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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북아역사논총 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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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차 례 논문 김규운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7 정순일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55 김득중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93 조윤수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25 서보경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2015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67 이종국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09 설림 이종수 중국의 최근 부여사 연구현황과 동향 楊 軍, 夫 餘 史 硏 究 ( 蘭 州 大 學 出 版 社, 2012)와 范 恩 實, 夫 餘 興 亡 史 ( 社 會 科 學 文 獻 出 版 社, 2013) 239 자료 소개 이근우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와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 261 동북아역사논총 규정 및 규칙 281

4 Contents Articles Kim Gyuun A Study on the emergence of the Early Stone Chamber Tomb in the Kinai area of Japan 7 Chong Soonil Borderlands of Japan and Interpretations in the Early Ninth Century: Focusing on Silla yeogeo( 新 羅 譯 語 ) Used in Tsushima 55 Kim Deugjoong The United States Military Occupation Logic and the Cold War after World War II: Focusing on an International Legal Analysis by Ernst Fraenkel 93 Cho Younsoo The Korea-Japan Talks and the Negotiation for the Return of Cultural Properties: Focusing on the List compilation Process for the Return of Korean Cultural Properties by the Government of Japan 125 Seo Bokyung An Analysis of Ancient Korean-Japanese History as Described in Japanese Middle School Textbooks: Focusing on Textbooks that Passed the 2015 Screening 167 Lee Jongguk The Historical Perceptions of Conservatives in Japan and the Development of History 209 Research Report Lee Jongsu Situation and Trends of China s recent study on Buyeo history: Yang Jun, Research History Fuyu(Ranzhou University, 2012), and Fan En Shi, The Rise and Fall Fuyu(China: Social sciences Academic Press, 2013) 239 Book Review Rhee Kunwoo The Map of Ryukyu in The Chronicle of Countries in the East of Sea and The Ryukyu Map in Okinawa Museum 261

5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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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7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김규운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전문연구원 Ⅰ. 머리말 일본열도에서 횡혈식석실이 최초로 축조되는 것은 규슈[ 九 州 ]지역이고, 그것 은 4세기 말 무렵이다. 그리고 5세기 이후, 주로 北 九 州 型 과 肥 後 型 의 두 가 지 type의 석실이 이어진다. 이후 6세기가 되면 이른바 畿 內 型 횡혈식석실이 성립되고 특히 畿 內 型 대형 횡혈식석실의 정연한 변천이 보인다. 1) 즉, 고분시 대 일본열도의 중추지역인 기나이[ 畿 內 ]지역에서는 규슈지역보다 늦은 5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횡혈식석실이 축조되고 그 이후 독자적으로 정연한 형태의 석실로서 정착하게 된다. 이러한 횡혈식석실의 출현은 단순히 매장주체부의 형태가 바뀌는 것에 그 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목관묘를 비롯해 목곽묘, 석곽묘처럼 매장주체부에 투고: 2015년 8월 3일, 심사 완료: 2015년 10월 30일, 게재 확정: 2015년 11월 23일 1) 森 下 浩 行, 1993, 横 穴 式 石 室 の 地 域 間 動 向 ( 九 州 大 和 ), 季 刊 考 古 学 第 45 号, 雄 山 閣.

8 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주검을 안치하고 외부세계와 이어지지 않도록 위에서 완전히 폐쇄하는 방법과 는 다르게 출입이 가능하도록 시설을 마련하는 등 형태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매장 관념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고분시대의 하나의 큰 획기가 될 것이다. 횡혈식석실이 기나이지역에서 처음 출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그 출현양상을 비롯해 배경과 역사적 의의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연구가 진행되 어 왔다. 그 결과 기본적으로는 한반도로부터, 특히 백제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성립되었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는데, 어느 지역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또 어 느 요소까지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씩 이견이 있다. 게다가 초기의 횡혈식석실에 묻힌 피장자에 대해서는 도래인 2) 으로 보는 입장과 재지의 수장 으로 보는 입장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기나이지역에서 횡혈식석실이 출현하는 양상이 반드시 같지는 않 을 뿐더러 석실의 평면 형태 하나만 보더라도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더불어 지금까지 기원지역으로 비정되는 백제 횡혈식석실의 양상이 명확하지 않은 것 에 기인한 것인지, 실제로 어떠한 영향을 어느 지역에서 받았는지 등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단순히 백제와의 관련만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최근 몇 년간 서울과 그 인근 지역에서 한성기 횡혈 식석실의 발굴 조사가 다수 이루어져 백제 횡혈식석실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 을 것으로 보이는 자료가 증가하고 있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 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먼저 기나이지역의 초기 횡혈식석실의 축조 양상을 세세하게 살펴본 후 그 특징을 확실하게 밝히고, 유형을 설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렇게 설정한 유형을 근거로 어느 정도 백제와의 관계가 있는지를 명확하게 하고, 그 의의와 배경 등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나아가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초기 횡혈식석 2) 일본에서는 한반도 혹은 대륙에서 열도로 건너온 고대 인물에 대해 도래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의 관점에서 보면 도래한 것이 아니라 왜로 건너간 것이기 때문에 도왜인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로 검토하는 분석 대상과 연구사가 일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 기왕의 도래 인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한다.

9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9 실의 피장자가 도래인인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Ⅱ. 연구사 검토 고분시대 일본열도에 분포하는 횡혈식석실은 크게 九 州 型 과 畿 內 型 으로 대별 된다. 그리고 이 글에서 다루는 기나이지역의 초기 횡혈식석실의 경우 어느 지 역에서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문제에 앞서 畿 內 型 으로 포함을 시킬 수 있는 지 등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기나이지 역 횡혈식석실 자체에 대한 주요 연구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이 글의 중심 분 석대상인 초기 횡혈식석실에 관련된 연구를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긴키[ 近 畿 ]지방에는 규슈지방, 산인[ 山 陰 ]지방과는 형태가 다른 석실이 분 포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3) 그리고 일찍이 고바야 시 유키오[ 小 林 行 雄 ]는 킨기지방과 규슈지방의 횡혈식석실 출현이 시기적으 로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횡혈식석실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차이를 근거 로 긴키지방이 규슈지방에 비해 반세기 정도 더 늦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당시 대륙에서 새로운 묘제로서 석실이 규슈지방에 도입되고, 그 후 긴키지방으로 전파되었다고 상정하면서, 긴키지방의 도입이 늦은 이유는 오래된 문화와 강 한 전통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라고 논하였다. 4) 한편, 규슈지역과 기나이지역 횡혈식석실의 계보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시라이시 다이치로[ 白 石 太 一 郞 ]이었다. 북부규슈와 기나이지역에서 5세 기 중엽이라고 하는 거의 같은 시기에 횡혈식석실이 성립하나, 규슈지역의 석 실은 한반도에서 전파된 것으로, 그리고 기나이지역은 중국 남조의 전실묘가 3) 喜 田 貞 吉, 1914, 古 墳 墓 年 代 の 研 究, 歴 史 地 理 ) 小 林 行 雄, 1950, 古 墳 時 代 に 於 ける 文 化 の 伝 播, 史 林 33 3.

10 1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전파된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5) 그러나 당시 인용된 기나이지역의 5세기 대 횡 혈식석실은 모두 규슈지역에서 전파되어 축조되었던 것이 밝혀졌고, 이후 시 라이시 다이치로는 기나이지역의 횡혈식석실 출현은 한성기 백제의 영향이라 고 수정하게 되었다. 6) 쓰데 히로시[ 都 出 比 呂 志 ]는 초기의 횡혈식석실 과 발전기 횡혈식석실 로 구별하고 양자 간 성격의 차이에 대해 논하였다. 초기의 횡혈식석실의 특징으 로는 연도가 분구 측면으로 설치되지 않은 것이 있고, 추가장이 적용되지 않는 수혈식석곽 7) 과 본질적인 차이는 없지만 천정은 높고 관 이외의 공간이 넓은 점 에서 수혈식석곽과는 구축 원리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수혈식석 곽에서의 자발적 발전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인식을 제시하였다. 8) 이후, 기나이지역 횡혈식석실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을 밝히면서 畿 內 型 石 室 이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은 야마사키 신지[ 山 崎 信 二 ]와 모리시타 히로 유키[ 森 下 浩 行 ]였다. 야마사키 신지는 기나이지역 중추부의 석실과 그 전파 지역의 석실을 구조면에서 비교하여 九 州 型 畿 內 型 의 양자가 中 四 國 지방 각지에 파급, 변용되는 여러 과정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가운데 현문 입주석의 구조를 기준으로 畿 內 型 석실을 설정하였다. 현문 입주가 내측으로 튀어 나오 지 않고 연도 폭과 같으며 현문 입주를 덮는 천장석이 연도부를 덮는 천장석과 같은 레벨의 수평으로 나란한 구조를 畿 內 型 석실의 특징으로 들면서 Ⅰ~Ⅳ기 로 구분하는 변천관을 제시하였다. 9) 모리시타 히로유키는 특히 폐쇄 방식의 차이를 지표로 九 州 型 과 畿 內 型 으 5) 白 石 太 一 郎, 1965, 日 本 における 横 穴 式 石 室 の 系 譜 横 穴 式 石 室 の 受 容 に 関 す る 考 察, 先 史 学 研 究 5. 6) 白 石 太 一 郎, 1995, 古 代 史 のなかの 藤 ノ 木 古 墳, 藤 ノ 木 古 墳, 読 売 新 聞 社. 7) 원문에서는 수혈식석실 로 표현되어 있고, 일본에서는 대부분 이러한 표현을 쓰고 있다. 여기에서 자세히 논할 순 없지만 출입이 불가능한 수혈식의 경우 석곽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원문과 다르게 일괄적으 로 수혈식석곽 으로 표기하도록 한다. 8) 都 出 比 呂 志, 1970, 横 穴 式 石 室 と 群 集 墳 の 発 生, 古 代 の 日 本 5, 近 畿. 9) 山 崎 信 二, 1985, 横 穴 式 石 室 構 造 の 地 域 別 比 較 研 究 - 中 四 国 編.

11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11 로 설정하였다. 九 州 型 은 현문에 판석을 세워 폐쇄하는 것에 비해 畿 內 型 은 석재를 쌓아 올려서 폐쇄하는 차이이다. 또 袖 部 의 형태도 九 州 型 은 내측으로 돌출시켜 평면형태가 凸 자형을 형성하나, 畿 內 型 은 兩 袖 片 袖 와 같이 어깨 부분을 형성하는 것으로, 그리고 畿 內 型 을 장방형플랜과 평천장의 A류, 정방 형플랜과 궁륭상 천장의 B류 두 가지로 세분하였다. 또, 畿 內 型 A류의 출자를 웅진기 남산록25 26호분 등에서 구하고 畿 內 型 B류의 출자를 웅진기의 송산 리고분군에서 구하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10) 그 후 高 井 田 山 古 墳 을 畿 內 型 B류로 하여 그 출자를 한성기의 횡혈식석실에서 송산리 석실로 이어지는 계보 속에서, 이러한 평면플랜이 출현하였다고 생각하였다. 11) 와다 세이고[ 和 田 晴 吾 ]는 군집분의 동향을 검토하는 가운데 군집분을 고 식 신식 종말식 군집분 및 군집분 소멸 이후의 4단계로 파악하고, 그 변화 의 배경에 야마토 정권에 의한 지배의 진전과 장제의 개혁과의 관계를 지적하 였는데, 기나이의 횡혈식석실의 설계척이 고려척으로 통일되고 규격화되는 단 계의 석실을 畿 內 型 횡혈식석실로 칭하면서 이 석실들이 채용되는 군집분을 신식 군집분이라고 하였다. 12) 畿 內 型 석실에 관련하여 그 특징을 가장 명확하게 밝힌 것은 하부타 요시유 키[ 土 生 田 純 之 ]이다. 畿 內 型 석실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두에 성립하는 것 으로 보면서 이전의 묘제와는 상당히 다른 특징을 아래와 같이 열거하였다. 13) 1 현실은 평면이 장방형이고, 천장 종단면은 평천장으로 전벽이 있는 것. 2 현문부에는 입주석의 사용이 적고, 입주석을 세웠더라도 벽체의 가운 데 포함되고 내측으로 튀어 나오는 것은 없다. 3 현문부에 문비석을 두지 않고 양수식 혹은 편수식에 연도가 접속되며 10) 森 下 浩 行, 1986, 日 本 における 横 穴 式 石 室 の 出 現 とその 系 譜 畿 内 型 と 九 州 型, 古 代 学 研 究 ) 森 下 浩 行, 1993, 앞의 글. 12) 和 田 晴 吾, 1989, 畿 内 横 口 式 石 槨 の 諸 問 題, 立 命 館 史 学 ) 土 生 田 純 之, 1991, 日 本 横 穴 式 石 室 の 系 譜, 学 生 社 ; 土 生 田 純 之, 1994, 畿 内 型 石 室 の 成 立 と 伝 播, 古 代 王 権 と 交 流 5 ヤマト 王 権 と 交 流 の 諸 相.

12 1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무수식은 원칙적으로 보이지 않는다(7세기에는 퇴화 형식으로서의 무 수식이 출현한다). 4 폐쇄는 괴석을 쌓아 올리고, 종말기를 제외하면 판석을 이용하여 폐쇄 하는 것은 없다. 5 연도는 초현기의 것부터 현실에 비해 극단적으로 좁은 것은 없고, 어느 정도의 폭이 있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갖춘 것이다. 6 석재는 대형화의 경향이 강하나 벽체의 최하부에 특히 다른 것에 비해 거대한 돌을 사용하는 요석과 같은 수법은 이용하지 않는다. 7 현실의 모퉁이는 위에 이르기까지 잘 유지되고 있으며 양벽에 올린 역 석을 다용하여 상부를 둥글게 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畿 內 型 석실의 성립에 관해 도래인의 영향과 관여가 있었다고 지적 하면서도, 재지 묘제의 영향력도 있기 때문에 畿 內 型 석실의 성립에는 토착 왜 인의 주제성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14) 오오타 히로아키[ 太 田 宏 明 ]는 기나이 중추부의 대형 석실에서 보이는 돌 쌓기 수법의 변천을 정리하여 기나이 중부추의 것으로, 동시기의 같은 돌쌓는 수법의 조합을 가지는 것 을 畿 內 型 석실로 재정의하였다. 15) 그리고 긴키에서 횡혈식석실이 발전 보급되어 가는 과정을 도입기 발전기 종말기의 3단계 로 나누었는데 그 가운데 도입기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 토기 형식으로 말하면 陶 邑 편년 TK10형식 신단계 이전이라는 인식을 제시하였다. 더욱이 이 도입기의 석실을 1군에서 5군으로 분류하고 각 군은 畿 內 型 석실의 변천 각 과정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였다. 1군은 한반도, 특히 백제지역의 것과 유사한 한편, 개별성이 현저하며 각 자료의 상호관계는 오히려 희박하다고 보았다. 또 2군~5군은 기나이적 변용이 인정되고 단독분과 기나이지역의 군집분에 널리 채용되는 상황을 밝혔다. 그 후,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畿 內 型 석실을 도입한 주체는 후기 정권이고, 후기 정권의 조직은 기나이지역을 범위로 하는 정권과 14) 土 生 田 純 之, 1994, 앞의 글. 15) 太 田 宏 明, 1999, 畿 内 型 石 室 の 属 性 分 析 による 社 会 組 織 の 検 討, 考 古 学 研 究 46 1.

13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13 군집분 피장자층의 강한 유대를 가지는 특징이 있다고 파악하였다. 16) 그 후, 2007년에 횡혈식석실 연구회가 주최한 긴키의 횡혈식석실 의 연구 집회는 기나이지역 횡혈식석실의 연구에 관한 많은 성과가 제시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가운데 우메모토 야스히로[ 梅 本 康 広 ]는 同 形 同 大 석실에 관 해 분석하였다. 同 形 同 大 석실을 18가지의 유형으로 설정하고 같은 시기의 규 격이라는 전제로 9단계로 나눈, 단계적인 추이를 상정하였다. 그 가운데 초기 의 횡혈식석실에 대해서는 同 形 同 大 의 석실이 현상에서는 인정되지 않고 규격 이 묘제의 질서로서 도입되었다고는 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특히 대형고분에 는 아직 횡혈식석실이 채용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대왕묘로의 도입도 늦 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추정하면서 市 尾 墓 山 고분이 출현하는 MT15형식기에 횡혈식석실이 정형화되며 규격이 도입되었다고 상정하였다. 17) 그리고 토미야마 나오토[ 富 山 直 人 ]는 석실의 기술혁신이라는 점에 착목하 여 5가지 양식으로 분류하였다. 그 가운데 高 井 田 山 양식은 석실의 도입기에 해당하고 벽면은 석재를 들여 쌓아 형성하는 조임식 기법에 의한 것으로 상정 하였다. 또 古 단계에 속하는 석실은 현재 大 和 지역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中 단계는 藤 の 森 古 墳 과 같이 평면형이 종장으로, 할석의 작은 눈 쌓기에 의한 강한 조임식에 의해 벽면을 구성하는 것과 高 井 田 山 古 墳 과 같이 평면형이 비 교적 정방형에 가깝고 강한 조임식에 의한 벽면을 구성하는 것으로 파악하였 다. 新 단계는 櫻 井 公 園 2호분과 七 ノ 坪 고분을 표지로 하는 것으로 벽면은 거 의 잔존하고 있지 않으나 여전히 연도의 발달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현 문부부터 폐쇄하는 것이 기본으로, 이 시기까지가 도입기로, 각각이 九 州 系 또는 대륙으로부터 도입된 것으로 그 원류가 되는 지역은 다양하다고 결론지 었다. 18) 16) 太 田 宏 明, 1999, 앞의 글. 17) 梅 本 康 広, 2007, 畿 内 大 型 横 穴 式 石 室 の 構 造, 研 究 集 会 近 畿 の 横 穴 式 石 室, 横 穴 式 石 室 研 究 会. 18) 富 山 直 人, 2007, 後 期 前 方 後 円 墳 の 消 長 と 横 穴 式 石 室 からみた6 世 紀 の 社 会, 研 究 集 会 近 畿 の 横 穴 式 石 室, 横 穴 式 石 室 研 究 会.

14 1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긴키지방의 초기 횡혈식석실과 백제의 횡혈식석실의 비교 검토를 행한 요 시이 히데오[ 吉 井 秀 夫 ]는 백제에서 목관 구조가 긴키지방으로 전해졌을 가능 성을 지적하였다. 긴키지방의 횡혈식석실에 이용된 관못으로 고정하는 목관의 기원을 백제 횡혈식석실의 목관에서 구하는 견해는 이전부터 있었으나 당시 비교대상이 되었던 것은 웅진기 이후의 횡혈식석실에 사용하였던 환좌금구가 있는 목관이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일본 고분시대 후기의 횡혈식석실에 보이는 관못을 사용한 목관에는 기본적으로 환좌금구가 공반되지 않고 관못의 길이도 길기 때문에 한성기 백제의 토광목곽묘 수혈식석곽묘 횡혈식석실묘 에 사용된 관못과 꺾쇠를 이용한 목관이 긴키지방 횡혈식석실에 이용된 목관 의 조형이 되었을 가능성을 밝혔다. 또 긴키지방 횡혈식석실의 출현에 대해서 는 동시기의 백제 횡혈식석실의 영향이 컸다고 보면서도 긴키지방 묘제의 전 통이 초기 단계부터 보이는 것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공통점에만 주목하지 말고 상이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도 검토해야 한다고 논하였다. 따라서 畿 內 型 석실은 횡혈식석실이 수용되어 가는 과정에서 재지의 묘제와 전통과의 절충이 행해지고 백제의 것과는 다른 새로 운 묘제가 성립되며 넓게 퍼져 나갔다고 생각하였다. 19) 초기 횡혈식석실의 공간배치를 분석한 기타야마 미네오[ 北 山 峰 生 ]는 다음 과 같이 크게 3가지의 결론을 냈다. 1 초기 횡혈식석실은 단장을 원리로 축조되었다. 이것은 관을 밀봉하여 유해를 영구히 보호하는 수혈계 매장시설의 설계 사상과 공통된다. 따 라서 횡혈식석실은 도입은 매장 행동양식의 변화가 있으나 사고 양식 은 전통적인 측면이 강하다. 2 다시 말하면 횡혈식석실의 출현이라는 것은 고분시대 중기에 존재하였 던 재래의 수혈계 매장시설에 외래의 매장양식을 접목한 결과라고 말 할 수 있다. 그 접목이 가능한 것은 고분 축조 과정 그 자체가 변화하고 축조 매장에 대한 자세가 횡혈식석실과 유사한 상황이었던 것이 하나 19) 吉 井 秀 夫, 2008, 墓 制 からみた 百 済 と 倭, 百 済 と 倭 国, 高 志 書 院.

15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15 의 이유이다. 3 Ⅱ 1단계부터는 추가장을 염두에 둔 횡혈식석실이 구축되었다. 즉, 단 장에서 복수 매장으로 변화한다. 여기에 공간 이용 원리의 변화를 파악 할 수 있다. 이상의 결론을 토대로 횡혈식석실의 역사적 의의를 고분시대 전기 이래의 전통적 사상과 新 來 의 문화요소가 융합하였던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구조물이 라는 것에서 구하였다. 20) 횡혈식석실의 의례에 주목한 모리모토 도루[ 森 本 徹 ]는 긴키지방 중앙부의 석실 내 토기 배치의 시작을 보여주는 高 井 田 山 古 墳 의 의례 양상에 대해, 석 실 구조의 조형이 백제 한성기의 것에서 구해지는 것이 명확하고 부장품의 양 상과 남녀의 피장자를 안치하는 관배치를 취한 것에서도 피장자 출신이 도래 인일 가능성을 지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고분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에 대해서 그 기원과 계보를 정리하면 모든 요소가 한반도에 기원을 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도래계 요소로 이해되는 스에키 고배를 중 심으로 하는 석실 내 토기류의 다량 배치에 대해서도 스에키를 고분의 의례에 사용하는 것은 열도에서의 스에키 생산의 개시기부터 인정되고, 긴키지방 중 앙부의 횡혈식석실 도입 이전부터 정착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한반도의 도 질토기 다량 부장의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긴키지방 중앙부에 5세기 후반 단계 에 다시 한반도 석실의 조형이 도입되는 것과 같이, 의례도 긴키지방 중앙부에 서 새롭게 재구성되고, 이를 발신지로 하여 주위에 전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 였다. 그리고 긴키지방 중앙부의 횡혈식석실 채용이 북부규슈에서 전파된 것 이 아니라는 것은 매장시설의 변혁도 긴키지방 중앙부에 중심을 둔 야마토정 권에 의한 시책의 하나로 이해하고 의례의 재구성도 같은 배경을 가진다고 보 았다. 그 시책의 배경에는 대륙적 묘제의 도입이라고 하는 방향성, 게다가 광 범위한 계층에 공통적인 매장시설의 채용이라고 하는 방향성이 포함된 것이라 20) 北 山 峰 生, 2012, 初 期 横 穴 式 石 室 の 空 間 利 用 原 理, ヒストリア 第 235 号.

16 1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는 인식은 인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21) 최근의 이러한 연구들은 대부분 한반도, 특히 백제에서 받은 영향보다 오 히려 재지의 전통적인 양상을 강조하면서 결론적으로 한반도에서 곧바로 횡혈 식석실이 기나이지역에 그대로 도입된 것은 아니라는 경향이 강하다. 한편, 이전부터 高 井 田 山 古 墳 을 중심으로 초기 횡혈식석실을 분석한 야스 무라 준지[ 安 村 俊 史 ]는 高 井 田 山 古 墳 은 백제로부터의 직접적인 영향에 의해 성립된 고분으로 파악하였다. 또 그 형태를 이어 받은 양상으로 畿 內 型 횡혈식 석실이 성립된다고 보았다. 초기의 畿 內 型 횡혈식석실은 우편재식으로 한정되 는데, 백제의 횡혈식석실에서 우편재식이 주류가 된 것은 피장자로부터 볼 때 오른쪽이 우위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오른쪽에 최초의 피장자, 보통 에는 남편을 매장하고 그 후 왼쪽에 부인을 매장하였기 때문에 高 井 田 山 古 墳 에도 오른쪽은 남편, 왼쪽에 부인이라고 하는 위치관계가 도입된 것이라고 보 았다. 기나이의 초기 횡혈식석실에는 두 개의 관을 나란하게 매장하는 예가 몇 군데 보이는데 이 매장방법과 우편재의 의의를 이해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 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의 관을 매납하는 것이 기본적인 형태이고 오른 쪽 우위라고 하는 사상이 사라지면서 이윽고 우편재식 석실의 의미를 잃어버 리게 된다고 파악하였다. 또 못으로 고정하는 목관도 보급되었고 횡혈식석실 의 채용에 의해 석실 완성 후에 목관을 안치하였기 때문에 들고 날랐을 가능성 이 크다고 보았다. 그리고 토기가 석실 내에 매납된 점에 대해서도 미니어처 취사구가 도래계 씨족과 관련되는 토기로 주목하였다. 22) 이러한 기나이지역의 초기 횡혈식석실에 관해 일본에서의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는 가운데 한국에서도 몇몇 연구자가 그 견해를 밝힌 바 있다. 홍보식은 高 井 田 山 古 墳 의 경우, 현실 평면 정방형의 송산리형 석실이 무령왕릉의 영향 으로 장방형화된 송산리Ⅲ식의 석실이 高 井 田 山 古 墳 의 조형이 되었다고 보았 다. 더욱이 高 井 田 山 古 墳 에서 출토된 울두 등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유 21) 森 本 徹, 2012, 儀 礼 からみた 畿 内 横 穴 式 石 室 の 特 質, ヒストリア 第 235 号. 22) 安 村 俊 史, 2008, 高 井 田 山 古 墳 の 意 義, 群 集 墳 と 終 末 期 古 墳 の 研 究.

17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17 사한 점을 근거로 高 井 田 山 古 墳 이 웅진기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23) 박천수는 高 井 田 山 古 墳 과 椿 井 宮 山 고분은 백제의 횡혈식석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상정하는 가운데, 특히 高 井 田 山 古 墳 은 긴키지역에 최초로 조영 된 횡혈식석실로 소형분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희소한 한반도산 문물을 다수 부장한 점에서 인근 이주민 기술자를 통괄한 백제의 왕족급 인물로 보는 조사 자의 견해 24) 에 동의하고 있다. 25) 한편 김낙중은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에 횡 혈식석실이 출현하고 수용되는 양상과 배경에 대해 전반적으로 검토하는 가운 데 기나이지역에서 횡혈식석실이 도입되는 양상을 언급하였다. 초기 횡혈식석 실로 파악되는 6기의 고분에 대해 한성기에서 웅진기에 걸치는 백제의 횡혈식 석실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하면서도 畿 內 型 석실이 완성되기 이전 에 축조된 석실은 소규모 고분에 한정되기 때문에 왜 왕권의 관여에 의해 도입 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백제와 교류를 담당하며 성장하던 기나이의 수장계열이 나 그러한 수장의 비호를 받던 도래인들이 축조하였다고 파악하였다. 나아가 기나이의 초기 횡혈식석실은 추가장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을 받아 들여 그 구조 자체는 외래의 아이디어에 의한 것이었지만 반드시 외래의 새로 운 사상적 배경에 준하여 구축 이용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26) 이상과 같이 기왕의 연구사를 살펴보았다. 대체적으로 정형화되는 畿 內 型 석실 이전 초현기의 횡혈식석실로, 백제로부터 영향을 받아 성립한 것으로 보 는 것에는 크게 이견이 없다. 다만 백제의 영향을 크게 보는 입장과 최근 재지 의 요소를 부각시키는 입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이에 앞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백제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 는지, 어느 시기, 지역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등에 관한 검토는 거의 이루어지 23) 홍보식, 1993, 백제 횡혈식석실의 형식분류와 대외전파에 관한 연구, 박물관연 구논집 2, 부산직할시립박물관. 24) 安 村 俊 史 桑 野 一 幸, 1996, 高 井 田 山 古 墳, 柏 原 市 敎 育 委 員 會. 25) 박천수, 2007, 새로 쓰는 고대 한일교섭사, 사회평론; 박천수, 2012, 일본 속 고대 한국문화 近 畿 地 方, 동북아역사재단. 26) 김낙중, 2012,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에서 횡혈식석실묘의 수용 양상과 배경, 한국고고학보 제85집, 한국고고학회.

18 1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지 않고 단순히 백제와의 관련만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초기 횡혈식 석실들을 전부 하나로 인식하여 수용양상을 한 가지의 모습에서 구하려고 하 는 문제도 있다. 또한 검토대상이 되는 초기 횡혈식석실의 선정에도 연구자마 다 다양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에 착목하면서 기나이지역의 초기 횡혈식석실을 세세하게 분석하여 백제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명확하 게 밝히고, 이를 통해 기나이지역에서 횡혈식석실이 출현하는 양상에 대해 언 급하고자 한다. 나아가 그 배경과 피장자 문제에 이르기까지 견해를 밝히는 것 을 목적으로 둔다. Ⅲ.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양상 1_ 초기 횡혈식석실의 개념 규정 분석대상이 되는 기나이지역의 초기 횡혈식석실에 대해 개괄해 보고자 한다. 이에 앞서 용어 규정과 그 대상의 선정이 문제가 될 것이다. 즉, 초기의 횡혈식 석실에 이어 정형화되는 이른바 畿 內 型 石 室 이 성립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나, 결국 어디까지가 초기의 석실이고 어디부터 畿 內 型 석실인지에 대한 설정 이 문제가 된다. 먼저, 기나이 라는 용어에 대해 살펴보면 횡혈식석실이 축조되는 시기는 아직 기나이 라고 하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횡혈식석실과 결부되 는 용어로서는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7세기 이후에 기나이 로 불리게 되는 지 역의 범위가 고분시대에도 왜의 중앙으로서 상정할 수 있는 범위로 묶을 수 있 다고 보이기 때문에 기나이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견해 27) 를 27) 安 村 俊 史, 2008, 앞의 글.

19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19 따르면 그대로 사용하여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긴 키 보다 그 한정적으로 분포하는 초기 횡혈식석실의 양상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용어로 생각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기나이지역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다음, 기나이지역의 초기 횡혈식석실을 畿 內 型 석실에 포함시킬 것인가, 그 렇지 않으면 분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사용되어 온 畿 內 型 횡혈식석실 의 개념은 주로 벽면의 단면형태와 돌을 쌓는 방법을 토 대로 기나이의 대형 횡혈식석실 및 그 영향을 받은 석실군에 대해 부여하였다. 특히, 현문의 구조가 중시되어 어깨 부분에서 동일 폭으로 구축된 연도 측벽의 모양은 기나이에 보편적으로 보이는 특징으로 주목된다. 물론, 畿 內 型 의 사 용에 대해 비판적인 지적도 있다. 니오 이즈미[ 新 納 泉 ]는 오히려 백제와의 관 계가 강한 수장계열이 기나이와 다른 지역을 무대로 채용하였던 것이 畿 內 型 석실이고 이윽고 이 계열이 권력의 중추에서 다른 지역을 압도해 간다고 상정 하였다. 28) 어느 쪽을 취한다고 해도 畿 內 型 석실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 이다. 이러한 가운데 畿 內 型 의 성립 시기를 두고서는 5세기 중엽에서 후반에 출 현하여 형식 변화를 보이면서 7세기 대까지 축조되는 기나이지역의 석실의 대 부분을 畿 內 型 석실에 포함시키는 야마사키 신지 29) 와 모리시타 히로유키 30) 를 비롯해 시라이시 다이치로, 31) 히로세 카즈오[ 広 瀨 和 雄 ], 32) 오오타 히로아키 33) 등의 高 井 田 山 古 墳 부터로 생각하는 입장, 혹은 市 尾 墓 山 고분 등 대형고분에 28) 新 納 泉, 1987, 戊 辰 年 銘 大 刀 と 装 飾 付 大 刀 の 編 年, 考 古 学 研 究 三 四 巻 三 号. 29) 山 崎 信 二, 1985, 앞의 글. 30) 森 下 浩 行, 1986, 앞의 글. 31) 白 石 太 一 郞, 1995, 앞의 글. 32) 広 瀬 和 雄, 2001, 7 世 紀 の 畿 内 首 長 層 の 動 向 横 穴 式 石 室 と 横 口 式 石 槨 の 変 遷 をとおして, 東 海 の 後 期 古 墳 を 考 える, 東 海 考 古 学 フォーラム, 三 河 大 会 実 行 委 員 会. 33) 太 田 宏 明, 2003, 畿 内 地 域 における 導 入 期 の 横 穴 式 石 室, 関 西 大 学 考 古 学 研 究 室 開 設 五 拾 周 年 記 念 考 古 学 論 集.

20 2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서 채용된 것에서부터로 보는 하부타 요시유키, 34) 토미야마 나오토, 35) 와다 세이고 36) 등의 입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들 가운데 대표적인 견해를 살펴보면 먼저 하부타 요시유키는 축조 수가 적고, 아직 횡혈식석실의 구축이 정착하였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단 계 및 본래 횡혈식석실이라는 묘제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장제가 정착하기 까지의 단계에 축조된 것을 초기 석실로 칭하고 있다. 그리고 기나이지역뿐만 아니라 범일본적으로 정리하여 최대공약수로 규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5세기 대에 축조된 석실을 초기 횡혈식석실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37) 한편, 畿 內 型 석실에 대해 전체적으로 세세한 분류를 시도한 오오타 히로아키의 경우, 초현기에 해당하는 그의 도입기의 1군을 畿 內 型 석실로 포함 시키는 것에 대해 1군이 이후의 석실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을 고려하여 畿 內 型 석실로 포괄하고 있다. 38) 이와 같이 분명 같은 지역에서 출현하고 이후 자체적으로 변화하면서 정 형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같은 형식의 석실로 포함시켜 분석하는 것도 가능 할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초기의 석실과 정형화된 畿 內 型 석실과는 차이가 있는 것도 분명하기 때문에 주저되는 면이 없지는 않다. 그리고 후술하는 바와 같이 초기의 횡혈식석실과 다른 畿 內 型 과는 석실의 형태뿐만 아니라 유물과 피장자도 다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初 期 畿 內 型 石 室 이라는 개념보다 기나이지역의 초기 횡혈식석실 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접 근하고자 한다. 어찌되었든 기나이형석실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예로 들고 있는 市 尾 墓 山 고분과 같이 정형성이 보이지 않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고 34) 土 生 田 純 之, 1991, 앞의 책. 35) 富 山 直 人, 1994, 畿 内 における 横 穴 式 石 室 の 構 築 技 術 と 渡 来 系 氏 族, 文 化 財 学 論 集. 36) 和 田 晴 吾, 1996, 見 瀬 丸 山 古 墳 藤 ノ 木 古 墳 と 六 世 紀 のヤマト 政 権, 情 況 日 本 の 古 代 をひらく, 情 況 出 版. 37) 土 生 田 純 之, 1991, 앞의 책. 38) 太 田 宏 明, 2003, 앞의 글.

21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21 분을 그 대상으로 할 수 있다. 대략 畿 內 型 석실을 통시적으로 분석한 오오타 히로아키 39) 의 1 2군에 해당하는 고분들이다. 이 고분들 가운데 석실의 평면 형태 등을 파악할 수 있고, 비교 분석이 가능한 주요 고분을 중심으로 자세한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2_ 초기 횡혈식석실의 양상 1) 다카이다야마고분[ 高 井 田 山 古 墳 ] <그림 1> 기나이지역의 초기 횡혈식석실의 분포도(번호는 본문 1)~8) 고분의 위치) 高 井 田 山 古 墳 은 오사카[ 大 阪 ]와 나라[ 奈 良 ]의 경계에 해당하는 이코마[ 生 駒 ] 산지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남으로 뻗은 능선 자락, 大 和 川 을 바라보는 작 은 구릉에 축조되었다. 직경 22m의 원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분구 북측에 돌 39) 太 田 宏 明, 2003, 앞의 글.

22 2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그림 2> 高 井 田 山 古 墳 (석실 s=1/200, 유물 s=1/20)( 安 村 俊 史 외 1996 수정 후 인용) 출부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매장시설은 안산암의 판석을 쌓아올리고 남쪽으로 입구를 둔 우편재식의 횡혈식석실로 현실 평면은 장방형이다. 조사 전에 천장이 이미 붕괴되어 양측 벽 중앙 부근도 현실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또 우측 벽 중앙부는 도굴 또는 후대의 교란으로 인해 훼손되어 있었다. 석실은 생토면을 정지한 후 5.4m 3.5m 의 묘광을 굴착하여 축조하였다. 길이 3.73m, 후벽 너비 2.34m, 전벽 너비 2.26m, 현문 너비 1.18m로 길이와 너비의 비율은 약 1.6:1이다. 측벽과 후벽 은 바닥에서 약 1m까지는 수직으로 세웠다. 연도부의 길이는 약 2m, 높이 약 1m이고, 묘도의 길이 약 2.7m로 방향이 현실의 주축에 비해 조금 동쪽으로 꺾 여 있다. 현실 벽면이 1m 정도밖에 넘지 않아 천장의 형태는 확실하게 알 수

23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23 없으나 현실 벽면 모퉁이에 약간의 조임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높이 약 2.2m의 궁륭상 천장으로 복원되고 있다. 현실 주축에 평행하여 2기의 목관이 나란하게 안치되었는데 관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2개의 목관은 두께 7~9cm의 금송 판재를 관못으로 조합한 것으로 관재를 고정하기 위해 사용된 관못의 출토 위치를 토대로 목관의 규모 가 복원되고 있다. 서쪽의 목관은 길이 250cm 전후, 너비 75cm로 추정되고, 동쪽 목관은 길이 228cm, 너비 74cm로 복원되고 있다. 동쪽 목관에서는 화상 경 1점, 청동제 울두 1점, 순금제 금환 2점, 금층유리옥을 포함한 경식 1련, 철 도 1점, 은제 도자 2점 등이 출토되었다. 부장품으로 보아 동쪽 관은 여성이 매 장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상정되고 있다. 그리고 금환의 출토 위치 등에서 양쪽 모두 두향은 북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관 바깥쪽의 부장품으로는 갑주와 철모, 철창, 철촉, 마구 등의 철기를 비 롯해 유개고배 등의 스에키가 있다. 이러한 관외 다수의 무기 등의 부장품과 목 관의 규모로 보아 서쪽 관의 피장자는 남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2) 후지노모리고분[ 藤 の 森 古 墳 ] 河 內 지역의 중심 고분군인 古 市 고분 군 내에 입지하는 고분으로 응신릉으 로 추정되고 있는 譽 田 御 廟 山 고분의 서측에 인접하여 축조되었다. 현재는 오사카부 水 道 部 美 陵 펌프장에 이설 되어 있다. 고분의 분구는 직경 약 22m의 원분으로, 높이는 3m이고 주 구가 돌려져 있다. 분구에는 자갈돌 <그림 3> 藤 の 森 古 墳 (석실 s=1/200) ( 柏 原 市 立 歷 史 資 料 館 1996 수정 후 인용)

24 2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을 즙석하였고 하니와[ 埴 輪 ]를 수립하였다. 또 분구 전체를 성토하였고 분구의 축성과 석실의 구축이 교호로 이루어졌다. 석실은 판상할석을 쌓아 올린 우편재식 횡혈식석실로 거의 남향으로 입구 가 있다. 현실의 규모는 길이 약 3.0m, 너비 약 1.5m, 높이 약 1.5m이다. 연도 높이와 거의 같은 높이까지 수직으로 벽면을 쌓고 그 위에는 조임식 기법으로 쌓아 올려 궁륭상 천장이 형성되도록 하였다. 측벽에는 전면적으로 적색 안료 가 도포되었다. 연도는 길이 약 1m, 너비 80~90cm, 천장석은 1매이다. 현실 내에는 서벽쪽에 치우쳐서 조합식 목관 1기가 안치된 것으로 추정되 고 있다. 출토 유물은 현실에서 관못, 유리제 곡옥 환옥, 금동제 삼륜옥, 철 촉, 혁철단갑편이, 분구에서 하니와와 하지키[ 土 師 器 ] 등이 확인되었다. 3) 나가하라시치노츠보고분[ 長 原 七 ノ 坪 古 墳 ] 오사카시 히라노구[ 平 野 區 ] 나가하라[ 長 原 ] 일대에 넓은 범위에 걸쳐 대규모 취락 유적과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취락과 고분군은 4세기에서 6세기에 걸 쳐서 형성되었다. <그림 4> 長 原 七 ノ 坪 古 墳 (석실 s=1/200)( 柏 原 市 立 歷 史 資 料 館 1996 수정 후 인용)

25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25 이 長 原 유적에서는 부뚜막이 부설된 수혈 주거와 대벽건물지가 확인되었 다. 또 부뚜막과 시루 등의 취사구와 조족문토기 등을 비롯한 한반도계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와 더불어 단야공방지도 다수 확인되는 등 철제품의 생산 을 담당하였으며 더욱이 유적의 전면에 걸쳐 말뼈가 확인되므로 말의 사육과 관련된 유적임을 알 수 있다. 이 유적 가운데 長 原 고분군이 입지하고 있는데, 전방후원분 2기를 비롯해 원분 4기, 방분 195기 등의 약 200여 기의 고분이 확인되고 있다. 4세기 말에 서 6세기 중엽, 유적의 1기에서 4기에 이르기까지 형성된 고분군이다. 고분군 의 마지막 단계인 제4기가 되면 이 고분군에서 확인된 유일한 횡혈식석실 고 분인 七 ノ 坪 고분이 축조된다. 전방부가 짧은 가리비형 전방후원분으로 분구 규모는 전체 길이 약 23.5m 이다. 횡혈식석실은 후원분에서 확인되었는데 입구가 오른쪽으로 열려 있는 우편재식이다. 석실의 윗부분이 전부 훼손되어 천장 구조 등을 명확하게 알 수 는 없으나 궁륭상천장으로 추정된다. 현실의 길이는 약 3.5m, 너비는 약 2.5m 이다. 석실 안에서 마구와 무기, 무구, 장신구를 비롯해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4) 이치스가고분군[ 一 須 賀 古 墳 群 ] Ⅰ-18호분 Ⅰ 19호분 오사카부 미나미카와치군[ 南 河 內 郡 ] 다시이쵸[ 太 子 町 ] 이치스가[ 一 須 賀 ]에 소재하는 미나미카와치[ 南 河 內 ]지역 최대의 군집분이다. 이 고분군은 오사카와 나라의 경계인 가츠라기산[ 葛 城 山 ] 서쪽에서 파생하 는 구릉 끝자락에 형성되었다. 약 280여 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데, 그 가운데 약 70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6세기 전반에 고분의 축조가 시작되었고, 6세기 후반에서 6세기 말에 걸쳐 가장 많이 축조되 었다. 이후 7세기 중엽 무렵에 고분 축조가 중단된다. 대부분이 지름 10~20m 의 소형 원분이고, 매장주체부는 횡혈식석실이다. 이 가운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고분은 Ⅰ지군의 고분 이다. Ⅰ지군은 좁은 계곡부의 미고지에 조영되었는데 매장시설은 소형의 할

26 2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그림 5> 一 須 賀 Ⅰ-18호분(좌) Ⅰ-19호분(우)(석실 s=1/200)( 柏 原 市 立 歷 史 資 料 館 1996 수정 후 인용) 석을 이용하고 짧은 연도가 부가된 횡혈식석실로 고분군 내에서 가장 빠른 양 상을 보이고 있다. I지군 18호분의 경우, 오른쪽으로 입구가 열려 있는 횡혈식석실로 윗부분 은 대부분 삭평을 당해서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현실 길이 3.3m, 너비 2.1m이 고 연도 길이 2.3m, 너비 0.8m로 현실의 길이와 너비의 비율이 약 1.57:1이 다. 석실 내에는 2개의 목관이 안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토된 유물 로는 은제 반지, 금환, 유리옥, 마구 등을 비롯해 축소모형 취사도구가 있다. I 지군 19호분 역시 오른쪽에 입구가 있는 횡혈식석실이고, 현실 길이 3.1m, 너 비 1.7m, 연도 길이 1.6m, 너비 0.8m로 현실의 길이와 너비의 비율이 1.82:1 이다. 축소모형 취사구를 비롯해 은제 머리뒤꽂이가 출토된 것이 특징이다. 5) 사쿠라이고엔[ 櫻 井 公 園 ] 2호분 나라현 사쿠라이시[ 櫻 井 市 ] 남쪽의 아베산[ 安 倍 山 ]에서 파생되는 구릉 말단에 분포하는 고분군으로 4기의 고분이 입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 2호분은 발견할 때 이미 상부가 파괴되어 분구 규모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매장시

27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27 <그림 6> 櫻 井 公 園 2호분(석실 s=1/200, 유물 s=1/20)( 網 干 善 敎 1959 수정 후 인용) 설은 남측으로 입구로 열려 있는 우편재식의 횡혈식석실임이 확인되었고, 편 평한 자연석을 쌓아 올려 구축하였다. 전체 길이는 4.4m이고 현실의 길이 2.9m, 너비 1.9m, 연도 너비 0.9m의 규모이다. 미니어처 취사구를 비롯해 시 루, 옹 등의 토기와 관못, 은제 머리뒤꽂이, 은제 반지 등이 출토되었다. 6) 데라구치오시미[ 寺 口 忍 海 ] D27호분 나라현 신죠우쵸[ 新 庄 町 ] 데라구치[ 寺 口 ] 일대에 분포하는 고분군이다. 가츠 라기산록에 170여 기의 고분이 동서 1.2km, 남북 1km에 걸쳐 조영된 군집분 으로 5세기 말에서 6세기 대에 축조되었다. 이 고분군 가운데 D27호분은 직경 약 16.5m의 원분으로, 서쪽으로 작은 장방형의 돌출부가 있고 분정부와 분구 자락에 하니와를 세워 돌렸다. 매장시 설은 남쪽으로 입구가 열려 있는 우편재식의 횡혈식석실이다. 현실의 규모는 길이 약 3.4m, 후벽 너비 약 1.7m, 높이 약 2m이다. 연도의 규모는 길이 약 2m, 너비 0.75m, 높이 약 1m이다. 현실의 길이와 너비의 폭이 약 2배이다. 현실에서는 두 개의 목관이 나란히 안치되었다. 부장품으로서는 대도, 철 검, 철모, 녹각제 도자, 내만타원형경판비, 철부, 철겸 등의 철기와 토기가 출

28 2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그림 7> 寺 口 忍 海 D27호분(석실 s=1/200, 유물 s=1/20) ( 新 庄 町 敎 育 委 員 會 ㆍ 奈 良 縣 立 橿 原 考 古 學 硏 究 所 1988 수정 후 인용) 토되었다. 7) 쓰바이미야야마쓰카고분[ 椿 井 宮 山 塚 古 墳 ] 나라현 이코마시[ 生 駒 市 ] 쓰바이[ 椿 井 ]의 구릉 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직경 20m의 원분이다. 매장시설은 입구를 남쪽으로 부가한 우편재식 횡혈식석실이 다. 전체 길이는 약 4.15m, 현실 길이 4.1m, 너비 3m, 높이 3m이고 연도 길 이 0.5m, 너비 1m의 규모이다. 자연석과 괴석을 사용하여 축조한 현실은 거의 완전한 궁륭상으로 내경하

29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29 <그림 8> 椿 井 宮 山 塚 古 墳 (1), 新 澤 千 塚 221호분(2)(석실 s=1/200)( 安 村 俊 史 2014 수정 후 인용) 고 후벽과 좌우 측벽의 접합부는 천장에 거의 맞닿아 있다. 현실의 입구 높이 는 0.8m로 낮고 연도부에는 천장석이 존재하지 않는 짧고 좁은 구조이다. 현 실의 측벽에는 적색안료가 도포된 것이 확인되었다. 8) 니자와센쓰카[ 新 澤 千 塚 ] 221호분 나라현 가시와라시[ 橿 原 市 ] 이치죠[ 一 町 ]에 입지하는 고분군으로 나라분지 남 부의 우네비야마[ 畝 傍 山 ]의 남쪽으로 뻗어 있는 해발 150m의 구릉 위에 동서 약 2km, 남북 약 2km의 범위에 10~15m 급의 원분을 중심으로 600여 기에 달하는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新 澤 千 塚 221호분은 직경 약 13m, 높이 약 3.3m의 원분이다. 매장시설은 남쪽으로 입구가 있는 우편재식의 횡혈식석실로 길이 약 3m, 너비 약 1.3m의 현실에 길이 약 1.4m, 너비 0.7m의 연도가 부가되었다. 석실은 두께 20cm 전 후의 돌을 쌓아 올려 만들었으며 연도의 상면은 현실보다 15cm정도 높게 되어

30 3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있다. 도굴에 의해 상부가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천장이 어떠한 형태이었 는지는 확정할 수 없다. 할석의 작은 눈 쌓기를 한 벽면의 상황을 보면 아마도 벽면 상부를 급격하게 조이는 형태였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석실 내에서는 중세의 도굴로 인해 부장품의 대부분이 반출되어 극히 일부 가 남았지만 목심철판의 등자와 토기가 출토되었다. Ⅳ. 유형 설정 이상과 같이 살펴본 기나이지역의 초기 횡혈식석실에 대해 유형을 설정하고자 한다. 기왕에는 평면형태와 천장구조를 기준으로 크게 高 井 田 山 古 墳 식과 椿 井 宮 山 塚 古 墳 식의 두 가지로 구분하는 연구 관점이 대부분을 점해 왔다. 그러 나 주지하다시피 초기의 횡혈식석실들은 대부분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형태로 구분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평면의 형태나 규격 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백제와의 비교 등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평면형태와 더불어 분구형 태, 입지, 유물의 부장 양상, 목관의 매납, 그리고 주변 유적과의 관계 등을 기 준으로 분류하고자 한다. <표 1>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초기의 석실에는 다양한 요소가 보인다. 이 요 소들 가운데 백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석실의 기본적인 형 태는 물론이지만, 못을 사용하는 목관, 40) 2인 매장, 백제계 유물 등이 있다. 2 인 매장의 경우, 기타야마 미네오는 기본적으로 단장이라고 보고 기왕의 수혈 40) 吉 井 秀 夫, 1993, 百 済 地 域 における 横 穴 式 石 室 分 類 の 再 検 討 錦 江 下 流 域 を 中 心 として, 考 古 学 雑 誌 第 79 巻 第 2 号, 日 本 考 古 学 会.

31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31 <표 1> 초기 횡혈식석실의 속성 일람표 현실 규모 분형 길이 너비 면적 장폭 입구 목관 유물 주변 유적 (m) (m) (m2) 비 高 井 田 山 古 墳 원분 우편재 2기 병렬 울두 금층유리옥 大 県 유적 平 尾 山 고분군 藤 の 森 古 墳 원분 우편재 조합 식 관못 埴 輪 古 市 고분군 長 原 七 ノ 坪 古 墳 가리비형 마구 전방후원분 우편재 무기 長 原 유적 一 須 賀 Ⅰ 18호 분 원분 우편재 2기 병렬 미니어처취 사구 은제반지 금환 一 須 賀 고분군 一 須 賀 Ⅰ 19호 분 원분 우편재 2기 병렬 미니어처취 사구 은제뒤꽂이 一 須 賀 고분군 櫻 井 公 園 2호분 원분 우편재 관못 미니어처취 사구 은제뒤꽂이 櫻 井 公 園 고분군 寺 口 忍 海 D27호분 원분 우편재 2기 병렬 마구 단야구 寺 口 忍 海 고분군 椿 井 宮 山 塚 古 墳 원분 우편재 적색안료 新 澤 千 塚 221호분 원분 우편재 마구 토기 新 澤 千 塚 고분군 식석곽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41) 기타야마의 지 적대로 수혈식석곽과 같이 추가장 없이 단장으로 그치는 경우도 있고, 2인이 매장된 석실들도 추가장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41) 北 山 峰 生, 2012, 앞의 글.

32 3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그러나 기본적으로 출입구가 만들어진다는 새로운 葬 制 의 도입과 더불어 한 매장주체부에 복수의 사람을 매장한다는 개념은 재지의 전통과는 전혀 다 르다. 새로운 묘제로서 기술, 유물조합 등과 더불어 복수매장이라는 새로운 관 념이 같이 들어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뒤에 자세 히 검토하겠지만 한성기의 석실은 2인 매장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다고 생각 되지만, 지역마다 도입되는 양상에 따라 단장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단장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횡혈식석실의 새로운 매장 관념이 전혀 도입되지 않았다고 그대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더욱이 초기의 횡혈식석실 가운데 복수매장이 된 경우 출토 유물의 조합으 로 보아 남녀가 매장된 것으로 보이는 고분들이 있다. 당시 일본열도의 기본 적인 매장 방식은 부부매장 혹은 남녀매장이 아니었고 횡혈식석실 도입기까지 도 부자매장이 기본이다. 42) 그러나 유독 초기 횡혈식석실에 남녀가 매장되는 양상이 보이는 것은 역시 한반도로부터 영향이 컸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 된다. 또한 토기를 현실 내에 안치하는 것 역시 이견이 있다. 재지의 장제로 보기 도 하고, 백제가 아닌 가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43) 그 러나 가야의 경우, 기나이지역에 초기 횡혈식석실이 도입되는 같은 시기에 비 로소 석실이 축조되기 시작하기 때문에 가야의 영향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 다. 현실 내의 도질토기 부장은 가야 또는 백제라는 식으로 한 지역에 국한되 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따라 서 토기 매납뿐만 아니라 공반되는 금공품 등의 다른 유물들과의 조합 양상을 보았을 때 현실 내에 토기를 매납하는 것 역시 백제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즉, 단순히 개별 요소별로 비교하는 것보다는 <표 1>에서 보듯이 전체적인 42) 田 中 良 之, 1996, 人 骨 からみた 古 墳 時 代 親 族 関 係, 考 古 学 による 日 本 歴 史 15, 雄 山 閣. 43) 森 本 徹, 2012, 앞의 글.

33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33 조합 양상을 파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 초기 횡혈식석실 들이 입지하고 있는 곳의 주변 유적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도 중요하다. 이러 한 점에 착목하여 여러 요소들 가운데 백제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또 재지 의 요소는 어느 정도 반영이 되어 축조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두 가지의 유형 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먼저 高 井 田 山 古 墳 의 경우, 전방후원분이 아닌 원형의 분구가 축조되고 그 안에 횡혈식석실이 축조된다. 장방형의 평면플랜에 궁륭상 천장구조라는 점에서 백제계로 상정되고 있다. 다만 규모가 다르다. 그러나 현실의 장폭비가 1.6:1로, 이는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에서 흔히 보이는 비율이다. 최근 백제 한성의 중앙지역 근처에서 조사되고 있는 석실들이 대부분 장폭비 1.6:1의 비 율을 보이고 있으며, 광암동 2호와 법천리 1호의 경우, 高 井 田 山 古 墳 과 규모 면에서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규모로는 가락동 3호와 비교할 수도 있겠 으나 장폭비 등의 평면플랜으로 보았을 때 가락동고분군보다 광암동고분군과 같은 한성기 중앙 인근지역 또는 한강유역의 횡혈식석실들과 형태적으로 가까 워 보인다. 결국, 高 井 田 山 古 墳 의 연대도 5세기 후엽으로 판단된다. 논자에 따라 TK23단계로 보거나 혹은 TK47단계로 설정하기도 하나, 한성기석실로부 터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한성기 말에 해당하는 TK23단계로 설정할 수 있다. 그리고 高 井 田 山 古 墳 의 연도가 약간 휘어져 있는데 이것 역시 한성기석 실의 요소로 파악한바 있다. 44) 결론적으로 평면형태로 보아 한성기 석실의 평면형태와 천장구조를 그대 로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입구가 우편재인 점, 연도가 휘어진 점, 관못 을 사용하는 목관 사용, 추가장은 아닌 듯하나 남녀의 복수매장, 그리고 주지 하듯이 무령왕릉 출토와 유사한 울두와 금층유리옥 등의 백제계 유물이 출토 된 점 등 거의 모든 요소가 백제와 일치한다. 더욱이 이 高 井 田 山 고분의 서쪽에는 단야( 鍛 冶 )공방과 관련된 단야로, 송 44) 김규운, 2014, 가락동 방이동고분군으로 본 백제 횡혈식석실의 성립, 선사와 고대 제40, 한국고대학회.

34 3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표 2> 광암동ㆍ판교동고분군 한성기 횡혈식석실 속성 유구 현실 규모 길이(cm) 너비(cm) 현실 비율 현실 면적 (길이:너비) ( ) 연도 위치 광암동1호 : 우편재 광암동2호 : 우편재 판교동1호 : 우편재 판교동2호 : 우편재 판교동3호 : 우편재 판교동4호 : 우편재 판교동5호 : 우편재 판교동6호 : 우편재 판교동7호 : 우편재 판교동8호 : 우편재 판교동9호 : 우편재 <그림 9> 백제 한성기 장방형 횡혈식석실(좌: 광암동2호, 중: 판교동1호, 우: 법천리1호)

35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35 풍관, 철재( 鐵 滓 ), 지석( 砥 石 ), 한반도계 토기가 출토된 大 縣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유적의 중심시기는 6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상정되고 있는데, 유적의 성 격, 한반도계 토기의 출토, 그리고 유적에 인접하고 있는 平 尾 山 고분군에서 이동식 부뚜막을 부장한 고분도 확인되고 있어 백제와의 관련이 주목되는 유 적들이다. 이러한 점을 종합하여 볼 때 단순히 무덤의 형태를 모방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장 관념, 장송의례가 전체적으로 갑자기 바뀌는 상황이 엿보인다. 스에키가 부장되는 양상을 통해 재지적 요소가 강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 에 대해 후술하겠으나 딱히 재지적인 특징으로 볼 요소는 아니다. 따라서 高 井 田 山 古 墳 은 거의 모든 요소가 백제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다음 藤 の 森 古 墳 의 경우, 평면형태에서 재지적 요소가 자주 지적된다. 현 실 장폭비가 2.33:1로 극히 세장한 형태로, 평면형태, 용적법 등을 통해 보았 을 때 횡혈식석실이라는 요소 외에는 재지적 기술이 바탕이 된 것 같다. 물론 한성기석실에도 용원리석실분과 같이 장폭비가 2:1이 넘는 세장한 형태가 없 는 것은 아니나, 용원리석실분 역시 횡혈식석실이라는 요소의 도입과 함께 재 지적 전통에 의해 축조된 경우이기 때문에 그 고분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 로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목관이 출토되고 있으나 재지적인 조합식 목관을 안 치한 점, 하니와 등을 수립한 점 등으로 보아 재지적 요소가 큰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더욱이 藤 の 森 古 墳 이 축조된 古 市 古 墳 群 은 당시 왕릉군의 묘역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아 횡혈식석실의 축조기법만 도입되어 재지적 전통에 따 라 축조된 석실로 볼 수 있다. 長 原 七 ノ 坪 古 墳 은 다른 초기 횡혈식석실들과 달리 분형이 원분이 아니라 가리비형 전방후원분이다. 이는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횡 혈식석실의 요소가 도입되면서도 일본의 전방후원분 전통에 따라 축조되는 것 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대형 전방후원분과는 차이가 있지만, 전방후원분 분 형을 유지한다는 점은 의의가 크다. 한식계 토기를 비롯해 한반도계 유물이 다 수 출토되는 長 原 유적에 입지하고 있으나 못을 사용하는 목관이나, 백제계 장 신구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36 3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一 須 賀 I 18호분과 I 19호분은 一 須 賀 고분군 내에서 가장 빠른 석실 가 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두 고분 모두 원형의 분구에 우편재식 횡혈식석실이 축조되고 평면형태 역시 거의 1.6:1에 가까운 장방형이다. 또 2개의 목관이 안 치되었고, 출토 유물 역시 공히 미니어처 취사구와 반지와 비녀 등의 은제 장 신구들이 출토되었다. 역시 남녀 2인의 매장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상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성기 세장방형 석실들과 거의 유사하다 특히 판교동고분 군의 석실들과는 평면형태와 규격뿐만 아니라 은제 장신구의 출토까지 그 양 상이 거의 동일하다. 一 須 賀 고분군이 이 석실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축조가 시 작되고 이후 고분군 내 다른 석실에서 한반도계 유물이 다수 출토되는 점은 시 사하는 바가 크다. 櫻 井 公 園 2호분 또한 위의 一 須 賀 고분군의 석실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분 형, 평면형태, 규격, 목관 사용, 미니어처 취사구, 은제비녀 등 거의 같은 양상 이다. 특히 이 고분은 판교동1호분과 너무나 유사하다. 전체적인 형태뿐만 아 니라 현실의 길이와 너비까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은제 비녀가 출토되는 양상도 그러하다. 櫻 井 公 園 고분군 내의 3호분과 4호분 역시 삭평이 심해 정 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대체적으로 2호분과 유사한 양상으로 생각된다. 이에 반해 寺 口 忍 海 D27호분은 조금 다른 양상이다. 우선 현실의 장폭비가 2:1로 극히 세장한 형태이다. 우편재식인 점, 그리고 못을 사용하는 2기의 목 관이 안치되는 점은 백제계 요소로 보이나 석실축조와 유물 구성에서 재지계 요소가 많이 보이는 듯하다. 심하게 파괴되어 전체적인 양상을 알 수 없기 때 문에 이 글의 분석 대상에서는 제외하였지만 D 27호분과 같은 단계에 축조 가 된 E 21호분 역시 초기 횡혈식석실이면서도 내부에 할죽형목관을 안치하 는 점도 도입기부터 재지의 요소를 강하게 반영하다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석실들로부터 축조가 시작되는 寺 口 忍 海 고분군에는 이후 횡 혈식석실이 다수 축조되는데 백제와 유사한 형태에서 점차 자체적으로 변화하 는 모습이 보이는 뚜렷한 것이 특징적이다. 椿 井 宮 山 塚 古 墳 은 초기 횡혈식석실 가운데 천장까지 완벽하게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고분으로 천장구조로 인해 그간 주목받아 왔다. 초기 석실가운데

37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37 <그림 10> 寺 口 忍 海 고분군 횡혈식석실의 변화 ( 新 庄 町 敎 育 委 員 會 ㆍ 奈 良 縣 立 橿 原 考 古 學 硏 究 所 1988 수정 후 인용) 에도 독특한 형식으로 설정하고 백제 송산리형 석실들과 연관 지어왔다. 그러 나 송산리고분군과는 차이가 크다. 4m가 넘는 현실의 규모가 다르고 현실 장 폭비 역시 1.37:1로 방형이라기 보다는 장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궁륭상의 천장구조는 송산리고분군 이전에 한성기에 이미 축조되기 시작하였다는 점 45) 을 중시하면 椿 井 宮 山 塚 古 墳 은 한성기 말의 장방형 석실로부터 영향을 받으 면서도 자체적으로 변화된 형태로 축조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연도가 바깥 쪽으로 휘어지는 형태로 복원되는 점 역시 한성기석실에 가까운 양상이다. 출 토 유물이 없어 이를 검증하기는 어려우나 현실에 적색안료가 도포가 된 점은 재지적인 요소가 컸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新 澤 千 塚 221호분의 경우는 寺 口 忍 海 D27호분보다 더욱 세장 45) 이남석, 2007, 한성기 백제 석실분의 재인식, 진단학보 103, 진단학회.

38 3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한 형태이다. 현실 장폭비가 2.31:1로 藤 の 森 古 墳 과 거의 같은 양상이다. 못을 사용하는 목관 등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 新 澤 千 塚 고분군은 주지하는 바 와 같이 한반도계 유물이 다수 출토되는 군집분인데, 이에 비해 오히려 221호 분에서는 한반도계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다. 물론 도굴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 으나, 남아 있는 유물에서도 전혀 확인되지 않고, 평면플랜에서도 차이가 있다. 이상과 같이 초기 횡혈식석실별로 어떠한 요소에 의해 축조되었는지 살펴 보았다. 결국 백제계 요소와 재지계 요소가 어떻게 조합되는지가 문제가 되는 데, 이 조합들을 염두에 두고 유형을 설정하고자 한다. 이전에 吉 井 秀 夫 는 일 본열도에서 출토되는 백제계 고고자료에 대해 아래와 같이 3가지로 유형을 설 정한 바 있다. 46) 1류: 백제에서 제작된 것이 일본으로 들어온 것 2류: 일본에 온 백제인이 일본에서 제작한 것 3류: 일본에 사는 사람이 1, 2류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모방해서 제작 한 것 이 유형들 가운데 횡혈식석실은 백제에서 축조하여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 하기 때문에 결국 2류와 3류로 나눌 수 있다. 이를 참고하면 초기 횡혈식석실 에 백제계 요소와 재지계 요소가 어떻게 조합되는지 그 양상을 토대로 2가지 의 유형으로 설정할 수 있다. 1유형: 高 井 田 山 古 墳, 一 須 賀 I-18호분, 一 須 賀 I-19호분, 櫻 井 公 園 2호분 2유형: 藤 の 森 古 墳, 長 原 七 ノ 坪 古 墳, 寺 口 忍 海 D27호분, 椿 井 宮 山 塚 古 墳, 新 澤 千 塚 221호분 1유형은 전체적으로 백제계 요소가 강한 고분들이다. 횡혈식석실의 기본적 46) 吉 井 秀 夫, 2012, 일본열도속의 백제문화, 중앙문화재연구원 편, 아시아의 고 대 문물교류, 서경문화사.

39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39 인 형태, 현실의 규격, 연도 위치, 못을 사용하는 목관의 복수안치, 남녀매장, 울두와 은제 비녀 등의 백제계 장신구와 미니어처 취사구 부장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백제 한성기 석실들과 같은 양상이다. 스에키 등의 일부 유물에서 재지 생산의 모습이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백제와 거의 동일하다. 2유형은 횡혈식석실이라는 기본 틀은 유사하나 기왕의 수혈식석곽 축조의 제작 전통에 따라 훨씬 세장하게 만들거나 전방후원분 내에 축조하기도 한다. 그리고 남녀매장이라는 새로운 장제의 요소도 보이지 않고 유물 구성에서도 백제와 차이가 있다. 즉, 횡혈식석실이라는 매장주체부의 공통점 외에 다른 요 소들은 개별적으로 전부 다르다. Ⅴ. 횡혈식석실 출현과 도래인 1_ 출현 양상 이상과 같이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양상을 검토하여 2가지 유형으로 설정하였다. 역시 완벽하게 백제의 횡혈식석실과 같은 형태는 없다. 그러나 애 초에 완전하게 같은 석실이 축조되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령왕릉의 예를 보아 도 재지의 요소가 결합될 수밖에 없다. 특히 토기의 경우 어느 묘제가 수용되거 나 혹은 모방하여 축조되더라도 재지의 토기를 생산, 매납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렇다면 이 유형들은 각각 백제의 어느 지역에서, 어느 요소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교 대상이 되는 백제의 횡혈식석실 가운 데 가장 중심이 되면서도 논란이 되는 것이 가락동 방이동고분군의 횡혈식석 실들이다. 평면형태, 입지 등을 근거로 한성기의 횡혈식석실로 비정한 바 있으

40 4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나, 47) 명확하게 단언하기는 힘든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최근 조 사된 한성기 석실들과의 비교를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이러 한 관점에서 두 유형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고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자 한다. 초기 횡혈식석실의 축조에 있어서 가장 먼저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영향 을 받은 석실의 계보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크게 백제로부터 영향 을 받은 것은 인정하면서도 세부적으로는 한성기 석실에 계보를 구하는 견해 48) 와 웅진기의 백제 석실에서 계보를 구하는 견해 49) 로 나누어져 있다. 앞서 석실별로 언급하였듯이 기본적으로는 한성기의 장방형 석실에서 영 향을 받은 것으로 상정된다. 기왕에는 백제 한성기 횡혈식석실을 조사한 예가 부족하였고, 특히 당시 중심지역에서는 거의 확인되지 않아 비교 검토가 어려 웠으나 최근에 서울과 그 인근지역에서 한성기석실이 다수 확인되었고, 결국 이 한성기석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판교동고분군의 경우 1유형 의 초기 횡혈식석실과 평면형태, 비율, 남녀매장, 유물 구성 등이 거의 동일하 다. 특히 櫻 井 公 園 2호분은 판교동1호분과 현실 규격까지 정확하게 같기 때문 에 결국 1유형은 한성기 백제의 장방형 석실로부터 직접 전파되어 축조된 것으 로 볼 수 있다. 그리고 2유형의 경우도 기본적으로 장방형 평면플랜을 유지하고 있어, 1유 형과 다른 계보가 아닌 같은 계보에서 영향을 받으면서도 재지의 요소가 가미 되어 조금씩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藤 の 森 古 墳 의 경우 高 井 田 山 古 墳 과는 달 리 재지 수혈식석곽의 폭을 유지하고 구축기법 역시 수혈식석곽의 구축기법을 기본으로 새로운 석실 구축 기술을 더해 축조하였으며 석재도 수혈식석곽의 석재와 거의 동일한 것을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 50) 역시 같은 의미로 볼 수 47) 김규운, 2014, 앞의 글. 48) 白 石 太 一 郎, 1995, 앞의 글; 安 村 俊 史 桑 野 一 幸, 1996, 앞의 책 등. 49) 森 下 浩 行, 1986, 앞의 글; 土 生 田 純 之, 1991, 앞의 책; 柳 沢 一 男, 1993, 横 穴 式 石 室 の 導 入 と 系 譜, 季 刊 考 古 学 第 45 号, 雄 山 閣 등. 50) 富 山 直 人, 2007, 앞의 글.

