펴 낸 이 김학준 펴 낸 곳 동북아역사재단 등 록 312-2004-050호(2004년 10월 18일) 주 소 서울시 서대문구 통일로 81 임광빌딩 전 화 02) 2012-6065 팩 스 02) 2012-6189 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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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 한일협정, 그 후의 한일관계

펴 낸 이 김학준 펴 낸 곳 동북아역사재단 등 록 312-2004-050호(2004년 10월 18일) 주 소 서울시 서대문구 통일로 81 임광빌딩 전 화 02) 2012-6065 팩 스 02) 2012-6189 e-mail book@nahf.or.kr 동북아역사재단, 2015 ISBN 978-89-6187-363-5 03910 이 책의 출판권 및 저작권은 동북아역사재단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어떤 형태나 어떤 방법으로도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이 도서의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예정도서목록(CIP)은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 홈페이지(http://seoji.nl.go.kr)와 국가자료공동목록시스템(http://www.nl.go.kr/kolisnet)에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CIP제어번호: CIP2015017771) 한일관계 지 은 이 정재정 그 후의 초판 1쇄 발행 2015년 7월 7일 한일회담 한 일협정 초판 1쇄 인쇄 2015년 7월 1일 지은이 정재정 한일회담 한일협정, 그 후의 한일관계

발 간 사 금년은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65년의 한일국교 정상화는 근대 일본의 조선 강점으로 단절되었던 양국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양국 관계의 출발을 의미하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국교정상화 이후 한일 양국은 협력과 경쟁을 통해 서로의 발전을 도모해왔습니다. 그 러나 불행하게도 현재 양국은 역사문제로 인한 갈등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일협정에서 역사문제는 어떻게 다루어졌고, 지난 반세기 동안 해결된 것은 무엇이고 남겨진 문제는 무엇일까요? 사실 한일협정만큼 한국 현대사에서 논쟁적이고 민감한 주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발간한 이유는 현재의 한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일관계의 기초가 된 한일협정이 체결된 과정과 그 의의 및 한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한일협 정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든 긍정적으로 평가하든 객관적인 사실이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 책은 기존의 연구 성과와 자료를 토대로 14년에 걸친 한일회담 과 정과 당시의 국제정세, 한일협정의 주요 내용 그리고 그 후의 한일관계가 어떻게 갈등과 협력을 반복해 왔는지를 일반 독자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집필했습니다. 한일관계에 대한 깊은 고민과 탁월한 식견을 토대로 이 책을 집필해 주 신 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무쪼록 이 책이 지난 50년간의 한일관계에 대한 잘못된 정보나 편견 에서 벗어나 한일관계를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종합적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입문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5년 6월 22일 4 5

머 리 말 이 책은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해방 이후 한일관계의 기본 틀을 규정한 한일협정에 초점을 맞춰 기술한 것이다. 한일협정은 14년 동안 중단과 재 개를 되풀이하며 진행된 양자협의, 곧 한일회담을 거쳐 1965년에 체결 발효되었다. 그 후 5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일협정의 일부는 개정이 되었고, 다른 일부는 조문은 그대로지만 취지상 보완된 것도 있다. 따라서 한일협정의 내용과 의의 및 그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일회 담과 그 후의 한일관계까지 역사의 안목에서 종합적 체계적으로 살펴보 아야 한다. 이 책의 제목을 한일회담 한일협정, 그 후의 한일관계 로 정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필자가 논쟁에 휩쓸리기 쉬운 이런 책을 일부러 집필한 이유는 위기에 처한 한일관계를 개선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은 일념 때문이 다. 국교정상화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한국과 일본이 정상회담을 꺼 릴 정도로 관계가 악화된 이면에는 근대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 및 배상을 둘러싼 태도의 차이 곧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에 관련된 갈등이 깔려 있다. 원래 한일협정이야말로 이런 낡은 문제들을 말끔히 정 리하고 우호친선의 새로운 한일관계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어야 마땅했 다. 그렇지만 한일협정은 양국뿐만 아니라 국제정세 등이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 한국과 일본이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 지 못한 채 체결되었다. 결국 한일협정의 태생적 결함이 한국과 일본 사이 의 갈등을 재생산해오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관점을 좀 달리하면, 한일관계의 위기는 한일협정이 보완되어 왔다는 점을 무시한 데서 연유하는 바도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한 일협정의 주요 부분이었던 어업협정이나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 등은 상 황의 변화에 맞게 개정되었고,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에서도 충분하지는 않지만 개선된 측면이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역대 정부와 수상 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명해왔다. 그리고 재일한국인 원 자폭탄 피폭자, 사할린에 버려둔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서 는 부분적으로나마 보상과 비슷한 조처를 취했다. 북관대첩비와 조선왕실 의궤 등도 반환되었다. 따라서 국교정상화 50년을 맞아 한국과 일본이 갈 등을 극복하고 화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일협정의 원죄를 규탄하는 데 만 머물지 말고 그 이후의 진화까지도 염두에 두고 한일관계 전반을 역사적 관점에서 재점검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는 그러한 문제의식이 배 어 있다. 이 책은 크게 보아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전반부에서는 한일회담 한일협정, 그 후의 한일관계 를 한일협정의 주요 쟁점과 관련된 주제를 기축 으로 하여 개관했다. 후반부에는 전반부의 논쟁을 뒷받침하는 자료 곧 한일 관계에 관련된 주요 문서의 전문을 게재했다. 독자들이 전반부를 읽으면서 후반부의 자료를 참조하면 한일회담 한일협정, 그 후의 한일관계 에 대해 정확한 지식과 폭넓은 견해, 균형 잡힌 시각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한일관계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교훈 을 얻게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2015년 6월 정재정 6 7

차 례 발간사 _ 4 머리말 _ 6 이 책의 문제의식과 논의 방향 _ 10 한일협정의 내용과 평가 _ 44 1) 국교정상화 50년과 한일관계의 위기_ 11 2) 한일회담 한일협정, 그 후의 한일관계 의 종합적 체계적 파악 _ 14 1) 한일협정의 의미_ 45 2) 한일협정의 내용과 한계_ 46 3) 한일협정에 대한 평가_ 59 한일회담의 추진과 관련국가의 대응 _ 16 한일관계의 심화와 한일협정의 진화 _ 67 1) 한일회담의 특징 _ 17 1) 한일관계의 심화_ 68 2) 한일회담을 둘러싼 국제정세 _ 18 2) 한일협정의 진화_ 82 3) 한일회담의 경과와 논점 _ 20 4) 한일협정의 체결과 비준 _ 32 5) 한일회담에 대한 저항과 수습 _ 35 한일 국교정상화 50년의 총괄과 전망 _ 101 1) 국교정상화 50년의 성취_ 102 2) 평화공영을 향한 비전_ 108 부록 : 한일관계 50년 주요 문서 _ 114 후기 _ 188 8 9

한일회담 한일협정, 그 후의 한일관계 1) 국교정상화 50년과 한일관계의 위기 이 책의 문제의식과 논의 방향 한국과 일본은 1965년 기본조약 과 부속협정 을 체결함으로써 한국 강제병합 1910. 8. 22, 대일본제국에 의한 대한제국의 폐멸 이래 비정상적이었던 국교 를 정상화했다. 이 책에서는 이때 체결된 일련의 조약을 한일협정이라 고 부르고, 거기에 이르는 14년의 양국 간 협의를 한일회담이라고 부 르겠다. 국교정상화 이후 50년 동안 한국과 일본은 미국과 각각 안보동맹 을 맺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공유하면서 정치 경제 사 회 문화 등에서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웅장한 스케일로 세계 문명의 흥망성쇠 興 亡 盛 衰 를 탐구한 미국 UCLA의 재러드 다이아몬드 Jared Diamond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특별한 인연에 착목하여 자신의 명저 총 균 쇠 에서 두 나라를 유년기를 함께 지낸 쌍둥이 형제 에 비유했다. 그런데 제삼자의 눈에 쌍둥이 형제 처럼 닮아 보이는 한국과 일본의 수뇌는 국교정상화 50년이라는 역사의 마디를 맞아 축하의 덕담을 나누 기는커녕 왜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피할 정도로 소원해졌는가? 엎친 데 덥친 격으로 한류 韓 流 와 일류 日 流 등으로 대중문화를 함께 즐기던 두 나라 국민조차 왜 서로 진저리를 칠 정도로 싫어하게 되었는가? 한일관계가 급전직하 急 轉 直 下 로 나빠진 원인에 대해서는 이미 전문가 들의 다각적인 분석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책에서 중언부언 重 言 復 言 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열거한 각종 원인의 근저에 근대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 곧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 등을 둘러싼 입장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게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곧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를 둘러싼 반목과 대립이 한일관계를 뒤틀어 지게 만든 근본적 원인인 셈이다. 11

그런데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국교 정상화 과정, 곧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에서도 극복하지 못한 채 애매모 호 曖 昧 模 糊 하게 얼버무린 골치 아픈 주제였다. 따라서 국교정상화 50년의 한일관계를 되돌아볼 때나 악화된 한일관계의 원인을 규명할 때는 한일 회담의 경과와 한일협정의 내용을 정확히 살펴봐야 한다. 그 속에서 한 일관계의 원점으로서의 의미와 한계 등을 찾을 수 있고,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지혜와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의 역대 정부는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 문제가 한일관계의 전반을 손상 시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관리해왔다. 그런데 최근에 양국의 최고 관 리 책임자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이런 문제들을 서툴게 다룸으로써 한일관계를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그리고 양국의 지도층도 앞서거 니 뒤서거니 하면서 국민의 여론을 그런 쪽으로 몰아갔다. 국교정상화 이후 5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는 왜 이런 현상이 되풀이되는가? 나는 그 배경에 한일회담과 한일협약의 태 생적 胎 生 的 한계와 더불어 또 다른 차원의 후생적 後 生 的 원인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곧 한국과 일본은 국교정상화 이후 50년 동안 절차탁 마 切 磋 琢 磨 하며 함께 만들어온 한일관계의 역사에 대해 무지하거나 편견 에 빠져 있다. 한일회담과 한일협약은 분명히 많은 결함을 안고 있지만 양국은 결함 을 보완하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그리고 일정 부분에서는 상당한 성과 를 거두었다. 세계사의 차원에서 보면 한국과 일본은 국교정상화 이후 50년 동안 교류와 협력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등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질의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과 일본은 이런 한일관계를 하나의 역사로서 총괄하여 공유하지 못하였다. 단적인 예를 들면, 한국과 일본에서는 국교정상화 이후 50년의 한일관계사를 균형 잡힌 시각에서 체계적 종합적으로 정 리하고 평가한 서적이나 영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서적이나 언론에는 국교정상화 50년의 한일관계에 대해 잘못된 정보와 편향된 보도가 넘쳐난다. 학교교육도 이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한국의 중 고등학생용 한국사 교 과서를 예로 들면, 근대 한일관계 1875 1945 에 대한 기술은 150여 쪽이나 되지만, 현대 한일관계 1945 2015 에 대한 기술은 근대 한일관계와 동일한 기간이지만 3쪽밖에 되지 않는다. 그 내용도 국교정상화 조약 체결과 그 에 대한 반대운동,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 등 첨예하게 대 립한 사안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일본의 중 고등학생용 일본사 교과서 도 국교정상화 이후의 한일관계를 아주 소홀히 취급하고 있는 것은 마 찬가지다. 다루고 있는 주제나 시각도 한국의 교과서와 거의 유사하다. 한국과 일본의 상황이 이럴진대, 양국의 일반인은 물론이고 여론 주 도자나 국정 담당자가 국교정상화 이후 50년의 한일관계에 대해 무지 와 오해, 왜곡과 편견의 늪에 빠져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필 자는 최근 한일관계가 위기에 직면한 후생적인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 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악화된 한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한일회 담과 한일협정은 물론이고 그 후의 한일관계를 균형 잡힌 시각에서 총 괄하고, 그 실상 實 像 을 널리 알리는 것이야말로 양국이 함께해야 할 꼭 필요한 일이다. 이 책은 그러한 작업을 선도하기 위한 입문서로서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의 제목도 한일회담 한일협정, 그 후의 한일관 계 라고 정했다. 12 13

