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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제15주 김호성,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 인 도철학 제10집, 인도철학회, 2001)에 대한 학생들의 논평문 발표 및 토론. 모든 학생들이 다 제출하였으나, 여기서는 2학생의 우수 논평문만을 공개함.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를 읽고 (동국대 불교대학 선학 전공, 인도철학 복수전공 3학년 여학생) 1. 논문 요약 베다는 그 자체로 진리 판단의 준거라고 할 수 있는 성언량이다. 그래서 후대 철 학자들의 몫은 베다에서 설해진 의미를 보다 적확하게 파악하고 해석하는 일이 된 다. 인도 철학은 해석학적(hermeneutical) 특징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논자는 베단타 사상을 기반하면서도 뚜렷한 자기철학을 보여주는 두 사상가인 상카라와 오 로빈도를 비교하기로 한다. 우선 논자는 두 철학자의 주석서의 내용과 그들이 이샤 우파니샤드를 어떻게 파 악했는지를, 과목 나누기를 통해 제시한다. 이를 통해 그들이 이샤의 주제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알 수 있다. 샹카라는 主 知 從 行 의 차별적 회통론의 입장인데 반하여( 지 식 중심으로 행위 회통) 오로빈도는 一 梵 안에서 一 과 多 의 합일로써 이샤를 파 악하고 있다.( 지식 과 행위 의 평등적 회통론) 그렇다면 이들이 어떻게 지 와 행 을 회통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샹 카라는 회통을 위해 근기론적 방법을 제시한다. 즉 상근기의 사람은 知 의 길, 하근 기의 사람은 行 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샹카라는 지와 행을 넘어선 범지 (Brahma-vidyā)의 개념을 상정하고 있다. 이 세 개의 개념은 범지>지>카르마로 서 열이 분명하다. 반면 오로빈도는 배타적인 일원론을 주장하는 샹카라를 비판하면서 一 과 多, vidyā와 avidyā를 평등하게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puruṣottama의 개 념을 상정하면서 이원을 통괄하고 있다. 이렇게 오로빈도가 avidyā를 인정하는 것 은 정신적 실용주의로 볼 수 있고 카르마 요가와 맥을 같이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논자는 3.각론적 관점의 차이에서 이들이 각각의 송에서 어떻게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우선 1송-2송을 보자. 샹카라의 관점을 다음과 같은 표로 정리하고 있다.

1송 갸냐요가 포기 자아보호 상근기 2송 카르마요가 삶에 대한 의욕 제례 하근기 하지만 샹카라가 2송의 카르마를 제례로 해석했던 것과는 달리, 오로빈도는 행 위 일반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근기가 낮은 사람이라는 서열적 가치관도 찾아볼 수 없다. 필자는 여기서 논리를 더 확장하여 이들 철학자가 몸에 대해 보는 관점을 서 술한다. 샹카라의 知 중심의 서열적 가치관은 몸은 참된 것이 아닌 것으로 몸에 대 한 경시, 행위/노동에 대한 경시로 이어진다. 하지만 상키야의 이원론 철학에 영향 을 받은 오로빈도는 몸과 마음을 둘 다 인정하고 있다. 다음으로 4송은 모순적 서술어로 그것 을 표현하고 있다. 상카라는 이 모순성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그는 이를 위해 제한적 첨가물(upādhi)이라는 개념을 끌어 온다. 경험적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즉 원래 순수한 본질인 그것은 움직이지 않으며, 하나 정지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있으면서도 이지만, 제한적 첨가물이 들어가면 우리의 현상세계의 물질처럼 더 빠르고 달려 가고 모든 행동들을 유지 한다. 여기서 논자는 진제와 속제를 파악하는 불교의 관점을 통하여, 샹카라의 설 명이 더욱 근기론적 서열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진제와 속제가 모두 공 하므로, 진제와 속제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불교는 곧 진제>속제의 관점이 아니 라 진제=속제=공인 것이다. 반면 오로빈도는 샹카라의 이제설에 대해 비판한다. 즉 多 (현상)는 一 (본질)에서 부터 나왔는데, 어떻게 가짜라고 치부될 수 있겠는가? 하는 비판이다. 여기서 논자 는 샹카라의 주장을 이제설적 근기론에 의한 차별적 회통론 오로빈도는 다원주의 에 입각한 평등적 회통론 이라 명명한다. 또한 오로빈도는 기타의 15장 16-18절을 차용하여 kṣara Brahma와 akṣara Brahma의 이원을 포괄할 수 있는 puruṣottama 의 개념을 설정한다. 이 개념으로써 현상과 본질을 평등하게 인정하면서 회통하고 있다. 