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1. 2. 3. 4. 5. 6. 7. 8. 系統論과 古代諸語의 硏究 夫餘系와 韓系의 諸言語 高句麗語 百濟語 新羅語 中世 韓國語의 成立 韓國語의 系統 夫餘 韓語群의 位置
1. 系統論과 古代諸語의 硏究 1. 系統論과 古代諸語의 硏究 오늘날 이 地球上에서 말해지고 있는 言語는 3,000을 넘는다고 한다. 아득한 옛날부터 최근까지 이 地球上에서 消滅된 言語까지 합하면 이 수는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오늘날 우리 民族이 말하 고 있는 言語 즉 韓國語도 이 많은 言語들 중의 하나다. 그러나 한국어는 그중 큰 言語의 하나다. 자세한 統計는 나와 있지 않으 나 한국어는 스무째 안에 꼽힌다. 특히 東洋에서는 中國語, 日本 語와 함께 三大 文明語를 이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한국어는 매우 오랜 言語의 하나다. 訓民正 音이 創制되어 이 文字로 한국어가 전면적으로 表記된 뒤로만 따 져도 500년이요 그 이전에 불완전하게나마 漢字로 表記된 것을 합하면 1,000년을 훨씬 넘는다. 그러면 한국어는 다른 언어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 물음을 던짐에 있어 우리는 먼저 관계란 말의 槪念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언어와 언어의 관계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 다. 가령 한국어와 英語는 관계가 매우 깊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한국어 속에는 영어 단어들이 상당히 들어와 있다. 이런 단 어를 借用語라고 한다. 한국어와 영어는 하나는 借用語의 受容者 요 하나는 供給者라는 관계에 있다. 이런 관계도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언어와 언어 사이의 관계 중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 게 여기는 것은 起源的인 관계다. 한 조상에서 갈려 나온 후손들 이 親族을 이루는 것과 비슷한 관계를 언어들 사이에서도 찾고 싶 은 것이다. 이런 言語의 親族關係를 증명하는 방법이 19세기에 유럽에서 - 169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발달되었다. 이것을 比較 方法 (comparative mthod)라 한다. 이 방법은 둘 또는 그 이상의 言語의 音韻 文法 語彙를 體系的 으로 비교함으로써 그들의 先史를 밝히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리하여 印度에서 유럽에 걸친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여러 언어들이 하나의 조상에서 갈려 나왔음을 증명하는 데 성공한 것 이다. 이 조상을 祖語(또는 共通語)라 하고, 한 祖語에서 갈려 나 온 언어들을 親族關係에 있다. 또는 系統이 같다고 한다. 그리 고 親族關係에 있는 즉 同系의 언어들은 하나의 語族을 이룬다고 한다. 위에서 地球上에는 3,000이 넘는 언어가 있다고 했는데 언어학 자들은 이들의 親族關係를 밝혀 語族으로 묶어 보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리하여 인도 유럽 語族, 세미트語族, 하미트語族, 우랄語 族 등이 확립되었고 그밖에 아세아, 아프리카, 大洋洲, 아메리카에 있는 여러 言語들에 대해서도 많은 假說들이 세워져있다. 토이기 諸語, 몽고諸語, 퉁구스諸語를 포괄하는 알타이 語族의 假說도 이 중의 하나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논하려 한다.) 한국어는 불행히도 그 계통이 쉽게 證明되는 그런 언어가 아니 었다. 이 지구상에 한국어의 분명한 친척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 다. 지금까지 한국어를 여러 언어와 비교하여 그 親族關係를 밝혀 보려는 노력이 적지 않았으나 아직 최종적인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現段階에서는 한국어는 알타이諸語와 親族關係 에 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假說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이 방면의 연구는 주로 외국 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알타이諸語의 연 구가 이들에 의해서 발전되어 왔고 그중의 몇몇 학자들이 한국어 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한국어에 대한 知識은 극히 제한된 것이었고 특히 그 歷史에 대해서는 정확한 지식이 거 - 170 -
2. 夫餘系와 韓系의 諸言語 의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연구는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 다. 한국어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近年에 큰 발전을 보았으므로 우리나라 학자들이 이 성과를 比較 硏究에 도입하면 앞으로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한국어와 일본어의 친족관계에 대한 假說도 자못 유력하 다. 지금까지의 한국어와 일본어의 比較 硏究를 종합해 보면 일본 어는 한국어 뿐 아니라 알타이 諸語와도 친족관계에 있을 蓋然性 이 큰 것으로 믿어진다. 한국어와 알타이諸語 및 日本語의 比較 硏究에 있어서나 한국 어의 역사적 연구에 있어서 가장 큰 난관을 가져온 것은 우리나라 의 古代諸國의 언어 자료의 거의 완전한 缺乏이다. 古代의 풍부한 언어 자료가 있었더라면 한국어의 歷史와 그 先史를 밝히기가 그 다지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료가 적다고 해서 아무 연구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다. 적은 자료일수록 면밀히 검토 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韓半島의 言語는 單一하므로 古代에도 이러했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先入見에 사로잡히지 말고 냉정하게 事實을 究明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古代의 高句麗 百濟 新羅 세 나라의 언어는 어떠했으며 그 이전에는 또 어떤 언어들이 있었던가, 이들의 相互 關係는 어떠했던가, 이 런 문제들은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 신중하게 연구될 가치가 있는 것이다. 2. 夫餘系와 韓系의 諸言語 古代에 있어서 오늘의 韓半島와 滿洲에 걸친 넓은 지역에는 실 - 171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로 여러 언어들이 말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들 언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아무데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우리 나라 史書인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서는 古代 여러 나라의 언어 에 대한 직접적인 記述을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撰者 들은 언어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언어에 대한 관심이 있 었다면 新羅語의 몇몇 단어에 대해서 新羅 末期의 학자인 金大問 의 語源說을 인용한 것이 가장 현저한 例요 高句麗에 대해서는 中 國 史書로부터 한 두 단어에 대한 설명 을 인용하는 데 그쳤던 것 이다. 韓半島와 滿洲의 古代 諸語에 대해서는 中國 史書인 三國志(3 世紀 晋 陳壽 撰)의 魏志(東夷傳)에 극히 斷片的인 기록이 보일 뿐이다. 이 기록을 통해서 여러 언어들의 分布 狀態와 그들의 상 호 관계를 추측해 볼 수 있다.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 의하면 西曆 紀元을 전후한 시기에 오늘 의 滿洲와 韓半島를 중심으로 한 넓은지역에는 系 ① 肅愼系 ② 夫餘 ③ 韓系의 세 語群이 있었던 것으로 推定된다. 먼저 이들 각 語群에 관한 기록들을 검토하고 그들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 推論 해 보기로 한다. 이에 앞서 먼저 古朝鮮의 言語에 대해서 一言해 둔다. (1) 古朝鮮의 言語 古朝鮮의 言語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다만 檀君神話 에 나오는 몇몇 固有名詞가 전할 뿐이다. 이 이름들의 정확한 해 석은 오늘날 바라기 어렵다. 왜냐하면 한 단어의 정확한 해석을 위해서는 그 音相과 의미가 확실해야 하는데 固有名詞의 경우에 - 172 -
