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길논단 현대와 기독교 사상 교회의 위기와 성서해석학의 새로운 소명 김 이 곤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1. 도입 위기 라는 표현이 좀 선동적( 煽 動 的 )인 표현일는지는 모르지만, 한 세기(역사의 한 마디)가 바뀔 때마다 우리 인류는 위기 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늘 경험해 왔었다는 것을 역사를 뒤돌아보면 누구 나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다. 구약과 신약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종 교사를 중동 종교들과의 관계 안에서 살펴보면, 이러한 위기 의식은 적어도 역사의 한 마디를 이을 때마다 진통의 아픔을 느끼며 점철 되 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4월 10일에 이례적으로 길게 바람, 지진, 불, 그러나 세미한 소리 (-21세기 한국교회를 위하여 우리가 받 을 소명-)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것이 발목을 잡히게 하여 이 글을 쓰게 한 명예로운 동기가 되었다. 행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실제로, 이 설교(아니, 강연)가 말하려는 목표가 바로 이러한 위기 조성에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친 덫 에 걸려 다소간 위기 를 느낀 101
순수한 신앙의 교우들 덕분인지, 그렇다면 그 위기 극복의 대안을 한 번 말해 보라! 는 과제가 마치 부메랑처럼 내게 다시 돌아오게 되었 다. 사실, 위기 선포와 그 위기에 대한 극복 대안 은 이미 그 설교 속 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위기는 태초부터(인간 창 조 때부터) 이미 선포되었고 또 억겁을 헤아리는 그 많은 세월동안 끊 임없이 위기 선포와 더불어 위기 극복의 대안 선포가 동시적으로 계 속되어 왔으며, 마침내 그 오늘 21세기의 우리들에게까지 계속되어 왔 다. 하지만 우리는 그 극복의 대안( 代 案 ) 을 잘 알면서도 그 대안을 채택하지 않고 방치해 두었거나, 아니면 마치 그것이 대안이 아니라는 듯, 아니면 우리의 지성이 닫혀 있는 것이라고 믿기라도 하듯-고비용 저효율의 나쁜 관행에 따라- 대안 제시란 실현 불가능한 것, 또는 실 현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하여 무시해 버렸거나 하였 던 것이다. 그리하여, 위기 는 인간 역사의 처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 지 인간을 제도( 濟 度 )할 지레질 역할을 해 와야 했다. 마침내 아모스 예언자는 다음 장에서처럼 입을 열지 않은 수 없었던 것이다(암 3:8). 2. 인간이여, 인간이여! 이러한 위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위기로 가득 찬 이 인간 역사 를 깊이 있게 관찰해 왔던 기원 전 8세기 예언자 아모스는 매우 적재 적소에서 그리고 매우 미래지향적인 형안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신탁, 즉 신( 神 )으로부터 위탁( 委 託 )받은 말씀 을 남겨 놓은 바 있다(아모 스 8:11~12). 이 말씀은 예언자 아모스가 네 번째 חזון) 비전 하존; 암 8:1~2a)을 본 후 무엇인가에 쫓기듯, 매우 다급한 종말론적 성격의 어 조로 외쳤던 심판의 신탁(Unheilsorakel; 암 8:2b~14)으로서, 그 불가항 102
그리하여, 위기 는 인간 역사의 처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제도 ( 濟 度 )할 지레질 역할을 해 와야 했다. 력적인 심판을 불러오는 현실이 근본적으로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 지를 성서 그 어디에서보다도(신명기와 신명기적 역사서에서 보다도) 가장 확실한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다. 필자 사역( 私 譯 ) (11) 보라, / [종말의] 그 날들이 / 온다! // [주 / 야훼의 / 신탁이다] // 내가 이 땅에 / 기근을 / 보내겠다. (3+[3]+3) 양식 때문에 / 주림 / 아니며 // 물 때문에 / 갈함 / 아니다. (3+3) 오히려, 야훼의 / 말씀을 / (λόγον / κυρίου) 듣지-못함- 때문이다. (3) (12) [그 날에는] 이 바다에서 / 저 바다 / 까지 // 북쪽에서 / 동쪽까지 / 떠돌면서, (3+3) 야훼의 말씀을(λόγον κυρίου) / 찾으려고 애써도 / 찾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3) 리듬: 3+[3]+3 3+3+3 // 3+3+3 히브리어 본문 / באים // [נאם / אדניי / יהוה] // והשׁלחתי / רעב / בארץ (11) (3+[3]+3) הנה / ימים 103
