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관논총_24집_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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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웅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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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古代日本佛敎에서의 三國佛敎의 역할 洪 潤 植*.序言. 百濟佛敎와 日本 初傳佛敎의 展開 1. 日本 初傳佛敎의 展開過程 2. 日本 初傳佛敎의 性格. 新羅佛敎와 聖德太子의 日本佛敎 1. 私寺佛敎에서 官寺佛敎로의 轉換 Ⅰ Ⅱ Ⅲ Ⅰ 2. 新羅佛敎와 聖德太子信仰 3. 王權의 確立과 國家佛敎로의 發展. 韓國佛敎의 受容基盤과 日本佛敎 1. 古代韓國의 土着信仰과 日本佛敎 2. 高句麗 百濟 新羅와 日本文化. 結語 Ⅳ Ⅴ.序言 古代韓日 佛敎文化交流에 대한 연구는 그 연구자료가 주로 古代韓國의 高句麗 百濟 新 羅의 三國이 日本에 불교를 일방적으로 전한 기사들로만 되어 있어 그 동안의 연구에 많 은 오해가 쌓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 日本側에서는 이 부분의 연구를 소홀히하거나 아니면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즉 百濟에서 일본에 불교를 전한 사실을 놓고 下賜냐 獻上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음이 그와 같은 것이며,1) 다른한편 日本이 古代佛敎 를 논함에 있어 印度 中國 日本의 三國佛敎論을 제시하면서 한국불교를 논외로 하고 있음 이 그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2) 그런데 이같은 사정은 자칫하면 불교를 일본에 전하여 恩典을 베풀었다는 입장에 서기 쉽고 한편으로는 불교를 전해 받았지만 별다른 영향을 받은 바 없다는 입장을 취하게 된 데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하여 古代韓日 間의 佛敎文化交流에 대한 연구는 주 * 東國大學校 歷史敎育科 敎授. 1) 欽明天皇은 百濟聖王과의 관계에서 佛敎受容이 강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百濟에서 보내진 佛敎 가 下賜가 아니라 贈與라 하고 있음이 그와 같은 것이나 先進文化를 後進社會에 보내는 것은 贈與의 의미보다는 下賜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된다. 田村圓澄, 古代朝鮮佛敎と日本佛敎 (吉 川弘文館, 1980) p ) 日本佛敎史의 연구가 三國佛法傳通緣起 를 中心으로 진행되어왔기 때문에 印度 中國 日本佛 敎 이외의 韓國佛敎를 論外로 하게 되는 愚를 범하게 되었다. 水谷幸正, 日本佛敎傳來의 再照明 ( 東亞三國佛敎傳來의 再照明, 靈鷲佛敎文化硏究院, 1989).
2 로 古代 韓國이 日本에 佛敎를 전한 사실을 중심으로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이와 같은 불 교전래 사실을 좀더 종합적인 문화교류의 차원에서 규명해 나갈 때 당시 韓日間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해명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같은 시각에서의 연구가 지금까지 전연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들은 交流次元이란 면 에서는 진전이 있었지만 부분적인 교류에 국한하고 있다는데 아쉬움을 느낀다.3) 따라서 본 연구는 되도록 보다 많은 因果관계를 종합한다는 입장에서 古代韓日 間의 佛敎文化交 流에 대한 진면목에 접근해 보려 한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의 古代는 삼국시대에 국한한 이 시대의 兩國 間의 交流관계를 대상으로 한다. Ⅱ. 百濟佛敎와 日本 初傳佛敎의 展開 1. 日本 初傳佛敎의 展開過程 韓國史書와 日本史書가 전하는 兩國의 佛敎初傳에 대한 기사가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데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三國史記 나 三國遺事 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한 사실을 대체 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 高句麗 小獸林王 2년에 前秦의 符堅王이 使臣과 僧 順道로 하여금 佛像과 經文을 보내니 이듬 해에 省門寺를 창건하고 順道를 그곳에 있게 하니 이것이 高句麗佛敎의 始初이다.4) (2) 百濟 沈流王 원년에 胡僧 摩羅難陀가 東晋으로부터 왔는데 이를 환영하여 王宮에 있게 하고 禮敬하였으며 이듬해에 新都 漢山州에 절을 짓고 僧 10인을 得度시키니 이것이 百濟佛敎 의 始初이다.5) 3) 洪淳昶, 7 8세기 新羅와 日本의 關係 ( 韓日古代文化交涉史硏究, 乙酉文化社, 1974). 以上 韓日古代文化交涉史硏究 에 있어 田村圓澄의 半跏思惟像과 聖德太子信仰, 李箕永 의 象徵的 表現을 通해 본 7 8세기 新羅 및 日本의 佛國土思想, 毛利久의 白鳳彫刻의 新 羅的 要素, 金宅圭의 新羅 및 古代日本의 神佛褶合에 대하여 등을 참고할 수 있다. 田村圓澄, 古代朝鮮佛敎と日本佛敎 (1980). 柳炳德, 古代韓日佛敎文化交流에 관한 硏究 ( 韓國宗敎 4 5, 圓光大學校 宗敎問題硏究 所, 1980). 柳東植, 韓日佛敎受容形態의 比較考察 ( 韓國文化人類學 8, 韓國文化人類學會, 1976). 鎌田茂雄, 百濟佛敎의 日本傳來 ( 馬韓 百濟文化 7, 圓光大學校 馬韓百濟文化硏究所, 1976). 4)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및 三國遺事 興法조. ① ② ③ ④ ⑤ ⑥
3 國史館論叢 第24輯 (3) 新羅 新羅佛敎는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新羅社會에 傳來되었으므로 高句麗나 百濟처 럼 간단한 기술이 어려우나 불교를 전한 자는 沙門이고 信仰의 대상은 三寶이며 禮拜의 場所가 필요하였는데 이와 같은 것을 처음으로 갖게 된 것이 納祗王때이다.6) 이상에서 보면 古代 韓國社會에 佛敎가 전해진 사실은 佛像 佛經 佛僧의 三寶가 전해져 야만 하고 또한 이들을 수용할 佛寺가 창건되지 않으면 佛敎가 전래되었다고 인식되지 않 았던 것이라 생각된다. 高句麗는 이 네가지 佛敎傳來의 條件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고 百濟와 新羅는 佛像과 佛 經을 전한 사실을 명확히 기술하고 있지는 않으나 佛僧이 와서 불교를 전하고 佛寺를 창 건하여 불교를 널리 폈다고 하고 있으므로 불상과 불경을 佛僧이 가져왔음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日本書紀 가 전하는 日本佛敎의 初傳記 事는 다음과 같이 다르다. 欽明天皇 13년에(552) 百濟의 聖明王이 西部姬氏達率 怒唎斯致契 等을 보내어 釋迦佛 金 銅像 一軀와 幡蓋若干과 經論若干卷을 바쳐 別表와 같은 流通 禮拜功德을 讚하여 曰 是法은 於諸法中에 最爲殊勝하여 難解難入이라 周公과 孔子도 尙不能知로다. 此法은 能生無量無邊福 德果報하고 乃至成辨無上菩提하나니 譬如人懷隨意寶하고 逐所須用盡依情이니라 7) 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즉 여기서 보면 百濟의 聖王이 佛像과 佛經을 전하고 佛法의 殊勝 함을 讚文을 지어 이해시키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佛僧이 가지도 않았고 佛 寺도 건립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의 日本書紀 기록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신빙성이 없는 기사로 알려져 있지만,8) 이에 비하여 신빙성이 있는 日本 初傳佛敎文獻이라 하고 있는 元興寺伽藍緣 起幷流記資財帳 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즉 이에 의하면 太子像, 灌佛器, 說佛起卷 一篋을 전해 받았다고 하므로 여기서도 佛像類와 佛經類만 언급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日本의 初傳佛敎記事는 佛敎가 일방적으로 전해졌을 뿐 일본사회가 이를 수용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낸 기사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전해진 불교를 놓고 日本의 欽明天皇은 佛敎受容을 강제받을 입장이 아니었으므 로 선택의 여지가 있어 백제에서 보내 온 佛像과 經典을 奉佛派의 蘇我稻目에게 주고 자 신은 반대파와의 중간입장에 서 있었다고 하여 百濟에서 日本에 贈與된 불교라 하고 있 다.9) 그러나 당시에 국가간에 불교가 전해진다는 것은 王權確立을 통한 古代國家의 발전 5) 三國史記 6) 三國史記 7) 日本書紀 8) 藤井顯孝, 百濟本紀 및 三國遺事 興法조. 新羅本紀 및 三國遺事 興法조. 欽明天皇 13년조. 佛敎傳來の記事に就いて ( 史學雜誌 36-8).
4 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文化段階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므로,10) 이때 日本이 佛敎를 적극 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백제에서 증여된 불교라서가 아니라 이를 수용할 수 있는 文化段階에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이상의 百濟佛敎를 국가적인 입장에서는 受容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더라도 蘇我氏 등의 奉佛豪族이 이를 受容하여 장차 국가적 사회적인 佛敎로 전개 발전시켜 나가는데 계 속 古代 韓國佛敎의 지원과 지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하며, 이같은 사실까지도 아울러 日本佛敎傳來의 歷史로 認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일본의 불교전래는 新羅佛敎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단계에 걸친 展開過程을 필요로 하였으며 이같은 여러 과정을 거치는데 古代 韓國佛敎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하에서 그 몇 단계의 日本佛敎傳來 과정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제 1단계 百濟系 渡來人들과 깊은 관계에 있었던11) 奉佛派의 豪族 蘇我稻目이 百濟에서 보내온 佛像과 佛經을 자신의 私家에 봉안하고 私的인 信奉을 하는 단계. 2) 제 2단계 反對派에 의하여 초기에 전해진 佛像은 難波의 강물에 던져지고 그 이후 蘇我稻目의 뒤 를 이은 蘇我馬子의 私家에 佛像이 없었으나 敏達天皇 13년(584)에 鹿深氏가 백제에서 彌勒石像一軀를 가지고 와 이 佛像을 蘇我馬子의 私家入口에 봉안하고 善信尼 등의 尼僧 으로 하여금 彌勒石像을 禮拜供養하게 하였다.12) 여기서 보면 전 단계와는 달리 佛像을 私家의 깊은 곳에 숨겨 두고 개인적인 崇拜를 한 것이 아니라 집의 입구에 안치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崇佛의 편의를 도모하였고, 尼 僧으로 하여금 佛像을 禮拜供養케 하는 佛敎儀禮의 진전에까지 이르렀다.13) 한편 때를 같이 하여 敏達 14년(585)에는 2월 15일 釋迦의 涅槃日을 기념하여 蘇我馬子의 근거지 인 豊浦에 일본 최초의 塔의 造營이 시작되었는데,14) 이는 百濟의 威德王이 敏達天皇 6 년(577) 僧侶와 더불어 造佛工 造寺工 등을 보내왔다고 하고 있는바 이들 僧侶와 기술자 들에 의하여 이룩된 것으로 생각된다.15) 9) 田村圓澄, 古代朝鮮佛敎と日本佛敎 p ) 洪淳昶 田村圓澄 編, 韓日古代文化交涉史硏究 (乙酉文化社, 1974) p. 26. 蘇我氏는 百濟系人 혹은 百濟系 渡來人들과 깊은 관계에 있었던 渡來人이었다 하고 있음이 그 것이다. 11) 田村圓澄, 古代朝鮮佛敎と日本佛敎 p. 28. 島辻義德, 蘇我氏臺頭の史的意義 ( 東アジアの古代文化 23, 大和書房). 12) 日本書紀 敏達天皇 13년조. 13) 위와 같음. 14) 日本書紀 敏達天皇 14년조. 15) 日本書紀 敏達天皇 6년조. ① ②
5 國史館論叢 第24輯 이상의 2단계는 佛像 佛經이 전해졌을 뿐 아니라 伽藍이 형성되고 佛敎儀禮를 행하는 僧尼의 出家도 있게 되었다. 이는 豪族勢力에 의한 佛敎의 社會化를 의미하는 것이겠으나 이러한 豪族勢力에 의한 불교의 社會化에 위기감을 느낀 敏達天皇은 疫病流行이 蘇我馬子 등의 奉佛에 연유한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다시 破佛行爲를 감행하여 佛像 佛殿 등을 파 괴하고 善信尼 등의 僧尼를 환속시킨다.16) 3) 제 3단계 蘇我馬子가 發病함에 불교에의 귀의를 敏達天皇께 發願하므로 敏達은 蘇我馬子에 限하 여 奉佛을 허가하였으므로 다시 馬子는 善信尼 등으로 하여금 彌勒像에 供養케 함으로써 병이 나았다.17) 이를 계기로 蘇我馬子에 의한 奉佛은 한 단계 더욱 발전하게 되는데 불 교신앙이란 佛像과 佛經을 봉안하고 아무렇게나 禮拜供養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불교의 戒法에 의하여 受戒한 僧尼에 의하여 祈願行爲를 하여야만 된다는 僧寶信仰에의 발전이 있게 된다. 앞의 제 2단계에서도 善信尼 등의 出家者가 있었으나 이는 佛僧의 역 할을 대행한 巫女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정통적인 戒法을 이어받은 僧尼를 필요로 하게 되 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상과 같은 바람을 用明天皇 2년(587)에 일본에 온 百濟臣에게 아뢰니 그는 백제에 있어 尼僧의 受戒法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尼僧은 먼저 尼寺에 10人의 尼師를 招請하여 戒를 받고 다음에는 法師寺에 가서 10人의 法師를 초청하여 受戒한다18) 고 하고 있다. 여기서 보면 尼僧이 受戒하기 위해서는 20인의 戒師가 있어야 하며 尼寺와 法師寺가 있어야 하나 당시 일본에는 善信尼 등이 주거하는 尼寺는 있으나 法師寺와 戒師 가 될 만한 20인의 僧尼가 없었다. 그리하여 日本에서 불교의 정통적인 수계를 하려면 먼 저 法師寺를 지어야 하고 또한 백제에서 戒師가 될 만한 僧尼를 초청해 오지 않으면 안되 었다. 그리하여 蘇我馬子는 皇室과 諸豪族에게 호소하고 反物部勢力을 규합하여 反佛派인 物部勢力을 타도하면서 法師寺 건립의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다. 이에 蘇我馬子는 崇峻 元年(588)에 百濟에 요청하여 百濟로부터 僧侶와 造寺工 露盤工 匠工 繪畵工人 등의 法師寺 건립에 필요한 要員을 보내게 하였던 바,19) 이때에 日本에 온 百濟僧은 6명 뿐이었으므로 受戒에 필요한 戒師 20명보다 부족하여 부득이 善信尼 등은 백제에 건너가서 정식으로 수계하지 않을수 없었으니 이들이 日本最初의 百濟留學 學問僧 16) 주 14) 와 같음. 17) 日本書紀 敏達天皇 14년조. 18) 元興寺伽藍緣起幷流記資財帳 ( 日本佛敎全書 寺誌叢書 第2). 19) 日本書紀 崇峻天皇 원년조.
