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한일관계사학회 학술발표회 발표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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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성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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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4년도 한일관계사학회 학술대회 주최 : 한일관계사학회 후원 : 동북아역사재단 이 발표논문집은 2014년도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원을 받아 발간되었음
2 표지그림 : 지볼트가 그린 나가사키 수용소 내의 조선 표류민 가족 지볼트는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독일인 의사로 1823년부터 1829년까지 6년 간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 연구에 심취했다. 이 과정에서 1823년 3월 조난으로 나가시키에 체류 중이던 조선인 어부와 상인들을 만나 조선에 관한 지식을 수 집하였다. 이 삽화는 수용소 내에 모여 있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검은 갓 과 겨울용 난모( 煖 帽 )를 쓴 조선인들이 둘러앉아 바둑을 두고 있다. 상투 머리 에 흰색 한복을 입고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모습에서 한국인의 특징이 강하 게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바둑알이 놓여 있는 바둑판은 일본 것이다.
3 2014년도 한일관계사학회 학술대회 일시 : (토) 오후 1:30~오후 6:00 장소 : 동북아역사재단 11층 대회의실 한 일 관 계 사 학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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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14년도 한일관계사학회 학술대회 일정 주제 : 조선의 대외관계와 국경지역 사람들 일시 : 2014년 6월 14일(토) 13:30~17:30 장소 : 동북아역사재단 11층 대회의실 접수 및 등록 (13:00 ~ 13:30) 개 회 (13:30 ~ 13:40) 사회 : 남상호(경기대) 개 회 사 : 정성일(한일관계사학회 회장) 제1부 주제발표 제1주제 (13:40 ~ 14:10) 조선의 對 明 關 係 와 義 州 사람들 발표: 민덕기(청주대) 토론: 이상규(한국학중앙연구원) 제2주제 (14:10~14:40) 조선의 對 女 眞 關 係 와 6 鎭 지역 사람들 발표: 한성주(강원대) 토론: 박정민(전북대) 제3주제 (14:40~15:10) 조선의 對 淸 關 係 와 羅 州 唐 津 사람들 발표: 김경옥(목포대) 토론: 원종민(사이버한국외국어대) 중간 휴식 (15:10~15:20)
6 제4주제 (15:20~15:50) 조선의 對 日 關 係 와 東 萊 사람들 발표: 양흥숙(부산대) 토론: 장순순(전북대) 제5주제 (15:50~16:20) 조선의 對 日 關 係 와 巨 濟 사람들 발표: 정성일(광주여대) 토론: 이훈(동북아역사재단) 좌석정리 및 휴식 (16:20 ~ 16:40) 제2부 종합토론 (16:40 ~ 18:00) 발표자 및 토론자 전원 사회 : 유재춘(강원대)
7 모시는 글 이번에 한일관계사학회 회원을 비롯한 국내외 석학들을 모시고 조선 의 대외관계와 국경지역 사람들 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보면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감이 감 돌고 있습니다. 중국의 급부상과 일본의 우경화, 북한의 핵개발 시도 등 으로 말미암아 동북아시아의 갈등은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에서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길을 선택할지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형국입니다. 과거의 역사 전개와 현재의 흐름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조선시대의 대외관계를 현 시점에서 다시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조선시대 국경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조선의 대외관계 유지에 어떻게 대응해 나갔는지를 살펴보고 거기에서 현재적 의의를 찾는 것도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부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서 활발한 토론과 교류가 펼쳐지고 더 나아 가서 동북아시아 문화의 이해와 통합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 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2014년 6월 14일 한일관계사학회장 정 성 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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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 - 제 1 주 제 : 조 선 의 對 明 관 계 와 義 州 사 람 들 민덕기(청주대) 목차 1. 머리말 2. 조선의 赴 京 使 行 과 明 의 天 使 3. 호송군과 평안도의 피폐 4. 의주 백성들의 핍박과 조정의 대응 5. 世 宗 世 祖 代 三 島 와 對 明 관계 6. 成 宗 代 三 島 와 對 明 관계 7. 中 宗 代 三 島 와 對 明 관계 8. 맺음말 1. 머리말 義 州 府 는 지방 군현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여느 군현과는 달라서 동래와 더불어 외국과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창구였다. 그래서 의주를 가리켜 一 國 의 門 戶 이자 海 東 의 咽 喉 라고 지칭했던 것이다. 義 州 城 의 南 門 에 걸린 海 東 第 一 關 현판은 그 위상을 상징했다. 1) 다음은 1476년(성종7) 대사헌 윤계겸 등이 올린 9조의 시무책 속에 평안도에 대한 피폐 현상과 그 대책에 대해 논한 것이다. 1) 박범, 17~18세기 의주부의 경제상황과 재정 운영의 변화, 조선시대사학보 58, 쪽.
10 2 - 평안도는 중국과 朝 聘 할 때에 왕래하는 길이며, 野 人 들이 入 寇 하는 요충지여서 勞 役 에 이바지하는 것이 다른 道 보다 배나 되는데, 지역은 넓은데다가 인구는 적어 서 物 力 이 모자라 도저히 지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조 대왕께서는 南 道 의 백성을 이주시켜 이를 충당시켰는데, 지금 여러 고을의 백성 중에 實 戶 로 불리워지 는 자는 모두 그 때에 옮겨온 사람으로서 여러 고을에서 그들의 힘을 입게 되었으 니, 이는 만세를 위한 깊은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는 邊 警 이 자주 있 게 되자 번거로운 使 命 이 전보다 더 많아져서 온 道 가 어수선하여 편안하게 쉴 여 가가 없게 되었으니, 백성들의 고생을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이런 때에 그들을 보호하여 안정되게 해주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臣 등은 세조께서 移 住 시킨 백성들이 따라서 離 散 될까 걱정입니다. 신 등은 듣건대 중국 京 師 에 가는 使 臣 이 沿 路 의 各 官 에서 착취한 물건들이 너무도 많아서 그것을 鬼 神 도 輸 送 할 수 없는 것이고 보면 반드시 그 일이 沿 路 의 백성에게 미치게 되어, 이를 번갈아가면서 운반하여 行 人 이나 居 人 이나 모두가 齎 送 하느라 온 가족이 길거리에 나와 거기에 시달리다 보니 심지어는 破 産 까지 하게 되며, 그렇게 해서 義 州 까지 이르면 또 그 것을 護 送 軍 士 에게 나누어 주어 駄 馬 에 싣게 합니다. 군사들의 말은 본래가 파리하 고 약한데, 무거운 짐을 싣고서 험하고 먼 길을 가게 되면 말이 어떻게 죽지 않으 며, 사람은 어찌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평안도의 큰 고통입니다. 나라에서 보내는 檢 察 官 은 그 일행을 규찰하여 이러한 폐단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 나 험난한 만리 길에 함께 갔다가 함께 돌아오는데, 私 情 이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니, 비록 非 行 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철저하게 규명하여 들추어 내지 못하는 것은 필연 적인 형편입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감찰을 보내지 마시고, 漢 訓 學 官 을 선택해서 書 狀 을 주어 보내며, 義 州 에다 臺 員 을 보내어, 가지고 가는 일체의 물품을 정해진 수와 대조 점검해서 만일 규정을 범한 자가 있을 때 즉시 그 죄를 다스린다면, 沿 路 의 백성들이 거의 다시 소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또 그들의 徭 役 을 가볍게 해주고 세금을 줄여서, 급하지 아니한 貢 稅 는 면제하여 그들의 생활을 넉넉 하게 해주시면, 어찌 연로의 백성뿐이겠습니까? 온 道 의 백성들이 모두 蘇 復 될 것 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살펴주소서. 2) 이외에도 의주의 피폐와 관련된 실록의 기사는 여기저기 많이 산견된다. 사신 접대 로 피폐한 의주를 부흥하는데 遊 離 한 의주 백성들을 귀환시키는 방법을 논의하고 있 는 것, 3) 의주 지역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은 세금을 면제하자는 호조의 제안을 이행하 자는 것, 4) 의주 백성들이 遊 離 하지 않게 할 방도와 土 官 을 더 설치하여 의주를 富 盛 2) 성종실록 7년(1476) 5월 15일(정사) 7번째 기사. 3) 세종실록 13년(1431) 11월 15일(병자) 5번째 기사. 4) 세종실록 17년(1435) 7월 10일(기묘) 1번째 기사.
11 3 - 시킬 것을 건의한 것, 5) 평안도 백성은 邊 鎭 에서 番 上 하고 중국 사신은 支 待 하고 出 役 하느라 피폐했는데 의주는 더욱 그러하다는 진단, 6) 의주는 중국사신이 처음 도착하 는 곳으로 쇠잔하니 定 寧 郡 을 폐지하여 의주에 붙이자는 것 등이 그것이다. 7) 평안도 지역은 중국과 경계를 접하고 있는 관방 지역이면서 사신의 행렬이 지나는 지역이므로 재정운영에서 중앙정부로부터 독립되어 독자적인 운영체제를 지니고 있었 다. 이러난 지역적인 특성은 평안도의 군역 운영을 다른 도와는 다르게 하였다. 8) 조선의 대명외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외교의 창구 역할을 담당했던 사 행의 모습을 규명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동안 사행 연구나 사 행을 통한 대중국관계 연구는 적지 않은 관심을 받아왔는데,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조 선 후기 對 淸 關 係 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조선 전기 對 明 關 係 의 사행 연구는 상대적 으로 소략하다. 이러한 경향은 현존하는 조선 전기 기행문인 朝 天 錄 의 편수가 조선 후기 연행록 에 비해 현저히 적은데다, 15세기의 조천록 은 그마저도 내용이 詩 로 이루어져 있어서 당대 사행과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파악하기 어려운 데에 기인한 것 으로 보인다. 9) 물론 의주 인민의 생활과 관련된 기존연구도 조선 후기가 주로 연구되 어져 왔다. 10) 2. 조선의 赴 京 使 行 과 明 의 天 使 (1)조선의 赴 京 使 行 사행은 매해 정기적으로 보내는 節 行 과 특정 사안이 있을 때 파견하는 別 行 으로 구 분된다. 정기사행인 절행의 종류로는 正 朝 使, 聖 節 使, 千 秋 使, 冬 至 使 가 있다. 정조사 는 정월 초하루에 元 旦 을 賀 禮 하기 위하여 파견되는 사행이고, 성절사는 황제의 誕 日, 천추사는 황태자의 탄일을 하례하는 사행이다. 그리고 동지사는 冬 至 를 하례하기 위한 것이었다. 太 祖 代 에는 3년에 한 번 파견하는 3 年 1 使 가 원칙이었다. 많은 사절 을 파견하려 했던 조선은 1 年 3 使 를 원했지만 洪 武 帝 는 조공횟수를 외교적 빌미로 삼 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조공횟수가 정식으로 1년 3사로 전환된 것은 定 宗 代 부터였 다. 당시 明 의 藩 王 이었던 燕 王 이 반란을 일으키자 皇 帝 였던 建 文 帝 가 조선을 회유할 5) 세종실록 26년(1444) 2월 3일(계묘) 2번째 기사. 6) 문종실록 즉위년(1450) 10월 19일(기축) 1번째 기사. 7) 세조실록 3년(1457) 3월 29일(임진) 4번째 기사. 8) 정인식, 17 18세기 평안도 良 役 制 의 변천, 한국문화 27, 쪽. 9) 구도영, 조선 전기 對 明 陸 路 使 行 의 형태와 실상, 진단학보 117, ~61쪽. 10) 의주와 관련된 기존연구는 논문 말미의 <참고문헌>을 참고할 것.
12 4 - 목적으로 1년 3사를 승낙해 준 것이다. 이후 明 과의 정기적 사행은 1년에 정조사, 성 절사 등 두 번을 파견하고, 황태자가 있을 경우 천추사를 파견하는 1년 3사가 정착되 었다. 11) 중국과의 조공책봉관계의 근간으로 정기적으로 꼭 보내야하는 사신이 節 行 이라면, 別 行 은 특정 사안이 발생했을 때 별도로 보내는 비정기 사행을 말한다. 대표적인 別 行 으로는 奏 聞 使, 奏 請 使, 謝 恩 使, 進 賀 使, 陳 慰 使, 進 香 使 등이 있고 欽 問 使, 告 訃 使, 問 安 使, 進 獻 使, 管 押 使 등 다양한 명목으로 사신이 파견되었다. 사행단은 크게 正 使, 副 使, 書 狀 官 의 三 使 를 주축으로 從 事 官, 從 人 등으로 구성된 다. 正 使 와 副 使 는 사행의 업무와 일정을 총지휘하고, 書 狀 官 은 사행단을 管 理 監 察 하 는 檢 束 의무를 맡았다. 通 事 가 종사관으로서 明 관리와의 통역, 公 貿 易 수행 등 사행 업무의 실질적인 활동을 맡았으며, 이밖에 子 弟 軍 官, 醫 員, 畵 員, 짐꾼인 종인 등이 포함되었다. 먼저 三 使 인 정사, 부사, 서장관에 대해 살펴보면, 正 使 는 使 行 을 대표하는 인물이 었다. 따라서 사행의 중요성에 따라 정사의 品 階 와 인물 배정에 차이가 두어졌으며, 明 에서도 정사의 품계에 따라 조선의 외교사안 해결 의지를 다르게 이해하였고 사행 단의 대우에도 차등을 두었다. 정사의 品 階 는 본 사행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는 척 도이기 때문에 定 規 가 있었다. 절행인 정조사, 동지사, 성절사, 천추사는 일반적으로 2품 관원으로 차정하였고 때로는 정3품 신료를 結 銜 하여 종2품의 직함을 띠고 보내 기도 하였다. 통문관지 에 의하면, 절행의 경우 正 使 는 正 2품을 結 銜 하여 從 1품으로 삼고, 副 使 는 정3품을 종2품으로 결함하였으며 書 狀 官 은 정5품을 정4품으로 결함한 다고 기록되어 있다. 별행인 사은사, 주청사, 진하사, 변무사 등은 정사와 서장관의 품계가 가장 높은데, 주청사는 조선의 외교적 필요성에 의해 파견하는 것이므로 그 간절함과 중요성을 나 타내기 위해서였고, 사은사는 황제가 내린 恩 數 에 감사하는 뜻을 보이는 사신이므로 품계가 높았다. 그렇지만 별행이라고 모두 품계를 올리는 것은 아니고, 왕위 책봉이나 황제의 은수에 대한 아주 특별한 謝 恩, 宗 系 辨 誣 奏 請 등 주요 외교사안이 있을 때에 만 정사의 품계를 올렸다. 고위급 사신 파견을 남발하면 외교현안의 중요도를 구분하 기 어려워지므로 조선 전기에는 특별한 사안 외에는 별행도 절행과 마찬가지로 종2품 사신이 차정되었다. 사행단은 연회 외에도 忌 日 이라든지 날씨에 영향을 받아 滯 在 기간이 길어졌다. 특 히 조선의 국경을 넘어가기 바로 전인 압록강 부근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기에 서 사행단의 짐바리 검속과 進 貢 할 말에 대한 점검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먼 11) 제2장은 기본적으로 구도영의 앞의 논문을 참고하였다.
13 5 - 길을 떠나는 사행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마지막 慰 宴 이 두 번이나 열렸다. 사행단은 조선 내에서는 각 고을의 영접을 받았으나, 국경을 넘어가면 사정이 달라 졌다. 명으로 들어가면 조선 사행단은 스스로 安 危 를 지켜야 하는 外 國 人 일 뿐이었 다. 교통수단이라고는 말과 수레밖에 없었던 당시, 외국인으로서 긴 路 程 의 고됨은 특별한 것 이 아닌 당연한 것 이었다. 1534년(중종29) 進 賀 使 蘇 世 讓 은 사행길 와중 에 갑자기 악천후를 만나 人 馬 가 모두 뒤집어 지는 사고를 당하였고 1539년(중종34) 종계변무 주청사로 파견되었던 권벌도 9월 15일 갑자기 大 溝 를 만나 차량이 건너지 못하여 차량의 卜 物 을 모두 내려 사람들이 지거나 메고서 15 里 를 가기도 하였다. 요 동평야 지역에 이르면 400여리를 지나가도 언덕 하나가 없이 평탄했고, 소혹산에서 산해관까지는 간혹 언덕이 이어지지만 높지는 않았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으로 장마 가 지면 물이 나갈 곳이 없어 진흙탕이 되었다. 따라서 사행단은 이곳에서 큰 비를 만나면 부득이하게 진흙탕 속에서 수레를 끄느라 고생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년(연산6) 質 正 官 으로 明 에 다녀온 李 荇 은 高 平 을 지나면 끝없이 평야가 펼쳐졌는데, 杏 山 에서 큰 비를 만나 언덕까지 온통 진흙탕이라 미끄러워 물 천지를 헤쳐갔다 고 적고 있다. 게다가 차량이 낙후하여 이러한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2) 明 의 天 使 중국 사행의 구성은 보통 정사 부사 頭 目 등 20~30명 정도였다. 사신이 오면 義 州 安 州 平 壤 黃 州 開 城 등 5곳에 2품 이상의 관리를 선위사(또는 원접사)로 선 발하여 맞이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요동도지휘사사가 오면 3품 당상관을 보냈다. 사 신 접대는 임시기관인 迎 接 都 監 에서 총괄하였다. 이때 통사는 사역원에서 11명이 선 발되는데, 통사의 외교적 경험을 중시하여 통사 출신을 영접도감의 실무책임자인 영 접도감사에 임명하였다. 12) 사신과의 원활한 통역을 위하여 의주에 통역관을 배치하였다. 즉 의주는 외교상 중 요한 장소로 사신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처음 머무는 곳이자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정 정도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1428년(세종10) 譯 學 訓 導 를 설치하고, 의주와 인근 각 고을의 자원자를 모아서 漢 文 과 漢 語 를 가르쳐 그 학업을 이룬 자는 平 壤 土 官 에 임명하였다. 13) 세종실록지리지 의주목조에도 역학 훈도 1인이 기록되어 있 다. 14) 사신들이 왕래하는 과정에서 접대로 인한 의주민의 고통은 심하였다. 특히 중국의 12) 장희흥, 朝 鮮 時 代 對 明 使 行 의 接 待 와 護 送 軍 - 義 州 民 의 生 活 을 中 心 으로, 백산학보 75, 쪽~. 13) 세종실록 10년 12월 병술. 14) 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의주목.
14 6 - 사신만이 아니라 호송군이 많을 경우는 더욱 심각하였다. 사신들은 의주 의순관에서 머물면서 요동에서 호송군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갔다. 그러나 요동호송군이 오는 기간이 오래 걸릴 경우 사신들은 의순관에서 몇 달을 머무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한 중국에서 사신과 호송군이 오게 되면 접대와 함께 擺 堡 의 말까지 주었다. 15) 그런 데 접대가 과다한 것이 문제였다. 그 비용은 의주 주변의 세금에서 충당되었기 때문 이었다. 그들에게 공급하는 1년 비용은 쌀로 1천여 섬으로 의주에서 부담하는 것은 한도가 있었다. 결국 이웃의 군현에서 가져다 쓰게 되는 형국이었다. 16) 이 폐단에 대 하여 黃 喜 는 사신을 맞이하러 가는 迎 逢 軍 이 적어 사신들이 의주에서 오래 머무는 것 은 한 때의 폐단이지만 호송군을 보내면 만세의 폐단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17)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에는 요동 호송군이 와서 호송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文 臣 인 天 使 이면 都 司 가 호송군 2, 3천 명을 거느리고, 太 監 이면 摠 兵 官 이 8천 명 을 거느리고 왔다. 그 접대 비용은 약 4천여 곡이었다. 그 외 조선에서 중국으로 갈 때 호송하는 군사나 滿 浦 에서 항상 나오는 野 人 에게 공급하는 것이 많았다. 결국 국 가에서는 무명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적자를 해 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屯 田 을 개간하자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연산군대 의주의 圓 直 從 達 두 섬의 밭을 當 領 船 軍 이 개간하여 양곡 1천 곡을 수확한 경우가 있었다. 국 가에서는 威 化 島 의 토지가 비옥하므로 이를 개발하자고 하였다. 결국 사신과 요동호 송군이 머무는 접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개간을 하자는 안이 제시되었다. 이 역시 국경 분쟁이 있어 쉽지 않았다. 18) 사신들의 왕래 시 물건을 운반하는 것 역시 문제가 되었다. 각 지역의 향리가 말을 이용하여 이들 물건들을 운반하였다. 사신의 물건을 운반하는 원칙은 단자가 있는 것 외에는 운반에 대한 책임은 없었다. 이를 계속 요구할 때에는 요동을 갔다가 돌아오 는 인원에게 책임을 물었고, 돌아갈 때에도 가져온 말에다 싣고 가고, 나머지는 호송 군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가져가도록 되어 있었다. 나머지 물건은 의주에 보관하게 하 였다. 19) 3. 호송군과 평안도의 피폐 15) 연산군일기 8년 6월 임자. 16) 연산군일기 9년 3월 기묘. 17) 세종실록 13년 12월 갑인. 18) 장희흥 앞의 책, 쪽 19) 성종실록 15년 5월 을묘.
15 7 - 正 官 외에는 짐을 나르고 허드렛일을 도맡을 從 人 과 사행단의 안전을 지켜줄 護 送 軍 이 있었다. 20) 사행은 明 과의 외교 현안을 해결하는 임무의 중요성과 더불어 황제께 바치는 表 文 및 方 物 을 소지하고 있어서 建 州 女 眞 이나 도적들에게 습격 받을 위험 소지가 다분했다. 따라서 이들을 호위하는 護 送 軍 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護 送 軍 은 平 安 道 의 正 兵 에서 차출하였고, 사신 일행의 짐을 날라줄 騎 馬, 駄 馬 도 평안도 各 官 의 鄕 戶 馬 에서 輪 番 으로 정하여 보냈다. 그러므로 사행 파견이 많아지면 평안도민이 그 피해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았다. 그렇다면 호송군은 몇 명이나 차정되었을까. 經 國 大 典 에는 사행의 호송군을 餞 送 시 4 隊, 出 迎 시 2 隊 로 差 定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1 隊 가 25명이니 餞 送 시의 호송군은 100명, 出 迎 시의 호송군은 50명이었다. 이렇게 호 송군의 숫자가 지정되어 있지만 政 丞 이 사신으로 파견될 때에나 북쪽 변방에 聲 息 이 있을 때에는 일시적으로 그 숫자가 증액되었는데, 많을 때에는 천여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중종대에는 평안도민이 호송군에 차정됨으로써 입게 되는 폐해가 지속적으로 거론되자, 변란의 소식이 없을 때에는 4 部 隊 에서 1 隊 를 감하여 보내기로 하였고, 이 것이 법제화되었다. 병영에는 각 鎭 에 예속되지 않고 평안병사가 직접 거느리는 隨 營 牌 라는 親 兵 이 있 었다. 이들은 북경으로 가는 사신 일행을 야인들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호송 군사로 차출한 군대이다. 본래 별도의 호송군이 있었으나 서북 변방의 사정이 좋지 않을 때 특별한 사태에 대비하여 호송군 외에 수영패를 데리고 갔다. 그런데 후에는 특별한 정황이 없을 때에도 통상적으로 데리고 가서 이들에게 짐을 수송하는 일을 맡 겼다. 21) 평안도는 부경사신의 왕래가 끊이지 않아 백성들의 고생이 다른 도보다 배나 심하 였다. 22) 특히 이 폐단이 심화된 것은 성종대 이후이다. 사실 세종대에는 영송의 폐단 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는 1년의 사행 횟수가 일정했고, 짐을 실어 나 르는 군마가 지치지 않도록 千 戶 가 알맞게 護 養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종대에 들어 일단 別 例 로 가는 사행이 잦아졌고, 부경하는 사람들을 검찰하지도 않았다. 23) 사신들이 부경할 때 날라줄 말은 평안도 各 官 의 鄕 戶 馬 에서 輪 番 으로 정하여 보냈 는데, 24) 부경사신들은 행차를 호송하는 군마에 사사로운 물건을 많이 실었다. 이들은 品 數 밖의 포자를 많게는 100여 同 에서 적어도 8, 90 同 까지 가져져 그것으로 중국의 紗 羅 綾 緞 이나 白 鐵 綠 礬 등과 바꾸었다. 25) 여기에 사신 외에 通 事 押 物 者 들도 물 20) 제3장은 기본적으로 구도영의 앞의 논문을 참고하였다. 21) 차문섭, 중종조의 정로위,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 출판부, 1973, 179쪽. 22) 중종실록 36년 2월 임신. 23) 성종실록 6년 5월 계해. 24) 성종실록 15년 5월 을묘.
16 8 - 건을 많이 가져갔다. 그런데 사신과 서장관들은 이를 금지하기는커녕 도리어 이들과 더불어 이익을 꾀하고자 했다. 26) 이런 상황이다 보니 평안도의 困 敝 는 오로지 중국 으로 가는 사신 행차의 짐을 나르고 迎 送 하는 일에서 말미암는다. 27) 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평안도 군사들이 말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各 官 의 수령은 그의 먼 일가에 독촉했 다. 군사들이 설령 말을 마련했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쇠약하면 튼튼한 말을 내놓으 라고 團 練 使 가 퇴짜를 놓기 일쑤여서 군사들은 家 財 를 다 팔아서 말을 사야 했다. 이 에 평안도 백성들은 차라리 중국 사신을 맞이할지언정 부경사신을 맞이하지 말았으 면 28) 하면서 평안도 일대가 잔폐하게 된 것은 오로지 중국 물품을 무역하기 때 문 29) 이라고 했다. 평안도는 서북쪽으로 압록강 건너 울창한 산림을 경계로 여진과 맞닿아 있었다. 평 안도의 지리적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여진은 태종 이후 주로 평안도의 江 界 渭 原 理 山 碧 潼 昌 城 朔 州 義 州 등 이른바 7읍으로 침입했다. 그것은 압록강 상류에 설 치되었던 4군이 세조대에 모두 폐지되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던 데다가, 건주위 에서 三 水 甲 山 까지는 백두산 기슭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나무만이 무성할 뿐 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진이 침입할 수 있는 곳은 북쪽으로 강계 만포로부터 남 쪽으로 의주까지였다. 조선에서는 여진 침입에 대비해 평안도 楸 坡 에서 隣 山 에 이르 기까지 압록강을 따라 15개소의 鎭 을 벌여놓고 군사들로 하여금 방수하게 했다. 그래 서 평안도 군사들은 별다른 聲 息 이 없어도 얼음이 어는 시기가 되면 방수하러 가야 했지만, 여름에는 그나마 수월했다. 그것은 얼음이 풀리면 압록강 강물이 불어서 여진 들이 강을 건너 침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15세기 중반인 성 종대 후반에 이르면 달라졌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여진들이 간헐적으로 강을 건너왔 지만, 이때에 이르러서는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작은 배인 皮 船 을 타고 본격적으로 강을 건넜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들은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무시로 침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평안도 군사들은 거의 대부분 변경에서 방수했기 때문에 방비의 고통이 그 전에 비해 크게 가중되었다. 1491년(성종 22) 許 渾 의 일 이후로, 평안도 군사들은 9월부터 2월 보름까지는 남도 군사와 合 番 해 부방했다가 분번한 후 4월부 터 8월까지는 단독으로 방수했다. 여기에 방수하러 연변 각 진으로 가는 데에도 거의 열흘에서 한 달이 걸렸다. 그러다 보니 쉴 수 있는 날이 거의 없는 셈이었다. 30) 25) 성종실록 22년 3월 을사. 26) 성종실록 5년 2월 임술. 27) 성종실록 6년 5월 계해. 28) 중종실록 23년 2월 경술. 29) 중종실록 28년 12월 무인.
17 9-4. 의주 백성들의 핍박과 조정의 대응 평안도 백성들은 군역을 피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했다. 이 시기 평안도 백성 들은 중국 땅엔 노역이 없고 먹을 것이 넉넉하다는 소문을 듣고 압록강 너머로 도망 갔다. 국가에서는 유망한 인물에 대해 기필코 모두 쇄환하려 했지만, 그들은 오지 않 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름을 바꾸는 자까지 있었다. 31) 성종 연간이 되면 의주 등지의 평안도 사람들이 요동방면으로 도망가는 것에 대한 논의가 종종 보인다. 예를 들어 조선에서 도망한 사람들이 東 八 站 에 많이 살고 있으 니 의주에 長 城 을 쌓아 이를 방지하자든가, 32) 요동에서 봉황산 방면으로 조선말을 쓰 는 사람들이 다수인데 이들은 모두 조세와 요역이 적은 이곳으로 도망한 결과라고 판 단하고 있다든가, 33) 중국이 동팔참에 성을 쌓아 인구를 이주시키는데 여기엔 도망간 평안도 사람들이 다수 살고 있는 듯하다든가, 34) 중국의 東 八 站 과 東 寧 衛 백성은 조선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중국 영토가 조선 경계에 점점 근접해 오니 평안도 사람 의 도망이 우려된다든가, 35) 중국 송참은 조선에 너무 근접해 있어 의주사람들의 도망 이 우려되니 禁 防 節 目 을 만들어 예방해야 한다든가, 36) 병조에서 의주와 七 站 의 방비 에 대해 아뢰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37) 호송군으로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안도의 군사들로 각 군이 돌아가면서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요동으로 갈 때는 대부분 의주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의주민들이 짐을 운반하게 된 이유는 황해도에서 짐을 싣고 의주에 도착하면 말과 사람이 지쳐 중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곧바로 의주 사람을 충당하여 요동까지 짐을 운반하였다. 때문에 요동호송군이 의주에 이르면 연고가 있는 자는 모두 의주 사람으로 충당하였다 년(성종15) 동팔참에서 사행 도중에 다수의 호송군이 죽은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의주 사람이었다. 법적으로 의주 麟 山 龍 川 鐵 山 宣 川 郭 山 龜 城 사 람은 호송군에서 제외하였다. 그러나 실제 대부분은 의주와 그 인근 주민들로 구성되 30) 김순남, 15세기 중반~16세기 조선 북방 軍 役 의 폐단과 軍 額 감소, 朝 鮮 時 代 史 學 報 61, ~49쪽. 31) 중종실록 23년 3월 임진. 32) 성종실록 14년(1483) 12월 12일(신미) 2번째 기사. 33) 성종실록 17년(1486) 10월 8일(기묘) 3번째 기사. 34) 성종실록 19년(1488) 8월 24일(을묘) 3번째 기사. 35) 성종실록 20년(1489) 7월 8일(갑자) 2번째 기사. 36) 성종실록 21년(1490) 5월 21일(임신) 4번째 기사. 37) 성종실록 24년(1493) 3월 22일(정해) 1번째 기사.