41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41 있다. 그리고 송산리형 석실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상정되어 왔던 椿 井 宮 山 塚 古 墳 역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성기에 이미 궁륭상 천장의 석실이 성립 되어 있었고, 장방형 플랜 역시 한성기에 가깝기 때문에 한성기석실로부터 영 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기나이지역의 초기 횡혈식석실은 전체적으로 백제의 동일한 형식 혹 은 계보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전부 우편재식이라는 점, 그리고 평면형태가 장방형이라는 점이 그 이유이다. 대체적으로 한성기석실의 세장방형 석실과 유사한 1.6:1의 비율을 유지하고 그에 영향을 받아 조금 덜 세 장하거나 조금 더 세장한 형태가 축조되는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관대를 설치 하지 않는 점도 같다. 그리고 축조시기로 보아도 한성기의 석실과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기왕에 藤 の 森 古 墳 이 가장 빠르게 축조되는데 그 시기가 대략 5세기 3/4분기로 인정 되고 있고, 高 井 田 山 古 墳 이 TK23 또는 TK47형식 단계, 長 原 七 ノ 坪 古 墳 이 TK47형식 단계, 櫻 井 公 園 2호분 역시 TK47형식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寺 口 忍 海 D27호분도 보고서에서 TK47형식 단계로 설정하고 있고, 新 澤 千 塚 221호 분은 TK47 또는 MT15형식 단계로 설정되고 있다. 高 井 田 山 古 墳 의 단계를 TK23형식 단계로 인정할 경우 藤 の 森 古 墳 과 함 께 한성기 말에 축조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고분은 한성기석실 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 이외의 상황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 외 고분들도 대부 분 TK47형식 단계로 비정되고 있는데 이 시기는 한성기가 끝나고 웅진기가 시작되는 단계이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웅진기석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는 보지 않는다. 송산리형과 같은 완전한 방형플랜의 횡혈식석실이 전혀 확인 되지 않고, 궁륭상천장의 경우 웅진기 이전 한성기에 이미 어느 정도 축조되었 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51) 만약 웅진기의 횡혈식석실로부터 영향을 받아 축조하였다면 조금 더 확실 한 방형플랜과 완벽한 궁륭상 천장, 관고리 장식 등이 확인되었을 것이다. 그 51) 이남석, 2007, 앞의 글.

42 4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러한 양상은 전혀 확인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한성기의 횡혈식석 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畿 內 型 석실이 확실하게 성립된 것을 표지적으로 보여주는 市 尾 墓 山 古 墳 의 연대가 MT15형식 단계이므로 6세 기 전반에는 이미 畿 內 型 석실이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이 시기 새로이 백제로부터 석실 축조의 영향을 받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를 정리해 보면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에 영향을 주는 지역은 백제 한성기 중앙 인접지역 혹은 한강유역이고, 그 시기는 한성기 말로 상정할 수 있다. 그리고 직접 전파되어 축조되는 경우와 영향을 받으면서도 재지적인 상 황에 맞추어 변형되어 축조되는 경우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2_ 도래인 문제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 문제는 결국 도래인 문제로 귀결된다. 재 지에서 보이지 않았던 요소가 새로이 출현하는 고고자료에 대해서는 그대로 쉽게 도래인을 상정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견해를 살펴보면 하부타 요시유키는 畿 內 型 석실 성립 이전에 구 축된 櫻 井 公 園 2호분의 출토유물에 비녀와 소형 취사구가 포함된 점, 게다가 寺 口 忍 海 고분군에서도 이 유물들이 출토된 점에서 기나이지역에서 畿 內 型 석 실 성립 이전에 횡혈식석실을 구축한 고분은 도래인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畿 內 型 석실에 대해서는 도래인의 영향과 관여가 있었 던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고 논하였다. 그러나 지역의 묘제에 대한 영향력 의 크기를 생각하였을 때 역시 畿 內 型 석실 성립에는 토착 왜인의 주체성을 중 시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52) 그리고 토미야마 나오토의 경우는 河 內 에서의 석실 도입은 대륙에서 이주 한 사람들에 의해 도입된 것과 九 州 系 의 석실, 두 계통이 도입되었다고 생각하 였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규슈에서 그 원류를 구하는 석실은 지역의 수장묘에, 52) 土 生 田 純 之, 1994, 앞의 글.

43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43 대륙에서의 이주자가 중심이 되어 관여한 석실은 군집분 등의 소형 고분을 중 심으로 각각 도입된 것으로 논하였다. 53) 야스무라 준지의 경우, 高 井 田 山 古 墳 은 백제에서 직접 영향을 토대로 성 립된 고분이고, 또한 초기 畿 內 型 석실은 우편재식으로 한정되는 점도 백제 횡 혈식석실의 영향으로 결론지었다. 백제에서 우편재식이 주류가 된 것은 피장 자에서 볼 때 오른쪽이 우위였기 때문에 오른쪽에 최초의 피장자, 기본적으로 남편을 매장하고, 그 후 왼쪽에 부인을 매장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더욱이 高 井 田 山 古 墳 의 피장자로 곤지 혹은 곤지를 전후하여 건너왔던 왕족에 필적한 인물로 추정하였다. 54) 한편, 요시이 히데오는 이러한 도래인 비정에 대해 주의할 필요성을 지적 하였다. 일본열도의 경우를 보면 고분의 피장자로 도래인을 상정하는 경우, 그 근거로는 묘제 자체가 가지는 새로운 요소과 함께 문헌 기록에 남아 있는 도래 인 관계와 여러 기록과의 일치 를 예로 들고 있지만 중국 남조의 전실묘와 유 사하나 묘지의 내용에서 백제 왕이 피장자인 것이 분명하게 밝혀진 무령왕릉 과 같은 경우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새로운 묘제가 도입된 분묘의 피장 자를 외래계의 인물로 연결하는 추측에는 충분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횡혈식석실의 출현에 관련된 사람의 이동을 고고학적으로 추정하는 것 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피장자보다도 오히려 석실의 축조에 관련된 기 술자의 이동이고, 기술자의 이동의 유무를 검증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하 였다. 55) 이상과 같이 피장자를 도래인으로 상정하는 입장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 다는 입장이 있다. 이 글에서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접근을 한다면, 우선 재지 의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2유형의 경우는 피장자를 도래인으로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1유형의 경우는 다르다. 53) 富 山 直 人, 2007, 앞의 글. 54) 安 村 俊 史, 2008, 앞의 글; 安 村 俊 史, 2014, 畿 内 初 期 横 穴 式 石 室 にみる 百 済 の 影 響, 百 済 文 化 50권, 公 州 大 学 校 百 済 文 化 研 究 所. 55) 吉 井 秀 夫, 2008, 앞의 글.

44 4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1유형은 단순히 무덤의 형태가 같을 뿐만 아니라 재지적인 부자매장 방식 에서 부부매장으로 바뀌는 등 매장 관념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며 이에 따라 시신의 안치 방법, 유물의 부장 등이 일순간에 변화하는 것이다. 즉, 무덤 축조의 거의 모든 요소가 백제와 동일한 것이므로 단순히 전파 혹은 모방만으 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만약 피장자가 도래인이 아니라면 어째서 거의 모든 요 소를 동일하게 모방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울 것이다. 이에 대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에키를 부장하는 점과 부장품의 공간 배치 가 백제와는 조금 다르다는 견해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고대 어느 형식의 무덤 이 전파 혹은 모방 축조되더라도 재지의 토기를 생산하고 매납하는 것은 당연 한 것이라 생각된다. 앞서 언급된 무령왕릉의 경우 중국 양나라의 공인이 관계 하여 축조된 것인데, 백제 유물을 매납하고 있다. 그 외,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서 다른 묘제가 전파되어도 재지의 토기를 매납하는 것은 같은 양상이다. 그러나 무령왕릉과 高 井 田 山 古 墳 과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무령왕릉의 경우 전으로 고분을 축조한다는 점 및 매지권과 묘수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요소가 백제적 요소이다. 즉, 기존에 횡혈식석실이라는 묘제가 일반 적으로 축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스타일이 접목된 것이다. 그러나 高 井 田 山 古 墳 의 경우는 새로운 묘제, 매장관념, 장송의례가 전반적으로 일시에 바 뀌는 것으로, 이는 상당히 큰 차이로 볼 수 있다. 결국 석실 축조의 기술집단이 건너오든, 또는 도래인 피장자가 건너오든 재지의 토기가 매납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 스에키와 같은 도질토기 생산이 5세기를 전후하는 시점부터 한반도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산되고 있었기 때문 에, 새롭게 토기 생산 집단이 같이 건너왔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따 라서 토기 등의 제사에 이용되는 기본적인 유물은 현지에서 생산하는 것이 자 연스럽기 때문에 스에키가 매납된다는 점에서 한반도와 다르다는 지적은 그대 로 수긍하기 어렵다. 따라서 1유형의 초기 횡혈식석실들은 백제, 특히 한성기 중앙과 인접한 지 역에서 건너온 도래인에 의해 축조되었고, 그들이 그 무덤에 묻히게 되는 것이 다. 그리고 2유형은 재지의 사람이 이러한 흐름 속에 새로운 묘제를 받아들이

45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45 면서도 전통적인 축조 방법을 접목하면서 횡혈식석실을 축조하게 되고, 이후 기나이형석실이라고 하는 자체적인 형식으로 변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문헌으로도 뒷받침이 된다. 당시 5세기 후반이라는 시기는 백제와 왜의 관계가 어느 시기보다 밀접하였다는 점 56) 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5세기 후반에 백제에서 일본열도로 도래하였다고 하는 니시키베씨[ 錦 部 氏 ]의 씨족 묘를 一 須 賀 고분군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그러한 비정이 맞는지 어떠한지를 문헌적으로 검토할 능력은 없으나 적어도 一 須 賀 고분군이 시작되 는 단계에 축조되는 I 18호분과 I 19호분은 초기 횡혈식석실로, 백제에서 도 래한 인물이 매장되었을 가능성은 분명히 크다. 그리고 초기 횡혈식석실이 다 수 축조되는 TK47형식 단계는 백제 한성 함락 직후가 되는데 이 시기에 일시 적으로 백제에서 왜로 도래한 사람이 증가하였다는 견해 57) 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 시기 백제와 왜의 관계에 대해 곤지의 파견을 필두로 왕족외교 라고 하는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58) 특히 왕족뿐만 아니라 왕녀를 파견하여 결혼동맹과 같은 관계를 맺었다고 하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 다. 59) 이러한 당시 외교관계는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문제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바로 백제와 왜의 관계에 있어 중심이 되는 지역은 중앙과 중앙의 관계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초기 횡혈식석실들이 대부분 수장묘인 대형 전방후원분이 아닌 소형 원분에 구축되고, 백제의 중앙지역에서도 비교대상이 되는 횡혈식석실이 잘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규모의 수장들이 개별적으로 교류하고 도입 56) 山 尾 幸 久, 1999, 筑 紫 君 磐 井 の 戦 争, 新 日 本 出 版 社. 57) 白 井 克 也, 2003, 土 器 からみた 地 域 間 交 流, 森 浩 一 編, 検 証 古 代 日 本 と 百 済 ( 枚 方 歴 史 フォーラム), 大 巧 社. 58) 연민수, 1998, 백제의 대왜외교와 왕족,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59) 김현구, 2009, 백제와 일본사이의 왕실외교, 고대한일교섭사의 제문제, 일지 사; 이재석, 2013, 5~6세기 백제 대왜외교의 추이와 유형, 5~6세기 동아시아 속의 백제와 왜, 백제 역사유적 세계문화유산 공주 등재 추진을 위한 국제학술회 의,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46 4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한 것으로 생각해 온 경향이 있다. 60) 그러나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은 분명 중앙과 중앙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그 이유는 우선 가장 먼저 축조되는 藤 の 森 古 墳 의 경우 분명 古 市 고분군 내에 입지하고 있다. 당시 오진 료[ 應 神 陵 ]와 같은 왕릉묘역 내에 축조되는 것으로 그 규모가 작다고 하여 이 를 중앙권력과 별개의 문제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 경우 전방후원분에 언제 횡혈식석실이 채용되었는지에 관련된 문제와도 밀접하게 관련될 것인데, 高 井 田 山 古 墳 의 축조부터 각지의 전방후원분 매장시설로서 횡혈식석실이 채용되기까지의 시기차는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61) 비록 가리비형 전방후원분이긴 하나 長 原 七 ノ 坪 古 墳 의 경우로 보아 TK47 형식 단계에 이미 전방후원분에 채용이 되었고, 더욱이 게이타이료[ 繼 體 陵 ]로 추정되고 있는 今 城 塚 古 墳 을 볼 때 횡혈식석실의 도입 이후 최초의 대왕릉에 횡혈식석실이 채용되고 있다. 藤 の 森 古 墳 과 묶어서 생각한다면 게이타이기 [ 繼 體 期 ] 이전의 대왕릉에 이미 횡혈식석실이 채용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각 수장별로 도입하였다고 한다면 같은 시기에 여러 곳에서 같은 형식의 석실이 도입되는 것도 설명하기 어렵다고 보 인다. 그처럼 개별적으로 도입하였다면 훨씬 다양한 형식의 석실들이 도입되 거나, 유물 구성 등도 달라졌을 것이 분명할 것이다. 백제의 경우 역시 중앙지역의 석실들이 잘 발견되지 않아서 지방과 연결시 키는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한성기 백제 호이혈식석실의 도입 단계부터 중앙 지역의 관련이 있었고, 한성기에 이미 상당한 정형성이 확인된다. 특히 5세기 전반의 왕묘인 석촌동4호분을 횡혈식석실로 인정한다면 5세기 전반 이후의 백 제 중앙의 묘제 역시 횡혈식석실로 볼 수 있다. 62) 분명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 석실들은 백제 중앙지역과 가까운 곳에서 확인되는 석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60) 김낙중, 2012, 앞의 글 등. 61) 吉 井 秀 夫, 2008, 앞의 글. 62) 김규운, 2014, 앞의 글.

47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47 따라서 이러한 양상을 종합하여 보면, 당시 왕족을 통한 특수한 외교로 인 해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백제와 왜 사이에서, 백제로부터 건너온 도래인에 의 해 횡혈식석실이 출현하고 그에 영향을 받으면서 새로운 형식의 횡혈식석실을 축조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한성기 백제의 왕릉군에 축조되었던 적석총이 전파되어야 하는 것 이 자연스럽지 않을까라고 하는 지적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5세기 전반으 로 비정되는 석촌동4호분 이후 왕릉으로서 적석총이 계속 이어졌는지 확실하 지 않고, 석촌동4호분에 이미 횡혈식석실이 도입되었으며, 웅진기에 송산리 형 석실이 처음부터 축조되는 양상으로 보아 한성기 말에 이미 원형봉토분의 횡혈식석실이 왕릉묘로 채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중앙과 의 관계라고 하여도 애초에 5세기 후반에 일본열도로 백제 적석총이 전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횡혈식석실에 묻혔던 도래인은 왕족이 아닌 그보다는 랭크가 조금 낮았던 인물로 생각된다. 당시 파견되었던 왕족은 거의 백제로 귀국하였 고, 초기 횡혈식석실의 규격과 유물 구성이 왕족급이 아닌 중앙 인근지역과 유 사한 점을 그 근거로 들 수 있다. Ⅵ. 맺음말 이상과 같이 기나이지역의 초기 횡혈식석실에 대해 검토하였다. 석실의 형태 뿐만 아니라 규격, 그리고 매장 방식, 유물 구성, 주변 유적과의 관계 등을 토 대로 유형화를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두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1유형은 거의 모든 요소에서 백제와 동일하기 때문에 백제로부터 직접 전 파되었고, 이에 반해 2유형은 재지의 전통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횡혈식석실이라는 새로운 장제를 재지의 기반 위에 주체적으로 도입하

48 4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여 모방 축조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기왕의 견해에서는 이러한 초기 횡혈식석실에 대해 백제로부터의 영향을 지적하면서도 어느 지역 혹은 어느 고분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정확하게 명시하 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장자로 도래인을 상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대해 최근 조사된 자료를 근거로 한성기 말에 백제 중앙지역의 석실 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을 확실하게 밝히고, 특히 1유형의 경우 거의 모든 요 소가 동일하기 때문에 피장자를 도래인으로 상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도래 와 묘제의 전파는 단순히 개별적인 교류가 아닌 당시 왕족외교 등을 통한 중앙 과 중앙의 교류관계 속에서 출현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많지 않은 분석자료를 근거로 비약적인 결론을 내린 감이 없지는 않으나 이는 최근의 자료 증가 추세에 따라 추후 보완하고자 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묘제의 전파와 도래인 문제에 대해서는 단순히 같은 것이 있다고 바로 연결하 는 것은 지양해야 하고, 또한 비교대상이 되는 양 지역에 대해서는 각각 그 변 화양상과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올바른 검토가 가능한 것임을 최종 적으로 지적해 두고 싶다.

49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49 참고문헌 吉 井 秀 夫, 2012, 일본열도속의 백제문화, 중앙문화재연구원 편, 아시아의 고대 문 물교류, 서경문화사. 김규운, 2014, 가락동 방이동고분군으로 본 백제 횡혈식석실의 성립, 선사와 고 대 제40, 한국고대학회. 김낙중, 2012,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에서 횡혈식석실묘의 수용 양상과 배경, 한국 고고학보 제85집, 한국고고학회. 김현구, 2009, 백제와 일본사이의 왕실외교, 고대한일교섭사의 제문제, 일지사. 박천수, 2007, 새로 쓰는 고대 한일교섭사, 사회평론. 박천수, 2012, 일본 속 고대 한국문화 近 畿 地 方, 동북아역사재단. 연민수, 1998, 백제의 대왜외교와 왕족,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이남석, 2007, 한성기 백제 석실분의 재인식, 진단학보 103, 진단학회. 이재석, 2013, 5~6세기 백제 대왜외교의 추이와 유형, 5~6세기 동아시아속의 백제 와 왜, 백제 역사유적 세계문화유산 공주 등재 추진을 위한 국제학술회의, 공주대 학교 백제문화연구소. 홍보식, 1993, 백제 횡혈식석실의 형식분류와 대외전파에 관한 연구, 박물관연구논 집 2, 부산직할시립박물관. 広 瀬 和 雄, 2001, 7 世 紀 の 畿 内 首 長 層 の 動 向 横 穴 式 石 室 と 横 口 式 石 槨 の 変 遷 を とおして, 東 海 の 後 期 古 墳 を 考 える, 東 海 考 古 学 フォーラム, 三 河 大 会 実 行 委 員 会. 吉 井 秀 夫, 1993, 百 済 地 域 における 横 穴 式 石 室 分 類 の 再 検 討 錦 江 下 流 域 を 中 心 と して, 考 古 学 雑 誌 第 79 巻 第 2 号, 日 本 考 古 学 会. 吉 井 秀 夫, 2008, 墓 制 からみた 百 済 と 倭, 百 済 と 倭 国, 高 志 書 院. 都 出 比 呂 志, 1970, 横 穴 式 石 室 と 群 集 墳 の 発 生, 古 代 の 日 本 5, 近 畿. 柳 沢 一 男, 1993, 横 穴 式 石 室 の 導 入 と 系 譜, 季 刊 考 古 学 第 45 号, 雄 山 閣. 網 干 善 教, 1959, 桜 井 児 童 公 園 の 古 墳, 奈 良 県 史 跡 名 勝 天 然 記 念 物 調 査 抄 報 11, 奈 良 県 教 育 委 員 会. 梅 本 康 広, 2007, 畿 内 大 型 横 穴 式 石 室 の 構 造, 研 究 集 会 近 畿 の 横 穴 式 石 室, 横 穴 式 石 室 研 究 会. 白 石 太 一 郎, 1965, 日 本 における 横 穴 式 石 室 の 系 譜 横 穴 式 石 室 の 受 容 に 関 する 考

50 5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察, 先 史 学 研 究 5. 白 石 太 一 郎, 1995, 古 代 史 のなかの 藤 ノ 木 古 墳, 藤 ノ 木 古 墳, 読 売 新 聞 社. 柏 原 市 立 歴 史 資 料 館, 1996, 高 井 田 山 古 墳 をめぐって 近 畿 地 方 の 横 穴 式 石 室 のは じまりは. 白 井 克 也, 2003, 土 器 からみた 地 域 間 交 流, 森 浩 一 編, 検 証 古 代 日 本 と 百 済 ( 枚 方 歴 史 フォーラム), 大 巧 社. 富 山 直 人, 1994, 畿 内 における 横 穴 式 石 室 の 構 築 技 術 と 渡 来 系 氏 族, 文 化 財 学 論 集. 富 山 直 人, 2007, 後 期 前 方 後 円 墳 の 消 長 と 横 穴 式 石 室 からみた6 世 紀 の 社 会, 研 究 集 会 近 畿 の 横 穴 式 石 室, 横 穴 式 石 室 研 究 会. 北 山 峰 生, 2012, 初 期 横 穴 式 石 室 の 空 間 利 用 原 理, ヒストリア 第 235 号. 山 崎 信 二, 1985, 横 穴 式 石 室 構 造 の 地 域 別 比 較 研 究 中 四 国 編. 山 尾 幸 久, 1999, 筑 紫 君 磐 井 の 戦 争, 新 日 本 出 版 社. 森 本 徹, 2012, 儀 礼 からみた 畿 内 横 穴 式 石 室 の 特 質, ヒストリア 第 235 号. 森 下 浩 行, 1986, 日 本 における 横 穴 式 石 室 の 出 現 とその 系 譜 畿 内 型 と 九 州 型, 古 代 学 研 究 111. 森 下 浩 行, 1993, 横 穴 式 石 室 の 地 域 間 動 向 ( 九 州 大 和 ), 季 刊 考 古 学 第 45 号, 雄 山 閣. 小 林 行 雄, 1950, 古 墳 時 代 に 於 ける 文 化 の 伝 播, 史 林 新 納 泉, 1987, 戊 辰 年 銘 大 刀 と 装 飾 付 大 刀 の 編 年, 考 古 学 研 究 三 四 巻 三 号. 新 庄 町 教 育 委 員 会 奈 良 県 立 橿 原 考 古 学 研 究 所, 1988, 寺 口 忍 海 古 墳 群. 安 村 俊 史, 2008, 高 井 田 山 古 墳 の 意 義, 群 集 墳 と 終 末 期 古 墳 の 研 究. 安 村 俊 史, 2014, 畿 内 初 期 横 穴 式 石 室 にみる 百 済 の 影 響, 百 済 文 化 50권, 公 州 大 学 校 百 済 文 化 研 究 所. 安 村 俊 史 桑 野 一 幸, 1996, 高 井 田 山 古 墳, 柏 原 市 敎 育 委 員 會. 田 中 良 之, 1996, 人 骨 からみた 古 墳 時 代 親 族 関 係, 考 古 学 による 日 本 歴 史 15, 雄 山 閣. 太 田 宏 明, 1999, 畿 内 型 石 室 の 属 性 分 析 による 社 会 組 織 の 検 討, 考 古 学 研 究 太 田 宏 明, 2003, 畿 内 地 域 における 導 入 期 の 横 穴 式 石 室, 関 西 大 学 考 古 学 研 究 室 開 設 五 拾 周 年 記 念 考 古 学 論 集.

51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51 土 生 田 純 之, 1991, 日 本 横 穴 式 石 室 の 系 譜, 学 生 社. 土 生 田 純 之, 1994, 畿 内 型 石 室 の 成 立 と 伝 播, 古 代 王 権 と 交 流 5 ヤマト 王 権 と 交 流 の 諸 相. 和 田 晴 吾, 1989, 畿 内 横 口 式 石 槨 の 諸 問 題, 立 命 館 史 学 10. 和 田 晴 吾, 1996, 見 瀬 丸 山 古 墳 藤 ノ 木 古 墳 と 六 世 紀 のヤマト 政 権, 情 況 日 本 の 古 代 をひらく, 情 況 出 版. 喜 田 貞 吉, 1914, 古 墳 墓 年 代 の 研 究, 歴 史 地 理 24 3.

52 5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국문 초록]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김규운 기나이지역의 초기 횡혈식석실에 대해 검토하였다. 석실의 형태뿐만 아니라 규격, 그리고 매장 방식, 유물 구성, 주변 유적과의 관계 등을 토대로 유형화를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두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1유형은 거의 모든 요소에서 백제와 동일하기 때문에 백제로부터 직접 전 파되었고, 이에 반해 2유형은 재지의 전통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횡혈식석실이라는 새로운 장제를 재지의 기반 위에 주체적으로 도입하 여 모방 축조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기왕의 견해에서는 이러한 초기 횡혈식석실에 대해 백제로부터의 영향을 지적하면서도 어느 지역 혹은 어느 고분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정확하게 명시하 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장자로 도래인을 상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대해 최근 조사된 자료를 근거로 한성기 말에 백제 중앙지역의 석실 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을 확실하게 밝히고, 특히 1유형의 경우 거의 모든 요 소가 동일하기 때문에 피장자를 도래인으로 상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도래 와 묘제의 전파는 단순히 개별적인 교류가 아닌 당시 왕족외교 등을 통한 중앙 과 중앙의 교류관계 속에서 출현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주제어 기나이지역, 횡혈식석실, 백제, 왜, 도래인

53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53 [ABSTRACT] A Study on the emergence of the Early Stone Chamber Tomb in the Kinai area of Japan Kim Gyuun Kinai local about the Stone Chamber Tomb of the initial review. Done by CPRI's form of burial, artifacts and specifications, as well as organizing around, including relations with the site based on the classification of sociality, but the result of two Types. Type 1 in almost every element in Baekje and spread directly from Baekje, and in the same because this is from two types of local traditional element is strongly reflected Ancient Tomb because of a new form of autonomous on the basis of the graves of local imitative, which was built by introducing it as we tried to figure. In view of the previous earliest Stone Chamber Tomb about a stone chamber. noting impact, no region or any tombs from Baekje were affected in exactly I did not specify, for example. Nevertheless, tomb's occupant to Baekje people tended to refer it. This most recent in a survey based on data from the central area of the Baekje Kingdom in the late hanseong period being influenced by a stone chamber. are and clearly identify, particularly for type 1, almost The Baekje Kingdom the tomb's occupant in the same because all the elements as envisioned. And spreading this tomb is not merely individual exchanges are a royal diplomacy at the time, including through the central and central in the trade relations with emerging as we tried to figure.

54 5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Keywords Kinai area, stone chamber tomb, Baekje, Wa, immigration to Japan

55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55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정순일 /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조교수 Ⅰ. 머리말 이 글은 고대 일본열도의 변경에서 전개된 이( 異 )문화 간 접촉 교류 양상에 주목하여, 그 최전선에서 기능한 통역의 실태에 대해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불특정 다수의 신라인이 열도사회를 빈번하게 왕래하기 시작하는 9세기 초에 초점을 맞추어, 이질문화의 충돌과 융합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통역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9세기 초 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이다. 그 중핵은 사람들의 활발한 국제이동 특히, 해상이동 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사람이 국경을 넘는 행위 자체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확인되며, 전혀 새로운 일이라 말하기 힘든 측면도 있다. 다만 왕권 이외의 세력 집단 개인이 주변 제국을 매우 빈번하게 왕래한 사례는 이전에 보기 어려웠던 신국 투고: 2015년 11월 12일, 심사 완료: 2016년 2월 22일, 게재 확정: 2016년 2월 24일

56 5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면( 新 局 面 )임에 틀림없고, 이 점이야말로 9세기 초 의 획기성을 보여주는 요소 이다. 9세기에 들어 활발해진 사람들의 해상왕래는 필연적으로 이문화 간 이민 족 간 이질언어 사용자 간의 조우( 遭 遇 )를 촉진하였는데, 고대 일본열도에서 는 연해제국( 緣 海 諸 國 ) 및 이도사회( 離 島 社 會 )가 바로 그러한 교류와 접촉이 이루어지는 장( 場 )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현재의 큐슈지역에 해당하는 서해도 ( 西 海 道 )는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로 대표되는 이국세계와 연결되기 쉬운 지리 상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다양한 형태의 문화접촉이 나타나는 공간이었다. 延 喜 式 民 部 上 (927년 성립)에서 무쓰[ 陸 奥 ], 데와[ 出 羽 ], 사도[ 佐 渡 ], 오키[ 隠 岐 ]와 함께 이키[ 壱 岐 ], 쓰시마[ 對 馬 ]를 변요( 邊 要 ) 로 규정하고 있으 며, 1) 貞 觀 儀 式 (875년 성립)과 延 喜 式 陰 陽 寮 조의 追 儺 祭 文 ( 儺 祭 詞, 역 귀를 쫓는 제문)에서 일본의 서쪽 경계( 西 方 之 堺 ) 가 오치카( 遠 値 嘉, 현재의 고토열도) 2) 라고 나오듯 서해도의 주요 섬들이 외부세계와 맞닿아 있는 변경으 로 인식되었던 것도 우연이라 볼 수 없다. 이 글에서 특별히 서해도의 이도사 회에 유의하고자 하는 이유 또한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문화 간 접촉의 가능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상과 같은 시공간에서 고대 일본이 운용하였던 통역 3) 의 실태를 알아보 1) 延 喜 式 民 部 上 國 郡 條 에 陸 奥 國, 出 羽 國, 佐 渡 國, 隠 岐 國, 壱 岐 嶋, 對 馬 嶋, 右 四 國 二 嶋 爲 邊 要 라고 나온다. 2) 가령 延 喜 式 陰 陽 寮 條 에는 四 方 之 堺, 東 方 陸 奥, 西 方 遠 値 嘉, 南 方 土 佐, 北 方 佐 渡 라고 나온다. 3) 고대 일본 측 사료에 보이는 통역 에 대해 직 간접적으로 논급한 연구로는 酒 寄 雅 志, 2009, 渤 海 通 事 の 研 究, 栃 木 史 学 2; 遠 山 美 都 男, 1991, 日 本 古 代 國 家 における 民 族 と 言 語, 学 習 院 大 学 文 学 部 研 究 年 報 38; 遠 山 美 都 男, 1998, 日 本 古 代 の 訳 語 と 通 事, 歴 史 評 論 574; 荒 野 泰 典, 1993, 通 訳 論 序 説, アジ アのなかの 日 本 史 ( 五 ) 自 意 識 と 相 互 理 解,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東 野 治 之, 1993, 平 安 時 代 の 語 学 教 育, 新 潮 45 7 月 号 ; 横 山 伊 勢 雄, 1995, 北 東 アジア 世 界 の 漢 詩 と 外 交, 環 日 本 海 論 叢 8; 森 公 章, 1998, 大 唐 通 事 張 友 信 をめぐって, 古 代 日 本 の 対 外 意 識 と 通 交, 吉 川 弘 文 館 ; 森 公 章, 2008, 遣 唐 使 と 唐 文 化 の 移 入, 遣 唐 使 と 古 代 日 本 の 対 外 政 策, 吉 川 弘 文 館 ; 馬 一 虹, 1999, 古 代 東 アジ アのなかの 通 事 と 訳 語 唐 と 日 本 を 中 心 として, アジア 遊 学 3; 湯 沢 質 幸,

57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57 기 위해 먼저, 9세기 초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으로서의 非 사절신라인 의 내항 현황을 검토해보고, 다음으로는 그러한 가운데 왜 복수의 언어를 매개할 필요 가 발생했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810년대에 쓰시마에 신라 역어가 배치된 배경을 동시기에 이루어진 박사 배치와의 비교를 통해서 고찰 하려고 한다. Ⅱ. 전사( 前 史 )로서의 신라사절 내항 검토 9세기 초에 일본으로 내항한 신라인들이 지닌 가장 큰 특징으로는 그들 대부 분이 사절( 使 節 )이 아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왕권으로부터 외교권한을 위 임받은 사신이 아닌, 非 사절신라인 들이 해상이동을 통해 일본 연안에 출현하 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성격을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우선 전사( 前 史 )로서 신라사절의 내항 실태와 일본 측의 대응방식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자. <표 1>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 사절단의 내항은 寶 龜 10년(779)의 김난손 사절(<표 1>의 No.12)을 끝으로 종언을 고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경위로 신라사절의 일본 방문이 끊어지게 된 것일까? 天 平 年 間 (729~749년)부터의 1999, 古 代 日 本 新 羅 間 における 使 用 言 語, 日 本 学 報 43, 韓 國 日 本 学 会 ; 湯 沢 質 幸, 2010, ( 改 訂 増 補 ) 古 代 日 本 人 と 外 國 語 東 アジア 異 文 化 交 流 の 言 語 世 界, 勉 誠 出 版 ; 石 井 正 敏, 2003, 遣 唐 使 と 語 学, 歴 史 と 地 理 565; 榎 本 淳 一, 2008, 遣 唐 使 と 通 訳, 唐 王 朝 と 古 代 日 本, 吉 川 弘 文 館 ( 初 出 2005); 장종진, 2011, 圓 仁 의 入 唐 求 法 巡 禮 行 記 를 통하여 본 新 羅 譯 語, 한국고대사탐구 7; 山 内 晋 次, 2012, 9~12 世 紀 の 日 本 とアジア 海 域 を 往 來 するヒトの 視 点 から, 専 修 大 学 東 アジア 世 界 史 研 究 センター 年 報 6; 鄭 淳 一, 2013c, 延 暦 弘 仁 天 長 年 間 の 新 羅 人 來 航 者, 早 稲 田 大 学 大 学 院 文 学 研 究 科 紀 要 58-4 등이 있어 참 고가 된다. 통역의 명칭, 지위와 신분, 양성체제, 역할과 임무 등에 대해서는 별고에 서 다룰 예정이다.

58 5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표 1> 신라사절의 내항과 일본 측의 대응( 天 平 年 間 ~ 寶 龜 年 間 ) 연번 (NO) 1 2 도착 연도 天 平 4 年 (732) 天 平 6 年 (734) 관련 내용 1.22 신라사( 新 羅 使 ) 김장손( 金 長 孫 ) 등 내일( 來 日 ). 3.5 신라사 김장손 등을 다자이후 [ 大 宰 府 ]로 부르다 신라사 김장손 등 40인, 입 경( 入 京 ) 5.19 재물( 財 物 ) 및 각종 동물( 動 物 )을 진상. 또 내조( 來 朝 ) 의 연 기( 年 期 )를 주청( 奏 請 ) 향연( 饗 宴 )을 조당( 朝 堂 )에 서 배풀고, 조( 詔 )를 내려 내조 의 연기를 3년에 1회(3 年 1 度 )로 하다 귀국 다자이후가 신라사의 내착 ( 來 着 )을 보고하다. 2.17( 天 平 7 年 735 ) 신라사 김상 정( 金 相 貞 ) 등이 입경( 入 京 ). 2.27( 天 平 7 年 735 ) 다지히노 아 카타모리[ 多 治 比 県 守 ]를 병부( 兵 部 )의 조사( 曹 司 )로 보내어서, 신 라사에게 내조 의 이유를 심문하 게 하다. 신라국이 국호를 고쳐 왕성국( 王 城 國 )을 칭하였기 때문 에, 사자를 귀국시키다. 특기사항 天 平 7 年 (735) 4.26 키비노 마키비[ 吉 備 眞 備 ] 등에 의해 당례( 唐 禮 ) (130권) 등이 들어오다. 이 당례 는 권수로 보아 고종( 高 宗 ) 현경( 顕 慶 ) 3년(658)에 편찬 된 현경례( 顕 慶 禮 )(영휘례[ 永 徽 禮 ]) 130권이라 보여진다. 본격 적으로 예 체계로서 빈례( 賓 禮 ) 가 도입된 것은 天 平 7 年 의 현 경례 수용에 의한 것이라 생각 된다. 외교형식 외교의례를 보다 엄 중하게 지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다.

59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59 연번 (NO) 3 도착 연도 天 平 9 年 (737) 天 平 10 年 (738) 관련 내용 2.15 견신라사( 遣 新 羅 使 ), 신라 국이 상례( 常 禮 )와 달리 사지( 使 旨 )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정 을 보고하다. 이에 관인 45인을 내리( 内 裏 )로 불러들여 의견을 묻다 제사( 諸 司 ), 신라 대책에 관 한 의견을 아뢰다. 어떤 이는 사 자를 보내어 사정을 물어봐야 한 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병사를 보내어 정벌 을 가해야 한다고 말 하다. 4.1 이세신궁( 伊 勢 神 宮 ) 대신사 [ 大 神 社 ] 츠쿠시 스미요시 신사 [ 筑 紫 住 吉 社 ] 하치만 신사[ 八 幡 社 ] 및 카시이 궁[ 香 椎 宮 ]에 봉 폐( 奉 幣 )하고, 신라의 무례 의 장 ( 狀 )을 고하다. 1. 다자이후, 신라사 김상순( 金 想 純 ) 등 147인이 내일한 사정을 보고하다 다자이후에 사자를 보내어 신라사 김상순 등에게 향연을 베 푼뒤 방환( 放 還 )하다. 특기사항 외교 무대에서 무례( 無 禮 ) 라는 언설이 처음으로 등장하다. 4 天 平 14 年 (742) 2.3 다자이후(치쿠젠노쿠니[ 筑 前 國 ]), 신라사 김흠영( 金 欽 英 )등 187인의 내착을 보고하다. 2.5 조를 내려, 시가라키 궁[ 紫 香 樂 宮 ] 조영을 이유로, 다자이후에 사자을 보내어 신라사에게 향연 을 베풀게 하고, 그곳에서 귀국시 키다.

60 6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연번 (NO) 5 6 도착 연도 天 平 15 年 (743) 天 平 勝 寶 4 年 (752) 관련 내용 3.6 신라사 김서정( 金 序 貞 ) 등의 내착을 보고하다. 이날, 다지히노 하니즈쿠리[ 多 治 比 土 作 ] 등을 치 쿠젠노쿠니[ 筑 前 國 ]에 보내어, 신 라사의 응대를 맡게 하다 다지히노 하니즈쿠리 등, 신 라사가 조( 調 ) 를 토모( 土 毛 ) 라 칭하고, 서( 書 )에 직접 물건의 숫 자를 적는 등 구례( 舊 例 )에 어긋 나다는 사실을 보고하다. 이 날, 태정관이 신라사의 수수( 水 手 ) 이 상을 불러들여 실례( 失 禮 )의 장 ( 狀 ) 을 고하도록 하고, 다자이후 에서 방각( 放 却 )할 것을 명하다 츠쿠시[ 筑 紫 ]에 진서부( 鎭 西 府 )를 두다.( 天 平 17 年, 다자이 후 복치[ 復 置 ]에 의해 폐지된 것 으로 추정됨) 閏 3.22 다자이후, 신라왕자 김태 렴( 金 泰 廉 ) 등 700여 인이 내박 ( 來 泊 )한 사정을 보고하다 이보다 앞서 입경( 入 京 ) 신라사에 대한 향연을 조당 에서 베풀다. 조를 내려, 전대( 前 代 )의 신라왕( 孝 成 王 )이 범한 결 례를 언급하고, 또 앞으로 국왕 이외의 인물이 내조 하는 경우에 는 반드시 표문을 지참할 것을 요 구하다. 특기사항 신라사가 지참한 외교문서의 서 식( 書 式 )을 처음으로 문제시하다. 앞으로, 내일( 來 日 )하는 신라사에 대해서 표문 지참이 요구되고 있 다. 국왕이 내조 하였을 경우에는 사( 辞 ) 를 주상( 奏 上 )하고, 왕의 사자가 내조 하였을 경우는 표 문 을 지참하도록 요구하는 조가 내려지고 있다.( 天 平 勝 寶 4 年 6 月 17 日 條 ) 이것은 개원례( 開 元 禮 ) 빈례의 번주( 蕃 主 )와 번사 ( 蕃 使 )에 대한 의례와 공통하는 내용으로, 외교문서( 國 書 )를 필 요로 하지 않았던 신라와의 외교 형식이 이 무렵부터 바뀌고 있음 을 엿볼 수 있다. 이 조를 통하여 신라사에 대해서도 당례에 의거한 빈례가 도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61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61 연번 (NO) 도착 연도 天 平 寶 字 4 年 (760) 天 平 寶 字 7 年 (763) 天 平 寶 字 8 年 (764) 관련 내용 9.16 신라사 김정권( 金 貞 巻 ) 등이 내조 하다. 김정권에게 사인경미 ( 使 人 軽 微 ) 로 인해 빈대( 賓 待 )하 지 않고 귀국시킨다고 말하며, 앞 으로는 전대( 専 對 )의 인( 人 ) 충 신( 忠 信 )의 예( 禮 ) 잉구( 仍 舊 ) 의 조( 調 ) 명험( 明 験 )의 언( 言 ), 이상의 네 가지를 구비하여 와야 함을 본국(신라)에 전하게 하다 신라사 김체신( 金 体 信 ) 등 211인이 내일하다. 이전에, 김정 권과 약속 한 것 등을 심문하다. 김체신, 단지 조물( 調 物 )을 바치 려는 것일 뿐, 나머지 일( 余 事 )은 모른다고 답하여 입경( 入 京 )을 허 락받지 못하고 귀국하게 되다 신라사 김재백( 金 才 伯 ) 등 91 인이 다자이후 하카타 진[ 博 多 津 ] 에 내착하다. 심문을 실시하다. 김 재백, 당의 칙사 한조채( 韓 朝 彩 )가 발해를 통해 와서, 일본승려 계융 ( 戒 融 )이 당에서 무사히 귀국하였 는지 일본에 물어보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집사첩( 執 事 牒 )을 가지고 도래하게 되었다는 취지로 대답하 다. 이에 재백 편으로 다자이후가 신라집사에게 보내는 반첩( 返 牒 ) 을 부쳐, 계융은 작년 10월에 발해 에서 귀국하였음을 전하다. 또 오 양( 午 養 ) 등, 이 무렵 신라에서 도 래한 백성이 신라에서는 경고( 警 固 )에 힘쓰고 있으며, 이는 일본의 문죄( 問 罪 )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 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사실 인가 묻다. 재백, 경비를 하고 있 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해적 ( 海 賊 )에 대비한 것이라 답하다. 특기사항 사자로서의 네 가지 조건(외교의 례의 문제)을 채우도록 요구하고 있다. 김정권의 때에, 명확히 내세운 사자로서의 조건(외교의례의 문 제)을 채우지 않았다며 질책하고 있다. 외교문서(집사첩[ 執 事 牒 ])를 지참 하여 내일했기 때문인지 트러블 이 발생하지 않았다.

62 6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연번 (NO) 도착 연도 神 護 景 雲 3 年 (769) 寶 龜 5 年 (774) 관련 내용 신라사 김초정( 金 初 正 ) 등 187인 및 도송자( 導 送 者 ) 39인이 쓰시마에 내착하다. 3.4( 神 護 景 雲 4 年 = 寶 龜 元 年 ) 이보다 앞서, 내조 의 이유를 추 궁당한 신라사 김초정 등, 재당일 본인 후지와라노 카와키요[ 藤 原 河 清 ], 혹은 키요카와[ 清 河 ] 등이 신라의 입당숙위( 入 唐 宿 衛 ) 왕자 에게 부탁한 서장을 전송하기 위 해 파견되었다고 답하고, 이어서 토모( 土 毛 )를 바치겠다는 뜻을 말 하다. 이날, 사자를 보내어 김초정 등에게, 몇 년 전 알린 김정권과의 약속 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빈 례를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리고 단, 당의 정보 및 후지와라노 카와키요 등의 서장을 전해준 것 을 가상히 여겨 다자이후에서 향 연을 베푼다는 것, 게다가 녹( 祿 ) 을 지급하며 신라국왕에게 보내는 증물( 贈 物 )을 부친다는 내용 등을 선고( 宣 告 )하게 하다. 3.4 이보다 앞서, 신라사 김삼현( 金 三 玄 ) 등 235인이 다자이후에 내착 하다. 키노 히로즈미[ 紀 広 純 ] 등을 보내어 내조 의 사정을 심문하게 하 다. 김삼현, 구호( 舊 好 )를 닦기 위해 왔고, 그와 더불어 국신물( 國 信 物 ) 및 당에 체재중인 후지와라노 카와 키요(키요카와)의 서장을 가지고 왔 음을 말하다. 이날, 키노 히로즈미 등에게 칙( 勅 )을 내려, 신라사가 조 ( 調 ) 를 신물( 信 物 ) 이라 칭하고, 조 ( 朝 ) 를 수호( 修 好 ) 라 하는 등 무례 한 언동이 있기 때문에 도해료( 渡 海 料 )를 지급하여 귀국시키다. 특기사항 김정권과의 약속(외교의례의 문 제)를 준수했는지가 빈례(외교의 례)실시의 기준이 되고 있다. 신 라사에 대해서 빈례 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寶 龜 元 年.(발해사에 대해서는 寶 龜 3 年 이 初 見 이다.) 신라사절의 외교 결례( 無 禮 ) 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외교문서 소지 여부나 김 정권과의 약속 에 대해서는 언급 이 없다.

63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63 연번 (NO) 12 도착 연도 寶 龜 10 年 (779) 관련 내용 7.10 다자이후, 견신라사 시모츠 미치 노 나가토[ 下 道 長 人 ] 등, 견 당판관( 遣 唐 判 官 ) 우나카미노 미 카리[ 海 上 三 狩 ] 등을 이끌고 귀 국하였음을 보고하다. 이때, 당사 고학림( 高 鶴 林 ) 등 5인 및 신라사 김난손( 金 蘭 蓀 ) 등도 함께 내일하 다 다자이후에 칙을 내려, 신라 사 김난손 등이 '내조'한 사정을 묻고, 또 표함( 表 函 )을 소지하고 있으면 발해의 예에 준하여 안문 ( 案 文 )을 서사하여 진상하도록 명 하다.(그러나 그들은 표를 소지하 고 있지 않았다) 신라사 김난손 등이 입경 하다. 2.15( 寶 龜 11 年 ) 김난손 등, 귀국 길에 오르다. 신라국왕에 보내는 위로조서( 慰 勞 詔 書 )를 위탁하고, 김난손 등이 표문을 소지하지 않 아서 본래라면 입경을 허락하지 않고 방환해야 하지만, 우나카미 노 미카리 등을 호송해 준 노고를 평가하여 빈례로 대우한 점, 앞으 로의 사자는 반드시 표문을 지참 시킬 것, 다자이후 및 쓰시마에 표문을 소지하지 않은 사자는 입 경시켜서는 안 된다고 명하였다 는 사실 등을 말하다. 특기사항 김난손 등은 외교문서를 지참하 지 않았는 데도 빈례가 행해지고 있다.(일본인, 당 사절과 동행했 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한편, 일본 측은 표문의 지참이 빈례의 대상인지를 판단하는 기 준이 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다. 앞으로는 표문을 소지하지 않은 사자에게 입경을 허가하지 않는 다는 방침을 밝히다. * 전거는 모두 속일본기( 続 日 本 紀 )

64 6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추이를 살펴보면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두드러지는 변화로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은 신라사절단의 대규모화다. 天 平 4년(732)에 신라사 김장손 등이 40인 규모로 내일( 來 日 )한 이래(<표 1>의 No.1), 天 平 10년(738)의 단계가 되면 사절의 규모가 147인에 이르게 된다(<표 1> 의 No.3). <표 1>의 No.4, 6, 8, 9, 10, 11에서도 사절단의 인원을 확인할 수 있 는데, No.4, 6, 8의 단계에는 각각 187인, 700여 인, 211인의 규모로 내항하였 음을 알 수 있다. 9의 단계가 되면 100인에 미치지 못하는 91인 수준으로 잠시 주춤하였다가 다시 No.10, 11의 단계에는 187인(+도송자 39인), 235인으로 인 원이 늘어난다. 관련 사료로부터는 인원수만 확인이 될 뿐 이들이 탑승한 선박 수에 대해 서는 구체상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인원수로부터 미루어보아 사절단이 방문 할 때마다 적어도 2척 이상의 선박이 입항하였을 것으로 추찰된다. 신라 측의 사절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그들을 수용하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내항자격 심사를 강화할 필요성이 생겨나게 된 듯하다. 공식사절로서의 자격 이 있는지를 심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격심사는 빈례, 즉 외교의례에 의거하 여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天 平 7년(735) 키비노 마키비[ 吉 備 真 備 ] 등에 의해 장래된 당례 (130권)는 외교형식 및 외교의례를 보다 엄중히 지키기 시 작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례 를 수용하고 2년 후인 天 平 9년(737)에는 외교 무대에서 무례( 無 禮 ) 라는 언설이 처음 등장하기에 이르 렀고,(<표 1>의 두 번째 ), 天 平 15년(743)에는 신라사절이 지참한 외교문서 의 서식이 처음으로 문제시되었다.(<표 1>의 No.5) 天 平 勝 寶 4년(752)에 대규모 사절을 이끌고 내항한 신라왕자 김태렴을 통 하여서는 추후 일본을 방문하는 모든 사절에 대해서 표문지참( 表 文 持 参 )이 요 구되고 있다.(<표 1>의 No.6, 단 김태렴은 입경이 허가됨) 이는 당례 를 바탕 으로 하는 빈례( 賓 禮 )가 외교의 장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신호탄으로서의 의 미를 가진다. 아니나 다를까 <표 1>의 No.7에 보이는 김정권 사절단에 대해서는 사자로 서의 네 가지 조건(외교의례의 문제)을 채우도록 요구한 뒤, <표 1>의 No.8, 10

65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65 에서는 김정권과의 약속 을 거론하면서 거듭 입경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김정권과의 약속 을 준수하였는지가 빈례 실시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급 기야 <표 1>의 No.11에서는 신라사절 김삼현 등에게 외교결례를 지적하는 모 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내항한 신라사절에게는 처음으로 무례 가 논하여 지는 사례이다. 바로 寶 龜 5년(774)의 일이다. <표 1>의 No.12에 보이는 김난손 사절단의 경우에는 외교문서를 지참하지 않았는데도 빈례에 의거하여 처우를 받고 있다. 일본의 견당사 우나카미노 미 카리[ 海 上 三 狩 ] 등을 호송해 준 노고를 평가하여 빈례로 대우하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마도 본국으로 귀국하는 일본인(견신라사 및 견당 사), 그리고 당 사신과 동행한 입국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처우가 있었던 것으 로 추정된다. 동행한 인물이 김난손의 입항자격을 보장해 주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이와 공통된 일은 발해사절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天 平 11 年 (739)의 발해사절이 일본의 견당사 판관( 判 官 ) 헤구리노 히로나 리[ 平 群 広 成 ] 등 4인과 함께 내항하였을 때 입경까지 허가받은 일이 있고, 天 平 寶 字 2 年 (758)에는 견발해사( 遣 渤 海 使 ) 오노노 타모리[ 小 野 田 守 ] 등과 함 께, 天 平 寶 字 3 年 (759)에는 영등원하청사( 迎 藤 原 河 清 使 ) 쿠라노 마타나리[ 内 蔵 全 成 ] 등과 함께, 天 平 寶 字 6 年 (762)에는 견발해사 이키노 마스마로[ 伊 吉 益 麻 呂 ] 등과 함께, 寶 龜 9 年 (778)에는 견발해사 코마노 토노쯔구[ 高 麗 殿 嗣 ] 와 함께, 延 暦 17 年 (798)에는 쿠라노 카모마로[ 内 藏 賀 茂 麻 呂 ]와 함께 내일하 였을 때 발해사절단이 순조롭게 입국을 허가받았는데, 모두 일본인을 동반한 사례이다. 4) 외교상대국의 왕권이 보낸 정식사절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 으로 자국 외교관의 동행 여부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절로서의 자격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역시 외교문서의 형식과 그 내용이었던 듯하다. 마지막 신라사절 이라고도 불리는 김난손 등이 귀국할 때 앞으로의 사자는 반드시 표문을 지참하게 하도록 요구하는 동시에, 4) 鄭 淳 一, 2013b, 縁 海 警 固 と 九 世 紀 の 黎 明, 일본학보 97, 한국일본학회, 328~329쪽의 <표 1>을 참조.

66 6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일본의 관문에 해당하는 다자이후 및 쓰시마에도 표문을 소지하지 않은 사자 는 입국을 허가해서는 안 된다고 명하였다는 사실에서 그것이 입증된다(<표 1> 의 No.12). 寶 龜 5년(774)에는 신라사절의 무례 가 처음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寶 龜 10년(779)에는 표문의 지참이 빈례의 대상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사 실을 재확인하고, 또 일본열도로 입항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표문을 소지해야 함을 강력히 요구하게 된 것은, 寶 龜 年 間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변 화양상들과 무관하다고 보기 힘들 것이다. 즉 일본열도의 서쪽 변경에서 유 래신라인( 流 來 新 羅 人 ) 이라 표현되는 불특정 다수의 정체가 불분명한 내항 자가 증가하고 있던 상황이 신라사절에 대한 내항자격 심사의 강화로 이어졌 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5) 산양도, 산음도의 서쪽 제국 및 서해도 지역을 대상으로 연해경고명령(경 고칙[ 警 固 勅 ])이 내려진 점이라던가, 6) 같은 시기부터 서해도 제국을 변요( 邊 要 ) 로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한 것, 7) 하카타, 이키, 쓰시마 등을 요해지처( 要 害 之 処 ) 로 인식한 것 8) 도 해당지역의 변화하는 움직임 즉, 유래자 가 문제시되는 상황과 연동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5) 鄭 淳 一, 2013b, 앞의 글, 338~344쪽. 6) 鄭 淳 一, 2013b, 위의 글, 322~324쪽. 7) 続 日 本 紀 天 平 寶 字 4 年 (760) 8 月 甲 子 (7 日 ) 條, (전략) 又 勅, 大 隅, 薩 摩, 壱 岐, 對 馬, 多 褹 等 司, 身 居 邊 要 (후략) ; 続 日 本 紀 天 平 寶 字 5 年 (761) 7 月 甲 申 (2 日 ) 條, 西 海 道 巡 察 使 武 部 少 輔 従 五 位 下 紀 朝 臣 牛 養 等 言, 戎 器 之 設, 諸 國 所 同, 今 西 海 諸 國, 不 造 年 料 器 仗, 既 曰 邊 要, 当 備 不 虞, 於 是, 仰 筑 前, 筑 後, 肥 前, 肥 後, 豊 前, 豊 後, 日 向 等 國, 造 備 甲 刀 弓 箭, 各 有 数. 毎 年 送 其 様 於 大 宰 府 ; 寶 龜 11 年 (780) 8 月 庚 申 (28 日 ) 條, 太 政 官 奏 曰, 筑 紫 大 宰, 遠 居 邊 要, 常 警 不 虞, 兼 待 蕃 客, 所 有 執 掌, 殊 異 諸 道 등. 8) 続 日 本 紀 天 平 寶 字 3 年 (759) 3 月 庚 寅 (24 日 ) 條, 庚 寅, 大 宰 府 言, 府 官 所 見, 方 有 不 安 者 四. 拠 警 固 式, 於 博 多 大 津 及 壱 岐 對 馬 等 要 害 之 処, 可 置 船 一 百 隻 以 上 以 備 不 虞. 而 今 無 船 可 用. 交 闕 機 要. 不 安 一 也.

67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67 Ⅲ. 비사절신라인( 非 使 節 新 羅 人 )의 내항 엄격한 입국관리 로 인한 신라사절의 방문 단절 이후에는 수십 년간 신라인의 내일이 확인되지 않는다. 延 暦 (782~806년) 大 同 (806~810년) 年 間 은 신라인 의 내항사례(=이 경우 발해인의 내항사례는 제외)라는 측면에서 보면 분명히 사료상의 공백기 라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9) 그 반면, 弘 仁 (810~824년) 天 長 (824~834년) 年 間 은 확실히 신라인의 쇄 도가 눈에 띄는 시기이다. 특히 弘 仁 年 間 이 시작되고 약 20년간은 비사절신라 인의 내항기록 가운데 귀화 의 사례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시기이기도 하 다. 10) 弘 仁 天 長 年 間 의 신라인 내항 상황을 정리한 <표 2>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적지 않은 귀화 사례가 확인된다. 유사표현에 해당하는 화래( 化 來 ), 투화( 投 化 ), 원투풍화( 遠 投 風 化 ) 등을 포함하면 No.7, 9, 11, 12, 13, 19, 20, 22, 24가 귀화 관련기록이 된다. 이들 귀화 신라인에 대한 처우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No.11의 청석진( 清 石 珍 ) 등은 다자이후에서 귀화의 뜻을 밝혔더니 시복( 時 服 ) 과 노량( 路 糧 )을 지급받았음은 물론 제공된 선편으로 입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No.24의 김예진( 金 禮 眞 ) 등도 투화를 표명하였더니 좌경5조( 左 京 五 條 ) 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이 두 사례는 공식사절로서 내항한 신라인에게조차도 입경이 거의 허락되지 않았던 8세기 단계의 선례와 함께 생각해볼 때 상당히 이례적인 대우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한정된 사례이기는 하지만 天 長 年 間 에는 귀화 신라인에 대해 구분 전( 口 分 田 )을 비롯하여, 생활기반 안정에 필요한 물품의 지급이 이루어지고 있 다. No.20의 귀화 신라인들에 대해서는 승전( 乗 田 ) 24정( 町 ) 8단( 段 )을 주어 9) 鄭 淳 一, 2013c, 앞의 글, 96쪽. 10) 佐 伯 有 清, 1970, 九 世 紀 の 日 本 と 朝 鮮, 日 本 古 代 の 政 治 と 社 会, 吉 川 弘 文 館 ( 初 出 1964); 渡 邊 誠, 2012, 承 和 貞 觀 期 の 貿 易 政 策 と 大 宰 府, 平 安 時 代 貿 易 管 理 制 度 史 の 研 究, 思 文 閣 出 版 ( 初 出 2003) 등.

68 6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표 2> 9세기 초의 내항신라인 일람 ( 弘 仁 天 長 年 間 ) NO. 연월일 호칭 사람 이름 배의 수 1 弘 仁 元 (810) 新 羅 人 金 巴 兄 金 乗 弟 金 小 巴 2 弘 仁 02(811) 新 羅 船 3 弘 仁 03(812) 新 羅 人 清 漢 波 등 4 弘 仁 03(812) 新 羅 人 劉 清 등 3 (그 가운데 1 艘 가 착안) (12.7에 船 20 余 艘 가 쓰시마 의 서해상에 출현) 5 弘 仁 04(813) 新 羅 人 5 6 弘 仁 04(813) 新 羅 人 一 清 등 7 弘 仁 05(814) 新 羅 人 加 羅 布 古 伊 등 8 弘 仁 05(814) 新 羅 商 人 9 弘 仁 05(814) 新 羅 人 辛 波 古 知 等 10 弘 仁 06(815) 新 羅 僧 李 信 恵 11 弘 仁 07(816) 新 羅 人 清 右 珍 등 12 弘 仁 08(817) 新 羅 人 金 男 昌 등 13 弘 仁 08(817) 新 羅 人 遠 山 知 등 14 弘 仁 09(818) 新 羅 人 張 春 등 15 弘 仁 10(819) 新 羅 人 船 16 弘 仁 10(819) 新 羅 人 王 請 등 17 弘 仁 11(820) 唐 人 李 少 貞 18 弘 仁 11(820) 新 羅 人 李 長 行 등 19 弘 仁 13(822) 新 羅 人 20 天 長 元 (824) 新 羅 人 21 天 長 元 (824) 新 羅 琴 ( 物 品 ) 22 天 長 元 (824) 新 羅 人 辛 良 金 責 賀 良 水 白 등 23 天 長 元 (824) 新 羅 人 張 大 使 24 天 長 10(833) 新 羅 人 金 禮 真 등 男 女 25 天 長 10(833) 新 羅 商 客

69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69 NO. 사람 수 도착지 비고 전거 1 3 大 宰 府 流 來. 放 還 하다 日 本 後 紀 ( 弘 仁 ) 2 10 (1 艘 에 처음 발견한 新 羅 船 은 3 艘. 翌 日 인 對 馬 島 日 本 後 紀 타고 있던 12. 7에 출현한 船 20 余 艘 를 ' 賊 船 '으로 下 縣 郡 佐 須 浦 ( 弘 仁 ) 인원수) 판단 3 流 來. 願 에 의해 방환하다 日 本 後 紀 4 10 糧 을 지급하고 방환하다 日 本 後 紀 肥 前 國 小 近 嶋 船 5 艘 日 本 紀 略 ( 弘 仁 ) 6 ( 肥 前 國?) 清 漢 巴 (NO.3의 清 漢 波 와 동일인물인 日 本 紀 略 가?) 등이 일본에서 帰 来 하였음을 히 ( 弘 仁 ) 젠노쿠니[ 肥 前 國 ]에 말함 7 6 化 來. 美 濃 國 에 배치함 日 本 後 紀 8 31 長 門 國 豊 浦 郡 新 羅 商 人 의 初 見 日 本 後 紀 9 26 筑 前 國 漂 着. 단, 그 사정을 물으니 멀리 風 化 博 多 津 에 던진다 고 대답함 日 本 後 紀 10 大 宰 府 入 唐 求 法 巡 礼 行 記 후에 환속하여 李 信 恵 라는 이름 사용. ( 開 成 및 엔닌[ 円 仁 ]의 통사( 通 事 )를 담당함 會 昌 ) 大 宰 府 歸 化. 時 服 路 糧 을 지급하고 입경하 도록 함 日 本 紀 略 大 宰 府 歸 化 日 本 紀 略 大 宰 府 歸 化 日 本 紀 略 驢 4 頭 을 바침 日 本 紀 略 15 唐 越 州 人 인 周 光 翰 言 升 則 과 동행 日 本 紀 略 16 出 羽 國 入 唐 求 法 巡 礼 行 記 교역을 위해 唐 人 張 覺 濟 형제와 동행 ( 後 長 門 國 ) ( 開 成 ) 17 漂 着. 李 少 貞 = 新 羅 人 인가? 日 本 紀 略 20 出 羽 國 18 羖 䍽 羊 2 白 羊 4 山 羊 1 鵞 2를 바침 日 本 紀 略 歸 化 日 本 紀 略 乗 田 24 町 8 段 ( 口 分 田 )주고, 種 子 農 調 度 價 를 지급함 類 聚 國 史 21 能 登 國 新 羅 琴 2 面 手 韓 鉏 2 隻 剉 碓 2 隻 이 표착 日 本 紀 略 陸 奥 國 에 安 置. 乗 田 을 口 分 田 으로 충당함 類 聚 國 史 23 張 大 使 =장보고인가? 唐 에 돌아갈 때 入 唐 求 法 巡 礼 行 記 10 신라승려 李 信 恵 를 동승시킴 ( 會 昌 ) 24 投 化. 左 京 五 條 에 貫 附 함 続 日 本 後 紀 25 安 祥 寺 伽 藍 縁 起 資 材 帳, 恵 運 이 新 羅 商 客 으로부터 銅 鋺 畳 子 平 安 遺 文 1 164, 등을 구입. 후에 安 祥 寺 에 施 入 함 入 唐 五 家 伝 * 参 照 1: 年 月 日 은 일본열도에 내착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시점. 月 日 이 없는 경우는 그 시점이 불 투명하다는 의미 * 参 照 2: No.17의 李 少 貞 은 ' 唐 人 '이라고 되어 있으나 続 日 本 後 紀 承 和 9 年 (842) 正 月 乙 巳 (10 日 ) 条 에는 ' 新 羅 人 '으로 등장

70 7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구분전으로 삼게 하였고 종자( 種 子 ) 및 농조도가( 農 調 度 價 ) 11) 를 지급하고 있 으며, No.22의 카라[ 辛 良 ] 김책( 金 責 ) 카라[ 賀 良 ] 수백( 水 白 ) 등에 대해서도 승전을 구분전으로 충당해 주고 있다. 모리 키미유키[ 森 公 章 ] 씨의 연구에 따 르면, 율령국가의 재일외국인( 在 日 外 國 人, 귀화 를 포함하는 개념)에 대한 대 우는 크게 관국안치( 寛 國 安 置 ), 조세면제( 租 税 免 除 ), 관인출사( 官 人 出 仕 ), 씨 성사여( 氏 姓 賜 與 ) 등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는데, 12) 귀화 신라인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조치는 그 가운데서도 관국안치에 근거한 것이라 생각된다. 관국( 寛 國 )이란, 반전액( 班 田 額 )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광대한 토지를 가진 쿠니[ 國 ] 를 가리키는데, 13) 토지지급은 이와 같은 관국으로의 이배( 移 配 )를 전제로 하 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No.22의 신라인들이 무쯔노쿠니[ 陸 奥 國 ]에, 그리 고 No.7의 사람들이 미노노쿠니[ 美 濃 國 ]에 안치되고 있는 것도 그와 관계가 있다. 14) 대규모의 집단 귀화 가 많이 확인되는 것도 弘 仁 天 長 年 間 의 귀화 가 가 지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No.7(6명), No.24(10명)의 경우는 10명 이하의 규 모이지만 No.9(26명), No.12(34명), No.19(40명), No.22(54명)와 같이 수십 명 레벨의 중규모도 있는가 하면 No.11(180명), No.13(144명), No.20(165명) 처럼 100명을 훌쩍 넘는 대규모의 귀화 도 있었다. 선행연구 가운데에는 신라인의 귀화 가 집중하는 서력 815년을 전후로 하 는 시기의 신라 국내 상황에 착목하여 대규모 귀화 의 원인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이상기상( 異 常 氣 象 )이 부작( 不 作 )과 재해를 초래하였고 영양실조가 역 11) 農 調 度 價 란 영농에 필요한 도구나 재료를 입수하기 위한 대가를 말한다. 黒 板 伸 夫 森 田 悌 編, 2003, 訳 注 日 本 史 料 日 本 後 紀, 集 英 社, 872쪽의 頭 注. 12) 森 公 章, 1998, 古 代 日 本 における 在 日 外 國 人 観 小 考, 古 代 日 本 の 対 外 認 識 と 通 交, 吉 川 弘 文 館 ( 初 出 1995) 참조. 13) 田 令 第 13 寛 郷 條 에 凡 國 郡 界 内, 所 部 受 田, 悉 足 者, 爲 寛 郷, 不 足 者, 爲 狭 郷 이라 기록되어 있다. 14) 日 本 三 代 実 録 貞 觀 12 年 (870) 2 月 20 日 壬 寅 條 所 引 의 天 長 元 年 (824) 8 月 20 日 格 에 不 論 新 舊, 併 遷 陸 奥 之 空 地 라고 되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상에서 이해해 야 할 것이다.

