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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8편 사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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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8편 사회 제1장 사회단체 제1절 개관(사회조직의 기능) 제2절 고창군의 사회단체 제1장 사회단체 619

4 고창군의 사회단체 내역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고창군의 사회단체 현황 (2009년 7월 현재) 연번 단 체 명 고창군민참여연대 고창발전협의회 고창군이장단협의회 고창군애향운동본부 농촌지도자회 농업인단체협의회 고창군생활개선회 농가주부모임회 고창군4-H연맹 고창군4-H연합회 고창군수도연구회 고창군농민회 농업경영인연합회 고창군여성농민회 고인돌농악단 전북역사문화학회 고창군지회 모양성 보존회 고창군치과의사회 고창군의사회 고창군약사회 고창군한의사회 고창양계(산란계)협회 자연보호고창군협의회 고창군낙우회 고창군한우협회 관상수 협회 고창군양돈협회 고창양계(육계)협회 국제와이즈맨고창클럽 고창군새마을부녀회 고창군자원봉사단체협의회 고창군자율방범연합회 고창군바르게살기협의회 새마을지도자협의회 JCI KOREA-고창 고창라이온스클럽 37 고창청년회의소(JC) 제 8편 사 회 사회단체 내역 대표자 주 소 남선옥 흥덕면 용반리 557 박상근 고창읍 읍내리 666 신종원 대산면 덕천리 194 조병채 고창읍 읍내리 663 류제준 고창읍 덕정리 317 류제준 고창읍 덕정리 317 석순덕 성송면 향산리 이양금 고창읍 내동리 395 정영진 고창읍 동백아파트 가동204호 조용채 고창읍 월곡리 하이빌 C동 201호 현홍순 심원면 만돌리 267 김주성 고창읍 덕산리 850 신연수 부안면 검산리 287 정경자 고창읍 읍내리 김상수 고창읍 읍내리 송영래 고창읍 읍내리 진남표 강기원 강신녕 임병준 정기상 김재영 박재철 오금열 오덕상 유동균 이석주 정병은 강대식 고행순 김경수 김범진 김복동 김용호 김재영 김종문 고창읍 월곡리 586 고창읍 읍내리 고창읍 읍내리 고창읍 읍내리209 고창읍 읍내리 고창읍 읍내리 흥덕면 흥덕리 대산면 갈마리 갈마 흥덕면 흥덕리 35-2 고창읍 교촌리 태양A 나동 301호 고창읍 읍내리 1138 성송면 암치리250-1 고창읍 읍내리 심원면 만돌리 267 고창읍 읍내리 439 무장면 성내리 230 고창읍 월곡리 620 공음면 선동리 782 고창읍 교촌리 아산면 삼인리 고창읍 읍내리 성산임대아파트 102동 307호 김진수 비고

5 사회단체 내역 연번 단 체 명 대표자 주 소 비고 38 김형영 39 박성학 40 박현규 41 성호익 42 송봉아 43 안세환 44 유병천 45 이종해 46 정남조 47 조용선 48 최광수 49 최종탁 50 함흥식 51 홍성금 52 홍종섭 53 강연화 54 김가순 55 김경수 56 김기순 57 김백호 58 김상선 59 김양기 60 김영호 61 김원중 62 김정숙 63 김정옥 64 김현순 65 김현순 66 라홍찬 67 류제구 68 박순희 69 서형수 70 손일석 71 신 욱 72 심재규 73 이경환 74 이윤호 75 이효순 76 전옥선 77 정수원 제1장 사회단체 621

6 사회단체 내역 연번 단 체 명 대표자 주 소 비고 78 조기환 79 조천호 80 최구언 81 최희수 82 홍정미 83 권오섭 84 유정일 85 이영식 86 박영길 87 김 충 88 박완실 89 정순화 90 정현도 91 최병권 92 최윤희 93 심재규 94 한재영 95 김영렬 96 변정옥 97 김현순 98 김혜옥 제3절 사회운동 1) 사회운동과 지역사회 622 제8편 사회

7 2) 고창지역의 농민운동 제1장 사회단체 623

8 은 주로 일본인 소유의 농장이었다는 점이며, 셋째, 소작쟁의의 형태는 주로 시위의 형태로 나타 났다는 점이다. 일시적으로 소작료 불납동맹을 결성하기도 하였고, 그 가운데 몇 사례에서는 폭력 적 충돌로 인한 부상자 및 구속자가 나오기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창지역에서의 소작쟁의 건수에 대한 연도별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고창군에 있어서 소작쟁의 건수의 추이(1930~1939) 단위: 건 구분 1930 고창군 계 536 자료: 천전교이 항일농민운동 지역적 특징, 603면에서 재구성. 또한 수리조합 반대운동은 보다 복잡한 형태로 나타났다. 원래 수리조합은 토지개량사업의 일 환으로 농업생산성을 증대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설립되었다. 그러나 수리조합은 일반 농민보다 는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고 식민지 지주제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기능하였던 까닭에 농민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즉 수리조합의 결성 자체가 대지주의 일방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었음에 도 불구하고 수리조합의 결성으로 인하여 소작료의 대폭적인 인상이 단행되고 그에 대한 부담이 일반 농가에 전가됨으로써 농민들의 빈곤화가 더욱 증폭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창군의 수리 조합 반대투쟁은 1924년 8월 고창군 공음면 두암리 700여 명의 농민들에 의해서 벌어졌다. 당시 공음면에서는 수리조합을 만들면 세금을 비싸게 물게 된다고 속여 싼값에 많은 땅을 사들인 사기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에 대해 농민들이 격렬히 항의함으로써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당시의 기록 에 의하면 고창지역에는 이러한 투쟁을 이끌었던 소작인 단체 등 14개의 농민운동 단체가 결성되 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고창지역의 농민운동은 각 시기마다 농민들에 대한 부당한 억압에 맞서 가장 주체적으로 싸워 왔으며 이러한 농민운동의 전통은 최근 삼양사 소작투쟁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하겠다. 624 제 8편 사 회

9 제2장 언론 제2장 언론 625

10 626 제8편 사회

11 제2장 언론 627

12 제3장 동학농민혁명과 고창과의 관계 제1절 동학농민혁명의 배경 역사의 물결에는 항상 그 시대의 주인공이 있었다. 삼국시대의 주인공이 무사(武士)였다면 고 려의 주인공은 무인(武人)과 승려였고, 조선의 주인공은 양반이었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에 밀어 닥친 근대화의 여명과 더불어 민중이 새 역사의 역량과 결단을 내리게 되었고, 여기에서 싹튼 궁 반(窮班)과 천민의 저항은 유교적이고 봉건적인 질서와 양반사회의 퇴폐에 대한 윤리적 항변으로 비약되어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형태로 나타났다. 시민사회가 귀족사회를 무너뜨린 불란서 혁명 으로 역사의 궤도를 달리하게 되었던 19세기 말 영국의 자본주의 체제로 세계적 조류와 정세가 일대 방향 전환의 물결을 크게 일으켰다. 바로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도 사대와 봉건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대적 요청 속에 그 역사의 전통이 맨 처음 전라도에서 세워졌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권운동의 새 장은 동학농 민혁명의 농민봉기로 표출되었다.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은 청일전쟁의 유발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만 요원하게 인식되었다. 때문에 반봉건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전주화약, 폐정개혁안 집강소 부분과 반제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제2차 농민봉기의 목적에 대한 서술이 도외시되어 반봉건, 반침략을 표방하고 전개된 동학농민혁 명이, 우리나라 역사와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꿔 놓은 일대 역사적 사건이라는 점, 우리민족해방 운동사 또는 민중운동사의 시발점이 뚜렷하긴 하나 아직도 그 성격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 고 있다는 점 등은 어느 뜻있는 학자에 의해 우리 역사가 식민사관과 민족사관의 괴리에서 자기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동학이 우리나라 근대 100년사에 미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동학 농민혁명은 반봉건ㆍ반사대ㆍ반침략주의의 기치 아래 민족의 자주의식과 인권 및 자유의 존엄성 을 일깨워 주었고, 아울러 자주독립의 정신적 근간을 이루어왔다. 이와 같은 천하의 대본을 민심에 둔 이 혁명은 민권ㆍ민생의 바탕 위에 민족의 자조ㆍ자율ㆍ자 강을 위한 민중의 항전으로서 당시 사회상이던 정치적 부패, 탐관오리의 행패, 세금의 과중 등으 로 농민은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고, 특히 외국 세력의 침투로 국가의 위험이 가중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농민들은 막연하게나마 외국의 침략을 물리치고 정부의 개혁을 요 628 제 8편 사 회

13 구하는 풍조가 싹트게 되었으며, 동학은 이러한 정세를 배경으로 급속도로 발전, 단순한 종교를 넘어 농민들의 사상을 뒷받침하고 사회개혁과 외국 세력의 배척을 포함하는 정치적인 세력으로 삼남지방에 급격히 전파되었다.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은 축소지향정책(縮小指向政策) 에 따른 일제의 간계와 이에 동조한 친일 학자들에 의해, 그리고 이러한 맥락 위에서 무모하게 인용하여 온 일부 학설들에 의해 불과 1세기 도 안 된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베일에 가려져 역사의 뒤안길을 맴돌아 온 것이다. 이로 인하여 마땅히 세계사조의 물결 속에 새 역사의 장으로 열려졌어야 할 동학농민혁명의 빛깔은 그 당시 탐관오리의 상징으로 부각된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에 대한 단순한 농민들의 불평불만에 대한 봉기로 얼버무려 버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봉기한 농민들을 외세에 대응하여 저 항의식이 투철하였던 동학군 들의 단순한 농간으로 몰아붙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당시의 전라도는 곡창지대로 관리의 토색질이 가장 많았던 곳으로서 대규모의 민란이 27 회나 발생하였던 곳이다. 이 고부의 민란은 동학농민혁명의 직접적인 동기를 이루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혹세무민한 가렴주구에 분격한 농민들이 폭발적으로 봉기하였던 것이다. 제2절 민중의식의 요람지 고창지역의 맥 한편 고창지역에서 농민군 봉기가 이루어졌던 전통적 배경을 살펴보면, 고창지방은 산이 있고 강이 있어 비옥한 평야가 조성된 데다 금상첨화로 칠산어장이 있는 서해바다를 끼고 있어 천혜조 건이 좋은 고장으로서, 고려시대에는 국가 유공자들에게 베풀던 사패지(賜牌地)의 명지(名地)가 되어 이른바 명문가의 후예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해서 고창은 고려가 망한 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의식이 투철했던 고려 유 민들이 모여 사는 고장으로 알려지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선택받은 백성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조선조에서는 사로(仕路)를 등진 채 전원생활을 즐기는 뜻있는 선비들의 요람으로 국란에 이르 면 충의를 앞세워 목숨을 바치는 의절을 지켜 의향을 정립하였고, 농한기에는 학문을 닦으면서 예와 악을 즐기게 되어 판소리의 성지가 되었다. 그리고 소작인들을 즐겁게 고무 격려하는 마당놀 이가 성행하여 풍물굿의 원조가 되었으며 여기에서 민중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또한 격조 높은 선비 고을인지라 그 밑의 서민층들도 상전들의 든든한 배경과 전통적인 우월의 식이 더불어 팽배하게 배이게 되어 이른바 깡치 있는 민중의식이 여물어서 무장(茂長)은 일찍부 터 아전자랑의 고을로 알려지게 되어 부임하는 수령들이 골치를 앓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중인ㆍ천인들까지도 뼈대를 추리는 입장인데다 불의와 타협이 철저하게 배제되고 제 3장 동 학 농민 혁 명과 고 창 과의 관 계 629

14 있는 선비 기품의 영향을 받아 야당적 기질이 지금까지도 두드러진 곳이어서, 18세기의 극도의 정 치적 부패 상황에 좌시 묵과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이에 대처하는 민중의 싹이 트게 되었다. 여기에다 꿈틀거리는 민중의식에 불을 붙이고 구슬을 꿰어낼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우 순풍조를 맞게 되었다. 무장 고을에는 천안전씨 문효공 신(信)의 손자 덕린(德隣, 고려 우왕 10(1384년), 천안에서 출 생)이 고려 유민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조용히 무장 장사산 남쪽 정동(井洞)에 낙향하여 20대를 세거하면서, 공음면 신대(新垈), 구정(九井)등에 100여 세대가 살았는데, 고창 당촌에서 13세 때까 지 살다 떠난 전봉준이 가난하지만 뜻이 깊은 선비로 성장하여 그 뜻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민중의 식이 투철한 무장 사람들의 기질을 찾아들게 된 것이다. 손화중 접주와 연계되면서 전봉준이 찾은 곳은 비밀이 보장되고 숙식이 해결되는 1등 보호 은 닉처인 구정동 문효(柏軒)공파 일가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동학교도와 젊은 일가 그리고 고창 당촌에 살 때 그의 아버지(全暢爀)가 훈 장으로 있었던 서당촌 친구들을 중심으로 해서 모집할 수 있었던 의기 넘친 청장년들의 규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민중의식이 강한 사람을 모은 전봉준은 그의 활동 본거지인 구정마을 뒷산(九笛山) 너머 골짜 기에서 농한기에 은밀하게 농민혁명군을 양성할 수 있었던 여건 조성의 성숙된 배경이 있었음을 향토 사료와 고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엮어 본다. 제3절 동학농민혁명의 서막 1. 고부민란(古阜民亂) 고부는 동진강, 정읍천, 팔왕천, 초강천, 고부천 등이 그 관할 지역 안으로 흘러, 고부평야, 팔왕 평야, 배들평야, 백산평야, 수금평야, 화호평야 등이 형성되어 비옥한 농토와 서해안의 풍부한 해 산물까지 얻을 수 있는 천혜의 낙토로서, 군내 제일의 곡창지대가 되어 전통적으로 지배층의 수탈 행위가 극심한 곳이었다. 더욱이 개항 이후에는 대일 쌀 수출항인 줄포항까지 있어 쌀 수출과 관 련하여 지주제가 강화되고 농민들의 몰락이 가속화된 지역이었다. 1893년 11월 고부 배들(梨坪) 농민들의 보세감면 원성으로 익산군수로 밀려났던 조병갑은 그 배경이 든든해서 임지에 부임도 않고 오히려 전라감사 김문현을 통해, 고부 전 군수 조병갑은 많 은 포흠을 청산하고자 때마침 세를 받아들이려는 참인데 다른 고을로 옮기게 되면 착오가 생길 630 제 8편 사 회