6 이었다.20) 崇峻天皇 3년(590)에 백제에 유학하여 受戒한 善信尼 등 5인의 尼僧이 百濟에서 돌아 오자 尼寺로 造營中인 櫻井寺에 머물게 되었고(後의 豊浦寺), 588년에 百濟에서 온 僧侶 6인은 法師寺의 건립예정지에 假僧房을 짓고 거주하게 되었다. 4) 제 4단계 이 단계에서는 受戒를 위하여서도 필요하였지만 受戒받을 僧侶가 僧寶로서의 역할을 다 해 나가기 위하여 있어야 할 法師寺의 건립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法師寺 건립의 필요성은 이미 전 단계에서 요구되는 바였지만 전 단계에서는 法師寺의 기능을 충분히 다할 수 있는 僧寶의 바탕이 마련되지 않아 이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百濟 에 留學僧을 보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 3단계에서 이미 건립 중인 尼寺로서의 櫻井寺와 더불어 法師寺를 그 가까이에 건립 해야만 되겠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百濟에 있어 法師寺와 尼寺의 기능을 日本에 移植하고 자 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당시의 백제에 있어 法師寺와 尼寺는 오늘에 와서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大日本佛敎 全書 의 기록에 의하면, 百濟의 法師寺와 尼寺에서는 毎月 1日과 15日의 두 번에 걸쳐 白羯磨의 法會를 행하는 것 이 恒例로 되어 있다.21) 같은 지역의 僧과 尼가 15日마다 오전 중에 한 절에 會同하고 독송 한 戒律의 條目에 바탕하여 各者에 해당하는 죄를 繪像 앞에서 懺悔告白한다. 이같은 會場의 절은 法師寺와 尼寺가 交代하게 되나 法師寺와 尼寺는 서로 종소리가 들리는 곳에 있어 서로 쉽게 來往하게 된다22) 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이상과 같은 正統 百濟의 佛法을 일본에 移植하기 위하 여 法師寺의 건립이 필요하였던 바 그와 같은 法師寺의 건립을 위하여 백제의 僧侶와 技 術者를 초청하게 됨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法師寺는 오늘의 飛鳥寺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는데 1956년에서 1957년에 걸쳐 발굴조 사한 바에 의하면 창건 당시의 伽藍遺構가 발견되었다고 하며23) 同報吿에 의하면 이 절 의 伽藍配置는 塔을 중심으로 동서와 북쪽에 3金堂이 배치되어 있으며 주변에 회랑이 있 고 塔의 정면에 中門, 中金堂의 북쪽에 講堂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20) 日本書紀 崇峻天皇 3년조. 21) 주 18) 와 같음. 22) 尼等受戒法者 尼寺之內 先請十尼寺 受本戒已 郞詣法師寺 請十法師 先尼師十合廿所受本戒也 時百濟客白 我等國者 法師寺尼寺之間 鍾聲互聞 其間無難事 半月 々々日中之前往還處作也 元 興寺伽藍緣起幷流記資財帳. 23) 金正基, 佛敎美術을 通해 본 古代韓日關係에 있어 伽藍配置의 比較 ( 韓國史論 16, 國史 編纂委員會, 1986).
7 國史館論叢 第24輯 이상과 같은 伽藍配置는 八角殿址塔을 중심으로 북과 동서에 3金堂을 갖는 一塔三金堂 의 伽藍配置를 지닌 高句麗의 金剛寺로 比定되는 韓國의 平安南道 淸岩里廢寺址의 가람배 치와 같은 계열의 것임을 짐작하게 하나,24) 다른 한편 同寺址에서 百濟瓦堂과 同系列의 瓦堂이 발견되고 또한 전술한 百濟技術者에 의하여 이 飛鳥寺가 창건되었다는 문헌기록에 의하면 오히려 이 가람은 百濟系의 伽藍樣式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飛鳥寺가 완공된 후 고구려 승 慧慈와 백제 승 慧聰의 2師를 이 절에 맞이하게 되 고 渡來人系인 止利에 의하여 中金堂의 丈六釋迦金銅像이 造成되었다고 하는 바,25) 이에 의하면 飛鳥寺와 관련하여서는 고구려불교와의 연관성도 배제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飛鳥寺의 건립은 고구려 백제의 宗敎的 技術的 支援없이 불가능하였고 이 후 飛鳥寺의 經營에도 慧慈 慧聰 등의 고구려 백제승의 지도가 필요하였을 뿐 아니라 百 濟僧 觀勒을 僧尼檢校의 最高 地位인 僧正에 임명하여 僧尼의 指導를 맡게 하고 있으 니,26) 日本 最初의 佛寺라 할 수 있는 飛鳥寺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난 후에야 완공 경 영이 가능하게 되나 이상과 같은 4단계에 걸쳐 전개 발전될 수 있었던 日本 初期佛敎 發 展의 모든 역할을 百濟佛敎가 主로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2. 日本 初傳佛敎의 性格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日本初傳佛敎의 전개과정은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國家나 王室中 心의 佛敎가 아니라 蘇我氏 등의 豪族이 중심이 되어 國家佛敎가 아닌 豪族佛敎로 성장시 켜 나갔다는 데서 특이성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우리나라 佛敎는 在來의 族的 部族信仰을 佛敎가 受容 統合한다는 성격을 지니게 되었으나,27) 日本初傳佛敎는 먼저 族的部族信仰을 스스로 佛敎로 전환하고 이렇게 먼저 族的 信仰을 佛敎로 전환한 豪族이 점차 다른 豪族의 族的 信仰을 佛敎信仰으로 전환케 하 는 단계를 거쳐 비로소 國家佛敎로 발전하게 된다는 사실이 그를 일러주고 있는 셈이다. 日本佛敎를 최초로 수용한 有力豪族 蘇我氏가 건립한 飛鳥寺가 日本固有의 國神을 숭배 하는 豪族의 領有地가 아닌 古代韓國系의 渡來人을 村主로 하는 渡來人의 領有地에 세워 졌다고 함은 주목할 만하다.28) 왜냐하면 眞神原이라 불리워지는 飛鳥寺의 創建豫定地에 는 옛 부터 槻木이 있었고 이 樹林은 이 지방 사람들의 宗敎的 聖地였다고 하는 바 그렇 다면 飛鳥寺의 창건은 佛敎 以前의 樹木崇拜의 聖地에 佛寺가 세워지고 樹林信仰에서의 24) 위와 같음. 25) 法師寺의 原寺名은 法興寺였고, 오늘에 飛鳥寺라 하고 있으나 日本書紀 에 의하면 이 法興 寺에 慧慈와 慧聰의 兩師를 초청하였다고 한다( 日本書紀 推古天皇 4년조). 26) 日本書紀 推古天皇 32년조. 27) 洪潤植, 韓國佛敎史의 硏究 (敎文社, 1988) pp ) 田村圓澄, 古代朝鮮佛敎と日本佛敎 p. 49.
8 巫가 飛鳥寺의 僧尼가 되는 셈이나,29) 이와 같은 예는 古代 韓國社會에 佛敎가 수용될 당시의 사정에서도 살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즉 蘇塗信仰의 기반 위에 佛敎가 수용되 는 百濟佛敎가 그러하며,30) 新羅에서 天鏡林에 興輪寺가 세워지고, 神遊林에 四天王寺가 세워졌다고 하는 것 등이 그와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31) 古代日本에서도 樹林信仰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飛鳥寺가 세워진 聖地가 古代 韓國 系 神의 聖地였다면 日本佛敎의 始源을 이룬 飛鳥寺는 蘇我氏를 중심한 豪族의 私寺的 성 격을 지님은 말할 것도 없고 그 私寺的 性格을 지니는 飛鳥寺는 古代 韓國佛敎가 蘇塗信 仰의 바탕 위에 佛寺를 건립하는 유형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 주목을 끌게 한다. 이상과 같이 日本初期의 佛敎는 蘇我氏를 중심으로 한 豪族의 私寺佛敎로 시작하지만 反佛派인 物部氏의 豪族勢力이 붕괴하면서 보다 많은 유력한 豪族들이 蘇我氏의 지원을 받으면서 私寺를 건립하였으니 그 수는 46個寺를 헤아리게 되었다고 한다.32) 그리고 다 음의 日本佛敎는 이렇게 유력한 豪族들에 의하여 건립된 餘他의 私寺들이 다시 고구려 신 라의 佛敎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佛敎文化의 발전을 도모하게 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Ⅲ. 新羅佛敎와 聖德太子의 日本佛敎 百濟의 聖王이 536년에 처음으로 日本에 佛敎를 전한 이래 蘇我氏의 豪族이 중심이 되 어 物部氏 豪族 등의 반대를 물리치면서 596년 飛鳥寺를 창건하고 餘他의 豪族세력들도 佛寺를 짓고 私的인 불교가 점차 발전해 나가기까지 日本王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어떠 하였는가를 보면 처음 전래 당시의 欽明天皇期( )는 불교에 대하여 奉佛派와 反 佛의 중립적 입장에 있었고 敏達天皇( )은 불교를 수용할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 었다. 그 후 用明天皇( )에 의하여 비로소 崇佛되고 聖德太子의 佛敎에 이르러 國家佛敎로서의 性格을 지니게 되는데 이같은 佛敎가 白鳳 奈良佛敎로 계승되어 나간다. 1. 私寺佛敎에서 官寺佛敎로의 轉換 私寺佛敎란 國家佛敎가 아닌 豪族一家의 祈願을 담당하는 佛寺를 말하며, 官寺란 國家 佛敎 즉 國家와 人民의 安寧을 기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워진 불사를 말한다. 우리나라 의 寺院은 초기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官寺 즉 國家佛敎로 비롯되는데 비하여 日 29) 위와 같음. 30) 洪潤植, 馬韓蘇塗信仰領域에서의 百濟佛敎의 受容 ( 韓國佛敎史의 硏究, 敎文社, 1988). 31) 위와 같음. 32) 주 28)의 책 pp
9 國史館論叢 第24輯 本佛敎는 전술한 바와 같이 초창기의 寺院은 私寺에서 시작되고 이와 같은 私寺가 官寺로 전환 하는 데는 半世紀 이상의 오랜 시일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이는 예컨대 私 寺로 창건된 飛鳥寺가 官寺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면 더욱 명료해진다. 飛鳥寺가 蘇我馬子의 發願에 의한 私寺였다고 함은 日本書紀 崇峻天皇前記(587)에 밝혀지고 있는 바이지만 大化改新으로 馬子의 자손인 ( +殷)夷 入鹿親子가 멸망하게 되면 飛鳥寺 측에서는 새로운 飛鳥寺 創建의 緣起를 창작하여 皇室과의 관계를 깊게 하여 官寺的 性格의 寺院으로 변모시켜 가고 있다. 즉 飛鳥寺에서는 緣起를 다시 창작하는 과 정에서 창립자인 蘇我馬子와의 관계를 되도록 희박하게 하고 대신 飛鳥寺의 창립에 天皇 이 관여하는 것처럼 기술해 나간 사설을 몇몇 문헌기록에 의하여 살필 수 있게 되는데 그 과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제 1단계에서는 馬子가 發願者로서 蘇我氏 자신을 위하여 創寺한 것이 분명함을 밝히 고 있다.33) 제 2단계에서는 馬子가 天皇을 위하여 절을 짓는다고 發願의 主體者로 변모하고 있다.34) 제 3단계에서는 推古天皇이 發願者가 되어 馬子와 聖德太子에게 명하여 절을 짓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35) 최종단계에서는 馬子의 이름은 전연 사라지고 推古天皇의 勅願으로 절과 佛像이 조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36) 이렇게 하여 飛鳥寺는 서서히 官寺的 性格을 强化하여 이윽고 天武 9년(680)에는 官寺 인 나라의 大官大寺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하여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이르면 日本에는 飛鳥寺 藥師寺 川原寺 大官 大寺 法隆寺 등의 寺刹이 國家的 寺院인 官寺로서 경영이 이루어진다. 위에서 살핀 데로 日本佛敎에 있어 私寺가 官寺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면, 첫 단계의 私 寺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것은 發願者가 개인이고 목적하는 바도 개인의 안녕을 祈願하는 데 있다. 그러나 官寺로 이행하는 첫 단계가 國王이나 王室의 안전을 위하여 절을 짓는다 는 發願文의 변화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단계에 있었던 대표적인 사찰로 法隆寺와 四天 王寺 廣隆寺 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는 聖德太子信仰과 新羅佛 敎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法隆寺는 처음에 班鳩寺라 하였으며 1次伽藍 2次伽藍 3次伽藍이 있었음을 발굴조사에 서 확인할 수 있었으나 飛鳥寺의 기록이 日本書紀 등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음에 반하 여 法隆寺는 문헌기록에서는 자세한 것을 살필 수 없다. 그러나 유물을 통하여 1次伽藍이 虫 33) 34) 35) 36) 日本書紀 日本書紀 日本書紀 日本書紀 崇峻天皇前記. 大化 원년의 詔勒 露盤銘 前半部分. 推古 13년조, 丈六光銘, 前半部分. 推古 13년조.