71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71 병을 만연시켜 막다른 곳에 몰린 백성이 도적으로 변신하였으며 폭동을 일으 켰다. 이러한 부( 負 )의 연쇄가 당시의 신라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면서 弘 仁 天 長 年 間 에 있었던 신라인의 귀화 에 대해서도 기근에 의해 발생한 난민의 집 단적 해외이주 움직임 으로 해석하고 있다. 15) 816년 당( 唐 )의 절동지방( 浙 東 地 方 )에 신라기민( 新 羅 饑 民 ) 170명이 음식을 구하기 위해 왔다는 기록 16) 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기민( 饑 民 )의 해외이주 흐름은 틀림없이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17) 다만 신라에서의 자연재해나 지방반란이 해당시기에만 일어났다 고 볼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18) 사람들의 해외유출현상(예를 들면 대규모 귀화 등)이 해당 시기에 돌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원인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욱 정밀한 검토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19) 귀화 신라인의 이름에 눈을 돌리게 되면 한반도계 인명표기 방식과는 다소 이질적인 것이 몇 가지 눈에 띤다. No.7의 加 羅 布 古 伊, No.9의 辛 波 古 知, 그리고 No.22의 辛 良 金 責 賀 良 水 白 이 그것이다. 이들은 이름의 모두( 冒 頭 ) 에 加 羅, 辛, 辛 良, 賀 良 이라는 접두어를 붙이고 있는데, 일본어로는 예외 없이 kara 로 발음된다. 이와 같은 문자열을 가진 kara 는 新 撰 姓 氏 録 ( 弘 15) 榎 本 渉, 2010, 遣 唐 使 以 後 へ, 僧 侶 と 海 商 たちの 東 シナ 海, 講 談 社 選 書 メ チエ 참조. 李 成 市, 1997, 京 師 交 易 から 大 宰 府 交 易 へ, 東 アジアの 王 権 と 交 易, 青 木 書 店 도 三 國 史 記 의 기사를 바탕으로 하여 天 災 및 지방에서의 반란이 여러 동요를 가지고 왔으며, 어떤 자는 중국으로 건너갔고 어떤 자는 일본으로 건 너가는 사태를 불러일으켰다고 설명한다. 16) 舊 唐 書 巻 199 上 列 伝 149 上 東 夷 新 羅 條 ; 唐 會 要 巻 95 新 羅 條 ; 三 國 史 記 新 羅 本 紀 十 憲 德 王 8 年 條. 17) 榎 本 渉, 2010, 앞의 글 참조. 18) 자연재해나 정치적 반란은 이른바 신라하대 전시기(780~935년)에 걸쳐 계속 발 행하고 있으며, 특정한 시기에 한정된 현상이라 말하기 어렵다. 신라 하대에 대한 일반적 이해 및 관련 연구목록은 정호섭, 2006, 신라하대의 사회변동, 한국고 대사입문(3) 신라와 발해, 신서원 참조. 19) 귀화 라고 하는 형태로 많은 신라인이 일본열도로 이동한 배경에 대해 논할 때에 는, 열도사회가 가진 유입 요인(pull factor) 및 당시 신라사회가 만들어내고 있던 배출 요인(push factor)이라는 두 가지 측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 다. 추후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72 7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仁 6 年 [815] 편찬)에도 보이고 있다. 20) 다만 이들이 이미 화내( 化 内 ) 에 편입된 도래씨족의 명칭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렇다고는 하더 라도 그들의 이름 앞부분에 kara 를 붙인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고, 수 용하는 쪽(일본 측)의 기록에 일부러 신라인 kara 〇 〇 라고 쓰고 있는 것도 그들이 kara 와의 관련성을 가지기 때문이라 추찰된다. kara( 加 羅 ) 란 본래 한반도 남부에 존재하였던 소국( 小 國 ) 혹은 그 연합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 런데 9세기 초의 귀화 신라인이 kara 〇 〇 라고 칭한(혹은 칭해진) 것은 자신 들이 kara( 加 羅 ) 지방, 즉 한반도의 신라 가운데서도 특히 남부지방에서 온 사 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은 아닐까 추찰된다. 21) 아울러 <표 2>의 No.24에 보이는 天 長 10 年 (833)의 김예진 등을 마지막으 로 고대의 귀화 기록이 찾아지지 않게 되는 점도 여기에 특기해 두고자 한다. 한편, 弘 仁 5 年 (814)에는 종래 확인된 바 없는 새로운 성격의 내항자가 등 장한다. 신라상인 31명이 나가토노쿠니[ 長 門 國 ] 토요라 군[ 豊 浦 郡 ]에 표착한 것이다(<표 1>의 No.8). 22) 이성시는 続 日 本 紀 神 護 景 雲 2 年 (768) 10 月 甲 子 (24 日 ) 條 에 좌우대신( 左 右 大 臣 ) 이하 귀현( 貴 顕 )한 자들에게 신라의 교관 물을 사기 위해 다자이후가 보관하고 있던 양질의 면을 하사하였다고 기록되 어 있는 점, 게다가 그해(768년)는 신라사절이 내항하였다는 기사가 없는 점에 서 768년의 교역 23) 을 담당한 것은 신라상인으로 봐야한다고 논하며, 이것을 20) 新 撰 姓 氏 録 과 같은 씨족 계보서가 만들어진 것은 편찬 시의 정치적 사회적인 요청에 의한 것이라 논하여지고 있다. 실제로 그 성립 배경을 밝히고자 하는 시도 도 일찍부터 이루어져 구체적으로는 1 桓 武 朝 의 정치적 대립, 2 軍 事 와 造 作 과 의 관련성, 3 班 田 農 民 의 변질양상과의 관계, 4 神 火 및 지방민의 반항 등이 제 시되었다. 佐 伯 有 清, 1983, 新 撰 姓 氏 録 の 研 究 研 究 篇, 吉 川 弘 文 館. 그러나 그와 함께 寶 龜 年 間 부터 弘 仁 年 間 에 걸쳐 확인되는 불특정 다수의 내항이국인 (특히 신라인)이 쇄도하는 현상 도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内 外, 혹은 皇 別 神 別 諸 蕃 과 같이 인민의 출자( 出 自 )를 선명하게 하고 율령국가의 지배질서를 확립시켜 가고자 하는 의사가 강하게 작용하였던 것은 아닐까 추찰되는 것이다. 21) 鄭 淳 一, 2013c, 앞의 글, 100~101쪽. 22) 日 本 後 紀 弘 仁 5 年 (814) 10 月 丙 辰 (13 日 ) 條. 23) 768년 교역 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시의 표현이다. 이 해에 교역이 이루어졌 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신라의 교관물(교역물)을 살 수 있도록 다자이

73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73 9세기 교역 형태(다자이후 교역유형)의 원형이라 평가한다. 24) 신라상인의 출 현시점을 8세기 후반에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상인이라는 내항형태 로서 처음 일본 측에 인지된 것도, 그리고 기록상에 남겨진 것도 弘 仁 5 年 (814)의 시점이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5) 弘 仁 5년을 기점으로 그 후에도 신라상인(혹은 상인으로 보이는 자)의 내 항이 이어진다. 먼저 <표 1>의 No.10에 보이는 이신혜( 李 信 恵 )의 경우, 그 자 신은 승려 및 통사( 通 事 )의 이력을 가지는 인물이지만 귀국할 때에 교역을 위 해 내일한 장대사( 張 大 使 )라는 인물과 동행하고 있는 점에서 상인집단과도 밀 접하게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弘 仁 6년(815) 내일 당시도 교역선 을 이용했던 것은 아닐까 추측된다. 이런 추론이 인정된다면 弘 仁 6년 시점에 도 상인집단의 내항이 있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또 弘 仁 10년(819)에 당 월주인( 越 州 人 ) 등을 태우고 내항한 신라인선( 新 羅 人 船, <표 1>의 No.15)도 교역과 일정한 관계가 상정되며, 마찬가지로 당인 ( 唐 人 )과 함께 내항한 신라인 왕청( 王 請 ) 등도 교역에 종사하는 자들이었다 (No.16). 弘 仁 11년(820) 단계에 당인 이라 기록되어 있는 이소정( 李 少 貞 )의 경우(No.17) 承 和 9 年 (842) 단계에는 신라인 이라 나오고, 더군다나 일본과의 교역에 힘을 쏟았던 신라인 장보고의 부하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弘 仁 年 間 에도 당에 거점을 두고 일본 당 간의 무역에 종사하였던 사람으로 생각된 다. 게다가, 天 長 元 年 (824)에 내항한 장대사( 張 大 使 ) (No.23)나 天 長 10년 (833) 단계에 내일한 것으로 보이는 신라인들(No.25)도 상인 혹은 상객이었다. 弘 仁 9년(818) 내일한 장춘( 張 春 ) 등(No.14)과 弘 仁 11년(820)에 내일한 이 후의 면을 지급했다는 것과 768년에 신라상인 이 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768 년을 전후한 시기에 일본을 방문한 신라사절(사신) 이 교관(교역)의 상대였을 가능 성도 남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자이후 면 지급 을 신라상인 의 출현과 곧바로 연 결시키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24) 李 成 市, 1997, 앞의 글. 25) 森 克 己, 2009, 末 期 日 唐 貿 易 と 中 世 的 貿 易 の 萌 芽, 新 編 森 克 己 著 作 集 (2) 続 日 宋 貿 易 の 研 究, 勉 誠 出 版 ( 初 出 1989)도 문헌상의 初 見 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74 7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장행( 李 長 行 ) 등(No.18)은 그들이 장래한 동물의 내역( 驢, 羖 䍽 羊, 白 羊, 山 羊, 鵞 )으로 미루어보아 한반도의 신라가 아닌 중국 당에서 내항한 상인집단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26) 이상과 같은 상인의 내항에 대해 일본 측은 새로운 정책 마련으로 응한다. 天 長 8 年 (831) 9 月 7 日 에 발행한 태정관부( 太 政 官 符 )는 신라상인이 내항하였 을 경우 배 안의 화물을 조사하여 적용지물( 適 用 之 物 )의 구입과, 그 경진( 京 進 )을 행하게 하고 그 이외에는 부관( 府 官 ) 검찰 아래 적정가격으로 교역하도 록 다자이후에 명하도록 하고 있다. 27) 종래에는 신라인 내항자를 유래 와 귀화 로 이분하여 유래 의 경우는 그냥 방환한다고 하였으나 28) 天 長 8년(831)의 처분을 기점으로 하여 방침을 크게 전 환한 것이다. 29) 무엇보다도 이 정책에 의해 비로소 신라상인의 존재를 공식적 으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는 신라상인의 내 항에 맞춘 수용시스템을 갖추지 않고 있었으나 신라상인의 활동을 교역관리체제 에 편입시키는 형태로 연해지역 인민과 신라상인과의 교역을 양성화하게 된 것 이다. 30) 26) 鄭 淳 一, 2013c, 앞의 글, 104~105쪽. 27) 類 聚 三 代 格 巻 18 天 長 8 年 (831) 9 月 7 日 太 政 官 符. 28)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룬다. 29) 田 中 史 生, 1997, 歸 化 と 流 來 と 商 賈 之 輩 律 令 國 家 における 國 際 交 易 の 変 遷 過 程, 日 本 古 代 國 家 の 民 族 支 配 と 渡 來 人, 校 倉 書 房 ; 李 成 市, 1997, 앞의 글; 渡 邊 誠, 2012, 律 令 國 家 の 対 外 交 易 制 度 とその 変 容, 平 安 時 代 貿 易 管 理 制 度 史 の 研 究, 思 文 閣 出 版 의 해석도 함께 참조해주기 바란다. 30) 鄭 淳 一, 2013c, 앞의 글, 105~106쪽.

75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75 Ⅳ. 유래( 流 來 ) 귀화( 歸 化 ) 의 판정과 언어 9세기 초에 나타나기 시작한 비사절신라인의 내항 형태로서 귀화와 상인에 대 해 고찰해 보았다. 그런데 귀화 신라인과 관련하여 종래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 던 규정이 있어 본장에서는 그 의의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사료 1> 日 本 紀 略 弘 仁 4 年 (813) 3 月 辛 未 (18 日 ) 條 辛 未. 大 宰 府 言, 肥 前 國 司 今 月 四 日 解 稱, 基 肆 団 校 尉 貞 弓 等 去 二 月 九 日 解 稱, 新 羅 一 百 十 人 駕 五 艘 船, 著 小 近 嶋, 與 土 民 相 戦, 即 打 殺 九 人, 捕 獲 一 百 一 人 者. 又 同 月 七 日 解 稱, 新 羅 人 一 清 等 申 云, 同 國 人 清 漢 巴 等 自 聖 朝 歸 來, 云 々. 宜 明 問 定, 若 願 還 者, 随 願 放 還, 遂 是 化 來 者, 依 例 進 止. ( 後 略 ) 이 사료는 다자이후[ 大 宰 府 ]에서 언상( 言 上 )된 두 가지 사건에 대해 조정 이 대응방침을 하달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두 가지 사건이란, 히젠 국사[ 肥 前 國 司 ]에게서 올라온 해( 解 )의 내용이다. 첫 번째는, 같은 해(813년) 3월 4일의 해( 解 )로, 이것은 2월 9일자 키이단[ 基 肆 団 ] 교위( 校 尉 ) 사다유미[ 貞 弓 ] 등의 해( 解 )에 대한 조치로 나온 것이다. 사다유미 등의 보고에 의하면 신라인 110명 이 5소의 배를 타고 소근도( 小 近 嶋, 고토열도의 오지카시마) 에 도착하여 그 지역의 인민과 물리적으로 충돌했다고 한다. 그 결과, 신라인 9명이 타살되고 나머지 101명이 포획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같은 해 3월 7일의 해가 전 하는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신라인 일청( 一 清 ) 등이, 청한파( 清 漢 巴 ) 등 신라 인이 일본에서 신라로 돌아간 적이 있음을 이야기하였다고 한다(이상은 <표 2> 의 No.5, 6에 해당함). 이상의 두 건이 다자이후를 통해 중앙에 보고되어 조정은 다음과 같이 처 분을 내렸다(<사료 1>의 밑줄 친 부분). 31) 우선 정중히 문정( 問 定 ) 을 행하여 31) 集 英 社 版 訳 注 日 本 後 紀 의 頭 注 에서는 大 宰 府 言 의 앞에 勅 이라는 문자가

76 7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혹시 돌아가기를 바란다면 그 원대로 방환하고, 화래( 化 來 ) 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예( 例 )에 따라 받아들이도록 명하였다. 즉 내항한 신라인의 의향을 확 인하여, 귀국을 원하면 귀국조치를 취하고, 귀화를 원하면 귀화수속을 밟도록 정하고 있는 것이다. <표 2>의 No.7부터 차례로 확인되는 귀화 신라인도 틀림 없이 일본 측의 문정 에 대해 스스로 귀화 의사를 표명함으로써 받아들여진 사 람들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방침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미 寶 龜 5년(774)의 단계에 유사한 법령이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32) <사료 2> 類 聚 三 代 格 巻 18 寶 龜 5 年 (774) 5 月 17 日 官 符 太 政 官 符 應 大 宰 府 放 還 流 來 新 羅 人 事 右 被 宣 偁, 奉 勅 如 聞, 新 羅 國 人 時 有 來 着, 或 是 歸 化, 或 是 流 來, 凡 此 流 來 非 其 本 意, 宜 毎 到 放 還 以 彰 弘 恕, 若 駕 船 破 損, 亦 無 資 粮 者, 量 加 修 理, 給 粮 発 遣, 但 歸 化 來 者, 依 例 申 上, 自 今 以 後, 立 爲 永 例, 寶 龜 五 年 五 月 十 七 日. <사료 2>에서는 寶 龜 年 間 에 문제시되었던 유래( 流 來 ) 신라인에 대한 내용 이 다루어지고 있다. 도해( 渡 海 )하는 신라인(사료에서는 新 羅 國 人 ) 가운데 어 떤 사람은 귀화 라고 하며, 어떤 사람은 유래 라 하는데, 이 유래 라는 게 본의 ( 本 意 )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 측은 넓은 아량을 보여서 그들을 방 환하도록 하였으며, 파손선박의 경우는 수리를 하고, 물자 및 식량이 부족한 자에게는 粮 을 지급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단 귀화를 바라고 온 사람에 대해 서는 보고하라고 요청하였다. 결국 유래 를 칭하는 자에 대해서는 방환조치를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黒 板 伸 夫 森 田 悌 編, 2003, 앞의 책, 646쪽. 32) 弘 仁 格 抄 下 格 巻 10에 應 大 宰 府 放 還 流 來 新 羅 人 事 寶 龜 五 年 五 月 十 七 日 이 라고 보인다는 사실에서, 이 格 은 본디 弘 仁 格 에도 수록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山 内 晋 次, 2003, 朝 鮮 半 島 漂 流 民 の 送 還 をめぐって, 奈 良 平 安 時 代 の 日 本 とアジア, 吉 川 弘 文 館 ( 初 出 1990); 田 中 史 生, 1997, 앞의 글 참조.

77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77 취하고, 귀화 를 바라는 자에게는 귀화수속을 허가하라는 것이다. 다음의 <사 료 3>도 유사한 내용을 전한다. <사료 3> 続 日 本 紀 寶 龜 5 年 (774) 5 月 乙 卯 (17 日 ) 條 乙 卯, 勅 大 宰 府 曰, 比 年 新 羅 蕃 人, 頻 有 來 著, 尋 其 縁 由, 多 非 投 化, 忽 被 風 漂, 無 由 引 還 留 爲 我 民, 謂 本 主 何, 自 今 以 後, 如 此 之 色, 宜 皆 放 還 以 示 弘 恕, 如 有 船 破 及 絶 糧 者, 所 司 量 事, 令 得 歸 計. 이에 따르면, 근년 신라인( 新 羅 蕃 人 )이 끊임없이 내착하고 있어, 그 사유 를 물었더니, 상당수는 투화( 投 化, 귀화) 가 아니라고 한다. 갑자기 바람에 떠 밀려 와 돌아갈 수단이 없어, 머물러 우리나라의 백성(=일본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본주( 本 主, 신라 왕) 는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물었더니, 이 같은 사람들은 모두 넓은 마음으로 방환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다. 만약 배가 파손되거나, 식량이 끊어지는 자가 있으면, 담당관청( 所 司 )이 판단하여 귀국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료 2>와 <사료 3>은 거의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적지 않은 차 이도 존재한다. <사료 3>에서는 투화, 풍표( 風 漂 ) 하였다고 되어 있는 신라인 들이 <사료 2>의 단계에서는 각각 귀화, 유래 했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사료 2>에서는 유래신라인( 流 來 新 羅 人 ) 이라는 표현이 보이지만 유래 는 본 뜻(본래의 목적)이 아니라고 설명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야마우치 신지[ 山 内 晋 次 ]는 유래 자를 본의 에 의하지 않은 표류민으로만 파악하고 있는 반면, 다나카 후미오[ 田 中 史 生 ]는 단순한 표류민이라고 말할 수 없는 존재, 즉 무엇인가 목적을 가지고 내일( 來 日 )한 신라인으로 해석하고 있다. 若 駕 船 破 損, 亦 無 資 粮 者 라는 표현으로부터, 거꾸로 선박의 수리, 식 량지급이 필요 없는 사람도 존재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 서 유래 란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내항 형태라고도 말해도 좋을 것

78 7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이다. 33) 보다 중요한 것은 <사료 1>과 <사료 2> <사료 3>의 비교검토라 생각된다. <사료 2> <사료 3>은 일본 측이 이국인을 돌려보낼지 받아들일지를 판단하 는 데 있어 내항신라인 스스로의 의사 및 의향을 존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 료 1>에 보이는 처분과의 유사성이 확인된다. 게다가 <사료 1>의 遂 是 化 來 者, 依 例 進 止 가 <사료 2>의 但 歸 化 來 者, 依 例 申 上 과 거의 같은 성문구조( 成 文 構 造 )를 띠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처분의 기본골자조차 흡사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는 양자 간의 계승관계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사료 2> 와 <사료 3>이 발포된 보귀 5년(774)에서 약 40여 년 지난 弘 仁 4년(813)의 시 점에서 내항신라인, 특히 귀화 신라인에 대한 처분 방침이 <사료 1>의 형태로 재확인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단 <사료 2>에서는 寶 龜 年 間 에 문제시되었던 유래 신라인이 논의의 중심 축이 되고 있는 반면, <사료 1>의 경우 귀화 신라인 대책에 중점이 놓였다는 상이점에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료 1>의 弘 仁 年 間, <사료 2>의 寶 龜 年 間 모두 신라인이 일본열도로 쇄도하는 시기였던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주된 내항 형태(예를 들어, 유래 인지 귀화 인지)에서는 각 시기별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시대 배경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된다. 寶 龜 年 間 에는 유래 를 칭하는 자가 주를 이루었던 반면, 弘 仁 年 間 에는 귀화 를 칭하는 신라인이 열도사회의 현안으로 급부상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표 2>의 No.1에 보이는 신라인 김파형( 金 巴 兄 ) 김승제( 金 乗 弟 ) 김소파 ( 金 小 巴 ) 등 3명은 유래 로 취급받아 본국(신라)에 돌아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 고 있으며, No.3의 청한파( 清 漢 波 ) 등도 유래 신라인으로 방환되고 있다. No.4의 유청( 劉 清 ) 등도 양( 糧 ) 의 지급을 받아 방환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스 스로 귀화 가 아니라 유래 를 칭했을 가능성이 사정된다. No.6 및 <사료 1>에 33) 이들 사료에 대한 해석은 山 内 晋 次, 2003, 앞의 글; 田 中 史 生, 1997, 앞의 글; 鄭 淳 一, 2011, 貞 觀 年 間 における 弩 師 配 置 と 新 羅 問 題, 早 稲 田 大 学 文 学 研 究 科 紀 要 56-4; 鄭 淳 一, 2013b, 앞의 글 등 참조.

79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79 등장하는 일청( 一 清 ) 등의 경우는 최종적으로 어떻게 처분을 받았는지 명확하 지 않지만 청한파( 清 漢 巴 ) 34) 등이 일본에서 신라로 돌아왔음을 이야기하고 있 는 점에서 자신들도 유래 를 칭함으로써 귀국을 시도하였을지 모른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No.9의 신파고지( 辛 波 古 知, 카라 파고지) 등은 처음에 는 표착( 漂 着 ) 으로 판단되었으나, 내항 사유를 질문 받았을 때에 원투풍화( 遠 投 風 化 ) 라고 말하여 귀화 로 인정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내항한 신라인을 유래 로 판단할 것인지 귀화 로 판단할 것인지는 내항자 본인의 의사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 이 그 의사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弘 仁 4년(813)의 시점(<사료 1>)에서는 문정 ( 問 定 ) 한다고 되어 있고, 보귀 5년(774)의 시점(<사료 3>)에서는 尋 其 縁 由 라 고 나온다. 공통된 것은 내항자 본인에게 내착의 사유를 묻는다는 점이다. 이 것은 틀림없이 구두에 의한 확인과정을 의미한다. 만약 그들이 문서를 지참하 였다면 일본 측 관리가 내항자에게 유래 인지 귀화 인지를 묻는 게 아니라 스 스로 해당내용을 열람하면 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항자가 도착하게 되는 다자이후 관내의 제 지역에는 내착 사유를 묻고 본국으로 돌아갈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등 신라인과 구두로 소통할 수 있는 담당자(통역에 상당하는 사람)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Ⅴ. 신라역어( 新 羅 譯 語 ) 배치의 의의: 박사( 博 士 ) 배치와 관련하여 弘 仁 天 長 年 間 에 확인되던 신라인의 내항 쇄도는 일본열도의 현관문에 해당 하는 지역에 적지 않은 고민거리를 안겨준 듯하다. 대응이 순조로운 경우라면 34) <표 2> No.3의 清 漢 波 와 동일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80 8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그들이 유래 한 것인지, 귀화 를 위해 온 것인지, 아니면 교역을 위해 방문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 종종 갈등과 충돌을 빚 기도 하였다. 弘 仁 2년(810) 12월 6일, 신라선( 新 羅 船 ) 3소( 艘 )가 쓰시마 서해상에 모습 을 드러냈던 때였다. 그 가운데 1소가 갑자기 쓰시마의 시모아가타군[ 下 縣 郡 ] 사스우라[ 佐 須 浦 ]에 착안( 着 岸 )하였던 것이다. 배 안에는 신라인 10명이 있었 는데 이들과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아( 言 語 不 通 ) 내항 사유를 알기 힘들었다 고 한다. 앞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국인이 도착하는 지역의 관리가 내항 인이 일본에 도착한 이유를 구두로 물어보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해 상에 대기 중이었던 신라선 2소는 어두운 밤에 어디론가 사라진 모양이다. 그 런데 그 다음 날 다시 배 20소가 쓰시마 서해상에 나타났다고 한다. 쓰시마는 그 배들이 촉화( 燭 火 )로 서로 연락을 취하는 광경을 보고 적선( 賊 船 ) 이라 판 단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먼저 착안하였던 신라인 10명 가운데 5명을 살 해하기에 이르렀다. 나머지 5명은 일시 도주하였으나 후일 그 가운데 4명이 포 획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쓰시마는 병고( 兵 庫 )를 수비한다거나 군사를 배치하는 등 경비를 견고하게 하는 한편, 신라 방면에서 매일 밤 관찰 되고 있는 수상한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보고 를 받은 다자이후는 사정을 상세히 묻기 위해 신라역어( 新 羅 訳 語, 사료상에는 初 見 로 나와 있다) 및 군의( 軍 毅 )를 발견( 發 遣 )하였다고 한다. 35) 弘 仁 4 年 (813) 2월 9일자 히젠노쿠니[ 肥 前 國 ]의 해( 解, 문서의 한 형태)가 전하고 있는 오지카시마[ 小 近 嶋 ]에서 신라인 110명 가운데 9명을 죽이고 101 명을 포획한 사건에 대해서는 앞의 <사료 1> 부분에서 논한 대로이다. 이상의 두 건 모두 대규모 신라인 집단이 바다를 건너오는 과정에서 발생 한 사건인데, 이들은 당시 일본 측이 불특정 다수의 신라인이 내항하는 사태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생각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본 측이 그와 같은 현실을 그대로 방치하였던 것은 아 35) 日 本 後 紀 弘 仁 3 年 (811) 正 月 甲 子 (5 日 ) 條. <표 2>의 No.2에 해당한다.

81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81 니다. 새로운 상황에 맞추어 시의적절한 후속대책을 내놓고 있는 모습도 확인 할 수 있다. 오지카시마[ 小 近 嶋 ]에서의 사건을 하나의 계기로 하여 부디 분명 하게 문정( 問 定 )하여 만약 돌아가기를 원하면 원에 따라 돌려보내고 여기에 化 來 하고자 하는 자는 예( 例 )에 따라 진지( 進 止 )하라( 宜 明 問 定, 若 願 還 者, 随 願 放 還, 遂 是 化 來 者, 依 例 進 止 )와 같은 처분(=<사료 1>의 밑줄 친 부분)을 내 린 것도 그 일환이며, 쓰시마에서 일어난 弘 仁 2년(810)의 사건에 대해 다음의 <사료 4>와 같은 관부를 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료 4> 類 聚 三 代 格 巻 5 弘 仁 4 年 (813) 9 月 29 日 官 符 太 政 官 符 應 停 對 馬 嶋 史 生 一 員 置 新 羅 譯 語 一 人 事 右 淂 大 宰 府 解 偁, 新 羅 之 船 來 着 件 嶋, 言 語 不 通, 來 由 難 審, 彼 此 相 疑, 濫 加 殺 害, 望 請, 减 史 生 一 人 置 件 譯 語 者, 右 大 臣 宣, 奉 勅, 依 請, 弘 仁 四 年 九 月 廿 九 日 이것은 쓰시마의 사생( 史 生 ) 1명을 정폐하고 신라역어를 두도록 한 태정관 부이다. 모리 키미유키[ 森 公 章 ] 씨는 율령체제 성립 시에 일본 신라관계가 중 시되고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신라역어가 다이호령[ 大 宝 令 ] 제정 당초에 이미 다자이후에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이어 단 8세 기 혹은 그 이전부터 신라인이 빈번하게 경과( 經 過 )하고 있었을 쓰시마에서 새 롭게 신라역어 등의 설치 필요성이 통감되게 된 것은 9세기 초의 일이었다 고 하며 36) 弘 仁 4년(813) 신라역어 배치기사가 가지는 의의를 평가하고 있다. 분 명히 관부에서도 신라의 배( 新 羅 之 船 ) 가 쓰시마 방면으로 내착한다는 새로운 사정이 인지되고 있으며 언어불통 때문에 신라인의 내항 사유를 심문하기 어 렵고 피차 서로 의심하게 되어 빈번하게 살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 고 있다. 그와 같은 상태를 타파하기 위해 신라역어를 쓰시마에 배치하게 되었 다는 것이다. 36) 森 公 章, 1998, 앞의 글 참조.

82 8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日 本 後 紀 弘 仁 6 年 (815) 正 月 壬 寅 條 에 이날 쓰시마 사생 1명을 멈추고 신라역어를 두다 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사료 4>에서 언급된 요청은 실현된 듯하다. 앞서 다루었던 日 本 後 紀 弘 仁 3 年 (811) 正 月 甲 子 (5 日 ) 條 에서도 살해사건의 사정을 상세히 조사하기 위해 신라역어가 파견되었다고 하였는데 그 때의 경험이 신라역어 상치( 常 置 ) 방침으로 연결된 것이라 생각된다. 37) 사실 역어 양성의 필요성은 天 平 2 年 (730) 단계에서부터 언급이 되고 있 다. 제번( 諸 蕃 ), 이역( 異 域 )은 일본과 풍속이 같지 않기 때문에 역어가 없으면 의사소통이 곤란하다면서 미리 한어( 漢 語, 중국어)를 학습해 두도록 명하고 있 는 것이다. 38) 비록 신라역어와 직접 관련된 기술은 아니지만 역어의 역할이 언 어불통( 言 語 不 通 ), 언어난통( 言 語 難 通 ) 과 같은 소통 불능 상태 39) 가 이문화 간 충돌 내지 갈등으로 이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확인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라역어 배치와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弘 仁 12 年 (821) 단계에 나온 박사( 博 士 ) 배치 관부이다. <사료 5> 類 聚 三 代 格 巻 5 弘 仁 12 年 (821) 3 月 2 日 官 符 太 政 官 符 應 停 對 馬 嶋 史 生 置 博 士 事 右 得 大 宰 府 觧 偁, 嶋 司 觧 偁, 此 嶋 僻 居 溟 海 之 外, 遙 接 隣 國 之 堺, 所 37) 이 글의 취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湯 沢 質 幸, 2001, 古 代 日 本 人 と 外 國 語, 勉 誠 出 版 은 신라역어뿐만 아니라 大 唐 通 事 및 渤 海 通 事 등 고대 일본의 통역을 망라하여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울러 참고해주기를 바란다. 38) 続 日 本 紀 天 平 2 年 (730) 3 月 辛 亥 (27 日 ) 條 의 太 政 官 奏 에는 又 諸 蕃 異 域, 風 俗 不 同, 若 無 訳 語, 難 以 通 事 라고 나온다. 39) 언어불통 및 언어난통 의 용례로는 이 이외에도 확인된다. 먼저 일본후기 延 暦 18 年 (799) 7 月 是 月 조에서 參 河 國 에 표착한 천축인과 언어불통 이었다고 나오며, 다음으로 일본삼대실록 貞 觀 5 年 (863) 11 月 17 日 丙 午 조에서 新 羅 東 方 別 嶋 인 細 羅 國 人 54명이 丹 後 國 에 내착하였을 때 言 語 不 通, 文 書 無 解 라고 나온다. 한 편, 일본삼대실록 貞 觀 15 年 (873) 5 月 27 日 庚 寅 조에서는 薩 摩 國 甑 嶋 郡 에 표 착한 최종좌 일행(후에 발해국인으로 밝혀짐)과 처음에 言 語 難 通 상태라서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고 나온다.

83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83 任 之 吏, 才 非 其 人, 爲 政 之 要, 事 多 蒙 滞, 接 陸 之 國, 皆 備 彼 任, 絶 域 之 嶋, 猶 闕 此 官, 無 師 質 疑, 不 隣 往 問, 縦 令 諸 蕃 之 客, 卒 尓 着 境, 若 有 書 契 之 問, 誰 以 通 答, 望 請, 特 置 件 博 士, 且 以 敎 生 徒 且 以 備 専 對 者, 府 加 覆 審 所 申 有 理, 謹 請 官 裁 者, 右 大 臣 宣, 奉 勅, 宜 停 史 生 一 員 改 置 博 士, 弘 仁 十 二 年 三 月 二 日 이 사료는 쓰시마 사생 1명을 정폐하고 박사를 두도록 명하고 있는 태정관 부이다.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쓰시마[ 對 馬 ] 도사( 嶋 司 )의 解 에서는 명해( 溟 海 ) 바깥에 위치해 있고, 인국( 隣 國 )과 경계를 접하고 있는 쓰시마의 지리적 조건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상황에 놓인 쓰시마임에도 불구하 고 대외업무를 관장하는 관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제번( 諸 蕃 )의 객 ( 客 ) 이 갑작스레 내착하여 서계( 書 契 )의 문( 問 ) 을 제시하더라고 거기에 통답 ( 通 答 ) 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에 생도의 교육 및 전대( 専 對 ) 40) 에 대 한 접대가 가능한 박사를 쓰시마에 배치함으로써 문제를 해소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내용이 다자이후에 올라오자 다자이후는 그것을 다시 중앙에 제출하였고, 최종적으로는 태정관부로서 쓰시마로의 박사 배치가 명해 진 것이다. 그런데 <사료 5>에서는 박사 배치의 배경으로 제번의 객 (외국사신)의 내 항 가능성이 상정되고 있다. 게다가 서계, 즉 외교문서를 소지한 외국사절의 내항이다. 박사에게 요구되는 임무라는 것도 외교문서를 소지한 외국 사절이 내항하였을 때에 전면에 나서 대응하는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단 <사료 5>의 卒 尓 着 境 이라는 표현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이 일본 측으 로서는 외국 사절이 언제 내항할지조차 몰랐던 것 같다. 나아가 <표 1>의 No.6 40) 외교교섭의 장에서 독자로 판단할 수 있는 것, 혹은 사자로서 단독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자를 말한다. 여기서는 문서를 지참한 외국사절(공식사절)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続 日 本 紀 天 平 寶 字 4 年 (780) 9 月 癸 卯 (16 日 ) 條 ; 続 日 本 後 紀 承 和 3 年 (836) 12 月 丁 酉 (3 日 ) 條 에도 보인다. 정순일, 2013a, 속일본후기 所 收 신라 국 집사성첩에 보이는 島 嶼 之 人, 일본역사연구 37, 128쪽 참조.

84 8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에 보이는 것처럼 天 平 勝 寶 4 年 (752)에 신라왕자 김태렴이 방일한 사례를 바 탕으로 차후에도 신라왕자 레벨의 인물이 일본을 찾을지 모른다고까지 생각 한 모양이다. 41) 결국은 외국사절의 내항을 상정한 상시준비태세가 쓰시마에 기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寶 龜 12년(780) 신라사절 김난손 등이 귀국길에 오를 때 장차 일본을 방문하게 될 신라사절은 반드시 표문( 表 文 )을 지참시킬 것을 요구하고, 다자이후 및 쓰시마에 표문을 소지하지 않은 사절은 입경( 入 境 )시키지 말 것을 명령한 내용 42) 의 연장선에 있는 조치이기도 했다. 실제로는 弘 仁 年 間 이후 정식 외국 사절이 쓰시마 쪽으로 내항하는 일이 없었지만 일본 측은 외교문서에 대한 대응이 뛰어난 박사를 배치함으로써 외 교상의 예적( 禮 的 ) 문제는 물론 가짜 사절의 출현에도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 라 생각된다. 이상의 검토를 정리하면, 쓰시마에 신라역어를 배치한 것은 내항 사유가 불명확한 이국인 유입이 증가하고 수상한 배의 빈번한 등장이 확인되는 가운 데, 만에 하나 일어날 수 있는 트러블을 미연에 방지하고 내항 사유를 묻기 위 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박사 배치는 복수의 선박이나 대규모 집단이 내 항하는 가운데서 외교문서를 소지한 사신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를 상정한 조 치였다고 판단된다. 신라역어는 구두대응을, 박사는 문서대응을 전문으로 하 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弘 仁 5년(814) 5월 21일에는 應 大 宰 府 省 史 生 置 弩 師 事 로 시작하는 太 政 官 符 가 나온다. 43) 이 관부는 지난 延 暦 16년(797)에 행해진 노사정폐( 弩 師 停 廃 )를 개정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로부터는 延 暦 年 間 의 이국인 내항상황이 弘 仁 年 間 이후 크게 바뀌었음을 읽어낼 수 있다. 延 暦 年 間 의 내 41) 日 本 紀 略 弘 仁 5 年 (814) 5 月 乙 卯 (9 日 ) 條 에 制, 新 羅 王 子 來 朝 之 日, 若 有 朝 獻 之 志 者, 准 渤 海 之 例, 但 願 修 隣 好 者, 不 用 答 禮, 直 令 還 却, 且 給 還 糧 이라 나오는 것에서 弘 仁 期 에는 新 羅 王 子 의 내항도 상정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2) <표 1>의 No.12에 보이는 내용이다. 43) 類 聚 三 代 格 巻 5 弘 仁 5 年 (814) 5 月 21 日 官 符. 연해지역으로의 노사배치( 弩 師 配 置 )가 가지는 성격에 대해서는 鄭 淳 一, 2011, 앞의 글 참조.

85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85 항 공백 과 弘 仁 天 長 年 間 의 내항 쇄도 를 매우 잘 대비해 주는 사례라고 하 겠다. Ⅵ. 맺음말 고대 동아시아에서 인민의 국제이동은 자유로웠다 라고 하는 명제는 일면 옳 다고 할 수 있지만 일면 타당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 간의 경계 선이 근대국민국가의 출현 이후에나 탄생하였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근대 이전 의 사람들 특히 고대인의 월경행위( 越 境 行 爲 )에는 제한이 없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은 반드시 그렇다고 잘라 말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실제로 사 료를 검토해 보는 한 완전하게 자유이동을 허락받은 사람의 사례를 접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왕권과 같은 특정 권력에 기대어, 혹은 그 권력의 허가 아래에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자주 볼 수 있다. 현재의 우리들이 상상하는 명확한 국경선이 고대에도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특정 국가를 드나들 때에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제한, 규제, 감시, 확 인을 받고 있었던 듯하다. 특히 일본열도와 같이 안 과 밖 이 자연환경에 의한 경계로 나누어져 있는 경우, 경계에서의 자유롭지 못함 은 더욱 선명해진다. 여기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월경행위가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 자체 가 곧바로 이동의 적음 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사람들의 활발한 이동에 의해, 월경( 越 境 )에 대한 통제 실태가 명확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룬 신라역어의 배치라는 입국관리 강화 조치 또한 역설적이게도 쓰시마와 같은 연해 도서부에서 이루어진 역동적 교 류의 결과인 동시에 그 변경에서의 자유로운 왕래를 뒷받침해 주었던 요소인 것이다.

86 8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참고문헌 사료 舊 唐 書. 唐 會 要. 類 聚 國 史. 類 聚 三 代 格. 三 國 史 記. 続 日 本 紀. 続 日 本 後 紀. 安 祥 寺 伽 藍 縁 起 資 材 帳. 延 喜 式. 律 令. 日 本 紀 略. 日 本 三 代 実 録. 日 本 後 紀. 入 唐 求 法 巡 礼 行 記. 入 唐 五 家 伝. 平 安 遺 文. 弘 仁 格 抄. 연구서 및 논문 장종진, 2011, 圓 仁 의 入 唐 求 法 巡 禮 行 記 를 통하여 본 新 羅 譯 語, 한국고대사탐구 7. 정순일, 2013a, 속일본후기 所 收 신라국 집사성첩에 보이는 島 嶼 之 人, 일본역사 연구 37. 鄭 淳 一, 2013b, 縁 海 警 固 と 九 世 紀 の 黎 明, 일본학보 97, 한국일본학회. 정호섭, 2006, 신라하대의 사회변동, 한국고대사입문(3) 신라와 발해, 신서원. 榎 本 渉, 2010, 遣 唐 使 以 後 へ, 僧 侶 と 海 商 たちの 東 シナ 海, 講 談 社 選 書 メチエ. 榎 本 淳 一, 2008, 遣 唐 使 と 通 訳, 唐 王 朝 と 古 代 日 本, 吉 川 弘 文 館. 渡 邊 誠, 2012, 律 令 國 家 の 対 外 交 易 制 度 とその 変 容, 平 安 時 代 貿 易 管 理 制 度 史 の 研 究, 思 文 閣 出 版.

87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87 渡 邊 誠, 2012, 承 和 貞 觀 期 の 貿 易 政 策 と 大 宰 府, 平 安 時 代 貿 易 管 理 制 度 史 の 研 究, 思 文 閣 出 版. 東 野 治 之, 1993, 平 安 時 代 の 語 学 教 育, 新 潮 45 7 月 号. 李 成 市, 1997, 京 師 交 易 から 大 宰 府 交 易 へ, 東 アジアの 王 権 と 交 易, 青 木 書 店. 馬 一 虹, 1999, 古 代 東 アジアのなかの 通 事 と 訳 語 唐 と 日 本 を 中 心 として, アジア 遊 学 3. 山 内 晋 次, 2003, 朝 鮮 半 島 漂 流 民 の 送 還 をめぐって, 奈 良 平 安 時 代 の 日 本 とアジ ア, 吉 川 弘 文 館. 山 内 晋 次, 2012, 9~12 世 紀 の 日 本 とアジア 海 域 を 往 來 するヒトの 視 点 から, 専 修 大 学 東 アジア 世 界 史 研 究 センター 年 報 6. 森 公 章, 1998, 古 代 日 本 における 在 日 外 國 人 観 小 考, 古 代 日 本 の 対 外 認 識 と 通 交, 吉 川 弘 文 館. 森 公 章, 1998, 大 唐 通 事 張 友 信 をめぐって, 古 代 日 本 の 対 外 意 識 と 通 交, 吉 川 弘 文 館. 森 公 章, 2008, 遣 唐 使 と 唐 文 化 の 移 入, 遣 唐 使 と 古 代 日 本 の 対 外 政 策, 吉 川 弘 文 館. 森 克 己, 2009, 末 期 日 唐 貿 易 と 中 世 的 貿 易 の 萌 芽, 新 編 森 克 己 著 作 集 (2) 続 日 宋 貿 易 の 研 究, 勉 誠 出 版. 石 井 正 敏, 2003, 遣 唐 使 と 語 学, 歴 史 と 地 理 565. 遠 山 美 都 男, 1991, 日 本 古 代 國 家 における 民 族 と 言 語, 学 習 院 大 学 文 学 部 研 究 年 報 38. 遠 山 美 都 男, 1998, 日 本 古 代 の 訳 語 と 通 事, 歴 史 評 論 574. 田 中 史 生, 1997, 歸 化 と 流 來 と 商 賈 之 輩 律 令 國 家 における 國 際 交 易 の 変 遷 過 程, 日 本 古 代 國 家 の 民 族 支 配 と 渡 來 人, 校 倉 書 房. 鄭 淳 一, 2011, 貞 觀 年 間 における 弩 師 配 置 と 新 羅 問 題, 早 稲 田 大 学 文 学 研 究 科 紀 要 鄭 淳 一, 2013c, 延 暦 弘 仁 天 長 年 間 の 新 羅 人 來 航 者, 早 稲 田 大 学 大 学 院 文 学 研 究 科 紀 要 鄭 淳 一, 2015, 九 世 紀 の 来 航 新 羅 人 と 日 本 列 島, 勉 誠 出 版. 佐 伯 有 清, 1970, 九 世 紀 の 日 本 と 朝 鮮, 日 本 古 代 の 政 治 と 社 会, 吉 川 弘 文 館. 佐 伯 有 清, 1983, 新 撰 姓 氏 録 の 研 究 研 究 篇, 吉 川 弘 文 館. 酒 寄 雅 志, 2009, 渤 海 通 事 の 研 究, 栃 木 史 学 2.

88 8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湯 沢 質 幸, 1999, 古 代 日 本 新 羅 間 における 使 用 言 語, 日 本 学 報 43, 韓 國 日 本 学 会. 湯 沢 質 幸, 2010, ( 改 訂 増 補 ) 古 代 日 本 人 と 外 國 語 ー 東 アジア 異 文 化 交 流 の 言 語 世 界, 勉 誠 出 版. 荒 野 泰 典, 1993, 通 訳 論 序 説, アジアのなかの 日 本 史 ( 五 ) 自 意 識 と 相 互 理 解, 東 京 大 学 出 版 会. 横 山 伊 勢 雄, 1995, 北 東 アジア 世 界 の 漢 詩 と 外 交, 環 日 本 海 論 叢 8. 黒 板 伸 夫 森 田 悌 編, 2003, 訳 注 日 本 史 料 日 本 後 紀, 集 英 社.

89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89 [국문 초록]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정순일 이 글에서는 고대 일본열도의 변경에서 전개된 이문화 간 접촉 교류 양상에 주목하여, 그 최전선에서 기능한 통역의 실태에 대해 검토하였다. 특히 불특정 다수의 신라인이 열도사회를 빈번하게 왕래하기 시작하는 9세기 초에 초점을 맞추어, 이질문화의 충돌과 융합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통역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검토 결과, 쓰시마로의 신라역어(통역) 배치는 내항 사유가 불명확한 이국 인 유입이 증가하고 수상한 배의 등장이 빈번하게 확인되는 가운데서 만에 하 나 일어날 수 있는 트러블을 미연에 방지하고 내항사유를 묻기 위해 행해졌음 을 알 수 있었다. 한편, 박사 배치는 복수의 선박이나 대규모 집단이 내항하는 가운데서 외교문서를 소지한 사신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를 상정한 조치였음을 밝혔다. 신라역어는 구두대응을, 박사는 문서대응을 전담하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대에는 인민의 국제이동이 자유로웠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일이 많은데, 문헌자료를 검토해 보면 그렇게 잘라 말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인민들이 국가와 국가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우, 어떤 형태로든 제한, 규제, 감시, 확인을 받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다만 월경행위( 越 境 行 爲 )가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곧바로 이동의 적음 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는 유 의해야 한다. 오히려 사람들의 활발한 이동이 있었기 때문에 월경( 越 境 )에 대 한 통제 실태가 기록상에 남게 되고, 또 그래서 그러한 규제 실태가 보다 명확 해진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다룬 신라역어(통역)의 배치라는 입국 관리강화 조치 또한 역설적이게도 쓰시마와 같은 연해 도서부에서 이루어진

90 9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역동적 교류의 결과인 동시에 그 변경에서의 자유로운 왕래를 뒷받침해 주었 던 요소인 것이다. 주제어 변경, 통역, 신라역어( 新 羅 譯 語 ), 박사( 博 士 ), 쓰시마( 對 馬 島 )

91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91 [ABSTRACT] Borderlands of Japan and Interpretations in the Early Ninth Century Focusing on Silla yeogeo( 新 羅 譯 語 ) Used in Tsushima Chong Soonil This study focuses on contact and exchange between different cultures in the borderland areas of the ancient Japanese islands and examines the actual condition of interpretation in those regions. In the early ninth century, an unknown number of Silla people frequently went to the Japanese islands. The specific roles of interpretation in the context of conflict and of the blending of different cultures are examined. The use of Silla yeogeo( 新 羅 譯 語 ), or oral interpretation between Tsushima and Silla, aimed to prevent possible trouble and also inquired into reasons for visits to Silla as the influx of foreigners whose reasons for visiting were uncertain increased and suspicious ships frequently appeared. The assignment of a baksa( 博 士 ), or a translator of written texts, was a measure to treat envoys bearing diplomatic documents among a group of ships or large groups. In other words, the Silla yeogeo handled spoken communication while the baksa focused on written documents. It is a common idea that in the ancient period people freely crossed a country s border, but extant records show the difficulty of making a categorical statement in that regard. Those who crossed a border met restrictions, regulations, supervision, and confirmation, although the

92 9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fact that people were not totally free to cross the border did not necessarily mean the rarity of trans boundary movement. Rather, there are numerous records regarding control of border crossing because people did so frequently, and regulations in that context have come to be clarified. The Silla yeogeo discussed in this article was essentially a measure to strengthen immigration controls. However, ironically, it also was a result of the dynamic exchange between the two countries near islands, such as Tsushima, and the coastal areas, as well as being an indication of frequent transit in borderland areas. Keywords borderlands, interpretation, Silla yeogeo, baksa, Tsushima

93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93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김득중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Ⅰ. 머리말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함에 따라, 일본 식민지였던 조 선은 역사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 새로운 시작이 어떻게 귀결될지는 누구도 확실하게 얘기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제국주의 식민지라는 국제관계 를 탈피하고 민족 단위의 국가를 수립하여 국제관계 속의 일원으로 주체적으 로 참여한다는 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한반도에서 새로운 시작은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는 동시에 승전국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점령 과 함께 진행되었다. 만주에 진입한 소련군은 관동군을 격퇴하고 8월 초에 북한지역에 진출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이들을 패퇴시켰다. 이에 비해 기나긴 남태평양지역 전투를 통해 오키나 와에 진입했을 따름이었던 미군은 소련의 남진을 우려하여, 38선을 경계선으 로 하는 관할권역(zone) 분담을 제안하였다. 연합국으로 공동의 적을 대상으 투고: 2015년 11월 19일, 심사 완료: 2016년 2월 16일, 게재 확정: 2016년 2월 24일

94 9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로 협력 관계를 가지고 있던 소련은 이 제안에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수용하였다. 이와 같이 1945년 8월과 9월에는 해방은 홀로 온 것이 아니었다. 1945년 8 월과 9월에는 한반도에서는 일제의 패퇴와 해방, 그리고 38선 분할과 점령 이 라는 두 가지의 결정적 사건이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이러한 사건의 중첩이 1945년 1948년 사이에 발생한 사건뿐만 아니라, 정부 수립(1948)과 한국전쟁 (1950)을 결정짓는 구조적 요인이 되었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945년 여름에 발생한 해방 과 점령 이라는 두 가지 계기는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결정 짓는 분수령이었다. 이 두 가지 계기에 대해서 많은 연구들이 있어 왔지만,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군사 점령의 논리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지 않다. 1) 연합군은 전후 처리 과 정에서 이탈리아, 독일, 일본 등의 적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했고, 점령 후에는 이들 사회에 대한 대대적인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38선 분할은 군사적 점령을 통해 보증되었고, 군사적 점령은 영토 분할의 선결 조건이었다. 한반도에 대한 미소 군사점령은 식민지에 대한 점령이라는 점, 즉 독일이나 일본 등 연합국에 맞섰던 적대국가 점령이 아니라, 일본에 의 해 식민지화되었던 국가에 대한 점령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미군의 한반도 점령은 전투를 통한 점령이 아니라, 평화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조선 인민은 미군과 소련군을 해방군 으로 환영했고, 해방자적 존재로써 그들 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자로서의 그들의 존재는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종료되었고, 미군정은 자신을 새로운 주권자이자 자치정부이자 국가건설자로 서 정립해 갔다. 이 글은 1945년 미군의 남한 점령을 스스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이 를 정당화하는 국제법적 근거는 무엇이었는지를 당시 미군정의 법률 고문이었 1) 군사적인 측면에서 점령을 다룬 연구로는 김기조, 2006, 한반도 38선 분할의 역 사, 한국학술정보(주); 이완범, 2001, 삼팔선 획정의 진실, 지식산업사 등을 참조 할 수 있다. 이 연구들은 38선 분할 정책이 어떤 과정을 통해 결정되었는지를 논구 하고 있지만, 점령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95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95 던 에른스트 프랑켈의 글을 통해 확인해 보고자 한다. 2) 미군정이 자신의 존재 와 의미를 국제법적 관점에서 검토한 예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1948년 미군 정이 종료되기 반년 전에 작성된 에른스트 프랑켈의 글은 국제법적 관점에서 미군정을 검토한 거의 유일한 문서이다. Ⅱ.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 연구: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 창출과 독일 한국의 포섭 에른스트 프랑켈(Ernst Fraenkel, ) 3) 은 독일 쾰른의 부유한 유태 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자유주의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프랑켈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그의 선생이었던 후고 진츠하이머(Hugo Sinzheimer)는 노동법의 아버지라고 불린 사회민주주의 성향을 가진 법학자 였다. 프랑켈의 주요한 관심은 노동법, 노동조합법을 비롯한 공법 분야였다. 재학 중이던 1919년 그는 학교에서 프란츠 노이만(Franz L. Neumann) 등과 함께 사회주의학생그룹을 조직하기도 했고, 이러한 진보적 정치성향에 따라 1921년에 독일 사민당(SPD)에 가입하였다. 4) 1927년부터는 베를린에서 변호사 2) 프랑켈(Fraenkel)에 대한 국내 연구는 최경옥, 2005, 미군정하의 사법부와 제헌헌 법의 성립과정 Ernst Frankel(sic!)의 논평과 관련하여, 한국공법학회, 공법연 구 제34집 제2호; 김종구, 2013, 미군정기 미법률고문과 대륙법 및 영미법의 교 착 프랭켈, 퍼글러, 오플러를 중심으로, 법학논총 제20집 제2호; 박용희, 2014, 민주주의 학문 으로 정치학의 도입? 전후 서독 정치학 성립 과정의 민주 주의와 미국 인식, 독일연구 제28호가 있다. 3) 프랑켈의 저술은 독일에서 출간된 Ernst Fraenkel, 1999, Gesammelte Schriften, Baden Baden, Nomos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한국과 관련된 저술은 제3권에 주로 수록되어 있는데, Military Occupation and the Rule of Law도 3권에 실려 있다. 4) Michael Wildt, 2003, Ernst Fraenkel und Carl Schmitt. Eine ungleiche Beziehung, p.2. kunden.net/wildt/download/wildt%20

96 9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로 활동하였고, 사회주의 이론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면서 노동법 관련 논문을 집필하였다. 한편, 나치의 위협으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진 프랑켈은 1938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시카고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하였고 단기간에 미국 변호사 자격을 획득하였다. 프랑켈은 나치 체제를 비판한 이중국가 를 미국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하 였다. 5) 나치 체제를 전체주의 국가로 본 프랑켈은 나치 체제가 대권국가라는 형태와 규범국가라는 두 개의 국가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대권국가 란 무 제한의 폭력을 행사하는 통치 시스템이지만, 규범국가 는 제정법 재판소 판결 과 같이 행정기관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법 질서를 지키기 위해 권한을 부여받 은 행정체이다. 나치 체제는 이 두 가지 체제가 병존하는 이중국가 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중국가 는 법을 통해 나치 체제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려 는 시도였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는 나치 체제를 수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법학자 칼 슈미트(Carl Schmitt)에 대한 대결의 산물이기도 했다. 이 책 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인 슈미트는 의회 민주주의의 취약점을 날카롭 게 비판하고 예외 상태 개념으로 나치의 통치를 합리화했던 인물이다. 법학자 일 뿐만 아니라 근대 정치와 전쟁, 국제법에 대한 보수적 해석을 통해 나치의 정당성을 뒷받침했던 것이 법학자 슈미트였기 때문에, 프랑켈은 그에 대해 비 판적 입장을 시종 견지하였다. 프랑켈이 자신의 전공을 살려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게 된 것은 1942년 부터이다. 이때부터 프랑켈은 카네기재단에서 독일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하였 다. 프랑켈이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의 라인란트지역 점령을 다룬 저서 군 Fraenkel%20und%20Schmitt.pdf 2015년 4월 검색. 이 논문은 Daniela Münkel, Jutta Schwarzkopf(Hg.), 2004, Geschichte als Experiment: Studien zu Politik, Kultur und Alltag im 19. und 20. Jahrhundert, Campus에 실려 있다. 5) Ernst Fraenkel, 1941, The Dual State: A Contribution to the Theory of Dictatorship, Oxford University Press(エルンスト フレンケル 中 道 壽 一 譯, 1994, 二 重 国 家, ミネルヴァ 書 房 ).

97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97 사 점령과 법의 지배 (1944)를 간행하는 데 도움을 준 것도 카네기재단이었 다. 6) 라인란트 점령은 전후 독일 점령에 역사적 시사점을 줄 수 있는 매우 유 용한 소재였다. 이 연구는 독일 점령을 예상하고 진행되었다. 7) 프랑켈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에 전략정보국(OSS) 산하 대외 경제부에 들어갔다. 전략정보국은 독일과 일본 등 적국의 정보를 수집, 정리하 여 적에 대한 선전과 심리전을 수행한 정보 기관이었고, 전후에는 중앙정보국 (CIA)로 변화되었다. 프랑켈은 이 조직에서 독일 점령계획을 작성하는 일에 종 사했다. 이 시기에 프랑켈의 사회 정치인식은 상당히 변화하였다. 그는 원래 정치 적 좌익에 속해 있었고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익숙했으며, 이에 따라 미국식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은 미국 정치문화와 시스템에 대한 평가를 우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로 규정하는 한편 미국 정치 체제를 공산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상정하였다. 1945년 독일 점령지에서 일해 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이를 거절한 프랑켈은 전쟁성 민간 사무원으로 1946년 주한 미군정의 법률 고문에 부임하였다. 제2 차 세계대전 중의 그의 활동은 전후 점령 케이스에 대한 연구와 이를 둘러싼 국제법에 집중하였는데, 남한에 부임한 그는 점령과 군정이라는 자신의 이력 과 전공 분야를 살려, 사법부 법률조사국장(Chief of the Research Bureau of the Department of Justice)을 지냈고, 법률심의국(Legal Opinions Bureau) 에서 미군정의 남한 통치에 필요한 법률 해석에 관한 일을 맡았다. 사법부 법 률심의국 초대국장으로 1년 반 정도를 근무하면서, 그는 거의 모든 법령 해석 의 승인자 역할을 수행했다. 프랑켈은 국제법 전문가로서 1946년부터 1947년까지 미소공동위원회에 서, 1948년에는 유엔조선임시위원단(UNTCOK)에서 고문과 연락관으로 활동 6) Ernst Fraenkel, 1944, Military Occupation and the Rule of Law: Occupation Government in the Rhineland 1918~1923, Oxford University Press. 7) Ernst Fraenkel, 1944, 위의 책, Introduction.

98 9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하였다. 사실 이 두 조직은 소련과 유엔과 관계된 것으로서, 미군정 시기에 가 장 중요했던 대외 관계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켈은 미군정과 유엔조선 임시위원단 간의 연락관 역할을 하면서, 주한미군정의 구조 라는 중요한 보 고서를 작성했다. 이 글은 미군정의 역할과 법적 지위를 논의하고 있는 흔치 않은 법적 검토 보고서이다. 8) 그의 활동은 미군정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국 헌법 제정과 정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남한정부 수립 과정에서 프랑켈은 1948년 7월에 제헌헌법안에 대한 논평서를 작성하기도 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1951년 독일 귀국을 결정하였 고, 베를린자유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영구 귀국하였다. 그가 귀국한 독일은 전 전, 전중 독일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세계의 기본 질서가 다시 구축되었 기 때문이다. 미국은 독일 점령 초기부터 독일 사회의 전면적 개혁을 목표로 삼고 있었고, 이는 나치의 잔재를 말소하고 민주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보장하 는 재교육(reeducation) 정책으로 공식화되었다. 전후 독일에 민주적인 정치 문화와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건설하려 했던 미국은 교육과 문화 부문에서도 이러한 정책을 꾸준하게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도입된 것 중의 하 나가 정치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의 재편이었다. 9) 독일 학계에서는 정치학을 미 국의 학문으로 간주하여 거부하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미국의 적극적인 전후 개혁 활동으로 미국의 사회과학은 독일 학계 내에 서서히 자리잡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 망명했던 독일 유대인 정치학자들, 예를 들면 칼 프리드리히 (Carl J. Friedrich), 프란츠 노이만 같은 학자들과 함께 에른스트 프랑켈 등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베를린에 돌아온 프랑켈은 학술적 개인적 경험에 기반하여 미래 독일의 엘 리트에게 민주적 가치와 규칙을 전달하고, 이를 통해 서구적 민주주의 사회를 8) 이 보고서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는 다음 장에서 한다. 9) 박용희, 2014, 앞의 글, 155쪽.

99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99 구축하는 데 기여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였다. 10) 그가 재임했던 독일 일 베를린자유대학과 오토 주르연구소는 독일 정치학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중심에는 프랑켈이 있었다. 1960년대 유럽에서 학생운동의 바람이 거세게 불자, 프랑켈은 학생들로부 터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와 우호적 태도,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무비판과 지지가 주요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프랑켈은 학생운동 세력을 나치 폭도와 다름없다 고 비판했다고 한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프랑켈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 의식은 나치의 억압 과 뒤이은 미국 망명생활을 거치면서 상당히 변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관이 얼마나 변화하였는지를 명확히 밝혀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미 국 망명생활을 통해 형성된 우호적 미국관, 미국의 팽창적 행태에 대한 무비판 적 접근, 대의제적 다원주의적 질서를 기본으로 하는 미국식 민주주의 문화 와 제도에 대한 믿음은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켈의 이력에서 주목할 부분은 냉전 시기 독일 한국의 학문, 정치 영역 에 끼쳤던 미국의 영향력이다. 프랑켈은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인 독일 출 신으로 독일 나치즘에 매우 비판적인 법학자였고, 소련에 대항할 체제로서 미 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법학자였다. 그의 사고에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사회민주주의적 관념과 더불어, 나치 체제를 법리적으로 옹호했던 나치 법학 자들에 대한 투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것이 과거의 시간이라면, 프랑켈이 1945년 한국에 부임했을 때 그에게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우월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미국은 아시아에 있는 신생 국가의 미래로 여겨졌다. 프랑켈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사고와 역사 인식은, 전후에 일제 잔재를 몰아내고 미국에 우호적 인 정부를 남한에 세우고자 했던 미군정에게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10) Hans J. Lietzmann, ed. 1996, Politikwissenschaft. Geschichte und Entwicklung in Deutschland und Europa(Müunchen, Oldenbourg Wissenschaftsverlag), p.38(박용희, 2014, 앞의 글, 163쪽에서 재인용).

100 10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이미 언급한 대로 미국이 독일 정치학 성립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칠 때 프 랑켈은 주요한 역할을 했지만, 프랑켈은 한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미군정 시기의 정치적 경제적 정책은 물리적 힘으로만 달성될 수는 없었고, 법적 질서의 수립과 이에 대한 정당화 과정을 수반하였다. 미군정의 법 해석과 운용은 남한의 기본 질서를 만들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법질서를 완전히 부정 한 미군정은 점령에 기초하여 완전히 새로운 법질서를 구축해 갔고, 미군정의 활동은 3년간의 통치와 제헌헌법 등을 통하여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 상당 부 분 계승되었다. 프랑켈은 미군정에 근무하면서, 법 해석을 통한 자문의 형태로 그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처럼 미군정 법적 활동의 중심에는 프 랑켈이 있었다. 프랑켈은 한국을 떠났지만, 한국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었 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한국전쟁이 국제법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국제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논문을 작성했고, 이 논문은 몇 년 뒤 한국에서 번역되었다. 11) Ⅲ. 조선은 무주지( 無 主 地 ) 인가? 주한미군(정)은 남한 점령에 대한 국제법적 해석을 거의 시도하지 않았다. 1947년 9월, 2년 동안 진행되었던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실상 결렬되어 한국문 제가 미소의 손을 떠나 유엔(UN)으로 이관되었다. 1948년 초, 유엔조선임시위 원단은 남북조선 총선거 실시를 통해 한반도 정권을 수립하고자 남한에 입국 11) Ernst Fraenkel, 1951, Korea Ein Wendepunkt im Vöolkerecht? [Korea A Turning Point of International Law] Schriftenreihe der Deutschen Hochschule für Politik. Berlin, Gebrüer Weiss Verlag; Ernst Fraenkel, 이영 재 역, 1958, 한국에 관한 국제법상의 제문제,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법정논총.

101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101 했다. 유엔조선임시위원단 활동에 적극 협조했던 미군정은 남한 점령의 근거와 미군정의 역할, 간략한 활동 내역을 담은 문서를 위원단에 제공하고자 했다. 주한미군정의 구조 라는 이 보고서는 프랑켈이 작성하여 완성했지만, 위원단 에 정식으로 제출되지는 못하였다. 12) 이 보고서는 미군정의 법적 위치를 분명 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보고서 이전에 남한을 점령한 미군이 국제법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검토한 적은 거의 없는 것 으로 보인다. 미군정은 남한에서 현실적인 지배력을 배타적으로 행사하고 있 었기 때문에 굳이 점령의 국제법적인 정당성을 검토해야 할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령을 선언하는 맥아더 사령관의 일반명령 제1호에서 나타 나듯,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미군의 점령 형식과는 달리 포고 내용은 대단히 배 타적이고 위압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일본과 일 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 대한 점령 내용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 보고서 앞부분에서 프랑켈은 미군의 남한 점령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자 조선은 일제 통치 이전의 국가로 부활되지도 않았고 새 로운 국가도 수립되지 않았다. 일본으로부터 조선의 분리는 1910년 8 월 29일 합병조약의 파기를 통해 성취된 것이 아니다. 결국 조선의 해 방은 조선인민의 혁명적인 행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통치는 전승국의 결의와 미소에 의한 결의의 실행을 통하 12) 원 자료는 Ernst Fraenkel, 1948, Structure of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History of the Bureau of Domestic Commerce thru USAMGIK: Press Releases July Sept. 1946(2 of 7), USAFIK, XXIV Corps, G 2, Historical Section, Records Regarding the Okinawa Campaign, USAMGIK, Box No. 23, Record Group 332. 영인본으로는 Structure of the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in Ernst Fraenkel, 1999, Gesammelte Schriften, vol. 3, Baden Baden, Nomos; Ernst Frankel, Structure of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정용욱 편, 1994, 해방직후 정치사회사 자료집 2권, 다락방. 번역본으로는 에른스트 프랑 켈, 1988, 주한미군정의 구조, 한국현대사연구, 이성과현실사)가 있다.

102 10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여 종식되었을 따름이다. 1945년 8 9월에 미군과 소련군이 조선을 점 령했을 때 그들은 국제법 관점으로 보아 임자 없는 땅 (no man s land)을 점령한 것이었다. 13) 조선이 주인 없는 땅 이었기 때문에 미군의 군사 점령이 정당하다는 이 짧 은 논리의 문장은 점령에 대한 미군정의 태도를 분명히 보여주지만, 이 언명을 옹호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첫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일본 통치의 종식이 오직 미소의 힘으로만 이루어졌다 는 언급이다. 일본 패망의 결정적 요인이 미국과 소련의 군사력이 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을 적으로 하는 연합군의 활동에 조선인이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직 미소만의 힘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제 식민지 시기에 진행되었던 조선 인민의 독립운동 활동을 시야에 두 지 않은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멀리는 1919년의 3 1독립운동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광복군과 임시정부 활동에 이르기까지 그 활동 강도의 고저는 있을 지언정, 조선 인민에 의한 독립운동은 꾸준하게 전개되었다. 세계대전에서 조선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단지 미국 조선 관계만 의 문제만은 아니다. 국제회담에서 한국 독립 문제는 전후 처리에서 회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1943년 미 영 중이 합의한 카이로선언이 조선을 일제의 지배 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적절한 시기 에 한국을 독립시킨다고 천명한 것은, 비록 다자간 국제신탁통치를 염두에 둔 모호함이 남아있었지만, 조선독립에 대한 국제적 인정이었다. 14) 또한 포츠담선언은 일본 영토를 4개 도서와 그 인근 섬 으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는 일본 지배에서 풀려나 독립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13) Ernst Fraenkel, 1948, 앞의 책, pp ) Full Text of Agreement Reached by Allies at Cairo, Washington Post, ; Department of State, 1961,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Diplomatic Papers The Conferences at Cairo and Teheran 1943,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Washington D. C., pp

103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103 일제 식민지하에서 조선인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기도 하였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임시정부로서 승인받지 못하였다. 식민지 조선이 정부 를 가지지 못했다는 점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정부수립은 일제가 물러난 직후부터야 시작될 수 있을 뿐이었 다. 그런데 프랑켈은 정부 공백 을 언급한 다음 문장에서 이를 주권 의 부재와 바로 연결시키고 있다. 정부의 부재와 주권은 서로 관련을 가지고 있지만, 두 가지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식민지 치하에서 갓 해방된 조선의 경우에 는, 정부는 없었지만 식민지 시기 이전에 엄연한 독립국가였다는 점, 인접한 다른 국가와는 구별되는 인민 과 영토 를 명확히 규정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주권 부재를 강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프랑켈은 주권 부재를 통해 점령을 합리화하는 논리를 펴 나갔다. 15) 미국은 남한 점령이 국제 협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며, 전후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한 점령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일본군 무장해제, 즉 군사적 목적을 위한 점령이라는 미군의 입장은 점령을 정당화하는 기본적 언명이었다. 그러 나 일본군 무장해제는 1945년 말이 되면 이미 모두 종료하게 된다. 두 번째로, 조선이 임자 없는 땅 이기 때문에 군사 점령이 가능했다는 주장 이다. 여기에서 임자가 없다는 것은 거주하는 주민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주권 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영토, 주권(권력), 국민의 세 가지 요소가 근대국가의 구성 요 건이라 말한다. 국가로 인정받는다는 것(이것은 보통 강대국이나 유엔 같은 국 15) 이 부분에 대해서 프랑켈은 1951년 논문에서 1948년과는 다른 의미의 주장을 하고 있다. 즉, 카이로선언은 제3국을 위한 국제적 협정인 카이로선언에 한국이 하나 의 국가적 통일로 단결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 어떤 차별을 둘 수 없으며 이 회담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고 하였다. 카이로선언은 한국을 국민의 지리적 통일체로 상정하고 있다 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만이 아니라 개인이나 집단이 권리와 의무의 지참자가 될 수 있다 라고 하면서, 밸푸어선언을 기초로 하여 유대 민족이 국제법에 근원을 두고 팔레스타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 같이 한민족도 자유와 독립에 대한 국제법의 요구를 가질 수 있다 고 주장했다. Ernst Fraenkel, 이영재 역, 1958, 앞의 글, 42쪽.

