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관논총_50집.hwp

Similar documents
152*220

* pb61۲õðÀÚÀ̳ʸ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120~151역사지도서3

041~084 ¹®È�Çö»óÀбâ

(012~031)223교과(교)2-1

- 2 -

(중등용1)1~27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º´¹«Ã»Ã¥-»ç³ªÀÌ·Î

기본소득문답2

ÃѼŁ1-ÃÖÁ¾Ãâ·Â¿ë2

CT083001C

[NO_11] 의과대학 소식지_OK(P)

<C3E6B3B2B1B3C0B C8A32DC5BEC0E7BFEB28C0DBB0D4292D332E706466>

5 291

<5BB0EDB3ADB5B55D 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 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 D3135B9AEC7D72E687770>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178È£pdf

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0.筌≪럩??袁ⓓ?紐껋젾 筌

¹é¹üȸº¸ 24È£ Ãâ·Â

....pdf..

01¸é¼öÁ¤

allinpdf.com

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µ¶¸³Á¤½Å60È£

단양군지

금강인쇄-내지-세대주의재고찰


<B0EDB5EEC7D0B1B320BFAABBE7B1B3B0FABCAD20C1FDC7CAB1E2C1D828C7A5C1F62BC2F7B7CA292E687770>

2013_1_14_GM작물실용화사업단_소식지_내지_인쇄_앙코르130.indd

내지(교사용) 4-6부

2002report hwp

#7단원 1(252~269)교

ad hwp

내지-교회에관한교리

(연합뉴스) 마이더스

???德嶠짚

ITFGc03ÖÁ¾š

hwp

2020 나주도시기본계획 일부변경 보고서(2009).hwp

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2003report hwp

- 2 -

141018_m

- 4 -

1220½É¹Ì¾Èâ27È£º»¹®

Art & Technology #5: 3D 프린팅 - Art World | 현대자동차

2ÀåÀÛ¾÷

CR hwp

hwp

2저널(11월호).ok :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

Microsoft PowerPoint - soc-mov-01.ppt [호환 모드]

현안과과제_8.14 임시공휴일 지정의 경제적 파급 영향_ hwp

bm hwp

<B1B9BEEE412E687770>

레이아웃 1

병원이왜내지최종본1

¾ç¼ºÄÀ-2

- 89 -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Çѹ̿ìÈ£-197È£

°¨Á¤Æò°¡

_¸ñÂ÷(02¿ù)

광주시향 최종22

Y Z X Y Z X () () 1. 3

4) 5) 6) 7)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연구노트

½Å½Å-Áß±¹³»Áö.PDF

나하나로 5호

ad hwp



<BFA9BCBABFACB1B8BAB8B0EDBCAD28C6EDC1FD292E687770>

77

750 1,500 35

SIGIL 완벽입문

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Microsoft PowerPoint - TKQYHLWRUIDI.pptx

<C7D1B1B9C7FC20B3EBBBE7B0FCB0E82DC3D6C1BE612E687770>

DocHdl2OnPREPRESStmpTarget

³»Áö_10-6

2015년9월도서관웹용

<34BFF9C8A320B4DCB8E9B0EDC7D8BBF32E706466>

º»ÀÛ¾÷-1

ok.

È޴ϵåA4±â¼Û

CC hwp

hwp

2006

ps

hwp

레이아웃 1

Transcription:

國史館論叢 第50輯 現代의 起點問題 徐 仲 錫* Ⅰ. 서론 한국에서 현대에 대한 시대 2. 중국과 일본에서의 현대의 기점 구분의 논의를 제약한 제조건 3. 남한에서의 논쟁 Ⅱ. 현대에 대한 시대구분의 기준 또는 4. 북한에서의 현대의 기점 문제 지표 Ⅳ. 현대의 기점에 대한 논의 기준 Ⅲ. 서유럽 중국 일본에서의 현대의 기점 또는 지표를 중심으로 논의와 남한과 북한에서의 현대의 1. 3 1운동 이후를 현대로 보는 경우 기점 논의 2. 해방 이후를 현대로 보는 경우 1. 서유럽에서의 현대의 기점 Ⅴ. 결 론 Ⅰ. 서 론 한국에서 현대에 대한 시대구분의 논의를 제약한 제조건 역사의 시대구분 논의에서 가장 적게 다루어진 부분이 현대이다. 서양사의 경우 고대 나 중세, 근대의 시대구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왔고, 그 만큼 이견도 많지만, 현 대의 기점이나 현대의 성격에 관한 논쟁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중국사나 일본사에서도 현대에 관한 시대구분 논쟁은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다. 현대의 기점이나 현대의 성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못한 것은 현대가 갖고 있는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역사는 가장 잘 알 것 같으면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객관적인 인식이나 총체적인 인식, 또는 명료한 인 식에 어려움을 안겨준다. 이 점은 세기적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경우에도 비슷할 것 으로 생각된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변화였는지는 변화의 와중에서는 제대로 인식되기 어려우며, 변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공유되고 주지되 는 데에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시대구분은 역사상의 큰 분수령을 잡아내 그것을 중심으 로 논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대변화에 대한 인식 및 그 인식의 보편화에는 시간 을 요구하게 된다. 이와 같은 현대의 특성 때문에 현대의 기점이나 성격에 대해 일정한 합의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 成均館大學校 史學科 敎授.

- 113 - 현대에 대한 시대구분적 인식이 어려운 데에는, 앞에서 기술한 바와 연관되지만, 역사 현상의 성격에도 기인한다. 마르크 블로흐가 기술한 대로, 역사적 현상이란 그 시간을 따로 떼어놓고는 이해되어질 수 없다. 이 시대건 다른 시대건 모든 발전 단계에서 항상 그러하다.1) 이 점과 관련하여, 그래도 고대와 중세,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기준들은 비교 적 확연한 바가 있지만, 근대와 현대에는 연속성이 강하기 때문에 그 만큼 뚜렷하게 성 격을 달리하는 기준들을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현대를 시대구분하는 데 어려운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로는, 현대는 역사학의 대 상이 아니라는 견해가 꽤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블로흐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 한 분이 1830년 이후는 역사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 모두 정치학에 속한다 라고 말씀했다지만,2)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시기는 역사학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학이나 사회학, 또는 경제학 등 일반 사회과학의 연구대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현대의 기점이나 성격에 관해서 거의 논의를 하지 않은 점에서 한국의 경우는 서양이 나 중국, 일본의 경우와도 크게 다르다. 현대뿐만 아니라,3) 일제시기의 성격에 대해서도 거의 다루지 않았다. 한국사의 시대구분에 대한 관련학계에서의 폭넓은 논의는 한국경제 사학회가 1967년 12월과 다음해 3월에 한국사의 시대구분 문제 란 제하로 심포지엄을 가 진 것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심포지엄에서 현대는 전혀 논의가 되지 않았 고, 근대의 시기구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인 일제시기는 한 두 마디 언급하고 지나갔을 뿐 이었다. 곧 趙璣濬이 1920년대 초 이래 민족기업 의 활동에 관해 한 마디 했고,4) 종합토 의에서 한 페이지 반가량이 논의되었는데, 그것도 그 당시 愼鏞廈가 창작과 비평 에 쓴 일제시대와 사회성격에 관한 기술에 대해 짤막히 논평한 것이었지, 일제시기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5) 한국근현대의 성격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논의는, 비록 한 대중잡 지에서 기획한 것이고 참여자도 3명의 교수에 불과했지만, 姜萬吉, 鄭昌烈, 신용하의 좌담 에서였다.6) 이 좌담에서는 조선말 이후의 역사적 성격에 관해 격렬한 토론이 펼쳐졌는데, 그러나 한국사에서 의미하는 근대의 성격에 대한 해명이 주조를 이루다보니까, 그리하여 강 정 두 교수가 통일되기 이전까지의 한국사는 근대가 완성 또는 완결되지 않은 역사로 논지를 펴다보니까, 해방 이후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는 짧게 언급되어질 수밖에 없었 다. 근현대의 기점문제와 성격에 대한 논의는 계간지 창작과 비평 이 마련한 좌담에서 도 있었으나 개략적인 수준이었고, 참석자 사이에 심한 의견의 차를 보여 주었다.7) 1) 마르크 블로흐, 역사를 위한 변명 (정남기 역, 한길사, 1979) p. 51. 2) 위와 같음. 3) 이 논의에서는 한국에서 현대는 일단 해방이후의 시기로 설정하였다. 또 이 논문에서 한국은 대체 로 남한을 가리킨다. 4) 조기준, 한국사에 있어서의 근대의 성격 ( 한국사시대구분론, 을유문화사, 1970) p. 210. 5) 위의 책 종합토의 참조. 6) 강만길 등, 한국 근 현대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 신동아 1984. 9).

