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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두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 의 바라 이고 다른 것은 죄 를 용서하다 의 살라흐 다.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인데, 이것은 온 세상이 그의 말씀에 절대 따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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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1: 하나님께서는남자와여자에게다른기능들을주셨는데, 그기능들은무엇인가? ( 창 2:20-24) 설명 : 하나님은사람을하나님의형상대로지으셨다. 하나님의형상대로지음을받았다는것은하나님의모습을따라지어졌다는것이다. 그럼어떤하나님의모습을말하는것인가? 하나님은영이라고성경을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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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일) 9월 30일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 도 싸우나 (계 12:7).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경쟁 세력 사이의 다툼, 전쟁, 갈등 속에서 인류가 존재 해 왔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그 투쟁이 무엇이며, 누가

이 음녀는 물위에 앉았다고 했는데 물은 열국의 방언입니다. 기독교를 방해하고 대적하는 문 화세력이 열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음행으로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는 바벨론, 음녀인 것입니다. 다섯 번째 원수는 짐승의 표를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은 사람들 즉,

평생교육원 모집안내-2013학년도

나하나로 5호

우리 옆에 계신분과 인사하겠습니다

내지(교사용) 4-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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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기독교 구원의 실제 (1-3 장) 성신신학

목 차 I 창조 구원의 모형 (창 1-2 장) A. 인간의 정체성: 왕으로 창조된 인간 (창 1:1-2:3; 1:26-28 절 포커스) B. 노동의 의미 (창 2:4-25) C 안식의 의미 (창 2:1-3) II 타락 - 구원의 시작 (창 3-11) A. 원죄의 의미 (창 3:1-22) B. 원 복음 (창 3:14-15) 1. 뱀이 여자와 원수가 됨 2. 뱀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됨 3.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함 4. 뱀은 그(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함 C. 죄로 인한 관계 및 노동 환경변화 (창 3:16-19) 1. 고통의 증가 2. 관계의 불평등 3. 저주의 전 우주적 영향력 4. 노동의 대가성 5. 죽음 D. 악한 성향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된 인간 (창 4:1-24) 1.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가인 (창 4:1-15) 2. 위험요소 제거를 위해 상대를 죽인 라멕 III. 아브라함의 언약 - 구원의 방법 (창 12-22 장) A. 바벨탑과 아브라함 (창 11:4, 12:1-3) 1. 흩어짐을 면하려는 시도가 죄인 이유 2. 바벨탑 건설 시도가 죄인 이유 3. 바벨탑 건설자들을 흩으시는 하나님 4. 바벨탑 건설 사건과 아브라함 부르심의 대조 B. 아브라함 언약: 무조건적 언약 (창 15:1-21) C. 믿음과 변화의 관계 (롬 3:20-28, 4:1-5; 약 2:19-24; 창 15-22) 1. 아브라함의 불완전한 믿음 (창 15:6) 2. 이스마엘 사건에서 나타나는 아브라함 믿음의 불완전함 (창 16) 3.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 될 때 나타나는 아브라함 믿음의 불완전함 (창 17-18) 4. 그랄 땅에서 나타난 아브라함 믿음의 불완전함 (창 20) 5. 믿음의 조상으로 변화된 아브라함 (창 21-22) D. 롬 4:3 절과 약 2:21 절의 대조 및 결론

머리말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이 참 많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정체성 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정체성은 결국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인데, 문제는 이 답을 하기가 그다지 쉽지는 않다는 것일 터이다. 정체성에 대한 답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정체성은 절대적으로 관계의 영향을 받는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다른 누군가의 관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정리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한 가지 모습으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식으로, 부모로, 친구로, 직장 동료로, 선생님으로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이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각기 관계를 맺어가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 우리들이고, 정체성은 이러한 다양한 관계 안에서 내가 있어야 할 위치를 묻는 과정을 거쳐서 답을 하게 된다. 아들로서, 또는 딸로서의 부모님과 나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어떠한 모습이 아들로써, 또는 딸로서 바른 모습인가? 어떤 관계가 아들로써, 딸로서 바른 관계인가? 지금 커가고 있는 내 아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부모의 역할은 무엇인가?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내 아이들에게 다가가야 하는가? 내가 다니고 또 일을 하고 있는 직장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이 직장의 상사, 또는 후배들과 바른 관계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하는 것이 바로 내가 누구인가? 나의 정체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과정이다. 헌데 정체성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고민을 해 본 사람은 이러한 이해에 대해 곧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위에 열거한 질문들은 모두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이다. 위에서 제기된, 나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에만 질문이 집중하게 되면 곧 다른 사람들의 꼭두각시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나 자신을 발견을 하게 된다. 따라서 정체성에 관해 다루는 분들은 보통 다른 사람이 정의하는 네가 아닌 진짜 너는 누구냐? 는 질문을 던지고 이 질문에 답을 할 것을 요구한다. 이 질문은 나와 나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 질문은 자신감과 자존감을 결정짓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나와 나 자신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하는 나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다른 표현으로는 과연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도 연결이 된다. 다 같은 맥락의 질문들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도 구원에 관해 이야기 한다면서 왜 뜬금없이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가? 하고 궁금해 할지 모르겠다. 정체성은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잣대로 작용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내 정체성에 대한 바른 고민과 이해 없이는 내 존재의 이유의 의미를 찾는 것이 매우 어렵다. 이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과연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깊이 있게 고민하고 또 이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독교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서부터 시작을 할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우리가 나름대로 이해를 해야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류의 삶인지까지 우리의 이해를 넓혀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론이 길었다. 구원론은 이러한 기초적이면서도 기본적인 질문들을 다루는 영역이다. 하나님은 누구이신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나와 내 이웃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나는 어떠한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까지 폭 넓은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기독교 구원론 영역이 하는 일이다. 이 글을 읽어가면서 과연 기독교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읽어갔으면 좋겠다. 글쓴이 여영환

I 창조 구원의 모형 (창 1-2) I 창조 구원의 모형 (창 1-2) 창조 사건은 창세기 1-2 장에 걸쳐서 나와 있다. 이 장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구원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창세기 1-2 장은 처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당시 창조섭리가 어렴풋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 내용만 가지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세상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 짧은 내용 속에 포함된 정보들은 우리가 구원 받은 자로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힌트는 얻을 수 있다. A. 인간의 정체성: 왕으로 창조된 인간 (창 1:1-2:3; 1:26-28 절 포커스) Figure 1: Suggested by Gordon P. Hugenburger Professor of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창세기 1:1-2:3 절은 천지 창조 기사가 날짜 별로 그 순서에 맞춰서 나와 있다. 이 창조 기사에서 주목해 보고 싶은 것은 먼저 창조된 창조물과 나중에 창조된 창조물들의 연관 관계이다. 표에서 보다시피 먼저 창조된 창조물들이 나중에 창조된 창조물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나중에 창조된 창조물들은 먼저 창조된 창조물들을 지배하는 구조로 1

I 창조 구원의 모형 (창 1-2) 되어 있다. 1 이러한 구조에서 눈 여겨 볼 점은 인간이 창조된 시점이다. 인간은 모든 창조물들이 창조된 후 제일 마지막에 창조된다. 이는 인간이 만물의 왕으로 창조되었음을 뒷받침해주는 매우 중요한 근거이다. 이 근거는 단지 창세기 1 장의 이러한 구조에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창세기 1:26-28 절의 기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창세기 1:26-28 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고 진술하고 있다. 아울러서 28 장에 명백하게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이러한 왕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속성은 신약으로까지 이어진다. 누가복음 22:28-30 절을 살펴보면 예수가 당신의 제자들을 열 두 지파를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려 하신다는 진술을 들을 수 있다. 히브리서 1:13-14 절을 보면 히브리서 기자가 천사들의 정체성을 내보이는데 천사들의 임무가 구원 받을 상속자들, 즉 성도들을 위하여 섬기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좀 과하게 표현을 하자면 우리들은 천사들을 부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존재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아마도 이러한 질문을 한 번은 해봄직 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그런 어마어마한 권세를 주셨는가? 다시 창세기 1:26, 27 절로 돌아가보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진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용된 형상이라는 단어를 좀 살펴보자. 1 Gordon. P. Hugenberger, Christ in the Old Testament classroom lecture, Janurary 2008 Bruce K. Waltke and Cathi J. Fredricks, Genesis: A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57 58. 2

I 창조 구원의 모형 (창 1-2) 우리나라 말로 번역된 형상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ל ם) 젤렘 이라는 (ז 단어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총 15 번 등장하는데 보통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어떤 무언가를 닮은 조각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용이 된 것은 아니었다. 민 33:52; 삼상 6:5, 왕하 11:18; 대하 23:17; 겔 7:20, 16:17; 암 5:26 등에도 같은 단어가 사용이 되었는데 모두 이방 신이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어떤 존재를 조각상으로 표현한 우상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이 되었다. 성경에서 사용된 이 단어의 의미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 되었든, 이방 신이 되었든 상관 없이 신의 형상을 본따서 만든 신상 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1:26-27 절에서 하나님의 형상 을 본따서 만든 인간인 아담과 하와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신상 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하나님의 신상 은 일반 다른 신상들과는 굉장히 많이 다르다. 다른 신상들은 돌이나 나무 등을 깎아서 만드는데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신상은 말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며, 여러 가지 감정들을 느끼기도 하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그럼 신상이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어떠한 것이 되었든 신상은 본따서 만든 신을 대표하는 성질을 가진다. 2 바알 신상은 바알을 대표하고 아세라 신상은 아세라를 대표한다.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신상인 인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속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왕 개념의 중요한 속성이 발견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왕으로 창조하시며 온 땅의 통치권을 맡기셨을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통치는 인간이 자신의 마음대로 이 땅을 통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땅에 왕인 동시에 하나님의 신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인간은 하나님을 대리해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 땅을 통치할 의무를 가진다. 따라서 끊임 없이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배우고 습득할 책임이 동시에 지워지게 된 것이다. 이는 이 땅에 왕인 동시에 제사장으로 지음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또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하나님이 인간을 이 땅의 왕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이제 이해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은 아니다. 능력에 있어서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을 대리한 인간의 통치에는 한계와 부족한 점들 투성이일 것이다. 인간이 부족할 때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직접 통치하시기도 하실까? 하나님이 직접 꽃이나 2 Bruce K. Waltke and Cathi J. Fredricks, Genesis: A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65. Victor Harold Matthews, Mark W. Chavalas, and John H. Walton,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Old Testament (electronic e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0), Ge 1:26-27. 3