104 10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제기구의 승인을 통해 이루어진다)은 안정된 권력, 명확한 국경, 정주하는 국 민의 세 가지를 구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6) 국제법에서 주권자가 존재하 지 않는 지역을 무주지( 無 主 地, Terra nullius) 로 규정하고, 최초로 점유한 자 가 이 땅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다는 이른바 선점의 논리 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식민지를 지배할 때 유럽 제국주의가 즐겨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식민지 지배 논리로 사용되던 무주지 논리는 무력 점령에 기반하고 있다. 무주지론은 무력 점령의 법적 정당화 논리이자, 유럽 국가 내부에서 극심하게 전개되던 식민지 쟁투를 관리하기 위한 규범으로 작동했다. 이러한 법적 규정 을 탄생하게 한 것은 무력 점령이었지만, 세계를 문명/야만 의 도식으로 구분 하는 것을 통해 이념적으로 더 한층 정당화되었다. 17) 북미 인디언, 남미 거주 민, 태평양 원주민들은 모두 야만인으로 취급당하였다. 일본이 맨 처음 식민지 화했던 홋카이도는 원래 아이누 민족이 생활한 터전이었지만, 일본은 원주민 은 현재 살고 있는 땅에 거주할 권리, 또 그대로 현재의 영주의 신민이 될 권리 가 없다 고 규정하였다. 국제법이 정당화시킨 무주지 식민지 논리는 스스로 문 명국이라 자부하던 국가가 원주민에게 가한 물리적 폭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념적 폭력이기도 했다.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 같이, 일본도 무주지론을 이용하였다. 러일전쟁 발 발 직후인 1905년, 일본은 독도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무주지라는 명목 으로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였던 것이다. 18) 16) 주권의 문제는 근대 정치철학의 중요한 문제다. 최근 국제법에서는 정부가 붕괴한 다 하더라도 주권은 넘어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권은 국가와 정부에게 있는 것 이 아니라, 주민에게 거주민에게 인민에게 있기 때문 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17) 마키하라 노리오[ 牧 原 憲 夫 ], 2012, 민권과 헌법, 어문학사, 쪽. 한 외 교사학자는 무주론과 제국주의의 연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팽창 과 제국주의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국가 승인의 창조적인 효과설과 무주지를 언 급하면 충분하다. 김용구, 2002,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 문학 과지성사, 64쪽. 18) 독도를 둘러싼 무주지론에 대해서는 박근배, 2005,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역권원 주장에 관한 일고찰: 고유영토론과 선점론, 국제법학회논총 50; 곽진오, 2012, 일본의 독도 무주지선점에 관한 고찰, 일본문화학보 Vol. 54; 中 野 徹 也,

105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105 이 점에서 군사 점령을 정당화하는 국제법의 무주지론은 폭력의 다른 이름 에 불과했고, 국제법을 만들고 받아들인 유럽 제국에게는 스스로와 이웃 나라 들을 납득시키는 자기 기만적 법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추축국과 연합국의 전쟁이었지만 식민지 민족에게는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이기도 했다. 세계 대전 초기 미국과 영국이 공표한 대서양헌장은 영토나 세력 확장을 추구하지 않는다 는 점을 내세웠고, 이는 연합국의 전쟁 명분을 드높이는 주요한 이념적 자산으로 기능했다. 또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군사점령이란 자유롭게 선점할 수 없는 토 지 에 대한 문제라는 점이다. 조선이 누구나 자유롭게 차지할 수 있는 그러한 토지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점령을 옹호하는 논리로서 무주론은 설 자리가 없 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도 무주론의 논리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해방 후 미군정은 조선인들은 적성국가의 국민임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 고 해방된 인민으로 간주하게 했 지만, 19) 기존 제국주의 국가가 내세웠던 무주 론을 다시 들고 나와 남한 점령을 합리화한 것은 강대국들이 내세웠던 민족 자 결이라는 이념적 좌표를 흔들어버리고 자국 이익을 위해 과거로 복귀하는 시 도로 비추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논리는 식민지는 식민지였기 때문에 식민지 대우를 받아야 한다 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전후 남한 점령에서 등장한 무주 론은 과거 식민지 침략을 자행했던 제국들과 공모하는 것이었고, 한반도 분할 에 같이 참여한 소련과 공유하는 지점이었다. 이런 점에서 무주론은 다른 제국 과 공모를 가능하게 하는 국제법적 형식에 다름 아니었다. 20) 2012, 1905 年 日 本 による 竹 島, 領 土 編 入 措 置 の 法 的 性 質, 関 西 大 学 法 学 会, 関 西 大 学 法 学 論 集 第 61 巻 第 5 号 ; 김수희, 2013, 독도는 무주지인가, 일본 문화연구 Vol. 47; 곽진오, 2014, 일본의 독도고유영토 무주지 선점 그리고 국 제법적 주장의 허구와 한계, 일본문화학보 Vol. 62 등을 참조. 19) 국사편찬위원회, 2014, 주한미군사 1 History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 Ⅰ, 89쪽. 20) 칼 슈미트는 유럽 제국 공간의 팽창을 법적으로 조정한 국제법 논리의 변화를 검 토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유럽 공법에서 공간 획정은 주로 신대륙과 식민지 분할 을 둘러싸고 이루어졌다. 스페인 포르투갈 사이의 경계선인 라야(raya)는 최초의 구별이었고, 그 후 프랑스 영국 사이에 우호선(amity line)이 등장하였다. 슈미트

106 10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임자없는 땅 이라는 프랑켈의 주장은 일본 패망 직후에 전개된 역사적 사 실을 무시한 채 유럽국제법의 노후한 논리로 점령을 정당화하려는 무리한 시 도였다. 남한에서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려는 활동이 8월 15일 이후 계속 나타 났기 때문이다. 한편, 소련도 한반도 북쪽을 미군과 동일하게 군사적으로 점령 했지만 북한이 무주지이기 때문에 소련군에게 주권이 있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각 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 조직을 인정했다. 프랑켈이 보고서를 작성한 3년 뒤인 1951년, 프랑켈은 1948년의 언급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프랑켈은 한국문제를 다룬 논문에서 한국은 황무지인 가? 주인 없는 영토인가? 이 사실은 국제법상 하나의 불가사의한 것이다 라고 언급하였다. 미군정 시기에 작성한 보고서와는 달리, 1951년 당시 프랑켈은 어 느 조직에도 구속되지 않았던 자유로운 몸이었다. 이때, 프랑켈은 조선(한국) 이 무주지 라는 그의 예전 주장에 스스로 의문을 던지면서, 그 주장을 수정하 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21) 사실 조선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무주지론을 전개한 인식에도 문제가 있지만, 미국의 점령지 통치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연합국의 점령 목적은 현존하는 파시스트와 나치 정권과 그 기구를 완전히 몰아내려는 것이었다. 이 는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 으로 실현 가능하게 되었다. 전후 미군은 일본에서는 기존 일본 제국 정부 기관을 그대로 이용하는 간접통치 방식을 사용한 데 비 하여, 남한에서는 군이 직접통치 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적이었던 추축국 일본 보다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더욱 더 강력한 지배 방식이 이용되었다. 는 대지의 질서를 명확하게 밝히는 유럽국제법의 전통은 미국의 등장으로 인해 무 질서로 변화되고, 유럽 사회에서 준수되던 공간 질서가 무너졌다고 주장한다. 칼 슈미트, 최재훈 옮김, 1995, 대지의 노모스, 민음사. 21) Ernst Fraenkel, 이영재 역, 1958, 앞의 글, 43쪽.

107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107 Ⅳ. 미군정의 국가 만들기 식민지를 경과한 조선이 주권을 비롯한 국가의 모든 요소를 갖추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주권을 세우 고, 인민을 대표하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과정은 미군정 점령 에 의해 좌절되었다. 미군정이 주장한 것처럼 조선이 원래부터 무주지인 것이 아니었다. 조선을 무주지로 만든 것은 미군정 통치의 결과였다. 일본 패망과 미군의 남한 진주 사이에는 약 20여 일간의 공백( )이 있었다. 22) 프랑켈은 한국의 해방은 조선인들의 혁명적인 행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승국의 결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선은 일제 통치 이전의 국가로 부활되지도 않았고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지도 않았다 고 말하 였는데, 이것은 사실에 대한 정확한 기술이라고 볼 수 없으며 중요한 사실을 누락하고 있다. 8월 15일 이후, 남한과 북한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등의 자 치정부 수립 운동이 계속 일어났다. 건국준비위원회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 기 직전인 9월 6일에 인민공화국을 급하게 발족했는데, 이는 미군 상륙을 대비 한 조치였다. 미군정은 진주할 때부터 미군만이 남한의 배타적 권력임을 주장 하였고, 10월에는 아놀드 군정장관 성명을 통해 남한에서 유일한 정부는 군정 뿐이라고 주장했다. 23) 미군은 조선인들의 자치정부 수립 노력을 폄하했으며, 미군정 방침을 따르지 않는 지방인민위원회의 경우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와해 시키고자 했다. 이 갈등은 1945년 말까지 진행되었다. 22) 미군은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다음 날 서울에 들어와 조선총독부(중앙 청)에서 항복 조인식을 가졌다. 소규모의 미군 선견대는 이전에 도착하여 항복 절 차 등을 조율했다. 23) 군정장관 아놀드, 미군정부 이외의 어떤 정부도 부인 발표 ( ), 매일 신보, ; 국사편찬위원회, 자료 대한민국사 제1권. history.go.kr/item/level.do?itemid=dh&levelid=dh_001_1945_10_10_ 년 8월 검색.

108 10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1945년 8월 15일부터 10월까지 남한에는 세 개의 권력체가 존재했다. 사용 할 수 있는 힘과 수단 그리고 존속 기간이라는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이 시기에 미군(정), 조선총독부, 인민공화국(지방인민위원회)라는 세 개 권력 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가장 강력한 권력은 미 제24군단이었다. 일본을 패망시키고 군사력으로 남 한을 점령하고자 한 새로운 권력으로서 미군은 남한에 존재하는 유일한 최고 권력임을 자임하고, 입법, 사법, 행정 일체를 관할했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비 롯하여 조선인이 만든 일체의 준군사단체, 정치권력 조직을 부정했다. 이 시기 미군정이 가장 주의를 기울였던 점은 군정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의 반질 서 행위였다. 미군정이 초기에 총독부 일본인 관료를 유임시키는 조치 24) 를 취 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방침은 조선인들의 반발로 수정되었 지만, 조선을 대하는 미군의 입장이 무엇인가를 드러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미국은 해방된 조선민족보다는 적으로 싸웠던 일본인들을 더욱 신뢰한 것 같이 보인다. 총독부와 미군 장교 사이에 오고간 다음의 대화는 제국의 감각을 잘 드러낸다. 총독부 총무과장 야마나 미키오[ 山 名 酒 喜 男 ]는 미군 아고(Ago) 대령에게 총독부 기능이 저하되고 있으므로, 한국인 유력자를 등용하여 인사 쇄신을 꾀해야 한다고 제안했는데, 이에 대해 아고는 현상유지로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야마나가 조선인은 미군을 독립의 복음을 가져오는 구세주로 환영 하고 있는데, 어떠한가? 라고 묻자, 아고는 그저 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야 마나는 이같은 태도를 보고 아고를 비롯한 미군 장교들이 한국인의 통치 능력 을 전혀 평가하지 않고 있으며, 한국의 독립은 아직 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25)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은 오키나와에 있는 미 제24군단에게 전신으로 한반 도 상황을 보고하는 가운데, 좌익세력이 남한 질서의 불안 요소라는 전신을 여 러 차례에 걸쳐 알렸다. 남한에서 미군이 우려한 위험 요소는 남한에 존재하는 24) 국사편찬위원회, 2014, 앞의 책, 89쪽. 25) 가토 기요후미, 2010, 대일본제국 붕괴, 바오, 102쪽.

109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109 좌익세력과 이들을 조종한다고 여겨진 소련이었다. 미군정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군정에 불복할 가능성이 높은 이들에게 맞서야 했다. 조선총독부와 17방면군은 비록 패망한 권력이었지만, 8월 15일 천황의 항 복 수락 이후부터 미군 진주 전까지 한반도 치안을 유지했다. 남쪽에 있는 일 본인의 피해가 적었던 것도 제17방면군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소련군이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는 예상 아래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 회를 지원했으나, 38선 이남을 미군이 점령할 것이라는 통고를 받고 미군에 적 극 협조하기 시작했다. 미군이 상륙하기 전인 8월에 조선총독부는 전신으로 미 군에게 한반도 상황을 제공했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유용성을 인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보고에 의지하여 남한의 상황을 파악했다. 미군 진 주 후, 일본군은 무장 해제당하고 본국으로 순조롭게 송환되었다. 8월 15일부터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와 9월에 조직된 지방인민위원회(조 선인민공화국)는 일본의 패망을 독립국가 수립과 동일하게 인식하고, 치안과 행정을 책임질 자치조직을 준비했다. 여운형의 주도로 전국에 걸쳐 조직된 건 국준비위원회에는 우익을 포함한 지방 명망가와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했다. 이 조직에는 조선공산당 등의 좌파 계열이 참가하였는데,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 식이 알려지자 조선인민공화국 이라는 정부 형태를 급속하게 조직하였다. 정 부 형태의 조직 구성을 통해 통치권을 인정받으려 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의도 와는 반대로,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지방인민위원회)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해 산을 명령했다. 지방의 인민위원회는 해당 지역에 배치된 미군 전술부대에 의 해 강제로 해체되기도 했다. 미군정 권력의 확립은 조선총독부 권력을 완전히 와해시키는 일에서 끝나 는 것이 아니었다. 미군정만의 독점적 권력 수립은 총독부 권력을 몰아낼 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자치조직체인 인민공화국(인민위원회)를 와해시킴으로써만 이 달성될 수 있었다. 미군정이 권력을 세우는 과정은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유혈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45년 하반기에 중도 좌익세력에 의한 자치 조직 건설이 미군정에 의해 와해된 이후, 1945년 말에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건국운동으로 몰아가려던

110 11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김구 임시정부 세력이 미군정에 의해 좌절됨으로써 미군정에 반대하는 정치 분파들의 실질적인 위세는 상당 부분 거세되었다. 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 세력을 제외한 남아있는 정치세력들은 대부분 미군정에 우호적인 질서 협조 세력이었다. 미군의 조선 점령은 제국주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지를 승전국이 점령한 경 우였고, 국제법에도 규정되지 않은 새로운 사례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 공법 에서 통용되던 점령의 국제법 을 조선에 적용하여 점령을 합리화하거나 정당 화하기 어려웠다. 26) 미국은 점령의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나가야만 했던 것이 다. 그러한 규범은 국제법의 새로운 제정이 아니라, 힘의 우위를 기초로 한 현 실에서 만들어져야만 했다. 결전의 장은 법정이 아니라, 현실적 힘이 발휘되는 대지였다. 1945년부터 시작되는 미군정 시기의 정치적 진행 과정을 파악하기 위해 필 요한 것은 미군정 그 자체에 대한 이해이다. 미군이 진주했을 때, 조선 인민들 모두는 해방군 으로 환영했지만, 그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기간은 매우 짧았다. 점령을 책임지고 있었던 존 하지(John R. Hodge) 제24군 사령관은 사실상 최 고의 입법자 라는 지위에 있었다. 미군정에는 조선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고 민 의를 대변할 의회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정의 모든 정책 결정은 주한 미군 사령관 존 하지에게 있었다. 조선총독부 권력보다 훨씬 더 많은 권력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부여되었다. 어떤 연구자는 미군정을 입헌적 독재 라고 규정했지만, 군정은 주권국가의 국내 정치과정에서 보이는 계엄 과 비교할 때, 더 큰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계엄과 점령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유사하다. 첫 번째로, 국제관계에서 나타는 타국에 의한 군정 은 계엄이 그러한 것과 같이 군대라는 물리력에 전적으로 의 26) 점령이 평화적인 과정 을 통해서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전투를 통해 무력 점령 되 었는가는 점령의 본질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점령 자체가 폭력적인 과정을 수반하기 때문이며, 점령이 평화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평화적인 점령정책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핵심적인 문제는 점령 이후에 펼쳐지는 정책과 원 주민의 권리 문제라고 볼 수 있다.

111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111 지한다. 둘째로, 계엄 상태에서 행정과 입법권, 사법 권력이 군 사령관에게 집 중되는 것처럼, 점령군 지휘관은 모든 행정, 입법, 사법권을 망라한다. 세 번째 로, 계엄 상태와 점령 양자는 기존 법이 무력화하는 것을 통해 법이 없는 상태 속에서 통치하고 새로운 법을 창출한다. 이러한 상태를 통해 권력자의 권력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커진다. 네 번째로, 계엄은 기존 권력에 반하는 정치세력 과 인민들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전쟁 상태의 돌입인데, 점령은 점령 당국이 규 정한 질서를 저해하는 세력을 적으로 간주한다. 점령의 구조는 피점령 인민과 의 적대관계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적 계엄과 국제적 관계에서의 점령 이란 주권자로 설정되어 있는 자가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예외 상태 이 다. 27) 프랑켈은 이중국가 에서 나치 체제를 계엄에 의한 체제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점령이 계엄과 매우 유사한 논리로 작동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점령이 기존 질서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혁명적 조치가 가능한 예외 상 태 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주한미군정은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프랑켈 은 주한미군정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남한 내의 유일한 정부로서 주권의 담당자이다. 2. 군사점령자의 권한을 행사하는 미 본국 정부의 한 기관이다. 3. 남한의 사실상의 정부로서 자치정부의 일반기능을 담당한다. 4. 귀속재산의 소유자로서, 관리자로서, 장래 한국정부에 대한 피신탁 자로서 활동한다. 28) 초기에 미군정이 설정했고, 프랑켈이 주장했던 미군의 남한 점령 필요성은 두 가지였다. 29) 첫째는 (일본의) 독점지배를 제거한 후에 발생할 혼란과 무질 27) 예외 상태에 대해서는 조르조 아감벤, 2009, 예외 상태, 새물결을 참조. 28) Ernst Fraenkel, 1945, Structure of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Box No. 23, Entry A1 1256, Record Group 332. pp 인용문은 번역본을 참조하여 필자가 수정하였다. 29) 프랑켈은 미소의 군사 점령이 대전 중의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에 기초를 두게

112 11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서를 방지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한 것이었다. 미군에 의한 일본군의 무장해제는 1945년 말이 되면 이미 종결되었다. 일 본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모두 일본으로 후송되었고, 점령의 군사적 목적은 시 효가 말소되었지만, 점령은 지속되었다. 미군정은 불과 반년도 넘기지 않아 주 권과 자치정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당시 미군은 점령에 대해 일본군 무장해제에 초점을 맞춘 군사적 목적이라 고 설명했지만, 38선 분할은 군사적 편의가 아닌 사실상 정치적 분할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영토에 대한 선 긋기 는 유럽국제법이 작동한 이래 주요한 부분 을 차지하고 있었다. 공간을 선으로 구분함으로써 유럽 제국( 諸 國 )은 자기의 세 력권을 분명하게 표시했고, 이를 통해 상호 갈등과 전쟁을 회피하고자 했다. 이같은 맥락에서, 2차 대전 직후 한반도에 대한 미소의 38선 분할이 정치 적 의미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프랑켈은 다음과 같은 여운이 남는 말로 미소의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였다. 38선 문제를 정치 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다만 군사적 목적으로만 참고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연히 발생하게 하였다. 즉 경계선을 긋는다는 것이 현대사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고 위험하다. 30) 프랑켈은 유럽국제법의 공간 부분이 갖 는 심대한 의미를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야, 즉 한반도 공간 분할이 서로 다 른 질서를 갖는 적대적 정권을 창출하고 이것이 참혹한 전쟁으로 이어진 뒤에 야 분할의 정치적 위험성을 깨달았던 것 같다. 점령의 효과를 검토하는 것은 한국정치사에서 중요한 문제인 신탁통치 문 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프랑켈은 점령군은 1947년 가을 시기엔 이 미 전쟁수단의 청산이 아니고, 오히려 새로운 국가의 창조를 대상으로 한 국제 법 협정, 즉 새로운 국가의 탄생에 있어서 산파역이었다 31) 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미군정의 목적이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되었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는 근거가 없다. 미소 점령은 미국과 소련 정책 당국의 결정과 상호 합의에 의해 진행되었고, 국제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아니다. 30) Ernst Fraenkel, 이영재 역, 1958, 앞의 글, 42 43쪽. 31) Ernst Fraenkel, 이영재 역, 1958, 앞의 글, 48쪽.

113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113 프랑켈은 1947년에는 전쟁수단의 청산이 끝났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1946년부터는 대의제 기구로서의 민주의원 구성을 비롯한 이른바 조선화 (Koreanization) 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미군정이 주도하는 국가 만들기 (Nation Building)는 프랑켈이 언급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일찍 시작되었다고 봐 야할 것이다. 이와 같이 미군의 군사 점령은 국내 정치세력과의 결합과 분리 과정 그리고 국제관계 속에서 스스로가 만든 목표와 위상을 끊임없이 (재)정립 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점령과 신탁통치는 내용적으로 분리된 단계는 아니다. 미국 군부의 주도로 38선이 결정된 이래, 국무부는 계속 신탁통치로 이행하려는 시도를 했다. 1945년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의와 미소공동위원회는 국무부가 주도하는 신탁통치 계획의 일환이었다. 전후 한반도에서 논의되던 신탁통치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회의 결정에서 나타나듯, 미 영 중 소 4대국의 참가가 전제된 것이었다. 4대국 참여는 미소의 한반도 단독 분할 점령으로 사실상 의미가 없 어지게 되었고, 미소 양 강대국만의 논의로 변화하였다. 미국과 소련의 상호견 제와 불신은 전후 한반도 분할 점령으로 나타났고, 분할 점령은 불신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신탁통치가 의도하고 있던 목적은 점령을 통해 사실상 이루어졌다. 미군정 은 점령 기간 동안 여러 정책과 활동을 통해 정치 세력을 재편하여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기대할 수 있었고, 소작료 제한, 노동법령 제정, 귀속재산 접수, 신한공사 토지 불하 등을 통해 자본주의적 경제제도의 토대를 수립할 수 있었 다. 신탁통치를 통한 독립국가 수립은 점령을 통해 이미 달성되었던 것이다. 프랑켈은 미군은 남한에 대하여, 소군은 북한에 대하여 신탁자의 입장으로 주 권을 행사하였다 고 말한 것은 비록 형식은 다르지만, 군사 점령을 통해 신탁 의 내용과 목적이 구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32) 이런 차원에서 보면, 점령과 신탁통치는 구분되는 것이 아니며 사실상 동 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서로 다른 형태에 불과했고, 한반도에서는 점령의 형식 32) Ernst Fraenkel, 이영재 역, 1958, 앞의 글, 43쪽.

114 11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으로 신탁통치가 내용적으로 관철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소의 상호불 신에서 시작된 점령과 영토적 분할의 시작은 곧 냉전 체제의 시작이었다. 얻은 것은 미소의 세력권 확보와 세계적 갈등 체제였고, 한반도에서 잃은 것은 통일 국가 수립의 실패였다. 냉전이 만들어놓은 유산은 한반도에서 아직도 지속되 고 있다. Ⅴ. 맺음말 2003년 미국이 이라크에 군정을 세웠을 때,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 는 미국이 타국을 지배했던 군정 경험을 역사적으로 정리했다. 미국의 군정을 겪은 수많은 나라들 중에, 일본과 한국은 성공적인 케이스로 높게 평가되었다. 점령 후의 높은 경제성장률과 사회적 안정 등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점령과 군정의 역사적 진행과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3 년여 동안 지속된 미군의 군사 점령이 국제법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으 며, 군정 그 자체가 무엇인지는 깊이 있게 논의되지 못했다. 주한미군 법률 고문이었던 에른스트 프랑켈은 주한미군정의 구조 에서 조선에는 주권이 없다는 제국주의적 무주지론을 전개하여 군사 점령을 정당화 하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에른스트 프랑켈의 점령 논리는 계속 유지되지 못했 다. 1951년 한국전쟁 발발 후, 그는 3년 전에 주장했던 기존 논리를 의문시하 면서 한국의 자격과 권리를 한층 강하게 주장하였다. 사실 식민지였던 국가를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다시 특정 국가의 지배하에 둔다는 것은 민족해방을 옹호하는 세계대전의 명분으로 보아도 수용될 수 없 었다.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 독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 과정을 거쳐, 전면적 인 사회개혁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개혁을 달성할 수 있게 한 것은 군 사점령이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115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115 한국의 경우, 해방 직후부터 자립적인 자치조직 결성 활동은 미군정에 의 해 제지당했다. 한국은 무주지였기 때문에 점령한 것이 아니라, 미군이 점령했 기 때문에 주권 없는 무주지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 전개가 가능했던 것은 점 령이 계엄과 매우 유사한 절대적 권력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주한미 군 사령관은 조선총독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소유하고 있었다. 세계질서를 새롭게 만드는 전후의 혁명적 상황에서 군사 점령은 권력자가 법을 창출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수립해 나가는 일종의 예외 상태 였다. 전후의 남한 신질서는 점령을 통해 창출된 미군정 이라는 절대적 권력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남한에서 그토록 정치적으로 논쟁이 되었던 신탁 통치는 점령을 통해 사실상 그 목적이 달성되었다. 자치 능력이 없는 국가의 역량을 양성하는 과정을 통해 자립 국가를 세워준다는 신탁통치의 목적은 점 령 속에서 조선화(Koreanization) 과정을 통해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으 로 실현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영토적 분할과 군사 점령은 적에 대한 이데올로 기적 형성 이전에 이루어진 냉전의 초석이었다.

116 11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그림 1> 년경 서울에서 근무할 때의 에른스트 프랑켈(서울). 프랑켈 개인 소장 (Ernst Fraenkel, 1999, Gesammelte Schriften Band 3, Baden-Baden, Nomos. 속표지 앞쪽에 수록). <그림 2>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한 미소 대표와 관계자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에른스트 프랑켈. 프랑켈 개인 소장(위의 책, 화보에 수록).

117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117 참고문헌 가토 기요후미, 2010, 대일본제국 붕괴, 바오. 국사편찬위원회, 2014, 주한미군사1 History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Ⅰ. 국사편찬위원회, 자료 대한민국사 제1권. emid=dh&levelid=dh_001_1945_10_10_ 년 8월 검색. 김기조, 2006, 한반도 38선 분할의 역사, 한국학술정보(주). 김용구, 2002,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 문학과 지성사. 김종구, 2013, 미군정기 미법률고문과 대륙법 및 영미법의 교착 프랭켈, 퍼글러, 오 플러를 중심으로, 법학논총 제20집 제2호. 마키하라 노리오, 2012, 민권과 헌법, 어문학사. 박용희, 2014, 민주주의 학문 으로 정치학의 도입? 전후 서독 정치학 성립 과정의 민주주의와 미국 인식, 독일연구 제28호. 이완범, 2001, 삼팔선 획정의 진실, 지식산업사. 정병준, 2014, 카이로회담의 한국 문제 논의와 카이로선언 한국조항의 작성과정, 역사비평 여름호. 최경옥, 2005, 미군정하의 사법부와 제헌헌법의 성립과정 Ernst Frankel의 논평과 관련하여, 한국공법학회, 공법연구 제34집 제2호. 칼 슈미트, 최재훈 옮김, 1995, 대지의 노모스, 민음사. Department of State, 1961,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Diplomatic Papers: The Conferences at Cairo and Teheran 1943,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Washington D. C. Ernst Fraenkel, 1941, The Dual State: A Contribution to the Theory of Dictatorship, Oxford University Press(エルンスト フレンケル 中 道 壽 一 譯, 1994, 二 重 国 家, ミネルヴァ 書 房 ). Ernst Fraenkel, 1944, Military Occupation and the Rule of Law: Occupation Government in the Rhineland , Oxford University Press. Ernst Fraenkel, 1948, Structure of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History of the Bureau of Domestic Commerce thru USAMGIK: Press Releases July Sept(2 of 7), USAFIK, XXIV Corps, G 2, Historical Section,

118 11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Records Regarding the Okinawa Campaign, USAMGIK, Box No. 23, Record Group 332(정용욱 편, 1994, 해방직후 정치사회사 자료집 2권, 다락방; 에른스 트 프랑켈, 1988, 주한미군정의 구조, 한국현대사연구, 이성과현실사). Ernst Fraenkel, 1951, Korea Ein Wendepunkt im Vöolkerecht? [Korea A Turning Point of International Law] Schriftenreihe der Deutschen Hochschule für Politik. Berlin, Gebrüer Weiss Verlag(Ernst Fraenkel, 이영재 역, 1958, 한국에 관한 국제법상의 제문제,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법정논총 ). Ernst Fraenkel, 1999, Gesammelte Schriften, Baden Baden, Nomos. Hans J. Lietzmann, ed., 1996, Politikwissenschaft. Geschichte und Entwicklung in Deutschland und Europa. Michael Wildt, 2003, Ernst Fraenkel und Carl Schmitt. Eine ungleiche Beziehung. kunden.net/wildt/download/wildt%20 Fraenkel%20und%20Schmitt.pdf 2015월 4일 검색. Daniela Münkel, Jutta Schwarzkopf(Hg.), 2004, Geschichte als Experiment: Studien zu Politik, Kultur und Alltag im 19. und 20. Jahrhundert, Campus.

119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119 [국문 초록]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김득중 1945년 8월과 9월에는 한반도에서는 일제의 패퇴와 해방 과 38선 분할과 점 령 이라는 두 가지의 결정적 사건이 동시에 발생했다. 이러한 사건은 남북 각 각의 정부 수립(1948) 과 한국전쟁(1950)을 결정짓는 구조적 요인이 되었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945년 8월과 9월에 발생한 해방 과 점령 이라는 두 가지 계기는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결정짓는 분수령이었다. 군사점령은 미소가 내걸었던 대의명분과는 달리, 식민지 해방으로부터 구 식민지 재점령으로 빠 르게 변화되었다. 한반도의 군사점령은 연합국에 맞섰던 적대국가(독일, 일본) 에 대한 응보적 점령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논문은 미군이 1945년 남한 점령을 스스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이를 정당화하는 국제법적 근거는 무엇이었는지를 당시 미군정의 법률 고문이 었던 에른스트 프랑켈의 글을 통해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독일에서 노동법을 전공한 에른스트 프랑켈(Ernst Fraenkel)은 미국 망명 뒤, 이중국가 를 출판하여 독일 나치 체제를 비판하였다. 1944년 프랑켈은 전 략정보국(OSS)에서 일하면서, 제1차 대전시 프랑스의 라인란트 군사점령을 연 구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켈은 국제법 전문가로서 미군정 사법부에서 일 하게 되었다. 프랑켈은 1948년 초, 유엔조선임시위원단(UNTCOK)에 제출할 예정으로 주한미군정의 구조 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에서 프랑켈은 미군의 남한 점령을 국제법적 관점으로 보아, 임 자 없는 땅을 점령한 것 이라는 논리를 제기했다. 이는 주권의 부재로 점령을

120 12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합리화하는 논리였다. 국제법에서 주권자가 존재하지 않는 지역을 무주지( 無 主 地, Terra nullius) 로 규정하고, 최초로 점유한 자가 이 땅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다는 이 른바 선점의 논리 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식민지를 지배할 때 유럽 제국 주의가 즐겨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군사 점령을 정당화하는 국제법의 무주지 론은 식민지에 대한 폭력의 다른 이름에 불과했다. 1951년 프랑켈은 무주지론을 수정했지만, 제국주의 국가가 내세웠던 무주지 론을 다시 들고 나와 미군의 남한 점령을 합리화 한 것은 연합국이 전체주의 파시즘 국가와 싸우면서 내걸었던 세계대전의 이념적 좌표를 흔들어버리고, 결 국 자국 이익의 확보를 위해 과거로 복귀하는 시도로 비추어질 수 있었다. 미군정이 주장한 것처럼, 조선이 원래부터 무주지인 것은 아니었다. 조선 을 무주지로 만든 것은 미군정 통치의 결과였다. 일제 패망 후, 남한에서는 새 로운 국가를 수립하려는 자치 활동들(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이 계속 나 타났다. 이 활동들은 미군정에 의해 제지당했다. 무주지였기 때문에 점령한 것 이 아니라, 점령했기 때문에 주권 없는 무주지가 되었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조선총독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소유하고 있었다. 남한에서 미 군정은 절대적 권력이었다. 세계질서를 새롭게 만드는 전후의 혁명적 상황에서 군사 점령은 권력자가 법을 창출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수립해 나가는 일종의 예외 상태 라고 할 수 있었다. 미소가 주조한 전후 신질서는 군사 점령을 통해 창출된 절대적 권력을 통해 만들어졌다. 군사 점령은 점령 지역 내에서 질서를 굳건하게 다져 나갔고, 자본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미국 주도의 냉전 으로의 급속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주제어 에른스트 프랑켈, 주한미군정( 駐 韓 美 軍 政 ), 해방과 군사점령, 무주지론, 국제 법, 국가 만들기, 예외상태

121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121 [ABSTRACT] The United States Military Occupation Logic and the Cold War after World War II Focusing on an International Legal Analysis by Ernst Fraenkel Kim Deugjoong In August and September 1945, two significant historical events occurred in Korea. The first was the liberation that immediately followed the collapse of the Japanese Empire. The second was the division at the 38th Parallel leading to occupation by international superpowers. Accordingly, these structural events resulted in the establishment of separate governments in South Korea and North Korea in 1948, and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in It is certain that the events of liberation and occupation both settled in 1945 were the critical moments that decided the flow of contemporary Korean history afterwards. Military occupation on Korea by U. S. and Soviet Unions rapidly transferred from liberation to re occupation. America s occupation on Korea had a different character from such as defeated Germany and Japan had. This paper aims to elaborate how the United States military rationalized the occupation of South Korea in 1945, and what was the justification under international law, relying upon Ernst Fraenkel s text as a legal adviser during that period. Fraenkel, who had studied labor law in Germany, fled to the United States and there published Dual State under an accusation of Nazism.

122 12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For a time, he worked in the Office of Strategic Services(OSS) in 1944, and subsequently studied the French Rhineland military occupation in World War I. When World War II ended, he proceeded further as an international law specialist working in the American military judiciary. In early 1948, he completed a report entitled Structure of the United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to present before the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f Korea(UNTCOK). In the report, Fraenkel set out a logic that the American military s taking over South Korea is like an occupation of a territory which appears to be no man s land, in accordance with international law. This was a mere justification taking advantage of the absence of sovereignty. This was an old, general law demonstrated by European colonialism from the nineteenth century until the early twentieth century, which claimed the territory where none had sovereignty was defined to be Nobody s territory: Terra nullius, and thus the first mover takes preoccupancy. Justification of military occupation, that is, the theory of Terra nullius, was another name for merciless violence toward colonial victims. In 1951, Fraenkel amended the theory of Terra nullius, but the American occupation of South Korea was irreversibly returning to the earlier theory of Terra nullius, which symbolized colonialism, and the weakening of the ideological pursuit of World War II, just for pursuing America s own interests. However, the Joseon Dynasty, which continued into the early twentieth century in Korea, was not a no man s land as the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claimed. In fact, the rule of the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made South Korea fall to a nation lacking sovereignty. After Japanese colonialism

123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123 collapsed, there were positive independent activities to establish a nation inside South Korea carried out by The Preparatory Committee for National Construction( 建 國 準 備 委 員 會 ) and the People s Committees( 人 民 委 員 會 ). But their activities were consistently restricted by the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The American military occupation thus occurred in Korea in the no man s land and not the other way around. As for the authority and power in Korea at that time, the Commander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 was much stronger in South Korea than that of the Governor General of Joseon. In short, the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was an absolute authority. The renewal of a world New Order is a revolutionary movement, especially at the period when everything had to be settled in new positions after the world war. The American military occupation meant the State of Exception (Ausnahmezustand), in which the power of authority created the legal standards. As a result, a well known New Order after World War II, the so called Cold War, is in a causal relationship with an absolute authority created through military occupation. Keywords Ernst Fraenkel,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USAMGIK), Liberation and Military Occupation, Theory of Terra nullius, International Law, Nation Building, State of Exception(Ausnahmezu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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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25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조윤수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Ⅰ. 머리말 1965년 한일협정에 대한 평가는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논쟁이 되고 있 다. 한일협정은 그 과정이 불투명하고 정치적 타결이었다는 점 때문에 과거사 문제와 관련하여 양국 정부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일협정 타결 이후 한일 양국 시민들은 한일협정 문서 공개를 정부에 지속적으로 요청했 다. 그 결과 한일 양국에서 2005년과 2008년에 한일협정 관련 문서가 공개되기 에 이르렀다. 문서 공개를 계기로 개인청구권을 비롯한 한일 과거사 문제가 또다 시 양국에서 쟁점화되었으나 동시에 이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도 진척되었다. 한일협정은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가 아닌 국제법에 기초하여 대등한 관계 투고: 2016년 11월 19일, 심사 완료: 2016년 2월 29일, 게재 확정: 2016년 2월 29일 * 한일회담에서 문화재 반환 교섭은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 한 협정 으로 정식 체결되었다. 문화재 교섭에서 반환, 기증, 증여, 원상복구 라 는 용어는 교섭의 쟁점이었다. 결국 반환 과 기증 의 중간단계인 인도(turn over) 라는 용어로 합의되었다.

126 12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에서 맺은 일본과의 첫 번째 협정이다. 당시 한국은 국제법적 지식이 불충분했 고, 국제법 자체가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 문에 식민지 국가들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한일협정 특히, 문화재협정 에 서도 이러한 점을 엿볼 수 있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과 식민지였던 국가들 사이에서 문화재 반환을 둘러 싼 외교적 갈등은 비단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불법 유출된 문화재에 대한 소유권 논쟁은 누가 합법적으로 문화재를 이동했고 그 법적 근거가 무엇 이었는가, 이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가 그 핵심이다. 그러나 과거 식민 지 국가는 제국주의 국가와 불평등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놓여있었기 때 문에 문화재 유출 과정의 불법성 여부를 밝히는 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일협정 체결 당시 과거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인 정하여 문화재를 반환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일회담에서 문화재 반환 협상은 당시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교섭이기도 했다. 제3차 청구권위원회에서의 구보타 망언 1) 과 같은 발언은 한국으로 반환할 문화재 목록을 결정하는 일본 내부 회의에서 자 주 언급되는 것이기도 했다. 현재 일본에 있는 한국 관련 문화재 수는 6만 7천 건이며 이중 중요문화재 혹은 보물로 지정된 국가문화재는 총 111건이다. 한국문화재가 왜 유독 일본에 많이 남겨져 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문화재 반환 을 위한 노력은 한일 시민단체를 통해서도 이루어졌는데 2010년 조선왕조의궤 반환은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일반 시민들의 일 본으로 반출된 문화재 반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오구라[ 小 倉 ] 컬렉션 소 장 한국문화재, 오쿠라[ 大 倉 ]호텔에 있는 고려시대 석탑(이천석탑) 등에 대한 1) 구보타 망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36년간 일본의 강제점령은 한국 사람에게 유 익하였다. 2) 한국민족의 노예화에 대해서 언급한 카이로선언은 연합국의 전시히스 테리의 표현이다. 3) 일본이 구 재한일본인 재산을 미군정 명령 제33호로써 처리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4) 대일강화조약 체결 전에 한국이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 이다. 5) 연합국이 일본국민을 한국에서 송환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127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27 환수 운동이 한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문 화재 반환 문제는 현재적 문제이기도 하다. 재산 및 청구권 문제, 재일한국인 법적지위 문제, 어업 문제 등에 대한 연 구에 비해 한일문화재협정 관련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알려진 바와 같이 한일회담에서 문화재 문제는 여타 문제와 비교하여 볼 때 회 담에서 다루어지는 빈도수가 적었다. 물론 빈도수가 적었다는 것이 상대적으 로 덜 중요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 반환 교섭과정은 문서 공개가 진행되면서 많은 부분이 밝혀졌다. 한일회담 문화재 반환 교섭에 대한 연구동향은 한일외교교섭이라는 외교사적 시각, 2) 국제법적 시각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3) 이 글은 국제법 시각이 아닌 한일 양국의 외교교섭사의 시각에서 분석하고 자 한다. 기존 논문에서는 문화재 반환 교섭에 있어 한국 정부의 한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4) 이 문제가 결국은 식민지 지배와 관련이 있다는 것 5) 과 한일 문 화재 교섭에서 일본 외무성보다는 일본 문부성의 소극적 자세 때문에 문화재 반환 교섭이 어려웠다는 점 6) 등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 이 외에도 한일회담 2) 문화재 문제는 그동안 고고학 등 역사 분야에서 많이 다루어져 왔다. 이 글은 외교 교섭의 시각에서 분석했으므로, 기존 연구 중 주로 외교사의 관점에서 작성한 논문 을 분석했다. 3) 국제법적 시각에서 다룬 논문으로는 다음을 대표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제성호, 2009, 한일 간 문화재 반환문제에 관한 국제법적 고찰, 중앙법학 11권 2호; 이 근관, 2008, 문화재의 기원국 반환의 최근 동향: 이탈리아 사례를 중심으로, 서 울 국제법연구 제15권 제1호. 제성호는 반환 과 인도 라는 용어의 차이점이 국제법 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결국 반환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함으로써 일본이 불법 반출하였다는 것을 시인하지 못했다는 협상의 한계를 지적했고 이근관은 최근 의 국제법적 동향을 소개하면서 식민지 시기 이루어진 불법 문화재 반환에 대하여 다른 사례를 통해 한일 문화재 반환 교섭에 어떤 시사점이 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4) 국성하, 2005, 한일회담 문화재 반환협상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5) 류미나, 2010, 일본의 문화재 반환 으로 본 식민지 지배의 잔상, 그리고 청산 의 허상 1958년 일본의 제1차 문화재 반환까지의 교섭과정을 사례로, 일본역사연 구 제32집, 213~241쪽. 6) 류미나, 2009, 한일회담 외교문서 로 본 한일 간 문화재 반환교섭, 일본역사연

128 12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문서 공개 재판에서 문화재 관련 부분이 다수 비공개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 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 비공개 부분을 한국외교문서와 비교 분석한 이양수 (2012)의 논문이 있다. 7) 한일회담 준비를 위한 내부 방침에서 일본은 문화재 교섭에 대한 방침으로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한바 있다. 첫째, 한국은 교전국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은 반환할 문화재가 없다는 것, 둘째, 정부 소유 문화재 중 일부 문화재를 한국에 문화협력의 차원에서 기증한다는 것, 셋째, 한국에 문화협력의 차원에서 기증 한다면 그 시기는 1910~1945년까지로 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문화재 반 환 교섭과정을 시계열적으로 분석하면서 일본 정부가 어떠한 방법으로 초기의 문화재 교섭에 대한 원칙을 논리적으로 보완해 가는지를 분석해 보겠다. 한일 간의 문화재 반환 문제는 일본이 한국에 반환할(인도할) 품목에 대한 교섭과 협정 등 조문화 교섭으로 나눌 수 있다. 초기 회담에서 문화재 반환 품 목 교섭에 일본은 매우 소극적으로 임했다. 이러한 일본의 소극적인 자세가 적 극적인 방어자세로 바뀐 것은 전문가위원회와 관련이 깊다. 문화재전문가위원 회가 개최되면서 문화재 교섭에 실질적인 진전이 있었다는 분석은 이미 박훈 의 논문에서 밝혀진바 있다. 8) 그러나 구체적으로 한국과 일본이 반환 품목에 대한 협상에서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문화재 반환에 대한 일본의 초기 방침이 반환 품목 교섭과정에서 어떻게 반영 구 제30집, 119~147쪽; 류미나, 2014, 문화재 반환과 둘러싼 한일화담의 한계, 일본사연구 40호, 249~271쪽. 7) 李 洋 秀, 2012, 日 韓 会 談 と 文 化 財 返 還 問 題, 戦 争 責 任 研 究 第 72 号. 이 글과 관련하여 이양수 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음을 밝혀둔다. 이양수 씨는 대일문화재 환 수 운동의 성과와 시사점, 문화재 합의의사록에 있는 권장 의 의의 등 많은 칼럼 을 한일회담 문서 공개를 요구하는 모임 의 소식지에 전한바 있다. 8) 박훈, 2010, 한일회담 문화재 반환 교섭의 전개과정과 쟁점, 의제로 본 한일회담 2, 선인, 357~386쪽. 박훈은 문화재 교섭은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한국은 외교관보다는 전문가가 회담에 참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 여 일본 측에 전문가의 출석을 일찍부터 요구해 왔으나 되도록 적은 수량의 문화재 를 한국으로 반환하는 것이 목적인 일본은 전문가의 출석을 오랫동안 회피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129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29 이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문화재 반환 교섭에서 일본은 한국이 품목을 요구하는 것에 대하여 처음부터 불만을 제기했다. 한국은 교전국이 아니므로 품목을 결정하고 요구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따라서 한국이 요구하는 문화재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로 임하면서 일본인 나포문제를 해결하고 어업 교섭을 진 척시키기 위한 외교교섭의 수단으로 문화재 문제를 이용한 측면이 있다. 이 글은 한일외교문서를 1차 사료로 분석한 것으로 한국외교문서는 한국외 교사료관 소장임을 밝히며, 일본외교문서는 일본 시민단체 일한회담 전면 공 개를 요구하는모임( 日 韓 會 談 全 面 公 開 を 求 める 会 )이 DB화한 것을 참조하였 다. 9) 문서번호와 제목은 동북아역사재단의 한일회담 일본외교문서 목록집 (2010)을 참조하였다. Ⅱ. 대일배상요구조서 와 약탈 문화재 문화재 반환 교섭은 한국 정부가 1949년에 작성한 대일배상요구조서 와의 연 속성 속에서 추진되었다. 한국은 일본으로 반출된 문화재를 약탈재산 으로 규 정했는데 이러한 규정 역시 대일배상요구조서 에 따른 것이다. 연합국의 일 원으로 대일강화조약에 참가해야 한다는 한국의 염원과는 달리 미국은 1951년 6월 미 영 공동초안에서 한국을 연합국에서 배제시켰고 1951년 7월 9일 한국 에 정식으로 이러한 사실을 통고했다. 교전국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함으로써 한국은 배상 의 개념보다는 청구권 이라는 명목으로 한일회담에 임해야 했다. 한일회담이 공식적으로 법적 배상 교섭이 아닌 청구권 교섭이 된 이유는 바 9) 일본시민단체의 DB는 홈페이지, nihonkokai/nihon.html에 게재되어 있다.

130 13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로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다. 한일회담에 임한 한국대표단의 자세는 대일배상요구조서 에 기초한 1910 년 강제병합은 불법 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를 한 국 국민의 의사에 반한 폭력과 착취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세는 청구권 협상에서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외교문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0) 대일배상요구조서 작성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 약 체결 시점 이후 일본이 약탈한 문화재는 한국에 반환되어야 한다고 규정했 다. 한국 정부가 이와 같이 결정한 근거는 1949년 9월 22일 미국이 작성한 항 복 후 미국의 대일방침 에서 약탈한 재산이 분명한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 완 전하게 직접 반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는 것과 1946년 4월 19일 SCAPIN 88호 에서 약탈한 재산 몰수 및 보고에 관한 각서 에 포함된 1937년 7월 7일(중일 전쟁 개시일) 이후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약탈한 재산으로 현재 일본에 있 는 모든 물품의 반환을 명령 한다 는 내용에 기초한 것이다. 11) 이 두 가지 근거 에 따라 한국은 일본에 있는 문화재를 약탈 문화재 로 정의했는데, 12) 그 근거 또한 연합국이 작성한 1947년 3월 2일 SCAPIN 54호 문서에 기초한다. 10) 한일회담에서 대일 과거처리를 배상 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한국 정부가 실질적으 로 청구권 개념과 유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대일요구 권리를 배상 으로부터 청구권 으로 변화시킨 논리 등의 분석에 대해서는 장박진, 2014, 미완의 청산, 역사공간을 참고하기 바란다. 11) 한국외교문서 76, 한일회담예비회담( ~12. 4)자료집: 대일강화조약 에 관한 기본 태도와 법적근거 1950, 34쪽 참고. 12) 1947년 3월 2일 SCAPIN 54호에서 약탈 이라는 것은 강제 몰수, 박탈, 약탈 등 불법 행위로 취득한 물건이다 라고 정의되어 있고 그 취득이 일본 법률에 의한 것 이거나 법률 형식의 절차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는 불문한다 고 명시되어 있다. 즉 전시점령 기간에 이루어진 모든 행위를 잘못된 것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한국은 일본에 있는 한국문화재에 대하여 1) 민족문화의 상징이 되는 물품의 조속 한 이전, 2) 국제법상 비합법적 이전 현재 물품이 일본 국내에 존재하면서 그 물품 이 식별가능한 것으로 1905년 11월 17일 이후의 전체 품목이며 특히 그 연대를 불 문하고 반환을 요구한다 고 설명하고 있다. 위의 문서, 한일회담예비회담( ~12. 4).

131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31 <표 1> 대일배상요구조서 문화재 관련 부분 항목 수량 3. 서적 212종 (1) 호사문고[ 逢 左 文 庫 ] 소장 조선 서목 142종 4. 미술품 및 골동품 827종 (1) 일본 제실박물관 소장 한국미술공예품 456종 가) 역사부 349종 나) 미술부 16종 다) 미술공예부 91종 (2) 한국 고미술품 개인 점유 조서 21종 (3) 공주 백제시대 미술품 개인 점유자 조서 다량 (4) 도쿄 제실박물관 소장 한국 미술품 광구감( 廣 口 坩 ) 기타 94종 (5) 도쿄 오쿠라[ 大 倉 ] 집고관 소장 한국 미술품 1종 (6) 일본 각지 소재 한국 종( 鐘 ) 목록 50종 (7) 재도쿄 도다 리헤이[ 戶 田 利 兵 衛 ] 소지 한국 고미술 골동품 52종 (8) 소노다 유타카[ 園 田 裕 ] 소장 몽유도원도 9장 (9) 국보 철채 자회( 自 繪 ) 당초문( 唐 草 文 )병 1개 한국이 작성한 대일배상요구조서 중 현물 반환 요구의 1. 지금( 地 金 ), 2. 지은( 地 銀 ) 부분을 제외한 문화재는 <표 1>과 같다. 13) 한일회담 예비회담에서 한국 정부는 재일 한국문화재(고서적, 미술골동품, 고고학 자료)의 반환을 주장하였는데, 이 역시 대일배상요구조서 에 근거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4조에 의한 한일협상을 앞두고 한일 과거사 처리 즉 약탈재산 에 대해 유진오 법률고문은 다음과 같이 배상의 시기를 확대 해석하기도 했다. 14) 13) 한국외교문서 87, 제1차 한일회담: 청구권관계자료, 173쪽. 14) 한국외교문서 76, 한일회담예비회담: 본회의 회의록 제1차~10차( ~14).

132 13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미국의 대일초기정책(United States Initial Past Surrender Policy for Japan) 및 극동이사회 FEC의 대일 기본적 방침(Basic Past Surrender Policy for Japan) 에는 일본은 식별할 수 있는 모든 약탈재 산(looted property)을 즉시 반환할 것이 규정되어 있다. 제2차 대전 중 한국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이 규정은 엄격히 말하면 한국 에는 그대로 적용되지 아니한다 할 것이다. 그러나 조정을 요하는 한일 간의 관계는 반드시 제2차 대전 기간 중에 발생된 문제에 국한되어야 할 하등의 근거도 없는 것이므로 약탈재산 반환의 문제는 한국의 경우 에는 적어도 일청전쟁까지 소급하여 올라가야 할 것이다. 한국의 유진오 대표의 인식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한일 문제가 일본과 연 합국 간의 문제와 다를 바 없으며, 한국이 연합국에서 제외되어 배상권리가 상 실됨에 따라 그 반환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는 인식은 없었다. 오히려 임진왜란 당시 약탈 문화재에 대해서도 시간이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환수가 가능하 다고 해석한 것이다. 15) Ⅲ. 한일회담 시기 문화재 교섭 1_ 1차~3차 문화재 교섭: 일본의 사례조사와 문화재 교섭의 정체 제1차 회담 청구권위원회에서 한국 정부는 요구 항목의 첫 번째로 일본에 존재 하는 약탈 문화재 즉 한국에서 가져온 고서적, 미술품, 골동품, 기타 국보, 지 도원판 및 지금과 지은 의 반환을 요구했다. 약탈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는 한국 정부에 대해 일본은 그 국제법적 근거를 한국에 15) 이 부분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석은 장박진, 2014, 앞의 책, 322~323쪽을 참고.

133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33 요청한바 있다. 당시 한국은 한국전쟁으로 교섭 준비가 부족했고 국제적으로 도 문화재에 대한 명확한 개념도 없었기 때문에 그 근거를 찾는 것 또한 어려 운 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시상황하에서 문화재를 보호하고 전리품 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점령지에서 약탈한 문화재가 반환된 사례는 있었으나,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국가에서 반출한 문화재가 불법이라는 이유로 반환한 사례는 없었다. 한국은 문화재 반환 협상에 대한 준비를 오로지 대일배상요구조서 에만 의지했고 반출된 기록이나 불법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자료도 준비할 수 없 었다. 반면 한일회담이 시작된 제1차 회담 청구권위원회는 일본이 전체 한일 회담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협상이었다. 일본 외무성은 1949년 이 후 (가) 조선에 대한 부채의 실제 금액, (나) 영토분리 시 책임 처리에 관한 조 약 전례, (다) 조선에서 일본 재산을 처분한 미군정 법령 33호 및 대일강화조 약 제4조, (라) 한국 측의 청구권 요구에 관한 주장 등 수많은 보고서를 작성 하는 준비를 했다. 16) 한편, 일본이 작성한 문화재 관련 보고서를 보면 문화재 협상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준비를 했음을 알 수 있다. 1952년 2월 18일, 다카야나기 겐조[ 高 柳 賢 三 ] 교수의 조선에 있는 일본 자산에 대한 의견 요지, 조약국이 작성한 1952년 2월 문화적인 세습재산의 반환에 관한 선례 등이 대표적이다. 1953년 2월 17일 일본 외무성은 패전 또는 영토분리 시 타국의 영토를 지 배했던 시기에 본국으로 가져온 문화재를 반환 또는 양도한 선례에 관한 보고 서를 작성했다. 반환 문화재의 범위를 전쟁 시 점령지일 경우와 그 밖의 경우 로 구분하여 조사한 보고서다. 17) 이 보고서에 의하면 반환(restore) 이라는 것 은 반출 사정이 부당하거나 혹은 적어도 통상적 사법적 방법이 아닌 경우를 말하며 특히 전시 점령지에서 반출한 경우에는 그 반환 범위가 매우 넓고 반출 방법이나 현 소유자의 성격 등에 대해서 모두 불문에 부친다고 기술했다. 즉 16) 이동준 편역, 2015, 일한국교정상화교섭기록, 삼인, 79~93쪽 참고. 17) 일본외교문서 1117, 文 化 財 等 に 関 する 協 定 要 領, 世 襲 的 文 化 財 について.

134 13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군사 점령지에서는 점령 당국의 권력이 매우 강력하게 작용하는 변칙적인 형 태이기 때문에 문화재 반출의 불법성을 추론할 수 없다고 부연 설명하고 있 다. 18) 그러나 영토분리에 해당하는 반환의 범위는 무상 또는 사법적 방법 이외 의 방법으로 반출한 것에만 한정한다고 작성되었다. 즉 현재의 소유자가 국가 또는 공공단체의 소유물로 한정되며 반환 방법도 군사 점령지일 경우만 반환 (restore) 혹은 권리를 포기한다/원상 복귀한다(surrender) 라는 용어를 사용 한다는 것이다. 즉 일본 정부 입장에서 보면 한국병합은 평화적 영유로 규정 했기 때문에 문화재 반출의 불법성은 없고 한국이 주장하는 반환 이라는 용어 는 적당하지 않다는 내용의 보고서였다. 일본이 조사한 국제 사례는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문화협정(1950), 불가리 아평화조약(1919), 이탈리아평화조약(1947), 베르사유조약(1919)으로 확인된 다. 이 중 반환(restore) 이라는 단어는 베르사유조약에서 사용되었으며 불가 리아평화조약에서는 수집한 것을 배상한다 혹은 반환한다 라는 의미로 recherche it restitute 가, 오스트리아평화조약에서는 권리를 포기한다 는 의 미에서 surrender 가 사용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식민지 사례는 1950년에 체 결된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문화협정이었는데 이때 사용된 개념이 transfer(이 전/이동) 이었다. 19) 당시 보고서에는 반출방법, 반출 시기, 현소유자, 물품의 반 환 범위, 지역 등도 함께 조사되었는데 네덜란드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의 경우, 식민지 지배 중 국유물품에 대하여 법적 절차에 의하지 않은 모든 국유문화재 에 대해서 이전(transfer)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조사를 통해 일본의 문화재 반환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이 만들 어졌다. 그것은 첫째, 불법적인 반입에 해당하는 것 중 국유 소재의 문화재에 한하여 반환하며, 배상, 권리를 포기한다 는 단어가 포함되는 일이 없어야 한 다는 것이다. 둘째, 반출 문화재의 시기는 한일강제병합 이후인 1910년부터 18) 앞의 문서, 文 化 財 等 に 関 する 協 定 要 領, 世 襲 的 文 化 財 について. 19) 베르사유조약 제254조에 따라 독일 정부는 프랑스 정부가 제출한 목록을 참조하 여 1870년부터 1871년까지의 전쟁 중 독일 관헌이 프랑스에서 탈취한 문화재에 대 해서 프랑스 정부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외교문서 1117 참조.

135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년까지의 식민지 시기로 한다는 것 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교섭이 타결 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일본 외무성이 이러한 선을 넘어 적극적으로 교섭에 임 했던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초기 한일회담에서 한국 정부가 요구하고 있는 반환 문화재 목록 검토를 위하여 일본 정부는 외무성을 비롯하여 문부성 및 문화재보호위원회, 전국 각 지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의 관계자뿐만 아니라 민간 학자들의 자문을 받았 다. 문화재 가치에 대해서는 주로 문화재보호위원회가 담당했다. 20) 조사는 1. 현소유자 (가) 주소(소재), (나) 국가, 공공단체 개인(별), 2. 일본으로 들어온 경위 (가) 연대, (나) 방법, (다) 들어온 당시 소유자, 3. 문화재의 문화적 가치 등으로 구별하여 추진했다. 21) 한국 관련 고서적, 미술품은 일본 외무성에서 1952년 7월부터 1차 조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일회담 예비회담에서 한국이 제출한 목록과 1953년 2차 한일회담에서 한국이 반환 청구한 목록을 토대로 1953년부터 1955년까지 1차로 한국 관련 서적, 고미술품에 대한 조사 가 이루어졌다. 한국이 제출한 목록과 일본 정부가 조사한 내용은 일본외교문 서에만 남아 있었다. 그 내용은 비공개로 되어 있다가 재판을 통해 2013년 공 개되었는데 한국이 요청한 목록은 <표 2>와 같다. 한국 관련 서적에 대해서도 전국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각 도서관의 답변을 통해 세이카도[ 靜 嘉 堂 ]문고, 일본 손케이가쿠[ 尊 経 閣 ]문고, 궁내청 서 릉부(태정관 문고), 나고야 호사문고[ 蓬 左 文 庫 ], 도요[ 東 洋 ]문고, 교토대학에 1 차적으로 한국 관련 서적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소장된 한국 관련 서적들은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학술적으로 중요하다고 평가하면서도 한국으로의 반환 에는 비협조적이었다. 22) 일본의 주장을 정리하면 첫째, 일본에 존재하는 한국 유물은 구입 시기가 오래되어 일본이 언제부터 소유하였는지 알 수 없다. 둘 째, 세이카도문고와 같은 사유물은 반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 정부 소유라 20)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분석은 류미나, 2009, 앞의 글 참조. 21) 일본외교문서 583, 文 化 財 保 護 委 員 会 本 間 氏 との 会 見 報 告, 韓 國 書 籍 美 術 工 藝 品 調 査 依 賴 の 件. 22) 앞의 문서, 文 化 財 等 に 関 する 協 定 要 領, 世 襲 的 文 化 財 について.

136 13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표 2> 제2차 한일회담에서 제출한 반환청구 한국문화재 목록 23) 1.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반출된 것 목록 비고 24) (1) 경남 양산 부부총에서 발굴된 신라유물(489점) 우에노 박물관 (2) 경주 노서리 215번지 고분 출토품 (3) 경주 황오리 제16호분 출토품(5점) (4) 평남 대동군 대동강면 정백리 127, 227호분 출토품(30점) (5) 평남 대동군 대동강면 석암리 201호분 출토품(16점) (6) 평남 대동군 대동강면 남정리 116호분 출토품(20점) (7) 평남 대동군 대동강면 왕간묘 출토품(118점) 도쿄대학 보관 2. 통감 및 총독부에 의하여 반출된 것 (1)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 고려자기(103점) 국유 박물관 (2) 소네 아라스케[ 曾 禰 荒 助 ] 한국 전적( 典 籍 ) 궁내청 도서실 (3) 데라우치 마사타케[ 寺 内 正 毅 ] 전적( 典 籍 ),서화( 書 畵 ), 불상( 佛 像 ) 하기시[ 萩 市 ]문고 ( 山 口 県 立 女 子 短 大 ) (4) 통감부 장서 (5) 가와이 히로타미[ 河 合 弘 民 ] 장서(관부기록) 교토대학 3. 일본 국유의 다음 항목에 속하는 것 (1) 경상남북도 소재 분묘 그 외 유적으로부터 출토된 것 박물관(예대) (2) 고려시대 분묘 그 외 유적으로부터 출토된 것 (3) 체신관계 문화재 체신박물관 4. 지정문화재(오구라 다케노스케[ 小 倉 武 之 助 ] 소장품 및 기타) 5. 사유(개인) (1) 야쓰이 세이치[ 谷 井 済 一 ] 소장품 (2) 오구라 다케노스케 소장품 (3) 이치다 지로[ 市 田 次 郎 ] 소장품 (4) 석조미술품

137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37 도 나이카쿠[ 內 閣 ]문고와 궁내청 서릉부가 소유한 유물처럼 모두 정당한 절차 23) 24) 에 따른 매매는 한국에 인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다. 25) 오히려 오타 니 고즈이[ 大 谷 光 瑞 ]가 중앙아시아 등에서 가져온 물건을 한국에 두고 왔기 때 문에 이 사람이 수집한 유물을 역으로 한국에 청구해 주길 바란다고 외무성에 부탁하기도 했다. 26) 한국 관련 고미술품도 마찬가지였다. 도쿄국립박물관 소 장 한국 관련 문화재는 모두 구입 기증 교환 등에 의한 정식의 절차를 거친 것이며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한국관계 고미술품은 고대 한일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일부이지만 학술상 매우 귀중한 자료라는 점을 들어 반환을 거부했다. 27) 불법 반출했다는 기록이 정부 문서에 공식적 기록으로 남아있을 이유가 없으 므로 조사는 한국에 설명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문화재와 관련 해서는 특히 문부성 외곽단체인 문화재보호위원회의 의견이 매우 강경했는데, 문화재보호위원회는 그 전문위원에 학계와 미술계의 유력자를 여러 명 참여시 키고 있으며 전문위원의 발언도 반환에 대하여 강하게 반대했다. 28) <표 3>은 문화재 반환과 관련한 문부성 및 관계자들의 주요 의견을 정리한 것이다. 29) 이들의 의견이 일본 외무성의 문화재 반환에 대한 기본 원칙을 더욱 지지 해주고 보완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3차 회담에서 한국이 제출한 2차 문화재 목록에 대한 논쟁에서도 일본은 한국에서 받은 목록은 대부분 정당한 수단으 로 취득한 것으로 총독부의 강권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반환할 문화재가 없다 고 주장했다. 다만 일본은 이승만 대통령이 관심을 보이는 일부 문화재만을 선 별하여 증정 의 형식으로 별도 고려하겠다는 취지를 한국대표에게 설명했다. 23) 일본외교문서 383, 返 還 請 求 韓 国 文 化 財 目 録. 24) 비고에 있는 소장처는 일본이 수기로 작성한 것이다. (예대)는 도쿄예술대학을 의 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25) 일본외교문서 687, 大 野 次 官, 金 裕 沢 大 使 との 会 談, 文 部 省 および 文 化 財 保 護 委 員 會. 26) 앞의 문서, 文 化 財 保 護 委 員 会 本 間 氏 との 会 見 報 告, 韓 國 書 籍 美 術 工 藝 品 調 査 依 賴 の 件. 27) 일본외교문서 584, 韓 国 関 係 文 化 財 調 査 に 関 する 打 合. 28) 이에 대해서는 류미나, 2009, 앞의 글, 136~139쪽을 참조. 29) 동북아역사재단, 2011, 청구권 기본관계 문화재 자료집에서 정리.

138 13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표 3> 문부성, 문화재보호위원회 전문가들의 문화재 반환 에 대한 주요 의견 문부성 문화재 보호위원회 후지타 료사쿠[ 藤 田 亮 策 ] 외 관련 학자 및 전문가 일본 보유 한국문화재는 모두 적법한 절차로 입수. 일본에 남아있는 것은 학술연구와 미술연구를 위해 필요. 한국의 국민감정을 고려하여 증여한다고 해도 일본이 보유한 것은 연 구상 중요한 것으로 가치는 낮지만 희소가치가 있음. 한국인이 만족할 만한 반환 목록은 보유하고 있지 않음. 법적으로 인도 가능한 것은 없으나 증여 는 가능함. 조선의 고고학적 출토품은 공식적으로 발굴하였으며 조선 법령에 따라 원칙적으로 발굴된 현지 박물관에 보관하였음. 일본에 보낸 것은 극히 소수이며 주로 도기 파편 등이라 학술적 가치는 있으나 미술품 혹은 골 동품의 가치를 가지지 않음. 도굴품에 대한 조사는 불가능함. 미술공예품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거의 고려, 신라 등의 시대의 것으로 일본에 들어온 시기가 불분명하여 대상의 시기를 선택할 수 없음. 박물관 소장품은 엄중한 심사수속을 거쳐서 구입한 것으로 반환하면 재수집이 곤란함. 조선관계 문화재는 미술품 보관의 측면으로도 일본이 훨씬 안전할 수 있음. 문화재를 일부 기증 하는 것에 대하여 찬성하기 어려움.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한국관계 문화재는 구제실박물관 보관 당시 고대 한일관계를 일반에 주지시키고 문화교류를 위한 목적으로 수집한 것으 로 구입 교환 기증 등에 의한 적법한 수단을 거쳤음. 박물관에 있는 것은 고대 한일관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학술적 자료임. 데라우치 총독은 조선의 고미술품, 골동품 등의 손실을 우려하여 기밀로 적극적인 고미술품을 수집했고 총독부 박물관을 설립하여 보관, 총독정 치 이후 일본의 국보에 상당하는 문화재는 거의 일본에 반입하지 않았음. 조선에서 출토한 유물은 조선에 둔다는 원칙에 따라 원산, 부산, 인 천 등 고미술품 골동품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엄중히 단 속, 이러한 데라우치 총독의 정책은 후임 총독들에 의해 답습되었으며 1931년(소화 6년)에 시행된 조선총독부령에 의한 고적명승보존령 에 기초하여 철저하게 고미술품은 국보로 지정. 경상남도 양산 발굴품은 조사자금이 일본에서 들어왔으며 조선문화와 일본문화와의 비교연구 취지에서 박물관에 조선실을 설치할 때 금관을 포함한 고분 한기 전체를 낙랑시대의 종과 함께 관에 기부. 도쿄국립박물관이 보유한 조선관계 소장품 가운데 양산 발굴품과 시모 노세키의 모로가 히데오[ 諸 鹿 央 雄 ]가 불법으로 유통한 유물 외에는 시 중에서 구입한 것임. 낙랑군 발굴을 시행한 도쿄대학은 발굴품 전시회 이후 조선에 반환.

139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39 이에 한국은 만약 일본에 있는 것이 모두 합법적 취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면 한국 소유였던 고서적 및 기타 국보가 일본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36년간의 일본 권력기구 속에서 문화재가 모두 불법 반출 되었다는 것을 역으로 의미하 는 것으로 문화재의 반환을 강력하게 주장한다고 반박했다. 30) 구보타 망언으로 결렬된 한일회담 재개를 위해 양해각서 및 전면회담 재개 에 대한 각서의 서명 교환 및 구상서 교환이 이루어졌다. 31) 문화재 반환 에 대 해서는 1957년 12월 말 상호석방협정의 구두전달사항으로 합의한 안에 기초하 여 일본은 한국 미술품 가운데 즉시 인도가 가능한 것은 한국에 건네고, 그 외 의 미술품 반환은 회담 개최를 통해 논의해 나가기로 약속한바 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일본 문부성 사무차관과 문화재보호위원회 위원장은 난색을 표명했다. 증여 와 기증 의 형식이 아니라면 한국에 인도할 필요가 없다 는 문화재보호위원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나카가와 도오루 [ 中 川 融 ] 아시아국장은 구두전달사항 전체를 삭제해 달라고 한국에 요청했 다. 일본 문부성은 문화재 반환 이 권리인 것처럼 행동하는 한국의 태도에 대 해 외무성에 불만을 제기했고, 1957년 12월 문화재 합의 관련 구두전달사항에 는 동의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결국 각료회의에서 마츠나가 도우[ 松 永 東 ] 문부대신은 인도(turn over) 의 의미가 반환 이 아닌 증여 의 의미라는 점과 반환받을 품목과 수량은 한국 의 결정이 아닌 일본이 선택할 문제임을 외무성이 분명히 해야 동의할 수 있다 고 주장했다. 32) 결국 기시 노부스케[ 岸 信 介 ] 외무대신이 문부대신의 의견에 동 의하면서 마침내 각의결정이 이루어졌다. 33) 30) 한국외교문서 97, 제2차 재산 및 청구권 분과위원회 경과보고서, 20~24쪽. 31) 한국외교문서 100, 제4차 한일회담 예비교섭 (V2.1957), 202~214쪽. 공동발표문은 일본 입국자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한국인 석방, 한국 외국인 수 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일본인 어부의 상호석방, 구보타 간이치로[ 久 保 田 貫 一 郞 ] 의 발언 철회, 일본의 재한재산에 대한 청구권 철회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문 화재는 구두전달사항에 포함되어 있었다. 32) 일본외교문서 567, 韓 国 文 化 財 の 提 供 について, 10~15쪽. 33) 한국외교문서 100, 제4차 한일회담( ~ ), V ; 4차 한

140 14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각료회의의 결정에 따라 문화재보호위원회는 한국이 제출한 목록 가운데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면 교동 출토 미술품 중 금제 귀걸 이[ 金 製 耳 飾 ] 2점, 도제고배( 陶 製 高 杯 ) 50점, 잔결이 있는 철제단도[ 鐵 製 刀 子 殘 缺 ] 5점, 철기잔결( 鐵 器 殘 缺 ) 1괄, 은제환( 銀 製 環 ) 2개, 철제고리 2점, 벽옥 제관옥( 碧 玉 製 管 玉 ) 1점, 유리구슬 7점, 도제( 陶 製 )장경( 長 頸 )단지 2점, 다리 가 있는 도제그릇 2점, 도제뚜껑 24점, 도제심완 10점 등 106점의 반환을 결정 했다. 34) 일본은 문화재 106점은 일본 어선 승조원이 석방된 후 인도하겠다고 한국 측에 통보했다. 35) 106점의 반환 품목에 대한 한일 양국의 평가는 상이하다. 한국은 금전적으 로도 106점이 고려자기 우량품 1개와 맞먹는 정도라고 낮게 평가한 반면, 일본 은 고미술품으로서의 가치는 없으나 일본에서는 학술상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 했다. 36) 그 이유는 보고서가 빠짐없이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동 시기 일본의 물품과 유사하기 때문에 비교연구 자료라는 측면에서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일본도 한국이 반환 을 요구할 것으로 생각되는 물품과 일본에서 이른 바 증여 한 물품 목록에는 큰 차이가 있어 앞으로의 문화재 협상에 대한 난항 을 예상했다. 일회담 재개를 앞두고 한국과 일본은 일본인 나포 어부의 석방 문제와 구보타 발 언의 취소, 대한 일본인 재산 취소 문제, 한국으로의 문화재 반환 문제 등이 협상 재개의 조건으로 교섭된바 있다. 외무성은 문화재 반환이 어려울 경우 평화선으로 나포된 일본 어부들의 석방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문부 성을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이동준 편역, 2015, 앞의 책, 306~307쪽. 34) 일본외교문서 1118, 韓 國 美 術 品 の 寄 贈. 문화재는 4월 16일 주일한국대표부에서 이루어졌다. 도쿄국립박물관 데나카[ 出 中 ] 회계과장 및 야지마[ 矢 島 ] 고고과장과 한국대표부의 진필식 서기관 및 황수영 전문위원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35) 이동준 편역, 2015, 앞의 책, 307쪽. 36) 한국외교문서 102, 문화재관계 전문위원 황수영( 黃 壽 永 )이 임병직( 林 炳 稷 ) 수석 대표에게 보낸 조사보고에 관한 건( ), 제4차 한일회담: 문화재소위원 회 회의록 및 문화재 반환 교섭, 1958, 195쪽. 한국이 일본에서 반환받은 문화재 품목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추가 반환을 요구하자 일본은 1958년 1월 27일 상호석 방 실시위원회 제4차 회의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양산 부부총 출토품으로 1938년 9월 5일 조선총독부의 손을 거쳐 도쿄국립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던 489점의 목록 도 준비하였다. 이동준 편역, 2015, 위의 책, 307쪽.

