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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학여행을 떠나요~! 2007 우수 수학여행 사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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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즐겁고 유익한~ 수학여행 빛바랜 사진 속 첨성대. 그 첨성대에 수많은 남학생들이 다닥다닥 매 달려 있습니다. 더러는 교모를 흔들고 더러는 환하게 웃으면서. 1930년대 어느 해 가을, 양정고보 학생들이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서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식민지 조국에서 공부하던 그분들의 가슴에 천년왕국 신라의 역사와 문화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갔을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이 땅에서 수학여행이 시작된 지도 어언 90여년이 되어가고 있습니 다. 때로는 천편일률적이라 지탄받고, 심지어는 여행이 활성화된 오늘 날 수학여행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폐 지론도 들립니다. 그러나 수학여행은 단순한 여행만 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각별한 가치 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 인지, 또 무엇인지 찾아내고 발전시키 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역할이 아닐까 싶습니다. 학생들에게 유익한 수학여행을 선 사하기 위해 지금도 고심하고 계실 전 국의 담당교사님들께 이 작은 책자를 드립니다

6 Contents 목 차 발간사 즐겁고 유익한 수학여행 1 제1장 우수사례 3 1. 자발성을 끌어내다 - 서울 양정고 2. 애너벨 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 - 서울 성신여고 3. 무지개로 어울리다 - 서울 숭의여고 4. 미래를 여는 아이들 - 안산 강서고 5. 마음을 씻는 여행 - 부천 소명여고 제2장 선진국 사례 민주시민을 육성한다 - 미 국 2. 다양성을 인정한다 - 영 국 3. 자발적으로 체험하라 - 프랑스 4. 강인한 인간을 키운다 - 독 일 5. 세계 시민으로 키운다 - 일 본 제3장 한국관광공사 추천 코스 초등학생 대상 추천코스 ( 수도.강원권, 충청권, 영남권, 호남권, 제주권 ) 2. 중 고등학생 대상 추천코스 ( 수도.강원권, 충청권, 영남권, 호남권, 제주권 ) 부 록 청소년수련 관련단체 111 수학여행을 떠나요! ( MBC 프라임 CD ) - 2 -

7 1장 국내 수학여행 우수 사례 CASE 1 CASE 2 CASE 3 CASE 4 CASE 5 자발성을 끌어내다 - 서울 양정고 애너벨 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 - 서울 성신여고 무지개로 어울리다 - 서울 숭의여고 미래를 여는 아이들 - 안산 강서고 마음을 씻는 여행 - 부천 소명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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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CASE 1 서울 양정고 자발성을 끌어내다 우리 때야 엄마가 사 주는 옷, 군소리 없이 입었지만 요즘 아이들은 어디 그래? 양말 한 켤레도 꼭 자기가 골라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들이니 여행도 맡겨 두는 게 좋겠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과거엔 양정고의 수학여행도 여느 학교와 다를 바가 없었다. 10여개 의 학급이 동시에 움직이니 자잘한 사고가 일어나고 시간낭비도 심했 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학생들이 도무지 의욕과 흥미를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1996년, 아예 수학여행기획위원회 를 만들었다. 교장을 중 심으로 뜻있는 교직원들이 모여서 좀 더 공부하고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수학여행 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연구에 돌입했다. 우선 수학여행 이라는 명칭부터 바꾸기로 했다. 공부가 되는 여행 이라는 막연한 이름 대신 아예 과제학습( 課 題 學 習 )여행 으로 여행의 목 적을 구체화시켰다. 그리고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평면적, 간접적으로만 배운 것들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중 심으로 여행계획을 짜기로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행하는 프로그램인 만큼, 여러 개의 권역으로 분 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첫 목적지는 제주도로 정했다. 공통과제를 정하다 그냥 현장 가서 안내판 보고 오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학기 초부터 - 5 -

10 아이들에게 여행목적지를 알려 주고 각자 관심 있는 분야를 찾아보게 합시다. 2학년은 좀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1학년생 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렇겠죠? 3월은 신입생들에게 뒤숭숭한 시기다.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부담, 낯선 친구들에 대한 어색함, 바뀐 환경 앞에서 느끼는 긴장감...따라서 1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수학여행을 준비하고 여행을 떠난다면 학교생 활이 훨씬 즐거워질 것이다. 1학년 담임교사들과 공통과목 교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제주도에 대 한 각종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담당교사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카테 고리가 나왔다. 제주도의 방언, 민속신앙, 신화와 전설, 문화재, 관광사 업, 심지어 이제 막 시작된 지방자치제까지 카테고리에 올랐다. 이것을 정리하여 공통과제 로 묶은 다음 1학년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취향에 맞는 쪽을 선택하게 했다. 처음에는 민속이나 역사 분야에 학생 들이 편중될 것이라고 예 상했지만, 의외로 지방자치 제와 관광사업 분야에 관 심을 보이는 아이들이 많 았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각 자 마음 맞는 친구끼리 조 를 짜서 너희들이 선택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조사해 봐. 이렇게 조별로 모여 좀 더 세분화된 주제를 잡고 연구하는 것을 집 중과제 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금방 관심사가 같은 친구들을 찾아냈고, 그날부터 인터넷이나 서적을 뒤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적극적인 반응 에 교사들은 좀 어리둥절해졌다. 하긴 어쩌면 자연스러운 거지. 우리 때야 엄마가 사 주시는 옷, 군소 - 6 -

11 리 없이 입었지만 요즘 아이들이야 어디 그래? 양말 한 켤레도 꼭 자기 가 골라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들이니 여행도 맡겨 두는 게 좋겠지. 요즘 아이들은 다르다 고 어른들이 비난처럼 하는 말. 그러나 이 다 름 이 바로 이 아이들의 경쟁력이 아닐까? 집중과제를 정하다 학생들이 집중과제작업을 시작하자 카테고리는 더욱 세분화되었다. 제주도의 갈옷을 연구하겠다는 팀, 용암동굴을 탐사하겠다는 팀, 해안 지형을 살펴보겠다는 팀, 심지어 관광안내판만 집중적으로 조사하겠다 는 팀도 나왔다. 교사들은 교사들대로 바빠졌다. 우선, 아이들의 취향을 모두 고려한 여행코스를 짜야만 했다. 여행목적과 조사주제가 다르니 코스도 여러 개였다. 국어 교사는 제주도 방언이나 민속신앙 등을 연구하겠다는 팀 을 위해 코스를 짜고, 사회 교사는 제주도 지방자치 현황을 조사하겠다 는 팀을 위해 자료를 찾았다. 일반적으로 수학여행은 학교가 여행사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는 형태 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양정고 교사들은 그것을 거부했다. 아니, 실은 이 복잡한 여행코스를 맡아서 하겠다는 여행사도 나서지 않았다. 결국 교사들은 제주도로 직접 답사를 떠났다. 후보지로 오른 코스를 직접 걸어본 후 시간을 따져보고 숙박업소를 찾고, 음식도 하나하나 먹 어 보았다. 제주도의 여러 정부기관과 시민단체를 찾아다니며 협조도 구했다. 일정이 겹치거나 충돌하지 않도록 시간을 배정하는 일이 제일 어려웠다. 그렇게 답사까지 마치고 나서 교사들은 학습장 을 만들었다. 여행하 기로 한 지역의 역사와 지형, 민속, 고적 등을 소개하고 사이사이에 아 이들이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쓸 수 있게끔 메모 코너를 만들었다. 너 무 두꺼우면 거추장스러워할까 봐 얇고 가볍게 만드는 것이 철칙이었 다

12 제주도에서 거둔 첫 번째 성공 그렇게 해서 실시한 제주도 과제학습여행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학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자신들의 코스를 여행했다. 힙합만 좋아할 거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인간문화재가 부르는 오돌또기 를 들으며 감 성에 젖기도 하고, 외국어 같은 제주도 방언을 호기심 어린 얼굴로 배 우는 아이들도 많았다. 전에는 민요나 국악을 들으면 일단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지 루했어요. 그런데 먼저 조사를 하고 나서 직접 들으니까 느낌이 와요. 이것이야말로 양정고 교사들이 처음부터 바라고 있던 기대효과였다. 아이들은 적극적이었다. 지방자치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다며 낯선 집 에 들어가 천연덕스럽게 질문을 퍼부어 대기도 하고, 위치나 표기가 잘 못된 안내간판을 샅샅이 찾아내는 바람에 일선 공무원들을 긴장시키기 도 했다. 밤에는 조원들끼리 모여 그날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학습장 의 메모난에 자기의 느낌을 적었다. 좀 이상하긴 하다. 그래도 수학여행 하면 선생님 몰래 숙소 빠져 나 가서 술 마시고, 패싸움하다가 혼나고, 친구 얼굴에 낙서하고...그러는 건데 말이야

13 우리 때야 원체 엄하게 자라서 수학여행 때 유독 극성을 피웠던 거 죠. 요즘 아이들이야 어디 그래요? 술 같은 건 중학교 때 벌써 마셔 봤 다고 하고, 노래방도 자주 가잖아요. 어쩌면 안 해 본 걸 하는 게 더 재 미있는 건지도 모르죠. 아무튼 가게 문 연 뒤로 이렇게 조용한 수학여행단은 처음 본다 는 숙박업소 주인의 감탄 속에서 양정고의 첫 번째 과제학습여행 은 성공 리에 끝났다. 그렇게 몇 년 간 제주도를 무대로 과제학습여행을 실시하여 경 험을 쌓은 후 양정고는 새로운 도전을 했다. 호남권, 영남권, 태백 권, 다도해권 등 4개 권역으로 나누어 과제학습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같은 시각, 다른 장소, 그리고 같은 마음 하나 둘 하나 둘 어영차 어영차! 2007년 가을, 통영 앞바다에 남학생들의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다. 과제학습여행을 온 양정고 학생들이 두 패로 나뉘어 해전체험을 하 고 있다. 이물에 앉은 학생이 방향을 지시하고 구령을 외치면 나머지 학생들은 노를 저었다. 청명한 날이라도 순하지 많은 물살! 하지만 학생 - 9 -

14 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처럼 바닷바람과 햇살을 받아 보기 좋게 그 은 얼굴로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교사들은 노심초사하며 아이들 주위를 빙빙 돌았다. 혹시라도 실족하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통영은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을 거둔 역사적인 장소다. 아이들에게 교과서에서만 배운 이순신과 한산대첩을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느끼 도록 해 주고 싶어서 봄부터 일찌감치 통영시에 협조를 구해 놓았다. 얘들아, 너무 바다 쪽으로 몸 기울이면 위험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의 함성은 더욱 높아 갔다. 평소에는 경쟁자 들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이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노를 저었다. 협 동의 즐거움을 생생하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자자, 여기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 알았지? 같은 시각, 다른 교사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데리고 거제도 포로수용 소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남학생들의 기호를 생각해 본 끝에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코스에 넣기로 했다. 즐거운 여행지에서 굳이 그 끔찍한 현장을 볼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반론도 있겠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어쨌든 한국남자들은 모두 군대에 가야하고,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만으로 아이들의 호기심을 유도할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요즘 남자아이들이 한창 프라모델, 특히 군대 시리즈물에 열을 올 린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거기 가면 50년대에 사용된 무기들을 다 볼 수 있는데 관심 없어? 그 한 마디에 신청자가 쇄도했다. 처음에는 아이들도 3D로 구현된 전쟁기록물이나 정밀하게 복원된 당 시 무기들을 살피는 데 더 몰두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아 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던 들뜬 재잘거림은 숙연한 침묵으로 바뀌기 시작 했다. 그리고 드디어 수용소를 나설 무렵 그는 한 학생이 이렇게 말하

15 는 것을 들었다. 무기 구경하러 온 게 미 안하네요. 저렇게 끔찍한 일이 있었는데... 군인은 필요해요. 하지만 전쟁은 없어져야 하는 것 같 아요. 인솔교사는 빙긋 웃었다. 바로 그 말을 듣기 위해서 기획한 코스였으니까.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저리 가거라 뒷태를 보자 고창 판소리 박물관에서 구성진 판소리가 들려온다. 인간문화재 국악 인이 학생들 앞에서 판소리 <춘향전>의 사랑가 부분을 부르고 있었다. 자, 나 혼자 허믄 재미없응게 한 소절씩 따라 해보드라고잉. 양정고 학생들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이내 작은 소리로 한 소절 한 소절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으따, 목소리 겁나게 작아부리네. 이몽룡이는 너들 나이에 이렇게 찐 헌 연애를 했는디 너그는 너그 목소리로 노래도 지대루 못허능가? 그 말에 한 녀석이 목청을 길게 뽑으며 제법 잘 울리는 목소리를 냈 다. 그러자 뒤이어 다른 녀석들도 한 명 두 명 목청을 돋우기 시작한다.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저리 가거라 뒷태를 보자, 벙긋 웃어라 입 속을 보자 잘들 헌다! 좋아, 그럼 누구 나와서 해 볼틴가? 그 말에 이번에는 사방에서 저요 저요! 하여 야단이 났다. MP3에 힙 합이나 10대 댄스가수들의 음악을 담아 갖고 다니던 아이들은 이날 처 음으로 판소리가 흥겹고 재미있는 음악장르라는 것을 알았다. 통영의 아이들이 해전놀이를 하고, 거제도의 아이들이 포로수용소를