(3+3) לא / רעב / ללחם // ולא / צמא / למים (3) כי אם לשׁמע / את דברי / יהוה (3+3) ונעו / מים / עד ים // ומצפון / ועד מזרח / ישׁוטטו (12) (3) לבקשׁ / את דבר יהוה / ולא / ימצאו 예언신탁의 언어배열로서는 이처럼 함축적이고 이처럼 잘 정제된 신탁, 즉 3+3+3 운율에 잘 짜 맞춘 이런 신탁은 예언서에서는 물론이 고 구약 전체의 그 어떤 성서문학 장르에서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여기에 나타난 예언의 초점은 전적으로 야훼의 דבר יהוה) 말씀 떠발 야훼 / λόγος κυρίου 로고스 큐리우)의 절실한 필요성에 대한 강조에 있음이 틀림없다. 즉 위의 말씀은 야훼의 말씀 이 우리의 운명을 좌 우하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관건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역설하고 있는 신탁 문단이라고 하겠다. 더욱이, 이 심판신탁 문단(암 8:11~12)을 인 클루지오 (inclusio) 형식으로 앞(3~8, 9~10절)과 뒤(13~14절)로 둘러 싸고 있는 그 종말론적인 선언 ביום ההוא= 문단들( 그날에 빠욤 하후 라는 말로 시작하는 문단들) 모두가 다 말씀의 부재 때문에 올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도 그 예언의 초점이 조금도 모호하지 않게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다. 기근 또는 기갈이라는 재난이 야훼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는 은유 법은 구약 예언자들의 언어세계에서는 결코 낯설지 않는 언어구사법이 지만, 그러나 말씀의 기근 또는 말씀의 기갈 이라는 은유는 아모스 시대 이전에는 이스라엘이 결코 알지 못하였던, 전혀 색다른 유형 1) 의 기갈, 즉 새로운 성격의 기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1) Cf. James L. Mays, Amos(London: SCM Press, 1969, 1974), p. 148; Hans W. Wolff, Joel and Amos(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7), p. 330. 104
시내(호렙)산의 계시사건 때부터 신명기 운동을 거쳐 구약 전 역사에 걸쳐서 야훼종교 신앙을 줄기차게 견지해 왔던 가장 중심적인 구약 신앙의 특징은 말씀 이 곧 불가시적 하나님의 가시적 현존이시다. 는 증언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도 예언자 아모스는 분명 개혁 예언자라고 칭할 만하다고 하겠다. 시내 (호렙)산의 계시사건 때부터 신명기 운동을 거쳐 구약 전( 全 ) 역사에 걸쳐서 야훼종교 신앙을 줄기차게 견지해 왔던 가장 중심적인 구약 신 앙의 특징은 말씀 이 곧 불가시적( 不 可 視 的 ) 하나님의 가시적( 可 視 的 ) 현존( 現 存 )이시다. 는 증언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고대 중동 지 역, 즉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끼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서 서남 지역으로 지중해를 끼고 뻗어 내려가 나일 강에 이르는 반달 형의 모양을 갖춘 옥토지대(the fertile crescent)가 바로 구약과 신약의 종교를 탄생시킨 지역인데, 이 중동지역을 지배하였던 그 수많은 종교 들 중에서 특히 1 신의 형상화의 절대금지, 2 신의 주기적 죽음과 주 기적 부활의 절대 불용( 不 容 ), 3 신의 성( 性, sex) 부여 금지(성의 종교 화 절대 금지), 4 유일신 신앙의 절대 고수를 유일하게 고집한 종교가 바로 다름 아닌 구약과 신약의 종교라는 것이 최근의 성서학에 오면서 더욱 더 분명해지고 있음 2) 은 놀라움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의 하나님 신앙이 갖고 있는 신앙적 갈등도 또한 바로 여기, 창 조주 하나님의 불가시성과 불가포착성(elusiveness), 그리고 하나님의 2) 이 부분에 관한 과학적인 연구는 Albright와 그의 제자들(올브라이트 학파)에 의하 여 꾸준히 계속되어 왔다. Cf. W. F. Albright, The Biblical Period from Abrahahm to Ezra(New York: Harper Torchbooks, 1949, 1963); idem, Yahweh and the Gods of Canaan(Winona: Eisenbrauns, 1968); F. M. Cross,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Cambridge, London, and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73, 1986); Mark S. Smith, The Early History of God(San Francisco: Harper & Row, 1990). 105
