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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기 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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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사 刊行趣旨 오늘 우리의 韓國史 연구는 지난날 民族史 탐구에 몸 바쳐 온 先人의 精神과 業績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分野에 걸쳐 큰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또한 韓國史에 관한 국내외의 관심은 한층 더 높아 가고 있읍니다. 이에 우리는 韓國史 硏究成果를 집대성하고 체계화할 단계에 이 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韓國의 歷史와 文化를 모든 사람에게 인식시켜야겠다는 사명감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硏究成 果를 현재의 수준에서 일단 총정리, 검토함으로써 앞으로의 硏究 方向을 제시하기 위하여 꼭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 믿기 때문입니 다. 國史編纂委員會가 있읍니다. 한국사 를 편찬 간행하는 취지가 여기에 한국사 를 편찬함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세 웠습니다. 첫째, 民族의 歷史와 文化의 성장 발달을 바탕으로 한 韓國史를 편찬한다. 둘째, 民族主體性에 입각하여 내재적 발전을 부각시키는 韓國史 를 편찬한다. 세째, 모든 硏究成果를 종합하고 체계화하며, 새로운 韓國史를 편찬한다. 한국사 가 간행됨으로써 앞으로의 硏究에 새로운 길잡이가 되 고 또 널리 韓國史를 올바로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國史編纂委員會 委員長
6 槪 要 1) 社會 經濟史의 時代的 背景 1914년 7월에 勃發하였던 世界大戰이 歐美 先進諸國이 확립하 였던 東洋에 대한 政治 經濟的인 支配權益을 물리치고 日本이 東 洋에 대한 帝國主義國家로 등장할 수가 있었던 歷史的 契機로 작 용하였다. 따라서 日本이 植民帝國으로 등장하는 歷史的 過程에 있어 世界大戰이 지녔던 意義는 淸日戰爭이나 露日戰爭에 못지않 게 중대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世界大戰은 日本 資本主義의 발전과정에 있어 財閥制度가 完備 한 體制를 갖출 수가 있었던 歷史的 契機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日本軍閥에 의하여 형성되었던 植民地에 대한 支配體制를 日本財 閥에 의한 植民地 經濟의 獨占的 支配體制로 재편성하는 歷史的 契機가 世界大戰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世界大戰은 植民地 民族의 植民帝國에 대한 抵抗運動을 불러일으키는 역사적 계기였던 것도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년에 있었던 中國의 5 4運動이나 印度 國民會議派의 獨立運動 등은 世界大戰이 몰고 온 被支配 民族의 抵抗運動이었던 것이다. 世界大戰의 勃發과 더불어 日本經濟의 지배자로 등장할 수가 있었던 財閥들은 韓國經濟의 支配體制를 構築함에 餘念이 없었다. 朝鮮總督府의 行政은 日本財閥의 迎入態勢를 마련하는 일에 全力 을 기울이는 현실이 韓國 民衆의 眼前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3 1 運動에서 발휘되었던 抵抗意識을 촉진하는 不滿要因들이 韓國社 會의 구석구석에서 助成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世界大戰으로부터 中國民族이나 印度를 비롯한
7 三 一運動 前後의 社會와 經濟 三 一 運動 前後의 社會와 經濟 동남아의 被支配 民族들이 품었 던 植民帝國에 대한 저항의식을 韓國民族의 경우에는 유례없이 민감하게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日本財閥들이 쌓아 가고 있었던 韓國經濟에 대한 지배체제는 1920년대에 걸쳐서 토대를 완성하였다. 따라서 世界大戰에서 192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韓國의 社會와 경제가 맞이하였던 歷 史的 實態를 해명하는 것이 3 1 運動을 전후한 시기의 사회 경 제의 실태를 파악하는 基本視角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2) 日帝財閥 進出基盤의 形成 韓日合併을 强行하고 난 日本은 經濟的 危機를 맞이하였다. 어 찌할 수 없는 財政的 破產 前夜의 窮地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 明治末年에서 世界大戰이 勃發하였던 1914년 7월에 이르는 시기 에 發呈되었던 日本 資本主義 經濟實態였다고 한다. 世界大戰이 勃發되자 交戰國들은 日本에 軍需品의 생산을 의뢰 하였으며 近隣 東洋諸國에는 공업제품을 독점적으로 수출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4년에 11억圓의 對外債務를 지닌 外資 導入國의 처지에 있었던 日本은 1920년에 이르러 27억 7천만圓 의 對外債權을 지닌 자본의 수출국이 될 수가 있었다. 對外經濟 的 지위의 강화는 日本財閥들로 하여금 무역뿐만 아니라 자원 및 공업부문에 대한 海外 進出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그러면 이미 정치적 지배권을 강탈하였던 韓國에 대한 日本 財 閥會社들은 어떠한 형태의 資本進出을 이룩하였는가. 다시 말하면 日本軍閥에 의한 對韓 정치적 지배체제의 확립에 뒤이어 日本財 閥에 의한 경제적 지배체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 문제를 살 피는 것이야말로 3 1運動 前後期에 걸친 韓國經濟의 역사적 실 태를 분석하는 과제가 되는 것이다
8 槪 要 世界大戰의 勃發과 더불어 交戰國들로부터 軍需品의 注文을 받 게 된 日本 財閥會社들은 韓國을 지하자원의 공급지로 개발하였 다. 1915년 12월에는 1906년 이래로 시행하여오던 鑛業法을 물 朝鮮鑛業令 을 제정하였다. 다음해 2월에 朝鲜總督府 令으로 施行規則 및 朝鮮鑛業登記規則 을 發布하였다. 리치고 外國人 會社의 鑛業權 取得을 금지하고 日本財閥會社들로 하여 금 한 푼의 鑛業稅도 지불하는 바 없이 金 銀 銅 뿐만 아니라 鐵鑛도 개발할 수가 있는 門戶를 개방한다는 것이 朝鮮鑛業 令 을 公布 施行한 목적이었다. 새로운 鑛業令을 무기로 삼으면서 日本 財閥會社들은 10년 만 에 韓國鑛業의 지배권을 손안에 넣을 수가 있었다. 1926년의 鑛 產額을 민족별로 나누어 본다면 韓國人 375만 2,000圓으로 15.6%의 비율을 차지하고 外國人이 315만 8,000圓으로 13 1% 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음에 반하여 日本人은 1,721만 9,000圓 으로 71.3 %의 비율을 차지하였다. 韓國의 地下資源開發에 있어 日本財閥會社들이 독립적 지위를 차지하였다는 사실을 중요 광업별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1929년 1월 현재로 鐵鑛山 수는 168개소로 증가하였다. 개인명의 鐵鑛山 수는 41개소였다. 그러면 127개소의 회사 소유의 鐵鑛山들을 소 유한 회사들은 어떠한 회사들이었는가. 三井財閥의 直營業體인 日 本製鋼所가 25개소, 三菱製鐵會社와 三菱合資會社가 54개소의 鐵 鑛山을 소유하였다. 日本의 兩大 財閥인 三井과 三菱이 79개 소의 鐵鑛山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가 있게 된다. 나머지 48개소의 鐵鑛山들 중에서 淺野財閥의 직영업체인 朝鮮 鑛山會社가 21개소, 日本 九州의 土着財閥인 安川 松本그룹의 직영회사인 明治鑛業會社가 16개소의 鐵鑛山을 소유하였다. 그리 - 3 -
9 三 一運動 前後의 社會와 經濟 고 鑛山財閥로 알려져왔던 小林鑛業會社가 4개소 日本 商工省이 5개소의 鐵鑛山을 소유하였다. 나머지 2개소의 鐵鑛山도 회사의 명칭은 다르나 財閥系 鑛業會社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鐵鑛의 개발은 반드시 炭鑛의 개발을 가져 오는 것이다. 平壤炭鑛 이 朝鮮總督府의 관리 밑에 있다가 1922년에 日本海軍에 移管되었 다는 사실을 예외로 친다면 鐵鑛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日本財閥 會社들이 韓國의 石炭產業을 독점적으로 지배할 수가 있게 되었다. 明治鑛業會社는 1917년까지 安州炭鑛 沙里院炭鑛 大成炭鑛 (平南) 등을 점유하였다. 九州에 발관을 잡고 炭鑛業에 군림하였 던 麻生財閥은 년 사이에 阿吾地炭鑛 永安炭鑛 吉 州炭鑛 古乾原炭鑛 등 咸北에 집중되어 있었던 有煙炭鑛들을 소 유하였다. 炭鑛業에 대하여 가장 능동적인 점유욕을 품어왔던 三菱財閥은 1927년에 朝鮮無煙炭株式會社 를 설립하였다. 江東炭鑛大寶 炭鑛 江西炭鑛 등 平南地方의 탄광들을 소유하였다. 三井財閥은 文川炭鑛(咸南)을 소유하여 川內里에 있는 小野田시멘트공장과 아울러 운영하였다. 또한 製紙業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던 大川財閥의 직영업체 인 朝鮮電氣興業會社 가 大文山炭鑛(平南) 貞柏炭鑛(平南) 등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日立製作所를 설립하였던 久原財閥은 三 神炭鑛(平南)을 소유하였다. 金 및 砂金鑛 등에 대하여 日本財閥會社들이 빚어냈던 侵奪史 는 1930년대에 이르러 극한에 도달했던 것은 널리 알려지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1910년대나 1920년대에도 이미 日本 財閥會社 들의 진출은 광범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澁澤 榮一이 주도하였던 稷山金鑛會社가 大成金鑛 聖居金鑛 栗金鑛山 등 忠南地方의 금 - 4 -
10 槪 要 광을 모조리 점유하였다. 그리고 久原財閥의 後身으로 滿洲開發을 독점하였던 日產系의 日本 鑛業會社는 瓮津鑛山 咸興鑛山 三德 鑛山(平南) 등을 소유하였다. 한편 三井財閥은 1928년 3월에 三 成 鑛業會社를 설립하였다. 500만圓의 자본을 가진 이 광업회사 가 韓國의 金銀鑛山의 개발 때문에 설립된 특수회사였던 것이다. 砂金鑛業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1926년에 三菱鑛業會社가 金堤砂金鑛을 소유하였다는 사실만을 지적하여 두기로 한다. 일반공업에 대한 日本財閥의 진출도 1930년대에 빚어졌던 일 로 이해되고 있으나 진실한 판단이 아니다. 1917년 11월에 朝鮮紡績會社를 설립하였던 인물들의 배경을 살핀다면 三井財閥이 일반공업 분야에서 품고 있었던 지배의욕을 推理하여 볼 수가 있다. 朝鮮紡績會社의 설립을 立案 實踐한 사람 은 山本 山 条 太郞이었다. 三井財閥의 海外行動隊와 같은 역할을 다 했던 三井物產의 上海 支店員인 山本 山 条 太郞이 시장 개척 때문에 滿洲에 進入한 것이 1890년의 일이었다. 3년 후에 滿洲 出張所를 설립하기에 성공한 山 本 山 条 太郞은 淸日戰爭 때에는 日軍의 통역원을 가장하고 滿洲 大豆 의 輸入路를 개척하였다. 1895년에는 三井財閥의 직영공장인 上海 劫績會社를 설립 하였다. 이처럼 滿洲와 中國 땅에 利權 扶植에 탁월 한 공헌을 쌓았다 하여 1927년에는 滿鐵의 總裁로 임명되었던 山本 嫌太郞이 손수 立案 設立한 朝鮮紡績會社야말로 三井財閥의 韓國 工 業界에 깊숙히 발판을 굳힌 지배력의 상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淸日戰爭과 더불어 韓國에 대한 무역을 손 안에 넣었던 三井物產이 輸出入 貿易뿐만 아니라 韓國의 국내상업에까지 지배 망을 뻗히고 있었다. 1929년경에 서울의 3대 시장에서 米穀거래 를 알선하는 韓國人 旅閣業者 70명이 있었다. 三井物產은 米穀 委 - 5 -
11 三 一運動 前後의 社會와 經濟 託販賣所를 설립하고 韓國의 전통적 상업에까지 침입하여 서울의 米穀市場을 지배하였다. 三井을 論하지 않고서는 日本資本主義를 논할 수가 없다는 말 이 日本學界의 상식이었다. 더구나 三井物產을 논하지 않고서는 韓日間의 貿易 實態를 논할 수가 없을 만큼 三井物產이 지녔던 지 위는 강대한 것이었다. 그러한 三井物產이 서울의 米穀 거래를 알 선하는 委託業에까지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日本財闕들이 지니고 있었던 經濟動物 의 本性을 일찍부터 발휘하여 왔음을 말하는 상징꺼리로 볼 수가 있다. 3 1 運動이 發勃하였던 5년 후인 1924년에 野口가 경영하여 오던 日本窒素會社가 北韓地域에 野口王國을 세우는 기반을 닦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세계 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硫安肥料의 수입길이 두절되었던 틈을 타 서 硫安肥料工場을 설립하려던 野口는 대규모 硫安工場의 설립지 를 日本안에서 探查하였으나 適地를 발견할 수가 없었고 韓國의 赴戰江과 長津江이 그 대상지로 부각되었다. 10만kw의 水力發電 이 가능한 곳을 日本안에서 찾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水力發電事業에 착안하였던 三菱財閥이 이미 두 강에 대한 水利權의 허가신청을 제출한 뒤였다. 三菱財閥의 지원을 받 아 왔던 野口는 三菱財閥에 교섭하여 赴戰江의 水力發電事業을 野口 側에서 개발하고 長津江의 水力發電을 三菱財閥이 개발하기 로 결정짓게 되었다. 1927년 1월 27일에 朝鮮水力發電會社가 설립되었다. 이것이야 말로 野口가 三菱財閥의 지원에서 독립하여 野口王國을 건립할 수가 있게 된 礎石이었던 것이다. 野口는 1928년 6월에 잘 집이 없고 먹을 물이 없는 寒村인 - 6 -
12 槪 要 興南에 東洋 최대의 硫安肥料工場을 설립하기 시작하여 1930년 1 월에 竣工하였다. 野口는 興南工場의 준공과 더불어 朝鮮水力發電 會社와 興南窒素肥料工場을 합병하여 朝鮮窒素肥料會社를 설립하 였다. 朝鮮窒素肥料會社의 설립과 더불어 朝鮮鑛業開發會社를 설 립하게 된 野口는 년인 불과 5년 사이에 野口財閥로 등장하여 日本의 旣成財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있는 境地 에 도달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처럼 살펴본다면 3 1 運動의 前後 10년간이야말로 日本財 閥 會社들이 韓國의 지하자원뿐만 아니라 수력자원의 개발을 독 점할 수 있는 기반과 체질을 완성하였던 시기였던 만큼 植民地時 代의 社會 經濟史上에 있어서도 특이한 의의를 지닌 시기인 것 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3) 都市社會의 植民地的 性格 3 1運動을 전후하는 20년간은 都市社會의 형성기로 볼 수가 있다. 1924년 말에 이르러 대도시 급인 府의 인구수는75만 8,385 명으로 증가하여 총인구수에 대하여 4.2%의 비율을 차지하게 되 었다. 府級의 도시 뿐만 아니라 기타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를 포함하 여 본다면 도시 인구수는 117만 4,828명이며 전체 인구수에 대하 여 6.5%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都市化의 진전이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판단할 수가 있다. 이제 도시 인구를 민족별로 나누어 그 비율을 살펴본다면 韓國 人이 79.3%, 日本人이 19.3%, 中國人이 1.3%, 기타 外國人이 0.1%가 되고 있다. 다시 각도를 달리하여 민족별 총인구수를 도시 거주자와 농촌 - 7 -
13 三 一運動 前後의 社會와 經濟 거주자로 나누어 보기로 하겠다. 그 때 韓國人의 총 인구수는 1, 761만 9,540명이었다. 도시에 거주하는 韓國人 수는 157만 1,470 명으로 8.9%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데 반하여 농촌에 거주하는 韓國人 수는 1,604만 7,070명으로 91.1%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 日本人의 人口總數는 41만 1,595명이었다. 도시에 거주하 는 日本人 수는 33만 6,001명으로 82.0%를 차지하고 있는데 반 하여 농촌에 거주하는 日本人 수는 7만 5,594명으로 18.0%에 지 나지 않았다. 中國人의 인구총수는 3만 5,653명이었다. 도시에 거 주하는 中國人 수는 2만 4,822명으로 67.5%를 차지하였으며 농 촌에 거주하는 中國人 수는 1만 0,831명으로 32.5%의 비율을 차 지하고 있었다. 기타 외국인의 인구총수는 1,328명이었다. 도시 거주자수는 1,190명으로 93.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농촌 거주자 수는 138 명으로 7.0%를 차지하고 있었다. 1906년에 日本人 戶口數는 2만 2,139戶이었으며 인구수는 8만 3,315명이었다. 1916년에 이르러 日本人 戶口 數는 9만 0,350戶 로 4배 이상으로 증가하였으며 인구수도 32만 0,938명으로 385%의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처럼 살펴본다면 도시의 형성과 발전은 日本人 移住者들을 위한 경제와 생활의 기반의 조성이라는 動因에 의하여 촉진되었 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日本人 인구가 도시에 집중되고 韓國人 인구가 농촌에 집중되 는 거주지 분포상황은 민족별 직업구성을 선명히 반영하는 기준 이 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1924년 말에 나타났던 日本人 인구 의 직업별 비율을 보면 農林業이 9.1%, 水產業이 3.0%, 工業이 15.6%, 商業이 33.0%, 公務 및 自由業이 31.6%, 기타 직업이 - 8 -
14 槪 要 5.3%, 무직 및 불신고자 2.5%이었다. 한편 韓國人 인구의 직업별 분포비율을 보면 農林業이 84.1%, 水產業이 1.3%, 工業이 2.2%, 商業이 6.0%, 公務 및 自由業이 2.1%, 기타 직업이 2.9%, 무직 및 불신고자가 1.4%이다. 都市職業으로 볼 수가 있는 工業 商業 公務 및 自由業의 비 율을 1920년 말과 비교하여 보기로 하겠다. 공업에 종사하는 韓 國人의 비율은 1.94%이었으나, 4년 후인 1924년 말에 이르러서 도 2.17%로 머물러 있었다. 상업의 경우에는 1.56%에서 6.0%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韓國人의 상업이 生計를 위한 零細商業이었기 때문에 도시에 流入한 농촌인들이 쉽게 영위할 수 있는 것이 零細 商業이기 때문에 상업인구가 다소나마 증가한 결과를 나타냈던 것으로 풀이하여 볼 수가 있다. 典型的인 都市職業으로 볼 수가 있는 公務 및 自由業은 1.69% 에서 2.06%로 증가하였으니 매우 격심한 停滞相을 나타내고 있 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1920년대에 걸쳐서 도시에 거주하는 日本人 수의 격증 실태를 서울의 경우에서 찾아보기로 하겠다. 1921년 말의 日本人 거주자 수는 6만 9,700여명이던 것이 다음 해에는 7만 3,300여명으로 증 가하였으니 한 해 동안에 3,500여명이 증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923년의 서울의 有職者數를 민족별로 나누어 본다면 韓國人 有 職者數는 5만 4,800여명이고 日本人 有職者數는 2만 9,600여명 이었다고 한다. 이제 韓國人 총수에 대한 有職者數의 비율을 보면 25%인데 반하여 日本人 有職者數의 비율은 40%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韓國人의 경우에는 2.5명의 수입으로 10명이 살아가는데 반하여 日本人의 경우에는 4명의 수입으로 10명이 살아가는 형편 이었다. 이 사실이야말로 도시사회에 있어 韓國人 거주자와 日本 - 9 -
15 三 一運動 前後의 社會와 經濟 人 거주자 사이에 貧富의 차가 해를 거듭함에 따라 격화되어 가고 있었음을 말하는 基本指標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賃金勞動者의 形成基盤과 實體 商工業의 전개에 따라서 賃金勞動者層이 형성되어가는 端初的 形態를 먼저 살펴 보아야 하겠다. 서울의 경우만 보더라도 1911 년 말까지 111명의 賃金勞動者가 金銀細工業에 종사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工藝業에서도 근대적인 임금노동자가 雇傭되었던 사실 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織布業과 織紐業에 299명의 임금노동자 가 일하고 있었다. 그 중에 64명의 女工들이 일하고 있었다. 製紙 業의 경우에는 100명의 賃金勞動者 중에서 女工이 70명으로 과반 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女性勞動者가 뚜렷한 진출상 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미 1910년대의 賃金勞動者層의 형성이 韓國社會相의 변모를 표시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게 된다. 이제 공장수의 증가와 더불어 賃金勞動者數의 증가추세를 개관 하여 보기로 하겠다. 1911년에 공장수는 252개소였던 것이 1917 년에는 1,358개소로 증가하였다. 그 증가율은 589%이었다. 한편 임금노동자수는 1911년의 1만 4,575명에서 1917년에는 4만 1,543명으로 증가하였다. 그 증가율은 285%이었다. 한편 日本 財閥會社들에 의한 지하자원의 개발이 촉진됨에 따 라서 鑛業 勞動者數가 격증하였다. 1920년대 말기의 경우를 살펴 보기로 하겠다. 1928년의 광업 노동자수는 2만 8,724명이었다. 다음 해에는 2만 9,484명으로 증가하였다. 다시 1930년에는 3만 1,100명으로 증가하였다. 1928년에서 1929년에 이르는 동안에 760명이 증가하였으며 1929년에서 1930년에 이르는 동안에 1,616명이 증가하였다
16 槪 要 日本 財閥會社들이 3 1運動을 전후한 시기에 定立하였던 對韓 進出의 基調가 지하자원의 개발에 있었던만큼 광업노동자의 격증 추세는 시대의 풍조를 반영하는 사회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공장에서 일하는 賃金勞動者의 실태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924년에 이르러 工場 勞動者數는 4만 8,043명으로 증가하였다. 남자 노동자수는 3만 8,173명으로 80%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 으며 여자노동자 수는 9,870명으로 20%의 비율은 차지하고 있었 다. 이들의 연령구성을 보면 다음 표와 같다. 年 齡 別 10歲未滿 12歲未滿 15歲未滿 20歲未滿 50歲未滿 60歲未滿 60歲以上 總 人 數 男 子 數 女 子 數 17명 291 4,138 9,548 14, 명 164 1,874 6,767 13, 명 127 2,264 2,781 1, 歲 미만의 소년 노동자수가 남자 노동자의 경우에 4,446명이 었으며 여자 노동자의 경우에는 2,396명으로 약 24.3%라는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다. 다시 20歲 미만의 여자노동자를 헤아려 본다 면 5,177명으로 52.4%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결혼을 앞둔 處女의 몸으로 근대적인 공장 안에서 노동자로 일 하는 여자 노동자 수가 증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韓國人의 빈궁 한 생활이 빚어낸 결과였던 것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전통적인 因襲을 깨뜨리고 商工業 분야에서 임금노동자로 就業하는 여성노 동자 수가 증가하였다는 사실은 3 1運動을 전후한 시기에 걸쳐 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전통적인 것에서 근대적인 類型으로 변 화하여가고 있었다는 指標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17 三 一運動 前後의 社會와 經濟 앞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韓國의 鐵鑛山들은 日本 財閥會社들 의 독점적인 경영 밑에서 개발되었던 것이다. 日本의 財閥會社들 은 韓國人 鑛夫들을 반노예와 같은 노동조건 밑에서 부리는 것이 상례였다. 따라서 광산을 이탈하는 광부수가 격증하는 결과를 나 타내었다. 광부들의 이탈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강권적인 조치로서 日本 財閥會社들은 광부들을 고용함에 있어 가족 거주자만을 고 용하였다. 참으로 근대적인 고용조건에 역행하는 처사였던 것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韓國人 노동자에 대한 노동조건이 악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 차별에 입각한 인간관계가 격화되어 감에 따라 노동자들의 저항의 식이 勞動爭議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3 1運動이 勃發하였던 1919년에는 8,283명이 노동쟁의에 참가하였다. 韓國民族에 대한 강압정책이 강행됨에 따라 노동쟁의에 참가한 인원수도 1922년에 는 1, 682명으로 감소하였다. 그러나 日本人 鑛工業體수의 증가와 더불어 韓國人 노동자 수도 증가함에 따라 勞動爭議에 참가한 인 원수도 다시 격증의 추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1924년에 이르러 勞動爭議에 참가한 인원수는 6,150명으로 증가하였다고 한다. 韓國經濟에 대한 日本財閥의 지배체제가 각종의 산업분야에 걸 쳐서 형성되어가고 있었던 시기에 발생하였던 노동쟁의의 사회적 성격은 무엇보다도 민족저항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더구 나 3 1運動을 뒤따르는 10년간에 발생하였던 勞動爭議는 民族 抵抗運動의 성격을 지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5) 農村支配體制의 强化와 海外流民의 擴散現象 露日戰爭의 勃發과 더불어 三菱 流澤 大倉 등의 日本財閥들
18 槪 要 이 앞장서서 韓國의 농토를 廉價로 점유하여 광대한 농장을 설치 하는 풍조가 高潮되었다. 더구나 韓日合併에서 1920년대 말에 이 르기까지 日本財閥과 日本人 巨大地主들에 의한 農場經營體制가 완성되었다. 黃海道의 사례를 보기로 하겠다. 1905년에 澁澤財閥의 朝鮮興 業會社 農場이 설치되었다. 1908년에 東拓의 沙里院 農場이 설치 되었다. 그리고 1916년, 1920년, 1928년에 3개소의 日本人 재벌 및 거대지주의 농장이 설치되었다. 이와 같은 사례로 미루어 본다 면 日本財閥 및 巨大地主에 의한 農場經營體制는 1920년대 말에 완성되었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日本人 재벌 및 거대지주들이 韓國의 전역에 걸쳐서 대규모의 농장을 설치하고 촌락민들을 小作人으로 지배하는 사태는 韓國 村落社會의 지배구조에 크나큰 변혁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지 않 을 수가 없었다. 1926년에 종말을 맺었던 東拓의 移民村落의 형 성과 더불어 日本人 대농장은 朝鮮總督府의 地方行政機構나 金融 組合의 지방점포들을 보조수단으로 이용하면서 촌락사회의 독립 적인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日本財閥 및 巨大地主들의 대농장과 東拓의 이민촌락이 韓國 농민에게 내리는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압력이 가중됨에 따라 도 시에로 이주하는 농민이나 해외로 移民하는 농민이 격증하지 않 을 수가 없었다. 1910년에서 1925년에 이르는 동안에 5만 6,000 명이 滿蒙과 西伯利亞로 이민하였으며 北間島에 11만 5,000명, 西間島에 11만명이 이민하였다. 1923년에 농촌을 이탈하여 도시로 移住하거나 해외로 이민한 農民數는 15만 0,112명이었다. 한 해 동안에 15만 명의 농민들이 離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은 농민경제가 전면적인 解體
19 過程에 빠지는 반면에 日本財閥 및 巨大地主의 大農場과 東拓 移 民들이 촌락사회의 지배자로 등장하는 변혁과정에 進入하고 있었 음을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徵候로 볼 수밖에 없다. 高承濟
20 I. 三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1. 日帝의 侵略機構 2. 日帝의 經濟政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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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 日帝의 侵略機構 1. 日帝의 侵略機構 (1) 統治機構의 成立 日帝의 韓民族에 대한 植民統治는 植民地 본연의 경제상 목적 도 크지만 그보다도 大陸侵略을 위한 군사상 前進基地로서 일층 중요시되었다.1) 따라서 統治機構는 군대를 배경으로 憲兵을 활용 한 武斷組織 즉 武官總督이 專權하는 軍事政治體制가 구성되었다. 또한 이는 韓民族의 지속적인 저항의 제압과 효율적 경제약탈을 위한 것이며, 나아가 韓民族을 말살하기 위한 구상이었다. 武官總督制의 韓國植民統治制度는 英國의 植民地總督制와 러시 아의 總督政治를 참작한 臺灣統治制度의 선례를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日本의 對韓植民政策 결정에는 韓民族의 끊임없는 저항과 전통성이 강하게 작용하여 治安維持를 요체로 하는 독특한 식민 통치제도가 성립되었다. 朝鮮總督府가 성립되기까지는 약 6년간의 준비기간이 소요되었 다. 이 기간 동안 日本은 行政 財政 軍事 警察 등 국가권력과 민족의 생존을 외양적으로 법적 규제를 가하며, 실험적 통치기구 인 統監府를 통하여 文 武 兩面에서 半植民的 지배를 경험하고 그 성패에 비추어 독특한 武斷政治機構를 수립하게 되었다. 즉 日 本은 러 일전쟁 중 韓日 議定書를 빙자하여 韓國駐箚軍으로서 치안을 담당하고 軍律을 韓國에 적용하였다. 1904년 韓國駐箚軍 司令官으로 부임한 長谷川好道大將이 자의로 咸鏡南道에 軍政을 선포하고 서울과 全州地區에 軍事警察制를 실시함으로써 韓國은 1) 失內原忠雄 植民及植民政策
23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日本軍政下에 놓이게 된 것이다.2) 이 때 전국 중요 都市에 12개 憲兵 分隊와 56개 憲兵分遣所가 설치되어 2개 師團兵力의 지원을 받으며 군사시설의 보호를 구실삼아 軍事警察 뿐 아니라 치안경 찰을 담당했다. 사회단체의 取締, 韓國 義兵의 討伐, 抗日鬪士의 체포, 日本官民 및 親日派의 보호 등이 그들의 주된 임무였다.3) 이와 같은 러 일전쟁 하의 병력을 배경으로 실시된 軍政은 비록 단기였으나 陸軍將官級의 軍司令官이 지휘하고 憲兵이 그 주역을 담당한 점에서 總督府憲兵警察政治의 原型으로 볼 수 있다.4) 러 일전쟁에서 승리한 日本이 韓國을 保護國化하기로 결정하 고 統監府를 설치함에 있어 武官組織論과 文官組織論이 대립되었 다.5) 軍閥들은 戰後에도 軍政體制를 고집하고 伊藤을 중심한 文 官들은 陸軍의 발호를 경계하여 文治組織을 주장하였다. 결국 伊 藤이 統監에 임명됨으로써 文官組織으로 낙착되었다. 1906년 2월 과도적 韓國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統監府가 설치 되었다. 文官統監 伊藤을 首班으로 방대한 文官組織이 창설되고 治安機能은 憲兵 중심에서 警察 중심으로 옮겨 갔으며 軍律을 완 화하는 등 文治的 경향이 농후하였다. 그러나 文治的 路線은 어디 까지나 표면적 형태이고 武力에 의한 主權侵奪과 생존권의 박탈 이 기본정책이었다. 더우기 침략에 대한 韓民族의 거족적 항쟁이 전개된 1907년에 이르러는 군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즉 伊 藤統監이 海牙密使파견을 계기로 高宗을 退位시키고 韓日新協約 軍隊解散 등 사실상 併呑을 단행하였다. 이후 전국적으로 義兵이 강력히 대두하여 文治를 주장한 伊藤 자신이 적극적으로 군대와 2) 金正明 朝鮮駐箚軍歴史 pp ) 柳永益 朝鮮總督府 初期의 構造와 機能, 3 4) 上 同 1運動 50週年記念論文集 p. 96 5) 金正明 日韓外交資料集成 6 上 p
24 1. 日帝의 侵略機構 헌병을 증강하여 憲兵補助員制度를 창설하고 軍隊에 의존함으로 써 文治는 실패로 끝났다. 總監府는 아미 방대한 관료조직과 군대식 치안체제를 형성하여 武斷統治의 기반이 조성되었다. 다만 併呑의 시기와 總督의 인선 이 남아 있었던 바, 1908년 7월 山縣軍閥系 桂內閣이 성립되자 1909년 7월 韓國併呑을 결정하고6) 1910년 5월 陸軍大臣 寺內正 毅大將이 統監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韓國統治에 武斷組織이 확정 된 것이다. 寺內大將을 統監으로 임명한 직후 日本政府는 併呑 후의 韓國 에 대한 施政方針7)을 결정한 바, 그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朝鮮에는 당분간 憲法을 시행하지 않고 大權에 의하여 이를 統治한다. ② 總督은 天皇에 直隷하여 朝鮮에 있어서의 일체의 政務를 統 轄한다. ③ 總督에게는 大權의 委任에 의하여 法律事項에 관한 命令을 發하는 權限을 부여한다. ④ 朝鮮의 政治는 될수록 簡易를 旨할 것. 따라서 政治機關도 主旨에 따라 改廢한다. ⑤ 朝鮮官吏는 그 계급에 따라 될 수 있는 限 多數의 朝鮮人을 채용한다. ① 韓國은 日本과 차별하 여 통치하며, ② 일체 政務는 武官總督이 독재하고, ③ 정치와 정 이 武斷組織의 통치요령을 요약하면 치기구는 간단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정방침에 의하여 併呑 即日에 6) 上 同 下 p ) 上 同 下 p 朝鮮總督府設置에
25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관한 件 8)을 발표하여 그 윤곽을 잡았다. ① 朝鮮總督府에 總督을 두어 委任의 범위 내에서 陸海軍을 統 率하여 一切의 政務를 統轄케 함. ② 統監府와 그 소속 官署는 당분간 存置하며, 朝鮮總督의 職務 는 統監으로 行케 함. ③ 종래 韓國政府에 屬한 官廳은 內閣 및 表勳院을 除하고는 朝 鮮總督府 所屬官署로 看做하여 당분간 存置함. ④ 前項에 官署에 在勤하는 官吏는 舊韓國政府에 在勤中과 동 일하게 取扱함. 日本은 總督府 設置에 있어 형식상 韓國政府와 統監府라는 이 중적인 시험기의 통치기구를 통합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植民地 韓國의 탄압과 약탈에 중점을 둔 간단하고 효율적인 大權 委任의 특수조직임을 다음의 朝鮮에 施行할 法令에 관한 件 9) 으로 알 수 있다. 第1條 朝鮮에서 法律을 要하는 事項은 朝鮮總督의 命令으로 規 定함을 득함. 第2條 前項의 命令은 內閣總理大臣을 經하여 勅裁를 請함이 可 함. 第3條 臨時緊急을 要할 경우는 朝鮮總督이 直히 第1條의 命令 을 發함을 得함. 事後裁可 第4條 法律의 全部 또는 一部를 朝鮮에 시행함을 要하는 것은 勅令으로 定함. 第5條 第1條의 命令은 第4條에 의하여 朝鮮에 시행한 法律과 특히 朝鮮에 시행함을 目的으로 制定한 法律及 勅令에 위반 8) 日本勅令 319號(1910年 8月 29日) 9) 日本勅令 324號(1910年 8月 29日)
26 1. 日帝의 侵略機構 함을 得치 못함. 第6條 第1條의 命令은 制令이라 칭함. 이상과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併呑 1개월만에 制 10)가 朝鮮總督府官 제정됨으로써 朝鮮總督府의 통치기구가 완성되었다. 臺 灣과는 달리 韓國에 있어서는 치열한 抗日運動을 배경으로 성립 한 정권이며 軍事上 중요한 의의를 갖는 지역인 만큼, 같은 武官 總督이되 朝鮮總督의 지위와 권한이 臺灣보다 우위였으며, 憲兵 警察制度 등 특성을 가진 武斷統治組織이 성립된 것이다. 이를 개 략하면 중앙행정기구로서 總督직속으로 總督官房 總務部 內務 기관으로 道府郡面의 지방행정조직, 裁判所監獄 등의 사 법기구, 警務總監部憲兵隊 등의 치안기관, 中樞院取調局 등의 자문기관, 鐵道局土地調査局通信局稅關 등의 약탈기관 등 部 度支部 農商工部 司法部의 1房 5部 9局을 두고, 그 소속 이 골격을 이루고 있다. 1910년 朝鮮施政年報에 나타난 總督府職員現況에 의하면 총 15,113명 중 3분의 1인 5,707명이 경제 약탈기관에 종사하고 치 안 기관에 2,600명, 지방행정기관에 4, 097명, 사법기관에 1,617 명 중앙행정기관에 974명이 배치되었다. 이 통계로 보면 經濟收 奪機關이 위주인 것 같으나 실은 탄압기관에 憲兵 11,143명과 警 察 5,698명 計 16,342명이라는 압도적 수의 직원을 두었다.11) 즉 朝鮮總督府의 전체적 성격을 평가한다면, 治安위주 掠奪본위 의 軍政組織이라 하겠다. 警務總監이 總督지휘 하에 一切政務를 감독하는 최고기관의 구실을 하고 文官은 보조기관에 불과하였다. 이 같은 武斷組織은 韓民族에 대한 정치적 탄압, 경제적 약탈, 10) 日本勅令 354號(1910年 9月 30日) 11)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p
27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민족문화의 말살기능을 발휘했으며, 韓國近代化를 외면한 반동정 책을 수행하는 한편,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를 구축하는 군사적 기 능을 담당하였다. (2) 行政機構 1) 總督의 地位와 權限 朝鮮總督은 日本天皇에 直隷한 특별한 지위로써 韓國에 있어서 全權을 위임받은 통치자였다. 즉 總督은 親任官으로 陸海軍大將 중에서 임명되며, 韓國에 있어서의 行政 立法 司法의 權은 물론 陸海軍을 통솔하여 朝鮮防備의 일을 관장하였다.12) 總督은 日本政府에 있어서도 최상계급인 內閣總理大臣과 동격 이며, 軍部首腦인 현역 陸海軍大將임으로 日本의 軍部統帥權 독립 에 따라 정치적 지위에 있어 더욱 安固하였다. 法制上 總督은 內 閣總理大臣을 거쳐 上奏裁可 받게 되었으나 사실상 總理大臣의 지휘감독을 받지 않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으며 天皇 이외의 다 른 기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초연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 지위에 상응하는 광대한 권한이 부여되었다.13) ㄱ. 行政權 總督은 行政首班으로서 韓國에 있어 제반정무를 총괄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 政務統轄權에는 行政 뿐 아니라 立法 司法 등의 모든 사항이 포함되는 것이다. 더우기 통치권자로서의 總督은 總 督府 모든 관리에 대한 감독 및 인사권을 갖고 있었다. 특히 判任官 이하의 진퇴는 이를 專行케 되었으므로 대개 判任 12) 朝鲜總督府官制(1910年 9月 30日) 1-3條 13) 朝鮮總督府官制 및 同分拿規程(1910年 9月 30日에 의함)
28 1. 日帝의 侵略機構 官 이하에 머무른 韓人官吏의 任免權이 總督의 손에 매여 있었다. 즉 統督은 통치자로서 최소한의 규제도 받지 않는 존재로서 行 政權을 專行할 수 있었다. ㄴ. 軍事統率權 總督은 위임의 법위 내에서 陸海軍을 통솔하여 朝鮮의 방비를 담당한다고 막연하게 관제에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總督 자신이 日本軍首腦로서 현역 육군대장이므로 사실상 활용성이 큰 군사지 휘권이 있었다. 실제에 있어 駐箚軍을 항시 통솔할 수 있게 總督 官房 武官室이 설치되었다. 武官室에는 陸軍少將 또는 佐官인 總 督附武官 2인과 陸海軍佐尉官인 專屬副官 1인을 두어 參謀의 역 활을 담당하게 했다. 또한 朝鮮駐箚憲兵은 陸軍大臣의 관할에 속 하며, 그 직무의 집행에 있어서는 朝鮮總督의 지휘 감독을 받게 되어 있었다.14) 다시 말해서 朝鮮總督은 육해군의 통솔권과 駐箚 憲兵의 지휘권을 갖고 韓國 防備와 치안의 책임을 가진 軍事統帥 權者였다. ㄷ. 立法權 總督에게는 大權의 위임에 의하여 法律事項에 관한 명령을 발 할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 명령을 制令이라하고 制令 외에도 행정상 필요한 府令을 발할 권한이 있었다. 朝鮮總督의 制令權은 日本憲法 질서의 예외적인 특권으로서 日 本皇帝의 裁可를 필요로 하나 긴급할 때는 절차를 생략하고 制令 을 발할 수 있었다. 더우기 行政權에 속하는 府令은 하등의 승인 이나 절차가 필요없이 立法할 수 있었으며, 또한 1년 이하의 自由 刑이나 200圓 이하의 財產刑을 자의로 정할 수 있었으니, 總督은 사실상 帝王을 방불케하는 立法權이 보장되었다. 14) 朝鮮駐箚憲兵條例(1910年) 1條
29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ㄹ. 司法權 總督에게는 立法權과 아울러 司法權도 귀속되어 있었다. 總督은 자신이 발하는 制令으로 司法機關의 구성과 判事 및 檢事의 임용 6호), 朝鮮總督府判事及檢事의 任用에 관한 件 (1911년 制令 5호), 朝鮮總督府判事懲戒令 (1911년 制令 6호) 등이다. 즉 을 규정하였다. 그것이 바로 朝鮮總督府裁判所令 (1910년 制令 朝鮮總督은 裁判所의 설립 폐지 등 司法機關의 구성을 비롯하여 法官의 轉補 停職 免職 등의 인사권 간접적인 재판의 관여 등 의 司法權을 장악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사법기관은 總督府 下 의 행정관서와 같은 위치에 있으며 司法官의 신분도 일반 행정관 리와 다를 바 없었다. 따라서 司法權의 독립이라는 일반원칙이 韓 國에서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이상과 같이 朝鮮總督은 日本政府의 통제를 받지 않고 오로지 天皇에게만 책임을 지는 지위에서 韓國의 行政 司法 立法 및 軍事 등 모든 政務에 대한 독재권을 갖고 있었다. 환언하면 總督은 하나의 獨立王國의 專制君主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15) 이와 같은 總督의 지위와 권능은 여러 차례의 官制改革과 日本政府와의 마 찰이 있었으나 太平洋戰爭 직전의 大改革 때까지 변함없이 약화 되지 않았다. 3 1運動 후 관제개혁에서 總督의 임용자격 제한 및 군사통솔권이 해제되었으나 文化政治의 표방수단일 뿐 실제에 있어 변화가 온 것은 아니다. 이후 단 한사람의 文官總督이 부임한 바도 없으며, 대륙침략의 군사기지로서 韓國의 중요성이 더해갔으므로 總督의 군사적 지위와 권한은 약화될 수 없었다. 다만 武斷에 대 한 韓民族의 저항과 이에 따른 日本 내부의 비판을 기만적으로 회피하기 위해서 武斷政治의 인상을 씻기 위한 것뿐이었다. 15)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p
30 1. 日帝의 侵略機構 朝鮮總督과 日本政府 사이에 監督權을 놓고 알력이 자주 있었 다. 그러나 韓國의 특수성과 總督의 특별한 지위 및 官制上의 규 제가 없음을 이유로 日本政府의 감독과 지시를 받지 않는 것으로 관례가 되었다. 1910년 韓國 植民 준비기구로 설치되었던 拓殖局 이 1913년 폐지되고 內務省이 韓國을 統理하게 되었다가 다시 1917년에는 拓殖局을 독립시켰다. 1924년에 內閣의 1局으로 축 소시켰다가 다시 1929년 拓務省으로 그 所管이 변전하면서 일관 되지 못했다. 一元的 統理機構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統治上 軍事上 韓國植民의 특수성과 韓國과 日本간의 政治的 經濟的 利 益의 相剋이 불가피했고 또한 總督의 권능이 강대하여 전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는 齋藤總督이 재임하면서 朝鮮總督 간의 권한에 관한 件 16)이란 拓務大臣과 覺書로서 二元化를 확인 한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拓務大臣은 朝鮮總督을 감독할 권한이 없음. ② 拓務大臣은 朝鮮總督府에 관한 사무에 대하여 主務로서 보 필함. ③ 朝鮮總督으로부터 裁可를 청하는 문서는 內閣總理大臣 외에 拓務大臣도 경유하는 것을 상당으로 함. 이상의 覺書로서 拓務省은 물론 日本內閣의 朝鮮總督府에 대한 命令系統과 감독권이 실제에 있어 배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42년 官制改革에서 內務大臣은 朝鮮總督府에 관한 사무를 統理함 이라는 1항이 관제에 추가되고 각 大臣의 事務統 理上 필요한 지시를 할 수 있게 됨으로써 總督府는 각 省의 하급 관청과 같은 기구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總督의 지위에 제약이 가 해졌다. 그러나 각 대신의 감독 지시란 어디까지나 勅令의 범위 16) 朝日新聞 1929年 9月10日
31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내에서 직권으로 사무를 統理할 뿐이고 朝鮮總督은 역시 天皇에 直隷한 최고행정권자이므로 二元的 統治를 벗어나 일반적 감독을 할 수는 없었다.17) 朝鮮의 總督은 육군의 지도적 인물이 부임하 여 거의 總理大臣으로 승격되었음이 그 지위를 단적으로 말해 주 듯이 그 지위가 확고하여 끝내 그 독립성이 유지되었다. 2) 中央行政機構 總督의 독재적 권한은 朝鮮統治의 중앙행정부인 朝鮮總督府에 의해 행사되었다. 總督府 조직은 文武양면에서 總督을 輔弼하는 務를 관장한 內務部稅關司稅를 담당한 度支部, 殖產商工을 관장한 農商工部, 法務司法을 관장한 司法部의 1房 5部 9局으 總督官房을 비롯하여 外事 人事 會計를 관장한 總務部, 地方 學 로 구성되었다.18) 이와 같은 중앙통치기구는 형식상 舊韓國政府와 統監府를 통합 하여 급격한 변화를 피한 과도적 성격이 있다. 韓國政府의 學部를 內務部의 1局으로 축소하고 統監府의 司法廳을 司法部로 개편하 고 새로 總務部를 설치한 것이다. 경비절약과 간이기구를 내세 웠 으나 學部의 전락은 敎育不在政策을 의미하는 것이며, 民生과 발 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治安에 촛점을 두었으므로 간단한 조직 이 된 것이다. 總督府의 사무는 제2인자인 政務總監에 의해 통리 감독되었 다. 政務總監은 總督과 동등한 親任官이긴 하나 그 권한에 있어서 總督을 補佐하며 府務를 統理하고 各部局의 事務를 監督한 다 는 정도의 극히 사무적인 권한밖에 없다. 오히려 憲兵警察 는 19) 17) 吳世昌 朝鮮總督의 地位와 權限, 編史 1 p ) 朝鮮總督府 官制(1910年 9月 30日) 19) 上 同 8條 3項
32 1. 日帝의 侵略機構
33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의 지휘자인 警務總監이 행정에 깊이 관여하였으니 이것이 武斷 獨栽 下에서의 文官官僚의 무력과 武官의 우월을 단적으로 나타 낸 것이다. 總督府 조직에는 5部 9局의 중앙기관 외에 소속관서가 즐비하 였다. 실질적 지배기구인 警務總監部를 비롯한 裁判所 監獄 등 독립적인 치안조직과 土地調查局 稅關 專賣局 鐵道局 通信 局 鑛業所 營林廠 등 경제수탈기관, 中樞院 調查局 등 諮問機 關, 각종 학교 및 지방행정 조직이 분화되어 있다. 이와 같은 중앙행정기구에는 各部의 長官 5인, 局務를 掌理하 는 局長 9인, 審議立案을 맡은 參事官 2인, 비밀사무를 맡은 秘書 官 2인, 府務를 관장한 書記官 19인, 府務를 助하는 事務官 19인, 기술을 掌한 技師 30인, 通譯官 6인과 屬 技手 通譯生 등 下級 官吏 337인이 배치되었다. 소속관서까지 합하여 總督府에는 약 1,000명의 직원이 있었다. 그 중 韓民族은 287명뿐인데 그것도 총독부 행정기관에는 거의 없고 대개 屬 技手 通譯生 등 말단 직위였다.20) 日本은 통치방침에서 가능한 한 韓國人을 다수 채용 한다고 하였으나 실은 다음과 같은 韓人任用 및 제한의 不文法이 있었다.21) 20)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p ) 同上
34 1. 日帝의 侵略機構 ① 가급적 韓人官吏의 登用을 要하지 않는다. ② 부득이한 사정으로 任用할 경우에 科學技能에서 반드시 排除한다. ③ 韓人官吏는 중요 地位에는 아예 두지 않는다. ④ 韓人高官의 봉급은 100圓, 判任官은 30圓에 이르면 退職시 킨다. ⑤ 裁判所 檢事에는 절대 韓人을 任用하지 않는다. 局課長 등 중요 직위는 日本人이 독점하였고 설혹 韓國人이 간부직원이 되어도 李王職長官 參議같은 有名無實한 직위에 소외 시키고, 末端韓人 관리도 기계적인 업무 외에는 접근시키지 않았 으며, 신분 보수 등 모든 면에서 韓國人의 차별대우가 극심하였다. 朝鮮總督府의 중앙조직은 日本의 국내외 정세와 韓民族의 저항 에 따라 자주 부분적 變改가 있었다. 1차로 1년 반만에 總務部를 없애어, 官房에 總務 外事 土木의 3局을 두고 農商工部의 商工 局을 폐지하고 農林局을 두었다. 이는 總務部를 官房에 흡수하여 지배체제를 강화하고 농민수탈을 포석한 것이다. 다시 1915년에는 3년 간의 경험을 토대로 식민지배를 효율화 하기 위한 개혁이 단행되었다. 즉 각부장관 아래 局을 폐지하고 長官이 직접 課의 사무를 지휘 감독하도록 간소화되었다. 이로써 武斷統治의 중앙관제가 일단락되었다. 3 1運動을 계기로 日本의 식민정책은 제2단계로 접어들어 武 斷政治를 포기하고 소위 文化政治를 표방했다. 이에 따라 朝鮮總 督府官制의 큰 변혁이 생겼다.22) 陸海軍大將으로 제한했던 總督 의 임명범위를 확대하는 한편, 陸海軍의 통솔권을 삭제하고 安 寧 秩序의 保持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는 朝鮮에 있는 陸海 22) 日本勅令 386號(1919年 8月 20日)
35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軍 司令官에게 병력의 사용을 청구할 수 있다 고 개정했다. 또한 總督府 중앙조직을 격하시켜 部制를 局制로 개편하고 內務部에 속한 學務局을 독립시켰다. 또한 독립기구이던 警務總監部를 직속 警務局으로, 總督官房의 總務 土木 鐵道의 3局을 직속 部로 개 편하여 6局 4部의 중앙관서를 구성하였다. 이 같은 통치방침 및 제도의 개혁은 武斷政治에 대한 韓民族의 지속적인 저항 내지 비협력과 거족적인 반항에 기인하는 한편, 무 단조직의 모순의 시정 내지 식민정책의 제2단계로의 필연성에서 취해진 조치이다. 즉 권력구조상 憲兵 軍隊의 武官組織과 文官의 官僚組織의 이중성이, 統治權者인 總督이 軍人인 관제로, 憲兵警 察이 統治를 전담하고 文人官僚는 중앙 지방을 불문하고 事務 的 補助的 機能 밖에 갖지 못했다. 이러한 이중성의 모순과 헛점 이 獨裁者인 總督의 개인적 성격 및 시상의 작용과 獨裁의 不合理 性과 함께 노출되었다. 이로 인해 朝鮮統治는 본래의 목적에 접근 하지 못하고 비능률 부패 반발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 다. 日本의 文化政治의 제시는 바로 이러한 점을 시정한 植民 政 策의 합리적 강화인 것이다. 學務局의 확대 승격과 憲兵警察의 폐 지는 탄압보다 同化가 民族抹殺의 지름길이며, 行政과 警察權의 결합이 능률적임에 착안한 것이다. 소위 文化政治는 植民政策의 기만적인 강화인 것이다. 군대와 경찰을 倍加하여 精神的 隷屬을 강요한 思想彈壓에 이르고 懷柔 와 同化施設을 확대하여 민족과 문화를 병들게 했으며, 조직적인 자본주의의 이식에 따라 토지 산야 인력 등 資力을 갈취하는 산업 시책이 강화되었다. 光復될 때까지 文人總督이 임명된 바 없 으며, 헌병이 경찰로 둔갑하고 官吏나 敎員이 制服帶劍을 벗었을 뿐 韓國統治의 根本方針에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韓國人의
36 1. 日帝의 侵略機構 差別 撤廢를 내세웠으나 1920년의 總督府(中央)奏任官待遇 이상 153명 중 韓人官吏는 3명뿐이었고, 1938년의 奏任官 이상 255명 중 韓人官吏는 12명이었으며23) 1941년도 朝鮮年鑑에 수록된 고 급관리 1000명 중 韓人官吏는 12명에 불과했다. 다만 3 1運動 때 회색적이던 韓民族의 중류층을 諮問機關의 확대 및 지 방자치 제 실시 등을 통해 수용한 것 뿐, 중앙행정기관은 더욱 日本人에 의해 독점되어 갔다. 3) 地方行政機構 地方行政 조직은 전국을 13道로 크게 구획하고 그 밑에 府 郡 島가 있으며, 말단행정 단위로 邑面을 둔 3단계 조직이었다.24) 道에는 勅任 또는 奏任官인 道長官 밑에 庶務와 會計를 담당하 고 장관을 보좌하는 長官官房과 地方 勸業 學務를 담당한 內務 部, 稅務 理財를 담당한 財務部로 조직되었다. 警察사무가 독립 된 것이 특징인 바, 이는 이미 併呑 前에 경찰권이 日本에 넘어가 헌병경찰 조직이 지방행정기구와 별도로 警務總長에게 직속되어 지방치안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道長官은 行政執行上 管內의 경찰을 사용할 수 있으나 단지 道警察部長으로 하여금 필요한 명령을 발하게 하거나 또한 이에 대한 필요한 처분을 명할 수 있 다 (官制 5條 5項)는 정도의 간접적 경찰권만을 가졌다. 地方文官도 중앙기구의 文官의 권한이 사무적인데 국한된 것과 같이 道長官은 法令을 執行하여 管內의 行政事務를 管理하고 소속官吏를 指揮 監督한다 (官制 5條)는 정도의 극히 사무적인 기능만이 부여되었다. 더우기 政治權力이 극도로 中央에 集權되어 韓國의 道長官은 총독부의 충실한 官吏에 불과하고 上級地方自治 23)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20年度 및 1939年度 24) 朝鮮總督府地方官制(1910年 9月 30日)
37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團體의 首長의 地位는 극히 제한된 형식적 권한에 불과했다. 道 밑에는 府 郡 島의 중간행정기관을 두고, 府에는 府尹, 郡에는 郡守, 島에는 島司가 道長官의 지휘 감독을 받아 施政하였다. 木浦群山馬山鎭南浦新義 府는 統監府時代의 理事廳 소재지를 개정한 것으로서 京城 仁 州淸津 등 12개 都市에 설치되었다. 원래 開港場이었던 관계로 川 釜山 元山 大邱 平壤 주로 日本人이 집단거주하는 특수행정구역이 되었다. 따라서 府尹 은 대개 前理事官이었던 日本人이 임명되고 自治的인 특권을 누 렸다. 1914년 지방제도 정리에 따라 郡은 317개에서 220개로 정리 되고 郡 밑의 面도 4,338개에서 2,521개로 정리되었다. 郡은 면 적 약 40方里, 인구 약 1만인을 기준으로 하고 面은 약 4方里 800戶를 최저기준으로 정리한 것이다. 面長은 원래 郡守의 補助 機關으로 하등의 직제상 규정이 없던 것을 1917년 행정기관으로 승격시켰다25) 다음 해 島制가 창설되어 濟州島와 鬱陵島에 島司 를 두고 행정 뿐 아니라 警察權도 위임하였다. 島는 행정과 경찰 이 분리된 郡行政과는 달리 一元化된 것이 특징이다. 日本은 韓國支配의 기초작업의 일환으로 面洞里에 이르기까지 물샐틈 없는 행정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러한 地方行政 조직에는 중앙과 달리 韓民族이 다수 이용되었다. 그 까닭은 韓民族의 日帝 侵略에 대한 완강한 저항이 併呑 후에도 지속되어 지방치안을 장 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14년에 이르러서야 郡面의 폐합 등 겨우 행정구획이 정비되지만 區劃再編이나 地名 變更 등에 대한 저항도 완강하였다. 이러한 지방을 日本人이 직접 통치한다는 것 은 어려운 일이었음으로 부득이 韓國人을 다수 지방관으로 사용 25) 面制 (1917年 制令 1號)
38 1. 日帝의 侵略機構 한 것이다. 13道長官 중에 6인과 郡府 全員이 韓國人으로 임명되 었다. 또 諮問職인 韓人參事制를 두어 道에 參事官 1인과 參事 3 인, 府 郡에 參事 2인을 배치했다. 이같이 지방행정기관에 한국인 관리를 다수 참여시킨 것은 統 治에 참여시킨 것이 아니다. 韓人 道長官이나 郡守 밑에는 반드시 日本人 관리가 배치되어 實權을 장악했으며,26) 參與官 및 參事의 諮問도 극히 제한되고 형식적인 것으로 영향력이 없었다. 즉 韓人 地方官의 임용은 지방통치의 難點을 해결하는 동시에 親日的 중 산층을 회유하는 이중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3 1運動 이후 증앙관제의 개혁과 아울러 지방관제도 개혁되었 다. 道長官을 道知事라 개칭하고 憲兵警察制의 철폐에 따라 道廳 에 警務部를 두고 道知事가 경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종래 중앙집권적 체제를 지방분권의 실현을 준비하는 방향으로 改廢하 였다. 이에 따라 府制 및 面制가 개정되었고 府會 邑會 面協 議 會 學校評議會 道會가 구성되어 知事 府尹 面長의 諮問에 응 하였다. 地方自治는 점차 구체화되어 1933년 4월 道制실시와 아 울러 종래 諮問機關을 議決機關으로 하고 道 邑 面에 法人格을 부여하였다.27) 그러나 地方自治制의 실현이 민중의 의사 반영과 는 전혀 별개의 것이였다. 지방의 土着 富裕層을 형식적이나마 지 방행정에 참여시키지 않고는 뜻대로 통치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韓人 부유층을 日本人 편에 서도록 유도하여 植民統治에 협력케 하자는 것이었다. 地方自治制의 실시는 기만적인 懷柔政策이었다. 道는 아직도 日 本政府가 임명한 道知事에 의하여 그들의 편의대로 통치되고 어 26) 朴殷値 韓國獨立運動之血史 p ) 道制( ) 실시
39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떤 사람이건 3개월 이상 投獄시킬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選擧는 이름뿐으로 官選 推薦 制限 등의 방법으로 농락하였다. 그 결과 1920년 府會議員 선거에서 府人口의 25% 밖에 안되는 日本人이 府議席 268席 중 203席을 차지했고, 1933년 道會議員 선거에 서 전인구의 2.6%에 불과한 日本人이 전의석의 29. 6%를 차지 했다.28) 地方行政機構에 있어서도 韓國人 등용은 헛구호였고 점차 중요 직위는 日本人에게 독점되어 가고 韓國人은 그 手從的인 지위로 구축되어 갔다. 그 실례로 과반수를 차지했던 韓國人 道知事가 1940년 道知事 13명 중 겨우 1명이 韓國人이었고 韓國人으로 만 임용하던 參與官마저도 日本人으로 교체되었다.29) 4) 諮問機關 諮問機關으로는 韓國統治의 합리화를 가장한 中樞院, 法制資料 의 조사기관인 取調局, 韓國人의 통치참여를 가장한 參與官 協議 會 등이 있다. 中樞院은 법제상 總督의 諮問에 응하는 諮問機關으로 議長 1인, 副議長 1인, 顧問 15인, 賛議 20인, 副賛議 35인과 약간의 행장 직원으로 구성되었다.30) 의장에는 政務總監이, 부의장에는 韓國 植民化에 가장 공이 큰 李完用이 임명되었다. 參議는 모두 總督이 奏請하여 日本天皇이 임명했으며, 후에 3년의 임기제가 되었다. 中樞院의 구성원은 대개 韓國植民化의 공이 큰 舊韓國大官 출 신이었다. 따라서 中樞院은 韓國統治에 韓民族의 의사를 반영 및 참여를 가장하는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日本人이나 다름없는 親 28) A.J Grajdanzerv 著 李基白譯 韓國近代史論 p.57. p ) 同上 p.55 30) 朝鮮總督府 中樞院官制 ( )
40 1. 日帝의 侵略機構 日人士로 구성된 中樞院에는 단 한사람도 韓民族의 이익을 대표 할 자가 없었으며, 오히려 최악의 植民政策을 적극 방조하는 집단 이었다. 그럼에도 조그마한 실질적 권위도 부여되지 않았으며, 3 1運動 때까지 10년 간 한 번도 소집된 일이 없었다.31) 3 1運動 이후 中樞院 官制를 고쳐 參議 65인을 두고 그 중 24 인을 道議員으로 임 명하여 그 활용을 다짐했다. 그러나 中樞院이 존속하고 있는 동안 諮問한 사항은 다음과 같이 植民資料 조사나 방조에 머물렀다. ① 墓地 및 火葬에 관한 規則(1919) ② 相續 및 親族關係에 대한 規程(1921) ③ 國民의 狀態에 관한 意見(1929) ④ 農村地方의 狀況(1930) ⑤ 現時의 狀態에 비추어 民衆의 生活安全을 위해 필요한 措置 ⑥ (1931) 地方의 狀況에 비추어 思想善導에 필요한 措置 (1932) ⑦ 農村의 振興上 필요한 새로운 措置 및 儀禮準則의 제정(1933) ⑧ 都市에 있어서의 民心作興을 위한 확고한 計劃은 무엇인가(1934) ⑨ 舊慣習制度의 變化와 現存 慣習의 調查(1934) ⑩ 固有 信仰의 부활, 現存 諸 宗敎의 振興 善導에 관한 事項(1935) 이상의 諮問內容은 中樞院이 31運動전의 친일공로자의 수용소 적 역활에서 통치의 助役機關으로 활용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取調局은 植民地 韓國에 있어서의 司法制度, 특히 民事法令와 제정 및 관습조사와 법령의 立案審議를 위해 설치된 기관이다. 同 局에는 30명 이내의 위원을 둔 바, 委員은 學識과 名望이 있는 31)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p
41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韓國人 중에서 總督이 任命 32)하였다. 同局은 民事法制가 정비 된 1912년 3월 印刷局과 함께 폐지되었다. 總督府 各道 各郡의 諮問機關인 參事會의 韓國人 參事는 식민 통치의 편의상, 日本人편에서 앞장 설 위인이 임명되었다. 매년 1 회 參事會를 소집하여 行政方針 및 事項을 諮問했으나 형식적 범 주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오히려 租稅督促 및 總督政治의 協賛의 助役을 하였다.33) 이 제도는 3 1運動 이후 광범한 부유층의 포 섭을 위해 활용되었다. 1920년에는 全國道參與官會議를 總督府에 서 소집하고 새로운 植民政策에의 적극 협조를 강조하는 동시에 韓民族의 동향을 탐색한 일도 있다 (3) 彈壓機構 1) 憲兵 警察 憲兵 警察은 武斷統治의 핵심기관이었다. 憲兵警察制度는 군사 조직인 憲兵이 警察權을 장악하고 경찰조직과 연립하여 그 長이 최고 치안기구인 警務總監部를 비롯한 경찰조직의 장을 겸임하는 一元的 二元組織이다. 憲兵 警察은 治安警察 뿐 아니라 司法行政 및 일반행정에도 널리 작용하여 韓國統治의 주역을 담당하였으므 로 1910년대의 韓國統治가 憲兵警察政治라고 평가되었다.34) 日本憲兵이 韓國에 있어서 高等警察과 普通警察을 담당한 것은 이미 1904년 러 일전쟁 때부터였다. 그후 救國抗爭이 치열해가 자 1907년 10월 統監府警察官을 폐지하고 駐箚憲兵이 統監에 예 속되어 경찰직무를 장악하였다.35) 中佐 이하 288명에 불과하던 32) 日本勅令 356號 (1910年 9月 30日) 33)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p.36 34) 金龍德 三 一運動 以前의 笞刑, 東亞日報社 3 1 運動 50週年紀念論集 p ) 日本勅令 323號 韓國駐箚憲兵에 관한 件(1907年 10月 7日)
42 1. 日帝의 侵略機構 駐韓憲兵隊를 782명으로 증원하는 동시에 少將을 대장에 補하여 치안유지를 꾀했다.36)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明石元二郞이 初代 憲兵隊長으로 부임하여 憲兵을 2,000명으로 다시 증원하고 韓國 人 무뢰배 4,300명을 憲兵補助員으로 삼아 韓國에 있어서의 軍事 警察, 行政警察, 司法警察까지도 장악하였다. 이 憲兵警察制度는 1910년 6월 韓國 경찰권의 日本위임과 함 께 統監府 警察官署 官制를 제정, 헌병병력을 경찰병력과 기구상 합동함으로써 제도화되었다. 이로써 복잡하던 치안조직이 통일되 어 駐箚憲兵司令官이 統監府警務總長에 憲兵分隊長이 道警察部長 에 위임되었다. 이같이 이미 제도화된 憲兵警察은 併呑 후 그대로 계승되어 다 음과 같은 원칙 하에37) 武斷統治의 핵심조직이 되었다. ① 朝鮮總督府에 警務總監部를 둔다. 警務總長에는 朝鮮駐箚憲 兵隊司令官인 陸軍將官으로 充하고 總督의 命을 받아 朝鮮에 있어서의 警察事務를 總理하여, 警察官署의 職員을 指揮監督 한다. ② 各道에 警務部를 두며, 該道憲兵隊長인 陸軍佐官으로써 部長 에 充하여 警務總長의 命을 받아 道內의 警察事務를 掌理하 며, 管內의 警察官署 職員을 指揮監督한다. ③ 朝鮮에 在勤하는 憲兵將校는 朝鮮總督府 警視에, 憲兵准士官 및 下士官은 警部에 任命할 수 있다. ④ 朝鮮駐箚憲兵 은 治安維持에 관한 警察 및 軍事警察을 掌 한다. ⑤ 朝鮮駐箚憲兵은 陸軍大臣 管轄下에 속하며, 그 職務에 관해 36) 李炫照 三 一運動以前 憲兵警察制度의 性格, 東亞日報社 3 1運動 50週年 紀念論集 p ) 統監府警察官署官制 改定의 件(1910年 9月 30日)과 日本勅令 343號 朝鮮駐 箚憲兵條例(1910年 9月 6日)에 의함
43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서는 朝鮮總督의 指揮監督을 받고 軍事警察에 관해서는 陸軍 大臣의 指示를 받는다. 이상과 같은 통일원칙에 따라 이루어진 憲兵警察機構를 圖示하 면 아래 표와 같다. 이와 같이 최고치안기구로부터 말단조직까지 憲兵과 警察의 두 조직이 연립되고 憲兵이 두 기구의 長을 겸하여 동일한 명령 체계 밑에 동일한 임무를 띠고 서로 조화를 이루며, 실질적인 통 치기능을 발휘했다. 운영에 있어서는 양자의 특성을 살려 警察은 京城을 비롯한 都市에 설치되어 행정 및 사법 경찰을 주관하고 憲兵은 국경지대 義兵 출몰지역 등 군사경찰상 필요한 지방에 주 로 배치되었다.38) 38) 田保橋潔 朝鮮統治史論稿 p
44 1. 日帝의 侵略機構 憲兵警察의 배치상황은 실로 碁布星散과 같았으며,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그 배치와 관할구역을 예민하게 조절하였다. 1910년 12월 종래 집단배치제를 분해배치제로 개정, 한 駐在所에 巡查 巡 査補 10여 명을 배치했던 것을 日本人 巡查 1내지 2명과 韓國人 巡 查補 2내지 4명으로 줄여 분산시켰다. 1914년 현재 全國 憲兵 警察機構는 다음과 같다.39) <憲兵警察機構 > 憲 憲 憲 憲 憲 憲 憲 兵 兵 隊 司 令 兵 兵 分 兵 分 遣 兵 派 遣 兵 出 張 計 部 隊 隊 所 所 所 1914년 警 警 務 總 監 警 務 警 察 京 察 分 巡 査 駐 在 巡 査 派 出 計 ,036 察 部 部 署 署 所 所 이상 1,767개 기관에 배치된 합병직후의 인원현황은 다음과 같 다.40) <憲兵警察機構 > 憲 兵 憲 兵 將 校 下士 准下士官 憲 兵 上 等 兵 憲 兵 補 助 員 探 偵 計 1914년 警 警 警 巡 巡 ,525 4,749 察 査 視 35 部 223 査 2,321 補 3,019 計 5,598 3,000 10,693 이 중 韓國人은 警視 1인, 警部 100인 巡查 100인이 있을 뿐이 39) 小森德治 明石元二郞 上卷 p ) 渡部學 朝鮮近代史 p
45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고 憲兵補助員 巡查補 探偵은 전원 韓國人이었다.41) 憲兵補助員制는 1908년 憲兵隊長 明石元二郞이 창설한 것인데 그 선발대상자는 韓國軍解隊軍人 警官解職者 및 義兵投降者 등 이었다. 日本 憲兵은 이들 補助員에게 義兵捜索 民情偵察 등의 임무를 부여하고 同族相殘을 강요한 것이다. 巡査補 制度는 併合 후 警務部長이 된 明石元二郞이 警兵補助 員制를 모방하여 만든 것인데, 그 임무 및 대우가 憲兵 補助員과 동일하였다.42) 이렇게 조직된 憲兵警察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고 만능적인 기 능을 수행하였다. 43) ① 軍事警察-義兵의 討伐, 諜報蒐集 등 ② 政治査察-新聞紙 및 出版物의 단속, 集會 및 結社의 단속, 宗敎의 단속, 寄附金의 단속 등 ③ 司法權行使-犯罪의 即決, 民事爭訟의 調整, 檢事業務의 代 理, 執達吏의 業務, 戶籍事務 등 ④ 經濟警察-納稅督促, 國境稅關業務, 密輸入團束, 國庫金 및 公金의 警護, 副業農事山林鑛業 등의 團束 ⑤ 學事警察-學校 및 書堂의 視察, 日語의 普及 등 ⑥ 外事警察-外國旅券交付, 日本行 勞動者 및 在韓 中國人 勞 動者의 團束, 在留禁止者團束, 國內外 居住移轉 등 ⑦ 助長行政-法令普及, 納稅義務諭示, 農事植林의 改良, 副業 獎勵 등 ⑧ 衛生警察-種痘普及, 害獸驅除, 傳染病豫防, 屠畜團束 등 ⑨ 其他-海賊警戒, 郵便護衛, 道路修築, 墓地埋葬, 火葬團束, 41)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p.40 42) 田保橋潔 朝鮮統治史論稿 p.91 43) 姜德相 憲兵政治下의 朝鮮, 歷史學硏究 321號 p
46 1. 日帝의 侵略機構 雨量 水位의 測量, 賭博 巫人 藝唱妓 賣淫婦 風俗 등의 團束 이와 같이 治安警察 뿐 아니라 諸般行政運營 및 행정사무의 立 案 審議까지도 憲兵 警察의 간섭을 받았으며, 상업 자산 신용 생업 사교 오락 노동 신앙 등44) 일체의 인간활동이 그들의 자의대로 좌우되었으니 憲兵警察政治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만능적인 憲兵警察의 기능이 실제로 행사하기 위한 한 수단으로 부여된 것이 即決審判權이었다. 警察署長 또는 이와 동일한 직무를 수행하는 憲兵分隊長에게 그 관할구역 내에 있어서 범죄를 즉결할 수 있게 다음과 같은 犯罪即決例45)를 제정했다. ① 拘留答刑科料에 해당하는 罪 ② 3월 이하의 懲役 또는 100圓 이하의 罰金 또는 科料의 刑에 處할 수 있는 賭博의 罪, 拘留 또는 科料에 處할 수 있는 傷 害에 미달하는 暴行罪 ③ 區裁判所의 裁判權에 속하는 事件으로서 舊韓國刑法*典에 규정한 3월 이하의 懲役刑에 해당하는 傷害罪 ④ 區裁判所의 裁判權에 屬하는 事件으로써 3월 이하 혹은 100 圓 이하의 刑罰에 該當하는 行政法規 違反의 罪 이러한 犯罪即決例는 무고한 韓國人에게 罰金 笞刑 拘留 등의 억압을 가하기 위한 조치였다. 때문에 韓國人의 범죄율이 가장 높 은 賭博 傷害未遂 暴行 등에 적용되었으며, 특히 答刑은 韓國人에 게만 적용한 탄압의 수단이었다. 이러한 即決例에 의하여 처벌된 韓國人은 1911년에 18,100여 건이 1913년에는 21,400여 건, 1918년에는 82,121건으로 증가되었다.46) 소위 文化政治를 표방 44)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p.41 45) 勅令 10號(1910年 12月) 46) 姜德相 憲兵政治下의 朝鮮, 歷史學硏究 321號 p
47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한 1921년에도 答刑처벌을 받은 사람은 73,262건에 달했다. 결국 실제로는 매년 10만이 넘는 韓國人이 賭博, 단순한 폭행, 교통규 칙 등 사소한 일로 3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100圓 이하의 벌금형 또는 笞刑을 당하였다. 日本에서는 政令違反에도 1월의 體刑이나 20圓 미만의 벌금을 과하면서 가난한 韓民族에게 100圓 이하의 벌금을 사소한 일에 가한 것은 韓民族을 위협하는 외에 아무런 의 미도 없는 것이었다. 즉 韓民族을 궁핍화, 무력화하기 위한 유력 한 무기로 사용되었다.47) 3 1運動 이후 韓國에 대한 武斷支配의 헛점을 느낀 日本은 그 합리적 철저적 지배를 위해 소위 文化政治를 제시하였다. 이에 따 라 戰時도 아닌 韓國에서 헌병병력은 경찰의 주력으로 사용하던 憲兵警察制度를 외형상 一般警察制度로 변모시켰다. 독립적이던 警務總監部와 各 道警務部를 폐지하고 總督府 직속 의 警務局과 道知事 예하에 警察部(第三部)를 두었다.48) 또 韓國 人의 차별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韓國人에 한하던 巡查補제도를 폐지하고 警部 밑에 警部補를 두었다. 이와 같은 警察制度의 전면적인 변화 즉 憲兵警察制度의 폐지 와 一般 警察制度로의 전환은 실제에 있어 과거의 헌병이 이제 경 찰로 둔갑한 것이며 위협적인 탄압에서 사생활 및 사상의 탄압에 까지 밀착한 查察의 강화였다. 또한 道知事가 道警察部를 통제 하 게 되었으나 警察制度는 전체적으로 독립되고 集權化되어 있었다. 다만 행정과 경찰의 二元的인 모순을 시정한데 불과하였다. 一般 警察로의 전환이 경찰의 강화임을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 는 경찰병력의 증원아 말해주고 있다. 개혁 전의 憲兵과 警察의 47) A.J Grajdanzev 著 李基白譯 韓國近代史論 p ) 日本勅令 朝鮮總督府官制改定( )
48 1. 日帝의 侵略機構 총수는 14,358명이었는데 1922년에 20,771명으로 45%가 증원 되었다. 그간 前憲兵 1,500명을 巡查服으로 갈아 입히고 日本에서 1,500명의 巡査를 새로 모집하였으며, 韓國人 憲兵補助員을 경찰 관으로 개편하였다.49) 이같은 경찰의 증원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日本人 警察의 증 원이었다. 물론 경찰의 고위직은 이미 日本人에 의해 독점되어 있 었으나, 개혁 전에 41.3%이던 韓人 警察의 구성비가 26.7%로 줄 어든 반면 日本人 警察은 58.7%에서 73.3%로 증가되었다.50) 경찰의 기능은 韓民族의 조직적 항일운동과 日本의 대륙침략 기지화에 따라 더욱 강화되고 악랄해갔다. 사상 및 저항 운동을 발본하기 위한 高等警察이 강화되어 各署에도 高等課를 두었으며, 경제통제를 위한 經濟警察, 戰時體制 정비를 위한 防護課 등이 설 치 확대되었다. 더우기 防護團 消防團 水防團 등 災害對策組織 을 警防團으로 통합하여 各 署長이 지휘하는 경찰의 手足으로 삼 았다. 2) 司法機構 植民地 韓國의 司法機關은 司法權의 독립이 무시되고 일반행정 관서와 같이 중앙행정부서의 일부로 總督에게 직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司法機構의 구성, 法官의 人事 등이 總督의 재량에 맡겨 져, 法官의 신분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즉 司法機關은 總督政治의 보조기관에 불과했다. 韓國의 司法權 및 監獄事務는 이미 1909년 7월 委託形式으로 日帝에 박탈되어 統監部 司法廳에서 관장한 바 되었다. 이 때 이미 그들 손으로 만들어진 韓國裁判所의 3審 4級制를 계승하여 高等法 49) 朝鮮總督府 朝鮮의 新政 p.57 50) A.J Grajdanzev 著 李基白譯 韓國近代史論 p
49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院 控訴院 地方裁判所 區裁判所를 구성하고 檢事局을 부설 하 였다. 여기에 日本人 判檢事와 書記가 배치되어 韓國에 있어서의 民事 刑事裁判 및 非訟事件까지 統監府 司法廳이 장악하였다. 併呑 후 總督府 官制 실시와 함께 統監府 司法廳이 司法部로 개 편 계승되였다. 裁判所는 高等法院 1개소(京城) 아래 控訴院 3개 壤海州大邱晋州光州), 地方裁判所支部 12개소, 區裁判所 소(京城 平壤 大邱), 地方裁判所 8개소(京城 公州 咸興 平 68개소 등 92개소가 설치되었다.51) 이 같은 3審 4級의 司法組織은 1912년에 高等法院, 覆審法院, 地方法院의 3審 3級制로 수정되었다. 여하간 재판제도 및 재판소는 日帝가 韓民族을 합리적으로 탄 압하기 위한 절차 및 시설이었다. 日本人 法官이 日本法 내지 總 督府法令에 의하여 韓民族에게 일방적으로 重刑을 내렸다. 法官은 이미 1909년에 日本人에게 독점되어 日本人 判事 192 명에 대해 韓國人 判事는 88명에 불과했다. 併吞 후 그나마 日本 人으로 대치되어 1912년에는 判事 199명 중 38명과 檢事 57명 중 3명만이 韓國人이었다.52) 또한 같은 法官이라도 민족차별이 심하여 韓國人 判事는 日本人이 관련된 재판을 담당할 수 없었으 며, 재판장이 될 수 없었다. 차별폐지를 선언한 1920년 이후에도 覆審法院을 비롯한 合議部 裁判部 구성 에 있어 韓國人이 裁判長 이 된 일은 없으며, 日本人 裁判長이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어 사실상 韓國判事의 裁判權은 박탈되어 있었다. 司法制度 및 裁判所는 韓民族의 탄압과 수탈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法官의 구성이 문제가 아니었다. 韓國에 적용한 刑律 51) 朝鮮總督府施政年報 (1910) p.96 52) J.A Grajdanzev 著 李基白譯 韓國近代史論 p
50 1. 日帝의 侵略機構 은 강도 강간에 死刑을 규정하는 등 하치 않은 범죄에 重刑을 규 정하였다. 또한 하치않은 사건에 다수한 관련자를 만들어 재판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審問하여 고통을 주었다. 일단 檢擧되면 無罪 判決을 받는 일이 극히 드물지만, 그럴 경우에도 무죄가 아니라 용서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韓民族은 장기간에 걸친 심문 및 재판 과정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았다. 그간의 獄苦과 拷問이 체력과 의 지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가정을 파멸시키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러한 탄압을 받은 韓民族은 해가 갈수록 늘어만 갔다. 1910년 刑事事件의 新受件數는 7,922건이었는데 계속 급증하여 1939년에 는 45,576건이 되었으며, 山林令 違反이 1911년 112건에서 1939 년에는 5,245건으로, 諸 稅法 違反이 44건에서 11,045건으로 증가 되었다.53) 특히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전반의 사상 탄압시 共 產主義運動 혐의로 검거된 수십만의 농민 및 노동자는 共產主義나 無政府主義가 무엇인지 왜 검거되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 었다. 이는 바로 韓民族을 노예화하기 위한 탄압이요, 빈곤화하기 위한 착취과정으로써 韓民族을 무기력화하는 수단이요 무기였다. 드디어 이러한 방법에도 굴하지 않는 뜻있는 韓民族을 탄압하 기 위하여 새로운 기구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1936년 전국 7 개소에 설치한 保護觀察所였다. 日本植民統治에 협조하지 않는 사 상을 가진 것 같다는 자의판단만으로 제한 없이, 사상을 바꿀 때 까지 拘禁하는 것이다. 1940년까지 保護觀察所에 구금된 사람은 4,551명에 달했다.54) 이상과 같은 韓民族의 검거는 감옥의 계속적인 증설에도 불구 하고 절대면적이 부족했다. 日本은 그 대책으로 假釋放 執行猶 豫 恩赦 등을 구사했으나 1909년 監獄事務가 日本에 넘어갈 때 53) 1939年度 朝鮮總督府 施政年報 p ) 1940年度 朝鮮總督府 施政年報 p
51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5,300여명이던 受刑者가 1918년에는 12,300명, 1933년에는 19, 254명, 1940년에도 19,241名을 受刑하고 있었다.55) 監獄의 衛生 給食 상태는 마치 짐승우리와 같았고, 坪當 7. 9인이 수용되고 있 었으며,56) 1933년부터는 상품제조에 受刑人力을 이용하였다. 3) 軍 隊 日本의 韓國統治에 一大支柱의 역할을 한 것이 朝鮮駐箚軍이었 다.57) 저항운동이 강력하고 지속적인 韓國에 있어서 군대병력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는 통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韓國에는 약 2개 師團 병력이 駐屯하고 있던 바, 總督은 陸軍 大將으로서 軍事統率權을 갖고 있었으며, 各道長官은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병력을 요하는 때는 總督에 구신하고 非常急變 時는 바로 該柱在軍隊司令官에게 출병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이같 은 總督의 군사통솔권이나 道長官의 출병요구권을 아울러 생각할 때 朝鮮駐箚軍은 韓國統治의 支柱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韓國統治의 배후에는 陸軍 2개 사단과 海軍 2개 분대가 주둔하 고 있었다. 陸軍의 주력은 龍山 平壤 羅南에 두고 지방 각지에 는 분산주의로서 군청소재지나 각 정거장에 守備隊를 배치하였다. 海軍은 鎭海灣과 永興灣에 防備隊를 두었다가 1916년 鎭海에 軍 港部를 두고 驅逐隊를 부속시켰다. 朝鮮駐箚軍은 統監府 설치 후 1906년 韓國駐朝軍司令部 條例 에 의해 京城에 司令部를 두고 陸軍大將(또는 中將)을 司令官에 임명하여 駐韓諸部隊를 통솔케한 데서 연원한다. 兵力은 처음 1개 사단 내지 1개 사단 반으로 日本內의 사단이 2년 교대로 韓國에 55) 同 上 56) 1916年 朝鮮彙報 9月號 p ) 金正明編 朝鮮駐箚軍略史
52 1. 日帝의 侵略機構 주둔하였다. 併呑 후 義兵討伐을 위해 산간지방에 분산 배치했던 守備隊를 집결시켜 재배치하는 한편 朝鮮軍 2개 사단 증설안이 확정되어 제19사단 제20사단이 1921년까지 편성됨으로서 韓國의 방위를 담당한 常駐軍이 창설된 것이다.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한 3 1運動 이후에 日本의 駐韓軍事力은 계속 증강되었으며, 朝鮮總督의 군사통솔권이 법제상 해제되었으 나 계속 日本陸軍大臣 내지 朝鮮軍司令官을 역임한 軍部지도층이 總督에 부임하였으므로 사실상 朝鮮軍은 總督에게 예속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4) 經濟掠奪機構 總督府 5部 중 農商工部 度支部의 2部가 收奪政策機關이고 鐵 通信局臨時土地調查局稅關專賣局營林廠平壤鑛 業所勸業農場土木會議工業傳習所 등 직속관서의 거의가 경 道局 제 약탈을 위한 現業機關이었다 이러한 收奪機關은 이미 러 일전쟁때부터 시설되어 併呑 전에 그 기초가 확립되었다. 그들은 근대적인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韓 國人이 미처 개발하지 못한 자원과 산업을 독점하고, 우선 植民地 지배의 기초와 원시적 자본축적을 강행하고자 財政 金融 交 通 通信 및 諸產業에 대한 掠奪機關을 설치하였다. 그 중 韓國의 토지 약탈을 수행한 臨時土地調査局이 대표적인 수탈기관이었다. 同局은 併呑 직전 韓國政府에 설치되었던 土池 調査局을 계승한 것으로 政務總監이 總裁를 겸임하였다. 또한 분 쟁지 해결을 위한 高等土地調查委員會와 地方土地調査委員會를
53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부설하고 필요에 따라 支局 또는 出張所를 설치했다. 日本은 이미 1905년부터 韓國의 토지수탈을 진행하였다. 韓國政府를 통해 기 술원의 양성, 土地家屋證明規則 등 토지의 약탈을 준비하였다. 併呑 후 1912년 土地調查令에 이어 朝鮮民事令 不動産登記令 등을 제정하여 1918년 11월까지 소위 근대적 土地私有制度의 법 적 확인을 완료하고 同局이 폐지되었다. 同局은 8년의 세월과 2,410 여만圓의 경비 및 34,000명의 상임직원을 동원하여58) 근 대적 土地所有權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韓國의 토지를 박탈하였다. 그 결과 全農家의 3.4%에 불과한 소수의 地主가 全農地의 50.3% 를 차지하고, 總督府가 國公有地를 몰수하여 재정기반을 형성하였 다. 또 토지조사사업은 근대적 土地私有制의 확립에 있다고 하였 으나, 실제는 종래의 半封建的 掠奪體制를 강화한 것이다. 日本은 韓國農業에 대한 반봉건적 약탈에 만족하지 않았다. 1920년 產米增殖計劃을 세우고 이를 위해 殖產局에 土地改良課 水利課 開墾課를 신설하였다가 土地改良部를 독립시키고 이어서 土地改良株式會社, 勸農共濟組合, 123개의 水利組合을 건설하여 韓國을 日本의 식량공급단지로 조성하였다. 그 결과 韓國農民은 水稅 改良費 金肥代 種子代 등 作料 외 의 여러 부담으로 더욱 궁핍화되어 토지를 상실한 반면, 日本人 所有土地는 1921년 242,500町에서 1927년에 346,200町으로 43%가 증가되었다.59) 米穀生產은 목표의 반에도 미달하여 450만石 증산에서 그쳤으 나 日本輸出은 계획대로 年平均 800만石을 상회했다. 따라서 韓 國人의 1인당 소요량은 0.718石에서 0.401石으로 감소되었다.60) 58) 土地調査報告書 pp ) A.J Grajdanzev 著 李基白譯 韓國近代史論 p ) 鈴木武雄 朝鮮經濟 p
54 2. 日帝의 經濟政策 이러한 韓國米의 수출증가가 日本農村을 위협하자 1932년 土 地改良部를 폐지하고 1934년에 產米增殖計劃을 폐지하여 韓國農 業을 파탄시켰다. 總督府는 이 파탄된 농촌에 自力更生運動 精神 作興運動을 전개하며 農山漁村을 진흥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중앙에서 말단에까지 각기 農漁村振興委員會를 조직하고 產米增 殖의 중단으로 허탈상태가 된 농업정책을 糊塗하는 동시에 韓國 民族의 농촌자활운동을 흡수하였다. 이 같은 更生運動의 실체는 농촌청년들의 통제와 동화에 있었다. 1920년대의 농촌에는 궁핍 을 自力으로 극복하려는 각종 농민단체가 조직되고 계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日本은 이를 탄압하는 동시에 戰時體制의 구성 을 위한 통제의 목적에서 農漁村更生運動을 전개한 것이다. 日本의 경제수탈은 總督府 수탈기구를 통한 것보다도 半官半民 의 정책회사가 큰 역할을 하였다. 東洋拓殖株式會社를 비롯하여 金融組合, 殖產稧, 各種銀行, 各種產業組合이 즐비하게 세워저 韓 國의 資力을 송두리채 갈취하였다. 梁榮焕 2. 日帝의 經濟政策 (1) 土地調查事業의 實施와 그 結果 1) 土地調查令의 發布 1910년 8월 29일, 韓國을 併合하여 植民地로 만든 日本은 곧 韓國經營의 큰 방침을 熟議決定하였다. 거기에서 얻은 결론은 韓 國은 日本資本主義發展의 食糧基地와 原料生產地가 되어야 하고
55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한편으로는 日本商品의 판매시장으로 육성되어야 한다는 고전작 인 植民地理論이었다.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조처의 일환 으로 日帝는 植民地官府인 朝鮮總督府로 하여금 두 가지 중요한 법령을 發布하여 실시하게 하니 그 하나는 소위 土地調查令이고 다른 하나는 會社令이다. 이 두 법령은 日本이 韓國의 영토와 인민을 정복한 마당에서 어 떻게 이를 통치할 것인가 하는 정책의 기본지침을 밝혀 놓은 것이 다. 會社令은 韓國에 대한 商工政策의 기본방침을 표명한 것이며 土地調查令은 韓國의 土地制度 및 農業政策의 핵심을 이루는 기 초법령이 되는 것이었다. 이 土地調查令에 따라 소위 土地調査事 業이 실시되었고 그 결과 20세기에 그 유례를 볼 수 없었던 資 本主義體制下의 小作小農體制 라는 畸型的인 農民關係를 創出해 낸 것이다. 土地調查事業은 이 土地調查令의 발포로 비로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乙巳條約이 締結된 후 韓國內에 統監府가 설치되자 이 統監府의 發議로 土地의 細部測量과 土地家屋證明規則 등 一聯의 土地登記法令이 發布되고 일부지역의 測量이 시작된 바 있었다. 그 후 1910년 3월 14일에 舊韓國政府는 勅令 제23호로 土地調 查局官制를 발포하고 다음 날인 15일에는 度支部大臣 高永喜를 土地調查總裁, 學部次官 表孫一을 同副總裁로 임명하고 토지조사 사업의 집행을 담당케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5개월 뒤인 같은 해 8월에 大韓帝國이 日帝에 併合됨에 따라 이 土地調 査官制도 일단 폐지되고 말았었다. 日帝는 그 해 9월 30일에 日本勅令 제361호로 朝鮮總督府 土 地調查局官制를 다시 공포하였다. 이때부터 朝鮮總督府에 의한 朝 鮮土地調查는 실질적으로 착수되었다. 1912년 8월 13일에는 드
56 2. 日帝의 經濟政策 디어 制令 제2호로 全文 19조로 구성된 土地調査令 및 同施行規 則을 制定公布하기에 이르렀다. 統監府에 의한 土地調查整理事業은 日人 농업회사와 농업이민 의 招致를 위하여 계획 실시되었던 것이나 合邦後 總督府에 의한 土地調查事業은 전국토를 세부측량하고 財源을 탐색하여 植民地 農政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主眼點을 둔 데에서 그 성격을 달리하 고 있다. 이 土地調査事業은 막대한 토지와 삼림지를 국유지로 편입시킴 으로써 朝鮮總督府의 재원증대를 꾀했고 또 그 국유지를 東洋拓 殖會社를 비롯한 日人農業會社에 불하함으로써 日帝의 토지수탈 을 가속화시켰다. 그리고 이 사업에서, 日帝는 舊地主層을 새로운 地主로 認定 포 섭함으로써 植民地 農政의 협력자로 삼으려 했고 전래의 小作制 를 허용하여 小農體制 위에서 식민지정책을 손쉽게 달성하고자 하였다. 朝鮮總督府는 土地調查事業을 다음의 세 가지 작업으로 구분하 여 실시하였다. ① 土地所有權 調査 ② 土地價格의 調查 ③ 地形地貌의 調査가 그것이다. 權者를 조사하고 지적도에 의하여 각 筆地의 위치형상 및 경계 土地所有權調査라는 것은 토지의 所在地 地番 地積 및 所有 를 標劃하고 토지소유권 및 그 경계를 사정하고 地籍을 설정함으 로써 土地登記制度의 창설을 꾀한 것이다. 土地價格의 調査라는 것은 時價 또는 賃貸價格, 기타 토지와 수 익을 사정하고 穀價 및 金利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통일적으로 전
57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국의 地價를 조사하여 地稅의 부과표준을 결정하고 地稅제도를 확립하여 재정의 기초를 수립하려고 했다. 地形 地貌의 調查라는 것은 지형측량에 의하여 지형도를 調製 하고 지상에 있어서의 天爲 人爲의 地物를 描畵하고 그 高低 脈絡 분포관계 등을 표시하여 이를 지도상에 명료히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1) 이와 같은 대규모의 토지조사는 1912년 5월부터 1918년 10월 에 이르는 8년 여의 세월과 2,040여 만圓의 경비로서 완료되었다. 이와 같이 전국 1만 3천 300여만里의 지역에서 삼각측량 및 지 조사를 실시하여 각 筆地마다 地番地目면적地價地主 및 형측량을 수행하고 토지소유권 토지가격 지형 地貌 등에 관한 지위 등급을 기재한 토지대장 기타 부속장부 및 이에 상당하는 地 籍圖를 작성하였던 것이다.2) 2) 土地調查令의 內容 土地調査令에는 土地所有權 裁定에 대한 원칙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첫째로 토지소유권은 朝鮮總督 또는 그 권한을 위촉받은 자가 裁決 확정한다는 것이며, 둘째로 소유권의 주장에는 申吿主義를 원칙으로 하고, 셋째로는 不服者에 대해서는 證據主義를 채택하였다. 土地調査令 제4조에는 토지의 지주가 朝鮮總督이 정하는 기간 내에 그 주소, 氏名 또는 명칭 및 소유지의 소재, 地目, 字番號, 四 標, 등급, 地籍, 結數를 臨時土地調查局長에게 신고한다. 단 국유 1) 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編 朝鮮土地調査報告書 (1918) pp ) 朝鮮總督府編 朝鮮總督府施政年報( ) p
58 2. 日帝의 經濟政策 지에 있어서는 보관관청에서 臨時土地調査局長에게 통지한다고 하였고, 제 6조에는 토지의 조사 및 측량에 있어서는 그 조사 및 측량지역내의 지주로 하여금 2인 이상의 總代를 선정케 하여 조 사 및 측량에 관한 사무에 종사케 한다고 하였다. 또 제9조에는 臨時土地調査局은 地方土地調查委員會에 諮問하여 토지의 소유자 및 그 疆界를 査定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토지소유권의 裁定은 朝鮮總督府로부터 그 권한을 위임받은 臨時土地調査局長이 확정하되 지주라고 주장하는 자의 신고에 따라 지주가 선정한 總代와 더불어 조사와 측량을 실시하 고 土地調査委員會의 자문을 거쳐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臨時土地調査局長의 裁定에 불복하는 자에 대한 구제조항으 로 제11조에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다. 즉 제9조 제1항의 查 定에 대하여 불복하는 자는 제9조 제2 항의 公示期間 만료후 60 일내에 高等土地調査委員會에 신청하여 그 재결을 구할 수 있다. 단 정당한 사유 없이 제7조의 규정에 立會를 하지 아니한 자는 不 在此限이다. 그리고 제12조에는 高等土地調査委員會는 당사자, 이 해관계인, 증인 혹은 감정인을 소환하고 또는 재결을 함에 필요한 서류를 소지한 자에 대하여 그 서류의 제출을 명할 수 있다고 하 였다. 또 제13조에는 高等土地調査委員會의 재결은 이유를 附한 문서로서 하고 그 謄本을 不服申吿者에게 교부한다. 이러한 高等土地調査委員會의 재결에 대해서는 다시한번 再審 의 기회를 주고 있다. 즉 土地調査令 제16조에는 査定으로서 확정 한 사항 또는 재결을 거친 사항에 대하여 재심을 신청할 수 있음 을 규정하고 있다. 위에서 土地調査令의 중요한 사항을 지적해 보았다. 그러나 토 지소유에 있어서 각종 권한이 얽혀있는 복잡한 사태를 몇 조목의
