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북한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과 청년동맹 김종수(인제대 통일학연구소) -목 차 - 제1장 서론 제2장 청년동맹의 성격과 역할 1절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대중정치조직 2절 혁명위업 계승을 위한 수령의 전위대 돌격대 제3장 김일성-김정일 권력승계와 사로청 역할 1절 계속혁명 담론 형성과 확산 2절 김정일의 친위대 역할:신진간부의 부상과 3대혁명소조운동 제4장 포스트 김정일 체제와 청년동맹 1절 김정일 후계체제 현황 2절 김정은 체제 구축과 청년동맹의 역할 제5장 결론 제1장 서론 2010년 9월 28일 제3차 조선노동당 대표자회 개최 결과 김정일 총비서의 3 남 김정은이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대표자회 를 계기로 김정일-김정은 부자권력 승계가 본격 가동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이는 북한 매체가 2010년 9월에 있은 노동당 대표자회의는 주체혁 명 위업계승의 일관성,영도의 중심의 공고성을 과시하고 그를 더욱 공고히 담보할 수 있는 근본 조건을 마련한 역사적 계기 라고 평가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 그 이후 김정은에 대한 우상화 흔적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는데,북한 조 선중앙TV가 방송한 다큐멘터리 영화 '민족 최대의 명절 2월 16일'을 통해서 1) 주체혁명 위업에 대한 영도의 계승문제를 정확히 이해할데 대하여, 우리민족끼리 (www.uriminzokkiri.co m)
- 2 - 도 알 수 있다.이 방송물에서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일 동지와 존경하 는 김정은 대장 동지를 위하여 한목숨 바쳐 싸우자 라는 우상화 구호가 등 장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군부대 공연 장면에서는 김정은에 대한 첫 찬양 가요인 '발걸음'연주와 합창 모습이 포착됐고 북한 여성들의 수예작품을 소 개하는 장면에서는 '발걸음'의 가사를 수놓은 작품도 등장했다.김정일 위원 장과 김정은의 이름을 함께 놓고 충성을 강조함으로써 세습을 위한 분위기 조성 노력이 진행 중 임을 확인할 수 있다. 2) 제3차 당 대표자회에서는 규약 개정도 실시하였는데,개정 내용 중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가 당과 근로단체 관계에 대한 규정 부분이다.개정 규약 제 9장 당과 근로단체에서는 근로단체의 기본적인 위상과 역할에 대해 대중적 정치조직이며 사상교양 단체 이며, 당의 외곽단체이고 당과 대중을 연결시 키는 인전대이며 당의 믿음직한 방조자 로 규정하고 있다.여기에 청년동맹 은 세대적 특성을 반영하여 주체적인 청년조직이며 주체혁명 선군혁명의 대를 이어 나갈 당의 정치적 후비대 로 규정한 부분이 주목받는데,이는 1980년 당 규약보다 개정된 규약이 청년동맹의 기능과 역할을 더 세밀히 규 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이는 최근 북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권력승계에 있어 근로단체,특히 청년동맹의 역할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 는 사례이다. 북한에서는 청년문제를 혁명과 건설의 성패와 민족의 장래운명을 좌우하 는 중대한 문제 로 규정한다.궁극적으로 청년운동의 본질은 청년들을 부강 조국 건설의 담당자,혁명의 계승자로 키우는 문제라는 것이다. 3) 오늘날 북 한은 청년들에게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기 위한 총공격전에서 선봉대,돌격 대가 되어야 한다 고 독려한다. 4) 청년들은 사회의 가장 활력 있는 부대이며 부강조국건설의 돌격대로서,시대의 선구자가 되어 강성대국 건설에 앞장 서 야 할 세대 로 요구된다.특히 계승의 시대 를 맞이하고 있는 북한에서 청년 조직인 청년동맹을 발전시키고 청년들의 역할을 높이는 것은 주체혁명 위업 의 계승 완성 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전략적 방침이 되고 있다. 5) 본 논문에서는 2010년 9월 당대표자회 후 김정은으로의 후계 구축 상황을 김일성-김정일의 권력 승계 과정에서 나타난 청년동맹의 변화와 비교 분석하 여 포스트 김정일 체제의 형성 정도를 평가하고자 한다.본 논문은 북한 권 2) 北 김정은 '구호'에도 등장 우상화 본격화, 연합뉴스, 2011년 5월 11일. 3) 선군청년전위의 대부대를 가지고 있는 우리 혁명의 전도는 양양하다, 로동신문, 2010년 8월 27일. 4) 강성대국 건설에서 선군청년전위의 전투적 기개를 높이 떨치자, 로동신문, 2009년 8월 28일. 5) 오늘의 총공격전에서 조선청년들의 영웅적기개를 남김없이 떨치자, 로동신문, 2008년 8월 28일.
- 3 - 력승계의 역사적 경험 과정에서 청년동맹의 역할을 분석하여 김정일의 후계 체제 형성 과정에서 청년동맹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전망하고 포스트 김 정일 체제 구축 과정의 이해를 한 단계 제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논문의 연구 범위는 김일성-김정일 권력승계가 이루어진 1970년대부터 김정일 이후 후계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2011년 현재까지다.이 연구는 북 한 후계자론과 청년동맹의 활동을 파악할 수 있는 원전 문헌에 대한 분석 을 기본으로 한다.김일성-김정일 권력승계 조건,과정,결과 등과 김정일 후 계구도의 조건 등과 비교하는 비교연구 방법도 활용한다.또한 1970년대 북 한 권력승계의 인과적 법칙이 김정일 후계구도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는 역 사구조적접근방법을 활용한다. 이 논문은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후계문제에 대한 분석 연구로서 북한 궁 중 정치 의 내밀한 부분까지 접근하기 어려운 현실적 조건으로 인하여 한계 를 지닌다.한정된 정보가 제공되는 상황에서 공급된 정보의 진위 여부에 대 한 판단도 매우 어려운 문제임을 밝힌다.
- 4 - 제2장 청년동맹의 성격과 역할 1절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대중정치조직 조선로동당 규약에서는 청년동맹은 주체적인 청년조직이며 주체혁명 선군 혁명의 대를 이어 나갈 당의 정치적 후비대 로 규정하고 있다. 6) 청년 사업은 혁명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업이다.청년들은 주체혁명위업의 계승자 이다.북한은 혁명의 핵심인 간부와 당원도 청년들 속에서 나오고 지식인 후 비도 청년들 속에서 나온다고 본다.따라서 청년사업을 잘 하지 못하면 청년 들을 혁명의 계승자 로 키울 수 없으며 이것은 곧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의미하게 된다. 7) 청년동맹의 조직생활은 청년동맹원들을 혁명가로 키우는 것이며,이 과정을 통하여 단련된 우수한 청년들을 당에 받아들여 당의 양적,질적 확대를 도모 하는 것이다.청년들이 청년동맹 조직에 들어옴으로써 실제적인 정치활동에 참가하며,정치사상교양을 받고 조직적 단련을 통하여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수령에게 충직한 혁명전사 로 자라나게 된다고 강조한다. 8) 북한의 청년동맹은 근로단체의 하나로,김정일의 청년중시정치 에 따라 당, 군과 함께 체제유지를 위한 3대 보루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즉 당은 혁 명위업의 향도자 이고,군대는 당의 위업의 수호자 이며,청년동맹은 혁명위 업의 계승자 라는 도식을 내세워 청년동맹을 당과 군대 다음으로 중시하고 있다. 9) 북한은 근로단체의 성격을 크게 3가지로 설명한다.먼저 근로단체는 대중적 정치조직이며 사상교양단체이다.당이 근로단체를 조직하는 것은 광범한 대 중을 자기 주변에 묶어 인민대중에 대한 당의 영도적 지위를 확립하며 혁명 의 주체를 튼튼히 꾸리기 위해서이다.근로단체는 동맹원들을 혁명적으로 교 양하고 정치적으로 각성시켜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만들고 당과 수령의 주변 에 묶어세우며 그들을 당의 혁명노선과 정책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로 조 직 동원하는 사상교양단체,정치적 조직이다. 따라서 북한 청년동맹도 대중정치조직이다.북한은 청년동맹에 대해 위대 한 수령님께서 창건하시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령도하시는 주체형의 혁명적 청년조직이며,사회주의,공산주의 건설을 자기의 투쟁목적으로 하고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주의적 근로청년들로 구성된 청년들의 공산주의적 6) 조선로동당 규약 (2010년 9월 28일), 제56조. 7) 김정일, 청년들과의 사업에 힘을 넣을데 대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과 한 담화, 1993년 2월 26일), 김정일 선집 13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8), p. 337. 8) 사로청원들이 조직생활에 대한 높은 긍지와 영예감을 갖도록 교양하자, 로동청년, 1969년 12월 6일. 9) 이종석,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서울: 역사비평사, 2001), pp. 13~15.
- 5 - 대중단체 라고 규정하고 있다. 10) 청년동맹은 만 14~30세의 북한의 모든 청년 들이 가입하여 동맹원 수가 500만 명이 된다.여기에 소년단원 300만 명까지 포함하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양적 측면에서 중요한 위상 을 차지한다. 11) 북한 근로단체 중 조선직업총동맹은 약 160만명,조선농업근 로자동맹은 약 130만 명,조선민주여성동맹은 약 20만 명의 맹원이 있는 것 으로 추정되는데 12),이들 세 개 단체의 맹원수를 다 합쳐도 청년동맹의 맹원 수보다 적다.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조선노동당원도 약 322만 명 정도로 추 정하고 있기에 청년동맹이 북한의 최대 정치조직임을 알 수 있다. 청년동맹은 사상교양단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청년동맹이 사상교양단체 로 현재 청년들에게 실시하고 있는 사상교양에는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 혁명교양,계급교양,사회주의애국주의교양,공산주의도덕교양 등이 있다.현 재 청년동맹이 실시하고 있는 사상교양은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 교양 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냉전시대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이 실시했던 사상교양과 대동소이하다.충실성 교양을 통해 혁명의 주체에서 수령이 차지하는 역할 과 영도의 현명성을 깊이 체득할 수 있으며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혁 명적 신념과 의리로 간직할 수 있다 고 설명한다. 13) 1981년 사로청 규약에서 는 청년동맹원들이 김일성동지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를 깊이 연구학습하 여 조선로동당의 혁명전통으로 튼튼히 무장하며 그것을 옹호고수하고 사업 과 생활에 철저히 구현해 나가야 한다 고 지적하고 있는데,김일성의 사망과 함께 김정일의 혁명역사 및 문헌에 대한 연구학습이 더욱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4) <표 1> 시기별 청년동맹 교양 내용 구 분 교양사업 및 활동 내용 국가건설기 전쟁과 전후복구기 -정부 수립의 해설대 역할 -민주사상 교양 및 과학적 선진 이론 교양 -전쟁에 총동원,후방에서는 빨치산 지원,선전사업 전개 -전선원호운동,군기헌납운동 전개 -산업화에 따른 청년들의 농촌 배치 10) 박정렬,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규약해설 (평양: 금성청년출판사, 1994), p. 7. 11) 김종수, 북한 청년동맹 연구 (서울: 한울, 2008), p. 15. 12) 정성장, 현대 북한의 정치 (서울: 한울, 2011), p. 398. 13) 김정일, 일군들속에서 혁명적수령관을 튼튼히 세울데 대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선전부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1988년 8월 23일), 김정일 선집 9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7), p. 280. 14) 세종연구소, 조선로동당의 외곽단체 (서울: 한울, 2004), p. 58.
- 6 - 권력승계기 체제위기기 - 김일성 혁명활동 약력 통달운동 등을 통한 유일사상체계 확립 노력 - 계속혁명 담론의 형성과 확산 -자본주의 사상 침투에 대한 경각심 고양을 위한 우리식사회주 의, 붉은기 사상 등을 강조 - 혁명적군인정신 전파자 역할 수행 - 청년중시 담론 유포와 정책 전개 -김정일 이후 권력승계를 대비한 계속혁명 담론의 확산 자료:김종수, 북한 청년동맹 연구,p.415을 재작성 두 번째 근로단체는 당의 외곽단체이며 인전대이다.당의 외곽단체로서의 근로단체는 당을 조직사상적으로 옹위하며 당의 영도적 역할을 보장하는 기 능을 수행한다.김일성은 복숭아씨를 당이라고 하면 거기에 붙어있는 살을 근로단체 로 비유하였다. 복숭아가 잘 크고 맛있게 익어야 안에 있는 씨가 잘 보호되고 실속 있게 여무는 것처럼 근로단체들이 일을 잘 해야 대중을 당의 주위에 튼튼히 묶어세울 수 있으며 당을 힘 있는 당으로 만들 수 있 다 고 강조하였다. 15) 근로단체는 자기 활동을 통하여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을 당의 주변에 묶 어세움으로써 당의 대중적 기반을 튼튼히 다지고 당과 대중과의 연계를 보 장하며 당으로 하여금 인민대중의 조직적 단결의 힘을 체현한 위력한 당으 로 만든다.당과 대중과의 연계는 인전대인 정부와 근로단체들을 통하여 실 현된다.국가정권은 가장 포괄적인 인전대로서 당의 영도 밑에 자기의 주권 적 및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는 과정을 통하여 당과 인민들을 연결시킨다면 근로단체는 당의 영도 밑에 자기의 조직사상적 활동을 통하여 각계각층의 근로자들을 당과 연결시킨다.북한 근로단체는 계층별,연령별,성별,직업별 에 따라 조직되는데,청년동맹은 청년들 속에서 사상교양과 조직생활을 강화 하여 자라나는 모든 새세대 청년들을 수령에게 충실한 혁명투사로 키우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셋째 근로단체는 당의 방조자( 傍 助 者 )이며 후비대이다.이는 근로단체들이 당의 위업,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에서 당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며 당의 위업,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해 나가는 정치적 조직 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근로단체들은 동맹조직들을 당을 둘러싸고 있는 위성 조직들로,방패의 대오로 만들고 당을 견결히 보위한다.혁명의 핵심역량인 노동계급을 망라하고 있는 직업동맹과 사회의 가장 활력 있는 역량인 청년 15) 사회과학원, 정치용어사전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70), p. 75.
