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 國史館論叢 第50輯 ( 韓國史時代區分論, 1973)이란 논문이 주목되고 있다. 그는 고려전기 이후 무신집권 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사회는 古代的인 사회에 속하고 조선시대부터가 中世的 封 建社會이며, 武臣執權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는 2세기에 걸친 긴 기간을 겪는 동안에 古 代社會를 극복하여 中世社會를 형성하는 과도기적인 전환기를 경과한 것이라고 하였다. 고려전기 전시과체제하의 농민의 토지소유관계는 嫡長子로서 대표되는 土地의 집단적 소유로서 이러한 토지의 집단적 소유를 가능케 한 기반은 혈연에 얽힌 古代的 共同體 관계의 遺制와 관련된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당시 농민들의 토지소유관계가 지극히 미숙해서 토지의 개별적인 私有財產化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田 柴科體制下의 寺院田, 家業田, 功蔭田 등과 같은 토지의 私有化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것은 田柴科에 비하여 질 양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전시과제도는 신라의 祿邑制와 같은 古代的 土地支配關係의 재편성과 연결되는 것으로 본 것이다. 한편 古代의 郡縣制에 있어서도 지역편성이 아닌 身分制를 중요시한 身分制的인 편성 으로 여러 가지 收取, 특히 力役 징발의 지역적, 신분제적인 조직으로 추측하고 국가권 력을 그들의 血緣團體의 首長을 매개로 군현에 침투하였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권력지 배구조는 역시 혈연적 유대에 얽힌 古代的 共同體 관계의 遺制와 깊은 인연이 있는 것 으로 해석되고 있다. 다음에 국가권력의 농민에 대한 지배 양식으로서, 收取體系를 보면 租税 貢賦 力役으 로 대표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收取의 내용은 겉으로는 三國時代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 일관되어온 것이지만 그 收取樣式에 있어서는 시대에 따라 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에 있어 租税 貢賦 力役 중에서 租稅는 土地의 結數에 따라서 징수되었는데, 비교적 부담이 가벼운 것이었고 貢賦와 力役의 부 담은 租税에 비해서 훨씬 비중이 크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에 있어 貢賦와 力役에서 문제 가 된 것은 土地와 財產이 아니라 人丁 즉 인간의 노동력이었는데 당시의 수취양식은 토지에 중점을 두고 그것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동력을 노동력 그 자체로서 직접 人身的으로 파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고려의 戶制 編成은 신라 이래 唐의 九等戶制를 모방하였으나, 唐의 경우와 같이 土地와 財產에 기준 을 두어서 작성한 것이 아니라 人丁 즉 인간의 노동력이 많고 적은 것에 따라서 작성되 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결국 고려전기 전시과체제하의 농민은 일정한 노동력의 소유자로서 국가로부터 주로 人 身的인 收奪의 대상이 되는 존재로, 이러한 성격의 농민은 古代的 農民에 가까운 것이라 고 하였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社會에 있어서는 일찍이 古典古代的인 그리이스 로마 型의 奴隸制가 형성된 일은 없었다. 또한 우리나라에 있어 生產階級인 농민이 토지를 매 개로 해서가 아니라 일정한 노동력의 소유자로서 국가로부터 직접 가혹한 人身的 收取를 당한 것은 비록 身分的으로는 自由農民이지만 그들의 社會經濟的인 위치는 奴隸的인 性格 의 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이것은 아마 아시아적인 특수한 노예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아,
