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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목차

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Transcription:

번역 近代 日本 佛敎學의 功過 오 테츠오 야마 리 태 번역) (이 승 無明 論爭 發端 켄 原始佛敎思想論 켄 無明 論 츠 反論 背景 켄 쿠 共鳴 츠 테츠 츠 緣起觀 地平 反論 根幹 츠 應酬 老獪 츠 血氣 쇼펜 칸 位相 스노 즘 넘 역자 후기 1. 의 2. 기무라 다이 의 3. 기무라 다이 의 의미 4. 우이 와 지 의 5. 기무라 다이 과 우이 하 주 6. 우이에 하는 와 지 로의 마음 7. 우이 와 지 의 8. 기무라 의 에 있는 것 9. 기무라와 와 지의 10. 우이의, 와 지의 11. 하우어와 트의 12. 근대 비 을 어서 無明 論爭의 發端 1. 켜 왔다고 할 일본의 불교연구가 언제나 그 불교의 生命을 高揚시 었 수는 없을지라도, 明治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 다고 하는 것은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다. 전통적인 漢籍을 중심으로 축적된 연구 위에, 근대유럽의 정교한 문헌학적 방법이 접목되어 새로운 불교연 구의 길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연구가 불교의 생 명력을 유지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전개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 도 불교의 근본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일종의 방향 제시를 해온 것만은 누구도 否定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그 방향 전

印度哲學 제집 살펴볼 여유는 없지만,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無明 과 바로 그 근본문제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왜냐하 면 그 문제는 일찌기 불교연구사상 중요한 논쟁의 焦點이 되었기 때 체에 대하여 같은 문제는 문이다. 먼저 말하자면, 그것은 단 한번 학문의 좁은 분야 졌 뿐, 그 후로는 定說 이라는 이름의 학문적 常識에 묻혀 완전히 썩어 埋沒될 정도로 風化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풍화와 매몰에 걸린 시간은 족히 반세기를 넘는 긴시간에 달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불교의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인 무명 의 문 제가 완전히 忘却된 채, 한결같이 佛法의 光明으로만 해바라기같이 얼굴을 돌려왔던 것이다. 불교에서 무명의 문제가 돌연히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기무라 다이 켄(木村泰賢)에 의한 것으로, 大正 10년(1921)의 일이다. 그것은 당사자 인 기무라가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무명이라는 불 교의 근본테마에 대한 새로운 문제제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기무라는 무명이라는 테마를 자체로서 직접 우리들 앞에 제시한 것 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原始佛敎에서 緣起觀 해석의 문제로서 논 했던 것이다. 연기의 각 支에 대한 사색을 거듭하는 속에 무명의 문 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리고 이 기무라의 논의에 대한 반응이 각 방면에서 나타났다. 反論은 먼저 기무라의 연기설 해석 전체에 대 해서, 그리고는 각각의 論点에 공격의 화살이 돌려지는 형상이었다. 大正 14년에 아카누마 치젠(赤沼智善)과 우이 하쿠주(宇井伯壽)가 기무라 의 견해를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렸으며(뒤에 말하겠지만, 우이는 기무라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는다), 그 다음해에는 와츠지 테츠로(和辻哲郞)가 철저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 중에서도 우이와 와츠지의 비판은 거의 동일한 視點과 論理에 의해 전개된 것으로, 이 논쟁에 끼친 영향은 실로 큰 것이었다. 기무라 다이켄이 무명에 대한 새로운 설을 학계에 제시한 것은 앞 서 말했듯 大正 10년이지만, 그것은 이 해에 간행된 原始佛敎思想論 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저술의 곳곳에서 전개되고있는 十 二緣起論 가운데 그것이 논해진 것이다. 이 문제에 바로 들어가기 전 하지만 결론을 에서 거론되어 을

번역 이태승 의 功過 近代 日本 佛敎學 쓰여진 배경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그것은 그의 사람됨과 대강의 經歷을 아는 데 필요 한 手順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며, 또 우이 와츠지와 전개된 논쟁의 배 경을 아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에 여기에서 기무라의 원시불교사상론 이 기무라 다이켄의 原始佛敎思想論 기무라 다이켄은 明治 14년(1881)에 이와테(岩手)縣에서 태어나, 曹 洞宗大學을 거쳐 東京帝國大學文科大學 選科生이 되었다. 日露전쟁에 종군한 뒤에 다시 문과대학으로 돌아와 동41년(1908)에 동대학 印度哲 學科를 졸업하고, 이 때 恩賜로 銀時計를 수여받았다. 이어 特選給費 生이 되어, 大正 元年(1912) 9월 31세로 문과대학 강사로 위촉되고, 동 4년에는 印度六派哲學 을 저술하였으며, 다음해 5년에는 이 저술로 恩賜賞을 받았다. 동6년에는 문과대학 조교수가 되며, 8년에는 영국 에 유학하게 된다. 실로 순풍에 돛을 단 듯한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영국 체재중에 W. 스테드(Stede), 리스 데이비스(Rhys Davids)등과 같은 원시불교연구자의 영향을 받고, 11년 5월에 귀국했다. 大正 8년 부터 동11년까지 약 2년반에 걸친 유럽 체재 중에 그는 앞서의 원 시불교사상론 과 阿毘達磨論의 硏究 를 脫稿했으며, 귀국후 동12년 아비달마론의 연구 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동시에 교수로 승진해 인도철학 제1강좌를 담당한다. 원시불교사상론 은 大正 10년 런던 교외에서 집필이 시작되어 동년말 베를린에서 탈고, 곧바로 원고가 일본에 보내져 인쇄 간행되었다. 이와 같이 기무라는 大正 10년대 초, 선진유럽의 학문을 전달하는 기수로 일본의 인도철학 불교학계에 화려하게 등장한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그의 원시불교사상론 에는 생기발랄한 血氣와 自負心이 고동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2. 이다. 중의 하나는, 불 타의 眞說을 대표하는 阿含部經典을 조직적 논리적으로 고찰하여, 말 그 책의 운 序 가 데 기무라가 주장하고 있는 것

印度哲學 제집 종 달 엮어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따라서 기무라의 意圖도 원시불교에 관한 사상적인 이론서를 구성하려고 하 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증명하려고 한 것은, 불타 자신의 입장은 소위 순수한 小乘도 아니고 또 순수한 大乘도 아니며, 소승도 대승도 또 그 양쪽도 될 수 있는 점을 구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 다. 이상과 같이 기무라는 먼저 이 책을 理想的인 이론서로 특징지움 으로써, 경전의 表層的인 言辭에 구애되는 문헌학적 해석의 진흙탕에 빠지는 것을 피하려고 했으며, 다음으로 그 내용의 大綱을 대승 소승 의 두 시점을 照鑑하는 구도 속에 놓고 불교사상의 전개를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자면 일 의 아비 마논서 로 달 서 말하는 아비 마 란 敎義에 관한 이론서 정도의 의미로, 이 문제의 원시불교사상론 은 전체 3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 편은 大綱論, 제2편은 事實的世界觀 ( 苦 와 集 의 2명제에 대한 논의), 제3편은 理想과 그 實現 ( 滅 과 道 의 2명제에 대한 논의)이다. 그리고 제 1편은 다시 方法論, 時代思潮論, 根本敎理論으로 나누어져 전체의 序論 的인 성격을 갖는데 대하여, 本論으로서 제2편은 四諦論 가운데 苦集 론 즉 원시불교에 있어서 認識論을 고찰한 것이며, 제3편은 같은 사제론 가운데 滅-道 론, 즉 원시불교의 實踐論을 고찰한 것이다. 기무라가 원시불교사상론을 전개하는데 있어 核心을 불타의 사제 출발하고 있는 것은 특히 주의할 필요가 있지만, 당면의 과제인 무명에 대해서는, 제2편 사실적세계관 의 제5장 특히 十二 론에 두고 緣起에 대하여 에서 거론되고 있다. 즉 거기에서 무명은 원시불교의 련 人間苦에 관 되는 사실적 세계관 의 一例로서 거론되는 것이다. 기 무라가 말하는 사실적 세계관 의 내용은 반드시 명확한 것은 아니지 쨌든 인간의 苦 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어 내용을 전개시키고 중요한 것임은 틀림없다. 만, 어 있는 것으로, 후의 논쟁 경과를 吟味할 때 : 中略 원시불교의 연기설에 대한 일반적 해설