16 둘러보고, 고창의 아이들이 판소리를 배우는 동안 다도해권 코스를 여 행하는 아이들은 어느 저택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버선코처럼 맵시 있게 추녀가 들려올라가는 한국식 지붕 대신 자로 잰 듯 반듯반듯 일자로 뻗어 내린 지붕, 동그란 창문에 어둑한 실내, 예 쁘장하고 꼼꼼하게 가위질을 한 정원의 나무들...그것은 이국적이면서 도, 마음 한구석 어딘가 불편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정경이었다. 자, 여러분이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어느 일 본인이 지은 저택입니다. 사실 목포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경성 다음으로 많이 진출했던 곳입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지하자원과 곡 식 등을 대거 수탈했습니다. 그렇게 빼앗은 곡식과 자원들은 바로 이 목포항에서 선적되었죠. 따라서 목포는 식민지배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 주는 현장입니다. 그렇다면 이 저택을 지은 일본인 역시 비슷한 목적으로 이곳에 살았 겠지. 아이들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의 경제를 흔들고 내정에 간섭하려 드는 일본을 떠올렸다. 그리고 새삼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다. 다시는 이런 건 물이 이 땅에 들어서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친구들이 주로 바다를 끼고 여행을 하는 반면, 산속으로 찾아들 어간 아이들도 있었다. 태백권 코스를 선택한 아이들이었다. 영월 봉래산 꼭대기의 별마로 천문대 에 모인 아이들은 국내 최대라 는 800mm 리치크레이티앙 망원경으로 별을 보고 있었다. 저기 작게 빛나는 고만고만한 별들이 보이지? 세븐스타 라고도 하 는데 저 별의 진짜 이름이 뭘까? 세븐 스타면... 북두칠성! 그건 국자 모양이지 이 녀석아. 인솔교사의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젖히고 웃는다. 저건 좀생이별 이라고 해. 저 별이 유난히 밝고 가깝게 느껴지면 겨

17 울이 다가온다는 신호야. 그냥 보기에는 대여섯 개의 별로 보이는데 사 실은 수 백 개의 별로 이루어진 엄청난 별 집단이지. 아이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온다. 매일같이 공부에 쫓기는 아이들은 밤하늘 한번 올려다볼 여유도 없다. 하긴, 올려다본다 해도 스모그 가득 한 서울하늘에서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도시의 아이들에게는 별빛보다 아파트 불빛이 더 익숙하다. 그날, 양정고 아이들 은 세상에 태어나 생전 처음 그렇게 많은 별을 보았다. 그리고 저 커다 란 우주에 비하면 지금 내가 사는 이 세상이 얼 마나 작은지, 새삼 깨달 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 들의 꿈의 크기조차도 키워 줄 것이다. 이렇게 양정고 학생들과 교사들은 같은 시각,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 른 것들을 체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느끼는 것은 똑같았다. 그것은 새 로운 체험, 그로 인한 감동 이었다. 蒙 以 養 正, 養 心 正 己 초저녁의 서울 시가지는 퇴근전쟁길이다. 김창동 교장은 뒷좌석에 기 대고 앉아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다. 바쁘게 보낸 사흘이었다. 호남권, 영남권, 다도해권, 태백권의 학생들을 일일이 찾아가 대화의 시 간을 갖고 돌아오는 길이다. 서툰 목소리지만 나름대로 감정을 섞어 사랑가 를 불러 주던 녀석,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다녀온 소감을 진지하게 털어놓던 녀석, 이순신 장군을 연구했다며 리포트를 보여 주던 녀석, 별자리를 그려서 보여 주 던 녀석...그 모습들을 회상하니 피곤도 가시는 듯했다

18 그는 옆에 둔 묵직한 책을 집어 들었다. 작년에 과제학습여행을 떠났 던 학생들이 조별로 작성해서 발표한 연구보고서를 엮어 만든 책이었 다. 가만히 페이지를 들춰 보니 진지한, 때로는 개구쟁이들의 표정이 성 심껏 쓴 보고서 곳곳에 보인다. 기껏해야 수학여행 아닙니까? 뭐 그렇게 요란을 떠세요? 농담처럼 던지는 말에 그는 지금까지 그저 웃기만 했다. 蒙 以 養 正, 養 心 正 己 (올바르게 깨우치고 가르쳐서 나의 마음을 바르게 한다), 이것이 양정고의 창학이념이다. 그래서 그에게 수학여행은 기껏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 었다. 蒙 以 養 正, 養 心 正 己 의 이념을 실천하는 또 다른 수업의 장이기에

19 CASE 2 서울 성신여고 애너벨 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 21세기의 소녀들은 자기 안의 애너벨 리를 죽이고 있다. 10대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감성의 싹을 스스로 잘라 내고 있는 것이다. 누가 애너벨 리를 죽였는가? It was many and many a year ago, In a kingdom by the sea That a maiden there lived whom you may know, By the name of Annabel Lee... 성북구 돈암동 산자락에 위치한 성신여고. 한 교실에서 여학생들이 포우(Edgar Allan Poe: 1809~1849)의 시 애너벨 리 를 소리 내어 읽는다. 박현성 교사는 아까부터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듯 귀를 기울이고 있 었다. 아무 감정도, 운율도, 즐거움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낭독. 소녀들이 시를 읽는 소리가 아니라 군인들이 PT체조하며 내는 구령 소리 같다. 얘들아, 이 시가 왜 아름다운 시로 꼽히는지 아니? 아이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만 한다. 손에 색볼펜을 든 아이들은 시험문제 힌트라도 하나 주려나 싶어 당장 필기에 들어갈 태 세다. 잘 들어 봐...이 시는 행들이 각각 비슷한 발음으로 운율을 맞추고

20 있어. by the sea...annabel Lee...loved by me...by the sea... 시이- 리이- 미이- 이런 식으로 여운을 던져 주잖아. 아주 음악적이지? 그래 서 이 시를 아름답다고 하는 거야. 하지만 아이들은 뚱한 표정으로 바라만 볼 뿐이다. 개중에는 지루하 다는 듯 볼펜을 돌리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데 그게 뭐 어떻다구요~ 라 고 반문이라도 하듯이.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들어온 박현성 교사는 생각에 잠겼다. 애너벨 리...남자인 자신조차도 사춘기 시절에 특유의 슬프고 낭만 적인 정조와 운율에 이끌려 몇 번이고 암기해 보려고 노력했던 시... 다른 교사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시집 읽는 여학생을 찾아보기 힘드네요. 아유, 요즘 학교에서 혼자 시집 읽다가는 왕따 당해요. 예쁜 척한다 고. 바야흐로 콘텐츠의 홍수시대. 매일처럼 공중파와 케이블, 인터넷 등 을 통해서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이들의 말투와 행동 도 거칠게 변해 간다. 분명 21세기의 소녀들은 자기 안의 애너벨 리를 죽이고 있다. 10대 시절에만 느껴볼 수 있는 아름다운 감성의 싹을 스스로 잘라 내고 있는 것이다. 한 아이라도 마음을 다쳐서는 안 됩니다 애너벨 리 걱정할 때가 아니에요. 수학여행 프로그램 짜야죠. 수학여행. 남들이 보기에는 학생들 데리고 사나흘 놀다 오는 학사일정. 하지만 정작 교사들로서는 사춘기 아이들과 신경전을 벌이며 노심초사해야 하 는 인고의 시간이다. 더 이상 유적지 둘러보고 싸구려 여관에서 묵고 오는 수학여행은 안 된다

21 수학여행은 학습의 연장이다. 좀 더 생산적이고 교육적인 프로그램 을 개발하라 교육청은 물론 학부모와 학생들로부터도 이런 요구는 수없이 들어온 다. 실제로 많은 학교가 새로운 형식의 수학여행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 기도 하다. 어떤 학교는 1년 동안 연구주제를 정하고 조사해서 학습여행을 간답 니다. 어떤 학교는 형편이 허락하는 아이들은 해외로 가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국내로 가는, 분 산형을 택했다던데요. 하지만 왠지 교사들의 마 음을 확 잡아끄는 것은 아 직까지 없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이들 이 여행까지 가서 공부하는 게 좀 안쓰러워요. 그냥 가서 편안히 쉬다 오는 것도 좋은 여행방법 아닐까요? 늘 뭔가를 얻어야 한다 는 생각이 아이들을 힘들게 만들 것도 같은데... 교사들의 의견은 다양했다. 이영애 교장은 단 한 가지만 제안했다. 저는 선생님들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우리 성신여고는 기독 교의 평등과 박애정신을 이념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공부를 못하 거나 집안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마음을 다치는 아이가 단 한 명이라 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학교가 그렇겠지만, 성신여고 역시 학생들의 생활격차가 컸다. 강북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돈암동 일대는 거대한 대형 아파트 단지 들이 들어서고 중산층이 대거 유입되었다. 반대로 재개발 바람에 밀린

22 토박이 세입자들은 좀 더 외진 곳으로 밀려났다. 이렇게 되자 상대적으 로 넉넉한 중산층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뒤섞여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중산층 학부모들은 대부분 해외수학여행을 원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더 넓은 세상을 보여 주고 싶어 하는 부모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 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상처받을 다른 학생들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상 분산형 수학여행은 어렵겠네요. 한창 사춘기인 여학생들인 데... 당연하죠. 그 나이 때 입은 상처는 평생을 가는 법이라고요. 그렇다면 관건은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국내여행 콘셉트가 되나 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경주나 설악산 관광을 벗어날 수 없잖아 요. 돌고 돌아 제자리네. 그때 박현성 교사가 제안했다. 제주도가 어떨까요? 아무래도 해외여행보다는 경비가 적게 들잖아 요. 또, 제주도는 문화나 풍습이 독특하고 이국적이어서 아이들이 흥미 를 느낄 겁니다.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니까 나름대로 해외여행 기분도 낼 수 있을 거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목적지는 제주도 로 정해졌다. 어른의 편견을 걷고 아이들의 시선으로 이제는 여행 프로그램을 짜는 일이 남았다. 좀 더 알찬 여행을 위해 경쟁입찰로 여행사를 선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여미지 식물원에 들르고, 도깨비 도로에 가보고, 성산포에 가고, 천 지연폭포를 보고, 중문단지를 거치고

23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순서만 조금 다를 뿐 내용이나 가격이 비슷했 다. 더구나 유원지 중심으로 프로그램이 짜여 있어 입장료 부담이 컸다. 요금 내고 들어갔다가 기념품 사서 나오는, 딱 그런 관광코스네요. 여고생들이 아줌마 깃발관광단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여행해서야 되겠어요? 비용도 생각보다 너무 비싸요. 이래서야 국내여행을 하는 의의가 없 잖아요. 그러자 이영애 교장이 방향을 제시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만 생각해 보세요. 그럼 답이 나올 거예요. 그리하여 학생들의 의견 수렴과정을 거치기로 했다. 제주도 하면 뭐가 생각나니? 이 질문을 던지면서 교사들은 기껏해야 유채꽃 감귤 돌하르방 정 도의 대답을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뜬금없는 것이었다. 올인 이오!!!! 올인? 에이, 선생님 올인 도 모르세요? 송혜교랑 이병헌 나오는 드라마요~ 그거 제주도에서 찍었대요~ 쉬리 도 거기서 찍었대요. 교사들은 픽 웃었다. 우리 반도 그러던데요. 올인 이라고. 정말 격세지감이네요. 감귤도, 유채꽃도 아니고 올인? 저는 아이들 중 한 명이라도 제주 4.3항쟁요! 하고 말해 주길 은근 히 기대했다니까요. 그런데 올인 이라니, 아, 정말 충격이었어. 한 교사의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겠어요? 그게 요즘 아이들의 코드라면 인정해야죠. 책 한 권 안 읽으면서 드라마는 꼬박꼬박 챙겨 보는 아이들, 수학공 식은 까맣게 잊어 버려도 가요 가사는 줄줄 외우는 아이들, 부모

24 님 생신은 기억 못하면서도 남자친구에게 줄 발렌타인 데이 초콜 릿을 산다고 부산을 떠는 아이들... 하지만 지금 교단에 선 자신들조차 사춘기 시절에는 참고서 값 빼돌 려서 음악 테이프를 사고, 라디오 공개방송을 쫓아다니지 않았던가? 그 작고 유치한 일탈들이 그나마 숨 가쁜 입시생 시절에 소중한 통풍구가 되어 주지 않았던가? 우리 아이들이 사춘기 여학생들이잖아요. 그러니까 뭘 더 배운다, 경 험한다, 공부한다, 이런 중압감을 벗어나서 그냥 여학생들의 감성을 일 깨우는 낭만적인 코스 를 중심으로 우리가 직접 여행프로그램을 짜 봅 시다. 그리하여 교사들이 직접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다. 유채꽃 보다는 올인 을 먼저 떠올리는 아이들의 감성코드에 철저하게 맞춰 주기로 한 것이다. 여학생들은 소녀병 같은 것이 있죠. 중세시대 공주님이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같은 걸 꿈꾸거든요. 우선 숙박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여자아이들이니까 기왕이면 잠도 예쁜 곳에서 자게 합시다. 제주도 곳곳을 뒤진 끝에 바다 옆에 면한 유럽풍 펜션을 골랐다. 드라마 올인 의 촬영지인 섭지코지 도 선정했다. 영화 쉬리 의 마지 막 장면을 촬영한 쉬리의 언덕 도 빠질 수 없었다. 이곳은 어느 호텔의 정원인데 특별히 이 구역은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담이 없었다. 명도암 목장도 코스에 포함되었다. 이곳에서는 직접 양떼들과 어울려 놀 수 있고, 말을 타 볼 수도 있었다. 선생님, 여기 어때요? 어느 교사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초콜릿색 벽돌을 돔형으로 쌓은 이국적인 건물이 한 채 있고 그 앞에는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인 빨간 트 롤리가 서 있었다