- 89 - 아시아적인 古代奴隸制의 標識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농민의 收取 형 태는 본질적으로 古典 古代의 노예와 같은 공통된 성격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전시과체제하의 고려전기의 사회가 中世的인 것이 아니라 古代的인 것이라 고 보았는데, 고려 中半期 武臣政權期부터 朝鮮時代에 이르는 2世紀餘의 긴 기간을 겪는 동안에 점진적으로 극히 완만하게 古代社會를 극복하고 中世社會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크게 주목되는 것은 收取樣式에 큰 전환이 있었는데, 高麗前期 는 收取過程에서 人間의 노동력, 즉 人丁의 多寡에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에 와서 인간의 노동력 대신에 土地가 수취의 대상으로 큰 의미를 가지게 되고 따라서 戶等의 편성이 貢賦 力役을 수취하는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收取樣式에 있어 이러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朝鮮 世宗朝의 일이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姜晋哲의 古代와 中世에 관한 時代區分論은 旗田 巍에 의해서 적극적인 비 판이 가해졌다. 그는 姜晋哲의 時代區分論이 탁월한 내용을 지니고 있고 앞으로 한 단계 발전시키지 않으면 아니 될 문제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중대한 문제제기를 진지 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면서 매우 자세한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첫째로 收奪의 기본관계를 국가와 일반농민(良民) 사이로 설정하여, 그 良民을 奴隸로 보는 점에 대하여, 良民의 奴隸的 성격에 대하여 보다 명백하게 하여야 할 것이며, 한편 으로 더욱 典型的인 奴隸인 奴婢의 奴隸的 性格을 명백하게 밝혀 奴婢와 良民과의 異質 性 共通性을 확인한 뒤에 良民과 奴隸의 共通되는 奴隸的 性格을 추구하는 것이 良民의 성격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고 있다. 둘째로는 農民의 부담에 대하여, 그 부담의 내용, 부담의 기준문제는 姜晋哲의 시대구 분론의 中核部이기도 한데, 租税 貢賦 力役 중에서 貢賦를 貢役으로 보고 貢賦와 力役을 합친 노동력의 부담이 전체 부담 가운데 壓倒的 部分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는 공감하 나, 이러한 농민의 부담에 대해서 姜晋哲의 見解에 대한 實證的인 뒷받침이 없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貢賦에 대해서는 負擔物의 生產過程, 輸送過程, 納入處에 이르기 까지 면밀한 연구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力役負擔의 기준과 그 變化에 대하여서는 농민부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力役의 부담기준이 朝鮮初期에 와서 家族人員數로부터 土地所有量으로 전환하였다는 것 은 국가의 收取樣式의 중대한 변화라 하고 이러한 사실은 이미 밝혀져 있는 바이나, 이 것을 社會構成의 변화 지표로서 삼은 것은 姜晋哲의 참견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 환은 여러 차례 긴 세월에 걸쳐 정착된 것인데, 그 기준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논 쟁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그 논쟁의 근거는 무엇이며 또한 어떠한 階層의 이해를 반 영하고 있는 것인가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넷째로는 私的土地所有의 발전과 力役負擔基準의 변화와 관련하여 강진철은 古代社會 를 무너뜨리고 中世社會를 탄생케 한 것은 고려중기 무신정권 이후 私的土地所有의 발 전, 地主佃戶關係의 成長을 들고 있는데 이것은 正當한 것이라 하고 있다. 地主制의 전
