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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자서 꾸는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되게 한다. 아빠가 나를 사랑하기는 했어? 치료나 하세요. 견디는 건 내가 하면 되니까. 너희들은 엄마라도 있지만 난 남편을 잃어 날 지탱할 수 없다고! 왜 우린하고 싶은데 못하는 게 많아? 여보, 내 곁에 오래오래 머물러 줘야 해요. 사랑해요. 아빠, 아빠의 사랑하는 첫째 딸 상 받았어. 아빠, 선생님들도 다 칭찬하셨어, 잘했지 아빠! 엄마, 어떤 어려운 일이 오더라도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엄마의 딸답게 최선을 다해서 살겠습니다. 약속 할게요. 처음처럼 늘 긴장하며 살자. 사랑하는 내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 이 다음에 꼭 성공해서 다시 만나자. 그 동안 장애인이라고 거부했던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제 안에 조용히 나를 바라보시며 슬픔의 눈물을 참으시고 미소 지어 주시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함께 살아온 시간이 그저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 여러 가닥의 등나무 줄기가 한그루의 나무 기둥을 만들 듯 그렇게 변하게 했다. 어느날 갑자기 다가온 좌절, 그리고 이별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가는 사람들의 감동에세이 강정수 외 지음 서른 한 명의 사연,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기막힌 사연들. 그 길고 힘든 고통의 나날들을 잘 견디어내고 새 삶을 시작하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불러주고 싶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운 도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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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 책을 에게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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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어느날 갑자기 다가온 좌절, 그리고 이별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가는 사람들의 감동에세이 강정수 외 지음

8 여 는 글 함께 꿈꾸는 안전한 세상을 위해 교통안전공단은 자동차사고로 인해 중증후유장애를 입은 사람이 나 그 유자녀 幼 子 女 및 피부양노부모에 대한 지원사업을 전개하고 있 습니다. 지난 10년간 18만여 명에게 2,800억 원을 지원하였고, 올해 에도 2만4천여 명을 대상으로 재활보조금, 생활자금 대출, 장학금, 피부양보조금 등 440억원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그동안의 금전적 지원 이외에도 문화체험 행사 등 정서적 지원을 강 화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올해 공단은 자동차사고 피해가정을 대상으로 생활수기를 공모하 였는데 무려 5백여편의 수기가 응모되었고, 전문심사위원의 공정한 심사를 통해 모두 31편의 입상작을 선정하였습니다. 모든 작품 하나 하나가 훌륭했고, 안타까운 사연이 많아 심사위원들도 저마다 눈시 울을 적셨다는 이야기에 저 자신도 가슴이 저렸습니다. 006

9 수기집 발간을 처음에는 망설였습니다. 채 아물지도 않은 상처를 덧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기대 이상의 많은 참여가 있었고, 그대로 묻어두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또한 그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면서 교통사고에 대한 사 회적 관심을 모으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이것이야말로 교통안전공 단이 해야 할 최우선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동차를 비롯한 교통수단은 우리 일상생활에 편리함을 가져다주 지만 반대로 교통사고라는 치명적인 불행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공 모된 수기 속에 나타난 교통사고는 음주운전이나 졸음운전 등 교통 법규 위반과 사소한 부주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 다. 평소 안전운전을 위해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인재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교통안전수준은 선진국 대비 20년 정도 뒤진 교통 후진국입니다. 교통사고 후 생활수준이 급격히 떨어지는 경우 가 많았다는 통계도 되새겨볼 일입니다. 그동안 교통사고를 운이나 007

10 재수가 없어 일어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사고는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습니다. 이번 수기집은 전국 주요 도서관과 재활시설 등에 배포할 예정입 니다. 또한 공단 홈페이지 등 온라인을 통해 모든 국민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교통사고에 대한 경각심과 함께 교 통사고로 인해 아픔을 겪고 있는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 소중한 계기 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함께 꿈꾸는 안전한 세상을 위해 참여해주신 모든 분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하며, 가정에 행복과 사랑이 더욱 충만하기를 바 랍니다. 2010년 7월 정 상 호 교통안전공단 이사장 008

11 추 천 사 벼랑 끝에서 기적을 일군 사람들의 그윽한 향기 한 달간이나 무의식상태로 사경을 헤맸다. 기적적으로 눈을 떴지만 머리와 왼 팔만 움직거릴 뿐 다른 곳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칼날 위에 선 목숨이었다. 건강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자신감이 있었고, 병원은 문턱도 밟아보지 않았던 내가 하루아침에 정신을 놓고 병원 침대에만 누워 있다니 그렇습니다. 누구도 자신이나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거 나 장애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교통 사고의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가고 있으며, 실제 교통사고로 매일 약 16명이 사망하고 990여명이 부상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거나 커 다란 장애를 입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극복해 오신 분들의 애절 하면서도 가슴 뭉클한 이야기입니다. 한창 젊었을 때 사고로 장애를 입은 분, 어느 날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사고를 당하여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나뉘어 간병을 해야 했던 009

12 어린 남매,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아이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남 편, 뜻밖의 교통사고와 설상가상으로 사기까지 당한 가족 등 가슴 아픈 사연들이 빼꼭히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가슴 아픈 사연으로 끝나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불 굴의 의지에 커다란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특히 평생 걷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받고서도 한 발짝 한 발짝 어린 딸의 손에 잡 혀 걸음마를 배워가며 결국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한 도전정신에 저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렇게 교통사고 피해자들이 벼랑 끝에서 스스로 새 삶을 찾아나 서는 이 일은 바로 기적입니다. 이 기적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일반인 들이 생각하는 노력보다, 수백 배 아니 수천 배 더 힘들고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라는 단어 대신 도전이라는 단어를 선 택했습니다. 절망 대신 희망을 선택했습니다. 그야말로 벼랑 끝에서 피워낸 한 송이의 향기로운 꽃과 같습니다. 그 꽃을 피우기 위해 모 진 바람과 맞서며 처절한 고통의 시간들을 감내해 냈기 때문에 더할 나위없이 고귀한 것입니다. 010

13 끝으로 이 책의 애절하고도 향기로운 사연이, 또 어디에선가 고통 을 받고 있을 교통사고 피해가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기를 바 라며, 중증장애를 꿋꿋하게 이겨낸 교통사고 피해자들과 그들을 헌 신적인 사랑으로 돌보고 있는 가족들께 진심어린 격려의 박수를 보 내드립니다. 2010년 7월 김 수 곤 국토해양부 자동차정책기획단장 011

14 목 차 여는글_ 함께 꿈꾸는 안전한 세상을 위해 006 추천사_ 벼랑 끝에서 기적을 일군 사람들의 그윽한 향기 009 1부 어느 날 갑자기 언제나 당신 곁에` 017 선물` 026 제비꽃이 된 제자의 이야기` 034 따가운 햇살아래 한줄기 소나기` 042 시간이 만든 등나무처럼` 049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니다` 055 탱크를 타고 달리는 나의 삶!` 064 절망에서 희망을 가져다 준 수호천사님들` 071 2부 준비되지 않은 길 사고 후 10년` 079 눈물의 입학식` 088 개울가 돌미나리`

15 흔들리며 피는 꽃` 104 하쿠나마타타!` 112 할 수 있다` 121 두 그루의 꿈나무` 127 아빠 같은 교통안전공단` 135 3부 그곳에도 아름다움이 따뜻한 겨울` 145 허수아비와 구세주` 153 절망의 벼랑 끝에서 희망의 언덕으로` 161 또 다른 꿈의 시작` 168 우리는 소망이 있는 예쁜 소자매입니다` 175 순간, 그리고 긴 고통` 181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습니다` 191 한 순간의 교통사고가 남긴 고통`

16 목 차 4부 새로운 출발점에서 우리는 장애를 딛고 일어서기까지` 207 공단 나무 가지에서 자란 꿈 열매` 216 단비` 224 다시 시작하는 삶` 231 우리는 꽃구경 가는 기다` 240 되찾은 나의 손` 263 좌절과 용기를 보면서` 271 심사평 살아있는 자의 고통과 슬픔`

17 1부 어느 날 갑자기 여느 아침처럼 현관을 나서는 남편과의 포옹을 마치고 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그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오늘도 어제처럼, 그제처럼 퇴근 시간이면 어김없이 돌아올 것이라 믿었던 가족,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밥 잘 먹고 잘 살아, 나 먼저 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훌훌 어느 이름도 모를 길로 떠나버린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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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언제나 당신 곁에 김현숙 전화를 걸었습니다. 남편의 휴대폰으로 통화가 되지 않자 회사로 전화를 걸어 무턱대고 남편을 바꿔달라고 울며 애원했습니다.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잠든 무덤에 쫓아가 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일산해수욕장의 밤은 꼭 젊은 연인 만이 아니더라도 좋은 사람들과 밤바다를 거닐고 싶게 만듭니다. 아파트 앞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밤풍경은 별빛과 불꽃놀이 폭 죽, 가족들 연인들 친구들 어린애들의 웃음소리. 큰아들은 그 풍경에 빠져 낼 오실 아빨 기다리며 잠자리에 듭니 다. 다음날, 1박 2일 회사, 대의원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과 우린 일명 쭈쭈바를 빨아가며 그 바다로 향했습니다. 7년 연애로 결혼한 그는 나에겐 사촌오빠 친구이며 남편이 되기 017

20 까지 오래도록 보아온 사람이지만 언제나 그는 백마 탄 멋있는 사람 이었습니다. 늘 말이 없어 표현함이 부족한 그는 내 마음을 애타게 만드는 이 유가 되기도 해서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10년이 가까워지면서 나도 모르게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백사장에 앉은 그는 내 어깨의 손을 얹은 채 두 아들의 파도 놀이를 바라보며 제 귀에 속삭 이더군요. 당신은 나 없으면 못 살겠지? 전 단 일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절대 못산다고 절대 남편은 내 말에 대답대신 피식 웃으며 일어섰습니다. 휴식도 없이 낼 당직을 해야 한단 말에 투정을 했죠. 회사가 너무하다고, 이렇게 피곤한데 어떻게 낼 당직을 또 하냐 고! 바빠서 어쩔 수 없다면서 저를 이해시키더군요. 이번 집행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어 앞장서서 일하는 남편 이 멋있어 보여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는데. 여느 날처럼 일찍 일어난 남편은 제가 처음으로 만든 복숭아통조 림이 맛있다며 스스로 챙겨먹고 문 앞을 나서는 그를 마지막으로 보 았습니다. 하루에도 두세 번은 꼭 집에 전화해 제 일상과 애들을 챙 기던 남편입니다. 밤 10시쯤 긴 통화에 잘 자란 말을 끝으로 행복에 젖은 난 두 아들의 잠자리를 챙기며, 농담을 주고받던 남편과의 통 018

21 화를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잠을 청했습니다. 행복한 밤일 줄만 알았습니다. 항상 불행은 행복 뒤에 온다 는 그 말 그때 알았더라면 차라리 꼭 꼭 숨겨뒀을 것입니다. 새벽 6시 40분쯤. 요란한 벨소리가 꿈속인 것처럼 늦게 전화를 받 았습니다. 최동지가 다쳤다고, 많이 다쳤다고. 빨리 오란 말. 동료의 말에 허겁지겁 택시를 타고 가면서도 그냥 다쳤을 거라고, 그냥 조금 다쳤겠지, 하면서도 많이 다쳤단 말이 귓전을 맴돌았지만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날 쳐다보면 괜찮다고 위로해 줄거라 엉뚱한 상상을 하며. 그런데, 하아얀 시트에 누워있던 남편을 본 난 큰 외상이 보이지 않기에 안심을 하면서 눈꺼풀이 반쯤 덮여진 눈을 쓰다듬으며 많이 아파? 물으며 남편의 손을 잡았습니다. 근데, 남편은 갑자기 제 손을 꼬오옥 잡아주는 거예요. 제 말을 듣고 있단 뜻인 거죠. 너무 기뻤습니다. 그럼 그렇지 하며 전 안심을 하며 조금만 기다려. 그러자 제 말이 끝나자마자 회사 상사는 저더러 빨리 가족 분들께 전화를 하라 는 것입니다. 왜냐고 묻는 저의 의아해하는 표정에, 새벽에 유인물을 실은 남편 이 탄 차와, 막 생산한 차와 충돌했고 남편이 탄 차가 전복되어 사고 가 났다는 것입니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019

