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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와 테러리즘: 정치적 폭력의 경제와 타락에 관하여 73 테러와 테러리즘: 정치적 폭력의 경제와 타락에 관하여* 1) 공진성 조선대학교 국문요약 테러는 왜 궁극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며, 성공하지 못하는 테러를 사람들은 왜 자꾸 하는 걸까? 우리 시대의 안타까운 현상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폭력의 관계를, 그리고 정치적 폭력이 가지는 테러적 속성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권력은 폭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폭력을 관리하는 한 형태이다. 권력은 폭력의 뒷받침 없이 유지될 수 없다. 권력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폭력은 언제나 그 대상의 부분에 대해서만 작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권력이 의도하는 복종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부분을 대상으로 하여 나머지 부분의 복종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권력이 사용하는 폭력은 원리상 테러와 닮았다. 테러는 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하지 않을 수 있음에 근거하여 작동한다. 그저 하거나 하지 않으면 테러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테러는 언제나 실패의 위험을 안고 있다. 이 위험에 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신뢰이다. 하지 않아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해도 하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권력은 바로 이런 믿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등장한다. 이런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에 테러의 속성을 지닌 정치적 폭력은 그저 하지 않을 수 없고 할 수밖에 없음을 표현하는, 즉 정치적 무능력을 표현하는 테러리즘으로 타락하게 된다. 주제어 테러, 테러리즘, 폭력, 마키아벨리, 권력, 이데올로기 * 이 논문은 2013학년도 조선대학교 학술연구비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다.

74 현대정치연구 2015년 봄호(제8권 제1호) Ⅰ. 서론 2015년 1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두 명의 남성이 풍자 잡지 주간 샤를리 의 본사에 침입하여 총기를 난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열두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얼마 후에 경찰은 이 사건의 배후에 2001 년 미국에서 9.11 테러 를 일으킨 알카이다와 최근에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는 이라크와 시리아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 가 있었다고 밝혔다. 언론을 통해 보도된 바에 의하면 이 총격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그동안 이 잡지가 만 평을 통해 이슬람과 그 예언자 무함마드를 조롱해온 데에 있었다. 이 잡지사에 대한 공격을 프랑스와 유럽의 언론에 대한 테러 공격으로 인식한 서유럽인들은 나는 샤를리이다 라고 적힌 팻말과 함께 언론의 자유를 상징하는 펜을 들어 올 리며 폭력을 이용한 위협 에 굴복할 수 없음을 선언했다. 주간 샤를리 는 이 사건 후에 발간한 첫 번째 잡지의 표지에 호기롭게 또 한 번 무함마드를 등장시 킴으로써 테러 가 성공하지 못했음을 알렸다. 그런데 이 테러 공격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공격이 어설프고 약했기 때문일까? 공격의 대상이 된 주간 샤를리 가 상징성이나 대표성을 지 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프랑스인들의 풍자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의지가 그 정도의 위협은 쉽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일까? 또는 프랑스의 경찰력이 막강해서 추가적인 공격을 사전에 감지해 적발할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기 때문일까? 얼마 후, 2월 14일에 이번에는 덴마크에서 유사한 총격 사건이 벌어졌다. 이번 에도 공격 대상은 무함마드를 개로 묘사한 만평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만평가 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오히려 무고한 시민 한 명과 경찰 관 세 명이 숨졌다. 이슬람에 대한 풍자와 그에 대한 보복 예고 및 시도들은 서유럽에서 지난 몇 십 년 동안 반복되어왔다. 여러 차례의 테러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그 테러의 원인으로서 지목되는 일종의 도발 행위들이 통제되지 않고 반복되는 이유는 무 엇일까? 테러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표현의 자유 가 사람에게 목

테러와 테러리즘: 정치적 폭력의 경제와 타락에 관하여 75 숨보다도 소중한 것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테러 공격이 충분히 강력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나는 이 글에 서 테러 자체의 고유한 논리가 지닌 한계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때 테러 를 비국가 행위자에 의한 것으로 국한하여 이해하지 않고, 그 행위 주체와 무관 하게, 폭력 사용의 특수한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럴 때에 정치학적으로 훨씬 더 의미 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이어지는 장에서 나는 먼저 폭력 사용의 특수한 양태로서의 테러 에 대해 간략히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일종의 폭력의 경제적 사용임을 주장할 것이다. 이로써 국가 역시, 국가 테러리즘 이라는 부정적 판단이 섞인 표현과 무관하게, 테러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이 암시될 것이다. 다음으로, 권력과 폭력의 관계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럼으로써 한 편으로는 국가 권력 역시 일 종의 수사적 의미에서 테러 의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그 테러는 권력에 의해 흔 히 범죄로 규정되는 테러와 달리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만 사용되며, 사용되는 순간에 이미 권력은 타락하기 시작함을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정치적 폭력으로서의 테러가 가지는 이런 고유한 딜레마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딜레마 때문에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폭력이, 지배를 위한 것이건 저항을 위한 것이건 간에, 절제 없는 폭력, 벌거벗은 폭력, 곧 파괴와 고통을 확 산하고 증가시키는 테러리즘으로 치닫게 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을 주장할 것 이다. II. 테러: 폭력의 경제학 테러 또는 테러리즘 이라는 개념을 학문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 의 의미가 이미 권력에 의해 부정적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테러 는 우리 의 생활 속에서 이미 배제 개념 으로서 기능하고 있어서 테러 라는 딱지가 붙 은 행위나 행위자는 그 자체로 이미 정당성을 박탈당하게 된다(뮌클러 2012,

76 현대정치연구 2015년 봄호(제8권 제1호) 207). 그래서 때로는 어떤 행위가 테러 라고 규정되기 전에 먼저 행위자가 테러 리스트 라고 규정됨으로써 그 행위자가 하는 이후의 모든 일들의 정당성이 사전 에 박탈되는 일도 벌어진다. 이처럼 테러 또는 테러리즘 이 기존 권력에 의해 이미 부정적 의미를 가지 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 사실을 인식한 후에도 여전히 이 개념들을 학문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테러행위자들이 그 사실, 즉 테러 또 는 테러리즘 이 권력의 언어라는 사실을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에 역으 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정당한 저항 행위를 때때로 부당하게 테러 라고 낙인찍는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자신들의 테러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고의로 의미론적 혼란을 일으키면서 테러행위자들은 테러 개념을 권력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만든다. 테러 를 학문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이 개념에 작용하고 있는 이런 권 력정치적 효과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편으로는 이 개념을 사용 주체의 법적 지위와 관련해서만 이해하려는 시도를 멈춰야 한다. 법적 지위 자체가 국내 적으로 또는 국제적으로 권력이 인정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 로는, 행위 주체의 법적 지위와 무관하더라도,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을 모두 테러 나 테러리즘 으로 뭉뚱그려 비난하려는 시도 또한 멈춰야 한다. 소설 가이자 군사학자( 軍 史 學 者 ) 칼렙 카(Carr 2002)의 책에 대한 마이클 이그나티에프 (Ignatieff 2002)의 서평은 이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카의 핵심 주장은 국가에 의한 것이건 비국가 행위자에 의한 것이건 간에 민간 인을 공격하는 것은 모두 테러리즘 이고, 그것은 끊임없는 피의 복수를 부르기 때문에 결국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먼저, 민간인에 대해 국가가 벌이는 응징 전쟁을 테러리즘과 동일시하는 것을 이그나티에프는 비판한다. 정당한 사유를 가지고 전쟁을 하다가 불가피하게 민간인을 죽이는 것과 고의로 민간인에게 테 러를 행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이 과거 에 무차별적인 살상을 저질렀으므로 오늘날 미국인들이 (예컨대 9.11 테러에서) 자신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해진 공격에 충격을 받는 것은 위선적이라고 주장하 는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그나티에프는 테러리즘 이 성공할 수 없다고 하는 카의 생각을 비판한다. 힘의 차이가 현저한 상황에서

