의 출토품이 많지 않은 현실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로는 정찬영과 리광희를 들 수 있다. 이들에 의해 강돌돌각담무덤, 돌기단 무덤, 산자갈돌각담무덤 등 고분의 유형에 따라 토기의 편년을 꾀한 연구가 일부 진행되었다. 먼저 1973년 정찬영은 기원4세기까지의 고구려 묘제에 관한 연구 에서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4세기경까지 축조된 적석총에서 물레를 사용하여 만든 갈색마연토기, 흑색토기, 갈색토기, 회색토기 등의 단지와 항아리 등이 있으 며 일부 손으로 빚은 토기도 출토된다고 하였다. 59) 주요고분은 심귀리78호분, 법 동리 하구비고분, 호남리 남파동163호분, 풍천리33호분, 태안리1호분, 조아리고분 등이다. 이처럼 구조적인 특징을 기준으로 고분을 편년하고 토기의 편년안을 내린 정찬영의 연구는 1990년대에 들어와 리광희의 연구로 이어졌다. 리광희는 1990년 고구려 무덤을 통하여 본 유약 바른 질그릇의 발생시기에 대 하여 의 논문을 통해서 그동안 시유도기가 출토된 만보정78호분, 풍천리7호분, 태 성리2호분, 안악3호분, 마선구1호분 등의 예를 설명한 후 고분을 구조에 따라 편년 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의 시유도기는 3세기 이전에 등장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다음해 고구려시기 질그릇들에 그려진 장식무늬에 대하여 에서는 고구려 토기 의 시문기법을 누르기법, 긋기법, 돋힘법, 뜯어내기법, 그림법 등으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60) 토기 문양에 대해서는 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56점의 토기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는 문양의 종류와 시문기법에 따라 토기를 분류한 결과 이들 토기에 시 문된 문양이 4세기 중엽부터 6세기말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고구려 토 기에 대한 북한의 연구는 고분 편년의 논리가 명쾌하지 않을 뿐더러 분석에 사용 한 개체수가 매우 적고 토기에 대한 기술마저 극히 간략하여 한계가 있다. 그렇지 58) 고구려 토기 연구에 대해서는 崔 鍾 澤, 高 句 麗 土 器 硏 究, 서울 大 學 校 博 士 學 位 論 文 (1999) 참조. 59) 정찬영, 앞의 논문(1973), 36~46쪽. 60) 리광희, 고구려 무덤을 통하여 본 유약바른 질그릇의 발생시기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0-4(사회과학출판사, 1990), 10~15쪽; 리광희, 고구려시기 질그릇들에 그려진 장식무늬에 대 하여, 조선고고연구, 1991-3(사회과학출판사, 1991), 18~27쪽.

북한의 고구려 유적 연구 현황 및 성과 351 만 그나마 북한에서 이루어진 고구려 토기 연구 성과로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3. 금속류 최근 리광희는 고구려유물연구 를 발간하였다. 61) 이 책에서는 그동안 연구가 비교적 소홀했던 고구려인들의 도구에 대해 고찰하였다. 우선, 도구를 사용한 목 적과 소유한 사람들의 지위를 고려하여 무기류, 마구류, 장신구류, 각종 생활도구 등으로 나누었다. 그 다음 구체적인 형태에 따라 다시 세분하였으며 분류된 유물 들의 연대를 추정하여 편년까지 나타내었다. 이외에도 고구려와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백제, 신라, 가야의 도구에 대한 비교 연구를 통해 고구려 문화가 이들 나라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다루었다. 또한 한~ 당나라 시기의 유물과 비교하여 고구려 문화의 독자성과 우수성을 밝히고 고구려 문화가 북중국의 문화에도 영향을 미친 사실에 대해서 구체적인 논증을 전개한 점 이 주목된다. 그리고 최근들어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평성 지경동고분 출토 마구류와 남포 룡 흥리고분 출토 금귀걸이가 특징적이다. 평성 지경동고분은 석실봉토분으로 안길과 안길좌우 벽감에서 금동마구류 일식을 비롯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62) 유물 은 전안교와 후안교의 테두리 1쌍, 꽃무늬의 금동치레거리 4점, 금동띠고리 8점, 운주, 행엽 2점, 금동이음고리 8점, 금동장식품 5점, 말자갈 2점, 말등자 1쌍, 둥근 금동장식판 2점, 단지 3점, 시루, 솥, 금동귀걸이, 금동대롱구슬, 쇠관못, 쇠활촉, 쇠문손잡이 등이 수습되었다. 이중 금동띠고리는 환인현 련강향15호분과 고력묘자 촌19호분, 평양 고산동15호분의 출토품이 있으며 서울 수락산1보루에서 마구류 일식이 출토된 바 있다. 시루는 안악3호분과 약수리고분 벽화의 부뚜막에 건 시루 와 그 생김새가 비슷하다. 한편 남포 룡흥리고분에서는 태환식 금귀걸이가 출토되 었다. 이와 유사한 양식이 최근 충청북도 청원군 남성골산성의 수혈유구 14호에서 도 수습되어 남북한 고구려 유물의 비교 연구에 좋은 자료로 여겨진다. 61) 리광희, 고구려유물연구 (과학백과출판사, 2005). 62) 박창수, 평성시 지경도 고구려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 1986-4(사회과학출판사, 1986), 42~48쪽.