22 그래서 남편이 튕겨 나와 아스팔트에 머리를 심하게 다쳐 위중하 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본 상황은 이해가 안 되지만 왠지 불안해 가족들에게 빨리 오란 말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전화를 끝내고 상사에게 물었죠. 왜 빨리 검사를 안 하냐고? 그 에 대답은 고개를 가로 저을 뿐 묵묵부답에 난 놀라 다시 남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습니다. 따뜻한 남편의 손을 다시 잡았는데 아까와는 다르게 힘이 풀린 채 제 손을 잡아주지 못했습니다. 놀란 난 아까처럼 잡아달라고 말했지만 그는 잡아주지 않았습니 다. 난 소리쳤습니다. 아까처럼 잡아보라고 아까처럼 잡아보라고 떼 를 쓰자 옆에 있던 동료는 OO 엄마의 착각이었다고, 절 달래는 거 예요. 저는 화를 내며 무슨 말을 하냐고 분명 제 목소리를 듣고 아니 깐, 손을 꼭 잡아줬는데. 저의 울부짖음을 끝내 남편은 모른 체 할뿐이었습니다. 5일 동안 남편은 뇌사상태에 빠졌습니다. 이승을 쉽게 떠날 수 없었던지 병원에 누워있는 내내 소나기가 연 일 퍼부어 됐습니다. 하늘도 쉽게 보낼 수 없어 슬펐던가봅니다. 9년 을 알았고 7년을 만났다 헤어지길 여러 번 오빠가 남편이 되기까진 쉽지만 않았던 세월, 원하던 아들형제, 밤 근무를 나가는 날이면 항 상 큰아들에게 문단속 철저히, 엄마 동생 잘 돌봐야한다고 교육시켰 던 그 사람,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020

23 몇 해 전 그렇게 존경하던 아버님을 중풍으로 보내고, 마음 아파 늘 술이 취하면 결혼식비디오를 보며 눈물로 달래야했고, 시할머니 를 모시고 혼자 사시는 어머님을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고, 철부지처 럼 남편 없인 아무것도 못한다고, 떼쓰는 마누라 챙겨줘야 하고 산 적해 있던 노동문제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회사 일들. 그 모든 것이 쉽게 떠날 수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떠나기 하루전날 첨으로 아무 말 없이 병상에 누워있던 아빠를 본 큰아들은 저에게 다가와 아빠 하늘나라 가게 되면 절대 결혼 하지 말라며, 자기는 최씨 성을 버리고 싶지 않다고, 초등학교 2학년인 어 린애 말이 의심스러울 만큼 똑똑하게 당부했던 그 말들도 이유 있는 말이 되었습니다. 5일째가 되던 날 남편 옆에 앉아 싸늘히 식어가는 손을 잡으며 잠 시 잠이 들었나봅니다. 꿈속에 그가 힘들어하며 몰아쉬는 숨소리가 생생히 제 귓가에 들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심장박동수가 떨어지 고 있었습니다. 급하게 달려온 의사는 몇 번의 심폐소생술을 끝으로 사망이란 끔 찍한 단어로 마지막 진단을 내렸습니다. 제 귀엔 영화에서 본 총 맞은 주인공의 울림처럼 멍해졌습니다. 모든 제 정신 상태는 정지 된 그 상태였습니다. 그 누구의 울음도 슬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3일내내 퍼 붓든 비는 제 슬픔과 함께였습니다. 장례식 날 아침 말갛게 떠오르는 햇살과 함께 회사에서 치러지는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021

24 거대한 장례절차 역시 너무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그 날은 왜 그렇 게 제 자신에게 냉정해버렸는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담담하게 한 편의 드라마를 찍은 것처럼,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실감이 나 지 않아서였던 모양입니다.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에 친정 부모님은 노심초사 혼자가 된 딸이 걱정이 되어 곁에 있어주길 몇 달, 서로의 살길이 다르기에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던 날 이후부턴 제겐 남편의 빈자리가 시작되었습니 다. 하루도 술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10월의 가을 저녁 턱을 괴고 베란다 창문에 기대 곤색 제복을 입 고 빠른 걸음에 집으로 향하는 여럿의 회사원을 보며 하염없이 울었 습니다. 이 시간쯤 남편도 함께였던 지난날이 너무도 그리웠습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어떤 날 8살인 큰아인 학교에, 6살인 작은 아인 유치원에 보낸 뒤 아침부터 술을 마셨습니다. 그 모든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엄청난 양의 술을 먹고 정지 된 남편의 휴대폰으로 전화 걸길 여러 번, 통화가 되지 않자 늘 남편 이 받던 회사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무턱대고 남편을 바꿔달라고, 울며불며 애원했습니다. 할 말이 없던 동료들이 집으로 찾아와 달래길 여러 번, 죽었다는 그 말이 믿 기지 않아 산소로 향해 그의 무덤위에 누워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 022

25 니다. 마지막 보내던 날 다하지 못했던 내 설움이 복받쳐 하염없이 울었 습니다. 어린애들은 울며불며, 하늘나라 간 아빠가 다 하지 못한 사랑 엄 마가 대신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매일 술만 먹고 우는 엄마가 싫어 저더러 죽어 하늘나라 가서 대신 아빠를 내려 보내라며 우는 것입니 다. 아이의 그 울음에 난 부끄럽고 미안한 맘도 들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은 엄마라도 있지만 난 남편을 잃어 날 지탱할 수 없다고! 내 슬픔에만 이기적이었습니다. 주말이면 가족여행에, 봄이면 남편이 속해있던 단체행사에, 가을 이면 단풍놀이, 체육대회 등 많은 행사에서 아빠의 멋진 모습 남편 의 자랑스러움. 그 모든 것들이 한 편의 추억, 아픈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어느 해, 남편의 생일날엔 퇴근해 오는 남편을 속이려 어린 아들 과 장롱 속에 숨어있던 우릴 발견하고 우스워 배를 잡던 일, 곤히 잠 자는 두 아들을 남겨두고 한 잔 술이 아쉬워 노래방에 가서 남편은 춤을, 전 노래를, 신나게 외쳐 부르곤 그 팔에 안겨 집으로 오던 날 이 생각납니다. 비오는 날 마중 나가 우산 속에서 꼭 잡은 두 손, 미 칠 것만 같은 지난날의 기억들 잊을 수가 없어 죽고만 싶었습니다. 사고 나기 전, 큰아이 생일엔 바빠서 함께 하지 못한다면서 카세트 에 생일 축하노래를 직접 녹음해 놓았던 그 목소리를 하루에도 열두 023

26 번씩 들으며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대답해보라고 소리 질렀던 날이 허다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살아만 있다면, 병상에서라도 볼 수만 만질 수만 있다 면, 그 애절함은 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힘든 날은 그렇 게 지루하게 이어져 갔습니다. 보다 못한 가족들의 성화로 십여 년의 생활을 정리하고 친정 가까 이 이사를 왔지만 몸이 떠나온다고 해서 그 기억들은 잊혀지지 않았 습니다. 그냥 상처는 상처로 남을 뿐이었습니다. 잦은 전학에, 준비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함에, 부족한 기초학습도 그렇지만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이 생활고는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생 각하면 가장 후회가 되는 것이 자식들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부분 이 가장 가슴 아픕니다. 엄마를 잃는 건 한부분이지만 아빠를 잃는 건, 주위를 전부 다 잃 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에 단절되니 두 아들을 키우는 엄마의 역할은 한계가 있단 걸 알게 되었고 그 부족함으로 애들이 받는 상처는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컸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니 참으로 후회가 됩니다. 많은 회환의 눈물 속에 지금이라도 못다 해준 사랑을 나누고져 엄 마의 자리에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지만 경제적인 문제만큼은 쉽 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아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소개 받은 교통안전 024

27 공단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답 답한 나머지 그 혜택을 받기위해 십여 년 전 살던 곳의 경찰서를 찾 아가는 일이 너무 힘들어 포기할까도 했지만, 다정다감하게 상담해 주던 담당자 강태영씨 의 목소리에 용기를 얻어, 지금은 많은 혜택 과 도움을 받으며 그 어느 가족들의 힘보다 큰 관심을 받는 것 같습 니다. 올해 큰아들은 대학교에, 둘째아들은 고등학교에, 저는 낮엔 열심 히 일하고 밤엔 야간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올해 입학하였습니다. 저 같은 경우엔 교통안전공단 소식을 늦게나마 접해도 많은 혜택을 받 았지만 아직도 저희들처럼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가족들이 많을 거 라 생각하며, 어둠속에 헤매지 않도록 밝은 등대역할을 해주시는 교 통안전공단 가족들을 빨리 만나길 바라며 많은 홍보와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도 쉼 없이 걸어 나오다보면 분명 불빛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그 불빛을 향해 우리 유가족 여러 분 함께 힘내며 제가 받아온 많은 사랑을 정말 제 힘이 다할 때까지 어떤 식으로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키워가겠습니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025

28 선물 강희선 시계는 어느새 새벽 2시를 행해 달리고 있었고, 그때 온 집안의 정적을 깨뜨리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신발을 끌며 정신없이 대문을 나서는 어머니. 이상한 날이었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이유로 엄마와 괜 한 말다툼을 하고 난 내 방에 들어와 문을 닫고 있었다. 거실로 나가 서 엄마한테 잘못했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괜한 고집 에 연습장 가득 낙서만 하고 있었다. 시계는 어느새 새벽 두시를 향 하고 있었다. 엄마는 그날따라 늦으시는 아빠를 기다리시는 중인지, 아니면 나 때문에 속이 상하신 건지 그 시간까지 주무시지 못하고 거실에 계셨다. 역시, 나가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좋겠지? 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온 집안의 정적을 깨뜨리며 전화벨이 울부짖었다. 다급한 엄마의 목소리에 무슨 일이냐며 거실로 나가봤을 땐 엄마 026

29 는 이미 문밖을 나설 채비를 하고 계셨다. 아빠에게 교통사고가 일 어났다고 하셨다. 엄마는 나에게 말씀을 하시면서도 그 상황을 이해 하실 수 없다는 표정이셨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벽에 전 화벨이 울리고 그 전화에서 가족 중의 누군가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상황은 드라마에서나 등장하는 게 아 니었나?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나는 건가? 멍하니 서있는 나에게 엄 마는 아빠가 크게 다치시지는 않으셨을 거라며, 금방 병원에 다녀오 실 테니 집에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하지만, 아침이 되어 동생과 내 가 학교에 가야할 시간이 될 때까지 엄마도 아빠도 돌아오지 못하셨 다. 아침에 걸려온 전화에서 엄마는 아빠가 많이 다치셔서 서울 세브 란스 병원으로 가 수술을 하셔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아마도 걷 지 못하실 것 같다는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정말 이상하고 이해하 기 힘든 일들만 벌어지던 날이었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그때쯤 우리 가족은 모두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십 년 동안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만 하시던 부모님이 사업을 확장 시 켜보시려 했을 때, 갑자기 IMF라는 날벼락이 우리나라를 뒤흔들었 고, 그때에 맞춰 삼촌이 아빠에게 사기를 쳤다. 이십년을 노력한 결 과를 친 혈육의 손에 잃은 아빠와 엄마는 한동안 넋이 나간 사람 같 았다. 순식간에 집과 가게를 팔아야 했고, 새로 시작하던 사업도 어느새 027

30 우리 것이 아닌 남의 것이 되어 있었다. 작은 집으로 이사해 짐을 채 들여놓을 곳도 없어 한 구석에 쌓아 놓아야 했다. 엄마는 불도 켜지 않은 방에서 나오지도 않으시고 매일 우셨고, 아빠는 삼촌이 만들어 놓은 덫에 걸려 이곳저곳에서 걸려오는 영문도 모를 대금 청구 전화 에 정신이 없으셨다. IMF의 타격으로 일가족이 자살했다는 기사가 남 이야기 같지 않 게 느껴질 무렵, 나의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질타라도 하시듯이, 아 빠가 파란 트럭 한 대를 구해 오시고는 그 뒤에 오징어 수족관을 꾸 미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아빠 엄마는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처 럼 아침부터 새벽까지 트럭을 타고 이곳저곳을 다니시며 장사를 하 셨다. 부지런함으로 평생을 살아오셨고, 그것만이 재산이었던 분들 이었다. 부모님을 보면서 나도 동생도 이제 더 힘든 일은 없을 거라 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만 믿고 열심히 따라가면 그깟 시련쯤은 잠 깐에 지나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유난히 엄마를 일찍 집에 들여보내시고 늦게까지 장사를 하시고 돌아오시던 그날, 예당저수지의 물 때문에 항상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안개가 끼던 지역을 지나오시던 아빠가 그 길이 급한 커브길 임을 아셨을 때는 이미 차는 도로를 벗어나 길 아래로 박혀 버린 후였다. 새벽에 가로등도 거의 없는 도로에 한 치 앞도 가늠하 기 힘든 두꺼운 안개는 아빠의 시야를 완벽하게 차단해 버린 것이었 다. 사고가 일어난 예산에서는 도저히 아빠를 치료할 수 없다는 의사 028

31 의 말에 바로 서울 영동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동해 수술을 받으셨지 만 여덟 시간이 넘는 수술 끝에도 11번과 12번 척추의 신경을 다치 신 아빠는 허리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시지 못하시고 움직이 실 수도 없게 되셨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고등학교 3학년과 1학년이던 나와 동생은 예산에, 엄마와 아빠는 서울 병원에서 머무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집안에 일어난 사건을 받 아들이기도 아빠가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힘 겨운 상황에서 가족이 떨어져 얼굴도 보기 힘들다는 상황이 모두 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기보다는 하루하루 가 사라져간다고 느껴지는 날들이 지나고 엄마와 아빠는 재활 병동 에서 쉼 없는 치료와 재활 훈련을 받으시며 6개월을 보내시고, 나와 동생은 학교생활을 하며 나는 어느새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갑자기 집이 힘들어졌을 때 보험을 모두 해지해서 아빠가 사고가 났을 때는 아주 작은 보험 하나만 남아 있었다. 그 보험금마저도 수 술비와 6개월 동안의 입원비 그리고 생활비로 써야했기 때문에 나 는 학교를 휴학하고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렇게 하다보면 아빠도 엄마도 힘을 내실 수 있고, 집에서 혼자 고등 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생겼 다. 하지만, 불행은 항상 혼자 오지 않았다. 재활 병동에 입원해 계시 029