25 이거, 우리나라에 있는 거예요? 네. 제주도에 있는 초콜릿 박물관이에요. 여학생들, 초콜릿 좋아하잖 아요. 그런데 정말 초콜릿으로 만 든 것 같네요. 제주도에서만 나는 송이암 이라는 돌로 만든 거래요. 그런 데 진짜 초콜릿 같죠? 아이들이 좋아하겠네요. 육 체적으로 힘들어하거나 비용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겠 어요. 휴식과 낭만을 찾는 여행 이라는 콘셉트만 놓치지 맙시다. 애너벨 리를 찾아가는 길 이렇게 여행사의 도움 없이 교사들이 직접 제주도를 뒤지고 거리와 시간, 비용을 계산하여 프로그램을 짜니 학생 1인당 5만원쯤 경비를 절 약할 수 있었다. 해외여행 경험이 없는 아이들은 비행기를 탄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 했다. 물론 제주도에 다녀온 아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 유명관광 지코스만 거쳤기 때문에 교사들이 직접 짠 새로운 프로그램에 호기심을 느꼈다. 쏴아쏴아~~ 파도가 포말을 일으키는 해변에 그림처럼 솟아 있는 펜션을 보고 아 이들은 열광했다. 와, 동화 속에 나오는 성 같아요. 오매불망 올인 을 부르짖는 아이들을 섭지코지 로 데려가자 흥분은 극에 달했다. 꺄아! 선생님, 저 바위요! 저 위에서 이병헌이랑 송혜교가 키스했어

26 요. 저기 저 카페에서 이병헌이 차 마셨어요. 선생님, 저희도 카지노 하고 싶어요! 나 카지노 대학 갈 거다~ 그래서 송혜교처럼 딜러 될 거야. 아이들은 소녀 특유의 높은 목소리로 재잘대며 올인하우스 를 들락 날락하고, 두 주연배우가 키스했다는 바위에 올라가 드라마 장면을 재 연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선생님, 그런데 섭지코지 가 무슨 뜻이에요? 참 빨리도 물어본다. 목적지 이름이 이렇게 독특한데 그게 이제야 궁금해? 글쎄, 아까는 올인 생각만 나서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지리교사가 나섰다. 섭지 라는 건 협지 라는 뜻이야. 코지 는 곶 의 제주도 방언이야. 이 리 와 봐라. 여기 지형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역사 교사는 아이들을 봉 수대로 이끌었다. 여기는 군사 요충지대였 어. 그래서 봉수대를 설치했 는데... 국어교사는 안내판으로 아 이들을 불렀다. 얘들아, 이 안내판은 제주 도 방언으로 되어 있지? 이리 와라. 해석해 줄게. 생각보다 올인 에 대한 흥분은 빨리 잦아들었다. 일부러 가르쳐 주려 고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어느 새 이곳의 지리와 역사에 대해 스스로 묻고 찾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쉬리의 언덕 에 올라갔을 때도

27 영화 쉬리 를 떠올리며 잠시 흥분하기는 했지만 어느 새 다들 말을 잊 고 그 자리에 앉아 가만히 낙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하니? 생각해요. 무슨 생각? 쉬리 주인공들. 그래? 무슨 생각이 드는데? 전쟁 같은 거 없어지면 좋겠어요. 우리 작은오빠도 군대 가 있는데. 넌 무슨 생각하니? 아무 생각도 안 해요. 그냥 앉아 있는 거예요. 아이들은 조각상들처럼 주 저앉아 바다를, 하늘을, 낙조 를 바라보았다. 문득 저 아이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해 보았다. 밤에도 불야성을 이루는 번화가, 하늘 을 가리는 마천루, 비좁고 지 저분하게 들어찬 간판들, 음악 소리, 사람 소리... 이런 소음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짧은 침묵도 불편해했다. 쉴 새 없이 휴대폰으로 문자를 날리거나 통화를 하거나 싸이월드에 접속했다. 어쩌 면 저 아이들은 생애 처음,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는지도 모른다. 다음날, 또 그 다음날.. 날이 갈수록 아이들은 침착해지고 조용해졌다. 교사들은 일부러 유원지를 피하고 해변을 천천히 걷는 코스를 많이 넣었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즐거워했다. 손을 잡고 걷다가 마음이 내키 면 바닷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바위틈에 갇힌 작은 물고기나 새우를 잡았다. 그렇게 잡은 물고기와 새우를 우유곽에 소중하게 담고, 매일 물 을 갈아 주며 정성껏 돌보기도 했다. 주워온 조개껍데기에 무엇인가 쓰

28 는 아이도 있었고, 부모님께 엽서를 보내는 아이도 있었다. 초콜릿 박물관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송이암으로 만든 유럽풍 건물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특히 초콜릿 제작과정을 직접 볼 수 있는 주방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지금까지 편의점이나 제과점에서 사 온 초콜릿을 금박지며 리본으로 요란하게 포장하기만 했던 아이들은 손 으로 일일이 우유를 젓고 코코아 가루를 빻아 초콜릿을 만드는 과정을 보며 몹시 감동했다. 집에 가서 반드시 만들어 보겠다며 제조과정을 꼼 꼼히 적는 아이들, 디카를 들고 일일이 찍는 아이들로 열기가 대단했다. 그 모습을 보던 박현성 교사는 문득 메말라 있던 아이들의 가슴 속에 서 빈사 상태로 누워 있던 애너벨 리가 천천히 눈을 뜨고 있다는 생각 이 들었다. 애너벨 리와 돌아오는 길 선생님네 학교는 여행을 참 조용하게 하네요. 여행 기간 내내 버스를 운전해 주던 기사가 말했다. 뭐 특별히 유명한 곳을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해안을 끼고 죽 달리 다가 멎고, 쉬고, 또 달리다가 멎고 쉬고... 그러려고 온 거예요. 뭐, 스케줄이 한가하니 저희들이야 편했지만 아이들은 좀 섭섭하지

29 않겠어요? 한창 하고 싶을 것 많은 나이인데... 박현성 교사는 차 안을 둘러보았다. 비릿하고 짭쪼롬한 바다냄새가 들어찬 차 안에서는 아이들이 곤하게 잠에 빠져 있었다. 그래요.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이 참 많은 나이죠. 그래서 좀 쉬 게 하려고요. 잠이 부족한 아기들은 키가 자라지 않는다고 하죠? 마찬 가지로, 휴식이 부족한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잘 성장하기가 어렵죠. 그 래서 쉬게 해 주고 싶었어요. 창밖으로 흰 포말을 일으키는 제주바다가 보였다. 이제 내일 정오쯤 이면 아이들은 이곳을 떠나 서울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끄러 운 도시생활과 빡빡한 학사일정에 쫓기며 정신없이 살게 될 것이다. 열 심히 받아 적은 초콜릿 제작노트는 책상서랍 어딘가에 처박힌 채 잊혀 가고, 우유곽 속의 새우와 물고기도 죽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 팍팍한 생활에 숨이 턱 막히는 순간이 오면 아이 들은 한없이 느긋하고 한가롭게 지냈던 제주도의 사흘을 기억해낼 것 이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으며 서툰 솜씨로 초콜릿을 만들어 보거나, 쉬리의 언덕 에서 보았던 낙조를 떠올리며 잠시 마음의 평화를 찾을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30 CASE 3 서울 숭의여고 무지개로 어울리다 여러분이 만든 고추장을 그릇에 예쁘게 담으세요. 그리고 각자 감사 편지를 쓰도록 해요. 여러분이 담근 고추장을 부모님께 선물로 드리는 겁 니다. 생각을 바꾸자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오작교를 놓아라 오늘도 똑같다. 아이들은 저쯤에서부터 오용환 교장을 보자 순간 살 짝 몸이 굳더니 모기만한 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는 쏜살같이 달아나 버린다. 아무리 온화하게 말을 붙여도 아이들은 좀체 긴장을 풀지 못한 다. 오교장은 그게 늘 서운하다. 저희도 마찬가집니다. 젊은 담임교사들도 한 마디씩 했다. 요즘 아이들, 솔직하고 거침없다고 하지만 그건 일부 아이들이 고 대부분은 담임한테도 마음을 잘 못 열어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데 아이들과 만나면 성적과 진로 이 야기밖에 못하거든요. 그래서 일 년 내내 같이 지내면서도 생각만큼 가 까워지지를 못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견우, 직녀도 아니고. 교사들의 고민을 듣던 오용환 교장은 우남일 교감을 만났다. 학생과 교사들이 견우와 직녀 같다는데, 오작교를 놔 줘야 하지 않 겠어요?

31 오작교가 무너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빡빡한 학사일정 속에서 사제 간을 위해 빼낼 수 있는 시간은 수학여행 뿐이었다. 지금까지의 수학여행을 되짚어 보았다. 전세버스를 타고 줄줄이 달리 다가 시간에 쫓겨 주마간산 식으로 둘러보고 쫓기듯 차에 올라탄다. 게다가 아무리 국민소득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참가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해마다 몇 명씩은 있었다.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대로 고생하고, 남은 사람은 남은 사람대로 상 처입고... 그러다 문득,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함께 산을 오르라는 말 이 떠올랐다. 서로 돕고 격려하며 힘겨운 등반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친해진다고 하지 않는가. 수련회를 가는 게 어떨까요? 요즘 아이들, 너무 나약하다고 하는데 담임선생님과 극기훈련을 하다 보면 심신이 강인해지고 사제 간도 더 가까워지지 않겠어요? 여고시절 수학여행은 단 한 번뿐입니다. 아이들이 실망한다면 여고 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빼앗는 일이 되지 않을까요? 그럼 우선, 특별활동부서 아이들 중에서 희망자를 뽑아서 시범적으 로 실시해 보도록 하죠. 이렇게 해서 수련회가 실시되었다. 특별히 위탁을 받은 전문강사들은 서울근교로 학생들을 이끌고 갔다. 그러나 결과는 의도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학생들은 강사의 지시에 따라 체조를 하고, 서바 이벌게임에 뛰어들어야 했다. 칠흑 같은 밤에 담력훈련도 했다. 학생들 은 비명을 질러대고 숙소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즐거워야 할 여행이 고 통의 시간으로 변한 셈이다. 저는 담력훈련이나 서바이벌 게임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 니다

32 인솔교사 한 사람이 말했다. 아무리 여자아이들이라도 스스로를 단련할 필요는 있으니까요. 하지 만 문제는 정작 여행기간 내내 교사들이 아웃사이더가 되어야 했다는 겁니다. 사실이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전문강사 지도로 움직이다 보니 아 이들은 인솔교사보다 전문강사들을 접하는 시간이 많았다. 학생과 교사 사이를 외부인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오작교 프로젝트는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경제적 부담 때문에 여행을 포기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는 정도다. 무지개다리를 놓다 견우와 직녀 사이에 오작교 놓아 주려다가 결국 머리털만 빠진 셈이네요. 오교장과 우교감은 씁쓸한 얼굴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 다. 방과 후 청소를 하는 소음이 들려온다. 어디선가 우당탕 퉁 탕 무엇인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그 웃음소 리에 남자어른의 웃음소리도 섞여 있다. 담임교사와 학생들이 청소하다 가 장난이라도 치는 걸까? 현관청소 담당반이 바뀌었나 보네요. 지난주에는 조용하던데... 네. 오늘부터 일주일간은 임선생 반이 현관청소를 맡았거든요. 아무 래도 남자 선생님 반 아이들이라 그런지... 그러고 보면 신기해요. 부부도 닮는다고 하지만, 교사와 학생들도 닮 잖아요? 그렇죠. 담임선생님이 남성이냐 여성이냐, 어떤 성향을 가졌느냐에

33 따라 아이들도 닮아간다니까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문득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같은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는 많아도 가르치는 스타일은 저마다 다 르다. 선생님의 개성에 따라 교습법이 모두 각기 다른 것이다. 전체수학여행은 폐지하도록 합시다. 극기훈련 수련회도 더 이상 하 지 않겠습니다. 대신, 반별로 오붓하게 여행을 보내도록 합시다. 여행 프로그램이나 내용은 각 반 담임선생님들께 일임하고요. 오작교는 철거되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다른 다리가 놓였다. 교사와 학생들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각기 다른 색깔로 칠해지기를 기다리는 무지개다리였다. 따로 또 같이, 모두가 즐거운 여행 일단 반끼리만 오붓하게 떠나는 여행이라는 점에서 학생들의 호응이 매우 컸다. 교과지도, 진학상담 외에 여행프로그램 구성까지 맡게 되어 업무부담이 과중했지만 교사들 역시 기뻐하며 학생들과 함 께 여행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온 학교가 여행프로그램 준비 로 들썩이자 2학년과 3학년들까지 덩달아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 것이 다. 면학분위기가 흐려지고 있어요. 어떻게 하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전 학년이 함께 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어차피 학교에 남아 있는 학년들도 마음이 잡히지 않을 테니. 3학년은 곤란하지 않을까요? 대입시험을 앞두고 있는데... 결국 절충안이 마련되었다. 1학년과 2학년은 2박3일 일정으로 가되, 3학년은 머리 식힐 겸 하루 일정 코스로 서울 근교를 다녀오게 하는 것으로. 그런데 담임교사 한 사람이 프로그램 기획, 진행, 섭외, 아이들의 안 전 등을 모두 책임져야 하는 시스템이라, 부담이 너무 컸다

