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B1E8C1D6BBEF2E687770>

Similar documents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652DB7AFB4D720BFECBCF6B1E2BEF720BAB8B5B5C0DAB7E E687770>

<C3CAC1A DC1DFB1B92E687770>

½Å½Å-Áß±¹³»Áö.PDF

allinpdf.com

C O N T E N T S 1. FDI NEWS 2. GOVERNMENT POLICIES 3. ECONOMY & BUSINESS 4. FDI STATISTICS 5. FDI FOCUS

C O N T E N T S 1. FDI NEWS 2. GOVERNMENT POLICIES 中, ( ) ( 对外投资备案 ( 核准 ) 报告暂行办法 ) 3. ECONOMY & BUSINESS 美, (Fact Sheet) 4. FDI STATISTICS 5. FDI FOCU

182 동북아역사논총 42호 금융정책이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 대외금융 정책의 기본원칙은 각 식민지와 점령지마다 별도의 발권은행을 수립하여 일본 은행권이 아닌 각 지역 통화를 발행케 한 점에 있다. 이들 통화는 일본은행권 과 等 價 로 연

152*220

**09콘텐츠산업백서_1 2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C O N T E N T S 1. FDI NEWS 2. GOVERNMENT POLICIES 3. ECONOMY & BUSINESS 4. FDI STATISTICS 5. FDI FOCUS

(012~031)223교과(교)2-1

- 2 -

2002report hwp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BFA9BCBAC0C720C1F7BEF7B4C9B7C220B0B3B9DFB0FA20C3EBBEF7C1F6BFF820C1A4C3A5B0FAC1A62E687770>

¹é¹üȸº¸ 24È£ Ãâ·Â

<B9ABC1A62D31>

41호-소비자문제연구(최종추가수정0507).hwp

<C3E6B3B2B1B3C0B C8A32DC5BEC0E7BFEB28C0DBB0D4292D332E706466>

G lobal M arket Report 중국지역 수출유망품목및진출방안


<C0BDBEC7B0FA2028BEC8B8EDB1E2292E687770>

소식지수정본-1


* pb61۲õðÀÚÀ̳ʸ

#7단원 1(252~269)교

Y Z X Y Z X () () 1. 3

¾ç¼ºÄÀ-2

(중등용1)1~27

È޴ϵåA4±â¼Û

....pdf..

A Time Series and Spatial Analysis of Factors Affecting Housing Prices in Seoul Ha Yeon Hong* Joo Hyung Lee** 요약 주제어 ABSTRACT:This study recognizes th

잡았다.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실추되었던 선조는 명군의 존재를 구세 주 이자 王權을 지켜주는 보호자 로 인식했다. 선조는 그 같은 인 식을 바탕으로 扈聖功臣들을 높이 평가하고 宣武功臣들을 평가 절하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제 명에 대한 숭 앙과 충성은

CC hwp

토픽 31호( ).hwp

C O N T E N T S 1. FDI NEWS 2. GOVERNMENT POLICIES 3. ECONOMY & BUSINESS 4. FDI STATISTICS 5. FDI FOCUS

<B1B9BEEE412E687770>

_ _ Reading and Research in Archaeology. _ Reading and Research in Korean Historical Texts,,,,,. _Reading and Research in Historical Materials from Ko


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한류동향보고서 16호.indd

감사회보 5월

<C7D1B1B9C7FC20B3EBBBE7B0FCB0E82DC3D6C1BE612E687770>

º´¹«Ã»Ã¥-»ç³ªÀÌ·Î

단양군지

Global FDI Briefing [FDI FOCUS] 아세안의외국인직접투자와경제구역 (UNCTAD) 2017 년 12 월 18 일 [ 제 139 호 ]

³»Áö_10-6

ITFGc03ÖÁ¾š

제국주의로서의 근대일본자유주의

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5 291

ok.

141018_m

항일 봉기와 섬멸작전의 사실탐구

기획7.hwp

#유한표지F

<3034BFEDC0CFBDC2C3B5C7CFB4C2C1DFB1B9BFECB8AEC0C7BCF6C3E2BDC3C0E52E687770>

<B0EDB5EEC7D0B1B320BFAABBE7B1B3B0FABCAD20C1FDC7CAB1E2C1D828C7A5C1F62BC2F7B7CA292E687770>

기후변화는 인류사회가 직면한 가장 거대한 불확실성 중 하나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Á¤Æò°¡

아태연구(송석원) hwp

<5BB0EDB3ADB5B55D 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 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 D3135B9AEC7D72E687770>

A 목차

2ÀåÀÛ¾÷


16-27( 통권 700 호 ) 아시아분업구조의변화와시사점 - 아세안, 생산기지로서의역할확대

나하나로 5호

< E5FBBEABEF7C1DFBAD0B7F9BAB02C5FC1B6C1F7C7FCC5C25FB9D75FB5BFBAB05FBBE7BEF7C3BCBCF65FA1A4C1BEBBE7C0DABCF62E786C73>

수입목재의합법성판단세부기준 [ ] [ , , ] ( ) 제 1 조 ( 목적 ) 제 2 조 ( 용어정의 ). 1.. 제3조 ( 대상상품의분류체계 ) ( ) 18 2 (Harmoniz

CB hwp

기본소득문답2

Readings at Monitoring Post out of 20 Km Zone of Tokyo Electric Power Co., Inc. Fukushima Dai-ichi NPP(18:00 July 29, 2011)(Chinese/Korean)

한류동향보고서 26호.indd

¾Æµ¿ÇÐ´ë º»¹®.hwp

120~151역사지도서3

µ¶¸³Á¤½Å45È£


11+12¿ùÈ£-ÃÖÁ¾

µ¶µµºÎ·Ï1~64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 평균 ( 만원 ) 자녀상태 < 유 자 녀 > 미 취 학 초 등 학 생 중 학 생 고 등 학 생 대 학 생 대 학 원 생 군 복 무 직 장 인 무 직 < 무 자 녀 >,,.,.,.,.,.,.,.,.

04 Çмú_±â¼ú±â»ç

<B4E3B9E8B0A1B0DD DB9E8C6F7C0DAB7E12E687770>

IDP www idp or kr IDP 정책연구 한국경제의구조적문제와개혁방향 민주정책연구원 The Institute for Democracy and Policies

DocHdl2OnPREPRESStmpTarget

Best of the Best Benchmark Adobe Digital Index | APAC | 2015


ºñ»óÀå±â¾÷ ¿ì¸®»çÁÖÁ¦µµ °³¼±¹æ¾È.hwp

2015현엘 내지.indd

Contents MAY Economic ISSN http www chungnam net http

216 동북아역사논총 41호 인과 경계공간은 설 자리를 잃고 배제되고 말았다. 본고에서는 근세 대마도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인식을 주로 영토와 경계인 식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 시기 대마도에 대한 한일 양국의 인식을 살펴볼 때는 근대 국민국가적 관점에서 탈피할

2013_1_14_GM작물실용화사업단_소식지_내지_인쇄_앙코르130.indd

서울도시연구_13권4호.hwp

Transcription:

아시아연구 김 주 삼 77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 일의 대응방식 분석 김 주 삼 조선대 정치외교학부 kjs3chosun@hanmail.net 접수일: 2009년 1월 9일, 수정일: 2009년 2월 5일, 게재확정일: 2009년 2월 15일 요 약 이 논문은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국 과 일본의 대응방식을 비교분석한 것이다. 동아시아 근대기에 발생했던 아편전쟁은 동양과 서양의 문물이 군사적으로 충돌한 사건이었지만, 그 결과는 서구열강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전역을 지배하는 것으로 나타 났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19세기 세계정치경제의 중심국가였던 영국에 의해 불평등조약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연속적인 서구열강의 시장쟁탈 지로 전락하였다. 중국은 아편전쟁 당시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봉건 제를 실시하여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중국의 추진한 쇄국정책은 중국이 이미 산업혁명을 거친 서구열강의 힘에 대한 본질파악에 미흡했으며, 그 결과 역시 주도권 상실로 이어졌다. 일본은 아편전쟁 이후 급변하는 동아시아정세변화에 발빠르게 적응한 대표적인 국가로 분류된다. 일본이 서구열강들로부터 강제점령 당하지 않 고,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서 발생했던 아편전쟁의 교훈이었다. 일 본 내부의 쇼군파와 존황제를 주장한 개혁파의 갈등이 단시일내에 개혁파 의 승리로 끝난 점도 주요요인이 되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은 일본 일반 국민들로부터의 변혁이 아닌 상층부 관리들의 분명한 개혁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편전쟁 당시 중 국과 일본의 국가체제는 봉건제를 실시한 전대적 국가들이었음에도 불구 하고 아편전쟁 이후에는 일본이 중국을 초월하여 근대화를 이룬 데에는 권력엘리트들의 개혁의가 달랐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근대기 중국과 일본