테러와 테러리즘: 정치적 폭력의 경제와 타락에 관하여 77 테러가 분명히 약자에게 힘을 증폭시키는 유용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테러를 하는 것보다 폭력 사용을 자제하는 편이 약자에게 더 유용하다는 주장이 틀렸다고 이그나티에프는 주장한다. 카가 전쟁사 속에서 도출한 테러의 교훈 과, 그에 대한 이그나티에프의 비판 에서 이 장의 서두에서 언급한 두 가지 편향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테러리 즘 이라는 용어를 비국가 행위자의 테러 행위에 대해서만 사용하려는 권력의 입 장을 비판하며 민간인에 대한 전쟁도 테러리즘 이라고 부르려는 것과, 다시 그 것이 의미론적 혼란을 꾀하는 테러리스트들을 돕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정당한 의도에서 시작된 국가의 전쟁 행위와 부당한 의도를 가지고 행해진 저항 집단의 테러를, 행여 그 과정에서 동일하게 부당한 민간인 살해가 이루어졌더라도, 구분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의도나 사유의 정당함과 부당함 자체가 권력과 무관하게 판단될 수 없고, 의미론적 혼란을 부추기며 9.11 테러에 대한 미국인의 위선적 반응을 비판하고 테러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미국이 전쟁 과정 에서 사용한 테러가 테러 가 아닌 다른 것이 되지는 않는다. 이에 덧붙여, 군사 적 힘의 차이가 클 때 테러가 약자의 힘(force)을 증폭시켜주는 효과적인 공격 수 단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이그나티에프의 주장은 군사적인 차원에서 적을 몰아내 거나 아예 제거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타당할지 몰라도, 정치적인 차원에서 권력 (power)을 증가시켜 주민들을 지배하고 복종시키려 하는 경우에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이런 오류가 반복되는 이유는 테러 또는 테러리즘 이라는 개념을 행위자와 무관하게 폭력의 어떤 특수한 형태와 관련해 사용하지 않고, 기존의 권력 관계나 대안적 권력 관계의 맥락 안에서 사용하는 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테러리즘 이 무엇인지를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해 보이기도 한다. 테러리즘 개념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을 검토한 뒤 기존의 정의들이 상충하고 모두 불충분함을 확인한 크리스토퍼 다제(Daase 2001, 57 & 66)는 결국 테러리즘 이라고 불리는 정치적 폭력의 다양한 사례들에서 우리가,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는 없고, 일종의 가족유사성 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글에서 나는 권력의 수단으로서의 폭력과 테러, 테러리즘이 가진 이 른바 가족유사성 을 탐색해보려고 한다.

78 현대정치연구 2015년 봄호(제8권 제1호) 테러는 폭력을 사용하는 한 가지 특수한 방식이다. 테러의 특징은 그 간접성에 있다. 테러는 물리적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무엇인가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효과, 즉 공포(terror) 를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리려는 것이다. 그래서 테 러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동일하게 공포를 퍼뜨리려는 의도를 가지 고 사용하는 폭력을 그 행위 주체의 법적 지위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 은 부당하다. 테러는 공포를 퍼뜨리는 것이다. 테러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심리적 영향 을 끼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극장과 같은 장소를 필요로 한다. (공진성 2010, 24) 이 점에서 테러는 일반적으로 범행 사실을 감추려고 하는 단순한 범죄와 구별된다. 테러는, 연극에 비유하면, 특이하게도 관객들을 놀라게 하는 연극이다. 관객 없이 이 연극은 성 립하지 않는다. 주인공과 그의 적, 그리고 관객의 삼자 연대를 통해 테러라는 연 극은 비로소 성립한다. (공진성 2010, 24) 테러의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제삼자인 관객을 향한다. 테러는, 비록 그것이 테러 라는 이름을 달고 행해지지는 않지만,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각종 처벌의 형태로 결코 드물지 않게 사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 것이 경제적이고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테러는 소수의 대상에게 폭력을 사용하 여 다수의 대상에게 간접적으로 그 효과를 퍼뜨리고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는 폭 력 사용의 한 가지 방식이다. 이렇게 의도한 바대로 테러가 작동하려면 그 소수 의 대상과 다수의 대상 사이에 모종의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대상들 사이에 유 사성이 있어야, 더 정확히 말하면, 서로 유사하다고 대상들이 스스로 느껴야 정 서적 모방, 즉 공포의 전이가 이루어질 수 있다. 이때, 폭력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는 소수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가 결정된다. 무작위로 대상을 고르는 방법도 있고, 대표성이나 상징성을 가진 대상을 선별하는 방법도 있다. 폭력을, 테러의 방식으로 사용하건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건 간에, 사용하는 것 자체가 나쁘고, 그러므로 폭력 사용의 방식에 더 좋은 방식이 있고 더 나쁜 방식 이 있다는 식의 논의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폭력과 테러, 그리고 테러리즘을 정확히 구별하여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세상을 조금이나마 덜 폭력 적으로 만드는 데에도 기여하지 못한다. 테러는, 일차적으로는, 공포가 사람들

테러와 테러리즘: 정치적 폭력의 경제와 타락에 관하여 79 사이에서 전이되고 확산되는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폭력 사용의 특수한 형태이지 만, 이차적으로는, 그럼으로써 폭력의 궁극적인 피해자의 수를 줄이려는 지배(와 저항)의 기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테러는 또한 폭력의 경제적 사용 이라고 불릴 수 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셸든 월린은 마키아벨리가 추구한 새로운 학문 을 폭력 의 경제학 이라고 불렀다. 그는 마키아벨리가 이전의 학자들과 다르게 권력의 본질적인 핵심이 폭력이며 권력의 행사가 종종 누군가의 신체나 재산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라는 원초적인 사실 을 직시했으며, 이 사실을 완곡하게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고 평가한다(월린 2009, 53). 폭력이 권력의 사용에서 불가피하다면, 이제 문제는 폭력이냐 비폭력이냐가 아니라 폭력을 필요한 만큼 만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폭력은, 마키아벨리의 생각에, 질서 의 파괴를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되고, 다만 질서의 복원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1) 월린에 의하면 마키아벨리는 폭력의 경제학, 곧 강제력의 통제된 사용에 관한 학문의 창조 에 자신이 기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자신이 개척하는 이 새로운 학문 이 특정한 상황에 적합한 폭력의 양을 처방할 수 있는 지 여부에 폭력의 통제가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월린 2009, 55, 강조는 인용자). 어쩌면 마키아벨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몸으로 실천해온 폭력 의 경제학 을 다만 언어로써 다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에서 폭력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는 것을 보면,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이 폭력의 경제학 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교육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은 듯하다. 이 글이 문제 삼고자 하는 테러리즘 이 바로 학습 실패의 대표적인 예이다. 폭 력의 경제학 은 단순히 최소의 폭력을 사용해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것만을 추구하 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폭력과 고통, 불안과 증오의 감소를 추구한다. 그 반면에 테러리즘 은 폭력과 고통, 불안과 증오의 광범위한 확산을 가져온다. 2) 그러나 테러 와 테러리즘 에 대한 오해가 그저 학습 실패에서만 비롯하는 것은 아니다. 1) 복원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 자가 아니라 파괴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 자가 비난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 2003, 108) 2) 이 두 가지 다른 방향의 운동을 공진성(2010)은 테러 와 테러리즘 의 개념을 구분하면 서 설명한다. 이에 관해 자세히는 30~31, 36~55, 67~68, 130쪽 참조.

