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사대부와 정치 라는 숙명 탁양현(20091217) 1. 여는 말 역사( 歷 史 )라는 말에는 흔히 Geschichte와 Historie라는 의미가 동시에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임수길은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 의 제2편 각주에서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의 <역사>의 원어는 Geschichte가 아니라 Historie이다. Geschichte는 사건으로서의 역사이고, Historie는 사건의 기술로서의 역사다. 본서에서는 Geschichte나 Historie 모두 <역사>라고 번역했다. <역사>의 어감에는 이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니체는 Historie와 Geschichte를 구별해서 쓰고 있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실 독일어의 Geschichte에도 <이야기> <역사기술>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1) 고 말한 다. 곧 니체 역시 사건 자체로서의 역사와 사건의 기술로서의 역사를 크게 분별하지 않고 뭉뚱그려 역사라는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분명 니체는 철학자이지 역사가는 아니지만 이러한 역사 인식은 상식적이며 보편적인 것이라 여겨진다. 대체로 역사를 살핌에 있어 그것이 사건으로서의 역사인지 아니면 사건기 술로서의 역사인지의 여부에 대해 굳이 의문을 갖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게 되는 역사란 것은 분명 역사적 기술로서의 역사임을 인식해두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 건 자체로서의 역사란 것은 어차피 공유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 이 역사적 사건을 인식할 수 있는 시공간의 범위는 이미 한정적이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인식의 범위는 아무래도 그의 감각범위를 넘어서지는 못 한다. 물론 어떤 천리안( 千 里 眼 )이나 혜안( 慧 眼 )을 지녔다면 그 범위는 무한히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 만 보편적 일반으로서의 개인이 그러한 능력을 지닐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2) 따라서 우리가 역사라고 표현하는 개념은, 사건 자체를 체험한 어떤 개별자의 기술에 의해 공유되는 역사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건 자체를 모든 사람이 동시적으로 체험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를 고찰함에 있어 가장 먼저 사려되어야 할 문제이기도하 1) 임수길의 각주, F. 니체, 반시대적 고찰, 임수길 옮김, 청하, 2001, 107쪽. 2) 예컨대, 현대에 이르러 매스미디어에 의한 실시간 뉴스를 생방송으로 시청하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한다고 하여 그 역사적 사실의 시공간을 직접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사건 자체의 시공간 이후에 특정한 매체 를 통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적 역사 체험 역시 사건 자체의 체험인 것은 아니며 일정한 역사기술 의 과정을 경과한 이후의 체험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2 다. 우리는 흔히 대중 다수의 신뢰를 얻은 역사라면 응당 실제적인 사실로서의 역사로서 인 식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이 현재 신뢰되는 역사라는 것과 실제적인 사실 자체로서의 역 사적 사건이라는 것은 서로 별개의 문제다. 굳이 이런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만약 역사를 고찰함에 있어 기성의 역사가 신뢰되는 역사적 기술이라는 인식을 배려해두지 않는다면, 또한 그러한 인식을 마치 실제적인 사실로 서의 사건인 것으로 인식해버린다면, 그러한 역사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늘 기존의 틀로부 터 벗어날 수 없는 한계성을 지닐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과거 사실의 확인에만 그 의미 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적 생성을 추구할 때라야 역사는 제 몫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필자의 역사 인식은 기묘사화( 己 卯 士 禍 )를 중심으로 고찰해 나갈 조선의 역사에도 적용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조선의 역사가 단지 망각되거나 단절되어야 할 전근대적 시공간이라는 왜곡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학파의 대립과 권력(혹은 기득권) 쟁탈로 인해 많은 선비가 화( 禍 )를 입은 열두 번의 사화( 士 禍 )가 있었다. 그 중에서 흔히 대규모의 사화를 간추려 4대 사화라고 일 컫는다. 곧 1498년( 戊 午, 연산군 4)의 무오사화, 1504년( 甲 子, 연산군 10)의 갑자사화, 1519년( 己 卯, 중종 14)의 기묘사화, 그리고 1545년( 乙 巳, 명종 즉위)의 을사사화가 그것이 다. 대체로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은 문( 文 )을 숭상하고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유림( 儒 林 ) 중심의 사회구조였다. 그러나 이들은 각자의 사상과 감정 또는 지연 등을 연고로 하여 파벌을 형성했으며 서로 논쟁하고 대립 투쟁하면서 서로를 반역으로 몰아 목숨까지 앗는 사 화를 발생시켰다. 이러한 경우 훈구( 勳 舊 )와 사림( 士 林 )의 대결구도에서 사림의 화를 지칭하 여 사화라고 하기도 한다. 어쩌면 결국 역사란 것은 이긴 자 혹은 강한 자의 기록이기 십상이다. 따라서 패한 자 나 약한 자는 역사 안에서 별다른 말이 없다. 역사 앞에서 백성과 국민들은 말없이 승복하 고 어떠한 평가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 역사가 지닌 아이러니며 또는 딜레마다. 이에 필자 는 우선 이덕일의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3) 의 요약을 통해 조선 사대부와 정치 라는 주 제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이덕일의 관점은 조선역사를 살핌에 있어 다양한 측면에 서의 역사 인식의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는 역사 그 자체로서보다 는 그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이야기하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는 데에 보다 큰 의미가 있다. 따라서 기묘사화라는 역사적 사건이 과연 지금 여기의 현재와 지금 여기로부터의 미래에 있 어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며, 그러한 의미와 가치는 철저한 반성과 비판 4) 을 통한 정 3)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 4) 반성( 反 省, reflection)이란 되돌이켜[ 反 ] 살핀다[ 省 ]는 의미다. 어떤 무엇이라도 다시 살펴보라는 것이 다. 예컨대, 이미 수천 년 동안 그렇게 믿어왔고 또 세상 사람들 대다수가 그렇게 믿고 있다고 해도 그 것을 되돌이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판( 批 判, criticism)이란 어떤 대상의 의미와 가치
3 립이어야 함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2. 조선 사대부과 정치 조선말의 실학자 성호 이익( 李 瀷 )은 그의 붕당론 에서 이렇게 말했다. 붕당은 싸움에 서 생기고, 싸움은 이해관계에서 생긴다. 이해가 절실할수록 당파는 심해지고, 이해가 오래 될수록 당파는 굳어진다. 어떻게 하면 이를 밝힐 수 있을까? 여기 열 사람이 모두 굶주 리다가 한 그릇 밥을 함께 먹게 되었다고 하자. 그릇을 비우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난다. 말 이 불손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말의 불손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다고 생각 한다. 다른 날에 또 한 그릇의 밥을 함께 먹다 그릇을 채 비우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난다. 태토가 공손치 못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태도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 또 이같이 하여 말이 불손하다거나, 태도가 공손치 못하다거나 하여 꾸 짖으면, 이번에는 밥 먹는 동작에 방해를 받는 자가 드디어 부르짖고 여럿이 이에 응하여 화합한다. 시작은 대수롭지 않으나 끝이 크게 된다. 이로 보면 싸움이 밥 때문이지, 말 이나 태도나 동작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5) 이익이 갈파한 대로 당파 싸움의 근본 이유는 밥그릇 싸움에 있었는지 모른다. 이익은 이런 견지에서 과거 횟수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 왕조는 양반 사대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과거를 남설했다. 3년마다 실시하는 식년시( 式 年 試 ) 이외에도 증광시( 增 廣 試 ), 별 시( 別 試 ) 등을 실시해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했다. 이익의 말대로 한 그릇의 밥(관직)을 놓고 열 사람이 먹겠다고 싸우는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의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이유는 이처럼 당파 싸움 자체가 곧 생존권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양반 사대부들 에게 벼슬은 생존의 필수 도구였다. 이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쟁취해내야만 를 가리어 판단하는 일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부분으로서의 대상을 분석하여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인식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런 부분들은 이내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그 존재의 논리적 기초를 밝히고 이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5) 홉스(Thoma Hobbes)는 자연은 인간이 육체적 정신적 능력의 측면에서 평등하도록 창조했다. 능력의 평 등에서 희망의 평등이 생긴다. 즉 누구든지 동일한 수준의 기대와 희망을 품고서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같은 것을 놓고 두 사람이 서로 가지려 한다면, 그 둘은 서로 적이 되고, 따라서 상 대방을 파괴하거나 굴복시키려 하게 된다. 파괴와 정복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경쟁의 주된 목적은 자기보존이 다. 때로는 [파괴와 정복에서 오는] 쾌감 그 자체가 목적인 경우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친구들이 자기를 높이 평가해주기를 바란다. 최소한 자기 친구들이 자기를 높이 평가해주기를 바란다. 따라서 자기를 경멸하거나 혹은 과소평가하는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자기를 경멸한 사람을 공격하여 평가의 수정을 요청하 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더욱 높아 질 것을 기대한 다.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는 원인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경쟁(competition)이며, 둘째는 불신(diffidence)이며, 셋째는 공명심(glory)이다. 인간은 경쟁 때문에 이익확보를 위한 약탈자가 되고, 불신 때문에 안전보장을 위한 침략자가 되고, 공명심 때문에 명예수 호를 위한 공격자가 되는 것이다 고 한다.(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1, 진석용 옮김, 나남, 2008, 168~171 쪽.) 이렇게 홉스는 너무도 잘 알려진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 라는 가설을 정립한다. 이익(1681~1763) 과 홉스(1588~1679)는 그 생몰이 다소 차이가 있다지만, 이는 자신이 살아내는 사회를 분석하는 관점의 같 음과 다름에 대한 좋은 비유가 되어 주는 듯하다.