59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법령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커다란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우선 地主申吿의 근거가 되는 것은 植民地官府가 작성한 數 連名簿 였으며 이것은 統監府治下에서 만들어졌던 結 地稅徵 收臺帳 을 기초로 한 것이었는데 그 대장 자체가 신빙성이 없는 문서였다. 그리고 韓國의 토지 중에는 어느 특정인에게 排他的인 권리를 허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宗中土地라든가 同甲契, 相助契 등 단체소유지가 그것이다. 원래 우리나라의 토지 는 역사적으로 小作人의 권한을 배제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宮房田, 開墾地, 投託地 등은 그 명백한 예에 불과하고 일반사유 지에서도 소작인의 권한을 간단히 배제하기 어려운 역사적 인연 이 얽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미묘하고 까다로운 관계를 판단하는 데에 중요한 자문을 맡아 보는 기관으로서 土地調査令에서는 地方土地調查委員會와 高 等土地調查委員會를 규정한 것이나 그 판단과정에 참여한 總代는 申吿地主들의 선정에 의한 것이니 이들은 처음부터 지주의 대변자 였고 소작인의 권익을 배제하는 데에 힘쓸 사람들이었다. 土地所有權을 분별 인정하는 土地調查局長의 자문기관인 地方 土地調查委員會는 각 道에 설치되었으나 그 구성을 보면 위원장 1인, 상임위원 5인을 두고, 필요에 따라 정원 외 3인 이내로 임시 위원을 두기로 되어 있었다. 위원장은 道 長官이 맡았고 위원 5인 중 3인은 道 參與官, 部長 및 道 事務官으로 임명하고 나머지 2인 은 道內의 名望家에게 위촉하였다. 土地所有權 裁定의 불복자에 대한 심사재정을 담당하는 高等土 地調查委員會에는 위원장 1인, 위원 25인, 간사 6인, 서기 및 통 역생 약간 명을 두었다. 그 위원장은 朝鮮總督府 政務總監이 되고 위원은 朝鮮總督의 奏請에 의하여 朝鮮總督府 判事, 同府 高等官
60 2. 日帝의 經濟政策 및 臨時土地調査局 高等官 중에서 日本內閣이 임명하며 간사는 同府 高等官 또는 臨時土地調查局 高等官으르 충당하고 서 기 및 통 역생은 同府 또는 臨時土地調查局 判任官 중에서 朝鮮總督이 임명하였다. 地方土地調查委員會는 자문기관에 불과하였으나, 高等土地調查 委員會는 裁定機關이었다. 즉 高等土地調查委員會는 臨時土地調 査局長의 재정에 불복하는 자의 신청을 받아 이것을 심의결정한 것이다. 이와 같이 지방 및 高等土地調査委員會는 그 구성위원의 대부 분이 현직관리이고 지방의 경우에는 그 지역의 명망가가 위촉되 었으나 그들은 모두 지주의 대변자이었고 농민의 권익을 도모할 만한 구성원은 아니었던 것이다. 3) 土地所有權 紛爭 韓國 전체의 토지 조사 總筆數는 1,910만 7,520筆인데, 그 중 에서 紛爭地로서 조사한 것은 3만 9,937건이고, 그 筆數는 9만 9,445筆로서 약 0.5%의 분쟁발생율을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 소 유권분쟁에 관한 것이 9만 9,138筆이고, 彊界紛爭에 관한 것이 307筆이니 분쟁지의 9할 이상이 소유권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소유권분쟁 시 9만 9,138筆 중에서 6만 4,419筆은 國 有地에서 일어난 것이고, 3만 4,689筆은 民有地에서 일어났다. 또 彊界에 관한 분쟁지에서 국유지, 민유지의 비율을 보면 307筆 중 에서 국유지 분쟁이 121筆이고 민유지 분쟁이 186筆이었다.3) ㄱ. 民有地 紛爭 民有地에 있어서의 분쟁은 다음과 같은 원인에서 발생하는 경 3) 前揭 土地調査事業報吿害 pp
61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우가 많았다. 첫째로 토지에 관한 權利證明이 분명치 못한 데에서 발생하였 다. 土地에 관한 權利證明과 같은 것은 當事者간에서 작성한 불 완전한 文記에 의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매우 不整備한 書類裝備 에 의거한 郡守의 증명에 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詐欺 혹은 불 법 취득하는 賣買抵當 등이 행하여지는 일이 있다. 이것을 矯正하 는 한 방법으로 1906년 土地建物證明規則 및 土地建物典當執行規 定이 제정 공포되어 그 결과는 公簿에 등록하는 길이 열리고 權利 公認의 法이 정비되어 약간은 그 面目을 개신하였다고 하겠으 土地面積을 표시하는 단위가 너무나 불확실하고 地稅制度가 나 극히 조잡하여 토지의 移動 등 역시 정리가 불완전하여 地籍의 분 란이 심하였다. 4) 고 土地調查報吿書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權利證書가 명백치 않았고 또는 郡守의 증명을 근거 로 소유권을 인정하게 되자 지방의 실력자들은 일반 농민의 토지 를 불법신고하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다 둘째로는 洞中 門中의 公有地 등이 洞中의 대표자 혹은 門中 의 세력가에 의하여 경작자들이 모르는 사이에 私有地로 신고된 경우가 있어서 경작농민들이 부지중에 토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약탈당하는 일이 많았다. 셋째로는 帝室財產으로 처리된 토지에서도 경작농민들은 억울 하게 소유권을 상실하는 일도 있었다. 宮中의 皇族에게 부여된 各 宮財產을 말하는 帝室財產은 이미 1907년 이래 국유재산에서 분 리하여 구별한 바 있다. 종래에 그 한계가 뚜렷하지 않았던 국 유 재산과 帝室財產을 분리하기 위하여 1907년 7월 臨時帝室所有 및 4) 1910年 朝鮮總督府編 施政年報 p
62 2. 日帝의 經濟政策 國有財產調査官制를 發布하고 이어서 帝室財產整理委員會를 조직 하고 여기에서 所有權裁定을 하고 宮內府에 帝室財產整理局을 설 치하여 그 실무를 담당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리된 帝室財產 가운데에는 일반농민의 開墾耕作地가 포함되어 있는 것 이 있어서 분쟁이 일어났던 것인데 금번 帝室財產을 처리할 때에 宮內部 소관의 토지 가운데, 증거가 불충분하다하여, 많은 토지가 경작농민들로부터 帝室소유로 옮겨지고 만 것이다. ㄴ. 國有地 紛爭 國有地에 있어서의 분쟁은, 명백히 농민이 대대로 농토를 개간 경작하여 온 것인데도 불구하고 농민의 無知와 無力을 기화로 국 유지에 편입되고만 경우가 많았다. 帝室財產을 정리할 때에도 宮內部 소관 및 慶善宮 소속의 부동산은 文簿가 闕如하는 所在 가 명확하지 않은 것 또 帝室財產은 원래 原簿를 설비함이 없 으므로 秋租成册에 기재된 이외의 土地家屋 등은 모두 證據不備 로 국유지에 편입되었던 것인데5) 그 중에는 농민지의 投託地, 농 민의 개간지, 導掌의 소유지가 태반이었고 이것이 농민 또는 導掌 의 증거미비로 국유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投託地에서는 투탁 임을 명기한 문서를 지닌 자에 한하여 還給키로 하였으므로 엄연 히 투탁지이면서 증거 불비로 패소되고 국유지로 편입된 토지 및 蘆田은 약 2만 5,800여 町步이고, 山林原野는 약 1만 9, 400町步, 家舍 약 190戶, 地宅 약 50町步이고 本宅에 돌아간 것은 겨우 610 여町步에 불과하였다.6) 驛屯土 牧場土 등에는 驛卒 軍卒에 의하여 개간된 토지도 있 었으나 분명히 백성이 개간 경작하고 있던 토지가 驛屯土로 편입 5) 度支部編 韓國財政施設綱耍 pp ) 前揭 韓國財政施設綱要 pp
63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런 것은 무조건 국유지로 편입되므로 써 농민의 土地喪失을 초래케 한 일이 많았다. 또한 森林 原野 火田 堤堰 등에 농민이 대대로 개간 경작한 토지가 많았으나 농민은 아무 文證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인해 서 모두 국유지에 편입되고 말았다 위와 같이 土地調査事業에서는 형식을 치중하고 사실을 무시함 으로써 농민소유의 토지가 부당하게 국유지로 넘어간 것이 많아, 다수의 경작농민들은 억울한 처지를 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국유지내에서의 소유권분쟁에서는 거의 백성에게 불리하게 해 결되었다. 경작자들은 日帝의 憲兵統治 밑에서 실시된 이 土地調 査事業에 항거할 수 없었고 또 항거한다 해도 형식주의를 표방한 이 조사에서는 반증할만한 文證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慣習耕 作民으로서는 證據의 자료를 제시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1912년 4월 26일, 朝鮮總督은 각 道長官에 공문을 보내어 土地 調查事業과 관련하여 農民取締에 만전을 기하라고 다음과 같이 시달한 바 있다. 근래 國有地編入, 小作料徵收, 漁業權의 許可 및 土地權利關 係 등에 관하여 地方民이 紛擾를 일으켜 다수 집합하여 관청에 請 願을 하며 심한 것은 多額의 비용을 써서 이로 인하여 部落의 疲 弊를 초래하는 것이 적지 않다. 그 대부분은 하등 정당한 이유 있 는 것이 아니고 몇몇 故意로 선동하는 자의 선동에 기인하는 것이 많다. 이들에 대해서는 경찰에서 상당히 取締하고 있지만 地方官 에서도 항상 주의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경찰에 명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일을 未然에 방지할 것을 期하라. 7) 백성들에 의하여 제기된 國有地紛爭은 위와 같이 官의 억압으 7) 1912年 4月 22日附 朝鮮總督이 各道長官에게 대한 指示文
64 2. 日帝의 經濟政策 로 미연에 방지되었던 것이니 정당한 주장도 하지 못한 건수가 이 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訴訟을 하였다 하여도 항상 불리한 판결을 받는 쪽은 백성들이었다. 1918년 土地調查事業이 완료되었을 때에는 朝鮮總督府는 전체 농경지의 약 10%에 해당하는 35만 7천여 町步에 달하는 耕地와, 전체 임야의 약 60%에 달하는 926만町步의 임야를 국유지라는 명목으로 그 소유로 편입시켰던 것이다. 4) 土地調査事業의 結果 소위 土地調查事業이 우리나라의 농촌경제의 근대적 발전에 어 떠한 결과를 가져 왔을까? 日帝는 종래의 封建的 지배층을 토지소유자로 등장시킴으로써 不在地主를 만들어 내었다. 이들 지주계급으로 轉身한 舊兩班官 僚들은 전농가호수의 3.4%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전국 농 지의 50.3%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지주들은 都市에 거 주하는 不在地主로서 토지는 종전과 같이 봉건적인 소작경영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반면에 世世孫孫으로 土地를 사실상 경 작하고 있던 세습적 경작인은 이제 토지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상실하게 되고 단순한 契約小作人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소작인은 전체농가 戶數의 37.6%이었다. 그런데 이 숫자는 토지 소유가 완전히 배제된 사람의 수를 표시하는 것이며, 약간의 농 지를 가지게 되었으나 그것이 自家經濟를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적은 면적이므로 小作地를 부쳐먹게 된 소작농은 39.3%나 되었 으므로 이들을 합치면 零細農의 수는 전체 농가호수의 76.9%나 되었다.8) 8) 細川嘉六 植民史 p
65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帝室財產에 속하고 있던 토지는 그 일부만은 李王家財產으로 남겨 놓고 그 대부분과 驛屯土 森林 原野는 국유지로 편입되었 다가 다시 불하의 형식으로 日人會社 및 日人農場에 넘어갔다. 1926년 東洋拓殖會社가 소유하게 된 토지 및 산림은 9만 3,390 町 步에 달하였다.9) 東拓 이외에도 富士 興業 片倉 東山 藤 井 등 日人大農場이 소유하게 된 토지는 막대한 면적에 달했다.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시키는 일련의 작업은 소작인에게 신 분적인 자유는 부여 하였으나, 한편 소작인은 토지를 떠나서는 生 計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경제적으로는 다시 지주에게 예속되고 말았다. 朝鮮王朝時代에는 농민은 토지에 대하여 세습적으로 경작 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지주의 의향 여하에 따라 언제든지 토지로부터 쫓겨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소작인 은 지주에게 현물 소작료를 지불하였고 小作關係를 지속시키기 위하여 名節에는 獻物을 바치고 때로는 지주의 요청에 의하여 노 동제공도 거절할 처지가 못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근대적 공업이 충분히 발달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에게는 토지가 유일한 生計源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는 일 방적으로 소작인에게 불리한 여건을 조성해냈다. 土地調查事業이 끝난 다음의 우리나라 농가의 1戶當 평균 경작 면적은 畓 0.575町步, 田 1.095町步, 합계 1.670町步에 불과하였 다. 당시 畓 1段步의 평균생산량을 보면 0.932石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아직 大家族制度가 완전히 분해되지 못한 우리나라의 실 정에 비추어 보면, 이 면적으로는 1戶當 가족부양은 도저히 해결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앞에서도 말했듯이 당시 우리나라 에서는 이들 인구를 흡수할만한 근대공업도 발달하지 못했으니 9) 東洋拓殖會社 二十年誌(1928) p
66 2. 日帝의 經濟政策 농촌경제는 더욱 궁핍에 빠지고 自作農은 小作農으로 또 雇農으 로 전락해가는 道程을 밟아 갔던 것이다. 한편 土地調査事業은 우리나라 농가구조에 지역적인 偏差를 조 성해 놓았다. 그것은 西北方과 南方에 있어서 자작농과 소작농의 비율이 달라진 것을 의미한다. 西北韓에서는 대체로 자작농이 우 세했고, 南韓에서는 소작농이 지배적이 되었다. 이와 같은 편차가 생기게 된 원인은 역사적인 토지관계에서 연유된 것이다. 朝鮮王 朝에 있어서는, 科田 功臣田은 왕의 거주지인 隣近縣에서만 還給 하고, 兩班階級은 그 근거가 京畿 이남 지역에 많았기 때문에 이 지역에 收租權이 介在되지 않은 토지는 거의 볼 수가 없었던 것이 다. 그러나 京畿 이북은 양반계급이 적었고 토지는 驛屯土 이외는 별로 收租權者가 사이에 끼이는 일이 적었던 것이다. 그런데 토지 조사사업에서 地主를 판정하는 데에 있어서는 收租權介在地에서 는 收租權者에게 소유권이 주어졌고 수조권자가 개재하지 않은 토지는 경작자로 하여금 토지소유권을 인정받게 조처된 것이다. 토지조사사업 후 토지소유권자 구성에서 지역적인 편차가 생긴 것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朝鮮總督府가 실시한 土地調查事業은 토지에 대한 근대적인 소유제도를 확립시켰으나 토지의 경영관계 에 있어서는 하등의 근대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을 터놓지 않았다. 1920년대 이후의 유랑농민의 격증은 그 결과라고 하겠다. (2) 會社令의 發布와 1910年代 韓國의 企業 1) 會社令의 內容 1910년 12월 29일 朝鮮總督府는 朝鮮會社令을 公布하고
67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년 1월 1일을 기하여 실시하기로 하였다. 앞에서 논급한 바와 같 이 이 會社令의 發布는 韓國을 日本資本主義에 대한 원료생산지 와 상품시장으로 육성한다는 고전적인 식민지이론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朝鮮會社令은 전 20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제1조에서 제15조까 지는 本文이고 제16조에서 제20조까지는 附則인데 그 주요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제1조에는 會社의 설립은 朝鮮總督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고 하여 회사설립에 있어서 許可制를 채택하였다. 朝鮮會社令을 논할 때에 항상 이 許可制 규정이 문제가 되었다. ② 제2조에서는 韓國外에 설립한 회사가 韓國에 本店이나 支店 을 설립하고자 할 때에는 朝鮮總督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고 하였 다. 이 조문은 일본에서 설립된 회사가 韓國에 진출하고자 할 경 우를 예상하고 설정된 것으로 그럴 때에도 朝鮮總督의 허가가 필 요하다는 것이다. ③ 제3조에서는 韓國外에 설립한 회사로서 韓國에서 營業함을 주목적으로 할 때에는 韓國에 本店 또는 支店을 설립해야 한다고 정했다. ④ 제4조에서는 위의 규정에 따라 허가를 얻은 후, 1년 이내에 회사가 성립되지 않을 때에는 그 허가는 효력을 잃고 만다는 것이 다. ⑤ 제5조에서는 이 會社令 및 이에 근거하여 발하는 명령의 조 건에 위반할 때 또는 선량한 풍속을 위반하는 행위가 있을 때에는 사업을 정지 또는 금지하고 그 회사의 폐쇄 또는 해산을 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⑥ 제6조 및 제7조는 부실한 신고로 허가를 받은 회사는 그 허
68 2. 日帝의 經濟政策 가를 취소할 수 있다는 것이며, 제8조는 허가취소시의 청산에 관 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⑦ 제9조, 제10조 및 제11조는 회사의 성격을 규정하였다. 營 利를 할 목적으로 하는 社團法人은 모두 회사로 간주하며 회사가 아닌 것은 그 명칭에 會社 의 문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규정은 舊韓末에 설립된 수많은 회사들이 그 명칭이나 성격 이 분명치 않은 것이 있으므로 이를 정비하자는 것이었다. ⑧ 제12조, 제13조 및 제14조는 罰則을 규정한 것이다. 즉 허 가 없이 회사를 경영 하는 자는 5년 이하의 體刑이나 5천圓 이하 의 벌금을 課한다는 것이다. ⑨ 제15조는 本令에 정한 외에 필요한 사항은 朝鮮總督이 이를 정한다고 규정했고, ⑩ 제16조는 附則으로서 會社令의 시행 일자를 정했으며, ⑪ 제17조에서 제20조까지에는 경과규정을 설정하였다. 즉 舊 韓國政府의 면허를 받고 사업을 계속하여 영위하고 있는 회사는 새로운 會社令에 의하여 설립된 것으로 간주하고 단 그 회사가 商 法(日本商法)이 정하는 회사의 어떤 종류에도 적합하지 않는 것 은 가장 유사한 회사에 관한 규정을 準用하게 하였다. 이것은 韓 國人설립의 민족계 회사를 대상으로 그 처리를 규정한 것으로 보 여지며 한편으로는 會社令 시행 전에 日本商法에 의하여 韓國에 서 설립된 회사는, 本令에 의하여 설립한 것으로 본다는 조문은 이미 韓國에 진출한 日本人會社에 대한 처리를 위한 便法이기도 하였다. 이 朝鮮會社令의 핵심적인 골자는 韓國內의 모든 회사는 朝鮮 總督의 허가를 받아야 설립되고, 설립된 후에도 회사의 운영에 있 어서는 朝鮮總督의 엄중한 감독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69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위에서도 본 바와 같이 이 會社令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주 고 있는 것은 會社設立에 있어서 許可主義를 채택한 점이다. 日本 의 商法에 의하면 회사설립은 届出主義를 채택하고 있는데 어째 서 韓國에서는 許可主義를 채택하였고 또 朝鮮總督府의 강력한 統制權을 인정했을까? 會社令을 제정 공포한 朝鮮總督府는 아래와 같이 그 이유를 설 명하고 있다. 古來 朝鮮人은 대체로 法律 및 經濟上의 지식이 부족하고 복잡한 會社組織의 사업을 경영할 수 있는 자가 적고 또 사업의 前途에 대해서도 判斷明確을 缺하고 往往 狡猾한 자의 甘 言에 유혹되어 不意의 損을 받을 위험이 있다. 또 內地(日本) 자 본가로서는 朝鮮의 실정에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 적절한 사 업에 放資하고 또는 或 유리한 사업에 경쟁투자하는 등으로 예측 치 못한 손해를 보게 되는 일이 없다고 보장할 수 없다. 이러한 투자자의 손해는 나아가서 朝鮮產業一般의 발전을 沮害함에 이를 것이므로 이를 미 연에 방지하고 周到한 注意監督을 가하여 朝鮮 產業의 건전한 발달을 기할 필요를 인정하고 朝鮮內에 있어 서의 회사설립 및 朝鮮外에서 설립된 회사가 朝鮮에 本店 또는 支 店을 설치함에 관해서는 당분간 許可主義를 채택하기로 했다. 10) 이러한 朝鮮總督府 의 이유설명은 口實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면 왜 日帝는 韓國에 會社令을 實施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까? 그것은 당시 日本資本主義 의 성장단계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1910년대, 日本에 있어서의 자본주의는 成熟段階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었고 따라서 일본국내의 공업화가 시급히 요청되고 있 는 시기였다. 日本은 淸 日, 露 日兩戰爭을 계기로 공업화의 초 10) 朝鮮總督府 族政二十五年史(1935) pp
70 2. 日帝의 經濟政策 기단계에 돌입하였고 1910년대는 그 跳躍의 후반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시기에 韓國이 日本資本家에게 개방된다면 日本國內資本 은 植民地의 高率利潤을 쫓아 韓國으로 대량유출될 것이며 결과 적으로 日本內의 공업화는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日本은 朝鮮總督府로 하여금 施政 제1차 작업 으로서 日本國內 자본이 韓國內 工業建設을 목적하고 流入되는 것을 통제하는 정책을 채택하게 한 것이다. 한편 韓國에 있어서 民族系資本에 의한 近代企業의 건설이 눈 에 띄게 나타난 것은 1890년대부터이었다. 후로 차츰 교육의 확 대와 사회의 개발로 民族資本이 서서히나마 성장하고 있었다. 이 에 대하여 朝鮮總督府는 韓日合併 이후 土地調查事業을 실시함에 있어서 土地資本의 貨幣資本으로의 轉換이 가능하게 되면 우리 民族資本이 近代企業에로의 성장이 빨라질 것을 우려하였다. 위와 같이 朝鮮總督府는 會社令에서 許可主義를 채택함으로써 한편으로는 日本國內資本의 韓國流入을 견제하고 다른 한편으로 는 우리의 民族資本의 산업진출을 억제하는 효과를 얻으려고 하 였던 것이었다. 日本의 자본주의는 1910년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유리한 여건을 이용하여 日本의 공업화는 일단 정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1910년대 말기에 접어들 면서는 日本의 자본은 해외자본화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게 되었 다. 1920년에 朝鮮總督府가 朝鮮會社令을 철폐한 것은 이렇게 日 本資本主義가 그 나름으로 상당한 수준에까지 이른 다음의 결과 인 것이다. 2) 1910年代 韓國의 企業
71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1910년 이후 10년간에 韓國에 설립된 회사는 商事會社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併合 전 統監府시대에 보여준 기업인의 관 심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會社令의 실시로 특징지워지 는 이 시기의 韓國經濟의 양상이었다. 韓日併合 이후 크게 달라진 것은 급격히 증가한 日本人의 진출 과 韓日貿易額의 확대를 들 수 있다. 日人의 韓國진출은 병합 전 인 1909년에 14만 7천여 명이었으나 1910년에는 17만 1천여 명 으로 되었고 10년 후인 1920년 말 현재로는 34만 7천 여명으로 늘어났다.11) 또 두 지역 사이의 무역은 1910년 말 현재 수출입 총액이 4,072만 6천여 원에서 1920년 말 현재로는 3억 1,749만 1천여 원으로 8배 가까이 증가되었던 것이다.12) 이와 같이 併合 후 日本人의 대량진출과 韓日貿易이 확대됨에 따라 朝鮮總督府는 도로 철도 항만시설을 확장함으로써 日本 경제진출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러한 일본 경제진출 을 위한 기초시설은 統監府시대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그 본격적 인 건설은 병합 후에 있었던 것이다. 統監府시대에 統監은 日本으 로부터의 소위 產業金融債 도입을 韓國政府에 강요하여 이로써 도시정리 항만시설을 확충케한 바 있었다. 병합 후 본격화된 기 초시설의 건설을 위한 재원은 朝鮮總督府가 租稅負擔의 가중과 토지 조사사업에서 남은 국유지 불하대금으로 충당하였다. 1910년대에 日帝에 의한 소수의 國策會社가 설립된 이외에는 민간회사의 신규설립은 보잘 것이 없었다. 韓曰併合 후 10여년 간의 기업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하여 다음 표를 보자. 11) 朝鮮總督府編 朝鮮總督府統計年報 各年度版 參照 12) 前揭 朝鮮總督府統計年報 參照
72 2. 日帝의 經濟政策 韓國內 企業會社表 對全體社數 拂入資本金 (千圓) 對全體拂入 金(%) 業種 社數 農 林 水 産 業 鑛 業 製 造 業 電氣 및 瓦斯業 金融業 運輸業 其 他 商 業 計 ,972 7,064 19,758 5, , , (%) 資料 : 朝鮮工業協會 會報 1931년 第7號, p.6에서 作成 위 표에서 우리는 朝鮮總督府가 1910년대에 어떠한 산업부문 에 주력하였고 기업인들이 어떠한 산업부문에 관심하고 투자했는 가를 추측할 수가 있다. 이 표에 의하면, 1921년 현재 韓國에 설립되어 있는 企業會社는 728社였고 총불 입자본은 1억 9,959만 8천圓이었다. 그 중 농림 수산업은 77社에 불입 자본금 2,097만 2천원이고, 광업 은 8社에 706만 4천원, 제 조업은 161社에 1,975만 9천원, 電氣 및 瓦斯業은 19社에 563만 8천 원, 금융 운수업 기타 상업을 합한 商事會社는 463社에 1억 4,615만 7천원이다. 이와 같이 이 시기에 설립되어 있는 기업회사 의 절대다수는 금융업을 포함한 상업관계회사로서 전체 회사에 대 하여 회사수의 63.6%, 불입자본금의 73 1%를 차지한다. 그 다 음 제조업 부문은 회사수에 있어서 22.1%로서 2위를 차지하나 불 입자본금에 있어서는 겨우 9.9%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로 농림 수산업은 회사수는 10.6%, 불입자본금은 10.4%로서 자본규 모에서는 2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이 통계표가 분명히 제시하여 주는 사실은 당시 韓國은 日本 경제에 대하여 상품시장이고 원료 생산지에 불과했다는 점이며 이것은 바로 併合과 더불어 日帝가
73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표명한 朝鮮統治의 기본지침과 부합되는 것으로 會社令의 실시와 연관지어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설립된 회사를 國籍別로 보면 1920년 말 현재 총 544社(1921년 말 현재로는 728社) 중 日本人 소유회사는 414社로서 전체 회사수의 76.1%이고, 불입자본금의 비율은 83 1%를 차지한다. 韓國人 회사는 99社로서 전체의 18.2%이고 불 입자본금 비율은 겨우 10.5%에 불과하였다. 그 밖의 31社는 韓日 合同會社 및 외국인 회사이다.13) 이것은 會社令 발포 이후, 회사 설립에 있어서 日本人이 보다 유리하고 韓國人의 경우에는 매우 어려웠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민족계 자본의 세력이 미약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시기에 설립된 대규모 회 사의 거의가 日人 회사였고 韓國人 회사로는 京城紡織會社와 약 간의 은행이 있을 뿐이었다. 이 시기의 공업실태를 綿織工業의 예를 들어 살펴보자. 日本製 綿織物이 韓國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부터 이나 대량으로 수입되어 韓國市場을 독점한 것은 1905년경부터이 었다. 일본제 면직물의 수입액은 년까지는 매년 400 만원에서 500만원대였고 1904년에는 700만원대로 올랐고 1905 년 이후 1,000만원대를 상회하였다. 京城紡織이 창립되기 이전인 1917년경에는 그 수입액이 연 4,000만원대에 이르렀다.14) 日本의 綿織業이 韓國의 棉花에 착안한 것은 統監府 설치 이후 였다. 日人의 繰棉工場이 木浦에 설립된 것이 이때이며 韓日併合 이후 1913년에는 朝鮮棉花會社가 설립되어 木浦와 裡里에 繰棉工 場을 건립하였고, 1919년에는 三井系의 東洋棉花株式會社가 韓國 13)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32) p ) 朝鮮總督府統計年報 參照
74 2. 日帝의 經濟政策 에 진출하여 南北棉業株式會社를 설립하고 棉花栽培와 繰棉工場 을 건설하였다. 韓國의 棉花는 일단 繰棉工程을 거쳐 日本으로 수 출되어 그 곳 공장에서 紡織되어 다시 韓國市場에 수입되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韓國에서 가공된 繰棉이 日本으로 수출된 금 액은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매년 격증하고 있었다. 韓國產 繰棉의 輸出額年次比較表 年度 繰棉輸出額(圓) 224, , , ,429 1,098,728 年度 繰棉輸出額(圓) ,157,663 1,749,666 4,227,817 6,141,088 8,164, , 1925年度版에서 作成 資料 :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17년 11월에는 日人系 朝鮮紡織會社가 釜山에 설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명한 京城紡織會社가 出帆하였다. 京紡은 金性 洙가 설립한 민족의 회사였다. 이 회사는 민족의 기대 속에서 발 족되었고 민족의 후원으로 육성되었다. 이 밖에 민족계 방직업 부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군소기업인들 의 활동이었다. 이들은 先代로부터 전래하여 온 수공업적 綿織業 에 종사하던 사람들로서 西歐의 공장제품이 대량으로 流入됨에 이르러 개량식 綿織機를 도입하여 영세기업이기는 하나 공장을 건설하고 근대식 綿織業으로 전환을 기도한 一群의 기업인들이었 다. 서울 長沙洞 일대의 綿織工業이나 平壤 鷄里 일대의 양말 메 리야스 공업 등이 그 두드러진 예이다. 서울 長沙洞의 金德昌工場은 전래의 綿織工業이었으나 꾸준히 성장을 거듭하여 1921년에는 東洋綿織會社로 발전하였다. 이 밖 에 浪大鎬의 染織工場, 盧洪錫의 織布工場, 崔奎翼의 綿織工場 등
75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당시 서울에는 이러한 영세규모의 면직공장이 30여 개소가 있었 다고 한다.15) 1911년에 자본금 10만원으로 설립된 京城織紐會社는 光熙洞 일대의 織布業者들이 자본을 모아 설립한 면직회사로서 그 당시 의 민족계 織造工場으로는 가장 규모가 큰 공장이었다. 다음 표는 釜山 朝鮮紡織會社와 永登浦의 京城勒織會社가 설립되기 이전의 韓國의 綿織業의 실태를 보여준다. 綿紡織工場의 實態 業種 工場數 資本金 (圓) 從業員數 (名) (1916년말 현재) 動力 機關力 馬力 生産額 (圓) 染 織 業 日本人 韓國人 計 15 99,750 2, , ,390 1, , ,140 3, ,514 製 綿 業 日本人 韓國人 計 19 6,752,229 2, ,073, , ,767,229 2,285 資料 : 朝鮮總督府 統計年報 1917년(大正 6) , ,173, 년말 현재 韓國의 染織工場은 83개소, 자본금 총액은 32 만 1,140원 연간 생산액 62만 9,514원이며, 이것을 공장당으로 보면 평균자본금은 3,869원이고, 연간 평 균 생산액은 7,584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중에 日本人 소유 공장은 15개소, 자본금 총액 은 9만 9,750원으로서 공장당 평균 자본액이 6,650원이며 韓國人 소유 공장은 68개소, 자본금 총액은 22만 1,390원으로서 공장당 겨우 3,256원이 된다. 韓國人 공장 중에는 자본금 10만원으로 설 립된 京城織紐株式會社와 자본금 4만원으로 설립된 金德昌織布工 15) 京城商工會議所月報 4號(1916) p.45 이하
76 2. 日帝의 經濟政策 場이 포함되는 것이니 이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공장들은 평균 자 본금 1,000원 정도에 불과한 영세성을 지니고 있었다. 製綿工業은 1916년말 현재, 21개소, 자본금 676만 7,229원, 연 간 생산액은 617만 3,173원으로서 공장당 평균자본액은 32만 2,249원이 된다. 그 중 韓國人 소유의 製綿工場은 2개소로서 자본 금 총액은 1만 5천원이니 공장당 자본금은 7,500원에 불과하다. 즉 韓國人 기업가는 製綿工業에는 별로 손을 대지 못했고 日本人 기업인은 織布 보다는 수출용 製綿業에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 다. 日本은 1차 세계대전까지는 韓國產 棉花를 수입해다가 日本에 서 紡績織布하여 다시 韓國에 수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併合 후 韓國에 건립된 기업회사의 실태를 고 찰하여 이 시기의 민족계 회사는 日人系회사에 비하여 劣勢이었 음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會社令의 발포와 민족자본의 영세성에 서 말미암았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다음에는 韓日併合 후에 설립된 製造工業의 일반적인 실태를 고찰하여 보자. 韓國內 工場業種別 一覽表 業種 經營者國籍 製綿染織業 日 本 人 韓 國 人 計 日 本 人 韓 國 人 計 日 本 人 韓 國 人 計 製 紙 業 皮 革 業 工場數 (1917년말 현재) 資本金(圓) 生産額(圓) 6,894, ,390 7,131,379 15,000 15,886 30,886 1,991,036 52,900 2,043,936 6,360, ,073 7,012,412 14,516 58,022 72,538 3,531, ,139 3,760,802
77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窯 業 비누染料등 製 造 業 金屬細工業 製材木工業 製粉精米業 煙草製造業 釀 造 業 製氷 製鹽 淸凉飮料水 등 印 刷 業 製 鐵 業 電氣 瓦斯業 日 本 人 韓 國 人 計 日 本 人 , , , , , , , ,627 日 本 人 韓 國 人 計 日 本 人 韓 國 人 計 日 本 人 韓 國 人 計 日 本 人 韓 國 人 計 日 本 人 韓 國 人 其他外國人 計 日 本 人 , , , ,010 33, ,927 4,082, ,920 4,629,826 2,214, ,880 2,426,293 1,968, ,000 23,000 2,092, ,281 1,590, ,695 1,969,424 1,344,906 80,529 1,425,435 41,685,923 5,859,653 47,545,576 6,016, ,627 6,555,959 1,835,318 97,216 53,363 1,985,897 1,321,951 日 本 人 韓 國 人 計 日 本 人 韓 國 人 其他外國人 計 日 本 人 韓 國 人 其他外國人 計 , , ,075 8,832,555 15,000 2,207,582 11,055,137 4,402, , ,000 5,637,281 1,400,014 65,546 1,465,560 14,801,381 10,330 5,975,230 20,786,941 2,176, ,769 14,442 2,325,
78 2. 日帝의 經濟政策 其 他 工 業 總 資料 : 計 日 本 人 韓 國 人 其他外國人 計 , ,320 5,000 1,036, , ,073 2, ,289 日 本 人 韓 國 人 其他外國人 計 ,358 33,660,358 2,292,526 3,086,082 39,038,966 84,401,585 8,520,522 6,050,080 98,972,187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17년 pp 이 表에서는 官營工業은 제외, 1일 평균 5인 이상의 職工을 사용하는 工場 또는 原動力을 사용하는 工場 및 1년 생산액 5,000圓 이상의 工 場을 收錄 위 표는 1917년말 현재 韓國에 있던 공장을 업종별, 경영주의 국적별 그리고 자본규모를 표시한 것이다. 이때의 우리나라 전체 의 공장수는 1,358개소인데, 이를 경영주의 국적별로 보면 日本人 소유공장이 736개소로서 가장 많고 韓國人 소유공장은 609개소 이며 기타 외국인 소유공장이 13개소이다. 日本人은 군소공업에 서도 韓國人을 능가하고 있었다. 이 공장들을 업종별로 나누어 보 면 製綿, 染織業, 製紙業, 皮革業, 窯業과 금속세공업 부문에서는 韓國人 경영의 공장이 많은데 이 부문은 韓國의 전통적인 수공업 분야로서 在來式 공장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비누, 染料工場, 製材木工業, 製粉業, 煙草製造業, 電氣 瓦斯業, 釀 造業, 製鹽業, 印刷業, 製鐵業 등 공업부문에서는 日本人 소유공장 이 단연 많다. 이러한 공장은 韓國의 전통적인 공업분야가 아니거 나 또는 비교적 많은 자본이 들어가는 공업이었기 때문에 영세한 민족자본으로서는 건립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공장의 자본규모를 보면 한 공장당 평균자본액이 2 만 8천여 원으로서 전반적으로 群小工場이었다. 그 중에는 電氣瓦
79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斯業, 製鐵 製鍊業, 製綿業, 煙草製造業 등 대자본이 소요되는 공 장이 90여 개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나머지 공장의 평균자본액은 더욱 적어진다. 공장의 평균 자본액은 日本人 소유 공장 1만 6천여 원이고 韓國人 소유공장은 3천여 원으로서 민족 계 공장은 수공업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영세공장이 그 대부분 이었던 것이다. (3) 東洋拓殖會社의 設立과 運營 1) 東洋拓殖會社의 設立 日帝의 경제침략, 특히 농민수탈의 총본산은 역시 東洋拓殖株式 會社였다. 東拓은 韓國내에 營業基盤을 갖는 日本 國策會社로 발 족하였는데 그 창립부터가 특이한 경로를 밟고 있었다. 이 회사는 일반회사법에 의하여 설립된 것이 아니라 東洋拓殖會社法이 란 특수법이 韓日兩國에서 제정 공포됨으로써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이 회사는 日本國籍의 회사인 동시에 韓國 국적을 갖는 2중국적 회사로 발족한 것이다. 日本은 1908년 3월 의회에서 東洋拓殖會社法 을 통과시켰 고, 이어서 日帝統監府는 이 법안을 韓國政府에 강요하여 그 해 8 월 26일에 국왕의 재가를 얻어 이튿날 8월 27일에 공포하였다.16) 이 법률에 의거하여 그 해 12월 28일에 韓日 合作會社로서 東洋 拓殖會社가 창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 회사 설립 준비의 일환으로 1908년 9월에 韓日兩國政府로 부터 116명의 창립위원이 임명되었고 그 중 日本측 위원은 83명 韓國측 위원은 33명이었으며 설립위원장에는 日人 正親町實正이 16) 東洋拓殖會社 30年誌(1939) p.1 承政院日記 隆熙 2年 8月 26日. 奏議
80 2. 日帝의 經濟政策 선임되었다. 일본측 위원에는 日本 大藏省 內務省 法務省 農商 務省 陸軍省 등으로부터 일본 고위관리와 韓國駐在의 日人 統監 府 직원들이 임명되었으며 韓國측에서는 漢城에 거주하는 금융계 인사 및 귀족(趙鎭泰 白完爀 韓相龍 李根培 등) 7명과 지방에 서는 각 도에서 地主 2명씩 임명되어 모두 33명이 참여하였다.17) 그러나 韓國側 위원의 참가는 다만 형식에 불과했고 日人들 손에 의하여 설립에 관한 제반사항이 결정되었다. 이는 이 회사의 設立 準備事務所를 일본 東京에 설치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겠다. 東洋拓殖會社 창립목적에 대하여, 同會社 30年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明治 39년(1906) 11월 및 翌年 7월에 체결된 양국의 협정에 의하여 我國(日本)은 정치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면 에서도 이를 指導誘掖하여 殖產興業의 방도를 열어 富源을 개척 하고 民力의 함양을 도모하며 韓國民으로 하여금 문명의 혜택을 입게 하는 중책을 걸머지게 되었다. 양국정부는 이에 뜻하는 바가 있어 韓國에서 拓殖事業을 영위함을 목적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日本政府는 이에 일정기간 상당액의 補給을 시행하고 韓國 政府 는 事業用地의 일부를 제공하기 위하여 國有地를 출자함으로써 同國이 資源開發 殖產振與을 담당케 하며 我國(日本)으로부터 善 良 勤勉하고 경험이 풍부한 농민을 移殖하고 진보된 農法을 시범 함과 동시에 기업가에 대해서도 低利한 자금을 공급하여 殖產事 業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이것이 本社 創立의 根源인 것이다 18) 하고 하였으나 이러한 취지를 내걸고 창립되는 東洋拓殖會社에 대하여 韓日 양국정부 및 국민들은 相反된 반응을 나타내었다. 日 17) 東洋拓殖會社 30年誌 pp ) 東洋拓殖會社 30年誌 pp
81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本측에서는 회사설립을 열렬히 환영하고 나섰으나 韓國측에서는 오히려 깊은 우려를 나타내면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東拓의 창립자본금은 1천만 원으로 정하였고 이를 20만株(1株 50圓)로 나누었으며 그 중 6만주는 韓國政府로 하여금 토지로서 투자하기로 했고 나머지 14만주 중 日本 王室이 5천주, 王族이 1 천주를 우선적으로 인수하고 韓國 王室이 1,700주를 인수하도록 했으며 잔여 14만 2,300주를 日本 및 韓國에서 일반에게 公募키 로 했던 것이다. 19) 이 東拓創立株에 대한 일본 국내의 인기는 거의 狂的이어서 應 募株數는 公募株數의 35배에 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東拓創立株에 대하여 지극히 냉담하였고 응모주수는 전체공모 주수의 겨우 1.9%에 불과하였다. 그 東拓創立株에 대한 일본 각 지와 한국내의 응모실태를 보면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大阪 京 都 東京 名古屋 등 日本 4대도시에서 전체응모수의 73%를 차 지하여 높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大阪에서는 47.6%를 나타내고 있어 東拓에 대한 大阪實業界의 관심이 대단함을 나타내었다. 東拓創立株 日本各地 및 韓國內 應募實況 地 方 東 京 大 名 古 日 本 各 韓 計 別 京 都 阪 屋 地 國 應 募 株 數 總株數에 대한 應募比率 390, , ,220, , ,162, , ,665, 資料 : 東洋拓殖株式會社 30年誌 p ) 東洋拓殖株式會社 30年誌 p
82 2. 日帝의 經濟政策 日本 국내에서는 이와 같이 인기가 높았던 東拓創立株가 韓國 에서는 응모자가 극소에 불과했던 것은 이 회사가 韓國植民地化 를 목적하고 설립되었기 때문에 창립 자체부터가 韓國人의 호감 을 받지 못하였고 한편 이후로 이 회사가 어떻게 운영될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東洋拓殖株式會社 설립에 대하여 韓國의 여론은 대단히 좋지 못하였다. 이 회사의 창립에 대하여 일본 국내에서는 이미 년경부터 논의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당시 皇城新 聞은 1907년 10월에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日本의 東洋拓殖株式會社 設立에 관하여 今日까지 決定된 事 項은 다음과 같다. ① 總資本金 1천만원, ② 1株 50圓 辨納株數 20만株, ③ 제1회 辨納金 2백만圓으로 회사를 成立하고, ④ 株式은 韓日兩國에서 모 집하고 타국인은 소유함을 不得케 하고, ⑤ 자본금의 10배 즉 1억 圓을 한도로 한 債券發行의 權을 갖고, ⑥ 日本政府에서 1개년 30 만圓을 한하여 회사 성립일부터 15개년 보조하고, ⑦ 日本 內地의 농민을 다수 韓國에 이주케 하고 該耕地의 耕作未懇地의 개간, 鑛 山의 開堀, 森林業, 倉庫業의 經營, 土木工役의 請負와 기타 此에 ⑧ 별도로 金融部를 設하 고 토지를 典質하여 자금 융통의 편의를 얻고, ⑨ 總裁副總裁 부속한 각종사업을 경영함을 목적하고, 각 1명, 理事 수명을 두되 회사 성립 후에 總裁는 平田 東勘, 副總 裁는 小松原英太郞이 被任한다는데 南滿洲 鐵道會社 설립시와 같 이 貴衆兩議院議員 및 民間實業家로 설립위원을 任하고 소위 擧 國一致의 형성으로서 주주모집에 착수한다더라. 또 20) 一說에는 移民을 豫後備兵 중에서 모집하여 屯田制度로 20) 皇城新聞 隆熙 元年 10月 25日
83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拓殖할 방침인즉 군인출신 총재가 적당하다 하여 宇佐川 中將이 피임되리라고 한다. 21) 또 이 회사의 운영에 관해서는 당시 한국인들은 깊은 우려를 나 타내고 있었다. 皇城新聞은 이 법안이 日本國會를 통과했을 때에 아래와 같은 우려를 나타냈던 것이다. 歐洲諸國에서는 無恒產한 인민에게 강제로 노동케하는 제도 가 있고 日本이 臺灣에서도 土人의 무뢰한을 강제노동시켜 拓殖 事業에 이용하였는데 내부에서 該制度를 我國에 실시하면 양호한 결과를 얻을 것이라 하여 目下 위원을 임명 각국 제도와 日本 臺 灣의 실시효과를 조사 중이라더라. 22) 韓日 兩國 국민들로부터 환영과 냉담의 상반된 반응 속에서 탄 생한 東洋拓殖株式會社는 1909년 1월부터 서울에 本店을 두고 업 무를 시작하였다. 당시의 東洋拓殖會社의 운영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23) 總裁 宇佐川一正 理事 岩佐瑝藏林市藏井上季哉韓相龍 監事 松下直平野田卯太郞趙鎭泰 副總裁 吉原三郞 閔泳鎬 일찌기 皇城新聞에서 예상했던 대로 陸軍中將 宇佐川一正이 總 裁가 되었다. 그는 실제로 東拓을 운영할 실무자 80여 명을 日本 으로부터 대동하고 1909년 2월 초에 서울 本店에 취임하였다.24) 1908년 8월 27일, 韓日兩國에서 동시에 發布된 東洋拓殖株式 會社法의 내용은 어떠한가? 이 법은 6章 4條와 附則 6條로 구성 21) 皇城新聞 隆熙 2年 6月 26日 22) 皇域報聞 隆熙 2年 4月 26日 23) 東洋拓殖株式會社 30年誌 pp ) 北崎房太郞 東拓三十年の足跡(1938) p
84 2. 日帝의 經濟政策 되어 있다. 제1장은 總則이다. ① 東洋拓殖株式會社는 韓國에 있어서의 척식사업을 영위함을 목적으로 하는 주식회사로서 그 본점을 韓國에 둔다.(1조) ② 자본금은 1천만 원으로 하고, 정부의 인가를 얻어 이를 증가 하도록 한다.(2조) ③ 東洋拓殖株式會社의 주식은 記名式으로 하고 韓日兩國人에 한하여 그 주를 소유할 수 있다.(3조) ④ 이 회사의 존립 기한은 등기일로부터 100년으로 정하고 정 부의 인가를 얻어 연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5조) 그리고 이 회사 는 지점 또는 출장소를 東京 및 기타지역에 둔다고 규정하였다. 제2장은 役員規定이다. ⑤ 이 회사에는 總裁 1인, 副總裁 2인, 理事 4인 이상, 監事 3 인 이상을 둔다.(7조) 총재는 日人으로서 日本政府가 이를 임명하 고 부총재 2인중 1인은 日人으로 하고 1인은 韓國人으로 하되 각 각 그 정부에서 이를 임명한다. 이사 및 감사는 그 인원 중 적어 도 3분의 2는 日人으로 하되 나머지는 韓國人이 한다. 이사는 주 주총회에서 50주 이상을 소유한 주주 중에서 2배의 후보자를 뽑 게 하여 그 중에서 정부가 선택하여 임 명한다. 감사는 주주총회 에서 30주 이상의 소유주주 중에서 선거한다. ⑥ 총재부총재 및 이사의 임기는 5년으로 하고 감사의 임기 는 2년으로 한다.(9조) ⑦ 총재부총재 및 이사는 정부의 허가 없이는 타 직무 및 상 업에 종사할 수 없도록 규정한다.(10조) 제3장은 東洋拓殖株式會社의 영업범위를 규정하고 있다. ⑧ 이 회사의 영업범위는 농업, 척식상 필요한 토지의 매매 및
85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貸借, 척식상 필요한 토지의 경영 및 관리, 척식상 필요한 건축물 의 축조 매매 및 대차, 척식상 필요한 日韓移住民의 수집 및 분배, 이주민 및 韓國農業者에 대한 필요한 물품의 공급 및 그 생산 또 는 획득한 물품의 분배, 척식상 필요한 자금의 공급에 미치고 있 다.(11조) ⑨ 이 회사는 정부의 허가를 얻어 韓國에 있어서의 수산업 기타 척식상 필요한 附帶事業을 영위할 수 있다.(12조) ⑩ 資金供給에 대한 방법을 규정 하였다. 예를 들어 25년 이내 에 年賦償還方法에 의한 移住費의 대부, 15년 이내의 年賦償還方 法에 의한 부동산담보대부, 5년 및 3년 이내의 정기상환방법에 의 한 부동산담보대부, 기타 생산물품의 담보대부와 그 상환방법 등 을 규정하였다.(13조-20조) ⑪ 영업상의 여유금이 있을 때에는 일시 國債證券을 매입하거 나 또는 정부가 지정한 은행에 預置하며 그 밖에 隨意로 사용할 수 없고 영업상 필요한 때에는 정부의 인가를 얻어 자금의 借入을 할 수 있도록 한다.(21조-22조) 제4장은 東洋拓殖證券 발행을 규정하였다. ⑫ 東洋拓殖株式會社는 불입자금액의 10배에 한하여 東洋拓殖 債券을 발행할 수 있고 그 발행절차는 日本商法에 의거한다.(23 조-30조) 제5장은 準備金에 관한 조항이다. ⑬ 영업기에 자본의 결손을 보충하기 위하여 이익의 100분의 8 이상을 적립하고 이익배당의 평균을 기하기 위하여 이익의 100분 의 2 이상을 적립하여 이를 준비금으로 한다.(31조) 제6장은 정부의 감독 및 보조에 관한 조항이다. ⑭ 日本政府는 東洋拓殖株式會社 管理官을 두고 韓國政府가 임
86 2. 日帝의 經濟政策 명한 管理官과 공동으로 東洋拓殖株式會社의 업무를 감시시킨 다.(33조) ⑮ 정부는 감독상 필요한 명령을 발할 수 있다.(34조) ⑯ 이 회사의 결의 및 役員의 행위가 법령 또는 定款에 위반되 거나 또는 공익을 해한다고 인정할 때는 정부는 그 결의를 취소하 고 그 역원을 해직할 수 있다.(35조) ⑰ 이 회사는 정부의 인가를 얻지 않으면 이익금을 처분할 수 없으며 移住規則 그 밖의 규정을 정할 때에는 정부의 인가를 얻는 다.(37조-38조) ⑱ 정부는 이 회사에 대하여 설립등기일로부터 8년간에 한하여 매년 30만원을 매 영업기에 할당보급한다.(39조) 제7장은 罰則에 관한 규정이 고(41조-43조), 附則은 東洋拓殖 會社의 설립 절차에 관한 규정이다.(44조-49조) 이 法令에 따른 細則으로 東拓은 총 84조에 달하는 東洋拓殖株 式會社 定款을 제정하여 1908년 10월 8일에 정부의 인가를 얻었 다. 이 정관은 전 9장으로서 1장 總則, 2장 株式, 3장 株主總會, 4 장 役員, 5장 營業, 6장 東洋拓殖債券, 7장 管理費, 8장 計算, 9장 附則으로 짜여졌다. 2) 東洋拓殖會社의 土地所有와 農業移民 東洋拓殖會社는 설립하자 韓國政府로부터 출자분으로 토지 1만 7,714町步(畓 1만 2,523町步, 田 4,908町步, 雜種地 283町步)틀 인계 받았고 이어서 1913년까지 토지 4만 7,148町步(畓 3만 534町步, 田 1 만 2,563町步, 山林野 1,563町步, 雜種地 2,082町步)를 매입하였다.25) 東拓의 토지소유는 土地調查事業이 완료된 후 국유지 불하의 혜 25) 東洋拓殖株式會社 30年誌 pp
87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택을 받아 더 확대되어 1920년말 현재 東拓의 소유지는 9만 7천 여町步에 달하였다.26) 이 회사의 토지소유는 전국에 걸쳐 있었으 나 특히 全羅南北 黃海 忠南의 곡창지대에 집중되었다. 이와 같 은 東拓의 소유지는 일본으로부터 誘致되어온 日人 농업이민에게 양도되었으므로 東拓의 직영지 면적은 점차 감소되어갔으나 1937 년 현재 東拓이 직접 경영하고 있던 토지면적은 6만여 정보에 달 하고 있었다.27) 그리고 1920년 이후 東拓은 林野 경영에 주력하 여 국유지 불하의 혜택을 받아 막대한 면적의 山林地를 소유하게 되었으며 1942년 말 현재 韓國內에서 東拓이 소유한 임야는 16 만여 町步에 이르고 있었다.28) 東洋拓殖會社가 韓國에서 日人 농업이민사업을 시작한 것은 1910년부터이며 韓日合併 이후에는 매년 1천戶의 移植을 목표로 각종 특혜를 제공하면서 日本 각 지방으로부터 농업이민을 실시 하였다. 이 농업이민은 1912년의 3회 이민까지는 주로 南韓 곡창 지대에 한정시켰으나 그 이후로는 咸鏡北道를 제외한 전국 각지 에 17회에 걸쳐 9,096戶가 移植되었다. 東洋拓殖會社의 농업이민계획은 경제적인 목적보다 정치적인 목적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東拓은 日本의 國策會社로서 그들의 대륙침략의 一翼을 감당하기 위하여 설립된 것이며 따라서 이 이 민계획의 수행과정에 있어서도 日帝의 朝鮮經營을 충실하게 반영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본정부는 韓國의 주요도시 뿐만이 아니라 농촌에도 日人 촌락을 건설하여 韓國支配의 據點을 삼으려고 했 던 것이며 東拓의 농업이민계획은 이러한 일본정부의 정책 의도 26) 1920年度 朝鮮 銀行 會社 組合實錄(1921) 27) 東洋拓殖株式會社 30年誌 pp ) 年刊朝鮮 1942年度
88 2. 日帝의 經濟政策 를 실천하는 첩경이 되었다. 東拓이 농업 이민에 대하여 각종 특 혜를 주게 되었으므로 일본 농민들의 이민 희망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東拓은 이들을 무조건 받아들이지는 않았고 일본의 韓國 침략의 담당자가 될 만한 사람들을 嚴選하여 불러 들였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東拓의 이민 모집에 있어서는 募集戶數 보다는 應募戶數가 몇 배에 이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민을 승 인한 戶數는 항상 모집호수를 밑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日本 政府가 韓國侵略의 요원으로서의 자격조건에 부합되는 이민을 선 출하는데 主眼點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日本 農業移民 募集應募承認戶數表 回期 募集年次 募集戶數 應募數戶 ,000 1, ,045 1, ,300 2,086 1, ,500 3,472 1, ,500 1,962 1, ,500 1, ,050 1, ,000 1, , , , 計 13,095 資料 : 東洋拓殖株式食社 30年誌 (1939) p ,832 承認戶數 160 9,036
89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東洋拓殖會社의 농업이민은 두 종류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第1 種은 2町步 이민이라 칭하여 移植된 농민이며 이들은 韓國에서 실제로 농업을 自耕하기로 되었고 第2種은 10町步 이민이라 하여 배당받은 토지의 일부는 自耕하고 나머지 일부는 韓國농민에 게 小作을 주고 경영하는 것이었다. 東拓이 韓國에 농업이민을 실시 해 본 결과 일본농민들은 한국농민과 어울려 自耕하려는 자는 별 로 없었다. 특히 韓國에서는 小作料가 높았으므로 그 2町步 이민 까지도 배당받은 토지를 小作을 주고 소작료를 취득하면서 다른 직업으로 轉業하는 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2년부터 는 2町步 移民인 1종 이민을 폐지하고 2종 이민의 10町步를 5町 步로 하여 2종 이민만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韓國에 온 日人 이민들은 실제로 농업을 自營하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였 고 그 대부분은 小作地主가 되었다. 東洋拓殖會社는 日本에서 오는 농업이민에게 배정하는 토지의 代金은 年利 7分, 25년 분할상환의 유리한 조건으로 제공하였고 到來하는 日人 농민들에게 기차비는 5할, 기선비는 3할로 할인해 주었고 영농자금으로 戶當 200원 내외, 토지복구 및 개량자 금조 로 호당 150원을 低利로 대부하였으며 재해 등 흉년을 당했을 때 에는 별도로 戶當 200원을 한도로 저리자금을 제공해 주었다. 이 와 같이 東拓은 日人 농업 이민에게 각종의 특전을 주어 그들의 정착을 보호 육성해 주었다. 이는 일본정부의 이민정책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며, 일본정부가 매년 30만원의 보조금을 이 회사에 지 급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東洋拓殖會社의 韓國에 대한 日人 移民은 1926년에 17회를 끝 으로 일단 매듭을 지었다. 이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일본정부가 韓國에 대하여 농업 이민정책을 더 이상 추진하지 않았고 東拓 자
90 2. 日帝의 經濟政策 체의 사업내용이 이때부터 크게 바뀌어진다는 사정에서 연유된 것이다. 韓國에 移住한 日人 농민이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배당받 은 토지를 小作을 주고 小作地主로 變身하면서 농촌을 떠났기 때 문에 일본정부가 당초에 계획하였던 한국농촌에 대한 日人 농민 촌락의 건설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192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日人의 韓國進出은 격증하였고 日人들이 우 리나라의 각 지방 구석구석에 침투하고 있었으므로 韓國支配의 거점으로서의 日人 촌락건설의 필요성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東拓을 통한 농업이민을 더이상 계속시킬 필요가 없 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東洋拓殖會社의 韓國內의 사업은 1920년대 후반기부 터는 토지경영보다는 부동산 담보대부에 주력하게 되었고 1930년 대 이후에는 日本 工業의 韓國進出政策에 따라 東拓의 투자사업 도 공업건설부문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移民政策은 자연히 東拓의 사업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이 東洋拓殖株式會社는 1910년 이래 1926년에 이르기까지 17회에 걸쳐 근 1만戶의 日人 농민을 우리 나라에 誘致하여 왔다. 이와 같은 유치정책의 결과 韓國農民의 토 지상실과 離村現象은 날로 격증하여 갔다. 1910년 이래 韓國民의 滿洲移民은 매년 1만여 명이었으며 土地調査事業이 완료되는 해인 1918년 이후 수년 동안은 매년 3만 5천명에서 4만 5천명으로 격 증되어 갔다. 東拓이 日人의 농업 이민을 포기하게 된 1926년까지 는 29만 9천여 명의 韓國人이 滿洲로 이주하여 갔던 것이다.29) 滿 洲로 이주한 韓國人은 물론 그 전부가 농업이민 뿐만 아니었고 그 중에는 정치적 亡命人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농 29) 李勳求 滿洲와 朝鮮人 (1932) pp
91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민들이었다. 그들은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경작지를 상실하였고 또한 東拓의 日人 농업이민정책에 의하여 생활기반인 농토를 빼앗 기고 무작정 滿洲移住를 감행한 零細農民들이었던 것이다. 東洋拓殖株式會社는 1921년에 南滿洲鐵道株式會社와 합작하여 東亞勸業公司를 세우고 滿州로 이주하는 韓國 농민의 정착을 후 원한다는 구실하에 계획적인 이민사업을 전개한 바 있었으나 이 公司가 제공한 후원이라는 것은 정착에 필요한 토지를 알선 배당 하는 정도에 그쳤고 정착자금에 대해서는 별로 후원한 바가 없었 다. 이 公司에 의하여 정착농지를 배당받은 韓國農民의 南滿洲 이 민은 겨우 4천여 호(인구 2만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30) 韓國人의 滿洲 이주는 1930년대에 들어와서 더욱 격증하여 1945년 현재 滿洲에 이주한 韓國人은 150만 명에 달하였던 것이 다.31) 이와 같은 韓國人 海外移住의 격증은 1930년 이래의 大恐 慌의 여파로 인한 생활고가 빚어낸 결과였던 것이다. 1936년 9월에 東洋拓殖株式會社는 前述한 바의 東亞勸業公司를 母體로 하여 鮮滿拓殖株式會社를 설립함으로써 韓國內의 영세농민 의 滿洲移住를 후원한 바 있었으니 이 계획에 의하여 이주한 농민 은 약 6만 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鮮滿拓殖株式會社와 이전의 東亞勸業公司가 정착농지를 알선한 在滿 韓國人 농민은 8만 여명 이었고 이것은 在滿韓國人 총인구 150만 명의 겨우 5%에 불과한 것이었다. 1942년 말 현재 韓國에 거주한 日人의 총수는 75만 3 천여 명이었고 이들에게 쫓겨 해외로 이주한 韓國人은 滿洲에 150 만 명(1945년 현재), 1938년 현재 日本에 79만 6천 명이었다.32) 30) 高承濟 韓國移民史硏究 31) 朝鮮銀行調査部 1947年度 經濟年監 人口實態調査編 p ) 友邦協會編 太平洋戰爭下朝鮮及臺灣 朝鮮近代史料(I) (日本) p.2 Ⅰ
92 2. 日帝의 經濟政策 제2차 세계대전이 勃發된 이후 日本 국내의 전시산업에 동원된 韓國人數는 더욱 격증하였으며 이들 징용인원을 합치면 1944년 말 현재 일본에 거주하게 된 韓國人 총수는 193만 6천 명에 달했 다. 東洋拓殖株式會社가 韓國民으로 하여금 근대문명의 혜택을 입 게 할 重責을 띠고 세워졌다고 하나 이 회사는 창립이래로 韓國人 의 韓半島外로의 逐出, 日人의 韓國 정착을 深化시켰을 뿐이다. 그리고 日本政府에 의한 韓國人 滿洲移民은 실로 移民政策이 아 니라 棄民政策이었다고 하겠다. 3) 東洋拓殖會社의 事業擴大 東洋拓殖株式會社는 1908년의 창립시에는 韓日兩國의 2중 國 籍會社로 발족하였던 것이나, 1910년의 併合과 더불어 日本國籍 會社가 됨에 따라 그 조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日帝가 東拓 의 창립 당초에 韓國政府의 자본 참가를 강요하고 또 韓國 실업 인 중에서도 설립위원을 선정하고 役員으로도 선출한 것은 비록 實權을 상실하였어도 大韓帝國이 존재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협력 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韓 日이 併合되고 만 이상 朝 鮮 植民地 경영을 목적한 회사로서 韓國人을 부총재 및 이사 등 중역자리에 둘 필요가 없어졌다. 韓國政府가 출자하였던 6만株의 株式도 併合 이후 朝鮮總督府 의 설치와 더불어 자동적으로 그 소유가 되었고 總督府는 이 주 식을 점진적으로 日本 실업인에게 양도하여 1918년 東拓의 增 資時에는 겨우 5,500株를 남기고 있었다. 1917년 7월에 東洋拓 殖會社法이 개정되었다. 여기에서 副總裁 2명을 1명으로 바꿈으 로써 韓國人 부총재의 길은 사실상 봉쇄되었으며 韓國人은 이후 이사 및 감사의 자리에도 선출될 기회가 줄어들게 되었다. 표면
93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적으로는 韓國人도 日本國民이 되었다는 논리에서 役員의 모든 職이 韓國人에게도 개방되었다고 하겠으나 실제로는 중역 진출 의 기회가 막히고 말았다. 1920년도의 東拓 重役 명단을 보면 총재 및 이사 4명이 모두 日人으로 선임되었고 감사 3명중 1명 에 韓人 趙鎭泰가 선임되었다는 점에서 그 사정이 짐작되는 것 이다. 1917년 7월에 개정된 東洋拓殖株式會社法에서의 또 하나의 중 요한 변경사항은 東拓 영업지역의 확대이다. 종래 이 회사는 韓 國內에서만 영업을 하기로 규정되었으나 이 개정법에서는 지역제 한을 철폐하고 韓國 및 외국에서도 업무를 영위할 수 있게 하였 다. 韓國을 이미 併合한 日本이 다시 中國大陸에로의 진출을 기 도하면서 東拓을 그 선봉에 세우고자 한 것이다. 1917년 10월에 는 서울에 두었던 本店을 東京으로 이전하고 서울에는 지점을 두 기로 하였다. 그리고 奉天과 大連支店을 개설하고 1919년에는 哈爾賓支店, 1925년에는 間島出張所, 1933년에는 新京支店을 개 설하였다. 東拓의 사업지역이 滿蒙지방으로 확대됨에 따라 韓國내의 東拓 事業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저하되었다. 그러나 韓國에서의 사업이 東拓事業에서 차지하고 있던 절대적인 우위성이 轉倒된 것은 결 코 아니었다. 이 회사 수입의 95% 이상을 차지하는 사업부문은 대부금, 유가증권, 토지, 산림, 건물과 그 밖의 특수사업이었으며 여기에 대한 투자액은 1942년 말 현재로 약 6억 원에 달했다. 그 중 가장 많은 것은 대부금으로 48%, 다음이 유가증권으로 37%, 토지 산림 건물은 11%, 특수사업이 4%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금은 70%가량이 韓國에서 이루어졌고 그 액수는 약 2억圓 에 달하고 있었는데 유가증권의 韓國內 투자액은 약 1억 4백만원
94 2. 日帝의 經濟政策 이며 이것은 유가증권투자액 전체의 약 46%가 된다. 그리고 토 지 산림 건물의 거의 전부는 韓國에 있어서의 사업이었다.33) 그러므로 1930년대 이후 東洋拓殖株式會社가 그 사업지역을 滿蒙 지방으로 확장시켰다고 하더라도 사업의 중심은 여전히 韓國에 있었고 따라서 朝鮮植民地 경영의 本山이라는 지위에는 변함이 없었다. 1938년대 이후에는 東洋拓殖株式會社는 鑛工業 부문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 회사의 유가증권 보유는 투자적 성격이 강하 였고 東拓의 투자사업체는 전기 탄광 제철 등 각 분야에 걸치 고 있었다. 그러나 東洋拓殖株式會社 사업의 중심은 역시 韓國 植民地化 사업인 農林業에 두고 있었다. 韓國에 있어서 東拓의 農地經營은 전적으로 소작경영에 의존하고 있었다. 1938년 현재, 東拓이 소유 하고 있던 농지는 5만여 町步이었으며 이 농토는 韓國人에게 소 작을 주어 경영하였다. 이 회사의 소작조건은 당시 韓國農村에 있 어서의 慣習에 따라 소작료는 現物로 징수하되 징수방법은 正租, 執租의 방법을 취하였으나 소작료는 대체로 2분의 1을 넘고 있었 다. 1938년 현재 東拓이 소작경영지에서 징수한 소작료의 품목별 수량을 보면 玄米 2만 184石, 籾 45만 7,089石, 大豆 6,409石, 雜穀 9,707石, 棉 7만 295斤, 그리고 金納 소작료 11만 6,250圓 이었다.34) 이와 같은 소작조건은 당시 韓國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일반적 인 소작조건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東拓은 그 소유지내의 소작인을 지도한다는 명목으로 1천여 명의 직원을 파견하고 소작 33) 東洋經濟新報社 年刊朝鮮 1942年度版 p.31 34) 東洋拓殖株式會社 30年誌 pp
95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東拓系의 事業體 區 分 東 洋 拓 植 朝 鮮 支 店 朝鮮林業部 朝鮮鑛業部 東 洋 鑛 業 朝鮮無煙炭 朝鮮有煉炭 朝 鮮 煉 炭 朝鮮無水酒精 富寧水力電氣 朝鮮電氣冶金 江界水力電氣 朝 鮮 電 力 南洋水力電氣 西鮮合同電氣 朝 鮮 畜 産 朝鮮亞鉛鑛業 朝 鮮 製 鐵 (1942년말 현재단위 : 千원) 公稱資本 50,000 7,000 50,000 15,000 2,000 5,000 10,000 4,500 50,000 30,000 20,000 30,000 10,000 1,000 15,000 拂入資本 35,000 7,000 40,000 8,760 2,000 5,000 5,000 3,375 45,000 22,500 10,000 25,000 3,000 1,000 3,750 資料 : 年刊朝鮮 p.31 인들의 경작상황을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東拓所有地의 소작인은 항상 과도한 간섭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東拓의 소작기간은 3년으로 정해져 있었다. 東拓 소작인 8만여 명은 항상 소작기한이 차면 소작지로부터 逐出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 다. 그래서 小作爭議가 이 東拓經營地에서 늘 치열하게 전개되었 던 것이다. 東洋拓殖株式會社가 그 창립 때에 내세웠던 韓國에 있어서의 殖產興業의 길을 열고 富源을 개척하고 民力의 함양을 기도하 여 韓國民으로 하여금 文明의 혜택을 입게 한다 는 표어는 한낱 美辭麗句에 불과하였고 이 회사는 항상 日帝의 先鋒이 되어 韓國
96 2. 日帝의 經濟政策 農民수탈의 총본산이 됨으로서 民怨의 대상이 되었다. (4) 韓國의 金融體系와 國策銀行의 設立 1) 韓國의 金融體系 日帝 朝鮮總督府 지배 밑에서의 韓國經濟는 日本經濟의 연장이 었고 韓國을 하나의 경제단위로 한 국민경제의 체계를 이루지 못 하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의 金融體係 도 역시 그 例外는 아니었다. 당시 韓國에는 중앙은행인 朝鮮銀行 이 있었고 그 밑에 각종 市中銀行이 있어서 얼핏 보면 韓國을 하 나의 경제단위로 한 金融體係를 이루고 있는 듯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朝鮮銀行은 發券의 권능 이외에는 중앙은행으로서의 기 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日帝侵略下 韓國의 금융은 크게 두 계통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鮮銀系 로 불리어지고 있는 朝鮮銀行系이고 다른 하나는 殖銀系 로 불리어진 朝鮮殖產銀行系이다. 鮮銀系는 朝 그 하나는 鮮銀行과 그 통제 밑에 있는 市中은행들이며, 그 중 민족계 은행 들은 자금의 기반이 튼튼하지 못한 弱體銀行이었다. 日本의 대자본진출 초기인 1933년 현재 이러한 민족계 은행은 서울에 漢城 東一 海東의 3개 은행, 釜山에 東萊銀行, 大邱에 慶尙合同銀行, 光州에 湖南銀行, 咸興에 北鮮商業銀行 등 모두 7 개 은행이 있었다. 殖產界는 朝鮮殖產銀行 및 그 산하의 朝鮮貯蓄銀行 朝鮮信託 會東洋拓殖會社 金融部 등이다. 이러한 殖產系는 日本金融市場 銀行 朝鮮商業銀行과 그 영향력을 받고 있는 朝鮮金融組合聯合 에서 起債할 수 있어서 자금원이 튼튼할 뿐 아니라 朝鮮總督府의
97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행정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韓國의 금융계를 실질적으로 이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鮮銀系와 殖銀系가 韓國金融界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보면 1933년 현재 殖銀系는 예금에 있어 55.7%, 대출에 있어 69.6% 를 점하고 있었고, 鮮銀系는 예금에서 32.3%, 대출에서 27.3%를 차지하고 있어 殖銀系가 鮮銀系를 압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鮮銀系 중에서 민족계 은행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대단히 미약 하였다. 민족계 은행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1933년에 서울 및 지방에 본점을 두고 있는 은행이 7개였으며, 이 은행들이 전국의 주요도시에 지점망을 펼쳐 놓았으나 이들이 韓國金融界에서 차지 하는 비중은 예금에 있어서 19.2% 대출에 있어서 15.5%를 점하 고 있음에 불과하였다. 민족계 은행이 韓國金融界에서 미미한 세력을 갖고 있고 영업 이 부진한 이유는 朝鮮銀行이 중앙은행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은행 업무를 겸하고 있었고 한편 殖產銀行이 장기산업금융을 담당하기 로 하고 설립되었으나 단기금융에도 손을 뻗히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은행과 민족계 은행이 경쟁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 겠다. 그 밖에 전국에 방대한 조직망을 갖고 있고 朝鮮總督府의 행정력 지원을 받고 있는 朝鮮金融組合에 고객을 뻬앗기고 있었 던 것이 朝鮮銀行 경영 침체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었을 것 이다. 2) 朝鮮銀行의 運營實態 1909년 10월에 설립되었던 중앙은행인 韓國銀行은 1910년에 韓國이 日帝에 併合되자 그 이름을 그대로 보존할 수가 없어 1911년 8월 15일에 朝鮮銀行法의 發布를 계기로 그 商號가 朝鮮
98 2. 日帝의 經濟政策 銀行으로 변경되었다. 일반적으로 중앙은행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發券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金融秩序를 통제 유지하는 기 능이다. 朝鮮銀行은 韓國內의 유통통화를 발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유통통화의 발행은 金貨, 地金銀과 더불어 日本銀行券을 正貨準備 로 하고 있었다. 사실은 正貨準備의 거의 대부분은 金貨나 地金銀 보다 日本銀行券으로 충당되고 있었다. 이렇게 朝鮮銀行券의 발행 이 日本銀行券의 뒷받침 밑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朝鮮銀 行이 日本中央銀行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朝鮮銀行은 韓國內의 금융질서를 통제 유지하는 기능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韓國內의 금융 질서에는 朝鮮銀行의 지휘를 받지 않는 금융계통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 예를 들어 朝鮮殖產銀行은 朝鮮殖產銀行法에 의하여 설립 된 특수은행이었고, 이 銀行은 법령이 정하는 범위 내에서 朝鮮殖 產 債券을 발행할 수 있었고 이 채권은 日本 내의 장기금융시장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殖產銀行은 朝鮮銀行의 직접통제 밖에 있는 금융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殖產銀行 외에 금융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朝鮮金融組合 및 東 洋拓殖會社도 역시 특수금융기관으로서 朝鮮銀行의 직접통제 밖 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특수금융기관 외에 韓國내에 지점을 두고 있는 日本 系銀行 역시 朝鮮銀行의 통제 밖에 있었다. 이러한 지점은행은 日 本內 本店에서 자금지원을 직접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朝鮮銀行은 中央銀行임에도 불구하고 韓國에 있어서
99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金融操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朝鮮銀行은 중앙은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은행의 업무를 겸하여 행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朝鮮銀行이 韓國內에서의 영업보 다도 滿洲 中國 그리고 日本本土 등에 눈을 돌리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朝鮮銀行은 1913년경부터 滿洲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년 11월에는 日本政府는 滿洲에 있어서의 日本金券을 朝鮮銀行券 으로 통일하였다. 이로써 朝鮮銀行券은 關東州 및 南滿洲鐵道附屬 地에서의 거래에 통용되는 화폐가 되었고 朝鮮銀行은 安東支 店 을 비롯하여 旅順 遼陽 鐵嶺 등에 出張所를 설치 경영하였던 것이다. 朝鮮銀行이 滿洲에서의 영업에 많은 관심을 보임으로써 韓國에 서의 영업은 소홀해 질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1919년 상반기 의 朝鮮銀行의 영업실태를 보면 韓國 내에서의 貸出金額이 6,903 만여 원인데 비하여 滿洲에서의 대출금액은 8,616만여 원으로서 滿洲에서의 대출이 韓國에서의 그것을 능가하고 있었다. 朝鮮銀行 의 국외 영업지역은 滿洲에 한한 것은 아니었다. 日帝의 대륙침략 이 본격화되고 그 세력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朝鮮銀行도 더 넓은 지역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1929년에 이르러 朝鮮銀行의 在外 支 店은 日本내에 4개소, 滿洲 16개소, 中國 4개소, 露領 2개소, 美 國 1개소로 합계 26개소이었으며, 이에 비하여 韓國내에 지점 및 출장소는 10개소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朝鮮銀行의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영업의 外地性 向은 韓國의 금융을 불충실하게 하였고, 외지에서의 무모한 대출 로 인한 回收不能의 자금이 증대되어 朝鮮銀行 自體의 경영에 커 다란 위기를 가져왔다. 1차 세계대전 후의 不況이 닥치자 朝鮮銀
100 2. 日帝의 經濟政策 行의 外地貸出은 1,000만圓의 회수불능과 5,000만圓의 滞貨現象 을 빚어냈고 그 결과로 朝鮮銀行에 대한 日本政府의 감독권이 강 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1922년에 日本政府는 朝鮮銀行의 감독을 철저히 한다는 구실 밑에 그 본점을 한때 日本 東京으로 옮기고 重役을 常時 東京에 駐在시킨 일도 있었다. 朝鮮銀行은 植民地官府인 朝鮮總督府의 政策金融의 충실한 하 수인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野口의 朝鮮窒素가 三菱으로부터 자금지원이 끊기자 그 소요자금을 朝鮮銀行에서 대출을 받아 충당 하였다. 1930년경에 野口의 朝鮮窒素會社는 朝鮮銀行으로부터 최 고 4,000만圓까지 융자받은 일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朝鮮銀行의 朝鮮內 대출총액 1억 2천만圓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日帝獨占시대의 中央銀行인 朝鮮銀行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 하지 못하였으며 韓國의 銀行이었으나 韓國內의 금융에 소극적이 었을 뿐 아니라 이른바 韓國系의 民族金融機關에 대해서는 자금 지원보다도 통제에만 힘썼고 오로지 日帝의 정책금융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3) 殖產銀行의 設立과 支配領域 1. 殖產銀行의 設立 1918년 10월 1일, 株式會社 朝鮮殖產銀行은 자본금 1천만圓으 로 설립되었다. 당시 朝鮮 안에는 창립자본금 1천만 원의 회사는 중앙은행인 朝鮮銀行(1909년 韓國銀行으로 발족, 창립자본금 1천 만원)과 식민지개발회사의 총본산격인 東洋拓殖株式會社(1908년 설립자 본금 1천만원)가 있었을 뿐이다. 1918년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금융기관은 자본금 30만원 내지 300만원에 불과했다. 舊韓末에 창립된 大韓天一銀行은 창립자본
101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금 2만 5천원이었는데 1918년 현재 자본금이 1백만원으로 增資 되었으며 漢城銀行은 15만 1천원으로 설립하여 3백만원, 韓一銀 行은 15만원으로 설립하여 150만원으로 증자하고 있었다. 그 밖에 韓日併合 후 설립된 은행들 중에 1918년 6월 현재로 자본금 30만원 이상되는 민족계 은행으로는 慶南銀行(1백만원), 湖南銀行(1백만원), 北鮮商業銀行(50만원), 大邱銀行(50만원), 東萊銀行(50만원) 등이 있었고 韓國에 본점을 둔 일본계 은행으 로는 釜山商業銀行(50만원), 三和銀行(30만원), 鮮南銀行(30만 원), 新義州銀行 (50만원) 등이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본금 1천만원의 은행은 대규모 은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朝鮮總督府의 의도는 朝鮮殖產銀行을 朝鮮銀行에 대비되는 대규모의 정책은행으로 설립하고자한 것인데 그 설립 경위는 다음과 같다. 舊韓末에 설립된(1906) 農工銀行은 설립 초기부터 자금원이 취약하여 운영난에 봉착했고 게다가 地方小農金融을 상대로 한 地方金融組合이 분립되어 나갔으므로(1907) 그 업무영역이 축소 되어 그 기구개편은 불가피한 실정이었다. 韓日併合 이후 이 農工 銀行은 농공업의 발달을 위한 금융을 담당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외면하면서 무원칙한 상업금융에만 치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不實 貸出이 누적되어 倒產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朝鮮總 督府는 日帝植民地로서의 韓國의 農工政策에 부응하는 금융기관 으로서 이 農工銀行은 부적당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1918년에는 日帝 나름으로의 朝鮮經濟建設 의 근간이 되는 土地調査事業도 일단락되었고 日帝로서는 植民地 韓國에 대한 경 제 건설의 기본방향을 수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상황의 큰 변 동이 없는 한 韓國은 日本資本主義 발전을 위한 식량기지 및 원료
102 2. 日帝의 經濟政策 공급지가 되고 日本공장제품의 시장으로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따 라 서 식량증산을 위한 水利施設의 확충과 공업자원개발을 위해 강력한 정책금융이 요청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朝鮮總 督府가 農工銀行을 점진적으로 해산시키고 새로이 殖產銀行의 설 립을 단행하게 되었다. 朝鮮總督府는 1918년 6월 11일에 別令 제7호로 朝鮮殖產銀行 令을 공포하고 이어서 殖銀設立委員會를 조직하여 殖產銀行 설립 을 추진하였다. 이 殖銀設立委員會의 구성을 보면 위원장에 朝鮮 總督府 政務總監, 위원에는 日本 拓務省 拓殖局 次長, 大藏省 銀 行局長 및 日本 第一銀行 頭取를 비롯한 日本金融界의 巨頭들이 위촉되었고 韓國에 서는 韓一銀行長, 朝鮮商業銀行長을 비롯하여 6개 農工銀行長들이 참여했다. 이 위원회의 구성에서도 알 수 있 듯이 日本政府와 그 植民地官府인 朝鮮總督府가 이 殖銀 설립을 매우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朝鮮殖產銀行令에 의하면 이 은행은 日本 국내에서 債券을 발 행하는 등의 특전이 주어지는 반면 朝鮮總督府의 엄중한 감독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朝鮮殖產銀行令은 全文 70조로 되어있다. 그 중에서 이 은행의 특수성을 나타내고 있는 조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朝鮮殖產銀行은 株式會社로 하며 그 본점은 서울에 둔다. (1조) ② 자본금은 1천만원으로 하고 이를 20만주로 나누고 1주의 금 액은 50圓으로 하며 朝鮮總督의 인가를 얻어 자본금을 증가할 수 있다.(2조) ③ 帝國臣民 또는 帝國法令에 의한 法人이 아니면 殖銀의 株主 가 될 수 없다.(4조 2항)
103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④ 정부 또는 공공단체도 殖銀의 株主가 될 수 있다.(5조) ⑤ 頭取는 朝鮮總督이 임명하되 임기를 5년으로 한다. 理事는 50株 이상의 소유주 중 주주총회에서 선거한 2배의 후보자 중에 서 朝鮮總督이 임명하며 임기는 4년으로 한다. 監事는 30주 이상 의 소유주 중에서 주주총회에서 선임하며 임기는 2년으로 한다. (8조) ⑥ 殖銀은 불입자본금액의 10배를 한도로 債券을 발행할 수 있 다.(30조) ⑦ 朝鮮總督은 殖銀의 업무를 감독한다.(40조) ⑧ 定款의 변경은 총독의 인가를 얻지 않고는 그 효력을 발생치 못한다.(41조) ⑨ 朝鮮總督은 殖銀의 업무에 관하여 감독상 필요한 명령을 할 수 있다.(44조) ⑩ 朝鮮總督은 殖銀 監理官을 두고 殖銀의 업무를 감시한 다.(45조) ⑪ 殖銀 監理官은 언제든지 殖銀의 金庫, 帳簿 및 文書를 검사 할 수 있다.(46조) ⑫ 農工銀行令에 의하여 설립한 農工銀行은 殖銀의 성립일에 해산하고 그 일체의 권리의무는 殖銀이 승인하되 이 경우 청산함 은 不要한다.(65조) ⑬ 農工銀行令은 殖銀 成立日부터 이를 폐지한다.(70조) 위와 같은 내용의 朝鮮殖產銀行令을 보면 朝鮮總督의 殖銀에 대한 권한은 절대적이다. 총독은 殖銀의 定款 승인권을 가지고 있 고, 은행장 및 이사를 임명하고 은행의 업무를 감독할 뿐만이 아 니라 필요한 업무상의 명령을 할 수 있었다. 殖產銀行은 農工 銀 行의 발전적 해산과 그 承繼者로 출현하였으나 경영 방침은 근본
104 2. 日帝의 經濟政策 적으로 달랐다. 農工銀行은 民族系 地主의 참여를 허용하였고 형 식적이나마 은행장 자리는 韓國人이 차지하였다. 그러나 日本人이 지배인으로서 은행의 경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殖產銀行은 처음부터 韓國人은 경영진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朝鮮殖產銀行은 그 출발에서부터 형식적인 경영진 구성에 있어서나 그 실권행사에 있어서 朝鮮總督府의 政策金融機 關으로 탄생하였다. ㄴ. 殖產銀行의 支配領域의 擴大 朝鮮殖產銀行은 韓國內의 산업금융기관으로서의 특수업무를 담 당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朝鮮銀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반 보통은행업무도 겸하고 있었다. 殖銀의 資金源의 중심은 물론 債 券發行이었으나 예금이 차지하는 비중도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었 다. 게다가 이 예금의 비중은 날로 증가하여 1938년말 현재 殖銀 의 자금원 중 예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26.6%이었으나 1941년말 현재로는 그 비율이 30.9%로 상승하고 있었다. 殖產銀行의 대출상황을 보면 이 은행이 朝鮮總督府의 정책금융 기관이란 면모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1920년대의 殖銀의 대 출은 朝鮮總督府가 강력히 추진하고 있던 產米增殖을 위한 농업부 문에 치중되었다. 그러나 이 농업 자금대출이란 농사운영자금이 아 니라 產米增殖계획을 뒷받침하는 水利事業資金이 주요대상이었다. 따라서 그 대출금은 거의 모두 日本農業會社에 흘러 들어갔다. 1930년말 현재 殖銀대출내용을 보면, 농업자금의 대출액은 1억 6 천 2백 여 만원으로 대출총액 2억 3천 2백 여 만원의 약 62%를 차지 하고 있었다. 이 대출자금의 혜택은 주로 日人農業會社가 받았는데 朝鮮開拓株式會社 不二興業株式會社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05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韓國內의 殖銀事業體 產 業 部 門 日本 高周波重工業 日本마그네사이드 化 學 工 業 金剛特種鑛山 朝 陽 鑛 業 利 原 鐵 山 雲 松 鑛 業 若山닛켈鑛業 鯨 水 鑛 山 日本炭素工業 漢 江 水 力 電 氣 成 業 社 不 二 興 業 朝鮮農器具製造 朝 鮮 開 拓 朝 鮮 製 鍊 朝 鮮 電 線 圖 山 自 動 車 京 春 鐵 道 朝 鮮 郵 船 朝 鮮 書 籍 印 刷 金 融 部 公稱資本 50,000 5,000 4,000 5,000 1,000 1,000 1,500 1,000 3,000 25,000 2,000 4,000 1,000 4,000 10,000 2,500 2,500 10,000 10,000 2,000 (단위: 千원) 拂入資本 50,000 5,000 2,500 1,250 1,000 1,000 1, ,250 12, , ,500 7,400 2,000 1,250 5,000 10, 門 朝 鮮 貯 蓄 銀 行 朝 鮮 信 託 朝鮮商業銀行 朝鮮火災海上保險 5,000 10,000 9,935 5,000 3,750 2,500 4,975 1,250 그 후 日帝가 中國本土 침략을 본격화함에 따라 韓國이 軍需工 業基地로 책정되고 각종 중화학공업이 일어나게 되자 殖產銀行은 군수공업자금의 공급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1939년 11월 8일에 朝鮮總督府는 別令 17호로 朝鮮殖產銀行의 朝鮮重要產業資金
106 2. 日帝의 經濟政策 供給에 關한 件 을 공포하였고 그 해 12월 9일에는 殖銀을 생산 확충 및 15품목의 생산에 관한 사업 그리고 거기에 직접 필요한 기초산업에 대한 자금공급을 위한 금융기관으로 지정하는 고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朝鮮總督府는 殖銀의 채권발행 한도에 대한 종래의 제한규정(불입자본금액의 10배, 뒤에는 15배 이내의 債券을 발행한다는 제한)을 일체 철폐하였다. 이와 같이 朝鮮殖產銀行은 朝鮮總督府의 정책 금융기관으로 발 족하여 제도적 및 행정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1920년대에는 주로 농업부문에 그리고 1930년대 이후에는 중화학공업부문에서 자금 공급을 담당함으로써 그 지배영역을 확대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1942년말 현재 殖銀 지배 하에 있던 韓國內의 사업체는 아래와 같다. 당시 우리 영토에서 殖銀이 지배하는 사업체는 실로 다양하였 고 그 자본은 막대하였다. 그리고 그 비중은 매우 커서 韓國內 전 체 회사자본의 7.5%를 차지하였고 속칭 殖產 콘체른 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4) 朝鮮金融組合의 運營과 그 地位 前述한 바와 같이, 韓國의 농업과 공업의 발달을 위한 금융을 담당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農工銀行이 창립 당초의 목적과는 크게 어긋나는 운영을 하게 되었다. 韓國政府의 日本人 財政顧問 으로 있던 目賀田種太郞은 지방 小農의 금융을 담당하는 별개의 은행을 구상하게 되었다. 韓國 농업은 小農爲主의 체제 밑에서 이 루어지고 있는 만큼 日本食糧와 주요기지가 될 韓國 농업의 발전