32 는 내내 아빠가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셨는데, 병원측에서는 교통사 고와 큰 수술에 따른 통증일 뿐이라고 무시를 해오다가 부모님께서 강경하게 요청을 하고 나서야 통증이 있은 지 몇 달 만에 검사를 했 고, 검사 결과 아빠가 담낭암 3기라는 기가 막힌 소식을 전해 주었 다. 그 후 수술을 시도했지만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다시 가슴을 닫아야 했다. 이미 암세포가 많이 퍼져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며 수술실에서 나온 의사는 엄마와 나에게 아빠에게 남은 시간이 길어 야 6개월 남짓이라는 냉정한 통보를 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아빠에게 전해야 할지 막막했고, 어떻게 그런 불행이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연이어 일어날 수 있는지, 운명을 가 지고 장난을 치는 이에게 제발 그만두라고 애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아빠는 마치 아빠의 상태를 독감에 걸린 정도로 받아들이시 는 것 같았다. 병실에 입원해 있는 다른 환자들과 가족들, 심지어 의 사들까지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아빠는 긍정적이셨다. 이미 암은 3 기에 접어들어 있었고, 여덟 시간이 넘는 큰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 지도 않은 시점에서, 게다가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상태에서 그 독한 항암치료를 견뎌내기는 힘들다는 모든 주변 사람들의 말에 도, 아빠는 치료나 하세요. 견디는 건 내가 하면 되니까. 라고 말씀 하시며 웃으실 뿐이었다. 의사선생님은 아빠처럼 사고로 신경이 마비되거나, 신체의 일부 를 잃은 다른 사람들이 절망과 고통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 니까 가족들이 많이 지지해 주고 더 힘을 내야 한다고 하셨다. 하지 030

33 만 아빠는 우리 가족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 아빠는 재활 치료와 물리치료 운동을 쉼 없이 하시며, 되레 병실의 다른 사람들 에게 농담을 던지셨다. 그런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지 만, 우리 가족은 그런 아빠를 보면서 더욱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담당 의사선생님조차도 가망이 없다고 말했던 아빠의 항 암치료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회나 단축해서 암세포를 모두 죽이고 성공적으로 끝을 냈다. 나중에는 아빠를 담당하셨던 의사선생님조 차 모든 치료는 아빠의 의지와 믿음이 이뤄낸 기적이라며 아빠께 이 겨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셨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암세포까지 모두 이겨낸 아빠에게 조금 이상한 점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된 건 항암치료가 끝나고 얼마 후였다. 항암치료가 모두 끝나 기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셨음에도 외향적인 성격의 아빠가 바깥출 입을 하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계셨다. 봄이 되어 개나리가 만발 하여 개나리를 꺾어다 드리며 바깥 구경을 나가자고 해도 아빠는 아 무 대답이 없으셨다. 되레, 꺾어온 개나리를 쓰레기통에 버리시며 화를 내시기도 했다. 그런 아빠 곁에서 엄마는 아빠의 모든 것을 받아내고 계셨다. 힘 든 일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겪어내신 아빠는 예전과 달리 점점 까다로워지셨고, 좀처럼 화내는 법도 없으시던 분이 어떤 경우에는 화를 감당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폭발하셨다. 동생과 나는 그런 아빠 가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어쩜 저렇게까지 희생하 031

34 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을 아빠에게 맞추셨다. 사업 실패와 사기로 어두운 방에서 우시기만 하던 엄마는 아빠가 교통사고로 다치시고 난 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자가 되었다. 아 빠를 간호하시면서 동생과 나를 가르치기 위해 일을 하셨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아빠와 동생과 나도 달라졌다. 동생과 나는 아빠의 달라진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아빠는 엄마를 통해 세상과 소 통을 하시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시 예전처럼 유쾌한 농담도 하시 고 이사한 집의 주변을 매일같이 휠체어로 운동하시기 시작하셨다. 그 많은 일들이 쉼 없이 일어나는 사이에 무섭지 않았냐고 묻는 나의 질문에 엄마는 대답하셨다.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처럼,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처럼 무서우셨다고, 하지만 가장 절망하셨을 아빠 가 엄마와 우리들에게 힘을 주시기 위해 하나도 힘드시지 않은 것 처럼,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노력하시는 걸 보고, 또 그 노력으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것을 이뤄내시는 걸 보고 엄 마도 아빠를 믿고 힘을 내셨다고 했다. 나도 그런 엄마와 아빠를 보면서 어려운 시간을 이겨냈고, 동생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평생을 노력해서 얻은 것을 잃은 상태에서 교통사고로 장애가 생기시고, 거기에 건강한 사람도 이겨내기 힘들다는 암까지 아빠를 괴롭혔음에도, 아빠를 버티실 수 있게 한 것은, 그리고 우리 가족을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준 것은 믿 032

35 음과 긍정의 힘이었던 것 같다. 아빠가 스스로를 믿으시고, 상황에 비관하지 않으시고 최대한 긍 정적인 생각으로 이겨내시려 노력을 하셨고, 아빠의 그런 노력을 지 켜보면서, 우리 가족들은 다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희 망의 믿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빠가 너무 지치셨을 때는 아 빠를 믿고 기다려주신 엄마의 모습이 우리 가족 모두에게 힘이 되었 다. 예전의 우리가족처럼 정신없이 밀려드는 불행의 폭력에 지쳐있는 분들에게 그 긍정과 믿음의 힘을 선물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033

36 제비꽃이 된 제자의 이야기 김동수 시커먼 유독가스에 뒤덮인 채 펑펑 유리창 깨지는 소리에 삽시간에 인파가 몰려들었다. 자동차 안에 갇힌 사람들은 뻘건 불길사이로 손을 내저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처절했다. 자동차가 불에 활활 타고 있었다. 시커먼 유독가스에 뒤 덮인 채 가끔 펑펑 하는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몰려든 사람들을 깜 짝깜짝 놀라게 했다. 온몸이 불에 타들어가는 고통에 차안에 갇힌 사람들이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아무도 자동차에 접근 할 수 없었다. 그저 소방차가 어서 오기만을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 볼 뿐이었다. 이윽고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차안에 갇힌 사람들 의 비명소리도 절규하는 손짓도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대신 매캐 한 연기와 함께 노릿노릿한 살 타는 냄새만이 코를 찔렀다. 나는 도 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 034

37 도 나지 않고 가슴만 두근거렸다. 그리고 여기가 몇 번 도로인지 차 안에 갇힌 저 사람들은 누구인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 저 진땀만을 흘리며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다 잠에서 깨었다. 아, 악몽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듯 나 는 두 눈을 똑바로 치켜떴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꿈에 보였던 불타는 흰색 소나타가 나를 놓아주지 않고 그대로 움켜쥐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멍하니 반대쪽 벽에 매달린 농협에서 무료로 제공한 달 력을 바라보았다. 2010년 1월 12일 수요일 새벽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습관적으로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켰다.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보라색 정장으로 예쁘게 차려입은 아나운서가 고운 목소리로 교통사고 소식을 전해주고 있 었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오늘 새벽에 서산에서 승용차가 전복되면서 불이 나 차에 타고 있던 고등학생 3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운전자였던 사람은 19살 김 모 군으로 운전면허를 딴 지 한 달도 안 된 상태에서 미숙 하게 운전을 하다 이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고 합니다. 사망자들의 시신은 불에 타는 등 심하게 훼손되어 지금 신원을 파악 중에 있다 고 합니다. 꿈결에 들은 탓일까. 부정하고만 싶은 친숙한 아이들의 얼굴이 자 035

38 꾸만 뇌리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얼마 전 수능이 끝나고 잠깐 쉬 는 동안에 자동차 면허증을 따고 즐거워하던 녀석의 얼굴이 자꾸만 불길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떨쳐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숙이 빠져 드는 늪처럼. 나는 어떤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 은 1월 12일 수요일이었다. 부리나케 아내에게 아침상을 차리게 한 뒤 몇 술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출근을 했다. 너무 이른 시 간이라 학교에는 아직 숙직아저씨 한 분밖에는 없었다. 나는 숙직아 저씨에게 달려가 혹시 학교로 무슨 소식이 온 게 없느냐고 물었지만 아저씨는 아무 일도 없었다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내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 앉아 보충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선생님들이 하나 둘 도착하고 있었다. 선생님들도 출근하자마자 오늘 새벽에 있 었던 뉴스를 화제로 삼고 있었다. 오늘 교통사고로 사망한 애들, 설마 우리학교 학생들은 아니겠 지? 하지만 우리의 기대는 1교시 보충수업이 끝나고 자리에 돌아왔을 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내가 1학년 때부터 애지중지하며 가르 쳤던 수제자 김경원, 바로 그 녀석이 오늘 새벽 교통사고를 당했다 는 것이다. 알 수 없던 불길한 예감이 그만 적중하고 만 셈이다. 2010년 1월 12일. 그 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제자 한 명을 잃었다. 봄날에 흐드러지는 개나리와 벚꽃처럼 여리고, 바 다처럼 시원한 웃음을 지었던 그 아이를, 그 아이와 나는 3년 동안 036

39 인연을 맺어온 사제지간이었다. 1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제자로 처 음 만나 3년 동안 서로를 보아왔던 만큼 수많은 추억이 쌓여있는 사 이였다. 더불어 다툼도 많았고 오해도 잦았지만 그 모든 흐트러짐을 감싸줄 수 있을 만큼 우리 사이에는 스승과 제자라는 끈끈한 정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자율학습 때문에 학교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던 녀석이라 사실 그 동안 가족이나 친구들보다 서로의 얼굴을 더 많이 본 사이였다. 하 교한 뒤에도 녀석은 나에게 종종 전화를 걸곤 했었는데, 유독 그날 밤에 들었던 경원이의 목소리는 지금까지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대 산이 집이었던 그 아이는 그날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내게 밖에 눈 이 많이 내린다며. 하늘이 뚫린 것처럼 눈이 펑펑 온다며 어딘 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친구들을 만나 맥주라도 한 잔 해야겠다고 했다. 아마 나는 잠결에 별 싱거운 소리도 다 한다며 어서 들어가 일찍 자라고 훈계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유독 쌀쌀해진 공기에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는데 텔레비전에서 교통사고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익 숙한 곳의 도로 사진이 등장하며 내가 평소 많이 보아왔던 산과 들 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라? 눈을 비벼보기도 하고 잠이 덜 깨었나 하는 생각에 팔을 꼬 037

40 집어보기도 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틀림없는 대산 명지 근처 의 국도였다. 또랑또랑 들려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귓속을 날카 롭게 파고들었다. 경찰 조사 결과 충남 서산시 대산읍 명지리 부근 4차선 국도를 과속으로 달리던 승용차가 난간을 들이받고 넘어지면서 차에 불이 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경찰 측은 승용차가 산 아래 옹벽에 충돌한 흔적이나 차체가 심하게 찌그러진 것으로 보아 교통사고로 인하여 차량에 불이 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다시 들어오는 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1교시 보충수업이 끝난 후, 나와 학생부장 선생님과 그 외 몇 분 이 부리나케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지휘봉까 지 그대로 들고 차에 타고 있었다.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사고현장 은 처참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차량이 1차 충돌했던 중앙분리대는 심하게 휘어져 있었고 2차로 충돌한 튼튼한 시멘트 옹벽도 일부가 부서져 있었다. 또한 화재로 인해 인근 도로는 시커먼 타르와 재들 로 엉망진창이었다. 사고차량은 이미 경찰들이 수거했는지 보이지 않았고 매캐한 불 냄새만이 주변에 진동하고 있었다. 노란색 폴리스 라인 너머로 구경나온 인파들이 측은한 눈빛으로 혹은 호기심이 가 득한 눈빛으로 우리 교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시신이 안치 038

41 된 서산의료원 영안실로 향했다. 영안실에는 이미 사고 난 학생들의 부모님과 친구들이 모여 넋이 나간 상태로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경원이 부모님께는 차마 눈길을 줄 수가 없었다. 내 잘못은 아니지 만 그래도 아이의 담임으로써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었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경원이 친구들로부터 그날 사고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날 경원이는 친한 친구 다섯 명과 함께 서산에서 즐거운 저녁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수능도 끝났고 앞으로 있을 대학생활에 대한 부푼 설계와 그리고 장밋빛 미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눈 뒤 헤어졌다는 것이다. 대산까지 무사히 도착한 다섯 명의 친구들은 풍림아파트 앞에서 2명을 내려주고 나머지 셋이서 친구 집에 가서 한 잔 더 하려고 이동 중에 그만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나는 오후 보충수업이 아직 남아 있어 영안실에 한 시간쯤 머물다 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 아이의 실내화도, 사물함도, 책상도 모 든 것이 다 그대로였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함 께 산책하던 교정, 수업시간에 떠든다며 쫓아냈던 복도, 이야기를 나누느라 늘 바빴던 상담의자. 학교의 모든 곳에 그 아이와의 추억 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회칠을 한 벽 한 쪽 귀퉁이에 새겨져 있는 깨 알 같은 경원이의 낙서가 보였다. 처음처럼 늘 긴장하며 살자. 사랑하는 내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 이 다음에 꼭 성공해서 다시 만나자. 글씨 한 획 한 획마다 그 아이의 숨결이 남아있는 것만 같아서 터 039