80 현대정치연구 2015년 봄호(제8권 제1호) 이 글이 핵심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테러 자체가 타락의 위험을 내포하 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다음 장에서는 권력과 폭력의 관계에 대 해 살펴보고자 한다. III. 권력과 폭력 권력의 본질적 핵심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마키아벨리가 노골적으로 주장한 이 후로, 권력과 폭력이 서로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줄었을지 모르지만, 권력 과 폭력을 동일시하는 사람은 오히려 늘어난 듯하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대표적 인 오해도 그가 군주에게 무자비한 폭력의 사용을 권장했다는 것이고, 테러리즘 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에 대해 결국 모든 정치가 테러리즘 이라고 주장하며 응수하는 것도 권력과 폭력을 동일시하는 오해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은 권력과 폭력을 구분하려고 노력한다. 권력과 폭력이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결코 같은 것은 아니며, 더 나아가 폭력이 그 자체로서 권력 이 될 수는 없음을 주장한다. 카야노 도시히토(2010, 43-44)는, 미셸 푸코를 인용하면서, 폭력을 대상에 직접 적으로 미치는 힘, 그럼으로써 대상으로 하여금 그 무엇을 할 수 없게 하는 힘으 로 정의하고, 권력을 그와 달리 행위를 유발하는 힘, 다시 말해, 대상으로 하여금 일정한 행동을 하게 하는 힘으로 정의한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폭력은 어떤 대상을 파괴함으로써 그로부터 행위의 능력을 빼앗는 것이고, 권력은 어떤 대상 이 지니고 있는 행위의 능력을 보존한 채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생 각해보면, 행위의 능력 이란 할 수 있음 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있음 을 또한 의미한다.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은 또한 항상 이미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이기 때문이다. 3) 이것은 단순히 함 이나 하지 않음 과 다르다. 할 3) 아감벤(2014)의 잠재성(potenza) 과 비잠재성(impotenza) 에 관한 논의를 차용한 것인데,

테러와 테러리즘: 정치적 폭력의 경제와 타락에 관하여 81 수 있음 과 하지 않을 수 있음 이 모두 잠재적 능력을 표현한다면, 단순한 함 과 하지 않음 은 그런 능력이 박탈된 상태를 표현한다. 잠재적 능력이 박탈된 상태 가 바로 폭력에 노출된 상태, 폭력에 의해 파괴된 상태이다. 카야노와 푸코가 권력과 폭력을 행위 능력의 허용과 박탈로써 구분한 것과 유 사하게 한병철은 자아와 타자 사이의 매개의 증감과, 그에 따른 타자의 자유(감 정)의 증감으로써 권력과 폭력을 구분한다. 한병철에 의하면, 권력은 에고가 타자 속에 자신을 연속시키고,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일 수 있게 한다. 매개가 영점으로 축소되면 권력은 폭력으로 뒤바뀐다. 순수한 폭 력은 타자를 극단적 수동성과 부자유의 상태로 몰아간다. 여기서 에고와 타 자 사이에는 어떤 내적 연속성도 성립하지 않는다. 수동적인 사물에 대해서 는 본래적 의미에서의 권력 행사는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폭력과 자유는 권력 단계의 양극점이다. 매개 정도가 증가할수록 더 많은 자유 혹은 자유의 감정이 생성된다(한병철 2011, 22). 공통적으로 폭력은 타자의 행위 능력 상실과 극단적 수동성을 가져오는 것으 로서 이해되는 반면에, 권력은 타자의 행위 능력을 보존하고 능동성을, 심지어 자유의 감정마저 가지게 하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폭력과 권력이 이처럼 개념적 으로 구분된다고 해서 그 둘이 서로 무관한 것은 아니다. 폭력과 권력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폭력은 권력을 낳지 못하지만, 권력은 폭력에 의해 언제나 뒷받침되어야 한다. 폭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는 말이 폭력이 직접적으로 사용되어야 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폭력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권력의 이런 속성을 두고 니클라스 루만Luhmann 1977, 477)은 권력이 폭력을 가정법으로 사용한다 고 말한다(한병철 2011, 33에서 재인용). 권력은 자기가 요구하는 행위 가 발생하지 않았을 때, 또는 금지하는 행위가 발생했을 때, 일정한 폭력을 처벌 로서 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권력은 폭력을 처벌로서 이에 관해서는 73~78쪽을 참조하라.

82 현대정치연구 2015년 봄호(제8권 제1호) 가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권력은 폭력을 어디까지나 가정법으로 사용해야 하 기 때문이다. 권력은 폭력에 의해 가상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하며, 폭력은 부정 적 가능성 으로서 남아 있어야 한다. 처벌과 같은 부정적 제재가 활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바로 그것이 활용되고 있지 않는 한에서 부정적 제재의 선포 가 능성이 권력을 낳는다. (Luhmann 1987, 119; 한병철 2011, 28-29에서 재인용) 루 만(Luhmann 1987, 119)에 의하면, 권력이 도발되고 그 도발에 대해 실제로 처벌 이 가해져야 한다면, 그 권력은 이미 파산한 것이며 종말에 가까운 것이다(한병 철 2011, 28-29에서 재인용). 권력이 폭력과 근본적으로 다르고 폭력의 사용이 권력의 파산을 표현한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개념적으로 순수한 권력과 폭력 사이에 아직 그 운명이 결정 되지 않은 많은 행위의 가능성이 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특히, 권력 관계를 단일한 자아와 단일한 타자 양자 사이에서만 파악하면, 폭력적 처벌이 필요한 상황은 이미 권력이 약해진 상황이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일 수 있다. 그러나 타자를 여러 개인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하면, 그리고 타자 가 개인인 경우에도 그 타자를 여러 신체적 부분들로써 구성된 하나의 조직으로 서 간주하면, 부분에 대한 폭력적 처벌을 전체에 대한 (또는 나머지 부분에 대한) 권력이 더 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응급조치로서, 권력의 유지와 재생을 위한 기술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이해에 근거하여 앞에서 내린 잠정적 결론을 다 음과 같이 수정할 수 있다. 폭력은 권력을 낳지 않지만, 권력은 폭력에 의해 뒷받 침되어야 하며, 폭력은 사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가상적으로 사용되어야 하지만, 부득이하게 사용되어야 할 때 어디까지나 부분에 대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 권력은 타자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처벌의 부정적 가능성을 보존할 수 있고 폭력을 가상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도 지킬 수 있다. 권력은, 폭력이 파괴적인 것과 다르게, 생산적이다. 권력은 복종을 요구하므로 타자의 자유를 허용한다. 타자로 하여금 스스로 복종하게 한다. 타자가 제거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타자의 자유가 사라지는 경우에 복종은 이루어질 수 없 고, 그러면 권력 또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은 어디까지나 타자와의 관 계 속에서만 성립한다. 타자를 살리지 못하면 복종도 없고 권력도 없다. 이 점에 서 폭력과 권력은 서로 대립한다. 그러나 권력은 복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를