34 그래서 부담임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연륜이 있는 교사 한 사람을 부 담임으로 선정해 함께 떠나는 것이다. 담임교사가 선두에서 현장 진행 을 하는 동안에 부담임 교사는 학생들의 안전을 챙기는 역할을 맡는다. 교사들은 열정적으로 프로그램 기획에 임하기 시작했다. 우선, 학생들의 의견수렴을 거쳐 여행테마를 정했다. 스포츠를 좋아 하는 교사는 익스트림 스포츠 체험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짜는가 하 면 생태체험, 역사탐방, 요리체험 등 다양한 내용의 프로그램들이 쏟아 져 나왔다. 여행목적지를 찾아가 일정과 프로그램, 그리고 비용을 점검하는 한 편 각 지역 문화원을 비롯한 지방자치단체에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일일이 전화를 걸고, 공문을 보내는 등의 절차를 밟고서야 일정을 확정 지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정보 를 교환하거나 길동무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선생님 반이 영월 쪽 으로 간다고요? 그럼 저 희 반과 같이 가시죠. 저 희는 거기 들렀다가 철원 으로 갈 건데요. 내린천 래프팅 강추합 니다! 제가 래프팅 클럽 회원이라서 거기 가 봤거든요. 원하신다면 제가 그쪽 안내자 연결해 드릴게요. 우리 클럽 회원이거든요. 선생님! 스포츠 전문가시죠? 그럼 저희 반과 연합해서 가시지 않을 래요? 우리는 문화체험 위주로 짰는데 스포츠도 하나 넣어 보고 싶거든 요. 좋습니다. 그럼 선생님이 우리 반 아이들 문화체험 맡아 주실 거죠? 그 와중에도 오교장과 우교감은 혹시 올해도 경제사정 때문에 수학

35 여행을 못 가는 아이가 있을까봐 걱정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보고가 올 라왔다. 운동부 경기 때문에 못 가는 학생, 몸이 좀 아픈 학생 빼고는 모두 다 여행에 참가합니다. 경제사정 때문에 못 가는 아이는 한 명도 없습 니다. 어떻게 된 일이죠? 경제사정이 어려운 학생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학부모 님이 경비를 대신 내 주셨습니다. 물론 담임교사가 부담하기도 하고요. 비결은 간단했다. 아무래도 학급별로 움직이다 보니 학부모들의 관심 과 집중도가 높아진 것이다. 우리 학교 학생 하나가 돈이 없어서 여행을 못 간다 는 것과, 내 아이의 반 친구가 돈이 없어서 여행 을 못 간다 는 것은 차이가 크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더 챙기는 인간적인 본성이 불러온 현상이었다. 이렇게 하여 숭의여고의 따로 또 같이, 모두가 즐거운 수학여행 이 시작되었다. 오색무지개처럼 다양한 체험, 따뜻한 친교 강원도 산자락에서 둔중한 소음과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숭의여고 학생들이 산악바이크를 타고 있다. 드드드드... 산악바이크는 빽빽하게 솟은 침엽수림 사이에 난 오솔길을 빠르게 달린다. 여학생들은 연신 함성을 지르며 즐거워한다. 이 팀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교사, 탈춤에 조예가 깊은 교사가 연합해서 이루어졌다. 그래 서 래프팅, 산악바이크 등의 익스트림 스포츠와 탈춤 배우기 등의 문화 체험을 함께 즐길 수가 있었다. 함께 노를 젓고, 산악을 달리다 보니 학생들은 서로 다른 반이면서도 쉽게 가까워졌고, 자기의 담임교사는 물론 이웃반의 담임교사들에게도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교사들 역시 이웃반의 아이들을 자기 반 아이

36 들처럼 여기게 되었다. 네 반 내 반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체험이었다. 그 시각, 임실 치즈마을에서는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조를 지어 둘러 앉아 시큼한 냄새가 나는 반 죽을 주무르고 있었다. 이윽 고 전문가로 보이는 한 사람 이 반죽덩어리의 한 끝을 아 이들로 하여금 잡게 했다. 자, 이제부터 부드러~업게 살살 잡아당겨 보세요. 순간 아이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잡아당기는 족족 반죽이 늘어 나는 게 아닌가! 아이들은 자신이 직접 만든 치즈를 입에 넣고 오 물거리며 즐거워했다. 한편, 한 무리의 아이들은 긴장된 눈빛으로 벌판에 서 있었다. 자, 이것은 암 가드 라고 합니다. 활을 쏜 후 활줄의 진동으로부터 팔뚝을 보호하기 위해서 차는 도구죠. 이것은 드레스 실드 입니다. 활시 위를 당겼다 놓을 때 시위가 가슴이나 옷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해 가슴 에 댑니다. 이 아이들은 양궁 체험을 하러 온 참이다. 지도자의 설명에 따라 보 호구를 착용하고,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긴다. 어~ 안 돼요. 와, 이거 되게 단단하네. TV에서 볼 때는 잘 휘어지는 것 같던데... 사방에서 호들갑스런 외침, 불규칙하게 바람 가르는 시위 소리가 들 린다. 화살은 과녁을 비켜 엉뚱한 방향으로 멀리 날아간다. 심지어 몇 미터 날지도 못하고 발밑에 떨어지는 화살도 부지기수다. 그 와중에 따아아악! 하며 화살 하나가 과녁에 날아가 박혔다. 물론 명중 부분에서는 한참 먼 외곽지역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도 함성이 터진다. 와, 누구야? 누구? 올림픽 나가도 되겠다!

37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양궁체험 역시 안전사고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해서 몹시 신경 쓰이는 프로그램이지만 아이들의 만족감 은 그만큼 더 컸다. 에취 에취! 조리실 한쪽에서 재채기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선생님, 코가 매워요~ 칭얼대는 아이도 있다. 고추장 재료가 고춧가루니까 코 매운 게 당연하죠. 그리고 재채기 나면 구석으로 가서 입 가리고 하세요. 이게 얼마나 신성한 작업인지 알아야죠. 엄격한 노부인의 꾸중에 조리 실 안엔 긴장감이 돈다. 장유체험관.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의 자치단체에서 운영하고 있 다. 간장과 고추장은 음식의 기본 입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좋은 날 을 가려서 간장과 고추장을 담갔어요. 혹시라도 침이 튈까 한지로 입을 가리고 말이에요. 아이들은 매운 고춧가루 때문에 연신 터져 나오려는 재채기를 참으 면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고추장을 담그기 시작했다. 선생님, 손등이 따가워요. 집안일을 너무 안 해서 그런 겁니다. 어머니 좀 잘 도와 드려요. 핀잔을 들으면서도 아이들은 즐거운지 킥킥거린다. 그렇게 주물럭거 리기를 몇 시간, 빛깔이 빠알간 고추장이 완성되자 아이들은 기뻐서 어 쩔 줄 몰라 했다. 여러분이 만든 고추장을 그릇에 예쁘게 담으세요. 그리고 각자 감사 편지를 쓰도록 해요. 여러분이 담근 고추장을 부모님께 선물로 드리는

38 겁니다. 다음 순간 조리실 구석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편지를 쓰던 여 학생 하나가 숨죽여 눈물을 흘리기 시작 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학생도 훌쩍이기 시작했다. 고춧가루 때문에 나오는 눈물 이 아니었다. 이렇게 1학년과 2학년이 각자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고 있을 때, 한 무리의 여고생들이 고려대학교 교정에 나 타났다. 숭의여고 3학년생들이었다. 공부에 지친 파리한 얼굴을 한 여학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주위를 둘 러보았다. 해묵은 벽돌건물, 그 건물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넝쿨, 활기찬 대학생들, 장서와 열기로 넘치는 도서관. 그때였다. 학생회관 쪽에서 대학생 밴드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난 이대로 내가 하고픈 대로 날개를 펴는 거야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내가 돼야만 해... 저 세상의 끝엔 뭐가 있는지 더 멀리 오를 거야 아무도 내 삶을 대신 살아 주지 않아. 아무도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진 않아. 수험생들은 모두 말없이 가사를 음미하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힘들게 공부하는 것은 고생이 아니야. 바로 내년 이맘 때 너희가 바로 이런 곳에서 누릴 자유와 기쁨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야. 그런데 이건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니? 결국은 각자가 자기 힘으로 해야 하는 거야. 인솔교사의 말에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때는 부모님을 위 해서 공부한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자기를 위해 공부하

39 는 것이다. Let it be... 여행을 다녀온 후 학교 분위기는 확실히 달라졌다. 교사와 학생들 사이가 놀랍도록 가까워졌다. 함께 산악바이크를 타며 뒹굴고, 눈물콧물 흘리며 함께 고추장을 담그고, 다친 곳을 치료해 주 고...이렇게 동고동락하면서 사제지간을 가로막고 있던 마음의 벽이 허 물어진 것이다. 학급 내의 분위기도 좋아졌다. 경제사정으로 여행에 불참한 아이가 없었던 탓에 모두의 마음이 가벼웠다. 우리 학급만의 추억 을 간직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또 다른 소중한 경험이었다. 더불어 다른 학급과도 가까워졌다. 담임교사는 아니지만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정이 든 이웃 반 선생님을 담임선생님처럼 따르고, 교사들 역 시 전교 모든 아이들을 자기 아이로 여기게 되었다. 하루 동안의 여행이었지만 3학 년생들의 나들이도 효과가 컸다. 면학분위기가 절로 무르익었고, 고 3 수험생치고는 표정들이 한결 밝 아졌다. 다시 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 는 오교장과 우교감의 마음도 덩 달아 상쾌했다. 너무 이른 걱정인지는 모르지만, 이 여행 시스템도 얼마 안 있어 구 태의연한 것으로 밀려나지 않을까요? 왜 아니겠어요? 시대는 빨리 변하고, 아이들도 그만큼 빨리 변하는 데...그럼 또 새로운 방식을 연구해야겠죠? 그래야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냥,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맡기니 잘 되지 않았나요? 모두들 잘 해냈잖아요?

40 CASE 4 안산 강서고 미래를 여는 아이들 우리 부모님이 그러시는데 사회주의국가 사람들은 게으르고 공짜 좋 아한대요. 통일 되면 굉장히 혼란스럽고 시끄러워질 거라던데요. 교사들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정말로 그런 꿈을 꾸셨어요? 젊은 교사의 질문에 40대 초반의 교사가 정색을 하며 대답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니까. 우리 세대는 다 그랬어. 꿈속에서 전쟁 이 터진 거야. 부모님은 안 보이고 사방은 불바다고, 나는 혼자서 울 고... 그 말에 교무실에 있던 소위 386세대 교사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거 렸다.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시절을 보낸 그들은 박통시대에 초등 학교를, 전통시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았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라는 노래를 배우면서도 정작 북한을 주적으로 삼고 그들을 증오하는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많은 어린이 들은 전쟁이 일어나는 꿈을 자주 꾸었다. 그러다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들이 받은 교육이 상당부분 왜곡된 것이었음을 알고 투쟁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었다. 대학생 임수경이 단신 으로 북한에 간 것도 그때였다. 그런 시대를 살았던 오늘날의 40대들에 게 통일은 숙명 이었다

41 그 사이 세상은 변했다. 개성공단에서는 남과 북이 함께 상품을 만들 고, 금강산 육로관광길이 열렸다. 남북 단일팀이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것이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대로만 나가면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통일 1세대가 될 수도 있겠네요. 내심 뿌듯해지던 교 사들의 마음은 누군가의 한 마디에 무너졌다. 그런데 문제예요. 우 리나라 청소년들 대다수 가 꼭 통일을 할 필요 는 없다 고 생각한다는 통계자료가 나왔거든요. 이른바 통일불감증세대 의 출현이죠. 독일 사람들, 행복해 보이지 않던데요 상대적으로 풍족하고 민주적으로 자라온 요즘 아이들은 감성적인 반 면, 모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합리적인 면이 있다. 아이들은 이렇게 되묻곤 했다. 독일은 통일된 후에 더 힘들어졌잖아요. 구서독 사람들이랑 구 동독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많이 차이나서 갈등이 심하다던데요. 통일될 때까지 서독이 동독에 엄청 많은 돈을 퍼주었다면서요? 지금 우리나라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북한은 핵무기 만들면서 우리나라 곤 란하게 만들잖아요. 우리 부모님이 그러시는데 사회주의국가 사람들은 게으르고 공짜 좋아한대요. 통일 되면 굉장히 혼란스럽고 시끄러워질 거라던데요. 교사들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까?