- 7 - 들을 망라하고 있는 청년동맹은 당을 정치사상적으로 옹호보위하는데서 돌 격대,결사대의 역할을 담당 수행한다. 16) 당의 정치적 후비대라는 것은 당대렬을 끊임없이 보충해주는 저수지이기 때문이다.또한 당과 국가 간부의 후비를 길러내는 원천지이기 때문이다. 청년동맹은 전망성 있는 좋은 청년들로 청년동맹 간부대렬을 튼튼히 꾸리고 그들을 당 및 국가 간부 후비로 키운다. 17) 특별히 청년동맹은 청년조직이라 는 특성으로 인해 예비 당원 배출의 가장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인재 양성소 가 된다.따라서 청년동맹은 여타의 근로단체들보다 강도 높은 규율과 당성 을 청년동맹원에게 요구하고 있다. 18) 16) 김종수, 북한 청년동맹 연구, pp. 32~33. 17) 박정렬,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규약해설, p. 8. 18) 이온죽 이인정,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과 조선민주녀성동맹 (서울: 서울대 출판문화원, 2010), p. 88.
- 8-2절 혁명위업 계승을 위한 수령의 전위대 돌격대 청년동맹은 북한체제를 수호하는 데 있어 수령의 전위대 돌격대 역할을 수 행한다.전위대는 일정한 사회적 집단이나 계급의 앞장에 서서 투쟁의 앞길 을 헤쳐 나가는 선도적이며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집단이나 조직 으로 정의 할 수 있다. 19) 북한 청년들에게 전위대 역할을 부여한 것은 청년들이 투철한 혁명의식과 수령관 으로 무장하여 위기 상황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이다.돌격대라고 하는 것은 어떤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서 기한의 단축,조 직력의 과시,규율 확립을 통해 당의 정책적 요구를 관철 하는 역할을 의미 한다. 20) 청년들의 전위적 역할은 궁극적으로 당 정책의 철저한 옹호자,실천 자가 되는 것이며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선봉대,돌격대가 되는 것이다. 21) 당의 전위대가 된다는 것은 당과 수령,사회주의 위업을 앞장에서 옹호보위 하고 당과 수령의 영도를 충성으로 받들어나가며 당의 노선과 정책을 관철 해 나가는 것이며,당의 혁명사상과 주체사상을 옹호하며 당과 수령을 앞장 에서 목숨으로 옹호보위하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청년들이 당의 노선과 정 책 관철에서 어렵고 힘든 부문을 맡아 무조건 수행하는 선봉대,돌격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22) 청년동맹이 체제 수호의 전위대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선결 과제가 있다.첫째는 사상교양단체로서의 자기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청년들 이 수령결사옹위 정신을 철저히 체득하는 것이다.두 번째는 당의 후비대 로서 훌륭한 간부를 양성해야 하는 것이다.청년동맹 사상사업의 목표는 청 년들이 김정일의 선군사상과 영도를 받아 그것을 전위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즉 수령결사옹위 정신을 청년동맹의 제일생명 으로 여기고 실천하는 것이 다. 23)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자본주의 자유화 바람 물들지 않고 당의 전위대 역할을 다 하기 위해서는 사상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북한 청년들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가 경제건설에 동원되는 것이다.북한 에서는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과 자질로 인해 사회주의건설 사 업을 펼칠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 한 특징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혈기왕성하고 용감하며 피곤과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청년들의 고유한 특징이다.청년들은 또한 큰 19) 사회과학출판사, 조선말대사전 2(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92), 163쪽. 20) 최봉대, 북한의 속도전청년돌격대와 체제유지 기제, 경제와 사회 49호(2001), p. 12. 21) 김종수, 8 28 청년절 을 통해 본 북의 청년세대, 민족21 2005년 9월호, 86쪽. 22) 박정렬,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규약해설, p. 9. 23) 청년들은 위대한 김정일동지의 선군영도를 받드는 결사대, 로동신문, 2002년 3월 21일.
- 9 - 담력과 투쟁력,무궁무진한 힘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청년들은 이와 같은 튼튼한 육체적 준비와 훌륭한 기질,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여 자연과 사회개조의 선구자,가장 적극적인 담당자로 되고 있으며 혁명역량 가운데 생기있고 전투력 있는 부대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24) 경제건설에 청년들 이 헌신함으로써 북한체제를 안정화시키고 이를 통해 혁명위업 을 계승한다 는 것이다. 북한 청년들에 대한 동원 정책은 1945년 해방 후 일관되게 지속되어 온 정 책이다.해방 후 북한은 사회체제 개혁을 통해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고 자립 적 민족경제의 토대를 구축하며 공업생산량을 복구하여 해방 전 생산 수준 에 도달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이러한 상황은 우 선 활용 가능한 방법인 노동력의 집중적 활용으로 옮겨갔으며 파괴된 인민 경제를 하루빨리 복구 발전시켜야 할 어렵고 절박한 과업의 성과적 해결 은 혈기왕성한 청년들을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25) 북한 청년들의 경제건설에서의 역할 강화는 김정일 후계체제 확립과 연관 되어 있다.김정일은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는 역사적 진군이 개시된 1970년대에 새로운 높은 단계에 올라선 혁명발전의 요구에 맞게 청년돌격대 운동을 적극화 하기 위해 속도전청년돌격대를 1975년 5월 16일 창립하였다. 속도전청년돌격대가 창립된 1975년은 북한정치사에 있어 격동 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이 시기는 1967년 당 제4기 1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북한에서 유일체제 형성이 가속화되고 있던 시기로,유일체제 형성과 수령의 후계를 위해서 사회 변화에 민감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청년세대에 대한 통제 또 한 필요했던 시기로 파악할 수 있다. 속도전청년돌격대 는 청년운동의 전통인 돌격대 와 김정일이 창조한 대중 운동 방식인 속도전 의 결합이다.즉 속도전청년돌격대는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어떤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서 기한의 단축,조직력의 과시,규율 확립 을 통해 당의 정책적 요구를 관철 하는 돌격대 와 최단 기간 내에 양적으 로나 질적으로 최상의 성과를 이룩하는 속도전 이 결합한 것이다. 청년돌격대가 속도전청년돌격대 로 변화하게 된 배경과 의미를 크게 3가지 로 살펴볼 수 있다.첫째,청년들의 노력동원의 일상화,전투화 확립이다. 1970년대 북한의 사회주의대건설 이란 목표 달성을 위해 모든 역량을 총동 원하여 사업을 최대한 빨리 밀고 나가는 속도전 이 나오게 된 것이다.둘째, 비핵심 청년들에 조직적 통제수단으로 청년돌격대를 상설화하여 엄격한 규 율로 이들의 생활을 통제함으로써 체제 순응적 청년으로 육성하겠다는 의도 24) 손기학, 청년들은 사회주의건설의 선봉대, 돌격대, 근로자 534호(1986), p. 39. 25) 김종수, 북한 속도전청년돌격대 에 관한 연구, 동아연구 제53집(2007), p. 360.
- 10 - 였다.기존 청년돌격대원들이 임시라는 생각을 갖게 되어 청년돌격대에게 주 어지는 경제건설 임무는 어느 정도 성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지만,청년들의 정치사상생활,도덕생활에서의 성장은 이루기 힘들다고 판단하였다.이러한 문제인식에 의해 청년돌격대는 한 사업이 끝나도 해산하지 않고 계속 유지 되면서 군대와 같은 정규화된 조직체계로 운영되는 청년돌격대를 결성한 것 이다.셋째,김일성-김정일 권력승계에서 김정일의 대중지도력 확보를 위해 청년들의 조직적 활용이라는 필요해 의해 조직되었다. 26) 결국 북한은 청년들에게 3D(Dificult,Dangerous,Dirty;북한식 표현으로는 어렵고 힘든 부문 )업종으로 진출할 것을 독려하기 위한 정치적 자극의 한 형태로 속도전청년돌격대 라고 볼 수 있다.이에 동요계층의 청년들을 집단 적으로 통제하고 교육함과 동시에 경제적 실익도 추구하는 속도전청년돌격 대를 건설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26) 위의 글, pp. 362~363.
- 11 - 제3장 김일성-김정일 권력승계와 사로청 역할 1절 계속혁명 담론 형성과 확산 1 계승혁명 담론 북한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적으로 부상한 것은 1974년 2월 당 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이다.김정일은 1964년 김일성종합대학 졸 업 후 고민 끝에 조선민주청년동맹에서 활동하려 했으나 김일성의 지시로 당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그 이후 1970년 9월 당 중앙위원회 부부장, 1973년 7월부터 부장,그 해 9월부터는 비서로 승승장구했다. 북한에서는 1967년 5월 당 중앙위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가 유일사상체계 를 형성하였다.북한은 이 회의를 당 안에 숨어있던 부르조아 및 수정주의 분자들의 반당 반혁명적 정체가 드러났으며,이 음모를 짓부수기 위한 단호 한 조치를 취하였으며 그 여독을 철저히 청산하고 당원들을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으로 확고히 무장시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기 위한 투쟁을 강 조 한 회의로 평가하고 있다. 27) 이를 계기로 사로청도 반당반혁명종파분자 들의 죄행의 본질과 사상적 근원 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게 되 었다. 1967년 12월 개최된 사로청 중앙위 제8차 전원회의에서는 수령의 사상의지 대로 사고하고 행동 하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과 이를 위해 김일성의 교 시와 노작,혁명역사와 혁명전통,사회주의적 애국주의 교양 사업을 철저히 할 것,사로청안의 규율을 강화하여 부르조아 사상,수정주의,사대주의,교 조주의를 척결할 것을 결의하였다.따라서 사로청에서도 유일사상체계 확립 을 위해 전사로청원들에 대한 사상 교육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그 후 1970년 당 5차 대회를 앞두고 청년동맹은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해 김일성 혁명활동 약력 통달운동을 전동맹적으로 실시하였다. 북한의 권력승계 담론이 처음으로 유포된 것은 1971년 6월에 개최된 조선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6차 대회가 계기가 되었다.이 대회에서 김일성은 청 년들은 대를 이어 혁명을 계속하여야 한다 는 연설을 하였다. 청년들은 우리 혁명위업의 계승자들입니다. 혁명은 계속되며 세대는 끊임없이 바뀌여집니다.혁명의 과녁은 변하지 않았는데 세대는 바뀌여 벌 27)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당력사연구소, 조선로동당략사 2(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서울: 돌베개, 1989 재발간), pp. 216~217.
- 12 - 써 해방 후 자라난 세대들이 우리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등장하고 있습니 다.자라나는 새세대들이 혁명을 계속하여야만 혁명의 대를 이어나갈 수 있 으며 우리의 성스러운 혁명위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28) 김일성은 이 연설을 통해 계속혁명 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새시대 의 주역인 청년들이 혁명정신을 철저히 체득할 것을 강조하였다.이는 자연 스럽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이다. 대를 이어 라는 표현에서 후계자가 수령의 다음 대에서 선출되어야 한 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북한 언론과 선전매체들은 아버지가 개척하고 미처 완수하지 못한 혁명위 업을 아들이 대를 이어 끝까지 완성하여 부모가 개척한 혁명의 종국적 승리 를 이룩해야 한다 며 혁명의 세습을 강조하였다. 29) 이 연설 후 당 조직과 청 년동맹은 후계문제를 혁명의 전도와 운명을 결정할 사활적 문제라고 선전 사업을 시작하였다. 30) 청년동맹 전 조직이 김일성의 연설 청년들은 대를 이어 혁명을 계속하여야 한다 의 통달 사업을 전개하였다.김일성의 연설문에 대해 청년운동에 관한 혁명이론을 가장 높은 단계로 완성하신 불후의 혁명적 문헌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종국적 이룩할 때까지 공산주의청년운동이 확고히 틀어쥐고 나 가야 할 휘황한 홰불이며 강위력한 무기 라고 선전하였다. 31) 이에 1971년 7월 29일 사로청 중앙위원회에서는 사로청 6차 대회에서 한 김일성 연설문은 사로청 간부와 맹원들이,조선소년단 창립 25주년 기념 김 일성 축하문은 사로청 및 소년단 간부와 소년단원들이 통달할 것을 결정하 였다. 32) 또한 연설문을 전체 청년들이 체득하기 위해 연구토론회와 학습 모 임이 전 사로청 조직에서 시행되었다. 33) 북한의 계속혁명 의 본질적 내용은 여러 단계의 혁명과업을 연이어 수행해 나간다는 것과 궁극적으로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할 때까지 혁명을 끊임없이 계속해 나간다는 것이다.혁명의 한 단계 과업을 수행한 즉시 지체 없이 다 음 단계 과업에 진입함으로써 단계와 단계 사이의 시간적인 연속성을 보장 28) 김일성, 청년들은 대를 이어 혁명을 계속하여야 한다. (1971년 6월 24일), 조선중앙통신사, 조선중앙연감 1972 (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72), pp. 19~20. 29) 신경완, 곁에서 본 김정일 (상), 월간중앙 1991년 6월호, p. 366. 30) 송정호, 북한 권력승계문제의 쟁점과 전망, 경남대 북한대학원, 현대북한연구 7권 3호(2005), p. 21. 31) 경애하는 수령님께 충직한 근위대, 결사대답게 청년들은 혁명의 대를 빛나게 이어나가자!, 로동청년, 1971년 9월 4일. 32) 위대한 수령 김일성원수님께서 사로청 6차대회에서 하신 연설을 사로청 일군과 사로청원들, 조선소년단 창 립 스무다섯돐에 즈음하여 소년단원들에게 보내신 축하문을 사로청 및 소년단 지도일군들과 소년단원들이 통 달할 것을 결정, 로동청년, 1971년 7월 29일. 33) 공산주의청년운동의 앞길을 밝혀주는 위대한 강령적 문헌, 로동청년, 1971년 10월 3일.
