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2.hwp
|
|
|
- 흥채 우
- 9 years ago
- Views:
Transcription
1 古 下 宋 鎭 禹 關 係 資 料 文 集 巨 人 의 숨결 Volume Two: The Writings and Biographical Materials of Mr. Chinwoo Song - 1 -
2 序 文 우리나라의 近 代 와 現 代 의 역사에 있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업적을 남기신 人 物 들의 생애 와 사상을 담은 傳 記 나 回 顧 錄 이 많이 出 刊 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은 주관적인 서술이거 나 일정한 관점에서 시대순에 따른 활동상황을 후학들이 선별적으로 기록한 것인 경우가 많아서 한 인물의 사상과 인품을 정확하게 알아내기에는 적당치 아니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本 人 이 직 접 집필한 글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그 人 物 의 思 想 과 人 生 觀 과 時 代 觀 을 좀더 잘 이해할 수가 있다. 이번에 동아일보사 창립 7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펴내게 된 古 下 宋 鎭 禹 선생의 文 集 은 先 生 의 탄신 100주년을 축하함과 동시에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요 언론인이며 정치가인 선생의 심오한 사상의 흐름을 그분이 직접 남기신 글로부터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매편이라고 할 수 있는 古 下 傳 記 및 古 下 評 傳 과 함께 짝지어 출간하게 된 귀중한 기록이다. 古 下 선생은 일찍이 동경유학시절의 20대에서부터 당시로서는 첨단을 걷는 새로운 사상과 구습 타파를 위한 과감한 주장을 글로써 발표하기 시작하여 변천하는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정세 에 관한 정확한 분석과 명쾌한 판단을 내리는 논문을 여러차례 집필한 바 있다. 1915년 學 之 光 에 기고한 思 想 改 革 論, 1925년의 世 界 大 勢 와 朝 鮮 의 將 來, 1931년의 萬 寶 山 事 件 에 대하여 등이 그 예이다. 이중에서 몇편의 논문은 뒷날 韓 國 近 代 名 論 說 66편 중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 러나 언론의 자유가 전혀 없던 일제 암흑기에서 때로는 삭제되고 때로는 발표가 금지된 경우도 허다하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망실된 글도 많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주로 일제 시대의 신문과 잡지로부터 발굴해 낸 상당수의 논문과 동아일보에 사설로서 게재된 바 있는 글들 을 토대로 하고 그 외에 대담 인물평 일화 기타 관련자료를 한데 묶어서 단행본으로 출간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古 下 文 集 에 수록된 글들은 대부분 漢 字 와 한문식 문체로 되어 있어서 어려운 대목도 있으나 선 생이 직접 집필하신 글의 경우에는 대체로 원본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며 제3자가 집필한 자료의 경우에는 가능한 한 한글로 고쳐서 읽기 쉽게 편찬하고자 노력하였다. 본 문집은 古 下 선생이 직접 쓰신 글과 기타 관련자료로 나누어서 각각 발표시대순에 따라 편집 하였으므로 傳 記 나 評 傳 에 묘사된 당시의 시대배경을 염두에 두고 대조하여 읽어가면 조국의 독 립과 민주국가의 수립과정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古 下 선생이 생전에 품으셨던 선각자적 안목, 웅장한 포부, 예리한 판단력 그리고 고결한 인품의 일단을 좀더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으 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해방후의 건국과정에 관한 연구에 귀중한 문헌이 될 것이므로 널리 一 讀 을 권하고자 한다 編 者 - 2 -
3 文 集 - 3 -
4 1. 물레방아 - 漢 詩 2 首 低 尾 噴 白 水 (꼬리를 나지막하게 하고는 흰 물을 쏟고) 擧 頭 撑 靑 天 (머리를 들고는 푸른 하늘을 괸다) ( 註 : 古 下 가 7세때 물레방아를 두고 지은 漢 詩 ) 欲 知 滄 海 量 (창해의 물이 얼마나 되는가를 알고자) 斗 送 小 溪 水 (작은 시냇물을 말로 되어 보내누나) ( 註 : 古 下 가 7세때 물레방아를 두고 지은 漢 詩 ) 2. 人 生 의 價 値 < 學 界 報 > 제1권 제1호 (1912년 4월 1일) 대개 物 이 有 하매 價 値 가 有 함은 自 然 界 의 一 大 眞 理 라 謂 할지로다. 大 抵 糞 矢 는 極 히 汚 穢 한 者 로대 利 用 하면 肥 料 를 供 하며 砂 石 은 極 히 陋 賤 한 者 로대 磨 琢 하면 寶 玉 을 成 하며 灰 炭 은 極 히 粗 末 한 者 로대 和 浸 하면 瀚 濯 에 資 하나니 由 此 觀 之 컨대 價 値 가 無 한 物 은 이 人 間 社 會 에 要 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元 來 造 物 主 가 그 存 在 함을 不 許 한 所 以 로다. 嗟 하다. 우리 人 生 이 廣 漠 한 宇 宙 間 에 介 在 함이 滄 海 의 粟 과 等 하도다. 如 何 한 方 法 으로 如 何 히 做 去 하면 相 當 한 價 値 를 發 揮 할까. 先 哲 이 云 하되 我 는 未 免 爲 鄕 人 으로 爲 愛 라 하였으니 是 는 實 로 우리의 注 意 地 며 期 圖 處 라 하노라. 然 하나 原 是 人 類 는 賣 買 品 이 아니라 金 錢 上 價 値 는 論 할 바 無 하거니와 飛 走 는 鳥 獻 에 不 及 하며 潛 躍 은 魚 龍 에 不 及 하며 堅 固 는 木 石 만 不 如 하거늘 何 故 로 萬 物 의 靈 長 이라 稱 하는지 或 自 許 에 過 度 치 아니한가 자못 稱 할 뿐이라. 實 地 로 地 球 를 區 分 하며 萬 物 을 支 配 하여 隱 黙 히 宇 宙 間 主 人 翁 을 作 함은 他 가 아니라 元 來 皇 天 이 萬 物 을 創 造 하실 새 或 技 能 만 與 한 者 도 有 하며 或 勇 力 만 與 한 者 도 有 하며 或 强 氣 만 與 한 者 도 有 하니 卽 語 에 云 한 바 角 을 與 한 者 는 齒 를 與 치 아니함이라. 如 此 히 偏 方 的 으로 賦 與 하시었거늘 우리 人 類 에게는 不 照 하여 良 知 良 能 을 與 하시며 聰 明 을 與 하시며 言 語 를 與 하시며 도한 相 當 히 活 用 할 機 關 되는 四 肢 百 骸 를 與 하사 具 體 的 으로 完 全 無 缺 한 資 格 을 賦 與 하메 原 因 함이로다. 大 抵 天 이 吾 人 에게 賦 與 하심이 如 此 이 厚 重 하시고 吾 人 이 天 에게 受 함이 如 此 이 廣 大 하거늘 어찌 暴 棄 에 自 流 하며 依 賴 를 是 好 하여 一 價 値 없는 物 을 作 하리오. 或 蓬 戶 蓽 門 에 一 生 을 虛 送 타가 萬 疊 靑 山 에 一 杯 土 物 을 作 한 者 도 有 하며 或 朱 閣 靑 樓 에 百 年 을 自 誤 하여 一 般 社 會 界 에 一 索 米 沃 을 作 한 者 도 有 하며 或 吳 市 越 會 에 片 利 를 是 逐 하여 萬 衆 會 場 에 一 壟 斷 夫 를 作 한 者 도 有 하니 嗚 呼 라 人 生 의 至 悲 至 慘 한 境 遇 가 此 外 에 過 할 者 無 하도다. 是 以 로 人 類 의 進 取 를 論 하매 孔 曰 仁 이라 하며 孟 曰 義 라 하였으니 至 哉 라, 此 言 이어 富 貴 가 能 히 淫 치 못하며 貪 賤 이 能 히 移 키 難 하도다. 殷 湯 은 萬 乘 의 帝 王 이로대 桑 林 에 祈 하고 伯 夷 는 百 世 의 師 表 로대 首 陽 에 餓 하니 是 皆 人 生 의 價 値 를 發 揮 하기 爲 하여 然 함이로다. 우리 人 生 은 마땅히 至 高 至 健 한 良 心 의 指 揮 를 從 하여 千 人 이 阻 防 하되 我 獨 往 之 하며 滿 人 이 沮 毁 하되 我 獨 爲 之 란 氣 槪 로 天 賦 한 價 値 를 發 揮 할지로다. 顔 賢 曰 有 爲 者 赤 若 是 라 하였으니 爲 할지며 那 帝 曰 無 不 可 能 이라 하였으니 能 할지니 吾 人 이 此 世 에 生 치 아니하면 已 어니와 만일 生 할진대 어찌 自 然 界 의 眞 理 를 背 馳 케 하며 天 賦 한 價 値 를 抛 棄 하여 禽 獸 不 若 의 歎 을 作 하리오
5 3. 思 想 改 革 論 < 學 之 光 > 제3권 1호 (총5호 1915년 5월 2일) 思 想 은 生 活 의 標 準 이니 萬 一 吾 人 으로 하여금 過 去 의 思 想 을 是 認 하며 現 在 의 生 活 에 滿 足 한 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아니하고 慣 習 의 權 威 를 打 破 하며 遺 德 의 奴 隸 를 解 放 하여 眞 生 命 의 領 地 를 展 開 하며 新 生 活 의 源 泉 을 啓 發 코자 할진대 第 一 要 緊 하고 急 切 한 問 題 는 思 想 界 革 命 이라 하노니 荒 頹 한 基 礎 에는 華 麗 한 樓 閣 을 建 築 키 難 하며 汚 穢 된 墻 壁 에는 燦 爛 한 彩 畵 를 添 加 키 不 能 하도다. 是 以 로 新 時 代 에는 新 生 活 을 要 求 하고 新 生 活 은 新 思 想 에 胚 胎 되나니 換 言 하면 倉 廩 의 富 가 社 會 發 展 의 標 準 이 아니며 兵 甲 의 銳 가 民 族 保 護 의 機 械 가 아니라 다만 隱 微 한 思 想 의 線 路 가 隆 替 의 運 命 을 支 配 하며 文 野 의 區 別 을 判 定 함은 人 事 界 의 一 大 原 則 이요 歷 史 上 에 明 瞭 한 事 實 이라. 爾 今 에도 闊 袖 曲 學 이 上 古 戀 慕 에 繫 戀 이 尙 存 하고 高 襟 新 派 는 邊 幅 修 飾 에 餘 醉 가 未 醒 하니 散 漫 한 思 索 은 時 代 風 潮 와 合 流 할 수 없으며 衰 頹 한 想 華 는 文 明 理 想 에 共 鳴 되기 難 하도다. 於 是 에 暗 淡 한 地 獄 이 現 世 에 來 臨 하고 窮 極 한 慘 劇 이 到 處 에 演 出 됨은 目 下 의 實 況 이라. 이 어찌 危 急 의 機 가 아니며 存 亡 의 秋 가 아니리오. 이에 林 隱 의 譏 와 井 觀 의 嘲 를 不 拘 하고 暗 黑 面 과 寂 寞 界 를 向 하여 一 筆 로 論 究 코자 한다. 第 一 孔 敎 打 破 와 國 粹 發 揮 孔 敎 는 打 破 될 時 代 도 到 來 하였거니와 打 破 도 하여야 하겠도다. 勿 論 孔 丘 氏 는 偉 人 傳 中 의 一 人 이라 氏 의 事 蹟 을 參 考 할 必 要 가 自 在 하며 敬 愛 할 感 情 도 不 無 하도다. 然 하나 吾 人 은 沐 冠 猴 가 아니라 自 己 의 處 地 를 沒 却 하고 그 言 行 을 模 倣 할 수 없으며 吾 人 은 蓄 音 機 가 아니라 時 代 의 利 害 를 不 拘 하고, 그 思 想 을 傳 播 하기 難 하도다. 換 言 하면 四 億 萬 族 의 血 肉 系 統 이 吾 人 과 連 鎖 가 無 하며 二 千 年 前 의 思 想 權 威 가 現 代 를 支 配 키 難 하도다. 玆 에 槪 論 하면 孔 敎 는 慕 古 思 想 의 源 泉 이니 祖 述 堯 舜 하고 憲 章 文 武 가 孔 敎 가 中 樞 思 想 이라 於 是 에 土 階 三 等 과 茅 茨 不 翦 의 半 蠻 生 活 을 讚 美 하며 禮 儀 三 百 과 威 儀 三 千 의 牧 畜 道 德 을 準 繩 하게 되니 社 會 는 停 滯 하여 發 展 의 希 望 이 杜 塞 되고 民 氣 는 鎖 索 하여 進 取 의 氣 象 이 缺 乏 한지라 是 以 로 無 窮 한 眞 理 를 闡 明 하며 無 限 한 幸 福 을 增 加 케 하는 人 文 進 步 의 原 理 에 背 馳 될지며 孔 敎 는 專 制 思 想 의 端 緖 니 民 은 可 使 由 之 요 不 可 使 以 知 之 라는 論 法 으로 賢 者 政 治 를 唱 導 하니 吾 人 人 類 가 政 治 的 動 物 이 되는 原 理 에 背 馳 될 뿐아니라 이른바 賢 者 가 代 代 繼 承 될 理 由 도 萬 無 하도다. 於 是 에 治 日 이 極 小 하고 亂 日 이 恒 多 하여 社 會 가 塗 炭 의 坑 을 幻 成 하고 人 民 이 覺 醒 의 機 가 絶 乏 됨 은 東 西 歷 史 의 一 一 示 明 하는 바라. 是 以 로 民 主 思 想 이 澎 漲 하여 自 治 權 利 의 平 等 政 治 를 實 現 하는 現 代 潮 流 에 不 適 할지며 孔 敎 는 排 他 思 想 의 表 現 이니 外 族 은 蠻 夷 로 待 遇 하며 他 學 은 異 端 으로 看 做 하여 獨 斷 論 評 과 妄 大 思 想 으로 部 落 社 會 를 幻 成 하며 暗 黑 時 代 를 再 現 하려 하니 是 以 로 人 類 平 等 의 眞 理 를 高 調 하며 思 想 自 由 의 特 色 을 發 揮 케 하는 文 明 思 想 에 反 對 될지로다. 우리 社 會 는 孔 敎 를 輸 入 한 以 後 로 處 處 에 傳 染 病 院 鄕 校 이오, 人 人 이 食 傷 患 者 라, 神 嚴 한 民 族 精 神 은 是 로 以 하여 破 壞 되었으며 壯 烈 한 武 勇 思 想 은 是 로 以 하여 鎖 沈 되었으며 燦 爛 한 美 術 工 藝 는 是 로 以 하여 殘 滅 되었도다. 噫 라 一 矢 를 不 拔 하며 半 箭 을 不 費 하고 幾 行 文, 數 片 語 로 他 族 을 戕 害 하는 孔 氏 의 勢 力 도 惡 極 하려니와 우리 民 族 의 中 毒 된 程 度 도 窮 極 하였도다. 然 하면 孔 敎 打 破 는 自 我 保 護 의 正 當 防 衛 요 時 代 要 求 의 緊 急 事 務 라. 是 以 로 玆 에 國 粹 發 揮 를 急 叫 코자 하노니 吾 人 의 生 命 은 太 白 山 檀 木 下 에서 神 聖 出 現 하신 大 皇 祖 께서 創 造 하셨나니 皇 組 께옵서는 領 土 家 屋 을 開 創 하셨으며 禮 樂 文 物 을 制 定 하셨으며 血 肉 精 靈 - 5 -
6 을 分 布 하셨으니 吾 人 의 生 命 을 集 合 하면 四 千 年 前 의 渾 全 한 一 體 가 될지요 分 布 하면 二 天 萬 族 의 分 派 된 支 流 가 될지로다. 庭 間 一 株 樹 를 試 觀 하라. 千 枝 萬 葉 의 生 命 이 一 帶 莖 根 에 起 源 된 者 아닌 가. 由 來 로 蒙 被 한 恩 澤 은 泰 山 이 猶 輕 하고 密 接 된 關 係 는 一 髮 을 難 容 이로다. 然 하면 吾 人 이 大 皇 祖 를 崇 奉 하며 尊 祀 함은 事 光 追 遠 의 至 極 한 精 誠 이오 啓 後 開 來 의 當 然 한 義 務 가 될지며 第 二, 家 族 制 의 打 破 와 個 人 自 立 社 會 制 度 는 人 文 進 步 와 時 代 發 展 을 隨 하여 變 遷 되며 改 革 됨은 人 事 界 의 事 實 이라, 元 來 家 族 制 度 는 部 落 社 會 의 産 物 이며 專 制 時 代 의 餘 波 니 一 은 人 文 이 未 闢 하고 知 識 이 幼 稚 하여 共 同 生 活 의 原 則 을 未 解 하고 猜 忌 爭 奪 의 野 心 이 劇 烈 함을 隨 하여 族 屬 을 團 結 하며 部 落 을 成 立 하고 防 衛 의 道 를 謨 하며 抵 抗 의 力 을 作 함에 起 源 되고 一 은 刑 政 이 未 備 하고 法 令 이 解 弛 하여 國 家 의 統 治 機 關 이 周 密 한 警 察 과 絶 對 한 權 威 를 發 揮 치 못함을 因 하여 狡 猾 한 專 制 家 가 夷 族 의 法 을 制 定 하고 家 族 의 制 를 利 用 하여 社 會 를 拘 束 하고 地 位 를 確 保 코자 함에 發 達 되었나니 是 以 로 個 人 權 利 가 尊 重 되고 國 家 威 力 이 澎 漲 한 現 代 에 對 하여는 家 族 制 의 存 在 를 容 認 키 難 하도다. 玆 에 槪 論 하면 家 族 制 는 社 會 發 展 에 障 害 物 이 될지니 靑 年 英 才 로 萬 里 에 壯 志 가 有 하고 一 生 의 經 論 을 抱 하여 法 律 의 制 裁 를 不 拘 하며 慣 習 의 科 臼 에 超 越 하여 快 擧 雄 圖 의 氣 槪 가 有 하여도 活 動 의 方 面 과 進 行 의 經 路 에 家 長 의 承 諾 을 要 求 하게 되니 偉 大 한 理 想 은 凡 夫 의 理 解 키 不 能 하고 危 險 한 事 業 은 俗 翁 의 妨 沮 되기 容 易 하도다. 是 以 로 社 會 는 進 取 氣 象 이 缺 乏 하고 保 守 思 想 이 溢 萬 될지며 家 族 制 는 懶 惰 性 의 源 流 가 될지니 一 人 이 耕 之 하고 十 人 이 食 之 라 함은 家 族 制 의 眞 相 을 說 明 한 句 語 라, 대개 勤 勉 은 奮 鬪 에서 生 하고 奮 鬪 는 生 活 에 基 因 되나니 靑 年 健 骨 이 蠢 蠢 한 寄 生 蟲 으로 化 作 되고 紅 顔 幼 婦 가 無 用 한 新 有 物 로 幼 出 되매 財 産 에 恒 心 이 無 하고 生 活 이 依 賴 가 自 甚 하도다. 是 以 로 勢 殊 事 異 하면 桑 海 의 變 이 斷 至 될지요 溝 壑 의 禍 가 難 免 될지며 家 族 制 는 人 材 擢 用 에 擠 陷 穽 이 될지니 門 閥 을 尊 尙 하여 貴 賤 을 判 定 하며 系 統 을 是 觀 하여 班 常 을 區 別 하니 於 是 에 祖 先 이 顯 著 하고 族 親 이 繁 昌 하면 瘋 癩 白 痴 와 酒 囊 飯 袋 라도 依 例 厚 待 하며 瞠 然 仰 視 하고 門 地 가 寒 微 하고 系 統 이 未 詳 하면 偉 貌 健 骨 과 逸 足 良 材 라도 互 相 排 斥 하며 睨 然 侮 視 하니 是 以 로 社 會 는 冷 酷 殘 忍 하여 和 氣 가 喪 失 되고 民 族 은 支 離 滅 裂 하여 怨 聲 이 漲 滿 하였도다. 勿 論 民 族 을 爲 하여 血 肉 을 犧 牲 하며 精 靈 을 盡 瘁 하는 人 物 에게 對 하여 그 勳 績 을 讚 頌 하며 敬 慕 함은 社 會 의 義 務 며 因 果 의 報 應 이라. 그러나 後 裔 近 族 이 遺 風 을 誇 張 하며 白 骨 을 利 用 하여 投 機 的 으로 漁 功 을 坐 收 하며 無 條 件 으로 門 閥 을 樹 立 함은 社 會 가 決 斷 코 容 認 키 難 할 뿐 아니라 어찌 先 哲 에 對 한 累 及 이 아니며 後 進 에 關 한 恥 辱 이 아니리오. 噫 라 王 侯 將 相 이 元 來 種 字 가 無 하며 偉 功 勳 名 이 特 別 한 限 界 가 無 하나니 疾 足 者 先 得 이오 熱 心 家 所 有 됨은 自 然 界 의 形 勢 요 歷 史 上 의 徵 擧 하는 바로다. 試 觀 하라. 家 族 制 의 胎 毒 이 如 何 하며 社 會 界 에 被 損 이 如 何 한가. 勿 論 皮 相 의 觀 과 近 視 의 眼 으 로 批 評 하면 家 族 制 度 는 骨 肉 連 鎖 의 機 關 이며 愛 情 發 露 의 結 果 라 할지나 吾 人 으로 하여금 眞 正 한 骨 肉 連 鎖 의 必 要 를 感 覺 할진대 二 千 萬 族 의 精 力 을 團 合 할지요, 純 潔 한 愛 情 發 露 의 精 誠 을 披 瀝 코 자 할진대 四 千 年 來 의 歷 史 를 光 輝 케 할지로다. 何 者 로 吾 人 의 肉 體 에는 同 一 한 檀 君 血 液 이 循 環 되며 吾 人 의 頭 腦 에는 同 一 한 槿 域 思 想 이 留 宿 되며 吾 人 의 活 動 에는 密 接 한 利 害 問 題 가 關 係 됨이 로다. 腐 敗 한 制 度 와 偏 狹 한 觀 念 은 門 戶 를 對 立 하여 賢 能 을 戕 害 케 하였으며 私 利 에 熱 烈 하여 公 事 에 冷 淡 케 하였으며 家 譜 는 重 視 하되 歷 史 는 無 視 케 하였으며 私 墳 은 修 築 하되 宗 祠 는 荒 蕪 케 하였으며 閥 松 은 長 養 하되 公 山 은 赭 禿 케 하였도다. 然 하면 家 族 打 破 는 大 和 樂 을 挽 回 하는 張 本 이며 大 發 展 을 要 求 하는 所 以 라. 是 以 로 茲 에 個 人 의 自 立 을 切 叫 하노니 支 人 張 某 의 九 世 同 居 를 美 事 로 稱 道 하며 好 例 로 看 做 하나 此 는 主 觀 이 아니오 客 觀 이며 實 質 이 아니오 形 式 이니 그 經 過 狀 態 는 忍 字 의 百 으로 說 明 되 었나니 到 此 에 裏 面 의 衝 突 과 內 幕 의 苦 痛 을 想 像 할지로다. 然 하면 不 和 를 引 致 하며 苦 痛 을 忍 耐 - 6 -
7 하여 九 世 를 同 居 하는 것보다 一 時 에 別 居 하여 和 平 을 共 樂 하며 幸 福 을 相 增 하는 것이 智 者 의 能 事 요 達 人 의 觀 察 이라. 是 以 로 複 雜 한 親 等 을 減 縮 하여 負 擔 을 輕 損 하며 獨 立 의 生 活 을 完 成 하여 自 由 로 發 展 케 할지니 換 言 하면 個 人 은 家 族 線 을 經 由 하여 社 會 에 到 着 할 것이 아니라 直 線 으로 社 會 를 貫 通 하게 할 것이니 如 此 하면 萬 里 獨 治 하여도 家 政 의 顧 가 無 하여 事 業 을 完 就 할 지요 一 力 直 進 하여도 交 老 의 阻 가 無 하여 社 會 가 發 展 될지로다. 噫 라 家 族 을 周 圍 하여 固 着 된 重 農 主 義 는 過 去 에 歸 屬 하였고 個 人 을 中 心 하여 流 動 하는 通 商 時 代 는 現 在 에 到 來 하였으며 第 三, 强 制 戀 愛 의 打 破 와 自 由 戀 愛 의 鼓 吹 戀 愛 는 至 誠 이며 事 實 이니 人 生 一 代 에 苦 樂 의 源 泉 이오 社 會 萬 般 에 盛 衰 의 關 鍵 이라. 이 어 찌 靜 思 沈 究 하며 重 視 詳 論 할 大 問 題 가 아니리오. 由 來 로 不 告 而 娶 는 成 人 之 戒 라 하여 坌 垢 堆 積 하 고 荒 唐 無 稽 한 一 片 空 文 으로 靑 年 男 女 의 肉 體 自 由 를 束 縛 하며 人 類 社 會 의 愛 情 發 露 를 塞 源 하여 萬 端 苦 痛 을 招 致 하며 一 般 風 化 를 損 傷 케 하나니 茲 에 槪 論 하면 强 制 戀 愛 는 階 級 結 婚 의 惡 果 를 發 生 케 하나니 靑 年 男 女 가 心 契 가 相 合 하며 情 愛 가 殊 切 하여 夢 中 에 人 이 되고 相 思 의 病 이 될지라도 貴 賤 이 不 適 하고 貧 富 가 不 均 하면 家 親 의 不 許 와 慣 習 의 制 裁 를 因 하여 巫 山 佳 約 을 虛 負 케 하나니 是 以 로 精 力 과 血 液 이 一 定 한 族 屬 에 循 環 不 通 하여 生 理 上 에 不 良 한 兆 徵 이 胚 胎 될지며 强 制 戀 愛 는 早 婚 의 末 弊 를 發 生 케 하나니 鄕 黨 父 老 와 村 閭 老 婆 가 身 後 의 種 을 豫 慮 하며 眼 前 의 花 를 玩 樂 코자 하여 幼 子 稚 女 를 載 車 負 馬 하고 華 燭 의 典 을 擧 行 하게 되니 知 覺 은 尙 早 하고 骨 格 이 未 成 한지라, 往 往 히 白 地 健 兒 는 黃 泉 의 客 을 作 하고 靑 春 孀 婦 가 素 縞 의 服 을 裝 하니 於 是 에 愁 雲 이 漠 漠 하고 冷 風 이 蕭 瑟 하는 人 生 悲 劇 이 演 出 될지며 强 制 戀 愛 는 作 妾 의 惡 習 을 招 致 케 하나 니 夢 寐 에 不 見 하고 鬼 神 도 未 知 하는 人 事 間 에 一 片 의 紙 와 數 匹 의 帛 으로 百 年 을 期 約 하니 鴛 鴦 의 樂 과 琴 瑟 의 和 를 得 한 者 辰 星 이며 僥 倖 이라. 性 格 의 異 同 이 水 油 의 關 係 요 或 은 容 貌 의 醜 美 가 玉 石 의 差 別 이 生 하니 男 男 이 君 子 人 이 아니며 事 事 에 道 德 家 가 아니라 於 是 에 心 神 의 慰 安 과 戀 愛 의 快 樂 을 別 途 로 求 하니 是 以 로 芳 年 紅 頰 이 破 鏡 의 身 勢 를 自 歎 하고 春 閨 靑 春 은 薄 命 의 長 恨 을 泣 訴 하는도다. 百 樂 天 의 詩 에 後 世 莫 作 女 子 身, 一 生 苦 樂 由 他 人 이란 一 句 는 어찌 强 制 戀 愛 의 黑 幕 一 面 을 畵 出 한 者 아니리오. 由 此 觀 之 컨대 强 制 戀 愛 는 弊 毒 이 窮 天 極 地 로다. 不 自 然 한 早 婚 의 弊 風 은 人 世 의 悲 哀 를 化 成 케 하였으며 非 人 道 된 作 妾 의 惡 例 는 婦 女 의 怨 恨 을 發 生 케 하였으며 沒 常 識 한 階 級 의 結 婚 은 生 理 의 發 達 을 妨 沮 케 하였나니 然 하면 强 制 戀 愛 를 打 破 함은 自 然 的 의 眞 理 요 人 事 上 의 正 路 라. 是 以 로 吾 人 은 茲 에 自 由 戀 愛 를 鼓 吹 코자 하나니 元 來 戀 愛 는 理 論 이 아니오 情 熱 이며, 客 觀 이 아니오 主 觀 이란 由 是 로 貧 富 의 限 界 가 無 하며 貴 賤 의 階 級 이 無 하며 土 地 의 遠 近 이 無 하며 知 識 의 比 較 가 無 하나니 換 言 하면 萬 金 의 富 가 戀 愛 를 橫 斷 할 수 없으며 三 軍 의 威 가 戀 愛 를 爭 奪 할 수 없으며 白 屋 의 貧 이 戀 愛 를 變 改 할 수 없으며 千 里 의 遠 이 戀 愛 를 疏 隔 할 수 없으며 知 識 의 力 이 戀 愛 를 解 剖 할 수 없나니 此 는 宇 宙 의 神 秘 요 人 情 의 機 微 라 萬 一 食 飮 을 强 效 치 못할 진대 戀 愛 도 强 制 치 못할지며 第 四, 虛 榮 敎 育 의 打 破 와 實 利 敎 育 의 主 張 由 來 로 우리 社 會 는 官 吏 萬 能 과 민 者 一 流 라는 沃 學 思 想 이 靑 年 의 頭 腦 에 浸 染 되고 社 會 의 習 慣 을 化 成 하여 十 年 의 苦 讀 은 標 準 이 馬 頭 의 榮 에 在 하고 一 生 의 守 道 는 目 的 이 豹 皮 의 名 에 終 하 니 是 以 로 全 體 事 業 은 衰 頹 가 窮 極 하고 一 般 思 潮 가 虛 榮 에 浮 敗 되었도다. 茲 에 槪 論 하면 虛 榮 敎 育 은 勞 動 虐 待 의 結 果 가 生 하나니 勞 動 은 神 聖 이라 他 人 의 汗 血 을 不 食 하고 自 力 의 勤 勉 을 是 資 하여 運 命 을 開 拓 하며 生 活 을 維 持 하니 天 賦 의 能 力 이오 人 生 의 要 務 라, 高 壯 한 城 壁 은 礎 石 이 無 하고 特 立 키 難 하며 偉 大 한 民 族 은 勞 動 이 乏 하고 雄 飛 키 難 할지며 虛 榮 敎 育 은 物 質 硏 - 7 -
8 究 를 疏 略 케 하나니 窮 思 覓 得 하고 緻 密 周 到 치 아니하면 自 然 界 의 法 則 을 解 悟 키 難 하고 物 理 上 의 變 化 를 覺 得 키 不 能 하나니 是 以 로 虛 榮 敎 育 은 規 則 을 是 準 하여 腦 力 을 鍊 鍛 하며 分 業 을 是 隨 하여 能 力 을 發 揮 키 難 할지며 虛 榮 敎 育 은 名 利 의 奴 隸 가 되나니 生 産 을 不 事 하고 澤 及 萬 民 을 希 望 하며 山 林 에 隱 遁 하여 名 傳 千 秋 를 夢 想 하니 事 業 에 階 級 이 分 明 하며 窮 達 이 途 程 을 要 求 하매 躐 等 하여 到 達 키 難 하며 不 勞 하고 成 就 키 不 能 하나니 是 以 로 實 體 를 未 解 하고 形 式 을 是 主 하며 事 理 를 不 拘 하고 榮 華 를 渴 望 하게 될지라. 勿 論 名 문민 輩 出 이 吾 人 의 希 望 이오 賢 相 繼 至 가 現 代 의 要 求 라. 然 하나 吾 人 이 眞 正 한 政 治 를 實 行 코자 할진대 먼저 虛 榮 的 思 潮 를 打 破 할지요 深 遠 한 學 術 을 硏 究 코자 할진대 먼저 固 陋 한 偏 見 을 打 破 할지로다. 是 以 로 茲 에 實 利 敎 育 을 急 調 코자 하나니 人 生 이 此 世 에 來 하매 宇 宙 間 森 羅 萬 象 이 一 般 硏 究 資 料 요, 社 會 上 大 小 百 事 가 俱 是 活 動 方 面 이라. 官 吏 의 寄 生 職 이 唯 一 한 目 的 되기 難 하며 문 者 의 釣 名 業 이 高 尙 한 事 實 되기 不 能 하도다. 다만 天 意 에 適 合 하고 民 生 에 必 要 하면 才 能 과 職 分 을 隨 하여 心 血 을 傾 盡 하며 努 力 을 極 盡 케 하는 것이 人 類 의 義 務 요 社 會 의 理 想 이라. 然 하면 煙 突 事 業 도 可 할지며 肥 料 生 活 도 可 할지며 珠 盤 活 動 도 可 할지며 航 海 硏 究 도 可 할지라. 現 代 는 實 利 文 明 이니 英 雄 은 團 體 로 幼 出 되고 政 治 는 生 活 로 變 形 되었도다. 是 以 로 杜 翁 은 文 豪 로되 農 園 에 投 足 하고 厚 公 은 偉 傑 이로대 工 場 에 出 身 되었으며 第 五, 常 識 實 業 의 打 破 와 科 學 實 業 의 喚 興 進 步 發 展 의 使 命 을 帶 한 吾 人 人 類 의 生 活 狀 態 는 時 代 의 變 換 됨과 人 文 의 繁 昌 함을 隨 하여 華 美 하게 되며 精 巧 하게 되나니 是 以 로 綿 布 의 服 이 護 身 의 着 이 아니며 茅 茨 의 屋 이 容 膝 의 處 가 아니며 蔬 菜 의 飯 이 充 腹 의 物 이 아니며 連 朮 의 草 가 病 治 의 藥 이 아니 될지로다. 茲 에 槪 論 하면 常 識 實 業 은 産 業 의 發 達 을 沮 防 케 하나니 物 理 의 硏 究 가 乏 絶 하며 機 械 의 使 用 을 未 究 하여 努 力 만 是 賴 하고 經 驗 을 標 準 하니 完 全 한 設 備 와 一 定 한 準 繩 이 無 한지라. 是 以 로 到 處 에 原 始 의 觀 이 有 하며 製 品 에 斧 鑿 의 痕 이 無 키 難 할지며 常 識 實 業 은 外 處 의 物 貨 를 招 致 케 하나니 精 拙 이 不 同 하고 遲 速 이 懸 殊 하매 同 價 면 紅 裳 이오 疾 足 에 先 得 이라. 是 以 로 風 雨 行 商 이 地 盤 을 奪 하고 盡 夜 製 工 은 職 業 을 失 하여 歐 品 米 貨 가 漁 貫 輻 湊 하니 經 濟 界 에 鳩 居 의 患 과 狐 借 의 禍 가 繼 至 하게 될지며 常 識 實 業 은 社 會 信 用 을 墮 落 케 하나니 貯 蓄 의 機 關 이 未 備 하고 簿 記 의 方 式 이 不 明 하며 損 得 의 證 據 가 未 確 하고 投 機 的 事 業 이 勵 行 되니 是 以 로 甲 者 를 疑 하며 乙 某 를 忌 하고 東 隣 에 得 하고 西 市 에 失 하게 되니 太 倉 紅 腐 는 活 用 의 途 가 塞 하고 寒 村 白 屋 은 流 通 의 路 가 能 하게 될지로다. 競 爭 은 生 活 에 起 因 되고 生 活 은 實 業 에 基 礎 되나니 吾 人 이 木 石 이 아니며 幽 靈 이 아니라. 食 飮 치 아니하면 飢 渴 할지요, 衣 着 치 아니하면 凍 寒 할지니 歲 入 歲 出 이 權 衡 을 失 하며 供 給 需 要 가 機 關 이 無 하여 天 産 原 料 는 他 地 에 流 出 되고 人 製 外 品 은 到 處 에 發 見 하게 되니 이 어찌 生 活 의 危 機 가 아니리오. 是 以 로 茲 에 科 學 實 業 의 急 務 를 喚 興 하노니 現 代 의 産 業 은 科 學 의 發 達 됨을 因 하여 革 命 되었나 니 視 觀 하라, 鐵 線 이 縱 橫 하며 電 信 이 連 絡 하여 貨 物 의 交 換 을 敏 活 케 하는 것이 蒸 氣 電 氣 의 作 用 이며 時 笛 이 四 起 하고 烟 突 이 林 立 하여 製 品 의 精 巧 를 窮 極 케 하는 것이 化 學 工 藝 의 發 達 이며 肥 料 가 山 積 하고 山 野 가 盃 蒼 하여 林 果 의 供 給 을 豊 饒 케 하는 것이 物 質 推 理 의 餘 波 며 內 外 를 科 分 하며 骨 節 을 解 剖 하여 生 命 의 苦 痛 을 輕 減 케 하는 것이 生 理 應 用 의 結 果 가 될지니 是 以 로 科 學 實 業 은 學 術 應 用 의 活 動 이며 分 業 發 達 의 關 鍵 이라 消 極 的 으로 土 産 을 保 護 하여 自 衛 의 道 를 謀 하 며 積 極 的 으로 科 學 을 引 用 하여 發 展 의 策 을 計 劃 하는 것이 生 活 維 持 의 方 便 이 될지며 産 業 發 展 의 基 因 이 될지로다
9 結 論 紙 面 의 不 許 함과 境 遇 의 難 用 됨을 因 하여 結 構 의 體 가 疏 略 이 多 하고 論 評 의 鋒 이 自 由 를 失 하 여 管 蠡 의 見 과 衣 上 의 感 이 不 無 하도다. 然 하나 누구던지 朝 鮮 民 族 史 를 讀 하다가 掩 卷 長 觀 할 處 는 思 想 界 의 墮 落 이라 할지니 試 觀 하라. 社 會 는 依 賴 의 風 이 彌 滿 하며 民 族 은 自 立 의 道 를 不 求 하여 士 林 은 孔 敎 를 依 賴 하며 靑 年 은 老 年 을 依 賴 하며 女 子 는 男 丁 을 依 賴 하며 實 業 은 常 識 을 依 賴 하며 敎 育 은 過 去 를 依 賴 하며 國 內 는 海 外 를 依 賴 하게 되니 元 氣 가 沮 喪 되고 神 經 이 虛 弱 하여 風 聲 鶴 唳 에 一 嚬 一 笑 하고 點 兩 片 雲 에 是 望 是 翅 하며 投 機 事 業 에 耳 目 을 傾 盡 하고 僥 倖 運 數 에 心 神 을 馳 驅 하니 於 是 에 訛 言 이 百 出 하고 群 妖 가 橫 行 하는도다. 噫 라, 天 은 自 助 하는 者 를 助 하나니 誰 某 誰 某 하여도 依 賴 心 을 打 破 한 以 前 人 이며 曰 何 曰 何 하여 도 自 立 力 을 確 立 한 然 後 事 라. 是 以 로 吾 人 의 今 日 은 改 革 을 要 하는 時 代 며 內 省 을 求 하는 時 代 라 하노라. 4. 男 女 交 際 에 對 한 名 士 의 意 見 < 靑 年 > (1921년 3월 12일 창간) 男 子 나 女 子 나 同 一 한 사람이라, 사람과 사람의 交 際 하는 것이 正 當 한 事 實 이다. 그러나 우리 社 會 에는 習 慣 의 制 裁 가 嚴 切 하였으므로 그 錯 誤 된 思 想 을 들어 確 論 하려 한다. (1) 兩 性 의 調 和 = 男 女 交 際 를 反 對 하는 理 由 는 흔히 風 紀 의 紊 亂 이니 異 性 의 相 求 함은 生 理 上 原 則 이라 握 手 交 話 하는 것이 戀 慕 의 情 과 亂 倫 의 變 을 引 致 하겠다 함이다. 그러나 이는 心 中 有 妓 者 流 의 近 視 皮 觀 이다. 紳 士 淑 女 의 交 際 는 淫 婦 蕩 子 의 遊 戱 가 아니라 知 識 을 相 資 하며 善 惡 을 相 戒 하여 理 性 으로 交 하고 信 念 으로 接 하나니 도리어 男 의 强 과 女 의 柔 가 서로 感 化 를 及 하며 和 氣 를 發 하여 圓 滿 한 社 會 가 現 出 될 것이며 (2) 文 化 의 速 進 = 個 性 의 發 展 은 人 類 의 重 大 한 問 題 다. 女 子 를 料 理 具 나 裁 縫 針 이나 媬 母 車 로만 看 做 하던 陋 習 은 論 할 바 無 하거니와 至 今 까지 男 子 만 專 橫 하던 社 會 運 動 을 그 範 圍 를 擴 大 하여 共 同 協 力 하면 文 化 의 發 展 이 倍 나 速 할 것이니 萬 一 共 同 協 力 이 必 要 하다 하면 그 前 提 로 男 女 交 際 를 肯 定 할 것이다. 要 컨대 男 女 交 際 를 反 對 하는 論 據 는 倫 理 上 原 則 이 아니오, 性 慾 的 關 係 이다. 人 類 의 原 始 狀 態 를 追 想 하면 無 知 蒙 昧 한 男 女 가 交 雜 共 處 하였으므로 淫 奔 이 流 行 하고 嫉 妬 가 爭 起 하여 風 紀 가 亂 하고 寧 日 이 小 한지라 哲 人 聖 者 가 이에 鑑 하여 男 女 七 歲 어든 不 同 席 이라 하는 嚴 法 을 制 定 하 게 된 것도 그 時 代 그 社 會 에는 適 應 한 方 法 이었다. 그러나 道 德 의 發 展 이 進 步 하고 文 化 의 範 圍 가 擴 大 된 現 代 에 處 하여는 成 人 이 復 起 하셔도 男 女 交 際 를 正 論 이라 할 것이다. 5. 本 報 의 過 去 를 論 하야 讀 者 諸 氏 에게 一 言 을 寄 하노라 < 東 亞 日 報 > (1921년 10월 15일) ( 註 : 동아일보 제3대 사장 취임시 취임사) 本 社 에 就 任 한지 月 로 計 하여 三 朔 에 跨 하고, 日 로 數 하여 百 日 에 達 하도다. 그러나 殘 務 의 整 理 와 餘 冗 의 收 拾 으로 因 하야 一 沫 의 例 辭 가 無 하게 됨은 어찌 遺 憾 이 아니 랴. 本 報 의 創 設 이 一 年 이요 七 個 月 이라. 그 동안 障 害 도 많았으며 困 乏 도 많았도다. 그러나 이에 - 9 -
10 不 拘 하고 讀 者 의 數 가 幾 萬 에 達 하며 社 員 의 數 가 百 名 에 及 하니 蕭 條 한 우리 社 會 에 있어서는 浩 大 한 機 關 이요 一 種 의 光 明 이라 하겠도다. 그 所 由 來 와 그 所 以 然 이 如 何 한가. 本 社 의 發 展 을 企 圖 하는 우리는 冷 靜 한 態 度 로 思 考 할 必 要 가 有 하도다. 第 一 은 時 代 의 産 物 이니 越 在 數 年 에 歐 洲 의 大 亂 이 方 熄 하고 平 和 의 曙 光 이 發 現 하여 改 造 의 精 神 과 解 放 의 思 潮 가 全 世 界 의 洋 溢 한지라 沈 鬱 에 沈 鬱 을 積 하고 苦 悶 에 苦 悶 을 加 하여 暗 中 에 서 摸 索 하고 迷 路 에서 彷 徨 하던 우리 民 族 의 思 想 界 가 衰 弱 한 元 氣 를 更 張 하려 하며 疲 困 한 神 經 을 亢 進 하려 하니, 此 에 順 應 하여 民 族 의 表 現 機 關 으로 本 報 가 誕 生 된지라 이 곧 天 下 의 同 情 이 集 中 된 所 以 이며, 第 二 株 主 各 位 의 熱 誠 이니 本 報 가 創 立 된지 幾 月 을 不 過 하여 財 界 의 恐 慌 이 掩 襲 하매 林 立 叢 生 하든 各 種 會 社 가 破 産 이 頻 頻 할 뿐만 아니라, 個 人 間 貸 借 도 困 難 한 時 期 를 際 하여 求 利 의 道 가 薄 하고 經 營 의 難 을 覺 悟 하면서도 그 信 用 을 盡 하며 囊 橐 을 傾 하야 經 濟 界 大 勢 의 逆 流 를 不 拘 하고 本 社 가 株 式 會 社 로 成 立 되었나니, 이것은 다 株 主 諸 氏 의 公 에 厚 하고 私 에 薄 하여 義 를 慕 하고 利 를 輕 히 여기는 熱 誠 中 으로 出 來 한 것이라, 余 는 讀 者 諸 氏 로 더불어 敬 意 를 表 하는 것 이다. 第 三 幹 部 諸 氏 의 努 力 이니 基 督 曰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심과 같이 世 上 事 는 金 錢 으로만 計 算 하는 것이 아니외다. 本 報 가 三 大 綱 領 을 提 唱 하여 侃 侃 諤 諤 한 論 旨 와 正 正 堂 堂 한 筆 法 으로 世 路 의 險 峻 을 突 破 하며 大 勢 의 歸 趨 를 洞 察 하여 眞 理 를 闡 明 하고 虛 僞 를 排 斥 하며, 是 非 를 較 判 하여 善 惡 을 褒 貶 하며, 美 는 鑑 賞 하고 醜 는 厭 避 하니 於 是 에 社 會 가 正 論 을 得 하고 人 衆 이 歸 向 을 定 하였도다. 이것은 다 學 識 과 經 驗 이 豊 厚 하고 品 性 이 高 潔 한 幹 部 諸 氏 에게 所 負 한 바 多 大 하도다. 그러나 良 馬 가 過 하여도 伯 樂 이 不 顧 하면 駑 馬 에 等 하고, 棟 梁 이 立 하여도 良 工 이 衰 乏 하면 樗 櫟 과 無 異 하나니, 如 何 히 時 代 의 潮 流 가 急 動 하고, 經 濟 의 狀 況 이 良 好 하고, 幹 部 의 努 力 이 勇 壯 하다 할지라도 讀 者 諸 氏 가 一 年 一 日 과 같이 愛 讀 하신 誠 力 이 缺 하였으면 어찌 過 去 의 良 積 을 期 하얐으리까. 元 來 本 報 는 一 黨 一 派 의 政 略 上 施 設 이 아니라, 十 三 道 를 網 羅 한 四 百 餘 株 主 의 共 同 經 營 이며, 一 人 一 家 의 私 論 偏 見 이 아니라 二 千 萬 民 衆 의 公 議 公 論 을 表 現 하는 機 關 이외다. 勿 論 個 人 과 個 人 間 에는 利 害 의 背 馳 도 有 하겠고, 感 情 의 差 別 도 有 하겠고, 地 方 에 따라서 習 慣 의 相 違 도 有 하겠으나, 同 一 한 歷 史 와 同 一 한 言 語 와 同 一 한 地 境 에 處 한 우리는 반드시 共 通 된 利 害 點 이 有 하리로다. 이 곧 二 千 萬 民 衆 의 公 利 며 公 害 라 本 報 의 使 命 은 公 利 는 어디까지든지 주장하며 保 護 할지요, 公 害 는 어디까지든지 排 斥 하며 防 禦 할지니, 이러한 意 味 에 있어서 本 報 는 二 千 萬 民 衆 의 公 有 物 이외다. 그러므로 本 報 를 愛 護 함은 卽 自 己 를 愛 護 함이요, 本 報 를 排 斥 함은 卽 自 己 를 排 斥 한다 하여도 過 言 이 아니라 하나이다. 그러므로 本 報 가 讀 者 諸 氏 에게 對 하여 愛 護 와 同 情 을 求 함은 義 務 뿐 아니라 權 利 이며, 또한 讀 者 諸 氏 가 本 報 의 錯 誤 된 點 에 對 하여 批 評 을 下 하여 忠 告 를 發 하는 것도, 權 利 뿐 아니라 義 務 라 하노라. 다만 前 路 가 險 峻 하고 群 妖 가 縱 橫 하는 이 社 會 이 時 代 에 處 하여 如 何 히 하였으면 本 報 의 使 命 을 完 全 히 할까, 이 곧 株 主 諸 氏 와 社 員 一 同 과 讀 者 諸 氏 와 같이 協 調 共 鳴 하여 討 究 하고 努 力 할 바외다. 余 는 知 識 이라면 空 疎 뿐이요, 經 驗 이라면 失 敗 뿐이외다. 그러나 二 千 萬 民 衆 으로 같이 立 하며, 같이 起 하며, 같이 怒 하며, 같이 喜 하며, 같이 哀 하며, 같이 樂 하려 하는 一 片 의 微 誠 만 가지고 本 社 의 美 良 한 從 僕 이 되려 하오니 諒 察 하소서. 6. 南 岡 李 昇 薰 先 生 回 甲 紀 念 文 ( 註 : 남강 이승훈선생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하여 만든 書 畵 帖 의 첫머리에 실린 축사)
11 거짓을 모르고, 게으름을 모르고, 몸과 집을 모르고, 오직 나라와 의를 위하여 생각하고, 다니고, 말하고, 일하고, 옥에 들어가기에 늙으신 남강선생은 우리 민족의 은인이요, 모범이시다. 이 어른 을 기념하기야 우리 동포의 가슴의 새김에 있거니와, 이번 육십일수를 축하함을 기회로 하야, 사 모하고, 오래 살아 일하소서 하는 참뜻을 표하고저, 이것을 받들어 드린다. 救 主 降 生 1924 年 2 月 18 日 東 亞 日 報 社 長 宋 鎭 禹 謹 書 7. 무엇보다도 힘 ( 最 近 의 感 ) < 開 闢 > 제5권 4호(총46호 1924년 4월 1일) 왜 오늘날 우리가 弱 者 가 되었는가 하면 누구든지 그 答 案 에는 甚 히 簡 單 하고도 明 瞭 하게 하리 라. 다못 힘이 없으니까 弱 者 가 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에 우리로 하여금 弱 者 가 되는 것을 가 장 光 榮 으로 생각하고 또한 幸 福 으로 생각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萬 一 그렇지 아니하고 弱 者 가 되는 것이 人 生 의 苦 痛 이며 또한 社 會 의 한 悲 劇 이라 하면 우리는 하루라도 弱 者 가 되지 아 니하기를 맹세하여야 할 것이며 또한 그 方 法 을 硏 究 하여야 할 것이다. 果 然 우리에게는 힘이 없다. 모든 事 物 의 原 動 力 이 될만한 힘이 없는 것이 事 實 이다. 勿 論 힘에 는 腕 力 도 있겠고 金 力 도 있겠지만 우리의 오늘날 要 求 하는 힘은 團 結 力 이다. 團 結 力 이 없으므로 弱 者 가 된 것이다. 보라! 倭 少 한 大 和 種 이 어찌하여 巨 大 한 歐 米 人 과 競 爭 하며, 또한 無 産 者 만으로 組 織 된 勞 農 露 國 이 어찌하여 資 本 主 義 의 列 强 을 能 히 對 抗 하는가? 勿 論 個 人 으로는 軀 殼 의 大 小 를 따라 腕 力 의 優 劣 도 있을 것이며 또한 社 會 의 制 度 에 依 하여 金 力 의 有 無 도 懸 殊 할 것이다. 그러나 團 體 的 으로서 能 히 競 爭 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凌 駕 하려 하며 能 히 對 抗 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征 服 하려 하는 것이 그 무슨 까닭인가. 오직 그네에게 團 結 力 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오늘 날 우리가 무슨 主 義 니 思 想 이니 하여 如 何 히 宣 傳 하며 如 何 히 鼓 吹 한다 할지라도 이 모든 主 義 와 思 想 을 實 現 할만한 團 結 力 이 없어서는 貧 僧 의 空 念 佛 에 不 過 할 것이다. 우리가 지나간 3 1 運 動 의 實 際 的 經 驗 을 考 察 하여 보아도 明 瞭 할 것이다. 宣 傳 이 不 足 한 것도 아니며 思 想 이 薄 弱 한 것도 아니건마는 最 後 의 功 을 奏 치 못한 것은 勿 論 大 勢 의 關 係 도 不 無 할 것이나 이 運 動 을 統 一 繼 續 할 만한 中 心 的 團 結 力 이 不 足 하였든 것이 不 誣 할 사실이다. 그러므 로 우리는 이렇게 主 張 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모든 主 義 와 思 想 의 實 現 에 土 臺 가 되고 根 底 가 될 만한 힘, 곧 團 結 力 을 準 備 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라고 본다. 보라. 大 戰 以 後 의 露 獨 兩 國 이 無 前 한 變 亂 과 改 革 을 繼 續 하면서도 依 然 히 自 體 의 生 存 權 을 維 持 하는 것은 兩 民 族 의 團 體 的 訓 練 이 무엇보다도 偉 大 한 것을 看 破 할 수 있으며 中 國 과 墨 國 이 今 日 까지 慢 性 的 革 命 病 에 걸려서 온갖 醜 態 를 演 出 하는 것도 個 中 의 消 息 을 傳 하는 것이 아닌 가. 要 컨대 問 題 는 團 結 力 이다. 換 言 하면 團 結 力 은 各 個 人 의 心 力 이다. 心 力, 곧 奉 公 心 이 發 達 된 民 族 은 强 者 가 되어 優 者 가 되고, 奉 公 心 이 薄 弱 한 民 衆 은 弱 者 가 되며 賤 者 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缺 陷 은 奉 公 의 不 足 이다. 奉 公 이 不 足 하므로 紛 糾 가 生 하며 猜 忌 가 起 하여 모든 惡 을 行 하게 된다. 이리하여 團 結 을 破 壞 하게 된다. 結 局 우리를 弱 하게 한 者 는 우리요, 다른 사 람은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弱 하여 自 滅 할까, 强 하여 自 立 할까. 이것이 곧 우리가 우리의 運 命 을 自 決 하는 分 岐 點 이다
12 萬 一 强 者 가 되자면 힘이 있어야 되겠고, 힘이 있자면 團 結 하여야 되겠고, 團 結 하자면 各 個 人 의 奉 公 心 을 喚 起 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을 더욱 實 感 하는 바이다. 8. 朝 鮮 社 會 運 動 에 관한 說 問 應 答 < 開 闢 > 1925년 6월호(총60호) 朝 鮮 에의 治 安 維 持 法 의 實 施 ( 大 正 14 年 5 月 12 日 )와 今 後 의 朝 鮮 社 會 運 動 에 關 한 說 問 1. 朝 鮮 社 會 運 動 의 今 後 勢 如 何. 2. 朝 鮮 社 會 運 動 의 今 後 方 針 如 何. 3. 社 會 運 動 과 民 族 運 動 과의 今 後 關 聯 如 何. 이 설문에 응답해 온 인사는 朝 鮮 農 總 同 盟 權 五 卨 서울 靑 年 會 李 廷 允 東 亞 日 報 社 宋 鎭 禹 朝 鮮 靑 年 總 同 盟 李 英 火 曜 會 金 燦 時 代 日 報 社 洪 命 憙 新 興 靑 年 同 盟 曺 奉 岩 北 風 會 辛 鐵 京 城 靑 年 會 宋 奉 瑀 社 會 主 義 同 盟 金 解 光 辯 護 士 李 仁 朝 鮮 日 報 社 辛 日 鎔 < 宋 鎭 禹 의 答 > 1. 첫째는 表 面 運 動 보다 裏 面 運 動 이 烈 하여 갈 것이며, 둘째는 在 來 의 紛 糾 混 雜 하였든 運 動 線 이 外 團 의 壓 迫 으로 因 하여 各 國 의 反 省 을 促 하는 同 時 에 統 一 團 結 의 氣 分 을 釀 成 할 것이다. 2. 外 部 宣 傳 보다 內 部 의 組 織 을 緊 着 케 하여 實 際 的 勢 力 을 樹 立 하는 것이 必 要 치 아니할까. 3. 外 來 의 共 通 된 壓 迫 과 現 下 의 共 通 된 生 活 不 安 으로 因 하여 더욱 더욱 提 携 協 調 의 關 係 가 發 生 할 것이다. ( 以 上 說 問 에 對 한 回 答 이 宋 鎭 禹 의 回 答 과 大 部 分 大 同 小 異 한데 특히 第 3 說 問 에는 曺 奉 岩, 李 英 의 意 見 이 同 一 하였다) 9. 漢 詩 1 首 ( 註 : 古 下 가 동아일보 주필로서 1925년 6월 20일경 신흥우 유억겸 서재필 김활란 등과 함께 하 와이에서 열린 범태평양 민족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선박편으로 태평양을 가로지르면서 船 上 에 서 얻은 漢 詩 ) 南 北 東 西 不 見 洲 (사방을 바라보아도 뭍은 안 보이는데) 連 天 水 色 閑 行 舟 (하늘과 맞닿은 물빛속에 뱃길만 한가롭구나) 安 將 眼 下 太 平 洋 (언제러나 눈아래 태평양 물로) 滌 盡 人 間 萬 古 愁 (만고에 쌓이고 쌓인 인간의 수심을 깨끗이 씻어 볼까) 10. 世 界 大 勢 와 朝 鮮 의 將 來 < 東 亞 日 報 > (1925년
13 8월28일~9월6일) ( 註 : 이 논문은 古 下 가 하와이 범태평양 민족회의에 참석하고 귀국한 후 20세기가 진전함에 따 라 펼쳐질 세계의 대세와 우리나라의 장래에 관하여 심사숙고한 글이다. 이 논문은 근대 한국 명논설 66편중의 하나로 선정되어 1967년 < 新 東 亞 > 誌 신년호 별책부록으 로 간행되었다) 1 우리는 朝 鮮 사람이다. 그러므로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새가 樹 林 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到 底 히 朝 鮮 을 떠나서는 또한 朝 鮮 을 잊어버리고서는 一 刻 一 秒 라도 설 수 가 없고 살 수가 없다. 이리하여 자거나 깨거나 듣거나 보거나, 잊으려 하여도 잊을 수 없는 것이 現 下 우리 同 胞 의 心 理 的 狀 態 인가 한다. 그러면 朝 鮮 을 위하여 웃을 사람도 우리 同 胞 요, 또한 朝 鮮 을 위하여 哭 할 사람도 우리 兄 弟 일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朝 鮮 過 去 의 興 替 的 史 實 을 追 究 하며 또한 朝 鮮 이 世 界 構 成 의 一 部 인 以 上 에는, 現 下 의 世 界 와 朝 鮮 과의 影 響 關 係 의 現 狀 을 그대로 冷 靜 하고 嚴 肅 하게 觀 察 하여서 朝 鮮 民 族 의 當 來 의 運 路 를 開 拓 努 力 하는 것 이 무엇보다도 緊 且 切 한 問 題 일 것이다. 2 勿 論 朝 鮮 의 將 來 를 論 究 하는데 있어서는 外 部 的 으로 重 要 한 影 響 波 動 이 關 係 를 가진 世 界 的 大 勢 도 要 緊 한 材 料 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욱 重 且 大 한 關 係 를 包 含 한 것은 內 部 的 으 로 朝 鮮 民 族 自 體 의 過 去 歷 史 上 興 替 盛 衰 의 因 果 關 係 이다. 이러한 意 味 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過 去 四 千 年 間 興 替 盛 衰 의 史 實 을 槪 括 的 으로 一 論 하려고 하는 바이다. 勿 論 過 去 의 朝 鮮 에는 表 面 的 으로 觀 察 하면 檀 君 大 皇 祖 의 登 極 肇 判 하신 以 後 로 箕 子 箕 準 의 朝 鮮 도 있었고 衛 滿 의 朝 鮮 도 있었고 또한 辰 韓, 弁 韓, 馬 韓 과 高 句 麗, 新 羅, 百 濟 의 分 裂 된 朝 鮮 도 있었다. 이리하여 이를 統 一 組 織 하였던 新 羅 의 朝 鮮 과 또한 이를 統 一 繼 承 하여 온 高 麗 의 朝 鮮 과 李 朝 의 朝 鮮 이 있었던 것도 歷 史 的 事 實 이었다. 3 그래서 四 千 年 을 通 하여 歷 史 的 變 遷 과 政 治 的 興 替 가 反 覆 無 常 하였다. 그러나 언제든지 朝 鮮 人 의 朝 鮮 이라는 觀 念 은 없어져 본 일이 없었으며, 또한 實 體 的 으로 想 像 할 수도 없었던 것은 嚴 肅 한 史 實 이다. 換 言 하면 三 國 의 分 裂 은 그 當 時 政 治 當 路 者 의 分 裂 이며 新 羅 高 麗 李 朝 의 滅 亡 도 또한 그 當 時 의 王 位 交 代 의 興 亡 變 遷 에 不 過 하였던 것은 昭 昭 한 史 實 이 아닌가. 어째 그러냐 하면, 歷 代 王 朝 의 變 遷 興 替 에 따라서 萬 一 朝 鮮 이 滅 亡 하였다 하면, 어찌하여 四 千 年 來 로 朝 鮮 民 族 의 文 化 가 依 然 히 保 全 할 수 있었으며, 또한 朝 鮮 民 族 의 血 統 이 儼 然 히 存 在 할 수가 있는가. 更 히 一 例 를 擧 하면, 美 國 의 民 主 共 和 兩 黨 이 競 爭 交 替 하여 美 國 의 政 權 을 接 受 相 傳 하는 동안에 或 은 共 和 黨 이 勝 利 를 得 하며 或 은 民 主 黨 이 失 敗 에 歸 하여도 누구든지 決 코 美 國 自 體 의 動 搖 興 替 로는 보지 아니할 것이 아닌가. 이러한 意 味 에서 歷 代 王 朝 自 體 의 政 治 的 興 亡 에 不 過 한 것이 고 決 코 朝 鮮 民 族 自 體 의 全 體 的 滅 亡, 根 本 的 滅 亡 을 意 味 하는 것이 아닌 것을 이에서 굳게 斷 言 하는 바이다. 4 우리는 前 欄 에서 歷 代 王 朝 의 興 廢 는 政 權 爭 鬪 의 手 段 方 法 에 不 過 하였고, 朝 鮮 民 族 全 體 의 文 化 및 生 活 에 들어서는 直 接 의 變 化 와 影 響 이 없었던 것을 說 破 하였다. 이것은 歷 代 王 朝 가 恒 常
14 民 族 生 活 의 土 臺 에서, 또는 民 衆 文 化 의 發 展 에서 政 權 을 運 用 하며 經 綸 을 施 設 하는 것보다, 王 家 自 體 의 發 展 또는 政 權 維 持 의 目 標 에서 政 治 的 理 想 이 局 限 되었던 事 實 이었다. 그러므로 歷 代 王 朝 의 興 廢 에 對 하여 그 當 時 王 朝 의 特 殊 的 恩 寵 을 받는 特 權 階 級 을 除 하여 놓고는 一 般 的 民 衆 은 그다지 直 接 으로 生 活 上 利 害 의 感 受 性 이 稀 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어떤 王 朝 에 對 하 여는 그 暴 虐 無 道 의 政 治 的 變 革 을 期 待 하였던 적도 없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歷 代 的 事 實 에도 特 히 吾 人 의 注 意 를 促 하는 것은 過 去 無 常 한 政 治 的 變 革 에 언제든지 異 民 族 의 勢 力 으로 오랜 동안 干 涉 或 은 統 治 하는 것은 絶 對 的 으로 拒 絶 하여온 사실이다. 이것은 元 來 부터 朝 鮮 民 族 의 血 統 이 極 히 純 粹 하고 또한 言 語 와 禮 俗 이 異 民 族 의 그것에 比 하여 恒 常 卓 越 優 秀 하였던 關 係 인가 한다. 回 顧 하여 보라. 李 世 民 의 精 銳 로도, 隋 楊 廣 의 强 暴 로도, 或 은 安 市 城 의 隻 影 이 되며 或 은 淸 川 江 의 孤 魂 이 되지 아니하였느냐. 5 그러면 最 近 의 政 治 變 革 의 史 實 은 如 何 한가. 半 島 의 政 權 이 李 朝 에 歸 한 以 後 壬 辰 丙 子 의 兩 大 戰 役 이 있었다. 이리하여 民 力 의 疲 弊 가 極 度 에 達 하였었다. 그러나 이를 改 革 濟 度 할 巨 脘 의 政 治 家 가 없었던 것도 事 實 이어니와 世 界 의 大 勢 는 帝 國 主 義 의 勃 興 과 東 洋 航 路 의 發 見 으로 因 하여 西 力 東 漸 의 大 勢 를 馴 致 하였었다. 이리하여 隱 士 國 의 朝 鮮 은 漸 次 로 世 界 的 朝 鮮 이 되어가며 閉 鎖 하였던 半 島 는 猝 地 에 列 强 의 角 逐 場 으로 化 하려 하는 形 勢 가 顯 著 하였었다. 이러한 氣 運 을 看 破 하고 四 千 年 來 의 新 機 軸 을 展 開 하여 一 大 變 革 을 試 하려 하였던 것이 距 今 三 十 年 前 의 甲 申 政 變 이었다. 그러나 時 運 이 不 至 한지라 우리의 先 覺 金 玉 均 一 派 는 千 秋 의 恨 을 抱 하고 畢 竟 殊 邦 異 域 에서 不 歸 의 客 이 된 것은 아직도 우리의 記 憶 이 尙 新 치 아니한가. 그러나 이것도 또한 極 少 數 의 覺 醒 으로써 四 千 年 來 의 굳어온 民 族 全 體 의 思 想 을 根 本 的 으로 一 時 에 改 革 하려 하였던 것이 니, 어찌 無 理 가 아니랴. 爾 後 의 形 勢 는 如 何 하였던가. 繼 續 된 李 朝 의 虐 政 과 澎 湃 한 西 勢 의 東 漸 은, 或 은 宗 敎 로, 或 은 商 船 으로 滔 天 의 勢 를 示 하였다. 이리하여 東 學 黨 을 中 心 으로 한 民 衆 的 叛 亂 이 起 하였었다. 그러나 이 또한 鎖 國 攘 夷 의 舊 思 想 에서 그 運 動 의 胚 胎 가 生 한 結 果 한갖 日 淸 戰 役 의 大 事 端 을 惹 起 하였을 뿐이오, 民 衆 自 體 에 對 하여는 何 等 의 收 穫 이 없었던 것이 事 實 이었다. 이 곧 甲 午 東 亂 이 아닌가. 6 그러면 그 後 形 勢 는 如 何 하였는가. 累 千 年 間 被 活 的 地 位 에서 服 從 과 壓 制 에 굳어온 民 族 의 頭 腦 는 新 文 化 에 對 한 覺 醒 이 遲 鈍 할 뿐 아니라, 所 謂 導 率 儀 範 의 地 位 에 處 한 貴 族 階 級 은 私 利 와 黨 爭 이 奔 汨 沈 溺 한 結 果 四 千 年 來 의 祖 傳 父 授 하여 온 政 治 的 權 力 은 日 露 戰 役 의 終 焉 으로 因 하여 異 民 族 의 手 中 에 移 轉 하게 되었다. 이 곧 庚 戌 의 合 倂 이 아닌가. 그러나 이에서 瞠 若 寒 膽 이 된 朝 鮮 民 衆 은 更 히 現 代 의 文 明 에 對 하 여 驚 異 의 眼 을 開 한 同 時 에 民 族 的 意 識 을 또다시 發 見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이 곧 1919 年 3 1 運 動 의 發 端 인가 한다. 7 적어도 一 九 一 九 年 의 三 一 運 動 은 朝 鮮 民 族 에 對 하여 四 千 年 以 來 輪 回 反 覆 하여 오던 東 洋 的 生 活 樣 式 을 精 神 上 으로나 文 化 上 으로나 政 治 上 으로나, 根 本 的 으로 民 衆 的 으로, 破 壞 建 設 하려 하 는 內 在 的 生 命 의 爆 發 이었다. 그러므로 朝 鮮 歷 史 에 있어서 처음 보는 運 動 인만큼 그 意 義 가 深 長 하고 그 關 係 와 影 響 이 重 且 大 한 것도 勿 論 일 것이다. 어째 그러냐 하면 過 去 幾 千 年 間 의 歷 史 上 으로만 表 現 된 幾 多 의 改 革 과 戰 亂 이 있었으나, 그 內 容 과 實 質 에 있어서는 少 數 階 級 의 政 權
15 爭 奪 의 變 革 이 아니면 尊 周 攘 夷 의 思 想 에서 胚 胎 되며 出 發 하였던 것은 不 誣 할 史 實 이었다. 그러 나 最 近 三 一 運 動 의 一 件 에 至 하여는 그 內 容 과 形 式 을 一 變 하여 적어도 思 想 의 根 抵 가 世 界 的 大 輿 論 인 民 族 的 自 尊 과 人 類 的 共 榮 의 正 義 人 道 의 觀 念 下 에서 全 國 的 으로도 民 衆 的 으로 刀 劍 裡 鐵 鎖 間 에서도 毅 然 히 立 하며 泰 然 히 動 하였던 것은 어찌 朝 鮮 民 族 의 革 新 運 動 史 上 에 一 大 奇 蹟 이 아니며 一 大 偉 觀 이 아니랴. 8 그러면 이러한 奇 蹟 偉 觀 을 演 出 케 한 그 原 因 이 那 邊 에 在 할까. 이곳 一 論 을 試 코자 하는 바 이다. 勿 論 朝 鮮 의 革 新 運 動 은 그 起 源 을 甲 申 政 亂 에서 求 하는 것이 正 當 한 經 路 일 것이다. 어찌 그러냐 하면 甲 申 政 亂 의 思 想 的 根 抵 가 在 來 의 政 權 與 奪 과 尊 周 攘 夷 的 思 想 과는 그 範 疇 를 달리 하여 적어도 現 代 文 明 을 肯 定 하여서 民 族 的 福 利 를 企 圖 하는 點 에서 起 因 된 까닭이라 한다. 勿 論 그 運 動 의 土 臺 가 極 少 數 階 級 의 覺 醒 에 出 發 하였으므로, 桑 楡 의 功 을 收 치 못한 것은 千 秋 의 恨 事 라 할지라도, 그 開 國 尊 民 의 大 理 想 에 至 하여는 岩 壁 으로부터 落 下 된 物 體 가 그 目 的 地 에 達 하기 前 까지는 沮 止 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爾 來 三 十 餘 年 을 通 하여 一 波 가 萬 波 가 되며, 私 語 가 與 論 이 되며, 或 은 獨 立 協 會 가 되며, 或 은 自 强 會 가 되며, 或 은 大 韓 協 會 가 되며, 或 은 學 校 와 學 會 가 되어 一 進 一 退 一 縮 一 張 의 無 數 한 變 動 과 許 多 한 試 鍊 을 經 過 한 것이 過 去 의 事 實 이었다. 그러나 더욱이 朝 鮮 民 族 의 急 激 한 衝 動 을 起 케 하고 加 速 의 覺 醒 을 促 進 케 하였던 것은 庚 戌 의 大 變 이다. 9 이리하여 朝 鮮 民 族 은 會 心 反 省 의 機 會 를 作 하였으며, 또한 舊 文 化 의 反 抗 을 試 하였었다. 村 塾 이 學 校 로 變 하며, 도련님이 生 徒 로 變 하며, 爾 來 十 年 間 을 社 會 的 細 胞 인 個 性 의 變 化 를 惹 起 하게 되었다. 또한 同 時 에 寺 內 總 督 의 舊 文 化 群 의 武 力 的 反 抗 思 想 의 轉 換 策 으로 盛 히 同 化 主 義 의 新 式 敎 育 을 勵 行 하였었다. 그러나 寺 內 의 無 理 한 同 化 政 策 은 四 千 年 동안의 訓 練 된 民 族 的 精 神 을 破 壤 하기에 너무나 微 弱 할 뿐만아니라 도리어 民 族 的 感 情 을 刺 激 하는데 있어서 그 功 效 가 莫 大 하였던 것을 이에 忌 憚 없이 斷 言 하는 바이다. 그리하여 그 所 謂 同 化 政 策 은 도리어 民 族 意 識 을 喚 起 하는 一 方 으로 一 般 的 으로 普 及 된 新 式 敎 育 은 新 文 明 의 肯 定 과 民 衆 的 覺 醒 을 非 常 하게 促 進 하였었다. 그러면 無 數 한 細 胞 의 變 化 가 起 하 는 同 時 에 全 體 의 變 動 이 生 하는 것과 같이 社 會 組 織 의 土 臺 가 되는 許 多 한 個 性 이 根 本 的 으로 改 革 覺 醒 이 되는 同 時 에 어찌 全 體 社 會 의 大 變 革 이 없으랴. 이 곧 三 一 運 動 의 起 源 이다. 或 은 三 一 運 動 을 美 國 宣 敎 師 의 敎 唆 라고도 하며 或 은 天 道 敎 一 派 의 煽 動 이라 하나, 이것은 朝 鮮 民 族 의 精 神 과 또한 朝 鮮 社 會 의 事 情 을 沒 覺 한 短 見 者 流 의 囈 語 에 不 過 한 것이오, 그 實 은 朝 鮮 民 族 의 內 在 的 生 命 이 世 界 的 新 文 化 에 接 觸 되어 爆 發 된 一 大 覺 醒 의 소리인 것을 斷 言 하는 바이다. 10 過 去 三 十 年 間 을 通 觀 하면 民 衆 的 運 動 을 三 期 로 分 할 수 있으니, 第 一 期 는 宗 敎 的 排 他 運 動 의 甲 午 의 東 亂 이요, 第 二 期 는 政 治 的 勤 王 思 想 의 義 兵 運 動 이요, 第 三 期 는 民 族 自 由 의 三 一 運 動 이다. 그러나 宗 敎 的 排 他 運 動 과 政 治 的 勤 王 思 想 이 實 際 上 으로 失 敗 에 歸 하였을 뿐만아니라 思 想 上 으 로도 民 衆 의 與 論 을 作 치 못하고 繼 續 的 勝 利 를 得 치 못한 것은 그 政 治 的 理 想 과 論 理 的 價 値 가 到 底 히 現 代 의 新 思 潮 에 對 照 하여 그 思 想 的 根 抵 와 土 臺 가 너무도 薄 弱 하고 背 馳 되었던 까닭이 아닌가 한다
16 그러나 民 族 自 由 의 三 一 運 動 만은 前 欄 에서 紹 介 한 바와 같이 그 動 機 와 思 想 이 內 的 으로 民 族 的 福 利 를 企 圖 하는 점에서 外 的 으로 世 界 的 思 潮 에 順 應 하는 點 에서 設 令 一 時 的 으로 完 璧 의 功 을 收 치 못하였다 할지라도 朝 鮮 民 族 의 良 心 的 發 動 으로 보아서 또한 世 界 人 類 의 思 想 上 共 鳴 으로 보아서 確 實 히 道 德 的 勝 利 인 것은 不 誣 할 事 實 이다. 그러면 現 下 의 情 態 는 如 何 한가. 過 去 를 回 顧 하면 朝 鮮 社 會 가 甲 申 의 革 新 運 動 을 筆 頭 로 하여 十 年 만큼 社 會 的 大 變 動 을 惹 起 케 하는 것은 本 來 의 常 例 이다. 試 思 하여 보라. 甲 申 政 亂 에서 甲 午 東 亂 까지, 甲 午 東 亂 에서 甲 辰 乙 巳 의 義 擧 에서 庚 戌 의 合 邦 까지, 庚 戌 의 合 邦 에서 己 末 의 三 一 運 動 까지, 마치 豫 定 的 行 動 과 같이 社 會 的 變 動 이 發 生 된 것이 昭 然 한 事 實 이 아니냐. 이것은 決 코 異 常 야릇한 運 命 의 魔 術 이 아니 라 現 代 의 어느 社 會 와 어느 民 族 을 勿 論 하고 舊 時 代 에서 新 時 代 에로 趨 移 過 渡 하는 途 程 에 있어 서 恒 見 例 有 한 史 實 인가 한다. 보라, 일본의 維 新 時 代 에 尊 王 攘 夷 의 論 爭 과 西 南 衝 突 의 戰 亂 이 어찌하여 생겼으며, 美 國 에는 獨 立 戰 爭 後 에도 왜 南 北 戰 爭 이 있었으며 現 下 의 中 國 에 어찌하여 團 匪 의 亂 과 革 命 의 戰 과 奉 直 의 爭 이 繼 續 不 絶 하는가를. 그 理 由 는 舊 勢 力 의 破 壞 와 新 文 化 樹 立 의 接 觸 點 에 處 한 社 會 의 不 可 避 할 現 狀 인가 한다. 12 하물며 半 萬 年 歷 史 的 背 景 을 가지고 東 洋 全 局 의 樞 要 地 에 處 한, 아니 歐 亞 美 三 大 陸 의 世 界 道 路 의 中 心 點 에 있는 朝 鮮 民 族 의 社 會 가 政 治 上 으로나, 文 化 上 으로나, 思 想 上 으로나, 經 濟 上 으로 나, 時 時 刻 刻 으로 外 勢 의 刺 戟 을 받고 內 部 의 衝 動 을 惹 起 함이랴. 元 來 朝 鮮 民 族 에게는 固 有 特 殊 한 先 入 的 文 化 가 있었다. 이리하여 한참 동안 新 舊 取 捨 의 苦 悶 이 있었던 것도 事 實 이었다. 그러 므로 新 舊 取 捨 의 煩 悶 時 代 에는 自 主 的 變 革 보다 他 力 的 變 動 이 頻 數 하였었다. 이 곧 日 淸 日 露 의 兩 大 戰 役 이 그것이며 庚 戌 의 大 變 도 그것이다. 그러나 朝 鮮 民 族 은 一 九 一 九 年 의 三 一 運 動 을 新 機 軸 으로 하여 民 衆 的 으로 새 기운을 탔고 새 빛을 보았다. 그 表 證 으로, 첫째는 敎 育 的 覺 醒 이요 둘째는 經 濟 的 意 識 이다. 보라. 三 一 運 動 以 後 로 아무리 僻 鄕 窮 村 의 農 老 炊 媼 이라 할지라도 子 弟 敎 育 에 對 한 渴 仰 追 求 의 熱 이 如 何 히 亢 進 하였으며, 또한 在 來 의 歷 史 的 感 情 으로만 訓 練 되었던 民 族 運 動 은, 그 內 容 을 一 變 하여 經 濟 的 意 識 곧 生 活 의 土 臺 위에서 그 根 抵 를 發 見 하게 된 것은 確 實 히 一 大 進 步 인 것 을 斷 言 하는 바이다. 이에서 過 去 庚 戌 事 變 以 來 의 十 年 間 普 通 敎 育 의 普 及 으로 三 一 事 件 의 自 主 的 大 變 動 을 惹 起 하였다 하면 이로부터 三 四 年 을 不 過 하여 또한 社 會 組 織 의 一 大 變 動 이 發 生 될 것도 先 知 卓 見 이 아니라 할지라도 누구나 豫 測 할 바가 아닌가. 그 理 由 는 民 衆 의 知 識 程 度 가 더 욱 進 步 될수록 더욱 普 及 될수록 社 會 組 織 의 變 化 가 더욱 頻 數 하여 갈 것은 進 化 의 法 則 인 까닭이 다. 13 吾 人 은 前 欄 에서 朝 鮮 民 族 의 內 部 的 進 化 로 因 한 社 會 組 織 의 自 然 的 變 化 를 論 하였다. 그러나 朝 鮮 半 島 가 世 界 構 成 의 一 部 分 이며, 또한 朝 鮮 民 族 이 人 類 全 體 의 一 部 分 인 以 上 에는 世 界 大 勢 의 趨 移 가 直 接 間 接 으로 朝 鮮 社 會 에 波 及 이 될 것은 勿 論 이며, 따라서 朝 鮮 社 會 의 變 動 도 世 界 大 勢 의 趨 移 에 莫 大 한 影 響 이 될 것도 想 像 할 수 있다. 回 顧 컨대 朝 鮮 問 題 로 因 하여 發 端 한 西 南 戰 爭 은 日 本 政 界 의 變 革 을 如 何 히 惹 起 하였으며 또한 朝 鮮 問 題 로 因 하여 突 發 된 日 淸 日 露 의 兩 大 戰 役 이 東 洋 全 體 의 風 雲 과 國 際 政 局 의 波 瀾 을 如 何 히 惹 起 하였는가. 이리하여 近 因 에 있어서는 淸 朝 의 敗 亡 을 招 하였고, 遠 因 에 있어서는 슬라브 族 의 受 侮 로 因 하 여 歐 洲 大 戰 의 發 端 을 作 치 아니하였는가
17 14 最 近 에 있어서도 美 大 統 領 이 提 唱 한 民 族 自 決 問 題 가 如 何 히 朝 鮮 民 族 의 新 興 氣 分 을 助 長 하였으 며, 또한 이로 因 하여 日 本 政 界 의 視 聽 을 如 何 히 聳 動 케 하였는가. 이로 보면 朝 鮮 問 題 는 東 洋 의 難 關 이며 世 界 의 論 點 인 것은 勿 論 일 것이다. 吾 人 은 이에서 更 히 世 界 大 勢 의 趨 移 上 으로 觀 察 한 朝 鮮 問 題 의 經 過 를 먼저 一 論 코자 하는 바 이다. 元 來 朝 鮮 問 題 는 前 欄 에서 詳 述 한 바와 같이 朝 鮮 民 族 自 體 가 現 代 文 明 에 對 한 理 解 와 覺 醒 이 遲 鈍 한 點 에서 無 慘 한 犧 牲 을 當 하게 된 것은 勿 論 이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過 去 의 形 勢 를 追 求 하여 보면 우리 民 族 自 體 의 責 任 뿐만 아닌 것도 想 像 할 수가 있다. 試 思 하여보라. 東 洋 全 體 의 地 理 的 關 係 로 보아서 朝 鮮 半 島 는 中 日 兩 國 間 에 介 在 한 中 立 地 帶 가 아니냐. 그러므로 大 陸 으 로부터 輸 入 된 歐 洲 의 文 明 은 中 國 固 有 文 化 의 抵 抗 으로 因 하여 傳 播 의 力 이 薄 弱 하였고, 海 洋 으 로부터 流 出 된 美 大 陸 의 文 化 도 日 本 의 維 新 大 業 을 促 進 하였을 뿐이 아닌가. 이리하여 그 中 間 에 介 在 한 우리 民 族 은 徒 然 히 鎖 國 의 長 夢 에 處 하였던 것이다. 萬 一 그 當 時 의 日 本 의 爲 政 家 로 하 여금 東 洋 全 局 의 百 年 大 計 에 着 眼 하고 또한 先 進 者 의 責 任 을 自 覺 하여서 誠 心 誠 意 로 東 洋 各 民 族 의 共 存 共 榮 을 圖 하게 되였던들 결코 朝 鮮 과 中 國 에 今 日 과 같은 無 慘 한 現 狀 이 없을 뿐만아니 라 日 本 自 體 도 今 日 과 같은 世 界 的 孤 立 의 危 地 에 立 치 하니하였을 것은 勿 論 일 것이다. 15 그러면 爾 來 日 本 의 東 洋 全 局 에 對 한 態 度 와 政 策 은 如 何 하였던가. 두말할 것 없이 日 英 同 盟 을 國 際 外 交 의 中 樞 로 하여 東 洋 平 和 의 保 障 이라는 美 名 下 에서 文 化 上 으로 恩 寵 이 殊 深 한 朝 鮮 의 合 倂 을 斷 行 하고, 一 步 를 進 하여 英 國 과의 協 調 下 에서 中 國 의 利 權 을 雙 分 壟 斷 하려 하던 것이 過 去 의 政 策 上 大 本 이 아니었던가. 이리하여 袖 手 酸 目 이 되어있던 美 國 으로 하여금 機 會 均 等 과 門 戶 開 放 主 義 의 提 唱 을 하게 되지 아니하였더냐. 萬 一 現 下 美 國 의 排 日 的 感 情 을 解 剖 하여 본다면 深 刻 한 印 象 과 動 機 는 그 當 時 日 本 의 傍 若 無 人 한 侵 略 政 策 이 그 累 를 及 치 아니하였는가 한다. 勿 論 그 當 時 의 侵 略 的 帝 國 主 義 는 日 本 에만 限 하였던 것은 아니다. 十 九 世 紀 로부터 二 十 世 紀 劈 頭 에 이르기까지는 果 然 侵 略 的 帝 國 主 義 의 全 盛 時 代 이었던 것도 不 誣 할 史 實 이었다. 아프리카 大 陸 에 있어서 列 强 의 任 意 的 分 割 이 斷 行 되었었고, 太 平 洋 에 있어서 群 島 의 爭 奪 倂 合 이 極 烈 하 였었고, 露 西 亞 에 있어서는 핀랜드 合 倂 을 斷 行 하던 時 期 가 아니었던가. 이로 보면 朝 鮮 問 題 도 그 當 時 世 界 大 勢 의 犧 牲 이 되었던 것도 一 面 의 觀 察 일 것이다. 그러나 日 本 의 立 地 에 있어서 東 洋 全 局 의 百 年 大 計 를 爲 하여 歷 史 文 化 의 特 殊 的 關 係 를 爲 하여, 또한 到 來 하는 世 界 的 人 類 問 題 를 爲 하여, 朝 鮮 問 題 의 犧 牲 이 果 然 得 策 이었을까 할 뿐이다. 16 十 九 世 紀 劈 頭 로부터 二 十 世 紀 劈 頭 에 至 하기까지 約 一 世 紀 間 에 亘 하여 激 烈 辛 辣 하던 列 强 의 侵 略 的 帝 國 主 義 는 乾 坤 一 擲 의 歐 洲 大 戰 으로 因 하여 急 轉 의 破 綻 이 生 하였고, 또한 最 後 의 末 路 를 告 하게 되었다. 大 戰 의 責 任 에 對 하여 聯 合 國 側 과 同 盟 國 側 의 是 非 의 論 爭 이 不 一 하였던 것도 事 實 이었다. 그러나 萬 一 春 秋 에 無 義 戰 이라는 筆 法 으로 嚴 正 한 批 判 을 내린다 하면 그 實 은 暴 力 으로 暴 力 을 對 峙 하는 데 不 過 하였던 것이 大 戰 의 眞 相 일 것이다. 如 何 間 이와 같은 不 合 理 한 殺 戮 的 戰 爭 이 四 五 年 을 繼 續 한 結 果 幾 百 億 의 戰 費 와 累 百 萬 의 生 命 을 水 泡 와 같이, 草 芥 와 같 이 雲 消 霧 散 하여버린 歐 洲 의 文 明 은 最 後 의 破 綻 을 告 하게 된 것이 過 去 의 事 實 이 아니었던가. 17 이에서 世 界 의 人 類 는 煩 憫 悔 悟 憂 愁 의 機 會 를 作 하였었다. 이리하여 一 面 에 있어서는 暴 露 의 崩 壞 로 因 하여 經 濟 的 으로 레닌의 社 會 主 義 가 實 現 되었고, 他 面 에 있어서는 强 獨 의 屈 從 으로부터
18 人 道 的 見 地 에서 윌슨의 民 族 自 決 主 義 가 提 唱 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와 같은 急 激 한 變 化 는 歷 史 上 實 例 로 보아서 依 例 히 反 動 的 氣 分 을 惹 起 하는 것이 常 事 이었다. 이것은 物 理 學 上 으로 도 實 證 할 수가 있다. 急 轉 直 下 하는 物 體 가 도리어 空 氣 의 波 動 을 受 하여 最 後 의 搖 動 을 惹 起 하 는 것과 何 異 가 有 하랴. 이른바 世 界 改 造 의 國 際 聯 盟 의 最 後 의 龜 裂 이 生 한 것도 事 實 이며, 또한 新 興 의 赤 露 를 敵 對 하 기 爲 하여 露 領 의 西 伯 利 亞 方 面 에서 聯 合 의 軍 隊 가 出 動 하였던 것도 事 實 이 아닌가. 그러나 世 界 人 類 의 大 輿 論 大 理 想 에 基 礎 한 主 義 와 實 現 은 決 코 時 間 的 反 動 으로 沮 止 할 수 없으며, 또한 武 力 的 制 裁 로 抑 壓 할 수 없는 것이 歷 代 의 史 實 이다. 이것은 지나간 十 八 世 紀 의 佛 國 의 革 命 史 와 美 國 의 獨 立 戰 이 吾 人 에게 昭 昭 한 實 證 을 例 示 한 바가 아닌가. 戰 後 의 四 五 年 동안에 殘 燭 復 明 의 反 動 的 氣 勢 의 擡 頭 를 不 拘 하고 人 類 의 大 理 想 에 至 하여는 조금도 沮 止 할 바를 모르고 風 船 의 順 路 와 같이 進 展 하여 가는 것이 現 下 의 大 勢 가 아닌가. 18 보라, 民 族 運 動 에 있어서는 巴 爾 幹 半 島 의 多 少 諸 國 의 獨 立 을 비롯하여 波 蘭 의 獨 立, 芬 蘭 의 獨 立, 埃 及 의 獨 立, 愛 蘭 의 分 立 이 繼 續 完 成 되었고 또한 印 度 의 非 協 同 運 動 과 比 島 의 獨 立 運 動 도 비록 運 動 의 途 程 에 있으나 그 氣 運 과 形 勢 가 갈수록 猛 烈 하고 擴 大 되는 것은 不 誣 할 事 實 이며, 勞 動 運 動 에 있어서도 大 戰 亂 을 一 經 한 後 赤 露 의 完 成 은 勿 論 이어니와 國 際 的 으로나 國 內 的 으로 勞 動 問 題 가 中 心 의 論 題 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實 際 的 으로 各 國 의 政 界 가 漸 次 로 勞 動 問 題 를 中 心 으로 하여 回 轉 할 兆 徵 이 顯 著 한 것은 現 下 의 大 勢 가 아닌가. 그러므로 現 下 의 反 動 的 氣 分 은 各 國 政 界 를 通 하여 特 權 階 級 의 因 襲 的 惰 力 의 最 後 發 作 에 不 過 한 것이요 결코 世 界 大 衆 의 理 想 과 輿 論 이 아닌 것을 이에서 斷 言 하는 바이다. 19 萬 一 歐 洲 의 戰 亂 으로 하여금 世 界 人 類 에게 對 하여 寄 贈 한 바가 있다 하면 이것은 侵 略 的 軍 國 主 義 崩 壞 일 것이다. 이로 因 하여 軍 國 主 義 의 雙 壁 인 暴 獨 强 露 의 崩 壞 를 完 成 한 것이 事 實 이었 다. 그러면 軍 國 主 義 의 新 參 見 習 으로 東 洋 方 面 에 있어서 이르는 곳마다 爪 牙 를 現 露 하던 日 本 의 形 勢 는 如 何 하였던가. 歐 洲 大 戰 當 時 로부터 巴 里 講 和 會 議 의 前 後 에 이르기까지는, 實 로 日 本 의 全 盛 時 代 이며 또한 得 意 의 秋 이었었다. 內 政 에 있어서는 戰 時 貿 易 의 盛 況 으로 因 하여 輸 入 된 金 貨 는 넉넉히 積 年 의 舊 債 를 報 償 하기에 그 餘 裕 가 綽 綽 하였고, 外 交 에 있어서도 聯 合 同 盟 兩 側 의 念 不 及 他 의 機 會 에 處 하여 東 洋 方 面 의 勢 力 扶 植 에 自 由 自 在 한 活 動 을 得 하였었던 것이 事 實 이었다. 하물며 戰 勝 國 의 一 員 으로 五 大 强 國 의 班 列 에 參 加 하여 從 來 로 東 洋 方 面 에만 局 限 되었던 實 際 的 勢 力 이 猝 地 에 歐 洲 政 局 에까지 有 力 한 發 言 權 을 得 하게 된 것은, 極 東 의 一 小 國 으로 그 光 榮 과 得 意 를 누구나 想 像 할 바가 아니냐. 20 그러나 興 盡 悲 來 하고 樂 極 生 哀 는 人 世 의 常 事 이다. 大 戰 當 時 의 二 十 一 個 條 의 對 中 外 交 는 다만 中 國 人 으로 하여금 切 齒 의 恨 을 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世 界 列 强 의 猜 忌 嫉 視 의 焦 點 이 되었 던 것이 아니냐. 또한 西 伯 利 亞 出 兵 은 다만 莫 大 한 國 費 의 消 盡 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日 本 의 軍 國 主 義 의 宣 傳 을 제물에 完 成 하였던 것이 아니냐. 이리하여 英 美 의 提 携 로 華 盛 頓 會 議 가 開 催 되었고, 華 盛 頓 會 議 의 結 果 로 一 面 에 있어서는 國 際 外 交 의 金 科 玉 條 이던 日 英 同 盟 이 破 壞 되었으 며, 他 面 에 있어서는 軍 費 制 限 으로 軍 國 主 義 의 手 足 을 切 斷 하게 된 것이 아닌가. 게다가 空 前 의 大 震 災 는 日 本 으로 하여금 極 度 의 致 命 傷 을 與 하였다. 近 百 億 의 財 貨 와 幾 十 萬 의 生 命 이 焦 土 의
19 烏 有 에 歸 하였던 것이 아닌가. 이에 對 하여 表 面 으로 同 情 을 宣 하고, 裏 面 으로 微 笑 를 發 하였던 것이 果 然 그 누구이었던가. 震 災 後 半 個 年 을 不 過 하여 峻 烈 한 排 日 法 案 을 通 過 하고 繼 續 하여 海 軍 大 練 習 의 高 壓 的 示 威 運 動 을 演 出 한 것은 平 素 부터 極 東 方 面 에 虎 視 眈 眈 하고 있던 美 國 이 아니 냐. 過 去 의 全 盛 을 回 顧 하고 現 下 의 孤 危 를 想 起 할 時 에 果 然 日 本 國 民 의 울분이 如 何 하였을까. 21 그러나 日 本 의 內 政 은 如 何 한가. 在 來 로 軍 國 主 義 를 唯 一 한 信 條 로 信 奉 하는 日 本 社 會 는 世 界 的 으로 軍 國 主 義 가 崩 壞 되는 同 時 에 一 大 恐 慌 이 起 하였으며 一 大 颱 風 이 襲 하였었다. 하물며 軍 閥 派 의 對 中 外 交 와 露 領 出 兵 의 連 次 失 敗 로 因 하여 國 威 國 財 를 아울러 世 界 的 으로 損 失 케 한 兩 大 事 件 에 對 하여 積 年 憤 抑 되었던 一 般 社 會 에는 反 抗 의 氣 勢 가 日 熾 하고 또한 資 本 主 義 의 勃 興 으 로 因 하여 社 會 主 義 의 輸 入 이 加 速 度 로 增 加 되어가는 것도 事 實 이다. 이리하여 中 樞 를 잃은 日 本 의 思 想 界 는 日 을 逐 하여 惡 化 激 化 해 가는 것이 現 下 의 情 態 가 아닌가. 이에서 思 想 的 緩 和 策 으 로 普 選 의 斷 行 이 된 것이다. 그러나 普 選 의 斷 行 으로 因 하여 果 然 어느 程 度 까지 社 會 의 安 定 을 得 할 것인가, 이 곧 吾 人 의 一 括 目 하는 바이며, 또한 普 選 의 實 施 後 日 本 의 政 界 에 赤 露 의 社 會 主 義 的 色 彩 가 濃 厚 하여질 것인가, 或 은 美 國 의 資 本 主 義 가 그대로 適 用 될 것인가, 이 곧 日 本 의 運 命 을 決 定 할 分 岐 點 이 될 것이다. 如 何 間 이로부터 三, 四 年 을 不 過 하여 政 治 的 으로나 社 會 的 으로나 一 大 變 革 이 생길 것은 吾 人 의 想 像 하는 바가 아닌가. 22 世 界 大 勢 의 潮 流 는 確 實 히 地 中 海 에서 大 西 洋 으로, 大 西 洋 에서 太 平 洋 方 面 으로 移 動 하여 오는 것이 過 去 의 史 乘 에 照 하여 昭 昭 歷 歷 한 事 實 이다. 萬 一 十 九 世 紀 를 佛 蘭 西 文 化 의 擴 充 時 期 라고 하면, 二 十 世 紀 는 赤 露 思 想 의 發 展 時 代 라는 것이 正 當 한 見 解 일 것이다. 資 本 主 義 의 模 範 인 美 國 과 社 會 主 義 의 代 表 的 인 赤 露 가 太 平 洋 을 隔 하여 兩 兩 相 對 하여 勃 興 되는 것은 果 然 不 遠 한 將 來 에 그 무엇을 暗 示 하고 있는가. 協 調 할까. 衝 突 할까. 이 곧 太 平 洋 上 의 一 沫 의 疑 雲 이 되어 있는 것은 不 誣 할 事 實 이다. 世 界 大 勢 의 運 命 이 이에서 決 定 될 것이며 또한 人 類 의 文 化 上 總 決 算 이 이에서 勘 定 될 것은 想 像 키 不 難 할 바가 아닌가. 23 그 中 間 에 處 하여 第 一 딱하고 애처로운 경우는 日 本 의 現 狀 이다. 두말할 것 없이 日 本 은 國 際 的 中 産 階 級 이다. 巨 大 한 資 本 을 抱 擁 한 美 國 과 競 爭 發 展 하는 것도 實 力 이 不 許 하는 바이며, 그 렇다고 赤 裸 裸 하게 世 界 的 으로 난봉 行 世 를 하는 赤 露 와 提 携 協 調 하는 것도 一 層 危 險 을 感 하는 바가 아닌가. 이에서 左 顧 右 眄 悔 悟 煩 悶 하는 것이 日 本 現 下 의 情 態 인가 한다. 하물며 一 面 에 있 어서는 美 國 의 資 本 的 帝 國 主 義 는 日 을 遂 하고 年 을 隨 하여, 或 은 移 民 問 題 로 或 은 中 國 問 題 로 反 目 의 度 가 加 하며 衝 突 의 機 가 促 進 되는 것이 事 實 이며, 他 面 에 있어서는 日 露 條 約 이 成 立 된 以 來 敬 遠 的 態 度 로 外 交 的 辭 令 이 互 相 交 換 되나, 立 國 의 基 礎 와 主 義 가 根 本 的 으로 不 相 容 할 關 係 가 있는 以 上 에는 衝 突 의 危 險 性 은 또한 不 避 할 形 勢 가 아닌가. 이로 보면 思 想 的 으로 資 本 的 으로 左 右 挾 攻 을 當 하고 있는 日 本 의 形 勢 는 實 로 危 卵 의 感 이 不 無 하다. 24 그러면 歐 洲 列 强 의 東 洋 政 局 에 對 한 態 度 는 如 何 한가. 무어라고 하든지 歐 洲 의 中 樞 勢 力 은 獨 佛 兩 國 일 것이다. 兩 國 의 歷 代 的 感 情 과 戰 後 의 形 勢 가 相 互 牽 制 와 現 狀 維 持 에 汲 汲 한 以 上 에는 東 洋 方 面 에 對 하여 어느 時 期 까지는 闊 大 進 取 의 活 動 을 取 치 못할 것은 피할 수 없는 情 態 일 것 이다. 그러나 英 國 에 至 하여는 特 殊 的 立 場 에 處 하여 獨 佛 兩 國 에 比 하여 戰 後 의 瘡 痍 가 그다지
20 甚 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傳 統 的 漸 進 政 策 으로 東 洋 方 面 에 對 하여 不 斷 한 注 意 와 視 監 을 行 하는 것이 昭 然 한 事 實 이 아닌가. 大 戰 後 에 바로 美 國 과 提 携 하여 日 英 同 盟 을 破 壞 하는 동시에 美 國 의 新 興 氣 銳 의 勢 力 을 아무쪼록 太 平 洋 方 面 에 集 注 케 하여, 日 本 의 衝 突 을 促 한 後, 途 途 이 漁 夫 의 利 를 取 하려 하는 것이 英 國 의 老 猾 한 極 東 政 策 이 아닌가. 이것은 太 平 洋 上 의 風 雲 을 豫 期 하여 新 嘉 坡 軍 港 建 設 의 一 件 으로만 보아서도 個 中 의 消 息 을 窺 할 것이다. 25 이렇게 觀 來 하면 美 露 衝 突 의 途 程 에 있어서 日 美 衝 突 이 前 提 가 될 것은 想 像 키 不 難 하다. 그러면 果 然 衝 突 의 導 化 線 은 那 邊 에 在 할까. 이 곧 中 國 問 題 이다. 萬 一 巴 爾 幹 半 島 가 過 去 歐 洲 의 謎 訛 라 하면 二 十 世 紀 의 中 國 問 題 는 確 實 히 東 洋 政 局 의 一 大 危 險 일 것이다. 그러나 巴 爾 幹 半 島 問 題 는 歐 洲 大 戰 으로 因 하여 不 完 全 하나마 그 解 決 을 告 하였거니와 中 國 問 題 는 아직까지도 疑 問 이며 危 險 하다. 如 何 間 中 國 은 一 大 美 人 이다. 그러므로 世 界 列 强 의 懷 腸 의 戀 과 秋 波 의 情 을 받는 것이다. 元 來 美 人 自 體 가 主 動 的 能 力 이 없는만큼 이를 玩 弄 阿 隨 하려하는 淫 夫 蕩 子 도 많 을 것은 事 實 이다. 이리하여 嫉 妬 도 생기며 鬪 爭 도 생기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이 中 國 의 無 限 한 富 源 과 許 多 한 利 權 은 列 强 의 好 投 資 處 며 大 發 展 地 이다. 이리하여 英 國 의 秋 波 가 되며 日 本 의 威 脅 이 되며 美 國 의 垂 涎 이 되며 赤 露 의 援 助 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中 國 의 現 狀 은 如 何 한가. 아직도 民 衆 의 覺 醒 이 徹 底 치 못한 現 下 에 있어서 張 憑 兩 派 의 勢 力 接 觸 點 에 立 한 段 祺 瑞 政 府 는 實 로 風 燈 의 感 이 不 無 하다. 그러나 民 衆 에 따라서 自 主 排 外 의 運 動 이 날로 熾 烈 하여 갈 것은 確 的 한 事 實 일 것이다. 今 番 의 上 海 事 件 은 그 무엇을 意 味 하는 것이며 日 英 의 排 斥 에 對 하여 美 國 의 同 情 과 露 國 의 暗 助 는 벌써부터 列 國 의 縱 橫 暗 鬪 의 序 幕 이 始 作 된 것이 아닌가. 이로부터 三 四 年 을 經 過 하면 赤 露 의 內 部 的 實 力 이 充 溢 하여 外 部 的 活 動 이 活 潑 할 때에, 美 國 海 軍 의 擴 張 計 劃 이 完 成 될 때에, 英 國 의 軍 港 計 劃 이 確 立 될 때에, 中 國 政 界 가 動 搖 될 때에, 中 國 方 面 의 一 點 暗 雲 이 太 平 洋 上 의 風 雨 를 大 作 케 할 것을 그 뉘가 保 證 하랴. 26 吾 人 은 以 上 에서 朝 鮮 內 部 의 社 會 的 變 革 과 世 界 大 勢 의 趨 移 와 東 洋 政 局 의 危 機 로 보아서 四 五 年 을 不 過 하여 太 平 洋 을 中 心 으로 한 世 界 的 風 雲 이 惹 起 될 것을 論 斷 하였다. 勿 論 主 觀 的 速 斷 일지는 알 수가 없으나 萬 一 過 去 의 歷 史 가 現 下 大 勢 의 産 母 며 未 來 의 大 勢 가 또한 現 在 事 實 의 播 種 이라 하면 결코 牽 强 附 會 의 空 論 이 아니될 것을 確 信 하는 바이다. 그러나 다만 論 點 은 時 間 問 題 일 것이다. 어찌하여 複 雜 多 端 한 世 界 問 題 가 何 時 四 ~ 五 年 을 前 後 로하여 惹 起 될 것인가 하는 點 일 것이다. 그러나 吾 人 이 四 ~ 五 年 前 後 를 豫 言 하는 것도 決 코 荒 唐 無 稽 한 空 想 에서 立 論 한 것은 아니다. 대개 人 間 社 會 의 十 年 이라 하는 時 期 는 個 人 으로나 國 家 로서나 一 大 計 劃 을 立 하여 準 備 와 組 織 을 完 成 하는데 있어서 比 較 的 最 要 한 長 期 이다. 이러므로 越 王 勾 踐 은 十 年 의 成 聚 로 因 하여 會 稽 의 恥 를 雪 하였고 宜 朝 祖 의 李 文 成 은 外 敵 의 侵 入 을 遠 慮 하여 十 年 의 義 兵 을 主 張 치 아니하였던가. 이러한 意 味 에 있어서 一 九 一 九 年 의 世 界 的 大 戰 의 終 熄 으로 一 九 二 九 年 까 지 곧 이로부터 四 五 年 만 經 過 하면 十 年 의 滿 期 가 될 것은 勿 論 이다. 그러면 大 戰 의 終 熄 으로부 터 그 동안 十 年 間 에 그 社 會 그 民 族 의 努 力 如 何 에 依 하여는, 疲 弊 된 國 力 도 復 活 될 것이며 消 沈 된 元 氣 도 振 作 될 것은 勿 論 일 것이다. 하물며 現 下 의 交 通 機 關 의 發 達 과 思 想 傳 播 의 影 響 이 過 去 의 時 代 에 比 하여 加 一 層 迅 速 해지고 敏 活 하여 時 刻 으로 急 轉 激 化 하는 것이 現 代 의 特 色 이 됨에랴
21 그러면 이와 같은 不 遠 한 將 來 의 世 界 大 勢 의 變 動 을 豫 想 하고 또한 東 洋 政 局 의 禍 亂 을 推 斷 할 때에 가장 特 殊 한 事 情 을 가진 日 本 과 朝 鮮 의 關 係 는 如 何 히 進 展 될 것인가. 이 곧 吾 人 의 中 夜 耿 耿 에 長 吁 太 息 하는 바다. 過 去 의 日 本 이 白 種 의 英 國 과 提 携 하여 東 洋 의 同 色 民 族 을 或 은 壓 迫 或 은 威 脅 함으로써 能 事 를 作 하였던 것이 現 下 東 洋 政 局 의 禍 機 가 아닌가. 萬 一 過 去 의 日 本 으로 하여금 當 初 부터 東 洋 各 民 族 의 共 存 共 榮 의 遠 大 한 計 劃 을 策 케 하였던들, 결코 現 下 의 日 本 自 體 가 孤 立 의 危 機 에 處 치 아니하였을 뿐아니라, 歐 洲 大 戰 으로 因 하여 破 綻 된 殺 伐 的 文 明 과 疲 弊 된 白 色 民 族 을 誘 導 啓 發 하여 世 界 改 造 의 人 類 의 大 偉 業 을 東 洋 民 族 의 導 率 下 에서 完 成 할 것이 아닌 가. 이 어찌 千 古 의 恨 事 가 아니랴. 그러나 過 去 는 過 去 인지라 追 窮 할 必 要 가 없거니와, 現 下 에 있어서 日 本 人 士 의 感 想 이 如 何 하며 所 見 이 如 何 한지 吾 人 의 切 聞 코자 하는 바이다. 적어도 朝 鮮 問 題 의 解 決 은 東 洋 全 體 問 題 解 決 의 前 提 가 되며 또한 要 件 이 될 것은 勿 論 이다. 왜 그러냐 하면 가장 民 族 的 關 係 가 密 接 하고 文 化 的 恩 澤 이 莫 甚 한 朝 鮮 民 族 을 蹂 躙 壓 迫 하는 것 은 아무리 日 本 民 族 의 全 體 意 思 가 아니요 秀 吉 寺 內 輩 의 軍 閥 一 派 의 背 恩 沒 義 的 行 動 이라 할지라 도 적어도 半 萬 年 歷 史 的 背 景 과 二 千 萬 民 衆 의 聰 明 을 가진 朝 鮮 民 族 으로서는 徹 骨 의 恨 이 될 것은 勿 論 이 아닌가. 툭하면 日 本 人 士 中 에는 이러한 말을 한다. 李 朝 虐 政 下 에서 지내던 朝 鮮 民 族 이 總 督 政 治 의 生 命 財 産 의 安 全 保 障 으로 因 하여 滿 足 할 것은 勿 論 이라 한다. 이것이 果 然 日 本 人 士 의 朝 鮮 民 族 에 對 한 心 理 的 觀 察 이라 하면 吾 人 은 寧 히 그 愚 痴 를 憫 憐 히 여길 뿐이다. 現 代 의 朝 鮮 人 이 過 去 의 朝 鮮 人 이 아닌 것도 勿 論 이거니와, 設 令 李 朝 의 虐 政 이 現 代 에 再 現 된 다 할지라도 朝 鮮 人 은 그 改 革 을 絶 叫 할 것이 아닌가. 하물며 總 督 政 治 와 李 朝 政 治 가 民 族 的 感 情 에 있어서 그 根 底 가 懸 殊 함이랴. 이것은 現 下 의 日 本 人 民 이 過 去 의 專 制 政 治 에 對 하여 反 抗 하 던 經 路 를 回 憶 하면 反 省 할 바가 아닌가. 둘째는 日 本 의 爲 政 家 로 하여금 朝 鮮 問 題 云 謂 할 때는 반드시 國 境 警 備 問 題 와 師 團 增 設 의 必 要 를 力 說 하는 것이다. 果 然 君 等 의 所 見 과 같다 하면 어찌 하여 暴 露 强 獨 이 一 戰 의 破 滅 에 不 堪 하였던가. 如 何 間 朝 鮮 問 題 를 그대로 두고는 中 日 親 善 도 空 念 佛 이며 東 洋 平 和 도 口 頭 禪 에 不 過 할 것을 斷 言 하는 바이다. 적어도 二 千 萬 民 衆 의 銳 利 한 心 刃 이 日 本 의 弱 處 急 所 를 隨 하여 機 會 대로 現 露 될 것은 現 下 의 情 態 가 아닌가. 이 곧 日 本 人 士 의 反 省 을 促 하는 바이다. 28 그러면 우리 民 族 의 世 界 大 勢 에 處 하는 抱 負 와 朝 鮮 의 將 來 에 對 한 經 綸 은 如 何 할 것인가. 客 觀 的 으로 朝 鮮 의 將 來 가 如 何 히 되리라 하는 것보다, 一 步 를 進 하여 主 觀 的 으로 朝 鮮 의 將 來 를 如 何 히 할까 하는 것이 注 意 의 焦 點 이며 問 題 의 目 標 가 아닌가. 一 言 으로 蔽 하면 朝 鮮 民 族 의 抱 負 는 어디까지든지 雄 偉 하여야 할 것이며 또한 어디까지든지 遠 大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祖 先 의 東 洋 各 民 族 에 對 한 傳 統 的 主 義 와 方 針 이었으며 또한 우리 兄 弟 와 人 道 와 文 化 를 愛 好 하 는 遺 傳 的 天 性 인가 한다. 回 顧 하여 보라. 北 으로 中 國 의 隣 誼 를 尊 重 히 하고 東 으로 日 本 의 文 化 를 啓 發 하여 恒 常 東 洋 平 和 의 先 驅 가 되며 또한 東 洋 文 化 의 導 率 이 되었던 것은 歷 史 的 史 實 이 吾 人 에게 例 證 하는 바가 아닌가. 往 往 히 隋 唐 의 劫 運 과 日 淸 의 惡 夢 이 있었으나 이것도 또한 朝 鮮 民 族 의 自 主 的 殺 伐 이 아니 요, 外 敵 의 蠻 性 發 作 에 對 한 正 義 的 制 裁 이며 人 道 的 防 衛 였던 것은 正 確 한 事 實 이다. 29 우리는 歐 美 의 自 由 精 神 과 科 學 文 明 을 愛 好 하는 바이다. 그러나 隣 國 을 盜 奪 하고 人 血 을 吸 取 하는 獸 性 蠻 行 은 어디까지든지 排 斥 하고 驅 逐 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萬 一 이러한 獸 性 蠻 習 을 그대로 肯 定 한다면 人 類 社 會 는 結 局 에 强 盜 의 跋 扈 에 不 堪 할 것이며, 平 和 의 祭 壇 은 畢 竟 은 牧 畜 의 蹂 躙 에 不 過 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民 族 的 正 義 와 人 道 的 平 和 의 維 持 發 展 에
22 對 하여는 어디까지든지 民 族 的 義 血 을 不 辭 하여야 할 것이며 全 國 的 動 員 을 行 치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이러한 意 味 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設 令 日 本 을 排 斥 한다 하면 日 本 의 軍 閥 一 派 의 侵 略 的 軍 國 主 義 를 排 斥 하는 바이며, 또한 赤 露 를 親 近 한다 하면 赤 露 의 平 等 의 精 神 을 愛 好 하는 바가 아닌가. 或 은 萬 一 東 亞 의 風 雲 이 起 하고 이리하여 日 美 의 衝 突 이 生 할 時 에는 美 國 의 勢 力 下 에서 朝 鮮 의 解 放 을 希 望 하며, 或 은 日 露 日 中 의 衝 突 을 豫 期 하여 露 中 兩 國 의 援 助 下 에서 民 族 의 自 由 를 囑 望 하나 이것은 決 코 朝 鮮 民 族 의 傳 統 的 精 神 에 背 馳 될 뿐 아니라 우리의 良 心 이 또한 不 許 하는 바이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에게는 自 主 的 精 神 이 있는 까닭이다. 自 由 는 어디까 지든지 自 主 的 行 動 이며 自 力 的 解 決 이 될 것이다. 決 斷 코 他 力 的 援 助 와 事 大 的 思 想 의 支 配 와 容 認 을 不 許 하는 바가 아닌가. 30 勿 論 우리는 他 民 族 의 人 道 的 同 情 과 正 義 的 援 助 를 不 辭 하는 바이다. 그 뿐만 아니라 現 下 의 日 本 으로도 昨 非 今 是 의 眞 理 를 飜 然 히 悔 悟 하고 自 進 하여 朝 鮮 問 題 의 人 道 的 解 決 을 斷 行 한다면 우리는 決 코 歷 史 的 感 情 에 拘 泥 하여 排 斥 할 必 要 가 없을 것이 아닌가. 우리의 主 義 와 目 標 는 언 제든지 民 族 的 으로 自 由 生 存 平 和 의 三 大 理 想 에서 그 出 發 點 을 作 할 것이요, 決 코 憎 惡 排 斥 侵 略 的 觀 念 에 支 配 될 것은 아니다. 이러한 意 味 에서 우리는 첫째로 民 族 的 自 由 를 解 決 할 것이요, 둘 째는 社 會 的 生 存 權 을 保 障 할 것이요, 셋째로 世 界 的 平 和 에 努 力 할 것이 아닌가. 이 곧 朝 鮮 民 族 의 雄 偉 한 抱 負 가 될 것이며 또한 遠 大 한 經 綸 이 될 것이다. 遽 然 히 小 强 을 持 하고 同 色 民 族 을 迫 害 하며 私 利 를 弄 하여 人 類 의 平 和 를 攪 亂 하려 하다가 最 後 의 破 滅 을 自 招 하던 露 獨 兩 國 의 前 轍 에 鑑 하여 또한 이를 見 習 模 倣 하던 日 本 文 明 의 破 綻 에 證 하여 反 省 自 悟 할 바가 아닌가. 31 우리가 이러한 抱 負 와 經 綸 을 가지고 當 來 할 世 界 的 變 局 에 處 하여, 어떠한 修 鍊 을 加 하여 어 떠한 準 備 를 行 할 것인가. 두말 할 것도 없이 思 想 的 修 鍊 과 民 族 的 團 結 이다. 첫째로 우리의 思 想 界 는 複 雜 한 것이 事 實 이다. 이를 整 理 하여 統 一 하는 데 있어서는 調 査 와 比 較 와 硏 究 가 必 要 한 것은 勿 論 이며, 둘째로 이렇게 整 理 統 一 이 된 思 想 下 에서 中 心 的 團 結 을 作 成 하여서 우리의 一 嚬 一 笑 와 一 動 一 靜 이 團 結 的 背 景 에 依 하여 發 하며 行 하게 되는 것이 現 下 急 務 가 아닌가. 如 何 한 名 俳 優 라 할지라도 舞 臺 가 없으면 巧 技 絶 藝 를 演 出 치 못하는 것과 같이 人 類 는 團 體 的 背 景 과 社 會 的 土 臺 가 없으면 그 天 才 와 才 能 을 發 揮 치 못할 뿐만 아니라, 如 何 히 雄 偉 한 抱 負 와 遠 大 한 經 綸 을 가졌다 할지라도 活 用 의 路 가 絶 할 것이며 實 現 의 日 이 無 할 것이다. 이러한 意 味 에 있어서 吾 人 은 外 勢 의 波 動 보다 他 力 의 援 助 보다, 中 心 勢 力 의 確 立 과 自 體 勢 力 의 解 決 을 絶 叫 力 說 하는 바이다. 要 컨대 朝 鮮 問 題 는 民 族 自 體 의 團 合 이 確 立 하는 그날로부터 解 決 될 것을 確 信 하는 바이다. 11. 農 村 問 題 를 가지고 걱정하는 이들의 意 見 < 朝 鮮 農 民 > (총3호 1926년 2월 12일) < 設 問 > 一. 農 村 靑 年 에게 간절히 期 待 하고 싶은 일. 二. 農 村 靑 年 을 위하여 實 行 하고 싶은 일
23 三. 農 村 靑 年 의 現 代 的 修 養 上 勸 하고 싶은 圖 書 及 雜 誌. < 應 答 > 東 亞 日 報 主 筆 宋 鎭 禹 一. 농촌청년에게 기대하고 싶은 일은 옛날과 같이 임군에게 충성해라, 부모에게 효도해라 하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니고 종래에 우리가 알아오던 것과는 도리어 반대 되는 관념을 가져달라는 것 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우리는 과거에 일을 아니하고 놀고 먹는 사람을 양반이라, 잘난 사람이라 하여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안될 일이외다. 우리가 가장 더럽게 생각하는 절도나 강도와 같은 일이외다. 이제부터는 노동신성( 勞 動 神 聖 )이 라는 관념을 꽉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제일 못난 사람이니까 농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고 생각함은 아주 못생긴 생각입니다. 일하는 사람이래야 귀한 사람이요, 일 안하고 먹는 사람은 도 적 사람이라고 생각하여야 됩니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노동을 신성하게 알고 놀고 먹는 사람을 도적과 같이 사갈시하게 되는 날 이 세상은 고쳐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농촌 청년으로 하여 금 노동하는 것을 최고도덕( 最 高 道 德 )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어달라고 하고 싶습니다. 二. 농촌청년을 위하여 하고 싶은 일은 그네들에게 어떠한 새로운 사상을 고취하여 갑자기 고 상한 운동자가 되도록 하는 것보다 대체로 그네는 무지하여 전후 분별이 선명하지 못한 터인즉 우선 간이한 국문을 가르치며 쉬운 숫자( 數 字 )부터 알게 하여 농촌청년은 물론 농민 전부에게 다 소라도 스스로 무엇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비판을 가 지도록 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三. 내가 권하고 싶은 책은 유감이지만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잡지는 더욱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구태여 권한다면 경제독본( 經 濟 讀 本 - 日 文 ), 자조론( 自 助 論 - 六 堂 著 )을 보라고 권할까요. 12. 最 善 의 努 力 과 方 法 을 講 究 하자. < 新 民 > 제2권 11호 (1926년 11월호) ( 註 : 한글날 제정을 주장한 글) 우리의 자랑거리고 첫 손가락을 꼽을 것은 우리의 글이다.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우리 祖 上 이 創 作 한 訓 民 正 音 이야말로 文 字 로서의 모든 條 件 을 具 備 한 完 全 한 文 字 이다. 이 民 族 的 자랑거리를 頒 布 한 것이 距 今 四 百 八 十 年 前 陰 九 月 二 十 九 日 이라 한다. 이 날을 우 리 民 族 이 紀 念 치 않고 돌아볼 者 누구이랴. 우리의 손으로 이 날을 永 遠 히 紀 念 하기에 우리는 아울러 最 善 의 方 法 과 努 力 을 다하여야 하겠다. 13. 獄 門 의 送 迎 < 新 民 > 제2권 12호 (1926년 12월호) 눈발을 부르는 무악재 바람이 쌀쌀히 불어온다. 그 바람 고지에서 떨고 있는 시커먼 西 大 門 刑 務 所 앞에서 우리 不 自 由 한 言 論 의 犧 牲 者 두 同 志 를 送 迎 하게 되었다. 하나는 朝 鮮 日 報 筆 禍 事 件 의 犧 牲 者 인 同 紙 印 刷 人 이었던 金 炯 元 君 의 刑 期 四 個 月 을 마친 出 監 이오, 또 하나는 東 亞 日 報
24 筆 禍 事 件 의 犧 牲 者 인 同 紙 主 筆 宋 鎭 禹 君 의 六 個 月 의 體 刑 을 받은 入 監 이다. 우리는 그 出 監 을 慶 賀 하여야 할는지 그 入 監 을 慰 勞 하여야 할는지 나의 鈍 筆 을 옮기기에 자못 躊 躇 치 않을 수 없다. 그러면 犧 牲 者 自 身 들은 出 監 을 기쁘다 하는가 入 監 을 慰 勞 하여야 할는지 나의 둔필( 鈍 筆 )을 옮기 기에 자못 躊 躇 치 않을 수 없다. 그러면 犧 牲 者 自 身 들은 出 監 을 기쁘다 하는가 入 監 을 섧다하는 가 그 또한 알아보아야 할 일이다. 이제 나오고 들어가는 이들의 忌 憚 없는 感 想 을 紹 介 하여 보자. 監 獄 으로 들어가면서 宋 鎭 禹 勞 農 露 西 亞 로부터 朝 鮮 民 衆 에게 보내는 電 文 을 東 亞 日 報 에 譯 載 한 것이 내가 今 回 入 監 하게 된 筆 禍 事 件 인 것은 世 上 이 周 知 하는 일이라 이제 새삼스러히 說 明 할 必 要 도 없을 것입니다. 該 電 文 의 原 意 가 目 下 나 또는 未 來 를 云 謂 하는 것이 아니라 過 去 를 意 味 하는 것이므로 別 로 拘 碍 될 것이 아닐 줄 믿고 다만 信 實 히 報 道 할 뿐이었는데 그것이 所 謂 保 安 法 違 反 이라는 罪 가 되 어 司 法 處 分 을 받게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首 肯 키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편에서도 어 디까지나 法 에 依 하여 다투어 보았으나 結 局 上 告 審 에서까지 敗 訴 를 當 하였으니 이제는 抗 拒 無 路 라, 刑 을 受 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일찍이 二 十 四 個 月 의 監 獄 經 驗 이 있으니까 이제 새삼스러히 獄 苦 를 놀랄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監 獄 을 刑 務 所 라 改 稱 한 以 後 內 部 에도 많은 改 善 을 하였다니까 曾 往 보다도 오히려 지내 기는 낫겠지요. 囚 人 生 活 의 第 一 어려운 冬 期 에 入 監 케 된 것은 肉 體 를 위하여 좀 不 幸 한 일이나 그 亦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는 더 싸워볼 餘 地 없이 그만 囚 人 生 活 에 들어가려고 覺 悟 를 하 고나니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하면 나에게는 多 幸 한 點 도 있습니다. 한동안 險 惡 한 世 波 에 부대끼고 난 心 身 을 그윽히 慰 勞 할 機 會 라고 생각합니다. 散 漫 한 情 神 을 收 拾 하여 修 養 함에는 人 間 事 會 와 別 交 涉 이 없는 獄 舍 라도 좋습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 어느 社 會 가 안 그 러리까마는 우리 社 會 에는 너무도 紛 糾 와 反 目 이 많습니다. 同 族 끼리는 勿 論 甚 하면 同 志 間 에도 서로 中 傷 과 批 難 을 일삼는 例 가 또한 적지않은 것은 참으로 寒 心 한 일입니다. 이런 點 에서 그 높디높은 붉은 墻 壁 너머의 벌려있을 此 生 地 獄 의 光 景 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나지마는 한편으로 생 각하면 골머리 아픈 우리 社 會 로부터 그윽한 避 難 處 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萬 一 내가 우리 社 會 의 어떤 一 部 에서 무슨 批 難 을 받고 있었다면 이번 入 監 은 그 非 難 을 緩 和 或 은 消 滅 케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心 身 修 養 期 또는 어떤 意 味 로의 隱 居 期 인 半 年 이라는 受 刑 期 를 가장 意 味 깊게 보내고 나오려 합니다. 14. 仁 村 에게 보낸 옥중 서한 사( 社 )를 떠난지가 벌써 한달이요, 나흘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건강이 여전하시며 사내의 모든 형제들도 다름없이 건강한 몸으로 꾸준히 분투하옵니까. 새 집 이사는 예정과 같이 11일에 아무 고장없이 순성되었아온지 해를 거듭하여 깨어진 창과 무너진 벽만 남은 낡은 집에서 고생을 하다가 아름답고 깨끗하고 튼튼하고 쓸모좋은 새 집으로 옮아간 쾌감과 기분이 과연 어떠합니까. 동고( 同 苦 )하던 사내 여러 형제의 즐거워할 광경을 상상하니, 그윽히 적막한 중에도 저는 기꺼 운 웃음을 웃게 되나이다. 이것이 모두 형님께서 평소에 땀 흘리고 애쓰시던 보상임을 생각하옵 고 더욱 건강과 행복을 비옵니다
25 저는 절대한 운명의 지배 아래서 외로운 그림자를 벗삼아 엄한( 嚴 寒 )의 폭위( 暴 威 )에 저항을 계 속할 뿐이오나 다행히 별고 없아오니 안심하옵소서. 날마다 날마다 시키는 일을 하고, 먹고 자던 나머지, 한 두시간을 이용할 수 있아오니 책이나 많이 보내 주십시요. 그전에 보낸 것은 다 받았아오니, 윤리학( 倫 理 學 ), 동서철학사( 東 西 哲 學 史 ), 서 양역사( 西 洋 歷 史 ), 서양문명사( 西 洋 文 明 史 ), 철학개론( 哲 學 槪 論 ) 등으로 대개는 우리집 책상에 있아 오니 그중 페이지 수효가 많은 놈으로 보내 주시옵소서. ( 下 略 ) 1926년 12월 16일 상오 11시 西 大 門 刑 務 所 에서 宋 鎭 禹 15. 獄 中 漢 詩 1 首 獄 中 夜 夜 不 成 眠 (옥중에 갇힌 몸이 밤마다 잠 못이루나니) 憂 國 傷 心 幾 積 年 (나라 근심에 상한 마음 몇몇해나 쌓였던고.) ( 以 下 逸 失 ) 16. 月 南 先 生 을 위한 輓 章 載 ) ( 註 : 古 下 가 月 南 선생 영전에 바친 輓 章 으로 < 月 南 李 商 在 先 生 實 記 > 173 面 에 收 錄 한 것을 轉 諷 世 詼 諧 倒 曼 倩 세상을 풍자하는 해학은 東 方 朔 을 앞섰고, 哀 時 憔 悴 憶 靈 均 슬플 때는 초췌하기 屈 原 을 생각케 하네. 歲 寒 殘 柏 堪 凋 落 시절이 차니 쇠잔한 잣잎새도 시들어 떨어지니, 蒲 柳 臨 風 總 忘 神 냇버들처럼 못난 이몸 바람에 임해 모두 정신을 잊네. 先 生 憂 國 不 憂 身 선생은 나라를 근심하고 일신은 근심치 않으시어, 頭 白 心 丹 老 益 眞 머리는 희고 마음은 붉어 늙을수록 더욱 참되었네. 今 日 翳 然 棄 我 去 오늘날 조용히 나를 버리고 가시니, 鯨 濤 鰐 浪 自 迷 津 고래 물결 악어 물결에 스스로 갈길을 모르네. 17. 興 味 와 通 俗 化 < 東 光 > (1927년 5월호) ( 註 : 이 글은 東 光 誌 가 東 亞 日 報 社 를 스스로 批 判 해 달라고 要 請 한데 대한 寄 稿 임) 興 味 와 通 俗 化 에 좀 主 力 하였으면, 새 社 會 를 建 設 하는데 基 礎 가 될 만한 모든 斬 新 한 道 德 的
26 觀 念 과 科 學 問 議 에 對 한 새로운 智 識 을 每 號 에 連 載 함을 볼 때에 항상 紙 面 을 通 하여 嚴 肅 한 氣 分 이었습니다. 그 中 에도 더욱 山 翁 先 生 이 一 般 同 胞 靑 年 에게 對 하여 敎 訓 한 文 章 에 對 하여는 特 히 數 十 年 間 先 生 의 實 踐 한 誠 忠 을 披 瀝 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더욱 言 論 界 에서 一 種 異 彩 를 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愚 見 으로는 너무도 嚴 肅 한 氣 分 에만 偏 重 되어 一 種 의 敎 科 書 비슷한 感 이 있고 興 味 方 面 이 缺 如 한 듯합니다. 이제부터는 從 來 의 氣 分 에 興 味 를 끌만한 文 章 이 添 加 되고 좀 더 一 般 讀 者 가 잘 알아보게 通 俗 化 하였으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합니다. 18. 三 個 의 當 面 한 急 務 < 朝 鮮 之 光 > (1928년 1월호) ( 註 : 朝 鮮 之 光 社 가 要 請 한 當 面 題 問 題 에 對 한 題 見 解 란 題 目 의 앙케이트에 대한 論 文 임) 現 下 朝 鮮 의 모든 實 狀 은 次 第 로 發 展 하고 있는 것이 事 實 이나 그러나 吾 人 의 보는 바 當 面 의 問 題 로서 더욱 緊 迫 한 問 題 는 첫째 民 族 的 總 力 量 의 集 中 問 題 이다. 只 今 新 幹 會 는 곧 이러한 使 命 을 가지고 誕 生 하였고 또 많은 努 力 을 하는 바이나 아직도 그 使 命 을 完 全 히 達 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는 卽 全 朝 鮮 民 族 의 各 階 級 이 完 全 히 이에 結 成 되지 못한 까닭으로. 그러므로 今 後 의 問 題 는 곧 어떻게 하여야 全 民 族 的 結 成 을 할 수 있겠느냐 함이다. 이에 對 하 여 吾 人 의 보는 바로서는 무엇보다도 가장 忠 實 한 指 導 者 가 있어야 할 것과 地 方 地 方 에 있는 從 來 의 健 實 한 指 導 者 들의 糾 合 을 圖 하는 것이 先 行 問 題 일까 한다. 今 次 本 社 가 失 行 中 에 있는 現 代 인물의 投 票 計 劃 도 이러한 一 義 가 없는 것이 아니어니와 우리의 當 面 한 必 要 는 實 로 充 實 한 指 導 者 를 구함에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의 經 驗 生 活 問 題 이니 危 機 에 陷 한 우리의 經 濟 的 生 活 을 어떻게 救 濟 하겠느냐! 하는 것은 刻 下 의 切 迫 한 큰 問 題 일 것이다. 이에 對 하여는 勿 論 여러 가지의 議 論 이 있을 것이다. 또 그 根 本 問 題 를 떠나 當 面 한 一, 二 問 題 를 論 함은 오직 枝 葉 問 題 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從 來 에 이러한 現 狀 을 볼 때에 그 原 因 을 오직 客 觀 的 情 勢 에만 돌리고 그 自 體 에 있는 內 在 的 原 因 을 等 閑 視 하는 傾 向 이 많았으니 이는 우리의 重 大 한 錯 誤 일 것이다. 吾 人 은 朝 鮮 人 의 經 濟 的 生 活 의 萎 縮 原 因 이 그 客 觀 的 條 件 에 依 하여 決 定 되는 바 큰 것을 否 認 함이 아니다. 勿 論 그것이 무엇보다도 큰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의 努 力 不 足 도 또한 一 原 因 이 되는 것을 우리는 看 過 하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제 저 中 國 人 의 實 狀 을 보자. 저들은 經 濟 的 生 活 에 있어 下 等 의 的 庇 護 를 받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一 面 에는 國 際 的 資 本 主 義 의 고 있다. 그러나 저들은 能 히 그 個 人 的 으로 그에 對 抗 하고 있으며 國 外 流 浪 하는 個 人 個 人 도 只 今 朝 鮮 에서도 到 處 에서 보는 바이어니와 能 히 自 立 한 生 活 을 營 爲 하고 있다. 이는 要 컨대 저 들의 牽 乎 한 個 性 과 不 斷 한 動 勞 의 結 果 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只 今 우리의 經 濟 的 生 活 의 萎 縮 되는 原 因 이 客 觀 的 條 件 에 依 하여 決 定 된다 할지라 도 一 面 에는 自 體 의 無 力 이라는 責 任 이 또하 적지 아니하니 이 實 로 우리가 反 省 하여야 할 問 題 이다. 셋째 朝 鮮 人 의 敎 育 問 題 를 들 수 있으니 우리의 敎 育 上 刻 下 의 必 要 한 問 題 는 어떠한 方 法 이나 形 式 으로든지 義 務 敎 育 의 실행이다. 이는 實 로 人 道 上 으로 큰 問 題 일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는 近 來 에 流 行 하는 學 生 의 盟 休 問 題 이니 이러한 問 題 는 結 局 우리의 文 化 發 展 上 重 大 한 支 障 이 될 뿐
27 이다. 우리가 一 日 의 學 業 을 게을리하는 그만큼의 文 化 는 뒤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우리는 盟 休 의 原 因 과 動 機 를 愼 重 히 檢 討 考 察 하여 防 微 杜 漸 의 實 을 擧 하는 것이 무엇 보다도 取 할 方 針 이라 할 것이다. 19. 平 和 裡 에 合 同 될 것이다. < 新 民 > (1928년 7월호) ( 註 : 滿 洲 東 三 省 을 統 治 하던 大 元 師 張 作 霖 이 1928 年 今 月 日 本 軍 에 依 하여 爆 死 한 後 그 歸 趨 에 대한 說 問 에 答 한 글) 今 後 의 東 三 省 이라면 卽 張 作 霖 死 後 의 東 三 省 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疑 心 할 것도 없이 國 民 政 府 와 合 同 될 것이다. 東 三 省 自 體 로 보아도 國 民 政 府 를 背 景 으로 하여 모든 解 決 을 짓는 것이 適 合 할 것이오, 國 民 政 府 나 또는 一 部 東 三 省 當 局 者 의 利 害 로 보아도 合 同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一 部 에서 宣 傳 되는 張 學 良 을 推 戴 하여 東 三 省 獨 立 云 云 하는 것은 처음부터 問 題 가 되지 않나니 大 部 分 이 漢 族 인 東 三 省 의 民 衆 이 反 對 할 것이며 張 學 良 自 身 도 그 頭 腦 가 張 作 霖 과는 다를 것이니까 언제까지 나 東 三 省 이 張 氏 의 것일 것이라는 迷 夢 에서 헤맬 理 는 없을 것이다. 그 合 同 하는 經 路 는 吾 人 의 豫 想 보다는 퍽 平 和 와 妥 協 裡 에 進 行 될 것이다. 郭 松 齡 을 犧 牲 하던 그 쓴 經 驗 에 비추어 奉 天 軍 이 對 南 軍 과는 絶 對 로 戰 爭 을 避 할 것이오, 國 民 軍 도 亦 是 對 奉 天 軍 挑 戰 으로써 問 題 의 解 決 을 바라지 않을 點 에서 兩 方 이 戰 火 의 不 利 만은 깨달았을 것이니까. 그리고 東 三 省 의 今 後 에 對 하여 列 國 의 態 度 는 如 何 할까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이 것도 그들이 平 和 裡 에 合 同 하는 데 대하여는 다시 干 涉 의 餘 地 가 없을 것이며 干 涉 해 본대야 別 수가 없을 것이다. 東 三 省 이 國 民 政 府 에 合 同 하는데 影 響 을 가장 많이 받는다면 東 三 省 에 가장 많은 關 係 를 가지고 있는 日 本 일 것이다. 日 本 이 이것을 考 慮 하여 合 同 에 대한 直 接 或 은 間 接 으 로 中 止 或 은 妨 害 를 할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日 本 도 亦 是 大 勢 에 背 馳 하여 이런 일을 할 理 도 없을 것이오 日 本 으로서도 滿 洲 에 槪 說 한 特 殊 利 權 만 保 障 되는 限 度 에서 彼 此 好 意 로서 合 同 을 贊 成 하는 것이 良 策 일 것이다. 萬 一 日 本 이 合 同 을 妨 害 하기 위하여 어떤 干 涉 을 取 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東 三 省 當 局 者 로 하 여금 日 本 때문에 合 同 을 促 進 하는 奇 現 象 을 볼 것을 日 本 은 覺 悟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20. 小 作 立 法 의 必 要 < 朝 鮮 之 光 > (1929년 1월호) 現 下 朝 鮮 의 小 作 問 題 는 地 方 에 따라서 各 其 事 情 이 相 異 하므로 一 律 로써 論 키 難 한 바 있으나 이를 大 體 로써 論 하면 첫째 制 度 의 改 善 이오, 둘째는 地 主 의 覺 醒 이라고 하겠다. 元 來 小 作 制 度 란 것이 地 方 地 方 이 서로 같지 아니하고 或 은 地 主 와 地 主 에 따라서도 그 事 情 이 不 一 하여 甚 히 複 雜 하다. 그러므로 이렇게 複 雜 한 制 度 를 法 律 이나 或 은 社 會 的 으로서 어떤 規 範 下 에 統 一 케 하는 것이 極 히 必 要 한 問 題 라 할 것이오, 小 作 人 에 대하여는 그 地 位 를 法 律 或 은 其 他 必 要 한 方 法 으로써 保 障 하여야 하겠다. 只 今 과 같이 小 作 人 의 地 位 가 恒 常 不 安 에 陷 하여 可 謂 安 堵 할 수 없
28 는 때에는 이 問 題 의 解 決 은 到 底 히 期 待 할 수 없으며 同 時 에 生 産 上 에도 莫 大 한 損 失 이라 할 것 이다. 生 産 者 인 小 作 人 이 恒 常 그 堵 에 安 치 못하고 있는 以 上 어찌 그의 最 善 의 努 力 을 期 待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特 히 小 作 人 의 地 位 를 保 障 할 만한 어떤 方 法 을 세워야 할 것이다. 小 作 法 과 같은 것이 極 히 必 要 한 方 法 이라 하겠는데 이에 對 하여는 或 이렇게 말할 것이다. 法 理 上 으로 보아 所 有 權 과 衝 突 되는 點 이 있는 것인즉 不 可 하다고. 그러나 그것은 解 釋 하기에 있다고 본 다. 元 來 土 地 의 所 有 權 이란 絶 對 性 을 가졌다고 하나 決 코 絶 對 的 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境 遇 가 多 하니 土 地 의 收 用 令 과 같은 것은 이의 一 例 라고 하겠다. 土 地 의 收 用 令 이란 것이 結 局 그 國 家 的 利 益 이나 또 社 會 的 利 益 을 위하여 하는 것인 以 上 小 作 法 이란 것이 그 國 家 的 或 은 社 會 的 利 益 을 위하여 必 要 하다고 하면 決 코 不 可 하다고 할 수 없 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或 은 말하되 小 作 法 이란 小 作 人 이라는 그 私 人 의 利 益 을 위하는 것이로, 決 코 國 家 的 또는 社 會 的 利 益 을 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小 作 問 題 가 漸 漸 深 刻 化 하 여 그 影 響 이 農 業 生 産 의 消 長 을 左 右 하게 된다면 이는 국가적 견지로 보아서 그대로 방임할 수 없는 일이오, 社 會 的 으로 보아서도 어떻게나 解 決 치 아니하면 안될 것이 아닌가! 이러한 議 論 은 專 門 家 에게 맡길 것이지만 吾 人 의 보는 바로써 하면 極 히 必 要 한 問 題 라고 생각 하므로 이를 提 論 하는 바이다. 그리고 다음은 地 主 의 覺 醒 이 必 要 하다. 地 主 가 부질없이 目 前 의 利 害 에만 拘 泥 되어 永 遠 한 將 來 를 보지 못함은 甚 히 寒 心 한 일이다. 그러므로 地 主 는 무엇보다도 共 存 共 榮 이라는 생각으로써 小 作 人 의 地 位 를 保 障 하고 小 作 人 을 指 導 하여서 農 業 의 보다 더한 發 展 을 期 하여야 할 것이다. 地 主 中 에는 間 或 覺 醒 한 사람들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大 多 數 는 頑 强 하여 苛 斂 誅 求 를 是 事 로 하는 者 이니 萬 一 지금 現 狀 과 같이 推 進 되는 때는 農 村 의 疲 弊 는 더욱 深 刻 化 하여 實 로 重 大 한 影 響 을 招 致 케 할 것이다. 21. 平 生 에 仰 募 하는 鄭 圃 隱 先 生 < 別 乾 坤 > (1929년 1월호) 新 年 이라고 特 別 히 생각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나는 언제든지 高 麗 의 鄭 圃 隱 先 生 을 仰 募 하는 까닭에 新 年 을 當 하여도 또한 그를 생각하게 됩니다. 鄭 圃 隱 先 生 은 누구나 잘 아시는 바와 같이 政 治 家 로나 外 交 家 로나 또는 學 問 으로 忠 義 로 그 모 든 것이 高 麗 四 百 七 十 午 年 間 에 第 一 人 으로 생각합니다. 옛사람의 松 都 懷 古 詩 에 山 河 氣 盡 姜 邯 贊 이오 日 月 光 明 鄭 夢 周 라고 云 云 한 것과 같이 高 麗 의 全 歷 史 를 通 하여 武 臣 으로는 姜 邯 贊, 文 臣 으로는 鄭 圃 隱 을 더할 人 物 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있음으로 因 하여 高 麗 가 保 存 되고 그가 죽음 으로 因 하여 高 麗 가 亡 한 것이 아닙니까. 當 時 高 麗 의 國 勢 가 이미 기울어짐에 不 拘 하고 그가 政 界 에 있어서 上 으로 昏 君 을 敎 誨 輔 弼 하 고 下 로 武 臣 의 跋 扈 와 佛 敎 의 淫 靡 를 抑 制 하여 外 로 倭 寇 를 擊 退 하는 同 時 에 或 은 日 本 或 은 元 明 의 國 際 舞 臺 에 活 躍 하여 高 麗 를 儼 然 히 復 興 하는 道 程 에 立 케 한 것을 보면 그의 人 物 이 如 何 한 것을 足 히 想 知 할 것입니다. 그가 外 國 으로 많이 來 往 하는 機 會 에 李 太 祖 가 國 政 을 干 涉 하게 되고 또 不 幸 히 太 宗 의 陰 謨 로 善 竹 橋 上 에서 趙 英 珪 의 兇 椎 에 忠 血 을 흘렸기에 그렇지 만일에 그가 外 出 을 하지않고 항상 國 內 에 있었으면 決 코 政 權 을 李 太 祖 에 주지 않았을 터이오 따라서 李 太 祖 의 王 業 도 그다지 容 易 하게 成 功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成 敗 如 何 는 別 問 題 이어니와 그의 人 物 에 對 하여 나는 眞 心 으
29 로 仰 募 하고 敬 服 합니다. 新 年 에 새 생각을 할 때에 더욱 그러한 偉 大 한 人 物 의 생각이 간절합니다. 22. 家 族 婦 人 敎 育 에 < 槿 友 > (1929년 5월 창간호) ( 註 : 槿 友 社 가 同 誌 의 創 刊 特 輯 으로 請 託 한 槿 友 運 動 에 對 한 各 方 面 人 士 의 期 待 라는 題 目 의 앙케이트에 대한 答 文 ) 현재 조선에 있어서는 모든 것에 질서적으로 그 어느 것을 먼저 할 것이며 어느 것을 나중에 하여야 된다고 할 수 없으며 많은 지장은 각방면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되니 그 실현에 있 어 매구 곤란한 것도 사실이다. 동서양을 물론하고 일어나는 운동은 각기 그 나라와 경우를 따라서 방침이 다를 것이니 조선에 있어 여성운동도 환경이 특수하니 만큼 그 방침도 다를 줄 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하여야겠 지만 무엇보다도 근우회의 사명은 일반 아매한 구가정 여성으로 하여금 세상의 일을 깨닫기에 필 요한 교양사업을 주로 하기를 바라며 또는 그리 해야 되겠다. 여기에는 먼저 선각여성의 책임과 실현이 충실하여 근우회가 조선여성의 이익을 도모함에 표현 기관이 되기를 바란다. 23. 하루 바삐 開 闢 時 代 < 別 乾 坤 > (1929년 7월호) ( 註 : 이 글은 < 別 乾 坤 > 創 刊 十 週 年 紀 念 祝 辭 임) 나는 이즈음 여러 가지 말씀을 하여 드릴 形 便 이 못되어 매우 遺 憾 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여러분이 가진 풍파와 마주 싸워 十 年 間 을 꾸준히 奮 鬪 努 力 하셨다는 것을. 그리하여 十 週 年 紀 念 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을 感 祝 하며 앞으로는 한시라도 바삐 開 闢 時 代 와 같이 되 기를 바라마지 아니합니다. (나보다도 勿 論 여러분이 더욱 기다리고 계시겠지만 ) 그리고 우리가 일상 앉아서 雜 誌 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開 闢 社 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이 야기려니와 開 闢 社 에 여러분의 不 屈 하고 꾸준히 싸워나가는 努 力 이며 紙 面 이 넘치는 誠 意 를 感 歎 치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탁할 것은 앞으로도 前 보다 더한 努 力 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24. 京 城 便 覽 < 別 乾 坤 > (1929년 9월호) 京 城 도 近 代 都 市 의 特 色 을 每 日 發 揮 하여 간다. 形 式 에 있어서도 그러하거니와 裏 面 生 活 에 있
30 어서도 더욱 그러하다. 畸 形 의 發 展, 人 爲 의 淘 汰 等 모든 點 에 있어서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첫째 京 城 은 建 設 의 京 城 이냐, 破 壞 의 京 城 이냐, 破 壞 와 建 設 의 交 響 樂 에 行 進 하는 것이 京 城 의 現 實 이다. 建 設 되는 勢 力 과 破 壞 되는 勢 力 의 相 衝 은 在 來 의 모든 形 骸 위에다 罪 惡 의 金 子 塔 을 세우고 있다. 이 것이 京 城 의 象 徵 이다. 우리는 항상 이 象 徵 化 하는 特 殊 한 都 市 의 空 氣 를 呼 吸 할 때마다 어떠한 窒 息 을 느낀다. 窒 息 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京 城 人 의 叫 呼 이다. 25. 敎 育 의 施 設 과 貧 民 窟 에 < 別 乾 坤 > (1929년 10월호) ( 註 : 別 乾 坤 社 가 要 請 한 京 城 에 와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란 題 目 의 앙케이트에 대한 答 文 임) 나도 시골사람으로 서울에 와 있으면서 이런 말을 하기는 未 安 하지마는 나는 언제나 根 本 的 으 로 시골사람이 서울 오는 것을 不 贊 成 한다. 시골 사람이라도 무슨 特 別 한 일이라든지 主 義 가 있 어서 서울을 구경한다면 已 어니와 그렇지 않고 다만 風 潮 에 딸려서 外 形 의 繁 華 한 것이라든지 奢 侈 한 것만 取 하여 구경한다면 그야말로 盲 者 丹 靑 구경 以 上 으로 所 用 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虛 榮 心 奢 侈 心 만 늘어서 如 干 한 惡 影 響 을 입지 않을 것이다. 實 際 에 시골사람들이 都 會 에 誘 惑 되어 자꾸 都 會 로 集 中 하려 하고 또 近 來 에는 農 村 의 生 活 困 難, 其 他 어떠한 一 時 的 機 會 로 因 하여 一 個 月 에 몇 千 몇 萬 의 시골사람들이 서울로 온대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그런데 旣 往 서울을 오게 되면 나는 이러한 말을 부탁하고 싶다. 卽 京 城 은 道 路 의 開 通, 市 街 의 櫛 比, 建 築 의 宏 大 그러한 모든 施 設 이 完 備 하고 外 面 이 번화한 反 面 에는 참으로 形 言 할 수 없는 貧 民 窟 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只 今 朝 鮮 에 있어서 어느 地 方 에 貧 民 窟 이 없는 곳이 없지마는 서울의 貧 民 처럼 慘 酷 한 現 狀 은 없을 것이다. 진고개와 鍾 路 같은 繁 華 地 를 보는 同 時 에 新 堂 里 孔 德 里 같은 貧 民 窟 을 보아 어찌하면 저런 사 람들도 잘 살게 할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고 또 다른 施 設 보다도 朝 鮮 人 의 一 般 敎 育 施 設 을 잘 살펴서 敎 育 의 必 要 를 確 信 하는 同 時 에 子 弟 를 많이 學 校 에 보내서 有 爲 人 物 을 많이 養 成 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까 한다. 26. 科 學 普 及 과 宗 敎 選 擇 < 朝 鮮 農 民 > 제5권 6호(총36호 1929년 10월) 農 民 을 속여먹는 幽 靈 輩 를 退 治 함에는 農 民 自 體 의 覺 醒 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急 務 라도 생각합니다. 農 民 自 體 의 覺 醒 을 일으킴에는 먼저 簡 易 한 科 學 的 知 識 을 普 及 케 하여서 一 般 農 民 이 事 物 에 對 할 때에 科 學 的 頭 腦 를 가지고 對 하도록 되게 하는 것이 農 民 을 속여먹는 幽 靈 輩 를 退 治 하는 積 極 策 인 同 時 에 農 村 에 橫 行 하면서 現 下 의 農 民 이 不 安 한 가운데 있음을 利 用 하여 함 부로 農 民 을 속여먹는 幽 靈 輩 를 社 會 的 으로 攻 擊 하여 現 社 會 에서는 擡 頭 치 못하게 하는 것은 消 極 策 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現 下 의 朝 鮮 農 民 은 經 濟 的 으로나 政 治 的 으로나 依 支 한 곳 없이 가장 不 安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不 安 한 가운데에서는 依 支 하고 慰 安 을 얻기 위하여 宗 敎 를 찾
31 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弱 點 을 利 用 하여 幽 靈 輩 들은 農 村 에 橫 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農 村 에 宗 敎 를 選 擇 하여 卽 世 界 的 으로 公 認 되는 宗 敎 를 紹 介 하는 것이 農 民 을 속여 먹는 幽 靈 輩 를 退 治 함에 對 하여 輔 助 手 段 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7. 大 協 同 機 關 組 織 의 必 要 와 可 能 如 何? < 彗 星 > 제1권 1호 (1931년 3월호) 그러한 것은 나는 아무 必 要 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全 民 族 의 協 同 機 關 이라 하면 外 面 으로는 勿 論 좋고 多 數 人 의 結 合 이니까 힘이 强 할 것 같지마는 실상은 아무 힘도 없고 그냥 또 시시부지하 고 말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무슨 俱 樂 部 모양으로 1 年 에 몇번씩 모여서 閑 談 이나 서로 하고 意 思 나 交 換 하는 그런 일을 한다면 已 어니와 적어도 民 族 的 으로 무슨 運 動 을 한다면 그 團 體 의 構 成 分 子 가 徹 底 한 意 識 과 主 義 가 서고 生 命 과 財 産 을 거기에 犧 牲 하겠다는 覺 悟 를 가진 人 物 들이 아 니면 아니 되겠습니다. 過 去 에 우리 朝 鮮 사람의 모든 團 體 와 事 業 은 그 趣 旨 나 綱 領 이 좋지 못 하여 成 功 을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奮 鬪 하는 勇 氣 와 誠 力 이 없는 까닭 으로 失 敗 를 한 것입니다. 只 今 도 萬 一 誠 心 誠 意 로 朝 鮮 을 爲 하고 朝 鮮 民 族 을 爲 하여 일할 생각 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다만 同 志 몇 사람끼리라도 서로 힘을 合 하여 旗 幟 를 鮮 明 하게 들고나서 實 質 있게 일을 한다면 거기에 뜻이 있는 사람은 嚮 應 하여 그 團 體 의 努 力 이 커지고 일도 힘있게 잘 할 수가 있지마는 다만 漠 然 하게 우리가 같이 團 結 하여야 되겠다고 하여 누가 發 起 하여 勸 誘 人 會 를 하게 한다면 그것은 個 人 本 位 의 結 合 이나 團 體 本 位 의 結 合 이나 結 局 은 아무 實 力 이 없이 第 二 新 幹 會 가 되고 말 것입니다. 대단히 未 安 한 말이지마는 어떤 會 合 이든지 우리 朝 鮮 사람은 적어도 權 利 主 張 하는 사람은 많은 것 같습니다. 會 를 할 때 보면 會 長 또는 委 員 長 같은 幹 部 運 動 에는 누구나 激 烈 한 것 같고 또 무엇을 하느니 하고 案 은 많이 내놓고 떠들기는 다 잘하지마는 實 施 에 金 錢 辨 出 할 方 法 이라든지 犧 牲 的 으로 할 人 物 을 討 議 하는 마당에 가서는 그저 面 面 相 顧 하 고 아무 소리가 없으니 그래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 只 今 에 만일 무슨 運 動 을 한다면 社 會 主 義 者 고 民 族 主 義 者 고 먼저 義 務 履 行 잘 할 사람으로만 그 團 體 를 組 織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요 人 物 에 있어서도 人 格 으로나 學 識 으로나 무엇으로나 한 地 方 하면 其 地 方 에서 信 賴 하는 人 物 을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最 初 일어날 때에도 決 코 量 을 取 할 것이 아니요 質 을 取 할 것입니다. 中 國 의 國 民 黨 이 只 今 은 저렇게 勢 力 이 크지마는 本 來 에야 孫 文 을 中 心 하여 몇 個 人 의 同 志 로 糾 合 된 것이 아닙니까. 其 外 다른 民 族 들도 대개는 그리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8. 朝 鮮 의 世 界 的 地 位 < 批 判 > (1931년 5월호) ( 註 : 批 判 社 의 要 請 에 依 하여 朝 鮮 의 世 界 的 地 位 란 題 目 의 論 文 을 寄 稿 하였으나 數 個 處 가 削 除 되어 있다) 朝 鮮 의 世 界 的 地 位 는 經 濟 的 으로는 植 民 地 요, 政 治 的 으로는 弱 小 民 族 의 地 位 에 있다. 萬 一 朝 鮮 을 世 界 다른 弱 小 民 族 에 比 較 하여 말한다면 英 國 의 깃발 아래에 있는 모든 弱 小 民 族 과 近 似 點
32 을 發 見 할 수 있다. 文 化 와 民 族 을 말한다면 愛 蘭 그것과 近 似 하며, 經 濟 的 으로 말한다면 印 度 그것과 ( 此 間 十 四 字 削 除 ) 近 似 하다. ( 此 間 七 十 字 削 除 ) 그러나 東 洋 의 大 勢 로 보아서 朝 鮮 의 세계적 地 位 가 將 來 에 있어서 더욱 重 大 性 을 包 藏 하고 있을뿐더러 現 在 의 東 洋 大 勢 로 보아서도 朝 鮮 의 世 界 的 地 位 는 實 로 世 界 어떠한 弱 小 民 族 의 地 位 그것보다도 더욱 重 大 性 을 占 有 하고 있다. ( 此 間 六 十 八 字 削 除 ) 一 例 를 最 近 에서 든다면 저 間 島 에서 接 踵 續 出 하는 共 産 黨 問 題 가 中 國 과 日 本 間 에 있어서 重 要 性 을 가진 國 際 問 題 를 일으킨 것을 볼지라도 朝 鮮 이 얼마나 重 大 한 地 位 에 있다는 것을 넉넉히 알 수가 있지 않으냐. 地 理 上 으로 말할지라도 朝 鮮 은 世 界 交 通 의 中 心 路 가 되어 있다. 저 아메리카, 亞 細 亞 大 陸, 歐 羅 巴 等 世 界 通 路 의 樞 要 地 帶 가 되어가고 있다. 통틀어 말한다면 政 治 的 으로나 地 理 上 으로나 朝 鮮 은 世 界 어떠한 弱 小 民 族 의 그것보다도 가장 重 要 한 地 位 를 占 領 하고 있다. 朝 鮮 問 題 如 何 가 東 洋 大 局 을 左 右 如 何 로 料 理 하게 된다. 東 洋 에 있어서 萬 一 의 變 局 을 일으킨 다면 朝 鮮 問 題 가 가장 干 要 한 形 勢 를 일으키게 된다. 過 去 의 歷 史 가 이를 證 明 하고 있지 않으냐. 日 淸, 日 露 兩 大 戰 役 의 原 因 은 朝 鮮 問 題 그것이 核 心 이 되고 있지 아니했느냐. 다시말하면 朝 鮮 問 題 가 없었다면 兩 大 戰 役 이 發 生 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萬 一 에 太 平 洋 問 題 라는 것이 日, 美, 中 三 國 間 의 重 要 問 題 가 되어가지고 있다면 이것이 國 際 的 問 題 가 되고, 滿 蒙 問 題 가 將 來 太 平 洋 問 題 를 惹 起 하는 導 火 線 이 된다고 하면, 그 中 에도 滿 洲 問 題 라는 것이 將 來 太 平 洋 問 題 를 일으키는데 出 發 點 이 된다고 하면 더욱 朝 鮮 問 題 의 重 要 性 이 느끼어지는 바이다. 이 點 에 있어서 朝 鮮 의 世 界 的 地 位 는 어떠한 方 面 으로 보든지 世 界 의 어 떠한 弱 小 民 族 그것보다도 가장 重 大 한 關 係 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바이다. 將 來 日 露, 日 中, 日 美 間 에 있어서 如 何 한 問 題 가 發 生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國 際 的 으로 如 何 한 問 題 로 展 開 된다면 朝 鮮 의 世 界 的 地 位 는 實 로 重 大 하다고 느끼어진다. 朝 鮮 의 世 界 的 地 位 는 過 去 에도 重 要 하였거니와 現 在 에도 未 來 에도 더욱 重 大 하다. 世 界 어떠한 弱 小 民 族 의 그것은 朝 鮮 의 세계적 地 位 에 미치지 못한다. 29. 世 界 大 勢 와 朝 鮮 의 將 來 < 東 光 > 제3권 6호 (1931년 6월) 萬 一 오늘날 朝 鮮 의 將 來 를 議 論 하고저 할 것 같으면 오늘날의 朝 鮮 이 過 去 의 朝 鮮 과 달라서 모든 情 勢 가 世 界 的 朝 鮮 이 된 以 上 먼저 世 界 의 大 勢 또는 思 潮 의 動 向 이 어떠한 方 面 으로 趨 移 하는가 하는 것을 明 確 히 把 持 치 아니하면 朝 鮮 의 將 來 를 豫 測 할 수 없을 것은 勿 論 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一 步 를 進 하여는 朝 鮮 民 族 이라는 自 體 가 過 去 文 化 的 生 活 에 있어서, 民 族 的 으 로 어느 程 度 까지 그 能 力 을 發 揮 하였는가 하는 것에 對 하여 歷 史 를 參 照 하여 正 確 한 觀 念 과 自 信 을 把 持 치 아니하면 또한 그 將 來 를 論 斷 하기는 不 可 能 한 일이다. 이러한 意 味 에 있어서 먼저 朝 鮮 民 族 의 文 化 的 能 力 을 歷 史 的 으로 溯 究 하고 또한 朝 鮮 과 不 可 離 한 環 境, 情 勢 를 世 界 的 으로 通 觀 치 아니하면 朝 鮮 의 將 來 가 如 何 히 進 展 될가 하는 결론을 斷 案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朝 鮮 民 族 이 過 去 歷 史 的 으로 보아서 完 全 한 文 化 的 能 力 을 가졌다 하는 것은 세계의 學 者 가 公 認 하는 바 다시 贅 言 을 不 要 할 것이다. 그러나 高 句 麗, 新 羅, 高 麗 로부터 李 朝 의 末 葉 에 이르기까 지는 모든 文 化 가 特 殊 한 一 變 化 를 일으키지 못하였으니 元 來 東 洋 文 化 自 體 가 家 族 制 度 主 義 와 封 建 制 度 의 思 想 의 領 域 內 에서 脫 出 치 못한 것이 그 重 大 한 原 因 이다. 그러므로 吾 人 은 過 去 同
33 一 한 規 範 으로 歷 代 王 朝 가 變 遷 하게 된 事 實 에 있어서는 特 別 히 쓸 것이 없다. 한번 文 藝 復 興 과 佛 國 의 大 革 命 으로 因 하여 民 權 自 由 의 世 界 的 思 潮 가 滔 滔 히 東 洋 政 局 을 氾 濫 하게 됨을 따라서 朝 鮮 半 島 도 政 治 的 으로 文 化 的 으로 數 千 年 以 來 의 大 變 動 과 大 改 革 을 일으키게 된 것은 不 誣 할 事 實 이다. 그러나 世 界 的 文 化 에 뒤떨어진 感 이 있는 것은 現 下 世 界 文 化 의 源 泉 인 歐 美 의 東 洋 에 對 한 地 理 的 干 係 가 重 大 한 原 因 을 作 하게 한 것이다. 海 洋 的 으로 輸 入 된 歐 美 의 文 化 는 日 本 의 維 新 을 作 하였고 大 陸 的 으로 輸 入 된 歐 洲 의 文 化 는 中 華 大 陸 의 遮 斷 으로 因 하여 近 代 에 있어서도 朝 鮮 의 世 界 文 化 에 接 觸 이 가장 遲 鈍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곧 지금부터 六 十 年 前 의 甲 申 政 變 의 改 革 運 動 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勿 論 甲 申 政 變 의 改 革 運 動 이 特 殊 階 級 에 局 限 되었고 또는 失 敗 에 歸 하였지마는 朝 鮮 社 會 에 重 大 한 波 動 과 影 響 을 일으킨 것만은 確 實 한 事 實 이다. 이 思 潮 가 韓 末 六 十 年 을 通 하여 或 은 獨 立 運 動 이 되고, 或 은 憲 政 運 動 이 되고, 或 은 社 會 改 革 運 動 이 되고, 或 은 新 敎 育 普 及 運 動 이 되어서 一 進 一 退 의 形 勢 를 일으키게 된 것도 過 去 의 事 實 이다. 이것은 獨 立 協 會, 自 强 會, 大 韓 協 會, 各 地 方 學 會 의 勃 興 等 等 으로 보아서 이것을 證 明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運 動 이 暫 起 暫 滅 의 形 勢 에 그치게 된 것은 民 衆 의 完 全 한 覺 醒 을 土 臺 로 한 것보다 一 部 知 識 階 級 의 運 動 에 起 因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庚 戌 의 大 變 革 으로 因 하여 潛 在 되었던 民 族 的 意 識 이 더욱 尖 銳 化 하게 되고 또는 普 通 敎 育 의 普 及 으로 因 하여 民 衆 的 으로 世 界 的 文 化 와 思 潮 를 完 全 히 普 及 感 受 하였다. 이것이 곧 己 未 運 動 의 發 端 이 된 것이다. ( 以 下 省 略 ). 30. 佛 陀 의 根 本 情 神 에 歸 依 하라 < 佛 敎 > (1931년 7월호) 나는 平 素 부터 佛 敎 에 對 하여서는 다만 好 意 가졌을 뿐으로서 그 根 本 義 에 깊이 들어가서까지 蘊 奧 한 敎 理 를 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러나 또한 일찍이 興 味 를 가지고 보아오던 敎 團 이었던 만큼 노상 거기에 對 한 希 望 과 私 見 이 없지도 않다. 그러므로 而 下 에 비록 槪 括 的 이나마 敎 團 에 對 하여서나 敎 政 에 對 하여서나 社 會 事 業 에 對 하여서의 나의 管 見 을 大 綱 말하여 보겠다. 첫째= 敎 團 에 對 하여 나의 생각하는 바를 말하여 볼 것 같으면 原 始 佛 敎 時 代 에 있어서도 元 來 佛 敎 는 二 重 敎 團 으로서 僧 家 耶 衆 이라 하면 四 大 部 衆 이라고 하여 比 丘 比 丘 尼 優 婆 塞 優 婆 尼 로 나 누어가지고 比 丘 比 丘 尼 로 말하면 반드시 獨 身 生 活 者 로서 佛 敎 의 情 神 과 學 理 만을 硏 究 하여 敎 團 의 體 가 되어가지고 宗 風 을 擧 揚 한다. 一 般 信 徒 를 敎 化 한다 하여 法 供 養 으로써 自 己 네들의 使 命 이라 하였고 優 婆 塞 優 婆 尼 는 곧 佛 敎 의 情 神 下 에 社 會 의 實 生 活 裡 에 들어가서 士 農 工 商 의 諸 機 關 內 에서 生 活 을 하는 이들로 比 丘 比 丘 尼 들에게 法 供 養 을 받는 代 身 에 그네들에게 物 質 로써 供 養 具 를 바치게 되어 敎 團 의 用 이 되어가지고 理 論 을 實 際 化 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在 來 에 우 리도 佛 敎 라 하면 곧 山 間 에서만 隱 居 하여 超 現 實 的 宗 敎 로만 알았더니 내가 監 獄 에 있으면서 佛 敎 에 對 한 書 籍 을 읽어보는 동안에 佛 敎 가 그렇게 超 現 實 的 宗 敎 가 아니오, 도리어 卽 實 主 義 의 宗 敎 인 것을 切 實 하게 깨달았다. 그러므로 우리 일반 社 會 人 으로도 過 去 의 佛 敎 를 排 斥 하여 山 間 宗 敎 로만 알고 一 般 的 誤 解 를 가졌던 陳 舊 한 觀 念 만은 비우고 보아야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同 時 에 佛 敎 敎 團 自 體 에서도 스스로 處 決 할 問 題 는 在 來 의 僧 侶 團 을 分 裂 시켜서 斷 乎 히 理 事 兩 判 의 僧 侶 의 行 爲 까지라도 明 白 히 하지 아니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理 判 僧 侶 는 어디까지든지 戒 行 이라든지 知 德 을 兼 修 하여서 一 般 信 徒 들에게도 儀 範 이 되도록 되어야 할 것이며 事 判 僧 侶 에 있어서도 亦 是 個 人 問 題 이지마는 宗 敎 人 으로서 忌 避 할 만한 것은 될 수 있는대로 勤 愼 하여 社 會
