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학연구논총 2012 ISSN 1979-9355 제 7호 Part.1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Part.2 울산 공단지역 내 문화유산과 관광자원화의 개념 Part.3 울산지역 근로자들의 직장생활과 가정문화 Part.4 300년을 거슬러 울산의 혼 을 만나다 - 울산의 공업도시 형성과정과 특성 - - 처용암(處容巖)을 중심으로 - - 울산 마두희(馬頭戲)의 역사적 배경과 복원(復原) 방안 -
2012 울산학연구논총 제 7호
2012 울산학연구논총 제 7호 지역문화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담았습니다. 울산발전연구원장 지난 반세기 동안 울산은 세계적인 산업도시로 성장 해오면서 공간변화가 급격하게 변모한 대표적인 도 시입니다. 그 어느 지역보다 자연환경이 수려한 도 시로 이제는 산업과 문화가 어우러진 생태산업도시 로 성장하였으며, 현재 울산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삶의 질을 한층 더 높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 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울산이 도시경쟁력을 확보 하는 데에 있어서 연구기반을 늘리고, 지역정체성 을 확립하기 위한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 2006년 연구원 부설로 울산학연구 센터를 개소하였습니다. 본 센터는 그동안 울산시민들이 내가살고 있는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를 찾아주기 위한 많은 노력을 경주해 왔으며, 이에 대한 학문적 차원의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해 왔습니다. 울산 시민들의 지역문화에 대한 이해와 높아진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올해 다양한 주제를 바탕으로 지역의 연구 동향과 과제를 담은 연구논총 4편, 학술적 연구의 틀에서 벗어나 시민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교양서 1편, 현실적인 내용인 자체과제 1편, 총 6편의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번에 발간된 연구논총 7호는 처용암을 중심으로 공단지역 내 문화유산의 관광 자원화를 고찰한 울산 공단지역 내 문화유산과 관광자원화의 개념, 전통 민속 놀이문화인 마두희 복원에 대한 300년을 거슬러 울산의 혼 을 만나다, 울산의 공업도시 형성과정과 특성 연구를 통해 공간적 정체성을 찾아보고자 한 공업도 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일과 가정의 양립문제를 다룬 울산지역 근로
발간사 자들의 직장생활과 가정문화 4편의 논문을 한권의 책으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교양서 울산에는 500가지 스토리가 있다 는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된 울산 의 설화를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춰 스토리텔링 함으로써 보다 쉽게 재미있고 유 익하게 접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자체과제로 수행한 역사와 문화, 산업이 있는 동천강 은 전 근대 산업의 초석이 된 동천강 을 조명함으로써 오늘날 울산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뿌리를 정립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바탕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울산시민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향토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서 연구 주제의 다양화 및 참여의 폭을 확대하여 보다 나은 연구가 이루어 질 수 있 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아울러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지역학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연구자들뿐 아니라 시민 여러분들의 더욱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이번 연구에 참여해주신 연구자와 토론자, 자문 심의위원 그리고 울산학 연구센터의 연구 사업을 위해 깊은 격려와 관심을 가져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 립니다. 2012. 12
C o n t e n t s Part1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 울산의 공업도시 형성과정과 특성 -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16 2. 연구의 범위 및 방법 16 3. 기존연구분석 16 Ⅱ. 일제시대 울산의 도시공간구조 20 Ⅲ. 도시로서의 새로운 출발(1960년대) 27 Ⅳ. 공간구조의 기틀 확립(1970년대) 38 Ⅴ. 시가지의 확산(1980년대 이후) 42 Ⅵ. 결론 48 참고문헌 52
2012 울산학연구논총 제 7호
Part1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 울산의 공업도시 형성과정과 특성 - 김헌규 울산대학교 건축대학 Ⅰ. 서론 Ⅱ. 일제시대 울산의 도시공간구조 Ⅲ. 도시로서의 새로운 출발(1960년대) Ⅳ. 공간구조의 기틀 확립(1970년대) Ⅴ. 시가지의 확산(1980년대 이후) Ⅵ. 결론 참고문헌
제 7호 초록 본 연구는 도시는 다양한 기능이 집적되고 또한 이러한 기능들이 공간 적으로 상호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도시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관 점 즉 도시시스템 적 관점에서 울산이라고 하는 도시의 공간적 정체성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울산이 공업도시로 출발하는 시점의 상황을 파악하 기 위해 조선시대 및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던 공간적 상황과 그 특성을 규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울산이라고 하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주요 기능들이 공간적 배치되어 가는 과정과 함께 이들이 상호 관계를 맺 어가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전통적 지방도시 울산이 국가지정 공업센터 로 지정되면서, 공업지역이 설치되고 이와 함께 물류수송을 위한 도로와 항만, 노동자들을 위한 주거지, 그리고 그들의 생활을 떠받치기 위한 상 업지역과 문화시설 등과 다양한 사회기반시설들이 공간적으로 어떻게 배 치되어 지금의 공업도시 울산으로 형성되었는지를 지도를 이용한 시각적 자료로 작성 분석하여 공간적 특성을 살펴보았다. 1962년 이후 토지구획정리 및 택지개발, 사택지 건설 등과 같은 다양 한 개발 사례들을 시계열적으로 정리하여 공업지역 및 기존의 시가지와 의 입지적 관계성을 비교분석하고, 또한 이 과정에 새롭게 건설되거나 정 비된 도로 등의 사회기반시설들의 건설과정을 함께 정리하여 울산이라고 하는 도시의 공간적 시스템이 구축되어 가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분석하 고자 하였다. 이를 위한 연구방법으로써 먼저 지금까지 울산을 대상으로 한 연구 성과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한편, 관보와 각종 보고서 및 통계자 료 등과 같은 문헌 자료와 함께 제작시기가 다른 지형도 및 항공사진, 때 에 따라서는 지적도 등의 시각자료를 최대한 수집 분석하여 시간적 흐름 12
Part1 에 따른 울산의 도시시스템의 변화양상을 시각적으로 작성 분석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살펴본 공업도시 울산의 공간적 변화과정은 다음과 같 다. 먼저 일제시대의 울산은 그 중심을 울산면에 두고 있으면서 조선시대 까지의 또 하나의 시가지로서 병영성이 도시적 기능을 상실하면서 시가 지로서의 공간적 특성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한편 일제시대에 들어 일본 인들에 의한 어업활동의 활성화로 인하여 장생포항과 방어진항이 급속도 로 성장하였으며, 도시공간적으로는 방어진 지역의 시가지로의 성장이 매 우 급속도로 이루어져 울산면과 병영성이 있던 하상면에 이어 울산지역 에서 세 번째로 큰 인구규모 등 시가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였다. 하지만 방어진 지역의 이러한 시가지화에도 불구하고 울산면 지역 즉 기 존의 중심지와 연결되는 도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는 등 도시시스템적 측면에서 중심지와의 관계성은 약했던 것이 특징이었다. 뿐만 아니라 1940년대를 전후로 하여 울산을 공업도시로 정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케다 스케타다는 울산을 대상으로 인구 50만 공업도시계획을 수립하여 1943년 기공식을 거행하 고 실재 축항공사 등에 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는 원산에 있던 정유공장을 울산에 이전하는 사업을 추진하여 전체 공정의 약 70%까지 진행된 상황에 해방을 맞이하여 공사가 중지되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사업들이 이후 울산이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되는데 적지 않은 역 할을 하게 되었다. 1962년 울산이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되면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도시계 획이 수립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지금의 신정동에서 삼산으로 이어지는 지역이 신시가지로 개발되었다. 특히 이 계획이 이후 울산의 전체적인 도 로망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시기 태화강 남쪽 의 신시가지 지역이 일조나 태화강의 강줄기 등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생 되는 남북방향의 지형축과는 다른 축을 형성하게 된 것은 당시 수립되어 있던 울산역 이전과 그에 따른 철도노선에 의한 축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13