42 져 나오는 슬픔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밤새 내린 눈에 온 세상이 흠 뻑 젖어버렸던 그 날, 나는 오래도록 교실에 남아있었다. 그 아이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좁은 공간에 갇혀 시시각각으로 타 들어오는 불길을 보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소방대원들의 말 로는 학생들은 차량이 전복되고 나서도 한참동안이나 의식이 있었 다고 했다. 기절한 상태로 불에 타죽는 것보다 의식이 명료한 상태 에서 불에 타죽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럽다고도 했다. 절체절명의 공포 속에서 그 아이를 구해주지 못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4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 나는 다시 텔레비전을 켰다. 아나운서 의 목소리가 다시 작은 웅얼거림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천안함 인양 소식에 이어 또 교통사고 소식이었다. 이번엔 역주행 차량에 한 명 이 사망하고 다수가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이었다. 이어서 교통사고 의 가장 큰 원인은 과속과 음주라는 전문가의 굵은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있었다. 그러면서 사고 다발지역엔 교통 사망사고 최다발생지 역 같은 표지판을 세우는 충격요법을 도입하는 것이 좋겠다고도 했 다. 나는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4월의 마지막 일요일에 보는 자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너무 나 아름다웠다. 연둣빛 새싹 너머로 비치는 말간 햇살이 마치 경원 이의 웃음처럼 환하게 보였다. 싱그러운 풀내음이 가득 실린 바람결 이 옷깃을 스쳐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봄바람에 흔들리 040

43 는 풀잎들이 새로운 계절이 다가옴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 고 개를 돌려 화단 옆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을 바라보았다. 함초 롬히 이슬에 젖은 풀잎 너머로 작은 물결이 아른거렸다. 녀석이 평 소 좋아했다는 바로 제비꽃이었다. 그 제비꽃이 봄빛 아지랑이와 함 께 슬프게 웃고 있었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이 글에 등장하는 사건은 모두 사실이고 다만 학생의 성명만은 가명임. 041

44 따가운 햇볕아래 한줄기 소나기 공미진 남편, 그가 드리운 그늘은 언제나 아늑하고 시원했다. 시샘을 한 것일까, 교통사고, 그리고 한 순간 나만 홀로 사막 한가운데, 자글거리는 땡볕 아래 버려지고 말았다. 나는 3남 1녀 중 장녀로 모든 세상의 부모님들이 다 그렇 겠지만 나의 부모님께서는 늦게 결혼을 하셔서 첫아이로 나를 낳아 무척 귀하게 사랑과 정성으로 키워주셨다. 가정에서부터 귀하게 여 김을 받아야 장차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부모님께서 장녀인 나에게 쏟으시는 정성이 유달라 물질적으 로는 그리 풍요하지 못했어도 그다지 아쉬움 없는 성장기를 보냈다. 그런 정성으로 키워주신 부모님의 은혜도 모른 채 고등학교 졸업 1 년 후 결혼을 하게 되었다. 딱히 눈에 띄게 내세울 만한 건 없었지만, 오직 나에 대한 깊은 사 042

45 랑 하나만으로 남편을 택해 부모님을 배신하고 말았다. 부모님과 의 절한 상태로 아는 이에게 20만원을 빌려 어느 누구하나 축복해 주 지 않는 신혼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첫 아이를 낳고 어떤 것 하나 부럽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게 되어 1년 뒤 부모님을 찾아 외손녀를 안겨 드리면서 용서를 받게 되었다. 점점 그렇게 아끼고 귀여워했던 딸아이에게 잘해주고 장인, 장모를 친 부모처럼 잘 모시는 사위에게서 딸을 맡겨도 되겠다는 믿음을 부 모님께 심어주었던 남편이었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남편은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님 잃고 몇 년 뒤 아버님마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곳으로 누님만 남겨놓고 부모님 모두를 잃고 말 았다. 어린나이에 굶주림에 시달려 식당에서 기술을 배우면 굶어 죽 지 않겠다는 생각에 중국집 요리사가 되기로 꿈을 꾸었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식당 주방 일을 배우면서 근면 성실함을 인정받게 되어 식당주인의 신임를 받고 열심히 기술을 배웠던 탓에 식당개업에 은 행대출 보증까지 쉽게 서주셨다. 이분들의 믿음에 보답하고자 더욱 더 열심히 일을 했다. 열심히 일을 해 은행 빚이 조금 정리되었을 때 즈음 외로이 홀로 컸던 유년시절 탓인지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셋째아이가 태어났다. 무엇하나 부러움 없고, 친정 부모님께 인정받고, 이웃 분들에게 부 지런하고 성실한 사람, 착한 사람이라고 소문나 있던 1998년 5월 어 043

46 느 날, 나에게 태어나 처음으로 힘든 고난의 기회가 다가왔다. 평소 부지런한 탓에 새벽 4시에 일어나 조상님 제사가 많아서 제사상에 직접 올리고 싶다면서 고사리나물을 캐러 갔다 집으로 오다가 빗길 에 미끄러져 교통사고가 나고 말았던 것이다. 연락을 받고 비가 부 슬부슬 오는 날씨에 돌도 안 된 막내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별 문제 없겠지~ 조금 다쳤겠지 하면서 큰 걱정할 것이 안 되는 걸로 알고 병원 응급실부터 먼저 찾았다. 응급실에서는 업무과에 가보라 고 해 업무과로 갔더니 지하 영안실에 가보라고 했다. 난 같이 동행 한 다른 사람이 사망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사망한 사람은 바로 나밖에 모르는 나의 소중한 남편이었다. 난 멍한 상태로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친정 엄마가 달려와 울음을 터뜨려 그때서야 나에 게 뭔가 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벌 써 10년이 훌쩍 넘어 내 나이 마흔이 넘었지만 내 눈가에 눈물이 또 흐르고 있다. 남편은 생각할수록 불쌍하고 아까운 사람이었다. 평생 내가 맛볼 행복감을 9년 동안 다 쏟아붓고 가버린 사람이다. 하늘은 나에게 남편의 그늘 아래서 충만한 행복에 9년을 살게 했 고, 시샘이라도 한 듯 교통사고라는 엄청난 현실은 나의 편안한 그 늘을 무참하게 빼앗아 가버리고 따가운 햇볕아래 홀로 서게 만들어 버렸다. 이젠 나 혼자 아이 셋에게 편안한 그늘을 만들어주어야 하 는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경험도 없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주부의 첫 044

47 직장은 보험회사 영업사원이었다. 무심코 아는 이를 따라 갔다가 어 린나이에 충격에서 못 벗어나 허우적대고 있을 때 발목을 잡혀버린 것이었다. 사고 후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으면 우울증을 앓게 된다 는 주위 분들의 말씀에 돌 지난 아이를 업고 나의 적성에 맞지 않은 일임을 알지만 사무실과 집을 오고 가는 일밖에 할 수가 없었다. 다 행히 우울증은 생기지 않았고 홀로 살아감에 첫 걸음을 걷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적성에 맞지 않았던 보험설계사를 그만두고 기초생활수급자인 나 에게 자활을 꿈꾸게 해주었던 거창지역자활센터 의 자활도우미로 새 직장을 찾아, 특수교육 보조선생님, 거창군청 주민생활 지원과의 복지도우미, 나는 사회복지와 관련된 일을 순차적으로 접하게 되고 현재는 기초생활수급을 탈피해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따가운 햇볕에 세 아이를 업고 무의식적으로 홀로 서게 된 몇 개 월 후 우연히 신문을 보게 되어 교통안전공단에서 자동차사고 피해 가족들에 대한 지원사업을 실시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나에겐 무더운 여름철 하늘에서 용기를 잃지 말고 세 아이의 그늘이 되어라 는 한줄기 소나기를 내려주신 것이었다. 물론 남편의 선물이었던 걸 로 지금까지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바로 교통안전공단 부산 경남지사에 연락을 하여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설명하였더니 담당선생님께서 친절히 안내를 해주신 덕분에 교통사고유자녀 장학생 선발제도와 생활안정자금 무이자대출제도 045

48 를 알게 되었다. 내가 처한 상황에서는 생활안정자금 무이자 대출제 도가 적합한 상태여서 신청을 하게 되어 지금까지 가정형편이 여의 치 않아 생계에 어려웠는데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사막에서 목 말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나에게 교통안전공단의 지원사업은 꿈 과 희망을 주는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다. 해가 갈수록 교통사고피해가정에 지원이 늘면서 자동차사고 피해 가정 유자녀 장학생 선발, 대학생 해비치 교육지원금, 자립지원금, 인터넷 학습지원, 여름캠프, 전세자금 무이자대출 등등. 많은 지원이 되고 있다. 현재 내가 교통안전공단의 보살핌을 받고 신청을 하고 있는 제도 는 유자녀 장학생 선발, 인터넷 학습지원, 전세자금 무이자 대출, 생 활안정자금 대출을 신청해 아낌없는 공단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런 도움 없이는 세 아이의 그늘을 만들어 줄 자신이 없었을 것 같다. 그 리고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혜택도 나에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국가의 도움과 교통안전공단의 도움으로 묵묵히 살아가고 있던 중 나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찾게 되었고, 내가 불볕 같이 따가 운 세상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혜택을 되돌 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지금은 사이버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공부를 한다는 건, 아니 세 아이의 엄마로 아 이를 키워야 하는데 내 학비를 보태야 한다는 생각은 경제적으로 많 046

49 은 부담감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시작이 두려웠다. 하지만 나의 직 장생활에서 필요성을 느끼고, 평소 관심은 있었지만 못하고 미루었 던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몇 개월 후면 졸업이다. 교통안전공단 의 지원으로 용기를 가지면서 자격증도 몇 개 가지고 있고 이젠 사 회복지사 자격도 가지게 된다. 이 공부를 마치면 보육학도 공부를 해볼 예정이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시작이 반이라고 하였다. 무엇이든지 망설이지 말고 시작할 수 있 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또한 경험이 없다고 당황하지 말고 언제나 자신감을 가지고 모든 일에 당당해져야 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어려운 가정형편이지만 무엇이든 시작을 하면 할 수 있다는 걸 깨닫 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공단의 도움 없이 나 자신을 위해 공부를 한 다는 건 꿈도 꿀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공단에서 아이들이 장학 금을 받으며 생활자금도 대출받고 있고, 내 집은 아니지만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안정적인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픈 시련과 공단의 도움으로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은 거 창군 민 관 협의체 라는 곳이다. 보건, 복지, 고용, 주거, 문화, 관 광, 평생교육, 생활체육 등 주민이 필요로 하는 각종 사회서비스의 통합과 연계를 좀 더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서비스 제공이 가능하도 록 민간과 공공의 협력강화와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일반주민에게도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주고 있는 곳이다. 047

50 법과 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서비스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분들에 게 관심을 기울이고, 서비스의 중복과 누락을 방지하기 위해 민과 관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는 곳, 꿈과 희망을 전달하는 미 래가 있는 기관이다. 혼자서 꾸는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되 게 한다. 는 말이 생각난다. 나의 꿈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교통안전공단의 지원이 있었던 것 이다. 아직은 아이들이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지 않고 나 혼자만으 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형편이지만, 교통안전공단 덕분에 매사 긍 정적인 사고로 나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세 아이들에게 존경받는 엄마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꿋꿋하게 살아 가고 있다. 048

51 시간이 만든 등나무처럼 배문주 *만약, 그 새벽이 아니었더라면, 마침 그때 아버지가 그 신호대기에 멈추지만 않았더라면, 그리고 트럭 기사가 졸지만 않았더라면. 밤낮이 바뀐 아르바이트로 인해 피곤한 와중에 아버지가 내미신 편지봉투 크기로 접힌 A4 용지를 받아들었다. 교통사고 피 해가족 수기 공모전 알림이었다. 언젠가 신문에 좋은 공모전이나 응 모할 것이 있으면 스크랩해 달라던 말을 기억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노안으로 조금씩 신문 보시는 것마저 귀찮아하시는 것 같아 계속 보 시도록 하려는 핑계였는데 말이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직접 챙겨주 신 아버지를 생각해서 없는 글 솜씨로 우리 집 이야기를 써본다. 내가 기억하는 시기부터 아버지는 줄곧 앉아계셨다. 한 번도 두 049