번역 이태승 의 功過 近代 日本 佛敎學 기무라 다이켄 無明 論의 의미 이상의 것을 염두에 두고 기무라의 연기론을 보기로 하자. 그에 의하면, 원시불교의 연기설은 대체로 다음의 세가지 입장에서 해석 될 수 있다고 한다. 먼저 첫째는 현실생활에 있어서 相互依存 관계를 心理活動의 樣式에 기초하여 고찰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둘째는 우리 들의 일생을 生命活動이 전개되는 과정으로서 설명 해석하는 입장이 며, 세째는 소위 分位說로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輪廻의 상태를 분 명히 한 것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기무라에 의하면 첫번째 입장으로부터 후에 般若나 華嚴의 사상이 나타나고, 두번째 입장에서는 唯識思想이,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입 3. 장에서는 소승교의 三世兩重觀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달리 말하면, 제1의 입장은 연기 를 現象에 卽하여 관찰하려고 며 려 해도 좋다. 그렇다고 한다면 제3의 입장은 동일한 연기를 時間(歷史) 에 卽하여 透視하려고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불교의 근본문제 중의 하나인 연기 를 고찰하는 데 있어 현상 생명 시간의 세가지 방 법적 視點을 제출한 기무라의 견해는 포괄적이며 동시에 타당한 것 이라 생각되지만, 그중에서도 그가 특히 제2의 입장 즉 생명활동의 전개라는 시점을 가장 중시하고 있는 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에 따르면 제1(現象論)과 제3(時間論)의 해석은 경전의 表面的인 言說 로부터 곧바로 추론할 수 있지만, 제2(生命論)의 해석은 소위 제1과 제3의 해석을 止揚한 위에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제2의 해석적 입장이야말로 원시불교사상의 根幹을 후의 대 소승사상에로 연결시키는 가장 有效한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연기 의 세계를 생명활동의 전개라고 하는 구도속에서 파악하고, 아울러 著者가 그 생명활동의 始原에 무명 이라는 근본명 제를 두고 있는 것은 극히 印象的이다. 즉 무명이 연기 라고 하는 체 계의 출발을 장식하는 명제에 그치지 않고, 원시불교 그 자체를 전개 시키는 發生基盤으로, 더 나아가 불타의 종교활동을 지탱하는 숨은 母胎라고 하는 확신이 저자에게 있는 까닭이다. 굳이 말한다면, 무명 것은 하는 것이, 제2의 입장은 그것을 生命에 卽하여 보 고 한 것이라

印度哲學 제집 테마는 기무라 다이켄의 원시불교사상론 전체를 방향 지웠으 며, 그 논리전개에 있어 나침판과 같은 역할을 하였고, 그것이야말로 저자의 불타관에 대한 출발점을 나타내는 테마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이란 수 없다. 먼저 제1로 무명 이란 煩惱의 根元 으로, 모든 힘에 의해 우리들의 의식활동이 生起하며, 그 활동이 마침내 인간의 성격을 형성하고, 미래의 인간을 규정해 간다. 그 경과를 業 의 相續廻轉 이라고 한다. 이어서 제2로, 이와 같은 무명을 知的으로 이해하면 無始의 無知 를 가리키지만, 이 것을 생명론과 관련시켜 생각하면 情義的 意義 가 생겨나게 된다. 즉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살려고 하는 意志 (Wille zum Lebe n)이며, 이 의지는 본성상 盲目的인 것이다. 요컨대 우리들에게 생명 활동이 있는 것은 根底에 無始以來의 盲目意志 가 작용하고 있는 까 닭인 것이다. 제3의 논점은 불타가 말하는 무명이 한편에서는 원시불교의 근본 생명인 四諦 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즉 기무라에 의하면 因緣의 根元 을 가리킨다. 이 무명의 사제 의 교리가 설해지기 이전, 즉 불타가 이 세상에 나타나기 이전 래 끊임없이 이어져 온 衆生의 無明 을 포함한다고 하는 것이다. 무명은 이와 같이 무시이래의 起源을 갖는 것이지만, 그러한 까닭에 맹목의지 라는 별명에 낙인 찍혀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제4로서, 이 무명 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그는 제시하고 있다. 즉 우리들의 생명활동은 소위 이와 같은 무명의 範圍를 벗어나 지 못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불타에 의하면, 우리들의 본질은 이 무 명이라고 하는 맹목의지로부터 叡智로서 解脫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우리들의 인생이란 무명에 의거하는 本能意志와, 이것을 벗어나 순수 한 精神生活에 들어가려고 하는 智慧와의 鬪爭 에 지나지 않는 것이 다. 달리 말하면 意志肯定의 세계에 나타나는 輪廻界의 법칙과 意志否 定의 과정에 나타나는 解脫界의 법칙간의 葛藤 超克의 드라마에 지나 의 무시이 로 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켄 무명 론의 要 사상내용을 생명활동 의 이상이 원시불교사상론 에 전개되는 기무라 다이 - 點이다. 원시불교에 있어서 연기 무명 의

번역 이태승 의 功過 近代 日本 佛敎學 려 핵심이다. 소위 제1의 현상 방법과, 제3의 시간론적인 방법을 止揚한 제2의 생명 심리론 적인 방법으로부터 파악하는 다이나믹한 연기-무명 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기무라 다이켄은 불타가 설한 연기의 시스템을 觀 照的인 인식으로 파악된다고 생각하는데 만족하지 않는다. 또한 단지 시간의 흐름 속에 有爲轉變하는 만상을 諦觀하는 것에도 동조하지 않 는다. 연기라고하는 복잡한 현실을 응시할 때 그의 시선은 내부로부 터 분출되는 과도한 衝動에 이끌려 마침내 그 한 곳에 멈추어진 것 이 아닐까. 그가 말하는 생명활동 의 근원과 그 전개라는 명제는, 불 타의 연기론과 사제론이 생생히 살아있는 肉身을 관통하는 大動脈과 같이 비추어졌음에 틀림없다.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해도 지장이 없다 고 한다면, 그가 말하는 무명-맹목의지 의 論議는 그 원시불교사상 론 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테마로, 소위 성립근거를 나타내 보이는 알파와 오메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개 속에서 파악하 고 한 것이 論旨의 론적인 우이 와츠지 反論의 背景 이 기무라 다이켄의 문제제기는 당시의 학계를 刺戟하는데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예상대로 그에 대한 반론 공격이 나타났 다. 첫번째가 大正 14년 宗敎硏究 1월호에 발표된 아카누마 치젠(赤 沼智善)의 十二因緣의 傳統的 解釋에 대하여 라는 논문이고, 두번째는 같은 해 잡지 思想 제3호에 발표된 우이 하쿠주의 十二因緣의 解 釋 緣起說의 意義 라는 논문이다. 그리고 다음해 大正 15년에는 동 일한 잡지 사상 에 7월부터 9월에 걸쳐 와츠지 테츠로의 비판 논문 4. 原始佛敎의 緣起說 이 게재되기에 이른다(이 一連의 논문은 改訂을 거쳐 렇게 하여 원시불교 의 연기설 本質에 관해 정면으로 대립하는 논쟁이 갑작스레 등장하 었 原始佛敎의 實踐哲學 제2장 緣起說 에 수록되 다). 이 게 된 것이다. 이 당시 암암리에 서로간의 양해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大正 14

印度哲學 제집 년의 우이의 논문과 동15년의 와츠지의 논문이 기무라 비판에 대한 방법과 논리에 있어 거의 동일한 입장에 있었다고 하는 점은 주의해 야 할 점이다. 그리고 이 우이 와츠지에 의한 비판논문의 基調는 실 로 기무라의 사상적 根底와 妥協을 허용치 않는 대립을 보이고 있었 으며, 또한 여기에는 원시불교의 근본이해에 대한 대립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점에서 우이 와츠지의 비판은 앞서의 아카누마 치젠의 비 판논문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本論의 의 도도 기무라와 우이 와츠지 사이에 드러난 대립의 의미를 고찰하려 고 하는 것으로, 아카누마설에 대한 검토는 여기에서 생략하기로 한 다. 켄 츠 협 허용치 않는 극히 冷酷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음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 래서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戰列을 재정비하여, 나아가 반론을 제기 했다. 그것이 昭和 2년(1927) 종교연구 1월호부터 5월호에 걸쳐 게 재된 原始佛敎에 있어서 緣起觀의 展開 특히 赤沼 宇井 和辻 諸敎授 의 說을 읽고 라는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기무라는 자신의 논의에서 발견된 缺點을 언급하고, 비판자의 냉엄한 지적에 敬意를 표한 뒤 나 아가 감사의 뜻마저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서서히 방향을 돌려 반론의 항목을 제시하며 逆襲으로 나오고 있다. 이 반론과 역습은 때 로는 直進하며 때로는 迂廻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카누마의 설보 다도 우이 와츠지의 설에 돌려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보다 구체적 으로 말하면, 우이 와츠지의 설 가운데 특히 와츠지의 설을 강하게 의식하며 논술하고 있는 것이 行間 사이에서 전해져 온다. 기무라는 종교연구 에 반론을 써가면서 자신의 진정한 敵 이 다 름아닌 와츠지 테츠로임을 직접 느꼈음에 틀림없다. 또 그는 와츠지 설의 논리가 자신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爆彈과 같음을 의식하고 있 었으며, 더우기 자신의 진정한 적인 와츠지의 背後에 우이라고 하는 무서운 裝甲車가 도사려, 와츠지에 강력한 應援射擊을 가하고 있음을 直感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전개되는 적의 陣營이 실로 二重의 포위망으로 비 쳐졌을 것이다. 이 포위망은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자신을 기무라 다이 이 이 우이 와 지의 비판을 사소한 타 도

