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전쟁 아담은 사람이 신이 될 것이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사람의 위치( 人 格 )를 이탈하여 사탄에게 패하였으나 예수 님은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사탄에게 승리하 시고 아담이 잃어버렸던 인격을 회복하였다. 사람-예수가 신-사탄을 이긴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진정한 인간 승리이자 하나님의 승리를 전하는 것이다. 박성완 著
내가 그들에 대해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이 글을 쓰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한테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열심으 로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죽으셨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처형한 죄목은 안 식일을 범한 죄와 신성모독 죄였는데 사실 이 죄는 아담이 먼저 범한 것이 었다. 곧 우리 인생의 근원적인 죄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보시기 에 매우 좋다고 하시면서 안식하셨다.(창1:31~창2:2) 그러나 아담은 신들 과 같이 될 것이라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다.(창3:5~6)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아담의 근원적 인 죄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제기한 것임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 고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다. 그리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은 아담, 곧 나를 대신하여 이 두 가지 죄목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것이다. 우리는 통상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연히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알아서는 부족하다. 판사 앞에서 피고인이 자신 의 죄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이 죄목으로 처형하였는가? 바 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들에 대하여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 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 (롬10:2) 라고 한다. 그들은 성경을 거의 다 암송하다시피 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여기 서 말하는 지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 시기에 그분의 목표는 항상 영에 있고 영이 살리는 것이고 생명이다.(요 6:63) 고린도후서에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 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 (고후3:6) 라는 말씀이 있다. 이 의미는 구약- 옛 언약과 신약-새 언약을 가장 잘 대별해 주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성 경 말씀을 거의 다 암송하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말씀을 표면적으로 받아드 - I -
려 예수님을 죽였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완성자 임에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니까 안식일을 어긴 죄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그들이 생각하 는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로 알고 있었기에 신성을 모독한다고 사람-예수님 을 죽인 것이다. 기록된 글자에는 인격이 없다. 그래서 글자의 사역으로 인 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성경이 역설적으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 처럼 기독교 역사에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참으로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 각하리라. (요16:2)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다음 부활 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주님을 붙잡고 꾸짖기 시작하 여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마16:22)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마16:21) 하셨다. 베드로는 좋 은 의도에서 말했지만 사탄의 일에 동참한 것이다. 이것이 모두 하늘의 일, 곧 영의 일을 모르고 글자대로 표면적으로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개념없는 열심은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자신도 의도하지 않 게 사탄의 일에 참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사탄이 사람을 속이는 두 가지 원칙은 동일하다. 첫 번째는 사탄이 아담을 속인 이것을 먹는 날에 사람이 죽지 않는 신들 과 같이 될 것이다 (창3:5) 라는 말이고, 두 번째는 성경을 읽되 문자적으 로 받아 들여 유대인들과 같이 생명이 없는 종교인이 되라는 것이다.(롬 10:2) 즉 영의 사역자가 아닌 글자의 사역자가 되라는 것이다. 성경의 서신 서는 교회 내에서 은사주의, 율법(문자)주의, 영지주의를 경고하고 있는데 사실 이에 대한 근원은 다 하나에서 기원한다. 모든 인간의 문제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에 기원하였듯이 이 또한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될 것이라는 사탄의 깊은 함정에 기인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 II -
마음, 곧 생명의 본질을 기록한 책이다. 그래서 표면을 보면 안되고 이면 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오셔서 글자의 사역이 아니라 살리는 영의 사역 을 하셨다. 공자나 석가의 말은 심오하지만 일반적으로 다 이해하고 수긍 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은 세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공자나 석가의 말같이 어렵지도 않은데 알쏭달쏭하고 이 해하기 힘들다. 다른 세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주는 계시에 의하면 사람은 본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생명의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 지만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지식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하였다. 이것은 물 고기가 물속을 이탈하면 사망이듯이 사람에게도 위치를 이탈한 것이 죄고 사망이다. 그리하여 위치를 이탈한 인류를 위해 누군가 와서 원래의 위치로 회복, 곧 구속이 필요하였다. 이것을 예수님이 하셨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 (골1:14) 그러므로 죄와 사 망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했던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원래의 세계, 곧 생명세계로 원 위치하였다.(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 이라. (롬8:2)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글자의 낡은 것 안에서 구출되어 영의 새로운 것 안에서 섬기는 영의 사역자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선악의 지식세계에서 오랜 기간 길들여진 그리스도인들은 선과 악의 이 분법적 관념 하에 여전히 표면적으로 성경을 보고 있다. 그러나 생명의 세 계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제3의 세계다. 성경은 바로 제3의 세계를 말 하고 있는 것이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는 세계, 지식이 아닌 태어나는 생명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교리를 주기 위해서 도 아니고, 가르치기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생명을 주러 오셨다.(요3:16) 예 수님은 오셔서 하나님의 왕국, 곧 생명의 세계를 전파하자 선과 악의 이분법 세계에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 III -
만물 안에는 하나님의 권능과 신격이 있고 이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롬1:20) 특수계시만이 성경이 아니고 자연계시도 성경이라 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목표는 오직 생명에 있다. 만물은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어떠함과 그분 의 일하시는 원리를 알 수 있다. 생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연결되어 태어나는 것이다. 또한 죽음을 통해서만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연결되 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의 음식헌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도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께 음식헌물로 드려짐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레위기 2장)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 되신 것만 알고 생명이 되기 위해 헌물 되심은 잘 알 지 못한다.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려고 한다. 그러나 희생물만 죽음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 니라 헌물도 죽음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이 사탄에게 속아 타락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한 이러한 생명의 경륜을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죽임당한 어린양 (계13:7) 이라는 말씀이 있다. 물론 영 안에 서 보면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이 없는 분이기에 창세로부터 죽임당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 안에서 보면 그분은 분명히 2천년 전에 죽 으셨다. 사람의 육신은 영생하게 되어 있는데 죄 때문에 육신의 죽음이 왔 고 오직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아는 사람들에게 는 이 말씀은 이해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세로부터 사람을 죄 인으로 창조하지 않았음에도 예수님이 우리의 죄로 인해 죽임당했다는 의 미이기 때문이다. 만일 육신이 단지 죄 때문에 죽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서 사람을 창세로부터 죄인으로 만들었고 이로 인해 어린양이 죽임 당했다 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주는 정확한 진리는 사람은 본디 죄가 없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헌물로 드려져야 하며 생명의 연결자인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근원 적으로 영원한 생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단지 죽 - IV -
지 않는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하지만 죽지 않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 아니 고 하나님 자신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죽지 않 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영원한 생명이 만 드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또 다른 하나님을 만든다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 다. 영원한 생명이란 거룩하고 시작도 끝도 없으며 피조되지 않은 생명으 로 하나님 자신이다. 그렇다면 피조물인 사람이 어떻게 피조되지 않은 영 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로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 연결되어 참여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이 하나님과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과의 관계적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식으로는 단 한 마리의 모기도 만들 수 없듯이 생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명은 반드시 죽음을 통해 연 결되어야 한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짐으로 영원한 생명에 연결되는 것 이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먹힘으로 그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함이라. (고후5:4) 하였다. 영 인 하나님과 육인 사람의 간격은 하늘들과 땅의 차이 보다 크다. 물과 기 름도 저절로 섞이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얼마나 크겠는 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연합이 된다는 것이다. 곧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지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만든다고 종교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연합을 통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합은 반드시 상호 죽음 안에서 연합된다는 것이다. 모든 만물은 상호 죽음 안에서 하나가 된다. 사람들은 죄가 없다면 하나님을 만나도 죽지 않 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고 소멸시키는 불이시다.(히 12:29) 하나님을 만나서 타지 않을 피조물은 죄가 있든 없든 아무것도 없 다.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하나 - V -
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는 근원적으로 번제단에서 만나는 것이다.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을 위해서 영-하나님, 곧 불-하나님께 태워져 번제 헌물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자신의 생명의 원리다. 십자가의 전면 은 죽음이지만 뒷면은 생명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 시기 위한 깊은 생명의 원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육으로 만들어진 사람 은 죽음 없이는 영생이 없는 것이다. 성경은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 니요, 입고자 함이니 (고후5:4a)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죄된 육신 때문에 육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이것을 벗어나 신들과 같이 되려고 생 각하나 바울은 우리가 육신으로 지어진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새로운 영적인 몸을 입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말하 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이 없으신 영이신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신 의 배필로서 몸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시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사람은 근 원적으로 육으로 지어진 다음은 영적인 몸을 입을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 것을 성경은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 (고 전15:46) 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본성에 속하게 된 것은 죄 때문에 본성 에 속한 것이 아니라 죄가 있기 전에도 본성에 속한 몸이었다. 근원적으 로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고전15:50) 성경이 주는 정확한 진리는 사람은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도 예수님을 믿어 야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도 어차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리적 대속뿐만 아니라 유기적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도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원래부터 죄가 없더라도 예수님을 생명의 연결자로 영접해야 한다. 만물은 다 이런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원자의 구조는 양성자와 음전자가 있고 중간에 이를 연결하는 중성자로 구 성되어 있다. 물과 기름도 저절로 섞이지 않고 반드시 중화제가 있어야 한 - VI -