2) 한일회담 한일협정, 그 후의 한일관계 의 종합적 체계적 파악 국교정상화 이후의 한일관계는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를 둘러싼 갈 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 이상으로 교류와 협력이 활발했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에서도 교섭과 타협을 통해 충분 하지는 않지만 적지 않은 개선이 이루어졌다. 양국은 안전보장과 경제 발전에서도 보조를 맞춰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했다. 따라서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이 안고 있던 태생적 결함은 미약하나마 보완된 부 분이 있다. 한일협정은 그 후 한일관계의 진전과 함께 진화된 측면도 있 는 것이다. 따라서 한일 국교정상화 50년의 역사를 총괄하는 데는 한일회담과 한 일협정 그리고 그 후의 한일관계를 일관된 논리와 균형 잡힌 시각에서 체계적 體 系 的 종합적 綜 合 的 으로 정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럴 경우에 갖춰야 할 몇 가지 관점을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장기사적 長 期 史 的 문명사적 文 明 史 的 시각이다. 역사 속의 한일관 계는 2천 5백여 년에 걸칠 정도로 길고 깊다. 그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 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나름대로 특색 있는 문명을 형성해왔다. 문 명의 전파와 수용은 전쟁 등을 겪으며 폭력과 강제를 통해 이루어진 적 도 있고, 평화 속에서 교류와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 적도 있었다. 한일회 담과 한일협정 그리고 그 후 50년의 한일관계는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 가? 2천 5백 년이 너무 길다면 적어도 근현대 한일관계 140년 1875 2015 만이라도 시야에 넣고 그 의미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둘째, 복합적 중층적 관계를 중시한다. 보통 한일관계를 운위할 때 는 정치나 경제 또는 역사와 문화 등의 어느 한 측면에 치우치기 쉽다. 그러나 한일관계는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면 만을 보고 한일관계 전체를 재단할 수는 없다. 한일관계의 역사를 정리 할 때는 인간이동과 문화접변, 전쟁의 충격과 사회변동, 물자의 교역과 생활변화 등의 다양한 측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일회담과 한일협 정 그리고 그 후의 한일관계는 복합적 중층적 시각에서 바라봐야 그 전체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셋째, 교류협력과 상호의존을 중시한다. 겉으로 보면 한일관계는 반 목과 대립으로 점철된 것 같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은 교류 와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각 분야에서 두 나라의 상호의존 관계도 깊어졌다. 한국과 일본에서 이에 대한 평가가 아주 인색하기 때문에 양 국 국민이 잘 모르고 있을 뿐이다. 중국의 강성과 남북한의 통일 등에 대 비하기 위해서라도 한국과 일본의 교류와 협력은 더욱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일회담과 한일협정 그리고 그 후 50년의 한일관계를 교류와 협력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은 공통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도 필요한 작업이다. 넷째, 현재적 모색적 摸 索 的 태도를 갖는다. 한일 양국 사이에는 오래 되고 새로운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한일회담과 한일협정 당시에 양국이 치열하게 논쟁했던 역사인식이나 과거사 처리가 지금도 현안으 로 부상하는 것이 좋은 사례다. 따라서 이런 문제들의 내력을 추적하고 극복 방안을 모색하는 자세는 연구자에게 중요한 미덕이자 의무다. 모 든 역사는 현대사다. 한일회담과 한일협정 그리고 그 후의 한일관계처 럼 이 명구가 잘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4 15

한일회담 한일협정, 그 후의 한일관계 1) 한일회담의 특징 한일회담의 추진과 관련국가의 대응 현대의 한일관계를 규정하는 기본 틀은 1965년에 한국과 일본이 맺 은 일련의 한일조약이다. 이른바 한일협정이다. 두 나라는 이 조약을 체 결하기 위해 1951년 10월부터 1965년 6월까지 14년에 걸쳐 끈질기게 교섭을 되풀이했다. 흔히 말하는 한일회담이 그것이다. 한일회담의 목적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유래된 여러 문제를 정리 극복하고, 그 바탕 위에서 한국과 일본이 단절된 국교를 다시 수립하는 것이었다. 한일회담은 양국의 수석대표가 참가한 공식회 의만 7차례나 되었고, 비공식 교섭은 1,500회 이상이었다. 이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해결해야 할 난제 難 題 가 산적해 있고, 서로의 오해와 불신, 이견과 갈등이 그만큼 심각했음을 의미한다. 1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중단과 재개를 되풀이하며 지속된 한일회 담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마라톤회담이었다. 한일회담은 다음 세 가지 점에서 대단히 복잡하고 곤란한 교섭이었다. 첫째, 교섭이 장기화되고 중단과 반복을 되풀이했다. 둘째, 시작부터 타결까지 미국이 한일 양국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셋째, 기본관계, 청구권, 어업 평화선,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 문 화재 반환 등의 복수 의제가 동시에 다루어졌다. 이에 따라 한일회담은 한일 양국의 외교역량이 집결된 엄중한 교섭 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과 일본은 해방과 패전 직후부터 이미 한일회 담이 열릴 것에 대비하여 치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국은 남북이 분 단된 상황에서 승전국으로서의 지위를 모색했고, 일본은 미군이 점령한 상황에서 패전국으로서 활로를 모색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배 상 요구 자료를 만들었고, 일본 정부는 이것을 상쇄할 수 있는 해외 재산 17

의 조사를 실시했다. 또 한일 양국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겨냥하 여 미국 등을 상대로 자국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도록 치열한 외교활 동을 전개했다. 2) 한일회담을 둘러싼 국제정세 한국과 일본의 현대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한일회담은 당연히 한 국과 일본이 주체가 되어 맞붙은 외교전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두 나라는 서로 명분과 실리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온갖 지혜와 술수를 동원했다. 그런데 이면 裏 面 에서 한국과 일본을 직접 간접으로 채근하여 한일회담 을 계속하게 만들고 한일협정을 맺도록 힘을 쏟은 나라는 미국이었다. 실제로 중요한 결정은 한일 양국 관계자의 직접교섭을 통해서가 아니라 워싱턴의 미국 정부를 통해 이루어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은 한국과 일본의 이해관계와 미국의 세 계전략이 서로 맞물려 추진된 삼국의 프로젝트 곧 삼인사각 三 人 四 脚 의 경 주였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해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한국은 6 25 전쟁과 남북대결 등 최악의 내우외환 內 憂 外 患 속에서 제국외교 帝 國 外 交 의 경험이 풍부한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힘겨운 샅바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이 구상한 동북아시아 정책은 일본을 철저히 약화시키고 전쟁 기 간 우방이었던 소련 중국과 협조함으로써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었다. 곧 일본을 공업생산 능력이 없는 농업국가로 만드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의 뒤를 이은 트루먼 Harry S. Truman 대통령은 일 본의 약체화 정책을 대폭 수정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소련은 동유럽 에 공산주의 위성국가를 세우고 북한에서 사실상의 군정을 실시하는 등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미국은 이에 맞서 서유럽을 자본주의 진영으로 재건하고 남한을 반공의 방파제로 만드는 봉쇄정책을 펼쳤다. 한반도에 는 체제와 이념이 상충하는 분단국가가 수립되고 미 소가 정면으로 부 딪치는 대결국면이 형성되었다. 중국에서는 치열한 내전 끝에 1949년 10월 10일 대륙에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만에 국민당의 중화 민국이 분립하는 형세가 나타났다. 이에 미국은 일본마저 소련과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가면 자국과 태평 양의 안보가 아주 위험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트루먼 대통 령은 동아시아 정책을 대폭 수정하여 일본을 냉전의 동반자로 육성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일본을 군사력을 배제한 공업국가로 육성함으로써 전쟁 억지력을 배양하고, 한일협력체제를 구축하여 공산주의 세력의 위 협에 맞서려 한 것이다. 1950년 6월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한반도에서 6 25전쟁이 발발하 자 냉전은 열전으로 폭발했다. 이에 미국은 일본을 공산주의 세력의 팽 창을 봉쇄하는 일원으로 재편하는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1951년 9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이 일본의 전쟁책임을 관대하게 처리한 샌프 란시스코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그와 함께 미국이 일본에 주둔하고 개입 함으로써 일본의 안전을 확고히 보장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미일안보조 약도 맺어졌다. 미국은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수립하 여 지역협력체제를 구축하도록 권고했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1951년 10월부터 한일회담을 시작했다. 한편 한일 양국의 경제 및 안보 욕구도 한일회담을 추진하고 한일조 약을 체결하게 만든 한 요인이었다. 북한과 대치하면서 빈곤에 허덕이 고 있던 한국은 1950년대 말에 자립을 향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18 19

1960년대 초부터는 실행을 추진했다. 국내의 자본축적이 허약했던 한 국이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싫든 좋든 외국 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의 최대 원조국가였던 미국의 사정이 녹록 치 않았다. 미국은 소련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군사비와 원조비를 과도 하게 지출해 재정적자에 빠졌다. 그리하여 미국의 한국 원조는 해마다 감소일로를 걷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전후복구와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국 자본을 도입할 수 있는 나라로 일본을 상정했다. 당시 일본 경제는 고도성장을 지속하고 있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황폐화된 일본 경제는 6 25전쟁의 특 수를 호기로 활용해 사상 초유의 급속한 부흥을 이룩했다. 나아가 일본 은 1950년대 중반부터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과 관계개선을 도모하고, 북한에 대해서도 민간의 경제 문화 교류를 용인하는 정책을 구사했다. 1960년대 들어서 더욱 기세가 등등해진 일본의 경제계는 자연히 한 국 시장에도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과 일본은 상 대방이 자국의 경제와 안보에 필요한 존재임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되 었다. 두 나라는 지리적 문화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와 시장경제를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류와 협력의 외형적 조건은 잘 갖춰져 있었다. 3) 한일회담의 경과와 논점 (1) 1~5차 회담(1952. 2 1961. 5) 한일회담은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과 갈등, 대립과 반전 속에 진행되 었다. 그 분위기는 한일회담의 예비회담 1951. 10. 20~1952. 2 부터 감지되었 다. 예비회담은 미국의 주선으로 개최되었는데, 연합국 최고사령부 외 교국장 시볼트 William J. Sebald 가 입회했다. 도쿄 東 京 에서 열린 예비회담의 주요 의제는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와 어업 문제였다. 당시 일본에는 64만여 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는 데, 국적을 포함하여 이들의 법적 지위는 대단히 불안했다. 한국 측은 이 들에게 영주권 부여, 강제퇴거 금지,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 생활보호비 지급, 귀국시 동산 휴대의 권리 허용 등을 일본에 요구했다. 일본 측은 이에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어업 문제와 관련해서는 한국이 나포하고 억류한 일본 어선과 어민의 송환 문제가 논의되었다. 당시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맥아더라인 제2차 세 계대전이 끝난 이후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일본 어선의 어로활동을 규제하기 위해 설정한 영역이 존재 했다. 한국은 맥아더라인을 넘어 한국 쪽 바다에서 어로활동을 한 일본 의 어선 27척, 어민 330명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회의 중인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 이른바 이승만라인 또는 평화선 을 선포했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발효 로 맥아더라인이 철폐될 것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다. 평화선은 맥아 더라인보다 일본 쪽으로 좀 더 많이 치우쳐 있었다. 독도는 평화선 안쪽 에 들어와 있어서 자연히 한국 영토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일절 인정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표명했다. 이어서 열린 제1차 회담 1952. 2. 15~1952. 4. 21 에서는 기본관계, 재일한국 인의 법적 지위, 재산과 청구권, 어업, 해저전선의 분할, 선박 등의 문제 가 의제로 채택되었다. 그중 재산과 청구권, 어업, 기본관계 등을 둘러싸 고 신랄한 설전이 벌어졌다. 일본은 한국에 남겨놓은 일본의 재산을 돌 려달라고 요구했다. 일본은 이 요구로 한국의 대일 청구권과 연합국의 대일 배상청구를 상쇄할 속셈이었다. 한국 측은 일본 측의 주장이 비이 20 21