번역 이태승 의 功過 近代 日本 佛敎學 괴 키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 때 기무라는 이 포위망의 떤 執念과도 같은, 라이벌의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음을 느끼 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이 과연 맹목의지이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어 쨌든 이 의지 의 所在를 분명히 하는 전제로서 여기에서 그것에 관 한 주변의 문제를 약간 더듬어 보기로 한다. 파 시 는 不吉한 뒤에 어 기무라 다이켄과 우이 하쿠주 앞에서도 보았듯 기무라 다이켄이 원시불교사상론 을 간행한 것 은 大正 10년이지만, 이 때 그는 동경제국대학 문과대학의 조교수이 었다. 하지만 2년 뒤인 大正 12년, 아비달마론의 연구 로서 문학박 사 학위를 받고, 같은 해 3월 교수로 승진해 인도철학의 제1강좌를 담당하게 되었다. 명실공히 일본 인도철학 불교학계의 中樞적인 자리 에 앉게 된 것이다. 이 기무라라고 하는 중추적인 인물에 대해 우이 하쿠주가 비판을 가한 것이 그로부터 2년 뒤인 大正 14년이며, 이어 서 와츠지가 공격전선에 가담한 것이 동15년이었다. 하지만 이 大正 14년의 時點에 우이 하쿠주는 학계의 어떤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는가. 그는 당시 갓 신설된 東北帝國大學의 교수로 인 도학 제1강좌를 담당하며, 멀리 仙台(센다이)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大正 14년의 와츠지 테츠로는 멀리 서쪽의 京都大學에서 강사로 부터 조교수로 막 승진한 상태이었다. 당시 우이는 43세, 와츠지는 3 6세, 그리고 기무라는 우이보다 한살 많은 44세이었다. 이 세사람 사 이에 보여지는 연령의 差, 제국대학에 있어서의 각각의 布陣, 그리고 東京 仙台 京都라고하는 지역적인 거리라고 하는 3요소가, 오늘날 우 리들 눈으로 보아도 그들의 논쟁에 絶好의 무대효과를 연출하는 결 과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좀더 蛇足을 덧붙여 보기로 한다. 지금 기무라가 우이보다 불과 한살 위의 同年輩라고 하였지만, 이 두사람은 동경제 국대학에서 거의 동시기에 인도철학을 배운 同期生이기도 하였다. 하 지만 이 동기생은 젊은 청춘의 시기에 동일한 길을 걸었던 것은 아 5.

印度哲學 제집 쿠 년 니다. 우이 하 주는 明治 39 (1906)에 第一高等學校를 거쳐 동경제국 편 기무라 다이켄은 거의 같은 시기 대학의 문과대학에 들어간다. 한 종 에 조동 대학을 거쳐 동경제국대학 문과대학 選科生이 된다. 正科生 차이는 있지만, 둘은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 아래에 서 인도철학을 전공하고 명치42년 7월에 동시에 졸업하게 된다. 이 졸업에서 기무라는 銀時計를 恩賜받고 이어 特選給費生이 된데 반하 여, 우이는 대학원에서 연구를 계속하며 한편으로는 曹洞宗第一中學 林의 敎諭를 겸한 뒤, 다음해 43년 조동종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이 것도 한 발 앞서 조동종대학에 있었던 기무라가 동경대학의 강사로 옮겨간 까닭에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다. 조동종대학의 專任이 된 우이는, 大正 2년 9월에 동대학 강사인 채 로, 曹洞宗海外留學生으로서 유럽에 유학한다. 처음에 독일의 튀빙겐 대학에 들어가 베다학의 大家인 가르베 교수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동3년(1914) 8월에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영국으로 간다. 이후로 는 거의 홀로 연구를 계속했으며, 런던에 1년, 옥스포드에 반년, 케임 브리지에 1년반 체재한 뒤, 大正 6년 7월 영국을 떠나 인도를 거쳐 1 1월에 귀국한다. 그 사이에 조동종대학 교수로 승진했으며, 大正8년 9월에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강사를 겸임하게 된다. 그러면 그 당시 기무라는 어떠했는가. 앞서 보았듯, 그는 大正 元 年에 문과대학의 강사에 위촉되어 3년에 印度哲學宗敎史, 4년에 印度六派哲學 을 연이어 간행하여, 동5년 6월에는 後者의 저술로 恩 賜賞을 받았다. 우이가 유럽에서 고생을 하면서 가난한 유학생활을 보내고 있을 때, 기무라는 실로 순풍에 돛단듯 출세가도를 달려 그 결실로서 동6년 문과대학 조교수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이 해에 우이 하쿠주는 거의 4년에 걸친 歐州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조동종대학의 교수가 되었던 것이다. 입장이 바뀌어 2년 뒤에 기무라는 후배인 우이가 걸은 길을 더듬 어 유럽으로 떠난다. 앞서 말했듯 大正 8년 10월 영국에 유학하여 리 스 데이비스 부부와 스테드 교수를 만나 東西를 대표하는 학자간에 啓蒙期의 阿含硏究를 둘러싼 논의의 불꽃이 타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가 아비달마의 연구 와 원시불교사상론 이라는 2개의 成果를 손 과 선과생의

번역 이태승 의 功過 近代 日本 佛敎學 귀국한 것이 동11년 5월이었다. 운명은 우이와 기무라의 두 라이벌에게 公平한 미소를 던지면서도 심술궂은 갈등의 씨를 뿌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즉 기무라가 귀국하기 1년전 우이는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기무라 가 귀국한지 1년 뒤인 동12년 4월에 신설된 동북제국대학의 교수로 轉出되어 仙台로 떠난 까닭이다. 이에 반하여 귀국후의 기무라는 아 비달마론의 연구 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그것을 계기로 12년 3월 동경제국대학 교수로 승진했다. 이렇게 보았을 때 기무라와 우이는 동경제국대학에 입학한 當初부 터 얼마나 격렬한 勝負속에 던져져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1년 선배 인 기무라가 조동종 대학으로부터 들어온 선과생이었던 것에 대하 여, 우이는 一高로부터 東大에 곧바로 들어왔다. 그렇지만 기무라는 그 화려한 활약에 있어 우이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歐州에서의 유학생활은 우이가 기무라보다 앞섰다고 하지만 귀국후 제국대학에서의 지위에 비교하면 기무라 쪽은 거의 약속되어 진 듯한 王道를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무라가 東京이라는 중심지 를 근거지로 정했다면 우이는 東北의 변경지방에 거주하게 된 것이 다. 이렇게 하여 시기는 점차 성숙해지고 있었고, 남은 것은 억눌린 갈등의 불씨가 점화될 순간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와 같은 때 기무라 다이켄의 원시불교사상론 이 등장했으며, 그리고 이 두사람 사이의 갈등의 폭발이 원시불교의 연기설 을 둘러싸고 찾아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무라가 東大 교수로 취임한 2년 뒤 大正 14년이 되 어 연기설 의 이해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惹起된 것이다. 학계에서 의 새로운 布陣이 정해지고, 학문상의 경력에 위험한 균형이 평형을 되찾았을 때, 젊은 학문의 獅子들은 마침내 학문 그 자체를 위해, 학 문 그 자체가 요구하는 논리에 따라 상대의 學說에 대해 공격 타도 를 목표로 일어난 것이다. 에 들고 그리고 여기서도