- 114 - 國史館論叢 第50輯 왜 한국에서는 현대에 대한 시대구분 논의가 없었나. 이 점에 대해서는 상호 관련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해방 이후의 정치적 체제적 조건이 갖는 제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 국은 해방된 지 3년 만에 분단이 되었다. 이 분단은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수반 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또한 극단적으로 민족문제를 왜곡한 시각에서 보게 하는 면이 있 었다. 분단체제에서 다른 한 쪽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 또는 없애버리거나 타도해야 될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남북한 전체를 시야에 넣는 역사 관이 존재하기가 어려웠다. 또 이렇게 된 데에는 관련 학자들이 권력 또는 체제가 요구 하는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면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후기의 경우 실 학자, 그 중에서도 경세치용학파의 인식체계는 비록 중세적인 세계관에 제약되어 있었지 만, 중세에 가질 수 있는 인식으로는 폭넓고 깊이 있는 것이면서 근대에의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한반도 전체의 과거와 당대를 총체적으로 사고한 것이었다. 일제 시기는 식민지였지만, 그 상황에서 한국인 전체를 시야에 넣고 사고하는 역동성과 유연 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데올로기의 제약도 해방후의 그것과는 크게 달랐다. 해방 이후 의 조건은 조선후기나 일제시기와 달리 남한에서건 북한에서건 기본적으로 현대에 대해 논의를 할 수 있는 사고의 지평을 제약하였다. 그리고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의 제약이 완 화되거나, 그러한 제약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있기 전에는 현대에 대해 논의하기가 어 려웠다. 설혹 현대에 대해 시대구분 논의를 하더라도, 북한에서의 경우가 말해주는 것처 럼, 반쪽을 중심에 놓거나 전체로 가정하고 논의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분단체제가 요구하거나 제약한 인식 수준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 우리 역사에 내재해 있는 미숙함이 현대에 대한 시대구분적 파악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하겠지만, 근대적 민족국가로 충분히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에서 식민지가 되었고, 식민지에 이어 분단이 되고 대규모 전쟁을 겪음으로써 한국은 근대사회가 갖춰야 할 민족국가에 이상이 있게 되었고, 근대를 완성하지 못한 채 민족의식이 파행적 또는 불구적 상태에서 현대생활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는 어느 시대보다도 역사적 의식이 발달한 시대이고, 그리하여 현대인은 전에 없으리 만큼 강하 게 자아를 의식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역사를 의식하고 있다고 하지만,8) 한국인은 해방 이후 상당기간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이 미약하거나 왜곡된 수준에 있었다. E.H. 카는 민중들의 사회적 정치적 의식이 더욱 증대되고 과거와 미래를 지닌 역사적 실체로서의 각자의 집단을 자각하고, 이리하여 그들이 완전히 역사속에 등장하게 되었을 때에 근대 사는 시작된다고 말하였지만,9) 이러한 주장에 따를 경우, 일제시기보다도 협소하고 퇴행 7) 강만길 徐仲錫 李炳天 임영태, 한국 근현대사의 성격과 민족운동 ( 창작과 비평 1988 여름) pp. 8 15 참조. 8) E.H. 카, 역사란 무엇인가 (吉玄謨 역, 탐구당, 1966) p. 177.

- 115 - 한 민족의식, 역사의식을 소유하였던 한국전쟁 이후 상당기간의 역사는 현대는 커녕 근 대에서도 거리가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한국은 70, 80년대에 상당한 규모로 시민 사회가 팽창되어 왔지만, 위의 조건 때문에 시민의식이 미성숙한 시민사회가 아니었느냐 하는 자문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현대사가 연구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80년대의 사회구성체논의는 사회구성이 구체적으로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역사적이고 전체적인 인식이 결여된 채 진행된 추상적 논의였다는 점에서 특성을 보여주었는데, 연구가 거의 없는데도 시대구분 문제를 논의한 다는 것은 무리를 낳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현대에 대해 시대구분 논의를 하고 싶어도 이 시기에 대하여 연구가 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이었다.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왜 현대사가 연구되지 않았는가를 언급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연구자들이 자료를 보기가 어려웠다. 도서관에서는 소장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고, 개인은 자신이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숨겼다. 이데올로기적인 제약과 실정법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국에서 현대사가 연구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이데올로기적인 제약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권력이나 지배층이 역대정권의 성립과정과 통치형 태, 종결 형태를 볼 때 현대사는 연구의 대상으로도 교육의 대상으로도 부적절하다고 생 각하였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해방 후 지금까지 주동적 역할을 담당한 세대가 대부분 일제통치하에서 살았음은 물론 직접 간접으로 식민지통치기구와 연관이 있었다는 점도10) 함께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민족해방운동사와 현대사가 연구되지 않은 것을 외부조건에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역사가는 자기가 살고 있 는 시대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에 대한 물음에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답할 수 있 고 또 답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은 역사가이고, 헤루도투스나 투키디데스 이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역사연구들은 그들 당시의 현대사였다고 피력하였다.11) 그렇지만 한국에서 는 일제시기 이래 현대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드물었고, 활동가들의 경우에도 자신의 활동에 대해 서술한 경우가 많지 않다. 사회주의자들의 경우, 이 문제에 특히 민감하였 을 성싶지만, 실제 그렇지 않았다. 한국에서 당대의 역사가 소홀히 다뤄진 데에는 학문과 사상의 이식적 성격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앞에서 현재에 가까운 시대는 역사학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음을 지적하였는데, 한국에서도 그러한 주장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것도 근현대에 대한 연 구를 막은 작은 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그렇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렇다면 근대까지 정치학이나 사회학 등에서 해방이 후사를 다뤘는가. 국내에 한해서 볼 9) 위의 책 p. 197. 10) 강만길, 국사학의 현재성 부재문제 (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창작과 비평사, 1978) p. 45. 11) 盧明植, 20세기 현대사 (청람, 1981) p. 8.

- 119 - 것이24) 아닐까. 그런데 노명식이 현대는 근세의 최근부분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의 출발 이라는 자각의 산물이라는 지적은 정치사나 경제사의 변동보다도 근세의 서구문화가 종 말을 고했다는 쉬펭글러, 토인비, 소로킨, 베버 등의 문명론적 인식에 견해를 같이하는 것이었다.25) 이 점도 간과해서는 안되겠지만, 노교수도 다른 곳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현대는 질적인 차이로도 인식할 수 있을 만큼 근대와는 아주 크게 다른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대변화는 1차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 2차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일어났는데, 또한 새로운 대변화가 이 몇 년 을 전후하여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근대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졌다면, 현대는 고전적 자본주의와는 명확히 구 별되는 독점자본주의시대이자 특정한 지역에서는 사회주의체제의 시기라고도 볼 수 있 다. 이러한 기준에서 본다면 독점자본주의의 출현과 그것의 세계사적 운동으로서 나타난 제국주의시대와 그 이후가 현대라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맑스가 자본론 Ⅰ을 썼을 때만 하여도 자유경쟁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보기에 당연한 법칙(natural law) 으로 보였으나,26) 그 무렵부터 자유경쟁을 지양하는 생산의 집 중이 나타나고, 그것은 독점자본주의로 발전하여,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에 독점자본 주의는 점차 지배적인 자본주의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20세기가 시작할 무 렵에는 기존의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시대가 열렸다.27) 그리고 이 시기 는 제국주의 시대의 전개와 궤를 같이하였다. 19세기 마지막 4반세기부터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식민지 경쟁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일본과 미국이 참여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남극대륙을 제외한 전지구의 육지가 식민지로 분할됨으로써, 15 16세기 지리 상의 발견 이후 확대되어간 세계는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완성의 모습을 띠게 되었 는데, 하나가 된 지구는 크게 보아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반식민지로 양분되었다. 이 점에서도 세계사는 과거와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대로서 현대의 시작을 보다 분명히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제조건은 대체로 1차세계대전 종전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대 는 독점자본주의시대, 제국주의시대부터 열리게 되나 1차세계대전 종전에서 일반화된 동 시대성을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차세계대전은 독점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른 제국주의국가의 세계분할이 낳은 모순 불균등한 독점자본주의의 발전을 기저로 한 제국주의국가 상호간의 격렬한 경쟁에서 야 기된 것이었으나, 전쟁의 결과는 놀랍게도 새로운 세계를 열리게 하였다. 쉬팽글러는 이 24) 차하순, 앞의 책 p. 188. 25) 노명식, 앞의 책 p. 9. 26) 레닌, 제국주의 (박세영 역, 과학과 사상, 1988) p. 30. 27) 위의 책 p. 30.