34 에 誤 解 가 없도록 努 力 하지 아니하면 또한 안될 것이다. 둘째= 敎 政 에 對 하여서는 亦 是 事 判 이라 하여 一 端 事 務 에만 注 目 할 것이 아니라 敎 界 가 어떻 게 해야 振 興 發 展 이 될까를 觀 察 하여 첫째 高 僧 大 德 을 極 力 으로 擁 護 해서 敎 界 의 情 神 集 中 에 努 力 하며 法 脈 을 繼 承 하는 點 도 크게 憂 慮 하여 慧 命 을 이을 積 極 的 方 針 을 取 하지 아니하면 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社 會 事 業 에 關 하여서는 方 今 學 校 를 經 營 한다, 布 敎 所 를 設 置 한다, 幼 稚 園 을 經 營 한다 하 여 많은 努 力 을 다함은 고맙게 생각하는 바이나 元 來 社 會 事 業 에 對 하여서는 他 敎 의 하는 方 針 을 많이 參 酌 함이 좋을 것이다. 決 코 남의 模 倣 이 아니라 그밖에 길이 따로 없다면 비록 남이 먼저 行 하였다고 그길을 아니 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都 大 體 크게 우리 朝 鮮 의 諸 方 面 을 觀 察 한다면 너무도 宗 敎 的 修 養 이 不 足 한 것이 우리 民 族 의 全 般 的 缺 陷 인 것이야 識 者 면 다 首 肯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信 仰 心 은 모든 것을 이기고 남는 것이기 때문에 乃 終 에는 生 死 問 題 까지라도 그리 어렵게 보지 를 않는다. 그러므로 功 利 的 方 面 으로만 보아서도 宗 敎 的 信 心 이 그 얼마나 社 會 的 惠 義 를 가지 고 있는지 모른다. 過 去 에 우리 朝 鮮 은 儒 學 思 想 에 너무 그릇 中 毒 이 된 所 以 로 죽음이라 하면 그만 暗 黑 에 돌아가고 마는 것 같이 생각하여 死 에 對 한 恐 怖 心 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根 氣 와 意 志 를 여간 弱 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宗 敎 로 因 하여 自 己 使 命 에 殉 死 하면 天 堂 이나 或 은 極 樂 世 界 에 꼭 간다는 信 心 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사람의 殉 節 하는 美 德 을 培 養 시키는지 모른다. 이 點 은 哲 學 이나 道 德 이나 法 律 이 宗 敎 에 미치지 못함이 크다. 나는 그만큼 宗 敎 에 對 한 期 待 가 많고 또 特 히 佛 敎 에 對 하여서는 以 上 의 몇몇가지 條 件 에 對 한 囑 望 이 크다는 것을 말하여 둔다. 31. 萬 寶 山 事 件 에 對 하여 <동아일보> (1931년 7월 5일) ( 註 : 이 글은 韓 國 近 代 名 論 說 66편중의 하나로 선정되어 1967년 新 東 亞 誌 신년호 별책부록 으로 간행되었다) 1 萬 寶 山 衝 突 事 件 을 單 純 하게 中 國 人 의 朝 鮮 民 壓 迫 이라고 떠들어대는 것은 淺 慮 의 甚 한 者 다. 좀더 冷 靜 沈 着 하게 事 態 의 眞 相 을 捕 捉 하고 그 裏 面 에 潛 在 한 種 種 의 微 妙 한 關 係 를 靜 觀 한 뒤 에 判 斷 을 내려야 한다. 하물며 이 事 件 을 曲 解 하고 無 辜 한 中 國 在 留 民 에게 暴 行 을 加 하는 등의 일이랴. 百 步 를 讓 하여 일의 非 가 全 혀 彼 에 있다고 假 定 하더라도 그것을 契 機 로 하여 朝 鮮 在 留 의 中 國 人 에게 報 復 的 暴 行 을 加 하는 것은 一 方 民 族 的 襟 度 의 缺 如 를 暴 露 하는 것인 同 時 에 一 方 으로 事 態 를 더욱 紛 糾 케 하고 自 他 의 損 失 을 擴 大 하는 것뿐이다. 在 外 의 同 胞 가 危 難 에 있다는 報 道 를 듣고 이를 念 慮 하고 그들을 위하여 돕고자 하는 생각이 있음은 同 胞 의 뜨거운 사랑을 表 現 한 것이라 할 것이나, 그 方 途 를 잘못하고 그 目 標 를 어그러뜨린다 하면, 本 來 의 目 的 을 達 치 못할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아니하랴. 昨 今 間 에 仁 川 과 京 城 등 各 地 에서 생긴 不 祥 事 는 實 로 痛 嘆 할 일이다. 同 胞 諸 位 의 冷 靜 하고 賢 明 한 態 度 를 재촉코자 한다
35 2 滿 洲 朝 鮮 人 의 問 題 는 奧 地 와 滿 鐵 沿 線 과를 區 分 하여 두 가지로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가 屢 言 한 바다. 다시 말하면 奧 地 의 農 民 問 題 가 單 純 히 朝 鮮 農 民 對 中 國 官 民 의 問 題 인 것의 反 對 로, 鐵 道 沿 線 의 問 題 는 여기다가 日 本 警 察 力 까지 加 合 한 三 角 問 題 가 되는 것이다. 이번 萬 寶 山 問 題 로 말하면 바로 이 둘째의 境 遇 가 分 明 하다. 이미 日 中 兩 警 官 隊 의 衝 突 이 있은 것을 보아 疑 心 없는 길이오, 따라서 今 日 에 와서는 問 題 의 中 心 이 中 國 人 의 朝 鮮 農 民 壓 迫 에 있다는 것보다도 日 中 警 官 의 衝 突 이라는 事 實 로 移 轉 되었다 함이 事 實 일 것이다. 詳 報 가 없으매 確 斷 을 내리기 어렵지마는 今 日 까지의 報 道 에 依 하여 보건대, 原 來 萬 寶 山 開 墾 事 業 은 傳 하는 바에 依 하면, 日 朝 中 露 四 個 民 族 의 合 資 로서 中 國 人 地 主 와 契 約 하여 水 田 開 拓 을 目 的 으로 생긴 一 大 企 業 이라 한다. 이 企 業 家 들의 손으로 二 百 餘 의 朝 鮮 農 民 을 移 住 케 하고 灌 漑 를 위하여 水 路 를 開 拓 한 것인데, 水 路 開 拓 時 에 中 國 人 의 土 地 를 侵 犯 한 것이 紛 糾 의 시작이라 한다. 그리하여 結 局 抗 爭 의 對 象 은 中 國 人 地 主 對 企 業 家 間 에 일어날 것이나, 現 場 에서 水 路 開 墾 에 從 事 하고 있는 것이 農 民 이매 自 然 의 形 勢 로 朝 中 兩 農 民 이 對 峙 하게 된 모양이다. 이 點 에 있어서 먼저 우리는 中 國 의 當 路 者 에게 抗 議 할 것은, 移 住 農 民 二 百 은 事 實 上 으로 애 매하다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單 純 히 企 業 家 對 中 國 官 廳 의 問 題 일 것이요, 小 作 農 인 朝 鮮 農 民 은 何 等 의 直 接 責 任 이 없는 것이다. 事 態 가 惡 化 하게 되매 日 本 領 事 舘 의 保 護 를 願 한 것도 물론 彼 等 企 業 家 일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兩 警 官 隊 의 正 面 衝 突 까지 보게 된 것이다. 至 於 兩 方 農 民 의 衝 突 은 그 餘 波 에 不 過 하다고 볼 것이며, 事 態 에 對 한 理 解 가 不 充 分 한 盲 目 的 行 動 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3 이와 같이 微 妙 한 關 係 를 가지고 있는 이 事 件 에 對 하여, 輕 率 히 事 態 를 誇 張 하고 抗 爭 을 擴 大 케 하는 듯한 言 辭 를 弄 함은 雙 方 의 感 情 을 挑 發 할 뿐으로 何 等 의 利 益 이 없는 일이다. 우리의 關 心 處 는 오직 二 百 의 農 民 同 胞 다. 一, 二 企 業 家 의 無 謀 한 行 動 으로 因 하여 애매히 被 害 를 받는 그들의 애매함을 徹 底 히 主 張 할 것 뿐이다. 이에 대하여 朝 鮮 人 은 朝 鮮 人 의 立 場 에 있 어서 愼 重 한 對 策 을 樹 立 할 必 要 가 있거니와, 오직 크게 삼갈 것은 事 件 의 眞 相 을 알기도 前 에 輕 率 히 行 動 한다거나 또는 問 題 의 正 鵠 을 混 同 誤 認 하여 화근을 將 來 에 남기지 않도록 크게 注 意 할 바다. 32. 二 천만 동포에게 고합니다. 민족적 이해를 타산하여 허무한 선전에 속지 말라. <동아일보> (1931년 7월 7일) ( 註 : 이 글도 앞의 萬 寶 山 事 件 에 대하여 와 한 묶음으로 韓 國 近 代 名 論 說 로 선정되었음.) 1 만보산 二 백명 동포는 안전하고 평안합니다. 지금, 만주와 그밖의 중국 땅에 있는 우리 동포들 은 무사하고 편안합니다. 중국 백성들은 지금 우리 동포들에게 손을 댄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만 주 기타 중국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가장 간절한 소원은, 국내에 있는 동포들이 중국 사람들에게 폭행을 말아 달라 (작일 상해 특전 참조) 하는 것입니다
36 동포여, 우리가 조선에 와 있는 중국사람 八 만명에게 하는 일은, 곧 중국에 있는 백만명 우리 동포에게 돌아옴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즉시로 중국사람을 미워하고 그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일을 단연히 중지하십시오. 2 동포 여러분은 만보산에 있는 二 백명 동포의 생명이 위경에 든 것처럼 생각하고, 또 어떤 악의 를 가진 자의 생각인지는 모르거니와, 그 二 백명 동포가 학살을 당한 것처럼 아는 이도 있는 모 양이나, 이것은 전혀 무근지설입니다. 무뢰배의 유언비어입니다. 또 조선 안에서도 조선 동포가 중국인에게 학살을 당하였다는 풍설을 돌리는 자가 있다고 하거 니와, 이것은 더구나 말도 되지 아니하는 허설입니다. 이 모양으로 무근한 유언비어를 돌려 이웃한 두 민족 사이에 틈을 내며 또 성군작당하여 아무 죄도 없는 이웃나라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파괴하는 것은 진실로 민족을 해치는 폭민이오 난민입 니다. 우리는 이러한 무리를 민족의 죄인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중국은 현재 백만의 조선 동포가 우접해 사는 나라요, 또 이 앞에도 그와 가장 밀접하고 친선 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조선 민족 백년의 복리를 위한 것이어든 무책임하고 일을 좋아하는 자 의 헛된 선전에 미혹하여 인천 경성 평양 등지의 대참극을 일으킨 것은 조선민족의 명예에 영원히 씻기 어려운 누명이 될뿐더러 중국에 있는 백만 동포의 목에 칼을 얹는 것이니 이런 통탄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동포여! 정신을 차려 앞뒷일을 헤아리십시오. 악의를 가진 무리의 헛된 선전을 믿어 여러분이 생명보다도 더 사랑하는 민족의 전도에 칼과 화약을 묻는 일을 하지 말으십시오. 3 비록 백보를 사양하여 만주에 있는 동포가 중국 사람들에게 폭행을 당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우리가 조선에 와 있는 중국 사람들에게 보복함으로 조금도 이로움이 없을 뿐더러, 도리어 핍박 받는 동포의 처지를 더욱 곤란하게 할 것이 아닙니까. 중국 땅에 있는 조선 동포가 핍박을 당한 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가 이렇게 분개할진댄, 우리 조선 사람이 조선에 있는 중국 사람에게 폭행 한 소문을 들으면 중국 사람들이 중국에 있는 조선 동포들에게 얼마나 분한 마음을 가지겠습니 까. 또 인도상으로 보더라도 호떡장수, 노동자 같은 중국 사람이 무슨 죄이길래 우리가 그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겠습니까. 이것은 도무지 불합리한 일이요 민족의 전도에 크게 해를 주는 일이니, 거듭 말하거니와 이러한 선전을 하고 폭동을 하는 이는 조선 민족의 적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 습니다. 동포의 뜨거운 민족애와 굳센 민족의식을 이용하려는 검은 손이 여러 가지 탈을 쓰고 각 도시 에 횡행하는 모양이니 선량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동포여! 삼가고 서로 경계하실지어다. 33. 己 未 年 과 그 以 前 < 東 光 > 제3권 10호 (총26호 1931년 10월호)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말할 수 없소. 天 道 敎 와 耶 蘇 敎 사이에 서서요. 그것도 어떻게 되어 서 세상에 어떻게 전하여진 것이라고 진상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소? (하고 옛날의 활 동을 추억하고 악착한 현실에서는 현실에서는 말 못하겠다는 듯한 氏 의 심사는 기자의 상상뿐이 아닐 것이다. 기자는 자연히 말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中 央 學 校 에 先 生 ( 校 長 )으로
37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더구나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때의 일반민중의 人 心 이요? (묻는 기자 가 실수다. 그때야 조선이 합방된지 불과 십년, 두사람이 만나도 새나 쥐가 없나 하여 음성을 낮 추던 시절이다) 그때는 천지가 음울하고 음산한 기운이 들고 있었습니다. 思 想 의 統 一, 思 想 의 통 일이 그때의 가장 重 要 한 條 件 이었지요. 思 想 의 統 一. (하고 다시금 입에 놓이는 그 思 想 의 統 一 이라는 것은 온 조선사람이 조선을 사랑한다는 民 族 主 義 思 想 을 가르침이다 - 記 者 註 ) 現 在 나로서는 이 問 題 에 對 하여 더 말할 수 없소. 다른 이 보고 부분적으로 물어서 종합해 보 시오.( 記 者 는 方 向 을 全 然 轉 換 하여 氏 의 學 生 時 代 를 물었다. 만세이전의 추억이 능히 만세당시의 氏 의 활동을 추측하는 데 한 재료가 될 줄 안 까닭이다) 우리가 처음에 東 京 에 留 學 을 하던 때는 留 學 生 이 한 百 名 이나 되었을까, 좀 더 되던 것 같습 니다. 大 韓 興 學 會 라는 것이 있었지요. 그 韓 字 가 합방이 없어지고 七, 八 年 後 에 學 友 會 라는 것이 생겼소. 學 之 光 은 누구지요? 처음에 우리가 시작하고 金 炳 魯 氏 가 編 輯 兼 發 行 人 이었던 것 같습 니다. 創 刊 辭 도 내가 썼지요. 一, 二 號 난 후에 學 友 會 로 넘겼다고 記 憶 됩니다 (이런 것을 쓰지 말 라는 것을 다 쓴 文 責 은 勿 論 記 者 에게 있다) 34. 新 東 亞 창간사 < 新 東 亞 > (1931년 11월호) 朝 鮮 民 族 은 바야흐로 大 覺 醒, 大 團 結, 大 活 動 의 曉 頭 에 섰다. 事 業 的 大 活 動 의 前 軀 는, 思 想 的 大 醞 釀 은 民 族 이 包 含 한 特 色 있는 모든 思 想 家 經 綸 家 의 意 見 을 民 族 大 衆 의 앞에 提 示 하여 活 潑 하게 批 判 하고 吸 收 케 함에 있다. 이러한 속에서 民 族 大 衆 이 共 認 하는 가장 有 力 한 民 族 的 經 綸 이 發 生 되는 것이니 月 刊 新 東 亞 의 使 命 은 正 히 이것에 있는 것이다. 新 東 亞 는 朝 鮮 民 族 의 前 途 의 大 經 綸 을 提 示 하는 展 覽 會 요, 討 論 場 이요, 醞 釀 所 다. 그러므로 新 東 亞 는 어느 一 黨 一 派 의 宣 傳 機 關 이 아니다. 名 實 이 다같은 朝 鮮 의 公 器 다. ( 下 略 ) 35. 各 界 人 士 들의 멘탈테스트( 說 問 ) < 東 光 > 제4권 제1호 (총27호 1932년 1월) 應 答 東 亞 日 報 社 長 宋 鎭 禹 1. 世 界 的 錢 慌 回 復 -- 經 濟 狀 況 이 너무 混 雜 하니 推 測 할 수 없소. 回 復 되는 날 回 復 되겠지요. 2. 中 國 의 完 全 統 一 -- 中 國 國 民 이 完 全 히 覺 醒 하고 民 族 的 으로 決 死 的 態 度 를 가지는 날에. 3. 朝 鮮 사람 잘 살 날 -- 朝 鮮 이 完 全 히 自 覺 하는 날이겠지요. 4. 戀 愛 와 相 對 者 -- 別 로 없습니다. 5. 運 動 과 娛 樂 -- 運 動 은 別 로 없소. 娛 樂 은 散 步, 談 話, 新 聞, 雜 誌. 6. 漢 藥 과 洋 藥 -- 漢 藥 은 數 十 年 經 驗 方 이니까 어느 程 度 까지 믿고, 洋 藥 은 學 理 的 으로 된 것 이니까 勿 論 믿습니다. 7. ( 不 得 已 하여) 略 함
38 8. 나의 할 遺 言 --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9. 祕 密 한가지 -- 말하면 벌써 祕 密 이 아니겠으니 祕 密 을 어떻게 말하오? 10. 來 生 과 因 果 應 報 -- 現 世 도 믿기 어려운데 어떻게 來 世 를 믿습니까. 그러나 現 世 에 있어서 因 果 應 報 를 믿습니다. 36. 努 力 前 進 更 一 步 <동아일보> (1932년 1월 1일) 1 새해가 온다 疾 走 하는 時 間 은 새로이 다시 우리네 二 千 萬 을 喚 起 하는구나. 世 界 를 震 憾 하는 怒 濤 의 속에 動 搖 困 弊 驚 愕 難 境 의 一 年 은 豫 期 와 希 望 의 새날에게 자리를 사양하고 물러앉는다. 오는 한 해는 果 然 世 界 人 의 渴 望 하는 解 決 과 安 定 의 新 時 代 를 가지고 오는가. 그렇지 아니하 면 難 境 은 다시 難 境 을 낳고 風 雲 은 다시 風 雲 을 吐 하여 沮 止 할 바를 모르는 歷 史 의 轉 換 이 奔 馬 的 速 力 으로 進 展 하려는가. 人 類 社 會 는 자칫하면 文 明 의 고삐를 졸라 잡지 못하고 大 波 紋 의 局 面 에까지 단숨에 굴러들지 아니할까. 이것이 現 代 人 의 疑 懼 요, 苦 悶 이요, 恐 怖 다. 이것은 그러하려니 와 돌이켜 우리의 苦 悶 은 그 무엇일 것이며, 그들의 希 望 은 또한 그 어디서 求 할 것이냐. 思 想 의 激 浪 이 四 面 으로 우리 心 境 을 두드리고 隣 人 들의 제각기 살려는 活 動 이 우리의 眼 界 를 活 氣 띠게 할 이때에 우리는 무엇으로써 새해의 부름에 應 하여야 할까. 2 우리가 元 氣 없으니 元 氣 를 振 作 함도 좋다. 우리가 勇 力 이 不 足 하니 勇 力 을 鍛 鍊 함도 可 할 것 이다. 우리가 團 結 力 이 弱 하니 團 結 을 굳게 함도 必 要 하다. 우리가 消 極 的 이라면 좀더 積 極 的 이 되자. 우리가 鎖 沈 하였으면 좀더 能 動 的 으로 움직이자. 우리가 信 念 이 엷었으면 좀 더 確 固 한 信 念 을 把 握 하자.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統 括 하고 이 모든 것의 前 提 로서 한마디로써 新 年 의 결심을 나타내자 하건대 오직 一 步 의 高 貴 한 價 値 를 把 持 하자 한다. 이 무엇을 말함이냐. 退 하여 지키매 一 步 를 辭 讓 치 아니하며, 나아가 取 하매 一 步 를 全 心 으로서 取 하자는 것이다. 窒 息 하는 退 嬰 的 雰 圍 氣 속 에 惡 戰 苦 鬪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一 步 의 價 値 의 正 當 한 把 持 야말로 萬 世 盤 石 의 强 壘 며 이 一 步 又 一 步 의 不 屈 的 進 取 야말로 바위를 가르는 나무 엄 의 偉 大 한 힘이다. 3 그렇다. 世 界 는 한 걸음씩 前 進 한다. 모든 動 搖 와 反 動 에도 不 拘 하고 그 行 步 는 能 히 沮 止 할 者 가 없을 것이다. 經 濟 的 困 難 은 一 層 그 酷 甚 度 를 加 하고 있다. 모든 爲 政 家 들의 國 民 的, 擧 國 一 致 的, 緊 急 的 必 死 努 力 에도 不 拘 하고 失 業 은 增 加 하고 通 商 은 減 縮 되며 個 人 의 貧 困 과 國 家 財 政 의 艱 難 은 아직 도 그 復 活 의 前 途 가 渺 然 할 뿐이다. 마치 酷 鞭 下 에 千 里 를 달린 驛 馬 와 같이 어떤 者 는 이미 困 疲 하였고 어떤 者 는 바로 困 疲 의 瞬 間 에 到 達 한 듯하다. 이 餘 波 는 本 來 부터 困 窮 한 朝 鮮 의 農 村 이 아니라 農 村 의 朝 鮮 을 掩 襲 하여 거의 復 活 의 餘 地 를 疑 心 하리만치 大 衆 的 生 活 을 困 勞 하게 하 였다. 이것이야말로 再 昨 年 의 世 界 問 題 며, 昨 年 의 世 界 問 題 며, 今 年 의 世 界 問 題 다. 이야말로 朝 鮮 의 當 面 한 모든 問 題 中 에 가장 重 要 한 問 題 인 同 時 에 加 一 層 우리의 努 力 精 進 으로써 局 面 의 打 開 를 要 求 하는 바이다
39 4 政 治 的 葛 藤 과 産 業 의 停 止 狀 態 로 呻 吟 하는 歐 洲 의 白 色 人 이나, 內 亂 과 飢 饉 에 苦 楚 를 겪는 亞 細 亞 의 黃 色 人 이나 世 界 어느 구석을 勿 論 하고 人 類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文 明 의 痼 疾 은 白 日 下 에 그 醜 態 를 暴 露 하고 있다. 黃 金 國 아메리카에도 失 職 者 가 거리를 메우며 貧 困 의 印 度 가 殉 敎 的 受 難 에 헐덕거린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이 時 代 는 努 力 奮 鬪 에 依 하여 進 展 한다는 것을. 人 類 가 하루 한해 한 世 紀 에 進 取 하는 一 步 의 前 進 이야말로 歷 史 上 永 久 한 紀 念 塔 으로 남는 것이 다. 세계는 確 實 히 나아간다. 朝 鮮 도 確 實 히 나아간다. 一 躍 九 天 의 野 慾 을 가지고 볼 때는 焦 燥 도 하려니와 꾸준한 努 力 으로 百 年 의 大 計 를 내다보는 者 一 步 의 無 雙 한 價 値 를 大 覺 할 것이다. 5 果 然 우리는 지나간 한 해에 一 步 를 前 進 하였는가. 그렇다. 確 實 히 우리는 나아갔다. 受 難 中 에 있으되 그 受 難 과 그 忍 耐 를 通 하여 우리의 意 識 은 一 層 堅 固 하여졌으며, 그 難 中 에 있어서 大 衆 의 覺 醒 은 一 層 徹 底 하다. 嚴 冬 의 氷 雪 이 두터웁되 새로이 움트는 生 命 의 씨는 자라고 있나니 그 나아감이 더디다하여 이를 근심할 것이냐. 오직 한 걸음 한 치의 걸음이 곧 人 類 社 會 의 大 行 進 曲 에 있어서도 그 歷 史 的 使 命 을 忠 實 히 하는 所 以 인 것을 알 뿐이다. 우리는 한 걸음을 귀히 여기 자. 한 걸음의 진취를 今 日 의 의무로 하여 새로 맞는 한 해에다 努 力 前 進 또 한 걸음 地 步 를 꾸 준히 쌓아 나아가자. 37. 經 濟 封 鎖 實 現 可 能 性 < 東 光 > 제4권 3호 (총31호 1932년 3월) ( 設 問 ) 1. 對 日 本 經 濟 封 鎖 는 實 現 될까? 2. 米 國 이 單 獨 으로 할까. 列 國 이 聯 合 으로 될까? 3. 萬 一 實 現 된다면 그 實 行 方 法 如 何 4. 日 本 의 對 策 如 何 5. 그 效 果 又 는 影 響 如 何 6. 朝 鮮 에 미치는 影 響 如 何 列 國 이 聯 合 하여 日 本 에 對 해서 經 濟 封 鎖 를 斷 行 하겠다구요? 그것은 그렇게 않됩니다. 여러가 지 理 由 가 있겠지만 萬 一 經 濟 封 鎖 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日 本 이 받는 損 害 가 오직 큽니까. 日 本 이 그 損 害 를 豫 想 하고 列 國 이 聯 合 하여 聯 盟 規 約 第 16 條 를 適 用 하기까지 行 動 을 하지 않을 것 입니다. ( 東 亞 日 報 社 長 宋 鎭 禹 談 ) 38. 國 民 黨 政 府 依 然 繼 續 < 東 光 > 제4권 4호 (총32호 1932년 4월) 1. 中 國 은 이번 滿 洲 事 件 과 上 海 事 變 으로 因 하여 人 命 과 財 政 上 其 他 여러 가지로 巨 大 한 損 失
40 을 보았지마는 精 神 上 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中 國 은 國 民 黨 과 廣 東 派, 共 産 黨 과의 對 立, 軍 閥 間 의 軋 轢 其 他 여러가지로 內 爭 이 많고 統 一 上 큰 問 題 였었는데 이번 事 件 으로 말미암 아 一 層 緊 張 한 自 覺 을 일으키고 따라서 中 國 進 路 에 많은 影 響 을 주리라고 믿습니다. 2. 中 國 은 中 國 自 身 의 힘으로야 그 基 礎 를 鞏 固 히 할 수 있겠지요. 政 治 上 으로보면 亦 是 親 米, 親 英 의 傾 向 을 가질 것입니다. 3. 國 民 黨 政 府 가 繼 續 될 것입니다. 왜 그런고하면 만일 共 産 黨 이 成 立 된다면 그것은 資 本 主 義 國 家 全 部 의 敵 이니까 그렇게 되게 두지 않을 것이오, 國 家 主 義 黨 이 갑자기 權 力 을 쥐게 되리라고 도 생각되지 않습니다. 亦 是 四, 五 十 年 의 歷 史 를 가진 國 民 黨 政 府 가 繼 續 될 것이오, 그것이 國 家 主 義 黨 의 色 彩 를 띄게 될지도 모릅니다. 4. 中 國 國 民 의 態 度 如 何 에 依 하여 決 定 될 問 題 입니다. 中 國 國 民 이 自 覺 하고 一 致 團 結 하여 善 處 하면 國 際 管 理 나 分 割 이 안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如 何 한 運 命 에 이를지 모를 것입니다. ( 宋 鎭 禹 談, 文 責 在 記 者 ) 39. 無 風 的 인 現 下 局 面 打 開 策 - 文 化 運 動 과 消 費 運 動 에 注 力 < 三 千 里 > 제4권 4호 (총25호 1932년 4월) 記 者 =오늘날과 같이 沈 滯 된 民 族 運 動 의 局 面 을 새로이 健 全 하고 活 潑 하게 打 開 하자면 어떠한 方 略 을 取 하여야 하겠습니까. 勿 論 우리들이 論 議 하자는 範 圍 는 合 法 運 動 에 限 할 것이오, 그 方 略 도 現 在 이 段 階 에 있어 必 要 한 그 點 만을 取 扱 하자는 것이올시다. 宋 = 沈 滯 된 局 面 을 打 開 할 方 略 이 꼭 있지요. 그것은 第 1 着 으로 또한 基 準 的 으로 먼저 全 民 族 의 力 量 을 한곳에 뭉쳤다 할 强 力 한 中 心 團 體 부터 結 成 시켜 놓는데 있지요. 그것이 없이는 政 治 運 動 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個 人 個 人 끼리 백날 애쓴대야 그것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오직 全 民 族 의 意 思 를 代 表 한 큰 團 體 를 通 한 運 動 이 없이는 尨 大 한 政 治 運 動 이란 일어날 수 없는 것이외 다. 그런데 現 在 우리 社 會 에는 이런 種 類 의 政 治 運 動 團 體 가 아직 없다고 봅니다 記 者 =그러면 그 中 心 團 體 의 結 成 이 可 望 이 없다고 보십니까? 宋 = 至 難 한 일로 압니다. 只 今 現 狀 으로는 中 心 團 體 가 만들어지기가 썩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政 治 運 動 이 容 易 히 있어지리라고 觀 測 할 수 없습니다. 記 者 = 그 理 由 로는? 宋 = 中 心 團 體 가 이루어질 可 能 性 이 없는 첫 理 由 로 조선사람의 理 想 이 統 一 되지 못하고 分 裂 되 어있는 點 이외다. 한쪽에는 民 族 主 義 가 盛 하고 한쪽에서는 社 會 主 義 가 있고 또 한쪽에는 무슨 主 義 무슨 主 義 하여 大 小, 長 短, 正 反, 離 合 이 도무지 雜 然 不 一 致 합니다. 그러니까 비록 結 社 를 이루어 놓았다 할지라도 그는 必 然 的 으로 分 裂 될 素 因 부터 內 包 하고 억 지로 된 것이지요. 그래서 밤낮 內 訌 이 일고 成 長 이 없다가 畢 竟 에는 그 壽 命 이 길지 못하고 말 지요. 記 者 =어찌해서 반드시 그러리라고 觀 察 하십니까. 宋 = 新 幹 會 가 最 近 에 우리에게 보여준 가장 좋은 例 이지요.( 中 略 ) 자 보시오, 무슨 일을 하자면 우리들에게는 强 力 한 어떤 한 편이 嚴 然 히 臨 迫 하여 있지 않습니까. 그에 對 한 對 策 에 우리의 智 慧 와 힘을 다 부어야 할 터인데 이와같이 內 紛 이 일어서야 오히려 그 內 治 하기에 바빠서 무슨일 이 이루어질 틈이 생기겠습니까. 누가 무슨 일을 한다면 그것을 싸고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벌써 檢 事 나 判 事 와 같이 條 目 條 目 치켜들고 批 判 하고 追 窮 하고 質 問 하고 檢 討 하기에 奔 走 합니다. 이
41 것은 전혀 思 想 이 不 一 致 한데서 나오는 弊 害 이지요. 記 者 =그러면 그 思 想 의 不 一 致 를 除 去 하려면? 宋 =오직 民 衆 의 自 覺 과 文 化 程 度 가 向 上 되어야 하지요. 記 者 =다음으로 中 心 團 體 가 이뤄지지 못하는 둘째 理 由 로는? 宋 = 有 志 有 力 한 人 士 들이 自 重 不 動 하는데 理 由 도 있겠지요. 記 者 = 彈 壓 이 무서워서일까요. 宋 =아니지요, 아직 無 用 한 犧 牲 을 避 하기 爲 해서지요. 즉 現 下 의 紛 糾 된 思 想 關 係 와 또는 複 雜 한 周 圍 環 境 의 事 情 이 많겠지요. 記 者 =그러면 民 族 運 動 의 今 後 의 코-쓰는 어떠하여야 하겠습니까? 宋 = 政 治 運 動 의 基 本 運 動 을 함에 있지요, 그 準 備 運 動 으로 文 化 運 動 을 不 得 已 일으켜야 하겠지 요. 記 者 = 文 化 運 動 이라면? 宋 = 敎 育 機 關 을 充 實 히 하고 新 聞 雜 誌 講 習 會 를 通 하여 智 識 을 啓 蒙 시키고 또 消 費 組 合, 協 同 組 合 運 動 을 일으켜서 經 濟 的 으로 지탱하여 나갈 길을 열어주어 그래서 文 化 的, 經 濟 的 으로 實 際 的 訓 練 을 하여야 되겠지요. 記 者 =그밖에는 또 길이 없겠습니까? 宋 = 現 下 의 環 境 에 있어서는 더 할말이 없습니다. 記 者 =무슨 運 動 을 일으키는데도 그렇겠고 무슨 局 面 을 打 開 하는데도 그렇겠지만 첫째 團 體, 둘 째 指 導 者, 셋째 돈이 必 要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團 體 結 成 에는 先 生 의 뜻을 알았습니다만은 둘 째의 指 導 者 問 題 는 어떻게 보십니까. 最 高 統 制 機 關 에서 民 立 大 學 같은 것을 하루속히 再 建 하여 劃 一 的 人 材 부터 養 成 하여 내놓는 것이 急 務 가 아니겠습니까? 宋 = 勿 論 必 要 하지요, 그렇지만 民 立 大 學 이 容 易 히 되겠습니까. 記 者 = 金 性 洙 氏 가 다시 한번 鐵 石 같은 決 心 을 갖고 蹶 起 하여 준다면 밖에서도 그 事 業 을 能 力 聲 援 하여 完 成 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宋 = 金 性 洙 氏 도 그런 생각이야 있겠지요, 그러나 그의 생각이 아직 公 表 되지 아니한 以 上 나로 서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記 者 =셋째로 資 金 은? 지금 이렇게 假 想 할 수 있을 줄 압니다. 金 性 洙, 崔 昌 學, 朴 榮 喆 等 諸 氏 가 數 百 万 圓 의 信 託 會 社 를 만들어서 金 融 組 合, 殖 銀, 東 拓, 其 他 資 金 業 者 의 손으로부터 全 鮮 各 處 의 土 地 가 싼값으로 마구 放 賣 되어가는 이판에 그 땅들을 前 記 信 託 會 社 에서 사들이거나 救 助 方 法 을 열어주어서 그 農 作 物 을 通 하여 恒 久 的 돈을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한편으로는 朝 鮮 農 民 의 經 濟 破 滅 을 막아주기도 하고. 宋 = 資 本 家 의 利 害 가 一 致 한다면 그도 可 能 하겠지요. 그렇지만 돈있는 사람들도 서로 立 場 이 다 르고 利 害 가 不 一 致 하니까 實 現 되기 어려울걸요. 記 者 = 北 米 李 承 晩 博 士 는 돈을 얻기 위하여 年 前 에 큰 商 船 여러 隻 을 사들여가지고 世 界 各 地 로 돌아다니며 通 商 을 하고싶다는 計 劃 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은 어쨌던 特 異 한 方 策 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愛 蘭 서는 科 學 者 를 시켜서 金 鑛 을 많이 發 見 採 鑛 하여 그것으로 資 金 을 썼다고 하지 않습니까. 宋 =그러나 그 點 이 그렇게 杞 憂 할 거리가 아니리라고 보여집니다. 40. 自 由 權 과 生 存 權 < 三 千 里 > (1932년 4월호)
42 自 由 權 과 博 愛 平 等 人 類 文 化 의 進 步 는 自 由 權 發 展 時 代 로부터 生 存 權 擴 充 時 期 에 入 하였다. 하나는 十 八 世 紀 의 佛 蘭 西 革 命 을 中 心 으로 世 紀 劈 頭 의 露 西 亞 革 命 을 비롯하여 점차로 그 潮 流 가 波 及 케 한다. 要 컨대 十 九 世 紀 를 自 由 權 發 展 의 全 盛 時 代 라면 二 十 世 紀 의 劈 頭 지금부터는 生 存 權 擴 充 의 專 力 時 期 라 할 것이다. 대개 人 類 로서 自 由 權 이 없으면 徹 底 히 個 性 의 能 力 을 發 展 할 수 없으며 또한 生 存 權 이 없으면 協 同 的 最 高 文 化 를 完 成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兩 大 權 利 의 擴 充 發 展 에 依 하여 於 是 乎 人 類 社 會 에 平 和 의 曙 光 이 照 臨 될 것이며 또한 最 高 의 文 化 가 完 成 될 것이다. 언제든지 人 類 의 歷 史 는 循 環 이 아니라 進 化 이다. 過 去 十 九 世 紀 의 極 端 的 으로 發 展 된 自 由 權 이 政 治 的 으로는 모든 改 革 을 斷 行 하였으나 經 濟 的 으로는 生 活 上 機 會 均 等 을 破 壞 하였으며 階 級 的 觀 念 을 挑 發 케 한 것이 事 實 이 었다. 이곳 自 由 發 展 權 의 餘 弊 를 匡 救 하기 위하여 自 然 的 으로 社 會 最 後 의 生 存 權 이 絶 叫 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兩 大 思 想 이 互 相 衝 突 되고 撞 着 이 되는 것은 아니다. 當 初 에 政 治 的 으로만 機 會 均 等 을 絶 叫 하던 世 界 人 類 는 一 轉 하여 經 濟 的 으로도 그 社 會 均 等 의 必 要 를 覺 醒 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 兩 大 思 想 은 鳥 의 兩 翼 과 車 의 兩 輪 과 같이 互 相 提 携 가 되어 發 展 하여야 될 것이다. 自 由 權 이 없는 곳에 個 性 을 擴 充 할 수 없으며 生 存 權 이 없는 곳에 平 等 的 文 化 를 完 成 할 수 없을 것이다. 要 컨대 問 題 는 自 由 權 의 病 的 發 展, 곧 不 合 理 無 節 制 한 資 本 主 義 를 咀 呪 할 뿐이다. 換 言 하면 過 去 封 建 時 代 에 特 權 階 級 인 武 士 貴 族 의 手 中 에 掌 握 되었던 政 治 的 權 利 가 自 由 權 發 展 에 依 하여 一 般 民 衆 에게 均 布 된 것 같이 現 代 의 資 本 階 級 의 獨 占 된 經 濟 的 權 利 가 生 存 權 의 覺 醒 에 依 하여 平 等 的 으로 分 配 될 것도 必 至 의 運 命 이다. 일로보면 自 由 權 은 政 治 的 生 存 權 이며 生 存 權 의 經 濟 的 自 由 權 이다. 封 建 時 代 에 있어서 生 存 權 이 없고는 經 濟 的 自 由 를 保 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吾 人 이 自 由 權 에 있어서 排 斥 코자 하는 點 은 博 愛 平 等 의 大 理 想 을 無 視 하는 不 合 理 放 縱 的 인 所 有 慾 이며 또한 生 存 權 에 있어서도 相 互 扶 助 의 原 則 을 離 脫 하는 壟 斷 的 利 己 心 인 怠 慢 性 을 廢 棄 치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封 建 時 代 의 無 理 한 神 權 說 이 政 治 的 自 由 思 想 의 發 展 을 阻 害 한 것과 같이 現 代 人 의 錯 誤 된 所 有 慾 의 觀 念 이 얼마나 經 濟 的 으로 生 存 權 의 擴 充 을 防 止 하게 된 것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吾 人 은 博 愛 平 等 의 前 提 下 에서는 自 由 權 과 生 存 權 이 表 裏 가 될지언정 背 馳 는 되지 아 니할 것이며 並 行 이 될지언정 相 悖 가 되지 아니할 것을 斷 言 코자 한다. 吾 人 은 前 欄 에서 自 由 權 과 生 存 權 이 그 關 係 가 表 裏 가 되고 그 發 端 이 先 後 가 될지언정 人 文 發 達 의 途 程 에 있어서 또한 博 愛 平 等 의 理 想 에 있어서 그 出 發 點 이 同 一 한 것을 斷 言 하였다. 그러 나 現 下 의 實 際 的 事 情 에 對 照 하여 보면 自 由 權 의 極 端 的 發 展 이 經 濟 上 으로는 世 界 大 衆 의 生 存 權 을 威 脅 하는 同 時 에 모처럼 얻었던 政 治 的 自 由 權 까지 蹂 躪 하게 된 奇 現 象 을 發 見 하였다. 이것 이 果 然 어떠한 矛 盾 이며 어떠한 撞 着 인가를 徹 底 히 檢 討 할 必 要 가 있는 줄로 믿는다. 元 來 自 由 權 이라면 言 論 自 由, 出 版 自 由, 集 會 自 由, 信 敎 自 由 이 모든 自 由 를 意 味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 佛 蘭 西 革 命 當 時 의 人 權 宣 言 書 에 依 하여 闡 明 되었고 또한 그 後 續 出 된 各 國 의 憲 法 으 로 確 保 되었다. 그러나 博 愛 平 等 의 大 理 想 은 다못 政 治 的 自 由 곧 形 式 的 自 由 에만 表 現 되었고 그 裏 面 에 있어서 實 際 的 自 由 곧 經 濟 的 方 面 에는 何 等 의 徹 底 한 保 障 이 없었던 것이 事 實 이었 다. 이것은 博 愛 平 等 的 大 理 想 의 自 體 的 缺 陷 보다는 佛 蘭 西 革 命 當 時 에 이 理 想 을 高 調 하였던 革 命 群 이 그 立 場 과 環 境 이 中 産 階 級 의 井 底 에 潛 在 된 까닭이었다. 이리하여 過 去 의 特 權 階 級 에 附 屬 되었던 모든 自 由 를 社 會 的 으로 政 治 的 으로 解 放 되며 保 障 하면서도 經 濟 方 面 에 至 하여는 依 然 히 自 己 네의 立 場 과 環 境 에 便 利 하도록 努 力 하였었다. 이곳 所 有 權 保 障 은 곧 資 本 의 擁 護 이다
43 資 本 과 勞 動 이 對 立 된 社 會 에서 自 由 의 競 爭 을 許 하면 資 本 主 義 가 그 勢 力 을 專 橫 할 것은 勿 論 이 다. 어째 그러냐 하면 資 本 은 先 天 的 이오 勞 動 은 後 天 的 이다. 그러므로 競 爭 의 出 發 地 가 벌써 水 平 線 에 立 치 아니할 것은 智 者 를 不 得 하여도 可 知 할 것이 아닌가? 어찌하여 出 版, 言 論, 集 會 의 모든 自 由 가 私 的 權 利 가 아니오, 公 的 權 利 인 以 上 에 何 特 所 有 權 만이 私 的 權 利 에 附 屬 할 理 由 가 있는가? 이 地 球 는 人 類 의 共 有 物 이다. 共 有 物 인 以 上 에는 共 同 이 開 拓 하여야 할 것이며 共 同 히 管 理 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區 劃 하며 이를 私 有 하는 것은 正 義 의 悖 戾 며 人 道 며 反 逆 이다. 하물며 現 在 의 文 化 의 總 和 는 全 人 類 의 共 作 이다. 그러므로 그 文 化 의 享 樂 은 共 受 하여야 할 것이다. 이에서 社 會 의 連 帶 的 責 任 感 이 生 하며 平 等 的 觀 念 이 發 하며 勞 動 崇 拜 의 眞 理 가 存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個 人 으 로 社 會 에 對 하여 最 少 限 度 에 있어서 最 後 의 生 存 權 을 主 張 할 理 由 가 自 任 하며 社 會 에서도 各 個 의 生 存 을 確 保 할 義 務 가 固 有 할 것이다. 於 是 乎 博 愛 平 等 의 大 理 想 이 實 現 될 것이다. 精 神 的 으로 各 個 의 自 由 權 을 保 障 하는 것과 物 質 的 으로 各 個 의 生 存 權 을 保 障 하는 것이 그 原 理 에 있어서 何 等 의 差 異 가 있으랴! 民 族 運 動 과 社 會 運 動 그러면 民 族 運 動 과 社 會 運 動 의 關 係 는 如 何 한가. 近 代 史 를 按 하면 前 者 는 自 由 權 運 動 으로 그 序 幕 을 開 하였고 後 者 는 生 存 權 運 動 으로 그 端 緖 를 發 하였다. 그러므로 그 對 抗 하는 方 面 이 武 力 或 은 資 本, 精 神 或 은 物 質 의 差 異 는 있으나 그 解 放 의 精 神 에 있어서는 모두다 自 由 權 과 生 存 權 의 發 動 인 것은 不 誣 할 事 實 이다. 그러나 吾 人 은 自 由 權 을 要 求 하는 民 族 運 動 이 生 存 權 을 아울러 主 張 하게 되고 또한 生 存 權 을 主 張 하는 社 會 運 動 이 아울러 自 由 權 을 主 張 하게 된 것을 看 破 치 아 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어째 그러냐 하면 最 初 의 民 族 運 動 은 强 大 民 族 의 武 力 征 服 에 依 하여 그 傳 統 과 自 由 를 蹂 躪 하며 無 視 한 結 果 그 征 服 에 反 抗 하며 敵 對 하는 것이었었다. 그러므로 古 代 의 征 服 은 誅 其 君 吊 其 民 한다는 것이 政 略 이었었으나 近 代 에 入 하여 所 謂 先 進 國 家 의 資 本 主 義 의 成 熟 됨을 따라서 그 政 略 이 一 變 하여 一 層 巧 妙 하고 惡 辣 하게 된 것이 事 實 이다. 이리하여 征 服 보다 懷 柔 며 威 壓 보다 搾 取 이다. 換 言 하면 搾 取 하기 위하여 征 服 하는 것이며 懷 柔 하기 위하여 威 壓 하는 것이다. 이것이 武 力 的 政 治 的 征 服 이 經 濟 的 資 本 的 征 服 으로 變 幻 된 것이 아닌가. 보라, 現 代 의 征 服 된 弱 少 民 族 으로 自 由 의 苦 痛 보다 生 存 의 威 脅 이 얼마나 悲 絶 慘 絶 한가. 印 度 의 國 産 運 動 과 支 那 의 關 稅 問 題 가 모두 그 무엇을 意 味 하는 것인가? 或 은 征 服 國 家 의 食 糧 問 題 를 위하여 或 은 資 本 國 家 의 商 工 業 의 販 路 와 原 料 를 위하여 弱 少 民 族 의 膏 血 은 거의 極 端 의 貧 血 症 에 걸리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弱 少 民 族 들은 大 部 分 이 無 産 群 이며 그 中 에 極 小 數 의 資 本 主 義 의 三 大 支 柱 인 自 由 交 通 金 融 의 保 護 가 없는 資 本 階 級 도 早 晩 間 無 産 群 의 運 命 에 沒 入 될 것은 明 瞭 한 事 實 이다. 이에서 征 服 의 怨 恨 에서 自 由 를 부르짖던 民 族 運 動 도 遽 然 히 生 存 權 까지 絶 叫 하게 된 것이 아닌가. 弱 少 民 族 이 반드시 民 族 的 感 情 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다못 民 族 的 으로 壓 迫 과 搾 取 를 當 한 까닭 이다. 그다음에 現 代 資 本 主 義 의 發 展 을 따라 大 規 模 의 産 業 機 關 이 成 立 되었다. 幾 萬 幾 千 萬 의 男 女 老 弱 이 牛 馬 的 勞 役 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繼 續 하여 그 縷 命 을 僅 保 하는 中 에서 그 生 産 의 大 部 分 의 利 潤 이 高 襟 遊 手 의 小 數 階 級 의 橫 領 이 되는 同 時 에 生 死 疾 病 에 自 己 들의 生 存 的 保 障 이 없는 無 常 한 運 命 을 自 覺 하게 되었다. 이에서 多 數 로써 小 數 를 對 抗 하며 團 結 로써 專 橫 을 牽 制 하려 하는 것이 이 곧 先 進 社 會 의 運 動 의 現 狀 이다. 이리하여 或 은 組 合 運 動 으로 或 은 同 盟 罷 業 으로 或 은 暴 力 으로 그 鋒 鋩 을 露 出 하게 되었다. 勿 論 暴 力 으로써 最 後 의 勝 利 를 得 하여 全 世 界 를 驚 異 케 하였던 勞 農 露 西 亞 도 없지는 아니하나 機 會 와 環 境 이 다르며 또한 그 社 會 의 文 化 程 度 에 따라서
44 合 理 的 運 動 의 傾 向 이 流 行 하는 것도 不 誣 할 事 實 이다. 英 의 勞 動 黨 內 閣 과 日 의 無 産 政 黨 의 出 現 은 다 이것을 意 味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合 理 的 運 動 에는 團 結 이 必 要 하고 團 結 의 完 成 에는 組 織 이 必 要 할 것이다. 이어서 그 團 結 을 計 劃 하고 그 組 織 을 完 成 하는 前 提 로 또한 自 由 權 이 必 要 할 것도 勿 論 이다. 換 言 하면 生 存 權 을 主 張 할 만한 自 由 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社 會 運 動 에 있어서도 自 由 權 을 아울러 主 張 치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하물며 人 性 의 根 本 에 있어서 自 由 와 生 存 이 아울러 必 要 한 것이랴. 現 代 의 生 存 權 의 保 障 을 得 한 赤 露 大 衆 의 不 平 이 아니고 무엇인가. 理 想 實 現 의 過 渡 時 機 에 있 어서 獨 裁 와 專 制 가 不 可 避 할 現 象 이나 그 組 織 을 完 成 할 때에 大 衆 의 自 由 保 障 이 또한 問 題 가 될 것이다. 이로 보면 自 由 思 想 에서 出 發 된 民 族 運 動 이 生 存 權 化 하여 가고 生 存 意 識 에서 社 會 運 動 이 自 由 權 化 하여 가는 것이 現 下 의 大 勢 라 한다. 우리는 猛 省 하자 사람으로서 自 由 權 이 없으면 偶 像 이며 奴 隸 다. 換 言 하면 人 格 의 內 容 은 自 由 意 思 가 重 要 한 要 素 이다. 보라! 이 地 球 위에는 세가지 現 象 이 있다. 한가지는 無 意 識 的 으로 被 動 的 으로 東 移 西 轉 하는 木 石 이 있으며 또 한가지는 意 識 은 있으나 目 的 이 없이 他 力 의 發 動 에 依 하여 左 牽 右 引 되는 禽 獸 가 있다. 그 다음에는 意 識 的 으로 自 動 的 으로 어떠한 目 的 을 向 하여 自 己 의 運 命 을 自 己 가 開 拓 하려는 人 類 가 있다. 이곳 人 類 가 萬 物 의 支 配 者 가 되며 宇 宙 의 主 人 公 이 된 까닭이다. 그러 면 우리는 無 意 識 的 으로 移 轉 되는 木 石 이 아니며 또한 他 力 에만 依 하여 蠢 動 하는 禽 獸 도 아니다. 적어도 피가 있고 눈물이 있고 또한 그 中 에도 가장 靈 妙 한 自 由 的 心 理 를 가진 사람이다. 어찌하여 사람으로서 無 意 識 의 存 生 을 許 하며 또한 他 力 的 蠢 動 을 自 認 하랴. 차라리 自 由 를 求 하여 얻지 못하면 죽음을 求 하여 얻을 것이다. 이 곧 사람이 사람된 本 領 을 發 揮 하는 것이 아닌 가. 自 由 없는 곳에 幸 福 이 없으며 歡 喜 가 없으며 向 上 이 없으며 發 展 이 없는 것이다. 아! 自 由, 自 由, 오직 이 人 類 의 神 象 이며 우리의 生 命 인 것을 徹 底 히 猛 省 하자. 그러나 不 合 理 한 自 由 는 往 往 히 平 等 을 破 壞 하며 正 義 를 無 視 한다. 그러므로 生 存 權 의 保 障 을 基 調 로 하고 內 容 으로 하는 自 由 가 아니면 特 殊 階 級 의 專 橫 放 縱 을 助 長 할 뿐이다. 獨 哲 칸트는 云 하였다. 東 洋 에 있어서 가장 完 全 한 人 格 의 所 有 者 는 君 主 뿐이라고. 이것은 古 代 의 君 主 가 獨 裁 와 專 斷 으로 萬 人 의 自 由 를 蹂 躪 하여 써 一 個 人 의 橫 暴 放 縱 을 如 何 히 自 矜 하였던 것을 可 知 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完 全 한 自 由 는 平 等 에 있고 平 等 의 基 調 는 生 存 權 保 障 에 있 을 것이다. 生 存 權 이야말로 平 民 文 化 의 土 臺 가 될 것이며 核 子 가 될 것이다. 生 存 權 의 保 障 없는 곳에 餓 莩 가 生 하며 竊 盜 가 起 한다. 人 類 社 會 에 餓 莩 와 竊 盜 가 繼 續 되는 날 까지는 萬 人 平 等 의 自 由 와 平 和 를 保 持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새 生 命 을 開 拓 하 고 새 文 化 를 樹 立 하는 前 提 로 徹 底 히 生 存 權 의 保 障 을 絶 叫 치 아니하면 안될 것이다. 兄 弟 여, 우리는 現 代 文 明 에 뒤진 사람들이다. 이러므로 深 刻 한 悲 哀 가 있고 深 刻 한 悲 哀 가 있으 므로 徹 底 히 奮 發 하여야 하겠다. 過 去 十 八 世 紀 로부터 二 十 世 紀 劈 頭 에 이르기까지 佛 蘭 西 를 비 롯하여 全 世 界 에 波 動 되는 自 由 의 理 想 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一 場 의 幻 夢 이며 二 十 世 紀 劈 頭 의 露 西 亞 를 비롯하여 提 唱 된 生 存 問 題 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觀 念 의 遊 戱 에 不 過 하다. 自 由 가 없고 生 存 의 保 障 까지 없는 우리가 어찌하여 살잔 말인가. 우리의 앞에는 危 壓 의 泰 山 이 屹 立 되었고 우리의 뒤에는 餓 莩 의 深 淵 이 展 開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다. 사람인 까닭에 鑿 山 通 道 도 할 수 있고 碧 海 桑 田 도 變 할 수가 있을 것이다. 美 人 에머슨은 云 하였다. 人 類 의 文 明 은 心 力 의 發 展 이라고. 果 然 그렇다. 우리의 다 못가진 바는 心 力 뿐이다. 心 의 力 을 確 立 하고 心 의 力 을 結 合 하여 써 二 千 萬 心 을 一 心 으로 하여 우리의 目 的 을 達 하기까지 努 力 하자. 이에 人 間
45 味가 있고 또한 人生의 價値가 發揮된다. 41. 新家庭 創刊辭 <新家庭> (1933년 1월 창간호) (註:오늘날 女性東亞 誌의 전신인 新家庭 의 창간사이다.) 우리는 진실한 의미에서 가정생활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고도 이 사실에 관심하지 아니 합니다. 그러나 가정이란 것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의의와 가치가 있는 것인 줄을 깨달을 때 우리 는 비로소 이 가정문제를 중대시 아니할 수가 없게 됩니다. 가정생활의 불완전이란 것은 그 결과가 단순히 가정생활 그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불행 의 남은 물결이 그대로 사회생활에까지 밀려 점점 걷잡을 수 없는 큰 현상을 지어내고야 마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사회가 남의 앞에서 떨쳐나지 못하고 남보다 기름지지 못한 것을 생각할 때에는 하나 둘이 아닌 여러가지 연유를 말하게 될 것이지마는 그 위에 무엇보다도 사회의 기초 를 지어 있는 이 가정 의 모든 문제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새 사회를 만들자, 광명한 사회를 짓자 하는 것이 우리의 다시없는 이상이라 할 것이면 먼저 그 근본적 방법인 점에서 새가정을 만들고 광명한 가정을 지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정을 새롭고 광명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것이 우리의 긴급히 해결하지 않으 면 안될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인격문제, 교육문제, 경제문제, 취미문제 등 여러가지 세분할 이론이 있는 것입 니다마는 전체적으로 보아 각각 그 책임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만은 거듭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인 줄 압니다. 그런데 가정문제의 모든 책임이야 그 가정의 전원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지마는 그중 에도 특별히 주부된 이가 가장 그 무거운 짐을 많이 지고 있느니 만큼 우리는 가정 문제를 생각 할 때 누구보다도 먼저 주부된 이를 목표로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혹 세상이 가정주부의 지위와 그 사회적 가치를 잘못 인식하여 남자에 대한 한개의 종속적 존 재로만 말하는 이가 있으나 그는 결코 그렇지 아니합니다. 만일 조선 이라는 사회를 二千만이라 는 개인 분자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하면 꼭 같은 이론으로 四百五十만이라 는 가정분자를 떠나서도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 물론입니다. 한 가정이 새롭고 광명하고 정돈되 고 기름지다고 하면 그것은 그 개인 그 가정만의 행복이 아니라 그대로 조선사회 조선민족의 행 복으로 볼 것입니다. 그렇거늘 어찌 주부의 지위와 그 가치를 예사로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는 조선사회의 새로운 건설을 꾀하는 그 방법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 동시에 이 가정문 제라는 것을 중대시하는 의미에서 이 <신가정>을 발간케 된 것입니다. 내용에 있어 가정의 실제문제와 그 상식, 자녀의 교육과 그 방법 등 가정주부의 필수 지식을 전하는 것이야 물론 그밖에도 각방면의 상식을 구비케 하고자 하는 이 모든 의도가 필경은 지식 적, 실제적으로 가정을 항상시키려 하는 한 뜻에 있을 따름입니다. 사회에 대한 본지 발행의 미충이 얼마만큼 클지 적을지는 우리의 지금 점칠 일이 아니오, 다만 이 충심에서 주저없이 첫 발걸음을 내닫을 뿐입니다마는 이에 임하여 만천하 여러분의 도움과 바 로잡음이 끊이지 말아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46 42. 억센 朝 鮮, 굳건한 民 族 < 新 東 亞 > 卷 頭 言 (1934년 3월호) 쏘콜 運 動 은 체코슬로바키아 民 族 을 살려 낸 基 礎 가 되고 原 動 力 이 되었다. 肉 體 的 으로 衰 弱 한 民 族 은 精 神 的 으로 健 全 하기를 바랄 수 없으며 偉 大 한 文 化 를 創 造 하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일 이다. 朝 鮮 民 族 도 옛날 그 威 名 을 中 外 에 날리던 時 節 에는 朝 鮮 民 衆 의 體 格 또한 健 壯 했었음을 볼 수 있다. 不 幸 히도 李 朝 五 百 年 의 文 弱 과 沈 滯 는 朝 鮮 民 族 으로 하여금 肉 體 的 으로 退 殘 케 하는 同 時 에 그 不 可 避 的 結 果 로는 民 族 文 化 全 般 에 亙 할 退 步 를 보게 만들어 놓았다. 이것을 생각할 때에 는 實 로 痛 嘆 을 마지 아니하는 바이다. 朝 鮮 에서 새로히 스포츠 熱 이 旺 盛 히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實 로 最 近 數 十 年 間 의 일이다. 이 짧은 동안의 努 力 이나마 헛되이 돌아가지 않고 이 兩 三 年 間 에 이르러서는 그 結 實 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朝 鮮 人 스포츠 界 도 그 方 面 에 있어서 國 際 的 活 躍 을 보기에 이르른 것은 實 로 慶 賀 할 일이오 또 기뻐할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가지 유감인 것은 朝 鮮 스포츠 界 가 二, 三 의 國 際 的 選 手 를 내놓았음에 不 拘 하고 一 般 的 民 衆 保 健 體 育 의 普 及 은 아직도 前 途 遼 遠 한 感 이 있는 것이 다. 이 點 은 特 히 朝 鮮 스포츠 界 에 從 事 하는 先 覺 者 諸 位 들의 覺 醒 을 促 하는 바이다. 二, 三 人 의 國 際 的 選 手 도 貴 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難 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마는 民 族 無 窮 의 繁 榮 을 꾀하 는 데는 그것보다도 大 衆 의 保 健 問 題 가 더한층 時 急 한 것이다. 民 族 的 保 健 體 育 의 普 及 을 促 進 하는 原 動 力 을 얻기 爲 하여는 무엇보다도 먼저 全 朝 鮮 體 育 團 體 의 統 一 을 渴 望 하는 바이다. 全 朝 鮮 을 돌아보아 거의 洞 里 마다 體 育 을 獎 勵 함으로 目 的 을 삼은 體 育 團 體 들이 임의 組 織 되어 活 動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유감된 일로는 그 들 團 體 가 아직도 모두 分 散 되어 있어서 아무런 統 一, 아무런 連 結 도 서로 없는 일이다. 國 際 的 選 手 까지 낸 社 會 에서 한개의 統 一 된 體 育 團 體 조차 없다는 것은 實 로 부끄러운 일이다. < 新 東 亞 >는 이번 스포츠 特 輯 을 發 行 함에 際 하여 朝 鮮 體 育 團 體 統 一 案 을 提 案 하는 바이니 三 千 里 에 널린 各 體 育 團 體 로부터의 共 鳴 이 있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끝으로 二 千 三 百 萬 民 衆 앞에 삼가 올리고자 하는 말은 體 育 界 뿐 아니라 우리 民 族 의 生 活 全 般 에 있어서 오직 스포츠맨십 精 神 을 굳게 把 握 하고 스포츠맨십으로써 生 活 의 指 標 를 삼기를 바 라는 일이다. 個 人 的 으로나 民 族 的 으로나 스포츠맨십을 잃지 않아야 그 將 來 가 囑 望 되는 것이다. 억세게, 굳세게, 快 活 하게, 남보다 나으려고, 이기려고, 그러나 스포츠맨답게, 이러한 健 實 한 生 活 을 目 標 로 다같이 突 進 하기를 切 望 하는 바이다. 43. 이 江 山 이 民 族 < 新 東 亞 > 卷 頭 言 제4권 7호(1934년 7월호) 人 類 文 化 의 發 源 이 山 岳 과 江 河 에 있음은 다시 말할 것이 없거니와 朝 鮮 의 上 下 半 萬 載 에 亙 한 長 長 한 民 族 文 化 史 를 開 闡 하려 할진대 또한 域 內 의 山 川 을 먼저 알아야 하고 또 그것이 곧 文 化 史 그것임을 볼 것이다. 檀 君 으로부터 扶 餘 로, 韓 으로, 肅 愼 으로 高 句 麗 로, 新 羅 로, 伽 倻 로, 百 濟 로, 靺 鞨 로, 渤 海 로, 高 麗 로, 金 으로, 女 眞 으로, 滿 洲 로, 朝 鮮 으로, 朝 鮮 民 族 에 關 係 된 모든 歷 史 가 다 山 岳 과 江 流 를 根 據 로 하고 胎 盤 으로 하고 또한 同 時 에 舞 臺 로 하고 거기서 發 展 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47 古 代 뿐만이 아니라 歷 史 를 通 하여 今 日 에 至 하기까지 실상 따져보면 山 岳 과 江 河 그것이 一 切 의 樞 機 가 되고 一 切 의 要 素 가 되고 一 切 의 生 分 이 되어 文 化 의 큰 덩어리를 運 行 시키고 發 育 시 키로 蘇 潤 시켜 온 것이다. 實 로 山 岳 은 朝 鮮 民 族 의 信 仰 的 大 願 佛 이오 江 河 는 朝 鮮 文 化 의 知 識 的 大 師 匠 이라고도 볼 것이 다. 風 雨 에 꺾인 나무 山 上 에 쓰러진 거기 그 밑에서도 嚴 肅 한 朝 鮮 文 化 의 部 分 部 分 을 確 實 히 보 는 것이오, 波 浪 의 파낸 흙이 河 邊 에 밀린 거기 그 속에서도 久 遠 한 朝 鮮 精 神 의 句 節 句 節 을 分 明 히 듣는 것이다. 그러므로 山 이 다만 山 이 아니며 江 이 오직 江 이 아니어서 그것은 그대로 歷 史 의 出 發 點 이자 祕 機 요, 文 化 의 入 門 이자 寶 庫 이다. 그리하여 朝 鮮 의 山 岳 과 江 流 를 더듬지 않고 서는 거기 끼쳐진 朝 鮮 民 族 의 信 仰 習 尙 乃 至 學 問 藝 術 政 治 等 一 切 의 文 化 的 本 源 및 特 質 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現 代 의 朝 鮮 人 은 山 川 巡 禮 또는 山 川 硏 究 의 熱 과 誠 이 끊기어 저절로 民 族 의 歷 史 와 文 化 를 蕪 雜 속에 그냥 버리매 晦 冥 한 채 그 發 闡 할 期 約 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이렇게도 이에 對 한 用 意 가 없고 關 心 이 끊긴 것은 그 結 果 를 적은대로 멈추지 아니하고 自 家 의 精 神 과 現 實 그 生 活 의 全 體 에 影 響 을 波 及 한 것임을 본다. 스스로 不 忠 不 義 하고 不 親 不 實 함이 이에서 더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朝 鮮 本 來 의 文 化 를 整 頓 樹 立 한 然 後 에라야 正 明 한 認 識 을 얻어 그 나아갈 길을 찾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이제 庚 炎 을 當 하여 學 窓 과 其 他 業 務 를 잠깐 버리고 休 養 하는 때에 親 히 이 山 岳 을 踏 破 하고 이 江 河 를 涉 盡 함으로써 朝 鮮 文 化 의 根 基 와 色 態 를 體 認 하기를 希 願 하는 本 意 에서 우리는 朝 鮮 山 水 特 輯 號 를 刊 行 케 된 것이다. 이것이 雜 誌 인 만큼 그 全 貌 를 說 盡 키 어려움은 毋 論 이나 簡 單 한 紹 介 中 에서도 所 得 이 있을진 댄 그로써 幸 을 삼고자 한다. 44. 蔣 介 石 장군이 大 統 領 됨이 東 洋 大 勢 에 좋을까? < 三 千 里 > (1936년 4월호) < 設 問 > 最 近 南 京 의 蔣 介 石 政 權 을 一 地 方 政 權 으로 見 做 하려는 傾 向 이 있는 反 面 에 蔣 政 權 이야말로 西 南, 東 北 까지 實 質 에 있어 號 令 하고 있다고 보는 傾 向 도 있다. 統 一 政 權 이냐 地 方 政 權 이냐 蔣 將 軍 을 싸고도는 中 國 統 一 問 題 도 注 目 거리거니와 果 然 蔣 介 石 氏 가 軍 事, 行 政 의 兩 大 權 限 을 完 全 히 手 中 에 넣어 一 國 의 元 首 인 大 統 領 에 오르느냐 하는 것도 몹시 注 目 을 끈다. 萬 一 大 統 領 이 된다 면 東 洋 大 勢 에 어떠한 利 不 利 를 끼치는가. 이것은 隣 接 한 우리네들 東 洋 諸 人 民 의 한번의 檢 討 거리가 아니될 수 없다. ( 中 略 ) 東 洋 政 局 에 別 無 變 動 < 應 答 > 蔣 介 石 氏 가 大 統 領 으로 就 任 한다고 하더라도 그 勢 力 이 猝 地 에 增 進 될 것은 아닌 故 로 中 國 自 體 나 東 洋 政 局 에 別 로 큰 變 動 이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습니다. 45. 讀 書 雜 記
48 < 學 海 > (1937년) 讀 書 는 人 生 의 糧 食 이다. 讀 書 를 모르는 사람은 오늘의 세상에서는 아무런 存 在 조차도 없을 것이다. 나는 人 生 의 糧 食 으로서의 讀 書 도 퍽이나 즐겨하지만 그저 어쩐지 책 이라면 無 條 件 하고 사랑 하고 싶어하는 根 性 을 本 來 부터 가지고 있는 듯싶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 책에 愛 着 을 두는 마음은 내 머리에서 언제든지 떠날 듯싶지 않다. 그러나 내가 타고난 이 天 性 은 자주 周 圍 에 벌어지는 많은 障 害 에 부딪치는 때가 많이 있다. 이럴 때마 다 나는 더한층 讀 書 에 대한 愛 着 을 느끼게 된다. 나는 어려서부터 책과 씨름하여온 몸이다. 아직 도 벌거숭이 六, 七 歲 에 嚴 父 의 膝 下 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종아리를 맞아 가면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한시도 책 과 멀리한 때가 없다. 책과 사귀이기 五 十 年 間, 나로서는 比 較 的 廣 範 圍 의 書 籍 을 뒤적여 보았었다. 在 學 時 에는 원체 法 律 科 를 專 攻 하였더니 만치 法 學 에 大 部 分 의 힘을 기울였던 것은 사실이나 自 然 科 學 修 養 書 籍 등 에 이르기까지 이모 저모로 여러 方 面 의 책을 보아온 셈이다. 그중에는 머리속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뜻깊은 句 節 도 많이 있고 내 心 琴 을 울리던 위대한 어른의 말도 많이 있었다. 이제 조용히 앉아 讀 書 五 十 年 間 을 돌이켜보면 대체 네 갈래로 區 分 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 어려 漢 文 學 을 工 夫 하던 때일 것이다. 이때에는 孔 孟 의 儒 敎 思 想 과 史 略 等 支 那 史 에 關 한 것들을 읽었으나 한마디로 말하자면 沒 批 判 的 無 咀 嚼 的 讀 書 方 法 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의 모든 部 門 의 讀 書 는 이 漢 學 修 業 의 첫 課 程 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고 原 動 力 이 되었다는 것은 지금도 가끔 새삼스러우리 만치 깨닫게 됨이 사실이다. 둘째 = 學 校 時 代 인데 中 學 時 代 부터 나는 特 히 歷 史 學 에 많은 關 心 을 갖게 되어 學 校 에서 배우 는 歷 史 時 間 도 있지마는 敎 科 書 以 外 의 歷 史 書 籍 에 많은 힘을 기울였었고 大 學 시절에는 法 學 을 專 攻 했던 관계로 法 律 書 籍 을 主 로 보아 왔지마는 史 學 에도 늘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밖에도 文 藝 書 籍 을 또한 熟 讀 하게 되어 톨스토이의 < 人 生 >, < 戰 爭 과 平 和 > 등은 아직도 熟 讀 하던 그때의 일이 記 憶 에 새로운 바가 많다. 셋째 = 在 監 時 代 를 말하게 될 것이다. 이 時 期 가 나에게는 가장 조용히 讀 書 에만 마음을 쏠릴 수 있던 時 期 였다. 또한 머리를 가다듬 고 思 索 과 熟 考 를 거듭해 볼 수 있었던 때도 이 在 監 時 代 라고 하겠다. 이때에 나는 비로소 커다 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宗 敎 에 아무런 知 識 도 못가졌던 나는 처음으로 基 督 敎 와 佛 敎 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게 될 機 會 를 얻게 되었었다. 佛 經 을 通 讀 하였고 舊 約 全 書 와 新 約 全 書 를 모조리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아직까지 밟 아보지 못한 未 開 의 땅을 비로소 開 拓 하는 듯하였다. 넷째 = 그뒤로부터 最 近 에 이르기까지인데 역시 현재의 생활이 생활이니 만치 여러 方 面 의 書 籍 을 많이 보게 되지마는 주위의 바쁜 일로 말미암아 讀 書 할 틈을 比 較 的 많이 얻지 못하는 것이 最 近 의 사정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틈만 있으면 修 養 書 籍 도 자주 뒤져보지마는 史 學 도 펼쳐보게 된다. 그밖에 月 刊 雜 誌 와 新 聞 等 은 朝 鮮 에서 나오는 것이나 東 京 方 面 에서 나오는 것은 대강 題 目 만이라도 훑어보게 되고, < 中 央 公 論 > < 改 造 > 等 은 比 較 的 每 月 손에 쥐어보게 된다. 나는 오 늘날까지 책과 벗삼아오는 동안 知 識 의 無 窮 함을 깨닫는 동시에 책 이란 얼마나 우리 人 類 文 明 에 커다란 存 在 인가 함을 느끼게 된다. 모든 책( 書 籍 )은 文 明 의 母 胎 이다. 文 明 에로 한걸음씩 달음질치는 오늘의 人 類 로서 어느 누가 讀 書 를 멀리할 것인? 책을 사랑하는 마음, 이는 人 類 生 活 에 있어서 가장 갸륵하고 아름다운 必 源 일 것이다
49 46. 漢 詩 1 首 詩 欲 驚 人 恒 固 癖 (시는 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항상 고집하는 버릇이 있으나) 酒 雖 病 我 更 多 情 (술은 비록 나를 병들게 하여도 다시 다정하구나) 47. 臨 時 政 府 歡 迎 辭 < 東 亞 日 報 > (1945년 12월 19일) 오늘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諸 位 를 맞이하여 歡 迎 會 를 開 催 하게 된 것은 우리 三 千 萬 民 衆 의 無 限 한 感 激 으로 여기는 바이며 또한 이자리에서 歡 迎 의 辭 를 올리는 本 人 의 無 雙 한 光 榮 으로 생각하 는 바입니다. 생각컨대 庚 戌 以 來 倭 敵 은 이 땅을 유린하고 이 百 姓 을 苛 虐 할지라 政 府 諸 位 는 死 線 을 뚫고 怨 淚 를 머금은 채 海 外 로 亡 命 한지 三 十 六 個 星 霜, 雨 慘 風 中 에도 一 意 初 一 念 을 굽히지 않고 오직 祖 國 의 光 復 을 爲 하여 毅 然 히 血 鬪 勇 戰 하여 왔습니다. 特 히 一 九 一 九 年 民 族 自 決 의 時 局 에 따라 서 三 千 里 坊 坊 曲 曲 에 充 溢 한 獨 立 萬 歲 소리에 呼 應 하여 李 承 晩 博 士 를 初 代 大 統 領 으로 推 戴 한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의 樹 立 은 世 界 에 우리 民 族 의 存 立 을 宣 揚 하였고 一 九 三 二 年 四 月 二 十 八 日 上 海 事 變 이 終 局 을 告 할 즈음 金 九 主 席 의 用 意 周 到 한 指 導 下 에 義 士 尹 奉 吉 先 生 의 擧 事 는 倭 將 白 川 을 爲 始 하여 文 武 巨 頭 를 爆 死 或 은 重 傷 케 함으로써 우리 民 族 의 聲 價 를 天 下 에 周 知 시켰습니 다. 어찌 그것뿐이셨습니까. 勇 略 無 比 한 義 血 團 의 活 動 을 비롯하여 許 多 한 革 命 的 事 實 은 마디마 디 民 族 鬪 爭 의 歷 史 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點 들을 想 起 할 때 金 九 主 席 李 承 晩 博 士 를 爲 始 하여 政 府 諸 位 의 우리에게 준 貢 獻 이야말로 實 로 絶 大 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오늘 三 千 萬 民 衆 이 政 府 諸 位 를 맞아 歡 呼 하는 것은 決 코 偶 然 한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內 外 情 勢 를 環 視 하건대 우리나라는 八 月 解 放 된 以 來 獨 立 이 約 束 된 채 彊 土 는 斷 絶 되 고 思 想 은 分 裂 하여 容 易 히 統 一 되고 獨 立 될 氣 運 이 看 取 되지 않을 뿐더러 聯 合 國 의 分 割 軍 政 은 國 際 的 으로 微 妙 한 動 向 을 示 하여 完 全 한 自 主 獨 立 의 達 成 에는 아직도 前 途 가 요원한 感 이 없지 않나니 政 府 諸 位 를 맞이하여 歡 迎 하는 이날에 있어서 이러한 報 告 를 하지 아니할 수 없는 우리 는 眞 實 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事 態 는 時 急 한 解 決 을 要 하나니 그 解 決 方 法 은 오직 한가지가 있다고 믿습니다. 一 九 一 九 년 以 來 우리 民 族 의 政 治 力 의 本 流 로서 信 念 해 왔던 臨 時 政 府 가 中 核 이 되어서 모든 亞 流 支 派 를 求 心 的 으로 凝 集 함으로써 國 內 統 一 에 絶 對 의 領 導 를 發 揮 하는 동시에 우리의 自 主 獨 立 의 能 力 을 國 外 에 宣 示 하여 急 速 히 聯 合 國 의 承 認 을 要 請 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政 府 諸 位 의 政 治 的 力 量 과 手 腕 에 期 待 하는 바 크다 하겠거니와 우리도 政 府 諸 位 의 賢 明 한 指 導 에 協 力 함으로써 國 民 으로서 擔 負 하여야 할 實 務 에 絶 對 로 忠 實 할 것을 盟 誓 하 는 바입니다. 蕪 辭 로서 歡 迎 辭 에 대신합니다. 大 韓 民 國 二 十 七 年 十 二 月 十 九 日 48. 最 後 까지 鬪 爭 하자
50 < 東 亞 日 報 > (1945년 12월 29일) 國 民 大 會 準 備 會 委 員 長 宋 鎭 禹 氏 談 우리가 가진 半 萬 年 歷 史 와 지나온 半 世 紀 동안 民 族 解 放 을 위한 血 鬪 는 世 界 政 局 에 대하여 朝 鮮 民 族 을 完 全 解 放 하여 自 主 獨 立 시키지 않으면 東 洋 의 眞 正 한 和 平 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敎 訓 하였고 따라서 朝 鮮 民 族 은 他 民 族 의 支 配 나 託 治 又 는 國 際 公 管 을 받을 民 族 이 아니라는 것도 天 下 가 周 知 하게 된 事 實 이다. 그러므로 카이로 포츠담 國 際 會 議 에서도 朝 鮮 獨 立 을 宣 言 케 된 것이다. 如 斯 한 國 際 信 義 를 無 視 하고 世 界 史 的 發 展 을 阻 害 하는 朝 鮮 의 託 治 云 云 은 斷 然 코 排 擊 치 않으 면 안된다. 우리는 男 女 老 幼 를 莫 論 하고 三 千 萬 이 一 人 도 빠짐없이 一 大 國 民 運 動 을 展 開 하여 反 對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의 正 當 한 主 張 을 爲 하여 이 彊 土 위에 있는 同 志 는 피한방울이 남지 않도록 決 死 的 勇 鬪 로서 우리가 當 當 히 가져야 할 民 族 主 權 을 찾아야 할 것이다
51 資 料
52 1. 中 央 學 校 訪 問 記 < 靑 春 > 제8호 (1917년 9월호) 五 月 十 九 日 土 曜 는 今 年 에 春 服 을 처음 입은 날이라 새 裝 束 한 새 精 神 을 무엇으로 값을 할고 하다가 새 氣 韻 새 希 望 에 둘려있는 敎 育 界 의 寧 馨 兒 中 央 氏 를 찾아뵈올 양으로 진솔 두루마기 바삭거리는 소리에 싸여 安 洞 막바지로 활개치다. 安 峴 에서 別 宮 西 垣 을 끼고 쭉 올라가다가 이마가 거의 막다른데 마주뜨릴번하기로 문득 精 神 을 차려 눈을 오른편으로 굴리니 검정칠한 板 墻 이 둘리고 幾 百 年 春 風 秋 雨 를 겪은 國 風 老 屋 몇채 의 琉 璃 窓 저고리를 입고 있는 것이 있으니 어딘지 모르게 예쁜 털이 박혀서 보는 이로 하여금 반가운 생각을 내게 하는 이 집이야말로 雖 云 舊 校 其 命 維 新 의 中 央 學 校 大 人 이라 문턱이 닳도록 다녔다 할만 하건마는 오늘 걸음에는 새삼스럽게 반갑고 새삼스럽게 情 다움이 어찌함인지.( 中 略 ) 校 監 은 茫 乎 深 遠 에 不 可 端 倪 할 宋 鎭 禹 君, 幹 事 는 韞 玉 藏 珠 를 不 許 輕 示 하는 白 寬 洙 君, 四 時 에 長 春 이오, 八 面 이 具 圓 한 李 重 華 君, 溫 容 을 可 掏 이나 機 鋒 이 還 銳 한 劉 泰 魯 君, 重 厚 其 德 이오 篤 摯 其 誠 의 金 聲 集 君, 精 彩 가 內 蓄 에 英 華 가 外 著 하는 李 熙 晙 君, 둘러보니 모두 熟 面 이라 골고루 寒 暄 하 고 맨나중 溫 藉 하긴 珠 玉 같고, 玲 瓏 하긴 琉 璃 같은 校 長 金 性 洙 君 을 北 窓 下 淨 几 傍 에 發 見 하여 늘 보아도 늘 반가운 溫 容 에 제물에 慇 懃 한 一 禮 를 베풀고 麥 茶 一 碗 에 목을 축여 가면서 새삼스러 운 節 次 로 이말씀 저말씀 끄집어낸다. 君 의 態 는 前 같이 謙 虛 하고 君 의 言 은 前 같이 謹 約 하다. 물부어 새지 아니하는 整 齊 한 論 理 와 바람불어도 흔들리지 아니할 듯한 堅 實 한 語 趣 는 용하게 사람으로 하여금 要 領 을 얻게 한다. 새 로 制 定 하는 듯한 諸 種 運 動 服 胸 背 며 帽 子 記 章 等 圖 案 을 點 檢 하다가 不 惶 不 忙 히 薰 陶 의 宗 旨 를 말하며 校 風 의 指 歸 를 말하며 現 代 靑 年 의 長 處 短 處 와 그 助 長 又 矯 正 의 見 識 을 吐 露 한다. 透 徹 한 所 說 에 저절로 首 肯 의 意 를 表 하겠다. 簿 書 하고 씨름하는 李 君 의 球 板 소리는 우리 問 答 에 長 短 을 쳐주는듯 또닥또닥 또두락. 訓 育 의 宗 旨 를 文 字 로 써 만들어 놓은 것은 없습니다마는 一 言 으로 蔽 하자면 사람 - 쓸 사람 - 아무 데 내놓아도 所 用 있을 사람 만드는 것이 우리 敎 育 方 針 의 根 本 義 를 삼는 바외다. 그릇이 되기만 하면 무엇을 담아 언잖으리까. 첫째 사람만 만들어 놓으면 公 私 大 小 隨 時 隨 處 에 쓸모 잡힐 손이 無 往 不 可 할 것이므로 全 科 程 諸 指 歸 를 總 히 이 點 으로 出 發 하여 또 다시 이 點 으로 注 集 하게 합니다. 가필드의 말인가 합니다 마는 먼저 사람으로 成 功 하라 한 것은 과연 千 古 의 旨 言 이니 中 等 程 度 以 下 의 敎 育 要 旨 는 要 컨대 먼저 사람으로 成 功 시킴일까 합니다. 사람으로 成 功 이 모든 成 功 인줄 압니다. 옳습니다. ( 中 略 ) 校 長 의 先 導 로 各 敎 室 을 돌아보았다. 理 科 敎 室 을 橫 奪 한 第 一 學 年 乙 班 은 좁은 房 에 죽덥개로 달개를 달아 간신히 敎 場 모양을 만든 곳인데 約 七 十 名 의 가장 前 程 많은 俊 髦 가 豁 然 한 天 庭 은 古 仙 人 을 뵙는 듯하고 茸 然 한 頤 下 物 은 胡 髥 主 簿 란 말 듣기도 괴이치 아니한 李 奎 榮 先 生 의 朝 鮮 語 敎 授 를 받는다. 일긋얄긋한 一 種 特 色 있는 字 體 가 漆 板 에 소나기 퍼부은 것은 時 文 의 敎 案 인데 先 生 님 紫 霞 洞 이 어디에요, 景 致 가 좋습니까 仙 人 橋 는 仙 人 이 다니던 다리오니까 하는 文 義 質 問 이 四 方 으로서 失 集 하는 것을 流 暢 히 詳 細 히 答 辯 함은 鍊 達 의 功 인가 하다. 石 階 를 내려와 첫 敎 室 은 같은 學 年 의 甲 班 인데 때묻은 試 驗 服 입은 羅 景 錫 先 生 이 一 小 隊 나 됨 직한 藥 甁 을 앞에 거느리고 長 短 圓 曲 의 許 多 한 琉 璃 筒 武 器 로 한참 化 學 實 驗 의 十 八 般 武 藝 를 다 하시는 中
53 콜타르란 것은 石 炭 깨스를 만들 때에 副 生 하는 검은 물반죽인데 요사이 물감이란 것은 대개 이것으로 만드는 것이야. 猩 猩 이 피처럼 빨간 물감도 거기서 나오고 하늘 빛 같은 파란 물감도 거기서 나오는 것이야. 깜해서 보기만 해도 속이 답답한 콜타르란 놈이 물감 만들어 내는 데에 는 千 變 萬 化 神 出 鬼 沒 하는 諸 葛 亮 노릇을 하는 것이야 하고 琉 璃 筒 을 위로 흔들고 아래로 두른다. 여기서 ㄱ 字 로 꺾여 가장 큰 敎 室 은 第 二 學 年, 넓은 房 이나 좁은 틈도 없이 그득그득한 盛 況, 번듯하고 질펀하여 富 貴 氣 가 一 面 에 가득한 白 寬 洙 先 生 의 商 業 時 間, 商 法 第 몇 條 몇 條 를 연방 引 用 하면서 株 式 會 社 는 發 起 人 七 人 以 上 을 가져야 組 織 한다는 節 次 를 說 明 하시기에 口 角 이 奔 走 하시며 다시 한모를 돌아서면 第 三 學 年 敎 室 인데 渾 身 이 都 是 XY인 崔 奎 東 先 生 의 代 數 時 間 이나 공교히 時 間 이 끝나는 어림이라 明 快 銳 利 한 先 生 獨 特 의 講 說 을 듣지 못함이 섭섭하며 여기서 뜰 을 건너 舊 事 務 室 을 변통한 것이 最 高 級 인 第 四 學 年 敎 室 인데 宋 校 監 의 西 洋 史 時 間, 民 族 遷 徙 의 西 史 上 大 段 落 을 바야흐로 委 曲 說 盡 하시는 참인데 無 慘 한 時 間 鍾 이 先 生 의 大 蘊 蓄 接 할 機 會 를 주지 아니한다. 敎 室 마다 充 溢 한 眞 摯 한 空 氣 와 生 徒 마다 生 動 하는 新 銳 한 意 思 는 暫 時 보는 이의 快 感 도 이러 하려거든 늘 데리고 薰 陶 하시는 이의 즐거움이야 오죽할까 하다. 이 집에 들어오는 족족 가장 기 꺼운 것은 이이 저이 할 것 없이 다 하려는 빛이오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다 하려는 자취임이라. 隆 熙 二 年 에 畿 湖 學 校 로 創 立 되고 同 四 年 冬 에 興 士 團 의 隆 熙 學 校 를 合 倂 하고 因 하여 中 央 學 校 란 이름으로 一 大 躍 進 을 遂 하여 여러 名 士 의 協 力 下 에 偉 大 할 效 績 을 振 新 舞 臺 上 보였지마는 돌 아보건대 三, 四 年 前 의 否 厄 은 이 意 義 있는 學 舍 로 하여금 거의 거의 末 如 何 의 狂 瀾 에 沈 淪 케 함 이 몇번이든지 우리도 남처럼 딱하게 보면서도 어찌하지 못하는 한사람이러니 하늘이 學 校 와 아 울러 金 祺 中 暻 中 兩 氏 에게 厚 眷 을 주사 斯 校 - 斯 人 을 의지하고 斯 人 이 斯 校 를 붙들게 되니 此 好 一 段 因 緣 이야말로 진실로 斯 人 斯 校 로 하여금 永 遠 히 斯 界 의 華 表 柱 가 되게 하는 關 節 이며 그 斷 斷 無 他 한 後 進 啓 導 의 誠 意 야말로 絶 大 한 倚 信 을 天 下 父 兄 에게 博 得 하여 지난 學 期 의 中 學 入 門 者 로 하여금 爭 頭 奔 波 에 唯 患 不 及 케 한 所 以 라 뉘 感 祝 하다 아니하랴. 誠 意 가 언제는 보람 없더 냐, 努 力 이 어디서 값이 없더냐. 이제 漢 城 의 有 數 한 形 勝 地 인 桂 山 一 局 을 占 得 하여 萬 戶 長 安 을 一 眸 에 吐 呑 할 新 校 舍 가 바야흐 로 柱 礎 를 놓는 중인즉 魏 然 한 廣 廈 가 城 北 에 屹 立 할 날이 아마 머지 아니하리라 하노니 그리로 서 나오는 흘러 흘러 흘러서 쉬움이 없는 文 明 의 長 江 과 거기다 자리잡고 솟아 솟아 솟아서 그 지에 없을 德 業 의 高 塔 을 想 像 할 때에 그 집이 하루바삐 이루이고 그리하여 많은 造 化 가 그 안 에 담기기를 간절히 바라는 者 어찌 우리뿐이랴. 늘 健 旺 하거라, 내 사람 中 央 氏 여. 2. 三 一 運 動 勃 發 의 槪 要 < 思 想 界 > (1963년 3월호 -- 舊 稿 ) 玄 相 允 一 九 一 年 나라를 빼앗긴 韓 國 民 은 暴 虐 한 日 政 下 에서 눈물을 머금고 亡 國 의 悲 哀 를 맛보면서 오직 그 覊 絆 을 벗어날 기회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一 九 一 八 年 에 第 一 次 世 界 戰 爭 이 끝나고 그 翌 年 봄에 파리에서 講 和 會 議 가 열리게 되었는데 그 때에 그 會 議 의 議 長 이 되는 美 國 大 統 領 윌슨 氏 가 休 戰 條 約 이 체결되기 전에 즉 一 九 一 八 년
54 一 月 에 講 和 의 기본원칙으로 하여 소위 十 四 個 條 의 원칙을 제청한 것이 있었다. 그 중에 모든 民 族 의 통치는 그 민족의 自 決 에 맡길 것이라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이 보도를 들은 韓 國 民 은 國 內 外 에 있음을 不 問 하고 歡 喜 雀 躍 하여 우리도 이 기회에 그 適 用 을 받자고 하여 到 處 에서 비밀리에 운동이 시작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美 國 에서는 李 承 晩 氏 外 二 名 이 韓 族 代 表 로 파리를 향하게 되고 上 海 에서도 金 奎 植 氏 가 在 美 代 表 團 에 참가키 위하여 역시 파 리로 향하고 日 本 東 京 에 있는 유학생들도 獨 立 要 求 의 宣 言 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다 國 外 에 있는 동포들의 하는 일이므로 그 세력에 있어서 미약하고 그 영 향에 있어서 크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國 內 에서 대규모의 운동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全 民 族 의 강력한 獨 立 運 動 이 될 수 있었다. 이때에 나는 金 性 洙, 宋 鎭 禹 兩 氏 와 中 央 學 校 構 內 의 舍 宅 에 동거하고 있었던 관계로 朝 夕 으로 時 事 를 말하는 동안에 말이 여기에 미치면 三 人 이 다같이 초조하였었다. 그리하여 國 內 에서 큰 운동을 일으키려면 먼저 團 結 力 이 있는 天 道 敎 를 움직이는 것이 上 策 이 라는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그때에 나는 天 道 敎 에서 경영하는 普 成 中 學 을 졸업한 관계로 同 校 長 崔 麟 氏 를 가깝게 從 遊 하던 터라 수차 崔 氏 를 찾아 天 道 敎 의 동향을 타진한 즉 用 力 할만도 하고 또 崔 氏 의 의견도 반대하는 기색은 적으므로 그때부터는 宋 氏 와 동반하여 崔 氏 를 찾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一 九 一 八 年 十 一 月 경부터 시작하여 이후 數 個 月 동안에 亘 하여 의견교환과 謀 議 를 거 듭한 결과 擧 事 를 결행하기로 하고 一 邊 同 志 를 구하는 의미로 崔 南 善 氏 의 참가를 구하는 동시에 他 一 邊 으로는 天 道 敎 의 重 鎭 吳 世 昌, 權 東 鎭 兩 氏 와 연락하여 孫 秉 熙 氏 의 蹶 起 를 慫 慂 하고 있었 다. 그리하여 나는 崔 南 善 氏 를 수차에 亘 하여 방문하였다. 그러나 崔 氏 는 용이하게 動 하지 아니하 였다. 이때 一 九 一 九 年 一 月 初 旬 頃 日 本 留 學 生 宋 繼 白 君 이 장차 日 本 에서 발표하려는 日 本 留 學 生 들의 獨 立 要 求 宣 言 書 草 稿 ( 李 光 洙 作 )를 휴대하고 祕 密 裡 에 入 京 하여 나에게 그것을 제시하였다. 宋 氏 와 나는 그것을 가지고 먼저 때마침 中 央 學 校 를 來 訪 하였던 崔 南 善 氏 에게 보이니 崔 氏 도 금 후로 國 內 의 獨 立 運 動 에 참가할 것을 승낙하고 또한 國 內 運 動 의 宣 言 書 는 자기가 짓겠다고 쾌락 하였다. 그때 나는 다시 그 草 稿 를 가지고 崔 麟 氏 를 經 由 하여 孫 秉 熙 氏 에게 제시하였다. 그러한즉 孫 氏 曰 어린 兒 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 하니 우리로서 어찌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있겠느냐 하여 그 날로 天 道 敎 의 最 高 幹 部 會 議 를 열어 토의를 하고 드디어 天 道 敎 의 蹶 起 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날 저녁 崔 麟, 宋 鎭 禹, 崔 南 善 과 나는 齊 洞 의 崔 麟 氏 집 內 室 에 비밀히 회합하였는데 이날 저 녁에 四 人 은 기뻐서 祝 盃 를 들고 밤깊도록 獨 立 運 動 의 實 行 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계획과 방안을 토의하였다. 그러한 결과 먼저 民 族 代 表 者 의 名 義 로 朝 鮮 獨 立 을 中 外 에 宣 言 하고 그 宣 言 書 를 인 쇄하여 이것을 朝 鮮 全 道 에 배포하고 또 국민을 總 動 員 시켜 크게 朝 鮮 獨 立 의 시위운동을 행하여 韓 國 民 族 이 一 九 一 年 의 소위 合 倂 을 힘있게 否 認 하고 또 그들이 어떻게 독립을 열망하고 있는 가를 內 外 에 표시케 하며 또 一 邊 으로 日 本 政 府 와 그 貴 衆 兩 院 과 朝 鮮 總 督 과 또 파리 講 和 會 議 에 列 席 한 각국 대표에게 朝 鮮 獨 立 에 관한 意 見 書 를 제출하며 또 美 國 大 統 領 윌슨 氏 에게 朝 鮮 獨 立 에 관하여 진력하기를 비는 請 願 書 를 제출하기로 결정하고 宣 言 書 와 기타 서류는 崔 南 善 氏 가 제작하기로 하고 우선 民 族 代 表 者 로 하여 제 一 후보자로 孫 秉 熙 氏 以 外 에 朴 泳 孝, 李 商 在, 尹 致 昊 諸 氏 의 승낙을 얻기로 하고, 朴 氏 의 교섭은 宋 鎭 禹 氏 가 李, 尹 兩 氏 의 교섭은 崔 南 善 氏 가 各 各 분 담하기로 하였다. 수일후에 전기 四 人 은 다시 桂 洞 中 央 學 校 舍 宅 에 회동하여 그동안 교섭의 경과를 보고하였는 데 그 내용은 朴, 李, 尹 三 氏 가 다 교섭을 거절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前 記 四 人 은 다시 第 二 候 補 者 로 韓 圭 卨, 尹 用 求 兩 氏 에게 교섭하기로 하고 韓 氏 에게는 宋 鎭 禹 氏 가 兪 鎭 泰 氏 를 통하 여, 尹 用 求 氏 에게는 崔 南 善 氏 가 尹 弘 燮 氏 를 통하여 각각 교섭하기로 하였다
55 二, 三 日 을 경과하여 또 다시 桂 洞 中 央 學 校 構 內 舍 宅 에 전기 四 人 이 會 合 하여 그동안의 경과 를 들었는데 韓 氏 는 처음에는 승낙하였으나 尹 氏 가 승낙치 않으므로 韓 氏 도 승낙을 철회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한즉 崔 麟 氏 가 民 族 代 表 를 다른데 구할 것 없이 孫 氏 를 先 頭 로 하고 우리 四 人 이 자진 참가하자고 하여 먼저 崔 南 善 氏 에게 의향을 물으니 崔 氏 는 家 業 關 係 로 하여 승낙할 수 없다 고 하였다. 그 다음에 宋 鎭 禹 氏 의 의향을 물었는데 宋 氏 는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한즉 崔 麟 氏 는 다시 崔 南 善 氏 를 향하여 崔 氏 ( 南 善 )가 승낙치 않으면 자기도 참가할 수 없고, 또 天 道 敎 만으로 는 이 운동을 進 行 할 수도 없으니 전부 이 운동을 중지하자고 提 議 하여 부득이 중지하기로 결정 하였다. 그러나 이만큼 진전된 운동을 중지하고 만다는 것은 심히 유감되는 일이므로 그 후 四, 五 日 을 경과하여 나는 崔 南 善 氏 를 자택으로 往 訪 하였다. 그리하여 崔 氏 에게 基 督 敎 를 天 道 敎 와 연결시키 는 것이 어떠하냐, 그리하자면 定 州 의 李 昇 薰 氏 를 上 京 케 함이 어떠하냐 하는 의견을 말하였다. 그러한즉 崔 氏 曰 좋다, 그리하자 하는지라 나는 그 길로 水 下 洞 鄭 魯 湜 氏 의 宿 所 에 들려서 鄭 氏 더러 同 所 에 止 宿 하는 金 道 泰 君 을 定 州 에 파송하여 李 昇 薰 氏 의 來 京 을 求 할 것을 言 託 하였다. 그리하였더니 二 月 十 一 日 에 李 氏 는 急 遽 히 상경하였다. 그러나 崔 南 善 氏 는 官 憲 의 주목을 피하기 위하여 자신은 李 氏 와 會 見 치 아니하고 宋 鎭 禹 氏 와 나더러 회견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兩 人 과 金 性 洙 氏 는 桂 洞 金 性 洙 氏 別 宅 에서 李 氏 를 회견 하고 그동안 在 京 同 志 의 계획과 天 道 敎 의 동향을 말하고 基 督 敎 側 의 참가와 同 志 糾 合 의 일을 청 하니 李 昇 薰 氏 는 즉석에서 그것을 쾌락하고 金 性 洙 氏 로부터 數 千 圓 의 운동비를 받아가지고 그날 로 關 西 地 方 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李 昇 薰 氏 는 疾 風 雷 雨 와 같이 平 南 北 을 巡 行 하여 長 老 派 의 吉 善 宙, 梁 甸 伯, 李 明 龍, 劉 如 大, 金 秉 祚 諸 氏 와 監 理 派 의 申 洪 植 氏 等 과 회견하고 그들의 민족대표자의 승낙을 얻고 또 그 印 章 을 모 아 가지고 그 중의 申 洪 植 氏 와 동반하여 다시 京 城 으로 왔다. 그리하여 곧 宋 鎭 禹 氏 에게 來 京 의 뜻을 통지하였다. 그러나 그때에 官 憲 의 주목이 있을까 하여 關 係 各 人 이 행동을 삼가던 때라 宋 氏 는 수차 李 氏 를 비밀히 昭 格 洞 旅 舘 으로 往 訪 하였으나 하등 명쾌한 회답이 없고 또 교섭의 本 人 인 崔 南 善 氏 는 용이히 一 次 도 면회치 아니하므로 李 氏 는 심중에 대단히 疑 訝 하여 天 道 敎 와의 連 繫 를 단념하고 基 督 敎 徒 單 獨 으로 獨 立 運 動 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는 때에 中 央 靑 年 會 幹 事 朴 熙 道 氏 를 路 中 에서 만나니 京 城 에서도 기독교도들 사이에 독립운동에 관하여 人 心 이 암암 리에 동요하고 있다 하므로 李 氏 는 곧 그들과의 회견을 청하여 二 十 日 夜 에 監 理 派 의 吳 華 英, 鄭 春 洙, 申 錫 九, 崔 聖 模, 朴 東 完, 李 弼 柱, 吳 基 善, 申 洪 植 諸 氏 와 회담하여 궐기의 계획과 운동방법을 협의하고 또 李 昇 薰 氏 는 그날 밤에 계속하여 별개로 南 門 外 咸 台 永 氏 집에서 李 甲 成, 安 世 桓, 玄 楯, 吳 祥 根 氏 等 의 長 老 派 人 士 들과 회합하여 역시 獨 立 運 動 에 대하여 基 督 敎 側 單 獨 의 계획을 협 의하였다. 그러는 중인 二 月 二 十 一 日 에 崔 南 善 氏 가 비로소 李 昇 薰 氏 를 그 宿 所 로 방문하고 李 氏 와 同 道 하여 齊 洞 崔 麟 氏 를 찾아 서로 회견케 하였다. 이때에 李 昇 薰 氏 는 崔 麟 氏 에게 基 督 敎 徒 만으로 독 립운동을 단독 진행하고 있다는 뜻을 고하니 崔 麟 氏 는 독립운동은 韓 國 民 族 全 體 에 관한 문제이 니 宗 敎 의 異 同 을 불문하고 마땅히 합동하여 추진시킬 것인 즉 基 督 敎 와 天 道 敎 가 합동하자고 제 의하였다. 그러한즉 李 氏 는 同 志 들과 상의한 후에 회답할 것을 약속하고 또 만일 합동하는 경우 에는 운동비를 얼마만큼 빌려달라고 하였다. 李 昇 薰 氏 는 崔 麟 氏 와의 회견이 있은 후에 곧 世 富 蘭 偲 構 內 인 李 甲 成 氏 집에서 朴 熙 道, 吳 華 英, 申 洪 植, 咸 台 永, 安 世 桓, 玄 楯 氏 等 과 회합하여 徹 夜 協 議 한 결과 天 道 敎 側 과 합동하는 문제의 가부 는 먼저 天 道 敎 側 의 운동방법을 알아본 후에 결정하기로 하고 그 교섭은 李 昇 薰, 咸 台 永 兩 氏 에 게 일임하기로 하였다. 그러므로 李, 咸 兩 氏 는 崔 麟 氏 를 往 訪 하여 天 道 敎 側 의 구체적인 의견을 물었다. 그러한즉 天 道 敎 側 의 意 見 도 基 督 敎 側 의 그것과 다름이 없고 또 崔 麟 氏 로부터 운동비 五
56 千 圓 도 그 전날에 李 昇 薰 氏 에게 貸 與 되어 왔으므로 李, 咸 兩 氏 는 다시 咸 台 永 氏 집에서 基 督 敎 側 의 동지들을 회합하고 협의한 결과 天 道 敎 側 과 합동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결정하고 그 취지를 정식으로 二 月 二 十 四 日 에 天 道 敎 側 에 통고하였다. 이때 天 道 敎 側 은 崔 麟 氏 를 대표자로 하고 基 督 敎 側 은 李 昇 薰, 咸 台 永 氏 를 대표자로 하여 수회 에 걸쳐 협의한 결과 獨 立 宣 言 은 李 太 王 國 葬 日 의 前 前 日 인 三 月 一 日 正 午 塔 洞 公 園 에서 행하기 로 정하고 宣 言 書 는 天 道 敎 에서 경영하는 普 成 社 에서 비밀히 인쇄하기로 하였다. 이때에 崔 麟 氏 와 李 昇 薰, 咸 台 永 三 氏 는 佛 敎 團 體 에도 운동의 참가를 구하여 韓 龍 雲, 白 龍 成 兩 氏 의 승낙을 얻 었다. 이보다 먼저 宋 鎭 禹 氏 와 나는 普 成 專 門 學 校 卒 業 生 朱 翼 氏 를 통하여 시내 專 門 學 校 學 生 中 에서 그 대표될만한 인물을 탐색하여 將 來 할 시위운동의 中 核 體 를 구성하여 대기의 태세를 취하게 하 였던 바가 있었는데 이때에 朴 熙 道, 李 甲 成 兩 氏 는 이것을 알고 此 等 代 表 者 들과 회견한 후에 三 月 一 日 의 계획을 말하고 시위운동의 실시를 청한즉 此 等 代 表 者 들은 이것을 쾌락하고 二 月 二 十 八 日 에 普 成 專 門 의 康 基 德 君 과 延 禧 專 門 의 金 元 璧 君, 醫 學 專 門 의 韓 偉 建 三 君 은 승동예배당에서 市 內 中 等 學 校 代 表 者 와 기타 男 女 專 門 學 校 代 表 者 十 數 名 을 소집하고 시위운동에 대한 구체적 지령을 授 與 하였다. 이때에 天 道 敎, 基 督 敎, 佛 敎 三 派 의 獨 立 宣 言 書 에 서명하기로 작정한 民 族 代 表 者 一 同 은 서로 대면도 할겸 또한 최후의 회의를 행하기 위하여 二 十 八 日 夜 齊 洞 의 孫 秉 熙 氏 宅 에 회동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塔 洞 公 園 은 다수의 學 生 이 집합하니 紛 擾 가 염려된다 하여 三 月 一 日 에 행할 獨 立 宣 言 의 장소를 仁 寺 洞 明 月 館 支 店 으로 變 更 하였다. 그리고 崔 南 善, 咸 台 永, 宋 鎭 禹, 鄭 廣 朝, 玄 相 允 諸 人 은 殘 留 幹 部 로 하여 대표자들이 체포된 후의 제반 任 務 를 담당할 것을 결정하였다. 三 月 一 日 正 午 가 되자 獨 立 宣 言 書 에 署 名 捺 印 한 민족대표자 三 十 三 人 中 에서 吉 善 宙, 劉 如 大, 金 秉 祚, 鄭 春 洙 四 氏 를 제한 나머지 二 十 九 氏 는 예정대로 明 月 館 支 店 에 회참하여 엄숙하게 獨 立 宣 言 書 宣 布 式 을 거행하고 韓 龍 雲 氏 의 선창으로 大 韓 獨 立 萬 歲 를 三 唱 하였다. 그리고 대표자 일동 은 각각 식탁에 나아가 축배를 들었다. 이보다 수일 앞서서 上 記 代 表 者 들은 安 世 桓, 林 圭 兩 氏 를 日 本 에 파송하여 三 月 一 日 을 기하 여 日 本 政 府 와 同 貴 衆 兩 院 에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전달케 하고 玄 楯 氏 를 上 海 에, 金 智 煥 氏 를 新 義 州 에 파송하여 역시 三 月 一 日 을 기하여 파리 講 和 會 議 와 美 國 大 統 領 에게 독립에 관한 請 願 書 를 傳 達 케 하고 또 宣 言 書 를 전국 각지에 밀송하여 三 月 一 日 을 기하여 京 城 과 시각을 같이하여 선언서를 살포하고 또 독립에 관한 시위운동을 일제히 실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塔 洞 公 園 에서는 예정한 시각이 되자 京 城 市 內 의 男 女 中 等 以 上 의 各 學 校 學 生 四, 五 千 名 은 각각 指 定 된 대표자의 명령에 따라 엄숙한 얼굴과 剛 毅 한 태도로 누구나 아무말도 없이 驅 步 로 일제히 南 北 門 으로 구름같이 집합하였다. 집합이 끝나자 金 元 璧, 康 基 德, 韓 偉 健 諸 名 은 높이 八 角 亭 에 올라 大 韓 獨 立 萬 歲 를 三 唱 한 후에 獨 立 宣 言 書 를 살포하였다. 그것이 끝나자 학생들은 각각 예정 한 部 署 에 의하여 즉각 시가로 나가 시위행렬을 하였다. 一 團 은 大 漢 門 앞에 가서 獨 立 萬 歲 를 부 르고, 一 團 은 京 城 郵 便 局 앞에, 一 團 은 남대문 정거장에, 一 團 은 義 州 街 道 를 지나 佛 國 領 事 舘 앞에, 一 團 은 昌 德 宮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一 團 은 美 國 領 事 舘 에, 一 團 은 總 督 府 를 향하여 獨 立 萬 歲 를 목이 터져라 連 呼 하면서 시위행렬을 거행하니 만세소리는 全 市 街 가 떠나갈듯이 擾 亂 하고 행렬 때문에 일어나는 紅 塵 은 실로 千 丈 萬 丈 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日 人 憲 兵 과 경관들은 너무도 意 外 요, 너무도 行 動 이 기민하고 조직적인 때문에 어쩔줄을 모르고 一 時 는 좌우에서 입만 딱 벌리고 우두커니 서 있어서 무슨 上 部 의 命 令 이나 기다리는 듯 하였다. 하여간 운동은 우리의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날 午 後 에 孫 秉 熙 氏 以 下 民 族 代 表 들은 日 本 官 憲 에게 체포되었으나 殘 留 幹 部 와 學 生 市 民 들 은 일제히 撤 市, 納 稅 拒 絶, 官 公 吏 의 辭 職 과 罷 業, 盟 休 等 을 주요한 슬로간으로 하여 日 本 에 대
57 한 반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지방에서는 전국 각처에서 시위행렬과 반항운동이 烽 起 하여 數 月 에 한하여 저지할 바를 몰랐다. 원래 이 운동은 非 暴 力, 非 暴 動 을 표방한 것이나 군중의 激 昻 과 군대 및 경찰과의 충돌로 인하 여 流 血 의 참극과 다수의 사상을 내게 되니 곧 南 陽, 定 州, 遂 安, 成 川, 江 西 等 의 諸 事 件 이 그것 이다. 이때에 上 海 에는 大 韓 臨 時 政 府 가 수립되고 上 海, 滿 洲, 美 洲, 蘇 領 各 處 의 憂 國 人 士 가 國 內 와 호응하여 혹은 武 力 으로 혹은 외교로 혹은 宣 傳 및 連 絡 으로 數 年 에 걸쳐서 獨 立 運 動 을 계속하였 다. 그런데 이 운동에서 특별히 느끼는 것은 男 女 老 少 와 上 下 貴 賤 을 막론하고 종교와 사상과 직업 을 초월하여 전 민족이 一 心 一 體 가 되어 오로지 祖 國 의 獨 立 을 위하여 정성스럽게 투쟁한 일이 다. 이 까닭으로 數 朔 或 은 반년에 걸쳐 內 外 各 地 에서 行 하여진 謀 議 와 계획이 한가지도 官 憲 에 게 비밀이 탄로되지 아니한 것이다. 즉 이것은 동포가 얼마나 祖 國 의 光 復 을 갈망하며 염원한 것 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은 당시에 있어서 비록 獨 立 의 실현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 효과에 있어서는 一 九 一 年 의 소위 合 倂 을 힘있게 부인하고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세계에 향하 여 强 硬 하게 주장하는 국민의 의사표시가 되었다. 그리하여 運 動 勃 發 이후에 세계각국의 통신원 들은 上 海, 北 京, 日 本 等 地 로부터 속속히 來 朝 하여 여러가지 상황을 널리 세계에 보도하였다. 그러므로 一 九 四 五 年 八 月 十 五 日 의 해방을 사다리의 최종계단이라 하면 이 一 九 一 九 年 三 月 一 日 의 운동은 확실히 그 第 一 階 段 이 되는 것이니 八 一 五 의 해방을 결과라 하면 이 三 一 運 動 은 그 원인이 되는 것이다. 3. 漢 詩 1 首 李 承 晩 一 可 亭 前 月 (일가정에 비친달 빛) ( 註 = 一 可 亭 은 남강의 산정) 使 人 不 得 眠 (사람을 잠못 이루게 하는구나) 徘 徊 還 獨 坐 (거닐다 다시 홀로 앉아) 無 語 仰 靑 天 (말없이 푸른 하늘만 바라본다) ( 註 : 3.1운동의 동지이자 동아일보 제4대 사장을 역임한 후 오산학교( 五 山 學 校 )경영을 맡고 있는 정주( 定 州 )의 남강( 南 岡 李 昇 薰 )은 고하가 1926년 영어( 囹 圄 )의 몸이 된 기별을 전해 듣고 고하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하와이에 있는 우남( 雩 南 李 承 晩 )에게 편을 얻어 알렸다. 우남은 다음의 한시 ( 漢 詩 )를 써서 인편으로 남강에게 보내온 것을 남강은 이를 족자로 만들어서 고하를 위로하기 위 하여 보내왔다. 4. 東 亞 日 報 에 대한 不 平 < 開 闢 > (1923년 7월호) 檗 啞 子 東 亞 日 報 壹 千 號 를 自 祝 하기 爲 하여 天 下 에 廣 告 하고 論 文 을 募 集 하였으되 政 治 에 對 한 不 平,
58 敎 育 에 對 한 不 平 監 獄 에, 警 察 에, 專 賣 에 對 한 萬 般 不 平 을 忌 憚 없이 陳 述 하라고 天 下 에 公 筆 을 求 하였었다. 그러나 크게 遺 憾 되는 것은 東 亞 日 報 自 身 에 대한 不 平 이란 論 文 을 公 募 한다 함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한 勇 氣 가 없었던지 그러한 생각이 없었던지 그 新 聞 에 대하여 天 下 에서 不 平 이 없으리라 하여서 그것을 빼어버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局 外 者 로 보아서는 그 모든 不 平 中 에 東 亞 日 報 에 대한 不 平 이 더욱 重 大 問 題 가 되지 아니할까 한다. 個 人 이고 會 社 或 은 法 人 이 處 世 하는 術 法 으로 自 己 의 過 失 은 自 訟 하려 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設 或 어떠한 機 會 에 그것이 暴 露 된다 하더라도 되도록 掩 蔽 하려는 것이 常 例 이다. ( 中 略 ) 필자는 東 亞 日 報 의 創 刊 以 來 로 始 終 如 一 한 愛 讀 者 의 一 人 으로 元 來 怨 恩 이 없는 故 로 此 를 批 判 할 時 에 오직 公 平 한 態 度 를 嚴 守 하기로 自 誓 한다. 東 亞 日 報 가 最 初 發 生 할 時 에 決 코 金 錢 이나 謀 略 으로만 成 立 된 것이 아니라 三 一 運 動 의 萬 歲 聲 이 全 國 을 振 動 하여 五 萬 人 의 大 衆 이 獄 中 에서 呻 吟 할 때에 獄 外 에 殘 存 한 全 道 의 憂 國 志 士 가 相 呼 하여 不 日 에 此 를 成 한 것이나 그 由 來 를 推 究 하면 五 萬 體 의 血 과 淚 가 凝 結 되고 鄕 村 의 匹 夫 匹 婦 까지 聲 援 을 다하여 實 로 偉 大 한 基 礎 를 確 立 케 한 것이오 決 코 偶 然 한 八 字 로 橫 財 한 金 錢 이나 狡 詐 한 謀 略 으로 成 立 된 것이 아니었다. 現 今 東 亞 日 報 의 所 謂 幹 部 라는 것을 解 剖 하여 보라. 人 格 이 있어 그 地 位 에 自 薦 한 것이냐, 衆 望 에 依 하여 公 選 된 것이냐, 또는 學 識 이 있어 文 章 을 잘하는 까닭이냐 하면 그 三 者 의 一 個 에도 該 當 한 所 以 를 發 見 할 수 없다. 다만 顯 著 히 識 別 할 수 있는 事 實 은 돈좀 많이 낸 關 係 者 의 印 刷 所 가 되었을 뿐이다. 新 聞 은 天 下 의 公 器 이다. 輿 論 의 指 針 이다. 마땅히 天 下 의 公 評 에 依 하여 人 物 을 全 道 에서 廣 求 하여 大 衆 의 公 僕 이 되게 할 것이 아닌가. 東 亞 日 報 의 所 爲 가 穩 當 한 일이라면 一 個 人 이 出 資 하 여 新 聞 을 經 營 하게 될 때는 能 力 無 能 力 을 不 計 하고 自 己 의 家 族 만으로 幹 部 로 組 織 하고 編 輯 도 하게 될 것이다. 金 錢 으로써 人 造 地 位 를 買 收 하여 名 刺 의 肩 書 도 圖 得 하고 利 益 도 收 入 되게 하고 名 聲 도 虛 傳 하려거든 高 利 貸 金 業 을 하든지 요즘 흔히 하는 水 利 組 合 을 하여보는 것이 罪 가 오히 려 적을 것이다. 東 亞 日 報 社 가 商 法 에 依 한 株 式 會 社 인 故 로 株 主 의 公 薦 에 隨 하여 幹 部 가 된 것이라고 卑 劣 한 辯 明 을 하려면 더욱 그 心 事 를 推 知 키 容 易 하다. 一 株 에 一 個 의 議 決 權 이 있는 東 亞 日 報 는 다른 營 利 會 社 와 다름없이 大 株 主 의 三, 四 個 人 이 結 合 하면 如 何 한 無 理 라도 通 過 되는 것이다. 高 利 貸 金 의 代 表 營 業 主 를 公 薦 함에는 必 要 한 方 式 일는지 모르지만 萬 千 人 의 公 器 를 運 用 함에는 至 極 히 不 公 平 한 結 果 를 招 來 하게 된다. ( 中 略 ) 安 昌 男 君 의 飛 行 機 事 件 은 이미 過 去 에 屬 한 일이라 구태여 그 過 失 을 追 究 하자 함은 아니나 아 직도 그 奇 怪 한 事 件 이 落 着 되지 못하여 그 地 方 黨 의 鐵 甲 같은 堅 實 한 幹 部 에서도 意 見 이 相 衝 되 어 四, 五 日 間 을 連 續 密 議 한 結 果 畢 竟 罪 가 없는 一 般 株 主 에게 損 害 負 擔 케 하였다 하니 그 模 暴 한 處 斷 은 可 驚 可 畏 하겠다. ( 中 略 ) 東 亞 日 報 의 記 事 를 보면 新 聞 全 面 이 安 昌 男 투성이이다. 少 年 時 代 의 安 君 의 事 蹟 으로부터 어 떤 料 理 집에서 妓 生 에게 귀염받던 일까지 歷 歷 히 記 載 하기로 二 週 間 을 하였으니 世 事 多 端 한 此 時 에 二 週 間 의 다른 重 要 한 事 件 을 沒 却 하고 安 昌 男 의 活 動 寫 眞 만 充 實 히 하였으니 이것으로만 判 斷 하더라도 東 亞 日 報 라는 것을 少 數 者 가 我 物 視 하여 傍 若 無 人 한 態 度 로 私 的 行 爲 를 取 한 것이 다. 이 奇 怪 한 心 事 로써 後 援 한 費 用 이 七 千 圓 以 上 이 되었었다. 世 上 사람이란 比 較 的 公 平 한 判 斷 을 하는 模 樣 이라. 新 聞 紙 上 에 姓 名 을 列 擧 하는 맛에 飛 行 後 援 會 란 것에 署 名 은 하였으나 필경 돈은 五 百 圓 外 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當 初 의 豫 算 인 즉 後 援 會 를 組 織 하여 限 貳 萬 圓 收 入 되면 費 用 을 除 하고 飛 行 機 一 臺 를 安 君 에게 사서 주겠다는 自 信 이 있었던 까닭에 重 役 會 議 도 經 由 하지 아니하고 七 千 餘 圓 의 費 用 을 支 出 하였다
59 今 日 을 當 하여 此 를 充 當 할 길은 둘이 있을 뿐이라. 誤 算 의 責 任 者 인 當 事 者 가 此 를 辦 出 하든 지 株 式 會 社 東 亞 日 報 의 負 擔 에 歸 케 하든지 할 것이다. 그러나 株 式 會 社 에 出 資 한 株 主 는 모두 八 朔 童 이가 아니어든 法 理 上 으로 보든지 德 義 上 으로 보든지 穩 當 치 못한 此 事 件 에 七 千 圓 을 擔 當 할 理 가 萬 無 하다. 此 事 를 責 任 지고 處 斷 한 勇 敢 하고 富 饒 한 最 高 幹 部 가 自 辨 할 줄 確 信 하나 아 직도 結 末 되지 못하여 祕 密 會 議 中 에서 甲 可 乙 否 한다 하니 此 를 如 何 히 處 決 하여 世 上 에 出 現 케 할는지 實 로 可 觀 할 구경거리다. 金 雲 養 의 社 會 葬 問 題 로 萎 縮 되었던 東 亞 日 報 가 金 東 成 君 의 新 聞 記 者 大 會 의 副 議 長 當 選 에 得 意 하여 그김에 在 外 同 胞 慰 安 會 作 成 한지 于 今 三 年 이라 昨 年 十 月 內 에 慰 問 講 演 을 畢 할 때에 벌 써 김빠진 麥 酒 와 같이 時 期 가 尙 晩 하였다. 昨 夏 에 南 北 滿 洲 西 伯 里 亞 에서 大 飢 饉 을 當 하여 朝 鮮 사람의 生 活 이 참담하였을 때에 우선 應 急 方 案 으로 各 處 에서 救 濟 를 要 望 하였었다. 東 亞 日 報 가 在 外 同 胞 慰 問 會 란 大 看 板 을 高 掛 할 때에 멋도 모르고 海 外 에 있는 同 胞 들을 自 己 네 困 窮 한 處 地 를 思 하고 하루라도 速 히 成 就 되어 在 外 子 弟 敎 育 費 의 一 部 를 捐 助 케 하였으면 하고 실로 多 大 한 囑 望 을 하였었다. 在 內 同 胞 는 한갖 在 外 同 胞 의 慘 狀 을 同 情 하여 東 亞 日 報 의 義 擧 에 疾 走 하여 全 國 人 士 의 貧 乏 한 주머니를 털어 分 分 粒 粒 히 모은 것이 三 萬 餘 圓 에 至 하였으니 東 亞 日 報 가 적으나 誠 意 가 있다 면 이를 速 히 整 理 하여 生 命 이 朝 夕 에 臨 迫 한 在 外 同 胞 를 잠시라도 慰 安 케 함이 全 道 의 義 捐 者 의 本 意 요, 東 亞 日 報 의 道 理 가 아닌가. 支 局 의 橫 領 挾 雜 에 放 任 하여 있다가 浪 費 하였는지 아직도 整 理 할 時 日 이 杳 然 하니 義 捐 者 도 瞞 著 한 것이어니와 被 義 捐 者 卽 在 外 同 胞 를 무슨 面 目 으로 對 하려는가? 이 모든 罪 惡 과 過 失 을 알고도 思 量 있는 世 上 사람이 짐짓 沈 黙 을 嚴 守 한 것은 東 亞 日 報 自 體 를 傷 할 念 慮 不 無 하고 我 朝 鮮 人 의 內 訌 으로 到 處 에서 諸 般 事 業 이 朝 鮮 사람 自 手 로 絶 滅 케 한 前 例 가 許 多 하므로 스스로 退 盡 할 것을 苦 待 하였었다. 보다가 볼 수가 없고 참다가 참을 수가 없어 危 言 苦 辭 를 進 呈 하게 되었으니 東 亞 日 報 의 讀 者 는 東 亞 日 報 의 株 主 는 東 亞 日 報 를 監 視 하여 最 初 創 刊 時 本 領 으로 還 元 케 함을 至 望 하노라. ( K.) 5. 동방의 빛이여, 너의 이름은 한국이다 <동아일보> ( ) 타 고 르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촉( 燈 燭 )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이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엔
60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6. 나만이 아는 祕 密 -- 古 下 宋 鎭 禹 氏 의 두가지 密 令 < 眞 相 > (1959년 9월호) 徐 範 錫 <첫번째 密 令 > 駐 日 中 國 公 使 汪 榮 寶 씨에게 준 비밀쪽지 만보산사건! 이것은 일본의 간교한 수단으로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만주에 있던 한국 인 농민들과 중국인 농민들에게 싸움을 붙여 그것을 핑계로 야망하던 대륙침략의 발판을 튼튼히 하려고 배후에서 조정하였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음흉했던 일본 - 때는 1931년 봄이었다. 사건이 발생했던 만보산은 장춘현에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사건이 일어나자 이것을 국내에 선 동적으로 보도시키기 위하여 갖은 수단을 다했다. 이용가치가 가장 있는 신문은 민족지인 동아일 보와 조선일보였다. 이 두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케 하여 국내 한국민들을 자극시켜 한국인과 중국인간의 반목을 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형세에 그들 일본에게는 다행히도 長 春 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두 지국이 다 있었 는데 그 지국장이라는 자가 일본관헌에 아부하는 작자였다. 金 利 三 -- 이것이 그의 이름인데 金 利 三 은 평소부터 일본 영사관에서까지 적극적인 후원을 받 고 있는 터라 그들의 노리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일본이 시키는 대로 사건을 침소봉대 하여 본사에 기사를 보냈다. 그러나 동아일보에서는 사건 자체가 중대함을 직감하고 어디까지나 신중을 기하는 뜻에서 우선 만보산사건이 발생하였다는 정도로 보도하고 자세한 것은 현지에 특 파원을 파견하여 취재하기로 하였다. 한편 조선일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대사건이라고 호외까지 발간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되었으니 실로 일본의 흉계는 예정대로 척척 들어맞게 되었다. 만주에 있는 한 중 농민들 사이는 계속해서 험악해져 갔다. 국내 민심도 점차 동요되었다. 만주 에 있는 동포들이 중국관민에게 부당한 박해를 받는다니 이것이 될 말이냐? 라는 것이었다. 흥분된 민심은 그대로 가라앉지를 못하였다. 급기야는 새로운 사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즉 平 壤 과 仁 川 을 비롯한 여러 지방에서 만주 동포들의 분풀이를 한다고 소리 높이 외치면서 중국인들 을 집단폭행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 순간 일본의 침략괴수들은 회심의 웃음을 짓고 있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국내에서 중국인들 이 입은 피해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또한 중국 당국에서 그저 방관만 하고 있을 리가 만무 했다. 드디어는 그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주일공사 汪 榮 寶 씨가 국민정부의 명으로 내한한다는 소문까지 떠돌게 되었었는데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나는 그때 동아일보의 국경특파원으로( 滿 洲 의 安 東 과 新 義 州 일대) 근무하고 있었다. 하루는 사 장인 古 下 宋 鎭 禹 씨로부터 속히 본사에 올라오라는 호출이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사전에 말하지 않으므로 퍽이나 궁금한 노릇이었으나 여하간에 그날 밤 기차편으로 상경하였다. 나는 서울역에 도착하는 바로 그 길로 신문사에 직행했다. 여러 선배와 동료들을 오래간만에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웠으나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사장실로 들어갔다
61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宋 鎭 禹 씨는 혼자 있었다. 그는 나의 귀사했다는 인사를 받을 뿐 아 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자에 깊이 기대어 눈을 감은 채 무엇을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순간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저분이 원거리에 있는 나를 불러 올라오게 하고서는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까?) 이렇게 혼자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뜩 한다는 말이 천만 뜻밖의 것이었다. 우리 신문은 정부행세까지 해야겠어! 어떻게 대답을 하였으면 좋을지 모를 말이었다. 잠시 후에 주일중국공사 汪 榮 寶 씨가 온다지? 예, 옵니다 폭행사건 조사를 온다니 그에게 꼭 전할 말이 있어. 徐 군이 좀 해주어야겠네-- 이번 사건은 한국인들의 본의가 아니라 일제의 한 중간에 이간을 붙이려는 정략하에 일부 한국 사람들을 선동한 것이라는 내용을 汪 씨에게 전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글쎄요 라고 대답하였다. 전혀 예기하지 않았던 지시이며 또한 어떻게 하라는 구체적인 설명도 하지 않 았었다. 그저 어떠한 수단으로든지 국내 중국인에 대한 폭행사건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본심이 아 니라는 것을 汪 씨에게 알려 주어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중대한 지시를 받기는 하였지 만 그 방도가 막연하였다. 어떻게 하면 일본 관헌에게 발각되지 않고 알려줄 수 있을 것인가? 얼 마 동안을 곰곰이 궁리하다가 다음날이면 釜 山 에 도착할 汪 공사를 수행하기 위하여 좌우간 서울 역을 출발하였다. 갈 때에 글로 쓴 쪽지를 미리 마련하였다. 만약 요행히 일경이 없는 틈을 이용할 기회가 생긴 다 하더라도 말로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먼저번과 같은 말의 내용을 엷은 양지에 써서 그것을 담배처럼 말아서 간직하였던 것이다. 釜 山 에 내려가보니 일본 관헌의 감시는 상상하던 것보다도 더욱 엄격했다. 일본 관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까이 할 틈이란 도저히 없었다. 차중에서도 기회가 오기를 초조히 기다렸으나 모 든 것이 허사였다. 기차는 서울에 도착하고 다시 新 義 州 에 도착할 때까지도 기회를 포착할 수가 없었다. 중국 조사단 일행이 신의주에서 유숙한 곳은 2층에 자리잡은 철도호텔이었다. 그들은 여기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사건을 조사하였던 것인데 국경 도시라 그러했던지 이번에는 정복을 한 관헌까 지 주위를 빙빙 도는 것이었다. 식당 복도 회석 기타 汪 씨가 나돌아다닐 때이면 항상 기회를 노 리었으나 틈이 없었다. 마음은 더욱 초조했다. 宋 鎭 禹 씨는 나를 믿고 시킨 일인데 이 일을 실패한다면 어떻게 하겠는 가? 그들 일행이 新 義 州 에서 일을 마치고 서울쪽으로 되돌아 갈 때 나는 (끝내 실패하고 마는구 나 )라고 낙심하였다. 그러나 기회는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일행을 태운 기차가 바로 평북 定 州 를 지났을 무렵이었 다. 그 때에 기회를 보느라고 汪 공사가 탄 외교관 전용특별실 옆을 (당시 특별실에는 日 警 도 들어 가지 못하였다) 지나다가 보니 어찌된 일인지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각도 주저할 수가 없었다. 무턱대고 문을 노크하였다. 또한 안에서의 회답을 기다릴 여 가도 없었다.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섰다. 들어서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였는데 汪 씨는 벌써 내가 기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의주에서 가졌던 기자회견 때에도 만나본 일이 있 거니와 그 보다도 나는 그의 앞에서는 항시 동아일보기자라는 것을 알도록 행동을 취했던 것이 다. 특별실에는 汪 공사외에 수행원 한사람뿐이었다. 기회는 더욱 좋았었다. 호주머니에서 준비했던 종이 쪽지를 내밀었다
62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 종이쪽지에 적혀 있습니다 라고 다급하게 말하고 묵례를 하자 그도 알았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면서 묵례를 하는 것이었다. 말로는 긴 시간 같지만 불과 1, 2분의 순간이었다. 밖에 나와 보니 다행히도 아무도 없었다. 나는 바쁜 걸음으로 특별실과의 거리를 멀리 하였다. 이때까지의 긴장이 일시에 풀려지자 갑자 기 온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잔등에서는 땀이 비오듯이 흘러 내렸다. 그후 汪 榮 寶 씨는 나에게 친필로 된 족자 한폭을 보내 왔었다. 나는 이것을 귀중히 간직하고 있 다가 6 25사변 당시에 분실하였다. 그때의 허전한 마음 무엇에 비길 데가 없었다. 그렇지만 인연깊은 이 족자는 다시 찾게 되었다 직후였다. 우연한 기회에 동대문 시장을 지나가는데 누가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누굴까? 하고 뒤를 돌아보았더니 고서화상( 古 書 畵 商 )을 하는 李 相 喆 씨였다. 중국인 글씨인 고서 가 하나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기증받은 사람의 이름이 나의 이름과 한자도 틀리지 않으니 한번 보라는 것이었다. 순간 혹시나 하고 가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것이 바로 몇달전에 분실되었던 문제의 족자였다. 나는 지금도 汪 榮 寶 씨가 보내준 족자를 보관하고 있다. <두번째 密 令 > 國 際 聯 盟 中 國 代 表 에게 준 비밀쪽지 릿튼경을 단장으로 한 國 際 聯 盟 滿 洲 現 地 調 査 委 員 團 이 奉 天 에 도착한 것은 萬 寶 山 사건이 발생 한지 약 반년후였다. 萬 寶 山 사건 후부터 일본은 허울좋게도 만주에 있는 한국인들을 보호한다는 구실하에 만주의 각지방에 무장군을 주둔시켰었다. 이렇게 하여 제반 침략준비를 끝내게 되자 이번에는 정말 엉뚱한 사건을 날조하였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일본은 그 전부터 南 滿 洲 철도 관할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 한가닥을 폭파시켰 던 것이다. 실지로 폭파시킨 것은 중국군인들로 가장한 일본이 돈으로 매수한 중국인 쿠리 들이었는데 그 들은 중국군인들이 일본재산을 침해하였다고 트집잡아 수많은 군인들을 투입하여 순식간에 전 만 주를 섭권하여 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1931년 9월 18일에 발생한 柳 條 構 사건 즉 滿 洲 사건 즉 滿 洲 사변의 발단이었다. 한편 억울한 침략을 당하게 된 중국은 가만히 있을리 만무했다. 이 문제를 국제연맹에 호소하여 이사회에서 일본군의 만주철병 권고안을 가결하였고 11월 16 일에는 國 際 聯 盟 滿 洲 現 地 調 査 委 員 會 를 설치하고 그 실정을 파악하고자 릿튼경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만주로 파견하였던 것이다. 이럴 즈음 동아일보 奉 天 특파원으로 가있던 나는 또다시 귀국 상경하라는 宋 鎭 禹 사장의 명령을 받았다. 이번에도 그 영문을 전혀 몰랐다. 그당시 나는 특파원으로서 취재는 안하고 놀러만 다닌 다는 중상모략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러므로 혹시 나에게 무슨 주의라도 시키려고 부르는 것이 아 닐까? 라고 의심도 하여 보았다. 영문을 모른 채 부랴부랴 여장을 갖추고 본사로 돌아오니 宋 鎭 禹 사장은 마침 春 園 李 光 洙 씨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언제 왔오? 무뚝뚝한 표정으로 (본래부터 그러함)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막 오는 길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더니 李 光 洙 씨는 사장과 나는 무슨 비밀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지 곧 자 리에서 일어났었다. 방안에 단 두사람만이 있게 되자 그는 얼굴에 웃음을 피우면서 나의 얼굴을 잠시 바라다보더니
63 奉 天 에 조사단이 와 있지! 예, 와있습니다. 가끔 만나나? 공식회견 이외에는 도무지 기회가 없습니다. 조사단 관계 보도는 관동군 신문보도반에서 공식 적으로 발표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이렇게 대답하던 나는 순간 내가 취재에 불성실했다고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혹은 잠시 후에 일소되었다. 또한번 수고해야 하겠는데 잘못하면 큰일 나! 조사단 중국대표로 와 있는 외교부장 顧 維 均 씨 에게 먼저번 汪 榮 寶 씨에게 하듯이 우리의 의사를 전달할 수 없을까? 이와 같은 말을 들은 나는 대뜸 그 사명이 무엇이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만주를 침략한 일본은 만주에 있는 한국인들이 자기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본군을 만주에 주둔케 하여 달 라는 진정서를 제출한 것처럼 허위조작을 하였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顧 대표에게 전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만주에 있는 한국인들의 진정서는 日 本 관헌이 허위조작한 것으로서 사실은 만주 에 있는 한국인들은 그 진정서 내용과는 정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중국대표 顧 維 均 씨에 게 전하라는 것이었다. 얼마동안의 면담후 밖으로 나온 나는 무척 어려운 일임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누구에게 그 방 법을 묻거나 조력을 요청할 수는 없었다. 이와같은 행동은 宋 鎭 禹 사장과 나만이 간직해야 할 비 밀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명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완수해야 하였다. 宋 사장은 그와같은 중대한 사명을 나를 신임하였기에 맡기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사명을 맡고 보니 조금이라도 서울서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그 이튿날 곧 奉 天 으로 되돌아가 서 일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국제연합 만주현지조사단이 묵은 奉 天 에서 가장 큰 大 和 호텔의 제반 분위기를 내사하였다. 그 랬더니 그 첫날에 대뜸 실망을 느끼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奉 天 에서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있었기에 大 和 호텔의 내용에 관해서는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돌아와 보니 이때까지 보지 못하던 보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전 부터 알고 지내던 종업원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긴장된 표정을 지으면서 좀처럼 말 하려고 하지 않았다. 얼른 말하지 않는 눈치로 보아서 더욱 의심나는 일이었다. 사유를 알아내기 위해 그를 달래기 시작하였다. 너와 나와는 그러한 처지가 아닌데 그럴 것이 없지 않느냐고 반 윽박다짐으로 캐어물었더니 자기가 말한 것에 관하여 비밀을 지켜줄 것을 되풀이하면서 사연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입을 통하여 비로소 알게 된 것인데 새로 들어온 보이들은 전부가 일본의 첩보원이라는 것이었다. 현역 첩보장교나 하사관 중에서 행동이 민첩하고 영어를 잘 하는 자들을 엄선한 후 그 들에게 사복을 입혀 조사단이 유숙중인 大 和 호텔에 배치하여 보이행세를 시켰었다. 일본은 자기들의 침략행위가 조사단에 발각될까봐 무척 두려워 했었다. 그리하여 조사단원이 외부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극력 감시하였다. 관동군 특무대원들이 눈을 부릅뜨고 항상 조사단원 의 주위를 감시하고 있는데 어느 누가 감히 그들에게 접근하거나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할 수 있었겠는가? 호텔에서의 감시는 더욱 엄했다. 보이로 변장한 첩보원들은 의심나는 사람이 호텔에 들어서면 시치미를 떼고 미행하기도 하고 또한 다른 보이들에게 그 사람을 주의하라는 것같이 구석진 곳에 서 귀속말을 주고 받곤하였다. 감시가 이와같이 삼엄한데 어떻게 하면 中 國 대표 顧 維 均 씨를 비밀리에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다행히 신문기자여서 비록 감시는 받았으나 호텔의 복도를 마음대로 왕래할 수는 있었다. 그러
64 다가 복도에서 조사단장인 릿튼경이나 중국대표 顧 維 均 씨를 만날 기회는 각각 한두번 있기는 하 였으나 보이로 변장한 관동군 첩보원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판국에서 어찌 하는 도리가 없었 다. 기회를 엿보는 사이에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그렇지만 그들의 감시는 여전히 심하여 좀처럼 틈이 없었다. 3일째 되던 날 -- 나는 이른 아침에 아침밥도 먹지 않고 호텔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 었다. 한낮과 밤이면 비교적 한산하였다. 또한 지난 이틀동안 살펴본 결과로 보아서 아침이면 감 시를 다소 등한히 하는 경향이 있음을 눈치채게 되었던 것이다. 대표들의 방은 3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로 3층에 올라오니 예상한대로 왕래하는 사람들이 드 물었다. 물론 감시원들은 들락날락 하였지만 나는 주저없이 顧 維 均 씨 방앞 복도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동태를 살피었다. 그러다가도 감시원들이 가까이오면 신문을 보거나 취재한 것을 메 모하는 시늉을 하였다. 어떤 놈들은 나의 행동이 아무래도 의심하였던지 바싹 곁으로 다가오기도 하였는데 나는 그럴 때일수록 태연을 가장코 그들에게 웃음을 던졌다. 그러던중 내가 호텔에 도 착한지 삼십분가량 경과하였을 무렵이었다. 돌연 도어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顧 維 均 씨 방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순 간 나는 긴장되었다. 주위를 살펴보았다. 일은 제대로 되기 마련이었던지 다행히 감시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顧 씨는 내가 앉아 있는 앞을 뚜벅뚜벅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무턱대고 뒤를 따 랐다. 따라가노라면 무슨 기회가 생기겠지 하고 그는 때마침 4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었다. 또다시 주위를 살펴보니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하여 나도 엘리베이터에 뛰어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세 사람밖에 없었다. 顧 維 均 씨와 나 그리고 중국인인 엘리베이터 운전 사 뿐이었다. 두번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낮은 소리로 먼저 동아일보의 특파원임을 밝혔다. 그랬 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다음에 미리 준비한 쪽지를 주었더니 顧 씨 는 외교관인지라 그러한 눈치가 빨랐었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하면서 양복저고리 윗 호주 머니에 재빨리 넣고 있었다. 쪽지에 씌어진 내용을 대충 설명하려고 하였으나 엘리베이터는 벌써 1층에 닿아 문이 열리고 있었다. 하는 수없이 묵례만 하고 헤어졌다. 7. 聲 明 書 < 近 代 韓 國 名 論 說 集 > (1979년) 李 忠 武 公 遺 蹟 保 存 會 우리는 李 忠 武 公 의 유적을 영구보존하기 위하야 이제 이 모듬을 발기하는 것이다. 묘소, 祠 廟, 位 土 로부터 친필, 일기, 상시 쓰시던 器 物 미세한 것까지도 어느 것이나 다 민족적으로 寶 重 할 것 은 이제 긴 말을 부칠 필요도 없거니와 근일 신문에 보도되는 바를 보건대 기약을 정한배 없이 勤 促 을 받은배 없이 時 로 붓고 날로 커지는 성금은 참으로 忠 武 의 當 日 至 誠 을 느끼웁게 映 寫 하는 것 같다. 처음 걱정하던 問 題 로 말하면 이렇다 이 어른의 祠 墓 守 護 와 香 火 가 없이 황송스럽게 되 어 一 區 荒 凉 으로써 우리의 心 面 을 미루어 볼 수 있지 아니할까 하였던 것인데 이제 저같은 열성 으로써 차차 처음 걱정을 놓을만큼 되었으나 다시 또 걱정할바이 있으니 목전의 保 存 을 넘어 만 세의 保 存 을 기하지 아니할 수 없으며 忠 武 의 祠 墓 이외 일체를 보존하는 문제가 지금으로는 忠 武
65 한분의 大 功, 盛 熱 을 받드는 것뿐 아니라 이 모든 유적에 전민중의 그칠줄 모르는 열성이 圍 繞 한 것이 더 한층 寶 重 에 寶 重 을 더하야 놓았나니 우리로서 더욱이 그 永 保 를 걱정하지 아니할 수 없 다. 그런즉 苟 安 에 그칠 수 없고 草 率 히 마말을 수 없고 肅 條 하던 前 狀 을 그대로 뒤에 끼칠 수가 없다. 債 額 辨 濟 의 걱정은 피어오르는 열성이 爐 火 에 燒 爎 될 것으로 본다. 忠 武 유적을 영구히 보존하 고 장엄히 보존하야 法 人 의 조직으로써 祠 墓 는 祠 墓 다웁게 構 飾 하고 유물은 유물다웁게 陳 列 하야 밧둘매 시설이 있고 두매 館 宇 가 있어야 할 것도 또한 우리의 淺 誠 이 끗끗내 大 方 의 阿 督 하심을 받을지라 所 需 는 圓 으로 貳 萬 이상을 算 하나 우리는 성금을 구한다 못하며 회원을 모든다 하지 않 는다. 삼가 기다림에 그칠뿐이다. 오즉 이 어른의 유적이 朝 鮮 에 있어 거대한 光 輝 인 동시에 이제 全 朝 鮮 의 열성까지 아울러 뭉치어 이 古 今 希 有 의 故 事 를 이루운 것을 한걸음 더 나가 자손만대 에 기리기리 燦 爛 炳 期 할 기초의 鞏 固 있어야 할 것을 互 期 하랴 한다. 昭 和 6년(1932년) 5월 26일 李 忠 武 公 遺 蹟 保 存 會 委 員 尹 致 昊 南 宮 薰 宋 鎭 禹 安 在 鴻 朴 勝 彬 兪 偵 兼 崔 奎 東 曺 晩 植 鄭 廣 朝 金 正 佑 金 炳 魯 鄭 寅 普 韓 龍 雲 尹 顯 泰 兪 鎭 泰 8. 三 大 新 聞 의 巨 頭 < 鐵 筆 > 月 旦 生 앞으로는 朝 鮮 의 民 間 言 論 界 가 얼마나 많은 발전을 보일는지는 아직 의문이나 現 今 의 情 勢 로 보아서는 金 屬 으로 치면 展 性 과 延 性 을 함께 가지지 못한 朝 鮮 의 言 論 界 이나 朝 鮮 東 亞 中 外 의 세 新 聞 이 朝 鮮 言 論 界 의 全 的 이며 따라서 覇 者 들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三 社 共 히 朝 鮮 人 大 衆 의 表 現 機 關 으로 自 處 하고 各 各 自 稱 十 萬 의 讀 者 를 擁 하여 朝 鮮 의 輿 論 은 一 般 에게 紹 介 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代 辯 도 한다. 그리고 그들 當 路 者 의 眼 中 에서나 念 頭 에서 언제나 朝 鮮 이 사라지지 아니하는 것도 自 己 네의 辯 明 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 스스로도 能 히 짐작하는 바이다. 이리하여 이 3 大 新 聞 은 한 저널리스트 로서 存 在 하는 그 以 外 의 意 味 깊은 役 割 을 맡아가지고 現 實 의 朝 鮮 에서 存 在 해 있는 것이다. 이런 意 味 에서 우리는 이 세 新 聞 을 一 種 合 法 (?) 的 이나마 運 動 團 體 로 본다고 하여도 妄 論 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우리 2천3백만 民 衆 의 表 現 機 關 이며 代 辯 者 이며 報 道 와 指 導 를 兼 해 맡은 이 세 機 關 은 어떠한 사람들의 팔뚝을 빌어 키( 舵 )를 돌리는가? 를 알아둠도 매우 緊 要 한 일일 것이다. - 女 子 라면 喪 夫 할 宋 鎭 禹 氏 - 停 刊 中 에 孤 獨 한 歲 月 을 보내고 있는 東 亞 日 報 社 長 宋 鎭 禹 氏 부터 보자. 氏 는 얼른 보면 內 侍 같 이 되고 어깨가 올라가지 아니한 것을 보면 氏 가 過 去 에 大 闕 出 入 이 없었던 것만은 누구나 잘 諒 解 할 것이다. 그러나 그 平 面 이라도 過 度 히 平 面 的 으로 된 氏 의 얼굴과 女 子 로 되었던들 喪 夫 할 程 度 로 쑥 나온 兩 頸 骨 그리고 離 婁 의 明 을 가진 사람이 顯 微 鏡 쓴 후에 족집개를 들고 대들 어도 찾아보기 어려운 수염 등으로 보면 推 定 하기는 어려울 것이나 그 넓직한 이마( 額 ) 軒 昻 한 氣 像 거기에서 氏 獨 特 한 氣 魄 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氏 의 넓직한 이마와 軒 昻 한 氣 品 을 看 破 하지 못하고 다른 點 만을 보아 氏 를 속속들이
66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을 몰라보는 데도 分 數 가 없는 사람일 것이다. 氏 는 얼굴의 大 體 로 보면 外 華 의 人 은 아니다. 그대신 內 實 의 人 이다. 韓 日 合 邦 以 後 世 事 가 自 己 의 뜻 과 어글어지매 몸을 庠 序 에 投 하여 白 墨 가루를 마시며 聰 俊 子 弟 敎 養 에 一 念 이 孜 孜 하였으되 恒 常 脫 潁 할 機 會 를 보아 오다가 己 未 -- 一 過 한 후에 民 衆 의 움직이는 傾 向 이 前 과 다름을 보고는 脫 潁 할 時 機 가 다다랐음을 看 破 하고 慨 然 히 일어나니 그때의 氏 는 敎 壇 의 人, 學 究 의 士 를 벗어 나 運 動 의 策 士 가 되었었다. 그러다가 東 亞 日 報 가 第 一 期 創 刊 者 의 經 營 難 이란 함정에 들었음을 보고 다시 氏 는 平 素 에 交 分 이 두텁고 志 氣 가 相 合 하는 金 性 洙 氏 와 天 下 事 를 共 論 하다가 드디어 이것을 지키어 써 定 向 없 이 動 하는 民 衆 의 指 南 이 되기를 決 意 하고 나선 것이 十 年 未 滿 이나 그동안 朝 鮮 으로 하여금 言 論 을 理 解 하고 大 勢 에 合 流 케 하는 한편 또다시 東 亞 日 報 自 體 의 內 容 도 充 實 하여 宛 然 한개의 王 國 을 이루게 하였으니 氏 는 여태것 지나온 바로 보아 能 小 能 大 하며 大 勢 의 歸 趨 를 알아 써 將 來 의 겪을 바를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月 旦 子 의 보는 바로는 氏 는 政 治 家 라기 보다는 策 略 家 이다. 運 籌 帷 幄 의 謀 士 이다. 氏 自 身 으로서는 섭섭히 여길는지 모르지만 表 面 에 나설 政 治 家 로는 外 華 에 무게가 적고, 演 壇 에 올라 서 政 治 演 說 한마디 하기는 聲 量 이 적다. 그리고 氏 는 勿 論 惚 忙 한 社 務 와 其 他 여러가지로 精 神 을 너무 쓰는 탓이겠지만 健 忘 症 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氏 는 部 下 를 統 制 하는데 역시, 어떤 妙 方 을 가진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렇게 많은 部 下 중에서도 不 平 을 吐 하는 者 가 없는 것을 보면 果 然 氏 가 部 下 統 制 를 잘하는 모양인지 수염 한개 없는 氏 의 얼굴에 嬌 態 가 어떤 魅 力 을 가지고 部 下 를 겸제( 箝 制 )하는지 알기 어렵다.( 申 錫 兩, 安 熙 濟 記 事 는 省 略 ) 9. 東 亞 日 報 社 長 宋 鎭 禹 氏 面 影 < 彗 星 > 제1권 제1호 (1931년 3월호) 白 菱 花 洞 東 亞 日 報 舊 社 屋 -- 때는 午 後 2 時. 하루일이 가장 바쁜 時 間 이다. 編 輯 局 長 자리 암체어에 큼직한 軀 體 를 푹신 잠그고 한팔로 뺨을 고인채 例 에 依 하야 눈을 감고 午 睡 (?) 瞑 想 (?)을 하고 있던 宋 鎭 禹 氏 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눈을 번쩍 뜨고 바로 그 옆에 있는 社 會 部 를 바라본다. 午 後 2시니까 社 會 部 外 勤 記 者 도 다 들어왔다. 日 常 하는대로 나란히 앉은 高 永 翰 君 과 柳 志 永 君 도 雜 念 없이 原 稿 를 쓰고 있는 판이다. 그때에 宋 鎭 禹 가 넙죽한 목소리로 高 志 永 氏 - 하고 불러 놓았다. 이 서슬에 高 永 翰 志 永 兩 君 이 다같이 한꺼번에 네? 네? 대답을 하고 이 편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社 會 部 를 中 心 으로 웃음이 왁 터져나온다. 그때에 宋 鎭 禹 氏 가 高 永 翰 君 을 부르랴다가 高 志 永 氏 라고 했는지 柳 志 永 君 을 부르랴다가 高 志 永 氏 라고 했는지 그것은 모르겠으나 이것으로써 氏 가 日 常 생각 을 골똘히 하다가 뜻밖에 그러한 망발을 잘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A 社 員 이 설렁탕을 먹으면 自 己 도 설렁탕을 給 仕 더러 시키라고 해놓고 또다른 B 社 員 이 모리를
67 시키면 먼저 시킨 설렁탕은 잊어버리고서 모리를 시키라고 하고 等 等 絶 唱 이 많다. 氏 는 全 南 潭 陽 태생이다. 지금 事 業 에 있어 一 身 兩 面 이라고 할만한 金 性 洙 씨와 한가지로 日 本 으로 건너간 것이 略 20 年 前 인 듯하다(그때 下 觀 서 잘못 2 等 車 를 타고 車 掌 에게 혼이 나서 東 京 驛 (?)에 내려 人 力 車 三 等 타 기를 固 執 했다는 말도 有 名 한 逸 話 다) 東 京 서 明 大 法 科 를 마치고 歸 國 하여 金 性 洙 와 한가지로 그때 바로 閉 門 의 悲 運 에 빠진 中 央 學 校 를 引 繼 하여 己 未 事 件 以 前 까지 처음에는 學 監 으로 나중에는 校 長 으로 敎 育 事 業 에 從 事 하였다. 그때의 氏 는 지금의 활달하고 때가 벗은 政 治 家 的 人 物 임에 比 하야 다만 한 敎 育 者 요 先 生 님일 따름이었다. 氏 自 身 亦 是 學 生 들에게 나는 一 生 을 敎 育 家 로서 마치겠다 고 하였다. 그에 알맞게 -- 말하자 면 若 干 고릿하게 -- 試 險 問 題 를 塗 板 에 써 놓고 난로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果 然 졸음만 은 예나 지금이나 變 함이 없으나 己 未 運 動 을 劃 期 로 氏 는 堂 堂 히 政 略 家 로써 나서게 되었다. 辯 才 도 그 當 時 는 그다지 神 通 스럽든가 싶지 않다. 그 固 有 한 語 辟 와 사투리는 그대로 있으나 그리 각꼬-는 하며 꽉 쥐인 주먹으로 테이블을 땅 치고 눈을 한번 꿈벅 입을 움찟하고 聽 衆 을 내려보는 樣 은 우습기는 하나 웃음은 나오지 못하고 귀와 눈이 번쩍 띄이는 무엇인가가 있다. 己 未 以 後 氏 는 다시 金 性 洙 와 한가지로 東 亞 日 報 를 세우며 일을 하게 되었다. 金 性 洙 氏 의 말이 여러번 나오니 말이지 이 兩 氏 는 一 身 兩 面 이다. 무슨 일이든지 둘이서 같이 나선다. 그것은 마치 한쌍의 夫 婦 와도 같다. 勿 論 두 性 格 은 全 然 다른 點 이 많다. 일을 着 手 혹은 進 行 하는데 있어 金 氏 는 消 極 的 인데 反 하야 宋 氏 는 積 極 的 이다. 金 氏 는 若 干 性 이 急 한데 反 하야 宋 氏 는 뱃심이 나온다. 金 氏 는 돈을 모으고 宋 氏 는 돈을 쓴다. 金 氏 는 쪽을 맞추고 짝을 짓는데 反 하야 宋 氏 는 떼어놓고 벌려 놓는다. 金 氏 는 君 子 的 으로 얌전하며 살림꾼인데 反 하야 宋 氏 는 外 交 的 이요 水 滸 誌 式 이다. 金 氏 는 자자본하니 고요한데 反 하야 宋 氏 는 거칠고 왕뗑- 한다. 金 氏 는 君 子 的 으로 公 平 한데 反 하야 宋 氏 는 政 治 家 的 으로 多 少 黨 派 的 이다. 그러므로 그 手 下 의 사람 中 에 氏 가 한번 信 任 한 사람이면 그 杜 護 가 두터운 反 面 에 한 눈이 벗은 사람이면 포인트 로 以 下 떠 내려놓고 만다. 그것은 그렇다고 以 上 과 같이 宋 金 兩 氏 는 서로 反 對 되는 두 性 格 을 잘 綜 合 하여 가지고 오늘 날의 事 業 을 이룬 것이다. 그러므로 金 氏 가 없었으면 오늘날의 宋 氏 와 그 事 業 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것이요 宋 氏 가 없었 더라면 오늘날의 金 氏 와 그 事 業 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東 亞 日 報 는 初 創 期 인 花 洞 舊 社 屋 時 節 이 가장 어려웠던 때다. 따라서 그를 背 景 삼아 오늘날까지 이르는 宋 鎭 禹 氏 도 그 時 節 이 가장 어려운 고비였을 것이다. 編 輯 局 長 으로 社 長 으로 한번은 一 但 引 退 를 하였다가 다시 顧 問 으로 編 輯 局 長 으로 及 其 也 社 長 으로 -- 그리하는 동안에 新 聞 自 體 로도 아슬아슬한 경우를 많이 넘겼고 氏 도 어려운 재주를 많이 넘었 다. 筆 禍 事 件 으로 鐵 窓 에 들어간 것도 그때요 말썽많은 社 會 團 體 의 뭇 攻 擊 을 받던 때도 그때요 에게 시달림을 받던 때도 그때다. 이라니 우스운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는 部 下 를 데리고 어떠한 때는 피스톨까지 차고 온다. 마주 붙어 싸울 수도 없는 일이요, 그러자니 당하기가 창피하고 어쩔 수 없이 실컷 시달리고
