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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純宗實紀 의고종시대인식과을사늑약의 외부대신직인 강탈 문제 * 윤대원 ** 1. 머리말 2. 純宗實紀 의구성과필자 3. 고종시대의인식과자료적한계 4. 을사늑약의외부대신직인 강탈 문제 5. 맺음말 초록 : 純宗實紀 는 1926 년 6 월순종의죽음을추도하기위해서발간한 新民 의특집제 14 호이다. 이책에실린글은회고담이거나기자가쓴기사이다. 이글의대다수는이미알려진사실이거나글쓴이의주관이반영된한계가있지만여기서몇가지중요한역사적사실을확인할수있다. 먼저우리는개화를주도했던박영효와같은친일개화파의회고담에서이들의현실인식에한계가있음을확인할수있다. 이들은개항이후정국을 대원군과민왕후의권력투쟁 으로인식하고이때문에나라가망해갔다고했다. 이들은고종의정치력과일본의침략성을부차적인것으로취급했다. 이밖에박영효의회고즉 1884 년 4 월무렵이노우에가오리 ( 井上馨 ) 일본외무상이자신에게밀사를파견했다는사실은정변주도자와일본과의사전모의설에관한중요한증언이다. 특히을사늑약체결당시외부참서관이었던어윤적의회고는 외부대신직인 에대한새로운증언이다. 이증언은조약서에한국의외부대신이스스로날인했다며 한국측의자발성 을강조한일본의주장이조작임을증명하고있다. 이용직의회고는제 3 자를통해알려진한일병합의불법성을직접증언한또다른자료라는점에서의미가있다. 이와같이 純宗實記 은자료적인한계는있지만부족한한국근대사관련자료를보완하는데나름의의미가있다. 핵심어 : 純宗實紀, 박영효, 을사늑약, 어윤적, 외부대신직인, 병합늑약 * 이논문은 2008년도정부 ( 교육과학기술부 ) 의재원으로한국연구재단의지원을받아수행된연구임 (NRF-361-A00007).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277

278 奎 章 閣 43 1. 머리말 뺷純宗實紀뺸는 최남선이 편집장으로 있던 新民社에서 1926년 6월 순종의 因山에 맞추어 追悼 특집으로 발간한 뺷新民뺸 제 1) 14호이다. 1) 순종은 일제가 1907년 헤이그 특사파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 위시킨 뒤 이를 승계한 대한제국의 마지 막 황제였다. 1910년 8월 29일 강제 병합 뒤에는 왕으로 강등되었고 창덕궁에서 일 제의 감시 아래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하다가 1926년 6월 병사하였다. 뺷순종실기뺸는 순종의 죽음을 추도하는 뜻에서 그의 탄생에서부터 동궁 시절, 황 제 재위 시절 그리고 병합 이후 창덕궁 에서의 생활과 인산일의 풍경 등을 관련 인사들의 회고와 기자들의 취재 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실린 글의 대다수 <그림 1> 뺷新民뺸 제14호의 표제지 는 일제시기 국내외에서 간행 발표된 저 1) 뺷新民뺸 제14호의 특집호와 같은 책이름으로 이각종이 저술한 뺷純宗實紀附名臣傳뺸(1927, 新 民社)이 있다. 이 책은 뺷신민뺸 제14호의 특집호를 보완, 編 章 節의 형식을 갖추고 본격 적인 實紀 형식으로 증편했지만 내용을 보면 이각종 개인이 편집한 다른 책이라 할 수 있 다. 이 책은 제1편 序論 제2편 純宗本紀 제3편 御一代時事各論 제4편 國喪總記 등 4편과 조선 태조 때의 정몽주에서 철종 때의 김정희까지 595명의 名臣傳을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뺷新民뺸 제14호에 一記者 또는 필명으로 수록된 글을 그대로 옮기면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고 다만 제2편 순종본기에 있는 박영효( 갑신정변 ) 권중현( 保護 條約調印風景 ) 이용직( 日韓合倂-余 의 追懷 )만 필자를 밝히고 있고, 대신 제3편 御 一代時事各論 에서 여러 새로운 항목을 설정,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뺷신민뺸 제14 호의 특집호인 뺷순종실기뺸와는 다른 책이라 할 수 있다.

純宗實紀 의고종시대인식과을사늑약의외부대신직인 강탈 문제 279 서와논문을모은 韓國近世史論著集 (1- 舊韓末篇 ) 에수록되었고, 2) 2) 신민 은 2002 년에영인되어나왔다. 3) 3) 그런데 순종실기 는 신민 이란잡지자체의친일적성격과이지용, 박영효등기고자들의면면때문에그동안학계의주목을별로받지못한것같다. 또일반적으로지적되는회고글의한계즉중요한역사적사건이나사실과직 간접적으로관련된당사자의회고글인경우자신의행위를합리화하거나사실을왜곡할가능성이있어그글의객관성에는분명한한계가있듯이 순종실기 에실린회고글도예외일수없다. 이런한계가있지만 순종실기 에수록된글가운데는부족한한국근대사관련자료를보완할수있는의미있는부분을확인할수있었다. 따라서본글에서는 순종실기 에대한비판적고찰을통해서먼저이책이갖는자료적의미와한계를검토, 소개하고특히 1905 년 11월을사늑약을체결할당시외부교섭국제2과장어윤적의회고를통해을사늑약의불법성과관련된쟁점가운데하나인 외부대신직인강탈 문제의진위여부를고찰하고자한다. 4) 4) 2. 純宗實紀 의구성과필자 신민 은 1925 년 5월 10일월간종합잡지로창간되었다가 1932 년 6월통권제 73호를끝으로폐간되었고편집겸발행인은李覺鍾이었다. 5) 5) 이각종은 1904 년관립한성고등보통학교, 1908 년보성전문학교법률과를졸업하고 1909 년대한제국학부위원에임명되었으며 1911년부터 1917년까지조선총독부학무과촉탁으로근무했다. 1917 년경기도김포군수로임명되었고 3 1운동이일어나자 만세시위와 2) 太學社編輯部, 1982 韓國近世史論著集 (1), 太學社. 3) 新民 영인본, 역락, 2002. 4) 본글의분석대상인 純宗實紀 는현재국회도서관소장본을근거로했음을밝혀둔다 ( 이하 純宗實紀 ). 5) 新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http://encykorea.aks.ac.kr/).

280 奎章閣 43 같은추악한투쟁과쓸데없는희생이반복되어서는안된다. 라고판단한뒤이를막는데일생을바치기로결심했다고한다. 1920 년병으로군수직을사임하고이듬해부터조선총독부내무국촉탁으로들어가활동하며이후일제의내선일체등황민화교육에앞장서는등친일활동에적극나섰다. 6) 6) 이런그의친일경력으로보았을때 신민 은이각종이 1920 년대일제의문화정치를뒷받침하려고발행한것임을짐작할수있다. 순종의죽음에대해 이복잡하고도紛擾한세상이건마는隆熙帝께옵서는人跡이드물고世情이성긴深深한九重宮闕속을一個別天地로하여春風秋雨十七星霜을閱歷하시고이쓰리고아픈세대가그다지그립지아니하시었든지實算이그리邵隆치도아니신五十三春秋를一期로丙寅 4월 25일상오 6시 16분에遽然히龍馭를오르시다. 아아前古曠有한世運의丕塞과時勢의浩劫을遭遇하신純宗御一代야말로古今帝王께서極히드물다이를지어다. 라고 7) 7) 했듯이순종은대한제국의마지막황제로서격동의한국근대사한복판에서불운한한시대를살고간왕이다. 사실순종의일대기를보면그는 1907 년이후의황제재위시절을포함하여자신의정책을펼치며정국을주도한적이없다. 그의동궁시절은고종이정국을주도했고 1907 년황제에오른이후에는주요관직의임면이나정책의입안및결정 모두가통감의승인을거쳐야하는등사실상명목상의황제에지나지않았다. 8) 8) 1910 년병합이후그는사실상창덕궁에유폐되어일제의감시와견제를받아야했다. 더욱이그는개인적으로보면어머니인민왕후를일제에의해시해당하는불운을겪어야했고, 1898 년의 金鴻陸陰謀事件 때 즐겨마시던珈琲茶 ( 커피-필자 ) 중에넣은아편 을마시게되어건강을크게해치기도했다. 9) 9) 6)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이각종,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11, 508-509면. 7) 桓山生, 1926 純宗御在世- 五十三年回顧錄, 純宗實紀, 30면. 8) 1907년 7월 24일강제체결된정미조약에의하면,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관해통감의지휘를받 고 ( 제1조 ) 법령의제정및중요한행정상의처분은미리통감의승인 을받아야하며 ( 제2조 ) 고등관리의임면은통감의동의를받 도록하는것 ( 제4조 ) 등 ( 韓日協約, 奎 25056) 순종은명목상의황제에지나지않았다.