52 다리로 걸으신 적 없으시고 일어서실 수도 없으셨다. 교통사고였다 는 말을 들었고 의료사고라는 말도 들었다. 짐작하고만 있었을 뿐 어리다는 이유로 누구 하나 제대로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원인조차 잘 알지 못하기에 평범하게 일어서서 걸을 수 없는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불만 이었고 지금은 어른이 된 나에겐 감사 다. 함께 살아있 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힘이 되는 존재가 가족이라는 것을 되 새기며 살고 있다. 누군가의 아픔으로 힘을 얻는 것은 아픈 당사자 에게 꽤나 불쾌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의 가족 이기에 상처를 메우기 위해 더 분발하고 모여드는 한 몸의 세포들처럼 살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버지의 사고에 관한 기억은 나에게 전혀 없었 다. 살아오며 당연한 일처럼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물어 볼 이유도 없었고 철없이 아버지의 상처를 이해하려 한 적이 없었 다. 그저 왜 우리아빠만 못 걸어 다니나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느라 정작 두 다리의 신경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아픔 따위는 안중에도 없 었던 것이다. 글을 쓴다는 핑계로 20년 넘게 묻지 못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아버지는 내가 사고 당시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 을 모르셨단다. 난 그때 고작 4살이었다. 모든 사고가 그렇듯 아버지 의 사고 또한 예고 없이 정말 평범한 날 평범한 일들이 우연처럼 끼 어들어 일어났다. 아버지는 택시운전을 하고 계셨고 횡단보도 신호 에 걸려 정차하셨다. 시간은 늦은 새벽이었고 그렇기에 졸릴 수도 050

53 있는 있었다. 그런데 그게 하필 우리 아버지의 뒤에서 달려오는 트 럭 운전기사일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는 설마 뒤차가 멈추지 않을지 도 몰랐고 피하실 수도 없었다. 사고는 그렇게 어이없이 평범하게 일어났다. 만약 새벽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트럭기사가 졸지 않았다 면, 트럭이 아니었다면, 신호에 걸려 정차하지만 않았었더라도, 그게 하필 우리아버지만 아니었었다면 어느 조건 하나만 바뀌었었더라도 우리에게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 든 사고는 일어났고 아버지의 택시운전으로 생활을 하던 우리 집의 기둥은 무너졌다. 나는 4살이었고 동생은 2살이었다. 잃을게 많이 없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행복도 생활도 조금씩 늘리며 채워가는 시기였기에 잃은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 다. 하지만 늘어가던 생활과 우리의 추억은 사고에서 시간이 멈춘 듯했다. 가장의 역할은 어머니에게로 넘어갔고 빠르게 채워지던 우 리의 앨범도 거기서 끝이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셨던 부모님이 만 드신 나와 동생의 사진들이 빼곡히 담긴 앨범들은 더 이상 새로운 권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여유가 없었다. 금전적이든 시간적이든 정 신적이든 그것은 사고가 우리 가족에게 남긴 첫 번째 결과였다. 아 버지는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피로로 항상 예민하셨고 어머니는 갑 자기 넘겨받은 가장의 부담과 생활고로 힘들어하셨다. 우린 아직 힘 이 되기엔 너무 어렸고 그저 작은 짐이었다. 사고는 신체적인 아픔만 남긴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마저 무 디게 하였다. 다리의 신경이 다시 살아난다 하면 무조건 해보고 사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051

54 들였다. 운동기구가 좋다하면 운동기구를 사들였고 이미 끊어진 신 경을 살려보겠다고 재활훈련을 하고 좋다는 말에 혈관주사, 침, 벌 침 등 가능한 것은 모두 받았다. 운동기구는 시간이 지나며 사용하 지 않아 하나씩 버린 기억이 있었지만 혈관주사 이야기는 처음 들 으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척추의 신경세포가 혈관주사를 맞아 새로 자라난다는 허언을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었을까? 지금 들어 웃 음 나는 일들이 그때는 절박하게 붙잡고 있는 희망이었고 하나씩 확 인하고 포기하는 시간과 함께 부정하던 사실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 다. 아빠는 다시 걸을 수 없었다. 즐거운 일이 생길 리 없었다. 누구나 현실과 세상을 불평하기 바 빴고 주변의 안타까운 시선마저 비뚤어진 자존심으로 거절했다. 준 비 없던 사고로 급작스럽게 가장이 된 어머니의 벌이로 환자와 커가 는 딸 둘을 부양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점점 더 작은 집 으로 이사를 다니다 결국 단칸 월세방이 되었고 무섭게 자라는 우리 의 속도만큼 가계는 빠르게 빈곤해졌다. 이미 아버지가 나을 수 있 을 것이란 희망은 없었고 복권이라도 당첨되지 않는 한 우리 가족에 게 평범하게, 남들처럼 이란 단어는 허락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서로는 서로에게 짐이었고 그것을 알기에 더 미안한 마음에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때 우리는 각자 사방으로 도도하 게 뻗은 대나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바라본 우린 네 가닥이 하 나로 엉킨 등나무였다. 혼자 서있을 수 없는 얇은 기둥으로 바닥에 서 더듬더듬 서로를 찾아 무게를 느끼며 한 땀씩 땋아 올라 한발씩 052

55 아주 천천히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었다. 가장 처음 도움을 받은 것은 자존심으로 거부하던 생활보호대상 자가 되는 일이었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혼자의 힘으로 강하게 살아오신 아버지였다. 다리를 잃은 뒤 가족을 위해 아버지의 자존심 마저 스스로 꺾으시었다. 이것만으로도 아버지의 병원비의 부담이 조금은 줄어들었고 학교 급식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조금 무너진 자존심을 움켜잡고 허리를 펴고 살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교통안전 공단에서 지원해주는 장학금이었다. 사실 어머니, 아버지가 많은 도 움을 받으셨다지만 나는 내가 알고 있던 사실까지만 이야기 하겠다. 난 이과 계열로 진학하기 위해 학업성적으로, 동생은 미술특기로 한 달에 20만원 정도의 장학금을 지원받았다. 어느 누군가에겐 큰돈 이 아닐지 모르는 금액이 우리에겐 냇가에 징검다리만큼 반가운 것 이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동생이 지금처럼 디자인 전공으로 대학 을 다닌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한때는 돈이 많이 드는 미술 을 선택하는 동생이 철없고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주변상황에 굽히지 않고 주장할 수 있는 그 강함이 부러 웠던 지도 모른다. 난 책값에 부담을 덜고 생명과학을 연구하겠다는 꿈으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성인이란 말에 참으로 신기한 힘이 있다. 세울 수도 없는 자존심 덩어리를 내세우며 고집부리고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들도 서슴없 이 하던 동생과 나에게 성인의 도장이 찍힘과 동시에 가족이 보였 다. 부끄럽게 너무나 늦게 철이 들었다. 말하지 않아도 계절이 무르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053

56 익듯 세상의 중심에서 나라는 존재만 보이던 아이의 눈이 어른의 시 작과 함께 우리라는 말을 배우고 남의 상처를 보는 법을 배웠다. 번 쩍 하고 가계 사정이 변한 것은 아니다. 우린 아직 학생이었고 학비 가 증가함에 앞으로가 더 힘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힘들게 살 아오신 부모님의 어깨에서 내려와 옆에 서 나란히 걸어간다는 사실 이 죄송한 마음을 덜어주고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 한 부모님들께서도 거친 세월에 많이 유해지셨고 지금의 상황에 만 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분들이 되셨다. 아직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다. 20년의 시간은 내가 살아 오며 기억하는 대부분의 시간이고 아버지가 그날의 사고 이후로 두 다리를 잃으신 시간이다. 조금 더 빨리 인정하고 주변의 도움을 받 을 줄 알았다면 우리의 시간이 몇 년은 더 빨리 평안해질 수도 있었 을지 모른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몫은 세월이 아니었나 싶다. 뻣뻣 하던 우리가족이 서로를 보듬을 여유를 준 것은 국가가 주던 금전적 여유도 주변의 동정어린 눈길도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될 때까 지 함께 살아온 시간이 여러 가닥의 등나무 줄기가 한 그루의 나무 기둥을 만들 듯 그렇게 변하게 했다. 이제 한순간 변하리라는 철없 는 생각을 가진 어린아이는 없다. 세월이 다듬었듯이 그렇게 천천히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조금 거칠어도 괜찮다. 우린 이미 한 그 루가 되었으니까. 054

57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니다 이범희 마지막 소원은 죽는 그날까지 만권의 책을 읽어보고 가는 것이다. 책은 나를 일으켜준 원동력이자 재산이며 진정한 멘토였다. 2010년 4월! 봄 같지 않은 봄 날씨가 연일 계속되고 있 다. 지금 난 장애인이지만 장애인이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장애 라는 것은 내가 장애에 굴복하여 장애란 굴레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장애인이지 장애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는 삶은 장애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록의 푸른 봄날! 해살이 눈부신 따스한 오후에 7살, 4살 난 두 아들이 아버지 같이 놀자 하며 나의 품으로 달려온다. 뛰어오는 두 아들의 모습이 봄날의 햇살보다도 더 눈부셔 보인다. 만일 내가 지 난날의 고통을 감수하고 인내하지 못했다면 지금 이 순간의 눈부신 055

58 행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었을까? 1994년 내 나이 스물일곱! 대학을 졸업하고 누구나 가고 싶어 하 는 대기업에 공채로 당당히 합격하여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렇게 우쭐하며 열심히 생활을 하고 있었다. 유난히 산에 가기를 좋아하여 쉬는 주말이면 늘 배낭을 메고 지리산을 올랐다. 산은 나 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구례 화엄사를 시작하여 노고단을 거쳐 연 하천에서 머물고 세석평전의 철쭉을 보며 장터목의 고사목에 세월 의 흔적을 살피고 천왕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가슴이 터지는 듯한 행복이었다. 산은 나의 안식처이자 휴식처였다. 오래된 등산장비를 새 것으로 바꾸고 다가오는 주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주말은 영원히 나에게 오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기다렸던 주말은 나에게 하반신 마비라는 장애를 안겨주었다. 죽음보다도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드는 순간이 었다. 나의 스물일곱 살은 희망이 아니라 죽음보다 깊은 절망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스물일곱은 저물어갔다. 스물일곱만이 저물어가는 것 이 아니라 나의 청춘도 함께 저물어가는 듯했다. 삶을 이어갈 열정 도 꿈도 내게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넌 아직 젊으니까 다시 털고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을 하지만 누워있는 나는 당신이 여기 누워있어 봐라. 그런 마음이 드는지? 그 056

59 냥 죽고 싶은 마음 외에 그 어떤 것도 안 생기는데, 젊다고 일어설 수 있다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마라. 라고 외치고 싶었 다. 나에게는 더 이상 긍정의 힘은 없었다. 오로지 지배하는 것이라고 는 움직일 수 없는 두 다리와 스물일곱에 차고 있어야 하는 기저귀 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었기에 세상의 모든 일이 부정적이었다. 1 년이 넘는 병원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서야 같은 사 고로 인해 장애를 입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그나마 이야기라도 했지 만 퇴원을 한 후에 집에서의 생활은 정말 문밖을 나서지 않는 고립 그 자체의 시간을 살았다. 세상에 나 혼자 병신이 된 것 같고 세상에 나 혼자 모든 고통을 다 받아내고 있는 것 같아 밖으로 나간다는 사 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늘 같은 천장만을 바라보며 그때 안전벨트만이라도 매었더라면 그때 조금만 천천히 갔더라면 수없이 많은 시간을 복기해 보았지만 달라지는 결과는 전혀 없었다. 수만 번이 넘게 곱씹어보고 또 씹어 보았지만 여전히 같은 결과였다. 바뀌지 않는 현실에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왜 하필 나냐고, 왜 하필 나여야만 했냐고 수 없이 물어보고 외쳐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것 밖에 없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방구석에 누워 짜증만 피워대는 시체보다 도 더 구린내 나는 인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있었다. 형님이 컴퓨터를 가지고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057

60 온 것이다. 내가 회사에 다닐 때 에어컨 설계 일을 하였으니 그 방향 이든 아니면 무엇을 하든 가지고 놀아보아라 하는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는 첫 관문이 되었다. 이제 산이 아닌 컴퓨터가 나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PC통신으로 대화를 하고 컴퓨터에 관해 물어보고 프로그램을 공부하고 할 때는 난 장애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년이란 시간을 집에서 컴퓨터와 함께 보냈다. 그러고 보니 컴퓨터에 대해 자신감이 생겼고 비록 휠 체어는 타고 다니지만 컴퓨터 일이라면 앉아서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97년 창원! 난 창원에서 5평정도의 창고를 임대하여 컴퓨터 가 게를 열었다. 건강하게 걸어 다니는 내가 아니라 휠체어에 앉아 장 애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처음으로 다시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는 첫 걸음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장애를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어서도 아 니었고 컴퓨터가게를 열어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도 아니었다. 그냥 집에 있는 것보다는 바깥세상 구경이나 해보자 라고 마음먹은 것뿐 이었다. 내가 돈을 벌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내가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 아야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그냥 서른이라는 나이에 한 지붕아래 서 늘 같은 천장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지루해서였을 뿐이다. 컴퓨터 가게의 장사가 되든 안 되든 그것은 관심이 없었다. 그냥 내 가 좋아하는 컴퓨터와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것만 해도 만족 할 수 있 058