15 2. 동학농민전쟁 제 3장 동 학 농 민 혁 명 과 고 창 과 의 관 계 631

16 공초를 보면 이를 명백히 알 수 있다. 그 기록을 간추려 보면, 첫째, 전봉준은 4천여 명의 농민군을 규합해 무기와 식량을 준비한 다음 제1차 농민전쟁을 무장 에서 일으켰다. 둘째, 먼저 고부를 친 다음 계속해서 태인 원평 금구로 진출하였다. 셋째, 농민군이 금구에 진출했을 때에 전라 감영군 만여 명이 농민군을 진압하러 온다는 정보를 듣고 일단 고부로 물러갔다. 넷째, 농민군은 금구에서 부안을 거쳐 고부로 후퇴하다가 관군을 만나 밤 낮 하루를 격전한 후 전라 감영군을 무찌르고 승리했다. 여태까지는 황토재 전투가 농민군이 고부에서 전주로 진출하다가 승리한 전투로 알려져 있었는 데, 실제는 전주로 진출하다가 길을 바꾸어 고부로 돌아가면서 승리한 전투였다. 다섯째, 농민군은 황토재 전투에서 이긴 후 정읍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의 경로로 진출하여 장성에서 경군(7백명)을 격파하고 주야로 강행군하여 4월 26일과 27일에 관군보 다 앞서 전주에 무혈입성 하였다. 여기에서 첫째 - 셋째까지의 사실은 종래 전혀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이었음을 밝혀둔 다. 또한 종래의 학계에서는 무장에서 포고한 창의문도 고부기포 후 전주로 가는 도중 포고한 것 으로 해석하고 백산 격문 등보다 뒤에 포고한 것으로 판단했었다. 이 창의문은 음력 4월 9일 무장 에서 포고된 문건이 아니며, 당시 조정에 4월 5일에 접수된 그 이전의 무장에서 포고한 창의문으 로, 제1차 농민전쟁의 첫 무장기포 때의 창의 포고문인 것이다. 그럼 왜 제1차 농민전쟁이 고부에 서 일어나지 않고 무장에서 일어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배경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무장에 남접(南接)의 도소(都所)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접이 설치된 정확한 시 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에 도착하여 민란의 주동자를 색출하기 시작한 2월 29일 3월 3일경이 아닌가 생각된다. 무장에는 손화중이라는 대접주가 있었다. 손화중포는 전라도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영향 력이 막강하였다. 또한 손화중은 1년 전의 보은(報恩)집회 때 독자적으로 호남의 동학도를 모았던 금구취당의 두목이었다. 따라서 무장에 도소를 설치하면 단기간 내에 효율적으로 대규모의 동학 조직 세력을 도소의 지휘 하에 둘 수 있었다. 또한 고부 접주 전봉준과 무장 대접주 손화중은 단순한 동호접주가 아니고 서장옥 계열의 혈맹 적 동지였기에 상호 신임도가 절대적이어서 손화중의 막강한 조직력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무장 에 남접도소를 설치함으로써 동학의 조직과 활동을 종교의 범주에 국한시키려는 북접의 제약과 632 제 8편 사 회

17 간섭에서 벗어나 당시의 사회적 모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투쟁력을 발휘할 수가 있어 남접도소 설치의 중요성과 무장에서 기포하게 된 배경과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전봉준의 고부 우거지와는 달리 무장지역에는 소위 역적모의를 큰 불편 없이 도모 할 수 있는 천안 전씨 문효공파의 세거지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족을 붙이자면 고부민란의 바탕정신이 당시의 사회개혁이나 정치개혁에 확고한 목적의식을 두지 않고 거의 단순하게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해 이판사판으로 봉기했던 일 반 농민들이 박원명 신임 군수의 유화책으로 해산되고, 이후 고부 안핵사 이용태의 주모자 색출을 통한 강압과 위력에 눌려 고부지역 농민봉기가 다시 일어날 힘을 잃어버렸던 사실 정황도 묵과 할 수만은 없는 문제점이었다. 고부민란의 해산 이후 안핵사 이용태가 8백 명의 역졸을 이끌고 고부에 진을 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주동자와 참가자를 색출한다는 명분 하에 죄 없는 농민들을 마구 구속하고 재물 을 약탈하였으며, 민란에 가담한 자와 그 가족들을 학살하였다. 이러한 만행은 고부에서 뿐만 아니라 무장ㆍ태인ㆍ금구ㆍ정읍ㆍ김제ㆍ부안 등의 지역에서도 있었다. 이러한 이용태의 폭압 속에서 전봉준은 고부봉기에서 드러난 한계를 극복하고 농민전쟁 으로 진전시키기 위해 손화중과 김개남의 참여를 유도했다. 마침내 전봉준은 손화중, 김개남, 김 덕명 등의 전라도 남접계 주요 인물들과 손을 잡고 무장에서 기병할 수 있었다. 3월 16일 18일 사이에 사방에서 농민군들이 주야로 무장 동음치면(冬音峙面) 당산(堂山 : 현 공음 면 구수)마을 앞 강변에 천여 명이나 집결하였다. 그 수는 점차 불어나 4천군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들 중 수백 명은 법성 진량면(陳良面) 용현리(龍峴里) 대나무 밭에서 죽창을 만들고 민가에서 총포 등을 마련해 갔다. 3월 20일까지 일단의 봉기의 만반 태세를 갖춘 농민군은 처음으로 정부를 살대로 한 창의 포고 문을 선포하여 농민군이 일어난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주변의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제 폭구민, 보국안민의 대의를 위해 모두 일어날 것을 호소하였다. 이것이 본격적인 1894년 3월의 1차 봉기였다. <무장포고문>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김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군신과 부자는 가장 큰 인륜으로 꼽는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충직하며 아비가 자애롭고 아들이 효도를 한 뒤에야 국가를 이루어 끝없는 복록을 불러오게 된다. 지금 우리 임금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애로우며 지혜롭고 총명하시다. 현량하고 정직한 신하 가 있어서 잘 보좌해 다스린다면 예전 훌륭한 임금들의 교화와 치적을 날을 꼽아 기다려도 바랄 제3장 동학 농민 혁명 과 고창 과의 관계 633

18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신하가 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하려는 생각을 아니하고 한갓 작록과 지위를 도둑질하여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를 일삼아 충성스런 선비의 간언을 요사스런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匪徒)라 한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바깥으로는 백성 을 갈취하는 벼슬아치만이 득실거린다. 인민의 마음은 날로 더욱 비틀어져서 들어와서는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와서는 몸을 보존할 대책이 없도다. 학정은 날로 더해지고 원성은 줄을 이었다.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구분이 드디어 남김없이 무너져 내렸다. 관자가 말하길 사유(四維 : 예의염치)가 베풀어지지 않 으면 나라가 곧 멸망한다. 고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예전보다 더욱 심하다. 위로는 공경대부(公卿大夫) 이하, 아래로는 방 백수령(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거의 자기 몸을 살찌우고 집 을 윤택하게 하는 계책만을 몰두하여 벼슬아치를 뽑는 문을 재물 모으는 길로 만들고 과거 보는 장소를 사고 파는 장터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허다한 재물이나 뇌물이 국고에 들어가지 않고 도 리어 사사로운 창고를 채운다. 나라에는 부채가 쌓여 있는데도 갚으려는 생각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탕과 안일로 나날을 지새워 두려움과 거리낌이 없어서 온 나라는 어육이 되고 만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진실로 수령들의 탐학 때문이다. 어찌 백성이 곤궁치 않으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약해지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데도 보국안 민(輔國安民)의 계책은 염두에 두지 않고 바깥으로는 고향집을 화려하게 지어 제 살길에만 골몰 하면서 녹위만을 도둑질하니 어찌 옳게 되겠는가? 우리 무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나 임금의 토 지를 갈아 먹고 임금이 주는 옷을 입으면서 망해가는 꼴을 좌시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이 마음 을 함께하고 억조창생이 의논을 모아 지금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을 생사의 맹세로 삼노라. 오늘의 광경이 비록 놀랄 일이겠으나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면서 함께 태평세월을 축수하고 모두 임금의 교화를 누리면 천만다행이겠노라. 1894년 3월 20일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일단 무장에서 기포한 농민군은 고부로 진격하여 안핵사 이용태를 징벌하려 하였으나 이용태는 이미 나주 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634 제 8편 사 회

19 전봉준은 3월 22일 새벽에 농민군을 이끌고 무장을 출발, 정오에 자기 태생지인 고창 당촌(堂 村)에 이르러 점심을 시켜 먹고 고창성을 바라보며 유유히 진군, 오후에 흥덕 사포(沙浦)에 당도 그날 밤을 이곳에서 묵고, 23일 낮에 줄포(茁浦)에 도착, 신(辛) 부잣집에 의뢰하여 점심을 해결하 고 기다렸다가 어두운 저녁에 고부 관아를 다시 치고 들어가 접수한다. 전봉준은 각 처에 파발을 보내 25일 백산성에 집결할 것을 독려하는 한편 무장을 강화하여 백 산으로 진을 옮기고 호남창의대장소 를 설치하였다. 여기에는 남접도소 산하로 동학조직이 완료된 무장, 고창, 흥덕, 고부, 태인, 정읍, 부안, 금구, 김제 등 10여 개 인근 고을의 농민군과 전남지역 및 충청도의 동학도 등 전국 각지에서 합류된 8천여 군이 집결되었다. 백산에서의 농민군 확대 개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김개남ㆍ 손화중을 총관령으로, 김덕명ㆍ오시영을 총참모로, 최경선을 영솔장으로, 송희옥ㆍ정백현을 비서로 삼아 농민군의 규율과 체제를 엄격히 하는 동시에 각처에 통문을 보내 농민궐기를 선동하고 거사의 대의를 밝힘으로써 고부 백산의 봉기는 한 고을 민란의 테두리를 벗어나 집정에 도전하는 병란으로 성격과 규모를 달리하였다. 전봉준은 여러 지역에서 모인 농민군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농민군 4대 행동강 령과 농민군 수칙 12개조를 발표하였다. 4대 명의名義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물건을 파괴하지 말라 : 不殺人不殺物). 2) 충과 효를 모두 잘 보전할 것이며, 세상을 구제하고 인민을 편안케 하라 3) 왜(일본)와 오랑캐를 모조리 쫓아 없애고 성도(聖道,서울)를 깨끗이 하라 4) 군사를 몰아 서울로 들어가 권귀(權貴)를 모조리 없애라 동도대장 약속 1) 매양 적을 대할 적에는 병사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 이기는 것을 큰 공으로 삼는다. 2) 비록 부득이 싸우더라도 절대 인명을 상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3) 매양 행진(行陣)하여 지날 적에는 절대 사람과 가축을 해쳐서는 안 된다. 4) 효제충신(孝悌忠信)이 사는 마을 10리 안에는 주둔하지 않는다. 이때의 3월 봉기는 동학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농민 조직은 확대일로에서 제3장 동학 농민 혁명 과 고창 과의 관계 635

20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였고, 그 지도층에는 동학의 교도가 많게 되자 고부 일대의 수령들은 모두 도망하고, 각 관아의 구실아치와 군무속역(軍校) 등까지 사방으로 흩어져서 여러 읍성들은 동학농 민군에 대해 무방비 상태였다. 동학농민군은 항전의 대오를 갖추어 3월 29일(양 5월 4일) 태인현 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탈취하는 등 거의 같은 시기에 거사를 일으켰다. 고부민요일기 에 3월 20일(양 4월 25일) 무장동학군 수천 명이 굴치(고창군 부안면 오산리에 있는 고갯길)를 넘어 줄포를 통과하여 4월 3일 부흥역(현 부안군 행안면)에 이르고, 고창동학군은 3월 29일(양 5월 4일)에 출발, 무장과 고창의 동학군이 합류하여 4월 4일 부안 현아를 점령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백산 기포에서 주력을 이룬 것은 손화중포가 이끈 무장의 동학군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당초 동학농민군 계획은 무장에서 고부ㆍ태인ㆍ금구를 거쳐 전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때 백산기포에서 호응한 고창지방의 동학군의 출병 내력을 보면, 두령 오하영(吳河永)ㆍ오시영 (吳時永)ㆍ임형로(林亨老)ㆍ임천서(林天瑞)등의 영솔하에 1,500명, 무장의 두령 송경찬(宋敬贊) ㆍ강경중(姜敬重)등 영솔하에 1,300명, 흥덕 두령 고영숙(高永淑)영솔하에 700명, 그리고 군장급 인사로 고창에 홍낙관(洪樂觀)ㆍ홍계관(洪桂觀), 무장에 송문수(宋文洙)ㆍ송진호(宋珍浩)ㆍ장두 일(張斗一)ㆍ곽창욱(郭昌旭), 흥덕에 고영백(高永伯)등이 참가하였다. 농민군은 3월 29일 태인에서 무기를 접수하고 다음날 원평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감영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본진은 다시 행로를 태인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잔류부대는 부안의 부흥역에 주둔하였다. 농민군은 감영군과 접전을 벌이다가 부안 쪽으로 달아나 유인작전을 썼다. 4월 6일 감영군은 농민군을 추격한 끝에 황토재에 이르게 되고, 여기에서 보부상으로 위장하여 감영군 속에 있던 농민군의 인도 하에 농민군의 진영 쪽으로 들어오다가 미리 매복해 있던 농민군 의 공격을 받아 섬멸되었다. 이것이 황토재 전투이다. 황토재 전투에서 패한 감영군이 버리고 간 물품 중에는 민간인으로부터 약탈한 금ㆍ은 보화가 가득하였고, 또 전사자 중에는 남자로 변장한 여자의 시체도 다수였다고 하니 감영군의 군기가 형편없었음을 엿볼 수 있다. 4월 7일 정읍의 관아를 습격하여 군기를 접수하였다. 이날 밤 고부 삼거리(현 정읍군 소성면 소재지)에서 숙영하며 거사를 도모하였던 농민군은, 편제와 대오를 재정비하고 전력 강화를 위해 서 남쪽의 여러 군ㆍ현을 점령하고자 이튿날 4월 8일(양 5월 12일) 아침에 흥덕 관아를 습격, 군기 고를 부수고 탄약과 조총, 창검, 화약 등을 탈취한 후 정오경에 고창을 진주하였다. 이들은 먼저 옥문을 파괴하고 억울하게 감금되어 있던 동학교도 7명을 석방하고 동헌과 아사를 부수고 들어가 인부(印符)를 접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현감 김사준(金思濬)이 이미 겁을 먹고 도피해 버려 화가 치민 이들은 군기를 접수하고 장적(호적부)을 압수한 후 사령청ㆍ노청ㆍ작청ㆍ풍화루ㆍ공북루를 제외한 관아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또한 이들은 성 아래 동부리에 있는 토호(殷大靜)의 집으로 636 제 8편 사 회