테러와 테러리즘: 정치적 폭력의 경제와 타락에 관하여 83 가정하여 부정적 제재의 가능성을 선포해야 한다. 폭력을 처벌로서 사용할 수 있음을 예고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처벌로서 사용될 폭력은 사전에 예고되어야 하기 때문에도 위협 의 성격을 가지고, 실제로 사용되는 경우에도 그 사람 자신 에 대해 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위협 의 성격을 가진다. 특정 개인에 대한 폭 력은 그 목적이 궁극적으로 복종을 얻는 것이라면 부분적이어야 하고, 특정 집단 에 대한 폭력은 마찬가지로 그 궁극적 목적이 복종을 얻는 것이라면 대표성을 지닌 일부 구성원에게만 가해져야 한다. 폭력이 일개인이나 집단의 부분이 아니 라 전체에 대해 가해진다면 복종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은 타 자의 복종을 요구하므로, 폭력은 적어도 그것이 권력의 수단이라면 타자를 완전 히 제거하는 방향으로 사용될 수 없다. 권력의 보존을 위해 그 수단으로서 사용 되는 폭력은 복종의 생산을 위해 때로는 불가피하게 파괴하지만, 결코 파괴를 위해 파괴하지는 않는다. 복원을 위해 폭력을 행사한 자가 아니라 파괴를 위해 폭력을 행사한 자가 비난받아 마땅하다 는 마키아벨리의 말은 이런 맥락 속에서 옳게 이해될 수 있다. 권력의 수단으로서 사용되는 폭력은 그것이 실제로 사용되기 전에는 가상적이 어야 하기 때문에 위협의 성격을 가지며, 그것이 실제로 사용될 때에도, 그것이 권력을 위한 것인 한, 부분에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또한 위협의 성격을 가진 다. 폭력은 대상에 직접 가해지는 힘이다. 그래서 폭력은, 한병철(2011, 40)의 표 현을 빌리면, 권력과 달리 매개 수준이 낮다. 그러나 폭력의 대상을 신중하게 잘 선택하면 그 효과는 공간적으로 멀리, 그리고 시간적으로 오래 퍼져나갈 수 있 다. 4) 이때, 폭력의 직접적 대상이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다. 폭력의 효과가 미 쳐야 할 궁극적 대상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면 그것이 건축물이든지 비가시 4) 한병철은, 엘리아스 카네티를 따라, 권력이 폭력보다 더 넓은 공간을 가지며, 폭력이 더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되면 권력이 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런 권력의 시공간을 죽음을 향한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카네티를 비판하며 한병철은 권력이 가상의 형태로 라도 할 수 있음 혹은 자유의 시공간 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한병철 2011, 46~47). 카네티가 고양이와 쥐의 관계에 빗대어 묘사한 권력 관계의 부정적 모습은 오 히려, 이 글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에 의하면, 수단으로서의 정치적 폭력이 지닌 테러적 속성과 관련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테러가 단순한 폭력보다는, 아직 그 성격이 부정적일 지라도, 분명히 더 넓은 시간과 공간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84 현대정치연구 2015년 봄호(제8권 제1호) 적 상징이든지 간에 상관이 없다. 5) 어떤 것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듣고, 느낌으 로써 자신이 복종하지 않았을 때에 그와 마찬가지로 파괴될 것임을 상상할 수 있으면 된다. 다만 중요한 것은 폭력이 전체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말 은 폭력의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그로부터 궁극적으로 자유를, 즉 복종할 능력은 물론이고 (원칙적으로는) 불복종할 능력도 완전히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불)복종의 능력 을 빼앗는다는 것은 한 편으로는 신체의 완전한 제거를 의미 하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정신적 능력, 곧 사유 능력의 제거를 의미하기도 한다. 신체 자체가 물리적으로 제거되지 않았더라도, 사유 능력을 잃은 허수아비 와 같은 인간들만 있는 곳에서, 권력은 복종을 누릴 수 없고 지배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지속적인 수취 역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 (2011, 20장)는 국가에 대한 신민의 복종 의무를 강조하면서도, 신민에게 여전히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할 자유 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 했다. 그럴 때에 비로소 국가가 학문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기 때문이 다. 조금 다른 맥락 속에서, 루만 역시 구체적으로 정확히 규정된 어떤 것을 하도 록 강제하는 것과 권력을 구분한다. 루만에 의하면, 어떤 행위가 강제되었을 때 강제된 자의 선택가능성은 영(0)으로 축소된다. 한계 상황에서 강제는 물리적 폭력의 사용으로, 그리고 그럼으로써 이룰 수 없는 타인의 행위를 자기의 행위로 대체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Luhmann 2012, 16) 한나 아렌트(2011, 193)도 마찬가지로 권력을 단순한 행위와 구분하는데, 그에 의하면, 권력은 단순한 행 위가 아니라 공동의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상응한다. 권력은 결코 한 개인의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집단에 속하며 그 집단이 함께 있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복종하는 자에게 명령하는 자와 함께 행위할 능력이 남아 5) 20세기 초에 발생한 일련의 전쟁들에서 사용된 인종 청소 의 전략은 폭력의 궁극적 대 상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을 파괴함으로써 폭력의 대상을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완 전히 제거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뮌클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공포를 생산하는 이런 전략의 중요한 세 단계는 다음과 같다. 정치적ㆍ문화적으로 지도적인 역 할을 수행하는 인물이나 잠재적으로 무장 저항을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을 처형한다, 신성 한 건축물과 문화적 기념물을 불태우고 폭파시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방해야 할 집 단의 여성들을 체계적으로 강간하고 임신시킨다. (뮌클러 2012, 175~177)