4 하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보다 근본 이유는 과거 합격자의 남발이 아니라 조선 특유의 사회 구조와 지배 층의 성격에 있다. 양반 사대부 중인 일반 양인 천민 으로 계서화된 조선의 계급 구조 자체가 조선의 당쟁을 격화시킨 근본 원인이다. 상당한 숫자의 양반 사대부가 존재하 는데 이들은 정치 이외의 직업에는 종사할 수 없었다. 날 때부터 정치를 생업으로 삼아야만 했던 조선 지배층의 성격 자체가 정쟁을 격화시킨 근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사대부는 제로섬(zero-sum) 게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었다. 동서 분당 이후 정쟁은 일상적이었으며 여기에서 패배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을 의미했다. 사대부의 숫자가 많아졌으나 관직은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정쟁은 점차 치열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 던 것이다.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상대 당파를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3. 조선 사대부와 성리학 다산 정약용은 성리학 자체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한다. 오늘날 성리학을 하는 자 는 이가 발한다( 理 發 ), 이미 발했다( 已 發 ), 아직 발하지 않았다( 未 發 ), 한 가지만 발한 것이다, 겸해서 발한 것이다. 리( 理 )는 같아도 기( 氣 )는 다르다, 기는 같은데 리가 다르다, 마음은 본디 선하여 악이 없다, 마음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 고 하여 세 줄기 다섯 가지 에 천 가지 만 가지 잎사귀를 털끝까지 분간하고 실같이 쪼개서, 서로 성내고 서로 떠든다. 문마다 기( 旗 ) 하나씩을 세우고 집마다 진( 陳 ) 하나씩 쌓아서, 세상이 다 하도록 그 송 사를 능히 결단하지 못하고, 대를 전해가며 그 원망을 능히 풀지 못한다. 하지만 문제는 성리학이란 학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받아 들인 사대부들에게 있었고, 사대부들로 하여금 정치와 학문 이외의 다른 길로 갈 수 없게 하는 사회 구조에 있었다. 6) 조선 사회에서 양반 사대부가 전체 인구 중에 어느 정도의 비 율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현존하는 자료들은 조선 초기와 중기에는 약 10 퍼센트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케 한다. 조선의 인구수는 중종 38년인 1543년에 약 83 만6천여 호에 416만여 명이었다. 이중 약 10퍼센트를 양반 사대부로 본다면 41만여 명이 되는데 남자를 반으로 볼 경우 약 20만여 명의 사대부가 있게 된다. 이들 중 16세 이상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숫자라고 가정할 때 약 10만여 명의 예비 정치가가 있게 되는 것이 다. 이들을 수용할 만한 관직이 없을 것임은 당연했다. 조선의 중앙 관청 정원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의정부라고 해봐야 영의정 좌 우의 6) 이덕일은 여기에서 성리학이란 학문 자체에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발언한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오히려 정약 용의 판단이 좀 더 타당한 분석인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정약용의 성리학 자체에 대한 비판은 이덕일의 사회 구조적 분석을 통한 비판으로 이어져야 함은 당연하다.
5 정을 합쳐 12명밖에 되지 않았으며, 이 호 예 병 형 공조의 6조 전체를 합쳐도 77명밖에 되 지 않았다. 막강한 수사권을 지닌 감찰기관인 사헌부도 30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나마 수 사권이 없던 사간원은 5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외에 의금부, 홍문관, 성균관, 춘추관 등의 중앙 관청 문관을 모두 합쳐도 3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잡직이 있었으나 잡직은 중인들의 직이어서 양반들은 주어도 갖지 않았다. 또 무관으로는 중앙을 지키는 5위에 약 3천3백여 명이 있었으나 많은 수는 실직( 實 職 )이 아닌 산직( 散 職 )이어서 직급만 있고 녹봉은 받지 못하였다. 또한 조선 시대 무관은 그다지 큰 권한을 갖고 있지 못 했으므로 당파 싸움의 핵심은 350여 자리에 지나지 않는 문관직이었다. 그리고 8도와 360 여 개의 부( 府 ), 군( 郡 ), 현( 縣 ) 등의 외직을 감안한다고 해도 그 수효는 자리를 얻으려는 사 대부에 비해서는 언제나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밥그릇을 둘러싼 싸움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치가 모든 것인 상황에서는 옛 독립 운동가들처럼 신념 때문에 정치에 참여하는 군자 보다는 이익(권력) 때문에 정치에 뛰어드는 모리배들이 많게 된다. 물론 조선 초기 세종 때 우의정을 역임했던 문신 유관( 柳 寬 )처럼 장마철에 비가 새는 안방에서 책을 읽은 청백리( 淸 白 吏 )도 있고, 중종 때 대사간과 좌의정을 지낸 이행( 李 荇 )처럼 퇴청 후 남산 청학동 집에 돌아와 해진 짚신을 여미던 가난한 고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때문에 실상 우리가 선 비정신 이라고 할 때에는 정신적 기개를 드높인 이런 인물들을 들어 이야기하는 것이다. 7) 하지만 이들을 특별히 청백리라고 부른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인물들은 소수였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선비들도 정치와 학문 이외의 직업은 가질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조선 사대 7) 이러한 점이 현재까지 선비 라는 명칭에 대해 막연한 노스탤지어(?)를 갖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조선 역사 안에서 실제적인 절대다수의 선비 들은 필자가 감성형 인간상의 모델로서 세워보고자 상상하는 인물상 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때문에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다분히 인문학적 상상력의 발현이 요구될 것으로 판단된 다. 물론 역사 안에서 참된 감성형 인간상으로 삼을만한 조선의 선비 를 만나게 된다면 더없는 다행일 것이며 그러한 조우의 기대를 버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필자가 정립해보고자 하는 감성형 인간상의 모델이 마치 이성 형 인간상의 모델로서의 성인( 聖 人 )이나 군자( 君 子 )의 추구인 것은 아니다. 이 점이 이성형 인간상과 감성형 인간상의 가장 큰 차이일 듯한데, 동서의 역사 내에서 이성형 인간상은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마땅한 당위로써 추구해야만 하는 강제적 모범의 전형이었다. 때문에 실상 누구도 현실 안에서 이성형 인간상에 미치지 못하면 서도 그런 인간상에 의해 정치적 윤리적 문화적 으로 일상 자체가 강제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감성형 인간 상은 그러한 모범적인 정상인을 목적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되살필 때 가장 먼저 회의되는 것 중 하나가 과연 당시의 시대 안에서 지극히 정상적이어서 모범적이라 분류되는 인간상들이 이성형 인간상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인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목표는 높고 고귀하게 설정해야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과 괴리되어 지나치게 고상하고 세련된 목표는 현실의 인간존재들을 외려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감성형 인간상의 정립은 현실의 대지로부터 결코 발을 떼지 않으며, 어떠한 목적태를 정하더라 도 그것은 현실의 실제적인 체험이 가능한 영역이어야 함을 망각할 수 없다. 때문에 숱한 바람직한 지향과 추 구의 측면들을 짜집기하여 구성해낸 이성형 인간상과는 많은 차이를 보일 것이다. 예컨대, 아무리 첨단 성형 의학의 도움을 받더라도 인간이 비너스의 육체미를 지니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러한 아름다움은 상상 속에서 만 가능한 것이다. 물론 감성형 인간상이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외면하지는 않는다. 다만 노자 2장의 말처 럼 세상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로만 알지만, 이는 이미 흉할 뿐 [ 天 下 皆 知 美 之 爲 美, 斯 惡 已 ] 인지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감성형 인간상은 이성형 인간상처럼 상상과 관념의 초월적 존재 로서의 인간상의 정립이 아니며, 먹고, 싸고, 잠자고, 숨쉬는 몸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체험적 사실로 부터 시작되며 그러한 토대를 떠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할 것이다.