21 몰려가 가산을 파괴하고 소각한 다음 이날 밤 고창읍에서 머물렀다. 이러는 동안 동학농민군의 세는 날로 늘어 1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날 밤 고창에서도 많은 수의 동학교인과 농민들이 이에 가담했었다. 4월 9일(양 5월 13일) 동학농민군은 무장으로 진입했다. 동학농민군의 무장 진주 상황을 전라 도 감사에게 무장 아리(衙吏)들이 보고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오후 3시경 신시에 1만여 명이 읍내로 밀려와 옥문을 부수고 옥중의 동학교도 44명을 석방하고, 좌수(座首), 수교(首校), 관속(官屬)들은 붙잡히는 대로 살해당했으며, 성 안팎의 7거리에서 죄를 저지른 인가를 모조리 소각해 버렸다. 무장은 동학농민군의 유력한 간부인 손화중포의 근거지로 동학세력이 우세했던 고장이다. 동학 교도들에 대한 지방관의 탄압이 어느 고을보다 가혹하였기 때문에 반대로 동학농민군의 무장현에 대한 응징도 강경했던 것 같다. 공형(公兄)의 보고에 의하면 성 안에서는 쉴새없이 포를 쏘아대고 한편으로는 관속들을 색출 하면서 또 다른 한편은 성 밖의 여시뫼(현 무장면 신촌리 : 왕(王)제(帝)산(山) 서봉(西峰))에 설진 을 하고 있었다. 또 혹은 갑옷을 입고 총과 창으로 무장을 한 농민군들이 성내를 누비고 다녀 성 안의 정황을 염탐해 낼 길이 없다. 고 농민군의 삼엄한 경계태세를 말해 주고 있다. 무장현의 신임 현감 김오현(金五鉉)은 미처 부임해 오지 않아서 난을 면했으나 그는 부임도 못 하고 곧 파면되었다. 여기에서 기록적인 사항을 말해 두고자 하는 것은 흥덕과 고창을 습격할 때 에는 관아 건물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으나, 이곳 무장에서는 무장 출신 동학도들의 적극적인 만류 로 동헌과 객사 등이 파괴 되거나 소각을 면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완연하게 보존됨으로써 문화재 로 지정되는 귀중한 유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농민군은 무장에 입성해 3일 동안 머물면서 황토재 싸움 이래의 휴식을 취하며 전열을 정비하 고, 전주에 와 있는 홍계훈(洪啓薰) 초토사가 거느리는 경군의 추격에 대비하여 호산봉(弧山峰)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와 같이 여시뫼는 표고 150m 고지에 불과하나 확 트인 시계가 좋아 훌륭한 요충지가 되고 있다. 황토재 대첩지가 성역화 되고 있는 이 마당에, 이곳 호산봉이나 창의포고지인 구수내가 전 연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은 뜻있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무장에서 다시 출발한 농민군 은 2부류로 나누어 4월 12일(양 5월 16일)에 영광으로 들어가서 부호들의 전곡과 마필을 징발하 여 군량을 확보하고 이곳에서 4일간 머문 뒤, 4월 17일에는 함평ㆍ무안을 거쳐 나주로 진격하였 다. 그리하여 전라도는 거의 농민군에 휩쓸리고 충청도에서도 여러 읍이 이에 호응하였다. 농민 군은 이른 곳마다 군기를 뺏고 죄인을 석방하는 한편 군세 강화에 진력하였다. 조정에서는 4월 2일 홍계훈을 양호남(兩湖南) 초토사(招討使)로 임명하여 경군 800명의 군사를 제 3장 동 학 농 민 혁 명 과 고 창 과 의 관 계 637

22 638 제8편 사회

23 장성 유생 봉남 변만기(邊萬基)가 쓴(봉남일기)의 관전 내용을 보면, 10월 28일 고창의 동학군 1,000여 명이 고수면 살이재를 넘어 석양에 황룡장터로 이동 집결하였고, 11월 22일에는 고창동학 의 두령 임천서가 기병하여 함평으로 출진하였으며, 이날 또 흥덕ㆍ고창의 동학군 1,000여 명이기 포장 장동행의 인솔 하에 나주로 행군하여 갔는데, 이때 흥덕의 대접주에는 고영숙, 고창의 접주 에는 홍동관이었다. 11월 24일 정읍 입암면 등천리(등내)와 고창 동학군 수천 명이 장성고을을 유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4절 전봉준의 출생지는 고창 당촌 1. 전봉준의 태생설에 대한 검토 지금까지 발표된 전봉준의 태생설은 그 설이 너무도 구구하고 진원지로 알려졌던 정읍지역만해 도 무려 다섯 곳이나 알려지고 있어 혼선일로이나 그동안 비중 있게 알려진 태생설 몇 가지를 놓 고 그 진상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먼저 그 내용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주 구미리(龜尾里 : 완주 봉동면) 태생으로 어려서 태인현 감산면 계봉리(감곡면 황새 얼)로 이주하였다는 설 둘째, 태인현 산외면 동곡리 지금곡 (지금실)태생설 셋째, 현 정읍군 이평면 조소리 태생이라는 설 넷째, 고부군 궁동면 시목리(감냉기)태생설 다섯째, 고부군 남면 진장 문하 차복리 부근설 여섯째, 고창현 덕정면 당촌(현 고창읍 죽림리 당촌부락)에서 출생하여 소년기에 고부로 이거 하였다는 설 등이다. 전주 태생설은 장봉선의 정읍군지 전봉준 실기 내용에 보면 전봉준은 전주에서 태어나 어 려서 태인현 감산면으로 이주하였다고 하나 근거가 희박하고 김의환의 전봉준 전기 에는 뒷날 전주사람들이 그를 숭모하여 꾸며낸 말이라고 한다.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태생설은 자료에 의하면 전봉준이 18세(1872)에 이거하여 근20년 우 거한 것으로 추산되며 마지막 이거한 사실 이외에는 분명치 못하고, 또한 신복룡 교수의 새 로운 주장에 의하면, 그 마지막 이거했다는 동곡리 지금실이 아니라 지금실과는 2km쯤 떨 어져 있는 동곡리 원동골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제3장 동학 농민 혁명 과 고창 과의 관계 639

24 정읍군 이평면 조소리 태생설은 전봉준이 살던 집이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1974년 해체보수공사를 할 때 1876(무인)년 2월 26일자의 상량문이 나타나게 되어 정읍사람 들이 그렇게도 생가라고 우기던 이 집을 전봉준이 23살 때 지은 것이 확실해져 그동안 숱하 게 미화되었던 이야기들을 일축해 버렸고 문화재 명칭도 생가에서 구거로 격하되고 말았다. 또한 1895년 2월 9일 일본 영사의 문초에 대한 전봉준의 대답을 기록한 재판 기록인 전봉 준 공초 중 일차 공초에 보면 너는 태인에서 살았는데 고부에서 난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 인가(汝居生泰仁地 何故起鬧古阜乎). 에 대해, 태인에서 살았지만 고부로 이사한 지 몇 년 된다(居生泰仁移寓古阜 爲數年矣). 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부에는 너의 집이 있는가(然則古阜有汝宇乎). 라고 묻자 난리에 불에 타고 말았다(入於燒灰中矣) 하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는데, 이에 의하면 지금까지 문화재로 지정된 그 자체가 재고되어 야 한다고 생각된다. 과연 전봉준이 세가를 이루고 살던 구거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쉽사리 떨쳐 버릴 수 없는 대목이 너무도 중첩되고 있는 실정이다. 數日賊李斗璜所追 窮海南界地 盡無可走 斗璜與李圭泰及倭人合奮擊大破之斬三萬六千餘級. 이것은 전남 강진 땅에서 동학군 참패, 참살상을 예시한 것이다. 물론 과장을 예상할 수는 있겠으나 한 고을에서의 참살이 36,000이라니 얼마나 혹독한 보복인가. 이 처참한 보복 속에서 전봉 준의 구가가 침해 없이 오늘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세상을 들쑤셔 놓은 동학 비적의 괴수집을 관가나 토호의 민병들이 과연 온전하게 놔두었을까? 일본인 사학자 국지겸양(菊池謙讓) 일행도 1940년대 초에 정읍 고부 일대를 샅샅이 밟으며 동학란과 전봉준의 유적 사회를 찾아다녔지만 전봉준의 태생에 관한 구명 자료를 얻지 못하 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연대로 보아 동학혁명 당시의 가담자들이 능히 생존해 있을 때인 일 제시대에 일본인 전문가가 나서서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면 이상의 정읍 쪽 기록의 허구성 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8 15 광복 이후에 슬그머니 생가가 나타나고 일가가 나타나서 양손(養孫)이 정해지면서 역사의 테를 매놓은 것이다. 덕천면 시목리 태생설은 그 신빙성을 신복룡 교수가 그의 저서 전봉준의 생애와 사상 에서 언급하였으며, 그 내용을 보면 당시 정읍에서 알려진 문장가로 동학혁명 때 활약하여 전봉준 과 친숙한 사이였다는 옹택규( )의 손자인 옹경원(1912년생, 정주시 광교리 172 의 2)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옹경원이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분명히 시 목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고, 그의 어렸을 때 전봉준의 집에 차려진 서당에서 글 공부를 한 사실 을 들고 있는데, 한 사람의 말을 듣고 신빙을 해야 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사정이다. 640 제 8편 사 회

25 또 신교수도 그 후 한때 거처한 곳으로 보고 출생지는 아니었다고 수정해 놓고 있다. 고부 진장문하 차복리 부근설은 우윤의 전봉준 장군 출생지 정립 에서 내놓은 새로운 주장 으로서 전봉준이 3살 때인 에 조부가 향년 68세에 타계하여 그 묘지가 고부 남부 면 진장문하(鎭長門下) 차복리(次福里) 앞 갑묘용간(甲卯龍艮) 좌(坐) 유(酉) 파지(破地)이 므로 고부에 살았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리고 조부(碩豊)가 죽은 직후에 근친인 종형제 간 들이 일제히 고창 당촌 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하였다. 그의 기록을 이용해 보면 [병술보]에는 병호(丙鎬 : 봉준) 윗대의 장지를 적고 있는데 이에 따라 거주한 곳을 추정할 수 있다. 엄격히 말해서 묻힌 곳과 사는 곳이 일치하지는 않을 것 이다. 명당 터라면 거리를 불문하고 장지로 삼았던 시대였던 만큼 양자 사이의 관련성은 희 박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명당 터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또 집안이 차츰 기울어지고 있는 무렵이라면 사는 곳 부근을 선택하는 것이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전봉준의 조부가 고부군 남부면 진장문 아래 차복리 앞에 묻힌 것으로 보아 전봉준의 가족 은 진장과 차복리 부근(사발 통문을 모의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로 들어가는 입석리의 진선 마을은 비롯한 부근 마을에 해당)에 살았다는 본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전봉준은 조 부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을 것이다. 아무튼 전봉준 집안은 조부가 돌아가자 어떤 이유에선지 전창혁의 종형제들이 고부를 떠나 (일부는 석풍의 죽음 전일 수도 있음) 고창 덕정면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때 전창혁 또한 아장 아장 걷던 전봉준을 데리고 고창 당촌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전봉준이 유년기일 때 고부를 떠나 당촌으로 옮겨 살았기에 유소년기의 흔적을 고부 보다 당연히 고창 당촌에 더 많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마을 촌로들의 증언도 고창 쪽이 훨씬 풍부하고 생생하다. 결국 두서너 살 때부터 살았던 고창 당촌이 고향과 출생지로 여겨 졌을 것이고 전봉준도 이를 굳이 부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런 만큼 당촌은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의 유소년기를 보내며 친구들과 사귀고, 꿈을 키웠던 곳으로 전봉준의 생애에서 빠트릴 수 없는 곳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전봉준 은 고부진장과 차복리 부근의 마을에서 출생하여 유년기에 고창 당촌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 야 하고 당촌도 한 가정을 꾸릴 나이에는 떠나야 했다. 그 후 이곳저곳으로 옮겨 산 것이 확인되는데, 이런 까닭으로 출생지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위의 내용을 놓고 검토해 보면 우윤 씨의 추정을 통한 조심스런 주장은 1886년에 발행된 병술보 만의 검토로는 매우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이때는 전봉준의 집안이 이미 고창파를 마감하고, 고부로 이거한 이후가 되어 고부파 로서 새로운 출발이 시도되고 있던 31세의 무르익은 때라서 조부의 묘소가 진장문하 차복리 제 3장 동 학 농 민 혁 명 과 고 창 과 의 관 계 641

26 642 제8편 사회

27 조(태인 고현면), 고조(남원 북면), 증조(순창 하치동), 조고(임실 강진면), 백부(임실 강진 면), 종형(고창 덕정면), 제(고창 덕정면), 당숙(정읍 서이면), 재종제(정읍 서이면), 재종(고 창 덕정면), 당질(고창 덕정면). 오지영은 본래 고창 출신이었는데 익산으로 이거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는 고창과 전봉준을 누구보다도 소상히 알고 있고 또한 기록할 수 있는 분이다. 그가 지은 동학사 에 새로 밝혀진 초고본의 서문을 보면 1924년에 완성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정세 때문에 뒷날 출간(1940)되었 지만 동학혁명에 직접 가담자가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생생하게 써낸 유일한 책이다. 그는 자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양호도찰로서 전라 충청 양 도 사이에서 접(동학의 전도인 수도인 사이에 이루어진 연원을 기반으로 한 조직으로서 지역 조직이 아님)과 접 사이의 일과 도인과 도인 사이의 일을 총찰하다 가 공주 싸움에 패한 후 익산 전주 사이의 군을 다 해산하고 서해안으로 피신하여 다니다가 서울 로 올라와 잠시동안 양주 묘숙암에 은거하여 세월을 보내던 중 마침내 천도교 교역자가 됨. 또한 동학혁명이 반봉건적 운동에서 반침략적 운동으로 방향 전환을 한 동학군의 2차 구월기 포때 오지영은 익산에서 오경도 고제정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고 돼 있다. 선비의식이 투철한 오지영의 가계는 항상 의를 숭상하는 고창인의 기질이 이어오고 있어 동학 농민혁명이 일어났던 백산봉기 때 고창현에서 1,5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나선 주모자 오하영 오시영도 또한 그의 집 안이었다고 한다. 2. 전봉준의 출생지는 고창 당촌 족보에 의한 추적 동학농민혁명의 사건처리가 역모행위로 귀결이 됨에 역적의 흔적을 없애는 일이 당시의 시류였 기에 생활주변의 정화작업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워 아무래도 족보자료에 의존 할 수밖에 별 뾰족한 수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가 1963년 9월 1일 고창문화원을 개설하고 신임 인사차 고창 기로사 를 방문하였을 때 동 재(東齋)원로들의 주문과제 1호가 동학 난리를 겪은 우리들이 엄연히 살아 있는데 어떻게 해서 녹두장군이 고부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느냐 문화원장이면 잘못된 역사를 우선 바로잡아야 한다. 는 것이었다. 필자는 원로들에게서 당촌 출신이라는 심증을 얻었고 농민군들의 숱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이를 우선 과제로 정립하고 고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전봉준 장군이 당촌 태 제3장 동학 농민 혁명 과 고창 과의 관계 643