61 었다. 그러다 간혹 찾아오는 손님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고 예 전에 설계한 기술이 있기에 찾아오는 손님 중에 설계에 어려움을 겪 는 사람이 있어 도움을 준 것이 입소문을 타서 가끔 손님이 오곤 했 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내가 굳이 손님을 더 유치해야겠다는 욕심 이 없었다. 걸어 다닐 때와 휠체어에 타고 있을 때와는 너무나 판이 하게 달랐다. 돈을 쓸 일이 없었다. 술을 마시러 나갈 일도 없었고 더더욱 놀러갈 일도 없었다. 그저 밥 먹고 담배 사 피울 돈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더 이상의 바램도 희망도 필요 없었다. 시간은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2000년! 밀레니엄의 시대라고 들뜨기 시작한 2000년! 그 2000년 에 내 인생에 있어서 기적이 일어났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기적 이었다. 그 해 11월, 내가 결혼을 한 것이었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일이었다. 나 역시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했다. 우연히 친구가 와서 설치해 준 채팅 프로그램이 나의 인연을 찾아 준 것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 축복이 시작된 것이다. 나의 인연은 인 터넷이라는 선을 타고 나에게 왔다. 2000년 11월 12일 결혼을 하였다. 결혼을 하면서 한 가정을 꾸리 게 되었고 뚜렷한 소득이 없었고 그렇다고 재산이 있었던 것도 아니 었다. 나에게는 빈손과 고장 난 두 다리가 전부였다. 아내 역시 서울 에서 창원이라는 지방으로 내려와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우 리부부는 국민기초생활 수급자가 되었고 교통안전공단에서 지원하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059

62 는 교통사고 피해자 지원으로 매달 받는 15만원이 우리 소득의 전 부였다. 한 달 생활비가 20만원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우리는 아끼 고 모았다. 나의 목표는 5년 안에 수급자 생활을 청산하는 것이었다. 장애뿐만 아니라 경제에서도 홀로서기를 하고 싶었다. 가정을 꾸리고 한 집안의 가장이 되다보니 내가 해야 할 일에 대 한 부분이 너무나 확실하게 다가왔다. 이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돈이 아니라 꼭 있어야 하는 것으로 변해 있었다. 시간 때우기로 시작한 컴퓨터가게를 본격적으로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때부터 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마케팅에 관한 공부를 하고 경영에 관한 공부를 하고 경제에 관한 공부를 하 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잠자기 전 11시까지 죽어라 공부를 했다. 그리고 컴퓨터 가게 일에 목숨을 걸었다. 내가 휠체어를 타고 할 수 있는 일이 이 일 외에는 보이지 않았고 내가 이 일을 해볼까 저 일을 해볼까 하는 시간적인 여유도 가지지 못했다. 7년이 넘는 시간을 그 냥 그렇게 보낸 것에 대해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컴퓨터 가게 일에 목숨을 거는 것 외에는 더 이상의 방도 는 내게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비장애인이 하는 실수는 그래 그럴 수 있지 라고 봐줄 수 있지만 장애인이 실수를 하면 병신 꼴값 떨고 있네 라는 소리가 바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장애인이라서 내가 휠체어를 타고 다니고 있으니까 정상인들이 좀 너그럽게 봐 주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은 나를 죽이는 것뿐만 아니 060

63 라 장애인 전체를 죽이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난 적어도 비겁 하게 장애라는 이름 뒤에 숨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비록 내가 장애인이지만 정상인 못지않은 능력을 보여 주고 싶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들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일에 목숨 을 걸어야만 했다. 피 터지게 살아야만 했다. 나를 위해서 나의 가정 을 위해서. 새벽 5시 어김없이 일어나 책을 보고 고객들에게 한 자 한 자 정 성들여서 편지를 쓴다. 때로는 우편으로 보내고 때로는 예쁜 복 돼 지 저금통과 함께 넣어 택배로 보낸다. 그리고 자주 연락이 오지 않 는 고객들에게는 계간지 형식으로 안부를 여쭈어보는 엽서를 보낸 다. 매일 20장씩 엽서를 보내고 편지를 쓰고 복 돼지 저금통을 보낸 다. 그렇게 고객과 관계를 맺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얼마 되지 않던 매출이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매출 이 달라지고 있었다. 처음 목표로 한 5년 안에 수급자 생활을 벗어 나겠다는 나의 목표는 2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실현되었다. 난 수급 자에서 벗어난 그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수급자 생활이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난 적어도 국가가 나를 책임지지 않을 정도로 홀로서기에 성공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해주는 것이기에 더 없이 기뻤다. 그리고 다시 목표를 정했다. 5년 뒤 번듯한 내 집을 갖 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내와 다짐을 했다. 2004년 7월. 기적의 일들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의 2세가 태어난 것이다. 시험관 아기 시술로 어렵게 아기를 가졌고 그렇게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061

64 가진 아기가 8개월 만에 세상에 나와 엄마 품에 안기기도 전에 인큐 베이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도 무사히 태어나 준 것만 해도 나 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그때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아들에게 이 말 을 했다. 아들아! 세상은 지금보다도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이 기다리 고 있단다. 지금 이 순간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니 넌 반드시 이 겨낼 수 있을 것이다. 힘내라, 아들아 나의 염원대로 아들은 불과 일주일 만에 인큐베이터에서 나와 우 리 품에 안겨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난 더 뚜렷한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내 가 할 수 있는 일에 목숨을 걸리라. 쉼 없이 뛰고 살아가고 열심히 노력했다. 나에게 있어 장애는 더 이상의 장애가 아니었다. 난 정상 인이 하는 컴퓨터 가게보다 몇 배나 높은 매출을 올렸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장애 뒤에 숨어버리는 순간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는 그 순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5년 안에 라는 목표는 지 키지 못했지만 난 지난 2008년 34평의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를 했다. 대출은 없었다. 온전히 내가 가진 재산으로 아파트를 구입했 다. 그럼으로 인해 지금 교통사고 피해자 지원금도 받지 못하고 있 다. 그러나 나는 하나도 아깝지 않다. 내 스스로 장애를 딛고 일어 서서 정상인들도 하기 힘든 일을 이루었고 지금도 하고 있기 때문 062

65 이다. 지금 나의 목표는 내 두 아들을 돈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감당 하기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당당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언제나 긍 정의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키우고 싶다. 그리고 여유롭게 나의 사랑 하는 아내와 노후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 소원은 내가 죽는 그날까지 만 권의 책을 읽 어보고 가는 것이다. 책은 나에게 있어 나를 일으켜준 원동력이자 나의 재산을 증식시켜 주는 길잡이였다. 책은 나의 진정한 멘토였 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063

66 탱크를 타고 달리는 나의 삶! 김대성 1991년 o월 o일, 그날, 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날이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하고 손꼽아 기다리던 첫 월급날이었다. 나는 가난한 농부집안의 가장으로 태어나 힘든 유년시절 을 보냈다. 아버지께서도 몸이 많이 안 좋으셔서 어려서부터 집안 농사를 도맡아 해나갔으니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학교수업을 마치 기가 무섭게 집에 가서 집안일을 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이 공을 차며 함께 노는 모습이 정말 부러웠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현 실에 대해서 원망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 집안일을 도와 농사일을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 터였다. 어린 나이에 경운기 타는 법과 여러 가지 농기구 사용법을 배워 집안 농사를 도와 나갔다. 중학교 재학시절, 너무나도 공부가 064

67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덟 식구의 가장역할을 해야만 하는 나에게 학업에 열중할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많이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 리고 그런 나를 더욱 더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몸도 안 좋으셨던 아 버지께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면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시고 넉넉하지 못했던 집안 살림들을 마구 부셔버리는 바람에 어머니와 5남매 형제들은 집밖으로 쫓겨나 도망을 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아버지가 너 무 원망스러워 좋지 않은 생각을 가졌을 때도 참 많았다. 고등학교 에 입학하면서 집과 학교와의 거리가 멀어져 자취생활을 하게 되었 다. 그러면서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시골집으로 돌아와 집안일을 해 나갔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그리고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나는 일자리를 찾아서 부산으로 넘 어오게 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될 무렵이라 도시에는 활 기가 넘쳤고 구할 수 있는 일들이 참 많았었다. 하지만 시골에서 막 올라온 터라 수중에 돈이 없어서 처음으로 시작했던 일이 신문을 파 는 일과 잡지책을 팔러 다니는 일을 하게 되었었다. 부산 전 지역 안 돌아 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로 곳곳을 다니면서 일을 했다. 그때는 잡지책을 들고 버스에 오르면 버스운전기사님들이 그런 우리에겐 요금도 받지 않았었다. 버스 종점에 도착해 200여권의 잡지책을 다 팔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떠올리지도 않고 악착스럽게 한 푼, 두 푼 돈을 모았다. 한 달 부식비로 만원을 넘기지 않았으니 말 065

68 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학업의 마지막 과정인 대학은 다니지 않으려 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려서 배우지 못한 것이 마음에 남아 배움 의 열정을 식힐 수가 없어 낮은 시험 성적이었지만 전문대에 합격을 하여 부산에 있는 한 대학에 다니게 되었다. 낮에는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학교를 다니며 학업에 열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수업이 끝나면 또 다시 생활전선으로, 잡지책을 가방에 넣고 또 다 시 돈을 벌러 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힘들었지만 그만큼 재미있었고 보람찬 시간들이었다. 대학 2학년이던 88년 9월에 군에 입대하였다. 군복무생활은 나에게 있어서 많은 생각과 바른 생각을 갖게 해준 아주 좋은 교육의 시간이었다. 시골에서 생활을 하여서인 지 군대에서의 훈련과정은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규 칙적인 식사와 운동을 하다 보니 몸무게도 10kg 이상 늘었다. 강원 도의 군 생활은 눈과의 전쟁이라 할 정도로 눈이 많이 왔고 겨울에 는 재설작업이 훈련에 일부였다. 1991년 1월에 군대를 제대하여 2학기 복학을 하기에는 시간이 좀 남아서 고향인 시골로 내려가 집안일을 돕다가 우연한 기회에 광양 제철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취직한 광양제철소의 공사 현장 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고 근무를 시작한지 한 달이 되던 91년 3월 9 일이 되었다. 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그 날. 한 달 동안 열심 066

69 히 일을 해서 드디어 손꼽아 기다리던 제대 후 첫 월급을 받아 퇴근 을 하게 되었다. 항상 오토바이로 출 퇴근을 했었는데 그날은 덤프트럭이 뒤에서 달려오다 앞서가는 나를 보지 못하고 달리는 바람에 사고가 나버렸 다. 그렇게 달리는 덤프트럭 밑에 빨려 들어가 30미터가 넘게 끌려 가게 되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3일이 지난 후 병원 중환자실이었다. 정 신이 들 무렵 중환자실 침상에 누워있는 내 눈에 어렴풋이 어머님에 모습이 보였다. 조용히 나를 바라보시며 슬픈 눈물을 참고 미소 지 어 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까지도 내 몸 상태가 얼 마나 심한지 알 수가 없었다. 의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자 의 사가 와서 발가락을 움직여 보라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움직이 던 발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12개월 동안은 병원에 있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그때 나는 병원에 있는 1년만 지나면 예전처럼 몸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나의 하반신 감각 은 전혀 돌아오질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어머니께서 좀 더 나은 서울에 병원을 수 소문해 조그마한 희망을 가지고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 기게 되었다. 세브란스 병원에는 나와 같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입원 해 있는 환자들이 많이 생활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평생을 휠체 어에 의지해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 그 소식을 067

70 접하고는 살고 싶지가 않았다. 정말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 게 절망감에 빠져 있으면서 3번의 자살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주위 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감시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으로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다 른 생각이 나질 않았다. 병원 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휠체어에 의지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나는 누구보다도 재활에 열과 성을 다하였다. 그 후 하루 16시간이 넘는 시간을 운동에만 열중한 결과 사고가 난지 3개월 만에 혼자 힘 으로 화장실도 갈 수 있었고 대 소변도 가릴 수가 있게 되었다. 그 렇게 2년에 가까운 재활의 시간을 거쳐 제2의 삶을 시작하였다. 휠 체어를 타고 다치기 전에 시작해서 끝내지 못한 대학도 졸업하게 되 었다. 대학 졸업 후 진로를 생각하고 있던 시기에 한 장애인단체를 알게 되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장애인들과 함께 재활운동을 해나 가며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보완해주며 함께 해나갔다. 내가 할 수 있고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쏟아 부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장 애인들이 운동을 하는데 동참하게 되었고 몸은 힘들었지만 큰 보람 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95년 대구국제휠체어마라톤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km에 도전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척 추를 다쳐 허리를 수술하여서인지 마라톤은 쉽지가 않았다. 5km 지 점을 지났을 때는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그만 포기해버릴까 하는 생 068