6 부는 아무리 가난해도 정치가 이외의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4. 기묘사화 전후의 대표 사상가(정치가)들 우선 역사 안에서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이름들을 열거하고 간략한 설명을 덧붙이도록 한다. 하지만 연구의 시작 단계이다 보니 잡다한 백과사전식의 고찰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 해야 할 듯하다. 인물의 선별은 기묘사화가 발생한 1519년(중종 14)이라는 시공간을 기준 으로 하였다. * 임사홍( 任 士 洪, 1445~1506) 본관 풍천( 豐 川 ). 자 이의( 而 毅 ). 좌리공신 임원준의 아들이며 효령대군의 아들 보성군 이용의 딸과 혼인하여 권력의 배경이 든든한 집안의 출신이다. 1465년(세조 11) 알성문과에 급제했다. 관압사( 管 押 使 )로 명( 明 )나라에 여 러 차례 다녀왔으며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쳤다. 성종( 成 宗 ) 초 도승지 때 유자광( 柳 子 光 ) 등과 파당을 만들고 현석규를 음해했다는 죄목을 받았으며 이일로 1478년(성종 9)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연산군의 생모( 生 母 ) 윤비 ( 尹 妃 )가 폐비( 廢 妃 )되어 사사( 賜 死 )된 내력을 연산군에게 알려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했다. 1506년 중종반 정( 中 宗 反 正 )이 일어나자 추살( 推 殺 )되고 이어 부관참시( 剖 棺 斬 屍 )되었다. 글씨는 촉체( 蜀 體 )를 잘 썼고 특히 해서 ( 楷 書 )에 뛰어났다. 글씨에 노문광공사신신도비명( 盧 文 匡 公 思 愼 神 道 碑 銘 ) ( 衿 川 ) 박중선묘비명( 朴 仲 善 墓 碑 銘 ) ( 楊 州 ) 이계손묘비명( 李 繼 孫 墓 碑 銘 ) ( 廣 州 ) 한확묘비명( 韓 確 墓 碑 銘 ) ( 廣 州 ) 영원윤호묘비명( 鈴 原 尹 壕 墓 碑 銘 ) ( 麻 田 ) 서거정묘비명( 徐 居 正 墓 碑 銘 ) ( 廣 州 ) 등이 있다. * 신수근( 愼 守 勤, 1450~1506) 본관 거창( 居 昌 ). 자 근중( 勤 仲 ). 호 소한당( 所 閒 堂 ). 시호 신도( 信 度 ). 성종 때 음보로 장령( 掌 令 )이 되어 우부 승지 중추부첨지사 호조참의를 역임하고 1495년 연산군비가 된 누이의 덕에 승지가 되었다. 1504년 돈령부첨정 ( 敦 寧 府 僉 正 )에 기용, 이듬해 우의정으로 등극사( 登 極 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1506년 좌의정에 올랐다. 이때 사위인 진성대군( 晉 城 大 君 : 中 宗 )을 옹립하고 함께 반정( 反 正 )을 도모하자는 박원종( 朴 元 宗 ) 등의 제의를 거절했다 가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3형제가 유자광( 柳 子 光 ) 일파에게 살해되었다. * 박원종( 朴 元 宗, 1467~1510) 본관 순천( 順 天 ), 자 백윤( 伯 胤 ), 시호 무열( 武 烈 )이다. 무술에 뛰어나서 음보( 蔭 補 )로 무관직에 기용되었다. 1486년(성종 17) 선전관으로 있을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내승( 宣 傳 內 乘 )으로 승진, 오랫동안 왕의 측근이 되었 다. 1506년 성희안( 成 希 顔 ) 유순정( 柳 順 汀 ) 등과 함께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하는 반정( 反 正 )에 주동적 역 할을 맡아 정국공신( 靖 國 功 臣 ) 1등에 책록되었다. 1507년에는 이과( 李 顆 )의 옥사( 獄 事 )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 ( 定 難 功 臣 ) 1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사은사( 謝 恩 使 )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1509년 영의정에 오르고 평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중종의 묘정( 廟 庭 )에 배향되었다. * 김수동( 金 壽 童, 1457~1512) 본관 안동. 자 미수( 眉 叟 ). 호 만보당( 晩 保 堂 ). 시호 문경( 文 敬 ). 1474년(성종 5)생원이 되고, 1477년 식년문 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 正 字 ) 사인( 舍 人 ) 등을 지냈다. 연산군 초에 전라 경상 경기도의 관찰사를 거쳐, 1499년(연산군 5) 예조참판으로 성절사( 聖 節 使 )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성학심법( 聖 學 心 法 ) 4권을 구하여 왔다.