- 120 - 國史館論叢 第50輯 전쟁을 통해서 결국 한 문명이 몰락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림을 비관적으로 이해하였지 만, 새로운 세계는 대단히 불안한 양태를 띠고 있었으나, 그것은 인간이성의 엄청난 확 장, 구체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엄청난 확장을 초래하였다. 오스만터키제국, 러시아의 짜르 제국,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제국, 독일제국이 붕괴하였고, 서유럽에서는 여성도 투표 권을 갖는 보통선거제가 자리를 잡아가게 되어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연속이면서도 19세 기의 그것과는 크게 차이가 나는 자유민주주의가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노동운동 이 고양된 것도 이 시기의 중요한 특징인데, 얼마 후에는 영국의 노동당내각과 같이 노 동자정당이 집권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보다 훨씬 중요하고, 세계사적으로는 더욱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세비키혁명과 아시아와 북부아프리카지 역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이었다. 볼셰비키혁명의 성공은 자본주의체제와는 질적으로 다르 고 그것과 정면 대결하는 사회주의 국가를 출현시켰으며, 소비에트사회주의국가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운동, 정치활동과 식민지 반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줌으로씨 세계사를 시대구분하는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독점자본주의의 출현, 1차세계대전의 종전은 확실히 시대구분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는데, 이러한 변화가 동시대적인 성격을 더욱 강하게 하는 것은 2차세계대 전 이후부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1차세계대전 이후를 현대의 기점으로 할 것인가, 2차세계대전 이후를 현대의 기점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지역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다. 예컨대 사회주의국가의 경우 사회주의체제를 현대의 기준으로 잡는다면 러시아는 1917년 이후부터가 현대이지만, 동유럽의 경우는 2차세계대 전 이후가 현대일 수 있다. 이제 2차세계대전 이후를 현대로 잡을 수도 있을 만한 큰 변 화는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보자. E.H. 카는 20세기 중엽이라는 시대는 아마도 15 16세기에 중세세계가 무너지고 근대 세계의 토대가 잡혀진 이후로는 목격할 수 없었던 가장 심각하고 가장 광범한 변화 과 정에 처해 있는 시대라고 말하고, 그것을 과학적인 발견과 발명, 사회혁명과 연결시켜 생각하였다.28) 카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2차세계대전은 생산력에서 엄청난 발달을 가져 왔고,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였음은 명백하다. 이와 함께 카가 사 회혁명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는데, 카가 의미한 사회혁명의 내용 이 애매한 점이 있지만, 필자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것에 연결시켜 설명하고 싶다. 우선 사회주의권의 확대이다. 그것은 동유럽에서 동아시아에 이르는 규모로 확대되었 다. 그런데 변화는 사회주의권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권에서도 사회혁명이 라고 할 만큼 심대하였다. 수정자본주의적인 현상, 복지정책의 강화는 2차세계대전 이전 에도 유럽과 기타 백인지역 국가 몇 나라에 나타났지만, 그것이 자리가 잡히고 확대된 28) E.H. 카, 앞의 책 p. 175.

- 121 - 것은 2차세계대전 이후였다. 이것은 국가의 역할이 고전적 자본주의시대와는 질적으로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은 또한 국가와 독점자본과의 새로운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독점자본주의가 여전히 자본주의세계를 지배하였지만, 그것의 내용 은 많이 달라졌다. 트러스트 카르텔 콘체른 같은 과대한 경제력집중 현상은 선진자본주 의국가에서 약화되었고, 나라에 따라 차이가 많지만 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 독점자본 에 대한 통제가 일정하게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본의 구성도 주식회사의 주주 분포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특정인의 집중에서 대중적인 면이 강화되는 형태가 나타났다. 그런 속 에서 독점자본이 다국적기업으로 발전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사가 갖는 심대한 변화는 제국주의시대가 고전적인 형태로는 종언을 고했다는 데에 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반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은 훨씬 고양되어 독립국가들을 출현시킴으로써, 비록 많은 신생 독립국들이 신식민지적 또 는 종속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고는 하지만, 세계사는 이제 독립국가들로 이루어진 지구적인 규모의 세계체제를 완성시켰다. 이것은 세계의 중심이 서유럽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29) 이른바 제 3세계의 시대라는 것이 또한 열리게 된 것을 의미하였다.30) 2차세계대전은 이와 같이 세계의 중심을 유럽에서 떠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시대와도 다른 세계체제, 이른바 얄타체제라고도 하는 세계체제를 가져 왔던 바, 그것은 세계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의 헤게모니하에 놓이게 되는, 세계적 규모의 냉전체제를 성립시켰다. 2차세계대전 이후의 변화로 자유민주주의의 정착과 확대도 중요시되어야 할 것이다. 서유럽 몇몇 나라에 출현하였던, 성별 신앙 등 어떤 차별도 배제한 보통선거권에 기반을 둔 자유민주주의는 1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얼마큼 꽃을 피우는가 했지만, 전세계적 규모 로 불어닥친 파시즘의 시련에 부닥침으로써 서유럽에서도 그것이 정착하는 데에는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기다려야 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아직도 서유럽의 몇몇 나라 등 일부 지역에서만 제대로 실현되고 있지만,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다. 지금까지 현대는 동시대를 의미하는바, 동시대가 근대 중의 최근세사로서 파악되거나 가치관이나 태도를 공유하는 시기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객관성 또는 일반성을 획득하려면, 근대와는 명확히 구별되는 것으로서 인식되어야 하며, 그러한 시각에서 현 대를 시대구분지을 수 있는 몇 가지 기준 또는 지표를 제기하였다. 이와 같이 질적으로 근대와는 구별되는 현대를 인식하는 방법으로 사회구성체의 변화를 제시할 수 있다. 맑 스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시대구분 기준인 사회구성체는 역사발전의 단계론에 입각해 있 다. 그리하여 정통 맑스주의자들은 근대를 자본주의가 지배적 생산양식으로 자리잡는 시 기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경우 자본주의에 대한 개념의 상위, 부르주아지의 29) 위의 책 p. 194. 30) 노명식, 앞의 책 p. 11.

- 123 - Ⅲ. 서유럽 중국 일본에서의 현대의 기점 논의와 남한과 북한에서의 현대의 기점 논의 1. 서유럽에서의 현대의 기점 앞서 살펴본 대로 현대의 기점이나 현대의 성격에 대한 파악은 전문연구가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많은 편차를 보이고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동유럽과 소련이 사회구성 자 체를 달리하는 변화를 하고 있어, 이 지역에서의 현대에 관한 기존 규정은 재검토를 요 구받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 남북한에서의 현대의 기점 문제에 대한 기존논의를 소개하 기에 앞서 가장 근대가 빨리 시작된 서유럽에서 현대에 대한 기점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몇 가지 예를 제시하기로 한다. 현대는 한 가정 안에 사는 사람들 속에서도 세대에 따라 그 기점을 달리할 수 있지만, 한 개인한테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헤이즈는 1932년의 저서에 서는 1830년대를 현대의 시작으로 보았지만, 그 후 이 저서의 1953년 개정판에서는 1870 년을 현대의 시작으로 보았다.39) 현대의 기점을 위와 같이 1830년대, 1848년, 1870년 등 19세기의 중요한 변화기에서 구하는 연구자도 없지 않지만,40) 대개의 경우는 1차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부터를 현대 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41) 이 경우 제국주의와 1914년의 유럽, 제 1차세계대전, 러시아혁명과 그 결과, 제 1차세계대전의 수습과 국제문제, 파시즘의 대두, 복지국가와 수정자본주의 등이 현대의 기점과 관련되는 사항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42) 그러 나 2차세계대전을 훨씬 뛰어넘는 1961년 이후를 현대의 기점으로 잡고 있는 연구자도 있으며,43) 경우에 따라서는 1968년 이후 또는 1991, 92년 이후를 현대로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39) 차하순, 앞의 책 pp. 187 188. 40) 河野健二는 현대는 1848년의 혁명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하였다. 집권국가와 자본주의가 근대 의 주요한 내용이라고 한다면, 그 두 개의 요인에 대하여 비판하기 시작하고 그것을 개변하기 위한 실 천적 활동이 전개된다면 그것이 근대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의 출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움직임이 서유럽에서 이미 무시할 수 없게 된, 2월혁명이나 맑스 앵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나온 1848년이 현대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河野健二, 프랑스현대사 (山川출판사, 1977) p. 35. 41) 그런데 일반적으로 근현대를 다룬 역사서에서는 뚜렷하게 현대의 기점을 기술하고, 왜 그 시기를 현대의 기점으로 잡았느냐를 설명하면서 역사를 기술한 예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42) 스튜어트 휴고, 서양현대사 (1976 ; 박성수 역, 종로서적, 1986), 中山治一 外 서양현대사 (京都大서양사下, 1953), 岩波강좌, 세계역사 24( 현대 1, 岩波서점, 1970) 및 차하순 앞의 책 p. 188 참조. 43) 차하순, 앞의 책 p. 188에 소개되어 있는 바라클라프의 현대사입문.