제 7호 구 지역에 있어서도 기존의 울산읍성 및 병영성의 도시축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축을 따르는 토지개발계획이 수립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 는데 이는 이후 진행된 대규모 사택개발에서 이 축에 따라 토지개발이 이 루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처럼 기존의 남북축과는 다른 틀어진 축을 새로운 시가지의 개발축으로 삼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울산의 도시공간 축이 매우 다양하게 섞이게 되었으며, 이들 신개발지들이 공간적으로 퍼져나가 기존의 시가지지역과 만나게 되는 지 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복잡한 도시공간을 형성하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이후 1970년대에는 기존의 도시기능이 분산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된 다. 오랜 기간 울산읍성 지역에서 기능해 왔던 행정기능이 신시가지로 이 전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교통 결절점으로서의 시외버스의 터미널이 기 존 시가지의 외곽지역에 해당하는 우정동 지역으로 이전하는 등 시가지 에 집중되어 있던 다양한 도시기능이 분산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뿐만 아 니라 이 시기는 동구의 방어진 지역과 시가지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정 비되어 일제시대 이후 줄곧 제기되어 오던 시가지와 방어진 지역과의 관 계성이 높아진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토지개발의 측면에서는 아직까 지는 그다지 활발한 개발은 눈에 띄지는 않았다. 남구의 신정동 지역의 개 발과 함께 기존 시가지의 외곽지역인 우정동, 학성동 지역에서 토지개발 이 시작된 시기이다. 이후 1980년대에 들어 비교적 활발한 토지개발이 이루어지는데 특히 중구의 병영성 주변과 방어진 지역에서 대규모 토지개발이 적극적으로 진 행된 시기이다. 뿐만 아니라 1980년대 후반에는 처음으로 공해지역 주민 들의 이주사업이 시행된 시기이다. 이를 위해 태화동, 다운동, 삼호 등에 택지개발사업이 진행되어 1990년대에 들어 그러한 공간적 변화가 나타나 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1990년대에는 삼산지구가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성남동 지역에 입지해 있던 백화점 등을 중심으로 한 상업기능과 함께 시외버스 및 고속버스 등의 교통기능이 삼산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또한 오랫 14
Part1 동안 문제가 되어 오던 철도노선 또한 지금의 장소로 이전되는 등 다양한 도시기능들이 분산되어 울산의 곳곳에 배치되었다. 이처럼 울산은 행정, 상업, 교통, 교육, 문화, 공업 등의 다양한 도시 기능들이 곳곳에 분산되어 배치되는 형태의 공간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는 1970년대 도시계획에서 지향하였던 다핵적 도시 로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목표로 하였던 다핵적 도시구조는 도시의 주요 기능을 분산, 특화하는 이른바 조닝(zoning)개념의 다핵적 도시구조였다. 이는 최근 서울을 비롯한 많은 선진도시들이 지향하고 있는 도심 이외에 도심 적 기능을 수행하는 부도심을 적극적으로 육성하여 다양한 도시기능을 다 양한 부도심에서 수행하는 개념의 다핵적 도시공간구조와는 다르다. 그 런 점에서 지금의 울산은 다양한 기능들이 흩어져 있는 분산적 공간구조 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보다 더 도시로서의 매력을 가진 도시공간 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능들이 분산되어 있는 공간구조가 아니라 다양한 도시적 기능을 가진 부도심을 육성하고 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주는 네트워크를 갖춘 도시시스템으로 정비해야 할 것이다.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주제어 울산, 공업도시, 도시화, 도시기반시설, 도시시스템 15
제 7호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본 연구는 공업도시 울산 이 가지고 있는 공간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를 살펴보는 것이다. 2012년은 한국 공업단지의 효시로서 국가적 차원에 서의 근대화와 공업입국을 이끌기 위한 전초기지로서 울산이 선정되어 울 산공업센터로 지정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울산공업 센터는 1962년 1월 4일 울산공업 센터 건설계획이 결정됨에 따라 당시 경상남도 울산군 울산읍 방어진읍 대현면 하상면 등을 포함하는 울산지구 173km2가 특정공 업지구로 결정되었으며, 1962년 5월 행정구역을 변경하여 울산이 시로 승격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울산에는 언제나 공업도시 라는 수식어가 훈 장처럼 붙게 되었다. 이에 본 연구는 울산이라고 하는 도시를 공업도시라고 하는 관점에 초 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관심의 폭을 조금 넓게 설정하여 공 업도시로서 기능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공업지역을 시작으로 하여 물류수송을 위한 도로와 항만, 노동자들을 위한 주거지, 그리고 그들의 생활을 떠받치기 위한 상업지역과 문화시설 등과 다양한 사회기반시설들 이 어떻게 공간적으로 배치되어 지금의 공업도시 울산이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공업도시가 기능하는데 있어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도시기반시설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가라고 하는 이 른바 도시시스템 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공업도시 울산이 가지고 있는 공 간적 정체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2. 연구의 범위 및 방법 16
Part1 먼저 1962년 공업센터 지정 이후 공업지역이 건설되어 가는 과정과 함 께 울산의 시가지에 주거지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주 거지의 정비는, 공장건설로 인해 울산 시가지 곳곳에 새롭게 정비된 이주 민 마을, 개별 공장들이 자신들의 사원들을 위해 건설한 사택, 그 외에 크 고 작은 택지개발사업들이 진행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개 발 사례들을 시계열적으로 정리하여 공업지역 및 기존의 시가지와의 입 지적 관계성을 비교분석해 거시적 관점에서의 공간적 특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또한 이 과정에 새롭게 건설된 도로를 중심으로 한 각종 사회기반 시설들의 건설과정을 함께 정리하여 울산이라고 하는 도시의 공간적 시 스템이 구축되어 가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한 연구의 공간적 범위는 1962년 1월 27일 공업특정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같은 해 6월 1일 울산시로 승격되었을 당시의 행정구역 즉, 지금의 울산광역시 중구, 남구, 동구와 북구 일부 지역을 대상으로 하고 자 한다. 시간적 범위로는 먼저 공업특정구역으로 지정되기 이전의 상황 을 개괄한 다음, 1962년 이후의 변화상을 비교분석해 가도록 한다. 구체적인 연구방법은 먼저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울산을 대상으로 한 연구 성과들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한편으로 관보와 각종 보고서 및 통계 자료 등과 같은 문헌 자료와 함께 제작시기가 다른 지형도 및 항공사진, 때에 따라서는 지적도 등의 시각자료를 최대한 수집 분석하여 시간적 흐 름에 따른 울산의 도시시스템의 변화양상을 시각적으로 살펴보고 그 특 징을 도출하도록 한다.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3. 기존연구분석 울산의 도시공간을 다룬 지금까지의 연구로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김 선범에 의한 도시공간론 - 울산의 도시성장과 변화(1996) 이다. 이 연 구는 울산을 대상으로 하여 도시형성에서부터 공업화 이후 신구도심의 변 17