테러와 테러리즘: 정치적 폭력의 경제와 타락에 관하여 85 있지 않다면, 권력 또한 있을 수 없다. 6) 권력의 수단으로서의 폭력은 어디까지나 그 대상에 대해 부분적으로 사용되어 야 하며, 그 대상으로부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복종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제거해서는 안 된다. 폭력이 왜 부분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는지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여기에서 부분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말은 공간에 대해서만 아니라 시간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한 개인의 신체 일부에 대해 폭력이 가해지거 나 한 집단의 일부 구성원에 대해 폭력이 가해지는 경우에 폭력은 공간적으로 부분에 대해 가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폭력은, 그것이 권력의 몰락을 막거나 권력을 유지하고 재생하기 위한 수단일 때, 또한 시간적으로 부분에 대해, 즉 미래를 위해 현재에 대해 가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부분적으로 사용되는 폭력은 그 대상으로부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복종할 수 있는 능력을 일시적으로 제거한다. 그 불가피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한때 폭력과 강제의 대 상이었던 타자는 행위의 능력을 회복하고 다시 자유롭게 (불)복종할 수 있게 된다. 권력은 복종하는 자에게 자유의 감정을 부여한다. 이 자유의 감정이 권력에 복종하는 자가 가지는 행위가능성의 수에 의존하지는 않지만, 7) 권력은 복종하는 자에게 불복종이라는 다른 행위의 가능성을 분명히 허용한다. 다만 권력은 복종 6) 루만과 아렌트가 권력과 폭력을 (또는 강제를) 구분하면서 권력을 긍정하는 것과 다르게, 아감벤은 인간으로부터 행위의 능력(잠재성)은 물론이고 비행위의 능력(비잠재성)마저 빼앗는 것이 권력의 기능이라며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권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으 로부터 인간을 분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주로 인간이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한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잠재성으로부터의 소외만큼 우리 를 빈곤하게 하고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없다.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은 여전히 저항할 수 있다. 그들은 여전히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스스 로의 비잠재성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은 무엇보다 이 저항 능력을 상실한다. (아감벤 2014, 75~77) 그러나 나는 그것이 권력 일반의 특징이 아니라, 오늘날 폭력적으로 작용 하는 신자유주의적 권력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관해서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 겠지만, 여기에서는 개념 사용의 차이만을 언급해 두고 넘어가자. 7) 한병철(2011, 30-31)은 행위가능성의 수적 증가에 비례해 권력이 커진다고 보는 루만을 비판한다. 행위가능성의 증가가 오히려 권력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 안의 수보다 중요한 것은 복종하는 자가 가지는 자유의 감정 이며 그런 자유의 감정을 생겨나게 하는 네 의 전폭성 이다.

86 현대정치연구 2015년 봄호(제8권 제1호) 하는 자의 다른 행위가능성 대신에 권력자와 권력에 복종하는 자 사이에 존재 하는 행위 선택의 편차 를 제거한다(한병철 2011, 23). 그럼으로써 권력은 인간 의 행위가능성의 불확정적 복잡성을 감소 시킨다(Luhmann 1977, 477; 한병철 2011, 23에서 재인용). IV. 테러의 딜레마 권력의 수단으로서의 폭력은, 그것이 복종을 목적으로 삼는 한, 반드시 부분적 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필연적으로 전체의 다른 부분에 대해 위협 의 성격을 가진다. 폭력이 사용되기 전에는 그 사용이 예고되기 때문에 그 렇고, 실제로 사용될 때에도 그것이 대상의 완전한 제거를 목표로 하지 않고 어 디까지나 개인이나 집단의 부분을 향해 일시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또한 그렇 다. 이 점에서 권력의 수단으로서 사용되는 폭력은 테러 와 유사하다. 부분에 대해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그 부분과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다른 부분들의 복종을 유도하는 것이다. 일정한 지배 안에서는 이것이 형벌 이라는 이름으로써 사용되는데, 형벌의 한 가지 목적인 예방 또는 억제 가 바로 권력이 사용하는 폭력의 테러적 측면과 연관된다. 8) 행위 또는 비행위를 요구하는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을 폭력으로 써 처벌하는 국가의 권리는 어디까지나 국가가 지닌 실제적인 처벌의 능력에 의 존하지만, 이 처벌의 능력은 한편으로는 폭력을 사용할 수 있음을, 다른 한편으로 는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을 수 있을 때에 8) 형벌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응보 이고 다른 하나는 예방 이다. 예 방은 다시 특별 예방과 일반 예방으로 구분되는데, 범죄인을 교정하는 것이 특별 예방이 고, 다른 잠재적 범죄를 억제하는 것이 일반 예방이다. 중세와 근대의 각종 형벌들은 공 포(terror)를 이용한 억제(deterritio)의 메커니즘을 따르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공진성 (2010, 32-33)과 Scheerer(2004, 259) 참조.

테러와 테러리즘: 정치적 폭력의 경제와 타락에 관하여 87 권력이 성립한다. 그러므로 처벌의 능력은 언제나 사면의 능력을 동반한다. 폭력 을 사용해 버리고 나면, 자발적 복종(공동의 행위)은 사라지고 강제(기계적 복종) 만 남는다. 그래서 아렌트는 폭력이 권력과 반대되며 오히려 권력을 파괴한다고 주장한다. 총구로부터 가장 효과적인 명령이 나와서 가장 즉각적이고 완전한 복종으로 귀결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권력이 아니다. 폭력은 권 력을 창조하는 데에 전적으로 무능력 하다. 권력은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 이다(아렌트 2011, 204 & 207). 이 점에서 또한 권력이 가하는 처벌은 테러 와 유사하다. 테러는 본질적으로 행위자의 할 수 있는 능력에, 그리고 동시에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 근거하여 작동한다. 테러 행위자는 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무작위로, 또는 대표성이나 상징성을 가지는 대상을 선택해 폭력을 가하지만, 그 대상과 일체감을 느끼는 더 많은 사람들의 복종을 궁극적으로 유발하기 위해, 그들에게도 폭력을 사용할 수 있음과 함께 그들에게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음을 또한 보여주어야 한다. 명령을 이행하는 경우에 폭력을 사용하지 않겠지만, 이행하지 않는 경우에 폭력 을 사용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킬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시켜야 한다. 폭력이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 즉 지배와 복종 사이의 신 뢰 창조이다. 9) 마키아벨리가 주창한 폭력의 경제학 은 단순히 폭력을 아껴 쓰는 것을 넘어 이런 정치적 신뢰의 구축을 지향한다. 그래야 궁극적으로 폭력의 사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10) 신민을 무장시키고 요새를 오히려 허물라는 마키아벨리 9) 물론 신뢰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권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뢰는 권력과 다르다. 그러 나 신뢰 없이는 권력이 작동할 수 없고, 권력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신뢰가 있다. 10) 이에 관해 월린(2009, 56-57)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대내적인 정치가 극단적인 억압 조치에 대한 필요를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양한 방법에 의해 구조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법률, 정치적 제도, 시민적 습속은 인간의 행태를 규제함에 있어 강제력과 공포가 적용되어야 하는 사례의 빈도를 감축하는 데에 기여하기 때문에 중요했다. ( ) 그는 인민의 동의가 일종의 사회적인 권력을 표상하며, 적절히 이용하 면 전체적으로 사회에 행사되는 폭력의 양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숙지했다. 공 화정 체제가 우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인민들에 대한 강제력의 행사가 아 니라 인민들의 강제력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이었다.

