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새국어생활 제11권 제1호(2001년 봄) 서울말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어디를 묻건 대뜸 우리들 입에서 나오는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날망으로 올라 기티로 돌아가 보이소. 날망이 산꼭대 기나 산 능선임을, 기티가 귀퉁이임을 알 턱이 없는 그네들이 무슨 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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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남북 언어 동질성 회복을 위하여 언론의 남북한 언어 동질성 회복 방안 김태식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1. 수굼푸와 날망 좀 무식하면서도 과격한 일화로 얘기를 시작해야겠다. 1980년대 중반 고 등학교 2학년 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 지만 수학여행단을 맞은 당시 현지 여관은 예외없이 대형 가마솥에다가 밥을 지었다. 투숙객이 많아서였겠지만 여관에서는 그 가마솥 밥을 삽으로 펐다. 우리 중 한 명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대단히 기분이 나빠서였는지 삽으로 밥을 퍼다 나르는 여관 종업원을 보고는 이렇게 외쳤다. 수굼푸로 배때지를 쑤시뿔라이. 그 말을 들은 여관 식당 종업원이 경상도 출신이었다면 그런 말 을 내뱉은 우리 무리 중 한 명은 사지가 성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수굼푸가 삽임을, 배때지가 배에 대한 비속어임을, 쑤시뿔라이가 쑤셔 버릴까보다임을 모른 듯 종업원은 다행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것이 재미있어 우리 는 한참을 웃었다. 고교 시절 필자와 친구들에게는 요상한 장난기 하나가 있었는데 그건 길 을 물어오는 외지인들을 골탕 먹이는 재미였다. 이 장난기는 한두 번 시도해 보다가 재미가 붙어 나중에는 종종 써먹곤 했는데 길을 모르는 외지인, 특히

88 새국어생활 제11권 제1호(2001년 봄) 서울말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어디를 묻건 대뜸 우리들 입에서 나오는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날망으로 올라 기티로 돌아가 보이소. 날망이 산꼭대 기나 산 능선임을, 기티가 귀퉁이임을 알 턱이 없는 그네들이 무슨 말인지 몰 라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양이 우리는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한국어나 일본어 어원론을 연구하시는 분은 필자의 고향 경북 김천에서 산을 날망이라 일컫고 있음을 주목해 주시라. 산을 뜻하는 일본어 야마가 날망과 같은 어원이 아닌 가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하기까지 20년 가까이 고향에서 살았 다. 서울 생활이 15년째로 접어들고 있지만 이(빨)를 닦는다 는 말을 아직도 못하고 마치 가재 잡기 위해 도랑을 치듯 이빨을 친다 고 하고, 손(가락)이나 나무 꼬챙이 같은 것으로 피부를 긁어 상처를 내는 행위를 까레빈다 고 하는 필자를 보고 서울 토박이인 집사람은 매양 놀려댄다. 2. 김천말과 서울말, 서울말과 평양말 대학교 때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 살고 있는 출신 학교 친구를 김천시 중에서도 소백산맥 중턱에 있는 필자 집에 데려갔던 적이 몇 번 있다. 그네들 반응은 한결같았다. 학력이라고 해 봐야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가 최고 라고 할 수 있는 우리 동네 어른들이 하는 말은 절반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은 텔레비전이 광범위하게 보급된 지금은 조금 달라졌겠 지만 여기서 한 가지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즉 서울사람들이 하는 말을 우리 동네 어른들은 거개 알아들을 수 있어도 그들이 하는 토박이말을 서울 사람들은 여전히 쉽사리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필자는 묻는다. 필자 고향인 김천말과 이른바 남한 표준어라는 서 울말과의 차이와, 서울말과 북한 표준말, 즉 문화어인 평양말 중 어느 관계가 더 이질적인가? 단언커니와 김천말과 서울말 사이의 괴리가 서울말과 평양말 의 그것보다 더욱 심각하다. 이 둘은 마치도 영어와 프랑스 어 관계와 같다