107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을 위해서는 소농금융을 담당하는 금융기관이 절실히 요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07년 5월 30일, 勅令 33호로 地方金融組合規則이 공포되었다. 이와 같이 농촌금융기관인 地方金融組合이 새로 설립 되니 農工銀行은 개편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農工銀行은 1918년 까지 명목은 유지한 채 변칙적인 운영을 계속하다가 朝鮮殖產銀 行으로 그 명칭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하여 식민지 산업 발전을 위 한 장기금융기관으로 變身하게 되었다. 目賀田 재정고문은 금융조합의 형태를 西歐의 농민협동조합에 서 본따려 하였다. 그러나 韓國의 실정은 서구의 그것과는 판이한 바가 있었고 더구나 日本은 韓國 농촌을 자기들의 식량기지화하 려는 목적 밑에서 개발하고자 한 것이니 금융조합을 서구의 농 민 협동조합 그대로 모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1907년 5월 30일에 공포된 地方金融組合規則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設立의 目的 : 농민의 금융을 강화하고 농업의 발달을 기도 한다. ② 事業 : 농업상 필요한 자금을 대부하고 생산된 곡물을 창고 에 보관하며 또 種苗, 肥料, 農具 등 농업상의 재료를 분배 혹은 대여하고 농업 생산물을 위탁판매한다. ③ 組織 : 지방 금융조합은 1郡 또는 수개 郡에 걸쳐서 농업을 경영하는 자로서 조직한다. ④ 任員 : 지방 금융조합에는 조합장 1인과 評議員 약간 명을 두되 조합원이 이를 선거한다. 사무의 집행은 理事 1인을 두되 度 支部大臣이 이를 추천한다. ⑤ 經費 : 조합의 경비를 위하여 각 조합원은 매년 2圓 이하의
108 2. 日帝의 經濟政策 조합비를 납부하며 정부는 약간 금액을 下付한다. 또 조합은 업무 의 필요에 따라 起債할 수 있다. ⑥ 利益金 : 이익금이 발생할 때는 조합의 공동기본금으로 이를 적립한다. ⑦ 監督 : 度支部大臣이 감독관을 두고 조합의 업무를 감독케 한다. 이 규칙에서 보면 서구의 협동조합에서 많은 점을 본딴 것은 사 실이나 그렇지 않은 특성을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官選理事의 규 정은 이 금융조합을 통하여 小農支配를 기도한 저의를 분명히 드 러낸 것이었다. 실제로 관선 이사로 日本人이 천거되었던 것이며 目賀田 재정고문은 창립 초기의 지방금융조합이사에 충당하기 위 하여 日本에서 30명의 청년을 불러들였던 것이다. 地方金融組合規則이 공포되자 1907년 7월에 처음으로 光州地 方 金融組合이 설립되었고 1910년 말까지는 130개소의 조합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韓日併合 이후 地方金融組合規則은 여러 차례의 개정이 있었고 개정될 때마다 금융조합은 草創期의 성격을 바꾸어 나갔다. 여러 차례의 改正金融組合規則 중에서 금융조합의 성격에 변화를 가져 온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地方金融組合規則의 1차 개정은 1914년 5월에 있었다. 이 개정 에서 유의할만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韓國에 있는 日本人 小農의 조합가입의 길을 터놓았다. 종래 금융조합의 조합원의 자격은 농업을 경영하고 있는 韓國人 에 한하였으나 이 개정 후 日本人 농민의 가입이 허용되었다. 둘째, 조합원의 出資金制度의 도입이다. 조합원은 조합비 이외 에 1口座 10圓을 부담하며 잉여금은 年 7分 이내로 이익배당을
109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실시하였다. 셋째, 지방금융조합은 보통은행과 마찬가지로 대부 뿐 아니라 예금을 취급할 수 있게 하였다. 금융조합에서 취급하는 예금은 일 반은행보다 높은 이자율을 적용하였고 또 朝鮮總督府는 지불보증 을 하고 있어 신용이 높았다. 1916년 9월과 1917년 12월에도 地方金融組合令은 부분적으로 개정되어 비조합원도 조합을 이용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고 또 장 기대부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지방금융조합은 본래 단기경영 농자 금을 대부함을 목적한 것이었으나 이후 장기대부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1918년 6월에 地方金融組合令이 대폭개정되었다. 이 개정령에 의해 금융조합의 성격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① 이 개정령에 따라 금융조합은 촌락조합과 더불어 도시금융 조합의 설립을 허용했다. 그와 동시에 종래의 지방금융조합의 명 칭을 버리고 단순히 金融組合 으로 이름하였다. ② 조합원 자격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종래에는 조합원은 농 업을 경영하는 자에 한했으나 이 개정령에서는 직업의 종류에 관계없이 구역내에 주소를 갖는 자는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 게 했다. ③ 대부 한도액을 확장하여 촌락조합의 담보대부는 400圓, 도 시조합은 500圓까지로 정했고 도시조합은 當座預金도 취급할 수 있게 했다. 부동산대부의 한도액은 그 후 더욱 확장되어 1921년 의 개정에서는 도시조합의 부동산담보대부는 3천圓까지 장기융자 할 수 있게 되었다. ④ 理事의 官選制를 일부 개정했다. 즉 정부가 지정한 이외의 조합에서는 이사를 조합총회에서 조합원 중의 한 사람을 선출할
110 2. 日帝의 經濟政策 수 있게 했다. 이것은 주로 도시조합을 상대로 한 개정이며 도시 조합에는 다수의 日本人이 조합원으로 가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⑤ 이 개정령에서는 각 道를 구역으로 하는 道金融組合聯合會 를 조직케 했다. 이 도금융조합연합회의 회원은 각 촌락조합 및 도시조합이 된다. 이와 같은 聯合會의 조직은 금융조합에 대한 중 앙통제 체제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중앙통제 체제의 확립 은 1933년 8월에 공포 실시된 朝鮮金融組合會令에 의하여 이루어 졌는데 이 令에 따라 그 해 8월말에는 朝鮮金融組合聯合會가 발 족하고 각 도의 金融組合聯合會는 道支部로서 그 산하에 들어가 게 되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금융조합은 1918년의 개정령 이후 異常 확장을 하여왔다. 나중에는 금융조합은 농촌의 小農金融의 담당자 로 머물러 있지 않고 도시금융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 었다. 특히 금융조합은 조합원의 자격 완화, 비조합원에 대한 조 합이용의 허용, 보통은행업무 겸업 등으로 금융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金融組合이 韓國의 金融界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보면, 1934년 현재, 韓國內의 주요금융기관의 예금총액 5억圓 중 금융 조합의 예금액은 1억 2천 7백만원으로서 전체의 25%를 점하고 있었고 대부금에서는 주요금융기관의 총대부액 7억 4천 4백만원 중 금융조합의 대부액은 1억 4천 2백만원으로서 전체의 약 20% 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금융조합의 업무확장은 일반 시중은행의 영역 침투 를 뜻하는 것이며, 이로써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것은 자금기반이 튼튼하지 못한 민족계 시중은행들이었다. 금융조합은 韓國의 金融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금융기관이
111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통치의 보조기관으로서도 중요한 역 할을 담당해왔다. 1945년 현재 금융조합은 중앙의 朝鮮金融組合 聯合會와 그 밑에 각 도의 支部, 그 산하에 912개소의 단위조합으 로 구성된 계통조직을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단위조합은 하부조직으로서 전국에 34,345개의 殖產契를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연면한 계통조직망을 갖는 금융기관은 金融組合 이외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朝鮮總督府는 이 조직을 통하여 농산물의 수 집, 농업용품의 판매 斡旋, 전시물자의 조달, 강제저축 등을 강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朝鮮金融組合은 植民地官府인 朝鮮總督府가 창안해낸 가장 효율적인 금융지배기 관이었던 것이다. 趙璣濬
112 Ⅱ. 三一 運動 年代 國內에서의 民族運動 年代 國外에서의 民族運動 3. 三 一運動 4. 大韓民國 臨時政府 5. 獨立軍의 抗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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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年代 國內에서의 民族運動 年代 國內에서의 民族運動 韓日合併을 단행한 日帝는 전국적으로 憲兵警察組織을 확대 강 화시켜 이른바 憲兵警察制度를 주축으로 한 武斷統治를 실시함으 로써 民族獨立運動은 물론 교육 언론 집회 결사 문화 등 모 든 사회적 문화적 활동을 봉쇄하였고 土地調查事業을 빙자한 토 지점탈과 기업통제에 의한 日帝資本의 침투를 꾀하여 韓國을 日 帝의 식량 자원의 공급지로, 日帝商品의 시장으로 전락시켰다. 특히 韓國民의 당연한 항일운동을 억압하기 위하여 전헌병경찰 력과 군대병력을 동원하여 물샐틈 없는 경계를 펼치는 한편 민족 운동을 주도하여 온 韓國의 애국자를 야만적 방법으로 감금 학살 하였다. 따라서 국내에서의 민족운동은 日帝에 의하여 봉쇄당하였 으며 秘密結社의 활동은 日帝의 憲兵警察의 감시와 탄압 하에 위 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韓國民族의 항일독립운동은 약화 되거나 두절된 것은 아니었다. 표면적으로 전개되었던 항일운동은 비밀 지하운동으로 계속되어 3 1운동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다만 이 시기의 민족운동을 항일운동의 침체기 라고 불리워지 는 것은 일제의 강력한 언론통제에 의하여 항일독립운동의 사실 이 비밀리에 망각되었었으며 또한 항일운동이 비밀 지하운동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사실이 뚜렷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韓日合併 이전의 항일운동은 義兵抗爭으로 대표되는 무장투쟁 과 민족의 개화와 실력 양성을 목표로 전개되었던 애국 계몽운동 으로 대별되고 있었으나 합병 이후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日帝
115 Ⅱ. 三一 運動 의 강력한 무단통치의 수단으로 말미암아 그 양상이 달라졌다. 즉 합병을 전후한 일본군의 대토벌로 의병항쟁이 대타격을 받았으며 합방직후에는 新民會事件-105인사건, 安岳事件-으로 민족 지도 자들이 투옥 감금되어 버림으로써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은 더욱 깊이 음성화되어 비밀 지하운동의 성격을 띄어 갔다. 따라서 이들 지하 비밀 항일결사들은 상호 연결이 되지 못하고 고립되어 독자 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1) 義兵闘爭 韓末에 전국적으로 봉기하였던 의병은 강력한 日本軍의 수비대 와 헌병 경찰의 공격으로 1910년에 이르는 사이에 그 기세가 꺾 여져서 수적으로 크게 줄어들고 활동범위도 좁아져 갔다. 특히 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간에 걸쳐 실시된 일본군의 南韓지역 대토벌 작전으로 남부지방의 의병부대는 대타격을 받아 합방무렵 에는 국내에서의 항전이 거의 불가능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그 러나 소규모적이고 산발적이기는 하나 의병항전은 1915년경까지 계속되었다. 韓日合併이 이루어진 1910년 9월부터 12월까지의 의병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1) 9월 13일 의병 4명이 醴泉에서 榮州警察署巡查 8명과 交戰 10월 17일 의병 2명이 京幾道 三串里에서 憲兵 2명과 교전 義兵 4명이 慶北 春陽에서 日憲 2명과 교전 10월 23일 義兵 3명이 忠南 恩山場에서 憲兵補助員 1명과 교전 10월 24일 義兵 7명이 京畿道 麻田에서 日憲 5명과 교전 義兵 7명이 黃海道 延安에서 日憲 2명과 교전 1) 朝鮮總督府警務局 暴徒の關する駐箚軍通報編
116 年代 國內에서의 民族運動 11월 14일 義兵 10명이 慶北 寧海에서 日憲 9명과 교전 11월 16일 義兵 20명이 黃海 溫井院에서 日憲 4명과 교전 11월 21일 義兵 5명이 京畿道 松陽里에서 日憲 3명과 교전 12월 18일 義兵 3명이 黃海道 上長陽洞에서 日軍斥候와 교전 義兵 3명이 黃海道 新幕에서 日軍斥候와 교전 日本側 자료에 의하면 1910년도의 의병의 교전회수는 128회로 써 이에 참가한 의 병은 1,832명이며 의병의 전사자는 130명이고 일본측의 전사는 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2) 1911년 이후의 의병 泰鼎李基淵, 忠北지방에 崔益三, 慶北지방에 盧炳稷史相斗 金炳一崔旭永金宗泰, 慶南지방에 安範成申任典李龍雲, 全 北지방에 李錫庸柳壯烈朴漢局鄭世昌金學俊李毅寬, 全 南지방에 鄭世昌金學俊金守正, 黃海道지방에 韓貞萬蔡應 彥李鎭龍金貞彥金貞安高達順, 平南지방에 董宗賛金在 化洪錫俊李龍石 등의 부대가 활동하였고 國境지방에는 在滿 활동을 보면 京畿지방에 田聖根 崔永宇, 江原지방에 朴文術 權 義兵部隊가 국내에 진입하여 抗日戰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이무렵 과거의 의병활동이 활발하지 못하였던 黃海道 平安道지방에 회수는 많지 않으나 의병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었 다는 점이 특기할만한 일이다. 이것은 南韓지방의 의병부대가 북 상한 점도 있으나 뒤늦게 의병 활동대열에 가담한 것으로서 자못 주목되는 일이다. 특히 黃海 平安지방에서 제일 활발하게 활동한 蔡應彥部隊는 1915년 蔡應彥이 체포되기까지 100여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괄목할만한 항전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平南道警察部와 平壤憲兵隊에서는 蔡應彥 체포에 현상금 280圓을 내걸고 관할 守 備隊 憲兵隊 警察을 총동원하여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2)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10年度 第310表
117 Ⅱ. 三一 運動 이때 日本側의 소요 경비가 10만원 이상에 달하였다 한다. 蔡 應彥은 1915년 7월 5일 平南 成川에서 軍資金募金 활동 중 日憲 에 포위되어 30분간 교전 끝에 체포되었으며 그 해 11월 4일에 死刑執行당하였다.3) 또한 日軍의 討伐作戰을 피하여 間島와 沿海州방면으로 이동한 洪範圖 朴長浩 등을 비롯한 의병부대는 韓滿國境地方에 진입하여 일본군과 항전을 계속하였다. 朝鮮總督府에서 간행한 朝鮮統治 3 年間成績 (pp. 7-9)에 기록된 義兵활동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期 間 交戰回數 義兵數 이상의 통계는 사실보다 훨씬 축소되어 기록된 통계이다. 즉 당 시의 總督府 기관지 인 每日申報에 게재된 1912년 중의 義兵活動 중 日軍警과의 교전회수는 10여 회를 상회하고 있다. 이 당시의 義兵활동 중 특기할 사실은 大韓獨立義軍府의 활동 이었다. 1) 大韓獨立義軍府 의병을 규합하여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하여 무장 항전을 전개하여 오던 義兵將들은 日本軍의 강력한 토벌작전으로 점차 그 활동근거지를 잃게 되고 많은 의병부대가 해체되는 비운 을 맞게 되었으며 끝내는 韓日合邦이라는 비극을 맛보게 되었다. 이 獨立義軍府의 활동은 日帝侵略에 대한 마지막 조직적인 의 3) 每日申報 1914년 12월 2일 1915년 7월 9일 10월 8, 29,31일 9월 5,15일 11 월 6일
118 年代 國內에서의 民族運動 병항쟁으로 日帝의 무단통치기에 있어서 光復會의 활동과 아울러 가장 조직적인 항일운동이었다. 또한 이는 皇室을 중심으로 한 전 의병장 및 儒林 관료들로써 이루어진 일대 국권회복운동으로, 비 록 그 계획이 실현되기 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끝났으나 독립운동 사상 큰 의의를 남겼던 것이다. 獨立義軍府는 1906년 淳昌에서 崔益鉉과 같이 의병을 이르켜 일본군과 항전을 하여 오던 전 樂安郡守 林炳瓚이 對馬島 流配에 서 돌아와 재기의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12년 高宗皇帝로부터 密 詔를 받아 獨立義軍府 全羅南道巡撫大將에 임명되어 獨立義軍府 를 조직하고 檄文을 발표하여 동지를 규합한 데서 비롯되었다. 林炳瓚은 먼저 湖南지방의 義兵과 儒生들과 협의하고 이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아 그 조직을 급속도로 확대 강화시켜 나갔다. 그 해 음력 12월, 林炳瓚은 全羅南北道 獨立義軍府 巡撫大將에 임 명되었으며 1913년 1월 16일에는 자기 아들인 林應喆을 서울로 는 한편 湖南지방의 유생 林泰興林昌鉉金德長 등과 같이 全 보내어 前 參判 李寅淳 李明翔 郭漢一 田瑢圭 등과 협의케 하 南北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1913년 2월 4일, 高宗皇帝로부터 全 羅南北道 巡撫總長兼 司令長官에 임명된 林炳瓚은 湖南지방의 조 직을 완료하고 獨立義軍府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하 여 그 이듬해 2월에 서울로 올라와서 李明翔 李寅淳 등과 협의 하여 獨立義軍府의 編制를 만들었다. 이 편제를 보면 중앙 元帥府에 兵馬都總長과 參謀總約長을 두 고 서울을 비롯하여 江華 水原 開城 廣州에 五營을 설치하여 司令總長과 參謀副約長을 두었으며 각 道에는 巡撫總長과 參謀約 長을, 각 府에는 觀察使와 道約長을, 각 郡에는 郡守와 郡約長을 두고 그 밑에는 鄕長 面長 里長 統長을 배치하여 동지를 규합
119 Ⅱ. 三一 運動 하기로 되었다. 이해 3월 林炳瓚은 李明翔 李寅淳과 상의하여 각 道 대표를 다음과 같이 선정하였다.4) 그리고 각 郡대표를 선정하였다. 총대표 林炳瓚 閔正植 李明翔 李寅淳 趙衡夏 郭漢一 蔡相德 金鐘應 田瑢挂 曺在學 崔萬植 李承旭 高石鎭 각 도대표 京畿道 崔永高, 忠淸道 柳濬根, 慶尙道 權鎭遠, 全羅道 李重翼 崔永禮 吳啓曄 朴在求 李權濟, 江原道 徐相烈, 咸鏡道 金性文, 平 安道 李道成, 黃海速 柳應斗 吳昌根 宋洛善 조직을 완료한 獨立義軍府는 첫번 활동으로 日本의 內閣總理大 臣과 總督을 비롯하여 대 소관리들에게 國權返還要求書를 제출 하여 일제의 관헌들에게 韓日合併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韓國統治 의 곤란함을 알게 할 뿐만 아니라 국외에 대하여서는 韓國民이 日 本의 통치에 계속 항거하면서 國權恢復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다 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일대 의병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그 실천방법으로써 다음과 같은 계획을 수립하였다. 즉 都總長 司令總長 八道巡撫總長 參謀總約長 參謀副約長 參謀約 長이 모여 각 郡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를 계산하여 투서 일자를 선 정한 후, 각 道觀察使 道約長, 각 府使 府約長, 각 郡守 郡約長 에게 비밀히 통고하여 한날 한시에 전국이 일제히 국권반환을 요 구하는 투서를 하기로 하였다. 參謀總約長 1명, 參謀副約長 5명, 參謀約長 8명은 각 外國公使에게 장서를 보내어 日帝가 韓國의 주권을 유린하고 병합을 강행한데 대한 그 부당성과 불의를 세계 에 선포한 후 모두가 함께 總督에게 國權返還要求書를 보내고 道 4)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2 p
120 年代 國內에서의 民族運動 約長은 각 道警務部에, 府約長은 각기 府郡의 日軍警駐在所에 투 서하고 또한 국권반환요구 및 철병요구를 전화로 통고하여 일시 에 360여 처의 전화가 總督府에 도달하도록 하여 日本관헌을 놀 라게 하고 340郡의 민중이 봉기를 하여 日帝를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해 5월 3일 林炳瓚은 咸鏡南道 觀察使兼 巡撫總長에 중임되 어 獨立義軍府의 조직을 北韓지방까지 확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러나 같은 달 23일 동지 金昌植이 日警에 체포되었고 그가 고문 을 이기지 못하고 獨立義軍府의 조직을 자백함으로써 獨立義軍府 의 국권회복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많은 간부와 동지들이 일경에게 체포되자 林炳瓚은 總督에게 단독면회를 신청하였다. 5 월 29일 總督을 대리하여 온 警務總監 立花小一郞과 면담한 林炳 瓚은 그에게 韓日合併의 부당성을 통박하고 국권반환 및 일본군 의 철병을 요구하였으며 日本의 韓國獨立 보장만이 동양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하였다. 그리고는 總督과 日 本 內閣總理大臣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냈다. 林炳瓚이 立花警務總監과 면담하고도 뜻을 굽히지 않고 總督의 면담과 회답을 주장하자 日警은 西署의 警視 國友尙謙을 보내어 林炳瓚을 협박하게 하였다. 그러나 林炳瓚은 國友의 협박에 굴하 지 않고 그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6월 1일 林炳瓚은 다시 總督과 總理大臣에게 서한을 보내어 면담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며 國 友가 韓國民族을 모독하는 언사를 자행한데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 하였다. 이에 당황한 日警은 林炳瓚을 체포 구속하고 관계자들을 모두 투옥시켰다. 林炳瓚은 옥중에서 수차례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12일, 1년 감금의 형을 선고받고 巨文島 로 유배되었는데 1916년 음력 5월 23일 병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121 Ⅱ. 三一 運動 (2) 秘密 抗日結社 日帝의 武斷統治 下에 있어서 韓國民의 민족운동이 비밀 지하운 동으로 전개되었음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더우기 1910년에서 1912년에 이르는 사이에 발생한 이른바 新民會사건은 우리 민족 의 민족주의사상과 신문화운동을 뿌리채 뽑아버리려는 일본의 악 랄한 책동으로 날조된 사건인데 전국적으로 애국인사 1천여 명이 검거되어 日官憲으로부터 악독한 고문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제가 한국민족의 항일운동을 미연에 저지시키 기 위하여 한국민족에게 선수로 보여준 본보기였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민족운동은 더욱 깊이 음성화되어 비밀 지하운동의 형태로 추진되어 갔다. 따라서 이 당시에 무수히 조직된 비밀결사들은 상 호 연결이 되지 못한 채 독자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면서 민족 운동의 명맥을 이어갔다. 합병 이후 3 1 운동에 이르기까지 일본 경찰에 발각된 국내의 주요한 비밀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5) 1910년 安岳사건 1912년 105인사건 1913년 獨立義軍府, 光復團, 李觀求의 秘密結社(光復會) 1914년 大成學校 출신 학생의 秘密結社, 箕成볼(野球)團 1915년 鮮命團, 朝鮮國權恢復團, 光復會의 親日派射殺, 榮州大 同商店事件 1916년 韓英書院唱歌集事件, 自立團, 洪川學校唱歌集事件 1917년 李增淵 등의 秘密結社, 朝鮮產織獎勵稧 5) 崔永禮 3 1運動에 이르는 民族獨立運動의 源流, 3 1運動 50周年 紀念論集 東亞 日報社(1969)
122 年代 國內에서의 民族運動 1918년 朝鮮國民會, 民團組合, 自進會, 靑林敎 이상의 비밀결사의 지역적 분포와 회원의 출신도를 살펴보면 朝鮮國權恢復團은 慶尙道출신의 兩班 儒生들로 구성되었으며 光 復會는 忠淸道와 慶尙道의 儒生 兩班 平民으로 조직되었고 朝鮮 國民會는 崇實學校學生과 基督敎人들이 핵심이 되었던 것이다. 이상의 비밀결사 중 주요단체의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大韓光復會 1910년대의 비밀결사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던 단체가 璋烈韓焄張斗焕姜炳洙金炳烈鄭萬敎金相玉鄭雲洪 鄭鎭華黃相圭李覺 등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大韓光復團을 조 직한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후 1915년 朴尙鎭禹在龍權寧 萬梁濟安金敬泰金漢鍾嚴正燮 등이 가담한 후 會名을 光復 會라 개칭하였으며 1916년 盧伯麟金佐鎮申鉉大申斗鉉尹 光復會였다. 이 단체는 1913년 慶北 豊基에서 蔡基中 庾昌淳 柳 洪重 등이 참가함으로써 다시 光復團으로 개칭되었다. 이 단체가 그 목적 조직 투쟁방법을 확립한 것은 1915년 음력 7월 15일, 大邱 達城公園에서 회합을 갖고 단체명은 大韓光復會 라고 바꾼 뒤부터였다. 이날 光復會員은 吾人은 大韓의 독립된 국권을 광복하기 위 하여 吾人의 생명을 희생함에 供함은 물론 吾人이 일생의 목적을 달성치 못할 時에는 자자손손이 계승하여 讐敵 日本을 완전히 구 축하고 국권을 광복하기까지 절대 불변하고 一心戮力할 것을 천 지신명에게 誓吿함 이란 결의를 하고 서약하였다. 그리고 투쟁방 법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6) 6) 金厚卿 申載洪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 p.137 國史編纂委負會 韓國獨立運 動史 2 p
123 Ⅱ. 三一 運動 ① 武力準備 : 일반 부호의 義捐과 일본인이 불법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이로써 무장을 준비함. ② 武官養成 : 남북 滿洲에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인재를 교양하여 사관을 채용함. ③ 軍人養成 : 大韓의 의병, 해산군인 및 남북 滿洲 이주민을 소집 하여 훈련 채용함. ④ 武器購入 : 中國과 露國에 의뢰 구입함. ⑤ 機關設置 : 大韓滿洲北京上海 등 요처에 기관을 설치하 되 大邱에 尙德泰라는 상회에 본점을 두고 각지에 지점 및 여관 또는 鑛務所를 두어서 光復會의 군사 행동의 집회, 왕래 등 모든 연락기관으로 함. ⑥ 行 刑 部 : 日本人 고등관과 우리 韓人의 반역분자는 수시 수 처 포살을 행함. ⑦ 武 力 戰 :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日本人 섬멸전을 단행하며 최후 목적 완성을 기함. 이 光復會의 회원은 대략 2백여 명으로 전하여지고 있는데 국 외로 독립운동의 터전을 넓히기 위하여 盧伯麟이 동지 10여명과 中國 上海로, 朴性泰 金佐鎭은 滿洲로 출발하였다. 光復會의 조직은 군대식 조직으로 되어 있었는데 중앙에는 總 司令 朴尙鎭, 副司令 李奭大(후에 金佐鎭), 指揮長에 權寧萬을 두 고 그 밑에 財務部 宣傳部를 설치하였으며 각 道에는 支部長을 두 었다. 滿洲에는 南滿 懷仁城에 副司令 李奭大가 駐在하면서 이 지 방의 활동을 담당하였다. 뒤에 禹在龍이 滿洲로 건너가 吉林에서 朱鎭洙 梁載勳 孫一民 李洪珠 등과 협의하여 同會의 滿洲 支 部를 결성하였다. 이상과 같이 조직을 완성한 光復會는 먼저 軍資金의 모금과 親
124 年代 國內에서의 民族運動 日派의 암살에 착수하였다. 주로 南韓지방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재산상태를 조사하고 그 재산에 비례한 기부금의 배당액을 정하 기로 하고 회원을 국내와 국외로 분산시켜 활동케 하였다. 즉 朴 尙鎭과 蔡基中이 嶺南지방을, 金漢鍾과 張斗焕은 幾湖지방을 담당 하여 각자 그 지방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이 들은 먼저 日本관리가 징수한 세금을 압수하여 무기를 구입한 후 악질 관공리와 친일 반역자를 숙청하고 滿洲에 독립군 사관학교 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키로 하였다. 그리고 京城 仁 川 大邱 慶州 槐山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다음과 같은 佈 吿文을 작성하여 각지의 부호에게 발송하였다.7) 佈吿文 우리 4천년의 宗社는 회진되고 우리 이천만 생령은 노예로 화하였다. 島夷의 학정 만행이 일가 월증하고 있으므로 회고컨 데 혈루의 천용을 금할 수 없어 조국을 회복하려 함이 본회의 성립 취지이다. 동포들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우리를 후원하여 후일본회의 의기가 東指함을 기다려라. 각 자산가는 미리 저축하였다가 본회의 요구에 응하여 義捐 하기를 바란다. 만약 본회의 비밀을 누설하거나 또한 본회의 요구에 불응시 는 正律에 의하여 처단 할 것이다. 光復會 總司令 주의사항 본회 회원이 각지에 산재하여 각인의 동정을 감시하고 있으므 로 본회의 명령을 각별히 지켜 지정한 배당금을 예비하여 본회의 7) 前揭書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 p
125 Ⅱ. 三一 運動 불시의 요구를 기대하라. 본회의 정율은 각자의 동정에 따라 시행 할 것이다. 위와 같은 포고문과 함께 군자금배정문서인 特定配當金證을 첨 부하여 각지의 자산가에게 발송하였다. 總司令 朴尙鎭은 1917년 봄 禹在龍 權寧萬 등의 용감한 단원 에게 지령하여 慶州 光明里 앞길에서 大邱로 수송중인 慶州 迎 日 盈德 3개 지방에서 징수한 세금수송차를 습격케 하여 8,700 원을 압수하여 무기를 구입하게 하였다. 光復會가 행한 활동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前 慶尙道 觀察使이 며 漆谷의 악질 부호인 張承遠과 忠南 牙山郡 道高面長인 親曰派 朴容夏의 암살사건이었다. 1917년 朴尙鎭은 光復會의 군자금모금 협조요청에 거부할 뿐 아니라 독립운동자를 日本관원에 밀고하는 등 독립운동에 비협조적인 張承遠을 사살하기로 결정하고 蔡基 中 姜順弼 庾昌淳 林鳳柱에게 張承遠暗殺指令을 내렸다. 이 지령을 받은 행동대원들은 11월 26일 張承遠家에 잠입하여 권총 으로 사살한 후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대문 입구에 첨부하여 친일 반역 분자를 처단한 光復會의 뜻을 세상에 성명하였다.8) 天人是符 聲此大罪 戒我同胞 聲戒人光復會員 光復會員의 저격을 받은 張承遠은 이틀 후인 28일에 절명함으 로써 光復會의 친일파 숙청 첫 번째 거사가 성공되었다. 한편 畿湖지방을 담당하고 있는 金漢鍾은 1917년 10월 張斗 焕 金敬泰 黄學性 李在德 姜奭周 등과 협의하여 忠南지방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였으며 친일파이며 악질 관리인 忠 南 牙山郡 道高面長 朴容夏의 암살계획을 추진하였다. 1918년 1 월 24일, 張斗焕 金敬泰 林鳳柱 등 행동대원들은 朴容夏를 찾 8) 大邱覆審法院 判決文 大正 9年 刑控 第135號
126 年代 國內에서의 民族運動 아가 朴容夏 今回指令違反故死刑處 惟吾同胞戒之 光復會指令 員 이라고 쓴 사형선고문을 제시하여 읽게 한 후 권총으로 사살 하였다.9) 한편 關東지방의 군자금 모금 활동은 金東鎬가 담당하 여 이를 실천하였다. 이상과 같이 光復會員의 활동이 활발하여지 자 日警의 수색도 그만큼 치열하여져 갔다. 그러나 동회의 조직이 군대식 비밀조직으로 되어 있었던 관계로 光復會의 정체는 좀처 럼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1918년 1월, 뜻밖에 同會會員인 天安人 李鍾國이 天安 警察署에 밀고함으로써 同會의 정체가 발각되었으며 朴尙鎭을 비 롯한 37명의 동지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들은 保安法違反 恐喝 强盜 殺人 銃砲火藥類取締令違反 등의 죄명으로 37중 29명 이 公 州地方法院 公判에 회부되었다. 1921년 8월 11일 朴尙鎭 金漢 鍾은 大邱刑務所에서10) 蔡基中 金敬泰 林鳳柱 姜順弼은 서울 에서 死刑執行되어 순국하였으며 張斗焕은 이보다 먼저인 4월에 麻浦刑務所에서 옥사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회원은 최하 1년에서 최고 10년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日警의 체포를 모면한 회원들의 일부는 滿洲로 건너갔으며 국 내에 남은 회원들은 韓焄을 중심으로 다시 뭉쳐 항일투쟁을 계속 하였으나 그 활동은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光復會는 1919년 3 1운동 이후 재기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2) 朝鮮國權 恢復團 中央總部 1915년 음력 정월 1일, 慶北 達城郡 壽城面 安逸庵에 尹相泰 徐相日 李始榮 등 慶北지방의 儒生들이 다수 모여 표면으로는 9) 高第4018號 國權恢復을 標榜하는 不穩團體員 發覺處分의 件, 續報 大正 7年 3月 2日 10) 朝鮮總督府官報 1921年 9月 8日
127 Ⅱ. 三一 運動 詩會를 가장한 회합을 갖고 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部라고 칭하는 抗日秘密結社를 조직하였다. 同團은 檀君을 받들고 신명을 바쳐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것과 滿洲와 沿海州에서 전개되는 독립운 동과 연결하여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목적으로 한 결 사였다. 同團은 統領에 尹相泰, 外交部長에 徐相日, 交通部長에 李始榮 朴永模, 機密部長에 洪宙一, 文書部長에 李永局 徐丙龍 勸誘部長에 金圭, 遊說部長에 鄭舜永, 決死隊長에 黃炳基를 선임 하고 慶南 馬山에는 지부를 설치하여 安廓을 지부장으로 임명하 였다.11) 同團은 尹昌基 李始榮 朴永模 徐相日을 滿洲와 露領지방의 독립운동자와 연락하도록 하여 국외로 파견할 계획을 세우던 중 1919년 3월 1일, 3 1運動이 발생하였다. 1910년대 국내에 있던 비밀결사 중 3 1운동까지 日警에 발각되지 않은 극소수의 항일 운동단체 중의 하나였다. 이 단체는 3 1운동이 발생하자 이에 적 극 참여하여 각지의 3 1운동을 주도하였다. 즉 4월 3일 昌原萬 歲運動을 주도하여 1천여 명의 군중을 동원하여 일본헌병과 대항 하였으며 中國 上海에 大韓民國 臨時政府가 수립되자 獨立軍養成 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講和會 議에 제출할 韓國獨立請願書를 작성케 하는 등 독립운동에 활동 하다가 끝내는 日警에 발각되어 徐相日 李永局 洪宙一 尹相泰 등 36명이 체포되었다.12) 3) 朝鮮國民會 舊韓末부터 기독교사상과 민족정신이 가장 널리 유포되어 있던 11) 高第3094號 秘密結社 發見處分의 件, 大正 7年 2月 18日 12) 慶尙北道 警察部 治安概要 p
128 年代 國內에서의 民族運動 平壞을 중심으로 한 關西지방은 이른바 105인사건으로 민족의 지 도자가 다수 체포되어 버림으로써 일시는 이 지방에서의 민족운 동이 침체되는 결과를 자아냈다. 일찍부터 安昌浩의 務實力行을 민족운동의 방편으로 삼아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이 지방은 민족의 역량을 키우고 민족정신을 함양하여 실력으로써 日本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고자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옴으 로서 일본관헌의 집중적인 감시 대상이 되었던 곳이다. 따라서 日 本은 韓日合併을 단행한 직후 이 지방의 민족운동을 말살시키고 자 계획하여 이른바 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을 날조하여 이 지방의 지도적 항일단체인 新民會간부를 일제히 검거함으로써 韓國民族 의 저항운동에 대한 탄압의 본보기로 삼았다. 이렇게 되자 이 지 방의 기독교 청년들은 드디어 무력에는 무력으로 대항하여야 한 다고 결심하고 보다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 리하여 平壞의 崇實學校의 재학생과 基督敎靑年들이 중심이 되어 秘密結社가 조직되었는데 이것이 朝鮮國民會였다. 이 國民會의 결성은 美國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朴容萬 의 지도로 조직된 愛國啓蒙과 實力養成을 목적으로 한 독립운동 단체였다. 즉 1914년 崇實學校 출신인 張日焕이 美國 하와이 로 건너가 朴容萬과 상의한 후 계획된 일인데 張日焕이 귀국하여 동지 포섭공작을 전개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張日焕은 崇實學校 재학생인 襄敏洙 金炳斗 盧善敬 金錫憲과 同校 敎師 安世桓을 포섭하였고 뒤를 이어 崇實大學生 朴仁寬 李輔植 薛命和 崔達 亨 崔志化 李守鉉과 동교 졸업생인 金仁俊 등의 찬동을 얻어 1915년 3월 23일 朝鮮國民會라는 秘密 抗日結社를 조직하게 되었 다. 이 회는 張日焕을 會長에 襄敏洙를 書記兼 通信部長으로 外國 通信員에 白世彬을 선임하고 다음과 같은 목적과 실행 세칙을 결
129 Ⅱ. 三一 運動 정하였다. 目的 장래 歐美 세력은 동양에 부식되어 日本은 이에 係累될 시 기가 반드시 올 것인데 이때 日本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동 양연방을 형성함으로써 구미의 세력에 대항할 것이다. 그러 나 우리들은 韓國은 한국인이, 中國은 중국인에 의해 자치의 자유를 향유함을 희망하여야 한다. 그런고로 우리는 장래 그 기회에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오늘날에는 동지의 결속 을 도모하고 그 준비를 하여야 한다. 實行細則 ① 在美 國民會 기타 재외동포와 연락을 도모하여 우리의 이상 을 실현할 것. ② 회의 세력을 점차 中國 間島방면에 부식할 것. ③ 회칙 회원명부 등은 비밀누설의 염려가 있으므로 일체 만들 지 말 것. ④ 회원은 매월 20錢의 회비를 징수할 것. ⑤ 吳炳變은 慶尙道, 盧善敬은 黃海道, 姜錫奉은 全羅道의 區域 長으로 각각 임명회원을 모집할 것. ⑥ 매년 春期 平壤神學 및 崇實學校 개학기간에 定期會를 열 것. ⑦ 국내 연락기관으로 中國 安圖縣에 白世彬을, 北京에 通信員 1명을 배치할 것. ⑧ 회원 상호간에 사용할 암호와 제도 新國補(國民會員) 商業 實業 又는 農業(國民會) 豚脚(피스톨) 檀山(美領 하와이)
130 年代 國內에서의 民族運動 寒暖計(會員의 心理作用) 秘密文書는 暗號記載를 할 것. 예컨데 張日焕의 氏名을 나 타내려면 張東西日大小煥이라 書함과 같이 필요한 문자 한 자를 書하며 다음에 不要文字 두자를 나열하고 순차 이와 같이 할 것. 1915년 6월에 裵敏洙 盧德淳 등이 각각 食指를 절단하여 大 決死 등의 혈서를 써서 결의를 굳게 하였으며 盧善敬 韓獨立 은 7월에 間島방면의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三源浦로 갔 으며 襄敏洙는 中國軍官學校에 입학하기 위하여 中國으로 건너갔 다. 그리고 회원 金思鉉 趙玉肖는 楊敬洙로 하여금 군자금 1만 원을 出資케 하여 拳銃을 구입하여 실제행동에 착수하도록 하였 다. 그러나 同會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기 전인 1918년 2월 日警에게 발각됨으로써 실패하였다. 4) 朝鮮產織獎勵稧 다른 抗日 秘密結社와는 달리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꾀하여 실 력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 하에 결성된 단체가 바로 朝鮮產 織獎勵稧였다. 즉 1914년 9월, 京城高普敎員養成所에 재학하는 李雨用의 발기로 6명이 모여 현하의 상태는 日本의 물산이 朝 鮮내에 충일하여 韓人은 경제상으로 패퇴자가 되어 국권회복과 같은 것은 몽상에 지나지 않게 될 뿐 아니라 우리가 훗날 각지에 흩어지게 되면 자연히 오늘날의 정신을 찾아 볼 수 없게 될 것이 니 생도들에게 이러한 정신을 고취하여 장래의 기맥을 통하게 할 사업을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고 협의하였다. 그 해 10월, 日本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일본의 현대적 문물 제도의 발달을 살펴보게 된 이들은 우리 韓國人이 지금 상당한 각
131 Ⅱ. 三一 運動 오를 하지 않으면 영구히 日本의 노예로 화하게 된다고 느끼고는 1915년 1월, 聖經硏究會에서 비밀 집회를 갖고 자신들이 양성소 를 수료한 후 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게 되면 학생 및 청년들에게 민족혼을 고취시켜 정신적 단결을 꾀하고 日本人에게 탈취당한 經濟權을 탈환하기 위하여 각종 사업을 전개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그 후 李雨用은 徽文義塾 교사인 南亨祐와 崔南善 등과 협의한 후, 그 해 3월에 朝鮮產織獎勵稧를 조직하고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출하였다.13) 稧 長 崔奎翼(中央學校 敎師) 總 務 尹昶植 會 計 崔南善 閔溶鎬 書 記 李鎭石 嚴柱東 協議員 柳 瑾 南亨祐 金昌德 吳相鉉 金枓奉 白南雲 安鍾健 李康賢 金 馹 朴重華 그리고 일반회원으로는 각지의 학생과 교사로 구성하였다.14) 이 계의 운영은 株式制를 채택하여 1주 20원으로 하였으며 주식 수를 한정하여 동계에 가입된 계원은 한 사람이 10명의 주주를 모집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日本의 수학여행에 갔다와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東遊誌 를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그러 나 이 계의 활동도 1917년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됨으로써 중단되 고 말았다. 5) 自立團 咸南 端川의 基督敎人 方周翼 朴承赫 姜明焕 沈恒基 등이 13) 前揭書 治安槪要 pp ) 前揭書 治安槪要 p 이 기록에는 會員이 李箕鍾 金性洙 白南奎 安在鴻 南亨祐 柳瑾 申錫雨 李殷相 등 130여 명이라 되어 있음
132 年代 國內에서의 民族運動 1915년 7월, 항일 비밀결사인 自立團을 조직하고 규약을 제정한 후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정하였다.15) 團 長 方周翼 副團長 金性翊 總 務 朴承赫 會 計 沈恒基 書 記 崔태형 이 自立團은 각지에서 단원을 모집하여 단원으로부터 입단금 1 원과 월연금 20전을 징수하여 이것을 단의 기금으로 적립한 후 실업을 경영하는 한편 그 이식으로써 청년들을 교육시키며 기회 를 보아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도 곧 일 본관원에 발각되어 단원 19명이 端川憲兵隊에 체포되고 말았고 이듬해 3월 14일에 保安法違反으로 咸興地方法院에서 方周翼 朴 형을, 金性翊金東燮崔태형은 징역 10개월형을, 기타는 징역 6 承赫 姜明焕 沈恒基는 징역 1년 6개월형을, 劉昌律은 징역 1년 개월형을 받았다.16) 6) 民團組合 舊韓末 의병대장으로 활동하였던 李康秊의 참모장으로써 忠北 江原 慶北지방에서 日本軍과 항전하였던 李東下와 역시 의병대장 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였던 李麟榮의 實弟 李殷 榮, 殉國義士 金濟欽의 實子 金洛文, 李康季의 甥 李堤宰, 李康秊 의 軍資長을 역임하였던 崔旭永 등이 1915년 항일 비밀결사인 民 團組合을 조직 하여 활동하였다.17) 15) 每日申報 1916년 3월 19일 4월 2일 16) 上 同 17) 高第5044號 不穩言動者 發見處分의 件, 大正 7年 3月 11日
133 Ⅱ. 三一 運動 李東下는 忠淸南道, 李殷榮은 忠淸北道, 李世榮은 慶尙北道의 民圃組合支部長이 되어 각지의 부호에게 격문을 보내어 군자금을 징수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7) 榮州 大同商店 慶北 榮州郡의 豊基公立普通學校 교사인 朴齋璿과 權寧睦이 독 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1915년 8월 榮州市場 내에 大同 商店이라는 잡화점을 경영하였다. 이들은 이곳을 일본관헌의 감시 를 피할 수 있는 집회소로 삼고 朴齋璿은 監督에, 權寧睦은 경영 주임이 되어 柳明秀 鄭應鳳 李敎悳 등을 포섭하여 상점을 경영 하였다.18) 이들은 기회를 보아 滿洲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먼저 국제정세의 변화와 滿洲에서의 독립운동 상황을 살피 기 위하여 朴齋璿과 金魯卿이 1917년 8월 3일 滿洲로 갔다 왔다. 그리고 이들은 이듬해 3월까지 滿洲로 전원 망명키로 결정하고 상점을 정리하고 폐쇄한 후 서울로 가서 光復會 總司令 朴尙鎭과 협의하였다. 그 후 權寧睦을 선발대로 먼저 滿洲에 보내어 군사 훈련을 받게 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일본관헌에 체포되어 실패하 고 말았다. 8) 松竹會19) 1910년대에 있어서 여성들이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 중 유일한 단체가 松竹會이다. 1913년, 平壤의 崇義女學校 교사 黃愛德 李 孝德과 崇賢女學校 교사 金敬熙 기독교도 安貞錫 등이 비밀결사 18) 慶北警察部 治安概要 p.264 慶北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 新丘文化社刊 韓國現代史 4 pp
134 年代 國內에서의 民族運動 조직을 협의한 후 朴賢淑 李馬大 蔡光德 宋福信 黃信德 등 20여명의 학생을 포섭하여 崇義女學校 기숙사 내에서 松竹秘密結 社團을 조직하였다. 동회의 조직형태는 철저한 점조직으로써 횡적 인 관계는 비밀로 하고 수직적으로만 연결시켰다. 그리고 창립 위 원은 松兄弟라 하여 이를 핵심회원으로 삼고 그 밑에 竹兄弟라는 하부조직을 두었다. 따라서 이들의 조직은 철저히 비밀의 장막에 싸여 회원명부도 만들지 않았으며 이름도 별명을 사용하였다. 이 회의 회원은 방학 때 수예 편물 등으로 자금을 마련하여 월 회비 30전을 납부케 하였으며 매월 1회 정기집회를 열고 회원포 섭 회비수납 재정처리 등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적립된 자금을 해 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자의 활동자금과 생활비로 송금하였으 며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는 애국지사들에게 필요한 숙식비 여 비 등으로 제공하였다. 또한 平壤시내의 교회에 침투하여 교회부 인회와 접선하여 월례회를 개최하여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함양 시키고 여성계몽운동을 추진시켜 나갔다. 1916년에 이르러 동회는 지방조직에 착수하여 대부분 동교 졸 업생으로 장로교 계통 여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회원을 지방책으 로 삼아 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 당시의 지방조직 책임자는 다음 과 같다. 全州 朴賢淑 宣 川 金玉石 平壤 黃信德 漢川 崔義卿 黃 州 蔡光德 南浦 崔梅智 木浦 崔慈惠 沙里院 朴敬愛 釜山 徐梅物 江西 李馬大 海 州 鄭愛敬 濟州 徐梅物(겸임) 이 회는 끝까지 日本관헌에 발각되지 않고 유지되었는데 일제 말기에는 日本 中國 美國 하와이까지 조직이 확대되었다. 申載洪
135 Ⅱ. 三一 運動 年代 國外에서의 民族運動 1910년 韓日合併을 전후하여 우리의 民族運動은 국내외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국외에서의 활동은 우리 韓國人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를 불문하고 크거나 작건 간에 민족운동이 왕성 히 일어났다. 滿洲와 沿海州에서는 義兵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武 裝抗日運動을 전개하였으며 또한 民族運動 지도자들에 의하여 구 국교육운동과 언론활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또 申圭植 등은 中 國 上海를 무대로 中國의 혁명가들과 밀접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 면서 활동하였고 美洲방면에서는 李承晚 安昌浩 朴容萬 등에 의 하여 民族運動 團體가 설립되어 주로 국제 외교활동을 통하여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적지 日本에서도 留學生들이 중심 이 되어 민족의 단결과 각성을 촉구하는 방면으로 민족운동을 전 개하여 나갔다. 이와 같은 海外에서의 민족운동은 韓日合併의 실현과 더불어 맹렬히 타올랐으며 1919년 3 1운동을 계기로 본격화 되었던 것 이다. (1) 滿洲에서의 民族運動 滿洲는 1905년 乙巳條約 이후 많은 民族運動者들이 건너감으 로써 우리 民族 抗日運動의 온상지가 되었다. 이곳에서의 민족운 동은 義兵활동과 더불어 구국교육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06년 李相卨 吕祖鉉(肇鉉) 鄭淳萬 李東寧 朴茂林 王昌東
136 年代 國外에서의 民族運動 등이 프랑스 神父 큐리 와 협동하여 間島 龍井에 瑞甸書塾을 세 운 것이 滿洲에서 시도된 救國新敎育運動의 효시였다. 이 學校는 1907년 日本의 統監府 臨時派出所가 설치되고 李相卨이 海牙密使 事件으로 沿海州로 피신하기까지 운영되었다. 이 뒤를 이어 1908년 金學淵 金躍淵이 和龍縣 太拉子 明東村 에 明東書塾을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1910년 3월 明東中學校로 개편되어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부터 滿洲 일대의 한국인이 사는 곳이면 어디를 불문하고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東間島地方만 하여도 50개교를 넘었다. 1910년 이후 間島 지방에 설립된 유명한 韓國人 학교는 다음과 같다.1) 학교명 彰東學校 鳳鳴學校 廣進學校 廣進學校 靑一學校 靑一學校 普進學校 進東學校 英實學校 崇信學校 普明學校 明東學校 昌新學校 勞動夜學校 普興學校 揚振學校 明信學校 소재지 長 東 大 梨 三 靑 二 紅 龍 救 草 樹 穆 水 河 岐 龍 興 花 道 坡 道 旗 井 世 柳 祖 砧 內 豊 井 洞 溝 洞 洞 溝 湖 溝 河 村 洞 坪 洞 洞 洞 城 峴 村 경영계통 설립년월일 교장 基督敎 崔東鎭 金明洙 孫正漢 孫正漢 羅仲植 羅仲植 梁亨植 安泰明 張學秀 李權洙 許鏞 韓承點 金英俊 李亨烈 金鍾弼 曺權根 奇愛時(英人) 大倧敎 大倧敎 基督敎 大倧敎 基督敎 大倧敎 大倧敎 天主敎 基督敎 天道敎 基督敎 1) 東洋拓殖株式會社 間島事情 1918年 3月 中日文化協會刊 在滿車朝鮮人と敎育 問題, 滿蒙 팜프렡 第 67號 合冊
137 Ⅱ. 三一 運動 明成學校 永昌學校 震明學校 光宗學校 明新學校 德成學校 化成學校 義興學校 勇新學校 崇神學校 義成學校 朝陽學校 光新學校 光信學校 新興學校 改良私塾 立新學校 新興學校 信興學校 永信學校 小王 道 構 小 廟 溝 鷄 林 村 三 東 浦 南 西 溝 大 陽 村 三 洞 笠 峰 尹 泉 浦 局 子 街 上 村 對 月 屯 銅 佛 寺 太 平 溝 電 線 村 長 城 村 長 城 村 九 戶 洞 吳 家 荒 北匡 岩 洞 基督敎 基督敎 基督敎 基督敎 基督敎 基督敎 基督敎 基督敎 基督敎 基督敎 白泰星 朴陽化 金自千 李東旭 盧宗郁 朴利涉 姜淳基 全完吉 金瑞化 朴瑞陽 尹汝濬 李基千 李河源 李秉益 李芳春 金鎭國 金成六 蔡逸宣 文明淑 이상의 여러 학교 이외에 소규모의 학교가 많이 있었다 년 12월 間島의 延吉 和龍 汪淸의 3 個縣의 私立學校가 83개 교인데 이들의 대부분은 韓國人이 경영하는 사립학교이었다. 이처 럼 많은 학교가 설립된 것은 1915년의 한 總督府 報吿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즉 同 報吿書에 근시 신교육을 받은 청년의 이 주가 증가하였다. 그들은 모국의 멸망은 교육이 발달하지 않은 때 문이라 외치고 빈번히 교육 및 학교 설치의 필요를 창도하고 있 다 고 지적하고 있다. 즉 다시 말하면 이처럼 사립학교 운동이 왕성하게 전개된 이유는 日帝를 배격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한 間 島僑胞들의 열렬한 애국심 때문이었다. 따라서 학교의 교육 내용 은 어디까지나 애국심을 배양하고 조국독립의 강한 의지를 불어
138 年代 國外에서의 民族運動 넣어 주는 데 있었다. 당시 학교의 설비는 초라한 것이었으나 교 육에 대한 열의는 대단하였다. 학생들은 제복 제모에 각반을 감고 군대식 교련과 국가를 배웠으며 修身 시간은 비운의 조국 역사와 日帝의 잔학한 침략사를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하였다. 따라서 이 들이 사용하는 교재도 교육 방침과 목표에 알맞도록 만들어 썼다. 그 대표적인 것이 修身敎科書인 吾讐不忘 이다. 이 책은 등사 판으로 만들어졌는데 韓日合邦 이전에 韓國과 日本과의 관계를 연대순으로 열거한 후 大韓帝國時의 日本의 배신적이고 야만적인 침략행동을 기술하고 있으며 韓日合併 이후의 日本의 식민지 정 책을 폭로하는 것이었다.2) 각지에 산재하여 있는 韓國人 경영의 학교들은 1년에 한 차례씩 聯合大運動會를 개최하여 韓國學生들의 단결과 친목을 도모하였 다. 1913년 端午節을 기하여 龍井부근 合成祐의 들판에서 벌어진 聯合運動會에는 수십개 교에서 참가한 학생들과 원근 주민들이 모 여들었는데 그 수효가 무려 15,000명이나 되었다 하며 각 교에서 차출된 樂團員이 400여 명에 달하였다 한다. 光復歌(愛國歌를 일 부 고친 것)의 제창으로 시작된 이 운동회는 2일간 개최되었는데 韓國人 뿐만 아니라 中國人들도 흥겹게 참가한 대축제였던 것이 다.3) 그리고 1914년 6월 25일부터 3일간 哈呢河의 大東中學校에 서 개최된 연합운동회에는 通化 柳河 興京 桓仁 등 4個縣에서 50개교 499명의 학생이 참가하여 徒手體操 軍事體操 徒步競走 등 여러 종목의 경기가 진행되었으며 특수한 경기로는 大韓地誌及 露日戰爭의 實地練習 이라는 종목이 있었다. 歷史競爭 4) 이와 같은 救國敎育運動과 더불어 진행된 것이 武裝活動이었다. 2)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2 (1966) pp ) 洪相杓 間島獨立運動小史 (1966) pp )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1(1965) pp
139 Ⅱ. 三一 運動 즉 1910년 國恥를 전후하여 국내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던 많 은 義兵部隊가 현대식 장비로 무장되고 철저한 훈련을 받은 강력 한 日本軍의 토벌작전에 견디지 못하고 滿洲로 이동하여 왔다. 당 시 韓滿국경을 넘어 渡滿한 義兵部隊는 각기 적당한 곳에 정착하 여 部隊를 재편성하고 군사훈련을 하는 한편 국내로 들어와 日本 軍과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즉 柳麟錫부대는 通化縣 輯安縣으로, 李康秊 李鎭龍 趙孟善 朴長浩 등 여러 부대는 長白 撫松 輯安 臨江縣 등지로, 趙秉 準 全德元부대는 寬甸 桓仁縣 등지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柳麟 錫은 輯安縣 覇王槽에서 保約社라는 자치단체를 조직하였고 白三 圭 趙秉準 全德元은 寬甸.桓仁 등지에서 農務稧와 鄕約稧를 조직 하였으며, 그리고 李鎭龍 趙孟善 尹世復 洪範圖 車道善 등은 長白 撫松 등지에서 砲手團을 조직하여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는 동시에 그 지방 移住民에게 독립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국내의 애국 지사들과 긴밀히 연락하였다. 이들 義兵부대는 兵農一致의 생활로 獨立運動의 基地 건설과 아울러 戰鬪力 배양에 힘을 기울였다.5) 이상의 義兵부대와는 달리 국내의 지도자들이 滿洲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즉 1907년 安昌浩가 조직한 구 국비밀결사인 新民會가 국외에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기로 하 였다. 1909년 京城 梁起譯 집에서 梁起驛 李東寧 安昌浩 全德 基 崔光玉 金九 등 新民會 간부들이 비밀리에 회합을 갖고 전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며 각지의 청장년들을 단결시켜 민족운동의 역량을 축적할 것, 또 각처에 교육기관을 설 치하여 신교육을 진흥할 것, 각 상공업 기관을 만들어 국가의 재 정과 국민의 부력을 증강시킬 것 등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경제 5) 愛國同志援護會 韓國獨立運動史(1956) pp
140 年代 國外에서의 民族運動 교육 문화 산업 등은 국내에서 장려하고 정치 외교 군사는 국외에서 비밀리에 시행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였다가 일조 유사시에 내외가 상응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北滿洲와 시베 리아 방면에는 李剛 金志侃 金義善 金聖武를, 南滿洲에는 崔 明植 외 2명을 파견하였다. 金聖武는 北滿洲 密山으로, 李剛은 沿 海州 블라디보스톡 으로 갔으며, 金義善金志侃은 여러 지방 을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한편 西間島로 파견된 崔明植 외 2명은 寬甸 桓仁 輯安 興京 등을 거쳐 通化 柳河縣을 답사하였다. 이들은 모든 지리적 조건과 자연 조건으로 보아 柳河縣 三源堡가 최적지임을 발견하고 이를 국내에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新 民會는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李會榮 李東寧 張裕淳 등 3명을 그 곳에 파견하여 적당한 지점을 매수케 하였다.6) 이에 李始榮 李會榮 李哲榮 李石榮 6兄弟가 滿洲로 이주할 것을 결정하고 각 도에서 지원한 100여 호와 함께 이주하였다. 이 들은 우선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고 많은 이민 을 장려하였다. 그리하여 약 300여 호가 집결되자 질서를 유지하 고 조직적으로 조국 광복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耕學社라는 자 치기관을 설립하였다. 이 耕學社의 社長은 李相龍이 피선되어 兵 農一致制를 실시하여 구국운동의 인재 양성 에 노력하였다.7) 이때 韓日合邦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전하여지자 獨立軍養成 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하여 三源堡 鄒家街에 新興講習所를 설립하 였다. 所長은 李光이였고 敎官은 金昌焕 南相復 李章寧 李天民 등으로 노소를 불문하고 훈련을 받게 하였다. 그리하여 1911년 4 월에 제1기 졸업생 50여 명을 배출하였다. 그 후 이 학교를 哈呢 6) 前揭書 韓國獨立運動史 蔡根植 獨立運動秘史(1949) pp.48 7) 蔡根植 武裝獨立運動秘史(1949) p
141 Ⅱ. 三一 運動 河로 옮기어 新興中學校로 개편하고 中學班과 軍事班을 설치하였 다가 얼마 뒤 中學班은 폐지하고 軍事班만을 두었다. 그 후 각지에서 많은 청년들이 입교하여 모두 수용하기 어렵게 되자 孤山子街 大肚子村에 교사를 신축하고 哈呢河에는 初等軍事 班을, 孤山子에는 高等軍事班을 교육하였다. 初等軍事班은 3개월 간의 일반훈련반과 6개월간의 후보훈련반을 실시하였고, 高等軍 事班은 2년간의 과정으로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였다.8) 이 외에 通化縣 快大帽子, 臨江縣 土崖, 海龍縣 聖永河子에 分 校를 설치하였고 각 지역에 勞動講習所를 설치하였다. 또 額穆縣 蛟河街 黃地岡子에 儉成中學을 설립하여 吕準 李元邦 등이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 新興學校는 수차례 폐교의 운명에 직면하였으나 근근히 그 명맥을 유지하여 나가며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1913년은 제2 기 졸업생 48명을, 1914년 제3기 졸업생 178명을 배출하였고 1915년에서 1920년까지 6년간은 2,876명을 배출하여 독립군의 기간요원을 길러냈다.9) 1919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중위로 근무하 던 李靑天 金擎天 申八均 등이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이 곳에 옴으로써 사기가 충천하였으며 많은 청년이 입교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5월 3일 학교를 新興武官學校라 개칭하고 명실 공히 독립 군의 士官學校로서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였다. 1913년 당시의 학교의 교직원은 다음과 같다.10) 校 長 呂 準 校 監 尹琦燮(후임 李相龍) 8) 元秉常手記 新興武官學校(독립운동사자료집 10)(1976) 9) 金承學 韓國獨立史 p ) 前揭書 新興武官學校
142 年代 國外에서의 民族運動 學 監 李光祖(후임 李圭鳳) 敎 師 李圭鳳 徐 雄 閔華國 敎 官 成駿用 金 興 李 克 生徒隊長 金昌焕 班 長 元秉常 (2) 中國本土에서의 民族運動 中國에서 전개된 民族運動은 1911년 申圭植이 上海에 亡命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申圭植은 中國의 孫文이 조직한 同盟會에 가 입하고 孫文과 같이 中國 辛亥革命에 참가한 유일한 韓國人으로 서 中國 요인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다. 이 후 日本으로부터 많은 留學生들이 上海로 건너오자 申圭植은 이 들을 규합하여 同濟社라는 民族運動團體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中國 上海에서 조직된 첫번째 단체였다. 300여 명의 회원을 갖고 있는 이 단체의 주요 인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11) 朴殷植 金奎植 申采浩 趙素昂 文一平 朴贊翊 曺成焕 申健植 金容鎬 申 澈 閔濟鎬 金 甲 鄭桓範 金容俊 閔忠植 李贊永 金英武 李 光 申錫雨 韓震山 金 昇 金 德 卞榮晚 閔丙鎬 申 武 그 후 이 同濟社는 中國의 혁명지도자들과 보다 깊은 유대 관계 를 유지하고자 다시 新亞同濟社를 조직하고 이 단체에 中國 國民 黨과 사회 저명인사 중에서 宋敎仁 陳其美 胡漢民 戴季陶 廖仲凱 鄒魯 徐謙 張搏泉 吳鐵城 殷汝驪 張秀鸞 胡霖 呂天民 唐紹儀 黃介 民 陳果夫 張靜六 등을 가입시켰다.12) 11) 甲圭植 韓國魂(1971) pp
143 Ⅱ. 三一 運動 申圭植은 環球中國學生會 또는 南社라는 단체에 가입하여 中國 의 청년들과 유대 관계를 깊게 하는 한편 張季鸞 胡政之 葉楚 僧 史量才 등과 같이 韓國의 역사와 문화를 공동 연구하여 한국 의 복국운동을 선전하였다. 그리고 韓國痛史 李舜臣傳 安重根 傳 등을 간행케 하고 震檀報를 출판하여 한국 독립운동의 대외 선 전 자료로 삼았다. 이와 같은 申圭植의 中國 要人과의 유대 강화는 뒷날 韓 中 공 동 항일전의 기반을 닦은 것이며 大韓民國 臨時政府가 中國護法 政府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게 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1918년 第1次 世界大戰이 종결되고 프랑스 파리 에서 講和會議가 개최됨을 안 이 곳 민족운동지도자들은 新韓靑年黨을 결성하여13)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결정하였다. 즉 鮮于爀 徐丙 浩를 국내로, 呂運亨을 시베리아 로, 張德秀를 日本으로 파견 하여 그곳 인사들과 협의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하고 金奎植 파리 로 파견하여 講和會議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韓國獨立에 관한 要望書 를 작성하여 당시 中國에 파 견된 美國 윌슨大統領의 특사 크레인 에게 주어 파리 講和會 을 議의 美大統領에게 전달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 또한 申圭植은 국내에서 대규모의 민중 봉기를 일으키도록 국내 지도자에게 부탁 하는 편지를 수십 통 작성하여 方孝成 郭儆 두 사람에게 주어 비 밀리에 입국시켰다. 또 美國에 체류하고 있는 李承晚에게는 급히 파리로 가서 국제여론을 환기하도록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12) 前揭書 韓國魂 13) 理事長 徐丙浩 理事 呂運亨 金九 鮮于爀 李光洙 韓鎭敎 韓元昌 金順愛 安定 根 趙東祐
144 年代 國外에서의 民族運動 (3) 美洲에서의 民族運動 1883년 韓美修好條約이 체결된 이래 在美 韓國人의 수효는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더우기 1903년부터 개시된 韓國人의 集團 移民은 在美 韓國人의 수효를 급격히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즉 1903년 한 해만 하여도 16차의 선편에 1,133명이, 1904년에는 33차의 선편에 3,434명이, 1905년에는 7월 초순까지 16차 선편에 하와 이 로 또 1905년 5월에는 1,031명이 멕시코 로 이주하였으며 이중 288명이 큐바 로 이주하였다. 2,659명이 이주함으로써 총 65척의 선편으로 7,226명이 이주하였다.14) 따라서 在美韓國人들의 民族運動은 韓國移住民이 가장 많이 증 하와이 에서 시작되었다. 즉 1903년 8월 7일 하와이 호놀루루 에서 洪承夏安正洙. 會 宋炳求 등이 同族團結民智啓發國政刷新을 강령으로 한 新民 睦를 조직한 것이 團體活動의 시초였다. 그 뒤를 이어 샌프란시스 코우 에서도 安昌浩의 지도로 朴善謙李大爲金聖武 등이 親의 會를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는 美洲 本土에서 조직된 韓國人 團體시 가한 1903년부터 초였다. 이 親睦會는 1905년 4월 同會를 확장시켜 共立協會로 변경 로스앤젤레 스 레드랜드 리버사이드 오클랜드 보이드 라 크스 프링스 등 7개 지방에 地方會를 조직하였으며 1908년에는 시베리아 水靑과 치타 지방에 遠東支會를, 海參威와 滿洲里지 되었다. 同會는 기관지인 共立申報를 발간하였으며 14) 海外 僑胞間題硏究所 美洲韓人 70年史, 僑胞政策資料 第15輯(1373) p.26 이 자료에 의하면 까지 총 7,394명이 이주하고 이 중 부녀자가 755명, 14세 이하가 447명이라 함. 金元容의 在美韓人 50年史에는 이 중 2,011명 이 美洲本土로 이주하였다 함
145 Ⅱ. 三一 運動 방에 滿洲支會을 조직하여 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 同會의 初代 會 長에는 安昌浩가 선임되었다. 1905년 패사디나 지방에 金愚濟가 大同敎育會를 조직하였 는데 이 단체는 1907년 3월 확대 개편되어 大同輔國會로 되었으 며 5개 지방에 地方會를 조직 하고 기관지로써 大同公報를 발간 하였다. 同會는 中央會와 地方會를 분치하여 中央會는 센프란시스코 우 로 이전하였으며 中央會長은 李秉湖가, 總務는 張景이 선임되 었다. 1905년 乙巳條約 이후에는 많은 단체가 각지에 설립되어 在美 韓國人들의 民族運動熱이 고조되었다. 1907년까지 조직된 團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5) 新 團體名 設立年月日 民 會 新 睦 會 共 立 協 會 에 와 親 睦 會 韓 人 靑 年 會 相 助 會 大 同 敎 育 會 와이파후共同會 血 成 團 自 强 會 共 進 會 設立地 호놀룰루 重要幹部 會長 韓柱東 副會長 張 永煥 書記 鄭鎭相 샌프란시스코 會長 安昌浩 會員 49명 샌프란시스코 會長 安昌浩 하와이 오하이오 정원명 김성권 윤병구 이만춘 김규섭 강영소 호놀루루 호놀루루 會長 宋憲樹 副會長 閔 燦鎬 朴允聖 書記 金聖 權 財務 李祉成 패사디나 會長 金愚濟 하와이 오하이오 전도원 안원규 정상교 하와이 올라 會長 공덕화 가와이 송건, 홍종표 고석주 이형기 이관묵 호놀루루 민찬호 이내수 임준호 임정수 15) 金元容 在美韓人 50年史, 在美韓人史略에서 발췌하였음
146 年代 國外에서의 民族運動 老 義 大 國 國 新 실 復 전 共 小 同 盟 成 同 輔 國 民 共 同 民 團 合 幹 지 興 흥 협 濟 會 會 會 會 會 會 회 會 회 會 하와이 하비 마위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올라 하와이 마위 하와이 파하윌로 하와이 힐로 마위 호놀루루 뉴욕 同 盟 新 興 會 시애틀 정병섭 편성원 會長 김재규 總會長 李秉湖 總務 張景 채극여 김봉기 會長 김건호 會長 김성옥 會長 박승렬 會長 서성년 會長 김익성 황용성 서필순 안정수 이원익 신성구 김승제 차두환 안규선 양홍빈 송헌길 윤석규 회장 이정실 김익제 박용태 장한조 김정식 오창덕 김봉희 韓國人이 별로 많지 않은 美洲에서 이에 대한 비판과 각성이 일 어났다. 더우기 국내의 정세가 점차 급박하여지자 지도층 인사들 은 각 단체의 합동운동을 일으켜 보다 조직적이고 총괄된 항일 민 족운동을 추진시키려 하였다. 하와이 각 지방에 분산되어 있는 24개 단체 지도자 30 명이 호놀루루 에서 회합을 갖고 단체통합에 대한 구체적 협 이에 의를 진행한 결과 1907년 9월 2일 다음과 같은 합동결의안을 통 과시켰다.16) ① 조국의 국권광복운동을 후원하며 재류 동포의 안녕을 보장 하며 교육사업을 증진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힘을 모아서 단 결함. ② 하와이 각 지방에 분립된 단체들을 결합하여 통일기관을 16) 前揭書 在美韓人 50年史
147 Ⅱ. 三一 運動 설립하고 그 명칭을 한인합성협회 라 하며 호놀루루 에 총회를 설립하고 각 지방에 있던 단체들을 일체 폐지한 후 한인합성협회 지방회 를 설립함. ③ 한인합성협회 총회는 시찰원을 각 지방에 파송하여 아직 에 까지 합동에 참가하지 않은 단체나 개인들에게 합동의 의사 를 설명하게 함. ④ 한인합성협회 총회는 기관신문을 발행하되 그 명칭을 한 인합성신보 라 하며 기왕에 각 단체가 행하던 회보들을 합 성신보 에 부합하여 실력을 집중하고 언론 일치를 도모하게 함. 이와 같은 경과를 거쳐 탄생한 韓人合成協會는 호놀루루리리하 하와이 스트리이트 에 中央會館을 설비하고 10월 22일부터 韓人合成新報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47개 지방에 支會 를 설립하고 總會員이 1,051명이나 되었다.17) 하와이 에 산재한 여러 단체가 이와 같이 통합을 보았으나 하와이 와 美洲本土를 합친 在美 韓國人 團體의 통합도 절실 한 문제였다. 특히 1908년 3월 23일 張仁焕田明雲 두 義土가 親日 美國人 스티븐스 를 射殺한 의거가 발생하여 재미 한국 인을 흥분시키고 애국열이 대단히 고조되었으며 두 義士의 裁判 을 전후한 구제사업을 벌이는 동안 재미 한인의 정신적 단결이 공고하게 미루어졌다. 이러한 시기에 단체통합의 기운이 조성되어 1908년 10월 23일 하와이 의 韓人合成協會 와 美洲의 共立協會 의 대표자 가 회합을 갖고 양단체의 통합을 결의하였으며 그 해 11월 30일 合同發起文을 발표하였다. 이 발기문에는 통합 일자를 1909년 2 17) 前揭書
148 年代 國外에서의 民族運動 國民會 라 하기로 하였다. 2월 1일 國民會 창립식에는 하와이 전 교포들이 휴업하고 월 1일로 하였으며 통합단체명을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며 경축하였다. 北美地方總會 와 하와이 에 하와이 地 方總會 를 설치하였으며 黄思溶을 멕시코 에 파견하여 멕시 코 地方會 를 결성하였으며 뒤에 시베리아 地方總會 와 滿 國民會는 美洲에 18) 洲地方總會19)가 설치되어 명실 공히 韓人의 지도기관으로 성장하 大同輔國會 가 國民會 에 참가하자 會名 을 大韓人 國民會 로 변경하였으며 1912년에는 4個地方總會 代表를 샌프란시스코 에 소집하여 대표회를 개최하고 中央總會 였다. 1910년 5월 를 결성하였다. 따라서 國民會는 中央總會 밑에 4개 地方總會와 新韓民報 를 발간하였 總會의 위치는 처음에 샌프란시스코 에 있다가 1913년 로스엔젤레스 로 이전하였으며 中央總會長은 安昌浩白日圭 尹炳求 등이, 副會長은 朴容萬白日圭洪彥 등이 역임하면서 116개 地方會로 성장하였고 기관지로서 다.20) 1922년 中央總會가 내분으로 해체되기까지 在美 韓人民族運動을 지도하여 나갔다. 이와 같이 在美 韓國人이 통일되어 민족운동을 수행하여 나가 면서 日本 領事館의 간섭을 배제하여 나가자 日本의 방해 공작이 치열하여 갔다. 더우기 美國社會가 韓國人과 日本人 間의 구별이 없어 韓 日人을 同一視하자 大韓人國民會 는 美國政府에 대 시베리아 地方總會는 1911년 10월 20일에 조직되었으며 치타 일크 스크 블라디보스록 등 16개 지방에 地方會를 두었고 총회원은 1,150명이라 함. 會長은 양주윤 부회장은 홍신언이며 총회의 위치는 水靑이다. 1915년 5월에 폐회되었다. 19) 滿洲地方總會는 하르빈 에 조직되었으며 8개 지방에 지방회를 설치하였 다. 총회장은 탁공주 부회장은 강복수로서 1914년 7월에 해산되었다. 20) 前揭書 在美韓人 50年史 18)
149 Ⅱ. 三一 運動 하여 韓國人을 日本人과 구별하여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美國務長官 브라이언 이 다음과 같은 회신을 보내 옴으로써 美洲社會에서의 韓人의 위치가 분명하게 되었다.21) 美 國務省 發表 한인은 일인이 아니라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의 전보를 받았 다. 그 전보에 말하기를 재미한인은 대개 한일합방을 인정하지 않으며 일본 정부와 관계가 없고 일본 관리의 간섭을 받지 않겠 다 한즉 이로부터 재미 한인에게 관계 되는 일는 공사나 사사를 물론하고 일본 정부나 일본 관리를 통하지 말고 한인 사회에 교 섭할 것이다. 1913년 7월 2일 미국국무장관 부라이언 北美地方 總會에 미국 정부에 社團法人官許를 청원하였으며 캘리포니아 州政府로부터 官許狀을 받았다. 또한 하와이地方總會도 기관지로 新韓國報 를 발간하였는데 이 를 1913년에는 國民報 로 개칭하여 週刊으로 간행하였고 또 이 地方總會도 하와이 州政府로부터 社團法人의 認可를 받았다. 1914년 4월 6일, 大韓人國民會와는 별개로 興士團이 조직되었다. 1913년 5월 13일 安昌浩는 國內 8道의 인사 중에서 1명씩을 선출하여 創立 務實力行으로 生命을 삼는 忠義 남녀 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며 智德體 三育을 동맹 수련하여 發起 委員을 선정하고22)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 번 영의 기초를 수련한다 는 목적으로 興士團을 성립하였다. 同團은 150여 명의 단원을 포섭하고 1917년에 北美實業會社를 조직하여 21) 前揭書 22) 경기도 홍언, 강원도 염만석, 충청도 조병옥, 황해도 김항주, 경상도 송종익, 전라도 정도원, 함경도 김종림, 평안도 강영소
150 年代 國外에서의 民族運動 農業을 경영하면서 團의 財源을 마련키 위하여 힘을 기울였다. 在美韓國人들은 국내 또는 국제정세에 변화가 있을 때는 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 며 민족운동을 추진시켜 나갔다. 즉 韓日合邦 이전인 1905년 7월 露日講和會議가 포오츠머스 에서 개최되 자 尹炳求를 파견하여 韓國問題를 제안케 하였으며,23)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 에서 萬國平和會議가 개최되었을 때는 尹 炳求를 英國 런던 으로 파견하여 동정을 구하게 하였다. 또 1908년 張仁焕田明雲이 샌프란시스코 에서 親日 美國 人 스티븐스 를 사살하고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는 모든 韓人 24) 이 일치 단결하여 구명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10년 韓日合併이 불원 이루어지리라고 예측한 재미 한국인 들은 7월 3일 愛國同盟團을 결성하고 合邦反對運動을 전개하는 한편 韓國 皇帝에게 合併을 끝까지 거부하도록 상소하였고, 日本 天皇에게도 韓日 合併이 世界 및 東洋平和를 파괴하는 침략 야망 적인 행위임을 경고하고 합병추진을 단념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8월 29일 치욕의 韓日合併이 성립되자 在美韓人들은 9 월 1일 共同會를 소집하고 다음과 같은 合併否認 聲明書를 발표 하였다.25) ① 우리는 만고의 치욕적 韓日合併을 부인하며 그에 관한 왜적 의 일체 행사를 배척함. ② 우리는 大韓의 민족이요. 왜적의 부속민이 되지 않을 것을 맹세하며 소위 韓日合併은 우리 민족의 의사로 된 것이 아니 23) 前揭書 在美韓人 50年史 在美韓人史略 尹炳求는 워싱톤大學에 재학 중인 李 承晩을 대동하고 8월초 루즈벨트大統領을 만났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 였다 함 24) 前揭書 在美韓人 50年史 25) 前掲書
151 Ⅱ. 三一 運動 고 왜적의 위협적 위조인 것을 확인함. ③ 우리는 韓國의 國號와 國旗를 보장하며 우리 강토에서 왜적 을 축출할 때까지는 8월 29일을 國恥日로 기념하여서 왜적에 게 대한 적개심을 해마다 새롭게 함. ④ 우리는 왜적과 공사 간 일체의 관계를 단절하며, 국제상 관 계가 발생될 때는 大韓人國民會가 在美韓人을 대표하게 함. ⑤ 일본황제와 寺內正毅에게 이 결의문을 보내서 우리의 주장 을 명확히 알게 함. ⑥ 韓國과 조약상 의무가 있는 각국 정부에 공첩을 보내서 韓日 合併 부인의 이유와 日本이 우리의 원수인 사실과 국제상 관 계가 있을 경우에 大韓人國民會가 在美韓人을 대표할 것을 알게 하기로 함 ⑦ 韓人으로써 왜적의 정부기관이나 개인 간의 친선관계를 가 자는 자는 민족반역자로 인정할 것이며, 경우와 형편에 따라 서 처리하기로 함. 한편 합병을 당하자 在美韓人들은 군인양성운동을 일으켰다. 즉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여 滿洲 시베리아로 파견, 독립군 편성에 협 조하자는 운동이었다. 당시 在美韓人 중에는 大韓帝國의 군인으로 복무하였던 사람이 하와이 와 美洲에 500여 명이 있었고 멕 시코 에도 200여 명이 있어 이들이 훈련을 지도하였다. 美洲 本土에서의 훈련상황을 보면 1910년 10월 클레어몬트 에 훈련반이 조직되어 매주 3일 군대훈련을 실시하였고 10월 8일에 롬폭 에 義勇訓練隊가 조직되 어 매일 야간에 훈련이 실시되 었다. 또 12월 5일에는 와이오밍 슈폐리오 에 靑年兵學院이 설 치되어 매일 야간에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하와이 에서는 大同 는 共進團이 각 지방에 양성소를 두어 훈련을 담당하다가 11월부터는
152 年代 國外에서의 民族運動 國民會內에 練武部가 설치되어 練武部가 200여 명의 청년을 훈련시 켰다.26) 네브라스카 에서는 朴容萬이 小年兵學校를 설치하고 헤스팅스 대학의 양해를 받아 이 대학의 교실과 운동장을 빌 려 군사 훈련을 전개하였다. 멕시코 에서도 군인양성운동이 일 어났다. 즉 1910년 11월 17일 멕시코 의 메리다 지방에서 李根永趙炳夏. 李舜根 등이 崇武學校를 설립하고 士官養成을 시 또한 작하였는데 학생이 118명이나 되었다. 하와이 에서 國 民軍團 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즉 朴容萬安元奎朴鍾洙 등의 노력으로 아후마누 農場에서 軍團이 편성되었다. 同軍團은 美國 이와 같은 軍人養成運動은 마침내 1914년 영토 내에서 외국인의 군사활동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美國法에 저 촉되는 일이었으나 하와이 軍司令部의 묵허 아래 편성되었다. 그 러나 銃은 사용할 수 없어 木銃으로 무장되었다. 同軍團은 학생들 의 기숙을 제공하였으며 제복소를 설치하여 군복을 마련하였고 교 련 기구는 士官의 단총(45식) 39정, 군도 10개와 나팔 12개, 북 6 개, 목총 350정, 군사용 교재 28종을 준비하였다.27) 훈련생은 103명으로 시작하여 311명까지 확장되었다. 군사령 부에는 團長에 朴容萬, 副官에 具宗權 太炳善이 임명되었으며, 軍團 經理部 製服所 兵學校 訓練隊 別動隊로 구분되어 편성되 었다. 이 國民軍團은 1916년까지 유지되다가 해체되었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세가 聯合軍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10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등 24개국이 주동이 되어 뉴욕 의 매칼린 호텔 에서 弱少國同盟會가 3일간 개최되었다. 월 29일 26) 前揭書 27) 前揭書
153 Ⅱ. 三一 運動 이 會議는 終戰 이후 개최될 平和會議에 제출할 弱少民族의 案件을 작 성키 위한 모임이었다. 이에 韓人社會에서는 朴容萬을 대표로 同會議 에 파견하였다.28) 또한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전승 국들이 프랑스 파리 에 모여 강화회의를 개최하자 大韓人 國民會는 在美韓人 전체 대표회를 개최하고 앞으로의 독립운동 방략을 협의하는 한편 강화회의에 대표단 파견을 결정하였다. 그 리하여 李承晚 閔燦鎬 鄭翰景을 대표로 선출하여 파견시켰으나 美國政府로부터 출국허가를 받지 못하여 실패하였다.29) (4) 沿海州에서의 民族運動 시베리아 沿海州는 舊韓末부터 어느 곳보다 강력한 義兵活 動의 기지였다. 1907년 국내에서의 義兵活動이 전국적으로 확대 되어 豆滿江 대안의 이 곳 沿海州의 교포들도 義兵을 소집하고 러시아 軍으로부터 신식 무기를 구입하여 군사훈련을 전개하 는 동시에 활발한 국내 진입작전을 개시하였다. 더우기 1907년 間島에 統監府 臨時派出所가 생기고 間島地方의 義兵活動을 규제 하자 間島의 義兵活動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고 자연 沿海州가 義兵 活動의 근거지가 되었다. 沿海州 義兵의 중심지는 노우키에프스크 (煙秋)지방으로서 李範允이 그 지도자였고 그 배후의 자금 공급자는 崔才亨이었다. 이들은 1908년 4월 이후 豆滿江渡江作戰과 偵察활동을 하여 오다 가 이 해 여름부터 활발하게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여 주로 甲 山 惠山鎭 茂山 등을 거점으로 하여 국내의 義兵과 상호 연락 28) 前揭書 29) 前揭書
154 年代 國外에서의 民族運動 하면서 日本守備隊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곳 義兵活動은 1908 년을 고비로 하여 점차 침체하기 시작하였고 국외의 義兵활동의 주도권이 東間島로 옮겨졌다. 그것은 露日 간의 외교분쟁을 우려 러시아 당국이 韓國人의 무장활동을 억제하였기 때문이었 다. 따라서 이 곳의 民族運動은 자연 敎育言論啓蒙을 통한 民 한 族實 力 養成運動으로 방향이 전환되었던 것이다. 沿海州에서의 첫번째 韓國人 團體는 1905년 서 조직된 블라디보스톡 에 韓民會 (一名 韓族會)였으며 이 단체가 유일한 韓國人 자치기관이었다.30) 이 회의 회원은 약 5,000명으로서 공동이익 증 하였다. 따라서 많은 學校가 설립되었다. 즉 블라디보스톡 의 新 韓村에는 啓東世東新東의 세 학교가 1905년부터 설립되어 있었 으며 1907년에는 大韓靑年敎育會를 확대 강화하여 大韓靑年 敎育 聯合會 를 발족시켰다. 이 곳의 韓國人들의 교육열은 대단히 높아 1908년 블라디보스톡 을 제외한 沿海州 각 지방에 설립된 학교 는 明東(리포)東興(영안평)昌東義東(소황령)선홍의숙(략럴 평) 인동의숙(煙秋) 모현의숙(감도진) 수청금당서숙(금당 초)홍원(회령봉) 등 11개교에 달하였다. 1909년 10월 블라디보스톡 의 啓東世東新東의 3개교가 통합되어 韓民學校 가 되었는데 이곳은 2명의 교사와 백여 명 진이라는 목표 하에 교육의 보급 민족의 계몽 단결 등을 목적으로 31) 의 학생이 있었다. 이와 같은 교육활동 이외에 言論活動도 활발하였다. 1908년 2 월 26일 블라디보스톡 에서 崔鳳俊이 海潮新聞 을 創刊하 30) 同會는 1905年에 결성되어 블라디보스톡 水靑 니코리스크 포세이트 하바로 스크 등 주요도시에 조직을 확대하다. 1910년 3월 현재 회장 金學萬 評議員 高尚 俊 高俊文 李尚雲 李東煥 金致寶 安레온체프 31) 前揭書 韓國獨立運動史 1 p
155 Ⅱ. 三一 運動 였는데 이 新聞은 러시아에 있는 韓國民의 애국 독립 사상을 대변 하고 지도할 뿐 아니라 日帝의 압제에서 허덕이는 국내동포의 횃 불로 발간된 것이다. 따라서 同新聞 취지문에서는 일반 국민의 보통 지식을 발달시키고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을 완전하게 함을 그 목적으로 함 이라고 밝혔다. 이 신문의 주필은 皇城新聞 主筆 이었던 張志淵이었다. 그러나 이 新聞은 日帝의 방해 공작으로 1908년 5월 26일 불과 62호를 내고 창간 2개월만에 폐간되고 말 大東共 報 가 탄생하였다. 大東共報 의 발행인 명의는 러시아 퇴 역 장교이며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로 하고 社長 車錫甫, 編輯 았다.32) 그러나 海潮新聞이 폐간되자 곧 새로운 新聞 人 兪鎭律, 主筆 尹弼鳳이었다. 毎週 2回 발행되는 이 신문은 국 멕시코 에도 배부되었는데 국내로 비 내는 물론 上海 美洲 밀리에 배부된 이 신문은 日警에 의하여 대부분 압수당하였다. 大東共報 는 1910년 재정난으로 폐간되었던 곧 崔在亨에 의하여 복간되었는데 이 때의 임원은 다음과 같다.33) 社 長 崔在亨 副社長 李尙雲 總 務 金圭燮 財 務 車錫甫 編輯長 發行人 兪鎭律 1910년 韓日合併의 기운이 점차 짙어져가자 이 곳 교포들의 활 동은 자못 활발하여 졌다. 7월에 水靑의 金敏奎가 각지의 교포 270여 명의 연서로 日本 정부에 韓日合併은 우리 국민이 결코 바 라는 일이 아니니 깊이 반성하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보냈다. 그리 ) 記錄 在露韓人發行新聞及 排日行動 33) 前揭書
156 年代 國外에서의 民族運動 블라디보스톡 에서는 韓日 合併의 부당성을 각국 정부에 밝히기 위하여 聲明會 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8월 23 고 8월 17일 일 韓日 合併 확정의 비보가 전하여 지자 聲明會는 激烈하고 悲痛 한 내용의 合併反對 檄文을 각지에 배부하였다. 블라디보스톡 의 교포 200여 명은 韓民學校에 모여 悲痛 속에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1. 재류교포가 동맹하여 이 날 국권 회복을 기한다. 2. 日本領事의 지배를 결사 거부한다. 만일 日本 領事가 韓國民에 대한 지배를 강행한다면 최후 수단에 호소 등을 결의하고 합병 무효를 각국 정부에 요청하는 전문을 한다 발송하기로 결의하였다.34) 뿐만 아니라 이 교포청년 50여 명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日本人 거류지를 습격하였는데 몇 일 후 결사 대에 참가한 사람이 천명으로 늘어났다. 러시아 당국이 강력하게 압력을 가하여 왔으며 또한 同會 간부인 李相卨李範允李圭豊 등 7명을 일크스크 로 강제 추방당함으로써 聲明會의 활동은 그러나 日本領事의 항의를 받아들인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치타 에 美洲에 있는 大韓人國民會의 시베리아 總 會가 조직되었는데 이 總會가 조직된 것은 鄭在寬李剛 등에 의해 서였다. 그리고 耶蘇正敎報 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여 민족정신을 1911년 고취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선전하였다. 블라디보스톡 에서는 李相卨李鍾浩 등에 의 하여 勸業會 가 조직되었다. 이 회는 실업을 장려하고 노동을 소개하며 교육을 보급함 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실은 민족 실력 양 또 이 해 12월 성 운동을 전개하는 민족 항일운동 단체였다. 新韓村에 總會를 설치 하고 8개 지방에 地方會를 설치하여 在沿海州 韓人을 지도하였다. 34) 前揭書 韓國獨立運動史 1 p
157 Ⅱ. 三一 運動 이 회는 기관지로서 勸業新報 를 발간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 는 한편 新韓村에 韓民學校를 설립하여 2世교육을 진행하였다.35) 러시아 인들의 항일열 이 고조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러시아 인과 연합하여 무력 항쟁을 전개할 것을 계획한 李相卨李東輝李鍾浩鄭在寬 등 은 大韓光復軍政府 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正統領에 李相卨(뒤 1914년 露日戰爭 10週年을 맞이하여 에 李東寧)이 취임하였고 滿洲 羅子溝에 士官學校를 설립하여 軍 事訓練을 전개하였다.36) 하였으며 1912년에는 金致寶 등이 老人會 를 조직하였다. 그 리고 1913년에는 水靑에 共進會靑年敎育會가 통합되어 大韓 靑年敎育會 틀 설립하였는데 이 敎育會는 24개 지방에 地方會를 두고 執行機關으로 會長總務書記 이외에 學務財務救濟 外交查察員을 두었으며 25개 지방에 학교를 설립하여 靑年들을 敎育시켰다. 이 이외에 共公會大韓民共濟會大韓人基督敎靑 年會靑年同志會鐵血團 등 크고 작은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한편 新韓村에는 李義橓 蔡桂福 李惠柱 등이 婦人會를 조직 37) 그러나 第1次 世界大戰이 발발하고 對日 外交관계의 악화를 우 려한 러시아 당국은 日本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1914년 勸業新 報를 정간시키고 勸業會도 해산시켰으며 大韓人國民會 시베리아 總會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1915년 해산하도록 하고 말았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정세가 변하여짐에 따라 韓 人들이 언론결사의 자유를 얻게 되자 러시아 에 귀화한 韓人 들이 중심이 되어 6월 2일 96명의 각 지방 대표자가 니꼴스크 1917년 에 모여 회합을 가졌다. 이 大會는 崔萬學이 大會長이 되어 회의를 35) 독립신문(上海版) ) 독립신문(上海版) ) 독립신문(上海版)