자기계시( 自 己 啓 示 )가 얼굴 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역사적 사건과 말 씀 에 의하여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 속에 있다고 하겠다. 이스라엘이 이 진리를 시내(호렙)산에서 직접 계시 받았으면서도(신 4:12) 그 진의 를 스스로 깨닫는 데에는 약 760년(기원 전 1200년~540년)이나 되는 긴 세월(모세의 시내 산 체험 때부터 고레스의 등장 때까지)이 필요하 였다(사 45:15; 제2 이사야). 막상 이러한 깨달음과 더불어 새로 시작 된 야훼주의 운동도 너무 극단적인 교조주의에 묶여 첨예화되는 바람 에 에스라, 느헤미야, 스룹바벨, 여호수아 등이 이끄는 바빌론 포로 후 기 공동체는 그 기초가 빈약한 율법주의 종교(유대교)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모순성이 지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역사적 예수 (성육하신 하나님, the Incarnated God/the Crucified God)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마 7:21 이하)는 회개운동이 자신을 십자가에서 불사를 정 도로까지 확실하게 증언되고(요 14:8~14) 또 자신의 대속적( 代 贖 的 ) 죽음과 부활을 통해 확증(마 27:54; 막 15:39; 눅 23:49; 요 19:28~30) 을 보여 주었지만(아들을 통한 계시가 역사 안에서 성취되었지만), 그 러나 성년( 成 年 )이 된 21세기조차도 여전히 1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말씀 이 하나님이시다 (요 1:1c, Θεὸς ἡν ὁ λόγος, The Word was God.)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2 그 말씀 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 운데 사셨다. (요 1:14a, Ό λόγος σὰρξ ἐγένετο καὶ ἐσκήνωσεν, The Word became flesh and dwelt among us.)라는 이 말씀의 증언은 여전히 이 세상으로부터 배척받고 있는 형국으로 남게 되었다(요 1:5). 그럼에 도 창조주 하나님은 오직 말씀을 통한 계시와 그 말씀 계시를 통한 구원만 을 고수하시고 계시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요 동시에 성 서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 번 바람, 지진, 불, 그러나 세미한 소리 라는 제하의 메시지가 이례적으로 길어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메시지의 106
우리의 하나님 신앙이 갖고 있는 신앙적 갈등도 또한 바로 여기, 창조주 하나 님의 불가시성과 불가포착성,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얼굴 로가 아니 라 전적으로 역사적 사건과 말씀 에 의하여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 속에 있다고 하겠다. 기본 요지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Mission of God)는 본질상, 창 세 때부터 그리스도가 오시고 떠나가신 그 이후까지도, 아마 영원히, 말씀을 통한 구원선교만을 고집하신다는 것이 성서의 일관된 증언이 라는 것 을 역설하는데 그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설교 는 오직 문제 제기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문제를 유도한 내가 입을 열어 인간이여! 인간이여! 라고 절규하며 대답해야 할 차 례가 된 것 같다. 3. 케리그마를 도출해 내는 성서해석을 지향하며 신은 존재하는 것이냐? 아니면 신은, 적어도 인격적 신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단지 우연의 산물이며, 아니면 인과( 因 果 )의 진화 질서에 속한 것이거나, 아니면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또 다른 특수 차원의 질서에 속한 것이거나 한 것이냐? 그리고 성서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냐? 아니면, 인간의 신앙고백문에 불과한 것이냐? 이러한 질문은 그 형식논리가 어떤 것이든 간에, 모두 신학적 리비 도(libido theologica) 3) 에서부터 또는 종교심의 리비도에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32:29[30], 출애굽기 3:13~15, 출 애굽기 33:18~23, 그리고 사사기 13:17~18은 구약 성서 안에 나타난 3) Cf. S. Terrien, The Elusive Presence(San Francisco: Harper & Row, 1978), p. 144. 107
신학적 리비도가 표출된 구절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거기에 나타난 공통된 답변은 하나님은 인간이 개념 정의를 할 수는 없는 분이다. 라는 것이고 단지 우리는 그분의 자유로우신 자기 계시 에 의하여서만 (지으신 만물을 통하여 / 역사적 [구원] 행위들을 통하여 / 아들을 통하 여서만) 그분을 알 수 있고 또 그분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지( 등[ 背 ] 을 통해서만 그를 알 수 있을 뿐이지, cf. 