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순서 개회식 9:30~10:00 인사말 :함세웅(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1부 (10:10~12:00)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사회 :조희연(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발표 1:민족주의-반공세력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7 양동안(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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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마이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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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위한 3대 논쟁

진행순서 개회식 9:30~10:00 인사말 :함세웅(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1부 (10:10~12:00)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사회 :조희연(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발표 1:민족주의-반공세력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7 양동안(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발표 2:민주화운동이 독재국가를 대한민국으로 바꿔냈다 31 -주류와 비주류의 역사사회학- 김호기(연세대학교 사회학과) 토 론 :허동현(경희대학교 교양학부) 홍석률(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 오찬 12:00~13:00 2부 (13:00~14:50)누구를 위한 대한민국인가? 사회 :임현진(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발표 1:누구를 위한 경제성장이었나?-박정희체제의 功 過 - 45 이정우(경북대학교 경제통상학부) 발표 2:누구를 위한 민주화였나? 77 신광영(중앙대학교 사회학과) 토 론 :유광호(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강문구(경남대학교 정치언론학부)

3부 (15:00~18:30)어떤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가? 사회 :안병욱(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발표 1:현실적 대안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 99 강정인(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발표 2: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 민주시장주의로 123 -나는 왜 민주시장주의를 주장하는가?- 장기표(새정치연대) 발표 3:사람나라 구상 151 최상천(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토 론 :박명림(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윤도현(현도사회복지대 사회복지학부) 이근행(생태공동체운동센터)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발 표 1 7 민족주의-반공세력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목 차 Ⅰ.머리말 Ⅱ.이승만세력과 김성수세력 Ⅲ.김구세력과 중간파세력 Ⅳ.좌익세력 Ⅴ.결어 Ⅰ.머리말 이 논문의 목적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정확히 구명하는 것이다. 어떤 정치세력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알려면 그들의 인적 구성,정치노선,활동을 알아보면 된다.어떤 정치세력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한층 정확히 알려면 그들의 인 적 구성,정치노선,활동을 알아보는 것에 더하여 그들이 참여했던 정치게임의 상대방 이었던 정치세력들의 인적 구성,정치노선,활동을 함께 알아봐야 한다.동일한 이유에 서 대한민국 건국세력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정확히 알려면 대한민국 건국세력의 인 적 구성,정치노선,활동을 추적하는 것에 더하여 해방정국에서 대한민국 건국세력과 정치게임을 전개했던 여타 정치세력들의 인적 구성,정치노선,활동을 함께 추적해봐야 한다. 이 논문은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대한민국 건국주도세력과 여타 정치세력들의 인적 구성과 정치노선에 초점을 맞추어 작성되었다. 해방정국의 정치세력은 우익 좌익 중간파의 3개로 분류할 수 있다.대한민국 건국주

8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도세력은 우익 중의 이승만세력과 김성수세력이다.우익의 한 부분이었던 김구세력은 대한민국 건국세력과 줄곧 협력해오다가 대한민국 건국의 최종단계에서 건국주도세력 의 반대진영으로 이탈했다.중간파와 좌익은 대한민국 건국세력의 건국노력을 시종일관 방해 저지했다.대한민국 건국주도세력 및 해방정국에서 활동한 여타 정치세력들의 인적 구성,정치노선을 건국주도세력,건국에 대해 덜 강경하게 반대한 세력,건국에 극 렬하게 반대한 세력의 순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Ⅱ.이승만세력과 김성수세력 이승만세력(독립촉성국민회=민족통일총본부=민족대표자대회)은 이승만이 1910년 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YMCA총무로 활동할 때 그의 지도를 받 았던 인사들,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그를 추종했던 인사들,기독교 신앙을 가 진 정치인들,임시정부 우파의 일부,해방 후 이승만의 정치노선에 동조하여 이승만 진 영에 가담한 인사들 등으로 구성되었다.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의 정치노선은 민족통합,민족자주,민중존종,미국식 민주주의 (대체로 대통령중심 민주주의),수정자본주의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45년 12월 이 후부터는 위의 5가지에 더하여 반공-반소가 추가되었다. <민족통합>이승만은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민족의 단결을 촉구했다.이승만은 미 국으로부터 귀국한 직후에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하루 빨리 뭉치고 대동단결하 여 우리의 자주독립을 얻어야 한다. 한데 뭉치어서 우리 땅을 우리 국가를 찾아 놓고 전인민이 총선거를 단행하여 새 국가를 세우지 않으면 안될 줄 안다 고 말했다. 1) 그는 또 귀국 후 처음 행한 방송연설에서 모든 정당과 당파가 협동하여 우리 조선의 완전무 결한 자주독립을 찾는 것이 나의 희망하는 바입니다 라고 천명했다. 2) 이승만은 자기가 천명한 민족통합을 위해 공산당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표명했다.이승만은 전민 족이 단결하여 조속한 완전독립을 추진하기 위해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의 결성을 주도했다.그는 45년 10월 23일에 개최된 독촉중협 준비회의에서 공산주의든 지 민주주의든지 서로서로 악수할 점이 있으면 지금은 무조건 악수하고 나갑시다 라고 1)양우정 편, 이승만대통령 독립노선의 승리 (서울:독립정신보급협회출판부,1948),93~96쪽. 2) 매일신보 1945.10.18.

양동안 민족주의-반공세력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9 호소했다. 3) 이승만은 그 며칠 뒤에 있은 방송연설에서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습니다 라고 밝혔다. 4) 이승만의 남한지역 정부수립론도 결코 민족통합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었다.그는 북 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38선을 봉쇄하여 남북한의 통행 통신 통상을 차단한 후 단독정 권을 수립해놓고, 5) 사회주의화를 급속하게 추진하면서 그것을 기지로 하여 남한까지 공산화할 것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공산화통일을 방지하고 민족주의적 통일을 추구하기 위해 남한지역에 통일을 위한 과도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이승만은 그런 생각을 48년의 3 1절 기념사에서 분명하게 밝혔다.이승만은 선거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단 독정부라는 언론을 만들어서 인심을 현혹시키는 것이니 이들은 총선거도 하지말고 가만 히 앉았다가 공산화하고 말자는 것이다. 남조선에서 정부가 수립되면 남북분열을 영 구히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총선거를 지지할 수 없다는 말이 있으나 이것은 사리에 당치도 않은 말이다.사람의 몸에 한편이 죽어 가는 경우에는 살아있는 편이라도 살려 서 죽는 편을 살리기를 꾀할 것인데 다른 방책이 없이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면 살아있 는 편까지 마저 죽어버리자는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 6) 이승만의 남한지역 정부수립론 은 민족분단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북한에 단독정권이 수립되어 사회주의화를 진 행하고 있으며,한반도통일정부수립에 관한 미소의 합의가 요원한 상황에서 비공산주의 적 통일을 추진하기 위한 준비조치의 일환이었던 것이다.이승만의 남한지역 정부수립 노력은 남북한의 공산화통일을 희망하는 사람들이나 어떤 체제로든 상관없이 무조건 통 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통일지상주의자들에게는 민족분단을 초래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체제로의 통일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는 통일을 위한 준비조치가 될 것이다. <민족자주>이승만은 해방정국에서 민족자주성을 제일 강력하게 가장 많이 주장했 다.이승만은 45년 10월 신탁통치론이 처음 보도되었을 때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입장 을 표명하면서 미소 양국을 물론하고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방해하면 우리도 이와 싸 3) 매일신보 1945.10.25. 4) 매일신보 1945.10.26. 5)북한의 역사책은 46년 2월에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북한지역의 인민민주주의독재정권 으로,47년 2월에 수립된 북조선인민위원회를 프롤레타리아독재정권 으로 기술하고 있다.김한길, 현대조선력사 (평양:사회과학출판사,1983),228,255쪽. 6) 동아일보 1948.3.2.

10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고 단언했다. 7) 이러한 발언은 우리나라에 신탁통치를 강요하 면 그 나라가 미국이 되었건 소련이 되었건 그에 맞서 싸울 것임을 밝히는 것으로서 그 의 강렬한 민족자주의식을 나타내는 것이다.이승만은 제2차 미소공위가 교착상태에 처했을 때 한국 정부수립문제에 대해 미소가 손을 떼고 한국민족의 자주적 결정에 맡기 라고 촉구하면서, 우리가 우리 뜻대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정부이지 미소공위나 만국 회의에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정부가 아니다 라고 말했고, 8) 또한 우리의 최대 불행은 미소 양국의 이념차이로 인한 혼돈에 아무 관계도 없이 끌려 들어간 것이다.미소 양국 은 각기 자기들의 문제를 혼돈하지 말고 우리로 하여금 국권을 회복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라고도 촉구했다. 9) 이승만은 심지어 그의 희망대로 한국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었을 때도 한편으로는 그 것을 환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문제를 외국손님들이 아무리 좋게 해결하여 주려하여도 한인들의 의사를 모르고는 우리 문제를 좋도록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한 국문제는 한민족 자신의 역량에 의하여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라고 걱정했 다. 10) 이러한 강한 민족자주의식으로 인하여 그는 민족의 자주적 역량에 의한 정부수 립을 위해 소련과는 물론이고 미군정과도 치열하게 투쟁했던 것이다. <민중존중>이승만은 항상 정치문제에 대한 민중의 선택을 중시했다.구한말 그가 앞장섰던 만민공동회운동도 민중운동이었다.해방정국에서도 이승만은 귀국직후부터 전인민이 참여하는 선거 에 의한 정부수립 방침을 반복해서 주장했다.이승만은 심지어 유엔총회가 유엔 감시 하의 남북한 총선을 결의했을 때도 향후 유엔위원단의 방한시 민 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민족의 대표를 참칭하여 유엔위원단과 협의하는 사태 를 우려하면서 유엔위원이 언제 도착하든지 우리가 선거를 하루 바삐 행하여 민의로 성립한 국회가 있어야 그 위원들이 우리 민족의 정당한 대표와 협의 합작해서 민의대로 해결할 것이다 라고 촉구했다. 11) 이승만은 집권 후에도 노동자와 농민의 복지증진을 위한 정책의 입안과 실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51년 자유당을 창당할 때도 그 당의 당명을 노농계층을 주로 대변한다는 뜻에서 노농당으로 정하려 했으며, 12) 자기에게 반 7)우남실록편찬회, 우남실록 (서울:열화당,1976),316쪽. 8) 경향신문 1947.8.12. 9) 우남실록,471쪽. 10) 우남실록,484쪽. 11) 동아일보 1947.11.19. 12)공보처, 대통령 이승만박사 담화집 제1집(서울:공보처,1953),65쪽.

양동안 민족주의-반공세력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11 대하는 중앙의 정치 엘리트를 견제하기 위해 민중을 동원하여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정치활동을 함에 있어서 엘리트보다 민중을 더 많이 배려했으며,정치엘리트 와의 협상보다 민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정치수법을 선호했으며,민중이 자기편이라고 믿었다.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한국정치사상 최초의 민중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식 민주주의>이승만은 우리나라에 정착시켜야 할 정치제도는 미국식 민주주 의라고 생각하고 미국식 민주주의 제도의 도입을 위해 노력했다.이승만은 제1차 미소 공위기간 중 현재 진행 중인 미소공위는 조선에 정부를 수립할 것이나 이는 미국식 민 주주의 정부를 수립해야 할 것 이라고 촉구했다. 13) 이승만은 제헌국회 헌법제정과정에 서도 초안이 유럽식 의원내각제로 작성된 것을 헌법기초위원들을 강력히 설득하여 미국 식 대통령제로 변경했다. <수정자본주의>이승만이 추구하는 경제체제는 수정자본주의였다.그는 46년 2월에 행한 모범적 국가를 만들자 란 제목의 방송연설에서 앞으로 건국될 새 나라가 취해야 할 경제정책으로 중요 광공업체,삼림,은행,철도,통신,운수 등 공익사업기관의 국유 화, 모든 상거래를 정부의 통제 하에 두어 소비자 생산자 무역자의 균등한 이익보장, 미곡을 비롯한 생필품에 최고가격제 실시, 고리대금의 악습 금지, 궁민과 영세농 의 세금 면제,국비에 의한 의무교육 실시, 모든 근로자에 대한 직업보장과 최저임금 제 실시,8시간 근무제 실시 등을 발표했다. 14) 경제문제에 대한 이승만의 이러한 발언 은 그가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수정자본주의 경제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반공-반소>이승만의 반공노선은 공산당이 민족통합노선에 반대하기 때문에 취하 게 된 노선이다.귀국직후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호감을 표시하기도 했던 이승만은 공 산당이 민족통합노선을 거부하고 민족통합 추구단체인 독촉중협을 파괴하려 하자 반공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45년 12월에 행한 한 방송연설에서 이승만은 한국은 지금 공 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공산주의자들이)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사를 조작하여 국민 전체에 분열상태를 세인에게 선전하다가 지금은 민 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희 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여 민심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종시는 우리나라도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두 切 分 으 로 나누어져서 동족상쟁의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라고 선언했다.이승만의 반공노선 13) 우남실록,466쪽. 14) 우남실록,382~384쪽.