- 124 - 國史館論叢 第50輯 2. 중국과 일본에서의 현대의 기점 중국에서 근현대의 기점문제를 논의할 때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이 구민주주의혁명과 신민주주의혁명으로, 양자는 5 4운동이 분수령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곧 신민주주의혁명이란 구민주주의혁명에 대한 대칭개념으로 프롤레타리아트 지도 아래에 서 농민이 주력군이 되어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역사적 한 시대로, 양자는 모두 민주주의 혁명의 한 단계를 구성하는데, 1840년의 아편전쟁부터 1919년의 5 4운동까지를 구민주주 의혁명기, 그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까지를 신민주주의 혁명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44) 그러나 연구자에 따라서는 5 4운동 이전 또는 이후도 중요한 시기구분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閔斗基는 현대사를 1919년부터 잡으면 신해혁명의 의의는 크게 준다고 보고, 2천년 지속된 황제 지배의 몰락과 황제로 상징되는 권위의 몰 락은 중대한 변화가 아닐 수 없으므로, 1911년과 1919년을 민국혁명으로 한데 묶어, 1911년 신해혁명은 민국혁명의 제 1차혁명, 1919년의 5 4운동은 민국혁명의 제 2차 혁명 으로 부를 것을 제안하였다.45) 또 다른 연구자는 毛澤東의 규정에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트에 의한 지도 가 시대구분의 원칙이 되어야 하는데, 맑스주의정당의 지도가 있어야 비 로소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지도가 있을 수 있고, 따라서 신민주주의혁명은 1921년의 중국공산당 성립 이후의 일이며, 그 이전의 5 4운동은 신민주주의 혁명으로 가는 과도기 (部分質變)라고 규정하였다.46) 그런데 5 4운동 이후의 신민주주의혁명을 현대로 보느냐 근대에서의 중요한 분수령으 로 보느냐는 대체로 봐서 시기에 따라 차이가 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지 얼마 되 지 않았을 때에는 현대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중화인민공화 44) 狹間直樹, 5 4운동연구서설 (1982 ; 양민호 역, 1985) p. 13. 45) 민두기, 중국사 시대구분론의 사회적 배경과 그 의의 및 전망 ( 중국사 시대구분론, 창작과 비평사, 1984) p. 20. 46) 朱務善, 五四革命運動是否就是新民主主義革命 ( 역사연구, 1962). 이에 대해 林傑은 당 성립 이전에는 초보적 공산주의사상을 지닌 지식인 이 당의 역할을 대행했다는 반론을 졌다. 林傑, 同 朱務善同志商榷五四運動的性質問題 ( 철학연구, 1963). 이상 狹間直樹, 앞의 책 pp. 15 16 참 조. 중국에서의 근현대시대구분에는 毛澤東의 인식이 큰 영향을 미쳤다. 毛는 아편전쟁 이래 각각 의 혁명발전단계마다 약간의 특징이 존재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공산당이 출현한 그 전과 그 이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전과정은 자산계급민주혁명의 성격 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이 사회의 전신은 봉건주의사회 후신은 사회주의사회 라고 기술하 였다. 브루노 쇼 편, 중국혁명과 毛澤東思想 (석탑, 1986) p. 258. 毛는 5 4운동이 중국의 반제반 봉건 자산계급민주혁명에서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발전한 것이며 이 시기에 중국의 노동자계급, 학생대중과 신흥민족자산계급이 새로운 사회 역량으로 성장, 발전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5 4운 동이 1911년 신해혁명보다 한발짝 앞섰다고 기술하였다. 브루노 쇼 편, 위의 책 p. 257.

- 125 - 국이 세워진 이후를 현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진 것이다. 1955년 연말에 翦伯贊은 대체 로(중국에서) 일치한 의견은 중국의 근대사는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하고 5 4운동에 이르 러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5 4운동부터 이후를 현대사에 넣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 다.47) 1980년대 이후에도 5 4운동 이후를 현대로 보는 견해가 있다.48) 그러나 신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은 질적으로 다르며, 자산계급민주혁명은 어디까지나 근대사의 범주 이고 사회주의혁명이 현대사 범주이므로,49)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를 현대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1980년대 이후에 강해지고 있다. 한 연구에서는 毛澤東의 언급을 주 요 논거로 제시하면서, 신민주주의 혁명과 구민주주의 혁명은 半식민지半봉건사회형태에 서 일어났고 혁명적 임무가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있으며, 자본주의의 사유제를 인정하 고 있는 점에서 서로 같은 것으로, 모두 근대사의 범주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50) 일본의 경우 서양이나 중국, 한국과 달리 1차세계대전 종전을 전후한 시기가 시대를 구분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기만 하여도 현대에 대해서도 시대구분이 뚜렷하게 주어졌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51) 그 러면서도 2차세계대전 이후를 현대로 보는 시각이 잡혀갔던 것이 아닌가 한다. 여기에서 는 高橋幸八郞 등이 편한 日本近代史論 중 大江志乃夫 집필의 전후개혁 에서 다 루어진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논의를 소개하기로 한다.52) 제 2차세계대전에서의 일본의 패배 및 패배에 따른 연합군에 의한 일본 전토의 점령 과 통치는 일본의 국가구조와 사회구조에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중대한 변혁을 가져 왔는 바,53) 藤元彰은 전후의 민주개혁을 明治維新과 겨룰 만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 니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54) 개혁은 전제권력으로서의 천황제를 해체시켰고, 군국주 47) 鈴木俊 西嶋定生 편, 중국사의 시대구분 (東京大學출판회, 1957) p. 17. 이와 함께 이 책에 수 록되어 있는 翦伯贊의 중국사의 시대구분의 문제에 대해서 를 참조할 것. 48) 장선문 丁永隆, 中國現代史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 中學歷史 1982년 제 3기 2) pp. 4 5. 민두기 교수는 1949년 이후의 시기는 현재이고 굳이 史를 붙인다면 현재사라고 해야 한다고 기 술하였다. 민두기, 앞의 논문 p. 20. 49) 장선문. 丁永隆, 위의 논문 pp. 5 6. 50) 위의 논문 p. 5. 51) 일본의 사학자들이 집필한 日本近代史 1 3에서 藤元彰이 집필한 3권은 1931 1960년간의 30 년을 다루었다(岩波全書, 1977). 그런데 藤元彰은 또한 岩波강좌 日本歷史 26권(1975 1977) 중 22권 현대 1의 현대사서설 을 집필하였는데, 여기서 현대사는 2차세계대전 이후를 가 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日本評論社에서 1978 79년에 낸 體系 日本現代史 1 3권에서는 2 차 대전 이전 일본 파시즘의 성립기를 현대로 다루었다. 52) 大江志乃夫가 쓴 小學館, 日本의 歷史 31(1976)은 표제가 전후개혁 이다. 그러나 有斐閣新 書로 나온, 大江志乃夫가 서장을 쓴 日本史 10(1978)은 표제가 현대 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80년에 출판된 高橋幸八郞 등이 편찬한 일본근대사론 에서는 大江志乃夫가 끝장을 맡았는 데, 표제는 현대라는 말이 없이 전후개혁 으로 되어 있다. 53) 大江志乃夫, 전후개혁 ( 일본근대사론, 1980 ; 車泰錫 등 역, 지식산업사, 1981) p. 327. 54) 위의 책 p. 336.

- 126 - 國史館論叢 第50輯 의와 군부에 커다란 타격을 주어 반전평화사상과 기본인권의 옹호, 민주주의의 원리가 자리를 잡아갔으며,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국민 각 계층의 정치적 지위가 높아졌고, 변 혁 지향의 정당이 정치 무대에 중요하게 등장하였다. 이와 함께 재벌해체, 농지개혁, 노 동개혁 등의 개혁과 가족제도의 개혁 등 사회생활면의 개혁이 있었다.55) 그러나 자본주 의의 성격에 대해서는 전후와의 연속성의 측면을 보다 강하게 파악하는 주장과 단절성 의 측면을 보다 강하게 파악하는 주장이 있다. 大內力은 연속설 위에 서서, 농지개혁이 나 재벌해체의 계기는 이미 1930년대 이후 일본자본주의의 내부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특히 전시 국가총동원체제 아래서 현재화해가고 있었던 것으로, 전후개혁은 이러한 국가 독점자본주의가 갖는 내재적 경향의 급성적인 촉진이었음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폈다. 그 러나 단절론에서는 전쟁전과 전쟁중의 일본자본주의의 구조적 파산 위에서 전후 일본의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재건되었다고 주장하였다.56) 3. 남한에서의 논쟁 앞에서 현대에 대한 시대구분 논쟁은 좌담에서의 토론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고 기 술한 바 있지만, 통사에서도 1970년대까지는 현대사가 별반 다루어지지 않았다. 1946년 에 쓰여진 孫晋泰의 서문과 李仁榮의 발문이 들어 있는, 李洵馥 林建相 金思億 孫寶基 韓 㳓劤 李明九 등이 분담 집필한 조선사개설 은 제 8장 李氏王朝의 종언 으로 끝마 쳐져 있다(弘文書館, 1949). 손진태의 국사대요 (乙酉文化社, 1949)에서는 해방 이후 서술에 단지 2면을 할애하였다. 1950년대에 널리 읽혀진 李丙燾의 조선사대관 (1948), 국사대관 (普文閣, 1955, 1960년판), 한국사대관 (1972)은 제 5편으로 최근(1910 1948) 을 설정하였는데, 일제시기에 12면, 해방이후에 3면을 할애하였다. 李仁榮의 國史要論 (民敎社, 1956)은 24장에 민족주의독립운동의 전개 가 있고 끝장인 25장 에 국사와 세계사 가 실려 있을 뿐이다. 李弘稙 申奭鎬 曺佐鎬 한우근의 國史新講 (일조각, 1958, 1972)에서는 제 8편에 민족의 수난과 해방 이 실려 있다. 해방 이후의 역사를 정식으로 취급한 것은 1960년대, 70년대에 널리 읽힌 李基白의 국사신론 (泰成社, 1961, 1965), 한국사신론 (일조각, 1967년판)에서인데, 두 권 다 4월혁명 에서 끝나 있으며, 후자의 경우 해방 이후에 13면을 할애하였다. 한우근의 한국통사 (을유문화사, 1970, 1982) 역시 4월혁명 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이보 다 늦게 나온 邊太燮의 한국사통론 (三英社, 1986)은 제 6편에 현대사회 를 설정 하고, 5공화국까지의 남한역사를 다루었다. 55) 위의 책 pp. 336 337. 56) 위의 책 pp. 338 339.