純宗實紀 의고종시대인식과을사늑약의외부대신직인 강탈 문제 281 순종의이런삶때문에 순종실기 에수록된글은순종의일상이나그와직접관련된역사적사건보다는그의생존시대에일어난주요역사적사건에대한당시관련당사자들의회고글과기자들의기사가대다수를차지하고있다. 먼저이책의목차를통해서수록된글의전체구성과필자를보면아래 < 표 > 와같다. < 표 > 순종실기 의목차와필자 구분소제목필자구분소제목필자 純宗東宮時代 奉悼文王統譜系圖純宗五十三年回顧錄純宗紀年 緣起甲子登極과大院君閔妃冊封과政權爭奪御誕生과御幼年 壬午軍亂甲申政變東學亂과日淸戰爭甲午更張과大韓獨立獨立協會의始終閔妃의大變御駕俄館播遷金鴻陸의陰謀事件韓日議政과顧問政治日露戰爭의開瑞保護條約의顚末保護條約調印光景光武外交의實際와其終幕美國舊交와海牙事件禪位의顚末 李覺鍾 桓山生 一記者一記者閔泳徽 李載克朴永孝朴永孝史直生霞山尹致昊一記者李址鎔同人同人沈鍾舜一記者權重顯魚允迪李夏榮一記者 御在位時代 昌德宮中의御晩年 御昇遐와因山 追慕와感淚 丁未登極과七條約嘉禮와立嗣軍隊解散西南巡幸伊藤博文과李完用의遭難日韓合倂合倂條約의顚末 德壽宮御昇遐萬歲事件御盛德의一班 侍湯四朔御病狀餘錄 御臨終奉悼光景因山儀軌彙報國葬에對하여 光武隆熙年代의啓蒙運動國朝와儒學四色偏黨의源流黨閥史의終幕王家와佛敎西北人의宿怨新慟王家와西敎外人의殊恩感激多罪先王之舊臣草葬之悲奉哀辭編輯後記 一記者尹德榮一記者一記者一記者李容稙一記者 一記者一記者閔丙奭 李喬永 康弼佑韓昌洙岩淵友次 李埼鎔一記者 閔李王職長官 ( 來月號에 ) 黃義敦鄭萬朝李胤鍾西城逸民李能和李昇薰奇一뻥커 - 韓圭卨李商在崔南善 9) 李址鎔, 1926 御駕俄館播遷, 純宗實紀, 69 면.

282 奎章閣 43 위의 < 표 > 에의하면 순종실기 는서문격에해당하는첫부분과편집후기를제외하면이책은크게다섯부분으로구성되어있다. 즉순종의출생에서부터 1907 년황제양위이전시기인 純宗東宮時代, 1907 년고종의양위로황제가된이후인 御在位時代, 1910 년강제병합이후에서병사하기직전시기인 昌德宮中의御晩年, 1926 년그의죽음과장례광경을기록한 御昇遐와因山, 마지막으로순종과관련된에피소드를중심으로회고한 追慕와感淚 로구성되어있다. 이들다섯구성가운데본글의주요검토대상은 1864 년대원군의집권에서부터 1910 년 한일병합 에이르는시기주요사건을중심으로연대기별로사건관련당사자들의회고와성명미상의잡지기자들의글로이루어진 純宗東宮時代 와 御在位時代 이다. 왜냐하면소제목에서알수있듯이각각의주제들은고종시대에대한인식은물론일제침략과병합에대한필자들의인식을잘보여주고있기때문이다. 해당시기필자들을보면, 사건관련당사자, 실명을밝히지않고필명 ( 桓山生 史直生 霞山 ) 을사용한필자그리고잡지사기자로추정되는 一記者 등이다. 실명을밝힌사건당사자들을보면, 민영휘 이재극 박영효 윤치호 이지용 심종순 권중현 어윤적 이하영 윤덕영 이용직등이다. 병합당시학부대신이었던이용직을제외한대다수는대개개항이후개화파로활동한인물들이며을사늑약과병합늑약이체결되는과정에서일제에협력했던친일인사들이다. 먼저순종의동궁및황제재위시절글들가운데필명내지 신민 잡지기자로추정되는 一記者 의글을보면다음과같다. 緣起甲子登極과大院君 閔妃冊封과政權爭奪 ( 一記者 ), 東學亂과日淸戰爭 ( 史直生 ), 甲午更張과大韓獨立 ( 霞山 ), 閔妃의大變 保護條約의顚末 禪位의顚末 丁未登極과七條約 軍隊解散 西南巡幸 伊藤博文과李完用의遭難 合倂條約의顚末 ( 一記者 ) 등이다. 글의제목에서알수있듯이개항이후일제의침략및강제병합과관련된사건에대해서는주로필명이나잡지기자들의글로대신하고있음을알수있다. 아마이것은이책이발행되던시기가순종의장례시기이자일제치하라는시대적조건과함께이들주제에해당하는역사적사건하나하나가관련당사자는물론일제에게도정치적으로매우민감한것들이기때문일것이다.

뺷純宗實紀뺸의 고종시대 인식과 을사늑약의 외부대신 직인 강탈 문제 <그림 2> 桓山生의 <그림 3> 一記者의 丁未登極과 純宗五十三年回顧錄 七條約(뺷純宗實紀뺸, 106면) 283 (뺷純宗實紀뺸, 28면) 이런 점은 발행인인 이각종은 물론 실명을 밝힌 필자들이 대개 친일인사들인데 도 불구하고 잡지 곳곳에 <그림 2> <그림 3>처럼 일제의 검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위의 <그림 2>는 필명 桓山生 이 쓴 純宗五十三 年回顧錄 중 을사늑약의 체결 과정을 기술한 부분이다. 그 내용을 보면, 博文等 이 가장 강경한 태도로 조인을 청할 때 參政 한규설은 극히 반대를 논하고 其餘 대신도 或可或否하며 의론이 不一하였고 (이하 세 줄 삭제) 조약이 성립되다. 10) 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림 3>은 一記者의 丁未登極과 七條約 의 일부분으로 10) 禪位에 반대하여 민중을 선동하였다는 嫌疑로써 궁내대신 박영효, 내대신 이도재, 10) 桓山生, 1926 純宗五十三年回顧錄, 뺷純宗實紀뺸, 28면.

284 奎章閣 43 원로남정철등은경무고문부에구인되고參將李熙斗, 부장漁譚, 참령李甲 ( 이하세줄뭉개짐 ) 을일찍入京케하였거나선위의결정을다시수일을늦게하였던들이칠조약의결정이이렀듯連하였을리는없었을터이다. 라고 11) 11) 되어있다. 현재로서는 < 그림 2> < 그림 3> 의삭제된부분의내용을정확히알수없다. 그러나 < 그림 2> 의삭제된부분은을사늑약체결의강제성내지불법성과관련된내용의글이었음을, < 그림 3> 역시황제양위과정의문제점과정미조약의불법성을폭로내지암시하는내용의글이었음을앞뒤문맥에서짐작할수있다. 그리고필자를밝힌글은 御誕生과御幼年 ( 閔泳徽 李載克 ), 壬午軍亂 甲申政變 ( 박영효 ), 獨立協會의始終 ( 尹致昊 ), 御俄館播遷 韓日議定과顧問政治 ( 李址鎔 ), 日露戰爭의開瑞 ( 沈鍾舜 ), 保護條約調印光景 ( 權重顯 ), 光武外交의實際와其終幕 ( 魚允迪 ), 美國舊交와海牙事件 ( 李夏榮 ), 嘉禮와立嗣 ( 尹德榮 ), 日韓合倂 - 余의追懷 ( 李容稙 ) 등이다. 필자들은모두해당사건의직접관련자로서해당사건에참여했던자신들의경험을중심으로쓴회고글이다. 이글가운데박영효의글은개항이후개화파의시대적과제에대한정세인식을, 어윤적 권중현 이용직의글은을사늑약과병합늑약의불법성을해명하는데중요한시사점과몇가지새로운사실을제공하고있다. 3. 고종시대의인식과자료적한계 개항이후조선사회는반봉건과반침략이라는시대과제를두고위로는개화파와척사파가, 아래로는민중이서로대립해왔다. 이가운데개화파는개화의방법을두고일본의명치유신을모델로하는급진개화파와청나라의양무개혁을모델로한동도서기파가중앙에서대립했다. 여기에다가밖으로는 조선의종속화 를꾀하려는청나라와 보호국화 를노리는일본이조선을두고대립했다. 이에대응 11) 一記者, 1926 丁未登極과七條約, 純宗實紀, 103-104 면.