68 나서 어떻게 쫓아보내고는 營 業 局 으로 쭉--오면서 當 時 營 業 局 長 (?)인 愼 구범 氏 더러 愼 구범씨 총 갖다놓으시요. 총 그 놈이 來 日 또 오면 내 그 놈을 쏘아 죽일테야 하며 분에 못이겨 하던 樣 은 實 地 로 아니본 사람말이지 아니 웃을 수가 없었다. 困 難 이 있었을 뿐 아니라 많은 誘 惑 도 있었다. 이것은 確 實 하다고 斷 言 하기는 어려우나 道 知 事 라는 미끼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困 難 과 難 關 을 디디고 넘어 한층두층 東 亞 日 報 의 基 礎 가 굳어짐에 따라 宋 氏 의 地 盤 도 든든하여지고 可 否 間 에 氏 의 定 體 도 또한 鮮 明 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新 社 屋 을 建 築 하고 다시 社 長 의 자리로 올라가 앉으면서부터이라 하겠다. 그러나 一 般 이 보기에는 宋 鎭 禹 氏 가 平 生 을 한 저널리스트로 보내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그리하기에는 氏 는 너무도 政 治 的 으로 頭 腦 가 생겨졌다. 언뜻 보기에는 둔한 것 같고 우물우물 하는 것도 같다. 손님을 앉혀놓고 혼자 졸기가 일쑤요 하이 하이 와다구시가 소징구데스 하는 한심한 日 語 로 外 交 는 하건만 어데를 가든지 발을 척 개 이고 앉었지 납짝 업드려 국궁하거나 반쯤 쪼그리고 앉거나 할 質 이 아니다. 이만큼 버틴다. 그리고 그만큼 밝게 觀 察 을 하며 그 觀 察 을 實 地 에 利 用 할 手 段 을 부린다. 勿 論 이것은 宋 鎭 禹 氏 가 現 在 디디고 서서 있는 바 背 景 인 그 情 勢 밑에서라는 前 提 로 두고 하 는 말이다. 그러므로 萬 一 그 背 景 이나 그 情 勢 를 善 으로 보지 아니하는 사람의 立 場 에 서서 論 한다하면 그동안까지 써온 中 宋 氏 의 公 的 生 活 에 대한 것은 全 部 否 認 할지 모를 것이다. 그보다 더 그 全 體 까지도 否 認 할지 모를 일이다. 且 說 氏 는 앞으로 政 治 的 舞 臺 가 許 與 된다면 그때에 비로소 氏 의 氏 다운 活 動 과 面 目 이 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東 亞 日 報 社 長 으로의 宋 鎭 禹 氏 는 그 앞날로 보아 아직도 潛 伏 期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氏 는 아직 42 歲. 年 齡 으로 보아도 지금으로부터가 한창 일을 할 때다. 아침마다 花 洞 自 宅 에서 人 力 車 에 몸을 싣고 例 의 例 대로 팔찌를 꽉 끼고 입도 꽉 다물고 눈을 꽉 감지 않으면 무슨 소린지 흥얼흥얼 하면서 社 로 향하야 出 勤 을 하고 있다. 그 큼직한 얼굴에 수염이 없는 것이 좀 섭섭하다. 몸은 比 較 的 퍽 건강한 편이요 政 客 답지 않게 술에는 弱 한 모양이다. 艶 史 를 조금만 썼으면 좋겠으나 先 生 님 꾸중하실까봐 그만둔다. 가장 信 任 하기는 朱 요한 薛 義 植 李 光 洙 氏. 말이 났으니 말이지 前 날 舊 社 屋 에서 생긴 이야기이다. 李 光 洙 가 病 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 代 理 겸 해서 그 夫 人 許 英 肅 氏 가 學 藝 部 일을 잠시 맡아본 일이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至 誠 으로 許 英 肅 씨를 불러놓고는 春 園 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이구 웬일인지 어제오늘 熱 이 더해요 엉? 그거 안됐군! 저 저 許 英 肅 씨를 春 園 한테서 隔 離 를 시켜야해 격리 이런 意 外 의 농을 하고 모두들 웃은 일이 있었다. 子 女 間 에 所 生 은 없다. 所 生 이 없다는 것보담 年 前 에 晩 得 으로 하나 얻은 애기를 앗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暴 言 多 謝 ) 10. 나의 八 人 觀 < 三 千 里 > 제4권 제4호 (총25호 )
69 黃 錫 雨 朝 鮮 의 人 物 中 에서 이미 完 成 된 權 威 者 를 골라내려면, 雄 安 昌 浩, 政 客 宋 鎭 禹, 事 業 家 金 性 洙, 家 金 翰, 雄 辯 家 朴 一 秉, 外 交 家 金 奎 植, 文 豪 李 光 洙, 好 人 物 安 在 鴻 ( 後 日 의 好 宰 相?) 等 이 될 것이다. 政 客 側 人 物 에는 申 錫 雨, 張 德 秀 君 등이 있으나 申 君 은 좀 더 긴 時 日 의 現 實 履 歷 을 가져 야 할 人 物 (그는 너무 빨리 隱 退 한 感 이 없지 않다)이며 張 德 秀 君 은 議 會 政 治 家 流 의 人 物 이나 學 界 로 向 해 가는 便 ( 充 實 한 政 治 學 者 로서)이 더 좋은 길일까 한다. 此 外 에 또 빼어놓지못할 人 物 로 는 崔 麟 이 있으나 그는 새 時 代 사람들의 信 賴 하는 支 持 를 받기에는 너무나 陰 險 하고 舊 式 人 物 인 듯싶다. 宋 鎭 禹 ( 觀 ) ( 前 略 ) 氏 는 理 論 家 는 아니다. 그는 謀 略 縱 橫 의 가장 活 動 的 인 政 客 이다. 朝 鮮 안의 人 物 로서는 政 治 家 로의 그럴듯한 素 質 이 第 一 豊 富 한 人 物 은 宋 氏 일 것이다. 그는 朝 鮮 안의 젊은 人 物 로서는 벌써 政 治 家 로의 及 第 點 以 上 을 突 破 한 人 物 이다. 그러나 宋 氏 는 그 政 客 으로의 性 格 이 너무나 動 的 인 것에 많은 失 敗 와 또는 그에 따르는 많은 是 非 가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앞날의 政 治 的 活 動 에 있 어서 風 雲 이 자못 잦을 것이다. 張 德 秀 君 과 같은 忠 實 함과 굳센 곳이 없는 點 이 그이의 큰 缺 點, 그러나 縱 人 御 人 之 術 에 있어 서야 張 君 之 比 가 아니다. 張 君 은 그 點 에 있어서는 宋 氏 의 발아래에 멀리 내려다보이는 純 眞 한 보이일 것이다. 11. 朝 鮮 新 聞 論 < 東 方 評 論 > (1932년 5월호) 漢 陽 學 人 現 下 朝 鮮 의 新 聞 은 一 大 危 機 에 逢 着 하고 있다. 지난 五 月 한달동안에 朝 鮮 中 央 兩 紙 는 畢 竟 休 刊 의 悲 運 을 안고 生 死 의 岐 路 에서 彷 徨 하게 되었으니 東 亞 홀로 굳은 盤 石 위에서 太 平 樂 을 울리고 있는 八 字 이다. 이로서 從 來 鼎 立 之 勢 를 形 成 하여 오던 朝 鮮 의 民 間 新 聞 界 는 巨 勢 의 暴 風 앞에서 戰 競 하게 되었다. 過 去 를 遡 古 하면 朝 鮮 의 新 聞 은 決 코 平 坦 한 길을 걸어왔다고 볼 수는 없다. 가시덤불 속에서 發 生 되고 成 長 되고 結 實 되었다. 結 實 그나마 변변한 것은 못되나 今 日 의 東 亞 朝 鮮 中 央 의 三 新 聞 이 朝 鮮 社 會 에 있어서 民 族 的 으로 重 要 한 使 命 을 띠운 機 關 임은 事 實 이다. 하여튼 以 上 의 三 新 聞 은 民 族 的 覺 醒 의 餘 勢 의 産 物 이다. 合 倂 以 前 에 漢 城 日 報, 獨 立 新 聞, 皇 城 新 聞, 帝 國 新 聞, 大 韓 每 日 申 報, 大 韓 民 報, 萬 歲 報 등이 簇 生 하여 當 時 기울어져가는 朝 鮮 의 運 命 을 얼싸안고 民 族 의 代 言 機 關 으로 自 任 하였던 것도 植 民 地 朝 鮮 에의 轉 化 와 함께 一 朝 에 潛 影 되어버려 朝 鮮 은 이 로써 輿 論 의 暗 黑 時 代 를 現 出 하더니 三 一 運 動 이후 十 餘 年 間 民 族 的 自 覺 의 産 物 로 東 亞 가 일 어나고 朝 鮮 이 革 新 의 面 目 을 세우고 時 代 - 中 外 - 中 央 의 經 路 를 밟은 現 在 의 中 央 이 復 興 되어 貧 弱 한 朝 鮮 新 聞 界 에서 角 逐 을 하여 온 것도 及 其 也 今 日 에 이르러서는 다시 昔 日 의 暗 黑 時 代 로
70 돌아가려는 前 兆 를 보이고 있으니 實 로 崎 嶇 한 朝 鮮 의 新 聞 社 會 라 하겠다. 그러면 朝 鮮 의 新 聞 은 왜 이와같은 不 振 狀 態 에서 終 始 一 貫 하여 甚 하면 隕 命 을 하고 設 或 隕 命 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하나 滿 身 瘡 痍 의 自 身 을 끌고 구구한 命 脈 을 지탱하여 가게 되는가. 新 聞 事 業 도 一 種 의 企 業 이다. 고무 企 業, 紡 織 企 業 만이 企 業 이 아니고 新 聞 도 資 本 主 義 生 産 機 關 의 한구석을 차지하는 同 時 에 新 聞 紙 는 一 種 의 商 品 일 것이다. 新 聞 紙 가 商 品 이라 함에 一 部 에서 는 新 聞 의 墮 落 을 부르짖을는지도 알 수 없다. 新 聞 은 新 聞 으로서의 機 能 이 있으며 그 機 能 을 完 全 히 發 揮 함에는 그것의 商 品 化 를 評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主 張 하는 理 論 일 것이다. 여기에 參 考 로 世 界 新 聞 企 業 界 의 動 向 을 一 瞥 하기로 한다. 新 聞 은 初 期 에 個 人 企 業 에서 出 發 하여 會 社 企 業 으로 完 全 히 發 展 할 수는 없었다. 産 業 合 理 化 라 는 現 代 高 速 度 的 資 本 主 義 經 濟 의 叫 號 가 新 聞 企 業 界 에도 震 動 되자 新 聞 企 業 家 들은 그들의 尨 大 한 資 本 力 을 가지고 大 小 新 聞 의 合 同 에 着 手 하고 一 新 聞 發 行 會 社 로부터 無 數 한 新 聞 紙 를 發 行 하게 된 것이다. 이는 不 可 抗 力 의 일이니 資 本 主 義 經 濟 에 있어 獨 占 化 하는 것은 반드시 新 聞 企 業 이라고 除 外 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現 在 世 界 의 新 聞 界 는 大 企 業 에의 躍 進 을 敢 行 하는 中 에 있어 英 國 의 로더미어 베리, 美 國 의 허스트는 그 中 에 代 表 的 企 業 家 이다. 이렇듯 世 界 新 聞 界 는 小 企 業 에서 大 企 業 으로 躍 進 을 敢 行 하고 있다. 가까운 곳의 例 로는 日 本 의 大 朝 大 每 만 하더라도 비록 英 美 와 같은 新 聞 合 同 의 大 規 模 에까지는 到 達 치 못하였으나 個 人 企 業 에서 會 社 企 業 으로 轉 化 하여 現 在 日 本 內 다른 群 少 新 聞 위에 君 臨 하는 二 大 偉 觀 을 이루 고 있는 것은 우리의 目 睹 하는 事 實 이다. 이로 보아 新 聞 經 營 은 企 業 形 態 를 갖추지 않을 수 없 을 뿐 아니라 企 業 形 態 는 資 本 主 義 의 高 速 度 的 發 展 과 함께 獨 占 化 한다는 傾 向 을 우리는 世 界 新 聞 界 의 動 向 으로부터 抽 象 할 수 있는 것이다. 上 述 한 바에 依 하여 新 聞 은 決 코 初 期 의 政 黨, 團 體, 個 人 에 從 屬 管 理 되는 新 聞 ( 原 始 的 企 業 形 態 )으로서는 到 底 히 存 續 할 수 없는 것이요, 現 代 資 本 主 義 經 濟 의 高 速 度 的 發 展 과 倂 行 하여 自 體 의 大 企 業 에서 躍 進 이 없으면 아니될 뿐더러 時 와 所 에 拘 泥 하지 않고 그것의 原 則 은 不 變 하는 것이다. 그러면 朝 鮮 의 新 聞 事 業 은 그동안 어떠한 過 程 을 밟아 어떠한 企 業 形 態 에까지 이르렀 는가를 暫 見 하면 다음과 같다. 東 亞 는 1920년에 金 性 洙, 朴 泳 孝, 柳 瑾 諸 氏 의 손으로 創 刊 되어 처음에는 純 然 히 個 人 企 業 의 形 態 로서 生 長 되었으나 時 代 의 要 求 에 聽 從 하는 百 퍼센트의 新 聞 機 能 을 發 揮 하는 熱 誠 의 나머지 에 ( 此 間 略 ) 그러다가 그 後 金 性 洙 氏 의 發 奮 의 結 果 로 七 十 萬 圓 株 式 會 社 가 成 立 되었으나 이때부터 同 社 는 會 社 企 業 形 態 로 完 全 히 轉 化 되는 한편으로 漸 次 社 運 이 好 轉 하여 現 在 에는 朝 鮮 新 聞 界 에 王 座 를 占 하고 있다. 다음에 朝 鮮 은 始 初 를 1920 年 大 正 親 睦 會 의 宋 秉 畯 伯 의 獨 單 經 營 으로부터 出 發 하였으나 그 後 申 錫 雨, 曺 偰 鉉, 李 相 協 諸 氏 等 이 引 繼 하여 李 商 在 氏 를 社 長 으로 推 戴 하고 同 社 의 主 義 主 張 을 民 衆 的 欲 望 에 두고 大 革 新 을 하였으니 이때부터 同 紙 는 旭 日 昇 天 의 氣 勢 를 가지고 當 時 新 聞 販 賣 市 場 에 覇 王 然 하던 東 亞 에 肉 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同 社 는 于 今 九 年 間 을 組 合 企 業 形 態 를 持 續 하여 前 後 五 十 餘 萬 圓 의 資 本 을 同 經 營 에 投 資 하였다고 한다. 中 央 은 以 上 兩 紙 와는 그 企 業 形 態 가 不 規 則 的 으로 變 轉 하였으니 1923 年 東 明 ( 雜 誌 )을 하던 崔 南 善 氏 가 時 代 를 처음으로 創 刊 하여 或 時 는 普 天 敎 로 或 時 는 洪 命 憙 氏 等 의 個 人 形 式 으로 經 營 되었으나 그 後 中 外 때에 내려와서 李 相 協, 安 熙 濟 諸 氏 等 을 中 心 으로 한 慶 尙 道 財 閥 이 會 社 企 業 形 態 로 轉 化 시켜 十 五 萬 圓 의 株 式 會 社 를 創 立 하더니 이도 幽 靈 이 되어 休 刊 되었다가 昨 年 末 頃 에 及 其 也 盧 正 一 氏 의 個 人 企 業 으로 現 在 의 中 央 이 出 生 된 것이다. 이를 다시 要 約 하여 말하면 東 亞 는 創 刊 前 後 幾 多 의 波 瀾 을 겪었을망정 그의 企 業 形 態 는 正 常 的 으로 發 展 되어 今 日 의 健 實 을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고 이와 反 對 로 朝 鮮 과 中 央 은 受 難 의
71 歷 史 를 거듭하였으되 그의 企 業 形 態 는 原 始 的 임을 免 치 못하는 한편으로 新 聞 企 業 에는 敗 北 者 가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면 朝 鮮 의 三 新 聞 中 에 何 必 東 亞 만은 今 日 의 隆 盛 을 보여주고 朝 鮮 과 中 央 은 昔 日 의 不 振 이 只 今 껏 繼 續 되어 結 局 이꼴이 되었는가? 여기에는 朝 鮮 의 新 聞 企 業 이 外 國 과는 딴판으로 企 業 으로서의 特 殊 性 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 야 한다. ( 此 間 略 ) 이것이 恒 時 新 聞 과는 不 可 分 의 關 係 를 갖고 있기 때문에 東 亞 비록 現 在 의 好 成 續 을 보이고 있기는 하나 이로 하여 無 限 한 辛 苦 를 當 하고 無 數 한 犧 牲 을 供 한 것은 일일이 記 憶 으로 헤일 수 없는 일이며 朝 鮮 中 央 이 今 日 의 不 運 을 當 한 것은 그 半 分 以 上 이 여기에 由 因 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卽 이 特 殊 性 이 從 來 朝 鮮 의 新 聞 企 業 不 振 의 第 一 原 因 體 가 된 것이 다. 그러면 企 業 으로서의 發 達 을 阻 害 하는 特 殊 性 -- 그 內 容 은 무엇인가? 또한 이 特 殊 性 과 아울 러 朝 鮮 의 新 聞 으로 하여금 凋 落 의 運 命 을 지게 하는 第 二 原 因 體 는 무엇인가? 便 宜 上 前 者 를 外 部 的 條 件 이라 하고 後 者 를 內 部 的 條 件 이라 하여 다음에 究 明 한다. 外 部 的 條 件 이라 함은 企 業 形 態 로서의 新 聞 事 業 이 植 民 地 朝 鮮 에 있어서 發 展 되어나가는 途 程 의 모든 不 利 한 情 勢 를 意 味 한다. 다음에 逐 條 說 明 하면 (1) 資 本 力 의 貧 弱 新 聞 經 營 에는 重 大 한 要 素 가 資 本 力 이다. 더욱이 新 聞 企 業 의 傾 向 이 大 企 業 에의 躍 進 으로 轉 化 하는 世 界 新 聞 企 業 界 는 資 本 力 의 大 小 如 何 로 그의 制 覇 가 決 定 되는 今 日 에 있다. 그러나 朝 鮮 은 이와 달리 特 殊 한 情 勢 에 處 하여 있으니 新 聞 에 對 한 朝 鮮 人 企 業 의 關 心 과 注 意 가 아직껏 不 足 한 것이다. 從 來 新 聞 紙 의 不 成 績 의 影 響 으로 大 槪 는 新 聞 企 業 에 對 하여는 不 安 을 품고 있 다. 勿 論 가난한 民 族 의 탓도 있거니와 이 까닭으로 해서 自 然 히 新 聞 經 營 에 血 液 과 같은 作 用 을 하는 資 本 의 投 資 熱 이 稀 少 하고 그 結 果 로 一 部 의 投 資 가 旣 往 에 있었다 하더라도 新 聞 運 營 에 支 障 을 가져오지 않을 만한 程 度 의 後 援 이 없는 關 係 로 恒 常 朝 鮮 의 新 聞 은 活 潑 한 活 動 을 하 지 못한 것이다. (2) 一 般 의 生 活 이 富 裕 치 못한 것 新 聞 企 業 收 入 의 二 大 源 泉 은 廣 告 와 販 賣 이다. 이 兩 者 로부터의 收 入 多 寡 로 新 聞 의 存 續 이 決 定 되는 것이니 이를 眼 中 에 두지않고 企 業 을 持 續 할 수는 없다. 그러면 朝 鮮 의 新 聞 은 이 兩 者 와 어떠한 關 係 를 맺어왔는가? 朝 鮮 의 新 聞 은 그동안 廣 告 보다 販 賣 에 置 重 하여 왔다. 最 近 의 東 亞 가 어떠한지는 몰라도 筆 者 의 推 測 으로는 販 賣 收 入 이 廣 告 收 入 을 超 過 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 한다. 그 理 由 는 第 一 로 朝 鮮 人 中 에 大 廣 告 主 가 없는 것과 第 二 로 日 本 의 東 京, 大 阪 廣 告 를 極 히 廉 價 로 가져오기 때문에 外 國 이나 日 本 과 같이 自 國 內 에서의 廣 告 收 入 을 販 賣 收 入 의 二 倍 로 努 力 한댔자 그 數 字 에 더 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朝 鮮 의 新 聞 은 自 然 히 販 賣 網 擴 張 에 必 死 의 努 力 을 하여 紙 代 의 增 加 를 期 하는 現 實 에 있다. 그러면 이 紙 代 의 增 加 만을 가지고 新 聞 을 運 營 할 수 있을는지는 또한 別 問 題 에 屬 하는 것이다. 이나마 一 般 의 生 活 이 大 槪 는 窮 貧 한 탓으로 紙 代 의 收 金 도 好 成 績 을 나타내지 못하는 한편으 로 販 賣 網 의 擴 張 도 如 意 치 못한 形 便 이니 이러한 理 由 로 朝 鮮 의 新 聞 企 業 은 自 體 存 續 에 一 大 威 脅 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3) 當 局 의 方 針 新 聞 의 效 用 은 그의 機 能 에 있다. 그래서 그의 機 能 을 完 全 히 發 揮 함에는 朝 鮮 의 現 段 階 에 있 어서는 對 立 的 社 會 意 識 ( 民 族 主 義, 社 會 主 義 )을 表 現 시키는데 있으니 前 期 三 新 聞 이 그동안 이 機 能 을 發 揮 치 못하였다. 李 如 星, 金 世 鎔 兩 氏 의 數 字 朝 鮮 硏 究 第 一 輯 에 依 하면 當 局 의 新 聞 取 締 는 一 九 二 九 年 度 의 東 亞 削 除 26, 押 收 22, 朝 鮮 削 除 22, 押 收 24, 中 外 削 除 24, 押 收 17, 1930 年 度 의 東 亞 削 除 30, 押 收 19, 朝 鮮 削 除 30, 押 收 14, 1931 年 度 의 東 亞 削 除 24, 押 收
72 7, 朝 鮮 削 除 15, 押 收 5, 以 上 의 數 字 는 從 來 朝 鮮 의 新 聞 이 自 體 의 過 多 한 犧 牲 을 回 避 하려고 하는 最 近 2, 3 年 의 것인 것을 보아 1928 年 以 前 에 當 局 의 取 締 가 如 何 한 程 度 이었음을 미루어 생각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停 刊 의 受 難 을 當 하여 新 聞 運 營 에 一 大 支 障 을 가져온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이로 하여 朝 鮮 의 新 聞 은 以 上 에 列 擧 한 諸 條 件 과 함께 陣 痛 의 歷 史 를 創 造 하고 한시라도 財 政 의 困 難 을 떠날 수가 없었다. (4) 民 衆 의 新 聞 에 對 한 期 待 의 過 多 前 述 한 바와 같이 新 聞 은 그의 機 能 을 效 用 으로 한다. 新 聞 이 極 度 로 商 品 化 한 外 國 과 日 本 은 몰라도 朝 鮮 은 新 聞 의 機 能 이 對 立 的 社 會 意 識 을 表 現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一 般 民 衆 은 新 聞 은 民 族 主 義 社 會 主 義 의 表 現 機 關 으로만 觀 念 하여 新 聞 의 企 業 形 態 로서의 發 展 을 無 視 하는 傾 向 까지 있다. 그것의 例 로는 廣 告 에 들 수 있다. 흔히 新 聞 에 花 柳 病, 化 粧 品 따위의 日 本 廣 告 가 揭 載 되 는 것을 朝 鮮 의 新 聞 이 墮 落 하는 것이라고 떠드는 것도 그 中 의 하나이다. 그밖에 여러가지로 新 聞 本 然 의 機 能 保 全 과 商 品 價 値 增 加 와의 衝 突 로 新 聞 企 業 家 는 岐 路 에 서 게 되는 境 遇 가 종종 있으니 여기에도 新 聞 이 企 業 으로서의 活 潑 한 活 動 을 하지 못하는 原 因 이 있는 것이다. 다음에 內 部 條 件 이라 함은 新 聞 企 業 自 體 의 缺 陷 을 指 稱 한다. 이는 非 但 朝 鮮 新 聞 에서만 摘 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外 國 의 新 聞 에서도 그 許 多 한 例 를 찾을 수 있으나 朝 鮮 은 上 述 의 情 勢 와 倂 行 하여 互 相 連 鎖 關 係 를 맺으면서 尤 甚 한 弊 端 을 일으키는 感 이 있는 것이다. 紙 數 의 制 限 도 있고 더욱이 이에 限 하여서는 그동안 市 內 의 彗 星 그의 後 身 으로 第 一 線, 別 乾 坤 批 判, 東 光, 三 千 里 等 그 外 種 種 의 雜 誌 에도 斷 片 的 으로 或 은 批 判 的 으로 紹 介 論 難 된 바 있음으로 冗 長 한 說 明 을 避 하겠거니와 要 約 하여 그의 缺 陷 을 들추면 다음과 같다. (1) 內 部 의 紛 糾 朝 鮮 의 新 聞 은 擧 皆 가 派 爭 의 歷 史 로 一 貫 한 弊 가 있다. 東 亞 가 初 期 에 小 派 瀾 을 겪은 일이 있으나 宋 鎭 禹 氏 社 長 下 에 統 制 가 된 뒤부터는 完 全 히 이 圈 內 에서 벗어나 安 穩 한 狀 態 에 들어갔 음에 反 하여 朝 鮮 은 革 新 後 얼마 안되어서부터 暗 鬪 가 시작되어 他 派 勢 力 의 驅 逐, 自 派 勢 力 의 扶 植 으로 지금까지 내려왔다. 幹 部 等 은 社 의 運 營 보다 自 己 네들의 地 位 安 全 을 더욱 重 視 한 結 果 를 나타내어 結 局 그 餘 毒 으 로 社 運 에는 莫 大 한 影 響 을 끼쳤으며 資 本 主 가 들고 날적마다 社 의 人 事 行 政 은 亂 麻 狀 態 를 이루 는 한편 社 內 에 不 安 을 일으켜 社 의 行 政 은 同 時 에 無 秩 序 無 統 制 에 빠지고 마는 醜 態 를 連 續 해 왔다. 只 今 의 朝 鮮 이 저 지경이 된 것도 이러한 派 爭 에 決 定 的 原 因 이 있는 것이다. (2) 資 本 運 用 의 失 敗 現 代 新 聞 紙 의 盛 衰 如 何 는 實 로 機 械 中 의 背 景 이 되는 資 本 과 資 本 을 運 用 하는 企 業 家 의 能 力 에 基 因 한다고 해도 過 言 이 아니다 라고 主 張 하는 사람이 있다. 卽, 巨 大 한 資 本 과 有 爲 한 企 業 家 가 있는 然 後 에야 新 聞 企 業 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에 依 하면 新 聞 은 有 爲 한 企 業 者 가 絶 對 必 要 하다. 換 言 하면 資 本 運 用 의 妙 理 를 아는 사람이 絶 對 必 要 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在 來 의 朝 鮮 과 其 餘 의 新 聞 은 어떠했나? 率 直 하게 말하면 東 亞 를 제쳐놓고는 果 然 이 렇다 할만한 企 業 家 가 없었던 것이다. 朝 鮮 은 前 後 投 資 額 이 50 餘 萬 에 達 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 금의 現 象 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이는 오로지 新 幹 部 의 放 漫 政 策 의 結 果 와 그 餘 波 가 今 日 의 混 亂 을 가져온 것이다. 傳 하는 말에 의하면 朝 鮮 은 革 新 後 分 辨 없이 그의 豊 富 한 資 本 을 흥 청거리고 썼다 한다. 中 外 도 株 式 會 社 當 時 에는 景 氣 가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에는 알 것도 없는 빈털털이가 아니냐? 新 聞 을 經 營 하려면 別 일이 다 많을 것이다. 資 本 主 를 끌어들이는 方 法 으로 料 亭 出 入 과 美 人 計
73 와 私 生 活 의 外 華 가 必 要 하고 이노릇 하기에 社 財 를 消 費 해야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方 法 을 取 한 旣 往 의 人 物 이 얼마나 新 聞 의 前 程 을 막아놓았는지도 모른다. 企 業 은 權 謀 術 數 가 아니다. 企 業 은 그 自 體 의 法 則 밑에서 成 長 하는 것이다. 卽 資 本 을 運 用 하는 妙 理 를 把 握 하는 企 業 家 가 아니고서는 新 聞 을 經 營 할 資 格 이 없는 것이다. 以 上 의 朝 鮮 中 外 는 이 點 에서 失 敗 하였다. 上 述 에 依 하여 朝 鮮 의 新 聞 이 企 業 으로서 아직 年 稚 한 狀 態 에 있는 것은 그의 過 程 이 外 國 과는 情 勢 를 달리한 植 民 地 朝 鮮 의 特 殊 性 으로 말미암아 不 活 潑 하고 無 氣 力 한 發 展 을 하고 있다는 것 을 指 摘 하고 아울러 이 問 題 의 特 殊 性 과 倂 行 하여 더욱 深 刻 히 朝 鮮 의 新 聞 으로 하여금 그 疲 勞 케 한 新 聞 自 體 의 內 部 的 缺 陷 에까지 言 及 하였다. 卽 特 殊 性 과 內 部 缺 陷, 이 두가지가 朝 鮮 의 新 聞 이 或 은 呻 吟 하고 或 은 悲 鳴 을 지르게 된 原 因 -- 不 屈 의 原 因 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朝 鮮 의 新 聞 이 앞으로 發 展 하여가려면 오직 한가지 길밖에 없는 것이다. 卽 可 能 한 範 圍 안에서 最 善 의 努 力 을 다하여 新 聞 을 進 步 된 企 業 으로 活 潑 히 發 展 시키는 同 時 에 新 聞 自 體 의 內 部 缺 陷 을 過 去 의 經 驗 을 거울삼아 一 掃 하는 것이다. 12. 徐 載 弼 이 보낸 편지 徐 載 弼 宋 鎭 禹 先 生 貴 下 昨 夏 호놀룰루에서 一 瞥 後 에 每 樣 글을 올리려 하였으나 오늘까지 時 間 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 하였습니다. 日 前 에 들은 즉 東 亞 日 報 가 停 刊 을 當 하였다 하니 그 理 由 는 分 明 히 알 수 없으나 何 如 間 言 論 의 自 由 가 없는 社 會 의 어떠한 法 律 에 抵 觸 된 것인 줄 알고 不 祥 事 에 對 하여 痛 憤 을 禁 치 못하던 바 이제 解 除 의 消 息 을 들으니 오히려 더 늦지 않은 것만 多 幸 입니다. 先 生 과 其 他 諸 位 가 이같이 자주 困 苦 를 當 하게 되는 것은 個 人 으로는 유감이지마는 民 族 全 體 에 對 하여는 도 리어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오직 이런 逆 境 의 敎 訓 을 받아야만 朝 鮮 民 族 은 自 由 와 正 義 의 價 値 를 解 得 하고 人 類 의 理 想 社 會 를 出 現 시키기에 努 力 할 것입니다. 우리는 過 去 에 自 由 와 正 義 를 위하여 努 力 하지 못하였으므로 지금 그것을 못가진 것이외다. 先 生 과 其 他 諸 位 가 이런 試 鍊 을 當 하는 것은 朝 鮮 民 族 의 過 去 의 허물을 報 償 하는 同 時 에 將 來 에 올 날을 위하여 길을 닦는 것 인 줄 압니다. 先 生 은 마땅히 생각할지니 先 生 이 된다 하면 이는 個 人 때문에 됨이 아니요 朝 鮮 의 言 論 의 自 由 를 爲 하여 됨인 것이외다. 言 論 의 自 由 를 爲 하여는 偉 大 한 人 物 들이 自 進 하 여 되기를 躊 躇 하지 아니할지오. 따라서 朝 鮮 이 先 生 의 只 今 苦 楚 받는 動 機 를 理 解 하고 感 謝 할 날이 올 것이외다. 現 在 의 言 論 界 의 苦 痛 에서 將 次 할는지 누가 豫 言 하리까. 世 界 上 에 어떠한 事 實 이든지 그를 爲 하여 奮 鬪 하는 勇 士 가 없이 成 功 된 法 이 없습니다. 言 論 의 自 由 를 爲 하여 先 行 의 로 因 하여 의 날이 올 것을 나는 確 信 합니다. 에 있거나 社 務 를 보거나 先 生 은 朝 鮮 民 族 에게 合 作 的 精 神 을 鼓 吹 하며 物 質 及 精 神 上 으로 奮 鬪 猛 進 해야 할 것을 알려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民 族 은 아직 奮 鬪 의 일을 하기 前 에는 吾 族 의 將 來 는 暗 黑 합니다. 우리는 일하여야 하겠습니다. 일하되 合 하여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오직 우리를 살리는 길이외다. 明 年 의 太 平 洋 會 議 에 出 席 하게 되면 다시 거기서 對 顔 할 줄 압니다. 마 지막으로 事 件 이 速 히 解 決 되기를 바라며 回 信 을 苦 待 하면서 그칩니다. ( 註 : 1926년 6월 6 10 만세사건으로 국내가 뒤숭숭하던 때 미국에 살고 있는 서재필박사로부터 고하는 위안과 격려의 글월을 받았다. 영문으로 된 것인데 6월 12일부였다(당시 신동아 부록에
74 번역하여 실렸고, 총독부가 꺼려하는 부분은 삭제하였으나 대체의 뜻은 알 수 있겠다). 13. 所 聞 의 所 聞 宋 社 長 과 獨 裁 者 號 外 ( 日 刊 誌 ; 1933년 12월호) 最 近 東 亞 日 報 社 에 入 社 한 一 新 入 社 員 이 述 懷 하여 가로되 나는 그전에 宋 鎭 禹 氏 라면 그저 고집투성이 獨 裁 者 로만 알았더니 이번 東 亞 日 報 에 入 社 를 하 여 보니까 아주 말과는 딴판입니다. 그야 新 聞 製 作 에 對 하여서는 모든 點 을 統 率 하는 關 係 上 自 然 獨 裁 的 으로 나가는 點 도 없지 않 지만 아침 아홉시면 벌써 出 社 하여 다른 社 員 이 거진 다 나간 午 後 6 7시까지 編 輯 局 에 혼자 떡 버티고 앉아서 새로 찍혀나온 新 聞 을 글자 한 자 빼어놓지 않고 샅샅이 주워읽는 熱 誠 에는 정말 感 嘆 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까닭에 글자 한 字 라도 잘 못 쓸래야 잘못 쓸 수가 있어야지요. 亦 是 宋 鎭 禹 氏 는 부지런한 일꾼입니다. 14. 挑 戰 하는 朝 鮮 日 報, 應 戰 하는 東 亞 日 報 < 三 千 里 > (1936년 2월호) 石 兵 丁 記 ( 前 略 ) 東 亞 日 報 의 對 策 -- 그러면 여기에 注 目 되는 것은 東 亞 日 報 의 對 策 이다. 싸울 칼이 잘라져 敗 戰 할 境 遇 면 捕 虜 되기 보다 차라리 自 刎 하여 버리는 勇 士 와 같이 萬 一 資 本 力 이나 人 材 配 置 에 있어 不 足 하여서 다른 新 聞 의 肩 下 에 서게 된다면 東 亞 日 報 는 스스로 廢 門 停 刊 하여 버리기는 할지언정 屈 辱 的 地 位 에 서 있지 않을 것이 同 社 의 矜 持 요, 배짱이요, 世 人 도 또한 東 亞 日 報 의 眞 價 를 그러리라 評 하여오는 터이다. 換 言 하면 東 亞 日 報 는 決 코 第 2 位 에 自 甘 할 新 聞 이 아니다. 第 1 位 가 못되면 적어도 同 位 에 서야 滿 足 할 新 聞 이다. 萬 一 돈을 내기 싫어서 株 主 側 이 第 2 位 에 서라 하더라도 宋 社 長 의 氣 骨 이 그를 不 肯 할 것이오, 宋 社 長 도 無 可 奈 下 라 할지라도 15 年 親 愛 한 十 數 萬 讀 者 가 그를 不 肯 할 것 이다. 그러므로 結 局 應 戰 하는 東 亞 日 報 의 大 砲 가 時 急 히 發 射 될 것인데 그 彈 丸 은 어떤 것일고. 天 機 不 可 漏 로 高 級 幹 部 數 人 과 最 高 重 役 사이에 쉬쉬하여 人 目 을 避 하여 가며 祕 密 히 銳 磨 되어가고 있는 중인데 이제 그 內 容 을 推 想 컨대 紙 面 을 12 面 또는 그 以 上 으로 增 面 하여 놓을 것은 不 可 避 의 旣 定 且 基 本 的 事 實 이 되리라. 萬 一 10 面 紙 를 不 變 한다면 事 大 思 想 에 젖은 新 聞 讀 者 는 딴곳 으로 가게 될 것이오, 그를 避 하자면 東 亞 는 定 價 1 圓 하던 것을 90 錢 이나 80 錢 으로 低 下 해야 된 다. 低 下 하는 날이면 東 亞 紙 는 中 央 日 報 級 에 編 入 되어 第 2 流 紙 에 自 落 할 밖에 길이 없는데 그러 면 大 新 聞 紙 主 義 를 取 하는 東 京 大 阪 의 廣 告 量 이 훨씬 줄어들 것이오, 讀 者 層 도 都 市 에서 農 村 으 로 옮겨진다. 이리되면 赫 赫 한 過 去 東 亞 紙 의 歷 史 는 塵 土 에 묻히고 그후 發 展 은 極 히 消 極 的 이 되어 一 言 以 蔽 之 하면 自 殺 의 길에 오르게 된다. 東 亞 日 報 는 12 面 以 上 으로 增 面 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 한가지 스스로 파놓은 陷 穽 이 있다. 曰 廣 告 料 5 割 引 上 이다. 廣 告 料 의 引 上 이란 말
75 은 紙 面 은 없고 廣 告 量 은 輻 輳 하고 하니 不 得 已 廣 告 料 金 을 올리겠소 하는 것인데 이제 增 面 을 行 한다면 現 在 廣 告 料 單 價 를 維 持 하기조차 苦 心 焦 思 할 판인데 그 逆 으로 도리어 紙 面 量 은 늘었 음에 不 拘 하고 稀 少 價 値 說 을 否 定 하는 曠 古 未 曾 有 의 語 不 成 說 로직 이 생긴다. 於 是 乎 여기에 東 亞 日 報 의 營 業 上 煩 悶 이 생긴다. 그러면 增 面 과 廣 告 料 引 上 關 係 에 對 하여 朝 鮮 日 報 는 어떠한가. 마찬가지로 同 社 역시 여기에 矛 盾 을 싸안고 있다. 그러나 朝 鮮 日 報 에는 定 型 이 없다. 新 興 하는 곳이니만치 體 面 과 傳 統 에 뭉개지 않을 것이니 무슨 길이든지 누이좋고 매부좋다 할 - 廣 告 主 좋 고 新 聞 社 좋고, 體 面 은 體 面 대로 維 持 할 案 을 發 見 키 그렇게 難 事 가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猪 突 的 인 點 에서 무슨 活 路 인가 엿보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東 亞 日 報 가 12 面 으로 增 面 하는 것으로 應 戰 의 基 本 武 器 로 삼을 것은 旣 定 의 事 實 이다. 그러나 世 人 의 눈은 살( 肥 )이 쪘다. 12 面 쯤으로 東 亞 日 報 東 亞 日 報 하고 떠들 때는 이제는 벌써 지나갔다. 萬 一 朝 鮮 보다 先 手 로 그를 着 手 하였던들 效 果 百 퍼센트였을 것을. 百 戰 百 熟 한 東 亞 當 局 者 이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朝 鮮 日 報 에서 增 面 發 表 後 地 方 의 支 局 長 으로 부터 讀 者 地 盤 을 攻 勢 에 있는 朝 鮮 支 局 에 다 빼앗길 염려가 있으니 하루바삐 增 面 을 斷 行 하라고 抗 議 電 報 가 每 日 多 數 히 들어오는 것을 보고있는 東 亞 幹 部 胸 中 에는 百 尺 竿 頭 更 進 一 步 할 길이 닦이고 있으리라. 여기에 덤 으로 내놓는 第 2 案 인 不 可 無 의 그것이 무엇일꼬. 五 人 의 興 味 는 여기 에 쏠린다. 想 像 컨대 極 東 問 題 의 重 要 한 一 面 을 보여주는 意 味 에서 南 北 中 國 에 讀 賣 가 室 伏 高 信 을, 大 每 가 松 村 을 보내듯이 主 幹 이나 編 輯 局 長 級 人 物 을 派 하여 蔣 介 石, 張 群 等 을 會 見 시켜 紙 上 을 찬란하 게 裝 飾 치 않을까. 또 中 國 이 아니면 比 律 賓 으로 또는 布 哇 나 南 洋 으로 視 察 團 을 보내지 않을까. 이러한 案 도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人 氣 있는 外 國 思 想 家 를 -- 胡 漢 民 이나 胡 適 之 나 혹은 타골, 아인슈타인 級 의 人 物 을 數 萬 金 을 들이어 招 聘 하여오지 않을까, 讀 賣 新 聞 의 智 慧 를 빌어 美 國 서 野 球 團 을, 佛 蘭 西 에서 音 樂 家 나 舞 踊 家 를 빌어오지 않을까. 어쨌든 人 氣 를 한번 푹신 끌어놓을 案 을 생각하고 있을 것 같다. 그리고 對 外 的 으로 보아 社 屋 도 急 하다. 서울장안 紳 士 淑 女 의 集 會 를 相 敵 二 町 以 內 에 우뚝 선 朝 鮮 日 報 講 堂 에 자꾸 빼앗기고 있는 것을 바라볼 때 人 氣 장사인 東 亞 는 電 車 속에서 달음박질하 고 싶도록 焦 燥 한 생각과 熱 湯 을 마시는 듯한 苦 惱 를 맛보리라. 또 東 京 大 阪 廣 告 主 앞에 남만 못한 社 屋 을 暴 露 시킬 때 斷 腸 의 괴로움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急 且 緊 한 이 社 屋 을 짓자면 現 有 貯 金 10 萬 圓 돈만으로는 不 足 하므로 結 局 第 몇 回 拂 込 을 새로 하여야 할 터인데 그러자면 大 株 主 金 性 洙 氏 의 現 金 出 資 가 1, 20 萬 圓 程 度 로 새로 있어야 할 터인즉 金 氏 負 擔 이 커진다. 그러 나 五 人 은 비록 外 債 를 얻어서라도 東 亞 는 增 築 計 劃 대로 今 春 에 社 屋 이 서는 것도 重 要 한 武 器 가 될 줄 안다. 이밖에 廣 範 圍 로 讀 者 層 에 서비스할 案 으로 年 定 制 의 東 亞 賞 東 亞 博 覽 會 東 亞 圖 書 舘 等 이 나오지 않을까. 兩 社 財 政, 人 的 關 係, 戰 略 等 -- 요즘 巷 間 에 떠도는 말이 있다. 東 亞 日 報 는 새해부터 營 業 政 策 을 更 新 하였던 까닭에 공돈으로 年 3 萬 圓 의 利 益 을 보게 되었는데 그 돈으로 큼직한 恒 久 的 事 業 을 하리라 한다. 즉 從 來 鮮 一 紙 物 會 社 에서 쓰던 新 聞 卷 紙 를 이번에 東 京 附 近 에 있는 北 越 製 紙 會 社 에서 사 쓰기로 되었는데 東 亞 日 報 의 1 年 卷 紙 使 用 量 은 約 6천 本 으로 그 價 格 은 24 萬 圓 에 及 하는 바 이번 北 越 과의 半 個 年 契 約 에는 싼값으로 되기로 되어 종이값 3 萬 圓 이 節 約 된다 함이다. 이와같이 공돈이 뜨는 것을 살핀 朝 鮮 日 報 에서는 東 亞 日 報 에 先 着 하여 突 嗟 的 으로 12 面 을 斷 行 한 것이란 말도 있는데 다시 鮮 一 系 도 들은 말에 依 하면 北 越 종이는 鮮 一 보다 1 連 에 5 錢 程 度 로 쌀 뿐 諸 般 費 用 을 넣으면 조금도 싸 진 폭이 아니라 하며 東 亞 宋 社 長 의 말에는 直 接 間 接 으로 3 萬 圓 이 浮 한다고 한다. 어쨌든 이번 싸움의 始 初 는 이 新 聞 卷 紙 의 新 契 約 에서 시작된 것으로, 싸우고 보니 그는 讀 者 會 社 에 利 로운 것이라 이 싸움이 더 커지고 더 持 續 되기를 바라는 傾 向 이 있다. 今 春 3월에는 副
76 社 長 張 德 秀 氏 를 맞는 東 亞 日 報 는 人 的 陣 容 에 있어서도 좀더 充 塡 할 것이오, 이에따라 심파적 筆 者 網 擴 大 를 쓰는 朝 報 또한 그 對 案 을 講 究 할 것이니 天 下 의 注 視 가 다시 이 新 聞 戰 에 모일 것 같다. 15. 宋 鎭 禹 氏 의 檀 君 說 < 三 千 里 > (1936년 2월호) 어느날 東 亞 日 報 社 長 室 에서 普 專 校 長 金 用 茂 氏 가 온 것을 붙잡고 宋 鎭 禹 氏 가 케케묵은 黃 紙 冊 을 일부러 꺼내놓고 檀 君 의 단 字 는 壇 字 가 分 明 한데 六 堂 이 잘못 檀 字 로 쓰기 시작했고 하면서 옛날 南 原 梁 誠 之 란 鴻 儒 의 著 書 句 節 을 가리키면서 長 時 間 熱 論, 宋 鎭 禹 氏 의 말씀에 依 하면 通 政 大 夫 까지 지낸 梁 誠 之 란 政 治 家 는 벌써 四 百 年 前 에 壇 君 을 모셔야 한다고 立 論 하였더라 고. 16. 東 亞 日 報 의 今 後 의 코스 < 三 千 里 > (1936년 4월호) ( 前 略 ) 나로 하여금 세 新 聞 의 思 想 的 系 列 을 評 하라면 東 亞 는 民 族 主 義, 朝 鮮 은 自 由 主 義, 中 央 은 社 會 主 義 라 할 것이라. 勿 論 이 말은 嚴 格 한 意 味 에서가 아니고 그저 가벼운 意 味 에서 그 態 度 도 行 路 가 총총한 夕 陽 過 客 이 沿 道 風 光 을 한두마디 指 摘 하고 가듯이 그러한 意 味 에서 하는 말이다. 中 央 을 左 翼 系 라 함은 呂 運 亨, 裵 成 龍, 林 元 根, 安 炳 洙, 李 天 鎭, 洪 悳 裕, 金 復 鎭 等 過 去 의 色 彩 가 그러하였던 분이 여럿인 點 으로도 首 肯 되며 朝 鮮 은 그 幹 部 層 에 아주 强 烈 한 社 會 主 義 아니 면 못산다 하는 이도 많지 못한 代 身, 民 族 主 義 아니면 못산다 하는 式 의 굳센 民 族 意 識 을 가진 이도 많지 못하다. 그래서 一 言 으로 要 約 하면 가벼운 意 味 의 自 由 主 義 傾 向 이 濃 厚 하다 할 것이 오, 그에 反 하여 東 亞 는 創 刊 初 의 社 是 에도 二 千 萬 民 衆 의 表 現 機 關 이라 公 言 하여 比 較 的 純 一 한 民 族 主 義 系 人 物 이 中 樞 神 經 이 되어 社 가 움직이고 있다. 宋 社 長 의 信 望 도 이러한 意 味 로서의 信 望 이다. 이것이 東 亞 日 報 로서는 無 形 의 힘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東 亞 日 報 社 幹 部 가 墨 守 하는 이 傾 向 은 最 近 激 動 하는 世 界 의 思 潮 와 步 調 가 맞추 어져 가는가 함을 一 部 急 進 層 들은 憂 慮 한다. 같은 民 族 主 義 면서 너무 保 守 的 이 아닌가 한다. 紙 面 에도 近 日 에는 昔 日 의 生 氣 를 잃는 듯한 感 이 不 無 하다. 어쨌든 東 亞 日 報 의 近 來 의 큰 失 手 는 朝 鮮 日 報 에 先 是 하여 12 面 斷 行 을 하지못한 것이다. 東 亞 日 報 는 今 年 正 月 초하루부터 오늘까지 꼭 12 面 以 上 을 增 面 할 覺 悟 가 있었던 以 上, 어째서 正 月 初 하룻날 萬 目 이 紙 面 에 모일 때 주먹같은 活 字 로 이 뜻을 公 表 하지 못했던고. 우물쭈물 一 週 日 을 끌어오는 동안 他 社 에 機 先 을 주어 이 先 驅 者 的, 覇 者 의 名 譽 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제 들리는 말에 中 央 日 報 는 3 月 中 에 10면 80 錢 을 公 言 할 듯하다고 한다. 또 每 日 申 報 까지 現 在 의 8 面 을 朝 鮮 日 報 以 上 으로 6 面 增, 14 面 으로 하기로 內 定 되어 그 工 場 擴 張 을 한달 前 부터 準 備 하고 있어 늦 어도 6 月 부터는 發 表 즉시 實 行 하리라 한다. 앞에는 1 圓 12 面 의 朝 鮮, 每 申 의 强 敵 이 있고 뒤에는 80 錢 10 面 의 中 央 의 追 擊 이 있다. 東 亞
77 紙 는 前 後 左 右 의 狹 擊 에서 어디로 가려는고. 東 亞 에 對 하여는 1 月 7 日 이 歷 史 的 厄 日 이었다. 이 날 以 前 에 大 勢 를 살피고 增 面 社 告 할 것을 可 惜 幹 部 層 의 無 氣 力, 保 守 의 罪 로 長 蛇 를 逸 하고 말 았다. 全 鮮 3 百 의 分 支 局 長 은 이 때문에 悲 憤 의 暗 淚 를 흘리고 있다. 워털루의 大 戰 도 그 勝 敗 는 極 히 짧은 一 瞬 間 에 달린 것을 잊었던가. 宋 社 長 은 이에 對 하여 다만 不 言 의 實 行 이 있을 뿐이라 한다. 그러나 어떻게나 빛없는 不 言 의 實 行 인고! 그러나 亦 是 東 亞 日 報 다! 이것을 다른 모로 解 釋 한다면 浩 浩 自 適 하고 浩 浩 蕩 蕩 하여 어디까지든 지 自 信 있는 배짱의 表 現 인 듯도 하다. 떠들지마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는 듯한 氣 壓 도 感 하여 진다. 그래서 第 1 着 으로 大 社 屋 主 義 로 나가기로 되어 方 今 現 社 屋 에 3 倍 大 增 築 을 하기로 되어 그의 設 計 中 인데 宋 社 長 의 言 明 에는 앞으로 3 個 月 內 에 起 工 하여 明 年 春 3 月 에 落 成 하리라 한다. 또 紙 面 도 必 要 에 應 하여는 12 面 을 하여 나가리라 한다. 公 約 한 말이 아니기에 이 말은 14~5 面 을 낼 날도 있는 代 身, 옛날의 10 面 紙 도 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增 資 說 도 있는데 이 增 資 가 되는 날이 면 至 極 히 積 極 的 인 方 面 에 躍 進 할 것 같이 觀 測 된. 그러나 東 亞 日 報 의 强 味 는 金 城 鐵 璧 같은 탄 탄한 그 財 政 이라 社 가 짊어진 빚이라곤 없다. 종이도 鮮 一 을 그만두고 北 越 것을 갖다 쓰는 바 람에 年 數 三 萬 圓 의 利 를 보고 있다 하며 東 京 大 阪 名 古 屋 의 廣 告 量 은 점점 늘고있다 한다. 支 局 도 모두 5 年, 10 年, 搖 之 不 動 할 地 盤 이 다져지고 있은즉 무슨 必 要 있어 數 萬 金 거두자면 이 支 局 地 盤 을 通 하여서도 一 朝 一 夕 에 可 能 하게 보여진다. 이것이 더 말할 수 없는 힘이오, 寶 物 이 오, 强 味 이다. 要 컨대 大 社 屋 이 完 成 되고 12 面 斷 行 을 公 約 하는 날 東 亞 의 威 勢 는 다시 一 世 를 떨치리라. 그리고 나의 觀 測 으로는 10년을 社 長 의 한자리에 있어 心 身 이 疲 勞 하였을 宋 社 長 은 한 1, 2 年 작정하고 世 界 週 遊 에 오르지 않을까. 또 在 美 張 德 秀 를 맞아 渤 渤 한 새 氣 槪 를 보이지 않을까. ( 下 略 ) 17. 東 亞 日 報 停 刊 眞 相 孫 選 手 國 旗 抹 消 社 員 10 名 警 察 拘 禁 取 調 中 < 三 千 里 > (1936년 10월호) 爲 先 東 亞 日 報 가 停 刊 되기까지의 眞 相 은 探 聞 한 바에 의하면 伯 林 으로 出 征 하였던 孫 基 禎 選 手 가 優 勝 하여 全 世 界 絶 讚 하는 속에서 月 桂 冠 을 받고 올림픽 壇 上 에 섰다. 이 좋은 뉴스의 앞에 東 亞 日 報 도 다른 僚 紙 朝 鮮 日 報 나 中 央 日 報 와 마찬가지 態 度 로 雀 躍 하여 每 日 朝 夕 으로 센세이셔 널하고 華 麗 한 紙 面 을 꾸미어 連 日 發 行 하였다. 여기에는 히틀러가 孫 에게 握 手 를 하여 주었느니 鄕 里 平 北 에서는 提 燈 行 列 이 있었느니 어디서는 旗 行 列 이 있었고 演 說 會 가 있었느니 누구는 돈을 내었느니 하는 記 事 가 滿 載 하였다. 新 聞 에 이러한 報 道 있음에 따라 孫 基 禎 은 漸 次 로 더욱 놀랐다. 그래서 宋 鎭 禹 方 應 模 呂 運 亨 의 이름은 몰라도 孫 基 禎 의 이름은 兒 童 走 卒 이라도 다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 있는 新 聞 들이 제 아무리 떠든다 할지라도 大 阪 新 聞 以 上 으로는 못 떠들었고 서울 의 新 聞 이 孫 을 아무리 치켜든다 할지라도 東 京 放 送 局 의 라디오 이상으로는 채 못 치켜들었으니 그것은 大 每 大 朝 는 伯 林 東 京 間 에 直 通 電 送 寫 眞 과 無 線 電 話 를 가지고서 孫 의 一 擧 一 動 을 눈에
78 보이듯 連 日 全 面 紙 로 割 充 하여 感 激 的 寫 眞 과 記 事 로 萬 人 을 울게 하였으니 伯 林 大 每 特 派 記 者 가 孫 選 手 가 快 勝 한 刹 那 에 滿 場 이 발을 구르며 歡 呼 하였고 邦 人 應 援 團 은 모두 울었노라 하는 類 의 記 事 가 몇번이나 되풀이되었는지 이는 紙 面 이 證 明 하는 터이다. 大 每 本 社 編 輯 局 長 은 伯 林 會 場 의 孫 選 手 를 일부러 無 電 으로 불러내어 온갖 故 國 의 感 激 的 消 息 을 傳 하고 그를 稱 揚 치 않았 던가? 그런데 서울에 있는 돈없고 勢 力 이 가난한 우리 新 聞 들은 이런 멋진 일은 한가지도 못하고 他 紙 의 轉 載 로서 말하자면 大 朝 나 大 每 의 뒤를 따라가면서 孫 選 手 孫 選 手 하고 불렀을 뿐이오, 또 東 亞 放 送 局 아나운서의 입을 좇아가며 다 들린 말을 되풀이하였다. 아무튼 報 道 에 있어서는 서울 의 紙 는 地 理 關 係 로 大 阪 東 京 에 있는 諸 新 聞 을 따르지 못했다. 어쨌든 孫 選 手 의 優 勝 은 痛 快 하고도 感 激 한 일이었다. 赴 任 初 의 南 總 督 도 辭 任 하고 간 宇 垣 前 總 督 도 모두 기뻐 祝 杯 드는 光 景 이 大 阪 每 日 에 실렸었고 閣 議 에선 內 閣 諸 大 臣 이 또한 孫 選 手 자랑 에 한동안 좋아했다고 東 京 新 聞 은 報 道 하였다. 이와같이 上 下 人 은 官 民 이든 老 少 든 모두 기 뻐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問 題 가 생겼다. 朝 鮮 의 特 殊 性 이 이 祝 杯 를 民 衆 的 으로 들기를 꺼리게 하였으니 孫 優 勝 의 感 情 이 民 族 的 어떤 感 情 으로 轉 化 하기 쉬운 것을 看 取 한 警 務 當 局 에서는 中 途 에 이르러 祝 賀 會 도 禁 止, 紀 念 體 育 舘 設 立 發 起 도 禁 止, 演 說 會 도 禁 止 로 孫 選 手 讚 揚 을 禁 하 였다. 따라서 警 務 局 長 과 圖 書 課 長 은 隔 日 에 한번쯤 新 聞 社 長 이나 編 輯 局 長 을 불러다가 孫 記 事 에 格 別 注 意 하기를 當 付 하였다. 이럴 즈음 8 月 25 日 東 亞 夕 刊 紙 가 押 收 를 當 하였다. 孫 選 手 胸 間 에 있어야 할 日 章 旗 를 抹 消 한 寫 眞 이 揭 載 되었던 까닭이라 그 뒤 곧 京 畿 道 警 察 部 에서는 高 等 課 員 이 出 動 하여 新 聞 社 로부 터 社 會 部 長 玄 鎭 健, 部 員 張 龍 瑞 林 炳 哲 運 動 部 員 李 吉 用 畫 家 李 象 範, 寫 眞 班 4 人 의 十 氏 를 檢 擧 하여 拘 留 取 調 한 結 果 故 意 로 日 章 旗 를 抹 消 했던 事 實 이 綻 露 되어 27 日 夕 에 이르 러 停 刊 處 分 을 當 한 것이다. 前 記 十 社 員 外 에 同 社 主 筆 金 俊 淵 氏 도 一 時 는 檢 擧 되었으나 곧 釋 放 되었고 編 輯 局 長 薛 義 植 氏 는 그 事 件 前 後 하여 地 方 旅 行 中 이었기에 何 等 關 聯 이 없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날 紙 面 에 낼 寫 眞 을 同 社 에서는 大 阪 朝 日 로부터 轉 載 했는데 寫 眞 班 員 과 運 動 部 員 과 社 會 部 員 몇사람이 흰 붓으로 胸 間 의 日 章 旗 를 지워버려 若 干 알려지게 한 것이었다고 한다. 新 東 亞 主 幹 拘 引 梁 源 模 氏 도 一 時 는 召 喚 母 紙 東 亞 日 報 가 이런 不 祥 事 속에 끼어있을 즈음 불똥은 同 社 經 營 의 月 刊 雜 誌 新 東 亞 에도 飛 火 하여 同 社 主 幹 崔 承 萬 氏 도 京 畿 道 警 察 部 에 檢 擧 取 調 中 이오, 同 誌 編 輯 兼 發 行 人 이자 東 亞 日 報 營 業 局 長 梁 源 模 氏 도 一 時 檢 擧 되었으나 곧 釋 放 되었는 바 新 東 亞 九 月 號 는 押 收 요, 10 月 號 以 後 는 當 局 에서 可 타 하는 指 令 이 있기까지 發 行 치 못하게 되었고, 新 家 庭 은 部 分 削 除 處 分 을 當 하였는데 新 東 亞 가 處 分 된 까닭은 마찬가지로 卷 頭 그림으로 낸 寫 眞 의 日 章 旗 를 同 樣 抹 消 하여 非 國 民 的 態 度 를 取 한 데 있었다. 東 亞 日 報 停 刊 理 由 警 務 局 長 談 으로 發 表 東 亞 日 報 는 今 回 發 行 停 止 處 分 을 當 하였다. 前 日 伯 林 에서 開 催 된 世 界 올림픽 大 會 의 마라톤 競 技 에 朝 鮮 出 身 의 孫 基 禎 君 이 優 勝 의 月 桂 冠 을 獲 得 한 것은 日 本 全 體 의 名 譽 로 日 本 內 地 와 朝 鮮 共 히 함께 祝 賀 할 것이며 또 日 本 內 地 와 朝 鮮
79 融 和 의 資 料 로 할 것이지 此 를 逆 用 하여 조금이라도 民 族 的 對 立 의 空 氣 를 誘 致 하는 일이 있어서 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事 實 은 新 聞 紙 等 의 記 事 는 자칫하면 對 立 的 感 情 을 刺 戟 함과 如 한 筆 致 를 取 하는 것이 있음은 一 般 으로 遺 憾 視 하던 바이다. 東 亞 日 報 는 從 來 屢 次 當 局 의 注 意 가 있었음에도 不 拘 하고 8 月 25 日 紙 上 에 孫 基 禎 君 의 寫 眞 을 揭 載 하였는데 其 寫 眞 에 明 瞭 히 나타나야 할 日 章 旗 의 마크가 故 意 로 抹 消 한 形 跡 이 있었으므 로 卽 時 差 押 處 分 에 附 하고 其 實 情 을 調 査 하였는바 右 는 八 月 二 十 三 日 附 大 阪 朝 日 新 聞 에 揭 載 된 孫 基 禎 君 의 寫 眞 을 轉 載 함에 際 하여 日 章 旗 가 新 聞 紙 上 에 나타남을 忌 避 하여 故 意 로 技 術 을 使 用 하여 此 를 抹 消 한 것이 判 明 되었으므로 마침내 其 新 聞 紙 에 對 하여 發 行 停 止 處 分 을 내리게 되었다. 如 此 한 非 國 民 的 態 度 에 對 하여는 將 來 에도 嚴 重 取 締 를 加 할 方 針 인데 一 般 도 過 誤 가 없도록 注 意 하기를 바란다. 金 主 筆, 薛 局 長 辭 表 = 宋 社 長 以 下 社 員 出 勤 謹 愼 中 = 이 停 刊 事 變 이 일어나자 同 社 主 筆 金 俊 淵 과 編 輯 局 長 薛 義 植 氏 는 宋 社 長 에게 引 責 의 辭 表 를 提 出 하였는데 警 察 側 取 調 가 아직 一 段 落 을 짓지않고 있으므로 事 件 의 發 展 性 과 또 그 眞 相 을 明 白 히 알 수 없기에 아직은 同 辭 表 를 受 理 치 않고 宋 社 長 이 保 留 하고 있다고 傳 한다. 더욱 社 長 以 下 社 員 一 同 은 謹 愼 의 意 를 表 하고 있으며 前 과 같이 每 日 社 에 出 勤 하여 讀 書 에 熱 心 하는 中 이라고 傳 한다. 損 害 拾 餘 萬 圓 說 復 舊 에는 巨 大 한 힘이 들리라고 이번 停 刊 으로 東 亞 日 報 의 損 害 는 얼마나 될는고. 直 接 損 害 額 을 記 하면 8 月 分 1 個 月 新 聞 代 約 3 萬 圓 中 未 收 를 三 分 之 二 로 보아 約 2 萬 圓, 東 京 大 阪 으로부터 들어오는 廣 告 料 約 1 萬 圓, 其 他 雜 收 入 等 月 3~4 萬 圓 의 收 入 이 전혀 없어지는 反 面 에 社 員 의 生 活 費 支 給 其 他 費 用 으로 적어 도 每 月 數 萬 圓 의 直 接 損 害 를 보고 있는 듯이 推 測 된다. 前 者 卽 第 3 次 停 刊 當 時 4 月 17 日 부터 8 月 末 日 까지 約 5 個 月 동안 東 亞 日 報 社 의 損 害 額 이 15 萬 圓 이라고 傳 하여 9 月 1 日 새 紙 面 을 내보낼 때에는 겨우 殘 額 3 萬 7 千 圓 인가 하는 적은 돈을 가지고 續 刊 資 本 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로 미루어 보면 그 當 時 보다 只 今 은 廣 告 收 入 도 늘었고 讀 者 數 도 많은 만큼 그 損 害 도 더 많을 것으로 觀 測 된다. 停 刊 中 도 停 刊 中 이려니와 續 刊 을 하게 되면 다 빼앗긴 讀 者 地 盤 을 復 舊 하기에 巨 大 한 人 力 과 資 力 이 들어야 할 것이요, 또 大 阪 東 京 의 廣 告 地 盤 을 回 復 시키려면 到 底 히 短 時 日 로 되어질 일이 아니다. 이일 저일에 想 倒 하면 東 亞 日 報 는 今 番 事 故 가 致 命 傷 에 近 한 重 瘡 인데 아마 復 舊 하자면 社 主 로 大 株 主 인 金 性 洙 氏 의 財 政 的 大 英 斷 이 있어야 할 것이오, 또한 海 內 海 外 의 人 材 多 數 를 網 羅 하여 紙 面 을 他 紙 보다 精 彩 있게 꾸 미지 않으면 昔 日 의 東 亞 日 報 에 돌아가지 힘들지 않을까? 東 亞 日 報 停 刊 史 今 爲 까지 東 亞 日 報 는 네번째나 停 刊 을 當 했다. 이제 事 件 別 로 보면 이러하다. 1. 第 1 次 는 社 說 三 種 의 神 器 事 件 으로 大 正 9 年 9 月 부터 大 正 10 年 2 月 까지 約 6 個 月 間 ( 當 時 總 督 齊 藤 實, 警 務 局 長 丸 山, 鶴 光 圖 書 課 長 ) ( 當 時 社 長 朴 泳 孝, 編 輯 局 長 張 德 秀 ) 2. 第 二 次 는 露 西 亞 서 온 祝 辭 揭 載 事 件 으로 昭 和 2 年 3 月 부터 4 月 까지 四 十 日 間
80 ( 當 時 總 督 齊 藤 實, 警 務 局 長 三 矢, 田 中 圖 書 課 長 ) ( 當 時 社 長 兼 主 筆 宋 鎭 禹 ) 3. 第 3 次 는 10 週 年 記 念 祝 辭 揭 載 事 件 으로 昭 和 6 年 4 月 부터 9 月 까지 約 6 個 月 間 ( 當 時 總 督 宇 垣, 警 務 局 長 淺 利, 立 田 圖 書 課 長 ) ( 當 時 社 長 宋 鎭 禹, 編 輯 局 長 李 光 洙 ) 4. 第 4 次 는 孫 基 禎 胸 間 國 旗 抹 消 事 件 昭 和 11 年 8 月 27 日 부터 ( 當 時 總 督 南, 警 務 局 長 田 中, 柳 生 圖 書 課 長 ) ( 當 時 社 長 宋 鎭 禹, 主 筆 金 俊 淵, 編 輯 局 長 薛 義 植 ) 東 亞 日 報 의 解 禁 은? 强 柔 兩 面 의 觀 測 區 區 8월 27일 停 刊 以 來 벌써 한달이 經 過 했다. 3 百 의 社 員 과 千 餘 의 그 家 族 生 計 를 앞에 둔 東 亞 日 報 의 焦 燥 는 하루바삐 解 禁 되기를 苦 待 하고 있다. 그런데 消 息 通 의 觀 測 에 依 하면 一 은 長 期 化 되리란 悲 觀 說 인데 그것은 時 局 이 예전과 달라 國 家 非 常 時 의 此 際 에 이와같은 非 國 民 的 態 度 를 보였으며 더구나 過 去 에 皇 室 記 事 에 對 한 態 度 와 總 督 政 治 에 對 한 積 極 的 協 助 가 없었던 點 으로 當 局 의 미움이 屢 屢 하였으니만치 이번에는 여간 謹 愼 치 않고는 解 禁 되지 않을 것이란 說 이 있고 또는 解 禁 이 된다 할지라도 嚴 重 한 內 諾 條 件 이 붙을 터이며 極 端 으로 觀 測 하는 이는 上 海 事 變 같 은 것이 東 亞 政 局 어느 곳에서든지 다시 터지는 날이면 아주 멀어져서 數 個 月 로는 可 望 이 없으리 라고 한다. 二 는 短 期 에 解 禁 되리란 說 이 있는데 그 根 據 는 이번 事 件 은 社 의 上 層 部 는 全 然 몰랐고 그아 래 寫 眞 班 員 等 數 人 이 共 謀 하고 한 事 件 인 바 이 때문에 큰 機 關 을 長 期 的 制 裁 를 줌은 苛 酷 하다 함이오, 또 南 新 總 督 은 恩 威 並 行 의 政 治 를 할 터이므로 停 刊 으로써 이미 十 分 懲 治 를 하였은즉 新 總 督 의 溫 情 이 不 久 하여 베풀어질듯 하며 警 務 局 長 또한 新 任 卽 前 의 事 라 三 橋 新 局 長 의 方 針 이 아무쪼록 勢 力 있는 言 論 機 關 으로 하여금 하루속히 反 省 하여 時 世 에 背 反 함이 없도록 引 導 함에 있을 것이므로 充 分 히 戒 飭 을 加 한 뒤 速 히 解 禁 이 되리라고 함이다. 아지못할게라, 모든 것은 南 總 督, 大 野 總 監, 三 橋 局 長, 柳 生 課 長 의 胸 中 에 있음인저. 一 般 輿 論 은 어떠한가. 非 國 民 的 態 度 는 잘못이다 東 亞 日 報 의 今 般 態 度 를 가장 痛 罵 한 것은 京 城 日 報 가 社 說 로 或 은 記 事 로 連 日 攻 擊 함이었고 東 京 서 發 行 하는 新 聞 之 新 聞 新 聞 之 日 本 도 모두 筆 銖 를 加 하였으며 그밖에 甲 子 俱 樂 部, 國 民 協 會, 大 東 民 友 會 等 에서 或 은 團 體 로 或 은 個 人 으로 攻 擊 하는 文 書 及 言 說 이 있었다. 그런데 一 輿 論 을 살피건대 國 旗 抹 消 한 行 爲 는 더 論 議 할 餘 地 없이 非 國 民 的 行 事 라 한다. 이 一 事 에 對 하여 는 如 何 한 制 裁 를 加 하여도 猶 不 足 하다. 東 亞 日 報, 中 央 日 報 모두 이 一 事 에 對 하여는 無 言 으로 모든 制 裁 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果 然 社 의 態 度 였을까? 警 察 에서의 檢 擧 範 圍 로 보아 이것은 數 個 社 員 의 失 行 인 것이 判 明 되었다. 같은 孫 選 手 가 寫 眞 을 紙 面 에 내기 시작한지 7, 8 次, 늘 日 章 旗 가 胸 間 에 붙은 寫 眞 을 내던 同 社 가 先 何 心 後 何 心 으로 단 한번을 國 旗 抹 消 를 하자고 했으리오. 그러므로 이번 失 行 은 社 의 全 體 意 思 가 아니오, 오직 한두 社 員 의 失 行 일 것이 分 明 하며 또는 東 亞 日 報 와 같이 有 力 한 民 間 紙 가 아직도 排 日 色 彩 를 띠고 있다 함은 總 督 政 治 에도 影 響 있는 일인즉 今 番 은 今 後 의 態 度 를 十 分 戒 飭 한 뒤 速 히 解 禁 하여 줌이 좋겠다고 一 般 은 希 望 하고 있다
81 18. 宋 鎭 禹 氏 는 무엇하고 계신가. = 前 新 聞 社 長 의 그 뒤 消 息 其 二 = < 三 千 里 > (1938년 5월호) 東 亞 日 報 社 에 15 年 가까이 계시던 先 生 이 新 聞 社 를 그만두신지 이제 햇수로 2 年, 그리 짧은 時 日 이 아니다. 그 짧지않은 동안 先 生 의 消 息 은 너무도 寂 寞 한 感 이 있다. 朝 鮮 型 의 紳 士 風 을 갖춘 先 生 이라 田 園 으로 돌다가 閑 暇 하게 계시는가? 그렇지 않으면 杜 門 不 出, 讀 書 三 昧 境 에 드셨는가? 또한 그렇지도 않을진대 전부터 몸에 있는 病 患 때문이신가? 오라 오 라! 昨 年 가을 東 京, 大 阪 으로 旅 行 하셨다지, 아마 틈있는대로 이곳 저곳 山 水 따라 돌아다니시지 나 않을까? 이런 생각에 갈피를 잡지못하는 채로 記 者 는 大 寒 의 고개를 갓 넘은 지난 스무 사흗날 이른 새 벽 市 內 苑 西 町 先 生 自 宅 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간밤에 내린 눈이 長 安 을 곱게 덮었고 昌 慶 苑 內 의 마른 나무에 白 花 가 滿 發 한 아침 아홉시 半 이었다. 이 宅 下 人 을 불러 물으니 先 生 은 舍 廊 방에 손님과 같이 계시다 한다. 첫새벽 추위를 참아가며 찾은 보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적이 마음이 놓였다. 조그만 대나무 문을 열고 돌층계로 올라섰다. 높다란 돌층계 위에 우뚝이 서 있는 한채 집, 이집은 마치 어느 寺 刹 의 堂 宇 같은 感 을 느끼게 한다. 방안에 들어서니 웬 젊은 靑 年 두분이 先 生 과 자리를 같이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李 君 은 이제 大 學 을 갓 나왔을 뿐이므로 社 會 에 對 해서는 아직 아무런 經 驗 도 없습니다마는 先 生 께서 꼭 힘써주셔야 합지요 글쎄 新 聞 社 에서도 모든 것을 緊 縮 하는 때이니까 어디 쉬워야지. 더구나 나는 신문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내 힘있는대로는 힘 써 보겠지마는 簡 單 한 對 話 만 들어보아도 한분은 어느 中 學 校 校 諭 로서 先 生 을 전부터 親 히 아는 사이요, 또 한분은 지금 新 聞 社 ( 東 亞 日 報 社 )에 職 을 求 하는 靑 年 임을 알 수 있다. 東 亞 日 報 와는 지금 어떤 關 係 이신가? 내 擧 動 이 그리 速 히 물러갈 것 같지 않은 것을 알았던지 두 靑 年 은 자리에서 일어서 나간다. 室 內 에는 先 生 과 記 者 단 두 사람뿐이다. 新 聞 社 를 나오신 뒤, 先 生 이 딴 方 面 에 關 係 하시고 있는 일은 없으십니까? 아무데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집에 꾹 박혀있는 것이 일이지요. 세상에서는 先 生 의 그뒤 消 息 을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줄로 아는데 언제까지나 先 生 은 沈 黙 만 지키시렵니까? 허허. 沈 黙 을 안지키면 무얼 합니까? 나이도 먹을대로 먹어서 이제는 아무런 일도 다 틀렸지 요, 이 社 會 에 늙은 사람이 어디 所 用 이 있습니까? 先 生 이 新 聞 社 를 그만 두실 때만 해도 健 康 이 좋지 못하다던가, 精 力 이 弱 하다던가 하는 그런 點 은 別 般 느끼지 않으셨겠지요? 왜요, 그렇지도 않지요. 내가 新 聞 社 에 15 年 가까이 있었지만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奇 蹟 이 었지요. 꿈같이 지나온 셈이지요. 그러나 이제 생각해보니 또다시 그런 奔 走 한 일을 감당해 나 갈 것 같지가 않습니다. 先 生 이 萬 一 新 聞 社 로 다시 들어가실 環 境 에 이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新 聞 社 로는 아주 말도 마십시요 (무슨 굳은 決 心 이 있으신지 두세번 손을 내저으신다) 先 生 님께서 지금은 新 聞 社 와 어떤 關 係 가 있습니까?
82 아무런 關 係 도 없습니다. 다만 十 餘 年 넘어 新 聞 社 에 있었던 關 係 로 社 의 일에 대해서 간혹 물 어오면 參 考 될만한 點 을 일러줄 뿐이지, 그밖에는 全 然 相 關 이 없습니다 그러시면 亦 是 間 接 으로는 많은 關 心 을 가지시고 늘 도우시는 보람입니까? 뭐 間 接 云 云 할 것까지도 없습니다. 오랫동안 있던 데니까 情 으로 보더라도 묻는 말쯤은 應 答 해야지요. 新 聞 社 에는 자주 出 入 하십니까? 자주 간다고 할 수야 없겠지요, 요새는 늘 閑 暇 하니까 間 或 들러보곤 합니다 新 聞 社 말씀은 그만하고 先 生 께서 요즘 지내시는 生 活 狀 態 나 좀 말씀해 주십시요. 나날이 무얼 로 消 日 을 하십니까?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습니다. 最 近 에는 病 으로 因 해서 藥 도 먹었고, 틈있는대로 新 聞, 雜 誌 나 뒤적이고 또 아침에는 일찍 散 策 하는 것 뿐이지요. 讀 書 는 어느 方 面 의 것을 主 로 하십니까. 勿 論 時 期 가 時 期 인만치 政 治 方 面 이나 時 局 에 關 한 書 籍 을 많이 보시겠지요? 아니오. 인제 政 治 方 面 의 책은 全 혀 읽지 않습니다. 첫째 읽을 精 力 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읽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런 方 面 에는 아주 無 關 心 一 貫 主 義 로 나갈 作 定 입니다. 몸도 健 康 한 편이 못 되고 머리도 疲 勞 하고 해서 讀 書 를 그리 精 力 的 으로 못하고 틈 나는대로 朝 鮮 古 代 文 獻 類, 例 를 들면 東 國 寶 鑑 같은 書 籍 을 比 較 的 많이 읽게 됩니다. 그밖에도 이것 저것 그때 그때에 必 要 하다 고 생각하는 것이면 어느 것이고 가리지 않고 읽습니다 (마침 先 生 의 책상을 살펴보니, 古 代 書 類 가 가득히 쌓여있고 또 當 山 房 版 인 百 科 大 辭 典 30 餘 冊 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이것을 보아도 先 生 의 讀 書 하시는 部 類 를 짐작할 수가 있다) 讀 書 는 하루에 몇 時 間 쯤 하시며 어느 때쯤에 하십니까? 꼭 몇 時 間 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틈있는대로 두 時 間 이고 세 時 間 이고 繼 續 하게도 되고 몇 十 分 하다가 마는 때도 있습니다. 또 대개는 조용한 밤 자리에 누워서 읽는 것이 제일 편하더군요 圖 書 舘 에는 종종 다니시는지요 별로 가지 않습니다. 한달에 겨우 두세번쯤 가는 쪽이지요 漢 詩 는 조용한 때에 한 두 首 적어봄직도 한데 그동안 읊으신 것이 있으시면 하나 주십시요 허허, 내가 무슨 詩 人 입니까? 十 餘 歲 前 後 에 書 堂 에서 좀 지어보았으나 그 뒤 한번도 없습니 다. 나는 藝 術 과는 아주 因 緣 이 먼 사람입니다. 내게 多 少 라도 詩 才 가 있다면 지금의 心 境 을 詩 로 써 읊을 만도 합니다마는 요즘 先 生 께서 나다니시는 곳은 주로 어디이십니까? 어디라고 꼭 정해 놓고 다니는 곳은 없고 여러 親 知 들을 찾아다닙니다 先 生 께서는 무슨 일로 昨 年 에 東 京 엘 다녀오셨나요? 그저 東 京, 大 阪 等 地 를 두루 旅 行 했을 뿐입니다 接 觸 하신 人 物 들은 어떤 層 입니까? 내가 新 聞 社 에 十 餘 年 있었던 關 係 로 그동안 廣 告 거래하던 廣 告 主 들을 만나보는 것이 커다란 일이었으니까요 東 京 에 갔을 때의 感 想 은? 大 阪 에 약 1 週 日, 東 京 에서 약 1 週 日 間 있었는데 그때가 이번 事 變 의 初 期 였던 만큼 모두 緊 張 하여 역시 戰 時 氣 分 이더군요. 그밖에는 每 年 다녀오는 關 係 로 해서 別 다른 感 想 이 없습니다 先 生 께서 이런 閑 暇 한 生 活 을 하실 바이면 안온한 田 園 으로 가시든지, 名 山 大 刹 을 찾아 조용한 生 活 을 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런 생각까지는 아직 없고 서울에 있으면서 여러 곳을 旅 行 이나 할까 합니다. 十 餘 年 의 新 聞 社 生 活 에서는 時 間 의 餘 裕 가 있었나요. 늘 바빴지요. 그러기에 朝 鮮 內 만 해도 못 가본 곳이 많습
83 니다. 金 剛 山 이나 扶 餘 같은 데도 아직 못 가보았습니다. 참 慶 州 는 中 央 高 普 時 節 에 生 徒 들을 데리 고 修 學 旅 行 다녀온 일이 있군요. 그중에도 南 原 의 廣 寒 樓 는 한번 가볼만한 줄로 압니다. 어쨌든 차츰 따뜻해질 터이니 旅 裝 을 꾸려가지고 山 좋고 물좋은 데나 古 跡 으로 알려진데를 찾아볼 작정 입니다 요즘은 어떤 方 面 의 사람들과 많이 接 觸 하시며 靑 年 들은 어떤 일로 先 生 宅 을 찾습니까? 내가 찾는 이는 대개 中 年 以 上 老 年 층이지마는 찾아오는 사람은 靑 年 층이 많습니다. 이제도 보 셨지마는 대개는 求 職 靑 年 들입니다. 하루에도 몇 名 씩 됩니다. 모두 專 門, 大 學 을 나온 有 爲 의 靑 年 들인데 職 業 을 못 얻어 어깨가 축 처져 힘없이 다니는 것을 보면 寒 心 합니다. 그들은 모두가 眉 目 이 秀 麗 하고 씩씩하고 外 貌 가 얌전한데 그렇게 쩔쩔매고 다니는 것을 보면 내 마음도 무거워 집니다. 實 로 朝 鮮 社 會 는 寒 心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런 靑 年 들을 모두 받아들일 만한 機 關 이 必 要 한데 어디 지금 現 狀 으로야 可 能 한 일입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緊 要 하지않은 것이 없지마는 그중에서도 産 業 方 面 이나 企 業 方 面 으로 좀 더 활 동무대를 넓혀서 有 爲 한 人 材 들은 모두 收 容 하도록 하는 것이 刻 下 의 急 務 가 아닌가 합니다. 나 도 그런 靑 年 들이 가득히 쌓여있는 것을 볼 때 적지않은 責 任 感 을 느낍니다마는 내게야 어디 힘 이 있어야지요. 참으로 딱합니다 金 俊 淵 氏 와 자주 接 觸 하신다는데 그 분은 무슨 事 業 을 하십니까? 그분은 지금 全 谷 이라는 시골에 가 있습니다. 한 달에 3 4 次 올라오는데 어디 자주 만나게 됩 니까? 全 谷 에는 普 成 專 門 學 校 農 場 이 있는데 그 農 場 總 監 으로 내려가 있습니다 金 炳 魯 氏 宅 엔 자주 가십니까? 그분도 職 業 을 가진 이가 되어서 늘 바쁜 關 係 로 자주 만나지 못합니다 桂 洞 金 性 洙 氏 宅 엔 자주 가십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가봅니다마는 거기도 자주 가는 편은 아닙니다 ( 先 生 이 가장 많이 接 觸 하실 분이 몇 분 있으련만 좀체 確 答 을 避 하신다. 아무리 날카로운 質 問 을 던져도 끝끝내 失 敗 다. 입이 무거운 터인지라) 거리에 나가셨다가 점심은 어디서 잡수십니까? 요즘은 점심을 대개 안 먹습니다. 먹는다 해도 집에 들어와서 먹지요 요즘 極 東 風 雲 이 漸 次 사나운데 거기에 대한 感 想 을 말씀해주십시요 아까도 말했지만 政 治 나 時 事 問 題 는 今 後 全 혀 無 關 心 하렵니다. 그런 말씀은 물어주지 마십시 요. 모릅니다 끝으로,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뭐, 지금 이 狀 態 대로 지내는 수밖에 없지요. 한 浪 人 이 된 셈입니다. 구태여 今 後 의 플랜을 말 하라면 오랫동안 못 다닌 곳으로 旅 行 하려는 것이 될까요? 물론 오랜 앞날의 일은 말할 수 없 고 긴 時 間 을 말씀해보아도 별로 신통한 資 料 를 얻지 못했다. 記 者 는 失 禮 를 謝 禮 하고 일어섰다. 宋 社 長 의 배웅을 받으며 뜰아래 내려서니 건너편으로 보이는 昌 慶 苑 內 의 鳳 凰 閣 이 꿈속에서 바라 보는 듯하다. 19. 新 聞 出 版 界 人 物 論 < 新 世 紀 > (1939년 9월호) 愚 愁 散 人
84 現 今 朝 鮮 의 出 版 界 는 名 實 共 히 活 況 을 呈 하고있다. 量 뿐 아니라 質 에 있어서도 30 年 代 以 前 에 比 하여 훨씬 發 展 하여 있는 것이 事 實 이다. 30 年 代 以 前 의 出 版 界 는 定 期 的 인 刊 行 物 이 거의 全 部 였다. 無 定 期 的 인 單 行 本 은 1 年 1 冊 이 있는 일도 드물었다. 그러나 聲 勢 만은 宏 壯 하였다. 이와 反 對 로 現 代 의 出 版 界 는 定 期 的 인 刊 行 物 은 적어지고 無 定 期 的 인 單 行 本 의 刊 行 이 자못 盛 況 을 이루고 있다. 聲 勢 는 예전같이 宏 壯 하지 않으나 그대신 虛 僞 聲 勢 의 弊 는 없다. 그러나 두 손을 들어서 大 歡 迎 할 氣 運 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點 이 적지않다. 왜그러냐? 現 今 의 單 行 本 을 刊 行 하는 사람들은 세 部 類 로 나눌 수 있으니 其 一 은 自 費 로 出 版 하는 사람이 오, 其 二 는 商 業 으로 出 版 하는 사람이오, 其 三 은 純 全 히 文 化 向 上 그것을 위하는 마음으로 出 版 하 는 사람이다. 즉 其 一 은 大 槪 가 現 實 에 絶 望 해서 이왕 文 筆 을 業 으로 삼아왔던 길이니 이 機 會 에 紀 念 으로 무엇이든지 남겨두지 않으면 永 永 遺 業 없이 終 生 할지도 모른다는 自 抛 半 過 去 事 에 對 한 愛 着 半 의 心 情 에서 억지로 單 行 本 한권이나마 刊 行 하는 者 이며 其 二 는 如 上 의 文 化 人 의 心 理 를 利 用 하여 文 化 程 度 가 多 少 높아진 大 衆 에게 冊 을 팔아먹으려는 생각 爲 主 로 單 行 本 을 發 行 하는 者 이며 其 三 은 보다 더 意 義 있는 일은 하기가 極 難 하니 不 足 하나마 許 與 된 條 件 을 最 大 限 最 善 으로 利 用 하여 文 化 의 遲 遲 한 進 步 를 庇 護 하는 同 時 에 過 去 가 남겨놓은 것이나 잘 整 理 해서 새로운 제네 레이션에 遺 産 하자는 心 算 으로 利 潤 不 計 하고 單 行 本 을 刊 行 하는 者 이다.( 中 略 ) 먼저 新 聞 界 를 보면 불행히도 朝 鮮 中 央 日 報 가 財 難 으로 破 産 한 뒤에 朝 鮮 人 側 民 間 新 聞 은 東 亞 日 報 와 朝 鮮 日 報 그리고 最 近 의 半 民 間 化 한 每 日 新 報 가 있을 뿐이다. 東 亞 日 報 는 數 次 의 秋 霜 에도 不 拘 하고 어찌어찌 延 命 은 해왔으나 昔 日 의 面 貌 는 그 影 子 도 볼 수 없게 變 하여졌다. 朝 鮮 日 報 亦 是 그렇기는 하나 東 亞 日 報 가 더 甚 하게 蒼 白 해진 것 같다. 時 勢 關 係 도 있겠지만 人 的 素 材 에도 多 大 한 原 因 이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다른 사람들은 社 長 白 寬 洙 氏 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나 내게는 宋 鎭 禹 氏 에 比 肩 할만한 人 物 로는 보여지지 않는다. 新 聞 에 依 하면 宋 鎭 禹 氏 가 지금도 後 援 을 하는 모양인데 借 力 하고서도 그만한 힘밖에 發 揮 못하니 큰 人 物 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編 輯 局 長 以 下 各 部 의 首 級 人 物 도 其 人 을 얻었다고 하기는 퍽 어 려우니 每 日 의 東 亞 紙 를 펴서 읽어보면 그속에 역력히 顯 現 하고 있는 事 實 이 證 明 한다. 朝 鮮 日 報 는 社 長 方 應 謨 氏 가 元 來 俄 成 的 人 物 이라 奇 妙 한 風 說 도 더러 있는 모양이나 氏 의 뜻 이든지 아니든지 間 에 現 在 에 있어서는 人 的 素 材 를 東 亞 보다는 고르게 가진 편이다. 두 新 聞 社 의 하루 바삐 고쳐야 할 惡 習 은 地 方 的 派 閥 이다. 現 象 으로 보아서는 白 氏 나 方 氏 가 그것을 是 正 할만한 人 格 을 가졌으리라고 하기는 어려우나 어쨌든 고치지 않아서는 안될 絶 對 必 要 事 이다. 每 日 新 報 는 社 長 과 副 社 長 을 둘 다 異 樣 한 意 外 의 人 物 을 갖고 있다. 崔 麟 氏 와 李 相 協 氏 의 過 去 事 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東 亞 와 朝 鮮 보다는 其 人 을 얻은 것 만은 事 實 이다. 그리고 各 部 의 首 級 人 物 도 相 當 히 選 配 되어 있다. 人 的 物 的 으로 東 亞 와 朝 鮮 보다 훨씬 優 位 에 있음은 누구든지 否 認 치 못할 것이다. ( 中 略 ) 朝 鮮 日 報 社 出 版 部 發 行 의 朝 光, 女 性, 少 年 의 세 雜 誌 도 없는 것보다는 좋은 冊 이다. 方 應 謨 氏 도 아주 생각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三 千 里 誌 의 金 東 煥 氏 는 꽤 끈덕진 사람이다. 어수선하게 벌려놓기 좋아하는 것이 좀 病 이기는 하나-. 東 洋 之 光 은 國 語 雜 誌 이다. 社 長 朴 熙 道 氏 와 編 輯 擔 當 者 金 龍 濟 氏 와 客 員 印 貞 植 氏 는 內 鮮 一 體 와 新 東 亞 主 義 를 위하여 不 休 活 動 하는 모양인데 基 盤 이 튼튼히 되기 前 에는 무어라고 批 評 할 수 가 없다. ( 中 略 )
85 人 文 社 에서는 새 雜 誌 를 發 刊 하고 徐 椿 氏 는 무슨 出 版 社 를 計 劃 한다니 朝 鮮 의 出 版 文 化 의 앞날 은 아직도 多 幸 한 때문에 이러한 現 象 이 接 踵 興 起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작히나 좋으랴만 -- 悲 觀 이 無 用 이라면 樂 觀 은 尙 早 일 것이다. 20. 趣 旨 書 < 韓 國 近 代 名 論 說 集 > (1979년) 國 民 大 會 準 備 會 천하의 公 道 와 인류의 정의는 마침내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의 기회를 약속하였으니 망국의 한 을 품은 채 忍 從 과 굴욕의 악몽에 시달리던 우리에게 광명의 새날을 위하여 진군하라는 巨 鍾 은 드디어 울었다. 필경 울고야 말았다. 懊 悶 과 怨 淚 로 점철된 과거를 회고할 때 혹은 鐵 窓 에서 혹은 해외에서 동지의 義 血 은 얼마나 흘렸으며 선배의 苦 鬪 는 얼마나 쌓였던가. 우리에게 이 날이 있 음은 진실로 苦 節 三 十 有 六 年 동안 누적한 희생의 所 産 이며 전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싸우던 우방 의 후의로 因 함이니 우리는 이 날을 위하여 이 날을 同 慶 치 못할 우리 在 天 의 영령을 추도치 않 을 수 없으며 聯 合 諸 國 의 의거에 대하여 滿 腔 의 사의를 표명치 않을 수 없다. 울적하고 압축되었던 潛 力 이 순간에 폭발되고 일시에 반발하는지라 衝 天 하는 意 氣 저절로 常 道 와 正 軌 를 벗어나게 됨은 이 또한 자연이니 勢 固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광복의 대중은 遙 遠 하고도 착잡한지라 그러므로 하여서 더욱이 先 後 緩 急 의 질서는 절대로 유지되어야 할 것이며 대의명분의 旗 幟 는 선명하여야 할 것이다. 강토는 잃었다 하더라도 삼천만 민중의 心 中 에 응집된 國 魂 의 表 象 은 庚 戌 國 變 이래로 亡 命 志 士 의 氣 魂 과 함께 해외에 儼 存 하였던 바이나 오늘날 日 本 의 정권이 퇴각되는 이 순간에 있어서 이에 代 位 될 우리의 정부 우리의 국가대표는 己 未 獨 立 이후로 具 現 된 大 韓 臨 時 政 府 가 최고요 유 일의 존재일 것이다. 派 黨 과 色 別 을 초월하여서 이를 환영하고 이를 지지하고 이에 歸 一 함이 現 下 의 내외정세에 타 당한 대의명분이니 舊 政 의 殘 滓 가 尙 存 한 작금에 있어서 우리 전국민의 당면한 관심사는 우선 국민의 總 意 로써 우리 在 重 慶 大 韓 臨 時 政 府 의 支 持 를 선서할 것. 국민의 總 意 로써 聯 合 各 國 에 謝 意 를 표명할 것. 국민의 總 意 로써 民 政 수습의 방도를 강구할 것 등이다. 政 體 政 黨 의 시비론도 이후의 일이며 정강정책의 가부론도 이후의 일이니 이리하여야 비로소 우리 大 業 의 巨 步 는 정정당당할 것이다. 이에 僣 越 하나마 同 憂 의 責 을 自 負 하는 발기인 일동은 聯 合 軍 의 정식주둔과 日 軍 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국민 總 意 의 所 在 를 聲 明 할 필요를 느끼며 아울러 總 意 집결의 방법으로서 國 民 大 會 의 發 會 를 준비하는 바이니 現 下 의 실정은 만사가 임시적 편법이라 名 實 이 相 符 할 최선의 방법이 있을 수 없거니와 우리의 意 圖 와 우리의 염원은 次 善 三 善 일지라도 철두철미 대의명분의 지표를 고수 하고 이를 구명코자 함에 있다. 滿 天 下 의 동포여, 국가재건의 제일보를 위하여 國 民 總 意 의 기치하에 삼천만 민중의 心 魂 을 凝 結 하라. 그리하여 현재와 미래 永 劫 에 우리의 행복과 번영을 期 하라. 1945년 9월 7일
86 21. 韓 國 民 主 黨 創 黨 大 會 ( ) 決 議 案 一. 聯 合 軍 總 司 令 官 맥아더 元 帥 에게 感 謝 의 打 電 을 할 것. 二. 朝 鮮 이 北 緯 三 十 八 度 線 을 南 北 으로 美 蘇 兩 軍 에게 分 斷 占 領 된 것은 不 便 不 幸 한 일이니 速 히 이것을 撤 廢 하여 行 政 的 統 一 을 期 할 것. 宣 言 日 本 帝 國 主 義 의 鐵 鎖 는 끊어졌다. 血 汗 의 鬪 爭 참으로 三 十 三 年, 世 界 史 의 大 轉 換 과 함께 우리 는 드디어 光 復 의 大 業 을 完 成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半 萬 年 의 빛나는 歷 史 를 도로 밝혀 完 璧 無 缺 한 自 主 獨 立 의 國 家 로서 久 遠 의 發 展 을 約 束 하게 되었다. 三 千 萬 의 가슴에 뒤끓어 용솟음치는 오늘의 기쁨이여! 이 기쁨은 곧 革 命 同 志 들에게 바치는 感 謝 로 옮겨지고 더욱 抱 恨 終 天 하신 殉 國 諸 賢 의 생각이 사무치매 도리어 못내 슬플 뿐이다. 참으 로 이 크나큰 光 復 의 功 勳 은 海 內 海 外 의 高 貴 하고 감추어진 無 數 한 革 命 同 志 들의 血 汗 의 結 晶 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는 머지않아 海 外 의 凱 旋 同 志 들을 맞이하려고 한다. 더욱이 隣 邦 重 慶 에서 苦 戰 力 鬪 하던 大 韓 臨 時 政 府 를 中 心 으로 集 結 한 同 志 들을 鼓 動 하며, 밖으로 民 族 生 脈 을 國 際 間 에 顯 揚 하면서 나중에 軍 國 主 義 撲 滅 의 一 翼 으로 當 當 한 各 分 아래 盟 邦 中 美 英 蘇 등 聯 合 軍 에 끼어 빛나는 武 勳 까지 세웠다. 오늘의 기꺼운 光 復 成 就 가 이 어찌 偶 然 한 것이랴! 우리는 盟 誓 한다. 重 慶 의 大 韓 臨 時 政 府 는 光 復 劈 頭 의 우리 政 府 로서 맞이하려고 한다. 또 우리는 約 束 한다. 軍 國 主 義 戰 壘 들을 爆 滅 하고 世 界 平 和 를 確 立 시키는 世 紀 的 建 設 期 를 當 하여 自 主 獨 立 을 恢 復 한 우리는 盟 邦 諸 國 에 最 高 의 謝 意 를 表 하는 한편으로 國 際 平 和 의 大 憲 章 을 끝까지 遵 守 擴 充 하려고 한다. 나아가서 우리 民 族 이 將 來 할 世 界 의 文 化 建 設 에 뚜렷한 貢 獻 이 있기를 꾀할진대 무엇보다도 完 璧 無 缺 한 自 主 獨 立 國 家 로서 힘차게 發 展 하여야 될 것이다. 이는 오직 專 制 와 拘 束 없는 大 衆 本 位 의 民 主 主 義 制 度 아래 皆 勞 皆 學 으로써 國 民 의 生 活 과 敎 育 을 향상시키며 特 히 勤 勞 大 衆 의 福 利 를 增 進 시켜 毫 末 의 差 別 도 重 壓 도 없기를 期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全 國 民 의 自 由 로운 發 展 을 保 障 하며 全 民 族 의 團 結 된 總 力 을 기울여 새 國 民 의 基 礎 를 盤 石 위에 두고 世 界 新 文 化 建 設 에 邁 進 하려고 한다. 綱 領 一. 朝 鮮 民 族 의 自 主, 獨 立 國 家 完 成 을 期 함. 二. 民 主 主 義 政 體 樹 立 을 期 함. 三. 勤 勞 大 衆 의 福 利 增 進 을 期 함. 四. 民 族 文 化 를 昻 揚 하여 世 界 文 化 에 貢 獻 함. 五. 國 際 憲 章 을 遵 守 하여 世 界 平 和 의 確 立 을 期 함. 政 策 一. 國 民 基 本 生 活 의 確 保. 二. 互 惠 平 等 의 外 交 政 策 樹 立
87 三. 言 論, 出 版, 集 會, 結 社, 信 仰 의 自 由. 四. 敎 育 및 保 健 의 機 會 均 等. 五. 重 工 業 主 義 의 經 濟 政 策 樹 立. 六. 重 要 産 業 의 國 營 또는 管 制 管 理. 七. 土 地 制 度 의 合 理 的 編 成. 八. 國 防 軍 의 創 設 主 旨 를 宣 明 함 - < 東 亞 日 報 > 重 刊 辭 ( ) ( 一 ) 天 道 - 無 心 치 않아 이 彊 土 에 解 放 의 瑞 氣 를 베푸시고 聖 祖 의 神 意 無 窮 하시어 天 民 에게 自 由 의 活 力 을 다시 주시니 이는 오로지 國 事 에 殉 節 한 先 烈 의 功 德 을 갸륵타 하심이오, 東 亞 에 빛난 十 字 軍 의 武 勳 을 거룩타 하심이다. 世 界 史 的 變 局 의 必 然 性 一 面 이라 한들 이 何 等 의 感 激 이며 이 何 等 의 鴻 福 인가?. 日 章 旗 抹 消 事 件 에 트집을 잡은 侵 略 者 日 本 僞 政 의 最 後 發 惡 으로 廢 刊 의 極 刑 을 當 하였던 東 亞 日 報 는 이제 이날을 期 하여 主 旨 의 要 綱 을 다시금 宣 明 하여서 三 千 萬 兄 弟 와 더불어 同 夏 同 慶 의 血 盟 을 맺으려 하는 바이다. 創 刊 以 來 로 二 十 餘 年 間 押 收 削 除 의 亂 杖 이 千 度 를 넘었으며 發 行 停 止 의 惡 刑 이 四 次 에 이르 러 滿 身 이 血 痕 이었으나 그러나 民 族 의 表 現 機 關 으로 自 任 하였던 東 亞 日 報 는 잦은 侮 辱 과 잦은 迫 害 를 받아가면서도 오히려 民 族 의 面 目 을 固 守 하기에 最 後 의 苦 節 을 다하였던 것이다. 敵 은 執 權 者 라 一 九 三 八 年 八 月 十 日 畢 竟 殺 害 를 當 하고 말았던 것이니 是 日 에 民 族 은 感 覺 을 잃었고, 知 性 을 잃었고, 情 操 를 잃어 이땅의 日 月 은 빛이 있은듯 없었으며 貪 政 의 行 悖 는 그 極 에 달하여 이른바 供 出 은 걸레와 雜 草 에 이르고 掠 奪 은 姓 名 과 言 語 에 이르렀으며 兼 하여 魍 魎 의 助 惡 이 날로 더하매 天 地 는 진실로 暗 黑 한 바 였었으나 八 月 도 十 五 日, 霹 靂 이 一 巡 하자 蒼 天 은 한 고비 높아졌으며 大 地 는 그대로 넓어졌으니 이 何 等 의 壯 觀 이며 이 何 等 의 盛 事 였던가? ( 二 ) 東 亞 日 報 는 創 刊 劈 頭 에 (1) 民 族 의 表 現 機 關 으로 自 任 하노라 (2) 民 主 主 義 를 支 持 하노라 (3) 文 化 主 義 를 提 唱 하노라 의 三 大 主 旨 를 宣 明 하여 言 論 報 國 의 大 綱 을 삼은바 있었거니와 이 主 旨 를 通 하여 흐르는 一 貫 한 精 神 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다. 時 勢 의 制 約 을 따라 用 語 의 限 界 가 있었음은 勢 固 不 避 라, 하는 수 없었거니와 耿 耿 一 念 이 오직 民 權 의 暢 達 을 主 張 하고 民 生 의 安 堵 를 希 求 하여서 民 族 全 體 의 永 遠 한 繁 榮 을 위하여 筆 致 의 全 能 을 傾 注 하려는 丹 誠 은 今 昔 의 別 이 있을 理 없다. 이제 重 刊 에 臨 하여 우리는 創 刊 當 初 의 三 大 主 旨 를 그대로 繼 承 함에 何 等 의 未 洽 을 느끼지 않거니와 現 局 에 處 한 우리의 主 旨 를 具 體 的 으로 敷 衍 한다고 하면 大 槪 다음과 같다. 一, 첫째로 우리는 時 間 空 間 이 自 別 한 우리의 獨 自 性 을 高 調 한다. 五 千 年 동안 時 間 의 集 積 으로
88 育 成 된 우리의 傳 統 과 矜 持, 亞 細 亞 的 領 域 의 風 土 로 馴 化 된 우리의 理 念 과 香 氣 로써 民 族 의 完 成, 民 族 文 化 의 完 成 을 扶 翼 코자 한다. 二, 둘째로 우리는 民 主 主 義 에 依 한 輿 論 政 治 를 支 持 한다. 그리하여 民 意 에 依 한, 民 意 를 위한, 人 民 의 政 體 를 大 成 하여서 國 權 의 尊 嚴 과 國 運 의 發 揚 을 위한 모든 建 設 을 協 贊 코자 한다. 三, 셋째로 우리는 勤 勞 大 衆 의 幸 福 을 保 障 하는 社 會 正 義 의 具 現 을 期 約 한다. 그리하여 機 會 均 等 의 公 道 에 依 한 理 想 社 會 의 實 現 을 推 進 코자 한다. 四, 넷째로 우리는 徹 頭 徹 尾 한 自 主 互 惠 의 精 神 이 交 隣 의 原 則 됨을 信 奉 한다. 그리하여 領 土 의 大 小, 國 力 의 强 弱 等 差 別 을 超 越 한 國 際 民 主 主 義 의 確 立 에 寄 與 코자 한다. ( 三 ) 欄 을 달리하고 붓을 다시금 다듬어 逐 條 的 으로 解 明 할 機 會 가 있음을 約 束 하거니와 우리는 以 上 과 같은 主 旨 로써 우리의 行 動 軌 範 을 規 定 하는 同 時 에 이 線 을 沿 하여 輿 論 을 喚 起 하여 衆 議 를 凝 集 하여서 大 道 를 開 拓 하고 正 軌 를 敷 設 하려는 것이다. 新 聞 道 의 固 有 한 職 能 과 使 命 이 事 象 의 忠 實 한 報 道 에 있음은 勿 論 이려니와 그렇다 하여 單 純 한 傳 達 機 關 에 苟 安 하기에는 우리의 要 請 이 너무도 巨 大 하며 不 偏 不 當 의 言 論 이라 하여 是 非 의 倂 列 과 曲 直 의 混 雜 을 그대로 容 認 하기는 우리의 指 標 가 너무도 確 然 하며 우리의 情 熱 이 너무도 强 烈 한 바 있다. 우리는 이미 붓을 들었다. 이 붓이 꺾일지언정 이 붓에 連 結 된 우리의 血 管 에는 脈 脈 한 生 血 이 그대로 激 流 를 지으리니 失 바야흐로 弦 을 떠난지라 懷 疑 逡 巡 이 있을 수 없으며 左 顧 右 眄 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우리는 人 道 와 正 義 에 則 하고 大 義 와 名 分 에 殉 하는 鋼 鐵 같은 意 志 로써 春 秋 의 正 筆 을 잡으려할 뿐이니 이리하여 우리의 이 붓이 王 師 의 前 衛 되기를 自 勉 하며, 破 邪 의 利 劍 되기를 自 期 한다. ( 四 ) 滿 天 下 의 同 胞 여! 兄 弟 여! 姉 妹 여! 우리의 念 願 을 바르다 하시고 우리의 丹 誠 을 믿쁘다 하시어 嚴 酷 한 鞭 撻 을 아끼지 말지며 絶 對 한 聲 援 을 늦추지 말아 光 復 의 鴻 業 을 大 成 하여서 우리 民 族 으로 하여금 未 來 永 劫 에 빛나게 하 라. 檀 紀 는 四 千 二 百 七 十 八 年 十 二 月 一 日, 東 亞 日 報 同 人 一 同 은 삼가 이 一 文 을 草 하여써 解 放 戰 線 에 義 血 을 뿌린 在 天 의 英 靈 께 奉 告 의 禮 를 갖추며 아울러 三 千 萬 同 胞 의 心 臟 에 檄 한다. 23. 瓦 全 보다 玉 碎 를 < 東 亞 日 報 > 社 說 ( ) ( 一 ) 이른바 外 相 會 議 는 끝났다. 國 際 信 義 를 背 叛 하고 朝 鮮 民 族 을 侮 辱 하는 信 託 統 治 를 決 定 하였다. 도대체 託 治 의 主 唱 者 는 어느 나라의 누구이냐? 美 英 蘇 三 國 의 어느 나라가 우리에게 不 共 戴 天 할 이 致 命 的 侮 辱 을 던지려 하였느냐? 自 己 의 自 由 를 主 張 하려는 者 는 남의 自 由 도 尊 重 하여야 하며 自 家 의 主 權 을 擁 護 하려는 者 는
89 남의 主 權 도 是 認 하여야 한다. 이것이 文 明 社 會 의 理 想 이오 文 明 人 의 通 念 이다. 이 明 白 한 公 理 를 모를 理 없거늘 어찌하여서 이같은 非 行 을 敢 行 하였는가? 强 盜 의 掠 奪 을 當 하여 赤 手 空 拳 이 되었 다고 人 權 을 無 視 할 것인가? 一 時 强 盜 의 侵 害 를 받았던 것은 事 實 이다. 그리하여 滿 身 瘡 痍 로 疲 弊 하였던 것도 事 實 이다. 그러나 우리는 俗 談 에 이른바 물어도 준치요 썩어도 生 雉 다. 五 千 年 의 歷 史 와 文 化 를 가졌고 三 千 萬 의 頭 腦 와 生 血 을 가졌다. 自 立 與 否 를 云 云 함도 無 知 와 不 遜 이려든 하물며 謀 略 的 意 圖 로 自 作 한 三 八 線 을 口 實 삼아 投 票 不 能 을 云 云 함과 같음은 狡 猾 한 知 能 犯 의 一 種 이니 이 知 能 犯 이 三 國 中 에 어느 國 이냐? ( 二 ) 首 犯 을 追 窮 하여 文 이 여기에 이르렀으나 나타난 結 果 를 一 瞥 할 때 우리의 받은 傷 處 는 오직 하나다. 託 治 라는 文 句 에 一 擊 된 深 刻 한 侮 辱 하나뿐이다. 이 國 辱 을, 이 民 辱 을 어떻게 雪 辱 할 것인가? 他 力 依 存 이란 元 來 이러한 것임을 三 千 萬 兄 弟 는 알았는가? 助 力 者 의 助 力 은 順 受 해 無 妨 하리라. 그러나 助 力 은 어디까지 助 力 이오 主 力 은 -- 動 力 은 徹 頭 徹 尾 自 力 의 如 何 에 있는 것이 니 天 은 自 助 者 를 돕는다 함이 그것이다. 自 力 으로 이 傷 處 를 回 復 하자! 更 生 의 險 路 를 이 自 力 으로 打 開 하자. 光 復 의 巨 役 을 이 自 力 으 로 建 設 하자. 피만 가지고 決 戰 하였던 已 未 當 年 을 回 顧 하라. 原 子 彈 이 없더라도 이 生 血 이면 足 하 다. 瓦 全 보다는 차라리 玉 碎 를 이 氣 魄 이면 足 하다. 外 侮 의 克 服 은 內 部 的 結 束! 이 努 力 이면 足 하다. 連 綿 五 千 年 悠 久 한 우리의 矜 持 를 다시금 가다듬고 亡 國 四 十 年, 뼈에 사무친 痛 恨 을 그대 로 爆 彈 삼아 三 八 障 壁 에 부딪혀 보자! 記 治 政 權 에 부딪혀 보자! 빛은 東 方 에서! 正 義 의 勝 利 는 畢 竟 우리에게 있으리라. 24. 一 柱 를 잃다! 民 族 의 今 日 을 一 哭 < 東 亞 日 報 > 社 說 ( ) 檀 紀 四 千 二 百 七 十 八 年 十 二 月 三 十 일 早 朝 古 下 宋 鎭 禹 先 生 은 苑 洞 自 宅 에서 凶 彈 을 받고 遽 然 히 作 故 하였다. 解 放 의 曙 光 이 妖 雲 에 싸인채 저물어 가는 이해의 아주 막 前 날이오 亡 國 의 痛 恨 을 풀지 못한 채 託 治 의 悲 報 를 듣게 된 다음의 다음날 獨 立 戰 線 에 뿌려질 許 多 한 生 血 의 先 頭 를 가로막아 儼 然 히 殉 國 하였다. 憶 라! 이 何 等 의 悲 報 인가? 이 何 等 의 痛 事 인가? 그러나 悲 報 라 하여서 痛 事 라 하여서 哭 之 痛 之 만 하기에는 이 巨 人 의 最 後 가 빚어놓은 國 家 的 民 族 的 表 情 이 너무나 壯 嚴 하고 너무나 尊 貴 한 바 있음을 直 感 하지 않을 수 없다. 下 手 者 가 그 누구임을 査 索 할 必 要 가 없으리라. 暗 害 의 目 的 이 그 어디에 있음을 追 窮 할 必 要 도 없으리라. 다만 民 族 의 更 生 을 위하여 進 軍 하는 우리의 首 途 에 피를 보았다! 하면 그만일 것이 다. 三 千 萬 民 衆 이 다같이 그 피를 뚜렷이 보았다! 하므로 足 하다 할 것이다. 光 復 의 巨 役 을 위하 여 苦 鬪 하려는 우리의 建 設 에 한 個 의 기둥( 柱 )을 잃었다는 事 實 을 直 視 하고 凝 視 하고 透 視 하고, 그리고 이로써 民 族 的 正 氣 를 다시금 다듬어 捲 土 重 來 의 進 軍 을 그대로 繼 續 한다고 하면 先 生 의 一 死 는 單 純 한 悲 報 가 아니라 警 報 다. 愛 國 의 警 報 요, 愛 國 의 信 號 다. 先 生 의 本 懷 진실로 여기에
90 있었거니 生 生 한 이 血 史 의 一 行 을 읽는 者 다같이 信 地 의 一 點 에 凝 集 되어 自 主 의 獨 立 을 完 成 한다면 先 生 彼 世 의 樂 이 오히려 無 窮 할 것이다. 先 生 의 風 度 와 先 生 의 平 生 을 여기에 敍 述 할 餘 裕 없음을 恨 하거니와 一 言 으로 따지면 先 生 은 徹 頭 徹 尾 意 志 의 人 이며 信 念 의 人 이었다. 나라를 걱정하고 民 族 을 사랑하되 所 信 을 不 動 하고 苦 節 을 固 守 하는 强 革 의 人 이었다. 育 英 의 基 를 닦았으나 樂 이 있을 수 없었고, 報 筆 의 責 을 맡았으나 快 를 얻은 바 없었으니 僞 政 의 制 壓 下 에 寧 日 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이리하여 或 은 獄 窓 의 苦 를 겪고 或 은 累 縛 의 痛 을 當 하되 轉 轉 一 念 은 오로지 國 家 民 族 의 再 生 에 있었고 世 道 民 心 의 刷 新 에 있었다. 때도 때인 이때 祖 國 은 光 復 未 半 에 先 生 을 中 途 에 잃게 되니 同 志 의 恨 은 얼마나 깊을 것이며 民 族 의 損 은 얼마나 클 것인가? 先 生 을 위하여 哭 함이 아니라, 先 生 의 死 를 위하여 哭 함이 아니 라, 이 겨레의 今 日 을 위하여, 이 겨레의 明 日 을 위하여 우리는 一 哭 을 禁 할 수 없으니 三 千 萬 兄 弟 여! 이 巨 人 의 凶 變 을 機 緣 삼아 다같이 是 日 에 放 聲 大 哭 하자! 그리고 明 日 부터 다같이 放 聲 大 呼 하자! 各 길로 한 信 地, 完 全 한 自 主 獨 立! 25. 人 物 素 描 - 宋 鎭 禹 < 新 天 地 > ( 창간호) 林 炳 哲 熱 의 新 聞 人. 뱃심의 政 客. 古 下 宋 鎭 禹 氏 를 論 하려면 이 두가지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여름날, 엷은 두루마기 밑으로 古 下 先 生 의 옥색 조끼 그리고 옥색대님을 볼 수 있다. 어린 鄭 夢 周 의 안은 붉고, 밖은 파란 저고리를 聯 想 케 하는데 그 옥색 조끼도 속의 情 熱 과 겉 의 平 和 를 뜻함인가. 즐겨 입으신다. 그리고 손에는 언제나 종이 한장을 들고 종이를 치마 주름잡듯 접는 것이 古 下 先 生 의 唯 一 한 娛 樂 이다. 그의 一 生 은 종이와 떠날 수 없다. 종이에 먹칠하는 것이 그의 一 生 事 業 인 까닭에 언제나 종 이를 놓을 수 없다. 그는 部 下, 많은 記 者 들에게 언제나 입에 익어 저절로 나오는 付 託 은 들고 쓰라 는 것이다. 들고 쓰라는 뜻은 언제나 붓과 종이를 땅에 놓치 말고 그 좋은 생각들을 熱 로 써 서 發 表 하라는 말씀이다. 그는 東 京 學 生 時 代 부터 學 課 보다 新 聞 읽는 것을 더 所 重 히 여겨서 매양 新 聞 을 읽고 硏 究 를 하 였다. 그의 머리속에 자라던 병아리 新 聞 은 마침내 東 亞 日 報 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타났다. 어쩔 수 없는 그 가슴에서 뛰는 民 族 主 義 의 思 想 은 民 族 自 決, 三 一 運 動 의 큰 潮 流 에 돛을 달고 花 洞 時 代 의 東 亞 日 報 때부터 자라기 始 作 했다. 東 亞 의 二 十 年 歷 史 는 이 民 族 의 記 錄 이오, 이 記 錄 이야말 로 우리 民 族 의 受 難 記 錄 이오, 눈물의 記 錄 이오, 迫 害 의 記 錄 이라 하겠다. 勇 士 라기 보다 좋은 參 謀 라는 것이 더 適 切 하겠다. 그는 하루에 2시간의 睡 眠 밖에 取 하지 않는 다. 그밖의 時 間 은 오로지 思 索 과 政 談 뿐이다. 그처럼 다른 趣 味 를 가지지 않는 이도 흔치 않을 것이다. 단지 있다면 그가 崇 拜 하는 孫 文 傳 같은 것을 읽는 것이리라. 古 下 先 生 은 東 亞 의 參 謀 가 아니었다. 東 亞 日 報 는 當 時 우리 民 族 의 依 存 할 곳이 없어 마치 물 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格 으로 迫 害 받는 民 族 이 울며 달려오는 곳이 東 亞 이었다. 東
91 亞 는 눈물을 씻어주는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 役 이, 그 參 謀 役 이 古 下 先 生 이었다. 여기에 한 例 를 들면 五 山 中 學 校 가 火 災 로 燒 失 되었을 때 朱 校 長 이 먼저 東 亞 를 통하여 많은 復 興 金 이 모여들어 災 前 보다 더 훌륭한 校 舍 를 지었다. 그 많은 水 害, 旱 災, 몰려다니며 迫 害 받던 南 北 滿 州 의 罹 災 同 胞 救 濟 의 손, 李 舜 臣 祠 堂 으로 이 百 姓 에게 民 族 心 을 넣어주고, 孫 選 手 의 壯 擧 를 報 道 하여 民 族 優 越 을 鼓 吹 하여 徹 底 한 民 族 主 義 의 本 色 을 여지없이 發 揮 하였다. 이 모든 일이 熱 의 新 聞 人 古 下 先 生 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라 하겠다. 當 時 에도 社 會 主 義 의 넘치는 波 濤 는 커서 이 모든 事 業 도 同 胞 間 에 적지 않은 反 對 가 그의 앞을 막았다. 그러나 古 下 先 生 의 뱃심은 能 히 이를 밀고 나갈 수 있었다. 그의 主 張, 그의 事 業 中 에 啓 蒙 運 動 을 뺄 수 없다. 이 民 族 에게 文 字 를 가르쳐 啓 蒙 을 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急 先 務 라 고 하였다. 民 度 를 올리는데 가장 큰 努 力 을 아끼지 않았다. 그를 或 訪 問 하여 무슨 이야기를 하면 때로는 東 問 西 答 을 한다. 그의 머리속에는 언제나 딴 世 界 가 進 展 되고 있는 까닭이다. 그의 넓은 雅 量 과 深 思 와 分 明 한 判 斷 은 누구나 탄복하리라. 或 많은 질문을 품고 先 生 을 찾는 客 이 나타날 때 先 生 은 熱 에 넘치는 主 見 과 主 觀 을 高 聲 으로 흐르는 瀑 布 와 같이 퍼부으면 來 客 이 言 權 도 얻어보지 못하고 精 神 을 잃고 退 陳 하는 경우가 많 다. 그런 까닭에 先 生 의 獨 斷 이 여기에서 생긴다. 主 張 보다 조용히 傾 聽 하는 것이 더 좋은 때가 있 다. 先 生 의 短 點 을 구태여 든다면 그 獨 斷 과 人 材 用 法 의 偏 狹 이라 하겠다. 조용히 듣는 것, 親 戚 보다 人 材 를 天 下 에 求 하여 쓰는 法 에 어둡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붓을 돌려 東 京 政 界 에 先 生 이 나타날 때 이야기를 쓰려 한다. 日 官 을 찾을 때 흔히 뒷짐을 짚고 玄 關 에 나타난다. 萬 一 오래 應 接 室 에 기다리게 하면 그냥 나와버리고, 主 人 이 速 히 맞아주면 例 의 송진우데스 하고 人 事 를 하는 것이다. 1940년 東 亞 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二 三 個 月 帝 國 호텔에 投 宿 하면서 貴 族 院 議 員 宇 佐 美, 丸 山, 拓 務 省 小 磯 田 中 等 과 相 議 하였다. 너희들이 조선민족에게 준 唯 一 의 선물인 言 論 機 關 을 어느 때는 주고 지금은 빼앗고 이렇게 工 作 하여 마침내 大 野 政 務 總 監 으로 하여금 貴 族 院 秋 密 會 議 席 上 에서 强 制 로 朝 鮮 의 言 論 機 關 을 廢 刊 시키지는 않겠다 고 言 明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當 時 毒 種 南 總 督 은 東 京 에서 이런 工 作 을 하고 돌아오는 古 下 先 生 을 그냥 둘 리는 없다. 豫 想 과 같이 留 置 場 身 勢 를 끼치게 되었다. 바지춤을 잡고 그 더러운 監 房 속에서 척 덮인 눈꺼풀 밑으로 구르는 눈초리, 그 모든 現 實 에 무 엇을 생각하는지 그 心 中 을 누가 알랴. 强 弱 이 不 同 이라 빼앗기고 넘어졌다. 그는 원동 居 士 杜 門 不 出 이었다. 世 上 은 싸움으로 물을 들 였다. 銃 칼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戰 爭 協 力 에 춤추게 하였다. 그때 서슬에 總 督 府 와 軍 이 古 下 先 生 을 그대로 둘 리 없다. 一 線 에서 외쳐달리는 무서운 勸 이 빗발친다. 그의 生 命 을 누가 保 證 하랴. 그러나 그의 對 答 은 내 입을 봉해 놓고 날더러 말하라면 내가 말할 수 있소? 이 한 말로 모든 것을 拒 絶 했다. 先 見 의 明 이 있는 先 生 이 이를 모를 리 없 다. 昨 年 겨울 어느 밤 先 生 을 찾았더니 반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밤이 깊어 한시를 지나는데도 붙잡는다. 젊은이와 농담, 政 談 을 즐기는 선생. 이제 獨 立 은 몇달 안 남았어 하시던 그때 나는 이 영감이 하고 지나쳐 들었다. 그 後 五 六 個 月 뒤 解 放 의 날이 이 땅에 왔다. 八 月 十 五 日 後 어느날 원동에서 政 談 으로 목이 쉰 古 下 先 生 이 그놈들이 政 權 을 준다고 내 손으로 받다니 이 말의 속뜻을 그때에는 잘 理 解 못했다. 萬 一 古 下 先 生 이 總 督 府 로부터 그 바통을 받았다고 하면 古 下 先 生 의 政 界 出 發 은 落 第 였을는지 모른다. 國 民 大 會, 臨 時 政 府 支 持, 强 力 한 民 主 主 義 이것이 古 下 先 生 의 뜻이다. 비록 外 見 으로는 좋은 先 生, 平 凡 한 아버지 같으나 그의 끊고 맺은 듯한 政 見, 勇 進 하는 膽 力 은 우리 政 界 에 巨 步 를 내어
92 디딜 것으로 믿는다. 26. 宋 鎭 禹 < 韓 國 近 代 人 物 百 人 選 > (1979년) 孫 世 一 혹 절조를 자랑할 수는 있어도 지략과 포부를 갖춘 이는 드문데 이를 겸해 갖춘 선비 ( 鄭 寅 普 撰 碑 銘 ) 宋 鎭 禹 는 한국근대화과정에 있어 누구보다도 폭넓은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의 하나일 뿐 아니라 그 추진세력의 집결에 이바지했다는 점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언론인이라는 관점에 서 보면 그는 獨 立 新 聞 이래의 한국언론의 정통을 계승 발전시킨 이른바 대기자였고, 抗 日 독립운 동의 지도자로서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구미유학이나 中 國 대륙에의 망명을 하지 않고 국내에서 합법 비합법의 아슬아슬한 선에서 때로는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혹은 협박과 회유를 받 으면서도 굽힘이 없이 민족운동을 전개해온 투사였다. 그러므로 해방후 국가건설의 단계에 이르 러서는 어느 혁명가 보다도 정치가 로서의 경륜과 기반을 갖추었으며, 불행히도 그것이 그를 해 방 4개월만에 정치테러의 첫 희생자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宋 鎭 禹 의 민족주의자로서의 성장은 그의 가계와 유년기의 교육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890 년 5월 8일 全 南 潭 陽 郡 古 之 面 巽 谷 里 에서 아버지 壎, 어머니 梁 씨 사이의 8남매중 다섯째로 태 어났다. 아들로서는 막내였다. 兒 名 은 玉 潤 이었고, 채소밭에서 금빛의 가지를 딴 태몽에서 애칭을 금가지 라 했다. 5대가 한 울안에 사는 대가족 속에서 그는 자랐다. 세살 때부터 한학을 배우고 일곱살에는 성리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奇 參 衍 의 훈도를 받았다. 奇 參 衍 의 영향은 컸던 것으로, 古 下 라는 아호도 그가 동리 古 比 山 의 꿋꿋함을 가리키며 지어준 것이었다. 열다섯살에 井 邑 의 柳 씨와 결혼하고, 乙 巳 條 約 이 체결된 이듬해에는 長 成 의 白 羊 寺 에 들어가 유학자 金 直 夫 에게 수 학했다. 宋 鎭 禹 가 신학문을 접하게 된 것은 열일곱 나던 1907년 昌 平 의 英 學 塾 에 들어가서였다. 英 學 塾 은 昌 平 學 校 와 함께 奎 章 閣 直 閣 高 鼎 柱 가 기우는 國 運 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설립한 것으로 宋 鎭 禹 는 이곳에서 高 鼎 柱 의 아들 光 駿, 사위 金 性 洙 등과 함께 英 語 등 신학문을 깨우쳤다. 1908년 金 性 洙 와 함께 가족들 몰래 日 本 유학을 결심, 群 山 에서 머리를 깎고 두루마기 차림으로 渡 日 했다. 두사람은 먼저 正 則 英 語 學 校 와 錦 城 中 學 校 를 거쳐 1910년 早 稻 田 大 學 에 입학했지만 宋 鎭 禹 는 이해의 韓 日 合 邦 에 충격을 받고 귀국, 이듬해 봄 다시 도일하여 明 治 大 學 法 科 로 전입학했 다. 光 復 운동을 하려면 조직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 아래 남과 별로 사귀는 일이 적었던 종래의 태도를 바꾸어 친구를 사귀기에 힘썼다. 留 學 生 親 睦 會 를 조직하고 그 총무 일을 맡는가 하면 다 시 湖 南 留 學 生 茶 話 會 를 만들어 회장이 되기도 하고 金 炳 魯 등과 함께 유학생 기관지 < 學 之 光 >을 펴내기도 했다. 그가 < 學 之 光 >에 발표한 孔 敎 打 破 論 은 전래의 尊 華 思 想 을 통렬히 비판한 것으로 국내의 일부 老 儒 들 사이에 말썽이 되기도 했다. 26세 되던 1915년 明 治 大 學 을 졸업할 때까지 崔 南 善 張 德 秀 玄 相 允 曹 晩 植 申 翼 熙 金 俊 淵 玄 俊 鎬 趙 素 昻 등과 교우를 가졌고 이들의 대부분은 후일 오래도록 그의 활동에 동지가 되었다. 宋 鎭 禹 와 金 性 洙 가 東 京 유학동안 결심한 광복운동의 제일단계 사업은 교육이었다. 1916년 金 性 洙 가 지사 柳 瑾 이 경영하다 운영난에 빠져 있던 中 央 學 校 를 인수하자 宋 鎭 禹 는 27세의 젊은 나이 로 교장이 되어 3 1운동이 터질 때까지 온 정열을 학생 훈육에 쏟았다. 그러나 宋 鎭 禹 의 교육열은 단순한 교육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檀 君 과 世 宗 大 王 과 李 舜 臣 을
93 강조하며 民 族 精 氣 를 고취했는데, 이 세 위인에 대해 宋 鎭 禹 는 1917년 따로 三 聖 祠 건립기성회를 조직하고 南 山 에 三 聖 祠 를 세우는 운동을 일으켰고, 당황한 총독부는 부랴부랴 南 山 에 神 社 를 세 우고 말았다. 전민족의 에네르기가 집결되었던 3 1 運 動 은 天 道 敎 基 督 敎 佛 敎 등 종교계 인사들이 협력하여 주도한 것이었지만 그 직접적인 산실이 된 것은 宋 鎭 禹 가 기거하던 中 央 學 校 숙직실이었다 년 10월 金 性 洙 玄 相 允 등과 민족의 의사표시 방법을 논의하던 宋 鎭 禹 에게 上 海 로부터 張 德 秀 가 특파되어 오고, 12월에는 美 國 의 李 承 晩 으로부터도 밀사가 찾아 왔었으며 1919년 1월에는 東 京 유 학생 宋 繼 白 이 나타났다. 玄 相 允 崔 麟 崔 南 善 등의 회합은 빈번해져 舊 韓 末 元 老 들과의 교섭은 실 패했지만 2월에는 崔 麟 을 통하여 天 道 敎, 李 昇 薰 을 통하여 기독교의 궐기가 확정되어 나갔다. 처 음 계획으로는 宋 鎭 禹 는 계속적인 운동 추진을 위해 남기로 했었지만 곧 被 檢 되어 48인의 한사람 으로 투옥되고 1년반의 未 監 생활 끝에 京 城 覆 審 法 院 판결에서 無 罪 로 출감했다. 그가 無 罪 가 된 것은 그동안 적용법이 모의의 처벌규정이 없는 보안법 및 출판법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 한다. 옥중에서 어머니를 여윈 宋 鎭 禹 는 1920년 10월 출감 후 잠시 하향하여 정양하는 동안 지방유 지들과 더불어 학교설립 기금운동을 벌이다가 高 光 駿 과 함께 그해 겨울을 潭 陽 경찰서의 유치장에 서 지냈다. 이 유치장 생활에서 그는 救 國 運 動 을 추진함에 있어 항상 국제정세와 連 繫 관계를 지 닐 것과 해외에 망명한 독립운동자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할 것을 결심했다고 하는데, 이 결심은 이후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행동으로 나타났다. 앞서 宋 鎭 禹 가 옥중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金 性 洙 는 柳 瑾 秦 學 文 李 相 協 張 德 俊 등과 더불어 民 間 新 聞 발행을 발기, 朴 泳 孝 도 참가시켜 총독부로부터 허가를 얻고 1920년 4월 1일 마침내 民 族 主 義, 民 主 主 義, 文 化 主 義 의 三 大 社 是 를 내걸고 < 東 亞 日 報 >를 창간했다. 그러나 東 亞 日 報 는 창 간과 더불어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時 勢 에 뒤진 腐 儒 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논설로 인해 유림 을 중심으로 한 불매동맹운동이 일어나는가 하면 이어 日 本 의 소위 三 種 神 器 비판으로 황실을 모 독했다 하여 창간 5개월만에는 무기정간처분을 당했다. 정간은 이듬해 1월에야 해제되었고 續 刊 을 하는 데는 자금난으로 한달 이상이 걸렸다. 이무렵 宋 鎭 禹 는 金 性 洙 의 再 婚 청첩장을 받았는데 이것이 그가 東 亞 日 報 와 생애를 같이하게 된 계기였다. 東 亞 日 報 운영을 통해 뜻을 펴기로 결심한 宋 鎭 禹 는 곧 金 性 洙 와 함께 주식회사 東 亞 日 報 社 설 립을 위한 주식 공모 및 창립총회 준비 등을 위해 분주히 활동, 10월에 이르러 총주주 256인의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32세로 그 사장에 취임했다. 이로부터 20여년간 宋 鎭 禹 는 상황에 따라 사 장, 고문, 주필 등 직책은 달랐지만 실질적으로 東 亞 日 報 를 주도했으며, 그가 부득이 사장직을 물 러나야 할 경우에는 金 性 洙 가 그 자리를 맡거나 두 사람이 신뢰하는 동지에게 위촉했다. 宋 鎭 禹 의 민족주의자로서의 정열과 패기는 그가 東 亞 日 報 를 운영하면서 벌인 각종 운동 및 사 업에서도 약여하다. 1932년의 安 昌 南 故 國 訪 問 大 飛 行 주최와 物 産 獎 勵 운동 및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제창, 6 10만세 사건이 있던 1926년 隆 熙 皇 帝 승하 때의 遺 勅 僞 作 획책, 1931년 萬 寶 山 사건 때 의 韓 中 간의 보복중지를 위한 캠페인(이에 대해 후일 蔣 介 石 으로부터 銀 牌 와 족자를 보내왔다), 1931년부터 4년간 계속된 브나로드 운동, 년의 李 忠 武 公 유적보존운동, 1934년의 江 東 檀 君 陵 修 築 기금모집, 孫 基 禎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우게 한 1936년의 日 章 旗 말소사건 등을 그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겠지만, 그밖에도 가령 최초의 현상소설 모집이 < 春 香 傳 >의 개작이 었고, 國 歌 격의 朝 鮮 의 노래 를 제정 보급시켰으며, 金 九 의 어머니를 아들의 망명지로 건너가게 뒷받침하고 독립투사 金 相 玉 의 아들을 東 亞 日 報 에 입사시킨 일 등도 그 예다. 이러한 그에게 일제의 탄압이 따를 것은 당연했다. 1924년 4월에는 金 性 洙 와 함께 親 日 團 體 代 表 朴 春 琴 의 권총 협박을 받았으며, 또 사내의 내분도 있어 잠시 사임했다. 李 昇 薰 이 사장에 취임 하고 宋 鎭 禹 는 10월 고문이 되었다. 주필이 된 1926년에는 국제농민본부에서 보내온 3 1기념사 朝 鮮 農 民 에게 를 게재했다 하여 신문은 제2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그는 11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94 투옥되었다. 1927년 10월 다시 사장이 되어 36년까지 10년간 사장으로 있으면서 東 亞 日 報 의 기 반을 굳혔다. 그러나 1936년 日 章 旗 말소사건으로 신문은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宋 鎭 禹 는 사장 직을 白 寬 洙 에게 맡기고 물러났다. 그동안 東 亞 日 報 는 1930년 창간 10주년 기념호에 게재한 美 國 네이션 誌 주간의 축사 朝 鮮 現 狀 밑에 貴 報 의 사명은 중대하다 가 문제되어 제5차 무기정간을 당했 었다. 1937년 6월 다시 고문에 취임한 그는 40년 8월 10일 東 亞 日 報 가 朝 鮮 日 報 와 함께 日 帝 에 강제 폐간당할 때까지 있으면서 파리를 잡자 산보를 하자 는 등의 사설로 일제의 전쟁 협력강요를 끝 까지 거부했다. 宋 鎭 禹 의 지도자로서의 특성은 흔히 세계대세에 대한 정확한 분석, 역사의 進 運 에 대한 예리한 先 見 ( 高 在 旭 記 < 古 下 宋 鎭 禹 先 生 傳 > 序 )으로 평해진다. 그가 남긴 그다지 많지 않은 문장중에서 1925년 6월 하와이에서 열린 제1회 범태평양회의에 申 興 雨 등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하고 돌아 와 東 亞 日 報 에 연재한 세계의 대세와 朝 鮮 의 장래 라는 一 文 은 그의 豫 言 者 적인 先 見 을 보여 준 다. 만일 19세기를 프랑스문화의 확충시기라 하면 20세기는 赤 露 思 想 의 발전시대라 하는 것이 적당한 견해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범인 美 國 과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赤 露 가 태평양을 隔 하 여 兩 兩 相 對 하여 발흥되는 것은 과연 불원한 장래에 그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협조할까, 충 돌할까. 이 곧 太 平 洋 上 의 일말의 疑 雲 이 되어 있는 것은 不 誣 할 사실이다. 세계대세의 운명이 이에서 결정될 것이며 또한 인류의 문화상 총결산이 이에서 勘 定 될 것은 상상키 不 난할 바가 아닌가 라고 하여 20년대의 국제정치 안정기에 이미 2차대전 이후의 정황을 전망하고, 세계대세의 추이 와 동양정국의 위기로 보아서 4,5년을 불과하여 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 풍운이 야기될 것 을 예언했다. 그리고 조국의 광복이 열강의 對 日 戰 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의 경고를 적중시켰다. 이러한 日 帝 必 亡 의 신념에서 그는 일제말 적지않은 지식인들이 저들의 소위 皇 民 化 運 動 에 협 력 내지 동원된 것과는 달리 혹은 지방으로 나가 옛 東 亞 日 報 주주들을 찾고 혹은 신병을 빙자하 고 자리에 누워 견디어 냈다. 1944년말 宋 鎭 禹 는 東 亞 日 報 폐간 후 광산에 종사하면서 단파 라디오를 들어온 薛 義 植 으로부 터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전해들었고, 45년 5월경에는 日 本 외무성에 근무하던 張 徹 壽 로부터 구 미측 동향을 상세히 들었다. 그리하여 측근에게 日 本 의 항복이 몇 달 남지 않았음을 공언할 수 있었다. 8월 10일 마침내 총독부로부터 정권인수의 교섭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 聯 合 軍 이 日 本 의 정식항복을 받은 다음 聯 合 國 으로부터 3 1운동이후의 정통정부인 臨 時 政 府 가 인수받아야 한 다는 것이었다. 민중의 보복을 두려워한 총독부는 宋 鎭 禹 와의 교섭을 단념하고 15일 새벽 呂 運 亨 에게 교섭했다. 呂 運 亨 은 즉석에서 이를 수락하고 8 15와 동시에 建 國 準 備 委 員 會 를 조직하여 臨 時 政 府 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나서 미구에 공산당에게 이용당하는 바 되었다. 建 準 과 맞서 국민대회를 준비하던 宋 鎭 禹 는 9월 민족주의 세력을 규합하여 韓 國 民 主 黨 을 결성 하고 首 席 總 務 가 되어 美 軍 政 에 적극 협력하면서 뒤이어 환국한 李 承 晩 및 임시정부와 함께 政 府 樹 立 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12월 1일 속간된 東 亞 日 報 의 사장이 되었다. 12월 28일 모스크바 三 相 會 議 의 信 託 統 治 案 이 전해지자 혼돈 속의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격 앙되었다. 이날 임시정부 요인들과 反 託 의 방법을 논의하던 회의에서 宋 鎭 禹 는 임정측과 의견이 다소 달랐다. 물론 託 治 에는 반대였지만 과격한 반탁운동으로 美 軍 政 과 충돌 사태가 발생해서는 안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암살자 韓 賢 宇 의 흉탄에 쓰러진 것은 그 이틀 뒤인 30일 새벽이었다
95 27. 宿 草 밑에 누운 故 友 宋 古 下 를 우노라 < 薝 園 時 調 集 > ( 발행) 鄭 寅 普 ( 一 ) 어젯밤 두굿 차니 미틔느니 간 해 이때 겨울은 또 겨울이 버님고만 꿈이라니 스무해 유난턴 사이 알리 없어 하노라. ( 二 ) 화개동 어느 아침 인사라고 한둥만둥 그냥 그랬던들 하마 아니 덜 슬프 리 정 이야 잊는다 할손 의초 어이 하리오. ( 三 ) 흰 갓1) 흰 옷으로 마지막들 울 구 불 구 그 누구 어느 친구 님의 말을 전했것다 한 일2)에 시여질 3) 마음 둘 없은 줄 아노라. ( 四 ) 신문사 집을 짓고 키 고 길러 몇몇해오 하면서 아니매어 부세 4) 의 면 한 방치 로 그 호의 나돌았던들 빈터 아니 됐으리 ( 五 ) 이 다음 뜻있는 이 계산골 5)을 잊을것가 막바지 종치는대 어듸쯤이 숙질실 터 십삼도 만세 아우성 긔뉘 6) 예서 터진고 ( 六 ) 뜻깊고 긔운차고 음응 능청 솜씨있고 성긘듯 주밀터니 몇 수 넘어 내보더니 손발톱 다다를 때에 누으실 줄 알리오 ( 七 ) 이궁안 7) 뜻밖 북새 하마트면 일8)이 컸다 돌팔매 들오거나 웨 모르고 이리저리 놀 자 고 물 맑어지니 님의 공 이 비춰라 ( 八 )
96 어룸목 9) 충무 산소 님의 손에 높으셨다 그렁성 겨레 얼 을 한번솟궈 올리려고 온천 서 떠들던 밤이 알풋 아득 하고녀 ( 九 ) 나무꾼 뉘시겻기 을지공 날 전했는고 듣기가 무서웁게 어느덧에 평양으로 비 셀날 가차웁건만 님은 멀리 설워라 ( 十 ) 한조각 깊은 마음 이 겨레 뿐 자나깨나 단군 세종대왕 예 처내친 이충무공 말씀이 구름될시면 하늘 가득 했으니 ( 十 一 ) 술 거나 날 붙들고 반을움에 뭐라섰다 적 이라 우리의 적 알라알라 부를 떨어 스무해 장 그소리 뜻맫친 줄 아노라. ( 十 二 ) 내 오활 곱다 하고 님의 주정 좋다 했네. 사날 못만나면 그야말로 삼년인듯 생초목 10) 불붙다 해도 생별 이면 하노라 ( 十 三 ) 추란화( 秋 蘭 花 ) 여윈줄기 댓옆 11)에서 고닷 소라 내일 볼 작별에도 하시더니 자중 하오 까치놀 12) 더떠오르니 키 13) 그리워 하노라 ( 十 四 ) 멀리서 말로 듣고 님께 보내 물었더니 내 편지 받아들고 눈물날듯 반겼다고 보랴던 그 새벽빛을 반못보고 가다니14) ( 十 五 ) 병꽤도 한둘아냐 남의 입을 보탰느니 자기말 자랑인듯 모를 것도 잘 아는듯 두어라 틔 보일수록 옥 갑 더욱 높아라. ( 十 六 ) 북문골 후미진 때 날 보려고 돌아들어 들창문 똑똑하면 묻지 않고 님일터니 내 병은 예런듯 한데 찾아올 이 뉘온고
97 ( 十 七 ) 작년 섯달 스무사흘 운동장서 나눴겄다 그제가 영결인줄 어느 누가 알았으리 한번 더 돌아나 볼걸 가슴 메어 하노라 ( 十 八 ) 신문은 살아 한돌 님가심도 또 한돌 이 설음이 고개고개 붓대 자주 가뿌구나 이 노래 남 못들리니 길어 무삼 하리오 註 1) 裕 陵 大 喪 때 第 二 次 獨 立 運 動 을 大 規 模 로 일으키려고 하였었다. 2) 獨 立 運 動 3) 死 4) 부시어 義 일 것 같으면 한 방망이로 부시어버릴 마음을 가졌다는 말. 5) 中 央 學 校 所 在 地 6) 國 內 己 未 運 動 의 策 源 地 는 中 央 學 校 宿 直 室 이었다. 이 때의 古 下 가 中 央 校 長 으로 있으면서 이를 주도했었다. 7) 校 洞 병문에서 水 標 橋 로 가는 골목, 中 國 商 人 들이 모여 사는 곳 8) 萬 寶 山 소문의 電 報 가 들어올 때 日 本 人 의 中 韓 離 間 謀 略 임을 모르고 華 商 들을 迫 害 하였다. 古 下 혼자서 그렇지 아니함을 力 說 하여 報 道 로 辯 破 하고 社 說 로 明 示 하였다. 古 下 아니더 면 在 滿 同 胞 의 危 害 는 물론 韓 中 의 感 情 이 다시 풀릴 수 없게 되었었을 것이다. 9) 氷 項 李 忠 武 公 墓 所 10) 우리 古 歌 에 죽어서 영이별은 사람마다 하거니와 살아서 생이별은 생초목에 불붙는 다. 11) 대나무옆 12) 海 上 에서 이 놀 이 뜨면 큰 바람이 분다고 한다. 13) 타( 柁 ) 14) 日 皇 隆 伏 放 送 을 듣고 서울 일이 궁금하여 두어자를 적어 尹 錫 五 君 을 古 下 에게 보내고 말 로 자세히 기별하라 하였다. 그 편지는 불도 없이 새벽 달빛에 비추어 쓴 것이다. 글자도 된지 만지 하였다. 첫머리 말은 우리가 죽지 아니하고 있다가 이 날을 보니 느끼움은 너 나가 없다 하였고 이어서 궁금한 말을 하고 끝으로 尹 君 을 보내니 무슨 말이든지 믿고 하 라 하였다. 古 下 가 이 편지를 보고 울더란 말을 들었다. 편지로는 이것이 最 後 다. 이것을 가지고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28. 古 下 宋 鎭 禹 先 生 肖 像 贊 鳴 皐 宋 必 滿 天 生 英 豪 唯 忠 不 離 氣 蓋 一 世 唯 義 不 戾 公 之 世 路 悽 風 慘 雨
98 無 處 置 身 厄 會 不 伸 空 手 單 躬 抗 倭 之 非 堂 堂 忠 義 日 月 爭 輝 遭 難 橫 逝 天 定 命 數 遺 恨 千 秋 不 要 怨 尤 遺 像 存 嚴 可 肅 薄 夫 公 於 祖 國 萬 古 垂 模 29. 古 下 를 위한 輓 章 李 承 晩 義 人 自 古 席 終 稀 (의인은 옛부터 자기 명에 죽는 경우가 드물고) 一 死 尋 常 視 若 歸 (한번 죽는 것을 심상히 여겨 마치 제 집으로 돌아가듯 한다) 擧 國 悲 傷 妻 子 哭 (나라안이 모두 슬퍼하고 처자들도 우는데) 臘 天 憂 里 雪 霏 霏 (섣달 그믐 망우리에는 눈만 부슬부슬 뿌리는가.) 30. 宋 鎭 禹 先 生 被 禍 實 記 <새벽> (1957년 3월호> 朴 相 浩 저녁노을이 서쪽하늘을 수놓고 차츰 어둠의 장막이 물들이려 할 무렵, 오고가는 사람의 자취도 드문 淑 明 高 女 앞을 지나, 騎 馬 警 察 隊 쪽으로 隨 行 인양싶은 젊은이 몇사람을 데리고 천천히 발길을 옮기고 있는 中 年 紳 士 가 있었다. 순간! 골목길에서 검은 중절모자에 검은 잠바, 곤색 海 軍 바지를 입은 젊은이 한사람이 날세게 뛰어나갔다. 그의 손에는 시꺼먼 권총 - 狙 擊 犯 이다. 차디찬 권총부리가 무심코 골목을 지나친 紳 士 의 뒷덜 미에 겨누어지더니 불을 뿜는다. 탕! 탕! 조용한 저녁 空 氣 를 진동시키는 두방의 총소리 - 응!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머리가 푹 숙여지더니 두손을 허우적거리면서 비슬비슬 몇발자욱 옮겨진 그의 몸뚱이는 電 柱 를 안고 미끄러지듯 고꾸라졌다. 앗! 저기다! 저놈이다! 잡아라! 뒤를 따라라! 하고 同 行 하던 젊은이들이 제가끔 한마디씩 외치더니 壽 松 國 民 學 校 正 門 쪽으로 쏜살같이 달리 는 怪 漢 의 뒤를 따른다. 銃 擊 을 듣고 달려온 巡 察 警 官 이 怪 漢 의 뒤를 쫓는 젊은이의 뒤를 추격하였다. 光 化 門 郵 遞 局 옆
99 개천가를 달리던 怪 漢 이 문뜩 걸음을 멈추고 홱 돌아서더니 어깨로 가쁜 숨을 거칠게 내면서 뒤 따르는 警 官 과 젊은이를 향하여 拳 銃 을 겨눈다. 탕! 탕! 탕! 4278년 12월 12일 吳 正 邦 을 狙 擊 한 申 東 雲 이가 警 察 에 被 檢 되자 中 國 에서 藍 衣 社 와 CC 團 을 轉 轉 하던 全 柏 의 指 示 로 韓 賢 宇, 劉 根 培, 白 南 錫, 金 義 賢, 崔 某 鄭 某 등과 새로 包 攝 된 金 仁 成, 李 昌 希, 李 如 松 의 전원이 南 山 洞 어느 구석진 곳으로 옮겨갔다. 搜 査 의 손이 미치거나, 吳 正 邦 이 領 導 하는 建 國 靑 年 會 員 들의 報 復 이 두려워서이다. 그러나 죽었으리라 믿었던 吳 正 邦 은 病 院 에서 소생하고 犯 人 의 완강한 否 認 으로 犯 行 은 單 獨 行 爲 로 斷 定 되었다. 南 山 으로 옮겨간 뒤에도 劉 根 培 는 계속하여 古 下 先 生 을 狙 擊 할 機 會 를 노리고 있었으나 警 護 員 들이 顔 面 있는 지난날의 同 僚 들이라 좀체로 下 手 할 겨를을 얻을 수 없어서 몹시 초조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도 무거운 발길을 옮겨 어깨가 처져서 돌아오는 根 培 는 賢 宇 에게 다가앉으면서, 韓 先 生! 오늘도 헛탕입니다. 方 法 을 달리 합시다. 苑 西 洞 宋 鎭 禹 집 뒷담은 사람의 가슴 높이밖 에 안됩니다. 이 담을 넘으면 바로 宋 이 居 處 하는 山 亭 입니다. 그러나 山 亭 에서 銃 소리가 나면 행 랑 房 에 있는 警 護 員 이 뛰어 나올 것이니 이 者 들을 牽 制 할 人 員 만 潛 伏 해 두면 감쪽같이 해치울 수 있으니, 밤에 집을 습격합시다 하고 勸 했다. 그가 古 下 先 生 의 身 邊 警 護 員 으로 있을 때, 뒷담을 높이든지 鐵 條 網 을 치든지 해야겠다 고 先 生 의 身 邊 을 염려하던 그가 오늘날, 이곳이 先 生 을 害 하는데 가장 손쉬운 侵 入 路 라고 指 摘 하게 되니, 이 얼마나 얄궂은 運 命 의 농간인가? 根 培 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앉았던 賢 宇 는 그 무 엇을 決 心 한 것 같은 悲 壯 한 얼굴을 번쩍 들며 입을 열었다. 좋소! 내가 陣 頭 指 揮 하지요. 그렇지 않아도 路 上 狙 擊 이란 申 同 志 의 경우 吳 正 邦 이를 놓치듯이 確 實 性 이 희박해요. 그럼 나는 銃 器 를 준비할테니 劉 同 志 는 그동안 配 置 할 人 員 이나 생각해 두시 오 다음날부터 곧 準 備 에 착수하여 不 足 한 拳 銃, 刀 劍 等 兇 器 를 손에 넣었는데, 만일의 경우에 쓸 手 榴 彈 이 좀처럼 求 해지지를 않았다. 생각던 끝에 火 藥 取 扱 에 自 身 이 있다고 自 負 하는 賢 宇 가 깡통에다가 시멘트와 鐵 片 을 빚어 놓 고 火 藥 을 裝 置 한 私 製 爆 彈 을 만들었는데, 實 驗 할 곳을 선택한 곳이 짓궂게도 그때의 昭 和 通 (현 退 溪 路 )에 있던 日 本 人 世 話 會 이다. 꽃송이같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다. 正 午 를 좀 지나서 자그마한 物 件 이 든 보자기를 들고 日 本 人 世 話 會 앞을 지나가던 젊은이가 걸음을 멈추더니 문득 피어물고 있던 담뱃불을 보자 기에서 빼져나온 짧은 줄끝에 갖다댄다. 지지지지!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연기를 뿜는 보자기가 홱하니 1 層 으로 던져졌다. 쾅 白 晝 의 거리를 震 動 시키는 爆 音 과 함께 아우성소리, 울부짖는 소리로 修 羅 場 을 이룬 建 物 속에 서 피투성이가 된 倭 人 男 女 들이 밖으로 뛰어 나와서는 눈위에 쓰러진다. 길 건너 街 路 樹 그늘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는 賢 宇 의 얼굴에는 불현듯 快 哉 의 웃음이 스치고 다음 순간 그는 소리없이 골목길로 사라졌다. 이렇게 私 製 手 榴 彈 의 試 驗 에도 성공하고 모든 준비를 갖추어 갈 때, 마침 12월 28일의 反 託 騷 動 이 일어나자 세상이 어수선해서 그들의 兇 計 에 絶 好 의 機 會 를 주었다. 30일 새벽 決 行 하기로 決 意 한 賢 宇 는 根 培 를 시켜 29일 國 民 大 會 召 集 準 備 委 員 會 를 정탐하게 하였다
100 지난날의 同 僚 이던 警 護 員 들을 넌지시 찾아가서 그날도 古 下 先 生 이 苑 西 洞 自 宅 으로 돌아가리 라는 것과 그날의 警 護 는 鄭 鍾 根 이가 혼자 한다는 情 報 를 가지고, 根 培 가 南 山 洞 으로 돌아오자 賢 宇 가 指 名 하는 白 南 錫, 金 義 賢, 李 昌 希, 金 仁 成, 李 如 松, 劉 根 培 의 7인이 2 層 의 密 室 에 모였다. 根 培 가 그린 苑 西 洞 집의 略 圖 를 둘러싸고 熟 議 한 結 果, 下 手 는 賢 宇 와 根 培 가 하고 警 護 員 이 있는 행랑 房 앞 뒷문은 白 南 錫, 金 義 賢, 두사람이 지키고, 李 如 松 은 前 面 의 대문을 파수보아 외부와의 연락로를 차단하고 金 仁 成 은 안채 마당에서 가족들이 나오지 못하게 하고 李 昌 希 는 돌층계 위에서 온 집안을 망보기 하는 등 各 者 의 部 署 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소지할 무기는 賢 宇 는 모젤 2호 권총 根 培 는 5연발 24 式 권총(두 세발의 달달 탄환이 섞여있었다) 白 南 錫 은 부로닝 2호 권총 金 義 賢 은 14 式 권총 金 仁 成 은 부로닝 2호 권총 李 昌 希, 李 如 松 은 각각 刀 劍 ( 日 本 刀 의 小 刀 )을 나누어 가졌다. 여기에서 특기할 것은 백남석, 김의현, 김인성에게 私 製 爆 彈 을 나누어 주면서, 만일 가족이나 경호원이 암살자의 정체를 눈치챘을 경우에는 서슴치말고 폭탄을 던져 몰살하라는 소름끼치는 지 령을 賢 宇 가 하였다는 사실이다. 신발은 輕 便 한 운동화로 통일하되 물러날 때에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거꾸로 돌려 신어서 눈위에 나간 발자국을 반대방향으로 남겨서 추격에 혼동을 일으키게 하고 복장과 복면을 임의로 하되 모자는 도리우찌 로 통일하여 混 戰 이 있을 때 분별이 쉽게 한다 는 등, 周 密 한 계획이 세워졌다. 그럼 내일의 행동에 지장이 없도록 푹들 쉬시오 賢 宇 가 이렇게 말하고 아래층으로 총총히 사라진 다음 그들은 자리를 깔고 누웠다. 이튿날 鐘 時 計 가 찌르릉 다섯시를 알리자 무거운 몸을 가누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란 몇개씩 으로 아침요기를 하고 賢 宇 가 따뤄주는 위스키를 한잔씩 마시고 두패로 나누어 南 山 洞 을 떠났다. 賢 宇 가 세명을 데리고 종로2가를 지나 齊 洞 쪽으로 해서 가고, 根 培 는 두명을 데리고 종로 3가 團 成 社 앞을 지나 敦 化 門 으로 해서 갔다. 5시 50분이 좀 지나서 그들은 약속하였던 苑 西 洞 집뒤 언덕위에 섰는 古 木 밑에 모였다. 西 北 風 이 휘 몰아치는 12월의 새벽은 아직도 어두웠다. 땡! 땡! 어디서인가 궤종이 여섯시를 치는 소리가 들린다. 정각 여섯시다. 根 培 는 정신을 차려서 날세게 뒷담을 뛰어넘어 집안의 動 靜 을 살핀 다음, 담밖을 향하여 조심 스럽게 휘파람을 휴 - 불었다. 이상 없다는 신호다. 차례로 담을 넘은 그들이 허리춤에서 권총과 刀 劍 을 꺼내들고 앞을 겨누면서 각자 맡은 곳에 이르러 대기하자, 賢 宇 는 根 培 를 앞에 세우고 눈을 밟으며 山 亭 앞에 다가섰다. 이때, 안에서 기침소리가 나더니 거 누구냐? 하는 것이 先 生 의 목소리다. (옳지, 있구나!) 이렇게 속으로 부르짖으면서 창문을 드르르 열고 마루에 올라서는데, 방안에서 또 누구냐? 하는 것이 몹시 초초한 목소리다. 根 培 가 狗 肉 的 인 침착성으로 전등 스윗치를 누르니 방안에 불이 화안하게 켜진다. 방문을 열고
101 들어서니 선생과 웬 노인이( 新 聞 에서 그가 선생의 친척인 梁 仲 黙 老 人 임을 알았다)자리 위에 일어 나 앉아 있다가, 이 不 意 侵 入 한 괴한들에 질겁을 하고 주춤 물러앉는다. 어느 쪽이오? 하고 賢 宇 가 초조히 물었다. 이 쪽이오! 하고 根 培 가 턱으로 가리키자 들었던 권총을 겨누어 마구 쏜다. 탕탕탕! 탕탕탕! 새벽의 적막을 뚫고 총소리가 요란히 울린다. 몇방의 兇 彈 을 맞은 선생은 방구석에 쓰러져 허 우적거리면서 응 --! 하고 신음한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광경에 얼이 빠진 노인은 얼굴근육이 굳어졌는지 입을 실룩거리면서 방구석으로 기어들어간다. 쏘지! 賢 宇 의 호령에 정신을 차린 根 培 가 간신히 머리를 들고 兇 漢 들을 쏘아보고 있는 선생의 머리를 겨누어 방아쇠을 당겼다. 탕! 탕! 홱하니 앞으로 고꾸라진 선생은 다시 움직이지 않는다. 이때 겁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 고있는 노인이 사 사람 살류 -- 하고 소리치자 떠들지 말어! 하면서 根 培 의 총구에서 또 불이 터졌다. 나가세! 하고 밖으로 나가는 賢 宇 의 뒤를 따라서 마루에서 내려서는데 쾅! 하는 총성이 행랑방 쪽에서 나더니 총탄이 根 培 의 신발을 꿰 뚫었다. 나오면 죽인다! 하는 고함과 함께 탕탕탕탕 탕탕탕탕 콩볶듯 총성이 나는데, 金 義 賢 과 白 南 錫 이가 총소리에 놀라 잠을 깬 경호원이 발포하면서 뛰어 나오는 것을 견제하느라고 쏘는 총격이다. 이때 사랑방에서 아버지! 하는 울부짖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꼼짝말아! 나오면 목숨이 없어질줄 알라! 하고 일르는 소리와 함께 金 仁 成 의 권총이 불을 뿜는다. 그만! 賢 宇 가 내 뱉는 호령에 전원이 숨소리 발소리를 죽여가며 조용히 山 亭 앞에 모였다. 이곳에서 운동화를 거꾸로 고쳐신고 차례로 담을 뛰어 넘었다. 둘, 셋씩 작패하여 南 山 洞 으로 돌아온 그들 은 위스키를 병채로 들여마셨다. 술로 죄악감을 마취시켜 보려는 것이었으나 악몽에서 깨어난 사 람들같이 신경은 날카로워지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날밤 어디인지 다녀온 賢 宇 는 창백해진 얼굴에 깊게 째진 눈에는 독기가 서리고 분노로 몸을 떨면서 嚴 ㅇㅇ이란 놈은 죽일놈이야! 인제와서 꽁무니를 빼다니 이놈 어디 두고 보자! 내가 네놈을 그냥 둘 줄 아느냐 배신자에게 돌아가는 무자비한 보복을 맛좀 봐라 하고 노발대발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모든 언론이 이 저주할 테러 행위를 건국의 암, 망국의 좀이라고 비난하고 온겨레가 지도자를
102 잃은 슬픔에 잠겨 끝없는 불안감에 떨고 있을 때, 그들은 全 柏 의 지시로 38 線 을 넘었다. <38 以 北 同 胞 에게 反 託 運 動 을 선동한다>라는 것이 그들의 仮 裝 된 시행 목적이었으나 실은 古 下 先 生 을 살해 후, 한때 南 韓 땅에서 자취를 감추고 搜 査 當 局 의 수사망이 어느 각도로 펴 지는지를 관망하자는 全 柏 의 치밀한 계획에서이다. 이북땅에 잠입한 그들은 할일없는 날을 보내다가 2주일 뒤인 1월 15일쯤 서울로 다시 돌아왔 다. 평안도 태생으로 창씨명을 箕 山 元 律 이라고 하고 있던 賢 宇 는 와세다 大 學 政 經 學 部 에 籍 을 두고 있을 때, 일본의 국수주의자 나까노 세이고( 中 野 正 剛 )를 欽 慕 하여 그가 領 導 하던 東 方 會 에 가담했 었다 事 件 의 主 謀 者 로 極 刑 에 처해진 北 一 輝 의 거사를 찬양하고 그를 추모하던 賢 宇 는 그당시 首 相 이며 軍 閥 의 元 兇 이던 東 條 英 機 를 죽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여 보겠다고 기회를 엿보고 있 었다. 이러던 때 東 條 의 橫 暴 가 날로 심해가서 일본 국민의 원성이 높아가자 東 方 會 의 젊은 동료 몇 사람과 東 條 암살을 共 謀 하였으나, 선전적인 그의 성벽이 화근이 되어 마침내 관헌에게 被 檢 되 었다. 小 兒 病 的 小 英 雄 主 義 者 의 賢 宇 는 乙 酉 年 봄에 執 行 猶 豫 라는 관대한 처분으로 방면되어서 서울, 春 川 등지에 나타났다. 한국으로 돌아온 賢 宇 는 江 原 道 警 察 部 橫 山 警 視 의 주선으로 春 川 에서 啓 蒙 義 塾 을 開 講 한다고 朴 春 琴, 伊 坂 和 夫, 韓 人, 黃 海 道 警 察 部 長 等 親 日 巨 頭 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갈피를 못잡고 있던 賢 宇 는 東 京 留 學 당시부터 呼 兄 呼 弟 로 지내던 古 下 先 生 의 祕 書 鄭 鍾 根 을 찾아서 여러차례 古 下 先 生 에게 추천해 달라고 졸랐으나 그때마다 鄭 鍾 根 은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저자는 미친개야! 미친 개는 주인도 물거든 비열감에 실룩거리는 표정으로 돌아가는 賢 宇 의 뒷모습에 내 배앝듯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鄭 鍾 根 이었다. 이때 筆 者 도 鄭 鍾 根 이와 같이 古 下 先 生 을 모시고 있었으나 하찮은 言 爭 으로 國 民 大 會 召 集 準 備 委 員 會 를 탈퇴하고 말았다. 얼마를 지내려니까 劉 根 培, 申 東 運, 白 南 錫, 金 義 賢 이도 鄭 鍾 根 이와의 감정대립으로 그와 결별하고는 賢 宇 와 같이 擊 蒙 義 塾 을 再 建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全 柏 이와 결탁한 賢 宇 는 차차 테러리스트의 본성을 나타내더니 급기야는 申 東 雲 에게는 吳 正 邦 을 殺 害 하라고 종용하고 劉 根 培 에게는 古 下 先 生 을 狙 擊 하라고 강요하였다. 지금 내가 내라고 長 安 을 휩쓸고 돌아다니는 吳 正 邦 이란 자는 日 帝 時 京 畿 道 警 察 部 囑 託 을 지 내면서 우리의 많은 先 烈 들을 감옥으로 몰아간 역도였오. 이놈이 日 帝 가 주고간 막대한 공작비 와 무기로 不 汗 黨 을 조직하여서는 혼란한 틈을 타서 장차 정부의 軍 部 大 臣 을 꿈꾸고 있으니 이 어찌 黙 過 할 수 있겠오. 한편 宋 鎭 禹, 呂 運 亨, 朴 憲 永 의 무리는 파벌을 조장하여 민족통일을 방 해하는 민족분열의 조작자이니 일찍 민족의 화근을 제거해야겠오 이것이 賢 宇 의 살인 구실이었다. 물론 全 柏 이나 賢 宇 를 조정하는 배후인물이 주는 살인구실의 녹음방송일 것이다. 건설적인 의견을 발표할만한 주변과 용기가 없는 자에게 불평이 있고, 불평이 지나친 곳에 테 러의 고질이 있다. 청년들의 피를 賣 名 과 榮 達 의 값싼 걸음으로 자멸의 길을 재촉하는 테러 군상 들! 목적을 위하여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공산당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이용가치가 있는 모든 사물과 현상을 100% 이용하라는 스탈린의 교훈(?)은 그들 테러 군상들에게도 행동신조 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해방이 되자 해외에서 돌아오고 또는 자유를 찾아 월남한 젊은이들이 東 家 食 西 家 宿 하는 질서 없는 날을 보내면서 삶의 길을 찾아 헤매일 때 一 宿 一 飯 의 친절을 베풀어 이들을 낚아가지고는
103 조국에의 情 熱 에 테러 至 上 의 그릇된 관념을 주입시켜 차례로 피의 제단에 장사지내고 있었다. 어느덧 따스한 봄이 다가왔다. 훈훈한 봄바람이 부는 3월말의 어느날 느닷없이 根 培 가 찾아왔 다. 때가 꾀죄죄 흐르는 한복에 중의 머리를 한 그의 모습은 처참하리만큼 초라했다. 지금 포천에서 오는 길일세! 그러니 朴 兄 과 달포만에 만났네 그려 하면서 방에 들어서자, 자리에 쓰러질듯이 들어눕는다. 핏기 하나 없는 그의 얼굴은 절망에 가까 운 수심으로 일그러져 있다. 朴 兄! 일은 바로 제 코스를 찾아 들어가는 것 같으이 하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오는 길에 義 賢 이를 만났는데 작자가 평안도 성미로 괄괄하기는 하나 뒤가 무르고 좀 우둔한 편이야 하면서 밝히는 根 培 의 일이 제 코스를 찾아 들어갔다는 말은 이런 것이다. 며칠전 義 賢 이가 동대문 근처를 지나가는데 뜻밖에도 그때 軍 事 英 語 班 에 다니고 있던 鄭 鍾 根 이 와 마주쳤다. 義 賢 의 앞으로 바싹 다가선 鄭 鍾 根 이가 다짜고짜 네가 宋 先 生 을 죽였지? 하고 다잡으니 그는 그만 얼김에 아니, 내가 한짓은 아니야! 하고 주춤 물러서는데 목소리가 떨려나오는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놈아! 네가 안했으면 누가 했단 말이냐? 鄭 鍾 根 이가 멱살을 휘여잡고 어르니 그는 그만 겁이 나서 멱살을 잡힌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고 말았다. 다음날 광화문 路 上 에서 崔 某 가 首 都 廳 刑 事 에게 체포되고, 어제는 崔 가 형사들을 데리고 짚차로 신당동 賢 宇 의 집인 그들의 숙소앞을 지나갔다는 것이다. 鄭 이 덜미를 쳐보는 수작에 작자가 감쪽같이 넘어가서 눈치를 보이고 말았네! 하고는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말을 이어 그동안의 회포와 마음의 변화를 이렇게 말한다. 朴 兄 과 그날 헤어진 다음 얼마를 지내면서 생각해보니, 자신에 대한 회의와 환경에의 염증에서 차차 고민하게 되었네. 피와 鐵 의 통일을 염불 외우듯 하고 있는 賢 宇 의 어처구니없는 시대착 오의 궤변에 귀를 기울이고 이순신장군의 주리를 틀던 이 민족의 결함을 송두리채 지니고 있는 全 柏 과 賢 宇 의 몸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끝내 맡지못하고 정치야욕에 눈멀은 테러리스트의 꼬 임에 빠져 古 下 先 生 을 내 손으로 죽이고 말았네 그려! 망상의 흙탕 속에서 허덕이다가 청춘의 정열을 헛되게 한 유감은 고사하고 민족에게 다시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범했네 말을 마치고 깊은 오뇌에 잠긴듯이 침울히 앉아있는 根 培 의 어깨는 힘없이 처지고 늘어진 여읜 목이 퍽이나 애처롭게 보인다. 그러나 나는 반가웠다. 중학교 동기동창인 根 培 의 오늘있기를 나는 얼마나 바랐던가. 劉 兄! 반가워, 진정 반갑네, 劉 兄 은 이제 옛 根 培 로 돌아왔네, 全 柏, 賢 宇 의 무리야말로 살인이 생활화된 악성인 정신병자야. 더욱이 현우는 제거되어야 할 존재야! 得 人 이라야 得 天 下 라고 하 네, 멀지않아 그들은 그들이 저지른 죄의 값을 치르고 이땅에서 사라질 것이네! 고민하던 끝에 나는 呂 運 亨 씨를 노리고 있던 현우와 결별하고 머리를 깎고 38이북의 포천 산 속으로 들어가서 새끼도 꼬고 독서도 하는 날을 보냈다네. 그곳에서 번민과 오뇌의 날을 보내 면서 나는 오늘의 시대성을 잘못본 어리석음을 깨달았네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얼굴을 두손으로 가리고 책상위에 엎드린다. 劉 兄! 우리는 아직 완전한 인간이 못되는 인간들이 아닌가. 과오도 있고 실수도 있는 것이야. 그러나 劉 兄 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뉘우침이 빠른 곳에 유형의 광명한 미래가 있지 않을까 너무나 깊은 상처에 우는 그를 위로할 말이 이렇게 밖에 나오지 않았다