71 각도 했었다. 끈기와 인내심으로 오로지 내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결국 완주를 하고 결승점을 통과한 후 순위와는 거리가 멀었고 모든 경기가 끝이 나버린 후였지만 그 무엇보다 나에게 힘을 주었던 것은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삶의 출발점에 서게 한 값진 경기였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많은 시간이 흐르고 결혼 적령기가 되었다. 그러나 장애를 가졌다 는 이유만으로 부딪히는 벽은 결코 만만하지가 않았다. 결혼은 결코 두 사람이 만나 둘이서만 좋아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도 아니었다. 또 다른 아픔의 시간들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러나 좌절 할 수 없었 고, 계속적인 사회활동을 하다 2001년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다. 아내는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별 볼일 없는 나를 무척이나 사랑해 주었고 묵묵히 나를 따라와 주었다. 그 리고 시험관 아기 시술을 통해 예쁜 쌍둥이 공주님들을 새로운 가족 으로 맞이하였다. 예쁜 천사들이 두 명이나 태어났다. 너무 행복하 고 벅찬 마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혼자서 많은 눈물을 흘렸던 생각도 난다. 어느덧 우리 두 공주들은 초등학생이 되었다. 아빠, 엄 마가 몸이 좀 불편하다고 해서 주눅들지 않고 활발하고 밝게 자라주 는 우리 효녀 딸들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고맙다. 교통사고로 조금 받은 보상금은 병원에서 생활하면서 거의 다 써 버리고, 그나마 조금 남은 돈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와 같은 처지 069

72 에 있는 장애우들을 위해 쓰다 보니 결혼 후 살길이 막막하였다. 그 러다 갖게 된 직업이 보험회사 영업사원, 휠체어를 타고 보험회사에 서 3년을 생활하였다. 하지만 혼자서는 네 식구의 생계를 꾸려 가기 에는 힘이 너무 벅찼다. 그래서 정부에 도움을 요청해 수급자가 되 었고, 그나마 생계비를 지원받게 되면서 조금은 숨통이 트이게 되었 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교통안전공단에서 교통사고 장애인들에게 생계자금을 지원해 준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원금을 받게 되면서 생 활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부족하나마 근검 절약하 면서 살아오고 있다. 최근에는 신설된 유자녀 장학금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어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요즘은 교 회에서 강의실을 하나 마련해주어서 어린이들과 장애인들에게 바둑 을 가르쳐 주면서 재미있게 살아가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이 너무나 도 재미있다. 장애를 가졌다고 하여 무언가를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시간은 기다려 주질 않는다. 그 말은 곧 세월은 너무나도 빨리 흘러 간다는 뜻이다. 주어진 현실을 원망하지 말고 그 현실을 빨리 받아 들이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만이 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고가 발 생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란 시간이 흘러가버렸다. 나름 대로의 삶을 후회되지 않게 열심히 살아갈 것을 다시 한 번 마음 속 깊이 다짐한다. 070

73 절망에서 희망을 가져다 준 수호천사님들 안진숙 교통사고로 남편이 떠난 지 8년, 그의 떠남과 동시에 많은 빚이 남겨졌다. 신용불량자가 되어 매일 빚 독촉을 받으며 힘겹게 살아가는 어느 날 다가온 도움의 손길. 아이들 아빠가 하늘나라에 가신 지도 어느덧 8년째로 접 어듭니다. 아침에 웃으면서 다녀오겠다고 했던 남편이 사거리에서 추돌사고로 목숨을 잃어 그날 저녁 손써볼 틈도 없이 싸늘한 시체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처음에는 믿어지지도 않고 하늘과 땅이 딱 붙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당시 큰 아이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 3학 년이었습니다. 남편은 친구와 동업으로 차린 인테리어 회사가 IMF 로 인해 망해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함과 동시에 많은 빚이 남게 되었고 그래 071

74 서 빚 독촉에 힘든 하루하루를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법무사에 다니는 아는 언니를 통해 저는 두 딸과 재산포 기각서 를 법원에 제출해야만 했었고 제가 운영하고 있는 관인피아 노 학원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 채 작은 피아노교습소로 자리를 옮 겨야만 했습니다. 하루하루 빚 독촉 전화 때문에 피아노 학원 아이들 눈치를 보며 레슨을 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임대료를 제 때 내지를 못해 주인집 눈치를 보며 밤낮으로 피아노 출장 레슨까지 뛰어다녀도 빚은 줄지 않고 이자만 불어났습니다. 급기야는 신용불량자로 등재되었고 빚 독촉은 더욱 심해 하루하 루가 살기 힘들었습니다. 그 당시 매스컴에서도 우리와 비슷한 처지 에 있는 사람들이 빚 독촉과 생활고에 시달려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 께 동반자살을 했다는 뉴스가 자주 나오곤 했었습니다. 저도 너무나 힘든 하루하루였지만 제가 버틸 수 있는 힘은 우리 두 딸들이었기 때문에 내 삶을 놓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성악선생님의 권유로 신용회복위원회를 찾아 상담과 서류제출로 심사 끝에 다행히 개인워크아웃을 받아 그때부터 빚 독 촉은 없었지만 8년 동안 매달 내어야 하는 신용회복위원회의 약속 금액을 갚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녀야만 했습니다. 아침에는 엄마들과 아직 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영 유아들 출장 레슨, 학원 피아노 레슨 후 6시에 학원 문 닫고 출장 레슨 뛰어다니 고. 072

75 그 당시는 버스 환승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교통비 때문에 웬만한 거리는 뛰어다니며 레슨을 해야만 했습니다. 점심에는 주로 컵라면 으로 지탱을 했고 저녁에는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며 레슨 하는 동안 저녁은 김밥이나 각 집에서 내어주는 간식으로 때웠습니다. 그래도 몸은 피곤하지만 한숨은 돌렸답니다. 빚 독촉이 없어졌고 앞으로 갚 아나가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그 당시 작은 아이 초등학교 5학년 때 급식비가 밀려 급식담당 선생님과의 면담 중에 복지관에 도움을 청해 보라고 하셔서 망설이다가 큰 용기를 내어 복지관 선생님을 만나 복지관 선 생님의 권유로 한 부모 가족 모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분끼리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서로 위로와 용기 와 희망을 주며 정보도 나누고 또한 복지관 후원으로 여름 바닷가 캠프도 가고 좋은 강의도 듣고. 힘든 와중에 천사선생님들 덕분 에 아이들도 방학 중에 행복해 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2천만원 연립빌라 지하에 전세로 살고 있었는 데 주인의 잘못으로 집이 경매가 되어서 낙찰이 되면 식구들이 뿔뿔 이 흩어져 살게 될까봐 걱정이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사느냐가 문 제였는데 이제는 어느 곳에서 사느냐가 문제가 되었으니까요. 복지관 선생님 말씀으로는 모자원 같은 데를 빨리 알아보라고 말 씀하시더군요. 그때는 정말 막막하고 답답했었는데 그러던 중 제가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복지관 선생님 추천으로 교통방송의 교통사고 유자녀 돕기 모금 라디오 방송에 사연이 나가게 되어 많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073

76 은 성금이 들어왔다고 하시더군요. 그때에 사회는 황인용 아나운서, 이익선씨였는데 황인용 아나운서는 음악회바자회에서 남은 이익금 20만원 전부를 우리에게 주셨고, 그 외 저희가 모르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방송국으로부터 방송 출연료를 입금 받았고 컴퓨터가 없 었는데 중고컴퓨터나마 기증해 주신 분, 고장 나서 고쳐주신 분, 이 모든 분들이 모두 우리에게는 수호천사님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방 송이 나간 후 우리는 집 문제를 빼 놓고는 여러 가지로 좋아졌습니 다. 어느날 갑자기 함께 있던 사람이 하늘나라에 떠나가 버리면 막막 하고 헤쳐 나가야 할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어두운 터널에서 빛을 잃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그런 힘 든 과정에서 희망을 놓고 싶은 유혹이 자꾸 들지만 어두운 터널을 벗어난 그 기쁨은 아주 더욱 값질 거라고 다짐하며 견디어 왔습니 다. 오히려 이런 모든 시련들이 전화위복이 되어 잘 풀릴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더군요. 그러면 하늘나라에 먼저 간 남 편도 기뻐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어요. 이 용기로 저는 우리 집을 2004년 12월에, 방송국에서 받은 돈과 전세 들어있는 돈과 지인들, 친척들 도움으로 4차까지 갔던 경매에 제가 직접 신청하고 낙찰을 받았습니다. 제가 경매 1순위로 받자 은 행에서 저에게 주인하고 짜고 경매낙찰을 받지 않았나 해서 민사소 송을 제기했는데 그 이튿날 은행 측에서 이의신청을 다시 취소해주 074

77 어 다행히 제가 배당금 1순위로 이 집을 얻게 되었어요. 그런데 다행히 꿈만 같은 집은 생겼지만 매달 갚아 나가야 하는 약속된 금액은 다시 저의 목을 조여 왔습니다. 갚아야 될 날이 다가 오면 소화도 잘 안 되고 불안하고 신경도 예민해졌어요. 어느 날 복지관 선생님과 상담하던 중에 교통안전공단의 교통사 고유자녀 장학금지원이 있다고 하여 큰 딸은 고1 때부터 다행히 공 부를 열심히 하여 장학금을 3년 내내 받게 되었고 작은 아이도 중학 교에 올라와 3년 내내 교통안전공단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게 되 었습니다. 그리고 복지관에서는 한 부모 가족 모임의 한 회원이 하 루는 저에게 회원은 자동차사고유자녀 생활자금 대출을 교통안전공 단에서 받을 수 있으니 한번 신청해보라고 해서 마침 심사를 거쳐 두 딸 모두 선정이 되어 매달 자동차사고유자녀 생활자금대출금액 인 20만원씩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곳 안내 선생님께서 아이들이 26살부터 15~20년에 걸쳐 무이 자로 매달 2만원씩 납부하면 되고 또한 일시불도 가능하다고 친절 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매달 교통안전공단으로부터 받은 대 출금 40만원과 아이들 통장에 입금되어 온 고마운 장학금이 저희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고마운 수호천사였어요. 이제 저는 신용회복위원회에 약속한 금액을 약속한 날짜에 잘 납 부하고 있고 성당에서 성가대 지휘도 하게 되어 성당에서 주는 지휘 자월급도 받게 되었어요. 피아노학원 아이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 답니다. 파랑새둥지 - 1부 - 어느날 갑자기 075

78 우리 큰 딸은 공무원이 되겠다고 전산공무원양성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교육구청장 상도 받았어요. 이번에 공무원시험을 올 4월 에 치렀는데 합격했으면 좋겠네요. 또 우리 작은 딸은 예술가가 되 고 싶다고 해서 특성화 고등학교의 인터넷 미디어과 특별전형에 좋 은 성적으로 합격하여 열심히 자기 꿈을 키우고 있어요. 제가 따뜻한 이웃의 힘으로 살아가듯이 극한 어려움에 처해서 상 심하고 계시는 교통사고 유가족들께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 요. 제 경우에는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이런 모든 시련과 고통들을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특별한 이유 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까지도 주 실 것이라는 신념으로, 그래서 이것이 전화위복으로 오는 날이 반드 시 올 거라는 희망의 신념을 놓치지 말라고. 그리고 이겨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많은 수호천사님들을 보내 주신다는 것을! 그래서 희망이 왔을 때 나와 아이들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또 다른 수호천사가 된다는 것을. 2010년 4월 29일 안진숙 p.s 다 쓰고 나니 무척 부끄럽네요. 쓸까 말까 많이 고민했는데 다 쓰고 나니 지나 온 지금의 나를 바라보게 되어 교통안전공단 지원사업처에 감사드립니다. 076

79 2부 준비되지 않은 길 한 사람이, 길 위에 서있습니다. 사방으로 열린 거리의 한 가운데서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망설이고 있습니다. 처음 와 보는 길, 아무리 보아도 낯설 뿐 어느 것 하나 익숙지 않습니다 전혀 가보지 않은 낯선 길에서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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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사고 후 10`년 강정수 병실에 갇혀 창문 너머 바라본 세상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걷고 있다. 딸의 조막만한 손에 의지해서 산책을 한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오늘 나는 문득 날짜를 짚어보니, 교통사고 후 벌써 10년 이 되었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그동안의 삶의 흔적들이 필름처럼 머 릿속에서 지나간다. 세월은 약이라고 하지만 나와 내 가족은 아직도 교통사고로 인한 후유증이 진행 중이다. 내 나이 42세 때인 2000년 5월 24일 교통사고 후, 4일 만에 눈을 떴을 때 이미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는 걸 느낌으로 알았다. 내 몸은 상, 중, 하 세 부위가 다 부러졌다. 경추 3~4번 골절, 고관절 골절, 양하지 골절. 병원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내가 이전에는 079

82 TV로만 보아왔던 처치 방법들을 내가 직접 겪었다는 것이다. 무더 운 여름날 목 때문에 머리마저 움직이지 못하고 꼼짝없이 누워있어 야만 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니, 차라리 나만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되 어 버렸다. 2000년 그 해, 좁은 병실에 갇혀 마치 시체놀이 하듯이 꼼짝 못 한 상태로 있으면서 병상 바로 옆 창문 너머의 세상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더구나 그해에는 역사상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 고 몇날 며칠을 다들 TV를 쳐다보는데 나는 귀로만 듣고 있어야만 했고, 식사시간에는 옆 침상에서는 음식냄새를 풍기면서 식사를 하 는데, 나는 식도에 튜브를 넣어 주사기로 무엇인가를 밀어 넣는 아 내를 멀뚱거리며 보면서 사람 몸의 신비로움을 체험했다. 그 후 몇 달 동안을 누워서 밥을 받아먹으면서, 내가 그동안 살면서 이렇게 누워서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얼마나 느끼며 살았는지 돌아보기도 했다. 우리 몸은 잃어버린 기능을 대신해서 또 다른 새 로운 기능이 작동한다는 사실도 알았고, 함께 누워있던 환자들이 퇴 원한다고 인사를 할 땐 부러워하면서, 나도 저들처럼 걸어서 퇴원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수시로 들곤 했다. 또 수술 후 통증 때문 에 잠을 잘 수 없어 밤마다 진통주사를 맞고 나서는,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잠이 들었던 많은 날들이 생각난다. 병원에 있는 동 안, 추측 컨데 내 몸에 아마도 천 대 이상의 주사바늘이 들락거린 것 을 기억한다. 그리고 지면으로 낱낱이 기록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 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 말고도 내 옆에 붙어서 간병하느라 고생 080