純宗實紀 의고종시대인식과을사늑약의외부대신직인 강탈 문제 285 하여고종은안으로 부국강병 을위한개화정책을추구하면서밖으로는청나라와 일본의간섭을배제할목적에서미국과러시아등서구열강을끌어들이는이른바 균세외교 를추구했다. 이과정에서 1882 년군인봉기 ( 임오군란 ), 갑신정변, 1894 년 농민전쟁과청일전쟁, 민왕후시해사건, 아관파천등한국근대사의물줄기를바꾼 크고작은역사적사건들이줄을이었다. 여기서는이들사건에직접참여했거나관계했던이들의글을통해사건당시 현실정세에대한이들의인식을살펴보고자한다. 이글의작성자들은박영효, 윤 치호등친일개화파이거나이지용, 이재극처럼병합과정에서친일파로돌아선이 들이대다수이다. 때문에이들의글에반영된정세인식에서개항이후이들이추 구한개화정책의한계뿐만아니라일제가조선침략의합리화를위해부정적관점 에서정리하기시작한 한국근세사 와의연관성내지그영향을추론해볼수있다. 먼저순종일대기에대한총론격이라할수있는필명桓山生의 純宗御在世: 五十三年回顧錄 을보면, 대원군시절부터대한제국이전시기까지의고종시대에 대한기본적인인식이잘드러난다. 그는 李朝時代처럼國力이退嬰하며民氣가 沈銷한적은없었다. 12) 라고 12) 전제하고 大政을奉還하며閔妃가중심으로금후 23 년간의조선은아주閔氏의천하가되었다. ( 중략 ) 이로말미암아閔后와대원군 사이에는더욱깊이仇讐를맺어금후정계에幾多事實이모두이二英傑의一動 一靜에좌우된바我國近世의혈투의페이지를添하게되었다. 13) 라고 13) 하여대원 군이후한국근대정치사를대원군과민왕후의仇讐에의한권력투쟁의역사로설 정하고있다. 그리고다른글에서대원군과민왕후가정치적으로仇讐이된계기 에대해서다음과같이설명하고있다. 14) 14) 閔妃冊封하신又明年戊辰 (1868-필자) 에貴嬪李氏로부터庶王子를誕生하시니이는곧完王宮이었다. 대원군과고종께서완왕궁을심히사랑하시매명성황후께서는불쾌 12) 桓山生, 1926 純宗御在世- 五十三年回顧錄, 純宗實紀, 16면. 13) 위의글, 20면. 14) 一記者, 1926 閔妃의冊封과勢道爭奪, 純宗實紀, 34-35면.

286 奎章閣 43 히여기셨다. 又明年庚午 (1870-필자) 명성황후께서다시元子를탄생하셨으나탄생후 3일에대변이通치못함으로대원군의方文으로산삼을用하고其後 2일만에요절하였다. ( 중략 ) 其後로대원군과명성황후간에는항상서로불평하심이있게되었다. 그러한중고종 11년甲戌에명성황후는제2 왕자를탄생하시니그가곧후일의순종이시었다. 처음대원군의생각에는완왕궁은비록서왕자라할지나長子임에는틀림이없음으로그를책봉하여왕세자를삼을의향이었다. 이기미를아신명성황후께서는불안에견디지못하여窮餘의計로李裕元원로를청국에파견하여완왕궁은비록장자라할지나正係가아니므로冊立世子의儀는옳지못함을대원군에게충고케하였다. ( 중략 ) 이러한세자계승문제가 20여년간政戰의발단이되었다고볼수있다. 즉민왕후가왕비로책봉되어일제에의해시해되는 1895 년에이르는 20여년간계속된대원군과민왕후의정쟁은민왕후가낳은원자의요절과세자계승문제가그원인이었고이것은결국 國朝의운명을傾케하는痛恨事 가되었다는것이다. 이같이시아버지대원군과며느리민왕후의仇讐관계가대원군의方文에의한원자의요절때문이라는설은한마디로난센스일뿐이다. 진작정쟁의원인은대원군집권 10년에있은고종의친정즉 10 년에걸친대원군의철권통치가성년이된국왕고종에게큰불만으로다가왔고, 고종자신이생부인대원군에게빼앗긴왕권을탈취해오려고친정의지를다지는과정에서민왕후가적극개입함으로써대원군과의갈등이본격화 한것이었다. 15) 15) 이와같이개항이후정국을대원군과민왕후의대립관계로만파악하는이런인식은갑신정변과갑오경장을주도했던개화파인박영효에게서더욱분명해진다. 그는 1882 년군인봉기 ( 임오군란 ) 를설명하면서 대원군과민비와의爭權은그결과가이런참화에까지이를줄을그내용을아는자는예측할수있었다. 라고하며 16) 16) 군인봉기의원인을대원군과민왕후와의권력투쟁에서찾고있다. 이어서그 15) 서영희, 2001 명성왕후연구, 역사비평 57, 112면. 이후민왕후의국정개입과그로인한개화파와의갈등에대해서는민왕후와고종은청의 속방화, 일본의 보호국화 라는명목으로 조선을병탄하려는의도를가지고있으므로멀리있고영토적야심이없는먼나라미국이나러시아등에기대어독립을보존하고자한 외교책략즉 引俄拒淸 또는 聯美論 의입장때문이었다고했다 ( 서영희, 2002 명성왕후재평가, 역사비평 60, 348 면 ).

純宗實紀 의고종시대인식과을사늑약의외부대신직인 강탈 문제 287 는군인봉기뒤수신사의일원으로일본에가서명치유신이후문명화된일본사회 를보고 회고하건대일본은黑船來에驚起하여즉시명치의대개혁을단행한지 이미 15 년이었거늘우리조선은병인양요이후 17 년에오히려鎖國守舊의昏夢中 에서대원군과민비의勢道爭奪로이국운이危急存亡之秋를잃어버리고말았 다. 17) 라고 17) 하며갑신정변을계획하게되었다고했다. 그리고그는청군의간섭으 로정변이실패한뒤정변참가자들이 모두살육혹은망명하니此間약 10 년은 완전한청국지배하에서小康을유지하여조정은길이민씨의천하로濁亂이愈 甚하여만민의불평이滋長하니이것이마침내동학당의봉기와일청전쟁의원인 을짓게된것이다. 18) 라고했다. 18) 1894 년농민전쟁과청일전쟁에대한시각도이와크게다르지않다. 즉필명史 直生은 東學의亂과日淸戰爭 에서청일전쟁에대해 일본은此時로부터청국세력 을반도로부터一掃하고자하여一方으로大鳥公使는趙義淵등친일파를사주하여 대원군을擁하고궁중에入하여민씨일파의附淸黨을流竄케하고一方으로 8 월 1 일에宣戰되니自此로반도는관군동학의討誅와日淸兩軍의兵火중에서寧日이 無하고정부는의연히대원군과閔派의알력으로紛紜混雜하였더라. 19) 19) 라고하여 나라의위난중에도대원군과민왕후가정쟁에여념이없었다고비판하고있다. 나아가갑오개혁이실패한원인에대해서도마찬가지인식을보일뿐이다. 갑오 개혁은 우리역사상의특필할국민적혁명의始端인갑오경장이라. 於是에서민 이크게환호하여동학의난으로써일시격동되었던下民의불평이稍히완화되고 국운의再造가庶幾有望하였더라. 그러나당시세력중심인대원군은의연보수사 상을고집하고巨族舊臣등은모두개혁을不悅하며閔妃를중심으로한일파는 대원군파와권세의爭이日復日甚하여閣臣들은국정에無意하고오직지위보전 에몰두하여개혁의實이不擧하였다. 라고했다. 20) 20) 즉갑오개혁은서민이크게환 16) 朴永孝, 1926 壬午軍亂, 純宗實紀, 38면. 17) 朴永孝, 1926 甲申政變, 純宗實紀, 41면. 18) 위의글, 47면. 19) 史直生, 1926 東學의亂과日淸戰爭, 純宗實紀, 49면.