78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 일의 대응방식 분석 엘리트들의 대외인식의 교훈은 21세기 국제질서에서도 해당국의 국가미래 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핵심어 아편전쟁, 근대화, 불평등 국제조약, 엘리트의 대외인식 Ⅰ. 서론 1839년부터 1842년까지 진행된 아편전쟁( 阿 片 戰 爭, Opium Wars)은 근 현대국제정치사에서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열강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 간 근대기 국제질서 주도권쟁탈에서 역사적으로 획을 긋는 일대 사 건이었다.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국내생산력의 팽창으로 수요공급의 경제 적 불균형에 따른 해외시장개척을 단행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이르면서 동아시아로 진출방향을 정하였다. 아편전쟁은 영국과 중국의 무역진행과정에 빗어진 동양과 서양간의 군 사적 충돌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그동안 영국이 그들의 세계시장개척을 위한 치밀하고 전략적인 시장접근전략이 깔려 있었다. 아편전쟁이 있기 전까지 중국의 국가체제 성격은 전통적 황제통치가 이루어지는 중앙집권 적 봉건제였다. 당시 중국은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대외인식의 부족과 새로운 변화에 대한 체제개편을 소홀히 함으로써 영국과 치르는 아편전쟁에서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하지만 중국은 아편 전쟁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외정세변화의 급변과 대내체제개편에 대한 자각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엘리트 상층부의 대내외인식 부족은 결국 1911년 청조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1949년 중국 공산당정권 이 창건되기까지 1세기 동안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반면 일본은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과의 국제조약체결과정에서 발생한 국제관계적 현상들을 살펴볼 때. 중국과는 접근방법과 대외인식이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은 아편전쟁 당시 국가통치방식은 형태는 약간 달랐지만, 전통적 중앙집권적 봉건제를 실시 하고 외국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폐쇄적 쇄국정책을 취해왔다. 이는 서구 열강이 17-18세기 산업혁명을 통한 정치경제구조에 대한 근대화를 일찍

아시아연구 김 주 삼 79 이룬 것과 비교하면 분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후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는 점점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여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일본이 중국보다 근대화를 먼저 달성하고, 양국의 경제력은 역전이 되고 만다. 그러면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인식을 가지고 아편전쟁이 있었던 19세기중반부 터 중일의 근대화과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따라서 논문의 연구범위는 근 대화시기인 아편전쟁부터 19세기 후반까지를 중점으로 하였으며, 연구의 대상은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상층부 권력엘리트들의 대 외정세변화에 대한 대응방식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그리고 본 논문의 연구방법은 근현대기 아편전쟁 이후 중국과 일본의 국제조약체결과정에서 발생하는 대외인식에 대해 그 차이점을 분석해 나 가는 병렬적 비교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논문의 구성은 제2장에서 당대 의 국제조약과정을 국제관계이론을 통해서 이를 적용하고자 하며, 제3장 에서는 아편전쟁 이후 발생한 중국상층부의 대외인식을 다루고, 제4장에 서는 아편전쟁 이후 일본의 상층부의 대외인식과 영향을 다루고자 한다. 제5장 마지막 결론에서는 본 논문의 요약과 내용의 함의를 포함시켜 서술 하고자 한다. Ⅱ. 국제관계이론 적용과 분석 1. 제국주의론 적용 19세기는 서구열강이 전세계를 대상으로 그들의 탁월한 항해술과 발달 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제3세계지역인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지 역에 진출하여 식민지 정복과 팽창을 노골화한 시기였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서유럽이 산업혁명을 거쳐 본격적으로 자본 주의로 발전해 왔지만, 동북아에서는 19세기까지 중국, 일본, 조선 등은 소농사회에 머물렀고, 결국 구미주도의 세계자본주의에 수동적으로 편입

80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 일의 대응방식 분석 되고 말았다.(나카무라 사토루와 박섭, 2007). 가장 큰 원인은 동아시아에 서 중화제국 체제 존속해 서유럽과 같은 국가 간 경쟁의 부재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중국의 인구는 약 3억명이 넘는 거대한 시장으로, 서구열강은 산 업혁명 이후 해외시장개척 확보를 위해 동아시아지역으로 제국주의적 활 동을 본격화하였다. 이러한 유럽의 식민지운동은 르네상스 시대의 지리상 발견 이후 활발히 전개되어 왔으며, 19세기 서구열강들은 자본의 이윤율 체감을 해결하기 위해 활발한 대외팽창과 해외식민지 확대에 노력을 더욱 경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제국주의국가들의 해외 식민지에 대한 경쟁은 결국 독점자본주의 형태를 띤 국가출현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1) (김주삼, 2008) 표 1 에서 보는 바와 같이 18-19세기 서구열강은 산업혁명 이후 전 세계를 무대로 해외식민지개척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으며,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전세계 83개 지역을 식민통치할 정도로 대표적인 제국주의 국가 들이었다. 이러한 제국주의국가들의 국제행위에 대해 John. A. Hobson는 제국주 의는 전체 국민들을 위해서는 쓸모없는 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계 급이나 직업을 위해서는 훌륭한 사업이었다는 모순을 지적했다. 즉 막대 한 군비지출, 값비싼 전쟁, 대외팽창에서의 심각한 위험과 곤란, 영국 국 내에서의 정치적, 사회적 개혁의 견제 등은 영국국민들에게 막대한 피해 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산업이나 직업들의 사업상의 당면이익을 위 해서는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John A. Hobson, 2005a). 이러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는 과두지배체제로 자본의 집중과 경제의 기생성을 나타냈으며, 19세기와 제2차 세계대전 종결까지 제국주의 국가 간 경제적 이익을 두고 상호간 전쟁까지 일삼는 제국적군국주의 행태로 변질되어 갔다. 한편 아편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의 상황에서 서구열강과 동아시아 국가 1) 제국주의에 대한 제국주의 초기이론가는 힐퍼딩(Rudolf Hilferding), 룩셈부르 그(Rosa Luxemburg), 카우츠키(Karl Kautsky), 부하린(Nikolai Bukharin), 레 닌(V.I. Lenin) 등을 들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하영선(1992) ; 유럽제국의 탈식민화는 존 베일리스 스티브 스미스(2007)을 참조.

아시아연구 김 주 삼 81 들의 국가체제와 제도 및 정부형태는 정치경제적 구조에서 많은 격차를 보이고 있다. 표 1 1900년대 서구열강의 해외식민지 팽창 현황 Number of Colonies Area Square Miles Population Mother Country Colonies, & C. Mother Country Colonies, & C. United Kingdom 50 120,979 11,605,238 40,559,954 345,222,239 France 33 204,092 3,740,756 38,517,975 56,401,860 Germany 13 208,830 1,027,120 52,279,901 14,687,000 Netherland 3 12,648 782,862 5,074,632 35,115,711 Portugal 9 36,038 801,100 5,049,729 9,148,707 Spain 3 197,670 243,877 17,565,632 136,000 Italy 2 110,646 188,500 31,856,675 850,000 Austra- Hungary 2 241,032 23,570 41,244,811 1,568,092 Denmark 3 15,289 86,634 2,185,335 114,229 Russia 3 8,660,395 255,550 128,932,173 15,684,000 Turkey 4 1,117,41 465,000 23,834,500 14,956,236 China 5 1,336,841 288,560 386,000,000 16,680,000 USA 6 3,557,000 172,091 77,000,000 10,544,617 Total 136 15,813,201 22,273,858 850,103,317 521,108,791 출처: John. A. Hobson(2005), Imperialism, A Study, New York: Cosimo. 1840년대까지 중국과 일본은 정치경제적 구조와 세계관에서 아직 근대 이전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 원인은 서유럽에서는 국가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국내경제통합, 국가재정 팽창, 국채발행, 국가의 원격지 교역 추진 통제, 군사력 강화 등이 진행된 데 반해, 동아시아에서는 그러한