88 현대정치연구 2015년 봄호(제8권 제1호) (2008, 139-145)의 조언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군주와 그의 신민 사이에 신뢰가 없다면 신민으로부터 무기를 빼앗고 요새로써 군주 자 신을 방어하더라도 결코 안전할 수 없지만, 군주가 신민을 신뢰하고 그 표시로서 신민에게 무기를 쥐어주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쌓았던 요새를 허물면 오히려 신 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형벌의 위협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 다는 것이다. 정치적 신뢰와 신민의 무장이나 요새의 철폐는 결코 인과적 선후 관계로서 설명될 수 없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와 신민 사이의 신뢰와, 군주가 사 용하는 테러적 처벌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명한 군주는 자신의 신민들의 결속과 충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잔인하다 는 비난을 받는 것을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 자비롭기 때문에 무질서를 방치해서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죽거나 약탈당하게 하는 군주보다 소수의 몇몇을 시범적으로 처벌함으로써 기강을 바로잡는 군주가 실제로는 훨 씬 더 자비로운 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공동체 전체에 해를 끼치 는 데에 반해 군주가 명령한 처형은 단지 특정한 개인들만을 해치는 데에 불 과할 뿐입니다(마키아벨리 2008, 112-113, 강조는 인용자). 소수의 몇몇 에 대한 처벌이 질서를 유지시켜 실제로 훨씬 더 자비로운 결 과를 낳으려면, 그들에게 시범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이 비슷한 잘못을 저지른 다 른 사람들에게 이중적인 방식으로 작용해야 한다. 한 편으로는 그 폭력이 자신들 에게도 가해질 수 있음이 예상되어야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 폭력이 자신 들에게 실제로 가해지지는 않을 것임이 확신되어야 한다. 사면을 확신할 수 없으 면 복종할 수 없고, 처벌을 예상할 수 없으면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 군주가 나 머지 신민들도 처벌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처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신민들 이 믿지 못한다면 테러 또는 폭력의 경제학 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 키아벨리가 마치 간단한 일인 것처럼 얘기한 잔인한 시범적 처벌의 실제적 자비 로움은 군주와 신민 사이에 일정한 신뢰 관계가 이미 성립되어 있을 때에만 실현 될 수 있다. 신뢰는 테러의 딜레마 를 낳는 군주와 신민 사이의 행위가능성의

테러와 테러리즘: 정치적 폭력의 경제와 타락에 관하여 89 불확정적 복잡성을 분명히 감소시켜준다. 그렇다면 그런 신뢰 관계가 없는 곳에 서는 처벌의 위협조차 작동할 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마키아벨리는 그런 무질서 한 상황에서 잔인한 폭력의 절제된 사용이 정치적 신뢰의 공간을 창출하는 구성 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주장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폭력의 경제학 또는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테러 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그 적용 과정에서 매우 큰 신중함이 요구되는 고도의 정교한 기술이다. 그래서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테러는 자칫 잘못 사용하는 경우에 오히려 무질서를 조장 하며 벌거벗은 폭력으로 타락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마키아벨리는 테러(공포) 의 유지를 군주가 신민의 사랑을 받는 일과 미움을 받는 일 사이에 놓고 조심스 럽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쉽게 도덕주의적으로 군주가 신민의 사랑을 받아야 한 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사랑의 감정이 쉽게 실망과 질투로 변할 수 있음을 직시하면서, 군주가 신민 쪽의 사정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사랑에 의존해서는 곤란하며, 군주 쪽에서 통제(절제)할 수 있는 일, 즉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신민들 사이에서 유지하는 것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신민의 미움을 받는 일만은 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마키아벨리 2008, 117). 두려움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폭력이 자칫하면 타락하여 복종은커녕 오히려 저항과 음모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V. 테러리즘: 폭력의 타락 권력의 수단으로서 이용되는 폭력은 테러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아직 본격적 으로 사용되지 않았지만 사용될 것이 예고되며, 사용되는 경우에도 부분에 대해 시범적으로 사용됨으로써 나머지 부분의 복종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폭력은 테러와 마찬가지로 더 적은 폭력을 이용해 더 큰 억제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적일 수 있고 효과적일 수 있지만, 또한 테러와 마찬가지로 자칫하면 무작위한 사용을 통해 무고한 피해자의 수를 늘림으로써 타락할 수 있

90 현대정치연구 2015년 봄호(제8권 제1호) 다. 권력의 수단으로서의 폭력, 테러 는 타락할 위험(risk)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그것이 타락 인 이유는 그 폭력이 인간을 살리지 못하고 죽이기 때문이다. 행여 신체적으로 인간이 살아 있더라도 테러에 의해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마저 빼앗기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하거나 하지 않기만 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죽인 것 과 다름이 없다. 그런 상태를 20세기에는 전체주의 라고도 불렀고, 파시즘 이라 고도 불렀으며, 국가 테러리즘 이라고도 불렀다. 11) 폭력을 독점하는 국가가 테 러에만 의존하는 체제로 쉽게 타락할 수 있음을 우리는 목격하였다. 그러나 국가 의 폭력만 타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약한 권력, 권력이 되지 못한 폭력은 언제나 타락할 수 있다. 테러 는 지배의 공간에 본질적으로 내재해 있다. 권력의 작용에 의해 그것은 형벌 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며, 불복종의 가능성, 즉 범죄 의 가능성을 억제한 다. 복종은 그 반대로 준법 으로 이해된다. 법의 제정과 집행에 인민이 스스로 동의했다고 하는 이데올로기는 권력으로 하여금 복종을 훨씬 더 쉽게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 저항으로서의 테러는, 그것은 권력에 의해 정당성을 박탈당하며 테러리즘 이라고 불리는데, 이 동의의 이데올로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에 서 등장한다. 권력의 공간이 일시적으로 중첩된 곳에서, 즉 제국의 공간이나 전 쟁의 공간에서, 또는 혁명적 상황에서, 그러나 대립하는 두 세력이 가진 물리적 힘의 크기가 비대칭적일 때, 테러는 먼저 군사적인 수단으로서 적 을 향해 사용 된다. 12) 이데올로기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테러가 작동하기 위한 인간학적 전제조건인 감정의 전이를 촉진할 수도 있고 차단할 수도 있다. 인민 의 동의 라는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공동체를 상상하게 만든다면, 민족의 적, 11) 폭력으로써 국민들에게서 사유 능력을 빼앗고 사회를 전체화하여 스스로 제동 장치 없는 폭력독점체가 되어버린 20세기의 전체주의 국가에 대해서는 공진성(2009, 98-104) 참조. 12) 테러리즘은 어떠한 행위의 의미를 고정시키는 정치적 맥락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고, 즉 권력이 약해진 틈을 타고, 그 의미론적 혼란을 이용하여 또는 의미론적 혼란을 일 으키며 작동한다. (공진성 2010, 67)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은 공진성(2010, 67-68) 참조.

테러와 테러리즘: 정치적 폭력의 경제와 타락에 관하여 91 계급의 적, 종교의 적 등은 분리된 공동체를 상상하게 만든다. 마키아벨리가 제시하는 폭력의 경제학 은 정서적으로 연결된 공동체를 전제하는데, 그 이유는 폭력이 테러적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도 폭력의 사용자와 그 대상이 정서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두려워할 만큼 폭력을 사용할 수 있지만, 동시에 필요한 만큼만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적 에게 사용되는 테러는 정서적 연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서적 연결이 차단되어 있어 야 더욱 효과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 폭력의 대상이 느낄 고통을 그 사용 자가 함께 느낀다면 적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신민 을 적으로 삼지 말라고, 즉 정서적 연결을 차단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요새 를 허물고 세우는 것은 군주와 신민 사이의 정서적 연결과 차단을 상징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폭력의 경제학 을 잘못 이해한 군주들은 신민을 적으로 삼음으로 써, 신민과의 정서적 연결을 차단함으로써 결국 타락했다. 타락한 지배 아래에서 흔히 저항으로서의 테러가 나타난다. 그래서 종종 사람 들은 테러리즘 을 국가의 폭력적 지배에 대한 맞대응으로 묘사하고, 오히려 국가 의 폭력이 근원적 테러리즘 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Herman 외 1989, 13-51). 저 항으로서의 테러와 단순한 범죄의 차이는 권력(지배)의 정당성을 실효적으로 의 문시하는지 여부에 있다. 범죄는 기존의 권력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문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범죄는 국가 권력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며, 권력은 그에 대한 전시적 처벌을 통해 더욱 공고해진다. 이와 달리, 저항으로서의 테러는 기존 의 권력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의문시한다. 그래서 범죄가 대개 은밀히 이루어 지는 반면에 저항으로서의 테러는 기존 권력에 도전하며 공개적으로 이루어진다. 테러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이미 깨어진 신뢰 상태의 표현이기도 하고, 관 념적으로만 이미 깨어져 있는 신뢰를 앞당겨 깨뜨리기 위한 도발이기도 하다. 그 렇기 때문에 저항으로서의 테러는 범죄와 전쟁 사이에 있다. 기존의 권력에 의해 서는 테러리즘 이라고 불리며 범죄 취급을 당하지만, 저항 세력 자신들은 그것을 현재의 타락한 국가와 미래의 국가 간의 다만 선포되지 않은 전쟁 이라고 여긴 다. 저항으로서의 테러는 공포를 유포함으로써 제삼자인 주민들로 하여금 권력의 약속을 의심케 하고, 권력이 저항적 테러 행위자를 색출하고 처벌하는 과정에서 권력이 지닌 폭력적 본성을 드러내게끔 전략적으로 유도한다. 13)