21) 288 奎章閣 43 영한국민적혁명의출발이었는데개혁을거부한민씨일파와대원군의정쟁으로결국실패하게되었다는것이다. 이와같이 1882 년군인봉기에서청일전쟁에이르기까지그모든국난의원인을대원군과민왕후의대립과친청수구적인민씨일족의탓으로파악하고있다. 純宗實紀 에드러난개항이후정국에대한이같은인식에는중요한두가지문제가있다. 하나는개항이후조선의보호국화를꾀하던일본의침략성을인식할수없다는점이고, 다른하나는정국의중심이되어야할고종에대한왜곡된인식이란점이다. 외세의간섭과내부적역량의미비로한계는있었지만고종은 1880 년대부터개화정책을적극추진했고 1882 년군인봉기이후청의간섭이노골화하는가운데대외적으로는균세외교를, 대내적으로군비강화에노력하면서반청정책을추진해왔던사실들이왜곡되고있는것이다. 고종시대의정국에대한이러한왜곡된인식은 1900 년을전후하여한국의근대 시기연구를본격화하기시작한일본의초기식민사관과크게다르지않으며 21) 또한고종시대에대해 반목으로점철된대원군과왕비민씨, 그사이에서난처했을군주고종, 권력의정상에있는 3자의바람직하지않은모습 으로인식한것은 조선왕조의당론차원의비방과일본인들의침략야욕에서나온폄훼가뒤엉킨일종의유언비어 였다는지적이있어왔다. 22) 22) 이런점에서 순종실기 에실린기사나회고글은기본적으로한계가분명하다고하겠다. 그런가운데서도갑신정변에대한박영효의 甲申政變, 1897 년당시주미한국공사박정양을따라미국에갔던李夏榮의 美國舊交와海牙事件, 을사늑약체결당시농상공부대신이었던권중현의 保護條約調印光景 과당시외부교섭국제2과장인魚允迪의 光武外交의實際와其終幕 그리고병합늑약체결당시유일한반대자였던학부대신李容 20) 霞山, 1926 甲午更張과大韓獨立, 純宗實紀, 50-51면. 21) 일제는 1896년이후한국근대사를일본의침략사입장에서본격서술하기시작하면서식민사관이대두하게되는데그과정과내용에대해서는趙東杰, 1990 植民史學의成立過程과近代史敍述, 歷史敎育論集 13 14 참조. 22) 이태진, 2010 대한제국, 결코버릴수없는역사, 100년전의기억, 대한제국, 국립고궁박물관, 324면.

純宗實紀 의고종시대인식과을사늑약의외부대신직인 강탈 문제 289 稙의 日韓合倂 - 余의追懷 등에는새로운사실과함께기존의알려진사실들을재 확인할만한내용이있다. 23) 23) 먼저갑신정변에대한박영효의글가운데주목되는부분은일본과의관계및 정변에대한구체적인실행논의시기에관한내용이다. 갑신정변의주체들이일본 과결합한시기는주로김옥균이쓴 甲申日錄 에근거하여 1882 년군인봉기로일 본에돌아갔던일본공사다케조에신이치로 ( 竹添進一郞 ) 가다시조선에부임한 1884 년 9 월김옥균과협의를거쳐정변을최종결정한것으로알려지고있다. 일 본에서차관교섭에실패한김옥균은일본정부에대해깊은불신을가지고있었 고, 한차례거사를결정하고일본민간인용사수십명을얻으려고일본에사람 을파견했지만실패했다고했다. 24) 24) 그러다가김옥균은그해 9 월조선에돌아온일 본공사다케조에로부터개화파에대한일본의정책이바뀐것을알고일본공사를 찾아가정변의구체적인내용을협의하고일본측이참여하는거사를결정지었다 고했다. 25) 25) 이같은 갑신일록 의이야기는박영효가 1884 년! 여름에김옥균이 귀국하고가을에일본공사다케조에공사가래임하니우리의개혁운동은대개의 모의가성립되었다. 26) 라고 26) 한사실에서확인할수있다. 그런데박영효는회고글에서자신이광주유수에서면관된뒤개혁이실패하여 이를비탄하며잠시미국유람을계획하던중이소식을들은일본외무대신이노 우에가오리 ( 井上馨 ) 가아사야마겐죠우 ( 淺山顯藏 ) 를보내, 목하동양의대세가 자못岌架한지라귀국의혁신진작이眉睫에迫하였거늘어찌한가히외유를하리 오. 일본도역시 1882 년의실패를분개하여장차청나라군사세력을반도로부터 소제하고귀국지사를원조하여개혁의실을거두게하려는뜻이없지않으니원 23) 특히을사늑약체결당시외부교섭국제2과장이었던어윤적의회고는을사늑약체결직후에도그러했고지금도을사늑약의 불법문제 를둘러싼쟁점가운데하나인 외무대신직인강탈문제 와관련된중요한증언이기때문에제3장에서별도로다룰것이다. 24) 甲申日錄, 1884년 10월 31일 ( 舊曆 9 月 )( 김옥균, 1979 金玉均全集, 亞細亞文化社. 이하 甲申日錄 ). 25) 甲申日錄, 1884년 11월 7일. 26) 朴英孝, 1926 甲申政變, 純宗實紀, 43면.

290 奎章閣 43 컨대잠깐중지함이어떠하뇨. 라는말을듣고기뻐하며동지홍영식, 서광범등당대지사들과은밀히정변을체결했다고했다. 27) 27) 다만박영효의회고가운데그시기와관련해서는착오가있다. 즉그가이노우에가보낸밀사를만난시점은자신이광주유수에서면관된직후이고그가밀사를만난뒤 홍영식, 서광범과모의했고이때김옥균은동경에있었다. 라고했다. 서광범이 1883 년보빙사의종사관으로미국에갔다가귀국한것은 1884 년 5월이고, 김옥균이일본에서귀국한것은이보다한달앞선 4월이었다. 때문에박영효가이무렵김옥균은동경에있었다라고한것은아마기억의착오로추정된다. 이런박영효의회고가사실이라면갑신정변과일본과의관계에대한기존의주장즉 甲申日錄 에근거한 1884 년 9월설은재고의여지가있다고보여진다. 이에대해서는당시일본의대조선정책의변화에주목할필요가있을것같다. 즉이노우에가박영효에게밀사를보낸시기가, 일본정부가김옥균의차관요구에부정적이던시점임을감안하면이노우에가박영효에게말한것은아직일본정부의정책이아니라그의개인적구상단계일수있다. 이구상이 1884 년 6월청불전쟁이일어나면서일본정부의정책으로구체화된것으로볼수있다. 그결과그해 9월일본공사가변화된정책을가지고조선에다시파견되면서김옥균등과일본사이에정변을위한협의가본격화된것이아닐까한다. 다음으로주목되는것은 1887 년주미한국공사서기관으로미국에갔던이하영의회고글이다. 그는 1887 년주미전권공사박정양등과함께미국에파견되었을때자신들의흉중에 건곤일척의대계획 이있었다고했다. 그것은 부산 인천 원산세항구의관세를담보로미국으로부터 200 만불을차관하여그것으로미국군인 20만명을고용한다는것이다. 28) 28) 그리고이계획은박정양이귀국한뒤자신이미국뉴욕은행과차관을교섭하여 200 만불차관에성공했고, 미군 20만명청병도미정계를설득하여이안이상하의원에상정되었으나미국의먼로주의정책으로상원에서부결되어무산되었다고했다. 또 200 만불차관가운데이미소비한 16 27) 위와같음. 28) 李夏榮, 1926 韓美外交와海牙事件, 純宗實紀, 98면.