印度哲學 제집 우이에 共鳴하는 와츠지 테츠로의 마음 이 폭발의 시기에 仙台에 있는 우이에게 멀리서 呼應하는 소리가 있었다. 때를 기다려 자신의 소리를 내기 시작한 우이에게 전면적인 支持의 聲援이 보내졌다. 경도대학 조교수로 막 승진한 俊才 와츠지 테츠로에 의한 성원이었다. 그는 이미 大正 2년에 니체 硏究 를 저 술해 識者層의 주목을 끌어, 新進 氣銳의 철학자로서 頭角을 나타내 고 있었다. 그 와츠지가 京都에서 상당히 먼 仙台의 우이에게 신호를 보내, 중 앙에 있는 기무라 다이켄의 원시불교사상론 에 도전의 화살을 보낸 것이다. 여기에서 와츠지가 一高로 부터 동경제대 철학과에 진학하 여, 우이와 같은 길을 걸어 학자가 된 것을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그는 학생시대 제2차 新思潮 의 同人으로서 오사나이 가오루(小山內 薰)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와 활약하고,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 의 面識을 얻어 漱石山房에 출입을 하고 있었다. 그 와츠지가 지금은 東京을 떠나 京都로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 변경의 지역에 流配되었다는 의식은 아마도 없었겠지만, 하지만 中央으로부 터 떨어져 있다고 하는 의식마저 전혀 없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거짓 말일 것이다. 어쨌든 京都에 있던 와츠지가 이 때, 學問 상에 있어서 仙台의 우이에게 共鳴 共感함과 동시에 心理 상에 있어서도 동북변경 지역에 물러나 있는 우이에 대하여 뜨거운 애정을 보이는 상황에 놓 여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堅固한 挾攻態勢는 갖추어진 것이다. 이것을 어떻 게 부르면 좋을까. 邊境인 동북과 斜陽의 경도로부터 新都인 동경에 우뚝솟아있는 동경제국대학의 기무라에 照準을 맞춘, 아카데믹한 학 문 분야에 있어서 협공태세 그리고 이 완벽한 협공태세는 인간의 심리 상에 있어서도 執拗한 협공태세를 나타내 보였다. 하지만 실로 얄궂게도 이 운명의 장난에 조종되어 만들어진 협공태세는 마침내 우연한 사건에 의해 자연히 해소된다. 왜냐하면 이 학문상의 삼각관 계에 있어 頂点에 서있던 기무라 다이켄이 昭和 5년 5월 16일에 心臟 狹窄症으로 졸지에 세상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나이는 불과 50세. 6.

번역 이태승 의 功過 近代 日本 佛敎學 너무나도 일찍 찾아온 우연한 죽음이었다. 논쟁 이라는 이름 래 만들어진 무대의 緊張이 급속히 그 密度를 잃고, 주인공이 없어 진 드라마는 빠르게 終焉을 告한 것이다. 기무라가 죽은 뒤, 곧바로 우이가 동경제국대학의 교수로 부임해 인도철학 제1강좌를 담당하고, 다음해 5월에는 主著 印度哲學硏究 6권의 業蹟으로 帝國學士院賞을 수상했다. 또 와츠지 테츠로도 독일 유학을 마친 뒤 昭和 9년 동경제국대학교수로 부임해 오랜기간에 걸 친 京都流配의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우이와 와츠지는 기무라가 없 는 동경에서 오랫만에 재회를 하게 된 것이다. 이때 地下에 잠들던 기무라 다이켄은 地上의 인생무대에서 필쳐지는 맹목의지 의 絶妙한 攝理에 嘆聲을 지르지나 않았을까. 혹은 거기에 우이와 와츠지가 주 장했던 것처럼 역사발전의 論理的 痕迹만은 인정해야 한다고 諦觀하 고 있지나 않았을까. 그것은 아 우이 와츠지 緣起觀의 地平 아마도 본론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던 것 같다. 기무라와 우이 와츠 지 논쟁의 요점에 들어가기 전에 그 背景에 대한 記述에 너무나 紙面 을 割愛한 것 같다. 하지만 이 배경에 대한 기술과 할애는 그들의 논 쟁상의 發火點에 있어서 갈등의 濃度를 測定하는 데에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기로 한 7. 다. 켄 와츠지의 비판 요점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원시불교에 있 어서 연기관의 眞意는, 주어진 현실의 생활에 대하여 그것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論理的으로 糾明하는 데에 있다. 그것은 아카누마 치 젠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輪廻의 상태를 시간적으로 규명하려고 하 는 것도 아니며, 또 기무라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생명발전의 전개상 태를 분명히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와츠지에 의하면 연기설 기무라 다이 의 생명 심리적인 관점에서의 연기설 에 대해 우이 에 있어서 各支의 관계는 원시경전에는 六支, 九支, 十支, 十二支의

제집 印度哲學 분석적 관찰등이 아니라, 法과 法 사이에 있어서 논리적 관계 근거지우는 관계 를 분명히 하려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연기관이 설해지고 있다 기무라가 말하는 생명 심리적인 사실에 대한 하는 것이다. 츠 나아가 와 지는 이 법과 법 사이에 있어서 논리적 관계를 해석하 령 十二緣起에 있어서 生 이라는 것은 결 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 코 태어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기는 것 일반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은 독일어의 Entstehen에 해당하는 개념 이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老死 라고 하는 것은 생리적으로 늙고 죽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지나쳐 가는 것 일반, 즉 Vergehen의 뜻이 라고 해석한다. 기무라의 생명 심리론적인 해석을 배척하고 논리적 분석적 해석을 그곳에 대치시키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견해를 주장할 때, 小論의 당면한 주제인 무명 츠 석 하여 이 두사람이 기무라가 말하는 맹목의지 론을 정면으로 반대하 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요컨대 12연기의 무명 은 우이에 의하면, 佛陀의 근본사상을 모르는 것 이며, 이와 같이 이 불타의 근본사상을 모르는 인간의 心行 이 어떠한 구조로 되어 있는가를 논리적으로 조 직하려고 하여 十二緣起가 성립한 것이라고 한다. 똑같이 와츠지도 또 이 우이설을 그대로 繼承하여, 무명 이란 無常과 四諦의 理致를 모 에 대하여 우이와 와 지는 어떠한 해 을 내리고 있는가. 그것에 대 르는 것 즉 一切法에 대하여 무지한 凡夫의 입장을 말하는 것으로, 달리 말하면 그 自然的 立場 에 있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와츠지에 의하면, 원시불교에 있어서 法을 본다 라고 하는 것은 이 자연적 입 월 장 을 초 하여 主客이 없는 無我의 입장에 서서 그 자연적 입장을 법 그 자체를 直觀하는 것이다. 이 직관에 있어서 무 며 건 워진 일체 법이 이 明=깨달음에 있어서 멸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우이와 와츠지가 원시불교에 있어서 연기관을 먼저 인간에 있어서 認識의 靜的인 지평으로 돌려 해석하려고 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즉 기무라가 그것을 인간에 있어서 생명활동의 動的 인 지평에서 재구성하려고 한 것에 대하여, 世界와 現象을 논리의 尺 가능하게 하는 명이 멸하고 明의 입장이 나타나는 것이, 무명에 조 지

번역 이태승 의 功過 近代 日本 佛敎學 방법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 결과 무명이란 근본불 규정성에 대한 무지라고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우이 와츠지의 비판 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기무라의 방법에 대한 정면공격을 의미하는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또 그것은 원시불교사상론 자체의 존 재이유를 잃게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을 기무라가 容易하지 않은 도전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대로 放置 하면 마치 몸에 붙은 불이 피부를 태워 骨髓에 도달하는 것과 같은 불안감이 그를 감쌌음에 틀림없다. 度로 파악하는 교의 입장에 대한 無知, 세계와 현상에 관한 논리적 상호 기무라 反論의 根幹에 있는 것 이렇게 하여 기무라는 곧바로 反擊의 준비를 갖추어 즉각 昭和 2 년 종교연구 1월호부터 5월호에 걸쳐 原始佛敎에 있어서 緣起觀의 전개 특히 赤沼 宇井 和辻 諸敎授의 說을 읽고 라는 논문을 쓴다. 장 기간에 걸쳐 渾身을 기울인 반론이었다. 거기에서 먼저 論難者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자신의 방법상의 특 징을 새삼 開陣 强調함과 동시에 비판논문의 내용을 摘記 要約하면서 8. 서서히 반론을 전개해 간다. 일반적인 학문상 반론이라 하더라도 때 배후에 논리를 逸脫하는 감정의 가시가 숨겨진 경우 중 것은 아니나, 그 가운데에 가령 다음과 같은 말은 독자를 놀라게 한 로는 그 言說의 도 있다. 기무라의 반론 에도 물론 그와 같은 言句가 보여지지 않는 다. 솔직히 告白하면 특히 와츠지씨의 緻密한 논리주의적 해석에 대해서는, 깊게하고, 더우기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유행의 사상과 결부시키려고 한 시도에 있어서는, 나의 嗜好上에서도 讚美하고 싶 은 느낌이 든다. 적어도 불교사상을 보다 츠 테츠로에게 阿諂을 떠는 말이 아님은 말 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기무라는 그 뒤 와츠지의 論據에 대하여 一 이것이 對論者인 와 지