104 마비된 인간성에서 국가대사를 그르치고 윤리에 반기를 들었던 나에게 오직 한갈래 갈 길이 있다면 속죄의 길일세. 그릇된 私 情 에 눈이 어두어 大 義 를 저버린 자로서 악의 길을 걸어온 내 가 아니었던가. 포천 산속에서 暝 想 의 날을 보내는데 이곳도 공산당 놈들의 등살에 배겨날 수 가 있어야지. 머리를 깎은 나를 僧 으로나 알었든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판에 박은 레닌 의 말을 되풀이해 가면서 못견디게 굴더군 하면서 쓴웃음을 짓는다. 하기야 큰일을 저지른 나를 이나라 이땅이 받아줄 리가 있겠나. 한줌의 흙도 나의 무덤되기를 원치 않을 것일세. 朴 兄! 고마워. 아직도 나를 친구로 알아준 朴 兄 의 우정이 눈물겨웁네. 나는 자수하겠네. 실은 건국하는 날 자수하려고 하였으나 지금의 마음에 魔 가 들기 전에 자수하려고 포천을 떠나온 것일세. 며칠동안 인천의 숙부집에 가서 부모님께 하직을 사뢰고 죄의 값을 치 를 마음의 준비를 갖추겠네 다음날 그는 발길을 옮겨 인천으로 떠났으나 며칠뒤 인천의 숙부집을 급습한 수도청형사대에 체포되어 자수하겠다던 그의 양심의 부르짖음과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 筆 者 는 故 宋 鎭 禹 先 生 警 護 員 이었으며 共 犯 者 劉 根 培 의 同 窓 生 > 31. 古 下 와 朗 山 < 獨 立 路 線 > (1959) 金 俊 淵 (1) 政 界 回 復 1년 - 解 放 과 政 治 運 動 의 出 發 - <동아일보> ( ) 1 공산혁명으로 一 路 매진하겠소! 이것이 建 國 準 備 委 員 會 委 員 長 呂 運 亨 씨가 작년(1945년) 8월 15일 오전 10시경 창덕궁 경찰서 앞에서 내게 선언한 말이었다. 蘇 聯 軍 이 곧 京 城 에 들어오고 우리가 곧 내각을 조직할 터인데 당신 후회하지 않겠소? 이것이 建 國 準 備 委 員 會 조직부장 鄭 栢 군이 역시 작년 8월 15일 오후3시경에 내게 전화로 한 말이었다. 정계1년을 회고하는 데 있어서 이 呂, 鄭 양씨가 내게 한 말은 참으로 우리가 기억할 가치가 있는 말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직접 들은 말은 아니지마는 세상에 이 미 널리 알려져 있는 또한 사람의 다음 말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 9월 8일 계동서 개최되었던 共 産 黨 熱 誠 者 大 會 석상에서 책임비서 朴 憲 永 군은 朝 鮮 人 民 共 和 國 만드느라고 동무들 대하기가 늦어졌소! 하고 말하였다. 建 國 準 備 委 員 會 人 民 共 和 國 人 民 黨 共 産 黨 民 主 主 義 民 族 戰 線 이것이 좌익진영의 주요형태이고 거기서 중요한 활동을 한 것이 呂 運 亨 朴 憲 永 씨이다. 이 두 사람의 자취를 살펴보면 좌익계열의 활동을 알 수 있는 것이다. 8월 6일에 廣 島 市 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9일 미명에 蘇 聯 軍 이 조선 만주로 쳐들어오게 되니
105 일본은 손을 들고 만 것이다. 9일에 소련측은 정정당당하게 日 本 에 대하여 宣 戰 布 告 를 하고 전투 를 개시하였으나 日 本 서는 그에 대해서 적대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회의만 거듭하고 있었다. 벌써 무조건항복은 기정사실이었고 다만 그 절차에 관한 것이 논의되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정부와의 연락으로 인하여 그 형세를 熟 察 한 朝 鮮 總 督 府 당국은 蒼 皇 失 色 하야 어찌할 줄 모르고 宋 鎭 禹 씨 에게 향하야 시국 담당을 요청하게 되었다. 총독부 보안과장 磯 崎 와 차석사무관 原 田 과 조선군참모 神 崎 외 또 한 참모와 朴 모와 宋 씨의 5인 이 本 町 某 日 人 의 사저에서 회합하게 되었다. 그때에 그들은 몰론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말 까지는 내지 못하였고 다만 형세가 급박 중대하다는 것을 말하고 行 政 委 員 會 같은 것을 조직하라 고 권하고 독립준비까지를 하여도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宋 씨는 應 從 하지 않고 佯 醉 하고 日 本 의 必 勝 을 말하고 그 자리를 파하여 버렸다. 그 이튿날 아침에 原 田 사무관이 또 와서 권유하고 경기도 보안과장 田 中 鳳 德 이도 와서 권하고 최종에는 경기도지사 生 田 이가 경찰부장 岡 과 함께 적극적으로 권하였으나 宋 씨는 여전히 거절하 고 응치 아니하였으니 그것이 8월 13일의 일이었다. 그때에 岡 경찰부장은 앉았다섰다 왔다갔다 하면서 어찌할 줄 모르고 형세가 절박하니 宋 씨가 담당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는 것을 협박적으로 말하였다. 총독부가 가진 권력의 4분지 3을 밀 어줄 터이니 해달라고 말하였다. 신문 라디오 교통기관 헌병 경찰 검사국 등을 다 밀어주겠다고 하 며 日 本 人 의 居 留 를 인정하며 그 사유재산을 보호하여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며 당신이 응락하면 지금 당장에 정무총감 遠 藤 에게 함께 가서 결정을 짓자고 하였다. 그러나 宋 씨는 여전히 거절하므로 岡 경찰부장은 당신이 그같이 固 辭 하면 金 俊 淵 군으로 하여금 하여보게 하면 어떠한가? 金 俊 淵 군을 만나게 하여달라 고 하였다. 그래서 宋 鎭 禹 씨는 金 俊 淵 군도 나와 동일한 의견일 줄 안다. 그러나 당신이 만나기를 원하니 연락은 취하겠다. 고 대답하고 나에게 그 뜻을 전하였으므로 나는 경기도지사 生 田 을 만나게 되었다. 2 8월 14일 오전 9시경에 나는 경기도지사 生 田 을 경기도지사실에서 만나게 되었다. 岡 경찰부장 도 들랑날랑하였다. 이야기는 5-6시간 계속되게 되었다. 그날 처음으로 경성에 B29가 2차례나 날 아와 나는 그들과 방공호에 들어가서 피난하고 점심까지 같이하고 이야기하였는데 조선내에서 폭 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퍽 염려하는 모양으로 더군다나 학생들의 동향에 대하여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무조건항복에 관한 의사를 표시치 아니한 이상 나는 물론 그 눈치도 보일 수 없는 것이고 그들이 듣기좋게 위안될 만한 말을 하여주고 갈리게 되었는데 맨 끝 에 生 田 지사는 당신이 宋 鎭 禹 씨를 만났는가? 하고 묻기에 나는 그렇다 고 대답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시국담당에 관한 宋 鎭 禹 씨측에 대한 교섭 은 이와같이 結 末 되고 말았는데 15일 아침에 들은즉 呂 運 亨 씨가 오전 7시반에 정무총감 遠 藤 을 만나러 갔다고 하였다. 물론 宋 鎭 禹 씨측에 대한 것과 동일한 문제인 줄을 짐작하였다. 그때 14일 밤 라디오 방송은 15일 정오에 중대방송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고하였다. 그런데 나 는 鄭 栢 군에게서 宋 鎭 禹 씨와 呂 運 亨 씨와의 제휴에 관하여 알선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었다. 鄭 栢 군 등의 의견에 의하면 宋 鎭 禹 씨측과 呂 運 亨 씨측이 제휴하면 국내에 있어서는 대항할 만한 세력 이 없을 터이니 그 뜻을 宋 鎭 禹 씨 金 性 洙 씨에게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金 性 洙 씨는 14일 오후에 漣 川 떠나는 길에 잠깐 만났을 뿐으로 그 문제에 관하여서는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 고 宋 鎭 禹 씨에게는 14일밤에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거절하고 응치 아니하였다. 총독부측으로부터 4차례나 교섭을 받았는데 그것을 거절하였은즉 지금 다시 응낙할 수도 없고 연합군이 들어오기
106 전에 일본사람의 손에서 정권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宋 鎭 禹 씨는 中 日 戰 爭 ( 日 支 事 變 )이 일어나고 美 日 戰 爭 ( 大 東 亞 戰 爭 )이 계속하여 일어나 일본이 혁혁한 승리를 얻 어가는 동안에도 日 本 必 亡 의 신념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 나는 宋 鎭 禹 씨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수백번 들었다. 日 本 人 이 亡 하기는 꼭 亡 한다. 그런데 그들이 형세가 궁하게 되면 우리 조선사람에게 自 治 를 준다고 할 것이고 형세가 아주 궁하게 되어서 진퇴유곡의 경우에 이르게 되면 그들은 조선사람 에게 독립을 허여한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자치를 준다고 할 때에 나서지 아니할 것은 물론이 려니와 독립을 준다고 하는 때에도 결코 나서서는 안된다. 그때가 가장 우리에게 위험할 때다. 망해가는 놈의 손에서 정권을 받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불란서의 페탕 정권을 보라. 중국 의 汪 兆 銘 정권을 보라. 또 비율빈의 라우엘 정권을 보라. 그들이 필경 허수아비 정권밖에 되지 못할 것이고 民 族 反 逆 者 의 이름을 듣게 된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總 督 府 의 교섭도 거절하고 呂 運 亨 씨의 제의도 거절한 것이었다. 이것은 宋 鎭 禹 씨가 총독부측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되는 동시에 呂 運 亨 씨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도 되는 것 이지마는 呂 씨측 제안을 거절한 것은 또다른 중대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呂 運 亨 씨에게는 해외에 있는 在 重 慶 大 韓 臨 時 政 府 를 위시하여 여러 독립운동 선배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경향이 농후하게 있고 또 공산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것이 간취되었기 때문이다. 이와같 이 되어서 최초의 합작시험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呂 運 亨 씨는 15일 오전 7시반에 정무총감 遠 藤 을 만나고와서 建 國 準 備 委 員 會 를 조직 하여 가지고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던 것이다. 3 8월 15일 정오에 과연 중대방송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 裕 仁 天 皇 의 무조건항복에 관한 것이었 다. 呂 運 亨 씨등은 바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建 國 準 備 委 員 會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되 었다. 16일 오후 2시에는 소련군이 경성으로 들어온다고 하였다. 그래서 건국준비위원회측에서는 위 원장 呂 運 亨 씨를 선두에 세우고 수만군중을 동원하여 경성역으로 나갔었다. 그리하였으나 소련군 은 한사람도 오지 아니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 사무소가 있는 계동 입구에는 목총 가진 학생군이 있어서 조각본부로 가는 행인을 제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組 閣 本 部 를 설명하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14일에 연천으로 갔던 金 性 洙 씨는 사태 의 급변함을 듣고 17일에 경성으로 돌아왔는데 오후 9시경에 자기집이 있는 계동입구에 다달으 니 목총든 학생군이 제지함으로 무슨 까닭이냐? 물었더니 組 閣 本 部 가 있기 때문에 잡인의 통행 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학생들의 모자를 보니 자기 학교 학생들이었다고, 그러나 자 기가 교장이란 말도 못하고 주저하고 있던 차에 다행히 普 專 졸업생 趙 中 玉 군의 알선으로 그곳을 통과하였다고. 그런데 趙 군은 조각본부인 건국준비위원회 사무소에서 나오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와같은 권력이 있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17일 아침에 평양서 宋 鎭 禹 씨 댁으로 전화가 왔다. 이것이 남북 연계에 관한 중대한 사실이다. 그 전화의 내용인즉 이러하다. 지금 曺 晩 植 吳 胤 善 金 東 元 세사람이 모여서 電 話 를 한다. 그런데 知 事 로부터 시국 담당의 교 섭이 있는데 어찌하면 좋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宋 鎭 禹 씨는 治 安 維 持 정도로 하는 것이 좋겠다! 고 회답하였다. 20일경에 金 炳 魯, 白 寬 洙 씨 등은 建 國 準 備 委 員 會 를 방문하고 정권을 정무총감에게서 받는 형식을 버리고 각계 유지를 총망라하여 그 자리에서 공론하여 치 안을 유지하는 정도로 하여 명칭도 治 安 維 持 會 같은 것을 채택하라!
107 고 제의하였었는데 찬성자도 많이 있었으나 건국준비위원회측에서 應 從 치 아니하여서 성립되지 못하고 만 것은 또한 기억할만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呂 運 亨 씨 등은 그대로 나가서 9월 6일 밤에 경기여고 강당에 모여서 人 民 共 和 國 을 만들 고 13일에는 그 각원의 명부까지를 발표하여 그의 숙원이던 조각을 완성한 듯하였다. 宋 鎭 禹 씨는 8월말에 와서야 겨우 활동을 개시하였다. 연합군이 9월 7일에 경성에 돌아온다는 것이 확실히 알려진 때문이다. 國 民 大 會 準 備 會 를 발기하였다. 9월 7일에 그 결성식을 光 化 門 通 東 亞 日 報 社 3층강당에서 거행하였는데 경향각지로부터 참집 한 인사가 수백명에 달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중경에 있는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를 지지하고 연합 국에 대해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당면의 문제를 담당처리하기 위하여 간부를 선정하는 결정을 보 게 되었다. 9월 16일에는 韓 國 民 主 黨 이 結 成 式 을 거행하였는데 宋 鎭 禹 씨는 그 首 席 總 務 로 취임하게 되어 서 國 民 大 會 準 備 委 員 長 인 동시에 韓 國 民 主 黨 首 席 總 務 인 宋 鎭 禹 씨는 두 단체를 영도하게 되어 建 國 準 備 委 員 會, 人 民 共 和 國 에 대한 대항적 세력을 집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9월말에 安 在 鴻 씨의 國 民 黨 이 결성되고 또 任 永 信 씨를 중심으로 한 朝 鮮 女 子 國 民 黨 이 결성되어 서 민족주의진영은 國 民 大 會 準 備 會, 韓 國 民 主 黨, 國 民 黨, 朝 鮮 女 子 國 民 黨 이와같은 4개단체로 두 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10월 16일에 李 承 晩 박사가 미국으로부터 미국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하였고 11월중에 중경에 있던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가 들어오게 되어서 民 族 主 義 陣 營 은 강화되게 되었다. 그동안에 民 族 統 一, 政 黨 統 一, 左 右 合 作 등 많은 문제가 논의되고 試 行 도 되었으니 10월 5일에 는 梁 槿 煥 씨의 알선으로 좌우요인들이 昌 信 洞 白 樂 承 씨 집에서 회합하였고 李 承 晩 박사는 中 央 協 議 會 를 중심으로 하여서 노력하여 보았고 重 慶 서 돌아온 臨 時 政 府 에서는 趙 素 昻 張 建 相 씨등을 내 세워서 합작을 도모하여 보았으나 다 성공하지 못하고 信 託 問 題 가 나오고 朴 憲 永 군의 蘇 聯 邦 가 입론이 나오게 되어서 合 同 되지 못할 것이 명확하게 되었던 것이다. 4 경성서는 12월 30일에 宋 鎭 禹 씨가 암살을 당하고 평양서는 미구에 曺 晩 植 씨가 연금을 당하게 되었다. 民 族 主 義 陣 營 에 대한 반격이 남북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된 것으로 보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이것은 일대 경종이었다. 建 國 準 備 委 員 會, 人 民 共 和 國 의 지도자들 즉 人 民 黨, 朝 鮮 共 産 黨 의 간부들 즉, 呂 運 亨, 朴 憲 永 씨 등은 共 産 革 命 으로 일로매진하기를 주장하고 內 閣 을 즉시 조직할 것을 주장하야 그 결론으로 9월 6일에 人 民 共 和 國 을 만들어서 13일에는 閣 員 까지 발표하고 信 託 을 支 持 하야 朝 鮮 의 絶 對 自 主 獨 立 을 否 定 하고 蘇 聯 邦 加 入 을 주장하야 4천년 문화민족을 노서아의 노예화하려고 한다. 그들이 이러한 태도를 固 持 하는 동안에는 도저히 합작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어느 편이든지 굴복이 있을 뿐일 것이다. 合 作 問 題 는 非 常 國 民 會 議 때에도 試 驗 되었고 民 主 議 院 成 立 時 에도 試 驗 되었다. 금년 2월 14일 民 主 議 院 발회식때에도 呂 運 亨 씨는 바로 회의장 앞에까지 왔다가 들어오지 않고 말아버린 일도 있었다. 美 蘇 共 同 委 員 會 가 無 期 延 期 되게 되자 초조한 外 賓 들은 또 다시 合 作 問 題 를 끌어내어 권 하여 보고있는 중이다. 中 國 에 있어서 마샬 特 使 의 노력도 크려니와 조선에 있어서의 버취중위의 수고도 또한 적지 아니한 줄 생각된다. 苦 熟 을 무릅쓰고 동분서주하며 노력하여주는 그 勞 를 나 는 크다고 생각한다.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民 主 議 院 부의장 金 奎 植 박사 이하 5인을 대표로 선정 하야 성의있게 덕수궁에 가서 기다리지마는 좌익측 대표들은 단장 呂 運 亨 씨의 병을 이유로 하여 서 3,4차례나 회기를 徒 過 케하고 1장의 쪽지만 남기고 갔으니 이것이 소위 五 原 則 이라는 것으로 서 土 地 의 無 償 沒 收 를 주장하고 南 朝 鮮 에 있어서도 北 朝 鮮 에와 마찬가지로 政 權 을 모두 人 民 委 員 會 로 넘기라는 것이다. 요컨대 남부조선도 북부조선과 꼭 同 一 하게 하여서 共 産 革 命 을 실시하자 는 것이다. 이것은 국제 국내형세로 보아서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거기 대하여 민주주의
108 진영에서는 合 作 基 本 對 策 八 個 條 를 작성하여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누구나 적절타당하다고 인정하 는 바이다. 그동안에 북조선에서는 共 産 黨 과 新 民 黨 이 합작하여 北 朝 鮮 勞 動 黨 을 만들었는데 평양 에 가서 지령을 받고 돌아온 朴 憲 永 군은 人 民 黨 을 시켜서 제기케하여 남조선에서도 그와같이 실 시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에 관련하여 공산당 내에 대파문이 일어나게 되어서 李 廷 允, 姜 進, 徐 重 錫, 金 錣 洙, 金 槿, 文 甲 松 의 六 中 委 員 이 反 幹 部 聲 明 을 발표하여 朴 憲 永 군의 당내 파벌성을 폭로하 게 되었다. 그리하여 李 廷 允 군은 제명처분을 당하게 되고 그외 5명은 무기정권처분을 당하게 되 어서 사회의 주목을 끌고 있는 터이다. 6월중에 인천에 있는 공산당원 曺 奉 岩 군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無 産 階 級 獨 裁 를 否 認 하고 소련의 존주의를 청산하는 태도를 명백히 하였다. 朝 鮮 의 獨 立 은 국제적으로 이미 公 約 된 바이니 1941년 8월 중순에 美 英 間 에 체결된 大 西 洋 憲 章 제3조 중에는 主 權 과 自 治 를 강제적으로 탈취당한 제국민이 그 주권과 자치를 회복하는 것 을 희망한다고 하였고 1942년 11월 카이로 美 英 中 3국회담에서는 전기3대국은 朝 鮮 人 民 의 奴 隸 狀 態 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으로 하여금 自 由 와 獨 立 을 얻게 할 것을 결의한다 고 하였다. 그리고 獨 逸 이 항복한 후에 개최된 포츠담회의에서는 美 英 蘇 中 4국이 카이로선언을 履 行 하고! 를 명시하여 조선독립을 재확인하였다. 사태가 이러하므로 우리는 국내에 있어서 조선의 독립을 최고목표로 두고 민족적 결합을 공고 하게 하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줄 안다. 그러므로 좌우합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呂 運 亨 朴 憲 永 씨등의 종래의 태도로는 합작은 거의 불가능이라고 보여진다. 몇번 껍질을 벗겨내버리 고 참으로 朝 鮮 民 族 을 사랑하고 참으로 朝 鮮 獨 立 을 염원하고 참으로 民 主 主 義 를 希 求 하는 새 세 력이 나와야 될 줄 안다. 그 점에 있어서 나는 曺 奉 岩 李 廷 允 군등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바이 다. 8 15를 당하여 감개무량하다. 순국선열들에게 감사하고 연합국에 감사한다. 그리고 기뻐도 한다. 그러나 민생이 날로 곤란하여가고 정부는 수립못되고 더군다나 이북에 있는 동포들을 생각할 때 에 가슴이 메여질 듯하다. 자! 조선사람들! 다같이 손잡고 나가 보지 않겠는가? ML 黨 옛 同 志 들! 독립기 아래로 태극기 아래로 다같이 모이지 않겠는가? (2) 國 民 大 會 準 備 會 의 一 年 <동아일보> ( ) 山 高 而 秀 雅 하고 水 深 而 淸 澄 한 漢 江 의 上 流, 勝 地 八 堂 에는 臥 龍 岡 이 아닌지라 伏 龍 先 生 은 없었 지마는 人 傑 은 地 靈 이라 그래도 一 個 王 佐 之 才 를 包 藏 하고 있었다. 때는 소화20년 夏 6월 어느날 이땅에는 漢 室 을 興 復 코저 하는 劉 關 張 의 三 人 은 아니지마는 日 皇 의 衰 運 을 만회코저 하는 朝 鮮 總 督 府 政 務 總 監 遠 藤 保 護 觀 察 所 長 長 崎 와의 二 人 의 來 訪 을 보게 되었다. 泛 彼 中 流 江 上 에 동실 떠나간다. 姜 太 公 의 낚시밴가? 渭 水 아닌 이 漢 水 에 같은 呂 船 이지마는 閑 雲 野 鶴 을 벗삼아 悠 悠 自 適 하는 興 周 의 祕 策 을 낚시대에 부치는 것이 아니고 兵 馬 倥 傯 之 際 에 日 皇 의 殘 命 을 구하려는 奇 計 를 案 出 코저 개최된 군사회담이었던 것이다. 三 千 里 江 山 에 三 千 萬 大 衆 이 사는 터이라 별별 인물이 다 있게 되어 縛 蔣 獻 上 을 進 言 하는 妄 動 者 도 있었고 日 本 을 위해 聯 蘇 攻 美 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인물도 튀어나오게 되었다. 이것이 그들의 수호책이라고 변명할는지 알 수는 없지마는 事 實 은 史 實 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遠 藤 長 崎 의 二 人 은 이 八 堂 船 上 에서 呂 運 亨 씨에게 延 安 行 을 권하게 되었다. 그래서 呂 씨는 그 것을 담당하고 崔 某 와 함께 가기로 하였던 것이었다. 前 者 에 呂 氏 는 자기가 가면 延 安 의 毛 澤 東 씨를 설득시켜서 日 本 及 蘇 聯 과 연합하여 美 英 을 치게 할 수가 있다고 揚 言 한 일이 있었다. 잔 뜩 궁한 판에 참 妙 案 이라고 생각하고 長 崎 는 呂 씨를 遠 藤 에게 소개하여 총독 관저에서 모씨의
109 통역으로 만나게 되었고 또 다시 八 堂 會 談 까지 보게 된 것이었다. 또 그전에 小 磯 總 督 시대에도 眞 鍋 와 연락하여 총독의 알선하에 民 族 維 新 會 라는 것을 呂 씨는 계획해본 일이 있었던 것이었다. 呂 運 亨 씨는 延 安 行 을 수행치 못하고 8월 15일을 맞이하게 되어서 그날 오전 7시반에 政 務 總 監 을 만나서 결정을 짓고 共 産 革 命 으로 一 路 邁 進 하겠다! 고 선언하고 建 國 準 備 委 員 會 를 조직하여 전국적 활동을 개시하여 곧 조각에 착수하여 9월 6일 밤에는 벌써 人 民 共 和 國 을 만들어서 13일 에는 閣 員 의 명부까지 전부 발표하여 버리는 대활야성을 표시하였던 것이었다. 8월 16일에는 소 련군이 꼭 경성으로 들어올 줄 알고 수만 군중을 동원하여 가지고 京 城 驛 으로 환영나갔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꺼리였다. 그들은 경성 이남까지도 전부 소련이 점령하게 될 줄 알고 버스에 미처 못타서는 큰일이라! 고 생각하고 조선에다가 공산주의를 실시하여 소비에트 공화국을 만들려고 한 것이었으니 그들의 안중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고 눈앞에 떨어진 全 朝 鮮 의 政 權 이 보였 을 뿐이었다. 이때에 결연히 일어나서 呂 씨와의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일부의 인사들이 있었으니 그는 故 宋 鎭 禹 씨를 중심으로 한 집단이어서 작년 9월 7월에 國 民 大 會 準 備 會 라는 간판을 내걸게 되었다. 9 월중에 韓 國 民 主 黨 國 民 黨 朝 鮮 女 子 國 民 黨 도 나오게 되어서 建 國 準 備 委 員 會, 人 民 共 和 國 과 그 배 경이 되는 人 民 黨 과 共 産 黨 에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國 民 大 會 準 備 會 가 최초에 간판을 내걸고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과 항쟁하여 나왔다는 것은 기록될만한 사실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동아일보 지상에 누차 이 國 民 大 會 準 備 會 에 관한 것을 발표하였고 더군다는 8월 15일의 기념논문에는 4회에 걸쳐서 해방후의 운동 전체에 관하여서 평론한 바 있었든 고로 여기서는 장 황하게 논술하기를 피하고 몇가지 점만 들어가지고 이야기하려고 한다. 國 民 大 會 準 備 會 情 報 部 에서는 작년 10월 14일부로 다음과 같은 문서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지금 와서 생각하여 보면 퍽 중대한 의미가 발견되는 것인 고로 冗 長 을 嫌 避 치 않고 전문을 인용 하기로 한다. 共 同 聲 明 書 檀 紀 四 二 七 八 年 十 月 二 十 四 日 午 後 二 時 서울 市 光 化 門 通 東 亞 日 報 社 에서 韓 國 民 主 黨, 朝 鮮 共 産 黨, 國 民 黨 의 三 黨 代 表 와 斡 旋 者 인 國 民 大 會 準 備 會 代 表 가 連 席 하여 지난 十 七 日 의 明 月 館 會 談 을 繼 續 한 結 果 滿 場 一 致 로 左 와 如 히 決 意 하였다. 檀 紀 四 二 七 八 年 十 月 二 十 四 日 韓 國 民 主 黨 代 表 = 宋 鎭 禹 元 世 勳 金 炳 魯 白 寬 洙 洪 性 夏 白 南 薰 國 民 黨 代 表 = 安 在 鴻 朴 容 羲 嚴 雨 龍 白 泓 均 金 寅 炫 蔡 圭 淵 閔 大 鎬 朝 鮮 共 産 黨 代 表 = 李 英 崔 益 翰 黃 郁 朱 鎭 璟 徐 丙 寅 國 民 大 會 準 備 會 代 表 = 金 俊 淵 薛 義 植 張 澤 相 徐 相 日 姜 柄 順 個 人 資 格 = 崔 星 煥 尹 亨 植 決 議 一. 우리는 在 重 慶 大 韓 臨 時 政 府 의 政 治 的 外 交 的 活 動 을 全 面 的 積 極 的 으로 支 持 함. 一. 우리는 在 外 諸 革 命 團 體 의 數 十 年 間 의 우리 民 族 解 放 鬪 爭 에 貢 獻 한 偉 大 한 業 績 을 支 持 함. 一. 우리는 大 韓 臨 時 政 府 의 還 國 을 促 進 하여 國 內 國 外 의 反 民 族 分 子 를 除 外 한 民 主 主 義 的 인 各 層 各 派 와 提 携 連 結 하여 國 民 總 意 에 依 한 正 式 政 府 의 急 速 한 樹 立 을 期 함. 一. 韓 國 民 主 黨 國 民 黨 朝 鮮 共 産 黨 은 全 朝 鮮 民 族 의 統 一 된 完 全 한 民 主 主 義 的 自 主 獨 立 的 正 式 政 府 樹 立 을 爲 한 準 備 로 國 民 의 總 意 가 反 映 되고 集 結 될 수 있는 國 民 大 會 準 備 委 員 會 를 構 成 함. 附 帶 決 議 의 一. 우리는 獨 立 促 成 中 央 協 議 會 의 强 力 한 發 展 을 爲 하여 積 極 的 으로 協 力 할 方 法 을 講 究 함
110 附 帶 決 議 의 二. 國 民 大 會 準 備 委 員 會 機 構 構 成 硏 究 委 員 及 國 民 大 會 準 備 會 와의 交 涉 委 員 을 左 와 如 히 選 定 함. 金 炳 魯 金 俊 淵 白 泓 均 崔 益 翰 崔 星 煥 左 右 合 作 문제가 지금도 논의되고 있는 이때에 이 문서를 보니 감회가 깊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만한 양해가 전면적으로 되었더라면 우리 독립사업은 훨씬 더 진보되었을 줄 안다. 그러나 공산당에도 두가지가 있어서 李 英 崔 益 翰 李 廷 允 徐 重 錫 등을 중심으로 한 작년 8월 15일에 성립된 共 産 黨 이 있고 朴 憲 永 군을 중심으로 하여 동년 9월 8일의 계동 熱 誠 者 大 會 의 결 정에 의하여 성립된 共 産 黨 이 있어서 전자는 朝 鮮 獨 立 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열의를 가지는 파이 고 後 者 는 소련방 가입론까지를 내세워서 조선독립을 부인하는 派 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합하였다가 이번에 또다시 분열을 보게 되어서 共 産 黨 의 反 幹 部 運 動 의 형식으로 李 廷 允, 徐 重 錫 군 등은 朴 憲 永 군 등 간부파를 배격하게 되었다. 呂 運 亨 씨도 人 民 黨 首 를 사임하고 금년말 까지는 정계에서 은퇴하겠다는 풍설도 들린다. 左 右 合 作 은 1년간을 두고 방황하다가 다시 옛길로 들어선 감이 없지않다. 세칭 長 安 派 共 産 黨 이라고 하는 上 記 共 同 聲 明 書 에 서명한 李 英, 崔 益 翰 군 등의 제씨에 의하여 진보되지 아니할까 생각된다. 國 民 大 會 準 備 會 에서는 금년 1월 10일을 기하여 國 民 大 會 를 소집하여 여러 가지 방책을 토의하 려고 하였으나 위원장 古 下 宋 鎭 禹 선생의 작년 12월 30일의 흉변으로 인하여 실행을 보지못하고 금년 2월 1일의 非 常 國 民 會 議 는 國 民 大 會 와 유사한 성질의 것이었는 고로 그 사업은 실현완료되 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동인들은 1주년을 기념하면서 俱 樂 部 로 개작하여서 창립 당시의 기분을 잃지않고 보전하여 가려고 하는 바이다. (3) 古 下 宋 鎭 禹 先 生 1 周 忌 를 맞이하여 <동아일보> ( ) 古 下 先 生! 선생께서 돌아가신지 벌써 1주년이 되었삽나이다. 작년 12월 30일 오전 6시 15분에 흉한들에게 해를 당하신 후 蕭 條 하게 漢 陽 이 공허한듯한 느낌도 없지아니 하였삽나이다. 선생께서 돌아가니 그때가 마치 우리 조선독립문제에 하자가 되는 莫 府 三 相 會 議 결정중의 信 託 統 治 문제가 전해오던 그때이었나이다. 그때에 우리 삼천만 동포는 일치하였나이다. 민족주의진영 에서 그에 대하여서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共 産 黨 과 人 民 黨 등 좌익진영에서도 그에 대하여 반 대하는 태도를 취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미국 국무장관 번즈씨로 하여금 조선사람이 원치 아 니하면 신탁통치를 실시하지 아니할 수도 있다! 고 성명케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古 下 先 生! 작년 12월 28일의 일이었나이다. 막부삼상회의 결정이 알려지고 그중의 신탁통치 조 항이 알려지자 노소남녀 할 것 없이 대경실색하여 서울 시중은 물끓듯이 되었나이다. 죽첨정 임 시정부요인 숙소에서는 밤에 들어가서 이 문제에 대한 토의가 개시되었던 것입니다. 金 奎 植 박사 가 하지장군과 만나서 이야기한 전말을 보고하였지요. 張 澤 相 형도 선생과 함께 가서 하지장군을 만난 보고를 하였나이다. 趙 素 昻 씨도 보고를 하였나이다. 요컨대 결론이 그 문제가 우리 독립과는 不 相 容 이라는 것이었나이다. 28일 밤에 개시된 회의는 29일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새벽 2시경에 회의를 마치고 자 동차로 돌아오는 도중에 자동차에 고장이 생겨서 1시간이나 지체하였던 일도 생각나나이다. 새벽 공기는 雪 寒 風 에 몸을 찌르는 듯하였었나이다. 29일 오후에도 죽첨정에서 또 회의가 있었지요. 선생과 함께 나도 또 그 회의에 참가하고 韓 國
111 民 主 黨 에 들렸다가 선생과 滄 浪 형과 同 車 하고 돌아가는 길에 나는 몸이 불편해서 선생께서 동행 하자고 누차 권하시는 것을 듣지않고 서소문 사위집에서 내렸었습니다. 그 전야 회의 때문에 냉 기가 침입하여 복통이 심하였기 때문이었나이다. 그 당시 한 달에 25회는 선생댁에 가서 동숙하 던 나는 복통 때문에 29일 밤은 결석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였더니, 어찌 뜻하였으리! 그날밤에 遇 害 하실 줄이야? 30일 早 朝 起 寢 前 에 나는 그 소식을 듣고 轉 之 倒 之, 원동댁을 달려간 것입니다. 松 石 菴 에 들어가니, 선생께서는 벌써 완전불귀의 객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동안 1년간의 우리 獨 立 의 步 度 는 퍽 지지부진의 상태에 있었나이다. 민생문제의 해결도 역 시 그와 관련되어서 步 度 가 지지합니다. 그러나 부단히 진전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간취하고 있 는 고로 희망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삽나이다. 신탁문제는 우리 국민에게 振 作 의 機 會 를 주었던 것입니다. 작년말에 벌써 그 반대 大 시위운동이 경성서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수십만의 군중이 신 탁통치 절대반대를 부르짖고 경성시가에 大 시위행렬을 하였던 것입니다. 공산당측에서도 곧 그뒤 를 이어서 금년 1월 3일에 경성운동장에서 회합하여 신탁통치반대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自 黨 의 기세를 보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좌익측에 권유당한 군중들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가하기 위하여 반대표어의 기치를 가지고 참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였는데 간부들의 태도가 돌변하여서 신탁통치 찬성으로 전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의 깃발은 똘똘말아서 집어넣고 찬성의 깃발을 들고 시위행렬을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일반대중의 앞에 그 신용을 추락하게 되어서 독립을 참으로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깊은 인상을 주게 되었던 것 입니다. 그후에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일대국민운동을 전개하게 되어서 각지에 國 民 會 의 발생을 보게 되 고 북에서도 曺 晩 植 씨가 그 문제로 최후까지 반항하여서 유폐의 몸이 되고 만 것입니다. 2월 14일 民 主 議 院 發 會 式 때에 李 承 晩 박사는 특별히 이 문제에 언급하여서 하지장군이하 한국 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장병은 모두 이 信 託 問 題 에 반대하고 있는 것을 안다! 고 하였습니다. 3월 20일에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었는데 소련대표 스티코프 중장은 개회벽두에 이 문제를 끌 어내어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정당이나 단체가 아니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시키지 않겠다! 고 하 였습니다. 이 문제로 인하여 미소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5월 8일에 결렬될 때에 미국 측은 한국인의 언론자유를 제한할 수 없으니 信 託 統 治 에 반대한다고 하여서 임시정부 수립에서 제외할 수는 도저히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였는데 10월 7일에 左 右 合 作 의 七 原 則 에 발표되어 그 제1조와 2조가 문제가 되어서 신 탁통치문제에 대하여서 불분명한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좌우합작위원회의 金 奎 植 박사와 呂 運 亨 씨가 10월 16일에 성명을 발하여 미소공동위원회의 속개를 요구하였나이다. 소련측에서는 금월 20일 막부방송에 있어서도 신탁통치에 대한 태도를 고집하고 있나이다. 그동안에 李 承 晩 박 사는 미소공동위원회는 믿을 수 없다고 하시고 미국 뉴욕에 가셔서 국제연합을 상대로 하고 운동 을 전개하셨습니다. 나는 금월 22일 동아일보 지상에 金 奎 植 박사께 공개장을 발하여 신탁통치문 제에 대한 태도를 명백히 하여 주시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이 점에 관하여는 점차 명백하여질 줄 믿고 있삽나이다. 韓 國 民 主 黨 측에서는 金 性 洙 선생을 위원장으로 하고 신탁통치 반대노선에 따라서 활동하고 있삽 나이다. 나는 지금 이 눈속에 망우리 묘지에 누워계신 선생을 생각하고 우리 독립문제를 생각하 고 다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전진할 생각을 하고 있삽나이다. (4) 古 下 宋 鎭 禹 先 生 2 周 忌 를 맞이하야 <동아일보> ( )
112 古 下 先 生! 선생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지 벌써 만2년이 되었삽나이다. 재작년 12월 30일 早 朝 에 흉한들에게 遇 害 하신 후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서 벌써 三 喪 이 다 지내게 되었삽나이다. 시일이 지날수록 선생을 사모하는 생각이 간절한 것은 동인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전민족적이 라고 하겠삽나이다. 나는 작년 이 때에 선생의 1 周 忌 를 당하였을 때에 선생을 추모하는 글을 썼삽거니와 지금은 그 후의 경과를 대강 말씀드리려고 하옵나이다. 금년 1년간의 우리 민족적 대수확은 信 託 統 治 撤 廢 라고 하겠삽나이다. 재작년 12월 28일에 모 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전하여 오지 아니 하였습니까? 그때는 아직 선생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이었나이다. 우리 삼천만동포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에 반대하였던 것이 아 닙니까? 그때에 미국 국무장관 번스씨같은 이는 한국인들이 신탁통치를 그와같이 싫어하면 시행 하지 아니할 수도 있다 고 선언하였나이다. 그러나 한번 결정된 국제협정은 파기하기가 용이한 것이 아닙니다. 反 託 運 動 이 전국적으로 맹 렬히 일어나서 그 파기를 주장하였지마는 美 蘇 共 同 委 員 會 의 당국자들을 움직이기는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나이다. 미국측 대표자들의 의견에 의하여 보더라도 三 相 會 議 결정이라는 것은 불가변 의 것이라는 것이었나이다. 그런데 소련측에서는 신탁통치는 그 결정에서 결정적으로 결정된 것이지 결코 변경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나이다. 그래서 소련 수석대표 스티코프중장은 작년 3월 20일 美 蘇 共 同 委 員 會 벽두에 있어서 양언하기를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하는 정당이나 사회단체 가 아니면 임시정부 수립하는 협의에 참가시키지 않겠다고 하지 아니하였습니까. 그래서 信 託 統 治 支 持 로 포섭하였던 左 翼 分 子 들은 축연을 베풀고 정권의 독점을 축하하였던 것이 아닙니까? 그 러나 미국측에서는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여서 信 託 統 治 조항 그것 자체도 반대하는 의사를 표시할 자유까지도 인정하자!고 주장하여서 소련과 충돌되어서 작년의 美 蘇 共 委 가 결렬되었던 것입니다. 금년의 美 蘇 共 委 도 동일한 원인으로 결렬된 것입니다. 소련측에서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24개 정당단체를 협의대상에서 제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금년 5월 21일 개회되었던 미소공위는 작년 과 마찬가지로 信 託 統 治 문제를 가지고 싸웠던 것이외다. 그런데 信 託 統 治 를 반대하는 강력한 24개 정당단체를 제외하고 보면 남는 것은 민전산하의 남 북정당단체와 그 추종군들이 있을 뿐인 고로 그렇게 되면 조선에 좌익정권이 수립될 것이 확실하 여졌으므로 미국사람들도 그 齎 來 될 결과에 想 到 하고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미국수 석대표 브라운소장은 금년 8월 9일에 저 역사적 대성명을 발표하여 주권을 침해할 수 있는 신탁 통치를 한국인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브라운소장의 이 성 명을 듣고 퍽 기뻐하였나이다. 금년 8월 10일에 서울시내 풍문여자중학교 강당에서 新 聞 記 者 協 會 가 發 會 되었는데 나는 그 석 상에서 연설하여 말하기를 나는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일본천황의 무조건항복 선언을 들을 때 에 기뻤고 오늘 신문지상에서 브라운 소장의 성명을 볼 때에 기뻤다 고 하였습니다. 이 미국수석 대표 브라운 소장의 성명은 우리에게 우리 독립에 대한 현실적 희망을 준 것이었나이다. 해방이 되면 곧 독립이 되는가 하였더니 난데없는 광풍이 불어서 저 마의 38선이 생기고 소련세력에 의 존하야 국토와 국민을 외국에 헌납하려고 하는 소연방 가입론자들이 생기고 추후해서 左 右 合 作 론 자들이 생겨서 미소의 합작을 조선에서 실현하여 신탁통치를 延 入 하려고 하는 태세를 갖추려고 할 때에 우리의 독립은 영원의 꿈속에 사라지고 말려는 때도 없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금년 1월 20일에 立 法 議 院 에서 44대 1로 반탁결의안의 통과를 보고 이어서 反 託 鬪 爭 委 員 會 의 결성을 보게 되고 하지장군의 2월 24일의 신문기자회견담이 발표되고 미국 국무장관보 힐드링 중장의 3월 10의 대연설이 나오고 3월 12일의 미국대통령 트루만씨의 希 土 양국원조를 역설하는 반공산주의적 역사적 대연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였지마는 5월 21일에 미소공위가 다시
113 열리고 보니 소련대표 스티코프 중장은 여전히 자설을 고집하여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사람만 협 의대상으로 하자는 것이었나이다. 그런데 브라운 소장의 전기 성명은 소련대표의 그 주장을 맹렬히 반격한 것으로서 유엔총회 정 치위원회에서 46대 0으로 또 유엔총회에서 43대 0으로 소련측의 보이코트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 국문제가 통과된 것은 그 기초가 브라운 소장의 성명에 놓여진 것이었나이다. 古 下 先 生! 나는 재작년 11월중에 靑 雲 洞 某 氏 宅 에서 소련영사관원들을 초대하던 일이 지금 생 각나나이다. 그때에는 滄 浪 張 澤 相 형도 그 자리에 있지 아니하였습니까? 오후 6시부터 오전 2시 까지 가는 7, 8시간 동안에 선생은 1분간도 쉬지 않으시고 조선독립 이야기만 하시고 정치 이야 기만 하셨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하였습니다. 참 입심도 좋으시고, 정열도 대단하시다고 하 였습니다. 선생의 유일의 취미는 정치이었나이다. 선생은 자나깨나 정치를 생각하시고 앉으시나 누우시나 조선독립을 생각하시고 조선의 어느 일부분 문제만을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온갖 문제를 자기 책임으로 알고 생각하셨습니다. 선생께서 계셨으면 현하 우리 조선 국면을 여 하히 보실는지요? 곤란한 가운데 있어서도 희망의 빛을 잃지 않으시고 터덕터덕 걸어나가실 줄 아옵나이다. 古 下 先 生! 신탁통치 철폐를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은 광명면이올시다. 그러나 전조선문제를 총찰 하시려고 하시던 先 生 께는 암흑면도 또한 말씀드리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古 下 先 生! 금년 1년간의 우리 민족적, 최대 불행사는 雪 山 張 德 秀 형의 참변이외다. 雪 山 형이 그 풍부한 학식과 水 湧 山 出 하는 문장과 懸 河 의 辯 으로써 韓 國 民 主 黨 政 治 部 長 의 요직에 있어서 당을 지도하고 따라서 국론을 지도하여서 국가민족의 棟 樑 之 材 가 될 터이니 그 손실이 크다고 하여서 애통하는 것 뿐만이 아닙니다. 雪 山 형의 참변은 우리 민족진영에 고쳐낼 수 없는 상처를 내인 통 격을 주었다는 점에 있어서 나는 민족적 최대 불행사로 보는 것이외다. 서기 1947년 12월 2일 오후 7시경에 雪 山 형은 祭 基 洞 자택에서 현직경관 朴 光 玉 이란 자에게 장총으로 저격당하여서 즉시 절명하였습니다. 12월 8일에 45 愛 國 團 體 聯 合 葬 으로 정중히 보냈습니 다. 8일 오전 10시에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그 영결식이 거행되었습니다. 韓 民 黨 副 委 員 長 白 南 薰 씨 의 弔 辭 는 사람의 폐부를 찔렀습니다. 聲 淚 俱 下 하는 그 弔 辭 에는 만장이 숙연한 가운데 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한민당원뿐이 아니었나이다. 나도 실큰 울었삽나이다. 식이 끝난 후에 동대문까지 도보로 행렬을 하고 거기서는 자동차로 가서 선생 누워계신 바로 뒷등척이에다가 매장하였습니 다. 滿 都 의 士 女 는 숙연하게 도로 양편에 서서 고인을 보내었고 종로4정목 근처에서 어느 노부인 은 나와서 합장하면서 황천에 가서도 일많이 하여 주십시요! 하고 묵례하였습니다. 하늘도 슬퍼하 심인지 때아닌 비가 내려서 사람의 마음을 더욱 산란하게 하였습니다. 三 韓 從 此 長 寂 寞, 九 原 落 落 有 餘 哀 이것은 滄 浪 張 澤 相 형의 雪 山 형을 보내는 輓 章 이외다. 古 下 先 生! 雪 山 형의 참변으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의 탑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우리 민족진영의 통일이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다시 쌓아야 하겠습니다. 雪 山 형의 참변, 信 仰 塔 의 崩 壞! 이것이 민족적 최대불행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수인들은 38시간만에 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었습니다. 범인 朴 光 玉 은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백였습니다. 범 인 체포후에 그 사진이 신문에 났습니다. 세인은 의아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추후에 國 民 會 議 관 계자 10여명이 그 사건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이어서 國 民 會 議 議 長 이고 韓 國 獨 立 黨 副 委 員 長 이 고 臨 政 外 交 部 長 인 趙 素 昻 씨 臨 政 宣 傳 部 長 인 嚴 恒 燮 씨의 양씨가 경찰문초중이라는 신문기사가 발표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인은 단안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 事 件 은 좌익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 우익에서 행한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에는 이것을 부정할 근거가 없습니다. 이래서 우리의 信 仰 의 塔 은 무너진 것이외다. 古 下 先 生! 놀라지 마십시오! 선생이 遇 害 하신 이틀 뒤에 나는 韓 國 民 主 黨 2층에서 모씨에게서
114 이번 일은 임정 가까운 측에서 한 것인데 미구에 李 博 士 도 해댈 작정이라고 한다 는 말을 들었 삽나이다. 그러나 나는 期 然, 期 然, 豈 其 然 乎 하고 모략인 줄 알았던 것이외다. 그후에 선생 가해 범인 韓 賢 宇 의 입에서 某 某 氏 의 이름이 나왔다고 하였으나 역시 모략으로 알았던 것이외다. 그리 하였더니 금번 雪 山 사건을 보니 선생사건에 대한 의심도 새로 난다고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中 國 國 民 黨 은 宋 敎 人 을 잃었지마는 더 커졌습니다. 韓 國 民 主 黨 에서는 首 席 總 務 이신 선생과 政 治 部 長 인 雪 山 張 德 秀 형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층 더 노력하여서 당을 더 공고하게 하여 서 국가와 민족에 盡 誠 할 결심을 더욱 굳게하는 터입니다. 古 下 先 生! 나는 지금까지 여러번 선생을 추모하는 글을 썼습니다. 死 者 를 추모하려니 자연히 어 조도 슬퍼집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선생을 추모하는 글을 쓰지 않고 우리 건설을 위해서 붓을 잡겠습니다. (5) 大 法 官 에게 보내는 抗 議 - 宋 鎭 禹 氏 殺 害 犯 判 決 에 관련하야 - <동아일보> ( ) 서기 1947년 2월 14일 대법원에서 宋 鎭 禹 씨 살해범에 대한 상고심 판결이 있었는데 재판장은 대법관 李 相 基 씨였다. 제1심에서 무기징역의 선고를 받은 주범 韓 賢 宇 劉 根 培 양인에 대하야 각 각 15년과 5년(단기) 내지 10년(장기) 징역의 판결의 언도가 있었다. 나는 이 판결에 대하야 엄중히 대법관 李 相 基 씨에게 항의하는 바이다. 사건의 판결전에 그를 논의하는 것은 재판에 간섭한다는 비난을 받겠지마는 판결후에 그에 대 한 비평을 행하는 것은 吾 人 의 言 論 의 自 由 의 범위내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미리 말하여 둔다. 본건을 법률적 관점으로 볼 때에 대법관의 행한 판결이니 거기 대한 이유는 무엇이든지 있은 줄 안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하여서는 나는 원심에서 검사로부터 사형의 구형이 있었는데 무기징 역의 판결이 있었고 검사측으로부터 그것이 부족하다고 하야 대법원에 상고하야 다시 사형을 구 형하였다는 것을 지적하여 두고저 한다. 물론 상고심에서는 원심의 판결을 수정할 수 있는 것이 지마는 그들의 소위 법률론이라는 것도 그다지 확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법관이 이 판결을 정당하다고 주장하면 나는 그 반대를 주장하더라도 조리상 용허될 줄 안다. 그러나 본건을 정치적, 사회적 관점으로 볼 때에는 극악졸렬한 판결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 는 것이니 이 점에 있어서 대법관은 통절한 책임을 느끼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宋 鎭 禹 씨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존재이었던가는 만인이 공지하는 바이다. 포학한 일제시대에 獨 也 靑 의 苦 節 을 지켜왔으며 8 15해방후에도 민족국가를 위하야 石 傾 天 地 를 한손으로 붙잡은 감 이 있던 위대한 존재이었다. 支 柱 中 流, 百 世 淸 風, 이것은 宋 鎭 禹 씨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할 것이다. 左 右 側 을 물론하고 그 거대한 존재에 대하여는 경의를 표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처지이었다. 建 國 準 備 委 員 會 에 대항하야 國 民 大 會 準 備 會 를 만들고 人 民 共 和 國 을 격파하기 위하야 韓 國 民 主 黨 을 이 끌고 분전한 그 자취는 건국도상의 일대장관이었다. 그러므로 암살을 감행한 韓 賢 宇 劉 根 培 그 自 身 들도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死 를 각오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와같이 흐지부지하고 말 어버린다는 것은 범인 자신들도 도리어 의외로 생각하는 바일 것이다. 일제시대에 부장판사로 있어 온실의 화초와 같이 곱게곱게 자라난 李 大 法 官 의 일인 고로 일본 의 선례를 들어서 내게 항변할 구실을 만들는지도 알 수 없다. 原 敬 사건을 말하고 濱 口 사건을 말 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대하여 齋 藤 을 저격하려다가 그의 털끝 하나도 범치 못 하고 사형을 받은 姜 宇 奎 의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더군다나 劉 根 培 에게 대하여 5년(단 기)의 경형을 판정한 것은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마는 그는 宋 鎭 禹 씨를 호위하고 있었다는 점
115 으로 보아서 李 大 法 官 의 도덕적 표준이 아니고 우리네 도덕적 표준으로 한다면 가중할 필요를 인 정하였으면 인정하였지 경감할 이유는 발견하지 못할 줄로 안다. 死 者 不 可 復 生 이라 한번 죽은 宋 鎭 禹 씨를 다시 살려내는 수는 없겠지마는 이와같은 중대한 사건 을 잘 규명하야 사회를 진정시키는 것이 필요할 터인데 韓 賢 宇 가 옥중에서 李 某 에게 친서를 보내 서 全 某 와의 관련관계를 말하고 검사측에서는 그것이 그 필적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여 재 판을 연기하여 신중 심리하기를 요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급속처리하여 버렸다는 것은 도저히 이 해할 수 없는 편파적 행동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불유쾌하기 짝이 없다 는 것은 내 한사람만의 감상이 아닐 줄로 생각되는 바로서 이 사건에 관하여서 언제든지 다시 철저히 심리될 날이 있어야 할 것을 나는 절실히 느끼는 바이다. 최근의 소식에 의하면 북에서는 남으로 암살대를 자꾸자꾸 보내는데 2, 3년 징역만 하면 나올 터이니 염려말고 단행하라 고 격려하여서 보낸다고 한다. 作 俑 者 는 누구인고? 李 相 基 대법관이라 고 나는 말하려고 한다. 우리 민족의 최고영도자 李 承 晩 박사를 저격하고 치안의 최고책임자인 警 務 部 長 趙 炳 玉 씨, 首 都 警 察 廳 長 張 澤 相 씨에게 수류탄을 던진 범인들도 大 法 官 은 다 흐지부지로 말아버려야 할 것이 아닌가? 彈 雨 下 에서 친히 진두지휘를 행하야 수도의 치안을 확보함으로써 남 조선 전체의 치안을 유지하게 하고 群 議 를 배제하고 쌀 한가마니 이하 자유반입을 허가하야 경성 시민을 기아에서 구제하여낸 것이 張 澤 相 씨가 아니였는가. 李 大 法 官 이 배부르고 발뻗고 잠자는 것이 뉘 덕인 줄 아는가. 민족 국가를 해독하는 이러한 판결을 감행한 李 大 法 官 자신은 井 蛙 의 見 이 아니고 大 鵬 의 見 이며 雕 虫 의 小 技 가 아니고 猛 虎 의 大 技 라고 자부할는지 알 수 없지마는 수양을 더하여 대법전서만 떠들어 보지말고 世 間 을 더 잘 알 필요가 있다. 나도 법률에 과히 무 식하지 않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야 대법관들도 잘 아는 일본의 형법학자 牧 野 씨에게서 들은 말 하나를 여기 附 記 하려고 한다. Weltfremdheit( 世 間 忘 却 性 )? 이것은 독일의 법학가들이 세간의 실 정을 모르고 법률의 관념적 유희만 하고 있는 것을 조소한 말이었다. 나는 지금 이 말을 李 大 法 官 과 그 동료들에게 보낸다. 듣건데 李 大 法 官 은 근일중에 미국 시찰의 장도에 오른다 하니 견식을 넓혀 가지고 와서 우리 실정을 잘 아는 법률가가 되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는 것을 一 言 하여 둔다. (6) 古 下 宋 鎭 禹 先 生 을 追 慕 함 - 日 帝 必 亡 論 과 東 亞 日 報 때의 이야기 - < 新 太 陽 > (1957년 12월) 大 策 無 策 의 古 下 古 下 宋 鎭 禹 씨는 전남 담양출신 庚 寅 生 으로 仁 村 金 性 洙 씨보다 한살 위이다. 仁 村 과 함께 동경 유학을 하여 明 治 大 學 法 科 를 졸업하고 病 軀 로 귀국하여 오랫동안 養 病 타가 완치된 후에 中 央 中 學 의 교장으로 靑 年 의 訓 育 에 종사하였고 제1차대전의 말기에 이르러 미국대통령 월슨씨가 제창 한 民 族 自 決 主 義 가 세계약소민족을 진흥케 되자 선생은 동지들과 相 謨 하여 3 1운동을 계책준비하 였고 그 관계로 입옥하였다가 1921년에 출옥하여 東 亞 日 報 社 에 입사하여 文 化 向 上 民 族 啓 發 에 헌신적 노력을 하고 해방후에는 國 民 大 會 準 備 會 를 조직하고 이어 韓 國 民 主 黨 에 가입하여 首 席 總 務 로서 활약하다가 1945년 12월 30일 오전 6시 15분 서울 苑 洞 에서 흉한들에게 피살 서거하셨 다. 내가 古 下 선생으로부터 들은 말중에 가장 인상깊게 남아있는 말은 大 策 無 策 이란 말이다. 8 15해방 후인지 전인지 분명히 기억되지 않으나 어느때 타처에서 만찬을 같이하고 원동댁으로
116 가는 도중에 창덕궁경찰서를 조금 지나 宮 墻 을 지나갈 때에 古 下 는 나를 부르면서 朗 山, 大 策 은 無 策 이요, 아시지요? 하였다. 나는 의미를 즉시 파악하였다. 그래서 나는 대답하기를 네 - 알았습니다 고 하였다. 큰 방침을 한번 정하면 부동하여야 한다는 의미이고 또 큰 방침은 명백한 것으로서 그리 쉽게 변경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大 策 無 策 이란 말은 그 의미를 음미하면 참으로 맛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전번에 어떤 친구가 국무총리가 된다기에 나는 이 말을 적어보낸 일이 있었다. 古 下 는 항일운동에 있어 서나 반공투쟁에 있어서도 大 策 無 策 의 구호를 實 踐 躬 行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古 下 의 입장과 태도를 이 한 말로 표시할 수 있을까? 나는 大 策 無 策 은 그 전략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전술에 있어서는 임기웅변의 책략을 구비하였 다고 본다. 그래서 그 전술적 입장은 臨 事 而 懼 好 謨 而 成 이 여덟자로 표시할 수 있으리라고 생 각된다. 혹은 古 下 의 성질이 호방함을 보고 謀 事 에 疎 漏 한 점이 있을 줄로 생각할는지 알 수 없지만 씨 는 퍽 치밀하고 물샐틈 없는 계획을 세우고 소관 매사에 부지런하기 짝이 없다. 씨가 일생의 힘 을 경주한 것은 東 亞 日 報 경영인데 3 1운동 후에 일어났던 수많은 주식회사가 거의다 쇠퇴하였지 만 그 어려운 압박하에서도 동아일보사는 사업적으로 성공하였던 것이다. 물론 金 性 洙 씨의 절대적인 후원이 중대한 요소가 되었던 것이지만 古 下 의 탁월한 식견과 경영 능력이 신문의 발전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던 것도 부인못할 사실이다. 나는 1925년에 독일유학으로부터 고국에 돌아와서 처음에는 朝 鮮 日 報 社 에 들어갔다가 그 다음 해인가 동아일보사로 옮겨갔었다. 여기서 古 下 의 신문사 경영에 관한 활동태도를 보고 놀랬었다. 편집국으로 영업국으로 아랫층으로 윗층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빈틈없이 활동한다. 동아일보는 광 고까지 한자 빼지 않고 정독한다. 또 博 覽 强 記 에는 누구든지 놀라지 아니할 수 없게 하고 세계정 세에 통달하며 인정의 기미를 잘 살펴 편집에나 영업에 관하여 항상 적절한 지시를 내려준다. 1926년 3월 1일의 3 1운동기념일을 당하여 모스크바 국제농민조합에서는 조선내의 각신문에 축사를 보내왔는데 다른 신문사에서는 조선총독부의 검열관계를 고려하여 어떤 부분은 삭제하고 발표하였는데 동아일보만 그대로 게재하게 되었다. 이 관계로 東 亞 日 報 관계자들이 체형을 받게 되어 古 下 는 영어의 몸이 되게 되었다. 총독부측에서는 직접책임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생각을 가 지고 있었지만 선생은 기어이 명의상의 책임을 자진 부담하여 체형을 받았던 것이다. 受 難 의 2 大 事 件 1936년 8월에 백림 올림픽대회에의 孫 基 禎 선수의 마라톤 우승에 관련하여 일장기 말살사건이 동아일보에 발생되어 신문은 11개월간의 발행정지처분을 당하게 되었지만 古 下 는 총독부의 요구 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동지 白 寬 洙 씨를 사장으로 하는 조건으로 신문의 발행을 다시 계속하게 되 었던 것이다. 그후 소위 日 支 事 件 이 일어나서, 일본제국주의의 최후발악은 동아일보의 존립을 불가능하게 함 으로 발행금지를 승인하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古 下 는 20년 동안 東 亞 日 報 社 를 육성하 여왔다. 파란곡절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지킬 것은 지켜서 민족의 체면을 유지하면서 民 族 의 表 現 機 關 으로 시종하여 온 공적은 古 下 의 불면불휴의 노력이 많이 관여한 바 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1928년의 東 亞 日 報 편집국장 시대에 3차조선공산당사건 즉 세칭 ML당사건에 관련되어 7 년간 서대문형무소에 있다가 1934년 7월에 나와서 다시 동아일보에 관계하게 되어 그 2년후에 孫 基 禎 선수 일장기 말살사건 때에 이르렀다. 내가 재옥중의 동아일보사건으로 두가지 사건을 들
117 수 있다. 하나는 李 忠 武 公 遺 蹟 保 存 會 事 件 이다. 또 하나는 萬 寶 山 事 件 이다. 李 忠 武 公 遺 蹟 保 存 會 事 件 은 1932년 5월 29일부 동아일보 지상에 상세히 보도되었다. 임진왜란에 상실할뻔한 3천리 강토를 건져낸 忠 武 公 李 舜 臣 의 업적을 찬양하자는 것으로서 민족의 얼 을 찾 아내자는 것이었다. 이 사업의 추진에는 동아일보가 특별히 기여한 바 크거니와 古 下 의 노력이 막대하였던 것이다. 萬 寶 山 事 件 은 만주 만보산에서 우리 한국인 농부와 중국사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서 우리 동 포가 박해를 당한 까닭에 조선내에서 군중운동이 일어나서 다수의 중국사람을 살해함으로부터 야 기된 사건이다. 그 당시에 朝 鮮 日 報 에서는 이 사건을 호외로 보도하고 대대적으로 선동선전하였다. 그리하여 全 北 參 禮 에서 호떡장수 중국인 1명을 살해함으로부터 점차 조선각지에 파급하게 되었 다. 그때에 평양에서만 중국인 2백여명이 살해되는 대불양사가 야기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古 下 는 동아일보에 침묵을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흥분된 군중들은 동아일보가 중국인에 게 매수되었다고 비난하고 투석까지 하여 동아일보의 유리창을 깨뜨리기까지 하였다. 당시 부산 동아일보지국장 강씨는 서울로 장거리 전화를 걸어서 古 下 에게 힐문하고 침묵을 지 키는 데 대하여 엄중히 항변하였다. 그랬더니 그저 덮어놓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강씨는 서울로 와서 古 下 를 만났더니 사리를 순순히 설명하여 줌으로 납득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고 한다. 古 下 는 이 萬 寶 山 사건에 관하여 며칠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중국인을 박해하는 군중을 暴 徒 亂 民 이라고 지칭하여 양민족간의 고유의 친선관계를 지적하고 무모한 만행을 즉시 정지할 것을 요 청하고 1면으로는 중국영사관을 방문하여 박해당한 중국인들을 위문하고 구호기관을 조직하여 이 재민의 구호에 착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齊 藤 총독이 다시 조선에 내도함에 古 下 는 그에게 엄중담 판하여 중국인 박해운동을 즉각에 정지케 하였다. 내가 감옥에서 나온 후에 古 下 는 당시의 일을 회고하면서 내게 말씀하기를 그때에 조선사람들이 감히 일본사람 상점의 유리창 하나를 부수지 못하는 때가 아니겠오? 그 런데 조선사람들이 다수의 중국사람을 살해하여도 일본경찰이 간섭하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있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오? 이런 사리를 판단하지 못하고 움직인다는 것은 참 딱한 일이 아니겠소? 뒤에 들은 바이지만 일본군부에서는 이 운동을 일으켜서 韓 中 양민족간에 충돌 을 조장하여 한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만주에 출병하려고 한 것이었다고 하오! 라고 하였다. 나는 얼마전에도 현 平 安 北 道 知 事 白 永 燁 씨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萬 寶 山 事 件 때에 내가 山 東 省 에 있었는데 그때에 중국인들이 퍽 흥분하여 우리 한인들에게 보 복적 조치를 취하려고 하는 기색도 보였다. 그러나 東 亞 日 報 사설을 번역하여 그들에게 갔다 주고 중국사람들을 진정시킨 일이 있었다 고 하였다. 그래서 중국 蔣 介 石 총통도 古 下 에게 대하여 퍽 고맙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민족적 과오가 무한히 확대될 것을 古 下 宋 鎭 禹 씨가 방지하였다고 대서특필 할 만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春 秋 筆 法 으로 보아서도 타당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바이다. 나는 전술한 바와 같이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 일장기말살사건에 관련하여 동아일보사를 그 만두고 경원선 全 谷 역에 가서 海 東 興 業 農 場 을 관리하게 되었다. 日 本 必 亡 論 1937년부터 1945년 解 放 되는 해까지 나는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118 9년간의 긴 세월이었던 것이다. 그때에 한정거장을 철원쪽으로 가면 연천에 어떤 동무가 있고 서울서 떠나서 경원선쪽으로 한 정거장을 오면 倉 洞 에는 古 下 의 養 嗣 子 宋 英 洙 군이 있고 또 街 人 金 炳 魯 씨가 있었다. 나는 9년간 全 谷 에서 連 川 으로 서울로 倉 洞 으로 개미 체바퀴 돌 듯이 내왕하 고 있었다. 古 下 도 내왕의 범위가 대개 그와같이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全 谷 은 참 山 明 水 麗 한 곳이다. 내가 관리하던 농장은 면적이 약 60만평 되는데 양수기를 놓아 서 금강산 전기를 끌어다가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의 지류 장진천에서 양수하여 개간하는 논이 다. 보성전문학교에 귀속되게 되어 있었던 것인고로 학교 관계자들이 관리하는 것이고 지배인격 으로 농장에 주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전곡에 있던 9년 동안에 가장 많이 만난 분은 古 下 와 仁 村 두분이었다. 古 下 는 전곡으로 오시기를 좋아하시고 나도 서울 오면 古 下 댁에 유숙하는 것이 통례이었다. 그 동안에 소위 日 支 사변을 거쳐 소위 大 東 亞 戰 爭 이 벌어져 미 일간의 충돌이 일어나고 전국은 결말 을 지었던 것이다. 南 陽 草 堂 에 누워서 諸 葛 孔 明 은 草 堂 春 睡 足 窓 外 日 遲 遲 大 夢 誰 先 覺 平 生 自 我 知 라고 읊었다. 내가 京 城 高 等 普 通 學 校 를 졸업하던 20세 되던 해라고 생각되는데 그때에 내 평생을 점쳐본 일 이 있다. 거기서 大 鵬 時 歛 翮, 山 谷 養 眞 性, 一 日 因 風 起, 飛 搏 九 萬 程 이라는 시구를 얻었다. 그래서 전곡에 와 있을 때에는 그것이 그리 될 운명이라고 생각하였고 서대문 감옥에 7년동안 있을 때는 거기가 역시 산곡인 고로 그리 될 운명이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나는 이 전곡에와 있는 것을 만족히 생각하고 여기선 眞 性 을 길러서 후일의 대비약을 준비한다고 자부하였던 것이다. 古 下 는 나와 世 事 를 의론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철저한 분은 없었을 것이다. 古 下 의 日 本 必 亡 論 은 감정에 서만 유래된 것은 아니었다. 민족적인 큰 감정이 발동되는 때에 모든 것은 그에 호응할려고 할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 만 古 下 의 논리는 그 투철한 세계정세관에서 유래한 것이고 또 심오한 역사철학적 배경을 가졌던 것이다. 古 下 는 말씀하기를 한일합병 당시에 어느 일본명사가 영국 런던에 있었는데 런던 대학 정치학 교수인 한 헝가리 인을 만났었다. 그랬더니 그 교수는 말하기를 한국민족이 너의 일본민족보다 더 문화적으로 진 보된 민족이라는데 그를 일본이 합병한 것은 큰 과오를 범한 것이다. 문화민족인 한국민족은 전력을 다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터이니 백방으로 일본에 반항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조선을 확보하기 위하여 만주에 손을 대야 할 것이니 그러자면 노서아와 충돌해야 할 것이고 만주를 확보하려고 하면 北 支 에 손을 대야 할 것이니 그러자면 미국과 충돌하게 될 것 이다.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그 보복을 30년 후에 받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고 한다. 이와같이 생각하여 古 下 는 진주만이 습격당하고 영국 동양함대가 전멸당할 때에도 조금도 日 本 의 敗 亡 을 의심하지 아니하고 그럴수록 日 本 必 亡 의 이유를 발견하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하였 다. 그 신념이 이러한 고로 동포들이 혹 만주에서 혹은 중국에 가서 무슨 사업이나 경영하려고 하 면 어디까지든지 반대하는 것이었고 조금이라도 일본사람과의 타협은 용허하지 아니하였다. 동아 일보를 경영하는 동안에 일본사람과의 상종도 없지 않았지만 정세가 발전되어 갈수록 일본인과의 관계를 기피하였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古 下 는 한국의 다른 소위 명사들과 판이한 사람이라 말 할 수 있다. 때문에 조선총독부에서 백방으로 古 下 를 끌어내려고 하였어도 일체 불응하였던 것이 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서는 古 下 는 단한번 방송국에 가서 방송을 행한 일이 있었는데 부지런히 일하여 저축을 하라! 는 말뿐이었던 것이다
119 나는 全 谷 에서 각색 화초를 심기에 노력하였다. 더군다나 제2양수장에 심은 코스모스 는 참으 로 훌륭한 것이었다. 우리 집에 심은 쑤세미는 천하일품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알리아며 백일홍 장미화 등 은 참 화려한 것이다. 가을의 홍엽은 금수강산의 이름에 부끄럽지 아니하였다. 물은 맑고 달은 밝고 대기는 청신하였 다. 이런 중에 古 下 는 전곡에 와서 세상사를 의론하기를 즐거워하였다. 전국이 가열하여짐에 일본 사람들은 한국사람의 物 力 외에 人 力 을 적극적으로 동원하기로 하여 徵 用, 徵 兵 에 별별 수단을 다 강구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조선사람들을 달래는 체도 하였다. 그리하여 京 城 日 報 등 총독부 기관지에서는 학병권유강연을 시키기 위하여 명사를 시골에서 동원시켜 마치 남양초당에서 諸 葛 孔 明 이나 모셔오는 듯이 대서특서하고 사진을 게재하여 숭앙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 그에 끌려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은 해방 1년전의 일이었다. 어떤 친구가 古 下 를 그 원동댁으로 방문하고 악수하며 활동하기를 권하는 말끝에 우리 청년들이 학병으로 나가서 죽은 그 피의 값을 받자! 고 하였다. 그러나 古 下 는 그에 응하 지 아니하고 그 친구도 나서지 말라고 만류하였던 것이다. 그랬더니 그는 말하기를 古 下 는 참으로 로맨틱( 虛 浪 )하오. 李 박사가 미국 군함이나 타고 인천항에나 들어올 줄 아오? 하였다. 그랬더니 古 下 는 변색하여 대답하여 말하기를 피는 다른 사람이 흘리고 값은 네가 받는단 말이냐? 하였다. 그날부터 古 下 는 이불을 펴고 드러누워서 문밖에 나오지 않고 해방되기까지 1년 동안이나 계속 하였었다. 古 下 의 信 念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의 참전으로 고전을 거듭해오던 일본의 침략전은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 렀다. 이 기미를 짐작한 나는 신변의 위험을 고려한 끝에 시골보다 서울에서 피신함이 상책이라 는 생각에서 이튿날 아침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하여 며칠동안 이곳저곳으로 은신하였다. 13일에 야 古 下 댁을 찾았다. 古 下 는 그동안 4차례나 총독부측에서 자기에게 뒷일을 담당하라는 교섭이 있었으나 불응하였다고 말하면서 경기도 岡 경찰부장이 나를 만나자고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古 下 는 일본사람의 손에서 정권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거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튿날 나도 生 田 경기도지사를 만나서 장시간 담화하였지만 나역시 宋 씨와 동일한 의견이 라고 대답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鄭 柏 군은 나에게 여운형 宋 鎭 禹 양씨의 합작을 알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古 下 는 그것을 거절하였다. 나는 14일밤에 내일 정오에 日 本 天 皇 의 중대방송이 있다는 말을 듣고 또 다 음날 아침 7시반에 呂 씨가 遠 藤 정무총감을 면회하러 갔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것이 정권이양 에 관한 교섭인줄 알았다. 나는 古 下 댁에서 조반을 먹고 아침 10시경에 계동 張 日 換 군댁에 있는 鄭 栢 군에게 古 下 의 呂 宋 합작에 관한 거절 회답을 전하러 가는 길에 창덕궁경찰서 앞에서 남쪽 으로부터 혼자 탈래탈래 올라오는 呂 運 亨 씨를 만났다. 나는 대번에 遠 藤 정무총감을 만나고 오는 길인 것을 알아챘다. 呂 씨는 평소의 활발한 태도로 내게 악수하고 나서 古 下 는 나오오? 하기에 나는 안나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또 내게 묻기를 그럼 동무는 어떻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기에 나는
120 나도 못나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그는 흥분한 어조로 말하기를 그럼 나혼자 나서겠소. 공산혁명으로 일로매진하겠소! 라고 하였다. 나는 그 뒤에 다시 呂 씨를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呂 씨는 결국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걸어가고 古 下 宋 鎭 禹 씨는 한양으로 오는 길을 걸어서 민주주의의 민족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에 일로매진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길로 鄭 栢 군에게 가서 古 下 의 거절의 회답을 하였다. 鄭 군은 재고를 요구하면서 적어 도 나만이라도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여주기를 요망하였다. 오후 2시경에 鄭 군은 古 下 댁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하여 말하기를 아까 呂 씨를 만나서 확실히 이야기했다니 다시 송씨의 의향은 물어볼 필요도 없소. 다만 동무 의 태도를 묻겠소. 소련군이 곧 경성으로 들어오고 우리가 곧 내각을 조직하겠소. 동무가 후회 하지 않겠소? 한다. 그래서 나는 후회하지 않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古 下 는 미군이 9월 7일에 서울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를 규합하여 國 民 大 會 準 備 會 를 결성하였다. 在 重 慶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를 절대지지할 것과 미군정에 협조할 것의 두 슬로건을 내 걸었다. 9월 16일에는 韓 國 民 主 黨 이 결성되었는데 古 下 는 그당시 首 席 總 務 로 취임하셔서 民 主 建 國 으로 일로매진하다가 12월 30일에 흉한의 탄환에 쓸어지고 만 것이다. 해방후의 일에 관하여는 수차 발표한 바 있는고로 생략하려고 한다. 元 漢 慶 박사는 古 下 의 영결식장에 와서 추모사를 하였는데 미국사람들이 링컨 대통령을 사모하 듯이 한국사람들이 宋 鎭 禹 선생을 날이 갈수록 더욱 생각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나도 그와같이 생각하고 또 그와같이 하고 있다. 32. 古 下 와 秋 汀 < 秋 汀 任 鳳 淳 先 生 小 傳 > (1969) 中 央 學 校 시절 중앙학교는 외국 선교사나 국내 종교단체에서 경영하는 딴 학교와는 성격이 달랐다. 우선 순수한 민족재단으로서 개인의 사재를 희사해서 이루어진 점이 활기와 긍지를 주었다. 딴 학교처럼 까다로운 의식( 儀 式 )으로 구속하지 않았으며 그 학풍이 민족의식에 충일했다. 더욱이 동 경 유학시절 때 규합해온 항일투사의 그룹들이 팀웍을 짠 민족운동의 산실이며 본거지였다. 학생 들도 이 학교를 선택한 동기가 강한 민족의식에서였지만 학교에 들어와서 더욱 굳어지는 풍토였 다. 젊은 교장 고하선생은 숙직실에 기거하면서 낮에는 강의와 교무에 분골쇄신의 정열을 쏟았고 시간이 파하면 일일이 학생집을 직접 방문해서 학생 단합의 조직에 나섰었다. 고하 선생의 사제 제일주의( 師 弟 第 一 主 義 )와 민족일가주의( 民 族 一 家 主 義 )가 바로 그 방법에 실효를 거두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간격이 좁혀지고 뜨겁게 밀착되면서 완전히 민족운동의 전위대로서 정수부대를 편성 해 갔다. 여기서 추정과 고하 선생과의 깊은 관계를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추정은 진작 이런 면에 예비지식이 충분한 학생이다. 그는 배영, 봉명에서 잔뼈가 굵은 학생이다. 조종대 선생이 어 쩌다 상경하면 어김없이 추정을 찾아주곤 하는 사이였다. 두 사람 사이는 사제간이라기보다 연령 을 초월한 우정이었다. 조종대 선생이 오셨다는 기별을 받으면 추정이 달려가기도 했다. 애국자의 마음에 당기던 추정의 인품이니 고하, 인촌 두 스승에게 바로 인정을 받을 수가 있었다. 추정은
121 이곳 동창으로 좋은 선후배의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세속적인 친우( 親 友 )가 아니라 뜻을 같이 한 지기지우( 知 己 之 友 )를 얻었었다. 일년 윗반에 이희승( 李 熙 昇 )씨가 있었고 일년 아랫반에 유홍( 柳 鴻 )씨가 있었다. 인촌, 고하 두 선생과 함께 신명을 걸고 민족전선의 전우가 될 수 있듯이 이분들과도 굳게 서약할 수 있는 맹우 였다. 추정은 거기다 스포츠맨이었다. 정구로 학우들의 인기를 모았었다. 그는 검소한 복장에 성 실했고 신념에 일관한 사나이였다. 배영과 봉명정신에 단련을 받아 중앙정신에도 투철한 학생이 었고 대륙성 기질로 작은 일에 가볍게 움직이지 않았으며 큰 일로 묵직하게 행동하는 스케일이 큰 미장부였다. 그는 언제나 걸음을 느릿느릿 걸었다. 그의 슬로모션한 성격이 걸음걸이에서 여전 히 나타나 보였다.( 中 略 ) 추정은 중학생 모자를 쓰고 다니면서도 장차의 웅지( 雄 志 )를 구상하기에 바빴다. 더구나 고하 선생이 교장의 신분으로 삼백여명의 학생들을 일일이 하숙이나 가정방문하는 숨겨진 의도를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그것은 조직이요 결사( 結 社 )라고 판단했다. 훈육을 명목으로 사상적인 결속과 인간적인 유대를 의리( 義 理 )의 밧줄로 묶어가는 동지규합의 공작이었다. 고하 선생과 추정은 사적으로 마주 앉으면 이심전심( 以 心 傳 心 )으로 무엇인가 기맥이 통한듯 했다. 1918년 겨울. 중앙학교를 거점으로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 윌슨대통령 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民 族 自 決 主 義 )는 이 나라에 한가닥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불면증으로 피 곤해 보인 고하 선생의 얼굴은 늘 굳어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도 딴 학교와의 접촉이 빈번해지면 서 하루하루 긴장과 급박감이 더해만 갔다. 추정은 어느 학생보다도 이 기미를 빨라 알아차렸다. 머리 큰 학생들 사이에는 공개된 비밀로 차츰 그 윤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하 선생은 각계에 손을 뻗혀 빈틈없는 조직력을 강화해 갔 다. 동지 섣달의 혹한에도 시내 각 학교의 학생 대표들은 연일 회합과 연락으로 추위 따위는 아 랑곳이 없었다. 학생연락의 총책은 경성법률전수학교( 京 城 法 專 )에 朱 翼, 세브란스의전( 世 醫 專 )에 이용설( 李 容 卨 ), 경의전( 京 醫 專 )에 한위건( 韓 偉 鍵 ), 경성공고( 京 城 工 高 )에 이종선( 李 鍾 宣 ), 그리고 중 학교 대표로는 중앙에 장기욱( 張 基 郁 ), 보성( 普 城 )에 장채극( 張 彩 極 ), 경신( 儆 新 )에 강우렬( 康 禹 烈 ) 등으로 되어 있었다. 이 조직을 움직이는 총참모의 주역은 뒤에 고하 선생이 맡고 있음을 아는 이는 알고 있었다. 고하 선생은 손병희( 孫 秉 熙 ) 한용운( 韓 龍 雲 ) 선생등 민족대표자 33 人 선정과 이번 거사의 결의 촉구 상호 연락과 회합 알선 등을 면밀한 계획으로 진행해 나갔다. 중앙학교를 본부로 거사 기운 ( 氣 運 )은 바야흐로 예정된 그날을 향하여 무르익어 갔다. 그리고 이때 진작 중앙학교 교사로 봉직 하다 재차 동경유학을 떠난 백관수( 白 寬 洙 )씨의 밀사로 국내에 잠입한 송계백( 宋 繼 伯 )을 통하여 국내외( 國 內 外 )가 호응해서 궐기키로 추진되어 온 것이다. 일이 급진적으로 구체화되기는 고종승하(1919년( 己 未 ) 1월 28일) 직후부터였다. 고종이 승하한 이면에는 일인( 日 人 )들의 흉모로 필시 독살했으리란 혐의가 농후했었다. 드디어 그날은 다가왔다. 고종 국장일로 택한 독립선언의 봉화를 올린 그날 3월 1일의 정오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추정이 중앙학교 4학년 졸업반에 있었던 약관 이십 이세의 일이다. 예정보다 두 시간이 지연된 두시 정각을 기해서 탑골공원에선 산천을 뒤흔드는 독립만세 소리와 함께 빛을 못보던 태극기로 하늘을 덮었다. 학생들은 노도와 같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호응하는 시민들과 합세해서 목이 터져라고 만세를 불렀다. 학생들은 미리 정해준 가두를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흽쓸었다. 한 줄기는 대한 문에서 남대문으로 그리고 의주통( 義 州 通 )을 누비는가 하면 일부는 창덕궁 앞을 홍수와 같이 스쳐
122 가기도 했다. 또 다른 물줄기는 진고개(그 당시 本 町 - 忠 武 路 )로 쏟아져 밀렸었다. 쫓기고 채이고 총과 칼에 맞아 피흘리며 쓰러져도 만세 소리는 더욱 우렁찼다. 추정은 유홍( 柳 鴻 )동지와 함께 진고개 쪽으로 달려가 일인 상점을 닥치는 대로 습격했다. 기마병에게 쫓기면서도 이들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여간해서는 성낼 줄을 모르던 추정도 큰 일에 성질을 내면 맹수와 같이 무서웠다. 공분으로 피가 끓는 그는 겁이 없었다. 그렇 게 느릿느릿 걸어다니던 추정이 어디서 그런 날센 동작이 나올 수 있었는가 곁에 사람이 놀랠 지 경이었다. 이 엄청난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혈안이 된 일본 경찰과 헌병대는 가장 혹독하고 잔인 한 방법으로 탄압했지만 군중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다. 날로 더 파상되어가기만 했 었다. 三 一 운동과 잣골 派 추정은 이희승 유홍씨와 함께 속칭 잣골파에 속해 있었다. 자핫골파( 紫 霞 洞 派 )라는 뜻이다. 3 1 운동의 거친 파도는 방방곡곡으로 거세게 번져만 갔고 기어이 독립을 쟁취하고야 말 기세로 끈덕 지게 들고 있어났다. 거리에서 만세를 부르고 함께 몰린 잣골파는 통의동( 通 義 洞 ) 108번지 세도있 던 이 모( 李 鴻 黙 )씨의 사랑에 숨어 버렸다. 깊숙한 방에는 밤늦도록 20여명의 학생들이 수군대고 있었다. 다만 모의만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은 태극기를 그리기에 바빴고 등사판을 놓고 독립선언문을 복 사하기에 여념이 없기도 하였다. 이들은 출출하면 호떡을 사다 밤참으로 먹어가며 밤을 새기도 했다. 방은 넓어서 그다지 불편이 없었다. 이 집에는 한인( 韓 人 ) 순사가 경비원으로 있어서 오히려 경찰의 눈을 속일 유리한 조건도 있었다. 주인은 유홍씨의 대고모부가 되었다. 여기 모인 학생들 을 통솔한 대표격은 이희승, 임봉순, 유홍이었다. 이 세사람은 상부에서 내린 지령을 하부로 전달 하는 전령과 동원 그리고 조계사( 曹 溪 寺 )에서 찍어낸 독립신문을 비밀리에 배부하는 전위대였다. 혹시 어느 한 사람이 경찰에 발각되면 전책임을 혼자서 감당하고 조직의 전모나 계획을 사전에 누설않는다는 굳은 신조로서 활동했다. 잡히면 일체 함구하기로 각오가 서 있었다. 이들은 등사판 이 없어서 인촌 선생의 계씨 김연수( 金 秊 洙 )씨가 창설한지 얼마 안되는 경성직유( 京 城 織 紐 )에서 훔쳐다 복사의 임무를 다했었다. 이 등사판을 이희승이 훔쳐온 것이다. 또 추정도 고향 회천면사 무소에서 가져온 일도 있다. 그러나 이 잣골파의 숨은 투쟁처도 그다지 오래 가지는 못했다. 하도 많은 학생들이 출입을 하 니까 혈안이 되어 수색에 나섰던 일본 경찰의 눈을 언제까지 피할 곳은 아니었다. 어느 날은 추 정이 밖에 나갔다가 대문밖에서 용변을 보다가 힐끔 안을 보니 형사들이 와서 조사를 하고 있었 다. 어찌할까? 당황한 그는 재빨리 옆에 서있는 오동나무에 올라가 큰 입새 사이에 숨어서 방안 기색을 살피면서 안전하게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날 잣골파는 각자 분산하기로 결의했다. 3 1운동 의 봉화를 올린지 여러 주일이 지난 후였다. 뿔뿔이 헤어진 동지들과 손을 나누고 이 집에서 나 온 추정은 갈 곳이 막연하였다. 익선동( 益 善 洞 )집에 가면 당장 잡힐 몸이다. 궁리 끝에 그는 동묘 ( 東 廟 )앞 전농동( 典 農 洞 ) 141번지의 집을 찾았다. 그곳은 무관으로 일등 주계( 主 計 )의 벼슬을 지냈 던 임형준( 任 炯 準 )씨 댁이었다. 이분은 추정의 대부 항렬이 되는 분이다. 그래서 향관( 鄕 官 ) 할아 버지 댁이라 불러온 집안이다. 추정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임형준씨 내외는 무척 반가워 하면서도 주위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추정은 이댁 뒷방에 숨어 바깥 정세를 관망했다. 이 집 노부부는 추정이 기거하는 방의 담장이 너무 얕아서 늘 그걸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동안 중앙학교는 고하 선생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당한 뒤라서 그 자리를 이어 인촌선생이 교장직에 취임했었다. 추정에게는 졸업장도 간접적으로 수여되어 왔다. 이해에 졸업할 예정이던
123 추정이니 당연한 처사였다. 추정이 여기 숨어있는 몇 달동안 외부공기를 접하지 못하여 더운 여 름날 얼굴은 파리했고 올백을 한 머리는 치렁치렁 땋아 내린만큼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검 거선풍이 심한 거리를 나설 수도 없고 감옥아닌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어느날 갑갑한 마음에 친구의 하숙을 찾았더니 마침 외출하고 없었다. 책상위에 고향서 온 편 지 한장을 뒤적거리고 있노라니 미행하던 형사가 들이닥쳤다. 네가 누구냐? 고 묻는 형사에게 태연히 조금전 편지봉투에서 본 이름과 주소를 댔다. 머리를 기웃하다가 가자! 하며 대문밖에 나가더니 벼락같은 큰 소리로 이름이 뭐야! 하는 통에 까딱 실수할 뻔 했으나 이내 정신을 바로 차리고 아까 봉투에 적힌 이름을 댔더니 들어가! 하고 가 버렸다. 그러던 추정이 하루는 일경에게 덜컥 붙잡히고 말았다. 이곳에 숨어 있은지 5개월은 추정에게 너무도 무덥고 지루한 나날이었다. 시일이 가자 다소 긴장도 풀렸고 흩어진 동지들의 소식도 궁 금했던 그는 잠깐 밖에 나갔다가 집요하게 그를 찾아다니던 경찰에게 체포된 것이다.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된 그는 혹독한 매질을 당하면서도 끝내 그 굳센 의지로 버티어 나갔다. 모진 고문을 이겨낸다는 것은 첫째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중벌을 면하는 결과 도 되는 것이다. 아무리 얽어매어도 자신의 입으로 불지 않으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 中 略 ) 東 亞 日 報 社 를 무대로 젊은 청년중의 호프였던 추정은 무관의 제왕이 되었다. 1926년 10월이었다. 민족운동자의 규합처요 필봉으로 조국독립과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던 동아 일보사( 東 亞 日 報 社 )에서는 그를 사회부 기자로 임명했다. 그는 집회에서 변설로 민중을 움직여 오 다 이제는 붓으로써 민족전선의 투사로 가담한 것이다. 그의 초기 사상이 열렬한 사회주의인 것 은 분명하나 그의 목적이 공산혁명에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민족자결독립에 투철했었다. 여기서 중앙고보 시절의 은사였던 인촌, 고하 두 선생과 재회한 것이다. 재회라는 뜻은 단순히 헤어졌던 인간관계의 결합이나 상봉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사상적인 해후요 동지적인 제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정신과 육신의 완전한 재결속인 셈이다. 제자 때부터 유의해 두었던 추정을 원대한 백년지계를 세운 그분들이 놓칠 리가 만무했다. 여러가지 점으로 이 사제지간의 재회는 필연적인 귀결이었고 공적 의의가 컸었다. 지조있는 인 재의 규합처인 이 기관에서 추정이 필요했겠고 추정 역시 옛 은사에다 민족지도자인 이 두분과 인연을 맺게 됐다는 것은 그의 진면목( 眞 面 目 )을 발휘하는 좋은 계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동아일 보사에는 서울 청년회의 동지였던 박금( 朴 錦 )씨가 한발 앞서 들어와 있었다. 추정이 동아일보에 입사할 당시는 인촌 선생이 사장으로 추대된 직후였고 고하선생은 남강 이 승훈( 南 岡 李 昇 薰 )선생과 고문으로 있으면서 주필을 겸직하고 있었다. 추정이 스물아홉되던 해다. 동아일보가 1920년 4월 1일에 창간했으니까 창간되지 6주년이 넘은 뒤였다. 추정이 입사하던 전해 7월에 현재의 위치 광화문( 光 化 門 ) 139번지 신축 사옥을 착공하고 있었었다. 추정은 셋집으 로 빌려쓰고 있던 화동( 花 洞 ) 138번지의 한식 구옥에서부터 기자생활의 첫 출발을 했었다
124 동아일보는 세인이 주지한 사실로 인촌의 사재( 私 財 )와 그분이 주선한 발기인으로 운영 멤버가 됐지만 인촌, 고하가 중심세력이 된 것이다. 실은 인촌과 고하는 동경 유학시절부터 계획한 사업 의 하나로 손 꼽아왔고 그 시기만을 노렸던 터였었다. 주식회사를 목표로 발족한 이 신문사의 초대 사장에는 박영효( 朴 泳 孝 )씨였었다. 고하는 이무렵 3 1운동의 주동인물로 연좌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이라 옥중에서 동아일보 창간을 맞이한 것이다. 동아일보 사시( 社 是 )는 1.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2.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3.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이 세 가지였다. 동아일보는 처음부터 형극의 길을 걸어온 민족수난사의 동반자였다.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탄 압한 발자취가 바로 동아일보 탄압의 발자취로 점철되어 왔기 까닭이다. 고하가 처음 사장이 된것은 1921년 9월 15일이다. 주식회사 사장으로는 초대였고 나이 32세 때였다. 초창기의 2년동안에 벌써 동아일보는 많은 파란을 겪어 왔었다. 사설에 일본 황실과 신기( 神 器 ) 를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발간하지 1년도 못가서 무기정간을 당한 기구한 사운( 社 運 )이었다. 고하가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 후 추정이 입사할 때까지의 다사다난한 갖가지 사건도 이루 헤아 릴 수가 없었다. 사장에서 고문으로 주필로 또 사장으로 이렇게 무수한 직위의 변천을 거친 것이 다. 고하의 수난이 바로 동아일보사의 수난이었다. 고하는 공적 책임으로 제물이 되어 파란에 따라 부침하면서 동아일보를 굳건히 키워가고 있었다. 친일파 거두인 박춘금( 朴 春 琴 )이 백주에 권총을 차고 사장실에 나타나 고하를 위협했고 인촌과 고하를 다시 식도원( 食 道 園 ) 요리집으로 유인해서 공갈하던 저 유명한 사건이 추정 입사 전 해에 벌어진 사건들이다. 추정은 입사 전에 벌써 이 사건을 소상하게 전해듣고 몸을 떨며 분개했었다. 추정이 입사한지 불과 한 달 후에 고하는 영어( 囹 圄 )의 몸이 되었다. 그것은 쏘비에트 러시아의 국제농민 본부로부터 보내온 메세지의 전문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소위 보안법( 保 安 法 )에 걸린 것 이다. 이해 3월 7일자로 정간되어 한 달 후인 4월에 속간되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순종( 純 宗 )승하 로 인해서 6 10 만세사건을 책모했다는 죄목으로 고하 선생이 또 다시 심리를 받아오다 확정형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동아일보는 계속 윤전기가 돌아갔고 추정도 사회부 민완기자로서 사회의 목탁을 간단 없이 두들겨 왔다. 추정이 입사한지 두달만인 12월 10일엔 완성된 새 사옥으로 옮기어 신문사는 더욱 활기를 띄웠다. 동아에는 쟁쟁한 베테랑급의 명사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추정의 선배사우들로는 홍명희( 洪 命 憙 ) 김준연( 金 俊 淵 ) 이광수( 李 光 洙 ) 주요한( 朱 耀 翰 ) 박찬희( 朴 瓚 熙 ) 박금( 朴 錦 ) 국기열( 鞠 琦 烈 ) 현진건( 玄 鎭 健 ) 양원모( 梁 源 模 ) 제씨가 있었고 비슷한 해에 전후해서 입사한 동료사원으로는 이은상( 李 殷 相 ) 설의식( 薛 義 植 ) 이상범( 李 象 範 ) 서항석( 徐 恒 錫 ) 최형종( 崔 衡 鍾 ) 이길용( 李 吉 用 ) 등 여러분이 있어 친 교를 맺었었고 홍효민( 洪 曉 民 ) 함상훈( 咸 尙 勳 ) 고재욱( 高 在 旭 ) 이무영( 李 無 影 ) 송지영( 宋 志 英 ) 등 몇 분은 추정보다 몇년 혹은 훨씬 후배사원으로 인재동아( 人 材 東 亞 )의 기염을 토했었다. 그후 10년 후배로서 곽복산( 郭 福 山 )씨가 있었으니 추정은 우리나라 언론계에 대 선배급의 서열에 끼어 있다. 추정은 총독부 경무부 출입기자로 활약했었다. 사건 취재차 자주 일본 경찰의 수뇌진과 접촉해 야 될 입장이지만 속으로는 서로 증오하고 경계하고 감시당하는 처지였다. 그것은 개인끼리의 감 정보다는 한 민족과 민족 사이에 얽힌 숙명적인 감정불화였다. 서로 아니꼽고 꺼려하며 탐색하고
125 견제하는 묘한 직업의식과 민족감정이 겹친 상극이었다. 그런 사이면서도 인간 추정에게는 때때로 호의를 보여주던 그들이었다. 추정의 인간됨이 그만 큼 남을 동화시키고 흡수해 들이는 힘이 있었던 것 같다. 딴 사의 기자로서 같이 출입했던 동료 끼리 취재에 경쟁을 하면서도 인화( 人 和 )를 도모했던 것도 그의 원만을 입증하고 있다. 그는 민완 기자라고 해서 행동을 민첩하게 한 것은 아니었다. 몹시 느렸었다. 걸음걸이부터가 느릿느릿했고 성질이 누굴누굴해서 조급하게 신경질을 낸다거나 사소한 일로 성내는 법이 별로 없었다. 그러면 서도 알찬 일은 소리없이 다 해치우는 성실하고 끈질긴 태도였다. 1934년 경의 일이었다고 한다. 매일신보( 每 日 新 報 ) 이상철( 李 相 哲 ) 중앙일보 이홍직( 李 鴻 稙 - 月 南 李 商 在 先 生 의 直 孫 ) 이 셋이서 경무부에 들렀으나 그날따라 별로 기사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모두들 귀사했고 이홍직씨가 남아 있었다. 추정더러 인제 그만 나가자고 권했었다. 추정은 별 대 꾸도 없이 기자실에 앉아 바둑만 두고 있었다. 의례 그런 사람이거니 생각하고 이씨는 총총히 사 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튿날 동아일보에는 독립투사 이동휘( 李 東 輝 ) 선생 체포 라는 제목으로 2단 기사가 실려있지 않은가. 딴 신문에는 전혀 볼 수가 없었던 특종( 特 種 )이었다. 추정이 일본 관리들 의 수상한 움직임에서 미리 눈치를 채었던지 아니면 평소에 원만하고 인상이 좋은 추정에게만 기 밀을 제공했던지 둘 중에 하나였으리라고 한다. 타사의 동료기자들은 의례 서로의 정보를 상통해 오던 불문률이 있어 골탕 먹은 분풀이로 뉴스 소스를 대라고 추궁도 했고 원망도 했지만 추정은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추정은 술이 무량주( 無 量 酒 )였다. 친구가 좋아 술 마시도록 분위기도 되었지만 나라 잃은 그리 고 압제받는 울분들이 자연 술을 마시게 했었다. 대주호( 酒 豪 )라는 별칭을 듣던 현진건씨와 취하도록 마시는 일이 빈번했다. 추정은 원래 대륙성 기질이라 무슨 일이고 시작만 하면 바닥을 보고야 만다. 술자리도 그렇게 항상 긴 편이었다. 두주( 斗 酒 )를 불사하고 마시는 술이지만 절대로 주정하는 법이 없었다. 농담도 곧잘 했지만 남의 험담을 하거나 고성으로 주흥을 깨는 일이 없었다. 그는 인촌, 고하와 두분과도 곧잘 술자리를 같이 했다. 봉순이 우리 약주 한 잔 할까 하면서 인촌이 청해오기도 했다. 사제의 정은 담소에서 무르익었고 국가민족에 대한 근심이나 앞 으로 해야 할 일에 호흡이 맞았었다. 남들이 평하기를 인촌과 추정은 외유내강한 그 성격이 많이 닮았다고들 했었다. 그런지 인촌도 추정을 인간면에서도 퍽 좋아했다. 그는 한 번 인연을 맺으면 끝까지 놓지 않고 한결같이 도와주기를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상대 방의 사람됨이나 사회적 위치를 고려하면서도 은근하게 도와주었다. 여담이지만 해방 후 6 25가 발발하자 옛 후배, 동료선배들이 부산서 어려운 피난살이를 겪어야 했다. 추정인들 넉넉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옛 친구의 어려운 살림을 힘껏 보살펴 주었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던 곽복산씨가 조선운수 사장실로 옛 선배인 추정을 방문했더니 깜짝 반기면서 모 기관에서 곽국 장을 노린다니 주의하라고 걱정해 주었었다. 동아일보는 집권당의 탄압을 받아오던 대표적인 야 당지로서 그 신문의 편집책임자의 신변이 위험한 건 뻔한 일이었다. 그뿐 아니라 한우정씨나 기 타 여러 옛 친구들이 어려운 피난살림이 고되어 추정을 찾아가면 청하기도 전에 도와주곤 했었 다. 혹시라도 그분들의 체면이 손상될까 염려하는 마음에서 비서까지도 모르게 도와주곤 하였었 다. 이런 일이 한두번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몇년을 계속해서 도와주는 그였었다. 그는 인정이 많 으면서도 겉 생색을 몰랐고 진실로 옛 후배나 옛 친구 옛 선배의 곤궁을 구해주는데 인색치 않았 었다. 그가 동아에서 사회부 기자로만 내리 10년을 꾸준히 근속했었다. 그동안 그가 다룬 굵직한 사 건만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고 직접 나서서 그 사건에 관여한 일도 허다하였다. 그는 반일투쟁 이라면 무슨일이고 어느 때든지 서슴없이 나섰던 것이다. 그 당시 동아일보사는 정부( 政 府 ) 아닌
126 민중의 정부였다. 그만큼 민족을 위해서 일했고 그만큼 민중에 미치는 영향에 공신력과 권위가 있었다. 기자생활 자체가 그대로 항일이며 민족운동이며 독립투쟁이지만 신문사 밖의 일로도 민 족의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그는 용감하게 선두에 나서는 정열을 가졌었다. 그 무렵 국내에는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2대조류로 나누어져 항일투쟁에 자못 혼선을 가져 오기도 했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러시아혁명의 여파로 공산주의 사상이 강한 세력으로 침투하고 있어 그것이 집단을 이루어 민족진영과 맞서는 상태가 되었다. 공산주의자의 투쟁목표는 계급혁 명이었다. 그러면서도 국민에게는 항일 투쟁의 인상을 주도록 되어있다. 물론 공산주의자 집단 자 체내에서도 독립투쟁의 한 방편으로 그 운동에 가담한 사람도 적지아니 있기는 했었다. 일경은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속속 검거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누락된 좌익노선을 걸어온 사람 들은 드디어 민족진영과 합작하는 길을 모색하여 민족대동단결의 명분 밑에 단일전선을 펴기에 이르렀다. 민족진영에서도 이를 흔연히 받아들여 뭉쳐진 단체가 신간회( 新 幹 會 )였다. 이 신간회를 실질적으로 통솔해 나가는 인물이 고하( 古 下 ) 가인 김병로( 街 人 金 炳 魯 ) 허헌( 許 憲 ) 등이었다. 내분 이 완전 불식된 건 아니지만 표면상으로나마 국내 항일세력을 하나로 뭉쳐 민족운동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데 공헌이 컸었다. 추정도 이 신간회의 쟁쟁한 중견으로서 일하였다. 추정이 신간회에 있으면서 또는 사회부 기자로서의 활약상은 장진강( 長 津 江 ) 일대의 토지 수용령 반대 투쟁이었다. 신간회가 발족한지 몇달 후에 마침 장진강 일대의 농민들이 궐기하여 총독부 정책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장진강 수력발전소 건립을 위해 그 일대의 농토와 가대( 家 垈 )를 헐값으로 강매( 强 買 )하기 시작하자 이에 불응하고 봉기한 것이다. 신간회에서는 신간회대로 농민투쟁을 돕기 위해 언론계 의 대표로서 신석우( 申 錫 雨 - 朝 鮮 日 報 )사장과 동사 주필 민세 안재홍( 民 世 安 在 鴻 ) 법조계등 제씨 가 사태수습에 나섰으며 동아일보사는 이해 8월부터 한달 동안 전국 수리조합 답사( 踏 査 )로 착취 와 억압당한 농촌실태를 대대적으로 보도케 하였었다. 여기에 김준연( 金 俊 淵 ) 서춘( 徐 椿 ) 박찬희 ( 朴 瓚 熙 ) 국기열( 鞠 琦 烈 )등 여러분과 함께 추정의 취재 활동은 실로 눈부신 바가 있었다. 그는 기 자라는 직업의식에서 보다도 한 민족운동으로서의 사명감에서 이 사건을 취재보도 하는데 힘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錦 湖 結 義 또 하나의 큰 사건으로는 1929년 1월 14일에 벌어진 원산부두 노조의 총파업일 것이다. 이 총 파업이 단행되기 전해에 추정은 박금씨와 더불어 금호결의( 錦 湖 結 義 )라는 비밀결사를 해둔 일이 있었다. 이 금호결의는 1928년 2월 11일(음력)에 있었던 박금씨 회갑잔치에 맺어진 것이었다. 금 호라는 명칭은 박금씨 고향인( 元 山 北 港 에서 더 깊숙이 들어간다) 문천( 文 川 )의 금성( 錦 城 )호수에서 연유된 것이라 한다. 이 금호결의는 千 명으로 하되 그 지도적인 두수( 頭 首 )급 열두명이 겉으로는 의형제를 맺고 제2차 기미운동을 일으키자는 굳은 서약을 한 것이다. 이 12인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최경식( 崔 境 植 ) 김두산( 金 頭 山 ) 박금( 朴 錦 ) 임봉순( 任 鳳 淳 ) 차주상( 車 周 相 ) 이재갑( 李 載 甲 ) 김동철 ( 金 東 轍 ) 최등만( 崔 等 萬 ) 이항발( 李 恒 發 ) 한기수( 韓 琦 洙 ) 김대욱( 金 大 旭 ) 강반( 姜 反 ) 이상이었다. 이 12총사의 총무는 박금씨가 맡고 사상지도에는 추정과 북간도에서 공산운동을 해오던 김두산이 맡 기로 했으며 조직담당에 차주상이었다. 원산 부두노조의 총파업이 이 멤버의 주동으로 단행된 것은 야마나시( 山 梨 ) 총독이 새로 부임한 다음 해가 되고 금호결의를 한 다음 해가 된다. 총파업의 슬로건은 일제( 日 製 ) 상품을 일체 보이코트하자는 내용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 의 주권을 강탈한 후 경제적 잠식( 蠶 蝕 )을 강행하는 악랄하고 교활한 수법을 써오고 있어 이를 결 사적으로 저지하려는 투쟁이었다
127 독립의 3대요소인 정치 경제 문화의 세 부분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일본제국주의의 흉계를 분쇄 하는 운동이었다. 일본 화물선이 산더미처럼 싣고 들어오는 물품을 몰아내기 위해서 일본물품 쓰지 말자! 라는 구호를 외치며 장장 백일에 걸친 이 투쟁에 동원된 인원은 연 1만 5천명이었다. 元 山 埠 頭 勞 組 의 罷 業 원산부두 노조에서 전단을 끊자 문평( 文 平 ) 라이징구 석유회사 종업원 5천명도 즉시 호응했고 노조와 같이 번져가는 파업의 물결은 부산 군산 청진 진남포의 각 주요항구의 부두노조를 휩쓸었 다. 이에 당황한 경찰은 총칼로 억눌렀으며 검거 투옥 선풍이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일본 아사 히( 朝 日 )신문사에서도 마쓰다히라( 松 平 )라는 특파원을 급파시켜 진상을 보도케 했으나 그자도 노 동자의 주장에 동정적인 기사로써 칭찬까지 표시했다. 날품을 팔던 노동자의 생활에 석달열흘을 임금을 못받고 싸웠으니 아무리 투쟁이 강한들 당장 생활의 궁핍을 견디기 어려웠다. 이 딱한 정 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촌 고하 두분이 숙의 끝에 만주 좁쌀을 사들여 후원하였으며 법조계에서는 김병로 김용무( 金 用 茂 ) 김태영( 金 泰 榮 ) 제씨가 달려가 법정투쟁으로 구금된 노동자 석방에 필사적 인 활동을 했었다. 이 파업이야말로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거사였다. 그 규모에 있어 세계적인 파 업에 비등할 만큼 대대적인 것이었다. 이것을 전기 금호결의 12용사가 주동자적 역할을 해왔었다. 그 당시 원산 특파원으로 가 있던 박금씨는 추정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노조투쟁에 적극적인 참획을 해 왔다. 생명을 걸고 싸운 이 노조투쟁은 공산주의 수법을 빌린 일대 민족항쟁이었다. 비 록 정치적으로는 실운( 失 運 )을 했지만 우리나라를 일제 상품의 시장화를 꾀하는 식민지 정책을 물 리쳐 자립경제의 기틀을 확고히 지키려는 레지스탕스 운동이었다. 여기에 그 당시 정세로는 우파 좌파가 없었다. 일제히 총 공세로 결속했던 것이다. 이 원산 부두노조 총파업이 일어나기 전에도 추정은 많은 일을 했었다. 1928년 4월은 동아일보사의 8주년 돐맞이였다. 이때 동아일보사에서는 8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서 전국적인 문맹퇴치( 文 盲 退 治 )운동을 전개키로 했었다. 이 운동의 기안 ( 起 案 )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가 추정이었다. 추정은 브 나로도(Vnarod) 운동으로 조선의 무지몽매를 퇴치하자고 주장했다. 민중 속에 파고 들어가 우매한 농촌의 눈을 뜨게 하자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불허로 사고( 社 告 )로 까지 공개한 이 사업은 좌절되고 만 것이다. 이 운동을 크게 해보려던 고하의 실망도 컸겠지만 추정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비범한 민족지도자인 고하의 넓은 도량과 용기의 뒷받침을 얻어 모처럼 계획한 사업이 강압은 당했으나 항상 옛 스승이자 동지였던 고하의 좋은 참모요 조언자로 일해 왔었다. 이 운동이 비록 중단은 되었지만 추정에게는 이 해가 인생 일대의 경사가 있던 해이기도 했다. 즉 이 해 4월 초8일(음력)은 그가 설흔둘이라는 노총각의 생활을 청산하고 동지요 실천 여학교 교원으로 있던 황신덕( 黃 信 德 )씨와의 결혼날이었다. 황여사의 고향은 이북이기 때문에 남남북녀 ( 南 男 北 女 )의 부러운 표본이라고 주위의 선망을 모았었다. 그날 동아일보 회의실에서는 고하선생의 주례로 조촐한 혼례식이 있었다. 신랑은 모시 두루막 을 입고 신부는 시간이 임박해서야 최은희씨가 빌려온 면사포를 억지로 쓰고 식이 거행되었었다. 힘에 겨운 허례를 싫어했던 두 부부는 지극히 간략하게 식을 마치었다. 번거로운 피로연도 피했 다. 그러나 당일 주례를 맡은 고하선생을 비롯한 몇분에게는 결례해서 안되겠다 싶어 대접한 비 용이 50원 정도이었는데 그것마저도 요릿집에 외상으로 달아두었다고 한다. 군색한 신접살림이라 월급으로 갚아 나갈 길이 없어 몇달후 인촌 선생에게 두 내외가 함께 사정을 했더니 껄껄 웃으며 내어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추정이 결혼한 다음해인 1929년 11월에는 저 유명한 광주학생사건이 발생하여 또 한번 그의
128 피를 들끓게 하였다. 8주년 기념사업으로 문맹퇴치운동은 중단된지 4년만에 다시 재연되기 시작했다. 2천만 동포 가 운데 8할을 점하는 1천 3백만 문맹자를 상대로 전개될 이 운동이야말로 먼 안목으로 볼 때 크나 큰 의의가 있는 사업이었다. 일본 총독 야미니시가 갈렸고 그의 후임 사이또오( 齊 藤 實 )가 또한 갈 리고 우가끼( 宇 垣 )가 부임하자 약간 해이된 무단정치의 틈을 타서 들고나선 것이다. 그것이 1931 년 7월이었다. 젊은 남녀학생들은 너도나도 이 운동에 가담하여 농촌을 가는 대열에 끼기를 자원 했다. 이무렵 각 농촌에 야학당( 夜 學 )이 세워지고 어두운 등잔 밑에서 가갸거겨 를 밤늦도록 배우 게 하며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다면 하는 창가를 소리높이 부르게 한 것도 다 브 나르도운동 의 덕택이었다. 이 운동을 제일 먼저 동아일보사에서 서둘렀고 이 운동을 주창한 중요한 인물이 추정이었건만 1929년에 조선일보사에 기선( 機 先 )을 빼앗겼던 것도 사실이었다. 먼저 착안하고 뒤늦게 실천하게 된 것은 동아일보사의 대내적인 사정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서막을 올리자 그 기세는 대단하였다.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농촌계몽을 자원해 가는 학생들의 대열은 그야말로 장사진을 이룰 형편이었다. 이 운동은 남녀 중학생과 전문학생을 분대 별로 편성해서 방방곡곡의 몽매한 농촌을 순회케 하였다. 1931년 기치를 올렸던 이 브 나로드운동도 4년만에 닻을 내리게 됨에 추정은 허전한 마음을 금 치 못했다. 여기에 특기해 둘 또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 있으니 만보산( 萬 寶 山 ) 사건이다. 1931년 7월 브 나르도운동과 겹치기로 겪어낸 사건이었다. 조선을 유린한 일본은 차츰 그 야욕이 커져서 이번에는 만주( 滿 洲 ) 대륙으로 마수를 뻗쳤다. 만 주침략의 서막으로 이들은 끔찍하게도 만보산 사건을 유발한 것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이해 7월 3일 길림성( 吉 林 省 ) 장춘현( 長 春 縣 ) 만보산 삼성보( 三 城 堡 )에서 수전 ( 水 田 )을 개간하던 한국인과 중국인간에 사소한 충돌을 일으킨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을 과장 선전해서 중국인은 한국인을 집단적으로 습격 폭행을 가해왔다는 것이다. 이 소문이 국내에 전파 되자 국민들은 그대로 이성( 理 性 )을 잃고 말았다. 곳곳에서 화교( 華 僑 )들에 대한 보복이 자행되었 다. 전북 삼례( 參 禮 )와 인천( 仁 川 )에서 화교를 습격 타살한 불상사가 발생했고 전국 각지에 파급했 다. 평양에서는 무려 90여명의 화교가 살해되었다. 국내 각 신문도 일제히 포문을 열어 화교보복 에 대한 선동에 나섰다. 그러나 오직 고하만은 즉흥적인 감정의 표시가 없이 심사숙고 끝에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이번 만보산사건은 일본의 흉칙한 모략이요 음모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한 일간의 이간책을 쓴 것이라고 그 진상을 투시했다. 동아일보의 만보산 사건에 대한 침 묵이 국민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으나 침착한 동아일보는 사태만을 주시해 오다가 드디어 사설로 서 허무한 선전에 속지말고 이성( 理 性 )으로 돌아가라는 요지로 국민의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한편 피해입은 화교 구제회를 결성해서 이 사태의 수습에 만전을 기했던 것이다. 한편 박금( 朴 錦 )씨는 만보산 사건의 진상을 파악키 위해 현지로 특파되었고 추정도 이에 보조를 같이해서 그 진압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고하의 냉철한 판단이 옳다고 여겼다. 국내에서 8만명의 화교에게 피해가 가 면 만보산에 있는 2백명은 물론 전 중국에 흩어져 사는 수백만 우리 동포의 생명은 어찌 되겠는 가? 이것은 필시 침략으로 팽창해가는 일본 군벌이 뿌린 유언비어라고 국민의 설득기사에 팔을 걷고 맹활동을 한 것이다. 천만 다행으로 동아일보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국민은 이성을 되찾았고 만주에서 중국인도 보복행위가 무마되었으며 한 중 양국의 친선이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 이 평정하게 돌아가 중국 장개석( 蔣 介 石 ) 총통은 박금씨에게 한 중 친선회복의 공로자로 표창되었 으며 중산복( 中 山 服 )을 송정( 送 呈 )해 왔다. 이 전달식은 중국 대사관에서 성대히 거행되었으며 이 사실을 추정은 대대적으로 보도하기에 주저치 않았다. 이 만보산사건이 수습된 후 9월에 만주( 滿 洲 )사변이 발발하여 일본의 본색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129 만주사변이 터지면서 동아일보사에서는 설의식( 薛 義 植 ) 서범석( 徐 範 錫 ) 특파원이 만주로 파견되 어 조선인 거류민의 피난문제와 구호대책에 임하도록 하였었다. 여하튼 이 만보산 사건당시에 고하의 혼미한 정세에서 정확하게 내리는 판단력과 박금 추정은 이를 받들어 언론인으로서 남긴 공적이 무척 컸었다. 그리고 이것은 한 중 양국간에 우호를 맺는 데 지대한 도움이 되어 정치적으로도 크게 이바지되는 일을 했다고 보아진다. 우리나라 임시정부도 제2차 대전중 중국 장정권의 원조를 받게 된 것도 만일 만보산 사건이 끝 내 불행한 사태로 끝났다면 여러모로 곤란했을 것이다. 만보산 사건에 미쳐 발발한 만주사변은 일본 군국주의가 소위 대동아전쟁의 전단( 戰 端 )을 끊은 침략 행위였다. 만주 침략이 조선에도 악 영향을 미치는 건 뻔한 일이었다. 식민지 국가의 탄압은 의례 언론기관에서 나타내기 마련이다. 민족의 지도자가 규합된 곳이요 민족전선의 최첨단인 언론기관을 무슨 형태로든지 압박을 가해 오는건 그들 수단으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추정이 10년동안 사회부 기자로 근속하다가 지방부장이 된 것은 1936년 11월이었다. 그해 8월 1일 독일 백림( 伯 林 )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출전했던 우리 손기정( 孫 基 禎 ) 선수가 마라톤에 一 착 한 것은 조선 남아의 기상과 체력을 세계 만방에 과시한 일대 경사였지만 원통하게도 코리아라는 국적을 떳떳이 못밝힌 민족적 울분이 터지도록 만들었다. 손 선수의 앞가슴에 일본 국기 일장기 ( 日 章 旗 )가 그려져 있으니 신문사에서는 이것이 분했다. 세계를 제압한 마라톤의 영웅 손선수의 사진을 차마 우리 동포앞에 일장기를 그대로 드러내기가 원통하고 서러웠다. 신문사에서는 이 일 장기를 지우기로 몇몇 실무자가 의논하고 기술적으로 말소( 抹 消 )하는데 성공했다. 다행히 일경의 눈이 속아넘어가기를 바랐지만 그들은 신문 검열에 절대로 소홀하지 않았다. 당장 발각이 났고 신문사는 발칵 뒤집혔다. 우선 그들은 몇 관계직원을 문초함과 동시에 보복조치로서 무기정간을 시켰다. 동아일보의 정간은 창간 이후 넷째번이 된다. 신문만 정간이 아니라 자매기관지이던 신동 아( 新 東 亞 )와 신가정( 新 家 庭 )은 아주 폐간을 시켰다. 그것이 8월 25일의 일이었고 총독부는 같은 해 11월 11일부로 고하 송진우 사장이 물러나도록 압력을 가했다. 신문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에서 고하선생은 만부득이 사임을 했으며 거기 따르는 부수조건으로 몇몇 사원의 사퇴까지도 보게 되었다. 즉 당국의 기피로 이길용( 李 吉 用 ) 현진건( 玄 鎭 健 ) 최승만( 崔 承 萬 ) 박찬희( 朴 瓚 熙 ) 등이 물러나야 될 처지였다. 미국에 가 있던 장덕수( 張 德 秀 ) 부사장은 몰론 주필 김준연( 金 俊 淵 ) 편집국장 설의식( 薛 義 植 ) 제씨도 언론계에 머무를 수 없도록 강력한 명령을 내린바 있었다. 박찬희 지방부장의 후임을 추정이 맡은 것이 동아에 입사한 꼭 10년후의 일이다. 손선수 일장 기 말소사건 후의 파동으로부터 생긴 사내 인사조처였다. 추정 마흔 살의 일이다. 송 사장의 뒤를 이어 백관수( 白 寬 洙 )씨가 제7대 사장이 된 것은 다음 해인 1937년( 丁 丑 ) 5월 31일이었다. 어수선한 일장기 말소사건의 여파는 국민의 불안을 더 한층 피부에 느끼게 하였다. 침략전이 차츰 열을 올리자 일본은 조선의 사상감시에 초조한 만큼 모든 면에서 구속과 억압을 전보다 더 심해가고 있었다. 근촌 백관수( 芹 村 白 寬 洙 )사장은 20전후의 청년시절부터 인촌 고하 두 분과는 막역한 친분을 맺었었고 뜻을 같이한 동지였다. 고하가 손 선수 사건의 일장기 말소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갈 당시는 조선총독도 우가끼( 宇 垣 ) 가 갈리고 미나미( 南 次 郞 )가 새로 부임한 직후였다. 같은 군( 軍 )이요 무단정치를 하는 입장은 같았 지만 사명을 맡고 온 임무나 성격이 달랐다. 미나미는 앞으로 있을 전쟁수행에 박차를 가할 인물 로 등장한 것이니 식민지 조선을 억누르는데는 몇곱절 심하게 구는 존재였다. 그는 부임하자 그 달로 동아일보를 무기정간을 시켜 첫 솜씨를 보인 셈이다. 물론 공교롭게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그들에게 구실을 주었다고 하지만 비단 그일이 발생치 않았더라도 언론탄압으로 조선 민족의 눈
130 과 귀를 가리자는 음흉한 정책이 변할리가 없었다. 미나미는 부임한 그해 12월에 조선 사상범 보 호관찰령( 思 想 犯 觀 察 令 )을 내려 그야말로 걸핏하면 예비 구속이니 하여 사상감시와 그 취체를 강 화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듬해인 1937년 백관수 사장이 사무를 인계받은 해였다. 6월에는 수양동우 회( 修 養 同 友 會 ) 사건으로 안창호 선생을 비롯 국내에 있는 독립 지도층의 인물들을 검거하기 시작 했다. 일종의 예비 검속이다. 그들은 비밀결사라는 검거명목을 붙였지만 탄압이며 사상 단속이다. 이 검거선풍이 있었던 다음달인 7월에 예상했던 중 일( 中 日 )전쟁은 터지고야 말았다. 추정은 무엇인가 자신의 피부에 조선이 당해낼 모진 혈풍의 전주곡이 느껴져서 마음이 괴로웠 고 그럴때면 친구끼리 술로 달래었다. 중 일 전쟁이 발발한 다음해인 1938년 2월에는 소위 지원병제( 志 願 兵 制 )가 실시되었다. 추정은 이제 시국은 오는 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에서 앞으로 그가 처신해야 할 마음의 준비 와 긴장해 가면서 붓을 총으로 생각하며 그날 그날의 임무에 충실했었다. 말이 지원병이지 조선 의 건전한 남아들을 일본의 침략행위에 보충하자는 것이요 이것은 미명을 겉치례로 하는 강제 동 원이다. 지원병으로 장정을 전쟁속에 몰아놓더니 이번에는 각 학교에 조선어( 朝 鮮 語 ) 과목을 폐지 하는데 이르렀다. 그 나라의 말과 글을 빼앗는 일은 문화를 말살하는 정책이니 언론기관을 그대 로 두지 않을 것을 추정은 예견하고 최후까지 동아일보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신문사를 의식해결을 위한 직장이라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오로지 민족운동의 의무감 에서 사운( 社 運 )과 진퇴를 같이 하려니 하는 결심뿐이었다. 중 일 전쟁을 시작하여 파죽지세로 그 광활한 땅을 석권했다고 착각한 다음해인 1939년 9월에는 독일 히틀러가 파란( 波 蘭 )을 진격하여 전운은 세계 제2차대전의 확대일로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門 닫는 東 亞 日 報 드디어 일본 제국주의는 그 잔인한 수법으로 동아일보사의 목을 조르는 것이었다. 앞으로 석달 말미를 줄테니 시국에 순응하여 자진 폐간하도록 종용해 왔다. 그것이 1939년 12월의 일이었다. 사내의 간부급 간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들 자기자신에게 자살권고를 내린 듯한 비분을 느꼈 었다. 과묵하기로 이름난 추정도 이날만은 견딜 수가 없어 술집에 들려 쌓인 울분을 토했던 것이 다. 그러나 문을 닫으라고 순순히 닫을 동아일보사가 아니었다. 가는 데까지 밀고 나가자는 뱃장 이었다. 추정은 타고난 대륙성 기질로 거의 무감각한 상태로 지낸 듯했지만 속으로는 무엇인가 검은 그 림자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예감이 들어 전율을 느끼기까지 했다. 이 때, 고하는 사의 고문자격으로 동경( 東 京 )에 건너가 정객들을 만나서 미나미( 南 次 郞 )의 횡포 를 톡톡히 따지고 들었다. 동아일보의 폐간은 부당하다는 항의도 별무효과였다. 그들이 조선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동아일보의 세력인데 그들이 실현시킬 소위 내선일체( 內 鮮 一 體 )와 대동아전 쟁 수행에 큰 암을 미리 제거하자는 방침을 변경할 리가 없었다. 고하는 귀국도중 부산에서 피검 되어 서울로 이송해 왔다. 고하가 일본에서 미나미( 南 次 郞 )를 규탄한 후 총독부는 즉각 동아일보사에 보복으로 앙갚음을 했었다. 그것은 첫 단계로 신문용지를 적게 배급하는 방법이었다. 모든 물자가 결핍하여 배급에 의존했던 형편이라 이것은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벌써 고하가 피검되고 용지를 군색하게 만드는 건 동아일보의 숨통을 끊는 처사라고 추정은 단 정했다. 그러던 차에 동아일보사는 하루아침에 쑥밭이 되고 말았다. 백관수( 白 寬 洙 ) 사장과 임정엽 ( 林 正 燁 ) 상무 그리고 국태일( 鞠 泰 一 ) 영업국장 등을 경리부정( 經 理 不 正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누명 을 씌워 한 그물에 얽어 놓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131 신문사 경영 책임자를 구금해 놓고 일경은 폐간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끝까지 대외적으로는 총 독부의 손에 의해서 문을 닫게 하였다는 구실을 주지 않고 실질적으로 폐쇄시키는 간악한 수단이 었다. 일이 이에 이르자 별 도리가 없었다. 민중과 함께 살아온 정의의 자명고( 自 鳴 鼓 )는 야수 같 은 일제의 칼끝에 찢기고 말았다. 이것이 1940년 8월 10일이었으니 추정의 나이 장년기였던 마흔 셋의 일이었다. 지령( 紙 齡 ) 6119호로써 민중의 참된 벗이었던 동아일보는 일제의 독아( 毒 牙 )에 먹히고 만 셈이 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조선일보( 朝 鮮 日 報 )도 폐간 당한 비운에 있었었다. 국가적으로도 슬프고 애석한 일이었지만 추정 개인에게도 크나큰 충격과 비애를 안겨다준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동아일보사에 입사한지 14년만에 당한 일이었다. 청춘의 황금을 아낌없이 뿌려온 곳이었 다. 온갖 정열을 기울였던 마음의 고향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거늘 기나긴 14년을 춘풍추 우 동아와 수난을 같이 겪어온 그였다.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면서도 그는 입술을 깨물며 스스로 의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다. 동아는 죽고 여기 뭉쳤던 동지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가지만 마 음만은 변치 말자! 이렇게 그는 아픔을 참고 견디었다. 추정은 평소의 교유( 交 遊 )에도 변덕을 무 척 싫어했다. 변덕은 변절이나 배신할 수 있는 소질이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점은 고하에게도 철저했다. 고하는 재주있는 사람을 오히려 크게 쓰지 아니했다. 재승박덕이 라 하여 자기 재주를 누를 줄 모르면 쉽게 변한다 하여 큰 인재로 평가하지 않했었다. 고하나 인촌 두 분이 추정을 특히 가깝게 했던 이유도 변할 줄 모르는 의지의 인이라 하여 가 위 믿을만한 동지로서 간취했던 모양이다. 이것은 고하가 인물을 보는 안목이 남달리 비상했고 추정이 그런 인물로 꼽혀온 건 적중되었다. 인촌이나 고하가 사장실에서 초인종을 울리거나 급사 를 보내 추정을 불러들이는 일이 종종 있었다. 퇴근하면 다시 오게. 우리 한 잔 하세 이렇게 친구처럼 대해오던 사이였었다. 고하나 인촌이 추정과 같이 마시면서 취중에 털어놓은 이야기가 절대로 새지 않겠고 이 다음 무슨 계기로나 한번 맺은 인연을 소홀히 할 위인이 아니라 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놓고 교유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게 추정은 남에게 든든한 믿음을 주는 사나이였다. 중앙일보는 경영난으로 진즉 폐간이 되었지만 자의 아닌 타의로 동아 조선이 문을 닫게 된 후 에도 한글로 찍어낸 신문이 하나 있었으니 이것이 매일신보( 每 日 新 報 )였다. 비록 한글 신문이기는 하나 내용은 총독부의 어용( 御 用 )기관지였었다. 추정이 동아일보사에서 사운과 함께 물러나게 되자 매신은 재빨리 유능한 기자 포섭의 공작에 나섰었다. 몇번이고 추정더러 오라는 유혹을 하였다. 그러나 추정은 남자가 거취를 분명히 해야지 나는 갈 수가 없다 고 딱 잡아떼었다. 그는 동아일보의 폐간과 함께 붓을 꺾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인촌 고하 두분은 물론 친히 지내던 친구들까지도 역시 추정다운 처사 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고 한다. 33. 暮 歲 의 回 顧 - 古 下 宋 鎭 禹 先 生 < 衣 堂 柳 鴻 回 顧 綠 > (1989) 古 下 宋 鎭 禹 先 生 은 내가 18세 때 中 央 學 校 에 入 學 하면서부터 선생이 逝 去 하신 날까지 30년동 안 모셔온 恩 師 이시다. 더욱이 古 下 선생과 仁 村 金 性 洙 선생은 나의 前 途 를 敎 示 해주신 지도자이 며 내 一 生 의 갈 길을 가르쳐주신 師 父 이시다. 내가 여기에서 先 生 이 품으신 큰 뜻이나 선생이
132 지니신 國 家 觀 을 술회한다는 것은 마치 반딧불이 太 陽 을 論 함과 같이 송구함을 금할 수 없다. 그 만큼 先 生 의 大 志 는 筆 舌 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깊고, 넓고, 높다. 先 生 은 嚴 한 듯하시면서도 慈 悲 롭고, 銳 利 한 듯하면서도 多 情 多 感 하여 잘 알기 힘든 인물이었 다. 선생의 일상생활은 순 한식으로 하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으며 지극히 검소하고 소탈했으나 주관이 정립하고 신념이 확고한 민족지도자였다. 또 천성이 강인하고 판단력이 예리하여 아무리 어려운 난관에 부딪쳐도 당황하거나 실망하지 아니했으며, 그 소신을 굽히거나 신념을 꺾지 아니 하여 毁 節 할 줄 모른 탁월한 독립투사요, 애국지사였다. 내가 중앙학교 3학년 시절의 어느날이었다. 修 身 (요즘의 도덕)시간에 헝가리 출신의 정치학자로 영국 런던대학 교수가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다. 한국민족이 일본민족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더 진보된 문화민족이다. 그런데 이를 합병한 것은 불가한 일이며 한민족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20년 내외에 일본은 그 보복을 받을 것이다. 왜 냐하면 한국병합을 유지하려면 만주를 차지하여야 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러시아와 충돌하게 되고, 또 만주를 지키려면 北 中 支 를 도모해야 할 터이니 그렇게 되면 중국과는 물론 미국과 총 돌되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끝없는 膨 脹 野 慾 때문에 30년내에 美 英 등 열강과 정면대결하게 되어 패망할 것 이고 한국의 보복을 받을 것이다 이와같은 말을 인용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을 일깨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선생은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별세하시는 날까지 日 本 必 亡 의 굳은 신념에 변함이 없으셨다. 나는 선생의 이와같은 독립신념의 말씀을 들을 때면 한편 겁이 나면서도 재미있었는데 그러한 선생의 예지와 판단력은 후에 모두 적중했던 것이다. 인촌 김성수선생이나 爲 堂 鄭 寅 普 선생은 고하를 가리켜서 獨 立 狂 이라고 말했듯이 그만큼 고하는 독립신념이 확고하여 그의 모든 언행과 모든 생활을 독립운동으로 歸 着 시켰던 것이다. 고하선생은 1890( 庚 寅 ) 5월 8일, 全 南 潭 陽 郡 古 之 面 巽 谷 里 ( 現 金 城 面 帶 谷 里 )에서 부친 壎 公 과 모친 梁 씨와의 8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아명은 옥윤이요, 애칭은 그 모친의 태몽에 따라 금가지 라 불렀다. 4세부터 한문을 배웠고, 7세 때부터 14세까지는 성리학자며 애국자인 奇 參 衍 선생에게서 수학했 다. 선생은 천성이 총명하고, 관찰력이 예리하며 집념이 강할 뿐만 아니라 凡 事 를 精 察 함이 비범 하여 장차 대성할 인물임을 예견했다. 신문화가 조수처럼 밀려오던 1908(19세) 이미 국운이 기울고 있을 때 구국의 길은 우선 신학문 을 배워야 한다고 판단하고 인촌 김성수 선생과 동반하여 부모님 모르게 渡 日 했다. 일본 동경 정 칙영어학교를 거쳐서 와세다 대학에 들어가 수학중인 1910년 8월, 이른바 한일합방이 발표되었 다. 悲 報 에 접한 선생은 크게 충격을 받고, 침략자인 일본땅에 하루라도 머문다는 것은 치욕이며 수치라고 생각하고 귀국했다. 울분과 적개심이 충만하여 집에 돌아온 선생은 자결과 義 擧 의 갈림 길에서 두문불출했다. 이와같은 선생의 심경을 눈치챈 부모님의 만류로 回 天 大 業 을 이루려면 먼 저 知 彼 知 己 로 적에게서 적을 알아야 한다고 마음을 돌렸다. 그리하여 다시 渡 日, 메이지 ( 明 治 )대 학 법과에 들어갔다. 선생은 동경유학 중 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여 민족단합을 꾀했고, 일본유학생기관지 學 之 光 을 정기 발행하여 애국심 앙양과 국민단결에 기여하는 등 대일투쟁의 기틀을 세운 후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다. 고하보다 1년 앞서 와세다대학을 마치고 귀국한 인촌선생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育 英 事 業 에 뜻을 두고 있었다. 마침 운영난에 빠진 중앙학교를 인수한 바 처음 고하는 學 監 으로 영입되었다 가 곧 교장직을 맡고 중앙학교의 중흥에 힘을 쏟았다. 본시 인촌이나 고하는 확고한 민족주의자 요, 독립주의자였으므로 전교의 선생들도 濟 濟 多 士 가 모였으며 해방후 부각된 각계의 지도자들에