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반드시 연결자가 있어야 한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 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딤전2:5) 죄라는 종교적 관념에 박혀 있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단순히 죄 때문에 예 수님의 중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연결되기 위해서는 중재자가 필요한 것이다. 아담은 본디 영생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영생을 얻을 자였다.(창3:22)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이 지 실재가 아니었다.(롬5:10) 모형은 그릇이라는 의미지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델하우스는 실재의 집이 지어지면 없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형-육적인 몸에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실재-영적인 몸으로 바뀌어지도록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것 이다. 우리는 종교적이고 율법적이고 표면적인 관념에서 빨리 탈피해야 생명의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가 보인다. 생명의 세계를 선악의 지식의 관점으로 재단하지 말고 생명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본디 생명 의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신들과 같이 된다는 사탄의 말에 속아 선 악의 지식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적전쟁은 위 치전쟁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씨와 땅의 관계다. 사람은 바로 씨- 하나님 앞에 흙-여자의 위치다. 사람은 본래 영생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씨를 주시면 그 씨를 발아시킬 토대지 자가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어떤 이들이 어떻게 죽은 자들이 일으켜 세워지 느냐? 그들이 어떤 몸으로 오느냐? (고전15:35) 라는 질문에 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고 (고전15:37) 하였 다. 왜 부활을 묻는 이들에게 어리석은 자여 라고 하는가? 타락한 아담의 기본적인 속성은 어떻게 하면 육신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소망한 다. 그래서 현대의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죄의 삯은 사망 (롬 - VII -
6:23)이라는 말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여 죄 때문에 육신이 죽고 죄가 없으 면 육신이 죽지 않는다는 문자적인 이분법적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 리석은 자여 라고 하는 것 같다. 이어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 (고전15:50) 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왜 이것을 말하노니 라고 하는가?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 들에게 당신들이 지금까지 잘 못 알고 있는 내용을 바로잡아 주겠다는 것 이다. 즉, 우리가 살과 피로 지어진 것은 죄 때문에 살과 피가 된 것이 아 니고 죄 이전에도 살과 피로 지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육신을 가지 고는 죄가 있든 없든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 로 죄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데 사탄이 설치해 놓은 하 나의 장애물에 불과 한 것이지 죄 문제만 해결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부활생명이란 말 그대로 죄가 있는 없든 육신이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씨를 뿌려 죽지 아니하면 부활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죄된 육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똑 같은 대자연의 생명 원 리에 의해서 자기 인격의 씨를 뿌리고 영적인 몸을 열매로 거둔다는 것이 다. 사탄의 자식들은 불의한 자들의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의로운 자 들로 부활한다는 것이다.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행24:15) 그러므로 바울은 죄가 있기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는 이분법적 세계를 말하 는 것이 아니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생명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 이다. 만일 죄를 대속 받은 그리스도인이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한 다면 예수님의 완전한 대속 사역을 심각히 훼손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전 존재적으로 구속을 받았고 전 존재적으로 거듭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 과 혼만 구원을 받았고 몸은 구원받지 못하고 죄 때문에 죽는다면 이는 예 - VIII -
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원을 심각히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란 단순한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 계가 끊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 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으면 죽은 것이고 육신은 죽었으나 하나님과의 관 계가 연결되어 있으면 산 것이다.(계3:1) 아담이 위치를 이탈하자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 (창3:9) 하시면서 위치를 물으셨다. 이 질문은 아담 안에 있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 의 영원한 질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무엇을 하였느냐 라고 물 으셨다면 인생은 참으로 절망이지만 행위를 묻지 않고 위치를 물으신 것이 은혜다. 그런데 당시에 아담이 하나님의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나무 뒤에 숨었듯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종교의 나 무, 명예의 나무, 도덕의 나무, 심지어 기도의 나무, 의의 나무 뒤에 숨어 서 어려운 길을 가고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위치를 이탈한 인류의 대표자 인 빌라도는 정 위치에 계신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어디서 왔느냐? (요 19:9) 고 물었다. 빌라도의 눈에도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사람과는 다르게 보였다는 것이다. 눈이 둘이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 눈이 하나 있는 사람들 의 세계에 가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거와 같은 이치다. 아담은 선악 과를 먹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정상적인 위치를 이탈한 자다. 그 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비정상적인 사람의 위치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님을 보고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를 발견하고 원래의 사람의 위치로 돌아가 는 것이 다름 아닌 구원이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창3:9) 이글은 이러한 영적인 위치전쟁의 관점에서, 그리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노력하였다. 부족한 이 글을 읽는 이들 이 마음의 문을 열고 이글을 읽는다면 분명 하늘로부터 오는 빛이 임할 것 이라 확신한다. * 본서의 인용된 성경구절은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 예수안에 刊 )임. - IX -
순 서 1. 요 약--------------------------------------- 1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 32 3. 하나님과 사람 ------------------------------- 38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45 5. 사람의 위치---------------------------------- 62 6. 죄란 무엇인가?------------------------------- 72 7.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78 8. 희생물과 헌물-------------------------------- 100 9.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116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127 11. 예수님의 침례------------------------------- 149 12. 십자가의 도--------------------------------- 156 13. 예수님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165 14. 이기는 자---------------------------------- 176 15.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182 16. 거짓 Vs 진실 ------------------------------- 192 17.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는가?-------------------- 197 18.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체계---------------------- 206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209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243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 279 22. 네가 어디 있느냐?---------------------------- 302 23. 반론에 답하여 ------------------------------ 322 24. 맺음말------------------------------------- 414
그러나 무엇이나 되는 것 같이 보이는 이 사람들에 관 하여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든지 내게는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무엇 이나 되는 것 같이 보이는 그들이 회의에서 내게 아무 것도 더해 주지 아니하였느니라.(갈2:6)
1. 요 약 1. 요 약 인류의 문제는 무엇인가? 속이는 자 아래 있다는 것이다. 속이는 자 아 래 있으면서도 너무 깊게 오래 동안 속아 있기 때문에 무엇에 속아 있는 지 모른다. 더 큰 문제는 소위 기독교인들조차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에 속아 있는가? 인간이 신( 神 )이 될 수 있 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있다. 사탄은 이브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 이 아시느니라. (창3:5) 하였다. 이 한 문장 안에 인간의 근원적 문제가 모두 들어 있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은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탄이 사람을 속이는 방법은 동일하다. 타락한 인류의 소망은 종교 안에서 신이 되고 정치 안 에서 왕이 되는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종교 안에 있는 교주들의 공통점 은 자기 종파 안에서 죽지 않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더욱이 소위 그 리스도인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되 참사람이신 예수님은 모르 고 신이신 예수님만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 마저도 믿을 수 없기에 예수님은 죄가 없어서 죽으실 수 없는 분인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해서 죽었다는 황당한 논리를 편다. 그러나 신은 사람의 구속자가 될 수 없다. 오직 사람의 구속자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말은 그분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의미다. 종교는 신과 사람을 분리시켜 신을 열심히 숭배하게 한다. 그러나 생명은 연합하게 한다. 우 리의 구원은 아담-신과 같은 사람에서 예수-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 이다. 아담은 신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므로 신과 같 은 사람은 심판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유사 이래 아담 이 소망하는 신과 같은 사람으로 사셨으나 역설적으로 예수님은 아담-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판을 받았고 죽으심을 통해 인간은 결코 신이 - 1 -
1. 요 약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하셨다. 만일 그분이 신이었다면 십자가에서 죽 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란 인간의 정체성이 폭로된 자리다. 죽은 자를 살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물위로 걸어가도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 자리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기 전까 지의 행적을 보면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아담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너무도 평범하게 죽으셨다. 아담 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면 사탄의 말이 맞 는 것이다. 그러나 흙은 흙이지 결코 씨가 될 수 없다. 십자가란 하나 님께서 사탄에게 속은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지니라 (창 3:19) 하신 말씀이 완전하게 확증된 자리다. 그래서 이 자리는 신이 되 고 싶은 아담의 소망이 끝난 자리다. 예수님과 같은 사람도 죽었기 때문 에 그 누구도 죽지 않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이 되신 것이다. 요한복음에 6장 54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 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영생의 근 거가 예수님의 살과 피 라는 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살과 피 가 없는 예수님을 추구하지만 분명히 예수님은 살과 피를 가지신 분이고 우리의 영생의 양식은 예수님의 살과 피 에 있다는 것이다. 살과 피 라는 의미는 그분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스스 로를 칭할 때 줄곧 사람의 아들 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자신은 사람이 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신들이 되고 싶은 사람 들의 속성은 신적인 예수님만을 알려고 한다. 살과 피가 없는 예수님만 을 믿으려고 한다. 예수님이 신이라면 예수님은 살과 피도 없고 십자가 에서 죽을 수도 없고 우리를 구속할 수도 없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 54 절에서 우리의 영생의 근거는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 에 있다고 말한다. 곧 사람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왜 십자 가에서 죽으셨는가? 죄가 없어서 죽으실 수 없는 분인데 하나님이 허락 - 2 -
