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사회의 변화, 5) 豊 臣 정권의 전략적 사고에 관한 연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6)동아시아 국 제질서, 특히 책봉체재 에 관한 재검토를 든다. 물론 이 순서가 과제로서의 순서를 의미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일본 측 위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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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욱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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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49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 朝 鮮 琉 球 日 本 에 있어서 大 明 外 交 儀 禮 의 관점에서- 구와노 에이지( 桑 野 栄 治 ) 머리말 Ⅰ. 조선 전기의 동아시아 국제환경 1. 명과 조선의 관계 2. 명과 琉 球 의 관계 3. 명과 일본의 관계 Ⅱ. 조선 宣 祖 代 의 의례와 외교 1. 宣 祖 의 책봉의례 2. 임진왜란 이전의 望 闕 禮 1) 명 사신의 來 朝 와 冬 至 의 望 闕 禮 2) 國 忌 에 수반하는 朝 賀 禮 의 順 延 조치 3. 임진왜란기의 望 闕 禮 1) 한성 탈환의 皇 恩 에 감사하는 望 闕 禮 2) 한성 還 都 후 南 別 宮 에서의 望 闕 禮 3) 전시하 의례 실시상의 문제점 4) 동아시아 세계의 조선과 명 4. 임진왜란 후의 望 闕 禮 1) 朝 賀 禮 의 정체 2) 宣 祖 즉위 40년째의 望 闕 禮 Ⅲ. 日 本 國 王 豊 臣 秀 吉 의 책봉의례 1. 일본국왕 책봉사의 復 命 報 告 2. 景 轍 玄 蘇 와 루이스 프로이스의 증언 맺음말 머리말 제1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제2분과회에서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임진왜란( 文 祿 慶 長 의 役 )에 관한 연구사 정리를 살펴보고 학계에 귀중한 성과를 제공하였다. 1) 동시 에 이들 성과에서는 한국과 일본에서 이후 검토해야 할 과제에 어느 정도 견해차이가 있다는 점도 드러났다. 일본의 경우 이후의 연구과제로서 1)조선 측 명측의 군량 공급 시스템 규명, 2)피로인의 실태와 송환 시스템 해명, 3)왜성 연구, 4)전쟁으로 인한 조선 1) 六 反 田 豊 / 田 代 和 生 吉 田 光 男 伊 藤 幸 司 橋 本 雄 米 谷 均 北 島 万 次, < 文 禄 慶 長 の 役 ( 壬 辰 倭 乱 )> ; 朴 晢 晄, < 壬 辰 倭 乱 ( 文 禄 慶 長 の 役 ) 研 究 の 現 況 と 課 題 > ( 日 韓 歷 史 共 同 研 究 委 員 会 編, 2005 日 韓 歷 史 共 同 研 究 報 告 書 ( 第 2 分 科 篇 ) ( 同 委 員 会 ))
2 5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사회의 변화, 5) 豊 臣 정권의 전략적 사고에 관한 연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6)동아시아 국 제질서, 특히 책봉체재 에 관한 재검토를 든다. 물론 이 순서가 과제로서의 순서를 의미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일본 측 위원의 보고서에는 조선의 군량조달을 주제로 하 는 논고가 게재되어 있으며, 2) 한반도에서 군량 공급 시스템을 밝혀내는 일이 매우 중요 한 과제로 제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편 한국의 경우는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수행해야 할 공동연구 과제로서 1)임진왜 란과 동아시아 국제정세, 2)일본과 조선왕조의 수군 전력, 3)의병운동, 4)조선군의 병력 동원 체제, 5)임진왜란의 전투지역 조사, 6) 降 倭 被 擄 人 문화재 약탈, 7)임진왜란기의 점 령정책과 민중의 대응 생활상, 8)상호 간의 문화 전파를 제시하였다. 과제는 다양한 분 야에 걸쳐 있으며, 이 순서 역시 과제로 되어야 할 우선순위를 나타낸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 측 위원의 보고서에는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인식을 비교한 논고가 실려 있으며, 3) 당시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관한 문제가 반드시 중요한 과제로 설정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제1기 보고서가 세간에서 널리 문제되던 2005년의 시점에서는 한일 양국의 연 구자 입장에서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혹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관한 문제 를 금후의 연구과제로 다루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던 것 같다. 제1기에서 橋 本 雄 씨가 조선국왕사와 일본국왕 ( 室 町 殿 )의 외교의례에 주목했던 것도 우연은 아닐 것 이다. 4) 외교의례가 당사국의 도의적, 정치적, 군사적 관계를 반영하는 실용의 거울이었 다 5) 면, 외교의례의 관점에서 임진왜란기의 동아시아 국제환경을 조명하는 것도 가능해 질 것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먼저 조선 전기(대략 15~16세기에 해당)의 동아시아 국 제환경을 개관해 보고자 한다. 2) 六 反 田 豊, < 文 禄 慶 長 の 役 ( 壬 辰 倭 乱 ) 開 戦 初 期 における 朝 鮮 側 の 軍 糧 調 達 とその 輸 送 >( 日 韓 歷 史 共 同 研 究 委 員 会 編, 전게 보고서, 수록). 3) 鄭 求 福, < 壬 辰 倭 乱 の 歷 史 的 意 味 - 壬 辰 倭 乱 に 対 する 韓 日 両 國 の 歷 史 認 識 > ( 日 韓 歷 史 共 同 研 究 委 員 会 編, 전게 보고서, 수록). 4) 橋 本 雄, < 朝 鮮 國 王 使 と 室 町 幕 府 > ( 日 韓 歷 史 共 同 研 究 委 員 会 編, 전게 보고서, 수록). 5) 로날드 토비( 速 水 融 他 번역) 近 世 日 本 の 國 家 形 成 と 外 交 ( 創 文 社, 1990년 9월. 原 著 는 Ronald P.Toby. State and Diplomacy in Early Modern Japan:Asia in the Development of the Tokugawa Bakuhu.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4) < 第 5 章 外 交 儀 禮 の 鏡 を 覗 く- 理 念 の 世 界 を 映 し 出 す 姿 見 > 138
3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51 Ⅰ. 조선 전기 동아시아의 국제환경 1. 명과 조선의 관계 조선왕조(1392~1897)는 건국 후 즉시 명 태조 洪 武 帝 ( 朱 元 璋. 재위 1368~98년)를 정 점으로 하는 이른바 冊 封 体 制 6) 에 참가하고 의례적인 관계를 구축하였다. 1401년( 太 宗 원년)에 恵 帝 建 文 帝 (재위 1398~1402)가 제3대 조선국왕 太 宗 (재위 1400~18)에게 誥 命 ( 辭 令 書 )과 金 印 을 하사하고 책봉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靖 難 의 變 ( 帝 位 를 둘러싼 내 란)을 거쳐서 옥좌에 올랐던 成 祖 永 楽 帝 (재위 1402~24년)도 역시 2년 뒤인 1403년에 다시 太 宗 을 조선국왕 으로 책봉하였다. 7) 제3대 永 樂 帝 는 洪 武 帝 의 대외정책을 계승하 도록 적극적인 조공 권유책을 취하고,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에 노력하고 있었다 8) 이념상 조선국왕은 명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동심원상의 華 夷 秩 序 에 편입되었던 것이 다. 이와 같은 동아시아의 국제환경에 처해 있던 조선국왕이 매년 正 朝 ( 元 旦 ) 聖 節 (명 황 제 생일) 千 秋 節 (명 황태자 생일) 외에 동지 때도 조공사절을 파견했던 것은 주지의 사 6)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국제관계의 특징을 표현하는. 책봉체제 에 관해서는 당장은 西 嶋 定 生 東 アジア 史 論 集 ( 第 3 卷 東 アジア 世 界 と 冊 封 體 制 ) ( 岩 波 書 店 ) < 第 1 部 3 冊 封 體 制 と 東 ア ジア 世 界 > 95~101 참조. 다만 이러한 정치구조에 대한 비판 재검토도 많다. 최근에는, 예를 들어 서 夫 馬 進, < 明 淸 中 國 による 對 朝 鮮 外 交 の 鏡 としての 對 ベトナム 外 交 - 冊 封 問 題 と 問 罪 の 師 を 中 心 に> ( 紀 平 英 作 編, グローバル 化 時 代 の 人 文 學 - 對 話 と 寬 容 の 知 を 求 めて( 下 ) 共 生 への 問 い 京 都 大 學 學 術 出 版 會 ) 238~244에 따르면, 安 南 에서 僞 勅 僞 年 號 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도 明 은 安 南 의 朝 貢 을 계속 받아들였고, 또한 同 <1609 年, 日 本 の 琉 球 倂 合 以 降 における 中 国 朝 鮮 の 對 琉 球 外 交 - 東 アジア 四 國 における 冊 封, 通 信 そして 杜 絶 > ( 朝 鮮 硏 究 會 論 文 集 第 46 集, 2008 년 10월) 7~10에 따르면, 淸 代 의 책봉국은 朝 鮮 越 南 ( 安 南 ) 琉 球 의 3국뿐이었으며, 겨우 暹 羅 를 추가한 4 國 에 불과하다고 한다. 7) 末 松 保 和, 高 麗 朝 史 と 朝 鮮 朝 史 ( 末 松 保 和 朝 鮮 史 著 作 集 5) ( 吉 川 弘 文 館 ) < 麗 末 鮮 初 に 於 ける 対 明 関 係 > (초판은 京 城 帝 國 大 学 文 学 会 編, 史 学 論 叢 第 2 ( 岩 波 書 店 )) < 第 十 一 章 誥 命 印 章 の 獲 得 > 234~237. 李 鉉 淙 < 対 明 関 係 > ( 國 史 編 纂 委 員 会 編, 1974 한국사 9 (양반 관료국가의 성립) ( 同 委 員 会, 서울)) 331~332. 孫 承 喆, 조선시대 한일관계사연구-교 린관계의 허와 실 ( 景 仁 文 化 社, 서울). 구판의 일본어 訳 은 鈴 木 信 昭 監 訳, 近 世 の 朝 鮮 と 日 本 - 交 隣 関 係 の 虚 と 実 ( 明 石 書 店 )) <제1장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교린체제> 35~38 8) 佐 久 間 重 男, 日 明 関 係 史 の 研 究 ( 吉 川 弘 文 館 ) < 第 一 編 第 二 章 永 楽 帝 の 対 外 政 策 と 日 本 > 98~99 ; 檀 上 寛, < 明 初 の 海 禁 と 朝 貢 - 明 朝 専 制 支 配 の 理 解 に 寄 せて>( 森 正 夫 他 編, 明 清 時 代 史 の 基 本 問 題 ( 中 国 史 の 基 本 問 題 4)> ( 汲 古 書 院 )) 223 ; 同, < 初 期 明 帝 国 体 制 論 >( 杉 山 正 明 他, 岩 波 講 座 世 界 歴 史 11( 中 央 ユーラシアの 統 合 ) ( 岩 波 書 店 )) 318~321
4 52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실이다. 다만 엄밀하게 말해서 1531년( 中 宗 26)에는 종래의 正 朝 使 를 폐지하고 冬 至 使 가 신설되었으며, 聖 節 使 千 秋 使 冬 至 使 를 명에 파견하는 1년 3공의 대명외교체제로 이행 하였다. 9) 이 1 年 3 貢 체제에 대하여 아직도 연구자들 사이에 오해가 있다. 예를 들면, 朴 成 柱 씨 는 冬 至 使 가 中 宗 26년부터 파견됐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16세기 후반부터 冬 至 使 가 추가되어 1 年 4 貢 이 규례화된 것 이라고 한다. 또 全 淳 東 씨는 正 朝 使 冬 至 使 聖 節 使 에 中 宗 26년(1531) 이후부터는 황태자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는 千 秋 使 도 함께 추가 되어 1 年 4 使 가 정례로 되었다 고 한다. 10) 그러나 양자 모두 잘못이다. 조선 초기의 遣 明 使 節 은 正 朝 聖 節 千 秋 使 의 1년 3공, 조선 중기인 中 宗 26년 이후는 聖 節 千 秋 冬 至 使 의 1년 3공이다. 이러한 오해가 생긴 까닭은 아마도 16세기 朝 明 関 係 의 실태에 접근 한 실증적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아니면 조선 후기의 사역원 역관인 金 指 南 金 慶 門 부자가 편찬한 通 文 館 志 (1720년 간행)에 國 初, 매년 파견하는 朝 京 使 에 冬 至 正 朝 聖 節 千 秋 의 四 使 가 있다 고 한 조문 11) 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으 9) 1587년( 萬 暦 15)에 완성된 明 代 国 制 総 覧 인 萬 暦 大 明 会 典 ( 新 文 豊 出 版 公 司, 台 北 ) 巻 105, 禮 部 63 朝 貢 1 東 南 夷 上 朝 鮮 國 条 에 永 樂 初 賜 印 誥 自 後 毎 歳 聖 節 正 旦 嘉 靖 十 年 (= 中 宗 26년), 外 夷 朝 正 旦 者 倶 改 冬 至 皇 太 子 千 秋 節, 皆 遣 使 奉 表 朝 賀, 貢 方 物, 其 餘 慶 慰 謝 恩 無 常 期 라고 되어 있으며, 中 宗 26년 3월에는 毎 歳 元 朝 ( 正 旦 )의 ( 朝 ) 貢 은 동지 전으로 옮겨 入 賀 하라 는 聖 旨 가 조선에 전달되었다( 中 宗 実 録 권70, 26년 3월 9일 甲 午 条. 사료 중의 안은 割 註, 이하 같음). 10) 朴 成 柱, <조선 초기 遣 明 使 節 에 대한 일고찰> 慶 州 史 学 第 19 輯 慶 州 ( 曺 圭 益 他 編, 연행록연구총서6(역사) ( 学 古 房, 서울)에 再 録 ) 153 ; 全 淳 東, <15세기 조선과 명의 문 물 교류-중국문물의 유입을 중심으로> 韓 国 史 研 究 会 編, 韓 国 史 의 国 際 環 境 과 民 族 文 化 ( 景 仁 文 化 社, 서울) 93. 그밖에 朴 元 熇, 明 初 朝 鮮 関 係 史 研 究 ( 一 潮 閣, 서울) <15세기 朝 鮮 과 明 의 關 係 > 294도 조선은 후일 中 宗 26년( 嘉 靖 10년, 1531)부터 冬 至 使 가 추가되어 1년 4사가 된다 고 하며, 16세기의 동아시아 세계를 그린 金 翰 奎,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중국적 세계질서의 붕괴> 鄭 杜 熙 他 編, 임진왜란-동아시아 삼국전쟁 (휴머니스트, 서울). 일본어 訳 은 金 文 子 監 訳, 壬 辰 戦 争 -16 世 紀 日 朝 中 の 国 際 戦 争 ( 明 石 書 店 ) 312도 역시 조선은 賀 正 使 와 聖 節 使 千 秋 使 등 1년 3사를 고집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冬 至 使 를 추가하여 1년 4공을 강행했다 고 서술했다. 한편, 조선시대의 조공 책봉관계를 정리한 権 善 弘, <조선시대 사대관계와 책봉체제> 韓 日 関 係 史 研 究 論 集 編 纂 委 員 会 編, 왜구 위사문제 와 한일관계(한일관계사연구논집4) ( 景 仁 文 化 社, 서울) 65에서 조선은 明 으로부터 1년 3~4공 이라는 유례없이 파격적 대우를 받았다 고 애매하게 표현했다. 11) 朝 鮮 史 編 修 委 員 会 編, 通 文 館 志 ( 朝 鮮 史 料 叢 刊 第 21) ( 朝 鮮 総 督 府, 京 城 ). 底 本 은 1888 년에 重 修 刊 行 된 서울 大 学 校 奎 章 閣 蔵 本 ) 권3, 事 大 上, 赴 京 使 行 条. 이 조문을 근거로, 예를 들어 서 全 海 宗, 韓 中 関 係 史 研 究 ( 一 潮 閣, 서울) < 清 代 韓 中 朝 貢 関 係 考 > 61에서는 李 朝 初 期 의 対 明 使 行 에는 冬 至 正 朝 聖 節 千 秋 의 四 行 이 定 期 的 이었다고 한다.
5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53 로 생각된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매년 명절 때마다 조공사절을 명나라로 파견했던 것만이 아니었 다. 조선왕조의 기본법전인 經 國 大 典 (성종 16년, 1485)에는 正 朝 冬 至 聖 節 千 秋 節 에 殿 下 는 왕세자 이하를 거느리고 望 闕 禮 를 올린다 고 명기되어 있으며, 12) 왕조정부의 儀 禮 書 인 國 朝 五 禮 儀 (성종 5년, 1474)에는 이 儀 註 ( 儀 禮 의 式 次 第 )를 嘉 禮 의 첫머리 에 수록하고 있다. 13) 조선 국왕은 正 朝 冬 至 聖 節 千 秋 節 에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왕도 한성의 왕궁에서 명나라 황제를 遙 拜 하는 궁중의례( 望 闕 禮 라고 한다)를 거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14) 이 궁중의례는 일찍이 명 태조 洪 武 帝 가 1369년( 洪 武 2)에 蕃 國 禮 로서 제정 했던 元 正 冬 至 上 國 聖 壽 節 에 望 闕 하며 축하를 드리는 의식 의 수용과 실천이다. 15) 이미 고려 恭 愍 王 (재위 1351~74)은 1372년 동지 때 명나라 관복인 冕 服 을 입고 이 요배 의례를 거행했으며, 백관과 함께 만세를 삼창하고 있다. 16) 望 闕 禮 의 의의는 일찍이 제9 12) 經 国 大 典 巻 3, 禮 典, 朝 儀 条 에 正 至 聖 節 千 秋 節, 殿 下 率 王 世 子 以 下, 行 望 闕 禮 라고 되 어 있다. 李 成 茂 씨는 이 朝 儀 条 를 근거로 조선은 사대의 표현으로 일년에 네 차례의 사신( 正 朝 冬 至 聖 節 千 秋 )을 보내고 조공을 바쳤다 고 한다. 그러나 이 조문은 正 朝 冬 至 聖 節 千 秋 의 望 闕 禮 에 관한 규정이며, 朝 貢 使 節 에 관한 규정은 아니다. 同, 개정증보 조선의 사 회와 사상 ( 一 潮 閣, 서울) <제1부 제1장 朝 鮮 時 代 의 王 権 > (초판은 朝 鮮 時 代 史 学 会 編, 東 洋 三 国 의 王 権 과 官 僚 制 ( 国 学 資 料 院, 서울)) 28. 대체로 조선정부가 명나라에 冬 至 使 를 파 견하는 것은 중종 26년 이후의 일이며, 經 国 大 典 에는 冬 至 使 자체에 관한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13) 国 朝 五 禮 儀 巻 3, 嘉 禮, 正 至 及 聖 節 望 闕 行 禮 儀 条 및 皇 太 子 千 秋 節 望 宮 行 禮 儀 条 14) 李 範 稷, 韓 国 中 世 禮 思 想 研 究 - 五 禮 를 中 心 으로 ( 一 潮 閣, 서울) < 第 2 章 Ⅲ 世 宗 朝 五 禮 의 分 析 > 327~329 ; 桑 野 栄 治, < 朝 鮮 初 期 の 對 明 遥 拜 儀 禮 -その 概 念 の 成 立 過 程 を 中 心 に> 久 留 米 大 學 比 較 文 化 年 報 第 10 輯 ; 同, < 朝 鮮 世 祖 代 の 儀 禮 と 王 権 - 對 明 遥 拜 儀 禮 と 圜 丘 壇 祭 祀 を 中 心 に> 久 留 米 大 學 文 學 部 紀 要 ( 國 際 文 化 學 科 編 ) 第 19 号 ; 同, < 朝 鮮 成 宗 代 の 儀 禮 と 外 交 - 經 國 大 典 成 立 期 の 對 明 遥 拝 儀 禮 > ( 同 第 20 号, 2003년 3월) ; 同, < 高 麗 末 期 の 儀 禮 と 國 際 環 境 - 對 明 遥 拜 儀 禮 の 創 出 > ( 同 第 21 号, 2004년 3 月 ). 이들 4편의 논문은 증보 수정된 후 桑 野 栄 治, 高 麗 末 期 から 李 朝 初 期 における 對 明 外 交 儀 禮 の 基 礎 的 研 究 (2001~ 2003 年 度 科 學 研 究 費 補 助 金 基 盤 研 究 (C)(2) 研 究 成 果 報 告 書, 2004년 2월)에 수록했다. 또한 桑 野 栄 治, < 正 朝 冬 至 の 宮 中 儀 禮 を 通 してみた15 世 紀 朝 鮮 の 儒 教 と 國 家 - 朝 鮮 燕 山 君 代 の 對 明 遥 拜 儀 禮 を 中 心 に> 朝 鮮 史 研 究 会 論 文 集 第 34 集 ; 同, < 朝 鮮 中 宗 代 における 對 明 遥 拜 儀 禮 -16 世 紀 前 半 の 朝 鮮 と 明 日 本 > 久 留 米 大 學 文 學 部 紀 要 ( 國 際 文 化 學 科 編 ) 第 24 号 참조. 15) 明 集 禮 ( 景 印 文 淵 閣 四 庫 全 書 第 650 冊, 台 湾 商 務 印 書 館, 台 北, 1983년 6월, 수록) 巻 30, 賓 禮 1, 蕃 王 朝 賀, 元 正 冬 至 上 國 聖 寿 節 望 闕 賀 儀 条. 萬 曆 大 明 会 典 巻 58, 禮 部 16, 蕃 國 禮, 聖 節 正 旦 冬 至 蕃 國 望 闕 慶 祝 儀 条. 桑 野 栄 治, 전게 < 高 麗 末 期 の 儀 禮 と 國 際 環 境 > 76~79. 또 岩 井 茂 樹, < 明 代 禮 制 覇 権 主 義 と 東 アジアの 秩 序 > 東 洋 文 化 第 85 号 132~133 16) 冬 至, 王 具 冕 服, 率 百 官, 向 闕 拜 賀, 山 呼 萬 歳, 後 百 官 又 行 本 朝 賀 禮 ( 高 麗 史 권67, 禮 志 9, 嘉 禮, 元 正 冬 至 上 國 聖 寿 節 望 闕 賀 儀, 恭 愍 王 21년 11월 14일 丁 巳 条 ). 桑 野 栄 治, 전게 < 高 麗 末 期 の
6 54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대 조선국왕 성종(재위 1469~94)이 秘 書 役 인 承 政 院 에 이르기를, 내가 望 闕 禮 를 행할 때 몸은 비록 이곳 조선에 있지만, 몸소 朝 天 하는( 皇 帝 를 拜 謁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라고 말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17) 원래 명절이 되면 蕃 王 인 조선 국왕이 몸소 황제가 기거하는 北 京 으로 가서 명나라 황제에게 拜 禮 를 해야 하지만 그렇 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부득이 조선의 왕궁에서 紫 禁 城 에 거처하는 명 황제를 요배하는 것으로 그 책무를 부담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명과 琉 球 의 관계 이어서 조선과 마찬가지로 책봉체제 아래 있었던 琉 球 國 의 경우를 보도록 하자. 洪 武 帝 는 당초 1372년( 洪 武 5)에 浦 添 을 거점으로 하는 中 山 王 察 度 (삿토, 재위 1350~95년) 가 일찍부터 入 貢 권고에 응했으므로(다만 中 山 王 의 冊 封 은 1404년 제2대 武 寧 ), 大 琉 球 國 의 朝 貢 은 不 時 (= 隨 時 )로 한다 고 우대했으나, 후일 琉 球 使 臣 이 福 建 省 에서 일으켰 던 살인사건을 이유로 1475년(성화 11년)에 憲 宗 成 化 帝 (재위 1464~87)는 琉 球 의 貢 期 (조공 빈도)를 2년 1공으로 제한했다. 18) 그 후 琉 球 국왕이 1년 1공의 주청을 거듭한 결 과 1507년( 正 徳 2)에 겨우 1년 1공의 貢 期 를 얻기는 했지만, 1522년( 嘉 靖 원년)에 다시 2년 1공을 하명받게 된다. 19) 조선의 1년 3공과 비교하면 그 대우의 격차가 현격하다. 20) 儀 禮 と 國 際 環 境 > 75~76. 17) 傳 于 承 政 院 曰, ( 中 略 ) 予 行 望 闕 禮 時, 身 雖 在 此, 豈 有 異 於 親 自 朝 天 乎, ( 後 略 ) ( 成 宗 実 録 권 284, 24년 11월 8일 己 亥 条 ). 桑 野 栄 治, 전게 < 朝 鮮 成 宗 代 の 儀 禮 と 外 交 > ) 祖 訓, 大 琉 球 國 朝 貢 不 時, 王 子 及 陪 臣 之 子, 皆 入 太 學 (= 国 子 監 ) 讀 書, 禮 待 甚 厚, ( 中 略 ) 永 樂 以 來, 國 王 嗣 立, 皆 請 命 册 封, 後 惟 中 山 王 至, 中 山 王 世 稱 尚 氏, 諭 令 二 年 一 貢, 毎 船 百 人, 多 不 過 百 五 十 人, 貢 道 由 福 建 閩 縣, ( 後 略 ) ( 萬 曆 大 明 会 典 巻 105, 禮 部 63, 朝 貢 1, 東 南 夷 上, 琉 球 國 条 ). 佐 久 間 重 男, 전게서 < 第 一 編 第 四 章 明 代 の 琉 球 と 中 国 との 関 係 > 174~177 ; 邊 土 名 朝 有, 琉 球 の 朝 貢 貿 易 ( 校 倉 書 房 ) < 第 一 部 第 一 章 貢 期 の 制 定 > 23~24 ; 同 < 第 一 部 第 三 章 貢 期 の 制 限 > 64~66. 또 明 実 録 과 歴 代 寶 案 을 토대로 琉 球 의 朝 貢 頻 度 를 정리한 岡 本 弘 道, < 明 朝 における 朝 貢 国 琉 球 の 位 置 付 けとその 変 化 世 紀 を 中 心 に> 東 洋 史 研 究 第 57 巻 第 4 号, 4~6에 따르면, 1480년대 이후는 거의 2년에 1번의 朝 貢 으로 안정되었다. 19) 佐 久 間 重 男, 전게서 < 第 一 編 第 四 章 明 代 の 琉 球 と 中 国 との 関 係 > 178. 邊 土 名 朝 有, 전게서 < 第 一 部 第 三 章 貢 期 の 制 限 > 76. 뒷날 薩 摩 島 津 氏 에 의한 琉 球 侵 攻 직후의 貢 期 는 10년 1공이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夫 馬 進, 전게 <1609 年, 日 本 の 琉 球 併 合 以 降 における 中 国 朝 鮮 の 対 琉 球 外 交 > 18~22가 이 통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 村 井 章 介 씨는 明 史 外 國 伝 을 기초로 < 明 에 대한 諸 國 의 入 貢 表 >를 작성하고, 조공 횟수가 171회인 琉 球 가 제1위이며, 다른 나라보다 두드러지게 많은 조공횟수 였다고 한다( 同,
7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55 또 1561년( 嘉 靖 40)에 冊 封 使 로 琉 球 에 갔던 郭 汝 霖 의 重 編 使 琉 球 録 에 따르면, 朝 鮮 과 安 南 (현재 베트남 북부)으로 파견되는 冊 封 使 가 대략 正 7 品 ( 副 使 는 従 7 品 )임에 비하여 琉 球 와 占 城 (참파, 현재 베트남 남부)의 경우는 従 7 品 ( 副 使 는 正 8 品 )이므로 琉 球 国 王 은 朝 鮮 国 王 보다 격하되어 취급받은 것이 된다. 21) 다만 이 조공 빈도는 어디까지나 원칙이며, 조선왕조와 마찬가지로 정기적인 조공( 琉 球 에서는 進 貢 이라고 한다)사절 이외에 謝 恩 使 慶 賀 使 進 香 使 등 임시사절도 파견하고 있다. 22) 예를 들면, 歷 代 寶 案 에는 제1 尚 氏 王 統, 2대 尚 巴 志 (쇼하시, 재위 1422~39 년)가 1425년에 등극한 宣 宗 宣 徳 帝 (재위 1425~35)를 축하하면서, 신하 尚 巴 志 는 멀리 蕃 國 에 기거하면서 마음은 달려가 遥 賀 한다는 내용의 表 文 (황제 앞으로 보내는 외교문 서)을 보냈다. 23) 외교문서의 상투적인 문구이기는 하지만, 직접 紫 禁 城 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할 수 없는 蕃 王 尚 巴 志 의 심정은 望 闕 禮 를 올리는 조선 국왕 성종의 심정과 상통 한다. 海 から 見 た 戦 國 日 本 - 列 島 史 から 世 界 史 へ ( 筑 摩 書 房 ) 67). 村 井 씨가 작성한 入 貢 表 는 秋 山 謙 蔵 日 支 交 渉 史 研 究 ( 岩 波 書 店, 1939년 4월) < 本 論 第 六 篇 第 五 章 勘 合 貿 易 と 密 貿 易 > 552를 참 조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표에 따르면 조선은 30회(10위), 일본은 19회(13위)이며, 高 良 倉 吉 씨 는 이 데이터를 기초로 明 朝 에 대하여 琉 球 는 아시아 최대의 조공무역국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 한다( 同, < 琉 球 の 形 成 と 東 シナ 海 世 界 > 大 石 直 正 他, 周 縁 から 見 た 中 世 日 本 ( 日 本 の 歴 史 14) ( 講 談 社 ) 193~194). 그러나 원칙상 2년 1 貢 의 琉 球 가 원칙상 1년 3 貢 인 조선의 朝 貢 회수를 이처럼 대폭적으로 상회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朝 鮮 王 朝 実 録 을 조사했던 朴 成 柱 씨에 따르면, 조선 초기( 太 祖 원~ 成 宗 25년 )에는 正 朝 使 102회( 兼 行 14회), 聖 節 使 96회 ( 兼 行 8회), 千 秋 使 61회( 兼 行 4회)의 데이터를 제시하였다. 통상의 조공사절로 한정해도 조선에서 明 으로 약 100년 동안 합계 259회가 파견되었으며, 기타의 임시사절, 예를 들면 謝 恩 使 의 파견 회수는 150회( 兼 行 15회)를 상회한다( 同, 전게 <조선 초기 遣 明 使 節 에 대한 일고찰> 153~156). 그런 까닭에 村 井 씨가 작성한 < 明 に 對 する 諸 國 の 入 貢 表 >는 당시의 실태를 반영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21) 孫 薇, < 冊 封 朝 貢 について- 中 琉 の 冊 封 朝 貢 関 係 を 中 心 に> 法 政 大 学 沖 縄 文 化 研 究 所 編, 沖 縄 文 化 研 究 17, 57~58 ; 郭 汝 霖 ( 原 田 禹 雄 訳 注 ), 重 編 使 琉 球 録 ( 榕 樹 書 林 ) 下, 群 書 質 異, 使 職 要 務, 176. 원문은 ( 前 略 ) 按 我 朝 封 錫 藩 王 之 制, 如 按 南 朝 鮮, 則 遣 編 修 給 事 中 等 官 爲 使, 占 城 琉 球, 則 遣 給 事 中 行 人 等 官 爲 使, ( 後 略 ) ( 同, 293~294). 다만 金 龍 基, < 朝 鮮 初 期 의 対 明 朝 貢 関 係 考 > 釜 山 大 学 校 論 文 集 ( 人 文 社 会 科 学 篇 ) 제14집, 155에 따르면 조선 초 기에 파견된 明 使 는 正 5 品 부터 従 6 品 의 하급관리였으며, 75회의 明 使 중에서 48회는 宦 官 이었다. 22) 野 口 鐵 郎, 中 国 と 琉 球 ( 開 明 書 院 ) < 明 代 琉 中 往 来 表 > ; 赤 嶺 誠 紀, 大 航 海 時 代 の 琉 球 ( 沖 縄 타임스 社 ) < 進 貢 船 一 覧 表 > 참조. 23) ( 前 略 ) 臣 尚 巴 志, 恭 遇 聖 君 嗣 登 天 位, 遠 處 蕃 維, 心 馳 遙 賀, 仰 紫 宸 三 祝, 祈 聖 壽 以 齊 天, ( 後 略 ) ( 歷 代 寶 案 제1집, 巻 12, 表 奏 文, 洪 熙 원년 윤7월 17일자, 宣 徳 帝 宛 中 山 王 上 表 文 ). 텍스트로 는 沖 縄 県 立 圖 書 館 編, 歷 代 寶 案 校 訂 本 제1책 ( 沖 縄 県 教 育 委 員 会 )를 이용했다. 이 上 表 文 에 관해서는 高 良 倉 吉, 전게 < 琉 球 の 形 成 と 東 シナ 海 世 界 > 188에서 인용되었다.
8 5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그렇다면 조선 국왕이 매년 명절에 망궐례를 행했던 것처럼, 琉 球 국왕도 역시 같은 궁중의례를 올리고 있었을까? 史 料 의 제약으로 단정하기는 조심스럽지만, 琉 球 왕권의 관점에서 일찍이 豊 見 山 和 之 씨는 왕은 紅 錦 衣 를 갖추고, 平 天 冠 을 쓰고, 一 僧 과 마주앉아 望 闕 의 禮 를 행한다 ( 朝 鮮 王 朝 実 録 1546년)라고 하듯이, 국왕은 승려와 함께 望 闕 의 禮 = 紫 禁 城 遥 拜 를 올리고 있다. 고 지적하였다. 24) 豊 見 山 씨가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았던 朝 鮮 王 朝 実 録 에 의하면, 中 宗 37년(1542) 琉 球 國 에 표착하여 4년간 생활했던 제주 표류민 朴 孫 등 12명으로부터 들은 琉 球 의 풍속으로, 확실히 琉 球 國 왕은 붉은 비단옷을 입고, 제례용 平 天 冠 을 쓰고, 승려와 마주앉아 望 闕 의 禮 를 행한다 고 기록하고, 大 明 을 섬기기 때문에 이 예를 올리 는 것이다 고 해설하였다. 25) 豊 見 山 씨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実 録 의 기사는 계속해서 百 官 은 관직의 서열에 따라 뜰아래 나란히 서서 배례한다 고 기록하고, 표류했던 제주 도의 朴 孫 일행도 반열의 뒤에서 배례를 행했다고 한다.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는 朴 孫 일행도 역시 琉 球 의 백관과 마찬가지로 명 황제의 신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늦 어도 16세기 중반 무렵까지는 琉 球 국왕이 蕃 王 으로서 조선의 望 闕 禮 와 유사한 궁중 의례를 首 里 城 안의 성스러운 광장 御 庭 (우나) 에서 거행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 이다. 다만 제주 표류민이 首 里 城 에서 참가했던 望 闕 의 禮 의 경우, 그 계절에 관해서는 朝 鮮 王 朝 実 録 에 기록이 없다. 그런데 豊 見 山 씨는 薩 摩 藩 의 琉 球 침공(1609년) 이전의 古 琉 球 때 초하루와 보름마다 首 里 城 正 殿 앞에서 官 人 은 位 階 에 따라 정렬하여 중국 황 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례를 도입하고, 聖 節 (중국 황제의 생일)과 정월 초하루에 중 국에서 하사한 관복을 입고 의례를 거행하였다 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26) 아마도 전자 는 매달 초하루의 朝 賀 儀 禮 이며, 후자가 聖 節 正 朝 (그리고 아마도 冬 至 )의 望 闕 禮 를 의 24) 豊 見 山 和 之, 琉 球 王 國 の 外 交 と 王 権 ( 吉 川 弘 文 館 ) <Ⅲ 第 1 章 祭 天 儀 禮 と 宗 廟 祭 祀 からみ た 琉 球 の 王 権 儀 禮 > ) ( 前 略 ) 注 書 尹 潔 因 朴 孫 等 之 言, 記 琉 球 國 風 俗, 其 略 曰, ( 中 略 ) 國 王 所 御 之 殿, 高 五 層, 以 板 覆 之, 王 具 紅 錦 衣, 戴 平 天 冠, 與 一 僧 對 坐, 行 望 闕 禮 事 大 明, 故 爲 此 禮 云, 百 官 以 職 次, 分 班 拜 於 庭 下, 立 朴 孫 等 於 百 官 班 後, 令 一 時 拜 曰, 爾 國 亦 爲 大 明 臣, 不 可 不 拜 云 ( 明 宗 実 録 권3, 원년 2월 1 일 戊 子 条 ). 26) 豊 見 山 和 之, 전게서 <Ⅲ 第 1 章 祭 天 儀 禮 と 宗 廟 祭 祀 からみた 琉 球 の 王 権 儀 禮 > 234 ; 安 達 義 弘, < 琉 球 國 王 のアイデンティティと 册 封 朝 貢 體 制 > 久 留 米 大 學 比 較 文 化 研 究 第 19 輯, 60~61도 이 聖 節 正 朝 의 王 朝 儀 禮 에 주목했다.