141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41 2_ 4차~6차 회담: 한국 측 전문가위원회의 참여와 일본의 대응 제4차 회담 청구권위원회에서 한국은 청구권 문제와 문화재 문제를 분리 진행 하자고 제안했고 이에 따라 문화재 문제는 청구권위원회가 아닌 문화재소위원 회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황수영 전문위원이 문화재 교섭에 참여 하게 되었다. 한국으로서는 황수영 전문위원이 참여함에 따라 문화재 문제는 이전보다 전문적인 지식에 입각하여 교섭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1958년 7월 7일 주일대표부는 황수영 전문위원의 의견을 외무부 장관에게 보고했는 데, 37) 기존에 한국이 제출한 목록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포함되어 있었 다. 그 이유는 첫째, 해방 후 일본의 경제적 문화적 혼란기에 소재지와 소장자 의 변동이 극심하고, 둘째, 반출 시기는 1905년으로 한정해야 한다는 것이었 다. 그리고 전적류와 개인소장 미술품 전문가를 1인씩 보강해야 한다고 요청했 다. 그는 도쿄국립박물관 신 목록에 의거하여 우리 문화재 5,617점을 다시 분 류했다. 전문가가 참여함으로써 문화재 반환의 원칙이 마침내 한국에서도 만 들어진 것이다. 38) 1958년 10월 25일 제4차 한일회담 문화재소위원회에서 한국은 미흡하지만 반환해야 할 문화재에 대한 반출경위 및 약탈 문화재에 대한 설명과 근거자료 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39) <표 4>를 참고하기 바란다. 문화재소위원회는 4차 회담에서 12차례 개최되었는데, 주로 한국이 반환 을 요구하는 목록에 대한 일본의 답변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전문가위원회에서 37) 문화재청, 2005, 한 일협정 반환문화재 자료집, 101~102쪽. 38) 황수영은 도쿄국립박물관 소장품 중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 고려자기 386점 중 96점이 불법 반출되어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이라는 의견과 오구라[ 小 倉 ] 컬렉션 총 1,102점 즉 1. 선사시대: 64점(중국 출토품 포함), 2. 낙랑시대: 80점, 3. 고구려시대: 17점, 4. 백제시대: 27점, 5. 임나시대: 247점, 6. 신라시대: 241점, 7. 고려시대: 139점, 8. 이조시대: 145점은 한국과 관계있는 유물임을 임병직 주일 대표부 대사에게 보고했다. 문화재청, 2005, 위의 책, 102쪽. 39) 앞의 문서, 문화재관계 전문위원 황수영( 黃 壽 永 )이 임병직( 林 炳 稷 ) 수석대표에게 보낸 조사보고에 관한 건( ), 제4차 한일회담: 문화재소위원회 회의록 및 문화재 반환 교섭, 1958, 110~114쪽에서 정리.

142 14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표 4> 한국 주장 반환 문화재 분류와 설명 반환 문화재 분류 설명 1. 일본 정부에서 중 요 문화재 또는 중요 미술품 으로 지정한 문화재 2. 조선총독부(조선 고적연구회)가 반 출한 것 3. 통감, 총독에 의 하여 반출된 것 4. 경상남북도에 소 재하는 분묘 또는 기타 유적에서 출 토된 것 5. 고려시대 분묘 및 기타 유적에서 출 토된 것 지정문화재라함은 한국문화재로서 일본에 반출되어 일본 법률에 의해 일본의 국보 또는 중요 미술품 으로 지정된 것 을 말함(예: 금동보관, 도자기, 석조물 등). 오구라 다케노스케[ 小 倉 武 之 助 ] 소장품은 민간인 소유가 불 가능한 것으로, 대부분이 도굴품이며 그중 창녕 출토 황금 관과 고려자기 등이 일본에 반출되어 일본 정부에 의해 국 보, 중요 미술품,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음. 그 소장이 비 록 개인소장이라 할지라도, 그 가치의 중요성에 비추어 당 연히 반환되어야 함. 1958년 반환된 1건 외 모두 반환해 줄 것. 양산 부부총 출토품은 모두 1920년에 발굴, 1938년 총독부 가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한 것임. 낙랑 왕간( 王 旰 )묘 발굴품은 도쿄대학에서 1925년 발굴하여 도쿄대학에서 반출, 경주 황오리 16호 고분 등 다수 발굴품 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 오대산 서고 수장 조선왕조실록 은 일부가 도쿄대학에 반 출됨.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 총독에 의해 반출된 것. 경주 석굴암의 사리탑은 소네 아라스케[ 曽 禰 黃 助 ] 통감에 의하여 반출됨. 경상남북도는 신라의 수많은 고분과 기타 고대 유적이 보존 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그 전부가 파괴되었다. 특히 경 주, 창녕, 선산, 성주 등지에서 극심하였으며, 이곳에서 출 토된 유물은 마땅히 반환받아야 함. 고려시대 분묘는 1905년을 전후해서 일본인에 의해 전부 파 괴되었음. 일본에 있는 수많은 고려도자기는 분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불법취득한 것이 아니면 도저히 볼 수 없는 제품들이 대부 분임. 일본은 한국에서 반출된 문화재가 총독부의 강권이 아닌 정당한 수단으로 반 출되어 반환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한 한국의 적극적 설명도 황수

143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43 영, 이홍직 등 전문가 위원들이 참석하면서 마침내 시작되었다. 일본대표는 한국이 반환을 주장하는 목록 중 개인소장 문화재는 정확한 소 장처를 파악하기 어려워 반환을 강요할 수 없다며 사유문화재에 대한 논의 자 체를 거부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관동대지진에 의해 모두 불탔으며 황금 관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2006년 조선왕조실록이 한국에 반환 되었다는 점과 도쿄국립박물관에 금관이 전시되어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한국에 고미술품을 인도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 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외무성은 어업교섭 등 다른 협상과 문화재 협상이 연계 되는 것을 우려했다. 즉 문화재 반환 범위가 확대될 경우 일본 국내 비난이 높 아지고 이로 인해 다른 교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여 한국이 요구하는 반환 품목의 현재 소장 장소, 반출경위 등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변을 피했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등 한국의 국내 사정으로 중단된 한일회담은 1960년 10월 25일 5차 회담의 개최와 동시에 재개되었다. 5차 문화재 교섭을 앞두고 문부성과 외무성의 사전협의가 계속되었다. 문부성은 문화재보호법 등 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한국에 문화협력의 일환으로 일부 문화재를 인도하 겠다고 외무성에 통보했다. 또한 문부성은 한국이 계속해서 문화재 반환 이라 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아예 교섭 자체에 응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40) 또한 일 본 국내법에 의해 궁내청 서릉부 소장 서적은 해외 인도가 불가능하다는 내용 40) 일본외교문서 573, 文 化 財 保 護 委 庶 務 課 長 来 訪 の 件. 반환 이라는 용어에 대해 서는 문부성 외에도 외무성, 법무성 등 일본 정부가 전체적으로 난색을 표명했다. 이러한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日 本 側 文 書 番 号 1062, 日 韓 会 談 決 裂 善 後 対 策, 1~20쪽에 잘 나타나 있다. 일본은 식민지와 제2차 세계대전 당 시 교전국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구보타 수석대표는 조선인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총아로서 마치 일본에 전승국으로의 진사를 요구해야 한다고 지금도 착각 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구름 위에서 우쭐해하는 기분으로 국제사회의 통념과 외교회의 상식을 적용하는 수준까지 내려오지 않는 한 한일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 은 있을 수 없다 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당시 일반적인 일본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태도였다.

144 14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도 외무성에 전달했다. 41) 일본 내부 회의에서도 일본 내 반환 목록에 대한 협 의와 그에 따른 법률 문제 검토가 계속되었다. 1960년 11월 14일 수석회담 비공식회의에서 일본은 문화재에 대한 세 가지 기본방침에 대해 한국에 설명을 하고 이해를 구했다. 42) 그 요지는 첫째, 국유 문화재는 원칙적으로 돌려주겠다. 돌려준다는 것은 반환 의 뜻이 아니라 기부 한다는 뜻이다. 국립대학 소유 문화재의 경우에는 대학이 정부의 말을 잘 따르 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은 돌려주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도 전달했다. 둘째, 사 유문화재는 인도할 수 없다. 셋째, 문화재를 인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 적 문화적 고려에 의한 것이지 법률적인 의무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 43) 앞에 서 설명한 1차 한일회담에서 일본 외무성의 방침에서 변하거나 확정된 지침은 하나도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은 4차 회담에서 제시한 5개 항목과 서적(고서) 및 지도 원판, 개인 소 유의 문화재를 추가로 일본 측에 제시했다. 44) 문화재 교섭 기간 동안 계속 소 극적 태도로 일관한 일본도 한국 대표단이 제시한 반환 목록에서 불법 반출되 었음을 증명하는 근거자료를 설명하자 이에 대해 반론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 했다. 45) 한일 간의 문화재 교섭의 진척은 없었으나 일본 소재 한국문화재의 반 출경위를 일본 전문가로부터 직접 듣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당사자인 문부 성이 참여함으로써 보다 직접적으로 한국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해졌 다. 일본은 회담 참석이 어렵다며 문화재전문가위원회 개최를 반대해왔었다. 41) 일본외교문서 386, 宮 内 庁 書 陵 部 所 蔵 の 書 籍. 42) 문화재청, 2005, 앞의 책, 105쪽. 43) 문화재청, 2005, 위의 책, 105~106쪽. 44) 문화재청, 2005, 위의 책, 105쪽. 45) 일본외교문서 598, 13~27쪽. 戻 ってくるであろう 韓 国 文 化 財 에는 1963년 신 세계 에 게재된 이홍직 대표의 글 한일회담에서 문화재문제에 대한 총괄 이 일본 어로 번역되어 게재되었다. 이 글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관헌( 官 憲 )을 배경으로 천 여 점의 뛰어난 고려자기를 수집하였다는 내용과 교토대학 소장 가와이문고가 강 화도 정족산 사고를 파괴하고 훔쳐갔음을 증명하는 경경비발( 京 警 秘 發 ) 제402호 융희( 隆 熙 ) 3년(1909) 3월 11일 경기경찰부장 경시 이다 아키라[ 飯 田 章 ] 발신 등 일본이 불법 반출했음을 증명하는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다.

145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45 그러나 한국의 설득에 일본이 동의하여 한국에서는 황수영 전문위원이, 일본 에서는 문화재보호위원회 미술공예과장인 마쓰시타 다카아키[ 松 下 降 章 ]와 문 화재위원회 조사관인 사이토 다다시[ 斎 藤 正 ]가 참석하게 된다. 이들의 참가로 인해 전문적인 지식에 입각하여 궁궐, 사찰 등의 유적지에서 반출된 석조물의 반출경위 등 지금까지 논의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의견교환이 이루어졌다. 한일회담 전 과정에서 6차 회담은 문화재 문제가 가장 많이 논의된 기간이 었다. 문화재소위원회가 8회, 전문가위원회가 6회, 비공식회담 1회가 개최되 었다. 예비교섭에서 한국의 이홍직 대표와 일본의 하리가니 마사유키[ 針 谷 正 之 ] 정보문화국 참사관과의 회합은 6회나 개최되었다. 1962년 2월 28일 한국은 다음과 같이 반환 청구 한국문화재 목록 을 전달 했다. 46) 이에 대한 구체적의 논의는 문화재전문가위원회에서 다루어졌다. <표 5> 를 참고하기 바란다. 6차 회담 문화재전문가위원회에서는 반환의 법적 의무, 반환의 대상, 반환 의 방법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그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은 전문 가위원회를 통해 일본으로 반출된 한국문화재가 불법 반출되었음을 적극적으 로 설명함으로써 애초에 일본이 인도하고자 하는 문화재의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본은 1962년 2월 28일 제출 목록을 기초로 하여 일본의 문부 성, 대장성, 외무성과의 내부협의를 통해 1962년 12월 24일 그동안의 조사결 과를 기초로 한국문화재의 현황 등에 관한 조서 를 작성하였다. 출토지역을 남 북한으로 표시하고 국유와 민간소유를 구분하여 조사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47) 이 안을 기초로 하여 1963년 7월 23일 외무성이 다음과 같이 1차 시안을 작성 했다. 가)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경상남도 소재 양산군 양산면 북정리 출토품 489점, 나) 약간의 고려자기 및 유일의 국유중요문화재인 도쿄예대 소장 미술 품 1점, 다) 한국에서 특별히 요청하고 있는 오구라 컬렉션 중 일부를 정부가 46) 일본외교문서 582, 日 韓 文 化 財 問 題 についての 問 題 点 ; 문화재청, 2005, 앞의 책, 102~110을 참고로 작성. 47) 일본외교문서 591, 韓 国 文 化 財 の 現 状 等 に 関 する 調 書, 1~2쪽.

146 14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표 5> 반환청구 한국문화재 목록 한국이 제출한 약탈 문화재 범주 세부 목록 일본이 밝힌 소장처 비고 1. 조선총독부에 의해 반출된 것 (1) 경남 양산 부부총 출토 품 전부 (2) 경주로서리 215번지 고분 출토품 (3) 경주 황오리 제16호분 출토품 전부 (4) 평남 대동군 대동강면 정백리 127, 227호분 출토품 (5) 평남 대동군 대동강면 석암리 201호분 출토품 (6) 평남 대동군 대동강면 남정리 116호분 출토품 도쿄국립 박물관 한국: 1905년 이전 한 국에서는 분묘를 파괴 하여 물건을 꺼낸다는 개념 없어 모두 1905 년 이후 관헌에 의해 도굴된 것임. 경남유적 은 모두 정당한 방법 의 출토품으로 볼 수 없음. 일본: 일본에 있는 모 든 것이 불법이라는 기 록은 찾을 수 없음. (7) 평남 대동군 대동강면 왕간묘 출토품 도쿄대학 2. 통감 및 총독 등에 의해 반 출된 것 (1)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 고려자기 약 100점 (2) 소네 아라스케[ 曾 禰 荒 助 ] 한국전적 (3) 데라우치 마사타케[ 寺 内 正 毅 ] 전적, 서화, 불상 (4) 통감부장서 (5) 가와이문고[ 河 合 弘 民 ] 장서(관부기록) 도쿄국립 박물관 소재불명/ 목록 없음 야마구치 단기여자 대학 보관 소장처를 알 수 없음 교토대학 한국: 사리장치를 꺼내 기 위해 석탑의 파괴를 자행, 역대 조선 통감이 반출했다는 기록들이 존재함. 이토 등이 반출 한 고려자기는 수만 점 이 넘는다고 지적. 가와 이문고는 개인이 한국 서적을 가지고 가서 문 고를 세웠는데 일부는 강화도 전등사 경내 자 물쇠를 도끼로 깨고 다 수 가져갔다는 기록도 있음. 통감부 장서는 현 재 궁내성 도서료에 보 관되었다고 밝혔으나 일본은 소장처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함.

147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47 한국이 제출한 약탈 문화재 범주 세부 목록 일본이 밝힌 소장처 비고 3. 일본 국유의 다음 항목에 속하는 것 (1) 경상남북도 소재 분묘 와 기타 유적에서 출 토된 것이 대부분 (2) 고려시대 분묘와 기타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 대부분 도쿄국립 박물관 경상남북도와 신라시 대 매장물. (3) 체신관계 문화재 체신박물관 에 보관 1905년 이후 반출된 것. 4. 지정문화재 (1) 오구라 다케노스케[ 小 倉 武 之 助 ] 소장품 및 기타 문화재의 가치로 보아 개 인이 소유하는 것이 불가 능한 것이 있으므로 도굴 품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반환의 의무가 있음. 5. 사유문화재 (1) 야쓰이 세이치[ 谷 井 済 一 ] 소장품 (2) 오구라 다케노스케 소 장품 (3) 이치다 지로[ 市 田 次 郎 ] 소장품 (4) 석조미술품 한국: 도굴품이 아니면 절대로 사유물이 될 수 없는 문화재가 다수 포 함되어 있음. 일본: 사유물에 대하여 국가가 관여하는 것은 어려움. 다보탑 사자 등 행방을 알 수 없음. 구입하거나 혹은 오구라 씨의 자발적 의사로 기증을 요청, 라) 체신관계 문화 재는 우정성에서도 반대하고 있지 않음, 마) 고서적 중 궁내성 소장의 통감본, 교토대학의 가와이문고, 데라우치문고는 마이크로필름에 수록하여 그 필름을 한국에 기증하거나 혹은 일본 측이 마이크로필름을 보관할 수 있다고 하는 안 이었다. 48) 궁내청 서릉부 소장 통감부 장서 11부 90책과 소네 아라스케[ 曾 禰 荒 助 ] 헌상본 152부 762책에 대해서는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한국에 전달하는 48) 이동준 편역, 2015, 앞의 책, 941~942쪽.

148 14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것이 가능하다는 기술도 보인다. 6차 회담 전문가회의에서 한국이 집요하게 불법 부당하게 반출된 경위를 밝혀낸 결과이기도 했다. 6차 문화재전문가위원회에서는 한국이 권리로서 요청하는 문화재 반환 의 무에 대한 한일 대립도 계속되었다. 첨예한 대립 속에 한국은 일본에게 반환 과 기증 에 대한 대안으로 인도 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제안했다. 49) 일본도 1957년 12월 31일자 구술서(oral statement) 의 표현, 즉 인도(turn over) 의 명목으로 국가와 공공기관 및 개인이 점유하고 있는 중요한 문화재를 반환하 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 한다 50) 고 언급한바 있어 결국 타협책으로 인도(turn over) 라는 용어에 양국이 암묵적으로 동의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은 1962년 8월 20일 한국에서 반출한 경위, 합법성 여부, 원산지 반환에 대한 국제적 해결방법 등 토의내용과 조사내용을 정리하였다. 51) 일본 은 제출받은 한국의 문화재 목록에 대한 조사를 이미 완료한 부분도 있었으나 교섭과정에서 일본 측 조사 내용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모른다고 일관했다. 1962년 12월 26일 예비교섭 제21회 회의에서 일한 간의 문화적 협력에 관한 의정서 요강안 을 제시했다. 이것은 김종필 오히라 회담에서 청구권 문제에 대한 기본방침이 정해지면서 문화재 문제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문화재 반환 의 측면이 아닌 문화협력의 차원에서 국유문화재에 한해서 증여한다는 가이드 라인이 정치적으로 합의되면서 작성된 안이었다. 52) 즉 문화재 반환 이라는 용 어가 제외되고 양국 간 문화협력을 중시하는 내용으로 협정을 체결하겠다는 일본의 의지를 다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문화재 교섭은 품목 결정이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어업교섭, 한국의 국내정 치 문제 등으로 1963년 4월 3일 제6회 예비교섭으로 중단되었다. 다시 교섭을 49) 문화재청, 2005, 앞의 책, 110쪽. 50) 이동준 편역, 2015, 앞의 책, 613쪽. 51) 일본외교문서 577, 日 韓 会 談 双 方 主 張 の 概 要 ( 文 化 財 問 題 ). 52) 일본은 김 오히라 메모에 의해 문화재 문제가 문화협력의 차원으로 해결된다고 보았 다. 한국은 문화재 문제의 해결은 문화재를 인도받아야 종결된다는 입장을 계속 견지했 으나 한일 간의 쟁점이었던 문화재 반환의 권리 가 이 합의로 한국이 권리주장을 강하 게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 문화재청, 앞의 책, 115쪽 참고.

149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49 <표 6> 제5차, 제6차 한일회담 문화재위원회 제 5 차 회담 ( ~ ) 제 6 차 회담 ( ~ ) 문화재위원회 (제1회~제2회) 문화재소위원회 문화재전문가회의 예비교섭 문화재 관계 회합 수석회담 제1회( ) 제2회( ) * 전문가위원회 개최에 양국이 동의 제1회( ) 제2회( ) 제3회( ) 제4회( ) 제5회( ) 제6회( ) 제7회( ) 제1회( ) 제2회( ) 제3회( ) 제4회( ) 제5회( ) 제6회( ) 제7회( ) * 비공식 수석회담 제1회( ) 제2회( ) 제3회( ) 제4회( ) 제5회( ) 제6회( ) 비공식 제1회만 개최( ) * 문화재에 대해서 반환, 기증 이 아닌 타협 책으로서 인도(turn over) 로 합의 문화재소위원회

150 15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재개한 시기는 1964년 3월 21일 문화재소위원회였다. 위원회에서는 문화재 반 환 문제는 일본이 결정만 하면 되는 문제이나 정체된 어업교섭으로 한일회담 의 타결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 반환 문화재 목록만 우선 제출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내세워 사실상 교섭을 중단시켰다. 6차 회담은 전체적으로 정치교 섭, 예비교섭, 본회담, 재개교섭 등이 반복되었는데 재개된 6차 회담에서는 1964년 3월 21일에 단 한 차례만 개최되었다. 53) 5차 회담과 6차 회담의 교섭을 정리하면 <표 6>과 같다. 3_ 7차 회담: 문화재 교섭의 타결 한국으로 인도할 품목 작성의 구체적 검토를 위하여 외무성 담당자를 비롯하 여 전문가, 박물관 관계자, 문부성 문화재보호위원회, 대장성 관계자, 법률전 문가 등의 협의가 1963년부터 1965년 5월 회담 체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먼저 도쿄국립박물관 소장품 중 인도할 품목에 대한 회의는 1964년 2월 6 일에 개최되었다. 한국 측 청구 목록 중 조선총독부에 의해 반출된 경주 황오 리 제16호분 출토품,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의 고려자기 103점 중 85점, 일 본 국유의 것으로 경상남북도 소재 분묘 및 기타 유적에서 출토된 것 280점 중 160점, 고려시대의 분묘 및 기타 유적에서 출토된 것 184점 중 80점, 그리고 양산 부부총 출토품은 1957년 12월, 한국에 그 목록을 전달했지만 고대 고고학 연구를 위해 중요할 뿐만 아니라 한국에 유사한 것이 있으므로 관계자는 절대 로 문화재 반환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문화재보호위원회 마쓰시타 미술공예과장은 본 출토품이 임나( 任 那 )와 일본과의 관계를 설명할 귀중한 것 이며, 한국에 이런 종류의 것은 따로 있으나, 일본에는 이것밖에 없다 는 학문 적인 이유를 내세웠다. 54) 1965년 3월 6일 외무성과 문화재보호위원회 사무국, 도쿄국립박물관, 궁 53) 이동준 편역, 2015, 앞의 책, 943쪽 54) 일본외교문서 581, 文 化 財 小 委 員 会 に 関 する 打 合 せ, 16쪽.

151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51 내청과의 연석회의에서 일한문화협력의 일환으로서 한국에 증여하는 것으로 고려해야 하는 품목 의 제목으로 외무성 시안이 제시되었다. 55) 1962년 2월 28 일 한국이 제출한 반환 청구 한국문화재 목록 중에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목 록의 일부였다. 외무성은 3월 6일, 도쿄국립박물관 소장품에 대한 반환 목록을 작성하여 문화재보호위원회에 검토를 부탁했다. 56) 그 결과는 <표 7>과 같다. 외무성 제시안 중 1958년 한국에 제출한 양산 부부총 출토품, 금착수렵문 양 동통 등은 문화재보호위원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57) 이토의 고려자기는 중요 미술품으로 지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국에 인도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다보탑 사자의 경우 행방이 묘연하다고 설명하여 결국 문화재보호위원회의 검 토 결과에서 제외되었다. 58) 이 외에 사유물은 전부 반환목록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 데라우치(전적, 서화, 불상)문고는 한국이 계속 반환을 요구하여 야마구치단기대학 소장분과 현( 縣 ) 도서관이 보유하고 있는 목록에 대해서 조사를 통해 문화재보호위원회 의 동의와 야마구치 현의 협력에 일부 기증을 한다는 방침이 세워졌으나 결국 외무성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寺 內 正 毅 ] 총독의 사유물에 가깝다는 원칙을 적 용하여 반환을 거부하였다. 59) 사유물을 반환할 경우, 오구라 소장품 등 다른 55) 앞의 문서, 日 韓 文 化 財 問 題 についての 問 題 点 ( 日 韓 文 化 協 力 の 一 環 として 贈 与 することを 考 慮 すべき 目 録 ). 56) 이동준 편역, 2015, 앞의 책, 944~955쪽. 57) 마쓰시타 다카아키[ 松 下 隆 章 ] 문화재보호위원회 미술공예과장은 부부총 일괄유물 은 한국 분묘 출토품 가운데 유일한 유물이라는 점, 고대 일본과 한국의 밀접한 관 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로 일본은 교섭에서 한국이 양산 부부총 출토품을 계속 요 구한다면 협상을 중단하겠다는 의지도 표명했다. 이동준 편역, 2015, 위의 책, 950쪽. 58) 앞의 문서, 文 化 財 小 委 員 会 に 関 する 打 合 せ, 22~24쪽. 59) 한국은 데라우치문고를 거듭 반환 요청한바 있다. 이에 일본도 본격적으로 학술조 사를 실시하였다. 북동아과 마에다 도시카즈[ 前 田 利 一 ] 과장, 모리타 요시오[ 森 田 芳 夫 ] 사무관, 전문가인 스에마츠 야스카즈[ 末 松 保 和 ], 동양문고 사서( 司 書 ) 타가 와 코조[ 田 川 孝 三 ] 야마구치 현을 방문하여 직접 조사가 이루어졌다. 외무성도 처 음에는 데라우치문고가 완전한 사유물이 아니라는 점, 즉 현이 보유하고 있는 일

152 15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1. 조선 총독부에 의 해 반출된 것 2. 통감 및 총독 등에 의해 반출된 것 3. 일본 국유 중 다 음 항목에 속하 는 것 4. 석조미술품 <표 7>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반환 목록에 대한 검토 결과 1965년 3월 12일 1965년 3월 6일(외무성 안) (문화재보호위원회의 답변) 점수 증여 점수 (1) 경남 양산 부부총 출토품 전부 불가 (3) 경주 황오리 제16호분 출토품 전부 (1)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 고 려자기 약 100점 (1) 경상남북도 소재 분묘 기타 유 적에서 출토한 것들 대부분 (2) 고려시대 분묘 기타 유적에서 출토한 것들 대부분 3점 103점 279점 182점 3점 90점 200점 100점 (1) 석조 다라 보살좌상 1점 1점 (ㄴ) 사자 2점 2점 5. 지정문화재 금착수렵문양 동통(도쿄예술대학) 불가 사유문화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제7차 회담 문화재위원회는 1965년 4월 24일에 처음 1차 회합을 개최하였 다. 한국은 데라우치문고의 서적, 야쓰이 세이치[ 谷 井 済 一 ]의 소장품, 이치다 지로[ 市 田 次 郞 ]의 소장품, 경주 석굴암의 석불, 석탑, 다보탑의 사자 등에 대 한 조사 성과와 오구라 컬렉션, 야마구치 현 데라우치문고의 견학을 요청하였 으나 문화재협정 등 한일회담을 앞두고 민감한 사안이라 일본은 한국 측의 견 부를 한국에 기증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이에 대하여 야마구치 현 부지 사와 하시모토 마사유키[ 橋 本 正 之 ] 야마구치 현 지사와의 회담에서 협력을 구하기 도 했다. 그러나 전문가의 의견에서 총독 개인의 수집품이라는 스에마츠 각슈인 [ 学 習 院 ]대학 교수의 의견에 따라 사유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인도를 거부했다. 물론 한국이 강하게 주장하면 한일 우호관계 및 한일문화 협력 증진이라는 대국적 견지에서 동 품목에 대한 인도를 할 예정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일단 사유물이 대상 에서 제외된다는 원칙을 고수한 것으로 보인다. 데라우치문고는 1996년 기증 형식 으로 경남대학교로 반환되었다. 일본외교문서 1116, 寺 内 文 庫 現 状 참고.

153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53 학을 거부하였다. 일본이 한국에 반환할 품목을 제출한 것은 협상 종료 직전 10일 전인 6월 11일이었다. 인도할 품목은, 도자기(이토의 고려자기 103점 중 72점), 고고자 료(1괄, 1련을 1점으로 하여 291점), 석조미술품 3점, 도서 163부 852권(통감부 장서 11부 90권과 소네의 헌상본 152부 762권), 체신관계 품목 35점이었다. 일 본의 입장이 대한민국 시정하에 있는 지역에만 한정하여 인도한다 는 원칙에 따라 고고자료 및 체신관계 품목 중 북한 출토품은 제외되었다. 60) 회담이 끝나 기 11일 전에 제출되었기 때문에 한국은 이에 대응할 시간도 부족하였다. 더 이상 반환할 문화재를 늘리지 않겠다는 일본의 교섭 작전이었다. 한국은 일본 이 정한 품목을 받아들여 교섭을 타결하거나 아니면 교섭을 중단하여 다른 교 섭에 영향을 끼치거나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국은 일본이 제출한 목록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6월 12일 김동조 대사 는 우시바 노부히코[ 牛 場 信 彦 ] 심의관에게, 그리고 방희 공사와 이홍직 대표 는 우시로쿠 도라오[ 後 宮 虎 郞 ] 아시아국장에게 일본이 제추한 리스트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1958년 4월 1 일본이 약속한 양산 부부총 출토품 489점, 이 토가 반출한 고려자기 전부 그리고, 2 오구라 다케노스케[ 小 倉 武 之 助 ] 소장 품, 3 일본에 반출된 고서적의 마이크로필름 등의 인도를 요청했다. 61) 이들 문화재 중 일부를 동양관의 설치와 관련시켰다는 점에 대하여 한국은 일본에 강한 불만을 표명했다. 다른 교섭에 비하여 비교적 진행 속도가 빨랐던 문화재 교섭이었지만, 이 제는 상황이 바뀌어 다른 교섭의 경우 협정 체결을 위한 조문화 작업이 시작된 반면 문화재 문제는 한국이 받아들이지 않아 6월 17일에도 아직 품목이 결정되 지 않은 상태였다. 품목 결정은 6월 17일부터 힐튼호텔에서 철야로 진행되었다. 62) 우시로쿠 60) 이동준 편역, 2015, 앞의 책, 947쪽. 61) 이동준 편역, 2015, 위의 책, 948쪽. 62) 마지막까지 한일 간의 쟁점이 된 것은 양산 부부총 유물이었다. 이로 인해 협상은 정체상태에 빠졌다. 양산 부부총 유물에 대해 일본은 1957년 489점의 목록을 한국

154 15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아시아국장이 회담에 관여하면서 한국은 양산 부부총을 포기했고, 대신에 일 본은 경주 노서리, 황오리의 출토품 전부, 이토의 고려자기는 일본 측에 6점을 남긴 나머지 97점, 경상남북도 소재 분묘, 그 외 기타 유적에서 출토된 것은 일 본에 6점을 남긴 전부, 고려시대 분묘 그 외 기타 유적에서 출토된 것은 일본 에 4점을 남긴 전부를 한국에 인도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한국은 양산 부부총 을 포기하는 대신 다른 문화재의 인도를 얻어내는 방식으로 교섭을 진행한 것 이다. 어쨌든 일본이 다른 것을 희생하더라도 양산 부부총 유물에 집착하면서 한국도 예상 외로 다른 문화재를 인도받는 것이 가능해졌다. 결국 6월 18일 회 의에서 72점의 품목이 추가되었다. 한편 한국 측이 최후까지 집착한 데라우치의 전적, 서화, 불상과 오구라 컬 렉션 등 사유문화재의 인도에 관한 의사록은 18일 밤까지 협의가 이루어졌 다. 63) 협의의사록에 대한 협상과정은 <표 8>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일본이 2차 안으로 제시한 내용 중 <표 8>의 괄호 안의 기증되도록 일본 국 정부가 가능한 한 알선하는 의 내용은 일본 문화재보호위원회의 반대로 삭 제되었다. 권장 한다 는 용어는 사유문화재가 추후에 반환될 여지를 남겨두기 위하여 한국이 강하게 요구한 것으로 보여진다. 교섭 문서에는 권장 이라는 단 어를 한국이 제안한 것인지 일본이 제안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일본 정부는 권장 이라는 용어가 개인이 좋을 대로 생각하라 는 뜻에 해당하며 정부 가 어떤 정책을 세우거나 압력을 가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고 한국은 기증되 64) 에 제출한 적이 있다. 1965년 6월 17일 힐튼호텔에서 일본 외무성은 양산 부부총 유물을 한국에 전달하는 방법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한일 간의 지리적 접근성 으로 고고학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라면 한국에 가서 유물을 보면 충분하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부성 당국은 다른 품목은 상당히 반출되더라도 부부총 유 물은 절대 넘길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결국 한국 측은 양산총 유물을 협상카 드로 하여 다른 문화재를 더 인도받을 수 있게 되었다. 결국 협상 타결 전날 아침에 문화재 협상이 타결될 수 있게 됐다. 이동준 편역, 2015, 앞의 책, 949~952쪽. 63) 이동준 편역, 2015, 위의 책, 955~956쪽. 64) 일본 측 초안에는 문화재 라는 용어는 포함되지 않았다. 6월 15일 오전 하리가니 문화사업부장은 방희 공사에게 문화협력에 관한 일본국과 대한민국 간의 협정 (안) 을 제시한바 있다. 이에 방희 공사는 문화재 라는 용어를 포함시켰는데 이를

155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55 <표 8>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 64) 1차 안 2차 안 합의안 한국(안) 일본국 정부는, 일본국 국민의 사 유 하에 있는 한국문화재가 대한 민국 측에 기증되도록 적극적인 지도를 행하며(밑줄 필자), 특히 다음의 문화재가 우선적으로 포함 되도록 한다. _ 일본(안) 일본 정부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 는 유물을 기증할 수 있게 유도할 수 있는 권한은 헌법상 불가능하 다고 주장. 대한민국 측 대표는 일본 국민 사 유의 한국에서 유래한 문화재가 대한민국 측에 기증되는(기증되도 록 일본국 정부가 가능한 한 알선 하는) 것을 희망한다. 일본 측 대표는 이들 일본 국민 이 자신이 소유한 문화재를 자발 적으로 한국 측에 기증하는 것은 일한 양국 간 문화협력 증진에 기 여하는 것으로서 환영할 일이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이를 권장하는 것이다. 한국 측 대표는, 일본 국민의 사유로서 한국에 연유하는 문화재가 한국 측에 기증되도록 희망한다는 뜻을 말하였다. 일본 측 대표는 일본 국민이 소유하는 이러한 문화재를 자발적으로 한국 측에 기증함은 한일 양국 간의 문화협력의 증진에 기여하게될 것이므로 정부로서 이를 권장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는 것을 희망한다 는 뜻이며 꼭 반환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일본 측에 설명했다. 65) 그러나 일본 문화재보호위원회 미야지 시게루[ 宮 地 茂 ] 사무국장은 권장 이 한국이 끝까지 고집한 이유는 일본이 단순히 문화협력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 려고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65) 일본외교문서 1316, 日 韓 国 交 正 常 化 交 渉 の 記 録 総 説 十 三, 622쪽.

156 15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라는 단어가 삽입되는 것에 반대했다. 66) 하리가니 부장은 권장 이라는 단어는 외교적 수사이며 법률적인 구속력과 의무가 없다는 점을 미야지 사무국장에게 설명했다. 6월 20일 문화재보호위원회 가라하라 슌[ 河 原 春 ] 위원장은 권장한 다 라는 문구에 거부감을 표하면서도 이 의사록을 붙여야만 정리가 된다면 어 쩔 수 없을 것이다 라며 동의했다. 67) 즉 권장 이라는 단어는 협정문에서는 생소하지만 일본에 존재하는 사유문 화재 반환 의무를 어떤 식으로든지 조문에 넣으려고 했던 한국에 대하여 일본 이 법적 의무감을 없애기 위해 타협안으로 생겨난 단어였다. 비록 법적 구속력은 없으나, 이 합의의사록에 의하여 한일회담 타결 수, 오 쿠라호텔 자선당의 초석돌(1996), 북관대첩비(2005),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2006)이 일본으로부터 환수되었다. Ⅳ. 맺음말 이상으로 양국 외교문서를 통해 한일회담 문화재 교섭을 분석했다. 문화재 교 섭에 있어서 일본의 최대 목표는 최소한의 유물을 한국에 인도하는 것이었다. 제1차 한일회담은 일본이 전체 한일회담 협상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준 비한 교섭이었다. 국제사회의 문화재 반환, 기증에 대한 치밀한 사례조사, 관 련법을 모두 조사하여 이를 한국에 적용시키고자 했다. 예비회담에 앞서 준비 한 문화재 반환에 대한 기본원칙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사유 물이 아닌 정부 소유의 문화재로 한국에 반환하여도 국내에 영향을 미치지 않 는 범위 내에서 일부 반환한다는 것, 둘째, 한국이 요구하는 약탈 문화재로서 66) 위의 문서, 日 韓 国 交 正 常 化 交 渉 の 記 録 総 説 十 三, 624쪽. 67) 위의 문서, 日 韓 国 交 正 常 化 交 渉 の 記 録 総 説 十 三, 624~625쪽.

157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57 의 반환, 원상복귀 라는 용어는 사용할 수 없으며 기증 혹은 증여 의 형식으 로 한국에 유물의 일부를 돌려준다는 것이다. 대일강화조약 체결과정에서 연합국의 지위를 상실한 한국은 독자적으로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규정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교전국으로서 대 일배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대전제하에서 출발한 문화재 교섭은 사실상 한국 으로서는 큰 한계를 안고가야 하는 험난한 교섭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 반환 협상은 일본 정부의 기본 방침을 중심축으로 진행되었다. 일 본의 문화재 교섭에 대한 내부 방침이 문화재 교섭과정에서 어떻게 반영되는 지를 살펴 본 결과는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외무성은 한국과 교섭의 당사자였으나 문화재 문제는 문부성이 소관 부서였기 때문에 문부성과 문화재보호위원회 그리고 전문가들의 의견이 외무 성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처음부터 일본은 문화재 문제가 청구권 협 상의 일환이었고 부수적인 교섭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한 한 학술적 금전적인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집중했고 협상 마지막까지 소극적 인 태도로 일관했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 일본 문부성이 조사한 한국 관련 문화재는 오히려 한국에 반환할 필요가 없다는 외무성의 논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결 과로 이어졌다. 일본이 문화재 교섭에서 보여준 늑장 태도와 부정적 인 견해 는 문화재 교섭을 다른 교섭과의 관계에서 지연시키는 전략이자, 반환 문화재 범위가 확장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전략에 불과했다. 둘째, 한국 전문가위원의 활약으로 반환 품목이 확대될 수 있었다. 일본은 한국에 기증할 수 있는 문화재 목록과 범위를 자신들이 정해 그 틀 안에서 인 도하겠다는 것이 대전제였기 때문에 교섭에서 한국이 요구하는 문화재 목록을 구체적으로 협상할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4차 회담에서 문화재위 원회의 개최가 별도로 이루어지면서 한국의 전문가들이 회담에 참여하게 되었 다. 한국 측 문화재 전문위원은 문화재가 불법 반출되었음을 알 수 있는 근거 를 구체적으로 제시했으며 사유물이라도 문화재가 도굴되거나 불법 유통 되었 다는 이유 등을 제시하면서 불법 반출된 문화재에 대한 반환을 요구했다. 일본

158 15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도 한국이 요구하는 목록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설명하거나 해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결국 문화재 교섭이 갖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의 참여와 의지로 문 화재 반환 목록을 확대하는 것이 가능했다. 당시의 국제상황이 교전국가에 대 한 배상, 반환 의 개념만 존재하였던 것을 고려해 본다면 이것은 한일문화재 교섭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마지막 교섭까지 일본은 정부 소유물이라도 도쿄국립박물관의 동양 관 설치 및 고대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유물 등 자국에 영향을 미 치는 것은 일절 반환하지 않았다. 한국이 요구하는 데라우치 관련 유물은 문화 재보호위원회, 야마구치 현의 협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칙을 고수했다. 그 이유는 이 유물이 정부 소유라기 보다는 개인 소유에 가깝다는 인식 때문이 었다. 이를 반환할 경우, 한국이 요구하는 사유문화재를 더 반환해야 할지 모 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한일회담 이후 문화재 반환에 대한 국제적인 흐름도 변화하고 있다 년 당시에는 문화재가 기원국에 원상복귀해야 한다는 국제적 규범이 형성되지 않았으나 오늘날은 상황이 다르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 20세기 를 걸어왔고 식민지 지배의 청산 문제로 문화재 반환이 국제사회에서 계속되 고 있다. 반환 문화재 해결에 있어서 국제적 요인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추후 에 연구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문화재는 원산지 사람들의 정체성이나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외규장각 의궤를, 미국에서 덕종어보를 돌려받는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교섭 사례는 향후 반환 문화재 교섭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10년 이래 조선에서 실시한 대규모 발굴 과정에서 얻은 대량의 고 고학적 출토품이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일회담 문서 공개로 일본이 내부 조사과정에서 불법임이 입증된 유물이나 도서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도 사실로 드러났다. 일본이 반출한 문 화재 중 다보탑 사자상 3개는 행방조차 묘연하다. 50년 전의 상황에서 국제사 회와 국민정서가 변화해 온 것도 사실이다. 문화재는 오로지 감상의 대상이 아

159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59 니다. 문화재를 통해 역사를 접하는 우리의 기억과 역사 속에 존재하는 귀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등에서 논의되고 있는 국제사회의 문화재 반환 의 움직임을 배우면서 세계사적인 시점에서 문화재 문제를 다시 한 번 고찰하 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160 16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참고문헌 국성하, 2005, 한일회담 문화재 반환협상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동북아역사재단, 2010, 한일회담관련 일본측 공문서 상세목록. 류미나, 2009, 한일회담 외교문서 로 본 한일 간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역사연구 30집. 류미나, 2010, 일본의 문화재 반환 으로 본 식민지 지배의 잔상, 그리고 청산 의 허 상, 일본역사연구 제32집. 류미나, 2014, 문화재 반환과 둘러싼 한일회담의 한계, 일본사역사연구 40집. 문화재청, 2005, 한일협정 반환문화재 자료집. 박훈, 2010, 한일회담 문화재 반환 교섭의 전개과정과 쟁점, 의제로 본 한일회담 2, 선인. 백충현, 1989, 해외유출불법반출문화재반환의 국제법적 규제, 서울대학교 법학 30권. 이동준 편역, 2015, 일한국교정상화교섭의 기록, 삼인출판사. 이보아, 1999, 문화재의 원산국으로의 반환에 대한 고찰, 비교문화연구, 서울대. 이홍직, 1963, 韓 日 會 談 과 文 化 財 返 還 問 題, 신세계사. 제성호, 2009, 한일간 문화재 반환문제에 관한 국제법적 고찰, 중앙법학 11권 2호. 조부근, 2007, 잃어버린 우리문화재를 찾아, 한일협정반환촉진 정책포럼발표자료 집,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재청. 황수영, 1960, 재일 문화재의 반환문제, 사상계. 황수영 편, 2014, 일제기피해자피해자료, 국외소재문화재재단. 高 崎 宗 司, 1986, 日 韓 会 談 における 文 化 財 返 還 交 渉 について, 朝 鮮 史 研 究 会. 旗 田 巍, 1965, 日 韓 条 約 と 朝 鮮 文 化 財 返 還 問 題, 歴 史 学 研 究. 藤 田 亮 策, 1951, 朝 鮮 古 文 化 財 の 保 存, 朝 鮮 学 報. 李 英 哲, 2006, 国 際 社 会 における 略 奪 文 化 財 返 還 に 関 する 諸 アプローチおよび 問 題 点 在 日 朝 鮮 文 化 財 返 還 のために, 朝 鮮 大 学 校 学 報. 伊 藤 孝 司, 2008, 韓 国 北 朝 鮮 からの 文 化 財 返 還 要 求 をどのように 受 け 止 めるの か, 世 界. 李 洋 秀, 2012, 日 韓 会 談 文 書 と 文 化 財 返 還 問 題, 季 刊 戦 争 責 任 研 究 第 72 号. 中 内 康 夫, 2011, 日 韓 図 書 協 定 の 作 成 経 緯 と 主 な 内 容, 立 法 と 調 査 No. 314.

161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61 [국문 초록]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조윤수 이 글은 한일회담 문화재 반환 교섭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고 있다. 전체 교섭의 시각에서 문화재위원회를 평가해야 하 는지, 아니면 협상자를 중심으로 평가해야 하는지, 기준에 따라 문화재 교섭에 대한 평가는 다를 것이다. 오늘날 시점으로 50년 전의 반환 교섭을 바라본다면 한계가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시 국제사회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 한일 양국의 문화 재 인식이 협상과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당연하다. 한일외교문서를 통해 분석해 본 결과 한국은 문화재 교섭을 부수적인 것으 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 한국은 한일 과거사 문제 처리의 일환으로 문화재 문제를 인식했는데 그것은 대일 8항목 중 1항목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 대일배상요구조서 에서 조사한 약탈 문화재 범주를 갖고 엉성하게 한일회담 초기 협상을 시작하였지만, 협상이 진행될수록 부수적 소극적으로 일관하는 일본에 별도로 문화재위원회의 개최를 요청하는 등 적극적인 태도로 일본을 압박해 나갔다. 반면 일본은 영토분리 차원에서 문화재 문제를 처리하고자 했 기 때문에 철저하게 제국주의적 논리로 문화재 문제에 접근했다. 문화재 교섭은 한국 외무부(현 외교부)와 일본 외무성이 실질적 교섭 당사 자였으나 일본은 문화재 문제에 있어 문부성, 문화재보호위원회, 전문가의 의 견을 반영하여 반환 목록을 작성하였다. 일본 외무성은 첫 번째 한일회담에서 조사한 국제사례를 한국에 적용시켰다. 즉 한국과 일본은 교전국 간의 배상이 아니기 때문에 문화재를 반환 할 의무가 없으며 사유문화재는 돌려줄 수 없다

162 16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는 논리였다. 문부성과 문화재보호위원회의 주장은 일본 외무성의 주장을 더 욱 지지해주는 결과를 가져다주었을 뿐 일본 외무성이 한국과의 교섭에서 더 적극적인 교섭으로 문화재를 반환하고자 한 의지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소극적이고 부수적인 교섭으로 일관하던 일본 측의 자세를 변화시 킨 것은 한국의 전문가들이었다. 처음부터 반환 문화재 목록을 확대하지 않으 려는 일본의 전략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문화재전문가위원회를 통해 방대한 양 의 일본 반출 목록을 제출해 상세한 설명과 함께 반출경위를 설명하였다. 기존 의 교섭에서 일본은 소장처를 알 수 없다는 태도와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나 한 국의 상세한 보고와 설명으로 더 이상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 다. 이로써 문화재전문가위원회 개최는 당초 일본이 생각했던 문화재 반환 목 록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제어 한일협정, 한일회담 문화재 교섭, 문화재 반환, 일본 문부성, 문화재보호위원회

163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63 [ABSTRACT] The Korea Japan Talks and the Negotiation for the Return of Cultural Properties Focusing on the List compilation Process for the Return of Korean Cultural Properties by the Government of Japan Cho Younsoo This study started from the question of how the Korea Japan talks for cultural property repatriation should be evaluated. Such evaluation will differ depending on the criteria applied, that is, whether the expert committee on cultural properties is assessed with a focus on the overall negotiation or on the negotiators. It is fair enough that the negotiations of fifty years ago had its limits from the current point of view and perceptions on cultural property of the international community. Korea and Japan at that time must have had an impact on the negotiation process. An analysis of the diplomatic documents exchanged between the two countries indicates that Korea did not view the negotiation for cultural assets as a collateral element, but as part of the process to resolve the historical issues with Japan. Such a perception is shown as an item in the Claims against Japan for Eight Items. Korea at the beginning embarked on the negotiations quite poorly based upon the scope of plundered cultural treasures presented in the Repatriation Request against Japan. However, Korea demanded to hold a separate meeting of the expert committee on cultural properties and put pressure on Japan, which showed nothing but a passive attitude towards the

164 16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negotiation. Meanwhile, Japan approached with a completely imperialistic logic, as the country attempted to handle this issue from the perspective of territorial separation. Korea s Ministry of Foreign Affairs and Japan s Ministry of Foreign Affairs were the de facto negotiators, but Japan prepared a list of cultural objects for repatriation based upon the opinions from the Japanese Ministry of Education, the National Commission for the Protection of Cultural Properties, and experts. The Japanes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applied to Korea the international cases explored in the first Korea Japan talks. That is, Japan claimed that it is not obligated to return the cultural properties and cannot hand over any privately owned artifacts, because the negotiations were not for compensation between two countries engaged in a war. The arguments of the education ministry and the National Commission only reinforced what the Japanes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claimed and showed that the Ministry had no intention to be more proactive in the process to return the cultural properties. Korean experts brought about a change to Japan s passive attitude. Although Japan attempted to prevent any extension of the list of artifacts for restitution from the beginning, Korea through the cultural expert committee submitted a long list of cultural assets displaced to Japan along with detailed descriptions of the plundered items and how they were taken out of the country. In the previous negotiations, Japan had remained silent and insisted that the whereabouts of the properties cannot be known. However, Japan could not continue to be passive after Korea provided such a detailed report and explanations. In this regard, it can be said that the meeting of the expert committee on cultural properties served as an opportunity to extend the list of cultural

165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165 properties to be returned. Keywords Treaty on Basic Relations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 negotiation for cultural properties in the Korea Japan talks, return of cultural properties, Japanese Ministry of Education, National Commission for the Protection of Cultural Proper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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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67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 서보경 / 고려대학교 동아시아문화교류연구소 연구교수 Ⅰ. 머리말 일본 문부과학성은 2015년 4월 6일 중학교 교과서의 검정결과를 발표하였다. 일본의 초, 중, 고등학교 교과서의 검정은 4년 주기로 출판사의 검정신청을 받 아 진행된다. 이번에 검정을 신청한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18종이었다. 그 가운 데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는 기존의 7종( 敎 育 出 版, 東 京 書 籍, 育 鵬 社, 日 本 文 敎 出 版, 自 由 社, 帝 國 書 院, 淸 水 書 院 )과 새롭게 채택된 마나비샤[ 學 び 舍 ]를 합하여 8종이다. 이 글에서는 8종 교과서의 고대 한일관계에 관한 기술 내용이 어떠한 연구사적인 배경을 기반으로 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주목하며 관련 기 술 내용을 분석하려 한다. 다만 교과서에 기술된 내용을 전부 다루기는 어려우 므로 한국학계에서 고대 한일관계에 관한 왜곡이나 오해를 초래할 여지가 있 투고: 2015년 11월 10일, 심사 완료: 2016년 2월 17일, 게재 확정: 2016년 2월 24일 * 이 글은 2015년 8월 30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개최된 2015년 검정통과 일본 중학 교 사회과 교과서 심층분석 학술회의 에서 발표한 내용의 일부를 가필한 것임을 밝 혀 둔다.

168 16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어 지속적으로 수정을 요구해 온 주제인 가야 지역을 둘러싼 한일관계 와 왜 왕의 都 督 諸 軍 事 호 문제를 둘러싼 한일관계, 그리고 왜국의 對 隋 外 交 와 한일관계 에 대한 기술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을 시도하려 한다. 개별 사안에 관한 검토는 분석할 문제가 실린 교과서 문장 전체를 인용하여 8종 교과서의 기술상 특징과 문제점을 살피는 방식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또 한국학계와 정 부가 지속적으로 수정을 요구한 부분은 이미 많은 연구 1) 가 진행되었으므로, 이러한 내용은 기존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간략히 정리하고, 검토가 더 필요 한 부분과 2015년도 검정통과 역사교과서에 새롭게 기술된 내용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러한 작업은 검정을 통과한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어떠한 관점에서 고대 한일관계를 기술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하는 바다. 1) 일본 우익의 역사인식을 대표하는 단체 가운데 하나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이 만들고 扶 桑 社 가 간행한 중학교 사회과 역사교과서가 2001년도 일본 문부 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함으로써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계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 다. 이른바 일본의 교과서 파동 이후에 나온 일본 역사교과서의 고대 한일관계 기 술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신형식, 2001, 일본역사교과서 의 전근대관련 서술의 문제점 새로운 역사교과서 ( 扶 桑 社 )를 중심으로, 백산학 보 61; 정효운, 2003, 새역사교과서 와 日 本 書 紀, 일본학보 57 2; 연민수, 2005,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古 代 史 서술과 歷 史 認 識, 한국사연구 129; 연민수, 2011,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古 代 史 像 과 歷 史 認 識 2011년도 검정합 격본을 중심으로, 역사교육논집 47; 김은숙, 2007, 일본 세계사 교과서의 전 근대 한국관련 서술 분석 2007년도 검정본을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구 30; 김은숙, 2011, 2011년 검정통과 일본 중학 역사교과서의 고대 한국관련 서술 내용 분석, 일본 역사교과서의 분석과 역사교육의 실태, 한일관계사학회 학술대회자 료집; 이근우, 2008, 新 しい 歷 史 敎 科 書 의 역사인식과 선사 고대사 서술, 일 본역사연구 27; 나행주, 2011, 일본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역사관과 고대사 서 술 2011년 검정통과본의 분석을 중심으로, 동국사학 51; 이재석, 2011, 2011년 도 검정통과 일본 역사교과서의 문제점 총론 2011년도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검 정의 특징과 문제점, 역사교육논집 47 등을 들 수 있다.

169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69 Ⅱ. 왜국의 한반도 출병과 가야지배 론 고대 일본이 4~6세기에 가야 지역을 지배하에 두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임 나일본부 론 2) 은 1970년대 이후 다방면에서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검토가 진행 되었다. 3) 다년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야 지역을 둘러싼 한일 양국 의 이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제1기 한일역사공동위원회의 제 1분과 연구자들은 4 6세기에 왜군이 한반도 남부 또는 가야를 군사적으로 지 배한 적은 없었다는 데 기본적으로 동의하였고, 4) 현재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 과서에서도 임나일본부 라는 단어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야 지역을 둘러싼 고대 일본의 歷 史 像 이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완전히 소멸된 것인가? 이 문제는 가야와 왜국관계로만 설명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따라서 8종 교과 서의 4 6세기 가야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제국과 왜국관계 기술 내용에 관한 분석을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8종 교과서(출판사) 는 서술의 편의를 위해 출 판사명 앞에 기호 로 표기하였다. 관련 내용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에 기술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확인된다. 라, 바와 나머지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는 양적인 면 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관련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왜국의 정치체를 표기할 때 라는 우리나라, 바는 야마토 조정 이라 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가, 나, 다는 야마토 정권, 마, 사, 아는 야 2) 末 松 保 和, 1949, 任 那 興 亡 史, 吉 川 弘 文 館 ; 井 上 秀 雄, 1959, いわゆる 任 那 日 本 府 について, 國 史 論 叢 1( 井 上 秀 雄, 1973, 任 那 日 本 府 と 倭, 東 出 版 ); 石 母 田 正, 1962, 古 代 史 槪 說, 岩 波 講 座 日 本 歷 史 1, 岩 波 書 店 등 3) 가야 지역을 둘러싼 한일관계 연구는 임나일본부 의 성격 규명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나행주, 2005, 6세기 한일관계의 연구사적 검토, 한일관계사연구논집편찬 위원회 편, 임나문제와 한일관계 한일관계사연구논집3, 경인문화사, 41~42쪽. 4) 김태식, 2005, 4세기 한일관계에 대한 인식의 공통점과 차이점 제1분과 共 同 硏 究 會 後 記 에 대신하여, 한일역사공동위원회 편,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1, 515~516쪽.

170 17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표 1> 8종 역사교과서의 4 6세기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제국과 왜국관계에 관한 기술 내용 출판사 가 敎 育 出 版 4~6세기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제국과의 관계 기술 야마토 정권은 4세기경에 철과 발달된 기술을 구하여 조선반도 남부 의 가야 제국과 관계를 심화하고, [*주4] 백제와도 동맹을 맺어 고구 려, 신라와 싸웠다(29쪽). [*주4 사진] 고분에서 출토된 철의 延 板 ( 奈 良 縣 출토 宮 內 廳 書 陵 部 소장). 야마토 정권과 유력한 호족은 철을 가야 제국에서 입수하였다(28쪽). 나 東 京 書 籍 다 마나비샤 [ 學 び 舍 ] 라 育 鵬 社 야마토 정권이 백제와 가야 지역(임나) [*주9] 나라들과 연합하여 고구 려, 신라와 싸운 내용이 호태왕(광개토왕)비에 기록되어 있다(37쪽). [*주9 사진] 일본 고분에서 출토된 철 연판(나라현 출토 궁내청 서릉 부 소장). 설명문: 가야 지역은 철의 산지로 일본열도 사람들은 여기에서 철을 수입하였다. 6세기에 백제와 신라가 세력을 키워 야마토 정권과 밀접한 교류가 있 었던 가야 지역의 여러 나라를 병합하였다(38쪽). <대왕의 이름을 새긴 철검 코너> 야마토 정권은 조선반도 남부의 가야 지역과 관계를 강화하며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신라와 싸웠다. 5세기 초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 왕의 석비에는 바다를 건너온 왜의 군대를 격파했다. 고 적혀 있다 (37쪽). 4세기 말 조선반도 북부에 있던 고구려는 중국 측으로 영토를 확 장함과 함께 남부의 신라와 백제에도 군사를 진군하였다. 철 자원을 구하여 반도 남부와 교류가 있던 우리나라는 백제에서의 구원 요청도 있어 조선에 출병하였다. 5세기에 세워진 고구려의 호태왕(광개토왕) 비에는 우리나라와 고구려 사이에 전투가 존재한 것을 나타내는 비문 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우리나라는 임나에 대해 영향력 을 가지게 되었다(34쪽). 광개토왕비문 일부 신묘년조 사진 설명문: 왜가 조선반도에 출병하여 백제와 신라를 복속시켰다고 쓰여 있다(35쪽). 6세기가 되어 신라가 세력을 뻗치게 되자 우호관계에 있던 백제로부 터 우리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자가 때때로 찾아왔다. 신라는 임나 에도 진출하여 6세기 중반에는 그 지역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조선반 도에서 우리나라의 영향력은 후퇴하였다(34~35쪽).

171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71 출판사 마 日 本 文 敎 出 版 바 自 由 社 사 帝 國 書 院 아 淸 水 書 院 4~6세기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제국과의 관계 기술 4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조선반도 북부에서 고구려가 힘을 뻗쳐 낙랑군을 멸하고 남부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소국의 통일을 진행했다. 백제와 신라에 끼인 가야(가라, 임나) 지방의 작은 국들은 야마토 왕권 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양국에 대항하였다. 조선반도와의 교류가 성 해지자 대량의 철을 연판의 형태로 야마토왕권에서 입수하였다(33쪽). <고대사 플러스알파 반정의 난 코너> 6세기가 되자 신라와 백제세력이 가야 지방에 미쳤다. 야마토 왕권은 군대를 보내 가야 지방에서의 이익을 지키려고 하였다. 6세기 중 엽 가야 지방이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 야마토 왕권은 조선반도에서 의 창구를 잃었다(35쪽). <서장 역사를 파악하는 방법 코너> [사진] 광개토왕비 실물과 탁본 게시, 탁본에서 신묘년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강조. [만화] 이 비문에서 왜(일본)가 391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를 격파한 것 을 알 수 있다고 기술(7쪽). 광개토왕(호태왕)비 사진 설명문: 광개토왕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고 조선반도에 출병한 일본과 고구려가 싸운 모습도 알 수 있다(48쪽). 중국사료와 명문으로 본 동아시아의 국제관계 연대기(49쪽). 고구려의 광개토왕(호태왕) 비문에는 왜의 군세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臣 民 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후 고구려왕이 이를 격퇴하기 위하 여 군사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야마토 조정은 고구려와 싸웠지만 점차 형세가 불리해져 404년 조선반도에서 철퇴하였다(49쪽). 고구려에 대항하여 조선남부에서의 군사적 영향력 유지(49쪽). 신라는 임나의 영유를 백제와 다투어 562년에는 임나를 병합하였다. 이렇게 임나는 멸망하였다. 신라는 이 문제에 일본이 개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게 임나의 산물을 보내 우호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49쪽). 야마토 왕권은 조선반도의 남부 가라(가야) 지역과의 관계를 강화하면 서 백제에 협력하여 고구려, 신라와 싸웠다(26쪽). 당시 일본열도에는 철을 만들어 낼 기술이 아직 없어서 철은 연판의 형태로 조선반도에서 입수하였다(26쪽). 6세기가 되자 조선반도에서는 왜국과 관계가 있었던 가라 제국이 멸 망하고 백제와 신라가 세력을 강화하였기 때문에 왜국은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32쪽). 야마토 왕권은 조선반도로도 진출을 도모하였다(27쪽).

172 17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마토 왕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먼저 야마토 조정 이라는 용어부터 살 펴보자. 고대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를 나타내는 용어는 일본 학계 에서도 정설이 아직 존재하지 않아 연구자마다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5) 다 만 조정 은 천자나 천황을 중심으로 관료조직을 수반한 중앙집권적인 정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군주호로서 천황호가 성립되지 않고 관제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의 정치체에 조정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6) 그러므 로 4세기 고분시대 초기 단계에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체를 야 마토 조정 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천황제 율령국가가 4세기부터 일본열도에 이 미 성립된 것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4세기부터 마 치 하나의 중앙정부가 왜국 전체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고 있던 것으로 이해될 우려가 있다. 다음은 우리나라 라는 표기를 살펴보자. 이것은 학생들에게 4~6 세기 고대인과 현재 일본인을 동일한 구성원으로 인식하게 하여, 자연스럽게 일본역사의 유구성과 연속성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의도 가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나 근대 국민국가 형성 이후의 국가와 고대 국가를 하나로 연결하여 고대의 일본인과 현대의 일본인을 일체화하여 기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둘째, 한반도 와 가야 에 관한 표기 문제이다. 8종 역사교과서 모두가 한반 도를 조선반도 라고 표기하고 있다(<표 1>, <표 2>). 일본뿐만 아니라 중화권 에서도 조선반도 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1948년에 정 5) 야마오 유키히사[ 山 尾 幸 久 ]는 야마토 왕권에 대하여 4, 5세기 近 畿 지역을 중심으 로 성립된 왕의 권력조직을 가리키며 고사기 와 일본서기 의 천황계보로는 대개 崇 神 天 皇 ~ 雄 略 天 皇 시대에 해당한다. 山 尾 幸 久, 1995, ヤマと 王 権, 日 本 古 代 史 研 究 事 典, 東 京 堂 出 版, 11쪽. 시라이시 타이치로[ 白 石 太 一 郎 ]는 야마토의 정치 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남과 북을 제외한 일본열도 각지의 정치세력의 연합체를 야마토 정권이라 부르고 기나이[ 畿 内 ]의 수장연합의 맹주이며 또 일본열도 각지의 정치세력의 연합체였던 야마토 정권의 맹주이기도 한 기나이의 왕권을 야마토 왕권 이라 부르며 양자를 구별하였다. 白 石 太 一 郎, 1999, 古 墳 とヤマト 政 權 - 古 代 國 家 はいかに 形 成 されたか, 文 藝 春 秋, 72쪽. 6) 關 和 彦, 1990, ヤマト 王 権 の 成 立 はいつか, 争 点 日 本 の 歴 史 2 古 代 編 1, 新 人 物 往 來 社, 53~54쪽.

173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73 부를 수립하면서 대한민국 이라고 국호를 정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국토의 전역을 한반도 라고 통칭하고 있으므로 한반도 라고 표기하는 것이 타당할 것 이다. 또 가야 에 관한 표기는 가, 다, 사에서는 가야(제국, 지방, 지역), 나에 서는 가야 지역(임나), 마에서는 가야(가라, 임나) 라는 형식으로 병기하고 있 다. 아는 조선반도 라고 통칭하여 표기하고 있고, 라와 바는 여전히 임나 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임나 는 일본서기 에서 가야 諸 國 이나 특정 가야국을 가리키는 용어로 등장하지만, 고대 한국 측 사료에서는 任 那 加 羅 (광개토왕비 문), 任 那 加 良 ( 삼국사기 强 首 傳 ) 그리고 任 那 ( 眞 鏡 大 師 碑 文 ) 등의 3가 지 사례를 제외고는 加 耶, 加 倻, 加 羅 등으로 표기되는 정치체이다. 국내에서 가야의 국명 표기에 관한 합의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 학계에서 加 耶, 加 羅 등을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고,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도 가야 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가야 로 표기되어야 할 것 이다. 셋째, 라와 바는 광개토왕비 의 신묘년조를 강조하여 기술하고 있다는 점 이다. 라는 광개토왕비 의 신묘년조를 제시하며 고대 일본이 한반도에 출병 하였고 이러한 정세하에 가야 지역에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기술하였 다. 바는 4 6세기의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연대기(49쪽)로 제시하였다. 게다 가 연대기에는 스에마츠 야스카즈[ 末 松 保 和 ]가 왜 왕권의 한반도 제국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인 지배를 설명할 때 제시한 칠지도, 광개토왕비 의 신묘년조, 송서 왜국전의 왜왕무의 상표문과 왜5왕이 요청한 한반도 제국명이 들어간 도독제군사 호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였다. 이미 다각도에서 비판이 이루어진 내용을 실제 사건처럼 연대기 속에 기록한 것이나, 신묘년조를 통해 고대 일본 이 한반도 제국을 정복했다고 하는 것은 4~6세기 한일관계나 한일관계에 관 한 기존의 연구사를 무시한 서술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이 지닌 문제점에 관해 서는 김은숙, 연민수의 논고 7) 에 잘 정리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라와 바 이외의 역사교과서에서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제국과 7) 김은숙, 2011, 앞의 글, 45~49쪽; 연민수, 2011, 앞의 글, 220~222쪽

174 17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의 관계를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나에서는 백제와 가야 제국이 고 구려, 신라와 싸운 내용, 가야 지역의 철을 일본열도에서 수입한 것, 6세기에 백제와 신라가 가야 제국을 병합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광개토왕 비, 삼국지, 일본서기 에 기술된 내용을 열거한 것이다. 그리고 가와 사에 서는 야마토 정권이 4세기경에 철과 발달된 기술을 구하여 한반도 남부의 가 야 제국과 관계를 심화(강화)하고, 백제와도 동맹을 맺어 고구려, 신라와 싸운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철 자원과 발달된 기술의 추구라는 목적 아래 취해진 왜 국의 움직임은 세 가지 형태로 정리 가능하다. 첫째는 가야 제국과 관계를 심 화(강화), 둘째는 백제와 동맹(협력)을 맺는 것, 셋째는 고구려, 신라와 싸우는 것이다. 가야 지역의 철 자원에 관한 설명과 왜국의 철 수입, 백제와 왜국이 함 께 고구려에 대항했다는 설명은 삼국지 와 광개토왕비 등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다만 왜가 가야 지역의 철 자원과 기술을 얻기 위한 노력과 백제와 동 맹을 맺고 고구려, 신라와 싸운다는 것은 어떻게 연결되는 사안인가? 이 문제 에 관한 설명이 필요한데 여기에 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다는 광개토왕 비 의 신묘년조 대신 왜군이 고구려에 의해 격파된 경자년, 갑진년조에 명기된 내용을 기술하고 있어 다른 교과서와도 설명을 달리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내의 전투에 왜가 등장하는 이유에 관한 설명 없이 고구려, 신라와 싸웠다는 내 용만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출병 문제를 가야의 철 자원 입수 문제와 연결한 설명에 대 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국은 3세기부터 자체 생산이 불가했던 철을 가야에 서 수입하였다. 8) 그런데 고구려의 남하로 인하여 가야 지역에서의 철 자원 공 급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자 일본열도는 지배체제의 정비에 큰 타격을 받 았고, 이러한 위기의식하에 백제의 구원 요청을 받은 야마토 왕권이 각 지역 수 8) 三 國 志 魏 書 東 夷 傳 韓 弁 辰 條, 國 出 鐵, 韓 濊 倭 皆 從 取 之. 諸 市 買 皆 用 鐵, 如 中 國 用 錢, 又 以 供 給 二 郡.