82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 일의 대응방식 분석 과정없이 경제가 완만하게만 성장했기 때문이다.(나카무라 사토루와 박섭, 2007a). 이 당시 서구열강은 이미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지역에 해외식민지는 물론 국내적 자본주의적 형태의 정치구조를 형성하여 봉건제를 중심의 동 아시아국가들과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동북아시아와 서유럽 의 차이는 경제내부가 아니라, 국가체제의 상태와 그것을 규정한 국제적 조건에서 찾을 수 있다.( 中 村 哲, 2001). 아편전쟁은 영국의 해외시장 팽창을 위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었다. 2) 유럽사회는 일찍이 15세기 항해술의 발달로 이루어진 신대륙의 발견으로 유럽인들의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은 계속되었다. 19세기의 주요 특징은 세력균형체제, 국제 금본위제, 자기조정적 시장, 자유주의국가라고 정의할 수 있다. 1839년 아편전쟁이 있기 이전 중국에서는 이미 명조때부터 14세기 포 르투갈 상인들에게 마카오자치구를 인정하여 서양과의 제한적이지만 간헐 적 무역교류를 실시하고 있었다. 19세기 중엽 영국은 면제품 무역쇠퇴로 차수입이 주류를 이루면서 중국과 차( 茶 )무역에 소요되는 자본금을 인도 에서 재배되는 아편을 수출하여 충당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편수출이 확대되자 중국은 결제수단인 은( 銀 )의 유출이 심화되고, 관리, 농민, 병사 들의 아편중독이 심화되는 상황에 직면하자 중앙정부차원의 아편엄금정책 을 실시하였다. 이 단속과정에서 중국과 영국은 결국 1939년 3월 아편전 쟁을 치르게 되었다. 하지만 19세기 영국은 세계정치경제의 최강국으로 세계의 중심국가였 다. 당시 영국은 자본주의 경제의 혈관인 세계철도의 절반을 보유하고 있 었고, 영국의 금융중심인 시티(City of London)는 세계경제의 중심이었 다.(구갑우, 2008). 고전적 자유주의 시대의 절정으로 평가되는 이 시기의 세계질서는, 유럽중심의 열국체제와 자유무역을 통한 세계경제의 확장으 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 세계질서를 주도한 국가가 바로 영국이었다.(구 2) 아편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중 영 전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아편전쟁은 최초 발발한 제1차는 1839년~1942년, 제2차는 1856년~1860년, 중국은 모두 패배하여 배상금지불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여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침투의 증 대로 반( 半 )식민지 상태로 빠지게 되었다.

아시아연구 김 주 삼 83 갑우, 2008a). 영국은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동아 시아지역으로의 상품시장을 확대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중국의 전통적 봉 건제하의 쇄국정책으로 광동성 1개 이외의 지역에서는 교역할 수 없었다. 이러한 중국의 쇄국정책은 일본과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7세기부터 영국을 비롯한 대표적인 유럽국가였던 프랑스, 네덜 란드, 독일, 러시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은 인도차이나반도, 태평양지역인 동남아를 강제점령하여 상품시장개척과 원료공급획득을 위한 식민지쟁탈 전을 경쟁적으로 벌여왔다. 이러한 국제행위는 강자가 약자를 발달된 군 사력으로 자국의 자본축적을 위한 제국주의침략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영국은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중국, 일본이 위치한 동북아시아지역에 개 항을 요구했으며,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이미 인도차이나반도와 태평양지 역에서 이미 제국주의침략을 확장한 상태였다. 제국주의는 국제정치이론에서 이미 체계화된 이론이다. 당시 서구열강 의 약소국 접근방식은 첫째, 일방적으로 개항을 요구한다. 둘째, 개항요구 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결국 군사력을 동원하여 해결하고, 셋째는 전 쟁결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여 전쟁패배에 대한 막대한 배상금을 물리고, 종속관계를 장기화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방법은 아편전쟁에 서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중국과 일본 모두 적용될 수 있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이 실시한 동아시아전략은 21세기를 막론하고 국제관계에서 국제행위자로서 해당국가의 제국주의적 속성은 쉽게 사라지 지 않고 있는 것이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따라서 아편전쟁은 이후 동아시 아에서 나타난 근대화과정은 제1차적 제국주의적 행태는 중 영의 아편전 쟁에서, 제2차적 제국주의적 행태는 1954년 미 일화친조약에서 나타났다. 제3차적 행태는 일본이 청 일전쟁(1894~1895년), 러 일전쟁(1904~ 1905)에서 서구열강이 사용했던 방법을 그대로 모방하여 사용했다는 점에 서 제국주의론 적용은 가능하다고 본다. 2. 현실주의론 적용 영국은 1839년 아편전쟁이 있기 전에 이미 인도네시아의 동인도회사 3)

84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 일의 대응방식 분석 를 통하여 더 많은 무역시장을 개척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영국이 동인도 회사가 위치한 인도네시아는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말라카해협을 통제하 기 위한 중요한 해상교통로이지만 시장가치는 중국보다 떨어졌다. 영국은 아편전쟁 이전부터 포르투갈이 관할하고 있는 마카오와 광동성 1개지역 통해 중국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무역은 상당히 불편하였으며, 영국은 1840년대 당시 약 3억 이상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시장을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 다. 당시 중국의 인구는 현재와 같이 명확한 인구조사결과에 따른 통계수 치를 확인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지만, 국내외 자료를 종합분석할 때, 약 3 억명 정도의 인구를 유지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중국인구는 경제적 이 익추구를 목적으로 한 영국의 입장에서는 해외시장으로서는 최적지였다는 점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당시 포르투갈을 제외하고는 중국에 직 접적으로 교역을 하는 서구열강이 없었다는 점도 매력적 가치를 더해 주 었다. 따라서 영국은 우선 중국과의 교역을 통하여 국내의 부를 축적하고, 축 적된 자본을 통하여 더 많은 해외시장의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국이 라는 교두보를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목 표에 대한 영국의 국제정치활동은 아편전쟁을 통하여 이후 전개된 중국과 의 국제조약체결과정에서 그대로 적용되었다. 아편전쟁 이전 영국과 중국 은 이전부터 향료와 면직물을 교역했지만, 18세기 중엽 영국의 면제품 무 역쇠퇴하자 차( 茶 )가 수입 주요품목으로 대체되었다. 영국은 지속적인 차 수입 결제적자로 아편을 1925년부터 중국에 밀수출한 결과 아편의 확산이 중국경제의 피폐를 초래, 중국은 아편수출엄금정책에 따라 영국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영국은 아편전쟁이 있기 전까지 중국에 대해 상당히 불만이 높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청나라 허가를 받은 독점적 상인길드를 통해서만 무역이 가능하게 되어 있는 공행( 公 行 )의 자의적 관세부과에 불만이 고조되어 있 3) 동인도회사는 1602년~1799년까지 네덜란드가 영국, 포르투갈을 제치고 인도네 시아지역에 설립한 회사였다. 이후 네덜란드 세력약화로 영국제국주의 침략의 대리인 역할을 해왔다. 영국은 아편전쟁 이전까지 동아시아지역에서 그들의 자 본축적을 위해 프랑스, 스페인과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한 후 동인도회사를 통 해 무역을 독점해 왔으나, 1873년 법인체 자격을 상실했다.