10 聖德太子 자신에 의하여 창건된 것이라면 2次伽藍은 聖德太子 死後 그를 추모하여 再建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37) 한편 四天王寺는 聖德太子 자신이 건립하였다고 하기도 하며 聖德太子를 위하여 건립되 었다고도 전한다. 廣隆寺는 古代 韓國에서의 渡來人인 秦河勝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38) 이 절은 원래 처음 京都 九條의 河原縣에 있었으나 寺域이 협소하여 오늘의 太秦에 옮겨 지었다고 한 다. 그런데 이 절을 지으려 할 때 어느날 聖德太子가 諸豪族들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갖고 있는 佛像을 禮拜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주겠노라고 하였다. 이에 河勝이 聖德太子로부 터 佛像을 얻고 이를 機緣으로 廣隆寺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39) 이때에 聖德太子가 秦河勝에게 기증한 佛像이 어떤 佛像이며 또한 聖德太子는 어떤 경 로를 거쳐 이 佛像을 입수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秦河勝이 그때까지 佛法興隆의 主 導權을 장악하고 있던 飛鳥의 蘇我馬子로부터 佛像을 구하지 아니하고 班鳩地方(法隆寺) 의 聖德太子로부터 佛像을 구하였다는 사실에 주목된다. 왜냐하면 聖德太子와 廣隆寺의 秦河勝, 四天王寺의 難波吉士 등의 結合은 佛敎를 통한 것이었고 이같이 佛敎를 매개로 하는 聖德太子 支持者가 점차 넓혀져 가고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聖德太子는 推古天皇이 즉위하면서 20세의 나이로 攝政皇太子로 임명되어 정치적으로 는 冠位 12階의 制定, 17條 憲法의 制定 公布 등에 의하여 革新的인 施策을 통하여 인재 의 등용과 儀禮秩序의 확립을 기하고 貴族官僚의 德育敎化와 정치의 질적 전환을 가져오 게 하였고, 다른 한편 攝政에 취임한 推古 2년(594)에 비로소 佛法僧의 三寶興隆의 詔가 발표되자 모든 臣僚들은 君親을 위하여 다투어 절을 짓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聖德太子崇 拜의 풍조가 대두되고 法隆寺와 더불어 太子信仰을 高揚하게 되었다고 한다.40) 이와 관련하여 新羅佛敎와 聖德太子信仰과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주목된다. 우선 6 7世紀에 걸쳐 新羅에서는 日本에 佛像 등의 佛敎文物을 전하고 있는데 그 기사 를 日本書紀 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37) 法隆寺 釋迦三尊像 光背의 다음과 같은 銘文이 그를 일러주고 있다. 法興元毋一年歲次辛巳十 二月 鬼前太后崩 明年正月廿二日上宮法皇枕病弗念干食 王后仍以勞疾 並著於床 時王后王子等及 與諸臣 深懷愁毒 共相發願 仰依三寶 當造釋像尺寸王身 蒙此願力 轉病延壽 安住世間 若是定業 以背世者 徃登淨土 早昇妙果 二月廿一日癸酉 王后即世 翌日法皇登遐 癸走年三月中 如願敬造釋 迦尊像幷俠侍 及莊嚴具竟 來斯微幅 信道知識 現世安隱 出生入死 隨壽三主 紹隆三寶 遂共彼岸 著遍六道 法界含識 得脫苦緣 同趣菩提 使司馬鞍首止利佛師造 日本の古寺美術 3, 法隆寺 所收, 保育社). 38) 田村圓澄, 古代朝鮮佛敎と日本佛敎 p ) 위와 같음. 40) 위와 같음. Ⅲ
11 - 78 ① ② ③ ④ ⑤ 國史館論叢 第24輯 新羅遣奈此政奈末進調幷送佛像 眞平王 원년(579) 敏達天皇 8년 冬 10월. 新羅遣奈末竹世士貢佛像 眞平王 38년(616) 推古天皇 26년 秋 7월. 新羅遣大使奈末智洗爾 任那遣達率 奈末智並來朝 仍貢佛像一具 及金塔幷舍利 且大頂幡一 具小幡十二條 即佛像居於葛野秦寺 以余舍利金塔灌頂幡等皆納于四天王寺. 眞平王 45년(623) 推古天皇 31년 秋 7월. 大宰獻新羅調賦 幷別所獻佛像 神文王 8년(688) 持統天皇 3년 2월. 新羅獻金銅阿彌陀像 金銅觀世音菩薩像 大勢至菩薩像各一軀 神文王 9년(689) 持統天皇 3년 4월. 이상과 같이 新羅에서는 日本에 佛像 등의 佛敎文物을 수시로 보내고 있었던 사실을 알 게 되지만 이 중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前記 기사 의 사항이다. 이 기사에서는 即 佛像居於葛野秦寺 라 하여 당시에 보낸 佛像의 奉安場所가 명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葛 野秦寺는 오늘날의 京都市 太秦에 있는 廣隆寺이며 이 절은 우리나라 국보 83號인 彌勒 菩薩半跏思惟像과 꼭 같은 彌勒像이 봉안되어 있어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이 절의 창건은 前述한 기사의 佛像을 보내기 1년 전에 聖德太子가 別世하였으 므로(622) 그의 冥福을 빌기 위하여 新羅系의 豪族으로 추정되는 秦河勝이 창립한 것으 로 전한다.41) 그리고 秦河勝은 廣隆寺의 本尊佛을 彌勒半跏像으로 奉安할 것을 희망하였 고, 따라서 新羅의 眞平王에게 그같은 불상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 신라에서 보낸것이 前記 기사의 佛像이며 그것이 또한 오늘에 전하는 廣隆寺의 彌勒菩薩半跏思惟像으로 밝혀 지고 있다.42) 한편 眞平王으로부터 彌勒像과 함께 보내온 金塔 舍利 灌頂幡 등은 難波의 四天王寺에 獻納되었다고 하는데 이같은 사실은 蘇我氏나 飛鳥寺 등을 통하여 百濟관계의 佛敎文物이 전하는 것과는 달리 太秦의 廣隆寺와 難波의 四天王寺에는 新羅의 眞平王으로부터 직접 佛像 佛具 등이 獻納되고 있어 이 점이 주목된다. 여기에는 彌勒信仰을 둘러 싼 신라와 일본과의 새로운 佛敎文化交流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眞平王으로부터 보내와 四天王寺에 獻納된 金塔 舍利 등은 四天王寺御朱印緣起 에서 말하고 있는 金塗六重寶塔壹基 로 알려지고 있는데43) 同緣起에 의하면 金堂의 本尊佛은 金銅救世觀音像一體이나 太子傳古今目錄抄 所引의 大同緣起 에는 彌勒菩薩一軀蓮 華座 로 되어 있는 彌勒菩薩像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彌勒像에 대해서는 百濟國王이 聖德 太子를 흠모하여 조성한 像이라는 寺傳이 있지만 이상의 四天王寺 廣隆寺의 신라와의 관 ③ 41) 黃壽永, 初期佛像樣式의 交流 ( 韓國史論 16, 國史編纂委員會, 1986). 42) 위와 같음. 43) 田村圓澄, 古代朝鮮佛敎と日本佛敎 p. 106.
12 계에서 보면 백제보다는 오히려 신라와의 관계를 중시하여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四天王寺는 聖德太子의 창건 또는 聖德太子를 위하여 창건된 것이라는 寺傳이 있는 44) 데 이는 飛鳥寺가 私寺에서 官寺로 옮아가는 과정에서 創建者의 發願이 바뀌게 된 것 과 같은 類型으로 생각된다. 즉 四天王寺도 官寺로서 자리를 굳히기 전에 私寺로서의 四 天王寺가 있었다는 것이다. 田村圓澄은 이 私寺로서의 四天王寺는 難波에 本據地를 갖는 難波吉士에 의하여 창건되 었다는 것이라 하고 있으며, 한편 難波吉士의 吉士 는 新羅의 官等 17官階 中 第 14位의 吉士 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여 難波吉士는 新羅系人이라 하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難波 吉士는 6세기 후반부터 7세기에 걸쳐 日本朝廷의 對新羅交涉이 활발해지자 外交使節로서 신라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45) 日本書紀 에 의하면 610년에 新羅 任那의 使臣이 入京하였을 때 膳大伴은 任那의 使臣을 맞이하는 莊馬長에, 新羅使臣을 안내하는 役을 秦河勝이 맡고 있다.46) 그런데 法隆寺도 再建法隆寺 이전에 私寺的 성격을 지니는 班鳩寺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私寺로서의 法隆寺의 前身은 班鳩地方(奈良縣 生駒郡 班鳩町)에 本據地를 갖는 膳氏豪 族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47) 膳氏家는 일찍이 古代韓國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膳班鳩는 464년에 高句麗 軍士 들에게 포위된 新羅王을 구출하기 위하여 難波吉士赤目子와 같이 出兵하고 있으며 膳巴提 便은 545년에 百濟에 건너간 바 있다. 또한 膳傾子는 570년에 高句麗使者를 饗應하는 役 을 맡기도 하는 등 古代韓國의 事情에 밝은 開明豪族이었다. 그리고 膳傾子는 蘇我馬子와 같이 反佛派의 物部安屋의 討伐에 참가한 奉佛派였다.48) 한편 膳氏와 聖德太子와의 관계를 보면 膳傾子의 딸이 聖德太子의 妃이기도 하지만 聖 德太子가 605년에 班鳩에 그 宮을 옮기게 되는 동기가 膳氏에 의한 班鳩의 開明性에 있 었다는데 더 중점을 두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상에서 보면 班鳩의 膳氏, 難波의 難波吉士, 太秦의 河勝은 모두가 護佛의 豪族으로 일찍부터 私寺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이들 豪族 中 難波吉士와 河勝 등은 新羅系人이라 는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古代韓國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膳氏는 韓國事情을 잘 알고 있어 開明派 豪族으로 前記 두 豪族과 뜻을 같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聖德太子와 膳氏는 佛敎를 전제로 한 開明性으로 인해 깊은 연관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이상을 다시 요약해 밀하면 聖德太子, 膳氏, 難波吉氏, 河勝氏 등은 佛敎를 기반으 44) 위와 같음. 45) 위와 같음. 46) 日本書紀 推古天皇 18年조. 47) 田村圓澄 古代朝鮮佛敎と日本佛敎 p ) 日本書紀 用明天皇 2年조 및 주 47) 참고.
