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代 儒敎改革思想의 類型과 思想史的 展開 琴 章 泰* Ⅰ. 社會變動과 傳統儒敎의 變革 1. 社會變動과 傳統儒敎의 變革 2. 韓末 開化期의 近代的 思潮와 儒敎的 對應 Ⅱ. 淸末 民國初 中國의 儒敎改革思想 1. 康有爲의 今文經學과 儒敎改革思想 2. 梁啓超의 儒敎改革思想과 宗敎觀의 轉換 Ⅲ. 韓末과 日帝強占期 韓國의 儒敎改革思想 1. 道學派의 儒敎改革思想 2. 愛國啓蒙思想家의 儒敎改革思想 3. 心學(陽明學)派의 儒敎改革思想 4. 李炳憲과 今文經學의 儒敎改革思想 5. 樸章鉉에서 經學과 歷史의 民族主義的 再構成 Ⅳ. 儒敎改革思想의 限界와 意義 1.儒敎改革思想의 展開樣相과 限界 2.儒敎改革思想의 意義와 남은 課題 Ⅰ. 社會變動과 傳統儒敎의 變革 1. 社會變動과 傳統儒敎의 變革 1830년대에서 1860년대 사이에 조선사회는 말기적 증후군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시작하였 다고 볼 수 있다. 그 가장 대표적 발병원인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본다면, 그 하나는 지배층의 관심과 서민대중의 요구 사이에 괴리가 일어나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배층과 지식층 의 의식 사이에 괴리가 심화된 것이라 이해된다. 이 원인을 종합하면 결국 지배층이 권력의 힘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자기이익에 집착하면서 인식의 공유를 위한 설득력을 발휘 할 수 없게 되었고 서민대중의 고통을 분산하거나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하나는 1801년의 辛酉敎獄(순조 1)으로 천주교도를 형벌의 힘으로 다스렸던 사건을 이어서 1839년의 己亥敎獄(헌종 5)과 1866년 丙寅敎獄(고종3)에서 다시 형틀 아래에 엄청난 살상을 일으키고서도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 실패하여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천주교도들은 1831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朝鮮敎區가 승인됨으로써 조선정부의 의도와는 전혀 상반된 방향에서 지하교회를 민중 속으로 더욱 확장시켜 가고 있 었다. 또 하나의 현상은 1811년 西北人의 차별대우를 항의하여 홍경래난이 일어난 이후로 1862년 三政의 문란에 따른 민생의 파탄에 항의하여 진주민란을 비롯한 전국적인 농민폭동 * 서울大學校 宗敎學科 副敎授.
이 일어난 사실이다. 서민층이 정부의 통치체제에 안주할 수 없었던 것은 사회변동의 가장 큰 요인이 될 것이다. 1860년 최제우가 東學 으로 표방하는 민중종교운동을 일으켰고 서민 층들이 폭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유교이념을 표방하는 조선정부의 교화체제 와 서민층 사이에 틈이 점점 크게 벌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더불어 유교지식층 사이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836년 丁若鏞의 죽 음은 실학파의 중요한 학맥이 거의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부의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분위기는 비판적이고 개방적인 실학정신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차가운 냉기류로서 휩쓸고 있 었다. 김정희 최한기 등의 활동이 점점으로 이어가지만 실학의 활발한 학풍은 점점 희미해 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도학파에서 본다면 상당부분이 권력에 기대어 서민대중의 수탈에 참여하였다. 그 누적된 폐단의 수술로서 1866년 大院君에 의해 유교사회 안에서 유교정신 배양의 온상인 書院에 대한 대규모의 철폐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1830년대 이후는 도학자들 사이에 새로운 학풍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정부가 형벌의 힘으로 異端(당시의 유교사회에 서는 천주교를 異端 또는 邪敎로 규정하였음)을 다루고 있는 동안, 침묵 속에 있던 정통의 도학자들은 힘에 의한 정부의 강압적 이단금교정책에 한계가 있음을 자각하였다. 이에 따라 그들은 자신의 강한 정통의식과 華夷論(또는 尊華攘夷論, 尊攘論)으로 무장된 신념에 근거하 여 이단을 배척하는 이념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일종의 새로운 학풍을 형성하였다. 19세기 중 반 이후에 등장한 도학파의 이 새로운 학풍을 우리는 衛正斥邪論 또는 韓末道學 이라고 한 다.1) 위정척사론의 가장 강력한 주창자이었던 이항로 계열의 이른바 華西學派에서는 1830년대 이후로 종전의 西學(천주교신앙과 서양문물)에 대한 비판서를 넘어서 철저한 배척입장에서 재비판을 함으로써 점점 침투압력이 높아가고 있는 서양종교와 서양문물에 대하여 이념적 항전을 선언하고 있다.2) 한말도학의 위정척사론은 정부의 일반적 입장과 형식적으로는 일치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적 성격에서는 정부가 힘에 의지하고 신념이 빈약한데 비하 여 한말도학파에서는 강인한 이념적 무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차이를 지니고 있 다. 곧 서양군함의 무력이 조선정부가 믿어 온 자신의 힘보다 강한 것을 알았을 때, 조선정 부는 쉽게 문호를 열고 불평등조약을 감수하였다. 그러나 한말도학파는 節義論的 신념에 따 라서 생명을 걸고 의병을 일으키는 등 항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1876년 개항 이후부터는 지금까지 이념적 뒷받침을 해왔던 도학파의 지식층과의 사이에서도 깊은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3) 민생에 직접적 관심을 보였던 실학파의 경세론은 소수의 권력자들에 국가권력이 사유화 되는 지경에까지 이른 勢道政治 아래서 좌절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말도학파의 경 우에서는 서민대중에로의 관심을 거의 지니지 않은 채 다만 의리론적 이념의 수호에만 집착 하였고 더구나 방어적 수호의지에 정열을 기울인 결과 시세의 변화를 무시하는 폐쇄주의로 맹목화되었다. 이처럼 어떠한 학풍의 지식층도 당시 사회의 기층을 이루는 서민대중을 위한 1) 금장태 고광직, 儒學近百年 (박영사, 1984) pp. l 13. 2) 李恒老는 1936년 洋敎의 재앙을 논하는 저술을 하였고, 李正觀의 闢邪辨證 (1839)과 南肅寬 의 遠西艾儒略萬物眞源辨 등을 토대로 關邪錄辨 (1863)序를 저술하였으며 그의 제자 金平 默은 벽사변증 을 더욱 강경한 입장에서 재비판하여 闢邪辨證記疑 (1847, 1866) 序를 저 술하고 있다. 3) 이항로의 제자 柳重敎는 1884년 變服令이 내려졌을 때, 天職은 무겁고 君令은 가볍다 ( 甲 申變服令後示書社諸子 ) 하여 왕명에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도학자들이 의병 운동을 일으켰을 때는 관군과 싸워야 했다.
민생문제나 세도권력에 도취되어 부패한 지배층의 기강문제를 위해 실질적인 사회변혁이 불 가능하였다. 이 시대의 지식층에 의한 사회변혁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민중 속으로 침투한 외래종교(천주교, 개신교)와 민중종교(東學)의 신앙운동이 사회변혁의 폭발력으로 작용하거 나 외세의 침략세력이 강권의 남용 속에 부패한 조선정부를 붕괴시킬 수 있는 선택의 여지 를 보이고 있었다. 소수 권력자들에 장악된 조선정부는 민중과의 연결은 물론이요 지식층과 의 연결도 없이 역사의 격류 속에서 표류하다가 결국 외세에 의해 멸망당하는 최악의 선택 을 받아들인 것이다. 도학파의 華夷論的 의리정신과 闘異端論的 정통의식을 극대화시킨 한말도학의 위정척사론 은 프랑스와 미국의 군함이 일으킨 두 차례의 洋擾(1866, 1871)에 버틸 수 있는 이념적 배경 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정부가 서민대중의 신앙운동을 억눌렀던 권력의 힘이나 한말도학이 외세의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 침략에 항거했던 이념적 확신이 폐쇄성이라는 공통적 특성을 드러내었다. 실제로 한말도학의 주류는 역사의 격동이 심화되면 될수록 깊이 숨고 구질서를 지키는 보수적 守舊論에 빠져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대적 변화에 대한 좀더 예민한 감각을 지닌 지식층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유교전통이 지닌 문화적 사회제도적, 신념적 변화의 필요성을 각성하기 시작하여, 자기 내부적 변혁의 추구와 이에 따른 사회적 변혁까지 추구한다. 온건한 변혁론에서 과격한 변혁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교변혁론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변혁론의 목소리가 비록 수구파로부터는 변질된 것으로 비쳐지고 개화 사상으로부터는 봉건적 껍질을 벗지 못한 잔재로 평가되고 있지만, 이 시대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위한 고뇌와 결단을 보여준다 2. 韓末 開化期의 近代的 思潮와 儒敎的 對應 안으로 서민대중의 신앙운동에 의한 도전과 밖으로 서양열강의 침략세력으로부터의 도전 을 받으면서 유교이념에 기초한 조선정부는 개화정책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도학적 유교이 념으로부터의 탈피와 근대적 서구문물의 수용에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한말 의 급변속에서 도학파는 유교전통의 계승과 민족국가의 수호를 위하여 혹은 항전을 하였고 혹은 은둔하였다.4) 전면에 나서서 항전하던 의병운동의 세력은 1920년대에 오면 거의 붕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학자들은 經典을 가지고 산으로 들어가 숨었으며(包經入 山), 더러는 바다를 건너 외국으로 망명을 하기도 하였다(浮校入海). 그러나 실학적 관심을 지녀왔던 인물들 사이에서나 역사적 변동에 충격을 받고 국내외적 현실에 관심을 지녔던 인물들 사이에서 새로운 시대사조를 받아들이는 개화사상이 대두되었 다. 開化思想의 양상에도 유교이념의 근본가치를 계승하면서 서양의 우세한 기술문명을 수 용하겠다는 東道西器論의 경우처럼 온건개화론도 있고, 유교사회의 전통을 과감히 타파하고 서구문물과 제도를 전면적으로 수용하려는 급진개화론도 있다. 급진개화론에서는 사실상 유 교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거나 다른 종교적 신념을 받아들인 경우가 상당수 있다. 그러나 온 4) 이항로의 제자로 의병장을 하였던 柳麟錫은 1895년 제천에서 을미의병을 일으키면서 선비가 국가의 변란에 대처하는 3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곧 의병을 일으켜 적을 쓸어내는 것 (擧義掃淸), 떠나서 옛제도를 지키는 것 (去之守舊), 생명을 바쳐 지조를 지키는 것 (致命遂志) 을 들었다.
건개화론자들 사이에서는 유교적 신념을 지키면서도 보수적 도학의 형식을 깨뜨리고 상당한 수준에서 사상적 혁신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유교개혁사상 은 같은 시대의 중국의 경우에도 孔敎運動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발전하였으며, 한국유학자 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여기서 한국의 유교개혁사상은 도학적 배경을 극복하 고 개화사상을 섭취하면서 여러 방향에로 확산되었다. 곧 아직도 도학의 기반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지식체계와 교화방법을 탐색하는 도학적 개혁론이 있고, 心學(곧 陽明學)에 대한 새 로운 개척을 통한 개혁론도 있다. 애국계몽사상의 입장에서 민족혼의 고취로서 유교사상을 재인식하는 개혁론도 있으며, 今文經學의 입장에서 유교이념의 혁신을 추구하는 개혁론도 있다. 유교개혁사상은 유교내적인 전통의 성찰과 재인식의 작업이 하나의 주제요, 유교외적인 근대서구문물의 수용과 섭취의 작업이 다른 하나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먼저 유교내적인 전통을 성찰하는 과제를 크게 다음의 4가지 사항으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사회변혁에 대한 적응력과 변혁의지의 결핍 : 먼저 유교가 역사의 변화에 대한 적응 력을 상실한데 대한 반성이 제기된다. 기본원리에서 보면 常道와 變法이 마치 양면의 관계 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도학의 기본논리에서 적용시키고 있는 體用論에서도 이미 불변의 본체와 변화 속에 있는 응용의 상관관계로서 모든 현상을 파악한다. 周易 의 기본원리도 易을 變易과 不易의 두 상반된 의미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사실상 변화에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모든 변화에는 타락하거나 악에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 다는 인식에 따라 항상 불변의 본체를 선의 기준으로 삼고, 변혁은 聖人이나 天子에 의해서 나 가능하다는 보수적 의식이 강화되어 왔었다. 여기서 유교개혁사상은 교리의 개방적이고 현실적인 재해석을 시도하며, 모든 제도와 행동절차에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적합한 합리적 변혁을 추구한다. (2) 민족의식의 자주적 각성의 결핍 : 유교전통이 중국중심의 중화주의에 사로잡혀 있거 나 유교문화의 보편주의에 젖어서 민족의식에 대한 주렷한 자각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에 대한 반성이 제기된다. 도학의 華夷論的 義理論이 문화적 우월의식은 강하지만 민족적 공동 체의식은 미약하며, 중화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에서 민족문화는 변방적 야만성으로 경 멸하는 경향까지 보이는 한계가 있다. 實學派에서 역사 언어 지리 등의 자기발견에 노력을 기울였지만 유교사회의 일반적 관심에 비중을 확보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비해 유교개혁 사상에서는 유교문화가 중국문화의 추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문화로서 발전시키고 정립 시키며, 민족정신의 기초로서 추구하고 있다. (3) 민중적 기반의 결핍 : 유교전통이 통치권력의 옹호와 지배층으로서 신분윤리의 강화 를 내세우면서 본래의 民本精神의 실천을 외면하는데 대한 반성이 제기된다. 민중의 생존과 인권의 요구가 유교정부와 유교지식층의 관심에서 벗어나면서, 유교이념에 근거한 지배층은 민중에 대한 敎化기능뿐 아니라 濟民기능도 상실하게 되었다. 명분론에 의한 신분계급의 엄 격한 확립은 민중의 억압수단으로 작용할 뿐이다. 漢字文化에 의한 유교지식층의 문화의식 은 민중문화와 괴리되어 문화적 이원화를 극단화시킴으로써, 계급적 단절의 골을 더욱 깊게 하였다. 유교개혁사상에서도 철저한 계급의식의 극복과 한자문화 탈피를 성취한 것은 아니 지만, 기본적으로 평등의식과 아동 및 여성교육에 대한 관심을 향상시키고 있는 뚜렷한 방 향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4) 종교적 자기 인식의 결핍 : 유교전통이 도덕적 규범체계나 정치적 교화체계로서 자기
인식은 철저한 반면에 종교적 신앙심과 조직에서는 각성이 지나치게 빈약하거나, 혹은 종교 성을 부인하는 입장까지 제시되고 있는 사실의 문제점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도학적 전통은 강한 정통의식과 異端排斥論에서 불교 도교 등 전통종교를 부정할 뿐만 아니 라 서양종교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배척의식을 관철하였다. 신앙의 초월적 이해를 환상적인 것으로 비판하는 유교적 입장은 매우 고상한 지성적 분위기를 형성하였지만, 대중적 신앙의 요구를 충족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유교개혁사상은 특히 서양종교가 서 양문명의 기초로서 서구사회를 가능하게 하였던 원동력으로 이해한다. 이에 따라 유교를 통 한 동양적 정신력의 확립을 추구하였으며, 동시에 유교를 종교적 신념으로 확립함으로써 우 리사회의 민중적 기반의 확보를 추구하였다. 종교적 각성의 고취는 근대 유교사상이 추구하 였던 기본과제로서 오늘의 우리에게도 주요한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다. 다음으로 儒敎外的인 근대서구문화의 수용에 따른 성찰의 과제를 다음의 3가지 사항으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사회적 효용성의 결핍 : 급진개화사상은 서구근대문물을 수용하려는 의도에서 우리의 폐쇄성을 타파한다는 의도에 따라 우리의 사회전통적 생활관습을 파괴하면서 아무런 사회적 효용성이 없는 지엽말단적 형식을 도입하고 있다는 비판적 반성이 제기된다. 넓은 소매를 고쳐 좁은 소매 옷을 입게 하고 상투를 잘라 머리모양을 바꾸는 일이 우리가 요구하는 서양 의 근대적 지식과 기술로서의 新學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엽적인 서구문물 의 형식이 우리의 가치질서만 혼란시키는 폐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서양의 과학기술 에 관한 지식은 우리의 산업을 발전시키고 생활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것으로 유용하지만, 모 든 서양의 생활관습이 우리에게 유익할 수는 없다는 인식이 제시되고 있다. (2) 문화적 자주의식의 결핍 : 서구근대문물의 무분별한 전반적 수용은 이미 문화의 자주 적 수용이 아니라 문화적 예속이거나 굴복이라 할 수 있다는 반성이 제기된다. 개화바람으 로 사회가 휩쓸려 갈 때 전통문화의 개혁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전통적 가치의 보호필요성 을 인정하는 문화의식의 자주적 각성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중심의 문화의식에서 서양중심 의 문화의식에로 직접 건너가는 현실에서 우리 문화의 위치를 각성하고 민족사와 문화의 주 체적 연관성을 탐색하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3) 민족적 자주성에 대한 위기의식의 결핍 : 서구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신봉은 문화적 예속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國權도 상실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에의 각성이 결핍된 것에 대한 경계와 비판적 반성이 제기된다. 나라를 얻는 방법이 백성의 마음을 얻는데 있는 것처럼, 나라의 상실은 국민이 마음을 상실하는 데서 온다는 사실의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 서구문화의 폭주 속에서 유교정신의 혁신을 통해 국민정신의 배양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추 구하는 유교개혁사상은 이 시대 민족정신의 발현방법의 한 가지를 이루고 있다. 온건개화론에 배경을 두고 있는 유교개혁사상은 다음 시대에서 얼마나 확장되고 발전하였 는가의 문제와 상관없이 이 시대의 중요한 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이 논 문에서는 유교개혁사상의 유형을 분류하고, 각 유형에서 제기되는 사상적 문제의 주제와 체 계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러한 유형의 인식을 통하여 이 시대의 유교사상이 지닌 문제의식 과 해결방법의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문제들이 갖는 사상사적 의의와 시대 적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우리 시대에 남은 문제의 성격과 방향을 이해하는데 시사를 받을 수 있게 할 것이다. Ⅱ. 淸末 民國初 中國의 儒敎改革思想
1.康有爲의 今文經學과 儒敎改革思想 19세기 말 서양열강의 중국침략이 점차 가중되어 가는 과정에 서양의 기술을 수용하여 국 력을 배양하여야 한다는 自強論의 洋務運動이 효용을 거두지 못하고, 淸은 마침내 1894년 청 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당하는 좌절을 겪었다. 이러한 시기에서 이제는 중국의 내부로부 터의 변혁이 일어나야만 국가의 존립이 가능하다는 인식에서 자기변혁의 變法論이 대두되었 다. 바로 이러한 요구에 따라 1898년 康有爲(字 廣廈, 號 長素, 南海 廣東 南海人, 1858 1927)가 주도하는 무술변법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세력 을 극복하기 위한 중국의 자기개혁의 방책으로서 많은 제안을 제시하였다. 그 가운데서 그 는 1898년 6월 성인 공자를 존숭하고, 敎部와 敎會를 세우며, 孔子紀年을 사용하고, 淫祀 를 폐지하기를 청원하는 주문 이라는 긴 제목의 글을 光緒帝에게 올렸다.5) 이 사건은 중국 의 사회적 기반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儒敎를 종교로서 재조직하며, 유교개혁을 통하여 중국에서 유교의 국교화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에 앞서 강유위는 유교개혁의 이론적 근거로서 그의 公羊學 내지 今文經學의 입장을 확 립하였으며, 그 입장에서 新學僞經考 (1891) 春秋董氏學 (1894) 孔子改制考 (1894) 를 저술하여 광서제에게 올렸다.6) 신학위경고 에서 고문경전을 劉歆이 위조하여 王莽의 新王朝에서 통용시킨 新學으로 규정하고 금문경전의 漢學과 구별하여 경학적 전통의 새로운 출발을 선언하고 있다. 춘추동씨학 에서는 공자가 춘추 에 담은 微言大義를 公羊三世 說에서 보는 역사발전론과 제도개혁론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봉건적 질서의 고수태도를 거부한다. 공자개제고 에서는 공자를 祖述者가 아니라 옛 성왕을 가탁하여 제도의 개혁 을 추구하였던 託古改制의 創敎者로 보고 있다.7) 이러한 공자의 이해는 유교전통의 혁신적 재해석을 추구함으로써 사회제도개혁의 근거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라 하겠다. 강유위에 있어서 창시자요 개혁자로서 공자의 재해석은 그의 변법운동이 지향하는 사회제 도의 개혁론에 기초가 되고 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공자에 대한 존숭의지와 종교적 조직화의 추구는 종교개혁가로서 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1898년 6월에 상주한 請尊孔聖 주문에서 당시 중국에 민속신앙이 성행하는 사실은 서구인의 눈에서 보면 중국이 쟈바 인도 아프리카와 같은 야만적 나라로 비쳐질 것이라 지 적하고, 正學인 유교를 받들어야 함을 강조한다. 여기서 그는 유교를 국민들이 존중하게 하 기 위한 방법으로서 무엇보다 민간의 남녀가 누구나 공자사당에서 분향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8) 그리고 신앙(信敎)자유의 정신에 따라 제천의례는 천자의 특권이 아니라 백성들이 누 구나 하늘에 제사드릴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9) 5) 康有爲, 請尊孔聖爲國敎立敎部敎會以孔子紀撚而廢淫祀摺 ( 康南海先生遺著彙 이하 남해유 저 로 줄임 12 宏業書局, 臺北, 1976) pp. 27 32. 6) 강유위의 제자 梁啓超는 강유위의 저술이 당시의 사상계에 미친 영향을 지적하여, 신학위경 고 는 태풍에 비유하고, 공자개제고 는 火山의 대폭발에, 그리고 大同書 (1884 1902 완 성, 1913 부분 발표, 1935 전 10권간행)는 대지진의 발생에 비유하고 있다. 梁啓超, 淸代學術 槪論 (臺北, 1985) pp. 56 57. 7) 崔成哲, 康有爲의 政治思想 (一志社, 1988) pp. 125 130. 8) 강유위는 강희제 때 吳培가 부녀자의 공자사당 참배를 금지하도록 상주한 이후로 금지되어 왔 음을 지적한다. 9) 강유위는 임금을 天子라고 하는 것은 존칭일 뿐이고, 모든 인간이 하늘의 아들(天之子)이므로