- 90 - 國史館論叢 第50輯 개가 土地를 기준으로 하는 力役 배당 方式을 낳게 한 것은 개괄적으로 보면 그대로 일 것이나 兩者를 연결 짓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力役을 안정적으 로 수탈하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 등등의 선택을 고려하였을 것이므로 이러한 점을 추 구하여 가면 解明이 가능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矢澤康祐는 수취양식의 변화에 있어 수취의 기준이 人丁의 多寡로부터 所耕田 의 多寡로 移行하게 된 것은 극히 큰 변화이기는 하지만 勞動力의 수탈이란 점에서는 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노동력의 수탈이 주로 所耕田의 生產物(주로 米糓) 收取로 轉換된 것은 1608년 이후 실시되어 간 大同法에서 성립된 것이라고 하였 다. 한편 姜晋哲이 朝鮮初期를 地主制的土地支配의 確立期로 잡고 있는데, 이 시기의 國 家的 收奪의 性格을 이상과 같이 잡는다고 한다면, 적어도 地主制的 土地支配는 國家支 配의 原理에 이르기까지 貫徹되어 있었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 이것을 바꾸어 말한다면 地主制的 土地所有가 지배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추론하였다. 朝鮮 初期에는 地主 佃戶 관계의 일정한 展開를 前提로 하면서도 아직 그것이 國家體制의 構 造的 基盤이 될 만큼 이르지 못한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결국 地主 佃戶關係가 規定的 役割을 이룩하게 된 것은 적어도 大同法 成立 이후의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矢澤은 土地所有 문제에 언급하여 姜晋哲이 高麗前期 농민의 現實的 土地支配 關係를 親族의 血緣共同體的인 유대를 基盤으로 하고, 田丁의 嫡長子相續으로 규제되어 있는 集團的所有制로 보아, 이것이 武臣政權 이후 農莊이 擴大되는 가운데 崩壞되었으며, 朝鮮에 와서 經濟的으로 독립된 小家族에 기반을 둔, 土地分割相續에 입각한 개별적 토지 소유가 확립하여 地主 佃戶의 직접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並作半收制가 일반화한다고 하 였다고 요약하였다. 이처럼 姜晋哲이 田丁이란 널리 農民에게 국가로부터 지급된 土地이 며 그것이 親族內保有를 保證하는 相續制를 취하고 있었다고 하여, 위와 같은 見解를 제 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田丁에 관한 武田幸男의 상세한 硏究에 의하면 田 丁은 田柴科 邑吏田制에 있어서 개인을 대상으로 한 國家的分地制에 바탕을 둔 支給地로 서, 일반 농민의 土地는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고 矢澤은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리하여 고려전기에 있어서 농민의 土地集團所有制論은 成立할 수 없다고 하고, 私的土地所有의 전개는 土地의 集團所有制의 解體와는 다른 觀點에서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한편 木村 誠은 朝鮮前近代の時代區分 ( 新朝鮮史入門, 1981)에서 姜晋哲의 高 麗 田柴科體制下의 農民의 性格 에 대하여 그 骨子를 정리 요약하였다. 특히 人身的支配 로부터 土地를 매개로 한 支配로 轉換되는 가운데 古代로부터 中世로의 移行을 찾아보려 는 論議가 이전에 있었으나, 이것을 농민에 대한 국가의 收奪樣式의 문제로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은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주목할 만한 論議라고 하였다. 그러나 木村이 이 논문에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人丁의 多寡에 의한 勞動力의 수탈에 대해 奴隸制收奪 로 규정하고, 總體的奴隸槪念에 의해서 고려이전의 社會를 一律的으로 파악하는 점이라고 하였다. 姜晋哲과 같이 人間의 노동력 그 자체로서 일정한 강제에 의해서 無償으로 직접
- 91 - 人身的 收奪을 加하는 것을 奴隸的收奪로 규정한다면 확실히 삼국으로부터 고려시기에 이르는 시대의 농민은 노예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姜晋哲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것은 奴隸槪念의 확대 해석에 의한 규정으로서 한국에 있어서도 비판이 모아지고 있다고 하였다. 설사 신라와 고려의 농민의 계급적 본질을 동일한 것으 로 한다면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역사발전의 계기가 상실될 결과를 가져올 것으 로 의문된다고 하였다. 