13 國史館論叢 第24輯 로 서로 연결될 수 있었고, 한편 그 결합은 百濟佛敎를 바탕으로 하고 있던 蘇我氏에 의 한 佛敎와는 달리 新羅와 직접 연결된 새로운 불교에 의한 結合(開明性)이었다. 그 새로운 불교는 彌勒沸敎를 지향하고 있었으며 그와 같은 佛敎는 私寺佛敎를 극복하 고 公的인 國家佛敎를 지향하는데 있었으며 여기에 聖德太子에 의한 국가불교의 전개가 있게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2. 新羅佛敎와 聖德太子信仰 필자는 韓國佛敎史에 있어 初期佛敎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 彌勒思想이었음을 누차 강조 하여 온 바 있으나,49) 初期日本佛敎에 있어서도 彌勒佛 彌勒菩薩像 등이 자주 등장하고 있어 이 점이 주목된다. 즉 敏達天皇 13년에 鹿深이 百濟에서 彌勒石像 一體를 모셔와 善 信尼 등으로 하여금 供養禮拜케 한 사실이 그와 같은 것이며,50) 또한 최초에 百濟가 日 本에 佛敎를 전한 때에도 太子像一軀를 보냈다고 하는 바51) 이 太子像도 彌勒像을 指稱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다른 한편 聖德太子와 佛敎를 통한 깊은 관계에 있던 四天王寺, 廣隆寺 등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彌勒像이 本尊으로 奉安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韓國이나 日本이 다같이 初期佛敎에서 彌勒信仰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彌勒信仰은 死後 미륵이 수행 중인 兜率天에 往生함을 목적으로 하는 上生信仰과 彌勒 이 娑婆世界에 下生하기를 기다리는 下生信仰으로 나누어진다.52) 여기 前者는 彌勒菩薩 이 信仰의 대상이 되고 後者는 彌勒佛이 信仰의 대상이 된다.53) 그리고 上生信仰이 개인 의 문제에 관계되는 신앙형태를 지닌다면 下生信仰은 國土와 全國民에 귀결되는 信仰形態 를 지닌다.54) 다른 한편 上生信仰은 戒律의 준수를 강조하지만 下生信仰은 彌勒에의 禮 敬만을 강조 한다. 그리고 여기 前者는 戒律重視라는 데서 轉輪聖王思想과 연결되고,55) 後者는 彌勒下生이 도래하였을 때의 세속의 정치는 轉輪聖王에 의하여 다스려진다는 데서 轉輪聖王과 연결된다.56) 여기서 보면 彌勒信仰은 上生信仰이나 下生信仰이 모두 轉輪聖 49) 洪潤植, 三國時代의 佛敎受容과 社會發展의 諸問題 ( 馬韓 百濟文化 8, 1985). 50) 日本書紀 敏達天皇 13년조. 51) 元興寺伽藍緣起幷流記資財帳 ( 日本佛敎全書 ). 52) 洪潤植, 三國時代의 佛敎受容과 社會發展의 諸問題 ( 馬韓 百濟文化 8, 1985). 53) 洪潤植, 彌勒思想의 造形化와 그 信仰 ( 彌勒思想의 現代的 照明, 法住寺, 1990). 54) 上生信仰이 個人의 修行 등 人格的 具顯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 下生信仰은 國土的 具顯에 목적 을 두고 있다고 여겨진다. 55) 洪潤植, 韓國佛敎史의 硏究 p ) 爾時法王出現各曰蠰佉(sanka) 正法治化 七寶成就 所謂七寶者 輪寶象寶馬寶 等所謂七寶 鎭此 閻浮地內 不以力杖 自然靡伏 (以上 彌勒上生經 ). 또한 彌勒下生成佛經 에서는 其國爾 時有 轉輪王 各曰蠰佉 有四種兵以威武治四天下 라 하고 있다( 新修大藏經 권14).
14 王思想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新羅의 彌勒信仰은 上 下信仰이 공존하고 있다. 즉 彌勒半跏像을 조성하고 八關齋戒 등 戒律을 중시하는 新羅佛敎는 上生信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眞慈 등에 의하여 彌勒의 下生을 發願하여 彌勒이 花郞으로 化現한다는 것 은 下生信仰의 일단으로 보아진다.57) 그런데 여기 前者는 주로 貴族階層에 의하여 유행하고 後者는 王權을 중심으로 전개되 었으며 두 형태의 彌勒信仰은 모두가 正法政治에 필요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初期佛敎의 사회적 전개가 轉輪聖王思想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함은 眞興王의 행적에 서도 살필 수 있다. 즉 眞興王은 두 太子를 銅輪, 舍輪 또는 金輪으로 命名하고 있는데,58) 이는 轉輪聖王 이 그 威德에 따라 金輪王 銀輪王 銅輪王 鐵輪王 등으로 四洲를 다스린다고 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한편 眞興王의 순수비에 나타난 巡行 역시 阿育王이 행한 轉輪聖 王으로서의 巡行과 같은 성격에서 이해된다. 즉 阿育王은 轉輪聖王의 입장에서 다르마정 치를 행하면서 法巡行을 자신의 실천사항으로 삼았는데 巡行의 주된 목적은 沙門들과 會 見하고 그들에게 布施를 베푸는 일과 각지의 대중들을 접촉하면서 다르마정치에 대한 의 견을 수렴하는 것이었다.59) 眞興王의 순수비가 정복을 단행한 각 지방의 백성들을 직접 파악하고 이들 지역사회에 질서를 부여한다는데 일차적 의미가 있지만 이같은 巡狩에 法師를 동행시키고 있음은 阿 育王에 의한 다르마정치의 순행을 방불케 하고 있다. 이상에서 初期 新羅佛敎의 사회적 전개는 轉輪聖王思想의 실천에 있었고 그와 관련하여 彌勒信仰이 성행하게 되었던 것이라 믿어진다. 그리고 특히 新羅의 彌勒信仰은 花郞이 곧 彌勒이요, 半跏思惟像이라는 信仰形態를 전개시켰다는 점에서 특이점을 찾아볼 수 있고, 그같은 발상은 轉輪聖王의 입장에서 正法政治를 하려 하였던 眞興王에 의하여 육성되었다 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百濟에도 彌勒信仰이 크게 성행하였다. 그것은 三國遺事 의 기록과 오늘에 전하는 益山 彌勒寺의 三院伽藍 遺蹟에서 下生信仰의 盛行相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 이다.60) 그런데 이같은 下生信仰의 道場이 武王代에 크게 경영되기 전 百濟에는 彌勒上 生信仰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彌勒寺의 緣起說話가 전해주고 있어61) 百濟에도 彌勒上 下 57) 또한 金庾信을 國仙으로 받들고 그 휘하에 모여드는 郞徒들을 龍華之徒 라 하였음도 下生信仰 의 형태로 생각된다( 三國史記 권41, 列傳 1 金庾信上). 58) 三國史記 新羅本紀 眞興王. 59) 長阿含 권7, 轉輪聖王修行經 및 中阿含 권15, 轉輪聖王經. 場本啓祥 アシヨーカ王碑文 (第三文明社, 1976). 60) 洪潤植, 益山彌勒寺 創建背景을 通해 본 百濟文化의 性格 ( 馬韓 百濟文化 6, 圓光大 馬 韓百濟文化硏究所, 1983). 61) 三國遺事 武王조.
15 國史館論叢 第24輯 生信仰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百濟佛敎의 戒律上 彌勒信仰 과의 관계도 謙益의 事跡에서 살필 수 있고62) 한편 聖王 法王 등에 의한 戒律思想도 轉 輪聖王으로서 다르마정치를 수행하는데 필요하였던 것이라는 사실에 접근할 수 있게 된 다. 다만 新羅 彌勒信仰에서 찾아볼 수 있는 花郞이 彌勒으로 化現한다는 형태는 百濟에 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다른 한편 日本에 있어서는 新羅系 渡來氏族인 難波吉士와 秦河勝 등의 秦氏에 의하여 彌勒上生信仰의 대상인 彌勒半跏思惟像을 新羅에서 보내와 四天王寺와 廣隆寺에 本尊으로 奉安하게 되었다고 함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으나 이같은 彌勒半跏像이 新羅에서는 花郞 으로 崇仰되고 있었음에 비하여 日本에서는 半跏像信仰은 聖德太子信仰으로 崇仰되었다고 하는 田村圓澄의 論證은 무척 주목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63) 왜냐하면 이같은 信仰形 態는 彌勒 곧 花郞이라고 하는 新羅의 彌勒信仰에서 연유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半跏像 곧 聖德太子信仰의 信仰形態를 지니는 寺院은 前述한 四天王寺 廣隆寺 이외에 法隆寺 中宮寺 法起寺 橋寺 葛木寺 등의 7個寺가 8세기 전반에 확대되고 있었음을 法隆 寺伽藍緣起幷流記資財帳 등에서 살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聖德太子信仰이 확대되어 가는 가운데 飛鳥寺는 여기서 의식적으로 제외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를 끌게한다. 왜냐하면 半跏像 곧 聖德太子信仰은 百濟系 佛敎 의 강한 영향하에 存立되어 온 飛鳥寺를 무시하는데서 성립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 고 이는 天智 9년(670) 法隆寺가 燒失되기 전에 이미 성립되고 있었고,64) 이 시기를 전 후하여 日本佛敎에 대한 新羅佛敎의 영향이 百濟를 대신하여 나타나게 되었다고 보기 때 문이기도 하다. 新羅의 彌勒半跏像에 대한 신앙은 上生信仰이었고 또한 이같은 신앙이 花郞에 대한 崇 仰이었다고 함은 전술한 바이나 같은 시기의 新羅에서는 이같은 上生信仰은 下生信仰을 짝하고 있었다는데 특징적 요소를 살필 수 있게 된다. 이를 花郞의 입장에서 보면 花郞은 개인적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上生信仰) 龍華香徒라 일컬어졌던 花郞이 이 끄는 花郞集團의 결합을 이루기도 하였음이 그와 같은 것이다(下生信仰).65) 그러나 日本 의 半跏像 곧 聖德太子信仰 의 패턴은 新羅의 그것과 비교하면 聖德太子 개인의 숭배에 머무는 上生信仰의 단계에 있었던 바 그것은 아직도 전술한 聖德太子 숭배의 寺院이 官寺 로서의 위치를 구축하지 못하였던 私寺의 단계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같은 聖德太子信仰은 法隆寺 燒失年代인 670년을 경계로 하여 큰 변화를 일 으키게 된다. 즉 飛鳥時代를 마감하고 白鳳期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 62) 李能和, 朝鮮佛敎通史 彌勒佛光寺조. 63) 田村圓澄, 半跏思惟像과 聖德太子信仰 ( 韓日古代文化交涉史硏究, 乙酉文化社, 1974). 64) 위와 같음. 65) 주 52) 참조.