언론의 남북한 언어 동질성 회복 방안 89 할 만큼 이질적이다. 반면 단어 몇 개, 표현 몇 개를 제외하고는 평양방송을 듣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남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만큼 남한 표준어와 북한 문화 어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실례로 최근 몇 년 동안만 해도 필자가 읽은 북한 원전 책이 족히 100책은 넘을텐데 거기에 쓰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한 경우는 필자가 게을러 사전 찾는 일을 싫 어해서인지는 몰라도, 그 횟수가 얼마 되지는 않는다. 물론 글로 쓴 이른바 문어( 文 語 )체와 실제 말로 하는 구어( 口 語 )체가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 글을 읽으면서 남북한 언어 이질화가 염려보다는 크지 않다는 확신을 갖게 되 었다. 그런데도 많은 언론과 일부 국어학자는 남북한 언어 이질화가 심각한 지 경에 이르렀느니, 혹 이러다가는 언어마저 둘로 갈라지는 게 아닌가라느니 하 는 따위의 극단적인 전망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그러면서 각종 수치를 들이 대며 그 원인은 무엇이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으며 또 그 극복 방안은 무엇 인지 그럴듯한 방안을 내놓고 있다. 국립국어연구원이 지난 1970년대 이후 1990년대까지 북한에서 발간된 장편소설에서 쓰인 어휘를 조사해 지난 1999년 발표한 남북한 언어 이질화 실태를 보자. 여기에 의하면 남한 국어사전에 아예 등장하지 않거나 남북한에 서 공통적으로 쓰이기는 해도 그 뜻이 다른 단어가 2천510개 가량 발견됐다 고 한다. 다른 사례를 보자. 북한 김형직사범대학 러시아 어 교수 출신인 정종남 (69) 통일정책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올해 1월 남한 주민이 알아야 할 북한 어휘 2000개 를 내놓았다. 이것은 지난 1999년에는 북한사람들에게 생소한 한자어 1천700여 개를 소개한 책 남북한 한자 어떻게 다른가 에 이은 정 씨 의 남북한 언어동질성 회복 시리즈 2편이라고 한다. 비단 국립국어연구원이나 정종남 씨 연구 성과 말고도 남북한 언어가 얼 마나 다른지를 사전과 같은 형식으로 출판된 사례가 최근 들어 부쩍 눈에 띄

90 새국어생활 제11권 제1호(2001년 봄) 고 있다. 이는 분명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들 조사를 맡은 사람이나 기관은 이구동성으로 남북 언어 이질화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는 진단을 내리면 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각기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효과를 발휘했음 인지 언론 또한 자주 남북 언어 이질화 문제를 짚고 있다. 3. 언어 이질화 요체는 단어 이질화 언어 이질화 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드러내 준 사건이 지난해 6월에 있 었던 역사적인 남북한 정상회담이었다.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은 평양 을 다녀온 직후 정상회담 기간 북한에 갔을 때 남북한 주민들의 언어 사용 과 표기에 있어서 엄청난 이질감이 있음을 발견했다 고 몇 차례나 강조했다. 이에 덩달아 김대중 대통령 또한 남북한 언어 이질화 극복을 위한 중장기 프 로젝트 개발을 지시하기도 했다. 하기야 남한에 온 북한사람이나, 북한을 다녀온 남한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남북한 언어 이질화의 심각성을 말하고 있으니 정말 이 문제가 심각하기는 한 모양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는 정말로 곰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단을 제대로 해야 치료법이 나올 수 있는 법이다. 어디를 도려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아무 데나 메스를 들이댈 수는 없다. 필자는 북한 원전을 읽은 경험을 들어 남북한 언어 이질화가 염려스럽다 할 만한 수준이 아님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느낌 속에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망각하고 말았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필자가 북한 글을 읽을 때는 통하지 않는 데가 그다지 눈에 띠지 않았으나 필 자는 남한에서 나온 글을 읽거나 남한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는 북한 사람이 되어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남북한 언어이질화 문제의 심각 성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남한사람들은 문장 중에서 가끔씩 튀어나오는 단어 몇 개를 제외하고는 북한 사람들이 하는 말은 대체로 알아듣는데 북한 사람들 은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언론의 남북한 언어 동질성 회복 방안 91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가는 조금 있다가 보기로 하고 우선은 남북한 언 어 이질화 문제를 지적한 지금까지의 조사 성과를 추려 보자. 