즉 일통이론/존이라고 명명한다. 7송에 대해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번역 차이는 그렇게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논자는 6~7송에 대한 오로빈도의 해의를 참조하며 상카라의 그것(타자를 위하여 사랑 또는 자비 또는 동료의식을 넓히려는 경향성, 타자를 위해서 노동/행위 하려는 충동)에 비해 오로빈도는 사회, 윤리, 실천적 성격(카르마 요가)이 짙다는 점을 내보이고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9송을 보자. 샹카라는 해석 속에서 무지(제례)를 숭배하는 사 람들은 맹목적인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지혜(명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큰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라고 하고 있다. 이 해석을 겸수하지 못하고 양자 중의 어느 하나만을 닦는 전수에 대한 경계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이

제까지 그가 주장해온 명상제일의 입장에서 볼 때 해석은 무리가 있다. 반면 오로 빈도는 9송을 어떻게 이해할까? 오로빈도는 vidyā를 일원성으로 avidyā를 다원성 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일원성은 없고 다원성만 있는 것이 어둠 속으로 가는 것 이라면 다원성은 없고 일원성만 있는 것이 더 큰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다. 즉 일원성과 다원성을 상보적인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 면, 그는 이들을 에너지(Chit-Sakti)의 쌍둥이 힘들로써 해석하고 있다. 이제 14송에서 샹카라는 자기 해석을 위해 원문까지 고치는 시도를 단행한다. sambhūti에 접두어 a를 집어넣어 완전히 반대되는 뜻으로 원문을 개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샹카라는 전개(현현)를 곧 해체(소멸)로 보고 있다. 전개 이전 (미현현)이 더 바람직한 상태라는 것이다. 반면 오로빈도는 현현이 곧 해체라고 보 지 않는다. 해체는 현현으로부터 미현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았다. 바꾸어 표현 하자면, 존재에서 비존재로 돌아감을 해체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오로빈도는 해 체에 대해서 어떤 입장일까? 긍정적이다. 존재에서 비존재로 돌아가는 해체를 불교 의 거대한 노력 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즉 존재의 삶을 비존재(해탈)로 돌 아가는 도정에 놓음으로써, 현실적 삶을 긍정하면서도 해탈을 향하고 있다. 2. 용감한 샹카라? 무모한 샹카라? 논자는 서론 부분에서 인도철학의 특징을 제시한다. 이는 베다 가 성언량( 聖 言 量 ) 으로써, 신의 말씀이라는 절대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대의 철학자들은 베다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것은 철학자 개인의 색깔과 그가 살고 있는 사회라는 콘텍스트적 맥락에 영향을 받 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절대적인 성전인 베다는 해석자라는 전령을 통해 그만의 스펙트럼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원전-해석자-독자 사이에서 해석자의 영 역은 어디까지 가능할 수 있을까? 논문에서 샹카라의 적극적 해석을 보면서 그 영 역의 범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이샤의 14송을 보자. 이하는 원문을 그대로 해석한 오로빈도의 번역이다. (논문 p.141) 생기와 생기의 해체를 하나 속의 둘로써 안 자는 해체에 의해서 죽음을 건너고 생기에 의해서 불사를 즐긴다. 여기서 대립되는 말은, 생기와 해체일 것이다. 범어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sambhūti(생기 현현) vināśa(생기의 해체)