성적이고 비논리적이라고 거세게 반발했다. 한국 측과 일본 측은 기본관계 수립을 둘러싸고도 충돌했다. 한국은 기본조약 체결을, 일본은 우호조약 체결을 주장했다. 명칭은 절충 끝 에 기본관계를 설정하는 조약 으로 잠정 결정됐다. 문제는 한국 측이 제 시한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 이 무효라는 것을 확인한다 라는 조항을 둘러싸고 발생했다. 일본 측은 이 조항이 일본 국민의 감정을 자극할 우려가 있으므로 필요 없다고 주 장한 반면, 한국 측은 일본 국민이 깨달음을 통해 민주주의로 재출발하 는 선언이 될 수 있다며 옹호했다. 양측은 절충 끝에 이미 효력을 상실 했다 는 표현으로 합의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애초부터 원천적으로 무 효 라는 시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1차 회담은 결국 일본의 대한 청구 권 주장 등에서 양측이 심각한 의견 차이를 드러낸 채 중단되었다. 제2차 회담 1953. 4. 15~1953. 7. 23 은 일본 측의 요구에 따라 개최되었다. 1952년 12월 클라크 Mark W. Clark 유엔군 사령관과 머피 Robert D. Murphy 주 일 미국 대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도쿄로 초청하여 요시다 시게루 吉 田 茂 총리와 회담을 갖도록 주선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이 조선 통치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시다 총리는 군벌이 한 일이라고 답변 하고, 두 나라는 공산주의의 침략에 직면해 있으므로 우호관계에 노력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둘은 제2차 한일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일본이 대한 청구권을 포기하지 않은데다가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선원 이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나 회담은 좀처럼 열리지 못했다. 제2차 회담은 미국의 압력 아래 개최되었다. 한국은 일본의 대한 청구 권 철회를, 일본은 평화선 철폐를 요구했다. 거기에다 재일 한국인의 법 적 지위, 어업, 독도 문제 등을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해 결국 결렬 되었다. ^ 이승만 대통령의 두 번째 일본 방문 1952년 초에 평화선을 선포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듬해 1월 5일 두 번째로 일본을 방문, 요시다 시게루 총리를 만 나서 일본이 양보하면 국교재개에 응할 용의가 있다 는 의사를 밝혔다. 사 진은 오른쪽부터 김용식 주일대표부 대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이승만 대 통령,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다. (동아일보, 1953. 1. 5) 제3차 회담 1953. 10. 6~1953. 10. 21 은 6 25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뒤 개최 되었다. 한국 측은 일본의 대한 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으며, 평화선은 미 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발표한 보존수역과 대륙붕에 관한 선언 1945. 9. 28 과 마찬가지로 국제법상 합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일본 측은 일본의 대한 청구권을 결코 철회할 수 없고, 트루먼선언은 평화선의 선례가 아 니라고 응수했다. 그런데 제3차 회담은 본격적인 토론에 들어가기도 전에 일본 측 수석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 久 保 田 貫 一 郞 가 망언 妄 言 을 함으로써 암초에 부딪혔 다. 그는 대일 강화조약 체결 이전에 수립된 한국 정부는 불법적 존재 22 23

다,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인에게 유익한 점도 많았다, 카이로선언 에서 한국 민족이 노예상태에 놓여 있다고 언급한 것은 전시 히스테리 의 표현이다, 미군정이 일본의 재산을 한국에 넘겨준 것은 국제법 위 반이다, 연합국이 일본 국민을 한국에서 송환한 것도 국제법 위반이 다 등의 발언을 했다. 한국 측은 구보타의 망언 에 맹렬히 항의하고 발언의 진의를 따졌지 만 구보타는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 회담은 결렬되었다. 일본 외무상도 구보타의 발언을 옹호했고 일본의 여당은 물론 야당도 이를 지지했다. 언론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일본 전체가 식민 지 지배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의식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제3차 회담도 무산되었다. 예비회담에서 제3차 회담까지, 한일회담은 일본을 6 25전쟁에 직접 가담시키려는 미국의 압력에 밀려 추진되었다. 그런데 회담에 참가한 한일 양국의 대표는 식민지 지배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드러냄으로 써 실질적인 토의가 힘든 상황을 연출했다. 한국 측은 일본의 식민지 지 배가 불법적인 데다가 한국인에게 막대한 손해와 희생을 강요했으므로 사죄와 배상을 하라고 요구했다. 반면 일본 측은 식민지 지배가 합법적 인 것이었고, 일본인은 한국에서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 했으므로 한반도에 두고 온 일본인의 사유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른바 역청구권.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은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어선과 어민을 나포 했고, 일본은 밀입국한 한국인을 강제수용소에 억류했다. 양국 관계는 날로 악화되었다. 한일회담 역시 장기간 중단상태에 빠졌다. 그 사이에 일본은 오히려 북한과 국교정상화 교섭을 시도했다. 한국은 반공 반 북 의 주의 주장에 입각하여 대일 강경자세를 고수했다. 제4차 회담 1958. 4. 15~1960. 4. 15 은 4년 반의 공백을 거쳐 재개되었다. 일 본의 기시 노부스케 岸 信 介 정부 1957. 2~1960. 6 는 최악의 상태에 빠진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욕을 보였다. 기시 정부는 유엔의 유권해석을 얻 어 일본인의 재산청구권을 포기하고, 미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구보타 발언을 철회했다. 기시 정부는 유권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국에 억류 된 일본 어선과 어민의 석방을 바랐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에 약간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제4차 회담이 열린 다음 날, 106점의 문화재가 한국에 반환되었다. 이 렇게 해서 열린 제4차 회담에서는 일본이 패전 전에 반출한 문화재의 반 환, 한국이 억류한 일본인 어부와 일본이 잡아둔 한국인 밀항자의 상호 석방, 한국이 주장하는 대일 청구권의 법적 근거, 한국이 선포한 평화선 의 합법성 여부 등이 논의되었다. 그전처럼 어업과 청구권 문제를 둘러 싸고 심한 이견이 표출되었다. 1959년 12월 21일 일본 니 가타 항에서 재일동포들을 태우고 있는 제2차 북송선 (동아일보, 2009. 12. 14) 그런데 제4차 회담에서는 새로운 복병이 등장했다. 일본이 한국의 격 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일한국인의 북송 을 추진하고, 오무라수용소 24 25

에 갇혀 있으면서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자를 가석방했기 때문 이다. 이는 이승만 정부의 반일감정을 극도로 자극했다. 한국에서는 재 일동포 의 북송 을 반대하는 반일시위가 전국을 휩쓸었다. 일본과 북한 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일한국인의 북송협정을 체결했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중재 속에서 제4차 회담을 속개하고 양국이 억 류한 상대 국민의 상호 석방을 결정했다. 일본 정부는 외환사정이 궁핍 한 한국을 배려해 한국산 쌀 3만 톤을 수입하기로 하는 등 유화적인 태 도를 보였다. 그런 가운데 1960년 4월 19일 한국에서 학생혁명이 일어 나 곧 이승만 정부가 붕괴되었고 제4차 회담은 중단되었다. 제5차 회담 1960. 10. 25~1961. 5. 15 은 양국의 정부가 교체된 가운데 열렸 다. 한국에서는 민주당의 장면 張 勉 정부가, 일본에서는 자민당의 이케다 하야토 池 田 勇 人 정부 1960. 7~1964. 10 가 등장했다. 장면 정부는 대일관계 개 선을 위해 한일회담에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다. 반면 이케다 정부는 야 당의 반대를 우려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제5차 회담에서는 주로 한국 측이 제시한 청구권 항목, 일본 측이 요 구한 어업 평화선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양측의 의견을 수렴 하지 못한 상황에서 1961년 5월 16일 한국에서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제5차 회담도 중단되었다. (2) 6~7차 회담(1961. 10~1965. 6) 1960년 이후 1년 사이에 한국, 일본, 미국에 새 정부가 들어섰다. 한 일회담을 둘러싸고 갈등과 대립, 중재와 타협을 벌여온 주자 走 者 들이 모 두 바뀐 셈이다. 관련 국가들의 정권교체는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변화를 가져왔고, 이러한 분위기는 한일회담 추진에 유리한 배경이 되 었다. 5 16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빈곤의 나락에 빠진 민 중생활의 향상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그리고 외국 자본을 도입하 여 경제를 발전시키고 자유우방이나 이웃 나라와 외교관계를 강화하겠 다는 방침을 내걸었다. 안전보장의 측면에서 일본을 후방기지로 삼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경제개발과 안전보장을 가장 큰 목표로 내세운 한국의 새 집권 세력 은 일본을 주요 자금원으로 삼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행동으로서 1961년 가을 경제기획원장관을 일본에 특사로 파견하여 청 구권 금액의 윤곽을 탐색했다. 이때 한국은 8억 달러, 일본은 5천만 달 러를 청구권 금액 타결선으로 제시했다.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한편 일본의 이케다 하야토 정부는 미국과 동맹을 맺은 안보체제 속 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국민소득의 증대를 꾀하고 있었다. 고도성장 을 지속하던 일본의 경제계도 해외진출을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 협력을 중시하는 쪽으로 선회하는 한일회담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 었다. 미국 또한 한일회담의 진전을 강력히 희망했다. 케네디John F. Kennedy 정부는 한일 양국의 안전보장과 경제발전이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 을 강조했다. 나아가서 양국에게 회담에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나설 것 을 요구했다. 미국은 일본이 한국과 경제협력을 강화함으로써 공산주의 와 대치하고 있는 한국의 안전보장을 강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결 과적으로 일본의 안전보장과 경제발전에도 도움이 된다는 논리이른바 동아 시아 안보론를 가지고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설득했다. 제6차 회담 1961. 10. 20~1964. 4 은 동아시아 안전보장을 위한 경제협력론 이 우세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미국 방문길에 나선 박정희 의장과 이케 다 총리는 1961년 11월 12일 도쿄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한일회담의 조 26 27

기 타결을 모색했다. 제6차 회담에서는 한국 측이 제시한 해양의 전관수 역 배타적 경제수역 안, 문화재 반환의 항목 등이 논의되었다. 그런데 청구권의 명목과 액수, 평화선, 독도 영유권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이견을 좁 히지 못해 회담은 또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 다만 청구권에 대해서는 배상적 성격이 아니고 경제협력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선에서 합의가 이 루어졌다. 이케다 정부가 청구권 문제를 경제협력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 것은 한국 정부의 의중을 꿰뚫은 것이었다. 이케다 정부는 경제적 곤란과 개 발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의 군사정부에 유상 무상의 일본의 역무 役 務 를 제공함으로써 한국의 청구권 요구를 묵살하고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을 선도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제6차 회담 기간에 이루어진 한국과 일본의 많은 절충은 경제협력 방 식의 구체안을 협의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양국은 청구권자금의 총액과 명목을 일괄 타결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한국 측은 순수변 제 3억 달러에 무상원조 3억 달러 안을 제시했다. 일본은 청구권 명목으 로는 7천만 달러를 넘을 수 없고 청구권, 무상원조, 장기차관을 합치는 방식으로 3억 달러를 내정했다. 박정희 정부는 한일회담을 조기에 타결하기 위해 1962년 10월과 11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金 鍾 泌 이 미국을 왕복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외무대신 오히라 마사요시 大 平 正 芳 와 담판을 짓도록 했다.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과 오히라는 일본 외무성에서 장시간의 담판 끝에 이른바 김종필 오히라 메모 를 작성했다. 이로써 청구권 문제의 해결과 한일 회담의 진전에 돌파구가 마련됐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부록 한일관계 50년 주요 문 서 1을 참조할 것. 일본이 한국에 제공할 금액은 무상원조 3억 달러, 유상원 조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이었다. 그렇지만 이 메모에는 자 금의 명목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명칭에 대해서는 나중에 협의하기로 했지만, 한국은 청구권자금 으로, 일본은 경제협력자금 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긴 셈이다. 1960년대 중반 한일 양국이 한일회담을 조기 타결하는 방향으로 선 회한 배경에는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대응하려는 의지가 작 용했다.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베트남전쟁은 격화되었다. 로스토 Walt W. Rostow 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한 미 일 삼국 정부에게 한일관계를 ^ 1962년 11월 12일 도쿄에서 만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과 오히라 일본 외상 김종필 은 오히라와 만나 무상원조 3억 달러, 유상원조 2억 달러, 민간 차관 1억 달러를 내용으로 하는 청구권자금 규모에 합의하고 메모를 작성했다. (조선일보, 1962. 11. 12) 정상화시킬 것을 촉구했다. 동아시아의 안전보장과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한 일의 교류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리가 더욱 힘을 얻어갔다. 이런 국내외 정세 속에서 한일회담은 제6차부터 논의의 초점에 변화 가 나타났다. 종래에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평가 28 29