352 정신문화연구 제31권 제1호(2008) VI. 맺는말 이상에서 남북 분단이후 북한 학계의 고고학적 조사연구 성과를 성곽과 고분, 그리고 사찰 및 기타 분야로 나누어 정리하고 끝으로 출토 유물에 대한 해석의 동 향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북한 학계에서는 해방이후 최근까지 고구려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꾸준히 진행시키고 있으며 이들 성과는 고구려 고고학을 상 당한 수준까지 올려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먼저 성곽의 분포는 대부분 평안도 일대와 평양, 그리고 황해도일대의 고대 교 통로 상에 집중하고 있다. 평양의 경우 안학궁성과 대성산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에 이중으로 배치하여 새로운 도성방어체계를 구축하였고 그 외 지역은 남진루트 를 확보하기 위한 산성들을 해안과 교통로 상에 축조하였다. 한편 대동강유역의 고조선 시기 토성들은 고구려 시기 산성의 위치와 매우 유사하게 분포한다. 즉 고 조선 시기의 청암리토성을 중심에 두고 지탑리토성, 성현리토성, 황대성이 배치된 양상은 고구려 시기의 평양성을 방어하기 위한 흘골산성, 휴류산성, 황룡산성, 청 룡산성이 자리잡은 점과 일치하고 있어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하겠다. 이처럼 북 한의 성곽 조사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관계, 고구려의 남진과 도성 방어체계 등을 밝히기 위해 실시되었다. 주요 성과로는 청암동토성과 덕산토성, 안학궁성과 대 성산성, 그리고 장수산성과 그 일대의 도시유적의 발굴을 들 수 있다. 고분 연구는 주로 벽화분, 적석총, 석실봉토분 등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특 히 적석총과 벽화분에 대한 형식 분류와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이는 고구려 문 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북한의 고분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는 초산 련무리고분과 운평리고분군의 발굴을 통해 일 본의 적석총계 전방후원분과 사우돌출형고분의 기원을 규명하는데 커다란 단서를 제공한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운평리고분군의 내부 바닥에서 관재로 사용된 암키 와들이 출토되었는데 이들 고분의 연대가 B.C. 3~2세기로 추정되기 때문에 앞으 로 고구려 기와의 사용 시기를 살피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밖에 정 릉사지와 대동강 나무다리, 청호동 나무다리, 고산동 우물 등 사찰과 기타유적에 대한 연구 성과도 괄목할 만하다. 고구려 유물 중 기와연구는 남한의 연구에 비해 지극히 평면적이라고 할 수 있

북한의 고구려 유적 연구 현황 및 성과 353 으나 연구 성과에 최신자료가 신속히 반영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토기 류의 연구에 있어서는 개별적인 기술에 그치고 있다. 금속류는 형식 분류를 통한 연대 추정과 편년, 삼국과의 비교연구 등을 통해 고구려 문화의 독자성과 우수성 은 물론 고구려 문화가 북중국의 문화에 끼친 영향을 구체적인 논증을 통해 전개 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남한은 임진강유역을 중심으로 양주분지와 한강유역, 금강유역에 이 르기까지 고구려 유적이 계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비추어 남북한 이 함께 공유하고 고민할 수 있는 고구려 고고학의 제 분야 및 연구 성과가 어느 정도 축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앞서 제시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각 유 적별 연구 방법론 검토를 심화시킨다면 향후 북한학계와 학술교류 사업을 추진하 는 데 기초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남한학계의 연구 성과를 비교함으로써 학문적 성숙도를 높이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이글에서 살펴본 북한 고고학계의 고구려 유적 연구 방법론 검토를 통해 남한의 고구려 고고학의 연구 성과와 상호 비교과정을 거쳐 연구 방법론의 교류가 가능하다. 특히 직접적인 인 적교류를 대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효과적인 접촉 채널이 되리라 여겨진다. 이를 계기로 남북한이 고구려 고고학에 대한 견해 차이를 극복하는데 보탬이 될 것이다. 나아가 남북 학계간의 좁혀진 견해차이는 중국 동북공정의 실체와 진행상황을 탐색하는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남ᆞ북간 학술교류의 기본 자료가 되며 북한학계 의 고구려 고고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원활한 정보 공유의 기초를 다질 수 있 다. 이는 중국의 동북공정, 탐원공정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에 남과 북이 공동으 로 대처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姜 仁 求, 平 壤 學 界 의 高 句 麗 古 墳 조사연구 성과 분석. 北 韓 의 韓 國 學 硏 究 成 果 分 析. 성남: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1991, 57~103쪽. 姜 賢 淑, 高 句 麗 古 墳 硏 究. 서울 大 學 校 博 士 學 位 論 文,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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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 정신문화연구 제31권 제1호(2008) 증을 통해 전개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최근들어 남한은 임진강유역을 중심으로 양주분지와 한강유역, 금강유역 에 이르기까지 고구려 유적이 계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비 추어 남북한이 함께 공유하고 고민할 수 있는 고구려 고고학의 제 분야 및 연구 성과가 어느 정도 축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남북한이 고구 려 고고학에 대한 견해 차이의 극복과 보다 성숙된 학문적 자세를 이룩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투고일:2008. 1. 20. 심사완료일:2008. 2. 28. 주제어(keyword):북한(North Korea), 고구려(Gogurye Kingdom), 유적(Relics), 유물(Rema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