첫째, 하나같이 단어 차이를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물론 맞춤법과 표기법, 띄어 쓰기도 양념처럼 짚어 넣기도 하나 단어 차이에 비해 이들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맞춤법이 다르다 해서 리완용이 이완용임을, 로동신문이 노동신문임 을, 리익이 이익임을 남한사람들이 모를 리 없고 할 수밖에 없다 를 할수밖에 없다 로 적는다 해서 남한사람들이 기상천외한 다른 뜻으로 받아들일 리 만무 하다. 따라서 현재의 남북한 언어 이질화 문제의 가장 큰 초점은 아무래도 단 어 이질화인 듯 싶다. 둘째, 남북한 단어 이질화가 심각할지언정 그런 차이, 혹은 이질화가 문법으로 크게 확대되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남북한 언어가 정말로 이질적인가 하는 기준으로 문법을 가장 중요한 지표로 삼는다. 문법까지 달라졌거나 혹은 그런 징조가 보인다면 남북한 언어는 정말로 이질 화가 심각한 상태에 돌입한 것이 된다. 하지만 남북한 언어가 문법까지 차이 가 난다는 연구 성과를 필자는 견문이 짧아서인지는 모르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여기서 결론은 하나 뿐이다. 우리가 심각하다고 지금 요란을 떠는 남북한 언어 이질화는 실은 단어 이질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단어 이질화를 남북한 언어 이질화라고 할 수 있는가? 필자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여기서 다시 필자가 처음 꺼낸 얘기로 돌아가자. 남한 표준어라는 서울말 과 필자 고향인 경북 김천말을 비교해 볼 때 단어 이질화는 정말로 심각하다. 정확한 통계가 없어 모르겠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적어도 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단어에서 볼 때 서울말과 김천말 중 절반 가량은 이질적이다. 이 문제를 서울말과 다른 지방말을 비교해도 비슷한 현상이 감지된다. 예컨대 서울말과 제주도말은 판연히 다르다. 또 같은 곳에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의 직업, 나이, 성별 따위에 따라 사용하는 말이 아주 다른 경우가 허다하고 요즘에는 인터넷이나 이를 통한 이른바 컴퓨터 채팅 문화의 발달로 세대 간 단어 차이

92 새국어생활 제11권 제1호(2001년 봄) 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남한말이 이질화되었다고 얘기하 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지방, 직업, 세대, 성별에 따른 언어 특수성을 인정하 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독 남한말과 북한말을 비교해 양쪽 중 한 곳에서는 전 혀 쓰이지 않거나, 양쪽에서 모두 쓰이기는 하지만 뜻이 다르게 쓰이는 말이 수천 개에 이른다고 해서 남북한 언어가 마치 영어와 프랑스 어의 관계나 되 는 것처럼 심각한 이질화 현상을 빚고 있다고 난리법석이다. 따라서 앞서 지적했듯이 남북한 언어 이질화가 적어도 현재까지는 단어 이질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남북한 언어 이질화 문제를 단어 이질화 문제로 국한해 대수롭게 보아 넘기자는 얘기가 결코 아니 다. 그보다는 오히려 작금의 남북한 단어 이질화가 언어 자체의 이질화를 불 러올 만큼 심각한 사태를 빚고 있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다만 남북한 언어 이질화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어 보자는 얘기일 뿐이다. 그런데 단어 이질화는 얼마나 심각한가. 그렇다면 그 구체적인 중요한 증 상은 무엇인가. 정말로 그렇다면 치료법은 이 테두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 4. 외래어와 한자어 남발 필자는 단어 이질화의 더 큰 책임이 남한 쪽에 있다고 생각한다. 주체사 상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짙게 풍기기는 해도 북한의 언어 정책은 첫째, 한문 교육을 하는 가운데서의 한글 전용이며 둘째, 외래어와 한자어에 대한 최대한 의 순화라는 점에서 큰 방향은 제대로 잡고 있다고 본다. 정치적 목적이야 어 떠했든 북한의 언어정책에서 이 두 가지 줄기는 남한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북한 언어정책이 갖는 최대 장점인 동시에 남한에 대 해서는 반면교사와 같은 구실을 한다. 그러면 언어 자체의 이질화라고 일컬을 만큼 남북한 단어 이질화를 부채 질한 최대 적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남한의 무분별한 외래어 도입과 한자어 남용이 그 원흉이라고 필자 또한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남