158 年代 國外에서의 民族運動 진행하였는데 여기서 韓族代表會의 조직과 靑邱新報(니꼴스크) 韓 人新報(블라디보스록)를 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會長에 金야고보 가 선임되었다. 이 회는 12월에 歸化非歸化 韓人을 막론하고 전 러시아 재류 韓人을 모두 입회시키 기로 하고 회명 을 全露韓族會中央總會 라 변경하였다. 會長에 文昌範, 副會長에 金立金 쥬프노코 를 선출하고 烟秋秋風水靑 하바로스 크 니꼴스크 아물 등지에 韓族聯合會를 설치하고 그 밑 에 地方會를 구성하였다.38) 中央總會에는 議員 7人을 두어 이 곳에서 正 副會長을 선출하 였으며 正 副會長이 집행위원이 되어 會務를 처리하였고 中央總 會 내에 다시 地方聯合會 常設委員會를 설치하여 중앙과 지방 간 의 연락을 긴밀히 유지하여 가면서 일을 해 나갔다. 이 회는 기관지인 靑邱新報 를 韓族會報 라 개칭하고 趙琬 九 尹海 朴殷植 南公善 등이 차례로 主筆이 되어 全面에 항일 기사를 게재하여 국권 회복을 부르짖었으며 國恥日에는 각종 행사 를 벌여 항일 애국애족 사상을 고취하였다. 또 교육사업에도 주력 니꼴스크 에 師範學校를 설립하였고 李大有尹昌善金立 등은 하바로스크 하였다. 각 지방에서 각출된 의연금 4만 루불 로 에 文德中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敎科書 편찬 사업도 벌였다. 즉 李翰榮 金立이 普文社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역 사 지리 등 민 족 문화 보급을 위한 교과서와 각종 서적을 간행하였다. 이 全露韓 族會는 1919년 大韓民國議會 로 개편되기까지 시베리아 재류 한국인의 핵심 단체였다.39) 이상의 단체 이외에도 1917년 金起龍이 38) 朝鮮總督府記錄 第4287號 復命書 ) 독립신문(上海版) 勞兵會 를 조직하였
159 Ⅱ. 三一 運動 으며 1918년에는 李東輝가 브라디보스록 에 大韓人勞動會 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1918년에는 통상 민족 좌익운동으로 불리는 방편적인 공 산주의 운동의 조직체와 처음부터 소련 볼쉐비키黨에 직결된 공 산주의 조직체가 출현하였다. 즉 전자는 1918년 6월 26일 하바 는 그 해 1월 22일 일크스크 에서 金哲勳吳夏默 등이 조직 한 일크스크 共產黨 韓人支部이다. 로스크 에서 李東輝 朴鎭淳 등이 조직한 韓人社會黨이며 후자 (5) 日本에서의 民族運動 日本에서의 民族運動은 舊韓末부터 在日留學生들에 의하여 진 행되었다. 이 때는 大韓興學會 라는 유학생들의 단체가 있어 이 단체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이 진행되었다. 1912년 大韓興學會가 朝鮮留學生學友會 로 개편되면서 이들의 활동은 본격화되었다. 이 회는 在日本 東京유학생은 모두 會員이 됨을 의무화하였으 며 유학생들이 이 회의 집회에 출석하지 않거나 회원과 친교를 맺 國賊 또는 日本의 개 라고 罵倒하였다. 또 정기총회 외에 웅변회졸업생 축하회신입생 환영회 등 여러 가지 명목으로 잦은 집회를 갖고 지 않는 자, 또는 日本人과 친밀히 지내는 자를 항일 사상의 선전과 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40) 따라서 在日本 韓國人 民族運動의 지도층은 이들 留學生들로 구성되었다. 이같이 민족운동의 핵심멤버가 유학생들이었던 것은 이곳 韓國人 중 이들이 가장 지식계급에 속하여 있었으며 따라서 국제정세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40) 朝鮮總督府文書 1920年 朝鮮人 槪況 三
160 年代 國外에서의 民族運動 이들 留學生들은 우리 민족을 짓밟은 적국에서 면학하고 있는 관 계로 항일의식도 대단히 강하였으며 더우기 日本人들의 민족차별 대우는 더욱 이들의 민족감정을 앙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日 치열의 정도와 수단의 차이는 있으되 모두 朝鮮民族의 독립을 희망 하고 있었으며 學 友會親睦會同窓會 등을 표방하고 조직된 이들의 단체는 표면 적으로는 학문의 연구와 회원의 친목을 내세우고 있으나 실제 本人도 평한 것과 같이 留學生들은 전원 회합에 있어서는 과격한 언동을 하고 배일사상을 발표 고취를 일 삼고 있는 일종의 항일 집단 이었다. 또 留學生들은 수시로 강연 회 웅변회 체육회 등을 개최하여 유학생들의 단결과 애국독립 사상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朝鮮女 子留學生親睦會 를 조직하였고 11월 10일에는 李光洙申翼熙 張德秀金喆壽白南勳田榮澤金度演 등이 朝鮮學會 를 조 1914년 4월에는 金貞愛 羅蕙錫 黃信德 玄德信 등이 직하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民族運動의 비밀결사와 같은 것이었다. 1916년은 洪承魯 李起東 崔甲春 金天海 朴烈 徐相焕 등 이 東京 苦學生 同友會 를 조직하였다. 이상과 같은 留學生들의 단체 이외에 1906년 11월에 조직된 朝鮮 基督敎 靑年會 가 있다. 이 회는 朝鮮 留學生 學友會와 더불어 民族運動의 쌍벽을 이룬 지도기관이었다. 經費를 世界 基 督敎 靑年會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 관계로 이 단체는 在日本 韓 國人 團體 중 가장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 교의에 따라 유학생들의 智 德 體의 발달을 기하여 완전한 인격을 양 성한다는 목적 하에 조직되었는데 이 역시 연설회 강연회 토론 회 등의 집회를 통하여 민족주의 사상 고취에 힘썼다. 더우기 이 회의 임원들이 모두 유학생들로 구성되었던 관계로
161 Ⅱ. 三一 運動 다른 유학생 단체와 긴밀히 협조하며 애국운동을 전개하여 나갔 다. 특히 朝鮮 基督敎 靑年會館은 민족운동의 집회장소로써 매번 學之光 과 사용되어 민족운동의 본부 구실을 하였다 朝鮮留學生學友會의 기관지 기관지 朝鮮 基督敎靑年會 젊은이 는 在日本 韓國人들의 언론활동의 중심이 되어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프랑스 파리 에서 講和會議가 개최되어 국제정세가 약소민족에게 유리하게 전환되 어가 자유학생들은 지금 이 시기가 韓國 獨立의 절호의 기회라 판 단하고 곧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마련하였다. 즉 12월 29일 學友 會가 주최한 忘年會와 30일 基督敎 靑年會館에서 개최된 東亞聯 合雄辯大會에서 독립운동에 관한 문제가 의제로 되어 상호 결의 를 다짐하였으며 이듬해 1월 6일 學友會 主催 雄辯大會에서 구체 적인 방안이 마련되었다. 이날 회의에서 獨立을 宣言할 것을 결의하고 實行委員으로 崔 田榮澤徐椿 金度演白寬洙尹昌錫 李琮根宋繼 白金尙德崔謹愚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이들은 朝鮮靑年獨立團 을 결성하고 獨立宣言書決議文 請願書 등을 國英日文으로 작성하고 2월 8일 獨立宣言式을 거행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이른바 28宣言이었던 것이다. 八鏞 41) 申載洪 41) 10명 중 田榮澤이 身病으로 사퇴하자 李光洙 金喆壽를 추가로 선발하여 11명 으로 하였다. 이 11명이 2.8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朝鮮獨立靑年團 代表이다
162 3. 三 一運動 3. 三 一運動 (1) 3 1 運動의 背景과 2 8 獨立宣言 1) 3 1運動의 背景 3 1運動은 韓民族의 潜在的인 힘이 外部的인 자극에 촉발되어 폭발한 거족적인 抗日獨立運動이었다. 한민족의 잠재적인 힘이란 日帝의 침략에 대항하는 自主獨立의 정신과 힘의 축적이었고 외부적인 자극이란 제1차세계대전과 미 국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民族自決主義였다. 1876년 日本의 무력위협으로 江華島條約이 강요된 이후로 한 민족 사이에 새로 싹튼 排日 감정은 이미 壬午軍亂 때 폭발하였고 계속되는 침략에 격화되어 東學敎徒와 농민군의 東學運動으로 번 졌으며, 특히 乙未事變과 1905년 乙巳條約 勒結로 국권이 침해됨 에 그 극에 이르렀다. 日帝의 침략에 대한 한국 국민의 항거는 크 게 두 조류로 나누어져, 무장항거인 義兵抗戰과 교육 언론 산업의 진흥으로 실력을 양성하려는 愛國啓蒙運動으로 전개되었다. 이 두 갈래의 抗日運動은 서로 다른 理念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義兵抗 戰은 衛正斥邪의 이념을 기반으로 하여 전통적 儒學者가 주동이 된 本能的인 民族의 生命과 傳統文化의 보존 옹호운동이었으며 農民들이 광범위하게 참가하였다. 愛國啓蒙운동은 衛正斥邪와는 반대되는 開化主義에서 출발하였으며 淸日戰爭 이후 日帝의 침략 에 대항하는 抗日獨立運動으로 발전하였으며 都市 또는 基督敎를 중심으로 하였다. 이 두 갈래의 民族運動은 성격에 있어서 전자는
163 Ⅱ. 三一 運動 封建的이고 復古的 경향이었으며 후자는 新文化運動이면서 市民 的 경향이었다. 그러나 乙巳條約을 전후하여 抗日 救國 運動이 격 화됨에 따라 두 갈래의 운동은 구분할 수 없게 되고 武力抗戰으로 발전하여 갔다. 그리하여 대부대로 편성되는 義兵의 武力抗戰과 크고 작은 秘密結社의 활약은 항일민족독립운동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소위 1909년 日帝의 南韓暴徒大討伐作戰 으로 국내에 서의 義兵의 武力抗戰은 큰 타격을 받고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滿 洲 間島지방과 露領 沿海州를 기지로 하여 항전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韓日合併 은 1910년 표면상으로는 한민족의 큰저항 없이 日帝가 韓國을 併呑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는 日帝가 1905년 乙 巳條約 이후 5년간에 걸쳐 신무기와 압도적 병력을 배경으로 비 밀경찰을 풀어 韓國의 애국자를 무자비하게 殺戮 拷問 監視하였 으며 더우기 소위 南韓暴徒大討伐作戰 으로 1910년에 이르러 서는 국내에서의 무력항전이 無力化되었기 때문이었다. 合併 후 日帝의 韓國에 대한 植民地支配는 그들의 관리 뿐 아니 라 국민학교 교사까지 제복에 칼을 차는 恐怖政治이며 暴力이었 다. 日帝는 이미 乙巳條約 후부터 군대 경찰 등 병력으로 韓國을 지배하였고 합병 후에는 약 2개 사단의 병력을 배경으로 하고 헌 병 경찰 밀정을 거미줄과 같은 조직으로 약 1천 6백 만의 한국 민을 탄압하였다. 한 외국인은 이때의 한국정세에 대해서 한국 에서의 일본정부의 통치는 暴力 그것이다. 지금까지 1온스의 애정 조차 표시한 적이 없다. 한국인은 잔악하게 총살당하고 사소한 범 죄에 대하여서도 즉시 장기의 중형에 처해졌다. 실로 무자비한 暴 力政治였다 고 평하고 있다.1) 1) 騷擾事件報告特報 第2 統治評 第22 宣敎師
164 3. 三 一運動 그러나 韓日合併 은 朝鮮王朝의 終焉에 불과하였고 한민족 의 자주독립정신은 일제의 탄압에 비례하여 오히려 내면적으로 더욱 격화되고 있었으며 滿洲 露領 沿海州 및 美國 등 해외에서의 抗日 獨立運動은 격화되어 국내와 비밀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獨立義軍府光復團光復會 리고 국내에서의 항일독립운동도 韓日合併 후 3 1 운동이 일어 나기까지 安岳사건 百五人사건과 등의 비밀 결사의 무력항쟁 또 여러 學會와 교육을 통한 항일운동 이 계속 되었다.2) 秘密結社는 自然發生的으로 조직된 것이었으나 光復會 獨立義軍 府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日本 軍警의 감시하에서도 큰 결사는 전국적 조직망을 펼 수 있었다. 특히 교육기관은 전문학교 중학 교 소학교 야간학교에 이르기까지 항일교육의 본산이 되었고 청 소년들에게도 항일독립 정신을 고취하였다. 乙巳條約 후 모든 일본 적인 것을 배격 하는 움직임으로 단발한 자가 상투를 다시 틀고 新 敎育을 반대하여 書堂으로 되돌아가는 현상도 있었으나 다시 신 교육열이 높아졌고 신교육을 통하여 항일교육을 받은 젊은 學徒들 은 民族의 先覺者임을 자각하고 자처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書堂에서도 乙支文德 李舜臣 등 민족의 영웅에 관한 교과서를 가 르쳤고, 기독교계통 학교에 서도 성경에서 이스라엘 족의 고통이나 영웅 등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구절이 강조되었다. 1914년 세계제1차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에 韓國民의 독립운동 은 이미 1905년 乙巳條約 締結 때와는 질적 양적으로 변하고 있 었다. 그리고 세계대전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세계속에서의 韓國을 생각하게 하였다. 그 예로서 학교에서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하 2) 崔永禧 三 一運動에 이르는 民族獨立運動의 源流, 東亞日報 三 一運動 50遇 週年紀念論集
165 Ⅱ. 三一 運動 여 부른 노래의 가사를 들 수 있다. (歐洲戰亂)3) 년 夏 7월, 심한 腥風이 西에서 불어와, 極東半島靑年의 惰眠을 깨우고 神經을 자극하여 迷夢을 놀라게 하네. 6. 太平의 꿈에 잠자는 容麗의 靑年이여, 이 戰爭의 영향을 아 는가 모르는가, 歐洲戰爭 종결의 아침에는, 東洋의 天地는 白人의 遊戯場으로 化하리라. 7. 우리 祖母인 옛 英雄에 묻노니, 너의 나라를 사랑하고 하느 님께 기도하리라. 너, 獨立國의 英雄을 부러워하지 않느냐. 우리들도 또한 너를 계승할 것을 맹세하노라. 이 한 예로서도 세계대전이 일본식민지하에 있는 韓國民에게 큰 충격을 주어 내부의 힘이 급격히 팽창한 것을 느끼게 한다. 특 히 주목되는 것은 西歐帝國主義에 대하여는 東洋人은 대항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半島靑年은 일어나 祖國獨立을 쟁취하여야 한다고 외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祖國의 歷史에서 민족의 위대성 歐洲戰亂 과 같이 학생들이 부른 英雄의 模範 이란 제목의 가사중의 鷄 과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을 찾으려 하였다. 위에든 林의 犬豕이 되어도, 日本의 臣이 되지 않는다고, 一死를 결심한 朴堤上의 忠誠은, 우리들의 模範이 된다. 閑山島의 永登浦, 龜船을 타고 倭船을 모두 覆滅한 李舜臣의 戰略은, 우리들의 模範 이 된다. 또 獨立軍歌중의 遼東 滿洲의 曠野를 攻破하였고, 女 3) 大正 5年 11月 13日 警高機發第527號, 不穩者發見處分의 件(京畿道 警務部報 吿)이 歌辭는 우리말을 日譯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까닭에 原歌辭와는 차이 가 있을 것임
166 3. 三 一運動 眞國을 討滅하고 開國한 東明王과 李芝蘭의 勇進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復讐하리라. 横濱大阪을 攻陷하고, 東京에 쳐들 어가 東西南北 敵을 깨뜨리고 國權을 회복한 우리 獨立軍 凱歌와 萬歲聲은 天地를 震動하네. 등의 내용에서도4) 3 1運動 전에 祖 國의 歷史의 전통을 되찾으려는 독립정신과 日本에 대한 복수심 이 팽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편 乙巳條約 전후에서 3 1運動까지의 기간중 新聞 雜誌 등 言論과 出版物과 學會의 활동은 抗日 鬪爭을 계몽하면서 대중 화하고 심화시켰다. 신문으로서는 大韓每日申報가 국내에서 항일 언론의 최후 보루였으며 해외에서는 露領의 海潮新聞 大東共報 와 하와이의 新韓國報 合成新報, 샌프란시스코우의 共立新報 新韓民報 등이 격렬한 항일언론을 폈으며 이들 해외신문의 일부 는 비밀리에 국내에 들어와 반포되었다. 신문외에도 각 學會에서 반포하는 月報, 會報와 그리고 雜誌는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특히 韓國의 역사와 영웅, 세계각국의 建國史와 亡國史의 서적이 많이 출판되어 청년학도들에게 읽히었다. 그 중에서도 많이 읽힌 서적 國建國史 瑞西建國史 伊太利建國史 禽獸會議錄 二十世紀朝 은 中等敎科 東國史略 幼年必讀 越南亡國史 波蘭亡國史 美 鮮論 등으로서 내용은 달라도 일제식민지통치하에 있는 민족의 운명을 통탄하며 조국의 빛나는 역사를 되찾으며 독립운동의 정 신을 고취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초 중 고등학교에서의 교육은 日警의 감시를 피하여 항일독립운동을 고취하고 있었다. 소학교 3 4학년 半島와 우리와의 관계 라는 제목으로 지은 작문 중에 다 음의 몇 구절로서도 31운동직전의 사정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생의 4) 同 上
167 Ⅱ. 三一 運動 半島三千里의 江山은 우리들의 몸, 우리들의 집이다. 우리들 이 사랑하는 半島는 우리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너와 나는 서로 헤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내가 사랑하는 半島를 생각 하여 보라. 一寸의 벌레도 밟으면 꿈틀거리고, 一寸의 벌도 건 드리면 반드시 쏜다. 내가 사랑하는 半島여, 너는 어찌하여 오 늘의 悲境에 빠져 있는가. 지금은 각성하여야 할 시기이다. 明 朗光明한 太陽은 벌써 東天에 올라오고 있지 않는가. 너는 왜 잠자고 있는가. 소년학생들도 뜨거운 조국애와 독립정신을 가졌으며 나아가 일 50년 후에는 우리 민족을 전멸하려는 저 원 수를 우리들은 강철과 같은 마음으로 滅殺하리라 는 분노와 적 본민족에 대항하여 개심을 나타내게 되었다.5) 1905년 乙巳條約을 전후한 이후의 日帝의 탄압과 1910년 韓日 合併 이후의 武斷統治로서도 한국민의 애국정신과 독립운동을 억 제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이에 부채질을 하여 한국민의 전민족적 인 힘이 축적되어 폭발직전에 있었다. 3 1운동 이전에 한국민은 自我를 발견하고 세계대전이란 歷 史的 急變期에 新時代精神과 使命意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새 시대에 앞장선 민족의 선각자는 知識層 宗敎家 靑年學徒들이 었으며 이들의 사상은 前近代的인 封建的이며 王朝的 民族主義 내지 愛國主義익 색채가 농후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아직도 옛 王 朝에 대한 애수적 감정이 뿌리박고 있던 시기에 있어서는 불가피 한 것이었으며, 그러하였기 때문에 知識層의 抗日獨立運動家는 일 반대중과 밀착된 선각자가 되었고 어떤 조직과 밀령이 없어도 공 감을 갖고 호응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 5) 大正 7年 2月 19日 高第3270號 秘密結社發見處分의 件 續報
168 3. 三 一運動 에 3 1운동은 高宗의 暴崩과 因山日을 계기로 하여 폭발되었고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2) 2 8 獨立宣言 근대사에 있어서 후진국가의 思想的 運動은 대개 知識階層이 중심이 되어 선도적 역할을 하여 일어난다. 3 1운동 전의 韓國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敵地인 日本의 東京과 기타도시에 유학한 遊學生들은 국내와는 다른 특수환경에 놓여 있었다. 세계 제1차세계대전 후 日本에서는 自由民主主義사조가 팽배하여, 日警의 감시를 받기는 하였으나 국내에서보다는 자유로이 서구의 학설을 배우고 토론 할 수 있었고 행동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東京留學生의 2 8獨立宣言은 독자적인 學生獨立運動이었으나 3 1운동을 폭발하게 한 효시적 역할을 하였다. 이들 유학생들이 국내에 앞서 독립선언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다음과 같은 특수한 조건이 있었다.6) 그들의 연령은 평균 26세 이상이나 되어 대부분이 기혼자이며 당시로서는 학생이라기보다 는 사회지도자층이었다. 그런 까닭에 자기나름의 사상적 체계를 가질 수 있었다. 또 外地 특히 敵地에 유학하는 몸이었으므로 서 로 친목단체를 조직하여 단결되었다. 그리고 식민지 지배하에 있 는 조국에서 보다는 비교적 쉽게 學會를 조직하고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미 1909년 1월에 大韓興學會가 조직되었는데 이 학회는 유 학생간의 친목기관인 동시에 사회정치에 관한 토론을 위한 회합 이 되었다. 大韓興學會가 韓日合併을 반대 하는 전국적 운동을 일 6) 金成植 日帝下韓國學生運動 高大亞硏刊 日帝下의 民族運動史 pp
169 Ⅱ. 三一 運動 으키려다 해산당한 후로는 각 학교별로 同窓會와 各道別로 學會가 조직되어서 유학생간의 조직체는 지속되었다. 1912년 10월에는 安在鴻 崔漢基 등이 주동이 되어 주로 東京의 學友會를 연합하여 전체적인 學友會가 조직되어 유학생을 통할하는 중추적 조직체가 되었다. 學友會는 民族主義思想을 고취하는 기관이 되었고 東京 유학생은 누구나 學友會에 가입하게 되었으며 가입하지 않는 자는 國賊 또는 日本의 개 로 매도되었다. 그 기관지인 學之 光 은 유학생들의 抗日思想과 民族獨立精神을 고취하는 글을 게 재하였는데 발매금지를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의 공동 광장 으로서는 學之光 외에 朝鮮 YMCA會館에서 개최하는 雄辯大會 가 있어서 여기에서 愛國思想과 각자의 의견에 열을 띠워 토론하 였다. 그런데 일본 유학생은 排日思想에 있어서는 공통적이었으나 實 踐을 하는 指導者的 역할을 한 학생은 소수였고 그 사상도 급진 온건 등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세계 제1차대전이 일어난 후 1917 년 후반경부터 東京유학생간에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행동통일 에 대한 구체적인 움직임이 싹트게 되었다. 그들은 사석에서는 물 론이고 연설을 통하여 각기의 주장을 내세우게 되었는데 李光洙는 封建的 遺習을 타파하고 產業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였고 宋繼伯은 유학생간의 타락행위를 반성하며 日本의 政治家 實業家에 아부하 여 朝鮮의 自治를 하려는 미온적 행동을 통박하고 우리는 人道 를 위하여 또 朝鮮民族을 위하여 誠心 誠意 天地에 맹세하여 獻身 的 奮闘를 하여 朝鮮이 自主自治의 天下가 되어야 한다 고 하였 으며 美日協約을 비난하였다. 李琮根 玄相允 徐椿 崔八鑛 尹 昌錫 張德俊 등의 연설도 유학생의 반성과 自己犠牲위에 救國獨 立運動을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향은 基督敎
170 3. 三 一運動 의 발전이 한국민족의 구원으로 생각되었는데, 이는 유학생 중에 는 기독교인이 상당수가 있었으며 기독교인이 아니라하여도 기독 교 사상은 封建思想을 타파하고 近代化하는 첩경으로 여겨졌기 때 문 에 그러한 경향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徐椿이 우리 朝鮮에 있어서 基督敎는 西洋人의 힘을 빌리지 않고 우리 同胞의 열렬한 信仰의 힘을 이용하여 전도함으로써 장래에 있어서의 獨立 思想을 양성하여야 한다 한 연설은 그의 개인생각일 뿐 아니라 유학생간의 공통적 경향으로 주목된다.7) 1918년 세계 제1차대전이 종전되는 해부터, 세계정세의 급변 속에서 유학생간에는 더 구체적 운동을 모색하며 행동화하게 되 었다. 學友會 주최 운동회 때에는 한글로 단군의 소유 (檀 君所有)라고 쓰여진 韓國地圖를 걸어놓고 민족의 시조 檀君의 氣 像이란 제목으로 민족의 영웅인 乙支文德 鄭夢周 李舜臣 論介 의 가장행렬을 하였다. 미국대통령 월슨(W. Wilson)의 民族自決主義는 국내보다는 일 본유학생들에게 속히 전달되어 그 운동에 전환기를 마련하였다. 윌슨의 종전 후의 세계질서의 이념인 民族自決主義는 이미 1916 년 5월 美國이 참전하기 전에 그의 국내연설에서 발표되었으며 이제까지의 이념으로서의 民族自決論이 1918년 1월 講和의 원칙 인 14 個條案이 발표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이 民族自決論이 한 理想이나 理念에 불과한 것이거나 獨 墺同盟國 지배하에 있는 약소민족에만 해당하는 것이거나 간에 세계의 약소민족에게는 福 音과 같이 들린 것은 사실이다.8) 이 民族自決主義는 국내보다 일 본유학생에게 먼저 전파되어 民族의 自決權을 행동으로 주장하고 7) 現代史料 26. pp ) 李普珩 三 一運動에 있어서의 民族自決主義의 導入과 理解, 東亞日報 前揭 書 F.볼드윈 월슨, 民族自決主義, 三 一運動
171 Ⅱ. 三一 運動 세계에 호소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때야말로 祖國光復 의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유학생의 民族獨立 運動의 理念과 運動의 방향은 결정되었던 것이다. 民族自決論에 대하여 가장 빠른 반응을 일으킨 것은 美洲에 거 주하는 동포들이었다. 1917년 10월 뉴욕에서 24개국의 世界弱小 國同盟會가 열릴 때 朴容萬이 민족대표로 참가하였으며 14個條案 이 발표된 후에는 이에 의하여 전후의 한민족 자결권의 근거를 마 재미한인전체대표회의 를 개최하여 파리講和會議에 민족대표로서 李承晚閔讚鎬鄭翰 련하였으며 종전 후 1918년 12월 1일에 景의 3인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샌프란시스코우의 동포들은 독립 운동자금으로 30만원을 모집하는 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12월9) 東京에서 발간되는 Japan Advertiser 지에 재미동포가 민족대표로 李承晚 등 3인을 파리로 파견한다는 내용 이 작은 기사로 실리었다. 이 기사 내용은 순식간에 동경 유학생 들간에 전파되었고 학생들은 흥분하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15일 자 東京朝日新聞 에 재미동포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한다는 기사가 실리자 학생들은 더욱 흥분하였다. 유학생들은 이러한 시기를 맞이하여, 더우기 민족대표가 파리강 화회의에 참석함에 맞추어 민족의 전체적 의사를 표시하여야 하 며 이에는 擧族的인 一大鬪爭이 전개되어야 하는데 그 선봉은 우 리 유학생이라고 자임하게 되었다.10) 이리하여 세계대전 종전 후에 독립운동은 극비밀리에 국내외로 연결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일시에 국내외가 거족적으로 호 9) Japan Advertiser는 神戶에서 발행되었다고도 한다. 이 기사가 실린 날자는 12월 1일이라고도 하는데 미국에서 이 내용을 결정한 날이 12월 1일이라는 사실이(재 미 한인오십년사) 확실하면 의심되는 날자다. 10) 白寬洙 나의 人生白書 p
172 3. 三 一運動 응하기는 힘들었다. 이 단계에서 東京留學生의 2 8獨立宜言은 가장 먼저 일어난 집단적 힘에 의한 獨立運動의 효시가 되었던 것 이다. 유학생들은 1918년 12월 29일 東京明治會館에서 개최된 學友 會의 忘年會 및 다음날 30일, 朝鮮 YMCA會館에서 개최된 東西聯 合雄辯會에서 흥분과 기대속에서 민족독립을 위해서는 생명을 희 생하여 실천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이 웅변대회에서 急進的 신獨立論과 自決論 등 다양한 의견이 있었으나 民族의 自主獨立을 위한 거대한 민족운동을 일으켜야 하는데로 결정적인 매듭을 지어 갔다. 다음해 1919년 1월 6일 朝鮮 YMCA會館에서 열린 新年雄 辯大會에서는 연사로 尹昌錫 徐椿 李琮根 朴正植 崔謹愚 金 尙德 安承漢 田榮澤 등이 등단하여 世界의 思潮에 비추어 이 때 가 한민족의 自主獨立의 시기이며 학생들이 선봉에 서서 희생하여 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운동으로 日本 內閣과 駐日 各國大公使들에게 이를 알릴 것을 논의하고 이를 위 昌錫李琮根宋繼伯金尙德崔謹愚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이 때에 金安植金賢準 등은 국내에 군자금조달을 위하여 출발하였 으며 崔元淳鄭光好는 동지 규합에 나섰다. 實行委員은 獨立宣言 한 臨時實行委員으로 崔八鏞 田榮澤 徐椿 金度演 白寬洙 尹 書를 日本 內閣과 議會 및 駐日各國大公使에게 송달하기로 결정하 였다. 그리고 上海에 있던 張德秀를 유학생대표로 파리 강화회의 에 파견코자 하였으나 上海에서는 金奎植을 파리에 파견하고 張德 秀는 국내와 일본의 독립 운동연락과 그 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이미 국내에 파견되었다는 정보에 접하여 학생대표의 파견은 중지 하게 되었다. 이 때에 李光洙는 上海 北京에서 국내에 들려 玄相 允과 국제정세를 말하고 民族自決主義에 의하여 獨立運動을 일으
173 Ⅱ. 三一 運動 킬 것을 종용하고 東京으로 가서 崔八鏞 白寬洙 등과 독립운동의 구체적 계획을 의논하게 되었다. 한편 美國의 李承晚은 呂運弘을 東京에 보내어 尹昌錫 李琮根과 만나 미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과 국제정세를 전하였다.11) 이렇게 일본유학생의 독립운동은 국제 정세에 민감하였고 또한 실천적이었다. 그러나 일본 警視廳이 학생 간부를 소환하는 등 감시가 심해졌 기 때문에 白寬洙 崔八鏞 金度演 등은 對策委員을 위장 탈퇴하 고 이들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東京에 돌아온 李光洙 등과 독립운 동의 구체안이 의론되었다. 그들은 새로 朝鮮靑年獨立團 을 조 직하고 이 명의로 獨立宣言書, 決議文과 民族大會召集請願書를 초 안키로 하고 李光洙가 이를 작성하여 日文 英文으로 번역하였다. 宋繼伯은 獨立宣言書를 갖고 서울에 돌아와 鄭魯湜 등으로부터 인쇄 자금을 마련하여 東京에 갔고 朝鮮女子留學生會 대표 金마 리아도 금품을 헌납하였다. 이리하여 民族大會召集請願書는 2월 7일에 인쇄되고 獨立宣言書와 決議文은 국문은 등사판으로, 영문 은 타이프로 찍어 준비가 완료되었다. 2월 8일 오전 10시에 在日本東京朝鮮獨立靑年團 代表명의로 된 民族大會召集請願書, 獨立宣言書 및 決議文은 일본의 각 大臣, 貴衆兩議員, 各國大公使, 各新聞社 및 朝鮮總督府에 발송되고 오 후 2시에 朝鮮 YMCA 하층 강당에서 學友會 임원선거회라는 명 목으로 학생을 소집하였다. 이미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의 기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 전에 남녀학생 400여 명이 모여 입추의 여지도 없었고 초조 흥분상태에 있었다. 尹昌錫의 사회로 대회가 시작되자 대회명칭을 바꾸고 단상위에는 獨立宣言書가 씌여진 絹 布가 걸리고 白寬洙가 獨立宣言書를, 金度演이 決議文을 낭독하자 11) 金成植 前揭書 pp
174 3. 三 一運動 장내외는 朝鮮獨立萬歲 소리와 환호성이 진동하는 가운데 決議文 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어 金度演의 강연이 있자 흥분하여 통곡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일본경찰이 대회를 해산시키려 하자 장내에서는 일대 난투가 일어나 수라장이 되었다. 독립선언식이 끝난 뒤에는 시위행진을 할 예정이었으나 주동학생의 검거와 일 경의 저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2 8獨立宣言書에 서명한 在日本東京朝鮮靑年獨立靑年團 代表 11명은 다음과 같았다. 崔八鏞(早大學生), 尹昌錫(靑山學院學生), 金度演(慶應大學生), 李琮根(東洋大學生), 李光洙(早大學生), 宋繼伯(早大學生), 金喆 壽(慶應大學生), 崔謹愚(東京高商學生), 白寬洙(正則英語學校學 生), 金尙德(無職), 徐椿(東京高師學生) 2 8獨立宣言은 일본유학중인 동경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독립 운동이었으나 그들은 국내의 애국적 지식인이 일본에서 집결한 조직적 힘의 집결체였으며 국내외의 독립운동과도 민감하게 연결 을 짓고 있었다. 이런 뜻에서 2 8獨立宣言은 태동되어 가는 3 1運動의 효시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 宣言書에 반영되어 있듯이12) 前近代的 愛國主義를 現代的이고 市民的이며 革 命的인 西歐的 民族主義로 轉換시켰다 고 볼 수 있다. 思想的으로도 13) (2) 3 1 運動의 勃發 朝鮮總督府의 武斷支配下에서 국내에 있어서의 항일독립운동은 地下組織인 秘密結社의 투쟁으로 계속되었다. 秘密結社는 전민족 12) 本稿 5)項 獨立宜言害書의 內容과 性格 참조 13) 金成植 前掲書 p
175 Ⅱ. 三一 運動 의 항일독립정신의 기반위에 동지적 결합체로서 自然發生的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각 秘密結社는 點 또는 線의 조직으로 횡적 연락 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3 1운동직전에는 전민족 사이에 항일독립사상이 팽배 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은 秘密結社의 지하운동이나 개별운동이 아 니라 어떤 충격이 가해지면 거족적 운동으로 폭발하기 직전에 있 었다. 이에 導火線역할을 한 것이 해외의 독립운동이었으며 33人 民族代表의 獨立宣言이었던 것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民族自決論에 대하여 가장 빠른 반 응을 보인 것은 미국의 동포들로서 李承晚 등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키로 하였거니와 上海의 大韓靑年黨은 1919년 2월에 金奎植 을 파리에, 張德秀를 日本에, 鮮于爀 金澈 徐丙浩를 국내에, 呂 運亨을 露領에 각각 파견하여 정보를 교환하고 전민족적인 독립 운동을 계획하였으며 윌슨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된 인 에게 크레 韓國獨立에 관한 要望書 를 주어 파리강화회의와 윌 슨 대통령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 同濟社의 申圭植은 方孝成 郭儆을 국내에 밀파하여 국내지도자들과 접촉하여 국내 에서 日本統治에 반대하는 全國的인 民衆運動을 일으켜 국제여론 을 일으키도록 계획하였다.14) 이 때의 國外獨立運動은 滿洲 露領은 군대의 양성과 武力抗戰 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으나, 上海와 美洲는 그 여건에 따라 국 제정세에 민감하였으며 외교와 국제여론 환기에 주력하였다. 이렇게 국내외의 항일독립운동이 연결을 짓게 되었으나 그 주 체는 국내의 전민족에 있게 되었다. 이때에 1919년 2월 8일 東京 留學生의 2 8 獨立宣言이 일어난 것이다. 14) 方孝成 郭儆은 密入國하여 얼마되지 않아 日警에게 체포되었다
176 3. 三 一運動 國內에서는 朝鮮總督府의 탄압으로 모든 社會團體는 해산되었 으나 團體的 組織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宗敎團體와 敎育機關이 었다. 가혹한 식민지 통치 하에서도 敎育機關과 宗敎團體 중 특히 天道敎 基督敎는 조직을 갖고 항일독립사상을 기반으로 융성하였 다. 擧族的 獨立運動을 일으키는데는 조직 또는 조직간에 연합세 력의 형성이 필요하였다. 그 主動證가 된 것이 宗敎團體와 敎育機 關이 되었던 것이다. 1918년 말에서 1919년 초에 걸쳐 天道敎 基督敎學生은 각기 단체와 조직을 통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天道敎는 1918년 12월 人日紀念日에 天道敎의 영도자인 孫秉熙 가 지방교도들에게 以身換天 의 정신을 강조하여 이 社會에 큰 변화가 올 것을 말하고 다음해 1월 5일부터 49일간 祈禱會를 개최 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이 사회에 큰 변동이 올 것을 예언한 것으 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기간은 天道敎側이 독립 운동을 준비하 는 기간이었다. 天道敎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최초의 발의자는 崔 麟 權東鎭 吳世昌이었는데 이들은 1918년 말부터 세계정세와 국 내동향으로 보아 一大 獨立運動을 일으킬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었 다. 특히 東京留學生 宋繼伯이 국내에 들어와 崔麟에게 東京 留學 生의 獨立宣言 계획을 전하여 자극을 받았으며 孫秉熙는 어린 사 람들이 저렇게 民族을 위하여 運動을 한다니 우리로서 어찌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崔麟 등 3인은 1919년 1월에 孫秉熙와 독립 운동의 전개에 관하여 협의하고 이 달 하순에 ① 獨立運動은 大衆化할 것 ② 獨立運動은 一元化할 것 ③ 獨立運動은 非暴力으로 할 것이란 三大基本路線을 확정하였다 -. 이 三大原則 중 獨立運動의 一元化는 天道敎 단독으로는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崔麟은 먼저 崔南善 宋鎭禹와 제휴하고 基督敎
177 Ⅱ. 三一 運動 儒敎 佛敎와 연결을 지으려 하였고, 舊韓國의 高官까지 포섭하여 擧族的 獨立運動을 일으키려 하였다.15) 서울에서는 天道敎 외에 中央學校와 學生간에서 별도의 독립 운동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다. 中央學校에서는 교장 宋鎭禹 교사 玄相允 등이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日本留學生 대표宋繼伯이 玄相允을 찾은 뒤부터 구체화 하여 中央學校 宿直室에서 宋鎭禹 金性洙 玄相允이 독립운동거 사에 대하여 자주 회합하였고 崔麟과 연결을 짓게 되었다. 基督敎도 두 곳에서 독자적인 독립운동계획을 모의하게 되었는 데 하나는 李昇薰을 중심으로 한 平安道 長老敎계통이고 또 하나 는 서울의 監理敎계통을 중심으로 한 움직임이었다. 李昇薰은 長 老敎 長老이며 전재산을 기울여 定州 五山學校를 설립하고 신학 문과 애국사상을 고취한 인물로서 1918년 말부터 李明龍 梁甸伯 등과 독립 운동을 논의하였다. 1919년 2월 6일경에 밀입국한 上 海 橋胞代表 鮮于爀은 宣川의 梁甸伯목사와 定州의 李昇薰을 만 난 후 李昇薰의 소개로 平壤의 吉善宙 邊麟瑞목사와 독립 운동 에 대하여 논의하게 되었다. 이에 平壞에서는 百五人事件에 연루 되었던 基督敎人을 중심으로 하여 독립 운동을 계획하고 崇實專 門學校 등 基督敎系 學生의 示威運動을 계획하게 되었다. 서울 基督敎 監理敎系의 독립 운동계획은 天道敎側과 거의 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근원지는 鍾路의 YMCA와 南大門의 세브란스 病院이었다. YMCA 靑年幹事인 朴熙道는 基督敎중심의 靑年學生團 을 조직하여 독립 운동을 추진하고 있었고 세브란스 病院에서는 李 15) 義菴 孫秉熙先生傳記 朴賢緒 三 一運動과 天道敎界, 前揭書 東亞日報 포 섭대상 舊韓國高官중에는 賣國奴 宋秉畯 李完用도 있었으며 실지로 이들과 교 섭을 하였다. (三 一運動秘史 著者 故 李炳憲氏 談)
178 3. 三 一運動 甲成이 별도로 기독교 학생의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16)6). 朴熙道는 延禧專門學校學生인 金元璧과 서울 各專門學校 학생 과 졸업생의 대표적 인물을 망라하기로 하여 朱翼(普專) 康基德 (普專) 尹和鼎(延專) 尹滋英(專修學校) 李容卨(세브란스醫專) 朱 種宜(工專) 金炳璣 등이 觀水洞에 있는 大觀園에 모여 東京留學 生의 獨立宣言준비를 말하고 國內學生도 독립 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그런데 學生사이에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金元璧이 신중론을 제기하였으나 그도 곧 찬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학생 측의 독립 운동은 급진행되어 2월 20일, 朱翼이 獨立宣言書를 기 초하여 인쇄하려던 참에 李昇薰과 朴熙道가 天道敎와 基督敎가 合同運動으로 거사하기로 확정되었음을 알리자 학생운동은 이에 가담하기로 결정되었다. 天道敎側이 제안한 독립 운동의 一元化는 基督敎 佛敎 등 宗敎 團體와 學生의 대표가 호응하고 가담함으로써 성공하였다. 基督敎 측과 제휴하기 위하여서 먼저 李昇薰을 움직이기로 하고 玄相允 의 주선과 鄭魯湜의 중계로 金道泰가 崔南善의 密書를 갖고 2월 9일에 五山學校에 이르렀으나 李昇薰은 부재중이었으므로 시급히 上京할 것을 전하였다. 李昇薰은 2월 10일에 상경하여 宋鎭禹를 만나 天道敎의 孫秉熙와 崔麟이 基督敎側과 제휴하기를 원한다고 전하였다. 李昇薰은 목사 咸台永과 세브란스 病院에 근무중인 李 甲成을 찾아 찬동을 얻고 宣川으로 직행하여 查經會에 참석중인 梁甸伯 金秉神 李明龍 劉如大와 기타 基督敎人을 규합하였고 平壞에 들려서는 목사 吉善宙와 安世桓 孫貞基 申洪植 등의 호 응을 받았다. 李昇薰은 2월 17일, 다시 上京하였는데 宋鎭禹를 만 났으나 그의 열성이 전날과 못하고 교섭의 본인인 崔南善은 만나 一運動과 基督敎前揭畜書 東亞日報 16) 金良善 三
179 Ⅱ. 三一 運動 지 못하여 의심을 품게 되어 基督敎 단독으로 독립운동을 거사할 마음까지 품게 하였다. 그러던 중 需昌洞 協成學校 사무실에서 감 리교 지도자격 인물인 朴熙道 吳華英 鄭齊洙 申洪植 등과 운 동계획을 의논하고 찬동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朴熙道는 기 독교 중심의 청년단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敎理가 다 른 天道敎와 합작에 곧 찬성하지 않았다. 그 후 2월 21일에 崔南 善이 李昇薰을 찾아 함께 崔麟을 방문하였다. 이 자리에 서 崔麟 은 基督敎측이 단독으로 거사하느니보다 天道敎側과 합동할 것을 권유하여 李昇薰은 이에 찬동하고 基督敎側의 運動資金을 요구하 게 되어 天道敎側이 5천원을 대여하여 주었다. 이에 李昇薰은 1차 회담 때와는 달리 朴熙道 吳華英 등 감리교지도자 외에 장로교 의 咸台永 李甲成 金世焕 등이 참석하여 독립운동의 방법과 天 道敎와의 합작을 논의한 결과 합작에 합의를 보아 교섭위원에 李 昇薰 咸台永이 선출되었다. 朴熙道는 延禧專門의 金元璧과 普成 專門의 康基德 등과 의논한 결과 찬동을 얻어 24일 李昇薰과 咸 台永이 崔麟에게 통고함으로써 兩敎의 합동운동은 성립되었다. 한편 佛敎側의 동태를 살펴보면 본래 韓國의 佛敎는 은둔의 경 향이 있었고 日帝는 朝鮮王朝 때의 斥佛政策을 역이용하려고 日 本 佛敎의 도입을 꾀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佛敎系統은 中 央 學林의 학생을 중심으로 한 항일독립 운동이 있었고 僧 韓龍雲 은 1918년 말부터 天道敎의 崔麟과 독립운동에 관하여 논의도 하 였다. 그리하여 2월 10일경 독립운동의 一元化에 따라 韓龍雲이 佛敎側을 대표하고 또 僧 白龍城이 이에 가담하게 되었다. 儒敎는 義兵抗戰으로서 抗日 運動의 주류를 이루었 다. 그러나 큰 희생을 내고 당시 儒敎의 대들보로서 田愚 郭鍾錫이 있었으 나 隱遁不屈 내지 聖人의 道를 고수하는 온건파가 당시의 儒林의
180 3. 三 一運動 주류였다고 할 수 있다. 韓龍雲이 郭鍾錫을 儒敎代表로 하기 위해 그 를 찾았고 후일에 쾌락의 회답을 받았으나 그 때는 獨立宣言書가 인 쇄 완료되었기 때문에 民族代表에서 빠졌다고도 한다. 그러나 郭鍾 錫 계통의 당시의 儒林의 주류는 3 l운동 모의에 사전연락을 받은 적이 없고 설사 연락을 받았다 하여도 동조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 까닭은 철저한 衛正斥邪의 理念과 勤王精神을 주류로 하는 이 儒 林의 정신에 비하여 3 1運動의 주동체의 이념에는 王朝에 대한 이 념이 없었기 때문이다.17) 그러나 3 1 운동의 폭발과 전개에 있어 서 儒敎的이며 忠君愛族의 精神이 그基底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天道敎 基督敎 佛敎 및 學生이 합동하여 3 1 운동의 主動體가 단 일화하자 독립운동의 계획은 급속화하였다. 먼저 獨立宣言書에 서명 할 民族代表의 선정에 착수하였다. 天道敎에서는 孫秉熙 權東鎭 吳 世昌 崔麟이 서명하고 2월 25 26일에 걸쳐 상경중인 중앙과 지방 焕朴準承羅仁協林禮焕李鍾勳 11인에게 운동 내용을 알려 찬 동을 얻음으로써 15명이 서명하였다. 基督敎에서는 李昇薫梁甸 伯李明龍劉如大金秉祚吉善宙申洪植朴熙道吳華英鄭 春洙李甲成崔聖模金昌俊李弼柱朴東完申錫九 16인이 직 간부 중 李鍾一 權秉悳 梁漢默 金完圭 洪基兆 洪秉箕 羅龍 접 서명하거나 인장을 맡겼으며 佛敎의 韓龍雲과 白龍城 2인을 합쳐 民族 代表는 총 33인이 되었다. 이 33인 외에 3 1운동의 계획과 칠 천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중에 개인사정과 다음 단계의 운동을 지 도하기 위하여 서명에서 고의로 빠진 인물이 있는데 그들은 宋鎭禹 奎金道泰金智焕林圭安世桓李景燮金世焕鄭魯湜의 玄相允 崔南善 咸台永 康基德 金元璧 朴實浩 盧憲容 金弘 인이었다. 33인과 16인을 합하여 49인이라고도 한다. 1運動과 儒敎界, 前揭書 東亞日報 17) 許善道
181 Ⅱ. 三一 運動 그리고 獨立宣言書는 崔南善이 기초하여 天道敎가 경영하는 普 成印刷所에서 2월 27일 밤에 비밀리에 2만 천매가 인쇄되었다. 3 1運動의 계획이 아직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지 않을 때, 1919년 1월 22일 德壽宮에서 은거하고 있던 高宗皇帝의 急崩御 는 전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高宗의 壽는 68세로서 건강은 좋은 편이었으므로 그 死因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고 毒殺의 소식이 퍼지자 亡國의 恨에 젖어있던 온 국민은 日本에 대한 적개심과 분 노가 폭발하였다. 남녀 학생들은 흑색 喪章을 달고 동맹 휴학을 하고 상가는 撤市를 하였으며 음주가무를 금하였고 자결하는 사 람도 있었다. 아직도 知識人은 王朝에 대한 封建的인 충성과 復古 的인 동정 애수가 깃들고 있었던 것이다. 高宗의 暴崩은 거족적 독립운동에 충격을 주었고 因山日인 3월 3일은 지방민이 서울로 모여들어 거족적 거사의 기회가 되었다. 본래 3 1 운동의 거사일은 高宗의 因山日인 3월 3일로 예정되 었으나 사정으로 보아 앞당겨야 하였고 因山日을 택함은 不敬이 란 의견도 있었다. 3월 2일은 日曜日이므로 基督敎의 안식일을 피 하여 3월 1일로 정하였다. 朝鮮總督府의 헌병 경찰 밀정망도 3 1 運動을 사전에 탐지하지 못하였다. 3월 1일 2시, 民族代表 33인 중 29인이 서울 仁寺洞 泰和館에서 韓龍雲이 宣言을 알리는 식사가 있었고 그의 선창으로 大韓獨立萬歲 를 제창하였다. 그리고 長谷川總督과 鍾路警察署長에게도 獨立宣言 을 선포하였다. 한편 東京에 밀파된 林圭 安世換은 일본정부와 의 회에 獨立宣言書 등을 전달하고 上海에 밀파된 金智煥은 윌슨대통령 과 파리 강화회의 각 대표에게 獨立宣言書와 具陳書를 送信했다. 이 무렵, 그 전날의 비밀연락에 따라 시내 학생들은 파고다 公 園으로 운집하고 있었고 그 중에는 시민들도 끼어 있었다. 오후
182 3. 三 一運動 시에 儆信學校 卒業生인 鄭在鎔이 獨立宣言書를 낭독하자 끝날 무렵에 학생들은 모자를 하늘로 날리며 萬歲를 부르며 鍾路쪽으 로 뛰쳐나와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본래 獨立宣言式은 파고다公園에서 열기로 되어 있었으나 학생 들의 희생을 고려하여 民族代表는 泰和館에 모였던 것이며 파고 다公園의 학생들은 民族代表를 기다리다 鄭在鎔이 자진하여 獨立 宣言書를 낭독하였던 것이다. 獨立運動의 一元化原則에 의하여 天道敎 基督敎 佛敎 學生 의 대표자는 사전계획을 치밀히 준비하였고 民族代表는 獨立運動 의 상징이었으며 擧族的 運動의 導火線이 되었다. 파고다公園과 泰和館과 이와 거의 같은 시간의 중요도시에서의 獨立宜言은 요 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다음의 獨立運動歌는 3 1운동의 폭발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터졌고나 터졌고나 朝鮮獨立의 聲 10년을 참고 참아 인제 터졌네 三千里 錦繡江山 二千萬民族 살앗고나 살앗고나 아 한소리에 萬歲 萬歲 獨立인 萬萬歲 萬萬歲 朝鮮獨立 萬萬歲 (3) 3 1 運動의 展開 3월 1일, 서울에서 3 1 運動이 발발함과 거의 같은 시간에 平 安 南北道와 黃海道 咸鏡道의 주요도시에서는 獨立宣言과 함께 시위 운동으로 들어갔다. 3 1 運動 이전에 주로 기독교와 천도교를 통하여 비밀리에 연락
183 Ⅱ. 三一 運動 獨立宣言書傳達經緯表 備考 橫線 위의 數字는 傳達日字, 橫線 아래의 數字는 傳達張數이다
184 3. 三 一運動 義州宣川定州, 黄海道의 海州甕津瑞興, 咸鏡道의 元山 등 을 받고 준비 중이던 平安南道의 平壤 安州 鎭南浦, 平安北道의 도시에서는 서울과 함께 봉기하였다. 平安道 黃海道는 基督敎와 天道敎가 융성하였으며 咸鏡道의 元山 등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기 때문에 3월 1일 이후 같은 곳에서 萬歲示威가 되풀이되고 각 중소도시와 산간 벽지로 전파되어 關西 關北地方은 3월 5 6 일에는 全道로 파급되어 치열한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3 1運動의 발상지인 서울의 시위운동은 因山日에 참가하려 모 여든 지방민이 참가하고 또 각 洞으로 퍼지며 되풀이되었으며 京 華 등 각지로 번져나갔다. 江原道는 3월 2일과 3일에는 平康金 化에서 일어나 華川鐵原春川江陵原州 등 각지에서 示威 餓道에서는 3월 3일에 開城에서 시작되어 仁川 始興 楊平 江 運動이 전개되었다. 忠淸南北道는 3월 19일 槐山에서 비롯하여 淸州 鶴山 永同 報恩 天安 公州 등지에서 계속 일어났다. 慶 尙北道는 좀 늦게 3월 8일에 大邱에서 발단하여 比安 金泉 安 일에 釜山馬山 등지에서 발단되어 昌寧晋州三嘉草溪咸 東 盈德 善山 義城 등 각지에서 일어났다. 慶尙南道는 3월 3 陽 등 각지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국토의 남단인 濟州 島에서는 3월 21일에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18) 우리는 3 1運動 發展過程에 있어서의 統計를 朝鮮總督府의 各 種 統計와 朴殷植著 朝鮮獨立運動之血史 중의 통계를 이용한다. 그중 朴殷植의 통계는 본인도 확실한 것이 못된다고 하였으나 連 通制를 통하여 조사한 것으로 생각되며 근사치에 가까운 정확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3 1 運動에 참가한 각지방의 인원수는 18) 3 1運動에 참가한 각 지역과 그 人員數는 國史編纂委員會編 韓國獨立運動史 2 第二編 三 一運動 第三章 運動의 發展 참조
185 Ⅱ. 三一 運動 통계에 의하여 그 격화된 운동과 그 성격의 경향은 파악하는데 도 움이 될 뿐이며 실지에 있어서는 전국토의 전민족이 이에 가담하 였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각 지방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나는 순서는 앞 表에서와 같이19) 秘密連絡員과 獨立宣言書의 전달날자의 차이에 있었으며 이에 촉 발되어 각지로 파급되었던 것이다. 3월 1일 서울과 平安南北 咸南 黃海道의 주요도시에서 일제 히 示威運動이 궐기하였고 2일 이후 20일경까지는 전국 산간벽지 까지도 파급되었으며 3월 12일과 13일에는 西間島와 北間島에서 獨立 宣言大會와 示威運動이 일어났다. 독립운동의 파급은 鐵道沿 線을 따라 大都市에서 中小都市로 그리고 邑 面 里 산간벽지로 點火 파급되었다. 각 지의 운동은 일회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반 복 계속되었으며 地方에 사는 대부분 場市 日에 일어났으며 5일 10일 간격으로 되풀이되었다. 또 因山日에 상경하였다. 귀향한 사 람들에 의하여 운동은 확대되기도 하였다.20) 3 1운동은 天道敎 基督敎가 主動體가 되었으나 순식간에 거족 적 운동으로 발전된 것은 農民層이 가담하였으며 儒敎的 敎養에 따른 愛國思想이 全民族의 思想的 基盤이었기 때문이다. 또 3 1 운동의 선도적 역할과 비밀연락원으로서의 학생의 활동은 컸던 것이다. 各道別 運動狀況21)과 暴力化한 運動22)의 통계는 다음과 같다. 이 통계표에 의하여 각도별의 운동의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19) 國史編纂委員會 前揭書 pp ) 金鎭鳳 三 一運動과 民衆, 前掲書 東亞日報 21) 國史編纂委員會編 前揭書 各道運動一覽 참조 22) 朝鮮總督府 警務局 騷密 第4453號 獨立請願運動에 關한 件에 의거함( )
186 3. 三 一運動 道別運動狀況表 道別 京 江 忠 忠 全 全 慶 Ⅰ(1919년 3월-4월) 示威 回數 單純 示威 示威 衝突 畿 原 北 南 北 南 北 道別運動狀況 道別 慶 黃 平 平 咸 咸 計 南 海 南 北 南 北 示威 回數 單純 示威 示威 衝突 , Ⅱ (1919년 3월-4월) 道別 參加 府郡 運動其間 參加人員 道別 參加 府郡 運動其間 參加人員 京畿 江原 忠北 忠南 全北 全南 慶北 約47萬 約2萬5千 約2萬8千 約5萬 約1萬 數萬 約2萬6千 慶南 黃海 平南 平北 咸南 咸北 計 約10萬 約7萬 約6萬 約15萬 約2萬5千 約2萬 約百10萬 道 別 暴 力 運 動 狀 況 道別 京 江 忠 忠 全 全 慶 畿 原 北 南 北 南 北 京察憲 日本官 一般官 兵官署 計 憲死傷 署襲擊 襲 擊 道別 慶南 黃海 平南 平北 咸南 咸北 計 京察憲 日本官 一般官 兵官署 計 憲死傷 署襲擊 襲 擊 운동은 一元化 大衆化와 함께 非暴力化를 원칙으로 하였다. 각지의 운동은 처음에는 平和示威로 시작하였으나 日帝軍警의 발
187 Ⅱ. 三一 運動 포와 잔학한 탄압에 따라 군중은 흥분하고 보복적인 暴力運動으 로 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日帝의 잔인한 탄압으로 3 1운동은 약화되게 되었다. 3 1 운동의 전개는 대개 前期(3월 1일-19일) 中期(3월 20일 -4월 9일) 後期(4월 10일-4월 30일)로 구분할 수 있다. 前期는 3월 1일 이후 격렬화하는 과정이었고 中期는 운동의 절정기였으며 後期는 日帝의 탄압에 의하여 시위운동이 줄어드는 시기 이다. 3 1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각 지방운동은 거의가 基督敎 天道敎 佛敎 등 종교지도자와 학생이 또는 지방의 儒林이 주동이 되었으나 도시를 제외하고는 농민이 참가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편 서울에서는 印刷工場과 電車從業員의 단독시위와 파업 도 있었으며 陜川 海印寺 密陽 表忠寺 大邱 桐華寺의 僧呂가 운동 의 주동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宗敎學生別 등의 개별운동은 초 기에서는 있었으나 운동의 전개과정에서는 이러한 구별은 없어지 고 전지역적이며 전민족적인 운동이 되었다. 3 1운동은 초기 지도층에 의해 無抵抗主義 非暴力化主義를 원 칙으로 하였다. 이는 東學運動 義兵抗戰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한 것과 3 1운동의 主動體가 宗敎人이었던 데 연유하기도 하나 실지로 日帝의 軍警과 대항할 수 있는 武器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 1운동은 본질적으로 韓民族의 武裝抗日戰과 愛國實力 吾族의 生存 의 權利를 위하여 (28 獨立宣言) 또 正義人道生存을 위 하는 (31 獨立宣言) 결사적 독립운동이었으므로 民族對民族의 戰爭이었다. 31운동을 실지로 목격한 외국기자는 31운동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日本이 韓國을 어디까지나 掌中 養成運動이 합친 잠재적 한일운동의 폭발이었으며 에서 解放하지 않으려 함은 물론이나 이에 반하여 韓人이 日本의
188 3. 三 一運動 覇絆으로부터 離脫하려고 하는 결심도 역시 결코 日本의 결심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韓國獨立問題는 韓人에게 있어서는 死活 問題이므로 그들은 어디까지나 결말을 보지 않으면 그치지 않을 것이다. 23) 赤手空拳으로 막강한 日 帝의 軍警과 대항한 3 1운 동은 日帝의 잔학한 탄압 고문 학살로 많은 희생을 내고 2개월만 인 4월 말부터는 점차 약화되어 가고 地下運動化하였다. 그러나 3 1운동은 실패에 끝난 것이 아니고 上海에는 臨時政府가 수립 되고 滿湖 沿海州 美國 등 해외독립운동은 더욱 격화되고 국내 에서는 社會文化 獨立運動의 새 起點이 되었다. (4) 日本軍警의 彈壓 3 1運動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감에 따라 日帝 軍警에 의한 의 민족대표가 희망하였던 대로 平和的인 示威 로 끝까지 진행 비인도적 잔혹한 탄압은 점점 더 가열되어 갔다. 3 1운동이 33인 되지 못하고 비록 관공서나 警察署를 습격하는 등 暴力 사태에 이 르렀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전국적으로 볼 때 극히 일부분의 행동이 었으며 暴力의 행사라 할지라도 投石을 하여 유리창을 깨뜨리는 단 순한 것이었다. 이에 대항한 일본 관헌의 처사는 정당방위를 넘어 선 잔학한 학살행위였다. 3 1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韓國人이 무기률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었고 다만 이들 의 시위에 대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일본군경의 만행에 울분한 군중이 경찰관서를 습격하여 일본관헌을 타살하는 정도였다. 3월 1일 서울을 비롯하여 平壤 義州 宣川 鎭南浦 安州 元 23) 다니엘 판이버 韓國運動의 眞相 國際聯盟 第1回總會準備委員會調書 第30 號 朝鮮問題에서 轉載
189 Ⅱ. 三一 運動 山 定州 등지에서 시위운동이 발생하자 일제는 처음부터 警察 憲兵 뿐만 아니라 軍隊를 출동시켜 진압에 나섰다. 이들은 처음에 는 몇몇 주동자들의 선동에 의하여 일어난 단순한 시위로 보고 주 동자의 체포와 위협해산으로 이 3 1운동이 곧 종식되리라 판단하 여 일제 경찰관헌들은 시위운동자들의 체포 구금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宣川에서는 軍警이 출동하여 시위군중에게 처음부터 사격 을 가하여 많은 수의 살상자를 냈다. 이 宣川에서의 일본군경의 학 살은 3 1운동에서 최초로 발생한 잔학행위였으며 일제가 3월 1일 시위발생 시초부터 무력을 행사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24) 3월 2일부터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고 지역적으로 더욱 확대되 어 갔다. 그러자 總督 長谷川은 추호도 가차도 없이 엄중 처 단 하겠다고 공언하였으며 그후 만세시위가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자 總督은 朝鮮軍司令官 宇都宮에게 발포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여러 곳에서 일본군의 발포행위는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3 1 운동 발발 당시 韓國에 주둔하고 있던 日本軍은 완전무장 한 1개 師團 半의 정규군과 1만 이상의 헌병경찰이 전국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는데 3월 12일 이를 다음 표와 같이 경비구역을 정 하여 한국민의 만세시위를 진압하도록 하였다.25) 24) 尹炳奭 3 1 運動史 p.75 25) 朝鮮總督府 騷擾事件特報 第一 騷擾鎭壓에 관한 軍隊行動槪要 國史編纂委員會編 韓國獨立運動史 二 p.211 總督府統計年報에 의하면 1918년 말 현재 憲兵은 7,978명, 警察은 5,285명으 로 되어 있음. 1919년 3 1 運動 직전에 韓國에 駐屯하고 있는 日本軍은 근 2개 師圈의 병력 이 있었으나 朝鮮軍司令部의 편제로는 第19師團과 第40旅團 뿐이었다. 1915년 日本은 朝鮮軍司令部내에 第19 第20의 두 師團編成을 계획하고 1916년 4월에 편성에 착수하여 1921년 4월에 완성을 보았고(朝鮮年報 昭和 13年) 初代 20師團長은 1919년 4월 1일에 임명되었다. (朝鮮總督府官報 1919 년 4월 8일) 그리고 이해 6월 4일에 정식으로 龍山에 師團司令部가 개설되었 다.(每日申報 1919년 6월 6일)
190 3. 三 一運動 日本軍 配置表 師團 第19師團 步兵第40旅團 Ⅱ 大號 步兵 步兵 步兵 步兵 步兵 步兵 守備管區 第78聯隊 第77聯隊 第73聯隊 第74聯隊 第79聯隊 第80聯隊 黃海, 京畿, 江原의 各 一部 平安南北道 咸鏡北道 咸鏡南道 江原道의 大部分 忠淸南北 全羅南北 慶尙南北 그 후에도 3. 1運動이 더욱 확대되어가자 4월 4일 일본으로부 터 步兵 6개大隊와 憲兵 65명, 補助憲兵 235명을 파견케하여 駐 韓軍事力을 증강하였다. 그리고 종전 주둔병력과 새로 증파된 병 력을 합쳐 보다 유효한 재배치를 이달 15일까지 완료하였다. 이 재배치에서의 주안점은 각지 운동 발발시 종전보다 더 신속한 출 동이 가능하도록 주재지점을 확충하는데 있었다. 그 배치도는 다 음 日本軍配置表 Ⅱ와 같다. 26) 이와 같이 병력증강과 배치를 완료한 총독부는 한국민의 독립 만세시위에 대하여 좀더 가차없는 살륙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앞 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일본 군경에 의한 무력적 탄압은 3 1 운 동시초부터 감행되었던 것이다.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일본군의 잔 학한 학살행위중 대표적인 것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平安道地方은 본래부터 基督敎세력이 크게 퍼져 있어 民族運動 이 일찍부터 왕성하게 일어났던 곳이며 3 1운동 역시 서울과 연 락되어 이 지방에서 가장 먼저 발생하였고 그 운동도 치열하여 전 국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던 곳이다. 平北지방에 서 가 장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은 定州 萬歲運動에서였다. 3월 30일 基 26) 前揭書 特報 第一 軍駐屯地名 一覽表 이 자료에서 20師團의 명칭이 보이 는데 동 師團은 4월 1일 師團長의 임명과 동시에 창설되었다
191 Ⅱ. 三一 運動 師團 道 第19師團 咸北 咸南 江原 平北 軍隊駐屯地名 羅南, 城津, 茂山, 會寧, 鏡城, 穩城, 訓戎 慶源, 新乾原, 新阿山, 慶興, 古邑. 咸興, 永興, 元山, 舊鎭, 北靑, 利原, 新豊里, 甲山, 惠山鎭, 普天堡, 三水, 羅暖堡, 新嘉坡鎭 (咸興部隊는 更히 分散한 것임) 通川, 巨津 厚昌, 中江鎭, 慈城, 江界, 滿津鎭, 高山鎭, 渭原, 楚山, 碧潼, 昌城, 義州, 新義州, 龍岩 浦, 宣川, 鐵山, 定州, 大關, 龜城, 泰川, 雲 山, 靑山, 楊市, 北鎭, 熙川, 寧邊, 武平里 第20師團 平南 德川, 寧遠, 孟山, 成川, 陽德, 平壤, 鎭南浦, 新安州, 順川 沙里院, 載寧, 安岳, 黃州, 遂安, 栗里, 谷山, 新溪, 新幕, 瑞興, 汗浦, 海州, 松禾, 延安, 甕津. 京城, 仁川, 江華, 楊洲, 淸凉里, 開城, 坡州 長湍, 抱川, 加平, 漣川, 龍山, 楊平, 廣州, 砥平, 水原, 安養, 烏山, 平澤, 安城, 利川, 金良場 伊川, 安溪, 佳灑川, 平康, 金化, 新安, 楊口, 華川, 麟蹄, 原州, 橫城, 平昌, 春川, 洪川, 江陵, 襄陽, 三陟, 蔚珍 忠州, 堤川, 鎭川, 槐山, 永同, 報恩. 大田, 天安, 溫陽, 稷山, 公州, 舒川, 江景, 鳥致院 安東, 醴泉, 禮安, 英陽, 聞慶, 尙州, 金泉, 善山, 義城, 倭館, 慶州, 永川, 浦項, 寧海 大邱, 慶山, 高靈 釜山, 蔚山, 密陽, 淸道, 昌寧, 宜寧, 晉州, 河東, 三千浦, 統營, 居昌, 陜川, 山淸, 咸陽 全州, 群山, 金堤, 任實, 南原, 高敞, 淳昌 光州, 靈岩, 海南, 濟州, 羅州, 順天, 筏橋 黃海 京畿 江原 忠北 忠南 慶北 慶南 全北 全南
192 3. 三 一運動 督敎 天道敎徒가 중심이 된 4천여 명의 군중이 邑內에서 시위 를 전개하자 일군경이 출동하여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사망 28 명, 부상 99명이 발생하였으며, 371명이 체포당하였다. 뿐만 아니 라 그 이튿날에는 천도교 교회당과 주택, 4월 2일에는 五山學校와 기숙사 및 교회당을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27) 平南에서 가장 잔학한 일본군의 학살행위는 沙川과 孟山의 만 세운동에서였다. 3월 3일과 4일 양일간에 전개된 沙川의 만세시 위에 일본군경의 무차별 사격으로 즉사 43명, 중상자 20여명, 병 원에서 치료 중 사망한 자가 20여 명이나 발생하였다. 그리고 3월 10일에 孟山에서 있었던 일본군의 학살행위는 그들의 잔학성과 야만성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인 것이다. 즉 전일의 집회에서 일 본 헌병에게 체포당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군중들이 헌병 분 견소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자 第77聯隊 井上中尉가 인솔하는 日本軍이 군중들을 헌병대 내정으로 끌어들인 후 문을 닫아 걸고 는 총격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총탄에 맞아 즉사한 사람이 51명, 부상후 도망하다 죽은 사람이 3명, 부상자 13명이 발생하였다. 이 날 일본군이 발사한 실탄은 총 76발로서 이 총탄에 의하여 54명 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하였다 하니 이날의 일본군의 사격이 얼 마나 정확한 조준사격이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이날의 광경을 상세히 기록한 美國 上院議事錄을 보면 다음과 같이 이날의 상황 을 설명하고 있다.28) 3월 상순 孟山에서 민중이 독립만세를 절규한 후 56명이 헌 27)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下編 p.61에는 시위 참가자 50명과 관광자 70여 명이 피살당하였다고 기록됨. 28) 前揭 韓國獨立運動之血史 下編 p.210大正 8年 9月 29日 朝鮮騷擾事件에 美國基督聯合協議會 있어서의 死傷者數의 件 報吿 書 朝鮮의 狀況에 關한 報吿 東洋關係委員會決議
193 Ⅱ. 三一 運動 병분견소에 오라하여 갔다. 그들 전원이 헌병대 구내에 들어가자 헌병은 문을 잠그고 담위에 올라가서 전부를 사격하여 쓰러뜨린 후, 그 옆에 가서 아직 살아남은 사람을 전부 단검으로 찔러서 56 인중 53인이 죽고 3명만이 시체더미에서 기어 나올 수 있었다. 그 들이 과연 살아 남았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신용있는 기독교부인 이 수일의 여행을 하고 와서 외국인 친구에게 가서 이상과 같이 진술하였다. 그 진실성을 의심할 수 없다. 3월 6일 郭山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는 일본군경들이 銃 뿐 아 니라 野犬撲殺用 쇠 갈쿠리로 한국인을 살륙하였다는 사실이 특 이하다. 즉 이날 시위에 일본군경들은 소방대를 동원하여 쇠갈쿠 리로 시위군중을 마구 박살하였고 日軍은 무차별 사격을 가하므 로써 수십 명의 군중이 학살당하였다. 黃海道 遂安에서는 3월 3일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여기 서도 일본헌병의 사격으로 즉사자 9명 중상자 18명이 발생하였다. 忠南지방에서는 柳寬順이 주동한 並川萬歲示威가 대표적이다. 이 지역의 만세시위는 극히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일 군경이 출동하여 柳寬順의 부모 등 15명이 참살되었으며 주동 자 柳寬順은 일경에 체포되어 악독한 고문 끝에 16세의 청춘으로 순국하였다. 全北 裡里에서는 4월 4일 수백 명이 시장에 모여 만세시위를 전 개하였는데 이날 미리 주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 헌병들이 군중 들이 만세를 고창하는 순간 일제히 발포하며 군중속으로 돌격하여 들어와 마구 학살함으로써 5명이 즉사하고 10명이 부상하였다. 南原의 만세시위도 질서정연하게 전개되었는데 일본군경이 총 격을 가하여 즉사자가 11인이나 발생하였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 생하였다. 이 때 소금장수 房鎭烱도 군중속에 있다가 피살당하였
194 3. 三 一運動 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의 아내는 빨래방망이를 들고 뛰어나 와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일군에 잡히게 되 자 가지고 있던 小刀로 자결하였으며 이 기별을 듣고 老母는 우 리 同胞諸君은 충용을 더욱 분발하며 독립을 회복하여 내 아들 내 며누리의 원혼을 위로하여 달라 하면서 통곡하다가 자결하였 다.29) 慶南 咸安의 趙氏문중들은 趙聲根이 시위 운동의 주동자로 日 軍에게 피살당한데 격분하여 문중전체가 권기하여 시위운동을 전 개하다가 70여 명이 살해당하였고, 陜川에서는 3월 23일 일본군 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사람이 살상되자 격앙하여 관공서를 습 격 파괴하다가 출동한 일본군에 의하여 160명이 참살당하고 518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상의 예는 3 1운동기간중 대표적인 사례이나 이와 비슷한 일은 전국 어느 곳의 시위운동에서도 발생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참사는 3 1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매일 같이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상의 日帝 만행가운데서도 가장 처참하였던 것은 水原 堤岩 里에서 있었던 집단학살 사건이었다. 4월 15일, 日本陸軍中尉 有 田俊夫라는 자가 인솔하는 1대의 일본군이 堤岩里로 들어와 동리 사람들에게 알릴 말이 있다고 속여 교회로 모이게 한 후 교회 당 문을 밖에서 모조리 못을 박아 감금하였다. 그런 연후에 총격을 감행하여 학살하였다. 이때 한 부인이 안고 있던 어린 아기를 창 밖으로 내보내면서 나는 죽지만 이 아이는 살려 달라 고 애원 하였으나 일본군은 이 아이마져 찔러 죽였다. 이렇게 만행을 저지 른 일본군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하여 교회당에 기름을 끼얹고 불 29) 前揭書 韓國獨立運動之血史 p
195 Ⅱ. 三一 運動 을 질렀다. 이때 미처 죽지 못한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뛰쳐나 오려 하였으나 이미 불길에 쌓여 이들도 타죽고 말았다. 22명이 교회 내에서 죽었으며 교회 밖에서 죽은 사람은 6명이었다. 金正 憲이라는 사람은 요행이 교회당 벽을 뚫고 뛰쳐나와 밖에 있는 자기 부인과 도피하다가 古洲里에서 일본군에 발각되어 총살당하 였다. 이것도 만족치 않은 일본군은 堤岩里 전 민가 81호를 소각 하였다. 이와 같은 천인공노할 堤岩里의 학살 만행 소식을 들은 宣敎師 스코필드 가 4월 17일 堤岩里에 도착하여 만행의 현장을 카메 라에 담고 만행의 사실을 취재하여 美國에 보내므로써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다른 선교사들도 일본군경의 이와 같은 비인도적 처사를 지적 하여 이를 本國에 알려 人類 良識의 분기를 촉구하였고 美國敎會 聯合協議會는 이와 같은 선교사들의 고발을 모아 책자를 발간하 여 國會에 제출하는 한편 日本政府에 대하여 韓國人에 대한 박해 의 중지와 행정의 개혁을 요구하였다. 한편 이때까지 침묵을 지켜 왔던 日本人들도 堤岩里의 참상을 대하자 이를 비판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편 애드버타이져 (Japan Advertiser) 재 재편 크로니클 (Japan Chronicle) 등은 목격자의 증언까지 실어 堤岩里학살사건과 그밖 의 만행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또 日本基督敎會同盟은 늦게나마 행동을 개시하여 대표를 한국에 파견하여 참상을 조사케하고 만 행의 일단을 신문과 잡지에 연재하여 일본인의 반성을 촉구하기 도 하였다. 이와 같은 日本 국내외에서 만행규탄의 소리가 높아지자 日本 首相 하라 도 정부는 이 소요에 처하는데 가장 공정할 것을
196 3. 三 一運動 바라고 그 관리든지 인민이든지를 불문하고 秋毫도 가차할 의사 가 없고 水原事件은 그 책임장교를 이미 행정처분하고 군법회의 에 넘겨 현재 심리 중에 있다 고 뒤늦게나마 일본군경의 잔악성 을 일부 시인하였다. 그러나 日本軍警의 만행은 겉으로 나타나는 시위운동 장소에 서의 학살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당한 사람들은 일본군경들로부터 筆舌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비인 도적이고 잔학한 처사와 악형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비록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라도 폐인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남녀노소를 불문 하고 체포당하는 순간부터 일군경의 가혹한 처사를 감수하여야 했다. 한 가지 실례를 들어 보면 3월 7일 平壤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 에서 일본군경은 여 학생 2명을 체포하여 소화기구로 쓰는 갈구 리로 머리를 찍어 끌고 가다가는 전신주에 묶어 놓은 후에 경찰에 인계하기도 하였으며 도망가는 여학생을 쇠갈구리로 옆 가슴을 찍어 버리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하였다. 특히 부녀자들에 게 행한 일군경의 만행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이 잔악하였다. 전국각지에서 자행한 일본군의 만행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녀자에 대한 강간이었다. 일본군이 행한 강간사례는 헤아 릴 수가 없었으며 체포된 뒤에는 으례 옷을 벗기고 심한 모욕을 준 뒤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고 심한 구타와 악형으로 옥중에서 목 숨을 잃었다. 일본군의 고문 방법도 극도로 잔학하였다. 빨갛게 달아 오른 쇠 꼬챙이로 손가락을 지지기, 집게로 손톱 잡아 뽑기, 콧구멍으로 뜨거운 물이나 고추가루 부어 넣기, 참대바늘로 손톱사이 찌르기, 수없이 태형 가하기, 꺼꾸로 매어달기, 못박은 상자속에 집어넣기
197 Ⅱ. 三一 運動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악형을 자행하였다. 이와 같은 獄中에서 의 만행사례를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京城女子高等普通學校學生 盧永烈은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었는데 일제로부터 다음과 같은 악형을 당하였다.30) 十字架위에 나체로 仰臥케하고 뒤에는 숯불을 피어 놓고 鐵線 을 벌겋게 달구어 乳頭를 삼사차 난자한 후 결박을 풀고는 칼로 四肢를 찢으며 유혈이 낭자케 한 후, 다시 다른 십자기에 옮겨 놓 고 머리와 사지 등 5처를 앙와 결박한 후 고약을 불에 녹여 머리 털과 음문과 좌우겨드랑이에 부쳐 냉각시킨 후 갑자기 힘껏 잡아 뜯으니 털과 살이 함께 묻어나 선혈이 낭자하는 것을 보고 倭奴들 은 손뼉을 치며 대소하였다. 네가 아직도 또다시 만세를 부르겠는가? 하자 독립이 되지 못하면 죽더라도 계속하겠다 소위 우두머리라는 자가 묻기를 한즉 부득이 다시 감금하고 수일동안 음식을 주지 않고 굶기다가 제3일 다시 악형을 계속하는데 왜경 2명이 좌우에서 여학생의 손 을 한쪽씩 붙들고 竹針으로 손톱 눈을 찔러도 여학생들은 도리어 왜적을 꾸짖으므로 왜병은 더욱 노하여 패검을 뽑아 여학생의 입 술을 베이려 하였는데 長官되는 자가 얼굴에 나타나는 상처는 내 지 말라고 제지하여 부득이 의복을 입게 하고 엄중 견책한 후 석 방했다. 在留平壤宣敎師會에서 일본관헌의 고문 사실을 英文으로 본국 에 통보한 서류에는 다음과 같은 고문현장의 광경이 생생하게 기 록되어 있다.31) 처음 심문시는 먼저 의복을 벗기어 나체로 만든 후 한 팔을 30) 前揭書 韓國獨立運動之血史 p.69 31) 前揭書 韓國獨立運動之血史 p
198 3. 三 一運動 등으로 돌리고 한 팔은 겨드랑이 밑으로 돌리며 두 손을 등 뒤로 하고 삼바로 두 엄지손가락을 묶은 후 천정에 철구(鐵鉤)를 걸어 놓고 그 삼바의 한 끝을 잡아 당기면 사람은 공중에 매달려 3 4 분이 지나면 두 손은 천정을 가르치고 두 엄지발가락은 땅에 닿듯 하게 된다. 이와같이 하면 전신에 땀이 흐르며 혹 대소변을 방출 하게 되는데 소위 심문관이라는 자들은 독서도 하고 혹 바둑도 두 고 혹자는 자고 있어 치지도외하고 있으면 전신의 피가 두상으로 역류하며 근육이 卷起하여 4. 5시간 후면 혀를 빼고 기절한즉 의 사를 불러 갱생케 하여 2주간 동안을 매일같이 반복하는데 2 3 일이 지나면 두 엄지손가락은 가죽이 묻어나고 살이 끊어져 뼈가 나타나게 된다. 이상과 같은 일본군경에 의한 학살만행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 이 받은 피해는 정신상 인명상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3월 1일부터 5월말까지 일제의 만행으로 인한 우리의 피해를 朴殷値의 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나타난 통계로 살펴보면 3개월간 만세시위에 참가한 총인원은 2,023,098명이며 일군경에 의하여 피살당한 사람은 7,509명, 부상자는 15,961명, 체포된 사람 46,948 명이 되었으며 파괴 소각된 교회당이 47동 학교가 2동, 민가가 715호에 달한다. 그러나 日本側의 統計는 이 統計數字와는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즉 憲兵隊司令部와 警務總監部에서 작성한 朝鮮騷擾事件 道別 統計 ( )를 보면 시위 참가 군중은 총 463,086 명, 일본군 출동병력은 2,071명, 발포장소 185개소로 사살당한 시위군 중은 1,199명, 일본군 피살자 141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 것이 얼마나 허위에 찬 통계라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平北地方의 定州 沙川 孟山의 3개 지방에서 피살당한 군중만도
199 Ⅱ. 三一 運動 120명에 달하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5) 獨立宣言書의 內容과 性格 生의 朝鮮靑年團 28獨立宣言書와 大阪에서 작성된 宣言書, 滿 獨立宣言書는 3 1獨立宣言書를 비롯하여 日本에서 東京留學 洲에서의 39인이 서명한 大韓獨立宣言書(戊午獨立宣言書)와 間島 居留 朝鮮民族一同의 이름으로 작성된 宣言書, 露領 沿海州에서 大韓國民議會의 宣言書, 그리고 3 1운동 발발 후 국내 각 지방에 서 작성된 宣言書와 檄文 등이 있다. 이 여러 종류의 獨立宣言書는 개인이 초안하였다 하더라도 각 독립운동의 주동자들이 선출하여 위촉하였기 때문에 각 독립운동 의 原則的 理念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3 1獨立宣言書의 경우 운동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일부에서는 獨立宣言書의 내용에 불만 을 품고 별도로 작성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일반 대중이 獨立宣言 書의 내용과 이념을 어느 정도 이해하였는지는 별문제라 하여도 獨立宜言書는 3 1운동의 主動體의 지도적 이념의 반영이고 대부 분의 경우 각 지방의 지도자들은 이에 따라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 이다. 이들 獨立宣言書는 모두 祖國의 獨立을 宣言하는 내용이었으나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사상과 내용은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고, 특히 獨立을 宣言한 후 日帝에 대항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국내에 있어서의 3 1獨立宣言書는 人道主義에 입각한 非暴力 平和的인 투쟁을 주장하였으나 국외의 2 8獨立宣言書나 大韓獨立宣言書는 暴力과 血戰을 불사하는 宣戰布吿와 같은 것이었다. 이는 국외는 국내와 달리 특히 滿洲에서는 獨立軍을 배경으로 하였고 또한 理
200 3. 三 一運動 念의 차이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獨立宣言書 중 대표적인 3 1獨立宣言書와 2 8獨立宣言書, 大 韓獨立宣言書를 대조할 때 공통적인 것은 서두에서 韓國의 獨立 宣言을 하고 다음에 韓日關係와 日本의 侵奪을 규탄하고 끝으로 鬪爭 方法을 제시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 3 1獨立宣言書 의 내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3 1 獨立宣言書 吾等은 兹에 我朝鮮이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 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吿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 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 노라. 그리고 丙子修好條約 이후 日本의 侵略을 논박하고 兩國의 併 合이 不法임을 논박하여 日本의 小義함을 責하려 아니하노라 自己를 策勵하기에 急한 吾人은 他의 怨尤를 暇치 못하노라 라 아아 新天地가 眼前에 展開되도다 威力의 時代가 去하고 道義의 時代가 來하도다. 我의 固有한 自由權을 護全하야 生 하고 旺의 樂을 飽享할 것이며 我의 自足한 獨創力을 發揮하여 星滿한 大界에 民族的 精華를 結紐할지로다. 라 하여 新時代의 내도를 예견하였으며 끝으로 公約3章으로 3 1 運動精神과 鬪爭方法을 제시하였다. 公約 三章 一.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위하는 民族的 要求니 오직 自由的 精神을 發渾할 것이요 결코 排他的 感 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一.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
201 Ⅱ. 三一 運動 히 發表하라..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여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여금 어디까지던지 光明正大케 하라. 2 8獨立宜言書 朝鮮靑年獨立團은 我二千萬民族을 代表하여 正義와 自由의 勝利를 得한 世界萬國의 前에 獨立을 期成하기를 宣言하노라. 라는 서두에서 獨立宣言을 선포하였다. 다음으로 吾族은 實로 世界古民族의 一 이라하고 한국은 역 사상 異民族의 지배를 받은 바 없음을 밝히고 日本은 武力과 기만 으로 韓國을 병합한 경위를 서술하면서 吾族은 日本의 軍國主 義的 野心의 詐欺暴力下에 吾族의 意思에 反하는 運命을 當하였 으니 正義로 世界를 改造하는 此時에 當然히 匡正을 世界에 要求 할 權利가 有하여 라고 하였다. 국제정세와 새 時代의 도래에 관 하여서는 最後 東洋平和의 見地로 보건대 威脅이던 俄國은 이미 軍國 主義的 野心을 抛棄하고 正義와 自由를 基礎로 한 新國家의 建 設에 從事하는 中이며 中華民國도 亦然하여 兼하여 此後 國際 聯盟이 實現되여 다시 軍國主義的 侵略을 敢行할 强國이 無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투쟁의 원칙적인 방법과 앞날의 전망에 대 하여는 吾族은 正當한 方法으로 吾族의 自由를 追究할지나 만일 此 로써 成功치 못하면 吾族은 生存의 權을 爲하여 온갖 自由行動 을 取하여 最後의 一人까지 自由를 爲한 熱血을 流할지니 어찌 東洋平和의 禍根이 아니리요 吾族은 一兵이 無하니 吾族은
202 3. 三 一運動 兵力으로써 日本에 抵抗할 實力이 無하도다. 日本이 만일 吾族 의 正當한 要求에 不應할진대 吾族은 日本에 對하여 永遠히 血 戰을 宣하리라 고 하였으며 끝으로 決議文으로서 구체적인 독립운동의 절차와 방법을 제시하였다. 決 議 文 一. 本團은 韓日合併이 吾族의 自由 意思에 出치 아니하고 吾族 의 生存發展을 威脅하고 東洋의 平和를 擾亂케 하는 原因이 된다는 理由로 獨立을 주장한다. 二. 本團은 日本議會及 政府에 朝鮮民族大會를 召集하여 大會의 決議로 吾族의 運命을 決할 機會를 與하기를 要求함. 三. 本團은 萬國平和會議에 民族 自決主義를 吾族에게 適用하기 를 請求함. 右目的을 達하기 爲하여 日本에 駐在한 各國大 公使에게 本 團의 意思를 各該政府로 傳達하기를 要求하고 同時에 委員 三人을 萬國平和會議에 派遣함. 右委員은 旣히 派遣된 吾族 의 委員과 一致行動을 取함. 四. 前諸項의 要求가 失敗될 時에는 吾族은 日本에 對하여 永遠 히 血戰을 宣함. 此로서 發生하는 慘禍는 吾族의 其責에 任 치 아니함. 大韓獨立宣言書32) 구성은 2 8 獨立宣言書, 3 1 獨立宣言書 와 같으나 내용이 더 격렬하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살피면 다 음과 같다. 32) 大韓獨立宣言書는 1918年 戊午年에 선포하여 戊午獨立宣言書라고도 하나 한 편으로 宣言年月日이 檀紀 4252年(1919) 2月로 되어 있기도 하다. 이 宣言書가 間島에서 작성된 것은 확실하나 그 시기는 아직 확실치 않다
203 Ⅱ. 三一 運動 大韓獨立宣言書 我大韓同族男妹와 曁我遍球我邦同胞여 我大韓은 完全한 自主獨 立과 我等의 平等福利를 我子孫黎民에 世世相傳키 爲하야 玆에 異族專制의 虐壓을 解脫하고 大韓民主의 自立을 宣布하노라. 라고 하여 汎國內外의 韓民族이 독립을 선언하는 것으로 되었으 며 그 대표로 39인이 대표로 되어있다. 그리고 韓民族의 自主性과 歷史에 대하여, 我大韓은 無始 以來로 我大韓의 韓이오, 異族의 韓이 아니라 半萬年史의 內治外交는 韓王 韓帝의 固有權이오 百萬方里의 高 山麗水는 韓男韓女의 公有產이오 氣骨文言이 歐亞에 拔粹한 我 民族은 能히 自國을 擁護하며 萬邦을 和協하야 世界에 公進할 天民이라 韓一部의 權이라도 異族에 讓할 我가 無하고 韓一尺 의 土라도 異族이 占할 權이 無하며 韓一個의 民이라도 異族이 占할 權이 無하며 韓一個의 民이라도 異族이 干渉할 條件이 無 하며 我韓은 完全한 韓人의 韓이라 라고 하였다. 그리고 獨立 民族自保의 正當한 權利 이며 偶然히 衝動한 바 아 니며 非文明한 報復手段에 自足하는 바가 아니다 라고 주장 宣言은 하였다. 獨立을 성취하기 위한 투쟁 방법에 대하여서는, 起하라 獨立軍 一齊히, 獨立軍은 天地를 網한다. 一死는 人의 免할 수 없는 바이므로 犬豚과도 같은 一生을 누가 苟圖할 것이 냐 殺身成仁하면 二千萬同胞는 同體를 復活할 것이다. 라고 하였으며 끝으로 肉彈血戰하여 써 獨立할 것이다 라고 끝을 맺었다. 이는 武裝獨立軍을 배경으로 하고 있던 滿洲地方의 抗日獨立運動의 精神이었다. 朝鮮靑年 獨立團은 我二千萬民族을 代表하여 독립을 선언하였고, 31 獨 이 세 獨立宜言書를 대조할 때, 2 8獨立宣言書는
204 3. 三 一運動 吾等은 兹에 我朝鮮이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 임을 宣言하노라 하였는데 吾等 은 좁은 의미로는 民族代表 立宣言書는 33인을 말하는 것이나 넓은 뜻으로는 民族全體를 말하는 것이 된 다. 大韓獨立宣言書는 그 서두의 내용으로 보아 獨立宣言代表가 主動體로 되어있으며, 이를 國內外同胞에게 알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宣言書는 間島獨立運動者에 의하여 작성되었기 때문에 이런 형식을 취하게 되었을 것이며 民族代表는 주로 上 海 間島 美洲의 독립지도자의 이름을 열거하였다. 이 세 獨立宣言書는 思想과 論調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나 많은 그 구성과 문맥에 있어서 매우 흡사하다. 이중 물론 2 8獨立宣言 書가 獨立宣言書보다 선행하고 大韓獨立宣言書는 확실치 않으나 그 뒤에 작성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大韓獨立宣言書는 獨立軍의 武裝鬪爭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으며, 2 8獨立宣言은 韓國의 獨 立을 韓國과 日本의 대립의 투쟁에서 또 民族自決論에서 해결하 려는 철저한 韓國 民族的 民族主義인데 반하여 3 1獨立宣言은 無抵抗主義와 呼訴 民族自決論을 이념으로 하는 人道的 民族主義 였다. 33) 이 세 獨立宣言書 뿐만 아니라 기타 獨立宣言書가 그 내 용을 달리하는 까닭은 宣布의 시기와 장소와 처지 그리고 주동체의 사 상의 차이에 의한 것이며 民族獨立思想은 공통적이었다. 3 1운동이 폭발하자 獨立宣言書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이나 문맹자들도 祖國의 獨立을 부르짖다 日軍警의 총칼에 쓰러져 갔 다. 3 1운동에 있어서 獨立宣言書의 내용은 그 理念이었으나 운 동의 本質的 問題는 아니며 副次的인 것이었다. 崔永禧 33) 金成植 學生民族獨立運動, 前揭書 pp
205 Ⅱ. 三一 運動 4. 大韓民國 臨時政府 (1) 臨時政府의 樹立 3 1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日帝覇絆에서 독립한 政府 樹立 에 있었으므로 3 1 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全民族運動으로 발전하던 1919년 4월에는 민족 지도자들에 의해서 臨時政府 수립 을 보게 되었다. 臨時政府의 수립은 국내외 곳곳에서 계획되었는 데 그것은 3 1운동의 정리작업이면서 새 국면에 대처하는 民族 運動으로서 獨立運動의 발전이었다.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3 1운동을 주시하면서 臨時政府를 수립하고 공표한다는 것은 日 帝에 대하여 民族意志의 결정적 표현으로서 그들의 퇴각을 촉구 하는 의미로 중요했고, 또 日帝가 퇴각할 경우의 過渡的 統治體制 로도 생각해 볼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日帝의 통치가 계속 강화될 경우에는 全民族運動으로 나타난 3 1운동을 조직적인 독립운동 으로 발전시키는 의미에서 더욱 중요했다. 이것은 몇몇 지도자만 의 지혜의 所產이 아니라 村夫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족의 민중적 輿望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파리 講和會議가 개최되니 국제적으로 주도적 의 사의 표시가 필요하게 되어 臨時政府의 수립을 현실적으로 요구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臨時政府는 3 1운동의 후반기에 朝鮮民國臨時政府 처럼 3 1운동을 총결산하면서 日帝에 대한 受權機關으로 수립된 것도 있고, 한편 新韓民國政府나 세칭 漢城政府, 그리고 沿海州의 大韓國民議會나 上海의 大韓民國 臨時政府처럼 3 1운동을 발전