2. 夫餘系와 韓系의 諸言語 는 이 둘을 다 갖춘 예가 드물기 때문이다. 檀君 王儉 阿斯達 등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진 語源說이 있다. 檀君 을 무당의 당굴 (全羅 方言)과 같은 것으로 보고 이 것을 몽고語의 tngri(하늘)와도 대응되는 것이라고 한 것(崔南善 說) 阿斯達 과 朝鮮 을 관련지어 阿斯 를 아침 과 같은 말로 보고 達 을 양달, 응달 의 달 로 보아 阿斯達 을 朝山 朝光의 地 로 해석하는 것(李丙燾 說) 등은 매우 그럴듯하게 이나 생각되기도 하나 그것이 꼭 옳다고 할 確證이 없음이 유감이다.1) 다만 阿斯達 의 達 은 나중에 말할 高句麗語의 한 특징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一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갑자기 말하 기 어렵다. (2) 肅愼系 肅愼系에 대해서는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 다음과 같은 記錄이 보인다. 挹婁는 옛 肅愼國이다. 그 人形은 夫餘와 비슷하나 言 語는 夫餘나 高句麗와 같지 않다. 이 挹婁는 그 뒤 勿吉靺鞨로 계통이 이어지는데, 이들의 언어 는 夫餘系와 다른 특이한 것으로 파악되었음을 본다. 魏書 勿吉傳 과 北史 勿吉傳에 勿吉에 대하여 高句麗의 北쪽에 있다 言語가 獨異하다 라고 한 것도 요컨대 그 언어가 高句麗의 言語와 다름을 말한 것이다. 1) 古代 固有名詞의 語源論이 지니는 問題에 대해서는 李基文 言語 資料로서 본 三國史記, 震檀學報 38號 (1974) 참고 - 173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이 肅愼系의 언어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漢字로 기록 된 그 이름들 뿐이다. 따라서 이들이 오늘날의 어떤 언어의 조상 인지는 밝힐 도리가 없다. 위에 인용한 中國의 몇몇 史書에 이들 에 관한 간단한 기록이 실려 있어 그들의 地理的 位置와 民俗誌的 性格을 참고하여 그 人種的 系統을 밝히려는 노력이 있어 왔으나 지금까지 定說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듯하다. 中國의 歷代史家 들은 肅愼族을 女眞族의 先祖로 보아왔고 현대에 와서 古아세아 族의 선조라는 學說이 주로 日本學者들에 의하여 제기된 바 있다. 前者는 오랜 세월에 걸쳐 中國學者들 사이에 행해진 定說이니 확 실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는 않다고 해도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 유가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에 대하여 後者는 표면적으로는 現代 史學의 세밀한 考證 方法에 의하여 도달된 結論이라고 하나 夫餘系를 오늘의 퉁구스族의 先祖로 보아 그것과 우리 민족의 직 접적 관련성을 否認하려고 한 日本學者들의 일관된 偏見이 그 밑 바닥에 깔려 있으므로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쨌거나 肅愼系의 言語가 夫餘系의 言語와 다르다고 한 三國 志를 비롯한 中國 史書들의 기록은 주목할 만하다. 만약 中國의 傳統的 學說을 쫓아 肅愼을 퉁구스의 어느 先祖로 본다면 이것은 夫餘系가 이미 古代에 있어서 이들과 분명한 차이를 보여 주었다 는 매우 중대한 證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나중에 夫餘系의 한 언어인 高句麗語에 대해서 검토하 면서 그것과 퉁구스諸語를 비교하게 될 것인데, 그 결론을 夫餘系 諸語가 퉁구스語와 親族關係에 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다른 언어 임을 말해 주고 있다. - 174 -
2. 夫餘系와 韓系의 諸言語 (3) 夫餘系 三國志 魏志 東夷傳은 高句麗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 다. 東夷의 舊語에 夫餘의 別種이라고 하였다. 言語와 그밖의 여 러 가지가 많이 夫餘와 같다. 그 性氣와 衣服에는 差異가 있다. 그리고 東沃沮에 대해서는 그 言語가 高句麗와 크게 같으나 때때로 조금 다르다. 라고 했으며 濊에 대해서는 그 늙은이들이 예로부터 이르기를 高句麗와 같은 종족이라 고 하였다. 言語와 法俗이 대저 高句麗와 같으나 衣服에는 다름이 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은 後漢書 東夷傳 등에서도 발견된다. 이 기록 은 夫餘 高句麗 沃沮 濊의 언어가 서로 비슷했음을 말해 주며 이들을 하나의 語群으로 묶는 것을 正當化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 다. 그 중에서도 家畜의 이름을 붙인 馬加牛加猪加狗加 등 官名의 加 가 주목된다. 이것은 高句麗語의 皆, 新羅語의 翰干 등과 일치하는 것으로 본래는 部族長을 의미했으며 뒤에 夫餘의 言語 資料로는 그 人名 地名 官名 등이 다소 전한다. 는 王 또는 大官의 칭호로 되었던 것이다. 蒙古語에 皇帝를 의미 하는 qa8an, qan이 있고 中世에는 qa란 語形도 보이니 이것은 夫 加 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 夫餘語에 관한 기록으로는 高句麗 始祖 東明王의 이름은 朱蒙 인데 이 餘語의 것이 善射를 의미한다는 기록이 여러 책에 보인다. 이에 대응되는 단어는 다른 言語에서 찾기 어렵다. 다만 滿洲語에 mergen(善獵 - 175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人)이란 단어가 있어 蒙 과 좀 비슷한 듯도 하나 확실치 않 다. 夫餘 開國神話에 보이는 解慕漱는 확실히 주목할 만한 이름 으로 과거에 이에 대한 몇 가지 語原說이 제기된 것이 있으나 그 어느 것이 옳은지 조심스런 言語學者로서는 斷定할 수 없는 처지 에 있다. 한편 夫餘의 王名으로 尉仇台位居麻余 등이 기 록에 보이는데 이들의 語源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語源論에서 필요한 것은 音相과 意味인데 이 漢字로 쓰 인 이름들은 그 發音을 보여줄 뿐 그 의미를 전혀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高句麗의 言語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말하겠기에 여기서는 略하기로 하며 沃沮와 濊의 언어에 대해서는 자료라고 전하는 것 이 없으니 더 말할 것이 없다. 다만 後漢書(東夷傳)에 又有北沃 沮 一名置溝婁 라 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三國志(魏志 東夷傳) 의 高句麗傳에 지금도 胡人들은 오히려 이 城을 幘溝宴라고 부른다. 溝漊 란 高句麗語로 城을 의미하는 것이다 라고 한 기록을 연상케 한다. 沃沮의 溝婁 는 필시 高句麗의 溝漊 와 같은 단어인 것으로 믿어진다. (4) 韓系 半島의 南部에는 이른바 三韓이 있었다. 辰韓 馬韓 弁韓의 위 치에 대해서는 史家에 따라 見解를 달리하는 점이 있으나, 이들은 다시 여러 小國으로 나뉘어 있었던 모양이다. 이 小國들이 모두 70餘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三韓 지역에 매우 심한 言語分化 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三韓의 言語에 대해서는 三國志(魏志 東夷傳)과 後漢書에서 간 - 176 -
2. 夫餘系와 韓系의 諸言語 단한 기록을 볼 수 있다. 먼저 辰韓에 대해서 二國志는 다음과 같 이 말하고 있다. 辰韓은 馬韓의 東쪽에 있다. 耆老들이 전하는 말로 스스로 이르기를 옛 亡人들이 秦役을 피하여 韓國에 왔다고 한다. 그 言語는 馬韓과 같지 않다 고 하고 이어 다음과 같은 實例를 들고 있다. 나라를 邦, 활을 弧, 도적을 冠, 行酒를 行觴, 서로 부르기 를 다 徒라 하니 秦人과 비슷한 데가 있다. 辰韓을 秦과 연결한 것은 辰 과 秦 의 同音性에서 연유 한 것이요 邦 등은 韓國語에 대한 우리의 知識으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것으로 이런 단어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中國 語로부터의 借用이 향해졌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辰韓이 樂浪 방 면에서 南下한 流移民으로 형성된 사회였다고 보면 거기에 이런 借用語들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 런 단어 들이 실제로 사용되었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편 弁韓에 대해서 三國志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弁辰은 辰韓과 雜居하며 역시 城郭이 있다. 衣服과 居處가 辰韓과 같고 言語 法俗도 서로 비슷하다. 三國志에 의하면 辰韓과 弁韓의 언어는 비슷하고 馬韓의 言語 는 달랐던 것이 된다. 그런데 後漢書(東夷傳)에는 이와는 달리 弁辰은 辰韓과 雜居한다. 城郭과 衣服이 다 같으나 言語 風 俗에는 다름이 있다 고 하였다. 三國志와 後漢書의 어느 것이 옳은지 지금 갑자기 말 하기 어려우나 三韓의 언어들은 서로 상당한 差異가 있었음을 추 측하게 한다. 三韓 地域에서 말해진 언어들 중에 아주 系統이 다 른 언어가 있었을 可能性도 排除할 수는 없으나 그 대부분은 역시 - 177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가까운 親族關係에 있는 言語들이었을 것이므로 이들을 묶어 韓 系諸語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三韓의 言語 資料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70餘에 달하는 그 國 名이다. 三國志에 실려 있는 이 이름들은 言語學의 觀點에서도 매 우 큰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의 과제 로 남아 있다. 이 地名들에는 특징이 있다. 가령 馬韓의 國名에 卑離 가 자주 보이는데 이것은 後日의 百濟 地名의 夫里 와 일치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 대하여 弁韓의 國名에는 彌 凍 이 붙은 것이 몇 개 보이는데 이것을 물동물둑 (水堤) 라고 보는 說이 있으나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臣智邑 借 등이 있었고 弁辰에는 臣智險側樊濊殺奚邑借 등 한편 三國志에 의하면 馬韓에서는 渠師의 稱號로 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語源에 대해서는 종래 주로 歷史學者들 의 假說이 적지 않았으나 역시 많은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한 자세 한 논의는 너무나 장황하고 또 아직 필자의 확고한 見解가 선 것 도 아니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以上을 종합해 보면, 古朝鮮 이후에 韓半島와 그에 인접한 大陸 에는 북쪽에 夫餘諸語, 남쪽에 韓諸語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러 면 이 兩語群은 어떤 관계에 있었던가. 이것이 하나의 큰 문제로 제기된다. 三國志를 비롯한 中國側 史籍은 위에서 본 것처럼 언어에 상 당한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이 관계에 대해서는 一言半句도 비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은 그 관계가 멀었기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추측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추측에 만족할 수 없다. 아무리 斷片的일지라도 具 體的 인 言語 資料에 의해서 이들의 관계를 밝히도록 노력하지 - 178 -