1. 요 약 하셔서 죽으신 것이 아니고 살과 피 가 있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다. 살 과 피가 없다면 죽으실 수 없다. 그래서 요한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 수님의 참사람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6:34)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다. 또 요한은 서신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이것이 적그리 스도의 영이니라. (요일4:3)라고 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의 영생의 근거는 예수님의 신 되심에 있지 않고 그분의 살과 피, 사람이신 예수님께 있다는 것이다. 아담은 이 살과 피를 피해 신이 되려고 하였다. 영생의 근거가 살과 피 에 있음에도 이것을 거부하고 사람이 신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살과 피 를 무시한 영과 생명은 근거가 없다. 종교의 허다한 문제들이 여기서 일 어났고 그 결과는 언제나 황당한 것이었다. 근거 없는 영은 영생 안으로 이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위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너무도 깊게 사탄에게 속아 있기 때문에 사람의 육신은 영생하게 되어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 육신에 죽음이 왔다고 단순하게 믿는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란 육신의 죽음과 삶에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하는 것임에도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사실 사탄이 아담을 유혹한 말과 같이 죽지 않는 신들 이 되고 싶은 아담의 깊은 속성에 기원한다.(창3:5) 성경은 우리의 육신 이 살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으면 사망이고(엡2:1) 하나님과 의 관계가 연결되어 있으면 육신이 죽어도 산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 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 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요11:25) 이 말씀에서 처 럼 당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안죽었는가? 모두 죽었다. 또 예수님 은 자신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이라고 하면서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 3 -
1. 요 약 죽지 아니하리라. (요6:50) 하셨다. 그러면 지금 우리 믿는 이들은 육신 이 죽지 않는가? 다 죽는다. 그러므로 우리 육신이 죽는 것은 생명의 연합을 위한 필수 과정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죄의 삯 은 사망 (롬6:23) 이란 말씀의 의미를 죄 용서를 받은 그리스도인 마저 도 죄로 인해 육신이 죽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너무도 큰 모순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죄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안 된 것이고 예수님의 구 속은 완성이 안 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 또는 남편과 아내라는 생명의 세계를 목표로 생 명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타락하여 선악의 지식세계 에 와 있다. 지식이란 영적인 것인 아닌 표면적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 을 단순하게 문자적으로 표면적으로 이해하면 율법이 되어버린다. 예수 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는가? 그들은 율법이라 는 선악의 지식의 세계에 있었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세계에 계셨기 때문 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적용한 죄목은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였다. 통상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고 한 다. 그렇다면 아담의 죄를 대속했다는 것인데 역으로 아담의 타락이 어 떻게 안식일을 어긴 것이고 신성모독 죄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 람을 창조하고 보시기에 매우 좋았더라. (창1:31) 하시면서 안식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이라는 작품을 만들고 매우 만족 하시고 안식하셨 는데 아담은 자기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이 되고자 했다.(창3:5)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고 창조자를 모독한 것이다. 하나님은 좋다고 하는데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이 하나님 께 나를 왜 이렇게 밖에 만들지 못했습니까? 라고 항의하고 불만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보면 안 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의 죄 값은 동일하게 사형에 처하도록 규 정되어 있는 것이다.(출31:14, 레24:6) 그러므로 성경에 안식일을 거룩 - 4 -
1. 요 약 히 지키라는 말의 영적 의미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것이다. 성경은 일관된 한 목표를 가지고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영시기 때문 에 영이 생명이고 하나님의 목표는 영에 있다. 그래서 살리는 것은 영 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게 하며 (요6:63) 라고 한다. 성 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록한 책으로 성경 말씀은 표면과 이면(영)이 있 다. 그런데 표면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이면은 영원하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은 현대에 와서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하나님의 창 조에 만족하라는 이면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말씀의 표면 만 알고 이면을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자 유대인 들은 성경말씀을 어긴 예수님을 보고 참지 못했던 것이다. 또 예수님이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본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아담이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위치 를 이탈해서 너무 오랜기간이 지나자 그들에게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유대인들의 개념 안에는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 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아들의 위치에 있는 생 명의 세계에 계신 분이다. 그러나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율법의 세계에 있는 유대인들로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 게 당시 율법은 조선시대의 유교이념과 같은 것이고 북한의 주체사상과 같은 것이고 종교 경전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당시 이스 라엘을 지배하는 질서인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죽음으로 내 몰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 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 (고후3:6) 라는 말씀이 있다. 이 의미는 구약 - 5 -
1. 요 약 -옛 언약과 신약-새 언약을 가장 잘 대별해 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었던 옛 언약, 즉 율법은 완벽하지만 생명이 없는 글자 의 표면만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아 이러니하게도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졌던 성경이 본질을 벗어나 오히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는 역효과를 냈다는 의미다. 성 경은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도 성경에 대해 그것들이 바로 나 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요5:39) 하였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생명나무의 열매, 어린양, 만나, 성전, 제물들, 절기들, 반석 등 여러 주제는 모두 예 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유대인들은 표면적인 글자의 사역으로 인해 성경이 예수님을 말하 고 있는데도 예수님을 몰라보고 죽였다. 어떤 이들은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 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표면적인 말씀만 지킨다면 이것은 율법과 같이 글자의 사역으로 죽이는 사역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 도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사례가 있었 다. 예수님은 오셔서 유대인들과는 반대로 글자의 사역이 아닌 살리는 영의 사역을 하셨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 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내가 주고자 하 는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가 주고자 하는 내 살이로다. (요 6:51) 하자 이 말을 표면적으로 받아드린 유대인들은 자기들끼리 다투 며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 냐? (요6:52) 하였고 제자들도 마저도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그것 을 들을 수 있으리요? 하였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하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는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 (요8:7) 하셨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모 두 돌아갔다. 예수님은 그녀를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요8:11) 하시면서 글자의 사역이 아닌 영 - 6 -
1. 요 약 의 사역을 통해 그녀를 살리셨다. 율법대로 하면 간음한 자는 죽여야 한 다.(레20:10) 그러나 성경의 본질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죽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성경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다. 지금도 어 떤 종교에서는 자기들의 경전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이고 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라도 생명이 없는 글자대로 하면 죽이 는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롬3:20) 왜냐하면 율법은 기계적 이기 때문에 인격적인 사람에게는 적용하면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마저도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로 정죄를 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는 결정적 흠이 있는 것이다. 만일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 법으로 말미암아 있었으리라. (갈3:21) 이와 같이 당시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말씀을 기계적으로 잘 지켰지만 속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행위 이전에 마음 의 동기를 먼저 보시는 분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 어도 간음한 자라고 하시는 것이다.(마5;28)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이 하 나님 말씀과 한 덩어리, 곧 말씀이 인격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었으나 유대인들은 말씀과 사람이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지어다! (마23:29) 하신 것이다. 이것이 종교다. 종교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말씀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영을 알지 못하고 표면적으로 받아 드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 아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구 약의 대언자의 사역을 글자사역으로 죽이는 사역이라고 하였고 정죄의 직무라고 한 것이다.(고후3:6, 9) 그러나 신약의 사역은 영의 사역으로 살리는 사역이다. 신약 경륜은 글자를 섬기지 아니하고 영의 새로운 것 안에 있는 것이다. - 7 -
1. 요 약 우리를 붙들던 것 안에서 죽었으므로 이제 우리가 율법에서 구출되었나 니 이것은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 안에서 섬기고 글자의 낡은 것 안에서 섬기지 않게 하려 함이라. (롬7: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살은 참으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느니라 (요6:55~56) 하시면서 영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말씀을 표면적으로 받아드린 제자들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그것을 들을 수 있으리요? (요6:60) 하였고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하겠느냐?(요6:52) 하였다. 제자들과 유대인들 은 예수님의 말씀을 율법과도 같이 표면적이고 기계적으로 받아드렸던 것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컴퓨터에는 어떤 숫자를 입력하여 출력 하면 그대로 입력한 대로 출력이 된다. 그러나 사람은 인격적인 존재이 기 때문에 어떤 말씀을 내가 받아드린다고 해서 그대로 내가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말씀을 소화해서 내 나름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하면서 수군거리자 이것이 너희를 실족하게 하느냐? (요6:61) 하시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 (요6:63) 라고 하였다. 실족한 사 람이 생겼기 때문에 이 말씀이 나온 것이다. 즉 살과 피는 영이요 생명 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는 살과 피가 기반이 되어서 주님의 영과 생명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살과 피 속에 물질적으로가 아닌 영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예 수님의 영과 생명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영과 생명으로 이끌기 위해 서 살과 피를 말씀하신 것인데 이는 사람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말씀은 계시의 말씀이다. 우리의 생각과 하 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목표는 문자적 인 표면에 있지 않고 영-생명에 있다. 성경 말씀은 표면적인 것이 아니 고 하나님의 영-마음을 알아야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 8 -