92 현대정치연구 2015년 봄호(제8권 제1호) 20세기까지의, 테러에 대한 기존 권력의 반응과 관련해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은 거기에 제1세계와 제3세계 사이의 흥미로운 차이점 이 있다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적어도 유럽의 경우에는 ( ) 새로운 정치적 폭력을 다 스리는 데 있어서 공권력이 제한적으로 사용됐고 헌정이 중단되지도 않았다. 물론 가끔은 히스테리로 반응을 하고 경찰뿐 아니라 공식ㆍ비공식적 군대를 동원하는 과잉 대응을 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적절한 대응으로 일관했다. ( ) 유럽에서는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조직적인 고문과 대규모 테러와 같 은 추악한 전쟁 이 없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정부군 의 테러 퇴치 작전이 반군의 폭력을 훨씬 능가했다(홉스봄 2008, 140-141). 제1세계와 제3세계에서 발견되는 이런 차이는 각각의 세계에 속하는 국가들 이 가진 권력의 정도와 관련될 것이다. 주민들에 대한 권력이 약한 국가에서는 정권이 그와 같은 저항을 훨씬 더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테러에 더욱 폭력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정권의 억압성 은 더 잘 드러나고, 그 사실을 주장해온 저항 세력은 반사적으로 주민들의 지지 를 얻게 된다. 그 반면에 주민들에 대한 권력이 강한 국가에서는 테러가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또한 정권에 중대한 위협이 되지 못하고, 그러므로 정권이 비교적 덜 억압적으로 테러에 대응할 수 있게 된다. 한때 저항으로서의 테러는 적어도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한 인구 집단에 대한 지배를 추구했기 때문에 지배의 대상을 직접적인 폭력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기존의 지배 세력만을 적으로 간주하고 그 일부를 폭력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이 다.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 식민지 해방 운동의 테러가 그러했고, 자본가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 사회주의적 혁명 세력의 테러가 그러했 다. 그러므로 공간에 대한 지배, 특히 그 공간에서 살고 있고 생산에 종사하고 13) 테러행위자가 관심을 끌고자 하는 제삼자와, 공격당한 쪽의 잔혹한 대응에 따라 테러행 위자가 주장한 공격당한 쪽의 혐의가 사후적으로 입증되는 논리에 대해서는 뮌클러 (2012, 213-214) 참조.

테러와 테러리즘: 정치적 폭력의 경제와 타락에 관하여 93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저항으로서의 테러는 그 공간과 그곳 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파괴하려고 하지 않았다. 파괴하는 경우에도 그 대상을 신중하게 선택했고, 파괴의 효과가 정서적 연결과 차단의 이중적 메커니즘을 따 라 의도한 대로 퍼져나가도록 하여 기존의 지배 집단에 속한 자들의 항복과 그들 의 지배를 받던 사람들의 복종을 얻어내고자 했다. 1960년대에 UN 총회에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수많은 정치인들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테러리스트로 낙인 찍혀 탄압받던 사람들이었다 라는 표현은 바로 저항으로서의 테러가 한때 지녔던 권력 지향적, 즉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뮌클러 2012, 215). 그러므로 폭력은 정치적 목적에 의해 통제되었고 절제되었다. 지배 세력에 대해서는 폭력을 사용할 수 있음을 보이되, 주민들에 대해서는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음을 또한 보임으로써 적의 항복과 주민들의 복종을 얻으려고 했다. 저항으로 서의 테러는 비대칭적 전술을 이용해 군사적으로 훨씬 더 강한 적과 진정으로 누가 더 강한지를 겨루면서 궁극적으로 공통의 인구 집단을 두고 그들의 복종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이 성공한 경우에도, 그들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주민들의 복종을 얻을 수 있게 한 것은 권력이었지 결코 폭력이 아니었다.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 하기 위해 적을 향해 테러의 방식으로 폭력을 사용했지만, 그것이 주민들에 대한 권력을 만들어 준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의 복종, 곧 권력을 획득하지 못했을 때, 저항 세력은 테러를 그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하지 않을 수 없을 때에 테러는, 그것이 저항을 위한 것이건 지배의 유지를 위한 것이건 간에, 반드시 실 패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고한 피해자를 끊임없이 양산했기 때문이다. 14) 이 점과 관련해 테러리즘이 도덕적으로 정당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마이클 왈저 (2009, 87-88)는 테러리즘이 약자의 최후의 수단이라고 흔히 얘기되지만, 이때의 약함은 그 어떤 군사적 약함이 아니라, 사실 테러행위자들이 주민들에 대해 가지 는 정치적 약함이며, 관념적으로만 최후의 수단이지, 실제로는 최우선으로 선택 하는 수단이라고 비판한다. 이제 테러는 그 어떤 목적을 위한 제한적 합리성을 14) 피해자의 무고함 과 유고함 에 대한 판단의 정치적 성격에 관해서는 공진성(2010, 67-68, 116 이하) 참조.