206 4. 大韓民國 臨時政府 시켜 독립 운동을 조직화하고 통할하는 民族 最高機關으로 수립 된 것도 있는데 이것은 당시 파리 講和會議가 개최된다는 점을 고 려하면 國交의 지위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의를 갖 는 것이다. 1) 各處의 臨時政府 臨時政府는 별표와 같이 국내에 3, 海外에 2, 모두 5개가 수립 공표되었는데 그 중에는 朝鮮民國臨時政府와 新韓民國政府처럼 추진 인물과 상황은 모르고 단지 撒布된 傳單에 의하여 확인된 것 도 있다. 그것은 지하 활동으로 추진한 것이므로 傳單 이외는 확 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臨時政府의 수립을 여러 곳에서 발 표했다고 해서 민족의 분열에 의한 정부의 난립으로 볼 것이 아니 라 3 1운동의 확대과정에서 전 민족의 임시정부 수립을 요망했 기 때문에 나타난 애국심의 발로현상으로 보아야 할 점이다. 즉 정부수립을 요망하는 민족의 의사를 植民治下에서 통일하여 정리 할 수 없었으므로 各處에서 추진 公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얼마 후에 大韓民國臨時政府로 통합일원화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면 각처에서 수립 발표된 臨時政府를 공표 일자의 순서에 따라 살펴보기로 한다. ㄱ. 大韓國民議會 大韓國民議會는 1919년 2월 露領 同胞社會의 단체였던 韓族會 中央總會를 改稱한 것이다. 이것은 블라디보스톡에 있었는데 그렇 게 개칭한 것은 講和會議에 임하여 說得力 있는 명칭 즉, 전민족 을 대변하는 단체 명칭으로 바꾸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207 Ⅱ. 三一 運動
208 4. 大韓民國 臨時政府
209 Ⅱ. 三一 運動 그리하여 尹海 高昌一을 講和會議 대표로 선출했던 것이다. 그런 데 때마침 국내에서 3 1운동이 일어나니 대표 파견을 보류하고 3 1 운동에 호응하여 3월 21에는 별표와 같은 閣僚 명단을 발표 하면서 정부수립을 내외에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上海에서 이미 金奎植을 講和會議 대표로 파견하였다는 통신을 접하고 國民議會는 민족의 통일된 지원 체제가 外交上 유 리했고 또 파리外交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다시 金奎植을 講和大 使로 임명하였던 것이다.1) 이와 같이 臨時政府 중에 가장 먼저 수립 공표된 大韓國民議會 는 그 후 上海의 臨時政府와 통합되었다. ㄴ. 朝鮮民國 臨時政府 이것은 傳單에 의해 확인된 臨時政府일 뿐 추진자도 확실하지 않다. 1919년 4월 10일자로 朝鮮民國臨時政府 創立章程 이 발표되었고 그와 함께 都領府令 제1호로 별표와 같은 각료명단과 제2호로 講和會議 外交委員 명단이 발표되었다. 傳單 撒布에 불과했지만, 朝鮮民國臨時政府는 다른 임시정부와 성격이 다른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日帝의 퇴각을 전제로 정식정 부가 수립될 때까지 過渡政府로 발족했음을 발표한 점이다. 따라 서 창립장정에서 정식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憲法委員會 구성 을 규정하는 한편, 日帝 總督下의 法令, 軍陵, 財產의 처리에 관한 규 정을 하여 受權 태세를 갖추고 있다.2) 즉, 다른 臨時政府는 독립 운동의 민족 최고기관으로 조직하고 있는데 朝鮮民國臨時政府는 1) 趙素昻의 韓國臨時政府於巴黎講和會之提案 제18항에서 臨時政府를 소개 하는데 大統領 副統領 國務總理 等 露領의 政府機構와 朴泳孝 등 역시 그곳 閣僚 名單을 넣고 있다. 講和會議 제출서류에 上海臨政要人이면서도 露領의 것 을 소개했던 것은 정부의 짜임새가 時宜에 적합하여 공개하기가 가장 좋았던 탓이 아닌가 추측된다. (趙素昻의 초안을 정리하여 金奎植이 제출함) 2) 朝鮮民國臨時政府 創立章程 第4章 立法. 第5章 外務 및 附則 參照
210 4. 大韓民國 臨時政府 3 1운동에 의하여 日帝를 逐出한 것으로 전제하고, 우려되는 無 政府狀態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조직한 것이니 독특한 성격 을 나타내고 있다. ㄷ. 大韓民國 臨時政府 31 운동을 계기로 수립된 臨時政府라면 상식적으로 上海의 大韓民國臨時政府를 가리킨다. 5개의 臨時政府가 공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후일 각처의 임시정부가 통합 일원화될 때 上海의 臨時 議政院을 주축으로 추진되었던 위에, 國 號도 上海의 大韓民國을 따랐고, 정부 소재지도 上海로 했기 때문 이다. 그리고 行政府와 議會가 운영되고 있던 臨時政府는 上海 뿐 이었다. 上海의 愛國志士들은 국내외 3 1 운동과도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던 점은 널리 알려진 바이지만, 그러므로 3 1 운동이 전개되 던 그 기관이나 그 후에도 각처 민족 지 도자와 연락을 유지하면 서 新韓靑年黨에서는 파리 講和會議에 金奎植을 파견하여 외교활 동을 펴고 있었다. 이와 같이 활동하는 동안 독립운동의 기반이 굳어 갔으며 그 기반은 上海가 租界地였고, 국내 및 해외 동포사 회와 교통이 편리하여 連絡도 잦았고, 많은 애국지사들이 모여들 어 어디 보다 유리한 處地에 있었다. 따라서 3월 하순경부터는 臨 時政府 수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프랑스租界 寶昌路에 玄楯을 總務로 한 임시사무소를 개설하고 추진하는 가운데 閣僚 조직문제, 國號문제, 舊皇室待遇문제 등 몇 가지 기본문제에 의견이 엇갈려 논란이 있기도 했으나 그것은 議 政院이 성립되면서 공식적으로 다듬어졌다. 1919년 4월 10일, 29명의 愛國志士가 프랑스 租界 金神父路에 모여 臨時議政院을 발족시키고 李東寧과 孫貞道를 議長과 副議長
211 Ⅱ. 三一 運動 으로 각각 선출하였다. 그리하여 11일에는 國號를 大韓民國으로 議決했고, 별표와 같이 각료를 조직하였으며, 全文 10條로 된 臨 時憲章을 심의 통과하여 13일에 공포하므로서 大韓民國 臨時政府 의 수립이 내외에 선포되었다. ㄹ. 新韓民國政府 이것은 日帝가 4월 17일 平安道 鐵山, 宣川, 義州지방에 撒布된 傳單을 발견하여 확인되었는데 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執政官 의 호칭이나 각료 명단이 세칭 漢城政府와 거의 같은 것을 보면 추진인물이 같거나 아니면 긴밀한 연락이 취해지고 있었던 것으 로 짐작된다. 또 國號가 上海의 新韓靑年黨의 명의와 같은 것을 보면 上海와도 연락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ㅁ. 漢城政府 세칭 漢城政府는 3월 중순부터 추진되어 4월 2일에는 仁川 萬 國公園에서 天道敎 基督敎 儒敎 佛敎 등 각계 대표가 모여 협의 하므로서 진전을 보아 4월 23일에는 서울 奉春館에서 13도 대표에 의한 國民大會가 열렸다. 여기에서 臨時政府가 선포되었으며, 때 國民大會趣旨書 宣佈文 臨時政府令 등 5종 傳單이 살포되었다. 이것을 세칭 를 같이하여 西大門 東大門 昌德宮 방면에서는 漢城政府라 한다. 漢城政府는 13道 대표로 구성된 國民大會 명의로 발표되었고, 국내 수도에서 수립된 臨時政府이므로 타처의 임시정부보다 3 1 운동의 계승관계가 밀접하여 후일 正統 政府로 인정받았던 점에 서 의의가 큰 것이다. 漢城政府의 傳單은 당시 聯合通信(UP通信 -UPI의 前身)에 의하여 세계에 보도되었고, 해외 동포사회에서 도 이 漢城政府를 주목하게 되었다. 따라서 露領과 上海의 臨時政 府에서도 漢城政府를 正統 政府로 인정하여 기왕의 정부 조직을
212 4. 大韓民國 臨時政府 개조하게 되었던 것이다.(後述) 그리고 漢城政府는 臨時事務所 위치를 미국 워싱턴(The Portland, 14st. Vermont Ave. Washington D.C. U.S.A.)에 두고 있 어 執政官 總裁 李承晚은 5월 워싱턴에 執政官總裁事務所를 설치 하고 大統領의 名啣으로 외교 활동을 개시했다. 2) 臨時政府의 統合과 新憲法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임시정부는 傳單政府를 除外하면 워싱턴, 上海, 블라디보스톡 3곳에 있었다. 수립 초에는 지리적 여건과 日 帝 때문에 곳곳에서 수립될 수밖에 없었지만, 3 1운동도 종막에 이르니 재정리하여 일원화 돼야 하는 필연성은 各 臨時政府의 당 면한 과제였다. 그리하여 의회를 갖고 있던 上海와 불라디보스톡 에서 통합을 추진하게 되었다. 4월 중순 露領에서는 이 문제를 구 체화하기 위하여 元世勳을 上海에 특파하였고, 上海의 臨時 議政 院에서도 정부 수립 직후부터 의제를 채택하여 논의하는 한편, 玄 楯 金聖謙을 露領國民議會측에 파견하여 交涉토록 했다. 이 무렵 에 漢城政府 수립선포와 워싱턴에서 李承晚은 漢城政府의 직위에 따라 執政官總裁事務所를 설치하고 활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上海 露領의 두 정부가 아니라 3처의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작업 이 이루어져야 했다. 露領과 上海의 두 議會와 각처에서 발표한 行政府의 일원화문 제, 정부 소재지문제 등이 難題였는데 議會問題는 露領에 파견된 玄楯 임석 하에 國民議會에서 議員 5분의 4가 上海 議政院에 편 입한다는 조건으로 國民議會가 해산 결의하니 上海의 臨時議政院 으로 단일화되었다. 그 후 다음과 같은 합의를 보았다.3) 3) 朱耀翰 安島山全書(1963) p.214. 金元容 在美韓人 50年史 p
213 Ⅱ. 三一 運動 ① 上海와 俄領(露領)에서 설립한 정부들을 일절 作消하고 오 직 국내에서 13道 대표가 창설한 漢城政府를 계승할 것이니 국내 의 13道 대표가 민족 전체의 대표인 것을 인정함이다. ② 정부의 위치는 아직 上海에 둘 것이니 각지에 연락이 비교적 편리한 까닭이다. ③ 上海에서 설립한 정부의 제도와 人選을 作消한 後에 漢城政 府의 執政官總裁制度와 그 인선을 채용하되 上海에서 政府 수립 이래에 실시한 行政은 그대로 유효를 인정할 것이다. ④ 政府의 명칭은 大韓民國 臨時政府라 할 것이니 獨立宣言 이 후에 各地를 원만히 대표하여 설립된 정부의 역사적 사실을 살피 기 위함이다. ⑤ 現任 政府 閣員은 일제히 퇴직하고 漢城政府가 택선한 閣員 들이 정부를 인계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합의는 7월 초 전후의 일이었는데 그에 따라 上海 에서는 8월 18일부터 9월 17일까지 열린 제6회 臨時 議政院 會 議에서 臨時 憲法改訂案과 臨時政府改造案을 상정하여 9월 6일에 모두 통과 확정하였던 것이다.4) 그리하여 漢城政府의 行政府를 정통화하고 합의사항도 있고 또 漢城政府에는 의회가 없으니 上海의 臨時 議政院이 새 헌법에 의 한 立法府가 되어 臨時議政院法도 개정하였다. 이제 정부는 하나 가 되어 9월 11일 새 憲法이 공포되었다. 大統領 李承晚은 워싱턴 에서 업무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國務總理 李東輝가 9월 18일 露 領으로부터 上海에 도착하여 李東寧 李始榮, 그리고 4월부터 上 海에서 활약하고 있던 安昌浩와 더불어 11월 3일 內閣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4) 臨時議政院 記事錄 第6回集 9月 6日字 記事
214 4. 大韓民國 臨時政府 국내외 전민족이 일으킨 3 1 운동은 임시정부 수립운동으로 정리되면서 5개의 임시정부 수립이 공표되더니 결국 일원화되었 다. 이것은 新憲法 前文에서 3 1운동을 다시 확인하고 半 萬年 歷史의 權威를 仗하야, 二千萬 民族의 誠忠을 合하야, 民族 의 恒久 如一한 自由 發展을 爲하야 組織된 大韓民國의 人民을 代 表한 臨時議政院은 民意를 體하야 元年 四月 十一日에 發布한 十 라고 표현한 介條의 臨時憲章을 基本삼아 本憲法을 制定하야 데서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上海 臨時政府側에서 보면 헌법의 개 정인데 위의 前文에서 보는 바와 같이 本憲法을 制定 한다고 한 점은 통합의 성격 및 新憲法의 중요성과 아울러 臨時政府의 개 조 통합이 독립운동에 있어 그만치 중요했던 這間의 사정을 立證 하는 것으로 보아진다. 新憲法은 前文 및 本文 58조로 제1장 總綱(綱領), 제2장 人民 의 權利義務, 제3장 臨時大統領, 제4장 臨時議政院, 제5장 國務院, 제6장 法院, 제7장 財政, 제8장 補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초기에 拙急히 만든 각처 臨時政府의 諸憲章보다 近代憲法의 체 제를 갖춘 것이며, 또 그 후 독립운동의 실정에 맞게 개정한 몇 번의 約憲보다도 自由主義와 民主共和國 憲法典의 實을 알차게 집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법전 자체로 보면 이상적이었지만, 獨立運動이 장기화하고 따라서 험난한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었 던 臨時政府로서 현실에 맞지 않는 점도 없지 않았다. 제1조와 제2조에서 전인민을 구성원으로 한 것, 제2장 人民의 權利義務, 제6장 法院 등이 그 대표적 조항인데 멀지 않아 개정했 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다음에 주목할 것은 三權分立을 표방하고 있는 이 헌법이 정부 형태는 大統領中心制와 內閣責任制를 절충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
215 Ⅱ. 三一 運動 은 光復後 1948년의 憲法을 연상케 하지만, 臨時政府 당시에 大 統領은 워싱턴에 있었고, 內閣은 上海에 있으므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의견충돌은 서로 먼 곳에 있었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정부가 두 형태를 절충하고 있었던 점에도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國務院 首班인 國務總理는 韓人社會黨 黨首로서 이미 소련의 볼 쉐비키 정부와 연락하고 있어서 후일 소련과의 관계 등 초기 정부 운영에 적잖은 혼선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聯立內閣이 가지고 있 는 通弊라 할 수도 있으나 정부의 절충형태가 더욱 부채질한 것으 로 봐야 할 것이다. 아무튼 1919년 9월의 憲法은 3 1 운동 후 全民族의 부푼 이 상을 골고루 표현한 것으로 현실에는 다소 맞지 않는 조항이 있었 으나 3 1 운동을 계승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한 민족적 矜持와 國 權恢復을 위한 의욕을 충족시키는데 훌륭한 헌법이었다. 3) 臨時政府의 性格 大韓民國 臨時政府는 國內가 아닌 上海에 있었다. 그러므로 얼 핏 보기에 亡命政府와도 같으나 망명정부는 아니었다. 1910년 庚 戌國恥 당시 大韓帝國의 정부요인들이 亡命하여 만든 것이 아니 라 3 1 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主體勢力이 세운 政府였다. 또 大 韓帝國과 大韓民國 사이에는 9년이란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 그리 고 大韓民國은 國體와 政體가 大韓帝國처럼 君主制가 아니라 民 主共和制를 표방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臨時政府는 亡命政府가 아니고 名分上 新生 大韓民國의 정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정부로서의 구실을 하자면 일정한 국민에게 유 효한 統治權을 행사하여야 하는데 臨時政府는 大韓民國의 영토 안에 수립되어 있지도 않았으며 大韓民國 국민에게 효력있는 통
216 4. 大韓民國 臨時政府 치력을 행사하지도 못하였다. 즉, 大韓民國 국토에는 日本의 통 치력이 미치고 있었다. 여기에서 臨時政府의 강렬한 정치적 意味 가 있는 반면, 國際法上의 虛點이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臨時政府 의 目標가 제시되고 있다. 그 목표는 말할 것도 없이 日本의 통치 력을 大韓民國 땅에서 축출하고 제거한 후 大韓民國 땅에 효력 있 는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식 정부를 수립하는 일이다. 이러한 목표는 臨時政府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소망이었으므 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활동하였으니 이 사람 들을 獨立運動者라고 하는데 독립운동자들은 각종 단체를 만들기 도 하며 혹은 개인적으로 활동하면서 모든 韓國人이 목표한 것을 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臨時政府는 그와 같은 단체와 사람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즉, 臨時政府는 독립 운동자를 기반으로 한 정부였다. 臨時政府와 統治權이 미칠 수 있다면 그것도 여러 가지 제한된 것이기는 하지 만, 獨立運動者와 그에 동조하는 동포에게만 효력이 미치고 있었 다. 따라서 독립운동의 범위 내에서는 정부의 구실을 다해야 했으 며 아울러 독립운동의 求心體로서 손색이 없어야 했다. 여기에 臨 時政府는 일반정부와도 다르고 보통의 독립운동 단체와도 다른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격은 臨時政府 1925 년의 憲法에 大韓民國은 光復運動 中에 光復運動者가 全人民을 31 운동 후 국내외에는 많은 獨立運動者와 그들의 단체가 있 代함 (第3條)이라는 규정에 잘 나타나 있다. 었다. 그런데 그 독립운동자들은 대부분 臨時政府에 대하여 納稅 와 兵役의 義務를 맡고 있었으며 臨時政府에 대하여 參政權과 獨 立 運動者間에 自由權과 平等權을 보장받고 있었다. 이와 같이 臨時政府는 독립운동의 범위 내에서는 정부로 군림
217 Ⅱ. 三一 運動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臨時政府가 3 1운동에 의한 민족적 소산 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적 소산인 臨時政府였기에 民族運動史에서 빛나는 광채를 받고 있지만, 그럴수록 臨時政府의 사명도 컸던 것 이다. 臨時政府는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국내와 해의 동포를 이끌 고 軍國主義 日帝와 싸웠던 26년 동안, 異國에서 정부 권위를 유 지하면서 독립 운동을 하느라, 쓰러질뻔한 아픈 고비를 몇 번씩이 나 넘는 험난한 역정을 걸었다. 그러나 끝내 쓰러지지 않고 3 1 운동과 累千年의 抗爭史를 가진 민족적 기반을 배경으로 光復 韓 國史로 연결시켜 줌으로서 日帝下 民族史의 主脈을 이루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2) 臨時政府의 活動 臨時政府 26년여간의 활동을 대체로 4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것은 初期活動期( ), 沈滞期( ), 移動期 ( ), 後期 戰爭期( )이다. 初期는 臨時政府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던 기간이었다. 다른 때 에 비하여 안정된 시기이기도 했고, 後期 戰時體制에 비한다면 1920년대 베르사이유 體制에 도전한 정치적 독립운동의 기간이기 도 했다. 沈滞期는 베르사이유 체제에 도전한 臨時政府가 국제정 국의 안정질서와 經濟恐慌의 영향을 받아 쇠퇴했던 시기인데 이 것이 李奉昌 尹奉吉 義擧로 활기를 찾았으나 동시에 臨時政府는 日帝의 습격으로 上海를 떠나야 했고, 계속되는 日警의 추격과 中 日戰爭의 惡勢로 수백리 수천리의 移動期를 겪었다. 그리고 後期 戰爭期는 臨時政府가 中日戰爭과 太平洋戰爭을 맞아 戰時體制를
218 4. 大韓民國 臨時政府 정비하여 對日戰을 졌던 重慶 滞留期를 말한다. 臨時政府의 활동이 보다 괄목할만한 시기는 초기와 후기인데 本項에서는 초기 활동을 祥述하면서 후기까지의 경향을 附言하고 이동기나 후기의 상황은 項을 달리하여 살피기로 한다. 1) 施政方針 臨時政府의 활동방향은 1919년부터 1926년에 걸쳐 行政府를 대표한 國務委員 趙腕九, 內務總長 安昌浩, 國務總理 李東輝, 國務 總理(代理) 申圭植, 國務領 洪震 등의 施政演說에서 나타나고 있 으나 거의 단기적인 것이거나 포괄적인 것인데, 그중에서 장기적 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1920년에 발표한 大韓民國臨時政 府施政方針 이란 것으로 臨時政府의 활동 방향과 개요를 파악하 자면 먼저 이것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大韓民國臨時政府施政方針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 內 政 第一項 統一集中 內外에 있는 國民을 連絡 統一하여 中央에 權力을 集中하고 我 民族 全體로 하여금 一致行動케 하기 위하여 左와 如한 方針을 實 施함. 1. 聯通制 實施 2. 民團制 實施 3. 各 團體와의 連絡 4. 人物聯絡 5. 人物集中 6. 宣傳員 派送
219 Ⅱ. 三一 運動 7. 反徒處置 8. 視察派遣 9. 機關報刊行 第二項 對敵 開戰의 準備 完成까지는 우선 現在로서는 日本 統治를 絕對 拒 絕하고 完全獨立의 意思를 表示하기 위하여 左記와 如한 方法을 實施함. 1. 示威運動 2. 納稅拒絕 3. 訴訟拒絕 4. 官公吏退職 5. 日本年號 旗章廢止 6. 日貨排斥獎勵 7. 日人法令拒絕 8. 臨時炸彈使用 9. 國內敢死隊組織 10. 國外敢死隊組織 11. 國內 各 敎派 褓負商 其他 各團體를 使用하여 以上 行事에 主動이 되게 함. 12. 飛行機使用 第三項 交通 國內 國外 各 機關과 民間의 交通을 위하여 左와 如한 方法을 實施함. 1. 通信機關 及 遞傳人 2. 航海事業實施 3. 無線電信 傳書鳩等의 施設
220 4. 大韓民國 臨時政府 4. 內地情况探查 5. 汽車船舶雇用 第四項 敎育 目下 獨立運動을 進行하고 있는 동안에도 될 수 있는대로 敎育 에 盡力하기 위하여 如左 方法을 漸次 實行함. 1. 敎科書編纂 2. 義務敎育實施 3. 官吏養成 4. 緊要使用에 관한 技術의 習得을 위하여 外國에 留學生을 派 遺함. 5. 書籍刊行 軍 事 第五項 開戰準備 1. 軍事適材召集 2. 國外義勇兵召集訓練 3. 司法部分置 4. 軍事私團調查 5. 國內義勇兵(募集) 6. 士官學校設立 7. 飛行機隊編成 8. 炸彈隊編成 9. 外國士官學校遊學 10. 戰時緊用技術學習 11. 軍物輸入交涉 12. 準備糧穀 13. 軍事宣傳員派遣
221 Ⅱ. 三一 運動 14. 軍法 軍規制定 外 交 第六項 世界에 대한 宣傳 世界列國으로 하여금 大韓의 獨立이 世界平和 維持上 必要함을 깨닫게 하여 我民國에 同情케 하도록 左와 如한 方法으로서 宣傳 을 實行함. 1. 宣傳事務擴張 2. 宣傳員派遣 3. 政黨 敎會 及 各團體利用 4. 遠東居留 美人使用 5. 韓中親睦會를 組織 第七項 調査 宣傳의 資料와 外交의 進行에 供用하기 위하여 左와 如한 方法 으로서 內外의 調査를 實行함. 1. 內地 及 日本에 關한 調查員을 密派 2. 國際問題 列强政策 世界思潮 審査 及 關係新聞 雜誌 鬼集 3. 各國政界 對我意思探査 4. 日本에 密探 派遣 第八項 交涉 我民國에 特殊한 關係가 有한 諸國과 相互 提携하고 他列國에 도 同情을 얻기 위하여 左와 如한 方法으로서 交涉을 實行함. 1. 中國外交團編成 2. 露國에 交涉員派遺 3. 蒙古에 交涉員派遣 4. 日美戰爭促進 及 (對美)軍事援助要求 5. 外國借款交涉
222 4. 大韓民國 臨時政府 6. 日本을 꺼리는 諸國에 特別交涉 7. 獨逸에 交涉員派遺 8. 英 佛 伊에 交涉 9. 新興弱少國과 交涉 10. 中日 駐在外交官에 交涉 11. 國際聯盟에 獨立承認 及 參加要求 財 政 第九項 收入 今回 大業의 諸般 經費는 金錢이 있은 後 成功하게 되므로 相當 한 金力을 準備하기 위하여 左의 方法으로서 財政을 收入함. 1. 人口稅徵收 2. 愛國義捐金收合 3. 公債發賣 4. 公債不許亂賣 5. 公債發賣人賞與 6. 臨時所得納稅 7. 外國借款 8. 實業 及 金融機關設置 第十項 豫算 財政의 收入 及 支出에 調定의 豫算이 없으면 財政은 그 軌道를 失하고 事業을 成就하지 못한다. 1. 豫算 決算 政府專任 2. 每月支出調定 第十一項 積立 敵의 障碍 其他의 關係로서 財政收入의 途가 斷絕하면 政府를 維持하지 못하고 大業의 進行이 中斷한다. 이에 備하기 위하여 政
223 Ⅱ. 三一 運動 府 存廢에 관한 以外에는 絕對로 이를 使用하지 못함. 第十二項 貨幣製造 尺地라도 光復한 時는 民國의 正貨를 通用케 할 必要가 있음은 明白하다. 그러므로 今日 이의 準備를 하지 않으면 他日 渴에 臨 하여 井을 파는 恨歎을 면하지 못하므로 지금부터 우선 紙幣一億 圓 以上 製造하려 함. 司 法 第十三項 司法實施 獨立運動 進行中 秩序維持 及 光復을 達成한 後 司法行政을 準 備하기 위하여 左와 如한 事項을 實行함. 1. 普通法院 簡單構成 2. 特別法院 構成하여 反徒懲罰 3. 臨時監獄設置 4. 民刑事法律編纂 5. 世界司法制度調査(參酌) 第十四項 賞罰 光復事業에 대한 忠義를 獎勵하고 反徒를 懲成하기 위하여 左 와 如한 方法으로서 褒賞과 懲罰을 施行함. 1. 勤勞者褒賞 2. 反徒懲罰 이상은 原文에서 설명문을 제외한 그대로를 옮겨 놓은 것이다. 이것을 보면 臨時政府 활동의 개략을 알 수 있다. 물론 異國에서 監獄所나 造幣所는 설치할 수 없으니 司法實施 나 貨幣製 造 같이 空文化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 계획대로 실현을 보았으 며 그 중에도 聯通制와 交通局의 설치, 炸彈活動, 外交交涉 등은 특기할만하고 후에 光復軍 조직으로서 對日戰爭을 수행했던 일은
224 4. 大韓民國 臨時政府 臨時政府 26년의 結晶일 것이다. 2) 獨立運動의 統轄 臨時政府는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서 국내외 同胞社會를 통 할하여 獨立運動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 였다. 그리하여 聯通府와 交通局을 설치하였고, 聯通府와 交通局 이 없는 해외 동포사회에는 居留民團 혹은 그에 준한 기구를 설치 하여 통할하였다. 그리고 통할의 성과를 올리기 위하여 調查員 特派員 宣傳員을 파견하여 民心을 臨時政府로 집중시키려고 노 력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臨時政府 內政에 속하는 것으로 통합 전 臨時政府 초창기부터 실시하고 있었다. 聯通制는 동포사회에 대한 地方行政制度로서 국내와 滿洲지방 에 실시하였는데 정보의 통신과 자금수합의 업무를 수행하였고 서울에 總辦, 各道에 督辦을 두는 등 다음과 같은 行政組織을 갖 추고 있었다. 전역과 京畿忠淸道의 일부지역이었고 江原慶尙全羅道의 경 우는 거의 실시되지 못하였는데 江原道와 忠淸全羅道 일부에는 국내에서 聯通府가 설치되어 있던 곳은 平安 黃海 咸鏡道의 大韓獨立愛國團(속칭 鐵原愛國團)이 聯通府 업무를 수행하였고, 慶 尙道와 그 외 지역에서도 靑年外交團 大韓愛國婦人會 大韓
225 Ⅱ. 三一 運動 赤十字會의 조직이 聯通府 업무를 일부 대신하고 있었다. 원래 국내에만 실시하려던 聯通制를 확장하여 南滿洲地方에도 실시하여 1920년 10월 墾北 南部總辦府와 北部總辦府 설치하여 西間島와 北間島 동포사회를 통할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臨時政府 산하 西路軍政署와 北路軍政署 조직을 옮겨 놓은 것이며 많은 同 胞가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실시되었다. 시베리아지방에는 總辦 으로 임명하려던 崔在亨이 피살되어 계획이 좌절되었다. 聯通府의 활동은 臨時政府의 선전, 愛國金 人口稅의 收合 정보 연락 등이 주요한 것이었으며 또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런데 1919년 9월 平南에 특파된 劉基峻이 관계 서류를 日警에게 빼앗 긴 뒤 수난을 당하게 되어 결국 1922년 이후는 거의 계속되지 못 하였다. 다음에 交通局은 交通部 소관 통신기관인데 통신업무 외에 재 정 업무도 수행하여 聯通府와 실질적으로 비슷한 활동을 하고 있 었다. 1919년 5월 국내로 통하는 鴨綠江口 安東에 交通部 安東支 部를 설치하면서 그 업무가 시작되었는데 安東支部는 安東 北坎 子에 있던 아일랜드 사람 조오지 엘 쇼우 (George L. Sho w)5)가 경영하는 怡隆洋行의 2층에 사무소를 두고 있었다. 支部 밑에 각 郡에는 支局, 각 面에는 支所를 두고, 事務局 金錢募集 課 通信課 人物紹介課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 해 10월에 安東交通事務局으로 개편되었지만, 이 交通局의 조직도 聯通府처럼 平安 黃海 咸鏡道지방에서 활동이 활발하였 조오지 엘 쇼우 의 이름은 蘇志英 조오지 쇼우 등으로 기록에 나 오는데 그의 이름은 George L. Show 이다. 필자는 1969년 聖心女子大學에 재직하던 아일랜드 출신 神父 오록(O. Lock)을 만나 交友하는 증에 쇼우의 本名 을 알게 되었다. 쇼우는 아일랜드人으로 日本 女子와 결혼하여 安東에 살면서 韓國 독립 운동을 지원하다가 옥고까지 겪었다. 5)
226 4. 大韓民國 臨時政府 고, 南部지방에는 1920년 5월 慶尙道 조직 계획이 누설되어 특파 원 金泰圭가 체포되는 등 계획 단계에서 그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交通局 업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安東의 太古 船輯公司 代理店이던 怡隆洋行이었는데 그것은 경영자 조오지 엘 쇼우 에 관한 다음과 같은 요지의 日本側 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6) ① 1919년 11월 李堈公事件을 지원했다. ② 滿洲의 獨立運動者에 武器輸送 ③ 臨時政府의 秘密文書 전달 ④ 1920년 臨時政府 要人이 怡隆洋行 소속 桂林丸을 타고 上海 에서 安東으로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英國 總領事의 양해를 얻어 체포하려고 하니 쇼우가 거절하여 체포하지 못하였다. ⑤ 1920년 7월 11일 吳學洙事件 때 그들 12명은 怡隆洋行에 숨어 있었고, 무기와 폭탄 및 화약제조기도 여기에 숨겨 두고 있었다. 위의 기록을 보면 怡隆洋行은 獨立運動의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고, 또 交通局 업무의 중요성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交通局의 활동도 聯通府에 이어 1923년 이후 쇠퇴하였다. 調查員 特派員은 수시로 국내외 동포사회에 파견되어 각종업 무를 수행하였고, 宣傳業務는 1919년 9월부터 시작되었는데 정부 가 통합된 후 얼마 뒤에 勞動局 업무가 중지되니 國務會議에서는 그 總辦을 맡고 있던 安昌浩를 1920년 1월 19일 宣傳委員長으로 선출하여 宣傳業務를 맡게 했다.7) 그리하여 그는 국내에 地方宣 6) 日本 外務省亞細亞局 쇼우事件槪要(1922) 7) 在上海日本總領事館 朝鮮民族運動年鑑의 1920년 2월 3일 기사에 수록되어 있
227 Ⅱ. 三一 運動 傅隊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居留民團制는 그 법령이 공포되기도 전에 上海에서는 실시하고 있었는데 1920년 3월 16일 國務院令으로 臨時 居留民團制가 공 포되므로서 공식화되었다. 居留民團은 해외 동포사회의 地方 행정 기구로서 內務總長의 감독을 받아 운영토록 되어 있다. 지방의회 인 議事會까지 있었던 이 居留民團은 海外동포사회 전역에 조직 할려고 했으나 각 지역 나름대로의 특수성 때문에 上海와 후일 美 洲 일부에만 조직하였고, 臨時政府의 허가를 받아 滿洲에서는 西 路軍政署(西間島-南滿洲)와 北路軍政署(北間島-東滿洲), 美洲에 서는 大韓人國民會가 居留民團 기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동포들은 大韓國民會를 조직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파리 委員部의 통할을 받았다. 동포사회 중에서 시베리아만은 당초부터 臨時政府와 별도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것은 臨時政府가 통합될 때 國民議會와의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그 보다 시베리아지방은 당시 볼쉐비키 革命問題로 소련 자체의 內 亂이 계속되고 있었던 위에, 日本軍이 進駐하고 있어서 소련의 對 日 外交와의 관계 등이 얽혀, 韓國獨立運動은 소련의 강한 통제를 받다가 결국 그들 共產黨에서 직접 지배하게 되었으니 臨時府의 힘이 미치기 어려웠던 것이 실제의 이유였다. 3) 外交活動 초기의 외교활동은 후기의 戰爭外交와 달리, 政治外交의 성격으 로서 파리 講和會議와 國際聯盟, 그리고 유럽 强大國 및 미국 소 련 중국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처음에는 파리 講和會議에서 는데 誤記이다.(上海版 獨立 1919년 9월 6일 기사와 朱耀翰 安島山全書 (1963 p. 621 및 p. 627 參照)
228 4. 大韓民國 臨時政府 독립의 보장을 받기 위하여 교섭을 벌였으나 뜻과 같지 않아, 다 음에는 列國政府가 개별적으로나마 臨時政府를 승인하도록 외교 활동을 폈다. 그러나 臨時政府는 亡命政府도 아니고 또 실제 統治 力을 유효하게 행사하는 정부도 아니었으므로 그것도 어려웠다. 그리하여 장기적 布石으로 각국 정부와 단체 및 민간지도자가 獨 立運動을 지원해 주도록 교섭하는 外交活動으로 변질되었던 것이 다. 외교활동이 변질된 후, 뒤돌아보면 1925년 3월 31일 獨立 新 美國의 윌슨을 正義 人道의 唯一한 天 神으로 알고 파리 講和會議에서 大韓獨立의 許可狀을 내 린 다고 夢想하던 그때의 그 부풀었던 이상은 정말 몽상이었다. 聞 社說에서 지적하듯이 그리고 각국에 대 하여 지원을 구하던 외교도 1920년대 베르사이 유 體制(파리 講和體制)에 의한 국제 안정 基調 때문에 臨時政府 로서 힘겨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夢想에 의한 外交였고, 안정 기조 때문에 힘겨웠 던 외교였으나 즉, 國際向方과 다른 韓國人의 요구였으나 人類正 道에 근거한 요구였고 활동이었으므로 世界史上 더욱 빛이 있고, 한 민족의 주체적 의지 표현으로 값있는 것이었다. 臨時政府는 각처에 外交委員部를 두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에 徐載弼을 중심한 韓國通信部, 파리에 金奎植을 중심한 파리 委員 部, 워싱턴에 李承晚을 중심한 歐美委員部 등인데 이것은 모두 중심인물에 의하여 설치된 것을 1920년 9월 2일 敎令으로 법제 화하였다. 李承晚은 1919년 9월 大統領이 되면서 파리委員部와 韓國通信部를 歐美委員部 산하에 흡수하였으며, 한편 臨時政府 外務部에서도 직접 다음과 같이 各地 駐在外交委員을 파견하고 있었다. 北京駐在 韓世良 曺成焕 李光
229 Ⅱ. 三一 運動 露領 우수리駐在 韋惠林 東三省外交委員長 李鐸 同 委員 吳德林 그리고 1934년에는 外務部에 外務委員會를 설치하였고, 워싱턴 에 駐美外務行署를 두고 李承晚을 위원에, 하와이에 李容稷을 특 파원으로 임명했으며 3년 뒤에는 李承晚을 면직하고 玄楯을 하와 이宣諭委員으로 임명하는 한편 徐嶺海를 駐佛特派員으로 파견하 여 통신연락을 취하도록 했다. 또 臨時政府의 重慶 滞留期에는 駐美外交委員部(會)를 설치하 였다. ㄱ. 平和會議를 前後한 파리委員部의 活動 파리 講和會議에 대한 外交는 31운동 전부터 上海와 露領에 서 착수하고 있었다. 上海의 新韓靑年黨에서는 金奎植을 파리로 파견하였는데 그는 파리에서 韓國民代表館과 通信局을 설치하고 스위스와 독일에 있던 李灌鎔과 黃玘換을 불러 함께 일했다. 또 上 海에서 金湯 趙鏞殷(素昂) 呂運弘이 도착하여 힘을 모았는 데 이보다 먼저 4월 13일에는 上海臨時政府에서 金奎植을 外務總 長 겸 講和會議 全權大使로 임명하여 信任狀을 보내니 金奎植은 정부대표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파리의 韓國通信局에서는 弘報 (Circulaire)를 간행하여 獨 立運動을 선전하였고, 한편 파리 委員部를 설치하여 講和會議에 대한 외교를 강화하였다. 그런데 講和會議에서는 냉담한 반응만 보였다. 講和會議 事務總長 두사다(Dusata)와 화이트(White)는 韓國問題는 大戰 前의 문제이니 國際聯盟에 물어 보라는 회답만 을 보내왔다. 파리通信局, 歐洲의 우리事業 (1920)에서 윌 슨의 14개 조를 기초로 한 平和會議는 유야무야의 사이 소멸되고,
230 4. 大韓民國 臨時政府 다만 유럽의 전쟁 당사국간의 승패문제만 해결함을 주장하게 된 평화회의는 韓國民의 요구를 여하히 등정한다 하더라도 폴란드나 첵코슬로바키아 같이 전국민이 움직여 독일 오스트리아와 싸우 지 아니한 이상은 더 거론의 재료될 기회를 얻기 무리이라 고 서 술하고 있다. 金奎植은 各國 代表 중에 한국문제를 동정하는 사 람은 많으나 勝戰國의 하나인 日本의 반대가 심하여 公式으로 토 의할 수 없었다 고 보고했다. 그러나 獨立運動의 선전 효과는 컸다. 각국 대표와 교섭하는 가 운데 그들의 이해를 촉진했음은 물론, 유럽 政界에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것은 회의가 끝난 후에도 파리 通信局에서 9월에 韓 國의 獨立과 平和 란 册字 6천 5백부, 1920년 4월부터는 月刊紙 자유한국 (La Corée Libre) 1천부씩을 발행하여 선전하므로 써 더욱 좋은 효과를 보았다. 그리하여 앞의 歐洲의 우리事業 에 게재된 바의 파리通信局 통계에 의하면 프랑스의 1백 33개 신문에서 한국문제를 4백 23 건 보도하였으며, 英國을 제외한 유럽 각국 新聞에서 확인한 것만 49개의 신문에서 94건을 보도했다고 하니 1년 반 동안의 기간이 었던 점을 고려하면 外交의 不毛地에서 이룬 성과는 결코 적지 않 은 것이었다. 講和會議가 끝나고 파리 委員部에서 金奎植 李灌鏞은 떠나고 黃玘焕이 남아서 파리委員部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1920년 10 월 英國 런던주재 외교위원으로 임명된 후 日本과 同盟國인 英國 에서 쌓은 외교업적도 적잖은 것이었다. 對英外交는 민간외교에서 성과를 얻었는데 그것은 런던의 데 다녀가 韓國의 悲劇 (The Tragedy of Korea)과 韓國의 獨 일리 메일 (Daily Mail)지의 기자로 1904년 후 두번이나 한국을
231 Ⅱ. 三一 運動 立運動 (Korea s Fight for Freedom)을 저술한 매켄지 (F.A. Mckenzie)와 韓國의 復興 (The Renaissance of Korea) 저자인 그레이브스(J.N. Graves)의 도움이 컸다. 위의 두 사람은 韓國人 이상으로 韓國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 지고 활동하여 1920년 10월에는 英國의 정치인 학자 언론인 성직자 등 62명을 모아 大英帝國 韓國親友會를 결성하여 활약하 기도 했다. 이러한 대유럽외교는 각국은 물론, 世界社會黨大會 國際聯 盟 國際赤十字社에 대해서도 꾸준히 교섭을 계속하여 이해를 촉 진하였다. 로마 敎皇이 韓國人의 자유와 행복을 기도한다는 글을 파리委員部에 보내온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런데 1921년 黃玘焕이 워싱턴會議(太平洋會議) 관계로 美國 으로 건너가고, 매켄지도 美國 시카고로 옮겨 간 위에 1923년에 는 黄玘焕이 사망하니 유럽에 대한 외교는 다시 한산하게 되었고 40년 전후에는 徐嶺海가 通信을 맡고 있을 뿐이었다. ㄴ. 歐美委員部의 活動과 對美外交 歐美委員部는 李承晚의 執政官總裁事務所가 韓國委員部로 변하 여 다시 歐美委員部가 된 것이다. 때마침 李承晚은 각처 임시정부 의 통합에 의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大統領에 선출되니 필라델피 아의 韓國通信部와 파리委員部를 산하에 흡수하여 歐美委員部를 강화하였다. 이렇게 하여 歐美委員部는 구미외교 뿐만 아니라 美 洲 동포사회에서 정부 행정기관으로 군림하게 되었는데 大統領 독단으로 정부 대행을 함으로서 國務院이나 大韓人國民會와 업무 의 중복을 가져와 여러 잡음을 낳았고 따라서 1925년 李承晚 彈 劾과 더불어 폐지되었다.)실제는 1928년에 폐지) 그러나 臨時政府의 초기 외교에서 歐美委員部는 그 중추적 역
232 4. 大韓民國 臨時政府 할을 대행하였다. 그것은 파리委員部까지 관할하고 있었던 것에도 이유가 있었지만, 초기 외교는 對美外交에 집중되고 있었고, 또 大統領이 워싱턴에 있으면서 對美外交를 관장한 歐美委員部를 직 접 맡아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외교가 대미외교에 집중되고 있었던 것은 戰後處理의 중심 역할을 할 美國의 윌슨大統領이 民族自決主義를 제창하였고, 國際 聯盟 창설을 추진하였으며, 1921년에는 極東問題 해결을 위한 太 平洋會議를 美國이 주도했으므로 對美外交가 단순한 韓美關係 이 상의 성격의 것이고 따라서 그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외교활동은 臨時政府나 歐美委員部가 설치되기 전부터 필라델 피아의 韓國通信部 또는 大韓人國民會가 이미 전개하고 있었지만, 윌슨大統領과 그의 정부는 파리에 파견할 대표에게 출국 허가조 차 않을 정도로 냉담하였다. 이러한 美國政府의 냉대는 美國이 1898년 美西戰爭後, 또는 1905년 태프트 가쓰라 秘密協定 이후 日本과 제휴하는 極東에 대한 傳統政策 때문이었는데 臨時政府가 人道主義나 혹은 개인적 친분으로 그들을 설득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윌슨政府의 태도에 하등의 기대를 할 수 없게 되자 歐美委員部 는 장기적 안목에서 美國의 일반 지도자와 시민들의 여론에 기대 를 걸고 선전활동에 주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美國 言論界와 宗敎界의 협조를 얻어 韓國과 관계 깊 은 宣敎師를 演士로 곳곳에서 강연회도 개최하고, 韓國현황의 간 행물을 배포하고, 韓國의 독립 운동과 日本의 蠻行을 언론기관에 소개하여 선전하는 등의 활동으로서 美國의 여론을 환기시키는데 노력하였다. 刊行物로 大韓人國民會의 新韓民報 나 歐美委員部의 Korean
233 Ⅱ. 三一 運動 Review (韓國評論) 같은 것 외에 외국인에 의해서 발행된 것도 근 30종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중에시 특히 基督敎聯合會 東洋宣 敎部의 The Korean Situation 衛國의 狀況)은 발간하기에 앞 서 그 내용을 日本政府에 통고했더니 韓國 통치를 개혁하겠다는 原敬 日本 首相의 회신까지 올 정도로 비참하고 상세한 내막을 폭 로하고 있었다. 위의 刊行物 외에도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된 것은 허다하였다. 1919년 3월부터 1921년 9월까지 新聞 雜認의 논설 이나 기사만도 9천 702건에 달했는데 이것은 日本을 同情한 기사 50건에 비하여 보면 당시 言論界의 동향을 짐작할 수 있을 것 이다. 이와 같은 효과는 韓國親友會의 활동이 많은 도움을 준 결과이 기도 하다. 韓國親友會는 韓國通信部의 창설 主管者였던 徐載弼이 톰킨스(F.W. Tomkins) 등 美國의 유력 한 인사와 손을 잡고 1919년 5월 16일 韓國의 독립사업을 원조하고 韓國 안에서 당하 는 日本의 압박과 학정을 항의하며 韓國의 실정을 선전하기 위하 여 설립되었는데 그 후 19개의 지방에서도 증설되어 회원 1만명 에 이르니 宣傳外交에 큰 보탬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선전외교의 효과는 美國議會에서 美國의 國際聯 盟 加入案을 논의할 때 현저하게 나타났다. 의회에서 가입이 否決 되기에 앞서 있었던 토의 때마다, 極東政策의 부당성과 韓國問題 도 해결하지 못하는 무력한 國際樹盟이란 점이 지적되었다. 그리 하여 1920년 3월에는 한국문제의 의안 상정을 놓고 正式 토의를 가졌다. 34 대 46으로 부결되기는 했으나 1919년 초 冷談하기만 하던 때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이고 그것은 歐美委員部를 중심한 선전외교에 의한 好轉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ㄷ. 美議貝의 極東視察과 太平洋會議
234 4. 大韓民國 臨時政府 對美外交는 다방면으로 전개되었다. 1次大戰의 戰後處理에서 極東問題(山東問題와 韓國問題)가 가장 잘못되었으므로 美國議會 에서는 그에 대한 논란이 많았고, 따라서 1920년 여름에 極東視 察을 위한 美議員團이 觀光의 명목으로 中國 韓國 日本을 여행 하게 되었다. 臨時政府에서는 美議員視察團 歡迎 準備委員會를 조 직하고 8월 5일 議員團이 中國에 머무는 동안 韓國憲法 韓日 日本의 諸不法行爲 등의 책자를 배포하면서 갖은 외 교수단을 다 쏟았다. 또 準備委員長 安昌浩는 국내의 梁起譯李 關係 商在 등에게 연락하여 국내대로 계획을 마련하도록 했다. 한편 滿洲에서는 光復軍總營의 吳東振이 金榮哲을 단장으로 한 결사대를 국내에 특파하여 官公署를 폭파하면서 日帝에 항거하는 韓國人의 의사를 議員團에게 實證的으로 보여줬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議員團이 지나가는 驛에서 시위를 하는 곳 도 있었고, 서울에서는 8월 25일 基督敎靑年會館에서 환영대회가 베풀어졌다. 對美外交는 1921년 11월에 개최된 워싱턴會議를 기하여 절정 에 이르렀다. 이 회의는 당시 美國의 하아딩(W.G. Harding) 大統 領이 주선한 海軍軍備縮少問題와 極東問題를 중심한 太平洋情勢 를 논의하기 위하여 개최된 회의였기에 太平洋會議라고도 한다. 極東問題 때문에 열리는 회의였으니 臨時政府나 獨立運動界는 비상한 관심을 기울여 1921년 7월부터 上海와 워싱턴 동포사회에 서 대책이 논의되었고 8월에는 太平洋會議 外交後援會가 조직되 었다. 李承晚 徐載弼 鄭翰景 黃玘焕 등의 대표는 大韓民國의 要求書 를 제출했고, 후원회에서는 宣言書 를, 국내에서는 韓國人民 致太平洋會議書 를 송달하였으며 中國의 韓中互助總 社와 韓中協會에서도 決議文 과 전보를 보냈다
235 Ⅱ. 三一 運動 太平洋會議는 1921년 11월 11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열 렸는데 파리 講和會議 혹은 國際聯盟에서처럼 韓國問題는 묵살되 고 말았다. 전민족의 기대는 다시 水泡로 돌아갔다. 李承晚은 그들은 大戰 중에 선포한 高貴한 理想을 어느듯 포기한 채 弱少 國家를 權力으로 統治하려는 腕力政治의 존속을 그대로 시인하고 있다 고8) 美國을 통박했으며 당시 하와이에서 열린 世界記者大 從來 美國 및 그 외 會에 참석했던 東亞日報社 기자 金東成은 外國人이 朝鮮獨立을 찬조 同淸하는 것 같은 態度는 誠意에서 나 온 것이 아니라 필경 宗敎 宣布의 手段 9)이었다고 비난했는데 이 무렵의 東亞日報의 기사와 논설을 보면 얼마나 큰 기대에 얼마 나 큰 실망을 안겨줬던가를 알 수 있다. 太平洋會議의 餘波는 臨時政府에 크게 밀어 닥쳤다. 어떻든 外 交의 실패였고 美國에 대한 실망이었다. 內閣 총사퇴, 議政院과 大統領의 대립, 議政院에서 政府改革의 논의, 國民代表會의 추진 등 對內的으로 대단히 어려운 사태가 겹쳐 일어나는가 하면 對外 的으로 美國에 실망한 나머지 民族陣營 지도자가 소련에 秋波를 던지는 심상치 않은 공기마저 돌기 시작하였다. ㄹ. 蘇聯에 대한 外交 臨時政府는 韓國問題에 관계가 있는 나라라면 물론이려니와, 韓 國의 독립을 위하여 유익하다면 어떠한 나라와의 외교도 주저하 지 않았다. 따라서 韓國과 국경을 접해 있고, 시베리아에는 20만 의 동포가 거류하고 있었고, 그위에 아직까지 共產主義의 정체 가 포착되지 않은 터에10) 소련은 원래 유럽 共產化에 주력하다가 여 8) R.T.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日譯, 1957) pp ) 朝鮮總督府 警務局, 美國 및 布哇地方에 있어서의 不逞鮮人의 狀況(大正 10年 3月) 10) 소련 共產主義의 正體를 아직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점은 李光洙의
236 4. 大韓民國 臨時政府 의치 않아 1920년부터는 아시아로 그 방향을 들려 특히 弱少民族 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격찬과 지원을 公言하고 있었으니11) 臨時 政府는 소련에 대하여 외교교섭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소련은 시베리아에서 共產革命을 완성하지 못한 채, 內亂을 치루 고 있는데 日本軍이 진주하여 소련정부를 위협하고 있던 당시였 으므로 시베리아에 거류하는 韓國人의 동향에 대해서도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獨立의 一念 뿐인 韓國 동포의 抗日戰線과 共產革命의 장해물인 日本軍隊를 축출하려는 소련의 對日戰略은 눈앞의 이해로 우선 결합될 수 있었고, 소련은 그 韓國人을 볼쉐 비키 共產革命에 이용할려고 했다. 그것은 日本軍이 퇴각한 뒤 1923년에는 소련의 조처로 동포사회가 전연 그들의 지배에 들어 갔던 사실로도 알 수 있다. 臨時政府가 소련에 접근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파리講和會 議, 國際聯盟 太平洋會議 등 서방 진영이 주도한 국제회의에서 韓 國問題가 계속 묵살된 데에 있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極東人民代表大會에 참석했던 金奎植이 우리가 美國에 대한 期 待를 크게 가졌으나 失望한 나머지 이곳에나 希望을 걸어 보려는 뜻에서 參席하였다. 12)라고 美國 기자에게 한 말이 단적으로 이 2 8 獨立宣言書에서 소련을 正義와 自由를 基礎한 新國家 라고 극구 찬양 하고 있는 점, 1919년 3월 서울에서 金嘉鎭 등에 의해 조직된 大同團 綱領에서 社會主義를 표방하고 있는 점, 朴殷植의 韓國獨立運動之血史 에서 소련을 찬양하고 있는 점, 臨時政府 軍務總長 盧伯麟이 靑年들에게 볼쉐비키 戰線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 점(金弘一 나의 證言 한국일보), 上海 獨立新聞에서 소련을 찬양하는 기사와 논조가 많은 점, 安昌浩도 그의 일기를 통해 보면 聯俄戰線을 누누히 주장하고 있던 점 등 民族主義者의 그와 같은 태도는 소련의 전략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11) 이것은 1920년 7월과 8월의 코민테른(Comintern) 第2次大會에서 약소민족 또는 식민지문제에 대한 토의와 결의에서 표면화되었는데 이것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1920년에는 中近東會議, 1921년에는 土耳其系諸民族共產主義會議, 1922년에는 極東人民代表大會가 열렸는데 極東人民代表大會에는 金奎植을 비 롯하여 많은 人士가 참석하였다
237 Ⅱ. 三一 運動 야기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韓蘇접근의 가능상황 속에 臨時政府에서는 1920 년 1월 22일(一說 1919년 10월)에 密送外交員을 파견키로 결정 했던 것이다.13) 그러나 당시 國務總理 李東輝는 韓人社會黨 黨首 였으므로 國務院의 결정을 무시하고 당원인 韓馨權만 파견하여 韓露秘密 協定도 맺고, 자금도 密入하였다. 그런데 그 자금은 共 產主義運動資金으로 사용되었으니 이것은 共產主義運動이란 차원 에서는 당연했을런지 모르나 臨時政府로서는 용납될 수 없었다. 流血事態까지 빚고, 秘密協定說은 雲霧에 사라지고. 國務總理 李 東輝는 1921년 1월 사임하고 말았다. 그 후 소련은 共產主義 국제로선의 전통적 전략인 연합전선 형 성을 위하여 1923년 國民代表會가 열릴 때나 그 전후에도 계속 臨時政府를 그들에게 유리하게 끌어드릴려고 直間接으로 작용했 으나 李東輝의 소련 資金問題, 國民代表會 때 共產主義者의 동향 에서 그들의 인터내쇼날 政策의 정체가 드러나 臨時政府와 소련 은 1923년 여름부터 상호관계가 거의 끊어졌던 것이다. ㅁ. 中國에 대한 外交 臨時政府가 中國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외교교섭을 할 수가 없 었다. 中國자신이 帝國主義 앞에 半植民地狀態에 있어 남의 문제 를 도울 겨를이 없었고, 또 그들 자신이 남북으로 분열하여 北京 에 北洋軍閥의 정권이 그나마 자체 내에서 정쟁을 계속하고 있었 으며, 南쪽 廣東에는 孫文을 중심한 國民黨의 護法政府가 있었으 니 臨時政府는 어느 하나만을 가까이할 수 없었던 것이다. 廣東政 府와는 정치이념이 같았고, 北京政府와는 그의 勢力圈인 滿洲에 1 12) 東亞日報社 三一運動 50周年記念論集 p. 550에서 引用 13) 密送外交員에 대하여 學界에서 의견이 분분한데 國務院에서 정식으로 파견을 결정한 것은 1920년 1월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미 다른 기회에 상술하였다(독 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4권 임시정부사 p. 372 參照)
238 4. 大韓民國 臨時政府 백만 동포가 거류하면서 독립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으니 어느 정 부도 경원할 수 없었다. 中國의 內紛이 1928년 蔣介石의 北伐로 일단락진 뒤에는 南京 政府만 관계하게 되어 臨時政府로서는 한결 가벼워졌으나 이 때 臨時政府 자체가 沈滞해 있던 시기였으며, 南京政府도 共產主義問 題 때문에 臨時政府와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어 外 交關 係가 밀접하게 성립되지 못하고 있었다. 韓中外交가 밀착된 것은 1932년 李奉昌 및 尹奉吉 義擧를 계기 로 한다. 그 후 中日戰爭과 第二次大戰時에는 연합전선을 형성하 여 대일전쟁을 수행하던 중 1945년 終戰을 맞았다. 對中外交는 타국에 대한 외교와 그 교섭 내용이 달랐다. 中國은 韓國獨立運動의 기자였으므로 中國으로서는 귀찮은 일이었고 근 대 主權國家의 개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을런지 몰라도 韓 國 臨時政府와 獨立軍으로서는 지리적으로나 전통적 우호관계 로 보나 활동 기치를 中國에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對 中外交의 내용도 北京政府에 대하여는 동포사회의 권익과 獨立軍 활동의 보장문제였고, 廣東政府에 대하여는 일반적 교섭 사항 외 에 獨立軍 양성문제를 요구하고 있었다. 어느 것이나 臨時政府의 뜻대로 될 수는 없었던 것이 中國政府 는 그들 나름의 處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廣東政府와 그 주변의 中國人士들은 臨時政府에 대단히 협조적이었다. 그리하여 孫文의 廣東政府는 臨時政府를 실질적으로 승인하였고 中國 각처 에는 韓中互助社 또는 韓中協會가, 上海에는 韓中互助總社가 결성 되어 韓國의 獨立運動을 지원하고 있었다. 北京政府와의 관계는 주로 東三省(滿洲) 동포사회의 생활문제 와 獨立軍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다음 節에서 상론될 것으로
239 Ⅱ. 三一 運動 알고 여기서는 생략한다. 南京政府와의 초기 외교관계도 주로 東 三省의 동포문제였으니 마찬가지이다. ㅂ. 其他 外交上 特殊問題 이상의 외교관계에 묶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臨 時政府 소속지인 프랑스 租界 지국 특히 佛蘭西警察(工務局)과의 관계와 呂運亨이 日本政府의 초청으로 東京에 行次한 문제이다. 프랑스 租界 당국은 1919년 이후 1932년 臨時政府가 上海에 서 移轉해 갈 때까지 시종 협조를 아끼지 않아 교섭상 큰 난관은 없었다. 그곳에는 臨時政府 뿐만 아니라 망명 동포들도 많이 살 고 있었으며 中國人도 많음은 물론, 電車는 英國의 것이니 전차 차장을 많이 하던 동포들로서 그들과의 관계, 그리고 끊임없는 日本 경찰의 침투, 이러한 얽힘 속에서 정부를 운영하고 炸彈을 만들며 독립운동하는 臨時政府에 租界 당국의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20년대 후기에는 共產主義運動 때문에 상 당한 監視도 받았으나 民族陣營의 활동에 대하여는 그 態度가 변함이 없었다. 呂運亨의 東京行次는 1919년 11월의 일이었다. 그는 日本政府 의 초청을 받고 荷衣島에 감금되어 있던 張德秀를 保釋받아 崔謹 野田印太郞朝鮮總 愚 申倚玩과 함께 東京에 가서 拓殖局長官 古賀廉造 陸軍大臣 田中義一 內務大臣 床次竹二郞 遞信大臣 督府 政務總監 水野鍊太郞 등 閣僚級과 面談하고 그곳 帝國호텔 에서 내외 기자 等이 모인 집회에서 韓國獨立을 주장하는 강연을 했다. 이것으로 日本政界에는 큰 波紋이 일어났고, 呂運亨 일행은 上 海로 돌아왔지만, 上海에서도 이 사실을 閣僚級 외에는 사후에 알 고 議政院에서 큰 논란이 벌어졌다. 李承晚의 委任統治論을 규탄
240 4.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 후 臨時政府에서는 어떠한 협상도 용납되지 않고 있었는데 呂 運亨이 臨時政府의 外務次長으로 日本에 갔다는 것은 自治論을 수용하는 등의 오해를 낳을 가능성도 있었다. 사실상 日本政府가 呂運亨을 초청하여 韓國獨立에 유일한 언질을 줄려고 했다고는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3 1운동후 日本의 蠻行을 규탄하는 국 제 여론을 日本에게 유리하게 돌려 보자는 속셈 이외에 다른 뜻이 있을 수 없겠다. 그러므로 申采浩 元世勳 等의 强硬論도 있을 법 한 일이었다. 臨時政府에서는 國務總理 布吿 第1號로서 東京行次를 문책한 것을 그 일행이 돌아온 후 1919년 12월 29일 布吿 第2號로서 독 립에 위배되는 행동이 없으므로 特赦하였다. 4) 軍事와 그 外廊團體 臨時政府가 직접 작전한 독립전쟁은 中日戰爭 後 光復軍을 편 성하여 中國과 함께 싸운 對日戰爭뿐이니 초기에는 전쟁준비가 곧 臨時政府의 군사관계일 것이다. 초기의 독립전쟁은 滿洲와 시 베리아의 독립군단체가 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臨時政府는 초기의 독립군 단체가 할 수 없는 성질인 정규 士官養成 등의 군사교육이 나 군사법규를 정비하면서 후일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軍事法規로서 陸軍臨時軍制 陸軍臨時軍區制 臨時陸 軍武官學校條例 軍事警衛勤務條例 警衛勤務細則 軍務部臨時 編 輯委員部規定 그리고 大本營의 규정도 만들어 軍事活動의 기 초를 정비하였다. 그런데 너무 正常國家의 군사제도처럼 만들어 독립 전쟁의 준비로서 더구나 어려운 재정 형편에 실현성이 희박 한 점도 많았다 그러나 후일 重慶에서 光復軍이 편성될 때 이 규 정에 의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초기에는 실현하지 못하였어도 有
241 Ⅱ. 三一 運動 意한 것으로 봐야한다. 초기에 실현을 본 것은 臨時陸軍武官學校 條例였다. 그것도 條例대로 실현된 것은 아니었지만, 가령 1년 修學期間 을 6개월로 단축하는 등 시급한 士官 수요와 재정형편에 따라 略 設될 수밖에 없었으나 초기 독립전쟁에 소수나마 初級將校를 공 급한 것은 사실이다. 獨立新聞 기사에 의하면 1920년 5월 8일에 첫 졸업식이 있었는데 19명이었다고 하며 12월 24일에 제2회 졸 업식이 있었다. 졸업생은 臨時政府 외곽단체인 南滿洲에 있던 光 復軍總營에 많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士官敎育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練兵場이 나 그의 교육시설을 上海나 그 부근에서 갖출 수 없었고, 더욱 實 戰 연습이 불가능했고 또 독립전쟁이 진행되고 있는데 우수한 敎 官을 후방에 묶어 둘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臨時政 府 는 廣東政府에 대하여 韓國軍의 士官敎育을 외교적으로 요구하고 있었으나 개별적인 것, 혹은 韓國勞兵會가 주선한 몇몇 事例 외에 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中國政府가 獨立軍의 士官敎育을 맡아 준 것은 1932년 후 南京 政府主席 蔣介石의 배려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그것은 蔣介石이 滿洲事變을 계기로 對日策에 고심하다가 李奉昌 尹奉吉義擧에 감탄하여 韓中聯合을 모색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韓國 獨立軍으로 서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리하여 1932년에는 義烈團 金元鳳에게 軍事幹部學校를 설치 케하여 6개월 군사교육을 실시했는데 이것은 中國軍事委員會 幹 部訓練班 第6隊로 불리웠다. 그런데 정규 교육의 실시는 蔣介石과 金九의 협의에 의하여 실시되었는데 그것이 洛陽軍官學校 韓 人 班의 설치이다. 洛陽에는 中國 陸軍軍官學校 分校가 있었는데 여
242 4. 大韓民國 臨時政府 기에 第2總隊 第4 大隊 第17隊로서 韓人班을 특설하고 李靑天 李範奭 吳光鮮 등을 敎官으로 滿洲와 中國 각 처에서 모인 90여 명의 士官生徒를 훈련하게 하였다. 훈련은 1934년에 있었던 일인 데 이것을 탐지한 日帝의 항의가 격렬하여 1년 修學의 제1기생을 배출하고 중단되었다.14) 그 후 군사교육이 본격적으로 實施된 것 은 重慶에서 光復軍總司令部가 설치 된 뒤부터였다. 1920년 초 安昌浩의 日記를 보면 臨時政府에서는 飛行機도 購 入하려고 노력했으나 財政事情으로 좌절되었다. 美洲의 金鍾麟은 臨時政府와 연락을 취하면서 캘리포니아州 윌로우스에서 飛行士 養成所를 설립하고 5대의 교육용 비행기도 구입하여 1923년에는 11명의 졸업생까지 배출하였으나 臨時政府에서 활용하지는 못하 였다. 한편 大韓赤十字會에서는 看護員養成所를 設立하고 위생병을 양성했으며 大韓愛國婦人會에서도 獨立戰爭에 대비한 준비를 도 왔다. 그런데 臨時政府가 직접 국내진격전 같은 독립전쟁을 작전 하기에는 준비가 부족했다. 財政도 너무 미흡하였다. 그리하여 議 政院에서는 한때 軍務部를 滿洲로 이전하자는 결의도 했으나 실 현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金九 呂運 亨 등은 韓國勞兵會를 조직한 바도 있었다. 韓國勞兵會는 1922년 부터 1932년까지 1백만원 자금 확보와 勞兵 양성을 위한 10년 계획을 세우고 활동하여 특히 中國 각 처의 군사학교에 학생을 파 견하여 수학케 하는 등의 좋은 성과도 있었으나 당초의 계획처럼 추진되지는 못하고 10년 뒤에 해산하였다. 臨時政府가 초기에 독립전쟁에 關與했다면 그 외곽단체를 통한 간접적 참여였는데 독립전쟁을 수행한 외곽단체는 모두 滿洲에 pp ) 앞의 임시정부사
243 Ⅱ. 三一 運動 있던 西路軍政署 北路軍政署 그리고 大韓光復軍總營과 參議府같 은 것이다. 5) 敎育 弘報와 財政 앞에 소개한 시정 방침이나 헌법에서 의무교육을 명시하고 있 는 것은 국민의 자질 향상이라는 욕심에서 나온 이상이었지 독립 운동 중에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臨時政府가 직접 관계하 던 학교는 上海의 仁成學校인데 그것은 臨時政府 수립 전부터 敎 會 또는 僑民親睦會에서 경영하고 있었다. 僑民親睦會가 臨時政府 의 居留民團으로 개편됨에 따라 仁成學校도 居留民團을 통하여 臨時政府가 관장하는 셈이 되었으나 역시 재정난으로 어렵게 운 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24년 무렵에는 金奎植을 院長으로 한 上海高業補修學院(三一中學)도 있었으나 길지 못하였다. 公報 가 있어 정확한 史料를 오늘에 전해 주고 있지만, 초기 홍보의 大宗은 獨立 또는 獨立新聞 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臨時史料編纂會의 韓日關係 史料集 의 간행도 괄목할 업적이며 朴殷植의 韓國獨立運動之血 史 도 이 編纂會의 주선에 의한 것이라 한다. 또 歐美委員部의 Korea Review (韓國評論)와 파리 委員部의 La Coree Líbr e (自由韓國) 같은 정기 간행물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獨立新聞은 1919년 8월 21일 獨立 으로 創刊號를 발행하여 그 해 10월 25일 제22호부터 獨立新聞 이라 고쳤고, 1924년 1 월 1일 제169호부터는 한글로 독립 신문 이라고 고쳐 발행하였 다. 李光洙金承學崔天浩 등에 의해서 경영된 獨立新聞은 日帝 臨時政府의 홍보 활동으로는 官報로서 의 부당한 방해와 재정난으로 폐간과 휴간을 거듭하면서 1928년까 지 계속되다가 문을 닫았다. 그후 1943년 6월 1일부터는 重慶에서
244 4. 大韓民國 臨時政府 獨立新聞이 다시 발행되었는데 中國文으로 간행되었다. 臨時政府가 重慶에 있을 때는 宣傳委員會와 宣傳部를 두고 弘報에 주력했으니 초기보다 활발하여 선전 전단이나 獨立運動文類 같은 간행물이 많았다. 臨時政府 초기재정의 재원은 義捐金 및 愛國金과 人口稅에 있 었다. 원래는 所得稅 國債 內外公債 外國借款 實業收益金 등 을 계획했으나 뜻대로 안되었으며 義捐金이나 人口稅도 1923년부 터는 거의 美洲 同胞에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歐美委員部 운영에 충당한 나머지였으니 소액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豫決算이 비밀 보존 관계로 공개되지 않다가 1928년에 처음으로 議政院에 공개되어 그 전의 상황은 알 수 없다. 1928년 이후는 募金도 잘되지 않았고 經濟恐慌의 소용돌이 속에서 온 世 界가 어려운 시기였으므로 臨時政府의 재정난은 비참하였다. 따라 서 金九를 중심한 몇몇 각료만 남아 있는 형편에 臨時政府의 家屋 貰도 지급치 못할 정도였는데 1930년에는 傭人하나 채용하지도 못하고 있었다.15) 이러한 재정난은 1932년 尹奉吉 義擧를 계기로 내외의 지원이 다소 있게 되어 소생의 기미가 보이더니 第2次大戰 당시에는 외 국원조가 많아져 재정난은 해소되고 아울러 臨時政府의 활약도 戰時體制 下에서 공전의 빛을 보게 됐던 것이다. 人口稅 또는 愛國金 등의 징수는 聯通府나 居留民團 조직을 이 용했고 美洲에서는 大韓人國民會 또는 歐美委員部가 충당하였고, 1920년부터는 駐外財務官署, 그 뒤 1934년에는 財務行署를 두어 모금했는데 臨時政府가 重慶에 있을 때는 거의 郵便 送金에 의 했다. 15)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Ⅲ 資料篇 p.438金九 白凡逸志(1971) p.290`
245 Ⅱ. 三一 運動 (3) 臨時政府의 改編과 移轉 臨時政府는 수립 당초부터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독립운 동의 처지에서 三權分立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던 점, 大統領 中心 制와 內閣責任制를 절충하고 있던 위에 內閣 首班인 國務總理가 共產主義者 李東輝로서 聯立內閣이 형성되어 있는 점, 여기에 끊 임없는 共產主義의 침투문제, 同胞社會의 유대 연락문제, 政府 機 構 統轄문제, 독립운동 방법상의 異見, 특히 財政源 확보문제 등 여러 문제가 겹쳐 臨時政府는 진통을 겪고 있었다. 악랄한 日帝와 싸우면서 臨時政府를 운영해야 하는 어려움은 당초부터 예기했던 것이라 하더라도, 1920년대의 국제안정 추세 때문에 외교 활동마 저 침체해 버린 형편이었다. 이러한 속에서 정부의 개편 혹은 독립운동 방략의 새로운 이 론들이 대두하고 있어, 조만간 臨時政府를 개편하지 않으면 안되 었다. 1) 國民代表會와 政府의 改編 政府의 개편 강화에 대한 의견이 속출하는 속에 1921년에는 국 내의 독립운동단체의 대표자대회를 열자는 의견이 나와 上海에서 는 安昌浩 朴殷植 등이 國民代表會를 추진하기에 이르렀고, 北京 呂準金東三李沰 등이 額穆縣會議를 열어 國民代表會 개최를 에서는 朴容萬 申采浩 등을 중심한 軍事統一會에서, 滿洲에서는 주장하며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 운동은 그 해 열린 太平洋會議의 결과를 기다리느라고 지연되다가 그 결과에 실망하고, 1922년 다 시 활기를 띄웠는데 때마침 소련의 極東人民代表大會에 참석하고 돌아온 呂運亨을 비롯한 공산진영 인사들도 합세하여 1922년 5월
246 4. 大韓民國 臨時政府 10일 國民代表會籌備會는 소집선언을 발표하였다. 國民代表會에는 蘇聯의 자금이 들어왔다고 하지만, 어떻든 개최 일자가 몇번 연기되어 1923년 1월 3일부터 예비회의가 소집되었 고, 1월 31일에는 본회의가 열렸는데 5월 15일 會議 제63일만에 결렬되고 말았다. 金東三을 의장으로, 安昌浩 尹海를 부의장으로 한 이 회의는 결국 臨時政府의 改造論과 創造論이 맞서 결열되고 創造系 인사 들은 蘇聯으로 떠났으나 이 國民代表會 소집 문제, 소집 후의 논 란 등으로 臨時政府는 극도로 위축되었고 上海政界는 적잖은 혼 란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1925년 3월에는 委任統治의 제의, 歐美委員部의 독주, 政務遂行의 독재 등으로 불신을 받아 오던 李承晚 大統領을 탄핵 하고 朴殷植을 大統領으로 선출하는 한편, 헌법을 개정하였다. ① 憲法의 적용 범위를 獨立運動者에 한정한 점, ② 國務領을 首班으로 한 內閣責任制, ③ 司法行爲를 行政府가 관장 하는 점, ④ 國務領의 임기를 규정한 점 등이 1919년의 憲法과 크 게 다른 것이다. 개헌 후 議政院에서 李相龍梁起釋安昌浩를 개정헌법은 차례로 國務領에 선출했으나 組閣의 실패, 아니면 사양으로 혼란 을 거듭하더니 1926년에 洪震內閣이 취임했으나 역시 오래 지속 되지 못하였고, 그 해 연말에 金九가 國務領에 취임하였다. 그는 취임 즉시 개헌을 착수하여 1927년 3월에 다시 새 헌법의 확 정 을 보았으니 國務領制는 2년 간으로 끝났다. ① 國務會議制, ② 光復運動者의 大同政黨에 臨時政府의 최고권한을 부여한 점, ③ 議政院 常任委員會를 설치 1927년의 헌법은 한 것이 2년 전의 헌법과 크게 다른 점이다.16) 16) 臨時政府의 6個 憲法중에서 1927년의 約憲만은 原文을 볼 기회가 없어 日譯文
247 Ⅱ. 三一 運動 國務會議制는 당시의 인물난을 말하고 있는데 内閣을 白凡逸志 에 조직하기가 번번이 곤란한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 한 사람에 책임을 지우는 國務領制를 폐지 하였다고 한다. 여기 의 主席은 國務領會議에서 선출한 국무회의 의장에 불과하였다. 常任 委員會의 설치도 긴급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 더라도 議政院의 會議 성립이 원할하지 못한 이유에서 案出된 것 이니 모두 臨時政府의 쇠퇴를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民族大同의 政黨에 최고권한을 부여하고 있는 데서 더욱 확실해진다. 민족 대단결의 정당에 관한 조항은 中國 國民黨의 國共合作과 그 정치 체제, 그리고 소련의 영향도 받아 소위 以黨治國을 모색 한 것인데 이것을 전후하여 국내외 특히 獨立運動街에서 民族大 黨인 唯一黨 조직을 위한 작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上海는 물 론 中國 본토와 滿洲에서도 唯一黨 촉성단체가 결성되었고, 국내 의 新幹會 조직도 그와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그러나 海外 각 처 의 唯一黨運動은 모두 결렬되고 말았다. 결렬된 것은 中國 國民黨 의 國共分裂과도 관계가 있었겠지만, 결렬 후에도 臨時政府의 憲 法上의 그 조항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1930년대에도 두번이나 民 族大黨 결성 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정부의 운영만 어지 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2) 尹奉吉의 義擧와 政府의 移動 1930년대에 접어들자 獨立運動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日 帝는 韓國의 독립전쟁의 기반인 滿洲를 침략하여 1932년에는 傀 儡 滿洲政府를 수립하니 在滿 獨立戰線의 변화가 컸다. 한편 을 참고하였다. 日譯文도 몇 개의 조항은 생략된 것이다.(慶北警察局 高等警察要 史, 高麗大學校 影印本) pp
248 4. 大韓民國 臨時政府 1932년 초 李奉昌의 義擧, 日帝의 上海侵略(소위 上海事變), 尹奉 吉의 의거, 臨時政府의 移轉 등이 연속되어 臨時政府의 주변도 急 變하였다. 臨時政府의 변화는 주관적 측면에서는 三均主義 선포와 義烈活 動의 계획, 객관적 측면에서는 日帝의 滿洲와 上海 침공이 主因이 었다. 때마침 베르사이유體制가 무너져가고 經濟恐慌이 세계를 휩 쓰는 국제정세 속에서 臨時政府도 장기간의 침체를 극복하려는 새 길이 모색되어야 했다. 三均主義는 1931년 4월에 선포한 것으로 보통선거를 실시하 여 정권을 均히 하고 國有制度를 採用하여 利權을 均히 하고 公費 敎育으로서 學權을 均히 하며 國內外에 대하여 民族 自決의 權利 를 保障하여서 民族과 國家와의 不平等을 革除할지니 이로써 國 라고 선언하므로서 內에 實現하면 特權階級이 곧 消亡하고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 즉, 정치 경제 사회적 민주주의를 천명 함과 아울러 민족 국가 국민의 평등을 밝힌 臨時政府 지도이념 이었다. 특히 1923년 國民代表會 이후 혼란과 침체 속에 있던 臨 時政府를 회생시키는 데는 그 理念의 방향 정립과 천명이 필요했 던 것이다. 기본이념을 三均主義로 하고 이때 채택된 기본방침은 義烈國爭 이었다. 義烈鬪爭은 臨時政府 초기 시정방침에는 炸彈活動으로 표 현되고 있는데 초기의 것은 여러 방침 중의 하나로 채택된 것이나 1930년대의 것은 일찌기 申采浩의 朝鮮革命宣言 에서 주병한 대로 기본방략으로 확정하여 특무공작이라 일컬었다. 여기에서 초 기의 방략은 외교에 주력하면서 군사 및 실력배양 등 1920년에, 발표한 施政方針에서 보는 것처럼, 각방으로 망라된 方略이었는데 1930년대에는 義烈鬪爭으로 集約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49 Ⅱ. 三一 運動 그리하여 臨時政府에서 그 임무를 金九에게 맡기니 金九는 愛 國團을 조직하고 추진하였다. 때마침 日帝가 滿洲 침략을 감행하 니 愛國團에서는 日帝의 軍國主義 元兇 爆殺을 계획하고 먼저 日 本皇帝(소위 天皇) 폭살을 추진하였다. 이것이 李奉昌 義擧이다. 李奉昌은 1932년 1월 8일 東京의 日 皇 宮城 櫻田門 앞에서 日皇의 행례에 투폭하였는데 당초의 의도 대로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독립 운동의 혈기와 한국민족 의 意志는 동포사회에는 물론,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민족운동에 새 활력소의 구실을 했으니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 때 中國 國民黨 機關紙인 國民日報에서는 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幸不 中 이라고 특호 활자로 보도했고 각처 신문에서 역시 李奉昌의 장거를 보도했다. 中國側의 不幸不中 과 같은 반일태도에 대하 여 日帝는 신문사를 습격하며 파괴를 자행하더니 필경에는 軍隊 를 동원하여 上海를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을 上海事變 이라고도 하는데 전면전을 회피하는 中國은 불리한 협정으로 和 戰하고 말았다. 승전에 도취된 日本軍은 그 해 4월 29일 日皇 生日(소위 天長 節)에 그 곳 虹口公園에서 전승기념을 겸한 대축제를 열었다. 이 기회를 포착한 愛國團에서는 단원 尹奉吉이 파견되었다. 式典에 입장한 尹奉吉은 도시락과 水筒으로 위장한 폭탄 한 개를 단상에 던져 陸軍大將 白川義則, 上海 日本人居留民團長 河端貞次는 죽었 고, 제3함대 사령 관 海軍中將 野村吉三郞, 駐中公使 重光蔡, 제9 사단장 陸軍中將 植田謙吉, 上海 總領事 村井倉松 등 上海침략의 軍官民 원흉들은 중상으로 쓰러졌다. 上海 천지를 경탄케 했음은 물론, 전세계 정국을 긴장시켰다. 이 때 日帝는 臨時政府에 대하여 발악적인 습격을 가해 왔다
250 4. 大韓民國 臨時政府 프랑스 租界 당국에서도 막을 수 없는 사태였으니 모든 獨立運 動者는 上海를 떠나야 했고(安昌浩 被逮) 臨時政府도 1919년 이 래 13년간의 근거지를 떠나야 했다. 이후 杭州(1932) 鎭江 (1935)으로 轉轉 이동하게 됐지만, 李奉昌 尹奉吉의 의거는 독 립운동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내외 동포사회에서는 활기를 되찾아 臨時政府에 다시 마음을 쏟게 됐으며 1931년 滿洲 9 18 사건의 오해로 인한 韓中間의 감정적 마찰도 완전히 씻어졌다. 中 國政府와 中國人은 전례없이 韓國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게 되어 그 移動期 중에도 臨時政府 요인을 호위하여 日帝 관헌의 접 근을 막아 주었고, 특히 蔣介石은 전술한 바와 같이 中國 軍官學 校에 韓人 特別班을 개설하는 등 朝野가 관심을 쏟아 주었다. 그러나 臨政 요인들은 신변관계로 上海時節처럼 일정 장소에 집결할 수 없었고, 또 어디에 있으나 어디로 가나 항상 극비리에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臨時政府의 규모도 자연히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政府 요인들이 수백리 수천리 떨어져 있었던 형편 에 연락도 쉽지 않아 서로간의 오해를 낳기도 했으니 정부활동도 이등기에는 미약했던 것이다. 따라서 國務委員數도 約憲에 따라 5 명부터 11명 사이에서 항상 유동적으로 선출되었고, 主席도 교대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매년 10월이면 定期 議政院 회의를 거의 빠짐없이 열어 臨時政府의 안정과 활기를 찾 으려고 노력하였다. 1934년에는 外務委員會 또 外務行署와 財務 行署를 美洲 각지에 설치하여 그 곳 동포사회와 유대를 강화했다. 그런데 1935년에는 臨時政府 주변에서 항상 문제되던 民族大 黨 運動이 다시 일어 나 소위 5黨統合作業이 추진됨에 國務委員 7명 중 宋炳祚 車利錫만 제외한 5명이 모두 新黨參與를 위해 사
251 Ⅱ. 三一 運動 임하여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으나 新黨으로 나타난 民族革命黨의 聯合은 민족진영의 탈퇴로 결렬되고 반면 臨時政府의 강력한 與 黨으로 韓國國民黨이 창당되어 위기를 극복하였다. 이 때에 杭州 에서 鎭江으로 옮기니 1935년 11월의 일이었다. 3) 中日戰爭과 臨時政府 3年計劃 1936년 日本政府는 2 26事件(軍部叛亂)을 계기로 軍國主義가 더 한충 강화되어 1937년 7월에는 끝내 中日戰爭을 일으켰다. 1931년 日本軍의 滿洲侵略 이래 中國政府는 굴욕적인 和戰에 응 해만 왔으나 이제 蔣介石 政府는 철저한 항전으로 버티었고, 그리 하여 1945년 世界大戰의 종전 때는 전승국의 영예를 차지했던 것 이다. 그러나 中國政府는 重慶까지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에 따라 臨時政府도 鎭江에서 長沙(1937말), 廣東(1938.7), 柳州( ), 綦江(1939.4)으로 옮겨 가며 항전하다가 1940년에는 重慶으로 갔다. 中日戰爭이 발발하자 臨時政府는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전시 대책을 강구하기에 腐心하던 중, 독립운동자의 大同抗爭을 위하여 民族陳營의 3당(朝鮮革命黨 韓國獨立黨 韓國國民寒) 통합의 작 업을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1937년 겨울 鎭江에서 湖南省 長 沙로 이전하였다. 어느 나라, 어느 때에나 사람의 사회에서는 문란이 있었던 것 같다. 杭州에서는 政府辦公處의 피습사건이 있었는데 長沙에서는 1938년 5월 8일 三黨統合을 논의하던 南木廳에 李雲漢 등의 폭 력배가 들어와 총격을 가해 玄益哲은 사망하고 金九 柳東說 李 靑天이 부상한 사건이 있어 동포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 일
252 4. 大韓民國 臨時政府 도 있었다. 그 동안 전세가 불리하여 長沙도 위험하므로 1938년 7월에는 廣東, 10월에는 廣西省 柳州로 옮겼고, 이듬해 4월에는 수천리 四 川省 綦江으로 이동하였다. 綦江에서 맞은 1939년은 臨時政府의 전시체제가 준비되던 해 였다. 그리고 民族單一大黨結成運動이 또 다시 일어나 처음에는 7 黨, 후에는 5黨이 통합한다는 金九 金元鳳(若山)의 통합선언까 지 발표되어 소위 全國聯合戰線協會의 실현을 보는 듯하더니 1935년의 경우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共產陣營의 金元鳳이 탈퇴하 여 결렬되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단일당운동은 1927년, 1935년, 1939년, 즉 세 번째의 결렬이었고, 民族 共產陣營의 합류를 1923 년 國民 代表會까지 소급하면 네 번째의 결렬이었다. 그러나 전부 터 통합을 추진해 오던 민족진영의 3당은 이번 기회에 합당하여 金九 趙素昂 李靑天을 중심한 韓國獨立黨을 결성하니 이것이 臨時政府의 정치적 혹은 정당적 기반이 되었다. 臨時政府는 中日戰爭이 장기화하고 세계적으로 전운이 감도는 속에 對日戰爭을 눈 앞에 두고, 臨時政府 3개년계획인 獨立運動 ① 光復運動者의 黨的 조직과 단결강화 ② 결전을 위한 所要將校養成軍隊編成遊擊隊編成 ③ 友邦에 대하여 臨時政府 승인요구와 원조청구를 위한 외교 方略 을 발표하였으니 大要는 다음과 같다. 활동 ④ 국내외에 선전업무 강화 ⑤ 財政 수입의 보강 ⑥ 獨立運動史 편찬과 인재양성 이와 아울러 宣傳委員會를 조직하고 3개년계획의 달성을 위하
253 Ⅱ. 三一 運動 여 全光復運動者와 국내외 동포의 협력을 호소하는 선포문을 발 표하였다. 3개년계획은 전시체제의 수립강화를 목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발표를 전후하여 國務委員會에는 參謀部를 독립시켰고, 예 산에서도 군사비를 크게 책정하는 한편 군대 편성을 위하여 軍事 特派員辦事處 규정도 다듬게 되었다. 군사문제 중에서 軍官學校 설치에 관한 것은 洛陽軍官學校 韓 人班이 폐쇄된 뒤부터 항상 臨時政府의 과제로 논의되어 오다가 中日戰爭 후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는데 정부의 이전관계로 실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綦江에 오자 곧 이 문제에 착수하여 軍事特旅員을 西安에 파견하기로 했다. 曹成換을 主任으로 黄學 秀 王仲良(羅泰燮) 李雄(俊植)을 특파원으로 선임했는데 이들 은 徐波 慮福善을 대동하고 西安으로 가서 1940년 초에는 활동 을 개시하였다. 이것은 光復軍總司令部가 설치되어 활약하기 전까 지 군사의 기초작업으로서 河北 또는 東北방면에 대하여 招募 선전 등 戰地工作 활동을 펴고 있었다. 여기에서 臨時政府 기본방략이 1930년대 의열투쟁에서 전쟁수 행 방략으로 변천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臨時政府의 기본방 략은 초기에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망라한 것이었고(1920년의 施 正 方針 參照), 1930년대에는 義烈活動이었는데 1940년을 전후 하여 전쟁으로 변천, 戰時體制 下의 重慶時代를 맞는다. (4) 重慶의 臨時政府와 光復 臨時政府가 綦江에서 重慶으로 이전한 것은 1940년 9월의 일 인데 이후는 重慶 안에서 廳舍는 몇 번 옮겼지만 1945년 終戰까
254 4. 大韓民國 臨時政府 지 5년간을 中國政府와 함께 이곳에 머 물렀다. 1932년 이후 수천리를 이전하는 동안 처참했던 고초는 물론이 지만, 臨時政府의 규모도 작아졌고 또 운영의 내용도 부실한 점이 많았던 것은 피할 수 없었는데 重慶에서는 그 모든 것을 정비하고 光復軍을 편성하여 對日戰을 수행하였고 또 양차의 개헌 등 정부 를 확충 강화하여 1945년 光復을 맞이했던 것이다. 1) 戰時體制의 整備 戰時體制의 정비는 綦江에서 獨立運動 방략을 立案하는데서 이 미 착수되었으나 본격적으로는 改憲 光復軍編成 등 重慶 이전 직후부터 구체화되었다. 먼저 10월에는 約憲을 개정했는데 改憲 이유는 臨時政府 특히 行政府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에 있었다. 그리하여 1927년의 約憲에 있던 光復運動者의 대단결인 黨을 臨 時政府보다 우위에 둔 조항을 삭제했다. 이것은 左右合作의 종결 을 의미하는 동시에 민족진영의 三黨統合으로 政界가 안정됐음을 설명하면서 臨時政府를 外的 정치정세에 의해서 동요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다음에 행정부를 國務會議制에서 止揚하여 議政院에서 선출하는 主席을 중심한 운영으로 행정부를 강화하였다. 內閣 責 任制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지만, 主席이 國務會議에서 선출되어 그의 議長格에 불과했던 위치에서는 戰時 下의 臨時政府를 양도 할 수 없었으므로 국가 元首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國軍(光復 軍) 統帥權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영도자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그리 하여 約憲改定 후 金九를 主席으로 한 內閣이 조직되었다.) 新約憲은 全文 5章 42條로 짜여져 있는데 이에 따라 1942년에 는 行政府와 議政院을 확충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光復運動者도
255 Ⅱ. 三一 運動 重慶으로 모였고, 특히 共產陳營 朝鮮民族革命黨의 金元鳳 계열도 臨時政府에 합류하여 上海 초창기의 臨時政府처럼 名實 共히 韓 國 獨立運動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統帥府 설치에 이어 光復軍도 조직하는 한편 外交硏究委員會와 宣傳委員會를 설치하여 外交 弘報활동을 강화하였으며 1941년 11월에는 臨時政府 기본이념인 정치 경제 교육의 三均主義 원칙 을 구체화한 建國綱領 을 제정 공포하였다. 2) 建國綱領과 指導理念의 確立 建國綱領은 1931년의 三均主義를 구체화한 것이며 1944년의 헌법에서 법제화되었고 光復後 1948년의 헌법의 기초가 되었 다.17) 제1장 總綱, 제2장 復國, 제3장 建國, 전 22항으로 짜여져 있는데 여기에서 三均主義가 갖는 모호한 점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三均主義의 후단의 三均인 人均 族均 國均이라는 것은 인 류 보편의 원리에 기초한 민족주의 이념으로 생각하면 3 1운동 이래 臨時政府 수립 이념이기도 했으니 새 삼스럽게 주목할 바는 아니나, 前端 三均인 정치 경제 교육의 三均에는 여러 가지 해 석을 낳을 가능성이 있으며 또 臨時政府 초기 자유주의 이념과 다 소 모순되는 점이 있다고 봄직도 하다. 더구나 二均主義 선포 직 후 臨時政府는 上海를 떠나 이동의 수난기를 맞았기 때문에 후속 해석을 충분히 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建 國綱領이 선포되고 그 總綱에서 三均制度에 歷史的 根據를 두 고 있으니 모든 혜택은 이 建國綱領을 기준하면 혼잡할 일이 없을 것이다. 또 그것은 光復後 大韓民國의 지도 이념인 정치적 경제적 17) 兪鎭午 新稿憲法解義(1952) p.26 參照 趙東杰 獨立運動의 指導理念, 독립운동 사편찬위원회, 광복 30주년기념 심포지움 논문집(1976)
256 4. 大韓民國 臨時政府 사회적 민주주의로 발전하여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 三均이나 建國綱領의 성격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光復後 1948년의 헌법과의 관게를 살펴보겠는데 그 중에서 정치 의 均等은 光復後 政治的 民主主義로 표현되었으니, 再論의 여지 가 없으나 교육의 균등과 社會的 民主主義는 전혀 같은 것은 아니 다. 그러나 본래 의도하는 바에는 다를 바가 없고, 建國綱領에 受 益權 또는 社會保障條項이 있는 것을 보면 양자는 같다고 봐도 좋 을 것이다. 그런데 경제의 均等, 특히 토지의 국유화 조항은 光復 韓國의 經濟的 民主主義와는 다르다. 新生 大韓民國 憲法 제15조나 제6장 經濟條項을 보면 初期資本 主義下의 夜警國家를 止揚하고 福祉國家 내지 修正資本主義를 指 向하고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企劃經濟란 말이 우리 사회에서 肯定的 용어로 사용된 것이 근래의 일이고, 케인즈 經濟學의 企劃 理論을 韓國學界에서 본격적으로 검토한 것이 6 25 이후부터의 일이었다는 기억을 함께 고려한다면 大韓民國 초창기의 경제정책 과 三均主義(建國綱領) 경제조항과는 유리되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光復後 공산진영과의 적대관계에서 온 反射作 用과 主體勢力 形成狀況에 그 要因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建國綱領의 경제조항에서 토지 國有化 항목을 우선 제 외하고 보면, 대기업은 國有化하고 중소기업은 사유화한다고 규 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新生 大韓民國 憲法 제6장 經濟條項과 거 의 같다. 즉, 개인이나 국가의 獨占經濟를 거부하고 있다. 여기에 서 三均主義의 평등사상이 일부 唯物論 社會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과 다른 자유와 평등의 조화, 즉 現代自由主義 내지 修正資本 主義 이념의 具現을 목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단지 토지의 국 유화 조항은 당시 經濟恐慌으로 나타난 初期資本主義의 모순에
257 Ⅱ. 三一 運動 대한 대책, 또는 국내의 토지가 거의 日帝機關 아니면 日本人과 植民性 封建階層이 점유하고 있는데 대한 방책으로 光復後 재분 배를 고려했을런지도 모른다. 이상과 같이 보면 臨時政府의 지도이념은 초기에는 民族主義 (普遍性에 근거한 것임)와 自由主義에 기초를 두고 출발하여 1920년대에는 社會主義와 無政府主義 등의 도전을 받아 지도이념 도 침체한 적이 있는데 이 때가 臨時政府 沈滞期에 해당한다. 그 러나 理念의 浮沈 起伏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 와서 三均主義로 浮刻되어 초기의 近代自由主義가 現代自由主義 로 발전하는 길을 열게 되었으며 이것은 建國綱領에 의해서 지도 이념으로 확립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3) 外交 및 宣傳活動의 强化 重慶 당시의 외교는 戰爭外交로서 次大戰의 戰後處理 ① 臨時政府의 승인 ② 第2 ③ 軍事 및 財政支援 등의 문제에 집약되어 있었다. 그리고 中國政府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初 期外交가 政治外交로서 對美外交에 집중되었던 경향과 대조되 기도 한다. 中國政府와 臨時政府는, 上海時節에는 政治外交의 시기였으니 中國 國內政變으로 말미암아 서로 소원했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尹奉吉의 의거, 中日戰爭, 中國의 日帝 占領地區內에서 韓國靑年 의 항일 폭동 등을 매체로 두 정부는 밀착하여 中國政府 자신이 臨時政府를 그들의 臨時 首都인 重慶으로 옮기게 했던 것이며 그 와 같은 태도는 中國政府 뿐만 아니라 中國의 朝野人士와 언론계 에서 공통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44년 6월에는 大韓民國 臨時 政府의 승인을 약속했고, 臨時政府 政務費 및 요인 생활비조로 매