18 10 - 었다. 의주 사람들이 호송군에 참여하는 이유는 결국 물건 매매로 이익이 생기기 때 문이었다. 사행에는 많은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물건을 가져가는 것을 인정하였 다. 다만 진헌 금지 품목으로 지정된 苧 布 麻 布 등을 가져가는 행위는 엄단하였다. 이것을 조사하기 위하여 물목을 만들어 의주에서 사행단 전체의 물품을 대조하였다. 수행원 역시 필요한 경비의 마련이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몰래 물건을 가져가기 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여기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상인들로 통역관에게 부탁하여 무 역에 참여하거나 호송군과 이름을 바꾸어 대신 요동으로 가서 장사하였다. 호송군이 법을 위배할 시에는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심할 경우 재산을 몰수하고 水 軍 에 충당하였다. 1413년(태종13) 조정에서는 호송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일정 정도의 이익 을 도모하기 위하여 牛 馬 를 제외한 10 升 이하의 苧 布 麻 布 人 蔘 皮 物 등의 무역 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호송군들은 布 物 을 정수대로 하고, 다른 물건을 모두 금지하 는 것은 문제가 많다고 하였다. 요동에 오래 머물 경우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이익을 금지한다면 생활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결국 布 10필, 인삼 5 斤 으로 하되 笠 帽 등은 금하지 않았다. 그 양이 많고 적다는 것으로 논의가 분분하였다. 여기서 문제는 평안도 호송군들이 1인당 私 布 10필씩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허용 하였으나 그 지방 풍속이 베를 짜는데 능하지 못하다는 데 있었다. 즉 서울의 富 商 大 賈 들이 의주에 가서 호송군에게 부탁하여 물건을 대신 가져가게 하거나 보내는 사람 의 이름을 사칭하고 대신 들어가서 이익을 취하였다. 5. 世 宗 世 祖 代 三 島 와 對 明 관계 여기서 三 島 란 압록강 하류의 주요 섬 3개를 가리킨다. 실록엔 삼도가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본 논문에서는 성종실록 19년(1488) 6월 13일(을사) 2번째 기사와 4번째 기사에서의 지적처럼 어적도 검동도 위화도를 삼도로 보려한다. 38) 1410년(태종10) 2월, 서북면 도절제사 김승주가 의주 軍 民 이 강을 건너가 밭을 경작하는 것( 越 江 耕 田 )을 금하자고 조정에 요청하고 있다. 39) 이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사람들이 경작을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越 江 이란 인식이 주목된다. 그런데 1432년(세종14) 1월 호조에서 아뢰어 의주 등지의 백성들의 越 耕 하는 것 38) 서인범, 압록강 하구 연안 도서를 둘러싼 조 명 영토분쟁, 명청사연구 26, 쪽. 본 논문에서 검토하는 조선 전기 삼도를 둘러싼 對 明 관계에 대한 기존연구는 서인범 의 앞의 논문이 유일하다. 39) 태종실록 10년(1410) 2월 16일(계축) 4번째 기사.
19 11 - 이 온당한지의 여부와 경작에 대한 조세 징납 여부를 논의했다고 하자, 세종이 10리 를 限 界 로 越 耕 하는 것을 금지하지 말 것이며 그에 대한 조세는 보통 경우의 반액 을 받게 하라고 답하고 있다. 40) 월강 월경 이 조선 조정에 의해 합법화된 것을 의 미한다. 그런데 월경 이 국경을 넘어선 경작행위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후 농경 이 끝났을 같은 해 9월, 병조에서 아뢰어 兀 良 哈 의 指 揮 林 加 羅 가 압록강 하루 근처 에서 횡행하며 약탈을 행하니 의주 이외의 강변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명년부터는 彼 邊 耕 田 을 금지하게 해야 할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백성의 생계를 위해 허락한 경작이므로 예전대로 허락하자는 허성의 의견이 수용되었다. 41) 1433년(세종15) 11월 영의정 황희가, 越 江 경작을 금지한 까닭에 평안도 백성들이 곤궁하여 도망치곤하나 賊 變 이 예상되니 금지는 계속해야한다고 아뢰었다. 이에 세 종이 적의 소굴과 멀리 떨어진 곳은 경작케 함이 어떨까 제안하고 있다. 42) 다음해인 1434년(세종16) 평안감사가 의주 등지의 주민들에게 越 江 耕 田 을 허용하되 수령과 千 戶 로 엄중히 수호하면 될 것이라 아뢰고 있다. 43) 이로 보아 경작을 위한 준비가 진 행되었던 듯하다. 1436년(세종18) 3월 세종이 평안감사에게, 여연에서 의주에 이르는 7개 邑 의 연변엔 이미 목책을 설치하여 괜찮으나, 인가도 드물고 목책도 없는 곳은 올봄에 내지로 철수시켜 여진의 습격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는 최윤덕의 의견에 찬성 하고 있다. 그러나 작년 7월 여연에서 일어났던 야인에 의한 3회의 약탈사건도 있었 으니, 목책이 없는 곳에선 낮엔 경작하고 밤엔 파수를 보는 방법도 강구하라고 하고 있다. 44) 1445년(세종27) 3월 평안도 도관찰사 조극관이 아뢰길, 의주는 경작할 만한 땅이 원래 적어서 백성들이 모두 威 化 島 와 今 音 同 島 및 於 赤 島 의 땅을 경작하여 먹고 살 았는데, 이 三 島 에 경작하는 것을 금지한 이후로부터 백성들의 생활이 곤란하오니, 청하옵건대, 그전대로 경작하게 하소서. 하니, 의정부에서 의논해 아뢰기를, 六 典 謄 錄 의 越 耕 禁 止 條 에, 의주의 狄 江 안의 어적도는 싸잡아 금지하지 말고 살피고 조사 하여 조세를 받으라. 하였고, 위화도와 금음동도는 어적도의 밑에 있어서 賊 路 와는 더욱 멀리 떨어져 있사오니 마땅히 관찰사가 아뢴 바에 따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 다고 한다. 45) 여기서 처음으로 三 島 가 등장하고 있다. 40) 세종실록 14년(1432) 1월 4일(갑자) 6번째 기사. 41) 세종실록 14년(1432) 9월 9일(갑자) 3번째 기사. 42) 세종실록 15년(1433) 11월 11일(경인) 2번째 기사. 43) 세종실록 16년(1434) 2월 6일(갑인) 8번째 기사. 44) 세종실록 18년(1436) 3월 25일(신묘) 1번째 기사. 야인의 약탈사건 기사는 세종실록 17년(1435) 9월 18일(병술) 3번째 기사, 9월 21일(기축) 2번째 기사. 45) 세종실록 27년(1445) 3월 13일(병술) 1번째 기사.
20 12 - 의주 백성들이 비옥한 삼도를 왕래하며 경작하던 것이 일대 변화를 가져온 것은 1461년(세조7년) 兀 良 哈 의 趙 三 波 등의 습격이었다. 이로 인해 農 幕 을 설치하고 경작 하던 백성 중에 잡히거나 살해된 자가 182명, 말 26마리와 소 155마리를 약탈당했다 고 한다. 46) 그럼에도 이듬해인 1462년(세조8년) 2월 한명회는 의주 백성들에게 비옥 한 삼도를 다시 왕래하며 경작케 하자고 건의하였고, 세조는 삼도의 농경을 허락하며 대신 참호를 깊이 파고 목책을 설치해서 수호군을 많이 배치하여 왕래 농경케 하라고 하고 있다. 47) 그러던 1464년(세조10) 11월 평안도 순찰사 한계미가 아뢰길, 압록강의 조몰정과 검동도는 농사짓던 땅이나 賊 路 가 사방으로 통하여 경작이 곤란하지만 위화도는 강 을 깊게 파서 야인이 쉽게 접근 못하게 하면 백성이 안심하고 경작할 수 있다고 하 며, 내년 봄에 군인 2천명을 동원하여 파게 해야 한다고 제안하자, 세조가 허락하고 있다. 48) 세조는 이어 다음해인 1465년(세조11년) 2월 평안도 관찰사 김겸광에게 의주 三 島 와 申 胡 水 의 耕 墾 事 目 을 내려보내고 있다. 그 내용은 신호수는 목책을 설치하지 말고 점차 개간 경작할 것, 삼도인 蘭 子 島 黔 同 島 招 募 島 는 의주목사가, 위화도는 麟 山 節 制 使 가, 신호수는 方 山 萬 戶 가 守 護 할 것, 경작엔 건장한 남자 농민이 참여하고 부녀자나 노약자를 거느리지 말게 할 것, 밤엔 안전시설 만들어 집단거주하게 하고 낮엔 군사가 경작농민을 지켜줄 것, 의주 농민의 경작순서는 먼저 招 募 亭 을, 다음은 검동도, 그리고 위화도와 난자도로 할 것. 난자도와 위화도와는 다르게 초모정은 목책 을 견고하게 설치할 것, 검동도는 도적이 건널 수 없게 여울을 깊게 팠으므로 목책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 농민도 무기를 준비하게 할 것 등이었다. 49) 세조의 삼도 농경에 대한 자세는 이처럼 적극적이다. 1466년(세조12) 윤3월 세조가 평안도 관찰사에게 狄 江 이 깊어지면 삼도에서의 농경이 편해질 것이라 하니, 동봉하 는 지도를 보고 그 지리와 水 力 등을 살피라고 명하고 있다. 이에 평안도 관찰사 오 백창이 답하여, 압록강 물이 넘치면 九 龍 淵 의 물도 넘쳐 적강과 합치게 되므로 적강 의 물을 깊게 파서 삼도의 경작에 도움이 되게 하라고 하신 것을 살펴보니 도움이 되 지 않음이 드러났다고 보고하고 있다. 50) 그런데 1466년(세조12년) 10월 평안도 절도사가 아뢰길, 야인 일족인 羅 下 의 군사 가 겨울 얼음이 어는 것을 기다려 의주의 삼도를 노력질하려 한다는 정보를 얻었다고 하고, 이 때문에 종종 賊 의 출현을 우려하여 삼도 농민을 보호한다고 주변에 斥 候 를 46) 세조실록 7년(1461) 9월 28일(을축) 2번째 기사. 47) 세조실록 8년(1462) 2월 19일(갑신) 5번째 기사, 2월 26일(신묘) 3번째 기사. 48) 세조실록 10년(1464) 11월 17일(병인) 3번째 기사. 49) 세조실록 11년(1465) 2월 15일(임진) 3번째 기사. 50) 세조실록 12년(1466) 윤3월 4일(을해) 4번째 기사, 11월 11일(기묘) 2번째 기사.
21 13 - 보내고 군마를 整 齊 하였다. 이에 대해 세조는 먼저 스스로 騷 擾 하지 말고 충분히 형 세를 살핀 연후에 거동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51) 1467년(세조13) 세조가 鳥 暮 亭 에서의 戰 敗 한 일을 논할 때, 의주목사의 禹 貢 의 후 임으로 제수받은 이윤인이 의주가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경계 를 넘어 삼도에서 경작을 시킨 것이니 이를 포기하라고 하였다. 이에 세조가 禹 貢 이 사냥하다 적지에 깊이 들어간 때문이지 삼도 때문이 아니라며, 하물며 작은 패배로 인하여 갑자기 국토를 버리겠는가? ( 況 以 小 敗, 遽 棄 國 土 乎 )고 힐난했다. 그러자 신숙 주가 아뢰길, 농번기에 집중 농경케 하고 柵 壘 를 잘 지켜내면 軍 需 도 넉넉해지고 욕 을 당할 근심도 없다고 하자, 세조는 곧 이윤인을 사임시키고 西 班 職 에서 천거를 하 라고 하자 신숙주가 성귀달을 천거했고 곧 의주목사로 제수되었다. 52) 세조의 삼도 경 작 의욕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인사교체라 하겠다. 세조의 삼도 경작에 대한 열의는 다음에서도 보이고 있다. 즉 1468년(세조14) 3월 평안 서도절도사 김견수가 의주사람들의 의견으로 검동도, 조모정, 위화도는 신미년 (1451년[문종1])에 올량합이 쳐들어와 농민이 잡혀가는 등하여 이익이 없으니 경작하 지 말게 해달라고 치계하였다. 이에 대해 세조가 말하기를, 경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넷이 있으니, 매년 耕 種 하여 곡식을 얻는 땅에다 금년에 경작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금년 곡식을 잃는 것이니, 그 폐할 수 없는 것의 하나이며, 옛날엔 한 번에 百 里 씩 나라를 넓혔는데, 이제 버리고 경작하지 않으면 이것은 날로 백리씩 나라를 줄이는 것이니, 그 폐할 수 없는 것의 둘이며, 금년에 경작하지 아니하고 명년에도 경작하지 아니하여, 오랑캐가 얻어 스스로 경작하게 한다면, 저들이 장차 말하기를, 이 땅과 이 밭은 모두가 본시 나의 소유였다. 고 하면 뒤에 말할 수 없으니, 그 폐할 수 없는 것의 셋이며, 人 主 는 의당 위엄을 四 方 에 펴야 하는데, 이제 사로잡히는 것 을 두려워하여 버리고 경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약하다는 것을 보일 뿐이므로, 그 폐할 수 없는 것의 넷이니, 경 등은 모름지기 다시 商 量 하라. 고하고 있다. 이어 농민 을 호위하고 건너가 경작하고 돌아오게 하되 고기잡이와 음주를 금지하라고 명하고 있다. 53) 예종대가 되어서도 한명회와 신숙주는 삼도 경작에 대해 적극적이다. 1469년(예종 1) 윤2월 그 둘은 예종에게 삼도 경작을 재개해야 하며, 그것은 가난한 의주 백성들 을 위해서라고 하며, 다만 군사를 주둔시키고 기일을 정해 농경을 행하면 될 것이라 아뢰고 있다. 54) 같은 해 6월 신숙주가 삼도 경작을 위한 守 護 圖 를 바치자 예종은 평 51) 세조실록 12년(1466) 10월 15일(계축) 3번째 기사, 세조실록 13년(1467) 4월 9일(갑 진) 2번째 기사. 52) 세조실록 13년(1467) 5월 10일(갑술) 2번째 기사. 53) 세조실록 14년(1468) 3월 20일(경진) 1번째 기사.
22 14 - 안도 관찰사 어세겸 등에게 이를 보내면서, 의주의 여러 섬에서 농사지을 때 煙 臺 와 木 柵 을 설치하여 수호할 위치 등을 마련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55) 6. 成 宗 代 三 島 와 對 明 관계 성종대가 되어도 신숙주의 관심은 여전하다, 1470년(성종1) 2월, 그는 삼도에서의 의주백성들의 경작이 오랑캐의 습격 이후 의주와 삼도를 오가며 경작하고 병졸로 일 일이 수호하게 하니 군사나 백성 모두 괴로워한다면서, 목책을 설치하여 수호를 엄중 히 하고 삼도에 거주하며 경작케 하면 좋아할 것이라고 성종에게 아뢰고 있다. 그러 면서 世 祖 께서 반드시 이 섬을 耕 種 하게 하려고 하였던 것은 후세에 반드시 중국 사 람에게 빼앗길 것을 염려한 까닭( 慮 其 後 世 必 爲 唐 人 所 奪 ) 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56) 이에 성종은 같은 달, 평안 서도절도사 하숙부에게 삼도 起 耕 事 目 을 내리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왕복 선박을 많이 마련할 것, 방어시설을 확충하고 군사로 하여금 적의 침략에 대비할 것, 농민들의 주간 농경이 끝나면 목책 안에서 숙박하게 할 것 등이었다. 다음 달인 3월에도 성종은 평안 동도절도사 이종생에게, 삼도 농사일이 바 야흐로 시작될 때이니 요동지방에 사람을 보내 賊 의 종적을 정탐하여 만약에 대비 하라고 이르고 있다. 57) 그런데 같은 달 신임 평안 서도절도사 이철견은, 의주 백성들 이 삼도 왕복 경작을 번거롭고 賊 變 을 두려워하여 소극적이며, 삼도에 연대와 목책을 설치해 놓긴 하였으나, 중국측의 여진 방어를 위한 역참 건설이 완료되는 것을 기다 려 5, 6년 후에 경작해도 될 것이라 아뢰고 있다. 58) 그런데 11년이 지난 1481년(성종12) 6월, 김승경이 아뢰길, 비옥한 삼도 경작을 금 한 이후로 의주가 殘 廢 되고 있으며, 중국이 站 을 설치해 압록강 가까이 오면 삼도를 그들이 경작하게 만들 수 있으니 조선측이 먼저 경작을 재개해야 한다고 아뢰고 있 다. 성종이 이에 경작재개를 수락하고 있다. 59) 이어 동지사 이파도 신숙주의 전술한 의견처럼 삼도 경작이 왕복형태라 의주백성이 힘들어 하니 목책과 농막을 설치해 군 사로 방비케 하면 될 것이라 아뢰고 있다. 성종도 평안도 관찰사 신정에게 비옥한 삼 도 경작에 백성들이 전념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 이르고 있다. 60) 이러한 분위기 54) 예종실록 1년(1469) 윤2월 10일(을축) 1번째 기사, 윤2월 24일(기묘) 5번째 기사. 55) 예종실록 1년(1469) 6월 9일(신유) 4번째 기사, 6월 22일(갑술) 2번째 기사. 56) 성종실록 1년(1470) 2월 16일(을축) 3번째 기사. 57) 성종실록 1년(1470) 2월 22일(신미) 6번째 기사, 3월 7일(병술) 5번째 기사. 58) 성종실록 1년(1470) 3월 7일(병술) 6번째 기사. 59) 성종실록 12년(1481) 6월 9일(임자) 1번째와 2번째 기사.
23 15 - 에 다음 달인 7월 평안도 관찰사 신정이 삼도에서 起 耕 할 방책을 아뢰었고 조정에서 이를 논했지만 賊 變 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금지하고 있다. 61) 1485년(성종16) 10월 사헌부 장령 이의가 상소로 삼도인 위화도 조몰도 검동도의 경작 재개를 요청하며 방비 방법까지 詳 論 하고 있다. 이에 삼도의 경작 재개를 조정 에서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62) 그에 의주목사 조숙기가 의주의 軍 需 가 부족하여 인근 고을에서 가져다 채우니 폐단이 많으니 삼도 중에서 변란 적은 위 화도라도 우선 둔전하자고 아뢰고 있다. 63) 이로부터 3년 후인 1488년(성종19) 5월 무령군 유자광의 다음과 같은 상소는 아주 구체적이며 시사하는 점이 많다. 의주는 나라의 西 門 인 큰 鎭 이며 중국 사신이 왕래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關 防 을 엄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성곽은 저렇게 협소하고 거주하는 백성들도 저렇게 쇠잔하며, 입을 수 있을 만큼 견고한 갑옷과 당길 수 있을 만큼 강한 활이 없는 것이 저와 같고, 1천 명의 군사가 수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비축하지 못한 것이 저와 같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중국에 변고가 있으면 의주에서 맨 먼저 군대를 받게 됩니다. 지금 중국에서 이미 애양포( 靉 陽 鋪 )를 설치하여 많은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起 點 을 遼 城 으로부터 하여 남북으로 廣 寧 까지 긴 담을 쌓아 야인이 요동 지경에 들 어갈 수 없는 것이 오래입니다. 그래서 開 州 이북에는 백성들의 거주가 이미 조밀합 니다. 그래서 지난해 개주에 성을 쌓았고 또 앞으로 湯 站 에 성을 쌓을 것입니다. 개 주는 의주에서 1백여 里 의 거리이며, 탕참에서는 6,70여 리가 됩니다. 탕참에 성을 쌓으면 또 반드시 婆 娑 府 에 성을 쌓을 것인데, 의주와의 거리는 겨우 30여 리입니다. 파사부에 성을 쌓으면 (중국은) 반드시 압록강 三 島 의 田 地 를 경작할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걱정해야 할 것으로서 이를 보류하여 뒷날의 근심이 되게는 할 수 없 습니다. 그리고 東 八 站 은 수백년 동안 텅비어 있던 지역인데 백성들의 거주가 이미 조밀하고 평안도는 백성들의 거주가 날로 더욱 쇠잔해지니, 비록 의주가 있으나 巨 鎭 이라고 여기고 關 防 이 있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중략) 전하께서는 사방이 무사하다 고 해서 장차 의주에 큰 걱정이 없다고는 하지 마소서. 거기에 거주하는 백성이 정말 쇠잔하다면 모름지기 금년에 남쪽의 백성 4,5백 戶 를 옮겨서 채우고 명년에 또 그렇 게 하며, 근방의 5,6 郡 縣 에도 남쪽의 백성들을 많이 옮겨서 그곳에 채워 백성들의 거주가 조밀해지게 되도록 하게 하소서. (중략) 그리고 남쪽의 백성들을 옮겨서 채운 다면 압록강의 三 島 는 경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0) 성종실록 12년(1481) 6월 13일(병진) 1번째와 4번째 기사. 61) 성종실록 12년(1481) 7월 13일(병술) 2번째 기사. 62) 성종실록 16년(1485) 10월 25일(임인) 3번째 기사, 10월 29일(병오) 3번째 기사. 63) 성종실록 17년(1486) 10월 19일(경인) 3번째 기사.
24 16 - 그 전에 장맹창 우공 허형손이 義 州 鎭 帥 가 되었을 적에, 兵 事 에 어두워 척후를 조심하지 않다가 敵 變 이 있게 되자 조정에서 논의하여 삼도를 묵혀 두었던 것이지, 세조대왕의 본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안되어 세조께서 다시 경작하려고 하 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정해지지 않았고, 세조께서 병으로 자리에 누우셨다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아아! 지금 의논하는 자가 삼도를 경작하는 便 否 는 의주의 백성들을 찾아서 물어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백성들은 비록 경작 을 하려고 하지만 관리들이 혹시라도 변고가 있을까 염려하여 편하다는 것으로 대답 하지 않는데, 누가 감히 편하다는 것을 말하겠습니까? 혹시 백성들도 그곳을 경작하 려 않는다고 한다면 그만두겠습니까? 큰 계획을 하는 사람은 마땅히 일의 이롭고 해 로운 것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일을 시행해서 이익이 많으면 지금은 불편하다고 말하 겠지만 뒤에는 모두 편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중략) 더구나 의주는 建 州 와는 거리가 멀지만 애양포는 상류에 鎭 守 하고 있으니, 우리의 창성과는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거 리입니다. 그리고 창성에서부터 의주까지에는 구령 方 山 두 鎭 이 있습니다. 만약 斥 候 를 멀리하고 烽 火 를 조심스럽게 한다면 야인들이 압록강가에 와서 말에게 물을 먹 이지 못할 것인데, 삼도의 경작하는 백성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생각 하지 않고 기름진 田 地 를 내버려두어 고기가 노니는 장소로 만드니, 조정의 의논이 계책을 잃은 것입니다. 만약 중국에서 파사부에 성( 城 )을 쌓고 경작하게 된다면 큰 근 심거리는 없겠으나 후회하여도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64) 한 달 후인 6월 유자광은 다시 상소하여 말하기를, 지금 (중국은) 천하가 富 盛 해서 천하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데도 요양으로부터 장성 ( 長 墻 )을 쌓고, 이미 애양보( 靉 陽 堡 )를 설치하였으며, 또 開 州 에 성을 쌓고, 점차 湯 站 에 성을 쌓고, 파사보에 성을 쌓았으니, 슬기로운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알 수 있으며, 더욱이 요동 사람들 또한 모두 그것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라며 중국의 위협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였고 남쪽의 백성을 옮겨 의주 인구를 더 키우고 성곽도 높 고 넓혀 쌓고 삼도도 정착하여 경작할 것을 요청하였다. 65) 1488년(성종19) 6월 유자광이 의주 및 동팔참 등지의 지도를 바치며, 중국이 탕참 에 성을 쌓아 10년 이내에 의주 가까이로 근접해 올 것이라고 중국을 우려하여, 의주 성을 넓게 쌓아 대비하자고 아뢰었다. 그리하면 동시에 삼도 경작도 수월해질 것이라 전망한 것이었다. 66) 이에 평안도 절도사 이병정도 같은 달 상소하여 삼도의 경작과 관련해 어적도는 경작이 용이하지만 검동도는 왕래하는데 멀어 곤란하다고 구분짓고 64) 성종실록 19년(1488) 5월 27일(경인) 2번째 기사. 65) 성종실록 19년(1488) 6월 4일(병신) 3번째 기사. 66) 성종실록 19년(1488) 6월 11일(계묘) 2번째 기사.
25 17 - 있다, 이에 성종이 어적도 검동도 위화도의 삼도는 야인에 대한 장맹창의 대응 잘 못으로 2년 동안 경작하지 못했지만 그 地 勢 를 조사하여 재경작의 방편을 궁리하라고 명하고 있다. 67) 1488년(성종19) 12월 삼도 개간을 중국 요동이 허락하지 않을 것을 우려하게 된다 (논의된 의견의 정리 필요). 삼도도 적강도 중국 땅이란 의견도 제기되고 그러므로 이 문제를 중국에 咨 文 으로 보내는 것도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68) 1년 후인 1489년(성종20) 5월 성종은 삼도를 둔전하려 했다가 중지한 것은 중국의 형세를 살피려 함이었다고 하고, 7월, 의주목사 경유공에게 삼도 개간건을 가서 살피 라고 명하고 있다. 69) 이같은 성종의 명령에 대한 회답인지 같은 해 12월 特 進 官 이병 정이 삼도 경작은 불가하다고 아뢰고, 그 이유로 삼도 경작을 위해 왕래 선박으로 漕 船 300척과 大 船 50척을 만들기로 했는데 이를 위해 벌목하느라 야단인데 중국 조정 에서 이런 소식을 들으면 실로 작은 일이 아니며( 中 朝 聞 之, 則 誠 非 小 事 ), 비가 내리면 삼도가 물에 잠겨 경작 농민이 죽을까도 두렵다는 의견이었다. 이극배도 같은 의견이 었다. 70) 1496년(연산2) 10월 어세겸이 아뢰어 삼도 경작을 이젠 백성들이 괴로워하는 일이 되었다고 아뢰고 있다. 윤효손도 적의 침략을 자주 입어 삼도 경작을 금한지 오래되 었다고 동의하고 있다. 71) 그러나 1503년(연산9) 3월 다음과 같은 이세좌의 제안으로 다시 경작건이 논의된 다. 요동 호송군이 으레 義 順 館 까지 오므로 그들 군사에게 주는 양곡과 仁 情 이 쌀 로 환산하면 1년 1,000여 석이니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特 進 官 조숙기가 아뢰기를, 文 臣 인 天 使 가 사신으로 올 땐 요동도사가 호송군 2, 3천 명을 거느리고, 太 監 이면 총병관이 8천 명을 거느리고 옵니다. 이들에 대한 접대비용이 4,000여 斛. 이러저러 한 지출로 둔전이 시급합니다. 2년 전에 직접 의주의 圓 直 從 達 두 섬을 둔전하여 양곡 1,000 곡을 수확한 바 있으니, 그 곁에 있는 비옥한 위화도를 경작하길 바란다 는 제안이었다. 이에 조정은 위화도 둔전 여부를 논의하여, 현지의 사정을 더 자세히 파악하여 결정하자고 결론짓고 있다. 72) 그런데 같은 해 8월 호조에서 위화도 개간이 섬을 왕래하며 경작하는 일이라 쉽지 않다고 하며, 그 대신 水 利 도 좋고 賊 變 도 염려 없는 大 川 水 口 등지를 개간하자는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73) 67) 성종실록 19년(1488) 6월 13일(을사) 2번째 기사, 4번째 기사. 68) 성종실록 19년(1488) 12월 29일(무오) 2번째 기사. 69) 성종실록 20년(1489) 5월 1일(무오) 1번째 기사, 7월 7일(계해) 1번째 기사. 70) 성종실록 20년(1489) 12월 2일(을유) 2번째 기사. 71) 연산군일기 2년(1496) 10월 30일(계묘) 2번째 기사. 72) 연산군일기 9년(1503) 3월 12일(기묘) 1번째 기사, 3월 17일(갑신) 2번째 기사.
26 18-7. 中 宗 代 三 島 와 對 明 관계 중종반정 이후에도 한동안 삼도 경작건은 논의되지 않고 있다. 그러던 1531년(중종26) 11월 성절사로 갔던 반석평이 귀국하여 복명하는 중에, 위 화도의 중국인 쇄환건을 요동도사에게 알려, 上 國 의 백성들이 국경에 흩어져 살아 두 나라 경계에 만연하고 있다. 그래서 혹 사로잡혀 가는 일이라도 생기면 조정의 문 책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땅이 비록 지금 비어 있지만 우리나라 백성들이 가서 살면서 농사지을 수 있겠는가? 그대로 비워두는 것은 오로지 대국을 섬긴다는 뜻에서 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74) 중국인들이 드디어 압록강 지역에까지 출 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32년(중종27) 10월 예조가, 요동 大 人 이 指 揮 3인을 파견하여 위화도와 圓 直 島 의 중국인을 推 刷 하는 중이라며 조선측의 접대에 대해 논하고 있다. 75) 중국인들의 출 몰이 잦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1532년의 년말은 압록강 출몰 중국인 추쇄건으로 몇 개의 기사가 보인다. 우선 11월 通 事 이화종이 아뢰길, 지난 달 10월 29일 중국인 손승은이 위화도와 원직도의 중국인 117 家 를 모두 쇄환해 가면서 의주목사에게 중국인들이 다시 그곳에 살지 못 하게 하라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 76) 12월의 평안도 관찰사 신공제의 치계 즉, 추쇄 당했던 중국인들이 다시 위화도에 들어와 천막을 짓고 거주하려 하니 불태워버리겠다는 것에 대하여 예조가, 이 겨울에 다시 돌아온 것은 비옥한 토지라 아예 평생 거처하려는 뜻이지만 강제로 구축한다면 사단이 생길 듯하니 더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77) 이에 의정부와 예조에 서도 논의하길, 위화도에서 쇄환해 간 중국인들이 다시 와 살려하니 그때마다 강제 철거시켜야 한다. 그들이 개간하지 못하게 파종했으면 갈아엎어야 한다. 그러나 중국 인은 내쫓고 조선백성은 들어가 농사지으면 토지를 탐내는 것이 되니 결국 조선백성 도 入 島 경작을 금지시켜야한다고 하고 있다. 78) 다음 해인 1533년 5월 평안도 관찰사 신공제의 書 狀 에, 쇄환해 갔던 중국인들이 위 73) 연산군일기 9년(1503) 8월 16일(경술) 1번째 기사. 74) 중종실록 26년(1531) 11월 2일(임자) 1번째 기사. 75) 중종실록 27년(1532) 10월 18일(임진) 1번째 기사. 76) 중종실록 27년(1532) 11월 12일(병진) 1번째 기사. 77) 중종실록 27년(1532) 12월 6일(기묘) 1번째 기사. 78) 중종실록 27년(1532) 12월 9일(임오) 1번째 기사.