175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75 장층을 규합하여 한반도에 출병해 고구려와 싸운 것 9) 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철자 원이 고대 사회에서 지배체제의 확립과 농업생산력 향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재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일본열도로 제철기술자를 데려가서 생산하게 하면 철의 생산을 한반도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 10) 은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사기 오진[ 應 神 ]천황단에는 제철기술과 관련 하여 백제가 대장장이 탁소와 오복서소 2명을 파견한 전승 11) 이 보인다. 만일 제철기술의 습득이나 철광의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철 자원과 기술이 고대 국가 성립의 주된 요건이라면, 가야 지역이 고구려 혹 은 신라세력에 의해 점령되거나 세력권에 편입되면 신라나 고구려와의 관계 수립이나 개선을 통해 철 자원을 확보하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왜국 입장에서 철 소재와 기술을 획득하는 방법에는 고구려, 신라와의 전투 이외에도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가 백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싸우는 길을 택한 이유는 무 엇인가? 이 문제는 한반도 내부의 당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고구려와 경계 를 접한 백제는 4세기 말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진에 대응하여 전지를 왜국에 파견하였다. 12) 또 전지가 왜국에 체류한 기간 13) 에 왜군이 한반도에서 활동한 9) 松 木 武 彦, 1998, 戰 いから 戰 爭 へ, 古 代 國 家 はこうして 生 まれた, 角 川 書 店, 195~200쪽. 10) 일본열도에서의 製 鐵 을 시사하는 가장 오래된 유적은 주로 中 國 地 方 에 분포하고 있고, 6세기 이전에 철 생산이 행해진 가능성으로는 鍛 冶 집단의 이주 등이 고려 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과 한반도의 板 狀 鐵 製 品 과 鐵 刀 劍 類 출토 예를 통해 볼 때, 가야 지역의 철이 사용된 것은 분명하다. 淸 水 欣 吾, 1982, 奈 良 縣 古 墳 より 出 土 した 鐵 刀 劍 類 の 調 査, 日 立 金 屬 株 式 會 社 安 來 工 場 冶 金 硏 究 所. 11) 古 事 記 應 神 天 皇 段, 貢 上 手 人 韓 鍛, 名 卓 素, 亦 呉 服 西 素 二 人 也. 12) 三 國 史 記 百 濟 本 記 阿 莘 王 6년(397) 5월조, 王 與 倭 國 結 好, 以 太 子 腆 支 爲 質. 13) 삼국사기 백제본기 腆 支 王 즉위년(405)조, 阿 莘 在 位 第 三 年 立 爲 太 子. 六 年 出 質 於 倭 國. 十 四 年 王 薨. 王 仲 弟 訓 解 攝 政. 以 待 太 子 還 國. 腆 支 在 倭 聞 訃. 哭 泣 請 歸.

176 17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것으로 보아 그의 파견은 군사를 요청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간주된다. 14) 이러한 백제와 왜국관계 위에 399년(기해년)과 400년(경자년), 404년(갑진년) 에 나타난 왜군의 움직임이 광개토왕비에 묘사된 것이다. 따라서 왜의 한반도 출병은 백제와 고구려의 대립, 신라와 고구려 관계 강화, 백제와 가야 지역의 관계 강화 그리고 백제와 왜국의 관계라는 각국의 상황이 어우러져 나타난 현 상이다. 그러므로 왜왕이 백제와의 연합이라는 선택지를 택한 이유가 문제가 된다. 이것은 고구려, 신라와 대립하던 백제가 왜국을 연합세력에 묶어 두기 위해 어 떻게 움직였나?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이에 관한 답을 제공하는 직접적인 자 료는 없지만, 5세기에 지속적으로 진행된 백제의 왕족 파견 15) 의 장에서 이루어 진 인적, 물적 자원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공급이 백제가 왜국과의 동맹관계 를 관리하는 방식이었다. 16) 따라서 왜국의 한반도 출병은 4세기 한반도 제국의 역학관계 속에서 고려 되어야 할 문제이지, 철 소재의 공급이나 기술의 수용 문제로만 설명될 수 있 는 사안이 아니다. 더구나 각국의 군사적인 연계관계에 대한 설명 없이 단지 고구려, 신라와 왜의 전투라는 상황만을 제시할 경우, 나머지 역사적 사실은 모두 묻혀버리고, 왜가 한반도에서 지켜야 할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출병했다 는 논리로 귀결되어 버린다. 즉 왜의 철 자원의 필요와 수입 이라는 측면에만 주목할 경우 가야 지역과의 교류와 교섭 에 주안점이 두어진 것이라 오인할 소 지가 있다. 그러나 왜가 가야 지역에서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출병했다는 차 원으로 확장이 가능한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적인 맥락 위에 6세기 신라의 가 야 지역 병합은 왜의 영향력 후퇴(라), 왜의 한반도에서의 창구 상실(마), 가야 14) 노중국, 1981, 高 句 麗 百 濟 新 羅 사이의 力 關 係 變 化 에 대한 一 考 察, 동방학 지 28, 64쪽; 김현구, 1993, 百 濟 新 羅 와 大 和 政 權 과의 관계, 任 那 日 本 府 硏 究, 일조각, 93~94쪽. 15) 이른바 왕족외교 에 관해서는 연민수, 1997, 百 濟 의 對 倭 外 交 와 王 族 百 濟 外 交 史 의 一 特 質, 백제연구 27(연민수, 1998, 고대한일관계사, 혜안)을 참조. 16) 서보경, 2006, 5세기 高 句 麗 와 倭 國 宋 書 倭 國 傳 의 倭 王 武 上 表 文 에 나타난 고구려 정토 문제를 중심으로, 백제연구 43, 12쪽.

177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77 지역을 병합한 신라가 왜에 가야 지역 산물 헌상(바), 왜의 가야 지역에서의 영 향력 상실(사), 조선반도의 진출(아)이라고 기술되었다. 교과서의 이러한 기술 내용은 어떠한 연구사적 배경이 존재하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에마츠와 이시모다 쇼[ 石 母 田 正 ]가 제시한 논리와 무관 하지 않다. 우선 스에마츠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국조에서 대방군에서 왜 에 이르는 노정을 설명하는 사료에 나오는 狗 邪 韓 國 을 왜국의 북안에 있는 구야한국 이라고 해석하여 3세기 중엽에 왜인이 이미 구야한국을 한반도 지역 에 대한 정치와 경제적인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고 간주하였다. 이러한 이해 아래 313년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을 물리친 이후부터 남하를 활발히 전개하 자,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백제가 왜국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왜국이 369년부 터 한반도에 출병하였고, 그 결과 왜국은 김해의 임나가라를 중심으로 한 지역 은 직접 지배하고 그 외곽에 위치한 백제와 신라는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구조 가 형성되었다 17) 고 설명하였다. 스에마츠가 제시한 3세기 중엽에 구야한국을 거점으로 삼았다는 논리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국조의 其 北 岸 狗 邪 韓 國 18) 이라는 문구를 왜국의 북 안에 있는 구야한국 19) 이라고 해석하고 구야한국을 왜의 강역에 포함하는 것으 로 간주한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구야한국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 기재된 弁 辰 狗 邪 國 20) 으로 왜국의 영역이 아니라, 21) 변진(한) 12국의 하나로 경상남 도 남부의 김해 지역을 가리킨다. 22) 더구나 삼국지 동이전 왜국조에는 (왜 17) 末 松 保 和, 1949, 앞의 책, 68~78쪽. 18) 三 國 志 魏 書 東 夷 傳 倭 國 條, 倭 人 在 帶 方 東 南 大 海 之 中 從 郡 至 倭, 循 海 岸 水 行, 曆 韓 國. 乍 南 乍 東, 到 其 北 岸 狗 邪 韓 國, 七 千 餘 里, 始 度 一 海, 千 餘 里 至 對 馬 國. 19) 末 松 保 和, 1949, 앞의 책, 66쪽. 20)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변진조. 21) 杉 本 憲 司 森 博 達, 1995, 魏 志 倭 人 傳 を 通 讀 する, 日 本 の 古 代 1 倭 人 の 登 場, 森 浩 一 編, 中 央 公 論 社, 125~126쪽. 22) 石 原 道 博, 1985, 新 訂 魏 志 倭 人 傳 後 漢 書 倭 傳 宋 書 倭 国 傳 隋 書 倭 国 傳 中 國 正 史 日 本 傳 1, 岩 波 書 店, 40쪽.

178 17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국)왕이 사신을 경도, (대방)군 그리고 여러 한국 23) 에 보내거나 (대방)군이 왜 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24) 는 문장도 보인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경도 즉 위 나라의 수도 25) 나 대방군 과 마찬가지로 구야한국 도 왜국의 일부가 아닌 외국 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그 북쪽 건너편 구야한국 이라고 해석하면 3세기 중엽 부터 왜국이 가야 지역에 정치적 군사적인 근거지를 확보했다는 논리는 성립 되기 어렵다. 또한 이시모다는 스에마츠의 설명에 기초하여 왜의 왕이 중국적인 세계질 서 즉 조공과 책봉관계 내에 존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야를 직할령으로 삼 고 백제와 신라에게 조공 의무를 부여하며 보호국으로 지배하는 형태로 東 夷 의 小 帝 國 의 군주 지위에 올랐다 26) 고 설명하였다. 즉 이러한 논리적 기반 위 에 가야의 철 자원 수입 문제에서 출발하여 이익의 출처인 가야 지역에 대한 지배권의 수호를 위해 고구려와 대립하는 야마토 왕권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 는 것이다. 다만 가야 지배라는 기존의 역사상 구축에 대한 한일 학계의 문제 제기와 한국 정부의 지속적인 시정 요구로 인해 임나일본부 라는 표현 자체가 교과서에서 사라지게 된 것일 뿐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바에서만 기술하고 있는 신라가 일본에게 임나의 산물을 보냈다 는 내용에 관해 살펴보자. 이것은 바의 2011년도판에는 없던 내용인데 2015년 도판에서 부가된 기술이다. 2011년판과 같은 장절에 신라의 대두와 임나의 멸 망 이라는 항목에 기술되어 있으므로 양자를 아래에 제시하였다. 2011년판 신라는 대화조정과 관계 깊은 임나도 위협하게 되었다. 562년 드디어 임나는 신라에게 멸망당하여 대화조정은 조선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 다(47쪽). 23) 한반도 남부에 있던 마한, 진한, 변한 등을 가리킨다. 24)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국조, 王 遣 使 詣 京 都 帶 方 郡 諸 韓 國, 及 郡 使 倭 國. 25) 위나라 수도인 중국의 뤄양[ 洛 陽 ], 현재 중국 허난성[ 河 南 省 ] 뤄양시에 해당된다. 26) 石 母 田 正, 1962, 앞의 글, 17~26쪽.

179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년판 임나가 멸망하자 신라는 이 문제에 일본이 개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게 임나의 산물을 보내 우호적인 자세를 취하였다(49쪽). 2011년도판까지는 임나가 신라에게 멸망=조선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고 정리된 임나관계 기사가 2015년도판에서는 신라가 일본에게 임나의 산물 을 보냈다 는 이른바 임나의 調 에 관한 서술이 부과되었다. 고대 일본에서 調 는 율령의 기본적 조세 목록의 하나로 조정에 대한 공납물을 의미한다. 따 라서 신라가 일본에게 임나의 산물을 보냈다 고 기술한 것은 신라가 임나의 산물을 일본에 공납한다 는 의미다. 이것은 가야에 대한 왜 왕권의 지배 논리 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바의 임나의 조 관련 기술은 <표 1>에 정리된 4~6세기 가야를 비 롯한 한반도 제국과의 관계 에 관한 기술을 고려하면 가야가 멸망한 이후에 가 야 지역을 병합한 신라 혹은 백제가 그 지배권을 인정받는 대가로서 야마토 왕 권에게 조 를 납입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는 스에마츠의 연구 27) 에 기초한 것이 다. 또한 이시모다는 스에마츠의 논리하에서 임나의 조 가 과거 임나 지역에 대한 지배 사실의 상징이자 동시에 명목상으로 과거에 멸망한 임나가 재흥 부 흥했다는 표현이며, 더 나아가 한반도 제국에 대해 소위 동이의 소제국으로 군 림하는 왜국의 위치를 대내외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하나의 중요한 표상이라고 설명했다. 더구나 이시모다는 임나의 조=임나부흥의 상징 으로 현실에 존재하 28) 지 않는 임나를 실재한 것으로 취급하기 위한 하나의 擬 制 儀 式 形 式 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이시모다의 논리는 일본 학계에서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그 대표 적인 논자인 스즈키 히데오[ 鈴 木 英 夫 ]는 임나의 조는 신라가 백제와 대립 항 쟁하는 과정에서 임나부흥을 명목으로 왜국의 군사력을 도입하고자 하는 백제 27) 末 松 保 和, 1949, 앞의 책, 189~196쪽. 28) 石 母 田 正, 1971, 國 家 成 立 史 における 國 際 的 契 機, 日 本 の 古 代 國 家, 岩 波 書 店, 48~51쪽.

180 18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의 왜국에 대한 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취한 외교책이며 왜 왕권의 군사개입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29) 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스즈키의 설명은 신라 측의 왜 왕권에 대한 일종의 전략물자로 임나의 조를 이해한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지 만, 임나의 조가 지닌 사적 의의에 관해서는 이시모다의 설을 거의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 왜국의 소중화(소제국), 대국의식 문 제와 관련시켜 이해한 스즈키 설의 문제점은 나행주의 논고 30) 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상의 연구사를 통해 볼 때 가야 멸망 이후 임나의 조 가 고대 한일관계를 논할 때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으며, 임나일본부 를 언급하지 않고서도 임나 의 조 를 기술함으로써 왜국이 동이의 소제국으로 군림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2015년도 검정을 통과한 바에서 임나의 조 에 관해 기술하기 시작 한 것이다. 근래 검정을 통과한 역사교과서에는 가야 지역에 대한 직접 지배 내지 군사적 지배를 의미하는 표현인 거점, 진출, 교두보라는 표현을 지양하고 밀접한 교류와 교섭, 영향력 등으로 표현을 바꾸어 기술하는 것이 일반적인 서 술 경향이다. 그러나 라와 바의 한반도 제국에 대한 기술은 이러한 흐름을 역 행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 왔지만, 2015년도 검정을 통과한 바의 임나의 조 에 관한 기술은 임나일본부 론을 표면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기존의 한일관 계사 연구에 대한 심각한 역행이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29) 鈴 木 英 夫, 1996, 任 那 の 調 の 起 源 と 性 格, 古 代 の 倭 國 と 朝 鮮 諸 國, 靑 木 書 店, 243~256쪽. 30) 나행주, 2008, 신라와 임나의 조 신라 측에서 본 종래설 비판, 한일관계사연 구 29, 36~41쪽.

181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81 Ⅲ. 왜왕의 都 督 諸 軍 事 호와 한반도 남부지배 론 왜군의 한반도 출병기사를 중심으로 한 4세기의 한일관계 서술 이후의 한일관 계 기술은 5세기 왜왕의 중국 남조와의 교섭에 관한 항목에서 집중적으로 나 타난다. 송서 에는 영초 2년(421) 왜왕 讚 의 조공부터 31) 승명 2년(478) 왜왕 武 의 조공 32) 에 이르기까지 讚, 珍, 濟, 興, 武 이른바 왜5왕 의 조공과 책봉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이러한 왜5왕의 대송 교섭에 관해 8종 교과서가 기술 한 내용을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표 2>에 기술된 송과의 교섭에 관한 기술은 다가 양적인 면에서나 기술 내용 면에서나 다른 교과서들과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다는 송에 사자를 파 견한 대왕 武 가 안동대장군 에 책봉된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다를 제외한 나 머지 교과서는 송과의 교섭에 관해 사자(절)를 파견하였다 혹은 조공하였다 고 기술하고 있지만, 책봉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기 술은 왜국(일본)이 중국(수 당)과의 관계에서 필요에 따라 사신을 파견하여 조 공은 하지만 결코 책봉은 받지 않았다는 니시지마 사다오[ 西 嶋 定 生 ]의 책봉체 제 론에 근거한 것이다. 책봉체체 론 33) 의 문제점은 이미 여러 방면에서 제기된 31) 晉 書 安 帝 紀 義 熙 9년(413)조에는 왜국이 고구려와 함께 동진에 조공했다는 것 이 기술되어 있다. 이때의 교섭은 왜왕이 정식으로 파견한 사신이 아니라, 고구려 가 왜인 포로를 데리고 공동 입조한 것으로 이해된다. 坂 元 義 種, 1981, 倭 の 五 王 空 白 の 五 世 紀, 敎 育 社, 34~74쪽; 鈴 木 靖 民, 1984, 東 アジア 諸 民 族 の 國 家 形 成 と 大 和 王 權, 講 座 日 本 歷 史 1, 東 京 大 學 出 版 會, 204쪽. 그러므로 421년 을 기점으로 잡았다. 32) 南 齊 書 高 帝 本 紀 下 建 元 원년(479)조와 梁 書 武 帝 本 紀 天 監 원년(502)조에 기재된 책봉기사는 왜국의 조공에 따른 책봉이 아니라, 중국 측의 신왕조 개창에 따른 주변국에 대한 책봉에 지나지 않는다. 坂 元 義 種, 1978, 倭 の 五 王, 古 代 東 アジアの 日 本 と 朝 鮮, 吉 川 弘 文 館, 340~369쪽. 그러므로 478년의 조공기사를 하한으로 삼는다. 33) 西 嶋 定 生, 1983, 東 アジア 世 界 と 冊 封 體 制, 中 國 古 代 國 家 と 東 アジア 世 界, 東 京 大 學 出 版 會.

182 18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표 2> 8종 교과서 왜5왕의 對 宋 교섭에 관한 기술 내용 출판사 가 敎 育 出 版 나 東 京 書 籍 다 마나비샤 [ 學 び 舍 ] 라 育 鵬 社 마 日 本 文 敎 出 版 바 自 由 社 사 帝 國 書 院 왜5왕의 대송 교섭에 관한 기술 5세기에 들어서면 야마토 정권의 대왕은 중국 남조에 여러 차례 사신 을 보내고 황제의 권위를 빌려 왜(일본)의 왕으로서의 지위를 높이고 조선반도의 여러 나라와 관계를 유리하게 하려하였다(29쪽). 5세기 야마토 정권은 남조 송의 역사서인 송서 에는 이 무렵 왜왕의 지위와 조선 남부의 군사적 지휘권을 중국 황제에게 인정받 으려고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낸 것이 기록되어 있다(왜의 오왕)(37쪽). 사진 왜왕무의 편지(37쪽). <대왕의 이름을 새긴 철검 코너> 와카타케루 대왕은 武 라고 칭하며 중국에 사자를 파견하고 황제에게 安 東 大 將 軍, 倭 王 등의 칭호를 받았다(중국의 역사서 송서 에 의거한다). 같은 시기 고구려의 왕은 征 東 大 將 軍 에 백제왕은 鎭 東 大 將 軍 에 임명되었다(중국의 역사서 송서 에 의거한다). 야마토 정권은 조선반도 남부의 가야 지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백제와 연 합하여 고구려와 신라와 싸웠다. 야마토 정권은 이러한 외교와 전쟁을 통해서 왜국 내에서의 힘을 강화했다(37쪽). 중국 남조의 역사서에는 왜의 5인의 왕(왜의 5왕)이 몇 번이나 황제 에게 사자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야마토 조정이 남조에 조공한 것은 고구려에 대항하고 조선에서 스스로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서였다(34쪽). 5세기부터 6세기 초에는 왜왕이 5대에 걸쳐 중국의 남조에 사절을 보낸 일 등이 기록에 보인다(32~33쪽). 야마토 조정이 송에게 조공한 것은 북위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고 구려에 대항하여 조선 남부로의 군사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 다(49쪽). <중국 사료와 명문으로 본 동아시아 국제관계 코너: 倭 王 武 (유랴쿠 [ 雄 略 ] 천황)의 상표문(일부 요약)>. 바다를 건너 북의 95국[*주]을 평정하였다. [*주] 해북 95국에 주를 달아 조선반도에 관한 것이라 생각된다(49쪽). 조선반도에서의 쟁란에서 패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야마토 왕권 조차 안정적으로 철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야마토 왕권 은 남조와 북조로 나뉘어 대립하던 중국의 남조 황제에게 여러 차례 사절을 보내 철을 확보하기 위해 그 힘을 빌리고 조선반도 제국에 대 해서 우위에 서려고 했다(27쪽).

183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83 출판사 아 淸 水 書 院 왜5왕의 대송 교섭에 관한 기술 야마토 왕권은 조선반도에도 진출을 도모하여 특히 5세기에는 조선 반도에서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고 국내에서 지배의 정당성을 인정받 기 위해서 중국 황제에게 여러 차례 사절을 파견하였다[*주2](27쪽). [*주2] 중국 역사서에 5명의 왜왕이 중국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26쪽). 바 있다. 34) 다음은 왜5왕이 송과의 교섭을 전개한 이유에 관한 기술을 살펴보자. 먼저 마는 왜5왕이 남조에 사절을 보냈다는 내용만 기술하고 있고 그 이유에 관해 서는 기술하지 않았다. 나머지 교과서에서는 모두 그 원인을 기술하고 있다. 라와 바는 외적 요인에 관해서만 언급하고 있지만 이를 제외한 나머지 교과서 는 모두 내 외적인 요인을 기술하고 있다. 우선 교섭의 내부적인 요인으로 기술된 내용을 살펴보자. 황제의 권위를 빌려 왜국 내에서 지배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아), 왜국 내에서의 왜왕의 힘(지위)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가, 나, 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 한 기술은 어떠한 연구사를 기반으로 한 것인가? 일반적으로 4~5세기 단계의 왜는 수장연합으로 이루어진 국가였고, 수장 연합을 이끈 야마토 왕권이 지역연합군을 통솔하여 한반도에서 고구려 광개토 왕의 군사와 전투를 치른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 군사와의 전투 결과, 야마토 왕권을 중심으로 한 수장연합 정권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간주한다. 또 이러한 상황에서 수장연합체의 맹주인 야마토 왕권은 실추된 위 상을 중국 황제에 권위를 빌려 왜국 내에서의 왕의 지위와 지배의 정당성을 높 이기 위해서 왜5왕이 대송 교섭에 임한 것 35) 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왜국 34) 鬼 頭 淸 明, 1976, 日 本 古 代 國 家 の 形 成 と 東 アジア, 校 倉 書 房 ; 山 尾 幸 久, 1989, 古 代 の 日 朝 關 係, 塙 書 房 ; 森 公 章, 1998, 白 村 江 以 後 國 家 危 機 家 と 東 アジ ア 外 交, 講 談 社 등. 35) 熊 谷 公 男, 2001, 列 島 と 半 島 と 大 陸, 大 王 から 天 皇 へ 日 本 の 歷 史 3, 講 談 社,

184 18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내에서 왜왕의 지배(지위, 힘)의 강화라는 기술은 일본 학계의 통설에 기초한 것이다. 다음은 외적 요인에 관한 기술 내용을 살펴보자. 나에서는 송서 에 기술 된 내용에 기초하여 5세기에 왜왕이 조선남부의 군사적 지휘권을 중국 황제 에게 인정받으려고 여러 차례 사자를 보냈다 고 기술하고 있고, 라와 바의 경 우에는 고구려에 대항하고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보 혹은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라고 기술했다. 이 외에는 한반도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유리하게 만 들기 위해(가, 아), 한반도 여러 나라의 우위에 서기 위해서(사) 라고 기술하 고 있다. 따라서 다를 제외한 모든 교과서에서 한반도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우위 혹은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라고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표 현은 한반도의 여러 나라보다 상위의 위치를 점하려는 데 목적이 있음을 나타 낸 단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실제로 어떠한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매 우 애매한 표현이다. 이러한 기술은 어떠한 연구사에 기초한 것인가? 기존의 왜5왕의 한반도 남부 제국(지역) 36) 을 대상으로 한 왜왕의 都 督 諸 郡 事 호 자칭과 책봉 37) 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한 대표적 논자인 사카모토 요시 79~80쪽. 36) 모한( 慕 韓 )을 영산강 유역 등지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이곳에 독자적인 세력이 존 재했다 하더라도 이들이 자신을 모한이라 자칭했다는 증거도 그 지역의 정치체를 모한이라 불렀던 증거도 都 督 倭 百 濟 新 羅 任 那 秦 韓 慕 韓 六 國 諸 軍 事 호에 기재된 것뿐이다. 또 모한이나 진한( 秦 韓 )은 신라, 임나, 가라, 백제와 달리 국명으로 보 기 어렵고, 지역명이나 소국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도독제군사 호에 등 장하는 6~7개의 국명도 동일한 수준의 국가명이 아니다. 이근우, 2005, 5세기의 일본열도,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편, 왜5왕 문제와 한일관계 한일관 계사연구논집 2, 경인문화사, 206쪽. 현재 왜왕이 제수를 요청한 도독제군사 호 에 등장하는 국명(지역명)이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관한 합의도 이루어지 지 않고 있다. 37) 438년(< 太 祖 > 元 嘉 15년) 왜왕 讚 의 동생 珍 이 즉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貢 獻 하고, 使 持 節. 都 督 倭 百 濟 新 羅 任 那 秦 韓 慕 韓 六 國 諸 軍 事 安 東 大 將 軍 倭 國 王 을 자칭하며 표를 올려 除 授 를 요청하였다. 安 東 將 軍 倭 國 王 을 제수하였다, 451년 ( 元 嘉 28년) 濟 에게 使 持 節 都 督 倭 新 羅 任 那 加 羅 秦 韓 慕 韓 六 國 諸 軍 事 호를 추가 하고 安 東 將 軍 은 그대로 하였다 興 이 사망하고 동생 武 가 즉위하여 使 持 節 都 督 倭 百 濟 新 羅 任 那 加 羅 秦 韓 慕 韓 七 國 諸 軍 事 安 東 大 將 軍 倭 國 王 을 자칭하였

185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85 타네[ 坂 元 義 種 ]는 일본 최대급 역사백과사전인 國 事 大 辭 典 의 倭 五 王 항 목에는 왜왕이 백제를 포함한 남부 조선 제국의 군사적 지배권과 왜국 내 정 통왕권의 승인을 요구한 것이다 38) 라고 적혀 있고, 古 代 東 アジアの 日 本 と 朝 鮮 에서는 4세기 후반에 이미 왜가 변한 제국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보고, 왜 왕들이 송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의 7국에 대한 군사호 제수를 요구한 것은 이 지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려던 것이다 라 고 규정하였다. 또 왜는 지역적 부분적으로 한반도 남부를 군사적으로 제압 하고 그 지배를 행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매우 불충분 불안정했기 때문에 한반 도 남부에 전통적 권위를 갖는 중국 왕조의 권위를 빌려 지배의 정통성을 얻고 안정성을 도모하려 했고 더구나 정복이 미치지 않은 제 지역에 대해서 잠재적 지배권을 인정받으려 한 것이다 39) 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왜왕의 지 위와 조선 남부의 군사적 지배권 인정 이라는 나의 기술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왜왕의 작호가 실효성 실재성을 가진 것이라는 주장에 관해서는 에바타 타케시[ 江 畑 武 ]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첫째, 백제왕의 작호보다 왜왕의 작호가 낮다는 문제점이다. 즉 백제왕이 송 황제에게 제수 받 은 진동(대)장군 보다 낮은 안동(대)장군이므로 작호가 높은 백제를 군사적으 로 지배할 수 없다는 점, 둘째, 백제를 제외한 신라 이하의 제국(지역)은 송조 의 조공과 책봉체제 내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이므로 송 황제가 지배권 군사권 을 인정한 것이 의미가 없다는 점 등이다. 40) 이와 같은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왜왕이 한반도 남부 지역의 군사호를 칭한 것이 군사적인 지배 의도와는 관련이 있지만 실제 지배와는 관련이 없다는 관 점에서의 연구가 제시되었다. 쿠마가이 키미오[ 熊 谷 公 男 ]는 日 本 の 歷 史 의 다, 478년(< 順 帝 > 昇 明 2년) 倭 王 武 가 사신을 파견하여 상표하여 云 云 ( 上 表 文 생략) 使 持 節 都 督 倭 新 羅 任 那 加 羅 秦 韓 慕 韓 六 國 諸 軍 事 安 東 大 將 軍 倭 王 을 제수하였다. 宋 書 外 國 傳 倭 國 條. 38) 國 史 大 辭 典 14, 1993, 吉 川 弘 文 館, 933~934쪽. 39) 坂 元 義 種, 1978, 앞의 책, 369~372쪽, 513~514쪽. 40) 江 畑 武, 1974, 四 ~ 六 世 紀 の 朝 鮮 三 國 と 日 本 中 國 との 冊 封 をめぐって, 上 田 正 昭 井 上 秀 雄 編, 古 代 の 日 本 と 朝 鮮, 學 生 社, 125쪽.

186 18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고구려에 대한 대항의식 항목에서 왜왕이 제정을 요구한 도독제군사의 범 위는 적어도 왜왕 珍 이후는 고구려를 제외한 반도 전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왜 5왕이 한반도 남부 지역의 군사호 제정을 요청한 것은 군사적인 지배 의도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실제 지배와는 관련이 없다 41) 고 설명했다. 또 같은 책의 小 帝 國 의식의 발생 이라는 항목에서는 4세기 후반에는 왜국은 이전부터 우 호국인 가야 제국에 더해 백제와도 동맹관계를 맺었다. 왜국과 이들 반도의 제 국과의 관계는 객관적으로는 결코 지배 예속관계는 아니고 기본적으로는 대 등관계였다. 그러나 가야 제국은 소국이었으므로 왜국과의 사이에 어느 정도 의존과 보호관계가 형성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도 군사력을 최후의 수단으로 하여 왕족의 質, 물적, 인적 자원을 반도 제국에 요 구하고 정치적인 개입도 행하며 왜국 측이 일시적으로 외교관계의 주도권을 잡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42) 고 기술하였다. 이와 같은 설명은 한반도 제국에 대 한 왜국의 우위를 잘 드러내고 있다. 한반도 지배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 대신 한반도 제국에서의 입장이나 관계를 유리하게(가, 아),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서(사)라고 기술한 교과서의 기술 방식과 통한다. 한편 제1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에서는 5세기 왜 왕권은 자신의 권위 를 대대적으로 과시하고 또 대외적으로는 백제와 우호관계를 가지면서 한편으 로는 그 보다 우위에 서려는 노력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왜는 자신의 권위 과 시와 주장에 대한 신뢰성을 부가하기 위해 대송 외교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 하여 백제를 비롯하여 한반도 제국이 포함된 자칭호를 송에게 승인받기 위한 노력을 여러 차례에 걸쳐 시도하였다 43) 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주목할 만하다. 다만 작호 가 당시 동아시아 세계 권위의 표 상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송이 백제를 대상으로 한 왜왕의 도독백제군사 호 는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백제 입장에서는 권위의 손상으로 받아들이 41) 熊 谷 公 男, 2001, 앞의 책, 71, 77, 79쪽. 42) 熊 谷 公 男, 2001, 위의 책, 45~46쪽. 43) 노중국, 2005, 5 世 紀 韓 日 關 係 史 宋 書 倭 國 傳 의 檢 討, 제1기 한일역사공 동연구보고서(제1분과 편), 239~242쪽.

187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87 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이 문제를 외교의 장에 서 공론화한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또 백 제는 이러한 왜의 움직임에 어떻게 대응하였는가에 대한 설명 또한 보이지 않 으므로 이 문제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공론화하지 않았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는 백제가 처한 상 황과 무관하지 않다. 적대세력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던 백제로서는 교전중이 아니라 하더라도 전쟁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했다. 그러므로 왜왕이 고구려와 접근하는 등의 직접적이고 중대한 사안이 아닌 경우, 백제 측이 먼저 왜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거나, 기존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일을 중단하지는 않았던 것 이다. 즉 그 원인은 공론화가 가져올 파장을 원하지 않았던 데 있었다. 그렇다면 백제와 왜국의 외교적인 마찰은 왜 발생하게 되었는가? 우선 고 구려와의 패전 이후 왜인 사회를 살펴보면 신라와 연합한 고구려 군과의 전투 와 패전은 5세기 왜국의 지배층으로 하여금 고구려에 대한 대항의식이나 적대 의식을 공유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상황하에서 수장연합의 정점에 위치한 왜 왕이 왜인 사회 내부에서 고구려에 대항하는 주체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할 필 요가 있었다. 이 점은 한일 양국의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왜왕의 이러한 입장과 달리 5세기 30년대 이후의 한반도 내부 상황이 이전과 다르게 전개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제는 적대적이 던 신라와 433년 이후부터 우호관계를 맺으며 고구려에 대항하는 외교망을 구 축하였고, 5세기 중반 이후 백제의 고구려전은 신라, 가야 연합에 의해 이루어 졌다. 이에 비해 5세기의 신라와 왜의 관계가 개선된 조짐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것은 신라와 백제의 우호관계가 왜국까지 확산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의 미한다. 바로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난 433년 이후부터 왜왕이 대송 외교의 장 에서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 지역을 대상으로 한 도독제군사 호의 제수 를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왜왕 珍 의 도독제군사 호 요청은 왜국 내에 서 고구려에 대항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함과 더불어 백제의 움 직임을 경계하고자 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왜왕들의 도독제군사 호 요청에 대해 백제는 어떻게 대응하였는

188 18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가?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백제는 외교의 장에서 공적으로 대립 상황을 표출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라, 가야 지역과의 동맹관계 구축 이외에도 勿 吉 이나 北 魏 와도 교섭을 추진하며 백제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反 高 句 麗 軍 事 同 盟 의 구축을 도모하였는데, 44) 여기에 왜국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와 같이 백제가 반고구려군사동맹 에서 왜국을 제외한 것은 왜국이 주장한 백제를 비롯한 한 반도 제국(지역)을 대상으로 한 도독제군사 호 제수를 요청한 왜왕들의 움직 임을 봉쇄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었다. 45) 따라서 433년 이후 왜5왕이 요청한 도독제군사 호 제수 문제는 실제로 왜왕이 고구려에 대항하여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 제국에 대한 군사적 지배 나 우위 혹은 유리 한 관계를 확보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왜5왕이 한반도와의 관계를 유리 하게 하거나 우위 에 서기 위 해, 또는 한반도 남부의 군사적 지배권 을 인정받기 위해 송과 교섭했다는 기 술은 당시 상황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4세기부터 철 자원 문제로 출병하여 고구려와 대립하며 한반도 제국에서 군사적인 영향력 을 유지하거나 한반도 제국과의 관계를 유리(혹은 우위) 하게 유지하였다는 논리 위에 세워진 관계 설정임을 알 수 있다. Ⅳ. 왜국의 對 隋 外 交 와 대국 론 한일관계에 관한 기술은 송과 교섭한 왜5왕에 관한 항목 이후는 스이코[ 推 古 ] 천황대에 진행된 隋 와의 교섭 개시에 관한 항목에서 다시 집중적으로 나타난 44) 서보경, 2006, 앞의 글, 8~13쪽. 45) 서보경, 2008, 百 濟 의 同 盟 形 成 과 管 理 宋 書 에 보이는 倭 王 의 都 督 百 濟 軍 事 號 요청과 관련하여, 일본연구 35, 25~31쪽.

189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89 다. 8종 교과서에 실린 수와의 교섭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표 3>에 따르면 수와의 교섭에 관한 기술에서도 라와 바 그리고 나머지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보인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 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수와의 교섭에 관한 기술 내용을 보면, 라와 바가 다른 교과서들에 비해 월등이 많다는 점과 쇼토쿠[ 聖 德 ] 태자 46) 와 관련된 내용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이러한 기술은 라와 바가 쇼토쿠 태자를 천황 제 국가의 창시자 설계자이며 각종 전통과 문화의 창시자로서의 자리매김하 고, 중국에 대해 일본인의 자존심을 세운 태자, 독립자존 정신의 소유자로 묘 사하고 있는 것 47) 과 연결된다. 둘째, 천황이라는 호칭이 성립된 시기에 관한 기술 내용의 차이다. 천황호 의 성립은 스이코조부터라는 견해가 존재하지만, 근래에는 실물자료인 목간이 확인되는 텐무조부터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48) 나에 서는 대왕에서 천황 칭호로의 변화 시기에 관해 견수사를 파견한 스이코 천황 이라는 설과 대왕(천황)의 지위가 대폭 높아진 텐무[ 天 武 ], 지토[ 持 統 ] 천황 경 <표 3> 8종 역사교과서의 對 隋 교섭에 관한 기술 내용 출판사 가 敎 育 出 版 수나라와의 교섭에 관한 기술 수와 국교를 열어[*주2] 중국에서 선진문화를 수용하려 하고 오노노 이모코[ 小 野 妹 子 ] 등이 견수사로 파견되었다. 견수사와 함께 많은 유 학생과 승려가 수나라에 건너가 정치제도와 불교 등을 열심히 배웠다 (35쪽). [*주2] 왜왕(천황)이 수양제에게 보낸 편지 코너. 수서 왜국전에서 인용,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 게 글을 보낸다. 잘 지내는가? 운운. (34쪽). 만화: 편지를 받은 양제가 왜 화를 냈을까?(34쪽). 46) 우마야도[ 厩 戶 ] 황자 또는 우마야도 왕의 후세의 호칭이다. 47) 나행주, 2011, 앞의 글, 190~194쪽. 48) 吉 田 孝, 1997, 日 本 の 誕 生, 岩 波 新 書, 202~203쪽; 熊 谷 公 男, 2001, 앞의 글, 335~336쪽.

190 19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출판사 나 東 京 書 籍 수나라와의 교섭에 관한 기술 중국에서는 6세기 말에 수가 남북조를 통일하며 강대한 제국을 만들 어냈다. 그래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고 수의 선 진제도와 문화를 수용하려고 607년 오노노 이모코 등을 보내고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수에 사자를 파견했다. 이러한 견수사에는 많은 유 학생과 승려가 동행하였다(38~39쪽). 다 마나비샤 [ 學 び 舍 ] 589년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조선의 백제, 신라, 고구려는 곧 수의 황 제에게 사자를 파견하였다. 소가노 우마코[ 蘇 我 馬 子 ]와 우마야도[ 廐 戶 ] 황자는 이 움직임을 보고 600년에 수에 사자를 파견하였다(견수 사)(39쪽). <견수사와 중국 황제는 무엇을 말했는가?> 코너. 2회째 견수사 오노노 이모코가 가지고 있던 국서에는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낸다. 잘 지내는가? 라고 했다. 이것을 본 황제는 만이의 글은 무례하다. 이제 전하지 말라. 고 명하 였다. 이에 관한 것은 중국의 역사서 수서 에 기술되어 있다. 이 무 렵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에서는 천자는 이 세계에 한 사람뿐이 라는 것이 상식이었다(39쪽). 라 育 鵬 社 쇼토쿠[ 聖 德 ] 태자는 오노노 이모코 등을 중국의 수에 파견하였다(견수 사). 그것은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중국의 제도와 문화를 수용해 야 했기 때문이었다. 607년 수의 황제에게 보낸 편지를 매자에게 맡겼 다. 그 안에 우리나라가 수와 대등한 나라임을 강조하였다. 수의 황제 는 이에 관해 격노하였다. 그러나 수는 고구려와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일본과 적대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매자 등에게 사자를 딸려 서 귀국시켰다. 견수사에는 많은 유학생과 유학승이 따랐다(41쪽). <역사 전망 천황과 황제 쇼토쿠 태자의 기개> 수서 에는 607년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 을 보낸다. 잘 지내는가? 운운. 이라는 편지가 일본의 천자(천황)로부 터 수의 황제 양제에게 보내졌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비 록 소국이라 해도 일본은 독립국으로서 중국과 대등하다는 의미가 담 겨 있었다. 또한 일본서기 에는 608년 스이코 천황이 수의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 동쪽의 천황이 삼가 서쪽의 황제에게 아룁니다. 라고 하 였다. 왕의 칭호 대신에 천황의 칭호가 사용된 것이 기재되어 있다. [* 주] 이렇게 우리나라는 쇼토쿠 태자 시대에는 이미 중국의 영향력을 벗어나려 하는 정치적인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41쪽). [*주] 이때 천황의 칭호가 처음 사용된 것으로 간주된다. 한편 텐무[ 天 武 ] 천황(재위 673~686) 시대가 된 이후라는 설도 있다(41쪽).

191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91 출판사 마 日 本 文 敎 出 版 바 自 由 社 사 帝 國 書 院 아 淸 水 書 院 수나라와의 교섭에 관한 기술 야마토 왕권은 중국을 통일한 수에 오노노 이모코 등의 견수사를 파견 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국교를 맺으려 하였다. [*주3] 또 수의 선진문 화를 수용하기 위해 많은 유학생과 유학승을 동행시켜 제도와 불교를 배우게 하였다(36쪽). [*주3] 대국 수에 대한 이러한 시도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고구 려와 대립하던 수는 왜국의 견수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36쪽). 600년 쇼토쿠 태자는 수에 사자(견수사)를 파견했다. 일본이 중국 왕 조와 교섭을 가진 것은 120년만의 일이었다. 견수사에 의해 수의 강대 함을 알게 된 태자는 일본이 독립된 국가로서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대륙에서 우수한 기술과 제도를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쇼 토쿠 태자는 수와 대등한 외교를 전개하기 전에 우선 국내 개혁에 착 수했다(52~53쪽). 국내 개혁에 성공한 쇼토쿠 태자는 607년 다시 견수사를 파견했다. 이때 수 황제에게 보낸 국서에는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낸다. 잘 지내는가? 라고 기재되었다. 태자는 편지 문장에서 대등한 입장을 강조하는 것으로 수에게 결코 복속되지 않는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이었다(54쪽). 608년 3회 견수사가 파견되었다. 그 때 국서에 기재할 군주의 칭호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중국 황제의 노여움을 산 이상 중 국의 군주와 같은 칭호를 칭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다시 왕 이라 칭하며 중국에게 책봉 받는 길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서 이때 편지에는 동쪽의 천황이 삼가 서쪽의 황제에게 아룁니다. 라 고 기술했다. 황제라는 문자를 피하는 것으로 수의 입장을 배려하면서 도 皇 이라는 문자를 스스로 칭호로 사용하는 것으로 양국이 대등하다 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이것이 천황이라는 칭호가 사용된 시작이다[* 주3](54~55쪽). [*주3] 뒤에 텐무 천황(재위 673~686) 시대에 천황호가 처음으로 사 용되었다는 설도 있다(55쪽). 국내 정치가 정비되자 태자는 수에 오노노 이모코 등을 견수사로 파 견하였다. 그리고 수의 선진 정치구조와 문화를 수용하기 위해 정식 국교를 추구했다. 고구려와 대립하고 있던 수는 왜국과의 관계를 중 시여겨 정치와 불교를 배우기 위한 유학생과 유학승을 받아들였다 (32~33쪽). 중국과는 대등한 관계를 맺으려고 오노노 이모코를 사자로 수에 파견 했다(견수사). 유학생과 승려도 동행하게 하여 뛰어난 문화를 배우게 했다(32~33쪽).

192 19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7세기 후반)이라는 설로 나눠져 있다고 기존의 설을 제시하였다(나 38쪽). 다와 사에서는 양설을 제시하고 텐무 천황 때 천황이라는 칭호가 정식으로 정 해진 것이라 기술하였다(다 31쪽, 사 35쪽). 그리고 가, 마, 아는 텐무 천황 설만 기술하고 있다(가 36쪽, 마 39쪽, 아 35쪽). 이러한 기술은 모두 기존 연구사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러나 라와 바에서는 오히려 일반론을 하나의 설 로 제시하며 쇼토쿠 태자를 중국 황제와 대치된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라 41쪽, 바 55쪽).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쇼토쿠 태자를 천황제 국가의 창 시자로 자리매김하려 한 것과 연관된 기술이다. 그렇다면 라와 바 이외의 교과서는 수와의 교섭에 관해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가? 마와 아는 607년의 오노노 이모코[ 小 野 妹 子 ]가 가져간 국서를 제시하 며 대등외교 의 입장을 강조하며 기술하고 있다. 가는 대등 이라는 표현은 사 용하고 있지 않지만 607년의 해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운운 하는 국서를 게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일한 범주에서 이해가 가능하 다. 이에 비해 다는 607년의 국서에 관해 언급할 때, 중국과 한반도 제국의 움 직임과 고대 동아시아의 중국적 질서에 관한 설명도 함께 기술하면서 당시 상 황에 대한 서술에 균형을 맞추고 있다. 다음은 8종 역사교과서에 기술된 견수사 파견 이유를 살펴보자. <표 3>에 는 수의 선진제도와 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과 이른바 대등외교 를 통해 왜국의 위상을 자리매김하기 위한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수의 선진제도와 문화를 수용하는 것과 수에 대해 왜국이 대등외 교, 독립외교 를 주장하는 것이 과연 어떤 맥락 속에서 연결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다. 대등외교 나 독립외교 를 주장하지 않으면 선진제도와 문화를 수용 할 수 없다는 것인가? 오히려 선진문화 수용을 위해 다수의 유학생과 유학승 을 파견하는 것이 당시 왜국의 입장이었다면, 가능한 외교적인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교섭을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접근법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러한 정합성이 떨어지는 두 가지 사안을 함께 거론하고 있는 것인가? 이 문제 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견수사 파견 이유와 당시 외교의 성격에 관한 기술이 어 떠한 연구사적 기반에 의거한 것인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93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93 스이코 천황대에 전개된 수와의 교섭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경향으 로 나뉜다. 첫 번째는 왜국의 대등한 외교자세를 한반도 제국의 책봉 문제와 연결해 설명하는 것이다.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모 두 수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아 수의 外 臣 으로 수의 질서 내에 편입되었다. 따 라서 전통적으로 삼국의 우위에 위치한 왜의 입장에서 삼국과는 다른 자세 즉 수와 대등한 자세로 외교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49) 는 것이다. 요컨대 왜의 외교 는 수의 책봉체제 밖에서 왜국을 중심으로 한 小 冊 封 體 制 즉 한반도 제국에 대한 大 國 의 위치를 유지할 목적에서 취해진 대등외교 라는 설명이다. 그러므 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수와의 교섭을 진행했다 는 나의 기술은 한반도 제국에 대한 우위론에 기초한 설명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시모다의 논리는 일본 학계에서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예를 들 자면 講 座 日 本 歷 史 에서 스즈키 야스타미[ 鈴 木 靖 民 ]는 임나의 조 제공은 임나의 조를 바친다는 종속적인 외교형식의 실시였고, 수서 왜국전에 기록 된 대국 입장 즉 왜 본위의 신라와 백제에 대한 중국적 정치질서의 실재성이 임나의 조를 바치는 것에 의해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50) 라고 언급하였다. 또 이시가미 에이이치[ 石 上 英 一 ]는 수서 왜국전에서 백제와 신라 모두가 왜를 대국으로 섬기며 진귀한 물건이 많다고 여겨 아울러 이를 공경하고 우러러 보 며 늘 통사가 왕래한다 51) 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7세기 초까지 왜(일본)는 신라와 백제를 조공국으로 둔 대국의 입장에 있었고 동이의 소제국으로 존재 하였다. 왜의 대국으로서의 지위가 562년 임나 멸망 후에는 신라와 백제의 상 호 견제에 의거해 일본에 대해 각각 조공하였고, 642년 백제의 임나 지역 점령 이후에는 백제에 의한 임나의 조 대납에 의해 겨우 타국 억압이라는 대국의 실 체를 유지하였다 52) 고 설명하였다. 49) 西 嶋 定 生, 1962, 6~8 世 紀 の 東 アジア, 岩 波 講 座 日 本 歷 史 2, 岩 波 書 店, 253쪽. 50) 鈴 木 靖 民, 1984, 앞의 책, 229쪽. 51) 隋 書 東 夷 傳 倭 國 條, 新 羅 百 濟 皆 以 倭 爲 大 國, 多 珍 物, 竝 敬 仰 之, 恒 通 使 往 來. 52) 石 上 英 一, 1984, 古 代 國 家 と 對 外 關 係, 講 座 日 本 歷 史 2, 東 京 大 學 出 版 會, 264~265쪽.

194 19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이시가미와 스즈키의 논리는 수서 의 백제와 신라 모두가 왜를 대국으로 섬겼다 는 기사를 당시 한반도 제국과 왜국의 객관적인 역관계를 나타낸 것으 로 해석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수서 동이전 왜국전에 기록된 내용은 백제, 신라와 왜국의 실제 역관계를 기록한 것이라기보다 왜국 사절이 제공한 정보와 수 煬 帝 가 파견한 사절단의 보고를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53) 우선 왜국의 사절단이 제공한 정보에 관해 살펴보자. 스이코 천황대는 내 적으로는 왜국의 國 制 와 禮 法 의 정비 등이 이루어진 시기이며, 외적으로는 한 반도는 물론이고 중국 등으로 외교의 장을 확장한 시기로 평가된다. 54) 특히 스 이코조는 고구려와의 교섭이 매우 활발히 전개된 시기였다. 예컨대 고구려의 승려 혜자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55) 혜자가 파견된 이후 고구려에서 왜국으로 불교와 관련된 인적 물적인 이동 양상이 계속적으로 나타났다. 56) 혜 자는 수는 물론이고 백제, 신라와도 대립하고 있던 고구려가 왜국과 연결하려 는 전략적인 의도하에 파견한 존재로 설명되고 있다. 57) 또 수에 보낸 국서 58) 에 나타난 문장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혜자가 국서 작성에도 관여한 것이 확인 53) 李 成 市, 1990, 高 句 麗 と 日 隋 外 交, 思 想 795, 岩 波 書 店 ( 李 成 市, 1998, 古 代 東 アジアの 民 族 と 國 家, 岩 波 書 店, 299쪽). 54) 武 田 佐 知 子, 1996, 儀 禮 と 衣 服, 岸 俊 男 編, 日 本 の 古 代 7 まつりごとの 展 開, 中 央 公 論 社, 344~346쪽. 55) 日 本 書 紀 推 古 天 皇 3년(595) 5월 정묘조, 高 麗 僧 惠 慈 歸 化. 則 皇 太 子 師 之. 56) 삼국사기 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일본서기 에는 추고천황 10년(602) 10월 기축조의 승려 僧 隆 과 雲 聰, 추고천황 13년(605) 4월 신유삭조의 원흥사 금당에 안치할 불상 조영을 위해 황금 300냥, 推 古 天 皇 18년(610) 3월조의 승려 曇 徵 과 法 定 일행, 推 古 天 皇 26년(620) 8월조의 고구려가 특산물[ 方 物 ]을 제공하며, 수 양제가 30만의 무리를 일으켜 우리를 공격하였다가 도리어 우리에게 패배하였다 고 전한 것. 그리고 推 古 天 皇 33년(625) 정월 무인조의 승려 惠 灌 파견 등의 교섭 기사가 기재되어 있다. 57) 佐 伯 有 淸, 1986, 推 古 紀 の 對 外 政 策 と 文 化, 日 本 の 古 代 國 家 と 東 アジア, 熊 山 閣, 175~176쪽. 58) 수서 동이전 왜국조, 大 業 三 年, 其 王 多 利 思 比 孤 遣 使 朝 貢. 使 者 曰, 聞 海 西 菩 薩 天 子 重 興 佛 法, 故 遣 朝 拜, 兼 沙 門 數 十 人 來 學 佛 法. 其 國 書 曰, 日 出 處 天 子 致 書 日 沒 處 天 子 無 恙 云 云. 帝 覽 之 不 悅, 謂 鴻 臚 卿 曰, 蠻 夷 書 有 無 禮 者, 勿 復 以 聞.

195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95 된다. 59) 따라서 왜가 수와의 교섭을 개시하면서 수와 대등한 입장에서 천자국 을 운운한 것은 수와 대립하고 있던 고구려의 입장과 잘 부합된다. 그러므로 왜국이 수나라와 교섭 때 국서에 기술한 내용에는 고구려의 의지가 반영된 것 이 틀림없다. 또한 607년(스이코 천황 15년, 수 양제 大 業 3년)에 오노노를 필두로 한 사 절단을 수나라에 파견하였다. 60) 수 61) 에 파견된 오노노(오미) 일행이 608년에 귀국할 때 수 양제는 裵 世 淸 일행을 딸려서 왜국에 파견하였고, 이들은 608년 4월에 츠쿠시[ 筑 紫 ](현재의 후쿠오카시[ 福 岡 市 ])에 도착하였다. 62) 일본서기 에는 수의 사절단 접견에 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관련 내용을 정 리하면 다음과 같다. 608년 6월에 오노노 일행과 함께 수나라 사절단이 야마토 왕권의 외항인 나니와노츠[ 難 波 津 ](현재의 오사카시[ 大 阪 市 ])에 상륙하였다. 이 당시 사절 영 접을 위해 장식한 배 30척이 (나니와)의 강구에서 수의 사절단을 맞이하여 새 로 지은 관사에 안치시켰다. 63) 8월 3일에 入 京 하게 되는데, 이 날 사절단을 맞 이하기 위해 기마가 동원되었고, 츠바키이치[ 海 石 榴 市 ](현재의 사쿠라이시[ 櫻 井 市 ])에서 입경 절차를 마치고 64) 12일 조정에 들어갔다. 65) 조정에서 16일에 59) 李 成 市, 1998, 앞의 책, 303쪽. 60) 일본서기 추고천황 15년(607) 7월 경술조, 大 禮 小 野 臣 妹 子 遣 於 大 唐. 以 鞍 作 福 利 爲 通 事. 61) 推 古 紀 에는 大 唐, 大 唐 客 등 당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당시 중국은 수나라였다. 62) 일본서기 추고천황 16년(608) 4월조, 小 野 臣 妹 子, 至 自 大 唐. 唐 國 號 妹 子 臣 曰 蘇 因 高. 大 唐 使 人 裴 世 淸. 下 客 十 二 人, 從 妹 子 臣, 至 於 筑 紫. 遣 難 波 吉 士 雄 成, 召 大 唐 客 裴 世 淸 等. 爲 唐 客 更 造 新 館 於 難 波 高 麗 館 之 上. 63) 일본서기 추고천황 16년 6월 병진(15)조, 客 等 泊 于 難 波 津. 是 日. 以 餝 船 卅 艘 迎 客 等 于 江 口. 安 置 新 舘. 於 是. 以 中 臣 宮 地 連 摩 呂. 大 河 内 直 糠 手 船 史 王 平 爲 掌 客. 64) 海 石 榴 市 에서의 영접은 사절[ 客 ]을 맞이하는 환영행사인 동시에 일종의 地 界 祭 儀 였다. 本 位 田 菊 士, 1985, 額 田 部 連 額 田 部 について, 續 日 本 紀 硏 究 238, 6쪽. 65) 일본서기 추고천황 16년 8월 계묘(3)조, 唐 客 入 京. 是 日. 遺 餝 騎 七 十 五 疋 而 迎 唐 客 於 海 石 榴 市 衢. 額 田 部 連 比 羅 夫 以 告 禮 辭 焉 ; 일본서기 추고천황 16년 8월 임자(12)조, 召 唐 客 於 朝 庭. 令 奏 使 旨. 時 阿 倍 鳥 臣. 物 部 依 網 連 抱 二 人 爲 客 之 導 者 也. 於 是. 大 唐 之 國 信 物 置 於 庭 中.

196 19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향연이 베풀어졌고, 66) 9월 5일에는 나니와의 대군에서 귀국을 앞두고 다시 향 연이 베풀어졌다. 67) 그리고 9월 11일에 귀국길에 올랐다. 68) 이러한 수의 사절단에 대한 의전에 관한 내용은 세부적인 기술면에서는 차 이가 있지만 수서 에서도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수서 69) 에는 裵 淸 의 파견과 왜국으로의 항해 일정, 도착 이후의 움직임에 관한 내용 등이 기술되어 있다. 70) 이러한 기술 내용은 모두 배(세)청 일행의 귀국 보고에 의거한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왜국이 행한 수의 사절단에 대한 환대는 이들이 귀국한 뒤 왜국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 데 큰 몫을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의지가 반영된 국서에 기술된 내용과 왜국에서의 극진한 접대를 받은 배세청 일행의 귀국 보고 등에 의거하여, 왜국이 백제와 신라 위 에 선 대국=천자국 임을 주장한 사료가 수서 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수서 에 나타난 대국 이라는 문구에 기초하여 이전 시기의 한일관계 전체를 대국과 소국 의 위치로 소급하여 규정한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고 평가하지 않 을 수 없다. 다음은 수와의 교섭에 대한 두 번째 연구 동향에 관해 살펴보자. 수를 대상 으로 한 대등외교 가 당시 수와 고구려 그리고 왜국관계라는 다국관계를 고려 하여 취해진 것이라 설명한 것이다. 이 논리는 니시지마가 주장한 왜가 전통적 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위에 존재했다는 소책봉체제 론이 가진 모순점에 대 한 지적에서 출발하였다. 즉 고구려와 왜국의 교섭은 6세기 중반에 고구려와 66) 일본서기 추고천황 16년 8월 병진(16)조, 饗 唐 客 等 於 朝. 67) 일본서기 추고천황 16년 9월 을해(5)조, 饗 客 等 於 難 波 大 郡. 68) 일본서기 추고천황 16년 9월 신사(11)조, 唐 客 裴 世 清 罷 歸. 69) 裵 淸 은 裵 世 淸 을 가리킨다. 수나라 2대 황제인 李 世 民 의 世 를 避 諱 한 것이다. 수서 에는 文 林 郞 으로 기재되어 있다. 문림랑은 수서 百 官 志 에 의하면 秘 書 省 소속, 종8품관이다. 70) 수서 동이전 왜국조, 明 年, 上 遣 文 林 郎 裵 淸 使 於 倭 國. 度 百 濟 行 至 竹 嶋. 倭 王 遣 小 德 阿 輩 臺, 從 數 百 人, 設 儀 仗, 鳴 鼓 角 來 迎. 後 十 日. 又 遣 大 禮 哥 多 毗. 従 二 百 余 騎 郊 勞, 既 至 彼 都, 其 王 與 清 相 見, 大 悦 曰 今 故 清 道 飾 館 以 待 大 使. 於 是 設 宴 享 以 遣 清, 復 令 使 者 隨 清 來 貢 方 物.

197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97 왜의 공식적인 교섭이 개시된 71) 이후부터였고, 이때 교섭을 개시한 이래 고구 려와 왜국은 긴밀한 교섭을 유지했다는 점, 그리고 교섭 개시 이전에는 고구려 와 왜국이 일관되게 백제를 매개로 하여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한 점 등을 근거 로 삼아 고구려가 왜의 번신인 적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또 고구려가 왜국에 접근한 것은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신라가 급성장하자 고구려가 신라 의 배후에 위치한 왜국을 재조명하게 된 것이다. 또한 고구려와 대립하던 수 입장에서도 왜의 전략적인 가치를 재평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바로 이 러한 시점에 수와의 교섭이 개시되었다. 그러므로 607년에 왜가 취한 수에 대 한 고압적인 외교자세는 고구려로서는 수를 견제한다는 차원에서 환영할 만한 움직임이라 할 수 있고, 수 입장에서도 이러한 정세였다면 왜가 일반적이지 않은 외교자세를 취했다고 하더라도 용인할 수밖에 없었을 것 72) 이라고 설명하 였다. 따라서 고구려와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일본과 적대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라), 고구려와 수가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수는 왜국과의 관계를 중 시 여겨(사), 고구려와 대립하던 수는 왜국의 견수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마) 등으로 고구려와 수의 관계를 고려한 교과서 기술들은 이러한 연구에 기 반을 둔 것이다. 또한 수 황제와 동급으로 천자를 칭한 것은 당시의 현실적인 역관계로 보 면 왜가 예를 벗어난 것으로 평가할 만한 일인데도 문책하는 대신에 오노노 일 행이 귀국할 당시 답례사를 왜국에 파견한 수의 태도로 볼 당시 스이코조의 대 등외교가 성공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73) 그러나 수를 대상으로 한 왜국 의 대등외교 는 고구려와 수, 왜국관계와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대립관계 등 다국관계 속에서 조명하면 수서 에 기재된 천자국 이나 대국 이라는 표현을 71) 山 尾 幸 久, 1967, 大 化 前 後 の 東 アジアの 政 勢 と 日 本 の 政 局, 日 本 歷 史 229, 29쪽; 栗 原 朋 信, 1978, 上 代 の 對 外 關 係, 對 外 關 係 史, 山 川 出 版 社, 127쪽. 72) 李 成 市, 1998, 앞의 책, 290쪽. 73) 坂 元 義 種, 1979, 推 古 朝 の 外 交 特 に 隋 との 關 係 を 中 心 に, 歷 史 と 人 物 100, 中 央 公 論 社, 53쪽.

198 19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가지고 고대의 한일관계 를 대국과 소국의 위치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한 주장 임이 드러난다. Ⅴ. 맺음말 2015년도 검정을 통과한 8종 역사교과서가 어떠한 고대 한일관계상을 가지고 기술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왜국의 한반도 출병과 가야지배 론, 왜왕의 都 督 諸 軍 事 호 제수 요청과 한반도 남부지배 론, 그리고 왜국의 對 隋 外 交 와 대 국 론이라는 3개의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검토하였다. 먼저 2015년도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의 고대사 기술 내용과 이전 검정통과 교과서와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쿠호샤[ 育 鵬 社 ]와 지유사[ 自 由 社 ]의 역사교과서 기술이 한일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역행 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2011년도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 분석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그러나 2015년도 검정을 통과한 지유샤의 역사교과서는 임나의 조 에 관 한 기술을 통해 한반도 남부지배 론에 입각한 서술 경향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 고 있다. 다른 하나는 새롭게 검정을 통과한 마나비샤[ 學 び 舍 ]가 기존의 검정 통과 교과서에 비해 한일관계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자는 교과서 채택률 면에서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고, 후자도 새롭게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인 만큼 채택률 면에서는 저조하지만, 서술 태도가 완전히 다른 양자가 모두 검정을 통과한 만큼 향후 검정에 대비할 출판사에 미칠 영향이 상 당할 것이라 생각된다. 다음은 2015년도 검정을 통과한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고대 한일관계사 서 술의 기반을 제공한 논리 체제에 관한 검토 결과는 다음과 같다. 하나는 일본 고대 국가의 성립과 발전과정을 중국 중심의 조공과 책봉체제를 중심으로 구 조화하는 과정에서 조공과 책봉체제에 편입과 이탈이라는 문제를 한반도 제국

199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199 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가야 지역은 왜국의 지배 혹은 보호 대상으로, 백제와 신라 등 한반도 제국에 대해서는 우위의 위 상을 유지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중국 을 중심에 두고 책봉체 제 라는 구조 속에서 왜국이 가야를 중심으로 하여 백제와 신라 등에게 지속적 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역사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일고대상을 대 체할 만한 논리체제가 재구축되기 전에는 역사교과서에 기술된 한반도 제국과 의 관계 기술은 온전한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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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201 연민수, 2005,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古 代 史 서술과 歷 史 認 識, 韓 國 史 硏 究 129. 연민수, 2011,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古 代 史 像 과 歷 史 認 識 2011년도 검정합격 본을 중심으로, 역사교육논집 47, 역사교육학회. 이근우, 2005, 5세기의 일본열도, 한일관계사연구논집편찬위원회 편, 왜5왕 문제와 한일관계 한일관계사연구논집 2, 경인문화사. 이근우, 2008, 新 しい 歷 史 敎 科 書 의 역사인식과 선사 고대사 서술, 일본역사연 구 27. 이영식, 1993, 五 世 紀 倭 の 五 王 の 韓 南 部 諸 國 名 の 稱 號, 加 耶 諸 國 と 任 那 日 本 府, 吉 川 弘 文 館. 이재석, 2011, 2011년도 검정통과 일본 역사교과서의 문제점 총론 2011년도 일본 중 학교 역사교과서 검정의 특징과 문제점, 역사교육논집 47. 이춘식, 1987, 中 國 古 代 朝 貢 의 實 體 와 性 格 朝 貢 의 性 格 과 그 韓 國 的 意 味, 韓 國 史 硏 究 會 編, 古 代 閑 中 關 係 史 의 硏 究, 삼지원. 정효운, 2003, 새역사교과서 와 日 本 書 紀, 일본학보 ひらかれた 歷 史 敎 育 の 會, 2007, 新 しい 歷 史 敎 科 書 の< 正 しい> 讀 み 方, 靑 木 書 店. 江 畑 武, 1974, 四 ~ 六 世 紀 の 朝 鮮 三 國 と 日 本 中 國 との 冊 封 をめぐって, 上 田 正 昭 井 上 秀 雄 編, 古 代 の 日 本 と 朝 鮮, 學 生 社. 關 和 彦, 1990, ヤマト 王 権 の 成 立 はいつか, 争 点 日 本 の 歴 史 2 古 代 編 1, 新 人 物 往 來 社. 鬼 頭 淸 明, 1976, 日 本 古 代 國 家 の 形 成 と 東 アジア, 校 倉 書 房. 吉 田 孝, 1997, 日 本 の 誕 生, 岩 波 新 書. 鈴 木 英 夫, 1996, 任 那 の 調 の 起 源 と 性 格, 古 代 の 倭 國 と 朝 鮮 諸 國, 靑 木 書 店. 鈴 木 靖 民, 1984, 東 アジア 諸 民 族 國 家 形 成 と 大 和 王 權, 講 座 日 本 歷 史 1 原 始 古 代 1, 東 京 大 學 出 版 會. 鈴 木 靖 民, 1985, 日 本 律 令 制 の 成 立 展 開 と 對 外 關 係, 古 代 對 外 關 係 史 の 硏 究, 吉 川 弘 文 館. 李 成 市, 1990, 高 句 麗 と 日 隋 外 交, 思 想 795, 岩 波 書 店 ( 李 成 市, 1998, 古 代 東 ア ジアの 民 族 と 國 家, 岩 波 書 店 ). 末 松 保 和, 1949, 任 那 興 亡 史, 吉 川 弘 文 館. 武 田 佐 知 子, 1996, 儀 禮 と 衣 服, 岸 俊 男 編, 日 本 の 古 代 7 まつりごとの 展 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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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203 坂 元 義 種, 1979, 推 古 朝 の 外 交 特 に 隋 との 關 係 を 中 心 に, 歷 史 と 人 物 100, 中 央 公 論 社. 坂 元 義 種, 1981, 倭 の 五 王 空 白 の 五 世 紀, 敎 育 社. 國 史 大 辭 典 14, 1993, 吉 川 弘 文 館.