古代社會와 奴隸制를 직결할 필요는 없으며 또한 古代 그 自體內 의 社會構成上 다른 발전단계를 想定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국가와 농민이 直結되어, 收奪關係를 검토하고 있기 때문 에 共同體나 在地勢力이 이룩한 역사적 역할이 과소평가된 점이라 하였다. 그것은 收奪 의 내용이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 하는 분석이 비교적 희박 하다는 점과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生產關係總體에 대한 加一層의 구명이 필요 하다고 하였다. 한편 吉田晶은 朝鮮古代의 時代區分 ( 日本과 朝鮮의 古代史, 1979)에서 韓國의 時代區分論이란 章을 마련하여 姜晋哲의 韓國史의 時代區分에 대한 一試論 을 요약 소개하였다. 즉 姜晋哲의 論點을 要約하여 첫째 世界史의 普遍的인 발전법칙의 존재를 인정함과 아울러 그것이 한국사 속에서 어떠한 특수성을 가지고 관철되고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 특수성을 유럽과의 대비를 통하여 停滞性으로서 파악되어서 는 아니 되며, 獨自의 발전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고, 셋째로는 당면한 韓國社 會의 近代化를 가늠하는 課題와의 관계로서, 그 後進性을 실천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전 망을 가지고, 時代區分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하고 다시 이 세 가지 課題는 韓國 뿐만 아니라 아시아社會의 역사발전을 고려할 때 共通된 課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는 姜 晋哲의 時代區分論에 있어 基本的 態度는 共感되는 바가 많다고 하였으나, 南北韓 특히 北韓의 時代區分論을 중심으로 그 동안의 時代區分論을 소개하고 崗上墓 樓上墓, 古朝鮮 의 犯禁八條, 三國志 東夷傳의 下戶, 6世紀代 加羅地域의 社會構成, 統一新羅段階의 村落構成 등에 관한 古代史料를 검토하고 社會構成의 특징을 말하고 있다. 즉 이러한 사 료를 中心으로 그 階級關係의 기초에 共同體的 關係가 존재하고 共同體的 關係를 떠나 서는 支配隸屬關係나 奴隸의 발생도 있을 수 없을 것이라 하고 階級關係의 역사적 성격 을 總體的奴隸制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하나, 또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다 고 하였다. 그러나 다만 앞에서 논급한 바 共同體關係가 同時에 階級支配의 기초로 되어 있다는 문제를 반드시 포함할 수 있는 論理構成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그는 古代 韓國의 階級構成을 생각할 때에 유럽에 성립된 奴隸制나 農奴制도 아닌 第三 의 隸屬關係를 理論的으로나 實證的으로도 重視하여 해명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浜中 昇은 高麗의 歷史的 位置에 대하여 ( 朝鮮古代의 經濟와 社會, 1986)에서 姜晋哲의 時代區分論에 비판을 가하면서 그의 견해를 덧붙이고 있다. 즉 姜晋哲이 時代 區分論에 있어서 收奪樣式에 주목하고 있는 점은 독창적이며, 또한 고려전기의 사회가
- 92 - 國史館論叢 第50輯 조선초기의 사회와 異質的이란 認識은 설득력이 있으나, 한편 時代區分論으로서의 論理 構成上 문제점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 첫째로는 삼국시대로부터 조선말기에 이르기까지 생산관계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강진철이 주장하듯이 國家와 農民과의 관계이었을까고 반문하면서 古代社會의 生產關係와 中世社會의 그것과는 本質的으로 다른 것인데 농민을 국가와 直結시켜 과연 두 가지의 발 전 단계에 있어서의 生產關係의 특질을 각기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가 의문된다고 하였다. 둘째로는 時代區分의 기준을 收奪樣式에서 구하고 있는 점이다. 