출 33:23) 그분을 본체로는 ( 얼굴로는 ) 결코 알 수 없는 분이라고 결론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1 우리 라는 존재는 그가 누구이든 모두, 우리를 있게 하시는 그분(The One Who causes [us] to be) 4) 으 로부터 왔다는 것(이런 점에서만 본다면 우리의 시공간은 모두가 현대 물리학의 엔트로피(entropy) 5) 법칙에 확고부동하게 속해 있는 것이 옳 은 것 같다)과 2 우리는 또한 그 어느 누구든, 또 그 어느 무엇이든 모두가 그 온 출발점(흙)으로 반드시 돌아간다는 것(이 경우에서만 본 다면 우리의 시공간은 엔트로피 법칙에 역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두 가지만은 분명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1과 2가 어떻 게 종합될지는 몰라도, 결국 우리는 출애굽기 33:17~34:8의 은유적 계 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이 믿음 이다. 이 믿음 으로 구원받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우리가 그 어떤 전공 영역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학문적 양심과 신앙적 양심 모두를 4) 라는 (יהוה) 야ㅎ웨 이름의 뜻을 구약의 여러 문맥에서 보면 그 이름의 기원은 대 강 다음과 같은 추론에서 그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예배[ 祭 儀 ]에 서 자주 사용되었던 할렐루-야[후] 라는 제의적( 祭 儀 的 ) 공식 문형에 나타나는 야[후] 가 야훼 라는 말의 initial일 것이라는 추론, 2 엘리-야[후], 예라미-야[후], 이사-야[후] 등의 theophoric names에서 사용되는 야-ㅎ 라는 말이 야훼 라는 말의 initial일 것이라는 추론 등이 우선 가능하다. 그 밖에도 전문적인 언어학적 연구 분야를 통하여서도 야훼 라는 이름의 기원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cf. 'el du yahwi, et al. 5) 제레미 리프킨, 엔트로피 (서울: 세종연구원, 2000, 2004(13쇄)). 108
한 쪽은 성서를 영지주의적으로(이 방법론을 본 필자는 또 다른 의미의 인본주 의적 성서해석 방법론이라고 본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쪽은 지식주의적으로 보아 나갔을 뿐, 성서문학 안에 들어 있는 신의 현실(divine reality)을 찾는 데에는 실패하였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가지고 진지하게 성서 해석학에 매달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하 겠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성서 해석학은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 실을 무시한 성서 해석학적 노력이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한 쪽은 성서를 영지주의적으로(이 방법론을 본 필자는 또 다른 의미의 인본주 의적 성서해석 방법론이라고 본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쪽은 지식주의 적으로 보아 나갔을 뿐, 성서문학 안에 들어 있는 신의 현실(divine reality)을 찾는 데에는 실패하였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필자는 18세기 부터 20세기까지에 이르는 각고의 성서 해석학적 노력은 어디까지나 올바른 성서해석학(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실을 드러내는 성서해석 학)에로 이르는 필수적인 전 단계였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 모든 해석학적 노력들이 케리그마 발굴로 이어지는 과제 에 이르기도 전에 최근의 신 문학비평학 6) 은 성서를 계시의 책 또는 케 리그마(선포된 복음)의 책이라는 전제를 벗어 던지고 성서를 순수 문학 으로만 보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리고 인간의 경험들의 빛에 비추어 그 문학세계의 심층구조를 살펴보는 것으로 해석학의 과제를 종결지음과 동시에 의도적으로 성서문학으로부터 신의 계시나 케리그마를 읽어내는 것을 거부하는 관점에서 성서를 읽는 방법을 추구하고 있다. 결국 신앙 공동체의 규범서라는 관점에서 성서를 볼 때는, 이 방법론은 신앙공동 6) 김이곤, 구약성서의 신앙과 신학 (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1999), 95~102쪽; D. N. Fewell & G. A, Phillips(eds.) Semeia: Bible and Ethics of Reading(Atlanta: Schoars Press, 1997); D. Patte, Semeia 81, Thinking in Signs: Semiotics and Biblical Studies...Thirty Years After(Atlanta: Scholars Press, 1998). 109