I 창조 구원의 모형 (창 1-2) 나무들, 동물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명령하시고 조정하시기도 하실까? 성서를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는다. 비록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망가뜨려도 여전히 인간의 손에 맡겨두신다. 그 덕분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인간과 더불어 고통가운데 빠져있다. 이 사실은 이 땅을 통치하는 임무를 부여 받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책임과 책무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무거움을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의 통치 범위에는 제한이 없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 있는 관계로 우리들이 돌보아야 할 통치 범위도 온 세상의 모든 만물과 모든 백성들이다. 우리가 하나님도 아니고 온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과 만물, 백성의 일들을 어떻게 다 책임을 지느냐? 라고 반문할 분들도 계실 줄 믿는다.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도 알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 책임을 맡기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몸을 사용해서, 우리의 물질을 사용해서, 우리의 지혜를 사용해서 할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위해서 기도 할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요청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욱 뛰어난 존재들인 천사들로 하여금 우리들을 섬기도록 명하신 궁극적 이유가 아닐까? B. 노동의 의미 (창 2:4-25) 과연 처음 천지가 만들어졌을 때 인간은 일을 했을까 안 했을까?? 사람에 따라서 의견이 분분할 수 있지만 창세기 3 장에 근거해서 처음 창조되었을 당시의 인간은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연 그럴까? 성경을 통해서 한 번 살펴보자. 노동의 의미를 고찰하고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직업을 어떤 관점에서 보고 이해해야 하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창세기 2:4-25 절은 창세기 1:1-2:3 절까지의 창조 이야기를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다시 설명하고 있다. 창세기 1:1-2:3 절까지는 창조 사건을 전 우주적인 관점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면, 2:4-25 절까지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인간의 역할과 환경에 그 관심을 두고 있다. 2:5-6 절을 살펴보면 들에는 아직 초목이 없고 밭에는 아직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땅에 비가 내리지도 아니하였고 또 땅을 갈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제시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처음 이 땅이 창조 되었을 때부터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가 인간의 노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4

I 창조 구원의 모형 (창 1-2) 2 장 7 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8 절에서는 에덴 동산을 만드신 후에 창조하신 인간을 에덴 동산에 두신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해야 했던 일은 15 절에 기술되어 있다. 2 장 15 절에는 동사가 3 개가 나온다. 보면 아래와 같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보다시피 두다, 경작하다, 지키다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경작하다에 사용된 동사는 ב ד) 아바드 라는 (ע 동사로 일반적으로는 봉사하다, 섬기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동사이나 여기에서는 농업성격의 단어로 말 그대로 경작하다라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지키다로 해석된 מ ר) 샤마르 라는 (ש 동사는 무엇인가를 보호하다, 유지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따라서 아담이 해야 할 일은 에덴 동산에 있는 나무들을 경작하고 또 보호하며 잘 자랄 수 있도록 유지하는 역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죄가 들어오기 전부터 인간은 노동을 하도록 창조 받았다는 것이다. 흔히 천국과 관련해서 하는 우스겟 소리가 있다. 천국을 가면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하루 종일 거룩 거룩 찬양만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이다. 염려 붙들어 매시라. 천국 가도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생활이 그렇게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15 절에서 눈여겨 볼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두다 라고 번역된 누아크( 라는 (נ וח 동사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데려다 두실 때, 두다 로 번역된 단어가 하나가 더 있다. 8 절에서 사용된 단어로 이 때는 누아크가 아닌 ים) 심 이라는 (ש 동사가 사용이 되었다. 둘 다 어떤 물건 또는 사람을 어딘가에 놓다 라는 뜻이 있지만 누아크에는 심에는 없는 다른 의미가 하나 더 있다. 이 단어는 놓다 라는 의미 외에 쉬다 라는 의미가 더 있다. 15 절에서 아담을 에덴 동산에 데려다 놓는다는 표현을 했을 때 왜 8 절에서 사용되었던 심 이라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구지 누아크 라는 동사가 사용됐을까? 15 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단순히 아담의 노동이 아니라, 그 노동의 의미 자체가 쉼(rest)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어째서 노동 자체가 쉬는 것이 될 수 있을지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구직난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안정적인 노동은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준다. 노동의 기회를 박탈 당했을 때, 인간은 절망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이 이야기 하는 쉰다 는 개념은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이는 성경이 제시하는 안식 의 개념과도 연관된다. 안식에 대해서는 다음 단원에서 한 번 살펴볼 것이다. 5

I 창조 구원의 모형 (창 1-2) 창조 직후의 아담의 노동과 관련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과연 아담의 노동이 대가성 노동이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조금 더 쉬운 말로 이야기 하자면, 아담이 노동의 대가로 음식을 얻었느냐 아니면 노동과는 관계 없이 음식을 얻었느냐 하는 질문이다. 먹거리에 대한 정보는 창세기 2:9 절과 16, 17 절에 나와 있다. 에덴 동산에는 각종 과실 나무와 생명 나무,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아담은 생명 나무의 열매를 포함해서 모든 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는다. 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빼고 말이다. 아담이 이 과실들을 먹을 권한이 아담의 노동으로부터 기인한 것일까 그렇지 않을까 하는 것이 이 질문의 핵심이다. 과실 나무들을 돌보는 것은 아담의 역할 중 매우 중요한 역할임에는 틀림이 없다. 따라서 아담의 노동이 아담이 얻을 수 있는 음식과 전혀 무관하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담의 노동이 음식을 얻는데 결정적 작용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아담이 일을 덜 하면 음식을 적게 얻고, 아담이 일을 많이 하면 음식을 많이 얻는 등 노동의 강조 및 시간과 아담이 음식을 얻는 권리의 상관관계는 적어도 발견할 수 없다. 이는 창조섭리 아래에서의 노동의 의미를 조명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근거이다. 마태복음 20:1-16 절을 살펴보며 이 원리를 더 자세히 이해해 보자. 마태복음 20 장을 보면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품꾼들을 고용해서 노동을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는 아침 일찍부터 온 사람들부터 삼시(오전 9 시), 육시(정오 12 시), 구시(오후 3 시), 십일시(오후 5 시)에 고용되어 온 사람들까지 노동 시간은 다양하다. 그런데 하루 일과가 다 끝나고 시간과 노동 강도에 관계 없이 모두 한 데나리온씩을 받게 된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다. 우리는 많이 일 한 사람은 많이 받고 적게 일 한 사람은 적게 받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창조 직후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만들어 놓으신 경제원리는 이렇지 않았다. 많이 일을 하던, 적게 일을 하던 관계 없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성실하게 한 사람은 먹고 살기에 필요한 만큼 받을 수 있었다. 노동의 강도와 노동의 시간은 아담이 필요한 먹거리를 확보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이 해야 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당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맡기신 노동의 성격은 어떠하였을까? 창세기 1 장을 훑어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땅에 왕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1 장 28 절을 보면 이 땅의 모든 창조물들을 지배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2 장에서 아담의 역할은 농부의 역할이다. 1 장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역할과 2 장에서 아담이 하는 역할을 비교해보면 뭔가 괴리가 있는 듯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을 왕으로 세우실 때, 그 왕에게 부여된 역할이 다른 창조물들을 보살피고, 그들이 그들의 모습 그대로 잘 살아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6

I 창조 구원의 모형 (창 1-2) 이 모습은 누가복음 22:25-30 절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난다. 예수는 이 구절들에서 세상에서의 왕의 모습과 하나님 나라에서의 왕의 모습을 비교하고 있다. 세상 임금들은 피지배자들을 주관하며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는다. 여기에서 주관하며로 해석된 동사는 쿠리유오우(κυριεύω)라는 단어로 그 의미는 누군가를 내 뜻대로 조정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말로 "은인"이라고 해석된 단어는 유엘게테스(εὐεργέτης)라는 단어로 이 단어는 당시 신이나 영웅들, 왕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이 되었었다. 3 단순한 은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힘 있고 권위 있는 존재를 상징하는 단어였던 것이다. 그 의미들을 살펴보면 당시 세상 왕들은 피지배자들을 자신들 마음대로 다루고 때로는 횡포를 부리면서도 스스로를 어떤 대단한 존재로 포장시키며 으시댄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다스리는 자들, 즉 왕으로 세움을 입는 자들은 누군가의 위에 힘으로 군림해서 내 마음대로 조정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의 위치에서 섬기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는 그 스스로 온 만민의 왕으로 왔으면서 그 역할을 하시고 계시고, 바로 그러한 역할을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바라고 계신다. 30 절에서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결국 열 두 지파를 다스리는 왕의 역할을 부여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 열 두 지파를 다스리는 예수의 제자들의 역할은 낮은 곳에서 봉사하며 섬기는 역할이 될 것이다. 바로 이 역할이 창세기 2 장에서 아담에 의해 실행되고 있다. 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다른 창조물들 위에 군림해서 창조물들을 자신의 욕심대로, 자신의 뜻대로 조작하고 조정하는 것이 아닌, 순수하게 다른 창조물들의 안녕을 위해서 묵묵하게 봉사하는 역할이 죄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 아담이 수행했던 왕으로써의 역할이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서 우리는 죄가 들어오기 전 창조 이후 아담의 노동의 성격에 대해 몇 가지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아담의 먹거리는 노동의 대가는 아니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공급 되었다. 또한 아담의 노동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왕으로서의 지위를 실천하는 성격이었으며 순전히 다른 창조물들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다른 창조물들을 보살피는 성격이었다. 이러한 노동의 성격은 오늘날 직업을 고민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무엇을 위해서 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어떤 대가를 위해서 노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 노동은 내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안녕과 내 주위 이웃들의 이익을 위해 내가 봉사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좋으며 그 목적 안에서 3 Robert H. Stein, Luke (vol. 2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549. 7