42 통일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다. 너희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피해 갈 수 있는 숙제가 아니다. 너희는 통일의 손익계산을 생각할 세대가 아니라 통일시대를 준비하고 그 시대를 살아가야 할 세대다. 통일은 너 희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다. 그러나 이런 장황한 설교를 늘어놓아보았자 효과가 있을 리 만무했 다. 우리 아이는 보내지 않겠습니다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이천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음악실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가곡 그리운 금강산 이 들려온다. 그러나 통일에 대한 요즘 아이들의 의식수준을 알고 나니 교사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과연 아이들은 저 노래를 만든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은 단순히 민족이나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 들의 미래가 걸린 문제였다.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면 어떻겠습니까? 남과 북이 한민족이라 는 것만 느끼게 해 줘도 아이들의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좋은 생각이었다. 이왕 고교시절에 한번 가는 수학여행이라면 남들 다 가는 관광지보다는 금강산이 좋았다. 이렇게 해서 강서고등학교의 수학여행지가 결정되었다. 육로관광길이 열렸지만 여전히 금강산으로 가려면 까다로운 절 차를 밟아야 했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학생들의 인적사항도 보고 해야 했다. 다행히 오랫동안 대북사업을 해 온 현대아산의 협조로 생각보다는 쉽게 여행수속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학부모가 반대하고 나 선 것이다

43 한국전쟁 때 빨갱이들이 얼 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어요? 그 런데 지금 정부는 계속 그놈들 한테 퍼주고 있잖아요? 나는 빨 갱이 땅에 우리 아이 못 보냅니 다. 당황한 교사들은 학부모를 설득했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 착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더 발전할 수가 없다는 것, 이 아이들이 평 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남과 북이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지 만 소용이 없었다. 통일교육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다시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름이 좋구나! 드디어 10월 24일. 강서고등학교 학생들은 금강산 수학여행길에 올 랐다. 화랑유원지에 모여 전세버스에 올라 비무장지대를 통과할 때까지 만 해도 아이들은 그저 일상을 떠나 여행 간다는 설렘 하나로 떠들 뿐 이었다. 자, 얘들아! 저게 남과 북의 경계선이야 아이들은 차창 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노란색을 칠한 시멘트 말뚝이 보였다. 애걔? 저거예요? 자, 말뚝을 넘었으니 여기서부터는 북한 땅이야. 말뚝 하나를 넘으니 북한... 아이들의 얼굴에 묘한 감정이 흘렀다. 놀라움과 약간의 당황스러움이 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아이들을 더 놀라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다. 안녕하십네까? 오늘부터 2박3일간 여러분의 여행을 책임질 안

44 내인입네다. 약간 높은 목소리에 북한사투리를 쓰는 여성이 차에 오른 것이다! 서... 선생님.. 저 아줌마, 북한 사람이에요? 응. 북한 사람이야. 무서워? 아뇨.. 좀 의외라서... 북측의 안내인을 섭외해서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하게 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해했지만 같은 버스에서 몇 시간을 지내면서 아이 들은 서서히 경계심을 풀어 갔다. 안내인도 예상 외로 밝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녀러분들은 맻살입네까? 17살요. 아, 기래요? 기러믄 조기 밖에 있는 닌민군 동무들과 또래디요. 검문을 위해 차를 세우는 북한군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을린 얼굴에 매서운 눈빛을 한 북한군 한 명이 어느 학생의 신분증을 보더니 이름을 불렀다. 강한별? 차 안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호명당한 학생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별! 이름이 좋구나! 순간 안도의 숨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이 짧 은 경험으로 북한에 대한 학생들의 경계심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45 우리랑 똑같이 생겼어 차는 점점 더 북한 깊숙이 들어갔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시골풍경 을 아이들은 진지한 눈빛으로 관찰했다. 민둥산, 똑같은 모양의 집들, 느릿느릿 밭을 가는 소, 농부, 논둑에 모여서서 남측 차량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손 흔들어도...되나? 잠시 망설이던 학생 하나가 용기를 내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주민 들 사이에 서 있던 꼬마 하나가 손을 흔들어 화답하기 시작했다. 야! 흔든다, 흔들어! 아이들이 일제히 차창에 붙어서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차가 기우뚱할 정도였다.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꼬마는 폴짝폴짝 뛰 기 시작했다. 당황한 어머니가 꼬마를 제지했지만 학생들은 꼬마가 환 하게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야! 꼬마야! 안녕? 꼬마야~~~ 여학생들의 눈에 눈물이 괴기 시작했다. 우리랑 똑같이 생겼어.. 당연하지. 같은 민족이잖아. 북측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개방적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마 을을 그냥 걸어서 통과할 수 있었다. 한국의 농촌에서도 흔히 볼 수 있 는 논둑과 누런 벼, 누런 소... 그러나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물건을 대한 아기들처럼. 그때 한 아이가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양 외쳤다. 선생님, 북한 염소는 다 희네요! 과연 논둑이나 집 앞에서 만나는 염소들은 하나같이 눈처럼 흰색이 었다. 저건 젖염소 라고 하는 거야. 보통 흑염소는 약용으로 많이 쓰이지 만 이 젖염소들은 젖을 얻기 위해 키우지. 한국에 우리민족서로돕기운 동본부 라는 단체가 있는데 그 단체에서 젖염소를 보내 준 거야. 북한

46 동포들 영양보충 하라고. 아유, 보내려면 젖소를 보내지, 왜 쩨쩨하게 염소래요? 젖소는 키우기도 힘들고 사료 값이 많이 들잖아. 게다가 우유는 반 드시 살균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젖염소의 젖은 그냥 짜서 마시면 되거 든. 아...그렇구나...다행이다. 그런데 소가 너무 말랐어요...여긴 경운기도 없나 봐. 우리나라 농기계 같은 거 갖다 주면 안 되나? 출발한 지 반나절 만에 아이들은 이렇게 빨리 변해 가고 있었다. 사랑하면 보이나니... 이튿날부터는 본격적인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이미 TV보도 등 으로 금강산 관광 장면이 많이 방송된 터라 사실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 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옛날에 어느 외국기자가 금강산에 왔대. 하도 아름다운 산이라고 소 문이 나서 사진에 담으려고 했지. 그런데 한 장도 못 찍고 돌아갔대. 이 유가 뭐게? 교사의 질문에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기를 찍으려고 하니 저기가 더 아름답고, 저기를 찍으려고 하니 여기가 더 아름답고 그래서 하루 종일 카메라만 이리저리 들이대다가 보니 해가 지더래. 에~~~ 거짓말! 썰렁해요! 그러나 막상 금강산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조용해졌다. 봉우리마다 설 치된 높은 철계단을 오르면서도 힘들다는 말이 없었다. 부지런히 사진 을 찍는 아이들도 있었다. 얘들아, 사진 그만 찍고 빨리 올라가자. 해지기 전에 찍어야죠. 그 멍청한 외국기자처럼 되기 전에요. 그러나 아이들이 더 호기심을 느낀 것은 금강산 풍경보다도 산길 곳

47 곳에서 기념품을 파는 북한 주민들이었다. 얼마 전만 해도 장승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기만 하더니 최근 들어 태도가 확 바뀌어 호객행 위까지 하고 있었다. 학생들, 이리 오시라요. 물건 좋습네다. 학생들, 이리 오시라요. 싸게 드립네다. 아이들은 북측 판매원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간혹 판매원이 미소라 도 지어 주면 기뻐서 콩콩 뛰기도 했다. 물건 값을 깎아 달라며 흥정을 걸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산 기념품을 전리품처럼 흔들며 자랑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하루 종일 금강산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아이들은 해질 무렵에야 산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한 학생이 양손 가득 빈 생수병을 들고 내려오는 게 보였 다. 두 손은 물론 가방 안에까지 생수병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게 다 뭐니? 개념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글쎄, 관광객들이 나뭇가지에다가 생수병을 걸어놓은 거 있죠? 자기들 딴에는 기념한다고 꽂아놓은 거지 만 환경오염 되잖아요! 그러자 다른 학생이 가방 안에서 비닐봉지를 하나 꺼내며 말했다. 맞아. 나도 휴지 이만큼 주웠어. 나도. 나도 아이들은 부스럭거리며 휴지나 빈 병 등을 꺼내 보였다. 순간 교사들은 아이들이 진심으로 북한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 달았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법. 아이들은 새로운 눈을 떠가고 있었던 것이다

48 우리 다시 만나요 평양교예단의 공연은 금강산을 찾는 관광객이 반드시 거치는 코스였 다. 강서고 학생들 역시 처음에는 화려한 고난도의 곡예술에 환호하며 박수를 치기 바빴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이 흐르자 한 사람 한 사람 마 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접시 돌리는 저애, 우리보다 어려 보이지 않니? 그러게 말이야. 저거 배우려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모르긴 해도 많이 맞지 않았을까? 어느 새 아이들은 공연을 보는 관객이 아니라 무대 위의 또래 소년 소녀를 걱정하는 친구의 입장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고양되던 아이들의 감정은 공연이 끝난 뒤 사회자가 던진 마지막 한 마디에 그 만 임계점을 넘고 말았다. 여러분! 우리 다시 만나요! 그 순간 사방에서 박수와 함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모든 여행일정을 마치고 아이들은 자신들이 머물렀던 숙소 일대를 청소했다. 물론 그것이 봉사활동시간으로 인정되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청소에 공을 들이는 모습은 유난히 진지했다. 언제 또 올지 모르잖아. 휴지를 주워 담던 아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희가 선생님들 나이쯤 되면 더 자주 오게 될 거야. 통일이 되어 한 나라일 테니까. 전세버스는 이틀 전에 달린 길을 거꾸로 되짚어 달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며칠 전에 논둑에서 손을 흔들어 주던 그 꼬마가 다시 보이 려나 싶어 차창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그러나 꼬마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느릿느릿 움직이는 여윈 소와 농부, 하얀 젖염소 몇 마리가 스쳐 지나갔다. 나도 젖염소 성금 내 볼까? 무슨 단체랬지? 우리민족서로... 뭐라고 했지? 인터넷 홈페이지 한번 찾아보

49 자. 차는 다시 휴전선의 시멘트 말뚝을 지나고 비무장지대를 통과 했다. 너희들, 아직까지 통일이 손해 보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잠깐 침묵이 흘렀지만, 이내 또랑또랑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뇨! 다시 만나자, 천하명산 이것 좀 보실래요? 금강산 여행을 다녀온 며칠 후, 국어교사 한 사람이 종이 몇 장 을 동료교사들에게 돌렸다. 아이들한테 금강산 수학여행에 대한 소감을 써 보라고 했거든요. 젖염소, 같은 또래의 북측 병사, 금강산의 판매원, 손을 흔들어 주던 꼬마 등, 아이들이 그곳에서 본 하나하나에 얼마나 애정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떤 아이는 시조도 썼어요. 읽어 보실래요? 풍악산 알록달록 물이 든 조선명산 교예단 아름다운 동작은 선녀의 춤 북녘 땅 다시 만나자 천하명산 다시 보자 시조를 읽어 보던 교사들 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제 법이었다. 이제 아이들은 더 이상 통 일불감증세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 게 깨달아 가고 있었다

50 CASE 5 부천 소명여고 마음을 씻는 여행 로사, 너는 수녀가 되어야 할 사람 같구나. 세상에! 종군기자를 꿈꾸는 저에게 수녀가 되라뇨! 안녕하셨어요? 크리스티나 수녀님! 그간 격조했습니다. 으레 학기말이면 그렇듯이 시험문제 출제, 채점, 면담으로 하루 하루가 바쁩니다. 수능성적을 비관해서 쌍둥이 자매가 투신자살했다는 기사를 필두로 올겨울도 전국이 수능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 자매의 이 야기가 남일 같지 않은지 덩달아 심란해하는 얼굴입니다. 어차피 인생 은 저마다의 몫이니 저는 그저 마음을 다해 기도해 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네요. 노트북 컴퓨터의 폴더들을 정리하다가, 올해 수학여행 가서 찍은 사 진 파일들을 발견했습니다. 한 장 한 장 클릭하면서 문득, 수녀님이 생 각났습니다. 수녀님을 처음 뵈었을 때, 저는 작은 체구 가득 분노와 갈등을 안고 사는 여대생이었습니다. 세상에 만연한 불의와 불공평함에 화가 나 있 었죠. 올리아나 팔라치 같은 기자가 되어 불의를 파헤치고, 정의를 밝 혀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물처럼 맑은 제 친구들을 제쳐 두고 제게 말씀하셨죠

51 로사, 너는 수녀가 되어야 할 사람 같구나. 세상에! 종군기자를 꿈꾸는 저에게 수녀가 되라뇨! 그런데 운명처럼 몇 년 후, 저는 머리를 자르고 수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교단에 서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군요. 단순함 을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소명여고는 요즘 한창 개발붐이 일어나는 부천지 역입니다. 보통의 위성도시들이 그렇듯이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서민들이, 상대적으로 집값이 싼 서울 근교 소도시로 몰려들면서 형성된 곳이지 요. 뿌리내리고 살 사람보다는 언제든 떠날 사람들로 가득한 곳, 정부의 정책발표에 따라 땅값이 들썩이는 곳, 그래서 늘 시끄러운 곳이랍니다. 그리고 저의 제자들은 그런 환경 속에서 입시에 대한 부담감까지 껴안 고 있지요. 처음 담임교사가 되었을 때 저는 몹시 떨었습니다. 과연 내가 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이 아이들은 나와 보낸 1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그러던 중 <마더 테레사의 단순한 삶>이라는 책을 읽으며, 아이들에 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늘 말씀하셨죠. 검소하게 입고, 소박하게 먹고, 단순하게 생각하라 고. 하지만 세상살이는 만만치 않은 것이라 조금만 방심하면 평화를 잃 기 일쑤지요. 수도생활을 한 저조차 이럴진대, 예민한 여고생들은 얼마나 흔들리겠 어요? 저는, 제 아이들에게 단순함이 주는 희열 을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수학여행을 그 기회로 삼았습니다