3. 高句麗語 않으면 안된다. 위에서 본 것처럼 夫餘系나 韓系의 여러 언어는 자료를 거의 남 기지 않았으나 불행중 다행히도 夫餘系의 高句麗語와 韓系에 속 하는 百濟語 新羅語의 자료는 얼마만큼 남아 있어서 이들을 통해 서 위에 말한 관계를 어느 정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3. 高句麗語 古代 三國 중에서 가장 先進이었고 또 强大하였던 高句麗의 言 語는 어떤 것이었던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三國遺事의 撰者는 말할 것도 없고 現代에 와서도 관심을 두고 연구한 학자가 없었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오늘의 韓國語가 單一한 것처럼 高句 麗 新羅 百濟의 언어도 단일한 것이었다는 通念에 지배되어 온 것이다. 그리하여 三國史記 기타의 內外 史籍에 나오는 高句麗 百 濟 新羅의 人名 地名 등을 뒤섞어서 다루어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高句麗 百濟 新羅의 地名 人名 등을 조 심스럽게 따로 구분하여 연구하여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어떤 결론을 얻는 것이 온당한 태도라고 하겠다. 우리 學 問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先入見을 씻어버리는 것이 절대로 요망된다. 이런 觀點에서 高句麗의 言語 資料라고 믿 어지는 것을 따로 가려내어 新羅나 百濟의 그것들과 비교해 보면 매우 흥미 있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2) 高句麗의 言語 資料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三國史記 地理志라 2) 高句麗語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李基文 高句麗의 言語와 그 特徵, 白山學 報 4호 (1963) 참고 - 179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고 할 수 있다. 卷 35와 卷 37에 本高句麗 地名들이 실려 있다. 卷 35에는 本高句麗 地名과 統一新羅(景德王) 改名이 실려 있음 에 대하여 卷 37에는 高句麗의 地名이 그대로 실려 있다. 여기서 兩卷의 例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水城郡 本高句麗 買忽郡 景德王 改名 今水州(卷 35) 買忽 一云 水城(卷 37) ② 重城縣 本高句麗 七重縣 景德王 改名 今積城縣(卷 35) 七重縣 一云 難隱別(卷 37) ①에서 卷 35와 卷 37에 水城 이 보이지만 前者는 景 德王 改名이요 後者는 本高句麗名이다. 그런데 卷 37의 買忽 은 音讀名이요 水城 은 釋讀名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高句 麗에 있어서 水 와 城 의 釋(새김, 訓)은 각각 買 와 忽 의 漢字音과 비슷했던 것이다. 따라서 水城 이라고 쓰거 나 買忽 이라고 쓰거나 읽기는 마찬가지였다. ①에서는 景德王 위의 改名에 있어 高句麗의 釋讀名을 그대로 채택했으나 이때에는 이 미 이것을 釋讀하지 않고 音讀했으니 本質的인 차이가 있었던 것 ②에서는 卷 35의 景德王 改名 重城 은 高句麗의 七重 縣 에서 重 一字를 따서 改名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卷 37에는 七重 과 難隱別 이 並記되어 있으니 前者는 釋讀名 이다. 이요 後者는 音讀名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高句麗의 言語 資料로서 卷 37의 地名 表記야말 로 기본적인 것이요 卷 35는 副次的인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 卷 37에서 同一 地名이 둘 또는 그 이상의 表記를 가졌고 그 중에 音讀 表記와 釋讀 表記가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될 때, 이 들 表記의 對應 關係를 통해서 高句麗 단어들을 再構할 수 있게 된다. - 180 -
3. 高句麗語 ① 買忽 : 水城 ② 難隱別 : 七重 위의 ①에서 買 와 水, 忽 과 城 의 對應關係가 확 인되며 여기서 水 와 城 을 의미한 단어가 각각 買 ( ) 와 忽 (홀) 과 비슷한 발음을 가졌었음을 결론할 수 있다. 이런 對應關係가 비단 이 地名뿐 아니라 여러 다른 지명에서도 확인되므 로 이 두 단어의 再構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②에 서의 두 表記의 對應關係는 다른 지명들에 대해서는 볼 수 없는 것 이어서 결정하는 데 약간의 難點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難 七重 이 音讀名인 것은 그 使用 漢字들로 보아 쉽게 판단되며, (釋讓字와 音讓字는 대체로 정해져 있다) 難 隱 (나는)과 別 (별)이 七 과 重 을 의미한 高句麗 단어 隱別 이 釋讀名이요 였음은 이와 대응되는 단어들이 中世한국어, 퉁구스諸語 및 古代日 本語에서 발견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中世한국어 (重); 퉁구 스 諸語 nadan(七) ; 古代日本語 nana(七), fä(重) 등 참고. 이런 방법으로 三國史記 地埋志에서 얻을 수 있는 高句麗의 단어 는 제법 확실한 것이 50을 조금 넘고 확실하지 않은 것들까지 합하 면 100 가까이 된다. (卷 37 끝에 鴨綠水以北未降十一城, 鴨綠水 以北已降城十一, 鴨綠以北逃城七 등의 이름이 있는데 이들도 高句 麗語 계통의 地名에 틀림없으므로 여기에 포함시킨다.) 이것은 매우 적은 數字이긴 하지만 좁게는 高句麗語, 넓게는 夫餘語群의 現存資 料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니 실로 귀중하기 짝이 없는 것 이다. 여기에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단어들 중에서 40例만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高句麗語의 音韻體系를 알 수가 없으므로 발음을 정 확히 再構하기는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그냥 漢字로만 적기로 한 - 181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다. 편의상 번호를 붙이고 다른 言語들에서 對應됨직한 단어들을 찾아 附記한다. ① 皆(王) : 王逢縣 一云 皆伯. 夫餘 官名의 加, 新羅 官名 의 干翰, 몽고어 qaŏan, qan, qa (帝) ② 加尸(梨) : 梨山城 本加尸達忽. 중세한국어 가래(木枕), 만 주어 halhan, halgan (犁) ③ 甲比(穴) : 穴口郡 一云 甲比古次 ④ 古衣(鵠) : 鵠浦縣 一云 古衣浦. 중세한국어 고해, 고대 일본어 kofu(鵠) ⑤ 居尸(心) : 心岳城 本居尸城 ⑥ 古次, 忽次(口) : 穴口郡 一云 甲比古次, 獐項口縣 一云 古斯 也忽次, 楊口縣 一云 要隱忽次. 濟州島 方言 굴레 (口), 고대 일본어 kuti *kulti(口) ⑦ 古斯(玉): 玉馬縣 本高句麗 古斯縣. 중세한국어 구슬 (玉), 滿洲語 gu(玉) ⑧ 功木(熊): 功木達 一云 熊閃山. 중세한국어 곰 (熊), 고 대일본어 kuma (熊) ⑨ 仇斯(童) : 童子忽縣 一云 仇斯波衣. 고대 일본어 ko (子) ⑩ 斤乙(文): 文峴縣 一云 斤乙波兮. 중세 한국어 글 (文), 만주어 hergen(文) ⑪ 今勿(黑) : 黑壤郡 本高句麗 今勿奴郡. 중세 한국어 검 - (黑) ⑫ 內, 奴, 惱(壤) : 槐壤郡 本高句麗 仍斤內郡, 荒壤郡 本高句麗 骨 衣奴郡, 休壤郡一云 金惱등. 南方퉁구스諸語(滿洲語, 골리語 등) na(地), 신라어 內 (世), 중세한국어 나랗 (國.) ⑬ 難隱(七) : 七重縣 一云 難隱別. 퉁구스諸語 nadan(七), 고 대 일본어 nana (七) - 182 -
3. 高句麗語 ⑭ 乃勿(鉛) : 鉛城 本乃勿忽. 고대 일본어 namari (鉛) ⑮ 內米(池, 長池) : 内米忽 一云 池城 一云 長池, 瀑地郡 本高句 麗 內米忽. 퉁구스諸語 namu-lamu(海), 고대 일본어 nami(波) ⑯ 達(山, 高) : 切木達 一云 熊閃山, 高木根縣 一云 達乙斬, 松 山縣 本高句麗 夫斯達縣, 高城縣 本高句麗 達忽 ⑰ 旦, 谷, 頓(谷) : 於支谷 一云 翼谷, 康谷縣 一云 首乙呑, 水 谷城縣 一云 買且忽, 習比谷 一云 呑. 고대일본어 tani(谷) ⑱ 吐(堤) : 奈吐郡 一云 大堤, 長堤郡 本高句麗 主夫吐郡, 堤 上縣 本高句麗 吐上縣 등 ⑲ 德(十) : 十谷縣 一云 德頓忽. 고대 일본어 töwo(十) ⑳ 買(水, 川) : 買忽 一云 水城, 南川縣 一云 南買, 橫川縣 一 云 於斯買 등. 중세한국어 믈 (水), 몽고어 mören(江), 퉁 구스諸語 mu(水), 고대일본어 midu (水) ㉑ 密(三) : 三峴縣 一云 密波兮. 고대 일본어 mi(三) ㉒ 波衣, 波兮, 巴衣(峴 巖): 夫斯波衣縣 一云 仇斯峴, 三峴縣 一云 密波兮, 文峴縣 一云 斤尸波兮, 孔巖縣 本高句麗 濟次 巴衣縣 등. 중세한국어 바회 (巖) ㉓ 夫斯, 扶蘇(松) : 松岳郡 本高句麗 扶蘇岬, 松峴縣 本高句麗 夫斯波衣縣 ㉔ 別(重): 七重縣 一云 難隱別. 중세한국어 (重), 고대 일본어 fä(重) ㉕ 伯(逢) : 王逢縣 一云 皆伯. 에벤키語 baka-(發見), 라무트 語 bak-(發見), 만주어 baha-(得) ㉖ 沙非斤(赤) : 赤木縣 一云 沙非斤乙 수늙 (嶺) ㉘ 首(牛): 牛岑郡 一云 牛嶺 一云 首知衣. 