- 13 - 해야 하며,원칙성과 일관성을 고수하고 계승하여 혁명을 끊임없이 진전시켜 야 한다는 것이다.이러한 계속혁명은 북한이 인민대중의 자주성이 완전히 실현되는 인류의 이상사회 라고 생각하는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할 때까지 해 야 한다는 것이다. 34) 2 후계자론 북한 권력승계에 있어 핵심이론인 후계자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후계자 론은 김정일로의 권력승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이다.북한의 수 령과 수령의 후계자 논의는 궁극적으로 주체사상의 사회역사적 원리에서 지 도와 대중의 관계에 대한 이론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다.북한 주체사상의 사회역사적 원리는 지도와 대중의 결합은 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체로서의 지 위를 차지하고 역할을 다하기 위한 근본요구임을 밝히고 있다.또한 사회역 사적 원리는 혁명운동,공산주의 운동에서 지도문제의 본질이 인민대중에 대 한 당과 수령의 영도문제라는 것을 천명하고 수령의 지위와 역할을 과학적 으로 해명한 이론이라 선전한다. 35) 특히 북한의 후계자론은 수령의 대를 잇 는 문제를 이론화한 것으로,혁명적 수령관에서 파생된 이론이다.즉 후계자 론은 혁명적 수령관이 낳은 파생물로,독자적 이론영역이라기보다 혁명적 수 령관의 종속개념으로 파악된다. 36) 북한 유일지도체계의 이론적 기초로서 혁명적 수령관 은 혁명투쟁에서 수 령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 을 규정하고 있다.수령은 인민대중의 최고 뇌 수이며 통일단결의 중심이며 자주성을 위한 혁명투쟁의 최고 영도자 이다. 즉 혁명적 수령관 의 핵심은 수령 당 대중이라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 에서 인민대중에 대한 수령의 지도를 규정하는 것이다. 37) 수령은 단결과 영 도의 중심으로서 인민대중의 운명을 개척하는데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인민대중에게 혁명적 수령관 을 확립하고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제일생명으로 간직하는 주체형의 공산주의 혁명가 가 되어야 한다 고 강요한다. 주체형의 공산주의 혁명가 들은 오직 당과 수령의 영도 밑에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로 굳게 뭉쳐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공 동 위업에 몸 바쳐 투쟁하는데서 참다운 삶의 보람과 행복을 체험 하게 되 며,이것은 곧 혁명적 수령관이 북한 주민의 인생관의 핵이라는 주장으로 이 34) 함치영, 계속혁명에 관한 주체적 리해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92), pp. 31~35. 35) 사회과학출판사, 주체사상 총서 2: 주체사상의 사회역사원리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2; 서울: 백산서당, 1989 재발간), p. 188. 36) 이종석, 조선로동당 연구 (서울: 역사비평사, 1995), p. 121. 37) 위의 책, pp. 101~102.
- 14 - 어지게 되는 것이다. 38) 수령의 후계자 문제는 혁명위업 계승문제와 직결된 것이다.수령의 영도적 지위와 역할은 그 후계자에 의해 변함없이 계승해야 할 문제이다. 당의 위업을 계승해 나가는데서 기본은 정치적 수령의 후계자 문제를 바로 해결하는 것입니다.로동계급의 당 건설에서 후계자문제는 정치적 수령의 지위와 역할을 계승하는 문제입니다.수령의 령도적 지위와 역할은 그 후계 자에 의하여 변함없이 계승되여야 합니다.대를 이어 계속되는 로동계급의 당의 위업을 누가 어떻게 계승하는가 하는 것은 당의 운명,혁명의 운명과 관련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당의 위업을 옳게 계승해 나가기 위하여 서는 후계자를 바로 내세우는 것과 함께 그의 령도를 실현할 수 있는 조직 사상적기초를 튼튼히 쌓고 령도체계를 철저히 세워야 합니다. 39)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북한의 수령 후계자는 수령이 이룩해 온 당 창건과 사업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수령의 혁 명위업 계승에서 후계자의 역할은 인민대중을 수령에게 끝없이 충실한 참다 운 혁명가로 키우며,수령의 혁명위업을 계승하기 위한 투쟁으로 조직하고 동원함으로써 혁명위업의 종국적 승리를 마련하는 데 있다.수령의 후계자의 영도에 의하여 수령에게 끝없이 충직한 주체적인 혁명역량이 마련되게 되며 수령이 개척한 혁명위업을 종국으로 완성해나가기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이 승리적으로 조직된다고 지적한다. 40) 북한의 후계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 징표는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충실성, 인민대중에 대한 열렬한 사랑,그리고 문무를 겸비 하는 것이다.북한의 혁 명위업은 수령에 의하여 개척되고 전진해 온 위업 으로 수령에게 충실한 후 계자만이 이를 계승할 수 있다는 것이다.또한 후계자에게 문무를 겸비할 것 을 강조하는 데,이는 북한의 정치,경제적인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북은 혁명위업은 반혁명세력과 치열한 정치군사적 대결에서 승리하는 과정을 통하여 완성한다 고 하면서 정치와 군사에 다 같이 정통하여 국방 력을 천백배로 강화해 나갈 수 있는 영장형의 후계자만이 반혁명세력의 도 전과 침략책동으로부터 혁명의 전취물을 지켜낼 수 있다 고 주장한다. 41) 38) 김정일,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 화, 1986년 7월 15일),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5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8), pp. 465~466. 39) 김일성, 조선로동당 건설의 력사적경험 (김일성고급당학교창립 40돐에 즈음하여 집필한 강의록, 1986년 5 월 31일), 김일성 저작집 40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4), p. 100. 40) 사회과학출판사, 주체사상 총서 2: 주체사상의 사회역사원리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2; 서울: 백산서당, 1989 재발간), p. 198.
- 15 - 북한에서는 수령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4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이 중 가장 우선시 되는 덕목은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다.후계자가 지녀야 할 수령 에 대한 충실성은 가장 철저하고 열렬하며 가장 진실하고 깨끗한 충실성,한 마디로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고의 충실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두 번째는 수령의 혁명사상을 완벽하게 체현하고 있어야 한다.수령의 혁명 위업을 계승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본질에 맞게 수령이 창시한 혁명사상을 고수하고 그것을 혁명실천에 구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세 번째 는 수령이 창시한 영도예술,혁명적인 영도방법을 체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령의 혁명위업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혁명과 건설의 주인인 인민대중을 하 나의 혁명역량으로 묶어야 하는데,수령이 창조한 영도예술,영도방법을 체 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네 번째는 공산주의 덕성을 체현해 야 한다.공산주의 덕성은 수령과 인민대중을 밀접히 연결시키고 수령을 중 심으로 단결을 실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42) 후계자 이론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수령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준비와 검증의 시간이 필요하다.김정일의 권력승계는 당내 후계자 지명,당대회를 통한 후계자 공표라는 철저한 준비와 수순을 거쳐 이루어졌으며,약 3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43) 그러나 현재 김정은은 김정일의 후계자로서 압축적 인 승계 과정을 밟고 있다.이러한 것의 주요 원인은 김정일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측면이 강하다.궁극적으로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확립 하기 위해서는 김일성-김정일 권력승계를 정당화시킨 후계자 론이란 이론을 계승 하고 이를 실천 하기 위한 노력을 다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3 청년세대 담론 북한 권력승계를 담당하는 청년세대에 대한 담론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 가 있다. 44) 북한은 수령의 대는 적어도 인간세대 교체의 한 주기를 가지고 바뀌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긴다. 45) 그래야 수령의 영도가 일정한 역사적 기간을 걸쳐 정책실현의 일관성을 보장할 수 있으며,이를 통해 안정된 정치 를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여기에서 권력승계에서 세대 담론,청년세대 담 론이 중요하게 제기되는 것이다.지난 시기 노농동맹에만 국한한 채 청년문 41) 주체혁명위업에 대한 령도의 계승문제를 정확히 리해할데 대하여, 김일성방송대학 논문집 (www.uriminjokkiri.com) 42) 김유민, 후계자론 (동경: 구월서방, 1986), pp. 73~77. 43) 김광인, 북한 권력승계에 관한 연구 (건국대 박사학위 논문, 1998), p. 180. 44) 이 부분은 김종수, 북한 권력승계 담론 연구, 평화연구 제17권 1호(2009), pp. 99~103 내용을 재정리. 45) 곽승지, 북한의 후계자론과 권력승계 과정, 안보연구 23호(1993), pp. 52~53.
- 16 - 제는 당의 전략적인 근본문제의 하나로 제기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국제공 산주의운동의 역사적 경험은 청년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혁명의 대는 끊 어지고 사회주의,공산주의 위업은 중단되게 되며,따라서 청년문제가 중요 하다고 역설한다.북한은 청년들을 혁명의 중요한 혁명 역량으로,대를 이어 혁명을 계속해 나갈 전략적인 후비력으로 키워내야 한다는 것이다. 46) 현재 북한 권력구조의 최상층은 1,2세대가 차지하고 있으나 중추적인 허리 역할을 하는 세대는 3세대들이다. 47) 북한의 세대를 정치적,사회경제적 경험 을 기준으로 구분하면 혁명 1세대는 항일빨치산세대,2세대는 전쟁 및 전후 복구세대,3세대는 3대혁명 세대,4세대는 그 이후의 세대이다. 혁명의 1세들은 백두의 흰눈 우에 붉은 피를 뿌리며 항일대전을 벌려 조국 을 해방하였고 혁명의 2세들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 전승을 안아오고 잿더미 우에 부강조국의 기둥을 세움으로써 자기 세대의 영예로운 과제를 빛나게 수행하였다. 백두의 영장 김정일장군님의 품속에서 자라난 세 대인 3 4세들은 1970년대 주체혁명위업 계승의 역사적인 시기에 자라 난 세대들이 21세기 강성대국 건설의 돌파구를 앞장에서 열어나가는 주력군 으로 되었다 48) 제국주의자들과 총포성없는 대결전에서 억세게 자라난 고난의 행군 동이 들,바로 이들이 부강조국 건설의 영웅적 바통을 넘겨받은 오늘의 10대,20 대 청년들이다. 혁명의 계승은 정신력의 계승이다.정신력은 혁명의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유산 가운데서 가장 귀중한 유산이다.전세대 의 정신력이 다음 세대에 와서 식어지고 약해지면 혁명이 생기를 잃고 전진 을 멈추게 되며 사회주의 위업의 최후승리를 이룩할 수 없다.우리가 전세 대를 잊지 않고 따라배운다고 할 때 그들이 이룩한 전변의 거창함과 놀라운 전진속도를 아는것도 중요하다.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전변,그 기적을 안아 온 사상과 정신을 아는 것이다. 49) 인용문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김정일 장군님의 품속에서 자라난 세대인 3 세,4세는 1세,2세들이 넘겨준 주체의 붉은기를 변함없이 추켜들고 선군의 위력으로 사회주의강성대국을 일떠세우며 그들이 이룩한 업적과 전통을 5세, 6세와 그 다음세대들도 변함없이 계승해 나갈 수 있는 믿음직한 세대 라고 46) 금성청년출판사, 위대한 수령 김일성원수님의 청년문제에 관한 독창적인 사상 (평양: 금성청년출판사, 1978), p. 12 47) 이교덕 외, 새터민의 증언으로 본 북한의 변화 (서울: 통일연구원, 2007), p. 193. 48) 혁명의 3세, 4세, 로동신문, 2006년 2월 28일. 49) 조국은 청년영웅을 부른다, 로동신문, 2008년 3월 28일.
- 17 - 믿음을 표하고 있다.그러나 세대의 혁명성 은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서 수령의 혁명사상과 정신 을 순결하게 계승할 것을 강조하였다.현재 북한 의 청년들은 1990년대 태어난 세대지만, 당과 수령을 받드는 청년들의 사상 정신상태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다 고 자랑한다. 50) 북한이 3 4세대를 계승의 세대,김정일장군의 세대 로 규정하고 이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다음 세대도 이들과 같이 주체혁명 위업 계승이라는 민족사적 임무 수행할 것을 독려하기 위함이다. 51) 북한의 소설에서도 청년세대에게 혁명위업 계승을 강조한다.소설에서 긍정 인물로 등장하는 대부분의 새세대들이 자신의 적성이나 취향을 고려한 직업 을 선택하기보다는 부모가 해오던 일을 기꺼운 마음으로 이어받는다는 것이 다.장편소설 열망 에서는 제대군인이며 당원인 새세대 청년이 대학추천을 받고도 아버지가 하는 일을 따라 배우기 위해 대학을 포기하고 아버지가 일 하는 공장으로 내려오며,이러한 아들의 행동에 대해 아버지는 매우 만족하 며 자랑스러워한다.이러한 서사는 중편소설 우리도시,단편소설 고향, 젊어지는 교단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이와 같이 북한 소설에서는 새세대 들이 부모의 직업을 이어받게 되는 동기 내지 계기가 당과 수령의 뜻을 관 철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는 부모에 대한 감동과 존경심에 비롯되 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또한 부모들이 자녀에 대해 자신들이 하던 일을 이 어받기를 바라는 것도 역시 당과 수령의 뜻을 받든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있는 것이다. 52) 40대 전후의 3세대와 20세 전후의 4세대들이 혁명 1,2세대 가 살아왔던 자세로 혁명위업을 계승하도록 하는데 초점이 두어진 예방적 조치 의 일환이었다.특히 1990년대 초에 발표된 소설들에 등장하는 2세대들 은 전후 천리마운동 시기의 국가 건설의 과정을 4세대에게 들려줌으로써 혁 명정신의 세대간 계승을 강조하고 있다. 53) 4 혈통승계론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의 권력승계와 김일성에서 김정일으로의 권력승계는 후계자의 능력 강조,우상화 등에 있어 유사한 면이 있지만 혈통승계 의 정 통성 제기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즉 김정일의 후계자 정통성은 후계자 의 능력과 자질을 부각시키는 인물본위였으나,김정은의 후계자 정통성은 주 로 만경대,백두산 혈통 의 전통을 강조하는 혈통승계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 50) 청년들은 당의 혁명위업수행에서 선군청년전위의 영예를 떨치자, 로동신문, 2011년 8월 28일. 51) 조국이 우리를 지켜본다, 로동신문, 2006년 10월 15일. 52) 임순희, 북한 새 세대의 가치관 변화와 전망 (서울: 통일연구원, 2006), pp. 47~48. 53) 조정아, 경제난 이후 북한 문학에 나타난 주민생활 변화 (서울: 통일연구원, 2006), pp. 104~105.