제 7호 화특성까지를 다룬 울산으로 대상으로 한 매우 심도 깊은 연구 성과이다. 다음으로 박재홍의 울산시의 도시화 특성에 관한 연구(1998) 에서는 1962~1994년까지의 울산의 도시화 특성을 인구변화와 토지이용 및 건축 물의 현황변화를 지표로 살펴본 것이다. 이도학의 울산시 사택의 유형분류와 계획특성에 관한 연구(2003) 는 울산에 건설된 사택단지의 건축적 특성과 입지적 특성을 각 단지별, 조성 시기별로 분석하여 그 변화, 발전 과정을 규명한 것이다. 최호현의 울산 시 공간구조 변화의 시기구분 및 특성(2007) 은 울산의 도시공간구조의 변화를 정량적인 방법으로 시기를 구분하고, 그에 따른 시기별 특성을 실 증적인 방법으로 규명한 것이다. 이민주의 울산 공업단지 개발에 관한 연구-일제강점기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2009) 는 울산의 공업센터 지정 이전에 이미 일제강점기 후반에 울산을 공업도시로서 개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이때의 개발계획이 이후 1962년 공업센터 지정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실증적으 로 규명한 연구 성과이다. 이창업의 산업수도 울산의 사택문화(2011) 는 공업화 이후 외부로부 터 대거 유입된 산업인력들과 그들을 위해 건설된 사택으로 인해 형성된 주거문화를 공업도시 울산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로 파악하여 울산지역에 건설되었던 사택들에 대한 실증적 조사와 분석이 이루어진 의 미 있는 연구 성과이다. 또한 한삼건의 울산 택리지(2011) 는 신라시대의 울산에서부터 근현 대에 이르기까지 울산의 도시상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을 정리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을 통해 울산이라고 하는 도시의 특성을 살 펴보고 있다. 또한 그의 울산 공업센터 반세기 - 울산 남구의 변천을 중 심으로(2012) 는 공업센터 기공 당시 및 전후 시기의 모습을 기록한다는 관점에서 공업도시 건설과 관련한 다양한 자료들과 당시의 주민들의 인 터뷰 등을 실고 있어 잊혀져가는 울산의 기억을 채록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성과이다. 18
Part1 이외에 울산대학교 도시건축연구소가 울산광역시의 의뢰를 받아 2006년 작성한 울산광역시 도시계획사 는 울산의 공간구조 변화과정을 각종 지표를 이용하여 계량적으로 분석하는 한편 지금까지 수립되었던 울 산 도시계획의 세부적 내용을 시계열적으로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 미 있는 연구 성과이다. 본 연구는 이상의 연구 성과를 최대한 활용하는 한편 공업에 초점을 두지 않고 그 속에서 생활해 오고 있는 거주자의 입장에 초점을 두어 시 민생활의 근거지로서의 주거지 형성과정을 살펴봄과 동시에 이러한 주거 지역과 경제활동의 기반으로서의 공업지역과의 공간구조적 상관관계를 살펴보았다.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19
제 7호 Ⅱ. 일제시대 울산의 도시공간 구조 1962년 공업센터로 지정되기 이전의 울산의 공간구조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1914년 측도, 1918년 발행된 5만분의 1 조선지형도_울산 와 1917년에 측도되어 1918년 발행된 1만분의 1 조선지형도_울산 일 것이 다. 1만분의 1 조선지형도_울산 은 한 장의 지도로 이루어져 있어 지도 이외의 범위에 대한 상황은 파악할 수 없으나, 5만분의 1 조선지형도_울 산 의 경우 당시 전국을 대상으로 거의 모든 지역이 제작되었기 때문에 울산의 중심지역 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의 상황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이들 지도를 이용하여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우선 건축물이 밀집되 어 시가지를 이루고 있는 것이 확인되는 것은 과거 울산읍성이 있었던 울 산읍치 지역과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이 있었던 병영성 지역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그림 1 참고) 이들 지역 외에 시가지를 이루고 있는 곳은 울산읍치에서 서쪽, 즉 지 금의 우정동 방향과 동쪽의 복산동 방향의 인접 지역과, 지금의 학성공원 주변인 반구동 일대에 약간의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는 정도의 모습이 확 인된다. 이 시기 울산의 인구규모를 살펴보면 울산군 전체의 인구는 124,343명이었으며, 이 중 인구가 가장 많았던 면은 울산읍치가 위치하 였던 부내면으로 11,034명이었으며, 병영성이 위치한 하상면이 9,241명 으로 울산군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1) 울산군에서 세 번 째로 인구가 많았던 동면(7,684명) 등을 5만분의 1 조선지형도_장생포 등을 통해 살펴보았지만 방어진항 등 일부 항구지역의 해안가에 약간의 시가지가 확인될 뿐 울산읍치나 병영성 지역과 같은 규모의 시가지는 확 1) 울산군, 울산안내, 1917.12 참고 20
1 Part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그림 1> 1만분의 1 조선지형도_울산(1917년 측도) 인되지 않는다. 도시와 도시, 혹은 지역과 지역을 이어지는 네트워크로서의 도로망을 살펴보면, 울산읍치의 시가지 중심부의 남북방향 가로와 서남쪽에서 연 못을 끼고 울산읍치로 이어지는 도로가 직선의 계획된 가로로 보이고 있 을 뿐 나머지 대부분의 도로망은 불규칙한 형태를 이루고 있어 계획적으 로 건설되지 않았을 뿐더러 그 역사가 비교적 오래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 시기 울산지역의 간선도로는 남창쪽에서 올라와 달동을 지나고 태 화강을 건너 울산읍치의 중심을 통과하여 북동쪽의 병영성을 지나 경주 (북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울산읍치의 서쪽으로 나아가 무거동에 21
제 7호 <그림 2> 5만분의 1 조선지형도_울산, 장생포(필자가필) 서 부산과 언양으로 연결되는 도로, 태화강 남쪽에서 신리, 여천동쪽으로 뻗어 울산읍의 동남쪽에 위치한 장생포로 이어지는 도로가 2등도로로 구 분되고 있다. 장생포가 울산읍치와 비교적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하면 당시 인구규모면에서 울산면과 병영성에 이 어 3번째로 큰 인구규모를 가졌던 동면의 방어진 방면으로 연결되는 도로 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았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지도들에서 파악되듯이 일제시대까지 울산지역은 그다지 시가지 가 발달하지 않은 지방의 작은 읍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 지 당시의 다른 일반적 읍지역들과는 다른 특징으로써 행정적 중심지인 22
Part1 울산면과 매우 인접한 곳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성곽도시가 시가지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 두 지역은 조선시대 까지 행정과 군사라고 하는 서로 다른 도시기능을 담당하면서 읍성과 영 성이라고 하는 전통적 도시공간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능적 측면 에서는 분명 별개의 시가지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산면 지역을 살펴보면 과거 읍성의 성벽의 동문과 서문이 있었을 것으 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성의 바깥쪽으로 시가지가 뻗어나가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성벽의 남쪽으로는 시가지가 전혀 형성되지 않 았는데 이는 당시의 생활축이 울산읍치를 중심으로 동서로 연결되는 도 로가 주된 도시축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상과 같은 1910년대의 울산지역 지도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 일제시대 초기까지의 울산지역은 경상좌도의 해안지역을 방어하는 군 사적 거점으로서의 병영성을 제외하고는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상도의 작은 읍치였다. 그러한 울산의 위상에 급변하게 된 계기는 1940 년 무렵 일본인 이케다 스케타다에 의해 추진된 공업도시계획에서부터였 다. 이케다는 울산의 역사적 특성은 물론 지형조건에 따른 입지적 특성까 지 심도 있게 분석하여 울산이 대일본제국 을 위한 병참기지 로서 최적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그림 3> 울산도시계획평면도(1943년경) 울산대학교 한삼건 교수 제공 23