그는 또한 유교와 공자의 성격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곧 공자는 중국의 敎主 이며, 다른 교주들이 神道에 의탁하였지만 공자는 신도를 빌리지 않고 교주가 된 진정한 문명시대의 교주 (眞文明世之敎主)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당시의 사람들이 공자를 철학가 정치가 교육가로 보는 입장을 망녕되게 일컫는 것이라 반박한다. 그 자신은 공자를 가리켜 제도를 개혁한 교주 (改制之敎主)라 하여, 교주로서의 공자상과 더불어 개혁자로서의 공자상을 강조 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모든 중국인이 孔敎에 속한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서, 전문직업을 설 치하여 공교를 보호할 필요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공교보호의 방법으로서, 중앙에 敎 部를 세우고 지방에는 敎會를 세울 것, 나라 안의 곳곳에 孔子廟을 세울 것, 이 사당에서는 공자를 하늘에 配享하고, 남녀의 백성이 누구나 참배하여 釋菜 奉花 默誦聖經하게 할 것, 마 을마다 孔敎會를 세울 것을 제안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공교회를 이끌어갈 교직자로서 鄕 의 講生(奉祀生을 겸함), 司의 講師, 縣의 大講師, 府의 宗師, 省의 大宗師, 전국의 祭酒(大長 이라고도 함)로 직제를 설정하고 이들이 7일마다의 휴식에 경전을 강론하여 백성들이 모두 듣도록 하며, 제사를 담당하게 할 것을 건의한다.10) 2)공교운동의 이론적 기초와 유교국교화에 대한 논란 강유위에 의해 주창되었던 공교운동은 그의 제자 陳煥章에 의해 孔敎會로 조직되기 시작 하였다. 1907년 당시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생이었던 진환장은 여기에서 공교회 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진환장은 1912년 上海에서 공교회를 재조직하면서 강유위 를 회장으로 하고 자신은 총무로서 활동하여, 1년 사이에 중국 전역과 일본 등지에 130여 지부가 결성될 만큼 신속하게 성장하였다. 진환장은 1913년 공교회 잡지 를 편찬하기 시 작하였고, 그해에 공교회는 중화민국 국회에 유교를 국교로 채택하도록 청원운동을 일으켰 다. 그러나 1913년 10월 북경 天壇에서 소집된 헌법기초위원회는 헌법 19조에 국민의 교육 에서 유교의 교리가 덕성함양의 기초가 될 만하다 라는 조문을 넣었을 뿐 유교의 국교화는 인정하지 않았다. 1914년에 袁世凱가 정치적 목적에서 祭天儀禮와 공자제사를 부활시켰으나, 1916년 그의 죽음으로 유교의 국가적 보호는 좌절되고 말았다.11) 이 시기에서 변법론적 개 혁론으로서 공교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전통계승을 추구하는 소수의 입장으로 나타났다면, 그 반대의 극단에서 유교전통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서구적 근대질서를 수용하는 혁명론을 전개하는 입장은 시대조류를 따르는 다수의 진보적 지식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다. 유교지식인들 사이에도 章炳麟은 중국은 지금까지 한 번도 국교를 가져본 적이 없다 하 여 유교의 국교화에 반대하였다. 문화혁명의 중심인물인 吳虞는 공자의 예교를 사람을 잡아 먹는 食人의 예법이라 하고, 陳獨秀는 유교를 현대의 평등사상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고 유 교전반을 비판하는 등, 진독수와 胡適을 선두로 당시의 지식인들은 공자를 타도하자 (打倒 孔家店)고 부르짖었다.12)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강유위의 공교운동에 대한 신념은 확고하였고, 그의 공자관, 유교종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맹자 에서 비록 악한 사람이라도 沐浴齋戒하면 상 제에 제사드릴 수 있다 는 구절을 인용하여 경전적 근거를 찾고, 민속에서 하늘을 향해 제사 드리는 歲時風俗이나 기독교인이 상제에게 예배하는 것도 금지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 한다. 10) 강유위, 請尊孔聖 앞의 책 pp. 28 32. 11) 윙치챤, 근대중국종교의 동향 (이은봉 역, 형설출판사, 1987) pp. 16 17. 12) 같은 책 pp. 18 32. 윙치챤은 유교에 대한 비판에 이어서 孫文 梁漱溟 장개석 곽말약 및 Creel 등에 의한 유교의 긍정적 재평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교관이 민족의식과 더불어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본다. 그는 종교를 人道와 神 道로 대립시켜 파악하면서, 공자의 道는 天命에 근본을 두고 귀신을 밝히며, 실지에는 人道 를 敎로 삼는다 13)라고 정의한다. 유교를 人道의 교 라 하는 이해는 바로 유교가 종교인지 아닌지의 종교성을 논의하는 데로 나간다. 곧 세계 각국의 종교가 모두 神道라는 점에서 유 교는 종교가 아니요, 공자는 철학가 정치가 교육가이며 희랍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 견주 어지는 사실은 우선 일본인이 유교를 잘못 인식한 것이라 지적한다. 동시에 그는 일본인들 이 영어의 Religion을 종교 라는 말로 번역하면서 종교의 개념을 기독교적인 이해의 형식에 빠져있는 치우친 것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한다.14) 이러한 강유위의 종교관은 매우 객관적 설득력을 지니며, 또한 유교사회에서 종교개념을 이해하는데 주의할 핵심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종교가 신존재에 대한 숭배여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해의 형태도 종교적 영역을 이룬다는 폭넓고 의미깊은 종 교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기독교적 신중심의 종교관에 사로잡혀 있을 필요가 없다는 유교적 종교관의 독자적 입장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매우 의미있는 이해를 보여준다. 동시에 그는 일본인이 서양말을 번역한 종교 라는 말에서 종 자를 떼어내 고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이 써왔던 교 자만을 가지고서도 종교의 의미를 완전하게 포함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15) 나아가 그는 원시적인 몽매상태에서 귀신을 숭상하여 神敎를 존중하지만, 근세의 문명사 회에서는 인간을 존중하고 인도를 중시하므로, 人道의 교 는 신교에서 더 나아간 것이요, 동 시에 신교나 인도의 교가 모두 교 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라 한다. 여기서 그는 유교가 다른 신중심의 교(종교)와 같은 교라는 종교의 보편성에 대한 확인과 더불어, 신중심의 종교에서 부터 인도의 교 인 유교는 인간중심의 종교로서 더욱 진보한 것이라는 종교의 진보방향에 대한 신념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정치체제와 종교의 양식을 대비시켜서, 신도 는 교주가 홀 로 존중되어 전제군주와 같으나, 인도 는 교조가 존중되지 않아서 입헌군주와 같다 한다. 그 것은 정치가 專制君主制度에서 立憲君主制度에로 진보하는 역사의 방향을 인정하였을 때, 인도의 교 인 유교는 입헌군주제도에 적합한 종교라는 신념을 확인시켜 준다. 이와 마찬가 지로 전제군주만 군주가 아니라 입헌군주도 군주인 것처럼, 인도의 교 인 유교도 종교임을 재확인하고 있다.16) 강유위는 유교와 중국문화의 필연적인 관계를 강조하여, 중국의 인심 풍속 예의 법도가 모두 공교를 근본으로 삼는다 라 지적하고, 나아가 중국과 공교의 관계는 공교를 존중하지 않고는 중국이 멸망한다 라고 하였다.17) 그만큼 그에게서 유교는 중국의 민족적 존립과 직 결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나아가 그는 유교를 중국의 국민정신과 연결시켜 중국의 진정 한 수호는 중국인의 國魂 내지 국민정신의 확립을 위한 유교의 정립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 다. 그는 중국의 국혼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공자의 敎일 따름이다 라고 확인하며, 마음이 먼저 죽고 그 다음에 몸이 죽는다 라는 田子方의 말을 빌어 국혼이 먼저 멸망하고 나라가 멸망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중국의 변법에 모범의 하나로 삼았던 일본의 경우 를 들면서, 일본의 강력함은 유럽과 미국의 정치나 물질을 피부로 삼고 공자의 교를 정신 13) 강유위, 孔敎會敍 1, ( 남해유저 19 ) p. 51. 14) 강유위, 공교회서 2, 같은 책 p. 58. 15) 같은 책 pp. 58 59. 16) 같은 책 pp. 58 59. 17) 강유위, 亂後罪首 ( 남해유저 19) p. 200.
과 골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라 한다. 여기서 그는 만약 공자가 폐지되면 중국에는 교화 가 없어진다 라고 강조한다.18) 이런 의미에서 강유위는 中體西用論의 자강론을 계승하여 발 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공교운동을 통해 강유위는 먼저 유교의 개혁사상을 제시하고, 동시에 중국의 사회변혁을 위한 변법운동에 정신적 기초를 확립하며, 나아가 중국민족의 주체적 정립을 확보하고, 여기 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가족적 국가적 경계를 허물어 뜨리고 인류의 이상인 大同社會를 지향 하고 있다. 그는 춘추 公羊傳의 공양삼세설에 기초하여 據亂世 升平世 太平世로 발전 하는 사회발전모형을 확인하며, 이를 통하여 태평세와 대동세계의 유교적 이상세계와 그 구 원론적의식을 제시해 주고 있다. 강유위의 이러한 유교 변혁론에 대해 그의 가장 탁월한 제 자인 양계초는 그를 공교의 마르틴 루터 라 지적하고 있다.19) 여기서 그의 공교운동이 사회 변혁론이며 동시에 전통계승론이요, 민족주의적이며 동시에 세계주의적이라는 양면의 종합 성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정치적 제도의 모형으로 제시한 입헌군주제도 군주제의 전통론과 공화제의 혁명론 사이를 종합하는 입장으로 이해된다. 그의 유교개혁론은 20세기 초의 한국 사회에 등장한 유교개혁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 梁啓超의 儒敎改革思想과 宗敎觀의 轉換 梁啓超(字 卓如, 號 任公, 飮氷室主人 廣東 新會人, 1873 1929)는 1890년 18세의 소년으로 33세의 강유위 문하에 나가 수학하면서 변법운동에 동참하였고, 공교운동에도 깊은 이해를 보여주었다. 양계초는 1897년 親友의 保敎論에 답하는 편지에서, 공교의 역사에서 국가의 힘을 얻었던 사실을 주목한다. 곧 魏 文侯 때 공자의 제자 子夏의 역할과, 진시황 때 荀卿의 제자 李斯의 역할과, 漢 무제 때 董仲舒의 역할의 3단계를 들면서, 다시 국가의 힘을 얻어야함을 역설한 다. 여기서 그는 이 시대에 중국이 처한 종교적 상황에 대해, 서양인들이 중국을 半敎(有敎 無敎 半敎의 3분법에 의한 분류)의 상태로 분류하며, 중국을 아프리카의 흑인과 아메리카의 인디언 수준으로 인식한다고 반성함으로써, 保敎의 필요성을 강조한다.20) 그는 또한 보교를 위한 방법으로서 기독교의 성립과정에서 많은 교도들이 생명을 바치는 회생이 따랐음을 지적하여, 서민의 강인하고 헌신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그는 천하에 敎가 없이 세워진 나라가 없다 라 하여 국가를 세우는 기초로서 보교의 필요성을 재확인하며, 그 방법으로서 일본인들이 保國公會를 세웠듯이 保敎公會의 설립을 제안한다. 이 보국공회에서 는 경전의 뜻을 밝히고 실용을 위주로 하며, 토론으로 실학을 강구하고, 또한 천문학 수학 18) 강유위, 중국학회보題詞 ( 남해유저 19) pp. 129 131. 19) 양계초, 康南海傳 ( 남해유저 p. 16). 양계초는 강유위가 계발한 공교를 1. 보수주의가 아 니라 진보주의요, 2. 獨善주의가 아니라 兼愛주의요, 3. 國別주의가 아니라 세계주의요, 4. 督制 주의가 아니라 평등주의요, 5. 巽柔주의가 아니라 強立주의요, 6. 愛身주의가 아니라 重魂주의 라는 6가지 특성으로 지적하였으며, 공교의 복원방법으로서 宋學(공자의 修己之學만 말하고 救世之學을 밝히지 못함)과 歆學(劉飮의 學 : 공자를 속이고 후세를 그릇침)과 荀學(荀卿의 學 : 공자의 小康之統만 전하고 大同之統은 전하지 않음)을 단계적으로 배척함으로써 확립한다고 설명한다. 20) 양계초, 復友人論保敎書 ( 飮永室文集 上, 廣智書局本; 以文社 영인, 1977) pp. 610 611.
광물학 음성학 광학 화학 등의 자연과학과 기술의 한 과목을 전공할 것 등의 구체적인 조직 계획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는 강유위에서 전수받은 공양삼세설을 적용하여, 선진시대를 傳 聞世 곧 자기 나라를 앞세우고 중국을 멀리하는 據亂世라 하고, 한나라에서 당시까지를 所 聞世 곧 중국을 내세우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昇平世라 하며, 앞으로 다가 올 세상을 所見世 곧 천하 안에 멀고 가깝거나 크고 작은 것이 모두 하나가 되는 太平世로 파악하고 있다.21) 무술변법이 좌절되면서 강유위와 같이 일본에 망명생활을 하던 양계초는 1899년 일본의 철학회에서 스승 강유위의 공교운동에 내포된 중국종교개혁론을 간명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강유위의 철학이 지닌 기본 강령은 중국에 관한 것과 세계에 관한 것으로 2분하고, 중 국에 관한 문제의 선결과제(第一著手)는 종교혁명이요, 세계에 관한 문제의 선결과제는 종교 통합이라 제시하였다. 여기서 그는 종교를 국민의 腦質을 주조하는 藥料 라 규정하여, 변법 운동의 기초에 종교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중국이 진나라 때까지는 서양의 희랍에 못지 않았다가 한나라 이후로 서양에 낙후한 것은 6경의 뜻을 오해하고 공교의 본래 취지를 잃었기 때문이라 지적하고, 강유위가 발휘한 공교의 진면목으로서 ① 進化주의(보수 주의가 아님) ② 平等주의(전제주의가 아님) ③ 兼善주의(독선주의가 아님) ④ 強立주의(文 弱주의가 아님) ⑤ 博包주의(單狹주의가 아님) ⑥重魂주의(愛身주의가 아님)의 성격을 확인 하고 공교의 6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 먼저 공교의 조직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22) 양계초는 강유위의 공교에 관한 인식을 특별과정과 보통과정 또는 大同敎派와 小康敎派로 분류하여 분석한다. 곧 공자문하의 가르침이 마치 불교에서 대승과 소승이 나누어지듯이, 보 통사람(中人) 이상을 위한 특별과정은 역 춘추 를 통한 大同의 교이며, 보통사람 이 하를 위한 보통과정은 시 서 예 악 논어 를 통한 小康의 교로 나누어지 고 있음을 주목한다. 또한 공자의 학통을 대동교파와 소강교파로 나눌 때, 대동교파에는 역 을 계승한 장자(有子 子夏 田子方 莊子로 계승됨)와 춘추 를 계승한 맹자(曾子 子思 孟子로 계승됨)가 속한다 하고, 소강교파에는 순자(仲弓 荀子로 계승됨)가 속한다 고 본다.23) 그는 중국역사의 2천년 동안 漢學이거나 宋學이거나 모두 실제에는 순자로부터 나온 것이 라 지적한다. 그 4가지 증거로서, ① 君權의 존중은 이사를 통해 진나라의 법제로 나타났으 며, ② 異說의 배척은 순자 非十二子篇에 들어 있고, ③ 禮儀의 삼가함은 순자가 大義를 강론하지 않고 예의를 존중하는데 나타나며, ④ 考據를 중시함은 순자가 名物 제도 훈고를 중요시하였던 것이 한학과 청조학풍에서 그 폐단이 드러났다고 제시한다. 이러한 소강 대동 의 분석체계를 통하여 그가 의도하는 것은 공교의 개혁방향이 소강을 극복하고 대동으로 나 가야 할 것임을 지시하는데 있다. 이에 따라 그는 당시의 과제로서 춘추 가 공자교파의 중심이 되는 줄을 아는데에서 중국의 종교혁명을 말할 수 있다 라 역설하고 있다.24) 이 시 기에서 양계초는 강유위의 공교운동이 변법운동의 기초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를 충분히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1902년에 양계초는 新民叢報 를 편찬하여 순식간에 전 중국의 청년과 지식층을 풍미하 21) 같은 책 p. 611. 22) 양계초, 論支那宗敎改革 위의 책 pp. 606 610. 23) 같은 책 pp. 606 607. 24) 같은 책 p. 607.
는 영향력을 획득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스승 강유위와 사이에 정치적 견해에서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곧 강유위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保皇派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 지만, 양계초는 공화제를 주장하는 혁명파의 입장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던 것 이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그는 공교에 대한 인식에서 결정적이고 중대한 전환을 맞이하 게 되었다.25) 이해에 그는 종교문제에 관한 3편의 논설을 신민총보 에 싣고 있다. 그 첫 번째 논설은 자신의 종교관과 유교관의 핵심적 쟁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서, 종교의 보 존(保敎)과 공자의 존숭(尊孔)을 분리시키고 있다. 이를 통하여 그는 공교에 대한 자신의 입 장전환을 명백하게 밝히면서, 동시에 스승 강유위의 공교운동으로부터 결별을 선언하는 것 이다. 양계초는 그 자신을 포함하여 당시 중국지식인들 사이에 추구되고 있는 3대 과제인 나라 의 보존(保國) 민족의 보존(保種) 종교의 보존(保敎)의 기치에서 근본문제는 보국 에로 귀결 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국가의 존립이 모든 문제에 우선하는 선결과제로 확인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나라를 보존하는 근거로서 보교 를 주장하는 입장의 폐단을 4가지로 계시한다. 곧 첫째로 공자의 진상을 모른다는 것, 둘째로 종교의 경계를 모른다는 것, 셋째로는 앞으로 종교세력이 변천해 갈 방향을 모른다는 것, 넷째로 여러 다른 나라의 경우에서 정치와 종교 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모른다는 것이라 지적한다.26) 여기서 양계초는 공교를 국교로 하여 보호해야 한다는 보교 의 주장과 이러한 공교의 입장에 나타나는 구체적이고 의미깊은 문제 점들을 8조목에 걸쳐 철저하게 분석함으로써, 자신의 공교관 및 종교관의 획기적 전환점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27) 번거러움을 무릅쓰고 조목별로 내용의 요약과 그 의미를 검토해 보겠다. (1) 공교보호의 불가능함 : 그는 종교는 사람의 힘으로 보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 하여, 종교와 국가의 기본적 차이점으로서 국가는 국민의 힘으로 보호할 수 있지만, 종교는 인간을 보호하지 인간에 의해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한다. 좋은 종교는 억압할수록 더욱 멀 리 퍼지는 것이지 유한한 인간의 힘으로는 종교가 억지로 보호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공교도 억지로 보호하려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아야 할 것으로 일깨워 준다. (2) 공교의 비종교성 : 그는 공교는 다른 종교와 성격이 다르다 라 하여 공교와 종교의 차이점에 주목하며 서양인이 말하는 종교를 미신이라 단정한다. 곧 종교는 영혼 예배 해탈 열반이나 천국 및 내세의 禍福 등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 규정하고, 또한 종교는 믿음을 요구하고 의심을 금하여 인간의 사상적 자유를 질식시키며, 마귀를 굴복시키도록 요구하여 종파를 이루고 배타적이라 비판하고, 나아가 종교는 인간을 진보하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고 판단한다. 이러한 양계초의 종교관은 일대전환을 거쳐, 합리주의적이고 진보주의적인 반종교 의식이 확고하게 도입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공자를 여러 종교들과는 달리 미신과 예배가 없으며, 의심을 금하지 않고, 다른 종교 를 원수로 대하지 않으며, 오로지 세계와 국가의 사업이나 윤리와 도덕의 원리를 다룬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 마디로 공자를 철학가요 경세가요 교육가이며 종교가는 아니라고 못박고 있다. 특히 공교의 보교론자들이 교회를 설치하고, 교당을 세우며, 예배의식을 정하고 신앙 25) 양계초는 1902년 新民叢報 를 발행하던 시기 이전부터 종전의 변법론에서 혁명론에 접근 하였다가, 1903년 미국여행을 하고 돌아온 뒤에는 다시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여 혁명파의 民 報 와 대립된 입장에 서서 논쟁을 벌였다(葉乾坤, 양계초와 舊韓末文學 (法典出版社, 1980, pp. 58 59 참조). 26) 양계초, 保敎非所以尊孔論 ( 음빙실문집 상), 위의 책 p. 612. 27) 같은 책 pp. 612 618.