28 생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 조사에 착수하였다. 먼저 고창 군내에 살고 있는 천안전씨들의 세거 상황을 알아보았다. 문효(백헌)공파 후손들이 공음면 신대리, 용수리 상하면 정동 대산면 덕천리 등지에, 삼제공파 손은 신림면 벽송리 일대에, 대제학파는 고창읍 도산리 아산면 하갑리에, 도평군파는 심원면 월산리 무장면 무장리 성내면 부 덕에, 판결사공파는 아산면 구암리 등에 산거해 오고 있다. 맨 먼저 착수한 것은 고창 신림면 벽송리에 자작일촌으로 세거하고 있는 천안전씨 삼제공(三宰 公)의 족보 입수였다. 촌가에서 사람들을 만나 보기란 농번기보다 농한기인 정월달의 한가한 때를 골라야 만나기가 수월하므로 자료 조사 활동도 여간 제약이 많았다. 정초에 심방을 해 보았더니 색안경을 쓰고 외 면하는 것이었다. 왜 남의 집 족보를 캐묻느냐. 하면서 지나칠 정도로 만나기를 꺼려하는 눈치가 역력해 보였고 몇 해 동안은 이와 같은 숨바꼭질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아는 분이 있어서 적당히 구슬려 보았더니 깜짝 놀랄 만한 정보를 일러주는 것이었다. 내용인 즉 방문할 때마다 옛날의 족보를 보여달라고 했지만 한결같이 일제강점기의 것과 8 15 해방 이후의 마분지로 인쇄된 근래 족보들뿐이었는데 벽송리 전씨의 문장인 전귀몽(全貴夢) 씨가 근래 족보를 나누어주고 옛날 족보는 잘못된 것이 있다 하면서 모조리 거두어 갔는데 어느 날 분 서해 버려 지금은 없다는 것이다. 귀몽 씨를 정읍에서 만나 다그쳐 물었더니 정읍군에서 기별이 와 녹두장군의 족보를 요구한 다기에 족보는 없고 해서 때마침 [계사보](1953년도 발행)를 만드는 중인데다 역적으로 몰려 이미 후사가 절손된 처지라 슬그머니 욕심이 생겨 우리 삼제공파로 끼여 붙였다 는 어쩔 수 없는 실정 의 토로를 들을 수 있었다. 삼제공파 족보를 조사해 보았더니 전봉준은 삼제공(三厚)의 4세손이며 흥덕파조인 현감공(鐵 石)의 5세손 철명(哲命)공의 차자인 극효(克孝)의 아들(性和)의 절손된 곳에 끼어 넣어 5대를 가 공인명으로 채우고 그 아래에 전봉준 부자를 맞추어 넣고 녹두장군의 양손까지 정읍 북면 남산리 에 사는 흥덕파 후손으로 끼어 넣고 있었다. 뒷날 익산 용안에서 세거하는 삼제공파 후손들이 적당한 거래를 요구해 오기까지 하였으며 1982년도에 전봉준장군 숭모회 에서 사무국장이 찾아와 내용 규명 요구가 있어 그 진상확인을 위해 사무국장(全炳龍)과 함께 수소문 끝에 인천에 살고 있는 전귀몽씨 댁을 찾아갔으나 그는 이 미 이승을 등진 몇 해 뒤였다. 미망인으로부터 문제의 계사보를 귀몽씨가 직접 필사한 원본을 인 수할 수 있었다. 여하튼 필자가 의심한 내용이 적중되기도 하였지만 3km 남짓의 당촌(堂村)전씨는 몰락을 하고 644 제 8편 사 회

29 8대째 세거해 온 벽송리(碧松里) 전씨는 동학 난리에 까딱도 안 했다는데 당촌의 문효공파 후손이 삼제공파로 대명천지에 둔갑한 것이 이상하여 끝까지 추적해낸 결실이었다. 여기에서 필자는 판 단을 세웠다. 전씨들의 세거 집성촌보다는 묻혀 사는 전씨들을 중점 추적기로 하였다. 조사경험을 통해 집성촌들은 동학농민군 난리에 모두 혐의를 벗어 무사한 입장인고로 오히려 숨어 사는 한두 집의 전씨 연고자들이 무엇인가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촌 앞마을 덕정리(德井里)에 세거해 오는 조진환(曺鎭煥) 씨의 증언과 인근 고로들의 이야기 속에서 덕정마을에서 평생을 고입살이 하던 윤삼(潤三, 본명 전장수(全長壽 : ) 의 아들 전동근(全東根)이가 신림 농암촌(籠岩村)에서 2대째 고입살이를 하고 있는데 덕정에서부 터 조상대의 족보를 숨겨 가지고 다닌다는 제보를 얻었다. 전동근의 아버지 전장수(자 潤三, )는 덕정리에서 고입살이를 시작하던 10세 때 부터 집 주인이 김윤삼 으로 변성명시켜 평생을 호적도 없이 윤삼 이란 이름을 갖고 살았다 하며 당촌에 살던 전봉준의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멸족을 당할 때 어린 윤삼 이는 덕정리 서당에 왔다 가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등 너머 죽림리에 빌려 왔던 양식을 갚으러 간 사이에 화를 면해, 온 집안이 몰살당하고 세간은 물론 가옥과 심지어는 가축까지도 모두 죽여 불질러 버렸다는 데, 다행이 살아 남아 불타는 집 속에서 족보(6권)를 건져냈다는 것이다. 그 후 윤삼 을 만난 어머니(晋州姜氏)는 덕정리에 사는 이규채(李圭彩-成均館博士)댁에서 식모살이를 하면서 윤삼 이와 한 마을에서 숨어살게 되었다. 두 모자의 형편을 알고 마을 사람들 이 숨겨주어 아무 탈 없이 잘 지낼 수가 있었다. 윤삼 이는 1931년 그의 아들(동근)이 여덟 살이 되면서 신림면 농암촌으로 옮겨 고입살이를 했 다. 아들 동근이도 자라서는 2대째 머슴살이를 하며 숨어살면서도 아버지가 물려준 족보를 고추 꾸러미 속에 싸서 칙간 모퉁이에 감추어 오면서 지금껏 소중히 간수해 오다가 필자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수소문한 보람으로 신림면 농암촌의 전양산(全良山 : 1902년생) 을 찾게 되었다. 그는 전봉준의 방손임을 시인하고 자기보다는 전 장군과 더 가까운 일가가 있다며 소개해 준 사람 이 윤삼 의 아들 동근 이었다. 부안읍에 산다는 전동근 을 만나게 된 필자는 그 숨겨 다닌 족보가 전 장군이 살아 있을 때인 1886년에 간행된 병술보 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족보의 서문은 조선 말기의 문인이요 순국지사인 송병선(宋秉璿; 시호 문충공) 이 쓰고 있는데 이 족보에 의하면 전동근은 전봉준의 종증조(德臣)의 7세손으로 전봉준과 11촌 간임을 알 수 있었고 전양산은 9촌 간 그리고 동근과 양산은 8촌 간으로 동근은 양산의 종조인 제3장 동학 농민 혁명 과 고창 과의 관계 645

30 기환(基煥)의 현손이었다. 족보명칭은 천안전씨세보(병술보) 로서 전봉준의 가계를 정리해 보면 기본은 5세 천성군(天 城君; 世柱)의 장자 6세 천양군(天陽君 仁亮)파에서 차자인 7세 문충공(文忠公 : 昇)파로 이어져 그의 5세손 12세 연산공(連山公 : 敏)파로 다시 이어지고 15세 연산공의 증손(五常)인 송암공파로 또 이어지면서 그의 손자인 17세 언국(彦國)에서부터 송암공손파로 세분이 되어 고부파로 기재가 되어 있고, 송암공 7세손파로 22세인 석운(碩雲) 석풍(碩豊)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병술보 를 찾아냄으로써 그 당시까지 전봉준 일가의 가계가 삼재공파의 후손이라고 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은 이제 일장춘몽으로 사라지게 되고 전 장군은 이제 떳떳한 제삿 밥을 들게 되었으니 얼마나 통쾌한 일이 되겠는가. 이후 근 20년 동안을 제보가 들어오거나 의도적으로 찾아나서서 전남북을 두루 섭렵하여 천안전씨 들이 살고 있는 곳에 이르면 어김없이 인근의 노인당과 집성촌을 찾아 동학농민혁명을 짚어 갔다. 다음은 임술보 에 대한 입수 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필자가 기적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임술보 는 1980년 가을이었으니까 올해로 24년 전의 일이었다. 완주봉동에 사는 전태연의 결정 적인 제보를 얻어 가까스로 찾아본 임술보 의 기록은 그동안의 초조와 긴장감을 일시에 해소시 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필자를 감격의 늪에 흠씬 젖어 놓게 하였다. 왜냐하면 이미 찾아 놓은 병 술보 의 기재사항이 별다른 하자 없이 잘 전개되었는데 유독 전봉준의 가계를 고부파로(송암공손 파)로 적혀 있었기에 그동안 당촌 태생설을 주장은 하면서도 약간은 께름한 일면이 내재되어 있 었기 때문이었다. 임술보 는 철종 13년(1862)에 간행된 16권 한 질의 천안전씨 세보 이다. 이 족보의 서문은 이듬해(1863) 늦은 봄 발행을 앞둔 최종단계에서 당시 대사헌(大司憲)이었던 송내희(宋來凞)의 글을 받았는데 그는 은진송씨로 자는 자칠(子七) 호는 금곡(錦谷)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다. 전봉준의 가계를 약기해 보면 5세 천성군(世柱)의 장자인 6세(仁亮)의 제2자 7세 문충공(昇)파 로 분파가 된 이후 그의 5세손 12세 연산공(敏)파로 세분되었다가 그의 증손 15세 송암공(五常)파로 이어졌는데 그의 손자 17세 언국(彦國)파로 이어지면서 이른바 고창파(高敞派)로 등재되고 있다. 이와 같이 임술보 의 등재사항이 확인됨으로써 병술보 에 고부파로 기재된 내용은 이제 무의 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임술보 에 송암공의 손자인 언국이 고창파의 어른으로 기재되어 있기에 뒷날 고부파 로 바뀌더라도 이미 고창파의 확실한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전봉준 장군 가계는 高敞파로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다가 고부로 이거한 것이 확실한 646 제 8편 사 회

31 것임을 확인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기록에 의한 고증 고창 당촌 태생설을 발표할 당시 병술보 의 확인 사항만으로도 충분하겠기에 그리고 임술보 의 기재사항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읽어만 보았을 뿐 당시에는 한 질의 복사가 불가능한 실정이 어서 복사본 입수가 안 되어 심증만 굳힌 채 병술보 만으로 발표를 하고 말았으나 오늘 이와 같 이 재조명하게된 마당에 그때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서두른 것이 보다 철 저하지 못한 아쉬움으로 남게 되어 유감스럽게 생각되고 있다. 그동안 20여 년간 현장을 발로 뛰 어 엮어낸 자료조사를 통해 전봉준 장군의 태생지가 고창 당촌 태생임을 밝히고, 그에 대한 기록 을 고증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1960년대에 고창 지역에 생존했었던 고창 기로사들의 관계된 고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녹 두장군의 아버지가 고창 당촌에 서당훈장으로 오게 되어 대소가가 모여 살게 되었다 한다. 그 선 대에서는 빈한한 선비집안이어서 여기저기 형편대로 흩어져 살았고 수준들은 있어서 풍수에도 상 식들이 넘쳐 겨우 생계는 유지하고 살았다고 한다. 전봉준의 선계를 보면 그의 7대조(彦國)는 부인이 광산김씨라는 기록 외에는 공란으로 되어 예 측할 수가 없는 실정이고 다만 임술보 에서는 고창파 어른으로 병술보 에는 고부파 어른으로 기재된 것을 보면 고창파의 파조로 있다가 고부로 이거한 이후에는 고부파의 파조로 전기만 된 것으로 미루어볼 수 있다. 6대조 후증(厚徵)은 태인현의 고현면(古縣面)에 내외간의 묘소가 각기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인 근에 살았던 듯싶고, 5대조 만기(萬紀)는 남원 북면(北面)에 합조된 것을 보면 근동인 것으로 추 리가 되고, 고조 상규(相圭)는 순창 하치동(下峙洞)에 합조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순창 땅에 우거 한 듯한데, 임술보 에는 관직 기록이 없고 24년 후의 병술보 에는 통덕랑을 지낸 것으로 표기되 고 있으나 이는 성립될 수 없는 허황으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1726년생인데 임술보 발행 년도만 해도 100세가 넘게 되어 터무니없는 조작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증조(道臣) 내외와 종조(碩雲) 내외가 임실 강진면 밤고개(栗峙)에 동원으로 설치되고 있는 것 을 보면 역시 근동에 자리하고 살았다고 보아도 무방하겠기에 어디 일정한 곳에 세거지를 잡지 못한 듯했다. 종증조(德臣) 내외는 임실에서 정읍 서이면(西二面)으로 분가해 이거한 듯싶고 그곳에 아들(碩 文) 내외도 묻히고 손자(基煥)도 동원(同原)을 이룬 것으로 보아 3대를 누린 것으로 짐작되는데 기환의 부인 전주최씨는 전봉준가를 따라 역시 고창당촌에서 살다가 서당촌 뒷산에 묻혔다. 또 증조(碩雲)의 아들 4촌 기필(基弼) 내외가 당촌 뒷산 고개인 회암치(回巖峙)에 묻힌 것을 보면 임 제 3장 동 학 농 민 혁 명 과 고 창 과 의 관 계 647