- 18 - 다는 것이다. 북한 관영매체는 김정일의 건강 이상 이전부터 부자세습에 대한 강한 메시 지를 흘렸다.2005년 1월 27일 중앙방송의 정론은 대표적이다.이 글은 수 령님께서 생전에 과업을 다하지 못하면 대를 이어 아들이 하고,아들이 못한 다면 손자 대에 가서라도 기어이 수행하고 말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었 다 고 강조했다.특히 몇 해 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일꾼들에게 나는 어 버이 수령님의 유훈을 받들 것 이라고 말씀하시었으며 이는 내가 가다 못 가 면 대를 이어서라도 끝까지 가려는 계속혁명의 사상이었다 고 전했다.북한 이 과거에도 계속혁명론 을 통해 권력승계 문제를 시사한 적이 있지만 이 정론의 경우처럼 3대 세습의 필요성을 분명하고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왔다. 김일성 가계에 의한 이른바 혁명의 계승 을 주장하는 보도는 2008년에도 이어졌다.2008년 9월 8일 로동신문은 북한 정권수립 60주년을 맞아 조선의 태양은 언제나 백두에서 왔고,백두의 핏줄기는 김일성 민족의 영원한 생명 선 이라고 강조했다.이를 둘러싸고도 후계문제가 백두의 혁명전통 에 따라 핏줄에서 나올 것임을 시사한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54) 2009년 9월 대만의 사진작가 후앙 한밍이 강원도 원산에서 찍은 선전벽보 사진은 김정은이 수령의 후계자로 상당히 인민대중들에게 선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벽보의 내용에는 만경대,백두의 혈통을 이은 청년 대장 김정은 동지를 (중략)김일성민족의 앞길은 영원히 휘항 찬란하여라 라 는 것이 있다.김정은을 청년대장 으로 호칭하고 있으며,장군복(김정일),대 장복(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의 순서를 적시하고 있고,특히 만경대 혈통 과 백두의 혈통 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김정은에게 수령과 장군을 잇는 3대 세습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만경대 혈통 과 백두의 혈통 은 3대 세습의 주인공인 김정은을 지칭하는 표현이다.북한 최고인민회의가 안동춘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장을 문화상에 임명하였는데,김정일 우상화를 전담하는 4 15창작단 부단장을 지낸 안동춘 의 임명은 김정은의 우상화 작업을 위한 포석으로 볼 수 있다. 55) '혈통계승론 에 대한 강조는 일본 마이니치 신문이 입수해 2009년 10월 5일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존경하는 김정운 대장의 위대성 교양자료 를 통해 서도 확인할 수 있다.이 자료에서는 주체조선의 장래가 보여 주체조선이 보다 호화찬란하며,백두산 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하겠다는 의지가 가득차 게 되고,만주시대와 항일유격대를 창건하실 때 조국에 개선하여 개선연설을 54) 이영종, 후계자 김정은 (서울: 늘품플러스, 2010), pp. 108~109. 55) 이승열, 북한 후계체제 구축의 세 가지 결정요인 에 대한 분석, 북한연구학회보 제14권 제1호(2010), pp. 170~171.
- 19 - 하시는 우리 수령님과 같이 보이며,또 1974년 2월 19일 온 사회의 김일성주 의화 강령을 선포한 우리 장군님의 모습을 꼭 닮은 김 대장의 모습에서 우 리는 감동을 금할 수 없다 는 것이다. 56) 또한 혁명의 본질에 있어서 수령의 사상과 영도를 실현하는 투쟁이며,1,2 세대가 아니고,대를 이어 계속하는 장기적인 사업이다 라고 하여 3대 권력승계를 정당화하고 있다. 57) 북한에서는 1970년대를 회상하며 계속혁명 을 강조하는 사설을 게재하여 관심을 끌고 있다.북한에서는 1970년대를 주체혁명의 자랑찬 70년대 58) 로 규정한다.김일성-김정일 권력승계 과정에서 살펴 보았듯이,1970년대는 김정 일이 북한의 권력후계자로 자리매김되던 시기였다.김정일의 후계자가 나타 나야 할 오늘날의 시점에서 1970년대는 북한의 역사에서 전형( 典 型 )시기였음 을 알 수 있다. 1970년 사업기풍,투쟁기풍은 수령의 위업계승의 새 시대를 개척하고 사회 주의 건설의 일대 전성기를 펼쳐놓은 가장 혁명적이며 위력한 투쟁방식이다 세월이 흐르고 세기가 바뀌어도 우리 혁명전사들의 심장마다에는 언제 나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 는 신념의 노래를 높이 부르며 기적과 위 훈의 서사시를 창조하던 그 때의 열성과 투지,기백이 그대로 맥박쳐야 한 다. 위대한 장군님을 따라 선군혁명의 천만리를 끝까지 가야 할 우리 에게 1970년대의 투쟁정신과 기풍은 오늘도 귀중하고 내일도 귀중하다 59) 2009년 신년 공동사설에서도 당조직들이 김정일동지를 당과 혁명의 진두 에 높이 모신 격정과 환희에 넘쳐 모든 분야에서 일대 앙양을 일으켜나가던 1970년대처럼 당사업에서 새로운 전환을 가져와야 한다 라고 하면서,이를 통해 김정일의 선군영도업적을 철저히 구현하면서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를 더욱 심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60) 2010년 당 대표자회 이후 혈통계승을 강조하기 위해 백두밀림에서 창조된 혁명정신을 빛내이며 주체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완성해 나가려 는 것은 우리 군대와 인민의 확고한 의지 라고 주장한다. 61) 56) 존경하는 김정운 대장 동지의 위대성 교양자료, 每 日 新 聞, 2009년 10월 5일. 57) 고유환, 김정은 후계구축 논리와 징후, 통일문제연구 통권 제53호(2010), p. 105. 58) 선군조선의 피줄기, 로동신문, 2006년 6월 3일. 59) 1970년대의 사업기풍, 투쟁기풍으로 일해나가자, 로동신문, 2004년 2월 9일. 60) 총진군의 나팔소리 높이 울리며 올해를 새로운 혁명적대고조의 해로 빛내이자, 로동신문, 2009년 1월 1 일. 61) 백두의 혁명정신은 우리 군대와 인민의 고귀한 정신적량식, 로동신문, 2011년 6월 17일.
- 20-2절 김정일의 친위대 역할:신진간부의 부상과 3대혁명소 조운동 1 청년동맹 간부의 세대교체 62) 김일성-김정일 권력승계 과정에서 청년동맹에 신진간부를 기용하여 김정일 의 권력장악을 위한 기반으로 활용하였으며,대학생 등을 중심으로 한 청년 인텔리들을 3대혁명소조원으로 조직하여 김정일의 지지 세력으로 형성하였 다. 사로청 간부들에 대한 세대교체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로청 조직 내부 변화 를 통해 김일성-김정일 권력 계승에 대한 지지 세력의 확장이다.민감한 감 성을 가진 청년들에게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을 확보하느냐 못하느냐 는 체제 유지에 사활적인 요건이라 볼 수 있다.김정일은 당권 장악 사전 단 계로 청년조직에 대한 당적 지도를 강조하였다.먼저 2차 당대회 이후 폐지 된 청년사업부가 1970년 5차 당대회를 계기로 부활된 것으로 보인다.1969년 당 4기 20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사로청사업,청소년사업에 대한 당적지 도를 더 잘하기 위하여 당중앙위원회와 도 시 군 당위원회들 그리고 큰 공 장,기업소 당위원회들과 인민군대 안의 정치부들에 청년사업부를 내오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라고 밝혔다. 63) 즉 미래형 서술어를 사용하고 있어 이 시 점에는 청년사업부가 부활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차 당대회 이후 시점인 1970년 11월 24일 김일성이 당 중앙위원회 청년사 업부,사로청중앙위원회 일군들을 대상으로 연설하였다. 64) 즉 당 중앙위원회 에 청년사업부가 부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후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 원회 확대회의에서 논의된 청년사업부를 조직지도부에 합치자는 논의를 반 대하고 각급 당위원회 청년사업부가 사로청 지도 사업을 개선할 것을 강조 하였다. 65) 김정일이 지도자로 오르기 위한 정지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이다.대 표적인 것이 1972년 하반기부터 시행된 당증교부사업 을 통해 노당원을 숙 청한 대신 40여만명에 이르는 청년들을 당에 흡수하여 당내에서 김정일 체 62) 이 부분은 김종수, 북한 청년동맹 연구, pp. 290~306을 요약 정리한 것임. 63) 김일성, 대학의 교육교양사업을 강화할 데 대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회의에서 한 결론, 1963년 4월 18일), 김일성 저작집 17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2), p. 224. 64) 김일성, 사로청조직을 생기발랄한 전투적 조직으로 꾸릴데 대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청년사업부, 사 로청중앙위원회 책임일군협의회에서 한 연설, 1970년 11월 24일), 김일성 저작집 25권(평양: 조선로동당출 판사, 1983), p. 385. 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임. 65) 김정일, 청년들을 계속혁명의 정신으로 무장시키자 (1971년 10월 1일), 김정일선집 2권(평양: 조선로동당 출판사, 1993), p. 305.
- 21 - 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세대교체를 전면적으로 단행한 것이다.이듬해인 1973 년 2월에는 5만 여명의 청년 및 학생 당원들을 3대혁명소조 로 조직하여 후 계구축을 본격적으로 시도하였다.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김정일은 1973년 9월 당 중앙위 5기 7차 전원회의에서 조직 및 선전선동담당 비서가 되었으 며,1974년 2월에는 권력 계승자로서 당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다. 66) 김정일이 정치위원으로 취임하자 로동신문 은 즉시 그를 당중앙 으로 호 칭하였다.김정일은 당 정치위원으로 취임하자마자 당내 실권을 장악하기 시 작하였으며 혁명 1세대들의 퇴진을 재촉하고 지도부 내의 신진대사를 촉진 시켰는데 1973년 가을 이후 최용건과 김일의 활동이 급격히 둔화되고 혁명 2세대나 실무형 지도자들의 발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67) 이와 함께 계속혁명 을 실질적으로 주도할 사로청에 대한 조직개편도 본격 적으로 전개되었다.김정일은 사로청의 조직 상황을 지시와 독촉으로 이어 지는 문서놀음 즉 '문건놀음'으로 상징되는 관료주의,밤거리를 돌아보는 것 과 같은 유람형태의 행세식 지도,영감티를 내고 권위를 내세우면서 청년들 에게 명령하고 통제하는 사업 방식으로 과거 당조직이 가지고 있던 관료주 의적이며 형식주의적인 낡은 사업방식이 사로청에 이식되고 배양되었다 고 인식하였다. 김정일은 사로청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조직혁신을 하기 위해 젊은 간부들로 교체하였다. 68) 특히 사로청 간부들의 노쇠화는 청 년들의 특성에 맞게 사업을 창조적으로 전개하지 못한다는 비판과 함께 결 국 사로청이 청년단체다운 기백과 적극성을 잃게 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 가받았다. 69) 간부 교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은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 이었다.젊은 간부를 등용한 것은 김정일과 동세대 혹은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면도 있지 만,그들이 주체사상 이외의 다른 사상을 모르고 순수하며 김일성에 대한 충 성심도 강했기 때문이었다.또한 청년 세대가 김정일에 의해 등용됨으로써 그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기 되기 때문이다. 70) 결국 북한의 세대교체 배경은 정치사회적 전환의 시대 를 맞이하여 대를 이어 사회주의 혁명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수령의 후계자인 젊은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신진 청년간부들을 대거 기용하여 김정일 세력으로 당 과 근로단체를 장악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66) 곽승지, 북한의 후계자론과 권력승계 과정, p. 37. 67) 이종석, 조선로동당 연구, p. 330. 68) 백남룡, 계승자 (평양: 문학예술출판사, 2002), p. 148. 69) 채종완, 청년사업 경험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90), p. 108. 70) 스즈키 마사유키 저 유영구 역, 김정일과 수령제 사회주의 (서울: 중앙일보사, 1994), pp. 116~117.