9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57 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豊 見 山 씨가 근거로 했던 歷 代 寶 案 에 따르면, 일찍이 洪 武 帝 로부터 하사받은 관복이 심하게 손상되어 聖 節 正 朝 등의 행사에 지장이 생겼 다 고 한다. 27) 尚 巴 志 가 명나라 禮 部 앞으로 보낸 이 咨 文 은 1436년( 正 統 원년) 당시 琉 球 의 왕권의례의 실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禮 部 의 咨 文 에 주목했던 邊 土 名 朝 有 씨는 聖 節 正 朝 등의 행사 에 대하여, 이것은 洪 武 2년에 정해진 聖 節 正 旦 冬 至 蕃 國 望 闕 慶 祝 儀 ( 大 明 会 典 巻 58, 1006쪽)을 가리키는 것이다. ( 中 略 ) 琉 球 王 및 신하가 冠 帯 를 하사받은 洪 武 31년 이후부터는 관복을 갖춘 정식 의례가 행해졌던 것이다. 라고 보다 깊이 있는 해석을 하고 있다. 28) 어느 것이든 단편적인 사료이기는 하지만, 뒷 날 18세기 전반에 성립한 琉 球 国 由 来 記 (1713년) 琉 球 国 舊 記 (1731년)가 보여주 듯이 薩 摩 藩 지배하의 근세 琉 球 에 있어서도 冬 至 元 旦 정월 15일의 王 府 儀 禮 는 3대 의 례로서 매우 중시되었으며, 중화황제가 사는 紫 禁 城 에 대한 요배의례를 강조하게 되었 다. 29) 이러한 王 府 儀 禮 에서는 외교문서 작성에 정교하여 儀 禮 에 익숙하던 職 能 集 團 閩 人 三 十 六 姓 이 관여하고 있었을 것이다. 30) 이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유구 국왕은 正 朝 聖 節 등 명절에는 帝 都 인 北 京 紫 禁 城 을 遥 拝 하는 의례, 즉 望 闕 禮 를 琉 球 나름으로 27) ( 前 略 ) 一 件, 朝 服 事, 洪 武 年 間, 欽 蒙 太 祖 高 皇 帝 給 賜 本 國 各 官 冠 笏 公 服 等 件, 欽 遵 奉 受 外, 今 照, 本 國 各 官 朝 服 已 經 多 年, 倶 以 朽 壞 無 存 及 不 能 裁 製, 凡 遇 聖 節 正 旦 等 事, 行 禮 未 便, 合 咨, 乞 爲 具 奏 給 賜 便 益, 咨 請 施 行, ( 後 略 ) ( 歴 代 寶 案 第 1 集, 巻 17, 國 王 咨 文, 正 統 원년 9월 24일자, 禮 部 宛 中 山 王 咨 文 ). 단, 朝 服 문제에 대하여 禮 部 는 직접 수선해서 사용하라고 회답했다( 同 書 第 1 集, 巻 4, 禮 部 咨 文, 正 統 2년 6월 6일자, 禮 部 宛 中 山 王 咨 文 ). 28) 邊 土 名 朝 有, 歴 代 寶 案 の 基 礎 的 研 究 ( 校 倉 書 房 ) < 禮 部 咨 文 > ) 琉 球 国 由 来 記 巻 1 ( 伊 波 普 猷 他 編, 琉 球 史 料 叢 書 第 1 ( 井 上 書 房 ) 수록), 王 城 之 公 事, 正 月 朝 拝 御 規 式 朝 拝, 및 11월 冬 至 条. 琉 球 国 舊 記 (전게 琉 球 史 料 叢 書 第 3 수록) 巻 3, 公 事, 正 月 朝 賀 南 殿 賀 禮, 및 11월 冬 至 条. 근세 琉 球 의 紫 禁 城 遥 拝 儀 禮 에 대해서는 豊 見 山 和 之, 전게서 Ⅲ 第 1 章 祭 天 儀 禮 と 宗 廟 祭 祀 からみた 琉 球 の 王 権 儀 禮 > 236~241 ; 伊 從 勉, 琉 球 祭 祀 空 間 の 研 究 -カミとヒトの 環 境 学 ( 中 央 公 論 美 術 出 版 ) < 第 3 部 第 11 章 琉 球 王 権 の 場 所 - 首 里 城 正 殿 唐 破 風 の 誕 生 とその 改 修 について> 557~558 참조. 30) 久 米 村 의 福 建 系 화교집단이 琉 球 의 王 府 儀 禮 에 관여하고 있던 것에 대하여는, 예를 들면 真 栄 平 房 昭, < 対 外 関 係 における 華 僑 と 国 家 - 琉 球 の 閩 人 三 十 六 姓 をめぐって> 荒 野 泰 典 他 編, ア ジアのなかの 日 本 史 (Ⅲ 海 上 の 道 ) (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259~260 참조. 또한 明 의 禮 部 가 제2 尚 氏 王 統 제7대 尚 寧 王 (재위 1589~1620년) 앞으로 보냈던 咨 文 에 ( 前 略 ) 竊 惟, 卑 國 僻 處 海 邦, 自 入 貢 受 封 之 後, 一 切 輔 導 禮 義, 悉 頼 原 賜 三 十 六 姓 之 裔, ( 後 略 ) 라는 구절이 보인다( 歴 代 寶 案 第 1 集, 巻 4, 禮 部 咨 文, 萬 暦 35년 12월 13일자, 琉 球 国 王 宛 禮 部 咨 文 ).
10 5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각색한 뒤에 올렸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 명과 일본의 관계 한편 일본에서는 1402년( 建 文 4)에 室 町 幕 府 제3대 장군에서 물러난 足 利 義 満 (재직 1368~94)이 京 都 北 山 의 별장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建 文 帝 의 책봉을 수락하였 다. 이듬해 永 楽 帝 의 등극이 알려지자 義 満 은 遣 明 使 에게 日 本 國 王 臣 源 명의로 시작되 는 表 文 을 지참시켜서 명으로 보냈으며, 그 결과 1404년에 永 楽 帝 는 義 満 을 다시 日 本 國 王 으로 책봉하였고, 日 本 國 王 之 印 이라고 새겨진 金 印 을 하사하였다. 31) 이미 전년에 는 永 楽 帝 가 조선 국왕을 책봉했으므로, 이 해 1404년에 琉 球 국왕과 일본 국왕이 탄생 함으로써 조선 琉 球 일본은 거의 같은 시기에 중화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세계 시스템(실제로는 무역시스템) 32) 속으로 편입된 것이 된다. 이때 일본에는 永 楽 勘 合 100 통이 들어왔고, 이후 일본과 명 사이에는 이른바 勘 合 貿 易 이 시작된다. 勘 合 船 ( 遣 明 船 이라고도 한다)은 1547년까지 약 150년 동안 19회에 걸쳐 파견되었는데 실제로는 朝 貢 船 이다. 33) 명나라가 일본국왕인 室 町 殿 ( 室 町 幕 府 의 수장, 대개의 경우는 室 町 장군)에게 인정했던 조공 빈도는 10년 1공이었는데, 34) 勘 合 船 =조공사절의 파견 빈도와 거의 부합 31) 田 中 健 夫, 中 世 對 外 関 係 史 ( 東 京 大 學 出 版 会 ) < 第 一 部 第 二 章 冊 封 関 係 の 成 立 > 64~ 67 ; 同, 前 近 代 の 國 際 交 流 と 外 交 文 書 ( 吉 川 弘 文 館 ) < 第 二 足 利 将 軍 と 日 本 國 王 號 > 49~50 ; 鄭 樑 生, 明 日 関 係 史 の 研 究 ( 雄 山 閣 ) < 第 三 章 明 日 交 渉 > 146~149 ; 佐 久 間 重 男, 전게서 < 第 一 編 第 二 章 永 楽 帝 の 対 外 政 策 と 日 本 > 109~113 및 < 終 論 明 清 からみた 東 ア ジアの 華 夷 秩 序 > 358~359 32) 坂 野 正 高, 近 代 中 国 政 治 外 交 史 -ヴァスコ ダ ガマから 五 四 運 動 まで (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 第 三 章 朝 貢 関 係 - 叩 頭 問 題 > 76~83 ; 浜 下 武 志, 朝 貢 システムと 近 代 アジア (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 第 一 部 Ⅰ 東 アジア 国 際 體 系 > 22 ; 村 井 章 介, 전게 海 から 見 た 戦 国 日 本 23 33) 田 中 健 夫, 전게 中 世 対 外 関 係 史 < 第 一 部 第 四 章 明 および 朝 鮮 との 通 交 貿 易 の 展 開 > 153~154 ; 同, 対 外 関 係 と 文 化 交 流 ( 思 文 閣 出 版 ) < 勘 合 符 勘 合 印 勘 合 貿 易 > 102. < 勘 合 貿 易 >의 선구적인 연구로 同, 倭 寇 と 勘 合 貿 易 ( 至 文 堂 )이 있다. 34) ( 前 略 ) 永 樂 初, 復 來 朝 貢, 賜 龜 紐 金 印 誥 命, 封 爲 日 本 國 王, ( 中 略 ) 給 勘 合 百 道, 始 令 十 年 一 貢, 貢 道 由 浙 江 寧 波 府, 毎 貢 正 副 使 等 毋 過 二 百 人, ( 後 略 ) ( 萬 曆 大 明 会 典 巻 105, 禮 部 63 朝 貢 1 東 南 夷 上 日 本 國 条 ). 다만 小 葉 田 淳 씨는 1511년( 正 徳 4)에 간행된 正 徳 大 明 会 典 ( 弘 治 会 典 ) 의 규정에 의문을 품고 10년 1공의 通 交 制 限 은 寶 徳 年 間 (1449~52년) 이후에 실시되었다고 한다. 또한 최근에 伊 川 健 二 씨는 이 통설에 반론을 제기하고, 明 側 의 재정사정과 遣 明 使 節 에 의한 소금 밀매, 北 京 会 同 館 에서의 傷 害 事 件 을 배경으로 10년 1공의 制 定 時 期 를 1484년( 成 化 20)으로 단정 하는데, 明 憲 宗 実 録 과 勅 諭 에서 이 점을 입증할 수는 없다 고 언급하기도 했으며, 설득력이
11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59 한다. 물론 1년 3공의 조선, 2년 1공의 琉 球 와 비교하면 그 대우의 격차는 부정할 수 없 다.(< 表 1>참조). 入 貢 할 때 정규의 朝 貢 使 節 인지 여부를 준별하기 위하여 의무적으로 지참해야 하던 勘 合 도 事 大 의 禮 를 충실히 이행하는 조선과 琉 球 두 나라는 면제받았 다. 35) 勘 合 은 1386년( 洪 武 16)에 暹 羅 (아유타야, 현재 타이의 일부)에게 지급한 것이 시 작이며, 급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日 本 占 城 爪 哇 (자바섬 북부) 満 刺 加 (말라카) 真 臘 (캄보디아) 錫 蘭 山 (스리랑카) 등 해상항로를 이용하여 중국에 来 航 했던 15개국이었다. 36) 勘 合 급부의 대상국이 된 暹 羅 占 城 爪 哇 의 조공 빈도가 모두 3년 1공이지만, 일본의 조 공 빈도는 10년 1공이라는 점에서도 일본의 이질성을 용이하게 간파할 수 있다. 또한 田 中 健 夫 씨에 따르면, 1402년 京 都 北 山 殿 에서 행해졌던 책봉의례 때는 高 机 를 母 屋 앞에 세우고 그 위에 詔 書 를 두고, 義 満 이 먼저 향을 사르고, 이어서 삼배, 그런 다음에 꿇어앉아서 이것을 삼가봤다 고 한다. 37) 鄭 樑 生 씨는 義 満 의 이런 태도는 중화 세계 제국의 일원으로 편입된 속국 국왕의 태도 이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고 간주하 지만, 38) 室 町 殿 과 명 황제의 종속관계를 시사하는 명절의 遙 拜 의례를 거행한 것인지 지 떨어진다. 小 葉 田 淳, 中 世 日 支 通 交 貿 易 史 の 研 究 ( 刀 江 書 院 ) < 第 六 章 明 の 諸 制 度 > 321~322 ; 伊 川 健 二, 大 航 海 時 代 の 東 アジア- 日 欧 通 交 の 歴 史 的 前 提 ( 吉 川 弘 文 館 ) < 第 一 部 第 二 章 諸 国 王 使 をめぐる 通 交 制 限 > 60~61 35) 鄭 樑 生, 전게서 < 第 二 章 明 の 対 外 政 策 > 62 ; 佐 久 間 重 男, 전게서 < 終 論 明 清 からみた 東 アジアの 華 夷 秩 序 > 353 ; 閔 徳 基, 前 近 代 東 アジアのなかの 韓 日 関 係 ( 早 稲 田 大 学 出 版 部 ). 증보판 은 同, 前 近 代 동아시아 세계의 韓 日 관계 ( 景 仁 文 化 社, 서울) < 第 一 部 第 二 章 朝 鮮 朝 前 期 の 日 本 国 王 観 - 敵 禮 の 面 から> 84~85. 権 善 弘, 전게 <조선시대 사대관계와 책봉체 제> 66. 다만 勘 合 의 現 存 例 는 없으며, 그 使 用 制 度 形 状 에 관해서는 伍 躍, < 日 明 関 係 における 勘 合 -とくにその 形 状 について> 史 林 第 84 巻 第 1 号 ; 橋 本 雄, < 日 明 勘 合 再 考 > 九 州 史 学 研 究 会 編, 境 界 からみた 内 と 外 ( 九 州 史 学 創 刊 50 周 年 記 念 論 文 集 下 ) ( 岩 田 書 院 ) 등, 통설에 대한 재검토가 진행 중이다. 36) 洪 武 十 六 年, 始 給 暹 羅 國, 以 後 漸 及 諸 國, ( 中 略 ) 毎 改 元, 則 更 造 換 給, 計 有 勘 合 國 分, 暹 羅 日 本 占 城 爪 哇 満 刺 加 真 臘 蘇 禄 國 東 王 蘇 禄 國 西 王 蘇 禄 國 峒 王 柯 支 浡 泥 錫 蘭 山 古 里 蘇 門 荅 刺 古 麻 刺 ( 萬 暦 大 明 会 典 巻 108, 禮 部 66, 朝 貢 通 例, 勘 合 號 簿 条 ). 松 浦 章, < 萬 暦 四 十 五 年 暹 羅 国 遣 明 使 - 明 代 朝 貢 形 態 の 様 相 > 夫 馬 進 編, 増 訂 使 琉 球 録 解 題 及 び 研 究 ( 榕 樹 書 林 ) 183, ) 田 中 健 夫, 전게 中 世 対 外 関 係 史 < 第 一 部 第 二 章 冊 封 関 係 の 成 立 > 65 ; 橋 本 雄, 前 掲 < 朝 鮮 國 王 使 と 室 町 幕 府 > 172~173. 醍 醐 寺 座 主 満 済 (만사이)의 日 記 満 済 准 后 日 記 ( 続 群 書 類 従 補 遺 1, 続 群 書 類 従 完 成 会, 1978 年 4 月 수록) 永 享 6 年 5월 12일조에 ( 前 略 ) 高 机 於 立 母 屋 前, 其 上 被 置 唐 書, 先 御 燒 香, 次 三 拜, 以 後 跪 テ 唐 書 お 御 拜 見 候 キ, ( 後 略 ) 라고 되어 있다. 다만 극히 최근 에는 橋 本 雄, < 室 町 日 本 の 對 外 観 - 室 町 殿 の 内 なるアジア を 考 える> 歴 史 評 論 697 호가 義 満 의 受 封 儀 禮 는 과연 明 集 禮 등 명 쪽의 빈례 규정대로 집행되었는지 여부에 대하여 재검토를 시도하고 있다.
12 6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금은 알 수 없다. 게다가 足 利 義 満 이 죽은 후 家 督 을 이은 4대 장군 義 持 (재직 1394~ 1423년)은 1411년에 대명외교 방침을 전환하여 책봉관계를 단절했고, 6대 장군 義 教 (재 직 1429~41년)가 책봉관계의 부활을 원하여 1432년 宣 徳 帝 에게 表 文 을 보냈으며, 8대 장군 義 政 (재직 1449~73년) 시대 이후는 명 사신의 来 日 이 끊어지는 등 황제 대 室 町 殿 의 외교관계가 그다지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明 황제가 冊 封 使 를 파견하여 誥 命 수여 儀 禮 를 거행했던 形 跡 이 있는 것은 義 満 義 持 義 教 3명에 불과하다. 39) 義 満 이하 室 町 殿 이 국내에서 日 本 国 王 을 표방했던 形 跡 도 찾아볼 수 없으며, 日 本 国 王 號 는 幕 府 가 対 明 貿 易 을 독점하기 위하여 通 交 名 義 로서 기능하는데 그쳤던 것이다. 40) 대명무역의 이권을 둘러싼 細 川 大 内 두 집안의 쟁탈전은 조공무역선의 입관수속을 두고 다투었던 寧 波 의 난(1523년, 이른바 寧 波 爭 貢 事 件 )을 초래하였고, 41) 일명관계는 이 후 勘 合 貿 易 을 독점하고 있던 大 内 씨의 멸망(1551)과 함께 단절된다. 16세기의 室 町 정 권하에서는 조공무역 시스템의 본래의 정치적 의미는 상실되고, 책봉체제와 조공무역이 별개의 것으로 전락해 간 것을 상징한다. 42) 훗날 1581년에 日 本 国 王 은 対 明 通 貢 의 중 재를 宣 祖 (재위 1567~1608년)에게 요청했지만, 宣 祖 는 人 臣 에게 私 交 없다 는 논리로 이를 거부하고 있다. 43) 그러면 1585년에 公 家 社 会 의 최고 관직인 関 白 에 취임하여 唐 38) 鄭 樑 生, 전게서 < 第 三 章 第 二 節 明 日 國 交 の 開 始 > ) 田 中 健 夫, 전게 前 近 代 の 国 際 交 流 と 外 交 文 書 < 第 二 足 利 将 軍 と 日 本 國 王 号 > 51~59에 따르 면, 1433년 6월에 명은 義 教 에 대한 책봉사를 파견했지만, 義 政 이후의 일본국왕에 대하여 책봉사 가 파견된 흔적은 없다. 또 義 政 이후에는 일본 국내의 내란을 계기로 朝 鮮 使 節 의 来 日 도 끊어졌 다. 이 점은 中 村 栄 孝, 日 鮮 関 係 史 の 研 究 ( 上 ) ( 吉 川 弘 文 館 ) < 五 室 町 時 代 の 日 鮮 関 係 > ) 田 中 健 夫, 전게 前 近 代 の 国 際 交 流 と 外 交 文 書 < 第 二 足 利 将 軍 と 日 本 国 王 号 > 44 ; 村 井 章 介, < 易 姓 革 命 の 思 想 と 天 皇 制 > 永 原 慶 二 編, 講 座 前 近 代 の 天 皇 ( 第 5 巻 世 界 史 のなかの 天 皇 ) ( 青 木 書 店 ) 34 41) 寧 波 争 貢 事 件 에 관해서는 최근 일본이라는 조공국의 入 貢 현장에 초점을 맞춘 山 崎 岳, < 朝 貢 と 海 禁 の 論 理 と 現 実 - 明 代 中 期 の 奸 細 宋 素 卿 を 題 材 として> 夫 馬 進 編, 中 国 東 ア ジア 外 交 交 流 史 の 研 究 ( 京 都 大 学 学 術 出 版 会 )가 있다. 42) 尹 誠 翊, 명대 왜구의 연구 ( 景 仁 文 化 社, 서울) <제3장 嘉 靖 時 期 倭 寇 활동의 증폭 요인과 활동의 양상> ) 松 浦 允 任 撰 ( 田 中 健 夫 田 代 和 生 校 訂 ), 朝 鮮 通 交 大 紀 ( 名 著 出 版 ) 巻 3, 萬 松 院 公 昭 景 ( 宗 義 智 ), 朝 鮮 国 王 李 昖 奉 復 日 本 国 王 殿 下 ( 萬 暦 9년 5월 일자), 116~119. 中 村 栄 孝, 전게서 < 一 八 右 武 衛 殿 の 朝 鮮 遣 使 > 749~750 ; 閔 徳 基, < 室 町 幕 府 의 対 明 朝 貢 仲 裁 요청과 朝 鮮 의 대응> 日 本 歴 史 研 究 창간호, 55. 다만 田 中 健 夫, 전게 前 近 代 の 国 際 交 流 と 外 交 文 書 < 第 二 足 利 将 軍 と 日 本 国 王 号 > 80에서는 이 < 日 本 国 王 >을 최후의 室 町 将 軍 足 利 義 昭 (재직 1568~73년)가 아니라 対 馬 에서 창작한 가공의 국왕으로 본다.
13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61 입국(= 明 정복) 을 선언했던 豊 臣 秀 吉 44)은 명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에 포섭되고, 그리고 황제를 요배하는 의례를 올렸던 것일까? 그 전제로서 秀 吉 은 당시 의 명 황제인 神 宗 萬 曆 帝 (재위 1572~1620년)의 책봉을 수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찍 이 豊 臣 정권에 의한 외교 구상의 성격을 검토했던 藤 木 久 志 씨는 豊 臣 정권의 대명외 교의 기축은 어쨌든 勘 合 =교역 재개책에 있다 고 보고, 豊 臣 의 天 下 一 統 을 군사정복으 로 간주하는 통설을 근본적으로 의심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45) 豊 臣 政 権 은 1589년 정월 시점에서 島 津 씨를 매개로 明 과의 勘 合 부활을 구상했고, 또한 1593년 5월에 명 과의 강화교섭 과정에서 勘 合 의 부활 요구가 나타나기 때문이며, 게다가 秀 吉 의 勘 合 에 대한 이해에도 문제가 있다고 한다. 46) 이미 中 村 榮 孝 北 島 万 次 두 분이 지적했던 것 처럼, 본래의 勘 合 이 조공 책봉관계를 전제로 함에도 불구하고 豊 臣 정권과 명 사이에 는 인식의 차이가 있었다. 47) 특히 幕 藩 體 制 성립기에 있어서 琉 球 支 配 의 구도를 논한 紙 屋 敦 之 씨는 豊 臣 政 権 의 1593년( 文 禄 2) 5월의 日 明 講 和 交 渉 에서 勘 合, 그리고 江 戸 幕 府 의 1610년( 慶 長 15)의 対 明 講 和 交 渉 에서 かんごう(감합) 은 모두 조공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 公 貿 易 을 바라던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고 日 明 간의 인식의 차이를 명쾌하게 지적했다. 48) 勘 合 에 대한 오해는 豊 臣 政 権 뿐만 44) 岩 沢 愿 彦, < 秀 吉 の 唐 入 りに 関 する 文 書 > 日 本 歴 史 第 163 号. 뒷날 三 鬼 清 一 郎 編, 豊 臣 政 権 の 研 究 ( 戦 国 大 名 論 集 18) ( 吉 川 弘 文 館 ) 再 録 ) ; 中 村 栄 孝, 日 鮮 関 係 史 の 研 究 ( 中 ) ( 吉 川 弘 文 館 ) < 三 対 外 戦 争 における 豊 臣 秀 吉 の 目 的 > 241~242 45) 藤 木 久 志, 豊 臣 平 和 令 と 戦 國 社 会 ( 東 京 大 學 出 版 会 ) < 第 四 章 海 の 平 和 = 海 賊 停 止 令 > 243. 이른바 勘 合 貿 易 振 興 説 과 対 外 領 土 拡 張 説 은 진작부터 임진왜란의 동기를 둘러싼 논점이 되었다. 예를 들면, 三 鬼 清 一 郎, < 関 白 外 交 體 制 の 特 質 をめぐって> 田 中 健 夫 編, 日 本 前 近 代 の 国 家 と 対 外 関 係 ( 吉 川 弘 文 館 ) 86 ; 同, < 朝 鮮 役 研 究 の 一 齣 - 中 村 栄 孝 氏 の 業 績 をめぐって> 同 編, 織 豊 政 権 期 の 政 治 構 造 ( 吉 川 弘 文 館 ) 357~360에 그러한 지적이 있다. 46) 藤 木 久 志, 전게서 < 第 四 章 海 の 平 和 = 海 賊 停 止 令 > 229~230, 239~244. 그리고 村 井 章 介, < 東 アジア と 近 世 > 歴 史 學 研 究 会 日 本 史 研 究 会 編, 日 本 史 講 座 ( 第 5 巻 近 世 の 形 成 ) ( 東 京 大 學 出 版 会 ) 51~52 47)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文 禄 慶 長 の 役 > 177~178 ; 北 島 万 次, 豊 臣 政 権 の 對 外 認 識 と 朝 鮮 侵 略 ( 校 倉 書 房 ) < 第 三 章 第 二 節 日 明 講 和 の 和 議 折 衝 > 188~190 48) 紙 屋 敦 之, 幕 藩 制 国 家 の 琉 球 支 配 ( 校 倉 書 房 ) < 第 一 部 第 一 章 琉 球 支 配 と 幕 藩 体 制 > 22. 島 津 씨에 의한 琉 球 侵 攻 직후인 1610년에 徳 川 政 権 은 日 明 貿 易 부활의 중개역을 琉 球 에 기대 했지만 실패했다 ( 同, 25~28). 또한 同 < 対 明 政 策 と 琉 球 支 配 - 異 国 から 異 国 へ> 加 藤 榮 一 他 編, 幕 藩 制 国 家 と 異 域 異 国 ( 校 倉 書 房 ) 265~268 참조.
14 62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이 아니었던 것이다. 中 村 質 씨도 豊 臣 政 権 의 勘 合 을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관리 의 통교체제 이며, 현실에서는 朱 印 船 제도처럼 국가관리의 교역형태 로 생각하고, 徳 川 정권기에 정비되는 朱 印 船 무역의 원류를 豊 臣 정권기에서 찾았다. 49) 원래 감합무 역 이라는 용어 자체가 조공무역이라는 본질적인 성격을 애매하게 만들고 있다. 극히 최 근에는 명 정부 내부의 대일 강화교섭을 둘러싼 논쟁을 정리한 中 島 楽 章 씨가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일본만이 조공무역을 허가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병에 이르렀 다는 화의추진파였던 小 西 行 長 柳 川 調 信 宗 義 智 景 轍 玄 蘇 일행의 말에 주목하였다. 50) 1592년 5월의 漢 城 함락 후, 秀 吉 은 後 陽 成 天 皇 을 北 京 으로 옮기고 秀 吉 자신은 日 明 貿 易 의 要 港 이었던 寧 波 로 居 所 를 정하여 동아시아 통교관계를 장악한다는 구체적인( 또는 공상적인) 구상을 밝히고 있으며, 51) 임진왜란의 원인론 52) 을 살피는데 있어서 흥미 깊은 지적이다. 과연 豊 臣 秀 吉 은 책봉 절차와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을까? 책봉체제로 들어선 경우 명과 어떠한 의례적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는지 아마도 秀 吉 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 으로 생각된다. 1년 3공의 조공 빈도로 명과 조공 회사라는 무역 시스템에 편입된 조선 과, 1547년의 제19차 勘 合 船 을 마지막으로 10년 1공의 공기마저 포기했던 일본에서는 49) 中 村 質, < 東 アジアと 鎖 国 日 本 - 唐 船 貿 易 を 中 心 に> 加 藤 榮 一 他 編, 전게서 幕 藩 制 国 家 と 異 域 異 国 수록, 341~342 50) 中 島 楽 章, < 封 倭 と통공-1594 年 の 寧 波 開 貢 問 題 をめぐって> 東 洋 史 研 究 제66권 제2호, 132. 平 行 長 通 書 于 金 應 瑞, 欲 見 更 事 之 人, 與 之 議 事, 應 瑞 使 李 弘 發 入 往, 則 平 調 信 平 義 智 仙 蘇 (= 景 轍 玄 蘇 ) 竹 溪 (= 竹 溪 宗 逸 ) 等, 辟 左 右 謂 曰, 南 蠻 琉 球 皆 是 外 夷 而 奉 貢, 稱 臣 於 大 明, 日 本 獨 爲 棄 國, 未 參 其 列, 前 以 此 意 請 朝 鮮, 欲 達 于 大 明 而 朝 鮮 牢 不 肯 許, 不 得 已 擧 兵 出 來,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57, 27년 11월 1일 을해조). 51)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76~77 ; 同, 전게서 < 三 対 外 戦 争 における 豊 臣 秀 吉 の 目 的 > 259~260, 283~284 ; 北 島 万 次, 전게서 < 第 二 章 豊 臣 政 権 の 対 外 認 識 と 東 アジア> 95 ; 三 鬼 清 一 郎, < 豊 臣 秀 吉 の 対 外 政 策 > 韓 国 史 論 22( 壬 辰 倭 乱 의 再 照 明 ) ( 国 史 編 纂 委 員 会, 서울) 64~67 52) 壬 辰 倭 乱 연구의 학설사는 北 島 万 次, 전게서 < 第 一 章 豊 臣 政 権 の 朝 鮮 侵 略 に 関 する 学 説 史 的 検 討 > 가 상세하다. 또한 임진왜란의 원인 목적 동기에 관한 연구사는 六 反 田 豊 他, 전게 < 文 禄 慶 長 の 役 ( 壬 辰 倭 乱 )> ( 日 韓 歴 史 共 同 研 究 委 員 会 編, 前 掲 報 告 書, 수록) 28~31 참조. 또한 朴 晢 晄, 전게 < 壬 辰 倭 乱 ( 文 禄 慶 長 の 役 )연구의 현황과 과제> 399에 따르면, 한국 측의 연구자는 원인에 대하 여 체계적으로 심도 있는 분석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실상 이라고 한다. 최근 朴 秀 哲, <15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와 도요토미 정권- 임진왜란 의 재검토> 歴 史 学 会 編,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 ( 一 潮 閣, 서울) 207~223에서는 壬 辰 倭 乱 의 원인론 외에 이른바 豊 臣 平 和 令 의 문제점, 항복하면 살려주고, 반항하면 토벌한다 는 秀 吉 의 침공논리를 재검토하고, 壬 辰 倭 乱 대신에 壬 辰 戦 争 이라는 호칭을 제시하였다. 모두 참조하기 바란다.
15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63 정보수집이라는 측면에서도 큰 격차가 있었을 것이다. 군사력을 배경으로 천하통일을 완수한 秀 吉 에게 있어서 萬 曆 帝 의 신하로서 의례적 관계를 체결하고, 이를 토대로 명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무역 시스템 속으로 포섭된다는 발상은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 이다. 동시에 그것은 임진왜란이 발생한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萬 曆 帝 의 신하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례적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이하에서는 秀 吉 과 거의 동시대에 한반도를 다스리고 있던 선조(재위 1567~1608) 시대로 시기를 좁히고, 望 闕 禮 라는 대명 외교의례의 場 을 통하여 16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한중 관계의 실상에 다가가려 한다. 물론 임진왜란이라는 전시 하에 있던 王 都 漢 城 이 주된 고 찰의 무대가 된다. 그런 다음에 임진왜란으로 발생한 秀 吉 의 일본국왕 책봉에 관하여 약 간의 고찰을 추가하려 한다. Ⅱ.조선 宣 祖 代 의 의례와 외교 1. 宣 祖 의 책봉의례 먼저 선조의 책봉의례의 場 을 보아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1567년 7월 3일, 宣 祖 는 景 福 宮 의 正 殿 인 勤 政 殿 에서 즉위하였다. 53) 당시 16세의 宣 祖 는 先 代 인 明 宗 (재위 1545~ 67년)의 직계가 아닌 徳 興 大 院 君 ( 中 宗 의 7남)의 3남으로 明 宗 妃 仁 順 王 后 沈 씨와 대신 들의 합의에 따라 옥좌에 오른 傍 系 의 조선국왕이다. 54) 그리고 이듬해인 선조 원년 (1568) 2월 27일, 왕도 한성에는 책봉사 姚 臣 李 慶 일행이 영접을 받고 입국하였다. 正 使 로서 조선에 파견되었던 姚 臣 은 中 官, 즉 宦 官 이다. 55) 宣 祖 의 冊 封 모습은 당일의 실록 기사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53) 宣 祖 修 正 実 録 권1, 즉위년 7월 3일 병진조. 54) 震 檀 学 会 編, 李 相 佰 著, 韓 国 史 ( 近 世 前 期 篇 ) ( 乙 酉 文 化 社 ) < 第 二 編 第 五 章 士 禍 党 争 > 567~568 ; 李 泰 鎮, 朝 鮮 儒 教 社 会 史 論 ( 知 識 産 業 社, 서울). 일본어 역은 六 反 田 豊 訳, 朝 鮮 王 朝 社 会 と 儒 教 ( 法 政 大 学 出 版 局 ) <Ⅱ. 제11장 壬 辰 倭 乱 에 대한 理 解 의 몇 가지 문제> ) 賜 故 朝 鮮 國 王 李 峘 (= 明 宗 ) 謚 恭 憲, 遣 中 官 姚 臣, 行 人 歐 布 稷 吊 祭, 封 其 侄 署 國 事 李 昖 (= 宣 祖 ) 爲 朝 鮮 國 王 ( 明 穆 宗 実 録 권14, 隆 慶 원년 11월 5일 병진조).