제 7호 의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는 1929년 부산남항 축항 공사 등을 시작으로 하여 1936년에는 조선축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37년 부터 울산항 축항 및 인구 50만 공업도시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후 1943 년 5월에 울산 학성공원에서 울산공업도시 개발을 위한 기공식을 거행하 였다. 이케다의 계획안을 살펴보면 지금의 양정동에서 명촌동까지 공업지역 (제2기공업지조성지역)으로 계획되어 있으며 그 외곽에 약간의 주거지가 계획되어 있다. 제2기공업지조성지역의 북쪽 즉 지금의 효문동 및 진장동 지역과 태화강 남쪽의 삼산본동지역은 시가지예정지역으로 비워두었다. 이 계획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로써 기존 시가지 즉 병영성과 울산읍치를 연결하는 철도를 기준으로 동쪽만을 개발 대상지로 삼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특히 기존 시가지와 계획지 간의 도로조차도 거의 연결되지 않고 있 다는 점은 그만큼 기존 시가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음을 단 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2) <표 1> 울산군의 면( 面 )별 인구 및 인구밀도 변화(일제시대) 명칭 총인구(인) 1917* 1930 1945 면적 (방리**/km2) 인구밀도( 人 /km2) 1917 1930 1945 부내 11,034 14,903 18,676 2.642 / 40.7 270.8 365.8 458.4 하상 9,241 10,282 9,131 1.986 / 30.6 301.7 335.7 298.1 농소 7,754 8,721 8,513 4.429 / 68.3 113.5 127.7 124.6 강동 5,366 6,719 6,708 3.920 / 60.5 88.8 111.1 111.0 동 7,684 13,278 13,967 2.479 / 38.2 201.0 347.3 365.4 대현 7,855 10,111 12,876 2.317 / 35.7 219.8 283.0 360.4 온산 6,583 7,659 7,614 1.429 / 22.0 298.7 347.6 345.5 서생 5,855 5,981 6,602 2.388 / 36.8 159.0 162.4 179.3 온양 6,035 6,523 6,608 4.730 / 72.9 82.7 89.4 90.6 2) 이상 이케다 스케타다에 관해서는 한삼건의 울산 공업센터 반세기-울산 남구의 변천을 중심으로(2012, pp33-78), 이민주의 울산공업단지 개발에 관한 연구 - 일제강점기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울산대학교 대학 원 석사학위논문, 2009) 참고 인용 24
Part1 청양 6,658 6,749 6,905 4.342 / 67.0 99.4 100.8 103.1 웅촌 6,082 5,746 5,753 3.491 / 53.8 113.0 106.7 106.9 범서 7,889 8,871 7,917 5.716 / 88.1 89.5 100.6 89.8 두동 5,732 6,594 6,164 4.799 / 74.0 77.5 89.1 83.3 두서 6,554 7,373 7,158 6.121 / 94.4 69.4 78.1 75.8 언양 8,661 9,369 9,208 3.161 / 48.7 177.7 192.2 188.9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하북 3,670 2.557 / 39.4 93.1 8,138 7,848 상남 3,865 4.726 / 72.9 53.0 72.5 69.9 중남 3,458 4,221 1.982 / 30.6 113.1 138.1 8,697 삼동 4,367 4,666 4.384 / 67.6 64.6 69.0 88.6 합계 124,343 145,904 150,345 67.599 / 1,042.4 119.3 140.0 144.2 * 1917년은 울산안내, 1930년과 1945년은 조선총독부의 통계연보 참고 ** 면적은 당시 일본이 사용하던 방리를 km2로 환산한 것임. 1 里 =3.927km, 1 方 里 =15.421km2 이러한 이케다의 노력과는 별개로 울산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원산 에 설립되어 있던 조선석유주식회사의 일부 시설의 이전이 추진되었다. 당시 건설을 이끌었던 것은 동양척식주식회사로 1940년경부터 고사동 일 대의 공장부지 매입을 추진하여 1944년에 약 15만평의 공장부지를 확보 하였다. 여기에 연간 20만 톤의 정유능력을 갖춘 울산공장 건설에 착공하 여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공정의 약 70%가 진행된 단계에 일본의 패전으 로 건설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 공장이 건설되면서 석유수송을 위한 철 도선이 계획되고 장생포역이 신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장생포항에는 유 류비축을 위한 축항공사 및 매립공사가 진행되었다. 3) 그런데 그림 3의 울산도시계획평면도를 살펴보면 울산읍치, 병영성 그리고 방어진항이 시가지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은 인구분포에서도 어느 정도 확인된다. 표 1은 일제시대 울 산지역의 면별 인구규모를 나타낸 것이다. 1917년 당시 인구가 가장 많았 3) 한삼건, 전게서, pp82-86 참고 25
제 7호 던 울산면은 1945년까지 약 7천 명의 인구가 증가하였던 것으로 나타났 다. 다음으로 방어진항이 있었던 동면은 1930년 이미 인구가 약 2배 가까 운 증가를 보이고 있어 어항기능의 정착으로 인하여 급격히 발전하고 있 었음을 짐작케 한다. 거기에 비해 장생포항이 속해있던 대현면의 경우도 방어진만큼은 아니지만 꾸준하면서도 비교적 큰 폭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다. 이외의 지역들의 경우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인구규모에 큰 변화를 보 이지 않는다. 다만 당시 주요 지역들의 대부분은 인구가 증가 혹은 유지 되고 있었던데 비해 병영성이 있었던 하상면의 경우 1930년대 이후 인구 가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는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병 영성이 가지고 있었던 주요 도시기능인 군사기능이 사라지고 난 이후 시 가지로서의 인구집중력이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병 영성 내 대지면적이 줄어들고 농경지가 늘어나는 등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 바 있다. 4) 이처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울산의 도시기능은 울산읍치 즉 울산면 에 집중되면서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시가지로 기능해 왔던 군사도시 병 영성은 도시적 기능이 사라지면서 도시로서의 역할도 약해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시가지로써 방어진 지역이 인구 규모 면에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시 대까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던 어업기능이 새로운 경제활동으로 자리 잡 으면서 생겨난 변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화가 공간구조적 측면에서는 변화를 유발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즉 방어진 이 새로운 시가지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울산의 중심지인 울산면 지 역과 연결하기 위한 도로의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5) 이는 도시시스템 적 측면에서 이들 지역이 서로 네트워크를 이루지 않고 각자 독립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4) 김종기 외 2인. 울산 병영성의 변화과정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제26권 제11호(통권 265 호), 2010.11 참고 5) 실제로 일제시대 방어진항의 5대 사업이라 하여 특히 도로개설 문제를 언급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삼건, 울산 택리지, 2011, p129) 26
Part1 Ⅲ. 도시로서의 새로운 출발 (1960년대)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1945년 해방이후의 어수선한 상황이 진정되기도 전에 1950년 한국전 쟁의 발발로 인해 전국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울산은 불행 중 다행으로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 피해는 거의 입지 않는 등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의 울산지역에는 도시공간적으로 큰 변화가 발생 하지 않았다. 이러한 울산이 일순간에 전국적 관심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그것이 바 로 1962년 1월에 결의된 울산공업센터 설치였다. 1962년 1월 13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한 다음 1월 27일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결 정 공포하고, 1주일 뒤인 2월 3일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이 대현면 매암리 에서 거행된다. 이와 동시에 공장건설과 지원시설에 대한 조사 및 계획에 <그림 4>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국가기록원 제공 27