- 22 - 세대교체의 상징성을 띠는 청년동맹의 지도자인 청년동맹 위원장 변동을 통해 권력승계 시기 북한의 권력 변동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북한의 유 일체제 형성 시기 청년동맹의 위원장은 홍순권이다.홍순권(재임기간:1962 년~1967년 9월)은 함경남도 출신으로서 1948년 모스크바 대학을 유학하였으 며 갑산파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71) 1954년 당 중앙위원회 과장을 거쳐 1956 년 사로청의 전신 조직인 조선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청년 사업을 시작하였다.1957년 사로청 부위원장 거쳐,1962년에는 중앙위원회 위원장에 올랐다.홍순권은 1964년 조선민주청년동맹 이 조선사회주의로동 청년동맹 으로 변화하는 당시에도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67년 당내에서 갑산파가 반당반혁명숙청분자 로 숙청되고 사로청에서도 중앙위원회 위원장 홍순권을 비롯한 간부들이 숙청되었다.북한은 반당반혁 명숙청분자 들이 사회주의경제건설의 주력부대인 청년들을 안일해이하고 일 하기 싫어하며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려고 책동하였다 고 신랄하게 비판하였 다.또한 사로청 총회와 생활총회모임에 오락 을 끌어들여 사로청의 규율을 허물어뜨리고 구락부화 하려고 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반당반혁명숙청분자 들 의 사상여독을 제거하고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전력을 다할 것을 강조하였 다. 72) 그는 1967년 3월 27일 로동신문 에 청년들을 당과 수령의 충직한 혁명전 사로 교양하며 새로운 혁명적 고조에로 불러일으키자 는 기사를 마지막으로 언론에 나타나지 않아 1967년 5월 제4기 15차 전원회의를 기점으로 해임된 것을 알 수 있다. 73) 홍순권이 청년조직에서 핵심적 지위에서 사업을 한 것은 10년이 넘는다.홍 순권의 장기집권은 활기차게 사회 발전을 선도해 나가야 사로청에 관료주의 조직문화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홍순권의 숙청 후 후임 사로청 위원장으로 만경대혁명유자녀 학원 출신의 오기천(재임기간:1967년 9월~1970년 11월)이 임명되었다.오기천에 대한 인 물 정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그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오기천은 1967년 사로청 위원장으로 임명된 그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당선되어 외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오기천은 1979년 9월에 작성한 수기에서 1968년 4월에 있었던 전국청년총동원대회 에 대한 회상을 발표하였다.오기 천의 기록에 따르면 전국청년총동원대회 는 1968년 3월 김일성 지시에 의해 개최되었다고 한다.김일성은 오기천에게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청년들을 71) 공산권문제연구소, 북한총람 45~ 68 (서울: 공산권문제연구소, 1968), p. 1057. 72) 금성청년출판사, 조선공산주의청년운동사 2권(평양: 금성청년출판사, 1982), p. 367. 73) 내외통신사, 북괴신문잡지집필자인명록 - 사회과학분야(ㅂ~ㅎ) (서울: 내외통신, 1975), p. 835.
- 23 - 불러일으키기 위한 큰 회의를 하나 조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특히 청년들 을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진시킬데 대한 당의 방침을 관철하는 투쟁에로 총동원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라고 전국청년총동원대회 의 필요성을 제 시하였다고 한다. 74) 1968년 7월에는 청년학생대표 단장으로 소피아에서 개최 된 제9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하였고,1970년 5월 사로청 단장 자격으로 소련공청 제16차 대회에 참석한 것을 마지막으로 공개적 활동이 언론에 발 표되지 않았다. 75)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1970년 제5차 조선노동당 대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격적인 사로청 위원장 교체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김일성은 당 대회 폐막 11일 후인 11월 24일 당 청년사업부와 사로청 중앙위 책임일군협 의회에서 사회주의 개조가 완성되어 모든 청년들이 사회주의 노동자로서 집 단생활을 하는 상황에서 청년사업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은 사로청에서 일하 는 일군들의 나이가 옛날 같으면 손자 볼 나이의 일군 들이 있기 때문이라 고 질책하면서 젊은 사로청원들을 직접 대상하는 사로청 일군들은 젊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그러면서 사로청 중앙위원회 일군들을 27~28살의 청년들로,군당위원회 청년사업부장은 35~38살 나이로 인선하는 것이 좋다 고 하였다. 76) 1970년대 들어서서 사로청의 연륜이 쌓이고 조직이 안정화되면서 동맹간부 들의 노령화가 커다란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원래 청년동맹은 동맹원들의 입장에서 과도기적 조직이다보니 간부의 육성과 활용에 어려움이 많았다.따 라서 북한에서 사로청 간부의 경우 30세가 넘어도 이단하지 않는 경우가 많 았다.그러다보니 40세가 넘는 간부도 나타나게 되었다.그러나 이러한 늙은 청년동맹 간부가 젊고 생기발랄해야 할 젊은이들의 조직을 이끌어가는 데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다.이에 북한 지도부는 사로청 간부진용을 젊은 층으 로 교체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77) 김일성의 연설 후 북한에서는 김정일 권력 승계 과정 시기 청년사업 부문 일군들의 연소화 강조는 줄곧 강조되는 경향이 있었는데,오기천의 교체도 여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1970년 11월 당시 사로청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김시학(재임기간:1970년 11 월~1972년 11월)이었다.김시학의 아버지인 김철은 김일성의 항일투쟁 동지 로 1934년 10월 전투에서 입은 휴유증으로 사망하였다.해방 후 김시학은 혁 74) 오기천, 사로청이 당의 근위대, 결사대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금성청년출판사, 혁명 의 미래를 위하여 5권(평양: 금성청년출판사, 1980), pp. 1~16 참고. 75) 대한민국 국회도서관, 북한인물록 (서울: 대한민국 국회도서관, 1979), p. 233. 76) 김일성, 사로청조직을 생기발랄한 전투적조직으로 꾸릴데 대하여 (1970년 11월 24일), 김일성 저작집 25 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3), pp. 387~388. 77) 이종석편, 북한의 근로단체 연구 (성남: 세종연구소, 1998), p. 40.
- 24 - 명유자녀학원에서 수학하였으며,한국전쟁 당시에는 김일성의 친위병으로 복 무하였다.조선노동당 5차 당대회가 개최되기 2개월 전인 1970년 9월 하순 김일성이 직접 김시학을 불러 아버지가 청년사업을 했던 것을 따라 청년사 업을 잘하라 고 직접 사로청 위원장에 내정하였다. 78) 김시학은 1970년 9월부터 노동당 제5차 대회가 개최되기 전인 11월까지 청 년사업부 조직 사업에 참여한 것으로 추측된다.김시학은 수기( 手 記 )에서 다 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70년 11월 24일 어버이수령님께서 청년사업을 맡아보는 당중앙위원회 일 군들과 사로청중앙위원회 일군들을 몸 가까이 불러 앉히시고 한나절이나 주 시던 가르침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저는 어버이 수령 님의 거듭되는 신임과 배려에 의하여 사로청중앙위원회에 파견되여 일하게 되였습니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에서 그만큼 청년사업부 일을 해보았으 니 이제는 직접 집행단위에 나가 청년사업을 맡아서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사로청중앙위원회 책임일군으로 파견해 주시였던 것입니다. 79) 김시학은 1932년생으로서 사로청 위원장 당시 39살이었다.김시학이 사로청 위원장을 물러난 이후인 1972년 11월에 중앙방송위원회 위원장직을 수행한 것을 볼 때 사로청 핵심 간부들에 대한 교체를 통한 김정일의 세력 구축이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1972년 11월 사로청 위원장이 김시학에서 이영복(재임기간: 1972년 11 월~1976년 6월)으로 교체되었다.당시 이영복은 사로청 중앙위원회 지도원으 로 활동하였는데,그는 과장-부장-비서-부위원장 직을 뛰어 넘는 초고속 승 진을 한 것이다. 80) 1971년 2월 김일성이 청년들에 특성에 맞게 사로청 사업 을 더욱 적극화할 데 대하여 에서 중앙 사로청 간부들을 35세 이하로 꾸리 고 군 사로청 일군들은 32세까지의 청년들로 꾸릴 것을 지시한 것을 실행하 기 위한 조치였다. 81) 그 결과 1972년부터 사로청 사업을 한 도 사로청위원장 들의 나이가 30~31살로 낮추어졌으며,세대교체를 이룬 신진 사로청 간부들 은 장차 훌륭한 당일군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김일성은 평가하였다. 82) 이 같 78) 김시학, 청년들이 대를 이어 혁명을 계속하도록 이끌어주시며, 금성청년출판사, 혁명의 미래를 위하여 4 권(평양: 금성청년출판사, 1979), p. 6. 79) 위의 글, pp. 7~8. 80) 이영복, 사로청사업을 하던 때를 돌이켜보며, 금성청년출판사, 혁명의 미래를 위하여 9권(평양: 금성청년 출판사, 1983), p. 53. 81) 김일성, 청년들의 특성에 맞게 사로청 사업을 더욱 적극화할 데 대하여 (1971년 2월 3일), 김일성저작집 26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4), pp. 17~18. 82) 김일성, 사로청중앙위원회 일군들과 한 담화 (1977년 3월 31일), 청소년사업과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의 임무에 대하여 4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6), pp. 195~196.
- 25 - 은 사실은 당시 사로청 부위원장이었던 지재룡의 수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 다. 1972년 12월 16일 이날 우리들은 오매에도 그리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부르심을 받는 끝없는 영광을 지니였다.그 당시로 말하면 어버이수 령님의 크나큰 배려로 중앙으로부터 도,시,군에 이르는 모든 사로청간부들 이 젊은 일군들로 새로 꾸려진 때 였습니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83) 그러나 여전히 30살 넘는 사로청 간부들이 많이 있으며 심지어 40세가 되 는 간부가 있다면서 당중앙위원회 청년지도부가 사로청을 잘 지도하지 못하 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84) 또한 새로 임명된 이영복에게 현재는 30세이지만 3~4년 후에는 젊은 일군과 교대해 사로청일군을 더 젊은 사람들로 계속 만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85) 이영복이 위원장으로 활동한 지 3년도 안 된 시점인 1975년 7월 17일 재일 본조선인청년동맹 대표단 환영 평양시 청년학생 집회 이후 공개적인 행사에 나타나지 않았다.1975년 8월 25일 남조선 청년학생들의 8월 투쟁 10돌 기 념 평양시 청년학생 보고회 를 시작으로 청년동맹 위원장이 참가해야 할 행 사에 부위원장들이 대표하여 참석하였다.대표적인 사례가 12월 19일에 개최 된 사로청 중앙위원회 12차 전원회의인데 이 회의에서도 장민룡 부위원장이 위원장을 대신하여 보고하였다. 사로청 위원장이 이영복에서 지재룡(재임기간:1976년 6월~1978년 12월)으 로 교체된 것은 1976년 6월 중순 경이다.1976년 6월 6일자 로동신문 에서 는 6월 5일 평양체육관에서 개최된 조선소년단창립 30주년 기념 전국연합단 체대회에서 장민룡 부위원장이 기념보고를 하였으며,6월 12일 행사도 장민 룡 부위원장이 사로청을 대표해서 참석하였다.6월 15일 일본사회당 청년활 동가 대표단 환영연회에 지재룡이 참석하였으나 직책은 표기되어 있지 않으 며,6월 26일자 로동신문 에 미제반대투쟁의 날 평양시 군중대회 연설자로 지재룡이 사로청 위원장으로 소개되었다. 이와 같이 사로청 위원장의 활동 공백이 약 1년 정도가 되는데 그 이유는 명확치 않다.다만 병으로 인해 일시적인 활동 공백을 예상했다가 생각보다 길어지지 않았을까 유추해 볼 수 있는데,이는 그가 1982년 이후 청진시당 책임비서로 재기용된 후 현재까지 공직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김정일이 권력 승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조직으로 인식한 청년동맹의 위 원장이 일년 동안 공백을 가졌다는 것은 북한 공간 문헌의 수사들(rhetorics) 83) 지재룡, 사로청사업을 더욱 적극화하도록 이끄시여, 금성청년출판사, 혁명의 미래를 위하여 1권(평양: 금 성청년출판사, 1978), p. 21. 84) 김일성, 새로 배치된 사로청중앙위원회 일군들과 도사로청위원들 앞에서 한 연설 (1972년 12월 16일), 김 일성저작집 27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4), p. 542. 85) 위의 글, p. 555.