1. 요 약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니까 말씀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이 영이요 생 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게되면 그것은 또 다시 글자의 사역이고 죽 이는 사역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른 세계에 계신 분이다. 소위 세상의 위인들이라고 하는 공 자나 석가,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어보면 심오하지만 다 이해가 간다. 왜 냐하면 우리와 같은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래서 공자나 석가나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서 한 두 명은 그들을 떠 날 수 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자기 스승과 함께 했다. 그런 데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선문답 같기도 하고 어려운 말도 아닌데 아리 송하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예수님을 따르다가 다 떠나갔다. 이것은 예수님의 세계와 아담의 세계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상식과 통념에 서 완전히 벗어난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라. 주가 말하노라.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55:8~9) 하 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는 크다는 것이다. 개는 사람을 알래야 알 수가 없다. 우리도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실상 은 모르는 것이다. 내 상식을 완전히 버려야 하나님의 세계가 보이는 것 이다. 생명의 세계를 지식의 세계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 수님은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 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13:14) 하신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 리도 여전히 선악의 지식의 관점으로 생명의 세계를 들여다 본다면 유대 인들이 겪었던 똑 같은 과정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사탄에게 속은 인류는 생명의 세계에서 지식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한 자 들이다. 그래서 사탄에게 속아 있는 인류는 깊은 소원이 있는데 그것은 - 9 -
1. 요 약 항상 죽지 않는 신( 神 )이 되고 싶은 것이다. 제한을 가진 사람이 제한이 없는 신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이 죽는 것을 불완전 하다고 생각하면서 늘 육신적으로 죽지 않는 것을 소망하고 있다. 일반 적으로 기독교계에서는 본래 사람은 하나님께서 죽지 않도록 창조했는데 아담이 죄를 지어 육체적 죽음이 왔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죽도록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창조했지 불완 전하게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창조물은 없다. 피 조물은 각각의 창조 목적 안에서 완전하게 지음 받았다. 독수리는 날아 다니고 뱀은 기어 다닌다. 그렇다고 뱀이 불완전한가? 천사는 죽지 않 고 사람은 죽는다고 해서 사람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각각의 피조물 은 그 창조목적 안에서 모두 완전하다. 사람은 사람 그 자체로서 완전하 고, 하루살이는 하루살이로서 완전하다. 모든 피조물은 그 창조 목적 안에 서 완전하게 지어졌다. 육신이 죽는다고 해서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우 리 인생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임도 불 구하고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류의 문제다. 사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내면에 흐르는 핵심 키워드다. 하나님이 정해준 운명을 인정 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가 하나님의 경륜을 푸는 중심요소다. 그래서 이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성경의 대부분의 계시는 드러나지 않게 된다. 예수님을 따라가던 제자들도 예수님에게서 어떤 신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 리고 이 분을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 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만 그들의 생각 밖에서 죽으시고 말 았다. 아마도 제자들은 마지막까지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 다. 그런데 그만 죽으시고 말았다.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셨다. 나 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하고 운명하셨다. 누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죽으셨다. 그러 자 모든 제자들이 떠나갔다. 죽는 데도 같이 가고 옥에도 같이 가겠다고 - 10 -
1. 요 약 했던 사람들이다. 만일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신으로 나타났다면 죽어도 같이 갔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고기 잡으러 갔던 것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사탄은 아담에게 신이 될 수 있다고 속였다. 그래서 지금 도 타락한 인류의 소망은 무엇인가? 신이 되는 것이다. 종교 안에서 신이 되는 것이고 정치 안에서 왕이 되는 것이다. 다 같은 말이다. 근원은 하나 다. 지금도 여전히 사탄은 같은 말로 사람을 유혹하고 있다. 우리의 구원 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인생의 진실을 알고 이 거짓 아래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인생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 하는 것이다. 피조물이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 속한 피조물이 있고 땅에 속한 피조물이 있다. 하늘에 속한 피조물은 영이 기 때문에 시작은 있지만 죽지 않는다. 그러나 땅에 속한 피조물은 물질이 기 때문에 끝이 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부여한 본질적인 임무가 있는데 그 것은 동산을 가꾸고 지키라 는 것이다.(창2:15) 그러면 동산이란 무엇인 가?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동산으로 소유주가 하나님이시다. 이 동 산은 성막-성전-예수-교회-천년왕국-새 예루살렘으로 발전된다. 이 동 산은 교회의 원형이다. 사람들은 이 동산을 물질적인 곳으로 생각하여 지 금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있지만 교회가 물질적인 곳이 아닌 영적이고 인격적이 듯이 동산도 영적이고 인격적인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의 목표는 물질에 있지 않고 항상 영-인격에 있다. 이에 대한 것은 뒤에 자세히 살 펴보기로 한다. 하나님은 영시기에 사람 안에, 곧 인격 안에 거하신다. 하 나님은 교회 안에 거하시듯이 동산이 하나님의 거처다. 이 동산은 오늘날 의 교회인 동시에 곧 나 자신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이 곧 동산인 것이다. 사람의 본질적인 임무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다. 이 인격을 지키는 것이 생명이고 이것을 이탈하면 사망이 - 11 -
1. 요 약 다. 그러므로 영적전쟁의 핵심은 사탄과 사람간의 인격 쟁탈 전쟁이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사람의 위치, 곧 인격의 본질은 흙이라는 것이다.(창 2:7) 하나님은 씨-생명이고 사람은 흙-육신이며 육신은 연약하고 생명이 없다. 씨의 절대적 소망은 밭에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흙이라는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사 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형상이란 실제, 곧 생명이 아니라는 의미다. 전기와 전등의 관계에서 전등 자체로는 빛이 없다. 전등에는 보이 지 아니하는 전기가 연결될 때 전기의 빛이 발하게 된다. 그래서 전등은 보이지 아니하는 전기의 형상이다. 형상이란 자가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고 무엇을 받아서 표현하는 존재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체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서 형상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되 어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서 죽게 된 것이 아니고 어차피 사람은 한 번은 죽게 되어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이것은 진리다. 사람들은 십자가라는 죽음이 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고전1:24) 인지 왜 승리인지, 왜 우주의 중심점인지 잘 모른다. 단지 부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단지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법리적인 혜택 정도로만 생각한다. 레위기에 보면 희생물과 헌물이라는 말이 나온다. 희생물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리는 제물이고 헌물이란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통을 위한 제물이다. 희생물이 법리적인 것이라면 헌물은 생명의 연합을 위한 유기적 것이다. 즉 헌물이란 죄와 관계없이 드리는 제물이다. 우리 인생은 원래 죄가 없더 라도 하나님께 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성경이 주는 계시는 희생물만 죽는 것이 아니고 헌물도 죽음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다. 모든 헌물은 살 아있는 채로 드려지는 것이 없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희 생물과 헌물은 동일시 되었다. 그것은 태우는 희생물이요, 불로 예비하여 - 12 -
1. 요 약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이니라. (레 1:17) 단지 희생물이 죄를 속하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질 필요가 없다. 제단 주 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레17:11) 이것은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이 아니 고 법리적인 죄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희생물을 하나님의 불 로 태우고 이것을 헌물과 동일시하고 있는가?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그런 것이다.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희생물이 태워짐으로 번제헌물이 된 것이다. 그래서 항상 태우는 희생물은 헌물과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아담이 죄를 지어 희생물이 필요했지만 어차피 사람 은 헌물로 지어져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생명이 연합이 필요했는데 이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희생물과 헌물이 동일시 되고 있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보면 희생물로서 피 흘림의 죽음과 헌물로서의 죽음, 두 번 죽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희생물과 헌물의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법리적인 희생물 안에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한 헌물을 포함시 켜 놓으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라는 것이 다.(고전1:2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희생물인 동시에 헌물이다.(레1:9, 17) 또 희생 물과 헌물은 우리 자신이다. 인생은 죄로 인해 희생물로서도 피 흘림의 죽 음이 필요했지만 죄 이전에도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 제헌물, 곧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 (히12:29) 하나님을 만나서 태워지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모든 헌물은 모 두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진다. 모든 만물은 불에 태워짐으로 다른 물질 로 바뀌어진다. 우리도 불에 태워짐으로 육신에서 영적인 몸으로 바뀌어지 는 것이다. 그래서 헌물의 총체와 기초는 번제헌물이다. 인생은 하나님 앞 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다른 4가지 헌물 - 음식헌물, 화평헌물, 죄헌 물, 범법헌물 - 은 번제헌물의 발전이고 번제헌물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다. 헌물이 불에 태워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표현하는 것이 다. 그러므로 희생물이 법리적인 것이라면 헌물은 유기적인 것이다. 우리 - 13 -
1. 요 약 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레위기에 나오는 제물들의 명칭은 우리의 죄로 인해 희생물 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희생물이라 하지 않고 헌물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신다. 왜 명칭이 희생물이 아니고 헌물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 제헌물, 곧 흙으로 창조되었다. 흙이란 생명을 받을 위치지 자체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은 시작이 있고 끝 이 있다. 사람만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사람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 은 오만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피조물이다. 창세기 1, 2장은 죄가 들어오기 전의 하나님의 원계시다. 바로 그 원계시 도 이 진리를 증거한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 게 하시고 갈비뼈를 뽑아서 이브를 만들었다. 여기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이브는 부활생명-교회를 예표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목표는 아담이 아니고 이브 곧 교회다. 이것은 죄가 들어오기 전의 일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사람은 거듭나야 했다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진리다. 여기서 아담은 인류와 그리스도 둘을 모두 예표한다. 아담이 깊이 잠들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을 의미한다. 죽지 않 으면 이브라는 부활생명을 산출할 수 없다. 또 예수님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를 죽지 않고 잔다 (마9:24) 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 도 안에서 죽은 자를 잔다 라고 표현함으로써 아담 안에서 죽은 자와 분 명히 구분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 니었다. 그리고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은 본질적으로 다르듯이 생명의 길 안에서의 부활과 사망의 길 안에서 의 부활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행24:15)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다. 생명의 길 안에서 부활과 사망의 길 안에서 부활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 면서도 육체적 죽음에 대해서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조건 육체적 죽음은 부정적인 것으로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실 리 없 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는 것을 아주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 14 -