12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의 내용은 공산주의정책에는 부분적으로 수용할 요소가 있지만 혁명투쟁을 하는 공산당 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이승만의 반공노선은 반소노선을 동반한다.그는 소련 이 사람들을 속이고 세계를 공산화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으며,소련이 그런 야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 문제는 미국과 소련이 모스크바협정에서 합의한 바 대로 해결될 수 없을 것으로 보았다. 15) 이승만은 해방정국에서 소련이 남한까지 공산 화하려 한다고 확신했으며,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소련의 계획으로부터 남한만이라도 구하기 위해 반공-반소투쟁을 일관되게 전개했다. 김성수세력(한민당 주류)은 김성수 직계와 비직계로 분류할 수 있다.김성수 직계는 동아일보 보성전문 중앙고보 경성방직 등 김성수와 연관된 기업과 학교에서 일했던 인 사들과 김성수의 고향인 호남지방의 지식인과 유지 등으로 구성되었다.한민당주류(광 의의 김성수세력)에 속하면서도 김성수 직계가 아닌 인사들은 해외유학파 지식인과 유 산계급(지주와 민족자본가)출신 인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김성수세력의 정치노선은 민족통합,민족자주,민중존중,유럽식 민주주의(의회중심 민주주의),수정자본주의 등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45년 12월 반탁투쟁개시 이후 반공-반소가 추가되었다.김성수는 해방정국에서 자신의 정치철학에 관한 발언을 별 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성수세력의 정치노선은 그들이 주도하여 창당한 한민당의 정 강과 정책을 통해 추론할 수밖에 없다. <민족통합 민족자주>민족통합과 민족자주에 대한 김성수세력의 입장은 그리 강하 게 드러나지 않았다.그들의 한민당은 창당대회에서 자주적 독립국가의 완성 을 천명했 고,그 당의 대변인 함상훈은 그것의 의미를 미소 양군이 철퇴하고 조선이 지리적으로 민족적으로 행정적으로 완전히 통일된 자주독립국가가 될 때까지 분투 노력하며,조선 을 반분한 미소 양군의 분단점령이 신속히 철거되도록 노력하는 것 이라고 설명했 다. 16) 민족통합과 민족자주에 대한 김성수세력의 입장은 이승만세력이나 김구세력의 그것에 비교할 때 강도가 크게 약한 것이었다.김성수세력에 속하는 사람들이 미군정청 관리로 활동하면서 김구세력의 미군정에 대한 저항활동을 견제했고,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 때 김성수세력이 미군정의 종용에 따라 이승만-김구의 미소공위 보이콧노선 을 이탈하여 미소공위 참여를 선언했던 사실 등이 그런 점을 잘 입증해준다. 15)이승만, 일민주의 개술 (서울:일민주의 보급회,1949),14~15쪽; 우남실록,461쪽. 16)함상훈, 我 黨 의 주의 정책, 개벽 제8권 1호(1946년 1월),53쪽.

양동안 민족주의-반공세력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13 <민중존중 유럽식 민주주의>김성수세력은 이승만을 추종하여 정치세력들 간의 협 상에 의한 정부구성에 반대하고 총선에 의한 정부구성을 주장했다.한민당은 정강에서 민주주의 정체의 수립 을 천명했다.한민당의 선전부장 함상훈은 한민당 정강에서 천명 한 민주주의 정체의 수립이란 남녀가 모두 참여하는 보통선거에 의한 총선을 통해 국회 를 구성하고,국회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도록 하며,국가가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선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체의 수립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17) 함상훈이 말하는 총선을 통해 국회를 구성하고 국회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민주주의는 유럽식 의원내각제이다.한 민당이 유럽식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했다는 것은 48년 7월 제헌국회에서 헌법초안을 작 성할 때 한민당의 주도로 바이마르공화국식 의원내각제 헌법 초안을 작성했던 사실에서 도 확인된다. <수정자본주의>한민당이 46년 2월에 발표한 정책세목 의 내용에는 8시간 노동 제 원칙의 확립,노동자의 단체교섭권 확립,노동자의 자주적 노동조합법의 제정,공장 의 운영 및 관리에 노동자 대표의 참여,부녀자와 미성년자의 야간노동 및 위험노동 금 지,부녀자와 유소년의 노동금지 등과 같은 노동자 권익 보호정책, 토지소유의 한도 제한과 농민본위의 경작권 균등 확립,농업경영의 자주적 협동조합화,농업생산의 합리 화,중요농산물의 통제 등과 같은 농업개혁정책, 광공업의 육성 확충을 기할 계획경 제의 확립,대규모의 주요 공장 및 광산의 국영 내지 국가관리,생활필수품의 생산 분배 및 무역의 통제관리,철도 기타 주요 교통기관 통신기관 및 동력의 국영 내지 국가관리, 주요 광산 기타 금융기관의 국영 및 통제관리 등과 같은 경제에 대한 국가통제정책, 국민교육제의 급속실시,국민학교 수업료의 폐지와 같은 사회정책 등이 포함되어 있 다. 18) 한민당의 대변인 함상훈은 한민당의 토지정책을 설명하면서 한층 더 개혁적인 주장을 했다.그는 지주계급은 지금까지 하여온 기생충적 생활을 청산할 것이고,국가 에서도 지주들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획기적으로 생산 면에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한민당은)지주의 토지를 적당한 가격으로 매수하여 그 지주계급들을 공업 방면에 적극적으로 전환시킬 정책을 취할 것 이라고 말했다. 19) 한민당이 천명한 이러 한 경제사회정책은 그 실천의지가 얼마나 진지했느냐를 논외로 하고 김성수세력이 기본 적으로 수정자본주의 경제노선을 취하고 있었음을 확인해준다. 17)Ibid.,p.52. 18) 동아일보 1946.2.8. 19)함상훈 외, 좌담:정당통일과 경제정책,춘추 제5권 1호<심지연,한국민주당연구 Ⅰ(서울:풀 빛,1982),163~167쪽.

14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Ⅲ.김구세력과 중간파세력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으나 그 반대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세력은 김구세력(임 시정부 우파=한독당)과 중간파세력이다.김구세력과 중간파가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 한 목적은 남북분단으로 인한 동족상쟁의 비극을 방지하자는 데 있었다. 김구세력은 47년 말까지 이승만-김성수세력과 자주적 건국(또는 자율정부수립운 동)의 동지관계에 있었다.김구는 47년 12월 1일에도 이승만의 정부수립노선을 지지 하는 성명을 발표했다.그 성명에서 김구는 유엔이 한국문제를 정식으로 상정하여 토 론한 결과 유엔 감시 하에서 신탁 없이 내정간섭 없는 남북을 통한 총선거로써 자주통 일의 독립정부를 우리나라에 수립하도록 협력하고자 결정하였다. 우리는 유엔결의안 을 지지하는 바이다. 만일 일보를 후퇴하여 불행히 소련의 방해로 인하여 북한의 선거 만은 실시하지 못할지라도 추후 하시든지 그 방해가 제거되는 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그 것은 남한의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좀더 명백히 규정하자면 그것도 법리상으로 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오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이 박사가 주장하 는 정부는 상술한 제2의 경우에 치중할 뿐이지 결국에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인 데 세인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정부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다 라고 천명했다. 20) 이처 럼 이승만의 남한정부수립에 동조적이었던 김구는 48년 1월 26일 유엔위원단과의 면 담에서부터 돌연 남북협상을 주장하며 남한정부수립에 반대하는 쪽으로 노선을 전환했 다.이때부터 김구세력은 우익진영과 결별하고 중간파세력과 연대했다. 김구세력은 임시정부의 우파와 김구의 귀국 후 김구 또는 한독당의 정치노선에 동조 하여 한독당에 합류한 국내활동인사 등으로 구성되었다.해방 후 한독당에 합류했던 국 내파는 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막된 후 이승만과 함께 미소공위 보이콧투 쟁을 전개하는 김구의 지도노선을 반대하고 김구세력으로부터 이탈했다.이들은 모두 중간파에 가담했다. 해방정국에서 김구세력의 정치노선은 민족통합,민족자주,임정존중,한국적 민주주 의,사회민주주의 등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45년 12월 반탁투쟁 때부터는 위의 5가 지에 더하여 반소-반공이 추가되었으나,김구의 반소-반공노선은 48년 1월 26일 김 구-유엔대표단과의 면담을 계기로 폐기되었다. 20) 동아일보 1947.12.3.

양동안 민족주의-반공세력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15 <민족통합 민족자주 임정존중>김구가 해방정국에서 민족통합과 민족자주의 상 징적 존재라는 점은 너무도 잘 알려진 바이기 때문에 김구의 민족통합 민족자주노선 에 관해서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또 그가 임정주석으로서 해방정국에서 임정이 정부로 인정받기 위해 투쟁해왔기 때문에 그의 임정존중노선도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 다.다만 그의 임정존중노선이 결국 이승만-김성수의 민중존중노선과 대립하게 되어 김구세력의 우익진영으로부터의 이탈을 초래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는 점은 지적해둘 필 요가 있다. <한국적 민주주의>김구는 정치체제와 관련하여 한국적 민주주의를 주장했다.그는 나의 정치이념은 한 마디로 표시하면 자유이다.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 야 한다.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 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 를 그대로 직역[필자 주:직수입을 의미]하자는 것은 아니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文 運 에 보태는 일이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21) <사회민주주의>김구가 추구했던 경제체제는 사회민주주의에 가깝다.그는 소련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공산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독점자본주의의 발호로 인하여 무산자를 외롭게 할 뿐 아니라 낙후 한 국가를 자기 상품시장화 하는 데는 찬성할 수 없다 우리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 을 기초로 한 자주 독립의 조국을 가지기만 원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고, 봉건적 악폐에 시달려온 우리로서야 누가 또 다시 압박자와 착취자와의 집단체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를 동경하고 구가할 것이냐 라고도 말했다. 22) 김구는 소련식 공산독재도 독점자본주의 도 아닌 경제체제를 주장하며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주장했는데,이는 임시정부의 강령에서도 천명된 3균주의이다.후술하는 바와 같이 조소앙이 제창한 3균주의는 사실 상 사회민주주의와 동일하다. <반소-반공>김구는 해방정국에서 반소-반공의 입장을 취하기는 했지만 소련이나 공산주의에 대해 전면적인 반대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민족의 자주성에 반대되는 신탁 21)김구, 나의 소원,송건호 편, 김구 (서울:한길사,1980),12~16쪽. 22)김구, 나의 갈 길은 명백하다,김구,325쪽;김구, 삼천만 민중의 절대희구는 오직 해방과 독립, 김구,271쪽.

16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통치를 강요한다는 이유로 소련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고,그러한 소련에 추종하여 신 탁통치를 찬성한다는 이유로 공산당을 반대했다.이승만은 그의 반공적 입장 때문에 반 소적 입장을 취한 데 반해,김구는 반탁-반소의 입장 때문에 반공적 입장을 취했다.따 라서 신탁통치문제가 사라지면 그의 반소-반공은 크게 약화될 것이었다.김구는 좌우 익이란 것은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필자 주:민족을 의미]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 파에 불과한 것으로 보면서, 23) 민족의 단결과 독립을 위해서는 좌익(공산당)과 우익 을 다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중간파는 46년 5월 좌우합작위원회 활동이 개시되기 이전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 다.그때까지 남한정계는 우익-반탁진영의 비상국민회의와 좌익-찬탁진영의 민주주 의민족전선(민전)으로 완전히 양분되어 있었다.격렬한 신탁통치반대투쟁으로 미국의 한반도정책(소련과 합의해서 한반도통일정부를 구성해놓고 남한주둔 미군을 조속히 철 수하려는 정책)실천이 지장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이 김을 거세하고 미군정에 협조적 인 중간파세력을 양성하려는 계획을 가진 미군정의 지원에 따라 김규식-여운형 중심 의 좌우합작위원회활동이 전개되면서 좌우합작위원회 주변에 중간파가 형성되기 시작 하고,세력이 확대되었다. 중간파의 주요 구성요소는 김규식세력,임정중도파와 좌파,한민당에서 이탈한 한민 당 좌파,여운형세력의 일부,전향한 공산주의전력자와 비조직 좌경 지식인들,안재홍 세력 등이다.김규식세력은 재미한인 정치세력 중 반이승만파 인사들과 좌우합작위원회 활동개시 이후 김규식 주변에 모여든 인사들로 구성되었다.임정중도파는 반탁투쟁에서 는 김구세력과 협력했으나 좌우합작위 활동,과도입법의원참여,초기 남북협상 주장 등 에서는 김구세력과 거리를 두었다.임정좌파는 신탁통치 수용여부를 둘러싸고 정계가 좌우로 양분될 때 김구세력을 등지고 좌익의 민전에 참여했으며,좌우합작위 활동에 적 극 참여했다.한민당에서 이탈한 한민당 좌파는 한민당 주류가 취해 온 반공노선과 유 상매입-유상분배 토지개혁정책에 반대하여 한민당을 이탈,좌우합작위 및 그 주변조 직에 참여한 세력이다.중간파에 참여한 여운형세력의 일부는 여운형을 추종하는 인사 들 중 좌경성향이 약한 인사들이다.전향한 공산주의 전력자들이란 일제 하 공산주의 투쟁전선에서 이탈한 후 해방 후에도 공산당으로 복귀하지 않고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인사들을 말한다.좌경지식인들이란 일제하에서부터 친사회주의적인 입장 23)김구, 나의 소원, 김구,10쪽.