중세한국어 쇼 ㉗ 述爾(峯): 峯城縣 一云 述爾忽縣. 중세한국어 - 183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여 (狐) ㉚ 也次(母): 母城郡 一云 也次忽. 중세한국어 어 (母, 親) ㉙ 也尸(牛): 狌川郡 一云 也尸買. 중세한국어 ㉛ 于次(五): 五谷郡 一云 弓次云忽(于次呑忽의 잘못). 고대 일 본어 itu(五) ㉜ 於斯(横): 横川縣 一云 於斯買. 중세한국어 엇 (横) ㉝ 於支(翼) : 於支呑 一云 翼谷 ㉞ 於乙(泉): 泉井郡 一云 於乙買, 泉井口縣 一云 於乙買串, 신 라어 奈乙 (蘿井)의 乙 (井) ㉟ 伊(入) : 水入縣 一云 買伊縣. 퉁구스諸語 i(入), 몽고어 ire-(來), 고대일본어 ir-(入) ㊱ 烏斯含(兎) : 兎山郡 本高句麗 烏斯含達縣. 고대일본어 usagi (兎) ㊲ 乙(木) : 赤木縣 一云 沙非斤乙. 고대 토이기語 i(森) ㊳ 濟次(孔) : 孔巖縣 本高句麗 濟次巴衣縣 ㊴ 斬(根) : 楊根縣 一云 夫斯斬, 高本根縣 一云 達乙斬 ㊵ 忽(城): 例는 생략함. 중세한국어 골 (谷), 만주어 holo (谷) 三國史記 地理志 이외의 책에서도 약간의 高句麗語 단 麗語謂復舊土 爲多勿 이라 있고 三國志에 溝漊者句麗名城也, 句麗 呼相似爲位 라 있다. 多勿 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으나 溝漊 는 윗 目錄의 (40)과 같은 단어요, 位 는 아마도 중세한국어의 이슷- 과 대응될 가능성이 있는 듯하다. 또 어를 발견할 수 있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에 古代 日本의 史書인 日本書紀(卷 24)에 泉蓋蘇文의 이름을 iri kasumi(伊梨柯須彌)라 表記한 데서 볼 수 있는 iri(泉)는 윗 目錄의 ㉞와 一致하는 것이다. 윗 目錄을 검토해 보면 다른 언어에서 類似한 단어를 발견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高句麗語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184 - ③, ⑯, ⑱, ㉓,
3. 高句麗語 ㉖, ㉝, ㊳. 그러나 많은 高句麗語 단어들은 中世韓國語, 古代 日 本語, 퉁구스諸語와 현저한 類似를 보여 준다. 數的으로는 中世韓 國語와의 類似가 가장 많은데 中世韓國語는 新羅語의 계속 이라 고 할 수 있으므로 (下述 참고), 高句麗語는 新羅語와 매우 가까 운 언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差異도 상당히 컸음을 인정하 지 않을 수 없다. 특히 數詞 ⑬, ⑲, ㉑, ㉛과 動詞 ㉕, ㉟가 다른 점이 주목된다. 이런 차이로 해서 高句麗와 新羅의 言語는 한 언 어의 方言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言語라고 하는 것이 더욱 온당하 지 않을까 생각된다.3) 위의 目錄에서 高句麗語는 뜻밖에도 日本語와 많은 一致를 보 여준다. 무엇보다도 數詞에 있어서 현저한 一致를 보여주는 사실 이 주목된다.4) 그리고 ⑥, ⑭, ⑰, ㊱ 등의 一致도 자못 印象的이 다. 이런 일치는 高句麗語(넓게는 夫餘系 諸語)와 日本語가 심상 치 않은 관계에 있었음을 말해 준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日 本語를 한국어(中世 및 現代 한국어), 알타이諸語, 말레이 폴리 네시아諸語 등과 比較하여 왔지만, 高句麗語만큼 현저한 一致를 보여주는 言語는 일찌기 없었던 것이다. 한편 高句麗語는 알타이 諸語 특히 퉁구스諸語와도 무시할 수 없는 一致를 보여 준다. 數 3) 言語와 方言의 구별은 사실상 程度의 문제이지 本質的인 것은 아니다. 또 이 구별은 言語外의 要因도 작용한다. 서로 의사소통이 잘되는 경우에도 그것이 두 국가에서 사용되면 서로 다른 언어로 부르기도 한다. 4) 數詞의 一致는 인도 유우럽諸語에서는 일반적인 사실이지만 알타이 諸語에서 는 찾아보기 어렵다. 토이기 몽고 퉁구스의 각 語群 안에서는 數詞가 일치하지만 그들 상호간에는 두어 數詞 만이 一致를 보여줄 뿐이다. 종래 數詞는 가장 墓礎的 인 語彙라고 생각하여 알타이 諸語의 數詞의 不一致가 그 친족관계 수립에 큰 장애가 되는 것으로 보아 왔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數詞는 交易 기타 경제적 이유로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던 高句麗語와 日本語의 數詞의 一致는 알타이 世界에서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 이 두 言語가 상당히 가까운 과거에 서로 접촉했다고 보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 185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詞중 七 ⑬과 두 動詞 ㉕, ㉟의 一致는 印象的이다. ⑬項을 보 면 퉁구스諸語 nadan, 高句麗語 nanan, 古代日本語 nana인데, 이 중 nadan이 가장 오랜 것이요, 그 -d-가 語頭 n-과 語末 -n에 同化되어 -n-으로 변한 것이 高句麗語의 nanan이요 다시 語末의 -n이 脫落한 것이 古代日本語의 nana 임을 推定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검토를 종합하면, 高句麗의 언어는 新羅語(및 중세 한국어)와 매우 가까운 親族關係를 가지고 있었지만, 日本語와도 이에 못지 않은 親族關係에 있었으며, 퉁구스諸語도 상당히 가까 운 親族關係에 있었음을 결론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夫餘語群의 언어들이 아무 자료도 남김이 없이 消滅되고만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夫餘系 諸語가 오늘날까지 存續하여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면 오늘날 韓國語, 알타이諸語 및 日本語의 比較 硏究는 그들의 親族關係에 대해서 훨씬 분명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을 짐작하기 어렵 지 않다. 高句麗語의 자료가 조금이나마 남아서 夫餘系 諸語의 편 린을 보여 줌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 百濟語 百濟의 言語에 대한 기록으로는 梁書(東夷傳 百濟)에 言語 服章이 대략 高驪와 같다 라 한 것을 우선 들 수 있다. 高驪란 다름 아닌 高句麗를 가리킨 것이므로, 百濟語는 위에서 검토한 高 句麗語와 비슷하다는 말이 된다. 이 말은 百濟의 支配族이 夫餘系 라는 데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마도 支配族은 夫餘系의 언 어를 오랜동안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周書(異域傳 百濟)에 - 186 -
4. 百濟語 王의 姓은 夫餘氏인데 於羅瑕라 일컫는다. 백성들은 鞬吉 支라 부른다. 중국어로는 다 王이다. 妻는 於陸이라 일컫는다. 중국어로는 妃다 라 한 것은 王을 일컬을 때 支配族은 被支配族은 於羅瑕 (어라하)라 하고 鞬吉支 (건길지)라 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기록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百濟에서는 支配族과 被支配族의 언어가 달랐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즉 被支配族의 言語는 馬韓의 土着語였을 것이다. 이런 狀態가 얼마나 오래 계속되었는지 현재의 우리로서는 推定할 길 이 없다. 그러나 百濟에서 支配族의 언어가 被支配族의 그것을 전 면적으로 同化시키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支配族의 언어가 被支配族의 그것에 同化되어 갔을 것으로 추측 된다. 적어도 현재 남아있는 百濟의 언어 자료들에 대한 검토는 이런 추측을 가능케 한다. 즉 이 자료들은 百濟語가 高句麗語와는 많이 다르고 新羅語와는 매우 비슷하였음을 보여 준다. 물론 支配 族의 언어가 被支配族의 언어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을 것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일부 언어학자들이 말하는 所謂 上層 (superstratum)의 현상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百濟語의 자료는 古代 三國 중에서 가장 적다. 역시 三國史記 地理志가 그 주된 자료인데 卷 37(地理 4)의 百濟 地名에는 불행 히도 同一 地名에 대한 釋讀 表記와 音讀表記의 並記가 高句麗의 경우보다 훨씬 적다. 夫里 를 들 수 있다. 夫餘郡 本百濟 所夫里郡, 陵城縣 本百濟 众陵夫里郡 등. 이것은 新羅 地名의 火 伐 등과 일치하는 것으로 高句麗 地名의 忽 과는 다른 것이다. 新羅語의 火伐 과 비교할 때 百濟語의 夫里 는 語末 母音을 百濟 地名의 특징으로는 - 187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이 百濟語의 특징이었다면 흥미 깊은 사실이 될 수 있지만 남아 있는 예가 적어 確言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百濟語 語彙는 中世韓國語(따라서 古代新羅語)의 그것과 대체 로 일치하는 듯하다. 아래에 그 몇 例틀 든다. 珍惡(石): 石山縣 本百濟 珍惡山縣. 珍惡 으로 表記되었는데 이 珍 은 돌 로 읽힐 가능성이 크지만 (馬突郡 一云 馬珍 참고)그 대로 字音으로 읽힐 가능성도 전혀 없지 않다. 그 결과는 돌악 또 는 진악 이 되는데 前者는 중세한국어의 돓 (石)과 완전히 같 은 단어요 後者는 (礫)과 같은 단어로 볼 수 있다. 沙(新): 新平縣 本百濟 沙平縣, 新良縣 本百濟 沙尸良縣. 중세 한국어의 새 (新)와 일치한다. 勿居(淸): 淸渠縣 本百濟 勿居縣. 중세한국어의 - (淸)과 일치한다. 毛良(高): 高敝縣 本百濟 毛良夫里縣. 중세한국어 (棟, 嶺)와 일치한다. 그러나 한편 百濟語에는 중세한국어나 新羅語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단어들도 있었다. 己, 只(城): 悅城縣 本百濟 悅己縣, 儒城縣 本百濟 奴斯只縣, 潔 城縣 本百濟 結己縣. 이 단어는 古代日本語에 ki(城)로 借用되었 다. 참고로 新羅語에서 城을 의미한 단어는 語에서는 잣 이었고 高句麗 忽 이었다. 新羅語의 잣 도 古代日本語에 tsasi로 借用되었다. 仇知(金): 金池縣 本百濟 仇知縣, 金溝縣 本百濟 仇知只山縣. 이 단어가 중세 한국어의 구리 (銅)와 어떤 관련이 있었을 可能性도 있다. 突(靈) : 馬靈縣 本百濟 馬突縣 百濟語 資料의 缺乏은 앞으로 日本側 史料의 연구를 통해서 다 - 188 -