I 창조 구원의 모형 (창 1-2) 내가 해야 할 일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마태복음 6:33 절의 말씀이 내 삶에서 실현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C 안식의 의미 (창 2:1-3) 일부 개신교 안에서는 예배를 안식일에 드리지 않고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에 드리는 것을 보고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가진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이는 안식일에 대한 오해에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일 주일 중 6 일은 일을 하되 마지막 하루는 일을 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는 안식일은 유대교나 기독교나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이 안식일의 규례는 출애굽기 20 장을 통해 주어진 십계명중 4 계명으로 주어져 있지만, 안식일에 대한 언급은 이미 출애굽기 16 장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안식 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창세기 2 장에서 언급이 된다. 과연 창세기 2 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안식의 의미는 무엇이고, 십계명에 명시되어 있는 안식일 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살펴본다. 다시 창세기 1 장의 표로 되돌아가보자. 창세기 1 장의 창조 순서는 각 창조물들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 관계는 먼저 창조된 창조물이 나중에 창조된 창조물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나중에 창조된 창조물들은 먼저 창조된 창조물들을 지배하는 구조라고 이야기 했다. 그 중 제일 나중에 창조된 창조물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된 인간이고 따라서 인간의 지위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온 땅을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라고 소개를 했다. 그런데 이 창조 사건은 인간의 창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곧바로 일곱 번째 날이 다가온다. 그 일곱 번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안식을 선포하신다. 이 구조의 틀 안에서 본다면 인간 위에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이다. 즉 인간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창조를 받긴 했지만, 그 인간을 지배하는 존재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세우신 것이다. 4 그러면 구체적으로 안식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창세기 1 장 31 절을 끝으로 모든 창조 사역을 마치고 그 만들어진 창조 세계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를 (ת וב) 토브 외치신 후 7 일째에는 안식 하신다. 창세기 2 장 2 절과 3 절에서 안식하셨다 로 번역된 단어는 ב ת) 샤바트. 이다 (ש 이 단어는 대략 두 가지 뜻이 강한데 멈추다 라는 뜻과 쉬다 라는 뜻이다. 4 Gordon. P. Hugenberger, Christ in the Old Testament classroom lecture, Janurary 2008 메리데스 G. 클라인, 김구원 역, 하나님 나라의 서막, (서울: CLC, 2012), 61-67 8

I 창조 구원의 모형 (창 1-2) 이제 몇 가지 질문을 좀 해 보자. 창세기 2 장에서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멈추신 후에, 또 다른 한 주의 첫 날이 왔을까 오지 않았을까? 보통 십계명에서 제시한 안식일의 율법에 익숙한 사람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도는 한 주에 매우 익숙하다. 즉 쉬는 날인 주일이 지나면 일 하는 날인 또 다른 월요일이 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죄가 아직 들어오기 전인 창세기 2 장에서도 이러한 법칙이 통했겠느냐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답은 아니다. 창세기 2 장에서 하나님의 안식은 영원한 안식이다. 창조 사역은 6 일로 끝나고 그 이후부터는 영원토록 안식, 즉 쉼의 시간인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질 문 하나를 해 보자. 하나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창조 사역을 멈추셨으니까 멈추다 라는 것도 맞고 또 일을 멈추시고 쉬셨으니 쉬다 도 맞다. 그런데 아담의 입장에서 한 번 살펴보자. 아담은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일이었던 창조물들을 돌보는 모든 일들을 안 해도 됐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다. 창세기 2 장에서 아담이 했던 일들은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멈춘 후에도 계속 지속되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안식을 선포한 후에도 아담은 계속 노동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생기게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하고는 뭔가 맞지 않는다. 이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힌트는 창세기 1 장 창조사역을 통해 7 번 반복된 단어인 를 (ת ב) 토브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단어는 형용사로 마음에 흡족한, 만족할만한, 아름다운, 윤리적으로 옳은 등의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당신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좋았다고 말씀을 하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아름답고 바람직하다는 의미도 물론 포함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선.악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윤리적으로 완벽했다는 의미를 같이 포함하게 된다. 이는 안식의 본질적 의미가 손 놓고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으로 인해 생기는 삶의 안정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하도록 해준다. 창세기 2 장에서 하나님이 안식 하셨다고 진술하는데 사용된 동사는 아까 이야기 했던대로 ב ת) 샤바트. 이다 (ש 이 동사는 쉬다 라는 뜻을 가진다고 이미 앞서 이야기 한 바 있다. 비슷한 진술을 우리는 출애굽기 20:11 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출애굽기 20:11 절은 십계명중 4 계명인 안식일에 관해 진술하고 있는 내용중 일부이다.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안식하셨다(쉬었다)는 진술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안식(쉼)을 진술하기 위해 사용이 된 동사는 샤바트가 아닌 누아크(. 이다 (נ וח 누아크라는 동사는 창세기 2:15 절에서 아담에게 사용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야기 했었다. 창세기 2:15 절에서 9

I 창조 구원의 모형 (창 1-2) 이 동사는 두다 로 해석 되었었다. 하지만 이 동사는 두다 외에 쉬다 라는 뜻도 있다고 이야기 했었다. 5 출애굽기 20:11 절에서는 이 동사가 쉬다 로 해석이 된 것이다. 이는 출애굽기 20:11 절에서 하나님의 안식과 창세기 2 장에서 아담의 상태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담은 노동은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 상태 자체가 안식을 취하고 있는,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쉼을 누리고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아담과 다른 창조물들이 누렸던 안식은 본질적으로 아담이나 다른 창조물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안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였으며 아담과 다른 창조물들은 하나님이 선포하신 안식에 같이 참여하는 것이다. 6 아담이 하나님의 안식에 초청되어 참여하였을 때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이었기에 아담은 자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있어서 삶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주시는 절대적인 공급자였으며 따라서 아담에게 있어서 경배와 예배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안식 안에 거할 때 이 모든 공급을 아무런 조건 없이 누릴 수 있었던 것이고, 하나님과의 이러한 관계 안에서 아담이 누릴 수 있는 삶의 안정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것이 창조 당시 안식의 본질적 개념이었던 것이다. 안식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완벽한 창조 질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땅에 만드신 하나님 나라의 완벽한 질서 안에서 생활하는 그 삶 자체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 삶 안에서 공급자로서의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공급을 받으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아담의 바른 관계가 전제되는 것이다. 따라서 안식을 한다고 해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안식에 대한 오해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안식일을 언급할 때 왜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출애굽기 20:8-11 절을 잘 뜯어보면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이 안식일에 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일 안식일에 일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슈가 되었다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안식일에 일을 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부작용이 소개 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식일에 일 해선 안 5 히브리어 동사는 동사의 형태에 따라서 몇 가지 form 으로 나뉜다.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같은 동사라도 어떤 형식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창세기 2 장에서 누아크는 히필이라는 형태로 쓰였다. 반면 출애굽기 20 장에서는 칼이라는 형태로 쓰인다. 따라서 두 단어의 의미를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는 없다. 이 누아크는 칼에서는 쉬다 라는 의미만을 가진다 하지만 히필에서는 두다 와 쉬다 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 6 메리데스 G. 클라인, 김구원 역, 하나님 나라의 서막, (서울: CLC, 2012), 64-65 출 20:10, 레 19:3 참고 10

I 창조 구원의 모형 (창 1-2) 되는 이유로 제시 된 것은 일을 함으로 인해 생기는 물리적, 영적 부작용이 아니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쉬셨기 때문에 그러라는 것이다. 다시 말 하면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출애굽기 31:12-17 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대해 말씀하시는 또 다른 규례가 나온다. 여기서는 출애굽기 20 장에서 더 나아가 안식일에 일을 한 사람을 죽일 것을 명하신다. 실제로 민수기 15:32-36 절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군가가 안식일에 나무를 했다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된다. 사실 안식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루 쉬는 시간을 주시는 정도의 의도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면 이렇게 사람을 죽여야 할 정도까지 큰 문제로 여겨지는 것이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는 단순히 하루 일 안 하고 놀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스라엘의 영원한 공급자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따라서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은 궁극적 창조자이시며 온 땅의 소유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안식일에 나무를 했던 이스라엘 사람은 반역죄로 다스려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매 주의 첫 날인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개신교의 예배 날짜에 대해 한 번 생각을 해 보자. 과연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정당한가?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주신 이유부터 따져볼 문제이다.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식일을 주셨을까? 사실 위에서 언급 하였듯이 이 땅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마치신 직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안식은 계속 되었을 것이다. 7 하지만 이 땅에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권리를 박탈 당하였고, 따라서 그 이후로 인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안식은 중지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류에 대한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이 땅에 건국하시게 된다. 그러시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온 땅의 창조자이시며 공급자로서의 하나님의 절대성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안식일을 제시하신 것이다. 하지만 6 일은 일 하고 하루 쉬는 이 안식일 사이클은 영원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회복되게 되면, 모든 인류들은 또 다시 하나님에 의해 제공되는 영원한 안식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비록 불완전한 모습이지만 이 땅에 7 메리데스 G. 클라인, 김구원 역, 하나님 나라의 서막, (서울: CLC, 2012), 64-65 11

I 창조 구원의 모형 (창 1-2) 도래 하였다. 예수의 초림으로 인해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세워졌고, 따라서 지금은 토요일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날이 안식일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개신교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주일이 안식일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주일에 예수가 부활하셨기에 예수를 중심으로 뭉치는 개신교는 예수의 부활을 기뻐하며 그 날을 기념하여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창세기 2 창과 기타 다른 성경들에 나타난 안식일의 내용들을 둘러보면 기독교 평안의 본질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기독교에서 이야기 하는 안식은 일 안하고 어떠한 어려움이나 역경도 없는 그러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좀 고된 일이 있고 삶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움과 역경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고 하는 믿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삶의 안정과 평안이 진정한 기독교 평안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쉬운 길, 육체적으로 편안한 길을 찾지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 평안의 본질이 아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어렵고 힘든 길이라도 하더라도 그 길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따라 나서는 것이 기독교가 추구하는 평안한 삶이다. 12

II 타락 구원의 시작 (창 3-11) II 타락 - 구원의 시작 (창 3-11) 앞서 I 장에서 창조 직후 타락 전의 환경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을 했다. 그러한 환경이 인간의 타락 사건으로 인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 타락의 문제를 다룰 때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내용이다. 아울러 이제는 구원의 의미가 비교적 확실해지게 된다. 구원은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타락 전 창조 섭리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 여정이 시작된다. A. 원죄의 의미 (창 3:1-22) 원죄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고, 그 죄 자체가 유전되는 것처럼 이해하는 경우가 참 많다. 따라서 원죄를 이야기 할 때는 왜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을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내가 받아야 하느냐는 항변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그 근거를 찾기가 힘들다. 사실 성서를 읽어보면 죄 자체가 유전되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유전자가 내려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서 죄가 들어오게 된 전말을 한 번 살펴보자. 창세기 3 장 1-5 절을 보면 뱀이 하와를 꾀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뱀은 하나님께서 2 장 17 절에 하신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 하며 하와가 선악과를 먹더라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하와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될 것임을 알린다. 뱀이 이야기 한 내용들은 아주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뱀이 한 이야기는 대부분 거짓말이 아니었다. 죽음과 관련된 사실만을 제외한다면 진실이다. 또한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이야기 하거나 권한적이 없다. 뱀이 한 일은 그냥 진실을 이야기 했을 뿐이다. 물론 뱀에게 아담과 하와를 꽤서 선악과를 따먹게 하려는 숨은 의도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와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뱀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 가운데 탐심이 발동해서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결정하고 먹은 것이었다. 뱀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탐욕을 불러 일으켰을 뿐이었다. 뱀이 한 이야기가 진실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의아하게 생각할 독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나 하나 짚어보도록 하자. 13