하고 처리할 것인가가 논쟁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제6차 회담 이후에는 한국의 청구권 주장과 일본의 경제협력 논리를 절충하는 선에서 타협하 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양국이 명분싸움에서 벗어나 실리추구 쪽으로 회담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한국 내부의 반발과 저 항은 거세고 끈질겼다. 김종필 오히라 메모 이후 한일회담은 한국의 정치변동과 반대운동의 격화로 2년여 동안 정체되었다. 제7차 회담 1964. 12. 3~1965. 6. 22 은 박정희 정부가 야당, 학생, 시민의 치 열한 반대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상황 속에서 개최되었다. 제7차 회 담에서는 주로 기본조약 의 내용을 검토하고 문서를 작성하는 작업을 했다. 한국과 일본의 의견이 충돌한 사안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과거 조약 의 무효 시점이었다. 한국은 1910년 한국강제병합조약 과 그 이전의 협 약이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과거 조약이 일본의 패전 혹은 대한민국의 수립까지는 유효하며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하 나는 한국의 관할권이었다. 한국은 한반도 전역의 유일 합법정부임을 주장했고, 일본은 북한을 고려해 유엔총회 결의에 명시된 범위의 합법 정부라는 표현을 고집했다. 두 가지 쟁점은 양국의 외무장관이 회담을 통해 정치적으로 타결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동원 李 東 元 과 시이나 에쓰사부로 椎 名 悅 三 郞 는 구 舊 조약 무 효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미 무효이다 라는 문구를 삽입하고, 유일 합법 성 문제는 유엔총회 결의 제195(Ⅲ)호에 명시된 바와 같은 한반도에서 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 라는 문구로 의견을 모았다. 한국 정부는 이 미 라는 시점을 구조약을 체결한 때부터로, 일본 정부는 일본의 패전 이 후로 해석했다. 한국의 관할권도 한국 정부는 한반도 전체를, 일본 정부 는 38도선 이남을 상정하고 있었다. ^ 한국 측의 이동원 외무장관과 일본 측 시이나 외상이 참석한 가운데 양국 관련 대표가 한일 기본조약을 가조인하고 있다. (조선일보, 1965. 2. 20) 결국 식민지 지배의 청산을 다룬 기본조약 은 한국과 일본이 식민지 지배 그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하는가에 대해서조차 의견의 일치 를 보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역사인식의 문제는 두고두고 논쟁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화근으로 남았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국제정세의 변화도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재 촉했다.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가담한 미국은 한일 유대가 아시아의 반공전선을 강화하는 데 제일 요건이라 여기고 한국과 일본을 독려 했다. 일본에서는 사토 에이사쿠 佐 藤 榮 作 정부 1964. 11~1972. 6 가 출범하여 한일 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사 에 대한 일본의 태도 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수석대표 다카스기 신이치 高 杉 晉 一 는 일 본은 조선을 좀 더 좋게 만들려고 식민지로 지배했다, 일본의 노력은 30 31

결국 전쟁으로 좌절되었지만 조선을 20년 정도 더 가지고 있었으면 좋 았을 것이다 라고 발언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구보타 망언 보다도 한술 더 뜬 것이다. 4) 한일협정의 체결과 비준 1965년에 들어서서 한국과 일본은 한일협정의 체결을 서둘렀다. 그 일환으로서 일본 정부는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무대신을 한국에 파견했 다. 1965년 2월 17일 김포공항에 내린 시이나는 두 나라의 긴 역사 중 에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며 깊이 반성한다 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불행의 시기와 가해의 주체가 분명하지 않은 미 지근한 사죄와 반성이었지만, 종래의 망언 보다는 훨씬 진전된 역사인 식이었다. 한국의 이동원 외무장관과 일본의 시이나 외무대신은 1965년 2월 20일 서울에서 한일 기본관계조약을 가조인했다. 양측 대표는 그 직후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한일협정의 체결에 임하는 결의를 거듭 다짐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부록 한일관계 50년 주요 문서 2를 참조할 것. 청구권과 경제협력, 6월 22일 일본 도쿄의 총리 관저에서 한일협정 정식 조인 이동원 외무장관이 한국 ^ 1965년 측 대표로 참석했다. (조선일보, 1965. 6. 22) 어업, 재일한인의 법적 지위 등에 관한 협정은 4월 3일 도쿄에서 가조인 되었다. 그리고 6월 22일 양국의 두 전권대표는 일본의 총리 관저에서 자세가 얼마나 바르고 우리의 각오가 얼마나 굳으냐에 달려 있다 는 것 한일협정을 모두 정식 조인했다. 이었다. 국민의 이해와 분발을 촉구한 담화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협정이 조인된 다음 날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한일 양국 정부가 험난한 과정을 거쳐 조인한 한일협정은 국회에서도 그 골자는 어제의 원수라 해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일본 사 아주 변칙적인 방법을 통해 비준되었다. 박정희 정부와 민주공화당은 람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32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 1965년 7월 14일 베트남 파병 동의안과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단독 다. 국교정상화가 앞으로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느냐 불행한 결 으로 국회에 보고 발의했다. 그리고 8월 14일 여당 의원의 찬성만으로 과를 가져오느냐는 우리의 주체의식이 어느 정도 건재하느냐, 우리의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의 통과를 강행했다. 33

강온의 차이는 있었지만 한국과 일본에서 국민의 반대 여론을 무릅쓰 고 체결된 한일협정은 양국이 1965년 12월 18일 비준서를 교환함으로 써 즉시 발효되었다. 5) 한일회담에 대한 저항과 수습 1년여 전 계엄령을 선포하여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던 박정희 정부는 이번에는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진주시켜 비준반대운동을 탄압했다. 대학에는 휴교조치가 내려졌다. 국민에 대한 설득에도 나섰다. 일본 국회도 여당 주도하에 한일조약 비준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일 본 국회는 1965년 11월 6일 중의원 일한특별위원회, 11월 12일 중의원 본회의, 12월 12일 참의원 본회의 순서를 거쳐 무리하게 비준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의 국민을 향한 호소 1965년 6월 23일 박정 희 대통령은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한일협정 조인에 대해 국 민의 이해와 협조를 당부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조선일 보, 1965. 6. 23) (1) 한국의 반대투쟁 한국의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 번 째 단계는 1964년 3월 6일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결성 에서 비상계엄령이 발동되는 6월 3일까지다. 두 번째 단계는 1965년 2월 17일 시이나 외상의 방한에서 위수령 휴교령이 발동되는 9월 초 까지다. 한국과 일본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한일회담은 1963년에 양국의 정치 변화와 맞물리면서 답보상태를 면치 못했다. 박정희 의장은 군을 전역 하여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그리고 1963년 말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는 한일회담의 일괄타결 방침을 굳혔고, 정부 와 여당도 한일회담을 빨리 매듭짓는다는 원칙을 확정했다. 일본에서 새로 출범한 이케다 정부도 한국의 움직임을 환영한다는 뜻을 천명 했다. 1964년 3월, 한일회담이 급속히 진전될 기미를 보이자 야당은 물론 종교 사회 문화단체의 대표와 재야인사 등 2백여 명이 대일굴욕외교 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범투위 를 결성하고 반대투쟁에 나섰다. 이들은 부 산, 목포, 마산, 광주, 대구, 서울 등에서 집회를 열고 한일회담 과정에서 보여준 박정희 정부의 굴욕적 저자세, 일본에 의존적인 태도, 국민참여 를 배제한 정치흥정 등을 비판했다. 34 35

^ 한일회담 반대 집회를 갖고 거리 시위를 하기 위해 교문을 나서고 있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 학 학생들 (조선일보, 1964. 3. 24) 한일회담 반대의 열기는 3월 24일 대학가의 대규모 시위로 폭발했다. 김종필 민주공화당 의장이 도쿄에서 오히라 외상을 만나 한일회담 일정 에 합의한 것이 대학생들의 시위에 불을 붙였다. 서울대학교 문리대에 서는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의 화형 집행식 이 열려, 이케다 총리와 김종필 의장을 상징하는 매국노 이완용 李 完 用 의 상에 불을 질렀다. 대학 생들은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선언문과 성명을 발표하고, 한일회담의 즉 각 중지, 평화선 사수, 국내 매판자본의 타살, 미국의 한일회담 관여 금 지 등을 요구했다. 학생들의 시위는 다른 대학과 고등학교에서도 일어 났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대학가에서 들불처럼 번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학생들의 우국충정은 이해하지만 시위는 외교에 더 이상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시위는 더욱 확산되어 고등학교 학생들로까지 번졌다. 학생 데모는 한일회담 반대뿐만 아니 라 박정희 정부가 구호로 내걸었던 민족적 민주주의 에 대한 비판까지 도 겨냥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김종필을 공화당 의장직에서 물러나 게 하고 한일회담 대표를 직업 외교관으로 교체했다. 학생들은 일단 학 교로 복귀했고 반대운동도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1964년 3월의 한일회담 반대시위는 한일회담의 조기타결 일정을 약 간 지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 한일회담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국 민에게 인식시키고, 박정희 정부 내에 균열을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 했다. 한일회담 반대시위는 4 19 학생혁명 기념일을 거치면서 다시 확산 되는 조짐을 보였다. 5월 19일 대학가에서는 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전 국학생연합회 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한일회담 반대의 차원을 넘어 박정 희 정부의 반민주적 통치, 외세 의존적 태도, 경제적 생존권의 위기 등을 문제로 제기했다. 그리고 박정희 정부가 제시한 민족적 민주주의 가 사 망했음을 알리는 조사 弔 辭 와 선언문을 발표했다. 박정희 정부는 한일회담의 타결 방침을 재확인하고 반대운동을 억압 했다. 이에 일반시민과 종교인, 대학교수 등 사회 각층의 지식인도 야당 과 학생의 반대투쟁에 동참했다. 그들은 한일조약 체결이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저해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국이 정치와 경제 등에서 다시 일본에 종속당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들은 또 박정희 정부가 어업과 대일 청구권 등의 문제에서 일본에게 지나치 게 양보하는 굴욕외교 를 벌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1964년 6월 3일 정점에 이르렀다 6 3항쟁. 서울에 서는 18개 대학에서 약 1만 5천여 명의 학생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들 36 37

은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반성을 촉구했다. 그리고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한일조약을 체결하려는 박정희 대통령의 퇴진을 주장했다. 경찰이 이들 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8백여 명이 부상을 입고, 2백여 명의 학생과 시민 이 구속되거나 연행되었다. 위기에 몰린 박정희 정부는 마침내 계엄령 을 선포하고 군대의 힘을 빌려 시위운동을 제압했다. 주한 미국 대사관 은 이것이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논평했다. 1964년 3월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정부의 굴욕외교와 일본의 침 략정책 등을 비판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6월에 이르면서 그 범위가 5 16 군사정변과 박정희 정부의 모든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되었 다. 그리고 비판의 강도 역시 민생고의 해결, 매판자본 철폐, 학원과 언 론의 자유, 박정희 정부 퇴진 등으로 고양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무력으로 이들을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1965년 1월 9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베트남 파병의 정당성과 한일회담의 연내 타결을 공언했다. 2월 17일 일본의 시이나 외상이 한일조약을 가조인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일부 야당 의원 과 학생들이 그의 숙소 앞에서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벌였지만, 한일조 약은 2월 20일 가조인되었다. 한일조약의 가조인은 대학생들의 반대시위에 다시 불을 붙였다. 1965년 4월 1일 서울에서 대학생들은 학생평화선사수투쟁위원회 를 결성하고 한일조약 가조인 무효와 평화선 사수를 주장했다. 박정희 정 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4월 3일 도쿄에서 어업협정 등의 부속협정 을 가조인했다. 한일회담의 종결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에 맞서 4월 17일 효창운동장에서 4만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한일회담 반대 시 민궐기대회가 열렸다. 한일조약의 정식 조인을 하루 앞둔 1965년 6월 21일 서울에서는 매 국외교 반대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1만여 명의 대학생과 고등 학생이 참가했다. 경찰이 이들의 가두시위를 봉쇄했다. 한국에서 마지 막 날까지 격렬한 반대투쟁이 전개되었음에도, 한일조약은 6월 22일 도 쿄의 총리 관저에서 정식 조인되었다. 한일조약이 조인되자 한국에서는 그 비준을 반대하는 운동이 전개되 었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종교인, 교수, 문인, 예비역 장성, 재야인사 在 野 人 士 등도 비준반대성명을 발표했다. 야당인 민중당 民 衆 黨 의 국회의원들 은 비준반대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의원 사직서를 제출했다.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국회의원들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독으 로 1965년 8월 14일 한일조약의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학생들은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여나갔다. 박정희 정부는 8월 26일 위수 령 衛 戍 令 을 발동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했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발동되었다. 시위를 주도한 학생은 구속되고, 몇몇 교수는 대학에서 추 방되었다. 한국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단순한 반일운동이 아니었다. 그들이 내 건 주의 주장을 보건대 그것은 외세 의존적인 경제개발을 추진하려는 군사정부에 저항하는 한편 자립적 근대화를 지향하는 자주민주운동이 었다. 또 군사정부의 반민주적 통치와 반민족적 행태, 일본 정부의 식민 주의적 역사인식과 고압적 자세, 한국과 일본을 동아시아의 반공 보루 로 결합시키려는 미국의 압박 등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민족계몽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주의 주장에는 사실 인 식과 정세 판단 등에서 오류와 편견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일본의 식 민지에서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과거의 지 배 피지배 관계를 똑바로 청산하고 평등하고 당당한 한일관계를 새롭 38 39