1. 요 약 있지만 조금 더 들어 가보면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풍성한 계시는 닫혀 있 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근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의 기점, 출 발점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열매가 달라진다. 내가 영생을 가지고 있었다 고 믿는 것과 그렇지 않다고 믿은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이방종교의 근원은 여기서 출발한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진 피조물서 영원한 생명이 없었다. 영-씨로 지어졌다 면 죽지 않지만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생명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그 생명은 그 왕국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생명원리는 만물이 똑 같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삼켜짐으로 높은 생명에 연결된다.(고후5:4)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의 왕국이다. 하나님은 왜 이 우주를 창조했는가? 생명의 왕국 을 목표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자연계시는 무엇을 계시하는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만물은 바로 그 생명을 계 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알 수 있다. 생 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라는 생명의 원리를 알 수 있다. 특수계시든 자연계시든 하나님의 모든 목표는 하나님-생명에 초점이 맞추 어져 있다. 사람만이 이 생명의 원리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고 생 각한다. 그러나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무 기물이 저절로 유기물이 되는 방법은 없다. 돌이 풀이 되려면 풀뿌리가 흙 속에 있는 돌을 뚫고 그 영양분을 취해 풀이 된다. 풀이 소가 되려면 풀은 소에 먹혀야 되고,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려면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고후5:4) 이렇듯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삼켜짐으로 그 생명에 연 합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 자신으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생명이다. 피조 되지 않은 생명이다. 만약에 영원한 생명이 만드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육 - 15 -
1. 요 약 신을 입고 오실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을 영생을 가진 자로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또한 영원한 생명을 만드는 것이라면 또 다른 하나님이 생기는 것이고 피조된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이란 말 자체에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죽지 않지만 피조된 생명이 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국의 첫 열매로서 하나님의 왕국의 씨-조상이다. 아 담이 옛 인류의 조상이라면 예수님은 새 인류의 조상으로 오신 것이다. 하 나님께서 생명이 없는 것은 금 나와라 뚝딱 하는 식으로 만드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만들 수 없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 능성에 손상을 입히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만드는 것 이 아니고 낳음을 통해 아들을 생산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장 5절에 그 분께서 어느 때에 천사들 가운데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 가 너를 낳았도다, 하셨느냐?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창 세기 6장과 욥기에서 천사들을 향해서도 하나님의 아들들 이라는 말이 나 오니까 천사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향해 내가 언제 너희들을 아들이라고 했느냐, 언제 내가 너희들을 낳았느냐? 반문하시면서 천사인 너희들은 내 아들이 아니 고 내가 낳은 사람이 내 아들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 니까 천사는 단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형상-아들이지 생명을 이어받 은 아들이 아니고 사람만이 하나님의 생명을 이어받은 아들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3장의 아담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눅3:38) 만들어진 아들이었 지 낳음 받은 아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은 근원적으로 거듭나야 했던 것이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낮과 밤이 있다. 성경에서 밤은 죽음을 예표하고 아침 - 16 -
1. 요 약 에 일어나는 것은 부활을 예표한다. 그러나 죽음이 없는 새 예루살렘에는 밤이 없다. 창세기 1장의 밤과 낮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은 죄가 없더 라도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창세기 1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마른 육지를 땅이라 부르시고 물들이 함께 모인 것을 바다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 았더라. (창1:10) 예표적으로 땅은 생명을 예표하고 바다는 사망을 예표한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에 가면 바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지 고 바다도 다시는 있지 아니하더라. (계21:1) 창세기 1장은 죄가 들어오기 전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육신이 한 번 은 죽어야 된다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한 번 죽는 것은 죄 이전에도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 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모든 피조물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한 생명의 길이 있다. 정해 놓은 생명의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씨는 땅에 뿌려져서 죽어야 싹을 낸다. 흙도 마찬가지다. 생흙은 씨를 발아 할 수 없고 죽은 흙이라야 그 씨를 발 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씨고 사람은 흙이다. 이 원리는 사탄에게도 그대 로 적용된다. 사탄도 영이기 때문에 씨다. 그래서 사탄도 흙-사람과 연합 하여 열매를 맺으려면 동일한 과정을 격어야 한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 정하는 것이다. 어떤 씨도 자신의 열매를 산출하려면 동일한 과정을 겪어 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이란 생명의 길 안에 있는 것이고, 사망이란 사망의 길 안에 있다는 것이다. 열매를 맺으려면 그 과정이 있다 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열매를 맺느냐? 사탄의 자식으로 서 사탄의 열매를 맺느냐? 이 차이다. 어떤 씨도 흙을 만나서 열매를 맺는 과정은 동일하다. - 17 -
1. 요 약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 (고전15:20) 가 되셨다. 이 말은 예수님은 새로운 인류의 씨로서 새 인류의 조상이 되 셨다는 의미다. 우리는 같은 열매(씨)를 소유한 자들이다. 그들뿐만 아니 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 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어찌하여 사람이 보는 것을 여전히 바라리요? (롬8:23~24) 또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씨를 가진 자로서 같은 열매 종류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 종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약 1:18)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는 하나님의 열매가 되고 마귀의 씨를 가지면 마귀 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이 씨-생명이다. 핵심은 영 -씨가 생명이라는 것이다. 씨와 열매, 생명은 한 개념이다. 사람은 흙-육 으로서 씨-열매가 아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육적인 몸은 생명이 아니 라 영이 씨-생명이기 때문에 영적인 몸이 열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 리가 첫 열매 종류가 된다는 것은 영적인 몸으로 영생을 가진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원래 사람을 지옥으로 가도록 창조하지 않았다. 지옥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다.(마25:41) 그런데 왜 사람이 그곳으로 가는가? 사람은 단지 흙으로서 그 씨를 받아들여 그 열매를 맺는 피조물이 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씨의 왕국으로 가는 것이다. 그 생명은 그 나라 다. 우리가 흔히 동물의 왕국, 식물의 왕국 하는데 그 왕국에 들어가려면 그 생명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가? 사람의 생명으로는 하나님의 생명의 왕국에 들어 갈수 없기 때문이다. 그 생명이라야 그 왕국이 될 수 있다. 개의 생명을 가지면 자동적으로 개의 왕국이 되고, 소의 생명을 가지면 소의 왕국이 일원이 되는 것이다. 예수 - 18 -
1. 요 약 님께서도...하나님의 왕국은 볼 수 있게 임하지 아니하며 또 그들이 이 르기를 여기를 보라, 혹은 저기를 보라! 하지도 못하리니 보라, 하나님 의 왕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b~21) 하셨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고 그 왕국을 결정하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의 생 명의 과정은 동일하다. 사람만이 특별하지 않다. 성경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원리는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 고 있다. 성경은 곳곳에서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고 있고, 부활을 밀과 보리 에 비유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도 식물의 열매 (고전 15:23, 약1:18)로 비유하고 있다.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 의 왕국이다. 또 예수님과 연합되어 죽는 것을 땅에 식물이 심기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심겼으면(planted) 또 그 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 (롬6:5)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지으시는 농부시다.(고전3:9) 그러니까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씨를 심는 것이고 부활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린 다음 최 종적으로 열매를 수확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덤에 묻히는 것은 부활의 열 매가 되기 위해 심겨지는 것이다. 또 성경은 거듭난 사람을 살아 있는 돌(벧전1:5)이라고 한다. 그러나 돌은 영원하지 않다. 돌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보석이 되어야 영원하다. (계21:11) 우리의 변화과정은 흙-돌-보석 순인데 이 말씀은 우리의 변화 과정을 물리적으로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의 생명의 과정이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 농사의 정상적인 과정은 흙-사람 안에 하나님께 서 씨를 뿌리면 이 사람은 영적으로 거듭나게 된다. 영적인 거듭남이란 하 나님의 입장에서 씨를 뿌리고 새로운 생명이 싹이 튼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거듭났다 하더라도 부활한 영적인 몸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최 - 19 -
1. 요 약 종 목표로 하는 열매는 아니다. 그래서 육신적 몸이 영광스런 부활의 열매 (몸)이 되려면 이 사람은 인생으로서 최종적인 인격의 열매(씨)를 땅에 뿌 려 심겨져야 한다. 이것이 죽음이다. 이를 통해 실제적이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 좋은 열매를 거두신 것이다. 육종 사업을 통해 좋은 씨를 얻으려면 여러 번의 씨 뿌리는 과정을 통해 좋은 씨를 얻 는 거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땅에 뿌려져 부활의 열매가 된다는 것은 처 음에 사람은 흙이었지만 씨가 된다는 것이다. 열매 안에는 씨가 있기 때문 에 씨와 열매는 하나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다. 씨란 생명이고 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원한 것이다. 생명은 이렇게 씨 뿌리는 과정을 통해 생명이 연결되고 또 생명이 더욱 강 화된다. 이 원리는 우주 만물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이다. 부정적인 면으로 보면 우리의 죄 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셨지만 긍정적인 면으로 보면 죽으심을 통해 예수님 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살려주는 영(고전15:45)-씨가 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육체로 계시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없다. 영-씨가 되셔야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 을 단순히 대속이라는 법리적인 면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법리적 인 면만이 아니라 유기적인 면이 더 중요하다. 아담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단순히 법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유기적 으로 선악과를 먹었다는데 문제가 더 있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어겼다는 것은 외부적인 것이다. 법리적 것은 외부적인 것 이기 때문에 그것의 해결은 단순히 용서해주면 해결된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유기적으로 사탄의 씨가 아담의 육신 안에 심어져 사망의 열매를 맺는 길로 갔다는데 문제가 더 있는 것이다. 사람은 밭이다. 그 밭 에는 원래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야 한다. 그런데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다 는 것이 죄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면 식물로 치면 아직 열매 - 20 -
1. 요 약 를 맺기 전이다. 그래서 열매를 맺기 전에 갈아엎고 새로운 씨를 심으면 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내 안에 성령-씨가 있더라 도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열매가 아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부 활이 열매다. 왜냐하면 씨의 소망은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밭에는 생 명이 없다. 밭은 씨를 받아드려 열매를 생산하는 것이지 자체로 씨가 있는 것이 아니다. 농부는 밭에서 열매를 거두지 밭을 거두는 것이 아니다. 밭 이란 여자와 같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로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 하나님의 아들을 생산할 운명이다. 스스로 씨가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 가 현재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하였지만(롬8:23) 몸 자체가 열매가 된 것 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몸도 부활을 통해 영적으로 변화되어야만 완전한 열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하였다 하더라도 육신은 죽어서 땅에 뿌려져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흙-몸이 영-몸으로의 전환, 곧 부활 의 열매로 변화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열매-씨는 한번 결정되면 고칠 수 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도 아담 안에서 죽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 는 것이다. 이미 사탄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매를 맺기 전 에 밭을 갈아엎고 새로운 씨를 뿌리면 된다.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 는 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갈아엎어진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이 새로운 밭이 예수님이다. 또 이 새로운 밭의 씨가 누구인가? 예수님이 다. 예수님은 밭인 동시에 씨로 오신 분이다. 예수님이 육체로만 있으면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가 없다. 육체는 흙이지 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 이 생명으로 씨다. 그래서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이 되신 것이다.(고전 15:45)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 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 21 -