52 수학여행을 구도의 여정으로 저는 한 학년 전체가 우르르 몰려가 관광명소를 돌다가 사진 찍고 돌 아오는 수학여행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측의 협조를 얻어 저희 반만 따로 수학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은 몹시 기뻐하면서도 한 가지 조건을 붙이더군요. 선생님! 너무 비싸면 안 돼요. 부모님이 힘드시잖아요. 단순함을 배울 수 있고, 부모님의 부담도 덜어 드릴 수 있는 여행이 라...그렇다면 구도 라는 콘셉트가 가장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순함과 청빈의 정신으로 구도의 길을 가 는 성직자들을 만나게 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자아이들인지라 숙박문제도 신경 써야 했어요. 이 순수한 아이들을 절대 여관 같은 곳에서 재우고 싶지 않았거든요. 저는 전남 고흥에 있는 남 포 미술관 을 찾아냈습니다. 지 역사회의 예술인들이 폐교를 꾸며 작업공간 겸 갤러리로 쓰 고 있는 곳. 순한 남쪽바다와 예술가들의 순수한 열정이 만 나는 곳. 그곳에서 아이들이 음악도 듣고, 미술작품도 감상 하면서 묵는다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겠지요. 다행히 남포 미술관 측에서는 선선히 제 청을 들어 주었습니 다. 한 학급 정도의 인원이면 수용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저를 더 기쁘게 한 것은 미술관 옆에 있는 울창한 삼나무 숲이었습 니다. 인적이 드물어 새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제 발소 리조차 엄청난 소음으로 들리는 곳이었죠. 그곳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 나갈 수 있는 오솔길이 있었어요. 아이들로 하여금 꼭 이 길을 걷게 해 주고 싶었어요

53 근처에 있는 수녀원도 섭외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고 겸손한 자 세로 생활하는 수녀들의 경건한 생활을 체험하게 해 주고 싶었거든요. 순천에 있는 선암사에도 견학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정상 은 하나지만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듯이, 사랑 이라는 진리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러 종교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열린 마 음을 갖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또,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장소는 소록도 였습니다. 선종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곳으로 안내해 달 라고 부탁해서 방문한 곳이 소록도였지요. 이곳에서 아이들에게 사회적인 편견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지를 가르쳐 주고 싶었고, 봉사의 기쁨도 알게 해 주고 싶었습니 다. 하지만 소록도 측의 답변을 듣고 제가 경솔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 다. 견학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하지만 봉사활동은 곤란합니다. 저희 소록도 요양원에서는 적어도 사흘 이상, 전심전력으로 봉사해 주실 분 만을 받습니다. 제 아이들만을 생각한 나머지 잠시 균형을 잃었던 것입니다. 정중히 사과드리고 견학을 허락해 주신 것에 감사드렸습니다. 이렇게 여행프로그램을 겨우 완성하고 나자, 내심 만족스러웠습니다. 구도 라는 콘셉트에도 잘 맞았고, 경비도 절약할 수 있었거든요. 수녀님 들도 스님들도 학생들에게 돈을 요구하지는 않으니까요. 바다와 삼나무 숲도 마찬가지고요. 구도의 첫걸음 무더워지기 시작하는 6월, 드디어 저희 반은 남으로 여행길에 올랐습 니다. 아이들은 하얀 모랫벌과 푸른 수평선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했 습니다. 눈이 시원해요!

54 진짜야! 간판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게 너무 신기하지 않니? 아이들의 눈은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보아 왔습니다. 단순하고 아름 다운 것보다는 복잡하고 지저분한 것들을 훨씬 많이 봐 왔지요. 숙소인 남포 미술관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팔레트에 물감을 푸는 화가, 정과 끌로 돌을 쪼는 조각가들을 황홀하게 바라보더군요. 잔잔하게 흐르는 고전음악에 차분해지기도 했습니다. 클래식 좋지? 그러니까 너희들도 자주 좀 들어. 만날 시끄러운 댄스 음악만 듣지 말고. 클래식 들으면 머리도 좋아진다잖아~ 웃으며 면박을 주었 지만 사실은 저도 알 아요. 이 아이들이 클 래식을 듣지 않는 것 은, 그 아름다움을 몰 라서가 아니라, 그것 을 들을 기회를 접하 지 못했기 때문이란 것을요. 앞으로 클래 식 음악을 자주 들려 줘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다음날, 아이들을 수녀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세속적인 행복을 버리고 구도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겸손하게 노동에 임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지요. 선생님! 저분들, 눈에 서클렌즈 같은 거 꼈나요? 굉장히 반짝거려 요. 마음이 평안하고 맑아서 그런 거야. 너희도 아기 때는 다 저랬어. 아이들은 새삼 자기의 표정을 다시 점검해 보더군요. 입가가 처져 있 던 아이는 미소를 지어 보기도 하고, 뚱하게 입을 내밀고 있던 아이도 표정을 수습하더군요

55 먼지 한 톨 없는 수녀원 구석구석, 어디서나 무릎을 꿇다시피 하고 걸레질을 하는 수녀들의 바지런한 움직임, 은은하게 들리는 성가소리, 조용한 걸음걸음. 처음에는 왁자하게 떠들던 아이들이 어느 새 걸음조차 수녀들의 그 것을 닮아 가더군요.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할 수야 없지만, 매일 조금 씩 노력하여 개선한다면 언젠가는 자기가 바라는 모습이 된다는 것! 아이들이 이 사실을 믿었으면 좋겠어요. 타인을 돌아보는 시간 수녀원에서 마음을 정화시킨 후에는 소록도로 향했습니다. 너희들 소록도 하면 생각나는 사람 없니? 한하운 시인요! 국어 시간에 배우는 시인이니 모를 리 없겠죠.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리리 (중략)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늴리리...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시를 흥얼거립니다. 물론 시인의 마음을 온전히 알지는 못했지요. 아마 머릿속으로는 외형률 이니 대구법 이니 하는 단 어를 떠올렸을 거예요. 하지만 소록도에 도착한 직후부터 아이들의 감정은 달라졌습니다. 인 간세상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있는 한센병 환자들의 요양원을 보며 가슴

56 아파하더니, 급기야 소록도 박물관에서는 눈물을 흘리더군요. 특히 강 제로 피임수술을 당하고, 자식들과도 떨어져 살아야 했던 한센병 환자 들의 수난사를 듣고는 말문을 잃었습니다. 병을 앓는 건 불행 이지, 죄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당해 야 해요? 사형제도도 없애자고 하면서 죄인도 아닌 사람들한테 너무 심해요. 한센병 환자들만 슬픈 게 아니야. 이주노동자, 혼혈인, 에이즈환자... 세상에는 남과 좀 다르다는 이유로, 수가 적다는 이유로 차별당하는 사 람들이 많아. 너희는 어리석은 어른들처럼 편견 같은 것 가지면 안 된 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이 아이들은 앞으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인들을 편견어린 시선으로 바라 보지 않겠지요? 나를 돌아보는 시간 소록도를 다녀온 후 차분하게 가라앉은 아이들을 삼나무 숲으로 이 끌었습니다. 다들 작은 돋보기 하나씩을 들게 하고요. 자, 이제 돋보기를 아무데나 들이대고 아무거나 관찰해 봐. 아이들은 거칠거칠한 나무줄기 표면에 돋보기를 대고 들여다보 기도 하고, 바지런히 움직이는 개미를 쫓아가기도 했습니다. 정교 한 대칭을 이루는 나뭇잎의 잎맥을 새삼 발견하고 감탄하는 아이 도 있었습니다. 헬렌 켈러가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이라는 수필에서 이런 말을 했어. 내일 눈이 멀 사람처럼 오늘의 풍경을 보고, 내일 귀가 멀 사람처럼 새 소리와 음악소리를 들으라고. 그 말에 아이들은 한결 진지한 모습으로 숲을 돌아보기도 하고, 가만 히 눈을 감고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더군요

57 이제부터는 침묵이야. 절대 말하지 말고 걸어가기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오솔길을 길게 줄을 지어 걷기 시작 했죠. 깊고 울창한 삼나무 숲은 숨소리 내기도 미안할 만큼 조용했습니 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이들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잠깐 멈추고 눈을 감아. 그리고, 두 팔을 쫙 펼쳐. 비행기처럼. 이제... 자기 마음속에 뭐가 들었는지 생각해 보자! 아이들은 눈을 감고 팔을 넓게 펼친 채 몸을 스쳐가는 바람을 느끼 고,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명상에 빠져들더군요. 그 아이들이 무슨 생 각을 했는지, 저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건 신과 아이만이 알고 있어야 할 비밀일 테니까요. 그날 밤, 미술관의 배려로 아이들은 직접 밥을 지어 먹었습니다. 쌀을 씻고, 장작을 쌓고, 채소를 씻고, 고기를 굽고...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친구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나눠 먹는 것 은 식당 밥을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추억이 되겠지요?

58 고기 굽느라 정작 자기는 한 점도 먹지 못한 아이도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도 안 서운해요. 기분 너무 좋은 거 있죠? 하며 웃는 그 아이가 어찌나 예쁘던지 꼭 안아 주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아이들은 촛불을 하나씩 들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 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서로서로 돌아가며 Free Hug'를 했지요. 함께 생활하면서 본의 아니게 쌓였던 앙금을 풀고, 우정을 다지 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비우고, 다시 채우고 돌아오던 날, 마지막 코스로 순천의 선암사에 들렀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그곳의 노스님께서 아이들을 직접 맞아 주시며 설법까지 해 주셨 습니다. 처음에는 좀 걱정했습니다. 사실 어제 파티를 하느라 아이들이 잠을 한 잠도 안 자 피곤한 상태라서 혹시라도 스님의 설법 시간에 졸 지나 않을까 해서요.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 습니다. 스님께서 합장하 는 법을 가르쳐 주시자 아이들은 그대로 따라 손 을 모으고는 스님의 설법 에 귀를 기울이더군요. 여러분은 운명을 믿습 니까? 저는 믿습니다. 왜 냐하면, 내가 하는 생각 자체가 바로 내 미래를 만들기 때문이죠. 운명은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들어 가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좋은 생 각을 하면, 우주는 그 생각을 되돌려 줍니다. 그럼 여러분의 삶도 즐거 워질 것이고, 반대의 경우는, 나빠지겠죠. 스님의 설법은 아이들의 생활에 밀착된 것이었고, 아이들의 고민을

59 정확하게 건드리고 있었습니다. 누가 요즘 아이들을 참을성 없다고 하 던가요? 설법 시간 내내 눈을 빛내며 경청하던 제자들의 모습을, 저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참, 절밥도 먹었습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세상의 어떤 생명체 가 자기의 생명을 바친 고귀한 것이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금도 남 기지 않고 먹어야 하며, 그렇게 해야 우리의 환경을 지킬 수 있다는 스 님의 설명에 아이들은 깨끗하게 그릇을 비웠습니다. 어떤 아이는 설거 지라도 한 것처럼 깨끗하게 비워 놓아서 제가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 주 기도 했답니다. 그렇게 해서 2박3일간에 걸친 구도여행은 막을 내렸습니다. 에필로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저는 아이들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솔방 울을 하나만 집으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묘하죠. 지 천에 널린 게 솔방울인데 막상 하나만 집으라고 하자,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가만가만 살펴보는 겁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저 아이들은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해야 할까요? 그때마다 저 솔방울을 고르던 순간처럼 진지하고 지혜롭게 선택해 주 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그 솔방울들은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어떤 아이는 책상 위에 잘 놓아두고 틈틈이 보겠지만 어떤 아이는 서랍 속에 넣어 두고는 잊어 버릴 테지요. 하지만 그 솔방울을 줍던 그 순간의 기억만큼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크리스티나 수녀님! 저를 수녀의 길로, 교사의 길로 인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전쟁터를 달리는 종군기자도 중요한 존재지만, 인생의 전쟁터에서 지친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는 소녀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 역 시 거룩하고 행복한 직분입니다

60 제 아이들 역시, 올해 제가 마련한 여행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길 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혼자 견디기 힘들 때, 잠시 휴 식처가 되는 행복한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연락 올리겠습니다. 서기 2007년 12월 부천소명여고 교정에서 김나령 로사 올림

61 2장 선진국 사례 CASE1 민주시민을 육성한다 - 미 국 CASE2 다양성을 인정한다 - 영 국 CASE3 자발적으로 체험하라 - 프랑스 CASE4 강인한 인간을 만든다 - 독 일 CASE5 세계시민으로 키운다 - 일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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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CASE 1 미국 민주시민을 육성한다 미국 청소년 수련 프로그램의 기본 철학은 성인들의 일방적 지도가 아 니라 청소년과 성인의 파트너십이다. You are a part of us 라는 문구가 잘 드러내 주고 있듯, 청소년을 사회의 중요한 자원으로 인식하고 더 나아가 인류사회의 동등한 파트너임 을 인식하고 있다. 청소년 육성자원이 사회전반에 풍부할 뿐더러, 협력적 네트워크와 정 보망이 잘 구축되어 있다. WOW (Wonders of Washington) - 체험 중심의 민주시민 교육 프로그램 전국 4-H 협의회가 운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청소년들이 워싱턴을 방문해 6박 7일 동안 국회의원과 함께, 국회의사당, 최고법 정, 국회도서관 등을 탐방하며, 미국의 역사와 문화를 학습한다. 워싱턴의 야경 : 워싱턴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영화 City Out of Wilderness 을 관람한다. 워싱턴의 대표적인 장소인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동상들, 기념비 등을 둘러보고 링컨과 제퍼슨 기념관을 거치면서 미국의 유산에 대해 새롭 게 깨닫게 된다. 의회 활동 : 연방정부의 역할, 그리고 국회에서 발의된 의안이 어떻게 법률로 정해지는지를 배운다. 1787년 입안된 법률제정 과정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음악 유산 : 미국의 민속음악을 체험할 수 있다. 25명 이상의 전문 악사들에