258 4. 大韓民國 臨時政府 월 1백만원을 부담하기까지 하였다. 생활비를 부담하는 처지에 군 사비의 지원은 물론이었지만, 군사활동비 등의 지원비는 대부분 借款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臨時政府를 지원하는데 공 이 많았던 中國政府의 主席 蔣介石은 물론, 立法院長 孫科와 國民 黨 秘書長 吳鐵城의 이름은 기억해 두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中國의 朝野 인사와 臨時政府 요인 간의 우호는 1942년 10월 11일 韓中文化協會를 탄생시켰다. 양국 민족의 영구 합작과 상호 협조로서 영구한 東洋平和의 奠立을 목표한 이 협회는 현실적으 로 臨時政府와 韓國獨立運動을 물심으로 지원했던 것이다. 對美外交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특히 1941년 英美共同宣言 (大西洋憲章)이 발표되자 臨時政府에서는 그에 대한 선언서를 발 표하여 臨時政府의 승인과 지원을 촉구하면서 전후처리에 韓國則 주장을 못 박았다. 같은 해 워싱턴에 駐美外交委員部를 설치했다 가 1944년에는 駐美外交委員會로 승격시켜 李承晚 金元容 鄭 翰景 등을 위원으로 임명하여 부단한 연락을 취하면서 對美外交 를 강화하였다. 한편 1941년 太平洋戰爭이 발발한 다음날인 12월 9일에는 정 식으로 對日宣戰布吿를 발표하여 美日戰爭에 대처하였다. 그리고 1942년에는 外務部에 外交硏究委員會를 설치하고 격동하는 국제 정세를 분석 연구하도록 하였다. 이즈음 美國의 일부 언론지에서 戰後處理에 있어 韓國의 國際 共同管理(信托統治) 문제가 거론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臨時政 府에서는 外務部長 趙素昂의 명의로 이를 반박하는 성명을 中國 지상에 발표하는 한편, 美國政府에 電文을 보냈고 中國政府에 대 하여도 구체적 외교공세를 폈다. 이와 같은 교섭은 1943년 11월 카이로會談을 前後하여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결과
259 Ⅱ. 三一 運動 당연한 순서에 따라 장차 韓國을 자유 독립케 할 결의를 가졌다 라는 선언을 발 美 英 中 三國 頂上會談 즉 카이로會談에서 표하게 되어 우선 日帝로부터의 독립을 약속하였으니18) 이것은 1919년 이래 외교의 첫 수확이요 臨時政府의 꾸준한 外交攻勢의 결실이라 하겠다. 對美外交의 결과로 終戰直前에는 韓美合同作戰 을 계획한 바도 있으니 이것도 參戰國의 권리를 얻으려는 臨時政 府의 外交結實로 보아야 할 것이다.(後述) 臨時政府는 전부터 프랑스 파리에 주재하는 徐嶺海를 통하여 歐洲 政局의 형편을 통신하고 있었고, 1944년 終戰의 기미가 현 저해졌을 때는 30여 聯合國에 備忘錄을 발송하여 전후처리에 있 어 韓國의 독립을 일깨우기도 했다. 그리하여 프랑스 폴란드 같 은 나라에서는 그들의 駐中使節을 통하여 장차 臨時政府를 승인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해 오기도 했다 重慶 臨時政府는 당면한 軍事活動과 外交活動을 지원하고 補填 하는 의미에서 선전활동이 필요했다. 선전활동은 光復을 눈앞에 두고 국내외 동포의 마음을 臨時政府로 모을 필요에서도 중요했 다. 선전활동이 궤도에 오른 것은 1939년 宣傳委員會의 설치 후 특히 1943년 정부조직에 宜傳部를 설치한 이후부터의 일이다. 그 리하여 국내외 동포에 선전 전단을 발송하고 또 戰地工作宣傳을 수행하여 光復軍 招募를 크게 지원하였다. 그리고 1943년 6월 1 일부터는 獨立新聞을 中國文으로 발행하였고, 重慶放送局을 통하 18) 카이로선언 전후의 동정은 大韓人國民會가 발행하던 新韓民報에 1943년 1년 간에 걸쳐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되어 있다. 카이로선언 전의 국제관리설 또 그 선언에서 當然한 順序에 따라 독립한다는 당연한 순서란 바로 국제관리(신 탁 통치)가 아닌가 하고 반박한 臨時政府의 성명은 물론, 新韓民報 자신도 논설 하고 있다. 8 15후의 미소軍政이 그 당연한 순서와 우연히 일치한 것은 아니었 을 것이다.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3 pp 및 pp 參照)
260 4. 大韓民國 臨時政府 여 한국말 방송을 실시하여 臨時政府의 활동을 내외에 선전함과 아울러 韓國民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李承晚의 미국의 소리 한국말 방송(超短波)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4) 光復軍의 編成과 活動 臨時政府가 重慶에 이전하고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光復軍 조 직이었다. 光復軍의 편성문제는 綦江에 있을 때부터 추진하던 일 로서 軍事特派團을 西安에 파견한 일은 전술한 바와 같은데 한편 光復軍은 많은 經費가 필요한 군사 조직이므로 中國政府의 양해 를 구하지 않으면 안되어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中國政府 에서 공식적으로는 찬성하면서 한편 臨時政府와 분열돼 있는 金 元鳳系의 朝鮮義勇軍이 이미 中國軍과 합동하고 있어 光復軍 조 직에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臨時政府에서는 먼 저 발족시켜 놓고 봐야 할 형편이어서 1940년 9월 17일 重慶 嘉 陵寶館에서 韓國光復軍總司令部의 成立典禮를 가졌다. 韓中 要人 들이 참석한 이 성립식은 대단히 성대했고 역사적인 행사였다. 이 날을 전후하여 光復軍 조직의 포고문 기타 선전 전단이 배포되었 고 臨時議政院에서는 관계 법규를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總司令에 는 李靑天(池大亨), 參謀長에는 李範奭이 취임하였다. 總司令部는 西安에 두었는데 전해에 西安으로 파견됐던 軍事特 派團은 그 업무를 司令部에 인계하고 해체하였다. 그리고 光復軍 은 3개 支隊(師團)로 편성하여 第1支隊長 李俊植(李雄), 第2支隊 長 公鎭遠(고운기), 第3支隊長 金學奎가 취임하였고, 이듬해 (1941) 1월에는 第5支隊가 편성되어 羅月焕(후일 宋虎聲)이 통 솔하게 되었는데 第5支隊는 원래 戰地 공작원들이 많아 편성 후 에도 주로 전후방 공작업무를 수행하였다
261 Ⅱ. 三一 運動 光復軍은 光復 이란 발간문을 발행하는 한편, 방송과 선전지 를 전후방에 살포하여 애국청년은 물론, 日軍에 징병되어 온 韓國 靑年을 유치하는데 노력을 경주하여 각 처에서 청년들이 모여 들 고 있었다.19) 그런데 군수물자를 충당할 길이 없었다. 中國政府에 계속 교섭 을 했으나 中國政府는 光復軍 조직 당초처럼 애매한 태도만 보이 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1년 11월에 中國政府 軍事委員會에서 光 復軍은 抗日 作戰期間中에는 中國 軍事委員會에 직속하고 參謀總 長에 의하여 장악 운용된다는 등의 9개항의 활동준승을 조건으로 지원을 제의해 왔다. 臨時政府로서 독자성 없는 光復軍이 되는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12월 1일에 수락 선언문을 발표하므로서 초창기의 애로는 일단 극복되었으나 9개 준승문제는 韓中間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이때에 太平洋戰爭이 일어났다. 臨時政府는 이튿날인 12월 9일 對日宣戰을 정식으로 포고하였으며 이와 같은 격동을 계기로 共產 陣營과의 합류가 추 진되어 1942년 7월에 金元鳳의 朝鮮義勇隊가 光復軍에 편입되었 고 金元鳳(若山)은 光復軍 副司令에 취임하였다. 光復軍 뿐만 아 니라 左系 인사가 議政院에도 많은 인원이 참여하게 되었으니 1923년 國民代表會 이래 결렬되기만 하던 좌우 합작이 비로소 실 현된 셈이다. 朝鮮義勇隊는 光復軍 第1支隊로 편입되어 金若山이 副司令과 第1支隊長을 겸하고 있었는데 후일 蔡元凱가 지대장에 취임하여 정비 강화되었고, 종전의 第1 2 5支隊는 통합되어 第2支隊가 19) 앞의 白凡逸志 (1971) p.344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그 대표적 예였다. 그 것은 50여명 靑年이 가슴에 太極旗를 붙이고 重慶에 있는 臨時政府 政廳으로 愛國歌를 부르며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우리 大學生들이 學兵으로 日本軍隊에 편입되어 中國戰線에 出戰하였다가 탈주하여 安徽省 阜陽의 光復軍 第3支隊를 찾아 온 것을 支除長 金學奎가 臨時政府로 보낸 것이었다
262 4. 大韓民國 臨時政府 되었는데 李範奭이 지대장을 맡아 있었다. 第3支隊의 金學奎는 오 랫동안 第6徵募分處를 맡아 활약하다가 1945년 6월 光復 직전에 支隊組織을 확충 강화하였던 것이다. 光復軍 각 支隊에는 각기 3개 區隊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支隊 와 區隊는 中國軍의 각 부대와 합동하여 전선에서 용명을 떨쳐 韓 國의 독립이 한갖 감상적 구호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였다. 光復 軍이 처음에는 中國 軍事委員會에 예속하고 있었으나 꾸준한 교 섭의 결과로 1944년 8월에는 臨時政府로 이관되어 臨時政府 統帥 府가 통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기구에 의하여 운영 되었다.20) 光復軍의 활동으로 주목되는 것은 印度와 버마 등 東南亞戰線 에 출전한 것이다. 그 자체가 비밀리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분명한 시기와 인원에 대하여 확실하지 않으나 원래 1944년 朝鮮民族 革 命黨 金若山(元鳳)과 印度地區 英軍과 협의된 것인데 그후 臨時 政府에서 접수하여 光復軍駐印聯絡協定이 체결된 것이다. 그리하 여 기록상으로는 韓志成 文應國 羅東奎 등 20명 안팎의 인원이 라고 하나 실제는 보다 많았겠지만, 이들은 주로 對敵宣傳, 戰地 20) 大韓民國臨時政府 公報 第83號(大韓民國 26年 12月 20日)
263 Ⅱ. 三一 運動 放送, 捕虜審問, 敵地偵察 등 특수공작의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위의 韓志成의 편지를 소개한 獨立新聞 기사에 의하면 정보활동 과 전투에도 참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21) 이와같이 光復軍은 北中國에서 印度에 이르기까지 對日戰線 전역에서 활동하면서 독 립을 찾기에 안간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리고 光復直前에는 韓美合同作戰으로 국내 挺進隊를 편성하 여 진격하려다가 출동 임박하여 日帝가 항복하여 실현하지 못했 음은 후술하는 바와 같다. 5) 臨時政府의 擴充과 光復 1941년말 美日戰爭(太平洋戰爭)이 일어나자 重慶 臨時政府 주 변에는 자못 격앙된 動靜이 오갔다. 그것은 日本의 패망을 눈앞에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戰後 처리의 잇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臨時政府를 확충 개편하게 되었는데 朝鮮民族革命黨 및 朝鮮民族解放同盟 등의 左系人士와 無政府主義聯盟22) 인사가 臨 時政府에 참여하여 議政院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朝鮮民族革命 黨의 朝鮮義勇隊는 전술한 바와 같이 光復軍에 편입되어 명실 공 히 臨時政府를 중심으로 모든 독립운동자가 연합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그동안의 분렬과 몇 번의 통합운동이 실패한 것을 참작해 볼 때 금번의 합류는 국제정국의 변화에 따른 대응책에서 공통된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결론은 국제적으로 분렬의 인상을 주 21) 臨時政府 公報 第83號 國史編纂委員會 앞의 資料2 p.385 및 資料3, pp 獨立新聞(重慶版) 第2號(1944,8,15) 李鉉淙 光復軍聯路隊의 印 度派遣과 活動狀況(亞細亞學報 第11輯 pp ) 22) 東洋의 無政府主義者는 쏘련혁명 후 共產主義와 합류하여 운동하고 있었는데 1922년초 모스크바의 極東人民代表大會 이후 분렬하였다. 그리하여 獨立運動 당시, 한국의 無政府主義者들은 民族陣營과 친근하였다. 近藤憲二 私の見さ日 本アナキズム運動史(1969, 東京) p
264 4. 大韓民國 臨時政府 지 않아야 하고 특히 中國을 비롯한 국제적 지원을 얻고, 아울러 전후처리에서 1次大戰後 같은 慘劇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렇게 해서 소위 統合議會가 성립되었고, 統合議會가 형성된 뒤 1943년 봄에는 韓國靑年會와 韓國愛國婦人會가 결성되었다. 이 무렵 戰後處理에 있어 韓國을 국제관리 한다는 일부설이 나돌아 臨時政府外務部에서 반박 성명을 발표했던 일은 전술한 바이지만, 放同盟 朝鮮無政府主義者總聯盟 韓國愛國婦人會 韓國靑年會 1943년 5월 10일에는 韓國獨立黨 朝鮮民族革命黨 朝鮮民族解 등 정당 단체가 重慶에서 在中國自由韓人大會를 개최하고 臨時政 府에 발맞추어 국제보호를 반대한다는 선언문을 國內外에 발송하 였다.23) 그러한 가운데 그 해 겨울에 카이로선언이 발표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개편과 긴장 그리고 홍분 속에서 光復을 전망하면서 議政院에서는 改憲 작업이 추진되고 있었다. 원래 개헌 논의는 1942년 10월 소위 統合議會 때에 시작되었다. 현행 約憲은 환경 의 변화에 따라 사용상 종종의 곤란을 절감하였으므로 개정을 제 의하여 起草委員까지 선출했는데 개정은 1944년 4월 제36차 회 의에서 이루어지고 보니 개정안 起草過程이 1년 6개월의 기간이 필요할 정도로 논란을 거듭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1942년 23) 重慶版 獨立新聞 創刊號( ) 국제관리설의 진원을 밝혀 두는 의미 에서 自由韓人大會 선언문의 한 토막을 소개해 둔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 립운동사자료집 8, p.37) 그중에서 가장 현저한 예로는, 미국에서 출판 되는 해피(Happy) 라이프(Life) 타임(Time)과 아시아(Asia)라는 잡지에서는 마침내 한국을 모욕하는 문장을 공공연하게 실었었다. 그들은 한국이 전쟁후에 있어서 마땅히 국제관리에로 돌아간다는 등의 말이다...이에 한국의 혁명인사 들은 이미 글을 써서 이를 변명하고 반박한 바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미국 시카고 선(Sun)의 런던 특파원이 전번( 筆者註)에 있었던 영국과 미국의 정치 영수들이 워싱턴에서 있었던 회담 소식을 보도했다. 그 말에 의하면 전쟁 후의 한국은 독립되기 전에 잠시 국제호위(國際護衛 : International Guard-Ship)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식은 이미 中央社 4월 27일 워싱턴발 전보로 重慶의 각 신문 지상에 발표되었다
265 Ⅱ. 三一 運動 당초 제의 때, 우선의 필요에 의한 개헌과는 달리 光復된 民主共 和國의 憲法 체제를 완벽하게 구비할려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했 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의도는 新憲章 내용에서도 읽을 수 있지 만, 당시 改憲委員會記錄을 보면 修正委員會의 보고문에서도 지적 되어 있다. 約憲을 憲章이라고 고친 1944년의 憲法은 1919년 9월의 헌법 처럼 근대 憲法典의 체제를 갖춘 것으로 前文과 本文 62個條로 되어 있는데 제1장 總綱, 제2장 人民의 權利義務, 제3장 臨時議政 院, 제4장 臨時政府, 제5장 審判院, 제6장 會計, 제7장 補則으로 되어, 우선 제2장 인민의 권리의무와 제5장 審判院을 신설한 것 그리고 영토의 조항까지 신설한 데서 무엇을 도모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臨時政府 요인들은 光復後 臨時政府가 국내에서 과도적 통치기 구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전망했던 것은 당연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24) 따라서 新憲章은 그러한 전망을 고려한 것이며 내용에서 1941 년에 발표한 建國綱領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光復後에 臨時 政府가 전망한대로 역사가 전개되었다면 1944년의 憲法은 韓國 憲政史上 다시없는 광채를 받았을 것은 분명하다. 新憲章의 다른 특징은 主席의 권한을 보다 강화했고, 行政府를 政策議決機關인 國務委員會와 執行 部署인 行政各部로 구분하여 이중구조로 만든 점과 副主席을 신설한 점 등이며 전체적으로 정 부의 규모를 크게 확장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5월에는 金九 主席, 金奎植을 副主席으로, 공산진영의 24) 1945년 9월 3일에 발표한 臨時政府當面政策 第9項에 다음과 같이 明示되어 있다. 國內에서 過渡政權이 아직 成立되기 전의 國內 一切 秩序 및 對外 一切 關係는 本臨時政府가 臨時로 責任지고 維持한다
266 4. 大韓民國 臨時政府 金元鳳과 무정부주의자 柳林까지 입각한 신정부를 내외에 선포하 고 각종 官制를 정비하여 새로운 체제를 완비하였다. 그리고 1944년에는 전에 없던 큰 歲入 2천 46만 2천 237원으 로 20만여 원의 黑字 결산을 보기도 했다.25) 終戰 직후에는 光復軍의 활동은 물론, 각처에 파견한 공작원중 에는 국내에서도 활동했다고 하는데26) 국내에 대한 본격적인 진 격은 李範奭을 대장으로 한 국내 挺進隊에 의해서 계획되었으나 그 실현 직전에 終戰되고 말았던 것이다. 즉 美陸軍省의 지원으로 挺進隊員이 阜陽과 西安에서 空輸作戰 등 특수훈련을 끝내 고 출동준비를 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日 本軍이 항복하였다. 당시의 主席 金九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 다.27) 西安과 阜陽에서 訓練을 받은 우리 靑年들에게 각종 비밀 무 기를 주어 山東에서 美國 잠수함을 태워 本國으로 들여 보내어서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美國 비행기로 무 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美國 陸軍省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倭敵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前功이 可惜이 어니와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아뭏든 환국은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1919년 이래 26년여의 서울에 들어가 全體 國民의 앞에 政府를 내어 바칠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美國側으로부터 서울에는 美國軍政府 臨時政府는 가 있으니 臨時政府로는 入國을 許諸할 수 없은즉 個人의 資格으 로 오라 하기로 (白凡逸志) 할 수 없이 그 해 겨울에 모두 개인 25) 第38回 議會會議錄(國史編纂委員會 앞의 資料1 p. 182) 2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임시정부사 p ) 앞의 白凡逸志 pp
267 Ⅱ. 三一 運動 자격으로 환국하였다. 2년전 카이로선언에서 當然한 順序에 따라 독립한다던 그 순서를 열강들은 軍政과 신탁통치안으로 표현하고 있었다.28) 大 韓民國 臨時政府는 3 1운동의 결정체로서 국민적 기초 위에 주 체적 의지에 의하여 수립한 것인데 光復 당시에는 戰後 국제적 제 패로 말미암아 국민의 정부로 환국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3 1 운동과 光復을 연결하는 현실적 절차를 밟지 못 하였으므로 독립운동이 한갖 外地的 終結로 끝난 것 같은 착각을 낳을 가능성이 많게 되었다. 그러나 獨立運動의 기간에 臨時政府 또는 제 단체나 지도이념 의 부침 기복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당면한 문제의 극복과정으 로 봐야 할 것이고, 3 1 운동 및 독립운동과 光復에 있어 현실적 연결에 다소의 흠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전후처리의 국제적 제패 라는 國際力學을 고려한다면 이해가 미칠 것으로 안다. 국제적 제패도 신탁통치안을 철회시키고 大韓民國政府를 수립 하므로서 그 說角은 꺾였다. 그러므로 이후에 주체적인 역사를 얼 마나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느냐 하는 데에 민족사적 과제가 놓여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趙東杰 28)
268 5. 獨立軍의 抗戰 5. 獨立軍의 抗戰 (1) 獨立軍의 編成 韓末에 전국적으로 봉기하였던 義兵活動이 日軍의 강력한 무력 으로 점차 활동근거지를 상실하게 되자 많은 義兵部隊는 새로운 활동기지를 찾아 韓滿國境線을 넘어 滿洲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滿洲에 새로운 獨立軍基地를 건설하는 한편 무기와 병력을 보충 하고 훈련을 강화하면서 국내진입의 독립전쟁의 태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9년 국내에서 3 1 運動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하여 본격적인 獨立戰爭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민족의 비분 과 주권회복의 열망이 총집결된 평화적인 3 1 運動이 日帝의 가 혹한 탄압으로 좌절되어 버리자 많은 애국청년들이 日帝와의 武 力抗戰을 전개하기 위하여 滿洲로 건너옴으로써 在滿獨立軍은 새 로운 활기를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韓 滿國境지대에 근거를 두 고 있던 여러 독립군은 새로이 부대를 정비 또는 편성하여 보다 효과적인 抗日戰을 전개하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따라서 1919년 후반기에는 滿洲와 沿海州지방에 많은 獨立軍部隊가 편성되어 獨 立戰爭을 전개하여 나갔다. 東北滿洲에 가장 강력한 抗日軍團은 大倧敎徒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고 汪淸縣 西大波溝에 본거를 둔 北路軍政署였다. 이 軍 致署의 독립군은 總司令官 金佐鎭에 의하여 통솔되었다. 시베리아
269 Ⅱ. 三一 運動 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독립군을 무장시키고 土官 양성을 목적 으로 十里坪에 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애국청년들을 훈련시켰다. 그리하여 1920년 8월에는 소속 병력이 1,600명이었고, 小銃이 1,300梃, 拳統 150梃, 機關銃 7門이나 되어 東北滿洲 최강의 정 예부대로 성장하였다.1) 이 北路軍政署에 필적할 만한 또 다른 독립군이 있었는데 그것 은 間島國民會에 소속된 大韓獨立軍으로서 前義兵大將 洪範圖에 의하여 통솔되고 있었다. 이 부대는 義兵出身이 중심이 되어 본부 를 鳳梧洞에 두고 있었으며 각 지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는데 이 부대는 뒤에 崔振東이 인솔하는 軍務都督府軍과 통합하여 大軍團으로 발전되었다. 통합 후의 진영은 崔振東이 司 令官, 安武가 副官, 洪範圖가 聯隊長으로써 가장 활발한 國內進入 作戰을 전개하였던 독립군이었다. 이 밖에 東北滿洲에는 여러 독립군이 존재하였다. 安圖縣에는 前義兵이 중심이 된 大韓正義軍政司와 光復團이, 延吉縣에는 義 軍府가, 撫松縣에는 咸南出身들로 구성된 光正團이, 烏雲縣에는 血誠團이 있었고 기타 지방에 義民團 野團 大韓新民會가 있었 다. 이들 독립군들이 비록 하나로 통합되지는 못하였을 망정 최후 목적은 민족을 구하고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하여 日帝와 싸운다 는데 귀일되었던 것이다. 한편 南滿洲에서도 많은 독립군들이 조직되었다. 이 곳 항일 운 동의 진원지는 柳河縣 三源堡로서 일찍부터 愛國志士들이 몰려 와서 獨立運動基地를 건설하였던 곳이다. 즉 1910년 韓 日 合併을 전후하여 李始榮 李相龍 金昌焕들 1) 독립신문 (상해판) 88호 I
270 5. 獨立軍의 抗戰 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耕學社라는 僑胞들의 自治機關을 설립하 는 한편으로 新興學校를 설치하여 애국청년들을 길러냈다. 그 후 이 기관은 扶民團으로 개편되었다가 1919년에는 韓族會로 되었던 것이다. 그 후 臨時政府의 동의를 얻어 西路軍政署라는 軍政府로 발전 되었다. 이 軍政署는 즉시 독립군 편성에 착수하는 한편 新興學校 를 新興武官學校로 개편하여 獨立軍 士官을 양성하였다. 1920년 4월 日本軍 中尉로 복무하던 李靑天이 망명하여 합세 하자 軍政署의 움직임은 일층 활기를 띄어갔다. 처음 小銃 5梃으 로 시작된 軍政署의 新興武官學校는 1920년 8월까지 2,000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이들은 西路軍政署 뿐만 아니라 다 른 독립군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柳河縣 三源堡에는 또 다른 독립군부대가 있었다. 즉 舊韓末에 국내에서 義兵活動을 하던 義兵將들이 중심이 되어 1919년 음력 3월 15일에 大韓獨立團을 조직하여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趙孟善 朴長浩 白三圭 등에 의하여 통솔되는 이 獨立團은 여러 곳에 지방조직을 확대시킨 뒤에 청년들을 모집하여 독립군 을 편성 훈련시켜 1919년 8월까지 약 1,500명의 병력을 유지하 였다. 700명의 독립군을 하얼삔에 주둔하고 있는 白系러시아부대에 보내어 군사훈련을 받게 하였으며 시베리아로부터 무기를 구입하 여 장비를 갖추었다. 이 독립군은 부대를 4개 中隊로 편성한 뒤에 南滿洲 第1師團이라는 부대명칭을 사용하였다. 이 大韓獨立團은 전술한 韓族會와 그리고 安東縣 弘通溝에 본 부를 둔 大韓靑年團聯合會와 통합되었다가 1920년 光復軍總營으 로 개편되어 大韓民國 臨時政府 산하의 軍團으로 되었다
271 Ⅱ. 三一 運動 이 光復軍總營은 1920년 6월에 편성된 것으로 본거지를 전의 大韓獨立團의 본부가 있던 柳河縣 花斜溝 福順成에 두었으며 吳 東振이 營長이 되어 부대를 통솔하였다. 이 營에 소속된 사람들은 모두 군인 신분으로 복무케 하였으며 總營 외에 국내외 각 지에 支營을 설치하여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가장 왕성하 였던 시기에 6個營에 병력이 3,732명이나 되었었다.2) 이 부대 역 시 國內進入作戰을 활발히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었다. 이상의 여러 獨立軍 이외도 괄목할 만한 활동을 하였던 것이 長 白縣 十七道溝 王哥洞에 근거를 두고 있던 大韓獨立軍備團이었으 며 기타 光韓團 義成團 太極團 大震團 등의 여러 단체가 南滿 洲에 편성되어 있었다. 한편 滿洲에서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沿海州지방에도 많은 韓 國獨立軍들이 편성되어 있었다. 주로 이만 이남의 韓滿蘇 國境線 부근에 편성되어 국내 돌입의 기회를 엿보면서 훈련에 열 중하고 있었는데 중요한 부대로는 崔慶天의 義軍府, 姜國模의 血 誠團, 金奎是의 新民團, 黄丙吉의 警備隊 등이 있었다. 1921년 自由市慘變 이후 蘇聯은 시베리아에 근거를 두고 있는 韓人 무장부대를 강제로 무장해제를 단행시킴으로써 沿海州에서 抗日獨立鬪爭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滿洲 沿海州에는 여러 독립군들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국내에서도 몇 개의 독립군이 조직되어 있었 다. 즉, 平北 義州郡 古寧朔面에 소재한 天摩山 속에는 崔時興이 인 솔하는 天摩山隊 獨立軍이 있어 朔州 義州 龜城 昌城지방을 활동무대로 하여 활발히 게릴라戰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義 2) 愛國同志援護會編 韓國獨立運動史 p
272 5. 獨立軍의 抗戰 州郡 東岩山에도 金仲亮에 의하여 통솔되는 普合團의 독립군이 있었다. 또 黃海道의 九月山 중에도 九月山隊라고 불리우는 일단 의 독립군이 주둔하여 인접지역을 출몰하면서 抗日戰鬪를 전개하 였던 것이다. 국내에서의 독립군 편성은 이상의 3개 단체에서 볼 수 있듯이 모두 日軍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깊은 산중에 본거지를 두고 있 었으며 日軍警과 유격전을 진행시켜 나갔다. (2) 國內 進入作戰 在滿 獨立軍들의 활동은 1919년 후반기부터 시작되어 1920년 부터는 본격화되어 갔다. 대규모의 전투를 치르기에는 장비나 병 력면에서 너무나 열세에 처하고 있는 독립군은 자연 소규모의 병 력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日本軍警과 유격전을 감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로 5명 이내의 소단위로 平安 咸鏡지방의 日本軍警과 싸우 는 한편 군자금의 모집, 일제의 침략기관 파괴, 친일파 숙청을 실 행하였다. 그리하여 日本의 공식 발표는 國境 3道에서 1920년의 독립군 출동건수가 1,651건에 출동인원 4,643명이라 기록되어 있고 警察 機關 습격 13개소, 警察射殺 9명, 부상 24명, 交戰回數 73건이었 다. 또 경찰 이외 官公署 습격이 25건에 사살 8명, 부상 3명이라 하였다.3) 그러나 이와 같은 日帝의 공식 발표는 사실과 많은 차 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 이상의 전과를 올렸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3) 朝鮮總督府 警務局編 第73回 帝國議會說明資料(昭和 12年)
273 Ⅱ. 三一 運動 1920년대 초반기에 在滿 獨立軍 중에서 가장 활발한 國內進入 作戰을 전개하였던 부대를 들어 그 활동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 다. 1) 大韓獨立軍의 活動 洪範圖에 의하여 통솔되는 大韓獨立軍은 1920년초부터 국내진 입 작전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 중 3월에는 咸北 穩城지방을 집 중적으로 공격하여 전후 8차의 기습을 감행하였다.4) 3월 15일 穩城郡 豊利洞 警察官駐在所를 습격하여 1시간동안 교전한 끝에 日警 1명을 射殺하였으며, 17일에는 同郡 柔浦面 月 坡洞에 출동하여 軍資金을 모금하였다. 그리고 계속 18일에는 美 浦面 長德洞에 출동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日警과 내통한 密偵 1명을 사살하였다. 그런 뒤에 다시 穩城郡 城壁을 점령하고 日軍과 50분 간 교전하여 日軍騎兵 1명을 쓰러뜨리고 또 그날 오 전 9시 日騎兵 偵察隊와 교전하였다. 18일 오전 5시 50분에는 50여 명이 美占洞 日憲兵監視所를 공격 警察隊와 50분간 교전하여 1명을 사살하였다. 18일에는 香棠洞을 기습하여 日警과 교전하였고 3월 2627 하였다. 이날 憲兵 양일 간에는 南陽洞에 주둔 중인 日軍守備隊를 공격하였다. 이 大韓獨立軍은 6월에도 계속 이 지방을 공격함으로서 日軍警 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鳳梧洞 戰鬪 에서 대승리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2) 光復軍總營의 作戰 1920년 중반기에 편성을 본 光復軍總營의 활동은 營長 吳東振 4) 독립신문(상해판) 74호
274 5. 獨立軍의 抗戰 에 의하여 상당히 활발하였다. 6월 8일 平北 碧潼郡에 출동한 암살대 2명은 同郡警察署 소속 악질 巡警 文治朝를 사살하였으며, 11일에는 다른 대원들이 平北 昌城郡 大倉面長인 親日派를 사살하였다. 그리고 12일에는 결사 대가 平北 朔州郡 九曲面 警察官駐在所를 기습 공격하여 日警 1 명을 射傷시켰고, 18일에는 碧潼郡 鶴會面事務所 및 江東郡 小貴 面事務所를 공격하여 소각시켰으며 역시 日警 1명을 射傷시켰다. 6월 25일에는 결사대 8명이 碧潼警察署 鶴會駐在所와 同面事 務所를 기습 공격하여 소각시켰으며 日警 1명을 사살하였다. 1920년 8월 美國 國會議員團이 韓國을 방문하게 되자 光復軍 總營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日帝의 기관을 파괴하고 要人들 을 암살시킴으로써 韓人들이 日帝의 植民統治에 항거하고 있다는 것을 美國會議員들에게 알리고자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營長 吳東 振은 7월에 결사대를 구성하며 安敬信 이하 3명에게는 平壤으로 鄭仁福 외 1명에게는 新義州로, 林龍日 외 2명에게는 宣川으로, 金榮哲 외 2명에게는 서울로 각기 폭탄을 주어 파견하였다.5) 安敬信 일행은 7월 30일 平壤으로 향하는 도중 平南 安州郡 燕 湖面 東西里에서 不審檢問하는 日警 1명을 射殺한 뒤 8월 3일 平 南道廳內의 警察部를 폭파시켰다. 그리고 鄭仁福 일행은 8월 15 일 新義州로 잠입하여 新義州驛前 鐵道호텔에 投彈하여 건물의 일부를 폭파시켰다. 林龍日일행은 宣川에 잠입하여 9월 1일 宣川 警察署와 郡廳에 投彈하여 폭파시켰다. 그러나 金榮哲 일행은 서울에 잠입한 뒤 總督府를 폭파하려 하 였으나 거사 전날 발각, 체포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5) 吳東振 裁判 判決文
275 Ⅱ. 三一 運動 3) 天摩山隊의 勇戰 天摩山隊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滿洲에 본거를 두고 있던 독 립군이 아니라 平北 朔州郡 天摩山을 근거로 하여 崔時興의 통솔 밑에 활동하던 독립군이다. 1919년 12월 滿洲로부터 잠입한 崔時興이 崔志豊과 더불어 天 摩山隊를 편성한 후 1920년 초부터 抗日戰을 전개하였다. 3월 日 本軍이 이들의 소재를 탐지하고 포위, 공격하자 독립군은 용전 분 투하였다. 그러나 日本軍이 火攻을 가하여 옴으로 天摩山隊는 할 수 없이 근거지를 일단 龍頭山으로 옮긴 뒤 계속 유격전을 감행하 였다. 5월에는 朴貞焕이 5명을 인솔하고 水北面에 출동하였다가 日警 과 교전을 벌였으며, 6월에는 日軍 수백 명이 龍頭山 근거지를 포 위, 습격하여 오자 이를 반격하여 日軍 3명을 시살하였다. 그러나 天摩山隊의 희생자도 5명이 발생하여 근거지를 다시 天摩山으로 이전하였다. 6월에 들어서자 天摩山隊는 더욱 활발히 투쟁하였다. 10일에 昌城郡 大倉面에 출동하여 日警의 앞잡이인 同面長을 사살하였고 19일과 21일에는 水登面 德瑜洞과 安豊洞에서 朔州警察署 수사대 와 교전하였다. 28일에는 雨山面 書興洞에서 역시 日警과 교전하 였다. 이 동안 天摩山隊의 전사자도 다수 발생하였고 많은 대원들이 日警에 피체당하였다. 이렇게 되자 崔時興은 부대를 새로이 개편 한 뒤 새로운 각오로써 臨戰態勢를 확립하였다. 당시의 부대 간부 는 다음과 같다.6) 司令長 崔時興 副 官 崔志豊 6) 독립신문(상해판) 158호
276 5. 獨立軍의 抗戰 參 謀 朴應伯 經 理 金世鎭 中隊長 崔義楫 小隊長 金尙玉 朴泳燦 崔允熙 金龍澤 6월 28일, 崔志豊이 인솔하는 19명의 대원들이 義州郡 玉尙面 日憲駐在所와 同面事務所를 습격하여 1명을 사살하고 兩所틀 소 각시켰다. 그리고 7월 26일 碧潼郡 加別面所를 습격, 소각하고 楚 山郡 板面 富崇洞에서 日山林看守 2명을 사살하였다. 8월 10일 에는 西三面 院豊洞에 출동하여 日警 1명을 사살하고 1명에게 총 상을 입혔으며, 9월 10일에는 楚山郡 砂器洞에서 역시 日警 1명 을 사살하였다. 이 天摩山隊의 활동은 1922년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에는 滿洲로 근거지를 옮기어 활동하였다. 4) 其他 獨立軍의 活動 1920년 日本軍의 滿洲 出兵으로 在滿 獨立軍들은 대타격을 받 아 일시 抗日戰이 쇠퇴해 가는 듯 하였으나 1921년 다시 부대를 정비하여 抗日戰을 계속하였다. 日本側 자료에 의하여 독립군의 활동을 살펴보아도 독립군의 활동에는 별다른 차이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國境 三道(平北, 咸北, 咸南) 지방에서의 독립군의 활동 통계와7) 1921년부터 1923년까지의 독립군의 국내 進入作戰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 다.8) 7) 朝鮮總督府 警務局編 第73回 帝國議會說明資料 8) 國史編纂委員會編 韓國獨立運動史 3 pp
277 Ⅱ. 三一 運動 區分 年度 交戰回數 獨立軍 出動件數 獨立軍 出動人員 國內 對岸 ,148 2,127 2,797 3, 警察機關 警察機關外 官公署 區分 年度 襲擊 射殺 負傷 襲擊 射殺 負傷 獨立軍의 抗日鬪爭 一覽 年月日 戰 鬪 狀 況 北間島 六道溝부근에서 日軍分遣隊와 交戰, 日軍 19 명을 사살하고 35명을 重傷시키다. 獨立軍 1大隊가 咸北 淸津을 공격하여 日軍 40여명 을 사살하고 또 羅南駐屯 日軍 14中隊를 맞아 1시간 교전 끝에 600여 명을 死傷시킴. 독립군도 50여 명 의 死傷者를 내다. 平北 寧邊郡 古城面 梧里面에서 교전, 獨立軍 2명 戰死. 平北 熙川郡 鷹洞 龍谷에서 獨立軍 4명이 日警과 교 전. 獨立軍 1명 전사. 平北 德川郡 德洞에서 교전. 平北 德川郡 九政里에서 교전, 日警 1명 사살, 2명 중상 咸南 三水郡 三南面 槍洞里에서 獨立軍 3명이 日警 搜查班과 교전, 獨立軍 2명 전사. 獨立軍 7명이 義州郡내 監視所근무 日憲兵 1명 사살. 平北 楚山郡 桃源面 義倉洞에서 獨立軍 7명이 日瞥 과 교전, 獨立軍 1명 전사
278 5. 獨立軍의 抗戰 光復軍總營의 獨立軍이 平北 昌城郡 大瑜洞의 日警 駐在所를 습격, 銃器 20梃, 탄환 수천發, 軍刀 4柄을 노획. 軍政署 義勇隊가 太平面에서 日警과 교전 3 4명의 日警에게 총상을 입히다. 甲山 日警駐在所와 營林廠을 습격, 日警 3명을 사살 하고 총기 6梃과 탄약 등 戰利品을 노획하다. 平北 慈城郡 閭延面 晩興洞에서 교전. 平北 朔州郡 東倉에서 光復軍 3명이 日警 11명과 교전 獨立軍 22명이 楚山郡 桃源面 日警駐在所와 面所를 습격 4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히다. 총기 5梃, 탄환 수백 發, 軍刀 4柄을 노획하고 軍資金을 모금하다. 碧潼郡對岸 寬甸縣 小荒溝에서 日警 10여명과 교전, 日警 3명에게 총상을 입히다. 咸南 三水郡 好仁面 雲谷里에서 日警과 교전. 平北 昌城郡 新倉面 城興洞 山中에서 日警과 교전, 獨立軍 4명 전사. 平北 朔州郡 兩三面 院豊洞에서 교전, 獨立軍 3명이 전사. 黃海道 新溪郡 古面 武庫里에서 光復團員이 교전, 日 警 1명 부상, 光復團長 전사. 長白縣 富興洞에서 光復軍이 日警 15명과 교전, 日 警 2명 중상, 獨立軍 1명 輕傷. 陰 6월 2일-7월 15일 獨立軍 遊擊隊가 平北 咸南에 서 7회 日軍과 교전하여 172명 사살, 小銃 64梃, 탄 환 5,146發, 軍刀 8柄, 革帶 43個 노획하다. 光復軍決死隊長 朱錫煥이 10여명을 인솔 日警과 교 전 日警 1명 중상. 江東郡 晩達面 大盛里에서 日警과 교전, 2명 사살, 1 명 중상, 獨立軍 1명 被逮. 黃海道에서 光復軍統營隊員이 日警과 교전 1명을 중 상입히다. 平北 朔州郡 東倉에서 光復軍統營隊員이 日警과 교전
279 Ⅱ. 三一 運動 平北 江界郡 立舘面에서 獨立軍이 營林廠出張所를 습격, 건물을 소각하다. 咸南 甲山郡 倉井里의 面事務所와 駐在所를 습격 1 명 사살, 2명 중상, 武器노획. 平南 寧遠郡 永樂面 陽城里에서 교전, 日警 4명 중상. 平南 成川郡 三興面 駐在所를 습격, 日警 1명 사살, 3명 중상. 平北 熙川郡 東倉面 駐在所를 습격. 平北 江界에서 교전. 平南 大同郡 古平面에서 교전, 獨立軍 1명 전사. 平北 朔州郡 外南面 大館洞 駐在所 습격, 日警 3명 사살, 3명 부상, 武器 다수 노획. 咸南 三水郡 嶺城駐在所를 습격, 日警 2명 사살, 2명 중상. 新加坡鎭에서 日警과 교전. 咸南 三水郡 好仁面 高巨里에서 교전, 獨立軍 2명 전사. 平北 江界郡 高山鎭駐在所 습격. 平北 渭原郡 和昌面 文明里에서 日警 1명 생포. 郭山郡 北面에서 교전, 日警 2명 사살. 平北 昌城郡 昌州後坪駐在所 습격, 日警 1명 사살 1 명 중상. 平北 渭原郡 西泰駐在所 습격. 平北 渭原郡 密小面 南坡洞에서 日警과 교전, 5명 사살, 同郡 九邑面에서 2명 사살, 獨立軍 1명 전사. 平北 碧潼郡 太平面에서 교전. 日警 1명 사살, 1명 중상. 平北 寧邊郡 南松面 豊門洞에서 교전 日警 1명 사살. 平北 厚昌郡 東興面 雙南洞에서 교전, 獨立軍 2명 전사. 平北 江東郡 漁雷面 駐在所습격, 日警 1명 사살. 平北 渭原郡 西泰面 龍門洞에서 교전, 日警 1명 중상. 平北 熙川郡 新豊面 南洞에서 교전. 平北 楚山郡 西面 蓮潭里에서 교전, 日警 3명 사살
280 5. 獨立軍의 抗戰 平北 渭原郡 密山面 南波洞에서 교전, 日警 2명사살. 咸北 茂山郡 三長面 農事洞 駐在所 습격. 日警 2명 사살, 2명 중상. 平北 義州郡 淸城鎭駐在所 郵便所 稅關出張所를 습 격 소각시킴. 1명 사살, 獨立軍 4명 전사. 平北 楚山郡 西面 舞鶴洞에서 교전, 日警 2명 사살, 3명 부상. 平北 楚山郡 西面 中段村에서 교전, 日警 2명 사살. 平北 江東郡 漁雷面 河淸場駐在所 습격, 日警 2명 사살. 平北 碧潼郡 零時面 駐在所 습격, 日警 2명 사살 무 기노획, 面長 총살. 平北 熙川郡 北面 明文倉駐在所 습격, 日警 2명 사 살 3명 중상, 무기 다수 노획. 平北 楚山郡 東面 化豊洞에서 교전, 獨立軍 1명 전사. 平北 江東郡 漁雷面 站城洞에서 교전, 獨立軍 2명 전사. 平北 義州郡 加山面 楸洞에서 日警과 교전, 獨立軍 2 명 전사. 平北 慈城郡 森林 중에서 日警과 교전, 日警 4명 사 살, 1명 중상. (3) 鳳梧洞 戰鬪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1919년부터 개시된 在滿 獨立軍들 의 무장투쟁은 1920년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더욱 활기를 띠어 갔 다. 1920년 3월부터 6월 초까지 이들 獨立軍의 국내 진입 작전은 32회에 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경찰기관을 파괴 습격한 것 이 34처나 되었다.9) 특히 洪範圖가 인솔하는 大韓獨立軍의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 9) 독립신문(상해판) 88호
281 Ⅱ. 三一 運動 다. 증강되어 가는 日軍警의 국경 수비망을 교묘히 뚫고 국내에 진입하여 惠山鎭 甲山 江界 萬浦鎭 慈城 등지에서 日軍과 교 전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것이다. 1920년 6월에는 和龍縣 月新江 三屯子를 출발하여 咸北 鍾城 郡에 진입하여 日憲兵 福江三太郞이 인솔하는 1개 小隊의 국경수 비대를 격파하였으며 추격하여 온 日軍南陽守備隊長 新美二郞이 거느린 1개 中隊의 日軍을 三屯子 南方에서 기습, 공격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한편 두 차례의 敗戰 報告를 접한 日軍 제39師團長은 安川少佐 에게 일개 대대의 병력을 주어 일거에 大韓獨立軍을 격멸할 것을 명령하였다. 6월 6일 日本軍 대병력이 大韓獨立軍의 本營인 鳳梧 洞을 향하여 진격하여 왔다. 이와 같은 日軍의 동태를 파악한 大 韓獨立軍은 곧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전투대형을 취하였다. 즉 獨立軍은 安山村落 後方高地에 매복하고 日軍을 기습 공격 하기로 하였다. 오후 3시 日軍 前衛部隊가 독립군 전방에 출현하 였다. 이 日軍은 安川少佐가 거느린 1개 大隊로써 독립군의 본거 인 鳳梧洞을 포위, 습격하기 위하여 행군 중인 것이었다. 독립군 은 日軍이 목전에 다가왔을 때 공격을 개시하였다. 日軍은 미처 반격을 취할 새 없이 쓸어졌으며 급히 퇴각하여 버렸다. 이 전투 에서 독립군은 日軍 120여명을 사살하였는데 我軍의 피해는 전사 1명, 부상 2명에 지나지 않았다.10) 대승리를 취한 독립군은 곧 鳳梧洞으로 집결하여 다시 있을 日 軍의 반격에 대비하였다. 獨立軍 聯隊長 洪範圖는 전부대를 練兵場에 집결시키고는 작전 명령을 하달하였다. 제1中隊는 中隊長 李千五의 지휘 하에 鳳梧洞 독립신문 88호 韓國獨立運動史 3 p ) 朝鮮民族運動年監
282 5. 獨立軍의 抗戰 上村 西北端에 위치케 하고, 제2中隊는 中隊長 姜尙模의 지휘 하 에 東山에, 제3中隊는 中隊長 姜時範 지휘 하에 北山에, 제4中隊 는 中隊長 曹權植 인솔 하에 西山南端에 배치케 한 뒤 洪範圖는 2 개 中隊를 인솔하여 西山 北端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日本軍의 本隊가 獨立軍의 포위망에 들어오기 전까지 는 절대로 사격을 하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聯隊 附 將校 李園에게는 본부 및 나머지 병력을 인솔하여 西北山間에 위치케 하여 병력의 增援과 탄약의 보급 및 軍糧給養의 책임을 맡 도록 하였다. 또 제2中隊 제3小隊 제1分隊長 李化日에게는 소속 분대를 이끌 고 高麗嶺 北方 1200m 高地와 그 東北쪽 촌락 앞에 대기하고 있 다가 日本軍을 공격하여 日軍의 전진을 제어하도록 하였다. 그런 후에 獨立軍 總司令官 崔振東, 副官 安武는 東北 산간 최고봉에 자리잡고 부대를 지휘하도록 결정하였다. 7월 7일 일본군 대대 병력이 高麗嶺 서쪽에 출현하였다. 1,500 m 高地에 매복하여 있던 李化日分隊는 日本軍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다가 日本軍 前衛中隊가 근접하였을 때 공격을 개시하여 일거 에 이를 섬멸하여 버렸다. 그런 연후에 곧 부대를 수습하여 鳳梧 洞 本隊에 귀합하였다. 獨立軍의 기습공격에 前衛部隊를 상실한 日本軍은 일단 퇴각하 여 부대를 재편성한 뒤 그날 오전 11시 30분에 다시 鳳梧洞으로 진출하였다. 4방 고지에 잠복하고 있던 독립군은 日本軍이 완전히 포위망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司令官의 사격 신호가 울 리자 공격을 개시하였다. 독립군의 매복 포위 전술에 또다시 당황 한 일본군은 곧 반격을 개시하였으나 4방고지에 몸을 숨기고 정 확히 조준 사격하는 독립군의 총탄에 수없이 쓰러져 갔으며 끝내
283 Ⅱ. 三一 運動 는 흩어져 버렸다. 제2中隊長 姜尙模는 부대원을 이끌고 敗走하는 적을 추격, 공격함으로써 日本軍은 괴멸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獨立軍은 日本軍 157명을 사살하였고, 300여명에 게 부상을 입혔으며 소총, 기관총 등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반 면 독립군 측은 전사 4명, 중상 2명을 냈을 뿐이다.11) 이 鳳梧洞 전투야말로 獨立軍이 편성된 이후 첫번째로 올린 통쾌한 대승전 이었던 것이다. 한편 패전한 日本軍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7월 8일 穩城 방면으 로 퇴각하여 버렸다. (4) 靑山里 戰鬪 1920년 韓 滿 國境을 중심으로 독립군들의 무장 활동이 적극 화되어가자 日帝는 전투력을 증강시켜 독립군 대토벌을 결심하고 中國 官憲을 강박 또는 회유하여 中國側의 협조를 강요하였다. 5 월부터 日帝는 總督府 警務局長을 滿洲로 파견시켜 東三省의 실 력자 張作霖과 협의케 하였다. 5월 상순부터 8월까지 세 차례에 걸친 이른바 奉天會談에서 中 日合同捜索案이 거론되었으며 이로부터 4개월 간 大討伐作戰이 실행되었다. 명목상 中日合同捜索이었으나 실제로는 각지 친일단 체인 保民會를 앞세운 日本軍警에 의한 韓人虐殺作戰이었다. 이 때 행하여진 日本軍의 대토벌작전은 독립군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滿洲에 살고 있는 일반 교포들에게도 취하여진 잔악한 대 학살이었던 것이다. 이런 작전에 만족하지 않은 日帝는 日本軍의 대병력을 滿洲로 11) 독립신문(상해판) 88호
284 5. 獨立軍의 抗戰 출병하여 일거에 독립군을 섬멸시키려 기도하였다. 허나 中國主權 下인 滿洲로 日本軍이 출병하기 위하여는 상당한 구실이 필요하 였다. 그러자 日帝는 琿春事變이라는 것을 일으키어 滿洲出兵 의 구실을 만들어냈다. 즉 日帝는 滿洲의 馬賊頭目인 長江好를 매수 하여 琿春을 습격 하도록 하였다. 10월 2일 사전약속에 의하여 長 江好가 거느린 400여 명의 馬賊團들이 琿春城을 공격하여 日本 領事館을 불태우고 日本人 수 명을 살해하였다. 이렇게 되자 日帝는 그날로 日軍 대병력을 滿洲로 출동시켰다. 이 때 滿洲로 들어 온 日本軍은 제19師團이 중심이 되었으며, 또 블라디보스톡 에 있던 시베리아 출병 병력과 遼東에 출동 중 인 關東軍의 일부였다. 구실을 조작하여 출병한 일본군은 東 西 南의 3방향에서 在 滿 독립군의 소탕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日本軍은 독립군의 토벌보다는 在滿 韓人의 학살에 주력하였다. 이 당시 在滿 독립군 의 일부는 日軍 출병 이전에 이미 이와 같은 사태가 올 것을 직 감하고 종래의 근거지를 떠나 안전지대로 부대이동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汪淸縣 西大坡의 산림 중에 근거를 두고 치열한 抗日戰을 전개 하여 오던 北路軍政署는 8월 10일 中國 延吉營長 孟富德의 종용 에 의하여 근거지를 長白山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고는 약 2,800 명의 병력과 장비를 이끌고 9월 8일 이동을 개시하였다. 180輛의 輜重車에 장비 일체를 싣고 長白山을 향하던 北路軍政署軍은 10 월 초에 和龍縣 三道溝라 불리우는 靑山里 어구에 들어섰다. 이 곳 靑山里는 萬山駿嶺 중의 한 계곡 盆地로써 그 길이가 80 여리에 달하였다. 폭은 제일 좁은 곳이 4-5리, 제일 넓은 곳이 8-9리나 된다. 그리고 靑山里 서북쪽은 비교적 삼림이 적고 동남
285 Ⅱ. 三一 運動 쪽으로 갈수록 울창하였고 80도의 급경사를 이룬다. 서남쪽엔 白 頭山이, 북쪽에는 天寶山이, 서쪽으로는 長白山이 둘러 쌓여 오직 동남쪽만이 열려 있어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어 수비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10월 18일 北路軍政署 독립군이 이 계곡을 향하고 행군하고 있을 때 멀리 日本軍 대부대가 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日 本軍은 東支隊라 불리우는 부대로써 제 37여단을 기간으로 하고 보병 제73, 74연대와 騎兵 제27聯隊, 野砲兵 제25聯隊, 工兵 제 19大隊로 이루어진 혼성 부대였던 것이다. 이 日本軍의 지휘관은 37旅團長 東正彥 少將으로써 이 부대의 임무는 龍井 방면에 진 출하여 茂山에서 北上하는 제20師團의 일부 병력과 합동으로 安 圖 敦化 방면으로 이동하는 독립군을 저지, 공격하는 것이었 다.12) 北路軍政署는 곧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靑山里 계곡으로 急進하 여 전투에 가장 좋은 지형을 물색하는 한편 정찰대를 파견하여 日 本軍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였다. 당시 北路軍政署의 조직은 다음 과 같았다.13) 總 司 令 官 金 佐 鎭 參 長 羅 仲 昭 官 朴 英 熙 副 謀 硏 成 隊 長 李 範 爽 奭 從 軍 將 校 李敏華 步兵大隊長 金 奎 植 第一中隊長 姜 華 麟 白鍾烈 12) 韓國獨立運動史 3 p.202. 李範奭 우둥불 p.30 13) 朝鮮民族運動年鑑 韓根源 金 勳
286 5. 獨立軍의 抗戰 第二中隊長 洪 忠 熹 第三中隊長 金 燦 洙 第四中隊長 吳 祥 世 日本軍은 三道溝를 양쪽으로부터 포위하여 왔다. 독립군은 즉시 부대를 둘로 나누어 임시 전투편제를 구성하였 다. 즉 훈련정도가 낮은 독립군과 비전투원으로써 제1悌隊를 조직 하여 金佐鎭司令官 예하에 두어 전투지역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하였으며 士官訓練所 졸업생을 기간으로 한 독립군은 李範奭 지 휘 하에 두어 제2悌隊를 구성하였다. 제1悌隊는 四方項子 기슭에 예비대로 控置되었으며 제2悌隊는 白雲坪에 자리잡고 右側은 1개 중대의 병력으로 李敏華가, 左側은 韓根源이 역시 1개 중대의 병력으로, 정면에는 2개 중대의 병력으 로, 金勳과 李敎成이 지휘하도록 하였고, 총지휘는 李範奭 이 담 당하였다. 10월 20일 오전 8시 日本軍 尖兵隊가 獨立軍이 매복하고 있는 지점에 당도하였다. 李範奭의 사격 신호로 전투는 벌어졌다. 순식 간에 日本隊 尖兵部隊는 전멸되었으며 이어 日本軍 본대가 양쪽 에서 공격하여 왔다. 독립군의 기관총 6정과 박격포 2문 그리고 600여정의 소총이 일제히 日本軍을 향하여 불을 토하였다. 오전 11시까지 3차에 걸쳐 日本軍이 맹공을 취하였으나 천연의 지형을 이용한 독립군의 반격에 번번히 격 퇴당하였다. 이 때 제1悌隊를 이끌고 있던 金佐鎭은 점차 증강되는 日本軍 에게 포위될 염려가 있다하여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제2悌隊는 제1悌隊가 안전하게 퇴각하기까지 엄호하다가 완전히 퇴각한 것 을 보고는 잇달아 퇴각하였다. 그러나 日本軍은 독립군이 퇴 각한 줄 모르고 계속 고지 위로 양쪽에서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87 Ⅱ. 三一 運動 끝내는 앞에 있는 것이 독립군인 줄 알고 저희들끼리 交戰을 벌이 므로서 그 피해가 증가되었다. 퇴각을 한 독립군은 그날 밤을 새워 행군을 강행하여 160리 떨 어진 甲山村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21일 오전 4시 泉水洞 근방에 당도하였다. 이곳에서 斥候로부터 泉水洞에 40여 명의 日本 騎兵隊가 있다 는 것을 듣고는 곧 공격을 하여 4騎를 제외하고 모조리 사살하였 다. 이때 泉水洞에서 80여 리 떨어진 漁郞村에는 日軍 步兵 2개 大隊와 騎兵 1개 中隊, 砲兵 1개 中隊가 駐屯하고 있었는데 泉水 洞에도 도망쳐 나온 4騎의 日本軍으로부터 전황을 보고 받자 곧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행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와 같은 상황을 판단한 독립군은 漁郞村 서남쪽 고지에 매복하여 日本軍이 출동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 을 하여 오전 9시부터 日沒 때까지 전투가 계속되었다. 日本軍은 大砲로 공격을 가하여 왔으며, 步兵이 正面을, 騎兵이 側背를 공 격하였으나 독립군의 勇戰에 끝내 敗走하였다. 22일 독립군은 다 시 맹개골과 萬麟溝 森林 중에서 日騎兵隊와 조우하여 교전을 벌 였으며 23일에는 쉬溝에서 日騎砲步兵隊와 전투를 하였다. 10월 20일부터 23일까지의 일련의 전투가 獨立軍 戰史上 그 유해를 찾아 볼 수 없는 靑山里大捷이었다. 이 전투에서 北路軍政 署는 日軍 加納聯隊長 이하 1,254명을 사살하였고 20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막대한 무기를 노획하였다.14) 독립군 측의 피해 는 전사 60명, 부상자 90여명을 내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대승리를 거두기까지 독립군들의 노고도 상당하였다. 14) 李範奭著 한국의 분노 우둥불 에서는 일본군 사살 3,300여명이라 기록되어 있고 임시정부 군무부 발표는 1,200여명이라 되어 있다
288 5. 獨立軍의 抗戰 특히 전투기간 식 사를 못하여 겨우 감자 3개와 한줌의 쌀로 연명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용전분투하였으며 지 형을 이용한 효과적인 작전이 대승을 가져오게 하였다. 반 면 日 本軍은 獨立軍을 輕視하였고 또 작전에 오류를 범하여 어이없게 패전하고 말았다. 勝戰한 北路軍政署는 곧 부대를 이끌고 日本軍의 추격이 미치 지 못하는 蘇 滿 국경지대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在滿 독립군 역시 日本軍의 토벌작전을 피하여 이곳으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말경 蘇 滿國境에 가까운 密山에는 여러 곳에서 온 독립군이 집결하였는데 이 때 모인 독립군은 鳳悟洞戰鬪를 치 룬 洪範圖의 大韓獨立軍과 大韓新民會 都督府 義軍府 血誠 團 野團 大韓正義軍政司 등 10여개의 독립군 부대였다. 이들 독립군은 안전지대인 蘇聯 沿海州로 越境하여 새로이 장 비의 보충과 군사훈련을 행하기로 결정하고 入境 前에 하나의 통 합 軍團을 결성키로 하였다. 그리하여 大韓獨立團이 조직되었다. 이 軍團은 전병력을 3개 大隊로 편성하고 1大隊를 3中隊로, 1中 隊를 3小隊로 나누었는데 小隊 총수가 27개였으며 병력이 3,500 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정하였다.15) 總 裁 徐一 副 總 裁 洪範圖 金佐鎭 曹成焕 總 司 令 金奎植 參謀總長 李章寧 旅 團 長 李靑天 中 隊 長 金昌焕 趙東植 尹擎天 吳光鮮 15) 韓國獨立運動史 3 p
289 Ⅱ. 三一 運動 이만 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이 軍團은 蘇聯의 赤白 이 大韓獨立軍團은 부대편성을 마친 뒤에 蘇聯땅 戰에 휩쓸려 들어 蘇聯에 이용만 당하고 일부는 곧장 滿洲로 귀환 하였으나 일부는 黑龍江 연안의 自由市로 이동하였는데 그 뒤 自 由市慘變을 겪고는 끝내 蘇聯軍에게 무장해제를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5) 三府의 成立과 抗戰 日本軍의 滿洲 大討伐作戰으로 일시 침체상태에 빠졌던 獨立 軍의 활동은 1921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점차 만회되어가기 시작 하였다. 滿洲에 잔류하여 있던 독립군들은 다시 활동을 개시하였 으며 蘇聯으로 越境하였던 독립군들은 自由市慘變 이후 蘇聯을 탈출하여 滿洲로 들어와서는 옛 근거지에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 하였다. 따라서 西間島지방에는 西路軍政署 光復軍總營이 중심이 되어 활동을 재개하였고 東支沿線에는 大韓獨立團 光韓團이 활동을 계 속하였고 長白縣지방에는 韓僑公會가 수립되었으며 懷德縣지방에 는 義成團이 결성되어 抗日遊擊戰을 전개하였다. 이 당시 在滿獨立軍 사이에는 효과적인 抗日鬪爭을 전개하기 위하여 각 단체 통합운동이 일어났다. 따라서 각 단체는 통합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는데 이것이 결실을 맺어 1923년 6월경에 大韓獨立團碧昌義勇隊光復軍總營平北督辦 府普合團光韓團 등의 여러 군단이 통합하여 大韓統軍府를 결 西路軍政署 성하였다. 8월에는 더많은 단체들이 이에 참가하여 統軍府를 다시 統義府
290 5. 獨立軍의 抗戰 로 개편하고는 소속 독립군을 大韓統義府 義勇軍이라 하고 司令 長으로 金昌焕을 선임하여 7개 中隊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 統義府 내의 의견차이로 일부가 이탈하여 義軍府 를 결성함으로써 독립운동계는 양분되어 이후 서로 대립항쟁이 일어나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지향한다는 통합목적에 배치되는 상 태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統義府의 제 1,2,3,5中隊는 1924년 統義府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軍團 설립에 착수하였다. 이 들은 上海에 있는 大韓民國 臨時政府에 대표를 파견하여 臨時政 府 직속의 軍團설립의 인가를 요청하였다. 이에 臨時政府는 陸軍駐滿參議府를 결성하도록 인가하고 輯 安 撫松 長白 安圖 通化 柳化 등 각 縣을 관할구역으로 하 여 民政과 軍政을 맡도록 하였다. 이 參議府는 參議長 白狂雲 밑 에 5개 中隊의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이와 같이 參議府가 성립된 지 얼마되지 않아 8월에는 大韓統 義府 軍政署 義成團 光正團 吉林住民會 등 여러 단체가 또 다른 통합운동을 전개하여 正義府를 결성하였는데 이 正義府는 소속 독립군 8개 中隊를 편성하여 항전을 하였다. 參議 正義府가 南滿洲에서 결성된 것에 반하여 北滿洲에서도 새로운 통합운동이 일어나 大韓軍政署 大韓獨立軍團 등이 新民 府를 결성하였다. 이와 같이 되어 滿洲의 우리 독립 운동계는 正義 參議 新民 府의 三府로 정리되어 잡다하게 산재하였던 독립운동단체들이 일 단 三府鼎立의 상태로 되었다. 그리하여 1925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奉天省의 輯安 寬甸지역 을 중심으로 한 韓滿 국경지대에는 參議府가, 하얼삔 이남 興京이 북 지역은 正義府가, 北滿洲 寧安을 중심으로 하여 中東線 일대에
291 Ⅱ. 三一 運動 걸치는 지대는 新民府가 담당하여 抗日戰을 계속하여 나갔다. 1) 參議府의 抗戰 參議府는 5개 中隊와 독립 1개 小隊의 독립군 600명 이상을 편 성하여 拳銃 또는 小銃으로 무장시켜 항전하였다. 同府는 관할지 역 내의 모든 韓人청년에게 兵役義務制를 실시하여 독립군에 편 입시켰다. 그리고는 中國 또는 蘇聯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일이 있 는 韓人靑年將校들을 초빙하여 군사훈련을 시키도록 하였다. 이 參議府는 正義 新民의 兩府보다 국경지방에 가깝게 위치하 였던 관계로 국내 진입 작전을 三府 중에서 가장 활발히 전개하였 다. 그 반면 日軍의 공격도 다른 府보다 심하게 받아 많은 희생자 가 속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參議府의 수많은 활동 중 간과할 수 없는 것이 齋藤總督狙擊 작 전이다.16) 1924년 5월 總督 齋藤이 國境地方을 巡視키 위하여 鴨 綠江邊에 도착하였다. 그리고는 경비선에 승선하여 강하류로 내려 오면서 국경방면의 경비상황을 살피려 하였다. 이와 같은 정보를 사전에 탐지한 參議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總督射殺作戰을 전개하였다. 參議府는 張昌憲 지휘로 제2中隊 제 1小隊長 韓雄權을 비롯하여 李春和 金昌均 玄成熙 李明根 金 呂河 田昌植 외 8명에게 이 重任을 맡겼다. 5월 19일 平北 渭原郡 馬사灘 강변에 잠복하고 있던 이들 독립 군은 오전 9시 總督이 승선한 경비선이 통과할 때 일제히 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놀란 경비선이 전속력으로 도주함으로써 總督 사살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비록 이 작전이 실패는 하였을 망정 독립군의 활동상황을 국내외에 선전하는데 큰 효과를 보았 독립신문(상해판) 호 朝鮮 16) 韓國獨立運動史 3 pp 總督府 警務局記錄 제799호
292 5. 獨立軍의 抗戰 던 것이며 總督은 이 해 6월에 개회된 日本 國會에서 이 사건의 경위를 변명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내 진입 작전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24년부터 시작된 이들의 활동은 주 로 平安北道 지방에서 중점적으로 행하여졌다. 日警駐在所와 日本 人 경영 鑛山을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24년 1년간의 활동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17) 17) 韓國獨立運動史 4 pp
293 Ⅱ. 三一 運動 이상과 같은 參議府의 활동은 자연 日警의 주목의 대상이 되게 되었으며 따라서 日警으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년 3월 제2中隊가 輯安縣 古馬嶺 산골짜기에서 국내 진입에 대한 작전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것이 日本의 밀정에게 탐지되어 버렸 다. 3월 16일 楚山警察署 65명과 日警이 포위, 기습공격을 가하자 방심하고 있던 中隊員은 中隊長 崔碩淳의 지휘로 곧 반격을 가하 였다. 1시간 동안 교전하는 가운데 독립군의 피해자가 속출하였고 끝내는 中隊長을 비롯하여 22명이 전사하고 3명이 피체되어 버렸 다.18) 이것이 古馬嶺事變이라고 불리워지는 일이었으며 이는 在 滿 獨立運動史上 가장 큰 참변이었다. 불의의 피해를 받은 參議府에서는 곧 雪辱作戰을 전개하였다. 3월 18일 全軍이 三陵隊로 나누어 楚山방면으로 출동하였다.19) 18) 蔡根植 武装獨立運動秘史 p ) 독립신문(상해판) 호
294 5. 獨立軍의 抗戰 제1대는 同郡 城面의 楸洞駐在所를, 제2대는 同面 下端洞駐在 所를, 제3대는 碧潼郡 梧北面 如海洞駐在所를 공격하기로 작전계 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날 밤 渡江하던 제2대가 國境守備隊에 게 발각되어 교전 끝에 퇴각함으로써 제1, 3대만이 계획된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楸洞駐在所 공격을 맡은 제1대는 19일 오전 5시에 공격을 개시 하여 日巡查部長 이하 2명의 日警을 사살하고 駐在所 건물을 소 각하였다. 그리고는 응원차 당도한 日警察隊와 또다시 교전하여 敵 4-5명을 중상입힌 뒤에 무사히 本隊로 귀환하였다. 如海洞駐在所의 공격을 담당한 제3대 역시 日警部 1명을 사살 하고 駐在所 監視幕 등을 소각한 뒤에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고 日 警의 추격을 피하여 무사히 본대로 귀환하였다. 이 전투에서 부상 을 입은 일경 3명은 그 뒤 병원에서 가료 중 사망하였다. 2) 正義府의 抗戰 다. 이 독립군의 總司令官은 金昌焕李靑天吳東振이 계승하여 正義府 소속 독립군은 8개 中隊와 憲兵隊 民警隊로 편성되었 1929년 正義府가 해체될 때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正義府의 活動 중 가장 유명한 것이 平北 鐵山郡 車輦館 습격작 전이다.20) 즉 正義府 제5中隊長 金錫河로부터 작전명령을 받은 李振武 이하 6명의 대원이 車輦館에 잠입하였다. 이날 이 곳은 장 날인 관계로 人海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 결사대원들은 백주에 그 곳 警察官柱在所를 공격하여 집무 중이던 日警 4명을 모조리 사살하고는 무기를 거두어 개선하였다. 이 기습작전은 전국을 진 동시킨 쾌거로써 日帝가 자랑하는 국경수비태세가 독립군 앞에는 20) 朝鮮總督府紀錄 제78호 死刑關係書類
295 Ⅱ. 三一 運動 얼마나 무력하였던가를 잘 나타내었던 것이다. 1927년에는 正義府의 洪學淳 張基千 李根秀 金奉秀는 각자 권총으로 무장한 후 平北지방으로 잠입하여 日警의 삼엄한 감시 망을 뚫으면서 2개월간 계속 활동을 하여 일경의 간담을 서늘하 게 만들었다. 당시 東亞日報는 이 4인 拳銃隊의 활동기사를 연일 게재함으로써 韓人의 가슴을 시원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각지에 출몰하여 밀정을 사살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때때로 日警들과 교전하였다. 이들의 활동 중 가장 유명한 것이 義州邑內의 殖產銀行과 龍灣金融組合 습격사건으로써 世人을 놀 라게 하였던 쾌사이었다. 3) 新民府의 抗戰 新民府의 獨立軍은 500여 명의 무장군을 別動隊와 保安隊로 편 성하여 軍事部委員長 金佐鎭의 통솔 하에 다음과 같은 편제와 부 서를 두고 활동을 개시하였다.21) 軍事委員長 兼 總司令 金 佐 鎭 總司令部 副官 朱 赫 保安隊 總指揮 朴 斗 熙 保安 第1大隊長 文 宇 天 保安 第2大隊長 白 鍾 烈(宗悅) 保安 第3大隊長 吳 祥 世 保安 第4大隊長 朱 保安 第5大隊長 張 宗 哲 別動隊長 文 宇 天 赫 그리고 軍事力 향상과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穆陵縣 小秋風에 21) 國史編纂委員會編 韓國獨立運動史 4 p
296 5. 獨立軍의 抗戰 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여 年2期의 速成敎育을 실시하였다. 이 士 官學校는 500여명의 독립군을 길러내어 독립군의 간부로 활동하 게 하였다. 新民府에서는 각지 청년에게 屯田制를 실시하여 관할 지역내의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모든 壯丁에게 군사훈련을 행하 여 혈전을 준비하고 상비군을 보충하였다. 獨立軍 편성을 완료한 新民府는 日帝의 밀정과 친일파를 숙청 하였으며 在滿 韓人의 안전보호에 주력하는 한편 항일전을 감행 하였다. 1924년 9월 別動隊는 친일파 숙청을 위하여 행동을 개시하였 다. 먼저 中東線 海林에서 親日 團體 朝鮮人民會를 조직하여 활동 하던 회장 裵斗山을 체포하여 死刑執行을 하였으며 하얼삔의 朝 鮮人民會를 급습하여 이 조직을 분쇄하였다. 그리고는 대규모의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써 국내의 日帝 경 비상황을 조사키 위하여 3방면으로 특수공작대를 편성하여 1925 년 8월 국내에 파견하였다. 自願將校로 편성된 제1路는 鴨綠江을 건너 江界를 경유하여 平壤까지, 제2路는 白頭山麓으로부터 咸鏡, 江原, 慶尙의 산맥을 타고 全羅道의 智異山까지, 제3路는 豆滿江 을 건너 鏡城을 경유 北靑까지 조사키로 목표를 세우고 파견하였 다. 이들 공작대는 온갖 고초와 위험을 무릅쓰고 작전지도의 작 성, 민중공작, 日軍警配置狀況調查 등 임무를 완성하고 무사히 귀 대하였다. 또 新民府에서는 대규모의 抗日戰을 위하여 中國軍과의 연합을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1927년 8월 汪淸縣 石頭河子에서 韓中合作 會議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貢沛誠, 岳維峻, 史可軒 등 중국 군의 요인과 新民府의 金佐鎭 外 2명의 韓人이 참석하였다. 이 회 의 결과 韓中聯合軍의 성립에 합의를 보아 표면으로 中央軍 第八
297 Ⅱ. 三一 運動 路軍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하고 군자금 및 무기의 조달에 노 력하기로 되었다. 그러나 不幸히도 이 소식을 들은 張作霖이 貢沛 誠, 史可軒, 岳維峻 등을 체포함으로써 동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6) 韓中聯合軍의 抗日戰 在滿 獨立運動界가 參議 正義 新民의 三府로 鼎立되었을 때 부터 三府統合問題는 독립 운동지도자 간에 절실한 과제가 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통합을 위한 노력이 부단히 진행되어 왔다.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15일 간 각 단체 대표들이 吉 林에서 회합을 갖고 三府통합에 대하여 구체적인 협의를 하게 되 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각 단체 대표자들 간에 의견불일치로 말 미암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즉 통합단체 조직에 있어 團體本 位組織論을 고수하는 측과 個人本位組織論을 주장하는 측으로 양 분되었다. 전자는 在滿運動團體協議會를, 후자는 民族唯一黨在滿 促成會를 조직하자는 주장을 내세워 맞서게 되었다. 15일간의 회의에서 끝내 타협점을 찾지 못한 양측은 각기 딴 장소에서 별개의 회합을 열고 자기들의 주장을 굳히는 한편 全民 族唯一黨促成會와 在滿獨立團體協議會를 각기 별도로 구성함으로 써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그 후 수차에 걸쳐 타협점을 찾기 위 한 노력이 진행되었으나 끝내 자기의 주장을 고수함으로써 분열 되어 버렸다. 따라서 兩側은 각기 다른 唯一黨과 軍政府 建立에 착수하였다. 1928년 12월 促成會側은 吉林에서 革新議會를 구성하였으며 協 議會側은 1929년 4월 國民府를 결성하였다
298 5. 獨立軍의 抗戰 國民府에서는 9월에 제1회 中央會議를 열고 民族唯一黨으로써 朝鮮革命黨을 조직하였으며 소속 黨軍으로써 朝鮮革命軍을 편성 하였다. 한편 존속기간을 1년으로 하고 결성되었던 革新議會가 1929년 5월에 해체됨에 따라 促成계통은 國民府 계통에 속하지 않는 인사들을 포섭하여 韓國獨立黨을 결성하고 그 所屬軍인 韓 國獨立軍을 편성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초 在滿 獨立軍은 朝鮮革命軍과 韓國獨立軍 으로 정리되어 항일전을 전개하여 나갔다. 1) 朝鮮革命軍의 抗戰22) 朝鮮革命軍은 7개대로 나뉘어 각지에 주둔하였으며 總司令에는 李辰卓 金寬雄 梁世奉 高而虛 등이 계승하여 革命軍을 통솔하 였다. 창설 초의 편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23) 總司令 李 辰 卓 副司令 梁 碧 海 參謀長 李 第一隊 寬東, 寬西地方 第二隊 桓仁, 輯安地方 第三隊 通化, 臨江地方 第四隊 柳河, 興京地方 第五隊 海原, 撫順地方 第六隊 開原, 磐石, 吉林地方 第七隊 東滿地方 雄 이와 같이 抗日戰을 대비하여 진영을 정비하여 갈 때 日帝는 滿 22) 蔡根植 武裝獨立運動秘史 pp ) 韓國獨立運動史 5 pp
299 Ⅱ. 三一 運動 州事變을 일으켜 본격적인 대륙침략의 길로 들어섰다. 강력한 日本軍 정예부대는 1931년 10월 이래 通化 柳河 桓 仁 新賓 淸源 海龍 金川 등의 省首都 및 縣邑을 차례로 점령 하고는 抗日軍團인 中國義勇軍 및 우리의 韓國獨立軍과 朝鮮革命 軍을 직접 공격하여 왔다. 이와 같은 최악의 사태에 직면한 朝鮮 革命黨 간부들은 新賓縣 河北에서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革命黨과 國民府를 단일 조직체로 만들 어 臨戰態勢를 갖추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장이 日警의 기습 을 당하여 회의장에 있던 30여 명 중 李浩源 金寬雄 李鍾建 張世湧 朴致化 李奎星 등 10여 명의 간부들이 체포되고 말았 다. 그리하여 일시 黨機能이 마비되었으나 다시 재정비하여 항일 전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1932년 3월 11일 總司令 梁世奉은 3개 中隊의 병력을 인솔하 고 中國 義勇軍과 합세하여 新賓南方 陡嶺地으로 행군하였다. 이 때 新賓縣城에 있던 日本軍이 대거하여 진격하여 왔다. 革命軍은 곧 이 日本軍 대부대를 맞아 격전을 벌여 이를 격퇴시켰으며 혁명 군은 이를 추격하여 永陵街 上夾河 등에서 교전을 벌여 日軍의 예 봉을 완전히 꺾어 버렸다. 이 전투는 5일간 계속되었는데 혁명군 은 수많은 戰利品을 획득하였다. 1933년 朝鮮革命軍에서는 입장이 동일한 中國軍과의 연합작전 을 계획하였다. 당시 滿州 桓仁城에는 中國義勇軍 司令官 唐聚五 가 遼寧救國會를 결성하고 항일전을 감행하고 있었는데 唐聚五는 遼寧民衆自衛軍을 편성하여 同軍司令官으로써 20만 대군을 편성 하고 있었다. 그 해 2월 朝鮮革命黨에서는 金學奎를 전권대표로 선출하여 桓 仁城에 파견하였다. 金學奎는 遼寧救國會의 領袖 王育文 唐聚
300 5. 獨立軍의 抗戰 五 등과 만나 韓中聯合作戰에 관하여 협상을 벌였다. 이 회담에서 양군이 의견 일치를 보아 抗日 聯合戰線을 결성하게 되었다. 그리 하여 朝鮮革命軍은 遼寧民衆自衛軍總司令部내의 特務隊司令部와 宣傳大隊로 편성되었다. 이 韓中聯合軍의 작전은 3월 하순부터 시 작되었다. 空軍의 엄호를 받은 日軍 1개 大隊가 興京城에 진주하여 永陵 街敗戰의 복수전을 기도하였다. 이 정보를 탐지한 梁世奉 總司令 은 中國義勇軍 李春潤부대와 연합하여 興京攻擊作戰을 감행하였 다. 이 전투에서 韓中聯合軍은 日軍을 격파하고 興京城을 점령함 으로써 韓中聯合作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5월 8일 日滿聯合軍 1,500여명과의 永陵街戰鬪에서 韓 中聯合軍은 행동 통일을 기하지 못하여 패전하는 비운을 당하였 다. 戰勝한 日軍은 그 기세를 몰아 臨江 桓仁 新賓 柳河 輝南 등 七省을 공략하고 自衛軍司令部 소재지인 通化로 진격하여 왔 는데 唐聚五軍은 通化省을 포기하고 濛江의 삼림지대로 퇴각하여 버렸다. 6월 15일 日本軍은 그 여세를 몰아 興京 淸原 등지로 진격하 여 왔다. 이 때 革命軍은 淸原을 수비하게 되었으며 李春潤부대는 興京을 死守하게 되었다. 淸原을 수비하던 혁명군은 기습 돌격작 전을 감행하여 日本軍에게 대타격을 주었으나 日本軍의 空爆에 견디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興京을 지키던 李春潤부대가 패전함 으로써 할 수 없이 南山城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7월 7일 日本軍은 永陵街 石人溝의 革命軍 司令部를 공격하였 다. 이때 혁명군은 과감한 반격전을 감행하여 日軍 40여명을 사살 하고 경기관총 3, 중포 1 등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그러나 이미 大勢는 기울어 버렸다. 通化에서 패전한 遼寧救國
301 Ⅱ. 三一 運動 軍이 再起할 수 없게 되어 山海關內로 들어가 버렸을 뿐 아니라 朝鮮革命軍도 수차 日軍과의 전투에서 막심한 타격을 받아 소규 모의 게릴라戰으로써 日本軍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2) 韓國獨立軍의 血戰24) 1930년에 편성된 韓國獨立軍은 中東線을 중심으로 하여 36개 區의 軍區를 설정하여 滿洲事變 이후 日 滿軍과의 抗日戰을 전 개하였다. 總司令官 李靑天의 통솔 하에 편성을 본 韓國獨立軍은 각 軍區에 총동원령을 발하여 청년을 소집한 뒤 義勇軍 暗殺 隊 別 動隊 憲兵隊 通信隊 先戰隊 決死隊를 구성하여 1933 년까지 在滿 抗日圖爭의 최후를 장식하였다. 1931년 11월 韓國獨立黨은 中央會議를 개최하고 韓中聯合軍 편성을 추진할 것을 결의하여 申肅 南大觀을 대표로 中國 護路軍 聯合軍總部에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일차적으로 同軍 總司令官 丁 超, 제2軍長 楊文輝, 제3軍長 考鳳林 등과 협상케 하였다. 이에 기 초하여 12월 1일 總司令官 李靑天이 中國軍과 구체적인 협의를 하여 다음과 같이 협상하는데 성공하였다. 1. 韓 中 兩軍은 최악의 경우에 이르는 한이 있더라도 長期抗 戰을 맹서한다. 2. 中東鐵道를 경계선으로 하고 서부전선은 中國이 담임하고 동부전선은 韓國이 담임한다. 3. 戰時의 후방 敎練은 한국장교가 부담하고 韓軍 需用의 일체 자료는 中軍이 공급한다. 이와 같이 聯合軍 결성에 성공한 韓國獨立軍은 각 처에서 모여 드는 청년들로써 부대편성을 서둘렀다. 그러나 韓國獨立軍이 미처 24) 蔡根植 武裝獨立運動秘史
302 5. 獨立軍의 抗戰 臨戰態勢를 갖추기 전에 日滿軍의 대 공격을 받게 되었다. 日本軍 은 陸 空軍으로서 9방면에서 中東縣沿線을 따라 진공하여 왔다. 이를 맞는 연합군은 葦沙河 一面陂 鳥吉密 密路站 同賓 方 正 依蘭 등지에서 善戰하였으나 무기와 식량 부족으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總司令官 李靑天은 黑龍江省 通河縣으로 퇴각하여 그 곳에서 부대를 재정비하였다. 처음부터 敗戰의 고배를 마신 聯合軍은 한동안 상호연락이 두 절되어 심한 곤경에 빠졌었다. 그러나 곧 전열을 가다듬어 哈長線 의 요지이며 滿洲산물의 집산지인 雙城에 대한 공략작전을 개시 하였다. 9월 14일 進軍을 개시한 독립군은 滿洲軍의 저지를 격퇴하면서 3일만에 雙城 南方 5里 지점의 小城子에 당도하여 考鳳林의 中國 軍과 합세하여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雙城 西門은 獨立軍이, 東 門 南門은 中國軍이 공격하기로 한 뒤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때 城 안에는 滿洲軍 3개旅團이 수비하고 있었으나 독립군의 돌 격작전에 무너져 버렸으며 北門으로 달아나다가 매복하여 있던 中國軍에게 전멸당하였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들은 3만병력이 3개월간을 유지할 수 있는 물자를 노획하였다. 일단 전승한 연합군은 적의 반격을 피하여 주 력부대를 50里 떨어진 牛家屯에 주둔시켰다. 이 결과 雙城은 다시 적에게 함락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聯合軍은 재탈환작전을 전 개하였다. 獨立軍이 선봉에서 공격을 담당하고 中國軍은 뒤에서 무기 식 량의 보급을 담당하였다. 부대를 15개로 나눈 독립군은 오후 6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수류탄과 박격포로 대항하는 敵陣을 돌입한 독립군은 수시간의 교전 끝에 滿洲守備軍 반을 사살하고 日軍
303 Ⅱ. 三一 運動 개 中隊를 전멸시키었다. 그러나 20일 日軍 滿軍의 연합부대가 재공격을 가하여 왔다. 3 일간 벌어진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勇戰하였으나 中國軍이 戰意 를 잃고 독립군을 배신하여 적과 일방적으로 휴전함으로써 독립 軍은 할 수 없이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考鳳林부대와 관계를 끊고 단독작전을 벌리던 韓國獨立軍은 1933년 1월 中國軍 제14師長 蔡世榮부대와 연합하여 韓 中聯合軍을 결성하였다. 이 聯合軍은 4월, 日 滿軍의 대부대와 四道河子에서 접전하여 적 반 수를 사살하였으며 木林子 金敞口 朱家屯 黃家屯에서 日 滿 軍을 요격하여 전멸시키는 등 대소 20여 차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6월 7일 연합군은 부대를 3路로 나누어 東京城을 공격하여 3시 간 교전 끝에 적군을 격파하여 同城을 점령하였고 7월 2일에는 大甸子嶺으로 진격하였다. 이 때 日本軍 飯塚聯隊가 韓 中聯合軍 을 토벌하려고 행군하고 있었는데 연합군은 埋伏 기습작전을 사 용하여 교전 4시간만에 전멸시켜 버렸다. 이 전투에서 막대한 戰 利品을 노획하였는데 그 품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軍 服 30, 000着 軍糧, 文書, 軍用品 200여馬車 大 砲 大砲, 迫撃砲 담 요 3門 10門 300張 小 銃1,500梃 대승리를 거둔 연합군은 전리품을 분배한 뒤에 大甸子街의 敵 兵營을 점령하여 군세를 정비하였다. 9월 1일 독립군은 東寧縣 공격계획을 수립, 작전을 개시하였다
304 5. 獨立軍의 抗戰 그러나 독립군이 3일간 격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來援키로 약속 된 中國軍이 출동치 않아 독립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中國軍이 사전에 약속된대로 출 동치 않은 까닭은 大甸子嶺大捷시에 戰利品 분배문제로 독립군과 불화 가 발생한데 그 원인이 있었다. 物慾이 강한 中國軍이 전리품을 독차지하려고 하는데 대하여 독립군이 불만을 토로하자 감정대립 이 일어났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中國軍은 獨立軍 總司令 李靑天 이하 수십 명의 고 급 간부를 구속하고 강제로 무장을 몰수함으로써 이후 연합군 사 이에는 불화가 더욱 고조되었다. 이같은 감정대립은 곧 화해되었으나 中國救國軍 總軍團長 吳義 成이 獨立軍에게 共產主義로 전향할 것을 강요하여 오자 독립군 은 中國軍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말았다. 때마침 上海에 있는 大韓民國 臨時政府에서는 韓國光復軍의 창 설을 앞두고 中植將校를 양성키로 하고 李靑天을 그 책임자로 지 정하여 급히 上海로 올 것을 독촉하고 있었다. 이에 李靑天은 趙 擎韓 吳光鮮 孔震遠 등과 上海로 가기로 하고 독립군 중에 서 中國軍官學校 입학을 지망하는 자를 선출하여 上海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독립군은 崔岳 安泰振 등이 인솔하여 穆 陵 寧安 密山 등 산림지대로 이동하여 다음 기회를 기다리게 하였다. 이렇게 되어 십여년 간 滿洲를 근거로 하여 무장항일운동을 하 던 중요인물들이 滿洲를 떠나 臨時政府를 찾아 中國 本土로 들어 갔다. 이후 在滿 獨立軍의 항전은 소규모의 게릴라전만이 도처에 서 계속될 뿐이었다. 그러나 독립군의 무장항전은 1940년 9월 17일 大韓民國 臨時
305 Ⅱ. 三一 運動 政府의 國軍으로써 韓國光復軍이 성립되므로써 그 명색을 잇게 되었으며 제2차世界大戰에 연합군의 일부로 日帝와의 항전을 계 속 조국광복을 성취하는데 기여하였던 것이다. 申載洪
306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2. 日帝資本의 浸透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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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1) 產米增殖計劃의 本質 日帝가 韓國을 강점한 이후의 한국의 사회와 경제의 변천은 일 제의 한국에 대한 植民地政策의 기본목표의 제약 아래에서 전개 되었다. 이 시기의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기본목표는 日本의 공업화를 위한 食糧供給地로 만들고 ① 韓國을 ② 日本의 공업화에 ③ 日本의 工業製品 판매를 위 한 독점적 商品市場으로 만들고, ④ 제2차세계대전 기간에는 일 제의 전쟁수행을 위한 소위 大陸前進兵站基地 로 개편하는 것 소요되는 原料供給地로 개편하며, 이었다. 일제치하에서의 韓國農業의 생산구조와 食糧의 增產 및 掠奪은 日本의 식민지정책의 네 가지 기본목표 중에서, 주로 한국을 일본 의 공업화를 위한 食糧供給地로 개편하려는 정책과 가장 직접적 으로 관련된 것이었다. 일제치하에서의 米穀 生產量의 추이를 보면, 제1표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1910년의 1,040만 6천石으로부터 1920년에는 1,488만 2천石으로, 1926년에는 1,530만 1천石으로, 1934년에는 1,671만 7천石으로, 1944년에는 1,605만 2천石으로 증가하였다. 이것을 指數로 보면, 1910년을 100으로 할 때 1920년의 지수는 143으로, 1926년의 지수는 147로, 1934년의 지수는 161로, 1944년의 지수는 154로 증가한 것이었다
309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第1表 日帝下의 米穀의 生產量과 輪出量 增加 年度 生産量 指數 輸出量 指數 ,406 11,568 10,865 12,110 14,131 12,846 13,933 13,688 15,294 12,708 14,882 14,324 15,014 15,175 13,219 14,773 15,301 17,299 13,512 13,702 19,181 15,873 16,346 18,193 16,717 17,885 19,411 26,797 24,139 14,356 21,527 24,886 15, ,198 1,967 1,332 2,498 1,652 1,683 2,250 2,883 2,091 3,555 3,210 4,084 4,886 4,758 5,785 6,470 7,021 5,791 5,170 9,030 7,506 7,988 9,931 9,025 8,948 7,202 10,997 6, ,232 6, , ,037 1,290 1,172 1, ,
310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719 16, ,303 4, 資料: 朝鮮總督府 統計年報 各年度에서 作製 그러나 같은 기간의 일제의 식량의 약탈을 나타내는 지표의 하 나가 되는 일본에의 米穀輸出量을 보면, 1910년의 77만石으로부 터, 1920년에는 209만 1천石으로, 1926년에는 578만 5천石, 1934년에는 993만 1천石으로, 1944년에는 412만 1천石으로 증 가하였다. 이것을 지수로 보면, 1910년을 100으로 할 때, 1920년 은 272로, 1926년은 751로, 1934년에는 1,290으로, 1944년에는 535로 급증한 것이었다. 이러한 日本으로의 미곡수출량의 指數의 증가는 같은 기간의 韓國의 미곡생산량의 지수의 증가를 훨씬 上 廻하는 것으로서, 이 기간에 日帝의 식량의 약탈이 얼마나 극심하 였는가를 단적으로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日帝는 食糧의 掠奪을 강화하기 위하여 3 1運動 직후인 1920 년부터 소위 朝鮮產米增殖計劃 이란 것을 실시하였는데, 이것 은 전적으로 日帝의 工業化에 따르는 자기들의 식량문제를 해결 하기 위한 것이었지 한국의 사회에 경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1) 日本은 1894년 이후 본격적인 공업화 단계에 들어서자 공업화 에 따라 급증하는 食糧需要를 日本國內의 공급만으로는 도저히 충당할 수 없게 되었으며, 1900년 이후에는 항구적인 食糧不足國 ① 1) 이 論稿는 주로 다음을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다. 趙璣濬 韓國資本主義 成立史 論(1973)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林柄潤 植民地に於ける商業的農業の 展開(1971) 東京大學出版會 愼鏞廈 韓國의 地主制度에 관한 一硏究-日帝 下의 土地小作制度에 대하여-, 經濟論集 5卷 3號(1966) 姜鋌澤 朝鮮國に於ける食食 糧問題の發展過程, 農業經濟硏究 16卷 2號(1939) 久問健一 朝鮮農政の課題 (1943) 東細精一 大川一司 朝鮮米穀經濟論(1935) 藤田强 朝鮮產米增殖 計劃經過と新增米計劃の檢討, 殖銀調査月報 23號 朝鮮總督府 朝鮮產米增殖計 劃要綱(1926) 矢内原忠雄 朝鮮產米增殖計に就て, 失內原忠雄全集 1卷(1963) ③ ⑥ ⑨ ② ④ ⑤ ⑦ ⑧
311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家가 되었다. 일본은 이 부족식량을 韓國과 臺灣으로부터 수입하 여 충당하였다. 그러다가 1910년 日帝가 韓國을 강점하자 소위 朝鮮土地調查事業 등을 비롯하여 한국을 그들의 不足食糧供給 地로 개편하는 식민지 농업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하였 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전쟁 경기를 타고 공업화 를 더욱 급진전시켰으며, 이에 따라 식량부족은 더욱 격화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에도 일본의 식량부족 상태는 계속 악화 되었다. 1918년 8월에는 東京을 비롯하여 日本의 주요도시에서 주부들과 실업노동자들의 소위 米騷動 이 일어났으며, 米價는 계속 폭등하였다. 1918년 1월의 東京의 米價는 石當 평균 23圓 58錢이었으나 그 해 12월에는 40圓 58錢으로 폭등하였고, 다시 1919년 12월에는 53圓 87錢으로 등귀하였다. 이에 일본은 만일 공업화에 수반하여 급증하는 食糧需要에 대하여 이를 저렴한 가 격으로 풍부히 공급하지 않으면 日本의 工業化 그 자체가 크게 저 지될 수밖에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日本이 채택한 것이 한국의 농업을 일본의 공업 발전을 위한 食糧供給部門으로 개편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었다. 일제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행한 植民地 農業 政策이 그 첫째는 제도적 측면에서 土地小作制度를 개편하 여 엄호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산의 측면에서 소위 朝鮮 產米增殖計畫 을 실시한 것이었다. 식량의 약탈을 위한 제도적 정책으로서의 小作制度의 개편과 엄호는 년에 걸쳐 실시된 土地調査事業에 의하여 재 정비한 것이었다. 土地調查事業 그 자체는 식민지체제 수립을 위 한 다목적 사업으로서, 비단 소작제도의 정비 뿐만 아니라, 朝鮮 總督府 財政收入의 증대, 日本人의 토지점유를 편리케하기 위한