양동안 민족주의-반공세력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17 을 취했으나 해방 후 공산당,신민당,인민당 등 좌익정당들에 가담하지 않고 개별적으 로(기껏해야 소그룹으로)활동했던 인사들을 말한다.안재홍세력은 일제 하에서부터 비 자본주의적 민족주의 노선을 취해온 안재홍의 지도노선을 추종해온 인사들로서 해방직 후 국민당을 조직한 이후 줄곧 안재홍을 따라서 정치적 거취를 결정해온 인사들이다.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중간파는 좌우 진영에서 이탈한 파벌들이나 개별 적으로 활동한 다양한 분파와 개인들로 구성되었고,일부는 자신들의 정치노선도 분명 하게 표명하지 않아서 중간파의 정치노선을 정확하게 정리하기 어렵다.중도파는 응집 력이 약했고,대중적 지지기반도 빈약하여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했다.이처럼 정치적 중요성이 미미한 중간파의 각 구성요소들의 정치노선을 일일이 기술한다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기도 하다.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중간파의 연합체인 민족자주연맹의 노선, 조소앙의 3균주의,안재홍의 신민족(주)주의를 종합하여 중간파 전체의 정치노선을 정 리하는 것으로 중간파에 관한 논의를 줄이려 한다.그러한 종합에 근거하여 볼 때,중간 파의 정치노선은 민족통합,국제적 협조,정치세력간 협상존중,한국식 민주주의,사회 민주주의적 경제 등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민족통합>중간파의 민족통합노선은 주로 그들의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나타났다. 김규식은 46년 8월 자신의 좌우합작 추진 목적에 대해 조선민족의 당면한 지상명령은 오직 국제적으로 공약된 조국의 완전독립을 전취하고자 민족적 총역량을 집중하여야 할 것이다.좌우합작위원회의 목적은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조국의 완전독립을 촉성하자는 데 있다 고 천명했다.또 47년 1월 신년사에서 금일 우익이 좌 익을 배척하거나 좌익이 우익을 공격하는 것은 일종의 변태적 행동이며 독립을 지연시 키는 민족적 범죄행위가 될 것 이라고 말했다. 24) <국제적 협조와 민족자주의 절충>김규식과 안재홍은 모스크바협정에 포함되어 있 는 신탁통치실시에는 반대하면서,모스크바협정을 이행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는 지 지했다.그들은 46년 5월 좌우합작위 활동에서부터 47년 9월 미국이 미소공위를 포기 할 때까지의 약 1년 반 동안은 미군정의 지원을 즐기면서 민족자율정부를 추진하는 이 승만-김구-김성수세력의 민족자주노선에 반대했다.조소앙은 중간파이면서도 민족자 주의식이 강하여 신탁통치실시에도 반대했고,신탁통치가 내포된 모스크바협정을 이행 하기 위한 미소공위에 대해서도 반대했다.조소앙이 다른 중간파 정치지도자와 달리 미 소공위를 반대한 이유는 미소공위에서 소련이 반탁운동세력을 배제하려는 것 때문이었 24)강만길 심지연, 우사 김규식:항일독립투쟁과 좌우합작 (서울:한울,2000),203,254쪽.

18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다.조소앙은 소련이 반탁운동세력을 배제하려는 것은 자국에 아부하는 일부분에게 정 권을 專 任 하여 全 韓 國 적화의 야망달성을 기도하는 것 이라고 분석했다. 25) <정치세력 간의 협상 존중>중간파가 정치세력 간의 협상인 좌우합작을 주도했음으 로 그들이 정치세력 간의 협상을 중요시했다는 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중간파 세력은 정치세력 간의 협상을 중요시 한 탓으로 상대적으로 민중을 경시했다. <한국식 민주주의>김규식이 이끄는 민족자주연맹은 47년 12월 결성식에서 발표한 선언에서 금일의 조선에는 독점자본주의사회도 무산계급사회도 건립될 수 없고,오직 조선의 현실이 지시하는 조선적 민주주의 사회의 건립만이 가능하다 라고 천명했으며, 강령에서는 전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으로 평등한 권리와 자유와 행복을 얻기 위하여 노력할 것임을 밝혔다. 26) 이는 김규식세력이 한국식 민주주의를 추구했음을 알려준다. 안재홍은 해방정국에서 만민공생의 신민주주의 를 주창했다.그의 설명에 따르면,신 민주주의는 자본적 민주주의 와 대위되는 것이며,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교류 회통 된 그러면서 자본적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양자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독자적 신주 의 이지만 모택동류의 신민주주의라는 것과는 발생학적 체계에서부터 전혀 다른 것 이 며,자본적 민주주의도 부정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또는 진보적 민주주의)도 부정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이고 조선의 조건에 적합한 체제이다. 27) <사회민주주의>조소앙은 중국에서 임시정부 활동을 하던 시절부터 정치에 있어서 균권,경제에 있어서 균부,교육에 있어서 균지 의 실현을 추구하는 3균주의를 주창했 는데 이러한 3균주의는 영국 노동당의 노선,즉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것이다.조소앙은 항상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다 같이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혀왔으 며,2차대전 후 집권한 영국노동당의 노선이 자기의 3균주의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조소앙은 한 신문기고문에서 영국과 같은 나라는 삼균주의 사회건설에 가장 충실한 노 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영국노동당은 제2차 전쟁[필자 주:제2차 세계대전을 의 미]에 병든 영국민족이란 환자를 병상위에 놓고 정확한 과학적 진단 위에서 반세기 동 안 연구하였던 처방을 집행하고 있다 고 말했다. 28) 안재홍은 자기가 주창하는 신민주 25)조소앙, 역사적 상봉의 악수가 있을 때까지, 소앙선생문집 하(서울:횃불사,1979),91쪽. 26) 한성일보 1947.12.21. 27)안재홍, 역사와 과학과 신민주주의,안재홍선집간행위원회, 민세안재홍선집 2(서울:지식산업 사,1983),232~234쪽;안재홍, 민주독립과 공영국가, 민세안재홍선집 2,214쪽;안재홍, 순정 우익의 집결, 민세안재홍선집 2,209쪽.

양동안 민족주의-반공세력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19 주의는 3균주의와 표리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밝히면서, 인간생활의 기본요소인 富 權 智 의 균등을 추구하는 삼균주의는 신민주주의의 기본요소이다 고 말했다.이는 안 재홍도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했음을 말해준다. Ⅳ.좌익세력 좌익의 주요 구성요소는 박헌영세력(공산당주류)과 백남운세력(신민당주류),여운형 세력(인민당/근민당주류)등이다.공산당에는 박헌영세력 외에도 장안파가 있었으나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규모에 이르지 못했다.백남운의 신민당과 여운형의 인민당에는 비백남운세력과 비여운형세력이 있었으나 그들의 중심은 공산당 프락치,즉 박헌영세력 이었기 때문에 좌익진영의 독립적 구성요소가 되지 못했다.해방정국의 좌익진영에는 임정좌파도 참여하고 있었으나,이들은 독자적 정당을 결성하지 못하고 대체로 여운형 -백남운세력과 행동을 같이했기 때문에 별도로 언급할 가치가 없다. 박헌영세력은 일제의 탄압 하에서도 투쟁전선에서 이탈하지 않았던 강인한 공산주의 자들로 구성되었다.일제의 탄압 하에서도 투쟁전선을 유지했던 강인한 공산주의자들이 모두 박헌영의 지도 하에 투쟁했던 것은 아니지만 해방 직후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으로 부터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재건의 책임자라는 확인을 받은 후 그들은 박헌영의 지도를 따르게 되었다. 박헌영세력의 정치노선은 민족통합보다 친일파와 파쇼세력 배척 우선,국제주의(소 련의 지시추종),노 농계급존중,사회주의사회 실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친일파와 파쇼세력 배제 우선>박헌영세력은 해방정국에서 친일파와 파쇼세력의 배제를 가장 강경하게 주장했다.이승만의 주도로 모든 정치세력이 단합하여 조속한 완 전독립을 추진하기 위해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기 시작하던 45년 10 월 박헌영은 통일함에는 목표와 원칙이 또한 없을 수 없다.덮어놓고 한데 뭉칠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아직도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세력이 남아 있다.이러한 친일 파를 근절시킨 다음 옥석을 가리어 놓고 순전한 애국자 진보적 민주주의 요소만을 한데 뭉치어 통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말하여 29) 독촉중협의 본격적 활동에 앞서 친일 28)조소앙, 삼균주의자가 본 세계, 소앙선생문집 하,122쪽. 29) 자유신문 1945.10.31.

20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파 숙청부터 먼저 할 것을 주장했다.여기서 박헌영이 말하는 친일파란 주로 한민당세 력을 지칭한다.이승만이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자 박헌영세력은 독촉중협을 반 민주주의적이며 통일운동 진행을 방해하는 단체 라고 비난하면서 독촉중협에서 탈퇴했 다.박헌영세력은 45년 12월 찬탁투쟁(모스크바협정지지투쟁)개시 이후엔 친일파만 이 아니라 파쇼세력(이승만세력과 김구세력을 지칭)까지 배제할 것을 추구했다.박헌영 세력은 46년 2월 찬탁진영의 통일전선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면서 발표한 민전선언에서 우리는 진보적 분자를 총망라하여 민주주의적 민족 통일체인 민주주의민 족전선을 수립키로 하였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조선 인민의 총투표로서 선거될 인민 대표대회가 구성될 때까지 과도적 임시국회의 역할을 장악할 것이며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의 책임을 자부할 것을 선언한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파시스 트 민족분열자 등의 반민주주의적 파쇼적 경향을 배제한 민주주의민족통일체임을 선언 한다 고 말했다. 30) 이러한 박헌영세력의 태도는 신탁통치 반대투쟁을 위한 국민통일기 구로서 비상국민회의를 구성함에 있어서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에게 동참을 제의했 던 김구세력의 태도와 대조된다.박헌영세력은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에 대해서도 짧은 기간 소극적으로 동조한 것을 제외하고는 지속적으로 반대했으며,여운형의 좌우 합작위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여운형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국제주의>박헌영은 쎄쎄쎄르 즉 소련을 만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조국 이라고 선언 하여 그의 국제주의노선을 분명하게 천명했다.박헌영세력은 해방정국에서 민족내부의 적에 대해서는 단호히 배척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소련의 지시는 무조건 충실히 추종했 다.소련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협정-신탁통치 지지,미소공동위원회 지지,한국문제 의 유엔총회상정 반대,미소 양군 조기철수론 지지 등의 입장을 취했으며,박헌영이 이 끄는 공산당-남로당은 한국문제와 관련하여 소련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지지하 는 성명을 발표했다. <노 농계급존중>박헌영세력은 노 농계급을 절대적으로 존중했다.박헌영은 당면 혁명인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동력으로는 노동자 농민 도시소시민과 인테리겐챠를 설정하고,타도대상으로는 지주 고리대금업자 반동적 민족부르주아지 등과 형식적 민 주주의국가 또는 미국식의 데모크라시적 사회제도 의 건설로 지주와 대자본가의 독재 와 이익을 옹호 존중하는 정권을 수립하려는 반동적 정당 등을 설정했다. 31) 30)송남헌, 해방3년사 Ⅰ(서울:까치,1985),290~291쪽. 31)박헌영,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김남식 심지연,박헌영노선비판 (서울:세계,1986),183~184쪽.

양동안 민족주의-반공세력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21 <사회주의사회 실현>박헌영은 2단계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실현을 추진했다.박헌 영은 해방직후 노동자 농민 도시소시민 인테리겐챠 등 근로계급은 당연히 사회주의사회 의 건설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박헌영은 남한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혁명을 부르 주아민주주의혁명과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두 개의 단계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박 헌영은 금일의 조선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단계를 걸어가고 있나니,민족적 완전 독립과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이 가장 중요하고 중심되는 과업으로 서있다 고 주장했 다. 32) 그는 또 객관적 정세는 우리로 하여금 무조건하고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제 과업의 수행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요,조선에서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단계는 아직 오지 않고 있다고 힘있게 주장한다.물론 이것은 조선혁명이 앞으로 그 발전에 따 라 혁명의 제2단계인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환되어야 하며,그것이 맑스-레닌주의적 혁명관을 망각하였다는 것이 결코 아니요,그와 반대로 조선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혁명 으로 속히 넘어가게 만들기 위하여 그 전제조건인 제문제 즉 반제반봉건적 투쟁으로 그 자유발전의 길을 열어주고,또한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정권의 수립과 프롤레 타리아 헤게모니 확립이란 주요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민족적 통일전선을 강조하여 둔 다 라고 말했다. 33) 백남운세력은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북한지역으로 귀국한 모택동노선 공산주의자들 (조선독립동맹)이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활동을 재개하면서 남한지역에 부식한 공산주 의세력이다.남한지역의 모택동노선 공산주의자인 백남운을 간판으로 내세워 형성된 이 세력의 조직은 46년 2월 독립동맹경성특별위원회로 출발했고,북한의 독립동맹이 조선 신민당으로 개편됨에 따라 신민당경성특별위원회를 거쳐 남조선신민당으로 개편되었다. 남조선신민당은 사회주의사회실현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통일전선적 정당이었기 때문 에 그 당에는 공산주의자이면서도 박헌영의 분파주의노선 및 소련추종노선을 혐오하여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사회주의에 동조하면서도 공산당에 입당하지 못했던 인사 및 좌경성이 강한 비사회주의자들이 참여했다.당원의 상당수는 공산당의 프락치였다. 백남운세력의 정치노선은 한시적 민족연합,국제주의와 민족자주성의 절충,노 농 계급존중,사회주의실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시적 민족연합>백남운은 46년에 발행된 그의 저서 조선민족의 진로 에서 당시 32)Ibid.,p.182. 33)Ibid.,p.195.