하지만 샹카라는 원문의 sambhūti를 asambhūti로 개변( 改 變 ) 시키고 있다. 그러 므로 asambhūti(미현현) vināśa(=sambhūti)(생기의 해체=현현) 이렇게 다른 범어를 놓고 14송을 해석해 본다면, 오로빈도가 현현을 해체라고 보 지 않고 현현에서 미현현으로 즉 존재에서 비존재로 돌아감을 해체라고 본 것에 반 해, 샹카라는 현현 자체를 해체라고 보고 있다. 즉 명상중심의 일원론자답게, 전개 이전의 상태를 더 바람직하게 평하고 있는 것이다. 원문을 고쳐서 자기철학을 제시 한다? 이것을 두고 과감한 자기 철학의 제시 해석학적 창견을 격려 하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것은 해석자의 영역이 원전을 고칠 정도로 무리하게 켜졌다고 본다. 샹카라가 뛰어난 철학자이지만 그래도 성언량인 베다의 권위는 침 범하지 않아야한다고 본다. 인도철학의 기본 전제가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악보를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작곡자의 음악이 아닌 그만의 음악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푸르트뱅글러라는 지휘자도 그의 해석에 따라 음을 길 게 또는 짧게 연주할지언정 음표를 고치지는 않았다. 3. 현현에서 미현현으로 샹카라의 1송~2송 해석에서 그는 카르마 요가를 어떻게든 포용하기 위해서 근기 론의 방법을 취했다. 상근기의 사람은 탐욕을 버림으로써 자아를 보호하는 명상의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14송에서 샹카라가 말한 의미를 생각해볼 때, 현현의 세상 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명상이란 현현의 세계에서 미현현으로 돌아가는 최상의 방법을 의미할 것이다. 샹카라가 2송에서 주어를 범부(하근기) 로 보아 서열화 시키는데 반하여 오로빈 도는 2송의 주어를 1송의 그것과 평등하게 보고 있다. 또한 샹카라가 2송에서 karma를 제례로 보고 있는데 반하여 행위로 파악함으로써 그가 강조했던 카르마 요가의 토대를 다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14송에 적용해 본다면, 현현에서 미 현현으로 돌아가는(오로빈도 식으로 풀이한다면, 해체) 방법으로써 카르마 요가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논문을 읽기 전에 오로빈도에 대해 생각하기로, 이 분은 미현현에서 현현으 로 전개되는 과정에 만 주목한 철학자로 착각하였다. 미현현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샹카라의 입장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현실과 몸에 대 한 긍정, 철학의 실천 윤리적 사명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도 한 몫 했다. 하지만 오 로빈도의 철학은 거기에 머문 것이 아니라 현현에서 미현현으로의 관점을 수용하고 있었다. 논자는 오로빈도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가 존재에서 비존재로의 해체를 해 탈로 여기며 이를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이 부분 뿐만이 아니라 9송을 해석한 것을 보자. 오로빈도는 vidyā를 일원성으로 avidyā를 다원성으로 이

해하고 있다. 즉 일원성은 없고 다원성만 있는 것이 어둠 속으로 가는 것이라면 다원성은 없고 일원성만 있는 것이 더 큰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여 기서 일원성과 다원성 즉 미현현과 현현을 동시에 긍정하고 있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즉 이것은 일원성 다원성 뿐만 아니라 다원성 일원성에 대한 긍정으로 이 어지는 것이다. 한편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종착역은 미현현으로 같지만 그의 방법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이들을 이해한 바를 나타내자면, 명상(회귀) 다음과 같다. 미현현 현현 <상카라> 행위(전진) 현현 미현현 <오로빈도> 상카라는 미현현의 상태 자체를 최고의 이상으로 간주하며, 현현의 세계에서 명 상의 방법으로써 거기에 도달할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본질의 상태로 회 귀 해야 하므로 현현의 세계는 떠나야 할 의미 없는 것이 된다. 반면 나는 오로빈도 의 주장을 현현의 세계에서 행위를 통해 미현현의 세계로 향하는 전진 으로 파악하 였다. 따라서 현현의 세계는 미현현의 세계로 가기 위한 소중한 도정이며 필수 불 가결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행위라는 동적이며 과정적,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일 어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조금 더 확장해 본다면, 상카라의 회귀 는 출가 수행자들의 생활 방식과 가까운 것이고 오로빈도의 전진 은 재가인들의 삶의 과정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따라서 오로빈도는 재가인의 생활방식으로도 해탈할 수 있다는 입장(재가인의 성불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이것은 논자가 말한 불교가 세속을 진제로 받아들인다는 입장, 중론에서 언설을 의하지 않고서는 진제를 얻을 수 없 다. 라고 인용한 부분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4. Brahma-vidyād와 puruṣottama 샹카라와 오로빈도는 공통적으로 지와 행을 회통하는 입장이지만, 샹카라는 지