착수하였다. 제 7호 이후 3월에 울산개발위원회 개발계획본부 및 울산특별건설국이 설치 되고, 그해 5월 14일 울산최초의 도시계획이 국토건설청 고시 제149호로 결정되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의 일환으로서 계획 인구 50만의 문화공업도시를 건설함과 동시에 관광시설도 완비하는 것으 로 되어 있었다. 도시계획구역 176,040,000 내의 인구는 40만 명, 교 외 10만 명으로 계획되었다. <그림 5> 1962년 울산 도시계획도 울산광역시 도시계획사 도면집 출처 이 계획에 따르면 지금의 삼산동 일대에 격자형의 가로망이 갖추어진 중심시가지가 입지하고 있으며, 장생포를 포함한 대현면 일대와 강북의 양정동 일대 등이 공업지역으로 계획되었다. 공업지역과 시가지 사이, 신 시가지의 상업지와 주거지역 사이에는 폭 200~300m의 띠모양으로 이루 28
Part1 어진 녹지대가 계획되어 있다. 본 계획의 가장 중심지역인 신시가지는 중 심에는 주거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 상업지역이 넓게 위요하고 있는 형태 이다. 또한 주거지 양쪽에서 상업지로 공원이 돌출 관입되어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상업지는 태화강의 울산교를 축으로 북쪽에 위치한 기존의 시가지 지 역과 연결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신시가지 지역의 도시축이 남북방향에 서 남동쪽으로 약간 꺾인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기존 시가 지인 읍치와 병영성 지역은 정남향을 축으로 삼고 있는데 반해 신시가지 의 경우 그 축이 남북방향에서 동남방향으로 축이 어긋나 있다. 이처럼 신 시가지의 도시축이 기존의 울산읍치와 병영성의 축인 남북방향, 혹은 주 변 자연지형 등과 상관없이 방향을 달리하는 것은 당시 계획 중이었던 철 도노선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림 6 참고) 또한 가로망계획은 신시가지를 중심으로 하고 구시가지는 가급적 기 존의 도로를 이용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그림 5에서 살펴보면 기존 시 가지 지역에는 새로운 도로를 설치하지 않고 있지만, 울산읍치의 동남쪽 에서 병영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읍치 북쪽에서 병영성 북쪽으로 이어 지는 명륜로가 계획되어 있었다. 이외에 태화강과 동천강이 만나는 지점 에서 북서방향으로 긴 띠모양의 상업지역을 설치하고 있는데 그 띠모양 으로 인해 생겨난 축은 신시가지의 도시축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성을 나 타내고 있다. 그림 1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울산읍성과 병영성의 공간축이 정남향 을 이루고 있듯이 울산이라고 하는 도시가 남북방향의 명확한 도시축을 가지게 된 것은 비단 풍수지리와 유교사상에 근거한 질서체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울산의 시가지가 자리 잡은 곳은 북쪽에는 낮은 구릉지가 시가 지를 감싸면서 그 앞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넓은 강과 남쪽으로 펼쳐진 넓 은 평야지대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지형적 조건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공 간구조적으로 남북방향으로 명확한 축이 형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 순응적 도시축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 당시 기존의 도시축과는 다른 새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29
로운 도시축을 신시가지에 설정하게 된 배경에는 철도노선 변경계획이 있 제 7호 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최근 확인되었다. 6) 이 계획은 울산이 가지고 있던 지역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중 앙의 행정관청이 중심이 되어 비교적 짧은 시간에 작성되었던 것에 비해 결과적으로 지금의 울산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 틀을 만들었던 계획이었 <그림 6> 울산공업지역의 토지이용계획 울산개발계획본부, 1962, p32 6) 한삼건, 전게서, pp123-124 참고 30
Part1 다. 1962년경에 계획되었던 이상의 도시계획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감 안하지 않고 지금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은 불합리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그 이전의 이케다의 계획안에서도 확인되었듯이 새로운 시 가지를 계획하는데 있어 기존의 도시지역과의 관계설정을 지나치게 가볍 게 여겼다는 점은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오던 행정, 상업, 금융 등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이 하루아침에 신시가지로 옮겨지지 않고 결국 분산되어버리는 형태가 되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그림 7> 1914년과 1967년의 주요 도로망 <그림 8> 울산 중심부 1967년 도로망과 60년대 각종 개발사업지 그림 7은 1914년의 5만분의 1 지형도(그림 2)에서 도로만을 추출한 것과 1967년 촬영된 항 공사진 상에서 확인되는 주요 도로를 추출하여 재작도한 것 이다. 기존의 시가지가 있던 지 역을 살펴보면, 울산면 주변 도 로가 이전에 비해 많이 복잡해 져 있는 모습이 확인되는데 이 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이루 31
제 7호 어졌던 도로정비로 1960년대의 개발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이외에는 1967년 대부분의 도로망은 이전 시대 연도에 해당되던 도로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신시가지에 해당되는 아랫부분의 신정동 지역에 격 자형의 도로망이 건설되고 있는 모습이 확인되며, 공업단지가 건설되고 있던 대현면 일대에도 기존의 도로망과는 무관하게 도로들이 늘어나고 있 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4년 당시의 2등도로의 흔적은 아직은 남아 있으며 그 위로 새롭게 축을 달리한 새로운 도로망이 덧씌워지고 있다. <그림 9> 1962년 공업센터 지정 이후 각종 개발사업 추이 그림 8은 1962년 공업센터 지정 이후 울산지역에 진행되었던 각종 개 발 사업에 관한 기록들 7) 을 종합하여 그 발생건수를 정량적으로 분석해 본 것이다. 이에 의하면 공업센터 지정 이후 공장건설과 함께 각종 도로 정 비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공 장과 기반시설 건설공사는 60년대 중엽에서 1970년대 중엽에 걸쳐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후에는 비교적 잦아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장 건설이 활발해짐에 따라 사택의 건설도 활발해 지는데, 사택 건설은 비교적 꾸준하게 진행되는데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조금 더 활발 7) 본 분석에 사용한 기초자료는 울산시 발행의 울산시사(1987), 시정백서(1994, 1996, 2011), 울산광역시 도시 계획사(2006) 이외에 이기석의 울산의 성장과정과 지역적 특성(1981), 이창업의 산업수도 울산의 사택문화 (2011), 한삼건의 울산공업센터 반세기 - 울산 남구의 변천을 중심으로(2012) 등에서 확인되는 내용들을 종합 한 것으로 사안에 따라 누락된 부분도 있을 수 있음을 밝혀둠. 32
Part1 해 지는 경향이 확인된다. 이와는 별도로 택지개발 및 토지구획정리 사업 도 진행되는데 택지개발의 경우 1980년대 들어 시작되었는데 비해 토지 구획정리 사업은 60년대부터 시작되어 비교적 꾸준하게 진행되었다. 도로와 관련하여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1962년 12월 도시계획 간 선 도로 6호노선의 축조공사를 시작하고 63년에는 사연제 진입로, 야음 동, 상개동, 고사동 등 공업센터 인근 지역의 도로 공사에 착수하였으며, 기존 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이어주는 태화교 공사도 1963년 시작되었다. 이후 거의 대부분의 도로공사는 공업지역과 신시가지에서 집중적으로 이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그림 10> 1960년대 토지개발사업지구 및 사택지 분포(BaseMap은 2010년 현재 지도) 33