312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토지의 상품화, 國有地및 未墾地의 점유, 토지로부터의 韓國人 勞 動力의 분리 등 다양한 효과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여기서 小作 制度에 한정하여 볼 때, 토지조사사업에 의하여 법제화된 소작제 도는 한국농민의 식량 소비 수준을 최저 수준으로 억제하여 잉여 생산물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이를 상품화하여 가능한 한 최대의 剩餘食糧을 日本으로 약탈해 갈 수 있는 제도이었다. 이 시대의 소작제도의 小作料率은 粗米생산량의 평균 50-60% 에 달하였으며, 이것은 朝鮮王朝 말기에 있어서의 소작료율인 賭 地法의 33%나, 並作法의 50%보다도 高率小作料이었다. 한편 소 작료 형태는 現物小作料가 畓에 있어서 93.9%, 田에 있어서 92.1%이었으며, 貨幣小作料는(代金納까지 포함하여도) 畓에 있 어서 6.1%, 田에 있어서 7.9%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당시의 우리 나라 小作 制度는 일본측의 입장에서 볼 때 日本의 공업화에 따르 는 부족식량을 한국으로부터 現物형태로 최대한 약탈해가는 가장 적합한 제도가 되었다. 小作制度의 이러한 기능이 日本의 공업발 전에 적합한 것이었기 때문에 韓國 소작농민의 小作爭議와 많은 문제점의 노정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이 소작제도를 끝까지 엄호 하였으며, 결국 8 15해방 후 韓國人 자신에 의하여 비로소 農地 改革을 통하여 이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존속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小作制度는 계속 확대되어 농민의 兩極 分解가 일어났다. 즉 년간의 추이를 보면, 자작농의 비율은 22.0%에서 13.9%로 감소하고, 자작겸 소작농은 35.2%에 서 34.7%로 감소한 데 비하여, 純小作農은 41.0%에서 49.2%로 증가하고 있는 바, 小作制度와 관련된 농민이 총농가의 83.9%에 달하였다. 그러나 日帝는 일본으로 최대의 식량을 공급하려면 剩餘生產物
313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을 極大化하여 수송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동시에 생산량 그 자체를 증대시켜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小作制 度의 재편성 다음에는 식량증산을 위한 朝鮮產米增殖計劃 이 수립되어 집행되었다. 日帝의 產米增殖計劃은 이를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米騷動 에 큰 자극을 받아 1920년부터 1925 년까지 소위 제1차 朝鮮產米增殖計劃 을 수립하여 집행하였다. 일제는 1918년의 일제가 日本 工業化에 따르는 식량부족을 구태어 韓國에서의 產 米增殖計劃을 통하여 충당하려 했는가 하는 이유는 생산증가를 위한 단위당 投下費用이 日本 농업에 비하여 韓國농업이 훨씬 저 렴하였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米穀 1石 증산에 소요되는 土地改 良事業費를 韓國의 경우와 日本의 경우를 비교하여 보면, 제2표 와 같이, 韓國농업에 투하하는 경우가 日本농업에 투하하는 경우 보다 開墾이 37%, 干拓이 21%, 地目變換이 28%, 대지구의 灌漑 改善이 24%, 소지구의 灌漑改善이 28% 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投下資本의 이윤율이 韓國 농업에 투자하는 것이 이와 같이 높았 기 때문에 그들은 식량부족을 韓國 농업에서 해결하려고 한 것이 第2表 米穀一石當 增產에 所要되는 土地改良事業費의 韓國日本 比較 사업종류 米穀 1石增産에 要하는 土地改良事業費 反當 增收量 國別 韓國(A) 日本(B) A/B 韓國(A) 開 墾 2.10石 2.30石 91% 32圓 干 拓 地目變換 灌漑改善 大地區26 小地區30 資料 : 林炳潤 前揭書 p.177 日本拓殖局 日本(B) A/B 87圓 朝鮮產米增殖ニ關スル意見 %
314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었다. 日帝는 제1차 朝鮮產米增殖計劃을 農地改良과 農事改善의 두 가지 방법에 의하여 달성하려고 하였다. 이 계획의 장기목표는 1920년부터 30년 간에 걸쳐 80만 정보의 토지 개량을 실시하기로 하고, 우선 제1기 목표로서 1920년 이후 15개년에 42만 7,500정 보를 개간하고 여기에 農事改善을 아울러 실시하여 920만石의 생 산량 증대를 기하려고 하였다. 그 세부개요를 보면 ① 灌漑施設이 없는 120만 정보의 약 3분의 1이 수리시설이 가능하다고 보고 灌 漑改善면적을 40만 정보로 책정하였으며, ② 地目變換은 田面積의 약 100분의 7이 畓으로의 전환이 가능하다고 보고 지목전환 면적 ③ 開墾可能地 약 7만 4천 정보 중에 서 開畓可能面積을 3만 정보로 책정하였으며 ④ 干拓可能面積 20 을 20만 정보로 책정하였고, 만 7천 정보 중에서 開杳可能面積을 17만 정보로 책정하였다. 제1차 產米增殖計劃이 토지개량의 방법에 크게 의존한 것이었 으므로, 日帝는 1920년 11월에 朝鮮總督府殖產局 안에 土地改良 課를 신설하여 灌漑改善, 水利施設, 地目轉換, 開懇, 干拓 등 일체 의 토지개량사업을 관장시키고 產米增殖計劃을 지원하도록 하였 다. 또한 토지개량에 대한 보조금정책을 채택하여, 旣成畓의 水利 灌漑改善工事에 대해서는 총공사비의 20%를 보조하고, 開畓을 위한 地目轉換에 대해서는 총공사비의 25%, 開畓을 위한 開塑 干拓에 대해서는 총공사비의 30%를 보조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년 사이에 토지개량사업 시행 면적을 42만 7,500정 보로 추정하고 그 총공사비 1억 6,800만圓 중에서 약 23%에 해 당하는 3,855만圓을 보조하려 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農事改善으로서 일제가 產米增殖計劃에서 가장 강조 한 것이 水稻品種의 개량과 보급이었다. 일제는 각 지방 행정구역
315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별로 採種畓을 신설 또는 증설하도록 하고 그에 소요되는 경비는 朝鮮總督府 中央會計로부터 地方費에 보조금을 교부하여 충당하 도록 하며, 100만町步의 在來水稻品種을 優良水稻品種으로 대체 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화학비료의 사용을 전국적으로 장려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제1차 產米增殖計劃은 계획대로 진전되지 않았으므로 1925년에 중단하고 1926년부터는 새로운 수정된 계획을 집행하 게 되었다. 1925년까지의 土地改良事業 실적을 보면, 1925년까지 의 토지개량사업 착수 예정 면적은 16만 5천 정보이었음에 대하 여 착수실적은 9만 7,500정보에 불과하였고, 준공 예정 면적은 12만 3,100정보였음에 대하여 완성된 면적은 7만 1천정보에 불 과하였다. 이것은 계획의 약 60% 정도밖에 토지개량사업이 실시 되지 못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朝鮮總督府의 보조금 지출 실적도 150水利組合에 대하여 1,015만 3천圓, 水利組合에 들어있지 않은 174지구에 대하여 460만 2천圓, 합계 1,475만 5천圓을 지출함에 불과하여 당초의 계획에 전혀 미치지 못하였다. 민간인의 자본도 예정대로 동원되 지 않았는바, 日本人資本은 당시 產米增殖計劃과 같은 장기투자에 는 흥미가 없었고 주로 소규모공업, 식료품공장 등에 투입되었으 며, 韓國人 지주의 土着資本은 토지개량사업이나 농사개선에 투자 하기보다는 旣耕地를 조금이라도 더 구입하여 高率小作料를 징수 하는 데 투입되었다. 제1차 朝鮮產米增殖計劃 期間의 米穀 생산실적과 수출실적을 보면 제3표와 같다. 즉 산미증식계획 실시 이전인 년의 연평균 생산량은 1,410만 1천石이었으나, 년의 연평균 생 산량은 1,450만 1천 石으로서 그 증가지수는 5개년 동안에
316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第3表 第1次產米增殖計劃期間의 米穀生產量과 輸出量 年度 (5年 平均) 生産量 (千石) 指數 輸出量 指數 14,101 14, ,196 4, 人當消費量 (石) 資料 : 趙璣濬 前揭書 p.364 으로부터 102.8로 겨우 2.8%가 증가하였음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日帝의 제1차 朝鮮產米增殖計劃이 완전히 실패하였음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의 미곡의 對日 輸出量은 219만 6천石으로 부터 434만 2천石으로 급증하였으며, 이것을 증가지수로 보면 100으로부터 197.7로 97.7%나 급증한 것이었다. 이것은 생산면 에서 제1차 朝鮮產米增殖計劃은 완전히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 고, 日帝는 산미증식계획이 목적한 바 日本으로의 朝鮮米穀輸出은 강행하여 해마다 연평균 4백만石 이상의 米穀을 日本으로 실어 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일제가 植民地掠奪政策에 의하여 韓國인의 미곡 소비수준을 切下시킴으로써 강행한 것이었다. 日帝는 朝鮮產米增殖計劃이 매우 부진하자, 1926년에는 이를 전면적으로 更新하여 새로운 產米增殖計劃을 수립하였는바, 이것 을 제2차 產米增殖計劃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제2차 朝鮮產米增殖計劃은 1926년부터 12년간에 걸쳐 3억 5,169만 2천圓의 자금을 투입하여 미곡 약 816만石을 증산할 것 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 방법으로서 日帝朝鮮總督府는 35만 정 보의 토지개량을 시행함에 의하여 약 280만石, 토지개량 시행지 구에 대한 施肥의 증가와 耕種法改善에 의하여 약 192만石, 旣成 畓 139만 정보에 대한 농사개선에 의하여 약 344만石의 증산을 달성하려고 한 것이었다
317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日帝가 제2차 朝鮮產米增殖計劃에서 가장 강조한 방법은 제1 차 計劃에서와 같이 토지개량이었다. 일제는 土地改良事業의 추 진체로서 우선 朝鮮總督府 殖產局에 설치되었던 土地改良課 외에 1926년 6월 水利課와 開墾課를 신설했다가 1927년 5월에는 朝 鮮 總督府 안에 土地改良部를 설치하고 위의 3課를 통괄하여 증 산계획을 추진 실행토록 하였다. 또 1927년 12월에는 朝鮮土地 改良令을 제정 공포하고 이와 동시에 朝鮮水利組合令의 일부를 개정하여, 土地改良令과 함께 水利組合事業에 박차를 가하도록 하였다 또한 日帝朝鮮總督府는 1926년에 東洋拓殖株式會社에 土地改 良部를 설치하도록 하였으며, 1926년 7월에는 朝鮮土地改良株式 會社를 창설하고 朝鮮總督府의 원조 하에 토지개량사업을 담당시 키었다. 제2차 產米增殖計劃의 토지개량사업 목표는 제1차 產米增殖計 劃보다 7만 7, 500정 보가 축소된 35만정보이었다. 그 내역은 대 지구의 灌漑改善이 15만 5천정보, 소지구의 관개개선이 3만정보, 地目 轉換이 9만정보, 開墾 干拓이 7만 5천정보이었다. 35만정 보의 토지개량에 소요되는 총경비는, 제4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第4表 第2次產米增殖計劃의 資金調達 및 用途別 構成 調達者別 東拓 殖銀 大藏省豫備額 地主 企業者 總 督 府 計 金 額 用 途 別 千圓 119,348(34) 119,348(34) 39,484(12) 金 額 千圓 土地改良事業 同 事 業 農事改良事業 303,250(86) - 351,692(100) 8,442(2) 40,000(11) 73,512(20) 351,692(100) 資料: 林炳潤 前揭書 p.189 朝鮮總督府 朝鮮產米增殖計劃要宽 p
318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같이, 3억 325만圓(및 同 人件費 844만 2천圓)으로서 제2차 產米增殖計劃資金의 86%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 朝鮮總 督府의 보조금 총액은 6,507만圓으로서, 그 내역을 보면 補助金率 을 제1차 계획에서와 같이 灌漑改善에 총 비용의 20%, 地目轉換 에 25%, 開墾 干拓이 30%로서, 灌漑改善에 2,052만圓, 地目 轉 換에 1,710만圓, 開墾 干拓에 2,745만圓을 보조하되, 1지구 10 町步미만의 開墾 干拓事業을 비롯하여 1지 구30町步 미만 및 공 사비예정액 5천圓 미만의 사업규모의 灌漑改善이나 地目轉換에 대해서는 일체 보조금을 교부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보조금을 필요로 하는 地主나 自作農에 대해서는 보조하지 않고 이미 상당한 資力을 가지고 있는 중규모 이상의 지주층에 보조금 을 지급하도록 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보조금의 수혜 층이 日本人地主가 되도록 정책화하였다. 예컨대 보조금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開墾 干拓補助金 2,745만圓의 경우 이 사업을 행하는 자는 거의 모두가 日本人地主이었으며, 地目轉換補 助金 1,710만圓의 경우에도 이 사업을 행하는 자는 거의 모두 日 本人地主이었으므로, 결국 開墾 干拓과 地目轉換에 대한 보조금 4,455만圓은 거의 모두 日本人地主에게 지출하도록 되었다. 30町 步 이상의 灌漑改善事業에 대한 보조금 2,052만圓의 경우에도 韓 國人地主나 자작농이 행하는 水利灌漑事業은 왜소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보조금의 과반이 日本人地主에게 지출되도록 되었다. 따라 서 日帝 朝鮮總督府의 토지개량사업에 대한 보조금은 그 대부분 이 日本人地主에게 지출되도록 정책화한 것이었다. 결국 土地改良 事業의 보조금정책은 이를 통하여 日本人地主에게 특혜를 준 것 이었고 반면에 韓國人地主에게는 이 사업을 통하여 점차 쇠퇴하 도록 작용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319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일제는 土地改良事業에 소요되는 총비용 3억 5,169만 2천圓의 공급원을, 제4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34%에 해당하는 1억 1,934만 8천圓을 東洋拓殖株式會社와 殖產銀行에서 공급하 도록 하고, 역시 34%에 해당하는 1억 1,934만 8천원을 日本 大 藏省 預金部로부터 차입하도록 하였으며, 12%에 해당하는 3,948 만 4천원을 지주 기업자가 조달하도록 하고, 나머지 20%에 해 당하는 7,351만 2천원을 朝鮮總督府가 공급하도록 하였다. 이 중 에서 朝鮮總督府 日本大藏省 東拓 殖銀의 자금은 모두 장기저 리로 융자하도록 하였다. 이 低利資金의 융자는 東洋拓殖株式會社 가 그 반액을 관장하고, 나머지 반액은 朝鮮殖產銀行이 관장하도 록 하였다. 그리하여 東拓을 통하여 나오는 자금의 토지개량 사업 은 同社 土地改良部가 사업을 대행하도록 하고, 朝鮮殖產銀行 을 통하여 나오는 자금의 토지개량사업은 朝鮮土地改良株式會社가 사업을 대행하도록 하였다. 이 두 대행기관은 원칙적으로 水利組 合 또는 개인기업자의 위탁에 의해서만 토지개량사업을 대행하도 록 하였다. 이 때문에 저리자금으로서의 토지개량사업 자금은 水 利組合을 갖고 있는 日本人地主들에게 주로 공급되었다. 日帝 朝鮮總督府는 이러한 土地改良事業과 함께 產米增殖을 위 한 農事改善事業을 계획하였다. 우선 투자효과가 큰 토지개량지구 만을 선택하여 耕種法 등 농사개선을 추진하기로 하고 제1차 계 획 때 그 자금을 지주와 자작농에게만 의존했던 것과는 달리 제2 차 계획에서는 제2차 產米增殖計劃 총비용의 11%에 해당하는 4 천만圓의 자금을 융자하여 투입하도록 하였다. 農事改善事業은 우선 우량품종의 보급에 주력하였다. 日帝는 1928년에 勸農共濟組合을 창설하고, 水原勸農模範場을 農事試驗 場으로 개칭하고 여기서 韓國 기후풍토에 적합한 품종개량을 실
320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시하도록 하였다. 또한 각 道에는 採種畓을 설치하고 種稻를 농민 에게 배부하여 그 재배를 장려하였다. 또한 우량품종의 선정과 함 께 苗床의 개량, 移植, 施肥, 中耕除草의 개선, 病虫害의 방지, 堆 肥獎勵, 適期播種 및 適期收獲 등을 장려하였다. 이러한 農事改善事業 중에서도 우량품종의 보급 다음으로 日 帝가 장려한 것이 비료의 增施이었다. 일제는 제2차 產米增殖計 劃 중에 肥料增施計劃을 수립하고, 주로 堆肥등 자급비료의 장려 와 비료구입자금의 융자에 의한 化學肥料 施用의 확대를 추진하 였다. 이 제2차 產米增殖計劃은 처음에는 비교적 순조로이 시행되다 가 1930년 世界大恐荒으로 米價의 폭락이 나타나고, 韓國米의 공 급이 日本米의 가격을 더욱 폭락시킬 위험이 높아진 위에 1933년 韓國의 미곡생산이 대풍작을 보자, 日本政府는 朝鮮總督府에 產米 增殖計劃의 중단을 요청하여, 1934년 日本 측의 사정으로 이 계 획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第5表 第2次產米增殖計劃中 土地改良事業의 目標와 實績 資料 : 林炳满 前揭書 p.189. 朝鮮總督府 朝鮮產米增殖計劃の實績 p
321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이 제2차 朝鮮產米增殖計劃의 당초의 목표와 1937년 말의 실 적을 대비하여 보면, 제5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토지개량 착수면적과 준공면적의 실적은 16만 3천정 보로서 목표의 46%밖 에 달성하지 못하였다. 사업자금의 공급에 있어서는 朝鮮總督府 보조금의 공급실적이 목표액의 56%, 日本大藏省 東洋拓殖株式 會社 朝鮮殖產銀行의 자금의 공급실적이 목표액의 42%, 地主 企業者調達金의 공급실적은 목표액의 66%에 불과하였다. 또한 미곡의 증수실적을 보면, 作付面積의 실적이 목표의 43%, 총증수 량이 목표액의 34%, 反步當增收量은 목표액의 79%를 달성함에 불과하였다. 제2차 產米增殖計劃은 1934년에 중단되어 실패로 끝났지만 이 기간의 미곡의 對 日輸出量은 여전히 급증하였다. 제6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년을 기준(100)으로 할 때 생산량의 증가지수는 년의 연평균이 111.9로 증가하고, 第6表 第2次產米增殖計劃期間의 米穀生產量과 對日 輪出量 年次 (5年平均) 生産量 (千石) 指數 對日輸出 (千石) 指數 14,101 15,788 17, ,196 6,607 8, 人當消費量 (石) 資料 : 趙璣濬 前揭書 p.366 년의 연평균이 120.5로 증가한 반면에, 미곡의 대일수출량은 년에 300.9로 격증하고, 년에는 398.7로 급증 하였다. 이렇게 해마다 급증하는 韓國米의 대일수출은 일본 공업화에 따르는 식량부족을 충당하였으나, 이것은 동시에 日本農業에는 커 다란 위협을 주었다. 특히 韓國米의 대일수출이 급증함에 따라 日
322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本米는 日本國內에서 품질에 있어서도 韓國米와 경쟁을 할 수 없 었을 뿐만 아니라 가격에 있어서도 경쟁을 할 수 없게 되어 日本 國內에 있어서의 日本米의 가격은 하락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특 히 1930년의 大恐荒을 계기로 日本國內에 日本米가격은 폭락하 여, 1929년 12월에는 石當 27圓 70錢이던 것이 1930년 12월에 는 17圓 78錢으로 폭락하였으며, 1931년에는 30년의 豊作의 영 향까지 겹치어 더욱 급격히 하락하였다. 日本地主들 사이에서는 이미 1930년 초에 韓國米 배척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日本政府도 1933년 3월에는 米穀統制法을 제정 공포하여 韓國米 수입을 규제하기 시작하였다. 日帝 朝鮮總督府도 日本 本國政府의 이러한 움직임에 부응하여 1933년에는 米穀長期貯藏對策을 추진 해보다가 1934년에는 마침내 제2차 朝鮮產米增殖計劃을 중단시 키게 된 것이었다. 日帝 朝鮮總督府가 1934년에 產米增殖計劃을 중단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뚜렷하게 이 증산정책이 日本으로의 식량의 약탈이라 는 식민지정책의 목적에 따라 수행된 것이며, 그것이 식민지식량 약탈정책이었기 때문에 일본국내의 사정만에 의하여 갑자기 중단 된 것임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제2차 產米增殖計劃의 집행기간에 생산량은 약간 증가하였는데 반하여 미곡의 對日輸出量은 급증하였다는 사실은 이 기간의 韓 國人의 식량 소비수준이 日帝의 食糧掠奪政策에 의하여 切下되었 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컨대 이 시기의 한국인 1인당 연간 미곡 소비량을 보면 년이 연평균 石이었는데 비하여, 년의 연평균 미곡소비량은 石으로 급락하였고, 년의 연평균 미곡소비량은 다시 石으로 하락하였 다. 이에 대한 부분적 보충은 滿洲로부터 잡곡을 수입하여 일부
323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충당하였는바, 滿洲粟 輸入量은 1918년에 20만 5천石이던 것이, 1924년에는 127만石으로 급증하였고, 1930년에는 171만 7천 石 으로 급증하였다. 그러나 滿洲로부터 수입된 잡곡을 포함하여 계 산하여도 韓國人의 식량 총소비량은 계속 저하되어, 1인당 연평균 식량소비량이 1918년의 2.021石으로부터 1924년에는 1.916石으 로 하락하였고, 1930년에는 다시 1.694石으로 급락하였다. 즉 日 帝 朝鮮總督府가 시행한 朝鮮產米增殖計劃을 통하여 미곡생산량 이 약간 증가한 바로 이 기간에 韓國人의 식량 소비 수준은 도리 어 日帝의 식량약탈로 말미암아 切下되어 더욱 혹심한 식민지착 취를 당한 것이었다. 日本國內의 식량사정의 요청에 의하여 시작된 朝鮮產米增殖計 劃이 또 그 요청에 의하여 중단된 이후에는 종래 朝鮮總督府의 구호인 한국농촌의 궁핍상태를 產米增殖運動으로 극복한다는 것 은 거짓임이 누구에게나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다. 日帝 朝鮮總督 府는 궁여지책으로 自力更生에 의한 농촌 산촌 어촌의 진흥을 내세웠으나 이것은 1934년 이후 產米增殖計劃의 중단 이후의 공 백을 메우려는 하나의 선전운동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1937 년 일제는 中日戰爭을 도발하고,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예견되자 軍糧確保를 위해서 다시 產米增殖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日帝 朝鮮總督府는 1940년 미곡증산을 위한 10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것을 제3차 產米增殖計劃이라고 말할 수 있다. 日帝 朝鮮總督府의 1940년에 시작된 제3차 產米增殖計劃은 1940년부터 10개년동안 680만石의 미곡의 증산을 목표로 하고, 이것을 각각 농사개선에 의해서 511만石, 토지개량에 의해서 169 만 石을 증산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 제3차계획의 특징은 그 이전
324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의 증산계획과는 달리 토지개량에 의한 증산보다 농사개선에 의 한 토지 생산성 증대에 역점을 두었으며, 동기간에 反步當收獲量 을 1石 2斗 6升으로부터 3石으로 증대시킬 것을 목표로 한 것이 었다. 이제 3차 계획의 농사개선사업은 주로 새 우량품종의 보급, 촌 락공동작업실시의 장려, 화학비료공급의 증가, 施肥方法의 개선 등에 중점을 두었다. 한편 토지개량사업은 日帝가 전쟁을 하면서 실시하여야 했기 때문에 제1차 및 제2차 계획에서와 같이 자재 와 자본을 투입할 수 없었으므로 대규모의 堤堰修築과 灌漑施設 개선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그리하여 灌漑改善의 목표면적 12만 7천정보, 畓排水施設改善의 목표면적 2만4천정보, 소규모 토지 개 량사업의 목표면적 1만 2천정보, 합계 16만 3천정보에 대하여 토 지개량을 실시하도록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제3차 產米增殖計劃은 완전히 실패하여, 米穀生產量 은 1940년의 2,152만 7천石으로부터 1944년의 1,605만 2천石으 로 감소하였으며, 反步當收獲量도 동년 간에 1,311石으로부터 1,209石으로 저하되었다. 日帝는 전쟁이 太平洋으로 확대되고 戰勢가 급박하게 되자 1944년도부터는 1개년 완성의 短期小規模計劃으로 轉換하였으나 모두 제대로 실행될 수 없었다. 日帝가 제3차 產米增殖計劃의 일환으로 신품종, 화학비료, 농 약, 개량농기구, 신재배기술 등 새로운 투입요소를 농업생산에 도 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米穀增產政策이 성공하지 못한 이 유에는 자금조달의 부족, 新投入要素供給量의 부족 등 여러 가 지 요인이 논의될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원인은 식량약탈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일제가 엄호한 小作制度 와 產米增殖政
325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策 이 상호 갈등하는 요인이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생산량의 50-60%를 징수하는 고율소작료의 소작제도는 이미 생산된 식량을 약탈해 가는 데에는 가장 효율적인 제도의 하나이 었다. 반면에 그것은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데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제도였다. 즉 고율소작료의 소작제도에 있어서는 비용을 공 제한 생산증가분의 거의 모두가 소작료로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 에 생산의 실제의 담당자인 소작농에게는 생산성을 증대시킬 하 등의 誘引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소작농들은 그들 에게 부담만 주는 日帝의 產米增殖計劃에 小作爭議를 통하여 저 항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日帝治下의 韓國 농민은 1940년의 경우 호당 평균 경영규모가 1.2町步에 불과한 영세농으로서 자기 가족의 생계유 지도 지난한 負債農이었으므로 설혹 產米增殖을 위한 신투입요소 가 소개된다 할지라도 이를 구입하여 생산과정에 투하할 경제적 능력이나 동기가 형성될 수 없었다. 日帝朝鮮總督府는 이러한 결 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地主로 하여금 새로운 투입요소를 도입하 도록 유도하고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지주측에 있어서도 장기 저리자금을 朝鮮總督府나 일본 금융기관이 공급해 주지 않는 한 產米增殖을 위한 스스로의 투자에의 유인은 형성되지 않았다. 왜 냐하면 고율소작료의 지주제도 밑에서는 產米增殖에 투자하기보 다는 한 坪의 토지라도 더 구입하여 小作貸付해서 소작료를 징수 하는 것이 수익율이 높고 안전하였기 때문이었다. 日帝 朝鮮總督府의 產米增殖計劃은 韓國농업으로부터의 식량의 약탈을 목적으로 하여 실시되었으나 바로 그 목적 때문에 실패로 끝나도록 되어 있었다. 일제 조선총독부의 產米增殖計劃과 관련하여 부기하여 두어야
326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할 것은 이 정책이 하나의 전기가 되어 그 후 한국 농업생산구조 에 있어서의 미곡단일경작 방식이 고정되고 전근대적 輪作體系가 고착되었다는 점이다. 일제의 食糧掠奪政策은 產米增殖計劃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 이 米穀의 약탈에 집중되었으므로 미곡단일경작에의 편향이 강화 되었다. 이와 함께 산미증식계획에 따르는 농업의 기술진보에 있 어서도 미곡에만 고립적 파행적으로 부분적 기술진보가 이루어져 서 농업의 전반적 발전을 유도할 수 없었다. 米穀單一耕作의 경작 형태는 비단 생산구조면에서 취약할 뿐만 아니라 가격변동에 있 어서도 매우 취약한 형태이었다. 예컨대 1930년의 世界大恐荒 때 에 한국에는 일본을 통하여 세계시장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단일 경작으로 말미암아 가격폭락의 심한 타격을 받고 결국 일제의 요 청으로 제2차 產米增殖計劃이 폐기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日帝 朝鮮總督府의 산미증식계획은 한국농업에 있어서 地 力補完的 근대 적 輪作體系를 수립 하지 못하고 地力掠奪的 전 근 대적 輪作體系를 고착시키도록 작용하였다. 이 시기 일제 조선총 독부가 장려한 작물재배 분포를 보면 米穀 麥類 雜穀 등 地力掠 奪作物인 禾本科食糧作物이 주요내용을 이루고 있으며, 윤작체계 가 水稻連作 또는 水稻一麥連作의 地力掠奪的 체계로 고정되었다. 농업근대화가 추구하는 윤작체계는 稔實作物(H)이 갖는 地力消耗 的 성격을 보완하기 위하여 荳科 牧草 中耕作物(根菜類) 등의 莖葉作物(B)이 갖는 地力增進的 성격을 도입하는 H-B-H-B의 윤작체계이었다. 서구제국의 농업근대화는 산업혁명기에 이 地力 增進的 윤작체계를 수립하여, 곡물생산과 경합하지 않고 地力을 고갈시키지 않고서 도가외의 목초와 莖葉作物을 생산하도록 전환 되었다. 일제가 產米增殖計劃을 통하여 고착시켜 놓은 H-H식 地
327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力掠奪的 윤작체계는 단기적으로는 新投入要素의 도입에 의하여 일정한 수준까지의 생산증대를 이를 수 있다 할지라도, 장기적으 로 이러한 윤작체계를 지속시키면 地力이 소모되어 생산성 증대 에 낮은 한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년 이후의 反步當生產量이 新投入要素의 투입증가에도 불구하고 저 하되었다는 사실은 그 후의 한국농업에 대하여 의미심장한 것이 며, 產米增殖計劃이 구조적으로는 한국농업생산에 대하여 장기적 으로 크게 부정적 영향을 끼쳤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產米增殖計劃의 집행 결과 미곡생산량의 증가는 미미하였음에 도 불구하고, 미곡의 대일수출량이 격증하였다는 사실과, 바로 產 米增殖計劃의 집행기간중에 한국인의 1인당 미곡소비량이 가장 적었다는 사실은 산미증식계획의 본질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일제치하 36년간에 미곡생산은 약 2배 증가하였는데 비하여 미곡의 대일수출량은 무려 10배나 증가하였으며, 연평균 韓國米의 대일수출량은 약 800만石에 달하게 되었다. 한편 韓國人의 1인당 미곡소비량은 년의 평균이 石이던 것이, 년에는 평균 石, 년에는 평 균 石으로 감소하였으며, 다시 년에는 평균 石, 년에는 평균 石으로 격감하였으며, 1937년에는 石 1938년에는 石으로 되었다. 산미 증식계획이 실시 되어 약간의 성과를 얻던 년의 기간에 한국인의 1인당 미 곡 소비량이 최저이었다는 사실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日帝의 產米增殖計劃에 의거한 식량약탈로 인하여 생긴 한국인 의 식량부족은 소비절감과 함께 滿洲 등지로부터의 잡곡 수입에 의하여 어느 정도 충당하였다. 產米增殖計劃 기간에 잡곡 수입량
328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이 년의 26만 6천石으로부터 년의 285만 3천 石로도 약 10배 증가한 것은 이 사실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日帝의 產米增殖計劃에 의하여 미곡생산이 증가되었음에도 불 구하고 한국인의 식량소비는 더욱 저하되고 악화되었던 것이었다. (2) 韓國農民의 負擔 日帝治下에서의 韓國農業의 양대 특징은 소작제도와 경영 규모 와 영세성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당시의 韓國農民의 부담 을 가중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당시의 경영규모별 농가호수의 비율을 보면, 1940년의 경우, 경영규모 1정보 이하의 농가가 63%나 되며, 정보의 농가 가 20%, 정보의 농가가 16%, 5.0정보 이상의 농가는 1%에 불과하였다. 1940년의 농가호당 평균 경영규모는 1.2정보 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을 소작농에 한하여 보면, 경영규모의 영 세성은 더욱 격화되어, 1.0정보 미만의 농가가 69%, 정보 의 농가가 18%, 정보의 농가가 11%, 5정보 이상의 농가 는 2%를 차지함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영세경영 위에 소작제도가 지배하였으므로 한국농민의 부담은 가중되어 생계유지도 불가능한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좋 은 자료가 없으므로 부정확하지만 日帝 朝鮮總督府의 농민가계 조사자료를 빌려보면, 제7표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농업수입 과 농업 외 수입을 모두 합하여도, 3町步 이하의 소작농은 모두 赤字이며, 0.3町步 이하의 自小作農도 적자가계이었다. 이것을 농 업수입에 한정하여 보면, 농업 외 수입이 50圓일 경우 모든 소작 농 및 3町步 이하의 自小作農과 1정보 이하의 자작농이 적자경영
329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第7表 階層別 農家 1戶當 家計收支(農外收入包含)(1923) 地主 自作農 20町 1町 1戶當 3町 0.3町 1戶當 以上 未滿 平均 以上 未滿 平均 收入 10,712 2, 支出 5,130 1, 差引 5, ,535 1, , 自小作 3町 以上 收入 1,015 支出 924 差引 小作農 町 1戶當 3町 未滿 平均 以上 資料 : 林炳潤 前揭書 p.299. 朝鮮總督府 町 1戶當 未滿 平均 農家經濟に關すゐ資料 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통계도 日帝가 농가지출 을 저평가하여 작성 한 통계이므로 실제의 家計赤字는 이보다 훨 씬 컸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농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小作農의 부담을 보면, 우 선 일제치하 소작제도에 있어서의 소작료의 부담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일제하 소작제도의 소작료는 이를 ① 小作料徵收方法 ② 小作 ③ 小作料形態로 편의상 구분하여 볼 수 있다. 小作料徵收方法은 크게 분류하여 ① 定租法 ② 打租法 ③ 執租 料率 法의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定租法은 한국농민들에 의하여 보통 賭只 定租 支定 定賭只 등으로 통칭되던 것으로서 소작계약 체결시에 지주와 소작인이 일정의 소작료액을 약정하여 당년의 풍흉에 관계없이 매년 약정 된 소작료액을 징수하는 방법이었다. 定租法에 있어서는 地主와 小作人은 소작계약에 앞서 소작지의 면적 地味 수확량에 대한
330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예비지식을 필요로 하였다. 따라서 定租法은 비교적 수확량의 변 화가 적은 無災肥沃地에서 행해졌으며, 주로 田에서 많이 행해지 고 畓의 경우에는 灌漑施設이 갖추어진 水利安全畓이 아니면 이 방법은 많이 행해지지 않았다. 소작료액 결정의 표준은 일제 치하 초기에는 보통 평년작의 40-50%가 많았으나 1920년대 이후에 는 전반적으로 55-60%가 가장 지배적이었고, 다른 소작료징수 방법에 비하여 더욱 高額化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定租法에서는 종자 비료 농기구 등은 소작인이 부담하며, 地稅는 지방에 따라 소작인이 부담하기도 하고 지주가 부담하기도 하며, 때로는 계약 에 의하여 양측이 절반씩 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 打租法은 농민들에 의하여 보통 打作 並作 半作 半租 등으 로 통칭되던 것으로서 地主 또는 그 대리인(마름)이 수확시에 實 收獲物을 약정한 소작료율에 따라 징수하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打租法에 있어서는 小作料 額 은 풍흉에 대응하여 변동하였으 며, 고정되지 않았다. 또한 지주와 소작인은 토지의 소재와 면적 에 대한 예비지식을 가짐으로써 족하였고, 定租法에서와 같이 수 확량에 대한 사전의 정확한 예비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打租 法의 소작료율은 일제치하 초기에는 50%가 지배적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에는 때로 55%로의 상승경향이 나타났었으며, 또 한 地稅 종자 농구 비료를 어느 쪽이 부담하는가에 따라 소작 료율에 다소의 차이가 있었다. 執租法은 농민들에 의하여 보통 執穗 看穗 看評 檢見 등으 로 통칭되던 것으로서 수확 전에 소작지의 작물이 立稻 그대로 있 을 때 지주 또는 그 대리인이 소작인 입회 하에 作况을 檢見 看 評 또는 坪刹하여 수확예상량을 추정해서 약정된 小作料率에 따 라 소작료를 징수하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執租法은 풍흉에 따라
331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小作料額이 변동하였다. 지주와 소작인은 토지의 소재와 면적에 대한 예비지식을 갖고 있으면 족하였지만 地味가 불량하고 재해 가 심하면 檢見이 어려우므로 비교적 地味가 양호하고 재해가 적 은 지역에서 행해졌다. 執租法의 小作料率은 打租法과 마찬가지로 50%를 표준으로 하는 것이 지배적이었으나, 대체로 지주측이 수 확량을 檢見 評價하였으므로 實納小作料率은 수확량의 60%이상 에 달하는 경우도 많았다. 執租法에 있어서는 종자 농기 구 비 료 등은 소작인 부담이며, 간혹 지주가 부담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소작인이 이를 부담하는 경우가 지배적이었다. 定租法 打租法 執租法의 소작료 징수방법이 어떠한 비율로 분포되어 시행되었는가를 보면, 1930년의 경우, 제8표에서 알 수 第8表 日帝下 小作制度의 小作料徵收方法의 分布 道別 畓 田 定租法 打租法 執租法 定租法 打租法 執租法 京 畿 道 忠淸北道 24.0% 74.0% 2.0% 87.0% 13.0% 極小% 忠淸南道 全羅北道 全羅南道 慶尙北道 慶尙南道 黃 海 道 極小 平安南道 平安北道 江 原 道 咸鏡南道 咸鏡北道 平 均 資料: 愼鏞厦 前揭論文 p.104. 朝鮮總督府 朝鮮の小作慣行 (上) p
332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있는 바와 같이 畓에 있어서는 定租法이 32.0%, 打租法이 52.0%, 執租法이 16.0%의 비율로 분포되어 있으며, 田에 있어서는 定租法이 60.6%, 打租法이 38.0%, 執租法이 1.4%의 비율로 분포되어 시행되고 있었다. 小作料의 생산량에 대한 비율은 소작료 징수방법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지역적으로도 차이가 나타나고 있었다. 1930년경 의 畓小作料率은 제9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最高 가 定租 法의 경우 58-90%, 打租法의 경우가 50-79%, 執租法의 경우가 50-80%에 달하고 있었다. 가장 일반적인 普通 의 경우에는 定 租法의 경우가 40-51%, 打租法의 경우가 50-60%, 執租法의 第9表 日帝下小作制度의 畓小作料率(1930) 道別 京畿道 忠淸北道 忠淸南道 全羅北道 全羅南道 慶尙北道 慶尙南道 黃海道 平安南道 平安北道 江原道 咸鏡南道 咸鏡北道 平 均 正 最高 租 普通 打 最低 最高 租 執 普通 最低 最高 租 普通 最低 % % % % % % % % % 自 至 { 資料 : 愼鏞廈 前揭論文 p.108. 朝鮮總督府 朝鮮ノ小作慣行 (上) p
333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경우가 50-55%이었다. 한편 1930년경의 田小作料率은 제10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最高 定租法의 경우 55-80%, 打租法의 경우가 50-65%, 執租法의 경우가 47-75%에 달하고 있었다. 가장 일반적인 普 通 의 경우는 定租法의 경우가 35-50%, 打租法의 경우가 49같이, 60%, 執租法의 경우가 40-55%의 비율을 보이었다. 이와 같이 畓田의 小作料率은 일반적으로 40-90%에 걸치는 광범위한 폭을 보이고 있으나, 빈도가 가장 높은 가장 일반적인 경우를 모형화하면 定租法의 경우가 50-60%이었고 打租法의 경 우는 50-55%이었으며, 執租法의 경우는 50-60%이었다고 볼 第10表 日帝下 小作制度의 田小作料率 (1930) 道別 京畿道 忠淸北道 忠淸南道 全羅北道 全羅南道 慶尙北道 慶尙南道 黃海道 平安南道 平安北道 江原道 咸鏡南道 咸鏡北道 平 均 正 最高 租 普通 打 最低 最高 租 執 普通 最低 最高 租 普通 最低 % % % % % % % % % {自至 資料 : 愼鏞廈 前揭論文, p.108 朝鮮總督府 朝鮮ノ小作慣行 (上) p
334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수 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일반화하면 일제치하의 小作料率은 粗 米生產量의 55-60%로 되어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高率 小作料는 당시의 韓國農民에 대하여 실로 가혹한 부담이었다. 그러나 소작농에 대한 부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당연히 지주가 부담하여야 할 公租公課(地稅 및 각종 附加稅 등)도 이를 지주가 부담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제11표에서 볼 수 있는 바 와 같이, 지주로서 각종 公租公課를 소작인에게 전가시키는 자의 수가 46%나 되며, 소작인으로서 公租公課의 被轉嫁者가 48%에 달하였다. 第 11表 地稅 및 公租公課의 小作人負擔狀況 道 名 京 忠 忠 全 全 慶 慶 黃 平 平 江 咸 咸 平 畿 北 南 北 南 北 南 海 南 北 原 南 北 均 資料: 朝鮮總督府 地 轉嫁者 主 小 不轉嫁者 作 被轉嫁者 人 不被轉嫁者 2.1割 7.9割 2.5割 7.5割 朝鮮ニ於ゲル小作ニ關スル參考事項摘要 그러나 高率小作料와 租稅公課가 소작인의 부담의 전부가 아니 었다. 이외에도 小作人은 지주의 冠婚喪祭나 大事가 있을 때에는
335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언제든지 무상노동을 제공하였으며, 연말년시와 대사에는 納物을 지주에게 제공하는 것이 상례였다. 韓國農民의 이러한 농업경영의 적자와 가혹한 부담은 그들을 負債農으로 만들었다. 日帝 朝鮮總督府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예 컨대 1930년의 경우 小作農家의 75%가 1호당 평균 65圓의 現物 負債를 갖고 있었으며, 現金負債까지 합치면 자작농까지 포함하여 全韓國農民이 負債農이었다. 한국농민은 대부분이 零細農이었고 小作農이었으므로 이자상환의 불능과 擔保物件의 부족과 심지어 는 元金의 상환의 어려움 때문에 근대 금융기관의 자금의 대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국농민들은 商業 高利貸資 本으로부터 고이자율의 자금을 빌려쓰고 추수 후에 이를 상환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농민이 다시 상업 고리대자본 의 수취의 대상이 되었으며, 고리대자본의 고이자도 그들의 부담 으로 짊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제치하의 小作制度의 소작료에는 원래의 地代 뿐만 아니라 土地改良費 租稅公課 高利貸利子 등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 다. 일제치하에서 소작료율이 50%를 상회하여 대체적으로 55-60%에 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소작료가 때로는 粗米生 產量의 90%에 달하는 극단적인 高率이 된 것은 소작료에 地代 이외에 다른 부담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日帝 朝鮮總督府가 조사한 각종 조사자료에 의거하여 일제치하 소작료의 내용구성을 분해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기본형이 노출 될 수 있다. ① 小作料=地代 小作料의 구성내용이 단순히 地代로만 되어있을 경우에는 小作 料率은 50-55%가 지배적이었다. 이것만으로도 朝鮮王朝 末期의
336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33-50%보다는 地代率이 상당히 상승한 것이었다. ② 小作料=地代+土地改良費(利子 또는 元利金) 특히 일제가 식량의 약탈을 목적으로 하여 產米增殖計劃의 일 환으로 水利組合을 조직하여 토지개량에의 강제투자를 시행하게 되자 水利組合圈內에 들어간 杳地에서는 水利費의 부담 문제가 발생하였다. 地主가 금융기관의 자금을 융자받거나 또는 지주 스 스로 이를 부담할 때에는 그 이자나 또는 원리금을 소작인에게 전 가하여 소작료율이 55-60%로 상승하였다. 定租法의 소작료율이 打租法이나 執租法의 소작료율 보다 고율이었던 것은 그 원인의 일부가 주로 水利組合에 들어가 있는 水利安全畓에서 定租法이 시행되고 水利費의 부담을 지주가 소작료에 포함시켰기 때문이었 다고 이해된다. 가장 일반적인 경우에 水利費는 粗生產量의 5-10%로 추정되어 전가되었으며, 이것이 원래의 地代에 가산된 것이었다. ③ 小作料=地代+農業資材의 先代利子 때때로 지주는 소작인에게 직접적 高利貸付를 하는 이외에 영 농자금이 부족한 소작인에게 종자 농기구 비료 농약 등 농업 자재를 先貸하고 그 元利金을 소작료에 포함시키거나, 또는 원금 은 별도로 징수하고 그 이자를 소작료에 포함시키거나 하였다. 이 경우에 농업자재의 원금계산에는 상업이윤이 개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大地主는 농업자재를 도매가격으로 구입한 다음 소작 인에게 先貸할 때에는 소매가격으로 평가하여 상업이윤을 가산하 였으며, 여기에 다시 이자를 가산한 것이었다. 이러한 형태는 日 本人 大地主의 경우에 지배적으로 행해졌다. ④ 小作料=地代+土地改良費+租稅公課 때때로 지주는 앞서 본 바와 같이 粗稅公課를 직접 소작인에게
337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전가하여 소작인이 소작료와 별도로 租稅公課를 납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租稅公課를 지주가 부담하고 그에 상당하는 가액을 토 지개량비의 이자분과 함께 소작료에 포함시키어 이를 징수하는 경우도 많았다. 租稅公課를 소작료에 포함시키는 경우 소작료의 상승율은 토지개량 비용이나 농업자재의 先貸利子負擔보다 저율 인 것이 보통이었다. ⑤ 小作料=地代+土地改良費+農業資材의 先貸利子 때때로 지주가 소작물에 地代 이외에 토지개량비와 이자와 농 업자재의 先貸利子를 포함하여 징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특히 日本人 會社地主나 대지주의 경우에 지배적으로 행해졌다. 이때에는 地主는 상업자본과 고리대자본의 기능을 겸함으로써 상업 이윤과 고율이 자를 소작인에게 부담시키었다. ⑥ 小作料=地代+土地改良費+農業資材의 先貸利子+租稅公課 소작료에 地代와 토지개량비의 이자가 포함되는 외에 농업자재 의 先貸利子와 粗稅公課가 모두 중첩 포함되는 경우도 있었는바, 이 경우의 소작율은 50%를 훨씬 상회하여 극히 고율로 상승하였 다. 앞의 제9표와 제10표에서 본 小作料의 최고징수율, 즉 定租法 의 58-90%, 打租法의 50-79%, 執租法의 50-80%의 극단적인 高率小作料는 이러한 구성내용을 가진 소작료에서 많이 나타난 것이었다. 이상 여섯 가지 형태는 소작료부담내용의 전형적인 것을 유형 화한 것이고, 이외에도 구체적으로 여러 가지의 조합, 예컨대, 地 代+租稅公課, 地代+各種高利代利子, 地代+農業資材의 先貸利子 +粗稅公課, 등 각종 형태가 있었다. 이것은 日帝治下의 한국의 小作農民이 부담한 소작료의 구성내 용이지만, 小作農은 이외에도 마름의 報酬, 饗應接待費, 斗稅, 場
338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稅, 色租, 加賭只 등의 각종 부담을 짊어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일제치하에서는 비단 小作農 만이 이러한 부담을 진 것이 아니 라, 自作農의 경우에도 地代 부분을 제외하고 고리대이자를 비롯 하여 위의 부담을 각각 독립항목으로 하여 짊어졌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농민들은 일제치하에서 이와 같이 가혹한 부담을 지고 있 었으나 高利資金의 借用도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보리 고개 라고 부르는 春窮期에 이르면 다수가 絕糧狀態가 되어 생존 第 12表 道別 春窮農家戶數와 그 階層別 比率 自作農 實數 比率 自小作農 實數 戶 小作農 比率 實數 比率 計 實數 比率 京 戶 % 畿 2, ,233 % 33.3 戶 % 97, 忠 北 3, , , , 忠 全 南 4, 北 3, , , , , , , 全 南 14, , , , 慶 慶 南 13, 北 8, , , , , , , 南部地方計 50, , , , 黃 平 海 4, 南 4, , , , , , , 平 北 3, , , , 江 咸 原 10, 南 15, , , , , , , 咸 北 4, , , , 北部地方計 42, ,002 合 計 92, , , , , ,253, 資料 : 林炳潤 前揭書 p.300. 朝鮮總督府 項摘要 戶 % 121, 朝鮮ニ於ゲル小作ニ關スル參考事
339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의 지속을 위협받게 되었다. 예컨대 日帝 朝鮮總督府의 자료에 의 거하여 절량농가의 비율을 보면, 제12표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 이, 1930년의 경우 自作農의 18.4%, 自小作農의 37.5%, 小作農 의 68.1%, 總農家戶數의 48.3%가 절량상태에 놓이었다. 이들은 더 이상 高利貸金을 借入할 곳도 없게 되므로 山野菜 草根 木皮 등으로 연명 하면서 춘궁기를 넘기었다. 그러나 이러 한 劣惡한 식생활과 연명은 바로 각종의 질병과 체력 체위의 저 하, 자녀의 발육불량을 가져왔으며, 餓死와 病死가 만연하기 일쑤 이었다. 일제의 식민지농업정책의 대종이라고 하는 產米增殖計劃도 한 국농민에게는 혜택은 커녕 그들을 몰락시키는 작용만 하였다. 일 제가 미곡증산을 위하여 투입한 新資材는 한국농업의 경작자인 자작농과 소작농에게 前貸되어 그들을 負債農化하는데 더욱 박차 를 가하고 추수 후에 元利金을 징수함으로서 그들을 더욱 빈곤하 게 만드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또한 產米增殖計劃이 채택한 증산방법으로서의 토지개량사업은 韓國人 지주와 자작농의 토지상실과 몰락을 촉진시키고 日本人地 主의 토지점유에 기여하였을 뿐이었다. 당시 產米增殖計劃의 토지 개량사업은 수리조합조직을 골자로 하였는데, 이로 인한 과중한 수리조합비의 부담은 韓國人 지주와 자작농을 몰락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특히 1930년 大恐荒 이후 米價가 폭락하였을 때에도 수 리조합비는 고정되어 있어 그 부담은 상대적으로 더욱 가중되었 었다. 水利組合에 강제로 가입된 농민이 부담에 못이기어 내어 놓 은 토지는 결국 日本人 地主에게 구입되어 日本人의 토지점유를 촉진시키는 작용을 한 것이었다. 하나의 사례를 들면, 제11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全羅北道 5개 水利組合區域에 있어
340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第13表 全北水利組合地區의 土地集中狀況 年度 日本人 韓國人 其他 計 人員數 土地面積 人員數 土地面積 人員數 土地面積 人員數 土地面積 町 人 町 人 町 人 町 人 ,674 3,141 4, ,694 3,933 14, ,998 2,960 3, ,292 3,859 19,826 資料 : 日本學術振興會 朝鮮米穀經濟論 서 產米增殖計劃이 실시되던 10년간의 토지이동 상황을 보면, 日 本人 토지소유자는 417명으로부터 828명으로 198.5% 증가하고, 日本人土地 소유면적은 5,674정보로부터 8,968정보로 158% 증가 하였는데 반하여, 韓國人 토지 소유자는 3,141명으로부터 2,960명 으로 도리어 5.8% 감소하였고, 韓國人토지소유면적은 4,181정보 로부터 3, 545정보로 15.2% 감소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의 식량약탈을 목표로 한 식민지농업정책과 그에 수반하는 한국농민의 각종의 과중한 부담은 韓國農民을 급격히 몰락시키어 소작농이 확대재생산되었다. 즉 제12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길이 自作農의 총농가에 대한 비율은 1915년의 21.7%에서 1920년에 는 19.5%로 감소되었으며, 1942년에는 17.4%로 다시 감소되었 다(1942년의 自作農에는 3.6%의 地主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실제의 자작농의 비율은 13.8%이었다). 또한 自小作農도 1915년의 40.8%에 서 1920년에는 37.4%로, 1942년에는 23.9%로 감소되였다. 반면 에 小作農은 1915년의 36.0%로부터 1920년에는 39.8%로 증가 하였으며, 1942년에는 53.8%로 더욱 증가하였다. 1942년에는 小 作에 관여된 농민이 전농민의 77.7%에 달하였다. 이것은 일제식 민지치하의 한국농민이 自作農으로부터 小作農으로 전락해가는 추세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제의 제2차 產米增殖計 劃이 폐기된 1934년에는 토지를 잃고 농업노동자로 전락된 농
341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第14表 日帝下 農民의 階層別 移動 年 度 地 主 自作農 自小作農 小作農 農業勞動 者 火田民 % 22.8% 32.4% 41.7% 資料 : 朝鮮總督府統計年報 各年度에서 作製
342 2. 日帝資本의 浸透 민의 총농가의 3.4%에 달하였으며, 火田民이 2.7%에 달하게 되 었다. 그러나 토지를 상실한 한국농민은 소작농이나 농업노동자로서 농촌에 남아있지 못하고, 離農하는 경우도 많았다. 離農民의 일부 는 한국내의 都市로 나가 流民이 되거나 광산 및 공업지대로 들어 가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이농민은 국내에서 일터를 찾지 못하고 男負女戴하여 滿洲와 日本으로 유랑을 떠났다 년 해방 당시 日本으로 도항한 韓國農民의 수는 약 100만명에 달 하였고, 滿洲로의 流民은 약 150만명에 달하였다. 日帝治下 36년간 韓國農民은 일제의 식민지농업정책에 의하여 가혹한 수탈을 당하여 더욱 더 몰락하는 추세에 있다가 1945년 8 15해방을 맞은 것이었다. 愼鏞廈 2. 日帝資本의 浸透 (1) 韓國에 對한 日帝의 工業政策의 變化 日本의 大財閥들이 韓國에 와서 공업개발을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 日產系인 日本 鑛業株式會社는 1915년에 鎭南浦製鍊所를 건설 하였고 三菱系의 兼二浦製鐵所는 1918년에 설립되었다. 三井系의 小野田세멘트株式會社는 1919년에 平壤 勝湖里에 공장을 건립하 였고 역시 三井系의 郡是製絲株式會社는 1920년에 忠州에 공장을 세웠다. 이 밖에 日本 中外產業系의 朝鮮紡織株式會社가 釜山에
343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설립된 것은 1917년 11월이며 이 공장은 韓國에 건립된 최초의 근대적 방직공장이었다. 製絲부문에서도 片倉系의 大邱製絲工場 이 1919년 4월에 창립되었다. 片倉系의 제사공장은 그 후 1927 년에 全州 및 咸興에도 설립되었다. 그리고 大日本製糖株式會社는 1917년에 韓國에 진출하여 平壤에 船橋里工場을 건립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의 대재벌들은 191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韓國의 공업개발에 착수하였던 것이나, 이때에 건립된 공장들은 대체로 日本에 있어서의 공업을 확장하기 위한 자원개발에 중점 을 둔 原鑛 원료처리공장을 건설한다는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日本政府의 韓國開發政策을 그대로 따른 결과이었다. 1920년 4월 1일로 朝鮮會社令이 철폐되어 韓國에 근대기업회 사 설립이 용이해지기는 했으나 이로써 韓國工業化政策이 확립되 어진 것은 아니었다. 1920년대에 日本이 韓國에 대한 경제개발정 책에서 추구한 것은 여전히 자원개발과 농업발전이었다. 1920년 후반기 이후의 韓國의 전력개발과 興南 室素肥料工場의 건설은 이와같은 정책의 기본노선을 크게 넘어서는 것은 아니었다. 日本政府가 韓國의 공업화를 정책적으로 확립한 것은 1931년 에 日本이 滿洲점령에 성공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日帝의 韓國 에 대한 산업정책이 기본적으로 변화되었다. 즉 종래에는 고전적 인 식민지정책으로 韓國을 지배하고 원료의 공급과 공업상품의 판매 시장으로만 생각하던 日帝는 韓國의 산업에 대한 자본의 직 접지배를 시도하였다. 이것은 1929년의 세계공황의 영향을 심각 하게 받고 있던 日帝자본의 불황 타개 방법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이어서 1930년대 후반기에 日帝가 中國 대륙 침략을 본격적으로 감행하면서부터 병참기지로서의 韓國의 공업화가 시급한 과제가
344 2. 日帝資本의 浸透 되었고 이에 따라 日本의 대재벌이 대대적으로 韓國 공업계로 밀 어 닥치기 시작하였다. 韓國은 공업입지조건에서 보면 많은 유리한 점을 갖고 있었다. 韓國은 공업자원이 풍부하였고 노동임금은 저렴하였으며 日帝資 本家측으로 보아서는 노동조건 등 노동법 령도 비교적 까다롭지 않았다. 또한 韓國은 中國 대륙과 인접하고 있어서 제품판매에 있 어서도 수송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1926년부터 착수한 電源開發은 韓國의 공업화를 가능케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였 다. 그리하여 앞에서 언급한 대로 1930년대 초부터는 日本은 韓 國의 공업개발을 추진시켰다. 이에 日本資本의 韓國 진출은 적극 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군소자본 뿐만 아니라 日本의 독점자본이 韓國에 진출하여 근대공업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植民地 官府인 朝鮮總督府는 이 공업정책을 뒷받침하는데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日帝의 독점자본이 韓國 공업건설에 어떠한 역활을 담당하였는 가를 고찰하기 위하여 우선 韓國에 건설된 공업을 그 자본계열에 따라 분류해 본다. 당시 韓國의 공업을 지배하고 있던 자본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日本 국내에 기업의 본거지를 두고 이미 일본에서 대재벌로 형성된 日人資本이 진출한 것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기업의 본거지를 韓國에 두고 韓國에서 성장한 日人資本 을 말한다. 이 분류는 회사 본점의 소재지와는 반드시 일치하지 는 않는다. 예를 들면 野口系의 日窒은 본점을 日本에 두고 있었 으나 그 기업체의 본거지는 韓國에 두고 있었고 그 기업은 韓國 을 발판으로 성장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朝鮮에서 형성된 日人資 本의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이 자본들은 朝鮮總督府의 적극적
345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인 행정적인 지원으로 비대해진 자본이었다는 데에 특징이 있었 다. (2) 日本 大財閥系 獨占資本의 進出 韓國에 진출한 日帝 獨占資本은 三井系 三菱系 住友系 등 日 本에서도 3대 재벌로 일컬어지는 거대자본을 비롯하여 日產系 日鐵系 鍾紡系 大日本紡織系 東洋紡織系 및 기 타 중견재벌들 이었다. 1) 三井系 三井系가 韓國에서 공업개발에 착수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부터이나 본격적인 활동을 한 것은 滿洲事變 이후였다. 三井系가 韓國工業開發에서 주력한 부문은 纖維工業과 鑛山開發이었다.1) 三井系가 韓國纖維工業 건립에 착수한 것은 三井系의 東洋棉花 株式會社가 1919년에 木浦에 南北棉業株式會社를 건립하고 棉花 재배 및 繰棉사업을 시작한 때부터이며, 1920년에 설립된 郡是製 絲에도 대주주로 참가했고 특히 1929년에는 三井系의 직접투자로 서울의 東洋製絲株式會社를 설립함으로써 韓國 纖維工業에 큰 관 심을 나타내었다. 1936년에는 東洋棉花의 子會社인 京畿染織이 설립되었고 다음해인 1937년에는 三井系의 東洋레이용會社가 慶 南 梁山에 朝鮮레이용株式會社를 설립하였다. 三井系가 韓國에서 광업 및 중공업 개발을 시작한 것은 1928년 에 三井鑛山이 三成鑛業株式會社를 설립한 때부터이다. 이 회사는 朝鮮總督府의 產金政策에 호응하여 금광개발에 주력하였다. 이 三井系의 朝鮮에 있어서의 금 산출액은 日鑛 三菱 다음 가 會社組合 要錄(1920) 參照 1) 東亞經濟新報社 朝鮮銀行
346 2. 日帝資本의 浸透 는 제3위를 차지하였다. 三井鑛山은 다시 1941년에 서울에 東洋 輕金屬株式會社를 설립하였고, 平北 龍川에 알미늄공장을 건설하 였다. 이것이 三井系가 韓國에서 軍需工業에 착수한 시초였다. 이 때 三井이 계획한 것은 비행기공장이었다. 三井系의 小野田세멘트株式會社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19 년에 平壤에 勝湖里工場을 건설한 바 있다. 이어서 1928년에는 咸南에 內川里工場을 세웠으며 이 두 공장을 토대로 하여 1934년 에 朝鮮小野田세멘트株式會社를 설립하였다. 이 밖에 三井系의 傍系會社인 東京芝浦電氣가 仁川에 직영 공 장을 세웠고 또 三井系의 日本製粉株式會社는 仁川 鎭南浦 沙 里院에 직영공장을 세웠다. 이와같이 三井은 일찌기 韓國에 진출하여 처음에는 三井物產을 통하여 무역 등에서 자본을 축적하였고, 그 후 섬유부문, 광업, 중 공업부문에 투자하여 韓國 工業開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三井系의 韓國에 있었던 공업회사는 대강 다음과 같다.2) 三井系의 韓國內 事業 會 社 名 公稱資本 東洋製絲 東洋棉花 東綿纖維工業 東北綿業 京畿染織 東洋레이용 朝鮮레이용 (단위 : 천원) 拂入資本 2,400 2,400 2,000 5,000 2,000 3,000 5,000 3,000 10,000 10,000 2) 東洋經濟新報社 年刊 朝鮮
347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三井鑛山 三成鑛業 義州鑛山 5,000 3,000 5,000 1,500 45,000 22,500 3,000 3,000 日本製粉 仁川工場 鎭南浦工場 沙里院工場 - - 郡是製絲 大田工場 淸州工場 大邱工場 - - 東京芝浦電氣 仁川工場 - - 大日本세루로이드 木浦工場 - - 東洋輕金屬 飛行機工場 (昭和飛行機會社로부터 買收) 小野田세멘트 朝鮮小野田세멘트 備考 : 標는 日本 在籍會社의 直營工場임 韓國內의 直營工場의 資本額은 不明임 三井系 지배회사의 자본액은 당시 韓國 企業會社 자본에서 차 지하는 비율은 약 3%에 달하였다. 2) 三菱系 三菱系의 韓國에서의 사업은 광업과 중공업에 집중되었다. 三菱 系의 韓國진출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1918년에 三菱鑛業이 兼 二浦에 제철소를 설립한 데서 시작된다. 三菱의 韓國에서의 사업
348 2. 日帝資本의 浸透 은 三菱商事와 三菱重工業을 통하여 직접 혹은 간접으로 공업 개 발을 추진하고 있었다.3) 三菱鑛業이 韓國에서 가지고 있는 鑛區는 1백 수십개소이었다. 그 중에서 개발 중인 직영 광산으로는 忠北 月田金鑛, 忠南 三光 金鑛, 全北 金堤金鑛, 平南 甘德金鑛. 黃海道 海州金鑛, 江原道 花 田利金鑛, 咸南 寶生金鑛 蓋馬金鑛, 咸北 靑岩金鑛, 黃海道 下聖 鑛山(鐵 螢石) 兼二浦鑛山(鐵鑛) 銀龍鑛山(鐵鑛)등이다. 이와 같이 三菱鑛業의 韓國에서의 중점사업은 금광개발이었으며 三菱 鑛業은 韓國의 광업생산량의 83%를 차지하였다. 三菱의 韓國에 있어서의 또 하나의 중점사업은 造船業이었다. 三菱重工業은 1937년 釜山에 朝鮮重工業會社를 자본금 7백 만원 으로 설립하고 造船業에 착수하였다. 이 造船工場은 당시 韓國의 최대규모의 조선소였다. 이 밖에 三菱系는 1933년에 日本穀產工業會社를 설립(美國人 경 영의 日本콘프로닥트株式會社를 인계)하였고 1937년에는 朝鮮製紛 을 설립하였고 한편으로 1934년에는 昭和麒麟麥酒會社를 세웠다. 1942년 현재, 三菱系의 韓國에 있어서의 공업개발 상황은 다음 과 같다.4) 三菱系의 韓國 內 事業 會 社 名 公 稱 資 本 三菱商社 日本穀産工業 (단위 천원) 拂 入 資 本 7,600 7,600 7,000 7,000 三菱重工業 朝鮮重工業 3) 前掲 朝鮮 銀行 會社 組合要錄 4) 前揭 商工月報 및 前揭 年刊朝鮮
349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三菱鑛業 諸鑛山 淸鎭製鍊所 朝鮮無煙炭 西鮮中央鐵道 茂山鐵鑛開發 日淸製粉 朝鮮製粉 麒麟麥酒 昭和麒麟麥酒 ,000 40,000 15,000 6,000 50,000 5,000 2,000 1,500 3,000 1,200 三菱系의 韓國에 있어서의 사업자본은 전체 韓國企業 회사자본 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약 4.4%로 추정된다. 3) 住友系 日本의 3대 재벌의 하나로 손꼽히는 住友系는 韓國 진출에 그 다지 큰 관심은 두지 않은 듯하다. 住友系의 韓國에서의 사업은 광산개발에 한정되어 있고 특히 금광개발에 역점을 두었다. 韓國 에 있어서의 住友系의 사업은 日本 본사의 직영으로 경영되고 있 었고 住友는 韓國에 별개회사를 설립하지는 않았다. 住友系의 사업은 모두가 광산경영이며 日本에 있는 住友本社 및 住友鑛業會社의 직영사업소였다. 元山製鍊所는 住友系가 직영광산에서 발굴하는 광석을 처리하 기 위하여 건설된 것이나 제련능력에 따라 일부 매입광석의 처리 도 담당하였다. 住友系의 자본이 韓國 工業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약 1.5%로 추 정되었다. 그 產金事業은 특히 활발한 바가 있어 韓國의 4대 產金 會社(三菱 三井 日鑛 住友)의 대열에 끼이게 되었다.5) 5) 前揭 年刊朝鮮(1942)
350 2. 日帝資本의 浸透 4) 日產系 日產系의 자본이 韓國에 진출하여 사업에 착수한 것은 日本鑛 業의 前身인 久原鑛業會所가 1915년에 咸南 甲山銅山과 威興 金 銀鑛山을 매수하고 같은 해에 鎭南浦에 제련소를 설립할 때부터 이며 이 日本鑛業株式會社는 광산업에 주력을 두었고 韓國 전역 에 30여 개소의 광산을 소유 경영하고 있었다. 그 중에 중요한 광 산을 보면 다음과 같다. 平北 雲山金鑛 大楡洞金鑛 平南 兹母城金鑛 梁山金鑛瓮河金鑛遂安金鑛箕州鑛山(金鐵重石) 達北金鑛金華鑛山(硫化鐵) 玉溪金鑛金港金鑛 盈德金鑛居昌金鑛 등 成南 咸興金鑛 檢德金鑛 甲山銅鑛 黃海 江原 全北 慶北 日本鑛業이 韓國에서 생산하는 金은 韓國總產金量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었다. 日產系 韓國內 事業 日本鑛業 鎭南浦製鍊所 雲山鑛山 등 29個所 日本油脂 朝鮮油脂 日産化學工業 朝鮮日産化學工業 (단위 :천원) 公稱資本 拂入資本 ,000 12,000 5,000 4,000 日本水産 長箭, 大靑島, 蔚山, 濟州, 大黑山島 등 5個 事業長
351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日産農林工業 朝鮮燐寸 日立製作所 仁川工場, 富平디젤自動車工場 日產系 자본의 韓國에 있어서의 사업은 광산경영 외에 油脂工 業, 水產業 등이 있다. 이 日產系의 韓國內 사업투자는 韓國의 총기업 자본액에 대한 비율이 8.9%로 추정되며, 日本鑛業이 韓國에서의 사업에 투입한 고정자본은 약 1억 7천여만원으로서 그것은 日本鑛業이 全日本國 內에서 투자한 전체 고정자본의 약 40%에 해당한다. 5) 日鐵系 日本製鐵系가 韓國에서 중점을 둔 사업은 철광개발과 제철업부 문이었다. 日本製鐵이 三菱의 兼二浦製鐵을 소유 경영하게 된 것 은 1934년부터이다. 兼二浦製鐵所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1914년에 三菱合資會社가 건립에 착수했고 뒤에 三菱製鐵이 인수 하여 완성시켜 1918년부터 조업하게 된 것이다. 이 제철소가 日 本製鐵로 넘어간 것은 1934년에 日本에서 製鐵大合同이 일어났을 때였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日本製鐵은 韓國의 제철업에서 결 정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日本製鐵은 1938년에 淸津에 제 철소를 건설하였으며 이후로 韓國의 제철업은 日本製鐵系가 지배 하게 되었던 것이다. 日鐵系의 韓國에 있어서의 사업은 兼二浦 淸津 양대제철소 외 에 黃海道 載寧鐵鑛과 殷栗鐵鑛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이 두 철광 의 생산량은 韓國 전체의 철광생산량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었 다. 日鐵은 2차대전 말기에는 咸南 茂山鐵鑛의 개발에도 착수하였
352 2. 日帝資本의 浸透 다. 日鐵系 자본이 韓國의 기업회사자본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약 3%로 추정되고 있다. 6) 鍾紡系 日本의 3대 紡績財閥 중에서 제일 먼저 韓國에 진출한 것은 鍾 紡系였다. 鍾紡系가 1925년 11월에 서울 東大門에 製絲工場을 설 립한 것이 그 첫 출발이며 이어서 全南 光州工場, 江原 鐵原工場 이 세워졌다. 처음에 건립된 鍾紡系 공장은 모두 生糸生產을 목적 으로 한 제사공장이었다. 鍾紡이 韓國에서 綿紡績부문을 개발하는 것은 1930년대에 접 어 들어서였다. 1935년 8월에 鍾紡은 全南 光州에 자본금 9백만 원을 투자하여 방직공장을 설립하였고 다음해 8월에는 서울에 자 본금 1천 4백만원을 들여 대규모 방직공장을 건립하였다. 이 두 공장은 당시 韓國의 방직계에서는 최대규모의 공장이었다. 鍾紡系는 1930년대 말기에는 亞麻纖維工業과 人造纖維工業을 착수하였다. 1939년에는 平壤에 2천 1백만원의 자본을 투입하여 수후(人造絹)공업을 세웠고 1940년에는 朱乙에 亞麻製絲工場을 설립하였다. 또 鍾紡은 펄프 원료생산을 위하여 新義州에 농장을 설립하였다. 鍾紡系는 韓國의 섬유공업계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 하고 있었으며 이 밖에 광업소 및 수산개발에도 약간의 투자가 있 었다. 鍾紡系 자본이 韓國기업 회사 자본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율 은 약 4.4%로 추정된다. 鍾紡系의 韓國에 있어서의 사업체는 대략 아래와 같다. 鍾淵紡績 全南工場(綿絲 綿布 精麻) 京城工場(綿絲布)平壤工場
353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東大門工場(生絲)鐵原工場(生絲)光 州工場(生絲) 朱乙工場(亞麻) 春川工場(大麻絲) 新義州 (人絹 化學工業) 農場(펄프원료 재배) 鍾淵實業 新義州工場 (펄프) 三和(金)襄陽(鐵)和順(石炭)東馬 靈興(金 銀 鐵) (硫化 鐵)등 鑛業所 鍾淵朝鮮水產(불입자본금 3백만원) 朝鮮製紙(불입자본금 3백만원) 鍾淵朝鮮商事(불입자본금 2백만원) 朝鮮電氣冶金(불입자본금 33만 7천 5백원) 日本디젤 群山工場 7) 東洋紡系 鍾紡系 다음으로 韓國에 진출한 대규모 紡績資本으로는 東洋紡 織系를 들 수 있다. 東洋紡織은 日本 방직계의 선구자였고 그 제 품은 일찌기 韓國에 진출하여 시장을 독점지배하고 있었으나 韓 國에서의 공장설립은 늦었다. 東洋紡織系의 韓國工場은 1933년 12월에 仁川工場을 건립한 데에서 비롯되어 그후 1936년 12월에 서울 永登浦工場이 설립되었다. 이 밖에 東洋紡織은 安養에 棉莖工場을 건설하였으며 이 공장 들은 모두 日本本社의 직영공장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東洋紡織系 자본의 紡績부문 이외의 사업으로는 丹陽에 子會社 인 丹陽石炭株式會社(불입자본 300만원)을 갖고 있었다. 東洋紡 織系가 韓國 기업회사자본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약 1.5%로 추정 된다
354 2. 日帝資本의 浸透 8) 日訪系 日本의 3대 紡績系 자본 중에서 韓國 進出이 가장 뒤늦은 것이 大日本紡織系였다. 大日本紡績系가 韓國진출을 계획한 것은 1930 년대 초였으나 실제로 韓國에 공장을 세운 것은 1934년에 淸津에 人絹공장을 건설한 때부터인데 이 공장이 완성된 것은 1939년이 며 이어서 서울에 織布加工工場을 건립했다. 大日本紡織은 韓國에 綿絲織工場을 건설하지는 않았으나 人絹 工業부문에서는 선구적 지위에 있었다. 大日本紡織은 이 밖에 子 會社로서 北鮮硫炭株式會社와 惠山鎭鑛業株式會社를 갖고 있었 다. 日紡系 자본이 한국기업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약 1.5%로 추 정된다. 9) 기타 中堅財閥 이상에서 韓國에 진출한 日本 대재벌의 기업활동의 실태를 알 아보았다. 韓國의 공업개발에 있어서는 이 밖에 중견재벌들의 진 출을 경시할 수는 없다. 이들 중견층 재벌들은 日本에서는 대재벌 속에 들지는 못했으나 韓國에 진출한 그들의 기업체는 거의 모두 가 대규모 기업체에 속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활동이 한국공업에 서 차지하는 비중도 컸기 때문이다. 韓國에 진출한 日本 中堅財閥系의 韓國에서의 활동상황의 대강 은 다음과 같다. ㄱ. 纖維 부문 ① 日本綿花系 日本綿花의 子會社인 朝鮮棉花株式會社가 설립된 것은 1913년 이며 木浦에 繰棉工場 및 織布工場을 건립했고 全北 裡里에도 繰 棉工場을 세웠다. 이 밖에 日棉系는 木浦에 棉實油工場과 全南의
355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道是製絲工場을 경영하고 있었다. ② 中外產業系 日本中外產業系의 朝鮮枯紡織株式會社는 1917년 11월에 자본 금 5백만원으로 釜山에 건립되었다. 朝鮮紡織은 紡績 織布 뿐만 아니라 繰棉工場도 자체 내에 설비하고 있어 특색을 이루고 있었 다. 中外產業系의 韓國에서의 사업은 紡織業 외에 朝鮮火藥製造 (자본금 1천만원), 朝鮮火藥銃砲(자본금 2백만원)와 中外鑛業의 직영 海州製鍊所 및 中外製作所를 갖고 있었다. ③ 片倉系 片倉系는 韓國生絲紡績界의 선구자였다. 片倉系가 韓國에 진출 한 것은 淸日戰爭 직후에 片倉組가 韓國 蠶業開發을 목적하고 渡 韓한데서 비롯되며 이 片倉組는 1919년 4월에 大邱에 製絲工場을 세움으로써 생사생산의 근대적 공장공업을 일으켰다. 그 후 1927 년에 恩賜授產京城製絲所를 매입하고 다음해 1월에는 全州工場, 그해 10월에는 咸興工場을 건립하였다. 韓國에 있어서 片倉系의 사업은 製絲業 외에 片倉殖產, 片倉肥 料의 子會社인 朝鮮化學肥料株式會社(자본금 2백만원) 및 大東鑛 業 株式會社(자본금 2천만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④ 安田系 帝國纖維 帝國纖維는 1923년에 韓國에 진출하여 日本의 제품 판매에 종 사하고 있었으나 1932년에 釜山에서 麻布제조사업을 시작했고 그 후 北韓지방에서 亞麻재배와 그 製絲業을 위하여 豊山 甲山 北 ⑤ 三興系(伊藤忠)의 朝鮮織物 靑 三水 端川에 제사공장을 설립했다. 伊藤忠商事가 韓國으로의 진출은 이미 舊韓末에서 시작되었다. 1905년에는 韓國人綿布商 朴承穆 등과 합작하여 共益社를 설립하
356 2. 日帝資本의 浸透 였으며 이 共益社가 주동이 되어 1932년에 朝鮮織物株式會社를 설립했으며 1934년에 자본금을 1백만원으로 增資하고 安養에 人 絹織布工場을 설립했다. ㄴ. 세멘트 부문 ① 淺野系 淺野系는 1936년에 韓國 淺野세멘트會社(자본금 3백만원)를 설립하고 黃海道 鳳山에 공장을 건설함으로써 韓國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淺野는 그 밖에 朝鮮카아리트會社 및 順安에 砂金鑛 을 경영하였다. ② 宇部興產 宇部세멘트의 韓國세멘트도 淺野세멘트와 같은 해인 1936년에 설립되었는데 그 공장은 黃海道 海州에 두었다. 이 회사는 공칭 자 본 1천 4백만원, 불입 자본 8백만원으로써 韓國 세멘트공업계에서 는 小野田에 다음가는 지위에 있었다. 이밖에 宇部興產系는 端川 에 硫化鐵鑛과 西鮮產工業(자본 130만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ㄷ. 製紙 부문 王子製紙系의 北鮮製紙化學工業會社는 1935년에 공칭자본 2천 만원, 불입자본 1천만원으로 설립되었으며 그 공장은 咸北 吉州에 세워졌다. 이 회사는 당시 韓國의 유일한 人造 펄프會社였다. 王 子製紙系는 이 밖에 日本王子製紙의 직영인 新義州工場과 王子證 券의 子會社인 鴨綠江製紙會社(불입자본 4천만원), 多獅島鐵道會 社(불입자본 150만원)를 운영하고 있었다. ㄹ. 기타 부문 이외에도 日本의 군소재벌들은 이 시기에 다수 진출하여 각종 사업을 경영하고 있었다. 大川系의 朝鮮鐵道會社(불입자본 1,765만원), 朝鮮自動車興業
357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會社(불입자본 90만원), 大橋系의 京城電氣會社(불입자본 2천 8 백만원), 朝鮮興業會社(불입자본 3백만원), 日電系의 三陟鐵道會 社(불입자본 625만원), 三涉開發會社(불입자본 1,875만원), 親和 企業系의 親和鑛業(불입자본 5백만원), 親和木材會社(불입자본 325만원), 大日本麥酒系의 子會社인 朝鮮麥酒(불입자본 3백만 원), 大日本製糖系의 平壤 製糖工場(불입자본 150만원), 日本車 軸系의 仁川工場 등 韓國의 중요공업을 망라하고 있었다. 이들 중견재벌이 韓國工業에 투자한 자본은 韓國內 기업회사 자본 총액의 11.1%를 차지하고 있어 당시 韓國工業에 있어서의 그들의 위치는 비교적 컸다고 하겠다. (3) 韓國에서 成長한 日人獨占資本의 實態 1) 野口系 ㄱ. 野口 財閥의 生成 日帝 强占期의 韓國의 공업화를 논할 때에 野口系의 기업활동 을 빼놓을 수는 없다. 당시의 韓國 공업계에서 野口系 자본이 차 지하는 비중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三井 三菱 住友 日產 日鐵 鍾 紡 大日本坊績 東洋紡績 등 日 本의 대재벌들이 일찌기 韓國에 진출하였고 특히 1930년대의 韓國 공업건설에 주도적 역활을 담 당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 대재벌이 한국공업에 대한 투 자액과 상당하는 자본을 野口系 단독으로 투입하고 있었다. 한국 의 공업화를 두고 말할 때 흔히 野口의 朝鮮 또는 朝鮮產業 界의 王者 운운하였다. 이것은 결코 근거없이 허망한 말은 아니 었다
358 2. 日帝資本의 浸透 그러나 가장 주목할 것은 이 野口가 이미 대재벌로서 韓國에 진 출한 것이 아니라 韓國에 들어와서 비로소 日本 굴지의 대재벌로 성장했다는 점일 것이다. 즉 野口財閥은 韓國 진출 후에 형성되었 다는 점이 다른 재벌들과 크게 구별되어지는 것이다. 野口의 모체가 日本窒素肥料會社였고 이 日窒은 三菱의 자본 지원으로 창립되었다는 점에서 野口의 韓國內 사업체를 三菱系로 보는 이들도 있으나, 野口가 재벌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野口가 韓國에 진출한 것은 1920년대 중엽이었고 당시에는 日 本內에서 三菱 자본에 의지하여 日本 窒素肥料會社를 창립 운영 하고 있는 일개 기업체에 지나지 않았다. 野口 사업의 모체인 日 本肥料會社는 1906년에 설립되었다. 창립 당초에는 日本 九州 鹿 兒島에서 曾木電氣株式會社의 명칭으로 발족했는데 이 회사의 창 립자본금은 20만원이었다. 이것은 당시 日本 국내에서는 일개 군 소기업회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野口는 三菱으로부터 자금의 지원을 받아 1914년에 熊本縣 白川郡에 발전소를 건설했고 同縣 八代郡 鏡町에 질소비료공장을 설립하였으며 社名을 日本窒素肥 料株式會社로 개칭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6) 그러므로 이 시기의 野口의 日窒은 三菱의 한 자매회사적 지위 에 있었고 군소재벌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野口의 日窒이 韓國에 진출한 것은 1926년이다. 그 해 1월에 野口는 赴戰江 전력개발을 목적하고 자본금 2천만원의 朝鮮水力 電氣株式會社를 설립하였다. 이어서 다음해 5월에는 자본금 1천 만원으로 朝鮮窒素肥料株式會社를 창립하고 興南에 공장건설을 착수하였다. 이것으로 野口의 韓國에 있어서의 기업활동이 시작되 6) 片桐龍吉 半島의 事業王 野口遵(1939) p
359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三菱과 결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즉 野口가 鴨綠江水域의 전력개발과 興南 窒素肥料工場을 주축으로 하여 北 韓에 큰 공업단지를 계획한 때부터 三菱은 野口의 저돌적인 사업 확대에 회의를 품었고 赴戰江 땜 공사가 의외의 난공사였으며 興 南 비료공장의 시험제품이 기술적 애로로 桃色硫安을 생산하게 되자 三菱의 실망은 컸다. 게다가 당시 獨逸 이게會社와 英國 푸 라나몬드會社의 질소비료가 동양시장을 개척 확보하기 위하여 덤핑투자를 감행하기에 이르자 日窒의 제품은 국내시장을 침해당 하여 倒產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위에 1929년의 세계경 제공황이 日本 財界로까지 파급되어 野口에 대한 三菱의 지원은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三菱이 자본지원을 중단하게 되자 종래 日窒과 거래해 오던 住 友 등 日本 국내의 각 은행에서도 현금대부를 점차 기피하게 되었 고 따라서 韓國에서의 野口의 사업은 자본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 野口의 자금위기를 타개해 준 것이 日帝의 植民地官府 朝鮮總 督府였다. 당시의 朝鮮總督 宇垣一成은 野口의 韓國에서의 사업을 도와 北韓의 공업개발을 달성케 함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 하려는 원대한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宇垣은 野口 의 사업에 모든 행정적인 편의를 제공하는 한편 朝鮮銀行으로 하 여금 자금지원을 해주도록 지시하였다. 三菱 住友 등 日本의 대재벌로부터 소외당했던 野口는 朝鮮銀 行으로부터의 자금지원으로 궁지에 몰렸던 자금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고 착공중이던 水電開發과 窒素肥料工場을 완성시킬 수 있었 다. 赴戰江水力發電所는 1930년 9월에 완성되었고 興南窒素肥料
360 2. 日帝資本의 浸透 工場은 1930년초 제품판매를 시작하였다. 野口는 赴戰江 전력개발에 이어 다시 長津江땜 건설을 계획하 고 전력개발사업을 더욱 확장시켜 나갔다. 당시 長津江 水電開發 權은 이미 三菱이 소유하고 있었다. 三菱은 120여 만원을 투입하 여 개발에 착수한 바 있었으나 한동안 중단되고 있었다. 野口가 三菱으로부터 長津江 水電開發權을 양도받는 일에 있어서도 宇垣 의 거중 조정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와같이 韓國에 있어서의 野口의 사업은 朝鮮總督府의 적극적 인 행정지원과 정책금융에 의하여 궤도에 올라섰고 순조롭게 성 장해 나아갔다. 野口에 대한 정책금융은 막대한 액수에 이르렀다. 朝窒은 최고 4천만원까지 朝鮮銀行에서 융자받고 있었는데 이것 은 당시의 朝鮮銀行 대출총액 1억 2천만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였다.7) 日本政府는 1931년 12월에 硫安輸入 許可規則을 발표했다. 이 것은 앞에서 말한 獨逸 英國회사의 덤핑수출 비료가 日本內로 침투하는 것을 억제할 목적으로 마련한 것이다. 그 후로 외국회사 제품의 비료수입은 제한을 받게 되었고 日本 국내 비료값은 급격 히 앙등하였다. 한편 朝鮮總督府는 農工併進政策을 내세워 농촌의 金肥사용을 적극 장려함으로서 朝鮮窒素會社의 제품인 硫安의 판 로확장을 정책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위와 같은 조건 밑에서 野口 의 朝鮮窒素 는 1932년 초부터 好況을 맞게 되었으며 韓 國농 민을 희생시키는 독점이윤으로 비대하여 갔다. 이때부터 野口의 사업은 확고한 기반 위에 서게 되었고 朝鮮總 督府의 절대적인 행정적인 지원하에서 점차 재벌로 성장되어 갔 다. 1937년 日帝 朝鮮總督府는 舊滿洲政府와 합작으로 鴨綠江 水 7) 前揭書 半島의 事業王 野口導
361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力開發을 계획하고 水豊땜 건설에 착수하였는데, 이 때에도 野口 는 이 鴨綠江 水電會社의 최대 주주로서 땜 건설의 실제 담당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 水豊땜은 당시 70만kw의 발전능력을 갖춘 韓 國 최대의 발전소였다. 1945년 현재 韓國의 전력개발은 146만 8,790여kw의 발전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연 평균 발전량은 98만 8,700kw였으며 그 중 92%는 野口의 건설에 의한 것이었다.8) 이 와같이 野口는 赴戰江 水電 長津江 水電 鴨綠江 水電 등 韓國 의 주요 수력전기 개발을 독점하였고 이를 근간으로 각종 화학공 업을 건설하였다. 그것은 비단 野口系 사업의 자체수요를 충당했 을 뿐 아니라 韓國 공업개발의 동력이 되었다. ㄴ. 野口財閥의 位置 1926년 이래 韓國에 진출한 野口가 건설한 사업체를 보면 대략 다음 표와 같다. 野口의 사업체는 전력개발과 화학공업을 주축으로 한 것이나 그 밖에도 각종 공업약품, 油脂工業, 특히 日本의 대륙침략전쟁의 확대와 더불어 火藥 및 人造石油 등 戰爭需要品 생산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野口가 건설한 공업은 모두 국제수준의 대규모 공업이 었고 당시 日本의 전공업생산량에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興南에 건설된 朝鮮窒素肥料工場은 그 규모의 크기에 있어서나 성능의 우수성에 있어서 獨逸 멘제불그공장에 비견되는 대규모 공장이었고 암모니아 합성법에 의한 硫安의 연생산량은 110만톤 으로서 日本硫安生產 총액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었다. 興南공 장에서는 1936년부터는 화약 주요원료인 硝酸과 硫酸 생산에 착 수하였고 그 생산량은 전체 日本 생산량의 40%를 차지하고 있었 다. 朝窒의 本宮工場에서는 電解法에 의한 苛性소오다의 생산 8) 朝鮮銀行 調査部 經濟年鑑 (1949) p
362 2. 日帝資本의 浸透 野口系의 韓國內 事業 舊日本窒素 (단위 : 천원) 公稱資本 拂入資本 70,000 2,000 4,200 10, ,000 10,000 2,000 1,000 1, ,000 30,000 5, ,000 10, ,000 10,900 70,000 1,520 4,200 10, ,000 10,000 2,000 1,000 1, ,000 22,500 5, ,000 10, ,000 8,850 本宮工場 舊朝鮮窒素 興南工場 永安工場 赴戰江發電所 鑛業所 新興鐵道 日本마그네시움金屬 日窒鐵鑛業開發 廣長金山 朝鮮人造石油 朝鮮窒素火藥 朝鮮빌딩 朝鮮水産工場 咸興合同木材 朝鮮水力電氣 朝鮮送電 端豊鐵道 鴨綠水力發電(鮮滿) 平北鐵道 北鮮水力電氣 北鮮合同電氣 에 착수하였는데 이 공장은 당시 日本 최대규모를 자랑했으며 그 생산량은 日本 전국 생산량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興南工場에서는 鰮油 硬化油脂肪酸 구리세린 비누 등 의 생산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그 생산규모는 日本 유수한 것이었 다. 北韓 일대에는 정어리(鰮)의 세계적 어장이 있고 이러한 풍부 한 원료가 興南공장에 집중되어 油脂工業이 발달하였고 硝酸 硫 酸 구리세린과 결부되어 戰時 火藥工業이 크게 일어나 거기에서 생산되는 화약은 전일본 국내 총생산량의 30% 이상을 점유하고
363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있었다. 그 밖에 野口는 北韓 일대의 石炭 자원에 착안하고 石炭液化工 場을 건립하였다. 1932년 처음으로 咸北 永安에 공장을 세웠고 1936년에는 咸北 灰岩에 제2의 石炭液化工場을 건립하였다. 野口는 韓國에 있어서의 광업개발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 다. 당시 韓國에 진출한 대부분의 일본재벌들이 모두 광산개발에 주력하고 있었으나 野口의 경우는 달랐다. 野口가 1930년대 후반 기에 광업에 손을 댄 것은 주로 硫酸 원료 획득을 위한 原鑛의 自 家需要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野口가 興南에 금속제련소를 설 립한 것도 이 때문이며 여기에서 광석채굴과 제련의 일관작업을 통하여 硫酸 원료를 생산하고 있었다. 興南工場에서는 그 외에 알 미늄 亞鉛 마그네슘도 생산되고 있었다.9) 이렇게 咸南의 與南 과 咸北의 灰岩은 野口에 의하여 새로운 공업도시로 발전되었다. 野口 사업체의 핵심부문은 興南과 灰岩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 었던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野口의 사업이 1930년대의 韓國工業界에 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매우 컸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野口 는 이미 하나의 재벌로 韓國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 韓國에 진출하 여 韓國의 공업화와 더불어 재벌을 형성하여 성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전적으로 日帝 植民地官府인 朝鮮總督府의 정책금 융과 행정적인 지원이 없었으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1930년대에 日本과 中國에 오래 체류하면서 韓國의 공업계를 시찰한 美國 잡지기자 죠지 카터는 野口의 사업을 다음과 같이 평 했다. 朝鮮에 있어서의 野口氏의 전력과 화학공업의 방대한 사업은 9) 東洋經濟新聞社 年刊朝鮮(1942)