16 면 豪族에 의한 私寺佛敎時代에서 國家에 의한 官寺佛敎에로의 移行을 뜻한다. 그리고 個 人崇拜 단계의 聖德太子信仰이 日本全域을 수용의 기반으로 하는 公的인 신앙의 대상으로 전환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계의 日本佛敎의 대전환에도 新羅佛敎와의 깊은 관계가 존속되고 있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3. 王權의 確立과 國家佛敎의 發展 法隆寺의 金堂에 奉安된 金銅三尊佛像은 推古 29년(621)에 별세한 聖德太子를 追善하 기 위하여 622년에 韓國系 渡來人으로 알려져 있는 佛師에 의하여 造佛되었는데66) 이 佛 像의 光背에 다음과 같은 銘文이 남아 있다.67) 法興王 31年(推古 29,621)에 聖德太子의 母后가 死亡하였다. 다음해 정월 22일에는 太子 가 침상에 놓고 잇달아 妃인 膳郎女가 發病하였다. 王后 王子 諸臣들은 깊은 슬픔에 잠겨 太 子와 等身의 釋迦像의 造成을 發願하고 太子의 轉病延壽를 기원하고 만약 定業이면 淨土에 올 라 깨달음에 이르기를 念願하였다. 그 효과가 없이 2월 21일에 太子가 죽었다. 이리하여 癸 未년 3월중순에 釋迦像 俠侍 및 莊嚴具가 완성되었다. 佛師는 司馬鞍首止利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田村圓燈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68) 먼저 法興의 年號를 聖德太子의 行歷과 관련하여 해석하고 佛法隆興에 유래하는 法興年 號는 法王 즉 日本의 釋迦인 聖德太子로 보아야 비로소 그 뜻이 살아난다고 하고 있다. 釋迦=悉達太子는 19세에 出家入山하였으나 聖德太子의 19세는 崇峻天皇4년 곧 法興元年 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法興年號는 聖德太子信仰이 발전하고 太子를 日本의 釋迦 로 信奉하게 된 단계에서 法隆寺의 僧侶에 의하여 사용되었다고 하고 法興年號를 전한 두 개의 자료, 伊豫溫岡碑文 과 前記 法隆寺 金銅釋迦像光背銘 이 모두 聖德太子를 중심에 두고 또 太子를 法王大王 法皇이라 불렀다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聖德太子=釋迦라는 생각은 新羅 善德女王 이후에 전개된 新羅王=釋迦佛 이라는 발상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 이 점이 주목된다. 필자는 新羅佛敎의 발전단계를 法興 眞興王代와 眞平王代 그리고 善德女王 이후의 3단 계로 나누어 생각해 왔거니와69) 聖德太子=釋迦라는 發想은 이같은 新羅佛敎에 대비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66) 洪潤植, 日本法隆寺金堂壁畵에 보이는 韓國文化의 影響 ( 考古美術 185, 韓國美術史學 會, 1990). 扶桑略記 에 止利師의 祖父인 司馬達의 아들 多須奈를 百濟佛工鞍即多須奈 라 하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67) 주 37) 참조. 68) 주 63) 참조. 69) 洪潤植, 韓國佛敎史의 硏究, pp
17 國史館論叢 第24輯 초기의 新羅佛敎는 靈異力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 靈異力이 보다 높은 것이라 믿게 된 佛敎를 수용한다(法興王代). 이같은 佛敎는 王室을 중심으로 수용되고 王室의 權威를 높 이는 佛敎로 전환되어 彌勒下生信仰에 입각한 轉輪聖王思想으로 전개되었다(眞興王代). 한편 貴族集團의 양해를 거쳐 수용된 불교는 貴族集團의 修行德目으로 전개된다. 이같 은 佛敎는 화랑의 修行德目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결국 八關齋 등의 修行實踐에 의 하여 身分的 品位를 높일 수 있는 귀족적 종교로 생각하였으며 이같은 신앙은 彌勒上生信 仰에 근거하고 있었다(眞興王代).70) 이상과 같이 新羅의 初期佛敎는 彌勒思想을 중심으로 王室과 貴族社會에서 그 사회적 전개를 보게 되지만 眞平王代가 되면 中國에 다녀온 圓光法師에 의하여 世俗五戒를 통해 보다 폭넓은 階層에 佛敎가 수용되었다.71) 그것은 眞興王代의 佛敎가 王室과 貴族層에 彌勒思想이라는 共同의 기반이 있었지만 王室側은 轉輪聖王思想에 의거한 다르마정치의 실현을 강조하고 있었음에 반하여, 貴族層은 身分的 品位를 높인다는 信仰動機를 지니고 있어 상호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데 眞平王代 圓光法師의 世俗五戒에 의한 佛敎는 이상과 같은 信仰動機의 對立相을 해소하고 사회적으로 共同的인 信仰基盤을 마련하고 信仰階層을 한층 확대해 나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圓光法師 자신의 신분적 제약에서 오는 文化運動이었다고도 할 수 있 겠으나,72) 한편 印度의 阿育王이 다르마정치를 수행함에 있어서도 彌勒思想에서 볼 수 있는 八關齋戒 具足戒 十善戒 등의 出家者 중심의 戒律을 그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在 家者 중심의 戒律을 중심하였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新羅에서는 眞平王代 의 圆光法師에 이르러 비로소 일반 民衆層에까지 기반을 둔 理想社會 建設運動이 일어났 던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특히 圓光의 世俗五成가 花郞의 倫理德目으로 중요시 되었다고 함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이때의 불교는 한층 더 사회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圓光法師의 大乘佛敎에 대한 諸說은 사회적 의미를 더욱 크게 지 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73) 한편 이와 같은 보다 넓은 계층으로 확대된 불교의 사회적 전개가 있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新羅社會는 다시 華嚴思想을 수용하고 그 사회적 전개를 보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新羅에 華嚴思想이 전래된 것은 慈藏의 入唐求法에서 비롯된다. 慈藏은 唐에서 돌아와 皇龍寺에 九層塔을 세울 것을 권유하여 重建伽藍을 이룩하고 江原道의 五臺山을 中國의 五臺山에 비정하여 眞身이 常住하는 곳이라 믿고 東 西 南 北 中의 五方에 각기 修道道場 70) 위와 같음. 71) 위와 같음. 72) 위와 같음. 73) 李基白, 圓光과 그의 思想 ( 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 韓國硏究院, 1978). 三國遺事 圓光西學조. ① ②
18 을 마련하였다.74) 또한 자신의 生家를 개조하여 華嚴經을 講하는 등 華嚴思想의 사회적 전개를 이끌어 나갔다.75) 그러면 다음에는 지금까지의 彌勒思想을 대신하여 華嚴思想을 수용하게 된 역사적 의의 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新羅 彌勒信仰의 사회적 전개의 表相으로 眞興王代의 興輪寺와 1次伽藍으로서의 皇龍 寺가 건립된 것이라면 善德女王代에 華嚴思想을 수용하여 그 사회적 의미를 표현하여 건 립된 것이 九層塔과 重建伽藍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皇龍寺라 할 수 있다.76) 그런데 이와 같은 文化轉換은 社會變動과 軌를 같이하고 있다. 즉 그것은 華嚴思想을 수용하여 重建伽 藍으로서의 皇龍寺를 건립함에 있어 慈藏이 中國의 五臺山에서 文殊菩薩을 親見하였다는 아래의 기사에서 알 수 있다.77) 너의 國王은 곧 天竺의 刹帝利種王으로서 미리 佛記를 받았다. 고로 특별한 인연이 있으니 東夷共工의 種族과는 다르다 고 하였다는 점과 또한 慈藏이 中國의 太和地에서 행한 神人과의 대화에서 神人이 말하기를, 너의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아서 德은 있으되 위엄은 없으므로 이웃나라가 도모하려는 것이니 빨리 本國에 돌아가서 九層塔을 이룩하면 九韓이 와서 朝貢하여 王業이 길이 太平할 것이요 하였다는 사실 등이 주목된다. 왜냐하면 이같은 慈藏에 의한 新羅華嚴思想 수용의 緣起說 話 등은 모두가 新羅王權의 尊嚴性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 彌勒佛敎時代의 新羅國王은 轉輪聖王으로 상징 되었으나 華嚴思想의 수용은 新羅의 王 을 釋迦佛에 비기게 되었음이 그와 같은 것이다. 金哲埈은 新羅佛敎가 王室이 곧 利帝利種이라는 眞種說을 내세우면서 성립시킨 王即佛 思想이 보다 體質的인 것으로 깔려 있었다고 하고 있으며,78) 李基自은 眞興王代에는 轉 輪聖王에 비견되던 王權이 眞平王代가 되면 釋迦佛로 여겨지는 變化를 초래한다 하고 있 음에서 모두 이러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79) 그런데 필자는 여기에 첨가하여 다음과 같은 74) 三國遺事 臺山五萬眞身조. 75) 洪潤植, 新羅華嚴思想의 社會的 展開와 曼茶羅 ( 三國遺事와 韓國古代文化, 圓光大學校 出版局, 1985). 76) 洪潤植, 新羅皇龍寺經營의 文化的 意味 ( 馬韓 百濟文化 7, 圓光大學校 馬韓百濟文化硏 究所, 1984). 77) 三國遺事 慈藏定律조. 78) 金哲埈,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產業社, 1982) p ) 李基白, 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 pp
19 國史館論叢 第24輯 생각을 하게 되었다. 金哲凌은 新羅王權에 대한 王即佛思想이 高句麗를 통한 北方佛敎의 영향이라 하였으 80) 나 그에 곁들여 慈藏에 의한 華嚴思想의 수용을 고찰함으로써 王即佛思想은 보다 설득 력을 지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李基白은 新羅의 王權이 眞平王 때에 와서 釋 迦佛로 비견되었다고 하고 있으나 그보다 늦은 善德女王代로부터라고 생각된다. 李基白은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들어 그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데,81) 여기서 보아도 釋迦佛은 釋迦의 父인 白淨(眞平王)과 摩耶夫人(金氏)의 子女인 善德女 王이 된다. 善德女王代부터 新羅의 王權이 釋迦佛로 상징되었음을 앞에서 살핀 慈藏의 求法入唐時 文殊로부터 받은 新羅國王은 天竺利帝利種族이라는 敎示와 皇龍寺 九層塔의 緣起說話에서도 살필 수 있는데82) 이들 因緣說話들이 모두 華嚴思想에 근거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華嚴思想이야말로 新羅의 國王이 釋迦佛일 수 있는 근거를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즉 華嚴思想에 의하면 그 主佛은 法身毘盧舍那佛이지만 釋迦佛은 百億化身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化身佛로서의 釋迦佛은 얼마던지 出現이 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新羅의 國王이 釋迦일 수 있음은 華嚴思想의 三身佛體系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新羅王權의 상징이 轉輪聖王에서 釋迦佛로 바뀌었다고 한다면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高翊晋은 말하기를, <그림> _0089.J PG</그림> 彌勒佛이 있기 위해서는 그 앞에 釋迦佛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轉輪聖王이 나오기 위해서 는 그 앞에 阿育王이 있어야 한다 고 한 대목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83) 즉 三國에 佛敎가 수용된 初期의 國王이 轉輪聖王으로 상징되기 위해서는 阿育王說話를 80) 주 78) 참조. 81) 주 79) 참조. 82) 三國遺事 皇龍寺九層塔조. 83) 高翊晋, 韓國古代의 佛敎思想 ( 哲學思想의 諸問題 ) p. 194.
20 수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하였듯이 彌勒佛을 알기 위해서는 釋迦佛을 알지 않고서는 안된다 는 것이다.84) 그리하여 결국 彌勒思想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진 轉輪聖王보다는 彌勒思想이 있게 한 근원으로서의 釋迦佛로 되돌아간 존재로 國王을 비유함으로써 더욱 왕권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감히 말하고 싶은 것은 이같은 왕권 에 대한 佛敎的 象徵이 新羅王族에 대한 聖骨 眞骨의 구분을 있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丁仲焕교수는 新羅聖骨考 에서 聖骨에 대하여 정치적인 면 사회적인 면 문화적인 면 에서 고찰하였는데 문화적인 면에서 살핀 내용 중 聖骨槪念의 성립을, 佛敎가 公認된 이후 佛敎의 宗敎的 神聖觀念에서 도출되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여건을 발판으로 삼아 王室의 骨品을 聖骨이라 칭한 것이라 하겠으니 遺事에서 中古期에 해당하는 法 興王으로 부터 眞德女王까지를 聖骨이라 함은 타당한 說이라 하겠다85) 하고 있는데 필자는 여기에 전적으로 賛同하는 바이지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면 王權 이 轉輪聖王으로 상징되던 시기를 聖骨로, 다른 한편 釋迦佛로 상징되기 시작한 이후를 眞骨이라 하게 된 것이라 믿고 싶다. 즉 聖骨의 聖은 轉輪聖王의 聖에서 취한 것이며 眞 骨의 眞은 彌勒佛이 있게 한 釋迦佛이 眞으로 상징되었거나 아니면 利帝利種이라는 眞種 說의 眞에서 취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상에서 新羅의 王即佛思想은 中國에서 華嚴思想을 수용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면 日本에 있어 聖德太子 곧 釋迦佛의 信仰形態는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이같은 信仰形態는 新羅의 王即佛思想과 일단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670년대 이후 日本은 白鳳期에 접어 들면서 新羅와 일본과의 友好關係가 계속되고 일본의 佛敎界는 新 羅에의 求法活動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었다. 즉 당시의 日本의 學門僧 중 唐에 유학한 자 는 불과 2명 밖에 안되지만 新羅에는 觀常 雲觀 智隆 明聰 觀智 辯通 등 13명을 헤아리게 됨이 그를 일러주고 있다.86) 그리하여 國家意識이 점차 성장되고 있던 일본이 新羅에서 王即佛思想을 수용하여 한편으로는 國家佛敎를 발전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통한 律 令國家의 체제를 확립해 나갔던 것으로 믿어진다. 日本王室이 직접 佛敎를 수용한 기사는 이보다 앞선 舒明天皇 11년(639)에 百濟川쪽에 百濟宮과 百濟寺를 세우고 九層塔을 세웠다는 데서 찾을 수 있으나87) 이는 아직 國家佛 敎로서의 단계에 접어든 官寺로서가 아닌 豪族의 私寺에 대비되는 王室의 祈願을 담당하 84) 위와 같음. 85) 丁仲煥, 新羅聖骨考 ( 李弘稙博士回甲紀念 韓國史學論叢, 1969). 86) 三國史記 海東高僧傳 三國遺事 唐西域求法高僧傳 宋高僧傳 明天皇조. 田村圓澄, 古代朝鮮佛敎と日本佛敎 pp ) 日本書紀 舒明天皇 11년조. 日本書紀 舒