제 7호 루어졌다. 이때까지 공장건설의 대부분이 남구 지역에서 이루어졌으며, 남구 이외의 지역에서는 1968년 10월 현대자동차가 준공되면서 다음 해 인 1969년 명촌교와 염포연결가로 축조공사가 시작되면서 명촌, 연암, 화 봉동 지역에 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8) 그림 10의 지도에서 대현면 방면에서 신시가지 남단을 지나 서쪽으로 이어지는 새로 건설된 도로가 도시계획 간선 도로 6호노선이다. 즉 공업 지역과 울산 외부를 연결하여 각종 물자와 생산품을 운반하기 위한 도로 가 가장 먼저 건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시기 즉 1960년대에는 토 지구획정리 사업이 3곳에서 진행되었는데 지금 시청이 위치한 월봉1공구 와 그 옆의 월봉2공구가 각각 68년과 69년에 사업이 완료되었다. 이와 함 께 남쪽 야음/선암동 지역에 야음/선암지구가 1969년 사업이 완료된 지 역이다. 울산에서 가장 먼저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실시된 것은 가장 먼저 <그림 11> 동부한농 및 한국비료 사택지의 모습 1967년 항공사진 8) 이상 울산시사(1987), pp550-561 참고 34
Part1 완료된 월봉1공구로 1963년 5월 시행에 들어갔는데, 이 다음에 부곡지구 가 같은 해 7월에 시행에 들어갔으나 사업완료는 다른 지역보다 조금 늦 은 71년 5월에 완료되었 다. 이외에 사택도 북구 달 천동에 대한철광개발(주) 의 사택 9) 이 1965년 건설되 었고, 이후 1967년에는 영 남화학 사택과 한국석유공 업 사택이 남구야음동에 들어섰다. 그리고 무거동 지금의 신복로터리 입구 부근에 한양화학 사택이 <그림 12> 동부한농 야음동 사택지 1967년 항공사진 1969년 건설되었다. 이들 사택들의 위치는 대한철광개발 사택을 제외하고는 공업지역과 외곽으로 연결되는 6호노선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1969년 11월에 건설 된 동부한농 사택은 중구 복산동에 입지하였는데, 공장과의 연결도로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 공장지대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곳에 입 지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뿐만 아니라 그 바로 옆에는 이듬해 한국비료 사택이 더욱 큰 규모로 완공되었다. 이들 두 사택이 입지한 곳은 앞서 살 펴보았던 신시가지 지역과 마찬가지로 그 기준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축 이 틀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10) 그림 11을 통해 개발 당시 주변 상황과 비교해 보면 서쪽의 각 학교 주변의 도로축과 서쪽 병영성의 축은 남북 방 향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택지 남쪽의 농경지를 살펴보아도 남 쪽으로 흐르는 듯한 모습으로 농경지가 나누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사택지 바로 앞을 지나는 도로는 일제시대 지도상에서도 확인되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9) 그림 10에는 표현되지 않았음. 10) 그 축이 이들 사택들의 공장부지 방향이라는 점을 들어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공장을 바라보도록 축을 설정했 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정확한 배경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35
제 7호 는 도로이다. 그림 7의 1914년 도로망에서 울산읍치와 병영성을 이어주는 도로가 바로 그것이다. 결국 기존의 읍치에서 병영을 연결해 주는 도로축 을 따라서 전체적인 사택지 배치와 함께 전면 도로까지도 개설하였던 것 으로 판단된다. 또 한 가지 1962년의 도시계획도(그림 5, 6)를 살펴보면 이 부근의 도로구조가 실제로 이와 유사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 확인 된다. 다만 이전의 계획에서는 실제로 건설된 것보다 훨씬 더 길게 뻗어 태화강 가까이까지 내려와 있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 시점까지의 개발을 살펴보면 사택지 부근에서는 명확한 직교형의 <그림 13> 1970년대 토지개발사업지구 및 사택지 분포(BaseMap은 2010년 현재 지도) 36
Part1 공간구조를 만들고 있지만, 남쪽으로 내려와 반구동 지역에서 철도와 새 로 개설된 도로와의 관계가 어정쩡한 형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원래의 계 획상에서는 철도가 이설되는 것을 예정하고 도로를 계획하였기 때문에 항 공사진과 같이 예각으로 도로축이 만나지 않고 사택지 전면의 도로축과 나란하게 병영성 방향으로 도로가 개설될 예정이었다. 이처럼 특정 지역 안에 다양한 방향축을 만들어 버림으로 인해 도시공 간이 확장됨에 따라 다양한 축이 만나게 되는 경계에서는 공간구조가 복 잡해 질 수밖에 없게 된다.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37
제 7호 Ⅳ. 공간구조의 기틀 확립 (1970년대) 1970년대에 들어 지금껏 남구지역의 장생포 및 여천지구에 집중되어 오던 각종 개발의 움직임이 염포, 미포지구의 개발로 인해 동구 지역에서 도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이 지역에 대한 도로 정비도 본격적 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1970년 진장동과 염포동을 연결하는 진입도로 가 축조되고, 이듬해인 1971년 염포-남목간 도로가 확장된다. 1973년에 는 방어진 순환도로 중 남목-전하동 사이에 개설되고 75년에는 미포단지 진입도로가 포장 완공되어 미포동, 일산동, 전하동 사이의 도로 정비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 주민들의 거주를 위한 토지 구획정리 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한국에서는 전혀 기술을 가 지지 못했던 조선업의 특성 탓인지 시가지 형성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이 루어진 개발은 외국인 사택이 1972년 건설되었다. 이후 78년에 사원들을 위한 현대 중공업 아파트가 건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0년대 초 어항이 들어서면서 시가지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울산의 주요 시가지를 이루었던 방어진항 지역이 도로 개설 등 도시화 과정에서는 소외되어 결 과적으로 울산의 중심 시가지와는 관계성이 매우 약한 공간구조를 이루 고 있었던 것을 앞서 살펴보았었다. 그러한 공간적 단절이 다소나마 해소 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조선소 건설과 그를 위한 기반시설 확충이었다 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이외에 남구의 신시가지 지역에서는 60년대 개발된 월봉지구에 이어 봉월, 달신 1, 2, 달동지구가 개발되면서 이곳에 사택들도 들어서는 등의 개발이 진행되었다. 또한 강북 지역에서도 우정지구와 옥교/학산지구, 학 성지구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완료하였다. 38
1 Part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그림 14> 태화교가 완공 이전의 우정동 지역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옥교동에 위치하고 있던 울산시청이 1970년 1 월 1일 신시가지인 신정동으로 이전하여 업무를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중요한 도시기능의 하나인 행정기능의 중심이 500여년을 이어오던 기존 시가지에서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울산읍 치의 행정기능은 동헌 등이 위치하고 있던 북정동 지역이 중심이었다. 이 후 행정적 중심지로서의 기능이 옥교동으로 이전되기는 하였지만 공간적 으로 매우 밀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1970년의 이전은 그 의 미가 다르다. <그림 15> 건설 당시 울산시청의 주변 그림 15에서도 확인되듯이 그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으로 도시의 중심기능이 옮겨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까지 울산시민이 가 39