22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남한에 적합한 정치형태는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를 수정 적용한 연합성 신민주주의라고 주장하고,연합성 신민주주의의 실현을 추구하는 당면 혁명에 있어서는 혁명의 주도자 인 무산계급이 양심적인 일부 유산계급과 연합해야 하며,공산주의자가 민족주의자와 한시적으로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4) <국제주의와 민족자주성의 절충>백남운은 그의 저서에서 조선민족의 밟어 갈 정 치노선을 현실적으로 규정하는데 있어서도 소위 국제노선을 유일한 공식으로 삼아 정치 적 자주성을 망각한다면 민중과 분리된 정치적 위험성을 초래할 것이다, 국내노선을 규정하는 정치적 척도는 조선사회경제의 발전적 현단계 그것이고 국제노선이라는 것은 세계사적 견지에서 지침은 될지언정 척도는 아니다 라고 말했다.그는 또 조선은 조선 민족의 생산지대인만큼 정치도 우리 손으로 운영할 것이고 경제도 우리가 구성할 것이 며 문화도 우리가 수립해야 할 것 이며, 정치형태에 있어서는 프로민주주의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가정할지라도 소련식은 지침은 될지언정 척도는 아닐 것 이라고 주장했 다. 35) <노 농계급존중>백남운은 노 농계급을 존중하되 양심적 자본가 및 민족주의자들 과의 연합을 위해서는 노 농계급의 헤게모니를 과도하게 내세우지 않아야 한다는 입 장을 취했다. <사회주의실현>백남운은 연합성 신민주주의를 거쳐 점진적으로 프롤레타리아민주 주의와 사회주의경제를 실현할 것을 주장했다.백남운은 그의 저서에서 조선민족에게 부과된 정치적 사명은 두 가지가 있으니 그 하나는 민족해방이요 그 둘은 사회해방 이라 고 설정하고,먼저 민족해방을 달성한 후에 사회해방을 이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으며, 무산계급이 담당할 사회해방은 민중생활의 근본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자 본본위의 계급사회가 노동본위의 비계급사회로 전환됨으로써 또는 자본가본위의 정권 대신에 노동자본위의 정권을 수립 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그는 또 공산 주의의 본질은 진정한 민주주의 즉 일반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 자체가 공산주의와 대 립적이 아니라 공산주의 자체의 사회적 성격이 민주주의인 것이다 라고 말하고,그러나 일거에 공산주의적 경제체제를 수립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소련류의 무산자독재의 프 로민주주의를 일거에 단행하려는 의도 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36) 백남운은 당시 34)백남운, 조선민족이 진로 (경선:신건사,1946),14~17쪽. 35)Ibid.,pp.5~6,14,34. 36)Ibid.,pp.12,33,36~38.

양동안 민족주의-반공세력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23 남한의 객관적인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에 비추어볼 때 자유민주주의도 사회민주주의도 다 부적합하고,남한의 혁명단계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단계도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 혁명단계도 아닌 민족해방혁명단계라고 주장하면서 남한의 민족해방혁명이 중국의 민 족해방혁명과 비슷한 성격을 가졌으므로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를 수용하되 수정적으로 적용해야 하며,그러한 수정 적용이 연합성 신민주주의 라고 제시했다. 37) 백남운은 이 런 연합성 신민주주의를 거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가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여운형세력은 여운형과 인간적으로 연결된 다양한 사상경향의 인사들과 좌익진영에 서의 박헌영의 독주에 반발하는 사회주의자 및 친사회주의 성향의 인사들로 구성되었 다.이들은 45년 11월에 인민당을 결성했다.인민당은 백남운의 신민당과 동일한 사회 주의사회 실현을 궁극목표로 하는 통일전선적 정당이기 때문에 그 당에는 사회주의자 외에 다양한 사상경향의 비사회주의자들도 참여했다.인민당의 당원 가운데 매우 많은 부분이 공산당의 프락치였다. 여운형세력의 정치노선은 제한적 민족통합,국제주의와 민족자주성의 절충,민주적 절차에 따른 사회주의실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제한적 민족통합>여운형은 통일을 위해 좌우익의 합작을 주장하고 추진했다.여운 형은 신탁통치문제를 둘러싸고 정국이 좌우로 양분되었던 46년 2월 좌익이나 우익이 단독으로 정권을 장악할 수는 없는 것이고 공산당만 빠져도 안 될 것이다. 좌우를 망 라한 연립정권만이 있을 수 있다 고 주장했다. 38) 또 김규식과의 좌우합작위원회활동에 참여하면서 진실한 통일정부는 좌우의 완전한 합작에서 수립될 것이다.결국 좌나 우 나 단독으로 수립되진 않을 것이며 수립된다 하드라도 지속성이 없을 것이다.우리는 우익 전체를 비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봉건잔재와 파쇼를 배척하는 것이니 이 것이 반동자이다.우익도 애국자이며 우리 독립정부를 민주주의적으로 수립하자는 것이 지만 보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라고 말했다. 39) 그러나 여운형은 좌우합작을 말하면서 도 우익 전체와의 합작을 부정하고 이른바 민주적 우익(실제는 김규식 안재홍 등 중간 파를 말함)과의 합작만을 추구하고 진정한 우익세력,혹은 우익진영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이승만-김구-김성수세력은 배척했다.이와 관련하여 여운형은 우익이라 하여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작용하고 있는 악랄한 비민주주주의적 요소,파쇼적 37)Ibid,pp.8~15. 38) 조선인민보 1946.2.22. 39) 독립신보 1946.6.12.

24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요소,친일파 요소들을 반대하는 것이다.이는 조선인의 양심이 죽지 않는 이상 그 반대 는 길이 계속될 것이다.이 불순한 요소들 때문에 통일이 못되고 합작이 못되는 것은 참 으로 통분하다 라고 주장했다. 40) 여운형이 말하는 비민주적 요소,파쇼적 요소,친일파 요소란 해방정국의 좌익 용어법으로는 이승만세력,김구세력,김성수세력을 각각 지칭 한다.여운형은 민족통합을 추구했으나 그 통합의 범위를 매우 축소시켜서 추구했던 것 이다. 한편 여운형이 좌우합작을 통해 이룩하려는 남북통일은 좌익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 하는 정부에 의한 통일,즉 공산화를 지향하는 통일이었다.이러한 사실은 그가 자신의 좌우합작 구상을 밝힌 기자회견에서 잘 입증된다.그는 46년 7월의 기자회견에서 이번 좌우합작의 先 단계에서는 우선 각 정당과 단체의 주요책임자가 개인자격으로 하나의 연석협의체를 구성하고 그것이 격의 없는 이해와 성의를 보임으로서 구체적 합작의 제2 단계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협의체는 우선 서울에 있는 주요 정당세력을 포괄 할 수 있는 범위로 구성하여 그것이 사절을 북조선으로 보내어 38이북의 諸 주요정치세 력까지 이에 합류될 구성으로 확대하면서 소련대표단과도 접견하여 공위속개를 촉진할 것을 의도한다.이렇게 해서 각 정당과 단체의 대표로서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회의를 구성할 준비에 착수할 것을 의도한다 고 밝혔다. 41) 여운형이 합작대상으로 삼 은 남한의 우익이 민주적 우익 즉 중간파를 의미하고,북한의 諸 정치세력이 전원 좌익 (공산당과 그 우당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여운형의 구상을 정리하면,남한의 좌익 과 중간파(민주우익)이 합작하고 그 남한의 합작팀이 북한의 좌익과 합작하여 통일정부 를 구성하는 것이 된다.그러한 통일정부의 사상성향별 인적 구성은 좌익 3대 중간파 1의 비율이 된다. <국제주의와 민족자주성의 절충>여운형은 46년 4월 초 조선의 건설은 조선인이 맡아야 된다.불원 수립될 신정부도 조선제가 되어야지 외국제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조선인이니까 조선의 주인이요 조선정치의 주체이다.외인의 원조는 받을망정 그 괴뢰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의 자율통일이 없는 곳에는 조선제 정부 도 없을 것을 잊지 말자 라고 말했다. 42) 이러한 여운형의 발언은 여운형세력이 민족자 주성을 강하게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그러나 여운형세력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 40) 조선인민보 1946.4.6. 41) 현대일보 1946.7.2. 42) 조선인민보 1946.4.6.

양동안 민족주의-반공세력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25 한 여운형의 발언과 반대되는 행동을 나타냈다.여운형세력은 45년 10월 미국무부의 극동국장이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실시 발언을 했을 때 신탁통치구상을 격렬히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신탁통치실시 내용을 포함한 모스크바협정이 발표된 직후에도 신탁통치를 반대했다.여운형의 인민당은 모스크바협정이 발표된 직후 탁치관리 운운으로 우리의 자율적 정치력을 무시 말살하려는 것은 비록 장래에 조선독립을 육성함에 있다고 할 지라도 조선실정의 무지에서 초래된 그 괴망한 판단에 단연 승복할 수 없음을 명언한다 라고 천명했다. 43) 이처럼 단호하게 반탁입장을 취하던 여운형세력은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하고 돌아온 박헌영이 신탁통치에 찬성하라는 소련의 지시를 전달하자 하룻밤 사이 에 찬탁으로 입장을 바꾸었다.그런가 하면 여운형은 두 딸을 평양에 보내 김일성의 처 김정숙의 관리 하에 두었고(이는 김일성에 대한 충성을 확인하기 위해 자식을 인질로 보낸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매우 자주 평양을 비밀리에 왕래하면서 김일성으로부 터 김일성 자신의 지령 및 소련의 지령을 받았다. 44) 여운형이 김일성 소련과 밀착되 어 지령을 받는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은 때로는 소련의 지령에 따르지 않 은 행동도 했다.소련이 좌우합작위활동을 계속하지 말라고 지시한 46년 9월말 이후에 도 좌우합작위활동을 계속한 것,소련의 지시를 무시하고 남로당과 별도로 사회노동당 을 결성한 것,47년 6~7월 중간파와 어울려 시국대책협의회를 결성한 것 등이 그 예 이다.여운형세력은 민족자주성과 국제주의를 절충했다고 볼 수 있다. <민주적 절차에 따른 사회주의 실현>여운형세력,특히 여운형 자신은 사회주의사 회 실현을 궁극적인 목표로 추진했다.여운형은 사회주의사회 실현을 2단계 혁명을 통 해 실현할 것과 제1단계 혁명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으로 생각했다.여운형은 해방정 국에서 전술상 그러한 사실을 가급적 우회적으로 표현했다.여운형은 45년 10월에 행 한 한 강연에서 조선의 현단계에서는 부르주아지민주주의혁명입니다.민주주의혁명이 제1입니다.우리의 큰 혁명은 장래에 있습니다 라고 말하여, 45) 그가 박헌영과 동일하 게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당면혁명으로 한 2단계혁명전략을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냈 다.여운형은 또 45년 12월 초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기가 이끄는 인민당의 성격과 43) 자유신문 1945.12.30. 44)한민성, 추적 여운형 (서울:갑자문화사,1982),440~448쪽;정병준, 여운형의 좌우합작 남북연 합과 김일성, 역사비평 38호(1997년 가을),21,28~30쪽;중앙일보 현대사연구팀, 발굴 자료로 쓴 한국현대사 (서울:중앙일보사,1996),245~246,259~260쪽. 45)여운형, 우리나라의 정치적 진로,몽양여운형선생전집발간위원회 편, 몽양여운형전집 1(서울: 한울,1991),254쪽.