32 실에서 4촌 간인 기창(基昶)을 찾아 당촌으로 합류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전봉준가의 족보상에 나타나는 모든 당내지간들이 고창 당촌으로 모여 동학농민혁명이 폐 쇄될 때까지 자작일촌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제 전봉준의 조부모를 병술보 에 수록된 고부 남부면 진장문하(鎭長門下) 차복리(次福里) 앞등 갑묘용간(甲卯龍艮)자리에 투장하기 위해 1868년 윤 4월 16일 고부로 위장이사를 떠난 유명 한 일화를 고로들의 증언을 통해 정리해 두고자 한다. 필자가 1966년 4월 고창 덕정리에서 전봉준의 가계에 대한 자료조사를 하던 중 덕정마을에 당 촌 천안전씨의 취객 한 분이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서치형(徐致亨; 향년 80) 댁을 방문했을 때 노구를 무릅쓰고 친절하게 근동에 알려지고 있던 일화 한마당을 들려주었다. 자기 조부(徐源國; )로부터 직접 들었던 이야기라면서 조부의 처가가 당촌에 살았던 전기술(全基述)이 장인이며 1남 3녀 중의 맞사위였다고 한다. 서당촌의 서당에서 성년이 될 때까 지 수년 간 한문공부를 배웠는데 그때 스승이 처가로 3종숙뻘 되는 전봉준의 아버지(基永 또는 基昶)여서 더욱 친숙하였다 한다. 전녹두의 아버지가 어느 날 만나자고 하더니 아버지 묘를 이장하려고 하니 제자들 중에 착실한 사람 두 사람을 더 골라 같이 그 일을 거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당 동문이었던 나이가 든 죽림 사는 김재영(金在英)과 자기보다 한 살 아래인 정인 민(鄭仁民)을 골라 셋이서 상의가 되어 스승을 위해 도와 드리기로 약속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 서 세 명이 윤 4월 보름날 아침에 모여 회암재 아래 맥모등에 올라 전봉준의 조부 묘를 파묘하고 대꼬챙이를 깎아서 낙근된 뼈를 갉아내어 다듬고 백지에다 곱게 싸서 순서를 매기고 집에 모셔 놓았다가 이튿날 아침 일찌기 모아서 소달구지에 위장하기 위해 이삿짐과 함께 꾸려 멀리 고부까 지 갔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이사하는 것이지만 속셈은 스승의 재략에 의해서 가난해서 돈이 없으 므로 아버지 묘를 명당에 투장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후에 고부 남부면에 당도하여 어느 마을집에 이사를 하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스승이 인도하는 갑묘용간 자리를 찾아 밤중까지 투장을 깨끗이 끝냈다는 것이다. 그날 전봉준은 갓 열세 살을 넘은 작달막한 키에 당차게 야물진 몸매로 아버지를 따라와 투장 하는 일을 끝까지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 너를 위한 일이니 잊지 않고 명심 해 두라. 고 일러 주었다. 꿈을 꾸어 내는 것 같아 모두들 어리둥절했다는 것이다. 이곳 삼신산 자락을 중심으로 뻗어 내린 곳에 호남의 팔대혈(八代穴)명당이 감돌고 있는데 첫째 자락이 옥구임피 술산(戌山) 648 제 8편 사 회

33 둘째 고부 영주산의 선인포전(仙人鋪氈) 셋째 흥덕 호암 금반옥호(金盤玉壺) 넷째 부안 석재와우(石峙臥牛) 다섯째 무안 회승예불(回僧禮佛) 여섯째 순창 오선옥(五仙玉) 일곱째 장성 손룡낙사(巽龍落梭) 여덟째 영광 비봉귀소(飛鳳歸巢)인데 그 중에 으뜸이 고부의 선인포전이라 : 선인이 털방석에 누워있는 형국이라면서 이곳은 자손이 창창하게 빛나는 형국이라고 일설을 늘어놓았다. 이런 스승의 속셈을 들은 세 사람의 제자들은 엄청 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명당 투장을 하고 왔노라는 유명한 일화가 고창지역의 유식한 선비 사이에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이와 같이 전봉준의 아버지(基永 : 基昶)는 매사에 치밀하고 철두철미 한 구상력이 넘쳐나는 인물로서 고창 당촌에서 계획적으로 고부입성을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끝으로 기록을 통한 고증자료로 병술보 보다 24년 앞서서 만들어진 장장 18권의 천안전씨 대동보 를 내놓고자 한다. 이 임술보 는 1862년 3월에 금산 광업재에서 간행되었는데 전봉준(鐵 爈)이 7살 때여서 생존 시의 가장 오래된 귀중한 족보이다. 특히 1권, 16권, 18권의 세 권은 직접적으로 기록된 고증자료가 등재되고 있다. 전봉준이 두 살 때인 1857년 5월 17일에 타계한 조부(碩豊)의 묘가 당촌마을 뒷등인 맥모등(脉母嶝)에 써 있다는 기록만 가지고도 고창 태생임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임술보 에 기재된 고창파의 내력은 제 16권의 끝부분에 등재되고 있고 맨 위 우두머리 어른은 언국(彦國)으로서 대를 이어 8대가 실려 있으며 공람칸에는 此派單牒 正印後入來故載錄 此篇日後修譜時更爲考正 (이파의 단첩은 족보인쇄가 마쳐진 뒤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이편(卷 16) 끝부분에 게재하니 뒷 날 족보를 다시 만들 때 상고하여 바르게 하라.)고 엄히 수록되고 있다. 그리고 이 족보 卷18 말미에 수록한 유사분정기(有司分定記) 중에 고창파의 수단 원고수집과 분담금 징수 책임자(收單收錢)로 전봉준의 아버지(全基永) 명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기영이 족 보 인쇄가 끝난 후에 수보소를 찾아 수단을 실을 수 있게 한 것을 보면 비록 수단원에 불과하지만 전기영의 고매한 인품이 능히 짐작되고 동학농민혁명이 끝내 역적모의 사건으로 귀결이 지어져 아무런 흔적을 찾을 길이 없는 막막한 중에서도 이와 같이 기록의 고증을 찾아내 놓은 것은 역사 발전을 위한 일대쾌거요 귀중한 밑거름이 아닐 수 없다. 제3장 동학 농민 혁명 과 고창 과의 관계 649

34 전봉준 장군이 고창 태생이라는 통설 정립을 위해 몸바쳐온 지 반평생, 1963년 하반기에서부터 1980년대 하반기까지 무려 4반 세기가 넘는 세월이었다. 당초에는 고증자료조차 태무한 처지에서 오직 불굴의 의지와 집념을 불태우면서 고로들의 순수 한 증언을 토대로 심증적 상황만을 믿고 의지한 채, 백방으로 뛰어다닌 보람이 있어 그동안 삼재 공파의 조작된 술수를 혁파해내고 천신만고 끝에 발굴한 병술보 와 임술보 는 전봉준이 살아있 을 때 만들어진 귀중한 자료로서 그의 행보 규정에 큰 몫을 보태주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병 술보 를 두고 위보일 가능성이 짙기만 하다는 등, 고창파를 위해 의도적인 조작이라는 등, 고창파 들이 주도하여 만든 그들만을 위한 족보라는 등의 별의별 난도질이 기세등등하고 있는데, 족보가 뭐 별것인가. 어느 문중치고 다 제손으로 골마리까기인 것을. 어느 족보치고 벼슬 없는 선영을 보았는가. 묵으면 묵을수록 벽짝처럼 두둑해지는 것이 상례가 아닌가! 임술보 가 있고 병술보 가 공존하는 마당에 전봉준이 고부 진장문과 차복리 부근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며, 또한 이곳에서 유년기를 살다가 고창 당촌으로 이사간 것처럼 주관적인 개념을 지양해야 한다. 아무리 병술보 의 전봉준 조부 묘 타령을 해도 임술보 가 존재하는 한 언감생심 당촌을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누가 뭐라해도 고창 당촌은 동학농민혁명을 영도했던 전봉준의 태생지요, 민권 운동사의 성지이다. 사대와 봉건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절실한 시대적 요청 속에서 반만 년 역사 이래 최초의 민권운동으로 일어난 새 역사의 장을 열고 그 주역의 요람이 된 당촌마을은 근대시민 사회의 여명을 알리고 불멸의 민권혁명가를 탄생시킨 곳이다. 제5절 동학농민혁명 고창 출신 가담자 이상의 동학혁명사에서 고창 출신의 동학농민군 가담자는 기록적인 자료로 보아 19,500명이나 되어 그 참여도는 정읍과 함께 가장 높은 편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참고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창 출신 동학농민군 및 관계 인명을 수록하기로 한다. 총참모 : 오시영(일설 고창오씨 - 고창읍 당촌) 비 서 : 정백현(공음면 구정 - 전봉준 장군 비서) 수 행 : 김흥섭(무장면 원촌 - 전봉준 수행원) 두 령 : 고창 - 오하영, 임천서, 임향노 무장 - 송경찬, 강경중 흥덕 - 고영(원)숙( 정읍에서 사형-성내면 용교리) 군 장 : 고창 - 홍낙관(觀 : 46세, 杖一百, 流三千里) 650 제 8편 사 회

35 홍계관(觀) 무장 - 송문수( 영광에서 사형)(공음면 당산리) 송진호 장두일 곽창욱(玉) 흥덕 - 고영백 집강 및 기포장 : 고창 장동행 김수병(고창읍 월곡리 고창형장에서 처형ㆍ孫, 재 덕ㆍ재수) 엄대영(고창읍 덕산리 生,孫, 경섭, 영섭) 무장 - 최서중( 광주에서 처형) 송병욱(해리면 수락, 孫, 재현) 김병은( 체포 효수) 박경석(사망 物故) 동학군 및 살인 : 고창일우복록(기포장 최서중의 마부로 처형) 서재성(살인), 이동술(살인) 무장 -고순택(38세: 무죄로 석방) 양상집( 압송) 송진팔(외 18명) 흥덕 -서상은 (성내면 은동 고종 6년 生)자-옥녀, 호 - 송암 사발통문서명자: 정종혁(1862년 초명 종묵 호-삼하) 부안면 검산리 황채오(1854년 초명 성모, 호- 죽속)성내면 신성리 나주에서 사형 접주 : 고창 - 홍동관 한학천(처가 신림 벽송全씨) 신정옥(독립접주) 무장 - 김성칠(무장면 원천리-김흥섭의 父) 표종길(상하면 장호리) 이재현(해리면 왕촌리 孫 규범) 조성원(해리면 사미동) 제 3장 동 학 농 민 혁 명 과 고 창 과 의 관 계 651

36 관계인 : 이춘경(고창현 도 사령으로 동학교인 서재성, 이동술과 내통하여 관군의 기밀을 제보 했다는 사유로 소주영 홍계흔으로부터 체포령 내림) 이봉우(본래 서울 사람이었는데 갑오년 봄에 고창에 들어와 손화중의 부하가 되 었던 자로 부안면 안현리 이모씨의 제실지기로 있었는데 동학군이 패하여 그 제 실로 은신하여온 두령 손화중을 관병에 附和한 자로 에 밀고하여 체 포케한 공으로 증산 군수를 얻은 자) 강성지(고창에 사는 토호로서 갑오년 초 동학에 입도하여 집강직에 있으면서 동 학군의 고창입성을 전후하여 동학군의 세력을 많이 부려 그의 생명을 보신하였 다가 동학이 패하자 재빨리 돈을 써서 고창현의 수성장이 되어 동학군을 무수히 죽이고 괴롭힘을 주었던 자) 고순택(高順宅 1858~1895) 그의 자는 순택(舜澤, 順宅)이며 휘는 창주(昶柱)이다. 관향은 장흥이며 제량(濟良)의 아들로 무 장현 동음치면 당산리(茂長縣 冬音峙面 堂山里 현 孔音面 九岩里 九水川)에서 태어났다. 그는 글도 잘하고 말도 잘 타고 다니며 활도 잘 쏘는 무예인이었다. 일찍이 동학에 입도하여 송화중포 로 송문수(宋文洙), 문덕중(文德仲)과 더불어 갑오동학농민혁명에 가담, 1894년 3월 20일 무장기 포에서 백산 봉기 그리고 9월 2차 봉기에도 참여하였는데 관군에 피체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1895년 3월 무죄판결을 받고 고부에 왔다가 다시 붙잡혀 무장에서 참형되었다. 1895년 3월 3일 동학농민군을 재판하기 위해 법무아문에 임시재판소인 권설재판소를 설치한 후 그 때 받은 판결문을 보면 전라도 무장거 평민 피고 고순택을 무죄 방송한다. 로 되어(총무처 정부 기록보존소 동학관련 판결문집 41쪽) 그는 안심하고 고부에 들렸다가 무참한 변을 당하였다. 고영숙 (高永淑 1867~1894) 이름은 제중(濟中)이며 영숙은 그의 자다. 본관은 장흥(長興)으로 1867년(고종4, 丁卯)에 고창 군 성내면 용교리(龍橋里)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동학에 가담하여 흥덕의 대표적인 접주로 성장하여 1894년 3월 20일 무장의 1차 기포 때 이후 흥덕을 관장하는 두령으로 참가하여 700명의 동학농민군을 인솔하였다. 1894년 12월 26일 정읍에서 붙잡혀 통위영군(統衛營軍)에 처형당하였다. 정재찬(鄭在燦 ~1923.) 정재찬은 고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산수리 마을의 부호 鄭復奎의 차남으로 태어나 동학의 孫華 652 제 8편 사 회

37 仲 大接主가 星松面 槐峙里에서 활약할 때 그의 동생 孫翼仲과 同庚의 인연으로 접촉되어 東學에 入徒하였다고 하는데 부자인 그는 손화중 대접주를 도와 농민군의 훈련비도 대주고 동학군의 무 기도 많이 사다 주었다고 하며 무장 당뫼골에서 봉기할 때 여러 대장들을 따라 농민군으로 가담하 였다가 뒷날 역적으로 몰리게 되어 그가 타계한 癸亥年 이전까지 20여 년간을 전국을 누비며 유 랑생활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김기학(金箕學) 그는 光山金氏 典理判書公派의 후손 金相輝의 넷째아들로 1870년(고종7) 고창 고사면 隱洞(현 고창읍 내동리 은동)에서 세거해온 전형적인 농가 집에서 태어났다. 성년이 되어 班名하던 집안의 후광으로 莘村의 徐부잣집 맏사위가 되었다고 하는데 고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장인 되는 徐益瑞(源國)가 전봉준 장군 아버지인 全基永의 서당제자가 되어 녹두 장군과 깊은 인연이 생겨 茂長땅에서 1차 봉기할 때 그는 영향권자인 장인을 따라 열혈청년기인 25세 때 친위부대원의 호위병으로 가담하였다고 전한다. 장인의 친위부대를 호위하면서 영광, 함평, 장성, 전주로 진격할 때 전주 용머리 고개전투에서 여러 날 동안 죽을 고비를 겪었다고 하며 가을철에 또다시 장인의 부대원으로서 적진과의 충돌로 역시 몇 차례의 사경을 넘다들다가 역적으로 몰리게 됨에 羅州에 있는 외가 집안으로 은신하게 되어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고 하는데 후에 자수성가할 수 있게 됨에 1920년대에 정읍 대양리에 서 동학의 후신이었던 普天敎의 車天子에게 몰입하여 요직을 거쳤다고 전하고 있다. 김병운(金丙云 1843~1894) 그의 이름은 규일(圭一)이며 또 다른 이름은 병운(丙云)이고 자는 자범(子範)이며 본관은 청도 (淸道)이다. 무장현 하리면 장암리(茂長縣 下里面 壯岩里 현 高敞郡 上下面 壯山里 壯岩마을)에서 이진(以 珍)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동학에 입교하여 1894년 3월 20일 무장 1차 기포에 가담하여 군수 전(軍需錢)을 출연하고 9월 2차 봉기에 참전하였다가 이해 12월 관군에 피체되어 무장현에서 효 수형(梟首刑)을 당하였다. 부인 조씨(趙氏)가 무장 사형장에 나와 효수된 머리채를 치마폭에 담고 와 시신을 거두었다고 하며, 자녀들을 데리고 화를 피하여 정읍 장재동(長才洞)으로 옮겨 살았다. 제3장 동학 농민 혁명 과 고창 과의 관계 653