21 國史館論叢 第24輯 는 王室의 私寺이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豪族의 私寺로서 대표적인 寺院이었던 飛鳥寺의 一塔三金堂 伽藍樣式에서 그 塔이 五層이었음에 비하여88) 王室의 私寺인 百濟寺의 塔을 九層塔으로 하였다는 것은 王室의 權威를 높이려 한 의도가 엿보이는데 이는 皇龍寺九層 塔을 세우게 된 동기가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는 사실과 결부시켜 생각하면 聖德 太子 곧 釋迦思想 이 성립되기 전부터 王權强化를 위한 新羅的 영향이 있어왔음을 살필 수 있게 된다. 이상과 같이 聖德太子를 釋迦에 對比시키는 것은 新羅의 王即佛思想에 영향받은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으나 다른 한편 兩者間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즉 新羅 에서는 王即佛 이 었음에 비하여 일본에서는 太子即佛 이 었음이 그것이다. 이를 田村圓 澄은 聖德太子 곧 半跏思惟像에 대한 私的인 信仰이 聖德太子 곧 釋迦(法皇)의 公的 신앙 으로 발전 전개되어 나간 것이라 하고,89) 洪淳昶은 法王인 聖德太子가 天皇의 자리에 있 었더라면 응당 法興天皇이라는 諡號를 붙였을 것이나 攝政에 그쳤기 때문에 後世 佛法隆 盛의 法王으로서의 聖德太子를 기리 숭앙하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90) 그러나 日本佛敎가 王即佛 이 아닌 王太子即佛 에 머물고 만 것은 위와는 다른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앞에서도 살핀 바 있지만 新羅에서는 일찍이 貴族層에 크게 유행하였던 私的인 佛敎로 서의 彌勒上生信仰에서 彌勒 즉 花郞의 信仰形態를 성립시키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 國家 社會的인 佛敎로서 彌勒下生信仰에서 彌勒下生의 분위기 조성을 위한 轉輪聖王으로서의 國王의 위치가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公的인 國王中心의 佛敎와 私 的인 貴族中心의 불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日本佛敎에 있어 半跏像 곧 聖德太子의 信仰 形態는 彌勒上生信仰의 패턴으로 볼 수 있으나 이와 같은 個人신앙의 上生信仰이 유 행하고 있을 때 日本에서는 국가적 사회적 신앙으로서의 彌勒下生信仰의 발전 전개가 없 었다. 그리하여 新羅에서는 다음 단계에 이르러 公的인 國家佛敎를 발전시키고자 하였을 때는 公私의 並存佛敎에서 公的佛敎를 선택 강조해 나가는 형태를 지니고 있었고 日本佛 敎에서는 彌勒菩薩即聖德太子 의 私的 信仰形態를 公的 國家的인 信仰形態로 전환함에서 聖德太子 곧 釋迦佛 의 패턴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日本佛敎의 이와 같은 轉換의 계기가 비록 新羅佛敎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結果論的 意味는 상당한 차이를 나 타내고 있다. 즉 新羅佛敎가 上向的 意味를 지니는 것이라면 日本佛敎는 下向的 의미를 지니게 되었음이 그를 일러주고 있는 셈이다.91) 그리하여 이 단계의 佛敎를 전환시킴에 88) 田村圓澄, 古代朝鮮佛敎と日本佛敎 p ) 주 58) 참조. 90) 위와 같음. 91) 新羅의 善德女王代에 王即佛思想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法興王 이래 國王에 의한 轉輪聖王的 입 장에서의 佛敎隆興政策이 있었옴에 비하여 日本의 王權은 佛敎傳來 이후 중립적 입장 혹은 반 대 입장을 취하다가 佛敎를 王權과 관련을 갖는 官寺佛敎로 전환시키면서 곧바로 聖德太子 곧
22 있어 新羅에서는 華嚴思想의 수용이 요구되었고, 일본에서는 法華思想의 수용이 필요하였 던 것이라 보아진다. 즉 日本書紀 가 전하는 聖德太子의 法華經 講說이나 道慈가 法隆 寺에 초청되어 法華經을 講하였다는 것은 그와 상관관계를 갖는 것으로 생각되며,92) 日 本이 華嚴思想을 수용하여 국가운영 원리로 삼게 되는것은 東大寺와 國分寺를 경영하는 奈良時代에 와서야 비롯되기 때문이다. Ⅳ. 韓國佛敎의 受容基盤과 日本佛敎 1. 古代韓國의 土着信仰과 日本佛敎 초기에 佛敎를 수용한 日本의 社會階層이 韓國系 渡來氏族과 깊은 관련을 갖는 豪族이 거나 아니면 韓國系의 渡來系 氏族集團이었다는 사실은 日本佛敎의 受容形態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생각한다. 즉 百濟의 聖王이 전해준 불교를 놓고 反佛派인 物部氏와 대립하면서 佛敎를 적극적으 로 수용한 蘇我氏는 飛鳥地方에 거주하고 있는 渡來人集團과 깊은 연관을 가지면서 古代 韓國文化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지니고 있었으며 한편 조금 뒤늦게 新羅로부터 직접 佛敎를 받아들인 難波의 難波吉士, 太秦의 秦河勝 등이 모두 新羅系 移住民이었다는 것이 그를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日本 최초의 사원인 飛鳥寺가 反佛派들에 의하여 崇拜되던 日本國神의 聖地에 세 워지지 않고 韓半島系神의 聖地에 세워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는 日本 佛敎의 受容基盤부터가 古代 韓國文化의 영향이라 할 수 있고 따라서 古代韓日佛敎文化의 交流問題는 聖王代에 百濟에서 불교가 전하기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에서의 渡來人集團에 의하여 일본에 수용된 불교를 문제시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韓日間의 교류의 始源은 멀리는 石器時代로 거슬러 을라가고,93) 三國志 東夷傳 등 의 문헌자료에 의하면 3세기 이후부터 빈번한 접촉이 있어 왔고, 5 6세기에 접어들면 大和朝廷과 古代韓國과의 교류가 더욱 빈번해져 佛敎信仰을 지닌 渡來人集團이 증가하고 韓國系 豪族의 수도 증가되어 이들에 의한 불교가 서서히 古代日本社會에 숨어들고 있었 던 것이라 믿어진다. 釋迦佛信仰形態를 성립시키고 있다. 92) 王命 能悟涅槃常住 五種佛性之理明開法華三車 權實二智之趣 ( 日本書紀 권22, 上宮聖德法 王帝說). 93) 金元龍, 在日韓國古代文化財現況調査の意義 ( 韓國文化財調査硏究學術會議 發表要旨, 淨 土宗寺院所藏 韓國文化財日韓共同調査硏究會, 1990).
23 國史館論叢 第24輯 百濟에 가서 처음으로 受戒하였다는 善信尼 등의 比丘尼는 受戒하기 전에는 巫堂으로서 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9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日本佛敎의 수용기반부터가 韓國文化와의 교류관계에서 찾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韓國의 土着信仰이 超越神的 巫俗信仰이라면 日本의 土着信仰은 閉鎖的 지역옹호神으로서의 氏神信仰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95) 따라서 飛鳥寺가 國神의 聖地에 건립되지 않고 韓半島系神의 聖地 에 세워졌기에 巫的 機能을 지닌 僧尼가 필요하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古代韓國佛敎 수용의 기반은 蘇塗信仰形態에서 찾을 수 있다.96) 蘇塗란 魏志 東夷傳 馬韓條에 의하면, 鬼神을 믿고 國邑에는 各一人을 세워 天神을 主祭케 하는데 이를 天君이라 이름한다. 또한 諸 國에는 各各 別邑이 있는데 이를 蘇塗라 한다. 大木을 세우고 鈴鼓를 흔들어 鬼神을 섬긴다97) 고 하고 있는 바, 飛鳥寺를 세운 聖地의 槻木은 蘇塗의 大木으로 天君은 善信尼 등의 巫女 를 대비시켜 생각함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같은 蘇塗는 주로 馬韓地域에 있었으므로 百 濟佛敎는 蘇塗信仰을 기반으로 수용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98) 新羅에서는 天鏡林, 神遊林 등이 佛敎寺院으로 대체되고 있었다고 하니 이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99) 이상에서 보면 飛鳥寺의 佛敎는 蘇塗信仰의 기반 위에서 수용한 百濟佛敎를 이 지방의 百濟系移住民이 오래 전부터 수용한 데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후의 日本佛敎는 豪族들의 私寺佛敎에서 국가적인 官寺佛敎로 전개 발전을 기하는 데 에도 新羅佛敎 등의 韓國佛敎의 영향을 받게 되지만, 그동안 反佛派의 숭배대상인 日本國 神을 모두 수용하여 전국을 기반으로 한 國家佛敎로 전개되면서 韓國佛敎와는 상당한 차 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古代韓國의 百濟나 新羅에서는 강력한 왕권을 중심한 國家佛敎의 전개를 통하여 國王이 佛敎隆興과 佛敎統制의 兩權限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貴族佛敎와 국가적 사회적 佛敎가 병 행하고 있던 단계에서 國王은 佛敎隆興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日本佛敎에서는 그 같은 단계를 살펴볼 수 없다. 즉 新羅佛敎에서 王即佛 思想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國王은 스스로 佛敎隆興을 위한 노 력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음에 비하여 日本佛敎는 聖德太子 곧 釋迦 혹은 聖德太子 곧 法 皇 의 신앙형태에서 살펴볼 수 있는 바와 같이 日本王權은 佛敎에서 그와 같은 지위를 차 94) 田村圓澄, 古代朝鮮佛敎と日本佛敎, p ) 柳東植, 韓日佛敎受容形態의 比較考察 ( 文化人類學 8, 韓國文化人類學會, 1976). 96) 洪潤植, 馬韓蘇塗信仰領域에서의 百濟佛敎의 受容 ( 韓國佛敎史의 硏究, 敎文社, 1988). 97) 三國志 魏志東夷傳 馬韓조. 98) 주 96) 참조. 99) 三國遺事 阿道基羅조.
24 지하기 위하여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강력한 지위를 지니고 있었고 원래 佛敎에서도 절대적인 權能者란 성격을 지닌다.100) 그것은 日本佛敎의 土着化 내지 社會 化를 의미하지만 그 배경에는 日本 土着文化의 영향이 있었음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그것은 古代王權確立의 배경이 되었던 開國神話의 구조적 의미가 韓日間에 相違한다는 데 연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日本의 開國神話는 곧바로 降臨하는 神(니니기노미고도)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高天原의 神들의 動向이 중심이 되어 있다.101) 그러나 韓國에 있어 建國神話는 地上의 나라가 무 대가 되며 여기서 主役을 맡은 자도 神들이 아니라 그 지방의 주민들이다. 新羅의 赫居世 王 神話에서, 우리는 위로 백성을 다스릴 君主가 없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여 제 마음대로 하니 어 찌 덕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겠는가. 이에 높은 곳 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楊山 밑 蘿井 곁에 이상스러운 기운이 번개빛과 같이 땅에 비치더니 거기에 白馬 한마리가 꿇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놀랍고 이상스러워 東泉에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天地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 지므로 그를 赫居世王이라 하고 휘호를 居瑟邯이라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다투어 치하하며 이제 天子가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있는 女君을 찾아서 짝을 지어야 할 것이다102) 에서 그같은 神話構造를 살필 수 있다. 이같은 神話構造는 高句麗나 駕洛國의 신화에서도 살필 수 있지만 어떻든 日本의 開國神話가 神들의 활동을 강조하고 天皇의 支配權의 강대 함을 상징하고 있음에 반하여 古代韓國의 開國神話는 스스로의 책임하에 始祖王을 맞이하 고 그를 훌륭한 國王으로서 받들어 가는 住民中心의 神話라는 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 어 이 점이 주목된다. 왜냐하면 이상과 같은 神話背景이 王權强化를 위한 것이며 佛敎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韓國과 日本이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이상과 같은 文化背景의 상이점이 이후 兩國佛敎의 주류를 이루는데도 차이점 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즉 新羅에서 王即佛 사상이 華嚴思想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면 日本에서의 聖德太子即法王 사상은 法華思想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 라 생각되며 또한 統一新羅時代의 傳統的 宗敎意識이 包括的 華嚴思想과 直觀的 禪宗에 있 었다면 日本은 奈良時代에 華嚴思想을 수용하지만 이후 平安時代의 宗敎意識은 統一論的 天台 法華宗과 密敎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음이 이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100) 주 85) 참조. 101) 井上秀雄, 古代の日本と朝鮮との文化特質-文字と神話より見て- ( 東アジアの古代文化, 1976 秋). 大林太良, 神話の系譜 (講談社, 1991) pp ) 三國遺事 新羅始祖 赫居世王. ① ②
25 國史館論叢 第24輯 2. 高句麗 百濟 新羅와 日本文化 高句麗 百濟 新羅의 三國이 日本과 접촉을 하기 시작한 시기는 三國史記 에 의하면 新羅建國 初부터 新羅와의 접촉이 있었고,103) 日本書紀 에 의하면 神功皇后 新羅征伐 傳說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접촉들은 6세기 초 大和政權을 중심으로 古代統一國家 가 성립되기 전의 것이었으므로 이같은 접촉은 日本列島 內의 北九州 吉備 畿內 등과의 개별 접촉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三國과 日本과의 관계를 佛敎文化를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면 6세기 이후가 된다. 6세기 이후 佛敎文化를 중심한 韓日間의 關係記事를 살피고자 할 때 韓國側 문헌자료 는 전무하다시피 하고 日本側 사료인 日本書紀 에는 상당수 전하고 있어 이를 삼국의 시대별 국가별로 나누어 밝혀보면 다음과 같다. 1) 百 濟 ① 欽明天皇 13년(552, 百濟 聖王 30) 冬十月 百濟聖明王(更名聖王) 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 獻釋迦佛金銅像一軀 幡蓋若干 經論若干卷 別表讚流通禮拜功德云 是法於諸法中爲殊勝 難解難入 周公孔子尙不能知 此法能生無 量無邊福德果報 及至成辨無上菩提 譬如人懹隨意寶逐所須用盡依情 此妙法寶亦得然 祈願依情無 所乏 且夫遠自天竺 爰泊三韓 依敎奉持 無不尊敬 由是百濟王臣明謹遣陪臣怒唎斯致契 奉傳帝國 流通畿內 果佛所記我法東流 이상의 문헌은 唐의 則天武后 長安 3년(703) 義淨에 의하여 번역된 金光明最勝王 經 의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104) 따라서 이 자료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이 자료의 臺本이 된 것이 元興寺伽藍緣起並流記資財帳 으로 밝 혀져 이 자료를 日本佛敎 初傳資料로 삼고 있어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元興寺伽藍緣起幷流記資財帳 大倭國 佛法 創自斯 嶋宮治天下天國案春岐廣庭 天皇 御世蘇我大臣稻目宿禰仕奉時 治天 下七年(538) 歲次戊午十二月渡來 百濟國聖明王時 太子像并灌佛之器一具及說佛起書卷一 篋度而言 當聞佛法旣是世間無上之法 其國亦應修行也 欽明天皇 15년(554, 百濟 威德王 1) 二月 百濟 僧曇慧等九人代僧道深等七人(권19) 敏達天皇 6년(577, 百濟 威德王 24) 冬十一月 庚午朔 百濟國王 付還使大別王寺 獻經論若干卷 并律師 禪師 比丘尼 呪禁師 造 ① ② ③ 103) 三國史記 新羅本紀. 104) 藤井顯孝, 佛敎傳來の記事に就いて ( 史學雜誌 36-8).