II 타락 구원의 시작 (창 3-11) 먼저 선악과를 먹더라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 즉시 죽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는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창세기 5 장 3-4 절을 보면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930 년을 더 살다가 죽음을 맞게 된다. 창세기 2:17 절 말씀은 마치 선악과는 독 사과와 같아서 그 과실을 먹자마자 죽게 될 것 같은 뉘앙스를 가진다. 결과적으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후에도 꽤 오랜 시간 살아있었다. 또한 선악과를 먹게 되면 하와의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는 창세기 3:22 절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직접 증언하시고 계신다. 이 부분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창세기 1:31 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의 모든 사역을 마치신 후 그 창조된 모습들을 보고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좋았더라 에 사용된 단어는 형용사 였다고 (ת ב) 토브 지난 장에서 이미 설명 했었다. 이 단어는 마음에 흡족한, 만족할만한, 아름다운, 윤리적으로 선한 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 했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이 좋았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웠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따졌을 때에도 모두 옳았다는 것이다. 창세기 2:25 절을 보면 아담과 그 아내의 옷차림에 대한 정보가 나와 있다. 하나님의 창조 직후의 아담과 하와는 둘 다 벌거벗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이상히 여기지 않으시고 윤리적으로도, 외면적으로도 아름답고 선하다고 판단을 하셨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자신들의 옷차림에 대해 어떤 의문도 가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인정하신 것을 그대로 자신들의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3 장 6 절 이후,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변화가 생겼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자각이 생겼고, 그것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결국 자신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는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 밖에 없었다. 하나님만이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아담과 하와가 결국 자기만의 가치 판단 기준을 가지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가치 판단 기준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만 할 수 있는 고유기능을 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하나님처럼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 3 장 22 절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진술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뱀이 한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14

II 타락 구원의 시작 (창 3-11) 하와가 자신들만의 가치판단 기준을 가지게 되면서 동시에 잃어버린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악을 구분하는 가치판단 기준이다. 이쯤에서 죄의 문제를 따져보자 과연 성경이 이야기 하는 죄가 무엇인가? 성경에서 죄 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4:7 절이다. 이 절에서 죄 로 번역된 단어는 ט את) 캍타트 라는 (ח 단어이다. 이 단어의 어원이 가지는 의미는 어떤 의도된 타겟이나 의도된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 안에서 의도된 타겟이나 길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시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 그런 이유로 이스라엘에서는 죄를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나 이웃에 대한 경시로 이해했다. 8 이제는 자기만의 선악 판단 기준을 가지게 된 아담과 하와의 처지에서 죄의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자. 자기만의 선악 판단 기준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악 판단 기준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조차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가 과연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당연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죄 가운데 거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인 우리들은 어떠한가? 우리들의 처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은 저마다 우리들만의 선과 악을 구분하는 가치판단 기준을 가진다. 그 기준은 당연히 하나님과는 다르다. 따라서 우리들 모두는 이 땅에서 죄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 것이 성경이 이야기 하는 원죄이다. 그렇다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서 새롭게 생긴 능력이 과연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고 인간의 삶에 있어서도 그렇고 긍정적 영향을 미쳤을까? 성경에서 보다시피 역사는 그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만드신 질서에 의해 움직일 때 세상은 가장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는 다른 자기만의 가치를 세움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유지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질서에 도전해서 자신의 질서를 세워나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도모하게 된 까닭이다. 이야기의 주제를 다음으로 넘기기 전에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되는 과정에서 뱀의 역할 말이다. 또 한 번 강조하지만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다. 선악과를 따가다 하와에게 건네준 적도 없다. 뱀이 했던 역할은 그냥 사실을 말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하와의 탐욕과 탐심을 건드린다. 결국 하와가 선악과를 8 G. Herbert Livingston, ט א 638,ח ed. R. Laird Harris, Gleason L. Archer Jr., and Bruce K. Waltke,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ld Testament (Chicago: Moody Press, 1999), 277. 15

II 타락 구원의 시작 (창 3-11) 따먹게 된 것은 뱀이 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도록 부추겨서가 아니었다. 하와 스스로 자신의 탐욕과 탐심을 제어하지 못해서 자발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인간 타락의 원인은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는 탐심의 영향이 더욱 크다. 사단이 우리를 쓰러뜨릴 때는 항상 이러한 전략을 사용한다. 우리 내면에 있는 탐욕과 탐심, 또는 공포를 일으켜서 우리 스스로 넘어지도록 만든다. 이러한 인간의 탐욕과 탐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성경 전체를 통해 계속해서 문제로 남게 된다. 진실이라고 항상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뱀이 하와에게 했던 이야기들은 진실이었다. 하지만 교묘하게 왜곡된 진실이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아담과 하와가 분명히 얻게 되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리게 되는 것들도 있었다. 뱀은 얻게 되는 것만을 이야기 하고 잃어버리게 될 것들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뱀이 이야기한 진실이 아담과 하와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도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우리에게 정말로 의미가 있고 우리를 살리는 지식은 적당한 수준의 진실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진리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떠돌아 다니는 진실을 대할 때는 뱀이 하와에게 그러하였듯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분노, 두려움 등의 감정을 유발시키거나 또는 탐심을 일으켜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패망의 길로 달려가게 하는 진실인지 또는 하나님 안에서의 삶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진실인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진실이라고 모두 진리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B. 원 복음 (창 3:14-15)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하나님과는 다른 선악의 판단 기준을 가지게 되고 그 결과 이 땅에 죄가 들어오게된 후 하나님의 반응은 즉각적인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이 문제를 수습하셨다. 하나님의 문제 수습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원인을 제공했던 뱀에 대한 저주의 선포였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 하나님은 저주 뿐 아니라 곧바로 회복을 선포 하신다. 여기서 먼저 죽음의 의미를 살펴보자. 성서에서 이야기 하는 죽음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말 그대로 육체적 죽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성서는 죽음을 육체적 죽음으로 한정해서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죽음의 또 다른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관계의 단절을 16

II 타락 구원의 시작 (창 3-11) 의미한다. 창세기 2:17 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육체적 죽음과 동시에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될 것임을 동시에 시사했다. 9 창세기 3 장 4 절에서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더라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었는데,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했다. 선악과를 먹은 후 아담과 하와는 바로 육체적 죽음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끊어짐을 경험 했었고, 결국 긴 시간이 흐른 뒤이기는 했지만 육체적 죽음도 경험하게 된다. 비슷한 예가 이스라엘의 율법에서도 발견이 된다. 이스라엘의 율법을 살펴보면 율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받게 되는 형벌이 언급된다. 경중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최고의 형벌은 죽음이다. 이 죽음에 대해서는 두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이 되는데 하나는 죽음 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로부터 끊어짐 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율법을 주실 때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로부터 쫓겨나는 것, 이스라엘로부터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죽음 으로 정의하셨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와 비슷한 예가 바로 창세기 3 장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창세기 3 장 22-24 절을 살펴보면 아담이 생명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서 영생할 것을 우려한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시는 장면이 나온다. 에덴 동산은 아담과 하나님께서 서로 연합하여 교재를 나누던 공간으로 사실 아담에게 있어서 에덴 동산에서 내쫓김을 당한 것은 그것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의 끊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아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이러한 상황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마치 기다리셨다는듯이 뱀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던지신 후 창세기 3:15 절의 말씀을 선포하신다. 창세기 3:15 절 말씀은 사단과 하나님의 관계, 사단과 인간의 관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좀 꼼꼼히 따져가면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은 아래와 같이 4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 뱀이 여자와 원수가 됨 2 뱀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됨 3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함 4 뱀은 그(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함 위와 같이 4 읽어보도록 하자. 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하나씩 하나씩 따져가면서 꼼꼼히 9 Elmer B. Smick, 1169,מ ות ed. R. Laird Harris, Gleason L. Archer Jr., and Bruce K. Waltke,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ld Testament (Chicago: Moody Press, 1999), 496 497. 17

II 타락 구원의 시작 (창 3-11) 1. 뱀이 여자와 원수가 됨 3 장 15 절에서 제일 처음 선포된 관계는 뱀과 여자와의 관계이다. 여기에서 여자는 물론 하와를 일컫는 것이다. 뱀과 여자가 서로 원수가 됨이 선포되고 있다. 여기에서 원수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יב ה) 에이바 라는 (א 단어로 말 그대로 적대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선언은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과연 여인과 뱀이 서로 적대관계가 되는데 동의 했을까? 사실 여인과 뱀이 적대관계가 되는데 있어서 여인과 뱀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관계를 그렇게 설정을 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다. 성서는 항상 하나님을 절대적인 주권자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과 뱀 또는 사단과의 관계 설정도 이미 이 부분에서 나타난다. 성서가 설명하고 있는 사단은 하나님과 싸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단도 하나님의 창조물일 뿐이며, 하나님께서 사단과 여인과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설정 하셨을 때 사단도 그러한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에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여기에서부터 나타난다. 또한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선과 악의 판단이라는 하나님의 고유영역을 침범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의 창조물이었고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 순종해야 하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2. 뱀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됨 성경 신학적 관점에서 성경의 각 권들을 보면 각각의 성경 책들은 모두 고유한 구조와 신학적 사상을 가진다. 창세기도 창세기만의 독특한 구조와 신학적 내용이 있다. 창세기 전체는 ד ות) 톨레도트 ( ת ול 라는 단어에 의해서 끌려가게 되는데 그 뜻은 계보, 족보 라는 의미이다. 그 첫 시작점이 3 장 15 절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부류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부류로 나누신다. 여자의 후손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부류로 그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로 직접적으로 이어지게 된다. 뱀의 후손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따르지 아니하는 부류이다. 계보는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요 주제와는 크게 관계가 없기에 간단히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만 알고 넘어가도록 한다. 10 10 자세한 설명은 이 책의 제일 뒷장에 있는 부록 1 을 참고하라. 18

