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0CFBABBC1F6BFAAB1E2BEF7C0A7BEC8BCD2C1F8BBF3C1B6BBE72E687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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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돌 소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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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 간 등 록 번 호 진 상 조 사 보 고 서 의결 전시하 일본지역의 기업위안소 와 조선인 기업위안부 에 대한 진상조사 -홋카이도와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책임조사ㆍ보고서 작성 : 조 건(조사1과)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 보고서 작성:박정애
3 전시하 일본지역 기업위안소 와 조선인 기업위안부 에 대한 진상조사 -홋카이도와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요 약 문>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 각지의 탄광ㆍ광산 일대에는 일본 기업들이 직접 운영 하거나 이용 하던 기업위안소 가 설치되어 있었다. 기업위안소 는 일본군을 상대 했던 군위안소 와 구분되어 강제동원된 노무자들을 대상으로 한 성적 위안시설 이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은 전시체제 노무 동원과 관리에 성적 위안시설 이 필요 하다는 인식에서 기업위안소 를 설치했으며, 이곳에는 조선인 여성들이 인신매매 나 감언이설에 속은 채 끌려와 있었다. 주목할 점은 전시기 운영된 기업위안소 가 근대 일본의 사창ㆍ공창제, 그리고 그 아래에서의 인신매매 등으로 인한 민족 차별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는 점 이다. 일본은 1938년 이후 표면적으로는 풍속취체 등을 이유로 유흥업 억제 정 책을 실시했으나 이는 오히려 사창 을 묵인하는 조치로 이어졌고, 기존의 조선요 리옥 등의 시설이 기업위안소 로 변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들 시설에 는 적지 않은 수의 조선인 여성들이 위안부 로 강제동원되어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위원회에서는 일본지역 기업위안소 실태에 대한 진상규 명을 위해, 우선 기업위안소 의 등장 배경을 살피고, 이후 홋카이도와 규슈 지역 의 기업위안소 실태 및 특징에 대해 조사를 실시하였다. 특히 기업위안소 의 등 장 배경에서는 조선요리옥과 조선인 접객여성 의 현실 및 전시기 일본 공창제의 재편을 연관지어 고찰했다. 또한 두 차례에 걸친 현지조사를 토대로 홋카이도탄광 기선주식회사를 비롯하여 일본의 대표적 전범기업인 미쓰이와 미쓰비시 계열 회 사의 작업 현장에 설치되었던 홋카이도와 규슈 지역의 기업위안소 실태를 살펴 보았다. ⅰ
4 현재 위원회에 접수되어 피해자로 결정된 사례 중 기업위안소 에 동원된 위안 부 피해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것은 위안부 피해가 일본군과 관련되어 군을 상대로 한 것이라는 인식에 갇혀있는 데 기인한 측면이 크다. 그러나 기업위안소 는 군위안소 와 함께 전시기 일본 정부가 주도적으로 고안한 여성에 대한 성폭력 시스템임에 분명하다. 위원회 피해 신고 내용 중에는 기업위안소 설치와 기업위 안부 피해를 뒷받침하는 진술들이 적지 않은데, 앞으로 이를 토대로 기업위안소 와 기업위안부 피해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ⅱ
5 목 차 Ⅰ. 머리말 1 1. 조사배경 및 경과 1 2. 선행연구 및 개념 검토 4 3. 주요 조사 내용 15 1) 위원회 피해신고 현황 및 구술조사 / 15 2) 현지조사 / 21 3) 문헌조사 / 23 Ⅱ. 일본지역 기업위안소 의 등장 배경 일본 지역의 조선요리옥과 조선인 접객여성 28 1) 조선인 접객여성 의 공창금지와 조선요리옥 / 28 2) 조선인 접객여성 의 현실 / 전시기 공창제의 변동과 기업위안소 의 등장 41 1) 전시기 공창제의 재편과 조선인 노무자 강제동원 / 41 2) 화류병예방법의 실시와 기업위안소 의 등장 / 45 Ⅲ. 기업위안소 의 실태와 특징 홋카이도( 北 海 道 ) 지역의 기업위안소 49 1) 홋카이도 기업위안소 의 실태 / 49 2) 홋카이도 기업위안소 의 특징 / 규슈( 九 州 ) 지역의 기업위안소 64 1) 후쿠오카( 福 岡 ) 지역의 기업위안소 / 64 2) 나가사키( 長 崎 ) 지역의 기업위안소 / 69 3) 규슈지역 기업위안소 의 특징 / 72 Ⅳ. 맺음말 73 ⅲ
6 표목차 [표-1] 위안소 가 설치된 주요 사업장 일람 / 2 [표-2] 일본 내 기업위안부 관련 보도 기사 / 6 [표-3] 문헌자료에 나타난 용어 사용 사례 / 11 [표-4] 선행 연구에 나타난 용어사용 및 개념 규정 사례 / 12 [표-5] 위원회 신고자 중 노무위안소 관련 진술자 / 16 [표-6] 구술 청취를 실시한 구술자 명단 / 20 [표-7] 전시기 일본 내 발간 신문기사 조사 상황 / 24 [표-8] 일본지역 요리옥의 작부 인신매매에 관련한 기사 / 33 [표-9] 일본지역 조선인요리옥 조선인 접객여성 의 현실을 보여주는 기사 / 39 [표-10] 홋카이도 지역 각 탄광ㆍ광산의 기업위안소 설치 상황 / 52 사진목차 [사진-1] 미쓰이 스나가와 탄광 / 54 [사진-2] 가미시스가와 시가지 / 54 [사진-3] 나카무라 시가지 / 55 [사진-4] 나카무라 시가지 뒷길 / 55 [사진-5] 미쓰이 아시베츠 광업소 조선인 기숙사 위 언덕 / 57 [사진-6] 기숙사에서 위안소 까지 가는 길 / 57 [사진-7] 미쓰이 아시베츠 광업소 위안소 / 57 [사진-8] 쇼와 도요사토 조선인 기숙사가 있던 자리 / 58 [사진-9] 쇼와 도요사토 조선인 기숙사 자리 옆 철길 / 58 [사진-10] 진자 도오리 / 59 [사진-11] 나카 도오리 / 59 [사진-12] 전시기 스미토모 혼베츠 탄광 들어가는 길 / 59 [사진-13] 옛 호로나이 역 / 60 [사진-14] 옛 댄스홀 / 60 [사진-15] 댄스홀 건너편 시가지 / 60 [사진-16] 1935년의 미쓰이 비바이 광업소 / 61 [사진-17] 옛 사무소 자리 / 61 [사진-18] 옛 병원 자리 / 61 [사진-19] 옛 조선인 기숙사 자리 / 61 ⅳ
7 [사진-20] 옛 위안소 자리 / 61 [사진-21] 가로( 我 路 )의 현재 모습 / 62 [사진-22] 가로( 我 路 )의 옛 요리옥 / 62 [사진-23] 東 旅 館 별채 / 64 [사진-24] 新 吉 野 樓 건물 / 64 [사진-25] 朝 鮮 館 터 / 65 [사진-26] 陽 信 寮 터 / 65 [사진-27] 大 和 屋 터 / 65 [사진-28] 1992년까지 남아있던 大 和 屋 건물 / 65 [사진-29] 失 澤 性 病 院 건물 / 65 [사진-30] 접객점 터 / 66 [사진-31] 豊 泉 閣 터 / 66 [사진-32] 사카에마치의 당시 접객점 건물들 / 66 [사진-33] 사카에마치 소재의 접객점 大 多 和 터 / 66 [사진-34] 우라시마 가는 길 / 70 [사진-35] 우라시마 거리 / 70 [사진-36] 우라시마의 喜 浦 茂 男 씨 집 / 70 [사진-37] 제2갱구 앞의 아리랑고개 / 70 [사진-38] 옛 접객점' 터 / 70 그림목차 [그림-1] 북탄계 소라치 탄광 내 조선인 기숙사와 기업위안소 소재도 / 55 [그림-2] 비바이시 관내도 / 60 [그림-3] 미쓰비시 사키토 탄광 일대 지도( 長 崎 縣 西 海 市 崎 戶 町 ) / 69 ⅴ
8 Ⅰ. 머리말 Ⅰ. 머리말 1. 조사 배경 및 경과 일본지역 기업위안소 와 조선인 기업위안부 에 관한 조사는 2005년 9월 1일 일본 홋카이도( 北 海 道 )에 소재한 삿포로시사편찬위원회( 札 幌 市 史 編 纂 委 員 会 )의 연구원 니 시다히데코( 西 田 秀 子 )가 진상 규명을 신청하면서 시작되었다(접수번호 위원회-32). 니시다는 본인의 연구논문 전시하 홋카이도의 조선인 노무위안부의 성립과 실태 : 강제연행과의 관련성에서( 戰 時 下 北 海 道 における 朝 鮮 人 勞 務 慰 安 婦 の 成 立 と 實 態 : 强 制 連 行 との 關 係 性 において) 1) 를 근거로 하여 다음의 네 가지 사실을 제시하였다. 첫째, 1939년 10월 홋카이도석탄광업회 는 홋카이도청 보안과에 조선요리옥 의 신 설을 요청했고, 그 허가에 의해 각 기업은 쉼터( 憩 いの 家 ) 등의 명칭으로 위안소를 신설했다. 둘째, 그 후 탄광 이외의 기업에서도 경찰서의 허가를 얻어 개설했다. 셋 째, 관헌의 허가와 기업의 관여에 의해 개설된 위안소는 적어도 17개 시설이 확인되 고, 이곳에서 종사한 여성 수는 최저 90명 내외였다고 확인된다. 넷째, 일본이 패전 함에 따라 대부분의 위안소는 1945년 해방 직후 폐지되었으나, 유바리( 夕 張 ) 탄광의 시설은 같은 해 10월 조선인노동조합이 결정된 이후에야 폐쇄되었고, 조선인 여성들 도 이때 해방될 수 있었다. 요컨대 신청인은 홋카이도 일대에 설치되었던 조선인 기업위안소 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밝혀낸 사실들을 제시하면서, 전시 하 조선인 노무자를 동원했던 홋카이도의 탄광ㆍ광산 기업이 신청ㆍ개설한 기업위안소 와 위안부의 실태 조사 및 그 외 일본 국내 기업위안부 에 대한 진상 조사를 요청했던 것이다. 진상조사 신청을 전후하여 사회 일반에서는 기업위안소 와 조선인 기업위안부 에 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었다. 이는 오랫동안 이 주제에 관심을 갖고 조사와 연구를 진행해 오던 정진성이 2003년부터 자료를 공개하고 연구결과 2) 를 발표한 것이 계기가 1) 札 幌 女 性 史 硏 究 會, 女 性 史 硏 究 ほっかいどう 創 刊 號, ) 정진성, 연구노트- 일제 말 강제동원기의 기업위안부에 관한 연구, 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 역사 제63권, 2003년 5월; 강제동원기 기업 위안부 에 관한 연구: 北 海 道 (홋카이도) 탄광지역을 중심으로, 여성부 용역보고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국외자료 조사ㆍ연구(Ⅱ), 2003년 12월; 기업성노 예제에 관한 연구, 일본군 성노예제,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년 6월
9 진상조사보고서 되어, 언론이 이에 대해 여러 차례 보도 3) 를 하였던 데에서 기인했다. 정진성은 2005년 2월 우리 위원회에 관련 자료를 기증하여 이 주제에 관한 조사에 발판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진상조사의 신청 시점이 제1차 진상 및 피해조사 신청기간( ~ )을 지난 때였기 때문에, 이 건에 대한 진상조사의 개시가 결정된 것은 2차 조사신청이 개시( ~ )된 이후인 2005년 12월 2일 제16차 위원회에서였다. 이 때의 검토의견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홋카이도 석탄광업회는 1939년에 조선인 노무자가 동원될 것에 대비하여 이 들을 성적으로 위안 하여 생산을 높이기 위해 조선요리옥, 곧 기업위안소 를 개설 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에 따라 조선인 여성이 동원되었다. 둘째, 홋카이도 지역 외 에 규슈, 교토 등 조선인 노무자가 강제동원 되었던 지역에 기업위안소 가 있었다는 기록과 증언이 산발적으로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 관한 진상조사가 필요 하다. 셋째, 경찰 및 기업관계를 비롯하여 신문ㆍ잡지 등의 문헌자료가 확보되었으 며, 구술 채록과 현지조사를 통해 실태조사가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설립 주체의 불 분명함을 감안하여 기업위안소 대신 노무위안소 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로 한다. 용어 문제에 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검토하겠지만, 조사 개시 시점에서 기업위 안소 대신 노무위안소 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배경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해 두고자 한다. 일본군 위안소 와 노무위안소 의 구분은, 이용주체의 차이, 곧 위안소 를 이 용한 사람들이 일본군이냐, 강제동원된 노무자들이냐의 차이였다. 더불어 노무자들 이 이용했다는 위안소 의 설치 장소는 노무자들이 집단동원되었던 장소, 즉 탄광이 나 광산, 비행장 공사장, 대본영 공사장 같은 지역의 주변이었다. [표-1] 위안소 가 설치된 주요 사업장 일람 4) 행선지 사업소 업종 소재지현 시정촌 전거 昭 電 豊 里 炭 鉱 慰 安 婦 鉱 山 北 海 道 赤 平 市 調 査 3) 日 기업도 위안부 강제동원 美 비밀문서 공개, 동아일보, 2003년 1월 4일; 미쓰이 등 日 기 업도 조선인 위안부 모집, 문화일보, 2003년 1월 4일; 취업사기에 속아 성노예로 팔려가 미국 서 위안부 강제동원 문건 입수, 오마이뉴스, 2003년 1월 7일; 칼럼-기업위안부 명예회복ㆍ보상 서둘러야, 한겨레, 2003년 1월 13일; 위안부ㆍ강제징용 피해자 외로운 소송투쟁 강 건너 불 보 듯 하는 한국 외교부를 고발한다, 오마이뉴스, 2003년 1월 22일. 일제피해 배상 소송상대 日 정부 서 기업으로, 세계일보, 2005년 2월 28일. 한편 니시다의 연구성과 또한 2003년 10월에 한국언론 을 통해 소개되어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日 당국 조선인 노무위안소 에 적극 관여, 연합 뉴스, 2003년 10월 17일. 더불어 TV시사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소개된 바가 있다. 기업위안부, 시사매거진 2580, MBC, 2004년 2월 29일 방영. 4) 朝 鮮 人 强 制 連 行 期 (1939~1945)の 朝 鮮 人 强 制 勞 働 現 場 一 覽 (www16.ocn.ne.jp/~pacohama/sensosekinin/flaber0506.html) 에서 발췌. 군위안소 와 이용주체가 모호한 위안소 는 목록에서 제외함
10 Ⅰ. 머리말 雄 別 炭 鉱 慰 安 婦 鉱 山 北 海 道 阿 寒 町 調 査 旭 川 慰 安 婦 鉱 山 北 海 道 旭 川 市 調 査 三 井 砂 川 炭 鉱 慰 安 婦 鉱 山 北 海 道 上 砂 川 町 調 査 北 炭 空 知 炭 鉱 慰 安 婦 鉱 山 北 海 道 歌 志 内 市 調 査 住 友 歌 志 内 炭 鉱 慰 安 婦 鉱 山 北 海 道 歌 志 内 市 調 査 静 狩 鉱 山 慰 安 婦 鉱 山 北 海 道 長 万 部 町 調 査 春 採 炭 鉱 慰 安 婦 鉱 山 北 海 道 釧 路 市 調 査 札 幌 慰 安 婦 鉱 山 北 海 道 札 幌 市 調 査 豊 羽 鉱 山 慰 安 婦 鉱 山 北 海 道 札 幌 市 調 査 大 畑 慰 安 婦 軍 工 事 青 森 大 畑 町 調 査 茂 原 郡 慰 安 所 飛 行 場 建 設 千 葉 茂 原 市 松 代 大 本 営 慰 安 婦 軍 工 事 長 野 長 野 市 証 言 海 軍 藤 枝 飛 行 場 工 事 慰 安 婦 飛 行 場 建 設 静 岡 大 井 川 町 証 言 静 岡 2 丁 町 慰 安 婦 土 木 建 設 静 岡 静 岡 市 証 言 大 井 川 久 野 脇 発 電 慰 安 婦 土 木 建 設 静 岡 中 川 根 町 証 言 大 江 山 慰 安 婦 鉱 山 京 都 加 悦 町 調 査 柳 本 慰 安 婦 飛 行 場 建 設 奈 良 天 理 市 調 査 柞 田 慰 安 婦 飛 行 場 建 設 香 川 観 音 寺 市 調 査 飯 塚 炭 鉱 慰 安 婦 鉱 山 福 岡 飯 塚 市 特 高 調 査 三 井 山 野 炭 鉱 慰 安 婦 鉱 山 福 岡 稲 築 町 証 言 古 河 大 峰 炭 鉱 慰 安 婦 鉱 山 福 岡 川 崎 町 調 査 豊 州 炭 鉱 慰 安 婦 鉱 山 福 岡 川 崎 町 調 査 赤 坂 炭 鉱 慰 安 婦 鉱 山 福 岡 庄 内 町 証 言 古 河 峰 地 炭 鉱 慰 安 婦 鉱 山 福 岡 添 田 町 調 査 大 鶴 炭 鉱 慰 安 婦 鉱 山 佐 賀 肥 前 町 調 査 崎 戸 炭 鉱 慰 安 婦 鉱 山 長 崎 崎 戸 町 証 言 高 島 炭 鉱 慰 安 婦 鉱 山 長 崎 高 島 町 証 言 鯛 生 鉱 山 慰 安 婦 鉱 山 大 分 中 津 江 村 調 査 鹿 屋 慰 安 婦 港 湾 建 設 鹿 児 島 鹿 屋 市 証 言 石 垣 慰 安 婦 軍 工 事 沖 縄 石 垣 市 調 査 嘉 手 納 慰 安 婦 飛 行 場 建 設 沖 縄 嘉 手 納 町 調 査 嘉 手 納 大 道 慰 安 婦 飛 行 場 建 設 沖 縄 嘉 手 納 町 調 査 白 保 炭 鉱 慰 安 婦 鉱 山 沖 縄 竹 富 町 調 査 外 間 慰 安 婦 運 輸 荷 役 沖 縄 東 風 平 町 調 査 川 田 慰 安 婦 運 輸 荷 役 沖 縄 東 村 証 言 이들 장소에 설치된 위안소 들은 강제동원된 노무자들에 대한 노무관리 차원에서 설치되었다는 공통점을 갖지만, 설치주체가 기업이나 군으로 엇갈리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기업의 노무자들이 이용한 위안소 라고 하더라도, 기업의 특별한 고려 없이, 당시 일본 공창제 아래에서 국가관리 성매매의 범위 안에서 존재한 경우도 있었다
11 진상조사보고서 이러한 상황에서 홋카이도의 사례로 도출된 기업위안소 의 개념만으로는 일본지역 을 대상으로 기업과 국가의 의도 하에 설치된 노무자들의 성적 위안시설 을 살펴보 겠다는 진상조사의 취지를 제한할 위험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진상조사의 제목은 노무위안소 로 확장하되, 조사결과 기업의 개입과 책임이 뚜렷한 경우 기업위안소 로 호칭하여 전시 성동원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5). 그런데 조사결과, 비행장 건설공사나 대본영 공사 등 군이 주체가 되어 공사를 지 휘하고, 여기에 동원된 군속, 노무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위안소 는 강제동원 된 노무자들이 이용했다 하더라도 그 관리방식이나 통제방식이 군위안소 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노무위안소 라는 호칭으로 이들 위안소 까지 포 함시킬 경우, 전시기에 군인을 상대로 했던 군위안소 와 함께 노무자들 대상의 위 안소 또한 설치되어 있었고, 따라서 군위안소 와 비교할 수 있는 노무자 대상의 위 안소 의 성격과 실태를 규명해 보겠다는 조사취지를 불분명하게 할 위험이 있었다. 그리하여 결과 보고서를 작성할 시점에서는 전문가 검토회 6) 를 거치면서 그 성격을 뚜렷이 하여 책임소재를 분명히 한다는 의미에서 기업위안소 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로 하였다. 한편 이 보고서는 2008년 11월 14일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제 51차 위원회에 상정되어 의결되었다. 7) 이후 수정ㆍ보완을 거쳐 출간될 예정이었으 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발행되지 못한 채 남겨져 있었다. 2010년 3월 우리 위원회 설립 후 책임조사자 변경과 함께 보고서 발간이 다시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애초 보고서 작성 담당자의 부재를 비롯한 여러 제약으로 추가 조사 및 보완은 여의 치 않았다. 8) 결국 의결 당시 보고서 내용 중 일부 문구와 편집 체제만을 다소 수정 하여 이번에 진상조사 결과보고서로 발행하게 되었다. 2. 선행연구 및 개념 검토 강제동원의 맥락에서 일제시기 일본 내의 광산이나 탄광 주변의 조선인 접객여성 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꽤 이른 시기부터였다. 조선인 강제연행진상조사단은 5) 기업위안소 라는 개념은 정진성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뒤의 조사방향 참조. 6) 2008년 4월 17일 기업위안소 관련 진상조사 전문가 검토회 개최. 이날 이성순 위원회 위원과 정진 성 서울대 교수가 참석하여 의견을 나눠 주었다. 7) 의안번호 ) 보고서의 원 작성자는 박정애이다. 보고서의 주요 구성 및 모든 내용은 박정애의 현지 출장과 구술 청취, 그리고 문헌 조사를 통한 연구의 결과물임을 밝혀둔다
12 Ⅰ. 머리말 1974년에 펴낸 조선인 강제연행 강제노동의 기록: 홋카이도, 치시마, 사할린 편 에 서 제7장 조선인 여성의 강제연행: 인신매매와 강제매춘 이라는 제목으로 탄광이 나 광산 주변의 조선인 접객여성 에 대해 기술했다. 이들을 목격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 접객여성 이 홋카이도에 증가하 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이후이며, 대부분 취업사기에 속아 인신매매되어 온 가난 한 집안의 딸들이었다. 이들은 사창의 형태로 조선요리옥, 조선바- 등에서 강제 매춘 을 해야 했기 때문에, 생활의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9) 이 글에서는 조선인 노무자 강제동원 계획에 따른 기업ㆍ경찰 주체의 조선 요리옥 개설계획에 대해서 언급했으며, 나아가 조선인 여성에 대한 강제동원 문제 의 더욱 근본적인 원인을 근대 일본의 사창ㆍ공창제와 그 아래에서의 인신매매 등으 로 인해 고통받은 식민지 여성이 겪은 민족차별이라고 지적했다. 그 후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던 탄광이나 광산 주변의 조선인 접객여성 의 존재 가 다시 한 번 환기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 였다. 이 시기는 김학순 등 위안 부 피해생존자의 등장과 군 관련 문서 등의 발견으로 인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뜨거웠던 때이다. 일본군 위안부 의 존재가 역사적인 사실로써 드러남과 동시에 그 실태를 밝혀 진상규명을 하려는 노력 또한 다각도로 이루어졌 고,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탄광 등 주변의 조선인 접객여성 또한 위안부 라는 범 주에서 해석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들 여성을 위안부 라고 부른 데에는 이들이 일본군 위안부 와 비견할만한 처참 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을 역사적 피해자로 보는 시각이 위안부 로 인식하게 했던 것이다. 또한 이들 여성의 존재가 전시기 일본의 노무자 강제동원 정책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정황들이 10) 이들을 군인 상대로 동원된 군위안부 에 견줄만한 노무자의 상대의 위안부 동원 피 해자로서 인식하게 하였다. 당시 기업위안부 에 대한 조사는 조선인 노무자들이 집 중적으로 동원된 규슈지역과 홋카이도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내용을 보 9) 朝 鮮 人 强 制 連 行 真 相 調 査 團, 朝 鮮 人 女 性 の 強 制 連 行 ( 人 身 売 買 と 強 制 売 春 ), 朝 鮮 人 强 制 連 行 ㆍ 强 制 勞 動 の 記 録 : 北 海 島 ㆍ 千 島 ㆍ 樺 太 篇, 現 代 史 出 版 會, 1974 年, 쪽. 10) 일본군이 홋카이도의 탄광회사에게 강제동원된 노동자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위안부 를 유치 하는 것이 필요하고 조언 한 문서에 대한 소개( 道 内 炭 鉱 慰 安 婦 従 軍 と 同 じ 構 図, 政 府 企 業 薄 い 加 害 者 意 識, 北 海 道 新 聞 1992 年 8 月 1 日 )와 홋카이도석탄광업회가 조선인 노무자 동원에 대비하 여 도 보안과에 조선요리옥 의 개설을 요청하고 있는 신문기사에 대한 소개( 道 内 炭 鉱 の 朝 鮮 人 慰 安 婦, だまされ 連 行, 関 係 者 が 証 言 : 実 態 の 一 部 明 らかに, 北 海 道 新 聞 1992 年 8 月 1 日 ), 또 한 일본정부(기획원)가 중국인 노무자 동원계획과 동시에 위안소 설치와 운영에 대한 계획한 문서 에 대한 소개( 中 国 人 の 強 制 連 行 前 に, 政 府, 慰 安 所 を 計 画, 朝 日 新 聞 1992 年 3 月 14 日 )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13 진상조사보고서 도한 당시의 신문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표-2] 일본 내 기업위안부 관련 보도 기사 기사제목 기사제목 번역 신문이름 보도날짜 道 内 炭 鉱 などに 慰 安 所 도내 탄광 등에 위안소 北 海 道 新 聞 1991년 12월 6일자 筑 豊 炭 鉱 に 慰 安 所 あった 치쿠호 탄광에 위안소 있었다 朝 日 新 聞 1992년 2월 21일자 炭 鉱 慰 安 婦 朝 鮮 半 島 女 性 も 元 社 員 募 集 し 連 行 筑 豊 の 住 民 グ ループ 確 認 炭 鉱 に 朝 鮮 人 慰 安 婦 教 師 ら 調 査 ' 接 客 店 '10か 所 確 認 炭 鉱 に 朝 鮮 人 慰 安 所 強 制 連 行 働 かす 筑 豊 で10 軒 を 確 認 中 国 人 の 強 制 連 行 前 に 政 府 慰 安 所 を 計 画 道 内 炭 鉱 の 朝 鮮 人 慰 安 婦,'だまさ れ' 連 行, 関 係 者 が 証 言 : 実 態 の 一 部 明 らかに 道 内 炭 鉱 慰 安 婦 従 軍 と 同 じ 構 図, 政 府 企 業 薄 い 加 害 者 意 識 慰 安 婦 の 写 真 入 手 : 夕 張 の 飲 食 店 主 人 が 撮 影 炭 鉱 のケースは 原 型 韓 国 挺 身 隊 対 策 協 尹 代 表, 政 府 関 与 を 指 摘 深 川 にも 朝 鮮 人 慰 安 婦 :プラチナ 鉱 山 同 国 男 性 が 五 人 連 行 탄광위안부 조선반도여성도, 전 사원 모집해서 연행, 치쿠호 주민 그룹 확인 탄광에 조선인 위안부, 교사들 조사 접객점 10개소 확인 탄광에 조선인 위안소, 강제연행으로 일하게 한 치쿠호에서 10헌을 확인 중국인의 강제연행 전제로 정부, 위안소를 계획 도내 탄광의 조선인 위안부, 속아 연행, 관계자가 증언 : 실태의 일부 밝혀 도내 탄광 위안부 종군 과 같은 구도, 정부기획, 희박한 가해자 의식 위안부의 사진입수 : 유바리의 음식점 주인이 촬영 탄광의 경우는 원형 한국정대협 윤대표, 정부관여를 지적 후카가와에도 조선인위안부: 플라티나광산 같은 나라 남성이 5인 연행 朝 日 新 聞 西 日 本 新 聞 毎 日 新 聞 朝 日 新 聞 1992년 2월 21일자 1992년 2월 21일자 석간 1992년 2월 22일자 1992년 3월 14일자 北 海 道 新 聞 1992년 8월 1일자 北 海 道 新 聞 1992년 8월 1일자 北 海 道 新 聞 1992년 8월 1일자 北 海 道 新 聞 1992년 8월 1일자 北 海 道 新 聞 1992년 8월 2일자 현지 연구자, 시민운동가들의 실태조사와 더불어 1992년부터 기업위안부 의 성격 을 규명하려는 연구 또한 시도되었다. 오랫동안 일본군 위안부 의 실태조사를 하며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해 온 윤정옥은 1992년에 그동안의 취재기 를 발표하고 홋카이도의 조선인 접객여성 이 겪은 처참한 현실에 대해서 언급하였 다. 즉 현지주민의 증언과 신문 등의 문헌자료에 따르면 조선인 여성들이 이미 1910 년경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를 상대로 성매매를 강요받고 있 었다는 것이다. 11) 이 글은 전시기 강제동원 노무자 상대 위안부 에 대해서 특별히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신매매를 통해 성매매를 강요받고 포주 등에게 학대당하 는 한편, 일본 당국의 감시 대상이었던 조선인 접객여성 의 현실을 위안부 실태의 이해배경으로써 소개하고 있는 데 의미가 있다. 히구치 유이치( 樋 口 雄 一 )는 전전기 재일조선인 여성의 직업 가운데 가장 높은 비 11) 尹 貞 玉 他 著, 北 海 道, 朝 鮮 人 女 性 がみた 慰 安 婦 問 題 三 一 新 書,1992, 16-21쪽
14 Ⅰ. 머리말 율을 차지하는 것이 예기ㆍ창기 또는 작부 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전전기 조선요리 옥과 조선인 접객여성 의 존재가 노무자 강제동원기 이후 산업위안부 등장의 바탕 이 되었음을 서술했다. 12) 그리고 조선인 여성들은 산업위안부 로서 전국의 탄광ㆍ 광산ㆍ군사 및 토목시설 등에 형태의 차이를 두고 대부분 존재 했다고 단정한 뒤, 일본의 국내 위안소의 경우, 일반적으로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유곽과 구분하기 어 렵다 고 조심스럽게 마무리했다. 13) 이 연구는 조선인 접객업 과 접객여성 의 통계분 석 및 전시기 탄광이나 광산 주변 위안시설 의 실태 분석을 통해 기업위안부 의 실 상에 접근하려 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가나가와현( 神 奈 川 県 )과 요코하마( 横 浜 ) ㆍ오사카( 大 阪 ) 등 조선인 집주지역의 조선요리옥과 규슈ㆍ홋카이도의 산업위안소 를 분석대상으로 하고 있어, 조선요리옥과 산업위안소 의 지역적 연속성을 살펴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뚜렷한 개념 규정 없이 탄광과 광산, 군사ㆍ토목 시설 주 변의 조선요리옥 을 광범위하게 산업위안소 로 다루면서 그 형태의 차이 에 대한 성 격 규명은 뒤로 미루고 있다. 니시노 루미코( 西 野 瑠 美 子 )는 두 편의 글을 통해 기업위안소 의 설치와 운영이 일 본군 위안소 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본격적으로 선언했다. 니시노는 1992년에 발표된 후쿠오카 치쿠호( 筑 豊 ) 지역의 실태조사를 인용하여 현재 미쓰이( 三 井 ) 탄광 주변에 는 10개소의 접객점 또는 특수음식점 이라고 불린 위안소가 확인된다 고 서술했다. 그리고 여자정신대로서 모집해 여자들을 조선반도에서 끌고 왔다는 증언으로 보아 도 군과 기업의 위안부 연행형태가 흡사했고, 탄광 발행의 금권이 요금 대신 사용 된 사례는, 군위안소 와 비슷한 탄광위안소 관리 사례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 들 접객점 은 탄광 직영의 위안소 였다고 할 수 있다 는 언급을 했다. 14) 또한 니시 노는 이때 탄광위안소 라 부른 것을 1994년 연구에서는 사업장 위안소 로 그 범위 를 확장시킨다. 군위안소 와 비슷한 성격의 위안소 가 탄광뿐만 아니라 군수공장, 비행장 댐 건설장 등 조선인 노무자가 강제연행된 사업장마다 있었다는 문제의식에 서였다. 니시노는 선행 연구 성과 및 실태조사를 종합하여, 일본에 있던 조선요리옥 의 여성들이 위안부 제도에 편입된 것은 국가총동원법 이래 조선인 강제연행이 빈 번했던 시기부터라고 규정했다 15). 조선인 남성을 강제동원하고 가혹한 노동조건 속 12) 樋 口 雄 一, 朝 鮮 料 理 店 女 性 と 産 業 慰 安 婦, 朝 鮮 問 題 硏 究 會 海 峽 16, ) 樋 口 雄 一, 위의 글, 28쪽. 14) 西 野 瑠 美 子, 筑 豊 に 刻 まれる 従 軍 慰 安 婦 の 歴 史 : 筑 豊 からの 提 言, 炭 鑛 慰 安 婦, MILE: Korean Information Magazine, Vol.33, 1992, 16-20쪽. 15) 西 野 瑠 美 子, 日 本 国 内 の 慰 安 所, 吉 見 義 明 ㆍ 林 博 史 外, 共 同 研 究 日 本 軍 慰 安 婦, 大 月 書 店, 1995, 쪽
15 진상조사보고서 에서 강제노동을 시킨 일본정부와 기업이 이들의 도망을 방지하고 효율적으로 노무 관리를 하기 위해 성적 위안시설을 고안했다는 것이다. 또한 관계자 증언을 통해 이 곳의 위안부 들이 군위안부 와 같이 사기와 강제수단 에 의해 연행되어 왔다고 주장 했다. 따라서 군위안소 정책을 추진했던 국가와 함께 기업 또한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하여, 기업위안부 문제를 기업의 책임문제로 실천적인 차원에서 인식했다. 오기노 도시오( 荻 野 富 士 夫 )는 중국인 강제동원 노무자 대상의 위안소 설치 사례 를 통해 기업위안소 설치에 일본정부 및 기업이 직접 관여했음을 밝혔다 16). 오기노 는 중국인 노동자 강제동원과 위안소 설치에 관한 外 事 月 報 자료를 활용하여, 베 이징( 北 京 ) 주재대사관과 관계 기업 사이에 위안소 설치 및 위안부 이주에 관한 협의와 운영 계획이 있었음을 밝혔다. 일례로 도야마현( 富 山 県 ) 후시키항( 伏 木 港 ) 하 역장에 위안소 가 설치됐으나, 간부의 독점 경향과 이용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영업 은 부진했다고 한다. 후시키항 하역장 사례는 조선인 대상의 기업위안소 사례는 아 니나 일본정부가 노동자 강제동원을 실시하면서 위안소 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설치 했던 경우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전쟁수행을 위해 총력전을 펼 쳤던 일본정부에게 위안소 설치문제는 노무자 강제동원 계획의 성과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전시기 일본의 정책적 고려에 따른 기업위안부 의 등장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분석 한 글이 나온 것은 2000년 이후의 일이었다. 이전의 연구들이 현지인 및 관계자 증 언과 그것을 뒷받침 하는 몇몇 문헌자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이 시기의 연구는 정부 및 기업 자료를 치밀하게 분석하여 기업위안소 정책의 제도적 측면을 밝힌다. 정진성은 2003년 5월 일제 말 강제동원기의 기업위안부 에 관한 연구노트를 발표 하고, 기타큐슈( 北 九 州 ) 지역과 홋카이도 지역을 중심으로 조선인 노무자를 위해 설 치됐던 위안소 실태를 드러내는 원자료를 소개했다. 이때 정진성은 기존 연구에서 용어사용에 대한 고민이 없었음을 비판하며, 이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용어로써 기업위안부 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곧 기업위안부 는, 일본군을 위해 동원ㆍ착 취되었던 군위안부 와 견주어, 기업의 생산성을 위해 동원ㆍ착취된 존재이며, 군위 안소 의 설치와 운영에 일본군의 책임이 있는 것과 같이 기업위안소 문제는 기업이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했다. 17) 그리고 위안소 의 전사( 前 史 )로서 조선요리옥의 설 치상황 및 그 기능에 대하여 설명하고, 일본군 및 정부ㆍ기업의 자료를 활용하여, 위안소 설치에 일본 정부와 기업이 관여한 내용을 밝혔다. 이 때의 조사내용과 문 16) 荻 野 富 士 夫, 富 山 縣 における 勞 務 慰 安 婦 について, 季 刊 戰 爭 責 任 硏 究, 冬 季 號, 1994, 64-67쪽. 17) 정진성, 앞의 논문, 2003년 5월, 200쪽. 용어문제에 대해서는 뒤의 조사방향 에서 자세하게 언급할 것이다