64 의해 진행된다. 놋쇠 워크숍 : 놋쇠 디자인을 문지름으로써 르네상스 예술을 경험하게 하여 참가자들이 손으로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당신의 깃발 워크숍 : 별들과 선으로 구성된 미국 국기의 상징을 학습 한다. 국기에 대한 예의와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준다. 역사시합 : 워싱턴의 역사에 대한 참가자들의 지식을 테스트하는 퀴즈 프로 그램. WOW게임 : 도우미에 의해 진행되는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 예술공연 : 존 F. 케네디 센터와 국립극장, 아레나 스테이지, 그리고 포드 극 장 등에서 공연되는 유명 예술공연을 관람한다. Outward Bound - 야외 모험체험과 탐험학습 프로그램 미래세계의 주인공이 될 젊은이들이 대자연 속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깨달아 자기 스스로의 세계를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할 수 있게 하며, 젊은이들이 항상 넘치는 열정과 세상에 대한 애정을 갖도록 하고자 한 다. 주요 프로그램으로는 백패킹, 카누투어, 개썰매, 산악자전거, 등산, 라 펠링, 멀티액티비티, 암벽등반, 항해, 바다 카약, 스키, 스노우보드, 급류 타기, 트레킹 등이 있다. Outward Bound는 야외 모험을 통해 참가자들 이 팀워크, 용기, 숙련된 기능, 인내력, 연민 등을 배울 수 있도록 한다. Concordia Language Villages - 세계 언어를 배우는 문화체험 프로그램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세계언어 문화교육 프로그램으로, 현재 13개 나

65 라의 언어 분야 프로그램 이 있다. 이 언어마을의 핵심은 집중훈련. 참가자들은 언어마을에서 실제 생활 을 하며 언어를 배우게 된다. 먹고, 노래하고, 게임을 하거나 악기를 다루며, 원어민과 대화를 하면서 참가자들은 해당 국가의 언어와 문화 속에 완전히 둘러싸이게 된다. 여름 캠프기간 동안 열리는 언어마을은 각 마을이 실제 하나의 국가 이기 때문에, 입국을 하려는 사람은 여권심사를 거쳐야 한다. 들어간 나 라에서 사용할 이름도 새로 짓고, 외국어로 안내를 받아 도착한 은행에 서 환전도 하는 등 모든 것이 타국을 방문한 실제 상황으로 진행된다. 아이들은 며칠만에 식당에서 하는 언어들을 배우게 되며, 놀이와 현장 위주의 프로그램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문화와 언어에 대한 호기심을 키 워준다. 콘코디아 언어마을의 특징이 바로 철저한 이국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며, 문화와 함께 배우게 되는 외국어는 아이들에게 폭넓은 이 해력을 제공하고 외국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만든다. 콘코디아 언어마을의 한국어 마 을인 숲 속의 호수 촌장을 맡고 있는 로스킹(Ross King) 교수는 옷을 기름통에 한 이틀 담갔다가 꺼내면 기름냄새가 온통 배듯이 언 어습득에도 이런 원리를 적용한 것 이라고 표현한다

66 인터뷰 공동체정신과 사회기여정신을 배우는 기회 허 미 경 (주부, L.A 20년 거주)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 어느 학자가 미국인에 대해 재미있는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미국인 은 유전적으로 낙천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는 견해였다.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은 유럽 각지에서 힘들게 살던 사람들이었 다. 하지만 그들은 신대륙으로 가면 뭔가 새로운 길이 있을 거야 라는 희망을 가지고 대서양을 건넜다. 어떻게든 될 거야 라는 낙천성 유전자 가 대대손손 이어져 온 것이다. 일견 황당하기도 하지만, 20년간의 이민생활 경험으로 보건대 틀린 말도 아닌 듯하다. 나 역시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생각하며 이민 온 처지니까. 아무튼 이렇게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사회 특성상 미국 교육은 다양 성을 인정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만 해도 WASP, 아시아 인, 멕시칸, 아랍 인에 이 르기까지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이 함 께 공부하고 있으며 학교는 이 학생 들의 문화적 충격을 덜어 주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한다. 내가 사는 사회 시스템 이해하기 하지만 이 다양성 만큼이나 중요한

67 것이 공동체 정신 이다. 서로 언어와 문 화가 달라도 어쨌든 같은 미국인 으로서 공동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이다. 이를 위해 각 학교에서는 여행프로그 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미국의 초등학교들은 거의 모두가 학 급 단위로 워싱턴 D.C를 방문한다. 출발 전에는 미국의 건국역사, 백악관의 구조, 미국 대통령의 집무 등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한다. 아이들은 각자가 조사한 내용을 발표하고, 그 내용 을 파일로 정성껏 만들어 여행길에 오른다. 녹음기도 가져간다. 워싱턴 D.C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국회의사당을 방문한다. 의원석 뒷 자리에 앉아 회의를 지켜볼 수도 있고, 흥미 있는 내용일 경우 녹음을 해 오는 아이들도 있다. 지루하지 않을까 싶지만, 예상 외로 아이들은 이 견학을 매우 좋아한다. 자기들이 사는 사회가 이런 식으로 결정되어 움직인다는 걸 신기해하는데, 이것은 평소에 미국 학교에서 사회시스템 이나 정치에 대해 중점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백악관도 빠지지 않는 코스다. 아이들은 백악관에서 있었던 유명대통 령의 일화, 역사적인 회담에 대해 교사들의 설명을 듣는다. (여담이지만 아이들이 가장 흥미를 갖는 대통령은 케네디와 빌 클린턴이라고 한다. 역시 젊고 잘생기고 개성이 강한 대통령은 세대를 막론하고 인기가 높 은가 보다) 링컨 기념관도 중요한 코스다. 이곳에는 미국의 역사가 모두 전시되 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아이들은 이곳에서 독립전쟁, 남북전쟁 등 오늘날의 미국을 이룬 중요사건들을 생생하게 공부한다. 그런 후 웰 링턴 국립묘지를 참배한다. 소박해 보이는 여행이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 여행을 통해 자신 이 미국인임을 자각하게 되고, 이 기억을 평생 가져가게 된다. 다양성

68 이 가져올 수 있는 심리적 분열 을 방지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인 것 이다. 클럽활동 중심의 여행 프로그램 하지만 학교나 학급 단위로 몰려가는 여행은 초등학교 시절에 대부 분 끝난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 학교생활이 클럽 활동 위주로 구성되기 때문 이다. 아이들은 자기의 관심분야에 따라 역사, 스포츠, 예능 등 다양한 분야의 클럽에 들어가는데 각 클럽에서는 각자 자기들의 취향과 목적에 맞는 여행지를 스스로 고른다. 예를 들어 우리 조카는 철도를 연구하는 클럽에 들었는데 방학 때마 다 미국 각지의 철도를 보러 다닌다. 덕분에 그 아이 방은 철도사진으 로 도배가 되어 있다. 각 철도의 역사와 그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기 록해 놓은 파일은 조카의 보물1호다. 우리는 딸만 둘인데, 모두 음악클럽에서 활동하고 있다. 큰아이 는 플루트, 작은아이는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음악클럽은 정기발 표회 외에 소외계층을 위한 자선연주회를 자주 연다. 지역사회의 병원이나 고아원에서 자선연주를 하기도 하지만, 아예 더 멀리 연주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떠날 때는 반드시 테마를 정한 다. 예를 들어 에이즈 환자를 위한 자선연주회, 인디언보호구역 철폐를 위한 평화연주회 등으로 그 연주여행의 목적을 분명히 한 다. 바자회를 통한 학교와 지역사회의 만남 하지만 정말 기특한 것은 이러한 여행 대부분을 아이들이 자발적으 로 기획하고, 비용조차 아이들이 스스로 마련한다는 사실이다. 여행목 적지가 정해지면 아이들은 각자 자기가 가진 재능을 총동원해 음식이나

69 물건을 만들어 바자회를 연다. 학생들의 바자회니 그 수준이 낮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워낙 다양한 인종이 살다 보니 독특한 것들을 참 많이 볼 수 있다. 아랍 아이 들은 자기들 전통의 난 이라는 빵을 구워 팔기도 하고, 일본 초 밥, 한국김치까지 등장한다(물론 어머니 솜씨겠지만). 아무튼 이 런 이유 때문에 학생들의 바자회는 자연스럽게 주민들의 사교장 이 된다. 그런 자리를 통해 교사와 학부모들이 자연스럽게 만나 아이의 장래문제를 함께 논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래저래 바자 회는 중요한 행사다. 흔히 미국 학생들은 돈이 많아 외국여행도 자주 갈 것이라고 생각한 다. 하지만 자기 힘으로 경비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학창시절에 외국 여행을 하는 것은 몹시 어렵다. 게다가 미국은 국토가 너무 넓어서 이 웃 주( 州 )로 여행만 가도 해외여행을 가는 기분을 느낀다. 심지어 하와 이로 여행 간다고 하면 동네 전체에서 화제가 될 정도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미국 학교의 여행프로그램에서 가장 중 시하는 것이 공동체정신 과 사회기여정신 이기 때문이다. 먼저 내 나라 내 땅을 여행하고, 내가 사는 나라가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를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여행의 첫 번째 목표다. 그리고 내가 가진 재능으로 이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두 번 째 목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참교육이 아닐까?

70 CASE 2 영국 다양성을 인정한다 입헌군주국인 영국은 아직도 귀족과 평민이 존재한다. 이들은 전혀 다 른 삶을 살고 있지만 상대편의 삶을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 립학교는 교과목 실력을 강화하기 위한 여행프로그램을 육성하는 반면, 일반학교에서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지역사회를 이해하고 개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도록 유도한다. 특히 이민자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있다. TRIP system - 학습능력 강화를 위한 여행 프로그램 영국 내 사립학교인 college를 중심으로 이루어 지는 프로그램으로 교과목 실력 향상 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매학기 커리큘럼에 맞추어 전과목 교 사들이 역사, 지리, 문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여행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여행을 통해 얻은 정보를 기록, 정리하여 교 과목의 보조자료로 활용한다. history trip : 그 학기에 배운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의 무대를 방문하고, 중요인물들의 사적을 견학한다. geographic trip : 영국 각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관찰하는 프로그램으로 각 지역의 자연형태와 부존자원 등을 연구한다. science trip : 과학자들의 사적을 견학하고, 교과서에서 배운 것을 현장에 서 학생들이 실험해 보게 하며 생명공학과 우주공학 등 첨단과학 현장을 견학한다

71 Your Roots, Your Community! - 지역사회에 뿌리를 둔 청소년 프로그램 - 특수한 사립학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국 일반학교들은 철저히 지역 사회 중심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따른다. Your Roots, Your Community!"라는 슬로건이 말해 주듯, 자신이 사는 지역의 문화예술유 산과 지역성을 충분히 이해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또한 과거- 현재-미래의 차원을 세대를 통해 전수하고 나누는 과정 역시 지역 과 연관시키고 있다. 살아움직이는 과거-회상실 Warrington시의 청소년 그룹이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고 있는 winwick 종합병 원의 노인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이다. 노인들의 유년기에 해당하는 1940년대를 주 제로 정해 실내를 1940년대풍으로 꾸미고, 학생들과 노인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1940년대에 그 지역에서 있었던 일들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청소년들은 지역사회 역사를 알게 되고, 지역사회 전체가 이 프로그램에 협조하여 세대 간의 벽을 허물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이후 세대 간 소통 프로그램의 전범 이 되었다. 연령교환극장 프로그램 지역사회 청소년들이 노인들과 함께 연극이나 공연, 전시회 등의 공동 프로젝트 를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청소년은 노인 세대가 좋아하는 아이템을, 노인들은 청소 년 세대가 좋아하는 아이템을 선정하여 연구한다. 이 프로그램에는 지역의 예술가 들과 영화제작자들까지 협조해 대본과 드라마를 함께 만들기도 한다. 이 프로젝트 는 교육용 CD로 제작되어 영국 각지로 퍼져나갔으며 오늘날 영국의 중요한 사회통 합프로그램으로 확립되고 있다

72 인터뷰 학교 안 공부, 학교 밖 공부 김 은 미 (지우에듀 컨설팅 대표) 보수적인 영국의 사립학교 내 아들은 영국의 한 college에서 공부했다. college라고 하면 우리나 라에서는 단과대학 을 말하는데 영국에서는 좀 복잡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 케임브리지 대학 나왔대. 라고 간단하게 말하 는데 여기서 말하는 케임브리지 대학 은 university 개념이다. 그런데 영국 대학들은 이 university 안에 여러 개의 college가 있다. 이 college들은 각기 독자적으로 학교를 운영한다. 물론 재원조달도 독자적이다. 따라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사람은 케임브리지 대 학의 뉴햄 칼리지를 나왔대."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내 아들은 대학생이 아니었다. college라고 불리긴 하지만 3 살짜리 유아부터 18살짜리 청소년이 함께 다니는 사립학교였기 때문이다. 즉, 한 학교 안에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것이다. 따라서 college라고 하는 것은 독립된 사립학교를 지칭하는 말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영국은 이탈리아와 함께 최초의 대학이 들어선 교육강국이다. 그런데 최초의 대학이 왕족이나 귀족, 혹은 유명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사립학교가 많이 발달했다. 따라서 좀 보수적인 색채가 짙고 규율 도 엄격하다