26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관련하여 인민당은 그 정치적 이념에 있어서는 공산당과 일치하고 있으나 현 계단에 있어서 전략상 차이가 있을 뿐 이라고 말했다. 46) 그 전략상의 차이 란 무엇인가?여운 형과 그의 세력은 공산당이 이념에만 급급하고 사대주의적 편향성을 가졌고 과격한 투 쟁을 강조하는 데 반해 자기들은 현실을 고려하고 자주적이며 통일전선을 중심으로 광 범한 계층의 요소들을 혁명전선으로 끌어들이는 정치공작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 다.여운형은 우리 인민당은 전 근로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것은 물론이오 진보적이요 양심적인 자본가나 지주까지도 포섭하고 제휴해서 광범한 혁명적 민족전선을 지어 현단 계에 적응한 가장 대중적인 정당으로서 긴급한 국내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하려는 것 이라고 설명했다. 47) 여운형세력은 47년 1월 말에 발표한 인민당 재건 성명서에서 우 리 인민당은 究 極 的 으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있을 수 없는 무계급사회의 실현을 위하여 이미 혁명적 추진을 결의한 자이다.다만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에 있어서 공산 주의적인 저들보다는 조선의 현실에 즉응한 민주과업이 정력적 전취로 나아가며 사대주 의적 편향성보다는 민주적 자립성에 입각한다 라고 주장했다. 48) 여운형은 또 38이북 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야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이것을 강력히 추진하려고 하겠지만 민 주주의적으로 볼 때 투표한 국회헌법으로 작정될 것이니 좌우 어느 편이 국회노력을 하 느냐에 따라 정책이 시행되는 것이니 이북의 시책은 잠정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라고 말하여, 49) 그가 민주적 절차에 의한 사회주의 실현을 고려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Ⅴ.결어 위에서 정리한 해방정국의 정치세력들의 인적 구성과 정치노선을 토대로 볼 때 대한 민국 건국을 주도한 세력 중,이승만세력과 김성수세력은 해방정국에서 민족주의적이며 반공적인 세력에 속한다.김구세력은 민족주의적이고 반공적이었으나 48년 1월 이후 반공을 포기했다.중간파는 민족통합을 추구했으나 민족자주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했으 며,46년 5월 좌우합작위 활동이후 공산주의에 대해 포용적 태도를 취했다.좌익은 민 46) 조선인민보 1945.12.7. 47) 조선인민보 1945.12.8. 48) 경향신문 1947.2.1. 49) 독립신보 1946.6.12.

양동안 민족주의-반공세력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27 족통합이나 민족자주를 추구하지 않고,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그런 민족주의적 가치들 을 양보했다.이렇게 볼 때 대한민국의 건국은 민족주의적이고 반공적인 정치세력이 공 산화통일과 민족주의적이면서 용공적(공산당을 용인한다는 문자적 의미)인 정치세력의 반대를 극복하고 건립한 국가라고 정리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대한민국 건국세력에 대한 5가지 비판적 견해가 통설화 되어 있다.5가지 비판적 견해는 대한민국 건국세력이 1민족분단을 추구하는 세력이었고, 2미국의 앞잡이였고,3친일파였고,4지주 자본가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세력이었 고,5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세력이었다는 것이다.이런 주장은 48년 당시 대한민 국 건국을 위한 5 10선거를 저지하려던 세력들이 주장했던 잘못된 것이다.그 잘못된 견해들이 해방정국에 대한 비실증적-이데올로기 구속적 연구 기술에 의해 오늘날까 지 전수된 것이다. 이상에서 기술한 바에 비추어보면 1,2,4의 견해가 실제와 일치하지 않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한 세력은 민족분단을 추구하는 세력 이 아니라,민족통합,즉 남한에서는 좌우의 모든 정치세력을 포용하고 남북을 자유민 주주의적으로 통일할 것을 추구한 세력이었다.그들은 공산주의적 민족통일국가를 건립 하려는 소련과 남북한의 공산주의세력의 반대에 부딪쳐 민족통합에 실패했을 뿐이다.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했던 정치세력은 미국의 괴뢰가 아니라,민족자주성을 강력하 게 추구하면서 미국과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대립하면서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대한 민국 건국을 주도했던 세력은 수정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추구했으며,수정자본주의는 지 주와 자본가의 이익에 봉사하는 체제가 아니라 노동자 농민 빈민에게 많은 배려를 하는 것이다. 5의 견해가 잘못된 것도 쉽게 입증 가능하다.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5 10선거의 선거인 등록률이 79.7%였고,등록유권자의 투표율이 95.5%였다는 사실,좌익과 중 간파가 선거인등록과 투표를 방해하기 위해 치열한 선거반대 선전전과 물리적 공격을 자행한 가운데서 이런 높은 등록률과 투표율이 나왔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건국세력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세력이 결코 아니었음을 입증해준다.뿐만 아니라,대한민국 건국세력은 해방정국에서 시종일관 정치엘리트 간의 협상에 의한 정부수립을 반대하고 민중의 의사에 따른 정부수립을 추구해왔다.그들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세력이 었다면 이러한 노선은 그들의 정치적 자살을 추구하는 노선이 될 것인데,건국세력이 정치적 자살을 위해 그런 민중존중 노선을 취했겠는가?

28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대한민국 건국세력이 친일파였다는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려면 상당히 긴 지면 이 필요하다.이러한 주장은 건국세력의 구성원들,특히 한민당 당원들 가운데 부일경 력자들이 많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건국세력에만 부일경력자들이 참 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해방정국의 정치세력들 가운데 김구세력과 박헌영세력을 제외한 나머지 세력에는 많건 적건 부일경력자들이 다 들어가 있었다.다만 건국세력에 참여한 부일경력자들의 수가 크게 많았을 뿐이다.부일경력자가 많이 참여했다는 사실 만으로 건국세력을 모두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다음으로 부일경력자들을 모두 친일파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건국세력에 참 여한 부일경력자들의 부일경력은 거의 모두가 일제 하에서 친일단체의 구성원으로 활동 하거나 부일적인 글을 발표하거나 연설을 한 것이다.그러나 건국세력에 참여한 부일경 력자들의 그러한 부일경력을 가지고 그들을 모두 친일파로 몰 수는 없다.해방정국의 좌익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도 그와 관련된 친일파 기준으로 친일단체 및 황민 화운동의 지도자로서 열성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자들,자진하여 일선간부에 취 임하여 열성적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들만을 의미한다.또 면장 기타 개인적으로 일제에 열성적으로 협력을 한 자도 이에 포함된다 라고 제시하고 있다. 50) 이러한 기준에 따르 면,건국세력에 참여하고 있는 부일경력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친일파가 아니다.그들은 모두 자신의 민족주의적인 사업을 지속하기 위해 비자발적으로 비열성적으로 그런 활동 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일제 하에서 국내에서 민족주의적인 사업을 전개하면서 감 옥에 가지 않고 그런 사업을 원만히 지속하기 위해 일부 비자발적 부일활동을 했던 사 람들은 고매한 민족지사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친일파로 규정할 수도 없다.백로에 검은 털이 몇 개 박혀 있다고 해서 그것을 까마귀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끝으로,건국세력이 해방정국에서 친일파 숙청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해 야 한다.이승만은 46년 2월에 행한 한 방송연설에서 새로 건국될 국가가 취해야 할 정 책을 발표하면서 일제잔재를 청소할 것,일인이나 반역자들에게 속한 재산은 공사를 불 문하고 전부 국가가 몰수할 것,몰수토지는 모두 농민에게 분배하고 큰 농장은 여러 사 람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분배할 것 등을 천명했다. 51) 한민당도 45년 10월에 개최된 창당대회에서 미군정은 정치기구 구성 조직에 있어서 일본인 및 친일적 조선인을 기용 하지 말라 는 내용의 친일파 반대결의를 채택하기도 했다. 52) 또한 건국세력은 건국을 50) 동아일보 1947.3.5. 51) 우남실록,382~384쪽.

양동안 민족주의-반공세력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29 위한 5 10선거의 선거법에 친일파에게 피선거권은 물론 선거권도 박탈하는 규정을 두 어 친일파가 새 나라의 간부로 등장하는 것을 방지하려 했다. 이러한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건국세력에 참여한 부일경력자들 가운데 예외적인 극 소수가 진정한 친일파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더라도,건국세력 전체 또는 건국세력의 중심을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52)심지연, 한국민주당연구 Ⅰ(서울:풀빛,1982),138쪽.

발 표 2 31 53) 민주화운동이 독재국가를 대한민국으로 바꿔냈다 -주류와 비주류의 역사사회학*- 김호기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목 차 Ⅰ.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Ⅱ.산업화 과정에서의 주류와 비주류 Ⅲ.민주화 과정에서의 주류와 비주류 Ⅳ.결론 Ⅰ.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를 읽는 시각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흔히 엘리트 사관과 민중 사관이 손꼽힌 다.엘리트 사관이란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가 엘리트이며,역사변동을 엘리트와 그로부 터 소외된 준엘리트가 벌이는 갈등과 투쟁으로 보려는 시각이다.한편 민중사관이란 역 사를 움직이는 주체는 민중이며,역사변동을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간의 갈등과 투쟁으 로 보려는 시각을 지칭한다.역사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주목한다면 이 두 역사관은 각 기 주류 중심적 역사관 과 비주류 중심적 역사관 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주류 중심적 역사관이 일견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승만 시대 나 박정희 시대 라는 개념이 함축하듯이 한 개인으로 상징되는 특정한 엘리트 집단이 지난 50여년의 역사를 주도해왔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이 시각에 따르면, 우리 현대사를 이끌어 왔던 두 세력은 산업화세력 = 보수세력과 민주화세력 = 진보세 력이며,196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산업화세력이 우리 사회를 주도했다면,80년 대 후반부터는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 공존하면서 경쟁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이 글은 완성된 논문이 아니라 발표를 위해 작성된 초고입니다.

32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역사변동에 대한 협소하면서도 피상적인 시각이다.프랑스 역 사학자 브로델(F.Braudel)이 강조하듯이,역사란 사건, 국면, 구조 에 이르는 다층 적인 수준에서 진행되는 것이며, 1) 엘리트 또는 주류 중심적 역사관은 이 가운데 사건 만을 중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오히려 역사의 흐름은 정치적 사건 의 수면 아래 놓여 있는 경제적 국면 과 사회적 구조 의 변화에 의해 이루어져 왔으며,바로 이 점에서 국 면 과 구조 를 중시하는 민중적 또는 비주류 중심적 역사관이 엘리트 또는 주류 중심적 역사관보다 더욱 포괄적인 문제틀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역사를 이루고 있는 국면과 구조,특히 국면을 중시해 지난 60년간 우리 현 대사의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주류가 누구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사회학적으로 볼 때 주류 또는 메인스트림 이란 경험적으로 엄밀한 개념은 아니다.하지만 이 개념은 언론을 포함한 공론장에서 그 사회의 변화를 움직이는 주요 세력이란 의미로 빈번히 쓰 이고 있다.문제는 주류라는 말 안에는 엘리트 집단을 특권화하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그들의 행위에 암묵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역사는 엘리트의 선택이나 민중의 집합행동 중 어느 하나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 가운데 보다 중요한 것은 다수를 이루는 민중의 집합의지와 집합행동이며,엘리트의 선택 또한 바로 이런 집합의지와 집합행동의 조건 아래 이루어진다.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역사의 주류는 엘리트라기보다는 오히려 민 중이라 할 수 있으며,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우리 역사 속에서의 주류의 의미를 올바로 자리매김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1)브로델에 따르면,시간은 사회적 창조물이다.그는 사회적 시간을 시간지속의 길이와 측정대상에 따라 세 개의 범주로 구별하는데,단기지속,중기지속,장기지속이 그것이다(Braudel,1958a:131-134; 1958b). <표> 시간지속,연구대상,역사 시간지속 연구대상 역사 단기지속 (정치적)사건 사건사,우연의 역사 중기지속 (정치 사회적)주기,국면 사회사,주기의 역사 장기지속 (지리적)구조 구조사,지리의 역사

김호기 민주화운동이 독재국가를 대한민국으로 바꿔냈다 33 Ⅱ.산업화 과정에서의 주류와 비주류 고도 경제성장은 흔히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손꼽힌다.이 경제성장을 분 석하는 데는 상이한 접근이 제시되고 있다.제3세계에서 성공적인 후후발 자본주의 산 업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기적의 대표적인 사례라는 평가가 그 하나라면,양적 팽창을 인정하더라도 대내적 불균형과 불평등 및 대외종속의 심화를 내포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박정권의 경제성장을 다루는 데서 제일 먼저 부딪치는 이슈는 과연 1960년대 초반 세계시장에의 통합전략이 불가피했는가의 문제이다. 내포적 공업화 냐, 수출지향 공업 화 냐의 선택의 문제는 수출지향이 종국에는 세계시장에의 종속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 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켜왔던 쟁점이다. 2) 비교발전론적 관점은 이러한 선택에 대 한 하나의 거시적인 답변을 제공하고 있다.유럽의 자본주의 역사는 한 나라가 통합과 이탈 가운데 어느 전략을 추진할 것인가는 산업화 초기 세계시장에의 통합정도,국가의 개입,그리고 내수시장의 규모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MenzelandSenghaas, 1986).자원 및 인구,특히 내수시장이 협소한 한국의 경우 세계시장에의 통합전략에 기반한 수출지향 산업화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시적으로 볼 때 박정권의 산업화전략은 전후 세계자본주의의 구조변동에 따른 국 제분업의 재편과정에서 이례적으로 이익을 취한 사례의 하나이다(Lipietz,1986).70 년대 이래 대다수 제3세계 국가들이 외채 문제로 인해 성장의 위기에 봉착했다면,한국 은 상품ㆍ생산ㆍ신용자본의 국제화를 특징으로 하는 국제분업의 재구조화 과정에서 세 계시장에 제조품을 특화하여 경제성장을 도모해왔다.무엇보다도 전후 선진자본주의의 포드주의 확립이 가져온 대중소비재의 광범위한 수요증대는 제3세계 노동집약적 제조 품의 새로운 성장공간을 창출했으며,박정권은 이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국제분 업에서의 지위상승 전략을 구사해왔다.이 점에서 한국의 경우 자본주의 세계시장은 발 전의 장애를 이룬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의 잠재력으로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제성장을 가능케 했던 좀더 중요한 요인은 그 내적 조건인 토지개혁ㆍ분단 상황,그리고 국가와 노동의 역할이다.우선 이승만 정권 하에서 추진된 토지개혁은 봉 2)한 사회 내에는 여러 축적전략들이 경합하고 있으며 하나의 축적전략이 선택되는 것은 대내외 사 회세력의 이해관계와 헤게모니의 역학관계에 따라 결정된다.한 경험적 연구에 따르면,5 16군사 정부는 내포적 공업화 전략을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반대 및 대내적 조건으로 인해 수출 지향 공업화 전략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木 宮 正 史,1992).