16 64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申 時, 冊 封 天 使 上 使 姚 臣 副 使 李 慶 到 迎 詔 門, 百 官 皆 以 雨 具 迎 詔 勅, 至 勤 政 殿, 殿 庭 亦 濕, 及 申 時, 頒 詔 勅 也, 雨 即 止, 上 捧 詔 勅, 退 至 中 門 外 而 還 入, 夕, 上 以 宴 詣 太 平 館, ( 宣 祖 実 録 권2, 원년 2월 27일 정미조) 오후 4시 무렵 책봉사가 迎 詔 門 에 도착하자 조선의 문무백관은 비가 내리는 중에도 공손히 詔 勅 을 맞이했고, 경복궁의 勤 政 殿 으로 이동했다. 책봉사가 詔 勅 을 내릴 무렵에 는 비도 그쳤으며, 선조가 詔 勅 을 받들고 中 門 에서 퇴장했으며, 저녁 무렵에는 太 平 館 에 서 책봉사를 접대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宣 祖 実 録 은 단편적이긴 하지만, 훗날 鵝 城 府 院 君 李 山 海 가 제술했던 萬 曆 36년 6월 12일 자 宣 宗 大 王 穆 陵 誌 에 따르면 이때 선조는 穆 宗 隆 慶 帝 (재위 1566~72)로부터 조선 국왕 에 책봉하는 誥 命 외에 金 印 冕 服 을 받았다. 56) 이 해에 선조가 명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무역체제에 정식으로 편입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록 기사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勤 政 殿 에서 冊 封 儀 禮 의 클라이맥스는 禮 制 上 조선 국왕이 종친 문무백관과 함께 萬 歳 를 삼창하는 장면 이다. 57) 만세삼창이라는 이른바 복속의례는 正 朝 冬 至 의 대명 요배의례에 모두 공통적 이다. 58) 이 점은 유의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豊 臣 秀 吉 에게도 이 의례행위를 요구했기 때문이다(후술). 사료 속에 보이는 迎 詔 門 ( 迎 恩 門 이라고도 한다)은 中 宗 32년(1537) 정월에 慕 華 館 앞 에 신축하고 편액도 달았다. 59) 慕 華 館 이란 한성부 敦 義 門 (서대문) 밖의 盤 松 坊 에 있던 명나라 사신을 위한 영접시설이다. 60) 향연이 베풀어진 太 平 館 은 崇 禮 門 안에 있던 명 사 신을 위한 숙박시설로서, 61) 모두 中 華 를 숭모하는 조선의 대명 외교자세를 가시화했던 56) ( 前 略 ), 翌 年 (= 宣 祖 元 年 ) 春, 皇 帝 遣 太 監 姚 臣 李 慶, 齎 詔 封 爲 朝 鮮 國 王, 欽 賜 誥 命 冕 服 彩 幣,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221, 41년 2월조, 誌 文 ). 57) ( 前 略 ) 左 通 禮 啓 請 山 呼, 殿 下 拱 手 加 額 曰 萬 歳, 啓 請 山 呼, 曰 萬 歳, 啓 請 再 山 呼, 曰 萬 萬 歳, 王 世 子 及 宗 親 文 武 百 官 同, ( 後 略 ) ( 國 朝 五 禮 儀 권3, 嘉 禮, 迎 詔 書 儀 ). 58) 桑 野 栄 治, 전게 高 麗 末 期 から 李 朝 初 期 における 對 明 外 交 儀 禮 の 基 礎 的 研 究 < 附 録 朝 鮮 初 期 望 闕 行 禮 儀 註 試 釈 > 참조. 59) 中 宗 実 録 권83, 32년 정월 2일 임오조. 柳 本 藝 漢 京 識 略 (순조 30년, 1830) 권1, 宮 室, 慕 華 館 条 에 ( 前 略 ) 館 前, 舊 有 紅 箭 門, 中 宗 丙 申 (= 中 宗 31년), 改 立 雙 柱 門, 蓋 緑 琉 璃 瓦, 扁 曰 迎 詔 門, 己 亥 (=중종 34년), 華 使 薛 廷 寵 以 為 詔 勅 殊 名, 改 扁 曰 迎 恩 門, ( 後 略 ) 이라고 되어 있다. 텍스트 로는 漢 京 識 略 ( 第 2 版 ) (서울 特 別 市 史 編 纂 委 員 会, 서울)을 이용했다. 60) 在 敦 義 門 外 西 北, 本 慕 華 樓, 世 宗 十 二 年 (=1430), 改 爲 館 ( 新 増 東 國 輿 地 勝 覧 [중종 26년, 1531] 권3, 漢 城 府, 宮 室 条, 慕 華 館 ). 在 盤 松 坊 東, 有 迎 恩 門, 爲 華 使 迎 送 之 所 ( 大 東 地 志 [ 高 宗 원년, 1864] 권1, 漢 城 府, 宮 室 条, 慕 華 館 ). 61) 在 崇 禮 門 内, 待 中 朝 使 臣, 館 後 有 樓 ( 新 増 東 國 輿 地 勝 覧 권3, 漢 城 府, 宮 室 条, 太 平 館 ). 在 崇 禮 門 内, 爲 華 使 留 館, ( 中 略 ) 仁 祖 朝, 撤 之, 構 弘 濟 院 ( 大 東 地 志 권1, 漢 城 府, 宮 室 条, 太 平 館 ).
17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65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책봉사를 맞이한 조선에서는 그 후 2월 28일에 선조가 주재하는 翌 日 宴, 29일에 경복 궁의 경회루 관람 후 勤 政 殿 에서 열린 향연, 30일에는 정부 고관이 太 平 館 에서 책봉사를 접대하고 있다. 62) 이러한 일련의 의례는 대명외교상 정해진 규칙이다. 명 사신이 체제 중일 때의 접대의례에 대하여는 成 宗 16년 정월에 시행된 經 國 大 典 에 명 조정의 사신이 왕도 한성에 도착하면 下 馬 宴 과 翌 日 宴 을 베푼다 왕세자 종친부 의정부 육조 또한 차례로 잔치를 베푼다. 사신이 帝 都 북경으로 돌아갈 때는 餞 宴 을 베푼다 고 되어 있으며, 63) 명 사신이 한성에 도착한 뒤에는 원칙적으로 下 馬 宴 翌 日 宴 餞 宴 순서로 조선 국왕이 주재하는 연회가 베풀어졌다. 64) 이러한 외교 규칙으로 보자면 책봉사가 귀 국할 때는 餞 宴 이 열려야 하는 셈이지만, 宣 祖 実 録 에는 책봉사의 귀국에 관한 기록 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宣 祖 實 錄 을 편찬할 때 최초의 11년분을 보완하는 자 료로 활용된 柳 希 春 의 眉 巌 日 記 草 를 대조해 보면 책봉사는 3월 1일에 한강유람을 즐기고 있다. 65) 당시 한성을 방문했던 명나라 사신에게 있어서 한강 유람은 이를테면 정 평이 나있는 코스였다. 66) 그 후 3일에 太 平 館 에서 餞 別 을 위한 上 馬 宴 이 열렸고, 이튿날 3월 4일에 선조는 백관과 함께 慕 華 館 迎 詔 門 에서 귀국길에 오른 책봉사를 전송했다. 67) 이번의 선조에 대한 책봉을 감사하기 위해 右 議 政 丁 應 斗 와 吏 曹 判 書 姜 暹 이 謝 恩 使 로 명에 파견된 것은 3월 하순의 일이다. 68) 62) 行 翌 日 宴, 上 行 酒 於 天 使, 五 爵 而 畢 後 還 宮, 上 於 慶 會 樓, 請 宴 兩 天 使, 慶 會 樓 觀 光 後, 勤 政 殿 赴 宴, < 宰 樞 宴 于 大 平 館 > (차례로 宣 祖 実 録 권2, 원년 2월 28일 29일 30일조). 63) 朝 廷 使 臣, ( 中 略 ) 致 京, 設 下 馬 宴 翌 日 宴 [ 王 世 子 宗 親 府 議 政 府 六 曹 亦 以 次 設 宴 ], 及 還, 設 餞 宴 凡 接 待, 考 儀 軌 行 之, 倭 野 人 同 ( 經 國 大 典 권3, 禮 典, 待 使 客 条 ). 國 朝 五 禮 儀 권5, 賓 禮, 宴 朝 廷 使 臣 儀 条. 64) 후일 通 文 館 志 권4, 事 大 下, 入 京 宴 享 儀 条 에 의하면, 명 사신 입경 후에 5회( 下 馬 宴 翌 日 宴 仁 政 殿 請 宴 回 禮 宴 別 宴 ), 귀국할 때 2회( 上 馬 宴 餞 宴 ), 합계 7회의 향연이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베풀어졌다. 또한 李 鉉 淙, < 明 使 接 待 考 > 郷 土 서울 제12호, 141~ ) 天 使 二 員 遊 觀 漢 江 ( 眉 巌 日 記 草 제1책, 무진 3월 1일). 텍스트는 朝 鮮 史 編 修 会 編, 眉 巌 日 記 草 ( 朝 鮮 史 料 叢 刊 第 8) ( 朝 鮮 総 督 府, 京 城, 저본은 文 化 柳 氏 家 소장본)을 이용했다. 66) 李 相 培, 2004 <조선전기 외국사신 접대와 明 使 의 遊 観 연구> 國 史 館 論 叢 제104집 ; 曺 圭 益 他 편, 연행록연구총서7(정치 경제 외교) ( 學 古 房, 서울)에 다시 수록, 242~243에 의하 면, 명나라 사신의 한양 遊 観 地 는 한강, 사찰, 도성 안의 개인집, 성균관, 모화루, 남산의 순서이다. 67) 以 太 平 館 上 馬 宴, 朝, 詣 漢 城 府 内 依 幕, ( 中 略 ) 巳 時, 百 官 隨 駕 至 太 平 館 近 處, 館 員 除 經 筵 番 外 入 依 幕, 盧 君 (= 盧 守 慎 ) 及 余 之 出 入, ( 後 略 ), 罷 漏 後, 以 天 使 回 程, 百 官 先 詣 慕 華 館, ( 中 略 ) 巳 時, 上 與 天 使 酬 酢, 四 爵 禮 畢, 両 天 使 與 上 相 別, 歩 至 迎 詔 門 外, 與 百 官 相 揖 而 別, ( 後 略 ) (차례로 眉 巌 日 記 草 제1책, 무진 3월 3일 4일). 68) 是 日, 謝 恩 使 乃 謝 册 封, 故 丁 應 斗 代 為 右 相 之 任, 姜 暹 亦 假 吏 判 之 銜 ( 眉 巌 日 記 草 제1책, 무진
18 6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이상으로 책봉사의 한성 체류는 1주일 정도에 불과했지만, 선조의 책봉의례는 상술한 접대의례를 포함하여 謝 恩 使 를 파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2. 임진왜란 이전의 望 闕 禮 1) 명 사신의 來 朝 와 冬 至 의 望 闕 禮 선조 대에 望 闕 禮 의 시행을 전하는 최초의 기록은 선조 5년(1572) 11월 동지에 보인 다. 이 날의 기록도 柳 希 春 의 眉 巌 日 記 草 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69) 冬 至, 罷 漏 天 明, 上 率 群 臣, 行 望 闕 禮, 仍 班, 又 行 兩 大 妃 殿 賀 禮, 禮 畢, 群 臣 退, 辰 正, 上 出 坐 殿 上, 群 臣 入 行 賀 禮, 禮 畢,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7일 기축조) 동짓날 한성부 안의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하는 큰 종이 울린다( 罷 漏. 5 更 3 点 ). 새벽녘 ( 天 明 )에 선조는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望 闕 禮 를 거행하였다. 조선 국왕이 문무백관과 함께 대명황제에게 동지를 축하하는 대명 요배의례이다. 이어서 양 대비전, 즉 仁 聖 王 后 ( 仁 宗 妃 )와 仁 順 王 后 ( 明 宗 妃 )에 대하여 동지를 축하한다. 이런 의례를 끝내면 신하들은 일단 대궐 정전에서 물러난다. 당일 오전 8시 무렵( 辰 正 )이 되면 선조는 다시 正 殿 으로 행차하고, 신하들이 선조에게 朝 賀 禮 를 올린다. 전자의 望 闕 禮 는 명 황제를 축하 대상으 로 하는 대외적인 궁중의례이며, 후자의 朝 賀 禮 는 조선 국왕을 축하 대상으로 하는 국내 용 궁중의례이다. 70) 望 闕 禮 와 朝 賀 禮 가 끝나면 통상은 대궐 正 殿 에서 会 禮 宴 이 열리지 3월 21일). 朝 鮮 官 人 이 外 交 使 節 로서 北 京 에 파견될 경우, 일반적으로 假 銜 으로서 임시로 1 品 階 를 올리는 일이 관례였다. 金 松 姫 朝 鮮 初 期 堂 上 官 兼 職 制 研 究 - 東 班 京 官 職 과 臨 時 職 을 중심 으로 ( 漢 陽 大 学 校 出 版 部, 서울, 1998년 12월) < 第 4 章 1 対 明 使 臣 과 明 使 迎 接 官 > ) 眉 巌 日 記 草 第 7 冊, 壬 申 11월 7일조 70) 國 朝 五 禮 儀 권3, 嘉 禮, 正 至 王 世 子 百 官 朝 賀 儀 [ 誕 日 賀 附 ] 条 ; 国 朝 五 禮 序 禮 巻 2, 嘉 禮, 排 班 圖, 勤 政 殿 正 至 誕 日 朝 賀 之 圖. 正 朝 冬 至 의 朝 賀 禮 事 例 에 대해서는 桑 野 栄 治, 전게 高 麗 末 期 から 李 朝 初 期 における 対 明 外 交 儀 禮 の 基 礎 的 研 究 에서도 다루었지만, 한국에서는 韓 亨 周, < 朝 鮮 初 期 朝 賀 儀 禮 에 대한 考 察 - 正 至 朝 賀 를 중심으로> 明 知 史 論 第 13 輯 (서울) 외에 姜 制 勲, <조선 초기 朝 会 의식> 朝 鮮 時 代 史 学 報 28 (서울) ; 同, < 朝 鮮 世 祖 代 의 朝 会 와 王 権 > 史 叢 61 (서울) ; 同, <조선 성종대 朝 会 儀 式 과 朝 会 운영> 韓 国 史 学 報 제27호 (서울) ; 同, <조선 초기 朝 儀 의 의례구조와 상징> 韓 国 史 研 究 137 (서울) 등 조선 초기로 시기를 좁혀서 朝 会 儀 禮 전반의 구조분석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正 朝
19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67 만, 71) 선조 6년 이 해의 동짓날 실록 기사에는 会 禮 宴 에 대한 기록이 없다. 正 朝 冬 至 의 会 禮 宴 은 중종대(1506~44년)에 가뭄과 이에 따른 흉년의 여파로 거행되지 않는 추세였 다. 72) 사료의 제약 때문에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아마도 이 해의 동짓날에는 会 禮 宴 이 열리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이때 조선은 한성에서 명나라 詔 諭 使 節 을 맞아들였다는 것 이다. 명 사신 翰 林 院 編 修 (정7품) 韓 世 能 吏 科 左 給 事 中 (종7품) 陳 三 謨 일행은 萬 曆 帝 의 등극을 通 達 하는 조칙을 가지고 11월 1일 한양에 도착했다. 그날 정오에 慕 華 館 으로 행 차한 선조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五 拜 三 叩 頭 의 배례로써 명 사신을 환영했다. 73) 저녁 무렵이 되자 선조는 역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太 平 館 으로 가서 명 사신을 위문해야 하는 下 馬 宴 을 개최하고 있다. 74) 이미 책봉사 영접의례의 場 에서 본 것처럼 이러한 일 련의 의례는 대명외교상 정해진 규칙이다. 그리고 이러한 외교 규칙에 준거하여 다음 날 은 이른 아침부터 太 平 館 에서 翌 日 宴 이 열렸다. 그때 선조는 명 사신이 동짓날인 7일에 望 闕 禮 를 거행하고 나서 귀국한다는 사실을 안다. 75) 이 때문에 조선 정부에서는 선조가 동짓날 望 闕 禮 를 명 사신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거행해야 하는지 어떤지 문제가 되었으 나, 柳 希 春 은 명 사신과 동석할 필요는 없다며 이를 부정했다. 76) 아울러서 선조는 명 사신에게 체재 일정을 연장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다음의 실록 기사가 그것이다. 天 使 詣 景 福 宮, 周 覽 慶 會 樓, 赴 勤 政 殿 之 宴, 上 以 宗 系 改 正 惡 名 申 雪 奏 請 使 將 遣 事, 令 通 事 告 于 兩 使, 答 曰, 天 子 聖 明, 今 若 奏 請, 可 得 請 矣, 上 又 請 曰, 初 七 日 發 行 云, 冬 至 節 日 行 望 闕 禮 而 後 發 行 日, 晩 矣, 一 日 之 間, 請 留, 天 使 曰, 懇 至, 當 依 許 留, ( 後 略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4일 병술조) 冬 至 의 朝 賀 禮 가 朝 会 儀 禮 의 中 軸 을 이루는 大 朝 会 이며, 그 전제로서 望 闕 禮 가 실시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71) 国 朝 五 禮 儀 巻 3, 嘉 禮, 正 至 会 儀 条 ; 国 朝 五 禮 序 禮 巻 2, 嘉 禮, 排 班 圖, 勤 政 殿 正 至 会 百 官 之 圖 72) 桑 野 栄 治, 전게 < 朝 鮮 中 宗 代 における 對 明 遥 拝 儀 禮 > ) 上 以 卯 時 爲 迎 詔, 而 至 午 時, 天 使 韓 世 能 陳 三 謨 奉 詔 勑, 而 至 慕 華 館, 上 率 百 官, 行 迎 拜 禮, 即 五 拜 三 叩 頭 也, 百 官 從 下 先 行,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1일 계미조) 74)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1일 계미조 75) 早 朝, 上 乃 出, 率 百 官, 詣 太 平 館, 設 翌 日 宴, 行 九 爵, 上 再 行 酒 而 止, 日 暮 雪 止, 還 宮, ( 中 略 ) 天 使 以 初 七 日 冬 至, 行 望 闕 禮 後, 發 行 云, 天 使 明 日 將 謁 聖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2일 갑신조). 76) 天 使 到 成 均 館, ( 中 略 ) 又 衆 議 冬 至 望 闕 禮, 或 疑 上 與 天 使 同 行 一 處, 希 春 以 爲, 不 當 同 處 爲 之 云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3일 을유조).
20 6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이날 명 사신은 경복궁 경회루를 관람하고 근정전 연회에 초대받았다. 그 자리에서 선조는 먼저 宗 系 를 개정하여 惡 名 을 申 雪 하는 奏 請 使, 즉 宗 系 辨 誣 奏 請 使 파견을 타 진했는데, 명 사신은 지금의 萬 曆 帝 는 총명하여, 만일 명에 주청사를 파견하면 허가하 실 것이다 라고 회답했다. 중종 13년에 재연된 한중 간의 일대 외교분쟁인 宗 系 辨 誣 문 제 77) 는 선조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해결을 보지 못했으므로, 조선 정부가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것은 외교 교섭을 직접 진행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선조는 한성 체제 예정기간을 연장하고 동짓날 望 闕 禮 를 마친 다음날 귀국하는 게 어떻 겠냐고 제안했는데, 명 사신도 이를 받아들였다. 78) 선조가 명 사신을 붙잡았던 것은 그 저 외교적인 발언이 아니라 宗 系 辨 誣 을 둘러싼 외교 교섭에서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명사 韓 世 能 은 동지 다음날 8일에 열린 太 平 館 에서의 上 馬 宴, 9일의 慕 華 館 餞 宴 이라는 공식행사를 마치고 선조와 종실, 그리고 문무백관이 전송하는 가운데 귀국길에 올랐다. 79) 宗 系 辨 誣 문제는 후일 선조 22년에 해결을 보지만, 그때 宣 祖 가 中 朝 의 明 은 우리 조선을 内 服 (= 帝 居 의 域 )과 마찬가지로 본다 고 말할 만큼 80) 조선 전기 의 한중관계는 긴밀하였다. 그리고 조선과 明 의 이처럼 긴밀한 관계 때문에 明 은 壬 辰 倭 乱 에 참전하게 되는 것이다. 81) 77) 大 明 会 典 朝 貢 条 에 李 仁 任 과 太 祖 李 成 桂 父 子 가 4명의 高 麗 国 王 을 살해하고 政 権 을 奪 取 했 다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 中 宗 13년에 발각되었다. 이후 조선정부는 그를 수정할 것을 요구하 는 使 節 을 여러 차례 明 에 파견했다. 末 松 保 和, 전게서 < 麗 末 鮮 初 に 於 ける 對 明 関 係 >의 < 第 十 二 章 宗 系 弁 誣 の 発 端 > ; 桑 野 栄 治, < 朝 鮮 版 正 徳 大 明 会 典 の 成 立 とその 現 存 - 朝 鮮 前 期 對 明 外 交 交 渉 との 関 連 から> 朝 鮮 文 化 研 究 ( 東 京 大 學 文 學 部 朝 鮮 文 化 研 究 室 紀 要 ) 제5호 ; 朴 成 柱, <조선전기 朝 明 관계에서의 宗 系 문제> 慶 州 史 学 第 22 輯 ( 慶 州 ) ; 桑 野 栄 治, < 朝 鮮 中 宗 代 における 宗 系 弁 誣 問 題 の 再 燃 > 久 留 米 大 學 文 學 部 紀 要 ( 國 際 文 化 學 科 編 ) 제25호 ; 同, < 朝 鮮 中 宗 20 年 代 の 対 明 外 交 交 渉 - 嘉 靖 会 典 編 纂 の 情 報 収 集 をめぐって> 東 洋 史 研 究 第 67 巻 제3호 ; 同, < 朝 鮮 中 宗 30 年 代 における 対 明 外 交 交 渉 - 宗 系 弁 誣 問 題 をめぐって> 久 留 米 大 学 文 学 部 紀 要 제26호 78) 다만, 明 使 가 동지의 望 闕 禮 를 실시했던 장소는 불명이다. 동지 전날의 실록 기사에는 政 院 啓 曰, 明 日, 天 使 望 闕 禮 處, 時 未 定, 何 以 爲 之, 取 稟, 傳 曰, 大 臣 禮 官 命 招 議 啓 (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6일 무자조)라고 하는데, 대신과 禮 官 의 협의 결과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 79) 宣 祖 実 録 권6, 5년 11월 8일 9일조. 80) 傳 曰, 我 國 宗 系 昭 雪, 大 明 會 典 一 冊, 則 徑 請 頒 給, 是 我 國 莫 大 之 慶, 而 巻 帙 未 成, 終 有 所 未 給, 中 朝 視 我 國 無 異 内 服, 而 獨 於 會 典 以 其 載 中 國 諸 機, 不 爲 頒 給, 是 外 夷 之 也, 尤 爲 未 穩,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23, 22년 2월 4일 신사조). 문제가 된 萬 暦 大 明 会 典 全 帙 은 이 해 11월에 萬 暦 帝 가 宣 祖 에게 頒 賜 했다( 同 書 권23, 22년 11월 22일 병인조). 81) 예를 들면 케네스 스워프(Kenneth M. Swope)씨는 明 과 조선의 관계를 이( 明 )를 보호하는 입술( 朝 鮮 )에 비유하고, 冊 封 朝 貢 体 制 의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同, <순망치한( 脣 亡 歯 寒 )-명나라가 참 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鄭 杜 熙 他 編, 前 掲 書 임진왜란, 수록) 342
21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69 그 후 선조대의 望 闕 禮 실시 상황을 정리한 것이 표 2 이다. 일련번호 1부터 16까 지는 임진왜란 이전, 17부터 34까지는 임진왜란기, 35 이후는 난후의 상황을 의미한다. 이하에서는 선조대에 특징적인 正 朝 冬 至 望 闕 禮 의 실시 상황을 임진왜란의 국면에 주 목하면서 추적하기로 한다. 2) 國 忌 에 수반하는 朝 賀 禮 의 順 延 조치 임진왜란 이전의 경우 宣 祖 実 録 에 보이는 한 望 闕 禮 실시 상황은 순조롭지 않다. 기상광학적 日 變 이라든가 日 食 등의 天 譴 思 想, 82) 극한 강우 등의 기후조건, 83) 明 宗 妃 인 仁 順 王 后 의 사망에 수반하여 正 朝 동지의 궁중의례는 차츰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 2> ). 더군다나 선조 10년 11월에는 仁 宗 妃 仁 聖 王 后 가 경복궁에서 사망했으며, 84) 그 후 3년 동안은 國 喪 기간인 탓에 명절의 궁중의례가 정지되었다고 판 단된다. 물론 임진왜란 이전의 왕조국가 공식기록은 대부분이 전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그 결과 광해군(재위 1608~23년) 때 편찬된 宣 祖 実 録 에는 모두 61개월분(약 5년간) 에 이르는 기록이 빠져 있다. 85) 때문에 望 闕 禮 를 비롯하여 궁중의례에 관한 기록이 빠졌 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선조 14년 正 朝 望 闕 禮 가 약식인 権 停 禮 ( 權 停 例 라고도 한다)로 거 행되었다는 것이다. 다음날 정월 2일이 明 宗 妃 인 仁 順 王 后 의 기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날의 기록을 보자. 82) 政 院, 以 日 變 (= 前 日, 흰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한다 는 이상 현상을 관측) 請 停 元 朝 望 闕 禮 及 初 九 日 文 昭 殿 大 祭, 上 從 之 ( 宣 祖 実 録 권7, 6년 12월 29일 을해조), 日 有 食 之 ( 同 書 권23, 22년 정월 초하루 기유조). 日 變 은 중대한 凶 象 이며, 日 食 또한 위정자가 덕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廃 朝 ( 輟 朝 )되었다. 渡 邊 敏 夫, 日 本 朝 鮮 中 國 日 食 月 食 寶 典 ( 雄 山 閣 出 版 ) 280 ; 田 村 専 之 助, 李 朝 鮮 気 象 学 史 研 究 ( 東 洋 気 象 学 史 論 叢 Ⅰ) ( 三 島 科 学 史 研 究 所 ) 114~115 83) 左 右 相 詣 闕 啓 曰, 日 候 極 寒, 自 上 冒 曉 擧 動, 有 妨 保 攝 未 安, 明 日 望 闕 禮 請 命 停, 本 朝 賀 禮 幷 爲 權 停, 上 從 之 ( 宣 祖 実 録 권8, 7년 11월 기해 29일 조), 以 庭 濕, 停 望 闕 禮 ( 宣 祖 実 録 권18, 17년 정월 1일 기묘조). 84) 宣 祖 実 録 권11, 10년 11월 29일 신사조. 璿 源 系 譜 紀 略 ( 震 檀 学 会 編, 韓 国 史 ( 年 表 ) ( 乙 酉 文 化 社, 서울) 수록) 璿 源 世 系, 仁 宗 妃. 85) 末 松 保 和, < 宣 祖 実 録 解 説 > 李 朝 実 録 제30책 ( 學 習 院 東 洋 文 化 研 究 所 ) 1 ; 申 奭 鎬 < 凡 例 > 朝 鮮 王 朝 実 録 제21책 ( 國 史 編 纂 委 員 会, 과천) 3~4
22 7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望 闕 禮 權 停, 以 明 日 乃 仁 順 王 后 忌 辰, 今 日 行 舞 蹈 盛 禮 未 安, 或 以 爲 退 行 爲 當, 或 以 爲 爲 上 國 之 禮, 不 可 退 行, 命 大 臣 及 正 二 品 以 上 會 議 于 闕 庭, 定 爲 是 日 行 之, 本 國 賀 禮 則 退 行 於 初 三 日, 永 爲 恒 式, ( 宣 祖 実 録 권15, 14년 정월 1일 병인조) 仁 順 王 后 는 6년 전인 선조 8년 정월 2일에 창경궁 通 明 殿 에서 사망했다. 86) 명절인 正 朝 라고는 해도 王 母 의 忌 日 에 앞서 가무음곡을 즐기며 성대한 축하행사를 거행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정부 안에서는 正 朝 望 闕 禮 를 연기해야 한다는 의견, 혹은 上 國 (=종주 국 명)의 예 를 경솔하게 연기하면 안 된다는 의견으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선조는 대신 및 정2품 이상의 고급관료에게 궁궐 뜰에서 의논하도록 하명했다. 그 결과 上 國 의 禮 인 望 闕 禮 는 지금까지 해 온 대로 正 朝 에서 거행하고, 본국 조선의 朝 賀 禮 는 정월 3일로 연기하며, 이후 오래도록 恒 式 ( 恒 例 )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실제로 이 해 정월 3일의 실 록 기사에는 以 權 停 禮 行 正 朝 賀, ( 宣 祖 実 録 권15, 14년 정월 3일 무진조) 라고 되어 있으며, 正 朝 를 축하하는 朝 賀 禮 는 仁 順 王 后 의 기일 다음날에 権 停 禮 로 시행 하고 있다. 그 후, 예를 들어서 <표 2> 11 14에서 표시한 대로 선조 17년 正 朝 와 21년 正 朝 의 朝 賀 禮 는 정월 3일에 거행했으며, 87) 선조 14년 正 朝 에서 결정했던 朝 賀 禮 의 順 延 이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까지는 거의 정례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번잡한 의례를 반복했던 것은 조선국왕 뿐만은 아니다. 일찍이 黄 仁 宇 씨는 朝 廷 의 정치는 복잡하기 짝이 없지만, 그 요점은 의례와 人 事 의 둘이다 라고 갈파했는데, 尊 卑 의 등급을 體 現 하고,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의례의 정치적 중요성을 환기하였 다. 宣 祖 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萬 暦 帝 는 각종 의례를 숙지한 군주로 평가받지만, 나중 에 매월 여러 차례 실시되는 이른 아침의 조회도 廃 朝 로서 쉬는 날이 많아졌으며, 제사 의례의 측면에서도 직접 임석하는 일 없이 관료를 대리로 파견하는 등 의례의 간략화가 진행되는 것도 지적되고 있다. 88) 86) 宣 祖 実 録 권9, 8년 정월 2일 임인조. 璿 源 系 譜 紀 略 璿 源 世 系, 明 宗 妃. 87) 以 權 停 禮 行 賀 禮, 以 初 二 日 仁 順 王 后 國 忌, 故 退 行 正 朝 賀 禮 也 ( 宣 祖 実 録 권18, 17년 정월 3일 신사조), < 行 正 朝 賀 禮 > (동서 권22, 21년 정월 3일 정해조). 88) 黄 仁 宇 ( 稲 畑 耕 一 郎 他 訳 ), 萬 暦 十 五 年 - 一 五 八 七 < 文 明 >の 悲 劇 ( 東 方 書 店 ) <Ⅰ 万 暦 帝 > 6~16
23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임진왜란기의 望 闕 禮 1) 한성 탈환의 皇 恩 에 감사하는 望 闕 禮 宣 祖 25년(1592)4월 13일( 日 本 暦 12일), 小 西 行 長 宗 義 智 등의 軍 勢 가 釜 山 에 상륙하 면서 壬 辰 倭 乱 이 발발했다. 조선왕조의 공식기록에는 일본군 침공의 기술로서 倭 寇 至, 先 是, 日 本 賊 酋 平 秀 吉 爲 關 白 ( 割 註 略 ) 并 呑 諸 國, 殘 暴 日 甚, 常 以 天 朝 不 許 朝 貢 爲 憤, 嘗 遣 僧 玄 蘇 等 乞 假 途 犯 遼, 我 國 以 大 義 拒 之 甚 峻, 賊 遂 傾 國 出 師, 以 玄 蘇 平 行 長 平 淸 正 平 義 智 等 爲 將, 大 擧 入 寇, ( 後 略 )( 宣 祖 実 録 권26, 25년 4월 13일 임인조) 라고 적었으며, 宣 祖 実 録 에는 豊 臣 秀 吉 이 関 白 이 되어 국내를 통일했음에도 불구 하고 天 朝 明 이 조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에 분개하였다 고 되어 있다. 작년 정월에 通 信 使 黄 允 吉 副 使 金 誠 一 書 状 官 許 筬 일행의 귀국에 수반하여 日 本 回 禮 使 로서 正 使 柳 川 調 信 副 使 景 轍 玄 蘇 가 来 朝 했는데, 당시의 対 馬 島 主 宗 義 智 등에 의한 전쟁 회피 대책, 즉 対 明 通 貢 을 위한 假 途 入 明 ( 假 道 入 明 이라고도 한다)교섭이 実 録 기사에도 반영되어 있다. 89) 주지하다시피 나중에 明 軍 은 秀 吉 과 함께 博 多 聖 福 寺 승려 景 轍 玄 蘇 의 首 級 에 최고액의 현상금을 걸었고, 秀 吉 을 日 本 国 王 에 책봉할 때는 景 轍 玄 蘇 에게 日 本 国 本 光 禅 師 칭호를 特 賜 하게 된다. 90) 좌우간 일본군 침공이 조선왕조에게는 空 前 絶 後 의 倭 寇 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4월 29일에 忠 清 道 忠 州 의 敗 報 에 접하자 宣 祖 는 庶 出 의 次 子 인 光 海 君 을 王 世 子 로 冊 立 하고(뒷날 宣 祖 25년 6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分 朝 ), 조 선정부에서는 宣 祖 의 去 邠 論 ( 播 遷 論 )과 諸 臣 의 漢 城 固 守 論 이 대립하는 와중에 遼 東 内 附 論 ( 逃 亡 論 ) 者 이기도 한 宣 祖 는 漢 城 탈출을 결의하고 다음날 平 壌 으로 향했다. 91) 임진왜란기에 있어서 望 闕 禮 의 실시 상황을 이전의 상황과 비교한 경우, <표 2>에 표시한대로 그 차이가 확연하다. 선조 25년 4월부터 전후 7년 동안 선조는 正 朝 동지 89) 中 村 栄 孝, < 壬 辰 倭 乱 の 発 端 と 日 本 の 假 道 入 明 交 渉 > 朝 鮮 学 報 제70집, 97~103 90) 長 正 統, < 景 轍 玄 蘇 について- 外 交 僧 の 出 自 と 法 系 > 朝 鮮 学 報 제29집, 136~137 91) 宣 祖 修 正 実 録 권26, 25년 4월 29일 그믐조. 孫 鍾 聲, < 壬 辰 倭 乱 時 分 朝 에 관한 小 考 > 渓 村 閔 丙 河 教 授 停 年 紀 念 史 学 論 叢 ( 刊 行 委 員 会, 서울) 294~296 ; 同, < 壬 辰 倭 乱 時 対 明 外 交 - 請 兵 外 交 를 중심으로> 国 史 館 論 叢 제14집 ( 果 川 ) 172~174 ; 北 島 万 次, < 壬 辰 倭 乱 期 の 朝 鮮 と 日 本 > 荒 野 泰 典 他 編, アジアのなかの 日 本 史 (Ⅱ 外 交 と 戦 争 ) (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133~134 ; 同, 豊 臣 秀 吉 の 朝 鮮 侵 略 ( 吉 川 弘 文 館 ) 42~44
24 72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그리고 聖 節 의 望 闕 禮 를 거의 매년 충실하게 시행하고 있다(<표 2> 17~34). 이 중에서 명절이 아닌 날에 望 闕 禮 를 시행한 사례가 보인다. 다음의 실록 기사를 보자. 寅 時, 上 幸 淸 溪 館, 率 百 官 耆 老 軍 民, 御 吉 服 行 望 闕 禮, 以 謝 皇 恩, 禮 畢, 反 素 服 還 宮, 以 克 復 京 城 告 于 宗 廟 社 稷 ( 宣 祖 実 録 권38, 26년 5월 2일 을묘조) 선조 26년 5월 2일 오전 4시 무렵에 선조는 清 渓 館 으로 행차하여 문무백관 기로 군 민을 거느리고 望 闕 禮 를 거행하였다(< 表 2> 19). 선조 26년 3월부터 선조는 평안도 肅 川 府 에서 남하하여 永 柔 縣 (별호는 清 渓 )을 行 宮 으로 삼았으며, 92) 의례의 무대가 된 清 渓 館 은 永 柔 縣 읍내에 있던 객사이다. 93) 望 闕 禮 를 실시한 이유는 皇 恩, 즉 대명황제의 은 혜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그 은혜란 경성 수복, 즉 왕도 한성의 탈환을 의미한다. 이해 4월 중순에 明 의 遊 擊 將 軍 沈 惟 敬 과 小 西 行 長 사이에서 日 明 화의교섭이 성립하자 일본 군은 한성에서 철수했다. 94) 일본 측의 생각으로는 명과 조선이 항복을 받아들이는 전제 조건으로 한성에서 철군했던 것이지만, 95) 조선 국왕의 입장에서는 황제가 파견한 명군 덕분에 한성이 탈환된 것이었다. 화의교섭을 의문시하는 明 정부에서는 社 稷 (국가)를 상실한 宣 祖 의 책임을 추궁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国 命 을 맡길만한 光 海 君 에게 譲 位 를 권고하는 王 位 交 替 論 까지 나온 것도 사실이다. 96) 경성 수복 에 대한 시선은 일본 조 92) 宣 祖 実 録 권36, 26년 3월 13일 무진조. 임진왜란의 개전으로 한성을 포기했던 선조가 이듬해 인 선조 26년에 평안도 의주에서 한성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족적은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190 ; 李 烱 錫, 壬 辰 戦 亂 史 - 文 禄 慶 長 の 役 ( 中 巻 ) ( 東 洋 圖 書 出 版 ) < 第 二 篇 第 八 章 第 一 節 概 況 > 166~167 참조. 93) 朝 鮮 後 期 地 方 地 圖 평안도편 상(서울대학교규장각, 2002년 12월) <25. 永 柔 縣 地 圖 > 참조. 94)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174~175 ; 石 原 道 博, 文 禄 慶 長 の 役 ( 塙 書 房 ) ~185 ; 李 烱 錫, 전게서 < 第 二 篇 第 八 章 第 一 節 概 況 > 153~154 ; 北 島 万 次, 전게 < 壬 辰 倭 乱 期 の 朝 鮮 と 日 本 > 151 ; 金 文 子, < 豊 臣 政 権 期 の 日 明 和 議 交 渉 と 朝 鮮 > お 茶 の 水 史 学 第 37 号, 35~36 95) 中 村 栄 孝, 전게서 < 三 対 外 戦 争 における 豊 臣 秀 吉 の 目 的 > 279~271 ; 中 野 等, 秀 吉 の 軍 令 と 大 陸 侵 攻 ( 吉 川 弘 文 館 ) <Ⅲ 戦 局 の 転 換 > 184~186 96) 小 野 和 子, 明 季 党 社 考 - 東 林 党 と 復 社 ( 同 朋 舎 出 版 ) < 第 二 章 第 二 節 明 日 和 平 交 渉 をめ ぐる 政 争 > 122~123 ; 韓 明 基,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 歴 史 批 評 社 ) <제1부 제1장 명군 참전과 정치적 영향> 60~61 ; 同, <임진왜란 시기 決 戦 여부를 둘러싼 朝 明 갈등> 鄭 玉 子 他, 조선시대 문화사(하)-시대정신과 인간의 대응 ( 一 志 社, 서울) 67. 明 정부 내부의 강 화문제를 둘러싼 정책결정 과정은 岡 野 昌 子, <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と 中 国 > 中 山 八 郎 教 授 頌 寿 記 念 明 清 史 論 叢 ( 燎 原 書 店 ) 148~154 외에 三 木 聰, < 万 暦 封 倭 考 ( 一 )- 万 暦 二 十 二 年 五 月 の < 封 貢 > 中 止 をめぐって> 北 海 道 大 学 文 学 研 究 科 紀 要 제109호 ; 同, < 万 暦
25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73 선 明 의 동아시아 3국에 있어서 각기 입장을 달리한다. 한성 탈환의 皇 恩 에 감사하는 望 闕 禮 를 실시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다름 아닌 宣 祖 이 며, 4월 하순에 선조는 승정원을 통하여 예조에 그 조치를 하명하였다. 97) 이 해 정월에 李 如 松 제독이 이끄는 명나라 지원군에 의하여 평양 탈환이 성공했지만, 98) 그때 謝 恩 使 파견이 늦어진 탓에 兵 部 尚 書 石 星 에게 비난을 들었던 일이 있다. 그 때문에 선조는 이 번에는 신속히 대응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禮 曹 는 우선 5월 1일에 백관을 거느리고 초하루의 哭 禮 를 거행했으며, 다음날에 望 闕 禮 를 실시하는 것이 좋겠 다고 회답하였다. 99) 확실히 조선 국왕은 즉시 望 闕 禮 를 거행하여 명에게 감사해야 하지 만, 禮 曹 는 宣 靖 陵 의 변, 즉 宣 陵 (성종과 그 繼 妃 貞 顯 王 后 의 능)과 靖 陵 ( 中 宗 의 능)이 일본군에게 침탈당한 사건 100) 에 대한 哭 禮 를 우선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조선시 대의 형법으로 도입된 大 明 律 刑 律 에 따르면, 무릇 모반이란 도모하여 社 稷 을 위 태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대역은 도모하여 宗 廟 山 陵 및 궁궐을 훼손하는 것을 말한다 고 되어 있으며, 조선 왕릉의 도굴 파괴는 쿠데타에 필적하는 大 罪 로서 陵 遲 (8토막으로 자름, 또는 車 裂 )한 뒤에 여러 사람들에게 보인다. 101) 게다가 禮 曹 는 望 闕 禮 를 거행할 때 원래의 의식에서 춤과 노래를 삭제할 것을 선조에게 요청하였다. 102) 宣 靖 陵 의 변 이라 封 倭 考 ( 二 )- 万 暦 二 十 四 年 五 月 の 九 卿 科 道 会 議 をめぐって> 同 제113호에 상세하다. 97) 上 敎 政 院 曰, 京 城 收 復, 即 時 似 當 率 群 臣, 行 望 闕 禮 謝 皇 恩, 而 該 曹 似 無 處 置 議 處, 且 平 壤 收 復, 不 即 謝 恩, 天 將 累 以 爲 言, 至 於 石 尚 書 (= 石 星 ) 亦 以 爲 非 云, 今 者 謝 恩 使 似 當 趁 發, 並 言 于 禮 曹 ( 宣 祖 実 録 권37, 26년 4월 28일 임자조). 98) 1개월 뒤인 宣 祖 26년 2월에 비변사는 李 如 松 을 위하여 顕 彰 碑 를 세우고 生 祠 에 제사를 지낼 것을 건의했고, 나중에 平 壌 에서는 李 如 松 과 石 星 을 함께 제사지내는 武 烈 祠 가 완성된다. 中 村 栄 孝, < 朝 鮮 の 慕 明 思 想 と 大 報 壇 > 天 理 大 学 学 報 제78집, 197 ; 桑 野 栄 治, < 朝 鮮 後 期 における 国 家 祭 祀 儀 禮 の 変 動 - 壬 辰 倭 乱 直 後 の 朝 鮮 と 明 > 久 留 米 大 学 文 学 部 紀 要 제23호, 35~36 99) 禮 曹 啓 曰, 望 闕 禮 所 當 即 時 擧 行, 而 自 上 方 遭 罔 極 之 變, 成 服 之 前, 行 禮 未 安, 初 一 日, 自 上 率 百 官, 行 朔 日 哭 禮, 自 初 二 日 行 之 ( 宣 祖 実 録 권37, 26년 4월 28일 임자조). 100) 李 烱 錫, 전게서 < 第 三 篇 第 十 一 章 第 二 節 交 渉 の 停 頓 > 418~419. 壬 辰 倭 乱 뒤의 日 朝 국교회 복 때 이 王 陵 盗 掘 사건의 범인 인도가 중요한 조건이 된다. 이점에 관해서는 中 村 栄 孝, 日 鮮 関 係 史 の 研 究 ( 下 ) ( 吉 川 弘 文 館 ) < 三 江 戸 時 代 の 日 鮮 関 係 > 264~266 ; 三 宅 英 利, 近 世 日 朝 関 係 史 の 研 究 ( 文 献 出 版 ) < 第 二 篇 第 一 章 幕 藩 体 制 確 立 期 の 通 信 使 > 158~161 외 에 孫 承 喆, 전게서 <제3장 임란 직후 중화적 교린체제의 부활> ; 李 啓 煌, 文 祿 慶 長 の 役 と 東 アジア ( 臨 川 書 店 ) < 第 五 章 和 好 通 好 関 係 の 成 立 > 242~247 참조. 101) 大 明 律 巻 18, 刑 律, 盗 賊, 謀 反 大 逆 条.. 물론 이 규정의 연원은 唐 律 까지 소급한다. 花 村 美 樹 < 高 麗 律 > 京 城 帝 国 大 学 法 学 会 編, 朝 鮮 社 会 法 制 史 研 究 ( 論 集 第 9 冊 ) ( 岩 波 書 店 ) 57. 朝 鮮 의 陵 遅 刑 에 관해서는 당장은 앤더스 칼슨(Anders Karlsson), < 千 金 の 子 は 市 に 死 せず 世 紀 朝 鮮 時 代 における 死 刑 と 梟 首 > 冨 谷 至 編, 東 アジアの 死 刑 ( 京 都 大 学 出 版 会 ) 109~115 참조.