II 타락 구원의 시작 (창 3-11) 3.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함 이 내용은 여자의 후손과 뱀과의 전쟁이 있을 것이며, 그 전쟁에서 여자의 후손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것임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언뜻 보기에는 그럴 듯 하다 하지만 이 선포를 가만히 뜯어보면 잘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있다. 사단과의 싸움은 영화에서 흔히 그리듯 칼과 창으로 싸우는 싸움이 아니다. 진리 싸움이다. (엡 6:12) 성경은 사단을 미혹하는 존재로 이야기 하고 있다. (계 19:20) 위의 원죄를 설명 할 때도 이야기 했듯이 사단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왜곡된 진실로 우리의 눈을 속여서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거나 따라가지 못하게 방해하고 결과적으로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상태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역사상 이 싸움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인간이 누구였을까? 예수님은 그 자신이 하나님이신 관계로 제외하면 아담과 하와였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도 이 싸움에서는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도, 따를 힘도 없는 인간이 어떻게 사단과의 진리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인간은 절대로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싸움에서 인간의 결정적 승리를 예고하고 계신다. 어떤 방법으로?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이 싸움의 본질적 모습을 눈치 채셨을 것으로 믿어진다. 바로 예수이다. 예수에 대해서 우리가 이야기 할 때에 예수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시라고 배워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다. 예수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셔야 하는 이유가 아담과 이브가 타락 한 직후에 이미 나타나 있다. 예수는 인간을 대신해서 사단과의 전쟁을 이기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뱀의 머리를 후려쳐서 이기는 최종 승리자는 누구일까? 예수일까? 물론 맞는 말이지만 100% 완벽한 답은 아니다. 예수는 자신을 위해서 사단과 영적 전쟁을 치르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종 승리자는 바로 여자의 후손들, 인간들이다. 현재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교회이다. 예수가 이루신 승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승리의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4. 뱀은 그(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함 그렇다고 뱀이 당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뱀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반격을 시도 할 것이며 여자의 후손에게 얼마간의 상처를 입히는 데에는 성공할 것이다. 성경상에서 보여지는 뱀의 반격의 결과는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아울러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19

II 타락 구원의 시작 (창 3-11) 순교이기에 우리들이 보기에는 매우 큰 의미로 보이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순교사건 자체를 사단의 결정적 승리로 평가하시지는 않으신다. 하지만 그것이 여자의 후손에게 어느 정도의 상처를 입히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게 선언되고 있다. 11 C. 죄로 인한 관계 및 노동 환경변화 (창 3:16-19)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다시 회복될 수 있는 회복의 기회는 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담과 하와가 계속 이전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뱀에 이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도 저주의 메시지를 선포하시는데, 이 메시지들은 그 이전까지의 모든 환경들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는 이렇게 변화된 환경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들의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죄가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의 환경과 죄가 이 땅에 들어온 후의 환경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는 꼼꼼하게 살펴보며 읽어보자. 1. 고통의 증가 16 절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먼저 저주를 선포 하신다. 그 첫 메시지가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며 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맥으로 보아 하와가 죄를 짓기 이전에는 고통이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이 선포하신 것이 고통이 생긴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고통을 더하신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하지만 같은 일을 함에 있어서 죄가 들어오기 전에 비해서 고통이 크게 가중되었음은 알 수 있다. 영어 속담중에 No pain no gain 이라는 말이 있다. 고통 없이는 얻을 수 있는 것도 없다는 말이다. 이 현실은 창세기 3:16 질서이다. 절에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새로운 세상의 11 이 부분에서 뱀의 후손이 그 에게 상처를 입힌다고 이야기 되고 있다. 만약 여자의 후손을 예수 개인이 아닌 예수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포함시킨다면 이 구절에서 단수인 그 가 아닌 복수인 그들 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창세기 3:15 절에서 여인의 후손으로 번역된 단어는 ר ע) 제라 라는 (ז 단어이다. 이 단어는 집합명사로 후손 중 누구 한 사람을 이야기 할 수도 있고 후손 전체를 이야기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명사가 가리키는 대상은 단수가 될 수도, 복수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명사 자체는 단수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 명사가 가리키는 대상이 단수인지 복수인지는 전적으로 문맥에 의해 결정된다. 창세기 3:15 절에서는 제라( ז ר ע )라는 단어가 단수인 예수만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예수를 포함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된다. 20

II 타락 구원의 시작 (창 3-11) 2. 관계의 불평등 그 다음으로 하와에게 하신 말씀은 하와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하와를 다스릴 것이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내는 남편에 대해 상대적으로 의존적이고 남편은 아내에 대해 상대적으로 권위적인 결과를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정말로 남편과 아내의 종속적 관계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뭔가 평등하지 않은 관계가 되었음은 확실해 보인다. 처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데려오셨을 때에 하와를 지칭했던 단어는 돕는 베필 즉 조력자였다. 이 돕는 베필로 번역된 단어는 צ ר) 에쩨르 라는 (ע 단어인데 이 단어는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군사적 조력자로 이해가 되었었다. 돕는 베필, 또는 조력자 하면 우리나라의 문화 안에서는 어떤 일을 돕는 조수 정도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사용된 군사적 조력자는 전적으로 평등한 관계에서 돕는 상대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즉 그 관계에서 누가 높고 누가 낮다거나, 누가 어느 한 쪽에 종속된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 3:16 절에서는 이러한 평등한 관계가 틀어지게 됨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3. 저주의 전 우주적 영향력 창세기 3 장 17 절로 넘어가면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고통 받는 대상의 범위가 나타난다. 단순히 아담과 하와만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땅도 아담과 하와의 고통 가운데 동참하게 된다. 땅이 고통을 받는 이유는 이미 앞서 왕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해 다루면서 한 번 언급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통치하시는데 직접 개입하시는 방법은 지양하신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땅의 통치권을 아담과 하와에게 맡기고 계시는 것이다. 왕이 타락하면 그 왕의 통치를 받는 만물들도 그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그 결과로 땅을 비롯해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창조물들이 하나님의 저주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된 것이다. 21

II 타락 구원의 시작 (창 3-11) 그렇다고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해 같이 저주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된 창조물들이 아담과 하와에게 고분고분 한 것은 아니다. 땅이 아담에 대해서 적대적이 되어버린다. 먹을 것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 4. 노동의 대가성 죄가 들어오고 난 후에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노동의 의미 변화일 것이다. 창조 섭리 안에서의 노동은 대가 성이 그리 크지 않다고 설명을 한 바 있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됐고, 아담의 먹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공급을 받는 구조였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노동에 대가가 따르게 된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남에 따라 하나님의 전적이며 절대적인 공급이 끊어지게 된다. 이는 아담이 자신의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 내 몰린 것을 의미한다. 노동의 대가성과 관련해서는 먹거리의 변화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죄가 들어오기 전 인간에게 주어진 먹거리의 정보는 창세기 2 장 16 절에 있다. 나무들의 열매였다. 죄가 들어오기 전 아담이 주로 관리했던 자원들에 대한 정보는 2 장 9 절에 있다. 역시 나무들이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난 후 아담의 먹거리와 주요 노동의 대상이 밭의 채소로 바뀐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나무를 가꾸기 위해 하는 노동과 밭의 채소를 가꾸기 위해 하는 노동은 다른 의미를 지녔었다. 나무는 매년 새로 씨를 뿌릴 필요가 없다. 어느 정도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만큼의 크기가 되면 그 이후에 필요한 것은 사실 열매를 맺기에 충분한 만큼의 강수량만 확보가 되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과수원들은 해충이나 병충해 등으로부터 열매를 보호하기 위해서, 또 상품성이 있는 큰 과실을 얻기 위해서 이런 저런 작업들을 많이 필요로 하지만 하나님의 안식 가운데 있었던 나무들의 경우 아담의 입장에서 먹거리를 얻기 위해 해야 할 큰 노동은 없었을 것이다. 때가 되면 적당한 열매들을 맺었을 것이고, 그렇게 맺은 열매를 큰 노동의 수고 없이 따서 먹으면 그만이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 먹거리가 채소로 바뀌었다. 그것도 에덴 동산이 아닌 가시덤불을 내는 아담에게 다소 적대적인 땅에서 말이다. 채소를 통해서 먹거리를 얻기 위해서는 노동의 강도가 그 이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먼저 채소를 심기 위해 땅을 갈아야 했을 것이고, 채소는 나무 열매와는 달리 매년마다 씨를 뿌려야 한다. 씨를 뿌린다고 뿌린 씨들이 모두 싹을 내서 먹기에 적당한 만큼 자라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며 여러 병충해와 들짐승들로 인해 소실되는 것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22

II 타락 구원의 시작 (창 3-11) 죄가 들어오기 전 에덴 동산에서 나무 열매를 주요 먹거리로 삼았을 때는 내가 수고한 것 이상의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에덴 동산 밖에서 밭에서 나는 채소를 먹거리로 삼고 난 후에는 내가 노동한 만큼 먹거리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말 그대로 노력해서 얼굴이 땀 범벅이 되도록 수고를 해야 겨우 먹거리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의 상황이다. 현재 우리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한 만큼 수확을 얻어갈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온갖 삽질들이 여기 저기에서 난무한다. 5. 죽음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라고 선포하고 계신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아담과 이브는 그 즉시 죽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담과 하와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심판을 연기된 심판 이라고 한다. 심판 자체가 지금 당장 임해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지금 당장은 괜찮지만 언젠가는 그 심판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상황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잘못을 한다고 해서 그 즉시 심판을 하시는 경우가 많지 않다. 하나님의 속성 중 중요한 속성이 바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처럼 심판을 연기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로 다시 돌이켜서 회개하실 기회를 주시기 위함일터이다. 죽음은 죄로 인해 생겨난 결과이다. 하나님의 회복이 선포될 때에는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해 생겨난 결과들을 모두 벗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육체를 포함한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매우 핵심적 요소가 된다. D. 악한 성향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된 인간 (창 4:1-24) 인간이 과연 태생적으로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하는 이슈는 대대로 큰 논란거리였다. 고대에서부터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해 대답하려고 시도를 해 왔었고 그 결과 성선설(인간은 태생적으로 선하다)을 주장하는 학자들과 성악설(인간은 태생적으로 악하다)을 주장하는 학자들간의 대립이 꾸준히 있어왔다. 인간을 태생적으로 선하게 볼 23