16 Ⅰ. 머리말 제의식을 최종적으로 정리ㆍ분석하여 발표한 것이 2003년 말에 여성부에서 발간한 연구용역 보고서이다. 18) 이 보고서에서는 특히 홋카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 위안소 의 설치 상황과 그 특성을 단계적으로 밝히고, 위안부 의 동원과 실태, 조선 인 경영자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언급했다. 또한 홋카이도 현지조사와 구술조사를 통 해 기업위안부 의 피해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진상조사의 신청자이기도 한 니시다 히데코( 西 田 秀 子 )는 기업위안소 의 설치 직전 <화류병예방법>이 시행되고 구분이 애매했던 요리옥과 음식점의 구분이 제도적으로 명확해진 사정을 설명하면서 기업위안소 의 설치과정과 운영에 일본정부의 의도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19). 또한 광산협회와 홋카이도청, 홋카이도 지역신문, 노동과학연 구소 등 일본정부ㆍ기업이 생산한 자료와 신문 등을 폭넓게 활용하여 홋카이도 지역 의 탄광과 그 주변 위안소 의 실태를 밝히고 있다. 정진성과 함께 니시다의 연구는 기존의 연구가 주로 증언에 의존해 있는 것에 비해, 기업위안소 의 설치와 운영에 정부와 기업이 어떻게 개입했는지를 소상히 밝혀, 정부와 기업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고 있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편 윤명숙은 2004년도에 기업 위안부 에 관한 연구현황과 과제 라는 제목으로 이제까지의 기업위안부 관련 선행연구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연구 과제를 제시한 바 있다. 20) 이글에서 윤명숙은 선행연구의 성과로 1939년 이후 일본 내의 조선요리점 과 조선인 접객여성에 대한 실태가 밝혀진 점, 홋카이도와 후쿠오카 지역을 중심으 로 기업 위안소 의 실태가 드러난 점, 일본관헌 자료가 뒷받침하는 중국인 기업위안 소 의 존재가 드러난 점 등을 지적했다. 그리고 니시다 히데코의 연구성과를 기반으 로 노무위안소 의 실태를 소개하고, 피해자 발굴 및 지역별 실태조사, 그리고 용어 정리의 필요성을 과제로 설정했다. 마지막으로 스즈키 유우코( 鈴 木 裕 子 )의 기업위안부 관계 자료집을 소개할 수 있다. 스즈키 유우코는 1996년 12월에 日 本 軍 慰 安 婦 関 係 資 料 集 成 을 펴내면서 기업위안부 에 관한 자료도 함께 엮어내었다. 중국인노동자관계, 조선인노동자관계 로 자료를 분류하고 자료를 원문대로 재입력하여 보기 쉽게 편집하고 해제를 달았다 21). 정진성ㆍ 니시다 히데코가 발굴한 원문자료와 함께 기업위안부 연구에 유용한 자료들이다. 기업위안소 에 관한 연구는 양적으로는 많지 않지만, 그동안 축적된 성과물로 인 18) 정진성, 앞의 논문, 2003년 12월. 19) 西 田 秀 子, 앞의 논문, 2008년 8월. 20) 윤명숙, 기업 위안부 에 관한 연구현황과 과제, 군산대학교 환황해연구원 제3차 학술회의ㆍ한일민족 문제학회 2004년 정기 학술대회, 한일간의 미청산과제와 동아시아의 미래 : 귀환과 미귀환, ) 鈴 木 裕 子 編, 日 本 軍 慰 安 婦 関 係 資 料 集 成 ( 上 ), 明 石 書 店,
17 진상조사보고서 해 대략적인 구조와 성격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일찍부터 일본에서 존재했던 조 선요리옥과 조선인 접객여성이 기업위안소 설치의 배경이 되었다는 점, 전시기 노 동자의 강제동원과 관련하여 노동동원의 효율성을 도모하기 위하여 기업위안소 설 치를 계획하기 시작했다는 점, 따라서 기업위안소 의 설치지역은 남성노동자의 강제 동원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곳에서 조선인 여성들이 위안 행 위를 강요받고 피해를 입었다는 점 등은 공통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부분이다. 지역 별 실태사례, 기업위안소 경영자 및 이용자, 피해자의 경험사례, 이에 기반한 개념 및 용어 정리는 앞으로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보고서는 홋카이도 지역을 비롯하여 일본지역에 존재했던 기업위안소 의 실태 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보고서의 조사대상과 범주를 설정하기 위해 서는 우선 기업위안소 의 개념과 용어를 규정하고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기업위안소 란 개념은 일본군 위안소 에 대한 개념 논의에 빚진 바가 크다 년대 초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역사적ㆍ사회적 시민권 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시 민단체, 연구자 간에 용어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22). 전쟁수행을 위한다는 명목으 로 일본군이나 국가에 의해 동원되고 성폭력에 시달렸던 여성들에 대하여, 기억을 되새기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역사적 문헌 또한 창기 ㆍ 작부 ㆍ 예기 ㆍ 추업부( 醜 業 婦 ) ㆍ 위안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용어는 위안소 에 서 성노예적 상황에 있었던 여성 피해자들의 현실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23). 따라서 그 본질적 성격을 보여주는 성노예 라는 용어를 써야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24). 다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수면화 이후 위안 부 라는 말이, 일본군과 정부에 의한 성노예제도를 가리키는 가장 대중적인 말로서 자리잡았다는 점, 또한 생존피해자에 따라서는 성노예 라는 호명이 불편할 수 있다 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위안부 가 아시아태평양전쟁 기간부터 일본군 문서에서 보 이기 시작한다는 점 25) 에서 따옴표를 두룬 위안부 ㆍ 위안소 라는 말을 역사적ㆍ사회 22) 정진성, 군위안부 개념, 일본군 성노예제, 서울대학교 출판부, 3-9쪽. 23) 후지나가 다케시는 이 용어들이 만주에 일본의 공창제도를 이식한 일본이, 그 인신매매와 인권유린 의 성격을 은폐하기 위해 기만적으로 사용한 용어이며, 특히 위안부 는 이러한 기만적 용어의 최종 적인 형태라고 한다.( 藤 永 壯, 植 民 地 公 娼 制 度 と 日 本 軍 慰 安 婦 制 度, 植 民 地 と 戦 争 責 任, 吉 川 弘 文 舘, 2005, 27쪽). 24) 정진성, 앞의 글, 5쪽. 25) 후지나가 다케시는 위안부 라는 말이 언제부터, 어디에서, 누가 사용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일본군이 위안부 라는 말을 만들어냈으며, 중일전쟁의 전면화 이후 중국 각 지에서 일본군 위안소가 대량으로 개설되면서, 위안부 라는 말이 좀더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을 것이 라고 한다( 藤 永 壯, 앞의 글, 17쪽), 정진성 또한 1939년경부터 위안부 라는 용어가 자주 쓰이기 시 작하여 이후 위안부 라는 용어가 거의 정착되어 갔다고 한다(정진성, 앞의 글, 13쪽)
18 Ⅰ. 머리말 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대략 동의를 얻고 있는 것이다. 결국 위안소 라는 말은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효율적인 전쟁수행을 위해 일본정 부 등이 주도하여 고안해 낸 여성에 대한 성폭력 시스템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기업위안소 는 일본군을 대상으로 했던 일본군 위안소 에 대비하여, 전쟁기 강제동원됐던 노무자를 대상으로 한 위안소 라는 차이를 갖는다. 선행연구에서는 산업위안소 ㆍ 사업장 위안소 ㆍ 탄광위안소 ㆍ 노무위안소 ㆍ 기업위안소 등으로 다 양하게 쓰였는데, 이 보고서에서 기업위안소 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그 이 유에 대해서는 기존 문헌 및 선행연구의 용어사용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기존의 관련자료에 보이는 용어사용 사례는 다음과 같다. [표-3] 문헌자료에 나타난 용어 사용 사례 출 처 용어 사용 용어가 사용되는 맥락 비고 陸 軍 省 整 備 局 戰 備 課 苦 力 管 理 要 綱 草 案 ( ) 企 画 院, 苦 力 使 用 ノ 要 領 ( ) 石 炭 統 制 会 労 務 部, 苦 力 使 用 ノ 関 する 件 ( ) 伏 木 港 移 入 華 人 勞 務 者 の 動 靜 外 事 月 報 ( ) 華 人 勞 務 者 の 動 靜 外 事 月 報 ( / / ) 日 本 鉱 山 協 会, 半 島 人 労 務 者 二 関 スル 調 査 報 告 ( ) 國 民 勤 勞 硏 究 會, 半 島 技 能 工 の 育 成 ( ) 労 働 科 学 研 究 所, 半 島 労 務 者 勤 労 状 況 に 関 す る 調 査 報 告 ( ) 石 炭 統 制 会 九 州 支 部, 炭 山 に 於 ける 半 島 人 の 勤 労 管 理 ( ) 娼 婦 위안부 (특수부인) 위안부 위안부 반도인 전용의 요정, 반도인 위안소, 조선요리옥, 반도인 요리점, 작부. 성적인 특수시설 반도요리옥, 선술집, 위안소(선술집, 음식점) 작부 특별위안소 (특수음식점) 중국인 노동자 동원에 따른 관리대 책을 계획하면서 후생시설 항에 성적 욕망을 고려 하고 조선인, 지나인 창부를 유치 하겠다고 기술 중국인 노동자 1000명당 40인내지 50인의 위안부인을 이입 한다고 기술. 위안부의 동원, 그 비용, 위안부 수, 요금에 관한 사항 소개 도야마현( 富 山 県 )의 위안부 가업 상 황 설명 새로 설치하는 문제에 대해서 언급 할 때는 반도인 위안소, 성의 위 안소, 특수시설 등으로 지칭. 기존의 장소를 이용하고 있는 상황을 말할 때는 조선요리옥, 유곽, 카 페 등 기존업종 형태 그대로 지칭함. 어느 광산에서는 반도노무자의 성 욕을 채워주기 위하여 성적인 특수 시설을 두었 다고 기술. 각 광업소의 후생시설 중 위락에 관 한 시설 관련 기술 중에 언급. 위안소 로서 선술집과 음식점을 두었다는 기 술이 특이함. 이곳의 여성에 대해서는 모든 광업소에서 작부 라고 부름. 특별위안소는 탄광 주변에 특수음식 점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고 기술. 중국인 노무자 동원 관계 중국인 노무자 동원 관계 중국인 노무자 동원 관계 중국인 노무자 동원 관계 조선인 노무자 동원 관계 조선인 노무자 동원 관계 조선인 노무자 동원 관계 조선인 노무자 동원 관계
19 진상조사보고서 먼저 중국인 노무자 관계 자료 속에 나타난 용어 사용 사례를 살펴보면, 육군성 전비과 자료를 제외하고는 모두 위안부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인 노동자 동원에 따른 위안소 설치는 일본정부 및 기업이 적극적으로 개입하 여 계획ㆍ설치 운영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위안부 동원계획 및 실태파악을 하는 과 정에서 일관되게 위안부 라고 명시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1939년 이후 정부 주도 의 성적 위안 시설 여성에 대하여 위안부 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된 전시상황을 반영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 노무자 관계 자료에서는 관련 용어가 위안소 ㆍ 성적특수시설 ㆍ 조선요리 옥 ㆍ 반도요리옥 ㆍ 선술집 ㆍ 작부 등으로 좀 더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는 관계 자 료의 대상지역인 홋카이도와 규슈에서 조선인 노무자의 강제동원을 계획하고 그에 대한 노무관리를 고려하면서, 기존의 접객업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노무자들의 성 적 위안 문제를 해결하려는 상황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특이한 것은 강제동원 노 무자의 노무관리라는 정책적 차원에서 언급할 때에는 위안소 나 성적특수시설 이라 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한편 위안소 의 설치상황을 설명하면서, 조선요리옥 을 새로 두겠다거나 기존의 조선요리옥 이나 선술집 ㆍ 카페 ㆍ 유곽 등을 활용하고 있다는 상황설명이 나온다. 이로 보았을 때, 총력전 체제의 일환으로 조선인 노무자 에 대한 강제동원이 실시되면서, 이들에 대한 효율적인 노무관리 대책 중의 하나로 써 위안소 라는 이름의 성 관리 방침이 고려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요리옥 ㆍ 선술집 ㆍ 카페 ㆍ 유곽 등에 대한 활용은 그 위안소 대책의 방법으로써 제시되고 있는 것들이다. 한편 기존 선행연구에 보이는 개념규정과 용어사용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연구자 용어사용 연구범위 비고 히구치유이치 (1992) 니시노루미코 (1992) 산업위안소 탄광위안소 [표-4] 선행 연구에 나타난 용어사용 및 개념 규정 사례 홋카이도의 사례를 들어 광산 주변 요리옥 에 회사가 관여했음을 제시하고, 이들 요리 옥을 위안소, 작부를 위안부 라 함. 이를 실마리로 전국의 탄광, 광산, 군사산업, 토 목산업에 형태의 차이를 두고 산업위안부 가 존재했다고 함. 일본국내의 위안소는 유곽과 구분하기 어렵 다고 덧붙임. 후쿠오카 탄광 주변에 접객점, 특수음식 점 으로 불린 위안소 확인. 군대위안소와 흡 사한 탄광관리의 위안소였다고 서술 분명한 개념 규정 없음. 회사의 경영 개입을 중시했으 나, 군사산업, 토목산업의 문 헌자료는 제시하지 못함. 유곽과의 구분이 애매함 1992년 신문보도 및 증언을 토대로 탄광 주변의 사례에 한정
20 Ⅰ. 머리말 오기노토시오 (1994) 니시노루미코 (1995) 니시다히데코 (2003) 정진성 (2003/2004) 윤명숙(2004) 스즈키유우코 (2006) 노무위안소 사업장위안소 중국인 노무자 동원계획에 따른 위안소 설 치계획을 제시함. 노무를 목적으로 한 조선인 강제연행으로 인하여 사업장 위안부 징집이 있었고, 군사 시설 외의 기업의 사업장에 육해군위안소와 흡사한 위안소가 설치되었다고 서술. 홋카이도 사례에 한정하여 조선인 노무자 노무위안소 동원에 따른, 조선요리옥 설치 및 관리 실 태를 설명. 기업 위안소 기업 위안부 노무위안소 일본군에 대한 군 위안부 에 대비하여 기업 의 생산성을 위해 동원, 착취되었던 상황을 강조하여 기업 위안부 로 명명. 홋카이도와 규슈 실태제시. 다양한 실태에 따른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 고 있음을 지적하고, 한국에서 익숙한 용어 인 기업 위안부 를 사용 관련 자료를 해제하면서 노무위안부 정책 으로 주제 분류함. 분명한 개념규정 없음. 노무자 에 대한 위안소라는 의미로 사용 분명한 개념 규정 없음. 군사 시설과 구분되는 노무자 동원 사업장의 경우로 한정시키는 듯함. 분명한 개념 규정 없음. 전시기 조선요리옥의 변동상 황을 전제하고, 조선인 노무자 강제동원과 함께 일본정부, 기 업의 주도한 위안소가 출현되 었다고 봄. 기업의 책임을 묻는다는 실천 적인 관심에서 기업 위안부 사용. 위안소 설립, 경영 및 위안부 동원에서 기업의 주 도성을 강조함. 군수산업사업장, 군시설 건설 현장 주변의 여성 성피해의 진상규명과 함께 개념 규정이 필요하다고 함. 분명한 개념규정 없음. 정부기관에 의해 기획, 입안된 정책임을 규정. 선행연구를 정리하면서도 언급했지만, 용어사용에 대하여 확실하게 개념규정을 한 연구자는 정진성 뿐이다. 그 밖의 연구에서는 뚜렷한 개념설명 없이 산업위안소 ㆍ 사업장위안소 ㆍ 노무위안소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논문의 문제의식과 연구 대상에서 용어사용에 대한 배경을 유추할 수는 있다. 기존 연구에서 연구자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는 것은 전시기 노동력 강제동원에 대 비하여, 일본정부 및 기업 차원의 위안소 설치가 있었고, 그러한 사실은 도야마현 중국인 노무자 관계자료, 홋카이도ㆍ규슈의 조선인 노무자 관계 자료로써 뒷받침된 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군 위안소 와 비슷한 설치목적과 운영사례를 보이는 것이며, 따라서 일본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와 함께 강제동원 노무자 대상의 위안부 문제에 도 진상규명과 사죄를 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정진성은 일본군을 위해 동원ㆍ착취됐던 군위안부 에 대비하여 기업의 생산성을 위해 동원ㆍ착취 상황을 강 조하여 기업위안부 로 부르기로 한다. 기업위안소의 설립 및 위안부 동원이 기본적 으로 정부의 정책적 개입에 의해 가능했으므로 정부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중요하지
21 진상조사보고서 만, 기업이 그 모든 과정의 공식적이고 실제적 주체라는 점과, 따라서 정부에 더하 여 기업의 책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기업위안부라는 명칭이 타당하다 26) 고 하여 이 문제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분명히 하였다. 한편 연구자들은 연구대상의 범위에 따라 용어사용의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탄광이나 광산, 또는 항만의 강제동원 노무자들을 대상으로 했던 위안소 는 노무위 안소 라고 지칭한다(오기노 토시오, 니시다 히데코, 스즈키 유코) 27). 그러나 비행장 건설이나 토목산업 대상으로 그 범위를 넓혔을 경우 산업위안부 (히구치 유이치)나 사업장위안부 (니시노 루미코)로 개념을 확장하고 있다. 아마도 비행장이나 도로ㆍ 댐 등의 건설현장에서는 노무자뿐만 아니라 군속 등도 강제노동에 사역되고 있었던 만큼, 위안소 의 이용자를 노무자만으로 한정짓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건설 작업장 관련 위안소 에 대해서는 구술을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 을 뿐이다. 이용자나 목격자의 구술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재구성을 할 수 있는 상황 이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이나 문헌자료의 존재 여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 다. 이 때문에 기존 연구들은 도야마나 홋카이도의 사례를 들어 강제동원 노무자 대 상 위안소 의 정책적 측면을 논증한 다음, 건설현장의 사례를 덧붙이고 산업위안 부, 사업장위안부 라는 애매한 표현을 쓰고 있다. 이러한 모호함은 총력전 시기 일 제의 노무자 강제동원의 실태가 점차 밝혀지고 있는 현재의 강제동원 연구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위안소 와 관련한 직접적인 문헌자료가 발굴되는 것과 아울 러 강제동원 지역ㆍ규모ㆍ주체에 대한 실태연구가 진전된다면 이들 지역 성적 위안 시설 에 대한 연구도 좀 더 제 성격을 찾게 되리라고 예상한다. 본 보고서에서는 문헌조사ㆍ현지조사ㆍ구술조사를 통해 그 모습을 입체적으로 재 구성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하여 연구대상을 설정하고, 강제동원된 노무자의 노무관리 차원에서 기업이 나서고 제도적으로 지원된 시설이라는 의미에서 기업위안소 라는 호칭을 사용하도록 하겠다. 일본군 위안소 와 비교하여 기업위안소 에서 기업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 이유는, 현재까지 알려진 기업위안소 의 사례가 조선인 노무자가 대거 동원된 일본 지역을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지역은 오랫동안 공창제도가 실시된 지역이며, 공창제도는 수립 당시부터 군대와 노동자 등 단신 남성 집단의 성병예방 및 성적 위안 을 통한 풍기단속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미 공창제도 하에 26) 정진성, 기업성노예제에 관한 연구, 앞의 책, 쪽. 27) 니시노 루미코는 그 중 탄광 노무자 대상에 대해서는 탄광위안부 라 하여 개념을 더욱 협소하게 사 용하였다
22 Ⅰ. 머리말 서 위안소 성격을 지닌 접객업이 존재했기 때문에 기업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28). 문제는 기업위안소 가 조선요리옥 ㆍ 특수음식점 등 기존의 공창 제도 하에서 사창의 영역에 있던 접객업을 대상으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사창은 성 병관리가 느슨했고, 법의 통제를 피해 비밀 성매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인 신매매와 성병의 소굴로서 사회적 지탄을 받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기업위안소 가 일본지역의 사창을 배경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이야말로 기 업위안소 의 정책적 성격을 잘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일본공창제도 하에서 조선인 여성은 공창이 될 수 없어 사창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었다는 점, 정부의 공창폐지 정책 방향이 공창을 사창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는 점, 그리고 1938년 이후 전시 긴 축재정과 자숙자계 에 따라 유흥업 통제라는 공ㆍ사창 재편정책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 하면, 기업위안소 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사회조직을 재편하는 가운데 탄생한 정부 및 기업 주도의 성폭력 시스템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보고서에 일본 공창제도의 전시변동 및 조선인 작부 의 존재조건에 대하여 서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주요 조사 내용 1) 위원회 피해신고 현황 및 구술조사 기업위안소 연구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하게 지적되는 과제 중의 하나가 기업위 안부 피해생존자의 구술조사이다 29). 공식 문헌 속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던 일본군 위안부 의 피해를 피해자 당사자 기억의 되새김으로 역사화했던 과정을 생각하면 그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위원회에서는 기업위안부 피해생존자가 피해신고를 할 경우를 대비하여 피해신고 대상자를 군위안부 에 한정하지 않고 위안부 로 확장하였다. 기업위안부 피해에 대 한 일반 대중들의 인식이 거의 없다는 점이 염려되었지만, 조선인 노무자가 대거 동 원된 지역인 탄광이나 광산, 건설현장 주변 등지에서 성적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하 는 신고자가 있다면, 기업위안부 피해자일 가능성을 열어두고 피해조사를 할 수 있 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28) 예를 들어 홋카이도 소재 일본광업주식회사의 도요하( 豊 羽 ) 광산에서는 공휴일을 이용해서 부근의 시설을 이용토록 했고, 오오모리( 大 盛 )광산에서는 월2회 공휴일을 이용하여 모리마치( 森 町 ), 하코다 테( 函 館 )로 외출을 허가하여 성문제를 해결 하고 있었다( 日 本 鉱 山 協 会, 半 島 人 労 務 者 二 関 スル 調 査 報 告 ( 鈴 木 裕 子 編, 日 本 軍 慰 安 婦 関 係 資 料 集 ( 上 ) 明 石 書 店, 2006, 쪽)) 29) 정진성, 앞의 책, 서울대 출판부, 371쪽
23 진상조사보고서 기업위안부 피해신고를 홍보하고 독려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지만, 기업위안부 에 대한 개념과 범주가 연구자들 사이에 합의되어 있지 않은 현재 상황 에서 피해신고자들에게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여겨졌다. 기업위안부 와 기존 조선요리옥(후쿠오카의 경우 특수음식점)의 작부, 카페 바 여급 사이의 경계가 애매 하다는 점, 그리고 군위안부 생존자에 대해서만 생활지원을 규정한 현재 <생활안정 지원법>의 상황이 기업위안부 피해신고에 대한 홍보문제를 신중하게 하였다. 위원회의 위안부 관련 피해생존자의 신고는 모두 일본군과 관련한 것이다. 일본 지역 피해신고자가 나타났을 경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접근을 했지만, 조사결과 남편을 따라 홋카이도 탄광 근처로 동원됐다거나 오카야마( 岡 山 )현의 오비공장 사장 집의 식모 로 갔다는 증언이 전부여서 기업위안부 피해자로 보기에는 무리였다. 그 외에 이미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피신고인에 대하여 가족이나 친족이 위안부 피해 신고를 한 경우에는 피신고인이 일본으로 가서 위안부가 되었다 는 신고내용이 많 았다. 그러나 동원정황을 근거로 한 추측신고인 데다 피해상황을 목격한 인우보증인 또한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 상태에서는 거의 피해조사를 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기업위안부 에 대한 피해신고가 거의 없는 것은, 강제동원이 일제에 의한 피해라는 인식이 강한 상황에서 조선인 노무자를 상대해야 했던 기업위안부 피해자 가 자신의 경험을 피해 로서 인식하기 힘들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안부 를 일본군 점령지에서 일본군의 엄혹한 통제 아래 학대당한 여성들로 보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일본지역의 조선요리옥 작부 30) 로 존재했던 기업위안부 를 피해당사자나 주변가족이 피해자 로 인식하기는 어려웠다. 한편 위원회에 노무동원 피해자로 신고한 분들 가운데, 각 지역 실무위원회에서 행한 진술청취 조사에서 기업위안부 에 관하여 언급한 분들이 있다. 진술청취조사서 에 기재된 위안부 관련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연번 동원지 작업장 이름(생년) 동원기간 내용 1 北 海 道 2 北 海 道 3 北 海 道 三 菱 大 夕 張 炭 鉱 三 菱 大 夕 張 炭 鉱 三 菱 大 夕 張 炭 鉱 [표-5] 위원회 신고자 중 노무위안소 관련 진술자 임 (21년생) 문 (22년생) 이 (28년생) 위안부 시설에 조선여자들이 10여명 있었고, (3년 10개월) 이용시 3원 정도 받음 탄광 근처에 위안소가 있었는데 낮에는 우동을 (3년 5개월) 팔고 밤에는 손님을 받았음 근처에 위안소가 있었음. (1년7개월) 30) 일본지역에서 조선요리옥이 전시기에 새롭게 등장한 형태가 아니라 일찍부터 사창을 행하는 유흥업 소로서 존재했다는 사실 때문에 조선요리옥 작부를 기업위안부 피해자로 인식하는 것이 더욱 어 려울 것이다
24 Ⅰ. 머리말 4 北 海 道 5 北 海 道 6 北 海 道 7 北 海 道 8 北 海 道 9 北 海 道 10 北 海 道 11 北 海 道 北 炭 夕 張 炭 鉱 北 炭 夕 張 炭 鉱 北 炭 夕 張 炭 鉱 北 炭 夕 張 炭 鉱 北 炭 夕 張 炭 鉱 北 炭 夕 張 炭 鉱 北 炭 夕 張 炭 鉱 北 炭 新 夕 張 炭 鉱 김 (27년생) 백 (27년생) 정 (19년생) 박 김 (22년생) 문 (26년생) 신 (23년생) 박 (28년생) 12 北 海 道 夕 張 炭 鉱 윤 (16년생) 13 北 海 道 夕 張 炭 鉱 김 (22년생) 14 北 海 道 15 北 海 道 北 炭 幌 內 炭 鉱 北 炭 新 幌 內 鉱 業 所 강 (23년생) 김 (22년생) 16 北 海 道 歌 志 内 炭 鉱 백 (17년생) 17 北 海 道 고 (18년생) 18 北 海 道 19 北 海 道 20 北 海 道 住 友 赤 平 炭 鉱 住 友 赤 平 炭 鉱 住 友 赤 平 炭 鉱 민 (20년생) 이 (30년생) 윤 (27년생) (1년) 위안소는 없었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사창가 같 은 것은 있었음. 사창가인 줄 알고 갔던 곳이 위안소였음. 위안 부 여성들도 합숙소 생활을 하고 있었음. 해방 (1년 9개월) 후 위안소 여성들을 피신시킨 기억이 있음 위안소에 조선여자들 10여명이 있었던 것으로 (4년 4개월) 기억함 함바 부근에 위안소가 있어 한국인 여자들이 (2년 10개월) 술도 팔았음. 그러나 본인은 이용하지 않았음 한국인 10명 정도가 있는 위안소가 한 곳 있었 (3년 5개월) 음 협화료 주위에 위안소(부산 말씨의 위안부가 (1년 4개월) 있는)가 있었으나 주로 일본인이 출입하였음 (3년 1개월) 위안소가 설치되어 있었고 조선여자 약 100여 명이 있었음. 위안소 여자와 탄광 노무자가 만 나서 함께 사는 사례가 많았고,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음. 위안소가 많았으며, 위안소 여성이 와서 이불 을 꿰매주기도 하였음(이북출신 한국사람), 서 (3년 3개월) 로 얘기를 나누기도 하였음. 우타시나이, 무로랑 등지로 옮겨 다님 유바리 탄광 근처에 위안소가 2-3곳 있엇고, (4년 10개월) 한국여자는 2-3명 있었음 (2년) 위안소에 한국여자 20명 정도 있었음. 노무자 들이 위안소에 갔다가 다음날 돌아오지 않아 료장과 함께 잠을 깨우러 간 적이 있음 여명의 위안부가 거주하고 있었으나 운영자 (4년 5개월) 등에 대해서는 기억하는 바 없음 탄광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위안소가 있었 (1년 10개월) 으며 한국인과 일본인이 있었음 (5년 6개월 위안소는 5개 정도 있었고, 한국여자가 많았음. 정도) (3년 정도) 본인은 시모노세키 항에서 하역 작업을 했음. 근처에 위안소는 없었음. 본인이 징용되어 올 때 15-20명 정도의 여자가 붙잡혀 북해도로 갔음. 당시는 색시모집 을 한 다는 명분으로 감. (홋카이도 동원 관련 진술) 중국, 일본, 한국인 위안소가 있었음. (2년 3개월) (9개월) (4년1개월) 위안소는 아니고, 시내에 여자들이 있는 곳이 있다고 들었음. 직접 가보지는 못함. 위안소는 없었음. 간혹 조선여자 몇 명이 개인적 으로 돈을 벌기 위해 위안부 하는 것을 보았음
25 진상조사보고서 21 北 海 道 22 北 海 道 23 北 海 道 24 北 海 道 住 友 鴻 之 舞 鉱 山 札 幌 비행장 건설 淺 野 雨 龍 炭 鉱 三 井 鉱 山 砂 川 鉱 業 所 황 (20년생) 김 (26년생) 오 (22년생) 유 (20년생) 25 福 岡 新 山 野 炭 鉱 황 (22년생) 26 福 岡 八 幡 港 運 이 (24년생) 27 福 岡 28 福 岡 29 福 岡 30 福 岡 明 治 鑛 業 高 田 炭 鉱 明 治 鑛 業 平 山 鉱 業 所 明 治 鑛 業 赤 池 鉱 業 所 日 本 通 運 博 多 지점 김 (23년생) 이 (26년생) 김 (21년생) 모 (26년생) 31 福 岡 中 鶴 炭 鉱 천 (28년생) 32 福 岡 33 福 岡 34 福 岡 35 佐 賀 36 佐 賀 37 佐 賀 38 佐 賀 宮 田 貝 島 大 之 浦 炭 鉱 日 鐵 高 松 炭 鉱 飯 塚 소재 탄광 杵 島 大 鶴 鉱 業 所 杵 島 大 鶴 炭 鑛 杵 島 大 鶴 炭 鑛 杵 島 北 方 炭 鉱 현 (23년생) 김 (21년생) 안 (26년생) 김 (23년생) 홍 (22년생) 전 (23년생) 권 (27년생) 위안소가 있었으며, 위안소 운영자는 미가미 (1년 6개월) 미시다였음. 비행장 근처에 위안소가 있어서 가는 사람도 있었 음. 위안소에 갈 수 있는 표를 1달에 1장 지급했음. (2년 2개월) 위안소 주인은 고향이 군산인 한국인. 위안소가 설치되어 3개월 만근시 받는 청로 권 으로 위안소를 이용했음. 정해진 날 단체로 (3년 5개월) 버스를 타고 갔으며, 조선인에게는 일본여자만 만날 수 있게 하여 조선여자는 본 적이 없음 광업소 내에 위안소와 극장이 있었고, 이북 기 (3년 1개월) 생 2-30명 정도가 왔음 위안소가 있었고, 한국인(전라도) 여자들이 있 (3년 6개월) 었음. 야하다시에 위안소 200여호가 밀집해 있었음 외출증을 받아서 한 번 가본 적이 있는데 헌병 (2년 11개월) 의 감시로 들어가 볼 수 없었음. 위안소 내용는 일본인 여자 및 한국인 여자들이 다수 있었음 위안소는 없었고 일본인들이 장사하는 술집 등 (3년 7개월) 이 있었음 위안소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목격하였고 조 (3년 6개월) 선인들도 있었지만 직접 이용한 적은 없음 위안소가 엄청 많았음. 저녁 때가 되면 조선 (4년 7개월) 여자들이 문밖에 나와 서 있었음 (1년) 한국인 여자들은 없었으며, 일본인 여자들이 거주하는 위안소가 있었음 탄광 지역에 위안소가 있었다는 얘기만 들음. (1년 5개월) 18-19세 사이 한국여자가 있었다 함 (2년 4개월) 탄광 주변에 위안소가 있었음. 2년 계약만기를 2-3개월 앞둔 노무자들이 여기를 자유롭게 이 용했음. 동원 뒤 1년 정도 지나면 덴뿌 라는 전표 50장을 한꺼번에 주었는데, 그것을 농촌 에 팔아 버는 돈으로 위안소 사용을 했음 위안소는 없었고, 시내에 유곽이 있었음. (1년3개월) 탄광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거리의 이스카 라 (2년 3개월) 는 동네에 위안소가 있었음 일본인을 위한 위안소가 있었음. 한국인 여자 (2년 9개월) 들이 있었으나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음 일본여자가 관리하는 위안소 1개가 있었으며, (1년 7개월) 한국여자가 5명 정도 있었음 부근에 위안소가 있었으며, 한국여자들도 5명 (1년 7개월) 정도 있었음 위안부가 있었으며 인원은 대략 3만명쯤 되었음. (2년 6개월)