중심의 행의 회통으로써 차별적 회통론이며 오로빈도는 지와 행을 동등하게 인정하 는 평등적 회통론이라고 논자는 주장한다. 그리고 두 철학자는 공통적으로 지와 행 을 뛰어넘는 개념-샹카라는 Brahma-vidyā, 오로빈도는 puruṣottama의 개념을 상 정한다고 밝힌다. 하지만 나는 논문을 읽으면서 puruṣottama의 개념이 또 하나의 개념을 추가시킴으로써 지와 행을 회통했지만, 또 하나의 위계가 설정되었다고 해 석할 가능성도 있지 않나 싶었다. 샹카라가 梵 知 > 知 > 無 知 로 3계를 했다면, 오로 빈도는 puruṣottama> 知 + 無 知 의 2계가 설정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로 빈도가 일원성의 뿌리에서 나온 줄기 같은 다원성을 말하고 있으므로, 굳이 지와 무지를 양분해서 표현하기보다 그것을 하나로 통합시켜야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전체적인 맥락을 놓고 볼 때, puruṣottama는 知 와 無 知 가 평등적으로 조화하려는 시도라고 파악하는 것이 해석자의 의도에 가까울 것 같다. 5. 짧은 생각들 덧붙이며 논자는 결론 부분에서 회통론의 진정한 모습과 관련해서는 근기론을 넘어서야 한 다고 밝히고 있다. 간단히 도식화 한다면 회통 근기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회 통의 목적을 생각해 본다면, 하나의 목적으로 가는 다양한 길들을 인정한다는 입장 으로(뭐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 다양한 길에 같은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이 다. 이것은 곧 나만 옳다. 라는 독단적 자만에 대한 경계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회통에 근기론 이라는 개념이 대립되기만 하는 것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근기론의 서열화, 계급화 시키는 엘리트 중심의 사고 이외에 긍정적인 역할이 있지 않을까? 사람을 일정 기준으로 나누고 거기에 알맞은 방식을 정해주는 것이 어쩌면 현실적인 방법으로써 모두가 그 끝으로 도달할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을 제시한 것은 아닐까라는 점이다. 즉 회통의 본래 목적(서울로 가자)라는 것에 효과적, 현실적인 방법이 될 순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다. 어짜피 그 끝이 동일하다면 하근기라고 상 근기라고 평가받든 무슨 상관일까? 하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을 나눌 수 있을 까? 수행의 역량이라는 것이 단순 I.Q로 평가 될수는 없을 터.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끝으로, 이 과제를 작성하면서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 다. 샹카라와 오로빈도처럼 내 의식은 미현현으로 향하고 있는지? 아니라면 어렴풋 하게나마 인지하고 있는지? 가끔씩 미현현에 이름을 붙여보며 불러보기도 하고 그 앞에 서보려고 하지만 잘 안 되는 것 같다. 거기에서 멀어지며 회귀하지 못하고 전 진하지도 못하며 일상에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었다.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상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비교(김 호성) 를 읽고

(동국대 불교대학 인도철하고가 4학년 비구스님) 이샤 우파니샤드 를 처음 배울 당시만 해도 우파니샤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필자는 왜 이것을 배워야 하는 가였다. 김 호성 교수의 이 논고에서 서두에 그러한 의문에 대한 자 세한 설명으로 답해주고 있다. 인도 철학사는 베다에서 나왔으며 이 베다에 설해진 언어자 체가 성언량(sabda)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설해질 수 있는 진리는 모두 베다에서 이미 다 밝혀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철 학하는 사람들 입장은 그 베다가 담고 있는 사상을 자기 철학으로 해석해 제시해내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논자는 말한다. 원전에 대한 述 而 不 作 이라는 해석적 견해는 베다의 해석학에 대한 철학자의 입장이 고스란 히 담겨있다. 논자는 해석학자의 입장을 상카라와 오로빈도라는 두 사람을 통해서 이샤 우 파니샤드가 갖고 있는 의미를 다양하게 풀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논자는 상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상의 차이를 두고 비교를 통해서 오로빈도의 견해를 지지 하고 있다. 