26 74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는 국난을 당하여 화려한 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望 闕 禮 는 上 國 을 위한 의례이므로 춤과 노래는 당연한 것이며, 다만 사죄를 드릴 때에는 五 拜 三 叩 頭 의 예로써 대처한다고 선조는 결정을 내렸다. 춤과 노래는 원래 고대 중국에서 황제 의 은혜에 대한 더없는 환희를 나타냄과 동시에, 황제에 대한 신하로서의 복종을 표현하 는 身 體 儀 禮 였다. 103) 선조는 5월 1일에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궁궐의 뜰에 모여서 통곡했다. 104) 4월 하순에 宣 陵 의 변 을 안 이래 선조는 禮 曹 의 진언에 따라 이처럼 四 拜 가 아닌 会 哭 의례를 이 미 세 번이나 지내고 있었다. 105) 그런데 그날 중에 禮 曹 는 宣 陵 의 변 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라는 종실 順 寧 君 李 景 倹 의 장계를 이유로 다음날 예정되어 있던 望 闕 禮 를 중지하 자고 선조에게 청원했다. 106) 이에 대하여 선조는 望 闕 禮 를 올려 사은하는 것은 皇 上 을 위한 일 이라며 일정을 변경해서는 안 된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선조가 들은 바에 의하면, 군주의 은혜를 중시하는 중국에서는 상중이라도 사은해야 할 일이 있으면 궁궐 밖에서 상복을 벗고 의례를 지낸다고 한다. 그리하여 禮 曹 가 대신들과 다시 협의한 결과 선조의 의향을 존중하여 다음날 5월 2일의 望 闕 禮 를 예정대로 거행하자는 의견에 찬성 했다. 이때 선조는 望 闕 禮 의 구체적인 거행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구체적 방법이란 지금 한성에 있는 노인 어린이와 이곳에 온 사람들은 모두 문무백관 행렬의 끝에 서고, 백관과 마찬가지로 拜 禮 와 叩 頭 禮 를 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일반 백성들도 황제의 은혜를 알고 크게 감격할 것이라고 선조는 생각하였다. 선조의 의중을 안 禮 曹 는 曠 世 의 盛 典, 요컨대 세상에 둘도 없는 성대한 儀 禮 라고 칭송했고, 대신들 또한 이에 102) 禮 曹 啓 曰, 初 二 日 望 闕 禮 儀 註, 減 去 舞 蹈 一 節, 上 敎 曰, 爲 上 國 陳 賀, 則 似 當 有 舞 蹈 之 節, 只 於 陳 謝, 則 似 當 行 五 拜 三 叩 頭 之 禮 ( 宣 祖 実 録 권37, 26년 4월 29일 계축조). 103) 渡 邊 信 一 郎, 天 空 の 玉 座 - 中 國 古 代 帝 國 の 朝 政 と 儀 禮 ( 柏 書 房 ), 한국어판은 문정희 임대희 역, 天 空 의 玉 座 - 中 國 古 代 帝 國 의 朝 政 과 儀 禮 ( 新 書 苑, 서울) 170~ ) 上 率 百 官, 會 哭 于 闕 庭 之 内 ( 宣 祖 実 録 권38, 26년 5월 1일 갑인조) 105) 禮 曹 啓 曰, 宣 靖 陵 之 變, 前 日 則 變 服 擧 哀, 行 四 拜 禮 矣, 群 議 拜 禮 未 穩 云, 自 上 率 百 官 哭 盡 哀, 連 三 日 朝 哭, 内 殿 亦 當 如 是, 上 從 之 ( 宣 祖 実 録 권37, 26년 4월 24일 무진조). 세 번의 會 哭 儀 禮 는 同 書 권37, 26년 4월 25일 26일 29일조. 106) 禮 曹 啓 曰, 即 見 順 寧 君 景 儉 状 啓, 宣 陵 之 變 尤 極 慘 痛, 今 日 自 上 率 百 官 哭 臨, 明 日 望 闕 禮 亦 姑 停, ( 中 略 ) 上 曰, 哭 臨 事, 更 與 大 臣 商 確 以 啓, 謝 恩 一 節, 則 爲 皇 上 事, 聞 中 朝 之 人, 則 初 喪 如 有 謝 恩 之 事, 脱 衰 於 闕 門 外, 成 禮 而 出 云, 蓋 以 君 恩 爲 重 也, 謝 恩 漸 晩, 予 意 雖 哭 臨, 明 日 謝 恩 似 不 可 退, 禮 曹 啓 曰, 更 議 于 大 臣, 則 當 初 聞 變, 已 行 三 日 哭 禮, 今 又 哭 臨 似 爲 未 穩 云, 來 初 二 日 謝 恩 事, 請 依 上 敎 行 之, 敎 政 院 曰, 明 日 謝 恩 時, 此 處 老 少 及 凡 來 此 之 人, 於 百 官 班 列 後 行 退 立, 使 之 同 行 拜 禮 叩 頭, 則 是 率 臣 民 謝 皇 恩, 而 臣 民 亦 知 皇 恩 感 激 之 至, 此 意 預 爲 曉 諭 行 禮, 禮 曹 回 啓 曰, 致 謝 皇 恩, 一 如 上 敎, 實 是 曠 世 盛 典, 大 臣 之 意 亦 如 此, 上 從 之 ( 宣 祖 実 録 권38, 26년 5월 1일 갑인조).
27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75 동의하였다. 원래 望 闕 禮 의 儀 註 에는 일반 백성의 참석 규정이 없으므로 이례적인 조치 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서 비변사 역시 경성 수복 을 나라의 큰 경사 로 간주하고, 모든 신하가 이를 축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선조의 의향에 동조하였다. 107) 선조는 한성의 백성들을 위로해야 하는데 축하는 불가하다며 다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최고 행정관청인 비변사 의 입장에서 보자면 경성 수복 은 만백성의 행복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宗 廟 와 社 稷 (왕실과 국가)의 경사였다. 조선 각지의 백성들은 오랫동안 일본군인 수중에 들어 있었 으므로, 이미 일본군으로부터 한성을 탈환한 사실을 여전히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 로 비변사는 각지에 사자를 보내 황제의 은혜가 조선에 미치고, 또한 宗 廟 社 稷 이 회복 된 일을 알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국왕이 내일 望 闕 禮 를 거행하여 황은에 감사하는 뜻을 밝힌 뒤에 우리 신하들은 여러 관리와 군민을 이끌고 궐문 밖에서 황은에 감사드 리겠다고 하였다. 선조가 비변사의 이런 제안을 허가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선조는 5월 2일 이른 아침에 백관 기로 군민을 거느리고 望 闕 禮 를 올렸으며, 그 후 종묘 사직에 한성 탈환을 고했다. 108) 望 闕 禮 가 끝나면 대개는 같은 正 殿 에서 朝 賀 禮 가 개최된다. 그러나 왕조국가에서 宣 陵 의 변 은 역시 견디기 어려운 참 사였으므로 사헌부와 사간원 兩 司 는 朝 賀 禮 의 중지를 요청했고, 선조도 이를 받아들였 다. 109) 나중에 李 山 海 가 쓴 宣 宗 大 王 穆 陵 誌 도 ( 前 略 ) 萬 曆 二 十 一 年 癸 巳 春, 提 督 協 率 軍 兵, 大 破 平 壤 之 賊, ( 中 略 ) 夏, 聞 官 軍 收 復 京 都, 群 臣 請 賀, 王 曰, 可 慰, 不 可 賀 也, 但 當 率 臣 民 行 望 闕 禮, 以 謝 皇 恩 而 已, ( 後 略 )( 宣 祖 実 録 권221, 41년 2월조, 誌 文 ) 107) 備 邊 司 啓 曰, 收 復 京 城, 一 國 大 慶, 群 臣 當 爲 陳 賀, 自 上 以 爲 可 慰, 而 不 可 賀 也, 京 城 恢 復, 非 徒 億 萬 蒼 生 之 幸, 其 於 宗 社 之 慶, 爲 如 何 哉, 而 闕 然 不 爲 喜 慶 之 擧 乎, 且 四 方 之 人 久 陷 賊 藪, 必 不 知 今 日 克 復 之 事, 理 宜 遣 使 通 諭, 使 明 知 皇 恩 所 及, 宗 社 重 恢 之 意, 明 日 自 上 致 謝 皇 恩 之 後, 臣 等 率 群 僚 軍 民 詣 闕 門 外, 以 謝 聖 恩, 上 從 之 ( 宣 祖 実 録 권38, 26년 5월 1일 갑인조). 108) 선조는 평안도 永 柔 를 行 宮 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종묘 사직 은 한성 안의 宗 社 가 아니라 永 柔 읍내의 임시시설을 이용했을 것이다. 종묘 사직의 신위(위패)는 선조가 한성을 포기했던 선조 25년 4월 말에 가지고 나왔으며, 이 해 26년 8월 한성으로 들여오게 된다( 宣 祖 修 正 実 録 권26, 25년 4월 그믐조. 宣 祖 実 録 권41, 26년 8월 20일 신축조). 그동안 廟 社 의 신위는 선조 26년 3월 상순에 定 州 에서 永 柔 로 옮겼고, 江 華 에서 옮긴 세종의 睟 容 (초상)과 함께 봉안되었다( 宣 祖 実 録 권36, 26년 3월 2일 16일조). 109) 兩 司 啓 曰, 京 城 賊 退, 皇 恩 罔 極, 自 上 致 謝 之 禮, 雖 不 可 得 已, 宣 陵 之 變 慘 不 忍 言, 本 朝 賀 禮 在 情 禮 未 安, 雖 今 日 所 當 并 擧, 請 命 停 行, 上 從 之 ( 宣 祖 実 録 권38, 26년 5월 을묘 2일 조).
28 7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라고 한성 탈환의 황은에 감사하도록 선조가 거행했던 萬 曆 21년( 宣 祖 26) 여름 5월의 望 闕 禮 에 주목하고 있다. 2) 한성 환도 후 南 別 宮 에서의 望 闕 禮 宣 祖 26년 10월 1일 저녁 무렵, 한성으로 돌아온 宣 祖 는 貞 陵 洞 에 있던 月 山 大 君 ( 成 宗 의 형)의 舊 宅 (현재 徳 寿 宮 )을 行 宮 으로 삼았다. 110) 宣 祖 는 즉시 慕 華 館 으로 나가서 皇 恩 에 감사하고, 폐허가 된 宗 廟 앞에서는 百 官 을 이끌고 통곡하였다. 111) 약 2개월 뒤의 實 錄 기사에는 上 께서 동지 望 闕 禮 를 南 別 宮 에서 행하다 라고 되어 있는데, 宣 祖 는 南 別 宮 (현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冬 至 望 闕 禮 를 거행했다(<표 2> 20). 112) 南 別 宮 이란 漢 城 府 南 部 会 賢 坊 에 있던 조선왕조 시대의 별궁 중 하나이며,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 총대 장 宇 喜 多 秀 家 및 明 軍 총지휘관 李 如 松 이 차례로 이곳에 주둔했다. 113) 이어서 이듬해 선조 27년에는 임진왜란이 한창인 중에도 명절 望 闕 禮 가 선조의 주재로 충실하게 거행 되고 있다. 이하에서 세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上 在 貞 陵 洞 行 宮, 王 世 子 在 公 州, 上 詣 南 別 宮, 行 望 闕 禮, ( 宣 祖 実 録 권47, 27년 정월 1 일 경진조) 卯 時, 上 行 望 闕 禮, ( 同 書 권54, 27년 8월 17일 임술조) 行 冬 至 望 闕 禮 于 時 御 所, 議 政 府 進 獻 誕 日 禮 物, 視 平 時 草 草, 王 世 子 問 安, ( 同 書 권57, 27 년 11월 11일 을유조) 110) 中 村 栄 孝, 前 掲 書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190. 宣 祖 의 한성 환도 후 약 1개월 동안의 활동상황은 李 鉉 淙, < 壬 辰 倭 乱 과 서울> 鄕 土 서울 제18호 (서울) 67~68 참조. 111) 上 至 慕 華 館, 謝 皇 恩 行 四 拜 禮, 至 宗 廟 前, 易 服, 率 百 官 哭 臨 ( 宣 祖 実 録 권43, 26년 10월 1일 신사조). 宗 廟 와 社 稷 의 神 位 는 沈 義 謙 ( 明 宗 妃 의 祖 父 沈 連 源 의 손자) 댁에 봉안되었고, 宗 廟 는 뒷날 光 海 君 즉위년(1608)에 재건되었다. 李 賢 珍,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 一 志 社, 서울) < 一 조선전기 종묘 営 建 論 과 운영상의 특징> 53~55 112) 宣 祖 実 録 권44, 26년 11월 29일 기묘조. 113) 京 城 復, 天 兵 入 城, 李 提 督 館 於 小 公 主 宅 後 稱 南 別 宮, ( 中 略 ) 小 公 主 宅 亦 倭 將 秀 嘉 所 止, 故 見 遺, ( 後 略 ) ( 懲 毖 録 西 厓 文 集 附 懲 毖 録 成 均 館 大 学 校 大 東 文 化 研 究 院, 서울, 1958년 9월, 수록 巻 2, 癸 巳 4월 20일조). 在 會 賢 坊, 本 小 公 主 第, 宣 祖 壬 辰, 倭 將 平 秀 家 住 此, 後 李 如 松 楊 鎬 亦 住 于 是, 仁 祖 朝, 太 平 館 撤 後, 以 是 宮 爲 華 使 留 館 ( 大 東 地 志 권1, 漢 城 府, 宮 室 条, 南 別 宮 ). 이후 조선의 역대 국왕은 남별궁에서 명 청의 사신을 접견하게 된다. 한성의 일본군 주둔지에 관해서는 李 鉉 淙, 전게 < 壬 辰 倭 乱 과 서울> 43~44 참조.
29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77 모두 간략한 형태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이 3건의 사례는 차례로 正 朝 聖 節, 그리고 동지 望 闕 禮 의 실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표 2> ). 선조는 이 해의 正 朝 를 정 릉동의 행궁에서 맞이하고, 작년의 동지와 마찬가지로 南 別 宮 에서 望 闕 禮 를 거행하였다. 이어서 8월 17일의 거행 기록에는 卯 時 (=오전 6시경)에 上 께서 望 闕 禮 를 행하다 라는 기사뿐이지만, 그날은 聖 節 이므로 宣 祖 가 이른 아침부터 백관을 거느리고 對 明 遙 拜 儀 禮 를 행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지막의 11월 11일 실록 기사에는 冬 至 望 闕 禮 를 時 御 所 에서 행하다 라고 되어 있고, 의례의 무대가 時 御 所 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여기서 말하는 時 御 所 란 貞 陵 洞 의 行 宮, 즉 月 山 大 君 의 옛 저택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114) 그 날은 선조의 생일 115) 이었으므로 議 政 府 는 예물을 진상했으나 전시 중인 탓에 보통 때보 다 검소했다고 한다. 그 후 임진왜란기에는 <표 2>에서 보는 것처럼, 선조는 正 朝 聖 節 冬 至 望 闕 禮 를 매 번 충실하게 시행하고 있다. 다만 선조 29년의 聖 節 에는 望 闕 禮 를 행했다는 기록이 없 다. 나흘 전에 萬 曆 帝 의 嫡 后 ( 隆 慶 帝 의 皇 后 陳 氏 )가 사망했다는 訃 告 가 조선에 도착했기 때문에 停 朝 (= 輟 朝. 조정의 정무를 쉬는 일)의 조치를 내리고 있으며, 116) 이에 수반하 여 聖 節 을 축하하는 望 闕 禮 를 부득이 정지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예외를 제외하면 임진왜란 이전의 실시 상황과는 대조적이다. 단지 왜란 이전과 이후는 실록 기사의 잔존 상황이 다르다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왜란기에는 명나라 지원군이 한반도에 상주하 고 있으며, 아마도 이 대명 요배의례를 權 停 禮 로 간략하게 끝내는 것을 꺼렸음이 틀림없 다. 다음으로 선조 28년 聖 節 의 실록 기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上 詣 南 別 宮, 與 天 使 行 聖 節 望 闕 禮, 仍 接 見 天 使, ( 宣 祖 実 録 권66, 28년 8월 17일 정사조) 8월 17일의 聖 節 때 선조는 南 別 宮 에서 天 使 와 함께 聖 節 望 闕 禮 를 거행하였다(<표 2> 25). 종전의 기록과 다른 점은 조선 국왕이 天 使 와 대명 요배의례를 거행했다는 것 이다. 여기서 말하는 天 使 란 豊 臣 秀 吉 을 일본국왕에 책봉하도록 명에서 파견된 封 倭 天 使 李 宗 城 을 가리킨다. 이 해 4월 하순에 宣 祖 는 정사 李 宗 城 부사 楊 方 亨 일행을 慕 華 館 에서 맞이했고, 117) 이후 南 別 宮 에서 종종 회담이 열렸다. 冊 封 日 本 正 使 李 宗 城 은 이 114) 在 西 部 皇 華 坊, 本 月 山 大 君 第, 宣 祖 癸 巳 (=선조 26년), 自 義 州 還 都, 爲 時 御 所, 光 海 主 七 年, 改 號 慶 運 宮, ( 後 略 ) ( 大 東 地 志 권1, 漢 城 府, 宮 室 条, 明 禮 宮 ). 115) 璿 源 系 譜 紀 略 璿 源 世 系, 宣 祖. 116) 仁 聖 皇 太 后 [ 皇 帝 母 后 也 ] 崩 逝, 停 朝 ( 宣 祖 実 録 권78, 29년 8월 13일 무신조).
30 7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듬해인 宣 祖 29년 4월에 일본으로 건너가지 않았고,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서 도망하여 귀국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18) 선조대에 명절과 명 사신의 체재기간이 겹쳤던 것은 선조 5년 11월 동지 이래로 두 번째이지만, 이번에는 萬 曆 帝 의 聖 節 을 명 사신과 함께 축하했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聖 節 望 闕 禮 는 대명관계를 유지해 가는 데에 있 어 중요한 왕조국가의례이다. 특히 이번은 명 사신이 체제 중이므로 의례의 절차와 시각 에 관하여 사전에 충분히 고려하고 의례 자리 에 임하도록 사간원이 선조에게 조언하고 있다. 119) 중앙정부가 이번의 명 사신 방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南 別 宮 이라는 공간의 이용이다. 임진왜란 후 南 別 宮 에서 는 적어도 4회에 걸쳐서 望 闕 禮 가 거행되고 있다(<표 2> ). 선조가 行 宮 으 로 삼고 있던 貞 陵 洞 에서 거리가 가깝다는 지리적 편리성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명장 李 如 松 일행이 한성을 탈환한 이래 이 南 別 宮 은 명, 더 나아가서는 皇 恩 을 상징하 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3) 전시하 의례 실시상의 문제점 임진왜란이라는 전시하에 대명 요배의례를 거행하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따른다. 왕도 한성은 잿더미가 되었으며, 그런 속에서 궁중의례를 치르는 경우에 많은 곤란이 따 랐을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선조 29년 정월에 司 憲 府 는 궐문의 금령이 엄격히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관계자 이외의 자가 멋대로 출입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이 해에 선조는 正 朝 望 闕 禮 를 예정대로 끝냈는데(<표 2> 27), 120) 그 사흘 뒤의 일이었다. 특히 正 朝 望 闕 禮 때는 각 관청의 하인이 함부로 출입하여 매우 소란스러웠던 모양이며, 사헌부는 당일의 파수를 파면할 것과 담당 부서의 조사를 요청했고, 선조의 재가를 얻었다. 전란으로 궁궐의 正 117) 宣 祖 実 録 권62, 28년 4월 28일 경오조. 宣 祖 修 正 実 録 권29, 28년 4월조. 118) 李 宗 城 이 도망한 사정은 佐 島 顕 子, < 日 明 講 和 交 渉 における 朝 鮮 撤 退 問 題 - 冊 封 正 使 の 脱 出 をめぐっ て> 中 村 質 編, 鎖 國 と 國 際 関 係 ( 吉 川 弘 文 館 )에 자세하다. 또한 李 宗 城 이 도망한 후 의 封 倭 政 策 에 대한 明 정부 내부의 반대론은, 小 野 和 子, 전게서 < 第 二 章 第 二 節 明 日 和 平 交 渉 をめぐる 政 争 > 128~133 ; 三 木 聰, 전게 < 万 暦 封 倭 考 ( 二 )> 12~21 119) 司 諫 院 啓 曰, 聖 節 望 闕 禮, 乃 莫 大 之 禮, 況 今 天 使 來 臨, 自 上 就 彼 行 禮, 則 節 次 早 晩, 尤 當 詳 審 預 講, 不 可 小 有 差 違, ( 後 略 ) 上 答 曰, 依 啓,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66, 28년 8월 19일 기미조). 120) < 上 初 行 望 闕 禮 > ( 宣 祖 実 録 권71, 29년 정월 1일 무진조).
31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79 殿 을 사용할 수 없었던 탓에 궁중의례도 時 御 所 에서 거행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결 과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121) 선조 29년 12월 하순에는 司 諫 院 이 習 儀 (의례의 예행연습) 때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사간원에 따르면, 전란 후 만사를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인데, 처음부터 완 전무결을 요구하는 것은 곤란하다. 특히 望 闕 禮 의 習 儀 는 왕조국가에 있어서 중요한 행 사이며, 예행연습장은 주의 깊게 조사한 다음에 결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당일의 예 행연습장은 길가의 더러운 장소로 설정되어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 다. 중요한 의례를 거행하기에는 난잡하며, 司 諫 院 은 당해 관청의 당상관과 色 郎 庁 (= 郎 官. 정5품관의 正 郎 과 정6품관의 佐 郎 )을 문초하도록 요청했고, 선조의 재가를 얻었 다. 122) 이듬해 선조 30년 正 朝 의 실록 기사는 望 闕 禮 를 행하다 라는 기록이 고작인데 (<표 2> 30), 123) 황폐한 한성 안에서 궁중의례의 예행연습장을 확보하는 일이 쉽지 않 았음을 말해 준다. 선조 30년 8월의 聖 節 에도 宣 祖 実 録 에는 上 께서 聖 節 의 望 闕 禮 를 別 殿 에서 행하 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표 2> 31), 124) 기록상으로는 望 闕 禮 가 별 탈 없이 거행된 것 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틀 후 司 憲 府 의 상소에 따르면, 당일에 트러블이 발생하였다. 이 해의 聖 節 望 闕 禮 는 別 殿 에서 거행되었다. 戰 時 중에 선조는 貞 陵 洞 의 行 宮 에 기거했으 며, 別 殿 은 行 宮 안에 있던 전각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헌부에 따르면 이번 달 8월 17일의 望 闕 禮 때 대명 황제의 권위의 상징인 闕 牌 (한자로 闕 이라는 글자를 새긴 목패, 闕 字 牌 라고도 한다) 125) 가 南 別 宮 에서 도착했는데, 갑자기 악기 소리가 나서 121) 司 憲 府 啓 曰, 闕 門 之 禁 全 不 嚴 肅, 常 時 雜 人 任 意 出 入, 已 爲 寒 心, 正 朝 望 闕 禮 時, 尤 不 嚴 禁, 各 司 下 人 闌 入 塡 塞, 喧 聒 莫 甚, 極 爲 駭 愕, 其 日 外 門 守 門 將, 並 命 罷 職, 兵 曹 不 能 檢 勑, 亦 爲 非 矣, 色 郎 廳 亦 命 推 考, 答 曰, 依 啓 ( 宣 祖 実 録 권71, 29년 정월 3일 경오조). 122) 司 諫 院 正 言 洪 慶 臣 來 啓 曰, 亂 後 庶 事 草 創, 大 小 規 摸 固 難 責 備, 至 於 望 闕 禮 習 儀, 莫 重 之 事, 而 行 禮 處 所 不 可 不 審 定, 而 今 日 習 儀 乃 設 於 路 傍 汚 穢 之 地, 非 但 觀 瞻 未 安, 其 於 大 禮 亦 渉 猥 褻. 請 該 曹 堂 上 色 郎 廳, 並 命 推 考, ( 中 略 ) 答 曰, 依 啓 ( 宣 祖 実 録 권83, 29년 12월 21일 계미조). 123) 宣 祖 実 録 권84, 30년 정월 1일 임진조. 124) 曉, 王 世 子 問 安, 上 行 聖 節 望 闕 禮 於 別 殿, 禮 罷 後, 王 世 子 問 安 ( 宣 祖 実 録 권91, 30년 8월 17 일 을해조). 125) 朝 鮮 総 督 府 編, 朝 鮮 古 蹟 圖 譜 제11책 ( 朝 鮮 総 督 府, 1931년 3월. 名 著 出 版, 1973년 3월 復 刻 ), 朝 鮮 時 代, 客 舎, 1580의 圖 版 5092 < 開 城 府 客 舎 太 平 館 殿 牌 及 闕 牌 > 참조. 純 祖 (재위 1800~34 년) 대에 중국 사신의 접대 의례를 정리한 賓 禮 総 覧 ( 東 京 大 学 総 合 圖 書 館 阿 川 文 庫 소장) 권2, 儀 註, 勅 使 望 闕 禮 条 말미의 割 註 에 敕 使 留 館 時, 若 遇 聖 節 正 朝, 則 移 設 闕 牌 於 西 宴 廳, 而 都 監 堂 上 以 下 行 禮 如 右, 若 在 途, 則 行 禮 於 站 上 闕 牌 前 이라고 되어 있으며, 開 城 의 太 平 館 처럼 駅 站 上 의 客 舎 에도 闕 牌 가 있었다.