27 19 - 화도에 다시 와 야간에 농지를 개간하고 곡식을 심고 김매는 지경이다, 군관과 훈도 로 하여금 가서 금지하게 했더니, 중국인 100여 명이 몰려들어 몽둥이와 돌멩이로 공 격하여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자 중종은 위화도의 중국인 경작 건은 방치하라 했는데 금지시키려 하다가 그렇게 사단을 만들었다. 앞으로는 금지시 키지 말라고 하고 있다. 79) 같은 해 12월에도 의주목사 민제인이 아뢰어, 삼도에 무단 침입한 중국인이 의주로 들어와 도둑질하면 어떡해야 하느냐고 묻고 있다. 중종이 답 하여, 삼도 무단거주의 중국인은 요동에서 조치할 것으로 도둑질한 중국인은 일단 구 류시켜 놓고 중앙에 보고하라고 하고 있다. 80) 1534년 초기에도 중국인 문제는 이어지고 있다. 윤2월 예조가 작년에 탕참 지휘사 가 위화도 잠입 농경을 금지했는데도 지금 다시 중국인들이 잠입해 밭을 일구고 있다 며, 탕참에서는 조선이 그들을 내쫒아라 하지만 조선으로서는 쉽지 않으니 탕참에 말 하고 요동에도 咨 文 을 보내자고 제안하고 있다. 중종은 성절사가 가는 길에 요동에 사실을 상세히 알리는 게 해결책일 듯하다고 답하고 있다. 이에 승정원이, 성절사행은 5월에 가는데 지금은 농경이 시작될 때에 해당하므로 조속히 알려야 경작을 금지할 수 있다고 하며, 위화도의 중국인들에게 요동도사에 고발하여 중죄에 처하게 할 것이 라며 지속적으로 위협해야 할 것이라 하고 있다. 81) 같은 해 3월에도 예조판서 유관이 아뢰길, 위화도 경작하는 중국인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 지금 布 政 司 가 평안도 함경도에서 중국인들을 쇄환하고 있다 하니 이화종을 시켜 해송하게 하면서 요동에 移 咨 하여 말함이 어떨까 제안하고 있다. 중종이 답하 여, 위화도는 국경 밖으로 조선 땅이 아니다. 위화도건은 중국 조정에서는 아직 모르 는 일이므로 알면 견책할까 염려된다. 명분 없이 요동에 사람을 보내는 것도 곤란하 니 변방 장수를 위화도에 보내 깨우치게 하라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에 三 公 이 성절사가 갈 기일은 아직 멀었으나 위화도에선 이제 땅갈이와 파종을 하는 시 기가 되었으니 시급히 이화종을 보내 요동에 移 咨 하게 하자고 재촉하고 있다. 82) 4월 이 되자 咨 文 을 가지고 요동에 갔던 이화종이 돌아와 위화도 중국인에 대한 강제송환 이 결정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즉 그가 요동측에 위화도의 중국인들이 의주에까지 들어와 도둑질을 하고 있다고 하였고, 이에 요동측은 중국 조정에 보고해 중죄로 다 스리게 할 것이라는 답을 얻었다고 하고 있다. 83) 79) 중종실록 28년(1533) 5월 3일(을사) 5번째 기사. 같은 날 4번째 기사에 의하면 이 때는 通 事 이화종이 위화도 경작건 때문에 요동으로 간 때이다. 80) 중종실록 28년(1533) 12월 20일(무자) 1번째 기사. 81) 중종실록 29년(1534) 윤2월 26일(계해) 1번째 기사, 윤2월 28일(을축) 2번째 기사와 4 번째 기사. 82) 중종실록 29년(1534) 3월 6일(임신) 1번째 기사, 3월 7일(계유) 1번째 기사.
28 20 - 그런데 같은 해인 1534년(중종29) 11월 중종은, 黔 同 島 와 위화도의 중국 경작지에 遼 東 大 人 이 푯말을 세워 경작을 금했는데 그들이 다시 조선 경내로 침입하여 물고기 를 잡곤 하니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결정하여 평양에서 대기 중인 謝 恩 使 에게 알려야 한다고 하고 있다. 이에 예조판서 유관이 아뢰길, 중국인들이 금동도와 위화도에서의 경작금지를 위반하고 조선 경내에서 노략질과 어렵행위마저 자행하니 사은사가 대동 한 通 事 이응성을 압해관으로 정하여 요동에 가서 호소하게 하라고 서두르고 있다. 84) 1535년(중종30)에 와서 조선은 삼도 중에서도 특히 위화도에 중국인들의 거주가 증 가하는 것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85) 그래서 중종은 위화도 등 삼도 경작 불 가건을 성절사를 통해 요동에 호소하려 하지만 오히려 직접 예부로 呈 文 함이 낫지 않 을까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그러나 좌의정 김안로가 아뢰길, 삼도 경작 금지건은 성 절사가 가는 참에 요동에 알린다 했는데, 금년 농사철이 시작되어 이미 늦었으니 예 부에 정문하자는 임금의 뜻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요동을 거치지 않는 것이 되므 로 요동측에서 불만 가질 것이며 삼도의 중국인은 또한 요동의 관할이다. 정문한다 해도 예부 또한 어차피 요동쪽에 그 전말을 문의해 알려 할 것이므로 조선으로서 입 장이 곤란해진다. 그러므로 이화종을 요동에 급히 보내 간절히 호소함이 좋을 듯하다. 이에 요동측이 소극적으로 나오면 중국 조정에 주달하겠다고 우회적으로 압박하고 그 런 연후에 예부에 자문을 보내면 요동측도 조선을 탓하지는 못할 것이다. 성절사는 시일을 지켜야 하지만 陳 慰 使 와 進 香 使 는 좀 늦출 수도 있으니 이화종을 서둘러 먼 저 보내 진위사와 진향사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요동의 뜻을 파악해 놓음이 좋을 듯하다. 곤란하다면 예부에 보내는 자문을 만들어 이화종에게 건네는 방법도 있을 것 이고, 동지사 편에 자문을 보내는 것도 좋을 듯하다고 의견을 내고 있다. 86) 이처럼 경작 금지건을 예부로 올릴까, 요동측으로 할까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같은 해인 1535년(중종30) 중종은 이화종을 요동측으로부터 삼도 중국인 경작건을 금지한 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어떻게 그들을 조선이 통제하고 금지시켜야 할 것인가 쉽지 않 다. 예부에 자문을 올리는 것이 좋을 듯하니 진위사편에 보내기로 함이 어떨까 묻고 있다. 이에 영의정 김근사 등이 논하길, 예부에 자문 올리는 것은 요동을 노여워하게 해 득될 것이 없을 것이라며 요동의 조치를 일단 지켜봄이 좋을 듯하다는 의견을 내 고 있다. 87) 다음 달인 1535년(중종30) 8월 평안도 관찰사 반석평 등은 장계에서, 遼 東 鎭 撫 강 83) 중종실록 29년(1534) 4월 30일(병인) 1번째 기사. 84) 중종실록 29년(1534) 11월 20일(임오) 2번째 기사, 11월 21일(계미) 1번째 기사. 85) 중종실록 30년(1535) 4월 21일(신해) 2번째 기사. 86) 중종실록 30년(1535) 5월 9일(기사) 1번째 기사, 5월 10일(경오) 1번째 기사. 87) 중종실록 30년(1535) 7월 1일(경신) 1번째와 2번째 기사.
29 21 - 진 등이 의주에 와서 말하길, 夾 江 의 땅을 조사하라는 명령 받고 왔다며 협강의 경작 을 금지하여 비워둘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위화도 등지에 가서는 곡식을 다 베어버릴 것이라며 경작하던 중국인 100 여명을 심문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88) 그런데 1536년 12월 김근사 등이 아뢰길, 이번에 조선에 오는 天 使 에게 삼도 경작 금지건과 관련하여 推 刷 되었던 중국인들이 고소하여, 요동측이 조선의 뇌물을 받고 삼도에 지은 우리 집들을 헐고 농사짓던 곡식을 베어냈다고 말하고, 이것이 중국조정 에 전하여지면 변명하기에 힘들 것이다. 삼도 경작 불허건은 이화종이 그 전말과 관 련문서도 있으니 천사에게 잘 알려야 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89) 그러나 조선에 온 천사는 서울을 다녀 돌아가는 길의 검동도에 들르면서도 삼도의 경작 금지건에 대 해선 전혀 언급이 없다. 90) 1540년은 삼도 경작건과 관련하여 한 획을 긋는 성과를 가져온 해이다. 그 과정을 보면 4월 영의정 윤은보 등이 아뢰길, 의주의 造 山 坪 과 設 陷 坪 등지에 중국인이 와서 농사짓고 있으니 이를 요동에 移 咨 해야 할 것이다. 검동도와 위화도 경작건은 이미 요동대인으로 하여금 금지시키게 하였는데, 조산평과 설함평은 위화도보다 더 의주에 가까운 곳이니 시급하게 禁 防 策 을 강구해야 할 것으로 요동에 移 咨 해서 요청해야 할 것이라고 서두르고 있다. 91) 그런데 8월에 예조 참판 윤개가 요동 徐 大 人 의 宣 尉 使 로 의주에 갔다 와서 아뢴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즉 신이 선위사로 의주에 갔었지만 경작을 금지하는 땅은 반 드시 강을 건너가서 보아야 하므로 신이 직접 가지 못하고 거느리고 간 通 事 차윤성 을 보내 그곳의 주민과 경작하는 전답이 얼마나 되며 추수는 어느 정도 하였는가를 알아오게 하였더니 위화도에서 黔 同 島 까지는 15여 리이고, 금동도에서 設 陷 坪 한 변 까지는 12 13리였으며, 설함평의 길이는 어림잡아 一 息 은 되었다. 중국 사람이 전일 에 冒 耕 하던 곳은 위화도와 금동도이고 현재는 造 山 坪 과 설함평 두 섬까지 모경하고 있다. 조산평의 주변 둘레는 20여 리이고 설함평의 둘레는 15여 리였다. 이 두 섬은 경작할 만한 땅은 이미 전부 경작하였고, 두 섬에는 농막이 몇 군데 설치되어 있었 다. 다만 狄 江 의 건너편 강가에 사는 자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강은 비가 많이 내리지 않은 경우 배를 사용하지 않고 걸어서도 건널 수 있기 때문에 그곳 사람 들이 항상 오가며 모경한다. 저들이 마을을 이루고 사는 것은 오로지 이 지역을 경작 88) 중종실록 30년(1535) 8월 10일(무술) 3번째 기사. 89) 중종실록 31년(1536) 12월 5일(병술) 3번째 기사. 90) 중종실록 32년(1537) 4월 13일(신유) 2번째 기사엔 의주 별전위사 박수량의 천사의 행 적을 아뢴 내용이 있으나 검동도를 지나면서도 삼도 경작 금지건과 관련하여 아무런 언급 이 없다. 91) 중종실록 35년(1540) 4월 10일(신미) 1번째 기사.
30 22 - 하여 먹고 살기 위해서이니 만약 이 지역에서 경작하는 것을 금지한다면 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올해의 경작은 대단히 잘되었으며, 신이 이달 11일 출발하였 는데 그때 추수를 거의 끝내간다고 하였으니 지금쯤은 아마도 수확을 마쳤을 것입니 다. 신이 千 秋 使 조광원이 보낸 呈 文 의 내용을 보니, 조산평에 돌을 세워 경작을 금지 토록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돌을 세운 곳을 보면 大 威 化 島 및 금동도와 설함 평 세 군데로서 대개 이 지역 일대는 다 경작이 금지되었는데 올해 경작한 곳은 전일 에 돌을 세워 경작을 금한 지역에 속합니다. 돌을 세운 지역 안에서 중국 사람들이 모경하는 것을 금해 달라고만 청하고 모름지기 다시 돌을 세우자고 청하지 않은 것도 당연한 듯합니다. 그리고 중국 사람이 앞서 이미 양단과 중앙 등 세 곳에 돌을 세웠 으니 이제 다시 요청한다 하더라도 다시 세우게 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일 을 조정과 本 曹 에서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므로 도면을 그려서 아룁니다. 는 것이었 다. 92) 이로부터 조선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하게 이뤄진다. 우선 9월 영의정 윤은보 등이 아뢰길, 검동도에 설치한 冒 耕 을 금한다는 標 石 세 곳 중에 또 모경 지역이 있습니 다. 재차 모경을 금지해야 한다는 자문을 작성해 새해가 되기 전에 이화종에게 중국 인 압송 임무를 겸임시켜 요청하게 하라고 건의하고 있다. 93) 다음 달인 10월 중종은 堂 上 官 을 불러 전교하기를, 협강에 대한 일은 심히 중요한데 중국인들이 경작을 금지 하는 표석을 쓰러뜨리고 글자를 깨뜨려 버렸다고 하니 어찌하면 좋을까 우려하고 있 다. 이에 대신들이 아뢰길, 협강의 일은 요동의 이대인이 북경에 주달하러 갔고 협강 의 중국인을 추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화종을 보내 탐문한 다음 처 리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94) 12월 드디어 통사 이화종이 요동에서 돌아와 요동측의 자문을 전하고 있다. 이 자 문에 접한 대신들은 경작을 금지하는 일로 처음 이화종을 파견하였을 때에는 허락을 얻기가 어려울 것으로 여겼으나, 지금 허락을 받았으니 매우 통쾌합니다. 라고 술회하 고 있는 점으로 보아 삼도 경작건이 일단락 되었음을 알 수 있다. 95) 그런데 요동의 자문엔 흥미로운 점이 보인다. 어사가 이화종을 불러 협강은 중국 의 경계선으로 중국인이 살며 경작함은 법에 당연한데, 너희 나라에서는 왜 그렇게 심하게 다투는가? 라고 묻자 이화종은 답하여, 혹 우리나라의 무지한 자들이 중국의 인민과 서로 왕래하여 우환을 야기시킬까 걱정이기 때문이라며, 전에 우리나라의 변 92) 중종실록 35년(1540) 8월 23일(임오) 1번째 기사. 93) 중종실록 35년(1540) 9월 20일(무신) 1번째 기사. 94) 중종실록 35년(1540) 10월 14일(임신) 4번째 기사. 95) 중종실록 35년(1540) 12월 18일(을해) 4번째 기사.
31 23 - 방 백성인 金 同 難 이 중국에 들어가 본래는 戶 籍 이 없는 사람들과 무리지어 소와 말과 재물을 훔쳐 말썽을 일으키는 그런 일들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런데 자문에서 요동측은 협강으로 빨리 가서 지은 집들을 불태워 부수고 경작한 토 지의 면적을 조사하게 하고, 불법으로 경작한 사람들을 잡아오게 하였고 標 石 의 글씨 를 고친 것도 조사하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실제 협강에 도착하여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과 쌓아둔 땔감과 곡물 등을 한꺼번에 다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협강에 사는 중국인이 조선인도 불법으로 경작하는 곳이 있다. 고 한 것에 대해 이화 종은 본래 우리나라 경계 안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正 德 연간에 옛날 경작하던 곳 에다 표석을 세워 금한 이후 감히 개간하지 않고 있다. 고 둘러댔다. 이에 요동측은 그대 나라도 경작을 금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96) 이처럼 삼도 경작건은 요동측의 자문으로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게 아 니었다. 다음 해인 1541년(중종36) 11월 윤은보 등이 말하길, 夾 江 지역은 前 任 御 史 曾 侁 이 엄하게 금지하여 세 곳에 비를 세워 요동의 軍 民 은 이곳에 살거나 경작을 하 지 못하며, 조선의 군민은 이곳에 넘어와 採 取 하지 못한다. 고 새겨 놓았고, 막 익기 시작하는 들판의 벼들을 모두 베어 버렸습니다. 금지하고 경계함이 이같이 엄하였는 데도 증선이 돌아간 뒤에 요동의 군민은 농사지어 수확하는 이익을 탐내어 집을 짓고 함부로 농사를 지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胡 御 史 가 각종 범인들을 죄의 경중에 따라 차등을 두어 엄하게 다스려서 협강의 군민들이 경계할 줄을 알고 있으나, 호어사가 임기가 끝나 북경으로 돌아간 뒤에 금하는 것이 해이해지면 틀림없 이 전처럼 와서 경작을 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97) 1542년(중종37) 윤5월에도 영의정 윤은보 등이 아뢰길, 夾 江 에 불법으로 거주하는 중국인은 胡 御 史 가 자세하게 조치하여 이미 탕참에 엄히 경계를 내리고, 또 우리나라 에도 通 諭 하여 양쪽에서 금한 이후로는 중국인이 함부로 경작하는 일은 이미 없어진 듯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불법으로 협강의 땅을 경작하지는 않지만 강을 따라 수많은 가호가 살고 있는 것은 옛날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고을과 아주 가까워 아무리 서로 통하는 것을 금하더라도 關 門 이나 城 塹 이 없는 한 막기가 어려운 형세입니다. 더군다나 이익을 좇아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奸 民 들의 常 情 이 어서 틈만 있으면 법을 어기고 몰래 통하기 때문에 금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이 일 은 나라의 큰 걱정인데 선처할 계책이 없습니다. 라고 논하고 있다. 98) 다음 달인 6월에도 평안도 관찰사 민제인이 書 狀 에서 아뢰길, 압록강에서 중국인들 96) 중종실록 35년(1540) 12월 17일(갑술) 3번째 기사. 97) 중종실록 36년(1541) 11월 6일(무자) 2번째 기사. 98) 중종실록 37년(1542) 윤5월 11일(경신) 1번째 기사.
32 24 - 이 예전과 똑같이 어렵행위를 자행하고 있으며, 馬 山 이하에서 麟 山 蘭 子 島, 西 江 위 화도 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闊 洞 앞 三 岐 水 口 乾 川 등의 堡 에도 오지 않는 곳 이 없으며 더러는 이쪽 편에 와 정박하는 등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다고 고발하고 있 다. 이에 윤은보 등이 아뢰길, 압록강 건너편에 사는 중국인들이 전에 금법을 어기고 고기를 잡는 폐단이 만연되어 일찍이 통사를 보내 湯 站 에 고하였는데도 아직까지 그 치지 않고 더욱 함부로 어기고 있습니다. 심지어 강가에 정박하여 고기를 잡으며 조 금도 꺼리지 않고, 항상 우리 백성들과 섞여 살아서 사건이 야기될 것은 뻔한 형세이 므로 매우 염려됩니다. 별다른 금지책은 없고, 평안 감사가 아뢴 바에 의해, 일을 잘 처리하고 중국말에 능통한 통사를 다시 보내어 전처럼 胡 御 史 의 禁 革 申 令 公 事 를 가 지고 가 탕참 守 堡 官 에게 고하여 엄금하기를 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고 하고 있 다. 99) 1587년(선조20)에도 의주 강변의 威 化 島 에 중국인들이 와서 馬 耳 山 에서 이주하여 와 농사를 짓고 있었으므로 역관을 차견하여 遼 鎭 巡 按 使 에게 이에 대해 爭 辨 하고 禁 牌 를 내어 법령대로 몰아내게 하였다. 고 있는 것으로 보아 끊임없이 상황이 재발되 었던 듯이 보인다. 100) 8. 맺음말 조선 후기엔 사신에 대한 八 包 에 이어 瀋 陽 팔포라고 하여 또 하나의 私 무역을 허락 하고 있었다. 즉 1665년 조선 사행이 심양을 거쳐 赴 京 하도록 되자 심양교역으로 심 양팔포를 이용한 사무역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101) 林 下 筆 記 제19권의 文 獻 指 掌 編 - 八 包 大 商 에 보면 심양팔포의 성립에 대해 영종(영조) 4년 이광좌가 경연 석상 에서 다음처럼 밝히고 있다 즉 원래 중국과의 관계로 關 西 지방의 재정이 쇠잔해 있었 는데 義 州 가 더욱 그러했었다. 그런데 근간에 칙사의 행차가 1년에 5, 6차에 이르기 까지 하는 바람에 그 접대로 더욱 힘들어하자, 정부에서 심양의 八 包 大 商 여섯 자리 를 정해서 의주에 주고, 평안 감영과 평안 병영, 松 都 에 각기 두 자리씩을 주게 되었 다. 그렇다면 부경사행의 팔포무역이 實 職 을 주지 못하는 역관에 대한 보상이듯이, 심 양팔포는 칙사 접대 등 事 大 외교에 무거운 의무가 지워진 義 州 府 등의 관서지역 官 99) 중종실록 37년(1542) 6월 16일(을미) 3번째 기사, 6월 18일(정유) 1번째 기사. 100) 선조수정실록 20년(1587) 1월 1일(경인) 2번째 기사. 101) 이철성, 조선후기 무역상인과 정부의 밀무역 대책 - 사행무역을 중심으로, 사총 58, 2004, 57쪽.
33 25 - 府 에 대한 보상조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으로 연결되는 관문인 의주부의 재정은 무역과 몹시 밀접한 입장에 놓 여있었던 듯하다. 1718년 義 州 府 尹 이성조는 정부에 호소하여, 本 府 에는 달리 財 貨 를 생산할 길이 없고 다만 銀 貨 를 교환하여 利 殖 을 내므로 公 私 모두 이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팔포로 수를 정한 뒤에는 稅 를 거둘 수 없고, 柵 門 貿 易 및 中 江 後 市 도 단절되어 官 用 경비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義 州 의 백성들은 태반 이 장사치로서 매매의 길이 단절된 뒤에는 대부분 생활이 절박합니다. 비록 潛 商 이 나라에서 금하는 것임은 알고 있으나 달리 생활할 길이 없으니 번번이 법을 犯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고 있다. 102) 이러한 의주였기 때문에 1725년에도, 齎 咨 官 과 譯 官 이 사사로이 常 人 을 데리고 가면서 銀 貨 가 매우 낭자하였다고 하니, 이것도 또한 의주에서 수색하여 검거하는 것 이 엄격치 못한 소치입니다. 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듯이, 재정의 중요 부분을 상업세에 의존하고 있던 의주로서는 잠상이 행해지는 것을 알면서도 금 지하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103) * 참고문헌 구도영, 16세기 對 明 私 貿 易 의 정책 방향과 굴레 - 中 宗 代 明 의 조선사행단 출입제한 조치 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62, 구도영, 中 宗 代 對 明 외교의 추이와 정치적 의도, 조선시대사학보 54, 구도영, 조선 전기 對 明 陸 路 使 行 의 형태와 실상, 진단학보 117, 구도영, 조선초기 대명 무역체제의 성립과 운영, 사학연구 109, 권내현, 조선후기 평안도 재정연구, 지식산업사, 권내현,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평안도에서의 淸 使 접대와 재정 운영, 역사와현 실 43, 권내현,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평안도의 대청사행 지원, 조선시대사학보 25, 권내현,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평안도의 대청사행 지원과 무역수세,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사총 56, 권내현, 조선후기 호조의 평안도 재정 활용,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동양학 102) 비변사등록 숙종 44년 윤8월 6일. 103) 영조실록 1년 10월 16일(경진). 김동철, 19세기 牛 皮 무역과 東 萊 商 人, 한국문화연 구 6, 1993, 408쪽.
34 26-35, 권내현, 17세기 전반 평안도의 군량 운영, 조선시대사학보 20, 김경록, 朝 鮮 初 期 對 明 外 交 와 外 交 節 次, 한국사론 44, 김송희, 조선초기 대명외교에 대한 일연구 -대명사신과 명사신 영접관의 성격을 중 심으로-, 사학연구 55 56, 김순남, 15세기 중반~16세기 조선 북방 軍 役 의 폐단과 軍 額 감소, 朝 鮮 時 代 史 學 報 61, 남의현, 고지도를 통해서 본 15~17세기의 변경지대 압록강 두만강을 중심으로-, 만주연구 14, 노영구,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內 地 거점방어체계, 한국문화 34, 박범, 17~18세기 의주부의 경제상황과 재정 운영의 변화, 조선시대사학보 58, 박범, 조선후기 義 州 府 의 田 政 운영과 防 稅 給 代, 한국사학보 50, 박성주, 朝 鮮 前 期 對 明 御 前 通 事, 경주사학 29, 서인범, 압록강 하구 연안 도서를 둘러싼 조 명 영토분쟁, 명청사연구 26, 서인범, 조선시대 승려들의 압록강 越 境 事 件, 한국사상과 문화 54, 양태진, 국경하천이 된 압록강 양태진, 압록강 국경 하천론 유재춘, 15세기 전후 조선의 북변 兩 江 지대 인식과 영토문제, 조선시대사학보 39, 유재춘, 중 근세 韓 中 間 국경완충지대의 형성과 경계인식, 한일관계사연구 39, 이철성, 17 세기 평안도 강변 7읍 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 13, 임성수, 18세기 평안도 鎭 堡 재정의 운영과 변화, 한국사학보 46, 장희흥, 朝 鮮 時 代 對 明 使 行 의 接 待 와 護 送 軍 - 義 州 民 의 生 活 을 中 心 으로, 백산 학보 75, 정인식, 17 18세기 평안도 良 役 制 의 변천, 한국문화 27, 차문섭, 중종조의 정로위,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 출판부, 1973.
35 27 - 토 론 문 조선의 對 明 관계와 義 州 사람들 이상규(한국학중앙연구원) 1. 논문의 의의 그 동안 17세기 이후에 연구가 집중되었던 경향에서 벗어나 15~16세기에 義 州 府 가 처한 환경 그리고 그곳 부민이 담당한 사신 왕래에 따른 잡역을 부담하면서도 활로를 찾기 위해 사행 무역에 집착하고 三 島 耕 作 에 주력했다는 점을 밝혔다. 사대관계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명나라 사신단이 머물다가 갔으며 명 사자를 응대하기 위해 도성 에서 파견된 조선의 접반사 일행이 이 곳으로 나왔다. 조선에서 명나라로 보내는 조 천사도 역시 의주를 거쳐가면서 이 곳에 일정 부분 부담이 지워졌다. 사행 무역에 종 사하는 의주민 그리고 범월해서 압록강 하류의 三 島 를 경작하려고 했던 의주민, 압록 강을 넘어오는 여진족의 침입... 이것 이외에도 15-16세기의 의주부 또는 의주 백성 들의 사정을 밝히기 위해서는 지면이 더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발표자께서 복잡 하고 사건이 많은 것을 대체를 잡아 분석한 공로는 크다고 본다. 또한 15~16세기 대명관계의 핵심 사안이 宗 系 辨 誣 에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 실이다. 이 논고에서 그런 사안 말고도, 삼도 경작 건이 15세기에는 의주를 비롯한 압록강 일대의 읍민들이 적극성을 보였는데 중종대 이후 역전 현상이 뚜렷해져 마침 내 명나라 쪽에서 압록강 일대로까지 침범해오는 형국이 되었다는 점을 구명한 것도 참신해 보인다. 이 방면에 문외한인데도 토론을 맡게 된 것은 조선시대 대외관계를 다각적으로 비 교해서 살펴보고자 한 학회의 고려인 것으로 여겨진다. 원고의 내용을 뛰어넘어 눈에 드러난 점만으로 의견 개진하는 것을 널리 혜량하기 바란다. 2. 목차를 내용에 맞게 고치는 것
36 28 - 내용을 종관하면서 정리했기 때문에 목차를 간략하게 할 필요성이 있다. 외형상으 로 명나라 사자가 왔을 때에 의주가 부담한 비용(역), 조천사가 의주를 거쳐갈 때 주 어진 부담, 의주 백성들에게 주어진 부담으로 나눠질 듯한데, 이것을 내용적으로 긴밀 하게 엮을 수는 없을까. 주로 三 島 에 국한되었지만 압록강 너머의 경작지로서 잇점이 있었고 조정에서도 백 성의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방비도 담당하면서 경작을 지원하는 방침이었다가 명 내부의 눈치로 보고 괜한 어려움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하여 소극적으로 나왔고 나중 에는 의주 너머 요동 지역에 인구가 늘면서 저쪽에서 오히려 조선 국경으로 좁혀오기 까지 추세의 변화를 요령있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윤문하듯이 숨겨진 흐름을 드러내면서 가지런히 하면 될 듯하고 보완하라는 의미는 아님] 3. 입체적인 이해를 위해서 지도를 활용하는 것 발표문에 평안도 지명이 많이 나오고 압록강 너머의 명나라 쪽 지명도 나온다. 의 주부 관내의 圓 直 島 從 達 島, 의주 軍 民 이 압록강을 건너서 경작했던 於 赤 島 今 音 同 島 威 化 島 의 삼도, 兀 良 哈 의 본거지와 그들이 월강하는 지역 등이 나온다. 지도로 보 여준다면 내용 파악이 확연히 될 것이다. 곁들여, 1572년에 명나라 사자가 의주에 왔 을 때 그려진 義 順 館 迎 詔 圖 가 있다. 이런 그림도 의주의 사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자료임. 4. 의견 개진 1) 2번 발표는 조선전기 대여진관계와 경성 경원 사람들 이다. 이 발표와 관련하여 연관적으로 고려할 점은 없는지 궁금하다. 특히 중종대에 三 島 를 의주 사람들이 경작 하려고 했던 방향에서 정반대로 중국쪽에서 의주쪽으로 좁혀오는 역전 현상은 뭔가 2 번 주제와 관련하여 요동 지역의 여진 동향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문제라고 본다. 2) 11~12쪽에 나오는 유자광의 소장을 본격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함. 15 세기까지 압록강 너머의 삼도 경작에 지역민들이 적극성을 보인 것에 중앙 정부가 호 응했는데 성종대 이후 명의 눈치를 보거나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으려 한 것으로 기조가 바뀐 이유를 면밀하게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을 위해서는 조천사의 기
37 29 - 록이나 중국측 자료를 추가해서 강조할 수는 없을까. 명 내부의 실정은 어떠했는지도 궁금한데, 이러한 궁금증을 답해줄 다른 자료가 있다면? 곁들여서 조용조용하게 해결 하는 방식으로 갈려고 하는 조선 조정의 방향은 고식적인 대응이라고 봐야 할지 아니 면 다른 외부적인 요인이 있었는지? 또는 종계변무와 같은 큰 사안에 눌려 그보다 작 은 사안은 덜 목소리를 냈는지? 3) 맺음말에 쓴 내용은 17세기 이후의 사정 변화를 일부분 쓴 것인데, 이것보다는 본문에서 다룬 내용의 의미적 관계를 짚어주는 것이 어떨까 한다. 선조대부터 建 州 衛 女 眞 의 세력이 커지기 때문에 17세기 이후와는 뚜렷한 구별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한 다. 오히려, 15~16세기의 조명관계에서 종계 변무 가 핵심 사안이었는데 이것과는 삼 도 경작의 추이가 어떠한 비중으로 놓일지를 써 주는 것이 어떨지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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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31 - 제2주제: 조선의 對 女 眞 關 係 와 6 鎭 지역 사람들 한성주(강원대) 목차 1. 머리말 2. 번리 구축과 대여진관계의 특징 3. 6진 지역의 조선인들 4. 6진 지역의 여진인들 5. 맺음말 1. 머리말 조선의 대여진관계는 조선의 건국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을 건국한 이성계의 세력기반은 동북면이었는데, 동북면에는 고려유민과 여진인들이 혼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려말에 이성계를 따라 從 軍 하였으며, 조선 건국 후 태조 는 자신에게 종군하였던 여진인들에 대한 만호 천호 등의 관직을 수여하는 등의 포상 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들을 편맹, 즉 조선의 백성으로 여겼으며 조선의 경계를 두만강까지 확대시켰다. 그러나 태종대에 明 의 적극적인 여진 초무로 인한 두만강 유역 11처 여진인의 귀 속 문제가 발생하면서 조선과 명의 외교전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이 명에 복속한 여진인들에 대해 무역소를 폐쇄하자, 여진인들의 조선 변경 침입이 시작되었 고, 여진의 침입은 조선의 여진 정벌을 불러왔다. 정벌에 대한 여진인들의 보복 침입 이 격하되어 조선은 경원부를 鏡 城 으로 옮겼는데, 이것은 사실상 행정과 군사 방어선 의 후퇴였다.