- 127 - 현대 라는 표제가 붙은 단행본에서도 현대는 소홀히 다루어졌다. 震檀學會에서 펴낸 한국사 현대편(李瑄根, 乙酉文化社, 1963)은 安重根의사의 의거와 庚戌國恥 로 끝 나 있으며,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한국현대사 1 5권(1969 1972)은 조선말에서 해방 으로 끝나 있다. 가장 놀라운 것은 1980년대에 나온 한국사연구회의 한국사연구입문 에서 해방 이 후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나마 1981년판에서는 근대사회의 15번째 맨 끝 항목으로 15. 8 15해방 이라는 항목이라도 들어갔는데, 1987년의 제 2판(새로 쓴 것)에서는 근세사회에 18항, 근대사회에 17항을 배정한 반면 해방 이후에는 한 항목도 넣지 않았다(둘 다 지식산업사에서 출간). 신진소장학자들의 통사에서는 현대편이 큰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민중사연구회 편의 한국민중사 2(풀빛, 1986)에서는 제 6부 현대 에서 광주민 중항쟁까지를 다루었는데, 160면 정도를 차지하였다. 한국역사연구회 편의 한국사강의 (한울, 1989)나 한국역사 (역사비평사, 1992) 역시 현대에 큰 비중을 두고 서술하였다. 한국 근현대의 시대구분 문제에 대해 가장 집중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한 잡지 에서 마련한 좌담회에서였다. 비록 이 좌담에서 강만길과 정창렬은 한국에서는 아직 현 대가 갖춰야 할 역사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해방 이후 분단시기 를 근대에 포함시킴으로써 현대에 관한 직접적인 논의는 제대로 안되었으나, 해방 이후 의 역사적 성격을 시대구분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다뤘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크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강만길의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 가 출판된 지 얼마 후에 마련된 이 좌담에서 강교수는 한국현대사 라는 저서를 내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편의상 표제로 붙 인 것이고 실제 한국은 아직도 근대의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였다고 피력하였다. 이러한 강교수의 주장은 이미 1978년에 쓰여진 분단시대 사학의 성격 에서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우리 근대사는 19세기 후반기에 시작된 실패의 역사가 1 세기를 넘어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 이라고 파악하였다.57) 강교수는 한국근대사 의 과제를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에서 찾고 있다.58) 이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를 현대사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근대적인 국민주권이 통일된 민족국가를 만들어내는 과 정이 우리 민족에게 하나의 역사적 시대가 되어야 하므로, 통일된 후에는 우리의 19세기 후반기와 20세기 전체의 역사를 엮을 때는 하나의 시대 곧 근대에 넣을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59) 강교수의 이러한 역사관속에는 민족 통일은 단순한 휴전선의 철폐가 아니라, 민족사적 단계를 한층 더 높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소망이 깃들어 있다.60) 강만길과 57) 강만길, 분단시대 사학의 성격 (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창작과 비평사, 1978) p. 14. 58) 강만길 등, 한국근 현대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 신동아 1984.9) pp. 510 511. 59) 위의 좌담 p. 512.

- 128 - 國史館論叢 第50輯 같이 한국근현대는 아직도 진전되고 있다고 보고 있는 정창렬은 보다 구체적이고 확고 하게 이 문제에 접근하였다. 정교수는 한국근대사를 한국주민 집단의 근대 민족으로서의 자기확립과정으로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외래자본주의의 침략으로 인한 식민지화 과정에 서 민족으로서의 결집이 이루어진 시기(1876 1910), 식민지지배하에서 민족으로서 형성 된 시기(1910 1945)를 거쳐 해방후의 역사는 세계의 양극적 냉전체제에 종속된 속에서 민족으로서의 확립이 진전되는 시기로 파악하였다. 민중의 내재적인 성장에 따른 이러한 진전에 의해 근대민족으로 확립될 때는, 인간으로서, 계급으로서, 민족으로서 해방이 전 일체로서 완성 완결되는 것이므로,61) 통일은 휴전선의 철폐를 넘어서서 한국민족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전망하였다.62) 강교수와 정교수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현대이고 일정한 시점 이후가 동시대라 는 것을 모르고 아직도 한국은 근대에 속해 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근현대의 역 사가 무의식 무주체 무방향이 될 수 없다는, 이 경우는 전근대와 구별할 수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깨어 있는 인간 또는 주민이나 민중, 민족이 역사의 주체로서 방향 성 있는 의식적 활동으로 마땅히 그 시대의 시대적 사명을 이룩하여야 한다는 역사의식 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좌담에 참석한 신용하는 해방이후는 半봉건성의 요소가 사실상 극복되어 기본적으로 현대 고도자본주의체제, 현대독점자본주의체제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63) 비 록 분단시대에 살고는 있지만 식민지시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신교수에 의하면 오늘날 한국사람은 세계 다른 나라 사람들과 같이 동시대인 이므로 세 계사와 보조를 같이 해서 현대사에 들어가 있다고 보았다.64) 현대에 대한 시대구분 문제는 다른 잡지에서도 논의되었는데, 그 지표나 기점에 대해 서는 참석자 4명이 모두 의견을 달리 하였다. 강만길은 앞의 좌담에서와 마찬가지로, 분 단 이후 남한의 자본주의적인 발전과 북한의 사회주의적인 발전을 세계사적인 시대구분 에 의해 하나로 파악한다는 것은 상당히 무리이며, 개항 이후 통일이 되기까지가 근대, 통일 이후가 현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65) 이 좌담에서 현대의 기점을 해방 이 후로 못박은 것은 임영태였다. 그는 불철저하나마 이 시기에 한국근대사의 과제가 수행 되어 봉건성도 거의 극복되었고, 종속적이지만 고도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왔으며, 국가도 상대적으로 신식민지 단계라고 인식하였다.66) 그런데 李炳天은 지표를 두 가지로 사용하 60) 위의 좌담 p. 513. 61) 위의 좌담 p. 514. 62) 위의 좌담 p. 515. 63) 위의 좌담 p. 513. 64) 위의 좌담 p. 515. 65) 강만길 등, 한국근현대사의 성격과 민족운동 ( 창작과 비평 1988. 여름) pp. 10 12. 66) 위의 좌담 pp. 8 10.

- 130 - 國史館論叢 第50輯 일단의 해결은 3 1운동 이후가 아니라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에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박린형은 근세사는 자본주의 시기에 상응하며 최근세사는 사회주의시기에 상응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8 15이후를 최근세사로 규정하였다.74) 그는 세계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 최근세사는 10월혁명의 승리로부터 시작되지만, 개별국가에서는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였 다.75) 장문선은 조선사회의 주요모순의 변화 발전과 계급투쟁의 변화 발전을 기초로 시 대구분을 할 것을 제의하고, 그 근거로 근세사가 조선의 경우 식민지반봉건사회였다는 점을 들었다.76) 그는 식민지반봉건사회에서는 민족적 모순과 계급적 모순이 첨예하며, 따라서 외래자본주의 침략자들과 그들과 결탁한 봉건지주 예속자본가 친일파 민족반역자 들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반침략 반봉건투쟁이 치열하였던 바,77) 3 1운동 이후 프롤레타 리아트가 반제반봉건투쟁의 선두에 섰지만, 일본침략자들과 조선인민간의 주요모순은 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모순이 소련군대에 의해서 해결된 해방 이후가 최근세사라고 주 장하였다.78) 그리하여 해방 이후 인민민주주의혁명이 결정적인 승리의 단계에 들어서게 된 것으로 파악되었다.79) 장문선은 리나영이 민족적 모순, 민족적 투쟁을 중시하면서도 3 1운동 이후를 최근세사로 잡은 것은 상호 모순될 수 있다는 점은 해결했으나, 식민지 반봉건사회인 조선에서는 계급투쟁이 다른 사회보다도 더욱 뚜렷하게 역사 발전의 추동 력이라고 피력하였던 바,80) 이 점은 어떤 것이 더 일차적인가 또는 더 중요한가 하는 점 에서 그의 주요모순 과 혼란을 야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1960년에 있었던 토론에서 김사억과 김희일은 최근세사 시기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 기,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 사회주의가 일국의 범위를 벗어나 세계적 규모로의 전환으 로서 특징지어진다고 설명하고,81) 1919년 전후는 의연히 동일한 식민지반봉건사회이 며,82) 자본주의에 상응하는 시기는 해방으로 종결진다고 파악하여,83) 해방 이후를 최근 세사로 파악하였다. 이 토론에서 최기환은 식민지제도의 기본적 청산과 인민민주주의사 회로의 전변을 기준으로 하여,84) 김맹모는 사회제도와 계급투쟁의 성격이 본질적인 변화 를 한 것을 중시하여,85) 해방 이후를 최근세사로 잡았다. 73) 위의 논문 p. 53. 74) 박린형, 조선근세사 시기구분에 관한 몇 가지 의견 ( 력사과학 1957, 제 4호 ; 이병천 편, 앞의 책) p. 77. 75) 박린형, 위의 논문 pp. 77 78. 76) 장문선, 조선근세사 시기구분에 관하여 ( 력사과학 1957, 제 6호 ; 이병천 편, 위의 책) p. 83. 77) 장문선, 위의 논문 p. 84. 78) 위의 논문 p. 88. 79) 위의 논문 p. 89. 80) 위의 논문 p. 84. 81) 토론 : 조선근세사의 시기구분에 대하여 ( 력사과학 1960, 제 3호 ; 이병천 편, 위의 책) p. 95. 82) 위의 토론 p. 101. 83) 위의 토론 p. 100. 84) 위의 토론 pp. 103 104. 85) 위의 토론 p. 110.