印度哲學 제집 격 렇 步도 양보하지 않는 반 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면 위의 순 낸 문장이 단 히 기무라의 謙讓과 寬容의 마음을 나타 다고 하는 것 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당시 기무라의 츠 복잡한 心事를 추측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적어도 그가 당시의 와 지에게 畏敬의 생각을 가 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와 같은 기무라의 一見 이상스럽다고 응답의 태도에 대하여, 그 후 와츠지가 어떻게 應酬했는가는 후에 보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순서상 기무라의 반론을 짚고 넘어가 지고 있 해야 할 기로 한다. 먼저 제1로 우이 와츠지는 기무라의 해석이 嚴密한 문헌비판에 서 츠 적 이론적인 兩面에 있어서는 물론 原始佛敎를 貫通하는 根本氣分 으 로부터도 그것이 유일한 근본해석법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라고 한다. 그것은 외견상 극히 綿密한 考證을 거치고 있는 것과 같 이 보이지만 실은 일종의 先入觀에 근거한 해석법이며, 獨斷的 요소 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제2는 그중에서도 와츠지 테츠로가 주장하는 연기설의 논리적 관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우이 와 지의 주장도 문헌 계에 대한 문제로, 연기를 法과 法 사이의 논리관계로 파악하는 그의 주장은 칸트의 소위 範疇의 사고방식과 가까운 것으로, 十二緣起說을 구체적인 인생의 설명원리로서가 아니라 槪念的, 模型的으로 인생존 분명히 했다라고 하는 점에서 그것은 현저하게 칸트적 범주론에 기울어져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이것에 반하여 실제 로 연기를 설하는 경전 속에는 그러한 範疇論에 맞지않는 문장이 다 수 나타난다. 와츠지가 말하는 생기는 것 일반 Entstehen, 지나치는 것 일반 Vergehen의 개념에는 다양한 개념이 있어, 단순히 生理的 사실을 가리키는 언설도 보여진다. 따라서 와츠지의 이와 같은 칸트 적 범주론은 논리주의적 해석에 형편에 따라 再編된 虛構의 産物에 재의 양식을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다. 답한다. 무명이란 기무라에 있어서는 欲(taṇhā)과 함께 불교의 인생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十二緣起觀의 출발점을 이루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무 명이 生에 대한 맹목의지에 歸着한다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했지만, 그리고 제3으로 무명에 대한 비판에

번역 이태승 의 功過 近代 日本 佛敎學 츠 이것에 대하여 우이 와 지의 설은 불타의 근본사상을 모르는 것으 석 로, 세계현상의 논리적 구조에 관한 무지에 의거하는 것으로 해 했 다. 이것에 대하여 기무라는 말한다. 과연 경전에는 무명을 설하여 모르는 것이라 쓰여져 있다. 그렇긴 하지만 만약 이것 을 글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무명의 의미는 너무나도 淺薄한 수준으 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무명을 四諦의 이치에 대한 무지 라는 틀로서만 고찰한다고 한다면, 불타에 의해 사제의 法門이 아직 설해지지 않았던 이전의 중생들의 무명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애매해 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부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다름이 없는 것 이라 일컬어진 연기법칙 즉 연기의 恒常性이란 의미가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부처가 세상에 나온 뒤의 무명은 그렇다 하더라도, 나오기 전의 무명은 적어도 그것만으로는 四諦의 이치를 설명할 수 없는 缺點이 同伴하는 것이 아닌가. 한발 물러나 만약 불타의 근본사상이 법의 眞相이라는 의미로, 따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물 론 이것은 전보다도 深奧하고 올바른 견해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 라도 우리들 범부는 왜 법의 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그 無理解의 라서 무명이란 그것을 이해하지 根本動力이 대체 무엇인가를 論究하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츠 일이 아닌가.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우이설도 와 지설도 무엇이라 응답하기에 충분한 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그 중에 서도 와츠지설에 대해서는 그 자연적입장 에 있어서 무명을 논리적 으로 의미부여하고자 하여 그것에 선행하는 行 이 오로지 制約되어 진 것임을 보이기 위해, 단지 그 때문에 세워진 것이 무명이다라고 하는 결론을 유도하고 있다. 행 과 무명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단지 부 닭 개념적으로만 의미 여하는 까 에 이 되어지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9. 놀랄만한 천박한 결론이 유도 기무라와 와츠지의 應酬 기무라의 반론은 물론 이상 槪括한 것보다 훨씬 다양하지만, 그 根

印度哲學 제집 운 흥미로운 것은 첫째로 그가 원시불교를 관통하는 根本氣分 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 고 있는 점이다. 우이 와츠지설은 이 근본기분 에 근본적으로 背馳하 고 있다고 하는 것이 기무라의 直觀이다. 그러한 직관적인 인상을 솔 직하고 분명하게 내보이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이 직관 에 대하여 우이와 와츠지의 비판이 그 迫力을 잃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즉 그들은 불타의 종교체험에 대하여 마치 觀照의 哲人과 같은 태도로 임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 幹만을 주시하면 거의 이상과 같다. 그의 반론 가 데 다. 둘째는 기무라의 와츠지 비판이 요컨대 그 底邊에 깔린 방법의식 이 칸트의 범주론이 아닌가 라고 하는 점이다. 굳이 말한다면 칸트의 방법으로 과연 불교를 알 수 있는가, 불교의 근본기분 을 진실로 이 해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기무라는 그와 같은 표현을 츠 운 칸트적 사고방식의 反映을 탐 하고 있지는 않지만, 와 지설 가 데 래 지해 그 본 의 의미는 그와 같은 것이 아닌가 라고 하고 있는 것이 다. 셋째로 무명에 관한 논리주의적 해석의 淺薄性에 대한 문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불교의 근본기분 에 감추어진 무명의 문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역사와 인 간의 배후를 관통하는 무지의 根本動力, 이것이야말로 불교를 관통하 는 근본기분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 반론의 배후에 드려진 기무라의 信念이었던 것이다. 기무라 다이켄은 이 反批判의 글을 渾身의 힘을 다해 집필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러한 힘이 행간사이에서 鼓動치고 있는 것이 읽 고 있는 사이에 전해져 온다. 이 기무라의 반론에 대하여 우이 하쿠 주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와츠지 테츠로는 재빨리 예리한 반응 을 보였다. 기무라의 제1회째 반론이 종교연구 新4권 1호에 실린 것이 昭和 2년 1월호이었지만, 이것을 읽은 와츠지는 곧바로 思想 의 동년 4월호에 기무라 다이켄씨의 批評에 答함 이라는 글을 발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당시 기무라의 반론은 제1회째가 公表되었 을 뿐 未完이었다. 이 미완의 논문에 대하여 와츠지가 곧바로 붓을 그리고 제이다. 불타의 근본사상을

번역 이태승 의 功過 近代 日本 佛敎學 든 것은 그에게 유럽留學의 시기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비평에 답함 의 末尾에 南支那海에서, 3월 1일 이라고 쓰여져 있는 것에서도 당시의 事情을 엿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 와츠지의 반론이 직접적으 로는 기무라의 제1회째 반론에 대하여 쓰여졌다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도 와츠지 자신이 그것을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와츠지의 응답이 소위 기무라가 논의 하는 全體像을 향해 던져진 전면적인 비판의 화살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논증을 위한 紙幅은 현저하게 제한되어진 데 반하여, 와츠 지의 반론의 基調는 변함없이 한발자국도 양보하지 않는 斷乎한 기 분이 넘쳐 흐르고 있다. 학문상 學說의 충돌에 있어서 세세한 것은 양보하더라도 핵심은 死守한다고 하는 것은 상식으로, 또한 그것이 소위 논쟁이라고 하는 츠 외 었 략 며, 또한 그 핵심 부분을 차지하는 논리의 전개에 대해서도 이미 자 세히 소개한 까닭에 再論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이 와츠지에 의한 應酬의 글 가운데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가 두가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반드시 본론의 내용과 관계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들 것의 宿命일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기무라와 와 지의 논쟁도 물론 예 는 아니 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 세세한 점 은 생 하기로 하 논쟁의 深層的 의미를 생각하는 데 반드시 無益하지만은 않을 것이 다. 우이의 老獪, 와츠지의 血氣 그 첫번째는 이 應答의 글 序頭에서 와츠지가 우이 하쿠주를 위해 辨明하는 句節을 덧붙이고 있는 점이다. 즉 기무라는 그의 반론 가운 데 자주 우이 와츠지설이라 표기하여 비평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러 나 기무라 다이켄의 해석에 대하여 실제로 公開反擊 을 가한 것은 와 츠지로서 우이 하쿠주는 아니다. 본래 우이씨는 전혀 기무라씨를 言 及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이가 공격한 해석 가운데에는 기무라 의 해석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더라도, 그러나 기무라가 말하 10.