40 32 - 세종대 이만주의 건주위는 압록강 유역으로, 동맹가첩목아의 건주좌위는 두만강 유역으로 이동해 옴으로써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조선의 여진관계가 압록 강 유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압록강 유역 이만주의 건주위에 대해서는 여연이 여진 인들로부터 침입을 받은 것을 계기로 두 차례의 정벌을 실시하면서 4군을 설치하였 고, 두만강 유역 동맹가첩목아가 여진인들의 침입에 의해 패망하자 6진을 설치하였 다. 4군과 6진의 설치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조선의 영토를 확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 <4군과 6진> 세조대가 되면 방어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4군은 폐지되지만, 6진 지역은 지속적으 로 유지되었다. 4군 지역은 압록강 중상류 지역에 삼각형처럼 돌출되어 여러 방면에 서 여진인들의 침입을 받을 수 있는 불리한 위치였고, 척박한 환경 때문에 조선인이 나 여진인들이 거주하기 쉽지 않았다. 6진 지역은 두만강으로 둘러쌓여 있었지만 강 의 중하류 지역의 어느 정도 비옥한 토지 때문에 조선인과 여진인들의 거주도 4군 지 역에 비해 용이하였으며 집중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 여진인들의 분포 역시 이러한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1) 그렇지만 조선의 4군의 폐지가 영토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 은 아니었다. 4군 지역에 들어와 거주하려던 여진인들을 구축하여 강 밖으로 쫓아 보 내려는 시도가 지속된 것은 이를 잘 대변해 준다. 2) 세조대와 성종대에도 각각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에 대한 정벌이 이 루어졌는데, 이 중 압록강 유역의 건주위에 대한 정벌은 명의 요청을 받아 조선과 명 의 협공으로 이루어졌다. 3) 그리고 연산군대 여진인들의 위원 침입에 따라 귀화인 동 1) 김구진, 麗 末 鮮 初 豆 滿 江 流 域 의 女 眞 分 布, 백산학보 15, ) 김순남, 조선 中 宗 代 의 북방 野 人 驅 逐, 조선시대사학보 54, ) 한성주, 세조대(1467년) 朝 鮮 과 明 의 建 州 女 眞 협공에 대한 연구, 한일관계사학회 45,
41 33 - 청례를 건주삼위에 파견하기도 하였고, 명종대에에는 두만강 이북 지역인 이응거도에 자모진을 설치하는 문제를 시작으로 여진의 서수라보 침입, 조선의 초관 정토, 여진의 조산보 재침입 등의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4) 한편 선조대에는 임진왜란 전에 조 선의 번호였던 니탕개의 반란이 있었으며, 임진왜란 전후로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의 반란을 정토라는 형식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 여진관계는 시기적으로, 공간적으로 다양한 양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공간적으로 살펴보면, 두 지역에 대한 조선의 정책 과 여진과의 관계가 대비되는 부분들이 있다. 특히 가장 특징적인 점은 압록강 유역 은 번호가 형성되지 못한 반면 두만강 유역은 조선의 번호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조선의 대여진관계의 특징을 두만강 유역의 번호 형성과 조선의 정책에 맞추어서 살펴보고, 조선의 번호가 형성되었던 6진지역의 조선인들과 여진인의 모습 들을 단편적이지만 살펴보고자 한다. 2. 번리 구축과 대여진관계의 특징 고려시대에는 서북면 및 압록강 유역의 여진인들을 서여진, 동북면 및 두만강 유 역의 여진인들을 동여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서여진, 동여진 중 고려에 내조하여 복 속한 여진인들을 西 蕃 과 東 蕃 이라고 하였다. 蕃 은 藩 과 혼용되어 써 왔으며, 중국에 서 藩 은 天 子 의 藩 屛 이라 뜻이다. 고려시대 여진에 대한 번 인식은 여진의 내조 내헌 과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여진의 내조에는 관직을 주는 賜 爵 이 이루어지면서 의례적 인 측면에서는 천자와 봉신의 관계의 형식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5) 따라서 고려 시대 여진에 대해 번병이라고 인식하던 지역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말 조선초가 되면 조선의 번병 인식의 대상이 두만강 유역으로 한정되 고 있다. 두만강 유역 여진인들에 대한 조선의 번 인식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세 력 기반이 두만강 유역이라는 것에 영향을 받은 것도 있겠지만, 이것은 이 지역의 번 병 인식에 대한 하나의 배경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조선의 번 인식이 두만강 유역 으로 한정된 것은 무엇보다 대외적인 문제, 즉 압록강 유역에서는 명과의 마찰이 일 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요동의 여진 문제를 둘러싸고 ) 한성주, 조선 연산군대 童 淸 禮 의 建 州 三 衛 파견에 대하여, 만주연구 14, 2012; 조선 명종대 豆 滿 江 以 北 지역에 대한 鎭 설치 시도- 伊 應 巨 島 의 子 母 鎭 설치와 女 眞 과의 분쟁 을 중심으로, 한일관계사학회 42, ) 추명엽, 고려전기 번( 蕃 ) 인식과 동 서번 의 형성, 역사와 현실 43, 2002, 21~36쪽.
42 34 - 명과의 마찰이 있어왔는데, 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여진인들은 두만강 유역보다 압록강 유역의 여진인들이었다. 고려와 조선의 영역은 이미 압록강 중하류 지역에 미 치고 있었지만, 압록강을 넘어 그 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인들에 대해 조선의 번병을 구축하는 일은 태조대에도 그 이후에도 명과의 외교적 마찰이 일어날 소지를 항상 가 지고 있었다. 두만강 유역에 대해서는 公 險 鎭 이남이 고려의 境 內 라는 인식과 이성계의 세력기 반, 즉 祖 宗 舊 地 라는 인식이 더해져서 이 지역에 대한 번 인식이 계승되어 왔다. 고 려말인 공양왕 때 공험진은 本 國 의 경내라고 하면서 그 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인들을 초유하여 귀부하도록 하고 있으며, 6) 조선 건국 후 두만강을 경계로 삼았다고 하면서 도 江 外 의 여진인들이 조선에 내조하고, 시위하고, 관직을 받고, 邊 將 에게 爭 訟 하여 판결을 받는 등 우리나라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하고 있다. 7) 태종대가 되면 두만강 유역에 대한 번 인식은 藩 籬 로 지칭되면서 보다 구체화되 기 시작한다. 특히 명에서 성조 영락제가 즉위하고 적극적인 대외확장정책 아래 두만 강 유역의 여진인들에 대한 초무를 실시하자 11처 여진 추장과 인민의 귀속문제가 발 생하였다. 11처 중 3개 지역은 두만강 바깥지역이지만 9개 지역은 조선의 동북면에 해당되었다. 8) 당시 동북면에 조선인과 여진인 혼재되어 있는 상황에서 명의 11처에 대한 여진 초무를 그대로 인정하면 조선의 영역이 축소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 다. 왜냐하면 명에서는 地 面, 즉 땅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여진 추장의 명 입조와 복 속을 바라는 것이었지만, 영토를 구성하는 핵심인 인민의 귀속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음에 틀림없다. 태종은 역시 공험진 이남이 옛 고려의 땅임과 이성계의 세력 기반임을 주장하여 11처 인민의 귀속을 허락받았지만, 명의 거듭된 초무 앞에 두만강 유역의 여진 추장 들의 명 입조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특히 태종은 알타리족의 대추장 동맹가첩목아를 동북면의 번리라고 지칭하면서, 9) 그의 초무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동맹가첩목아는 조 선을 배신하고 명에 입조하였다. 이후 태종대 이루어진 여진 정벌은 올적합의 침입으 로 경원부에서 兵 馬 使 韓 興 寶 가 피살된 것이 원인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을 배 반하고 명에 입조한 두만강유역의 올량합과 알타리에 대한 응징이 되어 버렸다. 세종대 6진의 설치 과정도 번리 및 조종구지 인식이 바탕이 되고 있다. 세종 역시 동맹가첩목아가 조선의 번리라고 인식하였고, 동맹가첩목아가 패망하게 되자 그 땅에 鎭 을 설치하면서 원래 조종의 땅에 진을 설치하는 것은 당연한 것임을 천명하였다. 6) 고려사 권46, 세가46, 공양왕 4년 3월 경자. 7) 태조실록 권8, 4년 12월 계묘. 8) 한성주, 朝 鮮 前 期 豆 滿 江 流 域 에 나타나는 두 개의 朝 鮮, 명청사연구 37, 2012, 251 쪽. 9) 태종실록 권9, 5년 3월 기유.
43 35 - 그리고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들에게 조선의 번리가 되면 彼 我 가 서로 큰 이익임을 강 조하면서 여진인들이 동요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면서 6진을 방어하는 번리가 되도록 하는 번리구축정책을 추진하였다. 10) 조선은 명을 이용한 외교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회유책 및 강경책으로 6진에 묶어 두려고 하였고, 심처 올적합의 침입을 막아주고 보 호하였으며, 여진인들을 조선에 내조시키고 관직을 수여하였다. 조선은 두만강유역의 여진 번리화를 통해 여진인들과 정치 군사적 우위에 기초한 상하관계의 조공관계를 형성하였다. 특히 세종대의 수직정책은 향화여진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에서 6진 설치 후 두만강유역에까지 확대되고 그 수도 급증하였다. 正 朝 와 冬 至 에 집중시킨 여진인 들의 내조와 조공은 의례화 정례화 되어갔으며, 11) 내조와 조공에 대한 반대급부인 관 직의 제수는 두만강유역의 여진번리가 조선에 복속하여 정치사회화 되었음을 의미하 고 있다. 결국 조선의 여진 번리 구축의 결과 여진인들의 조선에 대한 내조와 조공, 조선의 여진인에 대한 관직 수여가 이루어진 성격을 의례적인 측면에서만 한정하여 보면 조공과 책봉이라는 형식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번리 인식을 계승한 세조는 마침내 야인과 왜인은 모두 우리의 번리이고, 모두 우 리의 臣 民 12) 이라고 하고 있으며, 두만강유역에서 서로 반목과 투쟁을 하던 올적합과 올량합 알타리의 화해의 일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女 眞 和 解 事 를 주관한 이유는 여진 인들이 서로 투쟁과 반목 때문에 서로 모여 살게 되면 변경이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 해지는 진다는 것으로 두만강유역의 여진 번리 안정화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13) 또한 세조는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던 낭복아한의 처벌 이후 명과의 외교적 마찰 속에서도 낭복아한은 隣 境 의 사람이 아니라 조선의 편맹과 다름이 없다는 주장을 굽 히지 않았다. 당시 두만강유역에 왔던 명 사신 馬 鑑 역시 野 人 가운데 城 底 에 사는 자들은 곧 귀국의 번리 라고 하고 있다. 14) 이후 낭복아한 일족의 거듭된 보복 침입에 북정을 단행하여 두만강 유역에 대한 명의 간섭이 불필요한 것임을 각인시키고 조선 의 영향력 및 국위를 과시함으로써 여진인들의 이탈을 막고 조선에 대한 복속을 강화 시켜 나갔다. 성종대인 1491년(성종 22)의 이른바 辛 亥 北 征 은 올적합의 造 山 堡 침입과 慶 興 府 使 羅 嗣 宗 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지만, 당시 올적합의 침입은 두만강 유역의 번리인 10) 한성주, 조선전기 수직여진인 연구, 경인문화사, 2011, 184~194쪽. 11) 박정민, 朝 鮮 時 代 女 眞 人 來 朝 硏 究,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박정민의 연구 결과 조선시대 여진인의 내조의 전체적인 현황과 시기별 검토가 이루어졌는데, 여진인의 내조가 正 朝 와 冬 至 에 집중되었음이 실증적으로 밝혀졌다. 12) 세조실록 권8, 3년 7월 경인. 13) 한성주, 조선 세조대 女 眞 和 解 事 에 대한 연구- 申 叔 舟 의 파견을 중심으로, 동북아역 사논총 38, ) 세조실록 권21, 6년 8월 병진.
44 36 - 알타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2만 4천명이라는 대규모의 군사 정벌에 비해 올적합 이 도망하여 숨었기 때문에 전공을 이룬 것은 거의 없었지만 두만강 유역의 알타리를 비롯한 여진 번리에 대해서 조선의 군사적 위세를 드러내어 이들의 조선 복속을 심화 시켰다. 15) 명종대의 草 串 征 伐 은 골간올적합의 서수라보 침입에 그 원인이 있었지만, 사실 서 수라보 침입을 유발한 것은 두만강 이북 지역인 이응거도에 조선이 자모진을 설치하 여 여진인들을 쫓아버린 것에 있었다. 번리들은 이제 藩 胡 로 지칭되고 있었는데, 조 선이 두만강 이북 지역에 진을 설치하더라도 번호가 조선을 침입한 것뿐만 아니라 이 후 아무런 변명이나 사죄가 없는 것은 조선의 국위를 손상시킨 것으로 판단되었다. 조선의 국위 손상은 두만강 유역에 있어 번호들의 통제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는 중 요한 일이었으며, 이에 따라 초관정벌이 이루어졌다. 16) 한편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은 농업생산력의 발전 등 사회경제적 성장과 함께 부락 과 인구가 집중화되고 있었다. 집중화된 번호들은 점차 조선의 질서체제에서 이탈하 려는 경향을 보였는데, 바로 니탕개와 같이 조선의 변경을 약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번호는 6진의 屛 蔽 17), 즉 병풍과 담장으로서 深 處 胡 를 막는 조선의 1차 방어선과 같 았지만, 이제 1차 방어선이 오히려 조선을 침입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은 번호의 이탈을 가속화시켜 번호들의 반란이 지속되었으며, 이에 대해 조 선은 거듭 정토를 시행하여 번호의 복속과 변경의 안정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한편 번호의 반란 원인으로는 조선 변장의 威 虐 이 지적되고 있는데 18), 번호를 보호하고 무 육해야 할 변장과 수령들이 오히려 번호들을 지나치게 貪 虐 하고 있었다. 19) 이렇듯 조선의 대여진정책의 핵심은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번리 구축에 있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압록강 유역으로 여진인들이 새롭게 이주를 청하자, 이들을 번리로 삼는 방안이 모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삼포에서처럼 왜인들이 번성하게 되면 조선 내부의 화근이 될 것이라는 우려와 중국과 가깝다는 이유로 여진 인들의 압록강 유역 이주는 허락하지 않았다. 20) 조선에서는 압록강 유역에 여진인들 이 이주하여 번성하게 되면 번리가 되더라도 조선의 우환이 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었 다. 그렇지만 두만강 유역은 고려말부터 고려 유민과 여진인들이 혼재하던 지역이었 고, 공험진 이남에 대한 영토의식과 더불어 이성계의 세력기반으로서 압록강 유역과 비교할 수 없는 정치적 영토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세종대 6진의 설치로 행정적 군 15) 김순남, 조선 成 宗 代 兀 賊 哈 에 대하여, 조선시대사학보 49, ) 한성주, 앞의 논문, 한일관계사학회 42, ) 선조실록 권17, 16년 2월 계사. 18) 선조실록 권17, 16년 2월 정유. 19) 선조실록 권55, 27년 9월 기축; 신묘. 20) 성종실록 권154, 14년 5월 신축; 권209, 18년 11월 임자.
45 37 - 사적 경계선이 두만강 유역까지 확대되었지만 이 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인을 驅 逐 하여 江 外 로 모두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진인들을 모두 구축하는 것은 현실적 으로 불가능하였으며, 그들을 구축할 경우 오히려 땅을 뺏긴 여진인들과의 분쟁 속에 서 변경의 안정화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조선은 6진 성 밑에 여진인들의 거 주를 허용하여 城 底 野 人 이라 지칭하고, 더불어 두만강 유역 내외에 조선과의 상하관 계를 바탕으로 한 여진 번리 및 번호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두만강 유역을 중 심으로 한 조선의 대여진관계의 특징은 여진 번리를 구축함으로써 조선인들과 여진인 들이 공존하는 평화적인 변경과 공간을 형성하려고 했다는 점에 있다. 3. 6진 지역의 조선인들 조선의 6진 설치로 두만강 유역의 5 鎭 城 밑에는 城 底 野 人 이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6진 주변과 두만강 유역 내외에 흩어져 있던 조선의 번리였다. 조선은 조선인 들과 여진인들이 공존하는 평화적인 변경과 공간을 구상했겠지만, 조선인들과 여진인 들의 혼거는 결코 평화적이지만은 않았다. 우선 조선은 태종대에 여진인들의 침입으로 경원부를 鏡 城 으로 이동시킨 결과, 조 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두만강 유역은 여진인들에 의해 점거된 상황이었다. 21) 따라서 세종대 6진을 설치하면서 방어를 위해 새로운 木 柵 과 城 을 쌓고 군사를 파견 하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이주시켜 변경을 충실하게 할 필요성이 있었다. 백성을 이주시키는 徙 民 은 두만강 유역에는 북청 이북과 길주 경성 등지의 사람들 로, 북청 길주 경성에는 그 이남 지역인 고원 영흥 문천 안변 등지의 사람들로 옮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22) 강원도 및 하삼도의 백성들도 동원되었다. 그러나 백성들 은 사민에 대해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23) 향리 등이 토호들과 결탁하여 富 戶 는 숨겨 빠뜨리고 殘 戶 만을 뽑아 정하는 등의 폐단도 발생하였다. 24) 세종실록 지리지 를 보면 6진 지역의 戶 口 와 軍 丁 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사민의 결과였고, 다음 <표 1>과 같다. <표 1>을 보면, 경원에는 1,162호, 5,271명, 회령에는 624호, 2,157명, 종성에는 900호, 21,815명, 온성에는 800호, 3,637명, 경흥에는 402호, 5,058명, 부령에는 262 호, 2,294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6진 전체의 인구는 4,150호, 40,232명이었다. 6진으 로의 사민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표 1>을 보면 당시 6진으로의 사민이 대규모 21) 세종실록 권62, 15년 12월 경오. 22) 세종실록 권68, 17년 6월 갑진. 23) 세종실록 권62, 15년 12월 경오. 24) 세종실록 권69, 17년 7월 을미.
46 38 - 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표 1> 세종실록 지리지 에 나타난 6진의 戶 口 와 軍 丁 (단위 : 명) 六 鎭 戶 口 軍 丁 甲 士 正 軍 계 비고 경원 1,162 5, 회령 624 2, 종성 , 온성 800 3, 경흥 402 5, 갑사 90명은 船 軍 부령 262 2,294?? 262 翼 屬 甲 士 와 正 軍 을 함께 표시 합계 4,150 40,232 3,593 6진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새로 토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면서도 끊임없이 여진 인들의 침입을 경계해야 했고, 여진인들의 주된 침입 경로가 되는 곳에서는 농기구와 병장기를 휴대한 채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인들은 여진인들의 침입이 있으 면 농사를 짓다가도 城 으로 피신하여 군사들과 함께 여진인들의 침입을 막아야만 했 다. 군사들이 五 更 초에 두만강변 일대를 순찰하고 守 護 廳 에 이르렀다가 멀리 망보고 해가 질 때에 들판의 농민들과 鎭 堡 로 철수하는 것을 守 護 라 하였으며, 추수가 끝나 고 두만강이 얼어 여진의 침입이 격화되는 겨울철에는 집을 버려두고 성안으로 들어 갔다가 5월이나 6월이 되어 돌아가는 것을 疊 入 이라고 하였다. 25) 그리고 주민들은 石 城 과 小 堡 을 쌓는 일에도 사역되었는데, 26) 제승방략 에는 경흥 경원 온성 종성 회 령 부령의 6진의 소속 鎭 堡 가 29개로 나타나고, 女 墻 擁 城 曲 城 등의 방어시설을 갖 춘 것으로 되어 있다. 27) 6진에는 모두 이러한 屬 鎭, 즉 소속된 진보가 있어서 주민들 은 속진에서 僉 事 와 萬 戶 에게 부역을 당하고 본진에서도 부역을 당하면서 백성들은 조잔해지고 피폐되어 간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28) 한편 주민들은 良 人 皆 兵 의 원칙에 따라 군역에 종사하여 正 軍 이 되어야만 했다. 정군은 중앙에서 파견된 갑사와 함께 6진을 방어하는 주된 임무를 맡았다. <표 1>에 나타난 6진의 군정은 경원에 갑사가 133명, 정군이 629명으로 총 762명, 회령에 갑 사가 25명, 정군 695명으로 총 720명, 종성에 갑사 12명, 정군 725명으로 총 736명, 온성에 갑사가 25명 정군 686명으로 총 711명, 경흥에 갑사(선군) 90명, 정군 312명 으로 총 402명, 부령에는 익속갑사와 정군 모두 총 262명이 있었는데, 6진 전체의 군 25) 성종실록 권252, 22년 4월 병진; 제승방략 卷 之 2, 軍 務 二 十 九 條. 26) 세종실록 권75, 18년 11월 임진. 27) 제승방략 卷 之 1, 列 鎭 防 禦. 28) 성종실록 권185, 16년 11월 정묘.
47 39 - 정은 3,593명이었다. 즉 1개의 진에 평균 600여 명의 군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표 2>처럼 제승방략 에 나타난 6진의 군사를 보면, 조선 중기에는 지역 의 토병과 함께 남방에서 부방하는 군사가 6진에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토병은 각각 소속 本 鎭 에 소속된 백성들로 한편으로는 농지를 경작하고 한편으로는 여진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29) 경원에는 土 兵 667명, 南 方 赴 防 軍 士 170명, 회령에는 토병 1,002명, 남방부방군사 58명, 종성에는 토병 930명, 남방부방군사 173명, 온성에는 토병 663명, 남방부방군사 136명, 경흥에는 토병 395명, 남방부방군사 87명, 부령에 는 토병 509명, 남방부방군사 794명이 있었으며, 6진 전체로는 토병이 4,166명, 남방 부방군은 794명, 총 4,960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표 2> 제승방략 에 나타난 6진의 군사 (단위 : 개, 명) 六 鎭 所 屬 城 堡 土 兵 南 方 赴 防 軍 士 합계 경원 회령 5 1, ,060 종성 ,103 온성 경흥 부령 합계 29 4, ,960 이렇게 보면 1개의 진에는 평균 830여 명의 군사가 있었으나, 6진에는 총 29개의 성보가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1개의 진보에 평균 170여 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있었 다. 그러나 군사배치가 제일 적었던 경흥진 西 水 羅 堡 의 경우 토착군사와 남방부방군 을 합쳐 42명 밖에는 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30) <표 1, 2>의 정군이나 토병의 경 우 지역 백성이 그 중심이므로, 6진 설치 직후보다 조선 중기에 조선인들이 다소 증 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진인들은 조선 초기부터 정묘호란 이전까지 총 131회에 걸쳐 조선을 침입하였는 데, 31) 이 중 상당수는 두만강 유역의 6진에 해당되었다. 다음은 여진인들이 6진 지역 을 침입했던 몇 가지 사례들이다. 1436년(세종 18)에는 忽 剌 溫 兀 狄 哈 이 회령에 침입 하여 남자와 여자 9명, 말 1필을 노략하였고, 32) 1443년(세종 25)에는 여진의 4백여 기병이 종성부 甫 靑 平 에 들어와 도적질하였는데, 이를 방어하던 조선의 군사 28명, 말 28필이 화살에 맞고 2명이 죽었다. 33) 1460년(세조 6)에는 낭발아한의 아들 阿 比 29) 중종실록 권21, 9년 10월 임인. 30) 제승방략 卷 之 1, 列 鎭 防 禦 西 水 羅 堡. 31) 姜 性 文, 朝 鮮 시대 女 眞 征 伐 에 관한 연구, 군사 18, 1989, 47쪽. 32) 세종실록 권74, 18년 9월 기해.
48 40 - 車 가 諸 種 野 人 1천여 군사를 모아 長 成 을 헐고 들어와 회령성 아래까지 이르기도 하 였고, 8백여 기병이 종성의 水 口 木 寨 을 불태우고 장성으로 난입하여 읍성의 남문 밖 野 人 館 을 불태웠다. 34) 또한 여진인들은 부령의 읍성 아래 虛 水 剌 洞 의 갑사 金 叔 의 농막에도 침입하여 남녀 6명을 사로잡고 소 4두와 말 1필을 노략하였고, 경성의 吾 村 口 子 에도 침입하여 別 差 前 萬 戶 宋 憲 등 6인을 죽이고, 남녀 9명과 소 말 39마리를 잡아갔다. 35) 1491년(성종 22)에도 올적합 1천여 인이 造 山 堡 를 침입하여 군사 3인을 죽이고, 26명을 부상케 했으며, 성 안의 남녀 7명과 말 5필, 소 11마리를 노략하였다. 36) 1552년(명종 7)에는 서수라보가 침입을 받아 사람과 가축 40여가 죽거나 약탈당하였 다. 37) 1583년(선조 16)에는 尼 湯 介 의 침입으로 경원부와 安 遠 堡 가 함락되기까지 하였 는데, 이때 경원진의 성안에 시체가 가득하였고 남녀노소와 소 말 닭 개 및 관청의 물 건들이 모두 약탈당하였다. 38) 1587년(선조 20)에도 녹둔도가 함락되어 戰 士 10여 명 이 죽고, 160여 명과 15필의 말이 被 虜 되었다. 39) 이처럼 여진인들의 주된 약탈 대상 은 조선인들의 牛 馬 및 재산뿐만 아니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주민들과 군인들 은 약탈의 직접적 피해를 겪고 있었다. 이 때문에 6진의 군사들은 當 番 이 되면 다른 鎭 堡 를 지키러 가고, 下 番 이 되면 本 鎭 을 지키느라 갑옷을 벗을 때가 없을 정도였 다. 40) 그러나 조선인들은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면서도 추운 기후에 적응하며 6진의 땅을 개척하며 삶의 터전을 만들어갔다. <표 3>은 세종실록 지리지 에 나타난 6진의 농지 와 관련된 것이다. <표 3>을 보면, 6진의 토지는 경원 회령 온성이 비옥했던 반면 종 성 부령은 박토, 즉 척박하고 메말랐으며, 두만강의 하류였던 경흥은 습하고 저지대여 서 기반이 약하고 안정되어 있지 않았다. 五 鎭 을 설치하던 처음에는 地 力 이 흩어지 33) 세종실록 권101, 25년 9월 갑술. 34) 세조실록 권19, 6년 2월 경술; 병인. 35) 세조실록 권19, 6년 2월 신미. 36) 성종실록 권249, 22년 1월 병신. 37) 명종실록 권13, 7년 7월 정미. 명종실록 의 다른 기사에는 이때 포로로 잡힌 조선인인 150명으로 되어 있다( 명종실록 권15, 8년 12월 신사). 제승방략 에는 80여 명이 사로 잡혀 갔고 5명이 죽었으며, 말 13마리와 소 14마리가 약탈당했다고 하고 있다( 제승방략 卷 之 1, 列 鎭 防 禦 西 水 羅 堡 故 事 ). 서수라보 침입에 대해서는 제승방략 의 내용이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하다. 38) 선조실록 권17, 16년 2월 임진; 제승방략 卷 之 1, 列 鎭 防 禦 慶 源 鎭 故 事. 39) 여진의 녹둔도 침입으로 포로된 사람이 106명( 선조실록 권21, 20년 10월 을축)이라고 하지만 선조실록 의 다른 기사와 제승방략 에는 160여 명으로 되어 있다( 선조실록 권21, 20년 11월 병오; 선조수정실록 권21, 20년 9월 정해; 제승방략 卷 之 1, 列 鎭 防 禦 鹿 屯 島 故 事 ). 선조수정실록 과 제승방략 에는 이때 李 舜 臣 과 李 景 祿 이 여진인들을 추격하여 포로된 사람 50여 명을 빼앗아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40) 성종실록 권192, 17년 6월 계묘.
49 41 - 지 않아 곡식의 농사가 잘 되고 땔감도 부족하지 않고 넉넉하였다 41) 는 것은 아마도 경원 회령 온성 등의 토지가 비옥하였기 때문에 토지를 개간한 처음에는 상당한 성과 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개간한 토지는 대부분 水 田 인 논보다 는 墾 田 인 밭이었다. 墾 田 은 경원 4,096결, 회령 3,853결, 종성 4,347결, 온성 2,970 결, 경흥 2,283결, 부령 2,913결로 총 20,462결이었고, 水 田 은 경원 10결, 회령 12 결, 종성 45결, 온성 9결, 경흥 1결, 부령은 수전이 없었으며, 총 77결이었다. 이를 통해 보면 역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표 3> 세종실록 지리지 에 나타난 6진의 농지 (단위 : 결) 六 鎭 墾 田 水 田 비고 경원 4, 厥 土 肥 회령 3, 厥 土 肥 多 塉 少 종성 4, 厥 土 肥 少 塉 多 온성 2,970 9 厥 土 肥 경흥 2,283 1 厥 土 沮 洳 浮 虛 부령 2,913 0 厥 土 塉 합계 20,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경흥은 土 沮 洳 浮 虛 라는 말처럼 낮고 습한 지역이어서 자 주 水 害 를 입고 있었다. 또한 水 災 뿐만 아니라 旱 災, 심지어는 風 災 로 軍 民 이 다 떠 도는 실정이라 鎭 을 포기하고 읍을 폐할 지경이었고, 다시 사민을 해야 할 정도였으 며, 42) 경흥진 및 관할 보 등 강에 인접한 田 地 가 큰 비만 내리면 침수되어 여진인이 나 조선인들이 모두 굶주림에 처하기도 하였다. 43) 즉 매년 고질적인 수해를 겪어 주 민들의 굶주림이 심하였으며, 44) 두만강 하류에 위치했기 때문에 토사가 밀려와 녹둔 도가 이후 육지가 된 것처럼 들판이 없어지기도 하는 등의 지형의 변화도 있어서 45) 조선인들의 생활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렇듯 조선인들은 새로운 땅으로의 이주와 척박한 토지 및 기후 환경, 그리고 여 진인들의 침입과 약탈 등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토지를 개간하면서 정착하였지만, 다 른 한편으로는 정부의 과중한 세금 납부와 변장의 탐학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부 령을 제외한 5진은 본래 貢 物 이 없고 神 稅 布 만 바치게 하였지만, 46) 신세포는 神 布 로, 41) 성종실록 권215, 19년 4월 무술. 42) 중종실록 권93, 35년 4월 병인; 권101, 38년 10월 기축. 43) 명종실록 권10, 5년 8월 계해. 44) 명종실록 권13, 7년 5월 병오; 鶴 峯 逸 稿 권3, 北 征 日 錄 경진(1580, 선조 13) 1월 11 일 신해. 45) 경흥의 江 陽 陵 坪 이 수해로 인해 모두 없어지기도 하였다( 退 溪 先 生 文 集 卷 之 6, 敎 咸 鏡 道 巡 察 使 李 浚 慶 書 ).