II 타락 구원의 시작 (창 3-11) 것이냐 악하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인간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사회를 조직 할 때 매우 큰 문제이다. 어떤 성향을 지지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사회와 공동체를 유지해나가는 기조 자체를 완전히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과연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을까? 성경은 성악설, 즉 인간은 태생적으로 악하다는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창 8:21, 롬 3:10-12) 창세기 4 장은 타락한 직후 인간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이야기들에 그 이유가 나타나게 된다.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니만큼 꼼꼼히 체크하고 갔으면 좋겠다. 1.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가인 (창 4:1-15) 아담과 하와가 타락해서 자신만의 선과 악을 판단하는 판단 기준을 가지게 되는 사건, 그로 말미암아 이제는 태생적으로 하나님의 뜻도 알 수 없고 그것을 지켜낼 힘도 잃어버리게 되는 사건이 3 장에 기술이 된다. 그 바로 직후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창세기 4 장에서는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었던,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질투심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까닭에 질투를 느낀 가인이 자신의 동생이었던 아벨을 죽이게 된다. 혹자는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가 가인의 제물이 농산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뜯어보면 그러한 이해는 사실은 아닌 것 같다. 4 절과 5 절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 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고 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문제였던 것이다. 7 절을 보면 이러한 이해를 강화시켜주는 부분이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죄의 문제를 다스릴 것을 명하신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에 가인의 죄 문제가 분명히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가인은 자신의 죄를 다스리는데 실패한다. 질투심을 다스리지 못한 가인은 결국 8 절에서 아벨을 죽이고 만다. 가인의 동생을 살인한 가인에게 하나님은 관대하시지만은 않았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즉각적으로 저주를 선포하셨던 하나님께서 가인에게도 즉각적으로 저주를 선포하신다. 그 내용은 4:11-12 절에 나타나고 있는데, 땅이 가인에게 더욱 적대적이 되어서 가인을 위해 그 소출을 내지 않게 될 것이며, 땅에서 소출을 얻을 수 없는 가인은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옮겨다니며 먹거리를 찾아야 24

II 타락 구원의 시작 (창 3-11) 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에서 유리하다 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라는 (נ וד) 누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집이 없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 정처 없이 방황하는 것을 뜻한다. 이에 대해 14 절에서 가인은 즉각적으로 반발하고 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인의 염려에 대해 보호해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시지만 가인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2. 위험요소 제거를 위해 상대를 죽인 라멕 창세기 4 장 23 절에는 두 번째 살인 사건이 기술되어 있다. 라멕이 어린 소년을 죽이는 사건인데, 라멕의 때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직접적으로 다른 누군가를 살인하는 동기로 작용하게 된다. 창세기 4 장의 가인과 라멕의 이 짧은 이야기 안에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누군가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인정 받고 친밀하게 교재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심, 그 욕심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질투심과 그 질투심을 제어하지 못하였을 때 결국은 자신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해를 가하든지, 그 사람이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면 그 대신 인정을 받고 있는 자신의 동료를 모함해서 어떻게 해서든 관계를 떼어놓으려 하는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고 또한 우리들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다. 또한 내가 어떤 해를 입을 상황에 있거나 꼭 내가 아니더라도 내 가족이나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가 해를 입을 위치에 있다면 나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누군가를 내가 먼저 공격을 해서 무력화 하고자 하는 시도도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이 모든 문제들은 결국 내가 어찌 될 수 있다는 내 내면의 두려움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문제이다. 그 원인을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로 설명해내고 있다. 단순한 질문을 하나 해 보자. 만일 가인이 에덴 동산에 있었다고 한다면 과연 가인이 아벨을 죽일 이유가 있었을까? 에덴 동산에 있었다면 가인은 선악의 판단 기준을 하나님께 맞춰서 생활을 했을 것이다. 당연히 죄를 지을 이유가 없었을 터이고.. 가인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하심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아벨에게 질투심을 느낄 이유도 상황도 없었을 것이다. 25

II 타락 구원의 시작 (창 3-11) 라멕의 경우는 어떠하였을까? 라멕이 어린 소년을 죽인 이유는 라멕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 때문이었을터이다. 만약 라멕이 에덴 동산에 있었더라면, 설령 소년이 라맥에게 어떠한 상해를 가할 수 있는 상황이었더라도 자신을 보호해줄 절대자인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을터이다. 당연히 소년을 죽음으로 몰아갈 이유 자체가 없는 것이다. 가인도 그렇고 라멕도 그렇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끊어짐으로 인한 내면의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절대적인 지지자이시며 보호자이시며 공급자이시다. 외부로부터 상해를 걱정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설령 누군가가 나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또는 아벨의 경우처럼 나를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능력과 부활의 하나님께서 결국은 나를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누군가에게 나도 적대적으로 대할 이유가 없어진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대할 수 없는 인간들은 어찌 해야 할까? 그 인간들은 자기 스스로 나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 숙명을 안게 된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내 힘으로 내 가족을 지켜야 하고 내 힘으로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를 지켜내야 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빠져있는 사람이 나를 지키고 내 가족을 지키고 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옵션들은 그리 많지 않다. 나를 해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거나 그것이 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내가 먼저 상대방을 죽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바로 이러한 원칙 아래에 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상에서는 내가 나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폭력이다. 지금 주변을 한 번 돌아보라. 온갖 종류의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그런데 그 폭력들의 내면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떠나 이 세상에 믿을 힘이라곤 나 자신밖에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그것이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구원의 서정이 시작이 된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구원의 서정을 기대해 보자. 26

III. 아브라함의 언약 - 구원의 방법 (창 11-22 장) III. 아브라함의 언약 - 구원의 방법 (창 11-22 장) 앞 장에서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생기는 영향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구원은 그 죄의 영향으로부터 창조 섭리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회복을 위해서는 이 땅에 왕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자신의 생각과 뜻을 하나님께 굴복시키고 하나님이 옳다 여기시는 것을 옳다고 여기고 하나님이 악하다고 판단하시는 것은 악하다고 여기는 복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스스로를 변화시킬 능력이 없는 인간이 어떻게 변화되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내용이 길다. 먼저 D. 단원의 결론 부분을 읽어본 후에 앞에서부터 차근 차근 읽어나가기를 권한다. 앞 장에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생기는 영향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창조 섭리에 의해 유지되는 세상과 비교했을 때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모두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인간들에게도 그렇고 그 통치의 영향 아래 놓여있는 다른 창조물들에게도 그렇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 장 15 절에 창조 세상의 회복을 선포 하신다. 창조 세상의 회복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 왕으로 창조하셔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세우신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했을 터였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세움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멋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조정하려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회복의 핵심에는 타락 이후에 인간이 획득한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판단 기준이 자리하고 있게 된다. 인간이 자신의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과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기준에 자기 자신을 맞춰야 했다. 즉 인간의 전적인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 전적 변화의 지향점은 결국 하나님을 궁극적인 자신의 왕으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바로 인간의 변화의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인도하신 궁극적 목적은 창세기 18:19 절에 나타나 있다. 아브라함의 자식과 권속들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그 바로 전 절인 18 절에는 아브라함으로 인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 선포되어 있다. 문맥을 따져볼 때 아브라함으로 얻게 될 복이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과 분명히 관련성이 있다. 27

III. 아브라함의 언약 - 구원의 방법 (창 11-22 장) 결국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인간의 변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그 지향점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하나 하나 따라가면서 아브라함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A. 바벨탑과 아브라함 (창 11:4, 12:1-3)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1 장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 바로 뒤에 전개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기에 바벨탑 사건을 한 번 돌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 12 바벨탑 사건은 죄성으로 가득 차 하나님을 배역한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들의 왕국을 만들어가고자 했던 인류의 이야기이다. 반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한 평범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아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큰 왕국의 시조로 쓰임 받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사실 바벨탑을 쌓은 사건이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왜 죄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많이 접해보지 못한 독자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12 창세기 10 장은 노아 자손들의 족보가 실려 있다. 10:2-5 절에는 야벳의 후손들의 족보, 10:6-20 절은 함의 후손들의 족보, 10:21-31 절은 셈의 후손들의 족보들이다. 창세기 10 장은 이렇게 셈의 족보로 끝이 나게 된다. 그런데 각 족보가 끝나는 지점을 보면 각기 족속과 언어와 나라대로 흩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 11:1-9 절은 바벨탑 사건이 나온다. 그런데 바벨탑 사건을 시작할 때 처음 하는 이야기가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다 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 후 11:10-26 절까지 셈의 족보를 다시 한 번 기술한다. 셈의 족보가 10:21 절에 이어 두 번째 등장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창세기에서 11 장의 역사적 순서에 의문을 가지게 한다. 창세기는 대체적으로 역사적 순서에 의해 쓰여져 있다. 그런데 11 장의 경우 10 장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기에는 좀 어렵다. 10 장에 이미 언어가 나뉘어진 사건이 나오는데 11 장 바벨탑 사건 당시에는 언어가 하나였다고 진술하고 있고, 또 셈의 후손들의 족보가 다시 언급되는 점도 석연치가 않다. 창세기 11 장에 등장하는 셈의 족보는 창세기 5 장에 등장하는 아담의 족보와 비슷하다. 아담에게는 셋 외에도 가인이라는 아들이 한 명 더 있었다. 하지만 이 족보에서는 가인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셋의 자녀들만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그 끝은 노아까지 이어지며 그 후로 노아의 이야기(홍수 이야기)가 시작된다. 창세기 11 장도 역시 마찬가지로 셈에게는 아르박삿 외에도 엘람과 앗수르, 룻과 아람이 있었다. 다른 아들의 이름들이 10:22 절에는 등장하지만 11 장에는 아르박삿만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족보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를 거쳐 아브라함까지 이어진다. 그 직후 12 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는 창세기의 독특한 구조로 창세기는 전적으로 3:15 절에서 예언된 여인의 후손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다. 이 라인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족보가 나오고 난 후에는 어떠한 이야기가 시작되게 된다. 창세기의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본다면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족보 사이에 끼워 넣은 곁가지들이지만, 이야기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이전에 등장하는 족보들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프롤로그에 해당하기도 한다. 구조로 보았을 때 바벨탑 사건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프롤로그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11 장 4 절과 12 장 1-3 절의 대조는 너무나도 뚜렷하다. 의도적으로 이러한 대조를 만들기 위해 끼워 넣은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28