26 Ⅰ. 머리말 39 佐 賀 貝 島 炭 鉱 김 (23년생) 40 長 崎 41 長 崎 42 兵 庫 43 大 阪 44 大 阪 45 愛 知 46 和 歌 山 47 山 口 三 菱 埼 戶 鉱 業 所 三 菱 埼 戶 鉱 業 所 神 戸 三 菱 造 船 所 住 友 金 屬 工 業 伸 鋼 所 大 同 製 鋼 大 阪 工 場 東 邦 瓦 斯 名 古 屋 製 造 所 古 河 飯 盛 炭 鉱 宇 部 本 山 炭 鉱 김 (16년생) 이 (24년생) 오 (19년생) 김 (22년생) 최 (23년생) 김 (24년생) 김 (29년생) 윤 (28년생) 48 山 口 沖 宇 部 炭 鉱 한 (21년생) 49 山 口 50 靜 岡 근처에 위안소가 있었음. (2년11개월) 일본인이 운영하는 위안소가 있다는 말은 들었 (2년 10개월) 으나, 직접 가보지는 못했음 위안소가 있었음. (3년 4개월) (11개월) (11개월) (2년) (8개월) 日 立 제작소 笠 戶 공장 박 (23년생) (2년8개월) 日 發 久 野 脇 이 (23년생) 발전공사 間 組 51 함남 원산 댐공사장 임 (23년생) 공장 근처에 위안소가 있었으며, 위안소 여자 들을 개처럼 부리면 밥도 거의 주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음. 그러나 실제로 본 적은 없음. 근처에 한국여성이 있는 위안소가 있었으며 일 본군인들만 출입하였음. 인근에 노무위안소가 있는 것을 목격했으나, 이용은 하지 않았음. 근처에 위안소가 있었음. 조선인 위안부들이 비행기 훈련을 받고 돌아오는 군인을 환영해주고는 했음. 징용자들이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위안 소 주변에 문을 철창하고 사무실을 설치하여 (1년 8개월) 철저하게 감시했음. 41.4~45.8 탄광 외부에 위안소가 있었음. 일본여자가 많았 (4년 4개월) 다고 들었음. 어렸을 때라 직접 가본 적은 없음 술을 파는 위안소가 있었고 출입은 자유로웠음. (3년 7개월) (2년정도) 시내에 나가면 위안부가 있었음. 일본놈들이 팬티만 입고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음. 8-9명 정도 한국인 위안부가 있는 것 을 보았음. 15살 정도된 전라도 사람들이었음. 공사장서 5리 거리에 위안소가 있었음. 한달에 한번 외출증을 받아 나갈 때, 위안소를 이용할 수 있는 전표를 함께 주었음. 위안소를 지키고 있는 군인에게 전표를 내고 이용함. 위안소에는 총 12명의 한국여자들이 있었고 연령은 어렸음 일반적인 위안소는 아니었지만, 13-18세 여성들을 두 (1년 6개월) 고 노무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용했음. 위 50여명에 대하여 직접 만나 진술청취 조사를 하면 좀 더 구체적이고 풍부한 구 술을 채록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시간적, 인적 한계 상 구술청취 조사는 다 음 절에서 언급하는 19명에 대해서만 실시할 수 있었다. 위 표의 내용이 소략하기는 하지만, 기업위안소 가 설치되었던 지역이나 위안소 이용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본 보고서에서는 각 지역의 기업위안소 실태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위 표의 내용을 활용하고자 한다
27 진상조사보고서 구술조사는 위원회의 노무동원 신고자를 대상으로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실시하 였다. 노무동원 피해조사가 완료된 신고자를 대상으로 조사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조사 초기에는 대상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각 지역에서 진술청취조사 결과가 축적되어 기업위안소 에 대하여 언급한 피해신고자가 파악된 2007년 이후에 는 구술조사에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젊은 미혼 여성 조사관 이 위안소 에 대해 구술조사를 하는 것에 대하여 노무동원 피해자들이 부담을 느낄 수 있다고 판단되어, 처음에는 위원회에 파견되어 나온 남 성 경찰관의 도움을 받았다. 조사를 진행하다 위안소 부분 언급이 나오면, 여성조 사관이 자리를 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구술자들은 청취자의 성별에 구애를 받기 보다는 본인의 성격에 따라 구술 내용의 밀도를 달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2007년부터는 조사관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거나, 아니면 혼자 방문을 하여 구술조사를 실시하였다. 면접시 간은 대략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사이였다. 구술청취를 실시한 구술자의 명단은 다 음과 같다. 연번 이름 생년월일 동원시주소 동원지 작 업 장 동원기간 1 최 강원도 춘천 함북청진 청진 부두 권 충북 괴산 福 岡 縣 호죠( 方 城 )탄광 최 강원도 원성 福 岡 縣 4 장 전북 진안 福 岡 縣 5 박 충북 중원 北 海 道 6 이 전북 김제 北 海 道 7 최 경남 하동 北 海 道 아소( 麻 生 ) 아카사카( 赤 坂 )탄광 토호( 東 邦 )(주) 치쿠시( 筑 紫 )탄광 미쓰비시( 三 菱 ) 모시리( 茂 尻 )탄광 홋카이도( 北 海 道 )탄광기선(주) 신호로나이( 新 幌 內 )광업소 미쓰이( 三 井 ) 비바이( 美 唄 )광업소 마 충남 당진 北 海 道 신유바리( 新 夕 張 )탄광 최 충북 청원 北 海 道 스미토모( 住 友 ) 아카비라( 赤 平 )광업소 정 경북 안동 北 海 道 유바리 탄광 서 강원도 고성 北 海 道 북해도탄광기선(주) 유바리( 夕 張 )광업소 이 전남 함평 北 海 道 미쓰이( 三 井 )광업소 장 충남 서천 北 海 道 [표-6] 구술 청취를 실시한 구술자 명단 스미토모(주) 코노마이( 鴻 之 舞 )광업소 불상
28 Ⅰ. 머리말 14 양 충북 음성 北 海 道 스미토모( 住 友 ) 아카비라( 赤 平 )광업소 임 전북 익산 北 海 道 호로나이( 幌 內 ) 탄광 유 충북 중원 長 崎 縣 17 박 충북 중원 長 崎 縣 미쓰비시( 三 菱 )광업(주) 하시마( 端 島 )탄광 미쓰비시( 三 菱 )광업(주) 하시마( 端 島 )탄광 신 충북 음성 神 奈 川 縣 요코스카( 橫 須 賀 ) 비행장군속 신 충남 논산 和 歌 山 縣 타나베시( 田 邊 市 ) 비행장 건설 노무자 ) 현지조사 기업위안소 관련 현지조사는 2007년 7월 홋카이도, 2007년 8월 후쿠오카와 나가 사키, 나라 지역을 중심으로 2차례에 걸쳐 시행하였다. 기업위안소 가 강제동원 노 무자들을 대상으로 한 성적 위안 시설 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조선인 노무자들이 대 거 동원된 지역을 중심으로 조사하였다. 현지조사는 기업위안소 가 존재했던 지역의 탄광ㆍ광산ㆍ비행장 터를 방문하고, 위안소 의 설치 조건 및 노무자들의 이용 환경 등을 조사하였다. 또한 현지 전문가 의 의견을 수집하고 31) 주민들의 간접 증언을 채록하였으며, 지역 박물관이나 도서관 에 방문하여 문헌자료를 수집하였다. 단 현지조사는 옛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을 중 심으로 했기 때문에, 해당 지역 사정상 방문하지 못한 곳도 있었다. 예를 들어 최초 의 기업위안소 가 설치됐던 홋카이도의 유바리( 夕 張 )처럼 진상조사에서 중요한 장소 였음에도 불구하고 옛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아쉽게도 방문일정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던 사례가 있다. 현지조사 일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홋카이도 현지조사 기간 : 2006년 7월 6일(목) ~ 7월 12일(수) [6박 7일] 출장자 : 박정애(조사관), 홍종욱(도쿄 정무조사관, 현지 통역 지원) 출장 지역 : 일본 홋카이도 출장 목적 : - 홋카이도 도내 노무위안소 진상조사 관련 현지조사 - 진상조사 관련 자료수집 및 전문가 면담 31) 현지조사에는 전시기 강제동원 문제 현지 전문가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홋카이도에서는 시라토 히토야스( 白 戸 仁 康 ), 니시다 히데코( 西 田 秀 子 )가, 후쿠오카에서는 요코가와 테루오( 横 川 輝 雄 ), 후 쿠도메 노리아키( 福 留 範 昭 )가 현지 일정 계획 및 안내에 많은 수고를 해 주었다. 그리고 나가사키 에서는 시바타토시아키( 柴 田 利 明 ), 다카자네 야스노리( 高 實 康 稔 ), 나라 지역에서는 츠카사키 마사유 키( 塚 崎 昌 之 ), 다카노 마사유키( 高 野 真 幸 )의 수고에 빚진 바가 크다. 이 기회를 들어 감사드린다
29 진상조사보고서 세부일정 일 자 일 정 비고 7. 6(목) 7. 7(금) 7. 8(토) 7. 9(일) 박정애: 인천공항(KE766, 10:10) 삿포로 치토세 공항(12:55) 홍종욱: 하네다(BC717, 14:25) 치토세공항(15:55) 西 田 秀 子 면담: 현지조사 일정과 내용 협의 비바이: 白 戸 人 康 합류 카미스나가와: 미쓰이 스나가와 우타시나이시: 스미토모 우타시나이, 북탄계 소라치, 우타시나이시 향토관 아시베츠시: 미쓰이 아시베츠 아카비라시: 모시리역, 아카비라역, 쇼와 토요사토 비바이시: 비바이시 향토사료관 미사카시: 北 炭 호로나이, 스미토모 혼베츠 비바이시: 미쓰이 비바이, 미쓰비시 비바이 白 戸 人 康 자택: 조사결과 정리 및 검토 홋카이도개척기념관 삿포로시 L프라자 연구실: 西 田 秀 子, 白 戸 人 康 참가. 현지조사 결과 정리 및 검토, 관련 증언 교류, 진상조사 최종보고서 구성에 관한 의견교환 홍종욱: 삿포로(BC722, 18:00) 하네다(19:35) 7. 10(월) 삿포로시교육위원회 문화자료실: 자료수집(니시다히데코 동행) 7. 11(화) 삿포로시교육위원회 문화자료실(니시다히데코 동행) 삿포로 1박 비바이 2박 삿포로 3박 삿포로 4박 삿포로 5박 삿포로 6박 7. 12(수) 삿포로 치토세 공항(KE767, 14:05) 인천공항(17:05) * 기업위안소 관련 현지조사 외 타 팀 업무지원 협조 일정은 생략 규슈 및 나라 지역 현지조사 기간 : 2006년 8월 8일(화) ~ 8월 15일(화) [7박 8일] 출장자 : 박정애(조사관, 위안부팀), 남상구(전문계약직 나급, 유골유해팀), 장석경(검찰주사, 유골유해팀) 출장 지역: 일본 나가사키( 長 崎 ), 후쿠오카( 福 岡 ), 오사카( 大 阪 ), 도쿄( 東 京 ) 출장 목적: 규슈지역 기업위안소 및 니시소노기군 매화장 인허증에 진상조사 보고서 작성을 위한 현지조사 및 자료입수 등 세부일정 일 자 일 정 비 고 8. 8(화) 서울(인천)출발 OZ 132편 09:40 11:10 후쿠오카 도착 福 留 範 昭 안내. 이이츠카시로 이동 横 川 輝 雄 합류, 점심식사 1991년 실시한 후쿠오카 지역 접객점 조사 및 그 특징에 관한 설명 <출국> 후쿠오카 1박
30 Ⅰ. 머리말 8. 9(수) 8. 10(목) 기업위안소 에 관한 의견교환, 현지 조사지역에 관한 사전검토 후쿠오카 지역 접객점 현장조사 이이츠카시 후쿠오카 이동 후쿠오카 나가사키 이동 柴 田 利 明, 高 實 康 稔 안내. 사키토 섬으로 이동 나가사키 사키토 탄광 현장조사, 사키토탄광 주변의 접객점 현장조사 사키토쵸 역사민속자료관, 사키토 중앙공민관자료실(자료수집) 사키토섬 나가사키역 이동 나가사키 후쿠오카 이동 후쿠오카 이이츠카 미쓰비시탄광 가스폭발 사고 및 조선인 유골처리 관련 현장조사 8. 11(금) 규슈대 석탄연구자료센터, 자료수집 8. 12(토) 8. 13(일) 8. 14(월) 8. 15(화) 규슈대 도서관 방문, 자료수집 후쿠오카 오사카로 이동, 오사카인권박물관 방문 위안부 관련 전시 확인. 오사카 나라 이동 (오사카 나라지역 군사시설 전문가 塚 崎 昌 之, 高 野 真 幸 안내) 야나기모토 비행장 노무위안소 현장 조사, 관련자료 입수 오사카 교토 이동 교토 세계인권문제연구센터 방문, 재일조선인 관련 신문자료 수집 교토 도쿄 이동, 숙소 체크인 일본국립국회도서관 방문, 자료수집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 관장 니시노루미코 면담 도쿄 시내 하네다 공항 이동 도쿄 출발 OZ 1035편 19:20 서울 도착 21:40 후쿠오카 2박 후쿠오카 3박 후쿠오카 4박 오사카 5박 오사카 6박 동경 7박 귀국 * 기업위안소 관련 현지조사 외 타 팀 조사 일정은 생략하거나 요약 3) 문헌조사 본 보고서의 문헌조사는 2차 자료에 대한 검토 및 제1차 자료 수집을 중심으로 진 행하였다. 자료의 수집에는 선행연구자의 도움이 컸다 32). 이를 통해 기업위안부 정 책을 기획하고 입안한 육군성 전비과와 기획원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업위안소 를 두고 그 운영에 관여했던 기업측의 자료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일본광산협회가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무자의 생활에 대해 조사하고 그 결과를 기록 한 半 島 人 労 務 者 に 関 する 調 査 報 告 (1940년 11월 16일)는 홋카이도 지역의 기업위안 소 설립 상황을 종합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33). 32) 정진성은 본 진상조사가 개시되기 전인 2005년 2월에 관련 자료 일체를 기증하였다. 본 진상조사의 신청자인 니시다 히데코 또한 조사관의 홋카이도 현지조사 방문 시 연구에 사용한 자료 일체를 기 증하는 한편, 조사관의 자료조사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33) 정부 및 회사 측의 자료는, 정진성, 앞의 책, 2003과 鈴 木 裕 子, 앞의 책, 2006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31 진상조사보고서 그밖에 기업위안소 의 등장환경과 위안부 의 흔적을 추적하기 위해 신문ㆍ잡지 등 사회사 자료를 수집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인 노무자를 대상으로 한 기업위안소 가 기존의 조선요리옥이나 카페 등을 활용하여 운영되었음을 생각할 때, 일본지역의 접객업 현황이나 그것의 전시변동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 각됐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2006년 4월 일본 도쿄 출장 시에 폐창운동단체 곽청 회( 廓 清 会 )의 기관지 곽청( 廓 清 ) 등 관련 잡지를 검토하였으며, 홋카이도 지역 외 에 후쿠오카, 나가사키 등 조선인 노무자들이 대거 동원된 지역의 신문기사 등을 검 색하였다. 이 때의 검토내용을 기반으로 일본의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 女 性 たちの 戦 争 と 平 和 資 料 館 )>과 협의하여 전시기(1937~1945) 일본지역에서 발간된 신문기사를 수집하였다. 연구용역 형식이었으며 수집기간은 2006년 5월부터 9월까지 5개월간이 었다. 자료관측에서는 기업위안소 가 설치됐다고 알려진 홋카이도와 규슈 지역의 지역신 문을 비롯하여 조선인 관계기사가 많이 실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오사카마이니 치신문( 大 阪 毎 日 新 聞 ), 그리고 전국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도쿄아사히신문( 東 京 朝 日 新 聞 ) 등 6개 신문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를 위해 도쿄팀ㆍ오사 카팀ㆍ후쿠오카팀이 각각의 지역에 꾸려졌으며 조사 참여자는 22명이었다. 조사 대 상 및 내용ㆍ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표-7] 전시기 일본 내 발간 신문기사 조사상황 34) 신 문 명 홋카이타임스 ( 北 海 タイムス) 조 사 내 용 1. 조사 담당자: 田 場 祥 子, 池 田 弓 子, 有 村 順 子, 渡 辺 美 奈, 西 野 瑠 美 子 2. 조사방법 조사상황 보존상황 년(1942년 이후 홋카이도 신문으로 통합) 기사 - 국회도서관(일본)에 소장된 M/F. 축쇄판 없음. - 보존상황은 양호하지 않음. 지면이 누락되어 있거나, 얼룩져 있어 판독하기 어려 운 면이 많음. 3. 조사자 의견, 특이사항 등 년부터 처녀인신매매 기사가 눈에 띔. - 요리점 조선인 작부 음독자살 기사나 여급창기예기작부 등의 자살, 타살 사건 다 수 보도. 접객여성의 열악한 상황 알 수 있음 년에 <화류병예방법> 전면 시행. 성병진료소 개설되기 시작 년에 쉼터 (이코이노이에= 憩 いの 家 )가 개설되었다는 기사. 광산이나 탄광의 위안소가 쉼터 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 주목됨. 34) 女 性 たちの 戦 争 と 平 和 資 料 館, 일본 국내 노무위안소 개설 관련 접객업 실태조사를 위한 기초 연구(진상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32 오타루신문 ( 小 樽 新 聞 ) 도쿄아사히신문 ( 東 京 朝 日 新 聞 ) 오사카아사히신문 ( 大 阪 朝 日 新 聞 ) 후쿠오카 니치니치 신문 ( 福 岡 日 日 新 聞 ) 1. 조사 담당자: 田 場 祥 子, 池 田 弓 子 2. 조사방법 조사상황 보존상황 특이사항 년(1 8), 1939년(1 12) 기사 - 지역 신문답게 구체적인 기사가 많음. - 국회도서관(일본)에 소장된 M/F. 축쇄판 없음 : 1940년 1월 유바리( 夕 張 )에 조선요리옥( 朝 鮮 料 理 屋 )설립 기사. 기업 위안소 설명기사라고 할 수 있음. 1. 조사 담당자: 野 木 香 里, 배영미 2. 조사방법 조사상황 보존상황 - 요코하마시 소재 신문라이브러리에서 CDROM 검색/ 히토츠바시( 一 橋 )대학 도서 관에서 복사작업 년까지 검색 가능 - 복각판도 보존상태 양호 3. 조사자 의견, 특이사항 등 - 전국판 신문이어서 구체적인 기사는 거의 없음. 반면 시기에 따른 일본정부의 정 책 흐름을 알 수 있음. - 시기별 기사 특징은 다음과 같음. [1939년] 노동력이 부족함으로 조선인 노동자나 여성노동자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 요성 강조. [ 년] 조선인 노동자가 대량 이입됨에 따라 노무관리 로서의 능률향상 ㆍ 정착 (= 이동방지 )이 강조. [ 년] 노무관리 정책이 더욱 구체적으로 기술. 출신지별 특별배려 나 조선인 노동자에게 위안시설 이 필요하다는 내용. [1944년] 전년부터 나온 정착 정책이 3대 방침으로 정리. 계약기간 연장과 그에 대 한 우대 등. [1945년 8.15이후] 8 15이전 시기에는 위안소 라는 말 자체가 없던 것에 비해, 이 후에는 진주군과 관련하여 특정 지명에 몇 군데 등장함. - 조사자의 의견 : 기업이 설치한 위안소 는 일본정부의 주도와 조선총독부의 협력 으로 만들어진 노무관리 정책 하에서 구상된 것이라고 보임. 1. 조사 담당자: 青 木 敦 子, 本 山 裕 子 2. 조사방법 조사상황 보존상황 - 교토( 京 都 )대학 미즈노 나오키( 水 野 直 樹 ) 교수 홈페이지( 의 조선관련 기사검색 엔진에서 관련기사 검색. 그 후 국립국회도서관에서 M/F를 조사하고, 해당기사 복사함. - 누락된 지면이 있기는 하지만 판독하기는 어렵지 않아 보존상태는 양호. 3. 조사자 의견, 특이사항 등 - 전전의 오사카는 조선인 인구가 가장 많던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 신문에는 조선인 관련 보도가 적음. 특히 금번 조사목적과 연관된, 조선인(특히 여성)의 고용, 노동 상황, 사람의 이동 등에 관해 해명의 실마리가 될 만한 기사는 거의 없음. 전국지보다는 교한신( 京 阪 神 ) 지역의 지방지를 보는 것이 훨씬 좋은 정보원이 아 닐까 함. 1. 조사 담당자 松 尾 昌 世 (1937년; 花 房 恵 美 子, 野 田 鶴 子, 川 野 紀 子 가 도움), 木 下 直 子 (1938년), 川 野 紀 子 (1939년), 平 尾 弘 子 (1940년), 池 田 道 子 (1941년), 花 房 恵 美 子 (1942년), 野 田 鶴 子 (1943년), 安 部 妙 子 (1944년), 小 林 知 子 (1945년)
33 진상조사보고서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 大 阪 毎 日 新 聞 ) 2. 조사방법 조사상황 보존상황 년 기사(1942년 이후, 니시니혼( 西 日 本 )신문 통합) - 후쿠오카( 福 岡 )현립도서관과 후쿠오카시 종합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마이크로필 름으로 조사. - 보존상태는 양호하지 않음. 판독불가 지면도 있음. 축소복사하면 글자가 깨졌기 때문에 가능한 확대하여 복사함 년 이후 12면이었으나, 1942년 중반부터 4면이 되고 1945년은 2면으로 발간 됨. 4면으로 되면서 1면 광고는 없어짐 년부터 1942년에 걸쳐 조선이나 중국에 가는 식모( 女 中 )나 여급의 모집광고가 많았음. 3. 조사자 의견, 특이사항 등 - 탄갱, 광산과 관련한 접객업 기사는 거의 보이지 않음. 다만, 탄갱주변의 조선요리옥 에서 갱부에 의해 조선인 작부 4명이 살상되었다는 비참한 사건이 보도돼( ) 탄갱지대의 접객업에 종사했던 조선인여성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음. - 중일전쟁 이후 전쟁수행을 위한 화류병 대책이 전면에 드러남. 접객업 숙청 조치 도 단계적으로 진행. 이런 규제가 탄갱주변 요리옥 등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기사로는 판명되지 않음. - 후쿠오카의 석탄증산대책에 관한 기사 빈번. 조선인 노동력 이입 정도 외에는 구 체적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기사내용에서 드러남. 1. 조사 담당자 - 서부판 : 内 海 隆 男, 正 木 峯 夫 - 시내판 : 池 田 恵 理 子 2. 조사방법 조사상황 보존상황(오사카마이니치신문 서부판) 년 1945년 기사 - 히로시마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M/F로 조사. -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 - 기본 하루치가 24면. 규슈( 九 州 ) 각 현과 야마구치( 山 口 )현, 히로시마( 広 島 )현, 시마네( 島 根 )현 그리고 오키나와( 沖 縄 ), 만주 조선 대만 중국 판 등으로 구성. 이 때문에 1개월 분을 보는 것은 25일(월요일은 휴간)의 24배, 즉 600매의 마이크로필름을 보는 셈임. - 서부판 의 24면이라고 하는 것은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의 본지( 本 紙 )를 제외한 각 현판 (덧붙여 식민지나 점령지역에서 발행한 것)을 모은 것이며, 문화면이라든가 정치, 경제 면은 없고, 소위 사회면 (3면기사)을 모아놓은 것이어서 보지 않아도 좋은 지면은 없었음. 3. 조사자 의견, 특이사항 등 - 일본내 소재 위안소 설치에 관한 기사로 나가사키( 長 崎 )판 기사( , 6.1, 6.26)를 발견함. - 홋카이도에서는 강제연행기에 들어가서 조선요리옥 등이 탄광 내나 근처로 모아 져서 위안소가 설치되는 경과를 거친 듯 하지만, 지금까지 큐슈에서 그러했다는 확증은 얻지 못했음. - 큐슈에서는 홋카이도와 동일한 경과를 거쳤지만 지금껏 자료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전체 신문을 조사한 것은 아님). 아니면 홋카이도와는 다른 지역사정이 존재한 것인지, 이를테면 강제연행기 이전부터 큐슈에는 탄광근처에 위안소가 이미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음.(그렇다면 1937년 이전의 신문을 조사할 필요가 있음) - 앞으로도 신문 조사를 계속하면서 위안소 설치에 초점을 두고 기본 자료의 재검 토나 구술 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함. 그 외 탄광과 조선인 이라는 주제로 각지의 탄갱의 역사를 추적해보는 것도 좋을 것임. * 자료관측이 제출한 신문기사 조사결과 보고(번역: 윤명숙)를 참조하여 요약ㆍ정리
34 조사결과 전체 1,200여건의 기사가 수집되었다. A3 파일 10책의 분량이다. 조사 자의 판단에 따라 접객업 및 조선인 여성 관련 기사 외에도 전쟁의 확대 상황, 여성 계 동향 관련, 조선인 노동자 관련 기사 등도 함께 정리하기도 하였다. 수집된 자료를 통해서는 선행연구에서 이미 소개된 홋카이도 지역의 기업위안소 상황 외에도 나가사키( 長 崎 )의 하시마( 端 島 ), 다카시마( 高 島 ) 등지에 전시 노동자 대 상의 접객업이 설치되는 상황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기업위안소 설치 이전부터 일본지역에 들어와 있던 조선인 접객여성의 관련 기사를 찾아볼 수 있었다. 이들은 취업사기, 인신매매 등의 방식으로 조선에서 끌려왔는데, 일본에서는 조선인 여성의 공창이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요리점, 바- 등에서 은밀히 성매매를 강요당하는 사 창( 私 娼 )의 형태로 있어야 했다. 이 때문에 범법자로 취급되어 경찰의 눈을 피하는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포주나 성구매자의 폭력에 무력하게 노출되어야 했다. 이 들 중의 일부가 기업위안소 설치 이후 탄광이나 광산 주변의 조선요리옥 으로 옮겨 조선인 노동자의 위안 상대가 돼야 했다. 따라서 조선인 접객여성 관련기사는 기 업위안부 실태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35 진상조사보고서 Ⅱ. 일본지역 기업위안소 의 등장 배경 1. 일본 지역의 조선요리옥과 조선인 접객여성 기업위안소 는 전시기 일본의 탄광 등으로 대거 동원되어 온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노무관리 차원에서 설치된 것이었다. 그 때문에 기업위안소 에 대한 검토는 노 동자 강제동원이 시작된 1938년 이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기업위안소 가 아무런 물적ㆍ인적 토대 없이 전시기에 새롭게 출현했던 것 은 아니었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기업위안소 의 설치는 1920~30년대 일본 내의 조 선인 증가와 일본 공창제 하의 민족 차별 등 사회적 조건 속에서 조선인 집주 지역 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조선요리옥이 중요한 자원이 되었음을 지적한다 35). 일찍부터 일본 지역에 존재했던 조선요리옥의 경영자, 조선인 접객여성 등의 인적 자원과 건 물의 구조, 그리고 요리점을 내세우고 은밀히 성매매를 행했던 요리옥의 경영방식 등이 1938년 이후 등장한 기업위안소 의 뼈대가 되었던 것이다. 1) 조선인 접객여성 의 공창금지와 조선요리옥 일본 내 공창제의 역사 하에서 조선인 접객여성은 공창이 될 수 없었다. 공창제는 국가 공인의 성매매 제도로서 일정한 조건 하에서 포주가 여성의 성을 팔고, 이것을 남성이 사는 것을 국가가 허용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일본의 공창제에 대해서는 봉건사회부터 지속돼 온 일본사회 고유의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지만, 최근의 연구경 향은 메이지 정부가 유럽의 사례를 모방하여 에도기의 창기제도를 새롭게 재편한 제 도라는 것이다 36). 곧 전쟁을 통한 식민지 개척을 바탕으로 제국을 확대해 나간 프랑스ㆍ독일ㆍ영국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군대의 성병예방을 통해 전력손실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공 창제를 고안했고, 서구 열강을 모방하여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해 나간 메이지 정부 가 이를 참고했다는 것이다 37). 그러고 보면 공창제 탄생의 배경 뒤에는 군대와 같이 35) 樋 口 雄 一, 앞의 논문, 1992; 정진성, 앞의 논문, ) 藤 野 豊, 性 の 国 家 管 理 : 売 買 春 の 近 現 代 史, 不 二 出 版, 2001년, 10-12쪽. 37) 藤 目 ゆき, 性 の 歴 史 学, 不 二 出 版, 1997년; 김경자 외 譯, 성의 역사학 : 근대국가는 성을 어떻
36 Ⅱ. 일본지역 기업위안소 의 등장 배경 억압된 남성조직과 이를 여성의 성을 이용하여 손쉽게 통제하려는 국가의 의도, 그 리고 성병에 대한 공포 등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공창의 뒤에는 사창이 있었다. 일본은 가시자시키( 貸 座 敷 ) 및 창기에 관한 일련의 법규를 마련하여 공창의 틀을 정하는 한편, 예기 및 요리점, 음 식점 등에 관한 단속 규정 또한 제정하여 예기와 작부의 성매매를 금지하였다 38). 그 러나 경찰의 사창 단속이 엄격한 것은 아니어서 예기와 작부의 성매매는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192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는 카페 및 바의 확대를 배경으로 하 여 여급까지 공공연한 사창으로 취급되는 실정에 이르렀다. 일본의 사창방침은 사창 금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기ㆍ작부ㆍ여급에 대한 성병 검진을 강화하여 사창으로 인한 성병확산을 최대한 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공창제 실시에 대한 비판을 나라 안팎으로 받고 있었기 때문에 사창을 공창으로 전 환하여 창기를 확대하는 일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39). 그렇다고 사창을 철저하게 단속해서 예기ㆍ작부ㆍ여급에 대한 성매매를 근절하겠다는 의지도 없었던 것 같다. 제국 이 팽창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군인이나 이주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남성들의 성 구매는 어쩔 수 없는 일 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공창은 축소하되 사창에 대한 성병검진을 강화하고 이들의 성매매를 묵인하는 방식으로 공창제 를 실시하였다. 1893년 일본 군마( 群 馬 )현에서 최초로 폐 창이 실현되었을 때, 군마현 경찰은 <요리점예기취체규칙>을 개정해서 을종요리점을 게 관리하는가 삼인, 2004년, 91-92쪽. 이 때문에 제국주의 본국보다 식민지에서 공창제가 더욱 공 고하게 유지되었다고 한다. 38) 에도기의 창기제도가 인신매매에 근거했기 때문에 금지한다는 1872년 <창기해방령>의 공포에 이어, 창기 본인의 의사에 따라 계약의 성립 및 해지가 이루어지는 창기제도 라는 취지를 담은 공창 관련 법령들이 도쿄 등의 지역 곳곳에서 공포되었다. 개정을 반복하며 지역마다 다르게 운영되던 공창제 가 전국적인 법적 틀을 갖추게 된 것은 1900년 <창기취체규칙>의 공포에서부터이다. 몇 번의 개정 을 통해서도 공창제는 창기의 전차금과 보호자(호주 및 후견인)의 법적 권한 우선, 연기제도를 포기 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공창은 창기의 자발적인 선택 이라는 법적 취지가 기만적인 선언에 불과했 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예기 및 요리점, 음식점 단속은 지역에 사정에 따라 지역마다 시기와 내용을 달리하여 제정되 었다. 도쿄의 경우 예기의 창기유사행위 금지 조항을 포함한 <예기규칙>이 1872년에 제정됐는데, 이것이 1905년에 <예기영업취체규칙>으로 개정되어 시행되었다( 早 川 紀 代, 公 娼 制 とその 周 辺 ー 東 京 府 を 中 心 して, 季 刊 戦 争 責 任 研 究, 제17호, 1997, 55쪽). 대략 예기를 요리점 등에서 예능을 제공하는 여성으로 본다면, 작부는 음식점 등에서 음식접대를 하 는 여성을 말한다. 공창제가 시행되는 지역에서 예기와 작부의 성매매는 사창으로서 단속대상이 된다. 39) 국제연맹의 여성 및 아동의 인신매매 금지 관련 논의 및 조약 체결, 조사에 관한 내용은 鈴 木 裕 子, 東 洋 婦 人 児 童 売 買 実 施 調 査 団 と 国 際 連 盟 における 婦 人 売 買 問 題 ー 婦 女 禁 売 問 題 と 日 本 政 府 の 対 応 を 中 心 にー, 日 本 軍 慰 安 婦 関 係 資 料 集 成, 明 石 書 店, 2006년 참조. 대강의 폐창운동 내용 에 관해서는 早 川 紀 代, 日 本 社 会 と 公 娼 制, 吉 見 義 明 ㆍ 林 博 史, 共 同 研 究 日 本 軍 慰 安 婦, 大 月 書 店, 1995년, 쪽 참조
37 진상조사보고서 신설하고 이곳에서의 성매매는 묵인하는 방침을 취하였다. [군마현에서는 음식점을 갑종요리점, 을종요리점, 음식점, 이렇게 세 종류로 구분 해 단속하고 있다. 갑종요리점 에서는 술대접을 할 때 주로 예기 를 부르고, 을종요 리점 은 작부 를 이용하며, 그냥 음식점 에서는 일반여성 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즉 갑종요리점 은 예기가 출입하는 보통 요리점이며, 을종요리점은 이른바 유곽으로 보 아야 한다 40). 그리고는 작부의 허가연령을 16세 이상으로 제한하고 건강진단을 의무화했다 41). 사실상의 창기와 같은 취급이었는데, <창기취체규칙>상의 창기허가연령이 18세 이상 이었음으로 생각하면 조건은 오히려 더욱 열악해졌다고 할 수 있다 42). 공창제를 표면적으로 실시하거나, 실지하지 않거나 간에 일본 사창단속의 방점은 성매매 금지가 아니라 성병예방이었다.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규정된 법의 틀을 벗어 나 은밀히 이루어지는 성매매는 성매매 시스템의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접객여성 에게 더욱 가혹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조선인 접객여성은 작부나 여급의 형 태로 사창을 강요받고 있었다. 일본내 공창제에서 조선인 여성의 창기등록을 불허했 기 때문이다. 본래 일본의 공창제 법규에는 외국인을 창기명부에 등록할 수 없었다. 청국인, 한 국인 등 외국인 창기를 인정하면 외국인 추업부( 醜 業 婦 ) 43) 들이 일본에 점점 들어와 서 풍속 단속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44). 조선이 일본에 병합 되고 조선인이 더 이상 외국인이 아니게 된 1910년 이후에도 일본은 조선인의 창기명부 등록을 인 정하지 않았다 45). 대만인, 사할린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역시 풍속상ㆍ위생상 좋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선인 예기에 한해서만 그것이 창기와 동일시될 수 없다고 40) 군마현 경찰부장 사무관인 기시모토 야스미치( 岸 本 康 通 )가 곽청회 부회장과 간담하는 자리에서 군 마현의 성매매 통제에 대해서 설명한 말이다.( 藤 目 ゆき, 앞의 책, 110쪽) 41) 早 川 紀 代, 앞의 논문, 1997, 55쪽. 42) 조선에서는 창기의 허가연령이 17세 이상, 대만에서는 16세 이상이었다. 43) 성매매 관련 접객여성을 말한다. 당시 일본정부나 폐창운동단체들은 성매매 여성에 대하여 추업부 관을 갖고 있었다. 성매매 여성은 천하고 치욕스런 존재라는 가치관이다. 이러한 인식하에서 성매매 여성의 인권에 기반한 정책이나 대책이 나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폐창운동단체들의 추업부 관에 대해서는 藤 目 ゆき, 앞의 책, 쪽 참조. 44) 內 務 總 務 長 官 부터 廳 府 縣 長 官 앞, 通 牒 外 国 人 ヲ 誘 致 シ 娼 妓 タラシメントスル 者 ノ 取 締 方 ノ 件 明 治 三 四 年 (1901) 四 月 二 七 日 秘 甲 八 一 号 ( 荻 野 富 士 夫 編 ㆍ 解 題, 特 高 警 察 関 係 資 料 集 成 第 24 巻, 不 二 出 版, 1993, 288쪽) 45) 警 保 局 長 回 答, 朝 鮮 人 娼 妓 登 録 二 関 スル 件 通 牒 明 治 四 三 年 (1910) 九 月 一 九 日 内 務 省 秘 第 九 二 七 号 ( 荻 野 富 士 夫 編 ㆍ 解 題, 위의 책, 288쪽.)