50 42 - 다른 도에는 없고 강원도 함길도에만 있는 것이었다. 47) 강원도와 함길도는 무속을 숭 상하여 戶 마다 각각 베를 神 幣 로 사용하였는데, 신포는 무당이 나라에 바치는 巫 稅 였 으나 백성에게도 반드시 따로 稅 布 를 마련하여 바치도록 변하여 戶 布 라는 이름으로 호당 1필씩을 걷고 있었다. 48) 호포(신포)는 한 고을의 호를 모두 모아서 한편으로는 관찰사에게, 한편으로는 절 도사에게 상납하였고 官 用 으로 쓰였는데, 실제로는 넷으로 나누어 監 司 兵 使 와 本 邑 이 각각 취하고, 나머지는 곡식을 사서 軍 資 에 보태는 것을 상례로 하고 있었다. 49) 수령들은 신포를 거두면서 가혹하게 하여 이미 죄다 거두고도 또 억지로 추징하는 등 백성들을 침탈하고 있어서, 백성들은 신포 징수에 대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50) 곤궁하고 조폐되어 겨우 살아가는 백성이 꾸어다 먹은 官 倉 의 곡식도 갚지 못하여 流 離 되는 상황에서 신포의 가혹한 징수는 6진 지역의 조선인들에게 상당한 부담이었다. 관리들 또한 관부에서 사사로 쓰이는 물건이며 수령과 감사가 남용하는 것이라는 인 식과 함께 명색이 없는 부세, 그리고 弊 法 이라고 하면서 폐지하거나 감액할 것을 주 장하기도 하였다. 51) 게다가 5진의 軍 戶 는 鹽 盆 에서 순번대로 소금을 고아서 일정한 수량을 납부하는 데, 그 수량을 채우지 못하면 수령들이 엄중하게 독촉을 가하여 징수하였기 때문에, 소와 말이 모두 죽고 가산이 탕진되어 도망치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었고, 남아 있는 사람도 오래동안 軍 門 에 서기 때문에 농업을 돌보지 못하여 날로 더욱 곤 궁해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52) 조선에서는 각 鎭 의 성안에 사는 사람을 5 統 으로 조직 하고 통에는 장을 두었으며, 매월 월말에 點 閱 하여 1명이 빠지더라도 반드시 통장을 죄주게 하는 五 家 作 統 法 을 시행하였으나 53) 조선인들의 도망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 었다. 한편 6진에서는 수령들이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죄를 결단하지 않고 거의 모두 贖 46) 문종실록 권4, 즉위년 10월 경진. 47) 세종실록 권32, 8년 5월 무오. 咸 鏡 北 道 評 事 였던 柳 沃 은 神 布 가 함경남북도에만 있다 고 하였지만( 중종실록 권29, 12년 9월 을미), 실제로는 淫 祀 를 숭상하여 巫 覡 이 성행하 던 강원도와 함경도에서만 징수하던 것이었다( 중종실록 권20, 9년 2월 을미). 48) 세종실록 권32, 8년 5월 무오; 문종실록 권7, 1년 4월 경진; 중종실록 권6, 3년 8 월 병술. 49) 중종실록 권6, 3년 8월 병술; 권29, 12년 9월 을미. 함경도의 神 布 와 관련해서는 김순 남, 15세기 중반~16세기 조선 북방 軍 役 의 폐단과 軍 額 감소, 조선시대사학보 61, 2012, 참고. 50) 중종실록 권29, 12년 9월 을미. 51) 세종실록 권32, 8년 5월 무오; 문종실록 권7, 1년 4월 경진; 세조실록 권44, 13년 11월 계해; 중종실록 권6, 3년 8월 병술; 권20, 9년 2월 을미; 권26, 11년 9월 병오. 52) 연산군일기 권48, 9년 2월 경술. 53) 중종실록 권8, 4년 7월 경술.
51 43 - 錢 을 징수하고 있었다. 54) 특히 人 吏 軍 士 가 과실이 있으면 贖 을 징수하는 것을 아주 급하게 하였는데, 55) 6진의 백성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神 布 狗 皮 솥[ 鼎 ] 농기구[ 田 器 ]뿐이어서 이것으로 속바치고 나면 군민들이 살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56) 특히 군 졸들이 軍 葬 과 馬 匹 을 팔아서 贖 罪 하는 것은 조선의 군세가 약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57) 심지어는 奉 命 사신이 내려올 때 군사들은 말이 없어서 모두들 성저야인 들의 말을 빌려 타고 軍 容 을 갖추기까지 하였다. 58) 게다가 수령들이 징수하는 것이 한도가 없어서 빈객을 접대하는 비용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개인 비용까지 모두 田 結 에 따른 것이라며 많은 수량을 바치게 하여 가난한 백성들이 모두 바치지는 못하고 형장이 두려워 도망치는 실정이었다. 59) 그리고 수령 과 변장들은 義 倉 에서 곡식을 빌려주고 갚지 못한 戶 에 대하여 강제로 牛 馬 를 취해서 胡 馬 皮 物 과 바꾸어 수령의 本 家 로 보내거나 權 門 勢 家 에게 뇌물을 보내었고, 공납할 貂 鼠 皮 를 면제받아 民 戶 에게 돌려주지 않고 미납한 자를 독촉하여 착복하기까지 하였 다. 60) 더욱 심각한 것은 국가에서 변장들에게 貂 皮 를 재촉하여 바치게 하자 進 上 이라 칭 탁하면서 백성들을 誅 求, 즉 강제로 빼앗았다는 점이다. 61) 세종실록지리지 를 보면 함길도의 여러 부와 군에는 土 貢 이 쓰여 있지만 경원 회령 종성 온성 경흥 부령의 6진 에는 쓰여 있지 않다. 문종 때 5진은 본래 貢 物 이 없고 神 稅 布 만 바치게 하였다는 기 록으로 보아 공물이 지정되어 있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지만 62) 점차 6진에도 초서 피가 공물로 지정되었다. 6진의 초서피 공물 지정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1475년(성종 6)에 5진에서 초피를 바치는 것이 오래되지 않았다는 기록 63) 으로 보아 1465년(세조 11)에 정한 貢 案 에서부터였을 가능성이 크다. 1465년 永 安 道 공안에는 貂 皮 115장, 鼠 皮 250장, 樺 皮 375장을 매년 바치도록 하였으며, 1474년(성종 5)에 는 더 늘어나서 초피 180장, 서치 280장, 화피 725장이었다. 64) 하지만 초서피는 영 안도에서 생산되긴 하지만 많이 얻기가 쉽지 않았고 진상하기에도 부적합했다. 65) 54) 성종실록 권185, 16년 11월 정묘. 55) 세조실록 권43, 13년 7월 갑신. 56) 성종실록 권185, 16년 11월 정묘. 57) 중종실록 권21, 9년 10월 임인. 58) 중종실록 권60, 23년 3월 임진. 59) 중종실록 권21, 9년 10월 임인. 60) 세조실록 권43, 13년 7월 갑신. 61) 성종실록 권40, 5년 3월 임인. 초피를 둘러싼 함경도의 공납 문제, 여진과의 초피 무역 에 대해서는 김순남, 16세기 조선과 野 人 사이의 모피 교역의 전개, 한국사연구 152, 참고 62) 문종실록 권4, 즉위년 10월 경진. 63) 성종실록 권52, 6년 2월 신사. 64) 성종실록 권40, 5년 3월 병술.
52 44 - 결국 조선인들은 공물을 충당할 수 없게 되고 침탈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여 진인들에게 철물로 된 농기구와 가마솥, 農 牛, 말을 주고 초피와 무역하고 있었으며, 점차 皮 物 은 반드시 야인에게서 구하는 실정이어서 여진과의 무역을 금지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다. 66) 또한 초피 1장과 소 1두를 바꾸는 형편이 되자 서울에서부터 商 賈 등이 이익을 도모하려고 北 道 에 구름처럼 모여서 철물과 소를 가지고 通 事 와 결탁 하여 초피 사기를 그치지 않았고, 수령과 鎭 將 들도 백성에게 착취하면서 兩 界 가 시끄 럽다고 할 정도로 북방의 큰 폐단이 되었다. 67) 이에 조선에서는 5진의 초피 공납을 여러 차례 감면하기도 하고, 정지하기도 하고, 초서피의 착용에 제한을 가하기도 했다. 68) 그러나 국가와 민간에서의 초서피의 수요 를 막을 수는 없었으며, 여진과의 무역을 통해 초서피의 공물을 대부분 충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5진에서 공납하던 것을 내지에 옮겨 배정하면, 백성이 폐해를 받을 것 이고 백성에게서 값을 거두어 사서 바치는 것도 그 땅에서 나는 것에 따라 공물로 삼 는 뜻에 어그러진다는 이유로 공안에 따라서 5진의 상납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지 않 고, 그대로 상납하도록 하였다. 69) 조선의 수령들은 초피무역으로 인해 조선의 철물과 농우가 여진인들에게 유출되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였지만, 백성들은 관리들을 피해 밤을 이용하여 소를 끌고 가서 초피와 무역하다가 여진인들에게 사로잡혀 다시 深 處 의 야인들에게 팔리기도 하였 다. 70) 변장들은 공물을 채우지 못하면 죄를 받을까봐 초피와 관련된 이러한 폐단들을 알면서도 금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71) 심지어 변장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조선의 백성들에게서 초피를 강제로 빼 앗는 것을 넘어 여진인들에게도 진상을 빙자하여 초피를 과다하게 거두는가 하면 진 상할 때 그 값을 으레 下 下 品 의 싯가로 쳐서 여진인들의 원망을 사거나 상경을 꺼리 는 일도 발생하였다. 72) 변장들은 여진인들이 진상한 초피를 황색에서 흑색으로 바꾸 거나 수를 감하여 封 進 하기 때문에 여진인들이 올라와서 제값을 받는 일이 매우 적어 65) 성종실록 권40, 5년 3월 병술; 권228, 20년 5월 정해. 66) 성종실록 권52, 6년 2월 신사; 권57, 6년 7월 신유; 연산군일기 권29, 4년 4월 계미; 중종실록 권6, 3년 8월 신사; 권21, 9년 10월 갑인. 67) 성종실록 권40, 5년 3월 병술; 권57, 6년 7월 신유; 갑자; 연산군일기 권29, 4년 4월 계미. 68) 성종실록 권40, 5년 3월 임인; 권52, 6년 2월 신사; 권57, 6년 7월 신유; 갑자; 을축; 권225, 20년 2월 경술; 병진. 69) 성종실록 권225, 20년 2월 병진. 70) 중종실록 권6, 3년 8월 신사. 71) 중종실록 권6, 3년 8월 신사. 72) 중종실록 권57, 21년 11월 무신; 권72, 26년 11월 기미; 12월 신묘. 여진인들이 進 貢 하는 초피는 으레 8장을 바치게 되어 있는데 그 값이 비싸기 때문에 가지고 상경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중종실록 권72, 26년 11월 기미).
53 45 - 억울하게 여겼다. 73) 또한 여진인들이 進 貢 하는 초피는 으레 8장을 바치게 되어 있는 데 그 값이 비싸기 때문에 가지고 상경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여진인들이 변방에 오면 초피를 바치게 하여 誅 求 가 끝이 없으므로 원망이 더욱 증가되어 내조하기를 싫 어하고 침입의 기회만을 노리게 되었다. 74) 6진의 여러 장수들은 여진인들의 선물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예사로 여겼고, 75) 그 것은 대부분 초피였는데, 초피는 다시 재상들에게 뇌물로 바쳐졌다. 변장들이 여진인 들에게 초피를 억지로 팔게 하는 경우도 있어서 여진인들이 원망하고 조선을 배반할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도 문제였다. 76) 이렇듯 변장들은 초피 무역에 직간접적으로 참 여하고 있었고, 초피를 奇 貨 로 여겨 무역에 직접 간여하거나 주도하기도 하였다. 77) 병사 수령 첨사 만호 등이 재상이나 문사들을 위해 초피 수집에 전념하고 있었으며, 평안도 함길도의 소를 초피와 모물을 사는데 모두 써서 백성들은 말을 가지고 밭을 갈거나 소가 하는 일을 사람이 대신할 지경이었다. 78) 이에 북도는 인삼과 초피, 진주 가 생산되기 때문에 수령들이 거의 心 性 이 변한다는 평가까지 나오게 되었고, 79) 마침 내 변장이 초피를 매개로 백성들을 침탈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것을 피해서 오랑캐 의 땅과 중국으로 많이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80) 함경북도 병사를 지냈던 張 弼 武 는 6 鎭 의 兵 民 이 계속 유랑하고 도망가는 것은 貂 皮 를 진상하는 것이 빌미가 되었 다 라고 탄식할 지경이었다. 81) 6진의 변방 백성들은 척박한 환경과 과중한 부역 세금, 그리고 변장의 탐학과 수탈 을 피해 유망하고 있었다. 사민이 재차 고려될 정도로 읍이 텅 비어 있는 경우도 있 었고, 남쪽으로의 도망뿐만 아니라 북쪽의 경계를 넘어 胡 地 로 들어가고 있었다. 특 히 변방 백성들이 서로를 이끌고 오랑캐 땅으로 들어가는 이유 중 하나가 부역이 너 73) 중종실록 권88, 33년 10월 갑자. 穩 城 의 前 府 使 田 鳳 은 瞿 麥 을 통사에게 주어 번호에 게 나누어 주고 1 斗 마다 黑 貂 1 令 을 징수하면서, 관아에 坐 起 할 때 먼저 품질 좋은 貂 皮 를 앞뜰에 걸어놓고 見 樣 대로 責 納 하게 하되, 만약 제때에 납입하지 않으면 번호들을 잡 아다가 엄하게 형장을 가하였다( 선조실록 권55, 27년 9월 신묘). 74) 중종실록 권57, 21년 11월 무신; 권72, 26년 11월 기미; 12월 신묘; 권90, 34년 5월 을해. 75) 성종실록 권188, 17년 2월 무술. 76) 중종실록 권62, 23년 7월 병술; 명종실록 권23, 12년 9월 무진. 77) 중종실록 권13, 6년 2월 정미; 권23, 11년 1월 을유; 권67, 25년 2월 무진. 78) 연산군일기 권60, 11년 10월 갑인; 명종실록 권15, 8년 10월 병신; 권29, 18년 8월 계축. 79) 선조실록 권135, 34년 3월 정사. 80) 명종실록 권4, 1년 11월 기미. 81) 선조수정실록 권8, 7년 9월 임신. 장필무는 무인으로 선조대 咸 鏡 北 道 兵 使 를 지내었고 죽은 재상 가운데서 청렴하고 매사에 조심성이 있는( 廉 謹 ) 사람 7명을 뽑을 때 선정되었 다. 죽은 뒤에 淸 白 吏 에 追 錄 되었고 명종 이후 무신으로서 청렴한 자로는 제일로 꼽았다 ( 선조수정실록 권8, 7년 9월 임신; 권37, 36년 9월 갑인).
54 46 - 무 과중하다는 것이었다. 82) 조선인들은 여진인들의 땅에는 노역이 없고 먹을 것이 넉 넉하다는 소문을 듣고 편안하고자 그곳으로 도망하고 있었다. 83) 한편으로 여진인에게 팔려가거나 잡혀가는 조선인들도 있었는데, 북도사람이 몰래 성저야인에게 사람을 파는 것이 이미 풍습을 이루었고 이에 따라 조선인들이 점차 감 소하고 있었다. 84) 사람을 몰래 파는 사람들은 의뢰할 곳이 없든가 배고픔과 추위가 몸에 사무친 사람들을 교묘한 말로 유혹해 가기도 하고, 나이 어려서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자는 끌거나 엎고 가서 몰래 팔기도 하였다. 85) 다른 한편으로 여진인들이 城 밑 에 살기 때문에 조선인들과 가깝게 살았고 조선인들이 흉년과 추위로 굶주리게 되면 여진인들의 집에 자식을 팔고, 품팔이하며 아침저녁의 공급을 오로지 胡 人 들에게 삶 을 의지하기도 하였다. 86) 또한 비록 사소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왔다 갔다 하 며 사고팔게 되자, 조선인과 여진인의 남녀가 서로 결혼하는 일도 있었고, 조선인들이 호인들을 보면 부모와 다름없이 有 無 를 서로 의뢰하게 되었다. 87) 마침내 6진의 조선인들이 성저야인들과 더불어 收 養 이라고 일컫는 상황이었으 며, 88) 조선인들은 마음속으로 조선 땅에서 고통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진인들 땅 의 사람이 되겠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89) 즉 조선인들은 교묘한 말을 듣고 몰래 여진인들의 땅에 따라가기를 마치 자식이 그 아비의 집에 가듯이 하였고, 고생을 피 하고 편안한 것을 쫓아 몰래 여진인들의 마을로 들어갔다. 90) 결국 조선인들은 여진인 들의 땅은 衣 食 이 유족하여 편히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족속들을 데리고 점차 胡 地 로 들어가고 있었다. 91) 4. 6진 지역의 여진인들 고려말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들은 이성계가 동정서벌할 때 종군하였고, 조선 건국 후에 그 포상으로 만호와 천호의 관직을 받았다. 이후 이성계는 1393년(태조 2)부터 1398년(태조 7)까지 조선의 동북면 일대에 성보를 축조하고, 道 와 州 府 郡 縣 의 명칭 82) 중종실록 권61, 23년 4월 임술. 83) 중종실록 권60, 23년 3월 임진. 84) 중종실록 권8, 4년 7월 경술. 85) 중종실록 권21, 9년 10월 임인. 86) 중종실록 권61, 23년 4월 임술; 권88, 33년 8월 병인. 87) 중종실록 권61, 23년 4월 임술. 88) 중종실록 권12, 5년 8월 병신; 권21, 9년 10월 임인. 89) 중종실록 권61, 23년 4월 임술. 90) 중종실록 권21, 9년 10월 임인. 91) 중종실록 권61, 23년 4월 임술.
55 47 - 을 정하는 한편 그 경계를 나누었으며 조선의 관리를 파견하여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 다. 92) 동북면 一 道 에 李 豆 闌 ( 李 之 蘭 )을 보내 여진을 초안하여 풍속을 교화하고 조선 인들과 혼인하도록 하였으며, 服 役 하고 納 賦 하는 것이 編 戶 와 다름없었고, 여진인들 이 조선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면 읍과 진을 설치하고 관원을 파견하여 두만강까지 조 선의 완전한 版 籍 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93) 한편 두만강 밖에 거주하는 여진인들은 조선에 내조하여 토산물을 진헌하였고, 시 위하기도 하였으며, 관직을 청하거나 강 안쪽의 내지로 옮겨오기도 하였다. 또한 강 근처에 사는 자들은 조선의 三 軍 에 지원하거나 조선의 관청에 와서 爭 訟 하였고 조선 의 법률을 따랐으며 변장의 판결에 따라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94) 태종대에 들어서 明 의 두만강 유역 여진에 대한 초무와 이를 받아들인 여진에 대 해 조선은 무역소를 폐지하였고, 생필품을 구하지 못한 여진인들은 조선을 침입하였 다. 여진의 침입으로 경원에서 병마사 韓 興 寶 가 전사하면서 촉발된 조선의 제1차 여 진정벌은 毛 憐 衛 指 揮 把 兒 遜 등 8지휘를 죽이는 등의 성과가 있었지만 다시 여진의 침입이 격화되어 경원진을 철폐하고 남쪽으로 옮기면서 조선의 군사 행정 지역의 축 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세종대 6진이 설치되면서 조선의 관할은 다시 두만강 유역까지 확대되었으 며, 6진의 설치로 두만강 유역은 조선인과 여진인들이 혼거되는 상황이 되었다. 조선 에서는 두만강 유역에 대해서 祖 宗 舊 地 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원래는 여진인들이 점 거한 땅이어서 6진을 설치하자 성 밑( 城 底 )에서 愁 濱 江 까지 여진인들의 부락이 연이 어 있게 되었다. 95) 그리고 城 에 가깝게 거주하는 여진인들을 城 底 近 居 野 人 으로 부 르다가 이를 줄여 城 底 野 人 으로 지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성저야인들은 동시에 조선의 울타리인 藩 籬 로 지칭되었으며, 번리는 조선 중기가 되면 藩 胡 들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는 두만강 유역 번리에 대해 조선에 歸 附 하여 效 順 한 자들, 대대로 본국 경내에 살아온 자들, 심처에 거주하는 여진인들의 소식을 전하거나 사변을 탐지해서 보고하는 자들, 심처의 여진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면서 적변이 생기면 함께 막아 온 역할을 한 자들이라고 생각하였다. 96) 여진인들은 종족별로 투쟁과 반목이 심했는 데, 알타리 올량합과 올적합 사이가 심해서 서로 원수가 되어 그 고기를 먹고자 할 정도였고, 알타리는 올적합이 침략하는 것 때문에 안심하여 살수 없고 生 業 조차 누릴 92) 태조실록 권4, 2년 8월 을유; 권12, 6년 12월 경자; 권13, 7년 2월 경진; 계사; 3월 정 묘. 93) 태조실록 권8, 4년 12월 계묘. 94) 태조실록 권8, 4년 12월 계묘. 95) 세종실록 권88, 22년 1월 계축. 96) 세종실록 권64, 16년 5월 을사; 권74, 18년 9월 임술; 권84, 21년 3월 임자; 권86, 21 년 9월 기유; 권95, 24년 1월 무자.
56 48 - 수 없었다. 97) 조선에서는 성저야인에 대해서는 심처 올적합의 침입에서 구원하기 위 해 성자와 목책을 설치해 주기도 하고, 토성을 쌓아주기도 하고, 올적합과의 싸움이 있으면 이들을 성원하고 구원하였으며, 올적합에 침략당하여 장성이나 성을 넘어오면 몰아내지 않고 성내에 모아 보전하고 방호하여 주기도 하였다. 98) 여진인들도 변고가 발생하면 조선의 行 城 에 들어오기를 청하였으며, 99) 침략을 당하여 가산이 탕진하였을 경우에는 변장이 친히 가서 위로하고 布 穀 과 소금 등을 넉넉하게 주어 유리하지 않도 록 하였다. 100) 문종대에 내조한 여진인이 우리들이 비록 본래 야인에 속하였지만, 지금은 회령부 성저에 살고 있으므로 平 民 과 다름이 없다 101) 고 한 것처럼 조선에서는 이들을 編 氓 처럼 여겨서 보호하고 구제하여 왔다. 성저야인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항상 불 러서 무마하고, 굶주리거나 失 農 을 하면 먹을 것을 주었고, 그 중 유력자에게는 서울 에 내조하게 하였으며 관직을 주고 봉록 또한 넉넉히 주었다. 102) 또한 성 아래 거주 하는 여진인들이 실농하면 義 倉 의 곡식을 公 債 로서 빌려주고 추수 후에 갚도록 하였 는데, 여진인들이 조선 관청의 곡식을 빌어서 생활을 하는 것이 유래가 오래되었으며, 납부하기를 독촉하지 않더라도 먼저 갚는 것이 例 가 될 정도였다. 103) 한편 저들이 스스로 우리나라를 의지하여 삶을 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라의 번리가 되는 것 104) 이란 말이 대변하듯 6진 지역은 여진인들이 조선으로부터 소금이 나 면포 등 생필품을 얻을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으로부터 각종 의 보호와 혜택을 받는 대신 조선에 役 을 지거나 세금을 낼 필요도 없었다. 실제로 6 진 성저야인이들이 조선에 역을 지거나 세금을 내었다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고, 단 지 조선에 물품을 진상하였을 뿐이며, 물품을 진상하더라도 조선에서는 그 대가를 주 었다. 게다가 두만강 유역은 상대적으로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어서 어느 정도 초 보적인 농경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고, 조선으로부터 발전된 농법과 기술, 농기구 등을 얻을 수 있었다. 실제로 16세기가 되면 두만강 유역의 여진 농경 수준은 원시 농경 단계에서 집약 농경 단계로 이행하고 있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105) 여진인들의 농경 97) 세종실록 권88, 22년 2월 계미; 권95, 24년 2월 임진; 성종실록 권255, 22년 7월 정 해. 98) 세조실록 권15, 5년 1월 갑오; 성종실록 권48, 5년 10월 경인; 임인; 권211 19년 1 월 갑진; 중종실록 권34, 13년 7월 기해; 8월 경오; 명종실록 권9, 4년 10월 계축. 99) 세조실록 권19, 6년 2월 신해. 100) 성종실록 권50, 5년 12월 을사. 101) 문종실록 권1, 즉위년 2월 무술. 102) 연산군일기 권46, 8년 10월 정사; 무오; 중종실록 권91 34년 7월 을해. 103) 연산군일기 권46, 8년 10월 무오. 104) 중종실록 권81, 31년 4월 임인. 105) 김구진 이현숙, 제승방략( 制 勝 方 略 ) 의 북방( 北 方 ) 방어( 防 禦 ) 체제, 국역 제승방략,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48쪽.
57 49 - 화와 발전은 조선과 명에서 약탈해간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의 적극적인 두만강 유역 여진 번리화 정책, 그리고 여진의 사회경제적 발전은 여진인들의 생활을 안정화시켜 인구를 증가시켰다. 다음 <표 4>는 단종실록 3년 3 월 기사조에 나타난 5진 부근에 거주하던 여진인들의 부락, 가구, 장정수와 제승방 략 에 나타난 여진인들의 부락, 戶 의 수를 비교한 것이다. <표 4> 단종실록 과 제승방략 에 나타난 여진인 부락과 가구 (단위 : 개) 5 鎭 단종실록 (1455년, 단종 3) 제승방략 (1588년 증보) 부락 가구 장정(명) 부락 戶 경원 ,393 회령 ,936 종성 ,342 온성 ,614 경흥 합계 , ,523 단종 3년은 1455년이고, 제승방략 이 1588년(선조 21)에 증보된 것이므로, 약 130여 년의 차이가 있다. 1455년의 기록에는 경원의 주된 종족이 올량합 여진으로, 회령은 알타리 올량합으로, 종성은 올량합으로, 온성은 올량합 여진으로, 경흥은 골간 올적합 여진으로 되어 있어 초기에는 여진인들을 알타리 올량합 올적합 여진(토착여진) 으로 구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승방략 에는 이러한 종족의 구분은 보이지 않고 藩 胡 로 통칭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로 간에 혼인하기도 하고 혼거하면서 부락이 통합 집중화되어 종족적인 구분이 더 이상 무의미해졌던 것에 기인한다고 생 각한다. 따라서 종족적인 구분보다는 조선과의 관계에 따라 성 밑에 거주하는 여진인 들을 城 底 野 人, 강내외 邊 報 가까이 살며 무역을 하고 납공하는 자들을 藩 胡, 오 랑캐로서 아직 친부하지 않는 자들을 深 處 胡, 번호로서 조선을 배반한 자들을 叛 胡, 심처호나 번호로서 조선을 침입하는 자들을 賊 胡 로 부르게 되었다. <표 4>를 보면, 130여 년 만에 5진에서의 여진 부락은 53개에서 289개로 5배 이 상, 가구수 또는 호수는 800개에서 8,523개로 10배 이상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특 히 종성과 온성은 다른 지역보다 여진의 부락과 호수가 크게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 다. 특히 종성은 성종때 이미 5진 중 성저야인이 가장 많았는데, 106) <표 1>에서 보듯 조선인들도 6진 중 종성에 가장 많이 살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번리 및 성저야인의 번성에 대해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5진이 두만강으로써 한계를 삼았고 강 밖 106) 성종실록 권201, 18년 3월 경신.
58 50 - 은 여진인들의 땅이며, 비록 성 밑이라도 금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07) 그 러나 중종 때 이미 함경남북도의 軍 額 과 관련해서 本 道 의 軍 民 은 고단하고 약하며, 성저야인들은 그 수가 배도 넘는다 108) 라고 하고 있어 여진의 군사와 인민의 수가 조 선의 인구를 압도하고 있었다. 결국 여진인들의 집중화와 발전으로 여진 군사의 수가 조선의 군사보다 많았고 인구 역시 여진인들이 조선인들보다 더 많게 되었던 것이다. 즉 1455년에는 5진 부근에 여진인 장정이 총 1,982명이 파악되고, 제승방략 에는 장정의 수까지는 파악되어 있지 않아 당시 장정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여진 1호당 최소 1명씩의 장정이 있었다고 본다면 최소 8,523명의 장정이 있었다고 할 수 있고, 가구수 또는 호수가 10배 이상 증가하였으므로 장정 수 역시 10배 이상 증가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있다. 이렇게 보면 조선 중기 5진 지역에는 최소 19,820명 이상의 여진인 장정이 있었을 것이다. 선조실록 에는 1583년(선주 16) 니탕개의 난 이 일어났을 때, 栗 甫 里 와 尼 湯 介 가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종성을 포위 공격하 였다고 하고 있고, 제승방략 에는 栗 甫 里 와 尼 湯 介 의 군세가 1만~3만으로 기록되어 있다. 109) 니탕개 등 번호가 심처호를 끌어들였다고는 하지만 여진의 군세가 앞서 <표 2>에 나타난 조선의 6진 군사 4,960명을 뛰어넘고 있다. 즉 6진 설치 직후에는 조선 의 군사가 3,593명으로 여진의 장정 1,982명에 비해 약 1.8배 정도 많았지만, 130여 년 뒤에는 조선의 군사가 4,960명이고, 여진의 장정이 최소 8,523명이 되어 반대로 여진의 군사가 최소 1.7배 많아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5진 지역에서의 여진인 인구 증가는 그대로 조선의 경제적 부담이 되고 있었 다. 조선에서는 5진에 거주하는 여진인들에게 해마다 생필품을 주었는데, 이제는 綿 布 5천여 필로 사람마다 5필씩을 주어도 여진인들은 만족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였 다. 110) 또한 5진의 성저야인들에게 매년 절도사와 관찰사가 각각 2차례, 즉 총 4차례 음식을 먹이는 것이 恒 例 였는데, 한 진에 먹일 사람의 수가 1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한 차례 먹이려면 소비되는 닭 개 돼지가 3백여 마리, 大 口 魚 가 1천여 마리, 소주가 4 백여 병, 소금이 1백여 석이나 되었다. 111) 이러한 경비를 모두 군민들에게 거두어서 道 內 에 닭 개 돼지가 쓸어버린 듯이 없어져서 여진인들에게서 도로 사들이는 지경이 었다. 112) 결국 조선인들은 각종 세금과 부역 군역, 변장의 가혹한 수탈 등으로 농업을 107) 또한 자기가 자기 땅에 사는 것이라 三 浦 의 倭 人 이 경내에 사는 것과는 비유가 안된다 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연산군일기 권27, 3년 9월 신유). 108) 중종실록 권16, 7년 6월 계해. 109) 선조수정실록 권17, 16년 5월 임오; 제승방략 卷 之 1, 列 鎭 防 禦. 110) 연산군일기 권44, 8년 5월 경인. 111) 연산군일기 권48, 9년 2월 경술. 112) 연산군일기 권48, 9년 2월 경술.