언론의 남북한 언어 동질성 회복 방안 93 한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공간이나 한국전쟁 무렵 북한으로 넘어간 두 사람의 국어학자 김수경과 류렬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지난해 남북정상 회담 성과에 따라 성사된 그해 8월에 있었던 제1차 이산가족상봉단에 포함돼 반세기만에 서울을 찾았던 류렬은 허웅 한글학회 이사장과 만난 자리에서 서울 글은 외 래어로 난장판이 돼 민족주체성이 전혀 없다 고 일갈했다. 아마도 외래어로 도배질하다시피한 거리 간판에 충격을 받지 않았나 싶다. 지난해 3월 사망한 김수경 또한 우리 삼국시대 언어가 달랐다고 하는 남 한 학계 주장을 신랄히 꼬집어 지난 89년에 출판한 세 나라 시기 언어력사 에 관한 남조선학계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 이란 책에서 남북한 언어 이질화 문제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그 가장 큰 문제점으로 국한문 혼용 과 함께 남한의 무분별한 외래어 도입을 꼽았다. 물론 모든 책임을 남한에 지 우는 데 대한 반론이 있을 수는 있으나 남북한 언어 이질화 문제의 요체가 정 말로 단어 이질화라면 그 가장 큰 독소가 남한의 무분별한 외래어 도입과 한 자어 남용(혹은 국한문 혼용)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는 점에서 김수경과 류 렬의 비판은 되새겨야 한다. 이 때문에 남북한 언어가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지는 국립국어연구원이 한 국어문진흥회와 공동으로 실시해 지난 1999년 12월에 내놓은 북한 주민이 모르는 남한 외래어 조사 를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에 따르면 북한 주민 들은 남한에서는 아주 일반화된 뉴스나 콘돔이라는 단어조차 무엇을 가리키 는지 모른다고 한다. 뉴스나 콘돔처럼 남한에서 흔히 통용되는 외래어 중 북 한 주민이 모르는 단어가 8천284개나 됐다. 이를 거꾸로 뒤집어 보면 남한 언어생활에서 이미 일반화된 외래어가 적어도 8천 개를 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둘 것은 남한의 무분별한 외래어 도입이 남한말 문법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앞서 적어도 지금 심각하다고 이 구동성으로 얘기하는 남북한 언어 이질화가 실은 단어 이질화에 지나지 않는 다고 했으나 외래어의 무분별한 도입이 급기야 남한말 문법에도 영향을 미치 기 시작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단어 이질화보다 이 점이 더 우려할 만한

94 새국어생활 제11권 제1호(2001년 봄) 대목이 아닌가 한다. 문법까지 달라지면 정말로 그 두 개 언어는 이질화 단계 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외래어, 특히 영어가 남한말 문법에 끼치고 있 는 가장 뚜렷한 증거는 생각한다 고 하면 될 것을 생각되어진다 고 하고, 본 다 혹은 보인다 하면 될 것을 굳이 보여진다 느니 하는 따위의 영어식 수동 태 표현이 요즘 들어 부쩍 눈에 띄게 늘고 있다. 5. 민족 주체성을 상실한 남한 언어 한자어 남용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랴. 다른 곳 볼 것 없이 남한 법전을 보면 난수표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요지경과도 같은 한자가 지천으로 깔려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법조계만큼 한자를 좋아하는 분야 로는 고고학계가 있다. 돌칼, 돌도끼 하면 될 것을 굳이 석도( 石 刀 )라느니, 석부( 石 斧 )라고 하는 요상한 말을 즐겨 쓰고 있다. 그런데 가관인 것은 이처 럼 한자를 남발하는 까닭에 대해 고고학계 스스로가 중국과 일본학자들을 염 두에 두기 때문 이라고 한다. 남한 언어정책에 민족 주체성이 없다는 류렬의 지적은 이래서 정당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남북한 언어 소통에 커다란 걸림돌이 될 만한 것으로 남한의 무분별한 외래어 도입과 이에 따른 외래어 문법의 한국어 침투 및 한 자어 남용이라고 압축할 수 있겠다. 이것이 남한의 전적인 책임인가는 다시금 생각해 볼 문제이지만(사실, 책임이라기보다는 이른바 세계화 개방화 산업화 가 가져온 불가항력적인 현상 으로 볼 여지도 얼마든지 있다.) 남북한 언어 이질화 극복을 위한 방안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면 이를 위해 범위를 좁혀 필자에게 주어진 과제인 언론계가 할 수 있는 일은 무 엇인가? 이런 거창한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떠 안은 필자로서는 실로 난감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필자는 굳이 언론이 무슨 거창한 캠페인을 벌 이지 않더라도, 지금처럼 그냥 놔두어도 커다란 문제는 없지 않을까 할 정도