7 1503년 경상도관찰사 형조판서 겸 춘추관지사 홍문관제학( 提 學 ) 등이 되고, 이듬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갑자 사화 때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헌대부에 가자( 加 資 )되었다.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좌의정에 오르고, 정국공신( 靖 國 功 臣 ) 2등에 책록, 영가부원군에 봉해졌다. 1510년(중종 5) 영의정에 올랐다. 재치가 넘쳐 연산군의 폭정으로부 터 많은 문신들을 구하였으며 청렴을 지켰다. 예서를 잘 썼다. * 유자광( 柳 子 光, 1439~1512) 본관 영광( 靈 光 ). 자 우복( 于 復 ). 중추부지사 유규( 柳 規 )의 서자( 庶 子 )로 태어났으며 젊어서 방탕한 생활을 하 다 건춘문( 建 春 門 )을 지키는 갑사( 甲 士 )로 봉직하였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 李 施 愛 )의 난이 일어나자 자진 출 전하여, 공을 세웠다. 난이 끝나자 정5품 병조정랑이 되었고, 세조의 명으로 온양별시문과( 溫 陽 別 試 文 科 )에 응시하 여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영의정이던 구성군( 龜 城 君 ) 이준( 李 浚 ) 등을 연루시켜 죄목을 조작하였고 남이, 강순, 이 준 등을 비롯한 수많은 인사를 처형하게 하였고, 유자광은 이들을 숙청한 공으로 익대공신( 翊 戴 功 臣 ) 1등에 책록되 었고 무령군( 武 靈 君 )에 봉해졌다. 1476년(성종 7)에는 한명회( 韓 明 澮 )를 모함하다가 도리어 관직에서 쫓겨났다. 몇 차례 중국 사신으로 다녀온 뒤 1491년(성종 22)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처가가 있는 함양군으로 놀 러 갔다가 시를 지어 현판( 懸 板 )하게 하였는데, 그 뒤 김종직( 金 宗 直 )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그 현판을 떼어 불태 워버리자, 이때부터 김종직에게 원한을 품었다. 김종직이 죽은 뒤에도 그의 문인 일파를 비롯한 영남 출신의 유림 들을 성종이 대거 기용하여 훈구파( 勳 舊 派 )와 맞서는 신진 세력을 이루었다. 이에 유자광은 연산군 4년 성종실 록 을 편찬할 때 김일손( 金 馹 孫 )이 사초( 史 草 )에 그의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 弔 義 帝 文 ) 을 실은 것을 기화로 삼아, 이는 세조가 왕위를 빼앗은 데 대한 비유라고 연산군을 충동질하여 마침내 무오사화( 戊 午 史 禍 )를 일 으킴으로써 수많은 충신이 죽거나 축출 유배되었다.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평소 절친하게 지 냈던 임사홍( 任 士 洪 )과 연관하여 사림( 士 林 )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중종반정( 中 宗 反 正 )이 일어나자 전부터 인 연이 있던 성희안( 成 希 顔 ), 박원종( 朴 元 宗 ), 유순정( 柳 順 汀 )과 손잡고 반정에 참여하여 이번에는 정국공신( 靖 國 功 臣 ) 1등에 무령부원군으로 봉해졌다. 흥양( 興 陽 )에 부처( 付 處 )되었다가 해평( 海 平 )에 유배되었으며 이어 경상도 변 두리로 이배( 移 配 )되었는데 그곳에서 죽었다. * 유순정( 柳 順 汀, 1459~1512) 본관 진주( 晉 州 ). 자 지옹( 智 翁 ). 시호 무안( 武 安 ) 문성( 文 成 ). 김종직( 金 宗 直 )의 문인. 1487년(성종 18) 진사 를 거쳐 알성문과에 장원, 전적( 典 籍 )에 등용되었다. 1491년 북정도원수( 北 征 都 元 帥 ) 허종( 許 琮 )의 막하로 야인 정 벌에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다. 연산군 때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에 올라,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공 을 세우고 정국공신 1등으로 청천부원군( 菁 川 府 院 君 )에 봉해졌다. 이어서 우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직, 이과( 李 顆 ) 의 옥사를 다스려 그 공로로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509년 좌의정에 오르고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직접 경 상도도원수로 출정, 난을 평정했다. 1512년 영의정에 이르러 재직중에 죽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정붕( 鄭 鵬, 1467~1512) 본관은 해주( 海 州 )이다. 자는 운정( 雲 程 )이고, 호는 신당( 新 堂 )이다. 현감을 지낸 정철견( 鄭 鐵 堅 )의 아들로 경 상도 선산( 善 山 )에서 태어났다. 김굉필( 金 宏 弼 )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486년(성종 1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00년(연산군 6) 수찬, 이듬해 지평, 1504년 홍문관 교리 등을 지내며 직언을 하다가 갑자사화( 甲 子 士 禍 ) 때 영덕( 盈 德 )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교리에 복직 되었으나 사퇴하고 향리에서 학문에 힘썼다. 나라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다가 1509년 청송부사에 제수되어 재임 3년 만에 죽었다. 도량이 크고 학식이 높았으며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저서에 신 당실기( 新 堂 實 記 ) 가 있다. 선산의 금오서원( 金 烏 書 院 )과 개령의 덕림서원( 德 林 書 院 )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8 * 성희안( 成 希 顔, 1461~1513) 본관 창녕( 昌 寧 ). 자 우옹( 愚 翁 ). 호 인재( 仁 齋 ). 시호 충정( 忠 定 ). 1480년(성종 11) 생원이 되고 1485년 별시 문과( 別 試 文 科 )에 급제, 정자( 正 字 )를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 이조참판 겸 부총관( 副 摠 官 ) 때 양화도( 楊 花 渡 ) 놀이에서 왕의 횡포를 풍자한 시를 지어 바침으로써 미움을 사 무신직( 武 臣 職 )에 좌천되었다. 1506년 박원종( 朴 元 宗 ) 등과 중종반정( 中 宗 反 正 )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는 데 공을 세우고 정국공신( 靖 國 功 臣 ) 1등에 형조판서가 되 었다. 이어 창산부원군( 昌 山 府 院 君 )에 봉해지고 주청사( 奏 請 使 )로 명( 明 )나라에 가서 반정을 납득시켰다. 귀국 후 우의정을 거쳐 1513년(중종 8) 영의정에 이르렀다. 중종 묘정( 廟 庭 )에 배향되었다. * 신윤무( 辛 允 武,?~1513) 본관 영월( 寧 越 ). 연산군 때 선전관 의주( 義 州 ) 판관을 역임하고 군자감부정( 軍 資 監 副 正 )으로 있으면서 박원 종( 朴 元 宗 )을 움직여 중종반정 거사일에 임사홍( 任 士 洪 ) 신수근( 愼 守 勤 ) 등을 살해, 반정을 성공시켜 정국공신( 靖 國 功 臣 ) 1등으로 영천군( 寧 川 君 )에 봉해졌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508년(중종 3) 공조판서에 이어 좌 우 참찬을 역임하고 병조판서로 있다가 문신들의 반대로 파직되었다. 1513년 공조판서로 있다가 대간의 탄핵으로 파 직된 박영문( 朴 永 文 )이 그의 집을 드나들며 조정을 비방하고 난언을 일삼자 이를 엿들은 의정부의 관노( 官 奴 ) 정막 개( 鄭 莫 介 )의 밀고로 대역죄로 몰려 주살( 誅 殺 )되었다. * 박영문( 朴 永 文,?~1513) 본관 함양이다. 생원( 生 員 )으로서 무과에 급제, 연산군 때 군기시첨정( 軍 器 寺 僉 正 )을 지냈다. 1506년 중종반 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靖 國 功 臣 ) 4등에 책록, 함양군( 咸 陽 君 )에 봉해졌다. 1510년(중종 5) 경상도도순찰사( 都 巡 察 使 )로 있다가, 유순정( 柳 順 汀 )을 따라 부원수( 副 元 帥 )로서 삼포왜란( 三 浦 倭 亂 )을 평정한 공로로 공조판서에 임명 되었다. 그러나 간관( 諫 官 )의 탄핵으로 파직되자, 신윤무( 辛 允 武 )의 집에 드나들면서 조정을 비난하고 문신들을 비 방하였다. 마침내 신윤무 등과 함께 영산군( 寧 山 君 ) 전( 惍 )을 추대하고 무신난을 모의하자, 의정부의 관노( 官 奴 ) 정 막개( 鄭 莫 介 )가 이를 밀고하였다. 대역죄( 大 逆 罪 )로 몰려 사형되고, 아들도 모두 교수형되었다. * 신윤무( 辛 允 武,?~1513) 본관 영월( 寧 越 ). 연산군 때 선전관 의주( 義 州 ) 판관을 역임하고 군자감부정( 軍 資 監 副 正 )으로 있으면서 박원 종( 朴 元 宗 )을 움직여 중종반정 거사일에 임사홍( 任 士 洪 ) 신수근( 愼 守 勤 ) 등을 살해, 반정을 성공시켜 정국공신( 靖 國 功 臣 ) 1등으로 영천군( 寧 川 君 )에 봉해졌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508년(중종 3) 공조판서에 이어 좌 우 참찬을 역임하고 병조판서로 있다가 문신들의 반대로 파직되었다. 1513년 공조판서로 있다가 대간의 탄핵으로 파 직된 박영문( 朴 永 文 )이 그의 집을 드나들며 조정을 비방하고 난언을 일삼자 이를 엿들은 의정부의 관노( 官 奴 ) 정막 개( 鄭 莫 介 )의 밀고로 대역죄로 몰려 주살( 誅 殺 )되었다. * 유순( 柳 洵, 1441~1517) 본관 문화( 文 化 ). 자 희명( 希 明 ). 호 노포( 老 圃 ). 시호 문희( 文 僖 ). 1459년(세조 5) 생원이 되고 1462년 식년 문과, 146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주부를 지냈고, 우부승지 등을 거쳐 1478년(성종 9) 부제학이 되었다. 1487년 형조참판 때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 한때 파직되었다가 호조판서를 거 쳐 1503년 우의정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1506년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 靖 國 功 臣 ) 2등에 책 록되고 문성부원군( 文 城 府 院 君 )에 봉해졌으나 1509년 반정 때 중신이었다 하여 탄핵을 받아 사퇴하였다. 1514년 다시 영의정에 복직하였다가 1516년 노령으로 사직했다. 시부( 詩 賦 )에 뛰어나 왕명을 받고 서거정( 徐 居 正 ) 등과 연주시격( 聯 珠 詩 格 ) 을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의약 지리에도 조예가 깊었다.