30) 33) 純宗實紀 의고종시대인식과을사늑약의외부대신직인 강탈 문제 291 만불은미국정부의양해아래무상변상되어그나머지를뉴욕은행에환불하여이일이별탈없이마무리되었다고했다. 29) 29) 그러나당시미국의대조선정책이나조선과미국사이의최대현안들을고려 하면이하영의회고는영웅심리에서비롯된개인적몽상이거나과장일뿐이다. 30) 예컨대고종이박정양을주미공사로파견할때최대관심은 1883 년민영익이보빙사로가서합의했던군사교관을하루라도빨리조선에들여오는것이었다. 군사교관의파견에매우소극적이었던미국의태도에서알수있듯이당시미국은조선에대해호의적이었던수교초기와는달리조선에대한 관심퇴거 와 불개입주의 로바뀐상황이었다. 31) 31) 조선에대한정치적불개입정책을취했던미국이또한자국의상비육군이 3만명에불과한상태에서 32) 32)20만명을파견한다는것자체가현실성이전혀없는것이다. 더구나주미공사박정양도모른채일개서기관인이하영이혼자서개항이후중요한국가재정의수입원인인천 부산 원산세항구 의관세를담보로 200 만불의차관을교섭했다는것역시현실성이없는것이다. 33) 따라서이하영이말한미국에서의 200 만불차관및미군 20 만명청병계획은 29) 李夏榮, 위의글, 99-100면. 30) 이하영의일대기를연구한이민식은, 이하영이미국으로떠나기전大朝鮮海陸軍大都元帥라는敎牒을받은것, 200만불의차관및미군 20만명의청병계획을근거로이하영의활동에대해 이정도의외교적성과는탁월한수완이아니면불가능하다 라고높이평가하고, 이계획이무산된뒤이하영이 미국은믿을수있는나라가못된다. 라고한말을두고이하영의정확한대미관과애국심을극찬했는데 ( 이민식, 1998 금상이하영연구 (1858-1929), 白山學報 50), 이것은이하영의회고글에대한사실관계의확인이나고증없이받아들인데서비롯된오류로판단된다. 31) 관심퇴거 로일컬어지는미국의대한정책의변화에대한상세한내용은최문형, 1982 韓美友誼의變化, 한미수교 100년사, 국제역사학회의한국위원회참조. 32) 박정양은미국에서돌아온뒤고종에게보고하면서미국의상비육군이 3만명이라고했다 ( 高宗實錄, 高宗 26 年 7 月 24 日 ). 33) 200만불차관 에대해서는 관세를담보로미국으로부터 2백만원의도입을차관하려했던박정양 이라는주장도있으나 ( 한철호, 2005 개화기관료지식인의미국인식 : 주미공사관원을중심으로, 역사와현실 58, 45면 ) 이에대한전거가없고, 현재까지박정양이남긴글 ( 美行日記 등 ) 에서도이사실을확인할수없다.

292 奎章閣 43 이하영의개인적인영웅심리에서비롯된 몽상 이었거나아니면박정양등주미공사관들이파견될때고종으로부터부여받은임무즉확정된군사교관의파견독촉문제를이하영이과장한것으로보는것이사실에더가까울것이다. 마지막으로병합늑약체결당시유일하게반대했던학부대신이용직의 日韓合倂 : 余의追懷 의내용은이미다른자료를통해알려진사실이지만, 직접본인의증언이란점에서의미가있다. 1910 년 8월 18일병합늑약체결을위해열린내각회의에서학부대신이용직은이완용이제의한합병안에대해 임금이욕을당하면신하는죽음뿐 이라며반대하자 34) 34) 이완용은그날이용직을日本東京水害慰問使로선정하고 21일출발하라고지시했다. 물론이일은통감데라우치마사다케 ( 寺內正毅 ) 와사전협의하에이루어졌다. 35) 35) 그런데이계획이이용직의갑작스런설사증으로실패하자이완용은 8월 22일어전회의개최사실도알리지않은채일본인통역관덴죠이치로 ( 川上立一郞 ) 을보내어한담을하며그를집에붙잡아두도록했다는것이다. 36) 36) 이용직은이런전후사정에대해 (18 일 ) 저녁에나에게동경수해위문사로지시가있었다고여비를주며내일아침일찍급히출발하기를최촉한다. 나는과연설사증으로출발을중지하고있는중에井上立之郞 ( 川上立一郞의誤記 -필자 ) 이라는통역관이내방하여병상에담화를경과하였다. 그리고다음날 8월 23일에들으니까전날밤에벌써병합조약이조인되었다하였다. 라고회고했다. 37)37) 이완용과데라우치는병합늑약체결에유일하게반대한학부대신이용직을늑약체결과정에서배제하려고어전회의가열리기하루전인 8월 21일일본동경수해위문사로출발시키려고했고이계획이실패하자다시공작을꾸며 22일어전회의참석을막은것이다. 이들이이런농간을부린이유는단하나즉 8월 22일병 34) 李鍾學編著, 2000 1910년韓國强占資料集, 史芸硏究所, 32면. 35) 1910년 8월 20일데라우치는내각총리가츠라다로 ( 桂太郞 ) 에게일본의대홍수피해위문차학부대신이 21일출발할것이라고알리고다음날다시그가 대단히완고한인물로시국해결 ( 병합늑약체결-필자 ) 에대해도저히타협이불가능하기때문 이라고동경파견이유를밝혔다 ( 위의책, 107-108면 ). 36) 小松緣, 1920 韓國倂合之裏面, 中外新論社, 178-179면. 37) 李容稙, 1926 日韓合倂: 余의追懷, 純宗實紀, 123-124면.

純宗實紀 의고종시대인식과을사늑약의외부대신직인 강탈 문제 293 합늑약의체결을해결할어전회의에서 이용직의반대 로일어날지모를 불상사 를우려한때문이었다. 38) 38) 이처럼이용직이 8월 22일어전회의에참석하지못했던까닭에대해서는그동안통감부관리였던고마츠미도리 ( 小松緣 ) 가남긴기록에서알수있었는데이를당사자의증언을통해서직접확인할수있는자료라는점에서의미가있다고할것이다. 이상과같이 순종실기 는자료적측면에서분명한계가있지만박영효, 이하영, 이용직등의글은이시대연구에부족한자료를보완하는데나름의미가있다고할것이다. 3. 을사늑약의외부대신직인 강탈 문제 순종실기 에는을사늑약이체결될당시협약에참여했던농상공부대신권중현과 1905 년 11월 17일밤외부에있으면서이광경을목격했던외부교섭국제2과장인魚允迪의회고글이실려있다. 39) 39) 을사늑약의불법성에관한많은사실들이이미밝혀졌지만 40) 40) 이문제는지금도한일양국은물론국제적으로도쟁점이되고있다. 41) 41) 38) 윤대원, 2011 데라우치마사다케통감의강제병합공작과 한국병합 의불법성, 소명출판, 193면. 39) 이두편의글외에도李址鎔의 韓日議定과顧問政治, 沈鍾舜의 日露戰爭의開瑞, 一記者의 保護條約의顚末 禪位의顚末 丁未登極과七條約 軍隊解散 西南巡幸 伊藤博文과李完用의遭難 合倂條約의顚末 등의회고글이있으나그내용은이미 皇城新聞 이나 大韓每日申報 등에보도된내용과크게다르지않다. 40) 이태진외, 1995 일본의대한제국강점, 까치 ; 이태진등공편, 2009 한국병합과현대 : 역사적국제법적재검토, 태학사 ; 이상찬, 2005 1900년대초한일간조약들의불성립개론,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 근 현대편 4; 2007 駐韓日本公使館記錄 과 日本外交文書 의을사조약관련기록의재검토, 奎章閣 30; 박배근, 2008 국제법상시제법의이론과실제, 國際法學會論叢 53-1( 통권제110호 ); 운노후쿠쥬지음 ( 정재정옮김 ), 2008 한국병합사연구, 논형.