94 현대정치연구 2015년 봄호(제8권 제1호) 지닌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어 버렸다. 자립한 폭력, 타락한 폭력, 곧 테러리즘으로 변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권력이 정당성을 박탈하기 위해 낙인찍는 이름이 아니다. 이름의 유사성 뒤에 숨어 자신의 벌거벗은 폭력을 정당 화하려는 시도가 종종 이루어지고, 그런 시도에 많은 사람들이, 특히 사태와 무 관한 제삼자들이 속기도 하지만, 이 두 가지 폭력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주민들로부터 정당성을 얻기 위해 노력하며 적 에게 제한된 폭력을 행사하는 테러, 그럼으로써 유고한 피해자의 수마저 줄이려고 하는 테러와, 그런 정당성 을 선험적으로 확보하고서 적 은 물론이고 무고한 피해자의 수마저 늘리려고 하는 테러리즘은, 그것이 기존 권력에 의해 행사되는 것인지, 저항 세력에 의해 행사되는 것인지와 무관하게,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신뢰를 추구하며 폭력 감 소의 법칙을 따르는 테러와 불신을 조장하며 폭력 증가의 법칙을 따르는 테러리 즘은, 적어도 개념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응급조치로서의 테러는 타락의 위험 을 지닌 채로 권력에 의해 또는 권력을 추구하며 아슬아슬하게 사용된다. 그 폭 력을 사용하는 자신들과 그 폭력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비)잠재력 을 보존하 는 한, 테러는 권력으로 다시 재생될 수 있지만, 스스로 그 (비)잠재력 을 잃어버 리는 순간, 자신들과 함께 타인들도 파괴하는 벌거벗은 폭력, 테러리즘으로 변하 게 된다. 현실 속에서 테러와 테러리즘을 구분하는 것이 여전히 어려운 것은 적 의 의 미도, 무고함 의 의미도 모두 권력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이 궁극적 으로 인간의 복종과 자유의 감정과 관련되는 한, 테러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국가의 권력이 근본적으로 민주적일 수밖에 없으며, 생각하 는 존재인 인간을 동물이나 기계로 만드는 국가의 지배는 결코 지속될 수 없다고 하는 스피노자(2011, 16장과 20장)의 주장은 이런 의미에서 여전히 유의미해 보 인다.

테러와 테러리즘: 정치적 폭력의 경제와 타락에 관하여 95 VI. 결론 아렌트(2011, 232-233)의 지적대로 폭력은 본성상 도구적이므로 그것을 통해 정당화해야 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데 효과적인 만큼 합리성을 가진다. 그리고 우리가 행위를 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의 최종 결과를 결코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폭력은 오직 단기적 목표를 추구할 때에만 여전히 합리적이다. 그러므 로 충분한 시간 주권을 누릴 수 없는 정치적 폭력과 테러는 조바심을 낼 수밖에 없다. 인이불발( 引 而 不 發 ) 의 미덕을 보일 수 없는 것이다. 부분에 폭력을 가하고 서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나머지 부분들에도 마찬가지의 폭력이 가해질 것이라 고 위협했는데, 상대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수단으로서의 폭력은 딜레마에 빠진다. 약속한 폭력을 나머지 부분들에 가하는 순간, 지배와 권력은 불가능해지 며, 폭력은 단순한 파괴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나 폭력을 가하지 않는 순간, 그것은 공갈협박이 되어버리므로, 또한 지배와 권력은 불가능해진다. 이처럼 폭 력은, 권력이 결핍되어 있는 경우에, 타락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 권력은 잠재적 폭력(테러)의 뒷받침 없이 유지되기 어렵지만, 현재적 폭력(테러리즘)을 통해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테러리즘의 비참함은, 그것이 국가에 의한 것이건 저 항 세력에 의한 것이건 간에, 그것이 대부분 하지 않을 수 있음 의 표현이 아니 라는 데에 있다. 자립하여 스스로 목적이 되고 유희가 되어 버린 이 테러리즘이 어찌 보면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 이 시대가 낳은 평범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테 러리즘에 반대하며 위압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대규모 군중의 시위에서도 그런 평범한 모습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오늘날 사람들은, 아감벤 (2014, 76)의 주장대로, (비)잠재성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비잠재성에서 분 리되어 무엇인가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경험을 박탈당한 오늘날의 인간은 스스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 ) 그러나 이때야말로 정확히 인간은 그가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는, 전례 없는 힘과 흐름에 휘말려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오늘 날 인간이 외면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다. 인간이 외면하는 것은 ( )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

96 현대정치연구 2015년 봄호(제8권 제1호) 참고문헌 공진성. 2009. 폭력. 서울: 책세상. 공진성. 2010. 테러. 서울: 책세상. 마키아벨리, 니콜로 저. 강정인ㆍ안선재 역. 2003. 로마사 논고. 서울: 한길사. 마키아벨리, 니콜로 저. 강정인ㆍ김경희 역. 2008. 군주론. 서울: 까치. 뮌클러, 헤어프리트 저. 공진성 역. 새로운 전쟁. 서울: 책세상. 스피노자, 베네딕트 데 저. 최형익 역. 2011. 신학정치론. 신학정치론ㆍ정치학논고. 서울: 비르투. 아감벤, 조르조 저. 김영훈 역. 2014. 벌거벗음. 서울: 인간사랑. 아렌트, 한나 저. 김선욱 역. 2011. 공화국의 위기. 파주: 한길사. 왈저, 마이클 저. 유홍림 역. 2009. 전쟁과 정의. 서울: 인간사랑. 월린, 셸든 저. 강정인ㆍ이지윤 역. 2009. 정치와 비전 2. 서울: 후마니타스. 카야노 도시히토 저. 김은주 역. 2010. 국가란 무엇인가. 서울: 산눈. 한병철 저. 김남시 역. 2011. 권력이란 무엇인가. 서울: 문학과지성사. 홉스봄, 에릭 저. 이원기 역. 2008. 폭력의 시대. 서울: 민음사. Daase, Christopher. 2001. Terrorismus - Begriffe, Theorien und Gegenstrategien. Ergebnisse und Probleme sozialwissenschaftlicher Forschung. Die Friedens-Warte. 76, 1. Herman, Edward S. & O Sullivan, Gerry. 1989. The Terrorism Industry: The Experts and Institutions That Shape Our View of Terror. New York: Pantheon Books. Ignatieff, Michael. 2002. The Lessons of Terror : All War Against Civilians Is Equal. The New York Times. 2월 17일. Luhmann, Niklas. 1977. Macht und System. Ansätze zur Analyse von Macht in der Politikwissenschaft. Universitas. Zeitschrift für Wissenschaft, Kunst und Literatur 5. Luhmann, Niklas. 1987. Soziologische Aufklärung 4. Beiträge zur funktionalen Differenzierung der Gesellschaft. Opladen: Westdeutscher Verlag. Luhmann, Niklas. 2012. Macht. 제4판. München: UTB. Scheerer, Sebastian. 2004. Terror. Ulrich Bröckling 외 편. Glossar der Gegenwart. Frankfurt am Main: Suhrkamp, 257-262. 투고일: 2015.02.26. 심사일: 2015.04.01. 게재확정일: 2015.04.22.

테러와 테러리즘: 정치적 폭력의 경제와 타락에 관하여 97 ABSTRACT Terror and Terrorism: On the Economy and the Fall of Political Violence Gong, Jin Sung Chosun University Why terror can not succeed finally, and why people nonetheless try it again and again? For grasping the cause of the sorrowful phenomenon in these days we have to understand rightly the relation between political power and violence, and the terror-like property of political violence. Political power is not a state in which violence is absent, but a form of managing violence. Political power can not be sustained without being supported by violence. Violence as a mean of political power for sustaining itself must always be applied to a part of the object, because otherwise political power can not enjoy the intended obedience. This violence produces obedience of the rest parts by targeting a part. In this regard it resembles terror in principle. Terror operates on the basis of being able to do and also being able not to do. Terror can not operate if one just does or does not. Terror has therefore risk of failure in itself. What makes terror get out of this risk is trust. It is to believe that political power can do even if it does not do, and it can stop doing even if it does. Political power arises when such trust is. If political violence, which has the property of terror, could not produce such trust, it would fall into terrorism which expresses just being not able to stop doing, that is, political impotence. Key Words terror, terrorism, violence, Machiavelli, political power, tru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