제 7호 장 모여 살던 곳과는 태화강으로 인해 단절되어 있는 곳이었다. 시민들의 생활중심 즉 주요 도시 기능으로서의 경제 및 교육기능은 여전히 기존 시 가지에 그 중심을 두고 행정기능만이 신시가지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비 록 태화교와 울산교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도시 계획적 측면에서 이 일 대를 새로운 시가지로 육성해 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 의 생활패턴이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과 또한 행정 이외의 도심으 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여전히 남겨져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도시시스 템적 측면에서 도시기능이 분산되어 도시가 가지는 중심성을 약화시켜 버 리는 이전이었다. 비슷한 시기인 1971년에는 당시의 교통시스템의 주요 결절점에 해당 하는 시외버스 터미널이 성남동에서 우정동으로 이전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림 13의 우정지구 바로 서쪽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설치되어 약 30여 년 간 울산의 교통 결절점으로 기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같은 도시간 교통의 결절점인 고속버스 터미널은 강 건너 남쪽 신정동에 위치하였다. 버스 이외에 중요한 교통 결절점에 해당하는 철도에 대해서도 본격적 인 이전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앞서 1960년대에 이미 기 존 철도노선의 변경 등이 검토되어왔으며, 실재로 신시가지의 배치 등은 철도노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시의 노선과는 다른 또 다른 방향으로 노선변경이 고려되기 시작하였는데, 1970년 도시재정비계획에 서 철도를 주거지역과 공업지역을 차단하는 대상녹지로 이전할 것을 요 구하기 시작하였다. 11) 하지만 이 당시 철도노선 이전의 주요 고려사항은 바로 효율적인 공업수송에 있었다. 이를 위해 덕하~병영 구간의 노선 방 향을 공업지역에 면하여 직선적으로 이설하는 계획이 제안되고 있었다. 12) 가로체계에 대한 이러한 생각들은 1976년 도시재정비계획에서 교통계 획을 통해 장래의 도시 활동에 대처함과 동시에 시민의 안전성, 쾌적성을 확보하기 위한 4개 기본방침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1 대량 11) 울산광역시, 울산광역시 도시계획사(2006), p150 12) 울산광역시, 전게서(2006), p171 40
Part1 수송기관 중심의 교통체계 확립, 2 생활도로, 지구도로, 지역간선도로 등 도로의 성격에 상응한 사용구분과 교통 정비, 3 다핵적 도시형태의 유 도 등의 실현으로 도심교통 혼잡 완화와 효율적 물자수송의 확보, 4 기 간교통시설에 대하여 도시 내 교통체계와의 유기적 연계 계획 마련이 그 것이다. 13) 이상과 같은 교통 결절점의 새로운 입지선정 및 철도노선의 변경계획 등이 기존 시가지 및 신시가지와의 전체적 배치가 철도노선 조정에 맞춰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시기 진행된 각종 도시 시설들의 재배치 는 결과적으로 도시의 주요 기능들인 상업, 행정, 교통기능 등을 각각 분 산시켜 버렸다.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13) 울산광역시, 전게서(2006), p187 41
제 7호 Ⅴ. 시가지의 확산 (1980년대 이후) 그림 8에서 보듯이 1980년대가 되면 공업시설 및 도로 등의 새로운 건 설은 이전 시기에 비해 잦아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도로에 대한 공사가 진행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기존 도로를 확장포장하는 형 태의 공사가 주를 이룬다. 그림 16은 1985년 항공사진에서 확인되는 주요 도로와 1980년대까지 이루어졌던 토지구획정리사업 등의 개발사업지를 플롯트하여 분석한 것 이다. 1980년대의 개발은 특히 토지구획정리와 택지개발 등의 개발은 기 존시가지에 인접한 병영성 주변과 현대중공업이 들어선 동구에서 집중적 이고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으며 이들 지역에 각종 사택들도 입지하고 있 는 것이 확인된다.(동구지역까지 포함한 개발상황은 그림 17 참고) 중구의 경우 울산읍치와 병영성 사이에 위치한 학성공원의 동쪽과 북 쪽으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 지역은 대규모 사택이 먼저 들어선 다 음 비교적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사택들이 울산 곳곳에 건설되고 있는 것 또한 이전과는 다른 특징이다. 1971년 시외버스터미널이 입지한 우정동의 남쪽 태화동 에 토지구획정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교통 결절점의 입지로 인한 지역개발인 것으로 보여진다. 중구 지역 이외에 동구에서도 본격적인 토 지개발사업이 추진되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그림 17 참고) 동구지 역에서도 중구에서와 마찬가지로 토지개발사업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대 량의 사택도 건설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또한 남구 무거동 지역에는 1971년 개교한 울산공과대학에 인접하여 토지개발사업이 진행되었으며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과 인접 42
Part1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그림 16> 1985년 현재의 도로망과 1980년대까지의 토지개발 상황(범례는 그림 17 참고) 하여 사택이 건설됨으로써 울산 서쪽 지역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도로망에 있어서는 앞서 1970년대 진행되었던 염포로(반구동에서 동 구로 진입하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고, 경주방면에서 내려 와 여천방면으로 이어지는 산업로와 신시가지가 연결되는 삼산로가 이 시 기에 개설되었다. 이 시기는 특히 울산의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시행착오가 발생한 시기로 도시계획에서도 다양한 문제점을 재검토하여 구체적 개발 계획 작성을 꾀하는 시기였다. 80년대에 이미 시외버스터미널이 설치된 우정동 일대에 교통 혼잡을 유발하고 있을뿐더러 규모 또한 울산의 인구 규모에 적합하지 않는 등의 문제점을 들어 확장이전에 대한 계획의 수립 43
제 7호 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14) 또한 교통망에 있어 시가지를 관통하고 있는 철도로 인한 도시발전 저 해 문제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철도역 이전 문제 는 비단 울산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1983년의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대한 국토계획학회의 도시와 철도역 이전 이라는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도시 외곽으로 철도역을 옮김에 따라 도심 교통난 해소, 변두리지역의 신시가 지 편입, 철도역 주변 재정비, 철도사고 감소, 시외/고속버스 터미널과의 <그림 17> 1980년대 토지개발사업지구 및 사택지 분포(BaseMap은 2010년 현재 지도) 14) 울산광역시, 전게서(2006), p192, p205 44
Part1 연계개발에 따른 균형발전 등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평가하면서 울산을 비롯한 많은 지방 도시들에서 철도역을 외곽으로 이전해 줄 것을 요구하 고 있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15) 울산의 철도 이전은 1992년 8월 지금의 태 화강역 자리로 이전하면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새롭게 이전되는 울산 역의 경우도 교통결절점으로서의 중심성은 매우 약한 상태로 개발되었다. 이후 1999년 삼산으로 이전된 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 터미널과 약 1.5km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어 이들 시설들이 교통 결절점으로써 상호관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그림 18> 1990년대 토지개발사업지구 및 사택지 분포(BaseMap은 2010년 현재 지도) 15) 매일경제신문, 1983년 10월 25일자 기사 45
제 7호 계를 형성하기에는 거리가 어정쩡하게 설정된 점과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도심 외곽에 위치하고 있는 점 등으로 인해 교통결절점으로서의 역할이 지나치게 약화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1980년대는 공업도시 울산의 도시개발에 있어 큰 전환점 을 맞이하게 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울산이 공업도시로 조성되기 시작한 이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 것이 바로 공해 문제로 이는 지역 주민 들에게 있어서는 생존권과도 연관된 문제이다. 1973년 대법원이 영남화 학에 대해 울산 지역 과수피해주민들에게 320만원을 배상토록 판결한 것 은 공해에 대한 첫 배상판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소송은 근본 적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집단행동과 소송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정부에 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온산공단과 함께 울산지역 환경오염지구 주민 5,950세대, 27,017명을 86년부터 88년까지 3년에 걸쳐 이주시키기로 결 정하였다. 이 결정으로 여천동, 매암동, 부곡동, 황성동, 용연동, 용잠동 등의 7개동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완전 이주시키게 된다. 이들이 이주하게 될 집단이주단지를 삼호, 태화, 다운지구에 1,929,000m2 규모로 조성하 여 단계별로 이주시키게 된다. 16) 이러한 사업진행을 위해 1986년 1월 6일 울산시 이주지원사업소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이주사업은 1990년이 되면 택지개발이 완료되어 도시공간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그림 18 참고) 과거 울산 시가지에서 부산과 언 양으로 이어지는 주요 간선도로가 이어지던 태화동과 삼호 일대를 비롯 해 다운동에 대규모의 택지개발이 진행되었다. 이와 더불어 인접 무거동 에서도 토지개발이 진행되어 급속도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동구에서도 80년대에 이어 대규모의 토지개발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개발이 더디게 진행되던 삼산지역의 토지개발도 1990년대에 들 어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데, 이 시기의 삼산지역 개발은 토지개발 뿐 만 아니라 1997년 주리원백화점 아트리움점이 삼산에 개점하고, 이어 1990년대 말 시외/고속버스 터미널의 이전과 함께 롯데 백화점이 2001년 16) 울산시, 울산시사(1987), pp366-367 46