294 奎章閣 43 먼저권중현의 保護條約調印光景 은 1905년 11월 16일이후이토히로부미 ( 伊藤博文 ) 대사와하야시곤스케 ( 林權助 ) 일본공사가조약체결을강제하는과정부터 18일오전 1시반경늑약이체결되기까지의상황을회고한글이다. 이글은그가 1905 년 11월 25일, 을사늑약은조약체결에서지켜야할움직일수없는법즉절차를지키지않았고 11월 17일회의도정식회의가아니었고고종의결재도거치지않고대뜸조인을해서호상교환 한것이라고했던사직상소와 42) 42) 달리, 그해 12월 16일이완용등이조약체결당시함께했던모든대신이아닌자신들만이른바 을사오적 이라며비난하는데대해억울하다며올린오대신상소문에서 43) 43) 언급한조약체결전말과내용이대동소이하다. 이처럼권중현의글은책임회피의변명으로일관했던오대신상소의연장선에불과한것이다. 반면에외부교섭국제2 과장인魚允迪의 光武外交의實際와其終幕 은새로운사실을증언하고있다. 그것은을사늑약의불법성과관련된쟁점가운데하나인외무대신직인강탈문제와관련된부분이다. 그는 1905 년 11월 17일밤삼경 (11 시에서 1시 ) 외부교섭국장이시영등과함께숙직하면서외부대신직인의반출을담당했던당사자였다. 어윤적의글을보기에앞서외부대신직인강탈문제의전말부터보자. 을사늑약이조인된시점은 1905 년 11월 18일오전 1시반전후이다. 이날외부대신의직인을조약서에날인하던상황은이토가을사늑약체결전말을본국정부에보고한 伊藤特派大使復命書 중의 日韓新協約調印始末 에간략히언급되어있다. 이에따르면양측의협상이완료되고 고종이만족의뜻을표하자이에박 ( 제순 ) 외 41) 을사늑약의불법성여부에관해서는병합늑약과마찬가지로 조약체결과정이도덕적으로문제는있었으나조약자체는합법 이라는 부당합법론 ( 또는 부당유효론 ) 과조약체결의절차등의결함을근거로불법이라는 무효불법론 또는절차와형식상의결함으로조약자체가성립되지않았다는 불성립론 이대립하고있다. 이들양론간에는 고종의최종비준여부, 고종의협상지시설, 조약체결의절차적위법성, 국제법상의불법성 ( 국가대표에대한강제성여부 ), 외부대신의직인강탈문제 등이현재까지쟁점이되고있다. 42) 高宗實錄, 光武 9 年 11 月 25 日. 43) 高宗實錄, 光武 9 年 12 月 16 日.

純宗實紀 의고종시대인식과을사늑약의외부대신직인 강탈 문제 295 상은관인을외부주임자에게가져오라고전화로서명령했다 고했다. 44) 44) 그다음상황에대한언급은없지만외부주임자가외부대신의명령에따라관인을가져와서날인했다는것이다. 그런데이런일본측의주장에곧바로의문이제기되면서외무대신의직인문제는국내외적으로크게쟁점이되었다. 그발단은 1905 년 11월 23일상해에서발행되던영문지 챠이나가세트 에보도된다음과같은기사때문이었다. 45) 45) 이달 17일일본공사등은보호조약을조인시키기위하여궁중에문안하였지만황제를비롯하여내각원들은극력이에반항하면서조인을거부하였음. 오후 8시伊藤후작은林공사의요청에따라長谷川대장과함께일본병과순사를합한一隊를인솔하고궁중에들어갔으나오히려성사될전망이없게되자마침내헌병대를외무대신관저에파견하여다음 18일오전 1시외교관보沼野는그관인을빼앗아궁중으로들어갔으나소요로인하여그날 1시반日本全權등은제멋대로이것을조약서에날인하고는그것으로조인을완료하였다는것을내각원에게선언하였다. 그래서황제는계속국새의날인을거부했지만일본의강압에결국조인하기에이르게된것으로서교묘하게이조인이끝났다는것은사기술에의하여성립된것임. 챠이나가세트 는일제가한국의황제와내각이반대하는데도이를무시하고외부대신직인을강제로빼앗아멋대로조약서에조인한것이기때문에을사늑약을 사기 라고보도했던것이다. 같은시기독일베르린에서발행되던 로칼안쫠겔 도 조약체결에반대하며궁성을벗어나려는대신들을일본병들이추격하여 44) 日本外務省, 1958 伊藤特派大使復命書, 日本外交文書 第 38 卷第 1 冊, 日本國際連合協會, 506면 ( 이하 日本外交文書 ). 45) 日韓協約調印事情에關한新聞記事에대한報告의件 日本外交文書 第 38 卷第 1 冊, 550-551면 : 국사편찬위원회, 韓日協約調印배경에관한신문기사보고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4 冊, 406면. 鄭喬도외부대신직인강탈문제와관련하여 일본인은조약의조인을강요하기어렵다는점을알고서공사관통역원마에마고사쿠 ( 前間恭作 ), 외부보좌원누마노 ( 詔野 ) 로하여금외부에가도록했다. 황제의명령이있었다고둘러대며외부의도장을요구하자스티븐스 (D.W Stevens) 가즉각그것을내주었다. ( 중략 ) 일본공사관서기관고쿠분쇼타로 ( 國分象太郞 ) 가수옥헌뜰앞에서기다렸다가그대로그도장을받아회의자리에들여보내드디어도장을찍었다. 라고했다 ( 정교 ( 조광편 변주승외역주 ), 2004 大韓季年史 7, 소명출판, 161면 ).

296 奎 章 閣 43 데려다가 강제로 날인하게 하여 이 때문 에 한국민 사이에 소요를 일으키게 되었 46) 다 고 보도하여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 46) 결되었음을 강조했다. 조약 체결의 강압성을 강조한 외국신문 의 보도 내용은 곧바로 일제에게 문제가 되었다. 국제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 던 일제는 곧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주한일본공사 하야시는 1905년 11월 28일 가츠라 다로(桂太郞) 임시 겸임 외무대신에게 전문을 보내어, 이들 외신은 당지에 있는 영국인 베델이 전보한 것으로 이에 대해 속히 취소의 <그림 4> 조약문에 날인된 외부대신 電訓을 發 할 것과 필요하다면 6가지의 직인( 外部大臣之章 ) 조인 사정을 공표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요청했다. 하야시가 보고한 6가지의 조인 사정 가운데 세 번째 항목이 뺷챠이나 가세트뺸 등이 보도한 외부대신 직인 강탈 에 47)47) 대한 해명이다. 조약서에는 각 대신들이 열석한 후 외부대신 박제순이 직접 그의 성명을 自署하고 또 인장을 날인하였음. 외부대신은 조약 각 항을 의논한 후 그의 서명을 하기에 앞서 인장을 가져오도록 외부에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인장 보관자인 비서과장이 부재 하였기 때문에 인장은 2시간여를 경과하여 비로소 보관자에 의하여 궁중에 가져왔음. 46) 日本은 韓帝 및 大臣을 强壓하여 日韓條約을 調印시켰다는 新聞報道에 關한 件, 뺷日本 外交文書뺸 第38卷 第1冊, 554면. 47) 日韓協約調印情況에 關한 新聞報道에 關聯하여 實狀報告의 件, 뺷日本外交文書뺸 第38卷 第1冊, 556-557면: 국사편찬위원회, 韓日協約 조인 정황에 관한 신문 보도 관련 實狀 보 고 件 뺷駐韓日本公使館記錄뺸 24冊, 423-424면.

純宗實紀 의고종시대인식과을사늑약의외부대신직인 강탈 문제 297 즉일제는외부대신의직인을강제탈취했다는외신보도에대응하여외부대신직인은박제순이외부에전화하여그보관자가가져와서날인한것이라며강제성이없었음을강조했다. 이처럼을사늑약체결직후외부대신직인의날인에대한외신과일제의입장은완전히정반대였다. 외부대신직인의강탈문제는현재에도그렇지만늑약체결직후에도국내외적으로크게쟁점이되었다. 왜냐하면이문제의사실관계는을사늑약의강제성내지불법성을밝힐수있는여러사실가운데중요한하나가될수있기때문이다. 현재이문제와관련하여한일학계의입장을보면, 을사늑약의부당합법론을주장해온일본인연구자는하야시공사가가츠라외무대신에게보낸 1905 년 11월 28일의전문내용을그대로받아들여사실로인정하는입장이다. 48) 48) 반면한국측에서는 11월 23일 챠이나가세트 와정교의 대한계년사 등을근거로日本 ( 일본 ) 공사관의통역관마에마교사쿠 ( 前間恭作 ) 와외교관보누마노야스타로 ( 沼野安太郞 ) 가일본군과함께외부대신관저에가서외부대신직인을강탈한것이라며불법성을강조하고있다. 49) 49) 과연어느주장이사실일까? 그럼을사늑약이강제조인되던 1905 년 11월 18일오전 1시전후긴박하게돌아가던외부에서숙직하며이상황을직접목격한외부교섭국제2과장어윤적의글을보자. 50) 50) 11월 17일대신은早朝부터日公館으로內閣으로宮中에있어늦도록退出치아니하고協辦이하諸官은退仕한後余는主事申泰元과같이宿直을하였다. 夕飯後未幾에使令이來告하되방금광화문통대로상에는日兵이大砲를驅馳하여온다하기로門外를望見하니과연車聲馬蹄가요란하고外部내외에도日人警衛가嚴重하였다. 余는事體가벌써危重한줄짐작하고곧協辦尹致昊와交涉局長李始榮에게通知하였 48) 부당합법론을주장하는대표적인일본인연구자는운노후쿠쥬 ( 海野福壽 ) 이다 ( 海野福壽編輯 解說, 2003 外交史料韓國合倂 上, 不二出版, 216-217면 ). 49) 강성은, 2009 1차사료를통해서본 을사5조약 의강제조인과정, 한국병합과현대 : 역사적국제법적재검토, 태학사, 229면 ; 이상찬, 2007 駐韓日本公使館記錄 과 日本外交文書 의을사조약관련기록의재검토, 奎章閣 30, 196면. 50) 魚允迪, 1926 光武外交의實際와其終幕, 純宗實紀, 95면.