9 * 권민수( 權 敏 手, 1466~1517) 본관 안동. 자 숙달( 叔 達 ). 호 퇴재( 退 齋 ). 1494년(성종 2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 부수찬 을 지냈다. 부수찬으로 있을 때 연산군의 후원관사( 後 苑 觀 射 )를 논한 일이 화근이 되어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 사화( 甲 子 士 禍 ) 때 원지( 遠 地 )로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中 宗 反 正 )으로 풀려나와 이듬해 소격서령( 昭 格 署 令 ) 봉례( 奉 禮 ) 등을 지내고, 대사헌을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재임 중 병사하였다. * 윤여필( 尹 汝 弼, 1466~1555) 본관 파평( 坡 平 ). 시호 정헌( 靖 憲 ).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靖 國 功 臣 ) 3등에 책록되었 다. 1507년 딸이 중종의 계비( 繼 妃 : 章 敬 王 后 )가 되자, 파원부원군( 坡 原 府 院 君 )에 책봉되고 돈령부판사에 올랐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80세 노령이라 화를 모면, 용인현( 龍 仁 縣 )에 부처( 付 處 )되었다. 1551년 풀려났 으며, 죽은 뒤 복관되었다. * 한효원( 韓 效 元, 1468~1534) 본관 청주. 자 원지( 元 之 ). 호 오계( 梧 溪 ). 시호 장성( 章 成 ). 사도시정 증( 曾 )의 아들. 1489년(성종 20) 진사가 되고, 식년문과( 式 年 文 科 )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다. 1507년(중종 2) 수찬( 修 撰 )을 거쳐 교리( 校 理 ) 장령 ( 掌 令 ) 집의( 執 義 ) 전한( 典 翰 )을 지냈다. 다음해 함경도 진휼경차관( 賑 恤 敬 差 官 )이 되어 기민을 구제하고, 사간( 司 諫 )을 거쳐 1516년 황해도 문폐어사( 黃 海 道 問 弊 御 使 )가 되었다. 그해 부제학( 副 提 學 )에 승진하고, 1520년 대사헌 때 주청부사( 奏 請 副 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경상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공조판서 대사헌 우참찬( 右 參 贊 )을 지냈다. 1528년 성절사( 聖 節 使 )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형조판서 좌참찬을 지내고, 1530년 우찬성( 右 贊 成 ) 이 되었다. 1531년 우의정에 승진, 다음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 남곤( 南 袞, 1471~1527) 본관 의령( 宜 寧 ). 자 사화( 士 華 ). 호 지정( 止 亭 ) 지족당( 知 足 堂 ). 조선의 개국공신인 남재( 南 在 )의 후손이지만 직계 자손은 아니다. 김종직( 金 宗 直 )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명( 文 名 )을 떨쳤으며, 1489년(성종 20) 생원시( 生 員 試 )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직언을 하다가 서변( 西 邊 )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박경( 朴 耕 ) 등이 모반하였다고 고변한 공으로 이조참판 대사헌 중추부지사를 지냈다. 1518년 주청사( 奏 請 使 )로 중국 명( 明 )나라에 가서 종계( 宗 系 )를 변무( 辨 誣 )하고 귀국하였다. 1519년 훈구파 대신으로 심정( 沈 貞 ) 등과 기묘 사화를 꾸며, 집권자 조광조( 趙 光 祖 ) 등 신진사류( 新 進 士 類 )를 숙청한 뒤 좌의정이 되었다가, 1523년 영의정에 올 랐다. 심정( 沈 貞 ), 홍경주( 洪 景 舟 )와 함께 기묘 삼흉( 三 凶 )으로 불렸다. 문집에 지정집, 저서에 유자광전( 柳 子 光 傳 ) 남악창수록( 南 岳 唱 酬 錄 ) 등이 있다. * 이성동( 李 成 童,?~?) 본관은 인천( 仁 川 )이며 자는 차옹( 次 翁 ), 호는 졸옹( 拙 翁 )이다. 명종 때 군자감판관을 지낸 희안( 希 顔 )의 아들 이다.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04년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1507년(중종 2) 사간을 거쳐 1517년 이조판서 남곤( 南 袞 )의 추천으로 직제학이 되었고, 이어 대사간을 지냈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 며, 1519년 형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에 올랐다. 이때 대사헌 조광조( 趙 光 祖 )와 함께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 靖 國 功 臣 )이 문란하게 책록( 策 錄 )되었으니 부당한 자들은 훈록( 勳 錄 )에서 삭제하라는 소를 올리자, 중종은 심정( 沈 貞 ) 홍 경주( 洪 景 舟 ) 등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을 삭제하였다. 이어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이듬해 안처겸( 安 處 謙 )의 옥사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521년 예조참의로 다시 등용되었으나 조광조 일파라고 하여 삭직 되었다. 1538년에는 기묘사화 때 환수당했던 직첩을 돌려받았다.
10 * 홍경주( 洪 景 舟,?~1521) 본관 남양( 南 陽 ). 자 제옹( 濟 翁 ). 시호 도열( 度 烈 ). 1501년(연산군 7) 문과에 급제, 1504년 지평이 되고, 1506년 사복시( 司 僕 寺 ) 첨정( 僉 正 )으로 중종반정( 中 宗 反 正 )에 가담하여 정국( 靖 國 )공신으로 남양군( 南 陽 君 )에 봉해 지고 동부승지( 同 副 承 旨 )에 이어 도승지에 특진되었다. 이듬해에는 이과( 李 顆 )의 옥사( 獄 事 )를 잘 처결하여 다시 정 난( 定 難 )공신에 책록된 뒤 병조판서 좌찬성 호조판서 대사헌을 지내고 좌참찬( 左 參 贊 )이 되었으나, 사림파( 士 林 派 ) 출신 언관( 言 官 )들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1519년(중종 14) 훈구파( 勳 舊 派 )의 일원으로 심정( 沈 貞 ) 남곤( 南 袞 ) 등과 함께 기묘사화( 己 卯 士 禍 )를 일으켜 조광조( 趙 光 祖 ) 등 사림파의 신진( 新 進 ) 세력을 실각시키고 그 후 좌찬성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 심정( 沈 貞, 1471~1531) 본관 풍산( 豊 山 ). 자 정지( 貞 之 ). 호 소요정( 逍 遙 亭 ). 시호 문정( 文 靖 ). 1502년(연산군 8) 별시문과에 급제,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靖 國 功 臣 ) 3등으로 화천군( 花 川 君 )에 봉해졌다. 1507년 중추부지사로 사은 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18년 한성부판윤 형조판서에 올랐다가 신진 사류( 士 類 ) 조광조( 趙 光 祖 )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 정국공신도 삭탈되자 원한을 품고 남곤( 南 袞 ) 홍경주( 洪 景 舟 ) 등과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류를 모 조리 숙청하였다. 1527년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이 되었으나 김안로( 金 安 老 )의 탄핵으로 강서( 江 西 )에 유배, 다시 경빈박씨( 敬 嬪 朴 氏 )와 통정하였다는 죄로 사사되었다. * 박상( 朴 祥, 1474~1530) 본관 충주. 자 창세( 昌 世 ). 호 눌재( 訥 齋 ). 시호 문간( 文 簡 ). 1474년(성종 5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증조부 때까지 개경에서 살았으나 조부가 충청도로 이주하였고 부친 박지흥( 朴 智 興 )이 광주 봉황산 근처로 이주하 였다. 1496년(연산군 2) 진사가 되고, 1501년 식년문과에 급제, 교서관정자( 校 書 館 正 字 ) 등을 지냈다. 1511년(중 종 6) 수찬( 修 撰 ) 등을 거쳐, 담양부사 때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端 敬 王 后 ) 신씨( 愼 氏 )의 복위를 상소, 중 종의 진노를 사서 오림역( 烏 林 驛 )에 유배되었다. 고향 광주로 낙향하였다가 1530년 사망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 고, 문장가로 이름을 떨쳐 당대의 사가( 四 家 )로 칭송을 받았다. 이조판서가 추증, 광주 월봉서원( 月 峰 書 院 )에 배향 되었다. 문집 눌재집 이 있다. * 이장곤( 李 長 坤, 1474~?) 본관 벽진( 碧 珍 ). 자 희강( 希 剛 ). 호 학고( 鶴 皐 ) 금헌( 琴 軒 ) 금재( 琴 齋 ) 우만( 寓 灣 ). 시호 정도( 貞 度 ). 참군( 參 軍 ) 승언( 承 彦 )의 아들. 김굉필( 金 宏 弼 )의 문인.