38 Ⅱ. 일본지역 기업위안소 의 등장 배경 인정받는 한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46). 조선인 공창의 허가 문제는 1920년대 이후 일본에서 조선인 남성 노동자가 증가 하는 것을 배경으로 다시 한번 논의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원래 법률상으로는 공창을 허가하나 일본여자 외에는 허락을 아니하여 왔음으로 조선 여자에게 대하여도 그리하여 왔었는데 근래에 와서는 조선 사람이 생활의 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는 수효가 점점 늘어갈 뿐 아니라 일본에서 우리나라 사람 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것은 제가 성적관계가 원인이 되는 것이 많다 하여 성적 생활을 위한다는 구실 하에 일본에서도 조선여자 공창을 허가하자는 의론이 생기어 47) 경무국에서 조사한 바 大 正 13 年 말에 일본에 재주하는 조선인 창기의 통계는 臺 灣 에 66인, 山 口 縣 에 19인, 樺 太 에 15인, 합계 130명으로 작부로서는 樺 太 에 118인, 福 岡 縣 에 72인 長 崎 縣 에 31인, 대만에 20인, 북해도에 18인 등 291인이 산포되어 있 으며 그 외 남자로서는 노동자가 10만 2,000인으로 여자가 1만 8,000인밖에 없음으로 조선인 공창설치의 당연함을 느끼고 공창에 대한 인가를 내어줄 모양이라고 한다. 48) 일본에 조선인 공창을 허할지 아니할지는 공창폐지론이 주장되는 현재에 있어서 경 시청을 비롯하여 각 부현이 어떻게 취급할 것인지는 상당히 논의가 많은 문제인 모양 인 바 경시청에서는 조선인 공창은 장래 허가치 않을 수 없음을 간취하고 가까운 장래에 일본의 대좌 영업과는 취체를 다소간 달리할 방침으로 허가할 내정인 모양인 데 경시청에서는 이에 관하여 일본의 조선인 남자는 점차 증가하는 경향으로 이제는 벌써 1만이란 다수에 달하였으나 여성은 그 10분의 2도 못 된다 하며 이것의 허부와 및 취급방법을 총독부와 상의 중이나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되지 아니하였다 하며 허 가된다 하더라도 일본 영업자에게 둘 지는 문제라더라.(동경전보) 49) 이 시기는 탄광 중심지역인 규슈와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조선인 남성노동자들의 이주가 증가하던 시기였다. 이와 함께 이들을 대상으로 한 조선요리옥 및 조선인 작부 도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50). 그리고 곧 이들 조선요리옥에 일본인들도 출입하게 되었다. 46) 警 保 局 長 작성 廳 府 縣 長 官 앞, 臺 灣 人 娼, 樺 太 人 娼 妓 名 簿 登 録 申 請 二 関 スル 件 明 治 四 三 年 (1910) 十 月 二 十 五 日 内 務 省 秘 第 1120 号 ( 荻 野 富 士 夫 編 ㆍ 解 題, 위의 책, 쪽.) 47) 日 本 에 朝 鮮 人 公 娼 許 可? 재일 동포의 성적생활을 위한다는 구실로 일본내무성에서 조선공창을 허가할 방침, 內 務 省 通 牒 받은 總 督 府 도 贊 同?, 동아일보 1924년 11월 19일 2면. 48) 入 鄕 循 俗? 일본 있는 조선인 창기허가 방침, 시대일보 1925년 5월 21일 2면. 49) 日 本 에 朝 鮮 公 娼, 경시청에서는 임의내정, 동아일보 1925년 6월 12일 2면. 50) 宋 連 玉, 日 本 の 植 民 地 支 配 と 国 家 的 管 理 売 春 : 朝 鮮 の 公 娼 を 中 心 にして, 朝 鮮 史 研 究 会, 朝 鮮 史 研 究 会 論 文 集 第 32 集, 1994, 53쪽. 송연옥은 日 本 在 留 朝 鮮 人 職 業 別 表 (1925년 6월말 조)를 근거로 하여 1920년대 후반 조선인 작부의 수가 현저히 늘어난다고 한다
39 진상조사보고서 다이쇼시대부터 사키토탄광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인들 이 섬에도 조선인 유녀, 위안부, 소위 조센삐- 가 4,5인 있었다. 日 の 出 町 에 2층 건물의 조선인 유곽이 있었지만, 일본인도 그곳에 다녔다. 지금은 浦 島 町 라고 하지만 奧 浦 에 유곽이 있었고, 작부는 2,30명 정도 있었다. 유곽은 무슨 무슨 樓 라고 했지만, 지금도 기억에 있는 것은 港, 京 屋, まねき 등이어서 10헌에서 20헌 정도 있었다. 1인의 누주가 20인 정도의 창부를 고용하고 있었다. 창기를 1매 감찰, 예기를 2매 감 찰이라고 했다. 모두 다이쇼시대의 일이다. 이러한 유곽은 전후에는 소요리점이 되어, 창기는 작부로 되었다. 등루해서 1시간에 3전에서 5전, 대략 50전이 되었지만. 1926년( 大 正 15)부터 나야( 納 屋 )제도는 1931년(소화6)에 폐지되어 회사직영으로 되었 다. 나야로부터의 반발은 없었다. 옛날 나야(제도)에서는 의식주가 보증되어 있었다. 옛날에는 쌀이 5두표가 5엔정도. 연장에서 급료를 받을 때 나야가시라( 納 屋 頭 )는 갱부 의 음식하는 것 과 조센삐-를 사는 분 의 금액을 공제했다. 하룻밤을 머물고 돌아갈 때 유녀들은 갱부에게 5엔 있으면 또 와요 라고 했다. 兵 兒 띠를 흰색 유카타에 묶 고 50전의 배삯을 귀에 끼우고 배에 올라 건너편 해안의 유곽에 가서 一 發 하고 돌아 왔다. 유곽에 갈 때는 5,6인의 무리를 끌고 갔다. 단도를 복대에 넣고 걸어갔다. 유곽은 金 栗 이라고 했다. 사키토에서도 금권을 내고 갔다. 치쿠호 탄광에서도 금권 을 내어 썼다. 갱부가 유곽에 갈 때는 금권을 사용했다. 森 山 武 雄 증언(82세, 남) 1906년 12월 15일생. 西 彼 杵 郡 岐 戶 町 (증언일 1988년 5월 6일) 51) 윗 글은 1920년대부터 나가사키현 사키도섬에서 광부로 일했던 어느 일본인의 구 술을 인용한 것이다. 구술자는 1920년대 조선요리옥에서 있었던 조선인 작부를 위 안부 ㆍ 조센삐- 라고 부르면서 기억하고 있다. 위안부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의 일은 아니지만, 사키도섬에 와 있던 조선인 작부의 처지가 그만큼 강제적인 상황에 처해있었다는 인상의 반증일 것이다. 조선정( 朝 鮮 亭 ), 평양 옥( 平 壤 屋 ), 부산옥( 釜 山 屋 ) 등의 간판을 건 이들 조선요리점은 대개 2층으로 되어 있고, 각 층은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52). 홋카이도 삿포로의 경우 조선인 요리점은 1920년대 초 일본 유곽 주변에 여러 곳 생기기 시작하여 전 市 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53). 홋카이도에서는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 일본 지역의 조선요리옥이 본격적으로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에서 51) 長 崎 在 日 朝 鮮 人 の 人 権 を 守 る 会, 原 爆 と 朝 鮮 人, 1991년. 52) 樋 口 雄 一, 앞의 논문, 18쪽. 53) 정진성, 앞의 논문, 2004년,
40 Ⅱ. 일본지역 기업위안소 의 등장 배경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삿포로 부근의 여러 광산으로 와서 도요히라( 豊 平 ), 미나미이 치죠( 南 一 條 ), 스스키노( 薄 野 ) 등지에 약 20개의 조선요리옥이 생겼다는 것이다. 경 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곳은 요리옥이라는 간판은 걸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성매 매가 이루어지고 있던 곳이었다 54). 1935년경에는 100개소 이상이 되었으며 일본인들도 출입하였다. 그러자 경찰은 통 제를 쉽게 하기 위해 조선요리옥이 영업하는 지역을 지정하였는데, 이곳은 현지인들 로부터 조선장( 朝 鮮 場 )이라고 불렸다. 하코다테( 函 館 )나 오타루( 小 樽 )의 조선요리옥은 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했다고 한다. 이후 전시기 유흥업 전폐업 정책에 따라 이들 요리옥을 떠나게 된 경영자와 작부가 탄광ㆍ광산 등의 기업위안소 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55). 삿포로시내에는 현재 약 50헌의 조선바가 白 石, 豊 平, 萌 穗 를 중심으로 시내 각 처 에 분산해서 선인 작부는 약 150명이 있는데 바라는 것은 이름 뿐 전부 매춘을 업으 로 해서 화류병의 소굴로서 풍기위생상 한심한 상태가 계속되어 삿포로서에서는 이의 취체대책에 부심해서 특정지역 설정안 즉 조선바 및 모로, 淫 賣 등을 일정지구에 일 괄해서 감시하에 영업하도록 하는 일도 있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실현을 보지 못하다 가 56) 2) 조선인 접객여성 의 현실 조선요리옥에서 일을 했던 조선인 여성들은 대부분 인신매매를 통하여 일본의 요 리옥으로 팔린 경우가 많았다. 일제시기에 발간된 신문의 기사내용만 살펴보아도 일 본으로 팔려간 조선인 여성들에 관한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표-8] 일본지역 요리옥의 작부 인신매매에 관련한 기사 신문명 (날짜) 기사제목 내용요약 지난 31일 대구역에서 소녀 18명과 부녀 3명을 데리고 열차 를 타려하는 수상한 남자. 그 자는 달성군 이태근(24)으로 여 동아일보 女 子 를 몰아가는 자, 노동자 자를 일본으로 데리고 가면 돈벌이가 잘된다고 하여 그의 형 ( ) 모집령 위반으로 벌금 50원에 과 같이 전기 여자 20명을 모집하여 일본으로 가려하던 것이 판명되었음으로 노동자 모집령 위반이라 하여 벌금 50원에 처한 후 여자는 모두 자기집으로 돌려보냈다더라. 54) 朝 鮮 人 强 制 連 行 眞 相 調 査 團, 앞의 논문, 441쪽. 55) 樋 口 雄 一, 앞의 논문, 24쪽. 56) 숙청의 바람, 반도로. 삿포로서, 취체진을 더욱 강화, 北 海 道 タイムス 1938년 3월 7일
41 진상조사보고서 동아일보 ( ) 女 子 賣 買 의 惡 行, 사람의 피 를 빨아먹는 자에게 끌려 눈 보라치는 북화태도로, 이미 팔린 녀자가 네명//팔려가는 여자들 北 樺 太 亞 港 에서 소위 청부업 삼화조라는 간판을 부치고 한 편으로는 그곳 曙 町 에 大 福 樓 라는 요리점을 두고 인육시장을 시설하여 놓고 멀리 수륙만리를 겪한 고국으로부터 불쌍한 어린여성들을 이리저리 꾀어 사들여다 놓고 그들의 피를 빨 아 채우는 남용석은 지금으로부터 수일전에 현금 5천여원을 가지고 경성 시내에 들어와 평양여관에 투숙하면서 각처로 몰려드는 뚜쟁이들과 연락을 취하여 가지고 사들인 계집이 벌써 4명이나 되는데 대구 남정 이봉악(31)과 김주선(35)이 공모하여 직업을 구하 는 상주군 최순이(18)란 처녀를 감언이설로 꼬이고 민적등본 동아일보 夫 婦 共 謀 하고 處 女 를 誘 引 密 과 인감증명을 위조하여 대구 동성정에 있는 일인 草 野 定 壽 ( ) 賣, 필경 발각되여 피착 란 자에게 160원에 창기로 팔기로 하여 草 野 는 순이를 데리 고 일본 門 司 에 넣으려고 데려가다 발각. 충남 공주 朴 春 順 (28)은 처녀와 남의 젊은 며느리들을 일본 에 가서 공장에 넣어준다고 몇 십원씩 돈을 주어 유인하여 동아일보 少 女 誘 引 을 爲 業, 일본에 다 일본으로 데려다가 요릿집에다 많은 이를 남겨 파는 것으로 ( ) 려다가 작부로 팔아먹어 업을 삼는 다는데 거월 15일경에 당지 금정에 사는 16세 처 녀 이모와 동지 상반정에 사는 천소제(22) 두 여자를 사서 데리고 일본 北 海 道 小 樽 지방으로 향하였다더라. 중외일보 ( ) 중외일보 ( ) 日 鮮 融 化 業 輩 의 容 恕 못할 罪 惡 暴 露, 일선융화라는 간판 을 걸고, 同 胞 婦 女 를 賣 買 婦 女 誘 引 團 逮 捕, 부녀자를 유인해다가 삼사백원에 팔아 먹어, 被 害 者 無 慮 數 十 名 소위 일선융화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내어걸기만 하면 일본관 헌이 극력보호하여 주는 것을 기화로 일본 静 岡 県 横 松 市 에 재주하는 平 晶 根 등 여러명은 상애회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소위 일선융화를 제창하면서 일본관헌에 갖은 아첨을 다하여 애꿎은 1천여명의 조선동포만 팔아먹어오는데 실상 그 이면에 들어서는 갖은 악독한 수단을 꼬여내서 東 京 와 名 古 屋 등 각 지방에 팔아먹고 독아에 걸린 불쌍한 여성이 수십명에 달한 다 하며 부산경찰서에서는 부내 초량정 지나가에서 조선인 부녀자 유 인단 소굴을 탐색하고 12명을 검거하여 방금 엄중히 취조 중 인데 그 자들의 독아에 걸린 부녀와 처녀들은 수십명에 달하 며 그들은 초량정 110번지 소개업자 김치두가 단장으로 각지 에 연락을 취하여 부녀자를 유인하고 호적등본을 위조하여 북으로는 北 海 道, 남쪽은 대만, 그밖에 長 崎 大 阪 등지로 팔아먹은 사실과 樺 太 에 1명 長 崎 에 3명, 台 中 3명, 평양 3명만은 자백하였다는 바 그밖에도 일본 조선 각지에 많은 모양인 듯함으로 엄중히 취조 중 황해도 평산군 한창식(27)이라는 자는 생활난으로 자기 처되 는 금선이를 영정 모 음식점에다가 현금 100원에다가 팔아서 生 活 困 難 으로 愛 妻 를 放 賣, 받은 돈으로 배한 척을 사가지고 어업에 종사하던 중 전기 동아일보 남편은 그 돈으로 전부 생활, 음식점에서는 다른 곳으로 넘기게 되어 마침 일본 북해도 夕 ( ,30) 女 子 는 畢 竟 異 域 으로 轉 賣 張 郡 夕 張 町 4정목에서 조선요리업을 하는 盧 鳳 實 이가 사게 되자 전기 한창식이는 기왕 처를 잃게 되었은 즉 현금 30원 을 더 달라고 요구 동아일보 日 鮮 融 和 看 板 걸고 婦 女 誘 引 東 京 目 黑 署 에서는 지난 3일 자칭 조선연맹임원 지부장 임종 ( ) 이 專 業, 조선련 맹지부장의 권(29)을 체포하였다는데 임종권은 2월 이래 조선귀족이라고
42 Ⅱ. 일본지역 기업위안소 의 등장 배경 중외일보 ( ) 속이고 蒔 田 자작 자광사 남작 등으로 변명하여 조선연맹부 명칭으로 금전사취하고 부녀 총재라고 하면서 소위 일선융화라는 취지서를 만들어가지고 를 유인해, 貴 族 兼 朝 鮮 聯 盟 대관 실업가 등으로부터 5만 여원의 거액을 편취하는 한편으 長 林 鍾 權 의 犯 罪 로 수십명의 조선여자를 유인하여 팔아먹은 일이 발각 無 智 한 婦 女 十 肉 名 誘 引 하 여 販 賣 하려던 者, 감언이설 로 유인한 사실이 발각되어 서 부산 잔교에서 잡혀 경관 에게 취조 받아 지난 7일밤 부산에서 경남 진주 박문봉(28)이라는 자가 大 津 市 모 털공장의 의뢰로 여공으로 모집해간다 하였으나 면허 도 없었고 실상인즉 수 개월전부터 잔교에 그물을 펴고 지방 에서 흘러오는 젊은 여자 16명을 감언이설로 꾀어 일본으로 데려가서 北 海 道 에 팔아먹고자 형사라 자칭한 일인이 조선여자를 다른 일인과 공모하여 800 원에 작부로 팔려다가 발각. 일본 福 岡 縣 蓮 尾 元 (41)이 일본 어느 곳에서 조선 노동자들을 상대로 조선 작부 3명을 데리 고 음식점을 경영하다가 영업부진으로 전기 3명의 작부와 함 께 지난 2일에 부산을 건너와 전차 없는 그들을 구포 요리점 酌 婦 三 人 을 八 百 圓 에 팔고 에 팔아넘기려는 것을 전기 작부들은 빚이 없는 우리들을 팔 중앙일보 자하다가 발각되어 잡힌 자, 려느냐고 울고 떠드는 판에 蓮 尾 는 부산 이노구( 非 ノ 口 和 ( ) 釜 山 署 에서 取 調 中 )(50)에게 가형사로 꾸며가지고 구포에 가서 만일 말을 듣 지 않으면 경찰서에 데리고 가겠다고만 하면 수수료로 40원 을 주겠다는 약속으로 구포에 가서 전기 작부 3명이 말을 듣 지 않는다 하여 뜰에 끌고 나와 두드리며 포승줄까지 끌어내 어 묶으려고 하였다는데 명월관 주인이 아무리 보아도 거동 이 수상하여 부산서에게 계출 조선에서는 1916년에 완성된 공창제에 따라 17세(일본은 18세) 이상의 여자가 호 적등본과 친권자(친권자가 없으면 후견인 및 부양의무자)의 승낙서를 소지하고 가시 자시키 업자와 맺은 전차금과 기간에 관한 계약서를 경찰서에 제출하면 창기가 될 수 있었다. 예기 및 작부 또한 나이를 제외하고는 마찬가지 조건이었다 57). 이들 접객여성과 업자 사이에는 소개업자가 있었다. 업자는 계약 을 위해 필요한 모든 절차와 준비를 소개업자에게 의지했고, 소개업자는 그 대가로 수수료를 받았 다. 일반여성이 접객여성이 되는 과정에는 대부분 소개업자가 있었으며, 접객여성과 업자의 합법적인 계약 뒤에는 반드시 라고 해도 좋을 만큼 소개업자의 인신매매가 존재했다. 인사소개업의 간판 아래서 부녀를 유인하여다가 청루에 팔아먹는 유인마 일단 이 들은 방물장사 등 행상인으로 꾸미고 경성시내를 위시하여 각 지방 주요도시는 물론 궁핍에 떨고 있는 농촌 일대를 편답하면서 가정불화로 싸우는 집안들, 또는 가난에 쪼들려 끼니를 굶는 집안 등을 찾아들어 달달한 말솜씨로 부녀자와 숫처녀 등을 꼬여 57) 朝 鮮 總 督 府 警 務 摠 監 部 令 第 3 號, 芸 妓 酌 婦 芸 妓 置 屋 営 業 取 締 規 則, 朝 鮮 總 督 府 官 報 1916년 3월 31일. 제1조 참조
43 진상조사보고서 내다가는 서울로 데리고 와서는 음식점 작부 등으로 50원내지 2, 3백원씩에 팔아먹은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 매매 행위는 전차금이란 명목아래 여자를 화폐로 환산한 것 인데 거기는 당자의 부모승낙이 필요한 관계상 이들은 호적등본과 공인 사인 등을 모 조리 위조해가지고 양친의 승낙이 있는 듯이 꾸민 것이라고 한다 58) 위 기사는 발각된 사건을 통해 본 소개업자의 인신매매 방식이다. 이외에도 일제 시기에 검거된 조직적인 유괴ㆍ유인 사건에는 거의 대부분 소개업자가 개입되어 여 성의 유괴ㆍ유인 뿐 아니라 문서의 위조 등을 중개했다. 일본에서는 일찍이 에도시대 때부터 소개업자[구치이레야( 口 入 屋 )]가 활약하였다. 따라서 인신매매제도라는 비난을 피하면서 근대 공창제를 재편하는 가운데 메이지 정부는 소개업에 대한 단속규칙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1905년에 공포된 <예창기구 치이레업취체규칙( 藝 娼 妓 口 入 業 取 締 規 則 )>과 1917년에 공포된 <예창기작부주선업자취 체규칙>은 소개업자의 불법행위를 감시하기 위해 만든 법령이었다 59). 조선에서도 마찬가지로 공창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소개업 관련 법령이 제정되었 다 60). 1913년 경상북도에 <주선영업취체규칙>(경상북도 경무부령 제3호)이 제정되어 친권자 없는 미성년자의 주선과 피주선자의 의사에 반한 주선, 피주선자를 속여 주 선처를 그만두게 하는 것 등의 행위가 금지되었다. 인사소개소의 설립은 1923년에 <소개영업취체규칙>이 공포되면서부터이다 61). 이 때부터 접객여성의 소개는 이전의 <주선영업취체규칙>에서 <소개영업취체규칙>에 적용받게 되었다. 윤명숙의 연구에 의하면 62), 조선의 <소개영업취체규칙>은 일본의 그것에 비해 영 58) 방물장사 앞잡이, 誘 引 魔 의 毒 牙, 窮 乏 의 農 家, 不 和 의 家 庭 찾아, 公 印 僞 造, 人 身 賣 買, 동아일 보 1936년 1월 30일 조간 2면. 59) 早 川 紀 代, 앞의 논문, 192쪽. 1905년의 것은 소개업에 대한 허가, 장부작성에 대한 경찰의 검사, 소 개업자가 예창기의 금전 취급의 금지, 예창기 권유 금지, 의뢰인 숙박시키는 것 금지 등을 규정한 것이고, 1917년의 것은 여기에 작부가 추가된 것이다. 60) 宋 連 玉, 앞의 논문, 52쪽. 61) 이 도가 집이 생기기는 언제부터인가. 지금으로부터 삼년 전이오, 여기 참여한 뚜쟁이만도 서른 둘이라 한다. 원래 뚜쟁이란 그 전부터 있었지마는 하도 수가 많아 그 이익을 독차지 할 수가 없어 자기네끼리만 창기와 장사 해 먹듯 하여 보려고 예창기, 작부소개업이란 이름 아래 허가를 얻어가 지고 아주 마음 턱 놓고 직업적으로 사람매매 소개만 하게 되었다. 사람으로 사람매매를 소개하는 악마, 이 악마들이 모이는 악마굴 정말 말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人 肉 市 場 1: 河 橋 越 邊 半 頹 屋, 吸 血 鬼 窟 穴, 시대일보 1925년 8월 22일 2면. 도가 집, 곧 인사소개소 가 지금(1925년)으로부터 3년 전(1923년)에 생겼다고 한다. <소개영업취체규칙>은 1923년 1월 전라남도에서 공포된 것을 필두로 하여 1920년대 말까지 전국의 각도마다 계속 공포되었다. 내용상 차이는 대동소이하다. 尹 明 淑, 日 本 の 軍 隊 慰 安 所 制 度 と 朝 鮮 人 軍 隊 慰 安 婦, 明 石 書 店, 2003, 301쪽
44 Ⅱ. 일본지역 기업위안소 의 등장 배경 업단속 조항이 형식적이었다. 일본에서는 소개 영업 종목이 아홉 가지로 분류되어 이 가운데 예기ㆍ창기ㆍ작부의 소개 및 주선 은 다론 종목과 겸업할 수 없었다. 또 한 영업자의 사기와 유괴, 인신매매 행위에 대해서도 12항에 걸쳐 금지조항이 명기 되어 있었다. 영업자의 자격 또한 엄격하게 정하고 있어 영업자는 300엔 이상의 부 동산을 소유 해야 했다. 이 조항은 영업자 수를 줄이고, 또한 영업자의 소질을 향 상 시키기 위해 빠질 수 없는 조건 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나중에 제정된 조선의 <소개영업취체규칙>에는 영업자의 자격에 관 한 조항이 없었다. 오히려 루트만 있다면 자금 없이도 돈을 벌 희망이 있는 직업 이 어서 생활의 방도가 막혀버린 조선인에게 성공의 기대와 기업의욕을 채워주는 몇 안 되는 직업의 하나 였다 63). 다음과 같은 인사소개소의 외양 또한 여러모로 일본 소개업자의 엄격한 자격 조건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남향한 일각문이 납작하게 달려 난쟁이 키만한 사람도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이 자를 되려 받을 만치 된 오막살이 초가가 있다. 문패도, 간판도 달리지 않은 그 집안 으로 들어서면 창살이 반 넘어 부러진 문짝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고 종잇조각이 붙기 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여 구멍이 뻐끔뻐끔 뚫린 벽, 먼지가 뽀얗게 앉은 마루에도 드 문 있는 사람의 발자국, 쉬파리가 엥엥 하는 마당이 팔모로 뜯어보나 어수선 산란하 고도 우중충한 것이 사람 꼴이라곤 구경한지가 한 십년 넘어진 흉가같이 보인다 64) 그리하여 경찰의 허가를 받은 인사소개업자라 하더라도 주로 불법적인 인신매매를 통해 접객여성을 조달하였는데, 당시 사회에서는 이들을 공사창 업자, 유괴유인범과 함께 인육상 이라 부를 정도였다. 우리는 인도의 날카로운 칼로써 이를 사양( 飼 養 )하는 비인간의 인육상배를 모조리 처참할 것을 절규하여마지 않는 바이다. 일본인 지나인은 도외시하고라도 조선인 그 중에도 모 회 회원이라는 미명을 가진 임모 김모가 작부소개 반반겸의 요리업 등 간 판을 흘연히 붙이고 생지옥적( 籍 )을 꾸미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가증한가. 모두가 생활 을 양위하는 직업이라 하여 또 이하 제도의 법률 그 보양 하에서 부득이 그 존재를 허한다 하면 별문제라 할지 모르거니와 오인은 모름지기 인도상 다소의 양식을 집 ( 執 )한 이상 이런 것 박멸은 그다지 난사( 難 事 )가 아닐 것이다. 지방풍기를 고창하 는 청년단체여. 분투할 바이다. 65) 62) 尹 明 淑, 위의 논문, 302쪽. 63) 宋 連 玉, 앞의 논문, 51-52쪽. 64) 人 肉 市 場 1: 河 橋 越 邊 半 頹 屋, 吸 血 鬼 窟 穴, 시대일보 1925년 8월 22일 2면. 65) 自 由 鐘 - 人 肉 商 을 撲 滅 하자, 동아일보 1925년 7월 2일 3면
45 진상조사보고서 유괴유인, 문서위조 외에 소개업자는 전차금에 각종 비용 명목의 웃돈 을 얹는다 거나 한번 판 접객여성을 되파는 방식으로 이익을 취했다. 그러면 3월부터 7월까지의 시세없을 동안에는 어떤 수단으로 뚜쟁이들이 영업을 계속한다든가. 이미 자기 손으로 팔려간 여자를 다시 꼬여들여 팔아먹는 것으로 종사 를 하게 된다. 그럼으로 한번 자기가 흥정을 붙인 후에는 반드시 그 여자와 연락을 끊지 않고 비밀히 뒷기약을 항상 두어 너 거기서 지나다가 주인의 학대가 있다든지 고생이 되거든 나에게 다시 알려라 훌륭한 곳을 듣보았다가 인권해주마 고 엿을 먹인다. 아- 이런 꼬임이야말로 함정을 길이길이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올가미 이다. 한번 팔 려가서 한군데 오래 있고 보면 계약한 기한을 지내어 자유의 몸이 될 수가 있지마는 여러 번 팔릴수록 기한이 자꾸 늘어가고 값도 보태져서 좀처럼 하여서는 그물을 벗어 날 수 없다. 이런 몸서리쳐지고 지긋지긋한 꼬임이었마는 철모르는 여자들이 그 꼬임에 솔깃하여 조금만 자기의 비위에 틀리면 도로 뚜쟁이의 지시를 좇아 다른 데로 가기로 한다. 그리되어 서너 번 이상만 넘어 다니고 보면 영영 성한 사람이 될 수 없다 66) 접객여성을 파는 곳은 전국적이라 할 만 했다. 부내 각 처에 있는 인사소개업자 들 중에 시골에 있는 순진한 처녀를 유인하여 호적을 위조하여 가지고 각 지방으로 전매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 67) 했고, 서울서 팔려 시골로 가기도 하고 시골서 서울 로 오기도 하여 오늘 충청도, 내일 경상도로 넘어 다녀 앉은 자리가 더울 새 없이 끌려다니는 68) 상황이었다. 업자들은 외국으로 인신매매하는 것을 더 선호했는데 외국에 팔면 돈을 곱절이나 더 받는 바람에 욕심이 치밀뿐더러 조선 어디다 두었다 가 만약 모든 죄악이 사출이 나고 보면 두 수 없이 콩밥 신세를 지게 되기 때문에 돈 더 받고 뒷 염려까지 없애느라고 될 수 있는 대로 외국으로 보내려 하는 까닭에 그처럼 많이 가게 된다 고 한다. 그리고 그 중 많이 가는 곳이 일본ㆍ중국ㆍ대만ㆍ 사할린이었으며, 파는 자는 곱절의 이득이 있지만 팔리는 자는 옷 한번 변변히 얻 어 입지 못 했다고 한다 69). 이처럼 일본의 접객업에 팔려가는 여성들은 소개업 단속 이 느슨한 조선에서 소개업자에게 속아 갔던 것이다. 인신매매 업자는 일본인ㆍ조선인ㆍ중국인 등에 걸쳐 있었고 이들은 대부분 조직적 으로 움직였다. 접객여성 이 빚을 다 갚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 니어서, 1932년 11월 7일자 중앙일보 기사와 같이 다른 곳으로 다시 팔리기도 하였다. 66) 人 肉 市 場 5: 市 勢 좋은 時 節 은 九 月 에서 三 月, 시대일보 1925년 8월 28일 2면. 67) 시골색시를 꼬여내어 팔아먹는 못된 놈들, 호적을 위조하는 일이 항다반, 경찰에서 엄중 사실, 매일신보 1937년 11월 20일 조간 3면. 68) 人 肉 市 場 3: 外 國 方 面 輸 出 은 全 部 純 實 女, 시대일보 1925년 8월 24일 2면 69) 위의 기사
46 Ⅱ. 일본지역 기업위안소 의 등장 배경 팔려가기를 거부하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北 海 道 警 察 史 에 의하면 도 경찰부는 1939년에 요리옥ㆍ음식점 취체규칙 을 정 하면서 소개자와 결탁하여 예기ㆍ작부ㆍ여급 등의 인신매매적 행위를 하지 말 것 이라는 조항을 넣었는데, 당시 경찰도 접객여성의 인신매매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 여준다 70). 선행 연구자의 실태조사와 증언채취에 따르면 일본으로 팔려 온 조선인 작부의 생 활은 몹시 비참한 것이었다. 작부들은 한 밤에 추운 바깥에 서서 손님을 끌어와야 했으며, 처음 10엔 정도였던 빚은 점점 늘어나 작부들로 하여금 자포자기하게 만들 정도였다. 또한 성병에 걸린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수은 주사를 맞아가며 2, 3년 일하다 보면 폐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도망을 해서 경찰에 호소해 봐도 경 찰은 계약관계 를 들먹이며 이들을 다시 요리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71).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 조선인 작부의 자살이 빈번했고 이 때문에 1943년에 조선인 여 성의 자살을 보도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처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72). 다음의 표는 신문기사에서 엿볼 수 있는 일본지역 조선인 작부의 고통에 관한 기 사를 정리한 것이다. 포주의 횡포와 작부의 절망, 이해할 수 없는 경찰의 안이한 대 응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9] 일본지역 조선인요리옥 조선인 접객여성 의 현실을 보여주는 기사 신문명(날짜) 기사제목 내용요약 동아일보 ( ) 동아일보 ( ) 동아일보 ( ) 日 本 人 料 理 業 者 의 毒 手 에 걸닌 七 人 의 朝 鮮 人 妙 齡 女 子, 沙 里 院 驛 頭 에 나타난 그들의 將 來 旅 館 에 監 禁 하고 三 兄 弟 가 晝 夜 守 直 하회를 기다리는 조선녀자, 매맞은 녀자는 고소할 준비, 兇 計 百 出 의 日 人 肉 商 熟 睡 中 의 女 子 들을 自 動 車 에 실 고 逃 走 하려다가 일대 풍파를 야 긔, 경찰은 안면방해로 구류처분, 日 人 肉 商 凶 計 와 七 女 子 의 前 途 오사카 朝 日 亭 이라는 요리점에서 작년 11월경에 조선 여자 7명을 사다가 술 파는 영업에만 종사시키기로 작 정하였던 바 주인은 경찰의 눈을 속여가며 밀매음까지 시킨 것이 그곳 今 宮 경찰서에 발각되어, 그곳 경찰서에 서는 그 여자들을 놓아주라는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요리점 지점주인 奧 山 茂 八 이란 자는 형이 조선 안악읍에서 요리업을 하는 것을 기회삼아 그와 같이 끌고 나와 다른 곳에 팔아먹으려는 흉계가 탄로. 오사카 今 宮 경찰서에서는 무조건 풀어주라 명령하였 는데, 사리원에 와서 전기 일본인 형제가 여자들을 끌 고 가려고 발길을 채우고 쇠뭉치에 매까지 때림. 심지 어 여자들이 잠자는 사이에 들고 가려다가 깨어난 여 자들과 한바탕 소동. 사리원경찰서에서는 오사카경찰서로 조회를 하여 사실 70) 정진성, 앞의 논문, 2004년 71) 朝 鮮 人 强 制 連 行 眞 相 調 査 團, 앞의 논문, 1974년 441~442쪽.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은 조선인 여성의 이러한 상황을 지옥에서까지 차별정책이 관철되고 있었다 라고 묘사하였다. 72) 윤정옥, 앞의 논문, 19쪽