- 132 - 國史館論叢 第50輯 식민지반봉건사회가 청산되는 8 15해방 이후를 현대로 규정하였다 주체사상 확립 이전 북한에서의 현대의 기점과 관련된 시대구분 논쟁에는 몇 가지 특 징이 보인다. 첫째, 맑스주의에 의거하여 시대구분을 하면서도 근세 중의 가장 가까운 시기라는 뜻 으로 사용되는 최근세사라는 용어를 쓰고 있고, 또 근대도 대부분 단순히 우리가 사는 시대와 가까운 시기라는 의미가 강한 근세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이 시기 북한 학계가 현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시대구분 논쟁을 하였던 것이 아니라는 점과 맞물려 있을 것이다. 곧 이것은 시대구분에서 현대에 대해 명료한 상이 서있지 않았다는 반증은 아닐까. 둘째, 현대와 관련된 부분을 논의할 때, 몇 가지 이유 때문이었겠지만, 남한을 별로 다 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3 1운동 이후를 최근세사로 보는 논의에서는 약간 언급하고 있으나, 그 경우도 부수적으로 취급하였다. 셋째, 한국 근현대사의 시대구분에서, 다시 말하면 식민지사회, 분단사회의 시대 구분 에서 아주 중요한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의 차이점 및 상호관계를 제대로 인식 못하고 있 다는 점이다. 일제시기 일본제국주의와 조선인과의 모순은 민족모순이지 계급모순이 아 니며, 해방 이후 분단을 극복하는 것도 민족모순의 해결에 속한다. 또한 민족해방이나 분단 극복에는 영도계급 또는 헤게모니계급을 인정하더라도 민족통일전선이 말해주듯 여러 계급 계층이 연합 또는 제휴하게 된다. 계급투쟁은 부르주아사회나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을 목표하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일제시기의 경우 민족해방을 목표로 하는 민족투 쟁이 우선이냐 계급해방을 목표로 하는 계급투쟁이 우선이냐 하는 문제도 제기된 바 있 었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명확히 구별되는 것이라는 점에 특히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시대구분 논쟁은 정확한 개념 아래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이 확립된 이후 현대의 기점을 과거와는 전혀 다르게 잡았다. 3 1 운동 이후도 해방 이후도 아닌 시기로부터 현대역사가 출발하게 되었다. 북한에서 1981 년에 나온 조선전사 16은 현대의 기점 이후를 다루었는데, 현대편 항일무장투쟁 사 1로 표제가 붙어 있으며, 이것의 제 1장은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 명활동 개시 전야의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 방향을 전환시키기 위한 투쟁 으로, 제 2장은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타도제국주의 동맹결성. 새 세대의 공산주 의혁명 력량 육성 으로 되어 있다. 1926년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타도 제국주의동맹 (ㅌ ㄷ)의 결성을 현대역사의 시발점으로 규정한 것이다.95) ㅌ ㄷ 의 결성이 조선현대역사의 기점으로 되는 기본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 94) 위의 토론 p. 168. 95) 전영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현명한 영도밑에 역사과학 이 걸어온 자랑찬 40년 ( 력사과학 1988, 제 3호 ; 이병천 편, 앞의 책) p. 306 참조.

- 133 - 다도 ㅌ ㄷ 이전에는 참다운 혁명조직이 없었다는 인식에 의거하고 있다. 민족주의자들 의 독립운동은 의견 대립과 세력다툼이 우심해지면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고,96) 일제 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부르주아지들은 개량주의에로 전락되어 더 이상 부르주아 민족주 의운동을율 지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97) 그런가 하면 러시아 사회주의 10월혁명 의 영향으로 국내외에 맑스주의 소조들이 출현하고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 으나, 초기 공산주의운동은 대중을 떠나 파쟁만을 일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어 혁명 발전에 해독적 작용만을 하였을 뿐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래서 조선인민의 운명과 혁명의 전도는 새세대 공산주의자들에게 맡겨졌고, 이 시대적 사명을 띠고 탄생한 것이 ㅌ ㄷ 로서, ㅌ ㄷ 의 결성은 새시대의 탄생을 알리는 역사적 선언으로, 이 때문에 ㅌ ㄷ 의 결성은 조선현대역사의 시점이 된다는 것이98) 현재 북한측의 주장이다. 이와 같은 북한에서의 현대에 대한 시대구분적 기준은 사적유물론 또는 사회구성체론 과도 거리가 있고, 민족모순에 초점을 맞추거나 영도계급을 중시한 것이라고 보기도 어 렵다. 그것도 김일성이 혁명의 길에 나서서 조선혁명을 영도한 것과99) 김일성의 영도밑 에 주체사상을 구현해온 것에서1100) 구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김일성이 조선혁명을 영도한 것이 언제부터이며, 주체사상을 구현한 것이 언제부터인가 하는 논쟁도 야기하겠 지만, 일제시기의 경우건 해방 이후의 경우건, 현대의 시대구분 기준에 포괄하는 역사가 1962년까지의 논쟁에서 보인 북한 중심의 현대사 설정보다도 더욱 제한되어 있다는 지 적을 받을 것이다. Ⅳ. 현대의 기점에 대한 논의 기준 또는 지표를 중심으로 1. 3 1 운동 이후를 현대로 보는 경우 앞에서 세계사에서 제 1차 세계대전 종전이 차지하는 시대구분적 의의를 살펴봤지만, 한국의 경우도 이 시기는 큰 변화를 보여주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종전을 전후하여 식민지 이식자본주의의 성격을 띤 자본주의가 한국 96)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조선전사 16(과학 백과사전출판사 1981) p. 55. 97) 전영률, 앞의 논문 p. 306. 98) 위와 같음. 99)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앞의 책 p. 54. 100) 김한길, 현대조선역사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1983 ; 일송정, 1988) p. 12.

- 134 - 國史館論叢 第50輯 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은 아니라고 하여도 점차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1910 년 한국을 강점하면서 일본 본토의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시키고, 한국을 일본을 위한 식 량 원료의 공급지, 일본 공산품의 판매지로 삼기 위해 저관세율 아래 1910년의 회사령 공포가 말해주듯 한국에서의 공업화를 억제하였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을 통해 일본의 자본 축적이 급격히 이루어져, 낮은 수준에서나마 한국에의 자본 투자 능력이 커짐에 따 라 3 1운동을 전후하여 한국인들의 회사 설립 허가도 늘어나고, 1920년에 회사령도 개정 되었다. 여전히 식료품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매뉴팩처 상태를 벗어난 것도 아니지만, 3 1운동 이후에는 공장수와 공산품 생산액도 꽤 늘어났다. 공장수가 1911년에 252개였는 데, 그것이 1916년에는 1,075개로 늘어났고, 다시 1921년에는 2,384개로 늘어났던 바, 이 는 10년 사이에 10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었다. 이것은 1930년의 4,344개와도 대비된 다.101) 생산액도 1911년에는 1천9백60만원이었는데, 1921년에는 1억6천6백만원으로 증가 하였다(1931년에는 2억7천5백20만원).102) 1920년을 전후로 한 식민지 자본주의의 발전은 30년대에 가서 식민지 산업화의 형태 로 진전된다. 그런데 시기구분에서 1920년대가 의미 있게 논의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화 또는 공 업화보다도 인간의식이 확대되어 갔다는 점일 것이다. 이 시기 인간의식의 확대는 개인 차원이거나 추상적인 수준이 아니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 시기에는 민중이 자기의식 을 가지고 집단화해 등장하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농민운동 노동운동 여성운 동 형평운동 등 사회운동은 3 1운동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규모나 내용으로나 이 시기는 이전과는 양적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이 시기에도 민중의 대다수는 봉건적 의식에서 벗어나 있지 못했고, 봉건적 인간관계 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운동의 형태로서 일어난 반봉건운동은 갑오농민 전쟁기와 비교하여도 큰 차이를 보여주었다. 갑오농민전쟁의 경우 노비나 천민에 대한 해방운동을 포함하여 인간해방운동을 내포하고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즉자적인 반봉건운동이었지 새로운 인간상이나 인간의식을 제시하면서 전개된 것도 아니었고, 농 민이나 여성을 계급 또는 집단으로 의식하는 사회성, 역사성이 결여된 것이었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 종전을 전후하여 급격히 일어난 농민 노동자 여성 백정들의 움직임은 계급 또는 집단으로 각성되는 속에서, 집단적인 형태로 사회운동으로 나타나고 있었으며, 단 순한 반봉건적 차원을 넘어서서 근대를 열고 구축해가는 근대적 이 점에서 18세기 이 래의 반봉건운동이 근대지향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것과 뚜렷이 구별된다 운동이었다. 반봉건 근대적 운동으로서의 사회운동이 전에 볼 수 없었던 규모와 내용으로 일어남 으로써 민중은 어느 때보다도 목적의식적으로 민족사 형성의 주체로서 떠오르게 되며, 이 점이 기반이 되어 민족해방운동은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부르주아민주주의운동이 101) 全遇容, 1930년대 조선공업화와 중소공업 (서울대 석사논문, 1989) p. 23. 102) 김경일, 일제하 노동운동사 (창작과 비평사, 1992) p. 37.