1. 요 약 예수님은 대속을 위해서 희생물로서의 죽음도 필요했지만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도 헌물로서의 죽음도 필요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복이다. 만일 천사처럼 영-씨로 지어졌다면 거듭남이 없 다. 사람은 흙이기 때문에 타락했을 지라도 다시 부수고 재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사람이 사탄의 밭이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갈아엎고 새로운 씨를 뿌리면 되는 것이다. 일반 기독교인들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만 특별하다면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죄를 사해 주면 되지 무엇 하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겠 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만을 위해 죽으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만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낮은 수준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의 씨-생명이 되시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에게 하나님 자신-생명을 주시려고 한다. 그 런데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육 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 과정을 거쳐 오셨다는 것이다. 이 의 미는 무엇인가?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라는 것이다. 보통 기 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할 때 영원한 생 명으로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태 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굳이 왜 아브라함을 부르고 여러 세대를 거쳐 예수님이라는 한 씨가 태어나게 하셨는가? 이것은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 이고 여러과정을 거쳐 강화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육 종사업과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이라는 한 씨를 불러 여러 세대를 거쳐 예 수님 때에 이르러 하나님 나라에 딱 맞는 한 씨를 산출하신 것이다. 우리 - 22 -
1. 요 약 의 거듭난 생명-부활생명도 그렇다. 아담은 1차적으로 만들어진 아들이다. 만들어진 아들(흙) 안에는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거듭났다 하더라도 여전 히 연약하다. 그래서 죽음의 과정을 거쳐 보석-부활의 열매로 다시 태어 나야 한다. 로마서 8장 16절에 보면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 나님의 자녀 인 것을 증언하나니 라고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의 영안에 들어와 우리의 영과 연합된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그러나 육체는 아직 거듭나지 않았다. 영적인 몸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경은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고전15:50) 라고 한다. 살과 피라는 말은 육체라는 말이다. 우리는 죄가 있기 때문에 육체가 아니라 죄가 없을 때도 육체로 지음 받았다.(창2:24) 사람이 육체라는 것은 죄가 있으나 없 으나 육체이다. 우리가 천사처럼 영-씨로 지음 받았다면 죽지 않는다. 그 러나 사람은 육체-흙으로 지음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세계다. 영적인 세계는 그 세계에 합당한 영적인 몸을 입어야 한다. 그래 서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왕국에 살려 면 그에 합당한 몸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썩을 육체가 썩지 않는 영적인 몸으로 변화하려면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죄가 있기 때 문에도 희생물로도 죽어야 하지만 죄가 없더라도 사람은 헌물로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육체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지 육이 아니다.(요6:63) 육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어차피 육이 다. 육에서 난 것은 어차피 육이다.(요3:6)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즉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려면 어떤 공통지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의 간격은 하늘과 땅의 간 격보다 크다. 결국 하나님이 사람의 수준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래서 그 분이 육신으로 오셨다. 그럼에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 23 -
1. 요 약 수준에 맞출 수가 없다. 예수님을 우리가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병 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물위를 걸어가신 예수님과 내 가 어떻게 하나 될 수 있는가? 하나 될 수 없다. 그분은 우리에게 너무 멀 리 있는 분이다. 그런데 그분의 죽으심을 보니까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라 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연합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육신으로 오셔서 사람에게 생명을 직접 줄 수가 없다. 육체로 오 셨기에 육체에게 생명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육은 생명이 아니고 영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심을 통해 살려주는 영이 되신 것이다.(고전15:45) 예수님이 영-씨가 되어야만 흙-육인 사람에게 생명 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므로 영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큰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큰 것은 아 무리 커도 제한이 있다. 태양은 아무리 커도 제한이 있다. 그러나 공기는 제한이 없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공기와 같고 영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한이 없다. 여기에 영생의 원리가 있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 하 나님의 생명을 실질적으로 이식받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생명이다. 부활생 명의 예표인 이브는 아담의 죽음을 통해 산출되었다. 죽음을 통해서만 생 명이 산출되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에 만들어 존재이기에 사탄이 훼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1차적 인 흙-육신에서 더 이상 사탄이 훼방할 수 없는 2차적인 생명의 출생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부활생명으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이다. 물질세계 인 지구상에 존재하는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은 영-씨로 창조되지 않았고 흙-육신으로 창조되었다. 흙에게는 씨가 없다. 그래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은 반드시 한번은 죽게 되어 있다. 피조물에게 이것 을 지키는 것이 생명이고 이탈하면 사망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생 명의 책이다.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는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기록된 책이 아니다. 사망도 우리가 생각하는 - 24 -
1. 요 약 육체적 죽음과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은 생명의 길이 있고 사 망은 사망의 길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가 들어오기 전에 사람에게 정하신 생명의 길은 1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남 - 2 육체적 죽음(잠듦, 천국) 3 의로운 자의 부활- 4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성된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들어온 사망의 길은 1 선악과를 먹고 사탄 의 자식으로 거듭남 - 2 육체적 죽음(지옥) - 3 불의한 자의 부활 4 둘째사망(불 호수) 이다. 위 과정은 열차의 정류장과 같은 것이다. 생명노선이건 사망노선이건 표면 적으로 보면 똑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노선 안에서는 반드시 거쳐 야 할 과정으로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사람이 한 번은 죽도록 만들었을까? 상세한 내용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하나 님께서 정한 우주만물의 생명의 원리가 그렇다는 것을 만물을 통해 알 수 있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먹힘으로 높은 생명에 참여한다. 또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한다. 이 두 가지는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이것은 생명노선 뿐만 아니라 사망노선도 마찬가지다. 사탄도 영으로서 일 종의 생명이기 때문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는 과정은 동일하다. 성경은 사망노선 안에 있는 사망, 곧 영적인 사망, 첫 번째 사망, 둘째 사망이라는 세 가지 사망에 대해 용어를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고 있다. 다만 예수님은 생명노선에 있는 자들의 육체적 죽음에 대해서는 죽지 않았고 잔다 (마:9:24, 막5:39, 눅8:52) 라고 하시면서 사망노선 안에 있는 자들의 죽 음과 구별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잠 잔다 로 구별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구약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 하고 있다. 마태복음 27장에서 52절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한 구약성도 들의 죽음을 잠든 성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무덤들이 열리니 잠든 성 - 25 -
1. 요 약 도들의 많은 몸이 일어나 (마27:52) 또한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왕들의 죽음을 조상들과 함께 잠들다 로 표현하 고 있다. 이처럼 다윗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의 도시에 잠들었더라. (왕상2:10) 생명의 노선 안에서의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 앞에서 귀중하도다.(시 116:15)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14:13) 이것은 대단히 큰 차이다. 그러면 왜 사망노선 안에서는 육체적 죽음을 다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가? 어차피 사망노선 안에서는 어떤 과정에 있든지 하나님과 관계가 분리되어 있으며, 종착역이 불 호수이기 때문이다. 생명 노선 안에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라는 열차를 타고 있다면 사망노선 안에 있는 자들은 사탄이라는 열차를 타고 있는 것이다. 노선이 다르다는 것이 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었건, 첫 번째 육체적 사망이건, 불의한 자의 부활 이건, 둘째 사망이건 매 한가지라는 것이다. 그 노선 안에 있으면 어차피 과정만 다를 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된 사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굳 이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위 과정은 그 노선 안에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정류장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단 사망노선 안에서는 첫 번째 정류장 에서만 생명노선으로 가는 열차를 갈아 탈 수 있고 한 번 출발하면 돌아 올 수 없는 길이다. 우리는 아담으로 인하여 모두 사망 열차를 타고 있었 다. 그런데 사망 열차가 출발하기 전에 그리스도라는 생명열차로 갈아 탄 것이다. 창세기 2장 17절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in the day, 그 날 안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그러나 아담 의 육신은 그날 죽지 않고 930살까지 살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분명히 육 신의 죽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 - 26 -
1. 요 약 은 단순히 육체적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 17절은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그 날 안에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관계가 끊어지리라 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육신이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사람 들은 여전히 창세기 2장 17절의 말씀을 단순하게 육체적 죽음에 초점을 맞 추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단순히 육체적 생존과 죽음에 있지 않다. 어떤 종류의 씨건 땅에 뿌려져 열매를 맺 는 과정은 동일하다. 그래서 흙-사람에게 하나님의 씨가 뿌려지던지, 사탄 의 씨가 뿌려지던지 표면적으로는 육체적 죽음과 부활이라는 동일한 과정 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이란 생명의 과정과 사망의 과정이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면 어떤 이 는 구원 받는 데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알아도 문제가 없지 않느 냐?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담이 타락한 근원 의 문제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에게 처방을 한다고 했을 때 병의 근원을 모르고 처방하면 어떻게 될까? 단지 현상만 보고 처방을 한다면 그 병이 온전히 치료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근원이 중요하다. 기점이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모든 종교가 인간이 어디선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에는 다 동의한다. 그러나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는 정확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 또한 아담의 타락 원인에 대해 분명하게 제시하시 못하고 있다. 더구나 인간은 원래 영 생하도록 육체가 창조되었는데 타락함으로서 육체가 죽음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 같지만 실상은 사람 안에는 불성-영생이 있다고 하는 불교의 가르침과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현상만을 놓고 본다면 불교의 가르 침이 더 타당할 수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왜 변절하여 종교통합에 참 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거기에 참여하는 모두가 근원이 같기 때문에 그 런 것이다. 우리는 아담이 왜 타락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사고가 났 으면 사고원인을 알아야 대책을 세울 것 아니겠는가? 사고 원인을 모르고 - 27 -