204 20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국문 초록]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2015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서보경 2015년도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의 고대사 기술 내용과 이전 검정 통과 교과서 와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쿠호샤[ 育 鵬 社 ] 와 지유샤[ 自 由 社 ]의 역사교과서 기술이 한일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역행하 고 있다는 점은 이미 2011년도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 분석에서도 지적된 바 있 다. 그러나 2015년도 검정을 통과한 지유샤의 역사교과서는 임나의 조 에 관한 기술을 통해 한반도 남부지배 론에 입각한 서술 경향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다른 하나는 새롭게 검정을 통과한 마나비샤[ 學 び 舍 ]가 기존의 검정통과 교과서에 비해 한일관계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자 는 교과서 채택률 면에서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고, 후자도 새롭게 검정을 통과 한 교과서인 만큼 채택률 면에서는 저조하지만, 서술 태도가 완전히 다른 양자 가 모두 검정을 통과한 만큼 향후 검정에 대비할 출판사에 미칠 영향은 상당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2015년도 검정을 통과한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고대 한일관계사 서술 의 기반을 제공한 논리체제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일본 고대 국 가의 성립과 발전 과정을 중국 중심의 조공과 책봉체제를 중심으로 구조화하 는 과정에서 조공과 책봉체제에 편입과 이탈이라는 문제를 한반도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가야 지역은 왜국의 지배 혹은 보호 대상으로, 백제와 신라 등 한반도 제국에 대해서는 우위의 위상을 유지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중국 을 중심에 두고 책봉체제 라

205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205 는 구조 속에서 왜국이 가야를 중심으로 하여 백제와 신라 등에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역사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대 한일관계상을 대 체할 만한 논리체제가 재구축되기 전에는 역사교과서에 기술된 한반도 제국과 의 관계 기술의 온전한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제어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한일관계사, 교이쿠슛판[ 敎 育 出 版 ], 도쿄쇼세키[ 東 京 書 籍 ], 이쿠호샤[ 育 鵬 社 ], 니혼분쿄슛판[ 日 本 文 敎 出 版 ], 지유샤[ 自 由 社 ], 테코쿠쇼인[ 帝 國 書 院 ], 시미즈쇼인[ 淸 水 書 院 ], 임나일본부, 임나의 조, 스에 마츠 야스카즈[ 末 松 保 和 ], 이시모다 쇼[ 石 母 田 正 ], 니시지마 사다오[ 西 嶋 定 生 ], 도독제군사( 都 督 諸 軍 事 ), 조공 책봉체제, 대등외교, 대국론

206 20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ABSTRACT] An Analysis of Ancient Korean Japanese History as Described in Japanese Middle School Textbooks Focusing on Textbooks that Passed the 2015 Screening Seo Bokyung There are two major differences in the descriptions of Japanese history textbooks used in secondary education between those textbooks that passed the 2015 government screening and those textbooks that were approved in the past. The first difference is that the descriptions of ancient history sections in textbooks published by Ikuhōsha and Jiyūsha are completely counter to the recent developments in historiography in both Korea and Japan, a point mentioned in the analysis of textbooks that passed the 2011 screening. What is different this time is that the Jiyūsha history textbook approved in 2015, for example, leans more toward the so called theory of Japanese colonies in southern Korea in its account of Imna paying tribute to Japanese rulers. The second point is that the textbook published by Manabisha and newly approved by the Ministry of Education, Culture, Sports, Science and Technology (MEXT) depicts Korea Japan relations in a relatively objective perspective compared to other textbooks previously published. The first textbook is negligible in terms of the rate of adoption by schools. And the second book, too, has been adopted by only a few schools, as it was approved only recently. Still, the fact that two history textbooks with polar opposite views are available has important implications for other

207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대 한일관계 기술에 대한 분석 년도 검정통과본을 중심으로 207 textbook publishers as this may become a touchstone in order to pass the Ministry s approval process. The review of the ancient history of the two nations as described in Japanese middle school history books that were approved in 2015 is as follows. First, narratives on ancient states in Japan in these books are based upon a picture in which China is at the top of the tribute and vassal system, with Japanese states moving in and out of the orbit in relation to states in the Korean Peninsula. The other common characteristic is that these books consider the area occupied by the Gaya confederacy in the southeastern peninsula as under Japanese domination or protection while maintaining supremacy over other strong Korean states such as Baekje and Silla. Stated differently, this is an imaginary map concocted by Japanese historians where Japan plays a middling role over Baekje and Silla with Gaya as leverage in a China centered East Asian world. Until this historical prejudice is corrected and replaced by a new narrative, it will be difficult to expect major changes in Japanese textbook descriptions on ancient Korea and the relations with Japan. Keywords Japanese middle school History textbooks( 日 本 中 學 校 歷 史 敎 科 書 ), History of Korea Japan relations( 韓 日 關 係 史 ), Kyōiku Shuppan( 敎 育 出 版 ), Tōkyō Shoseki( 東 京 書 籍 ), Ikuhōsha( 育 鵬 社 ), Nihon Bunkyō Shuppan( 日 本 文 敎 出 版 ), Jiyūsha( 自 由 社 ), Teikoku Shoin( 帝 國 書 院 ), Shimizu Shoin( 淸 水 書 院 ), Manabisha( 學 び 舍 ), Imna Ilbon bu( 任 那 日 本 府 ), Cho of Imna( 任 那 의 調 ), Suematsu Yasukazu( 末 松 保 和 ), Ishimoda Shō( 石 母 田 正 ), Nishijima Sadao( 西 嶋 定 生 ), Totoku military affairs( 都 督 諸

208 20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軍 事 ), tribute and vassal system( 朝 貢 冊 封 體 制 ), diplomatic equality( 對 等 外 交 ), great power theory( 大 國 論 )

209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09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이종국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Ⅰ. 머리말 그동안 한일관계는 일본 정치인들의 과거사 관련 망언 으로 양국이 대립하는 상 황에 자주 직면하였다. 최근 역사인식 문제 1) 를 둘러싸고, 일본의 우파정치인과 투고: 2015년 10월 16일, 심사 완료: 2016년 2월 5일, 게재 확정: 2016년 2월 24일 1) 동북아시아에서 논쟁이 생겨나게 된 계기는 냉전이 종식되고 난 이후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부터였다. 그리고 탈냉전 이후 근대 국가의 역할이 변화하면서 역사인식 문제도 새롭게 문제 제기 되었다. 일본에서는 90년대 전반 일본 정부가 법적책임을 부인하는 입장을 보이자, 1995년 일본의 가해 책임에 대한 대법정이 개최되면서 시민들에 의한 평화운동이 전개되었다. 90년대 후반은 반동기로 일본의 전후 역사는 자학사관 이라고 비판하면서 자국중심적인 역 사관을 주장하는 그룹들의 활동이 강화되었다. 따라서 90년대 역사인식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후 일본의 역사인식은, 글로벌 역사로 인식되는 흐 름도 있으나, 새로운 국가주의적인 경향이 강화되는 상황에 있다. 이러한 논의에 대 한 관련 문헌으로는 이하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다카하시 데쓰야, 임성모 옮김, 2009, 역사인식 논쟁, 동북아역사재단; 若 宮 啓 文, 2006, 和 解 とナショナリズ ム, 朝 日 新 聞 社 ; 若 宮 啓 文, 2014, 戦 後 70 年 保 守 のアジア 観, 朝 日 新 聞 社 ; 中 野 晃 一, 2015, 右 傾 化 する 日 本 政 治, 岩 波 書 店 ; 菅 英 輝 編, 2011, 東 アジアの

210 21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보수적인 역사학자들이 역사수정주의 노선을 지지하면서 일본은 우경화 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한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그리고 미국과 유럽국 가들이 염려하고 있다. 2015년 아베 신조[ 安 倍 普 三 ] 총리의 방미 후, 미국학자 들과 세계의 역사학자들이 연대하여 일본의 역사인식을 문제 삼아 성명서를 내는 등 과거와는 달리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는 세계적인 문제로 확대되었다. 2015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지 70년이 되는 해였다. 지난해 동아시 아 3국은 물론 관계국들은 관련 행사들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러 국가 의 전문가들은 전쟁종결과 전후 처리, 전후 질서에 관한 전후사 재평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제2차 세계대전을 어떻게 기억 할 것인가? 그리고 전후 처리가 남긴 역사적인 의미를 기억하면서 어떠한 교훈을 얻을 것인가? 또한 그동안 진행된 가해자의 전후 처리 정책들을 상기하면서 무엇이 부족하 였으며, 그러한 것들을 향후 어떻게 보완하여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을 주 로 논의하였다. 그러나 전후 질서를 둘러싸고 관계국들은 서로 인식을 달리하고 있다. 그 것은 전쟁책임론 2) 과 전후 질서 탈각 3) 과 같은 형태로 주장되었고, 역사인식 을 통한 정체성 수립과정에서 갈등으로 나타났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였는가? 를 둘러싸고 논의된 선행연구들을 확인하면서, 먼저 전후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면서 냉전기 歴 史 摩 擦 と 和 解 可 能 性, 剴 風 社. 2) 전쟁에 초점을 맞추어 일본의 근대사 전체를 문제시하는 것으로, 1945년 이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시각이다. 그리고 전쟁책임을 회피하는 일 본을 비판한다. 전쟁책임과 관련하여 일본 내에서는 전쟁책임 긍정파( 大 沼 保 昭, 高 橋 哲 哉, 小 管 信 子 )와 부정파( 小 堀 桂 一 郎, 渡 辺 昇 一 )로 나눌 수 있다. 3) 아베 총리를 비롯하여 일본의 보수정치인들에 의해 주장되는 것으로, 그들은 역사 교과서 기술을 둘러싸고 新 しい 教 科 書 をつくる 会 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 고, 교과서 기술에서 위안부( 慰 安 婦 ) 문제를 삭제하려는 국민운동을 전개하기도 하 였다. 정치인들도 明 るい 日 本 国 会 議 員 連 盟 을 결성하여 일본의 자학사관을 비판 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의 일본의 동향은 정치 차원과 민간 차원에서 동시에 전 후의 역사관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다카하시 데쓰야, 임성모 옮김, 2009, 앞의 책, 104쪽 참조.

211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11 동안 집권 자민당의 보수정치인들이 한일관계에서 어떠한 역사인식을 가졌는 가?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냉전이 종식된 후 일본의 보수정치인들이 자국의 정체성과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면서 역사수정주의 노선을 선택하는 과 정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베 정부 등장 이후 우파 정치인들은 어떠한 역사인식을 하여 한일 간의 갈등을 유발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전후 질서 속에서 일본의 역사인식을 돌이켜 보면, 냉전이 시 작되면서 한일 양국은 안전보장과 경제성장이라는 두 가지 과제에만 집중한 결과 역사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로 다루었다. 그 결과 식민지 문제와 제2차 세 계대전에 대한 전쟁책임과 같은 역사 문제 는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였다. 그리 고 미완의 전후 질서가 형성되고 역사 문제는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논의 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국교정상화와 같은 외교행위로 봉합되었다. 그러나 역사 문제는 일본 정치가들의 망언 등으로 거듭 외교 문제가 되었 으며, 이것이 정치와 외교에 영향을 미쳐 사죄와 반성을 촉구하는 형태로 진행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상호의존 관계가 깊어지고 동시에 국가 간 우호적인 관계가 진전되면서도 역사 문제는 국가 간의 상호협력 관계를 약화 시키는 형태로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문제는 정치인 개인의 사과와 장관직 해임이라 는 형태로 마무리되기도 하였으나, 냉전이 종식되고 글로벌화가 진전되면서 일본 내에서는 신대국주의 4) 와 신자유주의 개혁 5) 과 함께 중요한 쟁점이 되었 다. 동시에 민주당의 정책실패로 자민당이 정권을 탈환하고, 아베 총리가 집권 하면서 역사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보다 보수 우익적인 경향으로 진행되었다. 4)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신대국주의 의 흐름은 전후 존재하였던 복고주의와는 달리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渡 辺 治, 2001, 日 本 の 大 国 化 とネオナショナリズムの 形 成, 桜 井 書 店, 139쪽 이하 참고. 90년대 이후 일본의 보수 우익 정치인들이 안전 보장면에서 새로운 우파의 정책 전환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참고로 1980년대부 터 일본의 내셔널리즘이 부활하기 시작하였으며, 두 가지 흐름에 따라 국가이념과 운동이 진행되었다. 鄭 敬 娥, 2011, 歴 史 認 識 をめぐる 日 韓 摩 擦 の 構 造 とその 変 容, 菅 英 輝 編, 東 アジアの 歴 史 摩 擦 と 和 解 可 能 性, 剴 風 社, 235~236쪽. 5) 渡 辺 修, 2013, 安 倍 政 権 と 日 本 政 治 の 新 段 階, 旬 報 社, 65 66쪽.

212 21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아베 정권 탄생 이후에도 일본 정치인들은 선거를 치르면서 포퓰리즘적인 입장에서 역사 문제를 왜곡하여 한일관계를 악화시켰다. 특히 하시모토 도루 [ 橋 下 徹 ]와 같은 선동적인 정치인은 모든 현상은 역사성이 있다. 또는 모든 나라가 전쟁에서 여성을 이용했다 는 주장을 하여 한일 간에 문제를 초래하였 으며, 정치인들이 망언하는 논리를 제공하였다. 비슷한 현상으로 혐한( 嫌 韓 ) 적인 서적이 증가하는 등 다른 국가에서 볼 수 없는 풍경들이 관찰되었다. 그 결과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점점 냉각되었다. 반면, 한국의 정치인들은 일본의 바람직한 역사인식이 모든 한일관계 정상화의 기본이라는 입장을 취하면서 일 본의 역사인식을 비판하였다. 즉 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한일관계의 현안들 은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바람직한 인식하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 장이다. Ⅱ. 문제인식과 선행연구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는 과거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행한 식민지 지배와 전쟁 범죄 행위를 둘러싸고 도덕적 법적책임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면서 제기되 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미국의 점령통치를 받으면서, 그리고 60 년대 일본의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완성되고 일본의 자립이 강조되기 시작하 면서 강한 국가 일본으로의 정체성, 그리고 냉전종식 이후 패권국가 미국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위치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논의되었다. 또한 잃어 버린 20년과 중국의 부상이라는 상황하에서 미래 일본을 둘러싼 논의가 진행 되면서 일본의 정체성 논의가 더욱 활발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의 역사 인식은 일본이 주변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과거사와 전쟁을 어떻게 인식하느 냐의 문제로 학술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었으며, 일본의 보수우익 정치인들은 약화되는 일본을 지키기 위하여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동시에 전후체제를 부정

213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13 하면서 바람직한 역사인식을 거부하고 있다. 그동안 진행된 선행연구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먼저, 일본의 보 수적인 시각 6) 의 연구로, 일본 전후사의 해방이라는 입장에서 러일전쟁부터 아 시아 태평양전쟁까지라고 표현한 시기를 다룬 호소야 유이치[ 細 谷 雄 一 ]의 역 사인식이란 무엇인가? 는 보수와 진보를 넘어선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 나 호소야의 시각은 보수진영의 논리를 아주 세련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한일 역사인식 문제를 연구한 기무라 칸[ 木 村 幹 ]의 일한 역사인식문제란 무 엇인가 가 있다. 둘째로, 리버럴한 시각에서 이루어진 연구 7) 로는 다카하시 데 쓰야[ 高 橋 哲 哉 ]의 역사인식 논쟁 이 있다. 데쓰야는 역사인식 문제를 총괄적 으로 다루면서, 동아시아 국가와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초국가적 역사인식의 가능성을 시험한 것으로 동아시아에 있어서 과거 극복을 하는 데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전후의 아시아관 속에서 역사인식을 비판하고 있 는 연구로는 와카미야 요시부미[ 若 宮 啓 文 ]가 있다. 그는 전후 70년 보수 정치 인들의 아시아관을 소개하면서 탈냉전 이후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의 역사인식 을 설명하였다. 또한 현재 일본의 우경화를 만들어 낸 원인을 분석한 연구로 나카노 고이치[ 中 野 晃 一 ]의 우경화하는 일본정치 가 있다. 마지막으로 국경 을 초월하여 역사인식을 공동연구하는 작업에 관한 연구로 8) 동북아역사재단 이 펴낸 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이 있다. 이 글 에서는 이러한 선행연구들의 분석을 참고하면서, 일본의 보수 정치인들의 역 사인식을 살펴보면서, 특히 일본의 역사인식의 중요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 泉 純 一 郞 ]와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을 분석할 것이다. 6) 細 谷 雄 一, 2015, 歴 史 認 識 とは 何 か 日 露 戦 争 からアジア 太 平 洋 戦 争 まで, 新 潮 選 書 ; 木 村 幹, 2014, 日 韓 歴 史 認 識 問 題 とは 何 か, ミネルヴァ 書 房. 7) 다카하시 데쓰야, 임성모 옮김, 2009, 앞의 책; 若 宮 啓 文, 2006, 앞의 책; 中 野 晃 一, 2015, 앞의 책; Lind Jennifer, 2008, Sorry States: Apologies in International Politics, Cornell University Press. 8) 동북아역사재단 편, 2010, 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 동북아역사재단.

214 21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Ⅲ. 냉전기 역사인식은 어떻게 다루어졌는가? 냉전기에 동아시아 질서에 있어서 역사 문제는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 냉전 기 한일 양국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공산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안전보장 정 책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미국은 역사 문제와 관련된 사항에 관해서 동아시아 국가들과 논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9) 과거 동북아 냉전질서는 두 가지 요소에 의하여 구성되었다. 첫째는 미소를 중심으로 한 팍스 루소 아메리카라고 명명 되어진 세계질서였다. 둘째로는 두 초강대국에 의해 유지되는 강력한 대결구 조의 국제정치의 전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냉전 초기부터 전쟁이 라는 형태를 거치면서 변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냉전기의 한일관계는 기능적인 명분보다는 실리 위주 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역사인식 문제는 정책 당국에는 관 심 밖의 문제였으며, 혹시 문제가 발생하면 대응하기에 급급하였다. 즉 냉전체 제는 안전보장을 중심으로 한일관계를 가깝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주로 기능주의적으로 안전보장과 경제협력 분야에서 이루어 졌다. 그러나 냉전체제 는 역사 문제에서 한국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부분적으로 부정적인 역할을 하 여 식민지 청산을 어렵게 만든 측면도 있었다. 그러므로 한일관계는 냉전체제 의 변화와 함께 망언 과 사죄 요구라는 역사 문제의 형태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냉전구조는 한일 간의 역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장애 요 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미소 간의 냉전은 군사적 경제적 이데올로기 적인 차원에서 대립하였기 때문이다. 냉전의 대립이 진행되는 가운데 서방 진 영 간의 관계 정상화가 우선 진행되었으며, 식민지 청산 문제는 첨예하게 대립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그 결과 한일관계 속에서 역사 갈등 문제는 외교 문제의 쟁점이 되지 못하였다. 9) Mike Mochizuki, 2011, 修 正 主 義,ナショナリズム,グローバリぜ ション, 東 ア ジアの 歴 史 摩 擦 と 和 解 可 能 性, 剴 風 社, 439쪽.

215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15 냉전기 역사 문제는 주로 과거에 대한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 일본교과서 검정 문제를 둘러싼 갈등, 그리고 일본 국내에서는 야스쿠니 관련 법안을 둘러 싼 대립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둘러싸고 일본은 항상 회피하려는 입장을 취하였다. 한일기본조약 에서도 과거청산 문제는 역사적 배경으로만 기록되는 등 문제점을 남기고 국교정상화 교섭이 진행되었다. 즉 역사 문제는 경제협력의 방식으로 부분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이렇게 역사 문제는 양국 간 교섭과정에서 배제되고 불완전한 국교정상화를 이루었다. 그 이후 양국은 이 따금씩 분출하는 역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모색 도 하였지만 처리되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시 냉전구조 속에서 역사 문제가 처리되려면 어떠한 조건과 노력이 필요 하였을까? 물론 한일 양국은 역사 문제가 양국 간의 중심과제가 되기를 원하 지 않았고, 그 영향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서로 갈등요인을 관리하고자 노력하 였다. 당시 양국 지도자들은 경제 문제와 안전보장 문제가 중요하였으므로 역 사 문제에서 발생하는 긴장관계는 관리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결과 국교정상화 교섭이 진행되었으며 1965년 국교정상화가 성립하였다. 이러한 한 일 간의 형태는 동아시아 냉전시스템 속에서 작동하면서 한일관계는 관리 대 상이 되었다. 10) 한국 정부는 역사 문제를 보류 상태로 하고 안전보장과 경제교류를 중심으 로 국가운영을 진행하였으나, 한국이 민주화되면서 그동안 보류상태에 있던 역 사 문제가 점점 목소리를 내게 되었고 정체성의 새로운 정의를 시작하였다. 이 러한 상황이 진행되면서 한일 양국은 기능적인 접근을 통하여 11) 역사 문제를 다 루었으나 1982년 교과서 문제 등으로 한일 양국의 갈등이 재현되기도 하였다. 일본의 역사왜곡으로 한국에서 반일 내셔널리즘이 강하게 나타나자, 일본 10) Christopher W.Hughes, 2011, 修 正 主 義,ナショナリズム,グローバリぜ ショ ン, 東 アジアの 歴 史 摩 擦 と 和 解 可 能 性, 剴 風 社, 163쪽; Victor D.Cha, 1999, Alignment Despite Antagonism: The United States Korea Japan Security Trian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11) Christopher W.Hughes, 2011, 위의 글, 164쪽

216 21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에서는 80년대부터 망언 이 분출 12) 하기도 하였다. 당시 자민당의 우파는 친한 파로 반공을 중시하면서 한일협력을 진행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과거의 역사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었다. 13) 1982년 제1차 교과서 문제에서 일본은 대외침략을 진출 로 표시하고, 3 1운동을 폭동 이라고 서술하여 한국 과 중국의 비판을 받았다. 14) 그러자 일본은 내정간섭 이라는 논리로 대응하는 등, 과거의 역사에 대한 인식 문제가 한일 간에 표면화되었다. 또 하나의 사건 으로는 1986년 9월 당시 문부대신이었던 후지오 마사유키[ 藤 尾 正 行 ]가 월간 잡지에 한일강제병합은 합의하에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고 한국에도 책임이 있다 고 기고하여 문제를 일으켰던 15) 제2차 교과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나카 소네 야스히로[ 中 曾 根 康 弘 ] 총리가 야스쿠니신사 참배 후 중국으로부터 비판 을 받고, 자신의 방침을 전환시키려고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으며, 의식적인 자민당 우파의 반발이었다. 이처럼 나카소네 정권에서도 일본의 강경파 정치 인들은 한국의 감정을 자극하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자신들의 정당화를 계속 주장하였다. 그 이후 호소카와 모리히로[ 細 川 護 熙 ] 총리가 취임한 이후 1993 년 10월 이시하라 신타로[ 石 原 慎 太 郎 ]도 전쟁에 대해 일본이 사과할 필요가 없다 고 주장하는 등 자민당의 우파 가운데 반미파들은 반한적인 논리구조로 한국인의 감정을 건드렸다. 일본의 국내정치는 50년부터 70년대까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자신감을 얻기 시작하자, 일본의 국가 내셔널리즘을 강화하는 환경을 만들어 갔다. 그리고 80년대 나카소네 정권에 이르러, 국제적으로 신자유주의의 흐름 과 함께 일본은 대국화 논의를 활발하게 진행하면서 역사왜곡을 강화해 나갔 음을 확인할 수 있다. 12) 박진우, 2013, 야스쿠니 문제의 논리적 비판을 위해서, 동북아역사재단 편, 일 본아베정권의 역사인식과 한일관계, 87쪽. 13) 若 宮 啓 文, 2006, 앞의 책, 206쪽. 14)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군국주의 대두의 증거라고 보기도 하였다. 木 村 幹, 2014, 앞의 책. 15) 若 宮 啓 文, 2006, 앞의 책, 쪽.

217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년대 이후 일본의 역사인식은 역사교과서 논쟁 등을 통하여 왜곡된 역 사인식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특히 교과서 논쟁이 정치 문제화하면서 일본 정 부는 근린제국조항 을 추가하였다. 그리고 역사교과서에서 전시 가해 관련 내 용이 기술되면서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동안 침묵하였 던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피해자들이 큰 목소리를 내면서 전후보상에 대한 요 구도 높아졌다. 16) 그리고 위안부 문제도 80년대부터 한국의 시민운동단체들에 의해 문제 제 기 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 시대에 발생한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왜곡된 역사 인식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여성 문제라는 시각에서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이 러한 문제의식은 한일 양국에 새로운 역사인식을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 시 일본의 나카소네 정부는 이웃국가들의 역사교과서에서 보이는 역사관을 수 용하는 방향으로 다가섰다. 한국은 일본의 사회당과 함께 역사인식 문제로 협 력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하였고, 일본의 자민당과는 갈등관계를 유지하였다. 일본의 사회당은 식민지 지배 청산과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을 일본 국회에서 제기하면서 17) 한국과의 관계개선 노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도 하였다. Ⅳ. 냉전종식과 일본의 역사인식 탈냉전 후 동북아 질서는 냉전기의 엄격한 구조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 면서 미중일 3국관계가 새롭게 전개되었다. 또한 세계에서 유일한 패권국이 된 미국은 새롭게 등장하는 중국의 대두 속에서 동북아시아 지역에 어떠한 형 태로 관여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정책의 변화를 모색하였다. 그리고 그 이외 16) 다카하시 데쓰야, 2009, 앞의 책, 쪽. 17) 木 村 幹, 2014, 앞의 책, 144쪽.

218 21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국가들은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18)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냉전종식과 함께 자국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동 시에 강대국화의 전략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미국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였다.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일본의 위치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그리고 대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이러한 일본의 문제인식은 기 본적으로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과거 제국주의 침략성을 사과하지 않으면서 대국화를 이루려는 구상을 하였다. 19) 특히 자민당 우파에 속하는 보수주의 정치인들의 입장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새로운 대국주 의를 주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의 보수정치인들은 침략전쟁, 식민지에 대 한 사과 등을 둘러싸고 충분한 사과와 행동을 하지 않고 오히려 역사왜곡을 하 면서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하였다. 일본 정치인들의 이러한 움직임과 관련하여 외국의 언론과 일본 국내, 그 리고 한국의 언론들은 과거보다 일본의 우경화 에 대하여 많은 비판을 가했다. 특히 일본의 안전보장과 역사인식 두 분야와 관련하여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되었고 먼저, 안전보장 문제에서 보면 일본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는 측면에서 우파적이고 군비확장을 중심으로 하는 안보정책을 채택하고 있 다고 염려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는 과거의 침략전쟁에 대해 조 금은 반성하면서, 새로운 대국으로서의 행동과 과거를 구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분석하였다. 1_ 역사왜곡과 망언 전후 일본 정치인들의 역사인식은 1995년 이전까지 망언 이라는 표현으로 널 리 표면화되었다. 당시 정치인들은 일본 국내 정치에서 자민당의 거물들로 자 신의 의정활동에서 어느 정도 경륜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인사들이었으나 18) 로버트 케이건, 황성돈 옮김, 2015, 돌아온 역사와 깨진 꿈, 아산정책연구원. 19) 渡 辺 治, 2001, 앞의 책, 142쪽.

219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19 과거의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관한 종합적인 지식에서는 이웃국가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세 가지 형태의 망언으로 전개되면서, 20) 한국 국내에서 비 판의 대상이 되었다. 먼저, 그들은 아시아 해방사관 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국 회결의가 있을 경우 표결 반대쪽에서 문제의 발언을 계속하였다. 대표적인 인 물은 자민당 우파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오쿠노 세이스케[ 奥 野 誠 亮 ]였 다. 그리고 법무대신이었던 나가노 시게토[ 永 野 茂 門 ]는 난징대학살의 날조론 을 주장한 인물로 오쿠노 보다 더욱 심각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이 러한 연장선에서 사쿠라이 신[ 桜 井 新 ]은 일본은 침략전쟁을 하려고 싸운 것 은 아니다. 아시아는 일본 덕에 유럽지배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여 아시 아에 경제부흥의 기세가 생겨났다 고 문제적인 발언을 하여 경질되었다. 그리고 한일병합이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는 식의 망언 형태다. 식민지 지 배 와 침략 이라는 문구를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싸고 국회에서 공방이 오가던 중, 와타나베 미치오[ 渡 辺 美 智 雄 ]는 일한병합은 원만하게 이루어진 국제적 조약 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국회에서 식민지 지배 와 침략 이라는 문구를 넣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언은 한국의 심각한 반발에 직면 하였다. 마지막으로, 일본이 좋은 것도 했다 는 망언 형태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 村 山 富 市 ]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를 준비하는 중에, 에토 다카미[ 江 藤 隆 美 ]는 총리의 발언이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식민지시대에 일본이 좋은 것도 하였 다 고 주장하여 한국을 자극하였다. 당시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였을까? 한일국교정상화를 진행하는 과정에 서 나타난 일본 외교관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 정부와 의회 그 리고 여론은 전전 일본의 아시아관 21) 과 비슷한 인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20) 若 宮 啓 文, 2006, 앞의 책, 쪽. 21) 일본의 아시아관은 대체로 대일본주의와 소일본주의로 나누어 설명이 가능하다.

220 22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2_ 우경화 하는 일본 그들이 주장하는 망언은 기본적으로 전전 일본의 지도자들이 주장한 것과 비 슷하였다. 전후 50년이 되는 해인 1995년을 맞이하면서 일본 정치인들에게서 다수의 망언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일본 정치인들이 바라보는 아시아관 과 과 거사에 관한 부분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즉 사죄와 망언이 당시 한일관계 를 긴장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당시 3당 합의로 무라야마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 를 채택하면서 담화의 중 심 내용인 과거의 침략, 식민지 지배, 통절한 반성 과 진심으로 사과 문제를 둘러싸고 자민당 우파 정치인들과 우익들의 저항이 강해졌다. 22) 자민당 우파 정치인들은 우익적인 활동을 강화하면서 내셔널리즘을 고양하고, 역사교과서 를 둘러싼 새역모 등이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예를 들면, 무라야마 정 권의 통산장관이었던 하시모토 류타로[ 橋 本 龍 太 郎 ]는 아시아 국가들을 상대 로 침략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는 등의 발언을 하면서 아시아 침략의 역사 를 왜곡하려고 하였다. 하시모토 역시 자민당 소속의 매파 국회의원으로 당시 진행되던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강화하는 측에 속했다. 다음으로 와타나베는 강 제병합이 국제적으로 합법적이라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 이라고 주장하여 한국 정부와 여론이 도발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22) 당시 무라야마 정권은 전후 50년 결의를 채택하려고 하였지만, 사죄결의에 반대하 는 세력들이 존재하여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특히 오쿠노 등은 일본이 아시 아를 해방시켰다는 논리를 거듭 주장하며 무라야마 정권에 저항하였다.

221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21 Ⅴ. 고이즈미 총리의 역사인식과 한일관계 탈냉전 후 일본은 미일관계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냉전기처럼 순응하는 외교 정책을 전개하면서 어떻게 국익추구와 경제발전을 함께 이룩할 수 있을 것인 가? 혹은 동아시아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보통국가 내지 국제국가 혹은 문민국가 로 자신들이 직접 국제질서 형성에 관여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탈냉전기 일본은 이러한 의문점을 가지고 국제환경의 변화를 지 켜보면서 자신들의 역할을 모색하였다. 물론 일본은 자국의 안전보장 확보, 국 제적인 영향력 행사의 증대, 국제질서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려 하였으나 주변국으로부터 신뢰가 결여된 상태에서 일본의 구상은 많은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하여 일본 경 제계의 동아시아 전략과 주변 국가들과 함께 공동체 구축을 실시하려는 구상 을 하고 있었다.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일본의 경제단체는 일본기업의 동아 시아 진출을 통한 동아시아 경제권을 구축하여 거점지역으로 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구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고이즈미 총리의 외교정책 이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진정한 동반자가 되어 야 했다. 이러한 구상이 이루어지면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면 서 경제공동체를 통한 경제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 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당선 전부터 공약사항으로 한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로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과 관계정상화는 멀어지게 되었다. 한국과 중국 의 비판을 받으면서 일본이 구상하던 동아시아 지역질서 구축이라는 구상은 점점 멀어져갔다. 그리고 일본의 경제계는 이러한 영향으로 경제교류가 후퇴 하면서 위기감을 갖게 되었으며 미국과 유럽과 같은 국가들과의 경쟁에서도 뒤쳐지게 되었다.

222 22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당시 일본은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예를 들면 오부치 게이조[ 小 淵 恵 三 ] 전 총리가 주장한 21세기 일본의 구상 을 살펴보면, 21세기 일본은 열린 국익을 추구하는 글로벌 시빌리언 파워 국가로 국제사회에서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인간의 안전보장과 국제적인 공익을 고려하면서 종합적이고 중층적인 안전보 장을 확보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 여,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들과 협력관계를 강화하여야 한다고 강조되었으나, 고이즈미 정권은 주변국과의 신뢰구축보다는 국가의 정체성 강화정책을 실시 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 23) 고이즈미의 등장은 일본의 대국화를 가속화하면서 동시에 군사대국화 단 계로 진입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대국화의 내용은 전후 일본이 경험한 것 에서부터 나온 교훈이었다. 첫 번째는 미국으로부터 가해지는 압력으로 대국 화 문제였다. 냉전종식 이후 세계 여러 지역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지면서 새 로운 전략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제의 글로벌화 확대로 일본기 업이 해외에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리고 군사대 국화는 미일안전보장을 재정의하면서 분쟁지역에서 일본의 역할을 강화는 것 이었다. 24) 이러한 대국화와 군사대국화가 요구되는 상황하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역 사인식은 보수를 넘어 우익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 고이즈미 정권의 목표는 일본의 국가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대국화를 가속화하고 동시에 군사대국화 를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고이즈미는 2006년 8월 15일 야스쿠니신사를 공식방 문하였다. 일본의 전쟁 패전일에 총리가 방문한 것은 21년 만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선거공약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일본 내셔널리즘의 복권 을 알리는 것이었다. 25) 이러한 그의 활동은 이미 총리에 당선되기 전부터 계산 된 행동이었다. 물론 그가 계산된 행동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두 가지 가설 23) 고이즈미 정권하의 우경화 문제는 김영춘, 2005, 일본의 보수우경화와 국가안보 전략, 서울: 통일연구원, 43쪽. 24) 渡 辺 修, 2013, 앞의 책, 77 78쪽. 25) 若 宮 啓 文, 2006, 앞의 책, 14쪽.

223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23 이 제기되었다. 먼저, 나카소네보다 더 훌륭한 총리로 일본역사에 남으려고 하 였다는 것이다. 그의 노력은 미일관계의 강화와 우정민영화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으로 충분이 역사에 남을 수 있었으나, 주변 국가와의 관계에서 특히 한국과 중국과 갈등을 남기면서, 고이즈미는 과거의 침략성이나 식민지 문제와 같은 역사인식 문제에서 많은 한계를 보였다. 다음으로 그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통하여 획기적인 외교를 전개하려고 하였을지 모른다. 그는 식민 지 문제와 관련하여 계속 사과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한국의 이해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26) 그러나 그의 역사인식과 행동은 거듭되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인해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고이즈미 총리의 역사관을 두 가지로 정리하면, 먼저, 그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라는 형태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한 정치인이었 다. 즉 야스쿠니와 관련된 역사인식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한일 간의 역사갈등 을 유발시켰다. 그는 일본에서 야스쿠니 문제가 논의되는 촉매 역할을 하였 다. 27) 그리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무시하는 인식을 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 는 물론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도쿄재판 부정론의 입장에 서는 등 관련 국가들 이 이해할 수 없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이즈미의 행동은 한국 과 중국에서 반일의 움직임을 초래하였고, 그동안 자민당 보수파들이 전개한 역사관련 정책들은 악순환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 국내에서 구조개혁 이라는 이름하에 개혁을 단행하여 자민당의 구세력을 약화시키면서, 28) 이웃국 가들에게는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는 퇴행적인 행동을 하였다. 고이즈미 정권기 동안 한일 간 세 가지의 역사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하나 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 의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것이 다. 새역모의 교과서는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아시아 국가들과 26) 若 宮 啓 文, 2006, 앞의 책, 18~19쪽. 27) Sheila A. Smith, 2015, Intimate rivals, Columbia University Press, p ) 고이즈미는 다나카 가쿠에이[ 田 中 角 栄 ], 오히라 마사요시[ 大 平 正 芳 ] 전 총리 등 구 우파들이 추진한 아시아 화해정책에 반하는 정책을 전개하면서 자민당 내 새로 운 복고주의적인 국가주의 그룹들이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24 22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의 화해에 부정적이었다. 특히 위안부 기술을 삭제하는 등 일본의 애국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였다. 고 이즈미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고집하여 결국에는 한일관계와 중일관계를 단 절시켰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고이즈미는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부분적으로 이 용하여 총리에 당선된 지도자였다. 과거 나카소네와는 달리 야스쿠니신사 참 배 문제를 철저히 이용하여 국내 정치에서 인기를 얻었다. 그는 자민당 총재선 거 전부터 지란[ 知 覽 ]특공대박물관을 방문하여 일본 유족회의 지지를 얻어 총 리가 되었다. 그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는 일본의 전쟁관을 긍정하는 것으 로, 단순히 아시아만이 아니라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남겼다. 이 러한 문제는 한일 간의 외교 문제이면서 동시에 정치 문제가 되어 갈등을 촉발 시켰다.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와 역사인식의 실패로 동아 시아 외교의 재건과 동아시아 질서구축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전혀 진척시키지 못하고 물러났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스스로 커다란 약화를 초래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 재계의 불만도 점점 더해졌다. 마지막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이 어렵게 되었다. 위안부의 설치 모집 관리에 일본군이 관여하였다는 문제가 자료로 밝혀지면서 정치 문제로 이어졌고 소송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서 일본의 우파들은 위안부 문제를 비판하면서 우파언론과 정치인들을 옹호하 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제1차 아베 내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29) 고이즈미 정권기에는 일본의 역사인식이 잘못되면 될수록, 아시아 외교는 경색되는 현상이 계속되었고, 결국 일본은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아시아 의 통합보다는 분열을 부추기는 외교를 전개하였다. 고이즈미 총리의 계속되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황 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총리 취임과 동시에 야스쿠니신사를 공식참배하여 자 신의 역사인식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 검정결과가 오류 와 역사왜곡이 있어 한국은 일본에 수정을 요구하였다. 특히 새역모가 만든 교 과서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이 없음을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하였으나 고 29) 若 宮 啓 文, 2014, 앞의 책, 쪽.

225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25 이즈미 총리는 검정 후 재수정은 없다 고 말하여 한일관계 교류가 일시적으로 중단하게 되었다. 30) 고이즈미 총리는 한중 양국과 국제적인 비판을 받아가면서도 야스쿠니신 사 참배를 계속하며 완강한 고집을 부렸다. 그의 행동으로 한일관계는 점점 악 화되었다. 그는 재임기간 옛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여 김대중 대통령과 한일 정상회담을 갖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 대해 많은 손해와 고통 을 준 것에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하는 마음으로 시설을 참배하였다 고 의견 을 피력하였다. 그는 한일정상회담을 가지면서 위와 같은 역사인식을 보였으 며 한일 간의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겠다고 강조하는 등 김대중 대통령 과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비판받는 모습도 보여 주 면서, 한일 간의 관계 악화를 초래하였다. 2003년에 접어들자 마자 고이즈미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여 한국 정부 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 그는 10월 8일 기자단에게 앞으로도 계속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겠다는 생각을 명확히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방일하여 한일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한일 양국이 과거의 역사를 직시하고 21세기 미래지향적 인 발전을 위해 전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공동발표를 하였다. 그 이후 한일 양국은 교류를 확대하면서 양국관계를 강화하여 나갔다. 그러나 2005년 2월 일본의 시마네 현이 죽도의 날 을 제정하는 조례를 제 안하면서 한일관계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6월 20일 한일정상회담에서 는 역사 문제가 초점이 되고, 노무현 대통령은 야스쿠니신사 문제가 핵심이 며,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 어떤 설명을 하더라도 역시 과거를 정당 화하는 것으로 이해되므로 거듭 그만두기를 바란다 는 취지로 설명하였다. 반 면 고이즈미 총리는 의견의 차이가 있어도 대국적인 견지로부터 양국관계를 원래의 궤도로 돌리고 미래지향적으로 진행하고 싶다 31) 고 말하였지만, 한일 양국의 입장 차이는 계속되었고, 결국은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둘러싼 일본의 30) 内 山 融, 2007, 앞의 책, 136쪽. 31) 内 山 融, 2007, 위의 책, 146쪽.

226 22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잘못된 역사인식으로 인해 한일관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경제관계는 희생 되었다. Ⅵ. 아베 정권의 역사인식 아베 총리는 경제와 안전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 을 궁극 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그를 포함한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논점은 일본 평화헌법 9조 등 일본의 자학사관을 수정하는 데 있다. 그리고 역사수정주의 자들은 일본인들이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도록 형태를 취하고,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논리를 집단적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그 결과 일본 이 침략국이고 반주권 국가라는 사실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 32) 를 보이 고 있다. 아베의 등장이나 일본 내셔널리즘이 격화하는 것은 어쩌면 고이즈미 정권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33) 아베 정권의 등장은 한일 간 역사전쟁의 시작이라고 염려되었다. 1_ 아베 정권의 성격과 사상 일반적으로 아베 정권의 성격에 대한 세 가지의 설명이 있다. 34) 먼저, 아베 정 권은 복고적이며 강경파 정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헌법 개정이나 교 육기본법 개정 등을 부르짖으며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 32) 菅 英 輝 編, 2011, 앞의 책, 168쪽. 33) 若 宮 啓 文,2014, 앞의 책, 17쪽. 34) 渡 辺 治, 2007, 安 倍 政 権 論 : 新 自 由 主 義 から 新 保 守 主 義 へ, 旬 報 社, 17 21쪽.

227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27 이 있다. 이에 대해 리버럴한 전문가들은 아베 정권의 위험성을 주장하며 위기 감을 표현하며 아베는 위험한 정치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아베를 중심 으로 시모무라 하쿠분[ 下 村 博 文 ], 야마타니 에리코[ 山 谷 えり 子 ] 등 우파 정치 인들이 포진하고 있는 점을 강조하면서, 향후 일본의 대아시아 외교와 교육재 생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다음으로,아베 정권은 전후체제로부터 탈각하려는 정권이라는 것이다. 앞의 성격과는 대조적인 것으로 아베 정권이 주장하는 정책들을 지지하면서, 일본의 보수정치를 변화시키려는 입장으로 나카니시 테루마사[ 中 西 輝 政 ] 등 정론( 正 論 ) 과 쇼군[ 諸 君 ] 의 많은 논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들은 특히 중 국의 침투공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강한 일본을 만들어야 하고, 무라야마 담 화의 수정과 근린제국조항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들의 논리는 헌법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고, 해석개헌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도 인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아베 정권은 약체 정권이라는 것이다. 아베 정권을 지지하는 그룹이 다양하므로 결국 정권의 수명은 단명할 것이라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지도력이 부족하여 우익들의 언설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인사에 있어서도 논 공행상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1차, 2차 아베 정부 인사 들의 면면을 보면 여러 파벌들 위에 총리가 존재하는 형태를 보였다. 이상과 같은 정권의 성격을 고려하면서, 아베 총리의 정치적 사상을 세 가 지로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아베 총리는 전후 내셔널리즘으로부터 벗어나기 를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전전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역사적인 반성을 하지 않는 것이다. 35) 과거 자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岸 信 介 ]의 내셔널리즘은 아시아주의 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반미국적 반식민지주 의 그리고 아시아 해방을 주장하며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 이 러한 내셔널리즘의 대표로는 나카소네 전 총리가 있고, 그는 전후 일본에서 어 떻게 민족주의를 재건하고 일반국민에게 침투시킬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35) 渡 辺 治, 2007, 앞의 책, 208쪽.

228 22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그러나 아베의 내셔널리즘은 그것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베의 내 셔널리즘은 글로벌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폐해들은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글로벌화와 신자유주의 개혁에 친화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둘째로, 아베는 신보수주의적인 주장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일본의 전통, 가족, 국가재건론을 주장한다. 글로벌화하는 세계의 흐름에 반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교육기본법이 추구하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이를 초래 한 유도리 교육 과 같은 것을 개혁하여 어린이들에게 규율과 도덕을 가르쳐 국 가발전에 기여하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베의 주장은 전후 일본의 경제 성장으로 인해 일본사회의 가치관이 붕괴되고 사회가 약화되었기 때문에 이러 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베 총리는 전통적인 공동체를 유지하고 개건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36) 셋째로, 아베 총리는 새로운 국가주의 사상을 주장하고 있다. 자신의 저서 에서 아름다운 나라 일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기본법 개정, 개헌절차법 제 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전후로부터 일본이 새로운 자주를 하여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지금까지 일본은 아름다운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닌가, 무엇이 아름다운 나라인가를 정의할 필요가 있 다는 반론도 있다. 2_ 역사인식의 후퇴 일반적으로 역사 문제에 대한 인식은 경험과 학습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아베 총리는 역사인식에 있어서 왜 우익적인 사고를 가졌을까? 가문의 영향으로부 터 혹은 우익적인 인사들로부터 학습된 결과인가? 물론 두 가지 모두 해당될 것이다. 그의 정치활동을 보면 그의 역사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아 베 총리는 호소카와 전 총리의 침략전쟁 인식에 대한 반대운동에 참가하였고, 36) 渡 辺 治, 2007, 앞의 책, 212쪽.

229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29 이어서 자민당의 야스쿠니 관계 검토위원회 에 참가 37) 하면서부터 역사 문제에 대한 인식은 편향적으로 되었다. 그리고 무라야마 정권 성립과 동시에, 일본 국회에 종전 50주년 국회의원 연맹 이 결성되자 아베 총리는 사무국 차장을 맡으며 연맹의 간부가 되었다. 당시 연맹의 취지서는 전쟁을 긍정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전후 처리가 끝났음 을 강조하고 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국회의 결의를 용인하지 않는 입장을 취 하였다. 38) 그러나 1995년 6월 9일 중의원에서 자민당, 사회당, 사키가케 3당의 지지로 역사를 교훈으로 평화에 대한 결의를 명확히 하는 결의 39) 를 채택한 후, 일본에서 다수의 합의로 인식되었고 일본 정부의 기본인식이 되었다. 그러 나 1996년 위안부 문제가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기술되자, 연맹의 간부들 은 밝은 일본 국회의원 연맹 을 결성하고 기술의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 고 일본의 미래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 을 통해 교과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보면, 고이즈미 정부 이후 등장한 역사수정주의자들이 자 국중심적인 역사인식을 하면서 한국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우경화 활동이 계속되자 한국과 중국에서도 내셔널리즘이 강화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40) 2002년 9월 고이즈미 전 총리의 평양 방문 이후 일본여론은 납치 문제로 우경화해가기 시작하였으며, 배외주의가 강하게 진행되는 상황이 전개되었지 만 일본의 진보진영은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에서 새로운 37) 和 田 春 樹, 2006, 安 倍 晋 三 氏 の 歴 史 認 識 を 問 う, 世 界 10월호. 38) 和 田 春 樹, 2006, 위의 글. 39) 이 결의에서 일본도 침략적 행위, 식민지 지배로 아시아 여러 국민에게 고통을 가 하였다고 인식하고, 깊은 반성을 표명하였으나, 연맹의 오쿠노 의원 등은 기자회 견을 열고 결의안 반대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和 田 春 樹, 2006, 위의 글. 무라야마 담화는 그 이후 하시모토, 오부치, 모리 요시로[ 森 喜 郞 ], 고이즈미 총리에 의해 견 지되었다. 40) 진창수, 2013, 일본정치권의 변화와 아베정권의 역사인식, 도시환 박진우 편, 일본 아베정권의 역사인식과 한일관계, 동북아역사재단; 이면우, 2014, 일본정 계의 우익 성향 강화와 동북아, 세종연구소.

230 23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형태의 민족주의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염려된다. 즉 보통국가 론의 등장과 전후 정치 총결산 등을 통하여 일본의 역사를 수정하겠 다는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점점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3국은 역사교과서 문제, 도쿄재판,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 등과 같은 이슈에 서로 민감하여, 잘못된 일본의 역사인식에는 서로 강한 비판을 가 하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문제들은 글로벌화의 진전으로 국제사회가 규범과 가치를 중시하기 시작하자 국제적인 이슈가 되고 시민단체들의 국제적인 연대 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색도 나타났다. 탈냉전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일본과의 관계가 수직적인 관계에서 수평적인 관계로 변화하면서 일본의 우익들은 가해 의 기억 을 말살하려는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한국과 중국을 자극하여 대항하는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은 도덕성을 강조하면서 일본의 역사 에 대한 반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일본은 과거에 대한 반성, 전쟁책임에 대한 반성보다는 주기적으로 망언을 행하기도 하고, 새로운 역사교과서 집필과 같 은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선택함으로써 동아시아 각국들과의 역사인식 공유 의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 Ⅶ. 맺음말 일본의 역사인식과 우경화 에 대해서는 주로 한국언론이나 외국의 언론이 많 은 비판을 하였고, 일본 국내에서는 안전보장과 역사인식 두 분야 중에서 주로 안전보장을 강화하기 위한 환경관련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대 조적인 모습은, 아베 정부는 안전보장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보 여주고 있다. 즉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우파적이고 군비확장을 중심으로 하는 안보정책을 전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한편 역사인식의 측면에서 아베 정부는 반일하는 주변 국가들의 환경변화에 과거보다 우파적인 대응을

231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31 하는 경향을 많이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많이 이야기된 교과서 문제 등을 보더라도, 과거 시민운동 차원에서 전개되던 리버럴한 분위기로부 터 그들은 학습하면서, 냉전이 종식되면서 가치관의 흔들림 현상이 보이자, 포 퓰리즘적인 츠쿠루카이[つくる 会 ] 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보수운동의 하나의 형태로 교과서 채택운동을 전개하였다. 현재 일본은 보수연합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역 사 문제에서는 국가주의적인 사관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역사관을 확대해 나가 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 이후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된 일본의 전통으로 회귀하 려는 현상은 현실정치나 동북아 국제정치에서 강한 국가 일본의 정책들을 수 행하는 데 기초가 되고 있다. 이처럼 일본이 진행하는 역사수정주의의 흐름은 향후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에 긍정적인 역할보다는 지역통합이나 공동체 형성 에 장애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일본에서 야당이나 리버럴한 그룹들이 대안을 찾지 못한다면 현재와 같은 소선거구제와 같은 구조에서는 별다른 선 택지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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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33 若 宮 啓 文, 2006, 和 解 とナショナリズム: 新 版 戦 後 保 守 のアジア 観, 朝 日 新 聞 社. 若 宮 啓 文, 2006, 和 解 とナショナリズム, 朝 日 新 聞 社. 鄭 敬 娥, 2011, 歴 史 認 識 をめぐる 日 韓 摩 擦 の 構 造 とその 変 容, 菅 英 輝 編, 東 アジ アの 歴 史 摩 擦 と 和 解 可 能 性, 剴 風 社. 中 野 晃 一, 2015, 右 傾 化 する 日 本 政 治, 岩 波 書 店. 和 田 春 樹, 2006, 安 倍 晋 三 氏 の 歴 史 認 識 を 問 う, 世 界 10월호. Gilbert man edt, 2010, U.S. Leadership, History, and Bilateral Relations in Northeast Asia, Cambridge University. Lind Jennifer, 2008, Sorry States: Apologies in International Politics, Cornell University Press. Sheila A. Smith, 2015, Intimate rivals, Columbia University Press. Victor D.Cha, 1999, Alignment Despite Antagonism: The United States Korea Japan Security Trian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234 23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국문 초록]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이종국 이 글은 일본정치인들이 전후 역사인식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설명하였다. 첫 번째로, 냉전기 역사인식 문제는 과거에 대한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 일본교과 서 검정 문제를 둘러싼 갈등, 그리고 일본 국내에서 야스쿠니신사 관련 법안을 둘러싼 대립이 그 내용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둘러싸고 일본은 항상 회피하려 는 입장을 취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두 번째로, 냉전종식 이후 일본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강대국화의 전략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문제인식은 기본적으 로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과거 제국주의 침략성을 사과하 지 않으면서 대국화의 구상을 하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세 번째로,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하 여 일본 경제계의 동아시아 전략과 주변 국가들과 함께 공동체 구축을 실시하 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구상은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로 인해 한국과 중국의 비판을 받으면서 동아시아 지역질서 구축이라는 일본의 초기 구상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마지막으로, 아베 총리는 경제와 안전보장을 강화하면서 전후체제로 부터 의 탈각 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일본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는 형태를 취했고,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 는 논리를 집단적으로 기억하려 한다고 설명하였다. 주제어 우경화, 망언, 역사수정주의, 한일관계, 아베 역사인식

235 일본 보수정치인들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전개 235 [ABSTRACT] The Historical Perceptions of Conservatives in Japan and the Development of History Lee Jongguk This article describes how Japanese politicians comprehend postwar history. First, the historical perception problem for the Cold War period includes the remarks of Japanese politicians regarding the past, the conflict surrounding the Japanese textbooks issue, and legislation related to Yasukuni Shrine. Japan has always avoided taking a stance with respect to those issues. Second, after the end of the Cold War, Japan started pursuing the super power strategy for strengthening the country s identity. This is closely related to Japanese nationalism. But Japan has dreamed of becoming a superpower without apologizing for the imperialist invasion. Third, former Prime Minister Koizumi Junichirō planned to forge an East Asian community with neighboring countries in order to exert leadership in East Asia. But his conception has disappeared under criticism from China and South Korea regarding the Yasukuni Shrine issue. Finally, Abe Shinzō has focused on riddance from the postwar system, and upon strengthening national security and enhancing economic growth. As a result, historical revisionists in Japan have taken a stance remembering collectively their history.

236 23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Keywords conservative swing, ludicrous statements, historical revisionism, Korea Japan relationship, Abe Shinzō s historical recognition

237 중국의 최근 부여사 연구현황과 동향 237 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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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중국의 최근 부여사 연구현황과 동향 239 중국의 최근 부여사 연구현황과 동향 楊 軍, 夫 餘 史 硏 究 ( 蘭 州 大 學 出 版 社, 2012)와 范 恩 實, 夫 餘 興 亡 史 ( 社 會 科 學 文 獻 出 版 社, 2013) 이종수 / 단국대학교 역사학과 부교수 Ⅰ. 머리말 부여는 쑹넌평원[ 松 嫩 平 原 ] 일대를 중심으로 늦어도 기원전 2세기경에 건립되 어 5세기(494년)까지 700여 년을 존속한 초기국가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스스 로 부여를 그들의 출자로 인식하였고, 발해 역시 부여 계승의식을 표방하고 있 다는 점에서 부여가 고조선과 더불어 한민족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한국 고대사에서 부여가 차지하는 비 중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문헌과 고고학 자료의 부족이라는 한계 로 인해 그 연구성과 역시 초보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부여사 연구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다. 부여는 역사적으로 한국사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지만, 경역 범위는 현재 중국의 영토 범위 내에 속해 있어 부여를 바라보는 시각은 한 중 간에 명확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은 역사주권론, 즉 역사 정통성 계승론에 입각해 부 여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영토주권을 앞세운 다민족

240 24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통일국가론에 입각해 부여를 자국의 소수민족사 중에 하나로 파악하고 있다. 즉 중국의 부여 인식은 부여는 고대 중국 동북지역의 일개 소수민족이 건립한 중원왕조에 속한 지방노예제 정권 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며, 이 인식을 기본 전제로 하여 모든 부여 관련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특히 부여는 동북지역 소수민족 중 처음으로 정권을 수립하였기 때문에 동북지역의 소수민족사를 중원왕조사에 편입시키려는 중국 측 입장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연구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로 인해 최근에 중국 학계에서도 부여 와 관련된 연구가 대폭 증가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가장 최근에 중국에서 간 행된 양쥔[ 楊 軍 ]의 부여사연구( 夫 餘 史 硏 究 ) 와 판언스[ 范 恩 實 ]의 부여흥망 사( 夫 餘 興 亡 史 ) 에 대한 서평을 통해 최근 중국의 부여사 연구동향을 살펴보 고자 한다. Ⅱ. 기존의 부여사 연구현황 근대 학문 개념에서의 부여사 연구는 일본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일본이 만 주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사전 조치의 하나로 문화유적 조사와 더불어 관련 연 구가 진행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케후치 히로시[ 池 內 宏 ], 시마다 코우[ 島 田 好 ], 시라토리 구라키치[ 白 鳥 庫 吉 ], 히노 가이자부로[ 日 野 開 三 郞 ] 등에 의해 몇 편의 부여 관련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차오이앤지에[ 曹 延 杰 ], 딩정 [ 丁 謙 ], 진위푸[ 金 毓 黻 ] 등의 중국인 학자들에 의해서도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당시의 연구는 부여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문헌 고증이 대부분이었다. 1940년 대에는 리원신[ 李 文 信 ] 등이 처음으로 지린시[ 吉 林 市 ] 롱투안산[ 龍 潭 山 ]과 동 투안산[ 東 團 山 ] 일대의 유적을 조사한 보고서를 학계에 발표하였는데, 당시에 는 이들 유적과 유물을 한( 漢 )의 이주민 집단이 남긴 것으로 파악하였다. 1960년대의 부여사 연구는 북한에 의해 주도되었다. 북한은 1963년에 이

241 중국의 최근 부여사 연구현황과 동향 241 지린과 황철산 등에 의해 관련 연구가 진행되었고, 1970년대에 이미 이러한 연 구 결과물이 정리되어 조선전사 2 에 실렸다. 1960~1970년대 중국은 지린시 일대의 서단산문화에 대한 조사와 연구에 치중하고 있어 부여 관련 연구는 거 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 시기에 지린시 일대에 석기문화와 서단산문화 이외에도 제삼문화( 第 三 文 化 ) 가 존재하고 있음을 밝힌 연구( 張 忠 培, 1973)가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1970년대 들어 처음으로 부여가 한국사에서 하나의 연구주제로 다 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부여의 사회현상(이기백, 1970), 신화전설(유명종, 1972), 국가 명칭(이병선, 1976)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부여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연구(이병도, 1976)도 이루어졌다. 일본에서도 부여의 정치체제에 대한 논문(이노우에 히데오[ 井 上 秀 雄 ], 1976)이 발표되었다. 1980년대 들어 중국의 부여사 연구는 획기적인 도약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서단산문화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지린시 일대에서 부 여의 유적과 유물이 다수 조사되면서, 연구방향이 점차 서단산문화에서 부여 로 전환되었다. 기존의 부여사 연구가 문헌을 주 대상으로 하였다면, 이 시기 의 부여사 연구는 문헌자료와 고고학자료를 함께 이용하여 부여사를 종합적으 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 학자로는 장보취앤[ 張 博 泉 ], 리지앤차이[ 李 建 才 ], 왕미앤호우[ 王 綿 厚 ], 마더치앤[ 馬 德 謙 ], 린윈[ 林 澐 ], 리우징원[ 劉 景 文 ] 등이 있다. 한국에서는 부여의 건국신화에 대한 연구 (이복규, 1982)와 더불어 동부여 관련 문제점을 다룬 논문(노중국, 1983), 부여 강역 문제를 다룬 논문(노태돈, 1989) 등이 발표되었다. 일본의 경우 다무라 코 이치[ 田 村 晃 一 ]의 연구(1987)가 유일하다. 1990년대 한국에서는 부여의 다양한 명칭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 연구(공석 구, 1990; 이도학, 1991)와 부여의 사회체계와 구조를 분석한 연구(김도용, 1994; 박경철, 1996)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 들어 부여사를 종 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글(송호정, 1997)이 발표되었다. 초보적이나마 고 고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서단산문화와 부여문화의 특징을 비교 분석하여 양자 간의 관련성을 언급한 연구(오영찬, 1999), 물질문화 자료를 통해 부여의 사회

242 24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체계를 해석하려는 연구(박양진, 1999) 등이 진행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한국에서 부여 관련 연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이유는 1992년에 중국과 수교 가 체결되면서 학술교류 및 관련 자료에 대한 수집이 용이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중국도 관련 자료의 증가로 인해 기존의 연구자들을 통해 꾸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나카야마 키요타카[ 中 山 清 隆 ]와 가미사키 쇼우[ 神 崎 勝 ] 등이 부여사 관련 논문을 발표하였다. 북한은 김병용이 후부여에 대한 연구(1991, 1992)를 진행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전문적으로 부여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는 연구자가 출현하고 있다. 부여 고고학문화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통해 부여문화 의 특징과 정체성을 분석한 이종수의 부여문화연구( 夫 餘 文 化 硏 究 ) (2004)와 부여 및 그 선사문화와 주변국의 역사와 문화를 비교 분석하여 부여의 인종 적, 문화적 특징을 분석한 Mark Byington의 A History of the PUYO state, its People, and its Legacy (2003) 등 두 편의 박사학위 논문이 발표되었다. 중국은 이 시기에 들어 동북공정이 시작되면서 중앙정부의 지원하에 각 지 역의 소수민족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더불어 지역 경제의 발 전에 따른 문화의식의 성장으로 지역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이로 인해 각 지역마다 지방사 연구와 더불어 문화 유적에 대한 대대적인 학술 조사가 이 루어졌다. 대표적으로 부여의 전기왕성으로 비정되는 지린시에서는 2002년에 시정부 주관으로 지방사와 고고학을 전공하는 전문가를 초빙하여 지린시사 편 찬을 논의하는 회의가 진행되었다. 회의에서 지린시의 출발을 부여 전기왕성 으로 파악하였고, 이에 부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 를 위해 첫째, 동투안산과 마오얼산[ 帽 兒 山 ] 주변에서 이루어진 발굴유적에 대 한 발굴보고서 발간, 둘째, 그동안 이루어진 부여 관련 연구 논문을 집성한 부여왕국논집 편찬, 셋째, 지린시에 서단산문화연구중심( 西 團 山 文 化 硏 究 中 心 )과 부여문화연구중심( 夫 餘 文 化 硏 究 中 心 )을 건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중 두 번째 목표인 부여왕국논집 의 편찬은 이미 서단산문화 관련 논문을 모두 모아 강성문박총간( 江 城 文 博 叢 刊 ) 4편을 발행한 경험이 있는 동쉬에 정이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물로써 2003년 7월에 부여왕국논집 이 간

243 중국의 최근 부여사 연구현황과 동향 243 행되었고, 2007년에는 1집에서 제외된 논문을 따로 모아 부여왕국논집: 속 편 을 발간하였다. 제1집은 중국 문헌에 수록된 부여 관련 자료 집성, 중국학자들이 연구한 부 여 관련 논문 집성, 외국학자들의 부여 관련 연구 자료 집성 등 세 부분으로 구 성되어 있다. 문헌 기록을 제외하고 수록된 논문은 중국학자 논문 52편과 외국 학자 논문 3편 등 모두 55편이다. 중국학자들의 논문은 기본적으로 1932년부 터 2002년까지 발표된 부여 관련 논문을 모두 집성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2002년까지 중국에서 발표된 부여 관련 논문은 대 략 80여 편에 이르고 있어 관련 논문 다수가 누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지 2007년에 논집에 실리지 않은 30여 편의 논문을 다시 모아 속집을 출간 하였다. 외국학자의 저술 논문은 일본 이케우치 히로시의 부여고, 북한 조 선전사 에 실린 부여사 관련 부분과 김병용의 후부여의 건립 등 3편이 전부 이다. 한국의 경우 2002년까지 부여 관련 논문이 약 40여 편 정도 발표되었는 데, 한 편도 수록되지 않았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부여사를 전문적으로 다룬 단행본이 출판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양쥔의 부여사연구 ( 蘭 州 大 學 出 版 社, 2012)와 판언스의 부여흥망사 ( 社 會 科 學 文 獻 出 版 社, 2013)이다. 한국에서도 2015년도에 송호정의 처음으로 읽는 부여사 (사계절, 2015)가 단 행본으로 출판되었는데, 부여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다룬 것으로는 처 음이다.

244 24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Ⅲ. 양쥔, 부여사연구 ( 蘭 州 大 學 出 版 社, 2012) 저자 양쥔은 랴오닝사범대학[ 遼 寧 師 範 大 學 ]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지린대학 [ 吉 林 大 學 ] 고적연구소( 古 籍 硏 究 所 )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 며, 현재는 지린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동북지방사를 연구하 고 있으며, 전공은 고구려사이다. 이 책의 저술 배경에 대해 저자는 전공인 고 구려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 기원 및 계승과 관련하여 부여와 발해에 대해 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각 시대별로 단행본을 발행할 결심을 하였는데, 고구려와 발해 관련해서는 고구려민족여국가적형성화연변( 高 句 麗 民 族 與 國 家 的 形 成 和 演 變 ) 과 발해국민족구성여분포연구( 渤 海 國 民 族 構 成 與 分 布 硏 究 ) 를 이미 출간하였고, 마지막으로 부여와 관련하여 부여사연구 를 간행하 였다고 적고 있다. 책의 목차는 본론에 앞서 부여와 관련된 한국 측 사료, 즉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 와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 검증을 시도하였다. 본 론에서는 독특하게 부여사 연구에서 풀어야 할 과제와 문제점을 주제로 삼아 모두 13개로 나누고 각 장마다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권말에는 부록으 로 이규보의 동명왕편( 東 明 王 篇 ) 과 조선고대사 계보의 변화 과정에 대해 간 략하게 정리하였다. 먼저 한국 측 사료의 운용과 관련해서 저자는 삼국사기 의 경우, 부여가 멸망한 후 650년이 지나 편찬된 사서이지만, 인용한 자료가 구삼국사( 舊 三 國 史 ) 라는 점과 구삼국사 역시도 과거 삼국시대 고구려, 백 제, 신라의 역사서를 인용했으리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다 만 삼국유사 의 경우에는 승려 일연이 개인적으로 편찬하였고, 인용사료인 고기( 古 記 ) 가 늦은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내용 역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인 식하였다. 또한 책의 내용이 대부분 고대의 설화에 불교적 요소가 가미되었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희박하다고 보았다. 본문에서 첫 번째는 다부여설( 多 夫 餘 說 )과 일부여설( 一 夫 餘 說 )에 대한 문

245 중국의 최근 부여사 연구현황과 동향 245 제를 다루었고, 두 번째는 북부여( 北 夫 餘 )와 동부여( 東 夫 餘 )의 실체에 대한 문 제를 다루었다. 두 주제 모두 부여국을 하나의 국가로 볼 것인지, 아니면 두 개 이상의 국가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이다. 즉 중국 측 문헌기록에는 부여라는 하나의 국가명칭만 나오는 반면, 한국 측 사서와 금석문에는 북부여, 동부여 등 2개 이상의 부여가 나타나고 있다. 일부여설은 리지앤차이에 의해 주창되 었는데,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설이다. 이에 따르면 한국 측 문헌기록에 등장하는 북부여와 동부여는 실제로 하나의 부여이며, 동부여란 명칭은 기원 285년 모용외에게 공격을 당한 부여가 옥저로 피난하면서 이들 지역에 사는 부여인들을 지칭한 것이 동부여라는 설과 346년에 서사근연( 西 徙 近 燕 ) 으로 부여가 지금의 농안( 農 安 ) 일대로 수도를 새롭게 천도하였는데, 그 동쪽의 구 도성지역을 부르는 명칭이라는 설 등으로 동부여의 실체를 설명 하고 있다. 다부여설은 장보취앤이 가장 먼저 제시하였는데, 부여 존립 당시에 부여에는 여러 개의 부여가 실제 존재하였다는 설이다. 다부여설은 두 개의 부 여설, 세 개의 부여설, 네 개의 부여설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저자 는 이 두 가지 설이 나타나게 된 배경에는 한국 측 사료에 대한 부정과 긍정에 서 기인한 것으로 보았다. 두 번째 북부여와 동부여의 실체에 대한 글에서는 삼국유사 의 기록을 사 실로 받아들여 해부루 이후의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부여가 분열하기 이전에 는 하나의 부여였고, 이는 중국정사에서 전해지는 부여와 동일하며, 한국 측 사서 중의 북부여에 해당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동부여의 실체에 대해서는 다부여설에 따라 다른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였다. 동부여에 대한 자신의 견해 는 여섯 번째 문제에서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285년과 346년에 사건 이 일어난 부여는 중국정사 중에 확인되는 부여(북부여)로 파악하였다. 세 번째는 부여의 분열과 천도 시점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부여의 분열 은 대략 4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첫 번째는 북이탁리국에서 탈출한 동명이 부여를 건국한 시점이며, 두 번째는 삼국유사 에 기록된 해부루가 동부여를 건립한 시점, 세 번째는 주몽이 동부여에서 떨어져 나와 고구려를 건국한 시 점, 네 번째는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백제를 건국한 시

246 24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점이다. 본문에서는 1~2차 분열과 천도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결국은 앞에 서 설명한 북부여(부여)와 동부여의 실체를 인정하는 전제하에 논의가 진행되 었다. 즉 저자는 부여인들은 원래 연국 이북에서 활동하였는데, 대략 기원전 2 세기 60년대에 동명의 인솔하에 동쪽의 예맥 거주지로 이동하여 나라를 세웠 고, 대략 기원전 2세기 40년대에 부여국은 북부여와 동부여로 갈라지는 것으 로 파악하였다. 또한 고구려 왕 세계도( 世 系 圖 )에 대한 고증과 사기 화식열 전( 史 記 貨 殖 列 傳 ) 의 기록을 분석하여 삼국유사 에 동명이 부여를 건국한 신작( 神 爵 ) 3년(기원전 59년)의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설명하였다. 네 번째는 동명전설을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중국 측 기록에는 부여 의 건립자를 동명으로 적고 있으며, 한국 측 사서에는 해모수라 칭하고 있는 데, 저자는 이에 대해 두 명칭 모두 사람의 이름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동명이 란 호칭은 부여어에서 나라를 새로 건국한 개국 군주를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 된 단어이며, 해모수는 부여어로 천자( 天 子 )의 자( 子 ) 혹은 천자의 의미로 사 용되던 단어로 해석하였다. 또한 부여의 동명전설과 고구려의 주몽전설은 비 록 내용상에서 매우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동일 전설의 두 개 판본이 아니라 두 개의 서로 다른 전설로 파악하였다. 다섯 번째는 북부여 및 탁리국( 橐 離 國 )의 강역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 다. 부여의 경역 범위는 시기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동한 이전의 부여 강역은 포자연유형의 분포 범위를 근거로 하여 지린시 일대를 중심으로 북류 쑹화강 중류 일대로 한정하고 있다. 부여의 전성기 강역 범위는 후한서 와 삼국지 기록에 근거하여 쑹넌평원과 길림합달령 대부분의 지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탁리국의 경역 범위는 랍림하 이북으로 추정하고, 백금보 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저자 역시도 이러한 추측의 성립 여부는 이후의 연구에 기대해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 짓고 있다. 여섯 번째는 동부여에 대한 고찰로, 동부여를 부여(북부여)와는 다른 또 하 나의 부여로 인식하고 동부여의 경역 범위를 지금의 두만강 이남 동북한 일대 로 설정하였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동부여에서 나와 나라를 건국하였는데, 고구려 5세기대의 금석문에 북부여에서 출자한 것으로 기록한 것은 동부여가

247 중국의 최근 부여사 연구현황과 동향 247 이 시기에 이미 고구려에 복속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 한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동부여는 기원 1세기 40 년대 전후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는데, 관구검이 고구려를 정벌한 이후 고구 려의 세력이 크게 약화된 틈을 노려 동부여는 고구려의 통치에서 벗어났다가, 광개토태왕의 즉위 시기에 다시 고구려에 복속된 것으로 보았다. 일곱 번째는 두막루( 豆 莫 婁 )에 대해 저자의 생각을 정리하였다. 두막루는 북부여 왕성이 서사근연한 전후에 일부의 부여인들이 쑹화강을 건너 북쪽으로 이동해 갔는데, 부여가 멸망한 이후에 그 후예들이 세운 나라이며, 대략 400여 년 존속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두막루의 강역은 대략 남으로 눈강과 동류쑹화 강을 경계로 하며, 동북쪽은 소흥안령과 헤이룽지앙, 서로는 대싱안링 동록까 지로 설정하였다. 여덟 번째는 부여의 명칭과 종족 기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부여 는 소수민족의 언어로 자신을 칭하던 명칭으로 한자로 음역하는 과정에서 부 여, 오유, 부유 등 다양하게 사용된 것으로 보았다. 한자상 고음 중 부여의 부 ( 夫 ) 독음( 讀 音 )은 발( 發 ), 맥( 貊 ), 호( 毫 ) 등의 글자 두음과 거의 일치하는 것 으로 보아, 그 의미를 맥인( 貊 人 ) 으로 파악하였다. 즉 부여인의 종족적 기원 을 맥인의 한 갈래로 보았고, 맥인은 동호족계와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아홉 번째부터 열두 번째 문제까지는 주로 부여의 정치, 사회, 경제에 대해 논하였다. 먼저 문헌기록에 나타나고 있는 부여 왕명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 고, 다음으로 부여의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저자는 부여의 사회계 층을 지배계층, 평민, 노예로 나누고 지배계층으로는 왕과 귀족, 관료 등이 포 함되며, 평민은 호민과 하호가 해당되고, 최하위는 노예로 보았다. 부여의 관 료제도에 대해서는 늦어도 기원 120년 전후에 이미 왕위계승제도가 형성되어 있었고, 삼국지 에 기록된 부여 관명은 모두 완전한 한어 번역 명칭이 아니라 부여어의 의미가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부여의 중앙 관제를 제가( 諸 家 )류와 사자( 使 者 )류로 구분하고, 전자는 읍락의 귀족으로, 후자는 아직 읍락 을 물려받지 못한 정부 중임직의 제가 의 자제들로 파악하였다. 또한 초기에

248 24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는 제가가 커다란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 왕권이 강해지면서 왕에 인접 한 사자류 관원의 세력이 커진 것으로 보았다. 부여의 경제는 농업과 목축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더불어 어렵활동이 보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으로 파악하였다. 더불어 토기 제조업과 방직업, 제철업, 제련업, 옥기제조업 등의 수공업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으며, 사통팔달의 교통로를 통해 주 변국과 활발한 대외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북)부여 유민의 동향 및 발해 부여부에 대한 문제에 대해 언급 하였다. 부여 멸망 후 유민의 동향은 고구려 혹은 말갈에 융합되거나 전연에 포로로 끌려간 경우, 북쪽으로 이동해 두막루를 건립한 것으로 보았다. 발해는 부여 고지의 동부에 속주를 설치하고, 서부에는 부여부를 설치하였으며, 북부 에는 막길부를 설치하였는데, 발해의 부여는 지금의 지린시 농안 일대로, 막길 부는 현재의 헤이룽지앙성 아성 일대로 추정하였다. 이상으로 이 책의 각 장에 나타난 저자의 부여사 인식을 정리해 보았다. 그 동안 학계에서 풀어야 할 숙제로 인식하고 있던 부여사 관련 문제들을 하나의 장으로 설정하고, 각 주제에 따른 기존의 연구성과를 모두 정리한 후,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한국 측 사서 와 중국 측 사서의 부여 관련 내용을 대부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이를 시 대순으로 정리하여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다 보니,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점이 이 책의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즉 주제별로 기존의 연구성과를 잘 정리하고 있으나, 저자 자신만의 견해를 제시하는 과정에서 많은 논리적 모 순이 나타나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보완이 요구된다. 또한 저서에 전반적으로 한국 측 사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 과 최근에 발표된 한국의 연구자료를 충분히 인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이 책의 한계로 지적된다.