133 서 능히 推 察 할 수 있다. 고하는 평소에도 학생들을 지도할 때 은연중에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排 日 독립사상을 주입하는 한편 유사시에 대처하여 학생들의 연락망을 조직하여 학생동원에 대비했다. 또 수시로 학생들의 가정이나 숙소를 방문하여 불우한 학생을 도와주기도 하고, 인자한 말씀으로 지도함으로써 師 弟 第 一 主 義 로 뭉치고 민족 一 家 主 義 로 단결함에 힘썼다. 내가 기숙하고 있는 通 義 洞 108번지에도 들 르신 바 있다. 선생이 3 1운동을 계획하고, 주동하고, 추진한데 대하여는 전장에서 기술하였기로 생략하거니와 이 거창한 민족항쟁을 계획한다는 것은 고하가 아니고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被 壓 迫 민족으로 서 全 無 後 無 한 3 1독립항쟁은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켰고, 현행 헌법에도 3 1정신을 받들도록 하였음을 오늘의 독립 또한 고하선생의 독립정신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튼 고하가 이 독립운동을 성공하기까지는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이 거사를 민족운 동화하기 위하여 당시의 국내 2대 세력인 기독교와 천도교의 양 교단을 단합하여야 한다고 보고 이에 주력하였으나 뜻과 같이 되지 않으므로 한때는 실의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좌 절하지 않고, 불퇴전의 집념으로 이를 극복하여 성공으로 이끈 것이다. 선생은 일제가 말하는 소위 48인사건(민족대표 33인 외에 古 下, 幾 堂 등 16인-33인중 金 秉 祚 는 상해로 망명-을 합한 48인)으로 1년반여의 옥고를 겪고 1920년 10월 1일 출감하였다. 선생은 곧 고향으로 내려가서 在 獄 中 에 타계하신 모친의 산소에 성묘를 마치고 피로한 심신을 정양하고 있 었다. 3 1의거로 표현된 한민족의 항쟁에 놀란 일제는 무단정치를 지양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하기에 이르렀다. 1919년 9월에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토( 齊 藤 實 )는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통제를 완화 하기로 함에 따라 민간신문의 발행이 허용되었다. 인촌과 고하는 동경 유학시절부터 민족을 대변 할 언론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차라 인촌은 마침내 숙원을 이룰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곧 동아일보의 창간을 추진했다. 천신만고 끝에 1920년 1월 6일자로 발행허가가 나왔고, 4월 1일자 로 창간호를 발행했다(이때 고하는 在 獄 中 이었다).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은 春 皐 朴 泳 孝, 주간은 雪 山 張 德 秀, 편집감독은 石 儂 柳 瑾, 편집국장은 何 夢 李 相 協 씨 등이었고, 사옥은 花 洞 의 전 중앙학교 건물을 썼다. 동아일보의 창간이념은 다음 3 대 主 旨 의 社 是 에서 볼 수 있다. (1)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2)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3)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즉 민족, 민주, 문화의 발현기관으로 출발하였으니 그 길의 험난함은 예측하고도 남음이 있었 다. 그러기에 창간 1년 남짓 사이에 두차례의 筆 禍 事 件 으로 무기정간을 당하는 등 가시밭길을 걸 어야 했다. 고향에서 심신을 요양하고 있던 고하선생은 동아일보사의 요청에 의하여 1921년 9월, 제3대 사 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民 族 紙 를 이끌고 민족과 더불어 형극의 길을 걸어야 했다. 때로는 親 日 走 狗 朴 春 琴 의 권총협박을 받기도 했고, 숱한 필화사건으로 투옥, 정간, 삭제, 발매금지 등 형언 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을 딛고 걸어야 했다. 1925년 6월, 美 洲 하와이에서 개최되는 범 태평양회의에 초청을 받고 민족대표의 일원 겸 동아 일보 특파원 자격으로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고하는 한민족의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고 일제의 침략만행을 규탄했다. 이때 雩 南 李 承 晩 과도 만나서 장차 독립운동에 대하여 협의했다. 이 자리에 서 雩 南 은 고하에게 美 洲 에 남아서 같이 독립운동할 것을 권고했으나 고하는 국내에 남아서 동포 들과 더불어 苦 樂 을 같이하며 투쟁할 것을 천명하고 귀국했다. 1926년 3월에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제농민본부가 보낸 3 1운동 7주년 기념 메시지를 게재하
134 였다가 필화사건으로 6개월간 옥고를 겪었고, 1929년에는 동경에 유학중인 極 熊 崔 承 萬 씨를 통하 여 인도의 독립운동가이며 大 詩 人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詩 빛나는 아시아의 등불 을 받아 게재 함으로써 한민족에 희망을 주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30년에는 충무공유적보존회를 결성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은행에 저당된 位 土 를 찾았고, 현충사의 신축과 한산도 洗 兵 館 개수등 충무공의 유적을 보호하고, 그 얼을 發 揚 함에 힘썼으며, 1931년 10월에는 임진왜란의 영웅 權 慄 도원수의 戰 捷 地 인 행주산성에 기공사를 重 修 함으로써 우리 한민족의 민족정기를 발양하고 또 은연중에 항일의식을 앙양함에 주력하였다. 또 선생은 단군, 세종대황, 이충무공 등 세분의 靈 을 모시는 三 聖 祠 건립에도 뜻을 가지고 있었 다. 이리하여 우리 민족이 崇 仰 하는 표적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이 뜻이 이루어지면 여기서 기념 식, 결혼식 등을 가져도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선생은 이 三 聖 祠 건립의 예정 부지로는 남산을 지목하였으나 후에 일제는 이 자리에 朝 鮮 神 宮 을 세웠다. 선생은 또 브나르도 (V.narod= 民 衆 속에) 운동을 전개하여 농촌계몽과 한글보급의 선봉이 되기 도 했다. 그리하여 近 10만명의 문맹을 퇴치하는 등 민족정신 앙양에도 큰 힘이 되었다. 또 일부 지식인과 언론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상 처음으로 한글 맞춤법(철자법)을 신문에 채용하여 한글 의 통일과 보급에 주력하였다. 그동안 한글학자들 사이에는 유파를 달리하여 서로 논쟁해오던 중 1933년 가을부터 다음해 봄 에 걸쳐서 각파의 논쟁점을 정리한 끝에 당시 조선어학회( 現 한글학회) 안을 채택하기로 하고 신 철자를 수십만매 인쇄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무료배포했다. 따라서 여러 방면의 반대를 물리치고 거금을 들여서 신철자를 鑄 造 하여 신문에 사용함으로써 우수한 우리 한글의 기반을 확립하고 신 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바 있다. 1931년 7월, 萬 寶 山 事 件 이 발생하자 일부 신문의 誤 報 와 악의의 허위선전으로 沸 騰 한 世 論 과 激 昻 된 민심은 일대 과오의 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때 적의 계략에 빠지고 있음을 看 取 한 선생 은 그의 예리한 기지로 일제의 흉계를 분쇄하고 위기에 직면한 在 滿 洲 동포를 구출한 바 있다( 前 述 ). 적지않은 피해를 감수하면서 이 사건을 평온하게 수습한데 대한 사의로 후에 蔣 介 石 主 席 은 親 仁 善 隣 의 銀 牌 와 東 亞 之 光 이라 쓴 簇 子 를 보내온 바 있다.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학생들 의 신사 불참배 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동아일보의 논설 사설을 통하여 옹호함으로써 同 校 교장 미국인 선교사를 크게 鼓 舞 하고 성원한 바 있다. 그는 후일 태평양전쟁시 자국에서 우리 민족을 성원하고, 또 독립이 성취되도록 크게 활동한 바 있다. 1936년 8월, 독일 베를린( 伯 林 )에서 열린 제10회 올림픽경기에서 한국의 孫 基 禎 선수가 마라톤 경기에 출전하여 세계 신기록을 당당히 제1착 골인했다. 孫 선수의 골인사진이 입수되자 체육담당 기자에게 암시하여 孫 선수의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서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무기정간되고, 여러 관련기자들이 투옥되는 등의 고난을 겪었다. 이때 선생은 정간처분의 해제와 구속된 기자들의 석방을 조건부로 사장직에서 사퇴하고 고문직을 맡고 제2선으로 물러났다. 후임에는 芹 村 白 寬 洙 씨가 사장으로 취임했다(일장기 말소사건). 1937년 7월 7일, 세칭 蘆 溝 橋 事 件 을 조작하여 中 日 戰 을 도발한 일제는 일거에 中 原 大 陸 을 석권 하려 했으나 중국민족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여 마치 범의 꼬리를 잡은 격으로 진퇴유곡에 빠졌 다. 이리하여 전쟁이 장기화하자 斷 末 魔 의 일제는 동아일보를 강제폐간할 흉계를 꾸몄다. 비밀결 사, 혹은 경리부정 등 허구의 모함으로 강압하여 1940년 8월 동아일보는 강제로 폐간되었다(이때 조선일보도 함께 폐간되었음). 민족사업이며, 항일투쟁이며 또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되고 투쟁해온 동아일보, 지난 20여 년간 나라 잃은 한민족은 동아일보를 정부로 믿고 의지해 왔다. 그러한 민족의 구심점이 소멸된 것이다
135 1941년 12월 8일,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반년이 못 가서 苦 戰 하기 시작했다. 남방에까지 진출한 일본군은 처처에서 연합군에 섬멸되니 시간이 흐를 수록 敗 色 이 짙어갔다. 전력보충에 혈안이 된 일제는 한국장정을 학병, 징병, 또는 징용으로 强 徵 하여 그들 전선에 투입하는 한편 국내 애국지사들의 협조를 조작하고 또 강요했다. 이때 선생은 나의 눈이요, 귀요, 입인 동아일보가 폐간되었으니 소경이요, 귀머거리요, 벙어리가 된 내가 무엇 으로 어떻게 말을 하겠는가? 하고 그들의 간청을 일축했다. 카이로선언, 얄타협정, 태평양 헌장등 국제정세를 소상히 알고 있는 고하는 일제의 패망이 가까 워옴을 짐작하고 혹 狂 暴 한 그들이 한민족에 위해라도 가하지 않을까 하여 신병을 빙자하고 두문 불출했다. 1945년 8월 10일, 선생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하라다( 原 田 )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일제는 美 英 측에 종전을 제의하고자 한다고 말하고 종전후의 뒷수습을 맡아줄 수 없는지 의향을 알아오라는 하명을 받고 왔다고 했다. 이때 선생은 稱 病 을 이유로 거절했으나 그들은 계속 4차나 교섭해 왔 다. 마지막날 조선군참모 간사끼( 神 崎 ), 경기도지사 이꾸다( 生 田 ), 경기도 경찰부장 오까( 罔 ) 등과 자리를 같이했을 때 선생은 그들이 요청하는 통치권 인수교섭에 대하여 나는 중국의 汪 兆 銘 이나 불란서의 페탕이 될 수 없소 하고 거절했다(제2차 세계대전중 汪 兆 銘 은 일본군의, 페탕은 독일군 의 괴뢰였다). 후일 일부 史 家 나 論 客 中 에서는 고하가 이때 정권인수를 거절했던 까닭에 左 右 翼 의 대립이 격 심해졌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남북분단이 固 着 했다고 비방하기도 했다. 그러나 패자로서의 일본 이 그들 마음대로 정권을 누구에게 줄 권한이 있을 수 없고, 설령 받는다면 그것은 잠정적으로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후(9월)에 인천에 상륙한 미군사령관의 포고에서 증명된 것 이다. 고대하던 감격의 8 15해방은 왔다. 선생은 민족진영을 규합하여 민족대회준비회를 결성하고, 임 정의 환국을 기다릴 때 일제의 요구를 수락한 呂 運 亨 은 그 세력확보에 광분했다. 또 아직 환국하 지도 않은 임정요인의 명의까지 盜 用 하여 소위 인민공화국( 壁 報 內 閣 )이란 虛 構 組 織 을 발표하는 등 초조와 조급으로 빈축을 샀다.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는 민족진영에서는 난립된 정파들이 결집하여 한국민주당을 창건하고 고 하를 중심으로 좌익타도의 기치아래 분연히 일어섰다. 선생은 이 시기에 미군정청에 요청하여 폐 간된지 5년 3개월만에 동아일보를 복간하고 사장직에 취임했다. 같은 해 12월 27일, 莫 府 에서 열린 美 英 蘇 등 三 相 會 議 는 한국의 5개년간 신탁통치안을 결정 발표했다. 아연실색한 국내정계는 혼란이 일었다. 민족진영은 고하를 중심으로 단합하여 대대적인 반탁국민대회를 계획하고 시위준비에 여념이 없던 동 12월 30일 새벽 6시경, 韓 賢 宇 등 6명의 지 각없는 자객으로부터 저격을 받고 長 逝 하니 고하의 춘추는 56세였다. 1946년 1월 5일, 온 국민의 비통속에 장례식이 거행되고, 서울 교외 忘 憂 里 에 幽 宅 을 모셨으나 나는 항상 한적한 곳으로 遷 奉 하고자 고심했다. 1965년 12월 30일, 고하의 20주기 추도식이 신문회관에서 거행되었다. 식이 끝난후 몇몇분과 회식하는 자리에서 移 葬 문제가 구체화되어 곧 고하 송진우선생 遷 葬 推 進 委 員 會 가 구성되었다. 위 원장은 覺 泉 崔 斗 善 씨였고, 나는 총무직을 담당하고 준비에 임했다. 유족 宋 英 洙 (고하의 嗣 子 )군과 상의하고 산소자리를 찾아 여러곳을 답사하여 물색한 끝에 양천구( 舊 영등포구) 新 亭 洞 의 내 所 有 芝 香 山 에 쓸만한 자리를 발견하고 이곳에 확정했다. 1966년 6월까지 천장을 끝내고 새로이 국한문 補 譯 의 비석을 위시하여 부속 石 物 일체를 구비 하여 이해 11월 11일 墓 碑 除 幕 겸 遷 葬 奉 安 式 을 현장에서 거행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르자 서울 인구의 팽창으로 至 近 距 離 까지 인가가 들어오고, 당국의 신시 가지 개발계획 등으로 환경이 번잡하고 불결하여 송구함을 금할 수 없게 했다. 마침 유가족의 요
136 청을 받아들인 당국의 배려로 동작동 국립묘지내 애국지사 묘역으로 다시 천묘하게 되었다. 海 葦 尹 潽 善 씨를 遷 墓 葬 儀 委 員 長 으로 추대하고 나는 부위원장직을 맡고 1988년 5월 3일 선생의 천묘 장의식을 거행하고 천묘를 마쳤다. 이보다 앞서 선생의 고매하신 애국의지와 투철한 민족정신을 후세에 기리 전하고 또 배우게 하 고자 1978년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동상건립사업을 추진했다. 동아일보사와 중앙학원 및 각계각 층의 후학으로부터 기금을 도움받아 성동구 구의동 어린이 대공원에 동상을 건립하고 1983년 9 월 23일 제막식을 가진 바 있다. 爲 堂 鄭 寅 普 선생이나 그외 史 家 중에는 고하가 일제의 암흑시대에 불굴의 정신으로 민족을 이 끌고, 민족에게 희망과 빛을 주어 갈길을 밝힌 공로는 壬 亂 時 의 총무공의 공적에 비긴다고 했다. 壬 亂 時 는 무력하나마 뒷일을 보살필 정부가 있었지만 선생은 오직 민족을 믿고, 민족에 대한 신 념과 사명감으로 일생을 헌신했다. 수없이 많은 어려운 고비에도 고결한 知 德 과 탁월한 판단력으 로 이를 헤쳐나가고, 끊임없는 유혹과 꾐에도 빠지지 않은 독야청청의 일생이었다고 설파했다. 국내의 일부 인사나 해외에서 환국한 일부 인사중에는 국내에서 그만한 일을 하면서 친일을 안 했을 리 없다는 毁 評 도 받은 바도 있다. 그러나 이는 선생을 잘 모르는 말이요, 격하하려는 악의 의 언동이다. 선생은 일본을 알고, 일본인을 알고 있기에 투쟁할 수 있었으며, 민족불멸 일제필망, 獨 立 必 至 의 굳은 신념과 판단력이 확고했기에 萬 古 不 動 의 자세로써 흔들림 없이 민족을 지켜왔던 것이다. 일제침략의 암흑속에서 한 점의 등불이 되어 이 민족의 앞길을 비쳐주시던 선생의 勳 業 은 세월 의 흐름에 따라 더욱 빛날 것이다. 34. 普 專 高 大 35 年 의 回 顧 < 養 虎 記 > 兪 鎭 午 結 緣 崔 容 達 군의 부탁으로 내가 古 下 를 만난 것은 그때 내가 仁 村 과 아주 안면이 없기 때문은 아니 었다. 실은 그보다 8년전 1924년 초가을에 나는 仁 村 을 뵌 적이 있었다. 京 城 日 報 (총독부의 일본어기관지) 사장을 지낸 阿 部 充 家 라는 浪 人 이 있었는데, 1924년 10월경 서울에 온 그는 나와 李 鍾 洙 군을 조선호텔 만찬에 초대하였다. 나와 李 鍾 洙 군은 맥도 모르고 초 대에 응해 갔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阿 部 는 東 京 조선인 유학생들과 항상 접촉을 하며 지내는 사 람이었다. 일본정부의 對 조선인 - 특히 젊은 엘리트에 대한 고등정책을 은근히 맡아보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싶은데, 어쨌든 그는 사상경향의 여하를 가리지 않고 한국유학생 가운데 좀 똑똑한 사람이면 모두 접촉을 가지려 했다. 일본유학생 중의 某 某 하는 사람으로서 그와 접촉이 없는 사 람은 거의 없었다 할 정도였다. 나와 李 鍾 洙 군이 선택된 것은 그해 봄에 창설된 京 城 帝 國 大 學 豫 科 의 文 科 A( 學 部 로 올라가서 法 科 할 사람)에 내가, 文 科 B(진짜 文 科 계통할 사람)에 李 鍾 洙 군이 각각 수석으로 합격하였기 때 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阿 部 씨의 덕택으로 나는 신축된지 얼마 안되는 호화찬란한(그때 나의 눈에는 정말로 그렇게 보 였다) 조선호텔을 처음으로 들어가서, 본 일도 들은 일도 없는 진수성찬 을 처음으로 먹어보고 했
137 는데, 그 자리에서 뜻밖에 仁 村 과 方 台 榮 씨, 그리고 그때 한창 유명하던 소프라노 尹 心 悳 양을 만 났던 것이다. 尹 양은 로비에서 한참 떠들다가 그대로 휙 나가버렸지만, 仁 村 과 方 台 榮 씨는 식탁에 까지 동석한 것으로 보아 우리들 두 학생과 함께 미리 초대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세의 청년인 나는 그날 저녁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지만, 仁 村 을 만난 인상은 그뒤 오래도록 선명하게 내 기억에 남았다. 만나 보니 온후하고 친절한 靑 年 紳 士 였지만( 仁 村 의 나이는 그때 34세 였다는 계산이 된다) 中 央 學 院 의 창설자요,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분으로, 그분의 명성은 우리 사 회에 그때 이미 그만큼 높았던 것이다. 仁 村 과는 그때 그렇게 한번 만난 일이 있을 뿐임에 반해 古 下 宋 鎭 禹 선생과는 자주 접촉이 있 었다. 어떻게 해서 고하를 알게 되었는지는 지금 기억이 없으나 그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 던 春 園 의 발연이 아니었던가 싶다. 春 園 과는 내가 글줄이나 쓴다고 해서 전부터 접촉이 있었으 니 말이다. 고하도 춘원도 나를 몹시 아껴 주었다. 특히 고하는 나를 만나면 으례 꼭 吉 野 作 造 (길야작조라 고 고하는 發 音 했다)를 보는 것 같다 고 했다. 吉 野 作 造 라면 그때 동경제국대학 정치학 교수로서 뿐 아니라 급진적 자유사상가로서 일본의 쟁쟁한 학자 - 사상가였으므로, 고하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어깨가 저절로 올라가는 것같이 느낀 것은 물론이다. 두 분의 부탁으로 나는 대학 3 학년 재학시에 벌써 李 之 輝 라는 펜네임으로 東 亞 日 報 신춘특집에 당시의 이른바 민족단일전선인 신간회를 비판하는 글을 쓴 일도 있었다. 동아일보의 社 是 나 고하, 춘원 두 분의 주의주장과도 어 긋나는 진보적 - 좌익적 입장에서 쓴 글이었으나 두 분은 쾌히 내 글을 신문에 실어주었을 뿐 아 니라 李 之 輝 란 者 가 누구냐고 캐묻는 여러 질문에도 끝끝내 緘 口 로 一 貫 하였다. 고하와는 그렇게 지내던 처지였으므로 그때까지 누구에게 무슨 청탁이라고는 해 본 일 없는 나 였지만 용기를 내서 나는 1932년 2월 어느날 동아일보사 사장실로 그를 찾아갔다. 그것이 내가 보성전문학교와 인연을 맺는 첫 걸음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친구를 추천하기 위해 찾아간 것이니 친구의 훌륭한 사람임을 극구 늘어놓는 것은 당연한 일이 다. 나는 崔 容 達 군의 인품과 학문에 관해 반시간 가량이나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대학입학은 나보 다 1년 늦었지만 사실은 함흥고보 4년 수료시에 중학졸업검정시험을 통과했다는 것, 21단위면 대 학졸업을 할 수 있는데 그는 법학뿐 아니라 정치 경제 철학 문학 등 여러 분야의 각가지 과목을 시간이 닿는 대로 履 修 해서 3년동안에 40여단위를 땄으니, 말은 법학사지만 학위를 한두개 더 가 진 사람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 대학졸업 후에도 부지런히 연구를 계속해서 그때 독일에서 회사 법의 신학설로 등장해 각광을 받던 기업 그 자체 (Unternehmen-an-sich)의 理 論 을 소개는 커녕 정면으로 비판한 논문을 이미 완성해서 東 京 일본대학에서 발간되는 法 律 學 硏 究 에 발표 중이라 는 것 등을 말했다. 고하는 가끔 음, 음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뿐으로 말없이 내얼굴을 건너다 보면서 내 말에 귀 를 기울이는 듯했는데, 내 말이 끝나자 그는 느닷없이 거, 兪 선생 와주면 어떻소? 하고 엉뚱한 제의를 하였다. 너무나 의외의 반응이라 잠깐 머뭇거리다가 나는 助 手 任 期 가 1년 남았으니 아직 급할 것 없 고, 이번에 임기가 끝나는 崔 군 일을 걱정해 달라고 온 것 이라는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고 하는 崔 容 達 군에 관해서는 여전히 可 타 否 타 말이 없이 어쨌든 仁 村 을 한번 만나시오 하였다. 그래서 仁 村 을 만나게 된 것인데,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는 지금 기억이 없으나 仁 村 은 처음 뵙습니다 라는 나의 인사에 우리 전에 한번 만난 일이 있지요. 왜, 그, 조선호텔에서 라 하여 7, 8년 전에 나를 만난 일이 있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전연 예기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날 仁 村 의 말은 普 成 專 門 의 인사는 벌써 대강 내정이 되었지만 내가 普 專 으로 와줄 생각만 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자리를 내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거듭거듭 崔 容 達 군 이야기를 하 였지만 仁 村 은 자꾸 나의 이야기만을 앞세웠다
138 그러나 나 자신의 문제에 관해서도 그때는 고하를 만났을 때와는 달리, 崔 容 達 군 문제만 해결 된다면 나도 함께 普 成 專 門 으로 갈 생각을 굳히고 있었으므로, 나는 普 成 專 門 의 앞날에 관한 仁 村 의 구상을 좀더 따지고 들었다. 京 城 帝 大 조수의 기간이 1년 남았다고는 해도 그 기간이 찬 뒤 의 전망이 밝은 것도 아니므로, 普 成 專 門 으로 감으로써 학자로서의 생활을 계속할 수만 있다면 普 專 으로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명칭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專 門 學 校 敎 員 도 대학교원과 마찬가 지로 교수라 불린다. 그러나 專 門 學 校 의 교수는 여간해서는 학자생활을 하기 어려운 것이, 전문학 교에는 학자를 길러 낼 만한 시설이 없고, 세상도 또 전문학교 교수에게 학자되기를 기대하지 않 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나는 普 成 專 門 을 대학으로 승격시킬 의사를 仁 村 이 정말 가지고 있는 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선결문제였다. 물론 있다 고 인촌은 卽 答 하고, 자기의 뜻도 대학을 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지만, 總 督 府 治 下 에 서 대학은커녕 전문학교 설립도 인가를 얻기 어렵기 때문에 우선 기존하는 普 成 專 門 을 인계받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하고 나는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도서관을 지을 것, 둘째 교수마다 연구실 을 마련해 줄 것, 셋째 연구논문집을 발간할 것의 세가지였다. 이 세가지만 구비되면 명칭은 전문 학교를 면할 수 없더라도 내용상으로는 대학의 실질을 갖출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었다. 즉석에서 인촌은 세가지 조건에 모두 적극 찬성하였다. 인촌이 기부한 五 千 石 秋 收 의 농토가 巨 財 인 것은 틀림없지만(그때 보통 50만원으로 평가되는 재산이었다) 대학을 제대로 경영하려면 최소한 매년 幾 百 萬 圓 의 經 常 費 를 써야 되고, 그러기 위해 서는 기본재산이 인촌이 기부한 재산의 최소한 10배 이상은 되어야 되는데 그러한 문제에 대한 앞으로의 전망은 어떠냐는 질문에 대하여는 인촌은 얼굴을 흐리면서, 그야 그렇지만 우리 형편에 지금 당장 그런 것을 기대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 점은 앞으로 피차 노력해 나가도록 하 자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 자신의 문제는 끝이 났으나 해결되지 않은 것은 정작 崔 容 達 군의 문제였다. 최 군의 이름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서 仁 村 의 마음을 움직이기 힘들 뿐 아니라 나와 최용달군의 문제는 普 專 의 인사 문제가 대강 내정된 뒤에 일어난 것이어서, 사실은 나 하나를 채용하기 위해 서도 仁 村 은 벌써 憲 法, 行 政 法 의 C모씨와 國 際 公 法 의 L 某 씨를 자르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거기다 가 崔 군까지 채용하게 된다면 불가불 이미 內 定 된 人 員 중 몇 사람을 더 잘라야 하는 어려운 문제 까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崔 容 達 군을 추천하기 위해 나섰던 내가 崔 군을 제쳐놓고 내 문제만 해결하고 말 수는 없는 일이므로 나는 그때 일본의 각 대학에서 행해지고 있던 관례와는 좀 다른 理 論 을 내세웠다. 국제공법과 국제사법은 성질상 거리가 멀어서 한 사람이 맡는 것이 이론상 옳지 않고, 더군다나 나는 법철학, 국가학, 형법학 계통의 공부만 해 왔기 때문에 민법, 상법에 정통해야 되는 국제사 법은 담당할 능력도 없으니 국제사법은 崔 군에게 맡겨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의 주장은 이유가 안서는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때의 일반 관행에는 어긋나는 것이었는데, 인촌은 더 묻지 않 고 그러면 그렇게 하자고 나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다. 국제사법을 내놓는 대신 나는 영어 원서강독을 신설해야 될 필요를 역설하고(이 과목은 대학에 서나 두는 것으로서 그때 전문학교로서 이런 과목을 가진 예는 일본에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자 진해서 그 과목을 맡을 것을 건의하여 내 문제는 완전히 끝장을 맺었으나, 여전히 남는 것은 崔 容 達 군의 문제였다. 일주일에 두 시간의 시간강사로는 생활의 방도가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도 곧 해결되었다. 그때까지 普 專 에 나와서 상법강의의 일부분을 맡아 보던 고 등법원(지금의 大 法 院 에 해당)판사 野 村 調 太 郞 씨가 崔 군의 딱한 사정을 듣고 자기가 맡고 있던 시 간을 崔 군에게 移 讓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해 崔 군은 어렵게 일주 6시간의 普 專 시간강사가 된 것 이었다
139 이것으로 나와 普 專 과의 결연은 성립되어 1932년 4월부터 나는 보성전문학교 전임강사로 부임 하게 되었는데 그 예정은 城 大 船 田 亭 二 (후나다 교오지)교수의 호의적인 조언을 내가 받아들임으 로써 일년간 연기되었다. 그때 나는 京 城 帝 大 法 哲 學 硏 究 室 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法 哲 學 의 尾 高 교수가 洋 行 中 인 동안 船 田 교수에게 신분상 감독을 받고 있었는데 船 田 교수는 내 말을 듣고 普 專 으로 가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나 城 大 助 手 의 남은 임기 1년은 旣 得 權 이니 자진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해서, 그의 말을 따라 맡은 時 間 (1주 13시간)은 다하되 普 專 의 전임이 되는 것은 1년 늦추기로 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城 大 硏 究 室 에서 船 田 교수 외 또 한 사람의 교수와 공동으로 레 온 듀기(LéonDuguit)의 憲 法 學 提 要 (Traité de Droit Constitutionel)를 일본어로 번역중에 있었던 관계도 있고 해서 船 田 교수의 조언을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기록상으로는 나는 1년동안 普 專 의 시간강사로 있다가 1933년 4월에 정식으로 專 任 이 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1932년 4월에 專 任 이 된 것이었다. 강의와 보수뿐 아니 라 교수회에 참석하는 등 專 任 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1932년 봄부터 다했으니 말이다 ( 中 略 ) 石 塔 의 氣 象 圖 새 校 舍 를 말한 끝에 한 가지 덧붙여 둘 이야기가 있다. 仁 村 은 새 校 舍 正 面 入 口 양편 기둥에 화강암 호랑이 머리 한 쌍과 뒷문 기둥에 역시 화강석으로 오얏꽃 조각 한 쌍을 만들어 붙였는데 호랑이 머리에 관해 仁 村 은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호랑이가 많다 하지 않느냐, 호랑이는 영특하 고 용맹하고 기품이 있으니 민족의 상징으로 삼을 만도 하지 않느냐 하였다. 오얏꽃에 대해서는 특별히 인촌의 말을 들은 기억이 없으나, 생각컨대 李 花 는 李 朝 王 室 의 紋 章 이었으므로 仁 村 이 무 어 李 氏 王 朝 의 復 歸 를 바랬을 리는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역시 일본의 손에 폐기된 민족의 상 징의 하나로 그것을 새겨 붙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이 李 花 彫 刻 에 관해서는 근래 無 窮 花 라는 說 이 퍼져 있어서 이번에 다시 확인해 보았으나 역시 李 花 에 틀림없었다). 새 校 舍 로 들어온 후 학교의 분위기는 희망과 활기로 가득차서, 마치 봄이 되어 새싹이 파릇파 릇 돋아나는 계절이 되면 사람의 마음이 까닭도 없이 들떠오르는 것과도 같았다. 교직원도 학생 도 校 友 도 얼굴에 미소를 띠고 떼어놓는 발걸음은 가벼운 것 같았다. 그러한 활기는 學 校 事 情 이 一 新 하여 희망에 찬 새 출발을 한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인촌을 비롯한 그때의 普 專 관계자들이 모두 한창 일할 수 있는 젊은 나이였 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인촌은 민족의 일꾼으로서 그때 이미 거족적인 人 望 을 모으고 있었지만 사실은 44세의 한창 나이였고, 교수들은 1, 2인의 예외를 빼어놓고는 30세 전후로부터 40세 전후에 이르는 靑 壯 年 이었으니 말이다(나는 그때 最 年 少 인 29세의 청년이었다). 그 당시의 이야기를 하자면 우선 學 校 關 係 의 酒 宴 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학교의 전반적 인 분위기가 그러니까 자연 酒 宴 이 잦았는데, 그때의 普 專 關 係 酒 宴 은 요사이 세상에서 흔이 보 는 것 같은 서로 눈치를 보아가며 상대편의 속이나 뽑아보려고 하는 조심스러운 자리와는 판이하 게 무슨 同 志 들끼리의 허물없는 자축연이나 같이 선배고 후배고 양껏 먹고 마시고 거리낌 없는 氣 焰 을 토하는 즐거운 자리였다. 인촌 주변의 분으로는 金 炳 魯, 金 用 茂, 宋 鎭 禹, 白 寬 洙 씨 등이 자 주 젊은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분들은 한결같이 술도 세려니와 젊은 사람 상대로 天 下 大 勢 에 관해 談 論 하기를 즐겼다. 酒 席 에서의 이야기는 사상문제가 되면 특히 열을 띠게 마련이었는데, 年 長 者 중에서도 특히 열 렬하게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나서는 것은 仁 村 과 古 下 였다. 젊은 패들 중에는 진짜 共 産 主 義 者 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대체로 좌익적인 생각을 가지 고 있는 것이 그때의 경향이었기 때문에 자연 仁 村 이나 古 下 의 말에 대해서는 반대론을 펴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촌은 평소의 인촌답지 않게 팔을 걷어붙이고 語 聲 을 높이기가
140 일쑤였고, 古 下 는 곧잘 주먹을 휘둘러가며 열변을 토하였다. 학교관계자들의 친목을 위한 모임이라기 보다도 憂 國 志 士 들의 비분강개하는 토론회장 같은 느 낌이었다. 사실 酒 席 에서 학교관계의 사무적 또는 교육적인 일이 화제로 되는 일은 드물었고, 그 대신 민족의 현재나 장래에 관한 이야기라면 흥분된 토론이 밤늦도록 계속되는 것이 恒 例 였다. 인촌, 고하의 두분 중 정치문제에 관해 좀더 직선적인 의견을 펴는 것은 古 下 였는데, 古 下 는 언 제나 민족은 自 決 해야 하니까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簡 明 直 截 한 주장이었다. 그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는 것이지만, 그 당시의 젊은 사람들의 생각은 약간 달랐다. 조선의 독립은 일본의 제국 주의체제가 무너지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고하는 곧잘 자기의 뜻을 이해해주는 인물로 頭 山 滿, 大 川 周 明 등 일본의 極 右 系 巨 頭 들의 이름을 들먹였지만, 그런 인물들이 입으로 아무리 민족자결의 원칙을 말한다 하여도 그것은 결국 입치레에 지나지 않는 만큼 정말 조선이 독립하려면 일본 자체의 정치체제가 공산혁명으로 넘어져야 하므로, 우리는 일본의 極 右 系 人 物 에 기대를 걸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일본의 좌익을 두둔하여 일본 자체의 혁명을 도와야 할 것이라는 것이 젊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당시의 老 壯 年 層 에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았었다. 평소부터 그러한 의견의 차이가 있었던 관계로 한 번은 고하의 민족자결론에 내가 불쑥 이의를 제기하여 고하를 몹시 흥분시킨 일이 있다. 아무리 民 族 自 決 을 외쳐 보아도 日 本 帝 國 主 義 가 건재 하는 한 조선독립은 無 望 하지 않으냐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끝에 내가 설사 일본의 현체제가 유지되면서 조선의 독립이 이루어진다 하여도 資 本 主 義 體 制 를 바탕으로 하는 한 독립을 뒷받침할 민족자본이 없지 않으냐,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 한 것이었다. 그랬더니 古 下 는 흥분해서 무어? 資 本? 내 말좀 들어보아요. 兪 군 ( 仁 村 과 달리 古 下 는 가끔 兪 군 이라는 말을 썼다)하고 서 주먹을 휘두르며 資 本 家 라니 富 者 말이지? 부자라면 閔 泳 徽 가 朝 鮮 甲 富 아냐? 그래 閔 泳 徽 가 어쨌단 말이야. 閔 泳 徽 가 우리나라 독립을 뒷받침해? 閔 泳 徽 같은 건 巡 査 한명만 보내면 그만이란 말이야. 안그 래 兪 군? 하였다. 이 이야기를 지금 내가 꺼내는 것은 古 下 의 朝 鮮 甲 富 도 巡 査 한명이면 그만 이라는 철저한 政 治 優 越 論 이 기발하고도 통쾌해서 그 후 近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기 때 문뿐 아니라, 이 간단한 問 答 속에 政 府 樹 立 후 우리 민족이 안고 온 여러 가지 복잡한 問 題 들이 그대로 內 包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은 내 생각과는 달리 古 下 의 생각하던 방향으로 이루어졌으나, 자본형성의 문 제는 나와 古 下 가 말을 주고받던 그대로의 문제점을 안고 여태껏 몸부림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 당시의 酒 席 이야기를 한다면 仁 村 의 普 專 인계 직후 前 校 長 朴 勝 彬 댁에서 있었던 조촐한 酒 席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朴 勝 彬 교장은 本 職 은 변호사였지만 啓 明 俱 樂 部 를 조직하여 新 生 活 運 動 에 앞장을 서는 한편, 한글 學 會 의 맞춤법에 반대하여 朝 鮮 語 學 硏 究 會 를 조직해 가지고 독자적인 철자법을 끝까지 주장 하던 신념과 氣 慨 의 인물이었다. 校 長 職 을 물러난 후에도 여러 해 동안 老 軀 를 무릅쓰고 無 報 酬 로 普 專 에 나와서 朝 鮮 語 講 義 를 계속한 분이다. 늦은 봄의 어느날 仁 寺 洞 朴 교장의 洋 式 저택에서 언제까지나 물러가지 않는 黃 昏 의 庭 園 을 바 라보면서 열렸던 麥 酒 파티는 그분의 독특한 너털웃음과 함께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선후배가 한데 엉킨 술자리에서의 기염은 밤이 늦어지면 으레 어른들의 獨 壇 場 이 되는 것이 통 례였다. 젊은 패들은 풋술이라 처음부터 마구 마시고 떠들고 하기 때문에 이내 기운이 지쳐버리 는 데 반해 仁 村, 古 下, 街 人 ( 金 炳 魯 ), 金 用 茂 같은 분들은 주량이 센데다가 폭음을 하지 않기 때 문에 술자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기세가 점점 더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정이 가까워지
141 면 나는 곧잘 옆방으로 가 드러누워서 반쯤 꿈결에 어른들의 氣 焰 을 듣곤 했는데, 한번은 그렇게 누워 있는 나를 보고 庶 務 의 吳 一 澈 씨가 무얼 벌써 그러슈. 저분들은 아직도 總 論 이요, 各 論 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소 하였다. 그 후로 各 論 은 아직 멀었나 하는 말은 酒 席 이 지루하도록 긴 때에 젊은 패들끼리 隱 語 처럼 주고받고 하는 말이 되었다 ( 中 略 ) 말없는 가운데도 저절로 통하는 師 弟 間 의 理 解 - 外 部 의 强 壓 이 심하면 심할수록 도리어 굳어 지는 先 後 輩 間 의 애정 - 그것이 그 당시의 普 專 을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였다. 그러나 그렇게 우울한 가운데에도 그 나름대로의 즐거움도 또한 있었다. 그해(1940년) 9월말경 하루는 무슨 까닭이었던가 인촌과 함께 종로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鄭 寅 普 씨를 만났는데, 그때 역 시 倉 洞 인가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爲 堂 은 病 客 같이 야윈데다가 입고 있는 옥색 모시 두루마 기 자락이 무릅 위까지 말려 올라가서 초라해 보이기가 짝이 없었다. 그러자 인촌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갑자기 밝은 목소리로, 우리 어디 가 술이나 먹을까 하더니 金 千 代 會 館 을 가면 지금 도 술을 실컷 먹을 수 있단 말이야 하였다. 그때는 벌써 돈을 가지고도 술을 사먹기 힘드는 때이었다. 당당한 요리집을 가도 淸 酒 는 한 사 람 앞에 半 合 조금 더 드는 소위 도꾸리 한 병밖에 주지 않는 때이었는데, 인촌 말씀은 金 千 代 會 館 (지금 서울 市 警 察 局 )은 朝 鮮 에서 제일 큰 양조장을 가진 齊 藤 이라는 일인이 직영하는 곳이라 서 말만 잘하면 지금도 술을 얼마든지 얻어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 술 먹을 시간은 아니었지만 爲 堂 도 나도 당장에 仁 村 을 따라나섰음은 말할 것도 없다. 金 千 代 會 館 에 이르러 조그만 방에 자리를 잡자 仁 村 은 古 下 도 부르지. 古 下 도 요새 꽤 울적할 텐데 ( 東 亞 日 報 폐간 후 古 下 는 쭉 집에 칩거 중이라는 것이었다) 하더니, 일어서 나가 손수 전화를 걸었다. 물론 古 下 는 곧 달려갔다. 나는 그날 그 술 座 席 처럼 마음이 푸근했던 자리를 아직 알지 못한다. 李 白 의 將 進 酒 末 尾 에 있는 五 花 馬 와 千 金 裘 를, 아이 시켜 꺼내다가 술로 바꾸어, 그대와 함께 萬 古 의 시름을 끄리라 라 는 表 現 그대로의 술자리였다. 그러나 술로 울분을 달래는 것은 잠깐 동안의 일이요, 현실은 날로 각박을 더해갈 뿐이었다. 해 가 바뀌어 1941년이 되자 인촌은 普 專 의 체제를 정비하여 신설된 副 校 長 과 生 徒 監 에 金 泳 柱 씨와 張 德 秀 씨를 각각 임명하였다. 인촌으로서의 전시체제를 갖춘 셈이다. 그때까지는 인촌이 몸소 第 一 線 에서 모진 비바람을 겪어 왔지마는, 이제 인촌으로서는 한계점에 온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副 校 長 은 창피하고 난처한 對 總 督 府 關 係 에서 교장을 대신할 것이요, 生 徒 監 은 勞 動 動 員 이 네, 학생지도네 하는 궂은 일, 뼈 빠지는 일에 교장을 도와 나설 것이다. 사실 雪 山 은 貫 祿 으로 보나, 縣 河 의 웅변으로 보나, 노고를 사양치 않는 성실한 성격으로 보나 非 常 時 局 下 의 學 生 指 導 를 맡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해 6월, 나는 退 溪 院 에 조그만 초가집을 지었다. 명목은 疎 開 터를 마련한다는 것이었지만 內 心 은 장차 필요할 은둔처를 장만하는 것이었다. 집 지을 못을 입수할 길이 없어 그때 平 壤 에서 조그만 제정회사에서 관계하고 있는 金 洸 鎭 군을 찾아가( 金 君 은 벌써 1939년 봄에 普 專 을 그만두고 있었다) 못 四 貫 을 얻어 가지고, 못도 통제물자 라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서울까지 들고 오던 것도 나로서는 잊혀지지 않는 일이다. 못 四 貫 이 그렇게 많고 무거운 줄 처음으로 알았다. 내가 집을 짓자 安 浩 相 씨도 내 집 옆에 내 집보다 더 조그만 초가집을 지었다 ( 中 略 ) 식사가 끝난 후 고이소는 이번에는 자기 차례라면서 한 시간 이상이나 조선학생들이 이 전쟁에 총을 메고 나가야 할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자신만만하게 학생들을 돌아보면서 어떤가? 그만하면 알아들었겠지? 그래도 이의있나?
142 하였다. 학생들은 이의가 없을 리는 만무하였지만 그때의 공기로 차마 무엇이라 입을 떼지 못할 판이었는데, 별안간 李 哲 承 군이 네, 이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저는 못 알아듣겠습니다 외치고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는 것이다. 學 兵 문제에 관해서는 한 가지 더 남겨둘 이야기가 있다. 학병지원소동이 일단락되어 해당학생 들이 대부분 학병으로 나가게 되자, 이번에는 모모하는 인사들에게 학병을 격려하는 글을 신문에 쓰라는 명령이 총독부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신문이라야 그때 우리말로 간행되는 것은 總 督 府 기 관지인 每 日 申 報 하나 뿐이었다. 나한테 그 명령을 전달해온 것은 每 日 申 報 기자인 金 秉 逵 군이었다. 金 은 日 本 에서 法 文 系 학생 들이 학병으로 끌려나갈 때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와 每 日 申 報 記 者 로 다니고 있었다. 金 의 말에 의하면 執 筆 者 명단은 경무국에서 직접 人 選 한 것으로서 金 性 洙, 宋 鎭 禹, 呂 運 亨, 安 在 鴻, 李 光 洙, 張 德 秀, 나와 그밖에 一, 二 人 이었다. 그때 朝 鮮 社 會 에서 영향력이 있다고 할 수 있 는 인물을 총망라하다시피 한 것이었다. 모두 나보다 훨씬 年 長 者 들뿐인데 어떻게 해서 내가 그 축에 끼어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집필은 경무국의 명령이라는 것을 金 은 강조 하였다. 나는 어떻게든 쓰겠지마는 글을 쓰지 않은 인촌이 문제였다. 金 은 벌써 인촌을 만난 모양으로, 인촌의 글은 자기( 金 )가 代 筆 하겠다 하였더니, 정 안 쓸 수 없는 것이라면 代 筆 은 하되, 쓴 것을 나에게 반드시 보이고 내도록 하라고 인촌이 말씀하였다고 전하였다. 전화로 확인해 보았더니 창 피한 글 이나 안되도록 주의해 달라는 인촌의 대답하였다. 같은 말을 해도 즐겨 창피 한 표현을 쓰는 사람이 있다. 기왕 本 意 아니게 쓰는 글이니 창피하 고 안 창피하고가 어디 있을까마는 그래도 입을 열면 으레 八 紘 一 宇 니 御 稜 威 니 해가며 과잉충 성을 일삼는 사람들이 많은데 仁 村 은 그러한 창피 를 특히 싫어하였다. 죽어도 더럽게 죽지나 말 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金 이 대신 執 筆 해온 仁 村 의 글 아닌 仁 村 名 義 의 글을 보니 秀 才 인 만큼 염려한 것 같은 창피 한 表 現 은 거의 없는 조촐한 글이었다. 나는 朝 鮮 靑 年 의 入 營 은 朝 鮮 人 의 힘의 增 大 다 라는 취지의 글을 써서 仁 村 명의의 글과 함께 金 군에게 넘겨주었다. 내가 지금 그때 學 兵 격려문이 나가게 된 경위를 말하고, 특히 仁 村 명의의 글에 관해서는 진짜 執 筆 者 의 이름까지 밝힌 것은, 그 글 때문에 仁 村 은 해방 후 심히 부당하고 억울한 비난을 받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金 秉 逵 는 해방 후 左 翼 에 가담했는데 金 등이 작성해서 그해 九 月 에 주로 미군기관에 뿌린 Traitors and Patriots라는 팜플렛에는 仁 村 명의의 그 글이, 해방후 解 放 의 감격 속에서 行 한 呂 運 亨 씨의 연설문과 나란히 실리어, 左 翼 을 치켜올리고 右 翼 을 깎아내리는 데 부당 하게 악용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일제하의 글을 사용하겠다면 呂 씨의 것도 그때 每 日 申 報 에 仁 村 이나 나의 글과 나란히 발표되었던 것을 사용했어야 할 일이 아닌가. 35.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 中 央 日 報 > (1975년 8월 28일) 李 哲 承 古 下 의 暗 殺 反 託 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던 45년 12월 30일. 朝 鮮 독립에 앞장섰던 선각자 宋 鎭 禹 선생이 反 託
143 의 시련을 헤쳐나갈 經 綸 을 펴보지 못한 채 저격범 韓 賢 宇 의 兇 彈 을 맞고 쓰러졌다. 평소에 古 下 를 따랐고 저격 이틀전인 28일엔 京 橋 莊 에서 그의 反 託 戰 略 을 경청했던 나로서는 저격소식에 눈앞이 캄캄해오는 어둠을 느꼈다. 古 下 의 暗 殺 과 관련하여 당시 항간에는 별별 風 說 이 다 나돌았다. 암살범 韓 賢 宇 의 自 白 처럼 해방후 政 局 을 昏 迷 하게 만든 세사람 - 宋 鎭 禹 呂 運 亨 朴 憲 永 - 으로 지목하여 죽였다는 이야기가 그 하나. 다른 쪽으로는 古 下 가 信 託 統 治 를 찬성했다 또는 3년에서 5년간의 訓 政 期 가 필요하다고 했다 는 말과 이에 따른 誤 解, 그리고 共 産 黨 이 민족진영의 훌륭한 政 治 家 인 그를 미리 꺾어버렸다는 說 등이 나돌았다. 다시 상황을 회고해보면 反 託 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民 族 陣 營 내부에서 異 見 이 노출됐던 것도 사 실이다. 金 九 主 席 을 비롯한 臨 政 측은 反 託 運 動 을 새로운 獨 立 運 動 으로 규정하고 政 局 을 强 硬 一 邊 倒 로 몰고가려했다. 美 軍 政 과는 정면으로 맞서 一 戰 도 不 辭 하겠다고 나섰다. 이와같은 臨 政 측의 反 託 運 動 전개와는 대조적으로 李 承 晩 박사나 古 下 선생의 反 託 運 動 방법은 침착했고 彈 力 性 이 풍부했다. 韓 國 의 독립을 위해 美 國 朝 野 人 士 와 오랫동안 접촉해 온 李 박사는 美 國 務 省 극동국장 빈센트가 韓 國 의 託 治 를 누차 공언해온 바 있었으므로 이미 이러한 상황을 예 견하고 反 託 의 효과적 대책을 비교적 차분히 세워왔다. 古 下 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것은 託 治 反 對 全 國 總 動 員 委 員 會 가 京 橋 莊 에서 열리던 12월 28일 밤 시종 强 硬 一 邊 倒 로 치 닫고 있던 臨 政 要 人 들의 主 張 에 맞서 융통성 있는 對 應 策 을 내세웠던 그의 주장에서 잘 나타났 다. 反 託 운동은 효과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의 처지에서 아무런 자체적인 힘과 준비도 없이 무조건 美 軍 政 까지를 敵 으로 돌리면 蘇 聯 이나 共 産 系 列 은 美 軍 政 을 逆 利 用 해서 一 時 的 合 作 으로 나올 것이 분명하다 古 下 는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 民 族 陣 營 은 도리없이 그들의 장기적 統 一 戰 線 전략에 말려들어 共 産 化 가 필 연적일 수밖에 없다 古 下 는 이미 공산주의 전략을 간파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古 下 의 주장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美 國 은 여론의 나라이니 만큼 강력한 운동으로 국민의사를 표시하면 족히 信 託 統 治 정책은 변 경될 수 있다 그는 냉철하고 조리있는 경륜을 밝혔다. 古 下 는 京 橋 莊 회의를 마치고 그 이튿날 國 民 大 會 準 備 委 員 會 本 部 사무실에 나와 任 永 信 張 澤 相 尹 致 暎 元 世 勳 제씨가 모인 자리에서도 전날 밤의 상황을 보고하면서 큰일 났어! 反 託 은 해야겠는데 그들은 美 軍 政 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짚신감발로 전국 坊 坊 曲 曲 으로 내려가 새로운 獨 立 운동을 전개한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國 內 治 安 과 國 外 情 勢 에 대한 效 果 的 代 案 은 아니내고서 하는 등 자기나름의 時 局 觀 을 피력했다. 古 下 는 彈 力 性 있는 현실대응책과 長 技 的 眼 目 을 가진 巨 視 的 政 治 人 임이 분명했다. 古 下 선생의 政 治 度 量 은 해방후 呂 運 亨 이 建 準 과 人 共 을 선포하고 손잡고 일하자고 제의한 것을 거절한 데서도 잘 나타났다. 呂 運 亨 이 나도 臨 政 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인물됨과 力 量 을 잘 아 는데 국내에서 고생한 나와 古 下 만 손잡으면 국민의 뜻에 맞춰 建 國 을 할 수 있다 는 유혹적인 제의를 한데 대해 도리어 祖 國 의 독립만을 위해 기약없이 풍찬노숙한 海 外 애국선배를 모셔다가 온 국민이 國 民 大 會 를 열고 받들어서 民 族 과 단결을 세계만방에 과시한 뒤에 그때가서 국민이 臨
144 政 보다 夢 陽 을 원한다면 나는 온 정성을 다하여 夢 陽 을 받들겠다 라고 응수했다. 그러면서 古 下 는 愛 國 先 輩 指 導 者 들을 海 外 에서 還 國 시키기 위해 美 軍 政 과 적극교섭을 벌였고 끝까지 자기희생을 통해 臨 政 추대를 주장했다. 古 下 는 항상 李 博 士, 金 九 主 席, 그리고 金 奎 植 박사를 3 領 袖 로 모시고 國 內 派 와 海 外 派 의 團 結 과 合 作 을 모색했다. 그래서 國 內 民 族 勢 力 을 규합해 韓 民 黨 을 만들 때도 自 己 는 스스로 幹 事 長 格 인 首 席 總 務 에만 머무르고 8 道 代 表 1인씩을 총무로 앉혀 派 閥 을 떠나 大 同 協 力 의 기반위에서 建 國 의 채비를 마련했다. 하지 中 將 에게 韓 服 을 처음으로 준 사람도 古 下 였다. 어느날 내가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古 下 는 우리의 실정을 모르는 하지가 韓 服 을 입고 있을 때 우리와 진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고 대답해 줬다. 그분의 주도면밀한 관찰이 없었던들 하지의 左 傾 化 된 性 向 을 바로잡지 못했을 것이고 趙 炳 玉 博 士 를 美 軍 政 의 警 務 部 長 에 추천, 공산당의 발호를 막거나 臨 政 要 人 을 추방하려고 하였을 때 단호 히 설득과 압력을 넣어 사태의 惡 化 를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46년 1월 5일 古 下 선생의 社 會 葬 영결식에 참석해서 그분과의 관계를 회상하면서 그분의 명복을 빌었다. 36. 횡설수설 < 東 亞 日 報 > ( , 號 ) 古 下 宋 鎭 禹 선생이 이 세상을 떠난지도 벌써 스물다섯해가 흘렀다. 祖 國 과 民 族 이 異 民 族 의 굴 레를 벗어나고 國 權 回 復 이란 回 天 大 業 을 비로소 이루려고 하는 찰라에 선생은 막 그 雄 圖 와 深 謀 를 펴려 하다가 殉 國 의 鮮 血 을 뿌리고 말았다. 25년전 오늘의 일을 생각하면 이보다도 더 분통스 럽고 원한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신음하는 民 族 에게 항상 보여주었던 그 회확대도( 恢 廓 大 度 )의 아량과 日 帝 에게 넌지시 뽐냈던 그 不 屈 의 抵 抗 精 神 은 날이 갈수록 뒷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師 表 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왕년에 있어 祖 國 의 獨 立 運 動 을 회고하면 이를 國 內 派 와 國 外 派 란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어느 派 나 큰 使 命 을 띠지 않은 것이 없겠으나 그중에서도 特 色 을 구태여 가려낸다면 國 外 派 는 異 域 의 辛 酸 을 맛보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래도 한결같이 獨 立 정신 을 지탱할 수 있었다는 長 點 이 있었다. 그러나 國 內 의 뜻있는 人 士 들은 異 民 族 과의 群 居 를 마다 하지 않고 갖은 威 脅 과 유혹을 뿌리치면서 高 潔 한 志 操 와 抵 抗 精 神 을 유지하기란 여간 힘겨운 일 이 아니었다. 당시 三 千 萬 의 우리 民 族 에게 뿌리를 박고 길잡이가 되고 등불이 된다는 立 場 을 지키기는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이렇듯 선생은 名 分 的 인 것보다는 차라리 實 利 的 인 獨 立 運 動 을 追 求 해왔다. 선 생은 우리 동포들과 삶을 같이하면서 그 가려운 곳이 있으면 이를 긁어주었고 그 아픈 곳이 있으 면 어루만져 주었는가 하면 또 동포들과 울음을 터뜨려야 할 때는 같이 울었고 웃음을 나누어야 할 때는 같이 웃었다. 아마 後 世 의 史 家 들이 선생에 대한 一 節 을 論 할 때는 반드시 이 대목을 소 홀하게 다룰 수 없을 것이다. 선생은 祖 國 의 獨 立 과 함께 그 雄 志 를 펴지 못했다는 것으로서 과 연 좌절의 政 治 家 라고만 불러야 마땅할 것인가. 선생은 57년 간이란 짧은 一 生 에 불과했지만 선 생이 남겨놓은 숱한 逸 話 와 業 績 은 아직도 우리들의 귓전을 울리고 있다. 선생의 거룩한 발자취 는 역시 民 族 의 代 辯 紙 였고 啓 蒙 紙 인 東 亞 日 報 社 長 재직 時 에 더욱 빛났던 것이 아닌가 싶다. 日 帝 가 소위 萬 寶 山 사건을 저질렀을 때 이를 看 破 한 그 先 見 의 明, 1925년 汎 太 平 洋 會 議 에 참석한 뒤 本 紙 에 실린 世 界 大 勢 와 朝 鮮 의 將 來 란 大 論 說, 李 忠 武 公 유적의 保 存 운동, 6 10 萬 歲 때의 獄
145 中 투쟁 등등에서 선생의 風 貌 가 歷 然 하게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本 社 가 1926년 12월 現 位 置 에 新 社 屋 을 짓고 이사할 무렵이었다. 그때 선생은 獄 中 에서 이 소식을 듣고 仁 村 金 性 洙 선 생에게 다음과 같은 글월과 詩 를 지어보냈다. 저 외로운 그림자를 벗삼아 嚴 寒 의 暴 威 에 저항 을 계속할 뿐이오나 다행히 별고 없사오니 안심하옵소서 옥중에 갇힌 몸 밤마다 잠못이루네. 나라근심에 상한 마음 몇몇 해나 쌓였던고 ( 獄 中 夜 夜 不 成 眠 憂 國 傷 心 幾 積 年 ) 오늘 선생의 25 周 忌 를 맞아 民 族 의 巨 人 을 사모하는 마음 새삼 금할 길이 없다. 37. 自 由 와 獨 立 의 權 化 - 古 下 宋 鎭 禹 先 生 25 周 忌 에 부쳐 - < 東 亞 日 報 > ( ) 李 仁 최근사상 우리 근역에 왔다 간 사람이 무수하지만 그중에도 겨레의 품안에 안기고 가장 그리워 지는 사람은 古 下 宋 鎭 禹 선생이다. 古 下 는 東 京 에서 法 學 을 공부하던 弱 冠 시절부터 非 命 으로 돌 아가기까지 千 가지 萬 가지가 祖 國 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살아온 自 由 와 獨 立 의 權 化 였고 겨레로 서는 잊어서는 안 될 위대한 巨 木 이 되었다. 과거를 돌이켜 볼 필요도 없이 앞에 놓인 國 內 의 情 形 과 닥쳐올 장래를 바라볼 때 古 下 가 계셨다면 우리의 가난과 辛 苦 가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一 念 에서 古 下 에 대한 그리움은 더해 간다. 古 下 는 日 本 유학시절부터 배워야겠고 적을 알아야겠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그래서 古 下 는 日 本 유학생들이 조국이 침략됨을 비분강개한 나머지 二 百 명만이 남고 모두가 떠나간 뒤에도 항상 남 아 있는 유학생들에게 主 權 회복의 의지를 불어넣기 일쑤였다. 그후 中 央 學 校 교장으로 취임한 뒤 에는 인재배양에 전력을 기울였고 3 1운동 당시만 해도 막후에서 은밀한 획책과 막대한 노력으로 3 1운동을 도왔다. 이에 앞서 3 1운동의 前 夜 작업인 東 京 유학생의 2 8사건이 일어난 것도 古 下 의 평소 사상고취가 열렬했던 점을 상기하면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古 下 는 잃은 자유와 주권을 회복키 위해 東 亞 日 報 를 創 刊, 겨레를 눈뜨게 했다. 東 亞 日 報 창간 뒤 日 帝 의 탄압은 民 族 운동의 진원지인 東 亞 日 報 로 쏠려 東 亞 日 報 는 이유없는 정간 판매금지, 종 말에는 폐간의 강권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겨레의 가슴속에는 東 亞 日 報 와 古 下 가 사라지지 않 았다. 古 下 는 日 帝 의 학정이 가혹해지는 가운데도 교육 언론 문화 사회문제 등등에 하루도 자리 를 따뜻이 할 시간없이 분주했고 동지와 후배 학생 대중의 갈 길과 지침을 지시, 恒 道 했다. 그래 서 民 族 主 義 者 들은 古 下 의 주변에서 떠날 날이 없었다. 日 帝 가 물러가기 직전 古 下 가 生 田 淸 三 郞 경기도지사의 治 安 담당 부탁을 받고 무조건 항복으 로 물러갔으면 물러갔지, 日 帝 의 뒷날의 韓 國 치안문제를 운운하는 것은 부당한 일 이라고 힐책, 일언지하에 거부했던 일은 이러한 古 下 의 민족 정기를 잘 보여준 일이었다. 해방이 되던 날 日 帝 의 탄압으로 방방곡곡에 散 在, 숨어있던 애국지사들 百 여명이 약속이나 한 듯 古 下 의 집으로 雲 集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해방의 기쁨을 나누기보다는 오히려 앞으로의 建 國 방 향을 논의, 國 會 창설을 위한 國 民 議 會 준비대회 준비에 분망했다. 나와 趙 炳 玉 白 寬 洙 元 世 勳 씨 등이 주동이 되어 창당된 韓 國 民 主 黨 은 古 下 를 위원장으로 추대, 古 下 는 더욱 建 國 작업에 몰두했 다. 그 결과 공산세력과 建 準 세력은 격파되고 自 由 民 主 사상이 고취되어 民 主 共 和 國 인 大 韓 民 國 창 건의 盤 石 이 굳어졌다. 자손만대까지 自 由 民 主 로 일관토록 만든 것은 오로지 古 下 의 遺 訓 과 遺 澤 이라 아니할 수 없다
146 그러던 古 下 가 25년 전 경교장에서 원서동 自 宅 으로 돌아온 후 12월 30일 새벽 1개 폭한의 흉 탄에 쓰러지고 말았으니 古 下 는 民 族 統 合 의 大 業 을 이룩하지 못한 채 千 古 의 恨 을 품고 숨지고 만 것이다. 古 下 가 가셨을 때 暗 夜 에 등화를 잃고 一 朝 에 民 族 의 恒 道 者 를 잃어버린 겨레의 슬픔 이 南 北 을 통틀어 江 山 에 가득했다. 2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民 族 統 合 은 달성되지 못하고 北 傀 의 준동은 계속되고 있으니 古 下 에 대한 아쉬움은 금할 길이 없다. 지금 비록 民 族 統 合 은 안됐다 해 도 古 下 는 해방전후를 통해 民 族 的 不 滅 의 업적을 남기셨음에 이는 民 族 史 上 白 日 貫 虹 이라 아니 할 수 없다. 38. 제1차 천장후 묘비제막식 式 辭 모음 (1) 式 辭 古 下 宋 鎭 禹 先 生 遷 葬 推 進 委 員 長 崔 斗 善 古 下 宋 鎭 禹 先 生 의 墓 所 를 이 자리에 옮기고 先 生 의 가장 親 近 하던 벗들과 先 生 을 崇 仰 하던 後 學 들이 敬 愛 의 徵 表 로 墓 碑 를 세워 오늘 여기서 除 幕 을 보게 되니 億 萬 가지 感 懷 를 누를 길이 없 습니다. 先 生 은 1890년 5월 8일 全 南 潭 陽 의 古 比 山 下 에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四 年 後 에는 淸 日 戰 爭 이 일어났고 그로부터 다시 10 年 後 에는 露 日 戰 爭 이 일어났습니다. 祖 國 은 列 强 의 角 逐 場 으로부 터 日 本 의 獨 舞 台 로 轉 落 하여 亡 國 의 날은 刻 一 刻 으로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韓 日 合 倂 을 맞은 것은 先 生 이 滿 20 歲 되던 1910 年 이었습니다. 當 時 日 本 에 留 學 中 이던 靑 年 古 下 先 生 에게 이것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던가는 想 像 하고도 남음이 있겠습니다. 風 雲 속에서 태어난 古 下 의 一 生 은 그대로 가시밭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故 國 에 돌아온 先 生 은 故 仁 村 金 性 洙 先 生 을 비롯하여 뜻을 같이하는 志 士 들과 힘을 合 하여 人 材 養 成 에 젊은 情 熱 을 바쳤고 學 生 을 組 織 하여 民 族 魂 을 鼓 吹 함으로써 後 日 3 1 運 動 에 重 要 한 一 翼 을 담당하였습니다. 遠 大 한 眼 目 으로 創 刊 된 民 族 紙 東 亞 日 報 를 두 어깨에 걸머지고 日 帝 監 獄 을 無 常 出 入 하면서 民 衆 의 覺 醒 과 啓 蒙 에 主 力 하였습니다. 타고난 政 治 家 로서의 先 生 은 世 界 大 勢 를 洞 察 하는 卓 越 한 眼 識 이 있어 20 年 代 이미 우리나라 獨 立 의 不 可 避 性 을 强 調 하였던 것입니다. 先 生 은 또한 보기 드문 樂 天 家 였습니다. 明 日 에 대한 確 固 한 信 念 에서 우러나온 樂 天 性 은 當 時 暗 黑 의 구렁에서 헤매던 온 民 衆 에게 希 望 의 등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絶 望 에서 오히려 光 明 을 찾은 先 生 은 글자 그대로 우리 民 族 의 先 覺 者 였습니다. 先 生 은 天 性 으로 타고난 指 導 者 이기도 하였습니다. 氣 宇 가 高 大 하고 無 言 中 에 사람을 魅 惑 하고 이끌어가는 힘의 所 有 者 였습니다. 先 生 의 膝 下 에서 奉 仕 한 人 士 들은 한결같이 그 넓은 度 量 과 指 導 力 에 悅 服 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先 生 이 그렇게도 渴 求 하고 苦 待 하던 解 放 이 왔을 때 우리는 모두 오로지 기쁨에 사로잡혀 있었 습니다마는 先 生 만은 이 기쁨 속에서도 冷 徹 히 情 勢 를 把 握 하고 앞을 내다보는 明 이 있었으며 混 亂 에 對 處 할 方 案 을 綿 密 히 檢 討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해 12월 30일 새벽 뜻하지 않은 同 族 의 兇 彈 에 맞아 온 民 族 이 아끼고 崇 尙 하던 이 巨 人 은 千 秋 의 恨 을 품은 채 波 瀾 많은 一 生 에 幕 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先 生 이 가신지 20년 그동안의 有 爲 轉 變 은 이루 말할 수 없고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우 리는 先 生 이 계시지 않음을 안타까워하고 先 生 의 知 慧 와 勇 斷 과 指 導 力 을 그리면서 오늘에 이르
147 렀습니다. 하늘이 古 下 에게 좀 더 壽 를 누리게 하였던들 우리 歷 史 는 많이 달라졌으리라는 것은 많은 人 士 들이 認 定 하는 事 實 입니다. 先 生 이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를 아끼던 至 誠 은 九 泉 에서도 變 할 까닭이 없습니다. 忘 憂 里 에서 이곳 新 亭 里 로 옮긴 先 生 의 幽 宅 여기 芝 香 山 기슭 양지 바른 언덕에서 古 下 宋 鎭 禹 先 生 은 祖 國 이 걸어가는 한걸음 한걸음을 永 遠 히 지켜보실 것입니다. 先 生 의 冥 福 을 빌어 마지않습니다. (2) 追 念 辭 新 民 黨 代 表 委 員 兪 鎭 午 古 下 宋 鎭 禹 先 生 이 가신지 於 焉 二 十 有 二 年. 그동안 忘 憂 里 초라한 幽 宅 에 계시던 先 生 의 遺 骸 를 有 志 들의 盡 力 으로 이곳에 遷 葬 하고 오늘 墓 碑 除 幕 式 을 올리게 되오니 在 天 의 英 靈 도 이제 는 永 久 히 安 住 의 地 를 얻으셨거니와 先 生 의 遺 德 을 追 慕 하는 겨레의 가슴에도 또한 安 堵 의 感 이 듦을 느끼겠습니다. 民 族 이 外 賊 의 鐵 蹄 下 에 呻 吟 하던 三 十 六 年 동안 先 生 이 民 族 의 先 頭 에서 燈 불이되고 棟 樑 이 되 어 惡 戰 苦 鬪 하신 일은 지금 온겨레가 다 알고 있는 바입니다마는 先 生 은 事 實 一 身 을 祖 國 에 바 치기 위해 이 世 上 에 태어나셨던 분인 것 같습니다. 祖 國 의 運 命 이 累 卵 의 危 機 에 處 해있던 一 八 九 年 에 태어나신 先 生 은 一 九 歲 의 靑 年 으로 救 國 의 大 志 를 품고 一 生 의 同 志 仁 村 金 性 洙 先 生 과 함께 日 本 留 學 의 길에 오르셨다가 不 過 二 年 만에 庚 戊 國 恥 를 당하셨으니 그때에 悲 痛 하셨던 先 生 의 心 情 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마는 그때 先 生 께서 決 然 히 積 極 的 救 國 의 길을 擇 하 신 것은 생각할수록 머리가 숙여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祖 國 의 悲 運 과 함께 스스로 貴 重 한 生 命 을 끊거나 祖 國 을 등지고 海 外 로 떠나신 義 人 烈 士 의 거룩한 精 神 도 百 世 의 敎 訓 이 될 것입니다마는 屈 辱 과 絶 望 과 無 智 와 貧 困 속에 헤매는 겨레의 품 안으로 뛰어들어 모든 苦 難 을 겨레와 함께 겪어가면서 한편으로는 日 帝 의 壓 迫 에 抗 拒 하고 한편 으로는 겨레의 前 進 을 爲 해 피와 진흙투성이의 鬪 爭 을 繼 續 한다는 것은 愛 國 의 熱 血 以 上 으로 不 屈 의 鬪 志 와 不 撓 의 忍 耐 와 그리고 遠 大 한 經 綸 이 없이는 不 可 能 한 일입니다. 先 生 은 普 通 사람으로는 不 可 能 한 이 길을 擇 하시고 그 길 하나로 日 帝 三 十 六 年 間 을 一 貫 해 나 오셨으니 先 生 의 그 偉 大 한 足 跡 은 다른 어느 先 烈 의 그것보다도 特 異 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己 未 獨 立 運 動 을 計 劃 組 織 하시고 東 亞 日 報 의 總 帥 로 民 族 精 神 을 代 辯 鼓 吹 하는 동안 屢 次 의 獄 苦 를 介 意 치 않고 가시밭길을 헤쳐나가신 것은 先 生 께 있어서는 처음부터 豫 定 되었던 일이나 다 름없게 생각됩니다. 解 放 이 되자 衆 望 을 지고 先 生 이 建 國 創 業 의 거창한 業 務 외 中 心 에 서시게 된 것은 事 理 의 必 然 的 인 歸 結 이었습니다마는 아깝게도 先 生 은 그 强 靭 한 鬪 志 와 遠 大 한 抱 負 를 펴볼 機 會 를 미처 잡기 前 에 暴 漢 의 兇 彈 으로 世 上 을 떠나셨으니 이 무슨 運 命 의 作 戱 였습니까. 先 生 의 一 生 은 봄부터 여름을 通 해 갖은 勞 苦 와 근심걱정을 다 겪어가면서 精 誠 들여 農 事 를 지 은 農 民 이 打 作 前 夜 에 갑자기 世 上 을 떠나버린 境 遇 에도 比 할 것입니다. 이런 억울한 일이 어데 또 있겠습니까. 先 生 이 가진지 이미 二 十 有 餘 年 이 지났습니다마는 우리 겨레는 아직도 先 生 의 큰 뜻을 제대로 實 現 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또한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國 土 가 兩 斷 될 줄 先 生 은 夢 想 도 안하였을 것입니다마는 우리는 아직도 國 土 統 一 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고 南 韓 에나마 自 主 自 由 의 獨 立 政 府 를 세우노라 해보았습니다마는 그것마저 제대로 運 營 되지 않아 지금 이 時 刻 에도 이 나라의 民 主 憲 政 은 올바른 軌 道 위에 서있지 못한 것이 오늘의
148 現 實 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며는 우리는 先 生 의 墓 前 에 얼굴을 들고 서 있을 수도 없는 形 便 입니 다. 아! 古 下 宋 鎭 禹 先 生, 先 生 이 좀 더 長 壽 하셨더라면 解 放 後 의 歷 史 는 좀더 달라졌을 것이고 따 라서 오늘 우리가 處 해 있는 處 地 도 좀더 달랐을 것이 아닙니까. 못난 後 輩 들이 어려울 때를 당 할 때마다 偉 大 한 先 輩 를 한층 더 追 慕 하는 우리의 衷 情 만은 살펴 주시옵소서. 有 志 몇분의 熱 誠 으로 오늘 이렇게 英 靈 이 길이 잠드실 安 宅 이나마 갖추어 드리게 된 것으로 겨우 自 慰 를 삼고저 하오며 이 以 上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3) 追 念 辭 柳 光 烈 故 古 下 宋 鎭 禹 先 生 墓 碑 除 幕 式 에 臨 하여 數 言 의 蕪 辭 로 追 念 의 辭 를 드리나이다. 先 生 은 1890년 庚 寅 5월 8일에 全 南 潭 陽 巽 谷 里 에서 나시어 1945 年 乙 酉 12 月 30 日 에 刺 客 의 兇 彈 에 넘어지기까지 56 歲 의 一 生 은 實 로 波 瀾 많은 一 生 이었습니다. 先 生 이 세상에 나시던 해는 아직도 女 眞 族 淸 朝 에서 보낸 袁 世 凱 가 이 나라 內 政 까지 干 涉 하던 중에도 오히려 나라의 自 主 權 을 守 護 하려고 애쓰던 때이었습니다. 先 生 의 다섯살 때에 淸 日 戰 爭 이 일어나서 東 洋 의 정세가 한번 변하고 선생이 열다섯 되던 해에 일어난 露 日 戰 爭 에 日 本 이 이기고 그 이듬해에 日 本 은 所 謂 韓 日 五 條 約 으로 우리의 主 權 을 强 奪 하자 우리 全 國 民 은 救 國 運 動 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先 生 은 義 擧 하던 志 士 들에게 글을 배우고 있 었습니다 年 19 歲 이던 先 生 은 그때 志 士 들의 悲 憤 慷 慨 와 保 守 的 인 抗 日 만으로는 救 國 이 어려움을 깨닫고 平 生 의 道 義 之 交 인 金 性 洙 先 生 과 함께 日 本 留 學 을 떠났으니 敵 을 制 하려면 먼저 敵 을 알 아야 한다 는 大 志 에서였습니다. 東 京 留 學 中 에 學 友 會 에서 發 行 하던 學 之 光 에 우리 一 部 의 尊 華 思 想 을 痛 駁 한 글은 그때의 우 리 儒 林 碩 學 들에게 많은 衝 擊 을 주었고 그때에 國 民 輿 論 을 兩 分 한 觀 을 이루었던 바 입니다. 先 生 과 仁 村 先 生 이 1915 年 에 大 學 을 마치고 形 影 相 隨 로 故 國 에 돌아오자 먼저 敎 育 救 國 을 생 각하고 白 山 學 校 를 세우려 하였으나 그 이듬해에 財 政 難 이던 中 央 學 校 를 맡아서 經 營 하게 되었으 니 때는 正 히 第 1 次 世 界 大 戰 이 方 酣 하던 때입니다. 그때에 서울에는 六 堂 先 生 의 光 文 會 와 中 央 學 校 宿 直 室 은 古 下, 仁 村, 幾 堂 玄 相 允 等 靑 年 志 士 들을 中 心 으로 한 愛 國 運 動 의 牙 城 이었던 것입니다. 果 然, 이 두 牙 城 은 史 上 曠 古 의 擧 族 的 運 動 인 3 1 運 動 의 産 室 로서 登 場 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先 生 은 48인의 한분으로 囹 圄 의 몸이 되어 獄 苦 를 겪으셨습니다. 1921년에 先 生 은 東 亞 日 報 의 株 式 會 社 成 立 과 함께 社 長 으로 就 任 하여 日 帝 의 牛 毛 같은 干 涉, 때로는 親 日 惡 黨 들의 迫 害 또는 그때 한창 初 期 의 共 産 主 義 가 휩쓸 때이라 이와의 對 決 로 艱 難 이 뒤를 이었으나 先 生 은 꿋꿋이 民 族 의 大 義 를 지키면서 안으로 産 業 과 敎 育 으로 民 族 的 基 礎 를 세 우고 밖으로는 在 外 同 胞 慰 問 과 汎 太 平 洋 會 議 出 席 으로 孜 孜 히 쉬지 않았습니다. 先 生 은 恒 常 先 見 의 明 으로 앞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때 革 命 後, 얼마 안된 蘇 聯 의 情 勢 를 分 析 하여 이것이 일찍이 歐 洲 에서의 佛 蘭 西 革 命 이 各 國 에 影 響 을 미치듯이 世 界 에 影 響 을 미치어서 우리의 將 來 에도 巨 患 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1931년에 日 帝 의 滿 洲 侵 略, 1937년에 中 日 全 面 戰 爭 이 일어난 후로 先 生 은 日 帝 가 반듯이 亡 할 것을 豫 言 하였습니다. 先 生 은 日 帝 의 迫 害 中 에서도 東 亞 를 固 守 하면서도 民 族 의 據 點 을 삼으려는 新 聞 을 繼 續 하는 중
149 에 4 次 의 無 期 停 刊 과 함께 數 次 의 獄 苦 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斷 末 魔 의 日 帝 는 太 平 洋 戰 爭 을 앞두고 마침내 1940년 8월에 東 亞 日 報 를 廢 刊 시켰습니 다. 이때에도 先 生 은 總 督 府 와의 對 決 보다 日 本 의 中 央 政 治 家 들과 그 無 理 를 詰 難 하다가 그 關 係 로 囹 圄 의 苦 楚 를 겪으신 일도 있습니다. 8 15에 日 本 의 無 條 件 降 伏 과 함께 총독부는 선생에게 정권맡기를 哀 願 하였으나 先 生 은 政 權 을 너에게서 넘겨받을 것이 아니라 고 斷 呼 히 拒 否 하고 韓 國 民 主 黨 을 結 成 하여 그 首 席 總 務 에 推 戴 되고 國 民 大 會 의 召 集 으로 民 意 에 依 한 自 主 政 權 樹 立 을 推 進 하였던 것입니다. 모스크바 三 相 會 議 로 四 國 信 託 統 治 問 題 가 일어나자 先 生 은 그 反 託 運 動 은 擧 族 的 으로 하되 그 方 法 으로는 美 軍 政 과 正 面 對 立 을 避 하자는 正 論 을 폈던 것입니다. 이 暴 風 雨 같은 混 亂 中 에 刺 客 의 兇 彈 은 先 生 을 壯 途 未 半 에 넘어뜨린 것입니다. 先 生 은 平 素 에 先 輩 를 尊 敬 하여 特 히 李 商 在, 李 昇 薰 두 先 生 을 父 兄 같이 받들고 後 輩 에게는 和 氣 와 情 感 이 自 別 하였던 바입니다. 1923년 제가 上 海 에 가 있을 때에 社 內 에서 漢 江 邊 에 祝 宴 이 있었는데 그대가 없어서 섭섭하 였다 고 長 文 의 편지를 주시고 社 內, 社 外 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저의 寓 居 를 찾으면서 諒 諒 히 相 議 하시던 정다운 모습이 어제같이 뵈옵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纖 細 한 感 情 을 지니신 先 生 도 한번 大 義 를 위하여 主 張 을 내세울 때는 千 萬 人 의 말에도 動 하지 않는 毅 然 한 態 度 이시었습니다. 아! 말은 限 이 있으되 情 은 限 이 없습니다. 二 十 餘 年 前 先 生 의 長 逝 를 回 顧 하니 先 生 이 즐겨 들 려주시던 杜 甫 가 諸 葛 亮 를 追 念 한 長 使 英 雄 淚 滿 襟 의 詩 句 가 새삼 생각에 새롭습니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 先 生 의 碑 文 의 글자는 風 雨 에 사라지는 날이 있을지라도 이 나라 史 上 에 끼친 先 生 의 功 績 은 永 遠 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4) 追 念 辭 中 央 高 等 學 校 長 崔 炯 鍊 國 運 이 기울어 奇 恥 와 大 辱 으로 民 生 이 暗 澹 할 때 國 光 을 일으키고 民 衆 으로 하여금 矜 持 와 勇 力 을 일깨운 先 烈 과 志 士 가 어찌 한 두 분이시겠습니까마는 오늘 여기 幽 宅 에 모신 古 下 先 生 께서는 永 遠 히 빛나고 熱 烈 한 巨 迹 이 많으셨으니 先 生 을 追 慕 하여 끊이지 않는 感 懷 가 深 遠 하옵 고, 더욱 肅 然 함을 느끼게 합니다. 先 生 께서 生 涯 를 通 하여 守 義 孤 高 하시던 衷 情 과 至 純 高 潔 한 行 蹟 은 이미 滿 天 下 에 顯 著 한 바이므로 小 生 의 追 念 으로 미칠 바 아니오나, 先 生 께서 隆 熙 庚 戊 의 國 難 에 즈음하여 깊은 衝 擊 과 激 昻 한 慷 慨 에 잠기시고 一 念 으로 國 威 의 恢 復 을 念 願 하시어 民 族 精 氣 와 獨 立 思 想 을 鼓 吹 培 養 함에 鬱 然 한 熱 血 을 傾 注 하시었고, 光 復 後 他 界 하시는 날까지 秋 毫 의 私 念 이 없는 公 憤 과 義 氣 로써 國 家 民 族 의 前 程 을 爲 하여 獻 身 하신 바 至 極 하시니 이에 온 겨레는 眞 心 으로 俯 伏 하여 그의 至 誠 을 仰 慕 하는 바입니다. 先 生 께서는 世 亂 을 克 服 하시고 危 機 를 救 出 하심에 義 人 으로서의 節 操 와 難 事 를 剔 抉 하는 明 晳 한 經 綸 을 兼 備 하셨다고 하며, 獨 立 의 達 成 과 國 力 을 伸 張 함에는 敎 育 과 言 論 과 産 業 을 振 作 함에 있다고 看 破 하시고, 日 本 에서 弱 冠 에 學 業 을 마치신 뒤, 于 先 敎 育 에 投 身 하시고자, 同 學 이시고 知 己 이시던 仁 村 金 性 洙 先 生 과 中 央 學 校 를 引 受 經 營 하시게 되어, 難 境 에 處 하였던 中 央 學 校 를 盤 石 의 터전에 놓아, 民 族 學 校 로서의 面 目 을 完 成 하였으니 그의 理 念 이야말로 仁 村 先 生 님과 더불어 爲 國 竭 力 하는 民 族 의 正 道 를 涵 養 하셨음이 야 再 言 을 要 치 않을 것입니다. 仁 村 先 生 님과의 意 會 는 平 生 을 通 하여 如 一 하였을 뿐 아니라, 國 難 을 開 除 하시려는 志 氣 마저 渾 然 하여, 中 央 學 校 在 職 中, 몇몇 분이 宿 直 室 에서 宿 食 을 같이 하시 며 때마침 澎 然 하던 民 族 의 鬱 憤 을 切 感 하신 나머지, 3 1 運 動 이란 民 族 的 인 抗 拒 를 直 接 劃 策 하시
150 고, 先 導 하신 것은 이미 獨 立 運 動 史 上 에 燦 然 히 表 徵 된 바입니다. 仁 村 先 生 님과 幾 堂 玄 相 允 先 生 님과 자리를 같이하여 熟 議 를 거듭하신 끝에, 天 道 敎 基 督 敎 를 비롯한 各 敎 界 와 國 內 外, 全 民 族 의 總 一 的 意 志 를 糾 合 함에 成 功 하시게 되자, 跳 梁 하는 倭 寇 에 必 死 的 抗 爭 을 敢 行 하는 民 族 運 動 의 先 鋒 에서 左 援 右 應 하는 先 導 的 役 割 을 다하시어, 마침내, 거창한 민족 蜂 起 로서 天 地 가 振 動 하니, 바로 이것은 民 族 正 氣 의 嚴 存 함을 闡 明 함이요, 이로써 滅 敵 의 烈 을 밝히어, 光 復 의 曙 光 을 天 下 에 비추어 주신 것입니다. 爾 來 半 世 紀 에 걸친 抗 日 鬪 爭 을 通 하여 筆 鋒 을 높이 들어 倭 帝 의 抑 壓 과 虐 政 을 痛 駁 하시거나, 衆 論 을 이끌어 民 意 의 衝 天 함을 代 辯 하실 제, 그 不 屈 의 鬪 志 와 剛 果 한 氣 慨 를 이제 와 敢 히 뉘 追 從 하겠습니까. 나라가 어지럽고 風 浪 이 드높으니 先 生 님과 같으신 熱 情 과 正 義 의 志 士 가 더욱 欽 慕 됩니다. 先 生 님 가신지 스무해에 그 遺 業 을 이은 우리가 垂 成 의 大 業 을 完 遂 하여 國 家 民 族 의 繁 榮 과 慶 福 을 靈 前 에 告 함이 마땅하오나, 여기 그 志 操 와 經 綸 을 이을 이가 적어 그를 完 成 치 못한 채 先 生 님 의 遺 訓 을 다시 마음에 새길 뿐이오니, 이에 끼치는 悚 懼 하옴은 가이 限 量 없습니다. 先 生 님을 이 幽 宅 에 모시는 자리옵기에, 生 前 에 우러러 뵙던 想 思 가 더욱 새로워, 오히려 슬프 고, 아쉽고, 그리운 마음 懇 切 하오나, 在 天 하시는 先 生 님은 그 至 高 하신 義 志 와 不 屈 의 氣 慨 를 모 든 國 民 들에게 드리우사 國 家 의 泰 安 과 民 生 의 福 祉 를 맞이하여 三 千 萬 의 祈 望 이 하루 速 히 이루 어지도록 來 來 돌보아 주소서. 삼가 靈 前 에 告 하나이다. (5) 횡설수설 < 東 亞 日 報 > ( ) 한 나라에 잘되는 時 代 가 닥쳐올 때는 多 士 濟 濟, 人 材 들이 구름같이 쏟아져 나온다. 나라가 잘 되고 보니 그것을 擔 當 해온 人 樑 감으로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東 洋 에서 일찍이 自 主 的 인 近 代 化 革 命 을 遂 行 한 唯 一 한 나라인 日 本 을 보더라도, 그들의 市 民 革 命 이라 할 수 있는 明 治 維 新 을 前 後 하여 人 材 들이 그야말로 구름같다. 어떤 이가 이런 仮 想 을 해 본 것을 읽은 記 憶 이 있다. -- 만일 幕 府 末 明 治 初 외 그 숱한 人 材 를 한 平 面 에 놓고 組 閣 을 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 한다면, 首 相 에는 維 新 前 에 橫 死 한 藤 田 東 湖 를 앉힐 것이라고 했다. 水 戶 學 이라 불리던 日 本 國 學 의 이 巨 匠 은 學 者 로서만이 아니라 經 綸 家 로서의 커리어도 대단 했던 모양이다. 우연히 옛날 東 光 誌 를 들춰보다가 그 1931 年 1 月 號 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 것을 發 見 했다. 당시의 人 士 들을 網 羅 해서 新 聞 社 를 하나 새로 꾸며보면 어떤 陣 容 이 될까하는 想 像 下 에 당시의 東 亞 朝 鮮 中 央 每 日 各 紙 記 者 約 50 名 의 投 票 를 얻어본 것이다. 그 結 果 는 現 記 者 及 前 記 者 를 總 括 한 新 聞 人 內 閣 을 만든다면 社 長 감에 尹 致 昊 宋 鎭 禹 安 在 鴻 이라 했 고, 全 혀 新 聞 에 關 係 안해본 이 로 外 人 內 閣 을 만든다면 社 長 감에 呂 運 亨 安 昌 浩 라 했다. 말 이 新 聞 社 長 감이지, 總 督 府 治 下 의 그 維 誌 編 輯 者 의 意 圖 는 바로 大 統 領 감이나 首 相 감을 念 頭 에 둔 것일 것이다. 이 가운데, 어떤 이는 일찍 갔고, 어떤 이는 日 政 末 에 總 督 府 의 시달림으로 民 衆 의 信 賴 를 저버렸고, 어떤 이는 解 放 後 의 路 線 이 民 族 의 期 待 를 저버렸다. 지난 20일 古 下 宋 鎭 禹 선생의 遷 葬 된 墓 所 에서 墓 碑 除 幕 式 이 있었다. 解 放 되던 그해 12월 난데없는 信 託 統 治 說 로 全 國 이 발칵 뒤집혔던 그 渦 中 에서 兇 彈 을 맞고 쓰러진 뒤 20 餘 年 만인 昨 年 겨울, 원래의 幽 宅 이 었던 忘 憂 里 로부터 永 登 浦 區 新 亭 洞 으로 옮긴 것이다. 鄭 寅 普 선생의 撰 으로 된 墓 碑 原 文 첫머리 에 世 亂 之 久 士 患 不 自 樹 卽 矜 於 節 又 鮮 克 以 幹 獻 濟 其 兼 而 具 者 以 普 朋 遊 有 古 下 宋 君 (세상 어지러 움이 오랠수록 선비는 스스로 바로서지 못할까 근심하여 節 操 로 자랑을 삼으나 능히 經 綸 으로써 大 事 를 이루는 이 적은데 이 節 操 와 經 綸 을 兼 備 한 이로 내 親 舊 에 古 下 宋 君 이 있다)고 했다
151 節 操 와 經 綸, 指 導 者 로서의 要 件 을 한마디로 꿰어 뚫은 말이다. 解 放 이 되고 民 族 主 義 勢 力 이 集 結 될 때 衆 望 이 古 下 선생에게 그 首 領 되기를 願 했던 것도 바로 이 節 操 와 經 綸 에 대한 期 待 였을 것이다. 이 集 結 體 에 羅 列 된 구름같은 人 士 들을 훑어보면 解 放 後 심지어 오늘날까지의 우리 政 治 가 바로 여기를 最 大 의 淵 叢 으로 삼았음을 直 感 케 한다. 그 指 導 力 을 정작 獨 立 된 내 나라에서 펴보지 못한 것이 恨 스럽지만, 古 下 선생은 과연 一 代 의 巨 人 이었다. 39. 古 下 銅 像 除 幕 式 의 式 辭 集 (1) 古 下 宋 鎭 禹 先 生 銅 像 除 幕 式 을 가지며 1983년 9월 23일 銅 像 建 立 委 員 會 위원장 兪 鎭 午 평생을 항일 反 共 民 主 鬪 爭 에 몸바치신 古 下 宋 鎭 禹 先 生 의 유지를 전승하고자 銅 像 建 立 委 員 會 가 발기된지 반년만에 선생의 동상제막식을 거행하게 되니 실로 감격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고하 선생의 동상건립에 관한 소식이 보도되자 경향각지에서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각계각층에 서 뜻있는 인사들이 물심양면으로 지대한 성원과 지도를 해주셔서 오늘 선생의 동상을 제막하게 되었음은 실로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선 이 뜻깊은 일이 이처럼 결실된 데 대하여 국 민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고하 선생은 구한말에 출생하시어 신구학문을 닦으신 후 中 央 學 校 校 長 으로서 3 1운동의 조직 과 전개의 모체가 되어 靑 史 에 빛나는 回 天 大 業 의 구국운동과 민족정신 앙양의 일대계기를 만드 셨고 동아일보가 창간된 후에는 인촌 김성수 선생과 함께 이를 이끌고 일제 암흑기에 국내에 우 뚝 서서 이 겨레와 강토를 수호한 대표적 민족지도자이십니다. 이 시기에 선생은 민족교육 민족 언론 민족문화 및 민족상업의 기반을 다지면서 줄기차게 민립대학 건립운동 물산장려운동 선열유 족보존운동 문맹퇴치운동 한글맞춤법보급운동 과학 및 체육진흥사업 등 각종 계몽운동과 민족정기 함양을 위한 투쟁을 주도하시었고, 1931년 한 중 양민족을 이간하려고 일제가 조작한 저 만보산 사건 때에는 결연히 민족의 선두에 서서 민중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여 한 중 양민족간의 우 호에 손상됨이 없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를 위기에서 구출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선생이 앞장서서 추진하신 재외동포 위문 및 독립군과 애국지사의 지원 등은 모두가 오늘 날 발전된 조국이 있게 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해방 수일전 전후 4차에 걸쳐 일제의 政 權 移 讓 제의를 받자 선생은 민족자결의 원칙을 고 집하여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해방을 맞자 한국민주당을 領 導 하면서 광복조국의 공산화를 봉쇄하 고 신탁통치반대대책의 수립에 奔 忙 하시던 중 반민족적 폭력배의 저격으로 항일독립과 반공민주 로 일관된 생애를 마치셨으니 해방의 기쁨이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슬픔으로 바뀌어 민족을 鳴 咽 케 하였습니다. 선생의 그 굳은 지조, 웅대한 포부, 역사의 進 運 에 대한 탁월한 洞 察 力 과 애국정 신은 그분의 업적과 함께 우리 민족으로서 언제나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선생이 가신지 38년만에 그 어른의 동상을 이 어린이 대공원에 세워 뒤를 잇는 세 대에게 선생의 정신을 전하여 민족중흥과 조국 발전의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2) 追 慕 辭 1983년 9월 23일
152 尹 潽 善 오늘 古 下 宋 鎭 禹 先 生 의 동상을 제막함에 즈음하여 추념의 말씀을 드리게 되니 깊은 감회를 금 할 길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곳 어린이 대공원에 선생의 동상을 세워 자라나는 後 進 들에게 선 생의 빛나는 위업을 길이 전할 수 있게 된 것을 대단히 뜻깊은 일로 생각합니다. 고하 선생이 우리 민족에게 남기신 업적과 교훈을 이 자리에서 모두 열거할 수도 없고 몇가지 만 간추려 추념해보고자 합니다. 고하 선생은 일제 36년간 敵 治 下 에 국내에 남아서 숱한 고난을 당하시면서 민족의 진로를 개척 하셨습니다. 우리 항일투쟁사에 빛나는 전환점을 이룬 3 1운동 때에는 당시의 국내정세로 보아 도저히 불가 능하다고 생각됐던 각종 교육단체간의 제휴단결을 이룩하여 민족대동의 旗 幟 아래 항일투쟁을 할 수 있게 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 다름아닌 그 분이었습니다. 고하 선생은 바로 이 때문에 옥고를 치르신 후 1921년부터 일생의 盟 友 인 仁 村 金 性 洙 先 生 과 함께 동아일보를 이끌어 가면서 국내외에서 일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우리 민족에게 부단히 희망 과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선생은 1940년 동아일보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폐간될 때까지 4차 의 무기정간과 一 千 餘 回 의 압수 삭제 발매금지 등 실로 형언할 수 없는 가시밭길을 걸었던 것입 니다. 그사이 고하선생은 민족의 얼을 일깨우고 역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이충무공의 유적보존운동을 일으켜 牙 山 의 顯 忠 祠 와 閑 山 島 의 制 勝 堂 을 重 修 하였고 행주에 있는 권율 장군의 紀 功 祠 도 중건 하였습니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의 一 前 奏 曲 으로서 한민족과 중국인 사이를 이간시키려고 萬 寶 山 事 件 을 조작해서 허다한 화교의 인명과 재산에 대한 피해를 발생케 했을 때 선생은 이것이 일본의 간 악한 모략일 것임을 남달리 먼저 간파하고 연일 동아일보를 통하여 한국민중의 이성회복과 對 中 國 人 활동중지를 호소하는 한편 在 韓 華 僑 에게 따뜻한 위문품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국내의 이 러한 조치로 말미암아 60 萬 이 넘는 滿 洲 居 留 동포들에게 닥쳐올 중국인의 보복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선생은 또 당시 고등 및 전문학생들을 동원하여 문맹타파 운동을 벌여 국어보급에 盡 力 하였을 뿐만 아니라 朝 鮮 語 學 會 의 新 綴 字 法 을 동아일보에서 채용하여 한글 발전의 큰 계기를 마련하였습 니다. 1940년 8월 동아일보가 폐간된 후에는 稱 病 을 하고 일체 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일제의 패망직 전에는 총독부로부터 치안유지 등의 통치권한까지 맡기겠다는 교섭을 수차 받았으나 선생은 이것 을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권한을 넘겨줄 자격이 없는 패망자 일제의 손에서 무슨 권한을 받 겠느냐는 것입니다. 고하 선생의 굳은 지조와 높은 기개를 뚜렷하게 나타내주는 좋은 예라고 생 각됩니다. 千 辛 萬 苦 끝에 해방을 맞게 되자 국내상황은 광복의 기쁨에 들떠 안정과 질서를 잃고 있었으며 이 기회를 틈타 공산계열과 여기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환란을 조장했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이런 속에서도 고하 선생은 3 1운동의 법통을 이은 임시정부와 기타 외지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지사들의 귀국을 기다려 이들을 환영하는 國 民 大 會 準 備 會 를 결성하고 한편 自 由 民 主 陣 營 각 파의 애국지사를 규합하여 韓 國 民 主 黨 을 조직하고 그 수석총무가 되셨습니다. 이 한국민주당이 앞장서서 對 共 産 鬪 爭 을 전개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1945년이 저물어갈 무렵 모스코바 三 相 會 議 가 한국을 信 託 統 治 한다는 발표를 하자 이를 거부 하고 反 託 運 動 등 대책마련에 勞 心 하다가 반민족적 暴 力 徒 輩 의 흉탄에 殞 命 하셨습니다
153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참으로 아쉽고 통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고하 선생이 좀더 생존하셨더라면 그분의 역량과 지도력을 미루어 보다 크고 많은 업적을 이 나라에 남기셨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고하 선생이 가신지 38년, 선생을 흠모하는 국내외 인사들이 뜻과 성금을 모아 이제야 선생의 동상을 세우게 된 것이 비록 晩 時 之 歎 은 있으나 이 동상을 통하여 선생의 유지가 자손만대에 거 울이 되어 비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삼가 고하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3) 祝 辭 1983년 9월 23일 國 務 總 理 金 相 浹 우리 모두가 존경하고 추모해온 민족지도자이신 古 下 宋 鎭 禹 先 生 의 동상을 오늘 이곳 어린이 대공원에 모시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선생은 韓 末 국운이 위태로울 때 이땅에 태어나시어 한평생 항일 반공의 정신으로 나라의 自 主 獨 立 과 民 主 發 展 을 위하여 신명을 바치셨습니다. 선생은 일찍이 民 族 民 主 民 生 民 文 主 義 를 구국의 기본사상으로 삼고 일제치하에서 온갖 박해와 옥고를 겪으면서 민족의 독립투쟁을 주도하셨고 언론, 산업, 교육, 문화활동 등을 통하여 독립을 위한 민족의 힘과 얼을 기르셨습니다. 광복후에는 국내외의 국민역량을 총집결하여 공산주의자들의 赤 化 劃 策 을 물리치고 이 강토위에 자유민주국가를 건설하는 터전을 닦아나가시던 중 불의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선생은 특히 역사발전과 민족진운에 대한 예리한 洞 察 力 과 투철한 신념을 갖고 나라 위한 모든 일에 선각자로서의 지혜와 용기를 십분 발휘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선생의 높으신 유지를 받들어 민주독립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 그 위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균형된 성숙 발전을 이룩해 가고 있습니다. 이제 세계를 향하여 부끄럽지 않을 만큼 국력이 크게 신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국토는 여전히 남북으로 분단된 채 선생께서 걱정하시던 공산주의자들의 위협과 蠢 動 이 계속되고 있어 조국통일과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결의와 노력을 한층 강화해 나가야겠 습니다. 선생의 거룩하신 애국정신과 赫 赫 한 공적은 우리 앞길에 등불이 되어 길이 빛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동상을 우러러 볼 때마다 선생의 꿋꿋한 기상과 크신 유덕을 가슴속에 되새기며 보 다 자랑스러운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우리의 각오를 가다듬어 나갈 것입니다. 이 동상건설을 위해 애써주신 尹 潽 善 명예회장, 兪 鎭 午 위원장을 비롯한 각계 유지 여러분께 깊은 경의와 감사를 드립니다. (4) 關 係 記 事 - 古 下 宋 鎭 禹 선생 銅 像 국민성금으로 세우다. < 東 友 > 1983년 10월호 9월 23일 어린이 대공원서 1000여명 참석 抗 日 反 共 指 導 者 本 社 社 長 세차례, 서거후 38년만에 銅 像 除 幕 式 성대
154 抗 日 反 共 民 族 指 導 者 이시며 세차례에 걸쳐 本 社 사장을 역임하시다가 8 15해방 직후의 혼란기에 反 民 族 的 兇 漢 들의 저격으로 서거하신 古 下 宋 鎭 禹 先 生 의 銅 像 이 국민들의 뜨거운 성금으로 세워 져 作 故 38년만인 지난 9월 23일 오후 2시 서울 城 東 區 陵 洞 어린이 大 公 園 수영장옆 잔디광장에 서 성대한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尹 潽 善 兪 鎭 午 蔡 汶 植 金 相 浹 李 熙 昇 金 容 完 金 相 万 회장 참석 이날 제막식에는 尹 潽 善 전대통령을 비롯하여 蔡 汶 植 국회의장 金 相 浹 국무총리 高 在 淸 국회부 의장 등 3부요인과 兪 鎭 午 동상건립위원장 高 在 珌 건립위원회 부위원장 金 容 完 경방명예회장 전 본사사장이며 국어학자인 李 熙 昇 박사 金 相 万 본사명예회장 金 相 琪 본사 회장 吳 在 璟 본사 사장 宋 英 洙 본사 감사( 宋 鎭 禹 선생의 장남) 金 聖 培 서울시장 등 각계인사와 시민 등 1000여명이 참석했 다. 이날 제막식에서 兪 鎭 午 건립위원장은 식사를 통해 平 生 을 抗 日 反 共 民 主 鬪 爭 에 몸바치신 古 下 宋 鎭 禹 先 生 의 遺 志 를 전승하고자 銅 像 建 立 委 員 會 가 발기된지 반년만에 선생의 銅 像 除 幕 式 을 거행 하게 되니 실로 감격함을 금할 수 없다. 古 下 先 生 의 銅 像 建 立 에 관한 소식이 보도되자 京 鄕 各 地 에서는 물론 海 外 에서까지 각계각층에서 뜻있는 인사들이 物 心 兩 面 으로 지대한 성원과 지도를 해 주셔서 오늘 先 生 의 銅 像 을 제막하게 되었음은 실로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이 뜻깊은 일이 이처럼 결실된 데 대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 라고 말했다. 古 下 를 民 族 中 興 의 指 標 로 삼자 그는 이어 宋 鎭 禹 선생의 위대한 抗 日 反 共 民 主 鬪 爭 업적을 간략히 소개한 다음 古 下 는 抗 日 反 共 民 主 鬪 爭 에 평생을 몸바치셨고 특히 東 亞 日 報 가 창간된 후 仁 村 金 性 洙 선생과 함께 民 族 言 論 民 族 敎 育 民 族 文 化 民 族 産 業 의 발전을 위해 진력, 오늘날 발전된 조국이 있게 되는데 중요한 밑 거름이 되었다 고 말했다. 이어 그는 先 生 의 그 굳은 志 操, 웅대한 抱 負, 歷 史 의 進 運 에 대한 탁 월한 洞 察 力 과 愛 國 精 神 은 그분의 업적과 함께 우리 민족으로서 언제나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제 우리는 선생이 가신지 38년만에 그 어른의 동상을 이 어린이 大 公 園 에 세워 뒤를 잇는 세대에 게 선생의 정신을 전하여 民 族 中 興 과 祖 國 發 展 의 指 標 로 심고자 한다 고 말했다. 高 在 珌 동상건립부위원장의 경과보고와 金 相 万 본사명예회장의 古 下 선생 약력보고에 이어 참석 요인과 유족에 의해 동상이 제막되었다. 3 1 運 動 民 族 團 結 에 決 定 的 역할 이어 尹 潽 善 동상건립위원회 명예위원장은 추념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古 下 先 生 은 日 帝 36년간 敵 治 下 에 국내에 남아서 숱한 고난을 당하시면서 민족의 進 路 를 개척하셨다. 우리 抗 日 鬪 爭 史 에 빛나는 전환점을 이룬 3 1 運 動 때에는 당시의 국내정세로 보아 도저히 불가능하다 고 생각했던 각 종교단체간의 提 携 團 結 을 이룩하여 民 族 大 同 의 기치 아래 抗 日 鬪 爭 을 할 수 있게 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 다름아닌 그분이었다. 古 下 先 生 은 바로 이 때문에 옥고 를 치르신 후 1921년부터 일생의 盟 友 인 仁 村 金 性 洙 先 生 과 함께 東 亞 日 報 를 이끌어 가면서 국 내외에서 일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우리 민족에게 부단히 희망과 용기를 복돋아 주셨다. 선생은 1940년 東 亞 日 報 가 日 帝 에 의하여 강제폐간될 때까지 4차의 무기정간과 1000여회의 압수 삭제 발매금지등 실로 형언할 수 없는 가시밭길을 걸었던 것이다. (중략)
155 日 帝, 古 下 에 政 權 移 讓 交 涉 4차례, 資 格 없는 者 의 權 限 접수 단호거부 1940년 8월 東 亞 日 報 가 폐간된 후에는 稱 病 을 하고 일체 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日 帝 의 敗 亡 直 前 에는 總 督 府 로부터 治 安 維 持 등의 統 治 權 限 까지 맡기겠다는 교섭을 수차 받았으나 선생은 이것 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권한을 넘겨줄 자격이 없는 敗 亡 者 日 帝 의 손에서 무슨 권한을 받겠느 냐는 것이다. 古 下 선생의 굳은 志 操 와 높은 氣 慨 를 뚜렷하게 나타내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된다. 亡 命 人 士 환영 國 民 大 會 준비, 韓 國 民 主 黨 조직 首 席 總 務 로 해방직후의 혼란 속에서도 古 下 先 生 은 3 1 運 動 의 法 統 을 이은 臨 時 政 府 와 기타 外 地 에서 亡 命 生 活 을 하고 있던 志 士 들의 귀국을 기다려 이들을 환영하는 國 民 大 會 準 備 會 를 결성하는 한편 自 由 民 主 陣 營 각파의 愛 國 志 士 를 규합하여 韓 國 民 主 黨 을 조직하고 그 수석총무가 되셨다. 이 한국 민주당이 앞장서서 對 共 産 鬪 爭 을 전개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信 託 統 治 反 對 運 動 부심하시다 反 民 族 的 暴 力 徒 輩 의 저격받다 1945년이 저물어 갈 무렵 모스크바 三 相 會 議 가 韓 國 을 信 託 統 治 한다는 발표를 하자 이를 거부 하고 反 託 運 動 등 대책마련에 노심하시다가 반민족 폭력도배의 兇 彈 에 殞 命 하셨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참으로 아쉽고 痛 嘆 스러운 일이었다. 古 下 先 生 이 좀더 생존하셨더라면 그분의 역량과 지 도력으로 미루어 보다 크고 많은 업적을 이 나라에 남기셨을 것으로 확신한다. 古 下 先 生 이 가신지 38년, 선생을 흠모하는 국내외 인사들의 뜻과 성금을 모아 이제 先 生 의 銅 像 을 세우게 된 것이 비록 晩 時 之 嘆 은 있으나 이 동상을 통하여 선생의 遺 志 가 子 孫 萬 代 에 거울 이 되어 비출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삼가 古 下 先 生 의 冥 福 을 빈다 銅 像 보며 國 家 建 設 의지 다질 터 이어 金 相 浹 국무총리는 축사를 통해 고하선생은 특히 역사발전과 민족운동에 대한 예리한 洞 察 力 과 투철한 신념을 갖고 나라 위한 모든 일에 선각자로서의 지혜와 용기를 십분 발휘하셨다 고 말하고 우리는 이 동상을 우러러볼 때마다 선생의 꿋꿋한 기상과 크신 유덕을 가슴속에 되새 기며 보다 자랑스러운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우리의 각오를 가다듬어 나갈 것 이라고 말했다. 이어 바리톤 吳 鉉 明 교수의 고하추모의 노래에 이어 兪 鎭 午 건립위원장이 金 聖 培 서울시장에게 동상기부 채납증서를 전달했다. 古 下 銅 像 모자 들어 군중에 답례 이어 宋 英 洙 本 社 감사가 유족대표 인사를 통해 銅 像 建 立 에 애쓴 각계각층 인사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했다. 그리고 내빈들의 헌화와 中 央 高 等 學 校 악대의 주악으로 제막식은 끝났다. 이제 제막된 동상은 立 像 으로서 어린이 대공원 정문에서 왼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서있 으며 높이는 3.75m이다. 고하선생은 오른손에 중절모를 들어 군중들에게 답례하는 모습이며 왼손 에는 지팡이를 짚고 있다. 옷은 망토를 걸쳐입고 한복바지에 구두를 신었다. 고하선생은 안경을 쓰고 멀리 남서쪽을 향해 서울시가지를 응시하고 있다. 동상을 받치고 있는 좌대는 높이 3.9m로 화강암이며 좌대 밑부분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좌대 밑부분 앞쪽에는 李 承 晩 박사가
156 지은 輓 詩 가 새겨져 있다. ( 義 人 自 古 席 終 稀 / 一 死 尋 常 視 若 歸 / 擧 國 悲 傷 妻 子 哭 / 臘 天 憂 里 雪 霏 霏 =의인 은 옛부터 자기 명의 죽음이 드물고/한번 죽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마치 제집으로 돌아가듯 한다/나라안이 모두 슬퍼하고 처자도 우는데/섣달 망우리에는 눈만 부슬부슬 뿌리는구나) 좌대의 바닥면적은 약37평, 전체 부지면적은 77평이다. 銅 像 뒤 병풍석에 一 代 記 쓰고 병풍석 양쪽에 抗 日 反 共 조각새겨 동상 뒷켠에는 병풍석이 따로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2.6m 길이가 12.1m이다. 병풍석 중심에 烏 石 을 붙여 고하 송진우선생의 一 代 記 를 음각으로 깨끗이 刻 字 했다. 그리고 병풍석의 양쪽 끝에 조작이 있는데 오른쪽 조각은 선언서를 읽는 등 抗 日 救 國 鬪 爭 을 하는 장면이고 왼쪽 조각은 태극 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등 反 共 民 主 鬪 爭 을 하는 장면이다. 병풍석 뒷면에는 銅 像 建 立 委 員 會 위 원명단과 성금기부자명단 그리고 동산 건립경위 등이 새겨져 있다. 병풍석 뒤에는 나무숲이 아늑 하게 감싸고 있다. 고하선생의 동상설계 및 조각은 又 湖 金 泳 仲 씨가, 一 代 記 의 글씨는 創 玄 朴 鍾 會 씨가 각각 맡았다. 金 泳 三 씨 등 정계 학계인사 다수 참석 이날 제막식에 참석한 중요인사는 高 在 鎬 閔 寬 植 尹 致 暎 李 元 淳 李 應 俊 (이상 원로인사) 金 泳 三 前 신민당총재 李 泰 九 민한당부총재 李 鍾 贊 국회운영위원장 林 鍾 基 민한당원내총무 金 炳 午 金 判 述 李 世 基 趙 舜 衡 黃 明 秀 (이상 현직 국회의원) 高 泳 完 高 亨 坤 金 祿 永 金 東 英 金 相 欽 文 富 軾 柳 鴻 尹 宅 重 梁 會 英 李 相 敦 李 晶 來 李 重 載 全 禮 鎔 趙 漢 栢 陳 馨 夏 (이상 前 職 국회의원) 李 成 烈 대법원판사 李 淑 鍾 국정자문의원 安 椿 生 독립기념관건립위원장 尹 天 柱 전문교부장관 柳 炯 鎭 대한교련회장 權 彛 赫 서울대학교총장 車 洛 勳 전고대총장 玄 勝 鍾 전성균관대총장 金 元 基 高 大 교우회장 金 致 善 서 울법대학장 崔 承 萬 전인하대학장 張 志 良 전공군참모총장 申 秉 鉉 무역협회회장 金 龍 周 全 紡 회장 朴 仁 天 금호그룹회장 趙 錫 來 효성그룹회장 愼 鏞 虎 대한교육보험회장 玄 在 賢 동양시멘트사장 金 觀 鎬 옹( 前 동아일보사원) 詩 人 梁 相 卿 씨 등이다. 그리고 本 社 에서는 金 聖 悅 부사장 金 炳 琯 전무 朴 五 鶴 이사 등도 참석했다. 한편 許 政 씨와 白 樂 濬 씨는 비서를 보내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陳 懿 鍾 민정당의장 柳 致 松 민한당총재 金 鍾 哲 국민당총재 兪 泰 興 대법원장 鄭 周 永 全 經 聯 회장 등 각계요인 50여명이 화환을 보내왔다. 自 由 黨 末 期 부터 銅 像 建 立 논의 고하선생의 동상은 自 由 黨 政 權 末 期 때부터 그 건립문제가 논의되었다. 당시의 중심 인물들은 張 澤 相 金 俊 淵 崔 斗 善 高 在 旭 金 相 万 柳 鴻 씨 등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등으로 그 추진이 좌 절되었다. 그리고 共 和 黨 政 權 末 期 에도 東 亞 日 報 社 屋 을 신축하는 계획의 일환으로 東 亞 日 報 社 정 문에 仁 村 金 性 洙 선생과 古 下 宋 鎭 禹 선생의 동상을 나란히 세우자는 구상이 李 殷 相 金 容 完 柳 鴻 씨 등의 협력으로 활발히 논의되다가 그것도 여러가지 이유로 좌절되었다. 그러다가 82년말과 83 년초에 걸쳐 고하선생의 鄕 里 인 全 南 潭 陽 등 全 南 지역 인사들 사이에서 自 生 的 으로 고하선생의 동상을 光 州 근처에다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울에 있는 古 下 紀 念 事 業 委 員 會 (위원장대리 柳 鴻 )가 全 南 지역추진인사들과 동상건립문제를 긴밀히 협의 동상건립장소를 서울로 변경하기로 합의하고 지난 4월 2일 尹 潽 善 씨를 명예위원장, 兪 鎭 午 씨를 위원장, 高 在 珌 씨를 부위 원장으로 하는 古 下 宋 鎭 禹 先 生 銅 像 建 立 委 員 會 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157 社 會 葬 으로 망우리에, 新 亭 洞 에 移 葬 고하 송진우선생은 1945년 12월 28일 信 託 統 治 反 對 問 題 로 아놀드 美 軍 政 長 官 과의 회담에서 反 託 示 威 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臨 時 政 府 要 人 들과의 회합에서 반탁의 방법문제를 논의한 이틀후인 12월 30일 새벽 6시 韓 賢 宇 劉 根 培 등 反 民 族 的 兇 漢 6명의 狙 擊 으로 서울 苑 西 洞 자택에서 향 년 56세로 서거했다. 1946년 1월 5일 社 會 葬 으로 서울 忘 憂 里 共 同 墓 地 에 안장되었다가 66년 11 월 11일 崔 斗 善 高 在 旭 金 相 万 柳 鴻 등 同 志 後 輩 들의 발의로 서울 江 西 區 新 亭 洞 芝 香 山 기슭에 遷 葬 하고 이듬해인 67년에 墓 碑 를 세워 제막했다. 遺 族 은 장남 宋 英 洙, 손자 宋 相 現 한편 고하 송진우선생의 유족은 장남 宋 英 洙 (72세 동아일보사 감사) 손자 宋 相 現 (43세 서울 大 法 大 교수 법학박사) 손부 金 明 信 (36세) 증손 在 爀 (12세) 有 鎭 (10세) 등으로 단촐한 편이다. 특히 宋 相 現 교수는 서울 法 大 를 졸업한 후 美 코넬 大 學 에서 29세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宋 교수는 1965년 에 古 下 先 生 傳 記 編 纂 委 員 會 가 편집하고 東 亞 日 報 社 出 版 局 이 발행한 < 古 下 宋 鎭 禹 先 生 傳 >을 보 완발간하기 위하여 그동안 전국에 걸쳐 자료를 수집했다고 말하고 적당한 시기에 增 補 版 을 발행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5) 고하 송진우선생 추모의 노래 이 古 下 追 慕 歌 는 선생의 20 周 忌 추 모식에 즈음하여 지은 李 殷 相 의 詩 에 다 銅 像 除 幕 式 을 위하여 張 一 男 敎 授 가 曲 을 붙인 것임. 조국 되찾은지 스무 해 고하 가신지 스무 해 이 땅엔 비바람조차 어이 그리 많은 겁니까. 갈수록 흐린 세상이기에 갈수록 어둡기만 하기에 그 지조 아쉬워서 그 경륜 아쉬워서 여기 동지들 한데 모여 옛 모습 그리옵니다. 이 나라 바로 서는 길 이 겨레 편히 사는 길 행여 가르치심 받을까 하고 굳이 가르치심 받고 싶어서
158 40. 국립묘지 遷 墓 葬 儀 式 追 慕 辭 1988년 5월 3일 故 古 下 宋 鎭 禹 先 生 遷 墓 葬 儀 委 員 會 委 員 長 尹 潽 善 古 下 宋 鎭 禹 先 生 이 가신지 어언 43년, 그동안 忘 憂 里 의 초라한 共 同 墓 地 에 계시던 先 生 의 遺 該 를 新 亭 洞 芝 香 山 으로 遷 葬 한지 22년만에 다시 이곳 國 立 墓 地 에 옮겨 모시게 되었으니 在 天 의 英 靈 도 이제는 大 韓 民 國 과 더불어 永 久 히 安 柱 하실 곳을 얻으셨거니와 先 生 의 遺 德 을 추모하는 겨 레의 가슴에도 또한 安 堵 의 후련함이 깃들 것으로 믿어집니다. 우리 民 族 이 外 賊 의 쇠사슬에 신음하던 36년동안 先 生 이 先 知 先 覺 의 眼 目 으로 民 族 의 등불이 되고 棟 樑 이 되어 脈 을 이어 오신 일은 온 겨레가 다 알고 있는 바입니다마는 先 生 은 오직 祖 國 光 復 과 民 主 建 國 그 자체를 위하여 이세상에 태어나셨던 분이었습니다. 絶 望 과 無 知 와 貧 困 속에 헤메는 겨레의 품안으로 뛰어들어 日 帝 의 壓 迫 에 抗 拒 하고 겨레의 自 主 獨 立 을 위하여 先 生 이 이룩하신 온갖 業 績 은 愛 國 精 神 과 不 掘 의 鬪 志 와 偉 大 한 經 倫 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己 未 獨 立 運 動 을 計 劃 組 織 하시고 東 亞 日 報 의 總 帥 로서 그당시 形 態 없는 政 府 를 이끌면서 民 族 精 神 을 고취하는 동안 누차의 獄 苦 를 介 意 치 않고 가시밭길을 헤쳐나가신 先 生 은 정말로 獨 也 靑 靑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解 放 이 되자 衆 望 에 의하여 先 生 이 建 國 大 業 의 中 心 에 서시게 된 것은 事 理 의 必 然 이었습니다 마는 아깝게도 先 生 은 그 遠 大 한 抱 負 를 펴보시기도 전에 暴 漢 의 兇 彈 으로 世 上 을 떠나셨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습니까.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先 生 이 계시지 않음을 안타까워하고 先 生 의 지혜와 勇 斷 과 指 導 力 을 그리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하늘이 先 生 에게 좀더 壽 를 누리게 하였던들 우리 歷 史 는 더 많이 좋아졌을 것입니다. 先 生 이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를 아끼던 至 誠 은 九 泉 에서도 변할 까닭이 없습니다. 이제 이곳 銅 雀 洞 國 立 墓 地 양지바른 언덕에서 先 生 은 祖 國 이 힘차게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을 영원히 지켜 보실 것입니다. 同 志 後 輩 여러분들과 함께 先 生 의 冥 福 을 빌어마지 않습니다. 41. 南 北 의 對 話 < 東 亞 日 報 > ( ) (1) 混 亂 속의 統 一 運 動 -- 分 散 된 民 族 의 힘 (동아일보 ) 해방의 감격은 百 日 이 채 못돼서 分 裂 의 비극을 잉태한다. 그것은 共 産 黨 의 小 兒 病 的 左 傾 때 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오랫동안 日 本 帝 國 의 武 斷 植 民 政 策 으로 인한 民 族 主 體 勢 力 의 말살과 국민 의 政 治 的 無 知 無 能 때문이기도 했다. 또 해방의 그날까지 獨 立 운동의 제1선에서 싸웠던 훌륭했던 우리의 지도자들이 해방이란 政 治 的 眞 空 상태에는 충분히 대처할 힘을 組 織, 集 中 시키지 못한 지도자들의 미숙 때문이기도 했다
159 民 族 統 一 과 政 黨 統 合 운동이 실패한 원인에 관하여 현재 美 國 펜실바니아 大 學 政 治 學 副 敎 授 인 李 庭 植 씨( 政 治 學 博 士 )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다. - 編 輯 者 에게 귀지에 연재되고 있는 南 北 의 對 話 시리즈는 해방된 우리 弱 小 民 族 韓 國 人 들이 强 大 國 의 파워 폴리틱스 속에서 어느 進 路 를 걸어갔어야 했고 또 걸어가야 하느냐는 문제에 관해 유익한 시사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나의 의견으로는 당시 남한에서의 左 右 對 立 이 너무 심했다는 것 또 朴 憲 永 등의 共 産 黨 이 蘇 聯 軍 司 令 部 앞에 너무나 저자세였고 약했다는 것 등이 南 北 의 分 裂 을 조장한 국내적인 요소들이었 다고 봅니다. 또 古 下 宋 鎭 禹 등이 臨 政 의 國 際 的 인 위치와 실력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도 잘못 이었습니다. 國 內 에서는 臨 政 의 사정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臨 政 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 지요. 그 결과 古 下 의 마지막은 너무나 비통했습니다. 그런 뜻에서 李 仁 씨 등의 初 期 노력이 실패 한 것은 民 族 的 인 비극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夢 陽 呂 運 亨 이 좀더 강한 성격이었던들 사정이 달 라졌을 것입니다. 美 國 이나 蘇 聯 이나 확고한 對 韓 政 策 이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韓 國 指 導 者 들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이 左 右 로 갈라져 있었다는 것은 극히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해방전에도 左 右 를 망라한 統 一 戰 線 형 성을 위한 新 幹 會 운동이 있었고, 그 운동이 처음에는 성공했다가 共 産 主 義 者 들의 分 裂 행동으로 실패, 해방당시 左 右 가 分 裂 돼 있긴 했지만 해방후 左 右 가 大 同 團 結 할 수 있는 여지는 아직 있었 던 것입니다. 그러나 共 産 黨 재건파들은 해방후 左 右 合 作 이나 단결보다는 자기세력 확장에 주력하였고 특히 蘇 聯 軍 의 서울 進 駐 라는 데마(demagogy)로 광적인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小 兒 病 的 인 左 傾 을 범하 여 共 産 革 命 을 즉시 달성할 듯 날뜀으로써 온건한 우익 民 主 主 義 지도자로 하여금 그들을 소원하 게 하는 결과를 빚었던 것입니다. 이 노선은 以 北 의 共 産 黨 지도자들과 蘇 軍 政 司 令 部 까지도 잘못 이라고 비판했지만 그들 역시 미구에 같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물론 해방직후에 夢 陽 呂 運 亨 이나 民 世 安 在 鴻 이 古 下 宋 鎭 禹 의 협력을 구하였을 때 古 下 가 응 하였던들 左 右 의 분열이 격심해지지 않을 수 있지 않았느냐 또한 우익진영에서 夢 陽 과 협조했던 들 建 國 準 備 委 員 會 가 共 産 黨 과 협력하여 좌익 一 邊 倒 로 나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지 않았느냐 하 는 의문을 항상 품게 됩니다. 그런면에서 이미 南 北 의 對 話 시리즈에서 다룬 바와 같이 국내 지 도자들의 통일운동은 그 의의가 자못 컸습니다만 헤게모니 쟁탈욕망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쉽습 니다. 古 下 와 夢 陽 사이에는 思 想 的 見 解 의 차이, 人 間 性 의 차이, 海 外 亡 命 客 들에 대한 인식의 차 이 등과 對 抗 의식이 격심하여 協 和 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臨 政 이 귀국할 때까지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臨 政 을 받들어야 한다 는 古 下 의 持 論 은 물론 수긍할 수 있으나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서 臨 政 이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수 있었던 가요. 결과적으로 古 下 자신도 그의 持 論 을 굽히고 韓 民 黨 조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지 않았습 니까. 우익의 보이코트로 夢 陽 은 共 産 黨 측과 더욱 가까워졌다는 理 論 이 설 수도 있기는 하나 夢 陽 자 신의 과거 親 分 관계로 볼 때 그는 역시 共 産 측과 同 調 할 수 있는 점이 많았습니다. 더욱이 남북의 대화 시리즈 二 十 九 回 에서 밝힌 것처럼 夢 陽 은 엔도( 遠 藤 ) 政 務 總 監 으로부터 蘇 聯 軍 이 漢 江 以 北 을 점령하여 통치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共 産 黨 과의 밀접한 관계수립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그의 성격으로 보아 첩첩이 그를 둘러싼 共 産 黨 간 부들의 농간을 물리치고 독자적인 노선을 세워 나가기에는 그는 너무나 好 人 이었고 약한 인간이 었습니다. 그 결과 建 準 은 점차로 共 産 黨 의 도구가 됐고 民 世 安 在 鴻 마저 二 十 일만에 副 委 員 長 을
160 辭 任 하고 이탈하게 됐으며 그 직후인 九 월 六 일에는 共 産 黨 의 압도적 우세 아래 소위 人 民 共 和 國 이 선포됐습니다. 이 인공 이란 단체는 아무런 理 論 的 인 法 的 인 뒷받침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인공 의 설립은 朴 憲 永 의 共 産 黨 이 범한 小 兒 病 的 인 左 傾 오류중에서 가장 큰 오류였습니다. 이 인공 의 설립으로 朴 憲 永 휘하의 再 建 派 共 産 黨 은 長 安 派 共 産 黨 에 의해 오랫동안 신랄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인공 이 설립된 며칠후 共 産 黨 평남지구확대위원회가 채택한 강령에서 첫째로 人 民 代 表 會 議 를 소집하 여 人 民 共 和 國 을 수립한다 고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소련 軍 政 당국도 서울에서 急 造 된 인공 을 승인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연합니다. 어떻든 이 인공 선포는 左 右 세력간의 對 話 또는 協 商 의 가능성이 아주 없어졌다는 것을 또한 선포한 상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分 裂 된 가운데 平 壤 에 주둔한 소련 軍 政 당국은 그들의 필 요에 따라 朴 憲 永 의 共 産 黨 을 지지함으로써 南 北 韓 의 分 裂 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만일 이무렵 소련 軍 政 당국이 朴 憲 永 의 共 産 黨 이 범하는 小 兒 病 的 인 左 傾 오류를 배척하고 그를 제거하여 온건 한 노선을 명령하였다면 정세는 급격히 호전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國 家 를 가져보지 못한 韓 半 島 의 悲 劇 은 꿈같은 國 際 共 産 主 義 의 환상을 심기에 알맞은 풍토를 제공했고 이런 여건아래 朴 憲 永 의 共 産 黨 은 新 生 獨 立 國 家 의 형태와 성격을 共 産 革 命 으로만 한정 한 가운데 李 承 晩 이나 金 九 의 統 一 統 合 운동까지도 분열로 맞서버렸다. 해방과 더불어 날뛰던 共 産 主 義 者 들을 수수방관함으로써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갔던 共 産 黨 세력 을 방치했던 것은 분명 宋 鎭 禹 등 국내 民 族 진영인사들의 커다란 잘못이었다. 朝 鮮 總 督 府 가 과연 民 主 主 義 진영 인사들에게 진정으로 政 權 引 受 를 요청하였는지의 여부에 관해 서는 아직 객관적 자료가 불충분하다. 그러나 朝 鮮 總 督 府 의 政 權 引 受 요청이 있었는데도 이를 거 부했다면 이는 해방후 최초의 政 治 的 이니시어티브를 오히려 呂 運 亨 과 共 産 主 義 者 들에게 스스로 넘겨준 民 族 진영 지도인사들의 소극적 수동적 보수적 성격이 저지른 잘못이었다고 볼 수 있다. 民 族 진영 인사들은 해방 당시 韓 半 島 의 北 端 에 이미 소련 軍 이 진주하고 있었다는 것, 그 소련 軍 은 곧 韓 半 島 를 석권할 기세였다는 것, 게다가 소련 軍 이 漢 江 이북을 점령할 것이라는 풍문이 나도는 가운데 정세를 방관하기만 함으로써 가장 중요했던 해방후 몇주간을 그냥 보내버렸을 것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편 이 무렵의 政 治 人 들은 南 北 分 斷 문제에 관하여 사려깊은 대책을 강구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宋 鎭 禹 등 韓 民 黨 이나 그후 李 承 晩 金 九 도 해방전에는 긴밀한 연락을 유지해왔던 曺 晩 植 등 北 韓 의 민족지도자들과의 공동보조를 취하기 위한 협의를 게을리 했을 뿐만 아니라 北 韓 의 민족지 도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政 黨 통합운동에 있어 李 承 晩 과 金 九 는 물론 朴 憲 永 의 共 産 黨 까지도 해방 2개월만에 北 韓 의 실력자로 등장한 金 日 成 이란 蘇 聯 軍 政 의 괴뢰, 그리고 金 枓 奉 武 丁 崔 昌 益 등 中 國 延 安 에서 들어온 獨 立 同 盟 계 인사들을 주목하지는 아니했고 그들을 포함한 民 族 統 一 과 政 黨 통합을 위한 左 右 또는 南 北 의 對 話 를 시도해 보려하지 않았다. 南 韓 에서의 政 黨 統 合 운동이 혼란을 거듭하고 있을 동안 北 韓 에서는 金 日 成 의 體 制 가 점차 굳어 지면서 南 北 의 左 右 政 黨 과 政 治 지도자들은 韓 半 島 를 分 斷 한 美 蘇 의 兩 極 化 體 制 에 말려들었고 그 결과 韓 民 族 의 內 的 政 治 力 을 集 中, 極 大 化 시켜 美 蘇 에 의한 영향력을 極 小 化 내지는 中 立 化 시키 지 못함으로써 韓 民 族 을 分 斷 이라는 民 族 的 悲 劇 에 휘말리게 했다. (2) 混 亂 속의 統 一 운동 에 대한 意 見 柳 鴻
161 貴 紙 에 揭 載 中 인 南 北 의 對 話 1972년 1월 13일자 41회 記 事 混 亂 속의 統 一 運 動 題 下 의 內 容 에 대하여 몇마디 異 見 을 提 示 하고자 한다. 全 記 事 中 東 美 펜실베니아 大 學 副 敎 授 인 李 庭 植 博 士 에 依 하면 1. 古 下 宋 鎭 禹 等 이 臨 政 의 國 際 的 인 位 置 와 실력을 너무 過 大 評 價 했던 것도 잘못이었습니다. 國 內 에서는 臨 政 의 사정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臨 政 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지요 云 云 한 句 節 이 있다. 解 放 直 後 古 下 가 政 黨 결성에 앞서 우선 國 內 에서 各 界 各 層 의 人 士 를 모아 國 民 大 會 準 備 會 를 구 성하고 臨 政 을 위시하여 海 外 에 亡 命 中 인 獨 立 運 動 者, 志 士 의 還 國 을 迎 接 하는 준비를 하고 환국 후에 國 民 大 會 를 가져 國 家 民 族 의 向 方 을 결정하려 한 것은 古 下 가 臨 政 의 사정에 어두워서 한 것이 아니라 3 1운동의 主 動 勢 力 이었던 古 下 나 그 同 志 들은 臨 政 이 3 1운동의 소산이므로 사실상 그 法 統 을 간직하고 이어나오고 있었던 것이요 또 그래야만 한다는 歷 史 的 觀 點 에서 臨 政 을 지지 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는 古 下 의 臨 政 의 法 統 에 대한 의리에서 뿐만아니라 어려운 日 政 의 탄압 하에서도 國 內 에서 獄 苦 등 苦 難 을 치른 志 士 들을 대접했듯이 海 外 亡 命 中 의 先 輩 나 同 志 를 대접 하고자 하는 古 下 의 人 品 의 一 端 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兼 하여 이는 國 內 外 의 指 導 者 를 網 羅 한 民 族 의 總 力 量 을 集 結 하여 建 國 에 當 하려고 한 古 下 의 政 治 的 識 見 을 말한 것으로서 評 價 되어야 할 것이다. 李 博 士 의 見 解 는 이러한 3 1운동과 臨 政 과의 關 係 를 歷 史 的 眼 目 에서 綜 合 的 으 로 考 察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誤 謬 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까닭에 解 放 前 出 獄 後 指 導 者 로서 그 處 世 가 탐탁지 못했고 臨 政 의 法 統 마저 否 認 하려 하 던 夢 陽 과 合 作 이 근본적으로 어려운 것은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욱이 建 準 發 足 직전 共 産 革 命 의 길로 一 路 邁 進 할 것을 公 言 한 夢 陽 과 合 作 이 不 可 能 하다는 것은 再 言 할 必 要 도 없다. 日 政 時 出 獄 後 夢 陽 의 處 世 가 탐탁지 않았다는 것은 가장 寬 大 한 人 士 들의 말을 빌린다 할지라도 그 당시로서는 夢 陽 에게는 不 可 避 한 일이고 人 間 的 이라고 할는지 모르나 民 族 的 指 導 者 로서는 그 處 世 나 態 度 가 一 般 이 首 肯 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는 것은 左 右 를 莫 論 하고 國 內 指 導 階 級 의 人 士 들은 大 體 로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企 業 經 營 에 才 略 과 經 驗 이 不 足 한 關 係 인지 당시 中 央 日 報 社 長 으로서도 成 功 을 거두지 못했고 그후 日 本 東 京 滯 在 時 나 歸 國 後 日 政 이 國 內 指 導 者 를 한 올가미로 묶어서 戰 爭 에 直 接 間 接 으로 協 力 利 用 하려고 만든 소위 時 局 對 應 思 想 報 國 聯 盟 ( 後 日 의 保 導 聯 盟 ) 에 대한 協 調 的 態 度 라 든지 등등을 고려해 볼 때 中 國 에 滯 留 時 에 國 內 에서 빛났던 往 年 의 名 聲 과 人 氣 는 찾아보기 어 려웠던 것이다. 오직 向 方 을 모르던 若 干 의 젊은 靑 年 學 生 層 에게 人 氣 를 유지했던 이유는 그 能 辯 과 靑 少 年 과 잘 어울리는 소탈한 점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建 準 發 足 直 後 8월 17일 來 訪 하여 古 下 에게 協 力 을 請 한 夢 陽 에게 古 下 가 간곡히 海 外 亡 命 同 志 들의 還 國 後 에 建 國 準 備 를 하고 그때가면 古 下 는 夢 陽 을 적극 추대하겠다고 거듭 말한 것을 보아도 古 下 가 3 1운동의 法 統 을 이은 臨 政 과 其 他 亡 命 中 의 여러 政 客 의 歸 國 을 기다려 內 外 指 導 者 가 한데 뭉 친 힘으로 建 國 方 向 을 設 定 하려던 것은 充 分 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夢 陽 의 建 準 은 發 足 한지 20일 內 外 간에 人 共 을 만들어 그 性 格 과 進 路 를 뚜렷이 한 바 있다. 여기에 이르러 建 準 이 애당초 내세운 名 目 과는 달리 急 히 左 傾 함을 우려하고 또 自 己 名 義 등까지 盜 用 當 한 바도 있던 金 炳 魯, 白 寬 洙, 李 仁 등 諸 氏 가 夢 陽 을 찾아 數 次 에 걸쳐 그가 建 準 發 足 以 來 言 明 한 民 族 總 集 結 體 的 代 表 機 關 이란 內 容 을 名 實 相 符 한 體 制 로 할 것, 卽 構 成 委 員 數 에 있어 서 民 族 共 産 兩 陣 營 中, 民 族 陣 營 側 의 數 를 보다 많은 比 率 로 按 配 할 수 없다면 最 少 限 度 로 左 右 同 數 로라도 構 成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忠 告 가 있었다. 그러나 面 談 時 에는 이를 同 意 한 夢 陽 은, 그때마다 번번히( 二 次 ) 自 己 가 言 約 한 바를 背 信 하였으니, 이에 民 族 主 義 者 와 建 準 은 完 全 히 訣 別 하게 되었던 일, 이에 분개한 民 世 安 在 鴻 도 이때를 前 後 하여 建 準 을 離 脫 하고 말았다
162 古 下 도 夢 陽 도 다 이 세상을 떠난 後 日 에 와서 史 學 者 나 政 治 學 徒 들이 3 1운동의 歷 史 的 意 義 와 8 15 解 放 직후의 民 族 陣 營 의 指 向 方 法 이나 努 力 은 비교적 간단히 無 視 抹 殺 해버리려는 대신 共 産 陣 營 에서 夢 陽 을 前 面 에 내세우고 自 派 中 心 의 革 命 을 推 進 하던 結 果 만을 높이 評 價 하던 그대로 의 論 調 나 態 度 는 公 正 을 잃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유독 夢 陽 에 寬 大 한 것은 역시 共 産 主 義 者 들의 行 蹟 에도 寬 大 한 것을 意 味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다음에 李 庭 植 博 士 는 물론 해방직후 夢 陽 의 協 力 要 請 에 古 下 가 應 하였던들 左 右 分 裂 은 격심해지지 않을 수 있고 右 翼 陣 營 에서 夢 陽 과 協 調 했던들 建 準 이 共 産 黨 과 協 力 하여 左 翼 一 邊 倒 로 나가는 것을 防 止 할 수 있지 않았느냐, 統 一 운동이 헤게모니 쟁탈욕망에 실패했고 古 下 와 夢 陽 사이 思 想 的 見 解, 人 間 性, 亡 命 客 들에 대한 認 識 等 의 諸 差 異 에다 對 抗 意 識 이 격심하여 協 和 를 이루지 못했다 云 云 하는 대 목을 羅 列 했다. 그러나 李 博 士 에게 世 界 어느 나라에서 共 産 主 義 者 가 民 族 主 義 者 와 協 和 해서 政 府 를 이룬 例 를 본일이 있는가를 묻고 싶다. 建 準 發 足 직후 夢 陽 이 來 訪 하였을 때 古 下 에게 古 下 가 나를 페탕이나 라우렐이라고 했다는데 사실이요? 하고 質 問 을 했다. 古 下 는 이에 대해서 서슴지 않고 夢 陽 은 共 産 主 義 者 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共 産 革 命 으로 적극 추진할 것을 主 張 하고 또 이미 敗 亡 하여 政 權 을 누구에게도 주고 말고 할 수 없는 日 政 에서 政 權 을 받는 것은 페탕이나 라우 렐과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이오. 더욱이 日 軍 이 降 伏 하기까지는 軍 警 의 힘은 日 政 에 있지 않소? 하고 준절하게 警 告 를 兼 한 忠 告 를 하였던 일이 있다. 여기서 古 下 가 말했듯이 夢 陽 이 朝 鮮 總 督 府 로부터 선뜻 政 權 을 引 受 하여 페탕으로 轉 落 하는 경솔을 저질렀고 金 炳 魯 氏 等 과 言 約 에 대한 背 信 態 度 로 보아 民 族 陣 營 의 協 調 를 事 實 上 眞 心 으로 求 하지 아니하였던 것도(사실 못했던 것인 지 모르나) 사실이다. 民 族 陣 營 의 一 部 勢 力 을 代 表 한다고 믿고 協 力 出 發 했던 民 世 마저 建 準 을 離 脫 하게 되고 進 駐 한 美 軍 까지도 建 準, 人 共 을 인정하지 않는데 이르러서는 더욱 말할 必 要 가 없 다. 꼭 政 權 을 引 受 하고 따라서 權 力 을 잡은 줄 알었던 夢 陽 의 경솔과 識 見 이 얼마나 短 見 이였던 가를 여기에 여지없이 露 出 하고 만 것이다. 李 博 士 가 말한 바와 같이 美 側 의 對 韓 國 方 針 도 뚜렷한 것이 아니었다면 夢 陽 이 政 權 樹 立 을 밀 고 나갈 수 있는 機 會 라고 보는 것은 현실과 距 離 가 먼 것이었음을 말해준 것과 다름이 없을 것 이다. 여기에 이르자 夢 陽 은 共 産 黨 마저 離 脫 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더욱 共 産 黨 과 密 着 하게 되었고 따라서 朴 憲 永 등의 南 勞 黨 주류파에 발목이 잡혀서 진퇴유곡의 형편에서 공산당을 代 辯 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후 얼마되지 않아 할 수 없이 共 産 黨 에서도 갈려 나왔다는 사실이 이 를 證 明 하고도 남는다. 革 命 의 目 的 達 成 을 위해서는 그 手 段 과 方 法 을 가리지 않는 共 産 黨 이라면 모르되 百 步 를 양보해서 夢 陽 을 共 産 主 義 者 가 아니라 하더라도 前 記 한 바와 같이 解 放 前 出 獄 後 의 處 世 나 解 放 後 여러가지로 그가 저지른 過 誤 에 대해서는 歷 史 가 그것을 嚴 正 히 가려내겠지만 이러한 見 地 에서 볼 때 夢 陽 은 指 導 者 로서의 識 見 等 에 있어서 古 下 와 同 一 線 上 에서 評 價 될 수는 없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李 博 士 가 民 族 分 裂 의 責 任 을 夢 陽 의 協 調 要 請 에 不 應 한 古 下 에게 主 로 돌리고 있는 것은 公 正 한 見 解 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되풀이하거니와 夢 陽 이 戰 爭 에 完 敗 하고, 우리 領 士 를 不 法 强 占 해서 아무 資 格 이나 權 限 도 없는 日 政 에게서 權 力 을 넘겨받았으나, 美 軍 은 進 駐 前 에 撤 布 한 삐 라를 통하여 進 駐 時 까지는 日 軍 警 이 治 安 을 확보하라고 指 示 하였다. 이렇듯 建 準 이 完 全 히 無 視 當 함으로써, 自 己 自 身 이 虛 空 에 뜨게 된 夢 陽 은 그의 政 治 的 인 立 場 을 挽 回 하고자 共 産 黨 과 악 수하는 등 갈팡질팡 하지 않을 수 없었다. 夢 陽 이 빚어낸 混 亂 에 古 下 가 夢 陽 의 背 信 을 감당하면
163 서까지 同 調 해야만 混 亂 이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인가? 몽양의 短 見 에 비하면 3 1운동 以 來 自 己 의 位 置 를 지켜오면서 解 放 까지 刻 苦 受 難 의 길을 걸어 오면서 民 族 의 指 導 者 로서 極 左 派 共 産 黨 을 제외하고는 臨 政 을 포함한 海 外 모든 民 主 勢 力 을 포 섭하려 했던 古 下 의 經 論 과 手 腕 에 대하여 후세 史 家 의 보다 公 正 한 批 判 이 있어야 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욱이 古 下 는 기회가 오면 夢 陽 을 지도자로 추대할 용의가 있음을 여러번 말할 바 있으니 兩 人 間 에 헤게모니 쟁탈싸움 云 云 은 語 不 成 說 이 아닐 수 없다. 덧붙여 말한다면 夢 陽 이 出 獄 後 中 央 日 報 社 長 時 代 부터 解 放 까지 古 下 가 그를 아끼고 여러모로 協 調 한 바는 크다해야 할 것이다. 가령 百 步 를 양보하여 古 下 와 그 同 志 들이 建 準 에 協 調 하고 갔다면 당장 一 時 約 으로는 表 面 上 協 和 비슷한 양상이 이루어졌을는지 모르나( 混 亂 을 일으킬 거리가 一 時 나마 없어지니까) 이는 결 코 持 續 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오히려 共 産 黨 의 宣 傳 材 料 에 效 果 를 더해줄 뿐, 民 族 陣 營 은 支 離 滅 裂 하여 큰 敗 北 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左 右 合 作 의 이름아래 試 圖 한 여러나라의 共 産 革 命 史 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多 幸 히 古 下 의 巨 視 的 이요 透 視 的 인 判 斷 이야말로 民 主 主 義 및 民 族 勢 力 의 命 脈 을 계속케 했고 難 局 에 對 處 하는 指 針 을 밝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국내에서 는 오직 古 下 한사람 밖에 없었다 해도 過 言 이 아닐 것이다. 古 下 와 夢 陽 의 人 間 的 인 다른 差 異 는 且 置 하고라도 對 抗 意 識 이 격심 云 云 은 李 博 士 만의 解 釋 에 그치기를 바란다. 古 下 가 作 故 한 後 에 一 部 新 聞 人 中 에는 美 軍 進 駐 후에야 國 民 大 會 準 備 會 를 發 會 하는 것은 古 下 가 비겁해서 그러한 것이라고 하는 訛 傳 까지도 公 公 然 히 돌고 있기 때문이다. 共 産 化 를 막기 위해서는 反 共 鬪 爭 은 不 可 避 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 후에도 夢 陽 의 追 從 者 인 一 洲 金 振 宇 등은, 夢 陽 의 뜻을 받들어 古 下 에게 夢 陽 과 合 作 할 것을 書 面 이나 또는 面 談 等 으로 공갈 脅 迫 을 兼 한 要 請 을 하였을 때에 古 下 는 毅 然 한 姿 勢 로, 夢 陽 이 共 産 黨 과 손을 끊고 나설 것과, 그러한 文 書 에 署 名 捺 印 하고 態 度 를 明 示 하면 이를 고려할 수도 있다고까지 應 酬 했던 것이다. 3. (가) 조선총독부가 과연 民 族 陣 營 人 士 들에게 진정으로 政 權 引 受 를 要 請 하였는지 與 否 에 관 해서 아직 客 觀 的 資 料 가 不 充 分 하다 는 것과 (나) 그러나 총독부의 政 權 引 受 要 請 이 있었는데도 이를 거부했다면 이는 最 初 의 政 治 的 이니시어티브를 呂 氏 와 共 産 黨 에 스스로 넘겨준 民 族 陣 營 指 導 人 士 들의 소극적 수동적 보수적 성격이 저지른 잘못이었다고 볼 수 있다 云 云 하는 두가지 점에 대하여는 後 者 에 대해 보다 充 分 한 解 明 이 必 要 하다. 李 博 士 와 동일한 見 解 를 갖는 것은 이러한 見 解 를 갖는 部 類 人 士 들의 自 由 일 수 있겠기에 이를 잠깐 미루기로 한다. 우선 前 者 의 경위에 대해서는 古 下 가 8월 11일부터, 여러차례 政 權 引 受 交 涉 을 받았지만, 이를 拒 絶 하자 그 다음으로 朗 山 金 俊 淵 이 8월 14일에 生 田 京 畿 道 知 事 로부터 交 涉 을 받은 바가 있었음은 古 下 傳 記 나 朗 山 이 남긴 여러 文 獻 에도 이미 記 錄 된 바이고, 古 下 殺 害 犯 人 公 判 記 錄 等 을 들추어보더라도 客 觀 的 資 料 不 足 云 云 은 不 可 解 일 뿐만 아니라 攻 擊 과 否 認 만 을 일삼는 人 士 의 말로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더구나 조선총독부가 과연 진정으로 民 族 主 義 陣 營 에 政 權 引 受 를 요청하였는지 云 云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李 博 士 는 무슨 資 料 에 依 하여 言 及 한 것인지는 學 者 로서의 良 心 과 公 正 을 喪 失 한 態 度 라고 밖에 볼 수 없다. 日 政 은 敗 戰 氣 色 이 짙어지자 오래전에 총독부 內 務 局 長 을 지낸 바 있는 老 退 役 官 吏 를 조선의 首 都 行 政 首 班 인 京 畿 道 知 事 로 再 起 用 하여 日 本 이 降 伏 後 예상되는 混 亂 狀 態 를 收 拾 하는 責 任 을 맡겼던 것이며, 이 老 獪 한 官 僚 인 生 田 (이꾸다)는 自 己 들 손에 統 治 權 이 있는 것인지의 分 別 도 못 하고 政 權 引 受 를 말했을 리가 없지 않는가. 古 下 는 名 分 上 으로도 그렇지만 또한 그들이 一 時 的 危 機 를 糊 塗 하려는 술책임을 看 破 했던 까닭 에, 引 受 를 끝까지 拒 否 했고, 夢 陽 은 無 分 別 하게 덤벼들어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그로 인한 混 亂 마저 李 博 士 로 하여금 古 下 에게 混 亂 의 責 任 所 在 를 묻게 하는 것은 크게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