강진철이 社會構成을 결정 하는 것은 當該 社會의 生產關係이며, 이 生產關係를 규제하는 것은 當該 社會의 收奪樣式이 라고 하고 있으나 收奪樣式이 생산관계를 규제한다는 파악방법은 의문스러우며, 특정한 생산 관계가 특정의 수탈양식을 규정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 반대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時代區分에 관한 여러 학설 중에서 姜晋哲이 史實에 기초하여 한국사의 발전을 고찰 한 점에 있어서, 특히 수탈양식을 구체적으로 고찰한 점에서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나, 생산 관계의 主軸을 국가와 농민과의 관계에 구하고, 시대구분의 기준을 수탈양식에 구 하는 思考方式自體는 성립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고 生產關係의 특질을 구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浜中은 단지 王朝의 변천에 따라 시대구분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한국의 前 近代社會를 古代와 中世로 구분하는 경우, 共同體가 이룩한 역할과 私的土地所有의 발달이 란 측면에서 보아 고려전기를 古代로 잡는 강진철의 견해 역시 有力하다고 동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土地制度史의 관점에서 고려의 시대적 특질을 고찰하고 그 근거를 구체적으 로 제시하려 하였다. 즉 고려전기의 小作制는 民田 이외의 토지 즉 私田 및 國家直屬地에서 행해지고 있었 는데 당시의 佃戶는 自作地를 보유한 농민으로서 말하자면 自小作農이라 할 수 있고 이 러한 小作制는 階層分化가 진전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12세기에 접 어들어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더불어 小作人 不足 상태에 직면하여 私田耕作農民이 성장 하여 自小作農으로부터 自作農으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고려전기와 후기 와의 사이에는 단절 내지 飛躍이 私田制度나 小作制度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私 的土地所有나 농업생산력에 관해서도 발견된다고 하였다. 한편 民田에 있어서 조선초기의 것은 매매 상속 등 처분이 가능한 토지임으로 私的所 有가 성립된 것으로 보았다. 고려전기의 民田은 우리나라에서는 私有地로 보는 것이 통 설이나 浜中은 그 근거가 밝혀져 있지 않아 인정하지 않고, 다만 私有地로 된 것은 고려 후기라 하고 이러한 民田에서 並作制가 형성되어 갔으며 私的土地所有는 民田에 있어서 일반화 되었다고 하였다. 농민에 의한 토지의 사유가 일반적으로 성립함에 따라 본격적 으로 농민층의 분해가 일어나서 한편으로는 지주, 다른 한편으로는 빈농이 발생하여 비 로소 並作制의 形成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共同體的土有와 관련하여 統一新羅期는 正倉院新羅民政文書에 나타난 烟受有畓
- 93 - 田이 村落의 共同體的 所有下에 있어서 村民 즉 共同體成員에 의한 土地保有라 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전기의 경우는 신라의 지방지배에 있어 지방관에 의한 촌락지배하의 村 主에 대하여, 고려에 있어서는 지방관이 파견된 主邑과 파견되지 않은 屬邑에서 邑吏조 직을 통하여 촌락 지배를 펴고 있었다는 것이다. 村主와 邑吏라는 차이가 있겠으나 村落 이 共同體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견지하고 鄕 所 部曲 등에서 나타나는 村落이 정치적 지 배의 단위로 되었다고 하였다. 아울러 同姓村落으로서 共同體的 性格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데는 당시 저급한 농업생산력의 수준에 의해 규정지어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고려 초기 이래의 同姓村落 즉 古代的 共同體는 그 내부구조의 변화에 따른 流民化現 象에 의해서 11세기 후반으로부터 12세기 전반에 걸쳐 붕괴되기 시작하여 古代的 共同 體의 解體가 급속하게 진전되었다고 한다. 鄕 所 部曲 등의 행정구역이 폐지되고 있었는 데, 그 實體에 있어서의 변화는 이미 武臣政權期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古代 에서 中世로의 전환은 12세기로부터 13세기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어 그 分岐點은 武臣 政權의 성립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강진철이 조선초기에 와서 戶等制의 기준이 人丁의 多寡로부터 所耕田의 多寡 로 전환되었음을 지적하였으나 浜中은 고려후기에 있어서 三税之田 의 존재에 주목하고 있다. 