印度哲學 제집 석 청 든 내면적으로든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나(와 츠지)에 대한 반론은 당연한 것이지만 우이에 대한 반론은 달리 고려 는 것같이 우이가 기무라의 해 에 異議를 신 하는 것은 실제 논문 상에서는 표면적으로 해야 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츠 변명은 언뜻보아 당연한 듯 보인지만,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인가. 우이가 기무라의 이름과 그 학설을 직접 거론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 內心上에서도 기 무라 비판의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와츠지가 말하듯 우이에 의한 기무라에 대한 이의의 신청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을 뿐 더러 內面 상에도 나타나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詭辯에 지 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라는 疑懼心이 든다. 굳이 말한다면 그와 같 은 와츠지의 변명은 오히려 기무라에 대한 성급한 揶楡 아니면 수식 어와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의 우이는 연기설의 해석에 있어서 기무라와 자신이 정면으로 부딪치고 있음을 痛切히 느끼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와 같은 切迫한 상황이 그로 하여금 기무 라의 이름과 학설을 직접 거론하지 못하게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이가 기무라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 그의 學說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이의 침묵은 거의 禮儀의 영역을 벗어나 老獪의 경지에 달 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와 같은 우이의 신중한 태도에 비해 볼 때, 와츠지의 기무라 비판은 血氣에 넘치는 청년의 傲慢性마저 느끼 게 한다. 앞서의 와츠지에 의한 우이 변명의 論調도 그와 같은 오만 성이 느껴지고 있다. 또 흥미로운 두번째 문제는, 와츠지 테츠로가 기무라 다이켄의 방 법 해석을 평하여, 요컨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너무나도 많이 원시 불교에 注入시키고 있다고 말하는 점이다. 이것이 앞서 보았듯 기무 라가 와츠지의 방법 해석을 평하여 칸트의 範疇論에 빗대어 전개시킨 것이라고 한 指摘에 대한 반론으로서 나타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거듭 말하지만, 기무라의 비판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와 츠지의 연구는 우이의 論理主義的 解釋 을 이어 받아, 그 논리주의적 해석을 한층 더 논리화하고, 인식론화하여 소위 칸트의 범주론에 가 이 와 지의 우이에 대한 그러나 과연

번역 이태승 의 功過 近代 日本 佛敎學 운 곳까지 나아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더우기 기무라는 우이의 연구가 新칸트파에 의거하는 발레저(Walle ser;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수, 新칸트파 거두인 H. Rickert의 동료)의 해석 연장 선상에 있다고 하고, 그 입장을 와츠지도 또 繼承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와츠지의 논의를 칸트의 범주론과 新칸트파적인 방법에 기 초하는 논리주의적 해석이라고 斷言한 것이다. 이 기무라의 비판에 대하여 와츠지도 변명을 시도하여 그와 같은 판단이 일방적인 것임 을 강조하면서, 마지막으로 그와 같은 기무라의 立脚地야말로 완전히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의거한 것이라고 반격한 것이다. 기무라에 의하면 와츠지 해석의 難点은 원시불교를 관통하는 생명 적인 근본기분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하여 와츠지는 자신은 원시불교의 철학 가운데 내용이 없는 단순 한 論理的 形式을 발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가장 구체적인 살아있 는 現實의 파악을 구했던 것이라고 말한 뒤, 우리들(와츠지와 기무라) 사이에 있는 것은 단지 意見의 差異 등이 아니라 기무라씨의 理解力 에 관한 문제 라고 딱 잘라 말하고 있다. 이 기무라와 와츠지 사이에 오고간 應酬의 方式은 재미있다. 그리 고 그 응수가 상대의 입장을 칸트의 방법 및 쇼펜하우어의 방법으로 각각 규정하여 조직되어지고 있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도 그 들이 단지 두사람의 個性的인 학자 사이에서의 논쟁의 틀을 벗어나, 일본에 있어서 학문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兩者의 논쟁을 객관적으로 비교하여 읽어보면, 기무라가 쇼펜하우어 의 發想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본인 자신도 말하고 있듯 의심할 바 없다. 동일하게 와츠지의 글이 칸트의 방법을 강하게 의식한 것이라 고 하는 것도 누가 보아도 분명하다. 그와 같은 일종의 自負의 생각 이 兩者 모두 그 의식 속에 가지고 있었던 것도 틀림없다. 그렇더라도 한쪽이 다른 쪽을 칸트의 學徒라고 비평하자 맹열하게 逆襲으로 나와 너도 또 쇼펜하우어의 學徒가 아닌가 라고 하여 맞대 응한다. 자신은 단순히 칸트의 학도도 아니고 쇼펜하우어의 학도도 아니다라는 激昻된 말을 내뱉지 않고는 가만히 있지 못한다. 그것도 그들이 단순히 쇼펜하우어의 模倣者이거나 칸트의 祖述者라고는 조 까

印度哲學 제집 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에 의거하면서도 獨自 의 견해를 전개하고, 칸트에 의거하면서 創造的인 견해를 개척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우이 하쿠주는 그와 같은 형태의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警 戒하고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불꽃 튀는 논쟁의 현장으로부터 一線 을 긋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기무라의 이름과 학설을 직접 거론하 지 않고, 그러나 그 해석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려고 한 우이는 소위 학계에 있어서 處身方法이 한층 신중하고 동시에 老獪하였다고 말해 도 좋을 것이다. 그것에 비교해 볼때 기무라에 향해진 와츠지의 비판 정신은 그 논리의 直進을 믿는 혈기와 완벽한 솔직성에 있어서 눈에 띄는 바가 있다. 그리고 이 우이의 노회와 와츠지의 혈기가 기무라를 협공하여, 그의 학설을 거의 瀕死地境에 빠지도록 궁지에 몰았던 것 이다. 노회와 혈기의 악수가 쇼펜하우어류의 新解釋에 타격을 가해 학계에서 숨통을 끊을 정도로 威勢를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격투 의 背後에 칸트적 논리주의라고하는 이름의 守護神이 우이 와츠지에 의해 창조된 견해의 전개를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말할 것 도 없다. 암암리에 제출되어진 듯한 대립의 圖式 쇼펜하우어와 칸트의 이름에 빗대어 만들어진 대결의 도식 을 기 무라도 우이 와츠지도 너무나 단순한 도식의 유형인 까닭에 한마디 로 부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학문에 있어서 발상과 방법이라는 관점 에서 이것을 다시 보았을 때, 이 대립의 도식은 객관적으로 성립하지 않을 수 없는 진실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와 같은 대립의 도식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더라도 그것을 드러내고 분명히 하는 것을 불쾌히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논쟁상 비난공 격의 응수에 있어서 해당 논적을 서구 知性의 추종자라고 叱咤하는 것만큼 애처럽고 동시에 자극적인 행위는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기 무라도 와츠지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애처럽고도 자극적인 행 위에 어느 사이엔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서