32 8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선조를 놀라게 했으며, 사정을 하문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경우는 통상 해당 관청의 관 원이 즉시 명령을 전달하고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관청은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았다. 궁궐 안을 놀라게 했던 일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었다. 그 래서 사헌부는 이번에도 色 郎 庁 의 수사를 요청했고, 선조는 재가를 내려 承 旨 ( 承 政 院 의 정3품 堂 上 官 )에게 문초하도록 하명했다. 126) 望 闕 禮 가 엄숙한 의례 공간 속에서 거행되 었음을 살필 수 있는 사례이다. 또 이 사례에서 추측할 때, 명 황제를 상징하는 闕 牌 가 임진왜란기에는 南 別 宮 에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역시 한성 안의 南 別 宮 은 당시 皇 恩 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주지하다시피 이미 선조 29년 9월 초에 大 坂 城 에서 日 明 강화교섭이 결렬되고, 이 해 宣 祖 30년 8월 초에는 일본군이 충청 전라 경상도로 진출 중이었는데, 127) 한성에서는 엄숙하게 대명 요배의례가 거행되고 있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4) 동아시아 세계의 조선과 명 宣 祖 31년의 正 朝 도 역시 선조는 貞 陵 洞 의 行 宮 에서 지냈다. 실록 기사에는 上 께서 세자 및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望 闕 禮 를 행하다 라고 되어 있으며, 선조가 예법대로 왕 세자 光 海 君 및 문무백관과 함께 正 朝 를 축하했다는 사실을 전한다(<표 2> 33). 128) 이 해의 동지 때도 선조는 이른 아침인 丑 時 (오전 2시경)부터 別 殿 에서 望 闕 禮 를 거행하고 있는데(<표 2> 33), 129) 8월 17일의 聖 節 은 望 闕 禮 기록이 빠졌다. 豊 臣 秀 吉 이 京 都 의 伏 見 城 에서 사망한 것은 그 직후의 일이다. 왜란 종식기에도 正 朝 동지 望 闕 禮 는 충실하게 거행되고 있었으며, 기록 형태 그 자 체는 간략하지만, 오히려 명에 대한 고마움이 증폭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필자 가 주목한 것은 이른바 丁 應 泰 誣 奏 事 件 을 받고 兵 曹 參 知 (정3품 당상관) 李 廷 亀 가 製 述 126) 司 憲 府 啓 曰, ( 中 略 ) 本 月 十 七 日 望 闕 禮 時, 闕 牌 自 南 別 宮 陪 來, 不 時 鼓 吹 震 天, 自 上 驚 怪, 至 於 下 問, 爲 該 曹 者, 所 當 登 時 傳 語 以 啓, 而 專 不 致 察, 使 闕 内 震 驚, 極 爲 未 便, 請 色 郎 廳 推 考, ( 中 略 ) 上 曰, 依 啓, 承 旨 并 推 考 ( 宣 祖 実 録 권91, 30년 8월 19일 정축조). 127) 石 原 道 博, 전게서 文 禄 慶 長 の 役 211~212.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212~215 ; 李 烱 錫, 전게서 < 第 四 篇 第 十 二 章 第 一 節 作 戦 第 六 年 (1597 年 )> 523 ; 北 島 万 次, 전 게 豊 臣 秀 吉 の 朝 鮮 侵 略 191~194 ; 中 野 等, 전게서 <Ⅴ. 慶 長 の 再 派 兵 > 311~ ) 上 在 貞 陵 洞 行 宮, 上 率 世 子 及 群 臣, 行 望 闕 禮, 王 世 子 問 安 ( 宣 祖 実 録 권96, 31년 정월 1일 정해조) 129) 丑 時, 上 行 望 闕 禮 於 別 殿 賀 至 日 也 ( 宣 祖 実 録 권106, 31년 11월 25일 병오조)
33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81 한 奏 文 (국왕 명의로 발급하는 외교문서)이다. 선조 31년 6월에 명군 총독 邢 玠 의 賛 画 ( 幕 僚 )였던 丁 應 泰 가 蔚 山 공방전은 패배이며 軍 務 經 理 楊 鎬 130)는 그 사실을 은폐했다고 萬 曆 帝 에게 상주하였다. 丁 應 泰 의 상주문은 조선이 일본과 결탁했으며, 또한 楊 鎬 가 조 선에서 축성한 것은 나중에 화근이 될 것이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131) 이 때문에 선조는 자주 명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 사실을 변명했으며, 이 해 10월에는 제3차 陳 奏 使 로 正 使 우의정 李 恒 福 이하 부사 李 廷 亀 서장관 黄 汝 一 일행을 明 으로 파견하였다. 이 사건을 해결로 이끈 李 廷 亀 의 奏 文 132)에는 당시의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조선과 명의 구체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기술이 있다. 奏 文 曰, 日 者, 贊 畫 丁 應 泰, 以 築 城 一 事, 搆 臣 以 不 測 之 語, 臣 驚 惶 痛 迫, 已 經 具 本 哀 籲 去 訖, 方 西 望 雪 涕, 怵 惕 竢 命, ( 中 略 ) 小 邦 自 先 臣 (= 康 獻 王 ) 以 來, 血 心 事 上, 盡 禮 盡 誠, 律 用 大 明 律, 曆 用 大 統 曆, 服 色 禮 義 無 不 慕 尚, 而 天 使 之 來, 有 迎 詔 儀, 陪 臣 之 去, 有 拜 表 禮, 正 至 聖 節, 有 望 闕 之 禮, 率 皆 虔 心 精 白, 肅 敬 將 事, 一 如 對 越 天 威, 以 至 各 樣 文 書 公 私 簡 牘, 皆 奉 年 號, 習 爲 恒 式, ( 中 略 ) [ 兵 曹 參 知 李 廷 龜 之 製 也 ], ( 宣 祖 実 録 권105, 31년 10월 21일 계유조) 이 奏 文 에서는 먼저 丁 應 泰 가 축성 문제를 날조하여 宣 祖 를 모함하려고 했기 때문에, 놀란 선조는 이 외교문서를 작성해서 제출하고 萬 曆 帝 에게 무고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신하인 선조로서는 명 황제가 거주하는 서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고, 삼가 하명을 기 다릴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小 邦, 즉 조선이 先 臣 태조 李 成 桂 이래 참으로 심혈을 기울여서 上 國 인 명에게 사대의 예를 다 해 왔음을 언급한 부분이다. 명에 대한 조선의 사대관계는 우선 조선에서 (1)율(형법)은 大 明 律 을 운용하고, (2)달 130) 이듬해 宣 祖 32년 9월에는 邢 玠 를 제사하는 宣 武 祠 가 漢 城 안에 완성되었고, 뒷날 宣 祖 37년 7월에는 宣 祖 의 뜻에 따라 楊 鎬 와 함께 제사지냈다. 中 村 栄 孝, 전게 < 朝 鮮 の 慕 明 思 想 と 大 報 壇 > 198 ; 韓 明 基, 전게서 <제1부 제1장 명군 참전과 정치적 영향> 82~84. 桑 野 栄 治, 전게 < 朝 鮮 後 期 における 国 家 祭 祀 儀 禮 の 變 動 > 37~39 131) 朝 鮮 明 日 本 에 있어서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李 啓 煌, 전게서 < 第 一 章 丁 応 泰 誣 奏 事 件 と 日 明 将 らの 講 和 交 渉 >에 상세하다. 132) 李 廷 亀 유고집 月 沙 先 生 集 ( 影 印 標 点 韓 國 文 集 叢 刊 69 (민족문화추진회, 1991년 11월, 수록). 底 本 은 1688년 대구에서 목판으로 重 刊 된 原 集 과 1720년에 같은 대구에서 追 刻 된 別 集 으 로 구성된 서울대학교규장각 소장본) 권21, 戊 戌 辨 誣 録, 丁 主 事 應 泰 參 論 本 國 辨 誣 奏 戊 戌 冬 条 는 < 朝 鮮 國 王 臣 姓 諱 謹 奏 >라는 글로 시작하는 조금 긴 문장의 奏 文 이다. 다만 宣 祖 実 録 에 수록된 奏 文 에서 인용한 부분만을 한정해서 보자면, 약간의 문자의 異 同 삭제가 있기는 하지만 글의 내용에 바뀐 것은 없다. 또한 奏 文 의 발급 주체가 조선국왕임에 비하여 呈 文 의 발급 주체는 陪 臣 즉 조선관료이다. 金 暻 緑, < 朝 鮮 後 期 事 大 文 書 의 종류와 성격> 韓 国 文 化 35 (서울). 후일 曺 圭 益 他 編, 전게 연행록연구총서6(역사) 에 再 録 )
34 82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력은 명에서 하사한 大 統 曆 을 채택하고 있다. 복색(의복과 車 馬 등의 색깔)과 의례 역시 명의 제도를 숭상하며, (3)명 사신이 방문하면 迎 詔 儀 가 있고, (4)조선 국왕의 신하 를 황제의 陪 臣 으로서 사신을 파견할 때는 拜 表 의례가 제도화되어 있다. 그리고 (5) 正 朝 冬 至 聖 節 때가 되면 조선 국왕은 궁궐에서 望 闕 禮 를 거행한다. 선조가 이들 의례를 경건하고 결백한 마음으로 공손하게 거행하는 것은 오로지 천자인 명 황제의 위광에 보 답하려는 까닭이다. 덧붙여서 조선에서는 (6)각종 행정문서는 물론 공사의 편지에 이르 기까지 모두 명의 연호를 쓰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과장도 없으며,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조선과 명의 국제관계가 명 쾌하게 적혀 있다. 먼저 (1)에 관해서는 經 國 大 典 刑 典 첫머리의 用 律 条 에 大 明 律 을 쓴다 고 규정하듯이 조선에서는 형법규범으로서 大 明 律 을 준용하며, 이미 太 祖 4년 (1395) 2월에 이두(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한 한국어 표기법)로 주해한 大 明 律 直 解 30 권이 간행되었다. 133) (2) 大 統 曆 의 경우 고려 공민왕 19년( 洪 武 3, 1370) 5월에 洪 武 帝 가 冕 服 과 함께 고려에 보냈다. 134)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된 뒤에도, 예를 들어 서 洪 武 帝 의 뒤를 이어 建 文 帝 가 즉위하자 이듬해인 定 宗 원년( 建 文 원년, 1399)의 大 統 曆 이 조선으로 왔고, 이후 태종 4년( 永 楽 2, 1404)부터 大 統 曆 100부의 하사가 정 례화된다. 135) 선조 연간에는, 예를 들어서 선조 6년( 萬 曆 원년, 1573) 11월의 明 実 録 에 조선국에 大 統 曆 日 100부를 주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선조 36년 3월의 실록 기사에 는 大 統 曆 100부를 天 朝 에서 보내오다 라는 기록이 보이며, 冬 至 使 가 귀국하는 길에 大 統 曆 100부를 들여오고 있다. 136) 大 明 会 典 에 따르면 萬 暦 연간 당시는 매년 11월 1일에 이듬해의 大 統 暦 을 백관에게 給 賜 한 다음에 전국에 공포하였고, 琉 球 占 城 등의 외국에게 正 統 연간(1436~49년) 이전에는 朝 貢 때 각기 王 暦 1 本 과 民 暦 10 本 을 급여하였다. 현재 항상 급여하고 있는 것은 朝 鮮 国 뿐이며, 王 暦 1 本 과 民 暦 100 本 133) 經 國 大 典 권5, 刑 典, 用 律 条. 朝 鮮 総 督 府 中 枢 院 調 査 課 編, 校 訂 大 明 律 直 解 (조선총독 부, 경성, 1936년 11월) 권말의 花 村 美 樹, < 大 明 律 直 解 解 説 > 11~13 134) 高 麗 史 권42, 世 家 42, 恭 愍 王 19년 5월 26일 갑인조 ; 同 書 권72, 輿 服 志 1, 冠 服, 祭 服, 恭 愍 王 19년 5월조 ; 高 麗 史 節 要 권29, 恭 愍 王 19년 5월조. 또 明 実 録 에 高 麗 使 者 成 惟 得 等 辭 歸, 上 以 書 諭 其 國 王 王 顓 (= 恭 愍 王 ) 曰, ( 中 略 ) 今 賜 王 冠 服 樂 器 陪 臣 冠 服 及 洪 武 三 年 大 統 暦 六 經 四 書 通 鑑 漢 書, 至 可 領 也, ( 後 略 ) ( 明 太 祖 実 録 권46, 洪 武 2년 10월 임술 1일)라고 보 인다. 고려의 책봉체제 편입은 末 松 保 和, 전게서 < 麗 末 鮮 初 に 於 ける 對 明 関 係 >의 < 第 二 章 高 麗 と 明 の 建 國 > 138~140 ; 沈 載 錫, 高 麗 国 王 冊 封 研 究 ( 慧 眼, 서울) <제5장 고려와 元 의 책봉관계> 227~ ) 太 祖 実 録 권15, 7년 12월 22일 갑자조 ; 太 宗 実 録 권7, 4년 3월 27일 무신조. 136) 明 神 宗 実 録 권19, 원년 11월 25일 신축조 ; 宣 祖 実 録 권160, 36년 3월 8일 갑자조.
35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83 이다 라고 하여 137) 조선이 琉 球 占 城 보다 우대받았던 충실한 조공국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蕃 王 이 중국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책봉체제에 편입되면 正 朔 을 받든다 ( 曆 을 나누어 받고, 그 정월 초하루에 따르는 것)는 반대급부 가 있으며, 138) 天 子 에 의한 시간 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였다. 139) 이러한 조선의 대명외교 자세는 (6)의 명의 연호 사용과도 상통한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임진왜란과 명청 교체를 거치면서 조선 사 회에서는 이른바 崇 禎 紀 年 140) 을 사용하는 관습이 퍼졌다. 인조 15년(1637)에 공식문서 에서 명의 연호를 폐지하고 청의 正 朔 을 받들었음에도 불구하고, 祭 禮 때 낭독하는 祭 文 외에 편지와 墓 誌 에는 대명제국 최후의 황제인 毅 宗 崇 禎 帝 (재위 1627~44년)의 연호를 즐겨 사용하였다. 특히 명나라 최후의 해가 된 崇 禎 甲 申 (인조 22년, 1644)이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崇 禎 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는 崇 禎 紀 年 法 은 중화의 明 에 假 託 하여 小 中 華 를 自 認 하는 小 中 華 意 識 141)의 상징이다. 대명외교의례에 속하는 (3)과 (4)의 迎 詔 儀 및 拜 表 儀 는 國 朝 五 禮 儀 嘉 禮 에 그 儀 註 가 수록되어 있다. 142) 이 중에 明 使 迎 接 儀 禮 는 이전 왕조의 紀 傳 體 史 書 인 高 麗 史 禮 志 에도 수록되어 있으므로, 고려 恭 愍 王 과 명 洪 武 帝 의 책봉관계가 시작된 시기에 명 의 예법을 도입하여 제정 운영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143) 그리고 (5)가 本 章 에서 주목 했던 正 朝 冬 至 聖 節 의 望 闕 禮 이다. 李 山 海 가 쓴 宣 宗 大 王 穆 陵 誌 에서도 선조의 대 명 외교자세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 前 略 ) 乃 於 戊 申 (=선조 41년) 二 月 初 一 日, 薨 於 貞 陵 洞 行 宮 之 正 寢, 壽 五 十 七, 在 位 四 十 一 年, 137) ( 前 略 ) 凡 毎 歳 進 御 覽 月 令 暦 大 統 暦 七 政 躔 度 暦, 洪 武 年 間, 以 九 月 初 一 日 進, 後 以 十 一 月 初 一 日 進, 當 日 以 大 統 暦 給 賜 百 官, 頒 行 天 下, ( 中 略 ) 如 琉 球 占 城 等 外 國, 正 統 以 前, 倶 因 朝 貢, 毎 國 給 與 王 暦 一 本 民 暦 十 本, 今 常 給 者 惟 朝 鮮 國, 王 暦 一 本 民 暦 一 百 本, ( 後 略 ) ( 萬 暦 大 明 会 典 권 223, 欽 天 監 条 ). 138) 藤 田 亮 策, 朝 鮮 學 論 考 ( 藤 田 先 生 記 念 事 業 会 ) < 朝 鮮 の 年 號 と 紀 年 > ) 大 井 剛 < 年 號 論 > ( 荒 野 泰 典 他 編 アジアのなかの 日 本 史 (Ⅴ. 自 意 識 と 相 互 理 解 ) 東 京 大 學 出 版 会, 1983년 1월) ) 崇 禎 紀 年 法 의 용례는 藤 田 亮 策, 전게 < 朝 鮮 の 年 號 と 紀 年 > 327~ ) 이른바 小 中 華 意 識 에 관해서는 한국의 각 왕조에 초점을 맞추어 가면서 華 夷 秩 序 와 인식을 서술 한 山 内 弘 一, 朝 鮮 からみた 華 夷 思 想 ( 山 川 出 版 社 )가 유익하다. 또 河 宇 鳳, 조 선시대 한국인의 일본인식 ( 慧 眼, 서울). 일본어 역은 金 両 基 監 訳, 朝 鮮 王 朝 時 代 の 世 界 観 と 日 本 認 識 ( 明 石 書 店 ) <제1부 제2장 조선후기 대외인식의 구조와 추이> 참조. 142) 國 朝 五 禮 儀 권3, 嘉 禮, 迎 詔 書 儀 및 拜 表 儀 拜 箋 附. 143) 高 麗 史 권65, 禮 志 7, 賓 禮, 迎 大 明 詔 使 儀 条. 奥 村 周 司 < 使 節 迎 接 禮 より 見 た 高 麗 の 外 交 姿 勢 - 十 一, 二 世 紀 における 對 中 関 係 の 一 面 > ( 史 観 제110책, 早 稲 田 大 學 史 學 会, 1984년 3월) 30
36 84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王 剛 毅 果 斷, 恭 儉 慈 仁, 誠 孝 出 天, 英 智 過 人, 迎 詔 拜 表 之 儀, 聖 節 望 闕 之 禮, 率 皆 虔 心 精 白, 肅 敬 將 事, 雖 在 顚 沛 流 離 之 際, 未 嘗 少 懈, ( 中 略 ) 宮 中 得 一 珍 味, 則 必 置 之 案 上, 西 望 拜 祝 曰, 欲 獻 吾 皇, 何 可 得 也, 瞻 戴 之 誠, 不 啻 如 孝 子 之 慕 父 母, 嘗 語 臣 隣, 一 則 曰 皇 恩, 二 則 曰 皇 恩, 一 念 對 越, 如 在 左 右, ( 後 略 )( 宣 祖 実 録 권221, 41년 2월조, 誌 文 ) 誌 文 에서는 선조의 강직하고 고결함과 영특한 지혜를 칭송한 뒤에, 선조가 항상 迎 詔 拜 表 儀 와 望 闕 禮 를 경건하고 엄숙하게 거행했으며, 일찍이 임진왜란 당시 유랑할 때 ( 壬 辰 播 遷 )에도 태만하지 않았다고 한다. 앞에서 본 李 廷 亀 의 진주문과 유사한 표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기에도 正 朝 冬 至 및 聖 節 의 望 闕 禮 를 성실하게 거행하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미 확인한 사실이다. 이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첫째도 황제의 은혜, 둘째도 황제의 은혜라면서 항상 對 越 (천지신명에게 대답하는 것)하는 것 처럼 선조가 신하에게 이야기했다는 에피소드이다. 임진왜란을 경험한 조선 국왕이 再 造 之 恩 에 감격하고, 마침내 명청 교체 후에 조선 소중화의식이 고양되는 것은 말할 필 요도 없다. 144) 4. 임진왜란 후의 望 闕 禮 1) 朝 賀 禮 의 정체 임진왜란 이후 正 朝 冬 至 望 闕 禮 가 충실하게 거행되고 있던 반면에, 望 闕 禮 가 끝난 후 개최되어야 할 朝 賀 禮 는 시행된 흔적이 거의 없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다음에 든 선 조 35년(1602) 10월의 실록 기사가 명쾌하게 대답해 줄 것이다. 144) 中 村 栄 孝, 전게 < 朝 鮮 の 慕 明 思 想 と 大 報 壇 > ; 鄭 玉 子,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 연구 ( 一 志 社, 서울) < 一 2.대보단( 大 報 壇 )의 창설> ; 李 泰 鎮, <조선후기 対 明 義 理 論 의 변 천> 아시아문화 제10호 ( 春 川 ) ; 桑 野 栄 治 < 朝 鮮 小 中 華 意 識 の 形 成 と 展 開 - 大 報 壇 祭 祀 の 整 備 過 程 を 中 心 に> 朴 忠 錫 渡 邊 浩 編, 國 家 理 念 と 對 外 認 識 -17~19 世 紀 ( 日 韓 共 同 研 究 叢 書 3) ( 慶 應 義 塾 大 學 出 版 会 ). 한국어판은 朴 忠 錫 渡 邊 浩 編, 국가이념과 대외인식- 17~19세기(한일공동연구총서3) ( 亜 研 出 版 部, 서울). < 再 造 之 恩 >의 형성 배경과 顯 彰 사업의 전개에 관해서는 韓 明 基, 전게서 <제1부 제1장 명군 참전과 정치적 영향> 67~88 외에 同,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질서> 韓 日 関 係 史 研 究 論 集 編 纂 委 員 会 編, 임진왜란과 한일관 계(한일관계사연구논집5) ( 景 仁 文 化 社, 서울) 118~122 ; 同, < 再 造 之 恩 과 조선후기 정치사- 임진왜란~정조대 시기를 중심으로> 大 東 文 化 研 究 제59집 (서울)에 상세하다.
37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85 禮 曹 啓 曰, 亂 後 庶 事 草 創, 章 服 不 備, 禮 文 所 載 本 朝 陳 賀 各 禮, 一 切 廢 而 不 行, 極 爲 未 安, 如 正 至 誕 日 王 世 子 百 官 朝 賀 儀, 王 世 子 嬪 朝 賀 儀, 正 至 會 儀, 中 宮 正 至 誕 日 命 婦 朝 賀 儀, 中 宮 正 至 會 命 婦 儀, 中 宮 正 至 誕 日 王 世 子 朝 賀 儀, 王 世 子 嬪 朝 賀 儀, 中 宮 正 至 誕 日 百 官 朝 賀 儀, 正 至 生 辰 百 官 賀 王 世 子 儀, 朔 望 王 世 子 百 官 朝 賀 等 是 也, 目 今 冕 服 新 降, 東 宮 冕 服 及 百 官 章 服 亦 已 製 備, 前 項 各 儀, 雖 不 得 一 一 擧 行, 其 中 不 可 廢 之 大 禮, 則 似 當 臨 時 稟 裁 講 行, 敢 啓, 傳 曰, 允, ( 宣 祖 実 録 권155, 35년 10월 25일 계축조) 禮 曹 의 上 啓 에 의하면, 전란으로 章 服 ( 禮 服 )을 갖출 수 없고, 그 때문에 왕조 정부의 의례서, 즉 國 朝 五 禮 儀 에 수록된 각종 하례는 모두 정지되고 실제로 거행되지 않았 다. 이 실록 기사에 보이는 正 至 誕 日 王 世 子 百 官 朝 賀 儀 란 왕세자와 백관이 正 朝 冬 至 를 축하하는 朝 賀 禮 (국왕의 생일도 이에 준한다)을 가리키며, 正 至 會 儀 는 朝 賀 禮 에 이어서 궁궐에서 개최되는 会 禮 宴 을 뜻한다. 145) 望 闕 禮 는 명 황제를 위하여, 朝 賀 禮 는 조선 국 왕을 위하여 명절을 축하하는 궁중의례이지만,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라는 비상시에 朝 賀 禮 보다 望 闕 禮 를 우선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이 해의 正 朝 의 기록에 의하면, 선조는 이른 아침부터 백관을 거느리고 望 闕 禮 를 거행했고, 나중에 중추부판사(종1품) 李 徳 馨 이 인솔하는 대신과 2품 이상의 고급관료가 선조를 問 安 했다고 전하며(<표 2> 43), 146) 문무백관이 모두 모여 朝 賀 禮 를 올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壬 辰 播 遷 때 분실한 선조의 誥 命 과 冕 服 은 이제 萬 曆 帝 가 다시 하사하였고, 147) 왕세자의 冕 服 과 백관의 예복 도 그럭저럭 갖추었다. 그리하여 國 朝 五 禮 儀 에서 정한 賀 禮 를 모두 거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폐지할 수 없는 大 禮 는 임시로 국왕의 재가를 얻어서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후에 正 朝 冬 至 朝 賀 禮 가 부활된 것일까? 이 해 11월 동지의 기록을 살펴보 기로 하자. 卯 時, 上 行 冬 至 望 闕 禮, 王 世 子 問 安, 百 官 以 權 停 例 不 陳 賀 前 此, 有 上 敎 故 也, 只 問 安, 答 曰, 知 道, ( 宣 祖 実 録 권156, 35년 11월 10일 정묘조) 正 朝 와 마찬가지로 선조는 우선 萬 曆 帝 가 맞이한 동지를 축하하려고 望 闕 禮 를 행했 다. 이어서 光 海 君 이 선조에게 문안을 드리고, 문무백관 역시 문안드리는 것에 그치고 145) 國 朝 五 禮 儀 권3, 嘉 禮, 正 至 王 世 子 百 官 朝 賀 儀 [ 誕 日 賀 附 ]조 및 正 至 會 儀 조. 146) 卯 初, 上 親 臨 率 百 官, 行 正 朝 賀 禮, 大 臣 判 中 樞 府 事 李 德 馨 爲 班 首 及 二 品 以 上 問 安, 答 曰, 知 道 ( 宣 祖 実 録 권145, 35년 정월 1일 갑오조). 147) 聖 節 使 趙 挺 等 回 自 京 師, 帝 賜 誥 命 冕 服 [ 壬 辰 播 遷, 命 服 莫 守, 至 是 往 請 而 補 賜 焉 ], 上 親 迎 于 郊 外, 至 闕 内 行 四 拜 禮, 受 中 外 賀, 加 百 官 資, 頒 敎 于 中 外 ( 宣 祖 実 録 권146, 35년 2월 8일 신미조).
38 8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있다(<표 2> 45). 요컨대 동지 朝 賀 禮 는 약식의 權 停 禮 로 끝내고, 國 朝 五 禮 儀 에서 정한 것처럼 문무백관이 조선 국왕을 위하여 성대하게 동지를 축하하는 일은 없었다. 실 록 기사의 割 註 에 이보다 이전에 국왕 전하의 명령이 내렸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볼 때, 선조는 사전에 동지 朝 賀 禮 를 약식으로 거행하도록 지시했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명절에 거행되는 朝 賀 禮 의 간략화는 그 후에도 상례화되었다. 훗날 선조 38년 10월에 우승지는 이번에 국왕 전하께서는 다시 탄신일과 동지의 朝 賀 禮 를 약식으로 하 도록 왕명을 내리셨다. 우리 신하들의 심정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고 서두를 떼고 朝 賀 禮 의 부활을 선조에게 요청하게 된다. 148) 원래 조선에서는 명절이 되면 백관들이 모두 의용을 갖춘 궁궐로 나아가 예물을 올리고 龍 顔 을 우러르며, 신하로서의 복종을 표현하 는 舞 踏 禮 와 축하의 말을 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10여년 동안 명절 때마다 權 停 禮 를 하명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正 朝 동지의 朝 賀 禮 가 정체되어 있던 것은 명 백하다. 그리하여 右 承 旨 는 이후부터 왕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朝 賀 禮 를 거행하도록 선조에게 요청했다. 물론 대신들의 생각도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선조는 반드시 약식으 로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회답했다. 그 결과 이 해 11월 동지 때 선조가 望 闕 禮 를 끝마치자 왕세자 光 海 君 은 백관을 거느 리고 朝 賀 禮 를 행하고 있다(<표 2> 54). 149) 다만 正 朝 동지에 왕세자가 백관을 거느리 고 朝 賀 禮 를 거행했던 것은 선조대에는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대체로 당시는 종묘와 궁 궐의 개축 및 수선을 우선했기 때문에 비좁은 임시 궁궐에서 望 闕 禮 와 朝 賀 禮 를 거행하 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150) 148) 右 承 旨 鄭 穀 以 禮 曹 言 啓 曰, 今 此 誕 日 及 冬 至 陳 賀 之 禮, 又 命 權 停, 群 下 之 情 不 勝 缺 然, 凡 遇 節 日, 百 僚 咸 造 明 庭, 備 其 儀 容, 修 其 禮 物, 瞻 望 日 表, 相 與 舞 蹈, 而 上 壽 稱 賀 者, 臣 子 之 至 情 也, 十 餘 年 來, 自 上 每 下 權 停 之 敎, ( 中 略 ) 兩 日 陳 賀 時, 親 臨 擧 動, 雖 不 敢 更 爲 啓 達, 亦 有 權 停 例 行 禮 之 規, 自 今 以 後, 遇 節 日, 容 令 王 世 子 率 百 官 行 此 禮, 則 臣 子 享 上 之 道, 庶 幾 少 伸, 大 臣 之 意 亦 然, 敢 此 仰 稟, 傳 曰, 不 必 ( 宣 祖 実 録 권192, 38년 10월 22일 계해조). 149) 上 行 望 闕 禮, 王 世 子 率 百 官, 行 陳 賀 禮 ( 宣 祖 実 録 권193, 38년 11월 12일 임오조). 150) 辰 時, 上 御 別 殿, ( 中 略 ) 柳 永 慶 (= 領 議 政 兼 經 筵 領 事 ) 曰, 宗 廟 宮 闕 不 可 不 營 建, 宜 先 料 理 可 也, 朴 弘 老 (=예조판서 겸 特 進 官 ) 曰, 自 上 接 見 天 將 之 時 及 望 闕 禮 時, 大 内 甚 狹, 百 官 班 行 不 成 模 樣, 西 墻 外 有 空 地, 構 一 小 室 以 爲 御 殿, 用 於 朝 會 時 何 如, 上 曰, 可 爲 則 爲 之,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193, 38년 11월 3일 계유조).
39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87 2) 宣 祖 즉위 40년째의 望 闕 禮 國 朝 五 禮 儀 에 의하면 조선 국왕이 명으로 사절을 파견하는 경우, 외교문서인 表 ( 千 秋 使 의 경우는 箋 )를 使 節 에게 주고, 景 福 宮 勤 政 殿 의 正 門 인 勤 政 門 까지 使 節 을 전송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왕조국가의 의례를 拜 表 儀 라고 하며, 그 의례공간, 즉 문무 백관 및 의장대의 배치는 正 朝 冬 至 聖 節 의 望 闕 禮 를 행하는 경우와 거의 같다. 151) 예를 들면 萬 曆 29년(선조 34) 10월에 명에서 萬 曆 帝 가 皇 長 子 를 황태자(나중의 光 宗 泰 昌 帝 ) 로 책봉하자 152) 이듬해 정월에 조선정부는 황태자 책봉을 축하하는 進 賀 使 를 파견하며, 그때 선조는 몸소 拜 表 儀 를 거행하였다. 153) 선조 35년 5월의 실록 기사에는 辰 時 (=오 전 8시경)에 上 께서 千 秋 拜 箋 禮 를 행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선조는 명으로 千 秋 使 를 파견할 때 이른 아침부터 拜 箋 儀 를 거행하고 있다. 154) 선조에게는 처음 치르는 拜 箋 儀 이며, 시행 방법을 둘러싸고 정부 내부에서 약간의 혼란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155) 이어서 같은 해 8월 11일에는 千 秋 節 을 축하하는 望 宮 禮 를 행했다. 156) 선조 연간에는 이 기록이 처음 보이는데, 千 秋 望 宮 禮 의 시행 기록이 모두 2건임을 확인할 수 있다(<표 2> 44 47). 그런데 이로부터 4년 뒤인 선조 39년 4월에는 특이한 사례 2건이 보인다. 이하에서 그 기록을 열거해 보자(<표 2> 56 57). 卯 時, 行 望 闕 禮, 千 秋 使 洪 慶 臣 書 状 官 李 馨 遠 等 赴 京 師, ( 宣 祖 実 録 권198, 39년 4월 26일 갑자조) 卯 時, 行 望 闕 禮, 聖 節 使 李 覮 書 状 官 柳 慶 宗 等 赴 京 師, (같은 책 권198, 39년 4월 29일 정묘조) 전자는 千 秋 使 로서 예조참판 洪 慶 臣 일행이 명에 파견되었을 당시의 기록이며, 3일 151) 國 朝 五 禮 儀 권3, 嘉 禮, 拜 表 儀 拜 箋 附. 또 國 朝 五 禮 序 例 권2, 嘉 禮, 排 班 圖, 正 至 及 聖 節 望 闕 行 禮 之 圖, 참조. 152) 明 神 宗 実 録 권364, 萬 暦 29년 10월 15일 기묘조. 明 光 宗 実 録 권1, 総 書. 153) 上 親 臨, 行 進 賀 拜 表 禮 ( 宣 祖 実 録 권145, 35년 정월 7일 경자조). 154) 宣 祖 実 録 권150, 35년 5월 1일 임술조. 155) 황제를 상징하는 闕 牌 에 대하여 황태자를 상징하는 宮 牌 가 있을 것은 틀림없지만, 선조는 보 지 못했으므로 禮 曹 에 그것을 조사하라고 명한 기록이 있다. 宣 祖 実 録 권150, 35년 5월 3일 갑자조. 156) 卯 時, 上 行 千 秋 望 宮 禮 ( 宣 祖 実 録 권153, 35년 8월 11일 경자조).