- 26 - 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김정일이 3대혁명소조 지도를 위해 조직 부 내에 별도로 3대혁명지도과 를 신설하여 중앙당은 물론 도당 군당까지 설 치하였는데 86) 이를 통해 청년들을 충분히 장악하고 있어 사로청 위원장 공 백이 권력 승계 과정의 큰 장애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1976년 사로청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은 지재룡은 1942년생으로서 당시 34살로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그는 1969년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1972 년부터 사로청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1976년부터 1978년까지 위원장직 을 수행하였다.그는 사로청 활동 후에는 전문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는데,정 무원 외교부 순회대사,주체코대사 등을 역임한 후 당 국제부부부장으로 재 임하였으며,2010년 당 대표자회 이후에는 중국 주재 북한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영수(재임기간:1978년 12월~1986년)는 1978년 12월 사로청 단장으로 유 고 사회주의청년동맹 제10차 대회에 참가함으로써 사로청 위원장으로 선임 된 사실이 알려졌다.이영수는 1946년 강원도 출생으로서 공업기술연맹에서 활동한 전문기술관료 출신으로 추측할 수 있다.이영수의 위원장 선임 배경 은 1970년대 하반기 북한 사회 전반적 상황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이 당시 북한의 모든 공장,기업소,협동농장에서는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 이 광범 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1977년 중앙,도,시 군에서 붉은기수여판정위원회 가 설치되었고, 충성의 등록장제, 붉은기 수여에 관한 세칙 이 제정됨으로 써 이 운동의 확산에 총력을 다 하고 있었다. 또한 사로청 내적으로는 속도전청년돌격대 활동이 본격적인 성과를 낳고 있었다.국가차원에서는 제2차 7개년계획(1978년~1984년)을 확정하고,그 기 조로 인민경제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를 제시하였다.여기에서 현대화와 과 학화라는 정책 기조는 1970년대 초부터 북한이 추구하던 생산의 집약적 발 전을 위한 기술혁명 을 좀더 분명한 정책기조로 정식화한 것이라 할 수 있 다.이러한 정책기조에 부응하여 경제건설의 현대화 과학화 노선을 추진할 수 있는 전문기술관료 출신인 이영수를 사로청 위원장으로 선임하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다. 87) 김정일의 간부 정책에 대해 부수상 김동규는 1976년 6월 초에 열린 당 정 치위원회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그는 김정일이 노간부에게 노쇠 라는 딱지를 붙여 일선에서 후퇴시키고,김정일 세력을 받쳐주는 청년간부들 이 대거 진출한 사실을 비판한 것인데 결국 1977년 말 10대 원칙 에 해독을 끼쳤다는 죄목으로 숙청되었다.이러한 사실은 김정일이 간부의 세대교체가 86) 김광용, 북한 수령제 정치체제의 구조와 특성에 관한 연구 (한양대 박사학위 논문, 1995), p. 115. 87) 박순성, 북한경제와 한반도 통일 (서울: 풀빛, 2003), p. 46.
- 27 - 사로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까지 확대되어 있었으며,이는 결국 김정일 의 권력 장악에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8) 군대에서도 1970년대 중반에는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었다.중대장은 종전의 30~40세에서 32세 미만으로, 대대장은 40~50세에서 32~35세로, 연대장은 50~60세에서 30~40세로 연령을 낮추면서 연대장급 이하 지휘관의 상당 부분 과 일부 사단장급 지휘관을 교체했다.이 시기 혁명 2세대 군부지도자인 오 극렬,김두남,김강환,최상욱 등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들은 김정일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89) 그러나 김정일 권력승계 공고화 정책으로 시행된 급격한 사로청 간부들의 세대교체는 간부 부족 현상을 낳았다.질 높은 청년간부 양성을 위해 1967년 에는 사로청 중앙학교를 사로청 대학으로,1973년에는 금성정치대학으로 발 전시켰지만 대폭적인 간부 교체에는 별 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보 인다. 90) 금성정치대학은 청년동맹과 근로단체 간부들 양성하는 정규과정과 현직간부를 위탁 교육하는 단기과정,한 달 기간의 강습회 등의 코스를 운영 하고 있다.정규과정 학생 대부분이 제대군인과 산업현장의 노동자 출신이 다. 91) 이는 김일성이 사로청의 결원 간부들을 빨리 채우기 위한 대책으로 금 성정치대학과 일반대학 졸업생 그리고 도 시 군 사로청위원회에서 일하던 일 군들을 잘 배합해서 구성하여 사로청의 과업 사업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 록 지시한 것에서 알 수 있다. 92) 2 3대혁명소조운동 93) 북한에서 3대혁명소조운동을 공식적으로 결정한 것은 1973년 2월 1일 당중 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였다.3대혁명소조운동은 북한의 사회주의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시작된 사상 기술 문화 혁신의 대중운동이면서,이 운 동의 지도 주체가 권력 후계자인 김정일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 닌다. 김일성은 1967년 5월 27일 당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 직후 자본 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에 대하여 라는 글에서 과도기에 대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였다.김일성은 북한에서 부르조 88) 손광주, 김정일 리포트 (서울: 바다출판사, 2003), pp. 118~119. 89) 정창현, 곁에서 본 김정일 (서울: 민연, 2002), p. 337. 90) 채종완, 청년사업 경험, p. 110. 91) 전영선, 북한의 사회와 문화 (서울: 역락, 2005), p. 148. 92) 김일성, 사로청중앙위원회 일군들과 한 담화 (1977년 3월 31일), 청소년사업과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의 임무에 대하여 4권, p. 197. 93) 이 부분은 김종수, 북한 청년동맹 연구, pp. 306~318을 요약 정리한 것임.
- 28 - 아혁명을 거치지 않아 생산력이 낮기 때문에 사회주의혁명 후에도 노동자와 농민의 차이가 장기간 남아 있다는 점을 전제로,사회주의혁명 승리 후 사회 주의적 개조가 완성되고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계급적 차이를 없앤 무계급사 회가 실현되어야 과도기가 종료한다고 설명하였다.김일성은 이를 위해 사 상,기술,문화의 3대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창하였다. 94) 북한은 계속혁명 담론을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3대혁명운동을 전 개하였다.북한은 사회주의 제도가 수립된 다음 사상,기술,문화의 3대혁명 을 사회주의 사회에서 수행해야 할 혁명의 기본내용,공산주의를 건설할 때 까지 수행해야 할 계속혁명 의 과업으로 규정하였다. 95) 3대혁명은 사상,기 술,문화 분야에서 낡은 사회의 유물을 청산하고 새로운 공산주의적 사상과 기술,문화를 창조하기 위한 투쟁이며 사회주의 사회에서 계속 진행해야 할 사업인 것이다.3대혁명은 사회주의 제도의 본성과 인민대중의 의사에 맞는 혁명방식으로,반드시 이러한 방식으로 혁명을 하여야 인민대중의 통일과 단 결을 강화하고 그들의 혁명적 열의와 창조적 능력을 높여 사회주의,공산주 의 건설을 성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96) 북한에서 3대혁명이란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1970년이지만 그 이 전에 사상혁명,기술혁명 등의 개념을 사용하였다.김일성은 1970년 11월에 열린 제5차 당대회에서 공업화의 성과를 공고 발전시키며 기술혁명은 새로 운 높은 단계에로 전진시켜 사회주의의 물질 기술적 토대를 더욱 튼튼히 하 며 인민경제 모든 부문에서 근로자들을 힘든 노동에서 해방하는 것 을 기본 과업으로 하는 6개년 계획의 구상을 발표했다. 김일성은 3대 기술혁명의 수행을 목표로 하는 기술혁명,사회주의적 민족문 화를 개화발전시킬 문화혁명,그리고 온 사회의 혁명화,노동계급화를 힘 있 게 밀고 나갈 사상혁명을 강화하여 공산주의의 두 요새인 물질적 요새와 사 상적 요새를 점령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라고 촉구했다.그러나 이 당시까 지만 해도 3대혁명은 여전히 사상,기술,문화의 3대혁명이라기 보다는 3대 기술혁명의 의미를 더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1973년에 이 르러서야 사상,기술,문화라는 3대혁명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97) 3대혁명소조운동의 등장 배경은 정치적 배경,경제적 배경,사회적 배경으 94) 스즈키 마사유키 저 유영구 역, 김정일과 수령제 사회주의, p. 96. 95) 김일성,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총화 보고(1980년 10월 10일), 김일성 저작집 35 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7), p. 293. 96) 김일성, 온 사회를 주체사상화하기 위한 인민정권의 과업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합동회의에서 한 시정연설, 1984년 4월 14일), 김일성 저작집 37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pp. 114~115. 97) 이정철, 사회주의 북한의 경제동학과 정치체제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2002), p. 217.
- 29 - 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정치적 배경으로는 유일지도체제 형성,세대교 체,정치적 폐단의 극복 경제적 배경은 계획의 일원화 세부화 조치,농촌에서 의 3대혁명의 수행,사회적 배경으로는 도시 농촌간 불균형,노동력의 부족, 엘리트 정책의 변화로 들고 있다. 98) 3대혁명소조의 역할이 김정일의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한 정치적 동원이란 점과 함께 노화한 당간부들의 관료주의,형식주의,경험주의,무사안일주의를 경계하면서 그들의 당정책 집행과정을 감독하고 근무태도를 감찰하는 다중 적 통제의 의미를 부각한다.생산현장의 당간부들은 당생활이나 당위원회 같 은 당 내적인 통제는 물론이고 외부적 통제에 의해 행동공간이 위축되기에 이르렀다.이런 맥락에서 3대혁명소조운동은 관료제적 병리현상에 대한 외부 적 치유책(externalremedial)의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99) 3대혁명소조운동은 초기 지도소조 라는 명칭으로 당핵심과 대학생들로 구 성되어 공장,기업소,협동농장에 파견되었으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차 확대되어 당일꾼,국가경제일꾼,대학생,대학교원,과학자,기술자 들로 확대 되었다.이 중 약 90%는 청년인텔리(대학졸업생과 재학생)로 구성되었다. 100) 김일성은 보통 규모의 공장,기업소들에는 20-30명,큰 공장,기업소에는 50 명 규모로 3대혁명 소조를 파견할 것을 지시하였다. 101)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그 이전에 선발된 당 일군과 대학생들로 지도소조를 구성해 시범적으로 각 공장에 파견하였다.즉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결정은 3대혁명소조운동의 본격적인 대중운동으로 발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북한에서 사회주의 개조의 완성을 위하여 전국 각지에 3대혁명 소조원들이 파견되었다.1974년 2월 공업과 농업 부문 3대혁명소조를 따로따 로 지도하던 체계를 없애고 당중앙위원회가 통일적으로 장악하고 지도하는 새로운 조치를 취한데 이어 1975년 3월에는 중앙과 도 시 군에 있던 3대혁 명소조종합실 을 3대혁명소조지휘부 로 개편하였다. 102) 파견된 3대혁명소조 원들은 당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간부들이 가지고 있는 보수주의,경험주의, 요령주의,기관본위주의 등을 개조하기 위한 사상투쟁을 전개하였다. 103) 즉 사회 전 부문에서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중심세력 으로 위치를 확고히 구축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었다. 98) 자세한 내용은 탁용달, 3대혁명소조운동에 관한 연구 (동국대 석사학위 논문, 2004), pp. 31~71 참고. 99) 김성철, 북한 간부정책의 지속과 변화 (서울: 민족통일연구원, 1997), p. 65. 100) 권오윤, 북한 동원체제의 변화에 관한 연구 (동국대 박사학위 논문, 1994), p. 309. 101) 조선중앙통신사, 조선중앙연감 1975 (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75), p. 333. 102) 탁진 김강일 박홍제, 김정일 지도자 제2부(출판지 미상: 동방사, 1984), p. 176. 103) 박형중, 70년대 북한 관료체의 조직-사상적 공고화와 생산동원, 1993년 한국정치학회 연례학술발표회, p. 12.
- 30 - 그러나 3대혁명소조원들이 각 사업 부문으로 파견되면서 해당 부문 간부와 노동자들과 불화를 일으켰다.이는 김정일이 소조원들에게 다른 사업에 간 섭하는 것이 아시고 본신임무인 3대 혁명에 대한 지도에 힘을 넣도록 강조 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공장 기업소 협동농장에 파견된 3대혁명소조는 해당 당세포보다 위에 군림하여 노동자들의 작업태도와 사상 동향을 감시 통 제하여 당 간부들은 물론이고 주민들이 그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104) 특히 1981년 11월 신의주에서는 당 간부들과 3대혁명소조원들 간에 대규모 충돌이 일어나 사상자까지 발생하였으며 일부 당 간부들은 중국으로 도피하 기도 했다.함경도 함흥시 교외의 한 기업소에서는 3대혁명소조원들이 자재 나 기술 수준을 무시한 불가능한 목표를 제기하자 해당 기업소 노동자들이 반발하는 사례까지 발생하였다. 105) 북한의 노동자,농민들은 김일성의 지도하에서도 힘껏 노동을 해 바쳤는데, 이제는 김정일이 이끄는 젊은이들이 지방 사정이나 공장 및 농장의 실정을 모르면서 이렇게 저렇게 해 보라고 지시하는 데에 염증을 내고 너희들이 해보라 는 식의 반응이 나타났다고 한다.그 결과 북한 경제가 뒷걸음치게 되었고 김일성은 이러한 결과에 대해 3대혁명소조운동 방침을 비판하였 다. 106) 이와 같이 3대혁명소조가 김정일의 권위에 의존해 기존 체계를 무시 함으로써 갈등을 양산한 측면 또한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3대혁명소조운동 결과 1970년에 49만 7천명이던 기 술자들이 1976년에는 100만 명으로 증가하는 성과를 낳았다고 선전하고 있 다. 107) 북한에서는 3대혁명소조운동에서 청년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 도록 독려하였다. 우리 혁명발전의 요구와 사상,기술,문화 혁명수행의 구체적 실태를 깊이 통찰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3대혁명소조운동을 발기하시고 3대혁명소조 를 공장,기업소,협동농장에 파견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시였으며 3대혁 명수행에서 청년들이 앞장에 서도록 적극 내세워주시었다.각급 사로청 조 직들을 당의 조치에 호응하여 새것에 민감하고 정열에 불타는 사로청원들을 사상혁명,기술혁명,문화혁명을 수행하는 투쟁에서 적극 조직동원 함으로써 그들이 3대혁명수행에서 근위대,선봉대가 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108) 소조원들은 현장으로 내려가 사상 기술 문화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김일성 104) 김성철, 북한 간부정책의 지속과 변화 (서울: 민족통일연구원, 1997), p. 65. 105) 박재후, 3대혁명소조의 특권의식, 북한 1986년 1월호, pp. 182~183. 106) 서대숙, 현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 (서울: 을유문화사, 2000), p. 193. 107) 로동신문, 1976년 1월 1일. 108) 금성청년출판사, 조선공산주의청년운동사 2권, p. 442.