번역 이태승 의 功過 近代 日本 佛敎學 쇼펜하우어와 칸트의 位相 기무라가 쇼펜하우어에 依據하고 와츠지가 칸트에 의거하여 논을 세운 것은 그들의 논쟁이 처음부터 勝負를 豫告하고 있었던 것이기 도 하다. 왜냐하면 시대의 정신은 압도적으로 칸트적 思考에로 기울 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정신은 그들 논의를 초월하여 작 용해, 논쟁의 결과마저 左右하고 있었다. 쇼펜하우어에게는 칸트를 凌駕하는 가능성이 숨겨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승부 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主著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 가 일본에 처음 번 역된 것은 明治 43-45년이었다. 이 번역자는 奇妙하게도 기무라 다이 켄의 恩師 가운데 한사람인 아네사키 마사하루(姉崎正治)로서, 이때는 意志와 現識으로서의 世界 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니시오 간지 (西尾幹二)에 의하면 일본에서 쇼펜하우어가 유행한 것은 明治 중기부 터 大正에 걸친 시기였다고 한다( 쇼펜하우어의 思想과 人間像, 세계의 名 11. 쇼펜하우어, 中央公論社). 著 먼저 모리 오가이(森鷗外)가 舞姬 (明治 23년)와 妄想 (明治 44년)에 름 란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 오가이(鷗外)의 글을 후에 아쿠다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는 유서격으로 쓴 어느 친구에게 보내는 手記 (昭和 2년)속에서 인용하고 있다. 또 오구리 후요(小栗風葉; 靑春 明治 38 년)와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 妻 明治 41년)도 쇼펜하우어에 관심을 보이며, 그의 戀愛論에 대해 소설의 주제를 전개시키고 있다. 거기에 서 쇼펜하우어는 肉欲과 本能을 긍정하고, 연애에 冷笑를 보내는 페 시미스트로 등장하여 女性蔑視論의 대변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한 사회풍조 속에서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가 아네사 키에 의해 大仰, 深刻, 莊重, 悲慘感 넘치는 文體 (西尾)로 번역되어 일본의 好奇스런 독자층에 제공되어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肖像이 점차 偏見과 歪曲에 사로잡혀 간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위에 이 憂愁의 哲人 에 관한 편견과 과장은 그의 철학상 주제 를 둘러싸고도 增幅되어졌다. 그것도 그의 주저에 전개된 맹목의 충 서 그의 이 을 거론해, 自殺과 無에 대해서 논하는 憂愁의 大哲人이

印度哲學 제집 억제할 수 없는 성격의 것으로, 따라서 그 맹목의지에 적극성을 보이는 그의 사상은 독일 非合理主義 系譜에 속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독일 비합리주의의 계 보가 칸트로부터 헤겔에 이르는 理性을 존중하는 독일 觀念論의 王道 와는 대조적으로 傍系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으로서 평가되어진 것도 어쩔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학문도 또 이 王道 를 추종하고, 비합리의 정신을 排斥하여 이성적인 實證精神에 우위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스스로의 형성을 보려고 하고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 동인 意志 는, 인식을 缺한 다. 쇼펜하우어가 당시 약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여진 데에는 앞서 의 원인 외에도 더욱 중요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즉 의지와 표상 으로서의 세계 는 그 序論에서 부터 칸트의 체계를 祖述하는 형태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지만, 後段에 이르면 인도철학의 諸命題를 약간은 억지로 자기 학설에 끌어들여 해석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그것을 상세히 살펴볼 여유는 없지만, 쇼펜하우어는 한편에서는 칸 트의 學徒 혹은 祖述者인 것을 표방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東洋의 難解한 형이상학적 사변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양다 리를 걸친 듯한 곳에 쇼펜하우어의 학설상 매력도 있고 생명도 담겨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소위 칸트파의 理性尊重 계보로부터는 嫌 疑와 不快한 눈초리로 보여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쇼펜하우어와 칸트 사이에 보이는 哲學的 위상의 차 이는 그대로 기무라 다이켄과 와츠지 데츠로 사이의 學問的 위상을 결정하는 데에 실로 어쩔 수 없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쇼펜하우어 가 혐의와 불쾌의 눈초리로 보여졌듯 기무라 다이켄도 또 와츠지와 그 배후에 있는 칸트파의 時代精神에 의해 움츠러들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후 일본의 학문상 인도철학 불교학 연구의 주류가 한결같 이 西歐直輸入의 文獻實證主義, 우이 와츠지류의 論理尊重主義의 계보 속에서 鍛鍊되고 陶冶된 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쇼펜하우어=기무라 의 二人三脚에 의한 사고체계가 의심할 여지없이 頹落의 末路를 맞았 을 것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번역 이태승 12. 의 功過 近代 日本 佛敎學 근대 스노비즘을 넘어서 출 처 은, 단적으로 말해 한쪽에 있어서 기무라 다이켄 학설의 철저한 抹殺 과 그것에 대신하는 다른 쪽의 와츠지(혹은 우이 와츠지) 학설의 압도적 인 번영이라는 跛行的인 斷層의 흔적이다. 이것은 원시불교사상에 관 한 논리주의적 해석이 그 생명 심리적인 해석을 압도하고, 마침내는 그것을 窒息시키는 과정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기 하다. 원시불교 연 기설의 기반을 무명 이라는 魔力的인 맹목의지 속에서 구하려고 하 는 기무라의 방법이 부정되고, 동일한 연기설의 구조를 논리적 반성 의 사고체계 속에서 靜態的으로 파악하려고 한 우이 와츠지의 방법이 正統으로 인정되어져 온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칸트가 승리하고, 쇼펜하우어가 패배한 것이다. 칸 트의 아폴로적인 理性이 칭송받고 쇼펜하우어의 디오니소스적인 意 志가 추방의 고통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정은 단지 인 도철학 불교학 분야의 문제로 그치지 않았다. 그와 같은 選擇意志는 철학과 논리학의 학문분야에 있어서도 自明한 이치로 간주되어 의식 적 무의식적으로 일본의 아카데미 그 자체의 王道로서 활보하게 된 까닭이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그와 같은 軌道의 설정이야 말로 일본의 근대라고 하는 것 자체의 운명을 鮮明히 상징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實證性이라는 기치아래, 客觀性이라는 이름의 金 科玉條를 방패삼아 일종의 理性信仰 論理信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 념체계가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다. 일본 근대의 인도철학 불교학 연구는 실로 일시에 이 이성신앙 과 논리신앙 이라는 權威의 언덕에 쇄도하여 그곳에서 스스로의 安息處 를 구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길을 닦은 사람이 우 이 하쿠주이며, 그에 대한 계몽과 보급에 절대적인 威力을 떨친 사람 이 와츠지 테츠로이었다. 이 방법과 사고는 점차 학계의 주류를 형성 하고 소위 학문상의 공통된 상식 즉 定說의 지위를 획득하기에 이르 반세기라고하는 시간의 경과가 연 해 보인 偏向이란 상 의 흔적 른 것이다. 금 람 느 지 까지 이 상식과 정설의 有效性을 의심하는 사 이 대체 어

印度哲學 제집 었 오늘날 이 상식과 정설의 권위에 의문을 던지 람 느 정도 있을까. 일찌기 있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현재 있다 하더라도 그 수는 매우 적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반세기에 걸친 이성신앙 과 논리신앙 의 推移를 지켜볼 때 필자는 일본 근대에 있 어서 인도철학 불교학 연구의 넘기 어려운 스노비즘(snobbism ; 사이비 신사, 학자연체 함, 속물적 행위의 뜻, 역자註)과 오포츄니즘(opportunism; 기회 주의의 뜻, 역자註)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스노비즘과 오 포츄니즘은 문헌실증이란 精緻를 경쟁하는 知的技術과 밀접히 결합 하고 있었다. 이 지적기술이라는 뼈를 깎는 듯한 競合 속에서 정설 이 굳어지고 상식 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 결과 이 스노비즘은 대체 무엇을 만들어 놓은 것일까. 그리고 그 오포츄니즘은 어떠한 結果를 가져다 준 것일까. 불교라고 하는 거 대한 星雲에 논리실증이란 도구로, 아름답고 맑게 개인 높은 하늘에 갖가지 和音이 조화로운 아폴로적 彫像을 조각해 내는 데 성공한 것 이다. 이성이라는 근대적 衣裳으로 장엄된 佛陀像이, 저 그리이스적 균형에 맞추어진 간다라 부처의 이미지에 重疊되어 觀照의 대상으로 되어진 것이다. 아폴로적 불타가 탄생하고 순수이성에 의해 파악된 불교가 그 윤곽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에 의해 불타와 불교의 內部로부터 뚜렷하게 없어져 버린 것이 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즉 一擧에 抹消되 어져 버린 것, 그것은 불타의 明澄性의 상징인 빛나는 신체 내부 깊 은 곳에 당연히 있어야 할 生命의 世界이었다. 불타의 신체적인 表層 의 막을 뚫고 그 深層의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과 문제의식이 放棄되 어진 것이다. 불타의 내부생명 根底에 카오스의 소용돌이가 휘돌고 있는 것이 忘失되어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즉 이와 같은 카오스의 소용돌이 속에서 원시불교의 에너지가 生成되고 있었다고 하는 것에 대한 통찰이, 훌륭하게도 망실되어진 것이다. 실제로 이 표층으로부터 심층에의 回路를 열려고 한 사람이 기무 라 다이켄으로, 그의 무명-맹목의지 론이야말로 이러한 試圖를 하는 데 불가피한 근본개념이었다고 생각된다. 달리 말하면 기무라는 불 타의 종교체험의 저편에 악마가 부르는 소리를 들으려고 한 것이다. 정도 있 을까. 그리고 는 사 이 어