164 다. 一 生 에 걸쳐 日 本 必 亡 을 確 信 하고, 그것을 信 念 처럼 간직하고 있던 古 下 는 解 放 되기 오래 전 부터 國 內 同 志 들에게, 日 本 이 危 險 해지면 조선에 自 治 를 준다고 달랠 것이고, 더 窮 地 에 빠지면 獨 立 을 준다고 꾀일 것인데 그때가 가장 어려운 때일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政 權 引 受 를 拒 絶 한 경위가 自 然 的 으로 짐작될 것이다. 古 下 殺 害 事 件 公 判 廷 에서 證 人 으로 出 席 한 民 世 의 陳 述 에 古 下 夢 陽 이 合 作 하였다면 解 放 後 混 亂 은 좀더 적었을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建 準 初 創 時 에 적극 協 助 했던 民 世 로서 는 있음직한 말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當 時 의 左 翼 과 많은 言 論 人 들이 즐겨 내세우던 이야기 다. 심지어는 一 部 實 業 人 및 바로 얼마전까지 日 政 의 宣 傳 에 同 調 하여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들 도 自 意 이건 他 意 이건, 共 産 黨 의 교활한 宣 傳 에 同 調 까지 하였다. 極 左 共 産 黨 을 相 對 로 反 共 鬪 爭 을 뚜렷이 한 古 下 와 그가 組 織 한 國 民 大 會 準 備 會 나 韓 民 黨 에 대한 中 傷 謀 略 과 攻 擊 을 일삼아야만 소위 知 識 人 으로 行 勢 할 수 있다고 한 虛 僞 와 悲 劇 을 20여년 을 지난 今 日 에도 間 間 히 類 似 한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과연 이러한 誤 謬 와 虛 僞 가 내 民 族 과 내 國 家 를 위해 知 識 人 으로의 옳은 姿 勢 라고 봐야 할 것인가. 혹은 이같은 妄 動 은 참으로 所 謂 知 識 人 의 自 己 滿 足 에서 나오는 無 責 任 한 言 動 인지, 또 그래야만 南 北 統 一 의 실마리라도 풀리는 길이 되는지 分 別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내 나라 民 族 의 不 幸 을 걱정하는 立 場 에서의 見 解 라면 事 實 의 發 生 經 緯 와 背 景 等 에 대한 분명하고 公 正 한 判 斷 이 있어야 할 것이며, 政 權 引 受 문제에 있어서는 세밀한 觀 察 이 있어야만 마땅할 것이다. 하물며 爭 取 아닌 授 與 라는 卑 屈 하기 짝이없는 方 法 에 있어서랴. 4. 宋 鎭 禹 等 韓 民 黨 이나 그후 李 承 晩 金 九 도 曺 晩 植 등 北 韓 민족지도자들과 共 同 步 調 를 취하 기 위한 접촉을 게을리 했고 北 韓 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고 李 博 士 는 말하고 있다. 解 放 直 後 古 下 는 平 壤 의 古 堂 曺 晩 植 과 비교적 緊 密 한 연락을 가졌었다. 8월 16일 古 堂 等 으로 부터 古 下 에게 電 話 가 걸려 왔고, 그 內 容 은 平 南 道 知 事 가 治 安 行 政 을 맡으라 하는데 古 下 의 意 見 如 何 를 물어왔을 때 古 下 는 民 衆 大 會 를 열어서 委 任 을 받는 形 式 을 취하도록 하지 日 人 으로부 터 直 接 行 政 權 을 맡지 않을 것이며 연합군 入 國 까지 治 安 을 維 持 하는 程 度 로 가는 것이 좋겠다 는 自 己 意 見 을 말했던 것이다. 또 古 堂 의 同 志 인 吳 胤 善, 金 東 元 等 과 그 家 族 들이 많은 危 險 을 무릅쓰고 古 下 와 연락차 往 來 하였던 것이다. 소련 軍 이 進 駐 한 8월말 9월초부터는 往 來 도 어려워 졌고 勿 論 公 公 然 한 연락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結 果 的 으로 보아 연락이 杜 絶 된 것은 노력이 부 족하고 게을리 했다는 責 任 을 묻게 될 경우 그러한 解 釋 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26, 27 년이 지난 오늘날의 여러 與 件 을 기준으로 해서 보아도 李 博 士 의 見 解 에 全 的 으로 首 肯 이 가지 않는다. 後 日 에 와서 歷 史 的 인 悲 劇 과 失 策 을 빚어낸 責 任 을 누구에겐가 지워야하겠다는 前 提 라면 더욱 이 國 內 民 族 指 導 者 에게 지울 수는 없다고 본다. 그것은 弱 小 民 族 인 韓 國 人 이 어떠한 觀 點 에서도 强 大 國 간의 政 策 的 흥정물이 되지 않을 수 없는 處 地 에는 더욱 그렇다. 北 韓 에서 소련군이 自 己 目 的 을 迅 速 히 달성하기 위하여 강력한 뒷받침을 하여 밀어준 金 日 成 政 權 과 美 軍 進 駐 後 3개월 후에야 겨우 民 族 陣 營 에는 新 聞 出 版 을 許 容 할 程 度 의 美 軍 政 府 의 施 策 사이에 處 하여 古 下 等 民 族 陣 營 指 導 者 들의 苦 衷 이 얼마나 甚 大 하였던 가는 一 顧 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참으로 理 解 하기 어렵다. 5. 끝으로 筆 者 는 歷 史 學 者 도 아니고 더구나 政 治 學 者 가 아니다. 오직 解 放 前 後 國 內 에서 古 下, 夢 陽, 民 世, 李 承 晩 等 여러 政 治 的 指 導 者 를 實 地 로 접하며 보아온 사람으로서 그중에서도 古 下 의 周 邊 을 잘 아는 한사람으로서 祖 國 의 解 放 과 分 斷 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것을 體 驗 한 나머 지 내가 아는 限 度 에서 李 庭 植 博 士 의 글을 대하였을 때 그 見 解 나 여러가지로 首 肯 되지 않는 點
165 들과 또 이러한 類 似 한 見 解 가 아직도 비교적 많은 것을 보고 筆 者 가 보고 겪은 바를 여기에 적 어 보는 것이나 이는 조금이라도 이러한 問 題 에 關 心 이 있는 人 士 들에게 參 考 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이다. (3) 反 託 과 贊 託 의 회오리 - 古 下 宋 鎭 禹 의 암살 (동아일보 ) 反 託 운동으로 온 장안이 발칵 뒤집히고 이에 놀란 하지와 아놀드가 信 託 이 아니라 援 助 또 는 諮 問 이 잘못 전해진 것이며 또 한국민이 싫다면 그것을 한국민이 거부할 수 있는 내용의 것 이라며 설명에 바빴던 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15분 해방후 줄곧 人 共 打 倒 와 臨 政 봉대에 앞 장섰던 古 下 宋 鎭 禹 가 암살자의 흉탄에 쓰러졌다. 이는 해방후 최초의 정치적 암살사건이었지만 宋 鎭 禹 의 죽음은 정계를 더욱 혼란에 빠뜨리게 했다. 古 下 암살과 관련하여 항간에 별의별 풍설이 나돌았다. 이 풍설이 古 下 암살의 요인인지도 모른 다. 그것은 古 下 가 信 託 統 治 를 찬성했다 古 下 가 美 軍 政 延 長 을 주장했다 古 下 는 三 年 에서 五 年 의 訓 政 期 가 필요하다고 했다 는 등등이다. 해방후 美 軍 政 官 吏 로서 한국에서 일했던 리차드 E 라우터백(당시 海 軍 中 尉 )은 그의 < 韓 國 美 軍 政 史 >에 宋 鎭 禹 씨는 이 모스크바 결정( 信 託 統 治 )을 승인했는데 당일로 암살당했다 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풍설에 대하여 日 帝 下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형무소생활을 했던 李 熙 昇 교수(78 당 시 京 城 大 學 교수 전서울 大 교수 東 亞 日 報 社 사장 檀 國 大 學 교수)를 비롯하여 李 晶 來 씨(73 전 國 會 議 員 현재 서울 市 갈현 洞 거주) 宋 英 洙 씨(50 당시 宋 鎭 禹 씨 비서 嗣 子 현 利 川 물산사장) 등은 한마디로 근거없는 중상모략 이라고 단언한다. 사실 당시의 左 右 익계 각 신문 잡지와 宋 鎭 禹 의 정치노선, 그리고 당시 하지가 美 國 務 省 에 보 낸 公 文 書 등을 참고로 살펴보면 宋 鎭 禹 의 反 託 자세는 명백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미 45 年 10월 20일 빈센트 美 國 務 省 極 東 局 長 이 信 託 說 을 발설할 때부터 反 託 태도를 명백히 하고 있었다. 12 月 27 日 모스크바 결정이 외신으로 전해졌을 때 그는 즉각 그가 지도하는 韓 民 黨 이 反 託 을 결의하도록 했고 그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신문 정당 사회단체 및 청년 단체로 하여금 反 託 국민운동을 벌이게 했다. 그러한 그를 贊 託 또는 訓 政 說 주장에 의한 軍 政 延 長 論 者 로 몰아 그를 중상모략한 것은 극렬한 共 産 계와 人 共 계열이었다. 그들은 古 下 가 암살되던 날인 12월 30일에도 反 파쇼 共 同 투쟁위 를 결 성하고 美 國 의 극동부 책임자 빈센트 같은 사람은 공공연하게 조선을 신탁통치할 것이라 말했고 국내의 소수 매족매국적 반동분자들은 여기에 영합하여 혹은 당분간 軍 政 期 가 필요하다고 하고 혹은 3년후가 아니면 독립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 朝 鮮 日 報 )며 풍설이 사실인 양 왜곡하 여 선전했었다. 좌익계의 중상모략은 臨 政 요인의 귀국후 간혹 폭발된 臨 政 과 韓 民 黨 의 불화를 파 고들어 교묘히 유포되고 있었다. 사실 反 託 방법을 둘러싸고 宋 鎭 禹 는 미군정을 배격하고 臨 政 이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려는 臨 政 요인들과는 의견을 달리했다. 당시 경교장에서 臨 政 일을 봤던 張 俊 河 씨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일밤 각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이 경교장에서 反 託 운동방법을 논의했습니다. 대표중에는 흥 분해서 美 軍 政 을 엎어버리고 臨 政 이 독립을 선포, 통치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66 모두들 울분과 분노로 흥분할 뿐 反 託 방법에 관해서는 차근차근하게 말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12시쯤 宋 鎭 禹 선생이 金 俊 淵 張 澤 相 씨를 대동하고 경교장 회의실에 들어오셨습니다. 특유의 망 토를 입고 단장을 짚으면서 회의장에 들어온 宋 鎭 禹 선생은 흥분한 대표들에게 내가 지금 하지 를 만나고 오는 길인데 신탁통치라는 것이 여러분이 흥분해서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우려할 만 한 것이 아니다. 反 託 을 하되 美 軍 政 을 적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다시 한번 여유를 가지고 냉정히 생각해보자 고 말하자 여기저기서 집어치우라 고 하면서 세찬 반발이 일기도 했습니다.--- 이에 관하여 古 下 先 生 傳 記 편찬위 가 엮은 < 古 下 宋 鎭 禹 先 生 傳 >은 요지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 다. --- 신탁통치안이 전해진 후 국내는 물끓듯 소연하기만 했다. 8 15해방의 기쁨도 사라지기 전에 한민족의 정치적 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한편 지도자 암살설이 시정( 市 井 )에 떠돌았다. 12월 중순께부터 苑 洞 고하집 주변에서는 이상한 공기가 감돌았다. 미군정에서도 이 기미를 알 아채고 미군헌병을 파견할 것을 제의해 왔다. 고하는 거절했다. 12월 28일(밤) 고하는 朗 山 ( 金 俊 淵 )을 대동하고 경교장의 임정을 찾아 신탁통치문제를 의제로 일련의 회의를 가졌다. 고하와 임정 은 신탁통치반대에는 이론이 없었으나 반탁방법에는 서로 상당한 의견차이가 있었다. 임정은 반탁방법으로 즉시 미군정을 부인하고 민족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정권을 인수하고자 하는 반면 고하는 국민운동으로 반탁을 부르짖게 하고, 미군정과는 충돌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 다. 요컨대 고하는 미국은 여론의 나라이니만큼 국민운동으로 의사를 표시하면 족히 신탁통치안 이 취소될 수 있고 한국독립을 열렬히 지지하는 중국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만일에 군정을 부인하고 임정 이름으로 독립을 선포하면 반드시 큰 혼란이 일어날 뿐더러 결국 은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취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고하는 만일 臨 政 식으로 사태를 수습하면 우선 미군정과 충돌해야 하고 미군정과의 충돌은 미국 및 민주주의 제국과의 충돌을 일 으킬 염려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면 고하는 찬탁파요 찬탁이 아니라 방법을 신중하게 하자는 것이요. 반탁으로 국민을 지나치게 흥분시킨다면 뒷수 습이 곤란할 것이니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서 시국을 수습해야 하지 않겠소 무슨소리요. 반탁 뒤에 오는 모든 사태는 우리가 맡지 고하와 임정간에는 격론이 벌어졌다. 깊은 밤중의 회의는 異 論 의 조정을 못보고 29일 새벽 4시 에 산회하고 말았다. 고하는 두어시간쯤 눈을 붙이고 일어나 찾아온 몇 손님을 차례로 맞았다. 박헌영군에게 이번만은 제발 영웅적 태도를 취해 달라고 전해 주시오. 내가 그러더라고 고하는 아침상을 받으면서 공산당측에 연락이 닿는 측근에게 말하기도 했다. 고하는 상을 물린 뒤 곧 韓 民 黨 舍 로 발길을 옳기고 오후엔 또 임정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저녁 7시경 元 世 勳 에 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고하와 임정간에 의견이 달라졌다는데 사실이요? 글쎄 임정에서는 모두 짚신감발을 하고 걸어다니면서도 반탁을 한다 합니다. 반탁이 문제가 아 니라 군정과 충돌을 일으켜놓고 임정이 뒷수습을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나도 알 수가 없소 고하는 밤 10시께 취침했다. 안으로 문을 걸까요? 문은 왜 거느냐 내버려 두어 조카 英 洙 는 정국이 흐려지고 이상한 풍문이 돌 뿐만 아니라 집주위가 어수선하기에 문단속을 제의했었는데 고하는 응하지 않았다. 고하집 관습으로는 문을 안으로 잠그지 않는 것이 버릇이다. 이튿날 새벽 돌연 고하의 침실 밀창문 여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렸다. 새벽의 고요한 공기 를 찢어댔다. 뜰 아랫방에 기거하던 英 洙 와 호위경관이 황급히 고하의 침실에 뛰어갔을 때에는 이미 兇 漢 의 총탄에 쓰러져 있었다
167 담장을 넘어온 흉한은 도합 6명으로 연속 13발을 쏘았다. 그중 6발이 명중했다. 고하는 56세를 일기로 45년 12월 30일 오전 6시 15분 자객의 흉탄에 넘어진 것이다--- 孫 世 一 씨( 東 亞 日 報 論 說 委 員 駐 東 京 )는 그의 < 李 承 晩 과 金 九 >에 당시 李 承 晩 의 비서였던 尹 致 暎 尹 錫 五 양씨와의 面 談 錄 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宋 鎭 禹 의 죽음은 李 承 晩 에게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가장 의지했던 정치세력 의 주축을 잃은 그는 손으로 방바닥을 치면서 엉엉 울었다. 이날의 그의 울음은 이성을 잃은 어 린애의 그것과 같았다--- 古 下 宋 鎭 禹 암살은 정계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죽음으로 韓 民 黨 ( 宋 鎭 禹 )과 國 民 黨 ( 安 在 鴻 ) 人 民 黨 ( 呂 運 亨 ) 및 온건파인 長 安 派 共 産 黨 ( 金 錣 洙 李 英 崔 益 翰 )을 중심으로 진행되오던 左 右 통합운동과 임시정부의 正 統 을 이을 國 民 大 會 ( 國 會 ) 개최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고 朴 憲 永 까지를 포함한 反 託 운동을 전개하려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4) 反 託 과 贊 託 의 회오리 - 古 下 의 政 治 路 線 (동아일보 ) 해방후 古 下 宋 鎭 禹 의 주변에서 줄곧 古 下 夢 陽 民 世 등 여러 정치지도자를 직접 접한 柳 鴻 씨 (74 전 國 會 議 員 현재 서울 市 노량진 洞 거주)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다. --- 南 北 의 對 話 시리즈중 지난 1월 13일자 分 散 된 民 族 의 힘 項 은 古 下 의 해방직후 정치노 선에 관해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이제 古 下 도 夢 陽 도 다 세상을 떠난 지금 굳이 夢 陽 을 비판할 뜻은 추호도 없지만 후일의 기록 을 위해 사실을 밝히려 합니다. 먼저 古 下 宋 鎭 禹 등이 臨 政 의 국제적 위치와 실력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三 一 운동의 주동세력으로 四 八 人 의 한분인 古 下 는 三 一 독립운동의 소산인 臨 政 의 法 統 을 新 生 韓 國 에 계승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지 臨 政 의 국제적 위치와 실력을 파악하지 못하여 臨 政 을 영접하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古 下 가 각계 각층의 인사를 모아 國 民 大 會 準 備 會 를 구성한 것은 臨 政 을 위시하여 해외에 망명했던 독립지사들의 환국을 영접하는 준비를 하고 그분들이 환국한 후에 國 民 大 會 를 가져 국가민족의 향방을 결정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이것은 臨 政 에 대한 義 理 에서 뿐만 아니라 古 下 가 국내독립지사를 대접한 것과 마찬가지로 해외망명중인 선배나 동지를 대접하고자 한 古 下 의 인품의 일단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또한 古 下 는 이렇게 해야만 국내외지 도자를 총망라한 민족의 총역량을 건국사업에 집결시킬 수 있다고 예견했기 때문입니다. 또 해방직후 夢 陽 의 협력요청에 古 下 가 응하였던들 左 右 분열은 격심해지지 않을 수 있었고 우 익진영에서 夢 陽 과 협조했던들 建 準 이 공산당과 협력하여 좌익일변도로 나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의문을 갖게 된다 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古 下 가 夢 陽 의 협조에 응할 수 없었던 이유는 첫째 夢 陽 이 臨 時 政 府 의 法 統 을 부인했다는 것 둘째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政 權 을 민족의 적이었던 총독부로부터 夢 陽 이 받았다는 것 셋째 夢 陽 은 공산혁명으로 일로매진하겠다고 공언한 점 등입니다. 古 下 는 이처럼 원칙과 명분없는 정치노선에의 협력은 혼란만 더욱 가중시키리라고 생각했던 것 입니다. 가령 일례를 들어 古 下 가 夢 陽 에게 협력했다면 臨 政 도 소위 夢 陽 의 人 共 을 떠받들었다 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또한 총독부로부터 政 權 引 受 교섭을 받고도 거절한 古 下 가 총독부로부터 政 權 을 수여받은 夢 陽 과 合 作 할 수 있을까요. 夢 陽 의 정치노선으로는 해내외의 민족 민주세력을 총망라할 수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며 그러기에 古 下 는 8월 17일 夢 陽 이 찾아왔을 때 그의 잘못을 누누이 설명하고 臨 政 의 法 統 을 존 중할 것과 건국준비는 독립지사의 환국 후에 國 民 大 會 를 열어 결정할 것을 종용한 것입니다. 夢 陽 이 古 下 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共 産 黨 과 합세, 독주함으로써 혼란을 빚어내자 金 炳 魯 百 寬 洙 李
168 仁 등 제씨가 민족총집결체로서 명실상부한 체제를 갖추어 해외독립지사들이 환국할 때까지는 치 안유지 정도로 하고 민족 공산 양진영의 구성비율을 최소한 左 右 同 數 로 구성할 것을 충고했는데 夢 陽 은 이에 일단 동의하고서도 두 번이나 번번이 공산당 일색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민족진영을 배신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古 下 가 夢 陽 의 잘못된 정치노선을 협력으로 중화시키려 노력했지만 夢 陽 이 받 아들이지 아니했고 古 下 가 夢 陽 의 협력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夢 陽 에게는 진정한 마음에서 협력 을 요청할 의사가 없었던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경우 夢 陽 자신의 뜻이 아니고 夢 陽 을 둘러싼 극좌파들의 압력에 夢 陽 도 어쩔 수 없었 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되자 처음에 夢 陽 과 협력하던 民 世 까지도 建 準 에서 이탈하 였고 夢 陽 도 갈팡지팡하지 않았습니까. 백보를 양보하여 夢 陽 의 背 信 을 감수하고서도 夢 陽 에 동 조 협력하였다면 일시적으로 協 和 비슷한 것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 디까지나 일시적이요, 臨 政 을 받든다는 원칙하에 人 共 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결국 민족진영의 패 배를 자초했을 것임은 명명백백합니다. 夢 陽 이 민족진영과의 통일은 구하지 아니하고 곧 政 權 을 잡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혀 소위 人 民 共 和 國 을 선포하자 민족진영은 부득이 人 共 타도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夢 陽 의 정치행각과 정치적 식견을 古 下 와 同 一 線 上 에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또 헤게모니 쟁탈욕망 때문에 (통일운동이) 실패한 것이 아쉽다 는 의견도 있었습니다만 실패 의 원인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左 右 同 數 比 率 로 동의해놓고 夢 陽 의 헤게모니 쟁탈욕망 때문에 夢 陽 이 번번이 공산당 일색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古 下 는 해방전에도 夢 陽 을 아끼고 도왔으며 夢 陽 이 臨 政 의 法 統 을 존중, 자중하면 기회가 왔을 때 지도자로 추대해 주겠다고까지 했습니다. 또 朝 鮮 總 督 府 가 과연 민족주의진영 인사들에게 진정으로 政 權 引 受 를 요청하였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아직 객관적 자료가 불충분하다 고 하는데 이미 南 北 의 對 話 시리즈 23회에서 밝힌 것 처럼 총독부가 古 下 에게 政 權 引 受 를 교섭했지만 끝까지 거부한 사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이 에 반해 夢 陽 은 분별없이 덤벼들어 많은 잘못과 혼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三 一 운동을 지도 획책하고 옥고를 치른 다음 계속 東 亞 日 報 社 長 으로서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몸바쳐온 古 下 宋 鎭 禹 로서는 사실 人 共 계의 좌익인사들과의 협력을 위해서 臨 政 을 버리기는 어 려웠던 것 같다. 그에는 臨 政 과 臨 政 을 부인하는 人 共 의 둘중에서 臨 政 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 그는 臨 政 을 부인하는 人 共 타도의 최일선에 섰고 좌익계에서는 그러한 그에게 총공격의 화살을 던진 것도 물론이다. 그런 가운데도 宋 鎭 禹 는 분열의 결과를 염려하여 國 民 黨 의 安 在 鴻 人 民 黨 의 呂 運 亨 共 産 黨 의 온건파인 金 錣 洙 李 英 崔 益 翰 등과 함께 계속 정책의 통합을 모색, 臨 政 환국을 기다렸다. 그러나 宋 鎭 禹 가 기다리던 臨 政 은 각자가 하나의 黨 보따리를 갖고 있을 만큼 분열돼 있었다. 金 元 鳳 등 좌익계를 포함한 左 右 聯 立 인 臨 政 은 韓 民 黨 과 선뜻 긴밀한 제휴를 가질 것을 주저했 다. 臨 政 재정부장 趙 琬 九 가 宋 鎭 禹 등이 보낸 還 國 志 士 後 援 會 기금 九 百 萬 圓 을 돌려왔을 때 宋 鎭 禹 가 흥분한 어조로 政 府 가 받는 稅 金 속에는 양민의 돈도 들어있고 죄인의 돈도 들어있는 것이오. 이런 큰일에 그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을 줄 아오 라고 말해 해결한 일이 있었다. 또 國 一 館 에서 베푼 귀국 환영연에서 申 翼 熙 池 靑 天 趙 素 昻 등 臨 政 요인들이 친일을 하지 않고 국내 에서 어떻게 생명을 부지해 왔겠느냐면서 친일인사 숙청론을 폈을 때 듣다못한 宋 鎭 禹 가 여보 海 公 ( 申 翼 熙 )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된 臨 政 을 누가 오게 했기에 그런 큰 소리가 나오는 거요. 人 共 이 했을 것 같애? 해외에서 헛고생을 했군. 더구나 일반에게 모두 臨 政 을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三 一 운동 이후 임정의 法 統 관계지 노형들 위해서인 줄 알고 있나. 여봐요, 中 國 에서 궁할 때 뭣들 해 먹고서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어? 국외에서는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 음의 고통은 적었을 거 아니야. 가만히 있기들이나 해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든 힘을 합해서 건국에 힘 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숙청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라고 정
169 면으로 공박한 일도 있었다.< 註 - 古 下 宋 鎭 禹 선생전> 그러나 宋 鎭 禹 가 생존해 있을 때에는 李 承 晩 金 九 韓 民 黨 의 관계는 그런대로 그가 유지했지만 그의 암살사건 이후로는 臨 政 과 韓 民 黨 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어 민족진영까지도 분열돼버리고 만다. 42. 祕 話 - 宋 鎭 禹 의 暗 殺 < 東 亞 日 報 > ( ) 한해도 거의 저물어가는 年 末 의 어느날 새벽. 祕 苑 돌담을 낀 苑 洞 의 골목길을 따라 두명의 젊 은 청년이 오버코트속에 얼굴을 푹 파묻은 채 말없이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서북풍이 몰아치는 쌀쌀한 새벽길엔 아직도 어둠이 깔렸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사나이들이 얼어붙은 눈길을 밟는 발짝소리만이 사박사박 적막을 깨뜨렸다. 새벽 5시 50분. 鍾 路 區 苑 洞 74 番 地 라고 쓴 주소 팻말이 나붙은 한식 기와집 문앞에 다다른 이들은 집 주위를 몇차례 배회하다가 뒤미처 계동쪽 골목길을 따라 나타난 세명의 다른 청년들과 합류, 그집 뒷골목 언덕배기에 있는 老 松 밑에 모였다. 둘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인기척을 살폈고 셋은 무엇인가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1945년 12월 30일이니까 해방을 맞은지 불과 4개월 남짓 美 軍 政 초기의 정국은 대소정당이 우 후죽순처럼 난립하는 가운데 上 海 臨 時 政 府 요인들이 막 還 國 을 했고 左 右 翼 의 대립 등으로 격동을 치르고 있었다. 더구나 信 託 統 治 說 로 물끓듯 소연해가고 있을 때였다. 딱 벌어진 체구에 중절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사나이를 가운데 두고 귀엣말을 주고받던 두 청년 은 그들이 배회하던 한식 기와집 담을 단숨에 뛰어넘어갔으며 중절모의 사나이도 뒤따라 담을 넘 어 들어갔다. 두 사나이는 여전히 밖에서 망을 봤다. 어디선가 괘종시계가 정각 6시를 치는 소리 가 가냘프게 들려왔다. 돌층계를 몇계단 돌아 대문이 굳게 잠긴 이 조선 기와집이 바로 韓 國 民 主 黨 수석총무 古 下 宋 鎭 禹 의 집이었다. 난데없이 13 發 亂 射 宋 鎭 禹 는 전날도 아침상을 물리자마자 韓 民 黨 舍 로 발길을 옮겼고 美 軍 政 廳 을 찾는가 하면 오후 엔 같은 韓 民 黨 의 金 俊 淵 과 같이 죽첨 莊 (뒤의 京 橋 莊 지금의 高 麗 病 院 자리) 임정회의에 참석, 金 九 등 임정요인들과 信 託 統 治 문제 등을 장시간 논의했다. 돌아오는 길에 同 行 하던 金 俊 淵 을 병원 으로 보내고 저녁 10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여러날 묵고있던 외사촌동생 梁 仲 黙 (53)이 출타하고 없어 혼자 저녁상을 받은 宋 鎭 禹 는 梁 仲 黙 이 돌아온 후 자정이 넘어서야 梁 仲 黙 과 같은 방에서 잠이 들었다. 만일 가족이나 경비원이 나오면 서슴지 말고 폭탄으로 해치워버려 중절모의 사나이가 나지막한 소리로 명령하며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자 다른 두 청년도 권총과 단검을 꺼내 들었다. 宋 鎭 禹 는 山 亭 별채에 기거하고 있었다. 철조망을 넘어든 세 사나이 중 한명 이 재빨리 山 亭 밑으로 내려가 본채를 감시하는 사이 중절모의 사나이와 다른 한 청년은 곧바로 山 亭 별채로 향했다. 이들은 이 집의 내막과 구조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두 청년은 미닫이식 유리문이 닫혀있는 별채앞 신발돌위에 멈춰섰다. 중절모의 사나이가 유리 문에 손을 대려할 찰나 게 누구요 하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방에서 들려나왔다. 중절모의 사나이가 유리문을 드르륵 열고 마루위로 올라온 청년이 전기스위치를 올려 방안에 전등불이 켜지는 순간 宋 鎭 禹 는 벌떡 일어나며 아니 웬놈들이냐
170 고 소리쳤다. 방문을 열어젖히며 탕탕탕 연속으로 쏘아대는 도합 13발. 총소리는 고요한 새벽공기를 찢 었다. 범인들은 같은 방에서 자다 놀라 깨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부들부들 떨고있는 梁 仲 黙 에게도 총 을 쏘았다. 총탄1발이 梁 仲 黙 의 오른쪽 대퇴부를 뚫었다. 뜰아래 방에서 자던 宋 鎭 禹 의 조카 英 洙 (33 宋 鎭 禹 작고후 양자로 입적)와 경호원 鄭 鍾 根 (26)이 총소리에 놀라 깨어 방을 뛰쳐나왔다. 山 亭 별채에 불이 켜져있는 것을 보고 무슨 변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이들이 山 亭 으로 황급히 올라가 려하자 총알은 이들에게도 날아왔다. 鄭 鍾 根 의 다리 사이와 宋 英 洙 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범인이 연속으로 쏘아대는 총탄은 행랑방 기둥을 뚫고 나갔다. 범인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판단한 鄭 鍾 根 은 누구냐 고 소리치며 호신용 브라우닝권총을 꺼 내 방아쇠를 잡아당겼으나 불발, 몸을 벽에 착 붙이고 범인의 총탄을 피했다. 조카 英 洙 와 경호원 鄭 鍾 根 이 山 亭 으로 올라갔을 때는 宋 鎭 禹 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 져 있었고 梁 仲 黙 도 오른쪽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고 넘어져 있었다. 宋 英 洙 는 황급히 몇몇 친지들에게 이 變 을 전화로 알렸다. 전날밤에도 늦도록 宋 鎭 禹 와 담소를 하고 돌아갔던 익선동의 姜 柄 順 이 근처 金 雄 奎 외과의사를 데리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이미 숨을 거두셨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흉탄은 심장과 안면하관절에 각각 1발과 복부에 3발 등 도합 6발이 관 통했다. 1945년 12월 30일 아침 6시 15분. 宋 鎭 禹 는 이렇게 해서 숨을 거두었다. 宋 鎭 禹 의 나이 55세였 다. 급보에 접한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출동, 현장을 보존하고 현장검증에 나섰다. 넓은 정원 안과 집주위를 샅샅이 조사했으나 증거가 될 만한 것이라고는 범행에 쓰인 권총탄피와 山 亭 뒤편으로 난 발자국뿐 범인들이 장갑을 끼었는지 지문조차 찾을 수 없었다. 새벽에 일어난 사건이라 범행 현장 주위에서 수상한 사람들을 보았다는 목격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고 근처 외과병원에 입원한 梁 仲 黙 은 다음날 아침에야 정신을 가다듬고 宋 鎭 禹 와 한방에서 자다가 흉변을 겪은 악몽같은 그날 새벽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건 전날밤 宋 鎭 禹 는 자정이 넘어서 梁 仲 黙 과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안으로 문을 걸까요 하고 宋 英 洙 가 물었더니 문은 왜거느냐, 내버려두어 하며 宋 鎭 禹 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12월 중순께부터 시정에는 지도자 암살설이 떠돌았고 苑 洞 宋 鎭 禹 집 주변에도 이상한 공기가 감돌아 조카 英 洙 가 문단속을 제의했으나 宋 鎭 禹 는 응하지 않았다. 문을 안으로 잠그지 않는 것 이 宋 鎭 禹 집의 관습이었다. 宋 鎭 禹 는 새벽 4시경 깨어 일어났다. 梁 仲 黙 도 함께 일어나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시국담을 하다가 담배를 한 대씩 피우고 새벽 5시경 다시 잠을 청했다. 허전 착잡한 李 承 晩 아침 6시쯤 해서 梁 仲 黙 이 잠이 어렴풋이 들려는데 인기척이 뒤꼍에서 들렸다. 이때 宋 鎭 禹 가 누구요 하고 평상대로 말했으나 아무 대답이 없더니 잠시후 마루 유리문이 갑자기 열리고 영창 문이 활짝 젖혀지면서 순간적으로 괴한들이 총을 쏘아댔다. 형님은 흉탄에 쓰러지신 후 아무 말도 못하셨지만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최후를 마치셨어요 梁 仲 黙 의 말이었다. 경무국장 趙 炳 玉 과 張 澤 相 이 흉보를 듣고 맨먼저 달려왔고 뒤미처 金 性 洙 가 잠옷바람으로 황망
171 히 달려와 이미 숨을 거둔 차디찬 宋 鎭 禹 의 손을 붙잡고 깨끗한 일생을 마쳤구려 하며 침통해 했다. 돈암 莊 의 李 承 晩 도 흉보에 접하자 마음이 허전하고 착잡했다. 한때나마 韓 民 黨 총재 추대문제와 좌우합작문제의 이견으로 다소 소원했던 宋 鎭 禹 지만 얼마전 자기에게 지금 시국으로는 李 承 晩 박 사밖에 政 局 을 맡을 인물이 없으니 사소한 일에 낙심말고 나가기를 희망한다 고 말했던 것을 상 기했다. 宋 鎭 禹 암살을 공산당의 소행으로 판단한 京 畿 道 警 察 部 長 (후에 首 都 廳 長 ) 張 澤 相 은 무슨 일이 있 어도 이사건의 犯 人 만은 체포해서 공산당의 음모를 백일하에 폭로하겠다고 결심, 美 國 陸 軍 特 務 隊 (CIC)와 서울지방법원 검사국에 수사협조 의뢰를 하는 한편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범인수사에 나 섰다. 그러나 단서가 될 物 證 이라고는 사건현장에서 발견된 日 本 제 99식 권총탄환과 탄피뿐 도움이 될 만한 다른 증거품이 없어 수사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사건 전날밤 宋 鎭 禹 가 金 九 의 숙소인 죽첨 莊 에서 늦게 돌아온 사실을 눈여겨 우선 사건 전날밤 죽첨 莊 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수사를 폈다. 그러나 宋 鎭 禹 암살에 관계될 만한 아무런 단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보름이 지나도록 수사에 아 무런 진전을 보지못한 張 澤 相 은 초조한 나머지 수사과장겸 官 房 長 인 盧 德 述 을 불렀다. 수사과장, 어떻게 속한 시일내에 犯 人 을 체포할 묘안은 없소. 내 생각으론 공산당의 所 行 이 분 명한 것 같으니 수사과장 책임하에 그 방향으로 철저히 수사해보시오 張 澤 相 의 이같은 명령에 한참 생각에 잠겼던 盧 德 述 은 6 人 組 를 풀어 수사하겠습니다 고 말했다. 6 人 組 란 당시 盧 德 述 수사과장의 직속조직으로 强 力 事 件 을 전담해온 高 英 煥 張 昌 海 朱 哲 淳 金 順 華 崔 蘭 洙 金 壬 銓 6명의 민완형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큰 强 力 事 件 은 모두 이들이 척척 해결해 냈다. 나는 새도 떤다는 6 人 組 가 수사에 투입되자 수사는 전보다 훨씬 活 氣 를 띠었다. 우선 많은 情 報 가 이들을 통해 입수됐다. 일제때 高 等 系 刑 事 를 지낸 수도청 知 能 主 任 崔 蘭 洙 는 정보를 얻기 위해 西 北 靑 年 團 등 이북에 서 내려온 청년들이 들끓는 韓 美 호텔(현 대원호텔)에서 노상 살다시피 했고, 동대문경찰서 사찰계 金 壬 銓 형사는 주로 共 産 계열 내부에 의심을 두고 朝 鮮 共 産 黨 의 朴 憲 永 일파를 뒤쫓았다. 그러던 어느날 6 人 組 앞으로 이상한 情 報 가 날아들었다. 서울 赤 十 字 병원의 어느 간호원이 宋 鎭 禹 살해범을 알고 있다는 情 報 였다. 형사대들을 급히 赤 十 字 병원으로 보냈으나 문제의 간호원은 1개월전에 사직해버려 이미 없었 다. 그러나 다른 간호원들을 통해 情 報 를 캐던 형사대는 의외로 중요한 단서를 잡았다. 문제의 간호원 尹 鳳 三 (31)은 宋 鎭 禹 암살사건이 있기 바로 한달전인 11월 병원에 再 歸 熱 로 입원 한 白 모라는 환자를 간호하다가 사랑을 속삭이게 됐는데 그 환자는 병원에 입원한지 2주일가량 되어 완치가 됐는데도 퇴원을 않고 근 2개월이나 입원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나이가 독방으로 쓰고 있는 3층 28호실에는 여러 청년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환자는 때로 尹 간호원의 양해를 얻어 외출을 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白 모라는 그 사나이에게 妻 子 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尹 간호 원이 다소 쌀쌀해지자 그 자는 어느날 尹 간호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인지 宋 鎭 禹 를 죽인 것 은 우리편에서 한 것이야. 우리들은 이렇게 큰 일을 하고 있다 며 뽐냈다. 환심은 커녕 尹 간호원이 그런 끔찍한 일을 당신네들이 저질렀단 말예요
172 하며 크게 놀라는 빛을 보이자 白 은 우리에게는 武 器 가 있으니 함부로 어디가서 입을 놀리면 재미없어 하며 위협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총각인줄 알고 白 모라는 환자와 한때 사랑을 속삭이던 尹 간 호원은 결국 풍기를 문란시켰다 하여 병원에서 축출당했고 고향인 鎭 南 浦 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였 다. 古 下 경호원에 端 緖 수사진은 우선 白 이라는 성을 가진 宋 鎭 禹 주변인물을 찾아보았으나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46 년 2월 13일 또 다른 정보가 날아들었다. 宋 鎭 禹 의 신변경호자로 있던 청년이 海 岸 警 備 隊 에 입대 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당시 해안경비대 입대자는 美 軍 의 인솔을 받게 돼 있었으므로 張 澤 相 수 도청장은 美 軍 당국의 협조를 얻어 盧 勳 慶 경위와 李 만종 형사를 京 城 驛 (서울역)에 급파했다. 두 형사는 미군 2명의 안내로 열차를 기다리고 있던 입대자 가운데서 宋 鎭 禹 의 경호를 맡은적이 있 던 金 日 洙 를 찾아내 임의동행을 시켰다. 宋 鎭 禹 의 신변경호책임을 맡은 적이 있던 白 南 錫 金 義 賢 申 東 雲 朴 閔 錫 劉 根 培 등이 사건이 나 기 한달전 宋 鎭 禹 와 主 義 主 張 이 맞지 않는다 는 이유로 경호직을 물러났는데 金 日 洙 가 종로통에 서 한번은 金 義 賢 을 만나 宋 鎭 禹 를 누가 암살했냐 고 물은즉 金 義 賢 은 그런걸 왜 내게 묻느냐. 누구면 알아서 무엇 할테냐 면서 당황한 표정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金 日 洙 는 申 東 雲 과 白 南 錫 을 잡아 물어보면 진상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고 진술했다. 수사진은 金 日 洙 가 말하는 白 南 錫 과 赤 十 字 병원에 입원했었다는 白 모가 동일인물일 것으로 보았다. 6 人 組 의 崔 蘭 洙 는 당시 정치에 관심을 둔 청년들의 동태를 훤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용의자 검거는 떡먹기였다. 다음날 崔 蘭 洙 는 아침밥을 먹고 있던 白 南 錫 과 申 東 雲 을 검거했다. 너희들이 宋 鎭 禹 를 살해했지 직접 범행은 하지 않았소 두 용의자는 끝까지 자신들의 범행을 시인하지 않을 뿐 아니라 범인을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용의자들이 전혀 배후를 불지 않고 있습니다 盧 德 述 수사과장의 보고를 받은 張 澤 相 은 무슨 다른 방도가 없느냐 하고 물었다.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만 자칫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까 해서 그 방법이 무엇인데 張 澤 相 은 다그쳐 물었다. 용의자를 석방해 주고 미행을 하는 겁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張 澤 相 은 옳지, 그거 좋은 생각이야. 그러나 용의자까지 놓치지 않도록 하라구 나흘 뒤 수사본부는 申 東 雲 과 白 南 錫 을 혐의가 없다 고 풀어주고 형사대를 따라붙였다. 한편 韓 美 호텔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며 명백한 용무없이 호텔을 드나드는 사람을 조사하던 崔 蘭 洙 형사는 돈을 물쓰듯하며 호텔을 무상출입하는 韓 賢 宇 란 사나이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 다. 하루는 이 자를 미행키로 했다. 韓 賢 宇 등 일망타진 韓 이 도착한 곳은 성동 區 신당 洞 304 2층집이었다. 청년은 주위를 한번 살펴본 뒤 무엇에 쫓기 는 사람처럼 황급히 들어가 버렸다. 崔 蘭 洙 는 이 집에 대한 情 報 를 이웃사람들로부터 수집, 우선 이 집이 일본군 대좌가 살던 적산가옥이라는 사실과 매일 이 집속에서는 총소리 같은 것이 들린
173 다는 것을 알았다. 문틈으로 집속을 기웃거려보니 널따란 마당 한가운데 고목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거기다 표적을 만들어 청년들이 권총사격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의심이 짙게 가는 집이었으 나 당분간 관찰만 하기로 했다. 白 南 錫 과 申 東 雲 에 대한 형사대들의 미행도 계속됐다. 1개월 반이나 끈덕지게 미행하는 동안 수사본부에 각종 정보가 날아드는 가운데 이들 두 용의자가 드디어 신당 洞 韓 賢 宇 의 집에 드나드 는 사실이 포착됐다. 수산선상에 오른 劉 根 培 는 仁 川 부두에 잠복중이라는 정보도 입수됐다. 盧 德 述 은 6 人 組 와 각 수사진들에게 범인들의 일망타진을 명령했다. D데이는 4월 8일. 2개반의 형사 대중 한패는 仁 川 으로, 한패는 용의자들이 밤에 모이기로 된 신당 洞 韓 賢 宇 의 집 주위에 잠복했 다. 이날밤 8시 30분 仁 川 화평 洞 에 숨어있던 劉 根 培 가 체포되었다. 10시 20분 韓 賢 宇 집에서는 韓 과 金 義 賢 李 昌 希 金 仁 成 등이 검거되었다. 宋 鎭 禹 가 살해된지 3개월 8일만이었다. 韓 賢 宇 (28)는 태연자약하게 범행을 시인했다. 劉 根 培 (19) 金 義 賢 (20) 金 仁 成 (20) 李 昌 希 (18) 등과 함께 범행을 했다는 것이었다. 韓 賢 宇 일당을 검거한 수도경찰청은 그 배후에 共 産 黨 의 사주가 있지 않나 하는데 搜 査 의 초점 을 돌렸다. 우선 韓 賢 宇 의 처 李 鳳 得 (22)을 소환했다. 만삭이 된 李 鳳 得 은 春 川 女 高 출신, 취조형사 앞에서 그는 그이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리라곤 생각할 수 없다 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韓 賢 宇 의 처 李 鳳 得 이 숨이 찬 목소리로 말하는 犯 人 韓 賢 宇 는 이런 사람이었다. 고향은 平 北 中 江 鎭. 4형제의 장남으로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 태어나 日 本 에 유학했다가 해방 바로 직전인 45년 2월에 귀국했다. 고향에서 세 동생들과 살고 있는 홀어머니를 잠깐 찾아보고난 韓 賢 宇 는 바로 春 川 으로 내려와 啓 蒙 義 塾 이라는 사설학원을 차리고 청년계몽운동을 벌였다. 그가 하는 청년운동이라는 것이 어 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많은 청년들과 어울려 강의 토론 등으로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 다. 아내가 본 韓 賢 宇 자신이 韓 賢 宇 를 사귀게 되고 장래까지 약속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해방 뒤 韓 賢 宇 는 자기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한때는 鍾 路 의 어느 친척집에 묵다가 남산 洞 신 당 洞 등으로 주거를 옮겼으며 신당 洞 의 2층적산가옥으로 이사한 후로는 다시 청년들과 접촉이 많 아졌다. 이때부턴 어디서 벌어오는지 생활비도 많이 갖다주곤 했어요 李 鳳 得 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러나 남편은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생활비는 어디서 벌어오는지 일체 밝히려 하지 않았고 수시로 청년들을 자주 집에 몰고와 저녁과 술대접을 했다 고 말했다. 李 鳳 得 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그이가 늘 일제때 고향( 平 北 중강진)의 경찰서사법주임인 요코야마( 橫 山 )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 다고 말한 점으로 보아 그이도 본래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가 싶다 고 의외의 진술을 했다. 李 鳳 得 의 진술에 귀가 번쩍 뜨인 취조형사가 다그쳐 물었다. 평소 주인에게서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느낀 점은 없소 글쎄요. 서울에 온 후로 그이는 권총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어요. 그런 위험한 무기를 왜 차고 다니느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李 鳳 得 은 의문에 싸였던 지난 일을 되살렸다
174 한편 형사대는 犯 人 의 한사람인 劉 根 培 의 부모가 살고있는 서대문 區 천연 洞 120번지를 찾았다. 서대문 밖 동명여학교옆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한참 걸어올라가니 예배당 둘째골목 셋째집에 劉 昌 浩 란 문패가 붙어있다. 재목상을 하는 劉 根 培 의 아버지 劉 昌 浩 는 仁 川 친척집에 가고 없었고 어머니 金 慶 順 (43)이 문 을 열었다. 劉 根 培 의 집에서는 이렇다 할 수사의 뒷받침이 될 자료를 얻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성 적인 성격의 劉 根 培 는 집에서는 일체 밖에서 하는 일을 입밖에도 내지않았을 뿐만 아니라 집을 등지고 주로 밖에 나가 살았기 때문에 집안식구들조차 그의 動 靜 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역시 平 北 이 본적인 劉 根 培 는 培 材 中 學 시절 총검술 선수였으며 17세에 중학을 졸업하고 日 本 陸 士 에 지원했으나 낙방하자 체신국과 공산연구소 등에 한때 취직했었다. 日 帝 말엽 폭격이 두려워 江 原 道 운천에 소개(피난)를 갔다가 해방 뒤 서울로 돌아온 劉 根 培 는 정치운동에 흥미를 갖고 매 일 밖에서 살았다. 宋 鎭 禹 암살 직전인 45년 12월초 선생집에 간다 면서 집을 나간 후 소식을 몰랐다는 것이 어머니의 말이었다. 하지만 선생 이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背 後 搜 査 는 오리무중이었다. 首 都 警 察 廳 수사과장 盧 德 述 은 韓 賢 宇 를 달래가며 그의 배후조종자가 누구인가를 캐고 들었다. 韓 賢 宇 는 시종일관 背 後 관계를 부인하면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범행임을 주장했다. 수사과정에서 떠오르는 범인들의 공통점은 모두 日 本 에 가있었거나 學 兵 출신들이라는 점이다. 浩 然 之 氣 가 대단 한 것처럼 보였고 자신들은 民 族 主 義 者 요 愛 國 者 라고 자부하는 것이었다. 또 이들은 모두가 사격 의 명수였으며 韓 賢 宇 를 제외하고는 모두 팔팔한 20대전후의 미혼자들이었다. 수도청장 張 澤 相 은 背 後 수사가 난관에 부딪치자 회유책을 쓰도록 지시했다. 범인들을 특별대우 하라 고 그는 수사관들에게 타일렀다. 범인들은 경찰에 신병이 확보돼있는 동안 특별주문한 좋은 음식에 잠은 침대에서 자도록 했다. 어느날 張 澤 相 청장이 취조실로 직접 韓 賢 宇 를 찾아갔다. 어떤가? 만약 자네가 배후관계를 솔직히 자백하면 자네들의 죄는 가벼워지네. 솔직히 말해봐 뭐요. 애국지사를 존대는 못할 망정 자네가 뭡니까 韓 賢 宇 는 발끈 화를 내며 외면을 했다. 그래 韓 同 志 미안해. 다음부턴 자네라고 안그러지 張 청장은 이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래 지금 심정은 어떤가 수사과장 盧 德 述 이 韓 賢 宇 에게 묻자 그는 체포되고 보니 마음은 편안하다 고 태연했다. 나를 共 産 主 義 者 로 아는 모양이나 그것은 나를 모르는 때문이오. 사실 나는 宋 鎭 禹 암살 을 노 린 것이 아니라 呂 運 亨 朴 憲 永 도 함께 죽일 생각이었소 하고 천만뜻밖의 말이 오랜만에 터져나왔다. 진짜 犯 行 動 機 는 그럼 범행동기는 나는 東 京 유학시절부터 철저한 民 族 主 義 者 로 자부했소. 그런데 해방직후 상경하여 각방면의 정 세를 살펴보니 자주독립을 표방하는 정당이 속출하여 자유해방 이다 자주독립 이다 말들만 떠 들고 의견통일이 되지 않는 것을 보고 치가 떨렸소 그렇다면 宋 鎭 禹 朴 憲 永 呂 運 亨 씨 등을 죽이면 그런 정치풍토가 개선되리라고 생각했단 말인 가 물론입니다. 말로만 애국자인 체하고 뒷구멍으로 야심만 채우려는 정치인은 제거해야 한다고
175 생각했습니다 우선 古 下 를 암살한 건 어떤 근거에서인가 盧 德 述 은 집요하게 캐물었다. 訓 正 을 주장하다니 될 말입니까 韓 賢 宇 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宋 鎭 禹 가 信 託 統 治 를 받을 바에야 차라리 美 軍 政 이 더 연장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는 이른바 訓 正 說 을 주장했다는 풍문이 나돌았었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확 인되지 않았다. 좌익계에서 그런 풍문을 조작해 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말도 나돌았다. 全 栢 이라는 새 人 物 수사진의 끈덕진 취조결과 韓 賢 宇 의 背 後 에 全 栢 (41)이라는 새 人 物 이 수사선상에 떠올랐다. 다음은 韓 賢 宇 가 자백하는 범행모의와 경위. - 해방직후 서울에 올라와 東 京 유학시절 동지인 李 龍 奉 의 소개로 성동 區 신당 洞 333 全 栢 을 찾 아갔다. 韓 賢 宇 와 全 栢 은 時 局 觀 에 뜻이 맞자 그후 자주 만났다. 이들은 정치적 야심가를 제거해서 정치풍토를 바로잡자 는데 합의, 全 栢 은 우선 무기와 자금은 자신이 조달하고 韓 賢 宇 는 심복부하를 물색하는 책임을 맡기로 했으며 거사일을 정해 그들 나름 대로 정치적 야심가라고 규정한 宋 鎭 禹 呂 運 亨 朴 憲 永 을 차례로 암살할 계획을 꾸몄었다. 그해 12월 29일 오후 5시경 신당 洞 全 栢 의 집에는 全 栢 을 비롯하여 韓 賢 宇 金 義 賢 劉 根 培 金 仁 成 李 昌 希 申 東 雲 白 南 錫 등 8명의 청년이 모여앉아 음모를 꾸몄다. 全 栢 은 거사자금으로 10 萬 圓 과 中 國 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일제 99식 권총 한자루를 韓 賢 宇 에게 내놓았다. 이것은 환자에 대한 독약과 같은 것이니 신중히 사용해야 하오 거사 성공을 비는 뜻에서 그들은 축배를 들었다. 宋 鎭 禹 가 이들에게 피살된 것은 다음날 새벽 이었다. 새 사실을 밝혀낸 盧 德 述 수사과장은 형사대를 풀어 서울시내 모처에서 이들이 숨겨두었던 권총 세자루 단도 네자루 권총실탄 200여발과 사제폭탄 2개 등 범행에 쓴 무기를 압수하는 한편 행방 을 감춘 全 栢 을 전국에 지명수배했다. 首 都 警 察 廳 은 범인일당 5명을 20일동안 취조하면서 배후에 全 栢 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있었다 는 사실과 韓 賢 宇 는 범행직후인 1월 17일 서울에 돌아왔다는 사실밖에는 다른 배후관계는 밝혀 내지 못했다. 韓 賢 宇 는 끝까지 다른 배후는 없으며 범행동기는 순수한 愛 國 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건직전 宋 鎭 禹 와 臨 政 사이에 심한 不 和 가 있었다는 설도 없지않아 경찰은 臨 政 의 주변까지 수사각도를 돌려 보았지만 역시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했다. 그래 배후가 안 나온다면 미친놈들의 소행이란 말인가 수사과장 盧 德 述 의 수사결과 보고를 듣고난 首 都 廳 長 張 澤 相 은 답답한 심정에서 불끈 역정을 냈다. 全 栢 이란 자를 검속하면 다른 배후관계가 나올지 몰라도 지금단계론 狂 亂 者 들의 소행으로 보 는 수밖에 없습니다 盧 德 述 수사과장의 결론이었다. 그해 4월 29일 수도경찰청은 결국 韓 賢 宇 등 5명만을 殺 人 과 布 告 令 3호 및 5호 위반으로 京 城 地 方 法 院 檢 事 局 에 송치했다. 全 栢 은 잡지못한 채 수사는 일단 종결했다. 主 犯 韓 賢 宇 의 과거
176 정부수립이 이렇게 지연될 바에야 하루빨리 이세상을 떠나서 모든 것을 잊는 것이 편할 것 같 습니다 韓 賢 宇 가 담당 金 占 錫 검사에게 하는 말이었다. 主 犯 韓 賢 宇 는 어떤 사람인가. 41년 12월 와세다( 早 稻 田 ) 大 學 정경과를 졸업했다는 韓 賢 宇 는 43년 5월경 東 京 에서 국수주의자인 일본인 나까노 세이꼬( 中 野 正 剛 )와 알게되어 그를 숭배하고 따르다가 나까노의 권유로 재일조선인 유학생을 모아 朝 鮮 獨 立 聯 盟 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 지 하독립운동을 한 적이 있다고 그는 경찰과 검사국에서 말했다. 그는 나까노의 지도아래 일본국제연구소 라는 간판을 내걸고 일본황실중심주의를 표방하다가 도조히데끼( 東 條 英 機 ) 首 相 의 암살을 음모한 혐의로 日 警 에 체포되어 44년 3월 징역 10개월에 집 행유예 4년을 선고받은 일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韓 賢 宇 의 주장은 앞뒤가 잘 맞지 않았다. 검사국 조사결과 당시 일본에서 정말로 韓 賢 宇 가 나까노 세이꼬의 지도를 받았다면 그가 조직한 도요렌메이( 東 洋 聯 盟 ) 에 가담했었을 것이 분 명했고 그당시 조선독립연맹이란 조직이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또 나까노는 국수주의자가 아니라 좌익계인물로서 도요렌메이는 조선독립과는 전혀 무관한 동 양인은 동양인들끼리 라는 동양주의를 표방한 좌익성을 띤 단체였다. 또한 일본내각총리 도조 首 相 을 살해음모하고도 집행유예를 받았다는 주장은 더욱 납득이 가지 않았다. 檢 事 局 의 金 洪 燮 검사와 金 占 錫 검사도 10일간 범인들을 수사했으나 경찰에서의 수사보다 이렇 다 할 다른 사실을 캐내지 못한 채 5월 9일 韓 賢 宇 등 5명을 殺 人 및 布 告 令 위반으로 기소했다. 宋 鎭 禹 暗 殺 事 件 공판이 京 城 地 方 法 院 에서 李 天 祥 판사 주심으로 진행되고 있을 무렵 수도경찰청 의 끈덕진 수사 끝에 7월 5일 背 後 人 物 로 지목된 全 栢 도 체포되었다. 한편 7월 19일 오전 10시 40분. 公 判 廷 인 4호법정에는 金 俊 淵 ( 韓 民 黨 民 主 議 員 )과 咸 大 勳 ( 漢 城 日 報 編 輯 局 長 )이 증인으로 나왔다. 먼저 咸 大 勳 이 증언대에 올랐다. 韓 賢 宇 피고인이 범행직후 黃 海 道 海 州 로 가서 당시 朝 鮮 民 主 黨 사무국장으로 있던 증인을 만 났다는 게 사실이요? 네 사실입니다 그때 韓 賢 宇 피고인이 宋 鎭 禹 씨 암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소? 宋 鎭 禹 씨를 누가 죽였을까 하고 물어보았더니 아마 右 翼 쪽에서 저지른 범행일 것 이라고 韓 賢 宇 가 말하더군요 韓 賢 宇 피고인이 西 北 지방을 다녀온 것은 바로 범행직후인데 증인은 韓 피고인이 누구 명령을 받고 西 北 지방을 다녀왔는지 알고 있소 海 州 에서 만났을 때 韓 의 말이 臨 政 의 嚴 恒 燮 씨가 시킨 것이라고 말했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재판부는 金 俊 淵 에겐 宋 鎭 禹 가 생전에 建 國 準 備 委 員 會 등을 배척하고 韓 民 黨 을 만든 사상의 동 기와 당 운영 상황에 대해 물었다. 動 機 까지도 베일에 檢 察 은 求 刑 을 앞두고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殺 人 도 犯 人 자신이 自 白 하고 있고 또 증거 가 뚜렷하지만 殺 人 의 背 後 나 動 機 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당 金 占 錫 검사는 金 溶 燦 검사장을 찾아갔다. 宋 鎭 禹 씨를 범인들이 죽인 동기와 배후가 뚜렷하지 않은 이상 사형구형은 공소유지상 어렵지 않겠습니까?
177 어쨌든 총장과 상의를 해봅시다 金 溶 燦 검사장은 金 占 錫 검사와 같이 檢 察 總 長 李 仁 방을 두드렸다. 주범에게도 사형구형만은 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다 사형을 구형하라구 李 仁 은 명령하듯이 딱 잘라 말했다. 이 사람들아, 치안확보가 제대로 안돼 야단인데 설사 지도자 살해가 아니더라도 사람을 살해했 다는 사실만으로도 용납할 수 없어 宋 鎭 禹 와 친분이 두터운 李 仁 은 宋 鎭 禹 가 암살되던 날 현장으로 달려갔던 일이 생생한데 자신 이 직접 이 사건을 지휘하게 되는 것이 벅찼다. 李 仁 의 명령대로 金 占 錫 검사는 다음과 같이 求 刑 했다. 韓 賢 宇 사형, 劉 根 培 무기징역, 李 昌 希 金 義 賢 단기 5년 장기 10년 징역, 金 仁 成 징역 10년. 한 개인의 테러로 인하여 위대한 朝 鮮 의 지도자를 살해한 주범 韓 賢 宇 의 행위는 무기징역형으 로도 일반사회가 용서치 않는다 는 金 占 錫 검사의 사형구형 이유의 한토막이다. 그러나 判 決 은 구형보다 훨씬 가벼웠다. 8월 2일에 열린 판결공판에서 李 天 祥 판사는 韓 賢 宇 와 劉 根 培 에게 무기징역형을, 金 義 賢 과 金 仁 成 에게 징역 10년을, 李 昌 希 에게는 단기 5년에 장기 10 년을 각각 선고함으로써 담당 金 占 錫 검사가 예측한 대로 주범 韓 賢 宇 에게도 극형은 피했다. 檢 察 總 長 李 仁 은 법원판결에 불만이었다. 檢 察 이 즉시 불복항소를 제기하자 피고인측에서도 모 두 항소했다. 한편 韓 賢 宇 등 5명에 대한 1심판결이 끝난 뒤인 8월 19일 살인방조 및 불법 무기소지 등 혐의 로 기소된 문제의 인물 全 栢 은 어떤 인물이었던가. 본명은 全 秉 龜, 全 栢 은 永 和 기업사라는 해운회사 사장으로 돈도 제법 있었다. 그는 慶 南 양산 郡 양산 面 중부 里 출신으로 中 國 廣 東 省 에 있는 建 國 廣 東 大 學 문과와 철학과를 나와 귀국후에는 趙 喆 鎬 方 定 煥 등의 소년운동에 참가한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모험심이 많았다는 全 栢 은 中 國 에 있을 때 중국정부의 첩보기관인 藍 衣 社 에서 일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韓 賢 宇 의 범행 직전 全 栢 은 韓 賢 宇 를 만나 韓 民 黨 의 宋 鎭 禹 와 建 準 의 呂 運 亨 共 産 黨 의 朴 憲 永 등에 대한 암살계획을 듣고 이 계획에 찬의를 표시, 일본 99식 권총 1자루를 내주며 이것은 환 자에 대한 독약과 같은 것이니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 고 암살계획을 협조 내지 방조했으며 범 행직후에는 韓 賢 宇 를 불러 범행경위를 듣고 용감하게 처치했다. 그 애국정열을 끝까지 잊지말 라 고 칭찬했다 檢 察 은 이와같이 起 訴 狀 에서 全 栢 을 殺 人 을 방조한 人 物 로 지목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全 栢 에 대한 공소사실은 全 栢 과 韓 賢 宇 의 자백에 따른 것이었지만 역시 다른 정치배후관계가 밝혀지지 않은 맥빠진 내용이었기 때문에 韓 民 黨 과 宋 鎭 禹 측근에서는 매우 불만 스러웠다. 왜냐하면 배후수사에 큰 기대를 걸었던 全 栢 마저 그것도 공범으로서가 아닌 단순한 살인방조혐 의로 기소된 데 대한 불만이었다. 全 栢 檢 察 진술 번복 46년 9월 3일 全 栢 에 대한 제1회 공판, 재판장 李 天 祥, 배석판사 李 奉 奎 沈 同 求, 검사 姜 錫 福. 피고인은 범행 직전 韓 賢 宇 를 만나 朝 鮮 은 중병환자고 그대는 독약이 든 주사기를 소지한 의 사라고 볼 수 있다. 그 주사를 잘못 사용하면 환자는 급사할 것이니 경솔히 쓰지말고 주사액의 분량과 시기를 잘 택하라 고 말했다는게 사실인가
178 그런 말은 韓 賢 宇 에게 직접 한 일은 없고 경찰에서 취조받을 때 그 당시의 나의 심경을 말한 것뿐이오 이렇게 全 栢 이 경찰에서 진술한 사실을 번복하자 李 天 祥 재판장은 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면 되는가 하고 준엄하게 꾸짖고 全 栢 이 부인하고 있는 범죄사실의 핵심부분인 독약든 주사 발언내용 여부 에 대해 계속 추궁했다. 피고인은 韓 賢 宇 에게 독약도 적당히 쓰면 효과가 있다는 의미로 말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韓 賢 宇 가 요인암살 계획을 상의할 때 왜 말리지 않았는가 벌써 결심이 굳게 된 것을 말린들 소용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권총은 韓 賢 宇 에게 언제 주었는가 작년 10월 상순입니다 권총을 왜 주었는가 권총이 고장난 것 같아 수리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범행전후에 피고인은 韓 賢 宇 에게 10 萬 圓 의 현금을 준 사실을 경찰에서 자백했는데 그 돈은 무 엇에 쓰라고 주었는가 啓 蒙 義 塾 을 만들어 청소년들을 훈련한다기에 그 자금으로 주었습니다 全 栢 은 경찰과 검사국에서의 진술 내용을 재판관 앞에서는 번번이 부인하고 번복했다. 10일 뒤인 9월 13일에 다시 열린 제2회 공판에선 全 栢 에 대한 공소사실중 제일 중요한 부분인 무기대여 여부에 대한 증인심문이 진행됐다. 全 栢 은 법정에서 韓 賢 宇 에게 당시 수리를 부탁했던 권총을 宋 鎭 禹 암살 직전 도로 받아 경찰 에 맡겼기 때문에 범행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고 딱 잡아뗐었으나 이 진술의 증인으로 출정한 수 도경찰청 盧 勳 慶 경위는 全 栢 이 권총을 경찰에 납입한 일은 있으나 그 날짜가 범행후인 금년 2월 23일 이라고 증언, 무기납입 기록카드까지 제시함으로써 중요한 범죄사실 부분을 부인하려던 全 栢 의 안간힘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피고인은 韓 賢 宇 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사실을 자백했고 宋 鎭 禹 呂 運 亨 朴 憲 永 씨 등 살해계 획에 찬의를 표시한 사실도 자백했다. 피고인은 어느 점에서나 지도자적 입장에 있으며 국내외 에서 조국을 위하여 투쟁한 데 대해서는 본직으로서도 동정에 넘치는 바나 피고인이 역사적 조 국재건의 위대한 지도자들의 암살계획을 찬양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피고인이 범죄 직전 韓 賢 宇 의 그런 악착스런 계획을 지도자로서 방지했다면 이런 비참한 사실을 발생시 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인에 있어서는 방조나 교사에 죄의 경중은 없다. 따라서 피고인에게 징역 7년의 형을 구하는 바다 간여 姜 錫 福 검사의 논고였다. 그후 선고공판에서 全 栢 에게는 살인방조 및 무기불법 소지죄가 적용돼 징역 5년이 선고됐다. 한편 韓 賢 宇 등 5명의 범인은 2심에서도 1심대로 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 불복상고, 그후 대법 원( 李 相 基 대법관 주심)에서 韓 賢 宇 와 劉 根 培 에게는 징역 15년씩이 확정됐고 全 栢 은 대법원에서도 원심판결대로 징역 5년이 확정됐다. 그러나 이들의 수감은 判 決 보다는 짧았다. 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및 광복절 특사로 모두 풀 려난 것이다. 韓 賢 宇 는 옥중수기에서 피와 땀이 없이 자유를 획득하여 행복을 차지할 수 없다. 피를 아끼고 땀을 아끼는 민족에게 무슨 행복이 있을 것인가. 노력치 않고 싸우지 않는 자에게 승리는 없다 고 그럴듯한 말을 썼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수사관들 대부분의 견해는 韓 賢 宇 나 全 栢 은 일종의 정치방랑자로 자
179 기형성을 타인의 제거로 꾀하려던 鐵 面 皮 들로서 이와 같이 전율할 암살범들의 범행은 사회가 안 정돼 있지 못하고 모든 것이 어수선하여 자리가 잡혀있지 못할 때 청년들이 흔히 품게 되는 범죄 심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또 다른 배후가 宋 鎭 禹 암살사건에 관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韓 賢 宇 는 출옥후 한때 일본에 건너갔다가 韓 國 에 다시 돌아왔으나 張 澤 相 이 국회에서 살인범 이 서울에 와서 활개치고 다니는데 무엇들 하느냐 고 소리를 친 후로 다시 韓 國 에서 자취를 감추 었는데 현재 日 本 에 살고 있다는 말도 있다. 金 性 洙 와 同 苦 同 樂 55년 동안의 宋 鎭 禹 의 생애는 한국 역사상 일찍이 겪지 못했던 혼돈과 격동의 시대였으며 그의 일생은 마지막 순간마저 이렇게 순탄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깊이 사귄 仁 村 金 性 洙 와 구한말기 日 本 유학을 함께 다녀온 후로 독립을 찾기 위 해 국민의 무지를 깨우쳐 주어야 한다 고 판단한 宋 鎭 禹 는 金 性 洙 와 一 心 同 體 가 되어 교육 언론 문화 등 크고 작고 간에 同 苦 同 樂 하여 왔으며 특히 中 央 學 校 교장으로서 3 1운동에 참여했고 東 亞 日 報 사장으로서 民 族 精 神 고취와 民 族 文 化 발굴에 앞장서 왔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에 힘입어 1919년 3월 1일 己 未 獨 立 宣 言 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 3년간 의 옥고를 치르기도 한 宋 鎭 禹 는 日 警 의 탄압과 재정난 등 갖가지 수난을 겪으면서도 節 操 를 지 켰다. 해방 직전 연합군에 대한 무조건 항복을 각오한 總 督 府 당국이 日 本 이 항복하고 나면 유혈사태 를 빚지 않을까 우려한 나머지 宋 鎭 禹 에게 治 安 權 이양을 교섭해왔을 때 宋 鎭 禹 는 내가 中 國 의 汪 兆 銘 이나 프랑스의 페탕이 되고자 한다면 벌서 됐을 것이다. 내가 만일 그대들의 청을 받아들 여 汪 兆 銘 이나 페탕이 돼버린다면 당신네가 日 本 으로 떠나버린 뒤 나는 조선민족에게 발언권이 없게 된다 면서 이를 거절했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반면 夢 陽 呂 運 亨 이 朝 鮮 總 督 府 로부터 治 安 權 을 이양받아 해방을 맞은 이틀 후 安 在 鴻 과 제휴 해서 建 國 準 備 委 員 會 를 조직하는 등 어수선한 가운데도 宋 鎭 禹 는 어디까지나 上 海 의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를 추대하기 우한 臨 政 奉 戴 論 을 내세웠다. 民 族 主 義 세력을 묶어 韓 國 民 主 黨 을 이끈 宋 鎭 禹 는 呂 運 亨 朴 憲 永 등의 左 翼 勢 力 과 對 決 하였으 나 信 託 統 治 반대의 회오리바람속에서 背 後 조차 분명치 않은 정치테러의 희생이 되고 만 것이다. 43. 解 放 政 局 의 主 役 들 < 東 亞 日 報 > ( )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이땅에서 실시된 美 國 의 軍 政 은 보는 측에 따라 두가지 의미를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美 國 측에서 볼 때 軍 政 은 전후처리의 한 과정이었다. 반면에 韓 民 族 의 입장에서 보면 미군정기 간은 또다른 독립투쟁의 세월이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 건국을 향한 민족내부의 치열한 정치적 갈 등이 불가피한 계절이었다. 이같은 민족내부의 정치적 갈등은 45년 9월 7일 勝 戰 美 軍 이 이땅에 진주하기 훨씬전 8월 15일 해방당일부터 이미 본격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이 갈등은 벌써 日 帝 치하에서 부터 독립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인물과 파벌간에 배태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갈등이
180 15를 기점으로 본격화됐다고 보는 것은 主 權 탈환이라는 日 帝 下 의 보다 거족적이던 목표가 이날을 기해 政 權 장악이라는 보다 정파적 목표로 세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들이 48년 정부수립 때까지 어떤 양상으로 진행되었느냐 하는 것은 그 이후, 가깝게 는 지금까지 韓 國 現 代 史 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할 것이다. (1) 古 下 와 夢 陽 (동아일보 ) 우선 이 갈등에는 많은 주역들이 등장했다. 일반적인 평가를 기준으로 할 때 이들 주역들의 노 선과 지략 그리고 개인적인 성격 등은 혹은 판이하고 혹은 애매했는데 이 모든 요소는 결국 民 族 史 의 향방은 물론 그들 개인의 운명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나름대로 新 生 近 代 國 家 를 만들겠다는 영롱한 꿈들이 있었다. 종국적으로 누가 승자였고 패자였든간에 아마도 독립이라는 목표에서 볼 때 이들 대부분이 가졌던 동기는 이 시점에서 함부 로 의심치 않는 것이 역사의 공정한 평가에 유익하리라고 본다. 개인이 가진 가장 현저한 속성을 기준할 때 李 承 晩 은 독립을 국제관계 속에서 이해했던 최초의 韓 國 人 이었다고 할 수 있다. 金 九 는 민족의 力 動 性 을 믿고 농부가 토지에 대한 애착을 갖듯 강렬 한 강토애를 가진 인물이었다. 金 奎 植 은 현상인식과 勸 力 에의 意 志 가 일치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呂 運 亨 은 목표감각이 뚜 렷치 않은 불철저한 이데올로그였다고 할 수 있다. 朴 憲 永 은 국제정세에 둔감했던 지역공산주의 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宋 鎭 禹 는 인간이 갖는 思 想 의 함축성과 개연성을 先 知 한 지략 의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해방당일 이 모든 사람이 국내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즈음 국내에 있던 宋 鎭 禹 呂 運 亨 朴 憲 永 중 呂 運 亨 이 제일 먼저 공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光 州 벽돌공장에 은신했다 上 京 한 朴 憲 永 은 유령처럼 上 京 說 만 퍼뜨리면서 일단 궁금증을 배가시키는 전술의 구사에 착수했 다. 이 소란을 대기하면서, 혹은 그 속에서 宋 鎭 禹 는 사태를 조용히 지켜보면서 深 思 熟 考 하고 있었 다. 그래서 얘기는 이들 3 人 의 최초 동정과 그 주변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5년 8월 14일 밤, 古 下 宋 鎭 禹 는 苑 西 洞 집에서 朗 山 金 俊 淵 (72년 작고 前 법무장관)과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金 俊 淵 은 全 南 靈 巖 출신으로 東 京 帝 大 獨 法 科 를 나와 東 亞 日 報 를 통해 宋 鎭 禹 와 인연을 맺었다. 1927년 宋 鎭 禹 東 亞 日 報 사장은 金 俊 淵 을 편집국장에 발령했다. 그런데 金 俊 淵 은 당시 공산주의운동에 투신, ML 黨 (마르크스 레닌 黨 )의 책임비서였다. 古 下, 理 念 달라도 포용자세 日 本 경찰은 즉각 宋 鎭 禹 를 불러 따졌다. 그러나 宋 鎭 禹 의 대답은 그는 성격이 온순하고 학문과 덕망이 있고 新 思 想 을 이해하는 좋은 사람이어서 썼소 라는 간단명료한 것이었다. 사실 宋 鎭 禹 는 청년들의 개인적 이념이 무엇이든간에 그 자질을 포용했다. 다른 얘기지만 뒤에 조선공산당의 朴 憲 永 도 東 亞 日 報 영업부에서 잠시 몸을 담은 적이 있었다. 아무튼 金 俊 淵 은 이 때문에 제3차공산당사건으로 이듬해인 1928년 체포되어 7년형을 살았다. 宋 鎭 禹 는 출옥한 그를 다시 東 亞 日 報 주필로 복귀시켰다. 이때 日 帝 는 다시 金 俊 淵 의 입사경위를 따졌는데 古 下 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것은 우리 東 亞 日 報 社 가 그대들을 위해서 한 것이나 다름없소. 만일 우리가 그 사람에 직장
181 을 주지 않으면 日 本 정부가 그를 등용할 리 만무하니 그때에 朗 山 은 부득이 上 海 나 다른 곳으 로 亡 命 하게 될 것이 아니오. 그렇게되면 朗 山 은 일본에 던질 폭탄을 만들게 될 것이오. 朗 山 은 전부터 東 亞 에 있던 사람이고 해서 다시 돌아온 것이니 거기에 대해 너무 성가시게 굴지 마시 오 뒤에 金 俊 淵 은 日 章 旗 抹 消 사건으로 사임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앞서 그는 宋 鎭 禹 의 이같은 人 格 的 感 化 로 그의 좌익적인 사상도 抹 消 했다. 그 뒤 그는 京 畿 道 全 谷 에 묻혀 있다가 8월 9일 소련의 對 日 선전포고 뉴스를 듣고 화급히 상경한 것이다. 古 下, 낮에 鄭 栢 을 만났습니다 宋 鎭 禹 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金 俊 淵 이 ML 黨 당시의 동지인 鄭 栢 과 만났다면 그 얘기 내용은 요즘 돌아가는 정세로 보아 뻔한 것이기도 했다. 日 本 天 皇 의 중대방송이 15일 정오에 있으리라는 것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鄭 栢 은 이미 夢 陽 呂 運 亨 의 측근으로서 뛰고 있음을 宋 鎭 禹 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뭐라고 하던가 宋 鎭 禹 는 당시 55세, 金 俊 淵 은 50세였다. 鄭 의 말이 夢 陽 도 좋은 지도자고 古 下 도 그러니 이 두 지도자가 합작을 하면 여기에 대항할 세력이 없을 것이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古 下 의 의중을 떠보라고 하더군요 宋 鎭 禹 는 말이 없었다. 金 俊 淵 도 무슨 대답을 들으려고 그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宋 鎭 禹 는 정세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해방은 될 것 같은데 이 民 族 에 대한 聯 合 國 의 대 접이 무엇인지 좀처럼 짚이지가 않았다. 일단 항복후의 日 本 人 과 한국인의 관계도 걱정이었다. 벌써 좌익은 발호하는데 해방후의 민족분열도 걱정이었다. 더욱이 좌익이 이미 징후를 보이고 있지만 日 帝 下 의 親 日 여부를 두부 자르듯 소아병적으로 구분하기 시작할 때 주로 有 志 들이 중심 인 민족진영의 전도문제도 宋 鎭 禹 를 괴롭혔다. 이같은 모든 요소들을 종합 고려한 宋 鎭 禹 는 결국 中 國 重 慶 에 있는 金 九 중심의 임시정부를 奉 戴 하는 것만이 민족진영이 살 수 있는 명분과 현실이라고 결론짓고 있었다. 그만 잡시다. 내일 오정 때면 다 결정날텐데 宋 鎭 禹 는 金 俊 淵 의 또 이어지는 얘기를 막았다. 그만 주무십시다 金 俊 淵 도 동의했다. 두사람은 잠을 청했다. 그러나 버릇대로 宋 鎭 禹 는 새벽3시에 잠이 깼다. 그 기척에 金 俊 淵 도 덩 달아 깼다. 夢 陽 이 잘못하면 이 민족에 큰 피해를 입힐지도 몰라 宋 鎭 禹 는 크게 한숨지었다. 苑 西 洞 집에서 민족진영의 거두 宋 鎭 禹 가 잠을 설치면서 解 放 前 夜 를 맞고 있을 때 뒤에 운명처 럼 좌익의 얼굴마담 이 된 夢 陽 呂 運 亨 은 아예 밤을 꼬박 세우고 있었다. 呂 運 亨 은 14일 오후 京 城 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 長 崎 祐 三 )의 방문을 받았다. 용건은 15일 아침 8시까지 총독부의 엔도( 遠 藤 柳 作 ) 정무총감 관사에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呂 運 亨 으로서는 예기하고 있던 용건이었다. 왜냐하면 呂 運 亨 은 이보다 앞서 龍 山 에 주둔하고 있던 日 本 軍 정훈참모부의 가바 소좌로부터 15일 정오에 日 本 의 무조건 항복방송이 있다는 전갈 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총독부측이 며칠 사이에 宋 鎭 禹 金 俊 淵 등과 접촉, 패전후의 사태를 협의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사실 조선총독부나 조선주둔 日 本 軍 측이 日 本 의 항복과 항복절차를 제대로 알 된 것은 14일 오 전 11시경이었다
182 이때 포츠담선언 수락에 관한 日 皇 의 詔 書 원고전문이 同 盟 통신사 京 城 지국에 도착했다. 이 뉴스는 제일 먼저 총독부의 니시히로( 西 廣 ) 경무국장과 제17방면군겸 朝 鮮 軍 管 區 참모장인 이하라 ( 井 原 )에게 보고되었다. 니시히로는 이를 엔도 정무총감에게 보고했고 엔도는 패전후의 사태수습 을 위한 마지막 韓 人 상대로 呂 運 亨 을 지목한 것이다. 古 下 일갈에 日 側 협상포기 엔도가 나가사키 京 城 보호관찰소장을 보낸 것은 呂 運 亨 이 思 想 犯 前 歷 者 였기 때문이다. 呂 運 亨 은 엔도를 찾아가서 면담하는 것을 쾌히 승낙했고 그 뒤에도 日 本 측과 적극 협상하게 된다. 한편 총독부가 呂 運 亨 과 접촉하기 전에 최초로 접촉한 상대는 宋 鎭 禹 였고 그 다음이 金 俊 淵 이 었다. 총독부와 宋 鎭 禹 의 접촉은 8월 10일 하라다( 原 田 ) 경무국사무관과의 접촉부터였다. 그러나 宋 鎭 禹 가 이 사태를 어떻게 보는가는 8월 11일 이쿠다 京 畿 道 지사와의 면담때였다. 이쿠다의 걱정은 패전후의 在 韓 日 本 人 의 안전문제였고 조건은 필요하다면 경찰권을 포함, 주요 권력을 宋 鎭 禹 에게 이양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宋 鎭 禹 의 입장은 간명했다. 생각해보시오. 내가 中 國 의 汪 兆 銘 이나 프랑스의 페탕이 되고자 했다면 벌써 됐을 것이 아니 오. 이것은 내가 사양한다느니 보다 만일 내가 汪 兆 銘 이나 페탕이 되어버린다면 당신네가 日 本 으로 떠난 뒤에 나는 발언권이 없어지지 않겠소. 그리고 멀지않아 조선은 일본과 국교도 맺어 야 할 것인데 지금 목전의 이익만 생각하다가는 도리어 앞으로의 큰 경륜을 잃을 염려가 없지 않소. 한사람의 올바른 知 日 인사라도 남겨두어야 하지 않겠소 1940년 東 亞 日 報 가 강제폐간된 이래 宋 鎭 禹 는 병을 칭하고 두문불출, 파리한 모습이 돼있었다. 그러한 宋 鎭 禹 의 일갈에 이쿠다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뒤에 金 俊 淵 도 이쿠다를 만나지만 그도 같은 얘기를 했다. 때문에 鄭 栢 이 金 俊 淵 을 만나 呂 宋 合 作 을 제의한 것은 呂 運 亨 에게도 마지막 으로 연락이 왔을 때다. 따라서 金 俊 淵 의 대답도 자연 이랬던 것이다. 총독부와의 면담은 古 下 도 했고 나도 했소. 저네들의 저의가 불투명하므로 우리는 고개를 돌려 버렸소. 夢 陽 이 어떻게 응했는지 그분 나름이겠지만 아무튼 夢 陽 의 뜻은 오늘 古 下 에게 전하지 요 그리고 전하나마나한 결과가 되었다. 어쨌든 呂 運 亨 은 나가사키가 다녀간 뒤 옆집에 사는 언론계출신의 좌익 洪 璔 植 ( 越 北 64년 조국 통일민주주의전선 선전부장)을 불렀다. 洪 은 기질상 謀 士 였다. 뒤에 朴 憲 永 의 조선공산당이 좌익 의 주도권을 본격적으로 장악할 때까지 呂 運 亨 의 노선은 이 洪 의 머리에 많이 좌우된다. 洪 은 이 같은 속성 때문에 그의 머리는 해방초기에 三 國 志 를 서른번이나 읽었다는 金 九 계의 趙 琬 九 나 韓 民 黨 의 보석 이었던 雪 山 張 德 秀 의 智 謀 와 잠시 대결한 바 있다. 誠 友 는 號 外 찍으시오 呂 運 亨 과 洪 은 많은 얘기를 나눴다. 呂 運 亨 도 宋 鎭 禹 와 마찬가지로 美 蘇 등 승전국의 한반도 해방방법에 대해서는 깜깜이었다. 그 시간까지 呂 運 亨 은 韓 半 島 를 美 軍 의 점령지역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呂 運 亨 은 그 시간에 진보적 지식인 과 일제하의 투쟁경력자 를 중심(결국 左 翼 )으 로 해서 日 帝 로부터 정권을 인수한다는 원칙은 정했다. 呂 運 亨 은 洪 과의 얘기중에 雲 泥 洞 宋 圭 桓 의 집에 머무르고 있던 동생 呂 運 弘 (작고 전참의원)을 전화로 불렀다. 呂 運 弘 은 美 國 우스터대학을 나온 지식인으로 동생이라기보다 차라리 그의 동지였다. 呂 運 弘 은 宋 圭 桓 을 깨워 桂 洞 으로 향하다 安 國 洞 네거리에서 整 骨 醫 院 을 하고 있던 張 權 (당시 YMCA유도사
183 범 建 準 청년대장 越 北 後 사망)을 불러 같이 갔다. 이들을 맞은 呂 運 亨 은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우리가 일생을 두고 원하고 투쟁하던 조국해방은 왔다. 엔도가 내일아침 8시에 자기 관저로 와달란다 이어 呂 運 亨 은 엔도와의 면담도 있기 전인데도 다음과 같이 주위에 지시했다. 誠 友 ( 洪 璔 植 의 號 )는 신문에 경험이 많으니 每 日 新 報 社 를 접수하고 號 外 를 수백만장 찍어 서울 은 물론 지방의 각도시와 향촌에 이르는 모든 국민에게 해방의 기쁨을 알리도록 하라. 그리고 運 弘 이는 방송국을 곧 접수하여 우리말은 물론 영어로도 방송하여 전세계 인민에게 朝 鮮 의 독 립을 알려라 日 帝 下 에서 宋 鎭 禹 나 呂 運 亨 은 다같이 독립투쟁의 경력을 갖고 있다. 全 南 潭 陽 출신인 宋 鎭 禹 는 日 本 早 稻 田 을 거쳐 明 治 大 法 科 를 나왔다. 그는 3 1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呂 運 亨 은 京 畿 道 楊 平 출신으로 中 國 南 京 의 金 陵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도 역시 1929년 上 海 에 서 체포, 본국으로 압송되어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43년에 재차 투옥되어 해방전해인 44년까지 있었다. 宋 鎭 禹 는 1921년 仁 村 金 性 洙 에 이어 東 亞 日 報 제3대 사장에 취임한 이후는 주로 민족의 내부 역량 도모에 주력하는 非 戰 鬪 的 路 線 을 취했다. 呂 運 亨 은 44년 출옥후에도 建 國 同 盟 이란 것을 만들어 해방에 대비하는 한편 中 國 延 安 의 무장독 립단체와도 연락을 취했다. 따라서 해방이라는 사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두사람은 판이했다. 宋 鎭 禹 가 臨 政 奉 戴 로 주로 民 族 의 法 統 性 을 존중한 데 반해 呂 運 亨 은 투쟁의 실적에 충실했으 며 스스로도 참여했던 臨 政 에 대해서는 오히려 냉담했다. 둘 다 獨 立 鬪 爭 성격은 판이 누구나 회고하듯이 呂 運 亨 은 당대의 웅변가였다. 그이 풍모도 한때 만주에서 日 警 에게 쫓길 때 터키인으로 변장할 만큼 서구적이었다. 그는 사교인이기도 했다. 臨 政 시절에 그는 소련에서 中 國 共 産 黨 을 지도하기 위해 파견된 보이딘스키와도 교유했고 中 共 黨 의 陳 獨 秀, 國 府 측의 蔣 介 石 과도 교분을 맺는 등 발이 넓었다. 그런가 하면 마르크스의 共 産 黨 선언을 최초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 러나 부류를 나눈다면 이데올로그라기 보다는 스타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평생을 두고 누구 보다도 크고 작은 테러의 대상이 된 것은 그의 이같은 종횡무진한 성격 때문인지도 모른다. 宋 鎭 禹 는 呂 運 亨 과는 판이한 사람이었다. 이 두사람의 성격이 解 放 政 局 에 미친 영향은 다대하기 때문에 기회있을 때마다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呂 運 亨 은 解 放 이 태평양전쟁이라는 외부현상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呂 運 亨 은 해방에 이르는 한국인의 독립투쟁 실적도 외부현상과 같은 비중으로 병렬시키고 싶어했다. 그것은 국가장래에 대한 呂 運 亨 나름의 숙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한 그의 지나친 집착은 有 志 급이 중심이 된 우익과 氷 炭 不 相 容 의 관계를 형 성시켰으며 결국 그는 가속적으로 좌익에 업히는 결과가 됐다. 정치인으로서 呂 運 亨 의 비극은 거 기에 있었다. 呂 運 亨 이 宋 鎭 禹 와는 정반대로 政 權 을 日 帝 로부터 인수할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의 이같은 사고방식과 기질적 英 雄 主 義 에 기인한 것이었다. 夢 陽 독립선언서 초안 만들라
184 뒤에 人 共 組 閣 을 발표한 뒤 가진 기자회견 때도 呂 運 亨 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대체 朝 鮮 독립은 단순한 연합국의 선물은 아닌 것이다. 우리 동포는 과거 36년간 유혈의 투 쟁을 계속해온 혁명에 의하여 오늘날 자주독립을 획득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呂 運 亨 의 해방전 동작이 또 하나 있다. 즉 8월 11일 呂 運 亨 은 연합국에 제출할 4개항의 요구조건을 초안했다. 그 내용의 주요골자는 日 帝 로부터 朝 鮮 이 해방되는 데 있어 연합국의 도움에 감사한다. 그러나 朝 鮮 은 朝 鮮 人 의 것이어야 한다. 연합국은 朝 鮮 의 內 政 에 대해 엄격한 중립을 지켜주기 바란다 는 것들이었다. 그는 또 建 國 同 盟 간부에게 독립선언서를 초안하도록 지시했는데 그 내용은 3 1독립선언문을 기초로 하도록 지도했었다. 그러나 8월 15일 아침까지, 아니 그뒤에도 상당기간 呂 運 亨 은 연합국의 韓 半 島 에 대한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몰랐다. 그 점에서는 宋 鎭 禹 도 마찬가지였고 日 帝 도, 심지어 美 國 까지도 큰 차 가 없었다. 이 와중에서 呂 運 亨 은 15일 아침 7시 50분 鄭 亨 黙 (당시 京 城 서비스사장)이 내주는 리무진을 타 고 大 和 町 (지금의 筆 洞 )으로 엔도 정무총감을 만나러 갔다. 엔도는 단조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그러나 태도는 공손했다. 금일 정오에 포츠담선언을 수락하는 詔 勅 이 있습니다. 자세히는 모르나 朝 鮮 은 漢 江 을 중심으 로 북은 소련군이 남은 미군이 점령할 것으로 압니다. 지금 소련군의 남하속도로 보아 늦어도 17일 새벽까지는 京 城 에 도착할 것 같군요. 소련군은 이미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하고 있고 형 무소의 사상범을 석방하게 될 겁니다 다른 얘기는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漢 江 을 중심으로 韓 半 島 가 양단된다는 얘기에 呂 運 亨 은 아 뿔싸 했다. 엔도의 말은 계속됐다. 우리로 볼 때 우선 당장의 문제는 사상범 석방입니다. 그때 朝 鮮 민중이 부화뇌동해서 폭동을 일으키고 그래서 양민족이 충돌할까 우려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미리 형무소의 사상범이나 정치범을 석방하고 싶은 겁니다. 물론 연합군이 올 때까지 치안유지 는 총독부가 담당합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측면협조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엔도는 거듭거듭 呂 運 亨 의 협조를 요청하면서 民 世 安 在 鴻 에게도 협조를 얻어달라고 부탁했다. 엔도의 얘기를 다 들은 뒤 呂 運 亨 은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1 全 朝 鮮 의 정치범 경제범의 즉시 석방 2 京 城 의 3개월분 식량확보 3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대한 총독부의 불간섭 4 학생의 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한 총독부의 불간섭 5 日 本 노무자들의 계속적인 협력 엔도는 모두 승낙했다. 여기서 엔도는 내실로 들어가고 니시히로 경무국장의 呂 運 亨 과 좀더 얘 기를 나누었다. 니시히로는 呂 運 亨 에게 치안유지협력에 필요하다면 조선인 경찰관을 이관해주겠다 는 등 좀더 구체적인 제의를 하고는 식량문제는 10월까지는 문제가 없고 치안유지법 위반자는 석방하 겠으며 집회의 자유를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呂 運 亨 은 크게 감격했고 니시히로를 스포츠맨이라고 칭찬했다. 呂 運 亨 은 약 30분간의 면담을 마치고 桂 洞 집으로 돌아왔다. 呂 運 亨 은 그때 무엇보다도 서울이 蘇 軍 治 下 가 될 것이라는 엔도의 말을 곰곰 생각했다.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공산주의자 鄭 栢 만을 불러 약 20분간 얘기를 나눴다. 동생인 呂 運 弘 이 참다 못해 들어갔다
185 어찌됐소, 방송국을 접수하리까 정세가 달라졌다. 엔도의 말이 漢 江 을 경계로 美 蘇 양군이 분할점령한다니 그러고 보면 우리의 모든 계획이 거기 따라 변경되어야 한다. 방송도 영어로 할 필요가 없을 터이니 서두르지 말고 신중히 하자 呂 運 亨 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古 下 연합국환영대회 구상 한편 일본천황의 무조건 항복방송이 있고 두시간 뒤인 15일 낮 2시 苑 西 洞 宋 鎭 禹 의 집에는 민족진영의 金 炳 魯 白 寬 洙 尹 潽 善 玄 相 允 白 南 薰 張 德 秀 金 俊 淵 高 羲 東 등 30여명의 인사들이 모 였다. 仁 村 金 性 洙 는 이때 漣 川 에 내려가 있었다. 분위기는 도도했으나 전쟁말기의 피폐해진 경제사 정으로 마실 것은 냉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두들 연거푸 마셨다. 모두들 美 國 의 거대한 힘을 찬 양하고 독립과 건국에 대한 구상으로 얘기의 꽃을 피웠다. 자연히 日 帝 로부터 치안유지를 위임받았다는 呂 運 亨 에 대한 비판도 터져 나왔다. 우리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라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집주인인 宋 鎭 禹 는 일의 순서를 생각하고 있었다. (연합군이 들어온다. 日 本 의 무력은 아직 이땅에 남아있다. 승전국의 한반도에 대한 구상을 아 직은 알 수 없다. 自 重 自 愛 할 시기다) 宋 鎭 禹 는 우선 희미하게나마 국민의 總 意 도 여과하고 아울 러 연합국도 환영할 국민대회를 혼자 구상하고 있었다. 宋 鎭 禹 는 격정과 냉철을 거의 같은 분포 로 하여 그의 人 格 性 을 형성하고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京 畿 도 楊 州 군 德 亭 리에 은거하고 있다가 불편한 다리를 이끌며 얼마전 서울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宋 鎭 禹 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呂 運 亨 의 얘기가 또 나왔다. 李 仁 은 격해졌다. 古 下, 夢 陽 의 합작제의는 民 族 大 事 인데 동지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독단으로 거절한 것은 잘 못이오. 만일 夢 陽 이 혼자서 조선독립을 하고 있는 양 민중들에게 선전되면 큰일이 아니오 宋 鎭 禹 는 아무말없이 버릇처럼 눈만 끄먹거렸다. 그가 이런 상황에 매양 짓는 그 표정이었다. 옆에 있던 白 寬 洙 와 金 俊 淵 이 거들었다. 愛 山 ( 李 仁 의 雅 號 )이 양쪽 ( 宋 鎭 禹 와 呂 運 亨 安 在 鴻 )을 다 잘 아니 중간에서 한번 더 절충을 해 보시지요 白 寬 洙 는 抗 日 운동사건을 간혹 변호한 일이 있는 李 仁 의 경력에 기대했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金 俊 淵 을 찾는 鄭 栢 의 전화였다. 鄭 =아침에 夢 陽 을 길에서 만나 朗 山 이 했다는 말을 잘 들었소. 金 = 古 下 는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그리 아시오. 鄭 =소련군이 곧 서울에 온다 하니 우리는 이제 組 閣 을 해야겠소. 朗 山 도 끼었으면 하는데. 조각에서 빠져도 후회하지 않으시겠소? 金 =당신들 마음대로 해보시오. 나는 후회하지 않을테니. 金 俊 淵 과 鄭 栢 간의 전화통화에 나오는 呂 運 亨 과 金 俊 淵 과의 아침대화 는 金 俊 淵 에 의해 기록되 어 定 說 化 되다시피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呂 = 古 下 는 어떻게 하오? 金 = 古 下 는 나오지 않습니다. 仁 村 은 어제 漣 川 으로 떠났기 때문에 이야기 할 틈도 없었구요. 呂 =그렇다면 동무는 어떻게 하겠소? 金 =나도 나서지 않을 겁니다. 呂 =그러면 좋소, 나 혼자서 나서겠소. 공산혁명으로 일로매진하겠소
186 呂 運 亨 은 平 生 을 통해 思 想 문제에 대해 言 行 이 부주의했던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呂 運 亨 이 바야흐로 개인의 사상이 그 개인의 생사는 물론 국가적 운명까지를 결정하는 그 시기에 한사람의 지도자로서 이같은 파행성을 버리지 못한 것은 뒤에 그의 운명과 더불어 음미해볼 만하 다. 진짜 공산주의자는 따로 있는데 呂 運 亨 은 자신의 다소 진보적 생각 을 상대와 상황에 따라 무 절제하게 구사한 듯하다. 동생인 呂 運 弘 의 회고에 따르더라도 그의 경력은 유달리 산만하다. 上 海 시절인 1921년 呂 運 亨 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遠 東 피압박민족대회 에 참석, 레닌과도 만나고 日 本 의 공산주의자 카타야 마( 片 山 潛 )와도 교유했다. 1920년에는 당시 소련이 中 共 黨 지도를 위해 파견한 보이딘스키의 권유 로 李 東 輝 의 고려공산당 에 협조했으며 모스크바대회 때 中 國 대표로 온 瞿 秋 白 의 알선으로 中 共 黨 員 의 대우도 받았다. 그런가 하면 孫 文 등 國 民 黨 사람들과도 친교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일정한 노선으로 정진한 적이 없는 하나의 社 交 人 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 만 그의 경력과 대부분 아시아에서 지낸 그의 경험은 그 자신 한반도의 독립문제를 소련중심으로 보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각도에서 8월 15일 아침 엔도 정무총감으로부터 蘇 軍 의 서울점령설을 들은 呂 運 亨 이 공 산당 경력을 가진 金 俊 淵 에게 동무 라고 호칭하면서 공산혁명 운운한 것은 적어도 心 情 的 으로는 있을 법한 일이었다. 이는 브루스 커밍스가 그의 저서 < 韓 國 戰 爭 의 기원>에서 金 奎 植 이 그의 반대파인 공산주의자 들보다 唯 物 論 에 대한 이해가 오히려 깊었다 고 지적한 점에서도 보듯이 소수의 골수공산주의자 를 제외하고는 당시 汎 左 翼 내부에는 呂 運 亨 과 같은 증상의 이념적 방황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古 下 국민의 뜻 외면 안될 일 呂 運 亨 이 解 放 政 局 의 一 番 走 者 가 되고 있을 때 苑 西 洞 의 宋 鎭 禹 는 어떤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새 나라도 꾸며야겠지만 새 살림부터 마련해야겠소 宋 鎭 禹 는 몰려드는 동지와 손님을 대접할 쌀을 구하려고 사람을 이곳저곳에 보내고 있었다. 무 엇인가를 해야한다는 주변의 재촉에 대해 宋 鎭 禹 는 계속 같은 얘기를 되풀이했다. 아직 日 本 이 연합국측에 항복하겠다는 것뿐이지 日 本 의 세력은 국내에 엄연히 남아있소. 이 러한 때에 정권을 받는다는 것은 프랑스의 페탕이나 日 本 에 잡혀있는 필리핀의 라우렐 정권이 나 무엇이 다른 것이 있겠소? 日 本 이 정식으로 항복을 하고 우리의 입장을 정정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때가 와도 우리는 국민의 뜻을 받들지 않고 자기의 정치적 利 慾 만 취해서는 안되는 것 이오. 연합군이 들어오고 日 本 이 정식으로 항복한 후에 연합국과 논의해서 건국을 한다 해도 조금도 늦을 것이 없어요. 또 지금 날뛰는 것은 국외에서 오랫동안 風 餐 露 宿 하던 선배동지들에 대한 의리가 아니라고 보오. 더욱 日 本 세력을 이용해서 정권을 세운다는 것은 日 本 세력의 연장 이며 日 本 의 뜻을 받들어 뒤치다꺼리나 하는 데 불과한 것이 아니겠소 宋 鎭 禹 는 세계정세를 이해하는 近 代 的 신사이자 명분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儒 者 이기도 했다. 1937년 中 日 戰 爭 이 터지자 宋 鎭 禹 는 세계대전을 예언했다. 일생의 친구 金 性 洙 는 그런 宋 鎭 禹 의 先 見 之 明 을 六 味 湯 이라고 부르면서 답답하면 宋 鎭 禹 와 의논하고 다른 이들도 경청하도록 권했 다. 中 日 戰 爭 이 터지던 날 宋 鎭 禹 는 큰잔으로 술을 들이켜고 自 作 詩 를 읊었다. 詩 慾 警 人 恒 固 癖 酒 雖 病 我 更 多 情 (시는 항상 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고집하는 버릇이 있으나
187 술은 아무리 나를 병들게 하여도 다시 다정하구나) 그리고 거나해지면 곧잘 남을 물어뜯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울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시국이 시끄러워지자 宋 鎭 禹 는 東 亞 日 報 의 社 說 에서 파리를 잡자 산보를 하자 고 쓰는 등 便 法 을 쓰면 서 日 帝 의 압제에 항거적 자세를 취했다. 李 仁 의 회고에 따르면 宋 鎭 禹 는 東 亞 日 報 폐간후 잔무처리를 하던 중 어느날 동저고리 바람으 로 李 仁 집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때 日 帝 는 군부가 직접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東 條 英 機 를 首 相 에 앉혔을 때다. 동저고리 바람에 의아해 하는 李 仁 에게 宋 鎭 禹 는 넌지시 한마디 했다. 東 條 니 동저고리야. 급하면 두루마기도 안입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뛰어나간다는 말 못 들었 나. 43년 宋 鎭 禹 는 나들이길에 金 俊 淵 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朗 山, 日 帝 는 꼭 망합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궁박하게 되면 自 治 라는 미끼로 우리를 유혹할거 요. 형세가 더 궁하면 독립을 許 與 한다고 할거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움직여서는 안 돼. 사실은 그때가 가장 위험한 때거든. 朗 山, 그래서 大 策 은 無 策 이오 지금은 無 策 이 大 策 이오 44년 7월 宋 鎭 禹 는 平 澤 에 소개해있던 安 在 鴻 의 방문을 받았다. 古 下, 기왕 조선사람들이 군인으로 나가서 피를 흘리고 있는 바에야 그 피값을 받아야 할 것 아니오. 그러니 무슨 운동을 일으켜 다소 권리라도 얻어야 하지 않겠소? 民 世 ( 安 在 鴻 의 號 ), 그 무슨 소리오, 긴박한 이 시국에 오직 침묵밖에는. 만일 우리가 움직이 면 움직일수록 日 帝 의 손아귀에 끌려들어갈 뿐 古 下 는 참 로맨틱도 하시오. 침묵만 지키고 앉아 있으면 李 承 晩 박사가 美 國 군함이라도 타고 仁 川 港 으로 들어올 듯싶소? 그건 안될 말이오. 피는 딴사람이 흘리고 그 값은 당신이 받는단 말이오 두사람 다 같은 목표를 갖고 있었으나 運 身 방법에 대해서는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었다. 아무튼 解 放 政 局 은 宋 鎭 禹 와 呂 運 亨 이라는 양대산맥으로 본격적으로 나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만이 다는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또 도사리고 있었다. 呂 運 亨 의 심정은 복잡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 같았는데 여의치가 않았다. 우선 그의 지시로 民 世 安 在 鴻 이 16일 京 城 中 央 放 送 을 통해 동포에게 행한 연설이 日 帝, 특히 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에 의해 문제가 됐다. 安 在 鴻 은 이 연설에서 建 準 이 구성될 것임과 建 準 밑에 치안대를 설치하고 나아가서 정규 군대를 갖게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는 또 통화안정정 책과 米 穀 공출방침을 설명했는가 하면 對 日 協 力 者 대책 등 광범위한 당면문제에 두루 언급했다. 安 在 鴻 의 방송으로 조선주둔 일본군은 呂 運 亨 과 엔도 정무총감간에 회담이 있었음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들은 大 怒 했다. 특히 젊은 장교들은 軍 刀 를 빼들고 흥분했다. 그날로 朝 鮮 軍 管 區 사령부 는 官 內 一 般 民 衆 에게 告 함 이란 포고를 발표하고 人 心 을 교란하고 치안을 해치는 일이 있으면 군은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 이라고 경고했다. 군부의 위세에 눌린 엔도 정무총감도 17일 建 準 의 활동은 치안협력의 한계를 넘지 않아야겠다 고 부탁했다. 呂 運 亨 은 또 자신이 해방전에 조직한 建 國 同 盟 멤버와 지금 자신을 따르고 있는 자들간의 갈등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미 내정한 建 準 의 조직에는 建 盟 의 멤버가 거의 소외되어 있었다. 또하나의 골치는 建 準 준비에 민족진영을 제외하고 있는 데 대한 李 仁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질
188 타였다. 이밖에 呂 運 亨 이 日 帝 에의 협력 대가로 거금을 받았다 附 日 경력이 있다 는 풍설 등도 呂 運 亨 을 괴롭혔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呂 運 亨 은 17일 오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宋 鎭 禹 를 만나 직접 담판키로 결 심했다. 모든 것을 분명히 해놓겠다는 呂 運 亨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두 주역 의 회담은 굉장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이 단독으로 대좌하고 있는 시간에 宋 鎭 禹 집밖에는 人 波 가 넘실거렸다. 방문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古 下 는 나를 페탕이라고 했다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한 말이었소? 夢 陽 을 가리켜 한 말은 아니오. 이런 시기에 정권을 물려받으면 페탕이 되기 쉽다고 했소. 정 권은 국내에 있던 우리가 받을 것이 아니라 연합군이 들어와서 일본군이 물러나고 해외에 있던 선배들과 손을 잡은 뒤에 절차를 밟아서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때가 되어 夢 陽 이 생각이 있다면 내가 극력 夢 陽 을 추대할 것이니 지금 정권수립은 보류했으면 싶소 古 下 夢 陽 담판후 行 路 갈려 두사람의 時 局 觀 이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어째서 꼭 해외에 있는 사람들과 정권을 받아야 하오. 古 下 와 내가 둘이 손만 잡는다면 그만한 세력은 없을 것이고 해외에서 들어오는 세력도 우리들 속에 흡수될 것이고 해외 인사라고 해도 별로 문제가 될 만한 사람은 없소 夢 陽, 의리상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소 그렇다면 그동안은 국내를 진공상태로 둘 생각이란 말이오? 夢 陽 은 내가 보기에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오. 그러나 자칫하면 그들에게 휘감기어 공산주의자도 못되면서 공산주의자 노릇을 하게 될 위험성이 없지 않소. 내 말을 잘 들으시오 宋 鎭 禹 는 냉엄하게 말했다. 내가 무엇이 되든 두고 보시오 呂 運 亨 은 약간 신경질적으로 받았다. 회담은 끝났다. 아니 日 帝 下 에서 대단한 친교는 없었지만 그래도 서로를 아꼈던 두사람은 이 會 同 을 끝으로 行 路 를 완전히 달리했다. 신문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만나신 결과를 얘기해 주시지요 呂 運 亨 은 미소만 띠었다. 宋 鎭 禹 가 짤막하게 반마디만 했다. 별로 아니 발표할 것이 없다니요 아무말도 없다는 것도 훌륭한 기사야 前 東 亞 日 報 사장인 宋 鎭 禹 는 기자들에게도 냉엄하게 한마디 했다. 苑 西 洞 宋 鎭 禹 집을 나와 승용차에 몸을 실으면서 呂 運 亨 은 결심을 했다. (할 수 없다. 이제는 서둘러야겠다) 그러나 결심한 것은 呂 運 亨 만이 아니었다. 宋 鎭 禹 도 방향은 달랐지만 결심을 했다. 바로 국민 대회준비회 에 착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뒤, 그러니까 建 準 이 人 民 共 和 國 으로 탈바꿈한 뒤에도 呂 運 亨 은 한차례 더 宋 鎭 禹 와의 악수 를 청한 적이 있었다. 이때는 呂 運 亨 측에 가담하고 있던 화가 一 洲 金 振 宇 가 중간에 섰다. 그러나 宋 鎭 禹 는 듣지 않았다. 宋 鎭 禹 는 呂 運 亨 이 모든 것을 원점에 돌려놓을 때 악수가 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그 과정에
189 서 다급했던 金 振 宇 가 후일 민족간의 互 相 出 血 이 있게되면 그것은 古 下 의 책임 이라고까지 대들 었지만 宋 鎭 禹 는 끝내 듣지 않았다. 宋 鎭 禹 는 이제부터의 싸움은 과거 日 帝 와의 그것과는 유가 다르게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될 것임 을 내다보고 있었다. 日 帝 下 에서 개인이 가진 이념에 관계없이 누구보다도 동족을 관대히 포용했 던 宋 鎭 禹 는 해방조국이 되자 누구보다도 路 線 의 애매성을 배척하게 되었다. 呂 運 亨 은 宋 鎭 禹 와 헤어져 桂 洞 집으로 돌아와 建 準 의 1차 부서 결정을 다음과 같이 완료했다. 위원장= 呂 運 亨 부위원장= 安 在 鴻 총무부장= 崔 謹 愚 재무부장= 李 奎 甲 조직부장= 鄭 栢 선전부장= 趙 東 祜 武 警 부장= 權 泰 錫 呂 運 亨 은 建 準 골격을 잡아감과 동시에 張 權 에게 下 命 한 치안대의 조직을 구체적으로 확충했다. 이 建 國 靑 年 治 安 隊 는 학생을 주축으로 한 청년 2천명을 동원하여 급한대로 서울치안을 맡게 하고 전문학교 이상 학생 2백명을 전국곳곳에 파견해서 지역별 치안대를 조직토록 하는 것이었다. 이 밖에 식량대책위원회도 조직, 긴급대책을 수립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呂 運 亨 은 독자적인 구상대로 나간 편이다. 물론 가장 핵심부서인 조직선전, 무 경부를 차지한 鄭 栢 趙 東 祜 權 泰 錫 은 공산주의자였다. 그러나 아직 이들의 참여방식은 개인적인 형태였으며 특히 長 安 派 공산당원이 많았다. 때문에 呂 運 亨 은 자신이 해방전에 지도해 온 建 盟 출 신들을 많이 기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建 盟 과 建 準 의 관계를 살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이유는 이들 두 단체가 建 準 수립과정에서 혼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呂 運 亨 의 사업스타일 을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심증도 되기 때문이다. 建 盟 내부 初 建 派 再 建 派 갈등 呂 運 弘 의 회고에 따르면 呂 運 亨 은 44년 8월 建 國 同 盟 이란 세포조직으로 된 비밀결사를 만들었 다. 이 결사에 처음 참여한 사람은 좌익계의 老 壯 層 이라고 할 수 있는 趙 東 祜 金 振 宇 李 錫 玖 등 이었다. 이 결사는 각 道 에 책임위원을 두고 중앙에서는 李 錫 玖 玄 又 玄 黃 雲 李 傑 笑 金 甲 文 등이 연락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8월 4일 이를 눈치챈 日 警 에 의해 建 盟 員 의 다수가 체포되었다. 이때의 建 盟 員 을 初 建 派 라 부르고 그 이후에 조직된 盟 員 을 再 建 派 라고 불렀다. 그러나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해방이 되자 初 建 派 와 再 建 派 는 서로 초면이었고 제각각 놀았다. 呂 運 弘 은 이같은 혼란은 呂 運 亨 이 8월 18일에 테러를 당해 양파를 미처 인사시킬 시간이 없었 기 때문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같은 혼란이 표면화된 것은 呂 運 亨 이 建 準 사업을 再 建 派 중심으 로 진행한 데서 표면화됐던 것이다. 또하나 呂 運 亨 은 45년 建 盟 을 조직하면서 八 堂 근처인 京 畿 도 楊 州 군 奉 安 에서 은거하던 중 엔 도 정무총감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다. 엔도는 그에게 中 日 화평을 中 國 에 가서 주선해달라고 요 청했다. 이때 呂 運 亨 은 여러 이유를 들어 애매한 대답을 했는데 한때는 엔도의 요청을 이용해서 國 外 탈출을 생각하기도 했다. 아무튼 呂 運 亨 의 그러한 八 方 美 人 같은 자질은 종종 그에게 오히려 逆 境 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 다. 왜냐하면 해방후 민족진영의 일부에서는 呂 엔도 면담을 이렇게 비꼬았기 때문이다. 浮 舟 遊 於 八 堂 之 下 ( 八 堂 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 다. 宋 鎭 禹 의 냉엄한 시국관에도 불구하고 呂 運 亨 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민족진영은 대체로 초조했 물론 민족진영 내부에도 여러 갈래가 있었다. 때문에 통일된 전략은 당초에는 있을 수 없었고
190 우선 先 發 한 좌익과 거리를 단축하는 것과 스스로의 정당조직에 나서는 움직임이 있었다. 8월 16일 낮 李 仁 (초대법무부장관 79년 작고)은 桂 洞 집으로 呂 運 亨 을 찾았다. 日 帝 下 에서 변호사를 지낸 李 仁 은 左 右 의 인사들을 두루 잘 알고 있었다. 李 仁 은 한때 淸 進 洞 에서 金 炳 魯 와 뒤에 좌익으로 넘어간 許 憲 과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린 적도 있었다. 15일 白 寬 洙 가 宋 鎭 禹 집에서 李 仁 에게 呂 運 亨 과의 협상에 나서라고 제의한 것도 李 仁 의 그같은 인간관 계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李 仁 은 그날 기분이 좋지 않았다. 呂 運 亨 의 서두르는 폼도 보기 싫었지만 宋 鎭 禹 도 그 저 팔짱만 끼고 있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더운 날씨탓인지 단장은 짚었지만 불편한 다리가 더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慶 北 大 邱 출신인 李 仁 의 한쪽 다리는 열두살 때부터 못쓰게 됐다. 그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엉 덩이에 종기가 나서 침을 맞다가 통증이 심해 몸을 심하게 흔들어 脫 骨 이 됐다는 것이다. 그 뒤 脫 骨 된 뼈가 근육을 압박하는 통에 다리근육이 발달하지 못해 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15일 해 방 당일에도 李 仁 은 조카가 끄는 자전거 꽁무니에 붙어 은거지인 倉 洞 에서 서울로 들어왔다. 아무튼 李 仁 을 맞은 呂 運 亨 집에는 마침 安 在 鴻 도 와 있었다. 呂 運 亨 은 퍽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李 仁 은 첫마디부터 대들다시피 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들입니까. 첫째, 夢 陽 이 日 帝 말단관리의 위촉으로 당면치안을 담당한 다는 의도 자체가 불순하게 보여지고 있어요 李 仁 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계속했다. 그리고 建 國 이라는 것은 민족적 역사적 聖 業 이 아닙니까. 이런 聖 業 을 단 몇 사람이 사랑방에 서 소곤대며 해치우겠다 이 말입니까 李 仁 의 돌격 에 呂 運 亨 과 安 在 鴻 은 당황한 눈빛이 역력했다. 古 下 仁 村 에 다리 좀 놔주시오 愛 山 ( 李 仁 의 雅 號 ), 愛 山 얘기대로 그런 것은 아니오. 愛 山 이 얘기하는 그런 의도로 일이 그렇 게 된 것도 아니고 사태가 워낙 급하다보니 그리 된 것이 아니겠소. 이제부터 동지들과 상의하 려던 참이었소 그러면서 呂 運 亨 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얘긴데, 愛 山 은 양쪽을 다 잘 알지 않소. 古 下 와 仁 村 에게 중간다리를 놓아주시오 李 仁 은 오히려 呂 運 亨 으로부터 白 寬 洙 가 자기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부탁을 받았다. 잘들 생각해 보세요. 나는 갑니다 李 仁 은 그 길로 苑 西 洞 으로 宋 鎭 禹 를 찾아가서 呂, 安 과의 면담내용을 자세히 얘기했다. 宋 鎭 禹 는 잠자코 들으면서 눈을 끄먹거렸다. 썩 기분이 좋지않을 때 짓는 그의 독특한 표정이 다. 그러면서 宋 鎭 禹 는 댓돌 위에 비켜놓은 李 仁 의 단장만 유심히 바라다보고 있었다. 돌아갑니다 李 仁 은 일어섰다. 울화만 치밀었다. 愛 山, 단장끝이 다 닳았구료 이 시국에 단장끝이 문제입니까 내가 언젠가 金 剛 山 에 갔을 때 사둔 것이 있는데 그걸 쓰시오 宋 鎭 禹 는 벽장을 뒤져서 단장 하나를 꺼냈다. 다리도 성치 않으면서 단장이나 하나 튼튼한 것 가지소 李 仁 이 짚어보니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튼튼하기는 했다. 단장을 얻어 짚고 李 仁 은 돌아갔다
191 민족진영의 일부가 벌인 建 準 과의 一 面 協 商 작전은 다음과 같은 경로를 거쳐 결국 무산된다. 李 仁 의 1차 움직임이 있은 후 金 炳 魯 白 寬 洙 李 仁 등은 建 準 측의 安 在 鴻 부위원장을 공격목표로 삼았다. 安 在 鴻 (2 代 의원 拉 北 後 사망)은 京 畿 道 平 澤 출신으로 언론인 경력을 가졌는데 본질적으로 민족 주의자였고 성품상 온건한 신사였다. 金 炳 魯 등은 우선 全 國 有 志 者 大 會 를 安 在 鴻 에게 제의했다. 민족진영의 방법상 1차로 민족진영 이 대거 建 準 에 참가하여 성격변화를 일으킨 뒤 궁극적으로는 建 準 을 全 國 有 志 者 大 會 로 전환시 킨다는 전술이었다. 이 제의는 安 在 鴻 에 의해 받아들여져 한때 명단 작성을 하는 단계에까지 갔 다. 그러나 建 準 내의 李 康 國 崔 容 達 鄭 栢 등 좌익은 민족진영의 기미를 알아차리고 적극적인 대응 책을 마련했다. 우선 그들은 합의사항은 뒷전에 두고 시일을 끌다가 민족진영이 초조한 기색을 보이자 2단계 작전을 통해 이 최초의 左 右 合 作 을 깨뜨려 버렸다. 즉 그들은 우선 민족진영 추천인사는 서울 거주자로 한정할 것을 요구했다. 다급한 민족진영은 이를 받아들이고 추천에 응했다. 그러자 그들은 이번에는 민족진영 추천인사보다 더많은 자파인 사를 이 擴 大 委 員 에 추천했다. 이에 민족진영이 심하게 반발하자 安 在 鴻 은 좌익의 반대를 무릅 쓰고 5명의 민족주의 인사를 추가했다. 그러자 좌익은 呂 運 亨 을 들쑤셔 이들 擴 大 委 員 에게는 발 언권을 제한해 버렸다. 결국 左 右 1차 합작은 깨지고 말았다. 이 때문에 建 準 은 呂 運 亨 위원장 安 在 鴻 부위원장이 사 표를 냈다가 반려되는 등 곡절을 겪었다. 이 소동은 결과적으로 建 準 이 좌익 위에 자리잡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민족진영이 얻은 것은 저들과는 안되겠다 는 확신뿐이었다. 굳이 더 얻은 것이 있다면 이 때 安 在 鴻 이 建 準 을 떠날 결심을 하도록 환경조성을 한 것이라고나 할까. 민족진영의 정당창당은 여러 갈래로 진행되었다. 그중에 한 갈래를 잡을 수 있는 것으로 許 政 씨( 前 과도정부 내각수반)의 회고가 있다. 許 政 은 8월 16일 普 成 전문학교로 雪 山 張 德 秀 를 찾아갔다. 張 德 秀 와 許 政 은 미국 유학시절 뉴 욕에서 <3 1신보>라는 신문을 내면서 서로를 아끼게 되었다. 張 德 秀 는 달변이고 일을 꾸미는 능 력이 대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許 政 의 인상에 뚜렷이 남아있는 인물이었다. 人 脈 으로 볼 때 張 德 秀 는 宋 鎭 禹 계의 사람이었고 許 政 은 李 承 晩 계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張 德 秀 는 呂 運 亨 과도 특별한 사이였다. 그들의 관계는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許 政 은 張 德 秀 에게 政 黨 창당에 대한 평소의 소신을 밝혔다.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했다. 만난 김에 몇가지 창당원칙도 정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汎 階 層 정당을 만든다는 것과 臨 政 을 奉 戴 한다는 것이었다. 행동가인 張 德 秀 는 이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呂 運 亨 도 만났다. 呂 運 亨 은 日 帝 下 에서 특별한 관계를 가졌 던 張 德 秀 에게 솔직히 심중을 털어놓았다. 주위를 살피면서 그래도 삼갔던 얘기를 呂 運 亨 은 張 德 秀 에게는 했던 것이다. 雪 山, 나도 上 海 에 있어보았지만 臨 政 에 도대체 인물이 있다고 할 수 있겠소? 누구누구 하고 지도자를 꼽지만 모두 노인들뿐이고 밤낮 앉아서 파벌 싸움이나 하는 無 能 無 爲 한 사람들뿐이 오. 臨 政 요인중 몇 사람은 새 정당이 수립하는 정부에 개별적으로 추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臨 政 의 法 統 은 인정할 수 없소 (2) 解 放 政 局 의 폭탄 -- 朴 憲 永 (동아일보 )
192 해방후 민족진영과 좌익은 각각 세력을 조직화하는 방법이 판이했다. 좌익은 민첩했고 체계적 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반대로 민족진영의 움직임은 굼뜨고 산만했다. 民 族 진영 느린 속도로 연합 민족진영은 당초 여섯 갈래가 있었다. 우선 元 世 勳 계가 있다. 桂 洞 韓 學 洙 ( 舊 韓 末 韓 圭 卨 의 孫 子 )의 사랑방을 거점으로 자주 모여온 이 그룹에는 李 炳 憲 朴 明 煥 宋 南 憲 등이 속했다. 이 계통은 社 會 民 主 主 義 를 신봉하는 색채가 있었다. 元 世 勳 은 1910년 庚 戌 國 恥 때 東 滿 洲 를 거쳐 沿 海 州 로 들어가 항일운동을 벌였다. 그 뒤 日 警 에 체포돼 2년간 복역을 했는데 출옥후에는 < 批 判 > < 大 衆 時 報 > 등을 발간하면서 총독정치에 대 항했던 사람이다. 元 世 勳 은 민족진영 중에서는 가장 빨리 8월 18일 高 麗 民 主 黨 이라는 정당을 창 당했다. 다음으로 金 炳 魯 계가 있었는데 建 準 과의 합작을 시도했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주 로 湖 南 출신들이 많았다. 白 寬 洙 金 用 茂 羅 容 均 鄭 光 好 등이 이 계통이다. 日 帝 때 新 幹 會 京 城 支 會 멤버를 주축으로 한 洪 命 憙 계에는 趙 憲 泳 李 源 赫 朴 儀 陽 金 武 森 등이 속해 있었다. 또한 李 仁 趙 炳 玉 朴 瓚 熙 咸 尙 勳 申 允 國 등이 한 모임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밖에도 共 産 主 義 者 로서 전향한 金 若 水 兪 鎭 熙 등도 있었다. 이들이 뒤에 韓 國 民 主 黨 이 되어 하나로 합쳐가는 과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 의 개별모임은 본질적으로 친소관계나 지역적 연고에 따른 것이었는데다 좌익의 발호가 워낙 심 했기 때문에 공동의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개별적인 친소관계에 관계없이 大 同 小 異 하 게 이들이 모두 宋 鎭 禹 나 金 性 洙 를 국내인사 중에서는 최고지도자로 꼽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기 도 했다. 그같은 환경하에서 元 世 勳 이 발기한 高 麗 民 主 黨 은 金 炳 魯 등 다른 계파와 협조해서 朝 鮮 民 族 黨 으로 통합되고 朝 鮮 民 族 黨 은 다시 金 度 演 許 政 尹 致 暎 尹 潽 善 등 歐 美 유학생이 주축이 된 韓 國 國 民 黨 과 연합하여 뒤에 韓 國 民 主 黨 을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宋 鎭 禹 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다. 그러나 이 과정은 매우 느리게 진행됐다. 呂 運 亨 이 建 準 에 열을 올리고 長 安 派 공산당이 간판을 내거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반면 민족진영은 아직도 사랑방 좌담회만 벌이면서 우왕좌왕하던 무렵이었다. 全 南 光 州 에서 한 사나이가 서울에 숨어들었다. 안경을 끼고 작달막한 볼품없는 외양의 이 사나이는 美 軍 政 3년은 물론 뒤에 韓 國 戰 爭 을 전후하여 이땅에 폭풍을 몰고왔다. 바로 骨 髓 공산주의자 朴 憲 永 이었다. 朴 憲 永 은 1939년 출옥하고 얼마 뒤부터 光 州 어느 벽돌공장에서 金 成 三 이란 가명으로 인부노 릇을 하면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가 해방을 맞아 언제 어떤 방법으로 上 京 했는지에 대해서는 定 說 이 없다. 8월 19일 上 京 說 이 있으나 金 南 植 씨는 < 實 錄 南 勞 黨 >에서 다음과 같이 異 見 을 제 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朴 憲 永 이 5년동안 光 州 에서 피신하고 있다가 해방과 함께 트럭을 타고 光 州 를 출발, 全 州 로 와 형무소에서 출옥한 콤 클럽 의 중심인물 金 三 龍 을 만나 19일에야 서울에 올라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朴 憲 永 이 그의 옛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8월테제라는 꽤 긴 政 治 路 線 을 작성하여 20일에 黨 再 建 委 를 발족시키면서 같은 날로 이를 공포하는데 과연 그가 19일 上 京 하여 단 하룻만에 그같은 일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하기야 이론 에 밝다는 그가 멀지않아 해방이 되리라는 생각을 하고 미리 테제를 구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 다는 얘기가 나올 법하다. 하지만 이것도 8월테제를 읽어보면 수긍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8월
193 테제에서 朴 은 解 放 後 의 상황 을 논하고 있을 뿐 아니라 長 安 派 공산당의 派 閥 主 義 를 비판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朴 은 8 15직후 아마 늦어도 16일에는 서울에 와 있었던 것 같 다. 믿을만한 기록에도 41년부터 李 順 今 ( 李 觀 述 의 妹 )을 통해 朴 憲 永 을 알게 됐다는 尹 淳 達 이가 서울에서 17일 朴 憲 永 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朴 憲 永 선생 나오시라 벽보 아무튼 上 京 한 朴 憲 永 은 明 倫 洞 金 海 均 의 집을 아지트로 삼고 공산당 조직사업에 착수했다. 金 海 均 의 집은 주위에서 阿 房 宮 이라고 불릴 만큼 당시 수준으로는 韓 洋 式 절충의 호화주택 이었 다. 그런데 근로대중의 전위 라고 하는 공산당이 이같은 저택을 아지트로 삼은 것은 두고두고 解 放 政 局 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金 海 均 이란 인물은 이런 사람이다. 金 은 해방 당시 35세로 全 北 益 山 의 土 豪 출신이다. 그는 東 京 유학후 普 成 專 門 교수로 있었는데 그때부터 공산주의자들에게 많은 재정적 지원을 했다. 그는 6 25전에 越 北, 停 戰 會 談 때는 人 民 軍 大 佐 로 북한측의 영어통역을 맡게 된다. 8월 18일 서울거리에는 괴벽보가 군데군데 나붙어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위대한 지도자 朴 憲 永 선생은 어디 계신가 위대한 지도자 朴 憲 永 선생은 나오시라 마치 尋 人 광고같은 이 술법은 朴 憲 永 의 출현에 고무된 콤클럽계의 대중적 분위기조성 전술이었 다. 이같은 분위기를 일단 깔아놓고 朴 憲 永 은 李 觀 述 金 三 龍 李 鉉 相 李 康 國 등을 불렀다. 대개 콤 클럽계이면서 呂 運 亨 의 建 準 쪽에 침투한 자들이다. 이 계파는 하나의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은 日 帝 下 에서 끝내 전향하지 않고 지하에서 서클활동을 하면서 나름대로 소규모 투쟁 을 계속해 왔다. 따라서 이들은 주로 전향한 자들로 구성된 長 安 派 쪽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李 觀 述 의 상황보고가 있었다. 그 요지는 대개 다음과 같았다. 建 準 은 우익의 지도급들이 대부분 배제된 가운데 지방조직을 계속 확대중이다. 建 準 의 조직과 선전부서를 과거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했고 따라서 조직원칙에 따라 사업중이다. 남은 문제는 建 準 과 미구에 재건될 우리 당과의 관계형태를 확정하기 위해 建 準 사업에 대한 우리 당의 공작 원칙을 정하는 것이다. 長 安 빌딩에서 李 英 鄭 栢 高 景 欽 李 承 燁 등 서울계 火 曜 會 ML 系 등이 모 여 조선공산당 간판을 내걸었다. 東 大 門 에서 공산당 서울시당부를 조직하고 대기하던 崔 益 翰 李 友 狄 河 弼 源 도 결국 長 安 派 에 합류했다. 이들은 轉 向 者 그룹인데다 창당의 형태를 취함으로 써 조선공산당 沿 革 의 정통성을 위배했다. 그러나 우리 당은 재건에 즈음하여 이들에 대한 공 격과 병행하여 그들을 처우하는 일정한 원칙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朴 憲 永 은 코웃음을 쳤다. 적어도 朴 의 관점에서 볼 때 日 帝 때 1차검거로 간단히 공산주의운동 을 청산하고 광산브로커나 하던 자들이 대부분인 長 安 派 는 가소롭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변절자 에 대한 끓어오르는 적개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朴 憲 永 은 황망한 가운데서도 일을 순서대로 꾸며나갔다. 그는 수하인물들에게 기간조직 인 콤클럽을 再 生 토록 지시했다. 長 安 派 에 가담한 李 承 燁 趙 斗 元 趙 東 祜 를 포섭해서 와해공작을 시작토록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방문을 닫아걸고 再 建 共 産 黨 이 제시할 종합적인 路 線 을 작성하 기 시작했다. 바로 조선공산당에서 南 勞 黨 에 이르기까지 南 韓 의 공산주의자들의 교과서가 된 유 명한 8월테제 였다. (3) 民 族 진영의 結 集
194 (동아일보 ) 建 準 이 人 共 으로 발전하는 소동을 먼 발치에서 보면서 민족진영의 宋 鎭 禹 는 좌익과는 전혀 다 른 계산법으로 時 局 에 대응하고 있었다. 宋 鎭 禹 의 建 國 구상의 1단계는 국민대회였다. 그는 국민대회를 통해 두가지를 국민의 總 意 형식 을 밟아 확정시킬 생각이었다. 그 하나가 重 慶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확정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연합국에 감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데는 宋 鎭 禹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전개되는 내외정세를 볼 때 視 界 는 불투명했다. 美 軍 의 서울진주가 통고됐지만 그들의 점령정 책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宋 鎭 禹 는 겉으로야 어쨌든 내심 建 準 에는 대항해야 한 다고 확실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建 準 에 대한 대항조직이자 우익의 공동광장으로 국민대회를 구성해서 밀고 나갈 결심이었 다. 옆에서 민족진영 정당을 구성하자고 보챘지만 宋 鎭 禹 의 생각은 달랐다. 좌익에 비해 조직력 동원력과 응집력이 미약한데다 또 非 理 念 的 인 우익이 정당부터 손대다가는 좌익의 통일된 공세를 당할 수 없다고 그는 계산했다. 더욱 建 準 이 우익일부를 日 帝 협력자 反 動 視 하고 있는 마당에 섣부른 행동은 우익의 자멸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宋 鎭 禹 는 建 準 의 움직임을 눈여겨 보면서 左 右 가 구분되기를 기다렸다. 민족진영의 對 左 翼 적개심이 한 방향으로 집결되기까지 기다렸다. 이런 정세관을 기반으로 해서 宋 鎭 禹 는 국민대회가 내세울 두가지 명분이 결과할 實 益 을 냉정 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첫째, 국민대회가 연합군환영을 주도할 때 점령군과의 관계에 있어 우익은 좌익을 제칠 수 있 다. 둘째, 臨 政 奉 戴 는 법통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좌익도 함부로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宋 鎭 禹 는 金 性 洙 와 모든 것을 의논했다. 소년시절 昌 平 英 學 塾 때부터 맺어진 두 사람은 평생 을 같이 지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東 京 유학도 같이했고 日 帝 下 에서 東 亞 日 報 를 운영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後 見 人 이었다. 대체로 金 性 洙 는 뒤에서 일을 기획하고 만들어왔다. 宋 鎭 禹 는 이를 받아 전면에서 마무리 지었 다. 때로는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古 下, 仁 村 과 대응책을 논의 두 사람의 성격은 판이했다. 宋 鎭 禹 가 열화같은 성격의 일면을 가진 데 반해 金 性 洙 는 차분하 고 온건했다. 이 두 사람은 살얼음판 같은 日 帝 下 에서 서로의 처신을 보호했다. 해방후 宋 鎭 禹 가 국내 민족진영의 지도자로 옹립될 만큼 위치를 가다듬은 것도 金 性 洙 와 宋 鎭 禹 간의 이같은 우정 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962년 兪 鎭 午 씨는 東 亞 日 報 에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겉보기에는 풍모나 뱃심이나 활동에 있어서 古 下 가 兄 格 같았지만 내용으로는 仁 村 이 兄 格 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古 下 는 호방하고 仁 村 은 諧 謔 을 좋아해서 酒 席 같은 데서 두 분이 맞붙 으면 사뭇 헐뜯는 것 같은 농담이 벌어지는 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古 下 가 仁 村 은 돈으로 社 長 을 했지 나는 내 몸뚱이로 社 長 을 했단 말이야 하고 내던지면 여북 미련해야 몸뚱이로 社 長 을 한담 하고 仁 村 이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번 仁 村 이 정색을 하면 古 下 는 눈만 껌벅껌벅 하는 것이었다. 日 帝 말기 때다. 仁 村 古 下 爲 堂 ( 鄭 寅 普 ) 세 분과 나와의 酒 宴 이 있었다. 日 人 경영의 음식점이 었다. 그러나 잔을 거듭함에 따라 古 下 의 음성은 높아졌다. 물론 時 局 談 이었다. 日 警 이 옆에 있
195 으면 잡아가기라도 할 판이다. 그때 이제 그만해 하고 날카로운 仁 村 의 말소리가 떨어졌다. 古 下 는 말을 뚝 그치고 약간 원망스러운 눈으로 仁 村 을 바라보고 그리고는 씩 웃고 또 술잔을 들 었다. 다음은 東 亞 日 報 사장 직무대리를 지낸 梁 源 模 씨의 회고. 두분은 가끔 대충돌을 일으켜서 그때마다 옆에서는 이제 영영 절교가 되는가 걱정을 하기도 했지마는 그 이튿날 桂 洞 사랑에 가보면 언제 왔는지 古 下 선생이 仁 村 선생과 머리를 맞대고 무 엇인가 열심히 숙의를 하는 장면을 보게되곤 했지요 해방 때도 두 사람은 역할을 나누고 있었다. 8월 14일 이쿠타( 生 田 ) 京 畿 道 지사와의 회담을 마 치고 宋 鎭 禹 는 金 性 洙 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내일이 고비가 될 것 같으니 자네는 漣 川 에 내려가 있는 것이 좋겠어 日 帝 의 단말마적인 발악을 걱정해서였다.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金 性 洙 가 물었다. 나야 세상이 뒤바뀌는 것을 지켜봐야 하지 않겠나 漣 川 驛 앞에 있는 崔 楠 의 농장에서 해방을 맞은 金 性 洙 는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政 治 는 古 下 와 동지들에게 맡기고 나는 학교를 하겠으니 당신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러나 해방초기에 정당결성를 서두르지 않는다는 데 대해서는 宋 鎭 禹 나 金 性 洙 는 생각이 같았 다. 宋 鎭 禹 는 국민대회라는 원거리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9월 4일 金 性 洙 와 함께 大 韓 民 國 임시정부 및 聯 合 軍 환영준비위원회 를 구성했다. 위원장은 權 東 鎭, 부위원장은 金 性 洙 許 憲 李 仁 이었다. 이 과정은 임정의 귀국을 쉽사리 예상할 수 없다는 표면적 이유와 建 準 의 人 共 결성 에 대응하기 위해 다음 단계인 국민대회준비회로 자연히 발전했다. 말하자면 宋 鎭 禹 는 임정 및 연합군환영준비회 과정을 통해 민족진영의 동원력을 사전 진단해본 것이다. 宋 鎭 禹 는 국민대회준비회의 구성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우파는 물론 온건좌파에까지 손을 뻗쳤 다. 9월 7일 宋 鎭 禹 는 東 亞 日 報 사옥에서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했다. 이날 대회는 위원장에 宋 鎭 禹 부위원장에 徐 相 日 元 世 勳 고문에 權 東 鎭 吳 世 昌 金 昌 淑 을 뽑고 총무 金 俊 淵 조직 宋 必 滿 정보 薛 義 植 외교 張 澤 相 지방 金 智 煥 조사 尹 致 暎 경호 韓 南 洙 등으로 조직을 짰다. 국민대회준비회는 당면사업으로 人 共 이 공산당과 그 동조자들의 모체 역할을 하는 데 대하여 국민대회준비회는 민족진영의 모체 역할을 한다 해외에서 환국하는 志 士 와 그 동포에게 편의를 베푼다 연합군에 대해 국민의 대변을 한다 민심안정과 치안유지에 협력한다는 것 등을 제시 했다. 또 상당히 장중한 어조의 취지서를 발표했는데 그중 국민대회의 취지가 선명하게 나타난 부분 은 다음과 같다. 강토는 잃었다 하더라도 3천만 민중의 심중에 응집된 國 魂 의 표상은 庚 戌 國 變 이래로 망 명지사의 氣 魄 과 함께 해외에 엄존하였던 바이니 우리의 국가대표는 己 未 獨 立 이후로 구현 된 대한임시정부가 최고요 또 유일의 존재일 것이다. 파당과 색별을 초월하여서 이를 환영하고 이를 지지하고 이에 歸 一 함이 現 下 의 내외정세에 타당한 大 義 名 分 이니 宋 鎭 禹 의 국민대회준비회 발족과 발맞추어 민족진영의 정당창당 운동도 그 맥을 찾기 시작하고 있었다