충숙왕 원년에 土地臺帳에 근거하여 貢物量을 정한 것으로 보이는 근거로서 三税 之田 이란 것이 人身課税의 단계로부터 土地課稅의 단계로 移行한 하나의 근거로 보아 고려전기에서 後期로의 단절 내지는 비약이 税制에도 드러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상에서 강진철의 시대구분론을 토대로 한국사에 있어 古代와 中世의 特質을 고찰하 고 있는데, 古代와 中世를 土地所有의 관점에서 二分하여 고려전기까지를 古代, 고려후 기 이후를 중세로 파악하고 私田制度나 小作制度, 村落制度나 郡縣制度, 課税制度 등에 관해서도 고려전기와 후기와의 사이에 나타난 차이를 가지고 古代로부터 中世로의 전환 이 고려시대에 행해졌다고 보았다. 그러나 강진철이 社會構成의 繼起的 발전과정을 世界 史的 규모로서 보편적으로 관철되어,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전기까지를 古代奴隸制로 규정 하고 있는데 대하여 회의를 표하고 있다. 즉 강진철이 奴隸制社會로 규정한 것은 이른바 總體的奴隸制理論을 원용하고 있는 것으로 이러한 總體的奴隸制란 것도 比喩的 槪念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當該 社會의 성격을 本質的으로 규정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 이다. 이러한 시대구분법은 유럽이 낳은 資本主義的 生產樣式이 전세계를 제패하였기 때 문이므로 世界史的 發展法則이란 것도 어느 지역에나 적용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울러 북한에 있어서 金錫亨의 시대구분론도 社會構成史的 發展段階論의 기계적 적용 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노예제단계의 설정과 마찬가지로 봉건제단계의 설정도 역시 무리한 것으로서 領主制 없 는 封建制社會를 규정지워도 그 특질은 무어라 표현되지 않는 것이며 古代奴隸制 中世封 建制 近代資本制란 繼起的 發展段階가 세계사적 규모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통설 은 근본적으로 再考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사의 시대구분은 유럽에서 성립
- 94 - 國史館論叢 第50輯 한 노예제도 농노제도 아닌 第三 第四의 社會構成의 실체를 추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다음에는 梁秉祐에 의한 강진철의 時代區分論 비판을 살피기로 한다. 그는 古代奴隸 制, 社會의 虚像 ( 世界史 속의 韓國, 1987)에서 시대구분론에 있어서 발전단계설과 그 적용에 관한 문제를 살피고 있다. 즉 발전단계설은 특정한 관점을 전제로 하고 있음 으로 그것이 비록 合法則的이라 하더라도 自然法則과 같이 보편타당성을 주장할 수 없 으며 곧 공통된 것을 추려 낸다는 뜻이라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고대 노예제사회 중세 봉건사회 근대 자본제사회라는 발전단계설은 서양사에서 끌어낸 것임으로 서양사에는 합 당할 수밖에 없지만 서양 이외의 지역에도 타당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로마와 같은 전형적인 노예제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노예제사회의 개념을 확대 해석하여 신분적인 노예가 아닌 일반 농민이라 하 더라도 그들의 사회 경제적인 수탈의 본질이 노예적인 것이라면 이들 농민의 사회경제 적 지위는 노예와 다를 바 없다고 하여 노예로 파악하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파악되는 노예는 아시아 사회에서 나타난 노예의 한 형태이며 그리스 로마적인 노예의 형태와 더불어 인류의 역사상에 나타난 노예라는 개념의 한 유형을 표시하는 것이 된다 는 것이다. 그러나 노예의 개념을 이처럼 확대하여 이해하고 있으나 그리스 로마의 전형 적인 노예는 人格이 전혀 부인된 인간이요 이른바 動產奴隸였다는 것이다. 