언론의 남북한 언어 동질성 회복 방안 95 로 아주 단순하고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이를 뒤집어 보면 남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언어 이질화 현상을 언론이 나선다고 해서 그 흐름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깔려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필자가 남북한 언어 소통에 가장 큰 걸림돌로 지목한 남한의 무분 별한 외래어 사용만 해도 그렇다. 외래어 사용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한다 해 서 그리 보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프랑스처럼 아예 강력한 모국어 정책을 펼쳐 외래어 사용을 원천적으로, 최소한으로 억제할 수도 없지 않은가. 개인 적인 경험 하나를 말하자면 필자는 요즘 유행가에 영어가 단어 한 두 마디가 아니라 몇 소절씩 들어가는 것을 꼴불견이라 생각하던 차에 언어정책을 맡고 있는 문화관광부 관계자에게 유행가 가사에 영어를 아예 쓰지 못하게 하는 방안은 없겠느냐 고 푸념한 적이 있다. 답변이야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남북한 언어 이질화의 주범인 외래어 남용을 막을 방법이 없을진대 다른 것은 말해서 무엇하랴. 또 무엇보다 남북한 언론 동질성 회복이 남북한 관계, 특히 정치 흐름에 종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언론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 이 원천적으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와 더불어 남한 언론 자체가 남북 한 언어 동질성 회복을 위해 나설 수 있는 주체 중 하나일 수 있는 동시에 그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6. 남한 언론의 두 얼굴 무분별한 외래어 도입, 한자어 남발에 앞장서고 있는 주범이 바로 언론이 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한 언어 동질성 회복을 위해 지금 언론계에서 시급 한 것은 남북한 교열기자들이라도 만나 두 지역 언론의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통일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남한 언론의 자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무 분별한 외래어 도입과 한자어 남발을 자제해야 하고 우리말로 살릴 수 있는 것은 우리말을 써야 한다. 그렇다고 외솔 최현배처럼 비행기 를 날틀 이라고

96 새국어생활 제11권 제1호(2001년 봄) 하고 북한처럼 아이스크림 을 얼음보숭이, 브래지어 를 가슴띠 라 억지로 바 꿀 필요는 없겠지만 석부 ( 石 斧 )는 돌도끼 로, 사료( 思 料 )됨 은 헤아림 으로, 워크아웃 (workout)은 구조조정 정도로 바꿔도 세상이 망하지 않는다. 여기서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즈음해 필자가 몸담고 있는 연합뉴스 를 비롯한 일부 언론이 북한말 상식 이나 북한 토막소식 정도의 이름으로 시 도했거나 시도하고 있는 체제도 그 효율성을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리하게 사전식으로 매일 한 두 마디씩 이른바 북한말을 던져 놓고 그 뜻을 설명하고 그것이 들어간 예문을 제시하는 지금의 행태로는 거기에 기울인 노 력에 비해 그 효과에 대해 필자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왜 그런가? 막무가내식 사전 암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국어사전 갖다 놓고 하루에 하나씩 외우라는 것과 다를 바 없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일쑤다. 흥미를 유발할 수 있고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는 설명이 제시되어야 한 다. 필요하다면 용비어천가 나 두시언해 같은 고전은 물론 각 지역 방언 자료까지 끌어대야 한다. 텔레비전같은 대중매체 퀴즈 프로그램 문제로 자주 나오는 북한말 중에 가시아버지 (장인), 가시집 (처가)이라는 말이 있다. 이 런 말을 남한사람들은 대단히 생경하게 느끼는 듯하나 이들 두 단어에 들어간 가시 는 여자라는 뜻의 순 우리말로 우리 옛 문헌에 종종 등장하는 역사가 아 주 오래됐거니와 비단 북한 지역 뿐만 아니라 지금의 경상도에서도 여자를 흔 히 가시내 로 일컫고 있다. 무턱대고 가시아버지 는 장인, 가시집 은 처가라 고 외우게 할 것이 아니라 이런 어원학적인, 방언학적인 설명까지 있어야 한 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자면 빈사상태를 뜻하는 북한말이 얼죽음 인데 여기서 의 얼 은 틀림없이 얼 빠진 놈이라고 할 때의 얼, 위당 정인보가 민족 정신 을 되찾자고 그토록 부르짖었던 바로 그 얼 일 것이다. 이런 설명을 곁들여야 한다. 이런 방법을 통해 기대하지도 않았던 언어학적인, 어원학적인 성과를 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필자는 북한말 토막 상식 따위와 같은 신문 토막난이나 퀴즈 프로그램 등지에 자주 출제되는 북한말 관련 문제의 효용성을 깎아 내릴 생각