38 김수병(金琇炳) 그의 본명은 용수(容秀)이며, 호는 운재(雲齋)이다. 수병은 그의 자로서 본관은 김해이다. 그는 김해김씨 판도판서(版圖判書)공파(三賢派)의 20세손인 봉환(鳳煥)의 아들로 고창 읍내리에서 태 어났다. 그는 성장하면서 기골이 장대하여 힘이 장사였고 의지가 굳어 오달진 성품이 넘쳐 주변의 젊은 이들 속에서 늘 우두머리를 차지했었다고 한다. 1890년 어느 봄날 고창 장마당에서 시국담을 늘어놓던 홍낙관(洪樂寬)에 푹 빠진 그는 뒷날 홍 낙관 접주가 동학농민군을 이끌 때 그의 예하로 들어가 이른바 천민부대(賤民部隊)의 기포장으로 가담하여 동학도로 입도한 그는 갑오년 농민군이 봉기할 때 고창읍내의 청년들을 규합 농민군에 가담시키는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고로들은 증언하고 있다. 청년부대와 천민부대의 기포장으로서 앞장을 선 그는 농민군의 최선봉에 서서 진군하여 많은 활약을 펴냈다고 하는데 동학 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두목격인 그는 고창지역의 수성군(守城 軍)들의 밀고로 1894년 12월 6일 29세의 한창나이에 붙잡혀 고창 숲정거리 형장에서 관솔불로 머리통의 쥐구멍에 불을 붙여 죽이는 최악의 참혹한 사형 방법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게 되어 그의 사형 실담을 지금도 고로들에 의해 회자되고 있다. 김양두(金洋斗 1845~1895) 그의 자는 사익(士益)으로 흥덕현 부안면 선운리(興德縣 富安面 禪雲里 현 고창군 부안면 선 운리)에서 김해김씨 삼현파(三賢派) 집의남계공파(執義南溪公派) 금암공(金巖公 睦玄)의 후손 창강(昌强)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6년(고종 23) 무과(武科)에 입격(入格)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1894년 9월 제2차 봉기에 가담하여 농민전쟁을 성실히 수행하였는데 11월 9일 공주 우금치(牛 禁峠) 전투에서 가까스로 퇴각하여 귀가하였다가 관군에게 피체되어 1895년 1월 5일 고창현아에 서 참형을 당했다. 김영달 (金永達 ~ ) 김해김씨 개암사(開巖祠) 세보(卷之一)에 의하면 그의 자는 영심(永心), 휘는 달병(達炳), 영달 은 초명으로 호적상 이름이다. 성품이 차분하고 온순하며 체격이 건장하고 발이 빠르고 날렵하였 으며 소년기에 원촌 사는 김흥섭(金興燮 : 전봉준 장군, 수행원)과 서당에서 동문수학하였다고 한 다. 654 제 8편 사 회

39 그는 김해김씨의 중조인 삼현파조(三賢派祖)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관(管)의 셋째 아들인 한 림공(翰林公) 용(勇)의 5대 손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 대전에서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 從功臣) 2등으로 녹훈된 지남(志南)공의 10대손이다. 그의 묘는 무장면 강남리(江南里) 석수(石 水) 후록의 자좌(子坐)에 부인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본래는 영광군 진량면 황개리(皇介里) 와우 동(臥牛洞)에서 살았는데 12대조가 무장 석수로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농민군 창의소와 영광(靈光) 농민군 간의 문서 연락꾼으로 임무 를 띠고 황아장수(끈목, 담배쌈지, 바늘, 실, 그밖의 온갖 잡살뱅이의 물건을 지고 집집이 찾아다 니며 파는 사람)로 능숙하게 변장하고 문서 송달과 정보수집 업무를 충실히 이행하였다고 한다. 2차 봉기 이후 무장 구수내(九水川) 출신으로 영광지역을 맡은 송문수(宋文洙) 대장을 따라 영 광, 무장 지역에서 활약한 그는 (陰) 공주 우금치(牛禁峙) 싸움에서 농민군이 참패당한 이후, 송문수와 함께 서부퇴로를 따라 후퇴하면서 임피(臨陂), 만경(萬頃), 부안(扶安), 흥덕(興 德), 고창을 거쳐 영광에 이르렀다. 농민군이 지리멸렬하다가 12월 2일 녹두장군이 순창(淳昌) 피로리(避老里)에서 피체됨으로써 사실상 끝장을 보게 되면서 각 고을에서 유생 중심의 민보군(民堡軍)들이 나서서 토벌군을 도와 농민군 체포 구금을 수행할 때 그는 처소에서 새벽에 밀어닥친 민보군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갖은 고문의 악형을 받은 후 영광 관아 앞 네거리에서 그해 12월 27일 참형을 당하니 향년 43세를 일기 로 생을 마감하였다. 김정문(金鉦文 1867~1932) 그의 자는 敬(暻)洙 호는 南谷으로 고종 4년 무장현 靑海面 新垈里(현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新垈마을)에서 김해김씨 侍中公派 15세손인 三萬의 次男으로 태어나 백부 二萬에게 出系하여 그 系代를 이었다. 27세 되던 1894년 3월에 동학농민혁명의 제1차 봉기가 무장땅 冬音峙面 堂山골 九水내에서 일 어날 때 인근의 士美洞 출신으로 靑海面의 先軍將이던 趙誠元의 휘하에 들어가 종횡으로 활동하 던 중 5월 말에 全州城의 西門 밖 용머리고개 근처에서 관군들과 10여 일 동안 격돌하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어 귀향하였다. 동학농민군이 공주 牛今峠에서 폐퇴하여 역적의 누명을 쓰게 됨에 그는 고향을 버리고 사위(徐 判岩)가 세거하고 있는 사돈지가에 숨어들어 은신하고 있다가 경술합방 이후에 사돈가의 주선으 로 고창읍 新月里에 거처를 마련하여 옮겨 살다가 1932년에 한 맺힌 생을 마감하였다. 제3장 동학 농민 혁명 과 고창 과의 관계 655

40 김준옥(金俊玉?~1899) 고창군 아산면 구암리(九岩里)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동학에 입도하여 1899년 4월 정읍 농민봉 기에 가담하였으며 4월 23일 고창 부안면 중흥리 알뫼(卵山) 장터 싸움에서 고창 수성군에 피체 되어 4월 27일 고창현옥에서 옥사당했다. 김흥섭(金興燮 1874~1965) 그의 자는 흥섭, 호는 영암(榮庵)으로 본명은 흥관(興寬)이다. 김해김씨 문경공파의 20세손으로 접주 김성칠(金聲七)의 아들이다. 본래 선대에서는 광산군 평 동면 용곡리(光山郡 平洞面 龍谷里)에서 세거해 오다 8세인 언전(彦恮)이 무장현 장자산면(莊子 山面) 남당(南塘)으로 이거해 왔다. 그의 조부(祖父)가 훈장을 맡아 해리면 하련리(下蓮里)로 옮겨와 살았는데 그의 아버지(聲七) 가 훈장관계로 무장 신촌(新村)으로 다시 이사를 하였다가 갑오농민전쟁 이후 가족들은 무장 원 촌리 송산(院村里 松山)으로 옮겨 그 후손이 지금까지 세거해오고 있다 그는 21세의 혈기 방장한 나이에( ) 동음치면 당산리(冬音峙面 堂山里)에 있는 송문 수(宋文洙) 접주 집에서 손화중(孫華仲) 대접주와 가친 김성칠의 천거를 받아 진중 수행원(陣中 隨行員)으로 발탁되었다. 그 자리에는 녹두장군, 손화중, 김성칠, 송문수, 정백현(鄭伯賢) 접주 등 이 함께 하였다. 이와 같이 그가 수행원이 되기까지에는 본인의 타고난 체질이, 장대한 기골과 힘이 장사였던 기본이 갖추어지기도 하였지만 성품이 매우 침착하고 훈장을 맡은 상당한 지식수준이 있었으며 또한 수행원으로서의 절대 요건인 신임이 두터웠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부친 김성칠(賜號 : 浩軒)은 일찍이 서당 훈장노릇을 하던 젊은 시절부터 손화중과는 교류 가 있었고 그의 호첩(號帖)을 보면 당초 그는 시천교(侍天敎) 교도로 활동하였는데 동학혁명 때 시천교와 동학이 병합되면서 손화중의 전도를 받아 그도 또한 접주가 되었으며 두 사람은 매우 긴밀한 유대관계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손화중 대접주의 권유로 김성칠은 녹두장 군이 고부에서 무장으로 옮겨와 거사를 계획하는데 이를 돕기 위해 신촌 자기 집에서 전봉준, 손 화중, 김개남, 김덕명, 서인주, 임천서, 강경중, 고영숙, 최재형, 김영달, 송문수, 정백현 등이 모여 구수회의를 할 때 쌀 50가마를 쾌척 고무 격려하기도 했다. 김흥섭은 무장기포 이전부터 전봉준 장군과는 기거와 침식을 함께 하며 바짝 붙어 따랐으며 장군의 언행을 메모하고 경호의 책임을 완벽하게 수행하였다. 집강정치가 열리던 그해 여름부터는 그의 부친이 무장 집강소를 설치하고 그 책임을 맡는 바람 에 그는 집에 눌러앉아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 맡아 가사를 돌봤는데 그해 가을 우금치 전투에서 656 제 8편 사 회

41 패한 농민군이 몰락하게 됨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김흥섭도 변산반도 깊숙한 골짝마을에 숨어들 어 서당 훈장으로 변신 불행을 극복해냈다. 그는 1965년 10월 28일 92살까지 장수하면서 여러 어 지러운 세상을 관망하여 살다 갔다. 문덕중(文德仲 1856~1894) 그의 본관은 남평(南平)으로 고창군 공음면 한사동(閑沙洞)에서 지현(智炫)의 아들로 태어났다. 손화중포로 동학에 입도하여 송문수, 고순택과 함께 갑오동학혁명에 참여하여 3월 20일 무장기 포와 백산 봉기에 관여하고 9월 2차 봉기 때 참여하였다가 관군에 체포되어 무장관아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문만호(文萬浩) 그의 자는 致順, 1864년(고종1) 무장군 瓦孔面 禮田里 上禮마을에서 鍾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4년 무장땅 冬音峙面 堂山골에서 동학농민군의 제1차 봉기 때부터 창의 모집에 스스로 앞장을 서서 가담하여 농민군이 되어 진력하던 중 乙未년 가을에 실종이 되어 공음면 예전리 長嶝에 초혼 장으로 모셔 있다. 禮田里에 사는 文氏 門中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그는 주변에서 종내에 역적으로 몰리게 된다 고 하므로 장검 1자루와 납탄 1되를 집에 숨겨둔 채 행방이 묘연한 것을 보면 하찮은 졸병으로 가담된 것이 아니라 상당한 부대지위가 있었던 신분인 것 같다고 전해주고 있으며 을미년 가을까 지 버텨낸 것을 보면 역시 상당한 입신자였을 것이라고 지금도 안타까워하고 있다. 문상학(文尙學) 그는 南平文氏 監察公의 후손 貴大의 둘째아들로 무장군 上里面 劍山里 幕亭마을에서 1872(고 종9)년에 출생하였다. 상학은 그의 初名이고 자는 尙烈이다.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던 1894년에 는 23살의 한창 나이였다 한다. 문중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무장땅과 영광, 함평을 왕래하면서 크게 활약하였다고 하는데 갑오년 늦가을에 瓦孔面 선산(현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 구역)등에서 사형을 당하였다고 하고 족보의 기록에도 卒年의 기록은 없으나 음력 10월 13일에 忌日로 표시되 고 있어 시기적으로 갑오년 늦가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박 헌 (朴憲 ~ ) 밀양박씨로 상하면 도리동에서 태어났다. 동학에의 가담 여부는 분명하지 않으나, 1894년 3월 제 3장 동 학 농 민 혁 명 과 고 창 과 의 관 계 657

42 당산(堂山 : 현 공음면 구수내)에서 첫 봉기한 동학농민전쟁에 농민군의 일원으로 갑오년의 1, 2 차 기병에 모두 가담하였다. 그해 11월 말 농민군이 해산하자 역적으로 몰리게 되어 집에는 들어갈 수 없고 전남 영광군 홍농면 월암리에 있는 처갓집으로 은신을 하게 되어 처남이 일원바위 등에 피신을 시켰는데, 어느 날 일본 헌병들이 말 타고 들어와 박헌을 찾으러왔다. 정보가 샌 모양인지 다짜고짜 방문을 열고 들이닥쳐 상투잡이로 끌려가서 1895년 2월 10일 무장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기별을 듣게 된 그의 부인이 이십 리 길을 달려와 시신을 거두어다 장사를 치렀다. 손자 되는 박용마의 증언으로는 동학을 믿었으니까 어울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같은 농민군이 었던 김병운과는 한 들 사이에 살았기 때문에 그럴 법했다는 의견이었다. 배환정(裵煥廷 1863~1922) 그의 자는 상삼(相三)호는 남계(南溪)이며 본관은 달성(達城)으로 무장현 와공면(瓦孔面) 청천 (淸川)(현 고창군 공음면 용수리)에서 후근(厚根)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기가 넘쳤으며 외모가 빼어나 사람들의 호감을 샀고 풍체의 풍기는 멋이 사람들 을 움직이는 기운이 있었다. 평소에 어려운 이웃을 만나면 숙식을 제공하였고 한약방을 경영하면서도 그들에게 무료봉사를 하거나 노부모를 모신 이들에겐 약값을 절반으로 줄여 주는 적덕을 쌓기도 하였다. 한약방을 하던 터라 갑오년 이전부터 손화중 접주와 인연이 되어 접주로 활약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1894년 농민군의 창의 기포할 때 그의 아들 정기(正基 15세)는 아버 지를 따라 시오리 떨어진 당뫼(堂山)에 도착 농민군들이 밤에 대(竹)를 베어다가 진을 치고 둘러 앉아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새 수천 개의 대창을 깎고 다듬는 것을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날이 밝 자 대오를 정비한 농민군은 구수내 갱변에 마련된 연병장에 모여 창의 포고문을 발표한 후 무장쪽 으로 해서 고부(古阜)로 향했다는 것이다. 그는 농민전쟁이 끝난 이후 어려운 고비를 예상했었으나 평소에 적덕한 보람이 있어 이웃에서 모두 덮어주어 다행히도 천명을 누릴 수 있어 무사했었다고 한다. 서상은(徐相殷 1869~1894) 그의 자는 옥여(玉汝), 법호는 송암(松菴)으로 1869년(고종 6) 고창군 성내면 은동(隱洞)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동학도로서 동학농민군의 선봉에 섰었다. 1894년 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귀가 후 658 제 8편 사 회