아시아연구 김 주 삼 85 었다. 둘째, 외국상인의 무역제한과 무역항의 제한에 불만이 높았으며, 셋 째, 무역신장의 제한하는 광동무역체제에 전반적인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 다. 영국은 아편전쟁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중국과의 1842년 난징조약( 南 京 條 約 )을 체결하였으며, 아편전쟁의 패배로 인해 체결된 난징조약은 서구 열강이 청에 대한 지속적인 국가 간 국제조약을 종용케하는 시발점이 되 었다. 그 사례로 청 미의 1844년 7월 3일 왕샤조약( 望 廈 ), 청 프 간의 1844 년 10월 24일 황포조약( 黃 浦 ), 이후 청과 영 프 미 러 간 체결한 텐진 조약, 1860년 10월 24일에 청과 영 프 러 사이에 체결한 베이징조약( 北 京 ), 1860년 11월 청 러 간 베이징조약을 체결이라고 할 수 있다.(백봉종, 2001). 서구열강은 영국이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을 체결하자 이후 중국 에 개항요구수위를 높이면서 영국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군사적 행동도 본격화하였다. 일본의 상황 역시 서구열강들에 의해 '힘의 원리'가 공통 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아편전쟁 당시 상황에서는 중국과 일본은 모두 서구열강의 군사력 과 경제력에 굴복되어 불평한 조건에서 일방적으로 체결한 불평등조약이 었다. 이는 국제관계에서 국제정치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대표적 현상 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는 동아시아근대화 과정 에서 노골화 되었고,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적용되고 있다. 현실주의는 국제관계의 상황전개변화에 구분없이 국제정치는 국가의 ' 힘의 원리'가 지배한다는 측면에서 이와 관련이론 검토는 중요하다고 하 겠다. 4) 현실주의는 우선 이기주의적 관점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국가의 이익추구와 힘에 바탕을 두고 있다.(Karen A. Mingst, 2008). 근대 국가체제의 역사를 살펴볼 때, 국제사회는 세 가지의 상호 경쟁적 인 전통을 유지해 왔다. 첫째, 홉스적 전통으로 국제정치를 전쟁상태로 보 는 관점이며, 둘째, 칸트적 전통으로 국제정치를 인류공동체의 발현으로 보는 관점이며, 셋째, 그로티우스적 전통으로 국제정치는 국제사회내에서 4) Thucydides' Histoty of the Peloponnesian War, St. Augustin(354-430), Thomas Hobbs, Niccolo Machivelli(1469-1527), Hans Morgenthuau(1904-80),George Kennen(1904-2005), Henry Kissenger.

86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 일의 대응방식 분석 이루어진다는 관점이다. 이 세 가지 전통 가운데 근대기는 제국주의 국가 들의 자국경제이익 추구를 위해 힘을 바탕으로 약소국을 침략한 사례는 국제정치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현실주의를 적용은 가능하다. 현실주의는 국제관계에서 힘을 바탕으로 한 주도권 확보와 영향력 발휘 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과 중국과 일본이 불평등적 입장에서 국제조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에서 이론적용의 타당성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투키디데스(Thucydides) 시대 이후부터 정치적 현실주의는 다음과 같 은 가정들을 받아 들여왔다.(김의곤, 2002) 첫째, 모든 국가는 국제정치에 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로 보고 있다. 둘째, 모든 국가는 힘을 추구하는데, 그 힘은 목표 그 자체가 될 수도 있고 혹은 다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셋째, 모든 국가는 합리적으로 행동하며, 따라서 다른 국가 들도 그렇게 행동하리라 기대한다. 넷째, 현실주의는 안보문제에 관심을 집중해 왔으며, 국내외 적으로부터 그 자신을 보호하고자 한다는 것이 다.(Karen A. Mingst, 2008a). 현실주의는 1939년 이 에이치 카아(E. H. Carr)의 이상주의에 대한 비 판으로부터 재인식되기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 발전되어 온 이론이다. 특히 독일의 나찌,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그리고 일 본의 군국주의자와의 전쟁은 국제법의 효용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 하였고, 동시에 전통적 힘의 정치 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었다(김 의 곤, 2002a). 서구열강은 19세기 이후 치열한 제국주의 국가 간 국제질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상황에 따라서는 서구열강 간 동맹과 적대적 행위를 반 복해 왔다. 이들은 20세기 들어 국제연맹, 국제연합이 결성되었음에도 불 구하고, 국제적 행위를 자국이익에 따라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제관계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체제는 19세기 영국주도의 세계질서(Pax Britannica)를, 20세기 제2차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에는 미 소중심의 양극체제와 이후 미국주도하의 국제질서(Pax Americana)가 유지되고 있다. 이러는 과정에서도 국제관계는 국가 간 경제적 이해목적 에 따라 동맹과 적대행위를 제국주의 시대와 동일한 현상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체제는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아시아연구 김 주 삼 87 구체적으로는 세계경제사적 측면에서 오늘날 G-8(주요정상회의; Group of Eight)국가들도 캐나다를 제외하면, 19세기 아편전쟁과 동아시 아근대화과정에 참여한 과두지배형태의 틀이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는 것 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들은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 정;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와 브레튼우즈체제(Bretton Woods System)체제에서 IMF(국제통화기금; International Monetary Fund) 현행 WTO(세계무역기구; World Trade Organization)체제를 통해 19세기 제국주의 시기보다 더욱 노련한 방식으로 세계정치경제를 지배한 다는 관점에서 현실주의는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3. 소결론 아편전쟁은 19세기 서구열강을 대표하는 영국이 자국상품시장을 확대하 기 위해 중국시장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필연적 사건이었다. 당시 서구열강은 19세기 비인회의 이후 새롭게 구축되는 국제체제에 국내자본 의 해외팽창을 목적으로 경쟁적으로 해외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는 서구열강의 원료공급와 그들의 상품시 장으로서 아주 적합한 지역이었으며, 특히 동아시아지역은 서구열강의 매 력적인 해외시장이었다. 국제정치사적 측면에서 서구열강의 근대기 중국과 일본의 진출에 대한 적용이론은 위에서 언급한 제국주의와 현실주의로 귀결된다. 물론 마르크 스주의와 자유주의, 신현실주의 등도 거론할 수 있지만, 근현대과정에서 서구열강과 중일관계를 분석하겠다는 측면에서 앞에서 제시한 두 개의 이 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제국주의는 1945년 제2차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국제질서 구축으로 일단 종결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국제정치에서 제국주의 속성만은 국제관계가 무정부상태라는 전제하에 언제든지 재발될 수 있다. 현실주의는 국제관계사에서 근대 이후 현재까지 유효한 국제정치이론이 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합(UN)과 기타 수많은 국제기구의 창설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서는 아직까지 힘 에 원리 가 적용되고 있는 것이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이러한 국제정치현

88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 일의 대응방식 분석 실은 현실주의 이론이 정치경제 측면에서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본격적으 로 다루어진 이론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이 이론을 19세기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국제정치경제를 해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 하겠다. 따라서 제국주의와 현실주의 두 개의 이론은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과 동아시아 사이에서 발생한 국제정치경제의 주도권의 선점과 유지, 박탈 등 강대국들의 국제체제 지배구조를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체계화할 수 있 다는 점에서 이론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 Ⅲ. 중국의 대외인식과 영향 1. 근대화과정에서 대외정세변화에 부적응 1839년에 발발한 아편전쟁은 영국과 중국이 국제관계에서 최초로 충돌 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아편전쟁을 통해 당시 청조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 러나는 계기이기도 했다. 영국은 아편전쟁 이전부터 국가체제를 입헌군주 제를 도입하여 국가형태를 형태적 조직형태로 이미 탈바꿈하였다. 특히 군사적 측면에서도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확보함으로써 19세기 자체가 영국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가규모와 국제 적 관계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당시 중국의 국가체제와 법, 제도, 경제구조는 서구열강과는 너무나 다른 후진적인 봉 건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축적된 자본과 국력은 지난 비인회의 이후 확립된 비인체제를 통해 견고함이 유지되었고, 무엇보다도 지속적으로 개척한 해외식민지로 부터의 부의 축적은 더욱 향상되었다. 이러한 영국의 발전은 영국 이외의 서구열강 국가들에서도 변화된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는 인도 차이나반도를 차지하여 식민지지배능력을 구축한 상태에서 중국에 노련하 게 접근을 하고 있었으며, 러시아는 17세기 청조와 네르친스크조약을 통

아시아연구 김 주 삼 89 해 시베리아지역 진출 극동지역으로 남하정책을 추진하였다. 중국은 당시 상황을 놓고 볼 때, 영국처럼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하였고, 태평양지역에 대한 주도적인 입장도 아니었다. 미국은 1848년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를 확보함으로써 샌프란시코와 상하이( 上 海 )를 잇는 태평양을 연결하고자 하였다. 미국은 신속하게 캘리포니아 서 부를 개발하고 급속한 자본주의체제로 발전시켜 미국이 중국시장과 태평 양에 위치한 일본시장을 통해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증대시키고자 경쟁적 으로 해외상품시장쟁탈전에 뛰어들었다.( 唐 緊 興, 2002) 중국은 서구열강의 치밀한 동아시아진출전략에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는 데, 이는 그때까지 전통적 중국역량에 대한 과신과 자만이 주요요인이었 고, 서양문물에 대한 비교평가를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였다. 특히 아편전 쟁이 발발한 이후 1860년 베이징조약체결과정에 이르기까지 정치경제적 구조개혁에 대한 개혁의지와 발달된 서양문물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는 결 국 청조몰락을 재촉하게 되었다. 2. 중국개국과정에서의 소극적 수용 아편전쟁 당시 중국은 황제에 통치되는 봉건제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 러한 전제정치는 역사적 흐름에도 대외정세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는 오류를 겪게 된다. 중국은 당시 전국을 18개 성( 省 )으로 구분하여 각 성을 제후들에 맡겨 관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전략적 으로 중국시장에 접근하고자 하는 서구열강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 했으며,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중국이 일본과는 다르게 나타난 점에 대해, 프랑스 동양외교사 거장인 피에르 르누벵의 당시 분석자료를 토대 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피에르 르누벵, 1988). 첫째, 중국인은 외국인을 경계하고 경원시 하며, 기술면에서 외국인의 우위를 인정하나 과거 서양문명보다 찬란했던 전통적 중국문화에 더 집착 했다는 것이다. 즉 중국인은 자만심과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불신이 많았 다는 것이다. 둘째, 기술문화를 무시하는 전통적 유교사상이 지배적이었 고, 외국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모방심이 일본인들보다 훨씬 부족했다. 셋째, 중국인들은 평화적이었으나, 군사적 활동에는 흥미나 존중을 하지