298 奎章閣 43 더니윤협판은病席에있고李局長은곧들어와서余等과共히숙직실에서下回를보고있었다. 밤은깊어삼경이되었는데홀연히日人이숙직실로들어왔다. 그는日公館通譯官前間恭作과外部顧問스티븐슨의隨員沼田某 ( 沼田安太郞 -필자) 이었다. 그자들은말하되외부대신박제순이방금내각에있어大臣印章을가져오라하니곧인장을내어달라한다. 더구나인장은수일전에朴大臣이韓參政과共히調印反對하기를密約할때나는印章을外部後庭池中에投棄할지언정捺印을아니하겠노라하였다고內外注目의焦點이되던것이라어찌輕輕히出給하리오. 余는곧前間을向하여大臣이吾人에게命令이無하니어찌外國人인君等에게重印을出給하리오하고拒絶하니彼는不得已退去하였다. 그러나 ( 중략 ) 席上에共坐한李局長은疑訝를不堪하여곧宮中의大臣會所로電話하여朴大臣에게事由를探問하니과연印章을보내라하는지라궁금은하지만은裡許를알수없어주사申泰定에게인장을주어궁중으로入送하였다. 어윤적이외부대신직인이외부에서경운궁으로가게된경위대해말한핵심내용은다음세가지이다. 첫째는 1905 년 11월 17일삼경무렵통역관마에마와누마노가외부숙직실을찾아와외부대신의직인을요구했다는것이고, 둘째는마에마등에게직인인도를거절하고돌려보낸후교섭국장이시영이경운궁에있는외부대신박제순에게전화를걸어확인하고외부주사신태정에게직인을주어경운궁으로보냈고, 그리고셋째는참정한규설과외부대신박제순이협약체결을끝까지반대하기로밀약하고최후에는박제순이직인을외부후원에있는연못에다버리겠다고까지하며반대입장을분명히했다는것이다. 51) 51) 우선이세가지사실을앞서본 챠이나가세트 기사와비교해보면, 일본공사관통역관마에마와누마노가일본병과함께외부대신직인을가지러외부로간것은사실인반면그직인을탈취해가져왔다는것은사실이아니다. 반면 1905 년 11월 28일하야시가가츠라에게보낸전문과대조해보면, 외부대신의직인을가 51) 어윤적이말한세번째내용과관련하여, 鄭喬도 大韓季年史 에서을사늑약이강제체결된뒤한규설이박제순에게 대감 ( 박제순-필자 ) 께서오늘아침우리집에서만났을때제게말하기를 이조약에조인하지않기로결심했습니다. 그런즉혹시근심이생길까봐예방조처로비밀리에당장외부의인장을연못가운데던져버렸습니다 했는데지금은어찌하여손수인장을찍었습니까? 라고하며질책했다고한것으로보아 ( 정교앞의책, 161면 ) 박제순이처음에는조약체결을반대하여만일의사태에대비하여 외부대신직인을외부후원에있는연못에버리겠다. 라고한말은사실로보인다.

純宗實紀 의고종시대인식과을사늑약의외부대신직인 강탈 문제 299 져온자는직인보관자인비서과장이아니라주사신태정이고, 또한박제순이외부에여러차례전화를한것이아니라반대로외부에있던교섭국장이시영이박제순에게전화를하여확인을한뒤직인을보낸것이다. 따라서하야시의전문은외부대신직인을강제탈취한것이아니라는것외에는모두어윤적의증언과다르다는것을알수있다. 그럼왜같은상황에대해이런차이가날까? 어윤적의증언이사실이라는전제아래가정해보면, 먼저 챠이나가세트 기사처럼외부대신직인을일본이강제탈취했다고믿는것은당시고종을비롯한대신들은물론특히이사안의주무대신인외부대신박제순이자신의직인을연못에던져버리려고할정도로반대하던상황에서마에마등이일본병과함께외부에직인을가지려간것이이런오해를낳았을수있다. 반면에하야시의경우는마에마등이일본병과외부로간사실을숨김으로써경운궁과외부는물론그주변을군사적으로압박하며조약체결을강제하는상황을은폐하고마치한국측이스스로조인한것처럼하려는목적에서일부사실을조작했을수도있다. 이제마지막의문은과연어윤적의회고내용이사실인가하는점이다. 현재까지는이를뒷받침할만한다른자료가없어사실여부를정확히판단하기어렵다. 하지만어윤적이말한당시정황이매우구체적이고더구나이것이외부대신직인의날인에대해한국의자발성을강조한일본의공식입장을전적으로부정하고있는점에서사실로보아도크게무리가없을듯하다. 또한직접적인자료는아니지만당시외부숙직실에서이상황을함께했고직접박제순에게전화를하여확인했던당시외부교섭국장이시영을통해서어윤적의증언이사실일것으로추정된다. 1919 년 4월상해에서수립된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그해 9월열린국제연맹에일제침략의부당성과한국독립의역사적정당성을알리기위해안창호를총재로하는임시사료편찬위원회를구성하고 한일관계사료집 을편찬했다. 이사료집에는 伊藤勒締保護條約 이란항목에서 1905 년 11월 10일이토가한국에온뒤부터 17일늑약체결까지의상황을간략히서술하고 필경에는협박과위력으로보

53) 300 奎章閣 43 호조약이체결되고말았다. 고결론짓고있을뿐 52) 52) 외부대신직인문제에관한언급은전혀없다. 당시이시영이임시사료편찬위원은아니지만법무총장으로있었고이전외부교섭국장을지낸경력등을감안할때이시기의사료편찬에어느정도관여했을것으로판단된다. 또한이시영은 1944 년 8월 29일 한일병합 의국치일을맞아중경에서발행되던 독립신문 에始林山人이란필명으로 나라를망친간신배들 이란글을기고하여, 을사늑약과병합늑약체결에앞장선이완용등 간신배들의秘史를공개했는데이글에서도외부대신직인에대한언급은없다. 53) 임시정부가발행한 한일관계사료집 이나 독립신문 에이시영이기고한글에서는병합늑약이체결되던당시황후의숙부이자궁내부시종원경인윤덕영이황후를협박하여국새를훔쳐날인한사실이모두언급되고있다. 54) 54) 을사늑약당시의외부대신직인탈취문제역시윤덕영이국새를훔친것에버금가는중요한사건이다. 그런데도이시영이이런중요한사실을어느곳에서도언급하지않았다는것은무엇을의미할까? 그것은어윤적의증언이사실일가능성이높다는것이다. 어윤적의증언에대해사실관계확인이더필요하겠지만일단은여러정황을고려할때사실로판단된다. 어윤적의말대로외부대신직인을일본인이아닌외부주사가가져간것이라하더라도일제가을사늑약을강제체결했다는사실에는전혀변화가없다. 오히려어윤적의증언은그런사실을반증하는또하나의중요한근거가된다. 왜냐하면일제는외국신문에보도된외부대신직인탈취문제를해명하면서, 일본공사관직원과일본병이외부에간사실과이로인해이시영이경운궁에있던외부대신에게전화를하여확인한사실을은폐하고마치박제순이 52) 국사편찬위원회, 2005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7, 36-37면. 53) 나라를망친간신배들 독립신문 ( 重慶版 ) 제3호, 1944년 8월 29일. 54) 임시정부가편찬한 한일관계사료집 에서는당시의상황에대해 1910년 8월 20일완용등이讓國詔를矯造하여황후의숙부시종원경윤덕영을闕에보내어날인을요구하다이를접한황제는통분을이기지못하여歔欷하시며황후는통곡을마지아니하였으나덕영은황제가취침함을틈타서어새를潛捺하여완용을援함에완용이이를寺內에게致하다. ( 국사편찬위원회, 2005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7, 42-43면 ) 라고했다. 또한같은내용의글을박은식의 한국통사 와정교의 대한계년사 에서도확인할수있다.