- 31 - 김정일의 교시와 당정책에 대한 이해와 암기는 기본이 되며 현장에 맞는 기 술지식 습득도 필수적 요건이 되었기 때문에 혁명사상이 강한 젊은 인텔리 들로 구성되었다.3대혁명소조원들은 수령의 교시를 받고 소조원이 되어 경 제건설 현장으로 자진해서 떠났다. 이들은 파견된 부문(광업,수산업,공업 등)에 대한 김일성의 교시를 제일 먼저 연구하였다.김일성이 밝힌 해당 부문의 교시를 근거해 파견된 현장의 주요 문제 해결에 매진하였다.이 과정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기술적 문제, 사상적 문제에 접근하고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심지 어 죽음까지 맞이하면서 문제해결을 위해 영웅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109) 이 들은 당중앙위원회의 지도하에 당 사업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던 김 정일의 지지기반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김일성은 현지지도 현장에서 청년 모범 소조원에게 파격적인 입당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한다.사로청원들에게 3대혁명소조운동에 참여를 독려하 기 위해 새로 대학생 잡지를 창간하고 모범적인 사로청원들에 대해서는 표 창을 장려하고 입당보증도 해 줄 것을 지시하였다. 110) 3대혁명소조에 나가있 는 대학생들을 간부로 등용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높은 정치적 신임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111) 궁극적으로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는 김정 일은 3대혁명소조라는 광범위한 청년학생들을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넓힘으 로써 권력 장악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3대혁명소조운동이 한창 전개되던 시기,특히 1970년대 후반에는 소조책임 자들의 권위가 당간부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로 매우 높았던 것으로 알려지 고 있다.그들의 역할과 권위는 공장과 생산현장에서 특히 높았던 바,김정 일이 당정책의 침투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생산현장의 간부들보다 3대 혁명소조의 의견을 먼저 청취하도록 배려한데서 알 수 있다. 112) 이런 측면에 서는 중간간부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3대혁명소조운동이 활용되었다. 김정일은 우리 인민들은 그래도 당의 방침은 옳은데 중간단위 일군들이 일을 잘못하여 된장,간장이 긴장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당을 옹호하여 나서 고 있습니다.우리 인민은 정말 좋은 인민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113) 이러 한 상황에서 3대혁명소조운동의 주요한 목적 중에 하나는 중간단위를 거치 109) 금성청년출판사, 3대혁명의 척후병들 (평양: 금성청년출판사, 1976) 110) 금성청년출판사, 조선공산주의청년운동사 2권, p. 443. 111) 김정일, 녀성간부들을 더 많이 키울데 대하여 (1975년 4월 30일),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3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7), p. 296. 112) 김성철, 북한 간부정책의 지속과 변화, pp. 66~67. 113) 김정일, 농촌경리부문에 대한 당적지도를 강화하여 올해 농업생산에서 새로운 앙양을 일으키자 (조선로동 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부부장협의회에서 한 연설, 1976년 2월 6일),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3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7), p. 462.
- 32 - 지 않고 수령과 당의 정책이 곧바로 하부단위에까지 미치도록 한 것이자,관 성화되고,관료화 된 중간단위 간부들과의 사상투쟁을 목적으로 하고 있 다. 114) 3대혁명소조가 권력승계 과정에서 김정일의 지도를 실천하는 전위대 로서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3대혁명소조운동은 1980년대 들어와 가장 중요한 대중운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1984년 9월에 개최된 3대혁명소조 제2차 대회 에서는 당중앙의 지 도가 하부말단에서 제때에 구현되도록 아래를 도와주며 모든 일군들과 근로 자들을 3대혁명 수행에로 힘있게 조직 동원하는 것이다.또 3대혁명소조들은 사상 기술 문화혁명에서 당중앙의 지도 밑에 활동하는 지도역량이며,각급 당조직들의 사업을 도와주는 방조자이다 라고 선전하고 있다. 북한은 1990년 2월 10일 3대혁명소조 결성 17주년에 즈음하여 1973년 2월 부터 오늘에 이르는 동안 우리당의 현명한 영도 밑에 17만여 명의 일군들 과 새세대 청년 인텔리들이 인민경제 여러 부문에 파견되어 당원 및 근로자 들의 3대혁명 수행을 적극 도와주었다 고 밝히고 이들 중 2만여명이 노동당 원이 되었으며, 공화국 영웅 칭호 1명, 노력혁신영웅 칭호 24명을 비롯해 각종 상훈 수여자가 5만여 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115) 북한의 3대혁명소조운동은 한 동안 언론과 공식 문헌에서 사라졌다가 2000 년대 초반에 되어서야 다시 보도되기 시작하였다.1995년 말경부터 2001년까 지 3대혁명소조운동의 공백이 있었던 것이다. 116) 로동신문 기사에서 각지 공장과 기업소,농업부문에 파견된 3대혁명소조원들이 생산에서 걸리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기술혁신을 힘 있게 벌여 최근연간 1천 150여건의 혁신안을 생산에 반영했다 라는 내용이 알려짐으로써 3대혁명소조운동의 재 개를 공식 확인할 수 있다. 117) 114) 정영철, 김정일 체제 형성의 사회정치적 기원: 1967~1982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2001), p. 156. 115) 권오윤, 북한 동원체제의 변화에 관한 연구, p. 34. 116) 정성장,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의 후계 문제: 현황과 향후 전망, 정책보고서 통권 52호(세종연구소, 2004년 8월), p. 30. 117) 로동신문, 2003년 12월 12일.
- 33 - 제4장 포스트 김정일 체제와 청년동맹 1절 김정일의 후계체제 현황 1 김정일 건강 악화와 후계 체제 구축 2008년 8월 김정일의 건강문제가 표면화됨으로써 북한의 내일 에 대한 다 양한 논의가 진행되었다.김정일은 2008년 8월 건강이상으로 정상업무를 중 단했다.북한 정권 창건 기념일인 9.9절과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일인 10.10절 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김정일이 뇌졸중 증세를 일으켰고,이후 병세 가 상당히 진척되었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김정일의 건강 문제는 북한체제 변화에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였다.김정일의 건강문제가 등장하면서 자연스 럽게 포스트 김정일이라는 용어가 등장했으며,후계자 문제가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등장하였다. 2008년 8월 이후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던 김정일이 가장 먼저 한 일은 2009 년 1월 말 후계자 지명이었다.김정일은 김정은의 생일날인 2009년 1월 8일 후계자 결정 교시를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의 리제강 제1부부장에게 하달했다.리제강은 조직지도부 과장급 이상 간부들을 긴급소집하여 김정일 의 결정 사항을 전달한 데 이어 각 도당으로까지 후계관련 지시를 하달했으 며,고위층을 중심으로 후계자 결정에 관한 소식을 빠르게 확산시켰다.이러 한 후계자 결정 사실은 동시에 군대 내에서 당 사업을 하는 총정치국을 통 해 북한군 대좌 수준까지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118) 2009년 10월 9일 당시 소문 으로만 나돌던 119) 김정일의 후계자 김정은에 대 한 찬양 합창곡인 발걸음 의 존재가 북한 관영매체인 조선중앙TV를 통해 확 인되었다.노래구절에 등장하는 김 대장 이란 표현은 김정일의 셋째 아들로 후계자로 유력시되는 김정은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120) 사실 발걸음 은 김정은의 아홉 살 생일 때(1992년 1월 8일)처음으로 연주되었다고 한다. 이 노래는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보내는 이른바 생일선물이라는 것이다.아홉 살 생일 때 발표할 당시의 가사는 김 대장 부분이 작은 대장 으로 되어 있 었는데,최근에 개사된 것으로 보인다. 121) 118) 이승열, 북한 후계체제 구축의 세 가지 결정요인 에 대한 분석, p. 154. 119) 공식확인되기 이전인 2009년 6월 2일자 동아일보는 발걸음 전체 가사를 소개한 바 있음. 가사는 다음과 같음. (1절)척척 척척척 발걸음 우리 김대장 발걸음 2월의 정기 뿌리며 앞으로 척척척 발걸음 발걸음 힘차게 구르면온나라 강산이 반기며 척척/ (2절) 척척 척척척 발걸음 우리 김대장 발걸음 2월의 기상 떨치며 앞으로 척척척 발걸음 발걸음 힘차게 한번 구르면 온나라 인민이 따라서 척척척/ (3절) 척척 척척척 발걸음 우리 김 대장 발걸음 2월의 위업 받들어 앞으로 척척척 발걸음 발걸음 더 높이 울려 퍼져라 찬란한 미래를 앞당겨 척 척척 120) 이영종, 후계자 김정은, p. 19.
- 34 - 북한은 김정은 후계자 내정 원년인 2009년을 변이 나는 해(큰 변화가 있는 해 라고 주장하며 그 성과 중의 하나로 4월 15일 김일성의 생일을 맞아 대동 강변에서 열린 축포야회를 꼽고 있다.북한은 주민 강연 등에서 2009년 4월 5일에 발사한 로켓을 인공위성 광명성 2호 라고 명명하면서 발사 현장에 김 정일과 함께 김정은이 참관했다고 하면서 김정은 선군업적 으로 선전하고 있다.아울러 북한 언론들은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인 2009년 8월부 터 본격적으로 산업 시설 CNC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이 또한 김정은의 공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왔다. 2010년 4월 14일에도 태양절기념 축포야회를 갖고 3대세습의 정당성을 알 리는 움직임을 보였다.김기남 노동당 비서는 연설을 통해 절세의 위인들을 대를 이어 모신 행운을 지닌 것으로 하여 오늘과 같은 희망의 축포를 터져 올릴 수 있으며,주체혁명 위업의 창창한 미래에 대한 확신을 안고 전진해 나갈 수 있다 고 말한 것으로 조선중앙방송은 전했다. 122) 김정은이 태어난 평북 창성의 관저는 김정은의 혁명역사 를 칭송하기 위한 사적지로 지정되어 2007년 3월부터 2009년 1월까지 2년여에 걸쳐 극비리에 확장 개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일의 요리사 로 알려진 후지모토 겐 지가 북한에 있을 때 옥외 사격장까지 갖춘 평북 창성의 초대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사적지로 지정된 관저는 바로 이 초대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 정된다.김정일의 백두산 밀영 집과 같이 주민들에게 나중에 혁명의 성지 로 교양하기 위한 김정은 고향집 사적지는 김정일의 명령으로 당중앙위원회 역 사연구소의 지도하에 북한군 제1여단 연대의 특별건설대에 의해 완공되었다 고 한다.이 같은 사실을 토대로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사업이 적어도 2007년 3월 이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123) 단 계 내 용 후계수업 단계 (1983~2006.12) <표 2> 김정은의 후계체계 형성 단계 -어머니 고영희와 김정일에 의해 왕자 로 키워짐.김정일은 세 아들 중 특히 김정은을 총애함 -1996여름 ~2001.1스위스 유학 -고영희 생존 시 북한 엘리트들이 참석하는 각종 연회 참석 -고영희가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해 측근을 동원하여 김정일 설득 -고영희 생존 시 김정일의 군부대 방문 동행 121) 후지모토 겐지 지음, 한유희 옮김,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 (서울: 맥스, 2010), p. 126. 122) 고유환, 김정은 후계구축 논리와 징후, pp. 107~108. 123) 정성장, 김정은 후계체계의 공식화와 북한 권력체계 변화 (현대북한연구회 발표자료, 2010년 11월 9일), p. 8.