90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 일의 대응방식 분석 않았으며, 서양인에 대한 반응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애국심 도 미미했다. 외국인이 자기 나라에 자리잡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기는 하였지만, 잠재적 배외심에 그친 채, 일반적으로 격렬한 항의행동은 하지 않았다. 5) 넷째, 일본개혁세력이 무사계급이 주도한 반면 대부분의 관리들 은 외국의 영향이 중국인의 생활에 전파할 변혁을 적대시 하였다. 다섯째, 중국관리들은 개혁사상에 문을 닫아놓고 있었다. 그들의 지적형 성은 전통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중국전통적 현인의 숭배 와 과학의 경멸 그리고 중국의 철학과 중국의 지적우위에 대한 확신을 가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배적 사상들은 공사( 公 私 )관계를 명확히 하는 서양사상을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고 배제하였다. 여섯째, 청 조정부의 개혁에 대한 수동적 태도와 황위를 계승하는 황제들의 청정부 권한행사 주권자 부재와 황권절대주의 존속이었다. 서구열강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정치제도 개편와 변혁보다는 전통적체제를 유지했는데, 이는 결 국 중국근대화에 역행하였다. 3. 국제조약체결과 영향 1) 청조의 혼란 중국은 아편전쟁의 패배로 영국 난징조약( 南 京 條 約, 1942년)을 체결하였 다. 이 조약은 일방적으로 전승국 영국에 강제된 불평등조약이었다. 영국 은 아편전쟁이 있기 전까지 광동성에 있는 무역항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과의 교역을 수차례 시도하였지만, 중국의 쇄국정책으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아편전쟁이 있기 전까지 영국에 대한 중국의 대외인식은 위협이 될 정도로 간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영국의 존재조차도 인정하 지 않을 정도였다. 5) 이에 대해서는 중국남부에서 홍수전( 洪 秀 全 )이 신정국가( 神 政 國 家 )건설을 목적 으로 일어난 태평청국( 太 平 天 國, 1851~1860년)과 염군의 난(( 捻 軍 亂 ; 1852~ 1868년)을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두 개의 난은 당시 서양열강에 대해 대항하 는데 있어서 규모와 개혁의 목적이 메이지유신( 明 治 維 新 ; 1868년)을 주도했던 일본 젊은 무사계급중심의 개혁파들과는 달랐다. 즉 중국은 애국주의와 민족주 의, 국가미래에 대한 체제개혁의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미약했다고 지적할 수 있다.

아시아연구 김 주 삼 91 난징조약체결은 영국과 중국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후 발생하는 서구 열강과 중국과의 국제조약까지 이어지는 기화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상 징적 불평등한 국제조약이었다. 난징조약체결은 국내외적으로 두 가지 변 화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표 2 중국과 서구열강 간 국제조약(1842~1860) 국제조약과 세칙 시기 체결국가 주요내용 난징조약 ( 南 京 條 約 ) 1842.3 영국 5구통상장정 1843.7.22 영국 후먼조약 ( 虎 門 條 約 ) 왕샤조약 ( 望 廈 條 約 ) 황푸조약 ( 黃 埔 條 約 ) 텐진조약 ( 天 津 條 約 ) 해관세칙 ( 海 關 細 則 ) 베이징조약 ( 北 京 條 約 ) 1843.10.8 영국 1844.7.3 미,프 1844.8.14 미,프 1858. 7 영,프,미,러 1858.11 영,프,미,러 186.10.24 영,프,러 홍콩 할양 외 5개 지역 개항 개항장에 영사설치, 배상금 지불 공행( 公 行 )상인폐지, 관세협의, 양국관리간의 대등한 문서교환 난징조약보완조치, 외국군함영해진입 외국인 토지임대, 외국인 영주권보장 개항장에 외국군함 파견 및 순찰보장 프랑스포교권 획득, 영사재판권 보장 외국공사 베이징 주재, 배상금 지불 아편무역 승인, 관세율고정 및 경감 주롱스( 九 龍 司 )영국에 할양, 배상증액 출처: 중국과 서구열강 국제조약 주요내용을 골자로 필자 정리 우선 국내적으로는 아편전쟁 패배가 중국인들이 서구열강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자괴감을 갖게 하면서 이후 청조에 대한 무능에 대한 반란이 일기 시작하면서 중국은 국내적으로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92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 일의 대응방식 분석 2) 서구열강의 중국침략 본격화와 혼란 아편유입은 중국의 은( 銀 )유출을 1820년부터 확산시키는 주요요인이었 음에도 불구하고, 아편수입은 약 1840년대에 18,000상자인 것이 그 규모는 1850년대 전후에는 48,000상자로 수준을 초과하여 절정인 1888년까지 계 속 증가하였다.( 上 田 信, 2005). 국제적으로는 아편전쟁을 통해 영국이 중국으로부터 난징조약을 받아내 자 그동안 중국진출에 열망했던, 프랑스, 독일, 러시아, 네덜란드, 미국 등 의 국가들도 중국과의 교역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난징조약을 통 해 아편전쟁에 대한 배상금을 충분히 받아내고, 5개 무역항을 확보하였다. 이후 텐진조약에서는 난징조약( 南 京 條 約 )보다 더 많은 10개의 무역항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영국의 최종 목표는 중국 황제가 있는 베이 징에 영국 공사관을 주재시킴으로써 중국시장의 종속화를 확고히 다졌다. 영국의 중국에 대한 주도권쟁취에는 당시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열강 들의 군사동맹과 중국접근전략에 필요한 국제동맹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 다. 영국이 중국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자 프랑스와 러시아, 네덜란드, 미국 등은 영국과 연합형태의 군사동맹에 합의하였으며, 이후 발생하는 충돌과 정에서도 서구열강은 조직적으로 중국에 연합군으로 대항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구열강 제국주의 각국의 중국진출에 대한 이해목적 은 각기 다르게 나타났다. 3) 교훈과 시사점 중국은 아편전쟁이 있기 전까지 전통적인 황제가 통치하는 전제봉건제 정부형태를 띠었다. 이러한 봉건제는 17세기 누루하치가 청조를 건국한 이래 중국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확보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형태였지 만, 반면에 산업혁명을 통해 정치경제구조의 변혁을 이룬 서구열강의 경 제침투를 제어하기에는 역량구축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층부 엘 리트의 대외인식 무능력으로 서구열강에 굴복하고 말았다. 아편전쟁을 거치면서 가장 한계를 드러낸 부분은 상층부 엘리트집단의 대외정세에 대한 분석능력이라 지적할 수 있는데, 중국은 제1차 아편전쟁 이 있었던 1839년부터 서구열강 연합군에 의해 베이징이 함락된 1960년 기간 동안 충분한 외국과의 충분한 교섭과 협상을 통한 근대화를 이룰 수