III. 아브라함의 언약 - 구원의 방법 (창 11-22 장) 아브라함과 바벨탑 사건의 대조는 바벨탑을 짓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배역이라는 전제하에 성립하는 것이기에 이 글에서는 바벨탑 사건이 왜 죄가 되는지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설명할 것이다. 관련 내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는 해당 부분은 읽지 않고 건너 뛰어도 좋다. 바벨탑 사건은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다는 말에서 시작한다. 이는 이 사건이 노아의 후손들이 본격적으로 온 땅에 흩어지기 전의 사건임을 짐작하게 한다. 노아의 후손들이 흩어질 때에는 이미 각 족속마다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아마도 이 사건은 창세기 10 장 사건의 중간의 어딘가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11 장 2-4 절은 노아의 홍수 이후 노아의 자손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하나님에 순응적이지 않은 뱀의 후손들을 홍수를 계기로 지면에서 쓸어버리고 하나님께 순종적인었던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을 시작으로 인류 역사를 다시 쓴 사건이다. 그 노아의 직계 후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바벨탑 이야기는 창 8:21 절과 롬 3:10-12 절 말씀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하나님께 순종적일 수 없는 악한 존재라는 것이다. 아직 흩어지기 전의 노아의 후손들은 동쪽으로 이동해서 시날 평지에서 도시를 하나 건설하게 된다. 도시를 건설 하면서 아울러 탑을 하나 같이 쌓게 되는데 그 이유가 4 절에 나타나 있다. 하나는 이름을 내자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었다. 1. 흩어짐을 면하려는 시도가 죄인 이유 왜 흩어짐을 면하고자 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11 장 본문에서는 적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창세기 4 장 가인과 하나님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는 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온 땅을 유리(방황)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을 때 가인이 가장 먼저 걱정했던 것은 자신의 안전의 문제였다. 혹시나 누군가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말이다. 그 두려움으로부터 자신들의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아의 후손들이 택한 방법은 서로 옹기종기 모여 한 지역에서 같이 사는 것이었다. 같이 살기 위해서는 공동의 주거지역이 필요했을 것이다. 14 13 창 10:5, 20, 31 참고 14 K. A. Mathews, Genesis 1-11:26 (vol. 1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478. 29

III. 아브라함의 언약 - 구원의 방법 (창 11-22 장) 사실 옹기종기 모여서 같이 사는 모습은 현대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모습으로 이 부분이 문제가 된다는 점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왜 그럴까?? 창세기 1:26-28 절을 한 번 떠올려 보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축복 하실 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질 것을 명하신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이 명령은 타락 이후에도 다시 한 번 등장하게 되는데 노아의 홍수 후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였다. 창세기 9:1,7 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셨던 명령을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똑같이 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9:1 절에서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명령이셨다. 이 명령은 3 개의 동사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생육하다로 번역된 ר ה) 파라 라는 (פ 동사는 열매를 맺다라는 뜻인데 아이를 낳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 번성하다로 번역된 ב ה) 라바 라는 (ר 동사는 많아지다라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충만하다로 번역된 마레( מ לא )라는 동사는 기본적으로 채우다(fill, full)라는 ומ ל א ו 하-아레쯔( 뜻을 가진다. 땅에 충만하라로 번역된 실제 히브리어 본문은 밀르우 엣 )인데 이는 땅을 가득 채우라는 의미이다. 15 이곳 저곳에 흩어져서 아이를 낳아 א ת ה א ר ץ 늘어나는 인구수로 땅을 채우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노아의 후손들인 바벨탑 건설자들은 이 말씀을 정면으로 위반하게 된다. 혹자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서워서 좀 안전하게 있자는데.. 이게 왜 그리 문제가 될까? 모이고 흩어지고가 뭐 그리 대수라고?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지으실 때 아담을 지으신 창조 목적을 고려하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아담은 이 땅에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지어졌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가 하는 역할이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의 창조 질서를 유지하고 동시에 그 창조물들의 안녕을 돌보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다른 창조물들은 온 세상에 생육하고 번성해서 온 세상에 흩어져서 생활을 한다. 이들을 통치하려면 인간이 어찌해야 하겠는가? 한 곳에 옹기 종기 모여 있어서는 안 된다. 인간도 덩달아 온 지면에 흩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온 땅을 채우라)는 명령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인간에게는 명령이 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대리 통치자인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을 보이시고 또한 영광을 받으시기에 그렇다. 15 히브리어는 기본적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나간다. ל א ו) 밀르우 는 (מ ל א) 마레 의 (מ 명령형이고 ת) 엣 는 (א 뒤에 오는 단어가 목적어임을 나타내는 목적격 조사이다. ר ץ) 아레쯔 는 (א 땅을 의미하며 그 앞에 붙은 하( ה)는 그 라는 의미의 정관사이다. 30

III. 아브라함의 언약 - 구원의 방법 (창 11-22 장) 이 대목에서 우리가 가지는 질문은 타락 한 이후의 인간이 여전히 이 땅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부분일터이다. 이 내용에 대한 실마리는 창세기 9:2 절에서 발견이 된다. 본문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메시지 이후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을 노아와 노아의 아들들에게 붙였다 고 진술하고 있다. 이는 창세기 1:28 절의 내용과는 상당히 다른데, 그 이유는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 인간의 생활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창세기 1:28 절에서 아담과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창세기 9:2 절에서 노아 및 노아의 아들들과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는 사뭇 적대적일 수도 있는 관계가 되었다. 먼저 통치자로 세움을 받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다른 창조물들이 같이 고통을 받게 되었음으로 이에서 나타나는 권위 하락도 있겠으나 중요한 환경 변화는 다음 절인 3 절에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인간에게 먹거리로 허락을 하신 것이다. 이제는 인간이 동물을 보살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의 생명을 취해서 먹기도 한다. 동물들 입장에서는 인간이 적대적 관계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동물들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인간의 안전의 문제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해졌다. 만일 동물들이 인간을 보았을 때 무조건 공격을 한다면 동물들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물리적 능력이 부족한 인간들에게는 큰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에게 인간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을 주신다. 16 두려움이라는 요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종종 사용하신 방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올때도, 가나안 땅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과 관련해 효과적인 무기가 있어서도 아니었고 전투 및 전술에 능해서도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 바로의 마음과 가나안 땅의 거민들의 마음에 이스라엘에 대한 두려움을 주셨기 때문에 스스로 자멸한 탓이었다. 또한 기드온의 300 명 용사가 미디안 연합군과 맞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도 기드온의 300 명 용사가 아주 훈련이 잘 된 용사들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미디안 연합군이 두려움으로 인해 자멸한 것이 원인이었다. 하나님께서 같은 원리로 노아와 노아의 아들을을 야생의 동물들로부터 보호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는 창 9:2 절의 붙였음이라 는 단어이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한글 성경에서 붙이셨다 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ת ן) 나탄 이라는 (נ 단어이다. 이 단어는 주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인데 여기에서는 수동태로 쓰여서 주어졌다 는 의미가 된다. 즉 언급된 동물들이 노아와 노아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들이 어떤 목적 하에 왜 주어진 것인지 그 의도가 이 본문에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결국 앞뒤 문맥을 통해서 유추해 보아야 할 것 같은데 바로 다음 절에 동물들이 노아와 노아의 아들들에게 먹거리로 주어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렇게 보면 16 K. A. Mathews, Genesis 1-11:26 (vol. 1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401. 31

III. 아브라함의 언약 - 구원의 방법 (창 11-22 장) 단순히 동물들이 노아와 노아의 아들들에게 먹거리로 주어졌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문맥의 범위를 조금 더 넓혀보자. 홍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들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을 쓸어버리시고 아울러서 동물들도 암수 몇 쌍을 제외하고는 같이 쓸어버리신다. 하지만 6 장에서 주어진 언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동물들 중 일부는 노아의 가족들과 함께 생명을 보존하시는데 17, 누구를 통해서 이 동물들을 살려내느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분명히 노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노아와 그 아들들을 통해서 살려내셨다. 정확히 대리 통치자로 세움을 받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9 장에서는 6 장의 언약이 약간 더 구체화된다. 다시는 홍수를 통해 생명을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말씀 하시면서 하나님의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보이신다. 그런데 이 언약의 대상이 흥미롭다. 노아와 노아의 아들들, 그들의 후손들 그리고 모든 생물을 상대로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 생물들을 지칭 할 때 노아와 함께하는 생물들로 지칭 하신다. 18 하나님께서는 이미 8 장 21 절에서 인간은 나면서부터 악하다고 선언을 하신다. 노아와 노아의 아들들은 설령 하나님의 뜻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었다. 사정이 이럴진대,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의 지위를 박탈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만일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박탈하고자 하셨다면 다른 생물들을 칭하실 때 노아와 노아의 후손들로부터 따로 떼어 놓으셔야 했을 터였다. 12 절 본문에서처럼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들 이 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구지 생물들을 노아 및 노아의 아들, 노아의 후손들에게까지 붙여 놓으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인간이 타락해서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부여하신 대리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능력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적대적으로 변해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박탈하지 않으신 것이다. 죄 가운데에서 허우적 거리며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이제 다시 바벨탑 사건으로 돌아가서 한 곳에 정착해서 머물러 있는 것이 왜 죄가 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다시 한 번 따져보자. 여전히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인간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이었겠는가?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아들들이 완전히 해내지 못했던 역할.. 하나님의 창조물들에 대한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을 터였다. 창조물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위해 봉사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17 창 6:18-21 절 참고 18 창 9:8-17 절 참고 특히 12,13 절 32

III. 아브라함의 언약 - 구원의 방법 (창 11-22 장)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교재할 수 없는 창조물들과 하나님의 방법으로 소통하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알리고 보이는 제사장 역할을 감당해야 했을 터였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은 내면의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들의 안위를 찾기에 급급하였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부여했던 대리 통치자로서의 역할 자체를 부인하고 포기했던 것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수 없었다. 2. 바벨탑 건설 시도가 죄인 이유 그런데 바벨탑 건설자들의 문제가 흩어지지 않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창세기 11:4 절을 보면 성읍과 탑을 건설하는데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고 우리 이름을 내자는 진술이 나온다. 성읍을 쌓는 것은 성벽과 집을 짓는 작업으로 그것 자체로는 주거 환경을 구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탑은 사정이 약간 다르다. 고대에 탑을 쌓는 것은 오늘날 현대 사회의 관점에서 보자면 군수 산업이나 컴퓨터 산업에 비견할만한 최첨단 기술이 동원되는 사업이었다. 따라서 탑을 얼마나 크게 또 높게 쌓느냐는 자신들이 기술력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바벨탑 건설자들이 탑 건설을 목표로 했던 하늘 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자. 창세기에서 하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소로 여겨진다. 따라서 하늘은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 영역이고 인간은 땅을 통치한다. 그런데 11:4 절에서 바벨탑의 건설자들은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 영역인 하늘을 자신들의 기술력으로 도달해보려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19 창세기 3 장에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보려는 하와의 시도가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다. 3. 바벨탑 건설자들을 흩으시는 하나님 11:6 절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인고로 하고자 하는 일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 말씀 하시며 언어를 섞어버리신다. 이 구절에서 바벨탑 건설자들이 무엇을 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당시 하고 있었던 바벨탑 건설 자체를 의미하셨을 수도 있고 바벨탑 건설 뿐 아니라 자신들의 안전과 자기 과시를 위해 앞으로 하게 될 일들을 포함하는 개념일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19 K. A. Mathews, Genesis 1-11:26 (vol. 1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481. 33