번역 이태승 의 功過 近代 日本 佛敎學 부르는 소리는 불타라는 존재도 뛰어넘어, 歷史의 놓인 암흑속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소리라고 그는 생각한 것 이다. 만약 간다라의 부처로 상징되는 불타를 아폴로적이라고 부른 다면, 이 역사의 암흑속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불타는 필경 디오니소 스적인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 생각해 보면, 기무라 다이켄이 提起한 맹목의지 론은 불타 에 있어서 심층체험과 원시불교에 있어서 심층구조를 명확히 하기위 한 중요한 문제 제기이었다. 가령 그의 맹목의지론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의거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문제 제기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 는 없다고 생각한다. 기무라가 말하는 맹목의지론을 와츠지의 論議와 동일하게 유럽에서 출발한 文化類型論의 한 變種이라고 간주하는 견 해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불타와 원시불교가 인간 욕망의 본질과 생명의 근원적 의미 추구를 그 본래적 과제로 삼고 그리고 그 악마의 始原에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기무라가 근대의 草創期에 이 문제의 해명에 코 과소평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기무라의 발상과 방법의 싹은 초기의 발화 지점에서 꺽여졌다. 근대 라는 가면을 쓴 스노비즘의 파도가 一瞬 사이에 삼켜버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후 불타와 불교에 대한 논리주의적인 실증연구 의 산이 쌓여져 반세기가 경과했다. 그 결과 우리들 앞에는 기무라 다이켄 학설이 漂白된 채 殘骸로 남아 있고, 우이 와츠지의 학설에는 榮光에 빛나는 실루엣(silhouette; 입체적인 윤곽이란 뜻, 역자註)이 머리높 이 드려져 있다. 하지만 시대가 크게 전환하고 있다. 오늘날 기무라 다이켄 학설의 잔해와 와츠지 테츠로 학설의 영광의 실루엣이라는 對照는 미묘한 轉移의 徵候를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불타와 불교의 再評價의 움직 임이 실로 그 내부생명의 영역으로부터 탐색되기 시작했다고 보여지 기 때문이다. 이 탐색의 시도는 불교세계의 내부에서는 물론이고, 불 교세계를 둘러싼 多種多樣한 知識世界로 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 에 의한 이러한 관심의 胎動은 표백된 잔해와 영광에 빛나는 실루엣 이라고 한 지금까지의 도식을 확실히 역전시키는 誘因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보인 그 先驅性은 결

印度哲學 제집 역자 후기 이 승(동국대 인도철학과 태 강사) 월 오 테츠오(山 빠진 불타 근대불교연구의 功罪를 물음 (原題: や 本 譯文은 季刊 佛敎 제1호(1987, 10 )에 실린 야마 리 씨의 折哲雄) 말라 せほそった 佛陀 近代佛敎硏究の功罪を問う )을 編譯한 것이다. 원논문은 뉘 져 있지만, 본 역문에서는 내용에 큰 영향 을 주지않는다고 생각되는 다음의 3절을 생략하였다(제1절: 파리 대 전체내용이 15節로 나 어 왕 이 意味하는 것, 제13절: 아폴로型과 디오니소스型, 제14절: 불타 에 대한 日本 필자인 야마오리씨는 1931년生으로 東北大學 출신이며, 이 논문 을 집필할 당시에는 國立歷史民俗博物館의 교수이었으며, 현재(1993년 5월 당시)는 國際日本文化센타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논문은 譯者가 일본에 유학을 갔을 무렵(1988년경), 당시 일본의 불교학계에 큰 反響을 일으킨 논문이었다. 물론 근대일본불교학의 형 성에 관심이 있었던 역자에게는 당시 갓 간행된 佛敎 속의 이 논 문이 근대 일본의 인도철학 불교학 연구의 선구자들인 木村泰賢, 宇 井伯壽, 和辻哲郞등에 대해 상세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어, 매우 흥미 롭고 중요한 논문이라 생각했다. 특히 多量의 연구업적을 쌓아올리고 있는 일본의 인도철학 불교학 연구를 생각할 때, 이러한 反省과 自省 의 글은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진지한 학문적 자세라는 생각이 들 었다. 하지만 이 논문을 계기로 알게 된 것은, 일본 학계가 진로 모 색의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새로운 진로에 접어들어 있었다 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것이 이 야마오리씨의 논문에 대한 하카마야 노리아키(袴谷憲昭)씨의 다음의 書評과 논문이 었다. 神話).

번역 이태승 의 功過 近代 日本 佛敎學 평: 季刊 佛敎 の發刊に寄せて ふとりすぎた 佛陀, 駒澤大學 서 佛敎學部論集 19, 1988. : 辻 における 法 と 空 理解の問題點, 上同論集 19, 19 논문 和 博士 88.( 批判佛敎 에 再錄) 씨 오 씨 논문의 원제목인 말라빠진 불타 에 대하여 그의 서평에 너무 살찐 佛陀 라는 대조적인 副題를 달고 있 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야마오리씨의 논문에 신랄한 비판의 서평을 쓰고 있다. 그 비판의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和辻박사의 견해에 대한 上記 논문에 잘 나타나 있으며, 특히 그 논문에서는 야마오리씨와 다 른 관점에서 木村泰賢 和辻哲郞박사등의 설을 비판하고 있다. 역자는 이 서평과 논문을 통하여 일본 학계의 새로운 흐름을 느낄 수 있었 지만, 그 후 얼마되지 않아 公刊된 하카마야씨의 논문 모음집인 다음 의 저술은 이러한 일본 학계의 흐름을 명확히 대변해 주었다고 생각 하카마야 는 야마 리 한다. 袴谷憲昭, 本覺思想批判, 大藏出版, 1989 批判佛敎, 大藏出版, 1990 씨 년 駒澤大學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이미 다수의 논문과 예리한 비판 으로 일본학계에서 定評을 얻고 있는 학자이다. 또한 駒澤大學은 본 역문에서도 등장하는 曹洞宗大學을 前身으로 하고 있으며, 역문에서 도 나타나 있듯 木村泰賢, 宇井伯壽 등이 교편을 잡았던 일본 불교학 계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이 하카마야씨와 같은 그러한 비판적인 흐름의 기운은 이 駒澤大學의 학문적인 분위기와 조화되어 새로운 비판의 논문과 저술이 나타나게 되는 바탕이 되는데, 그 대표 하카마야 는 1943 생으로 駒澤大學, 東京大學大學院을 거쳐 현재 적인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と の 伊藤隆壽, 中國佛敎の批判的硏究, 大藏出版, 1992 松本史朗, 緣起 空 如來藏思想批判, 大藏出版, 1989 禪思想 批判的硏究, 大藏出版, 1994

印度哲學 제집 처럼 이토(伊藤; 1944년생)씨나 마츠모토(松本; 1950년생)씨 등과 같 이 은 학자들에 의해 전통적인 불교학의 입장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再 작업들이 저술로서 나타나 학계에 자극을 던지고 있는 것 이 현재 일본 불교학계의 새로운 흐름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駒澤 大學의 경우, 그 대학이 조동종이라는 禪宗을 바탕으로 세워진 대학 임에도 불구하고, 그 선종 자체를 비판적 대상에서 학문적으로 조감 하는 풍토가 허용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라고 여겨진다. 따 라서 오늘날 일본 학계에서 文獻爲主의 학문적 풍토가 중시되고 있 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와 더불어 비판과 반성적 재조명을 통 한 새로운 학문 영역의 개척도 함께 竝行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照明하는 것이다. 오 씨 역자에게 단순히 논문 내용의 흥 미로움만이 아니라, 일본 불교학계의 새로운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좋 은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본 역문의 번역에 있어서도 유학 당시 느 껴졌던 여러가지 想念이 함께 중첩되어 떠올랐음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본 역문이 일본의 근대불교학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고, 현재 새로운 불교연구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역자로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끝으로 본 역문의 장을 마련해 준 印度哲學 편 집자께 깊이 감사올린다. 이와 같이 야마 리 의 논문은 (* 季刊 佛敎 는 최근호에 이르기까지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