196 9월 4일 서울 종로국민학교에서 韓 國 民 主 黨 으로 대동단결한 민족진영은 美 軍 의 진주와 때를 맞 춘 9월 8일 人 共 에 대해 포문을 열었다. 발기인 1천여명의 명의로 발표된 對 人 共 성명서는 상당히 격하고 다소 감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宋 鎭 禹, 수석총무로 참여 韓 國 民 主 黨 은 9월 16일 天 道 敎 회관에서 창당했다. 국민대회준비위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등 민족진영의 3대 분파가 하나로 통일된 韓 民 黨 은 한마디로 汎 右 派 정당이었다. 민족진영의 결속력이 自 生 되기를 기다리던 宋 鎭 禹 도 이에 참여했다. 金 性 洙 도 당초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측면에서 韓 民 黨 을 도왔다. 韓 民 黨 은 곧 部 署 를 결정했는데 領 袖 에는 李 承 晩 金 九 李 始 榮 文 昌 範 徐 載 弼 權 東 鎭 吳 世 昌 을 추대하고 수석총무에 宋 鎭 禹 그 밑에 元 世 勳 白 寬 洙 徐 相 日 金 度 演 許 政 趙 炳 玉 白 南 薰 金 東 元 등 8총무를 두어 운영했다. 韓 民 黨 의 정치적 좌표는 16일 채택된 강령과 정책보다는 8일 발기인 명의로 발표된 對 人 共 성 명에서 더 잘 나타나고 있다. 그들( 人 共 )은 이제 반역적인 인민대표자대회란 것을 개최하고 朝 鮮 人 民 共 和 國 정부란 것을 조직 하였다고 발표하였다. 可 笑 타 하기에는 너무도 사태가 중대하다. 출석도 않고 동의도 않은 國 內 知 名 人 士 의 명의를 盜 用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해외 우리 정부의 엄연한 主 席 副 主 席 領 袖 되 는 諸 英 雄 의 令 名 을 자기 어깨에다 같이 놓아 某 某 위원 운운한 것은 인심을 현혹하고 그런 다음으로 임정에 대한 人 共 의 輕 視 태도를 나무라고 呂 運 亨 개인을 비난했다. 嗚 呼 라 邪 徒 여! 君 等 은 현 대한임시정부요인이었으며 그후 上 海 사변 태평양전쟁 발발후 中 國 國 民 政 府 와 美 國 정부의 지지를 받아 重 慶 華 盛 頓 사이판 冲 繩 등지를 전전하여 지금에 이른 사 실을 모르느냐. 同 政 府 가 카이로회담의 三 巨 頭 로부터 승인되고 桑 港 會 議 에 대표를 파견한 사실 을 君 等 은 왜 일부러 은폐하려는가. 일찍이 汝 等 은 小 磯 총독관저에서 합법운동을 일으키려 다 조소를 당한 도배이며 日 本 의 압박이 소멸되자 政 務 總 監 京 畿 道 警 察 部 長 으로부터 치안 유지 협력의 위촉을 받고 피를 흘리지 않고 政 權 을 탈취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나선 日 本 帝 國 의 走 狗 들이다. 吾 等 은 장구히 君 等 의 행동을 좌시할 수 없다. 吾 等 의 正 義 의 快 刀 는 破 邪 顯 正 의 義 擧 를 단행한 것이다 여기서 흥미있는 것은 韓 民 黨 인사들이 重 慶 임시정부가 국제적인 승인을 받고 있는 것으로 誤 認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도와 종류의 차이는 있었지만 바깥정세에 대한 부분적인 無 知 는 비단 韓 民 黨 만이 아니라 어느 정파나 다소는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성명은 해방후에 각종 정 파가 내놓은 것들로는 그 성격에 있어서 상당히 과격한 범주에 들어가는 것만은 사실이다. 韓 民 黨 의 성격에 관해서는 그때는 물론 지금도 다양한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韓 民 黨 을 평가함에 있어서 현실적인 기준은 어느 정도 뚜렷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韓 民 黨 은 建 國 의 기 간세력이었고 反 共 의 실질적인 힘이었으며 한국정당사상 오늘까지도 一 脈 을 통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좌익은 공식대로 韓 民 黨 을 험담과 함께 反 動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反 動 勢 力 으로서 가장 먼저 기치를 들고 나타난 것이 韓 國 民 主 黨 이다. 이 당에는 온갖 反 動 要 素 가 섞여있다. 朝 鮮 에 있어 세칭 우익진영을 우리는 反 動 勢 力 이라고 규정한다 ( 民 主 主 義 民 族 戰 線 편찬 朝 鮮 解 放 年 報 ) 그러나 이것은 좌익이 비단 韓 民 黨 뿐만이 아니라 非 左 翼 일반에 상투적으로 적용하는 시각이어 서 별다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宋 南 憲 씨의 분석이 韓 民 黨 성격을 보다 균형있게 설명하고 있다. 창당 당시 韓 民 黨 의 지도부는 총무단이나 중앙집행위원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확실히 다양한
197 인물로 구성되었다. 3 1운동을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민족해방운동에 앞장섰던 인사 및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하였던 인사, 1920년대 후반으로부터 1930년대 전반에서 국내에서 노동운동 내지 농민운동 사회주의운동에 이르기까지 투신하였던 인사, 심지어 당시 전문학교 강단에서 마르크 스주의 경제학을 강의한다고 붉은 교수 로 지목되었던 교수 출신, 구미지역에서 전형적 자유주 의 교육을 받은 인사, 고루한 민족주의자 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여기에는 日 帝 에 충성을 바친 親 日 分 子 만은 아니었다. 혹 하부조직에 그러한 인물이 몇 사람 참가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것이 韓 民 黨 전체의 성격 규정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은 논의를 우익과 좌익간의 투쟁에서 더 선명하게 부각시킨 것으로 47년 新 太 平 洋 誌 에 실 린 李 相 敦 씨( 制 憲 의원)의 글이 있다. 과연 진정한 親 日 派 와 民 族 反 逆 者 는 어느 진영에 많은가를 음미하여 보자. 親 日 派 民 族 反 逆 者 는 오히려 공산진영에 압도적으로 많음을 부인치 못할 것이다. 共 産 黨 간부인사 朴 憲 永 씨 李 觀 述 씨 등을 제외하고서는 거개가 親 日 派 이며 附 日 協 力 者 이며 소위 轉 向 派 로서 민족반역행 위를 한 자들이다. 다만 그들의 친일행위와 附 日 반역행위가 표면적이 아니고 이면적이고 양성 적이 아니고 음성적이었기 때문에 일반이 잘 몰라서 그렇지 참된 親 日 派 의 집단은 공산당이라 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日 帝 시대에 每 日 新 報 京 城 日 報 에서 倭 敵 의 전쟁수행을 위하여 言 論 報 國 에 挺 身 하였고 倭 軍 의 전쟁살인철학을 정당화시키기에 文 筆 報 國 을 하던 악질언론인과 신문기자가 공산당원이 되어 賊 反 荷 杖 格 으로 大 聲 叱 呼 하는 것은 양심의 자살행위가 아니고 무 엇이랴. 日 帝 에 충성을 다하던 분자들이 民 戰 산하의 문학가 동맹의 중요직을 차지하여 人 民 文 學 을 운운하며 反 動 文 學 타도를 절규하는 奇 觀 奇 相 이야말로 世 紀 的 滑 稽 劇 의 一 幕 이 아닐 수 없다 朴 憲 永 도 共 産 黨 전격 재건 한편 민족진영이 韓 民 黨 을 결성하고 있는 사이에 공산당의 朴 憲 永 도 공산당 재건사업에 여념이 없었다. 朴 憲 永 은 이미 9월 8일의 長 安 派 열성자대회를 재건파에 대한 항복대회로 둔갑시킨 바 있다. 朴 은 이같은 여건을 기반삼아 9월 11일 자파의 재건준비위원회를 해체하고 조선공산당을 전격적 으로 재건했다. 물론 총비서는 朴 憲 永 이었다. 정치국은 朴 憲 永 金 日 成 李 舟 河 武 亭 姜 進 崔 昌 益 李 承 燁 權 五 稷, 조직국은 朴 憲 永 李 鉉 相 金 三 龍 金 炯 善, 서기국은 李 舟 河 許 成 澤 金 台 俊 李 龜 壎 李 順 今 姜 文 錫 등으로 구성되었다. 재건공산당의 초기단계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朴 憲 永 은 총비서와 정치국원 조직국원을 겸함으로 써 일단 親 政 體 制 를 확립했다. 또한 그의 직계중의 직계 李 鉉 相 金 三 龍 金 炯 善 을 조직국에서 집 중 배치함으로써 조직확대에 대비했다. 공산당은 14일에는 朝 鮮 共 産 黨 은 끊임없는 피투성이의 투쟁과정을 통하여 중대한 政 局 下 에 마 침내 통일된 형태로 지난 11일에 재건되었다 고 공식 선포했다. 한편 이보다 앞서 9월 12일 정오 공산당은 朴 憲 永 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재건대회 를 열었으며 대회가 끝난 후에는 鍾 路 乙 支 路 光 化 門 등지를 시위하면서 휩쓸었다. 물론 구호와 플래카드는 조선공산당재건 만세 였다. 찌는 듯 무더운 8월 한낮의 이 엄청난 시위를 중앙청 창가에서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 다. 9월 8일 하지장군의 부대를 따라 서울에 들어온 軍 政 정치고문 머렐 베닝호프였다. (4) 信 託 의 소용돌이
198 (동아일보 ) 反 託 의 절규는 45년 세밑을 온통 흔들어 놓으면서 행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12월 29일 군 정청 한국인 직원들이 가두시위에 나선 뒤를 이어 법원도 총파업에 들어갔다. 歌 舞 가 그치고 영 화관도 휴관했다. 상가는 철시했고 곳곳에서 反 託 가두시위가 잇따랐다. 삼천만아 살았느냐. 독립전선에 生 血 을 뿌리자 라는 구호가 터져나오면서 그것은 곧 독립운동 의 열기로 전국에 번져갔다. 그런 가운데 金 九 의 臨 政 은 그동안의 정치적 부진을 씻고 당연 정국 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신탁통치에 대한 거국적 불만을 독립운동 으로 연결시킨 金 九 의 착안은 엄청난 설득력을 발휘 했고 열띤 호응속에 京 橋 莊 을 정치활동의 震 源 地 로 부상시켰다. 12월 28일 金 九 의 사회로 열린 비상대책회의에서는 臨 政 지휘아래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를 설치키로 했다. 이날 金 九 의 개회사는 이러했다. 해외에서 30년 동안 싸우다가 고국의 강토를 밟게 되어 3천만 동포를 해후케 될 때 이사람은 3천만 동포와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언명한 바 있습니다. 불행히도 이사람의 말이 들어맞아서 지금부터 새출발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대치 않은 託 治 라는 문제가 3천만의 머리 위에 덮어 씌워졌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물리치기 위하여 덮어씌우려는 託 治 의 보자기를 벗어날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臨 政 은 이날 4개항의 결의를 발표했다. -. 본정부는 각층 각파 및 교회, 전국민으로 하여금 신탁제에 대하여 철저히 반대하고 不 合 作 運 動 을 단행할 것. -. 즉시로 在 京 각 정치집단을 소집하여 본정부의 태도를 표명하고 선도정책에 대하여 절실히 동의합작을 요하며 각 신문기자도 열석케 할 것. -. 신탁제에 대하여 中 美 蘇 英 4개국에 반대하는 전문을 急 電 으로 발송할 것. -. 즉시로 美 蘇 군정당국에 향하여 질문하고 우리의 태도를 표명할 것. 본정부 라는 당당한 표현까지 동원한 臨 政 의 이러한 태도에 가장 당황한 것은 臨 政 자체를 정 부 로 보지 않으려 했던 하지였다. 결국 하지는 金 九 주석 이하 臨 政 요인들을 국외로 추방하겠다며 펄펄 뛰기도 했는데 이 부분은 후술키로 한다. 그러나 反 託 의 소용돌이 속에는 많은 우여곡절도 없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反 託 의 방법 론이었고 韓 民 黨 宋 鎭 禹 총무의 암살도 그 여진속에 일어났던 일이다. 28일밤 京 橋 莊 에서 있은 각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의 비상대책회의에는 열띤 논의가 벌어졌다. 미군정을 엎어버리고 臨 政 이 독립을 선포하여 통치권을 행사해야 한다 는 주장도 나왔다. 논의가 한창 열을 띠어갈 무렵 宋 鎭 禹 가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하지를 만나고 오는 길인데 신탁통치라는 것이 여러분이 흥분해서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우려할 만한 것은 아닌 것 같소. 반탁을 하되 미군정을 적으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다시 한번 여유를 가지고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 宋 鎭 禹 의 말에 여기저기서 집어치워라 는 반발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宋 鎭 禹 는 계속했다. 만약 臨 政 식으로 사태를 수습하면 우선 미군정과 충돌해야 하고 미군정과의 충돌은 미국 및 민주주의 제국과의 충돌을 일으킬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면 古 下 는 찬탁파요? 찬탁이 아니라 방법을 신중하게 하자는 것이오. 반탁으로 국민을 지나치게 흥분시킨다면 뒷수 습이 곤란할 것이니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서 시국을 수습해야 하지 않겠소? 무슨 소리요? 반탁 뒤에 오는 모든 사태는 우리가 맡지
199 宋 鎭 禹 와 臨 政 간의 결론은 29일 새벽 4시까지 계속됐으나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宋 鎭 禹 는 실 제 反 託 운동에 共 産 黨 의 朴 憲 永 까지 포함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었으며 29일 아침엔 朴 憲 永 군에 게도 이번만은 제발 영웅적 태도를 취해달라고 전해주시오. 내가 그러더라고 하고 한 측근에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운명의 12월 30일 오전 6시 15분 宋 鎭 禹 는 서울 苑 西 洞 74 자택에서 자 객이 쏜 6발의 총탄을 맞고 56세를 일기로 他 界 했다. 宋 鎭 禹 의 死 去 로 해방정국의 소용돌이는 더해갔다. 宋 鎭 禹 의 죽음을 전해들은 李 承 晩 은 손으로 방바닥을 치면서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反 託 의 방법론을 놓고 宋 鎭 禹 가 臨 政 요인들과 의견을 달리하자 일부에서는 宋 鎭 禹 에 대한 모함 과 중상이 일었으나 宋 鎭 禹 는 이에 개의치 않고 의연히 臨 政 의 극한 투쟁론을 제동하기 위한 노 력을 포기치 않았다. 비상대책회의에 앞서 宋 鎭 禹 는 金 九 와의 단독요담에서 극한론의 자제를 요 청했다. 반탁국민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대한사람이면 누구나 반대 못합니다. 열화같은 반탁의사를 군정 사령관이나 미국대통령 귀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해야지요. 그렇지만 미국을 반대하고 미군정을 적대시하여 무모하게 머리로 받아넘기려 하다가는 작은 것을 얻고 큰 것을 잃게 되기 쉽습니 다. 宋 鎭 禹 는 金 九 에게 차근차근 말했다. 市 井 의 필부들이 주먹을 높이 쳐들고 고함을 칠 때 그 주먹을 가상히 여기면서도 정치지도자 는 사태의 앞 뒤 진전을 헤아리면서 물굽이를 잡아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强 硬 의 굽이에 들어선 臨 政 의 궤도를 돌려잡기엔 역부족이었다. 臨 政 의 이러한 강경노선에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하지였다. 하지는 그것을 軍 政 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난처한 입장에 빠진 것은 군정청 경무부장인 趙 炳 玉 이었다. 趙 炳 玉 은 宋 鎭 禹 가 암살되기 직전 그를 찾아가 방안을 협의했었다. 京 橋 莊 에서 붙은 불은 黨 ( 韓 民 黨 )에서 잡아보시오. 코쟁이들은 내가 맡아보리다 그런데 모스크바 三 相 會 談 결정을 반대하면서 이른바 반파쇼 공동투쟁위원회 까지 조직했던 좌 익진영은 46년 1월 3일 갑자기 조선공산당의 태도를 표변시키면서 신탁통치찬성 쪽으로 급선회 했다. 이즈음 朴 憲 永 의 모습이 한동안 보이지 않았는데 反 託 운동을 벌이려 했던 朴 憲 永 이 서울의 소 련영사관으로 불려가 폴리안스키 영사로부터 호된 야단을 맞고 찬탁으로 돌아섰다는 이야기도 있 다. 결국 託 治 결정은 해방정국을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戰 後 의 무질서를 더욱 악화시켰고 민족분열을 가속시켰다. 국토에 이어 사람까지도 반으로 자 르는 칼이 되고 만 것이다. 44. 사라진 政 治 指 導 者 群 像 : 宋 鎭 禹 論 - 오늘의 時 點 에서 본 古 下 의 思 想 과 業 績 - < 政 經 硏 究 > (1965년 9월호) 李 桓 儀 解 放 이후 20년간의 韓 國 政 治 史 를 살펴보면 비록 優 劣 盛 衰 의 起 伏 은 있을지언정 그 가운데는 꾸 준히 흐르고 있는 二 大 思 想 의 根 幹 이 있다
200 그 하나는 上 海 臨 時 政 府 奉 戴 와 美 軍 政 支 持 의 路 線 위에서 韓 國 民 主 黨 을 세워 李 承 晩 박사의 大 韓 民 國 건립에 推 進 力 이 된 古 下 ( 宋 鎭 禹 ) - 仁 村 ( 金 性 洙 )의 뿌리요, 다른 하나는 建 國 同 盟 과 建 國 準 備 委 員 會 를 구성하여 美 國 一 邊 倒 의 李 承 晩 씨나 蘇 聯 을 맹신하는 左 翼 共 産 勢 力 의 朴 憲 永 등 을 배격하면서 自 律 的 獨 立 즉 民 主 的 社 會 主 義 를 표방하던 夢 陽 ( 呂 運 亨 )의 이즘 이다. 前 者 인 古 下 - 仁 村 의 뿌리는 性 分 上 湖 南 의 土 着 地 主 層 으로서 우리나라의 民 族 資 本 家 新 興 財 閥 等 과 함께 保 守 政 黨 을 形 成 하여 혹은 與 의 位 置 에서 혹은 野 의 隊 列 에서 前 後 20 年 間 우리 나 라 政 治 史 를 주름잡은 主 人 公 役 을 했고 後 者 인 建 同 建 準 의 亞 流 즉 民 族 主 義 또는 民 主 社 會 主 義 를 표방한 夢 陽 이즘 은 中 産 層 以 下 의 庶 民 大 衆 과 一 般 的 인 浮 動 인텔리 階 層 에 파고들어 가면 서 建 國 準 備 委 員 會 를 만들었고 그 餘 勢 로 一 部 右 翼 人 士 를 포함하여 朝 鮮 人 民 共 和 國 을 수립했으 나 臨 時 政 府 推 戴 派 와 美 軍 政 견제탄압으로 결국 三 日 天 下 의 운명을 겪고 말았다. 그러나 이 建 準 의 씨 夢 陽 의 民 主 社 會 主 義 的 이즘 은 그후 우리나라 憲 政 史 의 흐름속에 때로 는 進 步 黨 이란 形 態 로 때로는 統 社 黨 社 大 黨 民 社 黨 이라는 이름으로 保 守 野 黨 과 함께 꾸준히 明 滅 했으며 오늘날 그 殘 命 은 공교롭게도 民 族 的 民 主 主 義 와 後 進 國 近 代 化 를 주창하고 있는 執 權 黨 의 一 隅 에서 아니면 親 進 步 反 保 守 속에서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 政 治 史 의 二 大 潮 流 속에서 볼 때 解 放 직후 암흑정치시기에 臨 政 還 國 歡 迎 準 備 委 를 결성하여 呂 運 亨 씨의 建 準 세력과 朝 鮮 人 民 共 和 國 을 形 成 한 左 傾 的 勢 力 을 牽 制 除 去 시키고 臨 政 派 를 봉대하여 韓 民 黨 을 구성, 大 韓 民 國 建 立 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한 古 下 宋 鎭 禹 씨의 思 想 과 업적은 保 守 領 域 의 政 黨 史 面 에서는 단연 鼻 祖 的 存 在 요 높이 評 價 할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解 放 직후 暗 黑 政 治 時 期 를 거쳐 美 軍 政 과 大 韓 民 國 建 立 을 하는 古 下 가 내건 과정에서 臨 政 奉 戴 라는 名 分 下 에 民 族 的 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日 帝 下 에 親 日 派 와 일부 地 主 階 級 들이 그 그늘에서 서식 조략하였고 그것으로 인하여 向 後 20 年 間 의 이 나라 政 治 風 土 와 官 僚 紀 綱 등이 퇴폐화하게 했다는 過 도 없지 않다. 그러나 모스코바 三 相 會 議 에서 韓 國 의 信 託 統 治 가 결의되고 서울의 美 蘇 共 同 委 員 會 가 결렬된 후 재빨리 提 唱 한 自 律 政 府 運 動 의 方 向 을 設 定 했고 후일에 仁 村 ( 金 性 洙 )으로 하여금 韓 國 民 主 黨 을 이끌고 臨 時 政 府 와 路 線 을 달리하면서까지 大 韓 民 國 建 立 에 一 役 을 하게 길을 닦아놓은 것 등 은 保 守 政 治 領 域 에서나마 확실히 先 驅 者 的 역할을 하였고 어느 意 味 에서는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評 價 할 수 있다. 이 나라 保 守 政 黨 의 舵 手 였고 오늘의 野 黨 根 幹 을 이루고 있는 舊 韓 國 民 主 黨 의 鼻 祖 格 인 古 下 宋 鎭 禹 씨의 政 治 經 綸 과 그의 思 想 을 다음의 몇가지 分 野 로 나누어 분석 비판해 본다. 倭 政 引 繼 를 拒 否 한 宋 鎭 禹 聯 合 軍 에 대한 無 條 件 降 伏 을 각오한 日 本 의 軍 國 主 義 者 들은 카이로 會 談 과 포츠담 宣 言 에서 확 인된 朝 鮮 獨 立 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天 皇 의 降 服 宣 言 이 내려지기 전에 미리 先 手 를 쓰려했다. 즉 1945년 8월 10일 日 本 이 國 體 護 持 의 조건부로 포cm담 선언을 수락할 것을 聯 合 國 에 通 告 했다 는 사실을 東 京 政 府 로부터 비밀히 연락받은 朝 鮮 總 督 府 당국은 終 末 에 이르는 朝 鮮 統 治 가 流 血 사태로 끝나는 두려움을 미리 除 去 하기 위해 朝 鮮 內 의 지도급 人 士 에게 8 15 前 治 安 權 이양 을 교섭한 것이다. 總 督 府 側 은 맨 먼저 東 亞 日 報 社 長 을 지낸 바 있는 宋 鎭 禹 씨에게 그 교섭을 해 왔다. 1945년 8월 9일 당시 朝 鮮 總 督 府 政 務 總 監 엔도( 遠 藤 柳 作 )는 宋 鎭 禹 씨를 京 畿 道 警 視 廳 에 초청 하여 戰 勢 의 급박함을 알리고 行 政 委 員 會 같은 것을 조직하여 獨 立 準 備 를 하도록 권유했다. 8월 10일과 11, 12일에는 朝 鮮 管 區 軍 參 謀 인 神 崎, 京 畿 道 知 事 生 田 淸 三 郞 警 察 部 長 岡 久 雄 등
201 이 宋 鎭 禹 씨를 知 事 室 로 초청하여 總 督 府 가 가진 權 力 의 四 分 之 三 을 내놓겠다. 그리고 憲 兵 警 察 司 法 通 信 放 送 新 聞 을 넘겨주겠으니 朝 鮮 人 들끼리 行 政 委 員 會 를 하되 日 本 人 의 生 命 財 産 은 保 護 해 달라 고 간청했다. 이때에 古 下 는 이를 거절한 것이다. 그때 古 下 가 倭 政 引 繼 를 拒 絶 한 이유로서 내세운 것을 現 役 某 政 治 人 의 傳 言 으로 소개해 보면 대개 이런 것이었다. 내가 中 國 의 汪 兆 銘 이나 佛 蘭 西 의 페탕이 되고자 한다면 벌써 되었을 것이다. 만일 내가 그대 들의 청을 받아들여 汪 兆 銘 이나 페탕이 되어 버린다면 당신네가 日 本 으로 떠나 버린 뒤 나는 朝 鮮 民 族 에게 發 言 權 이 없게 된다. 앞으로 朝 鮮 도 日 本 과 國 交 를 맺어야 할 텐데 한 사람의 올 바른 知 日 人 士 라도 남겨 두어야 하지 않은가 朝 鮮 총독부는 부득이 治 安 權 이양교섭을 당시 地 下 에서 獨 立 쟁취를 위한 祕 密 組 織 ( 建 國 同 盟 )을 하고 있던 呂 運 亨 씨에게 돌렸다. 夢 陽 呂 運 亨 씨는 8월 14일 밤과 8월 15일 새벽 각각 두 차례에 걸쳐 遠 藤 과 神 崎 를 만나 治 安 權 인계를 교섭받은 끝에 다음 五 個 項 의 조건을 걸어 이를 수락했다. <1> 政 治 經 濟 犯 의 卽 時 석방 <2> 三 個 月 間 의 食 糧 을 확보할 것 <3> 建 同 이 추진하는 獨 立 運 動 을 妨 害 하지 말 것 <4> 靑 年 學 生 들에 대한 軍 事 訓 練 을 許 容 할 것 <5> 勞 動 者 農 民 의 動 員 을 방해하지 말 것 이렇게 해서 治 安 權 引 受 를 條 件 附 수락한 夢 陽 은 朗 山 金 俊 淵 씨를 통하여 古 下 에게 協 助 할 것 을 의뢰했다. 그러나 당시 古 下 는 日 本 은 기왕 망해가는 정권이니 倭 政 이 완전히 패망될 때까지 治 安 權 이양 은 안하는 것이 좋다 고 거절, 머지 않아 돌아올 重 慶 臨 時 政 府 를 正 統 政 府 로 추대해야 한다 고 은근히 夢 陽 의 建 國 준비에 先 手 쓰는 것을 견제하였다. 이때부터 벌어진 古 下 와 夢 陽 간의 政 治 的 識 見 과 判 斷 의 기준 差 異 는 後 日 의 政 治 추세를 결정 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갭을 가져오게 하였고 나아가서는 美 軍 政 治 下 의 정치질서 확립과 民 國 수 립후의 정치판도를 형성하는 데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했다. 즉 후일의 左 右 대립의 시초적 근원은 이미 이때 古 下 와 夢 陽 간에 벌어진 日 本 治 安 權 의 이양문 제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建 準 에 대항하는 右 翼 陣 營 의 領 首 級 으로서의 古 下 朝 鮮 總 督 府 로부터 治 安 權 을 이양받은 呂 運 亨 씨는 8 15를 맞은 이틀 후(8월 17일) 民 政 長 官 安 在 鴻 씨와 제휴하여 建 國 準 備 委 員 會 를 조직하고 治 安 유지와 건국준비에 분망했다. 夢 陽 은 즉시로 建 同 의 核 心 同 僚 인 李 如 星 을 古 下 에게 보내어 그대 보기에 나의 出 發 이 잘못된 점이 있더라도 國 家 의 大 業 이니 虛 心 坦 懷 하게 나와서 大 衆 의 信 望 을 두텁게 하고 차질이 없게 하라 고 권고했으 나 宋 鎭 禹 씨는 경거망동을 삼가라. 우리는 重 慶 臨 政 의 還 國 을 기다려 臨 政 을 法 統 政 府 로 추대해 야 된다 고 끝내 協 同 하기를 고사했다. 夢 陽 은 金 俊 淵 張 德 秀 양씨에게도 建 準 에 協 助 할 것을 요청했으나 朗 山 과 雪 山 역시 우리는 古 下 의 路 線 과 分 離 할 수 없다 하여 宋 鎭 禹 씨의 노선을 따라갔다. 右 翼 陣 營 의 中 心 人 物 들로부터 協 助 를 거절당한 夢 陽 의 建 準 은 그해 9월 6일의 소위 全 國 人 民 代 表 者 會 議 를 거쳐 하룻밤 사이에 朝 鮮 人 民 共 和 國 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夢 陽 이 이토록 9월 6 일로 서둘러서 朝 鮮 人 民 共 和 國 을 수립한 것은 맥아더 摩 下 의 美 軍 이 9월 8일이면 仁 川 에 上 陸 하 기 때문에 그 이전에 自 律 的 인 獨 立 國 家 의 政 治 가 形 成 되어 있어야 美 蘇 兩 軍 의 干 涉 을 받지 않
202 을 것이라는 判 斷 에서였다. 民 族 叛 逆 者 의 土 地 沒 收 와 이의 無 償 分 配 非 沒 收 土 地 의 小 作 料 를 3 7 制 로 한다 日 本 帝 國 主 義 와 民 族 叛 逆 者 들의 鑛 山 鐵 道 船 舶 등의 國 有 化 조치 등 朝 鮮 人 民 共 和 國 이 내건 改 革 的 인 施 政 方 針 이 對 外 的 으로 발표되자 國 內 財 産 家 들은 물론 日 帝 下 에서 암암리에 總 督 府 에 協 力 했던 大 小 地 主 商 工 人 들은 은근히 私 有 財 産 의 侵 害 를 두려워했고 右 翼 陣 營 의 政 界 人 士 들은 夢 陽 의 建 準 과 朝 鮮 政 府 를 左 翼 으로 규정하게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9월 8일에 仁 川 에 上 陸 한 美 軍 은 10월 10일 軍 政 長 官 아놀드의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하고 38 度 이남에의 朝 鮮 땅에는 美 軍 政 府 가 있을 따름이고 그 이외 다른 政 府 가 존재할 수 없다 고 朝 鮮 人 民 共 和 國 을 正 面 으로 否 認 하고 나왔다. 이때에 古 下 宋 鎭 禹 씨를 중심으로 한 臨 政 봉대파들은 夢 陽 의 建 準 과 朝 鮮 政 府 에 대항하여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還 國 歡 迎 委 員 會 를 結 成 하고 9월 7일에는 國 民 大 會 準 備 會 로 發 足, 宋 鎭 禹 씨는 國 民 大 會 準 備 委 員 長 이 되었다. 이로부터 古 下 의 政 治 的 활동의 첫 걸음은 시작되었으며 左 翼 團 體 의 領 首 로서 革 新 派 인 夢 陽 에 對 抗 하는 行 動 이 개시된 것이다. 國 民 大 會 準 備 會 의 主 要 멤버로는 宋 鎭 禹 金 性 洙 徐 相 日 金 俊 淵 張 澤 相 金 東 圭 李 慶 熙 安 東 源 姜 柄 順 薛 義 植 金 東 元 씨 등이었다. 이에 앞서 8월 28일에는 金 炳 魯 白 寬 洙 趙 炳 玉 李 仁 羅 容 均 씨 등의 이름으로 朝 鮮 民 族 黨 이 發 起 되었고 9월 4일에는 白 南 薰 金 度 演 許 政 張 德 秀 尹 潽 善 尹 致 暎 씨의 이름으로 韓 國 民 主 黨 이 발 기되었다. 뿐만 아니라 古 下 가 지금의 東 亞 日 報 社 屋 에서 國 民 大 會 準 備 會 를 결성하던 9월 1일 같 은 날 安 在 鴻 씨가 建 準 에서 離 脫 하여 朝 鮮 國 民 黨 을 결성함으로써 右 翼 陣 營 의 조직활동도 활발해 지기 시작했다. 當 時 의 실정으로 보아 右 翼 陣 營 의 政 黨 政 治 團 體 의 추세는 安 在 鴻 씨의 國 民 黨, 白 南 薰 金 度 演 씨 의 韓 國 國 民 黨, 任 永 信 씨의 朝 鮮 女 子 國 民 黨, 宋 鎭 禹 씨 등의 國 民 大 會 準 備 會 의 4 個 團 體 가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들 右 翼 단체 중에서도 인물면에 있어서는 古 下 가 단연 탁월했고 영수급으로 지지받 고 있었다. 韓 民 黨 首 席 總 務 로서의 宋 鎭 禹 建 國 準 備 委 員 會 와 朝 鮮 人 民 共 和 國 에 자극되어 古 下 를 중심으로 한 右 翼 단체가 차츰 臨 政 推 戴 의 旗 幟 를 높이고 集 結 하였으나 8 15 직후부터 治 安 과 建 國 準 備 등 정치활동에 선수를 치고 나온 夢 陽 의 建 準 勢 力 에 正 面 대항하기에는 大 衆 의 지지와 조직이 미흡했다. 그리하여 9월 8일에는 金 炳 魯 白 寬 洙 씨의 朝 鮮 民 族 黨 의 白 南 薰 張 德 秀 씨 등의 韓 國 國 民 黨 發 起 體 가 합쳐 韓 國 民 主 黨 을 發 起 하였고 宋 鎭 禹 씨는 일약 首 席 總 務 로 추대되었다. 이 때에 편성된 韓 國 民 主 黨 의 部 署 를 보면 領 袖 에 李 承 晩 金 九 李 始 榮 徐 載 弼 吳 世 昌 文 昌 範 權 東 鎭 씨를 옹립해 놓 고 中 央 執 行 委 員 의 人 選 에서 오늘날 各 政 黨 의 幹 事 長 이나 事 務 總 長 格 인 首 席 總 務 에 宋 鎭 禹 씨를 추대하였으니 이때부터 韓 國 民 主 黨 의 실질적인 운영권은 古 下 의 手 中 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참고로 이때 韓 國 民 主 黨 의 中 央 執 行 委 員 部 署 를 보면 總 務 元 世 勳 白 寬 洙 徐 相 日 金 度 演 許 政 白 南 薰 事 務 總 長 羅 容 均 黨 務 部 長 申 유 局 組 織 部 長 金 若 水 外 交 部 長 張 德 秀 財 政 部 長 朴 容 善 宣 傳 部 長 咸 尙 勳 情 報 部 長 朴 瓚 熙 勞 農 部 長 洪 性 夏 文 敎 部 長 李 寬 求 厚 生 部 長 李 雲 調 査 部 長 兪 鎭 熙 連 絡 部 長 崔 允 東 靑 年 部 長 朴 明 煥 地 方 部 長 趙 憲 泳 訓 練 部 長 徐 相 天 中 央 監 察 委 員 長 金 炳 魯 등으로 右 翼 陣 營 의 巨 物 級 은 거의 망라되었다
203 9월 16일 天 道 敎 강당에서 열린 政 綱 과 8개 항목의 當 面 정책을 채택했는데 이 정강정책은 9월 7일 東 亞 日 報 사옥에서 구성된 國 民 大 會 準 備 會 의 中 心 멤버인 宋 鎭 禹 金 性 洙 徐 相 日 金 東 圭 李 康 熙 金 俊 淵 安 東 源 薛 義 植 씨 등에 의해서 주로 작성 검토되었기 때문에 그 대부분이 古 下 의 經 綸 과 政 治 觀 이 그대로 反 映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政 綱 에서 본 古 下 路 線 의 政 治 指 標 를 보면 <1> 朝 鮮 民 族 의 自 主 獨 立 國 家 완성 <2> 民 主 主 義 의 政 府 수립 <3> 勤 勞 大 衆 의 福 利 增 進 <4> 民 族 文 化 를 앙양하며 세계문화에 공헌 <5> 國 際 憲 章 을 준수하여 世 界 平 和 의 확립 등 五 個 항목을 표방하면서 정치지표의 초점을 內 國 的 으로는 日 本 과 美 軍 政 으로부터 완전한 獨 立 획득에 치중하면서 다음으로는 韓 國 의 自 主 獨 立 을 國 外 에 선양 인식시키려는 데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五 個 項 目 의 政 綱 中 에 가장 중요한 經 濟 政 策 을 빼면서까지 勤 勞 大 衆 의 福 利 增 進 을 강조한 것은 夢 陽 의 建 準 과 人 民 共 和 國 이 反 民 族 者 親 日 派 의 土 地 工 場 의 沒 收 와 이의 無 償 分 配 國 有 化 조치, 그리고 勞 動 者 農 民 을 위한 最 低 限 의 賃 金 보장문제를 정책 속에 어필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에 對 應 하는 항목으로써 설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음으로 8 個 政 策 에 표시된 施 政 目 標 를 보면 <1> 國 民 기본생활의 확보 <2> 互 惠 平 等 의 外 交 정책수립 <3> 言 論 出 版 集 會 結 社 信 仰 의 自 由 <4> 敎 育 保 健 의 기회균등 <5> 重 工 主 義 의 政 策 <6> 主 要 産 業 의 國 營 또는 統 制 管 理 <7> 土 地 制 度 의 合 理 的 再 編 成 <8> 國 防 軍 의 창설 등을 내세움으로써 前 記 五 個 項 의 政 綱 에 비하면 한결 進 取 的 이고 大 衆 的 인 方 面 으로 나가려고 애를 썼다. 施 政 公 約 에서 드러난 이 保 守 政 黨 의 고민은 戰 後 의 無 秩 序 와 황폐 속에서 어떻게 하면 國 民 의 最 低 기본생활이 영위되도록 경제정책을 시행하느냐와 모든 國 民 사이에 거의 맹목적으로 조성되어 있는 親 日 派 民 族 反 逆 者 大 地 主 계급들에 대한 설욕과 복수 感 情 을 如 何 히 완화 充 足 시키느냐에 있 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土 地 의 合 理 的 재분배와 主 要 産 業 의 國 有 化 조치를 내걸었고 社 會 福 祉 의 향상책으로서 敎 育 保 健 의 기회균등에 큰 볼륨을 둔 것으로 보인다. 古 下 와 夢 陽 의 時 局 觀, 韓 民 黨 과 人 民 共 和 國 의 政 策 比 較 古 下 의 時 局 觀 과 政 治 思 想 을 理 解 하는 데는 항상 그의 相 對 的 位 置 에서 왔던 夢 陽 의 政 治 權 과 思 想 을 對 照 시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成 長 과정에서 본 두 사람의 환경은 한 사람이( 古 下 ) 湖 南 地 方 의 순탄한 여건하에서 日 本 留 學 을 한 政 治 人 인데 反 해 한 사람( 夢 陽 )은 기독교의 영향력을 받으며 國 內 에서 여러 학교를 전전하다가 大 衆 속으로 파고 든 차이가 있을 정도이지만 이 두 사람이 가진 政 治 觀 과 思 想 의 根 幹 은 本 質 的 으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民 國 樹 立 이전에 兩 者 가 펴고 나간 政 治 路 線 을 보면 古 下 는 그의 思 想 的 바탕을 西 歐 的 自 由 民 主 主 義 에 두고 美 軍 政 의 協 助 下 에 半 封 建 的 인 上 海 臨 時 政 府 의 法 統 을 그대로 이어 받으려는 穩 健 한 保 守 主 義 者 인데 비하여, 夢 陽 은 그의 思 想 的 기초를 社 會 民 主 主 義 또는 民 族 主 義 에 두고 建 國 過 程 에 있어서도 美 蘇 양세력을 排 擊 하여 朝 鮮 의 獨 立 은 朝 鮮 民 族 의 손으로 이룩해야 한다는 進 步 主 義 者 이었다. 때문에 夢 陽 은 美 軍 政 의 비호하에 重 慶 臨 政 을 推 戴 하려는 親 日 派 反 民 族 者 들을 그대로 감싸주 는 過 誤 를 犯 한다고 判 斷 하여 臨 政 歸 還 을 기다리지 않고 美 蘇 兩 軍 이 進 駐 해 오기 이전에 國 內 의 進 步 的 人 士 들로서 朝 鮮 人 民 共 和 國 을 수립, 그대로 밀고 나가려는 勇 氣 를 낸 것이다. 兩 者 의 時 局 觀 은 朝 鮮 總 督 府 末 期 에 있었던 治 安 權 引 受 交 涉 과정에서도 현저한 差 異 를 나타냈 다. 解 放 에 따르는 時 局 收 拾 의 節 次 에 있어서도 古 下 宋 鎭 禹 씨는 日 本 이 降 服 을 하면 聯 合 軍 이 즉시 進 駐 하여 日 本 軍 의 무장을 해제하고 重 慶 의 임시정부가 들어와 政 權 을 담당할 것으로 斷 定 한데 비해, 夢 陽 呂 運 亨 씨는 日 本 이 敗 戰 하면 美 蘇 兩 軍 이 同 時 에 서울에까지 들어오되 그 이전에
204 國 內 의 政 治 勢 力 을 규합하여 民 族 代 表 기관으로서 과도정부를 구성하면 一 切 의 建 國 은 우리 民 族 自 體 의 힘으로 完 成 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古 下 는 倭 政 의 引 繼 를 거부하고 解 放 직후의 혼란한 治 安 收 拾 에 建 準 과의 協 助 를 外 面 한채 右 翼 陣 營 을 糾 合, 臨 政 봉대를 위한 國 民 大 會 準 備 에 골몰했고 夢 陽 은 建 同 과 建 準 을 기반 으로 하여 美 軍 의 仁 川 上 陸 직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政 府 形 態 인 朝 鮮 人 民 共 和 國 을 구성했 던 것이다. 결국 戰 勝 軍 의 支 持 를 받은 古 下 - 仁 村 의 韓 民 黨 勢 力 은 그들이 目 標 했던 臨 政 推 戴 가 多 少 의 方 向 을 바꾸어 美 國 으로부터 혜성처럼 歸 還 한 李 承 晩 씨의 初 代 政 權 을 수립하는데 밑거름이 되었 지만 古 下 - 仁 村 勢 力 으로부터 牽 制 받고 美 軍 政 으로부터 호된 서리를 맞은 夢 陽 勢 力 은 夢 陽 自 身 이 極 右 테러의 兇 彈 에 쓰러진 뒤 얼마동안 그 形 體 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獨 立 戰 線 에 귀중한 鮮 血! 30일 早 朝 兇 彈 을 맞고 古 下 宋 鎭 禹 先 生 殉 國! 12월 28일 모스코바 三 相 會 議 에서 朝 鮮 에 대한 五 個 年 信 託 統 治 案 이 결정되어 三 千 里 강토가 왈칵 뒤집힌지 2일 後 인 12월 30일 새벽 宋 鎭 禹 씨의 暗 殺 兇 報 는 또다시 全 彊 土 를 뒤흔들었다. 後 日 의 公 判 기록에서도 犯 人 韓 賢 宇 의 政 治 的 背 景 은 끝내 가려지지 못했지만 古 下 가 암살될 무렵 서울 장안에는 공교롭게도 韓 國 民 主 黨 首 席 總 務 宋 鎭 禹 씨가 우리는 아직 自 治 能 力 이 없으 니 五 年 間 의 訓 政 期 를 거쳐 自 主 獨 立 을 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는 流 言 이 삽시간에 퍼지고 있을 때였다. 이 流 言 의 根 據 가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古 下 의 暗 殺 은 信 託 統 治 案 이 발표된 3 日 後 의 일이고 보니 古 下 는 信 託 騷 亂 에 쓰러진 同 族 테러의 첫 희생자가 된 것이다. 오늘의 時 點 에서 본 古 下 의 思 想 保 守 의 카테고리 안에서 본 古 下 의 思 想 은 확실히 온건한 自 由 民 主 主 義 者 이었다. 政 治 다운 政 治 活 動 을 開 始 해서 테러의 兇 彈 에 맞아 숨지기까지 不 過 4 個 月 동안 그가 남긴 政 治 行 積 과 路 線 은 지극히 짧지만 이를 要 約 해서 하나의 줄거리로 엮어 본다면, 倭 政 引 繼 拒 否 - 重 慶 臨 政 推 戴 - 法 統 主 義 建 國 - 美 軍 政 과의 協 助 - 親 進 步 勢 力 의 排 除 - 右 翼 勢 力 의 糾 合 - 韓 國 民 主 黨 의 結 成 - 李 承 晩 씨 初 代 建 國 의 基 礎 構 築 으로 連 結 된다. 奸 惡 한 倭 政 末 期 의 뒤치다꺼리를 끝까지 거부한 것이라든가 日 帝 가 敗 亡 하면 聯 合 軍 이 進 駐 하 여 一 定 한 기간동안 軍 政 을 실시할 것이라는 先 見 之 明 을 가진 點 이라든가, 亂 立 하는 右 翼 政 黨 의 統 合 을 꾀하여 民 族 勢 力 의 大 同 團 結 을 지향한 것 등이 古 下 의 현명한 經 綸 이요 政 治 的 功 勞 라 한 다면 臨 政 推 戴 만을 주장함으로써 그 그늘 속에다가 親 日 派 民 族 叛 逆 者 의 서식온상을 길렀다는 것과 民 族 勢 力 의 大 同 團 結 을 표방하면서도 共 産 主 義 가 아닌 親 進 步 勢 力 인 夢 陽 의 建 準 參 與 를 끝까지 拒 否 견제함으로써 民 族 分 裂 의 遠 因 을 造 成 케 한 點, 五 年 間 의 訓 政 期 間 이 不 可 避 하다는 持 論 을 내세웠고 그것이 莫 府 三 相 會 議 의 決 定 으로 나타나리라고 豫 見 했으면서도 自 身 이 이끄는 國 民 大 會 派 와 韓 民 黨 은 후일에 反 託 으로 一 貫 케 하는 二 律 背 反 的 인 路 線 을 걸어왔다는 것은 政 治 哲 學 의 빈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古 下 - 仁 村 이 구축한 基 本 勢 力 인 舊 韓 國 民 主 黨 과 그 後 續 들이 혹은 李 承 晩 政 權 에 或 은 張 勉 政 權 에 個 別 的 으로 參 與 하기는 했어도 去 令 20 年 동안 떳떳한 執 權 黨 으로서 단 한번도 政 權 을 잡아 보지 못하고 오늘날의 野 黨 속에 그 殘 命 을 유지케 했다는 것은 어디인가 그 政 治 理 念 과 經 綸 의 바탕에 결함과 誤 謬 가 있지 않았는가? 이 나라 保 守 政 黨 의 鼻 祖 요 태두인 古 下 의 政 治 思 想 을 分 析 하는데 있어서 이 점에 대해서만은 늘 一 沫 의 懷 疑 를 품게 하고 어딘가 政 治 哲 學 의 빈곤성을 느끼게 한다
205 45. 쓰러진 巨 木 - 宋 鎭 禹 < 新 東 亞 > (1977년 8 月 號 ) 前 國 會 議 員 李 相 敦 暗 黑 속에서 8 15광복 이후의 古 下 宋 鎭 禹 의 행적을 추적하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東 亞 日 報 가 강제폐간된 ( ) 이후의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양상의 윤곽을 말해야 될 것이다. 당시는 日 本 제국주의가 中 國 大 陸 까지 침략하여 中 日 전쟁이 한창인 때였고, 日 本 軍 閥 의 화신인 조선총독 南 次 郞 은 1936년에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 공석상에서 조선말 사용을 엄금하고 日 本 語 만 쓰게 함은 물론, 조선사람에게 日 本 式 으로 創 氏 改 名 까지 강요하였다( ). 그리고 각급학 교를 비롯하여 각종 직장 단체소속 조선사람들에게 강제로 日 本 神 宮 神 社 에 참배시킬 뿐만 아니 라 전국 기독교 목사 장로 신부 敎 區 長 들에게 神 社 참배를 강요하고 불응하는 기독교인과 신자는 가차없이 구속 투옥하였다. 소위 皇 國 臣 民 誓 詞 를 전국민에 암송토록 강요하고 조선청년에게도 徵 兵 制 를 실시( )하여 수십만의 청년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끌어갔다. 전세가 日 本 에 불리하자 조선학생을 學 兵 制 라는 명목으로 강제징집하여( ) 전선으로 내몰았다. 이와 같은 植 民 地 暴 政 과 암흑시대에 古 下 는 철두철미 反 日 獨 立 主 義 者 이고 총독부정치에 거부 하는 反 骨 人 物 이었다. 南 총독이 東 亞 朝 鮮 두 신문을 강제 폐간할 때만 보더라도 당시 東 亞 日 報 社 고문인 古 下 는 비밀리에 日 本 東 京 에 건너가서 평소 古 下 와 친분이 있는 日 本 貴 族 院 議 員 과 衆 議 院 議 員 을 만나 東 亞 日 報 강제 폐간의 부당성을 역설하여 정치문제화시켜 총독정책에 정면으로 항 거하였다. 그러나 力 不 足 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돌아오자 서울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鍾 路 경찰서 형사에 의하여 연행 구속당했다가(1940년 5월초) 3개월 후에 東 亞 日 報 폐간이 결정되 자 석방되었다. 그 당시 필자도 東 亞 日 報 기자로 있다가 신문이 폐간되는 바람에 실직자가 되어 간혹 苑 西 洞 古 下 宅 을 찾아가면 日 本 은 中 日 戰 爭 과 太 平 洋 戰 爭 에서 반드시 패망할 것이니 낙심말고 적당한 직장에 가서 은신하고 있다가 재기를 도모하라 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古 下 말에 따라 보신책으로 나의 개성과는 거리가 먼 天 一 藥 房 ( 天 一 製 藥 株 式 會 社 )에 취직하여 2년간을 보냈다. 日 本 이 군벌독재체제를 강화하고 獨 逸 이탈리아와 軍 事 同 盟 을 맺어 美 國 英 國 등 세계 자유국 가를 상대로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하게 되자 조선식민지통치는 필설로 형언키 어려운 폭정이 자 행되었다. 國 民 總 動 員, 內 鮮 一 體, 皇 國 臣 民 化 등의 구호밑에 그 당시의 지도급인사와 지식인 등을 강제로 동원하고 협력하게 만들었다. 본의든 본의 아니든간에 많은 교육자 언론인 문인 종교인 등이 일제에 아부하는 연설을 하고 글을 쓰고 시를 쓰는 등 추잡한 世 流 가 우리 사회를 뒤덮게 되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민족의 지도급인사가 변절하여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합 리화하는 작업에 동원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일제에 충성을 다하는 표징으로 創 氏 改 名 까지 하여 설치고 다니는 판이었다. 물론 일제의 간흉한 정략에 의한 위협과 협박, 회유 등으로 본의 아닌 변절을 한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시국에 대한 誤 判 으로 자기의 지조와 정치 신조를 헐값으 로 팔아버린 사람이 많았다. 울분의 세월
206 日 帝 는 古 下 에게도 전쟁에 협력하라고 회유도 하고 위협도 하였다. 그러나 古 下 는 創 氏 改 名 을 거부한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회유와 협박을 지혜스럽고 슬기롭게 회피하는 것이었다. 언제인가 여름철에 나는 苑 西 洞 古 下 宅 을 방문하였다. 古 下 는 別 堂 넓은 방에서 모시 고의적삼 을 입고 혼자서 골패짝을 맞추고 있다가 나를 반가이 맞아 주는데, 風 爐 에 藥 湯 반이 놓여 있기에 나는 어디가 편치 않으시냐고 물었다. 古 下 는 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요사이 달갑지 않은 손 님이 자꾸 찾아와서 졸라대는 것이 있어 견딜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때 유행하던 國 民 服 을 입고 머리도 까까머리로 깎은 손님이 찾아왔다. 명함을 보니 조선 사람 으로 총독부 課 長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잠시 자리를 피하여 옆 대청마루에 있었는데, 그 사람이 戰 局 이 점점 심각하게 되니 宋 선생께서 나오셔서 협력해주셔야겠습니다 고 말하는 것이 었다. 그 말을 듣고 古 下 는 보시다시피 나는 신병이 있어서 현재 한약을 長 期 服 用 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나보다는 더 역량과 기량이 있는 분이 많이 있는데 굳이 나같은 인간이 나가서 무엇을 하 겠습니까 라고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는 수없이 아무쪼록 服 藥 하고 몸조심 잘 하시 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풍로에 한약을 달이는 것이 古 下 의 위장전 술인 것을 깨닫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944년 봄이라고 기억된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당시 지도급 인사로서 총독부기관지 每 日 新 報 에 글을 한번도 쓰지 않은 사람은 萬 海 韓 龍 雲 과 古 下 와 維 石 趙 炳 玉, 碧 初 洪 命 憙 등 몇 사람뿐인 줄 안다. 古 下 는 여러 가 지 협박과 회유도 물리치고 전쟁을 찬양하는 본의 아닌 글을 끝내 쓰지 않았다. 그런데 총독부 당국에서 古 下 에게 너무도 집요하게 방송을 하라고 강요하자 古 下 는 하는 수 없이 방송국에 나갔 다. 10분 이내로 방송시간이 제한된 것을 기화로 해서 古 下 는 마이크 앞에서 전국의 동포 여러분! 시국이 날로 중차대하고 전쟁의 양상이 날로 심각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여러분은 각자 생업에 충실하고 생산력 증강에 가일층 힘써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웃과 화목 단결하고 보건위생에 주의하여 신체를 단련하고 유언과 비어에 조심하여 법망에 걸 리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기 바랍니다. 라고 간략하고도 의미 심장한 몇마디 말로 방송을 끝맺고 말았다. 이 방송을 듣고 나서 日 本 人 모 고관은 宋 鎭 禹 란 자는 참으로 상대하기 곤란한 자다. 간단히 다룰 수 없는 인간이다 고 말하 더라는 것을 그 당시 每 日 新 報 총독부 출입기자인 郭 福 山 에게 들었다. 日 帝 총독부에 의해서 東 亞 日 報 가 강제폐간된 후에도 古 下 는 東 亞 日 報 社 屋 을 日 本 企 業 體 에 매각 하라는 총독부의 권유를 일축하고 仁 村 金 性 洙 와 상의 후에 東 本 社 라는 간판을 붙이고 日 本 人 大 企 業 體 에 賃 貸 해주어 임대료를 매월 또박또박 받았다. 古 下 는 未 久 不 遠 해서 日 本 이 패전하면 조 선이 독립될 것이고, 그 때에는 東 亞 日 報 도 복간되고 東 亞 日 報 社 屋 도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라는 先 見 의 明 과 확신을 가지고 金 佑 成 ( 前 東 亞 日 報 社 經 理 社 員 )에게 東 本 社 의 관리책임을 맡겼다. 古 下 자신도 유서깊은 東 亞 日 報 건물 한 귀퉁이 東 本 社 사무실에 간혹 나와서 친구도 만나고 저녁 에는 옛날 東 亞 日 報 관계자들과 만나 요리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실의를 달래기도 하였다. 古 下 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민족의 정기가 사라지고 正 과 邪 가 혼란된 암담하기 비할 데 없 는 식민지 암혹 暴 政 하에서 정치적 신념과 지조를 변치 않고 호방한 기개와 불굴의 투혼으로 날이 갈수록 패색이 농후해가는 戰 局 을 응시하고 있었다. 때로는 上 京 하는 옛날 東 亞 日 報 地 方 支 局 長 들과 저녁에 술을 나누며 서로 위로도 하고, 때로는 仁 村 金 性 洙, 芹 村 白 寬 洙, 街 人 金 炳 魯, 南 崗 金 用 茂, 朗 山 金 俊 淵, 爲 堂 鄭 寅 普 등과 서울 교외 倉 洞 에 나가 東 亞 日 報 社 株 主 이고 친우인 張 鉉 重 宅 에서 술을 마시고 그 특유의 고담준론으로 울분을 달래기도 했다. 日 帝 의 治 安 權 引 受 요구 거절
207 1945년 8월 13일께로 기억한다. 나는 東 亞 日 報 기자생활을 같이 하던 梁 在 廈 로부터 8월 15일 에 일본이 항복한다는 극비소식을 들었다. 당시 梁 은 역시 東 亞 日 報 社 調 査 部 長 을 지낸 바 있는 李 如 星 과 친교가 있고, 李 는 夢 陽 呂 運 亨 과 친교가 있어 극비외국정보를 입수하여 나에게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주었다. 나는 곧바로 苑 西 洞 으로 古 下 를 찾아갔다. 來 客 이라고는 시골서 올라온 古 下 의 친척으로 보이 는 몇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정적한 분위기였다. 梁 在 廈 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는 없고 해서 십여분동안 이 말 저 말 하다가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古 下 가 別 堂 돌층계까지 내려오면서 李 君, 무슨 소식 못들었나? 이런 때일수록 말조심하고 輕 擧 해서는 안 돼! 며칠 후에 다시 한번 찾아와. 15일 오후에 만나! 자고 말하며 나의 손을 힘주어 잡는 것이었 다. 나는 직감적으로 古 下 가 일본의 무조건항복소식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에게 직선적으로 말하 지 않고 언행을 조심하라는 간접적 표현으로 일본의 항복을 암시하는 것을 알았다. 古 下 는 器 局 이 크고 그 성격이 호방하고 담대하면서도 한편 세심하고도 추호의 허점이 없는 주 도면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古 下 는 아무리 난처한 경우 또는 혼란한 국면에 직면해도 냉정 침착하게 사태의 추이와 진전을 예의주시하고 달관하는 동시에 小 我 의 名 利 와 영달보다는 大 我 에 대한 명분과 大 義 를 존 중히 여기는 것이었다. 8 15광복 직전의 총독부 당국과 古 下 와의 사이에 오고가던 治 安 權 引 受 에 대한 古 下 의 의연한 태도가 바로 그것을 증언하여 주고도 남음이 있다. 1945년 8월 11일 저녁 일 본총독부 警 務 局 次 席 事 務 官 하라다( 原 田 )가 古 下 를 만나자고 요청했다. 古 下 는 이미 그 전날 친 교가 있는 젊은 변호사 姜 柄 順 의 정보를 통해서 日 本 이 8월 15일을 시한으로 무조건 항복한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던 바이지만, 시치미를 떼고 日 人 하라다가 지정한 현 忠 武 路 (그때는 本 町 )에 있 는 일본인 모의 사택으로 갔다. 古 下 가 그 집에 가보니 그 자리에 朝 鮮 軍 司 令 部 參 謀 간사끼( 神 崎 )와 총독부 警 務 局 保 安 課 長 이소사끼( 磯 崎 )가 古 下 를 고대하고 있었다. 하라다는 開 口 하자마자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자기들 개인의사로 된 것이 아니라 총독부 고위층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蘇 聯 軍 이 8월 9 일에 두만강을 건너 조선에 침입한 만큼 앞으로 朝 鮮 의 치안관계가 중대국면에 접어들 것이라는 말과, 총독부로서는 朝 鮮 의 치안책임을 朝 鮮 사람의 신망이 많은 朝 鮮 人 지도자에 일임하고 싶은 데 당신이 그 책임을 맡아주면 좋겠다는 말과, 그런 경우 우리는 당신에게 상당한 권한을 위임하 겠다는 말을 했다. 古 下 는 그들의 속셈을 다 알면서도 天 下 無 敵 의 막강한 日 本 關 東 軍 이 건재한 이상 蘇 聯 軍 쯤이야 무슨 걱정이 되어 치안 문제를 걱정하는가 라고 그들의 요청을 그 자리에서 거절하였다. 그 다음날 즉 8월 12일에 전기 日 人 하라다는 경기도 保 安 課 長 과 동행으로 苑 西 洞 古 下 자택을 방문하고 또 다시 朝 鮮 치안책임을 맡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古 下 는 냉혹하게 그들의 요청 을 거절하였다. 내가 만일 당신들 말대로 치안 책임을 맡는다면 나는 총독부의 앞잡이에 불과할 것인즉 민중이 나의 말을 믿어줄 리 전무하지 않는가 하라다는 하는 수없이 돌아갔다. 총독부에서는 초조하여 항복 하루 전인 8월 14일에 京 畿 道 知 事 이꾸다( 生 田 )가 古 下 에게 면담 을 요청하였다. 古 下 는 경기도 도지사실(지금 중앙청앞 치안국자리)에서 그를 만났다. 그 자리에는 경기도 경찰부장 오까( 岡 )도 동석하였다. 그 때에 비로소 그들은 日 本 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한다는 말을 하면서 조선에 있는 60여만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달라는 말과 만일에 古 下 가 치안책임을 져준다면 치안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권한을 맡기겠다고 말하였다. 그 러나 古 下 는 기왕지사 日 本 帝 國 主 義 가 패망하면 필시 聯 合 國 이 進 駐 할 것이 틀림없는 판국에 총 독부의 앞잡이로서 비록 단시일간이라도 치안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판단하여 그들의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여기에서 총독부 당국은 古 下 를 단념하고 제2차로 夢 陽 呂 運 亨 에 접촉하여 8월 15일 아침 총
208 독부 政 務 總 監 엔도( 遠 藤 )가 夢 陽 을 자기 관저로 초대하여 치안유지의 책임을 맡아달라고 요청하 고, 夢 陽 은 즉석에서 政 治 犯 과 經 濟 犯 석방과 향후 3개월간의 식량확보 등 5개항의 조건을 제시하 여 합의를 보고 치안책임을 맡을 것을 수락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託 治 를 拒 否 한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日 本 天 皇 의 떨리는 목소리로 포츠담선언을 무조건 수락한다는 항복방 송을 듣고 나는 흥분을 억제치 못하고 苑 南 洞 芹 村 宅 을 거쳐 桂 洞 仁 村 宅 에 갔으나 仁 村 은 漣 川 全 谷 農 場 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苑 西 洞 古 下 宅 으로 발을 옮겼다. 古 下 宅 에 가보니까 별당으 로 올라가는 대문이 활짝 열려 있고 古 下 가 쓰고 있는 응접실은 각지에서 모여든 來 客 으로 꽉차 있었다. 古 下 는 來 客 과 인사를 나누기가 바쁘게 앞으로의 시국에 대한 전망과 정확한 정보의 입 수에 큰 관심을 갖는 듯 보였다. 滄 浪 張 澤 相, 朗 山 金 俊 淵, 小 梧 薛 義 植, 心 崗 高 在 旭, 변호사 姜 柄 順 등 십여명의 평소 古 下 와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이 찾아와 감격의 악수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래도 古 下 는 비록 일본이 패전 항복하였지만 아직도 조선의 군권, 경찰권이 일본인 수중에 있 는만큼 경동해서 무용한 희생을 당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하는 것이었다. 1945년 9월 8일 美 國 의 제8군이 온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서울에 진주한 3일 후로 기억 된다. 나는 苑 西 洞 古 下 宅 을 방문하였다. 때마침 中 國 有 力 紙 大 公 報 지 기자가 찾아와서 古 下 와 회견을 하는 중이었다. 軍 服 차림으로 권총까지 차고 온 大 公 報 社 기자와 古 下 의 회견을 나도 그 자리에서 지켜보았다. 中 國 語 통역은 丁 來 東 李 相 殷 두 교수가 하였다. 그때 회견내용 중에서 지금 까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몇가지만 적어보기로 하자. 문( 大 公 報 記 者 )---36년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하에 있던 朝 鮮 의 장래에 대한 귀하의 전 망과 소신은? 답( 古 下 )---비록 일본에게 주권을 뺏겨 36년간 식민지통치를 받았지만, 우리 민족은 5천년의 역 사와 고유의 전통을 견지해 온 단일민족인 만큼 카이로선언에 의해서 연합국의 후원과 승인을 받 아 독립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 조선독립에 대하여서는 貴 國 蔣 介 石 총통의 배려함이 크다는 것을 우리 온 국민이 감사히 여기는 바이다. 문---조선이 독립국가가 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할 사회계층은 어떤 것인가? 답---비록 식민지교육일지라도 전문학교 이상 대학교육을 받은 수십만의 지식 계급과 해외에 나가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항일투쟁을 해온 혁명세력이 주축이 되어 독립국가 건설이 달성될 것으로 믿는다. 문---36년간이라면 긴 세월인데 더욱이 잔인무도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노예생활을 해온 조 선이 일약 독립국가로 발전한다는 것이 그다지 簡 易 한 것으로 보는가? 몇해동안 國 際 聯 合 의 후견 또는 信 託 統 治 를 받는 과도적 과정을 밟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 아닌가? 답--귀하는 카이로선언에 적당한 시기에 조선이 독립될 것이다 는 조항을 염두에 두고 질문하 는 모양인데, 나와 우리 국민은 어느 국가 또는 어느 국제기구의 신탁 또는 후견도 원치 않고 있 다. 美 國 中 國 英 國 이 경제적으로 또는 군사적으로 원조만 해주면 우리는 독립국가로 훌륭히 자 존 자립할 수 있다. 이것이 나의 확고한 신념이다. 문---이곳에 와서 나는 조선 共 産 黨 首 朴 憲 永 에 대한 벽보가 여러 곳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朴 憲 永 이는 어떤 인물이며 조선에 共 産 黨 세력은 현재 어느 정도인가? 답--- 朴 憲 永 이라는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왔는지 땅에서 솟아올랐는지 나는 잘 모른다. 크게 관 심을 가질 필요조차 없는 인물로 안다. 현재의 조선 共 産 黨 세력도 보잘 것 없는 줄로 안다. 출옥 한 극소수의 공산분자를 중심해서 철모르는 젊은 아이들이 부화뇌동해서 만든 것이 조선공산당이 다
209 문---귀하의 앞으로 정치적 구상과 활동목표는 무엇인가? 답---우리 국민은 하루 바삐 中 國 에 있는 망명정부(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가 환국하기를 바라고 있 다. 임시정부의 혁명원로를 중심으로 굳게 뭉쳐서 民 主 主 義 新 生 獨 立 國 家 를 세우자는 것이 나의 정치구상이다. 그리고 시급한 것은 언론기관의 부활이다. 東 亞 日 報 는 日 本 제국주의의 야만적 탄압 으로 1940년에 폐간되었는데, 그것을 복간시키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건전한 신문과 방송국만 우리 수중에 있다면 共 産 主 義 를 두려워할 바가 못된다고 생각한다. 눈부신 政 治 工 作 8 15해방 직후 국내정국은 혼란의 극에 달했다. 夢 陽 과 民 世 安 在 鴻 이 중심이 되어 建 國 準 備 委 員 會 를 발족시켜 8월 17일에는 그 중앙조직을 완료하고 방송과 신문을 손에 넣었고, 共 産 黨 은 전 국 각지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각지에 保 安 隊 治 安 隊 學 徒 隊 등이 결성되었다. 美 軍 이 진주하 기 전, 그리고 美 國 극동군사령부에서 南 朝 鮮 에 軍 政 을 선포(9월 7일)하기 하루 전인 9월 6일 共 産 黨 朴 憲 永 과 建 準 의 夢 陽 이 합작해서 朝 鮮 人 民 共 和 國 을 수립 선포하였다. 이렇게 정국이 격변하자 古 下 는 공산당과 人 民 共 和 國 과 民 主 主 義 民 族 戰 線 을 타도하기 위하여 美 軍 政 宣 布 日 에 國 民 大 會 準 備 委 員 會 를 결성하고 그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9월 8일에는 美 8군 24 군단이 서울에 진주하고 9월 11일 美 軍 政 시정 방침을 발표하였다. 古 下 는 그 때 벌써 美 軍 政 에서 人 民 共 和 國 을 부인하는 성명이 미구에 발표될 것을 예상하고 美 軍 政 고문에 취임하고 美 軍 政 人 選 작업에 깊숙이 관여하여 자기와 막역한 친우 金 用 茂 를 司 法 部 長 에, 趙 炳 玉 을 警 務 部 長 에 추천 발 령케 하였다. 한편 古 下 는 國 民 大 會 準 備 委 員 會 각 지방조직을 결성하는 동시에 人 共 반대 세력인 민족주의 정 당 韓 國 民 主 黨 을 결성(9 16)하고 首 席 總 務 에 취임하였다. 그런데 8 15해방 후 美 軍 政 초기에는 방 송국과 신문사에는 共 産 좌익계가 침투하여 사상적 혼란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데다가 11월 23일 每 日 新 報 가 서울신문으로 개제 속간되자 그 사설과 논조가 좌경화되고 雨 後 竹 筍 같이 발행되는 공산당기관지( 人 民 日 報 解 放 日 報 등)가 판을 쳐 세상이 온통 共 産 黨 천하가 되는 느낌이었다. 이때에 古 下 는 東 亞 日 報 의 복간을 서둘러 12월 1일에 東 亞 日 報 社 간판을 서울 公 印 社 에 붙이고 사장에 취임하였다. 共 産 黨 의 최대의 적인 한국민주당 수석총무가 되고 반공신문인 東 亞 日 報 사장 이 되고 美 軍 政 고문이 된 古 下 를 비난 공격하는 共 産 黨 의 모략중상 벽보와 傳 單 이 서울 시내에 범람하게 된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해외에서 돌아온 臨 政 派 에서까지도 古 下 를 질시하고 중상하는 것은 참으로 의외의 사태 로, 臨 政 절대지지를 위해서 분골쇄신하며 공산당과 투쟁한 古 下 로서는 정치무상과 냉혹한 현실을 개탄치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기야 海 外 派 가 국내에 돌아와서 古 下 의 탁월한 식견과 그의 폭 넓은 정략가로서의 역량과, 그리고 강대한 정치적 기반 등을 종합해볼 때 미구에 전개될 정권쟁 취에 가장 무시못할 적수라고 보았을 것만은 사실이다. 아닌게 아니라 古 下 의 기개는 北 岳 과 漢 江 水 를 삼킬 큰 야망과 불타는 의욕을 갖추었다. 격동 하는 정세를 예의 응시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정치적 기반을 整 地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기의 영도하에 있는 韓 國 民 主 黨 의 지방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初 代 執 權 者 로 공인된 李 承 晩 측근 에 古 下 자기 사람을 배치하고 美 軍 政 要 職 에 韓 國 民 主 黨 간부를 추천하는 등 빈틈없는 정치 공 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판국에 古 下 에 대한 정적도 많고 古 下 에 대한 질시와 중상모략도 심하였다. 巨 木 일 수록 强 風 에 닿는 면이 많은 것과 같이 정치적 거인일수록 정적의 중상과 모해가 큰 것이다. 古 下 에게도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210 쓰러진 巨 木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조선5개년신탁통치안이 결정 발표되자 정국은 극도의 혼란상 태로 들어갔다. 전국 각지에서 신탁통치반대의 波 高 가 높게 치솟았다. 이 때에 古 下 가 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중상과 모략이 海 外 派 ( 臨 政 派 )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 만 古 下 는 앞에서 말한 中 國 大 公 報 기자와의 회견내용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신탁통치는 절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다만 신탁통치를 반대투쟁하는 그 방법과 수단에 있어서 海 外 派 ( 臨 政 派 )와 의견을 달리할 뿐이었다. 臨 政 派 에서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방법으로 美 軍 政 을 반대하고 臨 政 機 構 가 접수하여 臨 政 이 곧 新 生 大 韓 民 國 의 정식정부로 그 주권행사를 하자고 주장하는데 반해서, 古 下 는 어디까지나 美 軍 政 과 협력해서 共 産 黨 을 타도하고 신탁통치를 반대하자는 현실론을 앞세 웠던 것이다. 古 下 는 본디 성격이 호방하여 측근들이 신변보호를 권고하였지만 聽 而 不 聞 하고 침 실의 덧문도 잠그지 않고 자는 습성이었다. 仰 天 俯 地 해서 민족과 조국에 죄를 짓지 않았는데 누 가 감히 나를 죽이겠는가! 이와 같은 신념과 자신이 古 下 로 하여금 자기생명을 무방비상태로 방 치하여 정치테러의 희생이 되고 만 것이다. 古 下 가 苑 西 洞 자택 別 堂 에서 韓 賢 宇 의 흉탄에 쓰러지던 날 즉 12월 30일 밤 8시쯤 나는 鍾 路 YMCA강당에서 古 下 를 만났다. 그때 각 정당사회단체연합으로( 左 右 翼 전부 참석) 시급한 식량대책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古 下 가 뒤늦게 韓 服 에 인바네스 외투를 입고 참석하였다. 내가 인사를 하 니까 臨 政 要 人 들과 京 橋 莊 에서 신탁반대 대책회의를 끝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고 말하고 중도에 퇴장하였다. 그것이 내가 古 下 를 만난 마지막이었다. 만일 古 下 가 음험한 정치테러에 희생이 되지 않았다면 大 韓 民 國 수립 전후의 우리나라 정치판 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古 下 는 확실히 정치적 거인이었다. 정치에서 잔꾀와 술수를 배제하고 無 策 이 大 策 이라는 정치신조와 철학을 과감하게 실천하다가 경륜을 펴보지도 못하고 55세를 일기 로 아깝게 쓰러진 巨 木 이었다. 46. 解 放 前 後 縱 橫 觀 < 新 東 亞 > (1987년 8 月 號 ) 前 國 會 議 員 李 相 敦 熱 氣 고조되는 현대사연구 벌써 8 15광복 42주년이 되었다.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 8 15해방 전후를 중심한 현대사에 대한 연구와 국민의 관심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것 같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한편 다행한 일이라 고 생각한다. 각 언론기관에서 해방전후의 현대사에 대한 연구토론회와 심포지움이 있어 국민의 관심과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필자도 그런 모임과 토론회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중의 한사람이다. 그러나 해방전후사에 대한 토론회와 심포지움에서 발표되는 주제와 토론내용 중에는 사실과 다 를 뿐 아니라 전혀 상반된 것이 역사적 사실인 양 제시되고 토론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 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해방전 일제치하 1910년에서 45년 사이의 침략기와 해방 후 45년 8월 15 일에서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 사이의 갖가지 역사적 사실을 사실 그대로 추적 재조명한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오랜 시일이 지났을 뿐만 아니라 8 15광복과 6 25동란을 거치
211 는 과정에서 모든 문서와 자료가 소실 또는 분실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제 군국주의의 폭정으로 1940년 8월 10일 강제폐간될 때까지 민족지 동아일보의 기 자로 있었고, 8 15광복 후에는 곧바로 정치 제일선에 몸담고 나름대로의 정치생활을 체험한 사람 이다. 말하자면 해방 전후에 있었던 사건과 당시 지도급 인물들에 대한 행동반경을 비교적 잘 알 고 있는 사람중의 한사람이라고 자부한다. 그래서 신동아 지의 부탁을 받고 해방전후사에 대한 몇가지 사실을 지면이 허하는 대로 단편적으로 써볼까 한다. 나의 졸고가 해방전후사 재조명에 있어서 참고가 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겠다. 그러나 본고를 집필함에 있어서 미리 말하여 둘 것은, 나는 편견독단이나 당파성을 가지고 사 안을 분석하고 묘사하지 않겠다는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구체적 사실과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그 리고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논리를 전개할 것을 다짐하여 둔다. 또 한가지, 비록 보잘 것 없기는 하나 나의 지난 70생애를 돌아볼 때 나는 일제치하는 물론이 고 8 15해방 이후 지금까지 반골정신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 또는 정 당일지라도, 맹종하지 않고 是 와 非 를 따지고 흑과 백을 가려 정론을 고집해왔다고 생각한다. 新 幹 會 는 민족운동단일체 지난 3월 3일 모 일간지가 주최한 한국민족운동과 신간회 라는 학술회의가 있었다. 나는 그 주 제발표논문의 내용에 대하여 비판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간회의 활동 이라는 제목의 이 주제발표에서 이문원 교수는 다음과 같이 신간회의 강령을 분석 발표하였다. 조선일보 간부들이 만든 신간회 강령을 분석하면, 첫째 조선민족의 일제의 지배로부터의 정치 적(제국주의) 경제적(식민주의) 각성을 통해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인식, 독립의지를 강화하고, 둘째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뉘어져 있던 당시 조선인들의 독립운동 역량을 하나로 집결 단 일화하여 항일 투쟁을 강화하고, 셋째 宋 鎭 禹 崔 麟 중심의 타협적 자치운동을 배격한다는 내용 이다 먼저 지적할 것은 이 논문이 일제식민지치하의 민족운동 단일체로서 일제의 감시와 박해속에서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결성되었다가 4년만에 일제 총독정치의 간교한 책동으로 해체된 신간회 의 성격과 강령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특정인에 연관시켜 결론을 내렸다는 점이다. 필자는 당시 고등보통학교 재학생으로서 신간회 창립에서부터 해체에 이르기까지 현장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그에 대한 반론을 펴보고자 한다. 첫째 신간회는 몇사람의 조선일보 간부들이 만든 민족운동단체라는 이론이다. 향우회 또는 친 목회를 만드는 데도 말이 많고 힘겨운 일인데, 하물며 막강한 일본제국주의 총독정치 하에서 우 리는 일체의 기회주의를 배격한다 는 전투적 정강을 내걸고 발족한 항일독립운동단체가 어떻게 한 신문사의 간부 몇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겠는가. 신간회 발기인 50명중에 언론인은 15명이었는데, 이들은 조선일보 12명, 동아일보 2명, 중앙일 보 1명이었다. 따라서 조선일보가 신간회 창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모두 인정하는 바이다. 그렇다고 1920년대 말기에 脫 식민지이념으로 합법적 항일민족운동단체로 나선 신간회가 조선일 보 간부 몇 사람의 구상과 노력으로 결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의 사회정세와 실정을 생각해보면 자명해질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신간회는 간교한 일제 총독부 고등경찰(지금 정보경찰)의 온갖 방해공작과 이간 분열공작이 있었지만, 천도교를 비롯한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법조계 교육계에서 동참했고, 지방 조직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지국장과 지방에 잠재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일부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이들이 며칠동안의 진통을 겪으면서 1927년 2월 15일 마침내 서울 YMCA강당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던 것이다
212 진짜 自 治 派 의 정체 다음 이 교수가 송진우 최린 중심의 타협적 자치운동을 배격한다는 내용이다 라고 풀이한 것 도 무리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우선 한 조직과 정당단체의 강령에, 정책적인 내용이 표현될 수 는 있지만 어떻게 특정인의 이름을 연관시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또 자치와 친일, 그 리고 항일에 대한 구분이 불명확함을 느끼게 한다. 본디 일제의 강점으로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이 공포돼 조선이 일본 식민지가 되고 총 독정치가 실시되는 과정에서, 비분순절한 사람도 있었지만 매국친일한 사람도 많았다. 이용구 송 병준의 일진회는 물론이고 합방을 합리화하고 국민을 기만하기 위해 온갖 단체가 생겼다. 1910년 3월 29일 閔 元 植 이 중심이 되어 대한제국 황실존영과 한일친선 등 7개 강령을 내걸고 정우회 라 는 친일어용단체를 만들었다. 그 후 민원식은 정우회 를 국민협회 로 개칭하여 조선에 자치권과 참정권을 줄 것을 요구하는 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조선사람의 항일 독립정신을 말살 또 는 둔화시키려는 친일 행위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이것이 자치 운동의 시발이다. 민원식은 기미 3 1독립운동 다음해인 1920년 2월 5일 조선인 참정권 청원서 를 일본국회인 중 의원 의장에게 제출하고, 다음해인 21년 2월 16일 또다시 동경에 가서 제국 호텔에 머물면서 친 일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날 일본대학 유학생 梁 槿 煥 (28세)이 李 吉 寧 이라는 가짜 명함을 가지고 민원식이 묵고 있는 호텔방에 찾아가 참정권과 자치운동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으나 閔 이 오히려 폭언과 함께 재떨이로 梁 을 갈기자, 梁 은 미리 준비해 가지고 있던 단도로 閔 을 단칼에 살해하고 2층 창문을 열고 아래로 도주하였다. 본적이 황해도 연백인 양근환은 민원식을 살해하고 그길로 일본인 목수 옷으로 변장하였다. 그 는 일본 남쪽 나가사키( 長 崎 )항에서 배편으로 중국 상해로 탈출하려다가 승선 일보직전에 일본 경 찰에 체포되었다. 그 후 그는 살인죄로 무기종신형을 받고 감옥생활을 하다가 몇차례 감형을 받 아 20년 형기를 마치고 40년에 출옥하였다. 당시 필자는 조선에 돌아온 양근환을 만나 보았는데, 키는 비록 작으나 눈매와 몸가짐에 살기가 있어 과연 친일파를 죽일 만한 인물로 보였다. 어쨌든 양근환이 민원식을 죽인 후 즉 20년 이후부터는 자치운동가가 자취를 감추고 노골적인 친일 매국세력이 판을 쳤다. 그런데 어떤 근거로 송진우 최린 등의 자치운동가 들을 제외하고 신 간회를 창립하였다고 주장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최린과 최남선은 뒤에 상술하겠지만 그 당 시 이미 민족을 배신한 변절자로 친일파의 선봉적 위치에 있었다. 여기서 고하 송진우의 항일투쟁기록을 대충 적어보기로 하자. 고하는 1915년 일본 明 治 대학 법학과를 마치고 돌아와 16년 인촌 김성수가 사립중앙학교(지금 중앙고등학교)를 인계할 때 교장에 취임하였다. 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한 산실이 바로 중앙학교 숙직실임은 잘 알려진 일이다. 고하는 33인 서명자는 아니었지만 48인 사 건으로 투옥되었다가 20년 10월 30일에 출옥하였다. 고하는 22년 33세에 동아일보사장에 취임하였다. 26년 3월 7일 모스크바 공산당 국제 農 民 本 部 에서 조선농민에게 보내는 3 1독립운동 기념사 를 동아일보에 게재한 탓으로 신문 무기정간과 동시에 고하와 발행인 金 鐵 中 씨가 구속기소되어 징역 6개월의 실형선고를 받고 1927년 3월까지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한다. 신간회 창립 당시인 27년 2월 15일에는 고하가 우리나라 언론사상 처음으로 일제재판에 의하 여 실형선고를 받고 복역중에 있었다. 만일 고하가 친일파로 자치운동을 했다면 그 유명한 친일 깡패 박춘금이 고하와 인촌을 백주에 부하 10여명을 데리고 집단 폭행을 할 수 있었겠는가도 생 각해볼 필요가 있다. 25년 이후부터는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강화되어 자치운동조차 말할 수 없었 고 오직 친일이 판을 치고 있었을 뿐이다
213 宋 鎭 禹 의 先 見 之 明 3 1독립운동의 주동인물이고 33인의 한사람이었던 如 庵 崔 麟 은 필자도 여러차례 만나 잘 아는 사람인데, 그 지모와 언변, 인품 그리고 외모가 당당하여 한때 義 庵 孫 秉 熙 가 죽고 난 후 천도교 의 실질적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진영의 거목이었다. 그러나 27년 그가 50세때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조선대표로 참석하여 연설하고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 파리에 들렀을 때 그곳에 유학중인 유부녀(친일파 金 모부인)와의 스캔들이 그곳 일본대사관에 탐지되었다. 조선총독 부에서는 그 약점을 최대한 이용 협박하여 崔 는 마침내 변절하고 時 中 會 를 조직, 34년에는 총독 부 中 樞 院 參 議 가 되고 그 후 총독부기관지 每 日 申 報 사장까지 되었다. 40년대에는 臨 戰 報 國 團 長 을 역임하는 등 온갖 친일과 반민족적 행위를 하였다. 해방 후 대한민 국이 수립된 후 반민특위에 의해 구속 수감되었으나 73세의 노령이라 석방되었다. 요컨대 최린은 자치운동가가 아니라 거물 친일파였다. 최남선 역시 3 1독립선언서를 집필하고 그의 학식과 천재적 역사관으로 조선민족혼과 조선주의 조선정신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공지의 사실이나, 그는 중년기부터 변절하여 총 독부 역사편수관이 되어 日 鮮 同 祖 同 根 論 이라는 반민족적 학설을 창출하는 등 용서받지 못할 반역 행위를 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말기인 43년 10월 20일 조선학도병제가 공포되자 일본 동경까지 가서 조선유학생을 모아놓고 일본제국을 위하여 기꺼이 출정하여 황군에 응답하라고 열변을 토하 였다. 이같은 반민족적 친일행위로 광복 후 역시 반민특위에 구속수감되었다. 말하자면 최린과 최 남선은 극단적 친일운동가이지 소극적 자치운동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당시 고하를 비롯한 몇몇 우익진영의 민족주의 지도급 인사들이 신간회에 대해서 냉담 하고 일종의 거부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 이유를 추적해본 일이 있다. 신간회 서울(당 시 京 城 )지부 위원장으로서 29년 11월 3일 光 州 학생항일투쟁 사건때 서울에서 민중대회를 열어 항일시위를 벌이려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만기출감한 維 石 趙 炳 玉 에게 서 들은 말이 있다. 유석의 말에 의하면, 고하가 말하기를 신간회가 민족운동 단일체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와 일시 연합전선형식으로 결정한 것까지는 전술적으로 수긍이 가지만, 머지 않 아 공산주의자의 생리와 그 이질적 성분 때문에 내부분열을 일으켜 조직이 외해될 것이라고 했다 는 것이다. 그것은 고하의 탁견이고 선견지명이라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고하의 공산주의자와의 합작불가론은 8 15해방정국에서 고하가 끝까지 좌우합작의 비 현실성을 들어 夢 陽 의 인민공화국 참가를 반대한 사실에서도 잘 나타났다. 아무튼 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본부에서는 긴급대책회의를 열었다. 민중대회를 열어 전국 각지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자고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하였다. 그러 나 낡은 부르주아 민족해방보다는 무산계급의 사회주의혁명이 앞서야 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이 론이 맞서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許 憲 洪 命 憙 趙 炳 玉 李 灌 鎔 李 源 赫 金 武 森 등이 주동이 되어 대규모 민중대회를 열기 위해 비밀계획을 추진중 일경에 밀고한 자가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주동자인 許 洪 趙 李 金 등 6명이 투옥되었다.( 許 憲 은 그때까지만 해도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변호사였으며, 한때 동 아일보 감사역과 사장서리까지 역임하였다. 다만 그의 외동딸 許 貞 淑 이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해 방후 소위 인민공화국 首 相 명단에 올랐다가 越 北 ) 당시 신간회중앙본부에 자리잡고 있던 공산주 의자들은 한사람도 투옥된 일이 없었다. 新 幹 會 解 體 의 내막
214 민중대회사건으로 신간회 중앙본부위원장을 비롯하여 핵심적 인물들은 모두 투옥되었다. 그러 나 그 와중에서도 좌익분자들은 신간회의 영도권을 잡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썼다. 1930년 신간회 제3회 중앙위원회는 우파 민족진영의 변호사 金 炳 魯 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때마침 1928년 제6차 국제공산당대회 결의에 따라 조선공산당은 종래의 제국주의 해방투쟁전술 로 민족주의 우익진영과의 협동전선 또는 연합전선에서 탈퇴하여 독자적으로 노동근로자와 농민 대중을 중심으로 한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으로 전환하라는 지령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 터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그야말로 민족개량주의 반동집단이라고 비난하는 공식론이 조선사회에 풍 미하게 되고, 좌익 소아병자들이 때를 만난 듯이 신간회 해체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총독부에서는 항상 눈에 가시 같은 소위 불온단체인 신간회를 조선사람 스스로의 손 으로 압살 해체시키는 고등전술을 짜냈다. 동아일보를 제외한 각 신문과 잡지에 풋나기 공산주의 자들과 철모르고 날뛰는 문인들이 신간회 해체론을 떠들게 방임하였다. 아무튼 총독부 경무국에서는 그간 신간회의 전국대회 집회를 금지하고 있던 때인데도 불구하고 31년 5월 10일에 서울 YMCA강당에서 신간회 전국대회를 열도록 허가해 주었다. 그리고 가장 교 묘한 수단으로 지방에 있던 해체파위원들에게는 서울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비용까지 지출하였 다는 설도 나돌았다. 그때 필자는 광주학생운동에 관련되어(학교당국에 제출한 요구서 집필) 公 州 공립고등보통학교에 서 쫓겨나 휘문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중이었는데, 5월 10일 신간회 전국대회를 방청하였다. 회순에 따라 신간회 해체결의안이 상정되었는데, 발언자 거의가 젊은 좌익계 공산주의자들이었고, 해체를 반대하는 이론가로서는 중앙위원장 金 炳 魯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다. 해체결의안의 선봉에 나선 사람이 당시 카프 시인으로 날리던 26세의 林 和 였다. 흥미로운 에피소드 한 토막을 소개한다. 애당초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신간회를 해체해버리고 자 기네끼리만 그 자리에서 새로운 계급주의 좌익단체를 결성할 구체적 플랜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 이다. 그런데 막상 신간회 해체결의안이 거수표결로 다수표로 결의되어 임시의장이 신간회가 해 체되었음을 선포하자 그 자리에 임석했던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 요시노( 吉 野 )가, 신간회 전국 대회는 신간회가 해체소멸된 이 순간부터 집회의 주체가 없어졌으니 집회해산을 명령한다 고 선 언하고, 그 장소에 모인 사람을 내몰아 강제해산시켰다. 좌익계와 공산주의자들은 닭 쫓던 개 지 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5월 10일 신간회를 해체한지 한달도 못되어 신간회 해체에 앞장섰던 임화 金 南 天 등 세칭 카프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에 무자비한 철퇴를 내려 전국적으로 70여명을 투옥 시켰다. 임화 등 심약한 문인 거의가 옥중에서 전향서를 쓰고 석방되어 친일문학으로 변신하게 된다. 아무튼 1931년 5월 10일 신간회가 소아병적 공산주의자와 총독부 경무국의 간교한 공작에 의 해서 해체된 후 8 15해방 때까지 조선사회에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항일사회단체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때부터 일본군국주의의 말기적 암흑기에 접어든 것이다. 필자는 해방 전인 43년 가을 우연한 기회에 한때 동아일보 조사부장도 지내고 조선민속학을 연 구하던 李 如 星 ( 越 北 )의 서울 옥인동 집에서 임화를 만난 일이 있다. 그때 임화는 소위 전향파 시 인으로 건강도 좋지 않았다. 나는 임에게 31년 신간회 해체의 배경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의 대 답은 간단했다. 놈들(총독부)에게 속고 이용당한 것뿐이다. 우리가 어리석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신간회 창립 당시는 물론이고 그후 8 15광복 때까지 고하와 인촌은 절대로 자 치운동과는 거리가 먼, 소극적이나마 항일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이다. 일제 말기, 즉 1944년 2월 총독부에서 조선사람 3명을 일본 貴 族 院 으로 추천했는데, 인촌만이 끝까지 거절하고 수락하지 않
215 았다고 한다. 동아일보가 폐간될 때 일제식민지 통치 36년동안 가장 암담하고도 불안과 공포에 떨던 시대는 1936년 8월 5일 육군 대장 미나미( 南 次 郞 )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때부터라고 본다. 이 동안에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 과 박해는 그야말로 以 筆 難 記 以 口 難 說 이다. 미나미총독은 부임한지 한 달도 못된 8월 27일에 日 章 旗 말소사건을 구실로 동아일보를 무기정 간시키고, 동아일보기자와 편집국 책임자 10명을 구속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40년 8월 10일 민간 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강제폐간시켰다. 1939년 연말에 총독부 경무국장이 동아일보사장인 芹 村 白 寬 洙 를 국장실로 불러놓고 戰 時 下 물자부족(신문용지 부족)을 이유로 40년 2월까지 자진폐간할 것을 강요하였다. 백사장은 즉석에서 경무국장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당시 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동아일보사장직에서 고문으로 물러나 긴 했으나 실권자였던 고하는 총독부의 폐간요구는 부당하다고 판단, 최후까지 반대투쟁할 것을 사주인 인촌과 합의하고 버티었다. 그런데 총독부에서 제시한 40년 2월 기한을 넘기게 되자 경무국에서는 백사장을 불러 노골적 으로 자진폐간하는 것이 국책에 순응하는 길임을 강조했다. 그는 同 業 紙 사장은 자진폐간하기로 이미 승낙하여 동아일보와 같은 날 폐간하겠다는 승낙서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 사에서는 최후까지 버티기로 하고 고하가 극비밀리에 일본 동경에 가서 일본 정계와 의회, 언론 계와 접촉하여 총독부의 언론말살정책의 부당성을 선전하고 진정하였다. 고하가 동경에까지 가서 문제를 일으키자 미나미총독은 노발대발했다. 7월초에 고하는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서울 종로경찰서 형사에 의해 연행, 한여름 복중에 종로경찰서(지금 제일은행본점 자리)에 구금되었다. 고하와 인촌 등 중역들이 완강히 자진폐간을 반대하자 경무국에서는 신문파지 를 판매가격을 위반하여 요식업자(명월관)에 팔았다는 것을 트집잡아 경리사원과 과장을 구속하고, 영업국장과 이사 등 10여명을 구속하였다. 7월 중순에는 백사장도 구속하였다. 사주인 인촌(당시 보성전문학 교장)도 경기도 경찰부에 불려다니며 며칠을 두고 엄중한 조사를 받았다. 경찰에서는 신문파지 불법처분사건을 단순한 경제사범으로 처리하지 않고 전시 입법인 國 家 總 動 員 法 위반(최고형은 사형 또는 무기형)으로 다스리겠다고 위협하였지만, 발행인 백사장은 종로경 찰서 유치장에서 끝까지 버티면서 자진 폐간에 서명날인을 거부하였다. 경찰에서는 하는 수 없이 최후수단으로 서울시내 각 경찰서에 분산유치시킨 중역 전원을 종로경찰서 고등계주임실에 불러 중역회의를 소집시켜 놓고, 중역회의 결의로 동아일보 발행인을 林 正 燁 상무에 넘기라고 강요, 임 상무가 발행인이 되었다. 임사장은 하는 수없이 40년 8월 10일에 동아일보를 국책에 순응하여 자진 폐간하겠다 고 서명날인하였다. 이렇게 해서 20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의 대변지 동아일보는 8월 10일 문을 닫고 광화문 사옥 에 게양된 동아일보사 기도 내려졌다. 구속됐던 고하 인촌을 비롯한 여러 중역들도 풀려나고, 8월 12일 동아일보 해산식이 5층강당에서 거행되었다. 해산식은 전국에서 올라온 지국장과 본사 사원, 공장직원들의 울음바다가 되어 인촌의 해산 식사를 들을 수 없었다. 당시 필자는 동아일보 기자 로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古 下, 日 帝 의 정권인수 要 請 거부 8 15해방 직전 직후인 45년에서 46년 사이의 역사적 사실은 필자가 비교적 잘 알고 있다고 자
216 부한다. 왜냐하면 45년 당시 필자는 33세로 해방정국의 주역인 고하와 인촌을 비롯, 夢 陽 呂 運 亨, 民 世 安 在 鴻, 維 石 趙 炳 玉 등과 평소부터 잘 알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대인관계에는 上 交 中 交 下 交 가 있는데, 나는 어이 된 셈인지 학생시절부터 웃어른들과의 교제, 즉 상교를 하였 다. 물론 친구와 동지간의 중교도 있었지만, 비교적 선배와 지도자들과의 상교를 많이 하였다. 고하와 인촌은 내가 동아일보 기자생활을 하였으니까 당연하거니와, 몽양은 내가 와세다( 早 稻 田 )대학 유학 때 몽양의 조카 呂 駧 九 (와세다대학 공과졸업, 해방 후 월북, 김일성대학 교수)와 친 하게 지내어 그 소개로 여름 방학에는 몽양을 만나곤 하였다. 민세는 돈암동 성신여학교(지금 성신여대) 밑에 살고 있었는데, 나도 그 이웃에 살고 있었을 뿐 만 아니라 민세의 측근인 梁 在 廈 (동아일보기자, 해방 후 한성일보 주필, 6 25때 납북)와 절친한 사 이라 자주 만날 수 있었고, 유석은 나와 동향이라 역시 해방전부터 친교가 있었다. 내가 일본의 패망과 일제가 미국 영국 중국 등 연합국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한다는 소식을 들 은 것은 8월 12일 밤 자정 무렵 집에 찾아온 양재하에게서였다. 그날 나의 이웃에 살고있던 梁 은 밤늦게 집으로 찾아와 좋은 소식을 알릴테니 술이나 한잔 내라고 했다. 나는 별 생각없이 집에서 담근 술을 내와 둘이 술을 나누는데, 梁 은 좀처럼 특별한 말을 꺼내지 않고 술만 마시는 것이었 다. 밤이 늦어 자정이 가까워지자 내가 도대체 기쁜 소식이 무엇이냐고 말을 꺼냈다. 梁 은 내 식구 들이 다 자느냐고 확인한 다음에 작은 목소리로 15일 정오 일본 천황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중대방송을 한다는 것과, 15일 정오 그 중대방송을 듣기 전에는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 고 했다. 그리고 양은 그 소식을 몽양에서 들었다고 말하면서 고하와 민세도 이 소식을 알고 있 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양에게서 충격적인 비밀뉴스를 듣고 흥분이 되어 밤잠도 설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원서동 고하집을 찾아갔다. 평시와 다름없이 시골에서 온 듯싶은 친척 손님이 있어 할 말도 삼가고 있다 가 내일(14일) 고향인 천안에 가서 있다가 일주일 후에 상경하겠다 고 하직인사를 했다. 그랬더 니 고하는 특별한 사정이 아니거든 15일까지 서울에 있어보라고 말하는데, 무슨 뜻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고하는 張 徹 壽 (일본동경대학출신으로 조선사람으로는 유일한 외교 고시합격자로 일본 주불대사관참사 역임)를 통해 일본이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무조건 수락한다 는 소식을 이미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총독부에서는 고하에게 15일 이후 잠정적으로 정권을 인수하라고 교섭을 진행중 이었다. 즉 8월 10일 총독부 경무국 사무관 하라다( 原 田 )가 고하댁을 찾아와 극비사항이라고 전제 한 다음, 일본이 영국 미국 중국 등 연합국에게 종전을 제의하여 전쟁이 곧 끝날 경우 조선의 시 국수습과 치안권을 맡아줄 것을 교섭했던 것이다. 고하는 거절하였다. 8월 11일 하라다는 조선군사령부 참모 간사키와 함께 또다시 고하를 찾아와 8 15이후 조선의 치안권 정권을 맡아달라고 권고하고, 좀더 구체적으로 총독부가 가지고 있는 권력의 4분의 3, 즉 경찰 사법 통신 방송 신문 등을 넘겨줄터이니 수락하라고 했다. 고하는 초지일관 거절하였다. 그 다음인 13일 고하는 경기도 경찰부장 오카( 岡 )의 안내로 경기도지사 이꾸다( 生 田 )를 김준연과 함 께 경기도지사실에서 만났는데, 역시 조선의 과도적 치안권과 기타 권한을 인수할 것을 교섭받았 으나 거절하였다는 것이다. 고하가 정권인수를 거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번 전쟁의 승리자인 연합군이 적법절차를 거쳐 그 나라 국민에게 정권을 줄 수는 있지만, 패 전국 일본총독이 어떻게 개인에게 정권을 줄 수 있으며, 내가 참월하게도 그것을 받을 수 있겠는 가 이렇게 해서 고하는 끝내 총독부의 정권인수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뚜렷한 사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 현대사 연구가 중에는 고하의 정권인
217 수론이 사실이 아닌 조작극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의 논거인즉 당시 총독부 사무관으로 있던 친일관리 崔 모가 모 월간지에 쓴, 정권인수론은 자기로선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무근한 사실 이라고 잘라 말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필자는 먼저 고하가 무슨 필요가 있어서 사실도 없는 정권인수론을 허위조작해야 했나를 묻고 싶다. 필자는 그 사실을 고하로부터 직접 들었을 뿐만 아니라, 8월 14일 총독부 관리로서 가장 비 중이 높은 金 大 羽 (당시 경북도지사)가 원서동 고하집에 찾아와 총독부 엔도( 遠 藤 )정무총감 말이라 고 전하면서 몽양과 협조해서 시국수습에 나서줄 것을 말하자, 고하는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김 에게 노형은 지금 그런 처신을 할 사람이 못되니 자숙하라 고 냉정히 충고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둘째로 그 당시 일황의 8 15 정오 중대방송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는 내용임을 안 사 람은 총독부 일본 고관 중에서도 몇사람뿐이었고, 여타는 일본이 미국 본토라도 상륙 점령한 발 표나 아닌가하고 태평세월인 형편이었다. 하물며 조선 지도급 인사와의 정권인수교섭 내용을 사 무관에 불과한 최모에게 알려야만 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좌익 주도의 建 準 과 人 共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의 한국의 국내정세는 글자 그대로의 혼돈과 무질서속에서 갈피를 잡 지 못하였다. 한반도가 38도선으로 남과 북이 갈라진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이때 몽양 여운 형은 8월 15일 오전에 총독부 엔도 정무총감과 만난 후 정치범석방 식량확보 치안유지 등 몇가 지 합의를 보고난 후 곧바로 朝 鮮 建 國 準 備 委 員 會 ( 建 準 )을 발족시켜 위원장에 몽양, 부위원장에 민 세가 취임했다. 이 건준 은 이름부터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준비조직이라는 점에서 국민의 호응을 받아 남북조선에 걸쳐 1백45개 지부가 결성되었지만, 내용은 거의가 공산당 조직이고, 핵심에는 공산당 의 엘리트인 李 康 國 崔 容 達 등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민족주의자 민세는 느낀 바 있어 9월 1 일 건준 에서 탈퇴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 우익정당 제1호로 國 民 黨 을 창당하였다. 9월 6일 박헌영을 중심한 공산당이 주도하여 소위 인민공화국 이 선포됨과 동시에 건준은 창건 20일만에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건준 발족 후 필자도 당시 건준본부로 쓰였던 徽 文 소학교 (지금 德 成 女 大 )에 몇차례 가보았는데,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이었고 건준의 조직은 완전 공산당에 서 틀어쥐고 있었다. 조직에 대한 경험과 투쟁력이 없는 우익진영 인사들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 았다. 민세가 부위원장을 그만둔 것도 공산당 때문이고, 그 자리에는 그때 이미 공산당에 들어간 許 憲 이 자리잡고 있어 몽양은 완전히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8월 25일 美 軍 선발대 일부가 인천항에 상륙하고, 38도선을 기준으로 미 소 두나라 군대가 분단 점령한다는 미국방송이 처음 있었다. 그리고 9월 8일에 미군이 정식으로 서울에 진주한다는 소식 도 들어왔다. 한편 해방 전 광주 벽돌공장에서 노동일을 하고 있던 박헌영이 서울에 나타나 공산당을 재건하 였다. 그들은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기 전에 좌우합작을 위장한 인민공화국 정권을 세워 기정사실 로 만들어 미군으로 하여금 승인케 하려는 정략을 세웠다. 그리하여 9월 6일 밤 당시 경기여고(지 금 昌 德 女 高 ) 강당에서 날치기로 전국 인민대표자대회를 열어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인민 위원 55명과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을 선출하였다. 9월 14일에는 인공내각 구성을 발표했는데 미국을 의식해서 그때까지 미국에서 돌아오지도 않 은 李 承 晩 을 인공의 주석에 앉히고 몽양을 부주석에 앉혔다. 또 그때까지 중국에서 돌아오지도 않은 臨 政 요인과 국내에 있는 우익인사들을 멋대로 임명했다. 그런데 인공 각료명단을 보면 참으로 공산당의 기만전술과 모략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즉 내각 13개 부장 중에서 수상에 許 憲, 군사 金 元 鳳, 보안 崔 容 達, 선전 李 觀 述, 경제 河 弼
218 源, 농림 康 基 德, 노동 李 胃 相, 서기장 李 康 國 등 가장 핵심적인 권력부서에는 전부 박헌영계인 재건파 공산당원으로 메꾸고 있다. 그리고 내무 金 九, 외무 金 奎 植, 재정 曺 晩 植, 사법 金 炳 魯, 문 교 金 性 洙, 체신 申 翼 熙 를 임명했다. 김구에게 내무를 주었지만, 내무행정에서 제일 중요한 경찰 권은 보안부에서 떼어가 공산당 중추인물인 최용달이 차지했다. 내각의 서기장 역시 공산당 핵심 인 이강국이 맡은 것이다. 韓 國 民 主 黨 창당 조선공산당이 주체가 되고, 그에 이용당한 몽양과 합작해서 9월 6일 우익민족진영의 의표를 찔 러 인공정권 수립을 선포하자 민족진영에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인공정권 내각명 단에 오른 우익인사들은 누구 한사람 사전에 연락과 상의도 없이 이름을 도용당했지만 변명과 호 소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일하게 남아 있던 총독부 기관지 每 日 申 報 는 출판노조와 좌익기자들로 공산당에서 장악하고 있었다. 9월 8일에는 공산당에서 人 民 報 를 창간했다. 9월 19 일에는 全 評 기관지로 解 放 日 報 까지 창간되었다. 언론은 완전 공산당에서 장악하였다. 그러니 인 민공화국 출현과 함께 민족진영에서 당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우익의 선전매체라고는 아 무것도 없었다. 그때 필자가 고하를 찾아갔다. 내가 인공세력이 날로 강대해진다고 말하자 그는 동아일보만 복 간되면 아무 염려없다고 말하면서도 약간 당황하는 모습이었다.(동아일보는 그해 12월 1일에 복 간되었다) 街 人 ( 金 炳 魯 ) 愛 山 ( 李 仁 ) 芹 村 維 石 元 世 勳 尹 潽 善 許 政 金 度 演 白 南 薰 徐 相 日 등이 중 심이 되어 한국민주당 창당작업을 추진 중이었는데, 9월 6일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창당대회까 지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 부랴부랴 발기인 2백명으로 인민공화국을 부인, 그 정체를 폭로 규탄 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때 크고 작은 신문은 전부 좌익공산계에서 장악하고 있어 그 성명을 국민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성명서를 백만장 전단으로 작성해서 서울 과 지방에 뿌렸다. 이 인공타도 성명서는 雪 山 張 德 秀 가 집필한 것으로 명문이었다. 성명서는 공 산당의 위계와 사술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정중한 표현으로 그들의 비도덕성과 간책을 꾸짖었으 며, 국민에게 그들의 속임수에 말려들지 말도록 경고했다. 아무튼 9월 16일 국내에서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한 세력과 비록 소극적으로나마 교육과 언 론, 그리고 종교를 통해서 일제에 항거하고 附 日 하지 않은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천도교기 념관에서 韓 國 民 主 黨 창당대회를 가졌다. 특기할 것은 공산당의 습격이 있을 것에 대비해 천도교 기념관 주위를 한국민주당 청년당원이 물샐틈없이 엄중 경계한 것이다. 한국민주당은 지도체제는 집단지도체제로 하되 한 도에서 한사람씩 총무 9명을 뽑고, 수석총무 에 고하가 추대되고 해외의 독립운동 원로 李 承 晩 金 九 李 始 榮 등은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총무 는 金 度 演 (경기) 趙 炳 玉 (충청) 白 寬 洙 (전북) 宋 鎭 禹 (전남) 徐 相 日 (경북) 허정(경남) 백남훈(황해) 원 세훈(함경) 金 東 元 (평안) 9인이었다. 가인 김병로는 자격으로 보아 총무가 되고도 남는 인물이지만 호남에 치우친다는 인상을 씻기 위해서 서울시당 위원장이 되었다. 또 한가지 특기할 것은 한국민주당(한민당) 발기인과 중앙당 인사에 있어서 일본정치하에 부일 하고 친일한 사람은 제외했다는 점이다. 韓 民 黨 의 功 과 비극 고하는 한국민주당 당무부장에 李 仁 을 임명하고 가장 요직인 조직부장에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 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6년의 형기를 치른 金 若 水 를 임명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공산주의를
219 가장 싫어하는 반공주의자 고하가 김약수를 조직부장에 임명한 데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 다고 본다. 물론 김약수를 한민당에 입당시킨 것을 애산이었다. 변호사 애산은 공산당사건을 변론 하여 김약수를 잘 알고, 김약수도 애산의 신세를 많이 졌었다. 인간으로서는 믿는 처지였다. 필자 도 김약수와는 자주 만나고 술도 같이 나누었는데, 전형적인 반골투사로 정치에 대한 식견과 경 륜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제헌국회부의장으로 있던 중 국회프락치사건에 관련 구속되었다가 6 25때 북쪽으로 끌려갔다. 여기서 필자는 한민당의 공과를 논하기에 앞서 만일에 8 15해방 직후 조선천지가 인민위원회와 공산당 등쌀에 못견딜 때 한민당이 없었다면 45년 10월 16일 우남 이승만이 미국에서 돌아와 누 구와 더불어 상의하고, 하지중장과 정면대립하고, 임정 김구와도 불화가 조성될 때 어디다 등을 대고 존립할 수 있었겠는가. 솔직히 말해서 8 15해방 직후 공산당과 한민당이 피투성이가 되어 싸울 때 기회주의자와 정상 배들은 일신의 안전과 실리를 위하여 안전지대에서 기회만을 보고 위선을 가장하고 있었다. 이런 때에 한민당이 감연히 반공이념과 민족주의에 대한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공산주의와 정면에서 투쟁하여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민당은 고 하와 설산 두 지도자를 건국의 제단에 바치기까지 하였다. 이 정치적 암살사건은 그야말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대 통한사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동 족끼리 國 家 棟 樑 之 材 를 무사려하게 살해하는 행위는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해야 한다. 백범 김구 같은 경우만 해도 일제가 36년동안 그 목에 현상금까지 걸고 체포하거나 죽이려고 한 혁명의 원 로가 아닌가. 그가 원수 일본의 손에 죽었다 해도 슬픈 일일텐데, 조국이 독립된 마당에 철 모르 는 군인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얼마나 비통한 일이고 저주받을 일인가. 고하 역시 마찬가지다. 일제 치하에서 여러차례 투옥되고 끝까지 지조와 신념을 굽히지 않고 살아왔고, 해방 후에는 인민공화국 타도를 위하여 선봉에서 공산당과 싸운 식견과 경륜을 겸비한 정치지도자인데 무슨 철천지원수라고 직업적 테러리스트를 시켜서 암살하는가 말이다.(당시 56세) 그런데 아이러닉하게도 고하는 해방 전이나 해방 후에도 일관해서 임시 정부를 정통정부로 추 대하고 지지했는데, 그의 살해범 韓 賢 宇 가 임정 엄모와 접촉했다는 공판 기록을 보고 필자는 큰 충격을 받았었다. 고하는 결코 신탁통치를 찬성한 일이 없고 지지하지도 않았다. 다만 미군정 하 에서 미국과 정면으로 맞서서 정권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느니보다는, 우리로서 적법한 절차를 거 쳐서 합리적으로 독립정부를 세우고 정권을 인수해야 된다는 것이 고하의 지론이었다. 이것을 찬 탁파로 몰아붙인 것은 큰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고하는 항상 정치는 고등상식에 불과하고 無 策 大 策 이라는 신념과 투지로 살다 56세에 흉탄에 쓰러졌다. 雪 山 張 德 秀 의 최후 설산도 그 풍부한 지식과 식견은 물론이고 현하의 웅변과 큰 도량을 갖춘 민족의 거목인 것만 은 틀림없다. 다만 일정말기 보성전문학교 교수 재임중에 학도병출정 권유연설을 한 것이 흠이라 면 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각 학교에서 연사를 차출하되 평소 학생간에 인기가 있고 말 자하는 교수를 지명하라는 총독부 학무국의 엄한 지시가 있어 만부득이 징발당하여 강연한 것 뿐이었다. 아무튼 설산을 암살한 이면에는 가장 치밀한 계획과 계산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설산은 정 치를 알고 실천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지도자임에 틀림없었다. 제1차 조선공산당 거두 김약수가 8 15해방 직후 한 말이다. 지금 해방조선에서 내노라 하고 설치고 날뛰는 군생들은 모두 가소로운 존재다. 머리가 텅 빈 허깨비들이 잘난 체하고 떠벌이고 있다. 설산은 명실상부한 정치가로 그 학문과 식견 그리고
220 경륜이 깊은 인물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미국 유학 경력이 있어 미군정에서도 크게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설산은 목을 노리는 세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김의 말은 정곡을 찌른 말이다. 설산은 한민당 정치부장으로서, 특히 대 미군정 활동에서 인촌 을 대신하여 누부시게 활동하였다. 그 때 필자는 한민당 선전부차장으로 있어 조석으로 설산을 만나 일을 하였다. 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위 때만 해도 이승만 김구 등이 참가를 반대했지만 애국단체총회 에서 설산이 그 해박한 지식으로 국제정치와 외교 문제의 실례를 들어 일생 일대의 대열변으로 설득, 각 애국단체가 미소공위에 참가하였다. 그 후 미군정에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선거를 실시 할 때에도 미국의 전통적 정책은 입법의원선거를 거쳐 입법회의를 두거나 정책이 법제화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설산이 주장, 인촌과 설산은 서울에서 입법의원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좌 우합작파의 작용으로 재선거) 1947년 들어 설산은 48년에는 정식 입법회의 즉 국회가 보통선거법에 의해서 구성될 것을 예 견했다. 그리하여 정당은 정권을 잡는 것이 1차적 목표이고 정권을 잡자면 국회의원을 많이 확보 해야 되고, 국회의원을 많이 확보하려면 정당의 지방조직을 강화하고 덕망있는 후보자를 확보하 는 동시에 선거자금을 확보해야 된다며 선거대책본부를 구성하는 실무진을 만들어야 한다고 해서 암살당하던 날 저녁 돈암동 劉 洪 鍾 박사집에서 제1차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날 유의 집에 사정이 생겨 부득이 제기동 설산댁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呂 運 亨 에 대한 기억 그날 모임에는 필자도 참석키로 되었다. 그런데 나 역시 그날 저녁 고향에서 찾아온 몇 사람 친구가 있어 집에서 저녁대접을 하느라고 설산댁 모임에 참석치 못하였다. 그날 저녁 설산은 정 복 경찰복장을 하고 찾아온 朴 光 玉 을 맘놓고 현관에서 맞아 찾아온 용건을 묻는 순간 카빈총 저 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범인 朴 光 玉 裵 熙 範 崔 重 夏 등이 체포되었고, 한독당 조직부장 金 錫 瑝 외 여러사람이 공범으로 체포되어 미군정재판을 받게 되었다. 미군정재판은 군정청(기금 국립박물관)안의 임시법정에서 국 내외의 주목을 끌면서 여러차례 열렸는데, 백범 김구도 몇차례 증인으로 출정하였다. 박광옥에게 는 무기형이 선고되고 김석황 등에게도 15년형이 선고되었다. 한편 47년 7월 19일 대낮 몽양 여운형이 탄 자가용차가 혜화동 로터리에서 창경원쪽으로 돌아 가려고 속도를 늦출 때 韓 智 根 이가 자동차 뒤쪽 범퍼에 올라 차 속의 몽양 뒷머리에 몇 발의 권 총을 발사, 몽양은 서울대학병원에 가기 전에 차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건 직후 범인은 혜화동 주택가로 월장 도망쳤다. 그 후 공산당기관지 人 民 報 와 解 放 日 報 등 좌익계 신문은 그 사건 배후 에 首 都 廳 고위인사가 관련됐을 것이라는 추측기사를 게재하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범인이 담 을 넘어 도망간 그 집이 해외에서 돌아온 모 요인이 자주 드나든 집이라는 것을 좌익계 신문에서 사진과 함께 보도하였다. 경찰당국에서는 조선인민보가 解 放 日 報 편집부와 기자들 20여명을 구속 하였다. 몽양은 필자가 해방 전 해방 후에 여러 차례 만나 그의 인품과 정치지도자로서의 탁월한 점을 잘 알고 있다. 더욱이 우람한 풍모와 대중을 열광케 하는 열변과 개방적인 제스처는 청년학생층 에 절대적 인기를 독점하였다. 다만 흠이라면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인기본위로 행동하여 팔방미인이라는 평을 받은 것이고, 더욱이 공산당과 합작하여 인민공화국에 참여한 것은 그의 과오라고 생각한다. 사실 해방정국에서 몽양은 확고한 방향설정 없이 민족진영의 전열을 흐트러 놓았다는 평을 받 을 수 있다. 몽양은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다만 공산주의자를 자기 품안에 안아보려 하다
221 가 도리어 공산주의자들에 업혀 이용만 당하고 만 것이다. 고하가 몽양이 자필로 인민공화국을 탈퇴한다고 선언, 도장 찍어 신문에 발표하면 만나겠다 고 한 것은 일리가 있다고 본다. 테러, 즉 폭력은 그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배격해야 한다. 더욱이 정치적 암살행위는 역사와 양 심 지성의 이름으로 근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건의 배후를 철저히 조사해서 그 진상 을 만천하에 알려 역사적 심판과 단죄를 받아야 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암살사건의 진상과 배후관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래가지고는 정치적 암살 사건은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222 京 城 百 勝 1929년 10월 20일 발행 정가 50전 편집겸 京 城 府 光 化 門 通 139 番 地 발행인 宋 鎭 禹 인쇄인 京 城 府 堅 志 洞 32 番 地 金 鎭 浩 인쇄소 京 城 府 堅 志 洞 32 番 地 漢 城 圖 書 株 式 會 社 발행소 京 城 府 光 化 門 通 139 番 地 東 亞 日 報 社 出 版 部 < 註 > 원칙적으로 당시의 표기대로 收 錄 하였으며, 다만 된ㅅ 은 된소리(보기:ㅼ ㄸ, ㅄ ㅃ)로 표 기하고, 읽기에 편하도록 대체로 띄어썼다
223 京 城 百 勝 차 례 緖 言 鐘 路 鍾 閣 安 國 洞 感 古 堂 公 平 洞 裁 判 所 苑 洞 모 기 壽 松 洞 騎 馬 隊 桂 洞 衛 生 所 昭 格 洞 宗 親 府 嘉 會 洞 翠 雲 亭 花 洞 복주움물 松 峴 洞 殖 銀 村 三 淸 洞 성제움물 授 恩 洞 捕 盜 廳 雲 泥 洞 쫄쫄움물 齋 洞 白 松 敦 義 洞 나무장 堅 志 洞 閔 公 舊 宅 八 判 洞 청기와집 慶 雲 洞 閔 子 爵 邸 寬 勳 洞 忠 勳 府 樂 園 洞 測 候 所 仁 寺 洞 泰 和 舘 茶 屋 町 妓 生 臥 龍 洞 宗 簿 寺 仁 義 洞 煙 草 工 場 三 角 町 굽은다리 水 標 町 水 標 橋 益 善 洞 줄항랑 都 染 洞 模 型 塔 觀 水 洞 觀 水 橋 淸 進 洞 內 外 酒 店 薰 井 洞 어수움물 並 木 町 갈 보 渼 芹 洞 초리움물 禮 智 洞 東 門 市 場 勸 農 洞 經 板 閣 長 橋 町 설렁탕 孝 悌 洞 홰나무 杏 村 洞 은행나무 舘 洞 獨 立 舘 橋 北 洞 獨 立 門 東 崇 洞 駱 山 瑞 麟 洞 拘 置 監 崇 仁 洞 關 王 廟 天 然 洞 天 然 池 宮 井 洞 매 祥 宮 蓮 建 洞 갓바치 蓬 萊 町 貧 民 窟 體 府 洞 돌함집 崇 三 洞 成 均 舘 積 善 洞 琮 琛 橋 昌 信 洞 昌 信 宮 玉 仁 洞 松 石 園 竹 添 町 굴 靑 葉 町 孝 昌 園 通 義 洞 司 宰 監 淸 雲 洞 淸 風 溪 武 橋 町 欌 廛 四 大 門 町 興 化 門 惠 化 洞 風 車 平 洞 網 巾 房 二 村 洞 水 害 昌 成 洞 썩은다리 崇 一 洞 앵도밧 新 橋 洞 宣 禧 宮 玉 川 洞 硯 滴 洞 麻 浦 洞 欌 浦 社 稷 洞 社 稷 壇 樓 上 洞 白 虎 亭 址 峴 底 洞 刑 務 所 弼 雲 洞 돌거북 需 昌 洞 內 需 司 貞 洞 西 洋 人 村 諫 洞 宮 人 家 水 下 町 日 人 貧 民 窟 崇 二 洞 自 動 車 修 繕 工 場 中 林 洞 天 圭 敎 堂 崇 四 洞 月 沙 舊 基 通 義 洞 東 拓 舍 宅 梨 花 洞 長 生 殿
224 西 界 洞 편쌈터 苑 南 洞 捲 草 閣 忠 信 洞 白 菜 圃 內 資 洞 內 資 寺 樓 下 洞 쌈지 中 學 洞 舊 中 學 桃 花 洞 煉 瓦 工 場 蓮 池 洞 개구리 소리 義 州 通 독갑이골 孝 子 洞 內 侍 松 月 洞 月 巖 光 熙 町 파리 蛤 洞 春 香 橋 南 洞 대장깐 冷 洞 休 紙 都 家 貫 鐵 洞 東 床 廛 長 沙 洞 妙 心 寺 紅 把 洞 뎐내집 唐 珠 洞 와다시 通 洞 林 檎 園 鍾 路 蠟 石 塔
225 緖 言 이 내 동리 名 物 은 지금으로부터 四 年 前 여름에 京 城 府 內 의 一 百 洞 町 을 추리어 一 百 名 物 을 마 련하야 寫 眞 과 아울러 當 時 의 本 報 (동아일보) 中 央 版 에 五 十 餘 日 間 을 連 載 하야 讀 者 의 大 歡 迎 을 밧든 寫 眞 記 事 의 全 部 를 收 錄 한 것입니다. 名 物 의 題 材 는 多 種 多 樣 으로 或 은 嚴 正 한 見 地 에서는 適 當 치 못한 것이 만흘듯하나 苦 熱 에 지 질린 讀 者 에게 趣 味 와 實 益 의 淸 凉 劑 를 提 供 하려든 當 時 의 編 者 와 執 筆 者 의 心 境 을 그대로 保 存 하기 爲 하야 題 材 의 改 正, 文 句 의 修 正 等 을 하지안코 그대로 收 錄 합니다. 當 時 編 輯 의 責 任 은 予 가 擔 當 하얏고 執 筆 은 社 會 部 記 者 一 同 이 擔 當 하얏스나 材 料 의 大 部 分 은 洪 命 憙, 鄭 寅 普 兩 氏 의 提 供 이엇습니다. 내 고을 名 物 과 내 동리 名 物 은 性 質 上 가름으로 이제 姉 妹 篇 으로 收 錄 하거니와 出 刊 을 際 하야 當 時 同 人 들의 努 力 을 謝 하면서 當 時 의 社 告 를 그대로 記 錄 하야 緖 頭 에 부칩니다. 丁 卯 (1927년) 4 月 23 日 編 者 識
226 鍾 路 -- 鐘 閣 종각은 원명이 보신각( 普 信 閣 )입니다. 그 안에 잇는 종은 외국사람들이 조선 오백년간 예술의 대표가 될 만하다고 합니다. 이 종을 경주 잇는 종에 비교하면 기교가 부족하나 크기가 더 지난 다고 합니다. 그 전에는 이 종이 식전 저녁으로 울엇는데 식전 우는 것을 파루( 罷 漏 )라고 하야 사 대문이 열리고 저녁에 우는 것을 인뎡( 人 定 )이라고 하야 사대문이 다치엇습니다. 사대문을 열린 채 내버려두게 되니까 종도 울리지 안케 되엇습니다. 종각에 잇는 종이 어떤 사 람들에게 저녁을 알외려나 하고 시인의 탄식거리가 되든 것이 삼일운동때 잠깐 울엉찬 소리를 내 서 울어 보앗습니다. 울엉차다니 말이지 그 전에는 종 미틀 깁게 파논 까닭에 우는 소리가 삼사십리 밧게까지 들렷 더니 대원군의 척화비를 무더서 그 허공이 메인 뒤에 울림이 줄엇섯습니다. 이 다음에 이 종이 뽀쓰톤 작은 집에 노혀 잇는 깨어진 종가티 울엉차게 제 힘껏 울어볼 날이 업스란 법이야 어대 잇습니까. ( 鐘 路 二 丁 目 忙 中 生 ) 安 國 洞 -- 感 古 堂 감고당은 력사잇는 집이올시다. 녜전 숙종( 肅 宗 ) 배우인 현후 민씨( 閔 氏 )의 본댁이올시다. 왕후 께서 장희빈( 張 禧 嬪 )의 참소를 맛나 궁중에서 나오셔서 륙년동안 거처하시든 방이 지금도 남아 잇 습니다. 왕후께서 거처 하실때에 밧게 돈대 우에 잇든 소나무 가지가 담을 뚤코 들어가서 그늘을 들이워 들엿다는 신통한 소나무 이야기까지 잇습니다. 지금은 이 집이 빈민굴가티 되엇습니다마는 녜전에는 문압헤 거마 추종이 물끌틋하든 집이올시 다. 이 집이 려양부원군( 驪 陽 府 院 君 )댁으로 잇슬 당시에 항랑방에서 놋요강 업질른 것이 려양의 중씨 봉눈에게 들켜서 려양이 그 중씨께 너의 집 항랑에서 놋요강을 쓰니 너의 안방 요강은 무엇 이냐. 한때 부귀를 밋고 그러케 사치하다가는 집안이 망하리라고 꾸지람을 바든 일이 잇섯다고 합니다. 선조의 조심을 후손이 본바덧드면 오늘 이 집을 차저온 우리로 번화령락에 눗김이 업게 하얏슬 지도 모를 것이 올시다. 혹 복소( 覆 巢 )알에는 완란( 完 卵 )이 업는 법이라고 말슴하는 이도 계십니 다. ( 懷 古 子 ) 公 平 洞 -- 裁 判 所 종로 네거리를 지나자면 피뢰침 꼬친 큰집이 잇습니다. 우부 우부라도 싸움을 하다가 수틀리면 이애 재판을 하러 가자 하고, 마진 편도 재판을 하거나 몬지판을 하거나 하렴으나 하는데 이 집 이 그 재판하는 집입니다. 지금은 경성디방법원( 京 城 地 方 法 院 )과 경성복심( 覆 審 )법원이 되엿스나 이 집을 짓기는 이전 한 국시대 륭희( 隆 熙 )이년에 평리원( 平 理 院 )으로 지은 집입니다. 그후 통감부 시대에는 대심원( 大 審 院 ), 공소원( 控 訴 院 ), 디방재판소가 되엇다가 대정원년 사월에 총독부 재판소령으로 디방법원, 복심 법원이 된것이오 근년에는 둥긔계( 登 記 係 ), 공탁국( 供 託 局 )도 두게 되엇습니다. 이 재판소가 생긴 이후로 의병대장으로 유명하든 허위( 許 蔿 ), 리강년( 李 康 年 )도 이곳에서 사형선 고를 밧고 가슴을 첫스며 사내( 寺 內 ) 총독 시대의 백오인 사건도 여긔서 판결이 낫고 조선 산하를 진동하든 OO운동사건도 거의다 이곳에서 판결이 낫고 재등총독에게 폭탄을 던진후 힌 수염을 삐
227 치고 강개히 재판장을 론박하든 강우규( 姜 宇 奎 )도 이곳에서 재판을 하얏다. 그러나 이런 간조한 법뎡에도 때때로 꼿가튼 미인이 신세한탄을 하며 어엿븐 얼굴에 눈물을 흘리고 아모래도 저는 살수업서요 하는 리혼재판도 근년에는 만습니다. ( 公 平 洞 木 兎 生 ) 苑 洞 -- 모 기 원동은 모기 가 명물이랍니다. 원동 모기는 한동리 명물 노릇을 하는 까닭인지 여간 주제 넘지 아니하야 디톄를 대단히 본답니다. 그래서 계동 모기와는 혼인도 아니한답니다. 그러치만 이것은 우물안 고기처럼 세상이 넓은 줄을 몰르는 까닭입니다. 멀리 신대륙에는 모기 나라가 잇는데 거 긔 모기는 목슴 해치기를 네뚜리로 안답니다. 그 근처에 파나마 라는 나라가 잇다나요. 거긔도 모기의 세력 범위인듯 합니다. 파나마 운하 가튼 세계뎍 대공사도 한참 동안은 모기의 방해로 진행을 못하얏섯답니다. 종류는 삼백종, 목숨은 약 사일, 날기는 일마일 가량은 헌그럽게 나는 모기들이랍니다. 또 좀 우리에게 갓가운 중국 소주 디방에도 모기세력이 굉장하다는 사담( 史 談 )이 전합니다. 이 사담은 별것이 아니라 어느 처녀가 남녀가 석기어 잘 수 없다고 로숙하다가 모기에게 목숨을 바첫다는데 살을 다 뜻겨서 힘ㅅ줄이 들어 낫드랍니다. 거긔 사람이 불상히 녀겨서 로근비( 露 筋 碑 )를 세워 주엇답니다. 이런 이야기를 원동 모기에게 들려주면 그 주제 넘은 것이 아마 좀 줄겟지요? ( 苑 洞 李 秉 穆 ) 壽 松 洞 -- 騎 馬 隊 경성안에 무슨 일이 잇슬 때마다, 사람이 혼잡할 때마다 말탄 순사가 나와서 말굽으로 사람을 쫏고 최근에는 언론 압박에 분개하야 일어난 민중의 진정한 부르지짐까지 이 긔마순사대의 말굽 으로 짓밟앗습니다. 그러면 이 긔마순사는 어대서 나오는 것입니까. 경긔도경찰부 소속으로 시내 수송동( 壽 松 洞 )에 있는 긔마순사힐소( 騎 馬 巡 査 詰 所 )에서 나오는 것 입니다. 이들은 웨 두느냐 그것을 둔 경찰부 편의 말을 그대로 소개하면 무슨 큰 사건이 나든지, 놉흔 량반이 지나 갈 때에 순사의 힘으로만 도뎌히 군중을 정리할 수가 업슬 때에 말로 헤치는 것이요. 일업슬 때에는 긔마 순사들이 교통순사 사무를 보며 시내로 다닌답니다. 조선에 긔마순사가 처음 생기기는 정미년군대해산( 丁 未 年 軍 隊 解 散 1907년)이 되어 물끌틋 하는 경성을 진정키 위하여 지금 광화문통 위생시험소에 한성부경시청( 漢 城 府 警 視 廳 )이 잇슬 때 당시 한국경찰의 고문이라는 환산중준( 丸 山 重 俊 )의 창안이랍니다. 처음에는 네명을 두어 경긔근처의 의 병토벌까지 한 일이 잇섯다 하며 긔미년까지는 열명이 잇다가 OO운동이 일어나니까 벗석 늘리어 현재는 말이 삼십여필이요 순사가 이십여명이라 합니다. ( 壽 松 洞 一 小 生 ) 桂 洞 -- 衛 生 所 녜전 륙궁( 六 宮 )의 하나인 경우궁( 景 祐 宮 )이 계동에 잇섯습듼다. 지금은 그 궁이 어대로 갓느냐? 궁집은 업서젓지요. 그러치만 그 터야 어대로 가겟소 남아잇지. 북부 위생소란 것이 그 터를 통차 지하고 지내더니 작년인가 그 절반은 휘문학교에 운동장 하라고 주엇지요. 경우궁이 한번 란리를 톡톡이 치른 일이 잇지요. 란리 이야기는 나종에 하리다. 그 란리 뒤에 포병대( 砲 兵 隊 ) 영문이 되어서 노랑테를 둘른 모자가 어린 아이 작난감 비슷한 금뢰박을 끌고 들
228 락 날락 하얏습듼다. 세월이 변하더니 이 영문이 위생소가 되어 위생소 인부가 쓸에기통, 똥통 마 차를 끌고 들락 날락합듸다 그려. 지나간 갑신년( 甲 申 年 )에 김옥균( 金 玉 均 ) 홍영식( 洪 英 植 )가튼 젊은 인물이 정치를 개혁하려고 변 을 꿈엿습듼다. 그네가 임검을 혼동하야 이 경우궁으로 모시고 와서 조녕하( 趙 寧 夏 ) 민영목( 閔 泳 穆 )가튼 시임장신들을 이 안에서 짓조겨 냇지요. 원세개( 袁 世 凱 ) 등살에 일은 필경 랑패하얏습듼 다. 이게 경우궁안 란리란 것이요. 이런 풍상을 격근 늙은 나무가 휘문학교 운동장 닥글 때까지 남아 잇든 것을 보섯지요? ( 桂 洞 S H K) 昭 格 洞 -- 宗 親 府 종친부는 무엇입니까. 지금 조선총독부 서고( 書 庫 )를 하려고 미리 준비한 것은 아니겟지요. 그럿 습니다. 종친부는 알기 쉽게 말하면 종친을 위하야 설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은( 殷 )나라 대궐터가 기장밧 되는 것이야 긔자( 箕 子 )의 한탄 거리만 되겟습니까. 종친은 무엇입니까. 지금 후작( 候 爵 ) 백작( 伯 爵 )하는 조선귀족이 되려고 미리 등대한 것은 아니겟지요. 그럿습니다. 종친은 즉 황실지친 이라 예사 신민과 달른 것입니다. 그럼으로 조자앙( 趙 子 昻 )가튼 명사로도 송나라 종친으로 원나라 를 섬긴 까닭에 후세에 말거리가 된 것입니다. 남은 듯기 실코 나도 하기 실흔 이야기 고만두고 우리나라 종친이야기 중에 우수한 것 하나를 골라서 소일거리로 들려 들이겟습니다. 세종대왕( 世 宗 大 王 )이 종친부에 종학이란 것을 맨드시고 종친을 글을 읽키섯습니다. 그때 순평군( 順 平 君 )이라는 둔한 종친 한분이 잇서서 글자 두자쯤 배 워 가지고 쩔쩔 매엇다 합니다. 이 분이 돌아갈 때에 자긔 처자에게 한 말슴 또 진국입니다. 죽는 것이 설지만 종학에를 아니 가게 되니 시원하다고 하얏답니다. ( 昭 格 洞 金 學 洙 ) 嘉 會 洞 -- 翠 雲 亭 바람이 물소리냐 물소리가 바람이냐 가회동 깁흔 골에 송풍이 시원하고 샘물 소리 줄줄하니 이 것이 취운뎡이랍니다. 지금은 초동목수( 樵 童 牧 叟 )의 짓밟히는 바가 되고 시인묵객( 詩 人 墨 客 )의 놀 이터가 되엇지마는 녯날을 캐여 보면 회고의 감이 적지 안흔 것이엇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칠팔십년전 창덕궁 뎐하의 장인되시든 민표뎡공( 閔 杓 庭 公 )이 한참 세도를 부릴 때에 취운뎡 뎡자와 사모뎡 뎡자와 백락동 뎡자를 지어 노코 꼿피는 봄과 달밝은 가을에 한가한 사람들과 더불어 취흥을 도두든 곳이랍니다. 창생은 변하는 법이라 어찌 한사람의 즐김이 오랠 수 잇겟습니까. 그후 대원군의 첩되든 소위 백락동 마마님이 며태 동안 살다가 죽은 뒤에 일시 리왕뎐하의 어 료가 되엇다가 다시 한성구락부가 되엇다가 나라가 망할 때에 소위 귀족들의 활쏘고 노는 터가 되엇더니 창생은 다시 변하야 조선 귀족회의 소유가 되엇다가 요사이는 시민의 소유디가 되엇더 니 며츨전 부터는 동맹휴학 하는 학생들의 회의디가 된듯합니다. 세월이 변함에 딸아 주인은 갈 리지마는 취운뎡 뎡자는 의구히 녯날을 말하는 듯하고 청린동텬( 靑 麟 洞 天 ) 바위 미테서 흐르는 약 물만 쫄쫄 ( 嘉 會 洞 朴 世 俊 ) 花 洞 -- 복 주 움 물
229 화동은 녯이름으로 화개동 입니다. 그래서 화개동의 복주움물이라 하면 서울사람 치고 모르는 사람이 업슬 것입니다. 맹현( 孟 峴 )동산 알에의 이 족으마한 복주움물은 물 맛이 조코 약물로 신통 할 뿐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이십칠팔년전에 돌아가신 덕수궁 고종뎨( 高 宗 帝 )께서 어수( 御 水 )를 봉하시고 이 물을 하로에 세번씩 갓다가 잡수셧답니다. 그리하야 그 당년에는 순검청까지 그 엽헤 지어노코 파수를 보앗다 합니다. 그리다가 고종뎨께 서 돌아가시자 어수는 봉하지 아니하얏스나 워낙 물이 조흔고로 춘하추동 사시를 두고 사람이 끄 칠 날이 업습니다. 더욱 여름철에는 차고 시원하고 맛잇고 약되는 이 복주움물물을 먹기 위하여 산애, 안악네, 로인, 어린아이 할 것 업시 구름가티 모여들어 화개동 바닥에는 사람의 바다가 됩 니다. 그 맛업고 밍밍한 수도물만 잡수시는 어른들이 한번만 우리동리 복주움물물맛을 보시면 참 긔 가 막히게 조타고 탄복을 한답니다. 누구시든지 여름철 더운 때 우리 동리에 유명한 이 물을 한 번 잡수러 오십시오. ( 花 洞 崔 民 吉 ) 松 峴 洞 -- 殖 銀 村 송현동 일대는 식은사택( 殖 銀 舍 宅 )이 차지하고 말앗습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조선인 경성의 몰 락을 알 것이 아닙니까. 이 집의 전신( 前 身 )은 부원군보다도 대갈장군의 아우로 유명한 윤택영( 尹 澤 榮 )씨의 집이 되어 한참은 들석 들석 하얏스나 형뎨가 시새가면서 넘우 과분하게 떠들고 지낸 까닭인지 이 집을 지니지 못하고 학생긔숙관으로 세를 노하 먹기 시작하더니 나종에는 식산은행 으로 들이밀고 말앗습니다. 식은에서 이 집 부근의 팔천오백여평을 사서 헐고 미국에서 류행하는 근대식으로 설은네채의 굉장한 사택을 짓기에 삼년의 세월과 칠십만원의 금액이 들엇다 합니다. 붉은 집웅만 보고 감옥 갓다고 하는 사람도 잇스며 속에 들어가 보면 리상뎍으로 된 문화 주택이라 합니다. 그런대 이 집은 뉘돈으로 지엇슬가요. 쓸어저 가는 초가집 엽헤서 사는 그네들도 좀 미안한 생각이 잇스리 다. 경비를 절약하노라고 하급행원을 도태하면서도 뎡원 압헤는 괴석과 화초가 하나씩 둘씩 늘어 감도 이상하다 하겟습니다. 그런데 이 사택으로 덕 본 것은 안국동 뎐차가 속히 된 것이라 합니 다. 성은 피가라도 관자맛에 산다고 뎐차 타는 맛에 견딀까요. ( 松 峴 洞 李 龍 求 ) 三 淸 洞 -- 성 제 움 물 북악산( 北 岳 山 ) 미테 잇는 성제움물은 우리 삼청동의 명물입니다. 녯날에 이 움물에서 무당들이 북두칠성( 北 斗 七 星 )을 제사하얏다 하야 성제움물이라고 하얏답니다. 력사가 오래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약물로 신효하야 더욱 유명합니다. 가슴알이 십년을 알튼 사람도 이 물 몃번만 먹으면 낫 고 그의 외모든 속병 잇는 사람도 대개 이 물을 먹고서는 낫는다고 합니다. 화개동 복주움물이 어수( 御 水 )를 봉하야 물이 조타고 하지마는 맨 처음에 어수를 봉하기는 성제 움물에다 봉하얏드랍니다. 그러나 북악산 밋 험한 길을 하로에도 몃번씩 올라 다니기가 어떠케 어렵든지 고종뎨께옵서도 물길러 다니는 사람을 생각하시고 조흔 물은 못먹드라도 갓갑고 교통 편한 복주움물을 가저 오라 하셔서 나중에 복주움물로 어수를 봉하게 된 것이랍니다. 다른 보통물은 만히 먹으면 배를 알른다 하지마는 우리 성제움물 물은 만히 먹을수록 몸에 리 로워서 오는 사람들은 짜고 짠 암치쪽을 가지고 와서 뜨더먹어가며 물배를 채운답니다. 요새 가 티 더운 때는 사람이 어찌 만흔지 이 물 한박아지 어더먹자면 한나절이나 기다려야 먹게 되지요
230 어떠튼지 우리동리의 명물입니다. ( 三 淸 洞 一 遊 客 ) 授 恩 洞 -- 捕 盜 廳 수은동을 지내자면 국민협회( 國 民 協 會 )란 문패 부튼 집이 눈에 떼일 것입니다. 이 집이 그전 그 전에 포도청이엇답니다. 포도청에도 좌우가 잇섯는데 이것이 우( 右 )포도청이엇다고 합니다. 포도청 이 경무청( 警 務 廳 )이 되고 포도대장이 경무사가 된 뒤에는 이 집은 육군법원( 陸 軍 法 院 )이 되엇섯 습니다. 포도청에서 마튼 직무는 간세도적( 奸 細 盜 賊 )을 즙포( 輯 捕 )하고 또 밤을 경( 更 )으로 난호아 야순 하는 것이 잇습니다. 지금 경찰서와 비슷한 것입니다. 문화정치 알에의 경찰서 속에도 참혹한 사 실이 만히 잇스니 그전 포도청 안에야 긔막히는 일이 업슬 리가 잇습니까. 포도대장이 벼슬계제 로는 아장( 亞 將 )에 지나지 못하지만 이세상 염라대왕( 閻 羅 大 王 )이라고 불러도 조핫섯답니다. 우리 나라의 유명한 이야기가 한두가지가 아니나 적을 틈이 업서 그만 둡니다. 지금 국민협회 회원이라는 것 그전만 가트면 포도청에서 학치를 끈허도 죄가 남을 것인데 세상 이 세상이라 포도청 집에서 제멋대로 노니 늙은이 아니라도 한숨짓기 알마즌 일입니다. ( 白 眼 生 ) 雲 泥 洞 -- 쫄 쫄 움 물 나제도 쫄쫄 밤에도 쫄쫄 가물에도 쫄쫄 장마에도 쫄쫄 사시장춘 한 모양으로 쫄쫄 흐르는 것 이 동구안에서 유명한 운니동 쫄쫄움물이랍니다. 동구안 사는 사람치고는 삼척소동으로 칠팔십세 로인까지 이 쫄쫄움물을 모르는 사람이 업다고 합니다. 쫄쫄움물이 물이 깁고 맑아서 유명한 것도 아니랍니다. 움물이 아니라 돌다리 밋 개울에 돈닙 가튼 족으마한 구녕에서 샘물가티 쫄쫄 흐르는 말하자면 움물이라기는 주제 넘은 것이지요. 아마 샘통이라면 조켓습니다. 이것을 움물이라니 무슨 곡절이 잇겟지요. 녯날도 녯날 이 쫄쫄움물 자리에 크다란 정말 움물이 잇섯드랍니다. 그 동리 사는 점 잘치는 장님이 잇섯는데 어느날 이 압흘 지나다가 발을 헛드듸어 움물에 풍덩 빠져 죽고 말앗답니다. 그 후에 동리사람들이 모이어 움물을 메워 버렷더니 멘 자리에서 샘물이 쫄쫄 흘러 나오는 것을 쫄 쫄움물이라고 이름지엇다 합니다. 이 쫄쫄움물은 그 장님의 령이 부터 이 물에 알른 눈을 씨스면 신통하게 눈이 낫는 답니다. 그래서 요사이도 밤마다 밤마다 밥도 지어가지고 돈도 갓다가 바치 고 눈을 씻고 가는 눈알른 사람이 만탑니다. ( 雲 泥 洞 韓 潤 明 ) 齋 洞 -- 白 松 우리 재동에는 장안에서도 유명 한 백송 이 잇습니다. 백송이라는 것은 글자대로 힌 소나무라 는 뜻입니다. 힌 소나무니까 솔닙까지 힌 줄로는 아지 마십시오. 솔닙은 다른 소나무나 마챤가지 로 사시장춘 푸르고 나무줄기가 보통소나무와 달라서 허여합니다. 이 백송은 지금 경성녀자고등보통학교 재동뎨이긔숙사( 京 城 女 高 普 校 齋 洞 第 二 寄 宿 舍 ) 안에 잇는 데 몃백년전부터 그곳에 그러케 힌몸을 버틔고 섯답니다. 그리고 이 백송의 고향은 중국입니다. 그때가 아마 리조시대( 李 朝 時 代 )이겟지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마는 그때에 우리나라에서는 청국에