59 51 - 돌보지 못하여 날로 곤궁해지는데 반해 여진인들의 부락은 날로 더욱 번성해지고 있 었다. 113) 그리고 어쩌면 6진 지역과 두만강 유역에서의 여진사회는 조선으로부터 무육과 보 호를 받는 한편 선진 농업기술과 농우, 농기구 등을 받아들여 농업을 발전시키고, 조 선의 물품과 초피를 매개로 심처의 여진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면서 조 선인들의 경제적 상황보다 더 앞서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즉 육진의 군졸은 매우 가난하고 器 械 도 완전하지 못하며 말을 가진 사람도 적은 반면 성저야인은 날로 더욱 번성하고 부유하여 모두 戰 馬 를 가졌으며 屯 을 만들어 놓아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114) 그리고 매년 의례적으로 서울에 오는 수효는 풍년에는 1백 20인, 흉년에는 90인인데, 우마와 철물로 심처올적합에게서 사온 초피로 모두 진상하고 있 었다. 115) 6진의 상황 역시 皮 物 을 무역하는 일로 가졌던 소와 말을 모두 성저야인게 팔아버렸고 야인은 또 北 虜 와 혼인을 맺고 있어서 야인은 강성해지고 우리나라 사람 은 날로 더욱 피폐해졌다 116) 고 하고 있어서 처음 6진을 설치할 때 보다 조선인과 여 진인의 사회경제적 상황이 많이 달라졌음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6진의 일부 조선 인들은 여진인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기도 하고, 변장의 탐학과 수탈을 피해 부역 과 세금이 없는 여진인들의 땅을 衣 食 이 유족하여 편히 살 수 있는 땅, 즉 樂 土 로 여 기고 두만강을 넘어 월경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한편 6진 지역의 여진인들이 조선의 무육과 보호를 받는 대신 이들은 조선의 법령 과 왕명을 지켜야했다. 또한 번리가 두만강 안팎으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법령과 왕명은 두만강을 넘어 미치기도 하였다. 조선은 이들을 변방의 울타리로 여겼 기 때문에 심처야인들의 소식과 변보를 당연히 알려야만 했고, 반대로 조선 국왕의 유시와 정보를 심처야인들에게 전하기도 했으며, 조선이 심각한 피해를 당했을 경우 번호와 심처야인들이 공모한 것으로 의심받기도 하였다. 117) 그리고 조선은 여진의 침 입으로 피해가 커졌을 때 성저야인들로 하여금 여진인 부락을 정탐하거나 향도로 앞 세워 공격하기도 하였다. 118) 심지어는 여진인들이 국경을 침범하면 조선의 변장들이 성저야인들과의 관계를 끊고 성안에 들이지도 않았으며, 성저야인을 엄하게 징벌하기 도 하였다. 119) 113) 연산군일기 권48, 9년 2월 경술. 114) 중종실록 권21, 9년 10월 임인. 115) 중종실록 권21, 9년 10월 임인. 116) 중종실록 권1, 1년 9월 갑진. 117) 성종실록 권250, 22년 2월 임자; 권252, 22년 4월 병진. 118) 성종실록 권258, 22년 10월 경신; 권259, 22년 11월 갑신. 119) 성종실록 권203, 18년 5월 병진; 권251, 22년 3월 경진.
60 52 - 또한 조선은 심처야인들로부터 조선의 군민이 약탈당하면 응당 번리와 성저야인들 로 하여금 피로인들을 쇄환할 것을 요구하였고, 심지어는 도망한 향화인 및 조선인들 의 쇄환도 요구하였다. 물론 피로인과 도망인을 쇄환하게 되면 그에 대한 포상이 이 루어졌으며, 120) 성저야인이 功 있으면 변장이 공을 논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121) 성종 때에는 여진사회에서 조선인 한 사람의 값이 마소인 경우 20여 頭 여서 조선의 人 物 보기를 기이한 보화로 여겼고 성저야인이 아무리 후하게 주고 쇄환 하였다 하더라도 한 번 서울에 올라가면 그 값을 보상받을 수 있으므로, 사로잡아 가 도록 유도하고 거짓으로 쇄환하는 자가 간혹 있었다. 122) 특히 쇄환의 대가로 받는 마 소는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가지므로 쇄환의 本 價 보다 쇄환의 공을 인정받아 서울로 상 경하였을 때 받는 이익이 더 커서 반드시 상경하려고 했다. 123) 그러나 조선에서 약탈 된 사람들은 며칠 만에 사고 팔리어 먼 지역까지 보내지는 경우도 있었고 여진인들은 약탈한 사람들을 노동력과 재화로 여기고 있었으며, 향화인이나 도망인은 스스로 강 을 건너 월경한 경우라서 이들을 쇄환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24) 그런데 변장들은 성저야인들을 編 氓 과 똑같이 대하여서 조금만 죄를 져도 곧 刑 戮 을 시행하여 위엄과 형벌로 복종시키고 다스렸다. 125) 야인들은 鎭 將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명령을 듣기를 노예같이 하였고,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나졸들에게 곤장을 맞 고 종종걸음치며 물러갔다. 126) 경원 온성 회령의 3진을 역임했던 田 霖 은 몹시 사납고 잔인해서 성저야인들이 두려워하였는데, 턱짓으로 가리키고 기세로 부려먹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고 한다. 127) 성저야인 중 도둑질한 야인은 보통 변장이 가두어 두고 推 考 했지만, 桎 梏 을 채워 서울로 보내어 의금부의 詔 獄 에서 추국을 당하기도 하였 다. 128) 특히 성저야인이 조선인을 잡아다가 팔면 杖 1백에 처하는 것이 준례였으나, 1513 년(중종 8)부터는 사형시켜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하는 법을 정하고 6진의 여 진인들에게 조정에서 엄중한 법을 세운 것을 알리기도 하였다. 129) 그렇지만 조선은 120) 성종실록 권140, 13년 4월 임인; 권142, 13년 6월 기미; 연산군일기 권44, 8년 5월 경인. 121) 중종실록 권50, 19년 5월 정해. 122) 성종실록 권250, 22년 2월 갑자. 123) 연산군일기 권44, 8년 5월 경인. 이 때 조선인 한 사람을 쇄환하는 대가는 소와 말 10마리를 내려가지 않았고 15마리까지 간다고 하고 있다. 124) 성종실록 권250, 22년 2월 임자. 125) 중종실록 권13, 6년 4월 임오; 명종실록 권9, 4년 10월 계축. 126) 성종실록 권201, 18년 3월 20일 경신. 127) 성종실록 권265, 23년 5월 무술. 128) 중종실록 권25, 11년 6월 정묘; 무진; 7월 경진.
61 53 - 죄를 지은 성저야인들에게 國 法 을 적용시켜 죄의 경중에 따라 형벌을 하거나 杖 刑 을 하거나 했지만 조선의 백성과는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큰 죄를 범했더라도 감형하거 나 末 減 하였다. 130) 즉 앞서의 1513년(계유년)에 조선인을 약탈하여 팔면 顯 戮 시킨다 고 법을 정했지만 10여 년 동안 죄를 지은 여진인들에게 한 사람도 적용시키지 않았 고, 단지 장형만을 집행하기도 하였다. 131) 조선에서 죄를 지은 여진인들 감면하거나 말감하는 것은 좋았지만, 변장들의 무리 한 형벌과 착취는 여러 문제를 발생시켰다. 특히 앞서 본 초피를 매개로 한 변장들의 무리한 수탈은 심각했다. 변장들은 여진인들이 公 事 로 상경할 때도 도장을 찍어주면 서 印 假 라는 것을 핑계로 獤 皮, 즉 모피를 함부로 징수하였고, 132) 여진인들을 잘 按 撫 하지 않고 멋대로 毛 物 과 馬 匹 을 징렴하고 갈취하고 있었다. 이에 여진인들이 예조 에 원통함을 호소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때문에 변장들이 조정으로부터 推 問 을 받기 도 하였다. 133) 그리고 여진인들의 조그만 죄에도 형륙을 시행하여 그들이 점점 살기 좋은 곳으로 옮겨가서 성 밑이 텅 비는 경우도 있었다. 134) 즉 여진인들은 6진 성저를 떠나 本 土 라 불리는 두만강 건너편으로 많이 들어가고 있었고, 심지어는 건주삼위로 옮겨가기도 하였다. 135) 여진인들이 성 밑을 떠나 본토로 돌아가거나 건주삼위로 돌아가는 것은 조선의 번 리가 없어지거나 약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조선의 虛 實 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조선을 침입하게 되는 심각한 일이었다. 특히 성저야인들은 조선인들과 뒤섞여 살며 서로 말 이 통하여서 조선의 일을 모르는 것이 없었고 조선의 자질구레한 일도 다 알았으며, 국가의 비밀스런 일까지도 전파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136) 성저야인 중에는 조선의 관복을 빌려 입고 路 引 을 받아서 진을 드나들어 진보의 강약과 군졸의 많고 적음을 훤히 아는 사람도 있었으며, 본토나 건주삼위로 들어간 성저야인 중에는 조선의 의복 을 입고 몰래 조선의 내지를 정탐한 사람도 있었다. 137) 마침내 성저야인들이 조선의 허실을 알고서 심처야인들과 공모해서 조선의 변방을 침구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 129) 중종실록 권19, 8년 10월 계축. 130) 중종실록 권46, 18년 1월 경오. 131) 중종실록 권46, 18년 1월 경오; 권47, 18년 3월 병오. 132) 명종실록 권6, 2년 8월 무신. 133) 중종실록 권58, 21년 12월 기유; 22년 3월 병술. 134) 명종실록 권9, 4년 10월 계축. 135) 성종실록 권144, 13년 8월 정미; 권261, 23년 1월 신축; 중종실록 권19, 8년 12 월 갑인. 136) 연산군일기 권34, 5년 7월 정해; 중종실록 권5, 3년 2월 계사; 권12, 5년 8월 병신. 137) 성종실록 권261, 23년 1월 신축; 중종실록 권40, 15년 9월 신미.
62 54 - 하였다. 138) 결국 성저야인들이 마음을 바꿔 배반하면 회령과 종성을 지킬 수 없을 것이고 나머 지 鎭 도 모두 그럴 것이며, 만약 성저야인과 심처야인이 결탁하여 국경 지방에서 난 리를 일으킨다면 鐵 嶺 이북 지방은 조선의 소유가 안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 기도 하였다. 139) 즉 조선은 6진의 방비가 허술해지면 성저야인들이 조선의 형세가 약 한 것을 보고 조선을 침략할 것이고, 만일 이러한 반란을 일으키면 6진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위기감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140) 그리고 그러한 우려와 위기감은 선조대 니탕개의 난으로 현실화되었던 것이다. 5. 맺음말 세종대 6진 설치로 두만강 유역은 조선의 실질적인 변경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두 만강 유역에서의 조선의 대여진정책은 여진 번리구축과 형성에 맞닿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울타리인 번리는 여진인들을 조선에 복속시켜 두만강 유역에 그대로 거주하게 함으로써 심처의 올적합 등의 침입을 막는 1차 방어선과 같은 것이었다. 두 만강 유역의 여진 번리 형성과 5진성 밑에 성저야인들로 불리는 여진인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6진 지역은 조선인과 여진인들이 공존하는 변경지역이 되었다. 조선의 여진 번리 구축은 조선인과 여진인들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공간을 형성하려는 시도였지 만, 그 방식과 과정, 결과는 결코 평화적이지만은 않았다. 조선은 여진인들의 주거지 를 빼앗고 조선인들을 6진 지역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면서도 여진인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때로는 명에 대한 외교적인 방법을, 때로는 여진인들을 회유하고 무력을 동반한 강경한 방법으로 그들을 두만강 유역에 머물러 두게 하였다. 또한 결과적으로 도 여진인들의 약탈과 침입, 조선의 보복 정벌 등이 내내 지속적이고 반복되었다. 6진으로 이주된 조선인들은 여진인들의 침입과 약탈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했고, 약 탈의 주된 대상이었다. 게다가 추운 날씨 및 각종 재해를 겪고 있었지만 척박한 토지 를 개간하며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정착해 나갔다. 그러나 변장의 가혹한 탐학과 수 탈, 과중한 세금 및 공물의 납부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공납으로 정해진 초서피 문 제는 조선인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하였고, 초서피를 구하기 위해 여진인들과의 무역 이 활발해졌다. 점차 皮 物 은 반드시 여진인들에게 구하는 실정이 되어 갔지만, 조정 138) 중종실록 권5, 3년 2월 계사. 권58, 21년 12월 경술. 139) 중종실록 권54, 20년 4월 기유. 140) 중종실록 권52, 20년 1월 신미; 권54, 20년 4월 기유.
63 55 - 에서는 여진과의 무역을 금지하지도 貢 案 에서 제외하지도 못하였다. 조정은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하는 폐단을 알면서도 지배층의 수요를 위해 과감히 폐단을 시정하거나 철폐하지 못했다. 결국 6진의 백성들은 척박한 환경과 재해, 과중한 부역과 세금, 변 장의 탐학과 수탈을 피해 유망하고 있었으며, 그 중 일부는 조선 땅에서 고통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진인들 땅의 사람이 되겠다고 두만강을 건너 월경하고 있었다. 반면 여진인들은 조선의 번리화 정책으로 무육과 보호를 받고 한편으로는 농업기술 과 농기구를 받아들이면서 여진의 부락과 인구는 증가하고 있었고 사회경제적으로도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진인들은 조선의 보호를 받고 의지하는 만큼 조선의 법령 과 왕명을 따라야 했다. 여진인들은 조선에 심처야인들의 소식과 변보를 전해야만 했 고, 피로된 조선인을 쇄환하는데 진력해야 했으며, 鎭 將 의 권위와 위엄에 복종해야만 했다. 그러는 한편 조선인들처럼 역시 변장에게 수탈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수탈의 주 된 대상은 역시 초피였다. 변장들은 진상이라는 명목으로 여진인들의 초피를 과다하 게 걷었고 진상할 때의 수와 값도 적게 매겼으며, 서울로 상경하는 여진인들에게는 도장을 찍어주면서 초피를 걷었다. 결국 조선 변장들의 이익을 위한 과도한 초피 징 수와 갈취, 권위와 위엄을 세우기 위한 형벌의 남용 등은 여진인들로 하여금 조선을 등지게 하는 원인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조선에서의 보호와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된 여진인들은 6진을 떠나 본토로 돌아가거나, 조선의 방비가 허술해지는 틈을 타 조선 의 변경을 침략하게 되었다. 6진 설치 후 조선인과 여진인들은 성내와 성밖이라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거주하였 다. 즉 민족과 민족이 구별되고 차별되면서 이원화된 공간 속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6진이라는, 두만강 유역이라는, 변경이라는 큰 공간 속에서 생각해 보면 서 로간의 거리는 가까웠고 항상 접촉하는 대상들이었다. 마침내 서로간의 교류와 접촉 속에서 서로를 收 養 이라고 일컫는 사이가 되어 갔음을 주목해 볼 때 6진 지역은 민 족과 민족이 만나는 변경에서 이제 민족을 초월하는 범민족적인 사회경제적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것을 주도한 것은 변경이라는 공간 속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던 조선인과 여진인들이었다. 그러나 지배층들이 여진인들을 여전히 禽 獸, 교화의 대상, 위엄으로 복종시켜야 될 존재라고 여기는 이상 이러한 변경이라는 공간은 민족과 민 족이 교류하고 생활하는 공통된 사회경제적 공간, 평화공존의 공간이 될 수는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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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57 - 토 론 문 조선의 對 女 眞 關 係 와 6 鎭 지역 사람들 에 대한 토론문 박정민(전북대) 이 논문은 조선 전기 두만강 유역에 거주한 번리들을 중심으로 조선 전기 대여진관 계 살펴본 연구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 거주한 조선인 즉, 6진의 조선인과 번리의 관계를 여러 방면에서 고찰하였습니다. 특히 조선이 두만강 유역에 거주한 여진인을 번리로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실증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또한, 6진 지역이라는 공간을 설정한 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조선과 번리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토론자는 본 발표문을 보다 양질의 논문으로 발전시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 되고자 몇 가지 두서없이 질문 겸 코멘트를 드립니다. 1. 용어의 통일 문제 1) 3쪽의 마지막 줄에 내조와 조공에 대한 반대급부인 관직의 제수는 두만강유역 의 여진번리가 조선에 복속하여 정치사회화 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등 내조와 조 공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朝 貢 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서 중국 주변 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보내 예물을 바친 행위를 말합니다. 구 체적으로 朝 는 1 천자를 알현한다. 2 방문 회동, 貢 은 천자에 貢 品 物 産 을 헌상 한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조공의 朝 의 의미로 來 入 聘 問 등이 쓰이고, 또 遣 使 또는 遣 某 奉 使 詣 闕 등도 내용상으로 朝 를 뜻합니다.(전해종, 漢 代 의 朝 貢 制 度 에 대한 一 考 察, 동양사학연구 6, 1973, 3-4쪽) 來 朝 는 역시 諸 侯 가 天 子 의 朝 廷 에 와서 朝 會 에 참여하는 것으로 詩 經 에서 유래합니다. 즉 조공과 내조는 거의 같 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데 굳이 같은 문장에서 따로 사용할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 니다. 2) 城 底 野 人, 藩 胡 / 藩 離, 深 處 胡, 賊 胡 조선 초에 여진인을 종족에 따라 올량합, (제종)올적합, 알타리, (토착)여진으로 구 분했던 것과 달리 연산군대, 중종대에 이르면 이들을 조선과의 관계에 따라 성저야인
66 58 - 과, 번호, 심처호, 적호를 조선과의 관계에 따라 구분하였습니다. 필자 역시 15쪽 첫 번째 문단에서 (조선의) 성 밑에 거주하는 여진인들을 城 底 野 人, 강내외 邊 報 가까 이 살며 무역을 하고 납공하는 자들을 藩 胡, 오랑캐로서 아직 친부하지 않는 자들을 深 處 胡, 번호로서 조선을 배반한 자들을 叛 胡, 심처호나 번호로서 조선을 침입하는 자들을 賊 胡 로 부르게 되었다. 라고 서술하였습니다. 그런데 13쪽 3번째 문단에 城 에 가깝게 거주하는 여진인들을 城 底 近 居 野 人 으로 부르다가 이를 줄여 城 底 野 人 으 로 지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성저야인들은 동시에 조선의 울타리인 藩 籬 로 지칭 되었으며, 번리는 조선 중기가 되면 藩 胡 들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으로 설명하였습 니다. 편의상 15쪽의 것을 A, 13쪽의 것을 B라 하면, A에서는 성저야인과 번호/번리가 구분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B에서는 성저야인=번리/번호 라고 설명하였습 니다. 그런데 같은 논문에서 성저야인과 번호/번리에 대한 개념이 다르게 쓰여 있어 독자에게 혼동을 주고 있습니다. 두 개념 중 한가지로 통일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 습니다. 2. 의문점 1) 14쪽, 2번째 문단에 16세기에 이르면 두만강 유역의 여진의 농경 수준이 원시 농경 에서 집약 농경 으로 발전 했고, 이는 조선과 명에서 약탈해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습니다. 일단 이러한 의견에는 동의를 합니다. 하지 만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이 약탈한 명인과 조선인을 이용해 농경을 이용했다면, 조선 의 지방관들이 이를 묵과했을지 의문입니다. 설사 다른 지역에서 잡혀 온 조선인을 성저야인이 구매하였다 하더라도 이들은 피 로인을 쇄환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실제 16~17쪽에서도 설명했듯이 성저야인은 조선인을 쇄환하여 本 價 를 받을 뿐만 아니라 내조의 허가까지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입장에서는 이들을 조선에 쇄환하는 편이 훨씬 이익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조선의 법령 이 미치는 곳의 성저야인이 조선 혹은 명의 포로 들을 농경에 이용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사료대로 해석하 자면 조선의 법령 이 미치지 않는 곳에 거주하는 성저야인이 이러한 포로들을 사역시 켰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심처의 니마차올적합과 도골올적합이 이미 명과 조선 의 포로들을 이용하여 성종대부터 농경에 발전을 이루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성저야 인이 조선인의 유망자 혹은 포로 등을 이들에게 팔았을 개연성이 있습니다. 물론 성 저야인과 조선인이 서로 교류하고, 결혼까지 하는 일도 있었지만, 이것과 조선의 인민 을 잡아가서 사역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67 59 - 그리고 여러 북방의 폐단 등으로 조선인이 胡 地 로 들어가는 사례도 상당히 있습니 다. 이때의 호지가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당시 도망간 조선인이 6진 근처 의 성저야인에게 의탁했다면, 조선의 지방관들은 반드시 추쇄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 다. 따라서 저는 6진에 사는 번호가 도망쳐 오거나 다른 지역에서 잡아온 조선인을 데리고 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성저야인은 이러한 조선인 을 심처의 니마차올적합이나 건주위인 등에게 매매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즉 번리가 심처야인과 조선 사이에서 이득을 취하는 사례로 제시하는 것은 어떤가라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2) 3쪽 4번째 문단에 조선은 명을 이용한 외교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회유책 및 강경책으로 6진에 묶어 두려고 하였고, 심처 올적합의 침입을 막아주고 보호하였으 며, 여진인들을 조선에 내조시키고 관직을 수여하였다. 여기에서 조선이 명을 이용 한 외교적인 방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는 맺음말(18 쪽) 그러면서도 여진인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때로는 명에 대한 외교적인 방법을, 때 로는 여진인들을 회유하고 무력을 동반한 강경한 방법으로 그들을 두만강유역에 머물 러 두게 하였다. 에도 보이지만, 그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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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61 - 제3주제: 조선의 對 淸 關 係 와 羅 州 唐 津 사람들 김경옥(목포대) 목차 1. 머리말 2. 관찬기록에서 검출된 중국 표도민들의 현황 1) 조난사고의 발생시기와 출항지 2) 중국인들이 표착한 조선의 서해해역 3. 중국 표도민들의 항해목적과 선적화물 1) 선박과 승선자 2) 商 船 을 통한 교역 4. 맺음말 1. 머리말 표류는 犯 越 이다. 해상에서 발생한 조난사고이지만, 타국의 경계를 침범한 행위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19세기 동아시아 사람들은 표류민을 구휼하여 본국으로 송환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의 경우, 이국인이 표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오 면 海 路 와 陸 路 를 불문하고, 표도민이 원하는 대로 송환시키도록 규정하였다. 만일 표도민이 뱃길을 따라 귀국을 원하면 선박을 보수해주고, 항해에 필요한 식량 의복 땔 감 등 제반 사항을 제공하였다. 반면 표도민이 陸 路 송환을 희망할 경우 바닷가에서 연안으로, 연안에서 내륙으로, 국경에 이를 때까지 역관과 낭청으로 하여금 후송하도 록 하였다. 또 표착 선박에서 수습된 화물은 돈이나 옷감으로 환산하여 지급해주었다. 표착지에서 국경에 이르는데 원거리의 이동이 불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 그 런가하면 표류민 문제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규례에 벗어난 지방관의 경우 추 1) 萬 機 要 覽, 비변사 표류민 관장 사무.
70 62 - 고하여 곤장을 때리거나, 심한 경우 유배형으로 엄히 다스렸다. 2) 조선시대 표류민 구 휼은 정부의 중대한 사안 중의 하나였다. 이렇듯 18~19세기 본국의 백성보다 타국의 표도민을 극진히 처우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표류 연구는 조선과 일본 간의 표류민 연구가 주를 이루었고, 최근 들어 조선과 중국 표류민에 대한 사례연구가 일부 발표되고 있다. 이를 통해 표류민의 표 착경위, 표류민 송환을 둘러싼 외교적 의례와 절차, 표류민에 의한 정보교류, 표류 기 록 D/B화 구축방안, 표해록 분석 등이 검토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朝 淸 간의 표 류 연구가 아직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앞으로 연구영역의 확대가 요구된다. 기존 표류 연구에서 조선 해역에 표착한 이국인들의 추이는 중국, 일본, 유구, 태 국, 베트남, 필리핀 순이며, 이 가운데 중국인이 다수를 점유한 것으로 확인된다. 3) 조 선 해역에서 중국인의 표착 사례가 가장 많이 발생한 이유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 지만, 무엇보다도 당 시대 중국인들의 항해목적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본고는 18~19세기 조선에 표착한 중국인들의 현황과 추이를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 었다. 중국인들은 언제, 어떤 목적으로, 어디를 향하여 출항하였다가, 조선의 서해해 역에 표착하게 되었는가를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연구대상 시기는 18~19세기이다. 이 시기는 조선과 중국 간의 표류민 문제를 공식문서로 작성하였던 1735년을 전후로 하 여 시기별 지역별 중국 표도민들의 현황과 추이를 파악하기 위함이다. 분석 자료는 朝 鮮 王 朝 實 錄, 備 邊 司 謄 錄, 承 政 院 日 記, 日 省 錄 등이다. 특히 조선의 관리와 2) 표류민 처우문제로 조선의 지방관을 추고한 사례는 1797년 3월 4일 전라도 무장현에 표착 한 중국 선박이 본국으로 향하다가 전라도 나주목의 부속도서인 홍도에 2차로 표류하면서 이들 표도민을 현장에서 공궤하였던 무장현감을 추고한 사례에서 확인된다. 그런가하면 1801년 1월 10일에 중국 강남성 소주부 남통주 사람들이 전라도 영광군 재원도에 표착하 였는데, 이 사건 역시 표도민 사고가 접수된 이래로 사건을 지체하였던 수군첨사를 곤장으 로 다스린 사례이다( 비변사등록 ; 비변사등록 ). 그런가 하면 표 도민을 구조하는데 있어서 규례에 벗어난 행위도 처별 대상이었다. 일례로 표류민에 대한 문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하선을 명령하였던 광주목사와 지도만호 등이 추고를 당하였으며, 나주목 팔금도에 표착한 중국인의 경우 임의로 항로를 이탈한 임치첨사를 실제 섬에 무기 한으로 정배한 사례도 확인된다( 비변사등록 ; 일성록 ) 3) 조선 해역에 표착한 중국 표도민에 관한 연구는 다음의 논저가 참고 된다. 김강일, 전근 대 한국의 해난구조와 표류민 구조 시스템, 동북아역사논총 28, 2010; 김경옥, 18-19세 기 서남해 도서지역 표도민들의 추이: 비변사등록 문정별단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 보 44, 2008; 劉 序 楓, 淸 代 中 國 의 外 國 人 漂 流 民 의 救 助 와 送 還 에 대하여, 동북아역 사논총 28, 2010; 마츠우라 아키라, 근세 동아시아 해역에서의 중국선의 표착 필담기 록, 한국학논총 45, 2009; 박현규, 1880년 조선 비인현에 표착한 潮 州 泰 國 商 人 의 표 류사정과 교역활동, 도서문화 42,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2013; 원종민, 雲 谷 雜 著 를 통해 본 조선후기 표류 중국인에 대한 구조 활동, 중국학연구 58, 2011; 원종민, 조선 에 표류한 중국인의 유형과 그 사회적 영향, 중국학연구 44, 2008; 원종민, 玄 洲 漫 錄 雲 谷 雜 著 를 통해 본 표류 중국인과의 의사소통 과정 및 문정 기록, 중국학연구 60, 2012; 주성지, 표해록을 통한 한중항로 분석, 동국사학 37, 2002.
71 63 - 중국 표도민 간의 주고받은 問 情 別 單 을 분석하여 당대 조선인들이 청에 대한 인식 이 어떠하였는가를 이해하고자 한다. 2. 관찬기록에서 검출된 중국 표도민들의 현황과 추이 조선의 서해해역에 표착한 중국인들의 현황은 역대 관찬자료에서 그 추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조선정부의 관찬자료에서 漂 流 漂 到 漂 着, 荒 唐 船 唐 船 異 國 船, 淸 人 漢 人 華 人 大 國 人 中 國 人, 그리고 조선의 서해 해역과 관련하여 전라도와 충청도의 地 名 島 嶼 浦 口 등을 검출하였다. 조선시대의 연대기 자료는 작성 주체와 시 기에 따라 표류 사건의 진행과정을 상호 보완할 수 있었다. 검색 시기는 淸 이 중국 전역을 통합하여 지배권을 확립한 1680년대를 포함하였다. 검색결과 조선의 서해 해 역에 표착한 중국 표류민 사례는 총 130건을 검출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의 서해 해 역에 표착한 중국 표도민들의 현황과 추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조난사고의 발생시기와 출항지 조선과 중국의 표류민 송환문제가 정례화 된 것은 17세기 이후이다. 즉 1637년부터 1644년까지 청나라가 조선을 강압적으로 압박해오던 시기였고, 1645년부터 1735년까 지는 청의 강압적 태도가 조금 완화되었으며, 1735년 이후에 비로소 朝 淸 간의 정상 적인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4)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여 조선의 서해 해역(특히 전라도와 충청도)에 표착한 중국 표도민 사례를 정리하였다. 과연 중국인들은 언제, 무엇을 목적으로, 바다를 항 해하다가 조선의 서해 해역에 표착하였을까? 특히 중국 표류민, 그들이 이용하였던 선박, 그 배에 선적되었던 화물을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또 중국 표도민에 대한 분류 는 막연히 시간을 단위로 하여 구분하기보다는 중국 황제의 재위기간에 맞춰 구분하 였다. 이는 18~19세기 중국인의 해양인식과 조선인의 대청인식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다음 <표1>은 조선 후기 관찬자료에서 서해 해역, 즉 전라도와 충청도 해역에 표착한 중국 표도민의 추이를 정리한 것이다. <표1> 조선에 표착한 중국 표류민들의 시기별 지역별 추이 4) 고동환, 조선 후기 선상활동과 포구 간 상품유통의 양상-표류관계기록을 중심으로, 한 국문화 14, 1993, 285~287쪽.