게 구축하라고 요구한 것은 타당한 주장이었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그 후에 전개되는 학생운동이나 반일운동의 길잡이가 되었다. 나아가 정부와 국민에게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 지 않도록 경종을 울림으로써 한일협정의 결함을 보완하고 실리적 효 과를 거두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주도한 학생 중에는 나중에 여야의 정치인이 되거나 학계와 언론계의 중진이 된 경 우도 많았다. 그들은 한일관계에 대한 여론 형성 등에 적지 않은 영향 을 미쳤다. (2) 일본의 반대운동 일본에서는 1950년대부터 미국과 일본의 편면강화 片 面 講 和 를 비판하 고 소련 중국 등 모든 교전국과 전면강화 全 面 講 和 를 요구하는 운동이 일 어났다. 1954년 미국의 비키니 섬 수소폭탄 실험으로 일본 어선이 피 폭된 사건을 계기로 핵무기 철폐를 주장하는 운동도 전개되었다. 특히 1960년에는 일본과 미국의 군사관계를 더욱 강화한 신안보조약이 체결 되어 이에 반대하는 반정부운동 안보투쟁 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일본에서의 한일조약 반대운동은 위와 같은 평화 민주주의운동의 흐름을 계승한 것이었다. 한일회담 반대운동 세력은 미국 일본 한국 이 연계되는 군사협력체제가 형성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또 일 본의 독점자본이 한국에 진출함으로써 일본에 저임금구조가 고정화되 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때마침 베트남전쟁이 확대되고 중 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여, 동아시아에서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한 미 일의 협력이 긴급하다는 여론이 조성되고 있었다. 또 한 일 양국에서는 반공을 중시하는 정계와 재계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한 일협정을 급속히 체결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일본의 야당과 진보세 ^ 일본에서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시위대(경향신문, 1965. 10. 5) 력은 이에 맞서 한일협정체결 반대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추궁 이나 한국인의 희생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과제로 삼지 않았다. 일본의 독점자본이 한국에 진출함으로써 한일 사이에 불평등한 경제관계가 형 성된다는 점을 비판하지도 않았다. 일본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평화헌 법에 입각하여 일본의 재무장, 베트남전쟁 참가, 동아시아 군사동맹 참 여 등을 반대하는 안보투쟁의 연장선에서 부수적으로 전개되었을 뿐이 었다. 재일한국인을 중심으로 한 소수 단체만이 식민지 지배 유산의 청 산과 전후처리라는 관점에서 조약 체결을 반대했다. 40 41

1960년대에 들어서 일본에서는 오히려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찬성 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한국은 일본과 같은 자유진영이고, 박정 희 정부는 합법정부이며, 남북통일을 방해하는 것은 공산주의 진영이 고, 북한이 오히려 소련 중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다고 반박했다. 나 아가, 그들은 한국과 경제 등에서 협력하는 것이 공산주의로부터 일본 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들 역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 와 배상 등은 전혀 시야에 넣고 있지 않았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은 한일회담의 찬성 또는 반대에서 자국의 처지와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서로 다른 시각과 태도를 보였다. 그러니 역사인식과 현실 대응에서 두 나라가 대립과 반목을 되풀이한 것은 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3) 북한의 반대 주장 북한 정부는 1950년대 초 예비회담이 시작될 무렵부터 일관되게 한 일회담을 반대해왔다. 특히 한일협정의 체결에 즈음해서는, 식민지 지 배의 또 다른 피해당사자인 북한을 도외시한 채 남한이 한반도를 대표 하여 일본과 조약을 체결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 구 조선인 전 체가 공유해야 할 배상 등의 문제를 남한 정부가 단독으로 처리할 수 없 다는 견해를 밝혔다. 배상의 명목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보상을 의 미하는 청구권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경제협력의 방식으로 변질시켜 일본의 책임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북한 정부는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되자 이의 무효 를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조선 인민은 일본 정부에 대해 서 배상청구권을 비롯한 제반의 권리를 계속 보유하고, 금후 언제라도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다 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는 곧 북한도 경우에 따라 일본과 수교회담을 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북한은 그 후 몇 차례 일본과 수교교섭을 벌였다. 그 도달점이 바로 2002년 9월 김정일 金 正 日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 泉 純 一 郞 총리가 함께 발표한 일조평양선언 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부록 한일관계 50년 주요 문서 18을 참조할 것. (4) 미국의 찬성 표명 북한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당연히 한일협정의 비준을 환영했다. 러 스크 Dean Rusk 국무장관은 한국과 일본이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은 대단 히 좋은 일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동아시아에 서 손을 잡고 반공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미국 은 세계의 냉전체제 속에서 동아시아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 일본에 대해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묻는 것을 엉뚱한 짓으 로 받아들이는 경향조차 있었다. 그런데 한일협정에서 보듯이,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침략과 지 배 등에 대한 사죄와 배상 등의 역사 문제를 소홀히 처리함으로써 두고 두고 골머리를 썩게 되었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 은 국교를 재개한 뒤에도 역사 문제를 둘러싸고 수시로 반목과 대립을 되풀이했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에 대해 상반된 주장을 굽히 지 않음으로써 정상회담조차 열지 못할 정도로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국교정상화 50년을 맞았다. 이것은 한 미 일 삼각협조의 한 축을 불 안정하고 허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한일 간의 역사 문제를 애매모호하게 처리하도록 방조한 업보가 끈질기게 미국을 괴롭히고 있는 셈이다. 42 43

한일회담 한일협정, 그 후의 한일관계 1) 한일협정의 의미 03 한일협정의 내용과 평가 한일협정은 1965년 6월 22일에 조인되고 그해 12월 18일부터 효력 을 발생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기본조약, 7개조, 전 문은 부록 한일관계 50년 주요 문서 3을 참조할 것과 이에 부속하는 4개의 협정 및 25개 의 부속문서를 모두 일컫는다. 한국 정부의 수석전권대표 이동원 외무 부장관과 일본국 정부의 수석전권대표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무대신, 그 리고 양국의 수행대표들이 각각 조인했다. 기본조약 의 부속협정으로 는 대한민국과 일본국 사이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 청구권협정, 4개조, 전문은 부록 한일관계 50년 주요 문서 4를 참조할 것, 대 한민국과 일본국 사이의 일본국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 지위 와 대우에 관한 협정 법적지위협정, 6개조, 전문은 부록 한일관계 50년 주요 문서 5를 참조할 것, 대한민국과 일본국 사이의 어업에 관한 협정 어업협정, 10개조, 전문은 부록 한 일관계 50년 주요 문서 6을 참조할 것, 대한민국과 일본국 사이의 문화재 및 문화협 력에 관한 협정 문화재협정, 4개조, 전문은 부록 한일관계 50년 주요 문서 7을 참조할 것 등이 있다. 한국과 일본은 한일협정 체결 이후 국교를 재개하고 오늘날까지 정 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면에서 아주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그렇지만 양국은 지금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보상, 한 국강제병합 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평가, 독도 영유권 등의 과거사 처리 를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 한일회담과 한일 협정에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과거사 문제를 애매하게 처리한 사정도 있기 때문에, 한일관계는 아직 역사의 늪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렇지만 국교정상화 이후 한국과 일본은 한일협정의 일부를 개정하 44 45

고 보완하는 길을 걸어왔다. 양국이 이런 태도를 취한 데는 정부 차원의 친밀한 소통과 협력, 국민 차원의 활발한 교류와 연대 등이 큰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리하여 일본의 역사인식이나 과거사 처리는 불충분하게나 마 개선되고 보완된 측면도 있었다. 이런 경위까지 시야에 넣고 한일협 정을 바라봐야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 한일협정의 내용과 한계 (1) 기본조약 한일협정의 실체인 기본조약 과 그에 부속하는 4개 협정은 지난 50여 년 동안 일부 개정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원래대로 존치되어 오늘 날까지도 한일관계의 기본 틀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 한일관계 의 구조와 성격을 파악하는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의 취지와 내용을 정 확히 알아야 한다. 한일 양국 정부는 당연히 각 협정의 조항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논쟁 했다. 그 경위를 아울러 살펴보면 한일관계의 설정에 임하는 두 정부의 역사인식과 외교전략을 이해할 수 있다. 좀 번잡하기는 하지만 한일협정의 주요 내용과 논점을 차례차례 살펴 보자. 기본조약은 전문 前 文 과 7개조로 구성되었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 다. 전문 全 文 을 알고 싶은 독자는 부록 한일협정 50년 주요 문서 3을 참 조하기 바란다. (제1조) 양국은 외교 및 영사관계를 수립하고, 대사급 외교사절을 지 체 없이 교환하며, 합의된 장소에 영사관을 설치한다.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사이 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약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제3조)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연합 총회의 결의 제195호(Ⅲ)에 명시 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 (제4조) 양국은 상호관계와 상호이익을 증진함에 있어서 국제연합헌 장의 원칙을 지침으로 삼는다. (제5조) 양국은 무역 해운 기타 통상의 관계를 안정되고 우호적인 기초 위에 두기 위해 조약 또는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교섭을 조속히 시작한다. (제6조) 양국은 민간항공운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조속히 교섭을 시작한다. 한일 국교정상화는 당연히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청산하 고 새롭게 국교를 맺음으로써 우호친선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었다. 이 를 위해서는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죄와 반성을 표명하 고 배상하는 것이 필요했다. 곧 한국병합조약 이 강압과 불법으로 체결 되었기 때문에 식민지 지배도 부당하고 무효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의 논리였고, 일본은 시종일관 始 終 一 貫 한국병합조약 과 식민지 지배가 합법이고 유효하다는 논리를 고수했다. 심지어는 한국병합조약 이 합의 체결되었고, 식민지 지배가 한국의 발 전에 기여했다는 주장도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렸다. 양국은 국교정상화를 실현하 기 위해서 자국의 주장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 었다. 한국 측이 기본조약에서 논란의 초점으로 삼은 것은 구조약의 무효 46 47