아시아연구 김 주 삼 93 있는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대외배척사상과 쇄국정책에 집착한 나 머지 근대화시기를 놓쳐버렸다. 이 기간은 서구열강의 입장에서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추구를 위해 중국 시장이 절대적이었다고 볼 때, 중국은 이들의 접근을 경제적 접근보다는 정치적 접근으로 보고, 외세에 대한 배척과 차단 그리고 전통적 중국문화 의 집착한 결과 결국 뒤늦게 출발한 일본보다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하나의 지적은 청조정부에 대한 중국인들의 민족주의와 애국심이 일 본보다는 훨씬 미약했다고 본다. 이는 청조정부가 만주족이었다는 점에서 한족들의 정부에 불만은 고조되었지만, 중국미래를 위한 국가관형성까지 는 미치지 못했다. 즉 청조정부가 만주족이 이룬 봉건국가였다는 점에서 서구열강이 계속해서 침투를 해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중 앙관리와 지식층의 각성과 결집이 부족했다. 이는 19세기 이래 청조를 유 지해 온 변혁기를 책임진 황제중심부의 무능과 부패라고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서태후( 西 太 后 ) 6) 가 섭정을 시작한 1861년부 터 청조몰락까지 체제개혁보다는 권력유지에 연연한 결과 역동적인 시기 에 서구열강에 종속되고 말았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은 1958년 막부정권( 幕 府 政 權 )이 서구열 강에 일방적 불평등조약체결에 분노하여 젊은무사 중심으로 서구열강에 대항하기 위한 공적( 公 的 ) 노력이 있었던 것과 비교할 때, 중국관리들은 오히려 변혁보다는 수구권력유지를 지지하는 개인의 사적( 私 的 )권력유지 를 지향했다는 데에서 커다란 인식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Ⅳ. 일본의 대외인식과 영향 1. 근대기 대외정세 판단 우세 일본은 중국이 아편전쟁으로 서구열강으로부터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자 6) 서태후( 西 太 后, Xi Tai Hou; 1835~1908)는 동치제( 同 治 帝, 1861~1875) 섭정 을 시작으로 19세기중엽부터 청조몰락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철권정치를 실시 했던 인물로 광서제( 光 緖 帝, 1875~1908)에 의한 체제개혁을 굴복시키고, 보수 파 부패관료중심으로 청말까지 통치했다.

94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 일의 대응방식 분석 이에 대한 그들의 서구열강대비책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일본 은 쇼군( 將 軍 )이 실질적인 권한을 관장하는 형태의 봉건체제였다. 아편전 쟁의 영향으로, 일본은 텐노파( 天 皇 派 )와 에도가와 쇼군파( 將 軍 波 )의 갈등 이 빚어지기 시작하였는데, 텐노파는 쇼군파에 대한 불만과 일본의 대외 정세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19세기 당시 일본의 실질적 인 권력은 쇼군이 행사해 오고 있었으나, 군사력은 서구열강을 상대하기 에는 대단히 미약하였다. 이러한 쇼군정치에 대한 불만은 번주( 藩 主 )를 중 심으로 한 쇼군반대자연합은 '천황제 부활과 외국인 추방'을 기치로 존황 운동 과 배외운동 을 확산시켜 나갔다. 아편전쟁에 이어 일본은 1953년 미국으로부터 최초로 개항할 것을 요구 받았다. 당시 상황을 놓고 볼 때, 아편전쟁과 비교하면 영국이 중국 개항 을 요구한 것과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은 1848년 서 부지역을 차지한 이후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항지 역할을 할 수 있는 무역항이 필요했다. 일본은 이러한 미국의 중국진출전략에 따 른 무역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본의 당시 막부체제하의 대외인식은 쇄국정책이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었다. 일본은 1850년대 초반부터 일본연안에서 출현하는 서구열강의 함대에 대해 쇄국정책을 고집하였으나, 1953년 7월 동인도 함대사령관이었던 미 국의 매튜 페리 함장이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우라가( 浦 賀 )에 입항하여 미 국함선의 연료와 식량 등의 물자공급에 필요한 항구를 개항할 것을 요구 하였다. 일본 막부정권은 미국 흑선의 출현 이후 본격적인 대비책을 강구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일본의 개항과정은 중국의 개항과 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 첫째, 일본은 시기적으로 아편전쟁의 결과를 이미 인지했다는 점에서 서수열강의 군사력 수준을 국내군사력과 충분히 비교할 수 있었다. 둘째, 당시 일본과 서구열강과의 정치경제 및 군사정보에 대한 정보 또한 일본 에 진출한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미리 획득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셋 째, 1853년 비록 페리가 함대를 이끌고 와서 위협을 했지만, 미국의 일본 개항접근방법은 영국과는 달리 개항하는데까지 1년간 시간적 여유를 충분 히 주었다. 이러한 점은 일본이 서구열강인 미국과 첫 국제조약체결이 강 제가 아닌 평화적 입장에서 체결한 사례로 남게 되는데, 이후 다른 서구

아시아연구 김 주 삼 95 열강과 조약체결형태로 중국과는 다르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 디까지 미국의 일방적이며 불평등관계에서 체결한 조약임에는 틀림없다. 일본은 1854년 3월 31일 현재의 가나가와( 神 奈 川 )에서 불평등 미 일화친 조약( 美 日 和 親 條 約, Treaty of Kanagawa) 을 체결함으로써 1639년~1854 년까지 실시해온 외국에 대한 쇄국정책을 종결시켰다. 일본은 이 조약으 로 시모다( 下 田 )와 하코다테( 函 館 ) 2개 항구를 개항하고, 시모다에 미국영 사 주재를 허용한다는 데 동의하였으며, 이후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가 차례로 조약을 체결하여 교역관계를 넓혀 나갔다. 2. 서구문명의 적극적 수용 일본은 1854년 미국에 지금의 요코하마항을 개항하면서 서구열강과의 국제관계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중국이 1860 년 서구열강의 연합군과의 전쟁을 통해 베이징함락으로 베이징에 외국공 사를 주재시킨 것과 비교해 볼 때, 일본의 조치는 상당히 우연의 일치였 는지는 모르지만, 미국의 요구를 거절없이 수용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해외시장 규모를 놓고 볼 때, 당시 중국인구의 3억과 일 본의 3천만이라는 10배의 숫적 차이는 미국은 일본시장을 강점목적보다는 미국의 중국교역을 위한 태평양 기항지를 필요가 필요했는데 일본과의 조 약은 이를 충족시켜 주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은 이러한 미국의 대일접근 인식 이상의 개혁의지가 분명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은 1854년 3월 31일 요코하마 가나가와에서의 첫 조약체결 이후 1868년 메이지유신( 明 治 維 新 )이 단행될 때까지 내부적으로 14년간 극심한 권력쟁탈과 주도권 싸움이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은 외국과의 교 역을 할 것인가 아니면 쇄국정책으로 일관할 것이냐하는 두 분류로 나뉘 어졌다. 결국 텐노파들이 쇼군파를 완전히 제거하고 천황중심체제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에 대한 일대 개혁을 추진하였다. 7) 7) 일본막부정권은 아편전쟁 당시부터 메이지유신 전까지 도쿠가와 이에요시( 德 川 家 慶 ; 1837~53), 도쿠가와 이에사다( 德 天 家 定 ; 1853~58), 도쿠가와 이에모치 ( 德 川 家 茂 ; 1858~66),도쿠가와 요사노부( 德 川 慶 喜 ; 1866~67) 등 4대의 막부정

96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 일의 대응방식 분석 이는 당시 서구유럽과 일본의 정치 사회구조적 차이를 비교할 때, 이 미 산업혁명을 거쳐 정치경제, 사회문화적으로 현대화를 추구하고 있는 서구열강과 일본의 격차는 상당히 벌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근 대화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서구문명과 과학기술, 군사제도를 수용할 밖 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현실적 입장은 쇼군파를 제거하고 주 도권을 장악한 개혁파에 의해 적극적이고도 일사분란하게 추진되었다는 점은 근대화 일본의 가장 큰 특징으로 평가할 수 있다. 3. 국제조약체결과 영향 1) 서구열강과의 연합전선 구축 일본은 미 일화친조약을 체결한 이후 시모다와 하코다데 두 항구를 개 방해 주었다. 미국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자 영국은 1854년 10월과 1859 년에, 러시아는 1855년 2월과 1859년에, 네덜란드는 1856년 1월에, 프랑스 와 포르투갈은 1859년에 유사한 조약을 맺었다(피에르 르누벵, 1988a). 일 본의 서구열강과의 조약체결은 중국이 서구열강과 끝까지 저항하다가 밀 릴 때까지 밀려 전쟁에서 패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불평등한 입 장에서 조약을 체결한 점에 비추어 보면, 일본의 개항은 이러한 과정없이 곧바로 교역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했다는 차별성이 나타난다. 이러한 차별적 현상들은 무엇보다도 미국과의 첫 국제조약체결을 평화 적 입장에서 체결했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중국이 아편전 쟁 이후 난징조약, 텐진조약, 왕샤조약, 베이징조약 체결까지 약 20년간 지속되었으나, 그 결과는 서구열강의 강제된 불평등조약 뿐이었다. 중일양 국의 엘리트들의 대외인식은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수동적이었고, 일본은 위기의식을 느껴 적 극적인 자세로 공무에 있다는 사실이다. 미 일의 첫조약의 좋은 선례는 다른 서구열강들이 일본과의 국제조약체결과정에서도 동일한 방법과 동일 한 형태의 평화적 과정이 계속해서 이어졌다는 데에서도 확실히 증명된다. 일본은 서구열강과의 국제조약체결로 일본이 당면한 과제에 대한 정책 권이 유지되다가 막을 내렸다.