III. 아브라함의 언약 - 구원의 방법 (창 11-22 장)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의 건설자들이 더 이상 진행을 하지 못하도록 막으시기로 결정을 하셨고 친히 내려오셔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다. 그 결과 바벨탑 건설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소통 불능을 경험하게 되면서 하던 일들이 실패하게 되었고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등을 지고 온 지면에 뿔뿔이 흩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살펴본 바와 같이 바벨탑 사건은 타락 후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의 죄성과 교만이 총체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이었다. 이처럼 죄성으로 가득한 인간이 자신의 안전과 과시를 위해 무엇인가 시도했을 때 그것을 주권적으로 막으시며 결국 인간의 이러한 시도를 무력화 시키신 사건이 바로 바벨탑 사건이다. 4. 바벨탑 건설 사건과 아브라함 부르심의 대조 그럼 아브라함 사건은 어떠할까? 창세기 12:2 절을 11:4 절과 대조해서 보면 아브라함 사건이 가지는 의미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11:4 절에서 바벨탑의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주거지를 만들어 흩어짐을 면함으로써 자신들의 힘으로 큰 공동체를 만들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집단들은 온 세상으로 흩으신 후 주권적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는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 하신다. 즉 11 장에서 바벨탑 건축가들이 하나님을 도외시한 채 자신들의 힘과 방법으로 이루려고 했었던 것을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또한 이름을 내는 부분도 큰 대조가 된다. 11 장에서 바벨탑 건설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바벨탑을 쌓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었다. 그런데 그들의 시도는 무력화 시키시고 12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아브라함의 이름을 세상에 내게 하시겠다고 약속 하신다. 두 경우 다 바벨탑 건설자들이 하고자 했었던 일들을 아브라함에게 선물하시겠다는 것이다. 이 두 이야기의 대조가 시사하는 점은 매우 명확하다. 일을 이루시고 역사를 끌어가는 존재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큰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결국 역사를 끌어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시도하는 모든 인간의 시도들은 처음에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종국에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방관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끌어가시는 역사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끌어가시는 역사는 우리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34

III. 아브라함의 언약 - 구원의 방법 (창 11-22 장) 이제는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B. 아브라함 언약: 무조건적 언약 (창 15:1-21)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이 내용을 읽어 내려가면서 과연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브라함을 변화시키셨는지 에 관심을 두고 읽어 내려가기 바란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줄 곳으로 가라는 명령에서 시작 된다. 그 직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 약속을 하시는데 첫째는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약속이고 둘째는 아브라함의 이름이 크게 드러날 것이라는 것이며 마지막은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약속들을 돌이켜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과연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을 이와 같이 복 주시기를 요구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런데 성서를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그와 같은 복을 요구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점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의아함을 가지게 하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원하고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해서 받아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오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떤 분들은 본인이 원하는 배우자감도 구체적으로 그려보고 기도를 해서 얻어내야 한다고 말씀 하시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관계는 전혀 이러한 관계가 아니었다. 아브라함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의 성격도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규정하셨고 아브라함이 구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겠다고 선포 하셨으며 결국 주시게 된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이제 언약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자. 어떤 사람은 언약이라는 단어를 이미 접해본 사람도 있을 테고 어떤 사람은 처음 접하는 사람도 있을 터인데, 한 번 살펴보자. 성경상에는 창조 언약, 노아의 언약, 아브라함의 언약, 모세의 언약, 다윗의 언약, 새 언약등 여러 가지의 성격을 가진 언약들이 존재한다. 언약이라는 개념은 메시아" 및 하나님의 나라 라는 개념과 아울러서 신약과 구역을 연결해주어서 성경 전체의 줄거리를 꿰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개념으로 이 언약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책에서는 여러 언약 사상들 중 핵심이 되는 아브라함의 언약, 모세의 언약, 다윗의 언약 과 아울러 새 언약, 이렇게 4 개의 언약에 대해서 간결하게 다룰 것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러한 언약 시리즈들 중에서 첫 언약이다. 35

III. 아브라함의 언약 - 구원의 방법 (창 11-22 장) 언약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 또는 어떤 조직과 조직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약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 20 성경의 언약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관계를 정의하고 설명하는 개념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관계이었는가는 각 언약에 따라서 약간씩 달라졌다. 따라서 각 언약을 이해하는 키는 과연 하나님과 각 언약의 주체들 사이의 관계가 어떠하였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성격은 무조건적인 언약으로, 아브라함이 요구하지 않은 축복을 하나님께서 특별한 조건 없이 주신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밑에서 계속 다루게 될 것이다. 보통 성경 가운데 나타나 있는 언약을 설명 할 때에는 성경이 쓰여질 당시 고대 국가들 간의 속국과 종주국의 계약문서 안에서 설명을 한다. 창세기 15 장, 출애굽기 24 장등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 관계를 맺는 언약식을 체결하는데 그 언약식의 내용이 당시 고대 국가들의 속국과 종주국간에 체결하였던 형식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 히타이트 문서는 많이 인용되고 있다. 꼭 외워야 하는 내용은 아니지만 성경에서 이야기 되는 언약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내용이니 한 번 훑어보고 지나가자. 1. 서론: 종주국과 속국의 이름 적시 2. 프롤로그: 종주국이 속국을 위해 행했던 일들의 리스트 3. 일반조건: 종주국과 속국 사이에 만들어지는 조약이 유효함을 인정하기 위해 속국이 따라야 하는 일반적 가이드라인 4. 구체조건: 속국이 따라야 하는 구체적인 규정들. 위의 일반적 가이드 라인의 구체화 버전 5. 보관과 공표: 조약 문서를 어디에 보관하고 언제 공공장소에서 읽을 것인지에 대한 규정. 속국의 미래 세대에 여전히 이 조약에 묶여있음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1 년에 1 번씩 읽음 6. 증인들의 목록: 보통은 종주국 신들의 이름 7. 축복과 저주: 조약을 깼을 때 당하게 될 저주와 조약을 지켰을 때 얻게 될 이득 21 8. 비준의식: 위의 조약이 효력을 발생하게 됨을 공표하는 의식 22 20 팔머 로벗슨, 김의원 역,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서울: CLC, 2008), 12-14 21 W. Randolph Tate, Handbook for Biblical Interpretation: An Essential Guide to Methods, Terms, and Concepts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2), 89 90. Joel T. Hamme, Mosaic Covenant and Ancient Near Eastern Covenants, ed. John D. Barry et al., The Lexham Bible Dictionary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3, 2014). 36

III. 아브라함의 언약 - 구원의 방법 (창 11-22 장) 위의 내용은 고대 히타이트라는 나라가 다른 약소국가와 속국, 종주국의 계약을 맺을 때 사용했던 조약 문서의 내용이다. 이 조약 문서에는 먼저 누가 종주국이고 누가 속국인지를 명시한다 (물론 여기에서 종주국은 히타이트가 될 것이다) 다음 히타이트가 속국을 위해 과거에 베풀었던 은혜를 역사적으로 나열 한다. 다음 히타이트의 속국으로 지켜야 할 일반적인 규율들을 써 내려간 후 그 규율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추후에 기술 한다. 또 새로 자라나는 속국의 미래의 세대들을 위해서 1 년에 한 번 정도는 이 조약 문서를 공공장소에서 읽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문서가 훼손되지 않도록 보관하는 장소와 방법도 아울러 기록하고 있다. 그 후에 그 문서가 효력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이 조약의 증인들을 나열하는데, 그 증인들은 보통 히타이트의 신들의 이름을 나열하게 된다. 그 후의 내용이 중요한데 속국이 계약 내용을 잘 지키면 종주국인 히타이트가 속국에 대해 베푸는 호의와 은혜의 내용이 적시되며, 또한 속국이 히타이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거나 계약 내용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저주의 내용이 담겨있다. 이 내용은 당시 히타이트와 다른 속국간에 종주국과 속국으로서의 계약을 맺을 때 일반적으로 기술된 계약 문서의 내용이었고, 히타이트뿐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대동소이해서 이러한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이러한 조약서가 만들어진 후에는 이 조약이 효력을 발휘함을 알리기 위한 비준의식을 거행하게 된다. 그 의식에는 보통 동물을 사용한 제물이 사용되는데, 창세기 15:9-10 절에서 행한 것이 바로 이러한 행동이다. 동물을 각을 떠서 각기 왼쪽과 오른쪽에 늘어 놓는다. 그 중간에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존재하게 된다. 비준의식이 진행되는 중간에 속국의 왕이 좌우로 각을 뜬 동물이 있는 가운데 길을 걸어가게 되는데 그 의미는 만일 속국의 왕이 변심을 해서 종주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면 현재 각을 뜬 동물처럼 될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23 이러한 비준의식까지 끝나게 되면 두 국가간의 속국과 종주국으로서의 관계가 정식으로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고대 국가들 사이에서의 속국, 종주국 조약은 기본적으로 속국의 의무 이행을 전제로 하는 조건적 계약 관계였다. 창세기 15 장 내용은 위의 고대 근동에서 속국과 종주국 사이에 체결되었던 조약을 살펴보면 그 의미가 더욱 자명해진다. 하나님은 창세기 15 장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다. 이때 하나님은 종주국의 위치에 있게 되고 아브라함은 속국의 위치에 서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5 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에 대한 축복을 한 번 더 강조하신다. 창세기 22 George E. Mendenhall and Gary A. Herion, Covenant, ed. David Noel Freedman, The Anchor Yale Bible Dictionary (New York: Doubleday, 1992), 1179. 23 Ibid.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