5. 新羅語 소 補完될 가능성이 보이기는 하나, 그것도 극히 한정된 것임을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5. 新羅語 新羅는 三韓 시대의 한 小國이었던 斯盧(徐羅伐)가 점차 주위 의 部族을 통합함으로써 형성된 國家였다. 斯盧는 오늘의 慶州 地 方이었으니 新羅가 古代 國家로서의 基盤을 굳혀 감에 따라 이 지 방의 언어가 그 中央語로서 그 강역 안에 영향을 미쳐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6세기에 있어서의 加耶의 合併과 7세기 後半에 있어서의 三國 統一은 비 단 政治史에서 뿐 아니라 言語史에 있어서도 特記 할 만한 사실이다. 이로써 新羅語 중심의 韓半島의 言語的 統一이 실현된 것이다. 統一新羅가 10세기 초까지 계속되는 동안 金城 (慶州) 중심의 新羅語의 영향이 점차 百濟와 高句麗의 故地에까 지 波及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이태리半島에 있어서의 라틴語에 의한 言語的 統一을 방불케 한다. 본래 이태리半島에서 는 여러 언어들이 말해지고 있었는데 오늘의 로마 지방에 있은 라 티움(Latium)이란 小國이 政治的 文化的으로 그 세력을 뻗침에 그 언어인 라틴語가 퍼져 인근의 여러 언어들은 消滅하고 드디어 全半島가 라틴語로 통일되게 된 것이다. 金城 즉 徐羅伐은 바로 韓半島의 라티움이었고 그 언어는 바로 韓半島의 라틴語였던 것 이다. 新羅의 언어 자료는 古代 三國 중에서는 가장 풍부하나, 그 音 韻 文法 語棄에 걸쳐 體系的인 연구를 행하기에는 너무나 빈약 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 189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1) 固有名詞 三國史記, 三國遺事를 비롯한 內外 史籍에 실린 人名 地名 官 名 등의 表記에 대한 硏究 方法은 앞서 高句麗語의 연구에서 말한 것과 같다. (2) 鄕歌 三國遺事에 14首, 均如傳에 11首가 전한다. 三代目이란 鄕歌集 이 眞聖女王의 命을 받아 편찬되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큰 책이었 는지 알 수 없으나 이것이 전하였더라면 몰라도, 지금 전하는 것 만으로는 그 완전한 解讀은 현재는 말할 것도 없고 먼 훗날에도 바라기 어려운 형편이다. 과거에 두 차례 鄕歌의 全面的 解讀이 있었으나 이들은 첫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는 이런 全面的 解讀보다도 깊이 있는 部分的 硏究가 있어야 할 것이다. 비록 鄕 歌 硏究의 現狀이 이렇다 하더라도 鄕歌가 新羅語의 가장 소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3) 吏讀 口訣 吏讀는 新羅 시대로부터 19세기 말기까지 연면히 사용되었다. 그러나 新羅 시대의 吏讀 자료는 극히 적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 은 대부분 近世 朝鮮 시대의 것이다. 吏讀도 시대에 따라 변해 왔 으므로 後代의 자료를 이용하여 연구하는 경우 과연 어느 부분이 傳統的인 것이고 어느 부분이 새로운 것인가를 판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口訣은 우리나라 사람이 漢文을 읽을 때 붙이는 토를 말한다. 아직 新羅시대의 口訣 자료는 발견된 것이 없으나 최근 高麗 시대 - 190 -
5. 新羅語 의 萬譯仁王經이 발견되어 朝鮮 시대의 口訣과는 큰 차이가 있음 이 알려졌다. 즉 舊譯仁王經의 口訣은 漢字를 音讀과 아울러 釋讀 도 했으며 그 語順도 한국어에 가깝게 바꾸어 읽었다는 사실이 밝 혀진 것이다.5) 이로써 비로소 三國史記(卷 46)에 薛聰이 方言 으로 九經을 읽었다 (以方言讓九經)고 한 말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종래 日本에 있어서의 漢文의 讀法이 매우 특 이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는데, 이 역시 新羅 시대의 漢文讀法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을 蓋然性이 커진 것이다. 舊譯仁王經의 口 訣은 비록 高麗 시대의 것이지만 그것은 新羅 시대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이의 연구가 완성되면 新羅 시대의 言語의 연구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믿는다. (4) 漢字音 우리나라 漢字音은 中國의 그것과 다르다. 처음 漢字가 우리나 라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漢 字音이 固定된 정확한 시기는 정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지금으 로서는 8세기 頃이 아니었을까 推定되고 있다 그 뒤 이 漢字音에 는 中國音의 새로운 영향을 받아 부분적으로는 다소의 변동이 있 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한국어에 일어난 여러 音韻 變化를 입 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나라 漢字音을 자세히 연구 하면 8세기 新羅語의 音韻體系를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된다. 以上의 資料들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가 아직 초기 단계에 있 어 新羅語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는 매우 제한된 것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新羅語의 윤곽을 가지고 우리의 논의를 진행하는 수 밖에 5) 沈在箕 舊譯仁王經의 口訣에 대하여. 美術資料 19輯 (1975) 참고 - 191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없다. 結論부터 말하면, 新羅語는 中世韓國語와 전반적인 一致를 보여 준다. 新羅語와 中世韓國語의 관제는 中世韓國語와 現代韓國語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차이가 결코 적지 않지만 그것은 通時的 변화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말을 바꾸면 新羅 語가 여러 世紀에 걸쳐 변화한 것이 中世韓國語라는 것이다. 몇 가지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新羅語의 文法體系는 中世韓國語의 그것과 크게 일치한다. 가령 新羅語의 格語尾와 活用語尾가 대부분 中世韓國語에서도 발견된다. 伊 또는 是 로 표기되었는데 이것은 中世韓國語의 이 와 같은 것이다. 對格은 新羅語 자료에 乙 主格은 新羅語 자료에 로만 표기되었다. 아마도 신라어에서는 母音으로 끝난 名詞 뒤에는 ㄹ, 子音으로 끝난 名詞 뒤에는 /을 이 붙었던 것 같다. 中 世韓國語에는 母音으로 끝난 名詞 뒤에 ㄹ 외에 /를 이 붙 기도 했으나 이것은 ㄹ 에 다시 /을 이 붙은 二重形이다. 이 밖에 屬格(신라어 矣衣 :중세한국어 /의), 處格(신라어 中, 良 中, 世中: 중세한국어 /의), 造格(신라어 留: 중세한국어 로, 로/ 으로)등도 일치를 보여 준다. 動詞 語尾의 예는 생략한다. 물론 新 羅語에는 中世韓國語에서는 얼핏 발견하기 어려운 語尾도 있었다. 가 령 動詞의 終結 語尾 齊 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예 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新羅語에 이미 敬語法이 발달되어 있었는데 그 體系 가 中世韓國語의 그것과 대체로 일치한다. 尊敬法의 先語末 語尾는 賜 로 표기되었는데 이것은 중세한국어의 시 의 古形이다. 그 리고 謙讓法의 先語末 語尾는 白 으로 표기되었는데 이것은 으로 읽혀지는 것으로 중세한국어의,, 등의 古形 - 192 -
5. 新羅語 임에 틀림없다. 중세한국어의 恭遜法은 先語末 語尾 되는데 신라어 자료에는 이것이 이 로 표시 音 으로 표기된 예가 있을 뿐이 어서 그 정확한 발음을 결정하기는 어려운 처지에 있다. 다음으로 新羅語와 中世韓國語 數詞가 일치한다. 오늘날 전하는 신라어 수사는 一等 ( ), 二肹, 二尸 (두블), 千隱 (즈믄) 등인데 이들은 각각 중세한국어의 해당 수사의 古形들이다. 15세기 正音文獻에 1은 나 이나 이것이 12세기의 鷄 一曰河屯 이라 있어 신라어의 과거의 같음을 알 수 있 다. 2에 대해서도 鷄林類事에 二曰途字 이라 있음이 참고된다. 千에 대해서는 15세기에 즈믄 이 존재하였다. 신라어 수사가 모 林類事에 두 전하지 않음이 유감이지만, 위의 몇 예로도 신라어와 중세 한국 어의 數詞의 일치는 인정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新羅語와 中世韓國語는 語彙에 있어서도 전반적인 일치를 보여 준다. 現存 資料에서 얻을 수 있는 신라어 단어의 수는 그렇게 많 지 않지만 그 거의 전부를 우리는 중세한국어에서도 발견할 수 있 다. 아래에 및 例를 든다. 朴(瓠) : 辰人謂瓠爲朴(三國史記 卷 1). 중세한국어 박. 바 로 읽힌다. 중세한국어의 바 (海)은 이 바 의 ㄷ 이 ㄹ 로 破珍(海): 波珍湌 或云 海干(三國史記 卷 38). 波珍 은 변화한 것이다. 韓(大) : 大舍 或云 韓舍, 大阿湌 或云 韓阿湌(三國史記 卷 38). 중세 한국어 한(大). 勿(水) : 泗水縣 本史勿縣(三國史記 卷 34). 중세한국어 믈(水). 柯半(袴) : 袴曰柯半(梁書 新羅傳). 鷄林類事의 15세기 문헌의 외 와 일치한다. 袴曰柯背 및 吉(永) : 永同郡 本吉同郡(三國史記 卷 34). 중세한국어 길-(長) - 193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居柒(荒 萊) : 東萊郡 本居柒郡(三國史記 卷 34), 居柒夫 或云 荒宗(同 卷 44). 