40 8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후에는 聖 節 使 로서 호조참판 李 覮 일행이 역시 北 京 으로 향했다. 157) 언뜻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千 秋 使 와 聖 節 使 의 北 京 파견에 앞서서 선조는 어느 경우든 이른 아침부터 望 闕 禮 를 거행하였다. 조선의 예와 법에서 조선 국왕이 望 闕 禮 를 거행하는 것은 正 朝 冬 至 聖 節 과 千 秋 節 (엄밀하게는 望 宮 禮 라고 한다)이며, 조공사절을 파견할 때 望 闕 禮 를 실 시하는 일은 없다. 조선 국왕으로서는 이례적인 행동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선조 39 년은 正 朝 와 聖 節 에도 통상대로 望 闕 禮 가 거행되었으며, 158) 선조는 이 1년 동안 모두 4 회의 대명 요배의례를 거행한 것이 된다(<표 2> 55~58). 그러면 선조는 왜 聖 節 使 와 千 秋 使 파견에 즈음하여 望 闕 禮 를 거행했던 것일까? 이 해 宣 祖 39년은 宣 祖 의 즉위 40주년에 해당하며, 정월 15일에는 약식 賀 禮 에 이어서 光 海 君 과 百 官 이 각기 賀 箋 을 진상하고 전국에 恩 赦 令 을 頒 布 하였다. 159) 3월 상순에는 宣 祖 에게 대망의 嫡 子 ( 永 昌 大 君 )가 탄생하였고, 160) 더군다나 4월 중순에는 明 의 皇 太 子 에 게 第 1 子 (뒷날의 熹 宗 天 啓 帝, 재위 1620~27년)가 탄생했다는 詔 勅 을 전달하는 明 使 朱 之 蕃 ( 翰 林 院 修 撰, 従 6 品 ) 副 使 梁 有 年 ( 禮 科 左 給 事 中, 従 7 品 ) 일행 161) 을 한양에서 맞이하 고 있으며, 조선 국내외에서는 경축 무드가 높아져 있었던 것이다. 太 平 館 에서 迎 詔 儀 를 무사히 끝낸 宣 祖 는 内 服 同 様 의 대우에 皇 恩 이 망극하다 고 하며 明 使 의 来 朝 에 감사 드리고, 小 邦 은 皇 恩 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보전할 수 있었으니 昊 天 이 망극하다 고 하 며 국가 보전의 皇 恩 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렸다. 162) 이미 壬 辰 倭 乱 은 종식되었고, 조 선과 일본의 徳 川 정권과는 通 信 使 파견의 가부를 놓고 논의 중이던 무렵이었다. 163) 조 157) 당시 조선국왕 명의의 表 箋 은 朝 鮮 史 編 修 会 編, 事 大 文 軌 ( 朝 鮮 史 料 叢 刊 第 7) ( 朝 鮮 総 督 府, 京 城 ) (1935년 3월 影 印. 底 本 은 서울 大 学 校 奎 章 閣 蔵 本 ) 巻 46, 萬 暦 34년 8월 17일자, 朝 鮮 国 王 表 ( 聖 節 賀 表 ), 및 萬 暦 34년 8월 11일자, 朝 鮮 国 王 箋 ( 千 秋 賀 箋 ). 158) 宣 祖 実 録 권195, 39년 정월 1일 경오조, 同 書 권202, 39년 8월 17일 계축조. 159) 午 時, 以 權 停 禮 行 賀 禮, 王 世 子 率 百 官, 進 箋 稱 賀, 頒 赦 文 于 八 道,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195, 39년 정월 15일 갑신조). 160) 宣 祖 実 録 권197, 39년 3월 6일 갑술조. 이날, 領 議 政 柳 永 慶 은 左 副 承 旨 를 통해서 永 昌 大 君 의 탄생을 축하하는 賀 禮 의 거행을 건의하였다. 당시 光 海 君 에 대한 柳 永 慶 의 견제는 具 徳 會, < 宣 祖 代 후반(1594~1608) 政 治 体 制 의 재편과 政 局 의 動 向 > 韓 国 史 論 20 集 (서 울 大 学 校 人 文 大 学 国 史 学 科, 서울) 262~265 ; 韓 明 基, 광해군-탁월한 외교정책을 펼 친 군주 ( 歴 史 批 評 社, 서울) 75~77 161) 明 神 宗 実 録 권416, 萬 暦 33년 12월 15일 을묘조. 162) 辰 時 末, 上 先 到 太 平 館, 入 幕 次, 兩 使 隨 後 入 來, 上 祗 迎 詔 敕, 行 宣 詔 禮 畢, 上 入 幕 次, ( 中 略 ) 上 詣 天 使 前, 行 拜 禮 後, 上 曰, 皇 孫 誕 生, 大 人 來 臨, 視 同 内 服, 皇 恩 罔 極, 大 人 又 許 留 詔, 尤 極 多 謝, 天 使 曰, 帝 命 也, ( 中 略 ) 上 行 茶 禮 畢, 上 曰, 小 邦 蒙 皇 恩, 至 今 保 全, 昊 天 罔 極,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 198, 39년 4월 11일 기유조).
41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89 선왕조를 둘러싼 동아시아 정세도 변모했지만, 선조의 萬 暦 帝 에 대한 皇 恩 은 흔들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明 使 의 漢 城 체재 중에 전 領 議 政 李 恒 福 등이 明 使 에게 光 海 君 의 王 世 子 冊 封 을 요청하는 呈 文 ( 陪 臣 의 이름으로 발급하는 문서)을 제출하고 萬 暦 帝 에게 上 奏 를 의뢰하였다. 164) 光 海 君 은 壬 辰 倭 乱 발발 직후 王 世 子 로 冊 立 되었지만, 宣 祖 의 嫡 子 가 아닌 庶 子 여서 아직까지 明 으로부터 정식으로 朝 鮮 의 王 世 子 로 승인받지 못했기 때 문이다. 呈 文 을 받은 明 使 는 王 世 子 冊 封 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使 臣 이 관여할 수는 없다 고 의뢰를 거부하며 呈 文 을 돌려주었다. 165) 光 海 君 의 책봉문제가 그에게 反 明 感 情 을 품을 여지를 제공했다는 것은 이미 韓 明 基 씨가 지적하였다. 166) 아마도 4월 하순에 실시 된 千 秋 使 와 聖 節 使 파견에 따른 望 闕 禮 의 배경에는 光 海 君 의 冊 封 을 기대하는 정치적 의미도 있었음에 틀림없다. 뒷날 宣 祖 는 冬 至 望 闕 禮 도 거행할 예정이었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직전에 중지 하도록 하명하였다(< 表 2> 58). 선조는 望 闕 禮 를 시행할 수 없는 일은 매우 유감 이 라고 그 심정을 承 政 院 에 말하였다. 167) 여기서 상기되는 것이 成 宗 의 발언이다. 이미 언 급한 것처럼 成 宗 은 내가 望 闕 禮 를 행할 때, 몸은 여기 조선에 있지만 친히 황제를 배 알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168) 짧은 기록이기는 하지만 조선 전기 에 있어서 望 闕 禮 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선 국왕은 매년 冬 至 때는 冬 至 使 를, 명 황제의 생일에는 聖 節 使 를 파견하는 등 명절 때마다 陪 臣 의 자격 으로 조공사절을 파견함으로써 對 明 事 大 의 예를 극진하게 올렸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163) 中 村 栄 孝, 전게서 < 三 江 戸 時 代 の 日 鮮 関 係 > 264 ; 三 宅 英 利, 전게서 < 第 二 篇 第 一 章 幕 藩 体 制 確 立 期 の 通 信 使 > 155~ ) 宣 祖 実 録 권198, 39년 4월 14일 16일조 ; 事 大 文 軌 권46, 萬 暦 34년 4월 16일자, 朝 鮮 国 原 任 議 政 府 領 議 政 李 恒 福 等 呈 禮 部 ( 請 封 世 子 事 百 官 呈 ) 165) 右 承 旨 宋 駿 以 禮 曹 言 啓 曰, 昨 日 百 官 呈 文 于 兩 天 使, 則 答 曰, 此 乃 重 事, 伱 國 奏 聞 于 天 朝, 則 禮 部 禮 科, 自 當 處 置, 非 出 使 之 人 所 預 知 云, 呈 文 還 出 給 矣, 傳 曰, 知 ( 宣 祖 実 録 권198, 39년 4월 17일 을묘조). 166) 韓 明 基, 전게서 <제2부 제1장 광해군 초 중반 조명 사이의 쟁점> 187~195 ; 同, 전게 광해 군 72~74 167) 行 都 承 旨 黄 暹 以 本 院 意 啓 曰, 聖 候 愆 和, 方 在 調 攝 之 中, 冬 至 望 闕 禮, 若 冒 寒 行 之, 則 必 致 添 傷, 事 勢 如 此, 決 不 可 爲, 臣 等 方 議 請 停, 今 承 下 敎, 極 爲 允 當, 本 朝 陳 賀, 則 八 方 既 已 進 箋, 王 世 子 大 臣 率 百 官 行 禮, 自 上 雖 不 得 親 臨, 自 有 權 停 禮, 恐 不 可 全 然 闕 之, ( 中 略 ) 傳 曰, 望 闕 禮 不 得 行 之, 極 爲 未 安, 而 方 患 痰 喘, 不 得 出 外, 勢 難 行 禮 矣, 本 朝 陳 賀, 則 尤 不 必 行 之 事, 權 停 爲 可 ( 宣 祖 実 録 권 205, 39년 11월 21일 병술조). 이미 전국에서 冬 至 를 축하하는 箋 이 漢 城 에 도착했으며, 당일은 宣 祖 가 불참한 채 光 海 君 과 大 臣 이 百 官 을 거느리고 朝 賀 禮 를 거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68) 전게, 주17)의 成 宗 実 録 권284, 24년 11월 8일 기해조 참조.
42 9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蕃 王 으로서 직접 帝 都 북경으로 가서 명 황제에게 배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조선 국왕 은 부득이 그 대체수단으로 望 闕 禮 를 거행하는 것이다. 조선 국왕에게 있어서 望 闕 禮 는 天 子 를 알현하는 것과 동등한 國 事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李 成 茂 씨는 조선 국왕 의 정치권력의 하나로서 외교권에 주목하고, 국왕이 직접 외국에 가는 일은 없었으나 ( 望 闕 禮 만은 행했다), 외국 사신은 직접 접견했다 고 언급했던 적이 있다. 169) 그러나 望 闕 禮 만은 행했다 는 서술은 이 儀 禮 의 성격을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望 闕 禮 란 조선 국왕이 직접 紫 禁 城 의 황제를 알현하는 것과 동등한 대명외교의례이며, 조선 국내에서는 이것을 정치권력으로 이용하고 있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Ⅲ. 日 本 國 王 豊 臣 秀 吉 의 책봉의례 1. 일본국왕 책봉사 楊 方 亨 의 復 命 報 告 일본국왕 책봉사 李 宗 城 이 釜 山 에서 도망간( 宣 祖 29년 4월) 후, 明 정부에서는 副 使 楊 方 亨 을 正 使 로, 遊 撃 沈 惟 敬 을 副 使 로 승격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종래에 책봉사를 人 選 할 때, 琉 球 国 王 에 대하여는 文 臣 을, 虜 王 즉 蠻 族 의 왕에 대하여는 武 官 을 파견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또한 北 京 에서 미리 사자를 파견한다는 시간적인 지연도 고려한 결과 萬 暦 帝 가 兵 部 尚 書 石 星 의 上 奏 를 받고 최종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170) 외국은 영구불 변으로 책봉체제 속에 가둬둘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황제 171) 에게도 다분 히 문제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한편 豊 臣 秀 吉 은 이들 明 使 일행의 来 日 을 기다리고 있었 다. 이미 文 禄 4년( 宣 祖 28, 1595) 5월 하순에 秀 吉 은 小 西 行 長 寺 沢 正 成 앞으로 沈 惟 敬 169) 李 成 茂, 전게서 <제1부 제1장 조선시대의 왕권> ) 明 神 宗 実 録 권297, 萬 暦 24년 5월 4일 경오조 ; 三 木 聰, 전게 < 万 暦 封 倭 考 ( 二 )> 23~25 ; 壬 辰 倭 乱 후 명 정부에서는 해상 항해의 위험성 및 재정상의 문제에 華 夷 의 구별이라는 명분론까 지 뒤엉켜서 福 建 에서 琉 球 使 者 에게 詔 勅 을 내리고 책봉하는 領 封 論 과, 琉 球 에 武 官 1명을 파견 하여 책봉하는 頒 封 論 이 논의되었는데, 琉 球 쪽은 1601년에 종전대로 文 官 을 파견하도록 요청해 서 萬 暦 帝 의 재가를 얻었다. 이 領 封 論 과 頒 封 論 에 대해서는 金 城 正 篤, 沖 縄 から 中 国 を みる- 歴 史 論 集 ( 沖 縄 타임즈 社 ) < 第 Ⅲ 章 4 領 封 論 頒 封 論 - 冊 封 をめぐる 議 論 > 272~280 ; 上 原 兼 善, 幕 藩 制 形 成 期 の 琉 球 支 配 ( 吉 川 弘 文 館 ) < 第 二 章 豊 臣 政 権 の 朝 鮮 出 兵 と 琉 球 国 > 43~46 참조. 171) 岡 野 昌 子, 전게 <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と 中 国 > 154
43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91 에게 제시할 것을 예상했던 3개조의 朝 鮮 差 軍 将 에게 說 諭 하는 大 明 朝 鮮 과 日 本 和 平 의 条 目 을 보냈다. 제1조는 朝 鮮 의 王 子 1명을 秀 吉 의 大 名 으로 등용하고 朝 鮮 의 4 道 를 준다, 제2조는 15개소의 일본쪽 城 塞 (이른바 倭 城 ) 중에 10개소를 파괴한다, 제3조 는 金 印 을 사용한 勘 合 을 부활한다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 제3조에는 大 明 皇 帝, 朝 鮮 国 과의 和 平 을 懇 求 하므로 이를 허락한다. 그러므로 예의를 갖추어 詔 書 를 내리고, 大 明 勅 使 가 日 本 으로 건너와야 한다 고 되어 있다. 日 明 간에 講 和 의 성격 해석에 오해가 생 긴 채로 日 本 에서는 明 使 를 맞이할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172) 예수회 年 報 에 따르면, 慶 長 원년( 宣 祖 29) 8월 하순에 사카이( 堺 )에서 오사카로 향하 는 冊 封 使 의 모습에 대하여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는 사절 일행은 8(9)월 20일에 오사카에서 9천( 小 ) 걸음인 사카이에서 평탄하고 좋은 길을 따라 출발했는데, 그 길에는 사카이의 귀부인들이 길을 가는 사절 일행을 구경할 수 있도록 길 양쪽 에 여러 층으로 된 관람석을 설치해 두도록 하였다. ( 中 略 ) 이어서 간격이 너무 벌어지지 않도 록 正 使 의 수행원들이 두 줄로 열을 지어 행진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의 전방에는 10 本 의 진 홍색과 鮮 黄 色 깃발이 앞서 갔다. 이들 뒤쪽으로는 文 字 板 혹은 판자에 둥근 글씨체로 (너를 일본국왕에 封 한다 라고) 크게 쓴 조항을 운반하고 있었다. 고 보고하였다. 173) 江 戸 時 代 의 朝 鮮 通 信 使 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다. 이 太 閤 이 중국 사 절 일행을 알현했던 경위 의 앞부분에는 京 都 에서 司 祭 아무개가 太 閤 의 중국사절 일 행 알현 모습을 보고했다 174) 고 하므로, 어떤 司 祭 의 보고서를 프로이스가 다시 정리한 다음에 로마로 보냈을 것이다. 이 책봉사 일행의 퍼레이드 모습에 주목했던 山 室 恭 子 씨 는 참으로 明 帝 가 秀 吉 을 日 本 国 王 에 책봉한다는 취지를 크게 쓴 판자 를 높이 쳐들고 행진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고 서술했다. 175) 다만 라틴어 서간집이 텍스트인 이 보 172) 佐 島 顕 子, < 壬 辰 倭 乱 講 和 の 破 綻 をめぐって> 年 報 朝 鮮 学 제4호, 27~30 ; 中 野 等, 전 게서 <Ⅳ 講 和 交 渉 の 推 移 > 278~ ) 松 田 毅 一 監 訳, 十 六 七 世 紀 イエズス 会 日 本 報 告 集 第 Ⅰ 期 第 2 卷 (1594 年 年 ) ( 同 朋 舎 出 版, 1987년 9월) <10 一 五 九 六 年 ( 九 月 十 八 日 付, 都 発 信 ) 十 二 月 二 十 八 日 付, 長 崎 発 信, ルイス プロイスの 年 報 補 遺 > ( 家 入 敏 光 訳 ) 316~318. 또 이 화평교섭을 예수회 선교사의 기록으로 보완 하면서 再 考 했던 Arcadio Schwade S.J. < 朝 鮮 の 役 における 日 明 和 平 交 渉 について- 主 として 外 国 史 料 による> キリシタン 文 化 研 究 会 編, キリシタン 研 究 제11집 ( 吉 川 弘 文 館 ) 321 참조. 174) 松 田 毅 一 監 訳, 전게서 <10 一 五 九 六 年 ( 九 月 十 八 日 付, 都 発 信 ) 十 二 月 二 十 八 日 付, 長 崎 発 信, ルイ ス フロイスの 年 報 補 遺 > 315~ ) 山 室 恭 子, 黄 金 太 閤 - 夢 を 演 じた 天 下 人 ( 中 央 公 論 社 ) 155 ; 金 文 子, <이벤 트로서의 朝 鮮 通 信 使 - 豊 臣 政 権 期 에 파견된 통신사를 중심으로> 日 本 歴 史 研 究 제22집 (서 울). 나중에 曺 圭 益 他 編,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12(정치 선박 제도 종교 교육 식품 기
44 92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고서의 ( ) 안은 訳 者 의 補 足 語 또는 注 에 넣어야 할 短 文 176) 이므로, 과연 행렬 뒷부분 의 文 字 板 에 封 汝 爲 日 本 國 王 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는지, 요컨대 이제부터 秀 吉 이 日 本 国 王 에 책봉된다는 것이 오사카의 군중들에게 공공연한 사실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신중 을 기해야 할 것이다. 秀 吉 을 冊 封 하려는 성대한 儀 仗 과 楽 隊 에 둘러싸인 明 使 일행이 오사카로 향했다는 것은 프로이스의 證 言 대로일 테지만, 아마도 秀 吉 은 여전히 책봉의 의미도 勘 合 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조 29년 9월 2일(일본력 9월 1일), 명의 일본국왕 책봉사 楊 方 亨 과 부사 沈 惟 敬 은 大 坂 城 에서 豊 臣 秀 吉 을 접견하고 萬 曆 帝 가 보낸 일본국왕 책봉의 誥 命 勅 諭 와 일본국왕 의 金 印 및 冠 服 을 하사했다. 이날의 책봉의례에 이어서 다음날 3일의 향연도 지체 없이 끝냈으나 秀 吉 이 제시했던 강화조건에 관한 회답은 없었고, 이에 일명 강화교섭은 파탄 이 났다. 177) 강화교섭 파탄의 직접적인 원인을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이 178) 있기는 하지 만, 秀 吉 이 명의 책봉을 받은 것 자체는 지금으로서는 문제되지 않는다. 당시 萬 曆 帝 가 秀 吉 을 일본국왕으로 책봉했던 誥 命 과 책봉 이유를 기록한 勅 諭 는 大 阪 歷 史 博 物 館 과 宮 内 廳 書 陵 部 에 각기 현존하며, 京 都 의 妙 法 院 에는 秀 吉 에게 하사했던 기린 문양의 常 服 (문무관이 조정에 입궐할 때의 평복)을 비롯하여 冠 服 22점이 전한다. 179) 그러면 秀 吉 을 일본국왕에 임명하는 책봉의례는 어떻게 거행되었을까? 선조 29년 12 월 상순의 실록 기사에 따르면, 秀 吉 과 접견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은 채 귀국길에 올 예) ( 学 古 房, 서울, 2008년 4월에 再 録 ) 64도 山 室 씨의 이 서술을 답습한다. 176) 松 田 毅 一 監 訳, 十 六 七 世 紀 イエズス 会 日 本 報 告 集 第 Ⅰ 期 第 1 巻 (1588 年 年 ) ( 同 朋 舎 出 版 ) 凡 例. 177) 石 原 道 博, 전게 文 禄 慶 長 の 役 108~109 ;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201~ 203 ; 李 烱 錫, 전게서 < 第 三 篇 第 十 一 章 第 四 節 交 渉 の 終 局 > 500~504 ; 北 島 万 次, 전게 豊 臣 秀 吉 の 朝 鮮 侵 略 179 ; 三 鬼 清 一 郎, 前 掲 < 関 白 外 交 体 制 の 特 質 をめぐって> 87 ; 鄭 樑 生 前 揭 書 < 第 五 章 第 六 節 丁 酉 の 役 > 541~ ) 예를 들면 명측 사료에 기초하여 강화교섭의 추이를 서술한 邊 土 名 朝 有 씨는 조선의 大 臣 이 와서 賀 禮 할 것을 요구했음에도 말단 관리 黄 慎 을 파견했던 것이 秀 吉 을 노하게 했다고 한다( 同, 전게 서 < 第 一 部 第 四 章 明 の 冊 封 体 制 と 文 禄 慶 長 の 役 > 150~151). 한편 佐 島 顕 子 씨는 조선 측은 豊 臣 政 権 에 편입될 意 志 는 없었으며, 明 역시 秀 吉 의 조선 지배를 용인하지 않았던 데서 강화 파탄의 원인을 구하며( 同, 전게 < 壬 辰 倭 乱 講 和 の 破 綻 をめぐって> 36~37), 中 野 等 씨는 한반도에 서 완전히 철수하는 문제가 강화 파탄의 주된 요인으로 본다( 同, 전게서 <Ⅳ. 講 和 交 渉 の 推 移 > 290~292). 179) 大 庭 脩, 古 代 中 世 における 日 中 関 係 史 の 研 究 ( 同 朋 舎 出 版 ) < 第 十 三 章 豊 臣 秀 吉 を 日 本 國 王 に 封 ずる 誥 命 > ; 中 村 栄 孝, <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國 王 冊 封 に 関 する 誥 命 勅 諭 と 金 印 につい て> 日 本 歴 史 제300호, 116~119 ; 河 上 繁 樹, <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國 王 冊 封 に 関 する 冠 服 について - 妙 法 院 伝 来 の 明 代 官 服 > 學 叢 ( 京 都 國 立 博 物 館 ) 제20호
45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93 랐던 조선통신사 黄 慎 ( 敦 寧 府 都 正. 정3품 당상관)과 부사 朴 弘 長 ( 掌 樂 院 正, 나중에 上 護 軍. 정3품 堂 上 官 ) 일행 180) 은 책봉사가 명나라 兵 部 에 상주했던 稟 帖 (하급 관리가 상급자 앞으로 보내는 문서) 2통과 秀 吉 의 謝 恩 表 1통( 僞 作 )을 등사한 다음에 한성으로 보내고 있다. 181) 이 가운데 遊 撃 沈 惟 敬 이 兵 部 앞으로 보낸 稟 帖 을 보도록 하자. [ 沈 遊 擊 兵 部 稟 帖 曰 ], 爲 完 報 東 封 事, 閏 八 月 十 八 日 卑 職 (= 沈 惟 敬 ) 等, 奉 到 欽 鋪 龍 節 璽 書 等 件, 秀 吉 擇 以 九 月 初 二 日, 迎 於 大 坂 受 封, 卑 職 先 往 敎 禮, 奉 行 惟 謹, 至 期, 迎 請 册 使, 直 至 中 堂, 頒 以 誥 印 冠 帶 服 等 項, 率 衆 行 五 拜 三 叩 頭 禮, 件 件 頭 項, 習 華 音, 呼 萬 歳, 望 闕 謝 恩, 一 一 如 儀, 禮 畢, 開 宴 使 臣 及 隨 行 各 官, 是 晩, 秀 吉 親 詣 卑 職 寓 所, 稱 謝, 次 早, 謁 謝 楊 正 使, 饋 以 衣 刀 甲 馬, 各 馬 官 亦 饋 刀 幣, 極 言 感 戴 天 恩 不 盡, 再 三 慰 勞, ( 中 略 ) 萬 曆 二 十 四 年 十 月 日, ( 宣 祖 実 録 권83, 29년 12월 7일 기사조) 이 上 奏 文 의 제목은 東 封 을 完 報, 즉 豊 臣 秀 吉 의 일본국왕 책봉을 완료했다고 보고 한 것이다. 이 해 윤8월(일본력 8월) 18일에 책봉사 楊 方 亨 과 沈 惟 敬 일행은 군사권을 천자로부터 위임받았다는 표시인 龍 節 (용 장식이 들어간 旗 印 )과 璽 書 ( 詔 勅 )를 휴대하고 일본 사카이 항에 도착했다. 秀 吉 은 9월 2일 책봉사를 오사카성에서 맞이하고 受 封, 즉 책봉을 받게 된다. 다만 의례절차가 번잡하기 때문에 沈 惟 敬 이 사전에 행례절차를 가르 쳐 주었는데, 秀 吉 은 그저 지시하는 대로 공손히 따랐다고 한다. 중앙의 어전으로 안내 받은 책봉사는 誥 命 과 金 印 외에 皮 弁 冠 服 (본래 朔 望 視 朝 四 夷 朝 貢 때 입는 祭 服 의 일 종)을 하사했다. 이 皮 弁 冠 服 은 琉 球 国 王 과 동등한 郡 王 ( 皇 帝 의 孫 )의 반열이지만, 예전 180) 通 信 使 파견 전야의 使 節 의 명칭을 둘러싼 조선정부 내부의 논의 및 沈 惟 敬 의 接 判 使 였던 黄 慎 과 大 丘 府 使 朴 弘 長 에 대한 実 職 敍 授 에 대해서는 三 宅 英 利, 전게서 < 第 一 篇 第 二 章 通 信 使 の 初 期 形 態 > 134~136 ; 孫 鍾 聲, <강화회담의 결렬과 일본의 재침> 国 史 編 纂 委 員 会 編, 한국사 29(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同 委 員 会, 果 川 ) 105~107 ; 김대길, <병신년( 丙 申 年, 1596) 통신사행( 通 信 使 行 )에 관한 연구-황신( 黄 慎 )의 일본왕환일기( 日 本 往 還 日 記 ) 박홍장 ( 朴 弘 長 )의 동사록( 東 槎 録 ) 을 중심으로> 朴 漢 男 他, 조선시대의 정치와 제도(조선 시대 양반사회와 문화 2) ( 集 文 堂, 서울) 117~122 참조. 181) 敦 寧 都 正 黃 愼 上 護 軍 朴 弘 長 等, 將 册 使 等 兵 部 稟 帖 三 道 秀 吉 謝 表, 謄 書 上 送 ( 宣 祖 実 録 권 83, 29년 12월 7일 기사조). 日 本 國 王 臣 豐 臣 秀 吉, 誠 惶 誠 恐, 稽 首 稽 首 라는 글로 시작하는 秀 吉 의 謝 恩 表 ( 同 書 同 條 수록)는 일찍이 源 道 義 ( 義 満 )가 成 祖 永 楽 帝 에게 보낸 表 文 과 동일한 형식 이므로, 石 原 道 博 씨는 이것을 沈 惟 敬 에 의한 위작일 것으로 판단하였다( 同, 전게 文 禄 慶 長 の 役 114~115, 211). 日 本 往 還 日 記 萬 暦 丙 申 9월 초8일 辛 丑 条 에는 ( 前 略 ) 楊 天 使 曰, 伱 休 説, 天 朝 事 已 完, 我 已 頒 敕 賜 印, 而 謝 恩 表 文, 至 今 討 未 得, ( 後 略 ) 라고 했다. 黄 慎 의 日 本 往 還 日 記 는 中 村 栄 孝 解 題, < 萬 暦 丙 申 秋 冬 通 信 使 一 行 日 本 往 還 日 記 > 靑 丘 学 叢 第 11 号 ( 京 城, 国 書 刊 行 会, 1971년 4월 復 刻 )를 이용했다. ママ
46 94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의 室 町 将 軍 이 朝 鮮 国 王 과 동등하게 親 王 ( 皇 子 ) 반열의 九 章 冕 服 을 받았던 사실을 감안 하면 秀 吉 은 명백히 격하된 취급을 받았다. 182) 秀 吉 은 여러 다이묘를 거느리고 五 拜 三 叩 頭 의 예를 올렸으며, 의례의 순서대로 중국어로 만세 를 부르고 望 闕 하여 은혜에 감사 를 드렸다고 한다. 이리하여 豊 臣 秀 吉 을 일본국왕으로 책봉하는 의례는 아무런 문제없 이 끝났고, 책봉사와 수행원을 연회장으로 초대하였다. 조선국왕이 明 使 를 위하여 행하 는 翌 日 宴 에 상당하는 접대 의례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선조 29년 12월의 실록 기사는 沈 惟 敬 의 稟 帖 에 이어 정사 楊 方 亨 이 병부 앞으로 보낸 掲 帖 (하급기관이 上 級 機 関 에 제 출한 문서의 일종)을 수록하고 있으며, 9월 2일 당일에 역시 秀 吉 이 궁궐을 바라보며 五 拜 三 叩 頭 의 예를 행하다 라고 기록했다. 183) 한편, 9월 2일 당일에 조선통신사 黄 慎 일행은 秀 吉 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에 책 봉의례 자리 에 동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黄 慎 의 일본기행 日 本 往 還 日 記 에 따르면 關 白 秀 吉 이 책봉을 받았고, 또한 萬 暦 帝 의 陪 臣 이 된 徳 川 家 康 이하 40명의 다이묘들 에게 明 의 冠 服 과 職 帖 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黃 慎 은 그 다음날인 3일에 전해 들었다. 184) 또 黄 慎 은 천조는 이미 사절을 보내 책봉하였다. 나는 잠시 이를 참았다 는 秀 吉 의 말 을 日 本 往 還 日 記 에 적었다. 185) 어찌됐든 秀 吉 이 책봉을 수락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 지가 없다. 그러면, 실제로 일본국왕 책봉사 楊 方 亨 은 이번 임무를 명 정부에 어떻게 보고했던 것 일까? 秀 吉 이 책봉을 수락했다는 정보는 이 해 11월 중순, 이어서 12월 하순에 명 정부 에 도착했다. 186) 그런데 그 사이에 조선 국왕의 咨 文 을 통해서 加 藤 清 正 이 이번 겨울에 182) 豊 見 山 和 行, 前 掲 書 <Ⅰ 第 1 章 明 朝 冊 封 関 係 からみた 琉 球 王 権 と 身 分 制 > 34~38 183) 天 使 兵 部 掲 帖 曰, 册 封 日 本 正 使 等 官 五 軍 營 等 掲 衙 門 署 都 督 僉 事 楊 (= 楊 方 亨 ) 等, 爲 完 報 東 封 事, ( 中 略 ) 倭 將 行 長 馳 報 秀 吉, 擇 於 九 月 初 二 日, 奉 迎 册 命 於 大 坂 地 方 受 封, 職 等 初 一 日, 持 節 前 往, 是 日 即 抵 大 坂, 次 日, 領 受 欽 賜 圭 (= 玉 製 의 笏 ) 印 官 服, 旋 即 佩 執 頂 被, 望 闕 行 五 拜 三 叩 頭 禮, 承 奉 誥 命 受 封 訖, 嗣 至 職 等 寓 所, 再 申 感 激 天 恩, 及 慰 勞 職 等 渉 歴 勞 頓 等 語, ( 中 略 ) 萬 暦 二 十 四 年 九 月 初 五 日 ( 宣 祖 実 録 권83, 29년 12월 7일 기사조). ママ 184) 聞 關 伯 已 爲 受 封, 諸 倭 將 四 十 人, 具 冠 帶 受 官 云, ( 後 略 ) ( 日 本 往 還 日 記 萬 暦 병신 9월 3일 병신조) ママ 185) ( 前 略 ) 關 伯 大 怒 曰, 天 朝 則 既 已 遣 使 册 封, 我 姑 忍 耐, 而 朝 鮮 則 無 禮 至 此, 今 不 可 許 和, ( 後 略 ) ( 日 本 往 還 日 記 萬 暦 병신 9월 6일 기해조) ; 김대길, 전게 <병신년( 丙 申 年, 1596) 통신사행 ( 通 信 使 行 )에 관한 연구> 131 ; 中 野 等, 전게서 <Ⅳ. 講 和 交 渉 の 推 移 > ) 兵 部 題, 董 一 元 報, 關 白 已 于 九 月 初 一 日 受 封, 初 九 日, 册 使 回, 已 到 南 戈 崖 (= 名 護 屋 ), 報 聞, 册 封 日 本 正 使 楊 方 亨 題, 關 白 于 九 月 初 二 日 受 封, 報 聞 (차례로 明 神 宗 実 録 권304, 萬 暦 24년 11월 12일 갑진조, 同 書 권305, 萬 暦 24년 12월 29일 신묘조).
47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95 다시 조선으로 출병할지 모른다는 정보도 입수하였다. 187) 그래서 이번에는 이듬해 萬 曆 25년(선조 30) 3월에 북경으로 돌아온 책봉사 楊 方 亨 의 復 命 報 告 를 보도록 하자. 188) 册 封 日 本 正 使 楊 方 亨 回 京 上 疏, 直 言 封 事 顚 末, 正 欺 罔 以 絶 禍 源, ( 中 略 ) 閏 八 月 十 五 日, 欽 補 諸 物 甫 至, 行 長 馳 奏 秀 吉, 即 擇 九 月 初 二 日, 于 大 坂 受 封, 惟 敬 先 去 敎 禮, 封 時, 委 行 五 拜 三 叩 頭 禮, 呼 萬 歳, 次 日, 至 臣 寓, 稱 説 感 戴 天 恩, ( 後 略 ) ( 明 神 宗 実 録 권308, 萬 曆 25년 3월 己 酉 19 일 기유조) 楊 方 亨 의 보고에 의하면, 책봉을 받을 때 秀 吉 은 沈 惟 敬 이 가르친 대로 五 拜 三 叩 頭 의 예를 올리고 만세 를 불렀다고 한다. 앞에서 보았던 沈 惟 敬 의 稟 帖 및 楊 方 亨 의 掲 帖 을 아울러서 생각하면, 책봉의례의 행례 절차 중에 秀 吉 이 望 闕 했다는 것도 반드시 허위 보고는 아닐 것이다. 약간의 윤색은 있다 해도 이러한 의례적 절차는 四 夷 의 封 王 을 은 혜적를 베푼 것으로 보는 명측의 논리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책봉사로 파견된 楊 方 亨 역시 은혜를 베푼 입장에서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뒷날 청의 谷 應 泰 (1620~1690)가 찬술한 明 史 紀 事 本 末 에 平 秀 吉 은 3일간 목욕재계하고 사절을 맞이 했으며, 책봉을 받을 때는 五 拜 三 叩 頭 와 山 呼 (=만세를 부르는 일)의 예를 행했다 189) 고 되어 있는 것은 楊 方 亨 의 復 命 報 告 를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날 일명 간의 화의 파탄으로 총책임자 兵 部 尚 書 石 星 은 실각하여 사형에 처해졌고, 楊 方 亨 도 해임처분 을 받았다. 2. 景 轍 玄 蘇 와 루이스 프로이스의 증언 조선통신사 黄 慎 일행이 오사카성의 책봉의례 자리 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 187) 薊 遼 總 督 孫 鑛 奏, 朝 鮮 國 王 咨 文 稱, 關 白 因 朝 鮮 不 遣 王 子 致 謝, 復 欲 興 兵, 淸 正 等 今 冬 過 海, 大 兵 明 年 調 進, 乞 要 先 調 浙 兵, 駐 箚 要 害, 以 爲 聲 援, 章 下 兵 部 ( 明 神 宗 実 録 권305, 萬 暦 24년 12월 4일 병인조). 188) 楊 方 亨 의 復 命 報 告 는 邊 土 名 朝 有, 전게서 < 第 一 部 第 四 章 明 の 冊 封 体 制 と 文 禄 慶 長 の 役 > pp 에 전문이 소개되었다. 189) 楊 方 亨 沈 惟 敬 奉 册 如 日 本, 平 秀 吉 斎 沐 浴 三 日, 迎 郊 節 使, 受 封, 五 拜 三 叩 頭 山 呼 禮, 禮 畢, 款 使 者 至 備, ( 後 略 ) ( 明 史 紀 事 本 末 [전게 文 淵 閣 四 庫 全 書 제364책, 수록]권62, 援 朝 鮮, 神 宗 萬 暦 24년 9월조). 다만 石 原 道 博 씨는 지나친 각색일 것 이라고 판단한다( 同, 전게 文 禄 慶 長 の 役 109).