1. 요 약 대책을 세우면 그 대책이 정확한 대책이 될 수가 없다. 현상도 중요하지만 근원은 더 중요하다. 근원이 열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이 미 예수 그리스도의 통하여 전 존재적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한다. 그런 데 구원받은 우리가 죄 때문에 육체가 죽는다면 이것은 너무도 큰 모순이 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완성이 안된 것이다. 구원받은 우 리 인생의 육체가 죽는 것은 죄로 인한 희생물로 죽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죽는 희생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희생물이 되라고 한 다.(롬21:1) 구원받은 우리가 죽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헌물 로 죽는 것이다.(딤후4:6)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 렀도다.(딤후4:6) 이를 통해 흙-육신이 하나님-생명에 삼켜져 영적인 몸으로 전환되기 때문 이다.(고후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 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5:4) 예수님이 우리의 주 라는 말은 조상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조상은 사람이 어야지 신은 사람의 조상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육체로 계실 때도 줄곧 자신을 지칭할 때 사람의 아들, 곧 사람이라고 하셨고 다시 오실 때도 사 람의 아들로 오신다고 하였다.(마26:64) 사람의 구속자는 사람이어야 한다. 아담은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패하여 사망의 길로 같지만 예수님은 사탄 과의 위치전쟁에서 죽기까지 참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하나님이 정해놓은 생명의 길을 걸으신 것이다. 이를 통해 새 인류-하나님의 왕국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음식헌물로 창조 되었다. 그런데 희생물만 죽음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헌물도 반드시 죽음을 통해 드려지는 것이다. 아담의 죄란 바로 이런 사람의 운명을 거부 한 것이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의 음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도 - 28 -
1. 요 약 반드시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고후5:4) 이것이 생명의 연결의 원리이다. 죄는 용서받아야 할 장애물이지만 영생을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 물리적이고 가시적으로 삼켜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을 위해서 피 흘림의 죽음도 필요했지만 우리 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도 죽으셔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과가 따른다. 첫째,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죄가 무엇인지 모호해진다. 특히 예 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이해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첫 단추가 안 풀리니 성경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곤란하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계시하는 죄가 무엇인지, 구속이 무 엇인지, 회개가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승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게 된다.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단순히 법리적인 대속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생명의 세계를 기록한 성경을 율법적인 관점에서 바라봄으 로 생명의 세계에 대한 풍성한 계시는 닫혀있게 된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포도주는 부활생명을 예표한다.(행2:13) 포도즙이 저절로 포도주가 되는 것이 아니고 외부의 공기 중의 효소와 결합하여 발효가 되어 새로운 물질 인 포도주가 된다. 우리가 얻은 새 생명 또한 우리에게 원래 있던 것이 아 니고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포도주에 취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듯 이 새 생명은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해 포도즙이 포도주가 되는 것은 부활생명을 예표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의 원리를 모르니 흠정역에서는 wine을 율법적인 관점에서 무조건 포 도즙으로 번역하였다.(요2장, 행2:13 등) 물론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다.(갈3:24) 그러나 율법의 세계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데는 필요할 모르지만 이것은 생명의 세계에 비하면 초등원리다. (갈4:3, 9) 아들은 종을 다스려야 할 자다. 아들이 되면 종의 세계를 알지 - 29 -
1. 요 약 만 종은 아들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고등학생이 되면 초등학교 과정은 자 동적으로 다 알게 되는 것이다. 신약경륜, 곧 생명의 세계는 하나님께서 정한 최종과정이다. 더 이상의 대책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세 계를 계시한 성경을 초등원리인 율법적인 관점에 바라봄으로 무궁무진한 생명의 세계에 대한 계시는 닫혀있게 된다. 63빌딩에 가서 입구가 있는 1 층 라운지만 보고 그 위 층에 있는 것은 누리지 못하는 거와 같은 형국이 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임에도 불구하고(요17:3) 늘 내가 무 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막10:17, 눅10:25, 행16:30) 라는 행위적 관 점에서 접근하게 된다. 우리는 신약경륜 하에 있음에도 여전히 구약적 경륜 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셋째, 생명이 근원에 관한 것이라면 율법은 현상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전하는 복음을 단순히 대속이라는 율법적 관점에서 전하다 보니 근원에 대 한 치료가 못되고 현상에 대한 처방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대속이 거 듭남이 아님에도 대속을 거듭남처럼 이야기 하므로 불명확한 복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넷째,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 사람이 본래 영생이 있었다는 주장은 불교를 비롯한 이방종교의 주장과 같다. 그래서 언젠가는 종교통합의 길로 갈 가 능성이 상존한다. 왜냐하면 근원이 같기 때문이다. 사탄은 오늘도 여전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될 것 이라는 말로 사람을 속이고 있다.(창3:5) 선악과를 먹고 신이 되고 싶은 사람의 결과는 율법(문자)주 의, 은사주의, 영지주의를 추구한다. 율법아래 있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었지만 올바른 영적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었듯이 말씀을 표면적으로 알고 말씀 뒤에 있는 하나님의 영-마음을 알지 못하므로 바로 그들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았듯이 오늘 날도 이 원칙은 동일하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열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롬 10:2) 아담 안에 있는 자가 가짜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진짜 사람이다. 그 - 30 -
1. 요 약 래서 예수님은 참 되신이라 불린다.(계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흰말이라. 그 위에 타신 이는 신실 하신 이, 참되신 이라 불리더니 그분께서 의로 심판하며 전쟁을 하시더 라. (계19:11) 그분은 위대한 분도 아니고 놀라운 분도 아니고 진실하신 분이다.(요일 5:20)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사람의 원형, 사람의 진실 을 발견하고 거기로 돌아가는 것이 다름 아닌 회개고 구속이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구속한 지점은 물위로 걸어간 지점도 아니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한 지점도 아니고 오직 십자가다. 십자가의 위치가 사람의 원형이 고 사람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씨-하나님께 대하여 흙이라는 것이 다. 이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구원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육신이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분인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특별히 허락해서 죽었다는 말은 합당하지 않다. 만일 예수님이 그렇게 해서 죽으셨다면 그 분은 우리의 구속자가 될 수도 없고 새 인류의 주-조상도 될 수 없다. - 31 -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세상에서도 구멍가게를 해도 목표가 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어떤 목적을 가 지고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목적을 모르면 나는 좋은데 하나님은 안 좋아하실 수가 있다. 직장이나 군대에서도 지휘관 의도를 모르면 열심 히 하지만 인정을 받지 못하고 괜히 힘만 쓰게 된다. 하나님 나라도 똑 같 다.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야 그 분의 목적에 합당하게 갈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구원받고 하늘에만 가면 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사람들은 하늘에 가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땅으로 오셨다. 사람들은 신-하나님이 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의 최종목표 인 새 예루살렘도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계21:3) 어떤 이는 새 예루 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땅 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땅이 아니라고 하 지만 땅으로 내려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다. 성경의 핵심 주제는 하늘-하나님과 땅-사람이다. 이외에 다른 세계는 없다. 하늘에서 내려오면 당연히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지 공중으로 내려오 겠는가? 하나님이 내려오시면 사람한테 오시지 어디로 가시겠는가? 계시록 21장에서 요한은 지금 땅에서 서서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새 예루살렘 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새 예루살렘은 땅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무엇인가? 영이신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은 자신을 표현할 형상을 가지시는 것이다. 씨의 소망은 열매다. 쉬운 말로하 면 몸이 없으신 하나님은 자신을 표현할 몸을 가지시는 것이다. 교회를 그 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도 그 이유다. 그런데 자신을 완전하게 표현하 려면 자신의 생명을 가져한다. 남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서 표현해 주겠 는가? 내 생명, 곧 내 마음과 똑 같은 사람이 있다면 나를 대신해서 나를 표현해 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 곧 자기 자신을 사람에 - 32 -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게 분배해서 그 사람이 만유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신격은 인격의 내용이 되고 인격은 신격의 표현 이 되는 것이다.(골2:9) 이것을 성경은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니라.(벧후1:4b) 라고 표현했다. 경륜이라는 말을 영어로 dispensation(분배)라고 하는데 결국 하나님의 생명의 분배 를 말하는 것이다. 이 생명의 분배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나님 과 사람사이에는 예수님이 중보자다. 예수님이 생명의 중보자, 연결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임무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라면 사람은 하나님과 만유 사이의 중보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 명을 분배받은 사람은 만유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할 책임을 위임 받았 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만유를 정복하고 지배하라 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세상적인 통치가 아니라 바 로 만유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라는 의미다. 로마서 8장 19절에 피 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 이니라. 라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서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는 것이 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은 창조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다 창조할 수 있다. 천사도 창조할 수 있고 우주 만물도 다 창조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창조할 수 없지는 않은가? 내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 아들한테 밖에는 없다. 그래서 창조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넣어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 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몸을 필요로 하신다. 영이란 마음은 있는데 몸이 없는 거와 같다. 만일 내가 손으로 무엇을 잡고 싶은데 손이 - 33 -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지금 하나님께서 그렇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무슨 불경스러운 태도인가 할 수 있는데 사실이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갈망은 육신을 가진 사람을 절대적으로 원하신다는 것이 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성막 안에 보면 증거판 과 증거궤가 있다. 증거판을 위해서 증거궤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하 나님은 궤짝이 반드시 필요한데 사람들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관념이다. 모든 것이 육신 때문에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 의 생각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육신을 벗어나보고자 하는 것이 종교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정작 사람은 육신을 벗어버 리고 신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동양의 신선사상, 종교 안에서 육신 을 학대하는 사상은 모두 육신이 죽지 않고 신이 되고 싶은 타락한 아담의 속성과 관계가 있다. 