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02년 알성문과 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04년 교리( 校 理 )로 있으면서 갑자사화( 甲 子 士 禍 )에 연루되어 거제로 귀양갔으나, 함흥으 로 도주하여 양수척( 楊 水 尺 )의 무리에 섞여 살면서 목숨을 유지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박원종( 朴 元 宗 )의 추 천으로 관직에 다시 임명되어 교리 장령( 掌 令 )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12년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듬해에 이조참판이 되었다. 1514년 예조참판으로 정조사( 正 朝 使 )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 며,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지냈다. 1519년 병조판서 재임시 남곤( 南 袞 ) 심정( 沈 貞 ) 등이 주도한 기묘사화( 己 卯 士 禍 )에 참여하였으나, 조광조( 趙 光 祖 ) 등 사화에 연루된 사림들의 처형에는 반대하다가 삭직되었다. 1522년 복관되었으나, 여강( 驪 江 ) 창녕( 昌 寧 ) 등지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창녕의 연암서원( 燕 巖 書 院 )에 제향되 었으며, 문집에는 금헌집 이 있다. * 김안국( 金 安 國, 1478~1543) 본관 의성( 義 城 ). 자 국경( 國 卿 ). 호 모재( 慕 齋 ). 시호 문경( 文 敬 ). 김굉필( 金 宏 弼 )의 문인으로 사림파( 士 林 派 ) 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1501년(연산군 7)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50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성리학
11 의 실천 보급에 주력하여 각 고을의 향교( 鄕 校 )에 소학( 小 學 ) 을 보급하고, 각종 농서와 의서( 醫 書 )도 널리 간 행하여 향촌민들을 교화시키는 데 힘을 썼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성리학의 실천적 입장을 중시한 조광조 ( 趙 光 祖 ) 일파가 실각하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천문과 병법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닥나 무를 이용하여 종이를 만드는 방법도 연구하였다. 성리학을 이념으로서만이 아닌 실천적 학문으로서의 의미를 중 시한 학자였으나, 조광조와 같은 급격한 정치개혁에는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인종( 仁 宗 )의 묘정에 배향되고, 여 주( 驪 州 ) 기천서원( 沂 川 書 院 ), 이천( 利 川 ) 설봉서원( 雪 峰 書 院 ), 의성 빙계서원( 氷 溪 書 院 )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모재집, 편서에 창진방( 瘡 疹 方 ) 등이 있다. * 이자( 李 耔, 1480~1533) 본관 한산( 韓 山 ). 자 차야( 次 野 ). 호 음애( 陰 崖 ) 몽옹( 夢 翁 ) 계옹( 溪 翁 ). 시호 문의( 文 懿 ). 서울 출생. 1501 년(연산군 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이때 함께 급제한 김안국( 金 安 國 ) 성세창( 成 世 昌 ) 등과 교유했다. 150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감찰( 監 察 )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연산군의 난정에 불만을 품고 외직을 자청하여 의성현령이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언관직에 발탁되어 수찬( 修 撰 ) 교리( 校 理 ) 사간 등을 지냈으며, 당시 조광조( 趙 光 祖 ) 등 기호사림들이 중심이 되어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도모했으나, 이들의 정치노선에는 따르지 않고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에서 중도적인 정치노선을 걸었다. 기묘사화( 己 卯 士 禍 )가 일어나자 사림파로 지목되어 파직되 었다. 이후 음성에 퇴거하여 음애 라 자호( 自 號 )하고,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였던 김세필( 金 世 弼 ) 이약빙( 李 若 氷 ) 이연경( 李 延 慶 )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독서로 여생을 마쳤다. 기묘명현록( 己 卯 名 賢 錄 ) 에도 이름이 올라 있으 며, 충주의 팔봉서원( 八 峰 書 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음애일기( 陰 崖 日 記 ) 음애집( 陰 崖 集 ) 이 있으며, 노수신 ( 盧 守 愼 )이 행장을 썼다. * 김안로( 金 安 老, 1481~1537) 본관 연안( 延 安 ). 자 이숙( 頤 叔 ). 호 희락당( 希 樂 堂 ) 용천( 龍 泉 ) 퇴재( 退 齋 ). 1506년(중종 1) 별시문과( 別 試 文 科 )에 갑과로 급제한 뒤, 사가독서( 賜 暇 讀 書 )를 하고 대사간을 지냈다. 1519년 기묘사화 때는 조광조( 趙 光 祖 ) 등 과 함께 유배되었다. 권력 남용이 잦아 영의정 남곤( 南 袞 ), 대사헌 이항( 李 沆 ) 등의 탄핵을 받고 경기 풍덕( 豊 德 )에 유배되었다. 1527년 남곤이 죽고 그 일파가 실각되자, 1529년에 풀려나와, 1531년에 다시 등용되었다. 이조판서 를 거쳐, 1534년에는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에 이르렀다. 정적( 政 敵 )에 대해서는 종친( 宗 親 ) 공경( 公 卿 )이 라 할지라도 이를 축출하여 살해하는 등 무서운 공포정치를 한 끝에, 문정왕후( 文 定 王 后 )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중 종의 밀령을 받은 윤안임( 尹 安 任 )과 대사헌 양연( 梁 淵 )에 의해 체포되어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형을 받았고, 이어 사사( 賜 死 )되었다. 허항( 許 沆 ) 채무택( 蔡 無 擇 )과 함께 정유삼흉( 丁 酉 三 凶 )으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용천담적기 ( 龍 泉 淡 寂 記 ) 가 있다. * 조광조( 趙 光 祖, 1482~1519) 본관 한양. 자 효직( 孝 直 ). 호 정암( 靜 庵 ). 시호 문정( 文 正 ). 개국공신 온( 溫 )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 元 綱 )의 아들이다. 어천찰방( 魚 川 察 訪 )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 金 宏 弼 )에게 수학하였다. 1510 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 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 安 瑭 )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 造 紙 署 司 紙 ) 에 임명되었다. 여씨향약( 呂 氏 鄕 約 ) 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 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 昭 格 署 ) 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 것( 走 肖 爲 王 ) 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기묘사화( 己 卯 士 禍 )를 일 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12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 士 族 )은 그가 정몽주 길재( 吉 再 ) 김숙자( 金 叔 滋 ) 김종직( 金 宗 直 ) 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 道 統 )의 정맥( 正 脈 )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 이 있다. * 김식( 金 湜, 1482~1520) 본관 청풍. 자 노천( 老 泉 ). 호 사서( 沙 西 ) 동천( 東 泉 ) 정우당( 淨 友 堂 ). 시호 문의( 文 毅 ).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열중하여,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관심이 없고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절도안치( 絶 島 安 置 )의 처벌이 내려졌으나 정광필( 鄭 光 弼 ) 등의 비호로 선산( 善 山 )에 유배되었다. 신사무옥으로 다시 절도로 이배 ( 移 配 )된다는 말을 듣고 거창으로 피하였으며, 시 군신천재의( 君 信 千 栽 義 ) 를 짓고 자결하였다. 