- 35 - -2002~2006.12 김일성군사종합대학 보병지휘관 3년제와 연구 년 2년제 수학(김정일의 선군정치 계승에 필요한 자질 습득) -김정은이 태어난 평북 창성의 관저를 사적지로 지정 -북한사회에 대한 김정은의 정책적 지도를 뒷받침할 정치,경 제,군사 등의 40~50대 실력자들로 구성된 실무팀 구성 후계자 내정 -김정일의 군부대 방문 수행 단계 -2008년 11월 자강도 군수공업 부문에 대한 김정일 현지지도 (2006.12~2009.1) 에 동행하여 군수공장과 군부대 시찰 -2008년 12월부터 군부에서 비공개로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지 하는 궐기모임 시작됨 -2008년 12월 김정일의 사리원 미곡협동농장 현지지도 동행 -2009년 1월 8일 후계자 결정 후 중앙당 조직지도부와 총정치 국을 통해 당과 군대 장악 착수 -1월~2월 국가안전보위부,인민보안성,군대,중앙당에서 김정 은에 대한 충성맹세 모임 개최 -2월 16일(김정일의 생일),김일성의 97회 생일(4월 15일) 축 포야회 시험발사 지휘 -4월 5일 김정일의 위성관제조종종합지휘소 시찰에 동행 -4월 14일 강성대국의 물보라 라는 이름으로 김정일도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김일성의 97회 생일 기념 축포야회 개최 -4월 20일~9월 16일,대중 총동원 증산운동인 150일 전투 지 정치적 휘 지도체계 구축 -5월 1일(국제노동절)북한 전역에서 금속공업과 연관부문의 (2009년 상반기) 노동자 1만 5,000여명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김정일과 함께 국 가공훈합창단 공연과 축포야회를 비롯해 다양한 경축공연을 관람토록 하는 성대한 행사 조직 -김정일의 군 관련 기관에 대한 현지지도 사전 준비 -중앙당 조직지도부를 통해 파워 엘리트 인사에 관여 -김정은에 의한 권력승계 정당화 문건 및 찬양가요 배포 -5월 25일 제2차 핵실험 후 해외공관장에게 후계자 결정 사실 통보 -대략 6월 말까지 단계적으로 각 조직의 상층부에서 하층부로 후계자 결정 통보 -군이 서서히 김정일의 군대 에서 김정은의 군대 로 변화됨 -김정일이 직접 챙겨야 할 핵심적 사안을 제외하고는 장성택 중앙당 행정부장,리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과 합의하여 군 정책적 대와 당의 중요 정책 결정 지도체계 구축 -김정은 주도의 북한 개혁 개방전략 수립 팀 가동 (2009년 하반기) -군 총정치국과 공안기관들의 김정은에 대한 직보체계 수립 -일부 공공장소에 김정은 선전벽보 및 김정은 찬양가요 발걸 음 게시 정책결정과 인사에의 적극적 개입 (2010.1~2010.9) -신년공동사설을 통해 인민생활 중시 경제정책 방향 제시 -평양시 10만 세대 주택 건설 지휘 -박남기 중앙당 계획재정부장 해임 주도 -김정은을 거쳐 김정일에게로 올라가는 보고체계 수립
- 36 - -당대표자회 개최 준비 작업 지휘 -조선인민군 대장으로 선임 -당대표자회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 -외신이 생중계하던 당창건 65주년 기념(10.10.10)군 열병식 참석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 장의위원회 2번째 호명 -공안 책임자인 류경,주상성 해임 주도 -멍젠주 중국 공안부장,김정은 후계세습 첫 공식 인정 후계자 공식화 -조선중앙TV 6월 11일 방영 영화에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 (2010.9~2011.10 동지를 위하여 한 목숨 바쳐 싸우자 는 플래카드 등장 현재) -청년동맹 기관지인 청년전위 (11.7.31)에 김정은을 찬양하는 글( 전설적 위인이신 김대장 선군의 총대 높이 드셨다 )게재 -국가 창건 63주년(11.9.9)기념 노농적위대 열병식 참석,당 정치국 상무위원인 김영남 다음,최영림,리영호 앞에 소개 -김정은,김정일과 라오스 촘말리 시야손 대통령의 정상회담 뒤 기념촬영,정상회담 배석은 외교분야까지 후계자 수업이 진 행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 자료:정성장, 현대 북한의 정치 (서울:한울,2001),p.141,p.153.;기 타 언론 자료 등 2008년 8월 김정일이 건강 이상으로 쓰러진 이후 북한매체는 백두산 핏줄 에 의한 혁명의 계승을 강조했다.2008년 9월 8일 로동신문은 조선의 태양 은 언제나 백두에서 왔고 백두의 핏줄기는 김일성 민족의 영원한 생명선 이 라고 강조해 부자 세습에 의한 후계를 암시했다.또한 2008년 11월 6일자 로 동신문에는 혁명위업을 계승하는 3세 4세들의 평균 나이가 25세 라는 표현 이 등장해 이 기사가 당시 25세이던 김정은을 염두에 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124) 조선인민군 은 김정은의 생일인 2010년 1월 8일을 맞이하여 선군시대의 미래의 봄은 1월부터 시작된다 는 표현을 사용,3대 세습을 암시하였다. 우 리 인민은 어버이 수령님의 은덕을 길이 전하며 4월의 봄을 노래했다.우리 최고사령관 동지를 끝없이 신뢰하며 2월은 봄이라고 소리높이 구가했다 며 오늘 우리는 선군조선의 미래의 봄은 1월부터 시작된다고 격조높이 칭송한 다 고 강조하였다.또한 4월의 봄이 있어 사회주의 조선이 있고,2월의 봄 이 있어 주체의 강성대국이 있으며,1월의 봄이 있어 강성부흥하고 영원무궁 한 김일성 조선이 있다 고 서술하고 있다. 125) 2 제3차 당대표자회와 김정은 부상 124) 김수민, 북한의 후계 체제: 형성과 전망, 평화학 연구 제11권 제4호(2010), p. 118. 125) 이은철, 북한 권력승계 과정에서의 청년동맹 역할 연구 (동국대 석사학위 논문, 2010), pp. 94~95.
- 37 - 북한은 지난 2010년 9월 28일 44년 만에 개최한 노동당 대표자회에 후계자 김정은을 전격 등장시킴으로써 그 동안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3대 세습을 공 식화하였다.2010년 개정 당 규약에서는 김일성을 전면으로 내세우며,조선 노동당의 성격을 김일성의 당 으로 규정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 다. 126) 1980년 규약에서는 김일성이란 단어가 4회 등장했으나,2010년판에는 11회나 등장한다.특히 본문에 김일성 단어는 1980년판에는 한 번도 없었으 나,2010년판에는 여러 번 등장한다.또한 김일성이 당과 인민의 영원한 수 령이라는 부분이 추가되었으며,더 나아가 김일성을 당 뿐만 아니라 군 정권 기관 근로단체 등 당 규약에 나오는 모든 조직의 설립자로 규정하였다.특히 군을 노동당의 혁명적 무장력 에서 김일성이 창건한 혁명적 무장력 으로 수 정하였다. 127) 임재천은 조선노동당 규약 배경과 의도를 네 가지로 정리한다.첫째,김정 일 사후를 대비하여 후계세습을 제도적으로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이다.근거 로 서문에서 당안에 사상과 영도의 유일성을 보장 하고 당건설에서 계승 성을 보장 한다는 부분이 김정일로부터 김정은으로의 권력승계를 염두에 두 고 작성된 부분이라고 주장한다.둘째,김일성-김정일 권력승계가 시작된 이 후 김정일의 치적을 기록하기 위해서이다. 선군정치, 선군혁명 등의 단어 등장들을 예를 들고 있다.셋째,당대표자회 개최와 당 규약 개정을 통해 당 의 지도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도 엿보인다.특히 당이 군에 대한 지도력 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는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이 당중앙군사위원회 부 위원장직을 맡으면서 보다 분명해졌고,이는 김정일 이후 김정은으로 하여금 당을 통해 군을 장악하게 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고 분석한다.넷째,당 규 약 개정을 통해 1980년 제6차 당대회 이후 변화된 사회적 상황에 대한 당의 대응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이다. 128) 개정된 당 규약에서 주목할 만한 것 중에 하나가 당의 당면목적 과 최종목 적 의 변화이다. 당면목적 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 라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가치지향적인 목표를 버리고 2012년까지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 이라 는 나름대로 실현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적 목표를 내세운 것을 주목한다. 이는 김정일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이후 김정은으로의 후계정치를 시작하면 서 새로운 젊은 지도자가 보다 현실적인 목표하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126) 1980년 당 규약 첫 문장에서는 조선로동당은 김일성이 창건한 주체형의 혁명적 맑스-레닌주의당 이라고 서술한 것이 2010년 당 규약에서는 조선로동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당이다 라고 바뀌었다. 127) 김갑식, 북한 노동당규약의 개정 배경과 특징, 이슈와 논점 제179호(국회 입법조사처), p. 2. 128) 임재천, 조선노동당 제3차 대표자회와 당 규약 개정, 북한의 노동당 규약 개정과 3대 권력세습 (국가안 보전략연구소 토론회, 2011년 2월 7일), pp. 6~9.
- 38 -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란 분석이 있다. 129) 그 동안 당 규약은 북한의 헌법과 불일치하고 있었다.이미 북한 헌법은 당 국가체제에 입각한 당적 영도원칙을 강화하고,공산주의 이념을 배제하고 주 체사상의 우월성과 선군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추가하였다.이에 비해 당 규약 은 1980년 규정에 머물러 괴리현상을 보이고 있었다.이번 당 규약 개정으로 유명무실화한 당 규약의 위상 강화를 통해 규약의 규범력과 구속력을 강화 한 면이 있다.즉 당의 성격 및 이념,지도적 지침,혁명전통,당의 지위와 역할,당면목적과 최종목적,당 활동의 최고원칙 등의 변화를 통해 주체사상 및 선군사상에 기초한 사회주의 강성대국의 건설이라는 기치를 반영한 것이 다.이 점에서 당 규약 개정은 그간 현실과 규범 사이의 불일치현상을 해소 한 부분이 있다. 130) 2010년 당 규약 개정 내용 중에 인민정권과 청년동맹에 대한 당의 령도를 강화하며 인민군대안의 당조직들의 역할을 높일 데 대한 내용을 보충 했다 고 밝혔다. 131) 즉 <표 3>에서 볼 때 2010년 당 규약에서는 청년동맹 규정은 1980년 당 규약 내용 보다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1970년대 5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북한의 근로단체는 당의 외곽단체,인전대로서의 위상과 기능을 제 도적 확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이에 근로단체는 당의 인전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우선 북한사회가 나가고자 했던 지향,즉 김일성 유일체제 확립에 적극 호응하게 된다.따라서 북한 근로단체들은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사상교양사업과 조직사업을 본격적으로 강화하게 되는 것이다. 2010년 당 규약에서는 근로단체를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조직한 조직으로 규정하고,청년동맹에 대한 규정 중에 당의 청년중시로선을 일관하게 틀어 쥐고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이 당에 끝없이 충실한 청년전위의 대오,조국 보위와 사회주의강성대국건설에 앞장서는 돌격대가 되도록 지도한다 는 내 용을 보충하였다. <표 3>조선노동당의 근로단체 규정 변화 당 대회 창립대회 (1946년) 제2차 당대회 근로단체 규정 없음.제3장 제12조 중앙위원회 다.당의 하급기관의 지도 및 당을 원조하는 민주주의적 사회단체에서 공작하는 당원의 사업 지도 없음.위와 동일. 129) 백학순, 북한권력의 역사 (서울: 한울, 2010), p. 719. 130) 박정원, 조선로동당 규약이 개정된 배경을 보면, kolofo 칼럼 (2011년 2월 15일) 131) 당규약개정에 대한 조선로동당대표자회 결정서, 조선중앙통신, 2010년 9월 28일.
- 39 - (1948년) 제3차 당대회 (1956년) 제4차 당대회 (1961년) 제5차 당대회 (1970년) 제6차 당대회 (1980년) 없음.제5장 제37조에서 당 중앙위원회는 중앙의 국가 정권 기관 및 사회단체 들의 사업을 그 기관 내에 있는 당조를 통하여 지도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제7장 당과 민주청년동맹 62.조선민주청년동맹은 조선 로동당의 후비대로서 당의 지도하에 자기의 사업 을 진행한다.조선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회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지도를 받는다.조선민주청년동맹의 지방 조직들은 해당 급의 당 조직들의 지도를 받 아야 한다.63~65조 생략. 제9장 당과 근로대중의 조직 56.근로대중의 조직들은 근로대중의 정치조직이며 항일무장투쟁의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계승하는 당의 외곽단체이다.근로대중의 조직들은 대중의 사상교 양 조직이며,당의 대중을 연결하는 인전대이며 당의 충실한 방조자다.사회 주의로동청년동맹은 우리의 혁명과업을 직접 계승하는 청년들의 혁명적 조직 이며 당의 전투적 후비대이다.근로대중의 조직들은 당의 지도하에 자기의 사 업을 진행한다. 57.근로대중의 조직들은 맹원들 속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튼튼히 꾸리며, 로동계급의 모범을 따라 그들을 혁명화하고 로동계급화하며,그들을 당 주위에 튼튼히 결속시키며,동맹 대렬들을 공고히 하며,맹원들의 사상교양사업을 강화 하며,천리마운동과 사회주의경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며,맹원들을 혁명과 건 설에 적극적으로 조직동원한다. 가.직업동맹은 맹원들 속에서 사상,기술 및 문화혁명을 강력히 전개하며,인 민경제계획을 완수 또는 초과완수하며 경제적인 생산관리에 맹원들을 끌어들이 며,근로대중의 생활조건을 보장하기 위하여 노력을 경주하여야 한다. 나.농업근로자동맹은 맹원들속에서 사상 기술 및 문화혁명을 조직적으로 전개 하며,<우리나라의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를 관철하며,농업생산을 부단히 향상시키며,로동생산 능력을 높이며,농업근로자의 생활조건을 보장하 도록 전력을 경주한다. 다.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은 맹원들 속에서 당원 후비대를 육성하고,당대렬을 부단히 보충하며,당과 조국을 위하여 간부 후비대를 육성하며,학생들과 청년 들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충실한 건설자가 되며,깊은 지성을 소유하고 높 은 도덕과 강한 체력으로써 정치사상적으로 준비된 근위대와 결사대가 되며, 당중앙위원회를 목숨으로 옹호하며,성스러운 조국방위사업에 자각적으로 참가 하도록 그들을 교양한다. 라.녀성동맹은 맹원들의 정치사상 및 문화수준의 향상을 위한 사업을 적극적 으로 전개하며,사회주의 건설에서 녀성들의 역할을 더욱 향상시키며,그들의 아들 딸들이 혁명의 충실한 계승자가 되고 가족을 혁명화하도록 그들을 교양하 여야 한다. 58.각급 당조직들은 로동대중의 간부대렬을 강화하고,그들을 교양하며,근로 대중의 조직을 통하여 대중과의 사업체계를 수립하며,그들이 자각적으로 자기 임무를 수행하도록 지도하여야 한다. 제9장 당과 로동대중의 조직 56.근로대중의 조직들은 광범한 근로대중의 정치조직이며 항일혁명투쟁의 영 광스러운 전통을 계승하는 당의 외곽조직이다. 근로대중의 조직들은 광대한 대중의 사상교양조직이며,당과 대중을 연결하는 인전대이며 당의 충실한 보조자이다.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은 우리의 혁명과업을 직접 계승하는 청년들의 혁명적 조직이며 당의 전투적 후비대이다. 근로대중의 조직들은 당의 지도하에 자기의 사업을 진행한다. 57.근로대중의 조직들은 동맹원들 속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튼튼히 꾸리며 동맹대열을 강화하며 조직생활과 사상교양사업을 강화하고 혁명화를 통해 동맹 원들들을 당두리에 결속시키며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과 사회주의경쟁운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