- 137 - 민지문제를 들 수 있다. 당시 가장 지배적인 생산관계였던 지주제는 일제의 강점하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합병 되면서 지주는 소작 이동을 자의로 할 수 있게 되었고, 조선후기보다도 고율의 소작료 를, 그것도 화폐가 아니라 현물로 내게 하였는바, 소작권의 상실은 새로운 형태의 경제 외적 강제를 낳았다. 이러한 식민지지주제는 이식자본주의의 수탈체제의 근간으로서 봉 건적인 농민을 봉건적 상태로 옭아매어두게 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대의 농민운동은 소 작농의 참혹한 상황을 개선해보려는 데에서 출발하였으며, 일제조차도 1930년대의 정책 이 보여주듯, 개선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태였다. 식민지지주제는 지주측으로 보면 최대 한의 수탈을 가능케 해주는 장치였지만, 한국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이 근대성을 획득하는 최대의 장애물이었으며, 인간으로서, 계급으로서 농민 해방이라는 역사의 방향 에 대한 전면적인 반등이자 역행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근대를 이룩하려면 식민지지주제 는 바뀌고 토지개혁이 있어야 했다. 토지개혁 자본주의적 농업의 발달은 그것이 비록 불철저한 형태라 하더라도 근대로의 중요한 지표로 볼 수 있다. 영국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농업으로부터, 또는 차지농과 연관되며 발전하였고, 프랑스혁명은 대규모 토지개혁을 수반하였으며,104) 독일과 러시아 도 대단히 불철저하게나마 19세기 이후 토지개혁을 하였다. 동유럽도 일정하게 토지개혁 이 있었던 것에 유의해야 한다. 불가리아는 1877 78년에 반봉건 부르주아혁명을 거쳐 대 토지소유가 무너진 대표적 예이지만,105) 폴란드는 1차세계대전 이후에 토지개혁이 있었고 (농노제는 1864년 폐지), 체코는 1848 49년의 혁명으로 부역노동과 봉건적 예속이 폐지 되었고, 1919년에는 토지개혁법이 실시되었다. 헝가리는 불철저하지만 1848년에 농업개혁 이 있었고 다시 1920년에 토지개혁을 실시했으며, 루마니아 또한 1864년의 농업개혁으로 농업의 자본주의적 발전이 진행되었고, 1921년부터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다. 한국이 식민지라는 것도 일제시기가 현대의 기점이 될 수 없다는 명확한 표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근대민족국가의 건설과는 정면으로 배치될 뿐만 아니라, 식민지가 안고 있는 포괄적인 봉건성과 파행적이고 왜곡된 근대성 때문에도 그렇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의 자본주의화 또는 산업화도, 임노동층의 존재양상도, 농민의 존재형태도 정상적인 근 대사회에서의 그것과는 크게 다르다. 어떠한 정치적 자유도 철저히 빼앗겼고, 인간의 기 본권도 금압 당했으며, 근대적 의회 근대적 정당도 존재할 수 없었다. 104) 이에 대해서는 아도, 프랑스혁명과 농민운동, 소불, 아나똘리 아도의 논문에 대하여 가 참고 된다. 이상 두 논문은 역사비평 (1992. 여름호)에 실렸음. 105) 시바타 마사요시, 동유럽 인민민주주의혁명사 1(사상과 정치경제연구소 역, 소나무, 1990) pp. 149 161.

- 138 - 國史館論叢 第50輯 2. 해방 이후를 현대로 보는 경우 해방은 민족국가를 건설하고 각 분야에서 하루빨리 근대성을 획득하여 현대사회로 발 전시켜야 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에 의한 한국의 분할 점령 및 일제의 유산, 한국인의 대단결 실패는 서로 작용을 하여 한국문제에 합의를 보지 못하다가, 미 소의 대립이 커 지면서 분단이 고정화 되었다. 곧이어 발생한 한국전쟁은 국제전이자 내전의 성격을 띤 복합적 성격의 전쟁으로 남북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남북한은 다른 나라는 갈 수 있어도 상호 왕래가 불가능하고, 또한 남북간에는 문화적 교류든 경제적 교류든 어떠한 교류도 불가능하였으며, 그러한 교류를 제의하는 자체가 범죄행위가 되었을 뿐만 아니 라, 극단적인 형태로 대립하여 상대방을 멸절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극단적인 이데올 로기의 억압기제와 친일파의 미청산 등은 분단체제의 강화속에서 민족의식을 극단적으 로 왜곡시키고 굴절시켰다. 근대인으로서 갖게 되는 對自의식이나 사상적인 지평은 식민 지시기보다도 제약되고 협소하였다. 막스 베버가 근대의 지표의 하나로 제시한 책임과 합리성도 관료기구에서 뿐만 아니 라 사회의 각 부분에서 관철되기가 어려웠다. 법에 의한 지배 또는 법치주의도 제한되었 다. 극우반공체제를 위협하는 것은 존립이 제한됨으로써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 인간의 기본권에도 제약이 따랐다. 행정국가의 과대성장은 3권분립을 형해화 하였다. 이 외에도 우리는 전근대적인 요소를 정당, 정치, 재벌 등 거의 모든 집단, 부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국가가 세워지지 못하고 두 개의 국가가 섰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국가 가 외부의 강한 영향하에 놓여 있고 종속된 상태여서 주권에 제약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식민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또한 이 국가는 외세의존 또는 신식민지적 성격을 띠고 있더라도 그 자신의 국가적 논리와 국가적 성격에 의해서, 그리고 내적 역사의 발 전에 의해서 축적되어지는 역량 또는 성숙도에 의해서, 또 위의 것들에 기반을 둔 경제 적 발전에 의해서 일정하게 국가의 기본적 성격을 축성 강화해 나가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중시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남북한은 각기 다른 체제를 갖고 있지만 모두 다 급격한 산업화를 이룩하였고, 특히 남한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 다른 한편 봉건적 요소는 크게 약화되거나 사실상 사라지다시피 했다. 토지개혁은 북에서 먼저 신속하게 이뤄졌지만, 남에서도 극우세력까 지도 토지개혁을 반대할 수는 없는 대세속에서 해방 직후부터 지주의 토지 방매현상이 일어났고 농민들의 정치적 사회적 의식의 발전으로 지주의 힘은 크게 약화되어갔으며, 1950년부터는 토지개혁이 실시되어 생산양식으로서의 지주제는 사라졌다.106) 이와 같이 산업화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봉건성이 남아 있던 전근대적 지주제가 소멸한 것은 사회

- 139 - 구성의 성격이 그 이전과 크게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사회의 평등화가 크게 이루어지고 도시화가 진전된 것도 그 이전의 사회와는 크게 달 라진 것을 의미한다. 특히 한국전쟁은 시골의 구석구석까지도 전쟁터와 이데올로기의 대 립장으로 만들었고, 수십 만 명의 농촌 청년이 군대생활을 하였던 바, 이것도 전근대적 농민의식을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산업화는 이농현상을 촉성시켜 농민을 도시빈민화, 도시민화 하였다. 각종 신분을 부정하고 각종의 지위에 대해서도 존경심을 갖지 않는 극단적인 평등화는 전쟁이나 산업화외에도 정치행태 경제행태 등의 성격에 기 인하는 것이겠지만, 남한의 경우 1950년대부터 가능해진 문맹퇴치, 보통교육의 전면화, 고등교육의 확장 등 교육의 확대가 가져온 의식의 변화도 주시해야 할 것이다. 교육은 또한 산업화의 토대 또는 물적 기초였으며, 나아가서는 사회전반의 변화를 초래하는 힘 이 되었다. 해방 이후에야 보통선거제가 실시되었다는 점도 중요한 변화로 꼽을 수 있다. 비록 외 견적 민주주의의 도구적 성격을 띤 점이 강하고, 수차례의 쿠데타나 유사쿠데타로 외견 적 민주주의조차 유린당하고 지켜지지 않았으며, 30년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지 않은 행 정통치국가였다고 하더라도, 보통선거제는 인민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으며, 민주주의를 달성하고 제도화하는 유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한국현대의 기점은 심한 불구성, 파행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정치와 산업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중요 부문간에 괴리와 불균형이 심하게 노출됨에도 불구하 고, 해방 이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전근대적인 성격이 많이 남아 있지만, 한 국인 대다수는 해방 이후를 동시대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 점도 시대구분에서 간과할 수 는 없을 것이다. Ⅴ. 결 론 E.H. 카는 현대는 어느 시대보다도 역사적 의식이 발달한 시대라고 말했지만, 근현대 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는 끊임없이 자기 사회를 의식하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려 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역사적 변화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던 전근대사회가 무의식 무 주체 무방향하에 있었다면, 근대인 현대인은 자기 사회에서의 급격한 변화의 의미를 찾 아내려 하고 있고, 그러기 위해서 역사적 사고를 하는 바, 그것은 한 인간을 넘어서서 집단 계층 계급 민족에 대한 역사적 인식으로 확대되어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 식수단을 이성이라고 할 때, 근현대의 진전은 이성의 확대로 나타나며, 그리하여 이러한 106) 1960년대 이후, 특히 80년대 이후에 급격히 증가한 소작제는 과거의 지주제와는 전혀 무관한 새 로운 경제관계 사회관계에서 발생한 것이다.