선조 때 영의정 에 추증, 기묘팔현( 己 卯 八 賢 )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조광조( 趙 光 祖 ) 김안국( 金 安 國 ) 기준( 奇 遵 ) 등과 도학 소장파( 道 學 少 壯 派 )를 이루어,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미신타파 향약실시 정국공신위훈 삭제 등의 개혁정치를 폈다. 청풍 황강서원( 凰 岡 書 院 ), 양근( 楊 根 ) 미원서원( 迷 原 書 院 ), 거창 완계서원( 浣 溪 書 院 ) 등에 제향되었다. * 박훈( 朴 薰, 1484~1540) 본관 밀양, 자 형지( 馨 之 ), 호 강수( 江 叟 ), 시호 문도( 文 度 )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학문에 힘써, 1504년 (연산군 10) 사마시에 급제하여 의영고주부( 義 盈 庫 主 簿 )가 되었다. 이어 보은현감( 報 恩 縣 監 )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다. 감찰( 監 察 ) 공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 持 平 )을 지냈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 장령( 掌 令 ) 동부승지( 同 副 承 旨 )를 역임하였다. 그해 기묘사화로 조광조( 趙 光 祖 ) 등과 연좌되어, 성주( 星 州 )에 유배된 뒤 의 주 안악( 安 岳 )에 이배( 移 配 ), 1530년 풀려났다. 관직에 있을 때 가는 곳마다 치적을 올려 명망이 높았고, 조정에서 는 나라의 인재로 여겼으나, 간신들의 질시( 嫉 視 )로 심한 비방을 받았다. 특히 조광조와 친해서 큰 일을 의논하였 고, 청렴한 관원으로 일생을 지냈다. 청주 신항서원( 莘 巷 書 院 )에 배향되었다. * 김정국( 金 正 國, 1485~1541) 본관 의성. 자 국필( 國 弼 ). 호 사재( 思 齋 ) 팔여거사( 八 餘 居 士 ). 시호 문목( 文 穆 ). 학자 안국( 安 國 )의 동생. 김굉 필( 金 宏 弼 )의 문인.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급제, 승지( 承 旨 )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기묘사화( 己 卯 士 禍 )로 삭탈관직되어 고향에 칩거하며 저술과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1537년(중종 32) 복관, 전라감사가 되고 뒤에 병조 참의 공조참의 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일찍이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업, 시문이 당대에 뛰어났고 또한 의서( 醫 書 ) 에도 조예가 깊었다. 좌찬성( 左 替 成 )이 추증되었다. 문집에 사재집, 저서에 성리대전절요( 性 理 大 全 節 要 ) 촌가구급방( 村 家 救 急 方 ) 역대수수승통지도( 歷 代 授 受 承 統 之 圖 ) 경민편( 警 民 篇 ) 기묘당적( 己 卯 黨 籍 ) 등이 있다. * 김정( 金 淨, 1486~1520) 본관 경주. 자 원충( 元 冲 ). 호 충암( 冲 菴 ). 시호 문간( 文 簡 ). 10세 전에 사서( 四 書 )에 통하고, 1504년(연산군 10) 사마시에 합격, 1507년(중종 2)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정언( 正 言 ) 순창군수 등을 지냈으며, 담양부사( 潭 陽 府 使 ) 박상( 朴 祥 )과 함께 폐비 신씨( 愼 氏 )를 복위시키고자 상소하였으나 각하되고 유배당하였다. 1516년(중종 11) 다 시 등용되어, 부제학( 副 提 學 ) 동부승지( 同 副 承 旨 ) 도승지( 都 承 旨 ) 이조참판( 吏 曹 參 判 ) 대사헌( 大 司 憲 ) 형조판서( 刑 曹 判 書 ) 등을 역임하였다. 조광조( 趙 光 祖 )와 함께 미신타파 향약( 鄕 約 ) 시행 등에 힘썼으나 1519년 기묘사화( 己 卯 士 禍 ) 때에 제주에 안치되었다가 뒤에 사사( 賜 死 )되었다. 시화( 詩 畵 )에 능하였다. 문집에 충암문집, 저서에 제주풍 토록( 濟 州 風 土 錄 ) 등이 있다.
13 * 한충( 韓 忠, 1486~1521) 본관 청주. 자 서경( 恕 卿 ). 호 송재( 松 齋 ). 시호 문정( 文 貞 ). 청주 출생. 주부 창유( 昌 愈 )의 아들. 1510년(중종 5) 생원이 되고 1513년 별시문과( 別 試 文 科 )에 장원, 전적( 典 籍 )을 거쳐 정언( 正 言 ) 이조정랑 응교( 應 敎 ) 등을 역 임하였다. 1518년(중종 13) 종계변무( 宗 系 辨 誣 )를 위한 주청사( 奏 請 使 ) 남곤( 南 袞 )의 서장관( 書 狀 官 )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그때 서로 의견충돌이 있어 남곤의 미움을 받았다. 1519년 전한( 典 翰 )을 거쳐 직제학 동부승지 좌승 지를 역임하고, 남곤에 의해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전임되었다. 기묘사화( 己 卯 士 禍 )가 일어나자 조광조( 趙 光 祖 )와 교 유가 있었다 하여 거제도에 유배되고, 1521년(중종 16) 신사무옥( 辛 巳 誣 獄 )에 연루되어 의금부( 義 禁 府 )에 투옥되었 다가 장살( 杖 殺 )당하였다. 율려( 律 呂 ) 음양( 陰 陽 ) 천문( 天 文 ) 지리( 地 理 ) 복서( 卜 筮 )에 모두 능하였다. 뒤에 신원 ( 伸 寃 )되고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 윤임( 尹 任, 1487~1545) 본관은 파평( 坡 平 ), 자는 임지( 任 之 ), 시호는 충의( 忠 義 )이다. 중종비( 妃 ) 장경왕후( 章 敬 王 后 )의 오빠로 대윤( 大 尹 )의 거두였다. 무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경주부윤에 올랐다. 1523년(중종 18)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왜선과 싸우다 패하여 충군( 充 軍 )되었다. 인종( 仁 宗 :장경왕후 소생)이 세자로 있을 때,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文 定 王 后 )가 경원대군( 慶 源 大 君 :명종)을 낳자, 김안로( 金 安 老 )와 함께 세자 보호를 둘러싸고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겼다. 1537년 김안로가 실각하고 윤원형( 尹 元 衡 )이 집권하면서 세력다툼이 심하여졌다. 1543년부터 그를 대윤( 大 尹 ), 윤원형을 소윤( 小 尹 )이라 불렀다. 1545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垂 簾 廳 政 )을 기화로, 소윤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정적( 政 敵 )인 대윤 일파를 숙청하였다. 이때 아들 3형제와 함께 사사( 賜 死 )되었으며, 1577년(선조 10) 신원되었다. * 서경덕( 徐 敬 德, 1489~1546) 본관은 당성( 唐 城 )이며, 자는 가구( 可 久 ), 호는 화담( 花 潭 ) 복재( 復 齋 ), 시호는 문강( 文 康 )이다. 그는 주로 산 림에 은거하면서 문인을 양성하였으며, 신분에 관계없이 문호를 개방하여 많은 후학들이 모여들게 하였다. 조식( 曺 植 ), 성운( 成 運 ) 등 당대의 처사( 處 士 )들과 지리산 속리산 등을 유람하면서 교유하였으며, 1544년 김안국( 金 安 國 ) 이 후릉참봉( 厚 陵 參 奉 )에 천거하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학문경향은 궁리( 窮 理 )와 격치( 格 致 )를 중시하였으며, 주 돈이( 周 敦 頤 ) 소옹( 邵 雍 ) 장재( 張 載 ) 등 북송( 北 宋 ) 성리학자의 학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노장사상으로 대표되 는 도가사상( 道 家 思 想 )에도 관심을 보여 도가의 행적을 기록한 해동이적( 海 東 異 蹟 ) 에는 그의 도가적인 성향이 소개되었다. 대표적 문인으로는 허엽( 許 曄 ) 박순( 朴 淳 ) 민순( 閔 純 ) 박지화( 朴 枝 華 ) 서기( 徐 起 ) 한백겸( 韓 百 謙 ) 이지함( 李 之 函 ) 등이 있으며, 단편 논저로는 원리설( 原 理 說 ) 이기설( 理 氣 說 ) 태허설( 太 虛 說 ) 귀 신사생론( 鬼 神 死 生 論 ) 등 네 편이 있는데, 이들 논저에는 '이( 理 )'보다는 '기( 氣 )'를 중시하는 주기철학의 입장이 정리되어 있다.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개성을 대표한 송도3절( 松 都 三 絶 )로 지칭되기도 하며,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는 시조작품으로도 전해질 만큼 유명하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의 주기철학을 유물론의 원류로 평가하 여 그의 철학을 높이 평가한다. 개성의 숭양서원( 崧 陽 書 院 )과 화곡서원( 花 谷 書 院 )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으로는 화 담집( 花 潭 集 ) 이 있다. * 이언적( 李 彦 迪, 1491~1553) 본관 여주. 호 회재( 晦 齋 ) 자계옹( 紫 溪 翁 ). 자 복고( 復 古 ). 이름 적. 시호 문원( 文 元 ). 원래 이름은 적( 迪 )이었으 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 彦 迪 )으로 고쳤다. 경주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 孫 仲 暾 )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 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 尹 元 衡 ) 등이 사림( 士 林 )을 축출 하기 위해 을사사화( 乙 巳 士 禍 )를 일으켰는데, 이때 의금부판사에 임명되어 사람들을 죄 주는 일에 참여했지만 자신 도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 良 才 驛 壁 書 )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시 축출