Part1 에 삼산에 개장하면서 울산의 중심상업이 성남동 일대에서 이곳 삼산으 로 분산되게 된다.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47
제 7호 Ⅵ. 결론 이상과 같이 본 연구를 통해 살펴본 공업도시 울산의 공간적 변화과정 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일제시대의 울산은 그 중심을 울산면에 두고 있으면서 조선시대 까지의 또 하나의 시가지로서 병영성이 도시적 기능을 상실하면서 시가 지로서의 공간적 특성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한편 일제시대에 들어 일본 인들에 의한 어업활동의 활성화로 인하여 장생포항과 방어진항이 급속도 로 성장하였으며, 도시공간적으로는 방어진 지역의 시가지로의 성장이 매 우 급속도로 이루어져 울산면과 병영성이 있던 하상면에 이어 울산지역 에서 세 번째로 큰 인구규모 등 시가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였다. 하지만 방어진 지역의 이러한 시가지화에도 불구하고 울산면 지역 즉 기 존의 중심지와 연결되는 도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는 등 도시시스템적 측면에서 중심지와의 관계성은 약했던 것이 특징이었다. 뿐만 아니라 1940년대를 전후로 하여 울산을 공업도시로 정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케다 스케타다는 울산을 대상으로 인구 50만 공업도시계획을 수립하여 1943년 기공식을 거행하 고 실재 축항공사 등에 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는 원산에 있던 정유공장을 울산에 이전하는 사업을 추진하여 전체 공정의 약 70%까지 진행된 상황에 해방을 맞이하여 공사가 중지되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사업들이 이후 울산이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되는데 적지 않은 역 할을 하게 되었다. 1962년 울산이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되면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도시계 획이 수립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지금의 신정동에서 삼산으로 이어지는 지역이 신시가지로 개발되었다. 특히 이 계획이 이후 울산의 전체적인 도 로망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시기 태화강 남쪽 48
Part1 의 신시가지 지역이 일조나 태화강의 강줄기 등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생 되는 남북방향의 지형축과는 다른 축을 형성하게 된 것은 당시 수립되어 있던 울산역 이전과 그에 따른 철도노선에 의한 축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 구 지역에 있어서도 기존의 울산읍성 및 병영성의 도시축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축을 따르는 토지개발계획이 수립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 는데 이는 이후 진행된 대규모 사택개발에서 이 축에 따라 토지개발이 이 루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처럼 기존의 남북축과는 다른 틀어진 축을 새로운 시가지의 개발축으로 삼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울산의 도시공간 축이 매우 다양하게 섞이게 되었으며, 이들 신개발지들이 공간적으로 퍼져나가 기존의 시가지지역과 만나게 되는 지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그림 19> 울산시 중심부 주요 도시기능 분포도 49
제 7호 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복잡한 도시공간을 형성하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이후 1970년대에는 기존의 도시기능이 분산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된 다. 오랜 기간 울산읍성 지역에서 기능해 왔던 행정기능이 신시가지로 이 전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교통 결절점으로서의 시외버스의 터미널이 기 존 시가지의 외곽지역에 해당하는 우정동 지역으로 이전하는 등 시가지 에 집중되어 있던 다양한 도시기능이 분산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뿐만 아 니라 이 시기는 동구의 방어진 지역과 시가지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정 비되어 일제시대 이후 줄곧 제기되어 오던 시가지와 방어진 지역과의 관 계성이 높아진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토지개발의 측면에서는 아직까 지는 그다지 활발한 개발은 눈에 띄지는 않았다. 남구의 신정동 지역의 개 발과 함께 기존 시가지의 외곽지역인 우정동, 학성동 지역에서 토지개발 이 시작된 시기이다. 이후 1980년대에 들어 비교적 활발한 토지개발이 이루어지는데 특히 중구의 병영성 주변과 방어진 지역에서 대규모 토지개발이 적극적으로 진 행된 시기이다. 뿐만 아니라 1980년대 후반에는 처음으로 공해지역 주민 들의 이주사업이 시행된 시기이다. 이를 위해 태화동, 다운동, 삼호 등에 택지개발사업이 진행되어 1990년대에 들어 그러한 공간적 변화가 나타나 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1990년대에는 삼산지구가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성남동 지역에 입지해 있던 백화점 등을 중심으로 한 상업기능과 함께 시외버스 및 고속버스 등의 교통기능이 삼산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또한 오랫 동안 문제가 되어 오던 철도노선 또한 지금의 장소로 이전되는 등 다양한 도시기능들이 분산되어 울산의 곳곳에 배치되었다. 이처럼 울산은 행정, 상업, 교통, 교육, 문화, 공업 등의 다양한 도시 기능들이 곳곳에 분산되어 배치되는 형태의 공간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는 1970년대 도시계획에서 지향하였던 다핵적 도시 로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목표로 하였던 다핵적 도시구조는 도시의 주요 기능을 분산, 특화하는 이른바 조닝(zoning)개념의 다핵적 도시구조였다. 이는 50
Part1 최근 서울을 비롯한 많은 선진도시들이 지향하고 있는 도심 이외에 도심 적 기능을 수행하는 부도심을 적극적으로 육성하여 다양한 도시기능을 다 양한 부도심에서 수행하는 개념의 다핵적 도시공간구조와는 다르다. 그 런 점에서 지금의 울산은 다양한 기능들이 흩어져 있는 분산적 공간구조 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보다 더 도시로서의 매력을 가진 도시공간 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능들이 분산되어 있는 공간구조가 아니라 다양한 도시적 기능을 가진 부도심을 육성하고 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주는 네트워크를 갖춘 도시시스템으로 정비해야 할 것이다. 공업도시 50년 촌락 에서 산업수도 로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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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울산학연구논총 제 7호 인쇄일 2012년 12월 발행일 2012년 12월 발행인 하동원 발행처 울산발전연구원 부설 울산학연구센터 (683-804) 울산광역시 북구 산업로 915 TEL 052. 283. 7715 FAX. 052. 289. 7227 www.udi.re.kr 인쇄처 주식회사 디자인백미 TEL. 052.700.7002 FAX. 052.700.7003 ISSN 1979-9355 [비매품] c 울산학 연구사업은 울산광역시의 지원을 받아 발간하였습니다.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로이 인용할 수 있으나 무단전제나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