47 진상조사보고서 동아일보 ( ) 동아일보 ( ) 函 館 日 日 新 聞 ( ) 函 館 日 日 新 聞 ( ) 北 海 タイムス ( ) 北 海 タイムス ( ) 小 樽 新 聞 ( ) 北 海 タイムス ( ) 人 跡 不 到 의 山 中 에서 短 刀 로 强 制 契 約 毒 手 에 걸닌 女 子 大 阪 에 또 七 名 酌 婦 服 毒 自 殺 一 時 は 他 殺 の 疑 朝 鮮 酌 婦 殺 し 犯 人 逮 捕 煮 え 湯 をかける 朝 鮮 酌 婦 を 虐 待 酌 婦 斬 り 執 行 猶 予 을 조사하기 전에는 처결할 수가 없다 하며 이들을 방 치함. 사리원요리조합에서 동정으로 대신 몸값을 지불하여 사 려한다는 데 그 중에 평양사는 김명주만은 당초부터 속은 것임으로 불응하고 재판을 할 터이라 함. * 윤정옥의 글에서 재인용 일본인의 학대에 참지 못하고 항의했던 여성이 옷까지 벗겨져서 거리로 쫓겨났다 * 윤정옥의 글에서 재인용 정덕수 요리점에 있던 이방수(20)라는 여성이 제대로 식사도 먹지 못하고 병에 걸려서도 약도 먹지 못하여 결국 정신착란을 일으켜 오전 2시경 머리가 헝클어진 반라 상태로 배회하는 것을 순사가 발견. 12일 오전 10시경 石 狩 郡 當 別 시가지 平 安 亭 요리점 에서 작부로 있는 이칠임(24)이 끈으로 목을 매고 죽어 있는 것을 발견. 동인은 조선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 친이 죽어 4,5년 전에 동 정의 작부가 되어 있었는데 금년 3월에 죽은 모친의 사망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어 극도로 비관하여 염세자살을 한 것이라고 한다. 7일 저녁 北 見 國 枝 幸 村 조선요리점 海 月 亭 등루작부 아이코 朴 善 喜 (21)에게 위장약이라고 속여 가루약을 복 용시켜 아이코는 고민 끝에 8월 오전 7시 절명했다는 괴사건에 대해서는 枝 幸 署 에서 동 시가 목공장 잡역부 山 本 義 行 (27)을 유력한 용의자로서 인치 취조. 4일 오전 10시경 두 명의 조선요리옥 작부가 주인에 게 살해당하니 살려달라 고 旭 川 署 에 도망옴. 양명은 시내5조 동7정목 우15 조선인요리옥 김해루 양송춘(35) 의 작부로서 동일 오전 1시경 주인 양이 술에 취해 생 트집을 잡으며 끓고 있는 주전자를 갑자기 던져 큰 화 상을 입어 피부가 벗겨지는 전치 2주간의 화상을 입었 다. 양명은 주인 동생이 처가 된다든가, 양녀가 된다든 가 하여 속아 끌려와서 평소에 공박을 받아온 것으로 판명되었다. 작년 12월 5일 밤 삿포로시 豊 平 2조 2정목 앞 도로에 있는 조선바 여급 김소순(24)이 강제로 유흥을 강요하 는 것에 분개하여 나이프로 동녀의 하복부를 찔렀던 삿포로시 남5조 서1정목 西 田 方 지물 대공 川 村 永 吉 (21)에 대하여 피해사건은 삿포로지방재판소에서 심리 중인데 7일 當 原 재판소장으로부터 징역 4월, 3년간 집 행유예의 판결을 언도받았다
48 Ⅱ. 일본지역 기업위안소 의 등장 배경 2. 전시기 공창제의 변동과 기업위안소 의 등장 일본의 공사창은 1938년 이후 전시 총동원체제를 맞아 변동을 겪게 되었다. 물적, 정신적 기반의 쇄신을 통하여 전시의 효율성을 꾀했던 일본은 국민 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침투하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요리옥, 카페 등의 유흥업은 전시생활에 어울 리지 않는 사치와 허영의 공간으로서 배격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한편 일본은 접객업 폐지와 전업( 轉 業 )을 강요하는 한편 산업전사 의 노동동원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접객업의 필요성에 대해서 역설하기도 하였다. 남성집단 노동자들에 대한 노무관리 방침에서 성적 위안 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항목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거 동원되는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성적 위안 방안이 모 색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 접객여성이 나오는 조선요리옥, 특수음식점 등이 재편 되었고, 이제 조선인 작부 는 공창이 아니면서도 성매매를 공인받는 기묘한 위치에 서게 됐다. 전시 효율을 위한 일본정부의 의도와 기업의 개입 속에서 기업위안소 는 이렇게 등장하게 되었다. 1) 전시기 공창제의 재편과 조선인 노무자 강제동원 일제는 전시기 사치와 향락을 배격한다는 명분으로 유흥업을 통제하고 전폐업을 유도하였다. 1939년부터 유흥업 영업에 대한 시간제한이 실시되었고 1940년에는 <사치품등제조판매제한취체규칙>이 공포되어 유흥가, 유곽영업에 대한 규제가 엄격 하게 시행되었다 73). 전시의 자숙자계 분위기를 해친다 하여 1937년에서 1941년 사 이 10여개 현에 대한 공창폐지가 실현되기도 했다 74). 풍기진작 을 위한 표면적인 유흥업 억제 정책이 실시됐지만, 일본 정부가 공사창 에 대한 근절의지를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공창제가 시대를 거스르기 때문에 억제해야 한다는 인식은 갖고 있었지만 전쟁에 따른 성병확산의 염려와 산업전사 에 대한 위안시설의 필요라는 현실적 문제 인식 때문이었다. 결국 일본정부는 접객점의 신설ㆍ양도ㆍ상속을 금지한다고 하면서도 지역에 필요에 따라 는 신설할 수도 있다 는 예외조항을 두는 등 애매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 과정에서 공사창에 대한 일본정 부의 통제 및 관리는 더욱 엄격해졌다. 73) 早 川 紀 代, 앞의 논문, 쪽. 74) (부분 폐창-17유곽지)(1937년), 도야마(1938년), 미에ㆍ미야자키ㆍ이바라키(1939년), 카가와ㆍ아이치, 도도쿠ㆍ도토리(1940년), 이시가와(1941년) 모두 10개현. 그 외 군마현, 사이타마현, 아키타현, 나가 사키현, 아오모리현 5개 현이 1937년 이전에 폐창이 실시된 현이다.( 早 川 紀 代, 앞의 논문, 194쪽)
49 진상조사보고서 홋카이도 경찰부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호응하여 사회 風 敎 의 쇄신숙정을 강 화할 필요 에 따라, 1938년 7월 풍속에 관한 영업의 취체 요강 을 정했다. 요리옥 에 관한 주요 내용은 원칙적으로 신규영업 및 이전과 증축, 개축을 허가하지 않는다 는 것과 영업시간을 오후 12시까지로 줄이며, 농산어촌의 요리옥은 전폐업 시킨다는 것이었다. 신규영업 및 이전은 단,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곳 등을 포함한 다소의 예 외 조항을 두었는데, 이것은 후에 기업위안소 설립의 법적 기반이 되었다. 75) 하타 이쿠히코( 秦 郁 彦 )의 연구에서도 각의 결정에 관련한 각 성 관계기관 회의 차 원의 문서에서 고급 접객점은 계속해서 그것을 휴업시키고, 하급 접객점에 대해서 는 명칭을 없애고 그 실질을 위안소적인 것으로 해서 그것의 영업을 시킬 것 이라고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76). 이를 반영하여 1980년에 발간된 警 察 廳 年 表 에는 창기, 예기는 징용노무자의 위안부 등으로 전용 했다는 표현이 나오며, 大 阪 府 警 察 史 는 접객점이 해군구락부 와 군수회사의 클럽으로 전환했다고 기술했다고 한다 77). 한편 후쿠오카에서도 요리옥에 대한 새로운 단속 규정을 두어 기존의 3등 요리옥 이라고 불리던 사창 업소를 특수요리옥 이라고 개칭하고, 영업시간 단축과 지정지역 내에서의 운영, 신규영업 금지를 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쿠오카현 하의 소위 3등 요리옥 수는 현재 1,600호, 작부 6천명에 달하고 해마다 늘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현 경찰부 보안과에서는 여기에 일정한 질서를 주어 풍교상 의 폐해를 제거하는 동시에 悲 魔 에 우는 작부 보호의 목적에서 취체내규의 개정을 협 의 중인데 20일 초안이 만들어져 동일 廣 부장은 이것을 결의했다. 이 신 취체규칙의 중요한 점은 제일 종래의 속칭 3등 요리옥이라고 불렸던 것을 <특수요리옥>이라고 고치는 것, 두 번째로 요리옥가를 일정한 지역에 지정하는 것, 이는 특수요리옥의 산재를 막고 또한 풍교상 폐해있는 지역에서 구축시키려는 것이어 서 지정지역은 당지 상황을 보아 소관 각 서장에게 일임할 예정이다. 세 번째는 종래 의 방침인 신규 영업 불허가 방침을 다시 하는 것, 네 번째는 종래의 작부의 고 용계약이 어쨌든 방종으로 흐르는 중에 부당한 계약을 해야 하는 비참한 생활에 우는 자도 지키는 것으로 계약비율을 명시시켜 경찰에서 이것을 감독하게 하는 것, 다섯 번째는 소위 하리미세를 11시까지로 하는 것. 등인데 동시에 화류예방시설의 완비, 풍 기의 향상을 기대하고 있다 78). 75) 西 田 秀 子, 앞의 논문, 23쪽. 76) 奏 郁 彦, 慰 安 婦 と 戦 場 の 性 新 潮 選 書, 1999, 58쪽. 각의 결정 문서에서는 위안소적 이 위안적 으 로 바뀌었다고 한다. 77) 奏 郁 彦, 위의 책, 58쪽. 78) 三 等 料 理 屋 の 張 り 店 は 十 二 時 まで 当 局 の 改 革 具 体 案 決 定 し 名 も 特 殊 料 理 屋 に, 福 岡 日 日 新 聞 1938년 4월 2일 조간 5면
50 Ⅱ. 일본지역 기업위안소 의 등장 배경 이때 특수요리옥 의 지정 지역은 각지의 상황을 보아 해당 지역의 소관 경찰서장 이 정하도록 되어 있다는 규정을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사치와 허영의 공간이 아니라 산업전사 를 위안 위안 공간으로서의 유흥업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던 당 시 분위기를 감안했을 때, 특수요리옥 이 들어서는 지역은 전시 산업에 종사하는 노 무자들이 집중해 있는 지역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후쿠오카 지역에 이전부터 존재했던 3등 요리옥이 특수요리옥 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위안소 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급접객점이라 할 수 있는 요리옥에 대한 정비는 이러한 접객점을 싸게 이용하는 노무자에 대한 관리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조선인 노무자의 강제동원을 준비 또는 시행하면서 이들의 노무관리 차원에서 위안 방면의 문제 또한 제기되었다. 그들은 일단 조숙하다. 게다가 연령으로 보아도 성 활동이 비약적으로 활발한 연령 이다. 이 때문에 적당한 성문제를 해결할 복리시설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찍이 어느 광산에서는 반도노무자의 성욕을 채워주기 위하여 성적인 특수시설을 두었었다 79) 直 方, 鞍 手 市 郡 內 거주하는 반도인으로 조직한 直 方 교풍회는 25일 오후 1시 直 方 경찰서 광장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반도인에 의한 노동력충족문제 및 내선융화사업의 실시 등에 관해서 중요협의를 했는데 노력문제에 대해서는 鞍 手 탄전의 노동력 보충대 책으로서 반도인 노동자의 취조율의 향상을 도모하고 이를 위해 취로성적이 좋은 자 에 대해서는 표창 일시 조선으로 돌아갈 경우에 노동율을 조건으로 우선적으로 편 의를 봐주고 위안방면에는 조선요리의 영업실시 등등 의해 적극적으로 이행하도록 장려할 것을 계획하고 이러한 시설은 각 갱 똑같이 실행해서 갑산에서 을갱이라는 빈 번한 이동을 방지할 방침이다. 80) 일본이 남성노동자의 노무관리 대책을 세우면서 성적 위안 문제를 빼놓지 않고 중요하게 다룬 것은 전쟁터의 군인 통제 경험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 시피 일본은 1932년 상해사변 발발 당시에 풍기문란 하고 부도덕 적인 얘기들을 몰고 다니던 병사들에게 평상심 을 주기 위해서 위안부 를 제공했던 전력이 있었 다 81). 그리고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일본군의 전쟁수행을 뒷받침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위안소 를 설치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일본 내에 중국인 노동자의 동원을 계획하면서 그 노무관리책의 하나로 서 노동자들의 성적 욕망 을 고려하여 위안부 유치를 제안하고 있다. 육군성 정비 79) 国 民 勤 労 研 究 会, 半 島 技 能 工 の 育 成, 1942년 3월 15일. 80) 半 島 人 稼 動 者 の 獎 勵 策 講 ず, 大 阪 每 日 - 西 部 版 全 九 州 1939년 6월 26일 5면 81) 요시미 요시아키 자료집
51 진상조사보고서 국 戰 備 科 에서는 1940년 3월에 작성한 苦 力 管 理 要 綱 草 案 에서 후생시설 항에 5. 성적 욕망 고려, 6. 조선인ㆍ지나인 창부의 유치 를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82). 당 시 노무동원 및 전시동원을 다루고 있던 기획원에서도 중국인 노동자 동원을 준비하 면서 위안시설을 적당하게, 성의 문제, 1000인에 2,3인을 동시에 데리고 올 예정 이라고 기재하고 있었다 83). 실제로 중국인 노동자가 동원됐던 도야마현( 富 山 県 )의 후시키항( 伏 木 港 )의 하역작업장에는 기업위안소 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화북운수회사 와 후시키항만운송회사 사이의 계약서에 위안부의 모집법, 경비 및 운송방법에 대 하여 협회에서 연구 중이며 가능하면 합법적으로 동행시킬 것(6명이 필요하다고 예 상), 위안소 경영방법을 연구 중 이라고 명시했던 것이다 84). 그러나 이때의 위안 소 는 간부의 독점경향 과 티켓구입의 수치 때문에 영업이 부진 했다고 한다 85). 실제로 일본정부나 기업이 걱정했던만큼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의 성적 문제 는 그 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억지로라도 결점이라 말할 고칠 점을 말씀하라시면 삯전을 받는 날이면 꼭 일터에 들이 주는 것이올시다. 내지인은 돈을 타면 더 재미가나서 그 날은 이 더 좋은 편인데 조선노무자는 손에 돈이 다 모이면 다. 그 다음에는 시간관념이 없습니다. 몇 시부터 시작해서 몇 시에 끝낸다는 것을 도무지 잘 지켜 주 지를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칭찬할 점은 性 에 관해서입니다. 술은 즐기지만 성에는 담 백을 합니다. 6백명이 거의 다 홀아비가 아닙니까. 처음에는 대 걱정을 해서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으면 안 되지 않을까 까지 염려하였으나 그런 염려도 없을 것 같습니 다. 내지인노무자 같으면 벌써 큰일났겠습니다. 86) 윗글은 이바라키현 히타치( 日 立 )탄광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생활을 탐방하 러 간 매일신보 기자에게 노무주임이 조선인들의 단점에 대해서 한 말이다. 게으 름이나 시간관념 없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성에는 담백 하다 고 무엇보다도 칭찬 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특별한 시설 에 대해 고려를 하였으나 이제는 그런 염려가 없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측이 기업위안소 에 대한 고려를 포기했을까. 1945년 5월에 간 행된 석탄통제회 규슈지부의 다음 글을 보자. 82) 鈴 木 裕 子, 앞의 논문, 641쪽. 83) 기획원, 苦 力 ノ 件, 1942년 10월. 84) 外 事 月 報, 1943년 5월. 85) 外 事 月 報, 1943년 8월. ( 荻 野 富 士 夫, 앞의 논문, 65쪽에서 재인용) 86) 地 底 속에 빛나는 內 鮮 一 體 의 佳 話, 大 好 評 인 內 地 의 半 島 勞 動 者 들, 매일신보 1941년 4월 17 일 석간 2면
52 Ⅱ. 일본지역 기업위안소 의 등장 배경 특별위안소- 쉽게 말하면 성 해결소이다. 탄산의 부근에 특수음식점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반도여자가 있으면 딱 좋다. 국어를 충분히 사용할 줄 몰라도 반도여자가 아니면 기분이 나지 않는다. 또는 탄산에서는 부근에 그 설비가 없어서 천릿길을 멀리 나갔다가 2-3일 일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탄산의 노무관리 담당자에 들어보면 대개의 대답은, 반도인은 의외로 이 방면에는 담백하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조선의 인구증가율은 병합 이래 40년에 약 2배의 인 구가 되었다. 이는 담백한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그 민정을 알면 긍정할 수 없다. 오 히려 여자에 대해서는 친절한 자가 많은 것은 주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백하다 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경제적인 원인으로부터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오락 17엔 15전, 하룻밤 50엔에서 70엔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그러면 바로 낼 수 없는 셈 이다. 나는 변소 안을 꼼꼼히 돌아보았는데, 자위의 흔적이 있는 것이 3-4개에 그치 지 않았다. 이는 즉 스스로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청장년으로 하여금 스스로 극복하는 기간은 3,4개월 정도가 아닐까. 노무자의 신체는 강건하다. 두뇌는 많이 사용하지 않 는다. 여기에 정력의 울적( 鬱 積 )이 생긴다. 무의식 속에 도주를 생각하기도 하고, 선 동성을 일어나게 하는 것은 프로이드의 분석학에 갈 것까지도 없이 당연한 것이다 87). 1945년의 시점에서 대개의 탄광 노무관리자들이 반도인은 의외로 이 방면[성 문 제-필자]에 담백 하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특별위안소 를 두지 않으면 도주에 대한 생각 이나 선동성 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 당연 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조선인 노 동자에 대한 기업위안소 설치는 노동자의 관리 차원에서 도주 나 선동성 을 방지하 고 효율적인 노동력을 끌어내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고려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전에 사창의 소굴 로서 지탄받던 조선인 작부 가 있는 조선요리옥이나 특수음식점이 기 업위안소 로서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2) 화류병예방법의 실시와 기업위안소 의 등장 일본정부 및 기업이 조선요리옥이나 특수음식점을 위안소 로 활용하는 것은 이들 에 대한 성병검진 강화 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반적으로 공창의 특징으 로는 등록제 및 집결, 강제 성병 검진이 꼽힌다. 공창제 하에서는 유곽(가시자시키; 貸 座 敷 )하의 창기만이 그러한 허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작부 및 여급에 게 공식적인 성매매 허가를 주지 않으면서도 이들을 집결시키는 한편 강제 성병 검 진을 강화하고 이들의 성매매를 묵인하는 방식으로 사창을 공창화했다. 일본의 공창 제가 오랫동안 국제사회에서 인신매매 제도로서 비난받아왔다는 점과 전시 시국하에 87) 石 炭 統 制 會 九 州 支 部, 炭 山 に 於 ける 半 島 人 の 勤 労 管 理 1945년 5월
53 진상조사보고서 공식적으로 공창제 억제정책을 폈던 것이 그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후생성은 1938년 4월 20일에 칙령으로 <화류병예방법>의 전면실시를 결정하였다. 본래 <화류병예방법>은 1927년 4월에 공포되어 1928년 9월 1일부터 제2조, 제3조를 제외하고 시행되고 있었는데, 이것의 전면적인 실시가 결정된 것이다. 제2조, 제3조 라는 것은 공공단체가 업태상 화류병 전파의 우려가 있는 자 를 대상으로 하여 진 료소를 개설하고, 그것을 국고로 보조하도록 하는 조항이었는데, 그 동안은 재정적 인 이유에서 시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귀환병사에 의 한 성병이 만연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에서 후생성은 그 시행을 단행했던 것이 다 88). 이에 따라 각지의 행정지관은 진료소를 설립하고 진료비를 보조하였다. 화류병의 철저적 박멸을 위해 후생성이 전국의 접객업자, 주로 예기, 여급, 요리점 의 女 中 등에게 강제적 검미를 오는 7월경부터 시행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삿포 로의 예기여급여중들은 큰 공포를 갖고 일찍이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그 리고 금회의 문제는 전국적으로 행하여지는 것만으로 어찌하여 반대운동을 일어나도 봉공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녀들에게 하면 일분의 것 때문에 여자로서 매욕을 받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89). 삿포로진료소의 검진문제에 대해 根 本 서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금일 중에는 여급, 게이샤, 작부, 조선바의 女 中 등 약 800명에 대하여 실시하는데, 성적여하에 따 라 늘어날지도, 또는 감소될지도 모릅니다. 그 횟수로 균의 보유자에 대해서는 빈번 하게 행하지만, 없는 자는 때에 따라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류카페 및 요리점 등의 여자는 하지 않는 그런 일은 없고, 진료를 거부하는 자는 혈액검사를 하는데 그것은 최후의 수단으로 무계여급과 작부 등은 물론 엄중 조사 상 공평을 기하겠습니다. 七 日 から 開 所, 市 立 札 幌 診 療 所 후생성이 주장하는 민족정혈의 대기를 걸고 준비 만 반을 갖춘 담당 서의 발표를 보면 즉시 개소하여 시립삿포로진료원은 드디어 石 井 도 청위생기사를 촉탁으로 오는 7일부터 개소할 것이 되었다 90). 위의 인용문은 홋카이도 삿포로시에서 후생성의 방침에 따라 1938년 7월경부터 여급ㆍ예기ㆍ작부 등에게 강제적 으로 성병검진을 시행할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88) 藤 野 豊, 日 本 フャシズムと 性 病 ーいわゆる 従 軍 慰 安 婦 の 前 提, 季 刊 戦 争 責 任 研 究 第 22 号, 1998, 55쪽. 89) 藝 妓 女 給 の 檢 梅 またひと 問 題 惹 起 か, 小 樽 新 聞 1838년 4월 20일 석간 7면 90) 公 平 にやりますゾ 一 流 カフェーから 朝 鮮 バーまで, 淨 血 工 作, 根 本 署 長 の 辯, 小 樽 新 聞 1939년 2월 3일 조간 8면
54 Ⅱ. 일본지역 기업위안소 의 등장 배경 그리고 1939년 2월부터는 시립으로 삿포로 진료원을 설립하고 준비 만반 을 갖추고 있다. 홋카이도에서는 조선인 노무자의 대거 동원에 따라 조선요리옥에 대한 특별한 단 속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리하여 삿포로 경찰서는 조선요리옥 음식점 영업자 49명 중 남창운을 대표로 하여 반도인만의 결속기관 인 <삿포로 자치조합>을 결성시키고 월2회의 건강진단 을 다짐 받는다. 삿포로시의 조선요리옥은 52헌으로 이를 직장으로 일하는 반도의 여자는 80명인데, 삿포로서의 최근 단속망에 걸린 자의 다수는 애를 끓이고 있는데 서에서는 이러한 그 녀들의 건강 유지를 건전하게 하려 건강 상담 및 진료소를 담당할 기관을 두어 반도 인 영업자로 하여금 따르게 하였다. 오는 22일 삿포로서에서 업자를 불러 대체로 실 현할 모양이다 91). 삿포로 시내의 조선요리옥 음식점 영업자 49명은 예전부터 삿포로서의 지시로 통제 조합을 만들 대책을 세웠는데 30일 총회를 열어 반도인만의 결속기관으로서 삿포로자 치조합을 결성하여 조합장에 토요히라( 豊 平 ) 2조 1정목, 남창운( 南 昌 雲 )씨 이하 간부 및 규약을 결정, 31일 삿포로서에 계출했다. 조합결성에 의해 반도의 여성들은 우선 보건위생지식을 각 방면의 권위자에게 배우거나 획기적인 것으로서는 그녀들은 비교 적 병색이 깊어도 평소처럼 있었지만 조합의 사업으로서 월 2회 건강진단을 받고, 계 약을 해제할 때에는 귀국여비의 알선 등 여러 가지 복음이 있다 92). 후쿠오카에서도 화류예방시설을 완비 하고 [특수] 요리옥을 일정한 지역에 지정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신취체규칙을 협의하고 1938년 4월 10일 초안을 만들어 당 일 결의하고 있다 93). 다만 일정한 특수요리옥에 조선인, 일본인 작부가 함께 고용되 어 있던 후쿠오카의 사정을 반영하듯 조선인 작부나 여급에 관한 특별한 언급이 홋 카이도 만큼 빈번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후쿠오카와 같이 특수요리옥 등을 일정한 지역에 집결하고 통제를 강화하는 것도 전시기 사창 대책의 특징이었다. 홋카이도의 경우에도 도시에 산재해 있던 조선요리 옥을 탄광 방면으로 집결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 도시 정화 차원과 반도노동자의 위안대책 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 관광도시의 미관을 해치는 하나인 커다란 암적 존재인 반도요리옥이 내년 봄부터 전부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현재 도내 6개 시를 비롯해 각 지에 산재해있는 반도 요 91) 半 島 人 料 理 店 の 診 療 所 札 幌 署 で 勸 奨, 小 樽 新 聞 1938년 3월 19일 조간 8면. 92) 반도인 요리점 자치조합, 삿포로에서 결성, 小 樽 新 聞 1938년 4월 1일 조간 7면. 93) 三 等 料 理 屋 の 張 り 店 は 十 二 時 まで 当 局 の 改 革 具 体 案 決 定 し 名 も 特 殊 料 理 屋 に, 福 岡 日 日 新 聞 1938년 4월 2일 조간 5면
55 진상조사보고서 리옥은 130헌으로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여급, 작부 등은 약 300명에 달하고 있다. 도시에 체면을 가진 관광 홋카이도로서는 조선요리옥의 정화가 커다란 문제가 되었었 는데 증탄계획의 파고를 타고 해협을 두개를 넘어 조선에서 약 8000명의 노력구원대 가 연내에 도내의 탄산을 목표로 해서 오도록 되어있다. 이 반도노동자의 위안대책으 로 홋카이도석탄광산회에서는 향토색이 가장 높은 동향 여성군이 만든 요리서비스를 한다는 것을 내걸고 반도인 노동자가 들어오는 도내 18 탄산에 대해 법도의 조선요리 옥 26곳을 인정해 달라고 해왔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만 이것을 인정해 도내에 산재해 있는 종래의 요리옥을 탄산 방면으로 돌리는 방침을 세워 금후 필요에 따라 도시의 반도요리옥을 이동시켜서 점차 도회로부터 그 모습이 사라지게 되었다 94) 일본 내에서 공공연한 사창을 행하고 있어 도시의 암적 존재 로서 취급받던 조선 요리옥은 조선인 노무자의 대규모 동원을 맞아 노력구원대 의 위안대책 의 대상으로 포섭된다. 일본 정부는 조선요리옥의 사창 성향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은밀한 성매매를 묵인하고 성병 검진을 강화함으로써 전시 생산성 향상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곧 기업위안소 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94) 朝 鮮 料 理 屋 へ 都 市 から 炭 山 へ 異 動, 小 樽 新 聞 1939년 10월 14일 조간 7면
56 Ⅲ. 기업위안소 의 실태와 특징 Ⅲ. 기업위안소 의 실태와 특징 1. 홋카이도( 北 海 道 ) 지역의 기업위안소 홋카이도는 메이지 초기 개척 이민의 이주 장려책으로써, 개척사 스스로 출자 개설 했던 관영 遊 所 가 존재했던 역사적 배경을 지닌 지역이었다 95). 일찍부터 정책적 차원 에서 관( 官 )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성매매 시스템을 활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반영하듯 홋카이도의 기업위안소 의 설치와 관리 과정에는 여타 지역에 비해 도청 과 경찰, 그리고 홋카이도석탄기선주식회사와 미쓰비시 등 기업의 적극적인 개입이 보인다. 1) 홋카이도 기업위안소 의 실태 홋카이도 석탄광업회가 홋카이도 도청에 18개 탄광에 36개의 조선요리옥을 신설하 고 허가해달라는 대규모의 요청을 한 것은 1939년 10월의 일이었다. 생산확충선상을 약진해서 우리 세상의 봄을 구가하는 은진산업의 팽창에 의해 勞 力 은 대부분 그 방면에 흡수되어 광산방면에서는 미증유의 인력기근을 현출, 이 감탄책을 극복할 최후의 비장의 카드로서 도청에서는 노력의 구원대를 반도인에게 구하게 되어 연내에 8 천명의 반도인이 해협 둘을 건너서 멀리 도내 각 광산을 목적으로 들어옴. 이렇게 반도 노동자의 위문방법이 갑자기 문제화되어 결국 반도여성군의 구원이 요망화 되어 와서 홋카이도 석탄광업회에서 도청보안과에 대해 반도인을 사용하게 될 18탄광에 26개소의 조선요리옥 개설을 인정해 주도록 요망하여 곧 삿포로 광산 감독국과 협의 하여 전면적 으로 허가하는 것은 어려워도 어느 정도의 인가를 얻게 될 모양. 요리옥 설치 요망 수는. 탄광기선 夕 張 5개소. 미쓰비시 美 唄, 雄 別 각 3개소 스미토모 歌 志 內, 同 奔 別 각 2개소. 茂 尻, 平 和, 眞 谷 地, 登 川, 幌 內, 미쓰비시 大 夕 張, 미쓰이 美 唄, 昭 和, 朝 野 96) 雨 龍, 新 幌 內, 東 幌 內, 각 1개소 97). 95) 西 田 秀 子, 앞의 논문, 17쪽. 96) 浅 野 의 오기로 보인다. 97) 入 道 の 半 島 労 務 者 たちに 同 郷 女 性 の 慰 めを 各 地 に 朝 鮮 料 理 屋 新 設, 小 樽 新 聞 1939년 10월 13일 석간 2면