의 규모를 드러내어 일마다 불교나 기독교를 모방하는 것은 종교의 경계를 오해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 하여, 孔敎를 종교와 기본적으로 영역이 다른 것이라 규정한다. (3) 쇠약해지는 기독교의 장래와 지켜야 할 중국의 주권 : 그는 앞으로는 종교의 세력이 쇠퇴할 징조가 있다 라 하여 종교의 장래에 대한 예견을 하고 현대서구사회에서 그 증거를 찾고 있다. 그는 保敎論의 발생근거로서 기독교의 침투를 두려워하여 견제하는데 있다고 진 단한다. 여기서 양계초는 종교의 인류문화사적 위치를 점검하고 있다. 곧 종교를 인류진화의 제2기 현상으로 규정하고, 과학의 힘이 날로 융성하면 미신(종교)의 힘이 날로 쇠퇴 하고, 자유의 경계가 날로 확장되면 神權의 경계는 날로 위축된다는 인식을 제기한다. 이와 더불 어 당시의 기독교세력이 유럽에서 전날보다 엄청나게 위축되어 있는 사실을 열거하여, 기독 교의 전도가 쇠퇴해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는 것으로 확인한다. 이에 따라 공교운동의 보교 론이 기독교의 쇠퇴해 가는 의식을 모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함을 강조한다. 여기서 그는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오는 데는 진실한 전교를 위한 것과 각국 정부가 이를 이용해서 중국의 권리를 침략하기 위한 것으로서의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분석하며, 또한 중국인이 기독교에 들어가는 데도 진실한 신앙과 외국선교사를 이용하여 관리에게 저항하고 마을을 멋대로 하고 싶은 것으로서의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구분한다. 여기서 그는 종교가 정치적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세력과 결합되어 한 국가의 주권을 침략하는데 이용될 수 있음 을 주목한다. 그는 진실한 전교와 진실한 신앙은 마치 중국이 불교와 회교를 받아들였듯이 용납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각국 정부나 지역의 간교한 백성이 기독교를 이용하여 중국의 주권을 침략하고 정치를 어지럽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孔子會를 열어 보교를 주장하 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하며, 이를 위해서는 다만 정치를 밝게하여 국가가 자립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과제라고 확인하고 있다. (4) 신앙의 자유와 정교의 분리 : 양계초는 유럽이 종교문제 때문에 수 백년 동안 전쟁을 일으키고 수 십만명이 피를 흘려 겨우 신앙의 자유를 헌법에 넣을 수 있게 되었음을 주목하 도록 요구한다. 이 신앙의 자유는 국민성품을 고상하게 하고 국가와 단체를 통일시켜 주는 기능 이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와 종교의 권한을 구획하여 서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지적한다. 이러한 신앙의 자유는 유럽의 정치가들이 수 백년 동안이나 심혈을 기울 여 얻은 것임을 강조한다. 이에 비해서 중국에서는 서양과 달리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 던 우수한 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보교론자들이 서양의 옛 자취를 밟아서 공교가 기독교 와 서로 대치하게 되면, 여기서 宗敎戰爭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정치전쟁도 따라 일어나고, 국민이 분열하는 재앙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음을 주의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5) 보교론의 국민사상속박 : 그는 문명진보의 기본원인을 사상의 자유로 인식하고, 유럽 은 14, 5세기 문예부흥을 통해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사상의 자유를 획득하면서 진보하였 던 것이 세계사의 상식이라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동시에 중국사상사를 반성하면서, 전국시 대에는 사상의 자유 속에서 위대한 사상가들이 출현하였으나 진시황의 焚書坑儒와 한무제의 表章六經 이래로 사상의 자유가 속박되었다 한다. 이에 따라 正學과 이단의 논쟁, 금문(今 學)과 고문(古學)의 논쟁, 고증학(考據)에서 師法의 논쟁, 성리학에서 道統의 논쟁 등 잇따른 논쟁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지적한다. 여기서 자신만을 공교라 하고 상대편은 공교가 아니 라 배척함으로써 공교의 범위가 날로 축소되어 갔다고 본다. 그는 2천년동안 보교당이 성취 한 결과는 한 사람 선생의 말씀만을 지키고 그 바깥에 대해서는 감히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폐쇄성을 비판하며, 이에 비하여 공자의 공자됨은 사상의 자유에 있는 것이 라 확인한다. 여기서 그는 오늘날 학문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상이 넘쳐 흐르는 시대에서 보
교함으로써 공자를 위한다는 생각은 공자의 자유로운 정신에 상반되는 것이라 지적한다. 양계초는 옛날의 보교론자와는 달리 당시의 새로운 학술과 이치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지 닌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곧 이들이 새로운 학술과 이치를 섭취한다면서, 어떠 어떠한 점 은 공자가 이미 알고 있다, 어떠 어떠한 점은 공자가 이미 말씀하셨다 라는 태도는 공자 를 속이고 사람에게 사상자유의 길을 막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비판한다. 동시에 이러한 공 자에 대한 존숭태도는 한마디로 공자를 사랑하는 것이지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라 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서양학문에 견강부회하는 자들이 명목은 開新 이지만 실질 은 保守 임을 지적하고, 이들이 사상계의 노예적 예속성을 강화시키는 것이라 하여 자신의 거부태도를 밝히고 있다. 그는 한마디로 이러한 방법의 保敎論者들이란 속이는 것이 아니면 어리석은 짓으로서 국민에게 무익한 존재라고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양계초의 태도는 사상 의 자유를 신봉하며 인간이 진리탐구의 주체로서 어떠한 권위적 존재에 대한 신봉도 거부하 는 반종교적 이성주의를 확고하게 제시한다. (6) 보교론이 외교에 방해가 됨 : 그는 보교론이 사상의 자유를 방해하는데 이어서 국가 간의 외교에도 방해가 됨을 주목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국력이 약하고 외국인이 교회를 이 용하는 시기에 놓여 있고,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서양종교를 배척하는 성질이 있어서 국가 간의 갈등을 일으켜 외교상의 곤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은 사실을 강조한다. 실제로 天津 敎案이나 義和團事件들이 수 십년 사이에 여러 가지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음을 지적한다. 보교운동이 공교의 존립을 보장하지도 못하고 기독교의 수입을 막지도 못하면서 이익과 손 해를 헤아리지 않고 행동하여 외국인을 자극하여서 일어나는 참혹함을 경계하고 있다. 천진 교안에서 처럼 교당 하나 때문에 지부와 지현의 목을 베게 되고, 膠州敎案에서 처럼 선교사 2명 때문에 百理의 영토를 잃고 한 省의 주권을 상실하게 되거나, 의화단사건에서 처럼 수 십명의 서양인 목숨 때문에 11국의 군대가 출동하여 5억량의 보상금을 물어야 하였던 사건 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여기서 공교를 종교적으로 인식하지 않음으로 써 기독교를 이용한 서양의 제국주의적 침략세력과 갈등을 피할 수 있다는 실용적 의미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7) 공교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이치 : 그는 보교당이 공교가 장차 멸망할까 염려하 지만, 공교는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 있듯, 우주에 가득찬 듯, 영원히 소멸될 수 없는 것이 라 확언하고 있다. 그는 다른 종교가의식을 중시하는 점에서 자유가 번창해지면 의식은 없 어질 것이며, 미신에 귀착하는 점에서 장래의 문명과 병존할 수 없을 것임은 명확한 일이라 하여, 미래에서 사상의 자유와 과학의 발달에 따라 종교가 쇠퇴할 것임을 예견하고 있다. 이 에 비해 유교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되는가 또는 나라가 어떻게 나라되는가를 밝히는 것으로 서 문명이 진보하면 할수록 더욱 연구될 필요가 제기될 것이라 확인한다. 그는 서양근세의 많은 교육가들이 인격교육을 주장하는 사실을 들어서, 인격교육에는 공자만큼 탁월한 인물 이 없으므로, 장래 세계의 교육에 공자의 지위가 중요하게 될 것이라 예언한다. 그는 소크라 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공자에 못미치지만 오래되어도 더욱 드러나는데 공교가 없어질까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세계가 무정부 무교육 무철학의 시대가 아니라면 공교 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하여 보교론자들이 안심하도록 당부한다. (8) 공교는 다른 종교의 장점을 채용하여 크고 빛나게 할 것 : 그는 종교의 종파주의적 폐쇄성을 지적하면서 공교의 정신은 專制的인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정신이므로 通義에서는 영원한 불변(萬世不易)이더라도 別義에서는 시대에 따라 변해간다(與時推移)는 것을 주목하 고, 공자는 때에 맞는 성인(聖之時者)이라 한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시대에 따르는 가변성
을 강조한다. 여기서 불교의 박애나 중생의 제도정신과 기독교의 평등이나 원수를 사랑하는 태도 등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 그 의미에서는 공자에게 있었더라도 절실하고 밝은 것이면 채용하며, 그들의 우수한 것은 우리의 것을 버려서라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종교에 서만이 아니라 고대 희랍철학과 근세유럽 및 미국의 철학에서도 유익한 것은 포용할 것을 제안한다. 여기에 공교는 물고기가 뛰는대로 바다가 넓으며, 새가 나는대로 하늘이 비어있는 데에 공교의 존중받음과 항구성이 있다 하고, 문호와 구획을 지어서 보교를 외칠 것이 없다 고 보교론을 거부한다. 그는 자신이 보교당의 선봉장이었던 사실과 지금에는 보교당의 역적이 되었음을 돌아보면 서, 나는 공자를 사랑하지만, 진리를 더욱 사랑하며, 나는 선배를 사랑하지만, 국가를 더욱 사랑하고, 나는 옛 사람을 사랑하지만, 자유를 더욱 사랑한다 라고 보교론을 거부하는 자신 의 공교관에 대한 입장전환의 신념을 선언하고 있다. 양계초는 자신의 참회가 2천 년만의 번복이라도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고 4억의 중국인이 도전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그의 전환된 종교관은 공자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모든 종교의 교주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며, 국민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확신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양계초에서 공자관 및 종교관의 전환은 현대 서구문화의 성격을 좀더 깊이 이해하면 서 종교의 힘보다도 과학과 철학의 합리적 정신에 경도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바로 여 기서 공교를 비종교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인식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의 관심이 보교에 근거를 둔 보국이 아니라 보국을 위한 문화와 종교의 역할에로 옮겨 간 것으 로서, 개인내면의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보다 국가사회적 정치에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의 근세 유교개혁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계초의 영향력이 한말 일제시기의 계 몽사상가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력을 주었던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더불어 강 유위와 양계초를 두 개의 축으로 하는 유교관 내지 종교관이 우리의 유교개혁론에 어떠한 양상으로 얼마나 깊이 침투하고 있는가를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02년의 두 번째 종교관계 논설에서는 종교가와 철학가의 사회적 역할을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먼저 종교와 철학의 특성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종교관을 적극적 의미에서 제 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전날에 종교를 논하기 싫어하였던 이유로서, 종교를 미신에 치우 쳐 진리에 장애가 되는 것 으로 보았기 때문이라 하여, 자신의 종교관이 지닌 일면을 제시 한다. 그러나 그는 진리탐구에서 철학가가 우세하더라도 정치에는 종교가가 우세하다는 점 을 주목하여, 이러한 사실을 크롬펠 잔다크 워싱론 등 서양의 인물들에서 입증하고자 하며, 하나의 主義를 굳게 지켜 여론을 감동시키고 國是를 혁신할 수 있는 것은 종교사상 이라고 종교의 기능을 강조한다.28) 양계초는 철학을 唯物論 唯心論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는 유심철학을 종교의 일종이라 하 고, 중국의 유심철학인 양명학 곧 心學이 일본의 明治維新을 성공시켰다고 지적하며, 심학이 종교의 가장 높은 수준이라 주장한다. 그는 철학사상이 할 수 없는데 종교사상이라야 할 수 있는 이유를 5가지로 들고 있다. 곧 종교사상이 없이는 ① 세계의 통일이 없고 ② 미래의 희망이 없고 ③ 자신을 던지는 해탈이 없고 ④ 꺼려서 삼가함이 없고 ⑤ 생사를 걸고 분발 하는 기백의 힘이 없다고 한다. 또한 의심을 중히 여기는 철학에 비해 믿음을 중히 여기는 종교는 지성스러운 태도와 실행의 힘을 발휘한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그는 이처럼 종교 의 사회적 기능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으면서도, 종교에는 바른 믿음(正信)과 미혹된 믿 음(迷信)의 구별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동시에 종교는 미신과 뗄 수 없는 본질적 성격이 있 28) 양계초, 論宗敎家之長短得失 위의 책 pp. 601 602.
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따라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존중되면서 종교의 미신적 요소 를 부정하는 철학적 탐구자세가 요구되는 것으로 지적한다. 여기서 양계초는 바른 믿음이거 나 그릇된 믿음이거나 아무 구별없이 지성스러운 태도를 지닌 종교 와, 그 종교의 믿음이 지닌 우열과 지성스러움의 기여정도에 대한 평가의식을 내포하는 종교학 을 구별하는 탁월 한 안목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는 종교학 의 관점에서 보면 불교를 가장 지극한 종교 라고 강조하고 있다.29) 그가 강유위와 譚嗣同이 불교에서 얻은 바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도 이러한 불교 중심의 종교관에 근거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보면 양계초는 이미 유교를 종교의 범주에 서 제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은 강유위의 공교운동과 상반된 입장이고 1899년까 지의 저술에서 보이는 그 자신의 입장과도 어긋나는 것이 사실이다. 1902년 30세의 청년으 로 온 중국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梁啓超는 이해에 저술한 종교관계 논설 3편 가운데 세 번 째 논설에서는 불교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그는 문제의 출발에서 중국의 모 든 정치는 신앙이 없이 나아갈 수 있는가? 신앙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가? 라는 선택적 요구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여기서 그는 신앙 곧 종교를 문명의 극치는 아니라는 근본인식 을 전제하고서, 당시의 세계가 처한 문명수준에서는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임을 인 정한다. 또한 그는 중국이 가져야 하는 신앙은 어떤 종교에 속해야 하는가? 라는 또 하나 의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중국인은 본래 공교를 가지고 있다 는 대답에 대해, 그는 공교 의 교 는 교육의 교이지 종교의 교가 아니다. 공교의 교는 실행을 주장으로 삼고 신앙을 주 장으로 삼지 않는다 라 하여, 공교의 종교성을 전면적으로 그리고 선명하게 거부하고 있다. 이에 비해 그는 기독교에로 개종의 위험을 경계하면서 종교 가운데서는 불교를 가장 고상한 신앙으로 부각시키고 있다.30) 여기서 그는 1899년의 중국 종교개혁을 논하던 논설에서 강유위의 공교사상이 제시한 공 교의 6가지 주의를 제시하던 것과 대조적으로, 불교신앙이 지닌 가치의 6가지 사항을 제시 하고 있다. 곧 불교신앙은 ① 지혜의 믿음(智信)이요 미혹된 믿음(迷信)이 아니며 ② 兼善이 요 獨善이 아니며 ③ 세상에 들어있는 것(入世)이요 세상을 싫어 하는 것(厭世)이 아니며 ④ 한량이 없는 것(無量)이요 유한한 것(有限)이 아니며 ⑤ 평등한 것(平等)이요 차별(差別) 이 아니며 ⑥ 自力이요 他力이 아니라고 지적된다.31) 그가 기독교의 침투를 경계하면서 공 교가 아닌 불교를 최선의 선택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중국의 민족전통과 종교의 연관성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사실을 말해 준다. 동시에 그가 중국인의 종교로서 공교 를 버리고 불교를 선택하는 것은 국민정신과 사회변혁의 원리로 종교가 갖는 신앙적 열정에 서 공교의 한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었으며,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관을 명백하게 확 립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Ⅲ. 韓末과 日帝強占期 韓國의 儒敎改革思想 1. 道學派의 儒敎改革思想 29) 같은 책 pp. 602 605. 30) 양계초, 論佛敎與群治之關係 위의 책 pp. 618 619. 31) 같은 책 pp. 619 623.
한말도학의 대표적 주제는 위정척사론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여기서 척사론의 대상이 되 고 있는 邪敎(邪道, 邪術로 일컫기도 함)는 서양종교로서의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 함)와 서양의 문물제도를 의미한다. 이 시기에 척사론은 禁洋論 및 斥倭論으로 전개되면서 표면적으로는 서양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문제삼았으나, 모든 드러나는 양상의 속 에는 뿌리가 있다는 本末論的 인식의 도학적 논리에 따르면, 침략세력이 지니고 있는 군사 력과 문물의 근본에는 그 정신적 요소로서 기독교가 있음을 주목하였다. 따라서 기독교가 보여주는 서민대중 속에로 뻗어 가는 강한 침투력과 확산력을 의식하면서 유교에 대한 자기 각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갑오경장(1894)을 계기로 유교적 전통의 관료제도와 사회질서가 붕괴되고, 잇따라 변복령과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에 도학적 신념의 집단이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을미의병(1895)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에도 이미 개화정책을 추구하는 정 부로부터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지만, 도학적 신념의 유림집단에서는 지속적으로 유교 규범의 실천과 유교교육의 강화를 요구하는 상소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유림 도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유교적 각성운동으로서 문헌편찬활동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곧 유교교육의 강화와 척사론적 신념을 재확인시키려는 의도에서 편찬 된 두 편의 문헌을 들어보면, 하나는 기호지방에서 宋秉稷이 편찬하고, 48명이 참여하여 1900년에 간행한 尊華錄 (6권 3책)이다. 다른 하나의 문헌은 영남지방에서 許試과 郭漢一 등이 편찬하고, 52명이 참여하여 1903년 간행한 大東正路 (6권 3책)이다.32) 이 두 문헌은 편찬의도나 체제가 매우 유사할 뿐만 아니라, 1899년 고종이 내린 尊聖輪音 을 공통으로 실고 있다는 점에서도 상호 유사성을 보여준다. 당시 대한제국의 정부가 文廟(공자를 모신 사당)의 제사와 유교교육을 소홀히 한다는 유림들의 항의에 대해 정부의 유교에 대한 태도 를 밝힌 것이 바로 존성윤음 이다. 여기에서 고종은 세계의 모든 나라가 종교를 극진히 존숭하는 것은 종교가 人心을 맑게 하고 정치의 도리가 여기서 나오기 때문이라 하여, 종교 라는 용어를 사용함과 더불어 종교 의 기능을 중요시하는 입장을 강조함으로써, 이 시기에 우리 사회의 종교관을 선명하게 밝 히고 있다. 동시에 고종은 스스로 우리 나라에서의 종교는 범상하게 존중되기 때문에 그 실지가 없다 라고 지적하여, 국가적으로 종교정책이 결핍되었음을 반성하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우리 나라의 종교는 공자의 도가 아니겠는가 (我國之宗敎 其非吾孔 夫子之道 乎)라고 단언하고 있다. 고종은 이 윤음을 통해 우리나라의 종교 곧 국교를 유교라고 확인 하였던 것이다. 또한 高宗은 국가가 처하고 있는 위기도 종교가 밝지 않은 데서 오는 것이 라 지적하고, 온 마음을 종교의 유지에 둘 것을 약속하면서, 앞으로는 朕과 태자가 한 나라 유교의 宗主로서, 眞子와 공자의 도를 밝히며, 선조의 뜻을 잇고, 모든 신하들에게 물어서 진심으로 공자를 받들어 올리고 도를 따르겠다 고 선언한다.33) 이 시기에 고종에 의해 유교 에 대한 아무런 변혁의지도 없이 유교를 국교로 선언하고 있는 사실은, 당시 중국의 무술변 법시기에서 康有爲가 공교의 변혁과 국교화를 요구하는 것과 비교할 때 우리사회의 보수적 여건이 잘 드러난다. 위정척사론의 가장 강경한 입장을 지켰던 도학자로서 堤川義兵을 비롯한 의병운동을 주도 했던 柳麟錫(毅菴, 1842 1915)은 1913년에 지은 宇宙問答 에서 중국문화를 구성하는 4가 지 조건(帝王大統 聖賢宗敎 倫常正道 衣髮重制)을 제시하면서, 그 하나로 성현의 종교 (聖賢 宗敎)를 들고 있다. 그는 성현의 종교로서 중국의 교 는 공자를 宗 으로 삼는 것이라 밝히 32) 금장태, 東西交涉과 近代韓國思想 (성균관대출판부, 1984) pp. 268 285. 33) 綸音 ( 尊華錄 권6)pp. 15 17 및 尊聖輪音 ( 大東正路 권5).
고 있다. 또한 그는 인류로서 공자의 교를 종 으로 삼지 않으면 인류가 아니다 라고 강조 하여, 공자의 교를 모든 인류의 보편적 진리로 확신하는 자신의 신념을 보여준다. 그는 이 성현의 종교에서 최고의 도리 곧 상달도리(上達道理)가 나오는 것이라 하여 종교가 모든 도 리의 근원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34) 이러한 정통도학자들에 의해서도 유교가 종교로서 자 기 확인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유교가 모든 종교 가운데 가장 우 월한 종교라는 독단적 신념이지만, 이를 통하여 유인석은 종교 라는 서구 문화의 개념틀 속 으로 한 걸음 들어가고 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도학자 출신으로서 온건개화사상에로 전향하였던 인물들도 東道西器論의 틀을 지키고 있 는 만큼, 도학전통의 유교관을 보여주고 있음을 본다. 여기서는 신기선 김윤식 이인재의 경 우를 검토해 보겠다. 그 가운데 申箕善(陽園, 1851 1909)은 유교의 원리와 당시대의 지식을 經과 緯로 엮어 교과서적인 유교입문서를 저술하려는 의도에서 1896년 儒學經緯 를 저술 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理氣 天地形體 人道 학술 및 세계의 역사지리(宇宙述贊)의 편자에 따라, 지구구형설(球形說) 등 당시 서양문물에 관한 지식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그는 공자 의 도는 人道이다 라고 확인하면서 동시에 기독교(耶蘇之敎)에 대해 하늘을 속이고 인륜을 어지럽히는 풍속이요, 오랑캐의 비루한 습속이라 거부하여 정통적 신념을 밝혔다.35) 이에 따 라 그는 주한 외국공관의 항의를 받아 관직까지 사퇴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그는 도학의 위 정척사론적 테두리 안에 있는 동도서기론적 입장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또한 1908년 伊藤 博文 통감의 재정지원을 받아 李完用이 조종하여 세운 친일유교단체인 대동학회(大東學會) 의 회장이 되어, 兪吉濬 金允植 등과 유교조직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 사실에서 그는 척 사위정론이나 유교개혁론으로 관철하지 못한 동도서기론의 중간적 입장이 지닌 한계를 드러 내 주고 있다. 金允植(雲養, 1835 1922)은 敦化論 에서 敎라는 것은 사람에게 善을 권하여 恒心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라 하여, 종교를 정의하고 있다. 그는 곧 종교의 가장 기초적 공통성을 도덕성과 인격성에서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서양에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이에 따라 공자의 말씀에서, 이단을 전공(攻) 하면 해로울 따름이다 라고 전통적 으로 해석해 오던 구절을, 이단을 공격(攻)하면 해로울 따름이다 라고 해석하여 종교간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시도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교를 삼가 지켜서 恒心을 잃지 않으면, 모 두 우리 동포이다 라 하여, 종파주의를 반대하고 있다. 특히 당시 중국인들이 공교(孔子之 敎)를 국교로 하고자 하는 태도에 대해 다른 종교들에게는 치우친다는 혐의가 있으며, 무 리를 지어 일어나서 반대를 하면 공교를 하는 사람에게도 유감스러움이 있다 하고, 공자의 도가 지극히 크고 무한한데, 한 나라의 교 로서만 한정하는 것은 너무 작게 여기는 것이 아 니냐 라 하여 공교의 보편성에 대한 신념을 밝히고 있다.36) 그의 공교관은 종교관의 보편적 이해처럼 정통주의 내지 종파주의를 깨뜨리고 보편주의요 조화주의의 성격으로 열어나가는 변화의 중대한 자취를 볼 수 있다. 34) 柳麟錫, 宇宙問答 ( 毅菴集 권51) pp. 5 7. 35) 申箕善, 儒學經緯 ( 신기선전집 하, 아세아문화사, 1981) pp. 475 477. 36) 金允植, 敦化論 ( 김윤식전집 2, 아세아문화사, 1980) pp. 623 625.