체의 하향곡선과 성서 신앙의 폐기를 촉진하는 셈이 된다. 그리하여 기 독교의 경전 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서를 읽는 것을 거부하는 데 까지 이른다. 이 경우의 최선은 기껏해야 인본주의(휴머니즘)를 최대한 으로 보존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성서해석 방법론은 크게 보면, 18세기 성서비평학이 열리던 때 폐기하였던 소위 아이세게제 (eisegesi s) 7) 로 되돌아가자는 것이고, 그 때 추구하였던 엑세게제 (exegesis) 8) 는 오히려 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 된다. 이러한 현상을 나는 성서해 석학의 절대 절명의 위기로 본다. 그 이유는 이 방법론이 성서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를 폐기하고 성서를 픽션화하는 결과를 가져 7) 아이제게제(eisgesis)라는 말은 eis(=into)를 eks(=from)로부터 구분 대립시키는 희랍 어 어원을 가진 성서학적 전문용어인데, 아이제게제 는 밖에서 (텍스트 밖에서, 즉 context로부터), 이른 바, 성서 본문(텍스트)과 관계없는 데서부터 해석자 또는 독자의 어떤 자기 목적과 자기의 주관적 의도를 가지고 성서 본문(텍스트)안으로 들어가는 성서해석 방법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다. 이러한 주석법은, 비록 성서 해 석자의 특별한 영감과 직감의 기능을 살려 의외의 좋은 해석을 가져 올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그런 경우는 거의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성 서 해석자의 자기 사상과 주견이 성서 해석의 barometer가 되어 성서 본문의 본 뜻과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결정적인 결점이 있다. 아주 최근에 유행하는 신문학비평학 의 독자 비평학이라는 것은, 비록 성서 본문의 최 종 형태를 존중한다는 점과 성서 본문을 세밀히 읽는다는 장점은 갖고 있다고 하 여도, 이러한 오류를 가져 오는 최악의 길로 성서 독자들을 인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방법은 본문 본래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므로 성 서 말씀을 무시간적 언어(픽션)로 내모는 모순과 성서의 케리그마적 본질을 의도 적으로 폐기하려는 반신앙적 입장을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서문학은 처음부터 그런 문학이기를 원하지 않았던 경전문학 이었다. 8) 엑세게제(exegesis)라는 말은 eks(=from)를 eis(=from)로부터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된 성서학의 전문용어이다. 이른 바, 성서 본문에서 부터 출발하여 성서 자체의 이야 기를 먼저 듣자는 입장에서 성서 본문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성서를 그 전승(구전이든 서전이든) 초기부터 현재의 형태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살피면 서 우선 먼저 현재의 텍스트가 본래 말하려고 하였던 것과 그 말하려는 바의 변 천과정을 살펴 본 후 최종 편집 때는 어떤 신학적 동기로 본문을 최종 확정짓게 되었느냐 하는 것을 살펴 본 후에 그 말씀이 지닌 의미가 오늘의 우리 에게 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를 묻고 그 대답에 우리가 응답하여야 비로소 진정한 하나 님의 말씀 을 듣게 되는 것이다. 110
21세기의 불길한 기운은, 자연과학의 무한 발전이라는 밝은 전망으로 자신을 위장함으로써 성서적 신앙의 엔트로피 현상을 계속적으로 증가시킬 것이라는 데 있다고 하겠다. 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중 도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유혹자(사탄)가 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18세기에서 시작하여 오늘에까지 이른 성서비평학 의 전통을 성실히 받아들여 1 한 편으로는 평신도들도 함께 그 도구 를 최선의 노력으로 사용하여, 성서로부터 신의 현실 을 찾아내고 케 리그마를 읽어내는 고된 작업을 포기하려는 모든 움직임을 철저히 제 거하여야 하고 2 또 다른 한 편으로는 해석학의 영성을 발휘하여 엑 세게제(exegesis)의 수고를 통하여 신의 현실 을 찾아내는 일을 소명감 을 가지고 감당해 내자는 것이다. 교회가 진보보다는 오히려 속화( 俗 化 )되어가고 있는데, 이와 동시에 성서학자들이 고된 성서 해석학적 (성서 주석학) 노력마저 포기한다면, 그 현실은 아모스가 예언한 것처 럼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떠돌아다니며 하나 님의 말씀(생명의 말씀)을 찾으려고 아무리 노력하여도 하나님의 말씀 (뉘셔맛 하이임, חיים 을 (נשׁמת 찾지 못하게 되어 마침내는 피할 수 없는 종말을 맞게 될 것 (암 8:11~12)임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사람 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야훼의 입에서 나오는(cf. 창 2:7b) 모 든 말씀(하나님의 생기: 생명의 기운, 뉘셔맛 하이임, חיים,נשׁמת 창 2:7b)으로 사는 줄을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불길한 기운은, 자연과학의 무한 발전이라는 밝은 전망으로 자신을 위 장함으로써 성서적 신앙의 엔트로피 현상을 계속적으로 증가시킬 것 이라는 데 있다고 하겠다. 적어도 이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