72 64 - 구분 康 熙 擁 正 乾 隆 嘉 慶 道 光 咸 豊 同 治 光 緖 합계 중국 전역 산동성 강남성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 합계 (8.5.%) (0.8.%) (31.5%) (23.8) (16.9) (8.5%) (3.1%) (6.9%) (32.0%) (20.0%) (23.8%) (3.1%) (16.9%) (3.8%) 130 (100.%) 위의 <표>에서 보듯이, 강희~옹정 연간에 중국 표류민 발생 건수는 총 130건 가운 데 12건으로 약 9.3%에 불과하다. 그런데 옹정제의 뒤를 이어 건륭제가 즉위한 1736 년을 기점으로 중국 표류민의 수가 무려 3배로 급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추이는 건륭제 이후 가경 연간까지 지속되었다. 다시 말해서 건륭~가경 연간에 발생 한 중국인 표류사례는 총 130건 가운데 72건으로, 약 55%를 점유하고 있다. 이렇듯 건륭~가경 연간에 중국 표류민 발생율이 증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건륭~가경 연간이 황제의 재임 시기만 하더라도 무려 80년 동안 장기 지속하였다는 점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그만큼 중국인들의 해상활동이 증가한 결과로 여겨진다. 실재 건륭제는 즉위한 이듬해인 1737년에 유구국 선박이 절강성에 표착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표류민 구조에 필요한 자금과 조례를 만들었다. 중국 연안에 입지 한 奉 天 ~ 山 東 ~ 江 南 ~ 浙 江 ~ 福 建 ~ 廣 東 에 이르는 各 省 에 표류민을 구휼할 때 지급하는 금전 식량 의복 등의 물품과 수량 등을 명시하여 전달하였다. 이러한 규정은 조공국이 든 비조공국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一 視 同 仁 으로 후하게 대접해서 본국으로 송환하 도록 제도화한 것이다. 5) 그렇다면 조선의 서해 해역에 표착한 중국 표도민들은 과연 어느 지역 출신들이었 을까? 총 130건의 중국 표류민 사례를 출항지를 기점으로 분류해 보면 다음 <표2>와 같다. 5) 劉 序 楓, 앞의 논문, 2010, pp
73 65 - <표2> 조선의 서해해역에 표착한 중국인 표도민들의 출신지 구분 산동성 강남성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 봉래현 (1) 복산현 (3) 남통주 (9) 태창주 (5) 황 현 (1) 숭명현 (2) 용계현 (3) 해령현 (1) 縣 곤산현 (2) 우 현 (1) 해징현 (3) 증해현 (1) 영성현 (4) 해문현 (1) 진해현 (2) 소안현 (1) 汕 頭 埠 (1) 문동현 (2) 상해현 (2) 동안현 (10) 영해현 (1) 곤산현 (1) 봉황성 (3) 직현 (1) 기 타 (2) 漳 州 府 州 登 州 府 蘇 州 府 寧 波 府 泉 州 府 潮 州 府 조선의 서해해역에 표착한 중국 표도민들 의 출항지는 산동성 등주부의 복산현 영성 현 봉황성, 강남성 소주부의 남통주 태창주, 절강성 영파부의 진해현 우현, 복건성 장주 부의 용계현 해징현과 천주부의 동안현, 광 동성 조주부의 증해현 산두부 등이 검출되 었다. 이 지역을 지도에 표기해 보면 다음 <그림1>과 같다. <그림1>에서 보듯이, 등 주 소주 영파 천주 장주 조주 등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유구 일본 조선 해역과 인접해 있다. 중국 연안지역 주민들이 조선의 서해해역 에 가장 많이 표착했던 이유는 바닷가 연안 에 입지하고 있는 지리적 조건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실정은 실재 조선에 표 착한 중국 표류민들의 문정별단에서 확인된 그림3. 조선에 표착한 중국인들의 출항지 다. 다음은 중국 표도민에 대한 비변사 문정별단의 내용을 일부 소개한 것이다. a-1) 전라도 나주목 지도에 표류한 중국인 문정별단: "너희들은 어느 곳에 살며 성명은 무엇이라 하느냐?" "우리들 세 사람 중 하나는 張 文 學 이고 나이는 29세이며 離 城 에서 40리 되는 劉 家 王 舍 莊 에 살고 있다. 다른 하나는 顧 一 論 으로, 나이는 28
74 66 - 세이고, 마지막 李 守 長 의 나이는 23세이다. 모두 綠 楊 舍 에 살고 있는데 세 사람 모 두 登 州 府 蓬 萊 縣 관할의 백성이다." 너희들이 등주에 있을 때에 어떤 身 役 에 응했 으며, 무엇으로 생업을 삼고 있느냐?" "우리들 세 사람은 모두 등주의 村 民 으로 배 를 부리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었는데, 吏 部 의 沙 尙 書 의 배를 빌어 1년에 세금으로 銀 子 15냥을 바쳤다." "너희들은 언제 무슨 일로 어디를 가다가 우리나라에 표착하 였느냐?" "우리들은 고향에 있을 때 매양 봄과 여름이면 물고기를 잡고, 가을과 겨 울에는 숯을 파는 것을 업으로 삼아 왔다. 작년 9월 22일 우리들 열 사람이 숯을 실 으려고 배를 띄워 黃 城 島 에 도착했는데, 황성도는 등주 관할로 하루 길의 거리다. 23일 배를 돌릴 즈음에 갑자기 광풍을 만나 돛대는 부러지고 닻은 끊어져 물결을 따라 표류하게 되었다. 6) a-2) 전라도 영광군에 표류한 중국인 문정별단: 너희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인 가? 우리는 청나라 사람이다. 너희들이 청나라 사람들이라면 어느 지방에 거주 하는가? 山 東 省 登 州 府 文 登 縣 에 거주하고 있다. 너희들은 무슨 일로 우리나라 지경에 도착하였는가? 우리 고장은 산이 적고 토지가 척박하여 바다에서 물고기 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불행히도 하늘이 큰 풍랑을 내려서 배가 파선되어 여기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너희들은 무슨 물고기를 잡는가? 靑 魚 를 잡는 다. 우리나라 법에는 다른 나라 사람이 경계를 침범하여 물고기 잡는 것을 허용하 지 않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멀리 험난한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 경계 안에 그물을 던졌는가? 우리 지방이 연달아 흉년을 만나서 빈한한 바에 곤란을 겪다가 험난함 을 무릅쓰고 여기에 이르게 되었다. 황공하고 황공하다. 너희들은 문등현에서 몇 월 며칠에 배를 출발하였는가? 올해 1월 2일에 배를 타서 12일에 귀국의 古 群 山 鎭 북쪽 12리 동쪽에 도착하였는데, 2월 9일에 풍랑을 만나 영광군에 이르렀으며, 10일에 배가 파손되었다. 7) 위에 제시되어 있는 사례는 전라도 나주목과 영광군에 표착한 중국 산동성 등주부 사람들과 조선의 관리가 심문한 문정별단이다. 산동성 사람들이 조선의 서해해역에 표착했던 이유는 그들의 생업이 바다를 무대로 한 어업과 선박업에 종사하였기 때문 이다. 이들이 바닷일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산동성의 자연환경에서 찾아진다. 산동성은 논보다 밭이 많다. 그래서 주민들이 농업보다 어업을 선호하였다. 그들은 바 다에서 고기잡이를 하거나, 숯을 만들어 판매하여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선박 은 선주에게 대여료 銀 子 15냥(산동성 기준)을 납부하고, 그 대가로 선박 운항에 종 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산동성의 주민들은 조선의 서해해역에까지 잠입하여 고기잡 이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 비변사등록 漂 漢 人 問 情 別 單 7) 비변사등록 영광군에 표류한 중국인들을 문정한 결과를 별단.
75 67-2) 중국인들이 표착한 조선의 서해해역 앞서 조선에 표착한 중국 표류민들의 출신지를 살펴보았다. 대체로 조선에 표착한 중국인들은 남부 연안에 입지한 자연촌 주민들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조선의 서해 해역의 어느 지점에 표착하였을까? 조선에 표착한 중국인 표류 사건 총 130건의 표착지점을 구분하여 정리해보면 다음 <표3>과 같다. <표3> 중국인이 표착한 조선의 서해해역 구분 흥양 장흥 강진 영암 해남 진도 나주 나주 함평 영광 부안 만경 무장 비인 태안 홍주 당진 충청 康 熙 진도 (1) 남도포 (2) (1) 지도 (2) 증도 영광 (1) 임치도 (1) 안흥진 (1) 태안 (1) 擁 正 볼매도 (1) (1) 우이도 (1) 흑산도 乾 隆 추자도 (1) 노아도 (1) 해남 (1) 남도진 (1) 만재도 (1) 진도 (1) 눌옥도 (1) (3) 자은도 (1) 도초도 (2) 비금도 (1) 영산도 (1) 태사도 (1) 팔금도 영광 (2) 법성진 (2) 임병도 (1) 임자도 (2) 서두산 포구 (1) 무장 (1) 구시포 (1) 고군산진 (2) 위도 (1) 격포 (1) 마량 (1) 가의도 (2) 안흥진 (1) 파두지 리(1) 당진 (1) (1) 하의도 (1) 嘉 慶 나로도 청산도 진도 흑산도 낙월도 위도 소근진 平 薪 鎭 (1) (2) (2) (2) (3) (1) (1) (1)
76 68 - 우묵도 1820 신지도 (1) 가리포 (1) 소안도 (2) (1) 지도 (1) 나주 (1) 우이도 (2) 재원도 (2) 칠산 (1) 임자도 (2) 격포 (1) 남도현 (1) 자은도 (1) 하태도 (1) 하의도 괘길도 (1) (1) 道 光 소랑도 (1) 진도 (2) 나배도 (1) 홍의도 (1) 우이도 (3) 영광 (2) 임자도 (1) 비양도 (1) 안흥진 (1) 흑산도 법성진 (4) (1) 자원도 (1) 안흥진 咸 豊 추자도 (1) 남도포 (2) 위도 (1) (1) 웅도 (1) 가음도 同 治 도초도 (1) 흑산도 (1) 검모포 (1) 내다포 (1) 안흥진 (1) 光 緖 흑산도 (2) 영광 (1) 고시포 (1) (1) 도둔포 (1) 마량진 안흥량 (1) (1) 위의 <표>에 제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중국 표류인이 조선의 서해해역에 표착한 지점은 내륙 연안과 섬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 공간을 지도에 표기해보면 다음 <그림2>와 같다. 8) 8) <그림2>에 표기된 중국 표류민 표착지점은 발생 빈도수에 따라 원형의 크기를 표기한 것 이다.
77 69 - 그런데 중국인이 표착한 서해의 표착 지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험조처로 알 려져 있었다. 그래서 조선정부도 이 지 역을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서해는 조선정부의 재정을 보장해주는 세곡선이 지나는 항로였기 때문이다. 다음은 조선 태조와 경종 때 지방과 중앙에서 올린 보고서이다. 조선시대 서해 해로에 대한 중앙정부의 고민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나타나 있다. b-1) 전라감사 黃 爾 章 의 장계에, 호남의 海 路 에서 右 水 營 이 가장 큰 요해처이고, 이곳을 지나 柴 河 의 큰 바다를 건너면 임자도가 또 하나의 큰 요해처이며, 임자도에서 七 山 의 큰 바다를 건너면 古 群 山 이 또 하나 그림4. 중국 표류인들의 표착지 의 큰 요해처입니다. 대개 임자도와 고군산은 모두 배를 정박하기에 아주 좋아 남쪽 에서 북으로 향하는 海 船 이 모두 이곳에서 정박합니다. 마땅히 重 鎭 을 두어 防 守 해 야 하므로 지금 혁파할 수 없습니다. 9) b-2) 參 議 政 府 事 김승주를 蓴 堤 로 보냈다. 순제는 충청도 泰 安 郡 의 서쪽 산마루 에 있는데, 길고 곧게 바다 가운데로 數 息 이나 뻗쳐 있어 수로가 험조하였다. 이름 하여 안흥량이라 하는데, 전라도의 조운은 이곳에서 실패가 많아 예나 지금이나 걱 정거리였다. 산마루가 처음 시작된 곳을 뚫으면 수로를 통 할만 한 곳이 있었으므로 前 朝 (필자: 고려) 때 王 康 이 뚫으려 하였으나, 그 땅이 모두 돌산이어서 마침내 실 효를 보지 못했던 곳이다. 10) 위의 기사에서 보듯이, b-1)은 전라도 해남의 우수영에서 만경의 고군산에 이르는 해로를 언급한 것이고, b-2)는 충청도 태안반도 안흥량 일대에 관한 것이다. 먼저 전 라감사의 보고에서 언급하고 있는 서해 해로는 <우수영 시하(현 木 浦 ) 임자도 七 山 海 (현, 영광) 고군산> 등으로, 오늘날 목포에서 군산 앞 바다에 이르는 구간의 중 간 기착지를 언급하고 있다. 11) 조선정부는 일찍이 b-1)의 기사에서 언급하고 지점에 9) 景 宗 實 錄 권13, 경종 3년 7월 18일 을미. 10) 太 宗 實 錄 권24, 태종 12년 11월 16일 정유. 11) 김경옥, 17~18세기 荏 子 島 鎭 의 설치와 牧 場 의 개간, 도서문화 24, 목포대 도서문화
78 70 - 수군을 파견하여 주둔시켰다. 예컨대 해남의 右 水 營, 목포의 萬 戶 鎭, 무안의 多 經 浦 鎭, 나주의 智 島 鎭, 영광의 法 聖 鎭, 옥구의 群 山 鎭, 부안의 黔 母 浦 鎭 蝟 島 鎭 등이 그 것이다. 이들 수군진의 기능은 해양방어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본질적인 목적은 서해 해로를 통과하는 세곡선의 안전 항해를 보장하는 업무였다. 12) 또 하나의 난제는 서해 해로에서 가장 험난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b-2)의 충청도 태안반도 안흥량이었다. 안 흥량은 소위 難 行 梁 이라 부를 만큼 험로였다. 그래서 조운선이 이곳에만 이르면 누 차 치패 된다 로 하여 붙여진 지명이었다. 훗날 破 船 을 두려워했던 사람들이 難 行 梁 의 지명을 편안할 安, 흥할 興 을 써서 安 興 梁 으로 개칭하였다고 전해온다. 13) 이 러한 안흥량의 험로는 비단 조선정부만의 일은 아니었다. 이미 고려정부도 사고해역 을 피하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즉 고려정부는 안흥량의 뱃길을 피하기 위해 태안반도 내륙에 수로를 개설할 목적으로 하한 굴착공사를 시도하였다. 14) 태안 반도의 굴착공사는 암반으로 이루어져 지형으로 인해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이런 실정이었기에 중국 선박이 조선의 해역을 넘나들었지만, 서해 해로의 험 조처를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3. 중국 표도민들의 항해목적과 선적화물 본 절에서는 조선의 서해 해로에 표착한 중국인들이 이용하였던 선박의 규모, 승선 자, 선적화물 등 관련 내용을 수집하고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 표류인들의 항해 목적을 검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1) 선박과 승선자 조선 해역에 표착한 중국 선박에 대한 용례는 각종 연대기에 漢 船 唐 船 魚 採 船 挾 船 商 船 異 樣 船 私 船 官 船 荒 唐 船 淸 國 船 中 國 船 舶 大 淸 國 商 船 大 淸 國 貿 易 船 大 國 人 商 船 등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관찬자료에 표기된 용례를 기준으로 시기별 추이를 정리 해 보면 다음 <표4>와 같다. 연구소, 2004, p ) 김경옥, 조선후기 도서연구, 혜안, 2004, p )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제19권, 泰 安 郡 山 川. 14) 김경옥, 조선후기 태안 안흥진의 설치와 성안마을의 공간구조, 역사학연구 32, 호남 사학회, 2008, p129.
79 71 - <표4> 중국 표류민의 선박 용례 구분 康 熙 擁 正 乾 隆 嘉 慶 道 光 咸 豊 同 治 光 緖 漢 商 唐 船 船 船 魚 荒 淸 採 唐 國 船 船 船 異 挾 官 私 樣 船 船 船 船 異 漂 淸 國 大 國 人 國 流 商 船 商 船 船 船 大 淸 國 漁 貿 易 船 船 중국 표류선에 대한 용례는 商 船 과 私 船 이 가장 많았다. 또 중국인의 해상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시기는 건륭제의 재위기간이었다. 아마도 이 시기 잦은 항해와 표류 의 결과라 여겨진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용례가 황당선이다. 중국의 황당선이 조선 해역에 출몰한 것은 17세기 초이다. 조선 선조 때 황당선이 제주 근해에서 육지로 후 송 중이던 進 上 馬 를 모조리 탈취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15) 또 조선 숙종대에는 황당선 이 전라도의 임자도 증도 자은도 도초도 비금도 태사도 팔금도 흑산도 홍의도 진도 등 서 남해역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이들은 조선의 관리에게 발각되면 단순히 魚 採 를 목적 으로 조선 해역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핑계대지만, 해적선으로 둔갑하여 섬 주민들을 약탈하였다. 이러한 황당선의 이미지가 18세기 조선 해역에 표착한 중국 표류선에 그 대로 적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외에도 中 國 船 舶 淸 國 船 大 國 人 商 船 大 淸 國 商 船 大 淸 國 貿 易 船 등의 용례가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인들이 行 商 을 목적으로 바다 를 항해하다가 조선에 표착한 것으로 이해된다. 중국인들이 항해에 사용하였던 선박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다음은 비변사에서 중국 표류민을 대상으로 한 問 情 別 單 에서 선박 관련 사항을 정리한 것이다. 15) 선조실록 권137, 선조 34년 5월 8일 을사.
80 72 - <표5> 問 情 別 單 에서 검출된 중국 표류민의 선박과 승선자 구 년대 지역 승선 官 船 분 인원 私 船 船 主 船 稅 비고 -관선: 吏 部 沙 尙 書 산 동 성 -소형선 10 관선 -년 銀 子 15냥 등주부 길이 7파, 너비 2파 반 - 小 船 :근해운항 강남성 -선주:휘주상인 오인칙 17 사선 남통주 -태창주 주표문 -상인 서몽상 복건성 -선주: 정영준 24 관선 천주부 선세( 私 納 ) - 居 間 (1명) 강 남 성 소주부 17 사선 -뇌득순의 배 -선박 貸 與 : 大 船 銀 子 30 복건성 - 行 商 거리에 따라 船 稅 차 28 사선 냥, 中 船 은자 15냥, 小 船 흥화부 별 은자 7~8냥 -선주 林 福 盛 복 건 성 -상선세( 縣 府 ) -현지 외상값 수금(5명) 24 사선 천주부 黃 豆 (1석 10두: 3푼) -음식 준비(1명) 면화(100근: 2전) 봉 천 부 해성현 6 사선 -고기잡이 어선 절 강 성 19 영파부 강 남 성 소주부 2 사선 절강성 1 항주 산 동 성 등주부 25 사선 강남성 소주부 15 관선 - 崇 宗 제579호 봉천부 금 주 7 관선 - 船 號 제41호 성 16) 직 예 성 천진부 복 건 성 천주부 광동성 광주부 -상선 -길이 10 丈. 29 사선 - 商 字 제69호 너비 1 丈 6 尺, 돛대 3개 산 동 성 4 사선 -선주: 장원주
81 등주부 복건성 장주부 산 동 성 등주부 강남성 소주부 강남성 태창주 산 동 성 등주부 복 건 성 천주부 복 건 성 천주부 복건성 천주부 강 남 성 소주부 강 남 성 진강부 절 강 성 영파부 산 동 성 등주부 복건성 장주부 산동성 봉황성 수양부 산동성 등주부 산 동 성 등주부 21 사선 - 福 字 제11호 -선주: 안영화 51 사선 - 黃 字 제19호 - 私 船 貸 與 大 錢 100, 小 錢 100 -배삯 6 사선 - 通 字 大 錢 10, 小 錢 43조 -선주: 조원발 13 사선 - 張 御 22 甲 7 號 鎭 字 號 -선주:장어 37 관선 - 張 成 順 蓬 子 제50호 - 商 客 과 空 客 승선비 - 商 客 (10명) 制 錢 (동전) 134,480개 - 空 人 (1명 동전 1,000~1,640개 22 사선 -선박 銀 子 陳 源 合 (매입) 36 사선 - 靜 字 제1749 號 -선주: 허진창 30 사선 -선주: 해징현 사람 37 사선 -선주: 석희옥 14 사선 - 船 票 16 사선 - 順 茂 號 35 사선 41 사선 3 사선 -선박: 은자 40냥 매입 -선주: 왕기운 -선박 건조 17년 경과 -선박 銀 子 15,000냥 -선박 임대업 -선주: 유일성 11 사선 -선주: 유증삼 6 사선 - 船 號 船 票 없음 -선주: 주수빈 -뱃사람(7명) - 空 客 (44명) 男 37명, 女 4명, 童 蒙 3명 - 商 船 의 기능, 그러나 船 票 가 등록되어 있어 관선으로 기재 - 客 商 (11명) -선주는 해징현, 선원은 복건 성 사람을 고용 -영파부 상인 -양곡 운송업 -생선 판매업 강 남 성 31 사선 -선주: 공윤보 - 水 手 (2명)
82 74 - 소주부 -대추상인(8명) 산 동 성 등주부 10 사선 -선주: 유청운 -상인, 운송업 강 남 성 송강부 21 사선 -선주: 욱태봉 - 船 號 : 孫 壽 福 산 동 성 등주부 12 사선 -선주: 조입과 산 동 성 등주부 5 사선 산 동 성 등주부 10 사선 -청어잡이 어선 - 犯 越 (고군산진 조업) 광 동 성 조주부 10 사선 -태국인(14명) 위의 표는 조선의 서해 해역에 표착한 중국인 사례 총 130건 가운데 문정별단이 전 해 오는 35건을 토대로 선박 관련 사항을 정리한 것이다. 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 표류민은 私 船 을 주로 이용하였다. 문정별단에 의하면, 총 35건 가운데 사선이 30건(86%) 이었으며, 관선은 5건에 불과하였다. 이들 선박의 출항지, 곧 선주 의 거주지로 가장 많이 검출된 지역은 1산동성 등주부 12건(34%), 2강남성 소주부 4건(11%), 3복건성 천주부 4건(11%), 4절강성 영파부 2건(6%) 순으로 확인된다. 이 지역 주민들이 바다를 무대로 운송업과 교역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표류선의 규모에 관한 것이다. 중국 표류선에 관한 정보는 총 3건(<표 5> 1 번 11번 12번)이 확인되었다. 먼저 1번은 官 船 으로, 산동성 등주부 선적이다. 승선인 은 10명이며, 배의 크기는 길이 7파, 너비 2파 반, 선적화물은 숯이다. 중국 표류민의 문정별단에 따르면, 우리들은 등주의 村 民 으로, 매양 봄과 여름에 고기잡이를 하고, 가을과 겨울에 숯을 만들어 파는 일을 업으로 삼아왔습니다. 라고 진술하는데 확인된 다. 17) 즉 산동성 주민들이 가을과 겨울에 숯장사를 다녔는데, 이 때 선박은 관선을 대여하였다. 다음 11번 사례는 관동성 영해현 18) 소속 官 船 으로, 선박의 길이는 7발, 16) 이 사례는 표류민의 거주지에 오류가 확인된다. 본 기사에는 봉천부 금주성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비변사 심문 결과 관동성 영해현으로 밝혀졌다. 관련 내용은 본고 각주 18)번을 참조하기 바란다. 17) 비변사등록 漂 漢 人 問 情 別 單. 18) <표5>의 11번 사례에서 비변사의 심문과정에서 거주지에 대한 표류민의 거짓 진술이 확 인되었다. 문정 초기 단계에 중국 표류민은 거주지를 봉천부 금주성 이라 하였으나, 중국 의 행정편제를 파악하고 있던 비변사 관원의 질문에 관동성 영해현 으로 바꾸었다. 이에 대해 중국 표류민은 농사짓고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문자를 읽고 쓸 수 없어서 그렇게 진술하였다 라고 해명하였다. 본 자료는 문정별단의 내용을 그대로 이기하 였다.
83 75 - 너비는 2발 반, 돛대 2개로 구성되었다. 이 배의 승선 인원은 舵 工 (1명), 水 手 (6명) 등 총 7명으로, 고기잡이 어선이었다. 문정별단에 따르면, 이들 역시 바닷가에서 거 주하는 백성들로, 평상시 농사짓고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고 살았다 라고 진술하였다. 이들은 1777년 9월 24일에 관선 제41호를 대여하여 관동성 영해현 노탄포구를 출항 하였다. 선적화물은 鹽 魚 300여 마리였다. 이 선박의 최종 목적지는 산동성 봉천부 로, 이곳에 가서 배에 선적한 염어를 판매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동년 9월 28일 산동 성 장주지방에 이르렀을 때 폭풍을 만나 조선의 해역에 표류하게 되었다고 진술하였 다. 19) 이 역시 선박이 없는 바닷가 사람들이 관선을 대여하여 소금에 절인 생선을 판 매하러 나갔다가 표류당한 것으로 확인된다. 마지막 12번 사례는 직예성 천진부의 私 船 으로, 이 배는 천진현 大 沽 營 에서 면화와 대추를 싣고 광동성 광주부로 가서 판매 할 계획이었는데, 배가 산동성 등주에 이르렀을 때 표류하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 배의 길이는 10 丈 이고, 너비 1 丈 6 尺, 돛대 3장이다. 20) 그런데 이 배의 선주와 선 원의 구성이 흥미롭다. 이 배의 선원 23명은 복건성 천주부 동안현 출신이고, 客 人 5 명이 동행하였는데, 2명은 광동성 광주부 남해현 출신이고, 나머지 3명은 복건성 천 주부 동안현 사람들이었다. 즉 직예성 천진부 소속 선박이 복건성 천주부 주민을 선 원으로 고용하여 광동성 광주부로 행상을 나간 것이다. 이는 아마도 화물의 선적 및 교역과 관련하여 구성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상에서 조선에 표착한 중국 표류선의 규모는 산동성 등주부 官 船 은 길이 7파 너 비 2파 반, 10명이 승선하였고, 관동성 영해현의 官 船 은 길이 7발 너비 2발 반에 7명 이 승선하였으며, 그리고 직예성 천진부 私 船 은 길이 10 丈 너비 1 丈 6척으로, 29명 이 승선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로써 보건대 18~19세기 중국 표류민들은 대형 선박보 다는 소형 선박이나 중선을 이용하여 어업과 운송업, 무역업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바닷가 연해변에서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던 주민들은 개인 선박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선이나 사선을 대여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중국의 선박 임대료에 관한 것이다. 중국 표류민들은 주로 사선을 이용하였지 만, 필요에 따라 官 船 私 船 商 船 등을 임대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례가 조선에 표착한 중국 표류민의 문정별단에서 확인된다. 일례로 17세기 말엽 산동성 등 주부의 경우 10인이 승선하는 관선을 1년 단위로 대여하는데 드는 비용이 銀 子 15냥 이었다. 21) 또 18세기 초에 복건성 흥화부의 私 船 임대료는 선박의 크기에 따라 대선 은 은화 30냥, 중선은 은화 15냥, 소선은 은화 7~8냥 등으로 확인된다. 22) 반면 선박 19) 비변사등록 珍 島 漂 人 問 情 別 單. 20) 비변사등록 茂 長 漂 人 問 情 別 單. 21) 비변사등록 ) 비변사등록 1794,11. 7.
84 76 - 매입가에 관한 정보는 총 2건이 확인되는데, 하나는 1830년에 산동성 등주부 사선으 로, 표류당시 승선자가 35명이었다. 이 선박은 은자 40냥에 선주가 매입한 것으로 확 인된다. 그런가 하면 1837년에 복건성 장주부에서는 건조된 지 17년 된 선박을 은자 15,000냥에 매입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동시대 지역마다 선박 가격이 은자 40 냥~15,000냥 정도인데 반하여 선박 대여료는 최고 30냥, 적게는 7냥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23) 넷째, 空 客 과 선박요금에 관한 것이다. 공객은 소위 客 人 이라고도 칭하는데, 승선자 가운데 뱃사람을 제외한 일반인들을 지칭한다. 공객의 용례는 <표5>의 15번 사례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1794년 10월 20일 산동성 등주부의 사선이 봉천부로 땔감과 식량을 구입하러 출항하였는데, 이 배에 승선자가 51명이었다. 이 가운데 뱃사람이 7 명이고, 나머지 40여명이 空 客 이었다. 여기서 공객이란 村 民 으로 동서를 왕래하며 때로는 매매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다 라고 기술되어있다. 즉 일반인으로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지칭하고 있었다. 당시 산동성 등주부에 흉년이 들어 r경제생활이 어려웠는데, 때마침 봉천부는 풍년이 들어서 등주 사람들이 먹거리를 찾아 봉천으로 이동하다가 표류를 당한 것이다. 이 배의 선표는 黃 字 제19 호, 선주는 장이순이었다. 선주는 공객들에게 셋돈[ 雇 錢 ]을 받았다. 당시 공객의 뱃삯 [ 船 雇 錢 ]은 大 錢 (필자:100개 100)의 경우 10 吊, 小 錢 (필자:16개 100)으로는 43 吊 이었 다. 24) 다만 셋돈은 개인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예컨대 1809년 1월에 산동성 등 주부의 商 船 의 경우 짐이 있고 없고 따라 차등을 두고 뱃삯을 받았다. 즉 화물이 있 는 客 商 의 경우 大 制 錢 (필자:명청대 동전)으로 134,480개를 받고, 화물이 없는 空 人 의 경우는 동전 1,000개, 1,320개, 1,640개 등으로 세분하여 각출한 것으로 확인된 다. 25) 2) 商 船 을 통한 교역 앞서 중국 표도민들이 선박을 대여하여 어업과 상업에 종사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어느 지역의 어떤 산물을 교역하기 위해 바다를 항해하였을까? 비변사 문정별단을 토대로 교역의 실태를 정리해 보면 다음 <표6>과 같다. <표6> 문정별단을 통해본 중국 표도민들의 지역별 선적화물 23) 비변사등록 ) 비변사등록 馬 梁 鎭 漂 人 問 情 別 單. 25) 비변사등록 奉 山 面 漂 到 大 國 人 問 情 別 單.