노동력을 수 탈당한다는 단 하나의 標徵만을 남기고 身分 등 그 밖의 본질적인 속성을 버려야 함으 로 본래의 뜻을 잃고 노예 아닌 노예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부분적인 일치가 반드시 전 체적일 수도 없으며 아시아 특히 우리나라에 있어서 노예제가 있었다 할지라도 이를 구 성하는 요소로서 편입하는 전체는 自由市民의 폴리스와 판이한 전제국가임으로 그것을 古代奴隸制的이라고 규정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梁秉祐는 우리나라에도 封建制度가 있었는가 ( 世界史 속의 韓國, 1987) 에서는 앞서와 같이 강진철의 시대구분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봉건제론 일반에 걸쳐 비판한 것이다. 먼저 유럽에 있어서 封建制의 특징과 속성 등을 비교적 자 세하게 소개한 다음, 이러한 제도가 과연 우리나라에도 있었는가 하면서, 봉토와 가신 관계를 통하여 階序的으로 조직된 통치형태로서의 봉건제도가 우리나라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봉건적이라고 규정되는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집권적 봉건제도라는 것이 있었다고 하는데, 집권적 봉건제도도 봉건제도가 있어야만 이러한 봉 건제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있었던 제도로서 왕권을 강화하 는 수단이 바로 封建法이었으며, 왕이 領域諸侯에 대하여 그 권위를 행사할수 있었던 것 은 왕국의 최고 封主로서 家臣契約에 의한 여러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가능하였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와 같은 중앙집권제적인 정치형태에는 적합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초기에 있어 지방의 首長들이 실질적으로 不入權이나 不輸租의 권리를 누리 고 있었다고 보면 봉건적이라고 할 수가 있을지 의심된다고 하였다. 봉건제도에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서 전사적 지배계급 지방분권 재지영주 등의 徵標가 필수적으로 있어야
- 95 - 하는데 고려초기의 경우에는 전쟁이 짧은 기간에 그치고 토호들이 거느린 私兵도 농민 병이어서 직업전사의 분화가 완전하지 못하였고, 고려의 중앙집권화에 대항하는 세력이 조기에 일소됨으로써 봉건제도의 맹아가 시들어 베버의 이른바 관료제 라이투기 국가가 성립하였다고 하였다. 다음에 우리나라에도 封建社會가 있었는가를 살피게 되는데 통치형태로서의 봉건제도 에 그 하부 구조로서 莊園制度가 접합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장원에서는 전사적 지배계 급인 영주와 예속농민인 농노가 종속과 보호의 유대로 맺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봉건제 도와 장원제도는 適合的이었고 필연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원제도를 볼 수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 상부구조에서 봉건제도를 찾을 수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고려중엽부터의 농장의 확대는 유럽의 장원과는 다른 것이지만 장원과 같은 것으로 본 다 하더라도 중앙의 유력 귀족이 不在領主로서 수탈한 것이고, 그나마 不輸租의 특권도 없었다. 이들이 不輸租 不入權으로서 봉건제도의 길을 갈 수 없었던 것은 在地領主로서 지배할 실력을 가진 전사계급이라는 봉건제도의 담당자가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한편 유럽의 장원 농민이 농노였다는 데서 농노제도 = 장원제도 = 봉건제도라는 等式 이 만들어져서 농노로 파악되는 농민이 있으면 봉건사회로 규정하려 하고 봉건사회의 징표로서 오직 농노의 존재 여부를 따지는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결국 고려국가가 밟아간 길은 앞서 본 바와 같이 관료제 라이투기 국가에의 길이었다 고 한다. Ⅴ. 餘 言 日帝時期이래 한국사의 時代區分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다. 전통적인 시대구분법으로 서의 王朝史的 구분론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일찍이 史的唯物論에 의한 時代區分法이 시대구분론의 특색을 그으면서 해방을 맞게 되었다. 이후 여전히 王朝史 區 分이 거의 일반화 되는 가운데 다시 史的唯物論 계열의 시대구분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한편으로 時間의 遠近이나 民族의 成長過程 등에 대한 시대구분도 제기되고 있었다. 6 25 動亂을 겪으면서 歷史 연구와 더불어 時代區分에 관한 논의도 중단되었다. 