83 한 아내는 나보다 더한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아내도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내내 나의 간병인 생활을 하느라 신장 한쪽이 망가져버렸 다. 그럼에도 지금도 나는 집에서도 보조를 받아야 하는 부분이 있 기에 늘 아내에게 미안하다.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이 태어나 29년을 살아온 청년 닉 부 이치치 그가 한 말 중에 선천적 장애가 훨씬 나은 것 같다. 만약 장 애 없이 출생했다가 사고로 신체의 일부를 잃었다면 더 힘들었을 것 이다 라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말을 마음에 간직하다 가 지금 내 몸의 장애를 비추어보았다. 정상적인 몸으로 살다가 갑 자기 예고 없이 당한 나의 삶. 10년 가까이 지내오면서 나는 수시로 절망 가운데 던져지곤 했다. 나는 분명 후천적 장애인이다. 그러나 후천적으로 온 내 몸의 장애를 더 이상 슬퍼하지 말자 고 수시로 마 음속으로 다짐을 해보았다. 그러나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의 상태가 원망스러웠다. 해가 넘어갈수록 고관절 부위가 더욱 시큰거린다. 양 다리는 흐린 날 기압에 따라 상태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그리고 보니 설날에 어 머님께 무릎 꿇어본 지가 10년이 넘었다. 수술한 목도, 오랜 시간 곧 추 세우고 있는 시간이 점점 예전 같지가 않다. 머리도 한 번씩 아프 다. 다리나 목의 신경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짐작을 한다. 다리는 움 직일 수 있을 만큼 계속 움직여주어야 한다고 해서 밖으로 한번 씩 지팡이를 짚고 나가거나, 딸의 손을 의지해서 산책을 한다. 그럴 수 없는 날은 집에서 아내가 대신 재활치료사로 움직여 준다. 휠체어를 파랑새둥지 - 2부 - 준비되지 않은 길 081

84 타고 다니면 조금 수월하지만 내 자존심이 아직 허락지 않는다. 몸이 이런 상태이다 보니 한번 씩 내 나이또래 동년배들과 비교를 해보고는 마음이 곤두박질친다. 모든 일에는 성취의 때가 있다고 하 는데 내 인생에서 성취의 때가 사라져 버린 나를 생각하면, 더욱 억 울하기도 하고 가슴을 치기도 여러 번, 장애의 몸으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앉아서 목을 기대고 책을 보는 일이나, 컴퓨터를 검색 하는 일뿐이다. 그것도 길어야 한 시간 정도씩, 더 욕심 부리고 싶지 만 마음뿐이다. 이 중증장애의 몸으로 그래도 무엇이든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굳은신념을 가지고 지금껏 생활해 왔다. 사고 난 4일 만에 깨어난 후에 찾아온 극심한 절망과의 싸움을 위 한 고독한 시간과, 1인실 독방에서의 고독한 재활의 그 시간을 견딘 후에 휠체어 생활을 거쳐 목발과 지팡이로 생활해온 지금까지의 내 생활이, 앞으로 얼마나 더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는 모르겠다. 그리 고 남은여생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처지를 후회도 해 봤다가, 지워봤다가 오락가락했던 나의 日 常 事 (일상사), 모든 인간의 삶에는 대화 못지않게 고독을 배우거나 통하지 않고는 일어설 수 없는 시간이나 사건이 있다고 한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 든 문제는 혼자 방에 머물 줄 모르는 데서 온다. 고 했다. 까뮈는 사회가 갈라놓은 사람들을 고독이 결합시켜 준다. 고도 했다. 그 말들이 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병상에서 혼자 고독한 중 에 특히 큰 힘이 되어준 책과 그동안 병문안을 와준 분들께 감사 하곤 했던 그 시절은 이미 과거가 되어 내 머릿속에서 잊혀지고 082

85 있다. 지금 나는, 사고 후 10년 만에 다시금 뒤를 돌아보니, 참 길다면 긴 시간동안 장애의 몸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우 리는 흔히 제2의 인생을 산다는 말을 듣는다. 나 역시 기적 같은 소 생을 하고나니 주변에서는 나를 보고 덤으로 사는 인생 이니 제2의 인생 이니 하는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지 기뻐한 때도 있었지만, 장애의 몸으로 살아있다는 것이 처절한 고통과 좌절에 이른 때도 많다. 몇 년 전에 우리 가족은 닥치는 생활 고와 내 몸의 상태를 고려해서, 40여년을 살아온 서울을 떠나 따듯 한 남쪽 지방으로 이사를 해서 살고 있다. 파랑새둥지 - 2부 - 준비되지 않은 길 작년부터 정기적으로 시립도서관에서 배달해주는 책을 읽다가, 장애인이 된 지금 나에겐 과연 행복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행 복에 대한 현재의 나의 가치관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 롭다는 것. 그것 이상의 행복이 있나? 하고 나는 생각해본다. 장 애인이기 때문에 몸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유는 빼앗겼다. 그러나 누구로 부터의 간섭이 없는 자유, 쓸 일이 적으니까 적은 돈으로나 마 누리는 자유, 시간으로부터의 얽매임이 없는 자유, 사소한 것에 도 만족하면서 사는 자유로움. 이런 것들이 현재 내가 당한 현 실이면서 누리고 있는 행복감이란 생각이 들었다. 직장에 출근할 일 도 없고, 그렇다고 일하러 오라는 사람도, 반기는 사람도 없는 지금, 083

86 어쩌면 예전의 나도 시간의 자유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지 모른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다는 보편적 진리를 생각하면서 위로 받는다. 교통사고의 장애로 오랜 시간 고통 받고 있던 나에게 금년 초에 갑자기 영감이 스쳐 지나갔다. 비록 장애의 몸으로 일도 할 수 없어 가장의 역할, 남편의 역할, 어버이의 역할을 못한다고 슬퍼하지 말 아야 한다고. 오히려 나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자라는 생각이 스 쳤다. 나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이 몸으로는 더 어찌할 수 없다 는 좌절의 생각덩어리로 인해 이제껏 감정의 오르내림을 반복해 왔 다. 그러나 사람은 어느 누구든지, 그야말로 한 인격체로서 역사적 사명 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사 명이란, 흔히 어떤 분야에서 반드시 두각을 나타내는 사명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명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조그만 일이라도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사명이다. 내가 늘 앉아있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설령 내가 후천적인 장애를 가짐으로 회복불능의 삶의 상처로 남았지만, 오늘 내가 이 모습으로 존재함, 그것이 내가 지금 감당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고 오히려 교통사 고 이후 처음으로 갖는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존재적 가치 로서의 사명은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누구에게나 주 어진 사명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부모 가 되고, 그 부모는 죽기 전까지 자식들이 잘 되기만을 갈망하다가 084

87 숨을 멈춘다. 어쩌면 요즘 같은 삭막한 세상에서도 자식만을 평생 짝사랑 하다가 허망하게 눈을 감아야 하는 그 이름이, 부모 아닌가? 비록 집안에 장애인이 된 부모가 벽에 몸을 기대고 있을 지라도, 부 모가 살아 있다는 그 존재감만으로도 가족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그 가정의 평화와 질서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파랑새둥지 - 2부 - 준비되지 않은 길 나는 19세 때, 아버지께서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 그 허무감과 함 께 갑자기 가정의 질서가 무너진 느낌과 황량함을 지울 수가 없었 다. 인간의 생명은 스스로 어찌 할 수는 없다. 누구나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는 순서는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살아서 누워만 있더라도 그게 후천적 장애인이 된 아들이 어머니께 해드릴 수 있는 효도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내 존재적 가치로서의 사명을 생각 하다 보니 살아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장애의 무게가 주는 슬픔 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지금은 평지를 조금이라도 걸어 다닐 수 있는 내 몸, 언제가 될지 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라도 걸을 수 없는 날을 생각하면서 가끔 딸 의 손을 의지해서 집 근처를 천천히 산책하며 동네 일주 를 한다. 거창한 세계 일주를 꿈꾸기보다는 동네 일주를 하며 내 삶의 행복 지수를 높여가고 있다. 내가 다니는 동네 일주 코스는 20분 거리이 다. 딸내미 손을 의지해서 걸어도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한계시간이 다. 큰 길로 나가자마자 앞에서 교복을 입은 딸내미 또래의 중학생 085

88 들이 지나간다. 나를 힐끔 쳐다보는 아이가 있다. 왜 쳐다보았을까? 무슨 생각으로 쳐다보았을까? 나를 장애인이라고 느껴져서 보는 것 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내 딸을 보면서 장애인 아버지와 사는 딸이 라고 비하하거나 불쌍히 여긴다면 나는 속상하다. 그 순간에는 나는 차라리 혼자 지팡이를 짚고 다닐지언정 딸과 함께 나오고 싶지는 않 다. 그러나 딸은 아직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한 적은 없다. 그 속은 아 버지인 나도 알 수 없게 감추어 두고 있는 듯하다. 속 깊은 딸에게 미안하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올려다보는 사 람이 얼마나 될까? 앞만 보고 달리기에도 바쁜 세상에서 나와 같은 사람은 하늘을 맘껏 쳐다볼 수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니 내 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가졌는가 묻고 싶다. 누구나 어느 순간 장 애인이 될 수 있다. 오늘도 나의 동네 일주는 무사히 마쳤다. 때로는 여행하는 기분으로, 때로는 순찰하는 기분으로 한 바퀴 돌고 집에 들어오는 순간 마치 하루 종일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기분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한마디 뱉는다. 여보 나, 왔어!. 동네 일주를 할 때마다, 몸이 건강할 때는 바삐 걷느라고 자세히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자연의 숨결과, 모든 생물의 신비함을, 또 이웃들의 생활모습을 깊이 마음속에 새겨지는 것을 느끼면서, 존 재하는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으로, 한 노모의 자식으로, 한 가정 의 남편으로 그리고 나 또한 부모로서의 존재론적 사명감을 갖고 남 은여생을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덧붙여, 나와 같은 교통사고 086

89 피해 가족을 위해 여러모로 지원을 해 주심으로 큰 위로를 받고 살 아가게 하시는 교통안전공단 관계자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파랑새둥지 - 2부 - 준비되지 않은 길 087

90 눈물의 입학식 김형진 엄마가 밤낮으로 땀 흘리며 가꾼 꽃밭, 그 가운데 향기를 머금은 천리향을 보면서 비록 아빠가 안계시지만 나는 부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03년 3월 3일, 설레는 마음을 안고 입학식에 참석했 다. 봄이 아직 오지 않은 탓에 찬 기운이 만연했지만 마음만큼은 겨 울을 보내고 이미 봄을 맞은 듯 설레고 따뜻했다. 이내 따뜻함을 더 해준 건 장학생으로 내가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는 것이다. 읍내 인문계 고등학교가 하나뿐인지라 5개면 단위의 중학교에서 나름 성 적이 좋은 애들도 많았을 텐데 내가 그중 한 명이라니 반 일등으로 입학한 나는 얼굴도 모른 친구들에게 이름부터 각인되었다. 장학금 수여와 함께 입학식을 마치고 들뜬 마음으로 배정받은 반을 찾아 교 실로 입실했다.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한껏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088

91 있던 내게 우리 반 담임선생님께서 오시더니 내게 말씀하셨다. 효진아, 병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효진이가 지금 바로 가봐야 할 것 같네. 순간 뇌리를 스쳤다. 아빠 난 아직 아빠와 인사도 하지 않았고 얘 기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잖아, 기다려, 제발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줘요.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아빠께 할 말이 있어요, 하나 님 데려가지 마세요. 이미 얼어붙은 내 몸은 옆집 아저씨 차에 맡겨 진 채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순간 눈을 뜨고 살아있음을 느끼 지 못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아빠의 사망소식을 듣고 나는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드 라마에서 너무 감당해내기 어려운 슬픔이 생기면 넋을 놓고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바로 그 상태였다. 눈물이 흐르지 않 아 순간 내가 불효녀인가 싶기도 했다. 맏딸로써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병원으로 향했다. 아빠는 이미 영안실에 안치된 상태였다. 영정사진으로 아빠를 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더 힘든 일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이 때 흘린 눈물보다 더 흘릴 눈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복으 로 갈아입고 손님을 맞이하는 나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왜 내 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믿기지 않았다. 아빠께 살아생전 사랑 한단 말도 제대로 한 번 해본 적 없었고 항상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기에 당연히 오랫동안 함께할 사람으로 생각해 제대로 된 효도 한 파랑새둥지 - 2부 - 준비되지 않은 길 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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