57 진상조사보고서 전시 생산 확충을 위해 조선인 노무자 8,000여명이 들어오게 되어 이들의 위문방 법 이 갑자기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해결방법의 일환으로 조선요리옥 의 설치를 요망한다는 내용이었다. 홋카이도 석탄광업회의 요청은 전시 풍기단속과 관련하여 요리옥 카페 유곽 댄스홀 등의 신설 증축 이전의 허가 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방침에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홋카이도 도청은 전면적으로 허가하지는 않는다 고 하면서 결국 조선요리옥 의 신규영업과 작부 기타의 고인 채용을 허가하였다. 원칙적으로는 허가하지 않지 만, 인구의 급격한 증가 등의 토지에서 이러한 업종 영업을 할 필요가 인정되는 경 우, 멈출 수 없는 경우 는 허가한다는 <풍속에 관한 영업의 취체요강>의 항목을 근 거로 시행된 조치였다 98). 이에 따라 조선인 노무자의 위안 을 목적으로 하여 조선요리옥 을 개설하게 된다. 노무자 500명에 1채를 할당으로 허가하고 여급 (작부)는 1채 3명으로 제한하는 조건 이었다. 이때 여급 은 조선에서 데리고 오는 것은 허가하지 않을 방침으로 오로지 홋카이도 도내에서 영업하고 있는 여급 으로 한정되었다. 노무자 5백명에 1 軒 을 할당. 생산확충의 길에 따른 노동력 구원부대로서 작년 10월 부터 잇따라 반도출신의 노무자가 본도 광산지대를 목적으로 착착 이입하고 있는데, 이런 노무자의 위안시설로서 광산측에서는 조선요리옥의 개설허가를 요망하여 도청 보안과에서는 이 요망을 충족할만 하여 노무자 500명에 1헌의 할당으로 허가해서 여 급은 1헌 3명으로 제한해서 당분간은 유바리, 다키가와( 瀧 川 ),쿠시스( 釧 路 ), 몬베츠, 비바이, 이와미자와의 6광에 허가했다. 그러나 여급은 직접 본국에서 데려오는 것은 허가하지 않을 방침으로 오로지 도내에서 영업하고 있는 여급에 한정되어 있다 99). 이에 따라 인신매매를 통해 홋카이도의 조선요리옥 등에 종사하고 있었던 조선인 여성이 노무자의 위안시설 인 조선요리옥, 곧 기업위안소 의 위안부 로 이동하게 된 다. 한편 1942년의 시점에서도 조선에서 여성들이 위안부 로서 가는 것을 목격했다 는 증언이 있어 100), 조선요리옥의 여급 을 조선에서 새로 동원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졌을까 하는 점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현재 자료상 보이는 가장 최초의 기업위안소는 홋카이도탄광기선주식회사( 北 海 道 炭 鑛 汽 船 株 式 會 社 ; 北 炭 으로 약칭)의 유바리( 夕 張 )광업소이다 101). 98) 西 田 秀 子, 앞의 논문, 21-22쪽. 99) 朝 鮮 料 理 屋 の 開 設 を 許 可, 小 樽 新 聞 1940년 1월 21일 석간 2면 100) 위의 [표-5] 위원회 노무동원 피해신고자 중 기업위안소 관련 진술자 가운데 17번 고 의 진술 내용 참조
58 Ⅲ. 기업위안소 의 실태와 특징 탄광보국의 제일선에서 활약하는 일천여명의 반도인 채탄부대의 유바리 광업소에서 는 기숙사 협화료의 가까이에 쉼터( 憩 いの 家 ) 를 두고 반도부인으로 향 토요리로서 노동을 위로하게 되어 유바리서에 허가신청 중인다는데 1일자로 허가되어 長 屋 의 일부를 개조하여 업자에게 제공하고 빠른 시일 내에 개업할 것이 결정되어 인 가된 쉼터 는 3호로 각호에 반도미인 5명씩 두고 반도산업전사에게 없는 것이 없이 두었다. 102) 유바리광의 채탄 제일선으로 일하는 반도인 산업전사 위안을 위하여 유바리 광업소 에서는 이미 福 住 一 區 上 高 에 憩 の 家 3호를 신설 향토요리를 준비하여 반도 미 인으로 접대하게 하여 향토정서를 만끽하려는 제 준비를 진행하고 있는데 반도미인 7 명은 이즈음에 와서 저녁 憩 の 家 는 19일부터 개설한 때부터 3개월에서 5개월만에 향 토 정서를 맛보아서 매우 호평을 받고 3헌 모두 크게 번창하고 있다. 103) 유바리 광산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의 쉼터 로서 조선요리옥 세 채가 기숙사 주 변에 설치되었다는 내용이다. 1940년 2월 1일자로 허가되어 3월 19일부터 영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따라서 기업위안소 가 설치되고 준비된 시기는 1940년 3월 19일 이전의 일임을 알 수 있다. 이어서 1940년 4월 20일 경에는 북탄 소라치 광업소가, 25일 전후에는 헤이와 광 업소가 쉼터 를 개설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북탄의 유바리 각 탄광에 인 접한 오유바리 광업소에서는 1940년 9월 24이에 기숙사 충생료 부근에 쉼터 를 설 치하고 작부 12인을 두어 영업을 개시했다. 歌 志 內 에는 음식점 경영 채탄전사로서 川 경찰서 관내의 각 탄광에 입산했던 반 도인은 작년 가을부터 금년 봄에 걸쳐 전부 3천 수백명에 달하고 있는데 내선융화를 도모함과 함께 稼 働 성적의 향상을 기하기 위해 각 광업소마다 협화회를 조직, 동 협 화회를 단위로 엽합회를 결성하여 지도적 입장이 있는 澈 川 署 의 특고계에서는 각 광 업소 협화회의 담담회 등에 출석하여 많은 의견을 교환하였는데, 회원의 도주방지와 생활개선 등에 걸친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 결과 비교적 호성적으로 회원 중에는 1개월의 벌이가 백수십원이 되는 자가 다 수인 외 탄광을 안주하는 곳으로 가까운 시일에 가족을 반도로부터 초청하는 것도 희 101) 정진성, 앞의 여성부보고서, 2003, 279쪽. 102) 美 味 い 郷 土 の 料 理 半 島 の 美 人 が 接 待 夕 張 憩 ひの 家 近 く 開 業, 北 海 タイムス 1940년 2월 14일 조간 6면. 103) 憩 いの 家 繁 盛 夕 張 礦 半 島 人 郷 土 情 緒 を 満 喫, 北 海 タイムス 1940년 3월 24일 조간 6면
59 진상조사보고서 망하는 자도 있고 광업소로서도 그 현상을 크게 기뻐하고 있는데 또한 일면 강경한 훈시와 지도 뿐으로 반도인간의 오락기관으로서 음식점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하여 우타시나이에는 上 砂 川 과 같이 반도인 경영의 음식점이 없어서 탄광기선 및 스미토모 의 양 광업소가 서로 제휴하여 반도인을 위해 음식점을 경영시키게 되었다. 104) 작년 가을 그 歌 志 內 에 입산했던 탄광기선 空 知 광업소의 반도전사를 위해 일하는 반면에 위안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데 동소의 간부가 夕 張 에 최근 생긴 것과 같은 형태의 쉼터 를 계획 중이다. 20일 경에는 가게 문을 열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현재 삿포로에서 영업하고 있는 것이 이전해 오는 것으로 6명의 반도미인이 서비스하 는 것이 된다. 이것이 상당히 번창함과 함께 여기에 의해 반도인 부대의 노동력도 크 게 향상할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고 있는 중이다. 105) 유바리정 若 菜 邊 平 和 광에서 일하고 있는 반도인 채탄전사는 약 2백여명. 동광에서 는 반도전사의 노동을 높이기 위해 이미 조선요리점 '쉼터'의 개업을 계획 중. 이즈음 당국에서 인가되어 근일 가게 문을 열 예정으로 목하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106) 선행연구 및 홋카이도 요리점 조합 명부에 의거하여 홋카이도 지역의 각 탄광, 광 산의 '기업위안소 설치상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10] 홋카이도 지역 각 탄광ㆍ광산의 기업위안소 설치 상황 107) 광업소명 ( )안은 소재지 성적위안시설의 설치상황과 작부 수 1940년 12월말 1941년 12월말 각 지역 요리점 설치 상황 (1942년 4월) 住 友 鉱 業 ( 株 ) 歌 志 內 炭 鉱 ( 空 知 郡 歌 志 內 村 ㆍ 現 歌 志 內 市 ) 北 海 道 炭 鉱 汽 船 ( 株 ) 空 知 炭 鉱 ( 空 知 郡 歌 志 內 村 ㆍ 現 歌 志 內 市 ) 반도인 전용의 요정이 교외에 개설, 티켓제도. 반도인을 선정, 회사로부터 건물 기타 설비를 제공하고 조선요리점을 경영시킨 반도인위안소. 작부 5명. 우타시나이 시가지에는 조선인 업주 경영 요리점 없음. 우타시나이 시가지에는 조선인 업주 경영 요리점 없음. 104) 美 味 い 郷 土 の 料 理 半 島 の 美 人 が 接 待 夕 張 憩 ひの 家 近 く 開 業, 北 海 タイムス 1940년 2월 14일 조간 6면. 105) 半 島 戦 士 憩 の 家 'お 国 美 人 のサービスで 愈 よ20 日 頃 店 開 き, 北 海 道 タイムス 1940년 4월 3일 106) 平 和 礦 憩 ひの 家 近 く 開 業, 北 海 道 タイムス 1940년 4월 28일. 107) 北 海 道 割 烹 料 理 店 組 合 員 名 簿 (1942년 4월)와 西 田 秀 子 가 글에서 인용한 자료를 통해 작성함. ( 西 田 秀 子, 戦 時 下 北 海 道 における 朝 鮮 人 労 務 慰 安 婦 の 成 立 と 実 態 ー 強 制 連 行 と 関 係 性 にお いて, 女 性 史 研 究 창간호, 2003년, 24 28쪽). 니시다는 半 島 人 勞 務 者 ニ 關 スル 調 査 報 告 (사단법인 일본광산협회, 1940년 12월)와 半 島 労 務 者 勤 労 状 況 に 関 する 調 査 報 告 (노동과학연구 소, 1943년 12월)를 이용함
60 Ⅲ. 기업위안소 의 실태와 특징 홋카이도탄광기선(주) 幌 內 광업소 (소라치군미카사산촌ㆍ현미카사시) 北 海 道 炭 鉱 汽 船 ( 株 ) 夕 張 炭 鉱 ( 空 知 郡 夕 張 町 ㆍ 現 夕 張 市 ) 雄 別 炭 鉱 ( 株 ) 雄 別 炭 鉱 ( 阿 寒 郡 阿 寒 村 現 阿 寒 町 ) 太 平 洋 炭 鉱 ( 株 ) 春 採 炭 鉱 ( 釧 路 市 ) 三 井 炭 鉱 ( 株 ) 砂 川 炭 鉱 ( 空 知 郡 砂 川 村 ㆍ 現 砂 川 市 ) 日 本 鉱 業 ( 株 ) 大 盛 鉱 山 ( 茅 部 郡 森 町 ) 日 本 鉱 業 ( 株 ) 豊 羽 鉱 山 ( 石 狩 郡 豊 平 町 ㆍ 現 札 幌 市 ) 靜 狩 金 山 ( 株 ) 靜 狩 鉱 山 ( 山 越 郡 長 万 部 町 ) 住 友 本 社 ( 株 ) 鴻 之 舞 鉱 山 ( 紋 別 郡 紋 別 町 ㆍ 現 紋 別 市 ) 住 友 本 社 ( 株 ) 奔 別 광업소 (소라치군미카사산촌 ㆍ현미카사시) 조선요리옥 3헌, 현재장소만족, 불평 없음. 작부 십수인. 조선인요리옥, 인접부락에 있음. 이곳을 이용. 탄광이 시내에 소재하므로 특히 고려하지 않음. 기재없음. (1941년에는 개설) 월2회 공휴일에 森 町 函 館 방면의 외출을 허가. 성문제를 해결. 현재 어떤 설비도 없음. 공휴일을 이용해서 부근의 시설을 이용. 시가지에 요리카페 등 있음. 조선요리옥은 없음. 성문제 해결 곤란, 가족초청 장려. 내지인과 같음. 조선 居 酒 屋 1헌을 지정해서 조선인이 경영. 건물은 무상대여. 조선인 작부 4인. 조선인노무자거주지역( 기숙사 사택)의 중심에 위안소를 설치. 건물을 무상대여, 노무과에서 물자를 배급 감독. 유흥비는 계약서에 의함. 銘 酒 屋 4호, 소바, 술의 음식점 각1호. 조선인 작부 16인. 회사지정의 조선인반도요리옥 3헌을 경영. 유흥비는회사가 가격을 정함. 조선인 작부 16인. 시가지에 조선 銘 酒 屋 1호를 경영시킴. 그밖에 일본인 銘 酒 屋 수호. 호로나이 시가지. 상호 없음. 업주 한용근( 韓 龍 根 ) 유바리정 시가지. 상호 없음. 업주 이일남( 李 一 南 ) 손기련( 孫 琦 鍊 ) 김원준( 金 元 俊 ) 釧 路 지방 阿 寒 村 평양정, 업주 양연선( 梁 連 先 ) 송월가( 松 月 家 ), 업주 이창업( 李 昌 業 ) 釧 路 시내에 조선인 업주인 요리점 없음 상호명-반도요리점 업주 岩 本 小 錫 국수( 菊 水 ), 업주 김성녀( 金 姓 女 ) ; 그 외 조선인 업주나 반도 요리점 관련 접객점 없음. 도요히라쵸에 일본인 업주의 요리점 다수 있음. 미카사산촌 시가에 조선인 요리옥 1곳 있음. 미카사산촌 호로나이 시가지 소재
61 진상조사보고서 미쓰비씨광업(주) 비바이광업소 (소라치군비바이정 ㆍ현비바이시) 쇼와전공(주) 豊 里 광업소 (소라치군아카비라촌 ㆍ현아카비라시) 이용자는 적음, 특설할 필요는 없음. 조선인 작부 2-3인. 시가지에 조선명의 居 酒 屋 1호의 개업을 허가(공식지정은 아니라고 함). 조선인 작부 7인. 건물은 회사로부터 무상대여 받고 지정 상인이 경영하는 태양관 이 있음. 기숙사에서 가깝고 최근 세액이 오른 것에 비해 고가가 되어 이용자 적음. 폐점 예정. 조선인 작부 6인-> 최근 3,4인으로 감소. 상호 없음. 업주 한용근( 韓 龍 根 ) 비바이 가로 시가지. 상호 없음. 업주 황군례( 皇 軍 禮 ) 太 陽 館 (업주 朴 萬 順 ) 1941년말 현재 미쓰이( 三 井 ) 스나가와( 砂 川 ) 탄광에는 1천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으며, 동 탄광에서는 조선요리옥 3채을 지정, 운영하도록 했다. 조선인 작부 는 16명 있었다고 한다. 요리옥의 유흥비 가격은 회사가 지정하여 관리했다. 조선요리옥은 요리점이나 술집이 늘어서 있던 스나가와 시가지의 뒷길에 있었을 것이나 현재로서는 위치를 알 수 없다. [사진-1] 미쓰이 스나가와 탄광 [사진-2] 가미스나가와 시가지 * 수직갱도(다테코)가 보임 * 현재는 숲으로 변했음. * 시가지 뒷길로 요리옥, 술집 들이 많았다고 함. * 이들 중 조선요리옥이 3헌이 있었음. 우타시나이 지역은 철도를 사이에 두고 스미토모( 住 友 ) 우타시나이( 歌 志 内 ; 中 村 지 역)와 호쿠탄( 北 炭 ) 소라치( 空 知 ; 神 威 지역)으로 나뉜다. 요리옥은 시가지에 소재했다 는 자료가 있는데, 두 탄광의 노무자들이 가운데에 있는 시가지( 中 村 지역)를 함께 이
62 Ⅲ. 기업위안소 의 실태와 특징 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북탄계 소라치 탄광은 1940년에 회사가 조선인을 선정하여 건물 및 기타 설비를 제공하고 요리옥을 경영시켰다고 한다. 조선인 작부 5명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탄 광은 현재 완전히 숲으로 변해버려 옛 흔적을 찾을 수 없는데, 조선인 기숙사와 기 업위안소 의 소재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1] 북탄계 소라치 탄광 내 조선인 기숙사와 기업위안소 소재도 * 오른 쪽 아래에 표시된 부분이 조선인 기숙사와 기업위안소 자리이다. 증언에 바탕하여 작성. 스미토모( 住 友 ) 우타시나이( 歌 志 内 ) 탄광은 조선인 전용 요정 이 교외에 있었다고 하며, 티켓제도로 운영되고 있었다 한다. 특별히 기업위안소 를 두었다기 보다는 이 전부터 존재했던 조선인 요정, 접객업을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3] 나카무라( 中 村 ) 시가지 [사진-4] 나카무라 시가지 뒷길 * 탄광과 거리를 두고 있음. * 노동자들이 휴일을 이용에 드나들었음. * 요리옥 선술집 등이 많았던 곳임. 조선인 전용 요정 이 있던 곳. * 위치는 현재 알 수 없음
63 진상조사보고서 아시베츠시( 芦 別 市 )에 소재한 미쓰이( 三 井 ) 아시베츠 광업은 1939년 9월에 광업소 를 설치하여 1941년에 영업을 개시하고 그 해 조선인 노동자들을 동원했다. 언덕 아 래 조선인 기숙사와 중국인 기숙사가 있었으며, 탄광천( 川 )을 건너 사찰 두 개를 지 나 고지대에 올라서면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이 곳에 위안소 가 있었다. 증언에 의 하면 조선요리옥은 1944년에 생겼다고 한다. 杉 山 四 郎. 미쓰이 아시베츠 광업소 노동자. 회사가 만든 위안소가 강 건너편에 있었습니다. 위안부는 5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부 조선여자입니다. 벌이가 좋은 광부에게는 할인권이 나왔습니다. 벌이가 좋다는 것은 예를 들면, 1개월에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도 이것도 늘 그랬 던 것은 아닙니다. 나왔다가 나오지 않았다가 했습니다. 할인권은 1엔의 가치가 있었 습니다. 위안부는 1번 안는 데 6엔입니다. 나는 3번 정도 갔습니다. 아시베츠 마을의 중심에도 몇 번인가 나갔었습니다. 마을의 여자는 병을 가진 이가 많았고 병이 옮은 동료도 있었습니다. 위안소에서의 이야기이지만, 어느 때인가, 아침부터 회사의 잘난 놈들이 여자를 불러들인 술자리를 했습니다. 그놈들은 5명 가운데 자기의 마음에 드 는 여자를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佐 藤 米 藏. 미쓰이 아시베츠 광업소 노무계 담당. 위안소 가 생기기 전 그 건물은 高 根 탄광의 독신자 기숙사였다. 村 松 부부가 관리. 미쓰이 광업소가 들어오자 다카네탄광의 노동자들이 미쓰이로 가버려 기숙사가 비게 되었다. 佐 藤 가 1944년 4월에 건물을 빌리고 그해 12월에 샀음. 그 뒤 그 건물은 조 센삐야 라고 불리게 되었음. 전후 어느 시점인가 건물이 비게 되었으며, 귀환자들이 그곳에서 살았었다 108). 朝 賀 しづゑ, 1927년생. 근처상점의 딸. 1941년 4월~1945년 3월 사이에 고등여학교 (고녀)를 다님. 고녀 4학년(1944년) 봄방학 때 집에 와 보니 위안소 가 생겨 있었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성이 4,5인 있었으며, 이들은 일본어는 못하고 손짓발짓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였다. 근처에 사는 마마상 라 불리던 여자가 이들의 치마저고리를 만들 어주었다. 1945년 가을에 여자들은 없어졌다 109). 미쓰이 아시베츠 광업소는 근처에 조선인노동자를 위한 特 飮 店 을 두고 업자에게 운영하도록 하면서 작업능률이 우수한 조선인에게 이용권을 주고 이용하도록 했음. 종전 후 차별대우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의 갈등이 심했 음. 어느날 고관급 중국인 노동자가 부하들을 데리고 特 飮 店 에 가 조선인들에게 시 108) 杉 山 四 郎, 私 の 民 衆 史 : 倶 会 一 処 芦 別 もう 一 つの 歴 史,みやま 書 房, ) 西 田 秀 子 가 청취한 내용(2006년 5월 21일 청취한 것을 현지 조사 당시 조사관이 니시다로부터 재청취)
64 Ⅲ. 기업위안소 의 실태와 특징 비를 걸고 신발을 숨겼음. 이것이 빌미가 되어 1945년 9월 22일 조선인노동자와 중국 인노동자가 총출동하여 난투를 벌였음 110). 위의 증언 내용을 종합해 보면 기업위안소 는 1944년 4월에 생겨 1945년 9월까지 유지되다가 그즈음 없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건물의 일부(옛 규모의 4분의 1)가 남아있는데, 현재 홋카이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업위안소 의 흔적이다. 그러나 현재 거주자가 그곳이 과거에 위안소 였는지 모르고 있으므로 공개하는 것은 곤란하다. [사진-5] 미쓰이 아시베츠 광업소 조선인 기숙사 위 언덕 [사진-6] 기숙사에서 위안소 까지 가는 길 * 뒤쪽 아래에 평평한 부지가 있는데 그곳이 조선인 기숙사가 있던 곳. * 그아래는 탄광천이 흐르고 있고 오른쪽으로 300미터쯤 되는 곳에 중국인 기숙사가 있음. * 중국이 기숙사를 지나 탄광천 다리를 건너 언덕을 올라가면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여기에 위안소 가 있었음. [사진-7] 미쓰이 아시베츠 광업소 위안소 * 현재 건물의 일부가 남아있음. 멀리 보이는 빨간 지붕이 조선인 위안소 건물. 아카히라시( 赤 平 市 )에 소재한 쇼와( 昭 和 ) 도요사토( 豊 里 ) 鉱 業 所 에는 1941년말 기숙 사 가까운 곳에 태양관 이라는 위안시설 있었다고 한다. 건물은 회사가 무상대여한 110) 芦 別 市 史,
65 진상조사보고서 것이며 지정상인이 경영하였다고 한다. 1942년 작성된 北 海 道 割 烹 料 理 店 組 合 員 名 簿 에 의하면 경영자는 박만순이다. 조선인 작부 가 6명 있던 것이 1941년말에는 3,4명 으로 감소된 상태이고, 이용요금이 고가여서 이용자가 적다고 한다. 곧 폐점 예정이 었다. 쇼와 도요사토 탄광은 시가지로부터 떨어진 외진 곳에 있었다. 이 때문에 위안소 가 기숙사 바로 옆, 도요사토 부지 내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진-8] 쇼와 도요사토 조선인 기숙사가 있던 자리 [사진-9] 쇼와 도요사토 조선인 기숙사 자리 옆 철길 * 지금은 아카비라시역소정화센터가 있음. * 철길 오른쪽에 태양관 이라고 불린 위안소가 있었음. 미카사시( 三 笠 市 )에서 기업위안소 를 이용 한 기업으로 스미토모( 住 友 ) 분베츠( 奔 別 ), 호쿠탄( 北 炭 ) 호로나이( 幌 内 ) 탄광을 꼽을 수 있다. 혼베츠 탄광 노동자들은 탄 광에서 내려와 이쿠슌베츠( 幾 春 別 ) 시가를 이용했다고 한다. 시가지에 일본요리옥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요리옥은 1호가 있었다. 탄광이 특별히 설치한 것은 아니었다. 이용자는 적었으며 조선인 작부 는 2, 3인 정도 있었다고 한다. 본래 이쿠슌베츠 시가지는 호쿠탄의 소유지였으나, 스미토모 소속자들도 이용했다 고 한다. 예전에 불이 나서 지금은 옛 흔적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시가지 가운데 진자 도오리( 神 社 通 り)는 중심거리로 신사가 있는 곳이다. 그 뒷길인 나카 도오리( 中 通 り)에 요리옥들이 많았는데, 조선요리옥도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호쿠탄 호로나이 탄광에는 그 주변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일본인 요리옥이 많았으며, 호로나이 탄광은 조선요리옥 한 곳을 지정해서 조선인이 경영하도록 하였다
66 Ⅲ. 기업위안소 의 실태와 특징 건물은 업주에게 무상대여하였으며, 조선인 작부 4명이 있었다. 호로나이역에서 산으로 올라가다 보면 선탄장과 주택지가 나오며, 강을 건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시가지가 나왔는데 이곳에 요리옥이 있었다. 종전 뒤 마을 [사진-10] 진자 도오리 에는 현지인이 거의 떠나고 사할린에서 귀환 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았다고 한다. 이 때 문에 전시기의 마을 사정을 아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 main street. 시가의 중심지임. [사진-11] 나카 도오리 * 진자토오리의 뒷길. 요리옥과 선술집이 들어서 있던 곳임. * 불이 나서 옛 모습은 잃었음. [사진-12] 전시기 스미토모 혼베츠 탄광 들어가는 길 * 시가지에서 숲길을 걸어올라가면 옛 탄광지역이 나옴. 지금은 모두 숲으로 변해버림. 임 전북 익산 출생. 1942년 4월 18세 때 北 海 道 幌 内 탄광으로 동원. 함바 와 탄 광 가까이에 시내가 있었다. 긴쵸 라고 불 리는 성매매 업소가 있었다. 조선인 여자가 있는 업소와 일본인 여자가 있는 업소 두 군데였는데, 일본인 여자가 있는 업소는 가 보았으나, 조선인 여자가 있는 업소는 비싸 다는 말에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111). 위 증언 가운데 金 鳥 (킨쵸) 는 홋카이도 소 재 요리점 조합원 명부( 北 海 道 の 割 烹 料 理 店 組 合 員 名 簿 (1942))에서 이름이 확인된다. 이는 일본인 요리옥 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 요리옥 도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바이시( 美 唄 市 )의 위안소 설치 기업으로 는 미쓰이 비바이와 미쓰비시 비바이가 있다. 비바이시는 철도를 사이에 두고 왼쪽의 미쓰 이 비바이와 오른쪽의 미쓰비시 비바이로 나 뉘어 있다. 미쓰이 비바이 탄광에는 탄광 부지 아래에 미나미비바이( 南 美 唄 )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 는데, 이것이 미쓰이의 소유는 아니었다. 소유 부지와 시가지의 경계선에는 감시소가 설치되 어 있었다고 한다. 위안소 는 시가지에 소재 하였다. 111) 담당 조사관이 구술청취한 내용(2006년 4월)
67 진상조사보고서 [사진-13] 옛 호로나이 역 [사진-14] 옛 댄스홀. * 지금은 미카사 철도마을로 바뀌었음. * 산 중턱에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음. * 호로나이 시가지에 있음. 지금은 주택임. * 종전 뒤 미군의 댄스홀로 쓰인 곳. 전시기에는 고급요리옥이 었을 것. [사진-15] 댄스홀 건너편 시가지 * 지금은 주택가. 예전에는 광부들이 이용하는 작은 요리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음. * 조선요리옥도 이 거리에 있었을 것임. [그림-2] 비바이시 관내도
68 Ⅲ. 기업위안소 의 실태와 특징 [사진-16] 1935년의 미쓰이 비바이 광업소 * 가로 선이 부지와 시가지의 경계선. 위의 검은 표시가 조선인 기숙사이며 아래의 검은 표시가 기업위안소 임. [사진-17] 옛 사무소 자리 [사진-18] 옛 병원 자리 * 탄광 입구 바로 아래 있음. * 빨간 지붕 건물이 있는 곳이 옛 사무소 자리. [사진-19] 옛 조선인 기숙사 자리 * 사무소 아랫자리임. 지금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음. * 미쓰이 부지 안에 병원이 있었음 [사진-20] 옛 위안소 자리 * 유치원 앞 공터가 옛 기숙사 자리임. * 앞에서 두 번째 건물자리가 옛 위안소 자리임. * 첫 건물자리는 영화관이 있던 자리
69 진상조사보고서 마을에 살던 국철 직원의 아들. 1929년생. 국민학교 졸업후 공업학교에 진학. 학교 를 가기 위해서는 요리옥 앞으로 지나다녀야 했음. 근로봉사 다녀오다 보면 조선인 여성들이 집 앞에 나와 있었음. 그녀들을 보면서 부끄럽다고 생각했음. 사람들은 그 집을 보고 (조센)삐야 라고 불렀음. 검은색 벽이 요리옥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음 112). 최 1921년 경남 하동 출생. 현 전남 담양 거주. 1941년 20세 되던 해에 미쓰이 비바이 탄광으로 동원. 관사 너머 마을에 조선요릿 집 하나가 있었음. 최 이 비바이에 가기 전부터 있었으며, 해방 뒤 돌아올 때도 영업을 하고 있었음. 요릿집에서 술을 팔기는 했으나 음식을 팔지는 않았음. 요릿 집 주인은 충청도 출신의 부부임. 40대 정도 돼 보였음. 여자들은 10명 정도 있었 음. 전부 한복을 입고 있었으며 댕기머리를 하지는 않았음. 젊은 여자들도 있었고, 나 이가 삼십, 사십된 여자들도 있었음. 그 여자들은 조선에서 팔려 온 여자들이었으며 주인에게 딱 잡혀갖고 꼼작 못했음. 주인이 조선에 있는 처녀들을 사다 놓은 것이라 기한이 넘어야 자기 활동이 가능 했음. 5년 동안 없어진 여자는 없었고, 처음에 본 여 자들이 끝까지 있었음. 마을에 내려가면 여자들은 요릿집 밖에 나와서 놀고 있었음 의자 내어 놓고 앉아 있기도 하고, 오고가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잡아끌기도 했음. 일 본사람도 다녔는지는 모르겠음. 요릿집은 빨간색 함석집이었던 것 같음. 마을에 조선 인 요릿집은 하나였지만 일본인 요릿집, 술집은 많았음. 이곳에 조선인들도 다닐 수 있었음. 탄광노동자들은 부지 안에 있는 병원을 다녔음.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마을 에 있는 병원에 다녔어야 했음. 요릿집 여자들도 마을에 있는 병원에 다녔을 것임 113). 사진-21) 가로( 我 路 )의 현재 모습 사진-22) 가로( 我 路 )의 옛 요리옥 * 가로의 오늘날 모습.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음. * 이곳에 조선요리옥이 있었을 것임. * 창이 돌출된 건물이 일반적으로 요리옥이나 음식점 건물. 사 진의 건물은 고급요리옥이었을 것으로 조선요리옥은 아님. 미쓰비시 비바이 탄광에서 비바이 철도를 지나 3조 거리와 4조 거리로 접어들면 가로( 我 路 )라는 거리가 있었는데 이 곳이 유흥가였다. 지금은 폐가가 많다. 시가지에 112) 白 戸 人 康 가 마을주민에게 구술청취한 내용(연도 미상). 113) 담당 조사관이 구술청취한 내용(2006년 7월)