모든 종교와 세상의 목표는 무엇인가? 죽지 않는 신 이 되는 것이다. 근원은 하나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남자가 홀 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2:18) 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빗 대어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아담은 하나님을 예표하고 이브는 사람을 예 표한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배필로서 사람 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배필이 되는 이것이 하나님의 경 륜의 목표다. 배필은 한 몸이다.(창2:24)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한 몸 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그런데 이러한 경륜의 목표를 이 루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생명의 연합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 곧 결혼을 통해 배필이 되고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이 한 몸이 되어 같이 살자는 것이다. 그런데 같이 살려면 생명이 같아야 함께 살지 생명이 틀리면 같이 살 수 없다. 인간세계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이질적이지만 같은 생명이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의 배필이 되려면 같은 생 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생명은 무엇인가? 이브로 예표된 부활생명 이다.(창2:21~22) 이 부활생명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부활생명이란 말 그 - 34 -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대로 거듭난 생명이고 하나님의 생명이다. 죽고 다시 산 생명이다. 죽지 않으면 거듭난 생명이 없다. 창세기 2장은 죄가 들어오기 전이다. 성경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사람은 거듭나야 한다고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거듭나야 하는가? 우리는 피조된 생명을 가지고 있었지 영원한 생 명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타락하기 전이나 타락한 후에도 여전히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사람이 가야 할 운명이다. 우리는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어차피 바꾸어져야할 운명이 라는 것이다. 육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육이지 육이 영이 아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요3:6) 하나님의 경륜의 목 표는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 영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육신은 하나님 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고전15:50) 그래서 우리는 근원적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부활생명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왕국이다. 이것 은 예수님이라는 씨로 이루어진 나라다. 사실 그 생명은 그 나라다. 예를 들어 동물의 왕국은 동물의 생명을 가져야 되고, 식물의 왕국은 식물의 생 명을 가져야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 생명이 그 왕국을 결정한다. 죄가 없더라도 사람의 생래 적 생명으로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죄가 있기 때 문에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의 생 명이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창세기 2장에서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의 경륜의 목표는 연합에 있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 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2:24) 위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신격이 인격의 내용이 되고 인격 은 신격의 표현이 되는 것이 다.(골2:9)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의 완성은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새 예루살렘에서 달성된다. 이때 하늘과 땅도 연합 - 35 -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되어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육적인 몸도 하나님의 생명 과 연합됨으로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하늘과 땅 도 불-하나님께 태워짐으로 영원한 환경이 될 것이다. 이 연합이 성경의 최종완성이다. 그러면 한마디로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목표는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하나 님은 왜 사람을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종교적으로 경배받기 위해 창조하셨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는 하나님이 사람의 생명이 되는 것이다. 곧 하나님과 사람이 완전한 한 몸, 곧 사람이 하나님의 아내가 되어 같이 사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고(엡5:32) 교회의 최종완성인 새 예루살렘을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라고 말한다.(계21:2, 계21:9)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사랑의 대상인 아내로 삼기위하여 창조하였다. 그래서 하나 님의 생명으로 태어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셨고(요 1:12) 아들-생명이 자라서 결혼할 때가 이르면 신부가 되고 결혼을 하면 아내가 되는 것이다. 부부사이는 사랑의 관계다. 두려워하고 경배하는 사 이가 아니다. 물론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 가기 위해서는 처음에 두려워할 줄도 알고 경배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 나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목표는 거기에 있지 않다. 그래서 계시록 21장 8 절에 보면 두려워하는 자들 도 둘째 사망에 들어간다는 말이 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 에서 자기 몫을 받으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계21:8) 여기서 다른 것들은 다 이해가 간다. 그런데 어떻게 두려워하는 자들도 둘 째 사망에 처해지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 라 고 한다. 그런데 성경의 결론에 가서는 왜 두려워하지 말라 고 하는 - 36 -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가? 이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가 남편과 아내의 부부관계에 있기 때문이 다. 부부란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 몸이 되는 완전한 사랑의 관계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부부다. 사람을 창조한 목적 은 이 이상도 없고 이 이하도 없다. 그런데 만일 아내가 매일 남편을 두려 워하고 경배만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부부가 아니다. 하나 님은 생명이신 동시에 사랑이시다.(요일4:8) 생명도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 니고 사랑도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 만이 사 랑할 수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함께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 즉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 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요 일4:7~8) 그러므로 삶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자. 주님을 찬양 할 수 있을 때 찬양하자. 아멘. - 37 -
3. 하나님과 사람 3. 하나님과 사람 모든 것은 근원이 중요하다. 근원을 모르면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한다. 출 발이 잘 못되면 목적지가 잘 못되기 때문이다. 우주의 대표는 하나님과 사 람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의 머리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근원적 관계를 아는 것이 핵심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근 원적 관계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하나님을 숭배한다. 하나님은 사람과 결혼 을 해서 같이 살자고 하는데 열심히 숭배만 하고 있다. 가정에서도 남편은 부부가 함께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는데 부인은 남편을 숭배만 한다면 어 떻게 되겠는가? 종교는 신과 사람을 분리시켜 신을 숭배하게 하지만 생명 은 연합하여 함께 살게 한다. 하늘과 땅 - 씨와 땅 하늘과 땅은 하나님과 사람, 그리스도와 교회를 예표 한다. 하늘은 무한하 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되었고 땅은 유한하기 때문에 단수로 표현되었다. 이 하늘은 무한한 영의 세계이고 땅은 유한한 물질의 세계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이 생명-씨다.(요6:63) 그래서 영이 아닌 것은 생명이 없고 유한하다. 영-씨는 하나님이고 육-땅은 사람이다. 모든 씨는 하나님-생 명을 예표한다. 그래서 씨앗은 외부적인 충격이 없다면 상하지 않는다. 수 천 년 전의 씨앗을 현대에 와서 발견하여 심어도 싹이 난다. 또 씨는 보통 자신보다 20만배나 더 무거운 흙의 무게를 뚫고 나와 싹을 낸다고 한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다. 물질세계인 이 땅의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의 만들어진 재료는 흙이다. 사 람은 피조물의 머리로서 사람이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다른 모든 피조 물도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늘은 영적세계이기 때 문에 하늘에 존재하는 피조물인 천사들은 영으로 창조되었다. 영이란 씨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고, 천사는 씨로 창조되었다. 이것을 분명히 구분 - 38 -
3. 하나님과 사람 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늘과 땅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각 의 세계에 적합하도록 피조물에게 고유한 몸을 주셨다. 하늘에 있는 몸들도 있고 땅에 있는 몸들도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광과 땅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르니라. (고전15:40) 하나님은 영이시고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영은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대 표한다. 그렇다고 피조물의 영이 하나님의 영은 아니다. 피조물의 영은 피 조된 영이고 하나님의 영은 피조된 영이 아니다. 천사는 영적세계에 살도 록 영-씨로 창조되었기에 죽지 않는다. 그렇다고 천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은 아니다. 사람은 육체-흙으로 창조되었기에 영원한 생명이 없다. 성경의 주제는 씨-하나님과 땅-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땅은 변개할 수 없 는 인격을 예표한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땅-인격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씨-하나님이 땅-사람을 회복하고 회복한 땅-사람에게 씨를 심어 열매를 추수하는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땅 을 잃어버리자 하나님은 씨를 뿌릴 땅이 없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 라함에게 씨와 땅을 약속하셨다.(창13:15~16)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에 게서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씨-하나님과 땅-사람으로 오신 분이 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아담이 잃어버린 땅-인격을 회복하셨고, 부 활하심으로 영-씨가 되셨다.(고전15:45, 갈3:16) 씨 -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다른 종교는 사람을 어떻게 개선해 보겠다든지 가르친다든지 하는 거다. 그러나 하나님은 씨를 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데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 씨란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 명이란 피조되지 않은 생명으로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이 란 1 피조되지 않은 생명이고, 2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3 신성하고 - 39 -
3. 하나님과 사람 거룩한 생명이고, 4 하나님의 생명이자 삶이고, 5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 님 자신이다. 이 조건에 하나라도 위배되면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성경에 서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말씀은 딱 한번 나온다.(엡4:18) 하나님과 생명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의롭고 빛이시고 무소부재하시고 등등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속성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사랑 은 하나님이다 라고 할 수 없다. 빛은 하나님이다 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유일하게 같은 단어는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시고 영원 한 생명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이시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 을 알게 하셨음을 우리가 알며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시요, 영원한 생명 이니라.(요일 5:20)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말할 때 헬라어로 조에(ZOE)라는 단어를 사 용한다. 반드시 하나님께만 사용되고 피조물의 생명을 말할 때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면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피조물인 사람이 어떻게 영원한 생 명을 얻는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 연합(연결)됨으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피조물의 입장에서 6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과 의 관계적 생명이다. 우리는 흔히 사람의 입장에서 영원한 생명 덩어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별 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영원한 생명 덩어리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 다. 우리가 보통 영생을 얻었다, 너희 안에 영생이 있다 라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중보자 곧 연결자에 의해 하나님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 라는 의미다. 전등은 전기의 형상이다. 그런데 전등은 전기와 연결되지 않으면 형상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전등에 전기가 연결되어야만 보이지 아 니하는 전기를 표현한다. 형상이란 이런 개념이다. - 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