14 될 때 그도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기( 氣 )보다 이( 理 )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그 다음 세대인 이황( 李 滉 )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유배기간 동안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명종의 묘정( 廟 庭 )에 배향되었고, 1573년에는 경주의 옥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610년 (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언적의 주요저술 원본은 이언적수필고본일괄 이라고 하여 보물 제586호로 지정 되어 독락당과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다른 글들은 문집인 회재집 에 실려 있다. * 기준( 奇 遵, 1492~1521) 본관 행주( 幸 州 ). 자 자경( 子 敬 ). 호 복재( 服 齋 ) 양덕( 陽 德 ). 시호 문민( 文 愍 ). 조광조( 趙 光 祖 )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고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응시하여 병과( 丙 科 )로 급제하였으며, 사관( 史 官 )을 거쳐 1516년 저작( 著 作 )으 로 천문예습관( 天 文 隸 習 官 )을 겸했고, 수찬( 修 撰 )을 지낸 후, 시강관( 侍 講 官 ) 등에 임명되었으며, 1519년 응교( 應 敎 )가 되었다. 기묘사화( 己 卯 士 禍 )로 온성( 穩 城 )에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교살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기묘명현( 己 卯 名 賢 )의 한 사람으로 온성( 穩 城 )의 충곡서원( 忠 谷 書 院 ), 아산( 牙 山 )의 아산서원( 牙 山 書 院 ), 종성( 鐘 城 ) 의 종산서원( 鐘 山 書 院 ), 고양( 高 陽 )의 문봉서원( 文 峰 書 院 )등에 각각 배향되었다. 저서에 덕양유고( 德 陽 遺 稿 ) 무인기문( 戊 寅 記 聞 ) 덕양일기( 德 陽 日 記 ) 복재문집 등이 있다. * 허항( 許 沆,?~1537) 본관 양천( 陽 川 ). 자 청중( 淸 仲 ). 사마시( 司 馬 試 )를 거쳐, 1524년(중종 19) 별시문과( 別 試 文 科 )에 병과로 급제, 정언( 正 言 )이 되고 부교리( 副 校 理 ) 지평( 持 平 ) 사인( 舍 人 ) 부응교( 副 應 敎 )를 거쳐 전한( 典 翰 )이 되었다. 1534 년 부제학( 副 提 學 ) 동부승지( 同 副 承 旨 )를 지내고, 김안로( 金 安 老 )가 재집권하자 대사간이, 다음해 대사헌에 이르 렀다. 간신 김안로의 일당이 되어 옥사( 獄 事 )를 함부로 일으키고 무고한 사림( 土 林 )를 죽이는 등 행패를 자행하였 다. 김안로 채무택( 蔡 無 擇 ) 등과 함께 정유삼흉( 丁 酉 三 兇 )으로 일컬어진다. * 채무택( 蔡 無 擇,?~1537) 본관 인천( 仁 川 ). 자 언성( 彦 誠 ). 초명 무역( 無 斁 ). 1524년(중종 19) 별시문과( 別 試 文 科 )에 급제, 1535년 대사 간( 大 司 諫 ), 이듬해 부제학( 副 提 學 )이 되었다. 권신 김안로( 金 安 老 )에게 아첨하여 유림( 儒 林 )을 무고하여 화를 입혔 고, 조정의 상하 조신들을 이간시켜 많은 분규를 일으켰다. 김안로와 허항( 許 沆 )을 포함하여 삼흉( 三 兇 ), 혹은 정유 삼흉( 丁 酉 三 兇 )으로 불리며, 1537년 이들과 함께 문정왕후( 文 定 王 后 ) 윤씨의 폐위를 모의하다가 탄로나 유배, 사사 ( 賜 死 )되었다. * 이황( 李 滉, 1501~1570) 본관 진성( 眞 城 ). 초명 서홍( 瑞 鴻 ). 자 경호( 景 浩 ). 초자 계호( 季 浩 ). 호 퇴계( 退 溪 ) 도옹( 陶 翁 ) 퇴도( 退 陶 ) 청량 산인( 淸 凉 山 人 ). 시호 문순( 文 純 ). 경상북도 예안( 禮 安 ) 출생. 1523년(중종 18) 성균관( 成 均 館 )에 입학, 1528년 진 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 式 年 文 科 )에 을과( 乙 科 )로 급제하였다. 이언적( 李 彦 迪 )의 주리설( 主 理 說 )을 계승, 주자 ( 朱 子 )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 理 ) 기( 氣 ) 이원( 二 元 )으로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 形 而 下 的 ) 존재로 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 具 象 化 )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 理 氣 二 元 論 )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 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 理 氣 二 元 論 )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 理 氣 互 發 說 )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 端 )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 乘 ]는 것은 7정( 情 )이라고 주장하 였다. 사단칠정( 四 端 七 情 )을 주제로 한 기대승( 奇 大 升 )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 四 七 分 理 氣 與 否 論 ) 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 純 粹 理 性 )은 절대선( 絶 對 善 )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 德 )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
15 ( 柳 成 龍 ) 김성일( 金 誠 一 ) 정구( 鄭 逑 )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 嶺 南 學 派 )를 이루었고, 이이( 李 珥 )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 畿 湖 學 派 )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서에 퇴계전서( 退 溪 全 書 ): 修 正 天 命 圖 說 聖 學 十 圖 自 省 錄 朱 書 記 疑 心 經 釋 疑 宋 季 之 明 理 學 通 錄 古 鏡 重 磨 方 朱 子 書 節 要 理 學 通 錄 啓 蒙 傳 疑 經 書 釋 義 喪 禮 問 答 戊 辰 封 事 退 溪 書 節 要 四 七 續 編 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십이곡( 陶 山 十 二 曲 ), 글씨에 퇴계필적( 退 溪 筆 迹 ) 이 있다. 5. 공동연구 주제와 관련하여 현재 독서하고 있는 책들 서경덕, 화담집, 황광욱 옮김, 심산, 2004. 이이, 성학십도, 조남국 옮김, 교육과학사, 1999., 퇴계선집, 윤사순 역주, 현암사, 2007. 고영진, 호남사림의 학맥과 사상, 혜안, 2007. 김인숙, 조선 4대 사화, 느낌이 있는 책, 2009. 김범, 사화와 반정의 시대, 역사비평사, 2007. 신봉승, 조선 정치의 꽃 정쟁, 청아, 2009. 이덕일, 조선 선비 살해사건 1, 다산초당, 2008., 조선 선비 살해사건 2, 다산초당, 2009.,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 이상성, 한국 도학의 태산북두 조광조,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8. 한국사상연구회, 조선유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09.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 한국철학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예문서원, 2005. 陳 來, 송명 성리학, 안재호 옮김, 예문서원, 2004., 주희의 철학, 이종란 외 옮김, 예문서원, 2002. 楊 國 榮, 양명학, 김형찬 외 옮김, 예문서원,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