73 교과목 강화를 위한 Trip system 엄격히 말해 영국에는 한국적인 의미의 수학여행이란 것이 없다. 하 지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학습여행 이라고 하는 것은 있다. 이것을 간단하게 trip'이라고 부른다. 원래 trip 은 가벼운 여행을 의미한다는데 사실은 전혀 가볍지 않다. 영국 학교의 trip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history trip, geographic trip, 그리고 science trip이다. 용어만 들어 봐도 알겠지 만 모두 교과목 위주의 여행이다. 학과 담당교사들은 한 학기 내내 공부한 것 중 가장 중요한 아이템을 잡아 그것을 중 심으로 여행계획을 짠다. 예를 들어 역사 과목의 경우, 그 학기에 빅토리아 시대를 중점적으로 공부했다면 우선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모 든 자료를 모으고, 박물관 견학프로그램을 짠다.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 했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콘서트도 찾아본다. 좀 더 센스 있는 교사라면 제인 오스틴 의 생가를 방문하는 프로그램 을 넣을 수도 있다. 제인 오스틴은 빅토리아 시대를 가장 잘 묘사한 작 가로 손꼽히기 때문이다. 뜬금없지만 탐험가 리빙스턴에 대해 조사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리빙스턴은 빅토리아 시대에 활약한 탐험가이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아프리카의 폭포에 빅토리아 폭포 라는 이름을 붙인 장본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history trip 프로그램을 짜는 데 있어서 역사 과목 교사 뿐 아니라 영어 교사, 과학 교사, 음악 교사, 미술 교사, 지리 교사에 이르 기까지 다양한 인력이 함께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내 준다. science trip 프로그램을 짤 때도 마찬가지다

74 이렇게 해서 science trip, history trip, geographic trip을 한 번씩 거치고 나면 그 학기에 배운 웬만한 교과 내용을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하는 교육 또한 영국 학교는 스포츠 교육을 강조한다. 주로 축구나 폴로, 크리켓 등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스포츠를 중점적으로 지도하는데, 사회생활을 좀 더 유연하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수영을 잘하는 아이보다 축구와 폴로를 잘하는 아이를 더 우수하게 생각하는 풍조도 이들이 사회생활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보여 주는 현상이다. 영국에는 아직도 우리나라의 교련 과 비슷한 과목이 있다. 학 생들은 매학기 의무적으로 교련을 배워야 한다. 군복을 입고 체력 단련도 하고 응급처치요령과 사격도 배운다. 정기적으로 단체여 행도 떠나는데, 말이 여행이지 사 실은 극기훈련 이다. 숲에서 야영 하고 참호를 파는 등 준군사교육 같은 커리큘럼이 갖춰져 있다. 어린 학생들이 그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좀 안쓰러운데 정작 학 생들은 별 불평 없이 이 과정을 이수 한다. 이유를 물으면 하나같이 국가 를 지키는 것이 내 의무 라고 대답한 다. 어려서부터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를 확실하게 교육시 킨 영향인 듯하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 포틀랜드 전쟁 때, 영국의 앤드류 왕자가 참전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앤드류 왕자는 특별대우 일절 없이 일반군인들 과 똑같이 생활하고 전투에 임했다. 그런데 영국인들 어느 누구도 그것

75 을 대단하다고 보지 않는다. 많이 누렸으니 많이 베푸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우리 실정에 맞는 프로그램을! 아무튼 교육선진국에서 짧게나마 학창생활을 한 것은 행운이다. 하지 만 인삼도 체질에 따라 누군가에는 독이 되듯이 교육정책 또한 그 사회 와 국민의 특성을 잘 고려해야 할 것 같다. 영국은 특수한 나라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왕실과 귀족을 인정하며 성문화된 헌법 없이 나라를 운영하는 곳이다. 혁명이나 개혁보다는 조 용한 수정을 선호한다. 이것은 개혁 성향이 짙고 평등정신이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교육성을 강화한 trip 시스템 역시 분명 많은 미덕을 가졌지만 창의성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실, 여행이라고 하는 것은 일상을 탈출하여 마음껏 해방감에 젖어 보는 기회이자 지친 몸과 영혼에 휴식을 주는 시간이 아닐까? 따라서 굳이 목적성을 강하게 띠지 않고 친구와 선생님과 오붓한 시 간을 즐기는 소박한 여행도 청소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영국의 trip 제도가 가진 탄탄한 커리큘럼과 교육효과를 우리 나라 실정에 맞춰 수정한다면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고 생각한다

76 CASE 3 프랑스 자발적으로 체험하라 프랑스 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자유 다. 그 다음은 행동 이라고 한다. 역동적인 사고와 실천을 강조하는 프랑스 인들의 특징은 교 육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프랑스에서는 유아부터 청소년에 이르기까 지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 센터를 갖추어 놓고, 어린 시절부터 가능한 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바캉스센터와 여가센터 - 다양한 탐험과 놀이 체험 - 프랑스에서는 바캉스센터 와 여가센터 를 중심 으로 청소년 수련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다. 바캉스센터 는 방학기간과 여가시간에 12명 이 상의 17세 이하 미성년자를 연속 5일 이상 수용하 는 시설을 말한다. 여가센터 는 학교공부 시간 외에 8인 이상 300인 미 만의 17세 이하 청소년을 대상으로 연 15일 이상의 청소년 프로그램을 만든다. 성 탐사 프로그램 역사교육과 지리교육, 그리고 체력단련을 아우르는 종합프로그램으로 프랑스 내 에 있는 여러 성을 탐사한다. 참가자들은 매일 다른 캠핑장소에 머물면서 각 성의 구조와 성에 얽힌 역사를 공부한다. 이를 통해 프랑스 유적과 역사에 대한 관심을 드높일 수 있다

77 소형로켓 프로그램 한적한 전원이나 교외지역 별장에서 머물며 소형로켓을 만든다. 이 활동 을 통해 참가자들은 로켓의 비행, 무게중심, 발사대, 반응-재반응 현상, 평 행회로 등등의 여러 가지 개념을 배우고 알게 된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소 형로켓을 상상하고 만들어 하늘로 날려보는 짜릿한 체험을 한다. 노는 꿈 프로그램 아름답고 고풍스런 프랑스 식 농가에서 합숙하면서 다양한 놀이를 하는 프로그 램이다. 단체놀이, 고전적 놀이, 모험놀이, 역할놀이, 시뮬레이션놀이, PC망을 통한 놀이, 비디오 게임, 컴퓨터 작업, 경찰조사놀이, 자연탐험놀이, 보자기놀이, 추적놀 이, 물놀이, 펜싱, 활쏘기 등 다양한 놀이를 통해 사회법칙을 익히고, 공동체 의식을 기른다. 도전 청소년 정책 - 연구와 취업준비를 도와 주는 수련 프로그램 - 15세에서 28세 사이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어떤 영역에서든 청소 년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바를 지원해 주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주로 취 업과 관련하여 청소년들이 스스로 세운 프로젝트의 완성을 지원해 준 다. 청소년들은 하고 싶은 일을 지역사회 청소년 체육실의 도전 청소년 담당자에게 신청하고, 하고 싶은 일을 실현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를 구 상한다. 제출된 프로젝트들 가운데 우수 프로젝트를 선정하여 수상하기 도 하며 수상자들은 상금과 후원자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완 성한다. 대표적인 수상사례는 아래와 같다. 촉각 가이드 시스템 을 개발한 파비안느 베커 평범한 고교생인 파비안느 베커는 출구를 찾으려다 벽에 부딪히는 시각 장애인 을 보고 촉각 가이드 시스템 을 생각하게 되었다. 촉각 가이드 시스템은 지팡이 손 잡이나 손목에 장착할 수 있으며, 레이저 발사기와 탐사기로 작동한다. 그 시스템에

78 도달하는 건물 내 방향 정보는 벽이나 천정에 붙여 놓은 고무패치를 통해 전파로 전달된다. 현재 파비안느 베커는 이 장치를 전문적으로 생산해 내는 회사를 세워 운 영하고 있다. 사진작가가 된 세바스티안 판티니 사진에 관심이 많은 고교생 세바스티안 판티니는 광부들의 일상생활에 관한 사 진기록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지하 1000미터 아래에서 광부들이 일상생 활을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생생하게 담아냈는데 이 작품으로 프로사진작가의 자 격을 얻었다. 인터뷰 세계인과 친구가 되는 여행 허 봉 금 (KBS통신원, 파리 라데팡스 거주) 여행을 통한 교육 을 강조하는 전통 내 딸은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직업 때문에 프랑스에 뿌리내리게 된 우리 부부는 고민 끝에 사빈 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사빈은 프랑스에서 가장 즐겨 쓰는 이름이자 한국이름으로도 별로 어색 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유럽에서 외국인 혐오증 이 강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마 나 프랑스는 아직까지 외국인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곳이라고 본다. 프 랑스 혁명의 뿌리인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교육의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랑스 학교에서는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프랑스 역사뿐만

79 아니라 세계역사와 정치에 대한 공부를 강조한다. 물론 사회문제에 대 해서도 끊임없이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다. 국경 없는 의사회 를 비롯, 세계적인 봉사단체들이 프랑스에 뿌리를 둔 경우가 많은데 이것 역시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교육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예로부터 유럽의 상류사회에서는 자녀가 어느 정도 크면 반드시 혼 자 여행을 떠나게 했다. 그것은 단순한 여가활동이 아니라 일종의 유 학 으로 간주되었다. 왕족과 귀족들을 위한 여행가방을 전문적으 로 만들다가 세계적인 브랜드가 된 루이비통 역시 여행을 통한 교육 을 강조하는 유럽의 전통이 낳은 독특한 역사일 것이다. 세계시민 양성을 목표로 그래서인지 프랑스에서는 모든 학교에서 다양한 여행프로그램을 실 시하고 있다. 하지만 단체수학여행 이라는 것은 전혀 없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프랑스 학교에서는 담임교사가 바뀌지 않는다. 입학식에서 만난 담임교사가 졸업식장에까지 함께 있는 시스템이다. 무엇을 가르칠지, 어디를 여 행할지를 모두 담임교사가 결정한다. 자 연히 담임교사가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 가에 따라 학생들의 관심사는 물론 세계 관까지도 달라진다. 아, 한 가지 빠진 게 있다. 프랑스에서 는 외국어를 중시한다. 그래서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는 프랑스 어 외에 제2외국 어를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는 다. 학급도 아예 독일어 반, 스페인어 반, 이런 식으로 나눈다. 사 빈은 독일어반이다. 사빈의 담임선생님(독일어 반 담임이니 독일어가 능숙하다)은 교육 세미나에 참가했다가 독일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프랑스 어

80 를 가르치는 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이렇게 여러 나라 교사들이 세미나를 통해 교류를 할 기회가 많다. 홈스테이와 교환학생제도 독일어를 하는 프랑스 교사와 프랑스 어를 하는 독일 교사는 금방 친 해졌다. 우리끼리는 이렇게 친하지만 사실 세계대전 때 우리 독일이 저 지른 만행을 생각하면 이웃나라 아이들에게 부끄러워집니다. 그 래서 저는 제자들에게 늘 말하죠. 부끄러움을 알라, 선조들의 죄 를 잊지 말라, 우리는 이웃나라에 빚이 있다고. 저 역시 말합니다. 비록 독일의 이름으로 끔찍한 학살이 자행되었고 많은 프랑스 인들이 죽었지만, 목숨을 걸고 프랑스 인과 유대인을 구한 독일인들도 많다고. 그러니 역사는 잊지 않되, 독일인들 전체를 오해하 지는 말라고. 그해 여름, 사빈은 몹시 흥분했다. 20명이나 되는 독일학생들이 독일교사의 인솔 하에 사빈의 학교로 찾아온 것이다. 프랑스 아이와 독일 아이는 한 명씩 짝을 이루었다. 사빈은 카를 이 라는 소년과 짝이 되었다. 이렇게 짝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무엇 이든 함께하게 된다. 수업도 함께 받고, 밥도 함께 먹고, 홈스테이 도 한다. 공동연구와 공동수행 중요한 것은, 이렇게 연합반이 결성될 때, 한 가지 공동연구주 제를 준다는 것이다. 그 해, 사빈의 반이 받은 주제는 아우슈비츠 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 사빈과 카를은 함께 도서관과 인터넷을 뒤지며 아우슈비츠 에 대 한 자료를 찾았다. 여행준비물도 함께 챙겼다. 그 사이, 사빈은 독

81 일어를, 카를은 프랑스 어를 썼는데 그 모습이 참 신기하면서도 보기 좋았다. 아우슈비츠 견학을 떠난 다음날, 사빈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 카를이 충격을 많이 받았나 봐요. 위로해 주다가 저도 울 었어요. 견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는데 이때도 사빈과 카를은 함께였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보고서를 쓰되 사빈은 독일어로, 카를은 프랑스어로 써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두 아이는 서로를 열심히 도울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을 통해 외국어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 다. 카를이 보고서 점수를 A'학점으로 받았을 때 사빈은 마치 자기 일 인 양 기뻐했다. 사람 만나는 것이 곧 공부 이렇게 카를이 보름간 머물다 돌아간 다음해에는 사빈이 카를의 독 일 집으로 가서 보름간 머물며 똑같은 과정의 공부를 했다. 더 신기한 것은, 그 사이 우리 어린 아들이 카를과 친해져, 지금은 그 아들녀석이 카를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학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평등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 두 다르기 때문에 획일화된 교육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여행도 학급이나 학교 차원의 단합심을 키우는 것 이 목적이 아니라 학생 개개인이 좀 더 넓 은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프랑스에 수학여행 이라는 말 자체가 없는 이유는 아마도, 여행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사귀는 과정 전부가 공부라고 생각 하는 자세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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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May 194호 2015년 5월 15일(금요일) 07 (10) 경인지역 뉴스의 중심에 서다 - KBS 보도국 경인방송센터 KBS 보도국 경인방송센터 이민영 팀장 공영방송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수신료 이메일, 메시지 등을 통해 업무에 관해 소통을 하죠. 뉴스가 끝나고 업무를 마감하면 10시가 좀 넘어요. 를 납부하는 시청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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