李承照(韓溪, 1847 1916)는 心即理說을 주창한 한말 영남도학의 거장인 李震相(寒洲)의 아들로서 비중이 큰 도학자이다. 1880년 그는 청나라 鄭觀應이 지은 易言 을 읽고서, 예 수의 앞잡이고 맹자의 죄인이다 라고 비판할 만큼, 개화사상에 거부적인 정통도학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후 그는 일제의 압박을 피하여 1908년 62세의 노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으며, 이듬해 1909년 만주로 옮겨가서 韓興洞을 세워 동포들을 유교정신으로 결속 시키기 위해 활동하였다. 여기서 그는 日則銘 과 日誦五綱 및 五綱十目 을 정하여 개인이 나 집단으로 날마다 성찰하고 암송함으로써, 유교인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 윤리강령과 실 천조목을 제시하였다. 일칙명 은 밝고 밝은 상제께서는 그 명하심이 쉼이 없으나, 활동하고 고요함이 때가 있 으니 본받아 내 직분으로 삼는다 (明明上帝 其名無息 動靜維時 則我攸職)라는 사언체 운문 의 銘으로서 암송하기에 적합한 문장이다. 일송 5강 의 5강은 천지를 위해 마음(心)을 세우 고, 부모를 위해 몸(身)을 세우고, 자기인생을 위해 도리(道)를 세우고, 백성을 위해 표준 (極)을 세우고, 만세를 위해 모범(範)을 세운다 는 대강을 제시하며, 5강 10목 에서는 더욱 구체화시켜 실천의 기본규범을 확립하고 있다. 이처럼 유교적 이념에 근거한 개인과 집단의 의례를 정립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유교공동체의 결속을 강화시켜 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 사 실이다.37) 여기서 실질적으로 유교의 종교적 인식이 싹트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같은해에 이승희는 萬國大同議院私議 를 지었는데, 그는 여기서 모든 국가가 결합하는 국제연맹적 기구를 구상하였고, 이를 위해 萬國公法을 제정함으로써 문자 윤리 헌법 군사 기 술 통상의 분야에서 국가간의 소통과 조화방안을 탐색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그가 이미 화이론적 중국중심의 천하관에 사로잡혀 있지 않음을 의미하며, 강유위에 의해 제기된 大同 의 이념과 그 구체적 현실방안에 상당한 이해를 가졌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는 여지가 크다. 그러나 그는 개화사상가도 변법론자도 아닌 도학자의 자리를 지켜가고 있을 뿐이다. 신해 혁명(1911)으로 중국 내에 斷髮令이 내려지자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피신하기도 하고, 원세 개 대총통과 손문에게 공리주의적인 서양제도를 따르지 말고 공자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진 정한 中華를 실현하도록 요청하는 서한을 여러 차례 보냈다. 그만큼 그는 공자에 대한 불변 하는 신념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1913년 67세의 노인이었으나, 당시 북경에 공교회가 조직 되어 있음을 알고는 만주지역(東三省) 한국인 동포들을 결속하는 방법으로 동삼성 한인공교 회 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곧 각지로 통문을 돌리며, 동삼성한인공교회취지서 와 節 目 10조를 제정한다. 강유위와 진환장이 이끄는 공교회의 조직은 자신이 탐색해 오던 유교 조직화의 추구에 해답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38) 동삼성한인공교회취지서 에서는 하늘이 공부자를 내려보내서 만세토록 중심이 바른 교 萬世中正之敎)를 세웠으며, 인생은 이로써 인생이 될 수 있고 중화는 이로써 중화가 될 수 있다 라 한다. 또한 그는 당시에 천하의 풍조가 변하여 공자의 교가 세상에 행해질 수 없는 현실을 지적하고, 곡부와 북경에 尊孔會가 설립되었다는 소식에서 극한에 이르러 다시 회복하려는 기미(剝極將復之幾)를 확인하고 있다. 이 취지서의 10조절목에서는 먼저 공 자의 교는 天地와 日月과 같아서 사람은 모두 볼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입회자는 종전의 부패하고 헛되고 거짓된 습관을 통절하게 씻어내어 성심으로 교를 신복할 것을 요구하며, 변혁은 아니라 하더라도 폐습을 성찰함으로써 자기 쇄신을 추구한다. 다음으로 공자의 교는 37) 李承熙, 日則銘 日誦五綱 ( 韓溪遺稿 6, 국사편찬위원회, 1979) pp. 438 441. 38) 이승희, 東三省韓人孔敎會趣旨書 같은 책 pp. 263 265.
六藝四科의 항목이 있음을 전제하고, 공자의 교에 위배되지 않는 것은 당세의 응용에 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함으로써, 한정된 조건 아래서 새로운 문물의 수용을 추구한다. 또한 교를 수립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 자본을 합하여 學舍를 세우고 문자(서적)를 간행하며, 후 진을 가르치고 새로운 지혜를 개발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 교육을 활동의 중요한 과제로 확 인한 것이다. 나아가 천하의 교회가 정치와 군사의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政敎 分離의 원칙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취지서와 절목을 통해 제시된 것은 공교회와 직접 만나 기 이전에 이승희 자신의 유교재건방안으로서, 매우 한정된 범위에서나마 새로운 시도를 위 한 관심이 엿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1914년 1월 이승희는 北京에서 북경공교회의 주임인 진환장 등 공교회 인사들을 만나서 공교회에 관한 논의를 하였고, 동삼성한인공교회지회 를 설치하도록 승인을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공교회와 연관된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곧 공교회의 黃龍厚와 진환 장으로부터 요청을 받고 孔敎敎科論 孔敎進行論 孔祀冠服說 등을 지어 공교회의 교육과정과 제도에 관한 견해를 공교잡지 에 싣기도 하였으며, 강유위에게 편지도 보내 어 공교문제를 논의하고, 직접 공교회 활동에 참여하여 강연회에 나가 몇 차례 연설도 하고 있다. 그는 공교교과론 에서는 공교교과의 대강령으로 五德 五倫 六藝 四科를 들고 있다. 또한 유럽과 인도에서 기독교와 불교를 지키는 사람들도 이미 人道의 교지를 점점 알게 되 면 스스로 공교를 宗으로 삼을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는 동양에서 2천년 동 안이나 공자를 信服하여 익히던 자들이 물고기가 물을 잊어버리듯이 집안을 뒤엎고 조상을 원망하는 등 가장 염려스러운 무리라고 서구화하는 동양인을 경계한다. 또한 공교를 밝히고 펴기 위해서는 종전의 헛된 그림자의 견해와 부패한 습관에 젖은 것을 모두 버리고 눈앞의 진실한 이치(實理)를 추구하고 발 밑의 실제적 자취(實跡)를 힘써서 본체를 밝히고 응용에 통달하는(明體達用) 영역까지 들어가야 할 것을 요구한다.39) 공교진행론 에서는 辛亥革命 이후에 수립된 공화국의 풍조가 공교는 무익하다 라거나 공교는 해롭다 는 비판의 소리를 들으면서, 공교도로서 반성을 요구하며 공교를 실행할 방 법을 강구하고 있다. 그는 공교를 진흥하기 위해서는 周나라 제도를 본받으면서 時宜를 참 작하여, 이미 세워진 각 지역의 孔廟에 공교의 학과를 설치하고, 더하여 전문학교를 증설하 는 등 교육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기한다. 이에 따라 學宮(학교) 學員(학생) 교과서 敎規 (학칙)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이 때 부딛치는 난관으로서, ① 인륜도덕을 위주로 하 는 공교와 名物과 事功을 위주로 하는 新學의 차이를 本末關係로 연관시키도록 제안하며, ② 중국이 국력과 백성의 어리석음으로 학교를 세우기 어려움은 부자의 재력과 가난한 자의 노력을 합쳐서 일으키도록 요구하고, ③ 經典의 오묘함과 신학서적의 복잡함은 절충하기 어 렵지만, 경전을 알기 쉽게 간추리고 신학서적은 바른 이치에 해롭지 않게 간추려서 時用에 적합한 것은 채택할 것을 주장하였다.40) 여기서 그는 전통의 유교와 서양학문의 신학이 조 화를 이루는 교육방법을 모색함으로써, 동도서기론적 의식에로 전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이승희는 북경공교회에서 몇 차례 강연하는 가운데서 공교의 당면 문제를 보다 깊이있게 논의하고 있다. 그는 당시의 세계가 크게 변하는 시기에서 일어나는 공자의 교에 대한 비판 을 전제로 스스로 반성하여야 할 점을 虛想 혼동 傅會의 주제로 분석하면서, 허상에 대해 實 心으로 실천할 것을 요구한다. 혼동은 신앙의 자유(信敎自由)로 공자 예수 노자 부처를 모두 39) 이승희, 孔敎敎科論 ( 한계유교 7, 국사편찬위원회, 1980) pp. 321 326. 40) 이승희, 공교진행론 같은 책 pp. 329 334.
성인으로 여기는 혼동으로 차이를 엄격히 분별하여야 實見이 있을 것임을 지적한다. 부회는 공교가 없어질까 염려하여 형편에 따라서 명맥을 보존하기 위해, 종교가 神敎를 주장하는 것을 보고는 공자도 신교를 주장한다 라 하고, 공화제에 임금이 없다고 말하니 공자도 임 금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라 하고, 남녀평등을 말한데 대해 공자도 婦道를 존중한다 라 하여 견강부회하는 것이라 본다. 그는 천당 지옥을 말하는 신교는 공자와 다르고, 공자에는 임금이 없다고 할 수 없으며, 지어미가 지아비를 따르지 않으면 가정이 될 수 없다고 차이 를 선명하게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孔道를 보호하고자 하면서 먼저 공자의 도를 속이는 것이 옳으냐 라고 반문한다. 또한 그는 공자의 도는 자립할 때라야 가능하다고 지적하며, 정 정당당하게 천지 사이에 우뚝 서서 사람이 모두 볼 수 있는 것이라 하여 독자적 자립성을 강조한다. 그는 공자의 도를 확립하는 방법으로서 실지를 찾아야 하며, 실지를 찾으면 분별 이 밝아지고, 분별이 밝아지면 믿음이 독실해지고, 믿음이 독실해지면 행동이 독실해 진다 라 하여, 다른 종교에 적응하는 의존적 방법이 아니라, 진실성과 분별 및 믿음과 실천을 통 한 공교의 독자성과 내면적 심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는 공자의 도를 천명의 성품에 근원 하며(原天命之性), 인도의 경전을 수립 한다(立人道之經) 라 하여 천명과 인도의 두 축을 기 준으로 정의하고, 공자를 중화의 마음(中華之心)이요 만세의 마음(萬世之心)이라 하여 중화 의 문화와 만세의 영원한 역사가 공자 없이는 생명을 잃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41) 또 다른 강연에서 이승희는 오늘의 중화가 지닌 큰 운명은 공교에 달려 있고, 공교의 근 심은 학교가 두 갈래로 나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라고 선언하여, 공교가 중화의 존망 에 결정적 요소요, 교육은 공교의 존망에 결정적 조건임을 지적하고 있다. 공교를 舊學 이라 하고 새로운 학교를 新學이라 하여, 구학은 이미 지나간 과거적인 것이요 버려질 것이며 실 용성이 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다. 여기서 그는 시대에 따라 마땅하게 제 정하는 것(因時制宜)이나 제도와 기계 등은 공자교의 문제에 속한다 하고, 다만 공교와 시대 에 적합한 제도와 기계의 문제를 두 갈래로 나누면, 학교도 온전하지 못하고 공교도 온전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는 도교 불교 예수교 회교는 人道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인간세상의 일과 정치를 위해서 학교를 별도로 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지적한다. 이와는 달리 공 교는 교밖에 정치가 없고 정치밖에 교가 없다 라 하여, 政敎가 분리되지 않음을 강조하며, 국가와 교가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자를 통합하여야 하며, 신학과 구학을 통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만약에 끝내 양자가 소통되지 않는다면, 孔廟와 학당에서라도 공 교학과를 설립하여 공교가 현시대의 응용(時用)을 겸하고 있음을 밝힐 것을 주장하고 있 다.42) 이러한 그의 정교일치론은 앞에서 제시한 동삼성한인공교회취지서 의 부록인 절목 10 조의 정교분리적 입장과는 상반된 것으로 보이지만, 현실적 대처방법과 구별되는 그의 이념 적 인식은 정교일치의 유교적 특성을 확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공교가 공식 교육 기구로부터 유리되는 것이 공교의 존립에서는 얼마나 심각한 문게인가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었으며, 진취적으로 통합론을 주장하고 있는 태도는 당시 국내의 도학자들이 신학교를 정 통에 위배된다는 점과 침략자인 일본인에 의해 세워진다는 점에서 자손들의 입학을 거부하 는 폐쇄적 거부태도와 좋은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승희가 중년기에서 만년에 이르기까지 남긴 여러 저술들도 그의 공교사상체계와 연관되 고 있음을 본다. 家範 (1912)과 女範 (1912) 및 內則章句 (1894), 閨儀 는 가정과 41) 이승희, 孔道會講說 ( 한계유고 6) 앞의 책 pp. 362 364. 42) 이승희, 孔敎會講說 같은 책 pp. 388 390.
여성의 실천규범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며, 禮運集註 (1914)는 강유위의 대동 개념 에 대한 관심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弟子職集解 (1914)는 교육문제에 대한 그의 깊 은 관심을 심화시킨 것이다. 中範 이 우주론적 원리를 체계적으로 인식한 것이라면, 曲 禮章句 (1894)는 의례에 대한 실천적 관심을 보인 것이다. 그가 일찍이 正蒙類語 (1884) 와 蒙語類訓 (1888)을 지어 천자문류인 아동용 교과서를 체계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에 서도, 뒷날 그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공교의 조직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는 맹아를 찾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그의 공교사상과 유교개혁론은 도학적 전통의 내면에서 성장되어 나온 것으로 강유위의 공교사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서로 맺어질 수 있는 사상내적인 독특 한 요인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2. 愛國啓蒙思想家의 儒敎改革思想 張志淵(韋菴, 1864 1920) 은 영남도학의 학풍 속에서 성장하여, 먼저 李瀷과 丁若鏞의 실 학사상에 접하면서, 이를 계기로 삼아 自強運動에 참여하게 되고 마침내 애국계몽사상가로 나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99년 時事叢報 와 皇城新聞 의 주필이 되어 언 론을 통한 계몽운동의 최선봉에 나섰다. 또한 1900년 廣文社의 출판위원으로서 정약용의 목민심서 홈흠신서 등 실학사상의 저술을 간행하며, 정약용의 疆域考 를 보완하 여 增補大韓疆域考 를 편찬하였던 것은 자강운동의 기초에 민족문화의 전통기반을 확립 하고자 시도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그가 朝鮮儒敎淵源 을 저술한 것도 유교를 통한 민족문화의 전통을 확인하는 작업을 수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선유교연원 은 한국유교사에 관한 최초의 통사적 서술이다. 그는 이 저술에서 도학 과 실학의 양면을 모두 긍정적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아무의 관심도 끌지 못 했던 關西와 關北地方의 유학자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민족통합의식을 투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부록에서 그는 유교의 기본성격을 재확인하고 역사를 통해 사 회적 효용성을 성찰한다. 그는 유교에 대한 정의로서 道에 의거하여 백성을 얻는 것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에 통하는 것이 유교다, 음양에 순응하고 교화에 밝다, 6예의 글을 널 리 배워서, 천도에 밝히고 인륜을 바르게 하며 지극한 정치(至治)를 실현하는데 법도를 이룬 다 등으로 고전을 인용하여 규정한다. 그러면서 근세의 山林學者를 가리켜 명성을 낚고 벼슬을 교묘하게 하는 마음(釣名巧宦之心)과 당파를 수립하고 사사로움을 경영하는 계책(樹 黨營私之計)을 가진 무리 라고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유교전통의 가치를 중요시하 면서도 당파적이고 허세와 위선에 빠진 도학자들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식을 통하여 유교개 혁론의 근거를 확인한다. 그는 유교에 대한 역사적 비판론을 검토함으로써 당시의 국가멸망에 대한 유교의 책임을 묻는 비판을 넘어서 정당한 평가의 기준을 정립하고자 시도한다. 곧 장자 外物篇에서 유학자는 시경과 예경을 들먹이면서 무덤을 파낸다 (儒以詩禮發塚)라는 평가는 유교를 가 장하고서 세상을 속이고 명성을 도둑질하는 자에게는 적합한 것으로 인정한다. 또한 楊雄의 法言 에게 소개한 魯나라는 유교를 썼다가 줄어들었다 (魯以用儒而削)는 비판적 평가를 검토하고 있다. 宋나라에 도학이 융성하였으나 金나라와 元나라에 침략당한 사실이나, 우리 의 경우 불교를 숭상한 삼국과 고려는 부국강병하고 오랜 국운을 누린데 비해 도학을 존중
한 조선왕조는 이상정치를 실현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국세가 쇠약해져서 나라가 망하는데까 지 이르렸다는 사실을 지적하여 유교가 사회발전에 부정적 기능을 하는 것 인가를 반성한 다. 당시 조선왕조가 멸망한 책임을 유교에 묻는 비판이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었던 것이 현 실이다. 여기서 그는 노나라가 유교 때문에 세력이 줄어들었다는 비판에 대해 양웅이 노나 라가 참 유학자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魯不用眞儒故也)라고 대답한 말을 이끌어 자신의 입장을 삼고 있다. 조선사회에서도 사회의 참혹함과 朋黨의 해독이 일어난 것은 유교가 그 렇게 한 것이 아니라 정치가 순치시킨 것이며, 유교의 이름을 빌어 임금을 속인자들의 죄요 유교의 죄가 아님을 강조한다.43) 진실한 유교와 거짓 유교를 분별하고, 유교와 정치를 분별 하여 버려야 할 부분과 살려나가야 할 부분을 가려냄으로써, 유교개혁의 방향과 방법을 드 러내고 있다. 장지연은 공자를 유교의 宗祖라 함으로써, 유교를 종교로 이해하고 공자를 종교의 교주로 보는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유교적 인격의 주체인 선비에게는 궁색할 때의 도리와 지위를 얻었을 때의 사업이 있음을 분별하여, 인격을 닦고 말씀을 제시하여 선각자로서 후각자를 깨우치는 것이 궁색할 때의 도리이고, 자신을 세상에 내세워 도리를 행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은택을 끼치는 것이 지위를 얻었을 때의 사업이라 밝힌다. 이러한 전통적 선비관을 통해 역 사의 위기 속에서도 선비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그 는 유교의 종교적 각성을 통하여 민족정신의 강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우 리 민족의 종교적 시조를 단군의 神敎라 보고, 箕子를 한국 유교의 宗祖라 한다. 또한 우리 의 종교사가 불교우세시대와 유교 불교의 병행시대, 유교의 우세시대로 변천되어 왔음을 제 시하며, 당시를 신앙의 자유와 종파적 다원화의 시대로서 민족통일의 관념이 결핍되는 것으 로 지적한다.44) 그의 유교개혁론은 민족운동이 기본이며 유교개혁사상이 민족의식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樸殷植 등과 1909년 9월 大同敎를 창건함으로써 당시 親日유교단체인 大東學會에 저 항하여 민족정신을 기초로 유교를 조직화하는 민족적 종교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는 종교의 국가적 민족적 역할을 주목하여, 종교란 국민의 腦質을 鑄造하는 원료요, 한 나라의 강약과 흥망이 종교에 걸려 있다 라고 종교의 특성을 정의함으로써, 종교의 사회적 요청을 강조한다. 동시에 그는 공자의 誕日의례와 文廟의 釋奠의례 및 祭天의례를 비롯한 황제의 의례(皇禮) 등 유교의례의 체계적 재구성을 추구하고, 나아가 의관제도의 개혁방법을 검토하 기도 하였다. 의례의 재정립을 통한 유교적 실천의 활성화를 추구하는 것은 유교개혁운동의 중요한 과제로 인식될 수 있다. 여기서 대동교는 유교의 새로운 이념을 담고 있는 이름으로 서, 강유위의 대동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대동교의 입장에 서 유교의 기본성격을 進化주의 平等주의 兼善주의 強立주의 博包주의 至誠주의라는 6대주의 로 제시하고 있다.45) 이러한 그의 유교개혁사상은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며 민족적인 의식을 지닌 혁신적인 것으로서, 애국계몽사상의 이론과 더불어 강유위와 초기 양계초의 영향에 깊 이 젖어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43) 張志淵, 儒敎者辨 ( 朝鮮儒敎淵源 권3) pp. 192 193. 44) 같은 책 권7, p. l. 45) 장지연이 제시한 유교의 6대주의적 새로운 특성은 양계초( 論支那宗敎改革, 1899)가 제시 한 6대주의에서 重魂주의를 至誠주의로 바꾼 것 뿐이고 다른 것은 꼭 같다.