언론의 남북한 언어 동질성 회복 방안 97 은 없다. 다만 이왕 북한말에 대한 상식(혹은 지식)을 늘이고자 할 바에야 기 억에도 오래 남을 수 있고, 국어에 대한 무엇인가 고급 지식 도 아울러 얻을 수 있는 이런 방법들을 생각하자는 뜻이다. 7. 가판대에는 로동신문, 안방에는 평양방송 하지만 남북한 언어 이질화를 극복하고 최소한 한쪽에서 쓰지는 않더라도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함으로써 언어 동질성 회복도 꾀할 수 있는 언론계 방안은 뭐니뭐니 해도 북한 방송(라디오 포함)과 신문을 완전 개방하 는 것이다. 경상도말과 서울말이 서울말 - 평양말 관계보다 더욱 이질적임에 도 의사소통에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교육과 함께 언론, 그 중에 서도 특히 방송이 지닌 위력 때문이다. 남북한 언어 동질성 회복에서 언론이 갖는 최대의 효용성은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방송만큼 언어의 거리를 좁혀 주는 수단을 찾기는 힘들다. 요즘은 컴퓨터와 인터넷이 전국 언어권을 하나로 묶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볼 때 아직은 여기 에서 남북한 언어 동질화의 구실을 기대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한다. 물론 북한 방송과 신문의 완전 개방은 여러 걸림돌이 따른다. 또 언론 자 체만의 논리로는 이런 거창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당연히 정치적 결단 이 있어야 한다. 북한이 남한 언론에 대한 개방을 하리라는 기대는 당분간 요 원한 이상, 남한만이라도 북한 언론을 완전 개방해야 한다. 지하철 신문 가판 대에서 스포츠신문과 나란히 선 로동신문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KBS, MBC, SBS와 더불어 평양방송도 안방에서 청취할 수 있어야 한다. 요즘 일부 방송이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북한 방송 프로그램을 짜깁기해 방영하고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언론에 대해 남북한 언어 동질성 회복을 기대 할 수는 없다. 북한 언론이 남한에서는 안 쓰는 말을, 같이 쓰이기는 해도 뜻 이 다른 낱말을 구사한다 한들 어떤가. 그보다 더욱 격차가 큰 서울말과 경상 도말도 통하는데 몇 개 단어가 틀리다고 해서 대수는 아닐 것이다.

98 새국어생활 제11권 제1호(2001년 봄) 이런 점에서 필자는 남북 언어이질화 문제에 관해 낙관적인 생각을 지니 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은 아니라 해도, 언제인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 으나 조만간 북한 언론에 대한 완전 개방이 이뤄지고 남쪽 언론의 평양특파원 파견도 가능하리라 예상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앞당기기 위해 우리 언론 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를 위해 그 사전 행동으로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성과 중 하나로 성사된 남북한 언론인 만남과 같은 자리가 자주 있어야 한다. 자주 머리를 맞대어야 하다 못해 띄어쓰기 단일안이라도 마련할 게 아닌가. 8.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의 동질성 회복 다만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다고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남북한 언어 동질성 회복이 어느 한쪽 말을 일방적으로 말살하는 쪽으로 가지 않았으면 하는 기우 를 한다. 다른 나라 경우는 어떠한지 모르나 필자 개인적으로는 남한과 북한 공히 언어 정책 중 가장 큰 실패작으로 표준어 규정을 든다. 언어 그 자체는 어느 것이 더 존귀하고 더 열등할 수 없다. 서울말이 남한 표준어로 된 것은 서울말이 남한지역 다른 지역말보다 월등히 우수해서가 아니다. 국제사회에 서 영어가 요지부동의 국제어로 통용되는 것도 영어가 한국어나 일본어, 중국 어, 프랑스 어보다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북한이나 남한은 모두 평양말 서울말을 표준어로 설 정함으로써 의도했건 아니했건 다른 지역말은 말살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서 울에서는 서울말을 쓰고 평양에서는 평양말을 쓰는 게 당연하다. 광주에서, 대구에서, 대전에서 서울말이, 혹은 평양말이 표준어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언론은 통일시대를 대비해 표준어 규정 폐지에 앞장서야 한다. 언뜻 필자의 이런 말이 남북한 언어 동질성 회복과는 모순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단언 커니와 동질성 회복이 곧 언어의 획일성을 말하지는 않는다. 언어의 획일성은 로봇 인간을 양산할 뿐이다. 오히려 언어의 동질성 회복은 그 다양성을 인정 하는 데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