48 9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을 상기하기 바란다. 통신사 일행은 宣 祖 의 国 書 조차 건네지 못한 채 책봉사와 함께 宣 祖 29년 9월 9일 오후에 사카이 항에서 승선하여 다음날 釜 山 으로 출발하였다. 190) 사실 黄 慎 은 귀국에 앞서 군관 趙 徳 秀 에게 밀서를 주어 조선으로 보냈으며, 趙 徳 秀 는 11월에 어전에서 조선통신사 일행이 모두 명나라 사신의 행동과 秀 吉 을 책봉하는 모습을 보 지 못했습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191) 黄 慎 은 군관과 역관을 책봉의례가 거행되는 곳으로 보내 입회시키고 싶다고 명 사신에게 요청했지만, 명 사신이 그럴 필요는 없다며 거절 했다고 한다. 물론 이때 적의 정세가 급변했다 는 밀서를 받은 조선 정부에서는 명에 奏 聞 使 를 보내 사정을 급보하도록 비변사가 요청했고, 선조의 재가를 얻었다. 192) 1개월 뒤인 12월 하순에 선조는 겨우 한성으로 돌아온 黄 慎 을 別 殿 에서 인견하고, 왕명을 받 들고 이역땅 일본을 다녀온 노고를 위로했다. 당시의 모습을 실록 기사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申 時, 上 御 別 殿, 引 見 黄 愼, 上 曰, 爾 以 國 事 往 來 異 域, 多 苦 勞, 愼 曰, 奉 使 無 状, 不 能 傳 命, 臣 罪 當 萬 死, 上 曰, 此 非 奉 使 人 之 罪, 勿 爲 未 安, 且 其 處 賊 情 何 如, 愼 曰, ( 中 略 ) 因 令 明 日, 獨 接 天 使, 翌 日 兩 天 使 行 封, 關 白 立 於 庭 上, 五 拜 三 扣 頭, 敬 受 賜 衣, 其 臣 四 十 餘 人 皆 受 欽 賜 有 差 云, 臣 以 關 白 禁 不 入 參, 故 不 得 親 見, 其 間 曲 折 未 能 詳 知, 而 因 人 傳 聞 亦 難 盡 信, 上 曰, 關 白 行 禮, 何 以 爲 之 云 乎, 愼 曰, 以 倭 服 受 勑, 而 拜 禮 則 或 云 爲 之, 或 云 不 爲 矣,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83, 29년 12월 21일 계미조) 黄 慎 은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갔음에도 불구하고 직책을 다 하지 못한 일을 사죄 하였다. 그러나 선조로서는 일본의 정세, 특히 秀 吉 이 과연 명의 책봉을 받아들였는지 여부가 걱정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黄 慎 의 회답은 沈 惟 敬 과 楊 方 亨 이 兵 部 에 보고 했던 내용과 거의 같았다. 요컨대 9월 2일에 關 白 秀 吉 은 책봉사 앞에서 공손하게 五 拜 三 叩 頭 의 예를 올린 후 冠 服 을 받았으며, 40여 명의 다이묘들도 각기 위계에 따라 관복 190) 日 本 往 還 日 記 萬 暦 병신 9월 9일 10일조. 191) 巳 初, 上 引 見 黄 愼 軍 官 趙 德 秀 朴 挺 豪 等 于 別 殿, 上 曰, 賊 中 所 聞 如 何, 盡 言 之, 德 秀 曰, ( 中 略 ) 九 月 初 一 日, 副 使 先 往 五 沙 蓋 (= 大 坂 ), 關 白 不 見, 上 使 午 後 始 至, 期 初 二 日 相 見 封 受 云, 黄 愼 稟 於 天 使 衙 門, 請 差 軍 官 譯 官 跟 往 受 封 之 處, 以 觀 形 勢 云, 天 使 曰, 不 必 帶 去 云, 故 一 行 之 人, 皆 未 見 天 使 擧 動 及 關 白 受 封 節 目, 上 曰, 然 則 已 行 封 王 禮 乎, 德 秀 曰, 臣 不 得 目 覩, 只 所 聞 如 此 耳, ( 後 略 ) ( 宣 祖 実 録 권82, 29년 11월 6일 무술조). 趙 徳 秀 의 경력은 확실하지 않으며, 나중에 慶 山 県 令 (종5품)이 된 朴 挺 豪 도 직무태만으로 파직되었다는 사실이 전할 뿐이다.( 同 書 권113, 32년 5월 6일 계축조). 192) 備 邊 司 啓 曰, 黄 愼 状 啓 已 到, 賊 情 已 變, 事 勢 至 此, 唯 當 速 具 事 情, 告 急 於 天 朝, 請 出 奏 聞 使, 令 承 政 院 文 書 磨 練, ( 中 略 ) 傳 曰, 依 啓 ( 宣 祖 実 録 권82, 29년 11월 6일 무술조).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219
49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97 을 받았다는 것을 傳 聞 형태로 보고하였다. 확실히 秀 吉 이 五 拜 三 叩 頭 의 禮 를 올렸다는 것은 沈 惟 敬 과 楊 方 亨 도 보고를 끝냈다. 다만 그 자리 가 다다미를 깐 넓은 방이 아니라 庭 上 이라고 했던 것은 黄 慎 이 조선 왕궁의 殿 庭 闕 庭 을 상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문에 선조가 秀 吉 의 행례 모습을 구체적으로 묻자 오사카성에서 접견을 허락받지 못 했던 黄 慎 은 倭 服 을 입고 칙서를 받았는데, 拜 禮 했다고도 하고 拜 禮 하지 않았다고도 합 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黄 慎 은 현장에 없었다. 黄 慎 의 復 命 報 告 는 앞에서 본 楊 方 亨 沈 惟 敬 의 報 告 와 비교하면 약간 애매한 점이 남 는다. 이와 같은 사료상의 제약은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일찍이 中 村 栄 孝 씨는 이 당시의 사정은 일본의 문헌류에 아주 자세한 사실을 전하는 기록도 있지만 강화교섭의 진 상을 알기 어려운데다가, 근세 이래 일본국왕 책봉 등에 관해서 왜곡된 이해가 더해져 왔다. 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193) 예를 들면 秀 吉 이 日 本 国 王 에 책봉된 것을 알자마자 격노하며 冕 服 을 벗어던지고 誥 命 을 부셨다는 頼 山 陽 의 日 本 外 史 (1827년)는 전형적인 근세 이래의 오해일 것이다. 194) 원래 오사카성에서 있었던 秀 吉 의 책봉의례를 전하는 동시대 의 일본쪽 사료가 적은데, 예를 들면 미부 다카스케( 壬 生 孝 亮, )의 일기 孝 亮 宿 禰 記 ( 左 大 史 孝 亮 記 )에서는 秀 吉 이 唐 人 ( 明 使 )과 대면하고, 緞 子 冠 服 등 많 은 進 上 品 이 있었다는 풍문을 전하는데 불과하다. 195) 秀 吉 의 책봉의례를 전하는 일본쪽 사료로서 필자는 다음에 제시하는 景 轍 玄 蘇 의 遺 稿 集 仙 巣 稿 ( 慶 安 3년, 1650 간행, 国 立 国 会 圖 書 館 鶚 軒 文 庫 소장)에 수록된 柳 川 調 信 의 肖 像 賛 196)을 주목하고 싶다. 193)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202. 中 村 씨는 別 稿 에서 이 중요한 외교상의 의례가 어떻게 거행되었는지는 일본의 기록에서 자세히 알 수 없다 고 지적한다. 同, 전게 <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国 王 冊 封 に 関 する 誥 命 勅 諭 と 金 印 について> ) 中 村 栄 孝, 전게 <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国 王 冊 封 に 関 する 誥 命 勅 諭 と 金 印 について> 115~116 ; 石 原 道 博, 전게 文 禄 慶 長 の 役 111~112 ; 李 烱 錫, 壬 辰 戦 亂 史 - 文 禄 慶 長 の 役 ( 下 巻 ) ( 東 洋 圖 書 出 版 ) < 第 五 篇 第 十 八 章 第 二 節 本 戦 役 の 特 徴 > 329~ ) 文 禄 五 年 九 月 四 日, 去 朔 日 於 大 坂 城, 太 閤 有 御 對 面 唐 人, 唐 人 鈍 子 千 端, 唐 冠 六 十 頭, 進 上 之 由, 風 聞 ( 左 大 史 孝 亮 記 改 定 史 籍 集 覧 第 25 冊, 近 藤 活 版 所, 1902 年 6 月, 所 収 ) ; 中 村 栄 孝, 前 掲 <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国 王 冊 封 に 関 する 誥 命 勅 諭 と 金 印 について> 114 ; 河 上 繁 樹, 전게 <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国 王 冊 封 に 関 する 冠 服 について> ) 국립국회도서관은 이 木 版 本 3 冊 외에 写 本 仙 巣 稿 3 冊 도 架 蔵 하고 있는데, 양자를 열람한 결과 인용한 부분에 문자의 차이는 없었다. 이 肖 像 賛 은 1605년에 죽은 柳 川 調 信 ( 傑 岑 宗 英 居 士 ) 을 위하여 기록한 草 案 또는 案 文 ( 最 終 稿 )이며, 流 芳 院 은 그의 菩 提 寺 이다. 荒 木 和 憲 <16 世 紀 末
50 9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 前 略 ) 天 將 重 奏 天 朝, 俾 太 閤 封 日 本 國 王, 翌 年 甲 午 (= 文 禄 3 年 ), 差 楊 沈 二 老 爺, 爲 册 封 之 使, 太 閤 喜 氣 溢 眉, 領 金 印 著 衣 冠, 唱 萬 歳 者 三 次, ( 中 略 ) 慶 長 十 年 龍 集 乙 巳 蜡 月 之 尾, ( 仙 巣 稿 巻 下, 讃 類, 碑 銘 并 像 賛, 流 芳 院 殿 傑 岑 宗 英 居 士 肖 像 賛 并 序 ) 慶 長 10년(1605) 12월 말일자의 이 사료에 따르면, 文 禄 3년( 宣 祖 27)의 시점에서 明 에 서는 秀 吉 의 책봉이 결정된 후 책봉사로서 楊 方 亨 과 沈 惟 敬 일행이 오사카에 도착하였 다. 景 轍 玄 蘇 의 회상에 의하면, 太 閤 秀 吉 은 기쁨에 들떠서 金 印 을 拜 領 하고 冠 服 을 몸 에 걸쳤다. 그리고 만세 를 삼창했다고 한다. 景 轍 玄 蘇 는 柳 川 調 信 과 함께 임진왜란 직 전부터 전쟁 회피 대책과 그 후의 日 明 강화교섭에 분주했던 禅 僧 이며, 誥 命 의 내용도 이미 釜 山 의 일본 陣 営 에서 訳 読 하고 있었다. 197) 당시 몇 안 되는 證 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9월 2일의 책봉의례 모습을 예수회 年 報 에서는 앞의 太 閤 이 중국사절 일행을 알현했 던 경위 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중국 국왕의 親 書 에는 다시 조선을 침범하지 말라 ( 不 得 再 犯 朝 鮮 )는 문구가 있었다. 요컨대 앞으로는 高 麗 를 침공하면 안 된다. 만일 다시 침공한다면 이제 너에게는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威 光 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인( 諸 臣 )은 마치 중국의 封 建 家 臣 과 같은 신분이 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 謁 見 )은 일본식 의례이며, 즉 다다미방에 앉아서 진행되었다. 개회 중에 太 閤 과 正 使 ( 楊 方 亨 )는 대등했다. 출석자는 ( 徳 川 ) 家 康, ( 前 田 ) 筑 前 ( 利 家 ), ( 上 杉 ) 越 後 ( 景 勝 ), ( 宇 喜 多 ) 中 納 言 ( 秀 家 ), ( 小 早 川 ) 金 吾 ( 秀 秋 ) 殿, 毛 利 ( 輝 元 )였는데, 그들은 일본 전토에서 최대의 国 主 들이었 다. 盞 (사카즈키), 즉 술을 조금씩 나누어 마신 후 太 閤 은 천천히 栄 誉 로운 書 冊, 즉 커다란 황 금 書 板 ( 金 印 )을 받아서 머리 위로 들어 올렸고, 그때 冠 冕 도 수령했으므로, 그것들을 착용하기 위하여 別 室 로 물러났다. 중국인들은 別 室 에서 나온 ( 太 閤 )을 비상한 栄 誉 와 존경심으로 우러 러보았으며, 그리고나서 즉시 향응을 위한 음식들을 크고 높은 상에 차려서 날라왔다. 참으로 성대한 연회와 비상한 趣 好 로 가득한 儀 式 이었으므로 많은 ( 使 節 들)은 식사보다는 구경하기에 바쁠 정도였다. 연회가 끝나자 각자 자기 저택으로 돌아갔다. 해가 지자 새로운 국왕 太 閤 은 遊 撃 ( 沈 惟 敬 )을 방문하러 나갔고, 正 使 ( 楊 方 亨 )도 역시 크게 기뻐하며 그곳으로 갔는데, 그때 太 閤 은 그들을 매우 친절하게 접대했으며,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인용이 조금 길었지만 1596년 9월 18일자 오사카 발신의 이 書 信 은 明 朝 鮮 日 本 3국 이외의 중립적 입장에서 적은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198) 당일 秀 吉 이 誥 命 의 내용을 즉 期 対 馬 宗 氏 領 国 における 柳 川 氏 の 台 頭 > ( 九 州 史 学 研 究 会 編, 전게 境 界 からみた 内 と 外 所 収 ) 172. 仙 巣 稿 의 소재에 대하여는 伊 藤 幸 司 씨의 教 示 를 받았음을 여기에 附 記 하여 감사를 표한다. 197) 中 村 栄 孝, 전게서 < 二 豊 臣 秀 吉 の 外 征 > 199
51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99 시 이해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金 印 과 冠 冕 을 拜 領 한 新 国 王 秀 吉 이 楊 方 亨 과 沈 惟 敬 의 거처로 가서 직접 謝 意 를 표한 부분은 朝 鮮 明 의 実 録 記 事 와 모두 부합한다. 日 明 간의 책봉의례 자체에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 히려 프로이스의 證 言 은 사카이에서 오사카까지의 성대한 儀 仗, 이어서 매우 호화로운 책봉의례,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봉을 기뻐하는 秀 吉 의 태도를 후세에 잘 전하고 있다. 秀 吉 은 이 책봉의례로 萬 暦 帝 의 신하가, 徳 川 家 康 이하 諸 大 名 은 陪 臣 이 된다는 동아시 아 세계에 있어서 책봉체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秀 吉 은 宣 祖 29년 9월에 확실히 萬 暦 帝 의 책봉을 수락했다. 그런데 원래 明 이 秀 吉 의 冊 封 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제시했던 것은 1조선에서 일본군의 전면 철수, 2책봉 외에 朝 貢 을 요구하지 않을 것, 3다시 조선에 침공하지 않는다는 세 가지였으며, 이들 조건 은 皇 帝 敕 諭 日 本 國 王 平 秀 吉 로 시작하는 秀 吉 에게 보낸 勅 諭 에도 明 記 되어 있다. 199) 이 중에서 2의 朝 貢 = 勘 合 의 부활 요구는 화의 추진파에 의한 日 明 강화교섭 과정에서 떠오른 조건이었다. 그러나 秀 吉 이 日 本 国 王 에 책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긴요한 조공 무역은 불가능해졌다. 일본의 요구는 책봉이 아니라 영토의 요구와 조공무역에 있다는 明 정부의 경계심은 이미 책봉사 李 宗 城 의 도망 직후부터 있었으며, 또한 책봉 여하와 상관없이 일본은 공격을 재개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200) 秀 吉 은 이 무렵에 와서야 겨우 이번 책봉의 진의를 눈치 챘던 것이 아닐까? 秀 吉 에게 있어서 日 本 国 王 의 책봉은 전혀 의미 없는 일이었으며, 秀 吉 이 東 夷 의 蕃 王 으로서 中 華 帝 国 을 중심으로 하는 동 아시아 세계 시스템으로 편입되는 일은 끝내 없었다. 198) 松 田 毅 一 監 訳, 전게서 <10 一 五 九 六 年 ( 九 月 十 八 日 付, 都 発 信 ) 十 二 月 二 十 八 日 付, 長 崎 発 信, ルイ ス フロイスの 年 報 補 遺 > 319~320. 이 일본식 謁 見 儀 禮 의 모습은 간략하지만 Arcadio Schwade S.J., 前 掲 < 朝 鮮 の 役 における 日 明 和 平 交 渉 について> 321~322에 소개되었다. 199) 三 木 聰, 전게 < 万 暦 封 倭 考 ( 一 )> 47~48 및 同 < 万 暦 封 倭 考 ( 二 )> 5. 三 木 聰 씨가 지적했던 것처 럼 秀 吉 앞으로 보낸 勅 諭 에는 原 約 三 事 로서 自 今 釜 山 倭 衆, 盡 數 退 回, 不 敢 復 留 一 人, 既 封 之 後, 不 敢 別 求 貢 市, 以 啓 事 端, 不 敢 再 犯 朝 鮮, 以 失 鄰 好 라고 한다. ( 同, 전게 < 万 暦 封 倭 考 ( 一 )> p.94의 註 (18). 大 庭 脩, 전게서 < 第 十 三 章 豊 臣 秀 吉 を 日 本 国 王 に 封 ずる 誥 命 > 245). 또 책봉책의 모순은 佐 島 顕 子, 전게 < 日 明 講 和 交 渉 における 朝 鮮 撤 退 問 題 > 109~110에 지적이 있다. 200) 小 野 和 子, 전게서 < 第 二 章 第 二 節 明 日 和 平 交 渉 をめぐる 政 争 > 129~130 ; 邊 土 名 朝 有, 전게서 < 第 一 部 第 四 章 明 の 冊 封 體 制 と 文 禄 慶 長 の 役 > 140~147 ; 三 木 聰, 전게 < 万 暦 封 倭 考 ( 二 )> 15~16
52 10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맺음말 본고에서는 먼저 전반부에서 조선 전기(15 16세기) 동아시아 세계의 국제환경에 있어 서 明 을 주축으로 조선 琉 球 일본과의 책봉관계 및 의례적 관계를 조망하였다. 이어서 후반부에서는 조선 宣 祖 代 에 있어서 책봉의례와 對 明 외교의례( 望 闕 禮 )의 실시 상황을 중심으로 정리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日 本 国 王 豊 臣 秀 吉 의 책봉의례에 대하여 약간 의 고찰을 더하였다.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 太 祖 洪 武 帝 는 즉위 후 즉시 주변 諸 国 에 使 者 를 파견하여 朝 貢 을 독촉함과 아울러서 蕃 国 朝 貢 儀 외에 元 正 冬 至 上 国 聖 寿 節 望 闕 賀 儀 를 정했다. 조선왕조에서는 3대 국왕 太 宗 이 建 文 帝 의 뒤를 이어 永 楽 帝 의 책봉을 수락했고, 太 宗 3년(1403)에 朝 鮮 国 王 으로 승인을 받았다. 책봉체제에 편입된 조선은 이후 매년 正 朝 聖 節 千 秋 節 에 조공사절을 파견하고, 中 宗 26년(1531) 이후에는 正 朝 使 를 冬 至 使 로 바꾸어 聖 節 使 千 秋 使 冬 至 使 를 파견하는 1 年 3 貢 의 외교체제로 이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4 大 명절에 조선의 왕궁에 서는 対 明 遥 拜 儀 禮 가 거행되었다. 조선국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王 都 漢 城 의 왕궁에 서 明 의 황제를 遥 拜 하는 궁중의례이다. 조선국왕이 직접 紫 禁 城 에 参 内 하는 것은 불가 능하기 때문에 望 闕 禮 를 거행하는 것으로 明 황제와의 군신관계를 확인했던 것이다. 琉 球 의 경우, 洪 武 5년(1372)에 中 山 王 察 度 가 일찍부터 入 貢 권고에 응하여 제2대 武 寧 이 永 楽 2년(1404)에 처음으로 琉 球 国 王 으로 책봉을 받았다. 처음에는 大 琉 球 国 의 朝 貢 은 不 時 로 한다 고 하여 통교 제한이 없었지만, 成 化 11년(1475)에 琉 球 使 臣 의 살인 사건을 이유로 貢 期 를 2 年 1 貢 으로 제한했고, 그 후 奏 請 을 거듭하여 正 徳 2년(1507)에 1 年 1 貢 의 貢 期 를 얻었는데, 嘉 靖 원년(1522)에 다시 2 年 1 貢 을 하명받았다. 琉 球 에서 対 明 遥 拜 儀 禮 를 거행했던 상황에 대해서는 사료의 제약이 크기는 하지만, 琉 球 国 王 이 首 里 城 에서 望 闕 의 禮 를 행하고, 百 官 도 정렬하여 拜 禮 했다는 기록이 16세기 중반의 朝 鮮 王 朝 実 録 에 남아 있다. 또한 琉 球 의 외교문서집 歴 代 寶 案 에 수록된 15세기 전 반의 咨 文 에 따르면, 聖 節 正 朝 등 名 節 에 尚 巴 志 는 洪 武 帝 에게서 頒 賜 된 冠 服 을 입고 宮 中 儀 禮 를 거행했었다. 18세기 전반에 성립한 琉 球 国 由 来 記 와 琉 球 国 舊 記 가 시사하듯이 薩 摩 藩 지배하의 근세 琉 球 에서도 冬 至 元 旦 正 月 15일의 王 府 儀 禮 는 3대 儀 禮 로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었다. 어느 것이나 단편적인 사료이지만, 琉 球 国 王 은 일찍 이 洪 武 帝 가 제정했던 元 正 冬 至 上 国 聖 寿 節 望 闕 賀 儀, 즉 望 闕 禮 를 琉 球 나름대로 재해
53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101 석한 뒤에 시행했던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建 文 4년(1402)에 足 利 義 満 이 京 都 에서 明 使 를 영접하고 建 文 帝 의 책봉을 수락하였다. 永 楽 원년(1403) 義 満 은 遣 明 使 에게 日 本 国 王 臣 源 명의의 외교문서 를 가지고 入 明 하도록 했는데, 이듬해 永 楽 2년에 義 満 은 다시 日 本 国 王 에 책봉되었다. 京 都 에서 거행된 冊 封 儀 禮 때 義 満 은 세 번 절한 뒤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詔 書 를 받 았다고 하는데, 室 町 殿 가 明 황제와의 종속관계를 시사하는 명절의 遥 拜 儀 禮 를 시행했 는지 여부는 정확하지 않다. 이렇게 해서 15세기 초에 朝 鮮 琉 球 日 本 의 国 王 이 거의 같은 시기에 탄생하였다. 다만 일본국왕의 貢 期 는 10 年 1 貢 이었으며, 동아시아 3국 중에 서는 통교 제한이 가장 엄격했다. 일본에게는 의무였던 勘 合 지참도 조선과 琉 球 는 면제 되었다. 게다가 15세기 후반 이후는 明 使 의 来 日 도 끊어지고, 勘 合 貿 易 이라는 이름의 朝 貢 貿 易 도 16세기 후반에는 단절되었다. 그러면, 唐 入 り(=명나라 정복계획) 를 단행했던 豊 臣 秀 吉 은 중화제국을 중심으로 하 는 동아시아 세계 시스템(실태는 무역 시스템) 속으로 포섭되어, 神 宗 萬 暦 帝 의 신하로 서 의례적 관계를 구축할 의지는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먼저 전형적(내지 모범적)인 蕃 王 의 사례로서 秀 吉 과 거의 동시대에 한반도를 다스렸던 宣 祖 의 행동양식에 주목하였 다. 구체적으로는 宣 祖 代 의 책봉의례, 그리고 望 闕 禮 라는 対 明 외교의례의 場 을 통하여 16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朝 中 関 係 의 실상을 명확히 하였다. 宣 祖 원년(1568) 2월에 宣 祖 는 穆 宗 隆 慶 帝 로부터 朝 鮮 国 王 에 책봉하는 誥 命 과 金 印 冕 服 을 받고, 明 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무역체제에 정식으로 참가하였다. 国 朝 五 禮 儀 의 규정에 따라 책봉의례의 場 에서 宣 祖 는 宗 親 문무백관과 함께 萬 歳 를 삼창했 을 것이다. 明 使 가 한성에서 머문 기간은 불과 1주일 남짓했지만, 宣 祖 는 經 国 大 典 의 규정대로 下 馬 宴 翌 日 宴 上 馬 宴 순서로 접대의례를 베풀었고, 3월 하순에 謝 恩 使 를 파견함으로써 책봉의례는 완료되었다. 宣 祖 代 의 対 明 遥 拜 儀 禮 에 관해서는 편의상 임진왜란 이전, 전란기, 임진왜란 이후의 3기로 구분하여 정리 분석하였다. 먼저 宣 祖 가 望 闕 禮 를 처음 거행한 것은 宣 祖 5년 11월 冬 至 이다. 宣 祖 는 역시 国 朝 五 禮 儀 의 규정에 따라 群 臣 을 거느리고 大 明 皇 帝 를 위하 여 冬 至 를 축하했으며, 이어서 群 臣 은 宣 祖 를 위하여 朝 賀 禮 를 거행하여 군신관계를 확 인하였다. 이때 조선에서는 萬 暦 帝 의 등극을 전달하는 明 使 를 영접하고 있으며, 또한 宗 系 辨 誣 問 題 가 미해결이었으므로 明 使 의 접대에는 세심한 주의를 베풀었을 것이다. 다만 그 후에는 気 象 光 学 的 日 變 이나 日 食 등의 天 譴 思 想, 極 寒 降 雨 등의 기후조건 외에 先
54 102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代 王 妃 의 死 去 에 수반하여 正 朝 冬 至 의 궁중의례는 차츰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仁 順 王 后 ( 明 宗 妃 )의 忌 辰 이 정월 2일이었기 때문에 正 朝 의 궁중의례 거행에 지장이 생겼 지만, 上 国 의 禮 인 望 闕 禮 는 종전처럼 正 朝 에 실시하고, 조선 국내의 군신관계를 확인 하는 朝 賀 禮 는 정월 3일로 연기함으로써 対 明 遥 拜 儀 禮 를 우선하도록 하였다. 임진왜란기의 경우 宣 祖 는 正 朝 冬 至 그리고 聖 節 의 望 闕 禮 를 거의 매년처럼 충실하 게 거행하였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宣 祖 26년 5월 2일 피난처였던 평안도 永 柔 県 의 清 渓 館 에서 望 闕 禮 를 실시했던 일이다. 그 목적은 王 都 한성의 탈환이라는 皇 恩 ( 皇 帝 의 恩 義 )에 감사하는 것이었다. 당일은 문무백관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참가시켰으 며, 조선의 예법에 없는 이례적인 왕조국가의 의례이다. 다만 왕릉도굴사건을 이유로 望 闕 禮 의 정지를 요청하는 宗 室 을 배려하여 朝 賀 禮 의 실시는 보류하였다. 望 闕 禮 는 皇 上 을 위한 것 이며, 무엇보다 王 都 탈환은 宗 廟 社 稷 의 경사였다. 그 후 宣 祖 는 한성 貞 陵 洞 의 行 宮 에서 지냈으며, 南 別 宮 이 종종 望 闕 禮 의 会 場 으로 사용되었다. 宣 祖 28년 8월 의 聖 節 에 宣 祖 는 그 南 別 宮 에서 일본국왕 책봉사 李 宗 城 (나중에 帰 国 도망)과 함께 望 闕 禮 를 올렸다. 南 別 宮 은 明 軍 총지휘관의 주둔지이기도 하며, 明 더 나아가서 皇 恩 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大 明 皇 帝 의 권위의 상징인 闕 牌 도 南 別 宮 에 보관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전란으로 인하여 왕궁의 正 殿 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宮 中 儀 禮 를 거행할 때도 곤란한 일이 따랐지만, 日 明 강화교섭의 결렬( 宣 祖 29년 9월) 뒤에도 한성에서는 명절 때마다 望 闕 禮 가 엄숙하게 실시되었다. 왜란 종식기에도 正 朝 冬 至 의 望 闕 禮 는 충실하게 거행되었으며, 기록 형태는 간략하지 만 오히려 明 에 대한 恩 義 가 증폭되어 있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소위 丁 應 泰 誣 奏 事 件 이 있고나서 李 廷 亀 가 宣 祖 31년 10월에 제술했던 외교문서이다. 거기에는 (1) 大 明 律 의 운용, (2) 大 統 暦 의 채용, (3) 迎 詔 儀, (4) 拜 表 儀 의 제도화에 더하여 (5) 正 朝 冬 至 聖 節 의 望 闕 禮 실시, (6)조선사회에 있어서 明 의 연호 사용이 적혀 있다. 여기에는 동아시 아 세계에 있어서 조선과 明 의 국제관계가 명쾌하게 기록되어 있다. 宣 祖 가 迎 詔 拜 表 儀 와 望 闕 禮 를 경건하고 엄숙하게 집행한 것은 李 山 海 가 쓴 宣 宗 大 王 穆 陵 誌 에도 기록 되어 있으며, 또 宣 祖 는 가장 먼저 皇 帝 의 恩 義, 두 번째도 皇 帝 의 恩 義 라고 하며 언제나 신하에게 이야기하였다. 조선국왕의 再 造 之 恩 ( 国 家 再 造 의 恩 義 )은 이윽고 明 清 교체 후 에 조선 소중화의식으로 고양되며, 18세기가 되면 왕궁 昌 徳 宮 의 후원에 洪 武 帝 萬 暦 帝 崇 禎 帝 를 제사지내는 大 報 壇 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임진왜란이 종식된 후, 백관이 착용하는 禮 服 의 불비 때문에 朝 賀 禮 실시가 정체되었
55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103 지만 望 闕 禮 는 거의 충실하게 실시되었다. 특히 宣 祖 39년 4월에는 千 秋 使 와 聖 節 使 를 파견함에 즈음하여 宣 祖 는 望 闕 禮 를 올렸다. 조선의 禮 와 法 에서 조선국왕이 望 闕 禮 를 지낼 때는 正 朝 冬 至 聖 節 과 千 秋 節 이며, 조공사절을 파견할 때 望 闕 禮 를 거행하는 일 은 없다. 조선국왕으로서는 이례적인 행동양식이다. 이 해는 宣 祖 즉위 40주년에 해당하 는데, 조선에서는 嫡 子 인 永 昌 大 君 이 탄생하고 明 에서도 皇 太 孫 이 태어나는 등 조선 국 내외에서 경사가 뒤를 이었다. 그 한편에서 明 은 서자 光 海 君 을 아직도 왕세자로 책봉하 지 않았으며, 대명관계가 반드시 원활한 것은 아니었지만 宣 祖 의 皇 恩 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이 예전에 成 宗 이 내가 望 闕 禮 를 올릴 때 몸은 여기 조선에 있지만, 몸소 황제를 拜 謁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라고 한 말이다. 望 闕 禮 란 조선국왕이 직접 紫 禁 城 의 皇 帝 앞에 拜 謁 하는 것과 동등한 対 明 외교의례이며, 조선 국내에서는 이 것을 정치권력으로 이용했다고 생각된다. 儀 禮 는 정치와 외교를 가시화하는 공간이다. 그러면 豊 臣 秀 吉 은 明 과의 외교의례의 場 에서 어떤 태도로 임했던 것일까? 유일한 사례가 宣 祖 29년 9월 2일(일본력 1일) 오사카성에서 거행된 책봉의례이다. 일본국왕 책 봉사 楊 方 亨 과 부사 沈 惟 敬 이 誥 命 金 印 冠 服 을 進 呈 하자 秀 吉 은 諸 大 名 을 거느리고 五 拜 三 叩 頭 의 禮 를 올렸고, 儀 禮 의 순서에 따라 중국어로 만세 를 외쳤으며, 望 闕 하고 謝 恩 했다. 의례의 手 順 은 번잡했기 때문에 沈 惟 敬 이 사전에 行 禮 手 順 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豊 臣 秀 吉 을 일본국왕에 책봉하는 의례는 아무런 문제없이 끝났고, 그 뒤에는 책봉사를 접대하는 향연이 열렸다. 한편, 책봉사와 동행하였던 조선통신사 黄 慎 일행은 秀 吉 의 알현을 거부당하고 冊 封 儀 禮 의 場 에 입회하지 않았는데, 그 다음날 秀 吉 의 冊 封 수락을 전해 들었다. 黄 慎 의 復 命 報 告 에 따르면, 秀 吉 은 책봉사 앞에서 공손 하게 五 拜 三 叩 頭 의 禮 를 올리고 冠 服 을 받았으며, 또한 諸 大 名 40여 명도 각각 위계에 상응하는 官 服 을 받았다고 한다. 萬 暦 帝 가 豊 臣 秀 吉 을 일본국왕에 봉했던 誥 命 과 책봉 이유를 기록한 勅 諭 는 오사카역 사박물관과 宮 内 庁 書 陵 部 에 각기 현존하며, 京 都 의 妙 法 院 에는 秀 吉 에게 頒 賜 했던 常 服 을 비롯해서 冠 服 22점이 전래한다. 이 같은 물적 증거와 明 朝 鮮 의 実 録 記 事, 景 轍 玄 蘇 의 遺 稿 集 仙 巣 稿, 그리고 루이스 프로이스의 예수회 報 告 書 등으로 판단하건데, 秀 吉 이 공손하게 明 帝 의 책봉을 수락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秀 吉 이 제시 했던 강화조건에 대한 회답은 없었고 日 明 강화교섭은 파탄이 났다. 원래 朝 貢 의 전제로 서 책봉이라는 기본적인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秀 吉 은 日 本 国 王 에 책봉되었음에도 불 구하고 조공무역은 허가되지 않았다. 이리하여 제2차 조선침공이 시작되고, 秀 吉 이 東 夷
56 104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의 蕃 王 으로서 中 華 帝 国 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세계 시스템에 편입되는 일은 끝내 없었던 것이다. <표1> 明 代 東 南 諸 國 의 貢 期 國 名 朝 鮮 貢 期 1 年 3 貢 日 本 10 年 1 貢 琉 球 随 時 2 年 1 貢 ( 一 時 1 年 1 貢 ) 安 南 (베트남 북부) 真 臘 (캄보디아) 暹 羅 (타이의 아유타야) 占 城 (베트남 남부) 爪 哇 (자바 북부) 3 年 1 貢 不 定 期 3 年 1 貢 3 年 1 貢 3 年 1 貢 * 萬 暦 大 明 会 典 巻 105, 禮 部 63 朝 貢 1 東 南 夷 上 을 참고로 鄭 樑 生, 明 日 関 係 史 の 研 究 66의 표 < 諸 国 に 対 する 貢 期 の 規 定 >을 일부 수정함.