34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건적인 지주계급을 몰락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산업화에 유리한 정치경제적 조건을 형성 했다.이러한 한국적 조건은 봉건 농업구조가 끈질기게 잔존하여 자본주의 산업화를 지 체시켰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사례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냉전분단체제의 형성이 박정권의 경제성장에 끼친 영향은 이중적이다.박정권 은 이승만 정권과는 달리 경제성장을 위해 전후 동아시아에 고착화된 냉전체제를 적극 적으로 이용했는데,한일 국교정상화를 통한 일본 자본의 도입과 베트남 파병을 통한 베트남 특수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할 수 있다( 木 宮 正 史,1996).냉전분단체제가 낳은 또 하나의 조건은 반공이데올로기의 강화에 따른 새로운 이데올로기 지형이다.분 단체제의 형성과 특히 한국전쟁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내면화된 반공주의는 정치사회와 시민사회는 물론 일상의식까지도 결정적으로 변형시켰는데,이러한 반공주의는 한국판 프로테스탄트의 윤리 (이병천,1995)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60~70년대 북한과의 치열한 산업화 경쟁에서 경제적 동원을 극대화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풍부한 노동력과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은 박정권 고도성장의 좀더 직접적인 원동력 이었다.수출지향 공업화의 특징을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방식에 기반한 원시적 이자 유 혈적 테일러화에서 찾을 수 있다면,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야말로 세계시장에서 경쟁 력을 확보하는 데 핵심적인 원천이었다.이른바 발전국가(developmentalstate)의 대표 사례의 하나로 손꼽히는 박정권의 효율적인 경제정책 또한 고도성장에 크게 기여 한 것으로 보인다(Johnson,1987;Amsden,1989;Wade,1990).박정권 경제정 책의 중요한 양 축은 금융정책과 노동정책이다.금융정책의 경우 정권은 만성적인 자본 부족을 겪고 있는 대기업들에 대규모 외자배분은 물론 일반금리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저리의 자본을 지속적으로 공급해줌으로써 재벌 성장의 후견인 역할을 떠맡아왔으 며,노동정책의 경우 노동조합법ㆍ노동쟁의조정법 같은 입법적 절차에서 노동운동의 직접적인 탄압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억압적 노동정책과 노동통제를 통해 산업평화 와 저임금 유지를 도모해왔다. 박정권의 경제성장은 전후 포드주의 축적체제의 확립이 낳은 국제분업의 재편과정에 서 토지개혁과 냉전분단체제의 역사적 조건 아래 국가의 효율적 경제정책과 풍부한 노 동력이 결합되어 나타난 이른바 초대에 의한 반주변적 발전 (Cumings,1987)이라 볼 수 있다.이 점에서 박정권 경제개발정책의 효율성,특히 박정희 개인의 리더십이 경제 성장에 큰 역할을 했음을 과대평가할 필요도 과소평가할 필요도 없다.경제성장의 원동 력을 역사적 조건의 결과나 집합의지의 실현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일면적이다.왜냐하

김호기 민주화운동이 독재국가를 대한민국으로 바꿔냈다 35 면 축적전략은 복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어떤 전략을 추진할 것인가는 역사 구조 적 조건 속에 놓인 주체 혹은 집단의 선택,다시 말해 구조와 전략의 변증법 에 달려 있 기 때문이다(Jessop,1990).다만 주체적 조건이 중요하다고 해서 박정권의 리더십만 을 특권화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자본축적이 잉여생산물의 지속적인 창출을 의미한 다면,고도성장을 담당한 주체는 박정희 개인 혹은 정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산현장 의 민중이었다.최저생계비조차 되지 않는 저임금과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감내해야 했던 이들이야말로 고도성장을 성취한 진정한 주류이자 주인공들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엘리트 사관에서 옹호하는 우리 사회의 여건상 불가피한 개발독재론도 기실 정치권을 상위파트너로,재벌을 하위파트너로 한 엘리트 연합의 또 다른 이름이었으며, 이런 정경유착은 지난 1997년 IMF경제위기를 낳은 주요인이기도 했다.역사적으로 50년대 원조물자의 불하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한국 재벌은 박정권의 후견 아래 비약적으로 성장했다.60년대 경제개발과정에서 외자도입의 급속한 증가,수출시장 여 건의 조성,개발수요의 급증,그리고 무엇보다도 박정권의 금융 및 세제의 특혜가 재벌 에게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었다면,70년대에 중화학공업화를 위한 국민투자기금과 저 리의 금융정책은 재벌의 성장을 가속화시켰다.현재 한국사회의 발전에 가장 커다란 장 애가 되고 있는 거대 재벌의 등장은 박정권의 절대적 후원 아래 관치금융과 족벌경영을 양 축으로 하여 성장한 결과였다. 요컨대,후발 산업화 과정에서의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효율성에 대한 논의는 일단 접 어둔다 하더라도,경제성장의 성공을 소수 엘리트 집단의 리더십에만 귀속시키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며,사회구조의 거시적 변화와 그 변화를 이끌어왔던 광범위한 민중세력 을 간과하는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Ⅲ.민주화 과정에서의 주류와 비주류 해방 이후 지난 60년간 민주화 역사를 돌이켜보아도 한국 민주주의를 이끌어왔던 주 요 축은 엘리트와 준엘리트의 갈등이 아니라 이른바 국가와 시민사회의 대립이었다. 1960년 4월 혁명,1987년 6월 민주항쟁,2000년 낙천 낙선운동(이하 낙선운동), 그리고 지난 해 탄핵사태와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은 한 국 민주주의의 보루이자 주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왔다.널리 지적되듯이,4월 혁명과

36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6월 민주항쟁이 독재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시민사회의 폭발 이었다면,낙 선운동은 10년이 넘게 지체돼왔던 민주주의 공고화를 위한 시민사회의 부활 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6월 민주항쟁은 오랜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열 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최대의 전환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그렇다면 우리사회 에서 민주화 과정에서의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경제성장과 민주주 의의 관계다.경험적 문제이기도 하고 이론적 쟁점이기도 한 이 이슈는 경제가 발전하 면 민주주의를 실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근대화론의 기본 가설에 연관된 문제이다 (Lipset,1980).거시적인 시각에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는 정합적인 상관관계를 보 여주고 있지만,두 요인 사이에는 여러 매개변수들이 존재한다.다시 말해,자본주의 산 업화는 점차로 시민사회의 밀도를 증대시키는 바,시민사회의 이러한 성장은 피지배계 급들의 정치적 조직화를 위한 기반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을 국가의 압도적 권력에 대한 하나의 견제세력으로 등장시킨다(Rueshemeyer, Stephens, and Stephen,1992). 3)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의미하는 바는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관 계에는 그 매개변수로서 시민사회의 성장과 노동자계급의 형성이라는 주체적인 조건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 장기적인 추세에도 불구하고 중기적이고 단기적인 민주화의 경로는 개별 국가에 3)시민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국가,자본주의,계급구조와의 관련 속에서 검토하고 있는 것은 루 쉬마이어,스티븐스,스티븐스의 기여이다(Ruschemeyer,StephensandStephens,1992).이들은 시민사회 를 그 특성이 반드시 엄밀하게 생산연관적이거나 정부 혹은 가족과 연관된 것이 아닌,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사회적 제도들과 결사체들의 총체 라고 정의하고(Ruschemeyer,StephensandStephens, 1992:30),거시적인 비교연구에 기반하여 그 역사적 형성과정을 분석하고 있다.이들에 따르면,자 본주의 발전은 도시화를 낳고 노동자들을 공장으로 집결시킬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과 운송수단을 발전시키며 문자해독률을 증대시킴으로써 시민사회를 성장시킨다.다시 말해,자본주의 발전은 이 중적인 사회적 결과를 낳는데,그 하나는 노동자계급과 중간계급의 조직 및 조직적 능력을 강화함 으로써 계급역량의 균형을 변형시키며,다른 하나는 시민사회의 밀도(이차집단의 강도)가 증가하여 국가권력의 대항축을 형성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발전시킨다는 것이다.이러한 이론화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정합적 상관관계를 강조하는 립셋(Lipset,1980)의 논의나 경제구조에 상응하는 계급연 합이 민주주의 관건이라는 무어(Moore,1966)의 논의를 계승하는 것이지만,민주주의 발전에서 노동 자계급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다양한 변수들의 복합적 상호작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립셋과 무어 의 논의를 넘어서고 있다.이들에 따르면,국가,시민사회,자본주의,민주주의의 상호관계에서 주 목할 것은 국가-시민사회와 사회계급 사이의 상호관계는 매우 복합적이며,그것이 민주주의에 반 드시 유리한 조건만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국가가 처음부터 노동자계급을 통제하거나 제한하려고 시도했던 라틴아메리카 농업수출경제의 경우 산업화의 정치 사회적 결과가 약한 노 동운동과 민주화에 압력을 행사할 수 없는 무기력한 시민사회로 나타났던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 라고 볼 수 있다(Ruschemeyer,StephensandStephens,1992:286).

김호기 민주화운동이 독재국가를 대한민국으로 바꿔냈다 37 따라 역전되고 후퇴할 가능성이 존재한다.그것은 기존의 지배체제가 위기에 직면한 특 정 국면에서 지배블록과 피지배블록의 세력관계의 균형에 따라 민주화의 방향이 결정되 기 때문이다.박정권하에서 시민사회와 노동자계급의 피지배블록은 여러 사회운동을 지 속적으로 전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지배블록에 필적할 정도로 아직 성숙되어 있지 않았 다.또한 한국 부르주아지 계급은 민주주의에 친화적이지도 않았으며,오히려 권위주의 정권의 가장 충실한 동맹세력이었다(신광영,1995).이 점에서 부르주아지 없이 민주 주의는 없다 는 무어(Moore,1966)의 가정은 적어도 한국의 경우 적실성이 없으며, 동시에 경제성장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근대화론의 가정도 시민사회와 노동 자계급의 성장을 매개변수로 전제할 때에 타당하다(정상호,1996).박정권이 추진한 산업화의 내부 동학에는 민주화의 씨앗이 배양되고 있었다(김호기,1995).이렇게 배 양된 시민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또하나의 억압적 권위주의 지배를 거친 다음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분출하였다. 6월 민주항쟁 이후 우리사회 민주화 과정의 방향과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이다.먼저 거시적인 맥락에서 보면,우리의 현대사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는 이른바 국민투표제적 민주주의 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 왔다(최장 집,1996).국민투표제적 민주주의란 상이한 계층적,기능적,직업적 이해관계를 인정 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을 직접 연결하려는 정치체제를 말하는데,무엇보다 국가와 시민 사회를 매개하는 정치사회 곧 정당정치의 빈곤으로 특징지어진다.이러한 국민투표제적 민주주의 하에서 국가권력은 자연 거대해지고 권위주의적 통치경향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으며,그 귀결점이 1987년까지 이어진 군부독재였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은 이러한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민주화할 수 있는 중대한 전 환점이었다.시민사회의 민주화 요구 앞에 국가권력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으며,이에 국가는 지배의 정당성과 통치력을 회복하기 위해 시민사회의 동의를 구하는 전략으로 선회하였다.그러나 6월 민주 항쟁 이후 정치개혁에 대한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요구에 도 불구하고 정치민주화는 지체되어 왔는데,우리사회의 특수한 역사 사회적 조건,지 역주의적 정치행태,그리고 민주화 세력의 점진적인 약화 등이 그 주요 원인이었다.따 라서 위로부터 추진된 정치민주화란 1980년대와 1990년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위임민주주의 와 초대통령주의 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 정치체제에 머물러 있었다(O Donnel,1994;OxhornandDucatenzeiler,1998).6월 민주 항쟁 이후 시민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 배경의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는데,곧 국