아시아연구 김 주 삼 97 들을 발빠르게 추진하였다. 영국에는 해군군사제도를 도입하고자 군사무 관과 유학생을 보내고, 독일에는 육군군사제도를 개선하고자 육군군사무 관을 파견했으며, 미국에는 국제관계와 통상에 관련한 전문제도를 도입하 고자 인력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적극적인 노력은 1868년 이후 지 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이들의 일본귀국은 결국 그들이 근대화를 빨리 추 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일본은 서구열강으로부터 근대화된 제도와 기술을 도입한 이후 그들의 활로를 조선과 중국 등 대륙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일본이 대륙진 출을 시작할 때는 이미 일본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수준이 서구열강과 동일한 수준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비약적 발전은 엄청난 성과였 다. 1895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조선을 1910년에 강 제점령하고, 이후 중국대륙진출을 본격화했다. 이 두 전쟁에서의 승리는 일본이 그동안 동양에서 종주국을 자처하던 중국을 꺾고 새로운 강국으로 탄생했다는 점과 지난 서구열강으로부터 꾸준히 현대화된 서구문명을 통 해 결국 러일전쟁에서 서구열강과의 최초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일 본의 대외팽창의 자신감과 명분을 쌓게 만들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혼란상황에 빠져있는 중국대륙에 본격적으로 진줄하고 했다. 러일전쟁 승리로 대련( 大 連 )항을 차지하고, 최 초 선양( 瀋 陽 )에 만주국을 만들고, 점차 영역을 넓혀 최종에는 장춘( 長 春 ) 으로 만주국 수도를 이전하고 관동군사령부를 설치하여 중국대륙까지 식 민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대륙진출에는 서구열강과의 지속 적인 국제적 동맹과 경제적 이해목적이 일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 역시 이미 서구열강과 일본은 조선과 중국문제에 대해 그들의 이해목적을 달성하고자 전략동맹을 함께 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적 열강의 속성과 공통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2) 대륙진출과 군국주의 팽창 일본의 대륙진출의 계기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청일전쟁과 러일 전쟁의 승리가 가장 요인이었다. 일본의 대륙진출은 같은 해양국가인 영 국의 모델을 상당부분 참고했으며, 특히 영일동맹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98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 일의 대응방식 분석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영국과 일본의 차이점은 영국은 인 접유럽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한 것이 아닌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지역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한 반면, 일본은 모두 조선과 중국, 인도차이나반도, 태평 양에 있는 동남아지역이었다는 점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중국대륙에 직접적인 군사기지를 설 치하여 적극적인 대륙팽창을 시도하였다. 일본의 첫번째 군사주둔지역은 요녕성 대련( 大 連 )이었으며, 일본은 대련을 기점으로 이후 선양과 장춘 등 지로 군사적 팽창을 더욱 확대하였다. 일본군국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는 청조괴뢰정부인 만주국건설이었다. 만주국은 중국 마지막 황제 부의( 溥 儀 ) 를 만주국 허수아비황제로 만들어 조정하고, 일본이 이를 명분으로 만주 점령의 합법화를 추진했던 주도면밀한 책략중의 하나였다. 만주국 수도는 최초 선양( 瀋 陽 )에 있다가 일본이 만주철도부설권을 획득하고 세력이 팽 창되자 장춘으로 옮겼다. 만주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일본은 그들의 대륙장악에 대한 본격적인 시 동을 걸기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례는 1931년 발생한 사전조작하여 만주사변을 일으켜 1932년 3월 만주국을 건설한 것과 1937년 기습적 군사 행동을 감행한 중 일전쟁이다. 1937년 일본의 군국주의에서 비롯된 중일전쟁은 중국의 국 공합작의 계기로 작용하였으며, 미일관계에서 결국 태평양전쟁을 발발케하는 사건 이었다. 일본은 미국과의 무역마찰에서 입장을 일본의 주장을 굽히지 않 았으며, 결국 1941년 12월에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켰 다. 태평양전쟁을 기화로 일본의 국가체제는 전시상태로 전환하였으며, 이 러한 전시체제는 1945년 8월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히로시마( 廣 島 )와 나가 사끼( 長 岐 )에 원자폭탄을 피격당해 패전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3) 교훈과 시사점 일본은 대표적인 근대화의 상징인 1868년 메이지 유신 존황제복구를 주 장해 온 무사계급인 개혁주의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일본의 개혁방식은 일본국민들로부터 표출된 것이 아닌 개혁자체를 국가관리들이 강제적으로 이끌어 간 관리주도방식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본적인 변혁은 1869년부터 1878년까지 10년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다. 즉 일

아시아연구 김 주 삼 99 본의 개혁은 전반적인 제도를 수용화하는데 걸린 기간은 25년밖에 안된 단 기간에 국가구조를 완전히 개혁한 것이다. 일본은 아편전쟁 당시 중국과 일본의 봉건제와 소농사회구조 형태는 메 이지유신을 거치면서 완전히 새로운 국가체제로 바뀌었다. 1842년 난징조 약에서 1868년 메이지유신은 시기적으로 26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의 개혁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일본의 개혁은 우선 1854년 미일조약을 통해 서구열강에 대한 엘리 트집단이 대외정세에 대한 대외인식이 중국과는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일 본은 개혁파가 정치개혁을 통해 국내정치의 안정적 기반을 바탕으로 근대 화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둘째, 일본의 지리적 위치는 중국과는 달리 서구 열강이 중국보다는 낮게 인식하는 유리한 입장에서 아편전쟁결과를 통해 적극적인 서구문물을 도입하고자 했다. 셋째, 일본이 근대화를 단기간에 달성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요인은 19 세기 자본의 중심국이었던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절대적인 자본차관도입과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특히 이들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러일전쟁과 정에서 해군과 경제지원을 함으로써 일본이 승리하는데 일조하였다.(John J. Mearsheimer, 2001) 넷째, 일본의 엘리트들의 서구열강지역에 대한 연수단을 파견함으로써, 선진적인 인재배양과장차 이들로 하여금 일본의 정치경제개혁을 위한 주 도세력으로 양성시켰다는 점이다. 1868~1898년 30년 사이 일본에 파견된 외국기술고문관은 약 500명었으나, 이후 이들의 숫자는 외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일본 국내인력으로 점차 대체되었다. 마지막으로 일본은 아편전쟁을 통해 서구열강과 동아시아 군사력의 상 대적 열세를 간파하고, 우선적으로 군대를 현대화하기 위해 해군과 육군 의 현대식 군사고문단을 초빙하여 교육하였고, 인재들을 영국으로 파견하 여 현대화된 신식군사교육인력을 양성시켰다. 이러한 신식군사제도 도입 결과는 이후 일본의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 일본 을 승리로 이끄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 이 부국강병으로 나아가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그동안 서구열강으로부터 상대적 열세입장에 서 국제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승리 이후 동등한 입

100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 일의 대응방식 분석 장에서 서구열강이 취해 왔던 제국주의 적 방식을 그대로 아시아지역 적 용한 국제적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Ⅴ. 결론 근현대기 아편전쟁은 서구열강과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서양문명과 동 양문명이 충돌했던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아편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영국은 이를 계기로 중국과의 불평등조약체결을 통해 대륙진출과 중 국시장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국제조약체결의 대표적인 지역은 홍콩할 양으로써, 홍콩은 1997년 중국에 반환될 때까지 서구열강과 중국의 근현 대사를 그대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역항의 역할을 해왔다. 근대기 서구열강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 자본의 축적을 위 해 19세기부터 중국과 일본이 위치한 동아시아로 방향을 돌리기 시작하면 서 16세기부터 추진하기 시작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확장했다. 국제관계사 적 입장에서 볼 때, 서구열강의 동아시아진출은 필연이었으며, 중국과 일 본의 서구열강 접근에 대한 대처능력은 그들의 과제였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과 일본의 대외인식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차이점 나타나며, 두나라의 대외인식 결과는 근대사에서 주도권을 바꾸고 말았다. 중국과 일본이 같은 동양문화권에서 유사한 봉건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지속적인 쇄국정책을 추진한 반면, 일본은 초기 쇄 국정책입장을 가나가와항 개항을 시작으로 서구열강들로부터 선진 서양문 물과 제도를 도입하여 국제정세에 적극 대처했다는 점은 역사적 교훈으로 남는다. 아편전쟁 당시 상황을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를 함께 비교한다는 것은 약간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양국의 봉건체제하에서 상층부 엘리트의 대외인식에 대한 분명한 차이는 주목할 만하다. 당시의 국내 정치적 상황 조건은 중국이 일본보다는 훨씬 안정적이었고, 국가규모나 제도운영면에 서도 훨씬 앞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전개과정에서 후퇴한 점은 양 국가 엘리트들의 대외인식의 차이에서 가장 큰 요인을 발견할 수 있다.