70 Ⅲ. 기업위안소 의 실태와 특징 조선 이름의 요리옥 이 있었다고 한다. 경찰이 개업을 허가했으나 회사의 공식지정 은 아니었다고 한다. 조선인 작부 는 7명이 있었다는 기술이 있다. 이 조선요리옥은 가로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 전남 함평 출생. 1942년 6월경 25세 때 종로의 직업소개소를 통해 홋카이 도의 三 菱 美 唄 탄광으로 동원. 탄광에서 3키로 정도의 거리에 있는 비바이역 근처에 술집이나 몸 파는 한국여자들이 많았음. 비바이역 근처의 몸 파는 여자들 집 은 늘 꽉 차 있었음. 조선인 간부가 가자고 해서 이 따라간 적이 있으나 집집들마다 꽉 차 있어서 구경만 하다 나온 적이 있음. 조선인 여자는 한 집에 5 6명 정도 있었던 듯 함. 그 집 에서 한번 자는 데 일본돈 2원 필요. 탄광에서는 한 달에 한번 평가를 해 서 성적이 우수한 사람은 시내로 외출을 시켜 줌. 이때 영화관에 가거나 몸 파는 여 자집 에 갔음. 한 번에 7 8명 정도 외출했음 114). 현 삿포로시( 札 幌 市 )에 소재했던 니혼( 日 本 ) 광업 도요하( 豊 羽 ) 광산은 1945년 4월 수몰사고로 휴산이 되었지만 위안소 는 그때까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石 田 基 雄, 1925년 출생, 토요하 광산의 광부. 토요하광산은 北 海 道 石 狩 郡 豊 土 町 (현 삿포로시) 소재했음. 탄광으로 가는 길목에 조선 요리옥 1개가 있었음. 1943년 개 설. 여자들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으며 조선인 독신자 기숙사에 살고 있는 조선인 들을 상대했음. 연령은 알 수 없으며 조센삐 라고 불렸음. 요리옥 을 일본인도 이용 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음. 건물은 1개였지만 매우 컸음. 1944년에 폐광되었으나 요리옥 은 그때까지 있었음. 치료소는 사무실 위에 있었으며 의사는 1명이었음 115). 유바리시( 夕 張 市 )는 기업위안소 가 가장 먼저 생긴 지역이다. 호쿠칸( 北 炭 ) 유바리 ( 夕 張 )탄광이 소재했다. 조선인 노무자 거주지역의 중심에 위안소 를 설치했으며, 회 사측에서 건물을 무상대여했다고 한다. 1941년말 현재 조선요리옥 은 4채, 조선인 작부 는 16인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 당시 나이 21세. 1942년 夕 張 炭 鑛 으로 노무 동원. 3년간 채탄 작업. 1943년에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청노방 (조선요리옥, 노무 위안소 로 추정) 앞에서 조선 여자와 대화를 나눔. 夕 張 탄광에는 청노방 하나가 있었으며, 청노방 하나에는 조선 여자 7 8명이 있었음. 정 는 청노방 의 조선여자와 우연히 한 번 만났을 뿐 이며, 청노방 에는 놀러 가 본 적이 없다고 얘기함. 다만 동료들이 청노방 에 대해 하는 얘기를 몇 번 들었다고 함. 116) 2) 홋카이도 기업위안소 의 특징 홋카이도의 기업위안소 는 탄광, 광산 등 기업의 직접적인 관여를 말해주는 문헌 114) 담당 조사관이 구술청취한 내용(2006년 3월). 115) 니시다히데코가 구술청취한 내용(2005년). 116) 담당 조사관이 구술청취한 내용(2006년 2월)
71 진상조사보고서 자료가 존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만큼 기업과 도청, 경찰의 체계적인 협조 하에 기업위안소 가 등장했음을 말해 준다. 탄광이나 광산 주변에 시가지가 있는 경우에는, 시가지에 일찍부터 형성되어 있었 던 조선요리옥을 이용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 경우 기업위안소 에 대한 기업의 개입이 미약하다. 반면 탄광이나 광산이 시가지와 떨어져서 외진 곳에 위치한 경우 에는 기업이 적극적으로 기업위안소 의 개설에 개입하고 있다. 도요사토의 태양관 이라는 이름의 기업위안소 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 규슈( 九 州 ) 지역의 기업위안소 1) 후쿠오카 지역의 기업위안소 후쿠오카의 기업위안소 는 치쿠호 지역을 중심으로 확인된다. 치쿠호 탄광 지역의 접객점 조사는 치쿠호탄광모임( 筑 豊 ヤマの 会 )에서 1991년~1994년에 걸쳐서 한 적 이 있다. 당시 조사에 참여했던 요코가와의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50여명 정도 관련 자 증언을 들었으나 증언기록이 남아있지는 않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접객점 의 위 치와 이름은 증언이 최소 3번 이상 겹친 경우에만 사실로 인정하고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신뢰할만한 것이라 하겠다. 후루카와( 古 河 )공업소의 미네지( 峰 地 )탄광은 치쿠호의 소에다( 添 田 ) 지역에 소재한 다. 미네지 탄광에는 昭 和 寮, 日 輪 寮 라고 불린 조선인 독신용 기숙사가 있었고 접 객점 은 이들 독신기숙사와 10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영업하고 있었다. [사진-23] 東 旅 館 별채 [사진-24] 新 吉 野 樓 건물 * 오른쪽 건물 東 旅 館 의 별채로서 특수음식점 으로 사용되었 * 당시 건물에 지금은 다른 사람이 민가로 사용하고 있음. 음. 1955년 일본에 매춘금지법 이 생길 때까지 영업했음. 그 때까지 한국여성이 있었음. * 현재 東 旅 館 은 당시 업주의 아들이 민가로 사용하고 있으며 별채는 사용하고 있지 않음
72 Ⅲ. 기업위안소 의 실태와 특징 [사진-25] 朝 鮮 館 터 미네지 탄광 바로 옆에는 후루카와( 古 河 ) 공업소의 오미네( 大 峰 )탄광이 있었다. 映 心 寮, 愛 汗 寮, 陽 信 寮 등의 조선인 독신 자 기숙사가 있었고. 부근에는 조선인 노 무자를 상대로 한 昭 和 亭, 醉 心, 伊 矛 屋 등 조선인 여성이 나오는 접객점 이 상당 수 있었다. * 지금은 건물이 없어지고 공터가 되어 있음. 가게 앞에 <조선관>이라는 입간판이 있었다고 함. * 경영자는 일본인. 조선특색을 내걸고 영업했던 접객점 임. [사진-26] 陽 信 寮 터. [사진-27] 大 和 屋 터. * 조선인 독신자 기숙사 터. 현재 놀이터로 되어있는 부분은 당시에 기숙사 감독관이 살았던 곳. * 커다란 규모의 고급음식점이었으며, 방이 많았음. 전후에는 병원으로 쓰였음. * 1992년 <치쿠호탄광모임>에서 조사할 때까지만 해도 건물이 남아있었으나 언론에 보도된 뒤 철거됨. [사진-28] 1992년까지 남아있던 大 和 屋 건물 [사진-29] 矢 沢 性 病 院 건물 * 西 日 本 新 聞 1992년 2월 21일자 석간에 실렸던 사진. * 당시 성병원으로 사용됐던 건물. 지금은 민가로 쓰이고 있음. * 광부를 포함해서 일반인들이 다녔던 병원. 성병원은 당시 흔 히 존재했던 것으로 오오미네 탄광만의 특색은 아님
73 진상조사보고서 우에다( 上 田 )공업소의 호오슈( 豊 州 )탄광은 이중 탄광의 하나로서 지층을 경계로 아 래는 우에다탄광, 위는 후루나가( 古 長 )탄광을 이루고 있었다. 근처에 ' 協 和 寮 ', ' 淸 和 寮 '의 조선인 독신자 기숙사가 있었으며, 조선여성이 나오는 상호불명의 접객점 하나 가 있었다. [사진-30] 접객점 터. 미쓰이의 다가와( 田 川 )탄광은 다가 와이타( 田 川 伊 田 ) 지역에 소재하며 다 가와 탄광은 대규모의 탄광으로 모두 제6갱까지 있었다. 그 가운데 제3갱 주변 지역을 현지조사했는데, 모토마 치( 元 町 )와 나카토오리( 中 通 り), 사갱 ( 斜 坑 )에 조선인 기숙사가 있었다. 번 화가인 사카에마치( 栄 町 )에 조선여성 * 현재는 민가임. 이 나오는 접객점 들이 몰려있었으며, * 당시의 상호는 알 수 없음. 原 口 라는 일본인이 경영했음. 이 '접객 점'에서 장구소리가 들렸다는 증언이 있음(요코카와 청취) 탄광의 노무자는 이들 번화가로 나와 특수요리옥, 곧 기업위안소 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31] 豊 泉 閣 터. * 전후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들을 상대했던 접객점. 일본인 여성들이 있었음. * 전후에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들이 폭동 을 일으킬 것을 염 려해 마을 사람들이 豊 泉 閣 에 일본인 여성들을 모아놓고 무료로 성적 제공을 하게 했음. 경제적 대가는 마을 사람들 이 치렀을 것. 지금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음. [사진-32] 사카에마치의 당시 접객점 건물들 [사진-33] 사카에마치 소재의 접객점 大 多 和 터 * 타카와이타지역의 최대 번화가로 접객점 들이 밀집해 있었음. * 조선인 여성이 나왔던 접객점. * 지금은 주택가로 변했으나 옛 접객점 건물이 꽤 남아있음. * 지금은 빈터로 남아 있음. 역에서 가까울수록 젊은 여성이 나오는 고급 접객점 이 많았음
74 Ⅲ. 기업위안소 의 실태와 특징 조사에 참여했던 요코가와의 말에 의하면, 1939년 이후 조선인 여성이 접객점 에 대거 출현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특수요리옥 의 형태로 존재했다고 하는데, 특 수요리옥 이 전시기 성병검진이 강화된 것을 배경으로 새롭게 등장한 용어임을 생각 하면, 이것을 기업위안소 로 볼 수 있다. 기업위안소 1곳에 4~5명이 있었으며,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던 것이 특징이다. 요코가와 조사 당시 현지인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일본 안에서 동원된 여성들일 것 이며, 이들이 조선에서 왔다는 얘기는 듣지 못하였다고 한다. 한편 1939년 <석탄광업연합회>는 조선인의 성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위안소 를 두는 것보다 가족을 부르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보인다. 홋카이도 지역에 비해 후쿠오카에서는 기업위안소 를 새로 설치하는 것에 소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 헌상에 보이는 치쿠호( 筑 豊 ) 탄광지대의 조선인 접객여성의 흔적을 찾으면 다음과 같다. 코마츠 카즈마시( 小 松 一 馬 ) ( 豊 州 炭 鑛 古 長 광업소 노무주임) 석탄을 증산하기 위해서 조선에서 많은 돈을 걸고 끌고 오기 때문에 도망친다면 한 층 곤란하다. 3개월을 참으면 이타( 伊 田 )의 사카에마치( 栄 町 )의 인바이야( 淫 賣 屋 )나, 이케지리( 池 尻 )의 조센삐야에 여자를 사러 가게 했다. 사카타 츠쿠모( 坂 田 九 十 百 ) ( 豊 州 炭 鑛 上 田 광업소 坑 長 ) 후에 타가와 시장. 우수한 갱부에게는 휴일이 되면 이케지리( 池 尻 )에 있는 조센삐야에 노무가 인솔해 가서 가게를 전부다 빌려서 놀게 했다. 그 대금은 물론 급료에서 제했다. 마루야마( 丸 山 正 憲 ) ( 三 井 田 川 광업소 제4갱( 川 崎 ) 坑 内 係 ) 이케지리에서 고토지( 後 藤 寺 )에 가는 도중의 간바라( 上 原 )에 조센삐야(인바이야)가 있어서 거기 조선 여자가 많이 있었다. 여자정신대라고 해서 속아 끌려 왔다. 일본 인바이야의 여자들보다도 훨씬 쌌기 때문에 모두 다녔다. 황학성( 黃 學 城 ) ( 痲 生 광업소 赤 坂 탄광 조선인 대장) 탄광 주변에는 어느 곳이든 조센삐야가 많았는데, 강제연행되어 온 동포가 만기 후 에 이전후 자주적으로 폐지하기로 됐다. 그러나 거기에 고용되어 있던 여성들은 조선 에 가려고 해도 돌아가지 못했다. 삼등 요리옥에서 몸을 팔기도 했던 것이 고향에 알 려졌기 때문에 가는 것도 안됐다. 귀국을 체념해서 부자의 첩이 되서 그런 사람이 여 기에는 많았다. 김철발( 金 哲 發 ) ( 痲 生 광업소 赤 坂 탄광, 말로 석탄을 운반) 이이츠카( 飯 塚 ) 마을하고 미쓰이 야마노 탄광에 있는 가모( 鴨 生 )에서 인바이야를 몇
75 진상조사보고서 헌인가 가지고 조센삐야로서 조선여자들을 두고 있었다. 모치다 츠기오( 持 田 次 男 ) ( 痲 生 광업소 赤 坂 탄광 제2 蘚 直 기숙사장) 박동운( 朴 東 雲 )과는 반대로 아카사카 탄광에는, 조선인 대표들의 단체의 협화회의 간부인 정재봉( 鄭 宰 鳳 )이라는 보스가 있었다. 이이츠카( 飯 塚 ) 마을과 가모( 鴨 生 )에서 조센삐야도 했고, 이 지방의 조선인과 친분이 있었다 117). 한편 위원회 노무동원 피해신고인지 증언한 후쿠오카 지역의 기업위안소 는 다음 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최. 후쿠오카 아소기업 아카사카( 赤 坂 ) 탄광 동원. 강원도 원성 출생. 현 충북 제천 거주. 돈 좀 있는 사람은 신마치에 가서 일본여자 들, 조선여자들이랑 잠을 잤다. 탄광에서 신마치( 新 町 )까지의 거리는 2Km 정도여서 걸어서 다닐 수 있었음. 외출에는 특별히 제한이 없었고, 도망을 가지 않는다는 믿음 만 있으면 마음대로 외출할 수 있었음. 일 잘하고 모범적인 사람은 특히 자유롭게 몇 시간씩 다닐 수 있었음. 같은 합숙소의 동료가 다녀왔다고 말하는 소리만 들었음 118). 장. 일본 후쿠오카현 도호( 東 邦 )(주) 치쿠시( 筑 紫 )탄광 동원. 1940년 모집을 통하여 동원됨. 일본에서 6년간 탄광 노동자로 일하다 왔음. 도망이 심하다 해서 도착 뒤 2년간은 외출이 쉽지 않았음. 2년 뒤부터 외출이 가 능. 놀러 나갈 때는 전차를 타고 마치 에 갔음. 마치 에는 식당과 각시집 등이 많았 음. 일본에 있을 때, 1달에 1번 탄광에서 지원을 받아 도리시마 (감독)가 탄광노무자 들을 데리고 각시집 에 갔음. 마치 에 노무자들이 가는 각시집 이 정해져 있었음. 각 시집 에 들어갈 때 따로 요금을 내지는 않았음. 요금은 탄광에서 받는 월급에서 제해 졌음. 각시집 에는 조선여자와 일본여자가 다 있었음. 그러나 조선여자가 거의 대부 분이었음. 주인은 일본인이었음. 각시집 에 들어갈 때 조선여자방에 들어갈 것인지, 일본여자방에 들어갈 것인지 얘기를 하고 들어갔음. 방 앞에는 남자들이 줄 서 있기 도 했음. 인기가 많은 여자방에 남자들이 길게 줄 서 있기도 했음. 여자들이 밖에 나 와서 손님을 끌거나 하지는 않았음. 조선여자 방에 들어가면 여자들이 자기네 얘기를 하고는 했음. 강제로 끌려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음. 돈 벌러 일본에 왔다가 이 곳[각시집]에 왔다는 얘기는 들었음. 일본에서 살다가 각시집 에 왔다는 여자도 있었 음. 20살 초반의 젊은 여자들이었음. 콘돔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 여자들이 병 검 사를 철저하게 한다고 했음 119). 117) 이상은 林 えいだい 著, 消 された 朝 鮮 人 強 制 連 行 の 記 録, 明 石 書 店,1989 年 에서 발췌 118) 담당조사관이 구술청취한 내용(2006년 6월 청취). 119) 담당조사관이 구술청취한 내용(2006년 10월 청취)
76 Ⅲ. 기업위안소 의 실태와 특징 2) 나가사키( 長 崎 )지역의 기업위안소 나가사키 지역의 기업위안소 가운데 현지조사를 통하여 조사관이 확인한 곳은 미 쓰비시 사키토( 崎 戸 ) 탄광 부근이었다. 현지 조사 지역을 지도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3] 미쓰비시 사키토 탄광 일대 지도( 長 崎 県 西 海 市 崎 戸 町 ) * 1-1 제1갱구 부근 우라시마( 浦 島 )의 옛 유곽가 * l-2 제2갱구 부근 아사우라( 浅 浦 )의 옛 조선인 주택 터, 유곽 터 사키토 탄광 제1갱구 부근에서 옛 접객점 거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는 주택 가로 바뀌었다. 본래 사키토탄광 접객점 거리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2006년 8월의 현지조사에서 <사키도 중앙공민관>의 사서 上 野 久 美 子 씨의 자문을 얻 어 위치를 알 수 있었다. 현지조사 과정에서 原 爆 と 朝 鮮 人 에서 조선인 유곽에 대해 증언했던 喜 浦 茂 男 씨 의 집을 우라시마에서 발견하였다. 집의 위치로 보아 喜 浦 茂 男 씨가 계속 우라시마에 서 살아왔으며 따라서 조선인 유곽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77 진상조사보고서 [사진-34] 우라시마가는 길 [사진-35] 우라시마 거리 * 오쿠우라( 奥 浦 ) 마을. 왼쪽에는 바다가 있음. 뒤쪽에 집들이 보이는 마을부터 우라시마임. 광부들이 배를 타고 유곽 에 다녔다는 증언이 있음. * 우라시마 거리의 여관. 우라시마 접객점 거리에는 조선인용 유곽 이 2개가 있었다고 함.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음. [사진-36] 우라시마의 喜 浦 茂 男 씨 집 * 1928년생. 현재 생존. * 우라시마 거리의 조선인 접객점 에 대해서 증언함. 사키토 탄광의 제2갱구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제2갱구가 왼쪽에는 조선인 주택가와 조선인 기숙사가 있었다. 정면에는 극장이 있었다. 조선인 주택가와 영화관 사이에 유곽 이 2채 있었다. 여기에 조선인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인 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소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인 여성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진-37] 제2갱구 앞의 아리랑고개 [사진-38] 옛 접객점 터 * 아리랑 고개라고 불리는 곳. 지명 유래는 정확하지 않으나, 주변에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됨. * 옛 조선인 주택가와 극장 사이에 유곽 2헌이 있었음. 조선인 여성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음
78 Ⅲ. 기업위안소 의 실태와 특징 나가사키 하시마섬의 탄광 노무자들이 이용한 기업위안소 에 관한 사실은 다음의 신문기사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1천 수백명의 독신광부에 대해서 요리옥의 여자는 겨우 20명 내외, 독신광부는 신 이 아니어서 부부와 가족을 많이 데려오면 비생산적인 가족을 흙 한 줌, 쌀 한 되 귀 중한 작은 섬에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섬은 군함과 같이 작아 결국 독신자가 가 장 경제적인 것이다. 현재 만족한 기분으로 일하는 독신자는 거의 없다고 하여 이대 로 어떻게 능률을 올릴 수 있을까가 문제가 되어 탄광 당국, 梅 香 崎 署 에서는 가까운 高 島 에 최소한도의 환락가를 신설해서 端 島 와의 사이에 밤에는 12시까지, 아침에는 5 시부터 정기선이라는 멋진 계획을 세우고 있다 120). 하시마 탄광의 요리옥 이 부족하여 다카시마 탄광에 환락가 를 설치하여 하시마 탄광의 노동자로 하여금 이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독신 남성 노무자의 업무 효율 을 위한 요리옥 설치라는 의미에서 기업위안소 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이 조선인 기업위안소 였는지는 불분명하다. 한편 하시마에 조선인 작부 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시기에 제도 적으로 고려된 기업위안부 의 성격을 갖는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해야 할 것이다. 유. 1919년생, 충북 충주 가금면 출생. 1942년에 모집을 통해 나가사키 하시마 탄광으로 징용. 섬에는 몸 파는 조선여자들 이 있었음. 살림하는 여자들이 몸을 팔 기도 했고, 하코방 같은 데서 여자들이 나오기도 했음. 한 집에는 3,4명 정도. 전부 20명 정도 있었던 것 같음. 그 여자들은 이쁘게 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녔음. 말투를 들어보면 주로 경상도 여자였음 121). 마츠시마( 松 島 ) 탄광 오지마공업소( 大 島 工 業 所 )는 나가사키현 니시가이시( 西 海 市 ) 오지마쵸( 大 島 町 )에 소재한 미쓰이계 탄광이다. 노무자의 도망방지 대책의 하나로서 요리옥 등을 설치한다는 신문 기사 내용이 있어 기업위안소 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黑 瀨 村 大 島 광업소의 부근에 유흥장소가 없어서 도망하는 갱부가 많아, 그것을 방 지할 대책으로서 일반오락시설과 예기치옥, 요리옥 등을 설치하게 되었다 122). 120) 独 身 鉱 夫 の 天 国 へ/ 軍 艦 島 から 疫 病 と 夫 婦 者 を 駆 逐 / 端 島 炭 鉱 に 珍 計 画, 大 阪 每 日 - 西 部 版 長 崎 1939년 6월 1일 5면. 121) 담당조사관이 구술청취한 내용(2006년 7월). 122) 街 の 錄 音, 大 阪 每 日 - 西 部 版 長 崎 1939년 5월 25일 5면
79 진상조사보고서 3) 규슈지역 기업위안소 의 특징 후쿠오카 지역 기업위안소 는 홋카이도 지역에 비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건물이 많았으며, 큰 규모의 고급 요리옥 의 형태를 띤 것이 많았다. 홋카이도와 같이 기업 의 부지 안에 소재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또한 조선인 여성만 두고 있 는 기업위안소 는 없었으며 대부분 조선인 여성과 일본인 여성이 함께 나오는 형태 였다. 경영자 또한 일본인 또는 조선인이 혼재되어 있었다. 다음의 기사는 경찰서가 요리옥 영업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조선인 노동 자에 대한 노무관리와 노동력 고취를 위해 조선요리옥이 활용되고 있었음을 말해준 다. 이는 홋카이도의 경우와 공통된다고 할 수 있다. 直 方, 鞍 手 市 郡 內 에 거주하는 반도인으로 조직한 直 方 矯 風 會 는 25일 오후 1시 直 方 警 察 署 광장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반도인에 의한 노동력충족문제 및 내선융화사업의 실시 등에 관해서 중요협의를 했는데 노력문제에 대해서는 鞍 手 炭 田 의 노동력 보충대 책으로서 반도인 노동자의 취조율의 향상을 도모하고 위안방면에는 조선요리의 영 업실시 등등을 적극적으로 이행하도록 장려할 것을 계획하고 이러한 시설은 각 갱 똑 같이 실행해서 甲 山 에서 乙 坑 이라는 빈번한 이동을 방지할 방침이다 123). 한편 사키토 탄광의 경우에는 일찍부터 이 지역에 존재한 조선인 접객점 이 탄광 노무자들의 성적 위안 시설로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키토 탄광 근처의 조선인 접객점 124) 에 관한 이야기는 다이쇼시기(1920년대)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사 키토 섬에는 일찍부터 조선인 탄광노동자들이 와 있었고, 이들을 상대로 한 조선인 접객점 이 있었다. 접객점 은 전시기에 들어와 특수요리옥 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후쿠오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시기에 특수요리옥 이라는 형태로 기존의 접객점 이 기업위안소 로서 기능했음을 말해 준다. 123) 半 島 人 稼 動 者 の 獎 勵 策 講 ず, 大 阪 每 日 - 西 部 版 全 九 州 1939년 6월 26일 5면. 124) 증언 가운데에는 유곽 이라는 용어로 나오지만 당시 조선인 여성이 공창이 될 수 없었던 사정을 상기하면, 이는 아마 사창 을 행하고 있던 요리옥에 해당할 것이다
80 [부록-1] 지명대조표 Ⅳ. 맺음말 기업위안소 는 전시기 일본의 탄광 등으로 대거 동원되어 온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노무관리 차원에서 계획되고 운영된 것이다. 그 때문에 기업위안소 실태에 대 한 검토는 노동자 강제동원이 시작된 1938년 이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기업위안소 가 아무런 물적 인적 토대 없이 전시기에 새롭게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1920년대부터 일본 내에 증가한 조선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형성되어 있던 조선요리옥 등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전시기 이전부터 일본 지역에 존재했던 조 선요리옥의 경영자, 조선인 접객여성 등의 인적 자원과 건물의 구조, 그리고 요리옥 을 내세우고 은밀히 성매매를 행했던 요리옥의 경영 방식 등이 1938년 이후 등장한 기업위안소의 기본틀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요리옥에 있었던 조선인 여성들은 대부분 인신매매를 통하여 일본의 요리옥 등으로 팔려온 경우가 많았다. 공창제 하에서 여성을 인신매매 하는 소개업의 역할 을 규정하고 소개업자의 불법행위에 대해 눈감아버린 경찰의 태도가 이러한 인신매 매를 방조하였다. 특히 식민지 조선에서 소개업자 단속 관련 법령이나 실제 단속이 매우 느슨했고, 조선의 경찰은 사상범 단속에나 주력하지 유괴업자에 대해서는 무관 심하다는 비판이 빈번할 정도였다. 이러한 틈새를 이용하여 인신매매 업자들은 이익 이 곱절이나 남는 일본 중국 등지로 여성을 인신매매하였다. 조선요리옥이나 특수음식점 등에서 공공연한 사창으로 존재하던 조선인 작부에게 변동이 생긴 것은 1938년 이후였다. 전시 총동원 체제를 맞아 일본은 대외적으로는 자숙자계, 풍기진작 을 외치면서 공창제 억제 정책을 폈지만, 전쟁 수행의 효율성 을 기하기 위해 강제동원된 일본군이나 노동자들에 대한 성적 위안 대책을 강구하 였다. 이렇게 이중적인 일본정부의 시책 속에서 조선요리옥 등은 사창의 형태를 유 지하면서 정부의 적극적인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일본은 산업전사 의 위안 을 추구하 여 생산력 향상을 기한다는 명분으로 공사창제의 재편을 꾀하고 사창의 공창화를 전 개하였다. 바로 기업위안소 의 등장이었다. 사창에 대한 성병검진과 집결정책이라는 정부시책을 뒤로 하고 조선인 노동자를 강제동원했던 기업들은 위안소 를 두어 조선인 노동자들의 도주 및 파업 방지를 도 모하였다. 탄광 및 광산 중심지로써 조선인 노동자들이 대거 동원됐던 홋카이도와
81 진상조사보고서 규슈 지역에서 위안소 의 설치와 운영이 도드라졌다. 대부분 주변의 조선요리옥이나 특수음식점을 이용하여 위안소 를 운영하였다. 위안소 가 없을 경우에는 새로 설치 하고, 이용이 편리한 기존의 업소가 있을 경우에는 기존의 요리옥을 활용하였다. 홋카이도에서 탄광 및 광산을 경영했던 홋카이도탄광기선주식회사는 조선인 노동 자 거주지역 근처에 위안소 를 설치하고 건물을 대여하는 등, 위안소 경영에 적극 적으로 개입하였다. 미쓰비시 기업 같은 경우에도 위안소 개업을 허가하고 있는 기 록이 보이며, 미쓰이 기업은 주변의 요리옥을 지정하여 이용했다. 반면 스미토모 기 업 같은 경우에는 주변의 요리옥을 이용하든가 없으면 특별히 고려하지 않는 등 소 극적인 개입을 보인다. 후쿠오카에서는 일찍부터 존재했던 조선인 노동자를 상대로 한 음식점을 전시의 공사창 재편 속에서 재활용하고 있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홋카이도에서 조선인 위 안부(작부) 들이 일본인들과 대부분 구분되어 있었던 데 비해, 후쿠오카에서는 일본 인 위안부 와 섞여서 특수음식점에 거주하고 있는 양상이 보인다. 이밖에 나가사키 하시마와 오지마에서 기업위안소 가 설치됐던 문헌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이번 조사를 통해 새롭게 밝혀낸 것이다. 일본 정부는 전시 노무동원을 계획하면서 노동자들에 대한 노무관리 대책의 일환 으로 성적 위안 문제를 중시했다. 이는 거듭된 침략전쟁에서 일본군의 성병예방문 제를 고심했던 전례와 상해사변 때 위안소 를 설치함으로써 일본군을 통제했던 경 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인 노동자를 대거 동원했던 일본정부 및 기업은 조선요 리옥, 특수음식점 등의 성적 위안시설, 곧 기업위안소 를 둠으로써 노동자들에게 후생(복지) 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조선인들의 도주 및 파업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 라고 믿었다. 반도인 노동자들은 성적 방면에서는 의외로 담백하다 는 노무관리 경 험이 나오기도 했지만, 일본은 노무관리 대책에서 성적 위안시설 은 반드시 필요하 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교육과 직업의 기회에서 소외되어 생계를 위해 인 신매매 되어야 했던, 또는 감언이설에 속아 끌려와야 했던 조선인 여성들의 고통이 있었다
82 전시하 일본지역의 기업위안소 와 조선인 기업위안부 에 대한 진상조사 - 홋카이도와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 발행일 2011년 7월 25일 발행인 오 병 주 발행처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편집인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조사1과 주 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82 세안빌딩 8층 전 화 팩 스 홈페이지 인쇄처 (주)대성인쇄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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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2002 年 2 月 昌 原 大 學 校 大 學 院 音 樂 科 安 明 基 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Sonata for B-fl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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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s at Monitoring Post out of 20 Km Zone of Tokyo Electric Power Co., Inc. Fukushima Dai-ichi NPP(18:00 July 29, 2011)(Chinese/Korean)
碘 岛 监 结 30km 20km 10km 碘 达 碘 测 时 提 高 后 的 上 限 [250,000 微 西 弗 / 年 ] [10,000 微 西 弗 / 年 ] 巴 西 瓜 拉 帕 里 的 辐 射 (1 年 来 自 地 面 等 ) > 辐 射 量 ( 微 西 弗 ) 250,000 100,000 50,000 10,000 注 : 本 资 料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第 6 條 ( 壹 株 의 金 額 )..