본 논고의 결론에서도 논자는 오로빈도의 해석상의 타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논자는 상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을 두고 차별적 회통 론과 평등적 회통 론으로 구분하고 있다. 상카라에 대해서 비드야(지)를 우선으로 하고 까르마(제사=아비드야)를 從 으로 보는 근기론적 포용 론으로 보고 있고, 오로빈도에 대해서는 까르마를 제사의 의미에서 벗어나 모든 행위로 보고 종교 다원주의적 평등주의로 보고 있다. 비드야 와 아비드야의 차원을 진 제와 속제의 입장인 주지종행의 입장으로 보는 상카라와 달리 오로빈도의 일원성과 다원성 에 무게를 두고 있다. 아마 이러한 입장은 논자의 종교관의 입장도 개입되어 보인다. 종교는 저마다 각기 진리를 표방하고 있다. 저마다 종교를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는 입장은 자신의 종교의 입장에서 보 게 되는 포괄주의입장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에서 기인 한다. 자신의 주체성과 정체성은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순간부터 시작 된다고 보고 있다. 상카라와 오로빈도의 이샤 우파니샤드의 해석적 견해에서 우리가 보는 관점은 그 두 가지 해석적 견해에서 자유롭지가 않다. 사실 필자는 종교 다원주의적 견해는 지지하나 논자가 보고 있는 상카라의 견해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각기 종교를 다룰 때에는 교리 적 측면과 신앙적 측면은 분명 이견이 생길 수가 있다. 베다의 근본적 문제제기는 깨달음이라고 본다. 깨달음은 분명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이다. 괴로움의 해결인 것이다. 진리는 보편적 이어야하나 개인적 깨달음의 문제는 보편적일 수는 없다.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괴로움이 과연 개인에게 보편적 일까? 지극히 상대적이고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다. 우리가 보편적 입장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각자 개인의 개인적인 것에서 부터의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달음에 이르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밖에 다른 것을 논하는 것은 코끼를 부분적으로 만지고 코끼리를 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상카라가 말하는 것은 그러한 견해가 아닌가 필자는 본다. 각자의 개인적인 것은 존중해줘 야 한다는 오로빈도의 다양성 부분도 인정한다. 하지만 철학적인 해석상의 문제는 수행적인

차원과는 다르다고 본다. 해석상의 문제는 다양성의 문제이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다양성 의 접근 방식은 지극히 개인적이어야 한다고 필자는 본다. 결국 깨닫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문제이다. 신앙에서는 자력과 타력의 문제를 두고 우선순위를 논할 수가 있겠으나 붓다의 불교 수행에서만 보자면 분명한 것은 자력이 기본 베이스이다. 자력수행이 바탕이 없는 타 력신앙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고 본다. 이샤 우파니샤드 를 보는 해석상의 관점은 오로빈도의 현실적 행위로서 의견이 설득력 이 있어 보이나 필자는 상카라의 수행적 견해로서의 해석상의 의견을 우선순위로 파악하고 자 한다. 베다의 해석상의 근본 문제는 깨달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9송에서 보이는 제례를 행하는 자와 지혜를 행하는자의 상카라와 오로빈도의 다른 견해에 대해 일원성과 다원성의 대립과 회통의 문제로 논자는 다루고 있다. 필자도 일원성과 다원성에 관한 회통의 관점은 동의하 나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관점이 절대성을 띠면 안 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고 본 다. 그래야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맞을 수가 있다. 개인적 고의 해결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일 수 밖에 없는 문제이므로 절대성을 강조하게 되면 독단과 대립이 생기게 되기 때 문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상카라의 깨달음이 우선이라고 보지만 취하는 방식의 견해로서 오로빈 도의 까르마의 견해인 행위의 다원성을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