申采浩(丹齋, 1880 1936)는 任憲晦(鼓山)의 문인인 조부로부터 도학전통의 학풍을 전수 받고, 그의 조부와 동문인 申箕善의 추천으로 1898년 19세로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바로 그 해 11월 萬民共同會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면서 자강운동 내지 애국계몽운동에 뛰어 들었 다. 1905년 26세로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바로 그해에 황성신문사의 사장인 張志淵의 초 청으로 이 신문의 논설기자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언론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역사연구를 통한 민족의식의 각성을 추구하였고, 지하독립운동단체인 新民會에 가담하 고 1910년 망명하여 광복회 임시정부 신대한동맹단 군사통일주비회 국민대표회의 등 독립운 동조직에 참여한다. 또한 天鼓 大同 의 잡지 편집도 하며, 大倧敎와 불교에도 기울어 졌던 일이 있고, 무정부주의에 빠져들기도 하였다.46) 이러한 시기에 그의 애국계몽사상에는 양계초의 영향이 깊이 스며들었던 자취를 찾아 볼 수 있으며, 그 가운데는 유교개혁사상도 포함되고 있다. 신채호의 유교개혁론은 낡은 질서를 허물고 새 질서를 추구하는 진보주의적 관심과 국권 의 자주성을 확립하기 위한 민족주의적 관심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국운이 쇠퇴한 책임을 유교에 돌리기보다는 을바른 유교적 신앙의 결여에서 찾았고, 당시 사회에서 그릇된 유교신앙의 폐단을 예리하게 성찰하고 있다. 곧 개혁되어야 할 폐단 으로서, 속된 유교인(俗儒)들이 부귀를 추구하고 명예를 낚는데 젖은 탐욕, 先賢의 정신적 실질은 버리고 형식적 허식만 모방하는 허구성, 小節에 구애되어 대동을 못보는 편협성, 사 대주의와 보수적 완고성 등을 지적한다. 1908년에 친일유교단체인 大東學會가 설립되는 등 다양한 유교교세 확장운동이 제기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그는 한편으로 유교확장이라는 명분자체를 환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대동학회의 유교확장 명분 속에 감추어진 내면적 허위성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곧 그는 수 백년 동안 한국의 人情과 풍속 습관에 유교가 큰 영향을 미쳐서 유일의 국교 를 이루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 유교가 이 시대에서 세력 을 확장함으로써 문명의 풍조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백성과 나라를 행복하게 하는 역할이 중대함을 인정한다.47) 그러나 그는 유교확장의 방법은 유교의 진리를 확장함에 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확장 은 고사하고 도리어 멸망케 함이다 라 단언한다. 곧 유교진리의 확장을 유교확장론의 기준 으로 제시하고 진리의 위배는 유교의 멸망을 초래할 것이라 경고한다. 그는 당시 유교확장 론을 주창하는 집단으로 유교진리를 위배하는 경우를, 매국노(친일파), 어리석은 학자(보수 파 도학자), 아첨하는 무리들(보수파 추종자)의 3유형으로 분석하면서 그 폐해를 제시하고 있다. 賣國奴 醜行 : 황금이나 낚으며, 벼슬이나 훔치고자 함. 유교확장의 주창자 : 국가의 적이요, 유교의 적임. 愚學者 盲眼 : 존화주의나 주창하며, 완고사상이나 고취함. 유교확장의 주창자 : 문명의 적이요, 유교의 적임. 媚外輩 妖術 : 다른 종교나 박멸하고, 동포나 유도하고자 함. 유교확장의 주창자 : 사회의 적이요, 유교의 적임. 신채호는 유교의 진리를 확장하여 허위를 버리고 실학에 힘쓰며, 소강을 버리고 대동에 힘써서 유교의 빛을 우주에 비출지어다 라고 선언한다. 곧 진리를 확장함으로써 유교의 빛 을 우주에 비추는 데까지 이른다는, 진정한 유교의 확장을 위해서는 허위와 소강을 버리고, 46) 愼鋪度, 申采浩의 社會思想硏究 (한길사, 1984) pp. 11 72. 47) 申采浩, 儒敎擴張에 對한 論 ( 丹齋申采浩全集 下, 형설출판사, 1987) p. 119.
실학과 대동을 힘쓰도록 요구한다. 여기서 실학 은 도학파나 실학파에 의해 추구되어 온 유 교전통의 과제라 할 수 있지만, 대동 의 과제는 강유위의 대동사상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 이념으로 파악할 수 있다.48) 또한 그는 박은식의 儒敎求新論 (1909)을 유교개혁을 위한 새로운 빛으로 강조하면서, 그 자신의 유교개혁론이 추구하는 과제와 신념을 밝혀, 보수를 변하고 실천을 힘쓰며, 守舊 를 변하고 就新을 힘쓰며, 沈靜을 변하고 활동을 힘쓰면, 반드시 백성의 지혜를 진흥하며 국 가의 주권을 옹호하여 유가의 큰 광채를 번쩍일 날이 있을진저 라 주장한다. 그가 변혁하고 자 하는 것은 보수 수구 침정의 폐쇄적이고 정체적인 낡은 질서요, 그가 힘쓰고자 하는 과제 는 실천 취신 활동의 능동적이고 진보적인 새로운 질서로서, 그의 유교개혁론이 지닌 실천적 현실성과 진보적 세계성의 기본성격과 방향을 보여준다.49) 애국계몽운동기에서 신채호의 유 교개혁론이 지닌 또 하나의 기본성격은 유교개혁의 전제로서 국권의 수호와 국민정신의 강 화를 요구하는 민족의식에서 드러난다. 그는 종교를 국민에게 감화를 주는 하나의 큰 기관 으로 규정하고, 종교의 노예가 될 뿐이요 국가의 관념이 없는 종교 나 종교의 신도가 될 뿐 이요 국민의 정신이 없는 종교 는 20세기 새국민의 종교가 될 수 없다고 거부한다.50) 그는 민족주의적 관심에서 유교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고 불교와 기독교를 비롯하여 천도교와 대 종교 등 민족종교에도 적극적인 관심과 긍정적인 평가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柳寅植(東山, 1865 1928)은 安東出身으로 영남의 정통학맥을 이은 전형적인 영남도학자이 었다. 그는 1895년 31세 때 을미의병에 참여하였다가 관군에게 쫓겨 사방으로 피신하다가, 1903년 서울에 올라와 당시에 애국계몽운동을 하던 柳謹 장지연 신채호 등과 교류하였다. 그 때까지 보수적 도학자이었던 그는 성균관에 머물면서 신채호와 여러 날 신학과 구학의 문제 를 토론하였으나 신학에 승복하지 않았다. 이 때 신채호로부터 양계초의 陰氷室文集 을 빌려 며칠동안 침잠하여 읽고 나서 홀연히 결심을 하고 머리를 깎으며 개화론자로 전환하였 다. 머리를 깎으면서, 그는 성리학(心性理氣)이 전날의 학술이라면, 자연과학(氣化聲光)은 오늘의 학설이요, 전통예복(峨冠法服)이 전날의 풍속이라면 서양복장(洋裝削髮)은 오늘의 풍 속이다 라 선언하여 서양문물의 수용을 시대적 과제로 확인하였다. 여기서 또한 박은식 장 지연 신채호 유인식 등 이 시대 애국계몽사상가들이 양계초의 영향을 얼마나 깊이 받아들이 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51) 그는 일제의 침략으로 4천년 神明의 종족이 서로 이끌고 남의 노예가 되어가는 국가의 멸망을 목도하면서, 太息錄 을 지어서 시대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성찰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과제를 검토하고 있다. 먼저 언론자유의 권리를 내세워 2천만 동포에게 변혁의 역사적 요청을 호소한다. 우리 동포가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는 (無爲) 정부의 원숭이가 아니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옛 사람의 노예가 아니라면, 옛 것을 바꾸어 새롭게 하는 도리(革 舊維新之道)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유교가 우리 사회에 文弱한 기풍을 이루었 으나, 중화문화의 제도와 도학의 학풍을 지켜왔던 전통사회에서의 유교적 역할을 인정한다. 그러나 당시 사회를 진단하면서, 법도가 오래되어 폐단이 일어나고 외형을 꾸미고 실질은 48) 신채호, 같은 책 pp. 119 120. 49) 신채호, 儒敎界에 對한 一論 ( 단재신채호전집 別集) p. 109. 50) 신채호, 十二世紀 新國民 같은 책 p. 227. 51) 금장태 고광직, 앞의 책 pp. 417 426.
퇴화함으로써, 정부가 부패하고, 풍속은 문란하고, 선비의 기개는 시들고, 학술은 고루해져서 온갖 폐단이 일어나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라 하여, 현실의 위기를 선명하게 인 식하고 있다. 동시에 동양과 서양이 충돌하는 20세기의 경쟁풍조 속에서 우리 민족은 오히 려 소라껍질 속에서 한가롭게 단잠에 빠져 어느 때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나라가 망하고 집 이 무너져서 서로 이끌고 남의 노예가 되면서도,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편안하듯 눈이 먼듯, 나라가 망하였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굴욕을 당하는지도 모르면서, 완고함이나 지키고 먹고 마시기를 일삼고 있다 라 하여, 역사적 상황에 대한 민족의 맹목성을 통탄하고 있다.52) 유인식은 태식록 에서 우리 나라의 폐습을 구제하는 방법으로서 폐습의 원인을 먼저 성 찰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고, 조선왕조의 망국원인은 기본적으로 정부와 유림의 부패에 있 었던 것으로 진단하며, 민족의 당면문제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유림에 있음을 단정한다. 여 기서 그는 정부의 부패와 유림의 부패를 조목별로 분석하고 있다.53) 그는 조선왕조를 ① 창 업과 문명의 시대(태조 성종) ② 시들고 떨치지 못하던 시대(중종 선조) ③ 정통이 아닌 임금의 혼탁한 시대(연산, 광해) ④ 당쟁의 분열시대(인조 숙종) ⑤ 훈신과 외척이 왕명을 훔치던 시대(경종 고종)로 시대구분하여, 중엽 이후를 폐단이 누적되어 온 쇠퇴과정으로 파 악하고 있다. 또한 유림의 부패를 분석하면서 주자의 학풍을 추종하여 道문학의 한쪽에 치우치면, 尊德 性의 한쪽에만 치우친 육상산의 학풍보다 폐단이 더욱 심하다고 지적한다. 곧 우리의 학풍 이 공허한 이론(口耳之學)에 그치고 성찰할 줄 몰라서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와 세상을 경륜 하는 도구가 없으며, 국민을 위한 계책이나 세계의 형편을 알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그는 공허한 이론을 숭상하는 경학가(도학자)의 폐단이 날로 깊어지게 되어 나라의 멸망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여 도학파를 비판하고, 양명학의 심학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주목 하고 있다. 곧 중국에서도 왕양명이 致良知說을 제기한 이후 존숭되어 왔으며, 명 청시대에 뛰어난 인물들이 모두 陽明學派에서 나왔다고 지적하고, 일본에서도 명치유신의 주도자들이 진취주의를 내걸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반드시 양명학파일 것이라고 단정한다. 또한 도학의 정통주의적 입장에 따라 다른 사상을 異端과 邪說로 규정하여 배척하였던 학풍이 창 조성을 결여한 것을 비판하며 학문과 신앙의 자유를 강조한다. 곧 그는 전제정치는 백성의 기개를 쇠약하게 하고 전제적 학문은 백성의 지혜를 막아버린다. 백성의 지혜를 막아버리 는 것은 나라를 멸망시키고 종족을 절멸시키는 근원이다 라 하여 학문의 자유를 강조하고, 동시에서 서양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 사실과, 강유위가 三聖人(공자 석가 예수)이 일체를 이루며 모든 종교는 평등하다 (三聖一體 諸敎平等)라고 한 말을 인용하고 있다.54) 그는 당시 한국인 가운데 중년 이상은 사상이 부패하고 고질이 깊어서 떨치고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 없지만, 우리의 청년은 기상이 활발하고 사상이 청신하다고 대비시키고 있다. 그 만큼 그는 청년에게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걸고 있지만, 동시에 기성세대의 변혁가능성에 절망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20세기 이후의 時議는 진화의 원리와 민권주의 원칙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한다. 이 시의에 따라 옛 질서를 혁신하고(革舊), 새로운 52) 柳寅植, 太息錄 ( 東山全書 下) pp. 87 88. 53) 유인식이 太息錄 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부와 유림의 부패 조목은 다음 항목으로 열거되고 있다. 정부의 부패: 1. 君權太重 2. 勳戚世臣之禍 3. 黨論之禍 4. 尊大學者 5. 疏武備 6. 科擧之 弊 7. 用人尙閥 8. 事大主義 9. 田賦民籍之幣 10. 吏胥之弊. 유림의 부패: 1. 經學家(道學者) 2. 科學家(科擧之學) 3. 崇拜儒賢 4. 儒院(書院) 5. 經學家之專制 6. 豪家(世族)之專制 7. 家庭敎育 範圍之狹 8. 薄生財. 54) 유인식, 위의 책 pp. 101 105.
질서를 설립하는(維新) 것이 민족을 위한 계책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 계책에 책임을 지는 선각자의 역할을 주목한다. 여기서 그는 이러한 선각자가 유림들 사이에서 나와야 할 것으 로 요구한다. 그 선례로서 일본의 명치유신이 吉田松陰와 板垣退助에서 말미암았고, 중국의 만주정부 박멸이 양계초 강유위 손문 황준헌에서 말미암았다고 지적한다.55) 이에 따라 그는 교육을 통한 젊은 인재의 배양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그 자신이 1907년 고향에서 協東學校 를 세웠고, 李商在 등과 조선교육협회를 조직하기도 한다. 유인식은 1919년 양계초의 時務學堂 學記 를 참조하고 우리의 청년들이 배우는데 필요 로 하는 과제를 선정하여 15조의 學範 을 제시하였다.56) 그는 특히 15조(종교사상)에서 자신의 종교관과 유교관을 밝히고 있다. 곧 그는 공자를 모든 聖王의 으뜸으로 만세토록 太平을 열어주어 온 세상이 존숭한다 라 하고, 우리나라는 유학자에서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孔敎를 자부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불교가 사이에 끼어 있지만 공교는 2천년 동안 국민정 신의 정수(國粹) 로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근세에 종파가 다원화하면서 유교는 침체되고 사 상가나 명망있는 인물이 모두 기독교(邪敎)에서 나오는 현실을 인정한다. 그는 당시에 출현 한 민족종교인 대종교와 천도교는 공교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 본다. 그는 이처럼 유교가 쇠퇴하는 원인을 다른 종교가 미신을 진실하고 정성스러운 신앙(眞誠信仰)으로 이루 는 반면에, 유교는 경학의 대가조차도 입으로만 외울 뿐이요 진실한 정성과 실질의 얻음이 없는데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또한 그는 당시의 상황에 따른 종교정책으로서 신앙의 자유(信敎自由)와 모든 종교의 평 등(諸敎平等)의 주장이 세상에 성행하고 있으니 여러 종교들을 합쳐서 일치시킬 수 없는 만 큼, 다만 국민정신의 정수를 지켜서(保守國粹) 다음 세상에 소멸되지 않게 하여야 할 뿐이 다 라 하여 유교수호론을 제시한다. 동시에 인간은 종교사상이 있은 다음에 마음이 깃들 곳(主著)과 사업이 의거할 곳(據依)이 있으며, 모든 하는 일에 궁극처(究竟)가 있다 고 하여 종교의 보편적인 필수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또한 당시의 세계에서 강권으로 일컬어지는 나라들이 모두 종교와 신앙의 힘으로 굳은 결속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국제사회의 현실을 인식하고, 우리나라도 상호경쟁과 삼켜먹는 시국에 처하여서, 종교의 힘이 없이는 나라를 유지하고 회복할 수 없다 고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면서 국민정신의 정수로서 공교 의 신앙 (信仰國粹)을 배우는 청년의 중심과제로 삼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57) 그는 서양의 신학문을 받아들이도록 역설하면서 동시에 각국이 國粹를 중요시하는 민족주의적 세계사조 를 통찰하고 있으며, 우리나라가 우리나라의 일에 무관심하였던 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그가 국수 로서 유교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양계초의 입 장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지만, 유교를 종교로서 확신하고 있는 것은 1902년 이후의 양계초 입장과는 명백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유인식은 舊敎의 혁명으로서 루터(Martin Luther)의 입지와 공교의 復原으로서 강유위의 입지를 제시하여 종교사상가를 주목한다. 또한 일본인 吉田松陰의 격언을 소개하거나 서양 의 지식인을 西儒 라 일컫고 있는 사실은, 그가 폐쇄적인 국수주의나 척사론의 배타적 태도 가 아니라 개방적 자세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당시의 학계를 대혁명의 시기로 규 55) 유인식, 같은 책 pp. 107 110. 56) 유인식이 學範 에서 제시하고 있는 학문을 위한 방법과 과제의 15조목을 열거하면, 1. 立志 2.養心 3. 倫理學 4. 公德心 5. 熱誠 6. 毅力 7. 涵畜 8. 治身 9. 讀書 10. 窮理 11. 學文 12. 合 群 13. 經世 14. 理想 15. 宗敎思想이다. 57) 유인식, 學範 15, 宗敎思想 같은 책 p. 118.
정하고, 시대적 과제로서 관습을 파괴하고, 신사조를 섭취하며, 신진의 선비를 격양시켜 지 조와 절개가 있게 하고, 활발하여 생기가 있게 하며, 마음씨를 개량하고, 활동의 범위를 개 척하며, 정신을 발양하여야 할 것 을 요구한다. 이렇게 하여야 나라도 보호할 수 있고 백성 도 붙들어 줄 수 있을 것임을 강조한다.58) 또한 그는 유학의 새로운 방향으로서 心學에 깊은 관심과 긍정적인 이해태도를 보이고 있 다. 여기서 그는 후세 도학자들이 尊德性 의 수양론적 과제를 禪宗 또는 陸學이라 지목하면 서, 마음을 다스리는데 전혀 어둡게 되어, 번쇄한 문장의 뜻에 얽매임으로써 근본을 잃게 되 었다고 비판한다. 또한 그는 도학자들의 공허하고 무능함을 통렬히 공박하여, 비록 經史子 集의 책을 읽고 理氣, 性情의 이론을 분석하더라도, 막상 사업에 부딪치면 마음과 기개가 식 어버리고 손발이 떨리며, 뜻을 잃고 처리를 잘못하여, 몸과 이름을 그릇치게 되므로, 유학자 는 쓸모없다고 온 천하에 소문이 났다 고 지적한다. 이에 비해 그는 왕양명이 후기의 타락 한 성리학을 일소하고 致良知와 知行合一의 학설을 내세워, 오늘날까지 그 학설이 천하에 두루 퍼져있다고 인정한다.59) 이 시기에 박은식 등 애국계몽사상가들 사이에 제기되고 있는 심학(양명학)에 대한 적극적 이해태도의 배경을 그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유인식과 같은 영남유학자인 李寅梓(省窩, 1870 1929)는 郭鍾錫(俛宇)의 문인으로 高靈 사람이다. 그는 신학문의 적극적 수용과 깊은 조예를 지녔으며, 古代希臘哲學攷辨 (1912) 을 저술하여, 유학자로서 서양철학의 체계적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또한 강유위와 양 계초의 영향을 받아 保國 保種 保敎를 당면의 기본과제로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보교 의 문제에서는 천하의 교(종교)가 선을 좇으며 바른 것을 좋아하는 보편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 또한 동양이 외국을 배척하였고 서양이 분쟁을 일으켰던 것은 교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음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은 교 의 바탕이 아니라고 해명한다. 이에따라 서양에 서는 교회의 가혹한 관례를 제거한 뒤에 公法을 행하며 백성의 억울함을 풀 수 있었고, 동 양에서는 斥邪論이 행해지자 마침 교 를 더럽히게 되었고 攘夷의 습속이 성행하자 도리어 재앙을 재촉하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특히 모든 종교가 조화를 이루는 이 시대에서, 유교는 다른 종교가 진리와 仁心에 합치하는지 여부를 성찰하도록 요구한다. 그렇지 않고 허세를 부려 욕하고 꾸짖다가 이제 두려워 움추리면 유교가 우리 때문에 종식될 것이라 경계한다. 여기서 忠信의 마음과 멀리 서 온 사람을 회유하는 도리로 돌이켜서 실질(實)을 찾는데 힘쓴다면, 진리를 드러내어 세상 을 깨우치게 되므로, 유교와 서양의 교 가 병행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우리 유교에 敎士의 권리가 반드시 실질이 있고, 저들 서양종교가 같은 성품에 감응한다면, 우리 유교에 전문의 신학문이 없지만 자유롭게 분발하여 받아들일 수 있고, 저들 서양종교도 같은 양심을 얻어 人道를 행하게 될 것이라 파악한다.60) 그것은 배타적 정통주의를 넘어 종교자유의 시대에서 유교와 서양종교 사이에 조화 가능성을 확인하는 매우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종교관을 보여 준다. 3. 心學(陽明學)派의 儒敎改革思想 58) 유인식, 學範 같은 책 p. 111 119. 59) 유인식, 위의 책. 60) 이인재, 漫錄 ( 省高集, 아세아문화사, 1980) pp. 415 423.
樸殷植(白巖, 1859 1925)은 청년기에 丁若鏞의 저술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동시에 평북 泰 川에서 활동하던 華西學派의 도학자인 樸文一(雲菴) 형제에게서 수학하였다. 그는 1898년 40 세 때 獨立協會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애국계몽사상가로 전환하였다. 장지연 과 더불어 황성신문 과 대한매일신보 의 주필로서 활동하고, 신민회 서북학회의 조직 과 서북협성학교 설립 등에 종사하였으며, 1909년 51세 때 장지연 등과 大同敎를 창립하여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과 유교개혁 운동에 나섰다. 그의 초기 저작인 謙穀文稿 (1901) 속에는 宗敎說 한 편이 실려 있어서 그 자신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여기서 그는 당시 사회의 당면과제 가운데서 종교문제는 실제 로 긴급하고 절실한 것이라 강조한다. 또한 敎 (宗敎)를 정의하여, 성인이 하늘을 대신 하 여 말씀을 정립하심으로써 만민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라 하여 유교적 종교개념을 제시한 다. 성인의 말씀을 매개로 하여 위로 하늘의 명령과 아래로 인간에 대한 교화를 일관시키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유교의 종교적 근거를 마음의 개념적 인식에 기초 를 두고 있다. 곧 마음을 중심으로 하여 우주의 통일된 질서를 제시하는 心學(陽明學)的 이 해 위에서 유교의 종교적 인식을 선명하게 드러내었다. 천지와 만물은 한 근원에서 함께 나오고, 동해와 북해에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같고 이치가 같 다. 성인은 내 마음의 같은 이치를 먼저 얻었으니, 그 마음의 같은 이치를 미루어 가르친다. 마음이 같고 이치가 같다 (心同理同)고 인식하는 그의 마음 개념에서는 개인의 마음이 우주와 일체를 이루고, 동시에 모든 인간 사이에서 서로 일치한다. 이처럼 모든 개체 사이에 서로 같은 보편적인 마음의 확인은 바로 陸九淵(象山, 1139 1193)의 마음개념을 끌어 들이 고 있는 것이다.61) 그는 서양에서 종교를 존숭하고 신봉함이 동방에서 공자에 대한 존숭과 신봉보다 훨씬 지극함을 인정하면서, 공자의 가르침만큼 지극한 중용과 바른 이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신앙적으로 열등하지만 진리에서는 서양종교보다 유교가 우월하다는 확신 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공자의 도는 세상에 전해진지 오래되었지만 지금까지 널리 행하 지 못하였음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운행이 밝아지고 인간의 지혜가 열릴수록 禍福 으로 대중을 유혹하고 위협하던 다른 종교들이 쇠퇴할 것이지만, 공자의 도는 세계에 크게 펼쳐질 것이라는 신념을 재확인한다. 박은식은 종교를 도덕의 학문이라 하고 일반 과목의 학교(諸科學校)를 경제의 방법이라 구별하면서, 양자(종교와 일반교육)를 병행시킬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특히 한국의 현실에서는 종교를 扶植시키는 과제의 시급함과 공자의 도를 나라 안에 떨쳐 일으키고 백성 의 마음 속에 젖어들게 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그는 유교를 종교적으로 진작시키기 위한 구체적 과제를 3조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곧 종교의 사무를 정비하여 밝히기 위해서는 太學 (成均館)의 관장과 교수가 學部(오늘의 문교부)에 예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관리 할 수 있 을 것을 요구하며, 지방에서도 士林들이 실행과 실학이 있는 선비를 추천하여 향교의 교수 를 맡게 하여 학도를 교육하게 할 것을 요구하고, 小學 과 四書 를 국문으로 번역 간 행하여 평민과 부녀자도 모두 송독하게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62) 그의 유교개혁론은 교육 61) 象山全集書 年譜 13세 宇宙便是吾心 吾心卽是宇宙 東海有聖人出焉 此心同也 此理同 也. 62) 樸殷植, 宗敎說 ( 樸殷植全書 中, 단국대출판부, 1975) pp. 414 420.