364 2. 日帝資本의 浸透 마치 시베리아에 있어서의 蘇聯의 國策工業地帶를 연상시킨다. 비 상시에는 바로 그대로 국가의 전진기지가 되고 평화시에는 邊僻 의 땅에 殷盛을 가져다 주는 원동력이 되는, 蘇聯의 시베리아에 건립된 和戰兩面의 의의를 갖는 계획적 공업도시와 비교할 수 있 는 것이다. (중략) 이와같은 野口氏의 朝鮮에 있어서의 사업, 특 히 그 자신에 의하여 건립된 도시, 興南을 중심으로 한 諸 工業에 는 國策과 밀접,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역대의 朝鮮 總督, 역대의 朝鮮銀行總裁는 모두 그의 사업에 전력을 기울여 지 원해 주었다. 野口氏의 사업은 단지 한 재벌의 경영하에 통제되어 있다는 것보다는 다분히 국책적인 색채가 강한 戰略사업이라고 믿고 싶다. 10) 카터의 지적에 의해서 뿐만이 아니라, 野口의 재벌형성과 朝鮮 總督府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국내외의 중 론이었던 것이다. 재벌로 성장한 野口系는 직계회사 30社(소유주식 50% 이상), 姉妹會社 23社(소유주식 20% 이상), 기타 참여회사 33社(소유주 식 20% 이하), 합계 96社에 이르고 있었다. 野口콘체른의 業種別 資本額 業 電 化 鑛 鐵 其 種 道 運 資 力 學 業 輸 他 計 資料 : 東洋經濟新報社 本 金 比 率 432,000,000圓 44% 355,000,000 36% 125,000,000 13% 65,000,000 6% 19,000,000 1% 996,000, % 年刊朝鮮 1942 p ) 片桐龍吉 前揭書 pp
365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위의 표는 野口系의 소위 野口 콘체른 이 포괄하는 주요 사 업체 46개 회사의 자본금 및 그 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위의 표를 보면 野口 사업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역시 전력개발 과 질소비료공업이었다. 日本이 대륙침략전쟁을 시작하자 野口의 興南공장은 군수품, 특히 화약제조공장으로 변모되어 日帝의 전쟁 산업에 주요한 역할을 맡아 해냈다. 野口의 전력개발은 당초에는 興南窒素肥料工場의 자가수요를 충당하려는 것이었으나 赴戰江 전력개발에 이어서 長津江 虛川 江 鴨綠江 땜 건설로 전력개발을 확대해 나갔다. 野口사업 중 전 력 개발 투자는 4억 3천 2백만원으로 그의 전체 사업투자액의 44 %를 차지하였고 그 전력이 韓國의 공업에서 점하는 위치는 대단 한 것이었다. 화학공업 투자는 3억 5천 5백만원으로 36%이었고 광업은 1억 2천 5백만원으로 13%, 鐵道 및 기타 사업투자액은 8 천 4백만원으로 7%를 점하고 있다. 野口의 철도는 주로 北韓 일 대의 공업지구를 연결하는 산업 철도였다. 몇 차례 지적한 바와 같이, 野口는 日本 九州에서 사업을 시작 하였으나, 재벌로서의 성장은 韓國에 진출하고 난 다음의 일이었 으며 따라서 그의 사업의 중심은 韓國에 있었다. 野口콘체른의 地域別 投資表 日 朝 滿 中 地 本 域 國 內 鮮 洲 國 計 資料 : 東洋經濟新報社 投 資 額 比 率 170,000,000圓 17% 659,000,000 66% 138,000,000 14% 29,000,000 3% 996,000, % 年刊朝鮮 1942 p. 120 위 표를 보면, 野口 콘체른의 총투자액 9억 9천 6백만원 중 66%
366 2. 日帝資本의 浸透 에 해당하는 6억 5천 9백만원을 韓國內 사업에 투자하였고, 日本 국내에는 17%에 해당하는 1억 7천만원을, 滿洲 및 中國의 사업 체에 1억 6천 7백만원으로 日本국내와 거의 같은 비율로 투자하 였다. 이것을 보아도 野口 財閥의 사업무대는 韓國이었음을 알 수 있다 野口系가 韓國에 투입한 設備資本은 1941년 현재 韓國의 전체 기업 자본액의 26.6%를 차지하고 있었다. 2) 東拓系 東洋拓殖株式會社에 대해서는 이미 1章 2節 日帝의 經濟政 策 에서 비교적 자세히 論及하였다. 여기에서는 다만 東拓자본의 성격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東拓의 주요사업은 貸付業, 有價證券, 特殊事業, 土地, 山林 및 건물경영업이었다. 1941년 현재 東拓의 총자본액은 6억원이며 그 중 대부금이 48%, 유가증권이 37%, 토지, 산림, 건물이 11%, 기 타 특수사업이 4%를 차지하고 있었다. 東拓사업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대부금의 약 70%는 韓國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액수는 약 2 억원에 달했다. 東拓의 유가증권의 보유는 주로 각종 기업회사의 株式 소유이며 자본참가로 산업을 직접 지배하는 경우는 극히 드 물었다. 따라서 東拓은 韓國에서 다수회사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 었으나 東拓의 직속 子會社로 볼 수 있는 회사는 東拓直營 3개 支 社 및 14個社 뿐이었다. 東拓은 1917년 이후 滿洲, 中國 및 南洋 등으로 사업지역을 확 장시켰고 사업종목도 다양해졌으나 그 근간사업은 역시 대부업, 유가증권 및 토지경영이었고 그 중심지는 韓國이었다. 1940년 하반기의 東拓收入項目比率을 살펴보자
367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東拓收入項目 比率 業 種 資 貸付金利息 有價證券收入 土地收入 特殊事業收入 讓渡土地建物收入 山林收入 建物收入 其他雜收入 合 本 7,800 6,314 5,749 1, 計 23,566 金 (단위 천원) 比 率 33.1%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東拓 수입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 는 것은 대부금 이식이며 전체 수입의 33.1%를 차지한다. 그런데 東拓의 대부금의 70%가 韓國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 음이 유가증권 수입으로 東拓 전체수입의 26.8%에 이른다. 東拓 보유의 유가증권의 對韓國投資額은 약 1억 4백여만원으로서 이것 은 東拓 保有 有價證券 전체의 46%에 해당하였다. 東拓의 토지 수입은 전체수입의 24.4%에 해당한다. 토지수입은 모두 소작료에 의한 것인데 그 전부가 韓國人 소작지에서 수납된 것이었다. 東拓系 韓國內 사업체의 자본은 全韓國 企業會社 자본에서 차 지하는 비율은 8.1%에 이른다. 3) 殖銀系 韓國에 있어서, 특수금융기관인 朝鮮殖產銀行이 금융을 통하여 지배하는 산업의 비중도 상당히 컸다. 朝鮮殖產銀行에 대해서도 앞서 日帝의 經濟政策 에서 상세히 論及한 바 있다. 여기에서 는 殖銀이 지배하는 기업의 내용을 잠깐 알아보는데 그친다. 殖銀의 금융은 당초부터 植民地官府인 朝鮮總督府의 전략적 성 격을 다분히 가지고 있었다. 殖銀이 韓國에 있어서 다수의 산업을
368 2. 日帝資本의 浸透 지배함으로써 소위 殖銀 콘체른 을 형성한 것은 總督府의 행 정적 요청에 의하여 많은 전략산업을 지원한 결과인 것이다. 1941년 현재 殖銀 지배 밑에 있는 기업체는 20社이며 총자본 액은 공칭 1억 4,450만원, 불입 1억 1,200만원이 된다. 20개社 증에서 日本 高周波 및 그 산하 子會社가 약 60%를 차지하고 있 다. 日本 高周波는 1936년 1월에 서울에서 설립되었으며 군수공 업 자료인 高速度綱을 생산하는 공장으로서 咸北 城津과 日本에 富山 및 品川에 공장을 갖고 있었다. 그 중에서 城津공장은 가장 규모가 크며 이 회사의 高速度綱 생산량 전체의 80%를 이 공장 에서 생산하고 있었다. 日本 高周波會社는 日本의 최대 고속도강 생산 회사이며 일본고속도강 생산량 전체의 60%를 이 회사의 3 개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었다. 殖銀은 이 회사가 창립할 때 大株 主로 참가했을 뿐 아니라 그 회사의 借金 1억 1천만원 중에서 9 천만원을 殖銀이 담당하고 있을 만큼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殖銀은 이 밖에 朝鮮貯蓄銀行 朝鮮信託 朝鮮商業銀行 朝鮮 火災海上保險 등의 금융기관을 그 산하에 두고 지배하고 있었고 국책회사인 朝鮮鑛業振興에 자본참가를 하고 있었다. 殖銀이 지배하고 있었던 사업체의 설비자본은 韓國 전체 기업 자본의 7.5%에 해 당된다. 4) 其他 日人系 그 밖에 舊韓末 및 日帝지배 초기에 韓國에 와서 재산을 모아 후에 韓國산업계에서 활동한 日人들이 많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맨주먹으로 건너와서 성공한 사람들로서 그들의 초기사업은 상 업 대금업 정미업 수산업 광산업이었으나 점차 재산을 모아 韓國 실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369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齋藤久太郞 小倉武之助 小林采男 岩村長市 田川常治郞 등 이 그 두드러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朝鮮總督府의 행정적인 보호 와 금융지원으로 韓國人에 비하여 항상 유리한 기반을 닦을 수 있 었다. 韓國에 있는 日人 군소기업회사의 설비투자액은 韓國기업회사 전체 자본의 약 %를 차지하고 있었다. 5) 民族系 資本 民族系 자본이 韓國 기업회사 자본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극히 낮았다. 민족계 자본으로서 비교적 크다고 꼽히는 것으로는 農地 및 부동산업의 閔大植系, 紡織業의 金秊洙系, 質易業의 朴興植系, 運送業의 方義錫系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민족회사자본은 韓國의 전체 회사자본의 1.6%에 지나지 않았다. 韓國의 공업건설과 자본계열을 표로서 작성해 보면 아래와 같 다. 韓國工業과 資本系列 日本在籍의 財閥系 三井系 三菱系 住友系 日産系 日鐵系 鍾紡系 大日本紡績系 東洋紡績系 其他日人資本系 計 (단위 %) 韓國在籍의 資本系 野 口 系 26.6 東 拓 系 8.1 殖 銀 系 7.5 其他 日人系 16.9 民 族 人 系 1.6 計 60.7 總計 위 표를 보면, 1941년 현재, 日本의 대재벌계가 韓國의 산업에
370 2. 日帝資本의 浸透 대한 지배율은 39.3%이다. 日本의 3대 재벌이라는 三井 三菱 住友는 일찌기 韓國에 진출하였으나 그들이 韓國產業을 지배하는 비율은 8.9%에 지나지 않았다. 종래의 通說은 1930년대 이후의 韓國 공업은 日本의 3대 재벌의 진출로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그 러한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3대 재벌은 韓 國에 있어서의 사업으로 商事, 鑛山開發을 주로 경영하였고 다른 대규모적인 공업개발에는 별로 큰 관심을 나타내지 않은 것 같다. 반면에 日產系 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이 8.9%나 되는 것은 제철업 등 규모가 큰 공업을 설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韓國 산업계에서 韓國에서 성장한 日人 자본계열이 60.7%을 차지하여 비교적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는 野口 東拓 殖 銀系의 자본이 컸기 때문에 높은 비율이 되는 것이다. 이들 3대 자본계의 비율은 42.2%에 이른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자본은 野 口 系로서 그 비율은 26.6%을 나타내고 있다.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野口 東拓 殖銀系는 日帝 植民地官府인 朝鮮總督府의 특 별한 행정적 보호와 자금지원에 의하여 성장 발달한 것이다. 이들 은 식민지 행정속에서 형성된 식민지형의 재벌들이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때의 韓國공업건설에서 민족계 자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적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日帝의 식민지 정책이 얼마나 民族資本의 성장을 억압했는가를 알려주는 본보기 가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민족자본은 日人의 대자본과 競合되 지 않는 군소기업 부문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여 나아갔다. 민족 자본 이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하였는가는 稿를 달리하여 고찰하기로 하겠다 趙璣濬
371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東京의 大地震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우리 同胞가 무참하게도 생명을 빼앗겼다. 당시 학살에 대한 사실 은 日本政府의 은폐로 오늘에 이르도록 이렇다 할 조사발표가 없 다. 그 때는 戒嚴令下에 있었기 때문에 더우기 韓國사람으로서는 이런 일을 조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前京城日報社長 阿 部充家의 알선으로 간신히 罹災同胞慰問班을 조직하였는데 天道 敎 宗理院, 留學生 學友會 및 YMCA가 주축이 되어 수십 명의 인 원으로 어려운 가운데서 피해상황을 조사해 본 결과 피살자가 5 천명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罹災同胞慰問班에서 1개월 여의 짧은 기간 동안 조사하여 발표 한 2,613인은 어느 정도 확실하다고 보지마는 발표 후에도 橫濱 山下町에 50명, 千歲烏山에 17명, 隅田의 永代橋에 300명, 荒川 뚝 앞에서 200명이 피살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얼마던지 있는 것으로 혹은 수만 명이 될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덮어놓고 막연하게 몇 만명이라고 하기도 어려 운 일이다. 震災 당시 東京과 橫濱에 약 3만여 명의 우리나라 사람이 산다 고 하였다. 그 중에 대부분이 노동하는 이들이었고 학생은 3,4천명 쯤 될 것이라고 하였다. 大阪과 京都지방에는 약 6,7만, 그 외각 곳 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합하면 약 10만 명은 될 것이라고 하였 다. 朝鮮總督府 官房外事課의 조사를 보더라도 1922년에 70,462명, 1923년에 95,359명의 韓國사람이 日本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歸
372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還者도 있었을 것이지마는 어쨌든 약 10만 명 되었다는 점에 있어 서는 큰 착오가 없을 것이다. 그 때의 日本사람들의 홍분상태로 보 아 특히 軍隊 自警團 靑年團 在鄕軍人들이 韓國사람인줄만 알 면 不問曲直하고 닥치는대로 죽였다는 것을 보면 상당수가 더 되리 라고 물론 생각한다. 그러나 罹災同胞慰問班에서는 당시 東京과 橫 濱地方에 약 3만여 명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震災 직 후 각 처에 收容되었던 생존자 7천 5백 80여명을 제외한 2만 2천 4백 20명을 생각하였다. 정확한 조사가 不能하므로 2만 2천 4백 20명을 피해자로 볼 수도 없는 일이라 그 4분의 1 정도로 줄잡아 5천명이라고 한 것이다. 罹災同胞慰問班의 조사라는 것도 1개월 여에 불과하는 짧은 시 일에 日本사람 행세를 해가면서 알아본 일이라 충분한 조사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많은 사람이 피살된 것만은 사실이 다. 그 때 日本 內務大臣은 水野鍊太郞이요 警視廳 總監은 赤池濃 이었다. 水野는 朝鮮總督府 政務總監으로 있었고 赤池는 朝鮮總督 府 警務局長으로 있었던 자들이라 韓國사람의 排日思想이 얼마나 크다는 것도 잘 알 것이요, 朝鮮總督과 같이 水野가 서울에 到着 할 때 韓國사람의 폭탄에 맞을 뻔한 경험도 있는지라 그들이 일반 으로 가지고 있는 韓國사람에 대한 경멸심도 있지마는 공포심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食糧騷動으로 큰 어려움을 치르고 난 판에 또 大震災를 당하게 되고보니 日本政府 당국으로서는 당황치 않 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학살은 이런 혼란한 때를 틈타서 韓國人이 혹 무슨 폭동이나 일으키지 아니할까, 혹은 共產主義者들과 결합하여 革命運動이라 도 획책하지나 아니할까 하는 의구심에서 만들어 낸 연극이라고
373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할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민족증오의 감정을 자극시켜 정부에 향하는 민중의 반항을 韓國人에게 집중시키기 위하여 韓 國人에 대한 不美한 流言斐語를 퍼뜨려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의외로 확대되어 日本政府로서는 대내 대외로 심상치 않은 進退維谷의 窮境에 빠지게 되었다. 말하자면 自繩自 縛의 길을 취하게 되었다. 무고한 인간을 잔인무도하게 살해했다 는 누명을 벗을 수 없게 되었고 선량한 사람을 참혹하게 살륙했다 는 日本民族의 비인간적 비양심적 행동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과오를 은폐하고 진상폭로를 기피하려는 불순한 태도는 또한 비굴하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1) 震災와 流言斐語 地震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에 시작하여 强震 微震 이 수시간 계속되었다. 東京 横濱 三浦半島 전 지역에 파급되었 으니 相模灣연안으로부터 伊豆半島의 勢海, 伊東에 이르렀으며 북 으로는 箱根山 大山相模川 일대 및 御殿場, 甲府방면에 미쳤으며 동으로는 房總半島의 서부지역까지 뻗혀 도시는 삽시간에 불바다 가 되고 해안에는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 별안간 수십만의 인명과 건물의 피해를 보게 되었다. 나는 그 때 目白驛에서 省線을 타고 水道橋를 向하여 가는 車 中에서 별안간 車가 펄떡 뛰는 바람에 탈선이 되는 것이나 아닌가 하였더니 그것이 아니고 地震임을 알게 되었다. 계속하여 차는 뛰 다 말다 하였다. 차속에서 내려다 보이는 新宿驛 앞 음식점 4층에 서는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나오는 것을 보았다. 마침 점심준비
374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하는 때라 음식을 끓이는 불이 흔들리는 바람에 화재를 일으킨 것 으로 알게 되었다. 地震이 다소 멈춘 틈을 타서 차안에 있던 승객 들은 모두 내리게 되었다. 新宿驛 씨멘트 바닥은 모두 갈라졌 고 움푹 들어가 있었으며 驛員들은 驛주위에 새끼줄을 쳐놓고 텅 비워 놓은채 어디로 피난해 버렸다. 사방에서는 불길이 솟아 오르 고 시꺼먼 구름은 하늘을 덮고 있었다. 市街道路는 地震 때문에 위험하니까 여러 사람들이 省線 레일 을 밟고 水道橋방면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飯田橋로 갈 수는 없었다. 그 쪽은 전부 불바다가 되어 자욱한 검은 연기는 하늘로 치솟아 더 갈 수가 없 었다. 골목길을 취하여 靖國神社廣場으로 향하였다. 수만여 명의 피난민이 보따리 짐을 가지고 이 곳에 모인 것이 아닌가. 九段坂 위에 있으므로 지면이 좀 높기도 하고 또 넓은 마당이라 피난하기 에는 적당한 곳이었다. 여기서 YMCA 寄宿舍에 있던 수십 명의 학생과 炊事部 일을 맡아 보던 부인 1,2명을 만나게 되어 얼마 동 전신전화철도깨스전기수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파괴 되었으며 학교관청병원 및 기타 여러 건물은 다 쓰러지고 말 안 같이 困難을 맛보게 되었다. 1) 았다. 다음 날까지 猛火는 18시간 계속하여 꺼지지 아니했기 때문에 東洋 제일의 대도시로 자랑하던 東京은 3분의 2가 잿더미로 화하 게 되었고 사상자도 많이 나게 되었다. 불에 타서 죽은 사람이 많 았는데 이는 첫째로 불길이 너무 맹렬하여서였고, 둘째로는 안전 한 피난처를 빨리 찾아내지 못하였던 까닭이라고 하겠다. 사방에 서 일어나는 불길은 일정하지 않은 바람때문에 건조한 목조가구 1) 崔承萬 極熊筆耕(1970) pp 本稿의 집필에는 東京大震災 당시의 각 新聞 의 記事, 罹災同胞慰問班委員報告, 姜德相 琴秉洞 著 關東大震災と 朝鮮人 등을 참고하였고 주로 崔承萬 著 極熊筆耕에 의거하여 작성하였음을 밝힌다
375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에 잘 붙게되는 데다가 斷水로 말미암아 消防의 활동도 할 수 없 게 되어 燒死者 溺死者의 수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도 가장 참 상을 나타내게 된 것은 陸軍被服廠의 災禍라 할 것이다. 그 구내 는 꽤 큰 광장이어서 피난처로서는 적당하였지마는 너무 많은 사 람이 몰려들었을 뿐만 아니라 가재 가구들을 가지고 들어 왔기 때 문에 여기에 불이 붙어 3만 2천여명의 燒死者를 냈다고 한다. 9월 8일까지 수용된 死體가 7만 4천여 명이었고, 9월 12일까지 행방불명자가 2십 3만 1천 2백여 명이라고 하였다. 당시 臨時 救護局의 조사에 의하면 燒失家屋 289, 846戶 倒壞戶數 15, 942戶 計 305, 788戶 死 者 74,024人 傷 者 39,768人 計 113,792人 橫濱市도 8만 5천戶 중 약 10분의 9가 燒失되었고 市民 약 43 만 4천 1백 70명 중 死亡者 2만 3천 7백 67명, 負傷者 4만 8백 80명 그 외에 행방불명자도 상당하였다고 한다. 1) 流言斐語 日本警視廳에서 만든 大正大震火災訪 에 의하면 韓國人에 대한 악선전은 9월 1일 오후 1시경부터 유포되기 시작하여 2일과 3일 사이에 떠돌게 된 것 같다. 유포된 말을 보면 社會主義者와 鮮人의 방화가 많다. 不逕鮮人의 來襲이 있을 것이다. 9월 1일의 화재는 다수의 不逞鮮人이 방화 또는 폭탄을 던져서 일어난 것이 다. 鮮人 중의 폭도가 某神社에 잠복하고 있다. 鮮人 약 2백명이
376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神奈川縣 寺尾山방면의 부락에서 살상 약탈 방화 등을 감행하 고 점점 東京방면에 내습하고 있다. 鮮人 약 3천명은 이미 多摩川 을 건너 洗足村 및 中延 부근에 내습하여 지금 주민과 투쟁 중이 다. 橫濱의 大火는 대개 鮮人이 방화한 것인데 그들은 단결하여 도처에서 약탈을 감행하며 부녀자를 능욕하고 잔존건물에 불을 질러 무너뜨리려고 하는 등 포악이 심하여서 全市의 靑年團 在 鄕軍人團 등은 警察部와 협력하여 이를 방지코자 노력하고 있다. 橫濱방면에서 습격하는 鮮人수는 약 2천명으로 銃砲 刀劍 등을 휴대하고 이미 六鄕의 鐵橋를 건넜다. 군대는 六鄕 냇가에 기관총 을 비치하고 鮮人의 入京을 차단시키고자 하며 在鄕軍人 靑年團 등도 출동하여 군대를 응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矢口 방면 으로 향하고 있다. 鮮人 2,3백 명은 橫濱으로부터 神奈川縣 방면 에 들어가 방화한 후 多摩川, 二子渡를 건너 多摩河原에 진격 중 이다. 鮮人이 目黑 화약고를 습격했다. 鮮人들은 기회만 있으면 폭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한 것인데 震災가 돌발됨에 따라 예정의 계획을 변경하여 미리 준비했던 폭탄과 독약을 사용하여 帝都를 전멸코자하고 있으므로 우물물을 마시거나 과자를 먹는 것은 위 험하다. 上野 精養軒 앞에 있는 우물물이 변색한 것은 독약 때문 이다. 上野公園 아래 우물도 달라졌고 上野 博物館의 연못물도 변 색되어 금붕어가 다 죽었다. 鮮人이 시내 우물에 독약을 투입했다 는 등등의 말을 퍼뜨렸다. 流言斐語는 주로 韓國사람의 악행을 지적한 것으로 震災의 혼 란한 때를 틈타서 폭행 약탈 방화 부인능욕 井水投藥 폭탄 투척 집단습격 등의 악행은 모두 韓國사람에게 돌려보냄으로써 학살행위를 감행케 했던 것이다
377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2) 各 新聞記事 河北新聞 은 1923년 9월 3일 기사에 東京市內는 전부 식 료 부족을 구실삼아 全市에 朝鮮人은 대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고 했고, 大阪朝日新聞 은 1923년 9월 4일 기사에 不逞鮮人은 도 처에서 봉기하여 그 중에는 폭탄을 가지고 몰래 다니는 자가 있으 며 石油통을 가지고 다니면서 혼란한 틈을 타서 큰 건물에 방화하 는 것 같다. 東京市內에서는 극히 경계하고 있지마는 각 지에서도 엄중히 경계하기 바란다 고 했다. 河北新聞 은 또 1923년 9월 7일 기사에 大震災와 동시에 시내 각 처에 있는 깨스관이 파열되어 깨스 가 분출되고 있다. 여기에 鮮人들은 단체를 만들어 가지고 불을 지르며 다닌다. 그렇 기 때문에 市中 120여개소에서 불이 났으며 각 처에서 폭탄을 던 져 火勢를 조장하고 있다. 각 처 우물에 독약을 넣고 罹災民의 자 녀에게 주는 빵 속에 독약을 뿌려서 준다고 하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라고 보도했다. 이바라끼 新聞 은 9월 7일 기사에 特派記者는 朝鮮人의 폭동을 조사키 위하여 출발하였는데 澁谷방면의 어떤 村에는 朝 鮮人 일단의 意外 습격으로 학살을 당하여 1村이 거의 전멸되었 다. 그들의 계획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미리 시기를 엿보고 있 었던 것 같다. 시내의 중요한 건물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전 부터 화살표 위에 두 줄기의 불빛 같은 표를 찍어 둔 듯하다. 화 살의 방향은 잠입할 방향을 가르킨 것이요 두 줄기의 불빛 같은 것은 방화하라는 기호다. 우물이 있는 곳에는 도로에서 보이는 곳 에 둥글게 井 이라는 표를 찍어 두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두령 이 미리 표를 그려 두었다가 폭등을 거행하는 날 신속히 하자는데
378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9월 6일 北海타임스 의 記事에 品川은 3일 横濱방면으로 있는 것 같다 고 하였고, 부터 3백명쯤 되는 朝鮮人이 밀려들어 약탈과 폭탄투하를 감행하 므로 부근의 주민은 잘 싸웠다. 鮮人은 銃砲와 日本刀로써 덤비는 까닭에 퍽 위험했다. 그러는 동안에 군대가 와서 鮮人은 거의 다 9월 5일 山陽新報 기사에 東京에서 戒嚴令은 鮮人 때문에 피살되었다 고 하였다. 더 엄중해졌다. 3일 오전 중 上野署에 20명, 谷中署에 3, 40명이 검속되었는데 검속자 중 군대에 저항하므로 피투성이가 된 자 팔 을 잘린 자들이 있어 보기가 끔찍하며 그 밖에 검속 중 폭행을 한 자는 불 속으로 던져 버리기도 하였던 모양이다. 9월 8일 下野新聞 의 기사에 參謀長 井染大佐의 말이 발 표되었다. 이번 不逞鮮人의 不逕行爲에 관하여는 처음부터 배후에 무슨 세력이 있어서 지휘하고 있는 듯이 생각된다. 시일이 감에 따라 과연 몇 가지 사실이 발견되었는데 즉 이번 不逞鮮人의 부정 행위 이면에는 社會主義者와 蘇聯의 과격파가 큰 관계를 가진 것 같다. 사회주의자의 계획은 支那人과 朝鮮人을 선동하여 不逞의 행동과 不道德한 행동을 하게 만들어 치안을 문란시키고 혼란한 때를 이용하여 각종의 기괴한 浮說을 유포시킴으로써 관헌의 無 力과 不信을 선전하고 관민 간의 대항세력을 조성하며 내란폭동 을 전국에 파급시켜 그들의 염원인 극단의 민주정치를 실현해 보 이 계획에 관하여는 어떤 시기에 실행 자는 것이 그 목적이다. 해 보려고 생각했던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인데 마침 이번의 大災禍 를 다행으로 알고 급속히 서두른 듯하다. 또 朝鮮人의 계획이란 질서 있고 통일 있고 조직적인 것으로 그 준비도 비교적 완전한 듯하다. 이것을 증명할만한 사실이 이미 발견되었으며 모 중요 방
379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면에서도 확신을 얻었다. 그들의 재원은 말할 것도 없이 上海에 근거를 둔 蘇聯 이라 할 것이다. 蘇聯의 과격파와 不逞鮮人 과의 사이는 매우 밀접한 연락이 있는 듯하다. 神戶市 부근에 蘇 聯 과격파의 購買組合이 있어서 그들이 이 곳을 본거지로 하여 上 海와의 연락을 취한 사실이 있으며 이에 연락이 있은 듯하다. 요폐 체재 중에도 그들 사 요컨대 이번의 不逞행위는 이 3자 의 삼각관계를 기초로 하여 되었다는 데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 다. 이 사실이 점점 분명히 되어서 東京 부근에서는 일반 민중의 사회주의에 대한 격분한 생각이 높아지게 되는 동시에 사회주의 자에 가까운 자 혹은 경망한 신사상을 가진 자에 대한 민중의 반 감이 더욱 심하게 된 모양이다 라고 보도되었다. 이상과 같이 각 신문에서도 악선전을 부채질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軍 警 民의 虐殺行爲 1) 各 新聞과 手記에 揭載된 慘狀 韓國사람에 대한 악감정은 극도에 달하였으니 9월 7일 河北 내 부모를 자식을 아내를 형제를 죽인 것은 다 朝鮮 놈들이 新聞 에 게재된 것으로서도 잘 알 수가 있다. 다. 내 집을 빼앗은 것도 나를 이렇게까지 飢渴에 괴로움을 주는 것도 다 그놈들 때문이라고 믿게 되었으니 평온할 수가 없는 것이 다. 죽여라 처버려라는 소리에 이제 와서는 警察力이 미치지 못 하는 민중의 私刑이 구성되고 있다. 撲殺刑, 打殺刑, 一刀兩斷刑, 射殺刑 등 외에 다시 또 무슨 刑을 고려하고 있다는 데까지 민중 은 不逞鮮人의 피에 주리고 있다. 이 런 상태였기 때문에 朝鮮사 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日本人을 朝鮮人으로 잘못 보고 죽인 일 이 東京에서는 중대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도 가장
380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곤란한 것은 동북방면 사람들로서 그들의 말투를 누가 이 놈 이 상하구나 할 때에 와-하고 달려들게 되면 그 목숨은 그만 최후 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나중에 日本人이었군 해도 소용이 없게 된다. 이런 일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경찰에서도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日本人에게 머리띠(하찌마끼)를 하게 함으로써 알아 볼 머리띠가 가장 눈에 띄었다. 日本人의 것 수 있도록 하였다. 은 헐렁하게 매지 않고 단단히 모가 나게 매는데, 朝鮮사람은 축 늘어지거나 혹은 이마 중간까지 두 끝을 핑핑 감는 것으로 보아 또 좀 가혹한 많이 다르기 때문에 곧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것은 때려눕히고서는 아는 법인데 日本말을 아무리 잘 한다 해도 되게 치고 견디지 못하게 만들게 되면 부지 중 조선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좋은 식별법이 아닐까 한다. 이 기사를 보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무조건 죄인으로 인정 하고 이를 찾아내려고 도처에서 눈이 뒤집혀서 맹수처럼 날뛰었 던 것이다. 竹槍 곤봉 칼 총 등의 무기를 가지고 軍 警察 自 警團 靑年團 在鄕軍人들은 어마어마한 경비를 갖추고 밤과 낮 이 없이 韓國人 색출에 총력을 집중시켰으며 그리하여 많은 동포 가 참혹한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見習士官이었던 越中谷利一의 回想談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震災 때 東京을 중심으로 출동한 군대의 총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시내의 연대는 물론이요 東京 주변에는 대개 戒嚴令 근무에 임하고 있었다. 敵은 帝都에 있다고 해서 실탄과 총검을 들고 들어왔기 때문에 무시무 시하였다. 내가 있던 習志野 기병대가 출동한 것은 9월 2일 정오 조금 전인 듯한데 어쨌든 무섭고 빨랐다. 人馬의 전시무장을 정돈 하고 영문에 정렬하기까지 소요시간을 겨우 30분 밖에 주지 않았
381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다. 2일 분의 양식과 말먹이, 실탄 60발, 장교는 자택에서 가지고 온 新刀로 지휘 호령을 하게 되어 마치 전쟁기분이었다. 그리고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병영을 뒤로 두고 千葉街道를 먼지 를 날리면서 계속해서 뛰어가고 있는 것이다. 龜戶에 도착한 것이 오후 두시쯤 되었다. 罹災民은 홍수 같이 밀려든다. 연대는 행동 을 개시한다. 장교는 칼을 빼들고 열차 안과 밖을 살피고 있다. 어 떤 열차나 초만원으로 기관차에 쌓아두는 석탄더미 위까지 파리 같이 빽빽히 앉아 있었는데 그 가운데 있던 朝鮮人은 모두 끌어내 렸다. 그리고는 즉시 번쩍거리는 칼과 총검으로 차례차례 찔러 죽 이는 것이다. 日本人 피란민들의 우뢰와 같은 만세 소리와 함께 國賊 朝鮮놈들은 다 죽여버리자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들 의 연대는 이것을 벽두로 그날 저녁 때부터 밤중까지 본격적으로 朝鮮人사냥을 하게 되었다. 種蒔雜記 라는 책 가운데에 있는 立花春吉의 얘기는 이러하 다. 나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9월 3일 龜戶署에 보호받기를 신 청했다. 내가 있던 방은 쑥 들어가서 있는 2층 넓은 방이었다. 가 던 날에는 20명쯤 되는 朝鮮人이 전부였다. 4일에는 자꾸 늘어 백 십명 이상의 사람이 되매 다리를 쭉 펼 수도 없었다. 4일 아침 변 소에 가게 될 때 입구에 군인이 서있었다. 거기에는 7,8인의 시체 와 에 거적으로 덮어놓은 것을 보았다. 옆에 있는 演武場에는 피투성이가 된 朝鮮人이 3백명쯤 되는데 모두 결박이 되어 있었다. 그 밖에 아래채에는 5, 60명 쯤 되는 支那人도 한심 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4일 밤은 불안하고 처참하였다. 총소리가 밤새도록 들렸다.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한 때 오직 한사람의 朝 내가 죽게 되는 것은 고국에 妻子를 두고 온 죄일까. 내 저금은 어떻게 될 것인가. 참 鮮사람이 애처로운 소리로 울고 있었다
382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으로 가여워서 듣기 힘들었다. 다음날 순번 들던 순경은 말했다. 어제 밤 朝鮮人 16명, 日本人 7,8명이 피살되었다. 朝鮮人뿐만 아니다. 나쁜 일을 하면 日本人도 죽인다. 나쁜 일만 아니 한다면 는 것을 들었다. 어제밤에도 수십 명을 죽였다. 총과 칼로 쑥 쑥 하는 끔찍한 소리였어. 田邊貞之助 著 女木川界隈 속에 있는 한 토막을 소개하겠다. 大島町 六丁目에 많은 사람이 피살되었으니 구경하러 가보자고 죽이지 않는다. 5일, 변소에 가는 길에서 순경 두 사람이 얘기하 하는 이가 있어서 날이 밝자 가게 되었다. 석탄찌꺼기로 메운 4,5 백평의 공지였다. 동쪽에는 물이 깊이 고여 있었다. 공지 동쪽에 서 서쪽에 거의 裸體로 된 시체가 머리를 북을 향하고 있었는데 250명이라고 하였다. 하나씩 보면서 지났는데 목이 잘려 氣管과 食道의 두 頸動脈이 하얗게 보이는 것도 있었다. 목덜미 가 잘려 흰 살이 여러 줄에 붙어 있어서 석류 쪼개놓은 것 같이 보였다. 목이 떨어진 것은 하나뿐이었는데 무리하게 비틀은 듯 살과 가죽 과 힘줄이 헝클어저 있었다. 눈을 뜬 것이 많았는데 둥글고 미련 한 듯한 얼굴에는 괴로워하는 빛이 없었다. 하나 가엾은 것은 젊 은 부인의 시체였다. 배가 갈라저 6,7개월쯤 된 胎兒가 창자 속에 서 구르고 있다. 부인의 陰部에 竹槍이 꽉 박혀 있는 것을 볼 때 소름이 끼쳤다. 옆으로 피했다. 아무리 공포심이 치솟더라도 이렇 게까지 하지 않아도 좋을텐데. 나는 말할 수 없는 노여움이 일어 났다. 日本人이라는 치욕을 그 때같이 느껴본 일이 없었다. 그 밖에 東京日日新聞 10월 21일 기사 중 橫濱 山下町 淺 野 埋立人夫 工場職工 등이 있었고 엿장사도 2, 30명 있었는데 淺 野 埋立地에서 50여명이 피살되었다 라는 구절이 있고, 讀賣新聞 1923년 10월 21일 기사 중에 橫濱시내에서만
383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판명된 朝鮮人 시체가 44명, 기타 땅 속에 파묻고 물속에 던져 버 린 것을 합하면 백 4,50명은 될 것이라고 하였다. 子安의 自警團員 은 日本刀를 가지고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50여명을 살해하였 다. 이 외에도 많은 사람을 죽여서 철도 선로에 버리기도 하였고 혹은 불에 태우거나 바다물 속에 던져 버리기도 하였다. 神奈川에 80여 명은 하룻밤에 전부 피살되었다 는 보도가 某會社 있다. 이상은 각 신문에 보도된 것을 몇 개 소개한 것이다. 2) 罹災同胞慰問班의 調査 ㄱ. 藤岡町 警察署에서 일어난 일 韓國 노동자들이 警察署안에 있는 줄을 안 自警團과 2백여명의 군중은 署 앞에서 와글와글 떠들어댔다. 처치해 버리자! 고 누 군가 외치자 군중은 獵统 日本刀를 휘두르면서 경찰서 구내 뒷 쪽 유치장에 함부로 뛰어 들어가 흉기로 유치장을 처부수고 또한 사람은 순경이 가지고 있는 열쇠를 빼앗아 유치장 입구도 부수어 버렸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밖으로 뛰어 나가거나 유치장 지붕 위로 기어올라 갔었지만 自警團員들은 사다리를 걸쳐 놓고 쫓아 가서 흉기로 마구 찌르고 베이고 하는 한편 아래에서는 獵銃으로 쏘아 17명이 죽고 말았다. 그 성명과 본적은 아래와 같다. 金東元(27) 慶北 醴泉郡 甘泉面 敦山洞 金喆鎭(41) 慶北 尙州郡 化北面 東安洞 趙庭遠(43) 上 同 金白出(29) 上 同 南成奎(38) 上 同 金仁洙(22) 慶北 尙州郡 陽南面 石村里 許日成(25) 慶北 尙州郡 陽南面 石村里
384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金聲來(34) 慶北 榮州郡 榮山面 浦洞 金斗星(23) 慶北 榮州郡 榮山面 官視洞 鄭貴鳳(25) 慶北 淸道郡 淸道面 合川里 苗桐坤(27) 上 同 金周洪(28) 上 同 趙秀九(27) 慶南 晋州郡 晋州面 中安洞 泉曲野(24) 慶南 蔚山郡 能村面 鄭龍伊(24) 本籍 未詳 金東仁(26) 本籍 未詳 李相浩(26) 慶北 榮州郡 榮山面 浦洞 ㄴ. 琦玉縣 熊谷에서 9월 4일 밤의 일이다. 熊谷警察署에서는 消防隊와 在鄕軍人團 의 호위로 韓國人을 深谷방면으로 보내고자 하였다. 가는 도중 熊 谷町 大字 8番地에서 별안간 自警團의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소 방용 갈쿠리 죽창 곤봉 등으로 닥치는대로 찍고 치고 찌르고 하여 끔찍하게 죽였다. 그 근방 熊谷寺境內, 松坂屋여관 앞 筑波 町 등지에서 피해된 사람이 43명이나 된다고 한다. ㄷ. 兒玉郡 本庄町에서 9월 3일 저녁 때 경찰서 演武場에 韓國人 노동자들을 수용코자 할 때 벌떼같이 덤벼드는 수백여명의 군중들은 닥치는대로 치고 때려 잔인하게 86명을 죽이고 말았다. 이 때 한 사람만이 간신히 도망했다고 한다. ㄹ. 神保原村 派出所 앞에서 9월 4일 本庄署長 村磯는 여러 곳 순경들과 같이 두 대의 짐자
385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동차에 韓國사람을 태우고 藤岡署에 인계코자 神保原村 派出所 앞까지 갔을 때 自警團 등 약 3백여명은 村에 있는 警鍾을 두드리 고 큰 소리를 치면서 두 대의 자동차를 포위한 후 韓國사람들을 끌어내려 30분만에 35명을 살해했다고 한다. ㅁ. 龜井戶署에서 380여명이 학살되는 것을 龜井戶署에서 일하고 있던 羅丸山이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적어 보겠다. 나는 朝鮮사람을 총과 칼로써 마구 쏘고 베어 죽이는 것을 친 히 보았다. 9월 2일 밤부터 9월 3일 오전까지 演武場에 수용되어 있는 조선 사람이 3백여명 되었다. 그 날 오후 1시경 騎兵 1개 중 대가 와서 경찰서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 때부터 田村이 라는 소 위의 지휘 아래 모든 군인들은 연무장으로 들어오더니 세 사람씩 불러내어 연무장 입구에서 총살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 지휘자는 총소리를 듣는 부근의 사람들이 공포감을 갖게 될 터이니 총 대신 에 칼로 죽여 버리라고 명령하였다. 그 뒤부터는 군인들이 일제히 칼을 빼어 83명을 한꺼번에 죽였다. 임신한 부인도 한 사람 있었 는데 그 부인의 배를 가를 때 배 가운데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어 린아이의 우는 것을 보고 그 어린아이까지 찔러 죽였다. 피살된 시체들은 다음날 새벽 두시 화물 자동차에 싣고 어딘지 운반해 갔 다. 피살자의 성명과 원적은 일일이 알 수 없고 몇 사람만 기억하 고 있다. 林庚得(24) 京畿道 開城郡 長瑞面 九下里 金在根(44) 全北 淳昌郡 豊山面 年昇里 趙妙城 趙正法 濟州道 大靜面 仁城里(임부) 上 同
386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趙正夏 上 同 八島京一이라는 사람이 9월 4일 아침 3,4명의 순경(龜井戶署)이 짐차에 석유와 장작을 싣고 끌고 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마침 아는 순경이 있어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죽인 사람들을 태우러 죽인 사람들? 어제밤에는 밤을 새워 가면서 죽였는데 가는거야 3백 20명이나 되었어. 외국 사람이 署에 온다니까 오늘 급히 태워 버리는 거야. 이런 얘기를 해준 사람은 淸一순경이었다. ㅂ. 隅田川 永代橋下 1,300명의 死體 철도기관수 平田鐵이 목격했다는 얘기다. 田端에 사는 몸집이 튼튼한 韓國사람 한 사람이 총살당하는 것을 보았고 永代橋 아래 에서 韓國사람 시체 천 2,3백을 친히 보았다고 하였다. 吉原에서 도 3명의 韓國사람을 경관과 군대가 총살하였으며 淺草 수영장에 서는 남녀학생 2백명의 시체가 있었다. 물이 있는 곳에서는 철사 로 팔과 다리를 꽁꽁 묶어서 물속에 던저 버리는 것이 보통인 듯 하였다. 이상 몇 가지만 들어서 말한 것을 보아서도 그들의 잔인한 행동 을 족히 알고도 남을 것이다. 韓國人인줄 알게만 된다면 이유 여 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시에서나 촌에서나 기차 속에서나 배 속에서나 박해 학살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일 일이 말할 수는 없거니와 위문반에서 극히 짧은 시간에 조사한 것 을 대강 숫자로 표시해 보겠다. 3) 虐殺場所 및 被殺人數(단위 명) ① 横濱방면 神奈川縣 橋本町 淺野造船所 앞 廣場
387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神奈川警察署內 순경이 찔러 죽인 것 程谷町 井戶谷町 30여 根岸町 35 土方橋와 八幡橋사이 103 中村町 2 山手町埋地 1 御殿所부근 40 山本町警察署 立野交番所 2 若屋別莊부근 10 新子安町 10여 子安町에서 神奈川驛사이 神奈川鐵橋 여 茅崎町 2 久良岐郡 金澤村 12 鶴見町 7 혹은 326 川崎町 4 久保町 30 戶部 30 淺間町 및 淺間山 40 戶山 鴨山 30 久保山 火葬場 1,000여(横濱부근 피살자) 靑木町 三澤共同墓地 200(神奈川부근 피살자) 金澤村(未詳) 시체매장지 茅崎町 舊東海道線路 火葬 鶴見町 總持寺山內 埋葬 川崎町當地 또는 他處
388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② 琦玉縣방면 川口 33 赤羽荒川 300 大宮 2 熊谷 61 本庄 80 早稻田村 17 神保原 宗居 14 長澤 4 藤岡 18 習志野軍營倉內 12 ③ 群馬縣방면 ④ 千葉縣방면 船橋 法典村 64 千葉市 2 流山 1 南行德 2 馬橋 7 田中村 1 佐原 7 滑川 2 成田 2 我孫子
389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⑤ 長野縣방면 輕井澤부근 2 ⑥ 茨城縣방면 筑波本町 43 土浦 1 宇都宮 3 東那須郡 1 ⑦ 栃木縣방면 ⑧ 東京부근 月島 33 龜戶署內 小松町 47 寺島請地 22 寺島警察署內 13 向島 35 寺島手井驛 7 洲崎飛行場부근 26 日本橋 5 深川西町 11 押上 50 本所區一丁目 4 大島七丁目 4 大島三丁目活動寫眞館앞 26 大島八町目 150 小松川新町 7 淺草公園內 3 혹은
390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龜戶驛 앞 2 府中 3 世田谷三軒茶屋 2 新宿驛內 2 四谷見附 2 吾妻橋 80 上野公園內 13 千住 11 王子 81 합계 2,613 (3) 韓國人들은 果然 暴行을 하였던가 流言裴語로 말미암아 9월 1일부터 3일 사이에 많은 사람이 피 살된 것을 잘 알 수 있다. 과연 그들이 선전한 것과 같은 暴行이 있었던가. 한 마디로 말해서 이는 전혀 무근한 소리라고 단정한 다. 아무리 日本사람이 밉다한들 다 같이 큰 재난을 당한 때에 어 떻게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약을 넣으며 폭탄을 던지는 것과 같은 일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도대체 韓國사람으로서 더욱 그 때에 어떻게 폭탄을 얻을 수가 있으며 총과 칼을 어디서 구할 수 가 있었겠는가. 日本에 건너 간 사람들은 거의 어려운 사람들이 다. 고향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男 負女戴하고 남의 나라에라도 건너가서 노동이라도 하면서 살아보 겠다는 사람들이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큰 것으로 무 슨 딴 생각을 가질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몇 십명 몇 백명씩
391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떼를 지어 다니면서 나쁜 일을 한다고 선동하였으니 도대체 이 사 람들의 식량은 그 어려운 때 어디서 나오고 누가 준다는 말인가. 주먹밥 한두 덩어리 얻어먹기도 어려운 판에 또 그 어마어마한 군 대와 경찰을 가진 日本 首都 東京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신문에서도 아무 판단 없이 뜬소문에 휩쓸려 함부로 선동을 하 게 되었으니 군중의 신경은 날카롭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 다. 혼란한 때에 또 많은 사람 가운데 먹을 것을 찾으려고 하다가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한 사람도 없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 들이 말하듯 집단적으로 군대와 같이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어린아이라도 곧이 듣기 어려운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몇 가지 사실을 들어 그 그릇됨을 밝히고자 한다. 9월 6일 東京日日新聞 에 消防隊 본부가 발표한 것을 기사화 한 내용을 보면, 당시 소방대가 불을 끈 곳이 23개소가 되지마는 放火는 한 곳도 없다고 하였다. 또 朝鮮人들이 분필로 標識하여 폭탄을 던 지도록 했다는 선전에 대하여 알아본 결과 이것은 청소회사 인 부의 心算標였다는 것이다. 이 날 기사 중 湯淺警視總監의 말도 있었는데 아래와 같다. 일찌기 전에 없던 참혹한 상태에 대하여 罹災民의 불안과 당 황한 일이 많았던 중 더욱 朝鮮人폭행의 소문에 거의 미친 사 람들같이 흥분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朝 鮮人이 폭탄을 가지고 다닌다고 하여 붙들어 조사해 본 즉 이 것은 폭탄이 아니라 사과였다는 것이다. 또 一木씨 저택 부근 에서 있었던 일로 한 민가의 주부가 솜에 초를 적시어 洗面器
392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에 담아둔 것을 보고 청년단원들은 이것을 放火用의 석유로 잘 못 알고 그 주부를 朝鮮사람에게 가담한 사람이라고 힐문했다 는 실례도 있다. 위문반 위원의 한 사람이 알아본 얘기다. 9월 2일 오후 4시경 川崎 富士 까스공장에 임시로 고용되었던 인부 李祥金(31) 朴化 順(24) 姜欣生(19)등 3명이, 여공들이 참혹히 죽었다는 시체를 찾다가 목이 말라 공장부근에 있는 우물에 물을 길러 간 것을 옆 에 있던 인부 한 사람이 보고 조선사람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별안간 3, 40명의 인부들이 달려오고 自警團 까지 백여명이 합세하여 세 사람을 치고 때린 끝에 억울하고 무참 하게 죽게 되었는데 이 시체를 강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9월 4일 오전 11시경, 子安町 117번지 內山泰治집 우물에 18 세 쯤 되는 흰 사쓰에 통 좁은 바지를 입은 남자와 한국 옷을 입 은 여자 두 명이 독약을 넣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조사해 보니 여 자 5명이 쌀을 씻고 있는 것을 극약을 넣는다고 떠든 것으로 알려 졌다. 橫須賀市 震災誌附復興訪 에 이런 일이 기록되어 있다. 2일 저녁때 東京으로부터 돌아은 驅逐艦은 海軍航空隊의 북방 고지에 朝鮮人 약 2백 명이 집단하여 있다고 하여 곧 출동하라는 신호를 받고 정규의 전쟁준비를 마친 후 조선인 집단지에 陸戰隊를 상륙 시켜 수색해 보았으나 虛報였다. 다음 날에도 橫濱 根岸에 不逞鮮 人의 폭행이 있다는 말을 듣고 驅逐艦을 출동시켰으나 또한 아무 일도 없었다. 警視聽에서 조사한 몇 가지 일을 소개해 보겠다. ① 9월 2일 오후 3시경 自警團員이 폭탄과 독약을 가지고 다 닌다는 韓國사람을 駒込警察署에 끌고 왔으므로 조사해 보나
393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폭탄이라고 생각한 것은 파인애플 깡통이요 독약이라고 한 것 은 설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② 각처에 韓國人이 暴行襲擊放火 등의 계획을 同志들 에게 알리기 위하여 기록한 암호가 있다는 소문을 자주 듣게 됨으로 各署에 명령하여 조사한 결과 冀尿沒取人 신문 우유 배달부들이 단골집을 분필 같은 것으로 표해 놓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③ 우물에 독약을 넣는다는 말이 퍼지자 우물물이나 과자류 의 감정을 各署에 신청하는 일이 많이 있어서 감정을 해보았 으나 의심되는 일이 없어서 이를 알리었다. 그러나 민중들은 잘 믿지를 아니하는고로 早稻田 署長은 9월 2일 오후 2시 독약이 투입된 우물물이라고 해서 작은 병에 넣어 가지고 온 사람이 있 었는데 그 사람 앞에서 그 물을 마심으로써 떠도는 말이 虛言이 라는 것을 증명해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④ 3일 오전 10시경, 月島署에 韓國人 소유의 폭발물이라는 것을 보매 고추가루였으며, 4일 오후 5시경 巢鴨三丁目 26번지 길에서 주웠다는 圓形 폭발탄이라는 것은 단단한 고무공이었다. ⑤ 上野精養軒앞 우물물이 변색된 것은 독물이 들어간 까닭 이다. 공원 아래 下水에 이상이 있다. 박물관의 연못물 이 변색되어 魚類는 다 죽었다 등의 말은 모두가 민심을 어 지럽게만 한 것이다. 上野警察署에서 이상이 있다는 우물물을 실험 해 보았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⑥ 鮮人 약 3천여명은 이미 多摩川을 건너 洗足村 및 中延 부근에 내습, 지금 폭행을 하고 있다 는 정보를 제공하는 자가 적지 않아 品川 警察署員을 多摩川 丸子방면에 파견케 되었으 니 이것이 9월 2일 오후 5시경의 일이었다. 가서 보니 아무 일
394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도 없었다. 제1사단 사령부의 발표에도 多摩川부근 5里 사방 에는 不逞徒輩를 발견치 못했다 고 했다. 이상의 사실로만 보아도 그들이 퍼뜨린 流言裴語는 無根之說이 라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는 것이다. (4) 流言斐語의 出處 流言蜜語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여러 가지로 보아 日本政府 당 국 특히 內務省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한다. 內務省과 警視聽 및 軍部측 최고간부 몇 사람이 비밀리에 모여서 생각해 낸 술책이 었던 것 같다. 이는 당시 학살의 진상을 조사한 罹災同胞慰問班 위원회의 결론이라고 할 것이다. 軍部측이라는 것을 첨가한 것은 위에서 말한 參謀總長 井染大佐의 발표문을 본다던지 유언비어의 용어가 군사상 술어라는 것을 보아 軍部의 누군가 개재한 것으로 느껴지는 까닭이다. 몇십명 혹은 몇백명이 隊를 지어 어떤 騎兵 隊를 습격한다. 어떤 砲兵工廠에 폭탄을 투하한다. 어떤 火藥庫를 폭파한다. 등등의 예를 들 수가 있다. 군대가 행동하려면 이런 말을 써야만 할 수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하여간 군대식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 現代史資料月報(1965년 10월) 山邊建太郞의 글에도 震災 당 시 內務大臣은 두 사람이 있었는데 後藤新平과 水野鍊太郞이다. 두 사람이 다 재주꾼이다. 水野는 9월 2일까지 內務大臣으로 있었 는데 식량난으로부터 일어난 소위 쌀소동 때문에 퍽 두려움을 경 험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朝鮮統治者로서 3 1 運動 후 政務總 監이 되어 齋藤總督과 같이 서울에 도착하자 朝鮮人으로부터 폭 탄을 받게된 유명한 얘기도 있거니와 그가 서울에 온 뒤 朝鮮의
395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통치는 악화일로였다. 朝鲜사람의 抗日運動, 獨立思想이 얼마나 심각하다는 것도 알았으리라. 9월 2일 內閣이 변하여 後藤新平이 內務大臣이 되었는데 後藤 도 臺灣民政長官으로 있었을 때 臺灣人을 여러 천명 학살했다는 사람이다. 土匪歸順法이라는 것을 만들어 歸順證을 주겠다고 경찰 서에 호출하였고 이에 반항하는 자는 모두 사살하였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다 虐政의 巨頭들이다. 後藤이란 자도 쌀소동이 나기 조금전 水野와 바꾸어 자기는 外務大臣이 되었다. 民衆暴動의 두 려움과 植民統治를 해본 경험은 두 사람이 다 같을 것이다. 이런 자들이 震災 당시 內務大臣이 되었으니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고 하였다. 韓國人 학살을 꾸며낸 것은 혼란한 震災때 무슨 폭동이 일어나 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에서 가장 만만한 韓國人을 희생시킴으로 써 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을 막고자 함이었다. 韓國人에 대한 악감 정을 자극시킴으로써 정부에 대한 신뢰심을 갖도록 하기 위하 여 꾸며낸 것이라고 할 것이다. 震災로 말미암아 모든 통신은 단절되었다. 지방에 보내는 통신 은 오직 海軍省 船橋送信所나 橫濱港 안에 있는 船橋無線을 통하 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중앙정부의 통신문은 전부 船橋를 경 유하여 電報를 놓게 되었다. 그런데 船橋無電도 1일에는 전연 통 신이 불통하였다. 그래서 9월 2일에야 船橋에 사람을 보내서 전달 한 電報文이 9월 3일 오전 8시 15분에야 內務省 警保局長의 이름 으로 각 지방장관에게 보내게 된 모양이다. 電文은 아래와 같다. 東京부근의 朝鮮人은 震災를 이용하여 각지에서 불을 지르고 좋지 못한 목적을 수행하려고 지금 東京市內에서는 폭탄을 가지 고 석유를 뿌려 放火하는 자가 있다. 이미 東京府 下에는 일부 戒
396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嚴令을 시행하고 있는고로 각지에서도 충분히 주밀한 시찰을 加 하여 朝鮮人 행동에 엄중한 취체가 있기를 바람 또 같은 날 같은 시간에 內務省 警保局長이 朝鮮總督府 警務局 長에게 아래와 같은 電報를 보냈다. 東京부근의 在留鮮人은 震災를 이용하여 좋지 못한 행동을 감행하려고 한다. 지금 東京市內에서 放火를 하고 폭탄을 던지려 하며 자주 활동하고 있음으로써 貴府에서 日本에 오는 朝鮮人에 대해서는 이때 엄밀한 조사를 할 것이며 용의자는 日本上陸 을 막 아야 하겠는데 특히 上海에서 오는 朝鮮人에 대해서는 충분한 경 계가 있어야 되겠으며 적당한 조처가 있기 바람. 10월 8일 東京日日新聞 夕刊에 琦玉縣 內務部長에 보낸 전 달문이 게재되었다. 庶發 第8號 大正 12年 9月 2日 琦玉縣 內務部長 郡町村長 殿 不逞鮮人 及 社會主義者의 暴動에 關한 件 移牒 이번 地震에 대하여 東京에서는不逞鮮人의 妄動이 있고 또 그간 과격 사상을 가진 도배가 이에 응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하고 자 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점점 그 毒手의 위력을 보이려고 하는 우려가 있으매 이때에 町村당국자는 재향군인분회 소방대 청년단 들과 일치협력하여 그 경계에 힘쓸 것이며 일단 유사시에는 신속 히 적당한 방책을 강구하여 지금 상당한 조처를 취하기 바라며 당 국의 來牒에 의하여 이 뜻을 이행함. 이상의 전보문이나 이첩문이 내무성에서 나왔으며 특히 移牒文
397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의 발송일이 9월 2일인 것으로 보아 상부의 명령은 그 전날 9월 1일 중이나 9월 2일 오전 중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밖에 몇 신문에 난 것으로 보아서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10월 21일 報知新聞 夕刊 기사에, 9월 2일 밤부터 3일 오후에 이르기까지 淺草淀橋 방면에서 는 오토바이 를 탄 경관과 재향군인들이 鮮人이 襲來하니 여 자와 아이도 속히 안전지대로 피난하고 장년은 라고 소리 치고 돌아 다녔기 때문에 인심의 불안을 극도에 달하게 하였고 소란을 크게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부하 某署에서도 일부러 神 奈川縣 下의 경찰대를 풀어 그 無根之說임을 알고 이것을 本廳 에 보고한 즉 한 간부는 안색을 변하면서 보고가 틀렸다고 꾸짖 음을 받았다 고 한다. 이것을 보더라도 본청의 공기를 알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大阪朝日新聞 1923년 9월 2일 기사를 보면 船橋無線電信 所 吳鎮守府 無線電信所 사이의 定期通信은 매일 오후 3시와 오 후 9시 반 2회하게 되는데 東海道 방면의 地震에 관하여는 1일 오후 3시에는 近海를 항해중인 汽船이 몹시 발신하는 까닭도 있 고 空電에 차단되어 수신불능이었다. 오후 9시 10분부터는 전혀 통신이 되지 못하였다. 이것을 보면 東京지방은 폭풍우로 말미암 아 무선전신의 발신에 고장이 생긴 것으로 알 수 있다 고 한 것 을 보더라도 9월 1일에 內務省에서 密議를 결정하였으나 1일에는 통신 불능이기 때문에 2일 사람을 船橋에 내보내 3일 오전 8시에 야 內務省 警保局長의 이름으로 각 지방장관에게 발신한 것으로 알 수 가 있다. 琦玉縣 內務部長이 郡町村長에게 보낸 移蝶을 보면 9월 2일부 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2일 內務省에서 보낸 것을 즉시 縣의 內務
398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部長이 郡町村長에게 알린 것으로 알 수 있다. 어쨌든 內務省 警 保局長의 이름으로 각 지방장관에게 발송한 電文과 內務省에 서 琦玉縣 內務部長에게 보낸 이첩으로써 流言斐語의 출처를 內務省 최고 책임자에게 아니 돌릴 수 없으며 이것이 곧 日本政府 당국의 책임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5) 虐殺事件의 問題化 虐殺事件으로 말미암아 日本안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네들이 자기네 사람들을 죽 인 데에서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학살의 대상은 韓國人과 社會主 義者이지마는 韓國人과 日本人의 얼굴이 비슷하기 때문에 엉뚱하 게 죽은 日本사람도 상당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큰 말썽 이 되어 일본정부 당국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報知新聞 朝刊에 경관의 非를 들어 本鄕自警 團의 권기 라는 제목아래 쓴 기사가 있었다. 이 회의의 主眼이 되는 당국에 대한 관계 라는 의제로써 토의 하였는데 당국의 태 10월 29일 도에 분개한 각 대표자들은 선후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曙町 村 田 대표측은 이렇게 말했다. 9월 1일 오후 署町 交番巡査가 自警 團을 찾아와서 各 町에서 不逞鮮人이 살인방화를 하고 있으 聽 자동차가 不逞鮮人이 각처에서 폭행을 일삼고 있으니 각자 주의하라 고 선전비라를 뿌려 韓國人에 대하여 폭행할 동기를 니 주의하라 고 두 번이나 알려 주었으며 다음 날 2일에는 警視 만들어 주었다고 하였다. 報知新聞 夕刊에 關東自警團總同盟의 檄文과 決議 라는 것이 게재되었는데 모 방면에서 朝鮮人襲來의 염려 12월 22일
399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가 있다. 남자는 무장하고 여자는 피난하라. 조선인을 볼 때에는 살해하여도 무방하며 주의자이면 타격해도 관계없다. 그들은 흉기 를 가지고 다니면서 도처에서 살인 강도 능욕 放火 投毒 등 모든 악행을 하고 있다고 선전한 자는 누구인가. 당국은 이것을 橫濱에서 강도질한 모모 등이라고 선전하고 있지마는 직접 우리 관리였다. 진실한 단원의 모든 과실은 관헌의 선전에 유혹된 결과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결의 에게 전달한 자는 바로 正服한 에는 ① 流言斐言의 출처에 관하여 당국이 그 책임을 지지 않고 이것을 민중에게 전가하려는 이유여하 ② 당국이 위급할 때에는 自警團의 폭행을 방임하고 있다가 지금에 와서는 그 죄를 묻고자 하는 이유여하 ③ 自警團員의 죄악만을 천하에 폭로하고 허다한 경관의 폭 행은 비밀에 붙이고자 하는 이유여하 이 결의문을 보더라도 누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10월 20일 河北新聞 에 당국의 移牒文에 관하여 아래와 같 이 게재하였다. 琦玉縣 당국이 震災 직후 관하 각 町村에 격렬한 통첩을 발송 하여 自警團의 폭행을 유발함으로써 비난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은 旣報와 같거니와 이 사건의 公判도 미구에 개정되는 고로 변호의 지위에서는 각 변호사는 벌써부터 이 점에 착안하여 재 료 수집에 착수하고 있는데 문제의 移牒文을 가장 유력한 재료 로 삼고 있다. 당시 장관이 이 같은 誘引材料를 스스로 뿌리고 서 이제는 自警團이 계속 檢擧되는 것을 남의 일 같이 보고 있 는 태도에 분개하고 있는 사람이 많거니와 이것에 관하여 本庄
400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町 助役이 통첩을 郡으로부터 받았을 때, 한번 읽어보니 과격한 文句에 놀라 町內로 다니며 말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집어치워 버릴까 하기도 하였으나 極秘急의 도장이 찍혀 있으 므로 각 區長에게 빨리 전달케 하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전연 돌리지 아니하고 없애버렸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하는 助役의 심정을 本庄町民은 잘 알고 있는 동시에 더욱 縣의 처리 에 분개하고 있다. 이런 비난 중에 司法權의 발동은 용서없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의 총체적 책임의 지위에 있는 友 部警察部長은 깊이 느낀 바 있어 사건 분규 이래 사표를 낼 뜻 을 품고 사건이 낙착 되는대로 천하로 하여금 無警察의 상태로 法 빠지게 한 책임을 지고 사임을 하겠다고 결심한 모양이다. 學博士 上杉愼吉의 글이 警察官憲의 분명한 대답을 求함 이라는 國民新聞 10월 14일 夕刊에 게재되었다. 나는 수백만 시민의 의혹을 대표하여 간단히 左記 5개조를 들어 警察官憲의 책임에 관한 분명한 대답을 듣고자 한다. ① 9월 2일부터 3일에 걸쳐 震災地 일대에 襲來, 放火, 暴行의 流言裴語가 전파되어 인심이 극도로 불안에 빠지고 關 東 전체가 動亂의 정황을 나타내게 된 것은 주로 경찰관헌이 자 동차, 포스터, 말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과장하여 선전하게 한 까닭으로 그렇게 된 줄로 시민들은 목격하고 당해본 것이므로 이것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후 관헌에서는 이런 일은 전혀 사실이 아니요, 虛報 라고 극력 언명하고 또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경찰관헌이 무 근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민심을 소란시켜 震火災의 참화를 한 층 더 크게 만들어 놓은 데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401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② 당시 경찰관헌은 인민들에게 검거에 적극 조력토 록 自警自衛해야 될 것을 권유하였고 무기휴대를 용인하였다. 또 곤란한 자는 죽여도 괜찮다는 것을 일반에게 누구나 믿도록 했던 것이다. 이렇게 믿었기 때문에 毆打擊殺을 행한 자가 도 처에 적지 않았던 것으로 이들 自警團이나 기타의 폭행자는 당 연히 검거 처벌되어야 하지마는 이에 대한 관헌의 책임은 어떠 한가. ③ 설사 경찰관헌이 권유 교사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와 같은 큰 소란과 폭동이 일어났을 때 이를 예방 진압하는 직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책임은 어떻게 하는가. ④ 당시 경찰관헌은 인민들을 함부로 검거 구타 살해하고 그 시체를 태워 버렸다는 것은 龜戶事件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찰관헌의 폭행에는 군대도 협동했다는 것인데 경찰관헌은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⑤ 憲兵이 大杉(無政府主義者)을 죽인 사건에는 경찰관헌의 양해와 승인 또는 의뢰 권유가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이 미 의심이 있다면, 헌병측에서는 甘粨大尉(大杉을 죽인 자)를 軍法會議에 회부하였고 大杉과 野枝(大杉의 妻)와 어린아이 3 인을 죽였다는 사실은 아직 의심스러운 일이면서도 단연 사령 관까지 책임을 지는 것과 같이 경찰이나 정부에서도 즉시 파면 기타 책임을 분명히 하는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 다. 자세히 말하려면 말할 것이 많지마는 명료를 기하기 위하여 이상의 다섯 가지 요령을 말한다. 이것을 말하는 까닭은 이런 일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다면 수백만 시민의 가슴은 진정되 지 않기 때문이다. 10월 23일 東京日日新聞 에 지금 와서 검거란 무엇인가
402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關東 自警團同盟으로 부터 內相 法相에 詰問狀 이라는 제목아 래 쓴 결의문이 게재되었다. 新時代協會 菊池義郞씨 외 32명, 勞動共濟會 中西雄洞씨 외 52명 城南莊 菊池良一씨 외 수명 滿鐵調查課 棱川武治씨 외 8 명이 발기인이 되어 市內 各 區에 설치된 自警團을 산하에 모아 關東 自警團同盟을 조직하고 昨今 각 방면에서 벌떼같이 일어 나는 自警團의 검거소동에 대한 대항책을 강구한 결과 아래와 같은 결의를 가결하고 이것을 內務大臣과 法務大臣에게 보내기 로 했다. 우리는 당국에 대하여 아래 사항을 묻는다. ① 流言裴語의 출처에 대하여 당국이 그 책임을 지지 않고 이것을 민중에게 전가시키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② 당국이 自警團의 폭행을 보고만 있다가 이제와서 그 죄를 물으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③ 自警團의 죄악만을 천하에 폭로시키고 경관의 폭행은 감 추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10월 22일 東京日日新聞 에 某 法學博士의 담화가 발표되었다. 震災 당시 각처에서 연출된 自警團의 兇行은 言語道斷이다. 평소에 상상할 수도 없는 흉행을 거리낌 없이 감행하였고 심한 일은 흉행 후 곧 경찰서에 출두하여 賞을 요청하는 자도 있고 또 현재 琦玉縣下 郡村長에게 不穩한 移牒文까지 발표되고 있 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琦玉縣下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다 른 府縣에도 있는 듯 걱정되는 까닭에 충분히 생각하고 처리 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서투르게 해서는 도리어 큰 봉변 을 당할 것이다. 정부의 봉변을 운운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帝 國의 中外에 대한 신의가 어떻게 되겠는가. 다음 龜戶事件에 대하여 한마디 하고 싶다. 정부는 본건에 대해서는 다만 衛戌
403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規則에 의하여 살해했다고만 할 뿐 구체적 설명을 피하고 있지 마는 위수규칙이라고 함부로 사람을 죽여도 좋다고 써있지 않 다. 아마 다수 집합하여 폭행을 하게 될 때 병기를 사용치 않으 면 진압할 방법이 없을 때라는 조항을 적용코자 하는 것 같으나 과연 그런 정도의 것이었나는 구체적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 다. 이상과 같은 여론이 떠들썩하자 日本政府 당국은 퍽 난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6) 日本 政府當局의 唐慌 韓國사람만 죽였더라면 혹은 우물쭈물 넘어 갔었을런지도 모르 겠다. 그러나 자기네 사람들을 죽인 일이라 억울하다, 분하다, 고 소한다 등등의 일이 생기게 되니 문제는 간단히 수습되기가 어렵 게 되었다. 韓國사람인줄 잘못 알고 죽이기는 했지마는 살인은 살 인이고 보니 고소하면 재판을 아니 받을 수 없게된 것이 아닌가. 재판을 받게 되니 어떤 동기로 살인범이 되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 을 수 없게 되는 것이요. 이 동기를 말하게 되니 자연 당국의 지 시와 선전에 의한 것이라고 털어 놓게 되었다. 피해당한 韓 國사 람은 아무 말을 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는 그때의 존재였지마는 자기들 입으로부터 모든 비밀이 폭로되어 日本政府 당국으로서는 겉잡을 수 없이 궁지에 빠지게 된 것이다. 12월 15일 衆議院에서 田淵豊吉의 질문이 있었는데 중요한 몇 마디만 소개한다면 나는 內閣 여러분이 人道上 가장 비참한 큰 사건을 이 신성한 국회에서 一言半句도 보고하지 아니하고 또 신 성해야 될 여러분이 일언반구도 이점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함을
404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매우 분개하고 슬퍼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억울해도 호소할 데 없는 朝鮮人 殺害問題라 할 것이다. 사람을 위하여 여러분의 마음을 찌를 말로써 왜 억울함을 밝혀주 지 아니하는가. 피살된 큰 사건을 불문에 붙이는 것을 좋게 생각하는 것인가. 朝鮮人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가 나쁜 일을 했을 때 사죄한다는 것은 인간의 예의라고 생각한 다. 그런데 여러분은 도무지 일언반구도 이 일에 대하여 한마디도 없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또 신문상에도 게재를 금지하고 연설 에도 이를 금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말하는 자에게는 벌을 준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것을 나는 內閣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바 다. 12월 16일 衆議院에서 永井柳太郞도 山本 總理大臣에게 질문 한 바 있었는데 역시 중요한 대목만 몇 마디 말해 보겠다. 田淵군의 질의는 再昨日후 행해진 의원의 질문 가운데 가장 시정의 근본되는 질의의 하나로서 국민이 묻고싶은 바를 물 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하등의 대답이 없었 日本민족이 그와 던 것은 무슨 이유인가 듣고 싶은 바다. 같은 불상사를 빚어낸 것은 거기에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큰 원인이 무엇인가를 말한다면 그 당시 정부 내부의 소수 관 리가 일의 진상을 충분히 알아보지도 아니하고 자기들이 지금까 지 해 오던 그릇된 정책의 반동이 언젠가 나타나지나 아니할까 하 는 두려움이 있는 까닭에 그 두려움이 복받쳐서 과장된 보도를 정 부 스스로가 만들어서 발표한 것이 근본의 원인이 아닌가 한다. 여러분 나는 그 大震災 직후 그 때 內務省이 각처 지방관에게 보 그 하나는 발신 시각 9월 낸 전보를 여기 베껴 가지고 왔다. 3일 오전 5시 30분, 발신자 警保局長, 받는사람 朝鮮總督, 電文
405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東京부근의 震災를 이용하여 在留鮮人이 放火投彈 기타 不逞手 段을 행코자 하는 자 있다. 이미 東京府下는 일부의 戒嚴令을 시 행하고 있으므로 이때 鮮內鮮人의 동정에 대하여 엄중한 감시가 있어야 하며 日本渡來도 막도록 염려해 주기 바람. 둘째는 발신시각 9월 3일 오전 6시 40분 발신자 警保局長, 수 신자 吳鎭守府 副官, 電文 山口縣 知事에게 아래와 같은 전보를 쳐주시오. 셋째는 9월 3일 오전 6시 발신자 警保局長, 수신자 各鎭守府, 電文 各地方長官에게 아래와 같은 전보를 쳐주시오.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싶은 것은 이 세개의 전보가 어떤 것 이나 9월 3일 이른 아침의 발신으로써 이 전보는 어떤 것이나 9 월 1일 혹은 2일에 東京에서 사람을 시 켜 船橋 無線電信所에 보 낸 것인데 이 전보를 친 책임자는 현내각이 아니요 전 內田臨時 內閣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전보 발신자로서, 최고 책임자는 그 당시 內務大臣 水野鍊太郞이라고 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을 이러한 전보는 그 당시 內務省의 最高官이 발송한 것 것이다. 으로 그 명령을 받은 각지 지방장관은 그 명령을 관하 郡役所에 전하였으며 관하의 군역소는 또 이것을 관하 町村에 전달하기에 自警 힘쓴 결과 그들의 自警團 조직을 보기에 이른 것이다. 團에 속한 사람들의 활동은 평소부터 신뢰하던 관헌의 보도를 믿 고 관헌의 명령을 받들어 행한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自警 團에 죄가 있다면 국법에 비추어 이를 처단하는 것은 본의원이 처 음부터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 自警團으로 하여금 그 죄를 범하게한 당시에 명령한 사람 自身의 책임 또한 규탄치 않을 수 나는 없는 것이다. 山本總理大臣에게 묻고 싶다. 鮮人事件은 과연 流言斐語로 말미암은 것인가. 만일 유언비어로 말미암았다고
406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할 것 같으면 그 유언비어를 취체해야 될 정부 스스로가 발표한 이 유언비어에 대하여 정부는 책임을 느끼지 아니하는가. 정부는 그 태도를 분명히 해야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등 사실 의 진상을 밝히지도 아니하고 애도해야 될 경우에도 애도의 뜻을 표하지도 아니하고 의원의 질문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한마디 대답 山本總理大臣의 분명한 답변을 듣고자 한다. 中央公論 11월호에 吉野作造도 이런 말을 하였다. 어 이 없음은 쨌든간에 죄없는 朝鮮사람으로 災禍를 입은 자의 수가 매우 많은 것은 사실이다. 죄없이 무의미하게 살해당하는 것처럼 불행한 것 은 없는 일이다. 이번 震災로 많은 재물과 많은 친한 사람을 잃은 딱한 사람의 수가 무한히 많다. 그러나 참으로 딱한 정도를 말한 다면 민중의 홍분으로 말미암아 희생되어 무고하게 죽은 조선사 이상과 같이 日本國會學界法曹界 및 日本 각처에서 정부에 람 亡靈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대한 비난이 끊일새 없이 일어나게 되었다. 정부당국 자신들이 명 령을 해놓고 지금 와서는 하지 않은체 하고 민중에게 그 허물을 뒤집어 씌운다 하여 분개하는 것이다. 국외에서도 빗발치듯 비난 공격의 글이 들어오게 되었다. 上海 차이나 프레스 에서도 크 日本國民들은 日本憲兵과 같이 잔인하게도 朝鮮 人과 中國人을 학살하고 있다 고 하였다. 上海 中國人 사회단체 게 보도하기를 에서도 震災에 관한 대책을 협의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있 다. 美國 北京 上海 滿洲 露領에 있는 韓國人단체에서도 虐 殺眞相을 알고자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정보가 쉴새없이 들 어오고 있으니 日本당국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조선사람이 나쁜 일을 많이 하고 있으니 주의하 따라서는 죽여도 좋다고 하던 관헌이 지금와서는 며칠 전에는 라. 경우에
407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輕擧妄動을 하지 말라. 무고한 良民을 해하지 말라 운운 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갈팡질팡하는 태도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9월 9일 이바라끼新聞 에 輕擧妄動을 삼가라 는 제목아래 茨 城內務部長이 7일 各郡市長에게 論吿한 것이 게재되었다. 살해를 감행하던 관헌이 보호를 시작하기도 하였다. 不入斗鍊兵 場에 韓國人 수용소를 설치하고 아래와 같은 게시를 거리 각 요소 에 붙이기도 하였다. 게시 당지방의 조선인에 관한 소문은 대개 虛報이다. 그들이 다 악 인이 아니니 함부로 학대하지 말라. 朝鮮人 수용소는 不入斗鍊 兵場에 설치되어 있다. 朝鮮人은 그리로 가라.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 요즘 不逞鮮人 襲來의 소문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으나 모두 허언이다. 한마디로 유언비어가 無根이라는 것을 잘 안 그들은 이것을 일 반민중에게 알리는 동시에 韓國사람들을 일정한 장소에 수용시켜 보호하는 방향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리 하여 약 7,580여 명이 千 葉縣 習志野 目黑競馬場 각 경찰서 相愛會 督學部 宗宿舍 長白察 靑山明治神宮外苑 등지에 수용되었던 것이다. 9월 28일 까지는 귀국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존자는 대부분 수용소 에 있게 되었고 그 외는 有志人士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리라고 생 각된다. (7) 朝鮮總督府의 緘口令 韓國사람을 그렇게 많이 잔혹하게 죽였다는 일이 아무래도 무 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朝鮮總督府 당국자로서는 없
408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한 韓國사람의 반발은 어떠할까. 외국 사람들이 이런 일을 알게 된다면 그 미치는 영향이 어떠할까 하는 염려를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朝鮮總督府 警務局에서 1923년 10월 18일 東亞日報 李相協 歸 鮮後의 動靜에 關한 件 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感想談을 기록 하여 각 당국 요인에게 발송하였다. 간단한 요령만 적는다면 아래 와 같다. 日本人의 朝鮮人에 대한 폭행은 너무나 심하여서 매우 비인도적이었는데 나도 이에 대한 많은 재료를 가지고 있다. 震災 당시 朝鮮人이 받았던 포학능욕에 대하여 관헌의 태도는 극력 이 를 은폐하려는 의심이 있다. 공정히 발표함으로써 도리어 사회의 의혹을 일소할 수도 있을 터인데 관헌은 무책임하게 덮어두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우리의 가장 큰 불평이요 미운바다. 이번의 포학은 우리 朝鮮사람으로서는 有耶無耶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이번 나의 東京行의 용무가 그 진상을 알고자 하 는데 있었더니만치 설혹 어떠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명을 완 수하지 못하고서는 우리 민족에 대하여 일종의 죄악을 범하는 것 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까닭에 감옥에까지 가게 된다 할지라도 이를 감수하고 자기의 사명을 단행함으로써 그 진상을 천하에 호 10월 6일 東亞日報 사설은 齋藤總督에게 진상의 발표를 바란다 는 글을 썼다. 일대 不祥事件에 대하여 公明率直하게 소코자 한다.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의 眞相을 발표하는 것이 朝鮮統治의 전책 임을 진 지위로 보아서도 반드시 이행되지 아니하면 아니될 엄숙 11월 19일 東亞日報 에 또 이런 글이 실려졌다. 대규모의 한 도덕적 책임이 있다 고 하였다. 慘殺을 함부로 한 사실은 그들이 朝鮮사람에 대한 先入主見이 여
409 Ⅲ. 三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하히 냉혹 잔인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弱者에게 는 榮辱도 없고 存亡도 없다. 放火 强姦 등의 각종 누명을 씌워 玉石을 함께 태워버리는 참화를 입었다. 누구에게 이를 호소할 것 인가. 우리는 당국에 公明正大한 전말의 발표를 요망했지마는 아 직 의혹에 덮여 있다. 그 태도가 너무나 냉담하고 하등의 성의를 인정키 어려우니 어찌하랴 라고 하였다. 도둑이 발이 저리다는 격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악이 드러날 것을 초조히 생각한 나머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 진상이 널리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알리지 못하게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면 시일이 감에 따라 잊혀지지 않겠는가. 朝鮮總督府는 급히 서둘러 緊急勅令을 발표하였으니 流言裴語 取締令 이라는 것이 곧 그것이다. 9월 7일에 발표하고 발표 즉일 부터 시행하였다. 이 긴급취체령은, 사실이건 사실이 아니건 關東 震災 때의 학살사건에 관하여 전혀 입을 벌려서는 아니 된다는, 말하자면 입을 봉하는 緘口令이었던 것이다. 억울하건 억울하지 않건 간에 너희들의 죽고 사는 것은 우리의 손에 달린 것이니 너 희들을 살려 두는 것만으로도 다행인줄 알고 그저 꼼짝 말고 있으 라는 얘기다. 朝鮮總督府 警務局 1923년 治安狀況 이라는 문서에 의하면 9, 10 두달 동안에 학살사건을 둘러싸고 불온언동이 있는 자로 타 이른 것이 1,156건에 1,317인, 법규위반에 의하여 검거된 것이 111건에 122인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9월 15일을 전후하여 韓國 안에서 무슨 반발적 폭동이나 혹 일어나지 아니할까 하는 우려에 서 日本人 京城在鄕軍人 회원들로 하여금 府內 각처에 自警團을 조직하도록 계획하였다. 大邱 釜山 平壤에서도 이와 같은 회합 이 있어서 만일의 경우에 대처할 것을 협의하였던 것이다
410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東亞日報 朝鮮日報 에 대해서도 학살사건에 관한 기사 를 절대로 싣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9월 1일부터 11월 11일 사이에 18회의 차압처분을 당하였다. 日本에서 발행되는 신문으 로 韓國안에 들어온 것을 처분한 것이 403건, 韓國안에서 처분한 것이 602건이었다. 철저한 취체로 꼼짝 달싹할 수가 없었던 것이 다. 崔承萬
411 執筆者 槪要 高承濟 I. 三 一運動 以前의 社會와 經濟 梁榮煥 2. 日帝의 經濟政策 趙璣濬 Ⅱ. 三 一運動 1. 日帝의 侵略機構 申載洪 年代 國外에서의 民族運動 申載洪 3. 三 一運動 崔永禧 4. 大韓民國 臨時政府 趙東杰 5. 獨立軍의 抗戰 申載洪 Ⅲ. 三 一運動 以後의 社會와 經濟 1. 食糧의 增產과 掠奪 愼鏞廈 2. 日帝資本의 浸透 趙璣濬 3. 在日 韓國人과 東京大震災 崔承萬 年代 國內에서의 民族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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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v vi vii viii ix x xi 61 62 63 64 에 피 소 드 2 시도 임금은 곧 신하들을 불러모아 나라 일을 맡기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하 산을 만난 임금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어요. 원하시는 대로 일곱 번째 다이아몬드 아가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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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 - 國史館論叢 第50輯 ( 韓國史時代區分論, 1973)이란 논문이 주목되고 있다. 그는 고려전기 이후 무신집권 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사회는 古代的인 사회에 속하고 조선시대부터가 中世的 封 建社會이며, 武臣執權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는 2세기에 걸친 긴 기간을 겪는 동안에 古 代社會를 극복하여 中世社會를 형성하는 과도기적인 전환기를 경과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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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2008년 2월, 발전과 통합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출범한 새 정부는 문화정책의 목표를 품격 있는 문화국가 로 설정하고, 그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보완하는 한편 권한과 책임의 원칙에 따라 지원되고, 효율의 원리에 따라 운영될 수 있도록 과감한 변화를 도입하는 등 새로운 문화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란 국민 모두가 생활 속에서 문화적 삶과 풍요로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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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총선과 남녀유권자의 정치의식 및 투표행태에 관한 연구 - 여성후보 출마 선거구 조사를 중심으로 - 2004. 7 여 성 부 제17대 총선과 남녀유권자의 정치의식 및 투표행태에 관한 연구 - 여성후보 출마 선거구 조사를 중심으로 - 2004. 7 여 성 부 연구요약 표 주제 및 연도별 여성유권자 연구 현황 표 출마한 여성후보 인지시기 투표후보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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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 객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객사는 영조 35년(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입니다. 원래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습니다. 정당에서는 전하 만만세 라고 새 긴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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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경 광 학 과 세부내용 - 남을 도와 준 경험과 보람에 대해 말해 보세요. - 공부 외에 다른 일을 정성을 다해 꾸준하게 해본 경험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 남과 다른 자신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말해 주세요. - 지금까지 가장 고민스러웠던 또는 어려웠던 일과 이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 자신의 멘토(조언자) 또는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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