전후 1960년대 에 와서 일부 經濟史家들에 의해서 韓國經濟史의 著述을 통하여 시대구분 작업이 이루어 졌다. 이들의 시대구분론은 일부에 막스 베버의 理論을 원용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거개가 종전의 史的唯物論에 준거한 時代區分論이었다. 1960년 후기에 들어서 본격적인 韓國史의 時代區分論이 제기되어 특히 古代와 中世에 관한 논의도 활성을 띠었다. 그 중에 김철준 과 강진철의 본격적인 시대구분론을 접하게 되었다. 강진철의 경우는 역시 종래의 史的唯 物論의 범주에 드는 시대구분론이었다. 그러나 김철준의 경우에는 종래 史的唯物論에 의
- 96 - 國史館論叢 第50輯 한 時代區分論에 암시적 거부를 보이면서 우리민족의 내재적인 역사 전개에 주목하여, 그 실체를 파악함으로써 古代와 中世의 전환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철준의 시대구 분론에 대한 반응은 국내외적으로 별반 나타나지 않고 있는 반면, 강진철의 시대구분론은 국내외의 비판과 보완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긍정적인 면은 고려전기와 후기를 사 이에 두고 역사적인 큰 전환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점이며, 부정적인 시각은 사적유물론 내지는 서양사의 시대구분론을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한국에 있어서 시대구분에 대한 논의가 별로 활성화 되지 못하였던 현실 에 비추어 북한에 있어서는 그들의 정치 이데올로기의 전개의 일원으로 시대구분에 관 한 논의가 활발하였으며, 마침내 그들 나름의 어떤 결론이 도출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 학계에 있어서는 1960대 이래 우리나라 역사연구에 있어 시대구분론 논의에 관심을 가지고 南 北 특히 北韓의 시대구분론 전개에 대한 관심과 비판을 제기하여 왔다. 이들의 論究를 보면 白南雲 이래의 일련의 史的唯物論에 입각한 時代區分論에 중점을 두 고 비판과 보완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특히 주목되는 것은 時代區分論에 관한 한 역시 史的唯物論에선 이른바 社會構成體的 접근에 비중을 두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일본 學界에 있어서의 학문적 경향을 엿볼 수도 있는 측면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진전되어온 한국에 있어서의 시대구분에 대한 논의가 매우 열악한 상태에 있고 한편으로 북한에 있어서의 시대구분론이 열띤 논의를 거쳐 그들 나름대로 정착되 어 있는 형편이다. 지금 한국에 있어서의 시대구분론은 唯物史觀系에 속하는 논의와 함 께 민족의 내재적 발전의 계기를 파악하려는 접근에서 시도된 시대구분론과 공존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시대구분론의 성과에 대하여 각기 새로운 음미와 보완을 통하여 보 다 진전한 한국사의 시대구분 문제를 추구할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된다. 필경 시대구분 이 역사의 사실이 아니며 역사연구의 테두리의 구실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 때 종래의 선입견에서 벗어나서 신축성 있는 시대구분론을 펼쳐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參考文默 著書 車河淳, 歷史와 知性. 韓國經濟史學會, 韓國史時代區分論 (1970). 姜晋哲, 高麗土地制度史硏究 (1980). 河炫綱, 韓國中世史論 (1989). 朴龍雲, 高麗時代史 上(1985). 梁秉祐, 世界史 속의 韓國 (1987). 高大史學科, 歷史란 무엇인가 (1979).
- 97 浜中昇, 朝鮮古代の經濟と社會 (1986). 諭文 송호정, 북한에서의 고 중세사 시기구분 ( 역사와 현실 창간호, 1989). 武田幸男, 奴隸制と封建制 ( 朝鮮史入門, 1966). 旗田巍, 朝鮮史の時代區分についての問題 姜晋哲敎授の見解を中心にして ( 朝 鮮史硏究會會報 39號). 矢澤康祐, 高麗 李朝社會論의 問題點 ( 歷史學硏究 422, 1975). 木村誠, 朝鮮前近代の時代區分 ( 新朝鮮史入門,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