을 중심으로 유교조직을 지탱하고자 하는 전통적 방법을 계승하면서도, 먼저 정부로부터 분 리시켜 유림에 의한 자립을 추구하고, 동시에 지식층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대중 속으로의 확산을 추구하는 두 방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박은식의 유교개혁론은 이 시대 계몽사상가의 공통적 관심으로서 전통유교의 폐단에 대한 철저한 성찰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63) 그는 舊習改良論 에서 儒林家 行世家 雜術家 學究家의 4가지 유형을 통한 폐단을 분석하고 있지만, 특히 유림가의 폐단은 유교개혁론의 과제와 방향으로 인식될 수 있다. 첫째, 유림가들이 말 한마디만 달라도 분열하는 현상은 도 덕상의 본지를 크게 잃은 것이며 인민의 일상적 가르침(普通之敎)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둘째, 옛 폐습을 독실이 지켜 時宜에 따라 새로운 것을 찾지 않고, 예의를 공허하게 담론하 며, 경제를 강구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공자는 노자에게 예법을 물었던 것처럼 오늘에서도 때에 따라 마땅하게 하여(因時制宜) 서양인의 이용후생하는 제조품과 새 법률 및 신학문의 좋은 점을 취할 것이라 하여 공자정신의 변혁성을 강조하였다. 셋째, 사회적 가치(謙善)를 외면하고 개인적 수양(獨善)만 중요시하여 국가와 인민의 문제에 무관심한 것은 성현이 정 성을 다하여 세상을 구제하려는 어질고 의로운 마음에 배치할 뿐아니라 자신과 가정을 지키 는 방책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 비판한다.64) 곧 유림의 분열적 폐단, 수구적 폐단, 개인고 립적 폐단을 지적하면서, 공동체의 통합과 신학수용적 혁신과 민족국가의 보전을 지양하는 유교개혁론의 방향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박은식은 학교제도를 통한 계몽운동의 심화와 유교개혁론을 추구하였으며, 그 체계적 인 식이 1904년 博文社에서 간행된 學規新論 에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종교의 유 지를 논함 (論維持宗敎)의 한 편을 수록하면서, 먼저 우리 나라의 종교는 공자의 도이다 라 선언한다. 또한 우리 나라가 공자를 宗師로 받들며, 삼강오륜을 국가의 기강으로 삼고, 6경 4서로 도통을 밝히며, 예법과 의리를 닦고 밝혀서 풍속의 교화를 유지하고 배양해 온지 오래되었다 라 하여 역사 속에서 남긴 유교의 적극적 역할을 인정한다. 동시에 후세에 와서 유교가 쇠퇴하는 현실적 상황을 진단하면서, 종교에 이르면 겨우 명복만 남으니 국가의 원 기도 이로 말미암아 위축되었다 라 하여, 특히 종교와 연관시켜서 유교의 종교적 쇠퇴가 국 가적 쇠퇴와 상응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여기서 그는 국가에 종교가 없으면 어떻게 국가가 될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일반 과목의 학교를 확장시키는 과제와 함께 특히 종교의 유지가 더욱 시급한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65) 박은식이 추구한 유교개혁론은 儒敎求新論 에서 3조목으로 집약되는 핵심문제를 드러 내고 있다. 여기서 그는 유교가 개혁(改良求新)하지 않으면 융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 국은 멸망할 것임을 경고하면서 차라리 여러 선배에게 죄를 받고 유림파에 노여움을 얻을 지언정, 차마 공자의 도가 끝내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을 참을 수는 없다 라는 자신의 유교 63) 愼鏞廈, 樸殷植의 社會思想硏究 (서울대출판부, 1982) pp. 139 141. 유림의 폐습에 대한 당시 애국계몽운동가들의 비판의식으로서 皇城新聞 과 大韓每日申報 의 유림비판론도 소 개하고 있다. 박은식은 賀吾同門諸友 ( 박은식전서 下)에서 유림파를 開明시대에 一大 障 礙物로 보는 당시 한국사회의 일반여론에 따라 유림의 문제점을 조목별로 선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儒林派는 곧 1. 頑迷하고 固陋하여 舊習을 굳게 지키고 時宜에 어두운 자. 2. 隱遁을 달 게 여기며 潔身만을 숭상하고 民國올 잊어버리는 자. 3. 일생동안 부지런히 옛 책만 연구하고 새 이치를 탐구하지 않는 자. 4. 거만하게 自重하여 義理를 空談하고 經濟를 강구하지 않는 자. 64) 박은식, 舊習改良論 위의 책 下 pp. 8 11. 65) 박은식, 學規新論 論維持宗敎 같은 책 中 pp. 29 31. 이 편은 주 62)의 宗敎說 과 내용 이 상당부분 동일하다.
에 대한 신념을 밝혔다. 그가 제시한 유교구신론 의 3대문제는 다음과 같다.66) 첫째, 유림파의 정신이 오로지 임금에로 지향하고 인민사회에 보급하려는 정신이 부족함 을 지적한다. 이에 대해 공자에 의한 大同의 의리( 禮記 禮運篇)와 맹자에 의한 重民의 이 론( 孟子 盡心下篇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이 인민에게 보급할 정신이 있음을 확인하 면서 그 실천을 요구한다. 둘째,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면서 천하를 바꾸려는 신념(主義)을 강구하지 않고, 내가 아 동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동이 나를 찾는다 ( 周易 蒙卦)라는 신념을 지킨다는 비활동적 이고 소극적 태도를 지적한다. 이에 대해 趙憲이 율곡의 擊蒙要訣 을 가지고 여행길의 숙소에서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독서를 권하며 설명하였던 것처럼 血誠과 活法에 의해 적극적으로 전파하기를 요구한다. 셋째, 우리나라 유교가 간단하고 쉬우며 직접적이고 절실한(簡易直切) 방법을 필요로 하지 않고, 흩어지고 방만한(支離汗漫) 공부를 오로지 숭상하였다고 학풍과 학문방법의 어긋남을 지적한다. 이에 대해 그는 공자가 말한 하나로 궤뚫는다 (一以貫之), 맹자의 大體를 먼저 세운다(先立乎大者), 정자의 간약함을 지킨다 (守約), 범(範)씨의 요령을 안다 (知要)를 들 어 주자학의 방만하게 흩어진 방법이 아니라 양명학의 간단하고 절실한 요점의 방법을 쓰도 록 요구하고 있다. 유교구신론 의 3대문제를 요약하면 군주 중심을 벗어나 인민중심에로의 전환과, 소극 적 폐쇄성을 벗어나 적극적 전파활동 및 산만한 朱子學의 학풍을 벗어나 간단하고 절실한 양명학의 학풍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주적 사회의식과 행동적 선교방법 그리고 주체적 신념의 교리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20세기 초에 살면서 세계사적 위상을 통 찰하고는 19, 20세기를 서양문명이 발달하는 시기라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21, 22세기 는 동양문명이 크게 발달할 시기요, 공자의 도가 끝내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장 차 전세계에 그 빛을 크게 드러낼 시기가 있을 것이다 라 한다. 이처럼 그는 유교의 장래에 대한 강렬한 희망적 확신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확신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로서 마 르틴 루터가 로마구교(천주교)를 개혁(改良求新)함으로써 유럽의 암흑시대를 벗어나게 하였 다는 서양의 사건을 들고 있는 데서, 그의 유교구신론이 루터의 종교개혁에 상응하는 것으 로 이해되고 있음을 본다. 그렇지만 그가 말하는 儒敎求新 에서의 新 은 서양에서 온 것이 아니라, 유교의 고유한 빛이라 지적한다. 곧 공자의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안다 (溫故而 知新)라 하고, 장횡거가 낡은 견해를 씻어내어 새로운 의식을 부른다 (濯去舊見 以來新意) 라 하는 신 으로서, 도덕은 날로 새로워짐 (日新)으로서 빛나고, 국가의 맹맥은 새롭게 함 (維新)으로서 길어진다 라 확인한다.67) 박은식은 유교구신론 에서 그의 유교개혁론의 기반으로서 심학(양명학)의 신념을 확인 함으로서 심학적 유교개혁론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그가 왕양명에 기울어지게 된 것은 1909 년의 한두 해 전이었던 것 같다.68) 그는 일본양명학회주간에게 (1909.12.2)에서 朱子만을 존숭하는 우리의 학풍 속에서 자신이 하루 아침에 양명학을 주창하게 된 4종의 소감(四種感 覺)을 제시하고 있다.69) 66) 박은식, 儒敎求新論 같은 책 下 pp. 44 48. 67) 박은식, 같은 책 p. 48. 68) 박은식은 1909년 일본양명학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인 再與日本哲學士陽明學會主幹東敬治 書 (같은 책 p. 236)에서 그 몇 년전 자신이 病席에 있으면서 왕양명의 학설을 읽었음을 지 적하고 있다. 69) 박은식, 日本陽明學會主幹에게 (公函한 傳文) 같은 책 pp. 237 238.
첫째, 학술은 복잡해지고 인간의 능력과 세월은 유한한데, 이 시대에서 철학에 종사하여 인도의 근본을 수립하려 하는 자에게는 간단하고 직접적인(簡易直截) 방법이 노력하는 시간 을 덜어준다. 둘째, 성리학이 근래에 와서 보수적이고 활발성을 잃어 士氣가 왕성하지 못하고 人文이 떨치지 못하기에, 변혁하여 새롭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풍속이 어지러워지고 원기가 허약해지면서 각종 異說이 파고 들어서는 현실에서 대 중이 지향할 곳을 일치시키고 풍속 기강을 정비하기 위하여, 특별히 양명학을 주창하여 교 육계에 붉은 깃발을 세우는 것은 쇠퇴하는 정신에 빛이 되고 빠져들어가는 인심을 구제할 수 있게 한다. 넷째, 학술의 진보와 물질문명의 경쟁적 발달에 따라 도덕과 평화가 쇠퇴하는 현실에서, 도덕을 밝히고 人極을 유지하여 백성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서는 良知의 학설이 어두운 거리 의 불빛이 될 것이므로 특히 드러내어 밝힌다. 또한 그는 王陽明을 도학가 군략가 정치가 氣節家 및 문장가의 다양한 역량을 발휘한 인 물로 높이며, 한마디로 공자와 맹자를 활용하는 학자 라 규정한다. 또한 일본유학자 특히 명 치유신의 주요인물들은 왕양명을 활용한 학자 라 지적한다. 그는 일본이 서양의 물질로 국 력을 크게 떨치게 하고, 동시에 동아시아의 철학으로 백성의 도덕을 배양하여, 문명사업의 완비를 도모할 수 있었다 라 하여, 자신의 계몽운동과 양명학 추구의 방향에 일본을 하나의 모범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물리학을 예로 들어 서양인이 물질 을 발명하는 탁월한 능력은 타인의 학설에 의존하지 않고 실질에 나아가 연구하여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이점은 바로 大學 의 자신을 속이지 말라 (毋自欺)와 中庸 의 자신에 돌이켜 참되게 하라 (反身而誠)는 말에서 뚜렷이 찾아 볼 수 있는 양명 학의 정신이 타인의 학설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찾아 스스로 터득하는 점 과 같은 것으로 지적한다. 또한 서양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나 칸트 및 버클리의 학설은 왕 양명의 知行合一說 과 부합하는 점이 있음을 주목한다. 이처럼 그는 서양문명과 양명학의 공통성을 인식함으로써, 양명학에서 현대의 서구문명을 산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70) 박은식은 자신의 유교적 신념으로서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인식하기 위해 王陽明實記 (1910)를 저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왕양명의 良知 개념을 매우 중요시하여, 양지가 天理 를 본체로 한다 하고, 空寂을 본체로 삼는 선불교의 淨智개념과 구별하며, 인간에 양지가 있 는 것을 하늘에 태양이 있는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71) 또한 그는 깨달음에 이르는 3가지 방 법(入悟三種敎法)을 제시하면서 언어상에서 얻는 지식적 깨달음인 解悟와, 의식내면에서 대 상이 있는 깨달음인 證悟 및 삶의 현실에서 일을 통해 연마하여 얻는 것으로 언어적 개념이 나 관념적 대상이 없는 깨달음인 徹悟를 구별한다. 여기서 특히 구체적 일에서 연마하는 事 上磨練의 철오 에서는 지가 곧 행이요(卽知卽行), 활동함이 곧 고요함이요(卽動卽靜), 본체가 곧 공부(本體卽工夫, 工夫卽本體)가 되어 관념(空)이나 대상(物)에 사로잡히지 않는 주재자 의 자리를 지키게 되는 것이라 본다.72) 70) 박은식, 再與日本哲學士陽明學主幹東敬治書 같은 책 p. 236 및 與韋菴書 같은 책 p. 246. 71) 박은식, 王陽明實記 같은 책 pp. 48 49. 여기서 박은식은 良知의 개념을 1. 自然明覺之知 2. 純ᅳ無爲之知 3. 流行不息之知 4. 泛應不滯之知 5. 聖愚無間之知 6. 天人合一之知로 분석하여 제시하고 있다. 72) 박은식, 같은 책 pp. 138 139.
박은식은 자신이 양명학적 신념을 확립하는 시기에 뒤이어, 1909년 9월 11일 장지연 등과 大同敎라는 명칭의 종교단체를 조직하였다.73) 같은해 10월 10일(옴력 8월 27일) 대동교회 종교부장의 직책으로 孔夫子誕辰紀念會講演 에서 대동교의 배경과 종지 및 발전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대동교의 용어는 禮記 예운편에 나오고, 그 의리는 春秋 에 있다 고 지적한다. 그것은 大同 小康 의 사회질서와 據亂世 升平世 太平世 의 역사변천을 통 해 공양학파 내지 금문학파를 형성하는 강유위의 대동사상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대동교의 종지로서 먼저 천지와 만물을 일체로 삼는 어진 덕(곧 성인의 마음)을 미 루어 천하에 가르침을 세우며, 동시에 사람마다 고유한 밝은 본심에 근거하여 열어주고 이 끌어내어 자신의 신체의 사사로움과 물욕의 은폐를 다스리며, 나아가 마음의 본체가 같음을 회복하는 것이요, 이에 따라 천하의 사람이 어진 덕에 함께 돌아가서 태평의 복락을 함께 누리게 하는 것이라 제시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致良知 의 교리라 할 수 있다. 이 양지를 인 간의 감정과 일의 변화(人情事變) 속에서 연마하는 이른바 왕양명의 事上磨練 공부를 강조 하고, 실용과 실습을 요구한다. 동시에 앎과 행위가 일치하는 知行合一의 원리를 최고의 방 법(不二法門)으로 강조한다. 또한 대동교의 발전방법으로써, 첫째 국민의 계몽(開導國民)과 둘째 세계에로의 선교(世界宣布)를 제시하고 있다. 국민의 계몽을 위해 서민대중을 위해 국 문으로 번역하여 일반 남녀동포가 모두 이해하고 신앙하게 하여 대동의 교화를 이룰 것을 강조하며, 세계에 선포하기 위해 퇴계, 율곡 등 우리 선현들의 저술과 대동교회의 새 저술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중국과 일본에 전파하며 영어로 번역하여 대동교의 영향을 서양학계에 전파시킬 것을 의도하고 있다.74) 박은식에서 대동교운동은 양명학과 강유위의 大同思想을 우리사회의 시대적 현실 속에서 유교개혁사상의 독특한 모범으로 계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유교개혁사상은 우리의 민족의식과 새로운 서구문물의 수용을 위한 開化思想을 조화시키고 있는 애국계몽사상에 기 초를 두고 있다. 그는 양명학을 주창하면서도, 한편으로 주자학의 폐단에 대한 신랄한 반성 을 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그 긍정적 가치를 인정하고 특히 우리의 性理學的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전통에 대한 존중의식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는 유교 의 종교적 각성을 통해 대중적 확산과 세계에로의 성장을 추구하고 다음 시대에서 서양의 압도적 영향력을 극복하여 유교의 주도적 지위를 회복할 것이라는 인류의 정신사에 대한 전 망의 확고한 신념을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운동가로서의 뚜렷한 위치를 드러내고 있 음을 본다. 정인보에 앞서 심학과 관련되는 인물로서 開城 출신의 金澤榮(滄江, 1850 1927)을 들어 볼 수 있다. 그는 20대의 청년시절에 강화학파의 계승자인 李建昌(寧齋)과 교유하였으며, 이 시대 대표적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왕양명의 학설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으나, 왕양명의 格物說에 대해서는 명백히 반대하였다. 또한 개성의 학자 金憲基가 왕양 명이 氣를 理로 오인하였다 하고 良知를 氣로 보았다고 비판하는 것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 는 것을 보아 그는 결코 양명학을 표방하는 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格物解 에서 朱 73) 신용하, 樸殷植의 社會思想硏究 위의 책 pp. 201 206 참조. 이 때 大同敎의 회장은 李容植 이고, 總事에 李範圭 李胤鍾, 종교부장 樸殷植, 교육부장 元泳儀, 편집부장 張志淵, 掌財부장 李秉韶, 典禮부장 趙琮九, 議事부장 申夏均의 직책이 구성되고 있다. 74) 박은식, 孔夫子誕辰紀念會講演 같은 책 下 pp. 59 61.