중세한국어 거츨(荒). 密(推) : 密城郡 本推火郡(三國史記 卷 34). 중세한국어 밀-(推). 이밖에도 例는 더 추가할 수 있다. 특히 위의 目錄에는 鄕歌의 예는 하나도 들지 않았는데 가령 鄕歌의 日尸, 道尸, 心音, 夜 音, 雲音, 城叱 등은 첫 字는 釋讀하고 둘째 字는 각 단어의 末音 을 표기한 것으로 각각 중세 한국어의 날, 길,, 밤, 구룸, 잣 과 일치하는 단어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볼 때 中世韓 國語의 語彙는 新羅語의 계승이라고 말해서 조금도 그릇됨이 없 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신라어에 존재했으나 중세한국어에는 없어 진 단어들도 없지 않다. 가령 신라어에는 우물을 뜻하는 단어로 乙 (을)이 있었던 듯하다. 新羅 始祖의 降誕地인 蘿井 이 간혹 奈乙 로도 표기된 예가 있어 이런 再構가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저 위에서 말한 高句麗語의 於乙 (泉)에 대응되는 것 인데 중세한국어에서는 이 단어를 찾아 볼 수 없다. 또 신라어에 福, 卜 이란 단어가 있었던 듯하다. 三國遺事(卷 4)의 她 福不 言 에 兒名이 虵童, 虵福, 虵卜 등으로 표기되었는데 이 福, 卜 (복)이 바로 童을 뜻하는 신라어 단어였다고 註를 달고 는 있는 것이다. 이 단어는 퉁구스諸語의 pikte, hute 등에 대응되는 것으로 믿어지는데, 중세한국어 문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 러나 이런 例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6. 中世 韓國語의 成立 10세기 초에 高麗가 오늘의 開城을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歷史 家들은 새로운 王朝의 建設을 큰 사건으로 볼 것이나, 言語學者들 - 194 -
6. 中世 韓國語의 成立 은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의 政治 文化의 중심이 慶州로부터 開城으로 옮겨진 사실을 더욱 注視한다. 왜냐하면 이때로부터 그 때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開城 지방의 말이 우리나라의 中央 語로 등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中央語의 성립 및 발 달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그 이전의 新羅 中央語(慶州의 言語)의 영향 등 복 잡한 여러 가지 要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中央語 가 開城 지방의 方言의 토대 위에 성립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으로 믿어진다. 이 새로운 中央語의 성립은 韓國語의 歷史에서 하나의 획기적 인 사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中央語가 그 뒤 오늘날까지 그대로 계속되어 왔으니, 그 성립은 韓國語史 전체에서 매우 중요 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다. 모든 歷史 叙述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어의 역사를 叙述할 때에도 時代區分이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가 된다. 言語史는 政治史나 文化史에 예속된 것이 아니므로 言語史의 時代區分은 어디까지나 言語 자체의 변화에 입각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언어의 변화는 音韻 文法 語 彙에 걸쳐 어느 시기에나 일어나며 어느 한 時點에 그 體系가 큰 변혁을 일으키는 일은 거의 없다. 따라서 그 歷史上의 어떤 大事 件을 계기로 해서 時代區分을 하는 수밖에 없다. 위에 말한 高麗 中央語의 成立은 韓國語의 역사에서 드물게 보는 중대한 사건이 므로 이때로부터 새로운 단계가 시작된다고 보는 것은 어느 모로 나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에 韓國語史의 古代가 끝나고 中 世가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高麗 초의 開城 方言은 어떤 것이었 을까 하는 것이다. 이 지방이 新羅의 西北 邊方이요 본래는 高句 - 195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麗의 故土였다는 사실이 주목을 끄는 것이다. 이 지방의 住民들 은 7세기 後半(정확하게는 669년)에 新羅에 귀속되어 3세기 가 까이 지내는 동안 新羅語를 말하게 되었을까. 그들의 말에는 高 句麗語의 要素가 얼마나 남아 있었을까 이런 의문들이 연이어 제기된다. 위에서 우리는 古代 新羅語와 15세기의 중세 韓國語 사이에 직 접적인 連脈이 이어져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이 사실은 10세기 의 開城 지방 주민들이 新羅語를 말하고 있었다고 봄으로써 합리 적으로 설명된다. 즉 이 지방에서는 言語의 置換이 일어났던 것으 로 믿어진다. 만약 이 지방 주민들이 高句麗語를 계속해서 말 해 왔다면 중세한국어는 高句麗語와 직접적인 連脈이 닿아야 할 것 인데, 저 위에서 우리가 행한 高句麗語의 검토는 이런 사실을 암 시하여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떤 언어를 말하던 사람들이 그 언어를 버리고 다른 언 어를 말하게 되는 경우에 예전 언어의 특징이 은연중에 남는다. 그 증거를 분명히 제시하라면 곤란하다 해도 옛 언어를 말하던 때 의 습관이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일부 언어학자들이 제기한 底層(Substratum)의 假說이다. 이 假說에 의하면 開城 지방의 新羅 方言에는 高句麗語의 底層이 있었을 것 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音韻에 가장 잘 나타나는데 불행히도 우리는 高句麗語의 音韻에 대해서 사실상 아무것도 모 르고 있으므로 이 점은 덮어두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뜻밖에도 開城 方言의 語彙에 高句麗語의 要素가 있었 음이 확인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으로 다음의 두 예가 있다. 저 위에서 高句麗語에 乃勿 (鉛)이란 단어가 있었음을 지적한 일이 있는데, 13세기까지도 이 단어가 계속 말해졌음이 확인된다. - 196 -
6. 中世 韓國語의 成立 즉 13세기에 高麗 大歲經을 찍어낸 大藏都監에서 간행한 鄕藥救 鉛 俗云 那勿 이라 있는 것이다. 이 那勿 과 高句麗 語의 乃勿 의 一致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 高句麗 語에 旦, 頓, 呑 (谷)이란 단어가 있음을 보았는데 中國 (明) 에서 15세기 初에 편찬된 것으로 推定되는 朝鮮館譯語에서 村 谷 을 볼 수가 있다. 의미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골짜기가 마 急方에 을로 意味 變化를 일으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으므로 문제로 삼을 필요가 없다. 雞林類事는 12세기 初에 中國(宋)의 孫穆이란 사람이 쓴 책인 데 이 속에 한국어 語彙 350餘項이 실려 있다. 이 대부분은 15세 기의 正音 문헌에서도 발견되는 것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더 러 있다. 그 중의 하나로 谷曰丁蓋 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역시 위에 말한 高句麗語 단어와 연결될 수 있지 않은가 한다. 즉 高句麗語 名詞의 丁 (명)에 接尾辭 蓋 (개)가 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해석이 옳은 것이라면 谷을 의미하는 高句麗語 단어는 그대로 또는 접미사를 가지고 高麗 시대에 사용되었는데 12세기에는 아직 본래의 意味를 유지했었고 그 뒤에 村 으로 변했다고 推想해 볼 수 있다. 단 두 단어에 지나지 않지만 이들은 高句麗語 단어가 中世韓國 語에 존속된 증거로서 매우 소중한 것이다. 이런 단어들의 總數가 얼마나 되었는지 지금의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으나, 그것이 존재 했던 것만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세한국어의 성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 할 수 있게 되었다. 중세한국어(中央語)는 新羅語의 西北 方言을 토대로 하고 거기에 高句麗語도 참여하여 성립되었다. 이 참여는 지나치게 과장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이 있었던 것만은 의심 - 197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할 수 없는 사실이다. 7. 韓國語의 系統 지금까지 우리는 古代의 夫餘系와 韓系 諸語로부터 高句麗, 百 濟, 新羅 三國의 言語를 거쳐 中世韓國語가 성립되기까지의 歷史 를 대충 더듬어 보았다. 워낙 자료가 적어서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으므로 우리의 敍述은 극히 간략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이들 언어의 계통을 수립하려는 노력이 어디까지 왔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韓國語라는 말을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하려고 한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나날이 사용하 고 있는 언어를 한국어라고 부르는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이 말 속에 古代의 夫餘系와 韓系의 언어들도 포함시키려고 한다. 이의 이론적 근거는 앞으로 제시될 것이다. 종래 한국어의 계통에 대해서는 주로 서양 학자들이 연구하였지만 그들에게는 한국의 古代 諸語에 대한 광범한 識見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업적 위에 한국어의 역사에 대해서 얻은 지식을 더하여 한국어의 계통에 대한 보다 體系的인 論述을 꾀해 보기로 한다. (1) 알타이 系統說6) 한국어의 계통 문제는 19세기 후반에 서양인들이 처음 한국어 를 알게 되었을 때 제기한 최초의 의문 중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6) 韓國語와 알타이 諸語의 比較에 대한 종합적인 考察은 Ki-Moon Lee. Remarks on the Comparative Study of Korean and Altaic(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Symposium.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Seoul (1975) 참고 - 198 -