확인 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과 일본의 인식은 큰 차이를 보였다. 그 결 과 기본조약에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약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제2조 는 조 항이 설정되었다. 이 조항의 문구를 한국에서는 과거의 조약들이 체결 당시부터 불법이고 무효였다고 해석했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체결 당 시에는 합법이고 유효였으나 국교정상화 시점에서는 이미 무효가 되 었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조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양국은 왜 이렇게 차이를 보인 것일까? 한국 은 한국강제병합 이 협박과 기만에 따라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강제점령 이었다고 인식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 해 국제법상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의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에 대 해 일본은 한국병합 이 대한제국의 동의 아래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이 루어졌다고 보고, 그 후의 한국 통치는 강제점령에 따른 식민지 지배와 는 성격이 다르다는 견해를 고수했다. 양국은 결국 언제부터 라는 시점은 서로 편의에 따라 해석하는 대신, 여하튼 무효라는 점을 공지 共 知 하는 선에서 타협하고, 이미 라는 용어를 채용했다. 구조약 의 무효 시점을 둘러싼 논쟁은 일본의 한국 지배의 합 법성 또는 불법성과 결부된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도 양국 정부는 서 로 편의에 따라 해석할 여지를 남겨둔 채 서둘러 타결했던 것이다. 기본조약의 체결로써 한국강제병합조약 과 식민지 지배를 둘러싼 합 법 불법, 유효 무효 논쟁은 일단 봉합되었다. 그렇지만 한국과 일본 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애매한 문구는 그 후에도 역사갈등을 유 발하는 화근 禍 根 으로 남았다. 한국의 대법원이 징용자 문제의 판결에서 식민지 지배를 불법 무효라고 밝힌 데 2012. 5. 24 대해, 일본 정부가 그것 은 어디까지나 한국 측 주장일 뿐 일본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라는 반응을 보인 것인 단적인 예다. 국교정상화가 식민지 지배를 청산하는 것이라면, 그 전제로서 일본이 사죄와 반성을 표명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렇지만 기본조약에는 사죄와 반성은커녕 식민지 지배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겨우 시이나 에쓰사부 로 외상이 기본조약을 가서명 假 署 名 하기 위해 서울에 도착하여, 양국 간 의 오랜 역사 중에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 서 깊이 반성하는 바입니다 라는 성명을 읽은 것이 전부였다 1965. 2. 17. 가서명 직후 양국 외무장관은 회담을 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문서에는 이동원 장관이 과거 어떤 기간에 걸쳐 양국 간에 불행한 관계 에서 연유하는 한국 국민의 대일 감정을 설명 하고, 시이나 외상이 이 장관의 설명에 유념하고 그와 같은 과거 관계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 명하였으며 깊이 반성하는 바 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965. 2. 20. 전문 은 부록 한일관계 50년 주요 문서 2를 참조할 것. 일본이 애매모호하게나마 한국의 식 민지 지배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첫 번째 공식 문건이라고 볼 수 있다. 기본조약의 근본적인 한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지배를 명 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본의 반성과 사죄도 반영되지 않았 다. 물론 한국 측은 한일회담이 개시될 때부터 일본의 책임을 추궁하고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대해 완강히 반발하고 오 히려 식민지 지배를 옹호하는 언동을 보이기조차 했다. 더군다나 한일 회담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틀 속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들이 복잡하게 얽혀 한국 측의 주장은 점점 무뎌졌고, 기본조약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되었다. 기본조약에서 또 하나 문제가 된 것은 제3조의 유일한 합법정부 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것이었다. 한국은 당연히 대한민국의 주권이 한반 도의 모든 지역에 미친다는 것을 일본이 인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 48 49

면에 일본은 유엔의 결의가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대한민국의 합법성을 인정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관할권이 남한에만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과 일본은 결국 국제연합총회의 제195호(Ⅲ)에 명시된 바와 같 이 라는 구절을 삽입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로써 한국과 일본은 종래 의 자기 주장을 되풀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그렇지만 일본 측의 의 도가 좀 더 관철된 것으로 해석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이후 일본은 기회 가 있을 때마다 북한과 수교협상을 시도했다. 반면에 한국 정부는 이 조 항을 근거로 일본의 대북 접근을 견제했다. 일본 정부는 짐짓 한국 정부를 배려하는 듯하면서도, 이 조항을 활용하여 대북 접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1991년 9월 18일 남북한은 제46차 유엔총회에서 각각 별개의 의석을 가진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그리하여 국제사회에서 남북한이 한 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주장하는 논쟁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2) 청구권협정 청구권협정은 한일회담 당초부터 논란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까지도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는 사안이다. 또 한일 사이에 여전히 외교 현안으로 떠올라 있는 무거운 과제이기도 하다. 청구권협정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전문은 부록 한일관계 50년 주요 문서 4를 참조하기 바란다. (제1조) 일본은 한국에 10년에 걸쳐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2억 달러에 상당하는 일본국의 생산물과 일본인의 용역을 제공한다. (제2조) 양국과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 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 한국은 대일청구권을 개별 단위로 집계하여 총액을 계산하는 방식 대 신 총액을 요구하는 방식을 택했다. 일본은 처음에 전자를 주장했으나 나중에는 후자에 동의했다. 양국이 최종 합의한 금액은 무상 無 償 3억 달 러, 유상 정부차관 2억 달러였다 제1조. 그리고 양국과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 을 확인했다 제2조. 그런데 제1조의 자금제공과 제2조의 청구권 문제 해결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정부는 무상 3억 달러는 경제협력일 뿐 청구권변제와는 상관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한국과 일본이 청구권자 금의 성격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대상과 범위를 분명하게 합의하지 못한 것은 나중에 과거사 처리를 둘러싸고 분쟁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 었다. 한국과 일본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정반대의 태도를 취했으니, 이에 대한 배상에 대해서도 의견이 맞을 까닭이 없었다. 치열한 논쟁 끝에 양 국은 두 나라가 하나였던 상태에서 둘로 분리된 데 따른 재정적 민사 적 채권채무관계를 청산하는 방향으로 타협했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 약의 틀 제4조 a항 도 그러했다. 그리하여 이 협정은 이름에서도 청구권과 경제협력이라는 두 가지 뜻을 담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청구권, 일본에 서는 경제협력으로 해석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국교정상화 교섭에 관한 외교문서를 공개하면서, 공식적 으로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에 버려둔 한국인, 재한 원자폭탄 피폭자 등 의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혔다 2005. 8. 26. 이에 따라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이 제기한 소 송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대해 청구권협정 제3조 에 따라 해결하려 는 구체적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피해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헌법위 50 51

반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2011. 8. 30.. 그렇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주장이나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구 애받지 않고, 제2조에 따라 청구권에 관한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 으로 해결되었다는 자세를 굽히지 않고 있다. 이런 경위 속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안으로 다시 부상 하였다. 한일 간의 청구권 논의는 연합국과 일본 간의 전후처리 협상인 샌프 란시스코강화조약에 의거하여 진행되었다. 곧 미국의 대일 강화 방침인 배상요구 포기 정책의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이를 방패삼아 한국에 법 적 근거에 입각한 청구권 문제의 제기를 요구하고 경제협력 방식의 채 택을 유도했다. 미국 주도의 전후 국제질서 속에서 경제 개발 자금을 마 련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던 한국 정부는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 에 없었다. 청구권협정에서 불거진 문제는 민간 차원의 보상 문제였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리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 등의 문제는 한일 양국의 협정으로 처리하게 되었다.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와 벌인 청구권 협상은 민간의 재산권 협상을 대행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국가보상의 방법을 채택하도록 압박함으로 써 청구권자금을 국가가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한국 정부는 국내 에서 개인보상의 액수를 줄이고 시기를 늦추며 청구권자금을 경제개발 에 집중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개인보상은 1974년에 관련법을 만들어 불충분하게나마 시행했다. 이로써 개인의 청구권과 재산권이 국익에 종 속된 형태로 처리된 셈이다. 청구권협정에서는 청구권 과 경제협력 을 병기함으로써 일본이 한국 ^ 김포공항에 도착한 일본 경제시찰단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 곧 한일 경제협력의 단초를 열 었다. (경향신문, 1965. 11. 12) 에 제공한 자금을 양국의 주장에 맞춰 해석할 빌미를 제공했다. 일본에 서는 이 자금을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협력금 으로, 한국에서는 배상 금 혹은 보상금 으로 부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름은 사안의 본질을 규정한다. 일본은 청구권협정으로 보상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본 정부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없었기 때문에 한일회담 초기부터 이런 주 장을 고수해왔다. 한국은 이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지만, 회담을 타결 하기 위해 일본 측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같 은 자금에 대해 한일 양국이 서로 다른 해석과 이름을 붙임으로써 갈등 과 불신을 지속하게 만드는 불씨가 되었다. 최근 한국 대법원은 청구권협정에 대해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한국 정부의 입장과도 다른 판결을 내렸다 2012. 5. 24..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52 53

자체가 불법이고,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살아 있다고 판시한 것이 다. 이는 청구권협정 체제의 본질을 묻는 판결로서, 앞으로 한일 양국 정 부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3) 법적 지위협정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 문제는 패전과 해방 이후 일본과 한국이 당 면한 여러 난제 중에서도 매우 복잡한 사안이었다. 역사, 인권, 외교, 국 내외 법규, 재산, 정치, 감정 등이 깊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법적 지 위협정 의 골자는 아래와 같다. 전문은 부록 한일관계 50년 주요 문서 5를 참조하기 바란다. (제1조 1항) 일본국 정부는 1945년 8월 15일 이전부터 계속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자와 그의 직계비속으로서 1945년 8월 16일 이후 본 협정 발효부터 5년 이내에 일본국에서 출생하여 계속 일본국에 거주 하는 자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본 협정의 효력 발생일로부터 5년 이내에 영주허가를 신청하였을 때에는 일본국에서의 영주를 허가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제1조의 규정에 의거하여 일본국에서의 영주 가 허가되어 있는 자의 직계비속으로서 일본국에서 출생한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국에서의 거주에 관해서는 대한민국 정부의 요청이 있으 면 본 협정의 효력 발생일로부터 25년이 경과할 때까지는 협의를 행 함에 동의한다. (제3조) 제1조의 규정에 의거하여 일본국에서 영주가 허가되어 있는 대한민국 국민은 제3조에서 규정한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를 제 외하고는 본 협정의 효력 발생일 이후의 행위에 의하여 일본국으로부 터의 퇴거를 강제당하지 아니한다. (제5조) 제1조의 규정에 의거하여 일본국에서의 영주가 허가되어 있 는 대한민국 국민은 출입국 및 거주를 포함하는 모든 사항에 관하여 본 협정에서 특히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외국인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일본국의 법령의 적용을 받는 것이 확인된다. 1945년 8월 당시 일본에는 약 200만 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1946년까지 그중에서 140만여 명이 귀국하여, 1965년 당시 에는 약 60만 명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일본국적을 상실하고 특수한 외 국인이라는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들에게 합법적인 영주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였다. 한국과 일본은 협정을 통해 해방 이전부터 일본에 거주하던 재일한국 인과 그 자녀에 대해서는 영주권을 부여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협정 영주권을 가진 재일한국인 자녀의 영주권은 1991년 1월까지 별도의 조 처를 강구하기로 했다. 이로써 재일한국인은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 는 최소한의 법적 지위를 확보했다. 그렇지만 지문날인, 취업제한 등의 차별은 엄연하여 생활은 곤란하고 열악했다. 일본에서는 패전 직후부터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 철폐와 법적 지위 확보운동이 광범하고 끈질기게 전개되었다. 법적 지위협정은 그 운동 과정에서 제기된 요구조건을 충분히 수렴하지 못하고 재일한국인의 처 우를 개선하는 데도 특별히 기여하지 못했다. 법적 지위협정은 1991년 1월 10일 개정되었다. 재일한국인 3세 이하 에도 영주권을 부여하고, 종래 논란이 되어왔던 재일한국인에 대한 각 종 차별을 철폐하는 게 골자였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설 명하겠다. 54 55

(4) 어업협정 어업협정은 어민의 생계는 물론 평화선의 철폐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양국에서 매우 주목한 사안이었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전문은 부록 한일관계 50년 주요 문서 6을 참조하기 바란다. (제1조 1항) 양 체약국은 각 체약국이 자국 연안의 기선으로부터 측정 하여 12해리까지의 수역을 자국이 어업에 관하여 배타적 관할권을 행 사하는 수역으로서 설정하는 권리를 가짐을 상호 인정한다. (제4조 1항) 어업에 관한 수역 외측에서의 단속(정선 및 임검을 포함 함) 및 재판관할권은 어선이 속하는 체약국만이 행하며 또 행사한다.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어업문제는 아주 중요한 테마였다. 양국의 산업 구조에서 어업의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협정에서 논란의 초점은 한국 정부가 선포한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선언 1952. 1. 18. 이승만라인 또 는 평화선의 철폐와 어업전관수역 공동규제수역의 범위 등이었다. 어업협정은 한국의 낙후된 어업과 일본의 발달된 어업 실정을 토대로 하여 맺어졌다. 당시 한국은 무동력선에 의한 근해어업이 주류였고, 일 본은 최신장비를 구비한 원양어업으로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업수역의 범위와 조업선박의 단속권을 명시한 조항에는 일본 측에 유 리한 내용이 반영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평화선은 한국의 어업을 보호하고 한일회담 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평화선이 독도를 그 안에 포 함시킴으로써 영유권을 확실히 지키는 데 도움을 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평화선의 철폐는 장비와 기술이 앞선 일본 어민에게 한국 근해의 어장을 내주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또 한국인에게는 영해주권을 상 ^ 한일 어업협정 수역도 실한 듯한 공허감을 안겨주었다. 한국과 일본은 이승만라인을 철폐하는 대신 연안으로부터 12해리의 전관수역, 한국 측 전관수역 바깥쪽에 공동규제수역을 설정하는 데 합 의했다 한일어업협정 수역도 참조. 어선의 단속은 기국주의 旗 國 主 義 를 택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어업능력은 하늘과 땅처럼 컸기 때문에 어업협정 은 일본 측에 유리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정부가 일본에서 도 입한 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 중에서 1억 2천만 달러를 어업 근대화에 투입한 것은 국내의 반대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조처였다.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한국의 어업은 30여 년 만에 일본과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양국은 유엔해양법협약 등을 감안하여 1998년 11월 새로운 어업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부연하겠다. 56 57