제 정 1973. 2. 28 개 정 2010. 3. 19 定 款 삼성전기주식회사 http://www.sem.samsung.com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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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학보 제18권 제1호 The Korean Journal of Economics Vol. 18, No. 1(Spring 2011)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 吳 鎭 錫 ** 요 약 본고는 1940년대 전반 전력국가관리의 수립을 대상으로 정책 결정의 주체 에 주목하여 정책의 원안이 등장하여 최종안에 이르는 변천과정을 면밀하 게 분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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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 2 - - - - 4 - - 5 - - 6 - - 7 - - 8 - 4) 민원담당공무원 대상 설문조사의 결과와 함의 국민신문고가 업무와 통합된 지식경영시스템으로 실제 운영되고 있는지, 국민신문 고의 효율 알 성 제고 등 성과향상에 기여한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를 치 메 국민신문고를 접해본 중앙부처 및 지방자 였 조사를 시행하 였 해 진행하 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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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004. 12 2004. 11 25 26 2004. 12 % 50 40 30 20 10 0 華 東 華 北 中 南 西 南 東 北 西 北 전 체 중 대 형 차 중 형 차 소 형 차 경 차 2004. 11 27 帕 28 2004. 12 2004. 11 29 30 2004. 12 2004. 11 31 32 2004. 12 2004. 11 33 3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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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이 책에서는 단순히 가난한 관리들의 이야기보다는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사심 없이 헌신한 옛 공직자들의 사례들을 발굴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공과 사를 엄정히 구분하고,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공무를 처리한 사례,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최부, 송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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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제 의식의 원칙 논문은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야 한다. 주제 의식은 논문을 쓰는 사람의 의도나 글의 목적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협력의 원칙 독자는 필자를 이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나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노력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논리적 엄격성의 원칙 감정이나 독단적인 선언이
제국주의로서의 근대일본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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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의 일본군 위안부 동원: 소개업자 접객업자 일본군 청부업자 등의 역할* 1) 수행과제명 과제책임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종합연구(Ⅰ) 이인선 부연구위원 Tel: 02-3156-7159 e-mail: [email protected] 요 약 일본에서 발간한 자료집, 신문광고, 조선총독부의 재판자료, 국내 신문자료, 일본 신문자료 등을
152*220
152*220 2011.2.16 5:53 PM ` 3 여는 글 교육주체들을 위한 교육 교양지 신경림 잠시 휴간했던 우리교육 을 비록 계간으로이지만 다시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 선 반갑다. 하지만 월간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솔직히 나는 우리교 육 의 부지런한 독자는 못 되었다. 하지만 비록 어깨너머로 읽으면서도 이런 잡지는 우 리
211 1-5.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石 村 洞 百 濟 初 期 積 石 塚 이도학, (서울의 백제고분) 석촌동 고분, 송파문화원, 2004. 서울 特 別 市, 石 村 洞 古 墳 群 發 掘 調 査 報 告, 1987. 1-6. 고창지석묘군 高 敞 支 石 墓 群 문화재관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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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역사와 법* 60) 조시현** 목 차 Ⅰ. 들어가며 Ⅱ.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전개 Ⅲ.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법 적용의 의미 -역사와 법의 관계 1. 법적 책임의 전제로서의 사실에 대한 규범적 평가 2. 법을 둘러싼 진실규명의 필요성 3. 연속된 법의식의 회복과 미래 -피해자의 권리와 공동행동원칙의 정립 4. 국가책임의
나하나로 5호
Vol 3, No. 1, June, 2009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KACPR) Newsletter 01 02 03 04 05 2 3 4 대한심폐소생협회 소식 교육위원회 소식 일반인(초등학생/가족)을
見 積 書
2 한국일본문화학회 회 장 인 사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원 여러분께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물러가고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높고 파란 하늘이 성 큼 다가와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합니다. 한 여름이 지나고 찾아온 10월은 너무도 아름답습 니다. 파아란 하늘, 빠알간 단풍잎, 노오란 은행잎을 맘껏 즐기고
일본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러한 조선 밖으로의 강제동원 에 관한 실태연구는 점점 국내연구자 로 확산되었고,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면서 점차 사실적인 실체에 접근해가기 시작하였다 4). 이러한 노력 에 의해 조선 밖으로의 강제동원 의 실체는 보다 사실적이고 구체적으
1. 머리말 2. 경남지역 기초자료의 분석과 노무동원현황 3. 경남지역 노무동원 작업장과 노무실태 4. 맺음말 일본제국주의 및 식민지배의 실체와 일제말기 조선 사회 및 조선인들의 구체적인 삶을 고찰하기 위해 서 일제에 의해 추진되고 진행된 강제동원 에 대한 조사연구는 필수적이다. 또한 강제동원 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항일 봉기와 섬멸작전의 사실탐구
抗 日 蜂 起 와 殲 滅 作 戰 의 史 實 探 究 - 韓 國 中 央 山 岳 地 帶 를 中 心 으로- 이노우에 가츠오( 井 上 勝 生 ) 1) 머리말 지난 해(2015년) 10월과 11월, 日 本 軍 東 學 黨 討 伐 隊 의 進 軍 路 를 한국의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조사할 수 있었다. 後 備 第 19 大 隊 (당시 東 學 黨 討 伐 隊 라고 불리었다) 第 1
초대의 글 한국일본언어문화학회 회원여러분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어느덧 겨울이 성큼 다가오면서 으스스 추위를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재직 중인 회원님들께서는 입시철의 업무와 강요받는 대학 변화의 회오리 속에서, 신진 회원님들께서는 우리 학계의 발전을 기대하면서 연구에 박
2015 年 度 秋 季 國 際 學 術 大 會 日 時 : 2015 年 11 月 7 日 ( 土 ) 11:30~20:30 場 所 : 高 麗 大 學 校 國 際 館 主 催 : 韓 國 日 本 言 語 文 化 學 會 主 管 : 韓 國 日 本 言 語 文 化 學 會 高 麗 大 學 校 GLOBAL 日 本 研 究 院 高 麗 大 學 校 BK21PLUS 中 日 言 語 文 化 敎 育
23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생각해야 한다는 제안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貫 井 正 之 씨는 豊 臣 秀 吉 의 대외적 인 정복의도 전반을 검토하고 책 이름에 海 外 侵 略 이라는 문구를 채택했으며( 豊 臣 政 権 의 海 外 侵 略 과 朝 鮮 義 兵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237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나카노 히토시( 中 野 等 ) 머리말 Ⅰ. 근세 전기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위치 설정 Ⅱ. 근세 후기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위치 설정 Ⅲ. 근대 일본의 성립과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 관한 개략적인 소개가 있었지만, 1) 여전히 많은 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실정이다. 본고 또한 여전히 짧고 소략한 내용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39-44, 2008년 6월 Yonsei J Med Hist 11(1): 39-44, 2008 일반논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 신창희( 申 昌 熙 )의 생애와 활동 박 형 우(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홍 정 완(연세대 의사학과)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연구노트
#2. 종이 질 - 일단은 OK. 하지만 만년필은 조금 비침. 종이질은 일단 합격점. 앞으로 종이질은 선택옵션으로 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종이가 너무 두꺼우면, 뒤에 비치지 는 않지만, 무겁고 유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두꺼우면 고의적 망실의 위험도 적고 적당한 심리적 부담도 줄 것이 다. 이점은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 필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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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 在 朝 日 本 人 의 전쟁협력 실태와 그 성격 99 연 구 논 문 동학농민혁명기 在 朝 日 本 人 의 전쟁협력 실태와 그 성격 * 박 맹 수 ** 32) 1. 머리말 2. 在 朝 日 本 人 增 加 推 移 와 그 背 景 3. 在 朝 日 本 人 의 戰 爭 協 力 實 態 와 그 性 格 4. 스파이활동 事 例 分 析 5. 맺음말 1. 머리말 18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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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지석묘 6 일본 지석묘 동북아시아 지석묘 6 일본 지석묘 2011년 10월 26일 초판 1쇄 인쇄 2011년 10월 30일 초판 1쇄 발행 총괄 ㅣ 연 웅 기획자문 ㅣ 김성범, (재)동북아지석묘연구소 편집교정 ㅣ 이규훈, 정성목, 성윤길, 이은선 원고작성 ㅣ 小 池 史 哲 번역 ㅣ 이은선 사진제공 ㅣ (재)동북아지석묘연구소 발행처 디자인 펴낸곳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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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5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7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 인간의 존업성과 여성인권의 수호 - 성 산업의 구조적 사슬 단절 31 - 성매매 피해여성 적극 보호 -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됩니다. 32 - 인식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 성매매에 대한 처벌
需給調整懇談会の投資調整―石油化学工業を中心に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17 논문 5 朝鮮總督府의 臨時資金調整法 운용과 資金統制 박현 연세대학교 1. 머리말 1937 년 7 월에 시작된 中日戰爭은 전쟁 당사국인 일본뿐만 아니라 그 식민지인 조선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강화되고 전시 경제통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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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논총 51호 2016. 3 차 례 논문 김규운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7 정순일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55 김득중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93 조윤수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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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성매매를 위한 사회복귀지원 프로그램 연구 여 성 부 목 차 Ⅰ. 서론 Ⅱ. 이론적 배경 및 선행연구결과 정리 Ⅲ. 여성복지상담소 실태조사 결과 Ⅳ. 선도보호시설의 운영 및 프로그램 현황 조사 결과 Ⅴ. 결론 참고문헌 부 록 표 목 차 그 림 목 차 부 표 목 차 Ⅰ. 서 론 . 서론 1. 연구의 목적 및 필요성 탈성매매를 위한 사회복귀지원 프로그램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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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48.6% 남 51.4% 40대 10.7% 50대 이 상 6.0% 10대 0.9% 20대 34.5% 30대 47.9% 초등졸 이하 대학원생 이 0.6% 중졸 이하 상 0.7% 2.7% 고졸 이하 34.2% 대졸 이하 61.9% 직장 1.9% e-mail 주소 2.8% 핸드폰 번호 8.2% 전화번호 4.5% 학교 0.9% 주소 2.0% 기타 0.4% 이름
199-224 서강건치.hwp
국 학 연 구 론 총 제 1 집 택민국학연구원.2008.6.30. 日 本 에 있어서의 韓 國 文 學 의 傳 來 樣 相 江 戸 時 代 때부터1945 年 까지 西 岡 健 治 * 1) 序 言 Ⅰ. 江 戸 時 代 에 읽혀진 作 品 들 Ⅱ. 1868( 明 治 元 ) 年 에서 1918 年 ( 大 正 中 期 )까지 읽혀지고 翻 訳 된 作 品 들 Ⅲ. 三 一 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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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LETTER : 300-150 31-1 201 [email protected] : 2 한국일본문화학회 회 장 인 사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원 여러분께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 창밖에는 노란 개나리. 그리고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많은 꽃들이 피어 있고, 화사하게 핀 벚꽃들이 바람결에 꽃잎을 날리며 봄의 향연이 한창입니다. 여러 회원님들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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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102 103 104 105 혁신 17과 1/17 특히 05. 1부터 수준 높은 자료의 제공과 공유를 위해 국내 학회지 원문 데이 >> 교육정보마당 데이터베이스 구축 현황( 05. 8. 1 현재) 구 분 서지정보 원문내용 기사색인 내 용 단행본, 연속 간행물 종 수 50만종 교육정책연구보고서, 실 국발행자료 5,000여종 교육 과정 자료 3,000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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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제 5회 전문가초청간담회 경성제국대학 과 재조 일본인 지식 사회 박 광 현 (동국대학교) 연구 동기 - 문학사에 등장하는 일본인은 누구인가? 조동일 문학통사의 유행, 小 倉, 高 橋 - 경성제대 출신의 조선인? 조윤제(경성대학 출신으로 은폐), 김태준(사회주의자) - 문학연구과에서 연구할 수 있는 테마로서의 한계 - 인물에 관한 연구(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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像 氣 名 刹 希 望 曰 術 技 藝 道 技 年 月 日 0 5, 1 2 3 4 5 45,000 40,000 39,534 35,000 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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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016-9288 제41권 9호 2014년 9월호 제 4 1 권 제 9 호 ( ) 2 0 1 4 년 9 월 첨 단 전 자 시 스 템 의 산 업 기 술 The Magazine of the IEIE vol.41. no.9 첨단 전자시스템의 산업기술 R&D 전략 최신의료기기 기술 및 산업동향 시스템반도체 현황 및 경쟁력 분석 통합모듈형항공전자(IMA) 기술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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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法 學 제53권 제3호 2012년 9월 617 638면 Seoul Law Journal Vol. 53 No. 3 September 2012. pp. 617 638 1) 1920년~1941년 경성 발행 법정신문( 法 政 新 聞 ) * ** 吉 川 絢 子 Ⅰ. 머리말 이 글에서는 일제시기 조선에서 발간된 법정신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신문은
그렇지만 여기서 朝 鮮 思 想 通 信 이 식민본국과 피식민지 사이에 놓여 있는 재조선일본인의 어떤 존재론적 위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식민본국과 피식민지의 Contact Zone 에 위치한 재조선일본인들은 조선이라는 장소를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기
식민지의 목소리 - 朝 鮮 思 想 通 信 社 刊, 朝 鮮 及 朝 鮮 民 族 (1927)을 중심으로 鄭 鍾 賢 ( 成 均 館 大 ) 1. 伊 藤 韓 堂 과 朝 鮮 思 想 通 信 伊 藤 韓 堂 이 발간한 朝 鮮 思 想 通 信 은 1925 년에 발행을 시작하여 1943 년 그가 죽은 직후에 폐간될 때까지 대략 18 년 동안 간행된 조선문을 번역한 일본어 신문이다.
섬과 다리의 양면성 - 일본 세토내해 섬을 중심으로 1) - Duality of Island Bridges Case studies in Seto Inland Sea, Japan 홍선기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HK교수 차 례 I.
해양생태 섬과 다리의 양면성 - 일본 세토내해 섬을 중심으로 1) - Duality of Island Bridges Case studies in Seto Inland Sea, Japan 홍선기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HK교수 [email protected] 차 례 I. 서론 II. 일본의 섬 현황 III. 일본의 도서 정책 IV. 일본 세토내해 섬의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2 목차 편집자의 말 ------------------------------------------------------------------------------------- 3 한국의 * 상1 개괄 한국의 병역거부운동 -------------------------------------------------------------------------
편집완료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1) 李 宣 坭 (서울여대) Ⅰ. 序 言 Ⅱ. 臺 灣 : 황국의 백성 Ⅲ. 滿 州 : 동양 문명화 구현의 장 Ⅳ. 支 那 : 야만성 그러나 노제국 Ⅴ. 유교: 가족주의와 혁명 Ⅵ. 맺음말 Ⅰ.머리말 본 논문은 근대 일본의 대표적 여성언론매체 중 하나였던 婦 女 新 聞 의 중국 관련 담론을 분석하고자
1930년대 조선형특수회사 조선압록강수전(주)의 연구(20150627 경제사학회 발표논문).hwp
1930년대 朝 鮮 型 特 殊 會 社, 朝 鮮 鴨 綠 江 水 電 ( 株 ) 의 연구 정 안 기* 요지 이 연구의 목적은 1930년대 조선형특수회사 연구의 일환으로 1937년 9월 이래 압록강 수력개발을 전담했던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의 설립과 경영의 전체상을 실증적으로 검토하는데 있다. 1937년 8월 조선과 만주국은 압록강 발전사업에 관한 鮮 滿 協 定 과
35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5권 1883.01.24 釜 山 口 設 海 底 電 線 條 欵 / 海 底 電 線 設 置 ニ 關 スル 日 韓 條 約 漢 日 1883.06.22 在 朝 鮮 國 日 本 人 民 通 商 章 程 / 朝 鮮 國 ニ 於 テ 日 本 人 民 貿 易 ノ
근현대 한일간 조약 일람* 22) 1. 조선 대한제국이 일본국과 맺은 조약 주) 1. 아래 목록은 國 會 圖 書 館 立 法 調 査 局, 1964 舊 韓 末 條 約 彙 纂 (1876-1945) 上 ; 1965 舊 韓 末 條 約 彙 纂 (1876-1945) 中 ; 外 務 省 條 約 局, 1934 舊 條 約 彙 纂 第 三 巻 ( 朝 鮮 及 琉 球 之 部
건강증진 시범보고서 운영을 위한 기술지원 연구
짧활 康 t합샤훌 示 範 띔 健 所 運 營 응 위한 技 術 支 援 웹 JE - 示 範 保 健 所 模 型 開 發 을 中 心 으로l' 鍾 和 李 順 英 鄭 基 뽑 編 著 韓 國 띔 健 社 會 댐 究 院 머 리 말 美 國 이나 日 本 등 先 進 國 의 경우 이미 1970년대 부터 人 口 의 高 敵 化 와 生 活 樣 式 의 變 化 에 기인한 成 人 病 증가와 이에
33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문 * 웅 입주자격소득초과 34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송 * 호 입주자격소득초과 35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나 * 하 입주자격소득초과 36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최 * 재 입주자격소득초
1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주 830516 입주자격소득초과 2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연 711202 입주자격소득초과 3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이 * 훈 740309 입주자격소득초과 4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이 * 희 780604 입주자격소득초과 5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안 *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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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JAPAN ECONOMIC ASSOCIATION THE 38TH KOREA-JAPAN & JAPAN-KOREA BUSINESS CONFERENCE 2006. 5. 25 ~ 27 SAPPORO,JAPAN - 目 次 - Ⅰ. 團 長 團 禮 訪 活 動 3 Ⅱ. 共 同 聲 明 5 Ⅲ. 日 程 8 Ⅳ. 議 題 12 Ⅴ. 兩 側 代 表 團 名 單 13 1.
JCAK 09
JCAK 12-2(통산65호) Homepage http://www.bunka.or.kr 발행일 2012년 4월 5일 발행인 : 박희남 발행처 : 300-716 대전광역시 동구 대학로 62번지 대전대학교 일어일문과 박희남교수 연구실 042-280-2256, 010-8485-5119 사무 국 : 300-150 대전광역시 동 구 정동 31-1 신영빌딩 201호 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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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가을 24호 2_ . 02 03 04 08 10 14 16 20 24 28 32 38 44 46 47 48 49 50 51 _3 4_ _5 6_ _7 8_ _9 10_ _11 12_ _13 14_ _15 16_ _17 18_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개식사를 하는 김구(1940.9.17) 將士書) 를 낭독하였는데, 한국광복군이 중국군과 함께 전장에
큰 제목은 16
일본의 2000년대 의료보험제도 개혁과 일본형 복지 연세대학교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조 은 일본의 2000년대 의료보험제도 개혁과 일본형 복지 지도교수 류석춘 이 논문을 석사 학위논문으로 제출함 2013년 12월 일 연세대학교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조 은 조 은의 석사 학위논문으로 인준함 심사위원 인 심사위원 인 심사위원 인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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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관 원( 동북아역사재단) 1 일본에서의 한일회담문서 공개운동 현황 현재 일본에서도 시민단체가 한일회담문서의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 다. 그들은 일본정부에 대해 한일회담 관련 문서의 전면공개를 요구하여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지배의 사실 및 책임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의해 피해 를 입은 한국( 북한) 의 희생자 및 유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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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소 직물업의 발흥과 그 배경 류상윤( 서울대학교대학원 경제학부 박사과정 수료) 1. 머리말 1960 년대 이후 한국은 고도성장을 경험하였다. 고도성장의 원인 또는 배경이 무엇이었는 지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하여 왔다. 그 중에는 해방 후의 경제성장을 식민지기 조선이 경험했던 것들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들도 있다. 이들은 각각 자본주의
2004. 3. 31. 고속철도 개통의 영향과 시사점 목차 요약 Ⅰ. 고속철도 시대의 개막 Ⅱ. 고속철도 개통 현황 Ⅲ. 선진국의 고속철도 사례 Ⅳ. 고속철도 개통의 영향 Ⅴ. 시사점 내용문의: 전영옥 수석연구원 ([email protected]) 02-3780-8133 고속철도 개통의 영향과 시사점 - 철도국이 추진한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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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책임자 가나다 순 머 리 말 2006년 12월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원장 - i - - ii - - iii - 평가 영역 1. 교육계획 2. 수업 3. 인적자원 4. 물적자원 5. 경영과 행정 6. 교육성과 평가 부문 부문 배점 비율(%) 점수(점) 영역 배점 1.1 교육목표 3 15 45점 1.2 교육과정 6 30 (9%) 2.1 수업설계 6 30 2.2
재입국허가 및 재입국허가로 간주 를 받고 출국하는 분에게 시구정촌에 전출신고를 제출한 후 재입국허가를 받고 출국한 분은 탈퇴일시금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 POINT 1 - 전출신고를 제출하지 않은 경우, 재입국허가기간 내에는 원칙적으로 탈퇴일시금을 청구할 수 없습니
再 入 国 許 可 及 びみなし 再 入 国 許 可 を 受 けて 出 国 する 方 へ 市 区 町 村 に 転 出 届 を 提 出 したうえで 再 入 国 許 可 を 受 けて 出 国 している 方 は 脱 退 一 時 金 を 請 求 す ることができます POINT 1 - 転 出 届 を 提 出 していない 場 合 再 入 国 許 可 期 間 内 は 原 則 として 脱 退 一 時 金 を 請
2 동북아역사논총 50호 한국 입장에서 보면 총리나 각료의 참배와 더불어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 군인이나 군속으로 강제 동원되었다가 사망한 한국인 약 21,000명이 유족의 동의도 없이 무단으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다는 사실이다. 총리나 각료 참배와 한국인 무단합사가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1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남상구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Ⅰ. 머리말 2015년 8월 15일 아베 신조[ 安 倍 晋 三 ] 총리는 야스쿠니[ 靖 國 ]신사에 공물료를 보냈고 각료 3명은 동 신사를 참배하였다. 한국 정부는 식민침탈과 침략전쟁 의 역사를 미화하고 있는 야스쿠니신사에 아베 총리가 또다시 공물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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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1 [2]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MBL활용화학실험 수일고등학교 윤 상 2 [2]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MBL활용화학실험 구성고등학교 류 우 3 [2]2018개방실험-학생2기[
1 [1]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3D프린터이해와활용 상현고등학교 2 1 28 유 훈 2 [1]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3D프린터이해와활용 수원고등학교 2 6 24 정 찬 3 [1]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3D프린터이해와활용 수원고등학교 2 8 3 김 헌 4 [1]2018개방실험-학생2기[
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몸이란? 자 기 반 성 유 형 밀 당 유 형 유 레 카 유 형 동 양 철 학 유 형 그 리 스 자 연 철 학 유 형 춤이란? 물 아 일 체 유 형 무 아 지 경 유 형 댄 스 본 능 유 형 명 상 수 련 유 형 바 디 랭 귀 지 유 형 비 타 민 유 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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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파 방송의 여성인력 현황 및 전문화 방안 연구 한국여성개발원 발간사 Ⅰ....,.,....... .. Ⅱ. :...... Ⅲ.,,. ..,.,.... 9 1 1.. /.,. PD,,,,, / 7.93%. 1%... 5.28% 10.08%. 3.79%(KBS MBC), 2.38 %(KBS MBC) 1%...,. 10. 15.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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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 2. 3. 4. 제2장 아동복지법의 이해 12 4).,,.,.,.. 1. 법과 아동복지.,.. (Calvert, 1978 1) ( 公 式 的 ).., 4),. 13 (, 1988 314, ). (, 1998 24, ).. (child welfare through the law) (Carrier & Kendal, 1992). 2. 사회복지법의 체계와
PARK Yunjae : A Study on the Anti-smallpox Policy of Joseon Government-General 하다 고 평가했다. 3) 우두는 인류에게 글자 그대로 축복이었다. 그러나 우두법이 전세계로 확산되던 19세기는 제국주의의 시대이
377 의사학 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2012년 12월 Korean J Med Hist 21 ː377-402 Dec. 2012 c대한의사학회 pissn 1225-505X, eissn 2093-5609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과 두창의 지속 박윤재* 1. 머리말 2. 조선총독부 우두정책의 전개 3. 조선총독부 우두정책의 한계 4. 맺음말 1. 머리말 듣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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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연금 도입에 따른 금융업종별 대응전략 2005.11 남 재 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 목 차 1) 미국의 경우 1875년에 American Express가 퇴직연금을 최초로 실시하였다. : : 大 和 總 硏 2) 종업원의 근무에 대해서 퇴직 시에 지불되는 급부(퇴직금) 및 퇴직 후의 일정기간에 걸쳐 지불되는 급부(퇴직 연금) 중 계산시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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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산업중분류, 조직형태 및 동별 사업체수, 종사자수 단위 : 개, 명 금정구 서1동 서2동 서3동 Geumjeong-gu Seo 1(il)-dong Seo 2(i)-dong Seo 3(sam)-dong TT전 산 업 17 763 74 873 537 1 493 859 2 482 495 1 506 15 519 35 740 520 978 815 1 666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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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도서관총서 1 경기도 도서관 총서 경기도도서관총서 1 지은이 소개 심효정 도서관 특화서비스 개발과 사례 제 1 권 모든 도서관은 특별하다 제 2 권 지식의 관문, 도서관 포털 경기도 도서관 총서는 도서관 현장의 균형있는 발전과 체계적인 운 영을 지원함으로써 도서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간되 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를 통해 사회전반의 긍정적인
韓国人向け日本すごろく(韓国語)[中学生版]
일본 스고로쿠 보드 게임 한국판(중학교편)매뉴얼 A 우선 사전 앙케이트를 기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B 1 오늘은 여러분에게 일본여행을 떠날 기회를 경험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스고로쿠 Board Game 을 통해서 입니다. 보드게임에서 일본의 것을 많이 배워서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보드게임은 빨리 돌아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연구위원 김 현 아 연구위원 허 윤 경 연구원 엄 근 용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연구위원 김 현 아 연구위원 허 윤 경 연구원 엄 근 용 (%) 10.0 5.0 0.0-5.0-10.0 0.6 1.0 0.3 2.9 0.7 1.3 9.0 5.6 5.0 3.9 3.4 3.9 0.0 95 90-0.3 85 변동률 지수 65-15.0-13.6 60 '95 '96 '97 '98 '99 '00 '01 '02 '03 '04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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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지방자치 2012 2014개정판 일본의 지방자치 일본의 지방자치의 개요 1 1 지방자치가 법률에서 차지하는 위치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지방자치단체의 계층 수 2 지방자치단체의 성격 2 지방자치단체의 구역 3 지방자치단체의 규모와 수 3 지방자치단체의 획일성 6 지방자치단체의 종류 6 지방자치단체의 조직 9 지방자치단체가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안 경 광 학 과 세부내용 - 남을 도와 준 경험과 보람에 대해 말해 보세요. - 공부 외에 다른 일을 정성을 다해 꾸준하게 해본 경험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 남과 다른 자신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말해 주세요. - 지금까지 가장 고민스러웠던 또는 어려웠던 일과 이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 자신의 멘토(조언자) 또는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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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시 학살된 한인과 중국인에 대한 사후조치 김광열 광운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Ⅰ. 머리말 1923년 9월 1일 발생한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 관헌에 의해 조작된 무장 조선 인 폭동 등의 유언비어는 지진 발생지역의 민간 자경단과 군경을 폭도로 변화 시켰고, 그 결과 6,000명 이상의 한인과 650명 이상의 중국인, 그리고 1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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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02 8 9 32 33 1 10 11 34 35 가족 구조의 변화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원만한 생활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기능 사회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동 가구 가족 규모의 축소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 1인 또는 1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 타나는 가족 구조의
4 7 7 9 3 3 4 4 Ô 57 5 3 6 4 7 Ô 5 8 9 Ô 0 3 4 Ô 5 6 7 8 3 4 9 Ô 56 Ô 5 3 6 4 7 0 Ô 8 9 0 Ô 3 4 5 지역 대표를 뽑는 선거. 선거의 의미와 필요성 ① 선거의 의미`: 우리들을 대표하여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을 말합니다. ② 선거의 필요성`: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의 일을 의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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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합병 이데올로기와 식민지교육정책 77 연 구 논 문 일제 강제합병 이데올로기와 식민지교육정책 이 명 화* 1. 머리말 2. 日 本 의 韓 國 强 占 과 强 占 論 理 3. 倂 合 條 約 의 締 結 과 統 治 論 理 4. 强 制 倂 合 前 後 의 植 民 地 敎 育 政 策 5. 맺음말 47) 1. 머리말 2010년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일 양국에서는
현안과과제_8.14 임시공휴일 지정의 경제적 파급 영향_150805.hwp
15-27호 2015.08.05 8.14 임시공휴일 지정의 경제적 파급 영향 - 국민의 절반 동참시 1조 3,100억원의 내수 진작 효과 기대 Executive Summary 8.14 임시공휴일 지정의 경제적 파급 영향 개 요 정부는 지난 4일 국무회의에서 침체된 국민의 사기 진작과 내수 활성화를 목적으로 오는 8월 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이에 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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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연구 http://www.kbc.go.kr/ 텔레비전의 폭력행위는 어떠한 상황적 맥락에서 묘사되는가에 따라 상이한 효과를 낳는다. 본 연구는 텔레비전 만화프로그램의 내용분석을 통해 각 인 물의 반사회적 행위 및 친사회적 행위 유형이 어떻게 나타나고 이를 둘러싼 맥락요인들과 어떤 관련성을 지니는지를 조사하였다. 맥락요인은 반사회적 행위 뿐 아니라 친사회적
한국 시장경제체제의 특질에 관한 비교제도분석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Working Paper Series 韓 國 市 場 經 濟 의 특질 - 地 經 學 的 조건과 社 會 文 化 의 토대에서- 이 영 훈 Working Paper 2014-07 Nov, 2014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31gil 5, Bongcheon-ro,
20세기초 언양의 농민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Working Paper Series 20세기 전반 彦 陽 의 小 農 社 會 이 영 훈 Working Paper 2015-03 Arp, 2015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31gil 5, Bongcheon-ro, Kwanak-ku, Seou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