晦菴과 왕양명 사이에서 나타난 격물설의 차이를 주목하면서, 誠意를 행위에 앞서는 것이라 보고, 格物致知도 그 속에 포함된 것이라 봄으로써, 두 입장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또한 그가 大學古本私箋 을 지은 것도 양명학과의 일정한 연관성을 보인다.75) 여기서 김택영은 儒道無用於競爭之世論 에서 유교와 다른 종교(불교 및 기독교)를 비 교하면서, 유교만이 천하국가의 정치를 담당할 수 있고, 살리고 죽임을 주관할 수 있다고 강 조한다. 또한 경쟁시대의 허위와 폭력에 유교가 참가할 수 없기 때문에 무용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공자의 정신이 仁義의 불변적 도리(經)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적응(權)이 조화할 수 있기 때문에 경쟁시대에 유용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확신을 밝히고 있다. 유교와 서양종교 를 비교하면서, 유교의 인륜(秉彛)은 의리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고, 서양종교의 자유는 血氣 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라 대조시킨다. 따라서 의리를 지키는 자는 천하에 드물고 혈기를 따 르는 자는 무수히 많아 경쟁시대에 자유가 득세하는데 반하여, 인륜의 가르침이 힘을 잃고 있는 것이라 지적하기도 한다.76) 그는 또한 공자의 정치사상을 專制政治라는 비판에 대해, 군신상하의 질서를 잃은 상태인 專制 와 군신상하에 각각이 제자리를 지니는 名分 을 대립 시키면서, 명분의 보편적 원리에 따라 春秋 의 大義(大法)가 오늘의 立憲이요, 堯舜의 禪 讓(ㅁ讓)이 오늘의 共和라 밝힌다.77) 여기서 그는 유교가 우리 시대에 자기변혁을 통하여 새롭게 발휘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鄭寅普(爲堂, 1893 1950?)는 강화학파의 학맥을 이은 李建芳(蘭穀)에게 수학하여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양명학자요 애국계몽사상가이다. 그의 陽明學演論 은 1930년대에 신문 에 연재하였던 것으로 박은식의 왕양명실기 에 이어 양명학의 체계적 이해를 제시하는 대표적 저술이다. 그는 조선시대 수 백년의 학문이 유학이요 程朱를 신봉해 오면서 남긴 폐 단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곧 정주학으로 자신의 편의를 도모하였던 私營派와 中華의 정통을 이 땅에 드리우려 한 尊華派가 그것이다. 여기서 그는 정주학자들이 평생토록 心性 을 강론하면서도 이들이 實心을 저버림으로써, 학문은 공허한 학문(虛學)뿐이요, 행위는 거 짓 행위(假行)뿐이었다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 실심 에 따라 과거의 전통을 새롭게 인식할 뿐아니라 서양의 신학문도 실심 으로 판단하여야 할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그는 양명학을 통해 주체적 실심 의 확립을 추구하고 있다. 이 실심 은 그가 같은 시기에 저술한 5천년 간 조선의 얼 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얼 이며, 바로 조선얼 과 통하여 민족정신으로 발휘되 고 있다. 그는 양명의 學은 심학이다 라 규정하면서, 그 심학은 우리의 마음이 타고난 그 번밑대로 조그만 속임(挾詐)이 없이 살아가려는 공부이다 라 하고, 또한 간단하고 쉬우며 (簡易) 곧바로 결단하여(直截) 양지 의 한점 곧은 혈기로서 거의 소멸되고 끊어지게 된 심혼 (心魂)을 불러 오자는 것이다 라 확인한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주체적 진실성을 추구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생동하는 얼을 불러 일으키는 것임을 밝혀주고 있다.78) 정인보는 양명학 내지 유교를 학문이요 삶의 신념으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요, 종교로서 75) 劉明鍾, 韓國의 陽明學 (동화출판공사, 1983) pp. 218 223. 여기서 유명종 교수는 金澤榮을 순수한 양명학도가 아니라 소극적 동조자로 인정하며, 詩文에서도 泰州學派를 이은 性靈派가 아니라 神韻派에 속한다고 지적하였다. 76) 김택영, 儒道無用於競爭之世論 ( 金澤榮全集 2, 아세아문화사, 1978) pp. 77 81 및 雜言 3 같은 책 pp. 109 110. 77) 김택영, 孔子專制辨 같은 책 pp. 103 105. 78) 정인보, 陽明學演論 ( 담원 정인보전집 2, 연세대출판부, 1983) pp. 124 125. 양명학연 론)은 1. 저술의 緣起 2. 양명학이란 무엇인가 3. 陽明本傳 4. 大學問 拔本塞原論 5. 陽明門 徒 及繼起한 諸賢 6. 朝鮮陽明學派 7. 後記의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확인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유교정신의 전통이 지닌 폐단에 대한 개혁적 의식을 선 명하게 제시하고 있으며, 동시에 양명학적 신념을 자신의 주체적 진실성에서 최고의 진리로 확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교의 종교적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는 聖人의 學으로서 양명학은 불교와 노장의 말씀이 功利의 私心을 이기지 못하고, 여러 유학 자들의 이론이 공리의 私見을 깨뜨리지 못한 이후에 그 해독을 제거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 하여, 양명학을 진정한 성인의 학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확인한다.79) 4. 李炳憲과 今文經學의 儒敎改革思想 李炳憲(眞養, 1870 1940)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중국에서 진행된 공교운동을 가장 체계적이고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실천하였던 한국근대 유교개혁론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27세 때(1896) 郭鍾錫을 만나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도학의 학풍을 수업하였다.80) 그러나 그는 34세 때(1903) 중용 을 읽으면서 유교수호를 위한 확신(保敎之念) 을 갖게 되었다 한다. 그해 서울에 올라가 남산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전차와 전선의 연결 및 철도와 철교 의 가설 등 개화문물을 보면서 전통도학의 개인으로서 자신을 선하게 지키는(獨善其身) 방 법이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남산에서 내려오면서 청나라 의 무술변법기사를 읽고서 동아시아의 변화된 정국과 강유위의 인물됨을 알게 되고, 동시에 옛 것을 지키며 새 것을 배척하는 것이 유교가 자립할 수 있는 계책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 다 한다. 또한 泰西新史 등 서양근대문물에 관한 서적을 구해서 읽고, 그후 미국인 알렌 (Young John Allen, 林樂知, 1836 1907)이 상해에서 발행하는 萬國公報 (1875)를 구독함 에 따라, 세계정세에 대한 지식을 섭취하면서, 스스로 개화사상에로 전환하였다. 41세 때(1910)부터 국권상실의 역사적 파국을 당하자 교육이 최대의 급무라고 각성하여, 향리서당에서 義塾을 세우기 위해 노력을 하였으나 일제의 私立學校令으로 난관에 부딪치 자, 서울로 올라와 樸殷植 孫秉熙 등을 만나면서 애국계몽사상을 형성하였다. 그는 중국의 혁명전쟁에 관한 소식을 듣고서 중국에 들어 갈 결의를 하고, 45세 때(1914)에 중국에 들어 가 강유위를 만나게 된 것은 유교개혁사상가로서, 그의 일생에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북경에서 孔敎會와 孔道會를 방문하고 당시 북경에서 공교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이승희를 만나고, 공교회본부가 있는 곡부를 방문하면서 공교회에 점점 깊이 들어가게 된다. 이 때 이 병헌은 북경에 머물면서 당시까지 자신이 형성한 사상적 인식을 정리하여 宗敎哲學合一 論 이라는 제목의 작은 논문을 지었다. 이병헌은 제 1차 중국여행에서 홍콩까지 강유위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하고 있다. 강유 위는 이병헌에게 유교를 민족정신의 생명력을 이루는 종교로서 각성하고, 유교를 재건함으 로써 국권의 회복을 도모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81) 이 때 이병헌이 주자학과 양명학의 어느 쪽을 따라야 할 것인가를 질문한데 대하여 강유위는 양명학을 따라야 할 것으로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강유위의 유교개혁론이 주자학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청말의 유학 79) 정인보, 같은 책 p. 182. 80) 李炳憲은 李承熙(韓溪)를 비롯한 寒洲 李震相 학파의 인물들과 張福樞(四未軒) 崔益鉉(勉菴) 奇宇萬(松沙) 등 당대 대표적 명사들을 두루 방문하여 도학적 전통에 깊이 뛰어 들었다. 81) 이병헌, 眞菴我歷 45세조 國家之命脈 在於民族之精神 團結民族 維持精神之方 則有惟一無 二之宗敎也 中麗兩國之宗敎 則儒敎是也 以儒敎爲自國之生命 救敎爲救國之前提 則已亡之國 庶 乎 其有望也.
사상의 방향을 드러내 주고 있다. 또한 이병헌은 강유위와 만남을 계기로 하여 이승희와 박 은식을 강유위에게 소개하였다. 그는 박은식과 함께 강유위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1차대전이 한창이던 47세 때(1916) 이병헌은 제 2차 중국방문에서 杭州로 강유위를 찾아 갔다. 여기서 박은식과 함께 기거하면서 강유위를 방문하여 한국유교의 개량문제를 충분히 토론하였다. 곡부를 방문하여 공교회총회를 방문하였고, 귀국한 뒤에는 유교를 선전하여 國 粹를 보존하려는 의지에서 中華遊記 를 저술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총독부는 宗敎令 을 발표하면서 유교를 종교에서 제거하였으며, 공동묘지관리규칙 으로 동리의 합동방식 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한국인이 살아서 유교를 지킬 수 없게 되고 죽어서 가족단 위의 분묘에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라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밝혔다. 따라서 조선총독부 에 몇 차례 거듭 長書를 보내기도 하였다. 1918년부터는 공교를 보존하기 위해서 文廟를 설 립하여 교조를 존숭하는 의리를 지킬 것을 결의하고, 예안으로 퇴계 후손의 장노들을 찾아 가 培山書堂의 설립계획에 동의를 구하였다. 1919년 그는 儒敎復原論 을 저술하여 공교사상의 기본체계를 확고하게 제시하면서, 동 시에 일본 정부와 일본 수상 大猥重信에게 유교를 종교로서 승인하도록 호소하는 편지를 보 냈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에 모셔진 공자의 聖像이나 통행하는 경전이 진본임을 확보하기 위해 곡부와 강유위의 도움을 받아 성상을 모사해 오고 진본의 경전을 구입해 오기 위해서 중국여행을 계획한다. 그는 大同斯文會와 도산서원의 협조 아래 추진하고자 하면서, 51세 때 (1920) 제 3차 중국방문을 하였다. 이 때 강유위는 이병헌의 유교복원론 을 논평하면서, 금문경학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강조하여, 금문과 고문의 분별이 분명하지 않고 공양전의 이론이 밝지 않으면, 공자의 三世說과 태평 및 대동의 뜻이 나오지 않아서 오늘의 변화에 대응하여 용납될 수 없게 한다. 이것은 공자를 고립시켜 오늘의 세상에 소통할 수 없게 하 니, 본원의 학문은 반드시 금문에 통하여야만 가능하다 82)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이병헌은 강유위의 新學偽經考 를 중심으로 하여 금문학연구에 본격적인 노 력을 기울였다. 그 자신이 이무렵부터 오로지 금문경학과 우리나라 역사에 마음을 써서 현 시대의 대세에 소통하고자 하였다 고 술회하고 있다. 이 때 저술한 歷史敎理談 은 大民 族史觀에 입각하여 우리민족이 중국을 지배하였던 경험이 있으며 유교적 신념의 주체로 파 악하는 것이다. 1923년 배산서당의 문묘와 道東祠가 차례로 낙성되자 54세로 제4차 중국여행에 나섰다가 靑島로 강유위를 방문하였다. 이 때 강유위는 이병헌에게 유럽이 1차세계대전으로 두려움에 빠져서 벤덤(J. Bentham)의 공리주의나 헉슬리(T.H. Huxley)의 진화론(天演論)으로 대중을 안심시킬 수 없게 되었으며, 공자의 학설을 존중하는 태도가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한다. 동 시에 중국에서도 공자존숭의 분위기가 회복되고 있으므로 공교운동이 시대적 요청을 받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특히 강유위는 이병헌의 저술을 보고서 새로운 유교를 발휘할 수 있다 고 인정하면서, 오늘날 동방(한국)에 새로운 유교가 행해지는 것은 마땅히 그대로부터 시작 할 것이다 라 하여 극찬하고 격려하였다. 여기서 강유위는 금문경학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공자의 創敎에서 보는 바, 옛 일에 가탁하여 제도를 개혁하였다는 託古改制의 의리는, 의심 82) 이병헌, 같은 책 51세조. 이병헌의 저술은 인쇄본도 몇 종이 있지만 대부분 필사본이어서 인 용서의 쪽수를 밝히기 어렵다. 아세아문화사에서 眞菴全書 로 영인본이 곧 나올 예정이다. 이병헌의 유교개혁론에 관한 참고자료로 다음의 몇 논문이 있다. 琴章泰, 한국근대유학의 공 자교운동 ( 한국근대종교사상사, 원광대, 1984). 鄭奎熏, 진암 이병헌의 유교개혁사상과 공자교운동에 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대학원, 1984). 김유택, 한국 공자교에 관한 연 구 (성균관대대학원, 1984).
하면 온전히 의심하고 믿으면 온전히 믿어야 하며, 옳으면 온전히 옳고 그르면 온전히 그른 것이다 라고 확신하도록 역설한다. 그는 이병헌에게 그대가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하니 온전 히 도리를 이루지 못한다 라 질책하고 있는 것도 금문학의 확신을 요구하며, 주자의 경전주 석은 작은 성인 내지 작은 교주의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라 규정한다.83) 이병헌은 한편으로 금문경학의 문헌을 구입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樸殷植 李始榮.趙琬九 金九 등 임시정부요인들로부터 배산서당의 축사를 받았고, 곡부에서 모사해 온 공자의 聖像 을 모시고 귀국하였다. 이 때를 맞추어 단성에서는 배산서당이 낙성되었다. 먼저 성상을 배 산서당의 文廟에 모시고 釋奠禮를 거행하였다. 뒤이어 배산서당의 道東祠에 退溪와 曺植(南 冥) 두 선현을 모시고, 자신의 선조이기도 한 李源(淸香堂) 李光坤(松堂) 李光友(竹閣)를 배 향하였을 때, 보수적인 지방유림들의 항의로 낙성식이 중단되고 성토가 일어나는 변고를 당 하였다.84) 이 사건을 계기로 지방유림의 성토와 배척을 당하면서 공교운동은 좌절되었다. 그 러나 이병헌은 1924년 일본의 帝國圖書館(현 국립도서관)을 출입하며 자료를 모으는 등, 공 교의 경전적 기초인 금문학연구에로 관심의 방향을 돌려 孔經大義考 를 저술하는 것을 비롯하여, 금문경학의 저술에 중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는 계기를 삼았다. 이병헌은 56세 때(1925) 제 5차 중국방문길에 올라, 항주로 강유위를 방문하고 곡부를 예 방하여 경위를 보고하였고, 이들의 위로를 받았다. 이 때 청도의 同文印書局을 찾아가서 유교복원론 과 공경대의고 및 叢書 를 인쇄한다. 귀국 후 1926년부터는 금문경학 의 저술에 전념하여, 詩經附注三家說考 (1926) 書經傳注今文說考 (1926) 禮經今文說 考 (1927) 易經今文考 (1928) 및 春秋筆削考 를 저술하여 금문경학의 체계적 이해를 추구하였다. 이병헌의 유교에 대한 인식은 한마디로 유교를 공자의 교 라고 정의하는 데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정의가 지닌 의미는 한편으로 유교는 종교로 확인되어야 한다는 인식과 다른 한편 으로는 개혁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 유교에 대한 우선적인 인식은 유교의 종교적 확인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는 당시 새로운 서구적 학문체계에서 제기되는 종교와 철학과 과학이라는 영역간의 문제에 대한 전체적 인 식을 전제로 하여 유교의 위치를 확인한다. 그는 종교철학합일론 에서 서양은 종교와 철 학이 둘로 나뉘고 있지만, 동양의 종교는 철학과 합일되어 있다 하여, 동서양 종교의 특징을 지적하였다. 동시에 철학과 종교를 나눈다는 것은 곧 철학을 眞知로 종교를 미신으로 구별 하는 것이라 본다. 철학과 분리된 종교는 방편으로 천당 지옥의 명칭을 선정한다. 이에 따라 불교나 예수교는 세상을 벗어나서 신의 권위(神權)에 미혹하는 종교라 지적되고 있는데 비 하여, 유교는 현실세계와 초월세계의 구별이 없고(無內外) 하늘과 인간이 합일하는 도리(道 合天人)이면서도 종교임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종교의 개념을 분석한 다.85) 83) 이병헌, 같은 책 54세조. 강유위는 중국에서 출현한 작은 聖人 내지 작은 敎主로서 5명을 들 고 있다. 곧 1. 周公을 내세우는 劉歆 2. 文昌帝君과 關帝를 받드는 袁了凡 3. 佛家의 彗能 4. 道家의 張陵 5. 四書의 朱子이다. 84) 이 때의 사건들은 九思齋及培山書堂事實錄 및 培山書堂遭變日誌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 다. 85) 이병헌, 宗敎哲學合一論 迷於神權者 方可以享宗敎之名 而我孔之誠無內外 道合天人者 反不 能爲宗敎家.
여기서 공자를 철학가나 정치가로 보고 종교가가 아니라고 보는 입장은 바로 종교를 미신 으로 보는 견해에 따른 것임을 지적한다. 곧 유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는 서양인의 견해에 는 두 가지 시각이 있음을 제시한다. 첫째, 서양의 종교가는 신의 권위만을 주창하고 인간세 상의 다스림은 관여하지 않는데 비해, 유교가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 인륜을 살피는 것은 정 치나 철학으로 이름붙일 수는 있지만 세상을 초월한(出世間) 종교라 볼 수 없다는 것과, 둘 째, 서양에서 정치가 세계로 전파되고 과학이 발전되는 것은 구세주의 신통력(救主之神力)에 서 나온 것이나, 부패한 나라의 유교는 종교로 받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자는 미신을 종교라고 보는 편협한 종교관이라 지적하고, 후자의 입장은 기독교의 전지전능을 신 봉하는 입장일 뿐이라 비판한다. 그는 전 지구상에 전파되고 있는 서양의 기독교도 마르틴 루터에 의해 외형적 개혁(改頭 換面)이 일어났고, 칸트와 다윈이 출현하면서 더욱 많은 적들에 둘러 싸이게 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20세기 이후는 哲理가 날로 밝아지고 미신이 날로 엷어져서 각국의 종교가는 점점 죽심의 굳은 성벽을 허물게 되어, 종교와 철학이 합일할 것이라 내다 보았다. 이런 시 기에서 공자는 지구상에 하나 뿐인 종교가, 곧 철학과 합일한 종교가일 것이며, 공교는 전세 계의 大同敎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밝혔다. 종교(Religion)는 명치유신 초기에 일본인이 번역한 용어로 法敎라 번역되기도 하였음을 지적하면서, 강유위의 견해를 따라 宗 자가 반드시 첨부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한다. 이병헌 은 周易 觀卦의 성인이 신도로써 교를 베풀었다 (神道設敎), 또는 주역 계사전의 窮 神 盡神 등의 말을 인용하면서 유교에도 神的 영역이 있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공자를 중국의 앞선 성인들에 비교하면 초월성(出世間法)이 많고 서양종교에 비교하면 현실 성(入世間法)이 많다고 대비시킴으로써, 공자의 종교적 성격과 교조적 지위를 특징지워 주고 있다.86) 이병헌은 유교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자주 다른 종교와의 비교 분석을 시도한다. 특 히 방법(立敎之方)과 목적(救世之意)에서 뚜렷한 차이를 제시한다. 곧 교리사적 배경에서 보 았을 때, 불교와 기독교는 천당 지옥설을 따라서 교파를 수립하였다면, 유교는 백성의 윤리 (民彛)와 사물의 법칙(物則)의 실질을 따라서 교의 종지를 정했다 한다. 이에 따른 교리의 일반적 특성은 서양종교가 위로부터 아래로 통한다 (自上而達下)면, 유교는 아래의 비근한 현실에서 배워서 위로 고매한 이상에 이르르는 것 (下學而上達)이라 지적된다. 그러나 목적 으로 삼는 바 천하우세가 진리를 잃고 있음을 민망하게 여겨서 세상을 구원하려는 의지에서 는 동서의 종교가 일치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유교와 다른 종교 사이는 세상을 구제 한다는 목적에서는 같지만 이 목적에 이르는 방법과 배경의 원리에서 차이가 있음을 부각시 키고 있다. 그는 당시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를 ① 守舊說(宋의 道學을 조술하고 敎祖를 생각하지 않 음) ② 革新說(말단의 관습을 징계하다가 도리어 교조를 배척함) ③ 通新舊說(서양종교의 미신을 싫어하여 무종교인이 됨) ④ 通東西說(孔敎의 순수 지선함을 알아서 우주 속에서 폐 지 될 수 없는 敎로 삼음. 敎 라고만 하고, 宗敎 라 할 필요가 없음)의 4가지 유형으로 분류 하고 있다.87) 여기서 그는 자신이 통동서설 의 입장에 서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유교관과 함 께 종교관의 독특한 성격을 제시한다. 유교에 대한 또 하나의 기본적 인식은 시대적 변화에 상응하여 혁신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86) 이병헌, 유교복원론 제2장. 87) 이병헌, 儒敎爲宗敎哲學集中論.
것이다. 그는 유교를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전통을 전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 히려 공자라는 구체적 인격을 통해 제시된 정신을 존숭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공자를 유일한 교주 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공자를 교주로서 재확인하는 것은, 바로 유교를 전통의 유산과 관습으로서가 아니라 공자라는 인격주체에 의해 추구되었던 개혁성과 창조성 을 주목하는데 의미가 있다.88) 그의 개혁론은 제도의 개혁을 넘어서는 것으로 주장되고 있 다. 그것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면목만 바꾸는데 그치는 형식적 개혁인 改頭換面의 改敎 라 규정한다. 이에 비하여 그는 자신의 개혁론을 공자의 본래 정신(孔子之原狀)을 회복 하고자 하는, 진실의 회복이라는 의미에서 復原 으로 명명하며, 그것은 경전으로 돌아가고, 근본에로 돌아간다 (反經歸本)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당시 중국의 5 4운동을 전후하여 격렬한 공자 비판운동과 그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유교비 판이 대두되고 있었다. 이병헌은 이에 대해 민감한 관심을 보였으며, 동시에 능동적인 대응 방법을 제시하였다. 먼저 그는 당시 국내외의 유교반대론자가 제기하는 비판의 논점을 4가 지로 요약한다. ① 인권유린 : 유교인들이 사대주의에 빠져 중화만 존중하고 자신의 선조를 오랑캐로 삼고, 외국인을 오랑캐와 짐승으로 삼는다. ② 대세에 거역 : 춘추 의 尊周와 專制를 정도로 삼아 자신과 다르면 異端과 邪說로 배척하니, 오늘날의 신앙의 자유라는 원 칙에 배치된다. ③ 진리의 오해 : 유교의 天圓地方說은 오늘날 국민학교 아동도 그릇됨을 안 다고 지적한다. ④ 공자는 종교가가 아니다 : 오늘날 세계종교는 초월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만, 공자는 현세의 정치가나 철학가일 뿐이라 본다. 그 대답으로 이병헌은 예기 예운의 大同 개념에 근거한 대동주의와 공양전 의 춘추3세설 을 발전시켜 立憲과 共和의 의 미가 이미 갖추어 있음을 주장한다. 또한 논어 에서 攻乎異端 의 攻 을 공경의 뜻으로 해석하여, 이단을 공격하면 해로울 따름이다 라 하는 이단배척론을 해소시키고 있다.89) 그는 중국의 만민공보 와 국내의 동아일보 등에서 제시되는 유교비판론을 반박하면 서 자신이 추구하는 입장의 정당성을 보수적 유림들을 중심으로 하는 국내 유림들에게 호소 하는 계몽적 설득작업을 벌여 나갔다.90) 이병헌은 당시의 지식인이 劉歆에 미혹되어 오로 지 통속의 학풍(俗學)을 서술하거나, 통속의 학풍을 징계하다가 오로지 공자를 공격한다 고 전반적인 평 를 하면서, 특히 전통의 유교를 舊儒敎 라 하고, 이를 東漢 이후로 역대 專制 家가 이용하던 것 이라 규정하여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개혁론적 출발점을 선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또한 당시 국내에서 자신이 취하는 강유위의 대동사상에 대해 찬반론을 파악하 고 있었다.91) 88) 이병헌, 儒敎復原論 제1장 今當天下之變局 不先折衷於孔子 則必將經僥於習慣 浚巡乎塗轍. 89) 이병헌, 敬告域內儒林同胞. 90) 이벙헌이 泣告朝鮮 13 道儒林同胞 에서 인용하고 있는 유교비판론의 문헌은 다음과 같다. 萬國公報 : 蔡爾康, 宋儒怡禍中國論 ; 범의 論儒敎與基督敎之分 新靑年雜誌 : 5년 11월호, 陳獨秀, 憲法及孔敎論 ; 同 12월호, 孔子之道及現代生活論 東亞日報 : 1920, 告朝鮮父老 ; 權悳奎, 假明人頭上一棒 ; 1922, 中國思想革命論 (康有爲가 總統, 總理에 게 보낸 편지를 반박함. 新靑年雜誌 에 실은 陳獨秀의 글을 번역논술 ; 反孔敎道德革命 論 東明週報 : 제11호, 金昶濟, 儒敎及現代 여기서 金昶濟는 중국의 民國日報 를 인용 하여, 盜蹠의 해독은 한 때에 미치지만, 盜丘(孔丘)의 재앙은 만세에 끼친다 라 표현되는 극 단적 공교반대론을 소개하고, 그 요점을 1. 유교의 정치사상결함(尊周 事大 君權 獨裁 專制) 2. 유교의 윤리학적 결함(불평등도덕, 尊卑의 계급, 여자의 인격과 권리를 무시) 3. 유교는 종 교가 아 님(윤리학 교육학 정치학의 법위를 벗어나지 못함)으로 제시한다. 91) 전통 도학자들인 田愚(艮齋)는 梁啓超의 康南海傳 에서 소개한 大同문제를 조목별로 논변 하였고, 曺兢變(深齋)은 강유위를 禽獸之敎 로 비판하고 있는 사실과, 자신에 동조하는 인물로 李圭晙(石穀)을 지적하고 있다(이병헌, 泣告朝鮮13道儒林同胞 ).