(5) 문화재협정 문화재협정은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문화가 국민생활 의 주요영역이 된 최근에 와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문화재협정의 골 자는 아래와 같다. 전문은 부록 한일관계 50년 주요 문서 7을 참조하기 바란다. (제1조) 양국은 양국민 간의 문화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협력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부속서에서 열거한 문화재를 양국 정부 간에 협의되는 절차에 따라 본 협정 발효 후 6개월 이내에 대한민국 정부에 인도한다. (제3조) 양국 정부는 자국의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 및 기타 학술문 화에 관한 시설이 보유하는 문화재에 대하여 상대방 국민에게 연구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편의를 제공한다. 국교정상화 교섭과정에서 문화재와 관련된 문제는 소홀이 다뤄졌다. 문화재협정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곧 일 본 측이 문화재 반출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가져간 문화재를 모 두 반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은 식민지 지배 시기에 일본에 불법으로 반출된 문화재 3천여 점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협상 과정에서 일본 외무성은 문화재 반환 에 좀 더 적극적이었던 반면,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문부성과 문화재 보호위원회는 강력히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문화재협정을 통 해 일본 측이 한국에 인도한 문화재는 미술품 363점, 전적 典 籍 852점 등이었다. 한일관계의 진전에 따라 일본 정부는 2005년 이후 몇 종류의 문화재 를 한국에 반환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설명하겠다. 3) 한일협정에 대한 평가 (1) 긍정적 평가 한일협정은 한국과 일본의 복잡한 국내 사정과 미묘한 국제정세 속에 서 고육지책이 뒤섞인 가운데 체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양국의 의견 을 충분히 조정하지 못한 채 의도적으로 애매한 표현을 구사하여 반대 여론을 무마시킨 조항도 있다. 게다가 한일협정은 사할린 잔류 한인의 귀환, 일본군 위안부 에 대한 사죄와 보상, 원자폭탄 피해 한국인의 치료 와 보상 등의 문제는 제대로 거론하지 않았거나 충분히 협의하지 못한 채 봉합했다는 결함을 안고 있다. 이 문제들은 나중에 한일 양국 사이의 외교현안으로 불거져, 일본 정부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별도의 조처를 취하게 된다. 한편 한일협정이 많은 결함을 안고 있지만 총체적으로 한국에 더 많 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일단 두 가지 성과를 지적할 수 있 다. 하나는 기본조약에서 일본이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로 인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구권협정을 통해 한국에 유입된 일본 자금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다. 먼저 한일협정의 정치적 국제적 효과를 살펴보자. 1970년대 중반까 지 일본에서는 공산당 사회당 등이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좌파 지 식인들의 영향력이 여론을 주도했다. 그들은 대체로 남북한 문제에서 음으로 양으로 북한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분위기는 집권 자 민당 안에도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에 작은 58 59

변화만 생겨도 일본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이나 국교수립을 추진하 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때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해 북한에 접근하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그 논거가 바로 기본조약 에 규정되어 있는 유일한 합법정부 조항이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 의 요청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지라도 대체적으로는 북한 과의 정치적 교류를 자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한국 정부가 기본조약에 의거하여 일본 정부를 견제하지 않았더라면 일본의 대북한 접근은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이 깨져 한국의 안 전보장이 불리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기여다. 청구권협정에 따라 1966~1975년 까지 일본에서 5억 달러에 해당하는 물품과 용역이 유입되었다. 이 자금 은 농림업, 수산업, 광공업, 과학기술, 인프라스트럭처 등 광범위한 분 야에서 사용되었다. 각 부문의 사업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추동하는 데 적지 않은 기반이 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 이 자금에 의한 고정자본 형 성 기여도는 제조업 3.9%, 건설업 3.8%, 농림수산업 3.7%, 전기수도 21%, 운수통신 1.0% 등이었다. 그리고 총자본재 수입 중에서 일본 자 금의 비중은 연평균 3.2%였다. 특히 1966년에는 28.0%, 1967년에는 10.7%에 달했다. 1966~1975년까지 한국의 국민총생산에 대한 일본 자 금의 기여도는 연 1.04~1.61%였다. 청구권자금에 의한 국민총생산 성 장률은 최저 1.11% 1970 에서 최고 1.73% 1975 까지 이르렀다. 단기적 경상 수지 개선효과는 연평균 4.3%였으며, 무역수지에 대한 경상수지 개선 효과는 연평균 7.7%였다. 한국 정부는 회담 초기에 변제권 이라는 명목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 한 배상을 요구했다. 변제권 을 고집했으면 일본의 자금 공여는 3억 달 러 이하에서 타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 정부는 막판에 청구권으 로 선회함으로써 6억 달러 이상의 경제 개발 자금을 획득했다. 국내적으 로는 청구권자금이라는 명분도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 정부는 청구권자금을 배상이 아닌 경제 협력 자금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명목을 내세워 국내의 반발 여론을 설득했던 것이다. 청 구권자금은 당시 일본의 외환사정으로 볼 때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그 렇지만 한국의 경제성장으로 일본 상품의 수출이 크게 증가할 것을 감 안하면 일본 정부에게도 큰 부담은 아니었다. 더구나 한국이 자유 진영 의 반공국가로 안정적으로 발전하여 일본의 안보에 방벽 역할을 하기 때문에 더욱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청구권 협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미국 정부도 한 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로 동북아시아에 한 미 일 협력체제가 견고하 게 구축되는 기반이 조성되었다고 환영했다. 따라서 청구권협정은 한 미 일 삼국에게 서로 이익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성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한일협정이 체결될 당시에도 기본조약과 부속협정 등은 많은 한계와 결함을 안고 있었다.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가 아직도 한일의 외교현 안으로 부상해 있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한일협정에서 독도 영유권 문제를 명쾌하게 정리하지 못한 점도 아쉬 움으로 남아 있다. 일본은 한일조약 조인 직전까지 독도 영유권 문제를 거론했다. 그렇지만 한국이 한일협정을 체결 못하는 한이 있어도 독도 영유권은 건드릴 수 없다고 버팀으로써 독도 문제는 일단 논의에서 제 외되었다. 일본이 한국의 반대를 수용한 것은 독도 문제의 현상 유지 곧 한국의 실효적 지배를 묵시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일회담 추진 당시의 국제질서와 국내정세, 특히 한국과 일본의 국 력차이 등을 종합해 감안하면, 한일협정은 한국이 일본의 집요한 공세 60 61

를 막아내면서 나름대로 주장을 관철한 조약이었다. 현대의 독립국가 사이의 외교교섭에서 한쪽의 일방적 승리는 있을 수 없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게 상식이다. 한일협정에서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았는 지, 그리고 손익계산을 했을 경우 어느 쪽에 더 유리했는지는 논자에 따 라 시대의 과제에 따라 서로 다르겠지만, 국교정상화 이후 50년 간 대한 민국의 성취를 감안하면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많았다고 볼 수도 있 을 것이다. (2) 부정적 평가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에 대해서는 논의가 시작된 당시부터 찬성 긍정 과 반대 부정 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리고 양 극단의 견해는 반세기 가 지난 지금까지 해소되지 않은 채 갈등을 재생산하고 있다. 한일협정 의 부정적 효과, 곧 한일 국교정상화의 허물을 지적하는 견해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일협정 발효 이후 양국 정부의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정치적으로는 한국의 군사독재를 강화하고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일 제의 식민지 지배와 연결되는 자민당 정권과 이른바 친일파 세력이 결 합함으로써 한일 유착이 심화되고 민족정기가 흐려졌다. 그리고 한국이 경제개발에 투자할 욕심으로 소액의 청구권자금을 받아내는 데 그쳤다. 한국이 당당하게 많은 배상금을 받아내지 못하고, 민간인 피해자에게 제대로 보상도 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이권이 달려 있는 일본 자본이 한국에 유입됨으로써 부 패의 고리가 형성되었다. 한국 경제는 값싼 임금에 바탕을 둔 노동집약 산업의 성격을 띠고, 일본 독점자본의 재생산구조에 종속되는 형태가 되었다. 국제적으로는 한 미 일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유착을 강화시켜 한반도에서 냉전을 격화시키고 남북통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일본의 전후 처리를 독일의 배상외교와 비교하여 한일협정의 한계를 지적하는 경향도 강하다. 일본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한국에 배상 또는 청구권자금을 지불했지만, 거기에 침략과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 죄의 의미를 담지 않았다. 아시아 저개발국가에 대한 경제협력이나 원 조제공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마저 국가를 대상으로 자금을 제공 하는 방식을 취하고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을 배제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민간인의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 가 드높다. 일본에서 한국인 등이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은 70여 건에 달 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패소로 끝나 법적인 구제의 길이 막혀버렸다. 반면 한국의 대법원은 최근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과 개인청구권의 존재 를 인정하는 판결을 함으로써 2012. 5 민간인 피해보상에 새로운 가능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일협정의 한계를 논의할 때 피할 수 없는 것이 독도 영유권 문제다. 일본은 독도 문제까지 포함하여 조약의 일괄타결을 집요하게 요구했지 만, 한국은 독도 문제를 교섭현안으로 다룰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 일 본은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 에 독도라는 표현을 집어넣자고 주장했 지만 한국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리하여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 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하는 것으로 하고 이에 의하여 해결할 수 없을 경 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에 의하여 해결을 도모 한다 고 합의했다. 독도라는 문구가 빠진 것이다. 한일협정에서 일본 정부가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하지는 않았지 만, 한국 정부가 독도의 분쟁지역화를 집요하게 노린 일본 정부의 공세 를 막아내고 실효적 지배를 용인하게 만든 것은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그 럼에도 최근 독도 영유권 문제는 다시 한일 간의 외교쟁점으로 부상했 62 63

다. 한일협정의 체결과정에서 독도 문제가 어떻게 논의되고 귀결되었는 가를 면밀히 검토하면 해결의 단서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 각한다. 그 밖에 한일협정은 한일 양국에서 흔쾌하게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 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반대운동을 제압했고, 일본에서도 변칙적인 방법으로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한일협 정의 정당성에 상처가 생긴 셈이다. 한편 한일협정은 일본과 북한의 관 계에도 숙제를 남겼다. (3) 구조적 평가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은 찬성 긍정 과 반대 부정 의 논리만으로 재단하기 어 려운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과거사 청산 곧 식민지 관계의 청산은 일본이 한국병합 과 식민지 지배의 불법 적 성격을 인정하고, 한국에 대해 그 책임에 상응하는 배상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에서 일본은 시종일관 그럴 의향 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세계사에서도 그런 사례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한국도 일본이 그렇게 하도록 압박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과거사 청 산은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에서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원인은 동 아시아에서 반공전선을 구축하려는 미국의 대일 유화정책, 일본의 과거 사에 대한 성찰의 부재, 그리고 대일 교섭에 임하는 한국의 열악한 처지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은 애초부터 과거사 청산을 제기할 만 한 구조적 기반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근거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 정부는 과거사 청산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할 능력이 없었다.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상황에서 남북의 민족 간 대립 은 한국 정부로 하여금 반공을 국가수호의 최우선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반공논리는 친일논리와 연결되어 국민의 신뢰 를 얻지 못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둘째, 일본 안에서 한일회담을 추진하는 세력은 애초부터 과거사에 대해 반성할 기색이 전혀 없었다. 과거사를 반성하는 극소수의 세력은 한일회담 자체를 반대했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가 과거사를 반성하는 자세로 한일회담이나 한일협정에 임할 가능성은 기대할 수 없었다. 셋째, 한일회담의 법적 근거인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은 반공논리에 기초하여 일본에게 배상책임을 지지 않도록 했다. 그것도 미국을 중심 으로 한 전쟁 당사자끼리의 논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 에 한일회담이나 한일협정에서 과거사를 청산하는 논의는 진행될 수 없 었다. 결국 한국은 과거사 청산이 불가능한 조건 아래서 한일회담을 추 진한 셈이었다. 따라서 세계의 냉전 구조,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체제, 남북대결의 한반도 정세라는 안팎의 제약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 어떤 정부도 한일 회담과 한일협정에서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관철할 수는 없었을 것이 다. 바꿔 말하면 박정희 정부가 아닌 다른 정부가 한일회담을 추진하고 한일협정을 체결했다 해도 과거사 청산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을 가능 성이 높다. 한일협정은 주권국가끼리 논의하고 합의하여 맺은 조약이기 때문에 결함이 많다고 해서 50년이 지난 시점에 이것을 뒤집고 다시 체결하기 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다만 언제가 북한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하 기 위해 조약을 체결한다면, 한일협정을 교훈으로 삼아 좀 더 확실하게 64 65