249 중국의 최근 부여사 연구현황과 동향 249 Ⅳ. 판언스, 부여흥망사 ( 社 會 科 學 文 獻 出 版 社, 2013) 이 책의 저자인 판언스는 길림성 위슈현[ 楡 樹 縣 ] 출신으로 난카이대학[ 南 開 大 學 ]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베이징대학[ 北 京 大 學 ] 역사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 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저장대학[ 浙 江 大 學 ] 중국고대사연구소에서 박사후 과 정(Post Doc)을 거쳐, 현재는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연구원 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의 저술 목적을 동북지역 고대사에서 부여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매우 높은데, 현재 중국은 기본 사실의 고증이라는 초보적인 단계에 머 물러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한국과 북한의 학자들은 더 많은 열정을 가지고 많은 연구를 진행하고 있어 부여 연구의 절박성 때문에 이 글을 작성하게 되었 다고 하였다. 또한 부여 관련 사료가 모두 중문으로 되어 있고, 그 역사 영역이 완전히 지금의 중국 경내에 포함되어 있어, 중국학자들은 관련 고고학 자료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관계로 많은 연구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음에도 불 구하고 부여 연구가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중국 학계에 부여 사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관련 연구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도 함께 제시하였다. 책의 구성은 먼저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동안 학계에서 이루어진 부여 사 연구 현황을 부여사의 지리적 고증 방면, 고고학 연구 방면, 사회발전사 연 구 방면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첫 번째, 부여 역사의 지리 고증에 대한 연구 사 정리에서는 주로 부여의 종족적 기원과 관련된 연구, 탁리국에 대한 연구, 부여의 강역과 왕성에 대한 연구, 부여와 북부여, 동부여에 대한 연구로 나누 어 각 주제별 연구성과를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두 번째는 그동안 이루어진 고 고학 방면의 연구성과를 정리하고 있으며, 세 번째 사회발전사 방면에서는 부 여 국왕에 대한 연구, 신분제도 연구, 지방통치 연구로 나누어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250 25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본문의 목차 구성은 모두 4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에서는 부여 국가기원에 대한 연구 겸( 兼 )고구려 국가 기원과 상호 비교 라는 제목하에 제 1절에서는 부여문화 흥기의 고고학적 분석이란 제목으로 선행 연구에 대한 검 토, 고고학 자료를 통해 살펴 본 부여문화의 흥기, 부여시조 신화의 새로운 해 석 순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저자는 이 장에서 고고학적으로 부여의 출자 는 눈강중하류 유역의 백금보 한서2기문화가 아닌 서단산문화로 보고 있으 며, 서단산문화의 기반를 토대로 중원의 연, 진, 한 문화가 유입되어 부여 문화 가 완성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부여의 동명신화 역시 중원지역 중토문화와 일 정한 영향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제2절에서는 고구려 문화 흥기의 고고학적 분석 이라는 제목하에 고구려 건립 이전 요동지역 고고학 문화의 변화양상과 고구려 성립 시기 고고학 문화 의 특징, 고이( 高 夷 ) 맥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 다루었다. 제3절은 요동지역 고인돌의 기원과 한반도 지역 고인돌과의 관련성을 언급하였고, 제4절에서는 부여, 고구려 국가의 기원 비교 연구라는 제목하에 화하변연역사족군국가기원 적양조도로( 華 夏 邊 緣 歷 史 族 群 國 家 起 源 的 兩 條 道 路 ) 라는 부제를 달았다. 저 자는 부여 고구려 국가 기원을 기존의 학설과는 달리 북쪽이 아닌 현지 문화 의 자생적인 발전과 더불어 중원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파악하였 다. 부여의 경우 서단산문화를 기초로 철제 농기구를 대표로 하는 중원의 선진 농업 생산 방식이 유입되어 부여 문화 형성의 동력이 되었으며, 고구려는 통 화, 환인지역의 토착 문화 요소에 한 군현의 하나인 현토군의 문화적 영향력이 고구려 문화 형성에 원동력이 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제2장에서는 부여와 양한 관계 측증( 側 証 ) 이란 제목하에 제1절에서는 서 한 현도군 관할지역에 대한 고찰이란 주제로 제1차 현도군 관할구역에 대한 학 술적 논쟁을 정리하고, 옥저설을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제2현도군 의 설립과정과 제2현도군의 관할지역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결론적으로 제2 현도군은 퉁화지역을 중심으로 맥인의 활동을 통제하기 위해 설립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제2절에서는 서차구고분군의 족속에 대해 논하고 있다. 저자는 서차구고분군 출토 유물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 유적에는 토착문화인소, 북방

251 중국의 최근 부여사 연구현황과 동향 251 초원문화인소, 평양묘장문화인소, 한문화인소, 부여문화인소 등 서로 다른 5 개의 문화 요소가 복합적으로 내재되어 있으며, 이 고분군의 조영 집단을 오환 인들로 파악하였다. 이는 최근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부여설을 주장하는 것과 는 반대되는 견해이다. 제3절에서는 한 대의 동북지역 변강정책에 대해 논하 면서, 더불어 한의 부여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함께 다루었는데, 특히 부여와 한의 우호적인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지를 전개하였다. 제3장에서는 부여정치체계 연구 라는 큰 틀하에, 제1절에서는 부여 정치 체계의 역사사회학적 해석이라는 제목으로 부여 정치에 대해 언급하였다. 첫 번째로는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 중 우가의 반란 사건과 관련하여 새로운 해 석을 시도하였다. 두 번째로는 부여사회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왕, 제가, 사자, 국인으로 나누어 그 특징을 살펴보았다. 저자는 부여의 계층을 귀족(제가, 호 민), 국인(평민)과 하호, 소수의 노예로 파악하였다. 또한 부여의 사회 발전 단 계를 왕권이 점차 강화되고 있지만, 아직은 단계가 낮은 가족국가 로 규정하 였다. 제2절은 위슈 노하심고분군을 통해 본 부여의 지방통치체제란 제목하에 노하심유적에 대한 세부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 다만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대부분 이미 한국에서 이루어진 연구결과를 재인용하는 수준에 그쳤 다. 제3절에서는 고구려의 품위제와 국가정치체제의 특징이라는 제목하에 삼 국지 동이전 고구려조에 기록된 관료 명칭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또 한 고구려 초기의 내작( 內 爵 ) 외작제( 外 爵 制 ) 와 고구려 초기 품위 제도를 통 해 본 고구려국가 정치 체제의 특징, 사자계( 系 ) 형계( 兄 系 ) 각 칭호의 변화 과정과 새로운 품위제의 형성, 새로운 품위제를 통해 본 고구려의 국가 정치 구조의 발전 과정 이라는 소제목으로 고구려 국가 정체체제의 특징을 설명하였 다. 제4절에서는 고구려 사자, 조의선인( 皂 衣 先 人 ) 에 대해 다루었다. 제4장에서는 부여의 멸망에 대해 논하였는데, 첫 번째 절에서는 부여 쇠망 의 역사과정 및 그 영향에 대해 다루었다. 먼저 부여 멸망의 역사적 과정을 문 헌기록을 통해 세부적으로 살펴보았으며, 다음으로 부여, 북부여 와 동부 여 의 실체에 대해 논하였다. 저자는 동부여를 동옥저와 하나로 보았으며, 동 부여는 일찍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가 일정 시기에 다시 부여에 복속되었고,

252 25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이를 광개토태왕이 다시 복속시킨 것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부여 멸망이 동북 지역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자세히 언급하였다. 마지막으로 부여 가 멸망한 이후 유민의 이동에 대해 논하였는데, 부여인이 가장 많이 옮겨간 곳은 포로로 끌려간 모용선비의 전연이며, 두 번째는 고구려로의 유입, 세 번 째는 물길에 융합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제2절에서는 염모( 冉 牟 )묘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 묘지를 염모묘지로 볼 것인가 모두루( 牟 頭 婁 )묘지 로 볼 것인가라는 견해에 대해 저자는 묘지명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염모묘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묘지를 편찬한 모두루의 직책인 대 사자와 노객에 대해서도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묘지의 내용을 통해 고구 려의 부여 통치방법에 대해 언급하였다. 판언스의 부여흥망사 는 철저하게 중국의 다민족통일국가론에 입각해 저 술된 책이다. 책 내용이 부여사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고구려사까지 세부적으 로 다루었고, 특히 이들 국가에 미친 중원의 영향력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원문화와 동북지역 소수민족 으로 제목을 수정하는 것이 훨씬 더 어울릴 듯 하다. 아마도 이 책이 현재 중국의 부여사 연구 동향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연구가 향후 지속적으로 축적된다면, 부여는 점 차 한국사에서 그 존재가 사라지게 될 것이며, 이는 한국사 전체의 뿌리를 흔 드는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도 부여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연구 기반 확립이 요구되는 바이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까지의 부여사 연구는 문헌 및 고고학 자료의 부족이라는 한계로 인해 기존의 연구성과에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 는 실정이다. 최근에 중국에서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부여사 관련 연구가 다

253 중국의 최근 부여사 연구현황과 동향 253 소 활기를 띠고 있으나 이 역시도 기존의 부여사 연구와 차별되는 새로운 자료 혹은 견해가 제시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기존의 연구성과를 정리한 수준에 불 과하다. 물론 부여고고학 전문가인 필자 역시도 지금까지 조사 연구된 자료를 가지고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상황이라 보고 있다. 부여사 연구가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부족한 문헌자료를 보충할 수 있는 새로운 고고학 자료의 발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부여의 전기 왕성으로 비정되는 지린시 일대의 부여 유적에 대한 보고서 발간 은 모든 부여사 연구자들이 함께 염원하는 일이다. 1990년대부터 시작되어 지 금까지 연차적으로 진행된 동투안산, 마오얼산 부여 유적 발굴이 아직도 정식 보고서로 발간되지 않았다는 것은 고고학자 개인 혹은 집단의 직무유기라 할 수 있다. 향후 조속한 시간에 관련 자료가 출간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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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와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 259 자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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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와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 261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와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 이근우 /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Ⅰ. 머리말 1471년에 신숙주의 명의로 편찬된 해동제국기( 海 東 諸 國 紀 ) 는 15세기를 중심 으로 한 한일관계사 연구의 핵심적인 사료 중 하나다. 내용 중에 대마도에 대 한 상세한 정보가 가장 주목을 받고 있지만, 일본, 대마도, 일기도( 一 岐 島 ), 유 구국 등의 지도 역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해동제국기 의 대마도지도( 對 馬 島 之 圖 ) 에는 82개의 포구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데, 일본이 제작한 지 도에 이처럼 자세한 지명이 나타나는 것은 1700년대다. 또한 해동제국기 의 대마도지도 는 대마도의 지도를 인쇄하여 간행한 최초의 사례다. 필자는 이미 해동제국기 의 대마도지도 가 태종과 세종 시기에 조선과 일본의 외교에서 큰 활약을 하였던 이예( 李 藝 )가 획득한 대마도 정보를 반영하 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1) 신숙주는 단 한 차례 일본에 다녀왔을 뿐 이었고, 결코 일본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해동제국기 가 신숙주의 1) 이근우, 2015, 해동제국기의 지리정보와 이예, 한일관계사연구 51.

262 26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이름으로 간행된 것은 당시 그가 영의정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 다. 대마도지도 의 특이한 형태는 대마도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릴 수 없는 것이었다. 1443년의 계해약조 체결의 주역도 신숙주가 아니라 이예였다 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이처럼 대마도지도 는 대마도와의 오랜 교섭의 결과 이고,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를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또한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 一 疆 理 歷 代 國 都 之 圖 ) 의 대마도 형태가 해동제국기 의 대마도지도 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는 한 편, 이후 조선에서 제작된 많은 지도에서 그 형태가 계승된다. 일본이 제작한 지도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 臣 秀 吉 ]가 소지하였던 부채에 그려진 조선 지도를 제외하고는 그러한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대마도의 특이한 형 태가 이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를 제작하는 단계에서 성립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 지도를 제작하던 이회는 일본지도는 있었으나, 대마도와 일기도를 그 린 지도가 없어서 이를 보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1402년이라는 시점에서 대 마도의 사정을 잘 알 수 있었던 사람은 역시 이예이며, 그는 1402년 8월 이전 에 이미 세 차례에 걸쳐 대마도를 왕래하였고, 당시 왜구의 소굴이었던 아소만 [ 淺 藻 灣 ]을 비롯하여 대마도 구석구석을 어머니를 찾기 위하여 돌아다녔던 것 이다. 이처럼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와 해동제국기 의 대마도지도 의 접 점은 이예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해동제국기 의 다른 지도에도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해동제국기 에는 일본 본국 지도를 비롯하여 유구국[ 琉 球 國 ]의 지도가 있다. 현재로서 일 본 본국 지도의 원형이 될 만한 지도는 발견되지 않았다. 15세기의 일본지도는 대단히 희귀하고, 해동제국기 의 일본지도가 일본지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정도다.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琉 球 國 之 圖 ) 역시 유구국 전토 를 상세하게 나타낸 최초의 인쇄지도다. 그런데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A)와 거의 흡사한 지도가 오키나와 현립박물관[ 沖 繩 縣 立 博 物 館 ]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몇 년 전에 밝혀졌다. 아직 우리 학계에서는 크게 주목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를 소개해 보고자 한 다. 현재는 유구국이 일본의 일부를 구성하게 되었으므로 우리로서는 큰 관심

263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와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 263 <표 1> 지명표기의 비교 현재 지명 기해동정 이예 啓 文 해동제국기 일본행록 신숙주 실록 쓰치요리 [ 土 寄 ] 후나코시 [ 船 越 ] 니이군 [ 仁 位 郡 ] 豆 知 浦 豆 知 洞 豆 知 洞 浦 豆 地 浦 訓 乃 串 訓 羅 串 訓 羅 串 船 餘 串 船 越 船 越 尼 老 郡 尼 老 郡 仁 位 郡 니시도마리 [ 西 泊 ] 尼 神 都 麻 里 浦 利 新 梁 灣 게치[ 鷄 知 ] 桂 池 浦 愁 美 要 時 얀비토[ 矢 櫃 ] 也 音 非 道 浦 也 音 非 梁 하에도마리 [ 南 風 泊 ] 和 因 都 麻 里 浦 제포( 薺 浦 ) 乃 而 浦 乃 而 浦 薺 浦 花 延 都 末 里 乃 而 浦 薺 浦 이 없는 지역 혹은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609년 사쓰마번[ 薩 摩 藩 ]이 유구국을 정벌하여 속지로 편입하기 이전까지 유구국은 조선과 교린관계를 맺 고 있던 독립된 왕조국가였다. 명과도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고, 동남아 시아 지역의 물산을 조선과 일본으로 유통시키는 중요한 역할도 수행하였다.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대립을 보면 오키나 와(유구국)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64 26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Ⅱ. 도안이 가져온 박다 살마 유구상거지도 유구국에 관한 지도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453년(단종 1년) 하카타[ 博 多 ]의 상인이자 유구국의 사절을 자처하고 조선을 찾아온 승려 도안( 道 安 )이 가지고 온 지도다. 예조는 단종 1년 5월 11일에 도안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면서 도안이 한 말을 적어서 아뢰었다. 2) 그 중에 박다 살마 유구상거지도( 博 多 薩 摩 琉 球 相 距 地 圖 ) (B)(밑줄 필자)가 보인다. 이 지도야말로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와 같은 박다( 博 多 ) 살마( 薩 摩 ) 유구( 琉 球 ) 사이의 거리를 나타 낸 지도다(A, <그림 1> 참조). 도안은 하카타의 상인이었고, 상선을 타고 유구 국까지 교역을 하러 다녔다. 이때 유구국 중산왕이 도안의 배를 태워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조선인을 돌려보낸 것이다. 도안의 발언 속에 언급된 박다 살 마 유구에 대한 정보를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조선 사람 4명이 표류하다가 와사도( 臥 蛇 島 )에 정박하였는데, 그 섬은 유구도( 琉 球 島 )와 사쓰마의 사이에 있어서 반은 유구국에 속 하고, 반은 살마에 속한다. 2. 유구국 왕의 동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기포도( 岐 浦 島 )를 정벌하다가 조선인들을 발견하였다. 3. 유구국과 사쓰마가 서로 통호하기 때문에 하카타 사람으로 사쓰마 를 거쳐서 유구국에 가는 데 장애가 없다. 4. 와사도에서 3일 노정으로 가사리도( 加 沙 里 島 )에 이르렀다. 2) 朝 鮮 王 朝 實 錄 端 宗 元 年 五 月 十 一 日 宴 琉 球 國 中 山 王 使 者 道 安 于 禮 曹. 禮 曹 錄 道 安 之 言 以 啓 一, 去 庚 午 年, 貴 國 人 四 名, 漂 泊 于 臥 蛇 島, 島 在 琉 球, 薩 摩 之 間, 半 屬 琉 球, 半 屬 薩 摩. 故 二 名 則 薩 摩 人 得 之, 二 名 則 琉 球 國 王 弟, 領 兵 征 歧 浦 島 而 見 之, 買 獻 國 王, 王 置 于 闕 內, 厚 加 撫 恤. 一, 琉 球 國 與 薩 摩 和 好, 故 博 多 人 經 薩 摩 往 琉 球 者, 未 有 阻 礙. 近 年 以 來, 不 相 和 睦, 盡 行 擄 掠. 故 却 從 大 洋 迤 邐 而 行, 甚 爲 艱 苦. 今 我 等 出 來 時, 商 船 二 艘, 亦 被 搶 擄. 因 示 博 多, 薩 摩, 琉 球 相 距 地 圖 (밑줄 필자).

265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와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 265 또한 도안은 일본유구양국지도( 日 本 琉 球 兩 國 地 圖 ) (C)의 모사화 네 벌 을 가져왔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 벌은 궐내에 들이고, 나머지는 의정부, 춘추 관, 예조가 보관하였다고 한다. 3) 이 (C) 지도가 아마도 (B) 지도와 같은 지도일 것이다. 만약 (C) 지도가 일본과 유구를 각각 그린 지도였다면, 전체를 지칭할 때도 각 네 벌이라고 하고 이것들을 나누어 보관할 때도 각각이라고 말했을 것 이기 때문이다. 예조에서 도안이 유구국의 사정을 (B) 지도를 가지고 설명하였 는데, 그 지도는 다시 가져가고 전혀 다른 지도를 네 벌이나 주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또한 해동제국기 의 (A) 지도는 도안이 가져와서 예조 등에 보관되어 있었던 (B)와 (C) 지도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키나와현립 박물관의 유구국도( 琉 球 國 圖 ) (D, <그림 2> 참조)가 확인되기 전까지 이는 가능성이 높은 추정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유구국도 (D)가 발견됨으로써 (A) 지도와 (D) 지도가 거의 유사한 지도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D)지도는 1609 년 유구국이 사쓰마번에 편입되기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점 등에서 단 종 대에 도안이 가져온 지도 (B)의 또 다른 사본으로 생각된다. 4) Ⅲ. 오키나와현립박물관의 유구국도 5) 1980년에 이미 시마지리 가쓰타로[ 島 尻 勝 太 郞 ]가 오키나와현립박물관의 유 구국도 가 해동제국기 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였고, 우라조 3) 朝 鮮 王 朝 實 錄 端 宗 一 年 (1453) 七 月 四 日 己 未. 禮 曹 啓 : 日 本 僧 道 安 齎 來 日 本, 琉 球 兩 國 地 圖. 摸 畫 四 件, 粧 褙 成 簇, 一 件 入 內, 其 餘 分 藏 于 議 政 府, 春 秋 館 及 本 曹 從 之. 4) 秋 岡 武 次 郎, 1955, 日 本 地 圖 史, 河 出 書 房. 5)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 에 대한 조사 성과는 深 瀬 公 一 渡 辺 美 季, 2004, 沖 繩 縣 立 博 物 館 所 藏 琉 球 國 圖, 琉 球 大 學 에 의거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해 당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266 26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에시사[ 浦 添 市 史 ] (1981)에 일부가 영인되어 수록되었으나, 주목을 받지 못하 였다. 2003년에 아사토 스스무[ 安 里 進 ]가 수리성연구회( 首 里 城 硏 究 會 )에서 이 지도가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원도일 가능성을 지적하였다. 유구국도 는 현립박물관이 1978년 시내의 모처에서 구입한 것이라고 한 다. 채색지도로 지도 왼쪽 위에 유구국도 봉납 천만궁광전 원록구병자 팔월길 신( 琉 球 國 圖 奉 納 天 滿 宮 廣 前 元 祿 九 丙 子 八 月 吉 辰 ) 이라고 쓰여있고, 왼쪽 아래에는 송수암죽삼도열봉상 웅본이우위문입도원재칠십일세서언( 松 壽 菴 竹 森 道 悅 奉 上 熊 本 伊 右 衞 門 入 道 圓 齋 七 十 一 歲 書 焉 ) 이라는 내용이 쓰여져 있 다. 이를 통해 이 지도가 1696년(원록 9)에 다케모리 도에쓰[ 竹 森 道 悅 ]가 규슈 다자이후[ 太 宰 府 ] 텐만궁[ 天 滿 宮 ]에 봉납하였으며, 지도를 그린 사람은 승려 인 엔사이[ 圓 齋 ]라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다케모리는 후쿠오카번[ 福 岡 藩 ] 구로다가[ 黑 田 家 ]의 가신의 한 사람으로 조부는 다케모리 신우에몬쓰구타다[ 竹 森 新 右 衛 門 次 貞 ](1550~1621)이고, 아 버지는 신우에몬도시토모[ 新 右 衛 門 利 友 ](1599~1674)이며 1625년 경에 태어 난 것으로 추정된다. 19세 때 경도에 가서 의술을 배우는 한편, 후지와라 세이 카[ 藤 原 惺 窩 ]의 아들인 하네바야시 슈인[ 羽 林 集 陰 ]으로부터 경사( 經 史 )를 배 웠다고 한다. 이후 고지마[ 五 島 ]에서도 활동하였고, 후쿠오카로 돌아와 가이바 라 에키겐[ 貝 原 益 軒 ] 및 그 제자 다케다 슌안[ 竹 田 春 庵 ]과도 교유가 있었다. 1699년(원록 12)에 죽었다. 유구국도 의 지도가 갖는 특징은 1609년 사쓰마가 유구국을 침공하기 이 전의 상황을 보여주는 점이다. 흔히 유구사 연구에서는 1609년 이후를 근세유 구, 그 이전부터 12세기 경까지 고유구라고 하는데, 고유구보다는 국가가 성립 된 것이 중세이므로 중세유구라고 부르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사쓰마를 통해 서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인 유구국은 1696년(원록 9)에 국회도( 國 繪 圖 ) 로서 유구국도 를 작성하였다. 중세유구와 근세유구의 차이점은 첫째, 본래 유구국에 공조를 바치던 오미 제도[ 奄 美 諸 島 ]가 사쓰마번의 직할지가 되었다는 점, 둘째, 16세기 중엽부터 남만 무역이라고 불리던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무역이 쇠퇴하였다는 점이

267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와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 267 다. 중세유구에서는 유구 본도인( 本 島 人 ), 일본인( 日 本 人 ), 강남인( 江 南 人 )이 잡거하는 상태였으며, 남만의 선박도 나하[ 那 覇 ]에 입항하였다. 또한 어물성 ( 御 物 城, 見 物 具 足 )은 강남 남만의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로 기능하였다. 그러 나 오미제도가 더 이상 공조를 바치지 않고 남만 무역의 중심이 보노쓰[ 坊 津 ] 와 나가사키[ 長 崎 ]로 옮겨가면서 사람들과 선박으로 붐비고 물품이 넘쳐나던 중세유구는 쇠퇴하였다. 구스쿠라고 불리는 유구국의 성채도 유구국도 에 보이는 것처럼 중세유 구에는 여러 개가 존재했지만, 근세유구에서는 수리성, 금귀인( 今 歸 仁 )구스쿠 (17세기까지), 중성( 中 城 ) 정도였다. 유구국도 (D)와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A)의 가장 큰 차이는 사 찰과 신사에 대한 기록이다. (D) 지도에는 국성사( 國 聖 寺 ), 경선사( 慶 禪 寺 ), 법 음사( 法 音 寺 ), 호국사( 護 國 寺 ), 파상웅야권현( 波 上 熊 野 權 現 )이 기록되어 있 다. 파상웅야권현은 현재의 파상궁( 波 上 宮 )으로 추정되지만, (D) 지도가 모사 되던 1696년에 이들 사찰은 모두 폐사가 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 사찰과 신 사에 대해서 유구국지도 에서는 대부분 기록하지 않았다. 또한 유구내( 琉 球 內 ) 즉 유구의 영역은 희계도( 喜 界 島 ), 엄미대도( 奄 美 大 島 ), 충영랑부도( 沖 永 良 部 島 ), 사가미( 思 柯 美 ), 이평옥도( 伊 平 屋 島 ), 이시명도 ( 伊 是 名 島 )라고 명시하고 있다. 특히 사가미가 일본과 당토( 唐 土 )의 경계인데, 대도에 이르기까지 25리[ 至 大 島 二 十 五 里 ]라고 하였으므로, 사가미가 엄미대 도의 주변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 朝 鮮 王 朝 實 錄 ) 에도 등장하는 와사도( 臥 蛇 島 )의 반은 유구에 속하고 반은 사쓰마에 속한다[ 半 屬 琉 球, 半 屬 薩 摩 ]라고 되어 있다. 해동제국기 에서도 일본과 유구에 나누어 속해 있다[ 分 屬 日 本 琉 球 ]라고 하 였다. 이를 통해서 토카라 해역이 15세기 중엽의 중세 일본과 유구의 경계임을 알 수 있다. 6) 파상호국사( 波 上 護 國 寺 )가 세워진 것이 1523년 이후인데, 유구국도 에 6) 村 井 章 介, 1997, 中 世 国 家 の 境 界 と 琉 球 蝦 夷, 境 界 の 日 本 史.

268 26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이 정보가 없는 것으로 보아, 16세기 후반 이전의 상황을 보여 준다. 한편 지도 에 표시된 장홍제( 長 虹 堤, 石 橋 )가 건설된 것이 1451~1452년 사이이므로, 유 구국도 의 제작은 1452년 이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지도를 도안이 완성된 직후인 1453년에 조선으로 가져온 것이다. 유구국도 는 항로를 붉은색 선으로 나타내었다. 남구주 엄미대도 사이는 대우반도( 大 隅 半 島 ) 동안에서 종자도( 種 子 島 )와 옥구도( 屋 久 島 )의 연안을 지 나 토카라열도를 거쳐 엄미대도에서 이르는 항로와 살마반도( 薩 摩 半 島 ) 서안 에서 구영량부도( 口 永 良 部 島 )를 경유하여 토카라열도를 너머 엄미대도에 이 르는 항로, 살마반도 서안에서 토카라열도 서안을 우회해 남하하여 엄미대도 에 이르는 세 가지 항로가 있다. 다시 엄미대도로부터 남쪽으로 뻗어나가 덕지 도( 德 之 島 )를 거쳐 나하에 이른다. 나하에서는 서쪽으로 항로가 표시되어 있어 서, 구미도( 久 米 島 )를 거쳐 화도( 花 島 )에까지 이어져 있다. 서쪽으로 연결되는 항로는 강남(중국), 남만(동남아시아)과 연결된 항로로 판단할 수 있다. 유구국도 는 당시로서는 지리표시에 있어서도 대단히 자세한 지도이자, 일본과 유구국 사이 해역의 분할과 항로까지 기록한 주목할 만한 지도다. Ⅳ. 유구국지도 와 유구국도 의 차이 그러나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A)와 오키나와현립박물관의 유구국 도 (D) 지도는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 먼저 (A) 지도는 상송포( 上 松 浦 ), 유구, 살마를 기준으로 거리를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 거상송( 去 上 松 )~리 ( 里 ), 거대도( 去 大 島 )~리( 里 ), 거유구( 去 琉 球 )~리( 里 ), 거살마주( 去 薩 摩 州 )~ 리( 里 ) 등과 같이 표기하였다. 이에 대해서 유구국도 는 박다 유구 살마를 기준으로 기록하였으며, 그 거리도 자박다( 自 博 多 ), 지류구( 至 琉 球 )와 같이 나 타내었다. 이는 도안이 조선의 예조에서 보여 준 (B) 지도의 명칭과도 잘 부합

269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와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 269 된다. 따라서 (A) 지도가 왜 박다가 아니라 상송포로 되어 있는지가 문제가 되 었다. 도안이 조선에 바친 지도 (B)를 해동제국기 편찬 단계에서 어떻게, 왜 수정 개편하였는지를 밝혀야 한다. 이미 도안으로부터 입수한 (B) 지도를 조선의 관점에서 새롭게 정리할 필 요가 있었을 것이고, 또한 목판본으로 제작하여 인쇄하는 단계에서 기술적인 제약도 고려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7) 기존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몇 가지 의견을 덧붙여 보고자 한다. 먼저 왜 기준지점이 박다에서 상송(포)로 바뀌었을까? 이는 아마도 조선의 입장에서 상업이나 교역의 중심인 박다보다 왜구의 거점 중 한 곳이고 대마도 에서 일기도 그리고 상송포로 이어지는 항로의 종점인 상송포를 중시했을 가 능성이 있다. 해동제국기 의 일본국서해도구주지도( 日 本 國 西 海 道 九 州 之 圖 ) 에서 구주 북부의 지명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박다, 지좌( 志 佐 ), 압타( 押 打 ), 호자( 呼 子 ), 상송포, 하송포( 下 松 浦 ), 좌지( 佐 志 ), 전평( 田 平 ) 등이다(<그 림 3>, <그림 4> 참조). 박다와 비교하면, 압타, 호자, 좌지, 전평 등은 작은 어 촌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곳은 조선 전기 왜구의 근거지였고, 일기도를 분할해 서 지배하는 세력들이었다. 이들 지역에는 조선의 관직을 받은 왜인들도 있었 다. 박다와의 상업적인 교류보다 왜구 대책에 부심하고 있었던 조선으로는 유 구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박다의 상인과는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유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조선은 왜구에 붙잡혀 간 백성들의 쇄환이 일차적인 목적이 었고, 유구국과의 교류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도안이 가지고 온 (D)지도의 원본인 (B)지도는 박다 지역 혹은 박다 상인의 시선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A)는 왜구와 왜구에게 붙잡혀 간 조선인 쇄환이라는 시선에서 만들어진 것이 라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조선에서는 박다를 기준으로 한 (B) 지도를 입수한 다음 왜구의 거점 중 하나인 상송포를 기준으로 개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 한 가지 참고해야 할 것은 조선의 고위 관인으로서 유일하게 유구국을 7) 深 瀨 公 一 渡 辺 美 季, 2004, 앞의 글, 琉 球 大 學, 167쪽.

270 27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다녀온 인물이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해동제국기 의 대마도지도 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이예다. 그는 1416년 유구국을 왕환하였다. 8) 당시 조선의 관 인들은 외국에 사절로 파견되면, 반드시 왕환과정과 획득한 정보에 대한 보고 서를 제출하였다. 그 중에서는 항로의 방향이나 거리를 상세히 표시한 것들이 적지 않다. 이예의 유구 왕환 보고서는 상송포를 기점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있 다. 조선에서 유구국으로 갈 경우 후쿠오카를 거칠 필요가 없이, 대마도 일기 도에서 상송포 오도를 경유하여 가는 편이 자연스럽다. 또한 (D) 지도에서는 일향국( 日 向 國 ), 대우국( 大 隅 國 ), 살마국( 薩 摩 國 ) 등 으로 되어 있는 지명이, 유구국지도 (A)에서는 일향주( 日 向 州 ), 대우주( 大 隅 州 ), 살마주( 薩 摩 州 )로 되어 있다. 또한 (D) 지도에서는 경선사, 국성사, 법음 사, 파상웅야권현, 호국사 등의 사찰과 신사 이름이 보이지만, (A) 지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장려했던 조선의 국시에 따 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Ⅴ. 맺음말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A)와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 (D) 는 공통적으로 1453년에 도안이 조선에 제출한 박다 살마 유구상거지도 8) 朝 鮮 王 朝 實 錄 太 宗 十 六 年 一 月 二 十 七 日 遣 前 護 軍 李 藝 于 琉 球 國. 上 聞 本 國 人 爲 倭 所 擄, 轉 賣 琉 球 國 者 甚 衆, 命 遣 藝 請 刷 還. 戶 曹 判 書 黃 喜 啓 曰 : 琉 球 國 水 路 阻 遠, 且 今 遣 人, 煩 費 甚 多, 莫 如 不 遣 上 曰 : 懷 土 之 情, 本 無 貴 賤 之 殊. 借 使 貴 戚 家 有 如 此 被 擄 者, 豈 計 劇 費? 朝 鮮 王 朝 實 錄 太 宗 十 六 年 七 月 二 十 三 日 壬 子 / 琉 球 國 通 信 官 前 護 軍 李 藝 還. 推 刷 國 人 爲 倭 寇 所 擄, 轉 賣 于 琉 球 國 者 四 十 四 人 以 來. 有 全 彦 忠 者, 慶 尙 道 咸 昌 縣 人 也. 歲 乙 亥 年 十 四, 被 擄 轉 賣, 今 隨 藝 還, 父 母 已 俱 歿, 欲 追 喪 其 親, 上 憫 之, 賜 裌 衣 二, 單 衣 一, 正 五 升 布 十 匹, 米 豆 幷 十 五 石 以 遣 之.

271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와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 271 (B)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실물은 존재하지 않지만, 두 지도의 비교를 통해서 원본이 된 지도가 1452~1453년 사이에 제작되었다 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D) 지도는 박다를 기점으로 한 데 대하여, (A) 지도는 상송포를 기 점으로 바꾸어 놓았다. 또한 (D) 지도에 기재된 사찰과 신사의 이름을 (A) 지도 에서는 채택하지 않았다. 한편 유구국에 속한 해역을 (A) 지도에는 속유구( 屬 琉 球 ) 라고 하였으나, (D) 지도에는 유구내 라고 하였다. (D) 지도가 모사된 1696년에는 유구가 사쓰 마에 복속되기에 이르렀으므로, 일본인의 입장에서 속( 屬 ) 이라는 용어를 피하 고 내( 內 ) 라고 개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유구가 살마번에 속( 屬 ) 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A)와 (D) 지도는 (B) 지도를 원도로 하면서도 부분적으로 변개를 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D) 지도는 (A) 지도와 비교하였을 때 일부 오자로 보이는 글자도 있다. (A), (B), (D) 지도의 상호관련성에서 대해서 이제 부터 보다 자세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덧붙여 (D) 지도의 발견으로 해동제 국기 의 사료적인 가치가 재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설령 (D) 지도가 원도인 (B) 지도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A) 지도가 제작된 것은 1471년이고 (D) 지도가 모사된 것은 1696년으로 200년 이상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해동제국기 에 수록된 지도를 다시금 주목해야 할 이유다.

272 27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그림 1>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273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와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 273 <그림 2>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 ( 深 瀬 公 一 ㆍ 渡 辺 美 季, 2004, 沖 繩 縣 立 博 物 館 所 藏 琉 球 國 圖 )

274 27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그림 3> 해동제국기 의 일본국서해도구주지도

275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와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 <그림 4> 해동제국기 의 일본국서해도구주지도 의 규슈 북부 275

276 27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현재 지명과 유구국도 의 지명 현재 지명 琉 球 國 圖 (D) 1. 宮 崎 縣 鹿 兒 島 縣 日 向 國 / 大 隅 國 / 薩 摩 國9) 2. 坊 津 房 泊 兩 津 / 房 御 崎 3. 開 聞 岳 10) 海 門 岳 4. 種 子 島 種 島 11) / 白 博 多 百 七 十 七 里 / 至 大 嶋 百 五 十 五 里 5. 屋 久 島 鷲 12) / 自 博 多 百 六 十 九 里 / 至 大 嶋 百 四 十 三 里 6. 竹 島 高 嶋 7. 硫 黃 島 硫 黄 島 / 産 硫 黄 日 本 人 採 之 凡 黄 島 皆 産 硫 黄, 日 正 照 常 有 焔 島, 去 房 御 崎 十 八 里, 去 上 松 一 百 三 十 八 里 8. 口 之 永 良 部 惠 羅 武 / 白 博 多 百 六 十 七 里 / 至 大 嶋 百 四 十 五 里 9. 口 之 島 (토카라열도 최북단) 口 鳴 / 自 博 多 百 九 十 九 里 / 至 大 嶋 百 十 三 里 10. 中 之 島 (토카라열도) 中 嶋 / 自 博 多 二 百 十 二 里 / 至 大 嶋 百 里 11. 惡 石 島 (토카라열도) 悪 石 / 白 博 多 二 百 三 十 七 里 / 至 大 嶋 七 十 五 里 13) 12. 黑 島 黒 嶋 / 去 薩 摩 二 十 里 / 自 博 多 百 四 十 里 13. 臥 蛇 島 (토카라열도) 臥 馳 / 自 博 多 二 百 里 / 去 薩 州 房 津 八 十 里 余 / 半 屬 日 本 / 半 屬 琉 球 14) 両 鴫 間 三 里 14. 小 臥 蛇 島 (토카라열도) 小 臥 虵 嶋 15. 平 島 (토카라열도) 多 伊 羅 9)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에서는 일향주( 日 向 州 ) 대우주( 大 隅 州 ) 살마주( 薩 摩 州 )로 되어 있다. 이는 일본국( 日 本 國 )이라는 용어와 살마국( 薩 摩 國 ) 등의 용어가 국( 國 )이라는 한자에서 충돌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10) 해동제국기 에는 산하포( 山 河 浦 )로 되어 있다. 11) 해동제국기 에는 種 島 / 去 上 松 一 百 七 十 五 里, 去 大 島 一 百 五 十 五 里 로 되어 있다. 이하 상송포를 기점으로 한 注 記 는 일일이 기록하지 않는다. 12) 鸞 은 해동제국기 에 보이는 야쿠시마[ 亦 島 ]를 한 글자라고 생각하고 아래위로 잘 못 쓴 것으로 보인다. 후대의 전사 과정에서 생긴 오류다. 이러한 점에서 해동제 국기 의 유구국도 가 더 원형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3) 해동제국기 에 黑 島 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14) 해동제국기 에는 去 臥 蛇 三 里 라는 대응 기록이 보인다.

277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와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 미상 鳥 起 湍 15) 両 島 間 十 五 里 17. 미상 諏 訪 湍 / 白 博 多 二 百 廿 二 里 / 至 大 嶋 九 十 九 里 18. 寶 島 16) 渡 賀 羅 19. 小 寶 島 嶋 子 20. 喜 界 島 17) 琉 球 内 / 鬼 界 嶋 / 自 博 多 三 百 里 / 至 琉 球 百 五 十 里 21. 奄 美 大 島 18) 琉 球 内 / 大 島 / 白 博 多 三 百 十 二 里 / 至 琉 球 百 里 22. 德 之 島 19) 度 九 鴫 / 白 博 多 三 百 四 十 二 里 / 至 琉 球 七 十 里 23. 沖 永 良 部 島 琉 球 内 / 小 崎 惠 羅 武 自 博 多 三 百 七 十 二 里 / 至 琉 球 四 十 里 24. 与 論 島 與 論 島 / 自 博 多 三 百 九 十 七 里 / 去 琉 球 十 五 里 25. 미상( 須 古 摩, 西 古 見 ) 琉 球 内 / 思 柯 未 / 日 本 唐 土 之 境 / 自 博 多 二 百 八 十 七 里 / 至 大 嶋 二 十 五 里 26. 미상 國 頭 城 27. 雲 天 港 雲 見 泊 / 要 津 28. 今 歸 仁 구스쿠 20) 伊 麻 奇 時 利 城 / 昆 北 何 崎 29. 미상 21) 30. 瀨 底 島 世 世 九 浦 / 有 人 里 31. 미상 河 尻 城 32. 미상 白 石 城 33. 讀 谷 崎 ( 殘 波 岬, 崎 枝 ) 大 西 崎 34. 北 谷 구스쿠 22) 奇 羅 溪 城 15) 해동제국기 에는 去 諏 訪 湍 十 五 里 라는 대응 기록이 보인다. 16) 해동제국기 에는 渡 賀 羅 / 去 二 百 六 十 里, 去 大 島 十 里 라고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17) 해동제국기 에는 鬼 界 島 / 属 琉 球, 去 上 松 二 百 九 十 八 里, 去 大 島 三 十 里 라고 되 어 있다. 18) 해동제국기 에는 大 島 / 去 恵 羅 武 一 百 四 十 五 里, 属 琉 球 라고 되어 있다. 19) 해동제국기 에는 度 九 島 / 去 大 島 三 十 里, 属 琉 球 로 되어 있다. 20) 自 此 北 河 崎 의 오기로 본다. 21) 해동제국기 에는 那 五 城 이라는 기록이 있다. 22) 해동제국기 의 波 라는 글자가 명료하지 않다. 溪 의 오기로 보기도 한다.

278 27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35. 미상 23) 慶 禪 寺 36. 泊 港 ( 那 覇 市 ) 24) 毒 大 嶋 鬼 界 之 舩 / 皆 入 此 浦 37. 미상 25) 國 聖 寺 / 僧 禄 38. 報 恩 寺? 26) 法 音 寺 39. 미상 27) 飛 羅 加 泊 40. 久 茂 地 ~ 泊 28) 此 江 湖 來 往 有 滿 乾 / 廣 一 里 41. 那 覇 港 那 波 皆 津 / 日 本 人 本 嶋 人 家 有 此 42. 親 見 世 29) 此 地 王 之 庫 藏 / 衆 多 有 43. 久 米 村 九 靣 里 / 江 南 人 家 在 此 44. 波 上 宮 30) 波 上 熊 野 權 現 31) 45. 長 虹 堤 32) 石 橋 / 此 下 有 五 水 46. 那 覇 港 口 33) 那 波 皆 津 口 / 江 南 南 蛮 日 本 之 / 舩 入 此 浦 47. 御 物 구스쿠 34) 江 南 南 轡 寶 物 在 此 / 見 物 具 足 廣 48. 伊 計 구스쿠 35) 池 具 足 城 49. 勝 連 구스쿠 賀 通 連 城 50. 中 城 灣 浦 51. 越 來 구스쿠 五 欲 城 52. 中 城 中 貝 足 城 23) 해동제국기 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24) 해동제국기 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25) 해동제국기 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26) 해동제국기 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27) 해동제국기 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28) 해동제국기 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29) 해동제국기 에는 國 庫 라고만 되어 있다. 30) 해동제국기 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31) 1451년에 건설된 해상도로, 부도라고도 하였다. 도안이 (B) 지도를 조선에 가져온 시기가 1453년이다. 따라서 해동제국기 의 지도는 1451년 이후 1453년 이전에 제작된 지도임을 알 수 있다. 32) 해동제국기 에는 石 橋 라고만 되어 있다. 33) 해동제국기 에는 湾 口 / 江 南 南 蛮 日 本 商 舶 所 泊 이라고 되어 있다. 34) 해동제국기 에는 寶 庫 라고만 되어 있다. 35) 伊 計 島 에 위치한 구스쿠이다.

279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와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 미상 鬼 具 足 城 54. 大 城 (우후구스쿠) 越 法 具 足 城 55. 玉 城 (타마구스쿠) 玉 具 城 56. 島 尻 大 里 구스쿠 36) 37) 守 城 / 島 尾 城 38) 田 野 間 人 民 衆 多 57. 미상 阿 義 那 之 城 39) 山 間 田 畠 人 家 多 北 / 自 是 至 國 頭 山 峯 嶮 58. 浦 添 구스쿠 40) 41) 浦 傍 城 / 自 内 裏 至 此 一 里 42) 59. 舊 護 國 寺 護 國 寺 60. 龍 潭 ( 首 里 ) 蓮 池 43) 61. 미상 太 倉 / 执 政 人 在 所 西 44) 南 / 自 是 西 皆 田 畠 也 45) 皆 人 里 東 門 3 46) 琉 球 國 62. 鳥 島 鳥 嶋 / 至 琉 球 七 十 里 / 此 嶋 硫 黄 琉 球 國 所 取 47) 63. 伊 平 屋 島 琉 球 内 / 惠 平 也 嶋 / 自 博 多 三 百 九 十 二 里 / 至 琉 球 二 十 里 36) 산남왕의 거성으로 1461년까지는 존재하였으나, 1683년에는 폐허가 되었다. 37) 해동제국기 에는 島 尾 城 이라고만 되어 있다. 38) 해동제국기 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39) 해동제국기 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40) 15세기 초까지 中 山 國 의 거점이었다. 41) 해동제국기 에는 浦 傍 城 이라고만 되어 있다. 42) 해동제국기 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43) 해동제국기 에는 大 倉 / 王 弟 大 臣 所 居 이라고 하였다. 44) 해동제국기 에는 南 / 自 此 至 島 尾 皆 由 田 이라고 되어 있다. 45) 해동제국기 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46) 해동제국기 에는 琉 球 國 都 라고 하였다. 47) 해동제국기 에는 惠 平 也 山 / 去 琉 球 二 十 里, 去 上 松 三 百 九 十 里, 属 琉 球 라고 하 였다.

280 28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64. 古 宇 利 島 郡 嶋 / 有 人 里 65. 伊 是 名 [이제나] 島 琉 球 内 / 伊 是 那 / 自 博 多 三 百 九 十 七 里 / 至 琉 球 十 五 里 66. 伊 江 島 泳 嶋 / 有 人 里 67. 미상 師 子 嶋 68. 粟 國 島 粟 嶋 / 自 琉 球 三 十 五 里 69. 慶 良 間 列 島 訃 羅 婆 嶋 / 即 百 嶋 也 / 自 琉 球 五 十 里 70. 久 米 島 九 米 嶋 / 自 琉 球 百 五 十 里 71. 花 甁 嶼 ( 尖 閣 列 島 )? 花 鳴 / 自 琉 球 三 百 里 72. 미상 有 見 嶋 73. 津 堅 島 通 見 嶋

281 동북아역사논총 규정 및 규칙 연구윤리위원회 구성 운영 규칙 편집위원회 규정 논총 간행 및 논문 심사 규정 논문 심사 내규 투고 방법 및 원고 작성 요령

282 28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연구윤리위원회 구성 운영 규칙 제정 규칙 제19호 개정 규칙 제43호 제1조 (목적) 이 규정은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윤리위원회(이하 위원회 라 한다) 의 구성 및 운영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용어의 정의) 이 규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 각 호와 같다. 1.``` 연구부정행위 (이하 부정행위 라 한다)라 함은 연구를 제안, 수행하거나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행하여진 위조, 변조, 표절 등 연구의 진 실성을 침해하는 다음의 행위를 말한다. 1)``` 위조 라 함은 자료나 연구결과를 허위로 만들고 이를 기록하거나 보고 하는 행위를 말한다. 2)``` 변조 라 함은 연구와 관련된 자료, 과정 및 연구결과를 사실과 다르게 변경하거나 누락시켜 진실에 부합하지 않도록 하는 행위를 말한다. 3)``` 표절 이라 함은 타인의 아이디어, 연구과정 및 연구결과 등을 적절한 인용 표시 없이 연구에 사용하거나 자신이 이미 발표한 연구결과를 적 절한 인용 표시 없이 부당하게 발표하는 행위를 말한다. 2.``` 연구부적절행위 (이하 부적절행위 라 한다)라 함은 연구내용 또는 결과에 대하여 학술적 공헌 또는 기여를 한 사람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저자 자 격을 부여하지 않거나, 학술적 공헌 또는 기여를 하지 않은 자에게 감사 의 표시 또는 예우 기타 이유로 저자 자격을 부여하는 행위를 말한다. 3.``` 제보자 라 함은 부정행위 또는 부적절행위를 인지한 사실 또는 관련 증거 를 위원회에 알린 자를 말한다. 다만,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당해 주장 이나 증언에 반하는 사실을 간과한 자는 제보자로 간주하지 않는다. 4.``` 피조사자 라 함은 제보 또는 위원회의 인지에 의하여 부정행위 또는 부적 절행위의 조사 대상이 된 자 또는 조사 수행 과정에서 부정행위 또는 부 적절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어 조사의 대상이 된 자를 말한다.

283 동북아역사논총 규정 및 규칙 ``` 예비조사 라 함은 본 조사 실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하여 제보된 사실에 대한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예비적인 사실 확인 절차를 수행하는 것을 말 한다. 6.``` 본조사 라 함은 부정행위 또는 부적절행위의 혐의에 대한 사실 여부를 입 증하기 위한 절차를 말한다. 제3조 (기능) 위원회는 재단 소속의 연구자와 재단을 통하여 연구비를 지원 받 은 자 및 재단 학술지에 원고를 게재한 자 등의 연구윤리와 관련된 다음 각호의 사항을 심의 의결한다. 1. 연구윤리 관련 제도의 수립 및 운영에 관한 사항 2. 부정행위 및 부적절행위의 예방조치에 관한 사항 3. 예비 본조사의 착수 및 조사결과의 승인에 관한 사항 4. 예비조사위원회, 조사위원회의 구성에 관한 사항 5. 제보자 보호 및 피조사자 명예회복 조치에 관한 사항 6. 조사결과의 처리, 후속조치 및 재심의의 처리에 관한 사항 7. 기타 위원장이 부의하는 사항 제4조(구성) 1.``` 위원회는 사무총장, 독도연구소장, 역사연구실장, 법률자문관(이하 당연 직 위원 이라 한다)을 포함하여 7인의 위원으로 구성하며, 위원장은 사무 총장이 되고 부위원장은 논총편집위원장이 수행한다. 2.``` 위원장이 부득이한 사유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부위원장이 그 직무를 대행한다. 3.``` 당연직 이외의 위원은 재단 부연구위원 이상의 연구직 중에서 이사장이 임명하며, 그 임기는 2년으로 한다. 4.``` 위원회의 원활한 업무수행을 위하여 연구직 직원 중에서 이사장이 임명 한 자를 간사로 한다. 5.``` 위원장은 위원회의 의견을 들어 전문위원을 위촉할 수 있다.

284 28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제5조(회의) 1.```위원회의 회의는 필요한 경우에 위원장이 소집하고 주재한다. 2.``` 회의는 재적위원 과반수 출석으로 성립하며 출석위원 3분의 2의 찬성으 로 의결한다. 3.``` 위원회는 필요한 경우 위원이 아닌 자를 회의에 참석시켜 의견을 들을 수 있다. 4.```회의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한다. 제6조(제보 및 증거보전) 1.``` 제보자는 위원장에게 구술 서면 전화 전자우편 등 가능한 모든 방법 으로 제보할 수 있으며 실명으로 제보함을 원칙으로 한다. 2.``` 위원회는 제보에 대한 증거보전을 위하여 연구기록이나 증거의 상실, 파 손, 은닉 또는 변조 등을 방지하기 위한 상당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제7조(검증시효) 1.``` 제보의 접수일로부터 만 5년 이전의 부정행위 및 부적절행위에 대해서는 이를 접수하였더라도 처리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한다. 2.``` 5년 이전의 부정행위 및 부적절행위라 하더라도 재단의 운영상의 장애를 초래하거나, 재단의 위상을 심각하게 훼손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위원 회의 의결에 따라 이를 조사할 수 있다. 제8조(예비조사위원회) 1.``` 위원회는 제6조 제1항에 의한 제보를 접수한 경우 예비조사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3인 이내의 위원으로 예비조사위원회를 구성한다. 2.``` 예비조사는 접수일로부터 15일 이내에 착수하고, 조사 착수일로부터 30 일 이내에 완료하여 위원회의 승인을 받도록 한다. 3.```예비조사에서는 다음 각 호의 사항에 대한 검토를 실시한다. 1) 제보내용이 부정행위와 부적절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

285 동북아역사논총 규정 및 규칙 285 2)``` 제보내용이 구체성과 명확성을 갖추어 본조사를 실시할 필요성과 실 익이 있는지 여부 3)```제보일이 시효 기산일로부터 5년을 경과하였는지 여부 4. 예비조사 결과보고서에는 다음 각 호의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1) 제보의 구체적인 내용 및 제보자 신원정보 2) 조사의 대상이 된 부정행위 혐의 및 관련 연구과제 3) 본조사 실시 여부 및 판단의 근거 4) 기타 관련 증거 자료 제9조(본조사 착수 및 기간) 1.``` 본조사는 위원회의 예비조사결과 승인 후 30일 이내에 착수되어야 하며, 이 기간 동안 본조사 수행을 위한 위원회(이하 조사위원회 라고 한다)를 구성하여야 한다. 2.``` 본조사는 판정을 포함하여 조사 착수일로부터 90일 이내에 완료하여야 한다. 3.``` 조사위원회가 제2항의 기간 내에 조사를 완료할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 위원회에 그 사유를 설명하고 기간연장 요청을 하여야 한다. 제10조(조사위원회의 구성) 1.``` 조사위원회는 5인 내지 7인의 조사위원으로 구성하며 당해 연구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 및 경험이 풍부한 자를 3인 이상 포함시켜야 한다. 2.``` 조사위원으로 전문성과 객관성을 가진 외부 인사를 2인 이상 위촉함을 원 칙으로 한다. 3.```당해 조사 사안과 이해관계가 있는 자는 조사위원으로 위촉할 수 없다. 제11조(기피 제척 회피) 1.``` 피조사자 또는 제보자는 위원 또는 조사위원에게 공정성을 기대하기 어려 운 사정이 있는 때에는 그 이유를 밝혀 위원회에 기피를 신청할 수 있다.

286 286 동북아역사논총 51호 2.``` 당해 안건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자는 안건의 심의 의결 및 조사 에 관여할 수 없다. 3.``` 제1항 또는 제2항의 사유가 있다고 판단하는 위원 및 조사위원은 위원회 에 회피를 신청할 수 있다. 4.``` 기피 또는 회피 신청에 대한 결정에 기피신청된 위원이나 회피신청한 위 원은 참여할 수 없다. 제12조(조사위원회의 권한과 책무) 1.``` 조사위원회는 조사과정에서 제보자 피조사자 및 참고인에 대하여 출석 과 자료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2.``` 조사위원회는 연구기록이나 증거의 상실, 파손, 은닉 또는 변조 등을 방 지하기 위하여 상당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3.``` 조사위원회는 조사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조사대상 연구와 연구자에게 부 당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제13조 (진술 기회의 보장) 조사위원회는 혐의 사실에 대해 피조사자에게 의견 을 제출하거나 해명할 기회를 부여하여야 한다. 제14조(결과보고서의 제출) 1.``` 조사위원회는 조사 완료 후 10일 이내에 조사결과보고서를 위원회에 제출 하여야 한다. 2.``` 조사결과보고서에는 다음 각 호의 사항이 포함되어야 한다. 1) 제보의 구체적인 내용 및 제보자 신원정보 2) 조사의 대상이 된 부정행위 또는 부적절행위 혐의 및 관련 연구과제 3) 해당 연구과제에서의 피조사자의 역할과 혐의의 사실 여부 4) 관련 증거 및 증인 5)``` 조사결과에 대한 제보자와 피조사자의 주장 내용과 그에 대한 판단 및 처리결과 6) 조사위원 명단

287 동북아역사논총 규정 및 규칙 287 제15조(조사결과에 따른 조치) 1.``` 위원회는 재단 소속 연구자의 행위가 부정행위 또는 부적절행위에 해당한 다는 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를 승인한 때에는 이사장에게 징계 및 상당한 제재조치를 건의하여야 한다. 2.``` 위원회는 재단을 통하여 연구비를 지원 받은 자의 행위가 부정행위 또는 부적절행위에 해당한다는 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를 승인한 때에는 이사 장에게 상당한 제재조치를 건의하고 소속 기관장에게 조사 결과를 통보 하여야 한다. 3.``` 위원회는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진실과 다른 제보를 하거나 연구윤리 관련 허위사실을 유포한 자에 대해 이사장에게 징계 또는 상당한 제재조 치를 건의할 수 있다. 제16조 (결과의 통지) 위원장은 조사결과에 대한 위원회의 결정을 서면으로 작 성하여 지체 없이 피조사자 및 제보자에게 통지한다. 제17조 (재심의) 피조사자 또는 제보자는 위원회의 결정에 불복할 경우 전조의 통지를 받은 날로부터 20일 이내에 이유를 기재한 서면으로 위원회에 재심의를 요청할 수 있다. 제18조(비밀유지의 의무 등) 1.``` 위원회와 조사위원회는 제보자를 보호하고 피조사자의 명예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2.``` 제보 조사 심의 의결 및 건의 등과 관련된 일체의 사항은 비밀로 하 되 상당한 공개의 필요성이 있는 경우 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공개할 수 있다. 3.``` 위원, 조사위원, 조사에 직 간접적으로 참여한 자, 이사장 및 관계 임직 원은 심의 의결 조사 기타 직무수행 과정에서 취득한 정보를 누설하여 서는 아니 된다. 그 직을 그만둔 후에도 같다.

288 288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제19조 (경비) 위원회의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예산의 범위 내에서 지급할 수 있다. 제20조 (운영지침) 기타 위원회 운영에 필요한 세부사항은 위원회의 심의를 거 쳐 별도로 정한다. 부 칙<제19호, > 이 규칙은 이사장의 승인을 받은 날부터 시행한다. 부 칙<제43호, > 이 규칙은 이사장의 승인을 받은 날부터 시행한다.

289 동북아역사논총 규정 및 규칙 289 편집위원회 규정 1.``` 편집위원회는 동북아역사 관련 고대 중세 근현대 연구 영역의 전문연구 자로 구성하고, 편집위원의 임기는 2년이다. 2.``` 편집위원회는 위원장, 편집위원으로 구성한다. 위원장은 동북아역사재단 (이하 재단)의 동북아역사논총 발간사업 담당부서장이 수행함을 원칙으로 하나, 부득이한 경우 이사장이 지명할 수 있다. 편집위원장은 재단소속 편 집위원 중에서 실무를 총괄할 편집이사를 임명한다. 3.``` 편집위원의 유고 시 편집위원회는 차기 호 논문 심사가 있기 전에 새로운 편집위원을 선정한다. 4.``` 편집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심의 결정한다. 1) 동북아역사논총 (이하 논총)의 편찬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 2) 논총에 게재하기 위한 일체의 논문류에 대한 심사 3) 논총 게재 기획논문, 자료소개, 서평, 설림 등에 대한 기획과 심사 4) 기타 논총 관련 사업에 대한 기획과 심의 5.``` 편집위원장은 편집위원회의 회의를 주재하고 논총의 편집과 간행을 총괄한다. 6.``` 재단 소속 편집위원은 논총의 편집과 간행에 따른 실무를 담당한다. 7.``` 편집위원회는 논총 발간 전에 개최하고, 편집위원회의 진행절차는 편집 및 토의사항을 중심으로 하여 기타 필요한 사항에 대해 논의한다. 편집이사는 편집위원회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참고자료 및 보고사항을 사전에 준비하 고 회의록을 작성한다. 이 편집위원회 규정은 2004년 12월 24일 제정된 북방사논총 편집위원회 규 정을 승계하여, 2006년 11월 22일 개최된 동북아역사논총 제1차 편집위원 회의 심의를 거쳐 개정되었고, 2013년 8월 30일, 2015년 2월 23일, 2016년 2월 24일 편집위원회에서 재개정되었음.

290 290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논총 간행 및 논문 심사 규정 1.``` 논총에는 다음과 관련된 특집, 논문, 설림, 자료소개, 서평 등의 글을 게재 한다. 1) 한국사(문화) 및 동아시아사(문화)와 관련된 문제 2) 독도 및 영토 관련 문제 3) 본 재단의 목적에 부합하는 논문 2.``` 논총은 3월 31일, 6월 30일, 9월 30일, 12월 31일 매년 4회 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3.``` 편집위원회는 투고된 원고를 다음과 같은 과정과 내용으로 심사한다. 1)``` 편집위원회는 투고된 모든 원고를 논문 제목, 형식요건, 원고분량의 적 절성, 재단 목적에 대한 부합성 등을 기준으로 1차 심사하고, 참석 편집 위원 과반수 통과 판정을 얻어 2차 심사에 회부한다. 2)``` 편집위원회는 투고원고 중 논문류의 경우 편당 학계 전문가 3인의 심사 자를 선정하여 2차 심사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2차 심사 때에는 공정성 을 위해 필자명을 반드시 지운 뒤 심사한다. 3)``` 심사위원은 심사 의뢰된 논문을 편집위원회의 정해진 양식에 따라 수정 없이 게재(A), 수정 후 게재(B), 수정 후 재심사(C), 게재 불가(D) 의 네 등급으로 판정한 후 편집위원회에 제출하여야 한다. 이중 B C등급의 경우 수정사항이, D등급의 경우에는 게재 불가 이유가 반드시 명시되어 야 한다. 4)``` 편집위원회는 심사 통과 논문 편수가 논총의 일반적인 분량을 초과할 경 우 편집위원회의 기획과 심사 성적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우선 게재 순 위를 정한다. 4.``` 편집위원회는 심사위원과 심사과정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 일체를 대외비로 한다. 이외 투고자는 게재가 결정된 논문이라 할지라도 심사위원의 보완 요 구가 있을 경우 이를 최대한 존중하여야 한다.

291 동북아역사논총 규정 및 규칙 ``` 편집위원회는 심사 결과를 투고자에게 서면 등의 방법으로 통보한다. 논문 은 아래와 같은 항목에 의하여 심사한다. 1) 논문 제목의 적절성 2) 형식요건 및 체제의 정연성 3) 논리성 및 독창성 4) 학술적 가치 5) 인용자료의 적절성 6) 분량의 적절성 7) 요약문의 적절성 6.``` 편집위원회는 논총에 투고된 일체의 원고에 대해 심사 종료 후 돌려주지 않는다. 이 심사규정은 2004년 12월 24일 제정된 북방사논총 심사규정을 승계하여, 2006년 11월 22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개최된 제1차 편집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되었음.

292 292 동북아역사논총 51호 논문 심사 내규 1. 편집위원회는 심사 결과를 다음의 네 가지로 처리한다. 1) 게재 가:3인 모두 A로 판정하는 경우 예:(A, A, A) 2) 수정 후 게재:3인 모두 B 이상으로 판정한 경우 / 2인이 A로, 나머지 1 인이 C로 판정한 경우 예) (A, A, B) (A, B, B) (B, B, B) (A, A, C) 3) 수정 후 재심사:2인이 A와 B 이하로 판정하고 나머지 1인이 C로 판정 한 경우 / 1인이 A나 B로 판정하고 2인이 C로 판정한 경우 예) (A, B, C) (B, B, C) (A, C, C) (B, C, C) 4) 심사위원 교체 재심사:2인이 B 이상으로 판정하였는데 1인이 D로 판정 한 경우, D 판정 1건에 대해서만 심사위원을 교체하여 재심사함 예) (A, A, D) (A, B, D) (B, B, D) 5) 게재 불가:2인 이상이 C나 D로 판정한 경우(A, C, C와 B, C, C는 제 외) / 1인이 D로 판정하였는데 A가 포함되지 않은 경우 예) (A, C, D) (A, D, D) (B, C, D) (C, C, C) (C, C, D) (D, D, D) 2. 편집위원회는 논문 편수가 논총의 수록 분량을 초과하거나 또는 편집위원 회의 기획 상의 우선순위 등의 사정에 따라 심사 통과 원고 가운데 일부를 필자의 양해 하에 차기 호 또는 차차기 호에 실을 수 있다. 이 가운데 단순 히 논총 수록 분량 초과만이 원인일 때에는 심사 성적 순위로 해당 호 게재 를 결정한다. 3. 심사 결과 통보는 심사위원이나 과정을 대외비로 한 상태에서 심사 결과와 수정 제의 및 게재 불가 사유를 통보한다. 이 심사 내규는 2004년 12월 24일 제정된 북방사논총 심사 내규를 승계하 여, 2006년 11월 22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개최된 제1차 편집위원회의 심 의를 거쳐 확정되었고, 2011년 10월 7일 편집위원회에서 재개정되었음.

293 동북아역사논총 규정 및 규칙 293 투고 방법 및 원고 작성 요령 1.``` 동북아역사논총(이하 논총으로 약함)은 전문적인 학술지로서 논문, 설림, 서 평, 자료소개 등이 게재된다. 투고하고자 하는 원고는 논총 발간 전 투고신 청서와 함께 동북아역사논총 편집위원회 앞으로 제출하여야 한다. 2.``` 원고는 반드시 컴퓨터 파일로 작성하여야 한다. 원고 제출방식은 본문의 경 우 동북아역사논총 그림과 사진의 경 우 심사용 각 3부를 동북아역사논총 편집위원회 앞으로 보내야 한다. 또한 최종 원고 제출 시 사진은 해상도 300dpi 이상으로 하여 별도 제출한다. 3.``` 원고분량은 200자 원고지 150장 내외를 기준으로 하되 충분한 논지 전개를 위해 부득이한 경우 70장가량 초과할 수 있다. 그림과 사진의 수량은 논지 전개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으로 제한한다. 4.``` 원고는 제목, 필자(소속기관, 직위), 머리말, 본문, 맺음말, 국문초록, 국문 주제어, 영문초록, 영문 주제어, 참고문헌(필요 시)의 순서로 구성한다. 5.``` 논문의 목차와 소제목은 머리말로부터 순서에 따라 I``>``1``>``1)``>``(1)로 번호 매 김을 한다. 6.``` 본문은 까다로운 고유명사 또는 의미상의 혼돈이 예상되는 경우를 제외하 고 한글로 작성하되, 한자가 필요한 경우에는 맨 처음만 한글(한자)로 병기 하고 이후부터는 한글로만 표기한다. 7.``` 인용문은 본문의 문장 가운데에 삽입되는 경우 표시로 묶고, 인용문이 길어 문단을 나눌 경우에는 표시 없이 글자크기를 작게 하여 서술하고 괄호 안에 출전을 밝힌다. 8.``` 각주에서 현대문헌을 인용할 때에는 필자, 연도, 논문, 서책(출판사),

294 294 동북아역사논총 51호 쪽수 의 순서로 한다. 앞서 인용한 문헌을 재인용할 때에는 바로 위의 문헌 을 인용할 경우에는 필자, 연도, 위의 글(책), 쪽수 의 순서로, 바로 위 이전의 문헌을 인용할 경우에는 필자, 연도, 앞의 글(책), 쪽수 의 순서로 인용한다. 예)``` 동북인, 2006, 동북아사와 동북문화에 대하여, 동북아역사논총 1 호, 1~10쪽. 동북인, 2006, 위(앞)의 글(책), 1~10쪽. 9.``` 각주에서 고중세 문헌을 인용할 때에는 작자(필요 시), 서책, 편목, 인 용대문 의 순서로 한다. 이중 고중세 문헌은 필요할 경우 판본명이나 영인본 명을 밝힐 수 있고, 인용대문 중 전략, 중략, 후략 등은 로 표기한다. 예)``` 東 北 人, 東 北 集 ( 東 北 文 化 社 影 印 本 ). 東 北 有 高 士, 東 北 公 賢 裔 鵠 擁, 是 人 也. 10.``` 서양문헌을 인용할 때에는 책명은 이탤릭체, 논문은 큰따옴표로 표기하고 다음과 같은 순서와 방식으로 인용한다. 예)``` V. G. Childe, 1932, Chronology of prehistoric Europe:a review, Antiquity 6, pp. 206~212. 이 투고 요령은 2004년 12월 24일 제정된 북방사논총 투고 요령을 승계하 여, 2006년 11월 22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개최된 제1차 편집위원회의 심 의를 거쳐 확정되었으며, 2015년 2월 23일 편집위원회에서 개정되었음.

295 편집위원장 노기식 동북아역사재단 한중관계연구소 소장 편집이사 박선미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편집위원 김흥규 아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남상호 경기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현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안병직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윤유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이근우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원택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이종수 단국대학교 역사학과 부교수 이현혜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 임상범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전호태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정병삼 숙명여자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정재윤 공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정혜중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최영호 영산대학교 일본비즈니스학과 교수

296 前 北 方 史 論 叢 동북아역사논총 51호( ) 초판 1쇄 인쇄 2016년 3월 24일 초판 1쇄 발행 2016년 3월 31일 펴낸이 펴낸곳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등록 제 호(2004년 10월 18일)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통일로 81 임광빌딩 전화 팩스 ISSN 비매품 이 책의 출판권 및 저작권은 동북아역사재단이 가지고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어떤 형태나 어떤 방법으로도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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