26 - 93 佛工造寺工六人 遂安置於難波大別王寺(권20) 用明天皇 2년(587, 百濟 威德王 34) 六月 甲子善信阿尼等 謂大臣曰 出家之塗 以戒爲本 願向百濟學受戒法 是月 百濟調使 來朝 大臣謂使人曰 率此尼等 將渡汝國 令學戒法 了時發遣(권21) 崇峻 원년(588, 百濟 威德王 35) 是歲 百濟國遣使并僧惠總 令所 惠寔等 獻佛舍利 百濟國遣思率道信 德率蓋文那率福富味 身等 進調并獻佛舍利 僧聆照律師令威惠衆 惠宿 道嚴 令開等 寺工太良未太 文賈古子 鑢 盤博士 將德日白味淳 瓦博士麻奈文奴 陽遣文 㥄貴文 昔麻帝彌 工白加 崇峻 3년(590, 百濟 威德王 37) 春三月 學問尼善信等自百濟還 住櫻井寺(권21) 推古天皇 원년(593, 百濟 威德王 40) 春正月 壬寅朔丙辰 以佛舍利 置于法興寺刹柱礎中 丁巳建刹柱(권21) 正月 法興寺建刹日 嶋大臣并百餘人皆着百濟服( 扶桑略記 ) 推古天皇 3년(595, 百濟 威德王 42) 五月戊午朔丁卯 是歲 百濟僧慧聰來之 此僧弘演佛敎 并爲三寶之棟梁(권22) 推古天皇 4년(596, 百濟 威德王 43) 冬十一月 法興寺造竟 則以大臣男善德臣拜寺司 是日慧慈 慧聰二僧 始住於法興寺(권22) 推古天皇 17년(609, 百濟 武王 10) 夏四月丁酉朔庚子 筑紫太宰奏上言 百濟僧道所 惠彌爲首 一十人 俗七十五人 泊于肥後國 葦地津(권22) 推古天皇 32년(624, 百濟 武王 25) 夏四月 壬戌 以觀勒僧爲僧正(권22) 孝德天皇 4년(648, 百濟 義慈王 8) 二月壬子朔 遣於三韓 學問僧(권25) ④ ⑤ 畫 ⑥ ⑦ ⑧ ⑨ ⑩ ⑪ ⑫ 2) 新羅 敏達天皇 8년(579, 新羅 眞平王 1) 冬十月 新羅遣枳政奈末進調 并送佛像(권20) 推古天皇 24년(616, 新羅 眞平王 38) 秋七月 新羅遣奈末竹世士貢佛像(권22) 新羅王送金佛像 安置峯岡寺( 元亨釋書 ) 推古天皇 31년(623, 新羅 眞平王 45) 秋七月 新羅遣大使奈末智洗爾 任那遣達率奈末智 幷來朝 仍貢佛像一具及金塔并舍利 且大 觀頂幡一具小幡十二條 即佛像居於葛野秦寺(권22) 舒明天皇 11년(639, 新羅 善德女王 8年) 秋九月 大唐學問僧惠隱 惠雲 從新羅送使入京 舒明天皇 12년(640, 新羅 善德女王 9) ① ② ③ ④ ⑤
27 - 94 ⑥ ⑦ 國史館論叢 第24輯 冬十月乙丑朔乙亥 大唐學問僧淸安 學生高向漢人玄理 傳新羅而至之(권23) 孝德天皇 4년(648, 新羅 眞德女王 2) 二月壬子朔 遣於三韓 學問僧(권25) 齊明天皇 4년(658, 新羅 武烈王 5) 是月(七月) 沙門智道 智達奉勅 乘新羅船往大唐國(권26) 3) 高句麗 ① ② ③ ④ ⑤ ⑥ ⑦ ⑧ ⑨ 推古天皇 3년(595, 高句麗 陽王 6) 五月戊午朔丁卯 高麗僧慧慈歸化 則皇子太師之(권22) 推古天皇 4년(596, 高句羅 陽王 7) 冬十一月 法興寺造竟 則以大臣男善德臣拜寺司 是日慧慈 慧聰二僧 始住於法興寺(권22) 推古天皇 10년(602, 高句羅 陽王 13) 乙亥朔己丑 高麗僧僧隆 雲聰 共來歸(권22) 推古天皇 13년(605, 高句麗 陽王 16) 是時 高麗國大興王 聞日本國天皇造佛像貢上黄金三百兩(권22) 推古天皇 18년(610, 高句麗 陽王 21) 春三月 高麗王貢上曇徵 曇徵知五經 且能作彩色及紙墨 并造碾磑 蓋造碾磑 始于是時歟(권22) 推古天皇 23년(615, 高句麗 陽王 26) 十一月癸卯 高麗僧慧慈歸干國(권22) 推古天皇 29년(621, 高句麗 榮留王 4) 當于是時 高麗僧慧慈 聞上宮皇太子薨 以大悲之 爲皇太子 請僧而設齋(권22) 推古天皇 33년(625, 高句麗 榮留王 8) 春正月壬申朔戊寅 高麗王貢僧惠灌 仍任僧正(권22) 孝德天皇 4년(648, 高句麗 寶藏王 7) 二月 壬子朔 遣於三韓(권25) 嬰 嬰 嬰 嬰 嬰 嬰 이상에서 보면 日本書紀 에 나타난 三國과 日本과의 佛敎關係記事는 百濟가 11건으 로 제일 많고 다음으로 高句麗가 9건, 新羅가 7건으로 제일 적다. 한편 이를 시대별로 보 면 百濟關係記事는 초기에 많고 이어 高句麗 新羅關係의 순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보면 日本이 佛敎를 수용함에 있어 초기 6세기에는 주로 百濟를 통하여 교류하다가 7세기에 접어들면 대체로 高句麗와 新羅를 통하여 韓國佛敎를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상의 문헌자료를 주제별로 보면 百濟에서는 聖王代에 佛像과 佛經 등을 보내 日 本에 처음으로 佛敎를 전한 이래 이어 律師 禪師 比丘尼 呪禁師 등의 僧侶와 造佛工 造寺 工 鑢盤博士 瓦博士 畵工 등의 技術者 그리고 佛舍利 등을 百濟를 통하여 수용하고 있다. 여기서 보면 百濟佛敎가 일본불교에 미친 영향은 日本에 있어 佛敎寺院의 토대를 굳히 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百濟는 日本에 절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그에 따 른 절을 짓도록 기술을 지원하고 절의 기능을 다하도록 여러 분야에 걸친 승려를 보냈던
28 것이라 생각된다. 日本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것은 佛像과 佛經뿐이다. 이것만으로는 佛敎가 제대로 전 해진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즉 佛敎에서의 신앙적 기능은 佛寶 法寶 僧寶의 三寶信仰의 연계적 관계에 의하여 그 기능을 다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佛像(佛寶)과 佛經(法寶)을 통하여 佛敎를 수용한 일본은 僧侶(僧寶)를 초빙하여야만 되었고 이들 三者 의 연계적 관계의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절을 지어야만 했다. 절을 짓기 위해서는 造寺 工 등의 각종 기술자가 필요하였으며 造塔을 위해서는 佛舍利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高句麗의 기사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高句麗의 기사가 처음으로 발견되는 것은 推古 3년(595)에 日本에 온 高句麗僧 慧慈를 聖德太子가 法師로 삼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日本書紀 에 의하면 이 해에 百濟에서도 僧 慧聰이 일본에 와 있었고 百濟의 도움으로 완성된 飛鳥寺(法師寺 또는 法興寺)에 그 다음 해인 596년에 蘇我氏는 이들 高句麗와 百濟의 兩師를 초청하고 있으나 聖德太子는 이들 兩師 중 高句麗의 慧慈를 선택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불교를 통한 외교관계의 변화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聖德太子 이후의 韓 國佛敎는 외교적 차원에서 高句麗佛敎와 日本佛敎의 교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605년에 飛鳥寺의 丈六銅像의 조성소식을 들은 高句麗王이 黃金 300兩을 보내고 僧 隆 雲聰 등의 高句麗僧을 보내어 日本佛敎의 興隆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음이 그를 말해 주 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百濟에서 日本佛敎를 도운 것이 佛寺 의 기능을 다할 수 있 도록 한 것이라면 高句麗는 佛敎의 사회적 기능을 다하도록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高句麗 王이 佛敎의 僧侶 뿐아니라 儒學에도 능통하고 繪具 紙墨에도 능한 工藝技術者를 日本에 파견하고 있는 것 등은 佛敎文化의 보다 폭넓은 이해를 가져오게 한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新羅에서는 일찍이 眞平王 원년(579)에 日本에 佛像을 보낸 바 있으나 한동안 교 류 관계를 끊고 있다가 推古天皇 24년(616, 新羅 眞平王 38)에 다시 佛像을 보내기 시작 하여 계속 몇 차례 佛像만을 보내고 있다. 이는 百濟에서는 僧侶와 造佛工 등의 기술자를 보내는 것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라 하겠는데 다만 眞平王 45년(623)에는 佛像과 더불 어 金塔 및 舍利 大觀頂幡一具 小幡十二條 등의 儀式用具를 보내고 있음이 주목된다. 왜 냐하면 이는 信仰儀禮의 制度的 樣式이 日本에 전해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105) 만 약 그렇다고 한다면 불교의 이같은 信仰儀禮의 制度的 樣式이 정치적으로 응용되어져 佛 敎가 天皇權 强化에 기여하고 아울러 律令制度를 확립하는 데 비로소 기여하게 되었던 것 이 아닌가 한다.106) 이는 聖德太子 이후의 日本佛敎가 주로 新羅와의 접촉을 통하여 전 105) 幡이란 梵語 patāka로 繪幡 幢幡이라고도 한다. 佛菩薩의 威德을 표시하는 장엄도구로써의 깃발이다. 新羅에서 보낸 大觀頂幡一具와 小幡 12조는 佛菩薩의 名號를 쓴 幡으로 생각되나 大幡과 小幡은 相互 信仰體系에서 儀式道場을 장엄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믿어지는데 이 는 佛敎 信仰儀禮의 制度的 樣式이 확립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29 國史館論叢 第24輯 개되는 사실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같은 日本佛敎는 다시 唐 의 留學僧을 新羅를 통하여 접촉함으로써 더욱 理論化된 學問的인 佛敎를 발전시키게 되 었던 것이라 보아진다. 日本佛敎의 전래와 발전에 있어 이상과 같은 三國과의 관계기사를 통해서 볼 때 三國과 日本과의 역사적 교류관계는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는 바 다음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첫째, 日本의 大和政權 內에 있어 親百濟勢力이라 볼 수 있는 蘇我氏가 佛敎受容을 계 기로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物部氏를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같은 蘇我氏에 의하여 수용된 佛敎는 주로 佛寺의 기능을 日本社會에 土着化 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그 결과 佛法僧의 三寶信仰體系를 이해하게 되어 精神世界의 발 전을 가져오고 한편 佛寺의 經營 등에서 오는 建築文化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둘째, 聖德太子가 攝政을 하게 된 이후 日本은 蘇我氏의 專橫을 저지하기 위하여 百濟 中心의 외교를 지양하고 高句麗 新羅 등의 諸國과 多元的 外交로 전환하여 문화의 다양한 攝取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 결과 그 후의 日本佛敎는 佛寺가 佛寺로서의 기능에만 머물 게 하지 않고 그 기능을 확대시켜 社會文化的인 전개를 가져오게 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 다. 이것은 6세기 중엽 이래 성장하고 있던 古代國家를 體制的으로 정비 강화하기 위한 시대적 요청이었던 것이기도 하였다. Ⅴ.結語 이상에서 古代 韓日間에 있어 佛敎文化를 통한 兩國의 교류관계가 어떤 것이었던가를 살 펴보았다. 그 결과를 한 마디로 말하면 古代 韓國에서의 高句麗 百濟 新羅의 三國은 일방적으로 先進 佛敎文化를 日本에 전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5세기 이후 中國 韓國 등의 국제사회에서 무르익고 있던 佛敎文化 수용에 따른 사회발전의 단계를 6세기 후반에 들어 日本社會가 취하도록 하였다는 데서 交流史的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하겠다. 日本 初傳佛敎의 受容基盤은 古代 韓國人의 渡來人 集團文化이었다는데 우선 주목할 필 요가 있다. 즉 불교를 수용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蘇我氏의 정치적 기반이 渡來人集 團이었고 따라서 이들 渡來人集團의 樹木信仰 등의 在來信仰이 佛敎를 수용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渡來人集團에 의한 佛敎受容의 형태는 蘇塗信仰 등을 기 반으로 佛敎를 수용한 百濟 新羅에서의 受容形態와 軌를 같이 하고 있어 주목되는 바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受容形態가 國神崇拜者인 物部氏 등의 더욱 강한 반대에 부 106) 위와 같음.