한일회담 한일협정, 그 후의 한일관계 과거사를 청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총리가 2002년 9월 공동으 로 발표한 조일평양선언 을 볼 때 우리가 바라는 바대로의 철저한 과거 사 청산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두 정상은 식민지 지배 책임의 처리 를 한일협정과 유사한 방법, 곧 경제협력 방식으로 해나간다고 합의했 다 자세한 내용은 부록 한일관계 50년 주요 문서 18을 참조할 것. 앞으로 일본과 북한이 이 선언에 의거하여 국교정상화를 추진한다면 한일회담과 비슷한 전철을 밟고 한일협정과 유사한 형태로 타결될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매년 5백만여 명의 사람이 왕래하고 1천억 달러 이상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보와 문화의 교류도 이에 못지않게 활발하다. 그럼에도 한국과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 에 대한 보 상, 역사인식의 충돌, 독도 영유권 주장, 어업분쟁, 재일한국인의 참정 권 문제 등을 둘러싼 갈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일 양국 간에 교차되는 이런 명암과 반목은 궁극적으로 과거사 처리의 원점, 곧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한일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또 적절한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한일 양국의 국민이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의 내용과 효과, 그 후의 한일관계의 흐름과 현안 등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 양국 국민은 지난 50년의 한일관계 속에서 교훈과 지혜를 얻 을 수 있기 때문이다. 04 한일관계의 심화와 한일협정의 진화 66

1) 한일관계의 심화 (1) 국교재개와 협력강화 한일협정은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사이에 맺어진 구조약 을 무효화 하고 대한민국과 일본국이 신조약 을 체결함으로써 국교를 새로 수립하 고, 양국 간의 인간 물자 문화 정보 등의 교류를 정상화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구조약 과 신조약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전자가 한국과 일본이 불평등한 처지에서 일본 제국의 한국 지 배를 실현한 침략의 도구였다면, 후자는 두 나라가 대등한 자격으로 식 민지 지배를 정리하고 교류협력의 동반자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 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은 1965년 12월 한일협정이 발효되자마자 각각 서울과 도쿄에 대사관을 개설하고 국교업무를 재개했다. 이후 양국 대사관은 두 나라를 밀접하고 특수하게 연결시키는 창구로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 을 했다. 그리고 양국 엘리트 외교관의 출세코스로서도 각광을 받았다. 한국은 1949년 1월 도쿄에 주일본 한국대표부를 발족한 바 있다. 1965년 12월 이것을 주일본 한국대사관으로 승격한 것이다. 초대 주일 대사로는 김동조 金 東 祚 씨가 부임했다. 그는 한일회담의 한국 측 대표로 활약한 경험이 있었다. 재일한인 기업인 서갑호 徐 甲 虎 씨는 1962년 11월 도쿄의 일급지에 소재한 토지와 건물을 한국 정부에 기증했다. 이곳에 1979년 9월 장엄한 대사관 청사가 신축되고, 40여 년이 지난 2013년 최신 시설로 전면 개축되었다. 한일 국교가 재개될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여서 공관의 설치 등에서 재일한인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일본은 한일협정이 조인된 1965년 6월 주서울 재외사무소를 개설했 ^ 제4차 한일각료회담 폐막 후 공동기자회견을 하는 회담의 주역들(중앙일보, 1970. 7. 23) 다. 그리고 한일협정이 발효됨과 동시에 주한 일본대사관을 발족시켰 다. 초대 주한대사로는 마에다 도시카즈 前 田 利 一 씨가 부임했다. 그는 일 제 강점기에 경성중학을 다녔기 때문에 한국 요인 중에 지인이 많았다. 일본은 종로구 중학동과 운니동에 각각 대사관과 공보문화원 건물을 신 축하고 정치 경제 영사 문화 등의 업무를 추진했다. 한일 양국은 국교를 수립한 뒤 1966년 3월 무역협정, 1967년 5월 항 공협정, 1970년 10월 이중과세 방지협정, 1978년 6월 대륙붕 공동개발 협정 등을 잇달아 체결했다. 그리고 재일한국인 3세 이하 자손의 법적 지위를 규정한 한일 외무장관 합의각서를 교환하고 1991. 1. 10, 신어업협 정을 체결했다 1998. 11. 28. 한일협정의 일부를 시대와 사정의 변화에 맞춰 개정한 것이다. 68 69

한국과 일본은 협력 증진과 현안 해결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1967년 8월 도쿄에서 제1차 한일 정기 각료회의를 개최한 이래 거의 매년 서울 과 도쿄에서 정기적인 회합을 가졌다. 한일 정기 각료회의는 양국 관계 의 부침에 따라 중단되거나 연기된 적이 있지만, 외교 경제 재일한국 인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하면서 1990년 11월까지 15차례 나 지속되었다. 1972년 5월에는 양국 국회의원들의 친목도모를 위해 한일의원간담 회 1975년 7월 한일의원연맹으로 개칭 가 창립됐다. 한일의원연맹은 양국의 주요 의 원을 회원으로 망라하며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 차원의 교류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에서는 국내외 사정으로 인한 현 안이 끊임없이 발생하여 양국 관계는 우여곡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2) 밀사외교와 막후조정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하는 과정이나 그 후의 외교관계에서 비 공식 채널을 통한 막후조정이 큰 역할을 했다. 곧 한일관계의 주요현안 은 겉으로는 공식 외교라인을 통해 결말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권력자 의 위임을 받은 밀사가 물밑교섭을 통해 미리 해결방안을 조정했다. 박 정희 정권 시기가 특히 그러했다. 양국의 관계 요로 要 路 에는 만주군관학 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 조선과 일본의 관계와 재계, 만주국과 관동군 등에서 경력을 쌓은 인사가 많았기 때문에 이심전심으로 의기투합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자민당의 실력자이자 부총재인 오노 반보쿠 大 野 伴 睦 (1890~1964) 는 1963 년 12월 28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일본 정부 경축사절단 대표로 참 석했다. 그는 서울에 오기 직전 나와 박정희 씨는 부자지간과 같은 사 이로, 그의 대통령 취임식에 가는 것은 자식의 축하연에 가는 것처럼 기 쁜 일 이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는데, 자신과 박정희가 의리와 인정으로 끈끈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잘 표현한 발언이었다. 오노는 축하인사를 마친 뒤 박정희에게 한일협상에서 막후교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대통령이 확실히 신임하는 사람, 대통령의 의중을 잘 아는 사람, 통역 없이 충분히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 을 활용하라고 조언했다. 그 후 자신은 자민당 안팎에서 한일회담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오노가 한일협상의 막후 주역이 되는 데는 김종필의 육사 동기생인 정보장교 최영택 崔 榮 澤 과 고다마 요시오 兒 玉 譽 士 夫 의 비공식 채널이 작용했 다. 5 16쿠데타의 주역 중 한 명인 최영택은 먼저 야쓰기 가즈오 矢 次 一 夫 와 접촉했다. 야쓰기는 일본 정계에서 쇼와 최대의 괴물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막후 실력자였다. 그는 기시 노부스케 정부 때 수상의 개인특사 자격으로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기시-야 쓰기 라인은 당시 자민당의 차기 수상으로 거론되던 실력자이자 농림장 관 고노 이치로 河 野 一 郞 라인의 견제를 받았다. 최영택은 한일회담을 타결하기 위해서는 자민당의 양대 실력자인 오 노와 고노를 만나야 하는데, 고다마 요시오가 중개자 역할을 할 수 있 다고 판단했다. 고다마는 오노의 수하로서 일본 극우 세력의 최대 두목 이었다. 그는 경성상업전문학교 선린상고 를 졸업하고, 31세 때 상하이에서 고다마기관 이라는 군수물자 조달업체이자 사설 정보기관을 운영했다. 그는 1955년 자민당이 창당할 때 거액의 자금을 기부했다. 최영택은 1962년 3월 고다마의 도움을 받아 오노 부총재와 고노 농 림장관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고다마의 중개로 김종필은 1962년 10월 도쿄에서 오노를 만났다. 둘은 한일회담의 막후교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김종필은 한 달 뒤인 11월 12일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장관을 만나 한일회담의 타결 방향과 대일 청구권자금의 규모를 합의했다. 70 71

1964년 오노가 심근경색으로 타계하자 고노의 입지는 더욱 강해졌 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정일권 丁 一 權 국무총리와 밀약을 맺었다는 설도 있다. 이에 따르면, 1965년 1월, 당시 건설장관이던 고노는 자필로 쓴 독도 밀약 초안을 비서인 우노 소스케 宇 野 宗 佑 (1989년에 일본 총리로 취임) 자 민당 의원을 통해 서울의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보냈다. 우노 의원은 성 북동 범양상선 박건석 朴 健 碩 회장 집에서 정일권 총리를 만나 밀약을 맺 었다. 이 밀약은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얻었고, 우노는 이를 고노에게 보고했다. 독도 밀약 의 골자는 양국 모두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 하고 동시에 그것에 반론하는 데 이론이 없다, 장래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쌍방 모두 독도를 자국령으로 선을 긋고 중복된 부분은 공동수역 으로 한다, 한국은 현상을 유지하고 경비원의 증강과 시설의 신설 증 설을 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이후에도 계승해나간다 등이었다고 한다. 곧 외교에서 타협하기 어려운 문제를 타결할 때 활용하는 미해결의 해 결 을 채택한 셈이다. 독도 밀약 의 아이디어는 김종락이 냈다고 전해진다. 김종락은 당시 한일은행 전무이사였고, 5 16 주체 세력의 일원이었다. 그는 김종필의 형으로서 일본통이었고, 박정희의 신뢰가 두터웠다. 김종필이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6 3항쟁 의 책임을 지고 공화당 의장을 사퇴한 뒤 자의 반 타의 반의 외유에 나선 시점에서 김종락은 한일회담의 막후무대에 등장했다. 그런데 한일협정의 체결 과정에서 길잡이 역할을 했던 김종필 전 중 앙정보부장은 최근 독도 밀약 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곧 고노 이치로가 독도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니 그냥 놔둘 수밖에 없다 고 말한 것을 정일권 국무총리가 듣고 와서 전한 가운데 부풀려진 이야 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김종락 씨는 그런 일을 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 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2015. 5. 4. 따라서 독도 밀약 의 존재 또는 진위 여부는 현재로서는 확언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항간에 이런 소문이 떠도는 것 자 체만으로도 한일 간의 주요현안이 비공식 채널을 통해 조정되고 합의되 었다는 정황을 확인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1960년대 초부터 형성된 한일의 비공식 인맥은 양국의 협력과 공조 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정책결정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전문가 네트 워크로 기능했다. 그들은 과거사 청산이라는 역사적 명분에 집착하지 않고 청구권자금과 독도 영유권 등의 현안에 실용적 접근을 모색하여 한일협정과 그 이후의 한일관계 곧 65년체제 를 만들어냈다. 그들의 활 동은 정부와 국회의 견제를 받지 않고 때로는 국민을 속이기까지 했다. 막후에서 진행된 밀사외교는 최고 정책결정자의 의중과 이익을 우선하 고 국가의 존엄과 이익을 경시한 경우도 있었다. 그들의 합의는 국민적 동의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공개되면 오히려 양국 사이에 오해와 갈등 을 야기하곤 했다. 박정희 정부가 끝나고 전두환 全 斗 煥 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한일의 비공 식 라인은 한동안 지속됐다. 1980년대에는 이병철 李 秉 喆 권익현 權 翊 鉉 세지마 류조 瀨 島 龍 三 (1911~2007) 등이 활약했다. 세지마는 1960년대 박정 희 정부에 대해서는 수출주도형 종합상사 체제의 구축 을 조언했다. 전 두환 정부에 대해서는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민심수습 차원에서 올림픽 개최 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노태우 盧 泰 愚 정부에 대해서는 3당 합 당과 내각제 개헌 이라는 전략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들은 1982년 한일 관계 최대현안이었던 한일안보경협의 타결에도 도움을 주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中 曾 根 康 弘 총리의 방한을 성사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72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