- 140 - 國史館論叢 第50輯 이성의 확대에 의해 그때까지 역사의 외부에 머물고 있었던 집단과 계급, 국민과 대륙이 역사의 내부에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107) 역사의 외부에 머물다가 내부로 출현하게 되었 다는 것은 역사과정에서 수동적이고 소극적이었던 존재가 이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존 재로 전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역사에서 소외된 자가 주체자로 떠오르는 바, 그 것은 집단이나 계급, 민족이 의식적으로 자기의 역사를 만들어 감을 가리킨다. 무의식 무 주체 무방향의 역사가 이제는 주체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이성적 진보적 방향으로 역사를 끌고 가게 하는 것이 근현대의 역사다. 그러면 우리의 근현대는 어떠하였나. 우리의 근현대에서도 민중 또는 민족을 주체로 하여, 때로는 계급을 주체로 하여 의식적인 방향으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려는 노력 이 끊임없이 있어왔다. 그러한 끊임없는 노력의 집적으로 19세기말에 농민전쟁이 있었 고, 1905년 이후에는 민중적 의병전쟁이 있었으며, 그것은 3 1운동이라는 민족해방투쟁의 거대한 봉우리를 쌓아올렸다. 특히 1920년대와 해방 직후에 그러한 노력은 훨씬 더 조직 적이고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분단체제에서도 그러한 노력은 계속되어왔던 바, 4월혁 명운동시기와 그 이후의 민주주의운동은 그러한 것의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현대에 대한 역사적 인식은 매우 빈곤하였고, 더구나 시 대구분적 인식은 더욱 결핍해 있었다는 것 또한 인정하여야 할 것 같다. 왜 역사적 인식 을 가장 필요로 할 시기에 그렇게 빈약할 수밖에 없었는가. 특히 분단시대의 역사의식의 빈곤은 참혹하기 짝이 없는 실정이었다. 그것은 1920년대의 동아일보와 1950년대의 그것 을 펴놓고 살펴보기만 해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보수적이고 민족개량주의적인 세력 을 대변한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지만, 그러나 1920년대의 동아일보는 우리 현실의 새로 운 변화, 폭넓은 변화를 나름대로 민중 차원, 민족차원을 이해하는 속에서 흡수하고 있 었고, 또한 세계의 진보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조류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소화해내려는 모 습이 나름대로 있었다. 민족과 민중을 주체로 한 진보적 시야가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 런데 해방이후의 동아일보는 어떠한가. 숨막힐 듯한 냉전논리, 극우반공논리로 가득차 있다. 거기에서는 자폐증 환자와 같은 닫혀 있는 경색되고 경직된 세계가 자리잡고 있 다. 이것을 한 신문의 차이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한 세계의 차이다. 근대 사상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데카르트는 인간을 사고의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 라, 자기 자신의 사고를 다시 사고할 수 있는 존재로서, 즉 관찰활동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관찰할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은 동시에 사고와 관찰의 주체와 객체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지위를 처음 확립하였다고 했을 때,108) 1920년대의 한국인은 데카르트와 같은 사고를 해보려고 노력하였다고 볼 수 있겠으나, 오히려 분단체제 이후의 한국인은 그러 한 사고를 해내지 못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역사의 식의 빈곤으로 표출된 것이다. 한국은 크로체가 말한 바 현재의 역사 로서 현대사를 가 107) E.H. 카, 앞의 책 p. l96. 108) 위의 책 p. 177.

- 141 - 졌다고 보기가 어려울 것 같다. 왜 우리는 크로체가 말한 바 우리를 채찍하여 과거 사 실속으로 탐구하게 하는 현재적 생활의 관심 을 갖지 못하였나. 다시 말하여 현대를 상실한, 또는 현대가 실종된, 비역사의 역사위에 던져져 있게 되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실체를 탐구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계급투쟁과 연결되어 있으 며, 그것은 결코 중립적일 수도 없고 분쟁을 초월해 있을 수도 없다고 장 셰노는 말했지 만,109) 분단체제의 역사적 성격이 바로 분단체제와 그것을 초래한 역사를 탐구하지 못하 게 했다는 사실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을 일단 제외한다면, 외세의존적인 친일 친미파의 득세, 민주주의 민족문제 시민윤리를 초월해 그 위에 군림해 있는 극우반공체 제의 극단성, 3권분립과 책임정치를 형해화한 권위주의적 행정국가체제는 자신과 자신의 과거를 탐구하는 것을 제약하였다. 과거는 오직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 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또한 과거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과거 중에서 수호하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며, 전복되거나 파 괴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110)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근현대의 역사에서, 곧 역사 그 자체와 역사의식의 양면에서 이중적으로 소외되어 있었고, 크로체 가 말한 바 현재적 관심 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라이프니츠가 말한 가 장 평범한 말, 왜냐하면 현실은 원인에 의해서 가장 훌륭히 이해되기 때문 이란 것 도111) 우리에게는 무관한 것처럼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강만길, 정창렬의 논리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의 근현대가 근현대로서 갖춰야 할 내용을 못 갖추고 있는 것은 명백하며, 그것은 역사의식의 빈곤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해방 이후의 변화는 시대구분에 준할 만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심한 불구성 파행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각 부문간에 보이는 심한 괴리와 불균형 현상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대는 해방 이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 한국인의 다수는 해방 이후의 변화속에서 살고 있다고 의 식하고 있으며, 동시대의식을 대체로 공유하고 있다. 더 나아가 젊은 세대는, 사람이란 그들의 부모보다 더욱 많이 그들의 시대를 닮는다 는 옛날 아라비아의 속담처럼 산업사 회 이후의 현대문화 현대감각 속에 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19세기 후반기 이래 여러 시대 가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는데, 이것은 상당기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해방 이후의 현대가 대단히 불철저한 현대라면, 3 1 운동을 전후하여 근대의 전기와 후기를 가를 수 있는 것처럼, 6월항쟁 이후를 새로운 현대로 상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6월항쟁 이후 한국과 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맞고 있다. 1987년 6월항쟁은 자유민주주의 가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기본원리로 자리를 잡게 하였다. 6월항쟁 이후 민주주의는 거역 하기 어려운 대세를 이뤄 국가와 사회를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게 하였다. 시간이 요구 109) 쟝 셰노, 실천을 위한 역사학 (주진오 역, 이론과 실천, 1987) pp. 27 28. 110) 쟝 셰노, 위의 책 p. 177. 111) 블로흐, 앞의 책 p. 51에서 재인용.

- 142 - 國史館論叢 第50輯 되겠지만, 보통선거제가 권력 등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게 되어가고 민주적인 정당정 치, 3권분립의 실현, 국가기구의 정상화도 전망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북관계, 북방외교, 군통수권 문제 등에서 드러나고 있지만 국가의 자주성도 강화되었다. 국민의 기본권도 확대되어 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요건인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나 정치 활동의 자유가 증대되어 가고 있다. 북한바로알기운동 등은 통일운동, 자주화운동의 일 환이자 굴절되고 왜곡된 민족의식의 정상화에 연계된 것이고, 학문 사상의 자유를 실현 시켜 가는 한 과정이었다. 6월항쟁 이후, 변화된 국제정세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지만, 통일의 가능성이 훨씬 커지고 있는 것도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민족국가 건설이 가까운 장래에 이뤄질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측하고 있다. 역사의식면에서 70년대가 암흑기였 다면 그 암흑의 두꺼운 암반 아래에서 민중과 민족, 또는 계급과 집단에 대한 새로운 인 식이 과거의 인식과 다르게 발전하였고, 80년대의 격동에서 그것은 훨씬 구체적이고 실 천적인 모습을 띠었다면, 6월항쟁은 그러한 제변화를 본격화한 계기로서 위치지워질 것 이다. 6월항쟁 이후 시민의식이 박약한 채로 시민층이 두터워졌고, 각 집단 계급에 새로 운 의식과 민주화가 폭넓게 자리잡아갔다. 아직도 제한되어 있는 면이 더 크지만, 시민 과 각 집단, 계급이 자기 의식을 갖기 시작하였고, 그럼으로써 자기의 역사를 만들어가 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6월항쟁 이후 근현대를 내실화해가는 큰 변화는 또한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난 세계적 변화에 의해 영향받고 있다. 얄타체제 냉전체제의 붕괴로 나 타나는 세계사의 전면적인 재편은 한 시기 또는 한 시대를 긋는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