7. 韓國語의 系統 19세기와 20세기의 交替期에 여러 사람들이 한국어의 계통에 관 한 잡다한 假說을 제기하였었다. 그들은 한국어를 우랄 알타이諸 語, 日本語, 中國語, 티베트語, 드라비다語, 아이누語, 심지어 인 도 유우럽諸語 등등에 연결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 假說들의 대 부분은 이제는 벌써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이중에서 다시 들어 말할 만한 것은 우랄 알타이 系統說과 日本語와의 同系說이다. (後者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논술하겠다) 우랄 알타이 語族(Ural-Altaic family)이란 우랄諸語(핀랜드語, 항 가리語 등의 피노우그리아 諸語와 사모예드諸語)와 알타이諸語(토이기 諸語, 몽고諸語, 퉁구스諸語)를 포괄하는 지극히 방대한 것으로 19세기 중엽 핀랜드 학자인 알렉산더 카스트렌(A. Castren) 등이 제기한 假說 이었다. 19세기 후반에 한국어가 이 어족에 속한다고 본 학자들의 주장 은 한국어가 이 어족의 언어들과 같은 몇 가지 構造的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러한 특징으로는 母音調和(vowel harmony)와 形態論的 膠着性(agglutination)이 대표적이었다. 母音調和 란 한 단어 안에 陽母音(또는 後舌母音)만 나타나거나 陰母音(또는 前 舌母音)만 나타나는 규칙을 말한다. (中性母音이란 것이 있어 위의 兩 系列과 어느 정도 자유로이 결되기도 한다.) 현대한국어에 이런 경향이 있음이 주목된 것이다. 이 母音調和가 中世韓國語에 대한 연구에서 더 욱 분명히 드러났음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한편 膠着性이란 造語法 에 있어서나 屈折(名詞의 曲用이나 動詞의 活用)에 있어서 接尾辭(또 는 語尾)에 주로 의존하는 것을 말한다. (英語 man: men, sink:sank:sunk와 같이 母音의 變化에 의존하는 예가 없다.) 이밖에도 우랄 알타이 諸語와 한국어의 공동 특징으로는 語頭에 ㄹ (r)이나 子音群이 없다던가7) 關係代名詞나 文法的 性(gender)이 없다던가 하 7) 中世韓國語에는 語頭 子音群이 있었다. 즉 15世紀의 正音 문헌에 - 199 - ㅄ, ㅶ,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는 사실들이 지적되었었다. 이런 구조적 특징의 일치는 그 언어들이 親族關係에 있을 가능 성이 큼을 보여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확실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전혀 親族關係에 있지 않은 언어들 사이에도 공 통적인 특징들이 발견되는 예가 결코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 본격적인 비교 연구가 이루어진 결과, 우랄 알 타이語族은 우랄語族과 알타이語族으로 兩分되게 되었다. 이 때에 토이기제어, 공고제어, 퉁구스제어를 묶어 알타이語族의 存立을 주장하고 그 연구를 발전시킨 대표적인 학자가 핀랜드 학자인 람 스테트(G.J.Ramstedt)와 본래 러시아 학자로 나중에 미국에 온 포페(N. Poppe)였다. 아직도 이들의 연구가 알타이제어의 親族關 係를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한 것은 아니라는 懷疑論을 펴는 학자 들이 적지 않지만, 알타이제어의 音韻 文法 語彙에 대한 禮系的 인 비교를 통하여 알타이祖語(알타이 共通語)를 再構한 이들의 연구로 알타이語族은 확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바로 이 두 학자가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의 비교 연구를 행하여 한국어의 알타이系統說을 주장한 것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람스테트는 20년대로부터 그의 죽음(1950)에 이르는 20여년에 걸쳐 이 비교 연구를 혼자서 개척하고 발전시킨 공로가 컸다. 불행히도 그는 한국어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으므 로 현대한국어를 가지고 비교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 르기도 했다. 모든 개척자의 업적이 그런 것처럼 그의 연구에도 결함이 많았으나 그가 이 학문의 주춧돌을 놓은 점은 높이 평가되 ㅳ, ㅴ, ㅵ 등으로 표기된 단어들이 있는데 이들은 분명히 子音群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어의 역사 전체에서 볼 때에는 一時的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子音群은 본래 그 두 子音 사이에 있었던 母音 이 없어져서 생겼다가 뒤에 된소리로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 200 -
7. 韓國語의 系統 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의 비교 연구의 성과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데는 학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로 의견이 엇갈 린다. 여기서 이에 대해서 장황하게 논할 여유가 없으나 지금까지 의 성과는 그 친족 관계의 증명을 완성했다고 보기에는 미흡한 점 이 있다. 한국어와 알타이제어 사이에는 語彙 및 文法的 要素에 있어서의 類似가 결코 적지 않으나 엄밀한 音韻對應의 규칙을 세 우기 어려운 것이 심각한 난관으로 되어 있다.8) 이 사실은 한국 어와 알타이제어가 비록 친족관계에 있기는 하나 그 친족관계는 자못 먼 것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람스테트는 그의 연구의 결론으로서 알타이祖語가 말해진 지역 즉 알타이語族의 故土는 興安嶺山脈 근처였고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까지 이 祖語 시대가 계속되다가 토이기, 공고, 퉁구스, 한국의 語派가 동시에 갈려 나간 것으로 推定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祖 語 시대에 있어서의 위치를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나타내었다. 蒙古人 北 퉁구스人 西 토이기人 東 南 퉁구스語 蒙古語 韓國人 韓國語 토이기語 그는 이 위치에 따라 토이기語는 한편으로는 몽고어, 다른 편으 로는 한국어와 친근하며, 한국어는 한편으로는 토이기어, 다른 편 으로는 퉁구스어와 친근하며 퉁구스어는 한편으로는 한국어, 다른 8) 言語의 比較는 外形의 類似에 의해서가 아니라 音韻 對應의 規則에 의해 서 행해질 때 비로소 믿음직하게 된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音韻 對應의 정밀한 규칙들이 수립되어 있지 않은 語彙의 比較는 아직 暫定的인 것이요 진정 한 同源語 (cognate)라고 할 수가 없다. - 201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편으로는 몽고어와 친근하며 몽고어는 한편으로는 퉁구스어, 다 른 편으로는 토이기어와 친근하다고 하였다. 그의 결론에 있어 서 한국어는 전통적인 三語派와 조금도 차별 대우를 받고 있지 않은 것이다.9) 이러한 람스테트의 견해에 대하여 포페는 비판을 가하고 한국 어는 전통적인 三語派와는 疎遠한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10) 그는 한국어의 先祖가 알타이祖語에서 제일 먼저 갈려 나간 뒤에도 토 이기, 몽고, 퉁구스의 先祖들은 꽤 오래 單一言語를 말하고 있었 다고 본 것이다. 그 뒤에 다시 토이기어의 先祖가 갈려 나갔고 맨 나중에 몽고어와 퉁구스어의 先祖들이 갈려 나간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그의 見解를 다음과 같은 도표로 표시하였다. 위에 말한 람스테트의 견해보다는 이 포페의 견해가 더욱 사실에 9) G. J. Ramstedt, Einführung in die altaische Sprachwissenchaft. (Helsinki 1952-1957) 참 고 10) N. Poppe, Vergleichende Grammatik der altaischen Sprachen. Teil 1. Vergleichende Lautlehre (Wiesbaden 1960). Introduction to Altaic Linguistics (Wiesbaden. 1965) 참고 - 202 -