38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할 수 있는 정당정치가 낙후되어 시민단체가 오히려 기존 정당을 대신,이른바 준정당 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더불어 단중기적으로 6월 민주화운동 이후 진행된 시민사회의 분화 또한 시민운동의 부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조희연,1998;김호기,2005).1987년 이전의 사회운 동은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이라는 큰 목표 때문에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또는 급진노선과 온건노선간의 차이가 명확하게 부각되지 않았다.하지만 시민사회의 폭발 이후 민주주의 절차들이 제한적으로 도입되면서 기존의 사회운동 세력 사이에 운동의 주체,목표,방식,정세에 대한 평가의 차이가 나타났으며,이에 따라 민중운동과 시민 운동간의 노선분화가 진행되었다.민주주의 이행을 경험하는 제3세계 국가들에서 빈번 히 관찰되는 이러한 분화 경향은 일반적으로 시민사회 내의 온건파와 급진파간의 분화 로 나타나며,우리사회의 경우 급진파는 기존의 민중운동을 고수한 반면에 온건파는 시 민운동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1980년대 중 후반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변화 또한 시민사회의 변동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곧 주변부 포드주의 축적체제의 확립은 6월 민주화운동에 따른 정치적 개방 속에서 이제까지 사회운동에서 간과되어 온 환경,교육,여성,지방자치, 의료,교통,인권 등 새로운 이슈들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으며,이에 따라 이러한 이 슈들을 담당하는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대거 결성되었다.국가와 시민사회의 이러한 새 로운 다층적인 구도 형성은 우리의 정치현실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시민 사회의 분화와 이와 연관된 사회운동의 분화는 민주주의 이슈를 시민사회 내 다양한 영 역으로 확산시키는 계기를 제공하고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을 확대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민주화 과정에서 국가 대 시민사회의 구도가 다시 한번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지난 해 탄핵 사태 이다.한 마디로 탄핵 사태는 1987년 협약 의 위기라 할 수 있 는데, 1987년 협약 이란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간에 맺어진 민주화에 대한 일종의 약속 이며,이 약속의 핵심은 민주주의 절차와 규칙에 대한 존중에 있었다.탄핵 사태의 본질 은 2002년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한 민주적 승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한나라 당을 포함한 야당들이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했다는 데 있다.문제의 발단이 된 대통령 발언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탄핵 사유가 되기 어렵다는 것은 국 민 대다수,다시 말해 시민사회의 중론( 衆 論 )이었다.탄핵 사태가 4월 총선에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정치사회에 대한 시민사회의 대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시민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은 엘리트집단이 아니라 시민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김호기 민주화운동이 독재국가를 대한민국으로 바꿔냈다 39 사회집단들이다.여기에는 생산현장의 노동자계급과 넥타이 부대 의 중간계급은 물론 여성 노인 청소년 등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이 포괄되어 있다.민주주의의 핵 심이 소수가 아닌 다수에 의한 의사결정의 제도화에 있다면,4월 혁명,6월 민주항쟁, 낙선운동,그리고 탄핵사태시 촛불시위는 이런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절차적 민주주의 를 성취하기 위해 벌였던 최소한의 행동이기도 했다.비록 군사 쿠데타로 좌절되었다 하더라도 제2공화국을 등장시키고,노태우 정권을 거쳐 두번에 걸친 문민정부를 출범 시킨 기본 원동력은 바로 이런 시민사회에서의 광범위한 사회운동에 있었으며,이 점에 서 민주화의 진정한 주체도 다름 아닌 풀뿌리 시민사회 였다고 볼 수 있다. Ⅳ.결론 산업화와 민주화의 현대사를 반추해볼 때 역사적 변화를 엘리트의 순환으로만 이해 하려는 주류 중심적 역사관은 역사적,현실적 상상력의 빈곤을 드러내는 발상이다.지 난 60년간 우리 사회를 이끌어왔던 주체는 소수의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사 람들이었다.이들은 건국 시대에서 산업화 시대,그리고 최근 민주화 시대에 이르기까 지 평범하더라도 오순도순한 삶 을 열망해왔으며,소박하고 인간적인 삶에 대한 이들의 간절한 열망이 경제적 고도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어왔다.간단히 말해,비주류라 고 불려지는 시민사회의 이름 없는 풀뿌리 시민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정한 주류이 자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오늘날 이 풀뿌리 시민사회가 세계화의 충격으로 인해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점이다.세계화는 무엇보다 시민사회를 세계화라는 호랑이의 등을 탄 영역과 그 렇지 않은 영역으로 이분화하고 있으며,그 결과 중간계급이 몰락하고 노동자계급을 포 함한 사회적 약자들이 빠른 속도로 주변화되고 있다.사회적 양극화의 확대는 지난 60 년간 우리사회 변화를 주도해 온 산업화와 민주화의 새로운 시련이다.세계화가 우리사 회에 주는 충격을 과장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소평가해서도 안된다.세계화 의 거센 물결 속에서 풀뿌리 시민사회의 인간적인 삶을 어떻게 유지하고 확장시켜 나갈 것인가는 해방 60년을 맞이한 우리사회에서 진지하게 풀어가야 할 과제라 할 수 있다.

40 1부 누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c참고문헌 김호기,1995, 현대 자본주의와 한국사회,사회비평사.,2005,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아르케(근간). 신광영,1995, 시민사회 개념과 시민사회 형성,유팔무 김호기 편, 시민사회와 시민운 동,한울. 정상호,1996,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주의:1961-1979, 정치비평 1호. 조희연,1998,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당대. 최장집,1996,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나남. 木 宮 正 史,1992, 한국의 내포적 공업화의 좌절,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1996, 냉전구조와 경제개발, 한배호 편, 한국현대정치론 I,오름. Amsden,A.,1989,Asia snextgiant,oxford:oxforduniversitypress. Braudel,F.,1958a. 역사학과 사회학, 신용하 편, 사회사와 사회학,창작과 비평사.,1958b, 역사와 사회과학:장기지속, 신용하 편, 사회사와 사회학,창작과비평 사. Cumings,B.,1987, The Origins and Developmentofthe NortheastAsian PoliticalEconomy, inf.deyo(ed.),thepoliticaleconomyofthenew AsianIndustrialism,Ithaca:CornelUniversityPress. Jessop,B.,1990.StateTheory,UniversityPark:PennsylvaniaStateUniversity Press. Johnson,C.,1987. PoliticalInstitutionsand EconomicPerformance, in F. Deyo(ed.),ThePoliticalEconomyofNew AsianIndustrialism,Ithaca: CornelUniversityPress. Lipietz,A.,1987,MiragesandMiracles,London:Verso. Lipset,S.,1980,PoliticalMan:TheSocialBasesofPolitics,Baltimore:Johns HopkinsUniversityPress. Menzel,U.andD.Senghaas,1986,EuropasEntwicklungunddiedritteWelt, Frankfurt:Suhrkamp. Moore,B.,1966,TheSocialOriginsofDictatorshipand Democracy,Boston:

김호기 민주화운동이 독재국가를 대한민국으로 바꿔냈다 41 BeaconPress. O Donnel,G.,1994, DelegativeDemocracy, JournalofDemocracy,Vol.5No. 1. Oxhorn,P.andG.Ducatenzeiler,1998. EconomicReform anddemocratization inlatinamerica, inp.oxhornandg.ducatenzeiler(eds.),whatkind ofdemocracy? WhatKind ofmarket?,university Park:Pennylvania StateUniversityPress. Ruschemeyer,D.,E.StephensandJ.Stephens,1992,CapitialistDevelopment anddemocracy,chicago:theuniversityofchicagopress,박명림 조찬 수 권혁용 옮김,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나남. Wade,R.,1990,GoverningtheMarket,Princeton:PrincetonUniversityPress.

2부 누구를 위한 대한민국인가?

발 표 1 45 누구를 위한 경제성장이었나? -박정희체제의 功 過 - 이정우 (경북대학교 경제통상학부) 목 차 Ⅰ.머리말 Ⅱ.독재는 경제성장을 위한 필요악인가? Ⅲ. 자유로서의 발전 Ⅳ.노동 탄압과 임금,노동분배율 Ⅴ.경제성장과 소득분배 Ⅵ.지가( 地 價 )폭등과 불로소득 Ⅶ.맺음말 Ⅰ.머리말 박정희 향수 현상이 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한때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던 독재자가 어느 새 국민 여론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 로 부상하는 충격적 결과 가 나타나고 있다.최근 한 신문사에서 역대 대통령을 비교하는 여론조사를 해본 바,박 정희는 종합순위 1위일 뿐 아니라, 경제 성장 분야에서의 1위는 그렇다 치고 심지어 정치 발전 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중앙일보,2005년 10월 13 일).유신독재라는 전대미문의 철옹성을 구축하여 국민이 대통령을 뽑을 기회조차 박탈 하여 종신 집권을 꿈꾸었고,국민의 인권과 자유를 철저히 짓밟은 박정희가 다른 분야 도 아닌 정치 발전 에서도 다른 대통령들을 크게 따돌리며 1위를 차지하는 이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이것은 국민적 희극인가,비극인가? 하나의 설명은 반사이익설이다.즉 박정희가 잘해서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

46 2부 누구를 위한 대한민국인가? 의 대통령들에 비해서 박정희가 상대적으로 돋보인다는 것이다.특히 평생을 민주화 투 쟁에 헌신하고 천신만고 끝에 집권에 성공한 김영삼,김대중 두 대통령의 치적이 국민 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각종 스캔들이 터짐으로써 국민들 사이에 큰 실망을 준 점 그 리고 그에 대한 반발심리가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향수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그 러나 이런 향수병은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경제성장에 대한 과대평가,경제적 안락만 보장된다면 다른 것은 문제 될 게 없다는 극단적 물신주의와 정치허무주의로 연결되기 쉽다.이것은 사상적으로 볼 때 극우파의 발호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한 정신적 토양이 므로 특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뭐니 해도 박정희의 첫째 공로로 거론되는 것은 경제 성장이다.박정희가 우리 민족 에 끼친 해악 민족 반역,동지 배신,쿠데타,종신집권 기도,독재,민주주의 말살, 부패,남북한 관계 악화 등 이 크지만 우리가 경제 성장에 성공해서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은 박정희의 공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국민들 사이에 강하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 해야 한다.이 점이 박정희 향수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된다.즉 박정 희의 인기는 그의 공로라고 국민들이 믿고 있는 경제 성장과 그 뒤의 민주투사 출신 정 치인들의 기대 이하 성과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국민의 피땀 위에 이룩한 1960~70년대의 경제 성장을 박정희 개인의 공으로 돌리 는 것은 지극히 부당하다.또한 박정희 식의 개발독재가 과연 경제성장을 가져온 요인 인지도 깊은 검토를 요한다.과연 독재는 불가피했는가?,민주주의를 하면서는 경제성 장이 불가능했느냐 하는 점을 따져 봐야 한다.나아가서 누구를 위한 경제 성장이었나 를 보기 위해서는 성장의 열매가 골고루 돌아갔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평가는 그간 간헐적으로 학계의 관 심을 끌어왔지만 최근에 와서 다시 뜨거운 쟁점으로 등장하는 느낌을 준다.2년 전에 개발독재론 에 대한 논의(이병천,2003)가 있더니,올해 들어서도 백낙청(2005)의 논 문을 비롯한 창작과 비평 의 박정희 시대 특집 있었고 녹색평론 에서는 강국주 (2005)의 생태주의적 반론 제기가 있었다.정치경제학 진영에서도 기존 평가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새로운 평가를 내놓고 있다(김수행 박승호,2005).특히 백낙청의 글 은 그가 지금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서 박정희 체제에 대해 오랫동안 비판적 관점을 견지해 왔었다는 점에서 중대한 태도 변화가 아닌가 하여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 으킨 바 있다. 필자는 이 논쟁을 보면서 두 가지 오해를 불식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

이정우 누구를 위한 경제성장이었나? 47 었다.즉 박정희 시대에 대해 국민들이 신봉하고 있는 대표적인 두 가지 학설,즉 첫째, 박정희 식의 개발독재는 경제성장을 위해서 불가피했다는 필요악 설과,둘째,그 시대 의 경제성장이 소득분배를 악화시키지 않고 골고루 이익이 돌아갔다는 양호분배 설의 허구성을 보임으로써 우리 국민과 심지어 학자들 사이에조차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오 해를 씻어내고 가장 가까운 우리 시대 역사의 올바른 이해를 돕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 하고자 이 글을 쓴다. 1) Ⅱ.독재는 경제성장을 위한 필요악인가? 독재와 민주주의 중 어느 쪽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는가?이 문제는 이론적으로 매 우 중요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일상 대화에서 자주 부딪치는 문제이기도 하다.많은 사람 들이 민주주의가 바람직하긴 하지만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수시로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성장과 민주주의 는 일종의 양자택일의 관계(trade-of)라고 보는 것이다.심지어 학자들조차 은연중에 이런 고정관념을 갖고 있음을 가끔 목격하게 된다.만약 이런 생각이 옳다면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경제 성장을 위해서 불가피한 필요악이었다고 정당화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생각은 옳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아래 논의를 통해서 보게 될 것이다. 실제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인도 출신의 경제학자 바그와티 가 오래 전에 양자택일론을 편 적이 있다(Bhagwati,1966).바그와티는 1966년에 쓴 경제발전론 교과서에서 민주주의는 발전을 희생 시킨다. 고 주장하면서 급속한 성 장과 민주적 과정 사이의 잔인한 선택(cruelchoice) 이란 문제를 제기하였다.1964년 군부 쿠데타 이후의 브라질은 잔인한 선택에 직면하여 민주주의를 버리고 성장을 선택 했던 대표적 경우다.그러나 한참 뒤 바그와티는 이 가설을 지나치게 일반화했을 때 올 수 있는 오류와 자신의 주장이 경험적 증거가 불충분했음을 인정하면서 민주주의와 경 제성장이 양립할 수 있다는 쪽으로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다(Bhagwati,1997). 민주주의가 경제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 찬반양론이 있다.민주 주의에 대한 반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에 필요한 투자 증가를 위해서는 소비 억제 가 필수적인데,이것이 민주주의 아래에서는 어렵다는 주장이다.예를 들어 다음과 같 1)이 글은 졸고(2003a,2003b)를 바탕으로 약간 가필한 것이다.