43 즉시 관군에게 붙잡혀 흥덕 통위영군(統衛營軍)에 처형되었다. 서원국(徐源國) 1957년(丁酉)에 간행된 利川徐氏派譜에 의하면 그는 隨聾公派14世孫으로 1844년(헌종 10)고창 현 덕정면 신촌(현 고창읍 율계리 신촌마을)에서 아버지 洪喆과 어머니 義城金氏 사이에서 장남 으로 태어나 87세의 수를 누리고 1931(辛未)년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자는 益瑞 號는 修堂으로 필자가 전봉준 장군의 堂村 태생지 구명을 위해 자료조사를 하 던 중 1966년 4월에 고창읍 덕정리에 사는 천안전씨 취객이던 徐致亨씨를 만나러 갔다가 그가 마침 서원국의 친손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그가 조부 서원국으로부터 직담으로 들은 집안 얘기를 들려주었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서 원국은 본래 莘村마을에서 세거해 왔는데 대농으로 찜방(쪽물염색-장)까지 경영하게 되어 집터 울안이 500평인 것으로 보아 크게 부를 누렸다고 한다. 고종 14년에는 通訓大夫의 직첩을 받아 司憲府 監察벼슬까지 얻어냈는데 청년기에 堂村 서당에서 妻 3從叔뻘 되는 全基永(전봉준 장군 아버지)의 문하에서 한문수학을 한 인연으로 스승의 선고 全碩豊(전봉준 장군 조부)의 묘지를 25 살 되던 해(1868)동문수학하던 金在英, 鄭仁民 등과 함께 古阜郡 南面 鎭長門下 次福里 앞산 甲卯 龍艮자리에 투장해준 일이 빌미가 되어 전봉준 장군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할 때 親衛部 隊의 일원으로 가담하게 되었다. 전장군보다는 11살 위지만 처가로 따지면 外四從間이었다. 이때 그의 맏사위 金箕學(淵-1870년생)도 장인을 따라와 함께 가담하여 장인과 친위부대를 돕 는 행동대원으로서 적군과 대치하는 아슬아슬한 고비를 여러 차례 겪다가 전쟁이 허사로 끝나게 되어 장인의 권유로 外家(錦城羅氏)집안이 있는 羅州로 피신하여 고입살이로 은신하였다고 한다. 서원국은 역적으로 몰리는 판국이 되자 가족들을 덕정마을로 이거케 한 후 재산을 정리하여 외가(義城金氏)집안의 집성촌인 정읍 땅에 묻혀 살다가 乙巳늑약이 체결된 이후에 고향으로 돌아 와 88세의 수를 누리다가 1931년에 타계하였다. 송경찬(宋敬贊) 그의 本名은 榮植이며 敬贊은 그의 字다. 그리고 又名은 榮殷이며, 그의 家門은 礪山宋氏이다. 1859년(哲宗 10) 高敞郡 孔音面 禮田里 上禮 마을에서 아버지 義浩 어머니 全州李氏 사이에 長 男으로 태어났다. 그는 鄕薦과 道狀을 받은 돈독하고 탁이한 효행으로 인근에 수범이 되었었다. 일촌의 鄭伯賢과 함께 청년기에 동학에 입도하여 활약하였으며 동학사의 기록에 의하면 姜敬重 제3장 동학 농민 혁명 과 고창 과의 관계 659

44 과 함께 茂長고을의 동학접주로 동학농민군의 頭領으로 가담하여 중추적 역할을 맡았었다. 1차 봉기 때부터 농민군의 핵심요원으로 가담한 데 이어 2차 봉기 때에도 孫華仲 大接主 예하 에서 요직을 맡아 크게 활약하였는데, 관군에 체포되어 나주군영으로 압송되었다가 12월 27일 처 형된 것을 얼마 뒤에 유족들이 확인하였으나 시신을 찾을 길이 어려워져 사형당한 전남 무안군 描堂山을 며칠을 두고 찾았으나 시신 등의 부패로 선별이 어려워 허탕을 치고 뒤에 초혼장으로 고향인 예전리 앞 토적골 壬坐에 안장하였다. (후손) 宋基弘(서울시 강북구 미아2동 송정빌딩 4층) 엄흥삼(嚴興三 1860~1899) 그의 본관은 영월(寧越)이며 호적명은 준화(俊化) 족보명은 항영(恒永)이고 흥삼은 그의 자이 다 고창군 아산면 구암리(九岩里)에서 출생하여 20대에 집안 족형 되는 엄대영(嚴大 永 -東學接主 觀導使)의 권유로 일찍 동학에 입도하였다. 1894년 3월 무장기포(茂長起包)의 4천군에 가담하고 고부관아에 진격한 후 백산봉기에 참가하 였고 이해 9월의 2차 농민군봉기에 가담한 이후 우금치 폐전 때까지 무장지역 동학 요원으로 활 약하였다가 숨어지냈는데 1899년 4월의 정읍 농민봉기에 역시 핵심 요원으로 활약한 이후 고창 민보군(民堡軍)에 체포되어 이해 5월 25일 고창군 관아의 감옥에서 처형당하였다. 이돈휘(李敦徽) 그는 본관이 全州李氏로 朝鮮朝 太祖 李成桂와 형제간인 義安大君의 二十世孫 輔文과 어머니 金海金氏 사이에서 四형제 중 막내로 1856년(哲宗7)에 고창군 심원면 珠山里 대실(竹谷)마을에서 태어났다. 남달리 정의감이 왕성하고 개척정신이 투철했던 그는 39세 되던 1894년 정월에 인근 공음면 당뫼골에서 동학농민군의 훈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뫼 마을에 사는 송문수 대장과의 인연으 로 이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동학에 가담된 그는 심원면 접주로 맹활약을 전개하던 중 부안면 인촌(仁村)마을 에 사는 珍山 영감(金性洙의 養父인 金棋重)이 농민군에 전혀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소문 을 듣고 동지들을 이끌고 心元面 竹谷에까지 연행하여 다짐을 받고 방면해 준 이야기는 지금도 고로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농민군의 두령이 되어 1, 2차 봉기에 진군 투쟁을 거듭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고 하는데 패전 이 됨에 관군에 체포가 되어 光州에 있는 日本守備隊로 이첩수감이 된 이후로는 생사를 알 수가 660 제 8편 사 회

45 없게 되었다. 이문교(李文敎 ~ ) 그의 자는 대성(大成)이며 관향은 전주이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형인 완풍대 군(完豊大君) 원계(元桂)의 17세요, 소파조(小派祖) 효강공(孝剛公 : 秉節校尉)의 12세손으로서 본래 그의 태생은 영광군 묘량면 영당리(影堂里) 소골마을에서 윤록(潤綠)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체구가 건장하고 성격이 활달하여 또래 중에서는 꽤나 우쭐했다고 하며 글도 출입 할 때 쓸 정도는 배웠다고 한다. 유족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 가산은 다소 여유로웠으나 손이 귀할 팔자라고 하여 고향을 떠 나서 살아야 팔자타령이 해소된다하여 외손(淸道金氏 : 金基一)의 권유에 의해 그때 외손이 살고 있는 무장현 청해면(靑海面) 안산리(安山里)로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왔는데, 경작하는 들녘이 왕 촌 앞들이라 편의상 왕거(旺巨)마을로 수년 만에 다시 옮겨 살았다. 외손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한 그는 오리동면(五里洞面)을 중심으로 크게 활약한 접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1894년 3월 20일 당뫼(堂山 : 현 孔音面 九岩里 九水내)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창의포고문을 발 표하던 1차 기포 때 무려 근 백 명의 동학도를 이끌고 나와 막강한 저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다. 그는 갑오농민혁명 당시 37세라는 완숙한 나이 탓에 최선봉에 서서 농민군을 지휘 감독하였다 고 한다. 3월 22일 새벽길을 나선 농민군은 무장, 고창을 거쳐 흥덕 사포(沙浦)에서 1박하고 23일 에 줄포(茁浦) 시장에서 점심을 먹고 이날 밤 고부(古阜)관아를 들이치고 25일에는 백산(白山 : 현 扶安郡 白山面)에 총집결하여 동도대장소(東徒大將所)를 차렸을 때에도 그는 무장 농민군 두 령 송경찬(宋敬贊), 강경중(姜敬重) 휘하 1,300의 최선봉에 섰었다. 이어 4월 6일 고부 도교산(道矯山 : 현 井邑郡 德川面 德川里 下鶴里)에 집결되어 이튿날 새벽 위계전술로 전라감영의 진위대와의 전투를 일방적 승리로 이끌어내고 4월 8일 새벽에 흥덕 그리 고 정오에 고창성을 무혈 입성할 때도 그는 앞장을 섰었다. 4월 9일 오후 농민군은 무장읍에 당도하여 농민군을 속박하던 관속들을 닥치는 대로 처단하고 그들이 사는 집을 모조리 소각하였다. 무장은 평소 동학교도들에 대한 지방관아의 탄압이 가혹하 였기에 이에 반비례하여 동학농민군도 무장관아에 대한 응징을 강경하게 대처하여 일벌백계를 삼 는 데 주도하였다. 한편 초토사 홍계훈의 전주입성 이후 경군(京軍 : 中央討伐軍)의 진격에 대비 여시뫼(狐山峰 : 茂長面 新村里 王帝山)에 주진(主鎭)을 설치하는데 사흘 동안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나 토벌군 의 동태에 대한 기별이 없자, 4월 12일에는 영광(靈光)으로 진출하여 중앙군을 유인하기 위해 4일 동안이나 유진하였으나 또한 중앙군의 움직임이 없자 다시 4월 16일에는 함평(咸平)으로 진격하 제 3장 동 학 농 민 혁 명 과 고 창 과 의 관 계 661

46 여 또 다시 4일간을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자 농민군은 4월 21일 적극적인 중앙군의 유인을 시도 하고자 장성(長城) 월평(月坪) 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홍계훈은 이학승(李學昇), 원세록(元世祿) 등을 선봉장으로 삼아 토벌군 300명과 대포 3문 을 주어 황룡천(黃龍川)에서 농민군을 공격해왔다. 마침내 4월 23일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대첩을 거두어 대포 2문과 100여 정의 장총과 많은 탄약을 뺏고 선봉장 이학승과 병사 5명을 사살하였다. 4월 24일 오후에 장성을 출발한 농민군은 천원(川原)에서 야영하고, 25일 정읍, 태인에 이르러 숙영하고, 26일 금구(金溝), 원평(院坪)에 이르렀다. 그러나 토벌군을 정면 돌파한 농민군은 너무 성급함을 드러내는 자만심에 도취된 듯싶었다.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최종 목표인 서울 진격을 위 한 발판 마련을 위해 4월 27일 농민군은 사전 내통 하에 스르르 열린 남문과 서문을 통해 입성, 전주를 완전 점령하였다. 한편 황룡천에서 참패를 당한 경군은 영광으로 물러나 있다가 25일 고창을 거쳐 26일 정읍으로 회군하고, 27일에 태인을 지나 원평, 금구에 이르니 이미 동학농민군은 전주를 점령한 뒤였다. 금 구에서 밤을 지낸 경군은 28일(陽 6月 1日) 오시에 전주 용머리고개에 당도하여 전주성을 탈환하 기 위해 완산 다가산, 사직단, 유연대 등 남쪽 주변 산과 골짜기를 연결하여 진을 치고 포열을 폈 다. 이때 경군의 병력은 1,500여 명이었다. 완산 전투는 4월 28일과 5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치열하 게 전개되어 농민군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전라도의 수도요 조선왕조의 태생지인 전주가 점령당하자, 조정에서는 급기야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청군이 출동하자 이에 질세라 엄청나게 많은 일본군이 서울에 투입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당황하여 전라감사(金鶴鎭)를 시켜 농민군과 휴전을 추진하여 전주화약을 맺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전라도 전 지역에 집강소(執綱所)가 설치되어 농민 통치사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 른바 농민을 위한, 농민에 의한, 농민의 세상으로 개벽이 되었던 것이다. 집강소의 설치로 폐정개혁의 기본이었던 신분의 차별은 없어지고 관리나 토호들의 착취와 탄압 이 물러가고 농민이나 천민을 괴롭힌 자들이 오히려 처벌을 받은 민정의 사회개혁이 이루어진 것이다. 전주화약 이후 무장으로 회군한 이문교는 무장집강소에 참여하여 글발을 익힌 대로 서기직을 성실하게 수행했다고 전한다. 한편 5월 16일 인천항에 도착한 일본군은 자국의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에 입성하 고 오도리(大鳥圭介) 일본공사는 조선의 내정개혁이란 미명 하에 내정간섭을 함부로 하고 6월 21 일(陽 7月 15日) 아침에는 일본군이 담을 넘어 경복궁에 침입, 어소(御所)의 고종 임금을 연금하 는 사태가 유발되었다. 662 제 8편 사 회