231 조공 바치러 늘 들어다 녓습듼다. 이 백송이 즉 그때 청국에 들어갓든 어느 사신이 나무가 하도 긔이( 奇 異 )함으로 족으마한 백송 하나를 가지고 나와서 심고 길른 것이 지금 재동 그 백송이지요. 세월은 가고 세상은 밧구이어 사모 풍잠한 정승 판서가 거닐든 그 소나무 미테는 지금은 검은옷 입은 일본 사람과 녀학생들이 요새가티 더운 날에 그늘을 차저 그 백송 미트로 와서 책을 읽는 답니다. 참 세상 변하는 것이란 몰를 것입니다. ( 齋 洞 金 淑 子 ) 敦 義 洞 -- 나 무 장 동구안 대궐 큰길로 올라 가다가 외인편으로 열빈루( 悅 賓 樓 )라는 료리 집이 잇습니다. 그 료리 집 뒤에 잇는 나무장이 우리 돈의동의 명물인 나무장입니다. 나무장 문 어구에 부튼 문패에는 돈 의동 공설 시탄시장 ( 敦 義 洞 公 設 柴 炭 市 場 )이라고 써 잇습니다. 이 나무장에 생긴 햇수는 벌서 이십 년이 갓가워 옵니다. 서울 안에도 나무장은 여러 곳에 잇지요 마는 우리 돈의동의 나무장 가티 력사가 오래고 터가 넓고 흥정이 만흔 곳은 드물줄 압니다. 이 나무장의 현재 주인은 일본 사람이라는데 그 전에는 나무바리가 이 장터 안으로 들어 가자면 몃푼씩 주고 표를 사고야 들어갓스나 지금은 그대로 들 어가서 흥정이 되어 팔게 된 후에야 거간에게 십전 가량씩 준다 합니다. 터가 상당히 넓어서 바리 나무가 꼭 가득이 차는 날이면 거의 천바리 갓갑게 들어 갈 수 잇다 합니다. 이만하야도 우리동리의 나무장이 얼마나 넓은가를 알수가 잇겟습니다. 요새는 여름이라 농군들이 일하기가 밧버서 나무를 가저오지 아니하며 나무장이 매우 쓸쓸하나 가을 겨을 봄에는 륙칠십리 밧게서 모여 들어 참으로 굉장하답니다. ( 敦 義 洞 金 貴 轍 ) 堅 志 洞 -- 閔 公 舊 宅 민충정공( 閔 忠 正 公 )이라면 누가 모르겟습니까. 지금은 모다 변작되엇습니다마는 이 터로 말하면 이 어른 계시든 녯집자리입니다. 그런데 단도로 매운 피를 흘리시기는 다른 집입니다. 그러나 피 바든 옷을 둔 마루에서 생각도 하지 못한 푸른 대가 솟기는 이 집입니다. 이 어른 돌아가실 때 년세는 오십에 삼년이 부족하얏습니다. 순결한 결심을 하시든 전날 저녁에 신됴약 거절할 희망이 끈침을 보시고 가티 상소하든 여러분더러 잠간 집에 감을 말하셧드랍니다 그리고 집으로 오셔서 그 어머님 계신 방으로 들어가시니까 부인과 두 어린 아들이 다 그리로 모엿습니다. 전부터 어머님께 효성이 지극하신 터이지마는 이날은 더 유난스럽게 자조 겨트로 닥 아 안지시며 참아 나가시지 못하시는 것 가텃습니다. 과자를 가저 오라 하셔서 두아들을 주시고 작은 아들이 더 달라니까 부인께 어서 갓다 주라 하시고 자조 두아들의 머리를 어루만지셧습니 다. 상소하는 데로 가신다고 일어나시며 잇다 또 오실 터인데 어머님께 절하시는 것을 다 이상히 알앗습니다. 이날 저녁에 이 문밧글 나서신 뒤로는 기리 이집을 떠나셧습니다. ( 堅 志 洞 撫 古 子 ) 八 判 洞 -- 청 기 와 집
232 청기와는 녯것입니다. 맨드는 법이 어느때 발명되엇든지까지 분명치 못한 녯것입니다. 이 청기 와 표본을 보시랴거든 팔판동( 八 判 洞 )을 가십시요. 그 동리에는 집웅 용마루에 청기와 입힌 집이 잇습니다. 입혓다 말한다고 몃천장 몃백장으로는 알지 마십시요. 단지 한장입니다. 이것은 말하자 면 입혓다느니 보다 노핫다고 할 것입니다. 그 집이 무슨 래력 잇는 것도 아니것만 그 청기와 한장이 유표한 까닭에 근처서는 청기와 집으 로 이름이 낫답니다. 래력이 업다고 명물되지 말라는 법은 업습니다마는 청기와 가튼 녯 것을 집 웅에 노흔 집이 래력이 업다는 것은 좀 섭섭한 일입니다. 청기와 한장이 팔판동을 대표하는 명물 이 된다니 팔판동을 위하여 더욱 섭섭한 일입니다. 저가진 재조를 저혼자만 써먹고 남 아니가르쳐 주는 사람을 청기와장사라고 하는 말이 잇습니 다. 우리 동양, 동양 중에서도 우리 조선은 청기와 장사가 만하서 그러케 되엇는지 한번 세상에 발명된 것으로 서양처럼 점점 발달되기는 고사하고 한때 반짝하고 업서진 것이 만습니다. 이것은 섭섭하니 보담 설고 분한 일입니다. ( 八 判 洞 吳 俊 容 ) 慶 雲 洞 -- 閔 子 爵 邸 이 집 녯 주인은 철종( 哲 宗 )때 당국하든 대신 김좌근( 金 佐 根 )씨입니다. 지금 주인되는 자작대감 도 세도하든 량반이요 또 부호입니다. 부귀하는 주인만 마저들이는 이 집이야말로 참으로 호긔 부릴만합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늙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성쇠의 늣김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허! 이전 김정승댁 적에야 저 대문으로 재상 명사들이 구름가티 모엿 섯지. 지금도 들어가는 사람은 만치마는 아마 마름 아니면 은행원이겟지. 집말이 나니 말일세마 는 지금 무슨 집이니 무슨 집이니 하야도 라주마마를 당하겟나. 저 집 작은 사랑채가 처음에 놉 게 지엇더니 서모가 남산을 못본다는 바람에 이약 김병긔( 金 炳 冀 )씨의 긔벽으로 헐어 다시 지엇다 네. 김정승 대감은 돈을 몰랏섯지. 세도야 참세도지 저 대문이 후끈햇섯지. 이게 늙은이 망녕 이야기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집 이 대문이라고 성쇠가 업겟습니까. 다시 생각하니 망녕 갓습니다. 부호요 자작인데 무엇이 녯적만 못하겟습니까. ( 一 老 人 ) 寬 勳 洞 -- 忠 勳 府 안동 네거리서 사동으로 나려가자면 얼마 아니가서 왼손편에 허수하게 문이잇고 그 대문안으로 들어가면 얼마 아니가서 녯집 한채가 잇습니다. 이 집이 무슨 집입니까. 사십이상 인물은 충훈부 ( 忠 勳 府 )라 하고 한 이십여세된 사람은 표훈원( 表 勳 院 )이라 하고 지각업는 아이들은 사동대문회집 이라고 합니다. 사동대문회( 斯 東 大 文 會 )라니 하고 들어보지 못한 회다 하면 대문이 사동에 잇는데 회가 그 대 문안에 잇스니까 사동대문회랍니다 하고 아는 체까지 합니다. 태조( 太 祖 )때 공신도감( 功 臣 都 監 )이 태종( 太 宗 )때 충훈사( 忠 勳 司 )가 되고 충훈사가 충훈부로 되기 는 세조( 世 祖 )때 일이라 합니다. 이 충훈부는 훈신( 勳 臣 )과 밋 훈신의 뎍장손( 嫡 長 孫 )에 대하야 국 가에서 대우하는 모든 일을 마텃든 관부( 官 府 )라고 합니다. 국가에 훈공( 勳 功 )이 잇는 이의 일을 보든 이러한 집에 유문( 儒 門 )에 훈공을 세우랴는 회가 들어잇스니 우연치 안흔 연분이라고 하겟습 니다. 아이들말로 사동대문회, 정작 대동사문회는 의리 아는 선비의 회라 유문이외 다른 무엇에 대하야 훈공을 세우랴고 한다는 말은 순연히 풍설일 것입니다. ( 一 笑 生 )
233 樂 園 洞 -- 測 候 所 어느 신문을 보든지 신문에는 대개 텬긔예보( 天 氣 豫 報 )라는 것이 잇지요. 그런데 서울신문의 텬 긔예보는 다-이 락원동에 잇는 측후소( 測 候 所 )에서 발표하는 것이랍니다. 래일 텬긔가 어떠켓다 하는 것은 풍우를 마튼 귀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알겟습니까마는 이 측후소에서는 래일텬긔를 대개 짐작한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사람의 하는 일이라 귀신의 재조를 배운 측우소도 하는 수 업서서 가끔 샛밝안 거즛말을 쉽살이 한답니다. 어쨋든지 몃십년을 하로가티 장안사람을 보고 래일은 비가 오겟다 눈 이 오겟다 흐리겟다 개이겟다 고 게으르지 안코 꾸준히 보고하야 준다는 것으로도 명물이며 능청 스러운 거즛말 잘 하기로도 한동리의 명물될 자격이 넉넉합니다. 이 측후소 안에는 여러가지 긔계( 機 械 )가 노혀 잇서서 현재와 장래의 텬긔를 긔계가 전부 가르 쳐 주는데 단지 업는 긔계라고는 디진계( 地 震 計 )밧계 업고 그 남아지는 다-잇다 합니다. 디진계가 업는 것은 우리 조선은 강산이 조하서 일본가티 디진하는 법이 업스니까 그까진 것은 잇스나 업 스나 상관이 업다 합니다. ( 樂 園 生 ) 仁 寺 洞 -- 泰 和 舘 이 집은 래력이 만흔 집입니다. 이 집은 안동 김씨( 安 東 金 氏 )중에 리문안 대신으로 유명하든 김 흥근( 金 興 根 )씨 댁이엇답니다. 이 대신은 량미간이 넓기로 유명하얏고 풍류에 범연치 안키로 유명 하얏고 직언( 直 言 ) 잘하기로 유명하얏답니다. 이 대신 뿐인가요 그 아들 영평( 永 平 )대신 김병덕( 金 炳 德 )씨도 일시에 물망이 잇든 대신이엇답니다. 이 집이 유명한 대신댁으로 헌종귀빈( 憲 宗 貴 嬪 ) 순화궁( 順 和 宮 ) 김씨의 궁이 되어 순화궁 순화 궁하고 불으게 되엇습니다. 세월이 변하더니 이 북촌갑뎨가 일시 남부끄러운 주인을 맛게 되엇섯 습니다. 리완용 후작이 이 집을 팔아서 료리집이 되기 시작하야 태화관( 泰 和 舘 )이 되엇고 명월관 지뎜이 되엇섯습니다. 이 집이 태화관으로 잇섯슬 때 삼일운동( 三 一 運 動 )에 큰 관계를 맷게 되엇섯습니다. 지금은 녀 자교육긔관이 되어 료리집 되엇든 흔적도 업게 되엇스나 그 안에 있는 뎡자 태화뎡( 泰 和 亭 )을 지 금도 양파뎡( 陽 坡 亭 )이라 별명삼아 불으는 것은 료리집으로 잇슬 당시에 기생들이 정양파( 鄭 陽 坡 ) 의 휘짜를 어대서 어더듯고 변삼아 불은 것입니다. 이만하면 한집 래력으로는 상당히 만치안습니 까. ( 仁 寺 洞 金 福 順 ) 茶 房 町 -- 妓 生 다방골은 본래 부자 만키로 장안에서 유명하얏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녯날 일이오 지금은 부자 대신으로 기생 만키가 장안에 뎨일입니다. 기생은 조선의 명물이라. 이 한나라의 명물이 한동리에 모엿스니 어찌 다방골의 명물이 안될 수 잇겟습니까. 좌우간 한나라의 명물이 다방골에 모엿스니 명물중에도 짭짤하고 갑비싼 명물입니다. 서울 안에 기생이 대략 삼백명이 잇는데 다방골에만 륙십명이나 잇다하니 어찌햇든 굉장하지 안습니까. 이 명물을 차저, 달밝은 밤마다 들창문으로 새여나오는 은방울 소리 가튼 노래를 차저
234 문압헤 대령하야 보는 것도 꼿을 탐하고 버들을 꺽는 풍류남아로 한번 하야 볼만한 놀음일 것입 니다. 기생도 조선의 명물인만큼 그 력사도 당당하얏지요. 정승판서도 슬슬 기엿지요마는 이것도 녯 날 일입니다. 지금은 한시간 얼마씩 팔리는 갑싼 몸으로 뜻도 안둔 손압헤서 웃음을 팔게 되엇습 니다. 웃음을 팔고 한숨을 사는 가련한 그들의 신세 - 어느곳 사람이 업스리오마는 색향으로 련 상되는 평양( 平 壤 )기생이 뎨일 만탑니다. ( 茶 房 町 鄭 煥 奭 ) 臥 龍 洞 -- 宗 簿 寺 창덕궁 돈화문( 昌 德 宮 敦 化 門 )압헤서 파조교를 향하고 몃걸음 나려오자면 올은손편에 큰 솟을대 문이 잇습니다. 전주리씨 종약소( 全 州 李 氏 宗 約 所 ), 종친청년회( 宗 親 靑 年 會 )라는 패가 문 량편에 걸 리엇는데 종약소패 머리에 잇는 금리화표가 풍우속에 떨어진 꼿송이가티 보입니다. 이것은 물론 보는 사람의 맘에 달린 것이겟지오. 이 솟을대문 안에 잇는 집이 그전 종부사랍니다. 종부사는 무엇을 마텃든 곳인고 하니 종친의 보첩( 寶 牒 )을 관리하얏섯고 종친의 과실을 규탄( 糾 彈 )하얏섯답니다. 오백년간의 뎨일 명군 세종이 종친의 집 사람들이 민간에 작폐가 심한 것은 규탄하는 관원이 업는 까닭이니 이후로는 종부사에 서 이것을 마터하라고 명하셧답니다. 세종말슴이 낫스니 말이지만 세종의 형님 양녕대군( 讓 寧 大 君 )은 호방쇄탈( 豪 放 灑 脫 )한 행동이 유명하고 효녕대군( 孝 寧 大 君 )은 돈후근실한 인품이 또한 유명합니다. 충년대군( 忠 寧 大 君 )이나 세종 대왕만 성인이라는 말슴을 들으신 것이 아닙니다. 사가로 말하면 되는 집안이란 달르다 하겟습니 다. 지금 종친청년회는 어떤 인물들이 모이는지오. 仁 義 洞 -- 煙 草 工 場 인의동 명물은 전매국 분공장이지오. 녯날 이 집은 국가의 간성을 양성하는 병대청이엇습니다 마는 오늘의 이 집은 머리가 썩는`니코친'중독자를 길러내는 담배 만드는 공장이외다. 이러한 집이 어찌 조선안에 하나만 잇겟습니까. 서울만 하야도 두 세곳이 잇고 평양에나 전주 에도 잇습니다. 이 여러곳에서 만들어내는 담배갑이 매년 이천만원 이상이라 하니 방금 굶어 죽 는다는 조선사람 주머니에도 아즉 몃푼씩은 남아 잇는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귀한 돈을 주고 비 싼 독( 毒 )을 사서 먹지오. 어리석은 백성이지오. 귀한 돈을 주고 비싼 독을 사먹는것 쯤이야 어떠케 되엇든지 저 조하서 하는 즛이니 상관할 것 업거니와 이안에서 일을 하는 직공들이 불상해서 못보겟다는 말이외다. 여긔에만 천여명이 잇는 데 그가운데 십오륙세 미만되는 어린 아이들이 오백명이나 된답니다. 이 어린 것들이 하로에 열 시간씩이나 로동을 하고 겨우 오륙십전에 목을 매다니 어찌 가련하지 안켓습니까. 남들은 글을 배울 때에 고약한 담배ㅅ내가 머리에 배여 얼굴이 노래집니다. 참말 가련한 명물이지오. ( 長 歎 生 ) 三 角 町 -- 굽 은 다 리 삼각뎡에 잇는 명물이 무엇이냐 하면 두말할것 업시 굽은 다리를 내여세겟습니다. 그런데 이
235 다리가 한 꿋은 수하뎡에부터 잇스니까 혹은 수하뎡 친구가 자긔동리 명물이라고 주장할는지도 모르겟습니다마는 굽은 다리는 세모진 동리에 알맛다고들 합니다. 굽은 다리는 활등가티 휘움한 것도 아니오 낫노코 기역자 보는듯이 중간이 꺽긴 것도 아니오 실상은 네귀 번듯하고 바닥이 판판하게 곳기만 고든 다리로 사람으로 말하면 구설복이 잇서서 공 연히 굽다는 루명을 쓰고 잇습니다. 굽다는 루명을 어찌하야 어덧느냐 하면 소광교 남천변에서 오간수교를 향하는 길이 꼿꼿하게 나려가다가 삼각뎡 수하뎡을 검얼잡이하고 잇는 이 다리에 와서 제물에 살작 앵돌아진 까닭에 못 된 바람은 수구문으로 불어온다는 것가티 굽다는 이름은 다리로 넘어왓습니다. 그러나 이 다리의 꼭 한가지 허물은 변명할 수가 업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홀아비 독가비 를 부쳐두고 어두은 밤에 지나다니는 부인네를 툭하면 떨어지게 하는 못된 버릇이 잇답니다. ( 曲 橋 人 ) 水 標 町 -- 水 標 橋 이 다리는 오래된 다립니다. 수표를 다리 엽헤 세워서 이 이름을 어든 것입니다. 명물은 좀 으 슥한 것이 조흔데 이 다리는 날마다 밟고 다니는 곳이라 혹 등한하게 생각할 사람도 잇슬 것입니 다. 이 다리 이름은 생각나지 안습니다. 다리라는 것은 건너는 것이 아닙니까. 다리를 건너서 다 리 북편쪽 이야기를 할가 합니다. 장희빈이라는 량반은 경종( 景 宗 ) 사친입니다. 그런데 이 량반의 본집이 이 다리 근처에 잇섯답니다. 숙종( 肅 宗 )대왕께서 영희뎐 거동을 하시는데 어로가 이 다리로 지나시게 되엇드랍니다. 그때 구경하는 사람이 길가에 련하얏는데 이 다리 북쪽 길가에 어느 집이든지 상감 지나실때 별안간 큰 바람이 불어서 창에 걸엇든 발이 떨어지며 그안에 안즌 어느 색시 한분이 상감 맘에 드시게 보여서 마츰내 궁으로 불러 들이시엇는데. 이가 다른이가 아니오 곳 장희빈이랍니다. 그집이 지금 중국사람 가개 어느 집인지 혹은 다리 막 지나서 북으로 오랴면 엽헤잇는 약국집 이 아닌지도 모르겟습니다. ( 水 標 橋 人 ) 益 善 洞 -- 줄 항 랑 익선동에 별로 명물이랄 것이 업습니다. 내외주뎜이 만코 밀매음녀가 어지간하니 이것으로나 명물을 삼을는지. 그러나 내외주뎜으로는 청진동만 못하고 매음녀로는 병목뎡 갈보에야 머리도 못들 터이니 이것도 저것도 다 명물감이 못됩니다. 그러니 할수업시 항랑만흔 루동궁이나 들추어 보려고 합니다. 익선동 줄항랑이라 하면 그 동리 사람은 어느집 항랑인 줄을 다 안다고 합니다. 이 집은 지금 으로부터 칠팔십년전에 철종대왕의 백씨되는 곰배대감의 별명을 듯는 영평군이 홍판서의 집을 사 고 든 때부터 루동궁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얏답니다. 지금 주인 후작 리해승각하는 곰배대감의 오 대손이라고 합니다. 곰배대감의 후손으로 리해승대감도 한때는 세력이 빨랫줄 가탓겟지오. 그러나 요새는 조선총독 대감에게 세력을 빼앗기고는 령락하기 가이 업답니다. 닥쳐오는 운명에야 임검의 형님이든 곰배 대감의 후손인들 어찌하겟습니까. 남종녀종이 드나들든 항랑방에는 인연도 업는 뭇 사람의 차지 한 바가 되고 오즉 비ㅅ물이 고여잇는 압마당에 노힌 인력거 한채가 그래도 후작대의 톄면을 유 지하는듯 합니다. ( 慷 慨 子 )
236 都 染 洞 -- 模 型 塔 조선총독부 톄신국 뒷골목으로 가자면 회칠한 동구라한 탑( 塔 ) 하나이 괴물가티 서잇습니다. 그 리하야 누구든지 그 골목으로 지나 다니는 사람들은 그 힌탑을 한번씩 쳐다보고 지나갑니다. 이 탑가티 웃둑 서잇는 것이 무엇인지는 별로이 아는 사람이 업습니다. 누구의 말을 들으면 등 대( 燈 臺 )의 모형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이의 말을 들으면 긔상대의 모형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무슨 모형인지 우리가 알 턱이 잇습니까. 그저 밤이나 낫이나 힌 몸이 웃둑 서 잇는 것만 하야도 우리 동리의 이야기 거리오 또 확실히 명물로 치기에 넉넉합니다. 어떤 로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며태 전에 캄캄한 그믐밤이나 구진 비 축축이 오는 날은 이 모형탑 부근에서 이상한 바람소리와 물소리가 들렷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이것은 며태전 일이니까요 지금은 그럴리가 만 무합니다. 하여간 문명한 사람들이 만들어 노흔 이 괴물이 우리동리 사람들의 이야기거리가 착실히 된답 니다. ( 都 染 洞 趙 漢 鳳 ) 觀 水 洞 -- 觀 水 橋 광교부터 시작하야 다리 이름을 상고하며 동편으로 나려가겟습니다. 첫재가 광교. 광교는 원명 광제교, 속명이 광충다리라 하고요, 광교 다음에 장교. 장교는 원명이 장통교, 속명이 장차꼴다리. 장교 다음에 수표교, 수표교는 원명이나 속명이 다 가트나 속명은`교'( 橋 )를 새김으로 불러서 수표 다리라고 할 뿐이랍니다. 수표다리가 수표뎡 명물이 되엇스니 수표다리 다음에 잇는 관수교가 관수동 명물이 되어서 부 끄러운 것이 업슬줄 압니다. 관수교는 새로 만든 다리라고 업수이 녀기지 마십시오. 외양이 새로 되니만치 다른 다리보담 낫습니다. 녜전 말을 들으면 수표다리 알에에 새다리라는 이름을 가진 다리가 잇섯답니다. 이제는 이 관수교가 새다리라는 이름을 차지하야도 조흘 것입니다. 이 관수교가 새로 훌륭하게 된 것은 창덕궁과 조선총독부 왕래길에 잇는 까닭이랍니다. 요사이 가튼 더운 날은 저녁이 되면 다리우에 바람쏘이는 사람이 대단히 만습니다. 이것으로만 하야도 광교, 장교, 수표교 따위는 못당할가 합니다. ( 觀 水 洞 過 橋 人 ) 淸 進 洞 -- 內 外 酒 店 청진동 명물은 부랑자들의 조하하는 내외주뎜이외다. 호수 륙백호에 내외주뎜만 열한집이 되고 보니 이동리의 대표 명물로는 당당하지 안습니까. 이 당당한 명물이 작년에는 삼십여호, 재작년 에는 사십여호나 잇섯드랍니다. 참 그때야 굉장하얏겟지요. 열집에 내외주뎜 하나씩 - 장관이엇겟 습니다. 내외주뎜의 력사를 캐여 보면 녯날에는 이름과 가티 안악네들이 술상만 차려 내보내고 내외를 착실이 하든 술집이엇드랍니다. 이것이 차차 개명하야진 탓인지 내외법이 업서지고 술상 엽헤 부 터안저 웃음을 팔고 놀애를 팔더니 자연히 매음까지 하게 되어 요사이에는 내외주뎜 하면 밀매음 이 련상되게 되엇답니다. 내외주뎜을 차저 가면 의례히 기름때가 꾀죄죄 흐르는 젊은 계집이 한둘씩 잇지요. 이 계집들
237 이 이제 말한 그것들인데 넘우 풍긔를 괴란함으로 경찰서에서는 내외주뎜 허가를 안내여 준답니 다. 이 까닭으로 해마다 해마다 내외주뎜이 줄어들어 가서 요사이에는 이미 서산의 비경에 들엇 답니다. 일동의 명물 내외주 도 칼찬 나으리 세력에는 꿈적을 못하는 모양입니다. ( 淸 進 洞 朴 萬 根 ) 薰 井 洞 -- 어 수 움 물 란초가 귀엽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잡풀 틈에 잇서도 향긔로운 까닭입니다. 련꼿이 귀엽다는 까 닭이 무엇입니까. 진흙 속에 낫서도 깨끗한 까닭입니다. 훈정동 어수움물을 명물이라는 것은 무엇 입니까. 인가가 주밀하고 뎌함( 低 陷 )한 바닥에 다른 물들은 찝질하되 이 물 혼자 청렬한 까닭입니 다. 삼청동 성제움물이 제깐에 명물소리를 듯나 봅니다마는 무당집의 `넉의메' 소용, 장안사녀( 長 安 士 女 )의 놀이터 소용, 허영띄어 흐르기 때문에 훈정동 어수움물가티 려염속에 숨어서 남이야 알거 니 말거니 차고도 맑은 본성을 족음도 변치안코 사시장철 한모양인 군자임으로 보아서는 비루한 친구라고 이웃하기도 실혀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물은 이름과 가티 녯날 어수로써 화개동 복주움물 가튼 것은 후생소년으로 불뿐 아 니라 참소를 밧고 방축을 당하야 대궐안에 들어가 본지가 어느때인지 모르지마는 외로운 충심은 그대로 남아서 풍마우세( 風 磨 雨 洗 )의 하마비를 짝하야 종묘 압흘 떠나지안코 섯습니다. ( 薰 井 洞 下 馬 生 ) 並 木 町 -- 갈 보 다방골 기생만 명물이냐고 병목뎡 갈보가 큰 불평이 잇습니다. 이것은 그네가 넘우 조급한 탓 이지오. 우리도 병목뎡에는 갈보가 명물이라고 합니다. 밤낫업시 그 근처로 지나기만 하며는 부끄 러운줄 모르고 지나는 사람을 손찟하야 불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잇스나 그네인들 사람이지 생각 이야 없겟습니까. 눈물은 북바쳐 올라오는데 웃음을 억지로 내이고 남자를 보면 대뎍갓건만 반가운듯이 맛는 것 을 보시오. 명물이 다른 명물이 아니라 불상하기로 첫재가는 명물입니다. 이 명물은 한편으로 보면 병목뎡 명물이 아니라 전세계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잇습니다. `론던'가 튼 큰 도회에는 팔만여명이 잇고 `파리'가튼 화려한 도회지에는 오만여명이 잇답니다. 인구비례로 보면 `파리'가 수효로 뎨일이랍니다. 이 명물은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다고 갈보라는 별명까지 잇습니다마는 실상은 사람에게 피를 빨리는 것이랍니다. 그 증거는 갈보가 사람 이백명가량만 치루고나면 피가 말라서 껍질만 남은 빈대가티 된답니다. ( 並 木 町 柳 炳 圭 ) 渼 芹 洞 -- 초 리 움 물 미근동 초리움물이라 하면 서울사람 치고는 모를 이가 업슬만치 이름이 놉흔 움물이올시다. 녯 날 어느때 나라에서 성안 성밧게 조타는 물은 하나도 빼지 안코 모조리 길어다가 저울로 달아본 즉 이 물이 뎨일 무거워서 어수( 御 水 )를 봉하얏드랍니다. 그때쯤이야 번듯한 대문에 큼즉한 잠을
238 쇠를 채우고 여간사람은 얼신도 못하얏슬 것입니다. 그러나 이 움물은 그따위 속박을 벗어부치고 제멋대로 지나온지가 며태나 되엇는지 지금 모양 을 보면 허수한 네기둥 안에 깨어진 양텰을 우장삼아 뒤집어쓰고 초라하기 짝이 업습니다. 그러 나 상하귀천을 뭇지안코 양대로 퍼먹게 내버려 두는 폼이 제법 네내것 업시 지낸다는 아라사 양 국에 다녀온듯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젓이 부족한 어머니가 이 물에 와서 넉의메 를 들이면 신통한 공효가 통 유탕(通乳湯)보다 낫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멀정한 거즛말이며 맑은 덕에 루되는 말이 올시 다. 아예 밋지 마시오. (渼芹洞 鄭 煥 斌) 禮智洞 -- 東 門 市 場 례지동의 명물은 배오개 장이랍니다. 종로에도 장이 잇고 남대문이나 룡산에도 장이 잇는데 한 갓 례지동 장이 유명할 것이야 무엇이겟습니까마는 례지동 장은 그 력사가 길어 요사이 새로난 ` 새끼장'과는 그 픔이 다른 까닭이외다. 장으로 력사가 길기는 남대문 장이지요. 이 장은 지금으로부터 삼십여년전에 선혜청(宣惠廳)이 든 것이 된 것이오 그 다음이 이 례지동 장인데 보통 속명으로 배오개장 이라고 합니다. 배오개 라는 것은 백고개의 와전인데 녯날은 그 고개에 호랑이가 만하서 백명씩 떼를 지어서야 고개를 넘어 다녓슴으로 백고개라고 이름지은 것이랍니다. 광무구년까지는 족으마한 장갓지 안흔 장이 만핫드랍니다. 그런 것이 갑오경장후에 지금터로 집을 짓고 옴겨온 것이랍니다. 이 장의 자랑거리는 순전한 조선사람 것이라는 것만 아니라 그 규 모가 큰것이 장안에 뎨일이라 할 수 잇슴이외다. 이 장안에 가게를 빌린 사람은 뎡주(定住)만 백 사십여호이오 저자보러 오는 사람은 몃만명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더욱 왕십리, 동대문 밧, 창의문밧게서 모여드는 장ㅅ군이 더욱 만타고 합니다. (禮智洞 朴 商 箕) 勸農洞 -- 經 板 閣 지금 이 집을 가보면 일본 사람이 주인입니다마는 전에는 교서관 경판(校書舘經板)을 두엇든 경 판각이오, 좀더 오래전에는 유명한 홍국영(洪國榮)씨가 거처하는 사랑이드랍니다. 오백년동안 세도 재상으로는 뎨일가는 량반이지오. 공로도 만코 시비도 만코 별별 이야기 거리가 만흡니다. 총명이 일세에 뛰어나고 민첩하기가 딸을 사람이 업드랍니다. 정조(正祖)께서 세손(世孫)으로 계 실때 남모르는 공로가 어떠케 만흔지 정조께서 네가 세도를 마타하면 내가 임검도 실타고까지 하 셧답니다. 이 마루에서 요새와 가티 더운 때 바돍을 두드랍니다. 시골 일가 한분이 와서 자긔선산에 누가 묘를 썻스니 좀 파 달라고 말을 하니까 못들은체 하더니 아모개가 내 일가집 산에 묘를 써 하 고 바돍 한뎜을 땅 노터니 아무말이 업드랍니다. 그 일가가 어떠케 야속하게 알앗겟습니까. 관가 에 송사나 할가하고 낫업는 얼굴로 나려가 보니까 그묘는 벌써 파 버렷드랍니다. 혼자 말 한번이 면 팔도가 떨엇지오. 이러한 세력을 가졋것 마는 거처하든 사랑은 이러케도 질소합니다. (勸農洞 鄭 致 永)
239 長 橋 町 -- 설 렁 탕 삼각뎡에서는 굽은 다리를 명물이라고 자랑하얏고 관수동에서는 관수교가 명물이라고 내세웟 습듸다마는 그까짓 쌔고쌘 다리 가튼 것이 무슨 명물이겟습니까? 그까짓 다리는 우리 동리에도 잇답니다. 장교뎡의 장교라 하면 그따위 굽은 다리나 수표교에 지지 안켓지오. 그러니 우리 장교뎡에서는 다리는 거더치우고 설렁탕을 명물로 내세우고자 합니다. 이러케 말 하면 장교뎡에만 설렁탕이 잇는가 하고 들고 나설지도 모르겟습니다마는 장교뎡 설렁탕은 맛조케 잘하기가 다른 설렁탕에 비길바가 아닌 까닭이외다. 경성사람치고는 장교 설렁탕이 조흔줄을 다 알지오. 그러나 요사이에는 설렁탕 장사의 배가 불럿는지 전보다 못하게 되엇다는 말이 만흐니 명물이 일종 일본비행긔 갓소이다. 설렁탕말이 낫스니 설렁탕 력사를 말하야 봅시다. 설렁탕은 선농탕( 先 農 湯 )의 와전인데 이 선농 탕이 생기기는 녯날 어느 임검이 젹뎐을 할때에 임검 모신 만흔신하와 수천군중에게 뎍심을 나릴 때에 소를 그대로 함부루 족여너코 국을 끌인 일이 잇서서 국 이름을 선농탕이라고 하얏답니다. ( 長 橋 町 曉 海 生 ) 孝 悌 洞 -- 홰 나 무 이 동리에는 세상에 이름난 명물은 그러케 업습니다마는 다른 동리에 별로 업는 홰나무 한개가 이 동리의 이야기 거리오 또한 명물입니다. 이 홰나무가 며태나 묵은 고목인지 이 동리에서도 확실히 아는 사람이 업다고 합니다. 하여간 크기는 그리 크지 안하도 여러해 묵은 것은 동리사람중에서 이 나무가 언제 심은 것인지 그것을 본 사람이 업는 것만 보아도 확실히 오래된 고목입니다. 이 나무가 오래 묵은 까닭에 명물이란 말은 아닙니다. 이 동리 안악네의 말을 들으면 이 홰나 무에는 신통한 신이 부터서 고사만 지내면 고사지낸 집에는 우환이나 질고 가튼 것이 얼신도 못 하고 복이 장마에 비쏘다지듯 한다 하야 해마다 부인네들이 복비는 고사지내기로 유명하얏답니 다.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서는 홰나무가 신통력을 일허버린 까닭인지 안악네가 못된 미신의 생각을 버린 탓인지 하여간 고사지내는 사람이 업게 되어 이 홰나무도 생활난이 막심하다고 합니다. 그 러나 이 홰나무는 고사야 지내거나 말거나 넓다란 원두밧 가운데 웃둑서서 타는듯한 바닥에 그늘 을 던지고 잇습니다. ( 孝 悌 洞 朴 貴 鍾 ) 杏 村 洞 -- 은 행 나 무 사직골 성터진 넘어 남향판 언덕우에 은행나무 하나가 웃둑 서 잇습니다. 맑은 바람이 불 때마 다 가지와 입사귀는 속살속살 녯날 이야기를 하는 듯합니다 이 은행나무는 행촌동의 명물이오 행 촌동의 이름은 이 은행나무가 잇는 까닭이올시다. 이 은행나무의 춘추는 얼마나 되엇는지 자세히 아는 이가 업스나 로인네의 전하는 말을 들으면 사직( 社 稷 )안에 잇는 태조대왕 수식송( 太 祖 大 王 手 植 松 )과 벗할 나무가 아니오 년치존장은 단단하 다 합니다. 그리고 물구즉신( 物 久 則 神 )이라더니 낫살이 만하서 아는 일이 만흔지 보통 해에는 열 매가 열지 안타가 나라에 큰일이 잇스려면 한번씩 열린다는 말도 잇답니다. 며태전까지는 엉클어진 뿌리를 들어내어 오고가는 사람을 붓들어 안치고 구름가튼 그늘로 덥허
240 주며 `내가 너히들 몃대조부터 이러케 정답게 굴엇다'하는듯 하더니 지금은 코큰 량반의 울타리속 에 들어가서 녜전 인연을 다 끈허버리고 `어느 몹슬 놈이 나를 팔아먹엇노'하고 구진 비를 눈물삼 아 뿌리고 잇습니다. ( 杏 村 洞 李 順 이) 舘 洞 -- 獨 立 舘 이 독립관은 녯적 모화관( 慕 華 舘 )입니다. 여러가지를 다 이야기 하면 무엇합니까. 서늘한 저녁에 자미잇게 보시다가 녯 부끄러움과 새 서름이 함께 쏘다지시겟지오. 다른 말 할 것 업시 독개비 이야기나 하겟습니다. 모화관 독개비라면 서투르실는지도 모릅니다 마는 무아관 독개비라면 누가 모르겟습니까. 무아관이 모화관입니다. 녯날에 소년 몃사람이 이 대 청에서 자는데 독개비들이 나오더니 에크 무슨 판서 무슨 대감 무슨 정승이시로군 하드랍니다. 그 말을 듯고 담력 세인 소년 하나가 자긔는 무엇을 할가 하고 밤중에 모화관을 갓더니 독개비가 굉장히 모이어서 들이지 안트랍니다. 주먹으로 두드리며 들어가노라니까 여러 독개비들이 억지 대감 들어오신다 하드랍니다. 그뒤에 그가 대감은 되엇지만 간신이 되엇드랍니다. 독개비가 지금껏 잇스면 물어볼 일이 만치오. 첫재 물어보고 십흔 것은 아마 다 생각하리다. 그 런데 그 사람 독개비 등살에 귀신 독개비는 어대로 밀려 갓나보외다. ( 舘 洞 金 光 鉉 ) 橋 北 洞 -- 獨 立 門 교북동 큰 길가에 독립문이 잇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불란서 파리에 잇는 개선문( 凱 旋 門 )과 비슷합니다. 이 문은 독립협회가 일어낫슬 때에 서재필( 徐 載 弼 )이란 이가 주창하야 새우게 된 것 입니다. 그우에 새겨잇는 독닙문 이라는 세 글자는 리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리완용이란 다른 리완용이가 아니라 조선 귀족령수 후작 각하올시다. 이 독립문께는 그전에 대국칙사라는 것이 왕래할 때에 연조문( 延 詔 門 )이란 홍살문이 잇섯드랍니 다. 연조문이 영은문( 迎 恩 門 )으로 개명된지가 벌써 오래건만 속명으로는 근년까지 연주문이라고 불러왓습니다. 연주문 석주( 石 柱 )는 지금까지 남아 잇습니다. 전에는 돌려 매엇든 쇠사슬이 잇섯는 데 독립문이 선 뒤에 누가 끈허 버렷답니다. 속박( 束 縛 )당하든 것이 해방되엇스니 쇠사슬이 끈허 진 것입니다. 년전 삼일운동때 독립문 우에 태극긔가 뚜렷이 솟아나서 경찰서에서 씻어버리랴고 `폼푸'질까지 한일이 잇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그리지 못할 곳이라 독개비 즛이라고 그당시 떠들엇습니다. ( 橋 北 洞 金 載 民 ) 東 崇 洞 -- 駱 山 이 산은 모다 낙산이라고 불읍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락타산( 駱 駝 山 )이라고 하얏습니다. 락타는 다른것이 아니라 동물원에서 약대를 보셧지오. 약대는 이름이오 락타는 자( 字 )이랍니다. 이 산이 중툭이 움속하야 약대등 갓기 때문에 락타산이라 한 것 갓습니다. 혹 걱구루 부쳐서 타락( 駝 酪 )산 이라고도 하나 아마 락타산이 원이름이겟지오. 글씨 잘쓰고 글 잘하고 그림까지 그리는 강표암( 姜 豹 菴 )선생이 이 근처에 살앗섯드랍니다. 근세 로 말하면 부재 리상설( 溥 齋 李 相 卨 )씨의 별장이 잇섯지오. 을사년 됴약된 뒤에 어느날 밤인지 달
241 이 낫가티 밝은데 이 별장에서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표현히 밧그로 나가서 고만 자최를 감추엇 답니다. 이십년동안 류리표박하면서 괴로운 맘이 귀신을 울릴만한 경력을 생각하면 첫걸음을 내 노흔 이 산밋 동구도 길게 강개한 긔념이 될 것입니다. 이 잔듸에 표암의 지팽이 자국이야 잇겟습니까마는 이 솔나무의 푸른 그늘은 부재의 걸음을 여 러번 멈추엇슬 것입니다. 瑞 麟 洞 -- 拘 置 監 서린동 구치감은 녯날 뎐옥( 典 獄 )입니다. 국초쩍 일은 별별 와전( 訛 傳 )이 만흐니까 다 밋기는 어 렵지오마는 서울안 생왕방터로는 뎐옥이 뎨일이오 뎐옥을 생왕방에 짓기는 죄인을 위하야 어대까 지든지 살아 나가게 하려는 뜻이랍니다. 참 그런지야 누가 압니까. 이 옥속에서 죄로 죽은 사람도 만켓지오마는 이름은 세상에 놉고 몸은 이 속에 빠젓든 명신 의 사인들 적겟습니까. 세상이 이러케 된 뒤로 더욱이 죄지은 사람만 가두는 터라고 할 수가 잇습니 까. 디옥은 옥이 아닙니다. 이 생왕방 긔운이 옥속에만 가치어 잇기가 실혀서 널리 좀 퍼저볼가 한 것인지 원체 엄청나게 큰 옥이 담 아니싸코 락성되엇스니까 이까짓 옥은 다 업서지게 되는 것인 지 어찌하얏든지 이 옥은 업서젓습니다. 이것 저것 이야기하야 무엇합니까. 담도 업는 이 큰 옥이 야말로 생왕방이나 되는지 모르겟습니다. 디술 미더 무엇합니까 어떠케든지 살아야지오. 崇 仁 洞 -- 關 王 廟 임진왜란을 지난뒤 일입니다. 명나라 사신 만세덕( 万 世 德 )이란 사람이 와서 신종황뎨의 명을 전 하는 말이 관공은 본래 령검이 장하고 임진왜란에도 음조( 陰 助 )가 만핫스니 나라에서 사당을 세워 공을 갑흐라고 하얏습니다. 그래서 동대문 밧게 터를 잡고 경자년부터 역사를 시작하야 삼년만에 필역하엿습니다. 이것이 칙건현령 소덕왕 관공지묘( 勅 建 顯 靈 昭 德 王 關 公 之 廟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곳 숭인동 명물 관왕묘입니다. 관왕묘 이야기를 하자면 보통 떠도는 것만 하야도 긔가 막히게 만흐니까 다 고만두고 남대문 밧게 잇는 남관왕묘가 이 숭인동 관왕묘만 못한것이나 잠간 적어 보겟습니다. 우선 남관왕묘는 명나라 장사 진인( 陳 寅 )이란 사람이 개인으로 세운 것이니 나라에서 세운 숭인동 것만 할 수 잇겟 습니까 또 남관왕묘에 잇는 관공상은 텰로 만들고 흙을 바른 것이니 숭인동 동상( 銅 像 )만 할 수 잇습니까 이 유명한 남관왕묘도 이 숭인동 명물만 못한 것이니 안동, 성주, 남원, 강진등 여러 시 골 잇는 것들에야 비교할 여디도 업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숭인동 관왕묘가 우리나라에 잇는 여 러 관왕묘중에 뎨일 가는 것입니다. 天 然 洞 -- 天 然 池 서울서 이만 때면 련꼿 구경을 나서지 안습니까. 약됴업시 모이는 데는 새문밧 텬연뎡이지오. 텬연지가 다른것이 아니라 텬연뎡압 련못이지오. 이 련못의 나히를 세이면 우리의 십사오대조 친 구입니다. 별별풍상도 여러번 격것지만 조흔 일도 여러번 지나 보앗답니다. 숭평시절에 풍악석근 바람이 가비엽게 련못 물을 흔들든 것이 어제 일이 아닙니까. 낫설은 타
242 국사람의 회관( 會 舘 )이 뎡자대신 련못우에 비추일 뿐입니다. 그러나 련화는 군자라 녯적 향긔는 그래도 변치 안핫습니다. 훈정동( 薰 井 洞 ) 어수움물과 맛나지는 못하야도 바람결에 통정은 서로 할 줄로 압니다. 한참 편론( 偏 論 )을 할적에 련못이 다 편색이 잇섯지오. 이 련못은 서인편이 되엇드랍니다. 이 련 못 련이 잘되면 서인이 잘된다 하얏섯지오. 꼭꼭 마저왓다는 사람도 잇습니다. 남문 밧게도 련못 이 잇섯는데 이는 남인의 련못이라 하얏지오. 그러나 말이 낫스니 말이지 점쟌흔 이들이 이런 말 을 하얏겟습니까. 녯일을 지금 누가 말할수 잇겟습니까. 서늘한 저녁때 련꽃 구경이나 나가시지 오. 宮 井 洞 -- 毓 祥 宮 숙종대왕( 肅 宗 大 王 )때 일입니다 자하ㅅ골 최씨( 崔 氏 )집안에서 부인 한분이 궐내에 들어갓습니다. 비빈도 아니요 녀관도 아니요 궁비가튼 나즌 소임으로 들어갓드랍니다. 이 부인이 몸은 천하나 마음은 곱고 얼굴은 밉도록 어엿브지 아니하나 덕성은 부럽도록 만트랍니다. 숙종대왕이 어엿븐 장희빈에게 일시 반하서서 부드러운 민중뎐을 내쪼치신 일이 잇습니다. 최 씨는 민중뎐을 잇지 못하야 밤마다 사람몰래 축수를 하얏답니다. 어느날 밤에 상감 눈에 들켯답 니다. 녯주인 위하는 것을 신통히 여기서서 갓가이 하셧답니다. 낫말은 새가 듯고 밤말은 쥐가 듯는 법이라 숫색시 최씨의 배가 괴상히 불러가는데 까닭을 아 는 사람외 말이 한입 두입 건너 희빈 귀에 들어갓드랍니다. 어느날 숙종이 낫잠을 주무시니 비몽사몽간에 내뎐 마당에 노힌 독미테 룡한머리가 나오려다가 못나오고 죽게 되드랍니다. 깜작 놀라시어 내뎐으로 들어가서서 독을 들라 하시니 숨막혀 거의 죽게된 최씨가 독미테 잇드랍니다. 그뒤 최씨 몸에서 영조대왕이 나셧습니다. 이 궁이 최부인 본 궁으로 오늘날 궁정동 명물까지 되엇습니다. 蓮 建 洞 -- 갓 바 치 련동 갓바치는 녜부터 유명합니다. 구쓰인지 구두인지 그것이 들어오더니 소년들의 태사혜, 늙 으신 이의 뒷발막, 부인네의 당혜, 아이들의 반결음 이모든 것이 고만 세월이 업서저 지어내는 갓 바치가 파리를 날리지요. 나무밋 으스스한 집들이 그녜의 생활을 그려냅니다. 중종조때 조정암( 趙 靜 菴 )이 피장이 친구가 잇지요. 피장이와 갓바치는 그게 그게랍니다. 지금도 그녜들중에 조정암가튼 친구가 몃명이나 잇는지 한번 차저가 볼것입니다. 또 고려( 高 麗 )가 망한 뒤에 왕씨( 王 氏 )녜가 갓바치 노릇을 만히 하얏답니다. 땅은 왕씨네 땅이 아니니까 땅밟을 신이나 왕씨의 손으로 만들려고 이 노릇을 하얏든가 봅니다. 정암친구 피장이가 왕씨나 아니든지요. 갓바치 한( 限 )이라고 녜부터 유명합니다. 모레 오라면 그글피나 가야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러치는 안탑니다. 일거리가 적은 바에 한한날 안될리가 업지오. 그들이 불상하야 광고겸 말이지 오. 蓬 萊 町 -- 貧 民 窟 안다 안다하니 염천교 건너서서 똑가튼 이십여채 집에 월세는 삼원씩이오 지어논 주인은 경성
243 부, 든 사람은 대개 빈민이니 이것이 무엇일가. 알지오. 봉래뎡 빈민굴! 빈민굴 빈민굴 하니까 다 빈민으로 아지 마십시오. 여긔든 사람으로 월수입 칠팔십원되는 사람도 잇답니다. 다시 생각하면 칠팔십원이 무엇이 만습니까 그도 빈민이지오. 그러나 단수입 구원되는 사람도 잇다하니 말이외 다. 빈민이라는 칭호가 이사람을 안고 도니까 칠팔십원 수입되는 사람을 끄을어 오기가 어렵습니 다. 구원을 벌어가지고 세식구가 한달을 살앗는데 십여전이 남앗드란 소문을 들엇겟지오. 어떠케 살앗는지 암만 생각하야도 알수가 업습니다. 그더러 물어보면 우리야 사는것이 사는것이 아니라 고 할것입니다. 한끼 밥은 꿈 밧기라 중국 밀가루 두어줌이면 남비알에 연긔가 일어납니다. 이 고 생을 하는 사람들이 로력은 뎨일 만히 한답니다. 고생이야 고생이지오마는 그들은 한울을 우를어 보아야 부끄러움이 업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 러움이 업슬것입니다. 體 府 洞 -- 돌 함 집 백제( 百 濟 )때 서울이든 부여( 扶 餘 )를 가서 들으니 엿바위 근처에 무친 돌함이 잇는데 그속에 백 제력사가 들엇다고 합듸다. 무안( 務 安 )사람의 말을 들으니 신라( 新 羅 )때 최고운( 崔 孤 雲 )이 력사와 기타 귀한 책을 돌함에 너허서 무안 어느 절압헤 무든 것이 있다고 합듸다. 이 부여, 무안뿐 아니 라 각처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돌아다닙니다. 서울안에는 톄부청골에 돌함집이라고 별명잇는 집이 잇습니다. 이집이 그전에 어느 공주댁이드 랍니다. 그 공주가 병들어 돌아갈 때에 가진 보물을 돌함에 너허서 대청미테 무덧다고 합니다. 이 집의 주인이 갈릴 때마다 대청미틀 파 보앗답니다. 족음 욕심이 심한 주인이 오면 압 대ㅅ 돌밋과 뒤ㅅ마당까지도 파헤첫답니다. 그 돌함 주인이 될 사람은 한울이 아시는 이라 집에만 잠 시 주인노릇하는 사람들이 헛 애만 쓰고 돌함은 구경도 못하얏답니다. 이 돌함의 주인될 사람과 돌함이 주인 맛날 때를 나는 대강 짐작합니다. 텬긔루설하면 텬벌을 밧는 법이라 자세히는 말할 수 업고 어림풋이 말하면 톄부동 돌함이 부여, 무안 돌함보다 일이년 뒤쯤 세상에 나올 것입니다. 崇 三 洞 -- 成 均 지금 경학원이 전날 성균관임은 다 아시는 것이 아닙니까. 태학( 太 學 )이라고도 불럿섯고 반궁 ( 泮 宮 )이라고도 하얏섯지오. 알성장원 경상감사라는 말이 잇지안습니까. 알성과라는 과거를 여긔서 보앗드랍니다. 알성은 성인을 뵈옵는다는 뜻이라 상감께서 공자위패에 절하신 뒤에 보이시는 과 거랍니다. 경학원이라는 것은 다른 것입니까. 조선총독부 소속 유교본부이지오. 대뎨학이 잇고 부뎨학이 잇고 사성이 잇서 늙은이 젊은이 할것 업시 벼슬맛 잘아는 분네는 머리가 터져가며 다툰답니다. 떼타고 바다에 뜨고자 하든 어른이 이 꼴을 보시고 게시겟습니까. 공자님 제사는 헛된 일이 아닐 지도 모르지오. 동맹파업 하는데는 이전 성균관 진사님들이 전세계에 전신으로 항렬을 따지면 십대조 뻘이나 되지오. 관진사가 관을 버리고 한강 모래벌만 넘어가면 나라가 망한다 하기 때문에 관진사의 동 요가 생기면 온 조뎡에 큰 소동이 일어나드랍니다. 성균관에 잇는 진사들까지 이러케 권위가 잇 섯스니 성균관이야 여간 존숭을 바덧겟습니가. 이러튼 데가 지금 총독부 경학원이 되엇답니다
244 積 善 洞 -- 琮 琛 橋 적선동에 유명한 돌다리가 잇습니다. 이름은 종침다리라고 합니다. 성종( 成 宗 )때 허종( 許 琮 )이라 는 정승이 잇섯습니다. 문무겸전하고 풍신이 비범하고 신장이 거의 십이척이나 되는 키다리 정승 이드랍니다. 그 아우 허침( 許 琛 ) 허정승은 성종때 동궁 강관( 東 宮 講 官 )으로 연산군( 燕 山 君 ) 글을 가르첫섯답 니다. 달래가며 글을 읽히기 때문에 글을 원수로 여겨 강관까지 미워하든 연산군에게도 허침은 대성인( 大 聖 人 )이라는 칭찬을 바덧답니다. 연산군 어머니 윤씨( 尹 氏 )가 성질이 좀 암상스럽고 세자( 世 子 )난 자세로 좀 방자스럽든지 성종 대왕 얼굴에 손톱으로 생채기까지 내엇섯답니다. 나중에는 궐내에서 쫓겨나서 약사발까지 안앗습 니다. 윤씨 일이 낫슬 때 허종과 허침 두 형뎨분이 매사에 지각잇든 그 누님에게 처신할 꾀를 물은즉 아들이 세자요 그 어머니가 애매히 죽으면 뒤에 무사할리가 업다고 말하얏답니다. 형뎨가 사직골 집에서 말을 타고 나오다가 돌다리우에 와서 다가티 락마를 하야 조반참례를 못 하얏답니다. 나 종에 허씨집안이 망하지 않키도 락마덕이오 이 돌다리가 종침이란 이름으로 유명하기도 락마덕이 랍니다. 昌 信 洞 -- 昌 信 宮 창신동에는 긔막히게 굉장한 집 하나가 잇습니다. 이 집이 사가는 사가지오마는 대궐에 지지안 는 집이라 아무개 집이라 하기는 흘한듯하야 못쓰겟고 또 송석원인지 솔돌원인지 하는 것 가튼 별호는 업는 모양이니까 동명을 딸아서 창신궁이라고 불러두겟습니다. 우리나라는 녯날 신라때부터 보통사람은 집을 이러케는 세우지 못하는 법이다. 집을 저러케는 치fp하지 못하는 법이다 하야 집에 대하야 대단히 까다라웟습니다. 삼문을 못세우고 두리기둥을 못세우고 부연을 못달고 채색을 못쓰고 하든 것은 여러분도 다 긔억하실것이 아닙니까. 지금은 돈만 잇스면 못할것 업는 세상이니까 족음도 상관업습니다. 이 창신궁을 세웟다고 경찰서가 포도 청 대신으로 잡어야 가겟습니까. 이집 주인은 강사람 림씨( 林 氏 )랍니다. 못해보든 놀음을 해보는 김이니 남보담 잘 해본다는데 새로 되는 사람의 긔개가 보입니다. 이집 주인이 사돈집 하인에게 집타박을 당하고 골이 나서 그 사돈집 덜미에다가 삼십만원 돈을 들여서 이 대궐가튼 집을 짓고 첩을 두엇답니다. 玉 仁 洞 -- 松 石 園 착한 이만 사람입니까 악한 자도 사람입니다. 충신효자만 명인입니까 란신적자도 명인입니다. 이름나니 명인이지오. 북부위생소는 똥냄새로 명물이오 새문밧 텬연지( 天 然 地 )는 련향( 蓮 香 )으로 명물입니다. 청택을 가릴것 업는 바에 윤자작( 尹 子 爵 )의 송석원인들 명물이 아닙니까. 독일식을 모떠서 별별 사치를 다한 집이라 대궐도 못딸으겟지오. 그런데 어린아이라도 이집은 떼악마( 惡 魔 )가 얼어부튼 것처럼 흉하게 보아서 저집 참 조타고 부럽게 알지는 안습니다. 더구나 뾰죽한 머리를 어떠케 밉게 보앗든지 이 집에 잇는 피뢰침만 보아도 만가지 흉한 수단이 그리로 솟을 것가티 안답니다. 이집 마당 련못이 어느 해인가 장마에 터저서 압동리 초가집들이 물벼락
245 을 마졋섯는데 손해는 대궐안에서 물어주셧답니다. 그러기에 충심이 그리 갸륵하지오. 화동은 구선복( 具 善 復 )이 다리가 잇고 계동으로 올라가면 서쪽 골목이 홍술해( 洪 述 海 )골이랍니 다. 문압 다리와 살든 골목이 무슨 죄입니까. 이집을 송석원이라 말고 윤자작뎌라고 하시지오. 푸 른솔 힌돌이 원통하다 할것입니다. 竹 添 町 -- 굴 누구든지 서대문밧 감영 네거리에서 마포( 麻 浦 )가는 뎐차를 타고 얼마 아니나가면 그전 팔각뎡 ( 八 角 亭 ) 부근에서부터 땅이 점점 놉하가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며 이와 한가지로 뎐차길 밋을 가 로지나 뚤린 그다지 작지안흔 `턴넬'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남부럽지 안흔 우리동리 명물입니다. 어찌`턴넬'이 한두개에 그치며 한 두곳에만 잇겟습니까마는 이것이 특별히 남다르게 동리 한복판 을 뚤코 나간 거긔에 명물감이 잇다는 것입니다. 조선에도 `턴넬'이 꽤 만히 잇지마는 동리 가운 데로 뚤코 나간 것은 아즉 하나도 업답니다. 그나 그뿐입니까 하로도 십여차씩 길고도 긴 긔차바퀴가 들고 나고 할때마다 동리 사람들은 모 다 한번씩은 치어다 보고야 만답니다. 전에는 경의선 텰도가 룡산을 지나서 가든 것이 이제는 바 로 이구멍으로 다니게 되엇지오. 이 턴넬 은 참으로 거리가 일천이백오십사척( 呎 )이 되고 총공비 가 이십삼만 칠백칠십이원이나 들엇답니다. 시작하기는 지금으로부터 여섯해전 서늘한 구월 일일 인데 근 삼년이나 걸려서 한참 더운 륙월 이십오일에야 준공되엇답니다. 靑 葉 町 -- 孝 昌 園 이 효창원은 순조황뎨( 純 祖 皇 帝 ) 형님 문효세자( 文 孝 世 子 )의 원소입니다. 홍살문밧긔 잔듸밧 넓 고 또 솔나무 그늘이 조키때문에 이맘때는 놀라 오는 사람이 만습니다. 원소인 효창원을 가르침 이 아니라 효창원 해자안에 사람 만히 모여드는 솔알에 잔듸밧을 명물이라 한 것이겟지오. 내동리 명물이라니 말입니다. 한동리에서 명물노릇하는 명물이 알뜰은 하지오마는 세상이 다아 는 명물을 가진 동리라야 참 긔운잇게 명물자랑을 할 것입니다. 빨래하는 녀인네, 작난하는 아이 들까지 효창원이라면 누가 몰르겟습니까. 여긔 와서 노는 이들이 가끔 소낙비에 경겁을 하면서도 그래도 또 모여드는 이 효창원이랍니다. 달밤의 솔밧경치는 참으로 형용할 수업시 좃습니다. 그런데 으슥한 곳이엇마는 자살하는 사람 은 하나도 아니오고 죽으러다가도 오장까지 서늘한 솔바람에 잡념이 살아진답니다. 한강 텰교가 튼 사위스러운 명물과는 항여나 비교하지 마십시오. 通 義 洞 -- 司 宰 監 사람이 사는데 업서서 못쓸 요긴한 물건이 만습니다마는 어염시수( 魚 鹽 柴 水 )가 뎨일이 아닙니 까. 그러기에 살 땅을 골르자면 첫재 이네가지가 조흐냐 언짠흐냐 뭇습니다. 물은 흔한 것이니까 고만두고 어염시가티 요긴한 물건은 또다시 업다고 말할수 잇습니다. 그전에 이 요긴할 물건을 궐내에 공궤하든 관청이 사재감입니다. 뎨일 존귀한 곳에 뎨일 요긴한 물건을 공궤하는 관청이니 관청중 뎨일가는 관청이 이 사재감이라고 말할수 잇습니다. 이것이 우리 통의동 명물입니다. 사재감이 사재감 노릇을 못하게 된 뒤에 잠간 마대( 馬 隊 )가 들엇섯고 또 오랫동안 공청으로 잇
246 섯답니다. 지금은 되지 못한 채 하나만 남아잇고 모다 빈 터전이 되엇는데 이 터전주인이 고리대 금업하는 일인이랍니다. 외, 호박 덩굴지고 수수 또는 옥수수때 웃둑웃독선 밧모통이를 돌아서 늙 은 회화나무 미테를 가며는 전에 부군당이 잇든 터전이 잇습니다. 이 부군당의 부군은 고려 공민 왕( 恭 愍 王 )이드랍니다. 이 부군이 령검이 잇서서 부군당 물건을 훔쳐가는 도적놈은 담에다 꼭 부 쳐노트랍니다. 그 령검도 지금은 물을 곳이 업게되고 회화나무그늘이 동리 늙은이의 조름터가 될 뿐입니다. 淸 雲 洞 -- 淸 風 溪 효자동 큰길로 한참 올라가면 맑은 내ㅅ물이 시원한 소리를 내고 북산으로부터 불어 나려오는 바람이 흐르는 물과 가티 맑습니다. 청풍계라는 이름이 참으로 부끄럽지 안치오. 그러나 맑은 바람 맑은 물이야 그리 귀할 것이 잇습니까. 청풍계가 명물되기는 물과 바람보다 도 내우에 잇는 녯집하나 까닭에 명물이랍니다. 녯집인들 다 명물이겟습니까 이 집은 뎡축년( 丁 丑 年 ) 강화( 江 華 )란리에 절사한 선원 김상용( 仙 源 金 尙 容 )씨 구택입니다. 이 집이야 명물에 빠질수 잇습니까. 농암( 農 巖 )의 청풍로수금상재 ( 淸 風 老 嫂 今 尙 在 )라는 글귀가 잇습니다. 농암이 이집에 오 면 과거하는 로인 수씨가 술을 내보내 들입니다. 혈혈한 부인 한분이라도 이 집을 지키어가기에 족음도 부족함이 업든 것을 보면 고금의 늣김이 자연히 일어납니다. 이집이 지금은 일본사람의 집이랍니다. 태황뎨 계실때 이 집이 궁중소속이 되게 된 것을 특별 히 돌우 내어 주셧섯지오. 그뒤 일이야 말할것 잇습니까. 맑은 바람 맑은 물까지도 고금이 달랏스 면 오히려 우리의 늣김이 덜할것 갓습니다. 武 橋 町 -- 欌 廛 누구든지 무교뎡 큰길로 다녀본 사람은 길거리에 장뎐이 만흔 것을 보앗슬 것입니다. 이 장뎐 만흔거야 말로 이 동리의 명물이고 겸하야 자랑거리입니다. 그 큰 거리에 장뎐이 즐비하게 잇는것이 장관도 장관이지오마는 그러한 의미보다도 이 동리에 서 만들어내는 장과 조선사람 생활과의 관계가 더욱 자랑할 만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십히 장이라는 것은 조선 고유의 물건입니다. 결코 외국물건이 아니오 조선사 람의 손으로 되는 생산품입니다. 물산장려를 떠드는 오늘날에 이 동리에서 조선고유의 물건을 생 산한다는 것도 결코 범연한 일이 아닐가 합니다. 물론 돈업는 사람에게는 비싼 물건을 사서 물산장려한다는 것이 돌이어 까닭모를 일이겟습니다 마는 이 동리의 장으로 말하면 외국 의거리 에 비하야 갑이 매우 싸니까 물산장려 되고 갑싼것을 살수가 잇습니다. 아름다운 색시가 시집갈 때에는 반듯이 꿀가튼 새살림을 꿈꾸면서 이동리 장뎐을 차저와서 한 번 자긔의 고흔 얼굴을 장석경에 비추어보고 희망에 넘치는 맘으로 장을 사가지고 갑니다. 이것 도 다른 동리에 업는 이 동리 자랑거리의 하나입니다. 西 大 門 町 -- 興 化 門 이 흥화문이 한동리 명물이 될 줄이야 생각이나 하얏겟습니까. 어린아이들은 일본사람 중학교
247 만 알겟지오마는 이십세 이상이야 누가 새문안 대궐을 모르겟습니까. 흥화문은 이대궐 정문이드 랍니다. 이전에 달렷든 현판글씨가 어찌 잘 썻든지 밤이면 광채가 나드랍니다. 야조가라는 이름이 어찌 하야 생기엇습니까. 밤야 비칠조 밤에 비추인다고 야조가라 하얏답니다. 임진란리에 이 현판이 불속으로 들어간 뒤로 이 광채를 차즐곳이 업습니다. 불속에 조촐하게 살아진 것이야 오히려 어 떠켓습니까마는 지금 달려잇는 현판 글씨야말로 참 가엽게 되엇습니다. 명종조께서 이 대궐에 만히 계섯는데 어느날 새벽엔 싸락눈이 와서 길로 지나가는 신발소리가 자박자박 들리드랍니다. 그 사람을 불러들여다 보시니까 문밧 어느 선비가 긔별( 官 報 ) 어들어 보 내는 하인이드랍니다. 선비가 글은 아니읽고 이것은 보아 무엇하느냐고 그 선비를 잡아다가 걱 정을 하시니 그 선비가 상감께서 안녕히 주무셧나 궁금하야 이를 알려고 이를 어들어 보냇습니다 하고 능청스러운 대답을 하얏섯답니다. 惠 化 洞 -- 風 車 동소문안 혜화동에 덕국사람들이 사는데가 잇습니다. 그안에 공장이 잇고 학교가 잇고 긔숙사 가 잇고 나물밧이 잇고 가진 각색 것이 다 잇고 교당까지 잇습니다. 아니올시다. 덕국을 줄여다 노흔 것입니다. 물산장려를 주장하고 자작자급을 말슴하는 이들이 본떠올만 합니다. 덕국남부 뮌헨 이라는 곳에 잇는 로마구교( 羅 馬 舊 敎 ) 쌍오텔리 라는 본부에서 사람과 돈을 보내 어 이것을 경영한답니다. 대전쟁중에는 미국에 잇는 로마구교에서 돈을 대엇답니다. 로마법황에게 서 이것은 법국사람을 주고 원산( 元 山 )으로 가서 다시 긔초를 닥그라는 명령이 잇섯다 하니 이 덕 국촌이 얼마안가서 법국촌이 될듯합니다. 아즉은 덕국사람의 촌으로 잇는 이곳에 괴상야릇한 물건하나 잇습니다. 이것이 풍차( 風 車 )인줄 아는 사람은 덜어잇스나 무엇에 쓰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드믄 모양입니다. 아는 사람의 말을 들 은즉 이것이 무자위랍니다. 바람의힘을 리용하야 깁흔 움물에서 물을 자아올리는 신식 들에박이 랍니다. 세포( 洗 浦 )사람은 눈이 시도록 보는 것이지마는 서울서는 이 혜화동( 惠 化 洞 )것이 희귀한 명물노릇을 한답니다. 平 洞 -- 網 巾 房 새 문을 나서서 성을 끼고 북으로 돌면 놉다란 언덕우에 성황당가튼 외따른 집 하나가 잇지 아 니합니까. 평동 망건방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집도 여러번 집을 밧구엇겟지오마는 망건일하는 사람만 잇섯기때문에 년세로 보든지 꾸준한 것으로 보든지 평동 망건방을 명물에 빼일수 업습니 다. 망건은 명나라 물건입니다. 명태조( 明 太 祖 )가 텬자된 뒤에 어느 도관( 道 觀 )을 갓더니 어떤 도사 하나가 머리동이는 물건을 만들어 두고 쓰드랍니다. 이것이 망건력사의 첫 페지 이지오. 도사의 만든 것이 텬자의 위엄을 빌어서 하로 아츰에 텬하사람의 머리를 꼼작못하게 묵것답니다. 만만한 조선사람이라 할수업시 딸아 당하얏섯지오. 망건이 우리것도 아니오 편한것도 아니겟지마는 세월이 오램으로 자연히 정이 들어서 머리가 압흐지만 모자를 밧구지안는 이도 잇습니다. 제머리는 깍거 버리고 남만 골리려고 중대강이로 망 건을 뜨고 안즌사람도 잇습니다. 이 집주인은 중대강이나 아닌지오
248 二 村 洞 -- 水 害 명물명물하니 이촌동의 수해처럼 유명하고 지긋지긋한 명물이 어대 잇겟습니까. 이촌동! 하면 세상사람은 벌서 장마때 수해나는 곳인 줄을 련상합니다. 말슴마십시오. 해마다 수해라면 지긋지긋합니다. 심솔 사나운 싯벍언 흙탕물이 추녀끗까지 몰려 들어와서 참혹히 죽어 떠나려가는 사람, 집을 떠내보내고 의지가지업서 쏘다지는 비ㅅ속에서 주 리고 벗은 몸을 떨고잇는 사람, 모든 참혹한 광경이 눈압헤 선합니다. 수해도 한두번이지 이촌동 의 수해처럼 해마다 당하는 수해야 넓은 텬하에 또 어대 잇겟습니까. 조선사람이 사천명이나 사는 이촌동에 이러케 해마다 수해가 나서 인축의 사상과 피해가 적지 아니하되 아즉도 완전한 뚝( 堤 坊 )하나 업습니다. 구룡산 원뎡( 舊 龍 山 元 町 ) 일본사람들 사는 곳에는 경성부에서 수백만원 돈을 들이어 뚝을 완전히 싸하 한달 장마가 저도 꼼짝 안하게 하야노코, 떠 나가고 남은 이촌동의 움막살이들은 올여름에 비가오면 또 물야단이 나겟습니다. 명물이라니 말이지 이런 끔찍한 명물이야 또 어대 잇겟습니다. 昌 成 洞 -- 썩 은 다 리 백이( 伯 夷 )는 개결하기 짝이업는 이라 탐천( 貪 泉 )물을 마시지 아니하고 증자( 曾 子 )는 효성이 출 텬한 이라 승모리( 勝 母 里 )를 들어가지 아니 하얏답니다. 그러나 샘이야 무슨 험이 잇스며 동리야 무슨 죄가 잇겟습니까. 이름지은 사람의 심사가 고약할 뿐입니다. 서십자각 모퉁이에서 륙상궁을 바라보며 올라가려면 영추문을 막 지나서 돌다리가 하나가 잇습 니다. 튼튼하고 보기 조흐나 썩은다리라는 이름을 갓기 때문에 창성동 명물이라 합니다. 이름은 썩은다리라도 누가 보든지 성하니까 곤닭의 알지고 성밋 못가는 사람도 맘노코 다닌답니다. 삼각뎡 굽은다리는 곳고도 굽다는 이름을 엇고, 창성동 썩은다리는 성하고도 썩엇다는 이름을 어덧습니다. 과부설음은 과부가 안다고 두 다리를 한데 모아 노흐면 설은 사정이 만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리 미테는 병아리 죽은것, 강아지 죽은것 가지각색 썩은 물건이 떠날 때가 업서서 그런 이름을 어덧답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씻고 까불을 뿐이지 다리야 무슨 잘못이 잇겟습니다. 崇 一 洞 -- 앵 도 밧 옥창앵도오견화( 玉 窓 櫻 桃 五 見 化 ) 님 못본지 다섯 해라 놀애가락에 올른 앵도꼿이 꼿으로는 보 잘것이 업습니다. 옥련몽 보신 이는 알으시리다. 양창곡이 집안식구가 각기 자기 맘에 드는 꼿을 주어댈 때 어느 계집아이년 대답이 앵도꼿이 조타고 하지 안핫습니까. 왜 조흐냐? 꼿에다가 힘을 다 들이지 아니하고 열매를 꼿보다 더 조케 맷는다고 하얏다지오. 닙사귀로 꼿보다 조키는 서리마즌 단풍닙이요, 열매로 꼿보다 조키는 앵도열매가 아닙니까. 그 럿키에 시짓는 사람, 그림그리는 사람의 조흔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푸른 입미테 붉은 구슬가튼 열매가 달린 것을 생각만이라도 해봅시오 시꺼리, 그림꺼리 못되겟습니까. 게다가 옥가튼 손으로 따는 것까지 너허보면 맛이 더 잇겟지오. 서울안의 앵도꼿은 송동이 뎨일이라. 앵도철에는 송동에 오고가는 사람이 끄치지 안습니다. 녜 전 송동이 지금 이름으로 숭일동이랍니다. 대한 이라는 나라이름이 조선 으로 변한 오늘날에 동 리 이름인들 거저 잇슬리가 잇겟습니까
249 新 橋 洞 -- 宣 禧 宮 이 선희궁( 宣 禧 宮 )은 장조황뎨사친( 莊 祖 皇 帝 私 親 ) 영빈 리씨( 映 嬪 李 氏 ) 궁이랍니다. 궁이라니 그 량반이 궁에 나와서 지내든 것이 아닙니다. 사가로 말하면 사천모양으로 범백일용을 모다 이궁에 서 바치든 것입니다. 한업시 불상하신 자뎨님을 두신 어머님이라 이 량반도 여간 불상한 량반이 아니랍니다. 등창으 로 돌아간 것만 보아도 가슴에 싸힌 슬픔과 뼈속에 사모친 한이 어떠하얏든 것을 생각할 수 잇지 오. 슬픈 명정이 유경원( 綏 慶 園 )을 향한 뒤로 이 궁은 폐하얏답니다. 영친왕이 태중에 잇슬 때에 순헌귀비( 淳 獻 貴 妃 )가 꿈에 영빈을 뵈엇는데 폐한 궁을 다시 만들어 달라고 말슴하드랍니다. 그리고 영친왕이 나니까 명명중 도으신 은혜와 력력하게 부탁하신 말슴 을 생각하야 태황뎨께 엿줍고 이 궁을 다시 만들엇답니다. 세상이 꿈입니다. 어느듯 다시만든 이 궁이 지금은 맹아원( 盲 兒 院 )이 되엇답니다. 순헌귀비도 이 세상을 떠난지 오래니 꿈에 뵈옵든 영빈을 모시고 지내일 것가트면 꿈가튼 세상 일을 눈물석거 말슴할 것입니다. 玉 川 洞 -- 硯 滴 橋 명물이란 명짜가 이름 명짜가 아닙니까. 명물에는 이름뿐인 명물이 알짜 명물이랍니다. 옥천동 연뎍교는 실물로는 맹량하나 명물로는 상당하지오. 지금 잇는 뛰엄다리 돌맹이가 전에는 복판에 구멍이 나서 한귀로 통하얏섯드랍니다. 흘러오는 산골물이 풍풍거리며 복판구멍으로 들어가서 한귀구멍으로 쫄쫄 흘러 빠지는 것이 마치 연뎍 갓 기 때문에 이 돌을 밟고 지나는 사람마다 연뎍교 연뎍교 하얏드랍니다. 언제부터 깨어지고 떨어 져서 연뎍 가튼 형테가 업서젓는지는 모릅니다 마는 이름은 지금까지 전합니다. 이름만 남앗스니 알짜 명물이 아닙니까. 연뎍교는 잇든지 업든지 흘르는 물은 옥가티 맑습니다. 이름모르는 푸른새가 날라오고 날라갑 니다. 문인묵객의 흥치나게 되엇지오. 언덕은 업슬망정 벼루물은 좃습니다. 그러나 경치는 실물이 라 아모리 조트라도 지금 명물노릇하는 연뎍교가티 이름만 남은 알짜명물이 아니기에 다 말슴아 니합니다. 麻 浦 洞 -- 麻 浦 마포는 속명으로 부르면 삼개라고 합니다.삼개는 룡산서 보면 물 알에요 서강( 西 江 )서 보면 물 우입니다. 그전에 대동배 올라다닐제 룡산에 경상도, 충청도, 물우 경긔도 배가 와서 닷고 서강에 황해도, 전라도 물알에 경긔도 배가 와서 닷섯는데 삼개에는 와서 닷는 배가 업섯드랍니다. 삼개는 녜전 이야기나 잇서야 명물갑슬 올릴 터인데 원수에 잇서야지오. 녜전 이야기야 잇겟지 요 마는 원수에 알아야지오. 탈낫습니다. 탈이 낫다니까 물탈로는 알지 마십시오. 몃백호가 물란 리를 맛나는 것이 탈이 아니겟습니까 마는 명물인 우리 삼개를 자미잇게 아야기하지 못하는 것이 탈입니다. 새가 날려면 날개를 옴으리는 모양으로 짭짤한 이야기가 나오려니까 숭거운 말이 만습니다. 소
250 곰배도 여긔와 닷고 새우젓, 조긔젓 잔득 실은 배들이 빈틈업시 들어서면 온동리 사람은 맨밥만 먹어도 숭거운 줄을 모른답니다. 그러타고 삼개에 사는 사람들은 충주 자린곱으로는 알지 마십시 오. 짜듸짠 이야기를 짜고짜서 내는것이 요뿐입니다. 社 稷 洞 -- 社 稷 壇 우리 조선 태조( 太 祖 )께서 즉위하신 이듬해에 도읍을 한양에 명하시고 또 그 이듬해에 사직을 세우고 춘추로 제향을 지내게 하셧답니다. 이 사직이 잇는까닭에 동리 이름을 오늘날까지도 사직 골이라고 불르게 되엇드랍니다. 사직은 단( 壇 )이 둘인데 주위( 主 位 )로는 각각 석주( 石 主 )를 모셧습니다. 동편에 잇는 것이 사( 社 ) 라는 것이니 후토씨( 后 土 氏 )로 배위를 삼고 서편에 잇는 것이 직( 稷 )이라는 것이니 후직씨( 后 稷 氏 ) 로 배위를 삼앗답니다. 이 사직의 력사로는 자미잇는 이야기꺼리 될만한 것이 업습니다. 그러하니까 자미업는 것이나 마 하나 적어보겟습니다. 선조( 宣 祖 )때 가을제향을 지내려고 관헌이 들어가보니 후직씨 위패가 업 서젓드랍니다. 갑작이 차wmf 수도 업고 맨들 수도 업서서 허위( 虛 位 )에 제향을 지낸뒤에 여러가 지 수단을 다 부려서 차저본즉 위패가 사직단근처 어느 나무미테 무쳣드랍니다. 채근해본 결과 수복이가 사직서( 社 稷 署 )관원을 모함하려고 훔쳐다 무든 것을 알고 그 수복이를 대역률로 죽엿답 니다. 이야기는 숭겁지마는 고만입니다. 樓 上 洞 -- 白 虎 亭 址 루각골 막바지에 백호뎡이라는 사뎡( 射 亭 ) 터가 잇습니다. 락산 청룡뎡터, 새문안 황학뎡터에 활 시위 소리가 끈허진 뒤에도 이 백호뎡터에는 갓금 가다가 관혁에 살맛는 소리와 지화자 소리가 석겨 들렷섯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바위우에 섯는 소나무의 바람소리가 들릴 뿐입니다. 그전의 사뎡주인은 활량 들이엇습니다. 활량은 근년의 무관학도와 비슷한 것이니 사뎡을 구식 사격장이라고 할 수 잇슬 듯합니다. 하여튼지 활량 이 업는 세상에 사뎡이 잇서 무엇하겟습니까. 지금도 활쏘는 이들은 덜어 잇스나 이것은 운동으로, 소일로, 쏘는 것이니까 그전 활량 들처럼 무 기( 武 技 )를 공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녯날에 가장 유력하든 병장긔 활이 지금 반 작난감밧게 아니되니 녯일을 밀우어 지금 일도 알 지오. 만국공법이 대포한방만 못하다는 대포도 지금 활신세가티 될 날이 잇슬 것입니다. 벌서 살 인광선이니 무엇이니 발명되엇다는 것을 들으면 그날이 그리 멀지도 안흘 것 갓습니다. 그날이 오면 오늘 룡산 텬병장가튼 것이 루각골 백호뎡터가티 쓸쓸하게 될 것입니다. 峴 底 洞 -- 刑 務 所 현뎌동에는 다른 동리에 별로 업는 형무소라는 무서운 명물이 잇습니다. 형무소라는 말은 시테 말이고 녜전 이름은 감옥소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무엇이 불행하니 무엇이 불행하니 한들 형무소 안에서 고생하는 사람들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이 어대 잇겟습니까. 그네들도 어머니 배속에서 나올제야 나도 한번 세상에 나아가서 복잇고 팔자조케 떵떵거리고
251 살아보려고 나왓겟지오마는 어찌어찌하다가 고만 그러케 자긔몸하나 맘대로 가지지 못하게 되고 굿게 다친 쇠문, 놉히 싸흔 벽돌담 속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보낸답니다. 세상에 사람으로 태여나기는 일반이엇만 어떤 사람은 팔자 조하 고량진미에 실증이 나서 자동 차 타고 산보다니고 어떤사람은 먹고 입을 것 업서 목구멍이 원수라 맘을 잠간 이상히 먹고 무엇 을 어쨋다가는 감옥소 콩밥에 머리가 세이게 됩니다 그려. 세상은 밤낫 경찰서니 감옥소니하는 살풍경한 세상이니 말하면 무엇합니까. 언제나 한번 세상 이 화평하야저서 경찰서니 감옥소니 하는 무서운 물건이 업서질는지오. 弼 雲 洞 -- 돌 거 북 필운동 돌거북은 녜부터 유명합니다. 지금은 통칭으로 필운동이라고 합니다마는 돌거북이 잇는 곳은 거북골이라 하얏지오. 단청한 집을 지어서 이 명물을 그안에 위하야 노코 복비는 사람들이 절을 시작하면 끗이 업섯드랍니다. 이왕은 령검하얏다는데 돌거북도 늙엇든지 빈 절만 얼마밧다 가 차차 절이 줄어지며 산수병풍을 치게 되엇답니다. 등우에 비ㅅ물 박엇든 흔적이 잇스면 비바침이라고 하겟는데 아조 흠업는 등어리니 이것은 분 명아니지요. 거북을 돌로 새겨서 길가에 노핫스니 이무슨 까닭입니까. 이전에 경회루( 慶 會 樓 )압 련 못에 돌거북이 잇섯는데 임진왜란때 경회루에다가 암만 불을 질러도 타지를 안트랍니다. 이 무슨 조화가 잇는가 하야 련못속을 뒤저서 돌거북을 끌어내니 그때에야 불이 붓드랍니다. 필운동 돌거 북이 경복궁안 돌가북이 아닌지 모르지오. 명물은 명물이나 래력이 불명하니 불명할스록 별별 와 전이 만습니다. 들은 말은 만치오마는 돌거북이 말하기 전에는 언제든 의심만 납니다. 需 昌 洞 -- 內 需 司 수창동 내수사는 업서진지 오래입니다. 오즉 녯대문이 남아잇고 녯현판이 달려잇슬 뿐입니다. 내수사 안 움물이야 참으로 유명하지오. 체증 잇는 사람이 이 동리에 와서 얼마를 지내면 약 먹 을 것업시 속이 시원하다합니다. 내수사라는 것은 궐내에서 소용되는 쌀, 포목, 다른 잡색 물건과 남녀 노비까지 마튼 데드랍니 다. 우리는 후생이라 녯일을 자세히는 모르나 구실 하나를 다니드라도 내수사가 무던히 움푹한 데드랍니다. 만사가 창상( 滄 桑 )이라 내수사는 대문이나마 남앗습니다마는 자최도 차질 수 업게 된 데가 얼마인지 모르지오. 대신집 큰 잔치에는 장악원에서 악공이 나오고 내수사에서 교자가 나왓지오. 태평세월 조흔 때 에 내수사, 장악원이 어대 가든지 조흔 짝이드랍니다. 명동에 잇는 동양텩식회사 집이 장악원 녯 터인데 자최나 잇습니까. 그러나 내수사 대문이 알음이 잇다 하면 남아잇는 그 한이 오작 하겟습 니까. 물은 어느 때든지 새 물이라 이 한 저 한 몰르겟지오. 물까지 한이 잇스면 먹어선들 시원하 겟습니까. 貞 洞 -- 西 洋 人 村 처음 서양사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는 썩 오래전 일입니다. 로마구교 선교사들이 선교하러 들어온 것이 그 시초라고 합니다. 선교사가 중국으로부터 들어와서 몰래 몰래 선교하다가 대원군
252 때에 와서 한번 몹시 서리를 마젓답니다. 그뒤 얼마 지나지 안하서 세상이 변하야 은자국( 隱 者 國 ) 별명을 듯든 우리나라가 외국과 통상됴약을 맷게 되어 서양사람이 우리나라 안에서 맘을 턱노코 돌아다니게 되엇습니다. 우리조선에 영환지략( 瀛 寰 志 略 )이란 책과 곤여전도( 坤 與 全 圖 )라는 디도나마 본 사람이 만치 못 하얏슬 때 우리사이에 서양사람에 대한 별 웃으운 이야기가 돌아다녓답니다. 추어 말하면 양대 인, 낫비 말하면 생국놈 들은 꽁지가 잇다고도 하고 연어새끼가 사람된 것이라고도 하얏섯드랍니 다. 별별 이야기가 다 만흐나 지금 생각나는것은 모두 길어서 손을 대지못하고 내버립니다. 서양사람이 만히 모여사는 데가 서울 안에는 정동입니다. 정동거리를 지나자면 류리창 열린 곳 에서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고 뜰나무 별려선 사이에 사옷( 紗 衣 )자락이 날립니다. 이것은 참 서 양사람의 촌이로구나 하고 누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諫 洞 -- 宮 人 家 녜부터 동양시인은 궁인을 두고 지은 글이 만습니다. 어려서 깁흔 궁중에 들어가서 봄바람 가 을달에 설음이 몸과 가티 자라는 그들이라 그 정경이 글에 올으면 곱고도 깁흔 정한( 情 恨 )이 한업 시 일어납니다. 뎨왕( 帝 王 )의 한번 불음을 바라고 일생을 거울 압헤서 녹이어버리는 그 설음을 생 각하면 정만흔 시인이 심상하게 볼수 업습니다. 바람이 허사라도 그 임검이 계신 때면 혼자 안저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깨닷지 못하 는 사이에 의지가 되어 오히려 설음이 덜할 것입니다. 한울가티 미덧다가 꿈가티 여인 뒤에 그 설음이 어떠하겟습니까. 간동 골목안에 새로지은 두집이 잇지오. 이 집은 다 - 태황뎨 계실 때 궁 중에 잇든 궁인의 집이랍니다. 지날 때마다 그들의 설음을 한번씩 생각하야 봅니다. 은총( 恩 寵 )을 못입엇다 하드라도 그 설음이 깁흐려든 갓가이 모시든 궁인이면 더욱이 어떠하겟습니까. 우리는 시인이 아닙니다마는, 이 몃줄을 보시고 늣기시는 이가 잇다하면 이 몃줄도 시노릇을 할것입니다. ( 諫 洞 朴 漢 錤 ) 水 下 町 -- 日 人 貧 民 窟 수하뎡에는 일본사람의 빈민굴이 잇습니다. 진고개 구경하고 오는 길에 들어가보면 빈민굴인 것이 분명합니다마는 보통 조선사람 사는 것만 보든 눈에는 빈민굴이라면 쇠통 고지 들리지 안흘 만큼 훌륭합니다. 형무소( 刑 務 所 ) 안에서 무서운 나으리 노릇하는 간수( 看 守 )들도 이 안에 만히 살고 창덕궁( 昌 德 宮 )이나 총독부( 總 督 府 ) 가튼데서 출입하고 관람하는 사람들을 총찰하는 수위( 守 衛 )들도 이 안에 만히 산답니다. 이 안에 사는 사람중에는 지금 이러한 조흔 구실 가진 이들이 만히 살뿐 아닙니 다. 장래에 큰 부자사람도 생길 것이오 큰 공명할 사람도 생길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기게 하느 라고 인심조흔 조선사람이 죽을 지경이랍니다. 조선사람으로는 빈민굴이라고 하기 황송한 이 빈민굴에는 집이 여러 채가 잇고 집한 채에 여러 가구가 산답니다. 여러 집들을 지은 재목은 대개 새 재목이 아니오 헌 재목인데 헌 재목으로는 훌륭합니다. 이런 조흔 재목이 어대서 나온 것이냐 하면 다 - 경복궁( 景 福 宮 ) 대궐안에서 뜨더낸 것이랍니다. 물론 경복궁이 이 빈민굴집 지으라고 뜻긴 것은 아니겟지오? ( 水 下 町 尹 熹 )
253 崇 二 洞 -- 自 動 車 修 繕 工 場 ( 京 城 工 業 社 ) 뿡뿡거리면서 부연 몬지를 제 키보다 왕존장치게 일으키는 자동차야말로 참 긔운조코 위풍잇는 물건이지오. 병에는 장사가 업나 봅듸다 숭이동에 자동차 수선공장이라는 자동차병원이 잇지 안 습니까. 이것만 보아도 병에는 장사가 업는 것입니다. 이 공장은 서양사람의 공장인데 조선사람과 일본사람 심부름군도 잇다고 합니다. 무쇠힘쭐 돌 몸으로 병업슬 건축이랍니다. 이 동리는 한가하고 정결한 동리이라 구경하려도 업슬 곳인데 골고 로 가티 당하라고 자동차 수선공장인지 병원인지 청하지 안흔 손처럼 어느 겨를에 와서 잇습니 다. 가튼 자동차 몬지라도 여긔 오는 자동차 몬지는 제 몸의 왕존장은 되지 못하지오. 탕자음부를 밤낫업시 더리고 다니는 것을 보면 자동차도 여간 부랑자가 아닙니다. 부랑객들이 남을 꼬이어 내려면 단꿀가튼 말이 여간 만치안컷마는 이 부랑객은 아느니 뿡뿡 소리뿐인데 한번 만 가티 다녀보면 밤낫업시 홀리니 이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자동차의 병은 이 집에서 고치려니 와 탕자들의 집 망하고 몸 망할 큰병은 어대가야 고칠는지오. 中 林 洞 -- 天 主 敎 堂 서울서 텬주교당 하면 대개는 종현 뾰죽집으로만 녀깁니다. 그러나 새문밧 중림동에도 텬주교 당이 잇습니다. 텬주교당은 종현 작은 집폭밧게 아니됩니다. 내 동리 명물에 큰집을 빼고 작은집 을 너흔것은 큰집의 안진 자리가 명물 골르는 됴건에 맛지안는 까닭이랍니다. 이왕 큰 집이 빠젓 스니까 이 작은 집이 큰 집의 대표가 되엇습니다. 종현교당이 대표가 되고보면 의례히 조선안 모 든 텬주교당의 대표가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이 중림 교당이 내동리 명물중에서 우리 조선 안 모든 텬주교당의 대표가 되엇습니다. 조선대표 텬주교당 이야기로는 전조선 텬주교 력사가 가장 상당할 것이오 텬주교 력사로는 피 흘린 력사가 가장 귀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텬주교가 우리조선에 들어와서 피흘린 이야기를 하렵 니다. 처음 피흘리기는 순조 원년( 純 祖 元 年 ) 일이랍니다. 그때 피흘린 사람중에 우리 조선사람으로 는 리가환( 李 家 煥 ) 리승훈( 李 昇 薰 ) 뎡약종( 丁 若 鍾 ) 가튼이가 유명하고 외국사람으로는 청국인 주문 모( 周 文 謨 )가 유명합니다. 그뒤 태황뎨 삼년에도 만흔 사람이 피를 흘렷는데 유명한 조선사람은 남종삼( 南 鍾 三 ) 리신규( 李 身 逵 ) 홍봉주( 洪 鳳 周 ) 가튼이요 외국사람은 법국선교사 십여명이 잇섯답 니다. 崇 四 洞 -- 月 沙 舊 基 월사라는 량반은 삼백년이전 명망잇든 대신입니다. 풍신 조코 글 잘하고 문벌 숭상할 때 처디 까지 명문인 까닭에 더욱이 인망이 놉핫드랍니다. 지금 총독부의원 동팔호텔 뒤에 일본 사람의 화초 심그고 채소 길르는 밧이 잇습니다. 아모리 우거진 입사귀와 버든 덩굴이 온밧을 덥헛다 하 야도 이 밧이 월사의 구긔( 舊 基 )인 것은 가리지 못하야 명물에까지 올르게 되엇습니다. 우리 조선은 단엽홍매( 單 葉 紅 梅 )가 업드랍니다. 월사가 중국사신을 갓다가 명나라 임검에게 단 엽홍매를 어더가지고 와서 뜰압헤 심엇는 이 홍매의 자손이 거의 월사 후예 만치나 번성하야 명 예잇는 종족이 각처에 피젓섯답니다. 이밧 어느땅에 이 홍매를 심엇섯든지 전일을 물을 곳이 업 습니다마는 이밧은 일부가 꼿밧이라 지금 꼿을 보니 녯생각을 아니할 수 업습니다
254 구긔말이 낫스니 말입니다. 우리는 어쩌한 일인지 녯량반의 구긔를 보면 한업는 늣김이 잇습니 다. 작은 구긔 큰 구긔 구긔란 구긔를 다 찾기 전에는 이 늣김으로나 문서대신 품속에 품어둘가 합니다. 通 義 洞 -- 東 拓 舍 宅 동텩인지 도척인지 하는 회사가 어떤 의미로 조선의 명물이라 하면 그회사 사람들이 들어잇는 동 사택이 우리 통의동의 명물이라 하면 좀 창피는 하지마는 당연하다고 할수밧게 업습니다. 그네들은 불상한 소작인의 땀으로 지은 농사와 채무자들의 바치는 돈을 힘안들이고 바다서 이 러케 훌륭한 집을 짓고 산답니다. 이런 집들 때문에 남부녀대하고 사랑하는 고국을 떠난 사람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이 집에 들 어잇는 사람들을 살리노라고 조석을 걱정하면서 거리로 방황하는 형뎨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이 러케 의리가 업는 일을 하는 것들은 속히 물리처 우리 동리의 이름과 가티 의에통 하고 리치에 사 모칠 날이 언제 잇슬는지오. 더운날 속상하는 말은 구만두고 웃으운 이야기나 하나 합시다. 이 사택중에는 들기만하면 상처 하는 흉가가 잇다고 하야 그예 헐고 말앗답니다. 소작인에게는 영악한 그네들도 미신에는 설설 긔는 모양입니다. ( 通 義 洞 吳 八 龍 ) 梨 花 洞 -- 長 生 殿 녜전부터 임검이 즉위하는 날 곳 재궁( 梓 宮 )을 만들어서 해마다 칠을 하는 법이 잇섯습니다. 재 궁이라면 얼른 알기 어렵지오. 임검의 관( 棺 )이 재궁이랍니다. 중국 한나라쩍에 관은 도성 동쪽에 집을 짓고 너허 두엇섯는데 그뒤에 대개는 이 전례를 조차서 우리나라도 재궁 두는 집을 서울 동 쪽에 지엇섯습니다. 이 집에 재궁만 두는 것이 아니라 판재가 한업시 만핫습니다. 궐내 소용도 하고 대신이나 대신이하에도 큰 공로가 잇는 량반이 돌아가면 전교가 나서 이 집 에 잇는 판재가 나리엇답니다. 이 판재를 동원부긔( 東 園 副 器 )라고 하지오. 동쪽이라 동원이오 여벌 것이라 부긔랍니다. 근세에도 조충정, 민충정이 다 - 이 판재에 누어 계시답니다. 만사가 모다 변천한 오늘날 이집은 녜턴듯 그대로 잇습니다. 해마다 칠하는 전례도 아즉까지 변하지 아니하얏습니다. 밧긔 검은 칠은 아모나 다 하야도 안의 붉은 칠은 재궁 이외에는 못하는 법 이엇섯는데 지금은 안칠까지 하는 자가 만습니다. 이야기는 이때껏 하얏는데 정작 말할 것은 이젓습니다그려! 이 집은 리화동에 잇는 장생뎐이야요. ( 梨 花 洞 具 仁 洙 ) 西 界 洞 -- 편 쌈 터 서계동에는 굴개라는 유명한 편쌈터가 잇습니다. 편쌈터가 명물에 올르게 되엇스니 편쌈 이야 기나 하겟습니다. 서울서 편쌈터로 유명하기는 이 남대문밧 굴개 이외에 서소문밧게 녹개천이 잇 고 새문밧게 모화관이 잇고 동대문밧게 무당개울이 잇고 공덕리도 잇고 또 동대문안 조산도 잇습 니다. 종친부 개천가 편쌈터는 폐한지가 오래라 아는 사람도 지금은 드믑니다. 인제는 유명한 편쌈군 애기를 해보겟는데 허락마튼 지면이 얼마 못되니 들은대로 성명이나 적 겟습니다. 편쌈은 녜전 전쟁실습이라 이알에 나오는 사람은 말하자면 명장깜들입니다. 인사동 사
255 람으로 리호보( 李 虎 甫 ) 문성문( 文 聖 汶 )이, 김수동( 金 壽 同 )이, 사직골 사람으로 손개똥이 서석길( 徐 石 吉 )이 김만쇠 윤수복( 尹 壽 福 )이, 관골 사람으로 리흥문( 李 興 文 )이 홍진흥( 洪 鎭 興 )이, 우대사람으로 태곰보 최명길( 崔 命 吉 )이 윤희영( 尹 熙 永 )이 손천만( 孫 千 萬 )이고, 강태진( 姜 泰 鎭 )이는 왕십리 사람, 박산흥( 朴 山 興 )이는 남문밧 사람이드랍니다. 하도일( 河 道 一 )이는 편쌈꾼 대접 잘하기로 유명하얏고 길한영( 吉 漢 永 )은 편쌈부치기 잘하기로 유명하얏답니다. 이 역시 편쌈 력사에 닛지못할 사람들입 니다. ( 西 界 洞 老 將 軍 ) 苑 南 洞 -- 捲 草 閣 중궁뎐( 中 宮 殿 )에서 태긔가 계시면 산실청( 産 室 廳 )이 안찌오. 세자가 나십니다 그려. 태는 태봉 ( 胎 封 )에 뭇고 거적 자리는 권초각에 둡니다. 태가지고 태봉에 가는 직임을 안태사( 安 胎 使 )라 하고 거적을 거더서 권초각에 갓다 두는 직임을 권초관( 捲 草 官 )이라 하얏답니다. 여간으로 이런 직임을 하겟습니까. 디위도 놉하야 하려니와 복수가 조하야 한답니다. 원남동 명물로는 우에 말슴한 권초각이 잇습니다. 태봉 다음에는 이 집도 소중한 데랍니다. 권 초각은 지금도 대궐서 관할하는 집이라 이 집에 딸린 작은 항랑채 가튼 집들은 대개 녯신하의 가 난한 이들이 들어 잇고 권초각 압마당에는 저녁때면 서늘하기 때문에 늙은이 젊은이가 만히 모인 답니다. 권초각을 보시럅니까. 종로서 뎐차를 타고 종로 사뎡목 네거리에서 나리지 안습니까. 본뎡으로 가시지 말고 창경원 가는 길로 올라가시다가 왼손편쪽 셋재 골목으로 들어서서 물을 것 업시 족 음만 가면 권초각이라고 쓴 현판이 보이지오. 하도 더우니까 참말 차저가시기는 어렵습니다. ( 苑 南 洞 韓 秉 俊 ) 忠 信 洞 -- 白 菜 圃 배채 별명으로 배추는 원래가 중국 북방에서 나든 물건인데 우리 조선으로 들어오고 또 일본으 로 건너가서 오늘날까지 동양에 넓히 퍼지게 된 것이랍니다 중국 땅에서 나는 종류로는 산동배 추, 지부배추, 만주배추, 금주배추 가튼 등속이 잇는데 그중에 산동배추가 가장 유명하고 우리 조 선것으로는 송도배추, 일본것으로는 나가사끼배추가 각기 뎨일 간답니다. 배추는 채소중에 뎨일 조흔 것인데 그것을 화학뎍으로 분석하면 성분( 成 分 )이 알에와 갓답니다. 수분( 水 分 )이 백분에 오십구콤마 팔십구요 추한 단백질( 蛋 白 質 )이 일콤마 이십륙이요 추한 지방질 ( 脂 肪 質 )이 공콤마 팔이요 녹을 만한 무질소물( 無 質 素 物 )이 역시 공콤마 공팔이요 회분( 灰 分 )이 공 콤마 오십구랍니다. 되지 못한 줏들을 과학지식을 내노타가 수분이니 회분이니 일콤마니 공콤마 니 적기가 성가십니다. 서울안 배추밧 이야기나 적겟습니다. 그전 서울안 배추밧으로는 방아다리와 훈련원벌이 유명한 곳입니다. 훈련원밧은 지금 거의 업 서지다 십히 되고 방아다리만 남은 모양인데 방아다리 배추밧이 다른 것이 아니라 곳 이 충신동 명물입니다. ( 忠 信 洞 金 亨 濟 ) 內 資 洞 -- 內 資 寺 내자시라 하면 알으시는 이가 대개 적을것 갓습니다. 업서지든 해 는 사람이 지금 서른살된 사
256 람보다 열세해가 우입니다. 자연히 우리 귀에 설지 안흘 수 업지오 대궐안에 술, 기름, 국수, 지렁, 꿀, 실과, 나무등속을 내자시에서 바치는 법이랍니다. 녯적은 이 대문안이 들석들석 하얏답니다. 내자시는 업서젓스나 그 집은 그저 잇서서 세상이 이러케 된 뒤에 여러 사람의 세ㅅ방이 되엇답 니다. 양말짜는 사람도 잇섯는데 지금은 떠낫지오. 과부설음은 동무과부가 아는 법이라 내자시 엽 헤 잇는 장흥고( 長 興 庫 )가 설어한다면 가티 설어할 것입니다. 자미는 업슬지 모르나 내자시 력사말슴이나 하려합니다. 고려 목종( 高 麗 穆 宗 )때 태관서( 太 官 署 ) 를 처음 두엇섯는데 충렬왕( 忠 烈 王 )이 이를 고치어 선관서( 腺 官 署 )라 하고 공민왕 때에 돌우 태관 서가 되엇다가 또다시 선관서라고 하얏섯지오. 나라이름 고처진 뒤에 선관서가 내자시로 변하얏 스니 이는 태종때 일이랍니다. 樓 下 洞 -- 쌈 지 시골 어떤 량반이 무엇 가튼 것이란 말을 어찌 잘하든지 제사ㅅ날 하인을 시켜서 장흥정을 하 러 보냇는데 북어가튼 것, 전복가튼 것을 사오라고 하얏드랍니다. 진실한 하인이라 가튼 것을 종 일 차자 다니다가 쌈지가 전복 갓고 갓모가 복어가튼 것을 보고 두 가지를 사왓드랍니다. 지금 루하동 명물의 쌈지 이야기를 하자니까 이 생각이 먼저 납니다. 루하동은 전날 유각골 이랍니다. 유각골하면 누구든지 쌈지장사 만흔데로 알지오. 이제와서는 이 노릇도 세월이 업답니다. 이 사진에 박힌 로인이 쌈지장사로는 썩 오랜 령감인데 비단쌈지 잘 만들기로 유각골서도 뎨일이랍니다. 동그러타고 동그래 쌈지요 병부쪽 갓다고 병부 쌈지요 손에 쥔다고 쥔 쌈지요 비빈 쌈지는 노끈 쌈지랍니다. 이중에 비단 쌈지가 뎨일 조치오. 뎨일 조흔 것 을 뎨일 잘 만드는 이 로인은 명물중에 더욱 더욱 명물입니다. 쌈지나 갓모나 한데서 만들 것만 갓모는 명물차지를 못하지오. 쌈지는 늘 차는 것이나 갓모야 늘 씁니까. 갓모는 별 이름이 업스나 쌈지 이름이야 여간 만흡니가. 또 북어가 어찌 전복을 당합 니까. ( 樓 下 洞 李 雲 坡 ) 中 學 洞 -- 舊 中 學 중학다리( 中 學 橋 ) 중학동( 中 學 洞 ), 녜전에 중학이 이곳에 잇섯든 표적입니다. 녜전 중학은 지금 중학교와 가티 중등정도 학교란 말이 아니오 서울 중부에 잇는 학교란 말이랍니다. 도텽도설로 전하는 소리를 들으면 국초쩍에 정도전( 鄭 道 傳 )이란 이가 이 중학터를 잡앗는데 현송( 絃 誦 )소리가 끈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하얏답니다. 이 예언이 도텽도설일망정 과히 헛 말은 아니든지 중학이 업서진 뒤에 중교의숙( 中 橋 義 塾 )이란 강습소 비슷한 학교가 생겨서 이 집안에서 낫에는 에이, 삐 와 아이우에오 오이는 소리가 나고 밤에는 성학즙요( 聖 學 輯 要 ), 대명률( 大 明 律 ) 읽는 소리가 낫섯드랍니다. 이 강습소 가튼 학교가 업 서진 뒤에는 또 관진학교( 觀 鎭 學 校 )라는 얼치기 소학교가 생겨서 곤니찌와, 재왈 하는 소리에 이 집이 떠들석 하얏드랍니다. 얼치기 소학교 업서진지가 벌서 언제인지 몰를만치 오랫건만 그 뒤를 이어 생기는 학교는 업고 묵은집 넓은 대청만 적적하게 남아 잇답니다. 이 중학터가 오백여년이나 묵엇스니 인제는 명긔가 다 빠젓는지 몰르지오. ( 中 學 洞 中 學 生 )
257 桃 花 洞 -- 煉 瓦 工 場 서울안에 양제집이 겅성드믓한 오늘날 벽돌 맨드는 공장이 업시 될 수가 잇습니까. 그래서 새 문밧 도화동에 련와공장이 생겻습니다. 도화( 桃 花 )에는 힌꼿 피는 벽도도 잇것마는 보통 도화라 하면 붉은 빗을 생각하고 벽돌에도 여 러가지 빗이 잇것마는 보통 벽돌이라 하면 붉은 빗으로 녀깁니다. 벽돌맨드는 공장이 도화동에 안즌 것은 벗어도 어울린다고 할 수 잇슬듯 합니다. 이 도화동 련와공장에서 로동하는 직공들은 다른 공장 직공과 다릅니다. 붉은옷 입은 직공들입 니다. 붉은 옷입는 직공들이 붉은벽돌 만드는 것도 역시 빗으로 어울린다고 할수 잇습니다. 이 붉 은 옷입은 직공은 두 사람이 한데 쇠사슬을 매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물론 일할 때는 쇠사슬이 풀립니다. 그러나 총든 사람이 망대우에 서고 칼찬 사람이 뒤를 딸은답니다. 직공중에는 딸아지 신세 직공들입니다. 이중에는 붉은 염통의 끌는 피를 눈물삼아 뿌릴 뜻잇는 사람이 덜어 잇슬 것 입니다. 이것은 빗으로 어울린다기가 참아 어려워 고만두겟습니다. ( 桃 花 洞 梁 光 烈 ) 蓮 池 洞 -- 개구리 소리 련못골 하면 명물이 나무신이 될 줄 아시지오. 아닙니다. 좀더 좌뜬 명물입니다. 동리 이름에 꼭 들어맛는 명물입니다. 이 명물이 무엇이냐. 개구리 소리라는 명물입니다. 요새가튼 여름철 비 지낸 저녁이나 달밝은 밤에 한번만 련못골 오서서 요란한 개구리 소리를 들어보시면 나무신가튼 명물을 제치고 명물노릇할만한 갑을 대강 짐작하시리다. 그전에는 이 련못골에 큰 련못이 잇섯드 라니 그 때쯤은 파궈 놔눠 합창소리에 귀가 따거웟슬 것입니다. 개구리 소리를 잘 들어주기로 유명하든 사람은 진( 晉 )나라 필탁( 畢 卓 )이랍니다. 이 술군 천명한 이는 이 소리를 삼현륙각 맛잡이로 들엇답니다. 개구리소리를 잘못들어 주기로 유명한 사람은 고 려( 高 麗 ) 강감찬( 姜 邯 贊 )인가 합니다. 이 이인( 異 人 )별명 듯는이는 소리듯기가 성가시다고 부적으로 벙어리 개구리를 맨들엇답니다. 진나라 혜뎨( 惠 帝 )라는 이는 개구리소리를 들으면서 엽헤 잇는 사람에게 저것이 관사( 官 事 )로 우느냐 사사로 우느냐고 물엇답니다. 이것은 잘 들어준 것도 아니오 잘못 들어준 것도 아니오 이 명물갑만 울리는 이야기 거립니다. ( 蓮 池 洞 林 奉 洙 ) 義 州 通 -- 독갑이골 우리 조선에 떠도는 독갑이 얘기는 만습니다. 그러나 독갑이를 본 사람이 흔치안흔 까닭으로 독갑이는 업는 것이라고 되지못한 과학지식을 내세우는 사람이 업지 안습니다. 그런 사람을 가르 처 주랴면 언제 심령학( 心 靈 學 )이 발달되기를 기다릴 수 잇습니까. 의주통 독갑이골로나 더리고 가보지오. 구즌 비는 부실부실 뿌리고 밤은 들어 사방이 고요한데 독갑이 골로 들어서면 난데업 는 키다리 장승이 우뚝우뚝 압헤 서서 가는 길을 막는 답니다. 이런 때는 섯불은 과학지식이 다 - 날라가고 등에 소름이 쪽쪽 끼치며 이마에 찬땀이 솟을 것입니다. 어둔 밤에 귀신이야기 마라 귀신이야기 하면 귀신이 온다는 녯사람의 말을 올케 녀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사람이 몰 려와서 살기 시작한 뒤로 독갑이골 독갑이도 잘 나서지를 안는다니 일껀 더리고까지 갓다가 허행 할까보아 걱정이 됩니다. 독갑이 잇슬만한 데를 갈 때는 왼손 바닥에 주사로 聻 자를 쓰고 주먹을 쥐고 가다가 독갑이를
258 보고 그 주먹을 펴면 독갑이가 내뺀답니다. 귀신이 죽으면 聻 가 되는 법이라 사람이 귀신 무서 워하는 것처럼 귀신이 聻 를 무서워 한답니다. ( 義 州 通 一 丁 目 趙 重 立 ) 孝 子 洞 -- 內 侍 중국으로 말하면 통지( 通 志 )가 잇지오마는 우리나라도 읍지( 邑 誌 )가 잇습니다. 읍지에는 유명한 루대( 樓 臺 )와 특별한 풍속을 다 쓰지오. 더욱이 그 땅에서 난 인물을 중요하게 긔록하는 법입니다. 녯 자하ㅅ골이 지금 효자동 아닙니까. 효자동 인물지( 人 物 誌 )를 만들랴면 내시( 內 侍 )를 뺄수가 업 지오. 다시 말하면 효자동 주인은 곳 내시입니다. 내시네중에 유명한 인물이 만트랍니다. 몃사람의 조치못한 이름도 잇섯지오마는 근일에 보아도 태황뎨 말슴만 하면 고만 눈물이 쏘다 지는 이들이 만탑니다. 홍택주( 洪 宅 柱 )씨의 행검과 김한정( 金 漢 貞 )씨의 문학과 황윤명( 黃 允 明 )씨의 절조가 다 - 각각 이름이 잇는데 저 눈물은 다가티 흐른답니다. 그러나 이네는 오히려 예사사람 들이라 내시의 대표뎍 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열다섯 해 전에 교하( 交 河 ) 삽다리에서 배갈라 돌아 간 반학영( 潘 學 榮 )씨야말로 굉장한 량반이지오. 그 이름이 우리 민족과 가티 길을 것입니다. 절 조하하면 자하ㅅ골 사느냐 말은 실업슨 말입니다. 승전색( 承 傳 色 )이 전교를 전하는 까닭에 절을 만히 바덧섯지오마는 조하한다는 말은 맹랑한 말입니다. 松 月 洞 -- 月 巖 새문밧게서 독립문쪽으로 가면 석다리 북쪽으로 큰 바위가 들여다 보이지오. 이 바위는 얼룽바 위라고 불르는데 얼룽은 와전이오 원이름은 월암이랍니다. 월바위가 얼룽바위로 되기도 어찌 생 각하면 그럴듯 합니다. 그러자니 이 얘깁니다. 적에 올가티 가믄 때면 명산대천에 긔우제를 지 내고 또 광통교 미테서 도롱룡에게 제사를 지내드랍니다. 그 축문은 간단하지오. 척석척석 홍운 토무 여듧자인데 척석은 도롱뇽이오 홍운토무는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란 말이지오. 그런 데 다리미틀 누가 잘 들어갑니까. 탁배기잔이나 자신 구중네들이 철석철석아 흠을흠을해라 이러 케 맹랑하게 읽드랍니다. 척석이 철석이 되는 것을 보십시오. 월바위가 얼룽바위되기가 어려울 것 이 잇습니까. 이름 이야기가 넘우 길엇습니다. 그러나 다시 또 말슴할 것이 잇습니다. 이 바위에 월암동이라 는 세 글자가 잇는데 시속글시가 아닙니다. 녯적 어떤 운치잇는 이의 자최 갓습니다. 그 글시만 하야도 얼룽바위는 명함도 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 松 月 洞 鄭 宗 洙 ) 光 熙 町 -- 파 리 광희뎡사람 말이 내동리 명물은 파리라. 어느집을 가보든지 사람의 집이라느니 보담 파리의 집 이라고 하는것이 상당할 만큼 파리가 숫하게 만타고 합니다. 파리는 추한 곳에 만히 생기는 물건 이니 파리를 명물로 내세우는 것은 동리가 추하다고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이 업습니다. 못된 바 람 부는 곳에 무슨 조흔 명물이 차저 가겟습니까. 파리가 느진 가을에 알을 배고 그대로 과동을 한답니다. 봄새 날이 따뜻하야지면 일백사오십개 새끼파리를 낫는데 그 새끼파리가 얼마 동안만 지내면 또 알을 배게 된답니다. 그래서 봄에 처음 으로 세상에 나온 암파리 한마리가 가을까지 가면 칠십구억 사천백이십칠만 가량되는 파리의 조
259 상할미가 된답니다. 이 파리가 만일 잡히지도 안코 죽지도 안코 몃해동안만 지내면 이세상은 파 리의 물건이 되고 말것입니다. 세계에 파리만키로 뎨일 갈만한 곳은 아마 압록강건너 안동현인가 합니다. 안동현 거리를 지내 가자면 거리의 몬지가 떼를 지어 날릅니다. 이 몬지는 참말 몬지가 아니오 파리가 몬지를 뒤어 쓴 것입니다. 광희뎡 파리쯤은 아마 명함도 못들일 줄 압니다. ( 光 熙 町 尹 基 炳 ) 蛤 洞 -- 春 香 숙종대왕 즉위초 전라좌도 남원( 全 羅 左 道 南 原 ) 퇴기 월매의 꼿가튼 딸이 서울 삼청동 리승지댁 옥가튼 도령님과 삼생연분을 굿게 매즌 뒤에 송죽가튼 그 절개가 몹슬 풍상을 격글스록 더욱이 굿고 변치 아니하야 꼿다운 이름을 후세에 전하게 되엇답니다. 춘향전 뒤풀이는 아니하는 것이 똑똑한 일이지오 고만 두겟습니다. 춘향의 사실이라고 전하는 말을 들으면 춘향이란 계집애가 텬하박색이라 시집을 가지 못하고 죽엇는데 원한이 구텬에 사모쳐서 남원에 비가 오지 아니하야 큰 한재가 들엇드랍니다. 그래서 춘향전을 지어서 한풀이를 해주엇더니 비가 왓다고 합니다. 지금 합동에 춘향이 하나가 잇는데 조막손이 거지랍니다. 바퀴달린 궤짝 속에 들어안저서 사내를 시켜 밀리고 이집저집 다니며 한푼 두푼 엇는답니다. 이 춘향이를 위해서 글 잘하는 분이 새 춘향전 한권을 지어두면 몃백년 뒤에 꼿가튼 춘향이가 또하나 생길것 갓습니다. 리도령의 성춘향이가 참말 박색이든 것으로는 밋지를 마십시오. ( 蛤 洞 李 道 令 ) 橋 南 洞 -- 대 장 깐 교남동에 대장깐 하나가 잇습니다. 이 대장깐은 언제 시작한 것인지 동리 로인들도 아는 이가 업답니다. 이 대장깐 주인은 우리 동리에서 윤대장이라고 유명합니다. 더운 날이나 치운 날이나 족음도 구별업시 풀무 압헤 안저서 벍어케 단 쇠에 무거운 마치를 먹인답니다. 이 로인은 열다섯살 되는 소년으로 대장일을 시작하야 칠십 로인이 되도록 한결가티 손에 마치 못이 빠진적이 업답니다. 이 로인 말이 자긔가 대장일을 시작할때 이 근처의 호수( 戶 數 )가 얼마 아니 되엇다고 합니다. 지금 교납동 로인들중에 이 대장깐 시작하는 것을 본사람 업는 것이 괴상 할 것 업습니다. 임오년에 구군총 란리, 갑신년에 개화당 란리, 갑오년에 동학당 란리, 을미년에 경복궁 란리, 을 사년 오됴약 소동, 뎡미년 칠됴약 소동, 경술년 합방 소동, 긔미년 만세운동 세상에는 이런 란리 저런 소동이 만핫건만 이 로인은 한결가티 뚝딱뚝딱 소리로 날을 보냇답니다. 이러케 세상을 지 내온 로인이것만 세상이야기가 나면 한숨을 쉬고 눈물까지 먹음을 때가 잇답니다. ( 橋 南 洞 姜 順 五 ) 冷 洞 -- 休 紙 都 家 장안안 물은 오간수로 빠지지오. 휴지란 휴지는 랭동 휴지도가로 대개 들어간답니다. 집은 족으 마한 초가이나 휴지장사로는 뎨일 큰 장사의 집입니다. 휴지를 무엇하러 삽니까. 도배의 초배도 하고 신 만드는데 속창 넛는 백비도 하지오. 그러나 뎨일 만히 소용되는 것은 물에 풀어서 다시
260 조히 뜨는 것이랍니다. 이 휴지속에 귀중한 책도 만히 들어가서 업서저 버리엇습니다. 몬지 뭇고 좀먹은 남저지가 혹 력사의 큰 자료가 되것마는 팔아먹는 사람이 몰르고, 사서 파는 사람이 몰르니 초배감, 백비감, 조히 뜰 감밧게 더 될수 잇습니까. 이것으로 보면 이 휴지도가에서 우리 녯문명의 자최가 얼마쯤 업서젓는지 알수 업지오. 지금은 이 도가에서 한탄이 갓금 난답니다. 간지휴지, 락복지는 말할 것도 업거니와 백지쪽 구 경도 할수 업수니 쪽쪽 찌어지는 조히쪽이라 무엇을 하든지 조치못한 까닭이랍니다. 뉘집 뉘집하 는 녯집에서 간간 뭉텅이로 쏘다저 나오는 것이 이 도가의 요용거리가 되지오. ( 冷 洞 金 宗 洙 ) 貫 鐵 洞 -- 東 床 廛 여보 이 량반 무엇을 사료. 갓, 망건, 탕건 다 여긔잇소. 안경을 사료 풍잠 관자를 사료 무엇을 사료. 이 량반 이리 갑시다. 이편에서 이러케 불르면 저편에서 또 불릅니다. 이것을 여리라고 하 고 이 노릇하는 이를 여리꾼이라고 하지오. 불르는 대로 딸아가 보면 동쪽은 동상전이오 서쪽은 서상전이드랍니다. 이전 저전 할것 업시 풍파를 격고 난 뒤로 녯 형모가 만히 변하얏지오. 동상전 은 아즉도 녯 현판을 걸고 녯 장사를 하는 까닭에 명물로 뽑히게 되엇답니다. 한가지 다른 것은 여리꾼의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안코 각 신문의 광고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상전( 床 廛 )이라는 것은 지금 잡화상과 갓습니다. 동서상전은 우에도 말하얏거니와 이외에도 남 쪽상전은 남문을 발아본다는 뜻으로 발알망 문문 망문상전이라고 하지오. 수동 건너라고 수진상 전이랍니다. 여리꾼이 물건을 주서 세이듯이 상전을 세이고 나니 별자미는 업습니다마는 상전 력 사로는 업지 못할 것입니다. ( 貫 鐵 洞 林 浩 俊 ) 長 沙 洞 -- 妙 心 寺 장사동 골목으로 뺑뺑 돌아 들어가면 긴 담이 잇지오. 이 긴 담이 둘리인 속에는 일본사람이 지은 묘심사( 妙 心 寺 )라는 절이 잇습니다. 법당 뒤에는 선방( 禪 房 )이 잇답니다. 이 절을 처음 지을 때 김운양( 金 雲 養 )이 상량문을 지엇지오. 이 글을 본 사람은 이 절 이름을 생각할 것입니다. 화개동 꼭대기에 복주움물이 잇지 안습니까. 임오군란때 곤뎐( 坤 殿 ) 민비께서 피란하시든 집 터 에다가 비를 세우랴고 뎐각까지 지어 노핫섯지오. 이 뎐각을 헐어다가 이 절을 지엇답니다. 들어 누은 이 비ㅅ돌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고, 꿀어안즌 저 중들은 이 때에도 더위를 몰른답니다. 선방이라는 데는 말을 아니하는 법이지오. 일본 중들이 구걸다닐제 보면 딱딱 뚜드리기만 하지 안습니까. 선방 생각을 하니 일본 중들 구걸하는 모양이 보이는 것 갓습니다. 길로 다니면서도 선 ( 禪 )공부를 하는 그들이라 선방 속에서는 어떠케 하는지오. ( 長 沙 洞 好 古 生 ) 紅 把 洞 -- 뎐 내 집 눈이란 것은 긔막히게 무서운 요술꾼입니다. 이것이 재주를 부리면 못하는 것이 업는 모양입니 다. 시비흑백( 是 非 黑 白 )을 혼동해서 구별업시 맨드는 것은 례사하는 짓이오 올흔 것을 글으게, 힌 것을 검게 맨들어보기도 일수합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 눈가튼 요술꾼은 다시 업슬 것 갓습니
261 다. 이세상은 사람다운 눈으로 보면 사람사는 세상이지오마는 파리란 놈 눈에는 파리세상으로 보일 는지도 모르고, 개눈에는 똥세상으로 보일는지도 모릅니다. 멀정한 이세상을 귀신세상으로 보는 사람이 잇습니다. 이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귀신인지 또는 귀신을 팔아먹는 사람인지 이것은 똑똑 이 몰르니 부질업시 말할 수 업습니다. 이 귀신세상으로 보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간곳마다 귀신이 잇답니다. 산천이나 목석에는 말할 것도 업고 집에는 터주, 성주 집속에도 부억에는 부억귀신, 뒤깐에는 뒤깐귀신 보통 이름만 주어 대도 뜬 것, 물귀신, 원귀, 아귀, 무명손각씨, 동자보살, 뎡신, 호구별성 가진각색 것이 다 잇답니 다. 이 홍파동 명물은 이런 귀신세상에 사는 사람의 집이랍니다. 唐 珠 洞 -- 와 다 시 당주동 명물은 와다시 입니다. 와다시 가 무엇인고. 이상히 생각하시겟습니다마는 알고 보면 당 주동 이십팔번디 항랑방에 사는 리경선( 李 慶 善 )의 별명입니다. 당주동에 명물로 와다시 가 들엇스니 그까짓 것이 무슨 명물인가하고 의심하실 이도 업지 안켓 지오마는 옥인동 아방궁이 명물이오, 경운동 민영휘씨집이 명물에 들엇스니, 당주동 와다시 는 빼 어놀 수 업는 명물입니다. 다른 동리 명물은 집이 커서 명물이오 돈이 만하서 명물이오 력사가 잇서서 명물이지마는 와 다시 는 돈업서 명물이오 술 잘먹어 명물이오 그 계집이 못나 명물이오 배ㅅ심 조하 명물입니다. 이사람의 직업은 막벌이꾼인데 하로에 밥 세끼는 못 먹어도 넉넉히 견대지마는 술 한잔 업서서는 못사는 사람이오. 텬하에 못낫다는 놈이 만흐되 와다시 가 못낫다면 큰일날 사람이외다. 하로에 십전 벌어서도 술! 일원 벌어서도 술! 술만 먹으면 안하에 잘난 놈이 업고 부자 놈이 업습니다. 술만 먹으면 나밧게 업다하야 와다시 라고 이름을 지엇답니다. ( 唐 珠 洞 金 永 根 ) 通 洞 -- 林 檎 園 서울서 능금밧으로 유명하기는 창희문 밧깁니다. 창희문밧게 사는 사람은 요맘 때가 되면 손에 돈푼이나 쥐게 됩니다. 창희문 밧글 가보면 이 모퉁이 저모퉁이 모다 능금밧입니다. 참말 유명한 능금ㅅ곳이란 다르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송동의 앵도밧보담 더 만흐면 만핫지 적지는 안흘 것입 니다. 경능금 즉 서울 능금은 창희문밧 능금이 아니오 통동 능금이랍니다. 이 통동에는 능금밧이 한 군대 뿐이것만 능금은 서울서 대표가 될만큼 폼이 조트랍니다. 그래서 그만흔 창희문밧 능금을 이 얼마 안되는 통동 능금만치 못녀겻답니다. 량( 量 )보다 질( 質 )을 더 숭상하든 세상에서는 그러한 것이 예사 일이엇겟지오. 창희문 밧게서는 여전히 능금이 만히 나고 이 만흔 능금으로 여러 사람들이 벌어먹고 사는데 지금 이 통동 능금밧은 일본 사람의 물건이 되엇답니다. 경능금 이란 말까지 아는 사람이 드물게 되엇습니다. 질을 량보담 더 숭상하면 이런 폐가 흔이 생기는 모양이야요. 그러기에 지금 세상은 질을 량보담 더 숭상하지 안흐랴고 한답니다. 이런 의미로 보면 통동 명물 능금밧은 참말 력사상 명물밧게 아니됩니다
262 鍾 路 -- 蠟 石 塔 명물 명물하니 서울안 명물에 탑골공원 납석탑이야 뺄 수가 잇습니까. 이 탑은 고려 충렬왕비 ( 高 麗 忠 烈 王 妃 ) 원( 元 )나라 공주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만흐나 그 반대 로 우리 조선에서 맨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잇습니다. 이 탑을 원각사탑( 圓 覺 寺 塔 )이라고 하는 것은 세조대왕 구년에 이 탑골에 원각사라는 절을 지엇 섯든 까닭이랍니다. 원각사는 중종때 헐어서 반정공신들의 집을짓고 탑만 오늘까지 그자리에 남 아 잇답니다. 아니 원각사 비도 남아 잇습니다. 이 탑 우의 세층을 나려 노흔 것은 임진란에 일본 병뎡이 가저 가랴고 나려 노타가 무거워 고 만두엇다고 합니다. 전하는 말이니까 꼭 미들 수는 업숩니다. 갑오년이후에 어느 일본사람 개인이 훔처가랴고 한일도 잇섯습니다. 이 탑의 자매탑( 姉 妹 塔 )이 잇습니다. 이것은 풍덕( 豊 德 ) 경텬사탑( 敬 天 寺 塔 )입니다. 이 탑은 년전 에 궁내대신 뎐중( 田 中 )이란 이가 집어갓습니다. 지금도 일본 뎐중의 뜰 구석에 서 잇슬 것입니다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渡 變 峻 現 代 銀 行 勞 動 東 京 大 月 書 店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銀 行 新 報 關 東 渡 變 峻 現 代 銀 行 勞 動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相 互 銀 行 計 數 集 計 ꌞ ꌞꌞ ꌞ ꌞꌞ
緊 張 冷 戰 體 制 災 難 頻 發 包 括 安 保 復 舊 地 震 人 類 史 大 軍 雷 管 核 禁 忌 對 韓 公 約 ㆍ 大 登 壇 : : : 浮 上 動 因 大 選 前 者 : : : 軸 : : : 對 對 對 對 對 戰 戰 利 害 腹 案 恐 喝 前 述 長 波 大 産 苦 逆 說 利 害 大 選 大 戰 略 豫 斷 後 者 惡 不 在 : : 對 : 軟 崩 壞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第 6 條 ( 壹 株 의 金 額 )..
제 정 1973. 2. 28 개 정 2010. 3. 19 定 款 삼성전기주식회사 http://www.sem.samsung.com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Readings at Monitoring Post out of 20 Km Zone of Tokyo Electric Power Co., Inc. Fukushima Dai-ichi NPP(18:00 July 29, 2011)(Chinese/Korean)
碘 岛 监 结 30km 20km 10km 碘 达 碘 测 时 提 高 后 的 上 限 [250,000 微 西 弗 / 年 ] [10,000 微 西 弗 / 年 ] 巴 西 瓜 拉 帕 里 的 辐 射 (1 年 来 自 地 面 等 ) > 辐 射 量 ( 微 西 弗 ) 250,000 100,000 50,000 10,000 注 : 本 资 料
<4D6963726F736F667420576F7264202D20313030303931302D3242463531B27BA6E6A6D2BBCDA8EEABD72DBEC7BEA7A558AAA9AAC02E646F63>
前 1 前 言 現 行 考 銓 制 度 一 現 行 考 銓 制 度 對 人 事 行 政 的 重 要 性 : 強 烈 建 議 考 人 事 行 政 的 同 學 們, 一 定 要 精 讀 現 行 考 銓 制 度! 熟 讀 現 行 考 銓 制 度 的 好 處, 可 以 從 以 下 幾 個 角 度 來 分 析 : 相 對 重 要 程 度 高 : 現 行 考 銓 制 度 在 人 事 行 政 三 個 主 要 等
POWERSHELL CONTROLLER + BATTERY Setup Guide English............................... 4 繁 體 中 文.............................. 12 한국어............................... 20 www.logitech.com/support................
건강증진 시범보고서 운영을 위한 기술지원 연구
짧활 康 t합샤훌 示 範 띔 健 所 運 營 응 위한 技 術 支 援 웹 JE - 示 範 保 健 所 模 型 開 發 을 中 心 으로l' 鍾 和 李 順 英 鄭 基 뽑 編 著 韓 國 띔 健 社 會 댐 究 院 머 리 말 美 國 이나 日 本 등 先 進 國 의 경우 이미 1970년대 부터 人 口 의 高 敵 化 와 生 活 樣 式 의 變 化 에 기인한 成 人 病 증가와 이에
한류동향보고서 26호.indd
Story Story 2013. 1. 30. Story 2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3 STORY STORY 12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3 Korean Wave Story 2013 (2012년 1/4분기) 12 12 2012. 4. 9. 2 3 4 5 6 乱 世 佳 人 花 絮 合 集 梦 回 唐
國 統 調 9 0-1 2-1 0 7 南 北 韓 社 會 次 化 力 量 綜 출 評 價 統 院 調 査 硏 究 室 책 을 내 면 서 南 北 韓 이 分 斷 以 後 각기 相 反 된 政 治 理 念 과 政 治. 經 濟 的 制 度 에 토대를 둔 體 制 成 立 으로 相 異 한 社 會 文 化 를 形 成 해온 지도 벌써 4 5 年 이 지 났다. 이 기간동안 南 과 北 의 社 會
16 經 學 研 究 集 刊 特 刊 一 墓 誌 銘 等 創 作 於 高 麗 時 代 與 朝 鮮 朝 時 代, 此 是 實 用 之 文 而 有 藝 術 上 之 美. 相 當 分 量 之 碑 誌 類 在 於 個 人 文 集. 夢 遊 錄 異 於 所 謂 << 九 雲 夢 >> 等 夢 字 類 小 說.
經 學 研 究 集 刊 特 刊 一 2009 年 12 月 頁 15~36 高 雄 師 範 大 學 經 學 研 究 所 15 韓 國 漢 文 學 硏 究 之 最 近 傾 向 김동협 金 東 協 教 授 / Professor Kim Donghyub 摘 要 我 想 對 於 韓 國 漢 文 學 最 初 之 專 門 著 書 是 金 台 俊 之 >. 此 冊 刊 行 於
<C0BDBEC7B0FA2028BEC8B8EDB1E2292E687770>
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2002 年 2 月 昌 原 大 學 校 大 學 院 音 樂 科 安 明 基 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Sonata for B-flat
<C1A4C3A530302D31302DBFCFBCBABABB2E687770>
低 所 得 偏 父 母 家 族 의 生 活 實 態 와 政 策 課 題 金 美 淑 朴 敏 妌 李 尙 憲 洪 碩 杓 趙 炳 恩 元 永 憙 韓 國 保 健 社 會 硏 究 院 머 리 말 배우자의 사별, 별거, 이혼 등으로 초래되는 偏 父 母 家 族 은 産 業 化 의 진전에 따른 개인주의 팽배로 이혼이 증가하였고 經 濟 危 機 로 인한 가 족해체가 확산되어 최근 증가 추세에
완치란 일반인들과 같이 식이조절과 생활관리를 하지 않아도 다시 통풍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의 통풍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로릭과 진통 소염제로 버텼는지 이제 저한테 하소연 하시고 완치의 길로 가면 다. 어렵지 않습니다. 1 2015 11 10
완치란 일반인들과 같이 식이조절과 생활관리를 하지 않아도 다시 통풍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의 통풍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로릭과 진통 소염제로 버텼는지 이제 저한테 하소연 하시고 완치의 길로 가면 다. 어렵지 않습니다. 1 2015 11 10 # 2012 000081 1 000 95% 95% 60 5 B 507 070 4651 3730~4
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棄 権 DNS: 欠 場 ) 順 位 氏 名 記 録 順 位 氏 名 記 録 順 位 氏 名 記 録
중국기본고적 데이타베이스 기능수첩
중국기본고적고 사용설명서 1 로그인( 進 入 ) 1.1시작을 클릭하신후 왼쪽 프로그램에서 AncientBook 을 찾으신후, AncientBookClient 를 클릭하세 요. 1.2 服 務 器 (ip), 用 戶 名 (id), 密 碼 (pw)를 입력 후 진입( 進 入 ) 클릭하세요. 1-3. 아이콘 설명 : 메인페이지 : 최소화 : 화면 닫기 2. 검색( 檢
目 次 第 1 篇 1995 年 度 水 産 業 動 向 1 第 1 章 世 界 水 産 業 動 向 3 第 1 節 水 産 物 生 産 3 第 2 節 水 産 物 交 易 5 第 2 章 우리나라 水 産 業 動 向 7 第 1 節 漁 業 構 造 7 第 2 節 漁 家 經 濟 22 第 3 節 水 産 物 生 産 30 第 4 節 水 産 物 輸 出 入 40 第 5 節 水 産 物 需 給
211 1-5.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石 村 洞 百 濟 初 期 積 石 塚 이도학, (서울의 백제고분) 석촌동 고분, 송파문화원, 2004. 서울 特 別 市, 石 村 洞 古 墳 群 發 掘 調 査 報 告, 1987. 1-6. 고창지석묘군 高 敞 支 石 墓 群 문화재관리국,
210 참고문헌 1. 능묘 1-1. 경주황남리고분군 慶 州 皇 南 里 古 墳 群 경상북도, 文 化 財 大 觀, 1-V, 慶 尙 北 道 編, 2003. 문화재관리국, 天 馬 塚 發 掘 調 査 報 告 書, 1974. 1-2. 함안도항리 말산리고분군 咸 安 道 項 里 末 山 里 古 墳 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咸 安 道 項 里 古 墳 群 5, 2004.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Microsoft Word - km20020132.doc
經 營 學 碩 士 學 位 論 文 韓 國 船 舶 管 理 業 의 競 爭 力 提 高 와 國 際 市 場 進 出 方 案 에 關 한 硏 究 - 國 籍 外 航 船 社 의 船 舶 管 理 部 門 을 中 心 으로 - A Study on Competitiveness Analysis and Entries into International Market of Korean Ship Management
빈면
j 발ζ틸록번호 1 1 4 0 % 0 2 0 - m O O 4 4 - 이 연 구 보 고 2 0 0 2-0 1 I R 애싱 -대도시 징탄성매때지역 증싱으로 g 김승뀐 조애저 김유곁 손승영 한혀 결 김성아 ~잉 z -ι7 / v / ι ζ a Tι r 鉉 ; ιo t n ι a 톨 상r X a 흥 낀 ~ ~ r - * 서 7 A * r - 엉 뇨려 - r M W
한류동향보고서 16호.indd
Story Story 2012. 9. 13. Story 1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2 STORY STORY 12 호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2 Korean Wave Story 2012 (2012년 1/4분기) 12 호 12 호 2012. 4. 9. 2 3 4 5 轩 辕 剑 之 天 之 痕 我 的
다문화 가정 중학생의 문식성 신장 내용
교육연구 제58집 성신여대 교육문제연구소 2013년 12월 30일 2009 改 定 敎 育 課 程 에 따른 中 學 校 漢 文 敎 科 書 의 多 文 化 敎 育 에 對 한 一 見 이돈석 청주대학교 한문교육과 Ⅰ. 들어가는 말 Ⅱ. 한문 교과 교육과정 목표에 대한 검토 Ⅲ. 중학교 한문 교과서 분석 목 차 1. 재제 출전의 문제 2.. 교육 내용과 제시 방법의 문제
<3120B1E8B1D9BFEC2D31C2F7C6EDC1FD2830292DB1B3C1A4BFCFB7E12831707E292E687770>
Perspectives J of Oriental Neuropsychiatry 2012:23(1):1-15 http://dx.doi.org/10.7231/jon.2012.23.1.001 심신치유를 위한 불교의학, 사상의학, 한의학에서의 心 의 연구 김근우, 박성식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신경정신과 교실,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사상체질과 교실 The Study on
신계내과학(1).indd
腎 系 內 科 學 1. 腎 에 관한 역대 醫 論 簡 略 2 2. 腎 의 해부학적 인식 및 오행적 속성 7 3. 腎 의 생리적 기능 9 4. 腎 과 他 臟 腑 와의 관계 12 5. 命 門 14 6. 腎 膀 胱 의 病 理 16 7. 腎 病 의 辨 證 18 2 1 腎 에 관한 역대 醫 論 簡 略 1. 黃 帝 內 經 에서의 腎 현대 우리나라 한의학의 여러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지만 여기서 朝 鮮 思 想 通 信 이 식민본국과 피식민지 사이에 놓여 있는 재조선일본인의 어떤 존재론적 위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식민본국과 피식민지의 Contact Zone 에 위치한 재조선일본인들은 조선이라는 장소를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기
식민지의 목소리 - 朝 鮮 思 想 通 信 社 刊, 朝 鮮 及 朝 鮮 民 族 (1927)을 중심으로 鄭 鍾 賢 ( 成 均 館 大 ) 1. 伊 藤 韓 堂 과 朝 鮮 思 想 通 信 伊 藤 韓 堂 이 발간한 朝 鮮 思 想 通 信 은 1925 년에 발행을 시작하여 1943 년 그가 죽은 직후에 폐간될 때까지 대략 18 년 동안 간행된 조선문을 번역한 일본어 신문이다.
DBPIA-NURIMEDIA
環 境 論 序 즙닮따11) 盧 隆 많B* 目 次 ** I. 序 옳 11. 쩔 境 의 훌 味 와 영훌 境 問 훌훌 III. 훌 R홈 戰 흉의 理 훌웅 1. 變 動 (Change) 2. 행 衝 (Equilibrium) 3. 自 己 調 整 (Self-regulation) IV. - 般 理 짧의 檢 討 1. 體 系 理 論 (Systems theory) 2. 均 衛
620-001768 AMR-0216-A改字型.indd
Contents 內 容 목차 English Setup, 6 Features and troubleshooting, 10 繁 體 中 文 設 定,6 功 能 與 疑 難 排 解,22 6 34 한국어 설치, 6 기능 및 문제 해결, 46 Logitech TM Wireless Desktop MK300 User s guide Logitech TM Wireless Desktop
35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5권 1883.01.24 釜 山 口 設 海 底 電 線 條 欵 / 海 底 電 線 設 置 ニ 關 スル 日 韓 條 約 漢 日 1883.06.22 在 朝 鮮 國 日 本 人 民 通 商 章 程 / 朝 鮮 國 ニ 於 テ 日 本 人 民 貿 易 ノ
근현대 한일간 조약 일람* 22) 1. 조선 대한제국이 일본국과 맺은 조약 주) 1. 아래 목록은 國 會 圖 書 館 立 法 調 査 局, 1964 舊 韓 末 條 約 彙 纂 (1876-1945) 上 ; 1965 舊 韓 末 條 約 彙 纂 (1876-1945) 中 ; 外 務 省 條 約 局, 1934 舊 條 約 彙 纂 第 三 巻 ( 朝 鮮 及 琉 球 之 部
4최종-『食療纂要』에 나타난 消渴의 食治에 對한 小考_송지청, 김상운, 채송아, 엄동명.hwp
J. Oriental Medical Classics 2012:25(3)39-49 Orignal Article 食 療 纂 要 에 나타난 消 渴 의 食 治 에 對 한 小 考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원전학교실 1 ㆍ원광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2 ㆍ한국전통의학연구소 3 송지청 1 김상운 1 채송아 2 엄동명 1,3* 1) A Review on Thirst Disease
특수의약품 개발 및 수요전략- 現況및 問題點中心으로 -
휴훌혔k 폴홉 藥 ti 뷰5 훌훌 덤5 絲 뭘했필홈 짧 況 맡 閒 훌훌훌홉 中 心 으로 李 張 柳 構 끊 뾰 承 따 聊 美 歡 韓 國 保 傑 社 슬 ijf~~ 머 리 '01 E표 醫 藥 品 은 질병의 진단 및 치료에 필요한 基 本 的 인 保 健 醫 廳 資 源 으로서, 의약품의 원활한 공급은 훌? 廳 의 質 的 水 準 向 上 은 물론 나아가 國 民 健 康 :l:
歷史通識-眺望中國
左 傳 期 中 報 告 ~ 故 事 改 寫 ~ 燭 之 武 退 秦 師 系 級 : 中 文 三 學 號 :49111003 姓 名 : 江 俊 億 指 導 老 師 : 蔡 妙 真 教 授 燭 之 武 退 秦 師 ( 上 ) 星 垂 四 野, 薰 風 習 習, 大 地 一 片 寧 靜 ; 但 今 夜 鄭 國 的 國 都 - 新 鄭 似 乎 很 不 平 靜, 那 是 因 為 秦 晉 兩 大 強 國 的
항일 봉기와 섬멸작전의 사실탐구
抗 日 蜂 起 와 殲 滅 作 戰 의 史 實 探 究 - 韓 國 中 央 山 岳 地 帶 를 中 心 으로- 이노우에 가츠오( 井 上 勝 生 ) 1) 머리말 지난 해(2015년) 10월과 11월, 日 本 軍 東 學 黨 討 伐 隊 의 進 軍 路 를 한국의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조사할 수 있었다. 後 備 第 19 大 隊 (당시 東 學 黨 討 伐 隊 라고 불리었다) 第 1
需給調整懇談会の投資調整―石油化学工業を中心に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17 논문 5 朝鮮總督府의 臨時資金調整法 운용과 資金統制 박현 연세대학교 1. 머리말 1937 년 7 월에 시작된 中日戰爭은 전쟁 당사국인 일본뿐만 아니라 그 식민지인 조선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강화되고 전시 경제통제가
untitled
용역보고서 2000-22 社 會 脆 弱 階 層 의 健 康 增 進 을 위한 푸드뱅크 事 業 의 活 性 化 方 案 (The Food Bank Activation Programs for Health Promotion of Lower Income Classes) 鄭 基 惠 李 誠 國 金 貞 根 金 聖 卿 韓 國 保 健 社 會 硏 究 院 保 健 福 祉 部 머 리 말
<31312D3331BACFC1A4C0CFB1E22E687770>
北 征 日 記 신류 申 瀏 1619~1680 본관 평산 平 山 훈련원부정 삼도수군통제사 등 역임, 1658년 영장 領 將 으로 나선정벌 羅 禪 征 伐 신기석 역, ꡔ북정일기ꡕ, 탐구당, 1980 북정일기 북 정 일 기 北 征 日 記 포사수( 砲 射 手 ) 방포( 放 砲 ) 시재( 試 才 ) ꡔ북정일기ꡕ 무술 효묘 9년 순치15년 4월 初 十 日 晴 往 會 寧
DBPIA-NURIMEDIA
119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역사와 법* 60) 조시현** 목 차 Ⅰ. 들어가며 Ⅱ.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전개 Ⅲ.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법 적용의 의미 -역사와 법의 관계 1. 법적 책임의 전제로서의 사실에 대한 규범적 평가 2. 법을 둘러싼 진실규명의 필요성 3. 연속된 법의식의 회복과 미래 -피해자의 권리와 공동행동원칙의 정립 4. 국가책임의
<40BBE7BBF3C3BCC1FAC0C7C7D0C8B8C1F6284A53434D D312DBABBB9AE34C2F7C6EDC1FD2E687770>
Review Article J Sasang Constitut Med 2015;27(1):13-41 http://dx.doi.org/10.7730/jscm.2015.27.1.013 태음인ㆍ태양인체질병증 임상진료지침: 진단 및 알고리즘 이준희ㆍ이의주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사상체질과 Abstract Clinical Practice Guideline for Taeeumin
제141호 2005년 4월 1일(금) 學 術 院 소식 3월 임원회 개최 사위원회는 학술원 회원과 교수 등 관련 3월 임원회가 3월 4일(금) 오후 2시 학술 분야 전문가로 구성하여 4월 11일(월) 오 원 중회의실에서 임원 15명 전원이 참석한 후 2시에 제1차 심사위
2005년 4월 1일(금) 제141호 Monthly Newsletter from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Republic of Korea 발행인:대한민국학술원 회장 / 우 137-044 서울 서초구 반포4동 산94-4 / http://www.nas.go.kr / XXXXX / F XXXXX / 편집:학술진흥과 第 76 次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 관한 개략적인 소개가 있었지만, 1) 여전히 많은 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실정이다. 본고 또한 여전히 짧고 소략한 내용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39-44, 2008년 6월 Yonsei J Med Hist 11(1): 39-44, 2008 일반논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 신창희( 申 昌 熙 )의 생애와 활동 박 형 우(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홍 정 완(연세대 의사학과)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南 北 體 育 會 談 第 5 次 實 務 代 表 接 觸 會 議 錄 $은 幣 K7를구 淸 를9 를3 는r구# 國 土 統 - Q ( 漆 北 對 話 事 務 局 ) < 目 次 l - 般 事 項 l l l l l l l 3 l l l l l l l l l 3 2 會 議 錄 7 附 錄 : 代 表 團 記 者 會 見 9 7-7 - 린 一 般 事 項 가 日 時 :1990
3학년.hwp
창의적 체험활동 및 방과후학교 한자교육 실험용 교재 한자 자료를 펴내며 학생들은 를 학습하면서 수많은 들을 접합니다. 그런데 를 학습하다 보면, 때로는 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간혹 생소한 를 접하게 되어, 학습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를 학습하는 데에 있어서, 많은 를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 뜻을 정확하게
<3035B1E8BFECC7FC2E687770>
정신문화연구 2006 겨울호 제29권 제4호(통권 105호) pp. 119~148. 硏 究 論 文 주자학에서 혼백론의 구조와 심성론과의 관계 * 김 우 형 ** 1) Ⅰ. 서론: 귀신론과 혼백론 Ⅱ. 북송시대 주자학에서의 혼백과 귀신 Ⅲ. 주희 혼백론의 구조 Ⅳ. 혼백론에서 심성의 지각론으로 Ⅴ. 결론: 혼백론을 통해 본 주자학의 성격
한국 시장경제체제의 특질에 관한 비교제도분석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Working Paper Series 韓 國 市 場 經 濟 의 특질 - 地 經 學 的 조건과 社 會 文 化 의 토대에서- 이 영 훈 Working Paper 2014-07 Nov, 2014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31gil 5, Bongcheon-ro,
chr89-BRLeiJS.hwp
書 評 評 史 泠 歌 宋 代 皇 帝 的 疾 病 醫 療 與 政 治 ( 保 定 : 河 北 大 學 出 版 社, 2013 年, 393 頁 ) 作 一 結 合, 使 我 們 可 從 新 的 角 度, 對 歷 史 得 到 更 完 整 的 認 識. 要 研 究 醫 療 史, 首 先 作 者 必 須 具 備 相 關 的 醫 療 背 景. 然 而, 當 代 的 歷 史 研 究 者 多 缺 乏 醫 療
sme_beta[1](류상윤).hwp
1930년대 중소 직물업의 발흥과 그 배경 류상윤( 서울대학교대학원 경제학부 박사과정 수료) 1. 머리말 1960 년대 이후 한국은 고도성장을 경험하였다. 고도성장의 원인 또는 배경이 무엇이었는 지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하여 왔다. 그 중에는 해방 후의 경제성장을 식민지기 조선이 경험했던 것들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들도 있다. 이들은 각각 자본주의
<4D6963726F736F667420576F7264202D20B1E2C1B6B0ADBFACB9AE28B1B9B9AE29>
인류문화에 공헌하는 한국학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이성무 1. 국제정세의 변화와 한국학 한국학은 한국에 관한 인문사회과학적 연구를 말한다. 그런데 현대의 한국학은 한국이 세계 속에서 협력 경쟁하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국제정세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현대의 한국학은 인류문화에 공헌하는 한국학이 되어야 한다. 20 세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사적인 전환기가
NEX-VG10
4-258-761-33(1) Interchangeable Lens Digital HD Video Camera Recorder 操 作 指 南 CT KR 在 我 們 的 客 戶 支 持 網 站 可 以 查 詢 到 本 產 品 新 增 的 訊 息 和 日 常 問 題 的 答 案 E-mount 2010 Sony Corporation Printed in Japan NEX-VG10
98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주요어 : 농업기술, 농서집요, 농상집요, 수도, 휴한법, 연작법 1. 머리말 한국사에서 14세기는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국가 지배체제가 크게 격변한 시기였다. 고려말 고려 사회 내부와 외부에서 발생한 여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 염 정 섭** < 국문초록 > 15세기 초반 태종대에 만들어진 농서로 현재 農 書 輯 要 가 남아 있다. 이 농서는 元 代 의 農 書 인 農 桑 輯 要 를 抄 錄 하고 吏 讀 를 붙여 간행한 것이었다. 간행연대가 아직 불확실하지만 15세기 초반 태종대로 추정된다. 고려말
101-03.hwp
人 文 科 學 제101집 2014년 8월 漢 字 문자 그 이상의 상징 체계 Ⅰ. 서론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한자의 본격적인 개혁운동은 5.4 白 話 運 動 이 후 지식인들에 의한 표음문자화를 지향하는 漢 字 革 命 論 이다. 근대 알파 벳 문자를 이상적 원형으로 사유하는 서구학계의 깊은 인식론의 영향으로 1954년 中 國 文 字 改 革 委 員 會 성립 이후
<3030305FBAD2B1B3C7D0BAB837302E687770>
알라야 識 의 존재증명과 경량부(I) - 유가사지론 의 경우 권 오 민 경상대학교 철학과 교수 Ⅰ. 서언 Ⅱ. 알라야식의 존재증명과 경량부 1. 제1 依 止 執 受 證 2. 제2 最 初 生 起 證 과 제3 意 識 明 了 證 3. 제4 有 種 子 性 證 4. 제5 業 用 差 別 證 과 제6 身 受 差 別 證 5. 제7 處 無 心 定 證 6. 제8 命 終 時 識
<3429BFC0C1F8BCAE2E687770>
한국경제학보 제18권 제1호 The Korean Journal of Economics Vol. 18, No. 1(Spring 2011)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 吳 鎭 錫 ** 요 약 본고는 1940년대 전반 전력국가관리의 수립을 대상으로 정책 결정의 주체 에 주목하여 정책의 원안이 등장하여 최종안에 이르는 변천과정을 면밀하 게 분석한
<BBFDB8EDBFACB1B83232C1FD2D766572342E687770>
유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전 병 술 건국대학교 접 수 일 : 2011년 11월 6일 심사완료일 : 2011년 11월 21일 게재확정일 : 2011년 11월 23일 주제분류 동양철학, 유가, 종교학, 죽음학 주 요 어 삶과 죽음, 생명의 학문, 명( 命 ), 사생취의, 초혼재생 초 록 동양철학의 특질을 생명의 학문 이라 규정하는 견해가 있다. 생명의 학문
역대국회의원_PDF변환용.hwp
역대 국회의원 명단 당적표시는 당선당시(총선결과, 재 보궐당선, 의석승계) 소속정당을 나타냄. 제9 10대 국회의원의 당적중 국민회의 표시부분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선출한 국회의원임. 제헌국회 (당적은 당선당시의 당적임) 성 명 선 거 구 당 적 비 고 성 명 선 거 구 당 적 비 고 姜 己 文 산 청 無 所 屬 金 若 水 동 래 朝 鮮 共 和 黨
<B0EDBCBA20C0B2B4EB20B3F3B0F8B4DCC1F620B9AEC8ADC0E720C1F6C7A5C1B6BBE720BAB8B0EDBCAD28C3DFB0A1BCF6C1A4BABB292E687770>
固 城 栗 垈 2 農 工 團 地 造 成 事 業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2003. 11 慶 南 發 展 硏 究 院 歷 史 文 化 센터 固 城 栗 垈 2 農 工 團 地 造 成 事 業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Ⅰ. 調 査 槪 要 1. 調 査 目 的 고성군에서 추진중인 율대 농공단지 확장예정지에 대해 문화재보호법 제74-2와 동법 시행령 제43-2
20001031jc0inb001a.HWP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1 2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3 4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5 6 (2000
S. Y. Ryu et al 15 연구대상 및 방법 결 과 본 연구의 대상은 東 醫 壽 世 保 元 辛 丑 本 新 定 太 陰 人 病 應 用 要 藥 二 十 四 方 에 기재된 24개의 처방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제마 의 저서인 北 韓 保 健 省 간행 東 武 遺 稿, 東 醫
J Physiol & Pathol Korean Med 30(1):14~19, 2016 태음인 처방의 사상의학적 병리 연구 유승엽 최나래 오승윤 박수정 * 주종천 *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사상체질과 Study on the Pathology of Taeeumin Prescription in Sasang Constitutional Medicine Seung Yeob
8.김민희.hwp
食 이 깨달음에 미치는 영향 김 민희 * 1) 목 차 Ⅰ. 서 론 Ⅱ. 食 과 깨달음 Ⅲ. 精 進 과 食 Ⅳ. 결 론 *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강사. 食 이 깨달음에 미치는 영향 289 요약문 사람은 건강하며 행복한 삶을 원한다. 그러나 최근의 자연환경이나 불 규칙한 식생활, 인스턴트식품의 증가로 음식의 심각성은 식생활 자체의 불균형을 만들고 나아가서는 건강을
untitled
敦 煌 本 傷 寒 論 에 관한 硏 究 105) 대구한의대학교 한의과대학 병리학교실 1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2 박시덕 1 신상우 2 박종현 1,* The Study on the Donhwang Manuscript[ 敦 煌 本 ] Sanghallon( 傷 寒 論 ) Park Si-deok 1 Shin Sang-woo 2 Park Jong-hyun 1,*
Microsoft Word - BRHCCMLSDNIQ.doc
한류 가 대만의 한국어 학습에 미친 영향 곽추문( 郭 秋 雯 ) 대만국립정치대학교 한국어학과 1. 서론 2000 년 7 월 빠따 방송국( 八 大 電 視 台 )에서 드라마 불꽃 을 방영하면서부터 한국 드라마는 대만 시청자들의 관심과 열띤 토론을 이끌어 내기 시작했다. 이에 이어서 2001 년 2 월에 팔대방송국은 또 가을 동화 를 방영, 대만 유선방송 드라마
DBPIA-NURIMEDIA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 1) 명 경 일 ** 1. 머리말 2. 判 付 의 개념과 구성요소 3. 判 付 의 작성절차에 따른 서식의 변화 4. 맺음말 초록: 조선시대 주요 관아가 각자 맡은 업무에 관하여 국왕에게 아뢸 때 사용한 문서를 계 啓 라고 했다. 그리고 啓 에 대한 국왕의 처결을 判 付 라고 했다. 본 논문은 판부의 작성 절차와 서식을
DBPIA-NURIMEDIA
104 韓 國 禪 學 제36호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 김상일(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Ⅱ 목 차 Ⅱ Ⅰ. 시작하는 말 Ⅱ.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와 불교 관련 증서류 산문 Ⅲ. 불교적 가치관에 대한 비판과 유교 윤리 권면 Ⅳ. 유불 교유론 Ⅴ. 유불 조화론 1. 김수온: 唯 心 一 理 的 儒 佛 融 通 論 2. 성 현:
1-조선선불교의 심성이해와 마음공부.hwp
교육학연구 Korean Journal of Educational Research 제50권 제2호, 2012, pp.51-70 A Study on the Theory of Mind and Mind Practice in Korean Zen Buddhism -Focused on the Thought of Deuktong-Gihwa around the Idea of
untitled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 심리록에 수록된 사례를 중심으로 - 김 용 희 * 차 례 Ⅰ. 서 설 Ⅱ. 심리록에 나타난 지방관리들의 사법행정능력 1. 검험의 기준 2. 검험조서 Ⅲ. 심리록에 나타난 재판의 기본원칙 1. 관용의 원칙 2.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in dubio pro reo)
토픽 31호(2016.3.7).hwp
절실히 묻고 가까이 실천하는 선진 산림과학 3.0 시대를 열겠습니다! 01 03 05 05 06 07 08 08 10 10 11 임업인에게는 희망을, 국민에게는 행복을 带 NIFoS 1 중국 닝샤회족자치구() 중국 무슬림 인구 주요 분포도 중국 닝샤의 회족 자치구 3 중국 무슬림 인구 Top 11 지역 순위 지역( 省 ) 인구(만)
<5B323031345DB4EBC7D0BFE4B6F7283037332D30383229B1E2B1B82E687770>
2. 주요 보직자 명단 (2014년 4월 1일 현재) (1) 교무위원 총장 부총장(인사캠) 부총장(자과캠) 부총장(의무) 일반대학원장 학부대학장 유학대학장 문과대학장 법과대학장 사회과학대학장 경제대학장 경영대학장 자연과학대학장 정보통신대학장 공과대학장 약학대학장 사범대학장 생명공학대학장 스포츠과학대학장 의과대학장 예술대학장 기획조정처장 교무처장 학생처장 산학협력단장
<312D3034C1A4BFEBBCAD2E687770>
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Social Awareness and the Strengthening of Organization by the New faction of Chundogyo in the Early 1930s 1)정 용 서(Jeong, Yong Seo)** Ⅰ. 머리말 Ⅱ. 신간회 해소에 대한 인식 Ⅲ. 반종교운동에 대한 대응
199-224 서강건치.hwp
국 학 연 구 론 총 제 1 집 택민국학연구원.2008.6.30. 日 本 에 있어서의 韓 國 文 學 의 傳 來 樣 相 江 戸 時 代 때부터1945 年 까지 西 岡 健 治 * 1) 序 言 Ⅰ. 江 戸 時 代 에 읽혀진 作 品 들 Ⅱ. 1868( 明 治 元 ) 年 에서 1918 年 ( 大 正 中 期 )까지 읽혀지고 翻 訳 된 作 品 들 Ⅲ. 三 一 獨
7 청보 86. 3. 29( 對 삼성 )~4. 5( 對 빙그레 ) NC 13. 4. 2( 對 롯데 )~4. 10( 對 LG) 팀별 연패 기록 삼 미 18 연패 ( 85. 3. 31~4. 29) 쌍방울 17 연패 ( 99. 8. 25~10. 5) 롯 데 16 연패 ( 0
전반, 타격, 투수, 수비 진기록 전반 시즌 최고 승률 0.706 85 삼성 (110 경기 77승 32패 1 무) 기별 최고 승률 0.741 85 삼성 ( 전기 55경기 40승 14패 1 무) 시즌 최저 승률 0.188 82 삼미 (80 경기 15승 65 패) 기별 최저 승률 0.125 82 삼미 ( 후기 40경기 5승 35 패) 시즌 최다 승리 91 00
23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생각해야 한다는 제안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貫 井 正 之 씨는 豊 臣 秀 吉 의 대외적 인 정복의도 전반을 검토하고 책 이름에 海 外 侵 略 이라는 문구를 채택했으며( 豊 臣 政 権 의 海 外 侵 略 과 朝 鮮 義 兵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237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나카노 히토시( 中 野 等 ) 머리말 Ⅰ. 근세 전기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위치 설정 Ⅱ. 근세 후기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위치 설정 Ⅲ. 근대 일본의 성립과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¾ÕµÚ
KOREA-JAPAN ECONOMIC ASSOCIATION THE 38TH KOREA-JAPAN & JAPAN-KOREA BUSINESS CONFERENCE 2006. 5. 25 ~ 27 SAPPORO,JAPAN - 目 次 - Ⅰ. 團 長 團 禮 訪 活 動 3 Ⅱ. 共 同 聲 明 5 Ⅲ. 日 程 8 Ⅳ. 議 題 12 Ⅴ. 兩 側 代 表 團 名 單 13 1.
신안해저인양 고대선(新安海底引揚 古代船)의 학술적 고찰(學術的 考察)
職 員 教 育 教 材 88ᅳ5 集 新 安 海 底 引 揚 古 代 船 의 學 術 的 考 察 崔 光 南 1988. 11. 문화재청 자료실 WM»II» 圖 1111 痛 騰 고 - ᅮ ᅳᅳ 了 - : 文 化 財 管 理 局 職 員 教 育 教 材 88-5 集 新 安 海 底 引 揚 古 代 船 의 學 術 的 考 察 崔 光 南 1988. 11. 1998.1! 2 4 料 文 化
<B9FDBBE7C7D0BFACB1B820353028BABBB9AE2C2032303130292E687770>
33 已 行 과 未 行 의 의미 -조선의 를 중심으로- 김영석* 79) 목 차 Ⅰ. 머리말 Ⅱ. «대명률»의 已 行 과 未 行 1. 已 行 未 行 에 관한 규정 2. 已 行 과 未 行 의 의미 3. 未 行 의 처벌 Ⅲ. 조선의 法 典 類 에서의 已 行 과 未 行 1. 三 省 交 坐 推 鞫 의 대상범죄 2. «속대전»과 «수교집록»의 비교 Ⅳ. 照 律 과 «대명률»
<C3E2B7C25F31343330C8A320B0F8BAB85F32303133303831352E687770>
법원공보 2013년 8월 15일 (목요일) 제1430호 법원행정처 2 제 1430호 법 원 공 보 2013년 8월 15일(목요일) 목 차 내 규 1147 법관 및 법원공무원 국내위탁교육훈련 내규 신법령 목록 1157 인사 1163 공지사항 1173 1146 2013년 8월 15일(목요일) 법 원 공 보 제 1430호 3 내 규 법관 및 법원공무원 국내위탁교육훈련
26권 4호-11
동의생리병리학회지 제 26권 4호 Korean J. Oriental Physiology & Pathology 26(4):418 426, 2012 藥 徵 續 編 을 통해 살펴본 村 井 琴 山 의 의학사상에 대한 연구 장기원 이미진 최준용 1 이병욱 2 신상우 정한솔 하기태*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응용의학부, 1 :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한의과학과,
<C7D1B1B9B5B6B8B3BFEEB5BFBBE733362E687770>
동학농민혁명기 在 朝 日 本 人 의 전쟁협력 실태와 그 성격 99 연 구 논 문 동학농민혁명기 在 朝 日 本 人 의 전쟁협력 실태와 그 성격 * 박 맹 수 ** 32) 1. 머리말 2. 在 朝 日 本 人 增 加 推 移 와 그 背 景 3. 在 朝 日 本 人 의 戰 爭 協 力 實 態 와 그 性 格 4. 스파이활동 事 例 分 析 5. 맺음말 1. 머리말 1894년
<C1F6C7A5C1B6BBE7BAB8B0EDBCAD3134C1FD2E687770>
( 財 ) 東 亞 文 化 硏 究 院 地 表 調 査 報 告 第 14 輯 진영읍 신용리 아름다운아파트 신축공사 구간내 文 化 遺 蹟 地 表 調 査 報 告 書 2 0 0 4. 10 目 次 Ⅰ 7. 조사개요 Ⅱ. 역사 ㆍ 고고분야의 조사 8 1. 김해시의 자연환경 1. 8 2. 김해의 역사적 환경 2. 10 3. 조사대상지역 개관 3. 28 Ⅲ 29. 현지조사 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