이병헌은 공자를 ① 眞知위주(非迷信派) ② 禮讓위주(非自尊派) ③ 大同위주(非排外派)로 재해석하고, 유교의 전포를 위한 방법으로는 ① 敎堂을 건립하여 성심으로 공자를 섬길 것 ② 별도로 가려서 번역한 서적을 聖經으로 하여 천하에 배포할 것 ③ 敎士를 선택하여 정해 서 경전을 강설하여 천하에 펼칠 것을 제안한다.92) 이러한 개혁방법은 당시에 강력한 전파 력을 발휘하는 서양종교인 기독교의 방법을 수용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유 교개혁의 방향을 전반전으로 舊派 곧 전통의 鄕校式 유교에서 新派 곧 敎會式 유교로 개혁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93) 이러한 이병헌의 유교개혁론은 과거의 개혁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서 인간의 이성(人道, 哲理)이 더욱 성숙하고 과학과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장래에는 유교가 크게 성장할 것이라는 희망과 신념을 밝히고 있다.94) 이병헌은 강유위의 지도로 금문경학의 연구를 시작하여, 금문경학의 체계적 주석을 남긴 우리나라의 독보적 인물이다. 그의 금문경학 연구업적은 초기에 공교사상을 접촉하면서 저 술한 經說 (1914)과 강유위의 신학위경고 를 공부하던 시기의 독서록인 讀僞經考 및 금문경학의 총론적인 개관인 공경대의고 (1925)을 비롯하여, 각 경전별 주석서인 시 경부주심가설고 (1926) 서경전주금문설고 (1926) 예경금문설고 (1927) 역경금문고 (1928) 춘추필삭고 의 저술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금문경학의 저술에서는 강유위의 春 秋筆削大義微言考 를 요약한 춘추필삭고 를 제외하면, 시경 서경 역경 예 경 에 대한 주석은 강유위에 의해서도 주석되지 않은 이병헌의 독자적인 금문학체계의 전 체성을 보여준다. 경설 에서 이병헌은 특히 중용 의 鬼神章(제16장)을 중용 한 편의 중심축이요, 공교의 두뇌이다 라 강조한다. 또한 그는 神개념을 성리학의 理氣 및 心의 개념과 연관시켜 해명하면서, 心 은 神의 當體요, 신은 理氣의 속에 자리잡고서, 헤아릴 수 없는 오묘함을 갖추고 있으며, 천지와 만물의 주재가 되는 것이다 라 정의한다. 그가 이처럼 신 개념을 주 목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공자의 종교가로서 위치와 유교의 종교적 성격을 강화하고자 하는 관심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독위경고 에서는 강유위의 신학위경고 편 차를 따라서 今文이 공자문하에 전해진 진실한 옛 경전이요, 古文은 劉歆이 만들어 낸 거짓 된 새 경전임을 확인한다. 공경대의고 는 시경 서경 예경 악 역경 의 전반적 해석이며, 이에 대한 강유위의 논평이 행간에 기록되어 있는 초고본이 남아 있다. 詩經附注三家說考 에서는 고문시경인 毛詩 를 벗어나 금문시경인 齊詩 (轅固生 의 傳) 魯詩 (申公의 傳) 韓詩 (燕나라 韓生의 傳)의 3가전을 드러 낼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는 고문경인 모시 를 상당한 부분 수용하고 있어서 今古文 대립의 극단을 피한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95) 그는 경전주석방법으로서 독일인 安 之花의 正學規 學問之訓 에서 제시하는 방법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다.96) 92) 이병헌, 유교복원론 제7장. 93) 이병헌, 辯訂錄, 鹹陽鄕校宋朝六君子殿內陞享時致稟單子 (京城大東印刷所, 1932) la 3a. 그 는 여기서 향교식 유교와 교회식 유교의 대조표를 제시하고 있다. 94) 이병헌, 유교복원론 제9장 各敎之偏於出世者 必歸乎先聖之天人一貫 入世而兼出世之道矣 西哲亦言 五百年後 孔子之敎 必大行於全球 愚則曰不必待百年. 95) 車柱環, 詩經孔學考에 부쳐서 ( 아세아연구 통권 31호, 1967) pp. 121 223. 96) 이병헌, 詩經附注三家說考. 독일인 安之花의 경전주석방법 5가지는 1. 論 此經之某時顯 某 時晦 2. 立據 此經出自某人 非後人爲托 3. 考其同異 4. 備列 古今名家注疏 5. 折衷 群言이다.
書經傳注今文說考 에서도 금문 서경 인 前漢時代의 伏生이 전하는 28편만을 주석하 고 있다. 그는 고문 상서 에 4종이 있다 하고, ① 孔安國의 고문은 금문 28편과 같고 ② 유흠의 고문은 孔壁과 공안국을 가탁한 것으로 16편이 있으며, ③ 杜林의 고문은 西州의 漆 書로서 賈逵 馬瀜 鄭玄이 전한 것으로 복생 공안국의 고문에 泰誓篇을 더하여 29편이 된 것 이고, ④ 王肅의 고문은 현행의 晚書 25편으로 복생의 28편을 나누고 합쳐서 58편을 만들어 공안국에게 가탁하고 있는 것이라 분별한다. 禮經今文說考 에서 그가 말하는 예경 은 儀禮 이다. 그는 이것을 해명하는 데는 공자가 편찬한 大戴禮記 와 小戴禮記 를 羽翼으로 삼지만, 거짓 가탁한 周禮 와 逸禮 는 배제할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易經今文考 와 그 뒤로 여러 해를 두고 저술한 易課 를 남기고 있는 것을 고려하 면, 이병헌이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경전은 무엇보다도 역경 이었다. 그는 易 을 공 자가 神道로써 베풀은 큰 경전이요, 六經의 두뇌를 이루는 것이라 중시하고 있다. 그는 역 이 복희의 八卦와 문왕의 64패, 주나라 때의 況辭(占辭)를 모은 것이라 보고, 공자가 序卦 ㅁ ㅁ 象 說卦 文言을 지었기 때문에 經 이라 이름붙여진 것이라 한다. 따라서 그는 공자가 역 을 서술한 것이 바로 경 이요, 결코 傳 으로 일컬어질 수 없는 것이라 강조한다. 또한 역 의 占에 대해 큰 비중을 두고 있으며, 점의 도는 神과 교통하는 것이요, 정성(誠)을 큰 근본으로 삼는다. 내 마음이 정성스러우면 신과 더불어 통하여 내 마음도 신과 같다 라 언 명하고 있다.97) 그는 역경 을 통한 유교의 초월적 신비성과 종교성을 확보하는데 큰 관 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본다. 5. 樸章鉉에서 經學과 歷史의 民族主義的 再構成 樸章鉉(中山, 1908 1940)은 비록 33세의 짧은 일생이지만, 20세기 전반기를 살아가면서, 독특한 업적을 남기며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 영남의 중요한 학자인 曺兢燮(深齋)에게 서 수학하고 宋淡弼(恭山) 등을 방문하면서 도학적 학풍의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독 자적 관심을 추구하여, 26세 때는 始興의 明敎學院에서 수학하였고, 32세 때는 일본의 二松 學舍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일본 漢學系의 주요 인물과 깊이 교유를 맺고 있었다.98) 그는 30세되던 해 고향마을에 文化學堂 을 세워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문화학당학규 의 첫머리에는, 유학(斯學)을 강론하여 밝히며, 聖魂을 불러 일으킴으 로써, 유학(斯文)의 한 가닥 명맥을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라 선언한다.99) 유교의 명맥을 보존하기 위하여 강론하는 학구적 과제와 더불어, 성혼을 불러 일으킨다 는 유교적 신념의 활력을 새롭게 고취시키려는 추구는 유교혁신운동의 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는 스스로 유교(斯道)의 책임을 맡으며 민족의 명령을 담당함으로써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 준 의미에 보답할 것으로 자각하고 있다.100) 유교와 민족의 문제는 그가 추구하는 모든 문 97) 이병헌, 易經今文考 石印本 通論 및 上 la. 98) 明敎學院은 1933년 安淳煥이 창립한 朝鮮儒敎會에서 운영하던 始與의 鹿洞書院이 주최하는 明敎學術講習會로 6개월 과정을 수료하였고, 일본에 건너가서는 양명학의. 山田準과 주자학의 井上哲次郞 및 老莊學의 小柳司氣太 등 석학을 만나 학문적 교유를 넓혔다. 99) 박장현, 文化學堂學規 ( 中山全書 下, 중산전서간행회, 1983) p. 343. 100) 박장현, 雜說 같은 책 p. 309, 將以任斯道之責 擔民族之命 以報天之所以降予之意也.
제를 꿰뚫고 있는 두 축을 이룬다고 하겠다. 박장현이 28세에 彛傳 을 짓고서 동지의 분발을 요구하는 글을 붙이고 있다. 여기서 그는 당시대에서 유교의 학문적 강론을 도모하고 새로운 활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 기독교나 불교의 신앙적 열정에 자극을 받았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는 먼저 자신의 시대에 유교가 쇠퇴하고 있는 원인을 분석하였다. 이 때 그는 불교나 기독교 등이 융성하고, 세상의 운수가 내려가기 때문이라 하여 침체의 원인이 유교 바깥에 외재한다는 견해를 전적 으로 거부한다. 도리어 오직 성경의 진리를 강론하지 않아서 침체하게 된 것이라 하여, 쇠 퇴의 원인이 유교에 내재하는 것임을 확인한다. 이에 따라 성경의 본원을 발휘하기 위한 방 법으로서, 유교말류의 학풍이 축적시킨 관습의 폐단을 변혁하며, 공자 문하의 원기를 회복 하여 대중의 천성을 잘 교화함으로써, 윤리의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는 것 으로 제시한다.101) 그가 성경의 진리 라 하고 공자문하의 원기 라 일컫는 것은 유교의 전통에서 발생한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유교정신의 본질인 경전자체로 돌아 갈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질의 재해석을 통한 본질의 회복을 추구하는 유교개혁론이 선명하게 제기되고 있다. 세계의 모든 현상을 진화가 아니면 퇴보라 파악하면서, 유교의 본질을 재해석하는 그의 시각은 전통의 보수적 계승이 아니라 진보의 추구에 있다. 그는 유교가 쇠퇴하고 국민이 퇴 보한 현실을 직면하면서, 梁啓超의 개념을 끌어들여, 전진하도록 진흥시키는 방법이 모험적 이고 진취적인데 있음을 확인한다. 또한 이러한 모험심과 진취성은 바로 호연지기의 기상에 근거하고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 진취적 기상의 浩然之氣는 구체적으로 희망 열성 지혜 담 력 에서 드러나며, 이 4가지 요소를 통하여 호연지기가 양성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102) 그는 호연지기의 기상을 길러야만 쇠퇴한 유교와 퇴보한 민족이 생명의 새로운 활력을 얻어 진보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박장현은 유교진흥을 위한 더욱 구체적인 실천대책을 해명하면서, 그 기본체계로서 ① 성 경을 강론할 것(講聖經) ② 대중의 지혜를 결집할 것(合衆智) ③ 모든 사람이 각자 전교할 것(各自傳敎)의 3조목을 제시한다. 그가 성경의 강론을 강조하는 것은 경학적 연구에 뜻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정치 의리 심법 언행 등의 모범을 확인하여 삶의 표준을 수립하는 실천적 관심에 있다. 중지를 모은다는 것은 성인을 기다려 그 권위에 따르려는 자세가 아니라, 현재 의 대중적 의견을 일치시킴으로써 유교의 운영주체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전교에 대한 적극적 관심은 유교의 활력있는 확산을 추구하는 자세를 말한다. 그는 성경의 강론을 도의 근본을 수립함 (立道之本)으로, 대중적 지혜의 결집을 도의 응용을 확대함 (擴道之用) 으로, 나아가 각 자의 전교는 도의 희망을 달성함 (達道之望)으로 각 조목의 유교진흥을 위 한 역할을 지적하고 있다.103) 그는 대동 의 개념을 다른 것을 같게 하는 것이며, 다양성을 하나의 일치점에로 복귀시키 는 것(歸一)이라 지적한다. 나아가 하나의 일치점을 인간과 국가를 성취시키는 도리라 규정 하고, 그 하나가 바로 유교 곧 공교 로 확인한다. 그는 공교와 다른 종교의 특성을 비교하여 공교의 특성을 명석하게 드러내 준다. 곧 다른 종교(불교 기독교 등)는 미신을 근본으로 하 고 의식을 주창하는 것이라 보고, 진리가 밝아지면 미신은 소멸하고 정신이 존중되면 의식 은 없어지게 된다 하여, 미래에서 타종교가 쇠퇴하고 유교가 융성할 수 있다는 신념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그는 다른 종교와 달리 공교의 특성은 성명과 윤리 도덕 인민 국가의 문제 101) 박장현, 經書講說 같은 책 pp. 317 318. 102) 박장현, 20일演草 같은 책 pp. 318 319. 103) 박장현, 吾道振興策 같은 책 p. 307.
를 가르치는 것이라 지적한다. 이러한 공교는 문명의 진보에 따라 더욱 절실한 도리가 될 것이라 본다.104) 그는 공자가 2천년 이전 사람들에게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인류의 일상생활에도 절실하며, 이 시대의 升平世에서나 장래의 大同世에도 적합한 것이라 한다. 그만큼 공교의 시간을 넘어선 보편성에 대한 확신을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그는 공교를 고금에 소통하 고, 동서양에 걸치는 변할 수 없는 하나의 큰 종교 (通古今ㅁ東西 不可易之一大宗敎)라 정의 한다. 여기서 그는 불교 기독교 천도교 등 다른 종교는 공교의 한 요소를 이루는 것이요, 공 교는 이들을 포섭하는 것으로 파악한다.105) 따라서 다른 종교는 신앙(起信)을 근본으로 하고 마귀를 굴복시키는 것(伏魔)을 응용으로 하는 혼란한 시대의 종교 (亂世之敎)라 결론짓는다. 박장현은 유교가 장래에 세계적으로 성행할 것이라는 확신을 밝히면서, 당시에 서양인의 말을 빌어 방증하고 있다. 곧 독일의 花之安(원명미상)이 공자의 도리는 5백년 후에 온 지 구상에 두루 통행할 것이다 라 하고 費希禮(원명미상)가 공자의 도리는 한 나라에 있는 것 이 아니라 만국에 있으며, 당 시대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후세에 행하는 것이다 라 언명하 였다. 이러한 유교의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는 공교의 법문을 크게 열고 성경의 진리를 강구하며, 참된 정신으로 꿈꾸며 자는 대중을 불러 일으키고 인류의 사상을 고취하도록 요 구한다. 또한 다른 종교인들은 이 공교의 가르침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공교인은 다른 종교 인들에게 아낌없이 가르쳐 주어서, 모두가 윤리의 문으로 나와서 큰 도리(大道)의 위로 다닌 다면, 여기에 대동의 세계가 열릴 것이라 보고 있다.106) 그는 공자를 대정치가 대학자 대교육가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대종교가라 하여, 종교가로서 공자의 성격을 확인한다. 나아가 그는 석가나 예수가 세상 바깥의 도리요 인간을 떠난 도리 를 설교하는 점에서 성인이라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와는 달리 공자는 人道에 근거 하는 유일한 성인이라 지적하여, 공자의 가르침을 人道 의 가르침으로 확인하고, 동시에 가 장 높여야 할 최고의 가르침임을 강조하고 있다.107) 그는 또한 공교와 과학의 본질과 기능 에 대한 차이도 명석하게 대비시킴으로써, 물질문명의 원리인 과학이 정신문명의 원리인 공 교에 우선할 수 없음을 확인시켜 준다. 곧 공교는 짐승과 구별되는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며, 도리를 배우고 현명함의 여부를 분별하는 것이지만, 이에 비해 科學은 생존에 우월함을 존 중하며, 이익을 헤아리고, 부유한지 빈곤한 지를 논의한다고 대비시킨다. 또한 공교에서는 이치가 우세함을 귀하게 여기며, 착한 사람들(善類)을 보호하려 하는데 비하여, 과학에서는 세력이 우세함을 귀하게 여기며, 강력한 권력(強權)을 숭상한다고 비교하고 있다.108) 박장현은 매우 독특한 자신의 공교관을 전개하였지만, 그 속에는 당시 강유위와 양계초를 비롯한 공교운동의 지식인들이 제기한 문제들을 폭넓게 수용하고 있다. 그 자신이 鹿洞書院 의 명교학원에 수학하는 시기에 북경공교회의 중심인물인 陳煥章과 夏成吉에게 편지를 보내 기도 하였다. 진환장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안순환이 창설한 유교학회 의 유교진흥운동적 104) 박장현, 原大同 같은 책 p. 317. 105) 같은 책. 여기서 박장현은 공교의 다른 종교에 대한 포용성을 밝힌다. 孔敎: 불교/기독교/천 도교 仁愛: 慈悲 勘破生死/赦罪 平等/廣濟 人乃天 福善禍淫 : 因果 普度衆生/天堂 靈魂 그는 訓辭 (같은 책 p. 375.)에서도 孔敎를 우리 인류가 공존, 공영하는 큰 도리이며 고금에 통 행하여도 그릇됨이 없고 동서양에 시행하여도 어긋남이 없다 (斯道者 實我人類共存共榮之大道 而通古今而不謬 施東西而不悖李也)라 정의하고 있다. 106) 박장현, 原大同 같은 책. 107) 박장현, 論語類集序 같은 책 p. 356. 108) 박장현, 跋拙修子太平書 같은 책 p. 357.
성격을 소개하며, 또한 자신이 강유위의 孟子微 와 양계초의 음빙실문집 및 진환장 의 孔子論 을 읽었던 사실과 공교운동에 대한 관심을 밝히고 있다.109) 그는 조선유교회 敎正인 안순환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나라가 몰락한 원인을 우리나라의 정신을 존중하지 않은데 있다고 진단하면서, 이 정신이 깃들어 있는 우리문자(國文)를 존중 하도록 요구한다. 이에 따라 우리 문화를 보급하고 공자의 언행을 전파하기 위해서 四書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활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또한 녹동서원의 동학들에게 우리 민족과 우리 문자와 우리 종교를 회복하기를 당부한다.110) 영남의 淸道에서 북상하여 서울에 올라 와서, 명교학원에 수학하였던 26세 때(1933)부터는 박장현의 공교에 대한 인식과 신념이 확 고화되었다. 28세 때에는 彛傳 을 저술하여, ① 뜻을 세움(植志) ② 공경함(致敬) ③ 학 문을 강론함(講學) ④ 성품을 함양함(養性) ⑤ 위의를 닦음(修儀) ⑥ 실지로 행동함(實行) ⑦ 도리를 담당함(任道) ⑧ 가르침을 수립함(樹敎) ⑨ 세상을 밝힘(明世)의 9조목으로 修養 論의 체계를 세우고 있다. 특히 그는 경전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체계화를 추구하여 저술활동을 함으로써, 독자적인 공교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강론한다 는 박장현의 유교진흥을 위한 과제는 경전에 대한 그 자신의 관심을 밝 혀주고 있다. 그는 경전의 새로운 체계화의 시도와 더불어 민족주의적 관심에서 우리 역사 의 인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여기서 경전의 보편적 진실성과 역사의 시대적 사실성은 유교 경전 속에서도 본래 결합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111) 그는 25세 때 저술한 三經 隨錄 으로 경전주석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깨달음(自得)과 의문점(疑難)을 제시하여 주석의 진보적 창의성을 중시하였다. 여기서 그는 경학의 방법으로서 熟讀과 精思의 단계 및 箚記 와 觀省의 단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의 경학체계로는 箚記형식의 주석서인 삼경수록 과, 경문을 다만 주자의 章句대로 수록한 學庸大全 이 있고, 주제별로 분류하여 편집한 論 語類集 과 孟子類集 이 있다.112) 그는 논어 와 맹자 를 분류체계에 의해 재구성 함으로써, 경전의 전통적 형식보다도 문제의 발견에 진취적인 적극성을 보여준다. 박장현에서 매우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의식은 유교와 민족의식의 결합이요, 그것은 경전과 우리 역사의 통합적 구성을 추구하는 데서 나타난다. 곧 海東春秋 와 半島書 經 ( 海東書經 으로 표제를 달기도 함)이 있다. 춘추 와 서경 은 중국의 역사기록 을 유교경전으로 채택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우리의 역사를 경전의 구성체계를 모방하여 편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유교의 경전적 체계 속에 받아들이려는 의도를 천명 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는 역사를 국민의 밝은 거울이요, 사상진보의 원천 이라 정의 109) 박장현, 上中國陳煥章 및 與中國夏成吉 같은 책 pp. 407 409. 110) 박장현, 答朝鮮儒敎會敎正安淳煥 같은 책 pp. 416 417 및 鹿洞講學諸兄書 같은 책 pp. 411 413. 111) 丁若鏞은 春秋考徵 ( 與猶堂全書 2 33, la)의 첫머리에서 왕도가 행해지는 시기에서는 한 마디 말이나 한가지 행동이 모두 경전이 되니, 그러므로 서 와 춘추 같은 역사의 기록 들이 六經에 열거된다 라 하여 경전과 역사가 왕도정치 아래서는 본래 하나이다가, 왕도정치 의 쇠퇴로 두 門으로 분리된 것임을 지적한다. 112) 學庸大全 과 論語類集 및 孟子類集 을 합쳐서 經學讀本 으로 표제를 붙이기도 한 다. 논어류집 에서는 다음의 16주제를 설정하여 분류하고 있다. 孝(11장) 仁(31장) 學(48장) 知(18장) 行(15장) 禮(19장) 樂(7장) 敎(106장) 道(24장) 爲政(36장) 論人(34장) 君子(31장) 弟子 (57장) 出處(21장) 帝王(7장) 行狀(30장). 맹자류집 에서는 다음의 7주제를 설정하여 분류하 고 있다. 王政(18장) 民族(16장) 征伐(10장) 學術(49장). 出處(19장) 聖賢(27장) 雜著(10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