아시아연구 김 주 삼 101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에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까지 1 세기 동안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는 혼란과 역사적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반면 일본은 1954년 서구열강과 첫 국제조약체결을 시작으로 1945년 패망 할 때까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주도했던 막강한 국가로 팽창했다. 역사 적 관점에서 볼 때, 양국가의 진전과 후퇴는 결국 해당국가의 엘리트집단 의 대외인식과 미래지향적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국가의 미래가 바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중국과 일본의 역사는 바뀌기 시작하였으며, 중국 의 근대화는 상당히 느리게 추진된 반면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 해 비약적인 근대화를 달성하여 20세기초반부터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국 가로 군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군국주의 확장으로 결국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후 현재의 일본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19세기 격동적이었던 근대역사를 통해 현재 직면한 국제관계를 살펴보 는 것은 미래지향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19세 기 서구열강의 경쟁적인 해외식민지개척의 역사는 제2차세계대전종결을 기점으로 대부분 마무리되었고 오늘날의 국제질서하에서 함께 국제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국제정치는 지난 역사를 통해 힘의 원리 가 존재하는 속성이 사 라지지 않는 한, 언제든지 제국국주의적 행태의 국제행위는 다시 반복된 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한 국제사회 현실들은 심지어 21세기 에 들어와서도 미국의 일방주의적 행태가 동맹국과 결성하여 이라크를 공 격했다는 데에서도 이미 입증됐다. 따라서 지난 시기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 일 의 대응방식은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통해 대응하는 방식에 따 라, 당사국의 정치경제적 형태와 사회문화적 수준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그리고 향후 보다 중요한 과제는 21세기 국제관계는 자국의 이익추구도 중요하지만, 아울러 세계평화와 안전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새로운 모델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102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 일의 대응방식 분석 참고문헌 국제관계연구회(2003), 근대 국제질서와 한반도, 서울: 을유문화사. 국제정치경제연구회(2008), 20세기로부터의 유산, 서울: (주)사회평론. 김성철(2007), 일본외교사와 동북아, 서울: 한울아카데미. 김용구(1990), 세계외교사 下,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김용구(2002), 외교사란 무엇인가, 서울: 도원. 김주삼(2008),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의 동북아진출전략, 동북아연 구, 25(1), 67-85. 김성희(1990), 구미정치사, 서울: 박영사. 김의곤(2002), 현대국제정치이론, 서울: 집문당. 나카무라 사토루와 박섭(2007),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 서울: 일조각. 백봉종(2001), 현대 지구촌 외교사, 서울: 선인. 사이먼 외(1998), 영국제국주의 1750-1970, 서울: 동문선. 성황용(2005), 근대동양외교사, 서울: 명지사. 존 베일리스 외(2007), 세계정치론, 서울: 을유문화사. 존 펀스톤(2005), 동남아의 정부와 정치, 서울: 도서출판 심산 차하순(1991), 서양사총론, 서울: 심구당. 피에르 르누벵(1988), 동아시아외교사, 서울: 서문당. 하영선(1992), 현대국제정치학, 서울: 나남. W.G. 비즐리, 일본근현대사, 서울: 을유문화사. 嬉 田 光 義 (1997) 중국근현대사, 서울: 일월서각. John A. Hobson(2005), Imperialism, A Study, New York: Cosimo. John J. Mearsheimer(2001), The Tragedy of Great Power Politics, New York: W.W. North & Company. John T. Rourke Mark A. Boyer, "International Politics on the World State Brief", Mc Graw Hill, 2008. Karen A. Mingst(2008), Essentials of International Relations, New York: W.W. North & Company. 衰 明 (2005), 國 際 關 係 史, 北 京 : 北 京 大 學 出 版 社.

아시아연구 김 주 삼 103 美 保 羅 肯 尼 迪 (2005), 大 國 的 興 衰, 北 京 : 國 際 文 化 出 版 公 司. 王 義 德 梁 守 明 (2006), 當 代 世 界 經 濟 與 政 治, 合 肥 : 中 國 科 學 技 術 大 學 出 版 社. 唐 緊 興 (2002), 現 代 當 代 國 際 關 係 史, 上 海 : 復 旦 大 學 出 版 社. 熊 志 勇 外 (2005), 中 國 近 現 代 外 交 史, 北 京 : 世 界 知 識 出 版 社. 伊 原 澤 周 (2008), 近 代 朝 鮮 的 開 港, 北 京 : 社 會 科 學 文 獻 出 版 社. 苑 書 義 (2007), 中 國 近 代 史 上, 下, 北 京 : 人 民 出 版 社. 上 田 信 (2005), 中 國 の 歷 史 海 と 帝 國, 東 京 : 講 談 社. 鈴 木 正 崇 (2007), 東 アジアの 近 代 と 日 本, 東 京 : 慶 應 義 塾 大 學 東 アジア 硏 究 所. 每 日 新 聞 社 外 信 部 (2004), 世 界 の 紛 爭 がよくわかる 本, 東 京 : 每 日 新 聞 社 外 信 部. 沈 才 彬 (2008), 今 の 中 國 がわかる 本, 東 京 : 三 笠 書 房. 古 田 博 司 (2005), 東 アジアイデオロギ-お 超 えて, 東 京 : 新 書 館. 小 島 晋 治 丸 山 松 宰 (1986), 中 國 近 現 代 史, 東 京 : 岩 波 新 書. 世 界 通 史 (2008), 北 京 : 北 京 出 版 社.

104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 일의 대응방식 분석 An Analysis of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in East Asia and the Corresponding changes in China and Japan after the Opium Wars Kim, Joo-Sam Department of Political Science, Chosun University Abstract This study analyzed how to readdress the external political changes in China and Japan exhibited in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The Opium Wars from 1839 to 1842 helped determine the military superiority between the West and the Orient, and England's victory lead the western powers to govern East Asia. With its defeat in the Opium Wars, China concluded the Sino-British Treaty in 1842 Nanjing Agreement, which was an unfair agreement which demanded that they pay compensation to the British and lead to a decline in Chinese power. It could not correspond to the rapidly changing world because of its feudalism system of government centering on the emperor. As well, its political system, closed to foreign business, was not strong enough to overcome the western powers which had already had the Industrial Revolution. The inability of the upper elites of China to understand foreign powers and reform systems, unstable political conditions and financial panic due to the unfair treaty were main reasons of Chinese failure to modernize. Meanwhile, Japan was a representative country which corresponded to rapidly changing foreign trends after the Opium Wars. Its international relations with western powers were different from Chinese due to strategic values western powers expected from Japan such as centralized authoritarian rule and elites' recognition on foreign powers. That is, Japanese modernization was successful because the strategic values of the western powers were

아시아연구 김 주 삼 105 consistent with Japanese elites' recognition of foreign powers, and its intention to reform all systems of government in Japan which were dominated by the ranks of power. In conclusion, though both national systems of China and Japan at the time of Opium Wars were pre-modern based on feudalism, after the wars, Japan succeeded in modernization as its ranks of power had more advanced consciousness of foreign trends and intention to reform. Historical experiences exhibited in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in East Asia will give both countries important lessons for setting national strategies and goals in the 21st century. Key Words Opium wars, Process of modernization, Unfair international treaty, Elites' consciousness on foreign trend, and a system refor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