57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105 年 月 日 望 闕 禮 朝 賀 禮 특기사항 冬 至. 명 사신 韓 世 能 陳 三 謨, 来 朝 2 6 正 1 사흘 전에 望 闕 禮 習 儀 기록 있음 문안 2품 이상은 四 殿 에 문안 4 7 正 1 정지 전년 말에 기상광학적인 日 變 을 관측 정지 権 停 禮 기후극한. 백관은 동지 문안만 6 8 正 1 정지 문안 玉 堂 은 四 殿 에 문안 7 9 正 1 정지 전년 정월 2일, 仁 順 王 后 ( 明 宗 妃 )사망 8 10 正 1 정지 익일, 魂 殿 에서 大 祥 祭 9 11 正 1 정지 작년 11월 하순, 仁 聖 王 后 ( 仁 宗 妃 )사망(3년상). 단 이 해 正 朝 기록 없음 正 1 権 停 禮 権 停 禮 朝 賀 禮 는 3일에 順 延 하여 恒 式 이 됨 正 1 정지 権 停 禮 闕 庭 습기. 朝 賀 禮 는 3일 聖 節 ( 萬 曆 帝 ) 権 停 禮 正 1 朝 賀 禮 는 3일 正 1 정지 日 食 正 1 문안 議 政 府 六 曹 동서반 2품이신 政 院 玉 堂, 문안 全 羅 道 観 察 使 権 慄, 冬 至 慰 箋 을 封 進 正 1 정지 정지 선조는 義 州 에 체제 정지 한성 탈환의 황은에 감사( 永 柔 清 渓 館 에서) 한성 南 別 宮 에서 正 1 南 別 宮 에서. 그 후 明 將 접견 時 御 所 에서. 이날 선조 생일 正 1 時 御 所 에서 明 使 李 宗 城 과 함께 거행( 南 別 宮 에서) 문안 時 御 所 에서. 議 政 府 2품이상 政 院, 문안 正 정지 - 仁 聖 王 后 ( 萬 曆 帝 의 母 ) 사망(8 13) 在 京 唐 官 에게 設 酌 을 명함(10 25) 正 1 <표 2> 宣 祖 代 의 望 闕 禮 실시 상황 別 殿 에서 別 殿 에서
58 10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正 1 왕세자( 光 海 君 ) 군신을 거느리고 行 禮 別 殿 에서 正 殿 에서 이튿날 선조는 經 理 萬 世 徳 의 館 所 에서 동지 축하 正 1 왕세자도 입궁, 行 禮 南 別 宮 에서 正 1 不 受 仁 順 王 后 기일 목욕재계 問 安 대신 및 2품이상 문안 正 1 問 安 대신 및 2품이상 문안 千 秋 節 (후일 泰 昌 帝 ) 権 停 禮 正 1 問 安 政 院 及 및 백관 문안 千 秋 節 왕세자 백관을 거느리고 行 禮 停 止 薬 房, 望 闕 禮 権 停 을 청함(11 18) 正 1 停 止 問 安 선조는 貞 陵 洞 행궁에 체재, 병환 일주일 전에 17일 望 闕 禮 있음 (8 10) 正 1 別 殿 에서 왕세자, 백관을 거느리고 陳 賀 禮 을 행함 正 1 문안 3 公 및 2품이상 문안 千 秋 使, 북경으로 출발 聖 節 使, 북경으로 출발 停 止 権 停 禮 선조, 건강이 안 좋아 외출 불가(11 21) 正 1 停 止 問 安 비로 인하여 대궐 안뜰에 물이 참 正 1 停 止 問 安 작년 10월부터 선조 병환. 대신 및 동서반 2품이상 六 曹 堂 上, 문안 *표의 연월일은 宣 祖 実 録 의 해당 연월일조에 의함. 聖 節 과 千 秋 節 의 경우는 朝 賀 禮 와 会 禮 宴 이 거행되지 않기 때문에 - 로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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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第 6 條 ( 壹 株 의 金 額 )..
제 정 1973. 2. 28 개 정 2010. 3. 19 定 款 삼성전기주식회사 http://www.sem.samsung.com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23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생각해야 한다는 제안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貫 井 正 之 씨는 豊 臣 秀 吉 의 대외적 인 정복의도 전반을 검토하고 책 이름에 海 外 侵 略 이라는 문구를 채택했으며( 豊 臣 政 権 의 海 外 侵 略 과 朝 鮮 義 兵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237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나카노 히토시( 中 野 等 ) 머리말 Ⅰ. 근세 전기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위치 설정 Ⅱ. 근세 후기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위치 설정 Ⅲ. 근대 일본의 성립과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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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1 前 言 現 行 考 銓 制 度 一 現 行 考 銓 制 度 對 人 事 行 政 的 重 要 性 : 強 烈 建 議 考 人 事 行 政 的 同 學 們, 一 定 要 精 讀 現 行 考 銓 制 度! 熟 讀 現 行 考 銓 制 度 的 好 處, 可 以 從 以 下 幾 個 角 度 來 分 析 : 相 對 重 要 程 度 高 : 現 行 考 銓 制 度 在 人 事 行 政 三 個 主 要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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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학 연 구 론 총 제 1 집 택민국학연구원.2008.6.30. 日 本 에 있어서의 韓 國 文 學 의 傳 來 樣 相 江 戸 時 代 때부터1945 年 까지 西 岡 健 治 * 1) 序 言 Ⅰ. 江 戸 時 代 에 읽혀진 作 品 들 Ⅱ. 1868( 明 治 元 ) 年 에서 1918 年 ( 大 正 中 期 )까지 읽혀지고 翻 訳 된 作 品 들 Ⅲ. 三 一 獨
POWERSHELL CONTROLLER + BATTERY Setup Guide English............................... 4 繁 體 中 文.............................. 12 한국어............................... 20 www.logitech.com/support................
35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5권 1883.01.24 釜 山 口 設 海 底 電 線 條 欵 / 海 底 電 線 設 置 ニ 關 スル 日 韓 條 約 漢 日 1883.06.22 在 朝 鮮 國 日 本 人 民 通 商 章 程 / 朝 鮮 國 ニ 於 テ 日 本 人 民 貿 易 ノ
근현대 한일간 조약 일람* 22) 1. 조선 대한제국이 일본국과 맺은 조약 주) 1. 아래 목록은 國 會 圖 書 館 立 法 調 査 局, 1964 舊 韓 末 條 約 彙 纂 (1876-1945) 上 ; 1965 舊 韓 末 條 約 彙 纂 (1876-1945) 中 ; 外 務 省 條 約 局, 1934 舊 條 約 彙 纂 第 三 巻 ( 朝 鮮 及 琉 球 之 部
211 1-5.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石 村 洞 百 濟 初 期 積 石 塚 이도학, (서울의 백제고분) 석촌동 고분, 송파문화원, 2004. 서울 特 別 市, 石 村 洞 古 墳 群 發 掘 調 査 報 告, 1987. 1-6. 고창지석묘군 高 敞 支 石 墓 群 문화재관리국,
210 참고문헌 1. 능묘 1-1. 경주황남리고분군 慶 州 皇 南 里 古 墳 群 경상북도, 文 化 財 大 觀, 1-V, 慶 尙 北 道 編, 2003. 문화재관리국, 天 馬 塚 發 掘 調 査 報 告 書, 1974. 1-2. 함안도항리 말산리고분군 咸 安 道 項 里 末 山 里 古 墳 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咸 安 道 項 里 古 墳 群 5, 2004.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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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로서의 근대일본자유주의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제28차 워크숍 2016-04-08 제국주의로서의 근대일본자유주의 -가와이 에이지로의 제국일본 인식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용철(한림대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 1. 연구의 목적 및 필요성 2. 식민지 인식과 정당화논리 2.1 이상주의적 자유주의와 국민적 자유론 2.2 식민지 정당화의 논리 3. 전쟁 인식과 정당화논리 3.1 이상주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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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여기서 朝 鮮 思 想 通 信 이 식민본국과 피식민지 사이에 놓여 있는 재조선일본인의 어떤 존재론적 위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식민본국과 피식민지의 Contact Zone 에 위치한 재조선일본인들은 조선이라는 장소를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기
식민지의 목소리 - 朝 鮮 思 想 通 信 社 刊, 朝 鮮 及 朝 鮮 民 族 (1927)을 중심으로 鄭 鍾 賢 ( 成 均 館 大 ) 1. 伊 藤 韓 堂 과 朝 鮮 思 想 通 信 伊 藤 韓 堂 이 발간한 朝 鮮 思 想 通 信 은 1925 년에 발행을 시작하여 1943 년 그가 죽은 직후에 폐간될 때까지 대략 18 년 동안 간행된 조선문을 번역한 일본어 신문이다.
16 經 學 研 究 集 刊 特 刊 一 墓 誌 銘 等 創 作 於 高 麗 時 代 與 朝 鮮 朝 時 代, 此 是 實 用 之 文 而 有 藝 術 上 之 美. 相 當 分 量 之 碑 誌 類 在 於 個 人 文 集. 夢 遊 錄 異 於 所 謂 << 九 雲 夢 >> 等 夢 字 類 小 說.
經 學 研 究 集 刊 特 刊 一 2009 年 12 月 頁 15~36 高 雄 師 範 大 學 經 學 研 究 所 15 韓 國 漢 文 學 硏 究 之 最 近 傾 向 김동협 金 東 協 教 授 / Professor Kim Donghyub 摘 要 我 想 對 於 韓 國 漢 文 學 最 初 之 專 門 著 書 是 金 台 俊 之 >. 此 冊 刊 行 於
초대의 글 한국일본언어문화학회 회원여러분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어느덧 겨울이 성큼 다가오면서 으스스 추위를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재직 중인 회원님들께서는 입시철의 업무와 강요받는 대학 변화의 회오리 속에서, 신진 회원님들께서는 우리 학계의 발전을 기대하면서 연구에 박
2015 年 度 秋 季 國 際 學 術 大 會 日 時 : 2015 年 11 月 7 日 ( 土 ) 11:30~20:30 場 所 : 高 麗 大 學 校 國 際 館 主 催 : 韓 國 日 本 言 語 文 化 學 會 主 管 : 韓 國 日 本 言 語 文 化 學 會 高 麗 大 學 校 GLOBAL 日 本 研 究 院 高 麗 大 學 校 BK21PLUS 中 日 言 語 文 化 敎 育
다문화 가정 중학생의 문식성 신장 내용
교육연구 제58집 성신여대 교육문제연구소 2013년 12월 30일 2009 改 定 敎 育 課 程 에 따른 中 學 校 漢 文 敎 科 書 의 多 文 化 敎 育 에 對 한 一 見 이돈석 청주대학교 한문교육과 Ⅰ. 들어가는 말 Ⅱ. 한문 교과 교육과정 목표에 대한 검토 Ⅲ. 중학교 한문 교과서 분석 목 차 1. 재제 출전의 문제 2.. 교육 내용과 제시 방법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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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 1) 명 경 일 ** 1. 머리말 2. 判 付 의 개념과 구성요소 3. 判 付 의 작성절차에 따른 서식의 변화 4. 맺음말 초록: 조선시대 주요 관아가 각자 맡은 업무에 관하여 국왕에게 아뢸 때 사용한 문서를 계 啓 라고 했다. 그리고 啓 에 대한 국왕의 처결을 判 付 라고 했다. 본 논문은 판부의 작성 절차와 서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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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히 묻고 가까이 실천하는 선진 산림과학 3.0 시대를 열겠습니다! 01 03 05 05 06 07 08 08 10 10 11 임업인에게는 희망을, 국민에게는 행복을 带 NIFoS 1 중국 닝샤회족자치구() 중국 무슬림 인구 주요 분포도 중국 닝샤의 회족 자치구 3 중국 무슬림 인구 Top 11 지역 순위 지역( 省 ) 인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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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 타격, 투수, 수비 진기록 전반 시즌 최고 승률 0.706 85 삼성 (110 경기 77승 32패 1 무) 기별 최고 승률 0.741 85 삼성 ( 전기 55경기 40승 14패 1 무) 시즌 최저 승률 0.188 82 삼미 (80 경기 15승 65 패) 기별 최저 승률 0.125 82 삼미 ( 후기 40경기 5승 35 패) 시즌 최다 승리 91 00
名門家 명문가 기록관리의 변천 2011년 부천 족보전문 도서관 變遷 序 文 나이 스물을 조금 넘겨 군대 생활을 할 때 우연찮게 족보를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즈음에는 문맹률도 높았고 그래서, 당히 각 가정에서 책을 구경하기란 아마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얘기 같지만 국민학교 교과서 정도가 전부이지 동화나 소설이나 잡지는 구경할 수도 없었다. 혹여 나름대로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 관한 개략적인 소개가 있었지만, 1) 여전히 많은 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실정이다. 본고 또한 여전히 짧고 소략한 내용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39-44, 2008년 6월 Yonsei J Med Hist 11(1): 39-44, 2008 일반논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 신창희( 申 昌 熙 )의 생애와 활동 박 형 우(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홍 정 완(연세대 의사학과)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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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004. 12 2004. 11 25 26 2004. 12 % 50 40 30 20 10 0 華 東 華 北 中 南 西 南 東 北 西 北 전 체 중 대 형 차 중 형 차 소 형 차 경 차 2004. 11 27 帕 28 2004. 12 2004. 11 29 30 2004. 12 2004. 11 31 32 2004. 12 2004. 11 33 3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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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대 초반 대일정책의 전개와 그 특징 1) 김 태 훈 * 1. 머리말 2. 己 酉 約 條 의 성립과 倭 使 上 京 금지 조치 3. 대일정책상의 異 見 조정과 명분 확보 4. 대일정책의 功 利 的 宥 和 的 기조 5. 맺음말 초록: 본 연구에서는 조선후기 대일외교의 출발선이었던 광해군대 초반 대일정책을, 외형적 측면에서 통교틀의 마련, 정책추진의 안정적 기반
國 統 調 9 0-1 2-1 0 7 南 北 韓 社 會 次 化 力 量 綜 출 評 價 統 院 調 査 硏 究 室 책 을 내 면 서 南 北 韓 이 分 斷 以 後 각기 相 反 된 政 治 理 念 과 政 治. 經 濟 的 制 度 에 토대를 둔 體 制 成 立 으로 相 異 한 社 會 文 化 를 形 成 해온 지도 벌써 4 5 年 이 지 났다. 이 기간동안 南 과 北 의 社 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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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회의원 명단 당적표시는 당선당시(총선결과, 재 보궐당선, 의석승계) 소속정당을 나타냄. 제9 10대 국회의원의 당적중 국민회의 표시부분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선출한 국회의원임. 제헌국회 (당적은 당선당시의 당적임) 성 명 선 거 구 당 적 비 고 성 명 선 거 구 당 적 비 고 姜 己 文 산 청 無 所 屬 金 若 水 동 래 朝 鮮 共 和 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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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학보 제18권 제1호 The Korean Journal of Economics Vol. 18, No. 1(Spring 2011)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 吳 鎭 錫 ** 요 약 본고는 1940년대 전반 전력국가관리의 수립을 대상으로 정책 결정의 주체 에 주목하여 정책의 원안이 등장하여 최종안에 이르는 변천과정을 면밀하 게 분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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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요 보직자 명단 (2014년 4월 1일 현재) (1) 교무위원 총장 부총장(인사캠) 부총장(자과캠) 부총장(의무) 일반대학원장 학부대학장 유학대학장 문과대학장 법과대학장 사회과학대학장 경제대학장 경영대학장 자연과학대학장 정보통신대학장 공과대학장 약학대학장 사범대학장 생명공학대학장 스포츠과학대학장 의과대학장 예술대학장 기획조정처장 교무처장 학생처장 산학협력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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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 심리록에 수록된 사례를 중심으로 - 김 용 희 * 차 례 Ⅰ. 서 설 Ⅱ. 심리록에 나타난 지방관리들의 사법행정능력 1. 검험의 기준 2. 검험조서 Ⅲ. 심리록에 나타난 재판의 기본원칙 1. 관용의 원칙 2.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in dubio pro r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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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 文 科 學 제101집 2014년 8월 漢 字 문자 그 이상의 상징 체계 Ⅰ. 서론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한자의 본격적인 개혁운동은 5.4 白 話 運 動 이 후 지식인들에 의한 표음문자화를 지향하는 漢 字 革 命 論 이다. 근대 알파 벳 문자를 이상적 원형으로 사유하는 서구학계의 깊은 인식론의 영향으로 1954년 中 國 文 字 改 革 委 員 會 성립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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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역사와 법* 60) 조시현** 목 차 Ⅰ. 들어가며 Ⅱ.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전개 Ⅲ.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법 적용의 의미 -역사와 법의 관계 1. 법적 책임의 전제로서의 사실에 대한 규범적 평가 2. 법을 둘러싼 진실규명의 필요성 3. 연속된 법의식의 회복과 미래 -피해자의 권리와 공동행동원칙의 정립 4. 국가책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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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 評 評 史 泠 歌 宋 代 皇 帝 的 疾 病 醫 療 與 政 治 ( 保 定 : 河 北 大 學 出 版 社, 2013 年, 393 頁 ) 作 一 結 合, 使 我 們 可 從 新 的 角 度, 對 歷 史 得 到 更 完 整 的 認 識. 要 研 究 醫 療 史, 首 先 作 者 必 須 具 備 相 關 的 醫 療 背 景. 然 而, 當 代 的 歷 史 研 究 者 多 缺 乏 醫 療
항일 봉기와 섬멸작전의 사실탐구
抗 日 蜂 起 와 殲 滅 作 戰 의 史 實 探 究 - 韓 國 中 央 山 岳 地 帶 를 中 心 으로- 이노우에 가츠오( 井 上 勝 生 ) 1) 머리말 지난 해(2015년) 10월과 11월, 日 本 軍 東 學 黨 討 伐 隊 의 進 軍 路 를 한국의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조사할 수 있었다. 後 備 第 19 大 隊 (당시 東 學 黨 討 伐 隊 라고 불리었다) 第 1
70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비 롯한 국학연구 기관들과 국립과천과학관, 한국천문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 는 조선시대 역서들의 숫자들을 모두 합하더라도 불과 수백 책의 수준을 넘
조선의 역서( 曆 書 )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박권수 (충북대학교) 1. 조선의 역서( 曆 書 )와 역법( 曆 法 ) 서운관지( 書 雲 觀 志 ) 와 내각일력( 內 閣 日 曆 ), 일성록( 日 省 錄 ) 등에 의거하건대, 조선시대 역서( 曆 書 )의 간행부수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급격 하게 늘어나기 시작해서 정조( 正 祖 ) 22년( 戊 午 年, 1798)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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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征 日 記 신류 申 瀏 1619~1680 본관 평산 平 山 훈련원부정 삼도수군통제사 등 역임, 1658년 영장 領 將 으로 나선정벌 羅 禪 征 伐 신기석 역, ꡔ북정일기ꡕ, 탐구당, 1980 북정일기 북 정 일 기 北 征 日 記 포사수( 砲 射 手 ) 방포( 放 砲 ) 시재( 試 才 ) ꡔ북정일기ꡕ 무술 효묘 9년 순치15년 4월 初 十 日 晴 往 會 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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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 下 宋 鎭 禹 關 係 資 料 文 集 巨 人 의 숨결 Volume Two: The Writings and Biographical Materials of Mr. Chinwoo Song - 1 - 序 文 우리나라의 近 代 와 現 代 의 역사에 있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업적을 남기신 人 物 들의 생애 와 사상을 담은 傳 記 나 回 顧 錄 이 많이 出 刊 된
재입국허가 및 재입국허가로 간주 를 받고 출국하는 분에게 시구정촌에 전출신고를 제출한 후 재입국허가를 받고 출국한 분은 탈퇴일시금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 POINT 1 - 전출신고를 제출하지 않은 경우, 재입국허가기간 내에는 원칙적으로 탈퇴일시금을 청구할 수 없습니
再 入 国 許 可 及 びみなし 再 入 国 許 可 を 受 けて 出 国 する 方 へ 市 区 町 村 に 転 出 届 を 提 出 したうえで 再 入 国 許 可 を 受 けて 出 国 している 方 は 脱 退 一 時 金 を 請 求 す ることができます POINT 1 - 転 出 届 を 提 出 していない 場 合 再 入 国 許 可 期 間 内 は 原 則 として 脱 退 一 時 金 を 請
98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주요어 : 농업기술, 농서집요, 농상집요, 수도, 휴한법, 연작법 1. 머리말 한국사에서 14세기는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국가 지배체제가 크게 격변한 시기였다. 고려말 고려 사회 내부와 외부에서 발생한 여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 염 정 섭** < 국문초록 > 15세기 초반 태종대에 만들어진 농서로 현재 農 書 輯 要 가 남아 있다. 이 농서는 元 代 의 農 書 인 農 桑 輯 要 를 抄 錄 하고 吏 讀 를 붙여 간행한 것이었다. 간행연대가 아직 불확실하지만 15세기 초반 태종대로 추정된다. 고려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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低 所 得 偏 父 母 家 族 의 生 活 實 態 와 政 策 課 題 金 美 淑 朴 敏 妌 李 尙 憲 洪 碩 杓 趙 炳 恩 元 永 憙 韓 國 保 健 社 會 硏 究 院 머 리 말 배우자의 사별, 별거, 이혼 등으로 초래되는 偏 父 母 家 族 은 産 業 化 의 진전에 따른 개인주의 팽배로 이혼이 증가하였고 經 濟 危 機 로 인한 가 족해체가 확산되어 최근 증가 추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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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CAK 12-2(통산65호) Homepage http://www.bunka.or.kr 발행일 2012년 4월 5일 발행인 : 박희남 발행처 : 300-716 대전광역시 동구 대학로 62번지 대전대학교 일어일문과 박희남교수 연구실 042-280-2256, 010-8485-5119 사무 국 : 300-150 대전광역시 동 구 정동 31-1 신영빌딩 201호 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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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1 2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3 4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5 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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固 城 栗 垈 2 農 工 團 地 造 成 事 業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2003. 11 慶 南 發 展 硏 究 院 歷 史 文 化 센터 固 城 栗 垈 2 農 工 團 地 造 成 事 業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Ⅰ. 調 査 槪 要 1. 調 査 目 的 고성군에서 추진중인 율대 농공단지 확장예정지에 대해 문화재보호법 제74-2와 동법 시행령 제43-2
目 次 第 1 篇 1995 年 度 水 産 業 動 向 1 第 1 章 世 界 水 産 業 動 向 3 第 1 節 水 産 物 生 産 3 第 2 節 水 産 物 交 易 5 第 2 章 우리나라 水 産 業 動 向 7 第 1 節 漁 業 構 造 7 第 2 節 漁 家 經 濟 22 第 3 節 水 産 物 生 産 30 第 4 節 水 産 物 輸 出 入 40 第 5 節 水 産 物 需 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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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연구 2006 겨울호 제29권 제4호(통권 105호) pp. 119~148. 硏 究 論 文 주자학에서 혼백론의 구조와 심성론과의 관계 * 김 우 형 ** 1) Ⅰ. 서론: 귀신론과 혼백론 Ⅱ. 북송시대 주자학에서의 혼백과 귀신 Ⅲ. 주희 혼백론의 구조 Ⅳ. 혼백론에서 심성의 지각론으로 Ⅴ. 결론: 혼백론을 통해 본 주자학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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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法 學 제53권 제3호 2012년 9월 617 638면 Seoul Law Journal Vol. 53 No. 3 September 2012. pp. 617 638 1) 1920년~1941년 경성 발행 법정신문( 法 政 新 聞 ) * ** 吉 川 絢 子 Ⅰ. 머리말 이 글에서는 일제시기 조선에서 발간된 법정신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신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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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 營 學 碩 士 學 位 論 文 韓 國 船 舶 管 理 業 의 競 爭 力 提 高 와 國 際 市 場 進 出 方 案 에 關 한 硏 究 - 國 籍 外 航 船 社 의 船 舶 管 理 部 門 을 中 心 으로 - A Study on Competitiveness Analysis and Entries into International Market of Korean Ship Mana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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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소 직물업의 발흥과 그 배경 류상윤( 서울대학교대학원 경제학부 박사과정 수료) 1. 머리말 1960 년대 이후 한국은 고도성장을 경험하였다. 고도성장의 원인 또는 배경이 무엇이었는 지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하여 왔다. 그 중에는 해방 후의 경제성장을 식민지기 조선이 경험했던 것들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들도 있다. 이들은 각각 자본주의
완치란 일반인들과 같이 식이조절과 생활관리를 하지 않아도 다시 통풍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의 통풍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로릭과 진통 소염제로 버텼는지 이제 저한테 하소연 하시고 완치의 길로 가면 다. 어렵지 않습니다. 1 2015 11 10
완치란 일반인들과 같이 식이조절과 생활관리를 하지 않아도 다시 통풍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의 통풍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로릭과 진통 소염제로 버텼는지 이제 저한테 하소연 하시고 완치의 길로 가면 다. 어렵지 않습니다. 1 2015 11 10 # 2012 000081 1 000 95% 95% 60 5 B 507 070 4651 37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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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제 5회 전문가초청간담회 경성제국대학 과 재조 일본인 지식 사회 박 광 현 (동국대학교) 연구 동기 - 문학사에 등장하는 일본인은 누구인가? 조동일 문학통사의 유행, 小 倉, 高 橋 - 경성제대 출신의 조선인? 조윤제(경성대학 출신으로 은폐), 김태준(사회주의자) - 문학연구과에서 연구할 수 있는 테마로서의 한계 - 인물에 관한 연구(일본인
需給調整懇談会の投資調整―石油化学工業を中心に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17 논문 5 朝鮮總督府의 臨時資金調整法 운용과 資金統制 박현 연세대학교 1. 머리말 1937 년 7 월에 시작된 中日戰爭은 전쟁 당사국인 일본뿐만 아니라 그 식민지인 조선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강화되고 전시 경제통제가
南 北 體 育 會 談 第 5 次 實 務 代 表 接 觸 會 議 錄 $은 幣 K7를구 淸 를9 를3 는r구# 國 土 統 - Q ( 漆 北 對 話 事 務 局 ) < 目 次 l - 般 事 項 l l l l l l l 3 l l l l l l l l l 3 2 會 議 錄 7 附 錄 : 代 表 團 記 者 會 見 9 7-7 - 린 一 般 事 項 가 日 時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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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JAPAN ECONOMIC ASSOCIATION THE 38TH KOREA-JAPAN & JAPAN-KOREA BUSINESS CONFERENCE 2006. 5. 25 ~ 27 SAPPORO,JAPAN - 目 次 - Ⅰ. 團 長 團 禮 訪 活 動 3 Ⅱ. 共 同 聲 明 5 Ⅲ. 日 程 8 Ⅳ. 議 題 12 Ⅴ. 兩 側 代 表 團 名 單 1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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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지석묘 6 일본 지석묘 동북아시아 지석묘 6 일본 지석묘 2011년 10월 26일 초판 1쇄 인쇄 2011년 10월 30일 초판 1쇄 발행 총괄 ㅣ 연 웅 기획자문 ㅣ 김성범, (재)동북아지석묘연구소 편집교정 ㅣ 이규훈, 정성목, 성윤길, 이은선 원고작성 ㅣ 小 池 史 哲 번역 ㅣ 이은선 사진제공 ㅣ (재)동북아지석묘연구소 발행처 디자인 펴낸곳 ㅣ
歷史通識-眺望中國
左 傳 期 中 報 告 ~ 故 事 改 寫 ~ 燭 之 武 退 秦 師 系 級 : 中 文 三 學 號 :49111003 姓 名 : 江 俊 億 指 導 老 師 : 蔡 妙 真 教 授 燭 之 武 退 秦 師 ( 上 ) 星 垂 四 野, 薰 風 習 習, 大 地 一 片 寧 靜 ; 但 今 夜 鄭 國 的 國 都 - 新 鄭 似 乎 很 不 平 靜, 那 是 因 為 秦 晉 兩 大 強 國 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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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논총 51호 2016. 3 차 례 논문 김규운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7 정순일 9세기 초 일본의 변경과 통역 쓰시마에 배치된 신라역어를 중심으로 55 김득중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군사점령 논리와 냉전 에른스트 프랑켈의 국제법적 분석을 중심으로 93 조윤수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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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39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이승일 김대호 정병욱 문영주 정태헌 허영란 김민영 지음 발간사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동북아 세 나라는 오랜 옛날부터 독자의 문화를 꽃피움과 동시에 여러 면에서 문화를 공유해왔습니다. 한자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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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연구 1999 여름호 제22권 제2호(통권 75호) pp. 151~184 硏 究 論 文 徐 命 膺 의 생애와 규장각 활동 김 문 식 1)* Ⅰ 머 리 말 Ⅱ 생 애 Ⅲ 家 系 와 교유 인물 Ⅳ 奎 章 閣 기구의 정비 Ⅴ 奎 章 閣 의 국가적 편찬 사업 Ⅵ 맺 음 말 Ⅰ. 머 리 말 保 晩 齋 徐 命 膺 ~ 은 세기 소론계의 名 家 인 達 城 徐 氏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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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已 行 과 未 行 의 의미 -조선의 를 중심으로- 김영석* 79) 목 차 Ⅰ. 머리말 Ⅱ. «대명률»의 已 行 과 未 行 1. 已 行 未 行 에 관한 규정 2. 已 行 과 未 行 의 의미 3. 未 行 의 처벌 Ⅲ. 조선의 法 典 類 에서의 已 行 과 未 行 1. 三 省 交 坐 推 鞫 의 대상범죄 2. «속대전»과 «수교집록»의 비교 Ⅳ. 照 律 과 «대명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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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화에 공헌하는 한국학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이성무 1. 국제정세의 변화와 한국학 한국학은 한국에 관한 인문사회과학적 연구를 말한다. 그런데 현대의 한국학은 한국이 세계 속에서 협력 경쟁하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국제정세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현대의 한국학은 인류문화에 공헌하는 한국학이 되어야 한다. 20 세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사적인 전환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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硏 究 論 文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오현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통합과정 수료, 한국고대사 전공 [email protected] I. 머리말 II. 갈석 과 요수 조문의 사료 맥락 검토 III. 갈석 과 요수 의 위치 고증 IV. 연장 진개 침입 이전 고조선의 중심지 V. 맺음말 I. 머리말 근대사학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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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공보 2013년 8월 15일 (목요일) 제1430호 법원행정처 2 제 1430호 법 원 공 보 2013년 8월 15일(목요일) 목 차 내 규 1147 법관 및 법원공무원 국내위탁교육훈련 내규 신법령 목록 1157 인사 1163 공지사항 1173 1146 2013년 8월 15일(목요일) 법 원 공 보 제 1430호 3 내 규 법관 및 법원공무원 국내위탁교육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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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LETTER : 300-150 31-1 201 [email protected] : 2 한국일본문화학회 회 장 인 사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원 여러분께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 창밖에는 노란 개나리. 그리고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많은 꽃들이 피어 있고, 화사하게 핀 벚꽃들이 바람결에 꽃잎을 날리며 봄의 향연이 한창입니다. 여러 회원님들께서는
2015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2015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국제학술행사 한일관계의 과거를 넘어 미래로 일 시 : 2015. 06. 17 ~ 06. 19 장 소 : 제주도 하얏트리젠시호텔 - 주 최 - 동북아역사재단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한국국제정치학회 현대일본학회 공익재단법인 일한문화교류기금 도쿄대 한국학연구부문 일본국제정치학회 현대한국조선학회 - 후 원 - 대한민국 외교부 일본 외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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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pectives J of Oriental Neuropsychiatry 2012:23(1):1-15 http://dx.doi.org/10.7231/jon.2012.23.1.001 심신치유를 위한 불교의학, 사상의학, 한의학에서의 心 의 연구 김근우, 박성식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신경정신과 교실,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사상체질과 교실 The Study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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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內 容 목차 English Setup, 6 Features and troubleshooting, 10 繁 體 中 文 設 定,6 功 能 與 疑 難 排 解,22 6 34 한국어 설치, 6 기능 및 문제 해결, 46 Logitech TM Wireless Desktop MK300 User s guide Logitech TM Wireless Desktop
편집완료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1) 李 宣 坭 (서울여대) Ⅰ. 序 言 Ⅱ. 臺 灣 : 황국의 백성 Ⅲ. 滿 州 : 동양 문명화 구현의 장 Ⅳ. 支 那 : 야만성 그러나 노제국 Ⅴ. 유교: 가족주의와 혁명 Ⅵ. 맺음말 Ⅰ.머리말 본 논문은 근대 일본의 대표적 여성언론매체 중 하나였던 婦 女 新 聞 의 중국 관련 담론을 분석하고자
제141호 2005년 4월 1일(금) 學 術 院 소식 3월 임원회 개최 사위원회는 학술원 회원과 교수 등 관련 3월 임원회가 3월 4일(금) 오후 2시 학술 분야 전문가로 구성하여 4월 11일(월) 오 원 중회의실에서 임원 15명 전원이 참석한 후 2시에 제1차 심사위
2005년 4월 1일(금) 제141호 Monthly Newsletter from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Republic of Korea 발행인:대한민국학술원 회장 / 우 137-044 서울 서초구 반포4동 산94-4 / http://www.nas.go.kr / XXXXX / F XXXXX / 편집:학술진흥과 第 76 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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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調 의 형성과 새로운 시대의 開 幕 윤 석 산(한양대학교 명예교수) 1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 같이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고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줄이 있으랴 이 시조들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방원(훗날 태종)의 하여가( 何 如 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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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명 497 색 인 인 명 (ㄱ) 강경중 姜 敬 重 182, 193 강덕상 姜 德 相 137 강만철 姜 萬 哲 149, 159 강만희 姜 萬 熙 135 강무형 姜 懋 馨 134 강문선 姜 門 善 88 강병학 姜 丙 學 390 강봉상 姜 奉 相 137 강봉진 姜 奉 辰 150 강석희 姜 奭 熙 133, 139, 158, 225 강선보 姜 善 甫 128,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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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연구 49(2014.6.30), pp.103-128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870년대 이후 分 院 官 窯 변천 1)방병선* 국문초록 본 논문은 1870년대부터 1910년까지 조선시대 왕실용 자기 생산을 담 당했던 사옹원 분원의 변천 과정과 원인, 이와 관련된 장인과 관리, 제작 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연구 방법은 문헌자료 분석을 중심으로 하였 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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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韓 國 禪 學 제36호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 김상일(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Ⅱ 목 차 Ⅱ Ⅰ. 시작하는 말 Ⅱ.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와 불교 관련 증서류 산문 Ⅲ. 불교적 가치관에 대한 비판과 유교 윤리 권면 Ⅳ. 유불 교유론 Ⅴ. 유불 조화론 1. 김수온: 唯 心 一 理 的 儒 佛 融 通 論 2. 성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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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역보고서 2000-22 社 會 脆 弱 階 層 의 健 康 增 進 을 위한 푸드뱅크 事 業 의 活 性 化 方 案 (The Food Bank Activation Programs for Health Promotion of Lower Income Classes) 鄭 基 惠 李 誠 國 金 貞 根 金 聖 卿 韓 國 保 健 社 會 硏 究 院 保 健 福 祉 部 머 리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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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財 ) 東 亞 文 化 硏 究 院 地 表 調 査 報 告 第 14 輯 진영읍 신용리 아름다운아파트 신축공사 구간내 文 化 遺 蹟 地 表 調 査 報 告 書 2 0 0 4. 10 目 次 Ⅰ 7. 조사개요 Ⅱ. 역사 ㆍ 고고분야의 조사 8 1. 김해시의 자연환경 1. 8 2. 김해의 역사적 환경 2. 10 3. 조사대상지역 개관 3. 28 Ⅲ 29. 현지조사 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