48 2부 누구를 위한 대한민국인가? 은 Rao의 주장에서 그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경제 성장은 인간과 물질에 거대한 투자를 필요로 하는 과정이다.그런 투자 프로그램은 현재 소비의 삭감을 의미하며,그것은 거의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의 낮은 생활수준에서 고통 스러운 일이다.투자를 위해 필요한 잉여를 동원하려면 정부는 강력한 수단에 의지해야 하 며,철의 손으로 강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런 정책이 대중투표에 붙여진다면 부결될 것이 뻔하다.밝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자는 강령을 갖고 민주적 선거에 이기리라고 기대 할 수 있는 정당은 없다. (Rao,1984,75쪽) 사실 이런 주장은 과거에 흔히 접할 수 있던 사고방식이었다.예를 들어 경제학자 Galenson은 정부가 민주적일수록 자원이 투자에서 소비로 새나가기 쉽다. 고 하였으 며,하버드대의 정치학자 Huntington은 경제성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시 적으로는 정치 참여가 보류되어야 한다. 고 하였다(Przeworskietal,2000,2~3 쪽).헌팅턴은 그의 저서 변화하는 사회에서의 정치 질서 (PoliticalOrder in Changing Societies)에서 1960년대 한국의 민주공화당을 찬양한 바 있다 (Cumings,2001,김동노 등 역,507쪽).현실적으로 경제 성장을 위해 현재 소비의 극단적 감축을 강요당한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스탈린 치하의 소련으로서 노동자와 농 민은 혁명 전 소비의 1/3수준의 살인적 내핍을 강요당했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두 번째 주장은 국가 정책에 대 한 특정 이익집단들의 압력과 왜곡 문제에 근거를 둔다.이 견해에 의하면 동아시아 여 러 나라의 경제성과가 좋은 이유는 국가가 대기업,노조 등 이익집단의 압력에서 격리 되어 발전국가(developmentalstate)적 정책을 입안,추진할 수 있었던 소위 국가의 자율성 (stateautonomy)에 기인한다고 본다.이것이 남미에 비해 동아시아에서 불로 소득추구행위(rent-seekingactivity)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 주장은 2단계의 논리를 갖는데,첫째,국가 자율성은 성장에 유리하다는 것과,둘째, 국가 자율성은 오직 권위주의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동아시아 모델의 지지자인 Haggar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집단행동의 딜레마는 집단의 이기적 행동을 제재를 통해서 제약하는 제도로써 극복할 수 있다.집단행동의 문제는 명령에 의해 해결 가능 하다 (Haggard,1990,p.262). 민주주의는 특수 이해집단들의 이기적 행동으로 인해 비효율적인 정책을 낳기 때문 에 경제 성장에 부정적이라고 보는 고전적 업적은 Olson(1982)에서 찾을 수 있다. Olson은 2차대전 후 독일,일본,한국,대만 등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패전,식민

이정우 누구를 위한 경제성장이었나? 49 지 등의 독특한 경험으로 인해 기존의 이익집단이 대거 파괴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석한다.그러나 Olson의 논의는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형성되는 유권자와 정부의 정 책형성 사이의 관계에서 내린 결론이며,민주주의가 다른 경로를 통해 경제활동에 미치 는 영향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많은 정치학자들은 정치적 민주화를 통해 경제 개혁을 이룰 수 있고 민주주의를 통해 정부가 시민들의 경제활동에 보다 더 잘 호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발전을 위해서 오히려 민주주의가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최근에 올 수록 늘어나고 있다.하나의 강력한 논리는 국가 자율성이 결국 민간 부문의 약탈을 가 져온다는 점을 강조한다(North,1990).약탈을 방지하고,민간의 경제활동을 보장해 주는 것은 민주주의 체제밖에는 없다는 것이다.노벨경제학상을 받은 North는 경제발 전의 장애요인 중의 하나로 군사독재를 들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장점이 발견되기도 한다.즉 독재 체제는 온갖 사회문 제가 병 속에 갇힌 채 부글부글 끓고 있어서 폭발 위험성이 큰 상태라고 할 것 같으면 민주주의는 안전판의 구실을 해서 사회 안정에 도움이 되며,결국 장기적으로는 경제성 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Bhagwati,1997).이 점에 착안하여 바그와티는 동아시 아의 권위주의 체제를 이렇게 해석한다. 동아시아가 장기간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초기의 평 등한 소득분배가 계급투쟁을 완화시켰다는 점,(싱가포르를 제외하고)인종적 동질성이 종 족 갈등을 배제했다는 점,종교 분쟁이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이런 유리한 조건이 없었더 라면 이들 나라가 그렇게 좋은 성과를 거두었을 것 같지 않고,틀림없이 권위주의의 폐단이 나타났을 것이다 (Bhagwati,1997,p.569). 결국 민주주의와 독재 중 어느 쪽이 경제 성장에 유리한가 하는 문제는 선험적으로는 쌍방의 주장에 일리가 있어서 이론적으로 옳고 그름이 판가름 날 문제는 아니고,실증 적으로 밝힐 수밖에 없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학계에서 오랜 연구의 축적이 있다. 이 문제의 세계적 권위자인 Przeworski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표 1>에서 보듯이 연 구 결과는 아주 다양하다(PrzeworskiandLimongi,1993). 이 표에 나와 있는 18개의 연구에서 21개의 결과가 도출되었는데,그 중 권위주의 지지가 8개,민주주의 지지가 8개,나머지 5개는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 백중지세 를 보이고 있다.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88년 이전의 연구 결과는 대부분

50 2부 누구를 위한 대한민국인가? 독재를 지지하는 데 반해서 그 이후에 나온 연구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민주주의를 지지 한다는 점이다.저자들은 연구 대상이나 시기가 비슷함에도 이런 결과가 나타난 데 대 해 의아해하면서 통계와 이데올로기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진다(PrzeworskiandLimongi,1993,60쪽).결론적으로 저자들은 지금까지 제 시된 통계적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경제 성장은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어느 쪽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 뒤에 나온 Barro(1996)는 경험적 연구 결과는 민주주의의 발달 정도와 경제성장 사이에 비선형( 非 線 型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서 조금 더 복잡하다. Barro는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간의 관계를 경험적으로 분석하면서 민주주의 발달 수준 이 매우 낮은 단계에서는 민주주의의 신장이 경제 성장에 도움을 주며 중간 정도의 민주 주의에서 경제 성장에 가장 유리한 영향을 주지만 그 이상으로 민주주의가 발달하면 오 히려 민주주의가 경제 성장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1960~ 1990년 기간에 100개국의 횡단면 자료 분석을 통해 밝히고 있다.이는 민주주의 발달 정도를 횡축에 놓 고,경제성장률을 종축에 놓을 때,역U자형의 관계가 성립함을 의미한다.그러나 이 둘 사이의 통계적 관계는 그렇게 강력한 것은 아니다.그럼에도 Barro는 아주 구체적인 제 안을 내놓고 있는데,한국에 대한 언급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인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이들 발견은 멕시코,말레이시아 같이 민주주의 지수가 중간 수준(0.5)을 보이는 나라에 서 더 이상 민주화를 하면 성장이 감소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게다가 정치적 자유화가 진전된 칠레,한국,대만 같은 나라에서 더 이상 자유화가 있으면 장래 성장이 저해될 것이 다(이들 세 나라의 민주주의 지수는 1980년대 초에 각각 0.17,0.33,0.33이었으나 1994년에는 각각 0.83,0.83,0.67로 상승하였다). <표 1>민주주의와 독재가 경제 성장에 미치는 영향 자(연도) 표본 시기 결과 Przeworski(1966) 57개국 1949~1963 독재적 중진국이 가장 빠른 성장 Adelmanand Moris(1967) 74개 후진국 (공산권 포함) 1950~1964 권위주의가 중진국,후진국 성장에 기여 Dick(1974) 59개 후진국 1959~1968 민주주의가 조금 더 빠른 성장 Huntingtonand Dominguez(1975) 35개 빈국 1950년대 권위주의가 더 빠른 성장 Marsh(1979) 98개국 1955~1970 권위주의가 더 빠른 성장

이정우 누구를 위한 경제성장이었나? 51 자(연도) 표본 시기 결과 W ede(1983) 124개국 1960~1974 권위주의가 더 빠른 성장 Kormendiand Meguire(1985) 47개국 1950~1977 민주주의가 더 빠른 성장 Kohli(1986) 10개 후진국 1960~1982 1960년대는 차이 없음. 1970년대는 권위주의가 약간 나음 Landau(1986) 65개국 1960~1980 권위주의가 더 빠른 성장 SloanandTedin (1987) 20개 남미국가 1960~1979 관료권위주의체제가 민주주의보다 우월 단, 전통적 독재는 더 나쁨 Marsh(1988) 47개국 1965~1984 체제에 따른 차이 없음 Pourgerami(1988) 92개국 1965~1984 민주주의가 더 빠른 성장 Sculy(1988,1992) 115개국 1960~1980 민주주의가 더 빠른 성장 Baro(1989) 72개국 1960~1985 민주주의가 더 빠른 성장 GrierandTulock(1989) 59개국 1961~1980 Remmer(1990) 11개 남미국가 1982~1988 1982와 1988 민주주의가 아프리카,남미에서 더 우월 아시아에서는 차이 없음 민주주의가 더 빠른 성장. 그러나 통계적 유의성 없음 Pourgerami(1991) 106개 저개발국 1986 민주주의가 더 빠른 성장 Heliwel(1992) 90개국 1960~1985 민주주의가 성장에 부정적 영향. 그러나 통계적 유의성 없음 자료:PrzeworskiandLimongi,1993,61쪽.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해답은 최근에 나온 Przeworski등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Przeworskietal,2000).저자들은 아시 아의 몇몇 고도 성장국이 권위주의 체제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독재가 경제 성장에 유 리한 게 아닌가 하는 속설이 퍼져 있는 것을 경계하면서 몇 마리의 호랑이가 독재인 것 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재가 호랑이를 낳는 것은 아니다. 고 주의를 촉구한다.왜냐 하면 경제 성장에 실패한 대표적 나라를 뽑아보면 그들 역시 독재국이기 때문이다. 141개국의 1950~90년에 걸친 방대한 자료를 분석하여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의 관계 에 대한 결정판이라 부를 만한 이 연구에서 저자들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 분석의 주요 결론은 민주주의와 발전 사이에 양자택일의 관계(trade-of)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중략)독재를 지지하거나 묵과하게 만들 정도로 민주주의가 성장을 낳는

52 2부 누구를 위한 대한민국인가? 데 열등함을 보여주는 증거는 전혀 없다.이것으로 이 문제는 끝난 것으로 봐주기를 우리는 희망한다.관찰된 성장률에서 독재를 두둔할만한 차이는 전혀 없다.(중략)지나 놓고 보니 하는 이야기지만 이 모든 논쟁은 태산명동서일필( 泰 山 鳴 動 鼠 一 匹 )이었다 (Przeworskietal, 2000,178~179쪽) Ⅲ. 자유로서의 발전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의 관계에 대해 최근 흥미 있는 새로운 관점이 제시되었다.인 도 출신의 존경받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센(Amartya K.Sen)은 자유로서의 발 전 (developmentasfreedom)이란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 있어서 학계의 주목을 끌 고 있다(Sen,1999).센에 의하면 자유의 신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주요 목적일 뿐 아 니라,발전의 주요 수단이기도 하다.센은 전자를 구성적 역할,후자를 수단적 역할이라 고 부른다.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발전은 부자유의 주요 원천의 제거를 요구한다:즉 발전은 빈곤과 폭정,빈약한 경제적 기회,체계적인 사회적 박탈,공공시설의 부족 그리고 억압적 국가의 과잉활동의 제거 등을 요구한다. 센은 사회적,경제적 발전이 충분히 이루어지기까지는 특정한 자유,특히 정치적 자 유가 유보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한다.센은 민주주의와 발전 사이의 상충 관계를 주장하는 가설을 리콴유( 李 光 耀 )테제라고 부르는데,싱가포르의 리콴유( 李 光 耀,Lee,KuanYew)는 소위 아시아적 가치 (Asianvalues)를 옹호하면서 경제 발 전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민주주의의 후퇴를 감수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사람이다. 리콴유는 민주주의 하에서는 기율(discipline)이 서지 않음을 비판하면서 소위 부드 러운 권위주의 (softauthoritarianism)가 싱가포르의 번영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민주주의보다는 기율이다.민주주의 가 무성하면 무기율과 무질서를 낳게 되며 그것은 발전을 저해한다. 고 열변을 토한다 (Economist,1994년 8월 27일).이는 노골적인 독재 옹호론이다. 당연히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박정희를 존경하며,한국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첫째,민주주의와 발전은 서로 모순이며,급속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권위주의 를 용인해야 한다.둘째,역사적 경험과 최근 한국 등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에서 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