30 딪혔고 또한 그러기에 한동안 日本 初傳佛敎는 蘇我氏 등의 私寺佛敎로 머물 수밖에 없었 던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日本 初傳佛敎의 수용과 발전에 기여한 나라는 百濟였다. 즉 百濟는 日本 에 처음으로 佛像과 佛經을 전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에도 계속 僧侶나 造佛工 등의 기술 자를 보내어 佛敎寺院의 기능을 다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百濟가 日本社會에 있어 寺院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었을 뿐 아니라 佛敎의 宗敎的 기능과 文化的 기능을 확대시 켜 나갈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日本社會에 있어 寺院의 종교적 기능과 문화적 기 능이 점차 축적 확대되어 나가자 이윽고 佛敎의 국가적 수용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여기 高句麗佛敎와 新羅佛敎의 수용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大化改新 이 후 佛敎를 律令社會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思想體系라 생각하게 되면서 新羅의 彌勒思 想과 王即佛 사상을 수용하여 聖德太子 곧 釋迦佛 사상으로 전개 발전시켜 나간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日本佛敎가 國家佛敎로 지향하게 되면 그 수용의 기반 이 初傳時代의 私寺佛敎와는 달리 日本의 開國神話를 바탕으로 新羅佛敎를 수용하게 되었 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수용의 기반이 달랐기에 이 단계의 新羅佛敎는 華嚴思想이 주류를 이룬데 비하여 日本佛敎는 法華思想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렇게 佛敎思想에 대한 선택의 필요성이 생기면서 唐나라 등에 學問僧의 유학이 빈번하 게 되는데 여기에도 新羅의 역할이 컸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특히 흥미를 끄는 것 은 日本 國家佛敎는 百濟보다 新羅佛敎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는데 그것은 佛敎의 私傳에서 公傳에 이르는 과정이 新羅와 공통성을 지니는데 기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요컨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말, 8세기에 걸친 日本社會는 정치적으로 보면 日本社會 가 律令制度를 확립해 가는 시기요, 문화적으로 보면 佛敎를 수용하여 國家佛敎로 발전시 켜 나간 시기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日本佛敎는 전적으로 古代 韓國에 있어 高句麗 百 濟 新羅佛敎의 영향과 지원하에 발전될 수 있었다는 日本 古代史의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 다. 그리고 다른 한편 韓國佛敎가 一方的으로 日本에 전파된 데 대한 배경규명을 통하여 文化交流史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百濟가 日本에 佛敎를 전한 사실을 놓고 下賜냐 贈與냐 獻納이냐 하는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는 데도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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弓 裔 세력 형성 彌 勒 信 仰 趙 仁 成 * Ⅰ 문제 제기 1 中 代 末 眞 表 敎 化 Ⅱ 八 關 會 始 作 2 下 代 華 嚴 宗 崛 山 門 例 Ⅲ 溟 州 末 世 意 識 彌 勒 信 仰 Ⅳ 맺음말 Ⅰ 문제 제기 弓 裔 彌 勒 佛 자칭하였음 잘 알려진 바다 사정 일단 다음 같 전한다 1) A 善 宗 ( 弓 裔 ) 彌 勒 佛 자칭하며 머리 金 幘 쓰고 몸 方 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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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3년 7월 25일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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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Group 2006 AUTUMN Volume. 02 Focus Group 2006 AUTUMN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 모두를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 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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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60 1 1 200 2 6 4 7 29 1975 30 2 78 35 1 4 2001 2009 79 2 9 2 200 3 1 6 1 600 13 6 2 8 21 6 7 1 9 1 7 4 1 2 2 80 4 300 2 200 8 22 200 2140 2 195 3 1 2 1 2 52 3 7 400 60 81 80 80 12 34 4 4 7 12 80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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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 객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객사는 영조 35년(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입니다. 원래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습니다. 정당에서는 전하 만만세 라고 새 긴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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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는 선 5 월 월말 성취도 평가 국어 2쪽 사회 5쪽 과학 7쪽 자르는 선 학년 5 13 4 47 1 5 2 3 7 2 810 8 1113 11 9 12 10 3 13 14 141 1720 17 15 18 19 1 4 20 5 1 2 7 3 8 4 5 9 10 5 월말 성취도평가 11 다음 보기 에서 1 다음 안에 들어갈 알맞은 말을 찾아 쓰시오. 각 나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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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와베트남어의불교어계한자어에대하여 289 한국어와베트남어의불교어계한자어에대하여 Ly Kinh Hien( 李敬賢 ) 한국과베트남은동아시아한자문화권에속하는국가들이다. 양국은옛날부터중국에서한자와한자어를많이수용해왔다. 한국에서는한자가오늘날까지어느정도사용되고있으나베트남에서는 1945 년 1 이래국자 (chữ quốc ngữ) 가한자를대체하여공식적인문자가되었다. 한국에서는현재까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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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경 광 학 과 세부내용 - 남을 도와 준 경험과 보람에 대해 말해 보세요. - 공부 외에 다른 일을 정성을 다해 꾸준하게 해본 경험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 남과 다른 자신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말해 주세요. - 지금까지 가장 고민스러웠던 또는 어려웠던 일과 이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 자신의 멘토(조언자) 또는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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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史館論叢第 26 輯 國史館論叢第 26 輯 國史館論叢第 26 輯 國史館論叢第 26 輯 國史館論叢第 26 輯 國史館論叢第 26 輯 國史館論叢第 26 輯 國史館論叢第 26 輯 國史館論叢第 26 輯 - 19 - 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요컨대 귀족관료들의 대토지 소유의 결과는 국가재정의 궁 핍을 초래시켰음은 물론이고, 권력과 재력을 배경으로 왕권쟁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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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 캠퍼스 문화 조성을 위하여... 고려대학교 양성평등센터 는 2001년 6월에 제정된 성희롱 및 성폭력 예방과 처리에 관한 규정 에 의거하여 같은 해 7월에 설치된 성희롱및성폭력상담소 를 2006년 10월 개칭한 것입니다. 양성평등 센터 로의 개칭은 교내에서 발생하는 성피해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과 상담 제공뿐만 아니라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양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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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파 방송의 여성인력 현황 및 전문화 방안 연구 한국여성개발원 발간사 Ⅰ....,.,....... .. Ⅱ. :...... Ⅲ.,,. ..,.,.... 9 1 1.. /.,. PD,,,,, / 7.93%. 1%... 5.28% 10.08%. 3.79%(KBS MBC), 2.38 %(KBS MBC) 1%...,. 10. 15.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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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a@opensurvey.co.kr 750 1,500 35 Contents Part 1. Part 2. 1. 2. 3. , 1.,, 2. skip 1 ( ) : 2 ( ) : 10~40 (, PC, ) 1 : 70 2 : 560 1 : 2015. 8. 25~26 2 : 2015. 9. 1 4 10~40 (, PC, ) 500 50.0 50.0 14.3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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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02 8 9 32 33 1 10 11 34 35 가족 구조의 변화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원만한 생활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기능 사회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동 가구 가족 규모의 축소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 1인 또는 1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 타나는 가족 구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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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 - 國史館論叢 第50輯 ( 韓國史時代區分論, 1973)이란 논문이 주목되고 있다. 그는 고려전기 이후 무신집권 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사회는 古代的인 사회에 속하고 조선시대부터가 中世的 封 建社會이며, 武臣執權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는 2세기에 걸친 긴 기간을 겪는 동안에 古 代社會를 극복하여 中世社會를 형성하는 과도기적인 전환기를 경과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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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 5 6 7 8 9 10 11 Chapter 1 13 14 1 2 15 1 2 1 2 3 16 1 2 3 17 1 2 3 4 18 2 3 1 19 20 1 2 21 크리에이터 인터뷰 놀이 투어 놀이 투어 민혜영(1기, 직장인)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가치가 있는 일을 해 보고 싶 어 다니던 직장을 나왔다. 사회적인 문제를 좀 더 깊숙이 고민하고, 해결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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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 융합 과학 2011년도 1학기 중간고사 대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 빅뱅 우주론에서 수소와 헬륨 의 형성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4 서술형 다음 그림은 수소와 헬륨의 동위 원 소의 을 모형으로 나타낸 것이. 우주에서 생성된 수소와 헬륨 의 질량비 는 약 3:1 이. (+)전하를 띠는 양성자와 전기적 중성인 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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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004. 12 2004. 11 25 26 2004. 12 % 50 40 30 20 10 0 華 東 華 北 中 南 西 南 東 北 西 北 전 체 중 대 형 차 중 형 차 소 형 차 경 차 2004. 11 27 帕 28 2004. 12 2004. 11 29 30 2004. 12 2004. 11 31 32 2004. 12 2004. 11 33 3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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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information#7단원 1(252~269)교
7 01 02 254 7 255 01 256 7 257 5 10 15 258 5 7 10 15 20 25 259 2. 어휘의 양상 수업 도우미 참고 자료 국어의 6대 방언권 국어 어휘의 양상- 시디(CD) 수록 - 감광해, 국어 어휘론 개설, 집문당, 2004년 동북 방언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제주 방언 어휘를 단어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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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교육자를 위한 디자인사고 / 교육자를 위한 디자인사고 / 4 5 어떻게 하면 나의 교실이 학생들의 니즈를 어떻게 하면 우리는 학교에서 21세기형 학습경험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재구성될 수 있을까? 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뉴욕에서 2학년을 가르치고 있는 마이클(Michael Schurr)은 자신이 한번도 아이들에게 무엇이 그들을 교실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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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란? 자 기 반 성 유 형 밀 당 유 형 유 레 카 유 형 동 양 철 학 유 형 그 리 스 자 연 철 학 유 형 춤이란? 물 아 일 체 유 형 무 아 지 경 유 형 댄 스 본 능 유 형 명 상 수 련 유 형 바 디 랭 귀 지 유 형 비 타 민 유 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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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도서관총서 1 경기도 도서관 총서 경기도도서관총서 1 지은이 소개 심효정 도서관 특화서비스 개발과 사례 제 1 권 모든 도서관은 특별하다 제 2 권 지식의 관문, 도서관 포털 경기도 도서관 총서는 도서관 현장의 균형있는 발전과 체계적인 운 영을 지원함으로써 도서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간되 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를 통해 사회전반의 긍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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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이 스승님이 스승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알라는 위대하다! 위대하다! 알라는 알라는 위대하다! 특집 특집 기사 특집 기사 세계 세계 평화와 행복한 새해 경축 세계 평화와 평화와 행복한 행복한 새해 새해 경축 경축 특별 보도 특별 특별 보도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도가니! 스승님과의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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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리-내지(6장~8장)최종 2007.8.3 5:43 PM 페이지 168 in I 덕수리 민속지 I 만 아니라 마당에서도 직접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장팡뒤의 구조는 본래적인 형태라 고 할 수는 없으나, 사회가 점차 개방화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폐쇄적인 안뒤공간에 위치하던 장항 의 위치가 개방적이고 기능적인 방향으로 이동해가는 것이 아닌가 추론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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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학회지 2004;25:721-739 비만은 심혈관 질환, 고혈압 및 당뇨병에 각각 위험요인이고 다양한 내과적, 심리적 장애와 연관이 있는 질병이다. 체중감소는 비만한 사람들에 있어 이런 위험을 감소시키고 이들 병발 질환을 호전시킨다고 알려져 있고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건강을 호전시킬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런 믿음을 지지하는 연구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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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말씀 우리의 타고난 사랑을 발휘하라 칭하이 무상사 / 1999. 5. 22. 이탈리아 로마 (원문 영어) 전쟁과 분쟁, 오해, 분노, 증오는 모두 신을 알 수 를 용서합니다. 예수는 원수를 용서하고 기도했습니다. 없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아버지, 그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악행들은 신을 알고자 하는 갈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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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Vol.159 www bible ac kr 총장의 편지 소망의 성적표 강우정 총장 매년 1학년과 4학년 상대로 대학생핵심역량진단 (K-CESA)을 실시한지 5년이 지났습니다. 이 진 단은 우리 학우들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직업인으로서 핵심역량을 어느 정도 갖추었나를 알아보는 진단입니다. 지난번 4학년 진단 결과는 주관처인 한국직업능력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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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BEST 365 _Korea Meteorological Administration 03 하늘사랑 www.kma.go.kr Vol.345 2010. March 하늘사랑 은 기상청 소식을 전하는 월간 정책지입니다. 하늘사랑 은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기상청 홈페이지(www.kma.go.kr)의 지식과 소통 간행물 하늘사랑 클릭! 기상이변의 예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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