純宗實紀 의고종시대인식과을사늑약의외부대신직인 강탈 문제 301 자발적으로외부에전화를하여외부대신직인을가져온것처럼해명했기때문이다. 따라서 외무대신직인탈취보도 에대한주한일본공사하야시의해명은외부대신직인을날인하는과정에서있었던협박내지강제나아가서는을사늑약의불법성을은폐하려는거짓해명인것이다. 5. 맺음말 이상과같이 1926 년 6월순종의因山에맞추어추도특집으로발간된 순종실기 을검토한결과, 이책이발행된시기나발행주체및필자들을고려할때자료적가치에는기본적인한계가있었다. 필자를밝힌글이나필명또는기자들이쓴글의경우이미다른자료들을통해서알려진사실이거나글쓴이의주관이편향적으로반영된것이대다수였다. 다만그런가운데서도몇사람의글에서는고종시대사를해명하는데중요한몇가지새로운사실을확인할수있었다. 지금까지검토한내용을중심으로 순종실기 의자료적가치와한계를다음과같이정리할수있다. 첫째는대원군집권에서부터청일전쟁에이르는시기개화파그가운데서도일본의메이지유신을모델로했던친일개화파가당시어떠한정세인식을바탕으로개화정책을추진했는지알수있었다. 이들은대원군집권이래전개된정국을 대원군과민왕후의세도쟁탈 과친청수구적인민씨일족의난정으로보고이때문에나라가망해갔다고파악했다. 개항이후정국에대한이들의이런현실인식은자연히반청 반민씨및반대원군으로기울었고친정이후근대화정책의한축을형성했던고종의역할에는부차적이었다. 이것은일제가조선을침략하면서꾀했던초기식민사학특히고종의무능을강조했던조선의 근세정치사 와일치된인식이었다. 때문에이들은조선의보호국화를꾀하던일본의침략론과침략현실에둔감할수밖에없었던것이다. 다만갑신정변의주체였던박영효의글에서 1884 년 4월전후이노우에외무상

302 奎章閣 43 이박영효에게밀사를파견한사실과이를계기로정변모의가시작된사실을새롭게확인할수있었다. 주미공사관직원으로파견되었던이하영의 200 만불차관및미군 20만명청병 계획은, 회고의글을자료로이용할때사실관계에대한검증과비판적고찰이얼마나중요한가를확인시켜준것이라할수있다. 둘째는을사늑약및병합늑약의불법성에대한새로운확인이다. 을사늑약이체결된 1905 년 11월 17일상황을회고한권중현의글은자신의사직상소문보다후퇴한책임회피성글이었고, 병합늑약당시유일하게반대했던학부대신이용직의글은당시통감부관리였던일본인의회고글에서알수있었던중요한사실즉 1910 년 8월 22일어전회의에그가참여하지못한이유를직접본인의글을통해새삼확인할수있었다. 특히을사늑약체결당시외부교섭국제2 과장이었던어윤적의글은을사늑약의불법성문제와관련된쟁점가운데하나인 외부대신직인강탈문제 에관한새로운사실을밝힌것이다. 이것은박제순의지시로외부의직원이직접직인을가져왔다는일본측주장과통감부직원과일본병이외부에와서외부대신직인을탈취해갔다는한국측주장과도달랐다. 그의말에따르면을사늑약의합법성을강조하려고 한국측의자발성 을강조한일본측주장은조작이고, 당시교섭국장이시영이박제순에게전화로확인한후외부주사가직인을가져갔다는사실만한국측주장과달랐다. 앞으로이와관련된사실관계의확인이더필요하겠지만이글의방점은 한국측의자발성 을강조한일본측주장을부정한데있다. 이와같이 순종실기 에실린글은당시가일제치하이고글쓴이들이역사적으로민감할수있는중요한역사적사건과관련된당사자였기때문에곧바로자료로서이용하는데는한계가분명했다. 그러나앞에서확인한몇가지사실은부족한근대사관련자료를보완하는데나름의의미가있다고할것이다. 논문투고일 (2013. 4. 26), 심사일 (2013. 11. 21), 게재확정일 (2013. 12. 20)

純宗實紀 의고종시대인식과을사늑약의외부대신직인 강탈 문제 303 참고문헌 高宗實錄 甲申日錄 新民 제14호 (1926.6) 국사편찬위원회,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4 冊小松緣, 1920 韓國倂合之裏面, 中外新論社. 李鍾學編著, 2000 1910 년韓國强占資料集, 史芸硏究所. 日本外務省, 1958 日本外交文書 第 38 卷第 1 冊, 日本國際連合協會. 정교 ( 조광편 변주승역주 ), 2004 大韓季年史 7, 소명출판사. 박배근, 2008 국제법상시제법의이론과실제, 國際法學會論叢 53-1( 통권제110 호 ). 박은숙, 2005 갑신정변연구, 역사비평사. 배항섭, 2003 갑오개혁전후군사제도의변화, 한국근대사회와문화 Ⅰ, 서울대출판부. 서영희, 2001 명성왕후연구, 역사비평 57., 2002 명성왕후재평가, 역사비평 60. 운노후쿠쥬 ( 정재정옮김 ), 2008 한국병합사연구, 논형. 이태진외, 1995 일본의대한제국강점, 까치. 이태진등공편, 2009 한국병합과현대 : 역사적국제법적재검토, 태학사. 李光麟, 1965 美國軍事敎官의招聘과鍊武公院, 震檀學報 28. 李民植, 1998 금상이하영연구 (1858~1929), 白山學報 50. 이상찬, 2005 1900 년대초한일간조약들의불성립개론,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 근 현대편 4., 2007 駐韓日本公使館記錄 과 日本外交文書 의을사조약관련기록의재검토, 奎章閣 30. 趙東杰, 1990 植民史學의成立過程과近代史敍述, 歷史敎育論集 13 14. 최문형, 1982 韓美友誼의變化, 한미수교 100년사, 국제역사학회의한국위원회.

304 奎章閣 43 Abstract The Recognition of SoonJongsilgi( 純宗實紀 ) to GoJong( 高宗 ) era and the robbed problem of Minister of Foreign Affairs seal( 外部大臣職印 ) of Protectorate Treaty( 乙巳勒約 ) Yun, Dae-won * SoonJongsilgi( 純宗實紀 ) is featured Article No. 14 of Sinmin( 新民 ) published in June 1926 to mourn for the death of SoonJong( 純宗 ). This book consists of a personal retrospective or articles written by journalists. The majority of this article is the already known or have limitations to reflect the subjectivity of the author, but here we can confirm some important facts. First, we can see that there is a limit to the recognition of reality in the pro-japanese Enlightenment-Faction( 親日開化派 ) s recollection like Parkyounghyo( 朴永孝 ). They recognized only the political situation after the opening as the power struggle between Daewongun( 大院君 ) and Min-queen( 閔王后 ) and understood that the country was leaning because of this. they treated GoJong( 高宗 )'s political ingenuity and Japan's invasion as secondary. In addition the recollection of Parkyounghyo that about April 1884 the Japanese Foreign Minister Inoue Gaori( 井上馨 ) has dispatched emissary to him is an important testimony about the preparatory operations between Gapsin Coup( 甲申政變 )' reader and Japan. Especially Eoyunseuk( 魚允迪 ) recollection on the Minister of Foreign Affairs' seal ( 外務大臣職印 ) is a new fact to prove that the Japanese claims to emphasize 'the Korean side of the spontaneity is a fabrication. The recollection of Yiyongjik( 李容稙 ) is other data to accuse directly the illegality of the annexation process.

純宗實紀 의고종시대인식과을사늑약의외부대신직인 강탈 문제 305 As such SoonJongsilgi( 純宗實記 ) has a material limitations but also has a meaning to supplement lack of data in modern history of Korea Key words : SoonJongsilgi( 純宗實紀 ), Parkyounghyo( 朴永孝 ), Protectorate Treaty( 乙巳勒約 ), Eoyunseuk( 魚允迪 ), the Minister of Foreign Affairs' seal( 外部大臣職印 ), the Korea-Japan Annexation Treaty( 倂合勒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