47 이와 같이 일군의 침략의 마수가 노골화되자 뜻있는 조야(朝野)가 나라의 장래를 심히 걱정하였다. 특히 갑오약력(甲午略歷 : 鄭碩模 저)을 보면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埈鎔)은 사람을 전봉준, 김개남(金開南) 진영에 보내 일군의 궁성침입사건을 알리고 기병하여 서울로 올라올 것을 촉구하 였다. 이에 전봉준은 휘하의 4천 동학농민군을 삼례(參禮)에 소집시키고 9월 16일 농민군 800명을 이끌고 전주성 안에 들어가 군기고(軍器庫)에 있는 총 251 자루, 환도(環刀) 442자루와 남영(南 營)에 있는 화포(火砲) 74문. 탄환 9,773개, 탄자(彈子) 41,234개, 환도 300자루를 확보하고(일본공 사관 기록 참조) 동학의 남 북접의 원만한 합의로 마침내 9월 18일 총궐기령이 내리니 이른바 9월 2차 봉기였다. 이문교는 무장 농민군 지도자 송문수(宋文洙), 송경찬(宋敬贊), 강경중(姜敬重) 등과 함께 일본 군을 상대로 하는 본격적인 농민전쟁에 참가하여 11월 9일 공주 우금치 싸움에서 참패를 당하고 전주로 퇴각하여 11월 25일 원평, 11월 27일 태인에서 최후의 항전을 마친 후 지리멸렬하게 농민 군이 해산당한 이후 가까스로 귀환하여 집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평소 마을에서 고분고분하지 않아 밉살이 든 그는 마을의 터주성씨였던 청도(淸道)김씨 와 경주(慶州) 김씨들이 밀고하여 귀가한 지 20여일 만에 관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무장관아에 끌려간 그는 갑오년 12월 26일 총살을 당한 후 이른바 확인사살의 잔인한 수법으로 몸에 기름을 뿌려 재차 화형까지 당한 두 번의 주검을 맞는다. 이와 같이 참혹한 주검으로 시체확인조차 할 길이 막연하였으나, 용케도 부인이 기워준 버선 바느질 솜씨로 천만 다행하게 시신을 확인할 수 있어 그가 살았던 왕거마을 뒤 조시산(造矢山)에 묘를 써놓고 있다. 이성천(李成天 ~?) 1856년 고부군 소정면(所井面) 마동리(馬洞里)에서 태어나 1893년(고종 30) 무과(武科) 병과(丙科) 701인으로 급제하여 오위도총부 요양위 소속 사과(司果 - 正6品)직에 근무하였는데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을 당하게 됨에 그를 추대하여 진무(鎭撫)를 삼아 마을의 피폐를 막고 마을사람들의 무사 안녕을 의탁함에 그는 자진하여 동학군에 가담 마을의 보존을 위해 헌신함으 로써 난세를 무사히 치러냈다. 후에 경군(京軍)을 인솔한 왕사(王師)가 내려옴에 그는 자기의 걸 어 온 길을 성실히 아뢰고 동학에 가담한 것은 마을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본의는 아니었으나 불가피성을 사죄하여 면책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부인 흥성장씨(興城張氏)가 왕사 앞에 엎드려 대신 죄를 받겠다고 호소함에 이에 감복한 왕사가 이 사실을 나라에 알려 1904년 효부로서 정려까지 내려졌으며 그 후 이성천은 처가 근처 제3장 동학 농민 혁명 과 고창 과의 관계 663

48 인 고창군 신림면 월평리(月坪里) 산속으로 은신하여 족보까지 바꾸어(전주이씨 담양군파에서 순 평군파로) 전혀 다른 사람으로 행세하다가 세상이 달라짐에 송촌 마을로 내려와 살았다. 구한말인 1909년도에 흥덕 사포에 있는 측량학교 1기생으로 수료하여 농촌의 구획정리 사업에 도 크게 기여하면서 만년을 뜻있게 보낸 분이다. 이재헌(李栽憲 : 1873(癸酉) 9. 29~1944(甲申)3. 1) 1982년 3월 18일 노병선(魯炳善당시 83세 해리면 용반리 신흥거주), 이재형(李載馨 당시 78세 해리면 용반리 거주), 이환범(李煥範 당시 73세 長孫 심원면 고전리 진주 거주) 씨 등이 고창문화 원에 내방하여 증언한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재헌의 자는 인배(仁培) 호는 하전(下田) 그의 선대는 咸平李氏로 시조 언(彦)의 6대손 인문 (仁問))의 둘째 손자인 삼언(三言)의 손자 현령공(縣令公) 조(稠)의 14대손 돈복(敦福)의 장남으 로 고창군 해리면 왕촌리 신흥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생활이 풍족하였고 강직한 기질로서 호걸풍의 선비상으로 성장하여 경학(經 㶅)을 익혀 관년에 이르러서는 사림류(士林流)의 몽학(蒙學)훈장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 13살 때 상하면 장호리(長湖里)에 사는 5살이나 많은 부호(富豪) 동학접주 표종길(表宗吉)의 딸(18세)과 혼인을 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동학에 입도하는 계기를 얻어 접주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1891년 초봄 이후 청해면(靑海面)의 15개 마을(安子, 松山, 古星, 平地, 下連, 牛山, 平章, 水洛, 新興, 七星, 杏山, 臨 海, 龍溪, 松岩, 二相)과 오리동면(吾里洞面)의 21개마을(旺村, 大興, 金平, 鳴鼓, 冬湖, 外景, 光升, 米洞, 巳盤, 方築, 萬化, 魚龍, 羅山, 月峰, 中九, 梅南, 星山, 良谷, 新興, 上阜, 芝老)을 순방하면서 접인들과 화합 맹약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무장 고을 당뫼(현 고창군 공음면 구수마을)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제1차 봉 기 때 21살의 건장한 성년이 된 그는 장인 표종길이 중위장(中衛將)으로 나설 때 부장(副將)으로 활약하게 되어 정읍, 태인, 금구, 진안, 장수, 남원 등지에 사는 표종길의 동학 접인들의 연락을 도맡아 순회 모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4월 28일 전주 입성 전투 시에는 표종길의 지휘를 받아 특수 공격의 역할을 맡아 크게 활약하였다. 전주화약 이후 집강소 정치기를 고향에 돌아와 무난하게 집강정치에 치중하였는데 일본군의 개입으로 사태가 여의치 않게 되자 1894년 9월 2차봉기가 심화되자 장인과 함께 농민군에 가담하 여 적극적인 활동으로 대처하였다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집에 돌아왔으나 관군의 지명수배에 밀려 검거 대상자로 지목됨에 부안군 변산의 깊은 오지에 숨어들어 모막(茅幕)을 짓 고 감자와 잡곡을 경작하여 은신하다가 1895년 7월에 日本軍의 토벌작전에 밀려 도주하다가 옆구 664 제 8편 사 회

49 리에 상처를 입고 고향으로 숨어들어 오리동면 난정(蘭亭)의 친척집에 은신하였는데 관군에게 발 각되어 뒷문으로 도망쳤는데 이때 쏜 적탄에 집주인이 맞아 목숨을 잃고 그는 가까스로 빠져나와 九死一生으로 도주하여 또 다시 피신생활로 일관하여 교묘히 은신하였는데 부친의 권유로 富興山 (大成山) 골짜기에 있는 永 齋제에서 변신하여 후학을 가르치는 등 연명하다가 은밀하게 심원면 고전리 진주마을 그의 집으로 옮겨 지내다 1944년 3월 1일 향년 72세로 생을 마감했다. 임천서(林天瑞 1864~ ) 그의 本名은 종문(鍾文)이고 천서는 자이며 초명은 문수(文洙)이다. 고창군 고수면 인성리(仁城里) 석우촌(石隅村)에서 아버지 임석황(林錫璜)과 어머니 울산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조양(兆陽)이다. 조양군(世味) 후손이 고창 땅에 들어온 분은 조양군으로부터 7세 되는 사복(士福)으로 서울에서 태어나(1445 세종 27) 문과 급제한 후 서천(舒川)군수를 지냈는 데, 관직을 떠난 뒤 집에서 학문을 즐기며 자적하던 차에 마침 아버지가 흥덕현감을 사는 터라 흥덕에 들렀다가 조양군의 묘가 있는 보성(寶城)을 찾게 되었다. 이때 고창 방등산(方等山) 아래 지금의 외정(外汀)마을 터를 발견하고 유사시에 피란지지로 점찍어 두었다가 연산군 때에 시절이 하수상함에 이곳으로 낙향하기로 하여 가솔을 거느리고 정착한 이래 15세에 이르러 천서가 태어 났다. 그러니까 천서는 조양군으로부터 22세가 되는 것이다. 그는 장성에 사는 황주변씨(黃州邊氏)를 내자로 맞아들였는데 전봉준과는 유년 시절에 동문수 학을 한 처지인 것을 후손들이 증언해주고 있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全彰赫, 本名 基昶)이 서당을 차렸던 서당촌은 당촌(堂村) 바로 서남쪽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그가 사는 석우촌과 서당촌과는 약 3.5 쯤의 거리로서 수긍이 간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전봉준은 농민혁명의 준비단계에 고창에 올 때면 으레 그의 집에 와서 살 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오지영의 동학사 에 보면 손화중(孫華仲) 포(包)에 속한 임천서는 고창에서 대접주로 활약하 면서 오하영(吳河泳), 오시영(吳時泳), 임형노(林亨老) 등과 함께 1,500명의 농민군을 거느리고 고 부 백산(현 扶安郡 白山面)에 3월 25일 본진을 설치할 때 당당하게 참여한 두령이었다. 이때 고창지역에서 출병한 농민군의 인원과 백산 본진에 총 집결된 8천 명의 내력을 동학사 에서 옮겨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임천서는 동학농민전쟁에 가담하면서 가족들을 고창군 상하면 장호리(長湖里)에 사는 사돈댁 (그의 며느리 咸平魯氏의 친정집) 옆으로 옮겨 놓고 떠났다고 한다. 만약을 위한 대비책이었다. 제3장 동학 농민 혁명 과 고창 과의 관계 665

50 그는 전쟁 중에 장호리 집에 몇 차례 들렀다는데 올 때마다 2 300명씩 농민군을 데리고 와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룻밤 자고도 가곤 했다 한다. 이와 같이 그의 활동 영역은 대단해서 동학교단 쪽에서도 천도교서 와 천도교 백년사 에 비 중 있게 실려난 것을 보면 대단한 인물인 듯싶다. 1894년 9월, 2차 봉기 때에도 동학사 의 기록을 보면 임형로와 함께 고창에서 5천군을 거느리 고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농민군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논산에서 공주를 공략하고자 11월 9일 우금고개(牛禁峠)에서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처절한 전투 끝에 공주를 눈앞에 두고 퇴각하고야 말았다. 논산 황 화대에서 정부군과 일본군의 연합세력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황산벌의 매서운 바람과 함께 밀려나 고 말았다.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퇴각했다가 11월 23일 금구 원평(院坪)으로 후퇴하여 원평과 태인(泰仁) 에서 안간힘을 다해 전투를 벌였으나 전세를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병사들은 모두 분산되고 임천서는 단신으로 장호리 사돈댁으로 피신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끝 내 붙잡혀 법성포 수비대에 끌려가다 홍농면 지한리 다리에서 사지를 찢기는 죽음을 당하였다. 가족들이 시신을 거두어 고향 땅 석우촌 양지바른 곳에 묘를 쓰니 향년 31세였다. 전막동(全莫同?~1899) 고창군 무장면 사점(沙店) 출신으로 1899년 4월 정읍 농민봉기에 참가하여 4월 23일 고창군 부안면 중흥리(中興里) 알뫼(卵山)장터 싸움에서 고창군 수성군(守城軍)에 체포되었다가 고창현 옥(獄)에서 원인불명하게 옥사를 당하였다. 전봉준(全琫準) 천안전씨 족보 중에 1886년(고종 23) 대사헌 문충공 송병선(宋秉璿)이 서문을 쓴 병술보(丙戌 譜)는 전봉준 장군이 32세 때 발간되었는데 그 뒤 전 장군이 역적으로 몰리게 되어 역적 이름이 들어있는 이 족보를 국법으로 모두 거두어들여 불태웠다고 한다. 그러나 병술보 1질이 그의 방 계 손에 의해 보존되어 지금은 유일본으로서 기념물적인 의미부여가 되고 있다. 이 병술보 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휘(諱)는 병호(炳鎬)요 초명은 철로(鐵爐)이고 자는 명좌(明 佐)로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그 기재사항 중에 봉준(琫準)이란 이름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본명을 드러내기 싫어하던 당 시 사람들의 인지상정으로 보아 봉준 은 갑오년 혁명을 일으킬 당시 임시변통으로 쓰게 된 속명 (俗名)인 듯싶다. 666 제 8편 사 회

51 왜냐하면 1931년 신미보(辛未譜) 에 이르러서야 족보기록이 휘봉준, 초명 철로, 또 다른 이름 병호, 자 명숙(明淑)으로 바뀐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녹두 이름은 전봉준의 야무지게 작 은 체구(5자)를 두고 불린 별명임을 고로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씨하로 또는 쇠하로 는 그의 어렸을 적 철로 아명에서 연유된 별명으로 전해왔었는데 불씨 화로, 쇠로 만든 화로란 의미가 담긴 것으로 그의 야무지고 당찬 그리고 골목대장으로 또래 아이 들을 이끌었던 유년기의 별명이었다. 천안전씨는 백제 온조왕조에 십제공신(十濟功臣)의 일원으로 환성군(歡城君)이 된 전섭(全聶) 이 그 시조요. 파조 37세 문효공(文孝公) 전신(全信 : 字 而立. 호 栢軒)은 고려 충열왕조에 진현관 (進賢館) 대제학과 밀직사(密直司)의 동지사(同知事) 상의도감사(商議都監事)를 지낸 분이다. 문효공파 세보(世譜)에서는 전봉준에 관해 공은 천성이 영특하고 도략이 웅장했다. 당시에 권 리자가 조정에 있어 국정이 문란하고 인생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공이 확청(廓淸)할 대의가 있어 상경하여 대원군에게 시폐(時幣)를 이야기하니 그의 언론을 장하게 여기고도 그 뜻을 펴주 지 아니함으로 공이 돌아와서 동지들에게 구국책을 의논했다. 때마침 그 부친이 관리의 횡포를 하소연 하다가 도리어 화를 당함에 공이 민중을 창솔하고 원 근에 격문을 돌림에 달포 사이에 사방에서 향응하여 온 나라가 진동하고 관군이 계속하여 패함에 조정에서 청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니 일본에서 천진조약을 위배했다하여 동시에 일본군도 출병함 으로서 마침내 청 일 전쟁이 일어나고 가을에 동학농민군이 대패하여 공도 잡혀 죽었다. 고 간기 해 놓고 있다. 또한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 에 보면 고창 당촌(堂村)에서 대대의 유림 집안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의 아버지 전창혁(全彰赫)이 일찍이 흥덕 소요산 암자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어느 날 밤 꿈에서 소요산(逍遙山) 만장봉이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아들 봉준을 얻었다. 고 한다. 이 책은 또한 그는 용모가 출중하고 재기가 넘치며 활달한 기상은 급인의 품이 있고 강개한 회포 는 제세(濟世)의 뜻을 품었다. 고 써 놓고 있다. 천도교 백년약사 에서는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담력과 기백이 있고 학식과 무예를 겸하였으며 체소하지만 강기가 있어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30세 때에 동학에 들어온 후 수도에 지극하여 접주의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 시국을 개혁하고자 사방을 주유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대원군(大院君)과도 기맥을 상통하였 다는 설이 있으나 공초(供草)에서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고 하였다. 장봉선(張奉善)의 정읍군지 전봉준 실기에는 전봉준은 용모가 단묘(端妙)하며 학문이 넉넉 하여 일찍이 고상하고 깨끗한 선비로 불렸으나 키가 5자밖에 안 되어 녹두란 별명이 붙었다. 그러 나 담은 커서 산 같고 눈은 샛별같이 빛났으며 목은 옥소리를 지녔고 힘이 보통 사람에 비해 뛰어 제 3장 동 학 농 민 혁 명 과 고 창 과 의 관 계 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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