7. 韓國語의 系統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으나, 한국 어의 먼 조상(아래에서 우리가 夫餘 韓共通語라고 부를 言語)는 알타이 共通語에서 갈려나온 것이 아니라 이들보다 더 오랜 한 共 通語에서 갈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夫餘 韓共通語와 알타 이 共通語가 姉妹關係에 있었을 가능성도 큰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진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 日本語와의 同系說11)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교 연구는 1879년 애스턴(W.G. Aston) 에 의해서 시작된 이래 주로 日本學者들에 의하여 추진되어 왔다. 이럭저럭 1세기 가까이 된 셈이다. 이 연구는 日本語의 계통을 밝 히려는 노력의 一環으로 이루어져 온 것이다. 아마도 일본어만큼 그 系統에 대해서 많은 假說이 제기된 언어도 없을 것이다. 지금 도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어의 起源은 不明이다 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런 결론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이 학문의 본 질이어서, 해마다 새로운 연구들이 발표되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 곤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틀어 볼 때, 한국어만큼 日 本語와 비슷한 언어는 아직 地球上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교는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교 연구의 성과를 분 석해 보면 우리는 저으기 실망하게 된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현저 한 共通的인 構造的 특징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언 어의 具體的 言語財(語彙와 文法的 要素)의 一致가 量에 있어서 나 質에 있어서 매우 빈약한 것이 이 방면의 학자들의 큰 고민이 11) 한국어와 일본어의 比較에 대한 종합적 고찰은 宋敏 韓日兩語 比較硏究 史(聖心女大 論文集 1 (1969) 및 李基文 韓國語와 日本語의 語彙 比較에 대한 再檢討. 語學硏究 9권 2호(1973) - 203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되어 왔다. 그리고 音韻 對應의 規則을 세우려는 노력도 오랫동 안 停頓 狀態에 빠져 있다. 요컨대, 두 언어가 어떤 親族關係에 있는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확고하게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종래의 韓國語와 日本語의 비교 연구는 하나의 중대한 方法上 의 결함을 지녀 왔다. 단 두 言語만의 비교 연구는 전혀 불가능하 지는 않지만, 학자들의 恣意에 대한 制動 裝置가 없어 지극히 큰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즉 진정한 對應과 似而非 對應을 判 別할 방법이 막연한 것이다. 실제로 종래의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 교 연구는 이런 결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결함을 없애기 위해서는 한국어와 일본어 이외에 제3의 언어를 비교에 가담시키는 것이 요망된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제3의 언어는 알타이諸語다. 실상, 한편에서는 한국어와 알타이諸 語의 비교 연구가 이루어지고 다른 편에서는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교가 이루어지면서도 이들을 統合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종래에도 일본어와 알타이 諸語의 비교가 이루어진 바 있고 이런 연구에 한국어가 등장되기 도 했으나 그것은 극히 散發的이었다. 진정한 有機的인 統合만이 믿음직한 성과를 맺을 것으로 기대된다. 일본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原始日本語는 紀元前 3세기경 北 九州 지방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12) 이것은 일본 考古學者들이 말하는 소위 彌生(yayoi) 시 대로서 우리나라에서 그곳으로 새 로운 문화의 물결이 들어간 때였다. 따라서 이때에 한국어가 일 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볼 수도 있음직하다. 실제로 이런 學說 을 주장한 학자도 있었다.13) 그러나 現代韓國語 및 中世韓國語와 12) 服部四郎 日本語의 系統 (東京, 1959) 참고 13) 大野晋 日本語의 起源 (東京 1957) 참고 - 204 -
8. 夫餘 韓語群의 位置 日本語의 비교는 이런 가까운 과거에 두 언어가 갈렸다고는 도 저히 생각할 수 없게 한다. 따라서 이때에 한국에서 어떤 언어가 건너갔다면 그것은 新羅語를 비롯한 韓系의 언어가 아닌 어떤 언어였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日本語가 高句麗語와 매우 가까운 親族關係에 있다는 假說이 제기된 것이다.14) 위에서 高句麗語를 논하면서 高句麗語 와 日本語의 語量의 一致를 보았으니 이 假說이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현단계에서 이 假說과 위에서 말한 原始 日本語의 形成과를 억지로 연결하려는 것을 성급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아무도 일본어에 알타이系 내지 한국어系 이외의 요소가 섞여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어떤 言語도 混淆語가 아닌 것은 없 다. 일본어에 南方系 요소가 들어온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다. 그러나 우리가 언어의 계통을 논할 때에는 그 언어의 核心部 를 이루고 있는 것이 어느 系統인가 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어의 계통을 논하면서 北方系와 南方系의 混淆語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8. 夫餘 韓語群의 位置 紙面 관계로 자세한 논의를 전개할 수는 없었으나 우리는 위에 서 지금까지의 한국어와 알타이諸語 및 일본어의 비교 연구가 거 둔 성과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그 결과 이들 연구가 심각한 난관 에 부딪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면 서도 그 언어들의 親族關系에 대한 결정적인 결론에는 도달하지 14) 이에 대해서는 註(2)의 논문 참고 - 205 -
Ⅳ. 韓國 古代諸語 系統論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눈을 古代 諸語로 돌릴 필요가 있다. 古朝鮮의 言語는 제쳐 놓고 肅愼의 言語도 夫餘系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 었으므로 論外로 하면 夫餘系 諸語와 韓系 諸語가 남는다. 그런데 夫餘系의 高句麗語는 韓系의 新羅語(및 中世韓國語)와 매우 가까 운 親族關係에 있음을 우리는 구체적인 자료의 검토를 통해서 확 인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는 夫餘系와 韓系를 크게 하나의 語群 으로 묶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夫餘 韓語群이라고 부를 수 있 을 것이다. 그리고 이 語群의 先祖로서 夫餘 韓共通語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夫餘共通語와 韓共通語로 나뉘고 다시 여러 言語로 分化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보 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오늘의 한국어는 이 夫餘 韓語群의 유일한 殘存者이다. 이것은 中世韓國語의 직접적 계속이며 中世韓國語는 新羅語를 根幹으로 하고 高句麗語의 부분적 참여로 형성된 것이다. 여기서 가장 흥미있는 것은 夫餘系 諸語의 위치다. 오늘날 남 아 있는 것이 高句麗語 資料밖에 없으므로 이것을 통해서 연구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실로 주목할 만한 結論으로 우리를 誘導한 다. 저 위에서 우리는 高句麗語가 新羅語(및 中世韓國語)와 매우 가까운 親族關係에 있으면서 日本語와도 가까운 親族關係에 있었 으며 퉁구스諸語와도 분명한 친족관계에 있었음을 확인한 바 있 - 206 -
8. 夫餘 韓語群의 位置 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이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과거의 한국어와 알타이 諸語 의 비교 연구,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교 연구가 심각한 停頓에 빠 지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깨닫게 된다. 이들은 서로 간접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夫餘系諸語가 이들의 중간 고리였는데 이 고리의 消滅로 서로의 관계를 밝히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논한 것을 간추리면, 한국어의 가장 오랜 先祖인 夫 餘 韓共通語는 아마도 알타이祖語와 姉妹關係에 있었거나 이것 으로부터 가장 먼저 갈려 나온 한 갈래일 것이다. 이 夫餘 韓共 通語가 다시 夫餘共通語와 韓共通語로 兩分되고 각각 복잡한 分 化가 이루어졌는데, 그 대부분은 消滅되고 新羅語가 우리 민족의 통일된 言語로 발전한 것이다. 中世韓國語는 이 新羅語를 근간으 로 형성된 것이요,現代韓國語는 이것의 직접적인 계속이다. 李基文 - 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