85 77 - 구분 년대 출항지 목적지 경유지 비고 지명 화물 지명 화물 지명 화물 산동성 산동성 숯 등주부 등주부 黃 城 島 산동성 두병:콩을 갈아 (판매) 강남성 산동성 보정부 편으로 말 면화 炭 남통주 내양현 산동성 대추 린것(거름 대산구 (선적) 용) 黃 豆, 豆 餠 복건성 산동성 사탕, 粉 乾, 柴 천주부 내주 草, 食 米 강남성 남금주 靑 豆, 防 風 -방풍 (약재) 소주부 - 茶 布 (판매) 복건성 강남성 산동성 茶, 布 - 豆 餠, -거름용 흥화부 상해현 교주부 淸 白 豆 (선적) 붉은팥,면 복건성 천주부 砂 糖, 茶, 粗 碗 산동성 화,목이버 섯,율무쌀 繭 紬 봉천부 해성현 漁 船 산동성 생선 절강성 영파부 강남성 소주부 출항 강남성 상해현 화물선적 산동성 石 島 - 茶 葉 절강성 항주 산동성 등주부 봉천부 쌀 매입 강남성 소주부 출항 천진부 대추,잉어 - 鹽 魚 : 和 羅 魚, 봉천부 금주성 鹽 魚 산동성 판매 영해현 노탄 장 주 白 布 袍 -편지 1통 - 鹽 魚 糧 食 장부 직예성 천진부 복건성 면화 대추 광주성 교역 산동성 등주부 -천진의 배가 동안현 고용 -동안현의 배가
86 78 - 천주부 광동성 광주부 천진현 선원 고용 산동성 ( 內 洋, 등주부 고기잡이 그물) 복건성 장주부 곡물 매입 금주부 쌀, 山 繭, 면화,연초 산동성 등주부 空 客 봉천부 곡물, 땔감 강남성 소주부 盧 竹 산동성 내양부 황두 -간찰:황두매입 하여 발송부탁 강남성 태창주 화물 금주부 황두 강남성 -선세:콩 1석에 7전 5푼 -간찰 2통 산동성 등주부 繭 包,찰 수수,옥 수수, 雜 粮 包, 衣 服 包 산동성 영해주 화물 (판매) 紅 黑 棗 (대추) 복건성 천주부 臺 灣 糖 屬 직예성 천진 복 건성 乾 葡 萄, 酸 乾 (매실) 乾 小 魚 白 米 燒 酒 -팽호에서 좌우영에 납세곡 -해징현 납세곡 茶 葉, 黃 豆, 白 米, 복건성 천주부 臺 灣 糖 屬 강남성 송강부 봉천성 서금주 鹿 肉 餠, 牛 觔, 木 耳, 遠 志, 甘 草, 丹 蔘, 赤 芍 藥, 菓 子, 字 號, 防 風 복건성 복건성 장주부 (고용) 금주 콩,잡화 산동성 강남성 소주부 糖 貨 개평현 당화 (판 매) 콩(매입) 해징현 강남성 진강부 공유현 강남성 청구포 콩깻묵 상해현 콩깨묵 판매 靑 -편지1통 - 上 海 에서
87 79 - 관동성 대장하 豆 매입 6개월 行 商 절강성 영파부 술 천진 (체류) 산동성 대산 대추 산동성 등주부 돈 南 城 면포,면화 매입 복건성 장주부 광동성 조주부 糖 천진부 영원주 장주부 - 糖 (판매) -술(선적) -대추 (선적) 산동성 봉황성 수양부 선박 대여업 금주부 海 關 口 靑 豆 - 商 人 은 영파부 사람 산동성 등주부 운송업 奉 天 府 巖 河 口 양곡 - 遊 氷 으로 항해 불가 -생선값 산동성 등주부 생선 老 口 灘 생선 (하적) :242 吊 (1적:1000 錢 ) -편지 12봉 대추,살구 강남성 소주부 皇 糧 천진 皇 糧 (하적) 산동성 烟 台 鎭 씨,향료,배, 홰나무꽃, 팥, 豆 餠, 粉 條 -무역상인(8명) 탑승 산동성 등주부 靑 豆 봉천부 洋 河 口 청두 (발매) 봉천부 문등현 黃 豆, 小 米, 강남성 송강부 곡물 봉천부 곡물 강남성 芝 麻, 瓜 子, 豬 肉, 牛 油, 胡 桃 油 산동성 영성현 鹽 魚 해상현 鹽 魚 판매 江 北 營 船 港 면화, 오동나무기 름, 산동성 등주부 大 孤 山 ( 邑 ) 包 米 산동성 산동성 등주부 漁 船 생선 -조선 고군산진 조업 중 표류 - 所 藏 :홍삼, 炒 광동성 조주부 (출항) 暹 羅 國 ( 泰 國 ) (이동) 산동성 烟 台 광동성 콩 餠,백미, 布 被, 乾 飯,양청소갑,유 리호, 銅 碗, 銅 茶 罐,양철통,개(1),
88 80 - 고양이(1) 위의 <표6>에 제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중국 표류민들은 지역간 교역이나 行 商 을 목적으로 바다를 항해하였다. 각 지역별 입지와 토산물을 고려하여 항해목적을 검출 해보면 다음의 사항이 주목된다. 첫째, 산동성의 토산물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산동성의 토산물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생선과 밭에서 생산된 靑 豆 와 대추가 대표 산물이었다. 산동성 주민들의 고기잡이 풍경은 문정별단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그 사례를 소개하면, 1786년 3 월 11일, 전라도 영암 추자도에 중국 산동성 등주부 영성현 주민 4명이 표착해왔다. 이들은 모두 영성현 성밖의 거주민들로, 瓦 屋 石 村 주민 4명(장원주 풍재효 장원서 이 봉동), 白 奉 村 주민 5명(허덕순 허덕평 이사원 장원상 이봉옥), 그리고 인근 鵞 島 에 사 는 섬 주민 1명(이사원) 등 모두 9명이었다. 이 가운데 장원주 장원서 장원상은 3형제 이고, 이봉동과 이봉옥이 형제, 허덕순과 허덕평은 종형제간이었다. 즉 인근 마을에 거주하는 집안사람들끼리 소형선박과 그물을 이용하여 고기잡이를 하다가 표류된 사 례이다. 26) 이외에 산동성의 산물은 임야와 밭에서 생산되는 대추, 살구씨, 배, 목이버 섯, 율무, 豆 餠 등이 주목된다. 이 가운데 두병은 콩을 갈아서 편으로 만들어 건조한 것인데, 주로 강남성과 복건성 사람들이 거름용으로 사용하였기 위해 교역해갔다. 27) 둘째, 강남성 사람들의 교역이다. 조선에 표착한 중국 표도민 사례 가운데 강남성 사례가 가장 많다. 이들은 주로 선박을 이용하여 교역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 로 1732년 1월 7일 비변사 보고에 따르면, 전라도 진도로 강남성 양주부 주민 16명 이 표착해 왔다. 이들은 모두 梢 工 으로, 평상시에 농사를 짓기만, 선주에게 고용되어 장기간 운송업에 종사하였다. 당시 진도에 표착한 강남성 사람들의 문정 내용이다. 雍 正 10년(1733) 정월 20일 徽 州 商 人 오인칙이 우리를 고용하여 면화 253포를 선적하도록 하였습니다. 남통주에서 출발하여 동년 정월 29일 산동성 萊 陽 縣 에 짐 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2월 28일에 산동 내양현을 출발하여 3월 28일 關 東 城 南 金 州 지방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또 蘇 州 府 관할인 太 倉 州 의 상인 周 豹 文 에게 고용되어 炭 380짐을 싣고 5월 18일에 남금주를 출발하여 6월 17일에 산동성 寶 定 府 의 관할인 天 津 衛 에 짐을 내려놓았습니다. 또 우리는 상인 徐 夢 祥 에게 고용되어 산동성 大 山 口 海 豊 縣 에 도착하여 대추 287석 1두를 싣고 10월 12일 해풍현을 출 발하여 강남성으로 돌아오던 중 10월 14일 大 洋 중에서 갑자기 악풍을 만나 귀국에 표착하였습니다. 28) 26) 비변사등록 ) 비변사등록 ) 비변사등록 珍 島 漢 人 問 情 別 單.
89 81 - 위의 사료에서 보건대, 강남성 주민 16명은 안휘성 선주, 강남성 선주, 산동성 선주 등 3인에게 고용되어 1년동안 운송업에 종사한 것이다. 이들이 고향을 떠난 것을 1월 이었고, 10월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표류된 것으로 확인된다. 즉 첫 번째 안휘성 선주 가 이들을 고용한 것은 1월 20일부터 3월 28일까지이다. 두 번째 강남성 선주는 3월 28일~6월 17일, 3번째 산동성 선주는 6월 17일~10월 12일 등 약 3-4개월씩 선원을 고용한 것이다. 이들이 교역한 물산은 1강남성의 면화를 선적하여 산동성의 래양현 에 하적하고, 2관동성 남금주에서 숯을 선적하여 산동성 보정부 天 津 衛 에 하적하고, 3산동성 대산구에서 대추를 선적해서 강남성으로 이동하던 중 표류되었다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강남성에서 출항하는 사선에는 무역 상인이 항상 탑승하는 사례가 많았 다. 29) 면화 이외에 강남성의 산물은 豬 肉, 牛 油, 胡 桃 油, 黃 豆, 盧 竹 등을 생산하였으 며, 이 물산은 산동성 관동성 봉천부 등지로 교역되었다. 셋째, 복건성 주민들의 운송업이다. 복건성은 대만의 행정권을 관할하였기 때문에 교역은 물론 화물 운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대표 산물은 糖 茶 布 등이며, 생필 품은 멀리 산동성에서 조달해왔다. 예컨대 1756년 1월 복건성 천주부에서 사탕을 선 적한 관선이 곧장 산동성 내주로 가서 사탕을 판매하고, 그곳에서 黃 豆 豆 餠 柴 草 등 을 선적해서 돌아왔다. 30) 그런데 복건 사람들은 이렇듯 단순히 지역 물산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교역하는데 그치지 않고, 또 하나의 운송업무를 동시에 추진하였다. 즉 1813년 복건성 천주부 동안현 사람들이 전라도 부안 격포에 표착하였을 때 작성된 문정별단에 의하면, 당시 중국 표도민들은 2장의 照 標 를 소지하고 있었다. 하나는 閩 海 關 에서 발급한 照 票 에 天 字 제23호로 적혀있고, 다른 하나는 해징현에서 발급한 照 牌 에 靜 字 제326호로 기재되어 있었는데, 세곡 운반 명령서였다. 즉 대만 澎 湖 守 備 衙 門 에 납부할 쌀 3,340석 가운데 260석을 운반하라는 것 내용이다. 당시 세곡운반 은 사선이 관선보다 운송비가 저렴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31) 결과적으로 복 건성 사람들은 지역 토산물인 사탕을 선적하여 직예성 천진부의 과일 생선 쌀 술 등과 교역하고, 동시에 팽호도 아문에 전달할 쌀을 함께 운송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국의 연안항로를 따라 남쪽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쪽으로 행상을 나갔던 선박들이 해상에서 기상악화로 조선 서해 해역에 표착한 것으로 보인다. 29) 비변사등록 ) 비변사등록 ) 비변사등록 扶 安 格 浦 漂 到 淸 人 問 情 別 單.
90 4. 맺음말
91 83 - 토 론 문 조선의 對 淸 關 係 와 羅 州 唐 津 사람들 32) 토론자: 원종민(사이버한국외대 중국어학부 교수) 연구 주제로서의 漂 流 는 이미 2000년대 초부터 한일관계사학회를 중심으로 활발 히 연구되어 조선시대 한일표류민 연구 (국학자료원 2001)와 같이 주목할 만한 성과 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동아시아 해역에서 발생했던 수많은 표류사고 중에서 주로 한일 양국 사이에 발생했던 표류사고에 중점을 두었다는 한계가 있었습 니다. 이에 반해 한중 양국 사이에 발생했던 표류사고에 대해서는 일본의 마츠우라 아키라( 宋 浦 章 ), 대만의 劉 序 楓 등과 같은 국외 학자들이 먼저 연구를 시작하였고, 2000년대 중반에 들어와 국내의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습 니다. 한중 양국 간에 발생했던 수많은 표류사고는 朝 鮮 王 朝 實 錄, 備 邊 司 謄 錄, 日 省 錄 등과 같은 관찬사료에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濟 州 啓 錄 같은 지방사료, 이 강회의 雲 谷 雜 楮, 柳 菴 叢 書, 이익태의 知 瀛 錄, 이원조의 凝 窩 全 集 등과 같은 개인 문집에도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어학계가 이미 한일관계사학회에서 거둔 연구 성과와 같이 체계적인 정리를 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 겠습니다. 이런 차제에 한일관계사학회에서 발표되는 김경옥 교수님의 논문 조선의 對 淸 關 係 와 羅 州. 唐 津 사람들 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김경옥 선생님의 논문을 읽고 몇 가지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조선의 對 淸 인식 조선의 對 淸 關 係 와 羅 州. 唐 津 사람들 이라는 논문의 제목으로 보아서는 표류사고 라는 매개를 통해 조선의 대청관계가 어떻게 확립되었고, 또 그 관계가 확립되는 가 운데 청대 중국인들이 주로 표도했던 나주,당진 지역의 사람들이 어떤 역할을 했으며 또 어떻게 그 표도 중국인의 영향을 받았는가를 살펴보겠다는 저자의 의지가 반영된 걸로 보입니다. 그런데 논문 전체의 구성과 내용을 보면, 조선의 서해안으로 표도해
92 84 - 온 중국 선박의 표류사고 발생 시기, 출항지, 출항목적, 선적물 등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습니다. 제4장에서 問 情 別 單 에 기록된 조선인의 심문 내용을 조선의 대청인식이 라고 하셨는데, 김경옥 선생님은 당시 조선의 대청관계와 인식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또 제목에서 언급하신 나주, 당진 사람들 과 조선의 대청인식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 계가 있는지요? 2.<표1>을 보시면 중국 산동성 선박이 조선으로 표도해 온 경우는 강희제 1662년 부터 광서제1895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26회였습니다. 그런데 논문 5-6쪽에서는 단 2 건의 산동성 출신 표류사고자의 심문내용만을 가지고 산동성 전체의 자연환경과 경제 상황, 선박의 임차비용 등을 설명하고 계신데 다소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사고 a-1은 1684년 2월 30일에 기록된 備 邊 司 謄 錄 의 漂 漢 人 問 情 別 單 이고, 사고 a-2는 1880년 5월 5일에 기록된 靈 光 郡 에 표류한 중국인들을 問 情 한 결과에 대해 別 單 으로 써서 들인다는 議 政 府 의 啓 와 그 別 單 의 내용입니다. 두 표류사고의 시대 차이가 200년이나 됩니다. 이에 대해 교수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3.청대의 지방 행정구역 체계와 국내무역선의 활동을 이해하시고, 問 情 別 單 내용 의 현대 국역문에서 발생하고 있는 오류 문제에도 주의를 하시면 더 훌륭한 논문이 될 것 같습니다. 4. 아래는 교수님 논문의 완성도를 위해 참고하시라는 뜻에서 제가 알고 있는 부분 을 몇 가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9쪽 金 : 조선 해역에 표착한 중국 선박에 대한 용례는 각종 연대기에 漢 船 唐 船 魚 採 船 挾 船 商 船 異 樣 船 私 船 官 船 荒 唐 船 淸 國 船 中 國 船 舶 大 淸 國 商 船 大 淸 國 貿 易 船 大 國 人 商 船 등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관찬자료에 표기된 용례를 기준으로 시기별 추이를 정 리해 보면 다음 <표4>와 같다. 元 : 선박을 구분하는 기준이 없이 사료에 기록된 선박에 대한 기술용어가 혼재해 있어 독자의 입장에서 이해가 어려울 수 있다는 느낌입니다.
93 85 - 국적을 기준으로 한 구분: - 漢 船 唐 船 淸 國 船 中 國 船 舶 大 淸 國 商 船 大 淸 國 貿 易 船 大 國 人 商 船 :중국배 - 荒 唐 船 異 樣 船 異 國 船 : 국적을 알 수 없는 배 황당선( 荒 唐 船 )이란 우리 나라 연해에 출몰하던 소속 불명의 외국 선박을 이르는 용어로서 후에는 서 양선박 역시 조선 연안에 출몰하게 되면서 이양선( 異 樣 船 ) 또는 이국선으로 불렀습니다. 朝 鮮 王 朝 實 錄 에 荒 唐 船 이라는 명칭은 국역본에 88번, 원문에 89번이 검색됩니다. 황당선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조선 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은 중종 92권, 35년(1540 경자 / 명 가정( 嘉 靖 ) 19년) 1월 19일(임자) 2번째 기 사 입니다. 선박의 소유주를 기준으로 한 구분: - 私 船 官 船 선박의 크기를 기준으로 한 구분: - 挾 船 (큰 선박에 종속된 작은 배) 선박의 기능을 기준으로 한 구분: - 魚 採 船 商 船 大 淸 國 商 船 大 淸 國 貿 易 船 大 國 人 商 船 5쪽 金 : "우리들 세 사람 중 하나는 張 文 學 이고 나이는 29세이며 離 城 에서 40리 되는 劉 家 王 舍 莊 에 살고 있다. 다른 하나는 顧 一 論 으로, 나이는 28세이고, 마지막 李 守 長 의 나 이는 23세이다. 모두 綠 楊 舍 에 살고 있는데 세 사람 모두 登 州 府 蓬 萊 縣 관할의 백 성이다." (원문) 答 : 俺 等 三 人, 一 則 張 文 學 年 二 十 九 居 在 離 城 四 十 里 劉 家 王 舍 莊, 一 則 顧 一 論 年 二 十 八, 一 則 李 守 長 年 二 十 三 俱 在 離 城 四 十 里 綠 楊 舍, 而 三 人 皆 是 登 州 府 蓬 菜 縣 所 管 之 民. 元 : 중국어에서 離 는 ~으로부터, ~에서 라는 의미의 전치사로 居 在 離 城 四 十 里 劉 家 王 舍 莊 은 城 으로부터 40리 떨어진 劉 家 王 舍 莊 에 살고 있다 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 같 습니다. 조선시대의 문헌을 현대 국어로 국역하는데 간혹 오류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료를 국역하시는 분들이 중국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국역본을 인용할 때 오역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할 수 있어 주의해야 합니다.
94 86-13쪽 金 : 다음 11번 사례는 관동성 영해현 33) 소속 官 船 으로, 선박의 길이는 7발, 너비는 2발 반, 돛대 2개로 구성되었다.... 선적화물은 鹽 魚 300여 마리였다. 이 선박의 최종 목적지 는 산동성 봉천부로, 이곳에 가서 배에 선적한 염어를 판매할 계획이었다.... (문정별단 원문) 問, ~~, 住 在 何 省 何 府 何 縣 答, ~~~ 俺 們 七 人, 共 住 奉 天 府 金 州 城 寧 海 縣 問, 你 們 因 何 事 往 何 處 答, 要 賣 鹽 魚, 往 山 東 地 方 矣 問, 你 們 何 月 何 日, 從 何 處 乘 船, 何 日 何 時, 漂 風 來 泊 於 我 境 耶 答, 今 年 九 月 十 四 日, 俺 們 自 寧 海 縣 老 灘 開 船, 二 十 日 到 長 洲 地 方, 忽 値 西 風 大 作, 漂 蕩 於 大 洋 元 : 7인 표류민의 거주지는 봉천부 금주성 영해현이 맞으며, 오늘날의 중국 대련시 지 역입니다. 조선 관원이 말한 關 東 省 이란 산해관 동쪽을 말하며, 지금의 요동반도 일 대를 이르는 별칭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표류민은 조선에서 봉천부 일대를 관동성 이라 부르는 걸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진술을 조선인에 맞게 고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거짓 진술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위 대화기록을 보면, 중 국 표류민들은 산동성으로 염장생선을 팔러가고자 한다 했습니다. 따라서 13쪽에서 기술한 이 선박의 최종 목적지는 산동성 봉천부로, 이곳에 가서 배에 선적한 염어를 판 매할 계획이었다. 에서 최종목적지는 산동성 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산동성과 봉천부(오늘날 요녕성)는 발해만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 지역입니다. 18쪽 金 : 33) <표5>의 11번 사례에서 비변사의 심문과정에서 거주지에 대한 표류민의 거짓 진술이 확 인되었다. 문정 초기 단계에 중국 표류민은 거주지를 봉천부 금주성 이라 하였으나, 중국 의 행정편제를 파악하고 있던 비변사 관원의 질문에 관동성 영해현 으로 바꾸었다. 이에 대해 중국 표류민은 농사짓고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문자를 읽고 쓸 수 없어서 그렇게 진술하였다 라고 해명하였다. 본 자료는 문정별단의 내용을 그대로 이기하 였다.
95 87 - 면화 이외에 강남성의 산물은 豬 肉, 牛 油, 胡 桃 油, 黃 豆, 盧 竹 등을 생산하였으며, 이 물산은 산동성 관동성 봉천부 등지로 교역되었다. 元 : 관동성과 봉천부는 거의 동일한 지역을 말합니다. 金 :이들은 모두 梢 工 으로, 평상시에 농사를 짓고, 필요시 선주에게 고용되어 장기간 운 송업에 종사하였다. 元 : 梢 工 은 艄 公 을 말하며, 키잡이,조타수 등의 뱃사람 을 말합니다. 27쪽 金 : 이 가운데 두병은 콩을 갈아서 편으로 만들어 건조한 것인데, 주로 강남성과 복건 성 사람들이 거름용으로 사용하였기 위해 교역해갔다. 元 : 豆 餠 은 黃 豆 에서 콩기름을 짜고 난 콩 찌꺼기를 떡 모양으로 빚은 것으로 주로 비료용으로 매매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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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89 - 제4주제 조선의 對 日 關 係 와 東 萊 사람들 양흥숙(부산대) 목차 1. 머리말 년 丁 未 約 條 이후의 동래와 부산포 3. 임진왜란 후 교류 공간으로서의 부산포 4. 교류의 장, 開 市 를 출입하는 동래 사람들 5. 맺음말 1. 머리말 근대 개항 직전 강화도에 일본 선박이 출몰하자 이에 대해 조정의 논의가 잦았다. 1876년 1월 국가의 門 戶 가 되는 지역을 왜인이 마음대로 들어온 것은, 침범을 하려 는 것인가? 말썽을 꾸미려는 것인가? 修 好 하러 왔다고 말을 하는데, 원래 정해놓은 東 萊 의 倭 館 을 버려두고 멀리 바다를 건너 강화부로 들어왔다 라는 34) 조정의 논의 속 에서, 이양선 출몰을 그동안 많이 경험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동래는 여전히 對 日 關 係 의 창구로 상징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근대 개항 이후에도 왜관과 그 주변은 일본거류지 뿐 아니라 각국의 조계가 구획되고, 각국의 사절이 체류하는 곳이 었으므로 다른 나라를 접하고 있는 경계 의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여전히 邊 境, 關 防 34) 비변사등록 고종 13년(1876) 1월 20일.
98 90 - 을 유지하는 중세의 제도가 관철되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하는 양상을 보였던 곳이 다. 경계 지역에서의 변화는 개항 이후의 상황만은 아니었다. 조선 초기, 1407년 남해안(제포, 부산포)에 일본인이 거주할 수 있는 포소를 지정한 이후, 倭 里, 倭 館 이 들어섰고, 이 공간은 다른 나라를 접하고 있는 경계 였고 異 文 化 의 初 入 地 이자, 경험지대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내내 다른 나라의 사람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하는 것은 동 래 사람들에게는 낯선 것은 아니었다. 주로 볼 수 있는 외국인이 일본인이었다가, 근 대 개항 이후 중국인, 서양인으로 다양해졌지만, 異 文 化 를 만나는 것은 흔히 겪는 일 상적인 것이었다. 일본과의 외교와 무역이 이루어지는 왜관, 왜관 외곽의 부산진, 행정관리 기구인 동 래부를 모두 포함하는 동래 는 조선 안에서 열린 공간이자 關 防 의 공간이었다. 그러 므로 동래 사람들 중에는 왜관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거나, 시장을 통해 일본인과 소통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통신사 파견과 관련하여 통역을 하거나 뱃사공 등으로 참 여하여 異 國 일본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글에서는 왜관과 관련해서 출현되는 동래 사람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 언급하는 동래 사람은 잡상, 잡류, 잡인 등으로 구분되면서 개시나 조시 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 직임과 직업은 분명하지 않지만 일본인과의 밀착된 관계로 대부분 범죄자로 치부되는 일반 민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잠재적 범죄자로 치부되거 나, 폐단의 주동자들로 지목이 되어 사료 상에 나타나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이들의 존재는 왜관이 유지된다고 하는 긴 시간 속에서, 邊 境 이라는 통제되어야 하는 공간 속에서, 지역사람들이 어떻게 왜관을 인식하는가, 왜관과 어떠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 는가에 대한 문제를 던져준다. 외교와 무역이라는 큰 구조 속에서 지역 사람은 과연 무엇을 알 수 있었을까? 우선 왜관이 부산포로 단일화되는 것에 주목하였다. 삼포왜관 가운데 제포보다 왜 관의 규모나 형세가 약했던 부산포에 단일 왜관이 들어서면서 외국 물문물이 들어오 는 유일한 포구로 변화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국교가 재개되는 과정에서 양국 무역은 허락되고 무역에 기반한 관계들이 형성될 있었다. 국교가 재개된 후에도 삼포 왜관 체제로 환원되지 않고 부산포의 왜관은 그대로 유일함 유지하였다. 이러한 왜관 의 단일함, 유일함 속에 동래 사람들의 동태를 찾아보고자 한다 년 丁 未 約 條 이후의 동래와 부산포
99 년 제포와 부산포에 일본인이 거주한 이래, 조선전기 왜관의 경관과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미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35) 부산포에만 왜관이 설치되는 '단일 왜관' 체 제는 조선후기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1547년 정미약조 체결 이후였다. 그러므로 조선 조정의 관심이나 통제도 부산포에 집중되면서 동래의 邑 格 도 달라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인은 부산포로 집중적으로 모였고, 이들을 상대하던 조선측 상인도 부산포로 모였다고 생각된다. 일본인 수만 보면 1494년(성종 25) 10월 경상감사 李 克 均 이 조사한 것에는 제포의 경우 247호에 남녀(승려 포함) 2,510명이며, 부산포의 경우 127호에 남녀(승려 포함) 457명, 염포의 경우 51호에 152명이었다. 36) 이 인구수는 그동안 삼포왜인 수를 조사 한 수치에서 가장 높은 것이다. 1547년 이후에는 부산포왜관의 인구수가 크게 증가하 였다. 1551년 경상감사의 장계에 따르면 부산포왜관에 함부로 머물고 있는 수가 아닌 현재 머무는 자[ 時 存 者 ]가 1,300여명이었다. 또한 일본인은 바다를 건너와서 부산포에 서 모여서 대기하는데 한꺼번에 올 때에는 1,000여명에 이른다는 의논이 있었다. 37) 그러므로 급증한 인구증가로 부산포왜관의 포구의 확대, 倭 里 의 조밀함이 예상되지만 이 시기 부산포왜관의 경관을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일본인이 한꺼번에 모이다 보니 조선 조정에서의 동래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높아 졌다. 삼포왜란과 같은 변란이 부산포왜관에서 일어났을 경우, 부산진 한 곳에서 일본 인을 다 막아낼 수 있을까라는 關 防 에 대한 우려가 컸다. 왜관 일본인 수보다 부산진 방수군의 수가 훨씬 적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절 접대 등으로 동래부가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빠질 수 있었으므로 공물을 10배 정도 蠲 減 시켜 주고, 또 추가로 공물 견감책을 시행하는 등 38) 동래부가 안정되도록 하는 방안도 모색하였다. 부산포왜관은 단일 왜관이 되기 전에도 규모는 적었지만 일본인에게는 잘 알려진 곳이었다. 1407년 일본인이 머물 浦 所 를 지정하기 전에, 이미 일본인들이 각 포에 흩 어져 정박해서 조선의 兵 船 허실을 엿본다는 기록에서 39) 지정 이전에 부산포는 일본 인들에게 노출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포소로 지정된 이후에는 上 京 道 路 의 출 발지점이었고 동래온천과 관련해서도 일본인에게는 인기가 있는 곳이었다. 광평대군 35) 조선전기 부산포왜관과 그 주변에서 동래사람과 일본인과의 관계는 다음의 논문이 참조된 다. 김동철, 15세기 부산포왜관에서 한일 양국민의 교류와 생활, 지역과역사 22, ) 성종실록 성종 25년(1494) 10월 25일. 中 村 榮 孝, 村 井 章 介 등의 책에 명기된 각 왜관 의 인구수가 실록 자료와 차이가 있다. 이후 이를 참고한 논문과 저서에서 숫자 오기가 반복되고 있어 바로잡고자 한다. 37) 명종실록 명종 6년(1551) 10월 24일. 38) 명종실록 명종 8년(1553) 5월 15일. 39) 태종실록 태종 7년(1407) 7월 27일.
100 92 - (세종의 아들) 부인이 동래온천에서 목욕을 하자 일본인의 온천 출입이 금지되고, 동 래온천을 경유하여 상경하려던 일본인들이 부산포왜관에서 지체하는 상황 40) 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동래 알려지기'가 이미 일본인들에게 익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동래 사람들에게 일본인이, 일본인에게 동래 사람들이 보여지는 빈도가 많았을 것으 로 보인다. 제포왜관에 비해서 규모가 적지만 釜 山 아래 항거왜인이 거주하면서, 동 래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왔다. 삼포왜란이 일어나기 전 제포에서는 일본인이 조선인과 형제와 같은 親 愛 함을 보였 고, 그런 관계를 바탕으로 밤낮없이 왕래하는 모습이 있었다. 부산포에서도 이러한 상 황은 비슷하게 나타났다. 조선인이 일본인과 거래할 때 신뢰를 얻곤 하는데, 신뢰를 얻는 과정을 보면 동래 사람들의 집에 작게는 1, 2년 많게는 3, 4년씩 머물면서, 酒 食 을 함께 하면서 신뢰로 맺어졌다. 즉 왜관과 인근한 조선인 마을은, 가까워서 일본 인이 왕래하기 쉬운 이점이 있었다. 관계를 형성하고 신뢰를 가지는 데에는 지리적 위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서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낯섬'을 무릅쓰고 맺어지는 데에는 함께 거주하고 언어를 같이하고 酒 食 으로 상징되는 '서로 이해하기'와 문화를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금지된 물품까지 거래를 맡아 주 는 경우가 있어 共 生 의 관계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이렇게 형성된 관계는 他 日 相 見 之 資 41) 즉 다음 거래를 위한 밑천이 되면서 관계를 유지시켜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관계맺기는 부산포왜관으로 왜관이 단일화된 1547 년 이후에는 달라졌을까? 두 나라 사람들과의 관계와 아울러 왜관과 그 주변 지역의 문화는 달라는진 것이 있을까? 조선 조정의 시각에서 단일왜관을 보자면 세 곳을 통 제하던 방식을 한 곳으로 집중해서 통제하는 것이었다. 1567년 제포 재개방 논의가 나왔을 때에도 제포의 지형적 단점이 크게 부각되어 끝내 개방되지 못하였다. 즉 다 도해에 위치하여 일본 선박의 은닉, 약탈 행위 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이었 다. 부산포가 왜관의 입지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왜관 앞의 바다에는 일본인이 왕 래하는데 숨을 곳이 없다는 점이었다. 42) 즉 關 防 의 이유였다. 그럼 지역의 시각에서 보면 단일화 라는 사건은 동래라는 지역과 지역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우선 제도적으로 변화가 있었다. 東 萊 府 誌 (1740) 建 置 沿 革 에는 明 宗 祖 陞 爲 府 使 라고 하여 동래는 客 使 가 왕래하는 첫길[ 初 程 ]이고, 事 體 가 의주와 같아서 府 使 로 승 격하고 당상 文 武 官 을 뽑아서 보내어 邊 城 을 누르고, 객사를 응접하도록 하였다 43) 고 기록되어 있다. 왜관이 단일화되면서 그만큼 동래의 역할이 많아졌을 뿐 아니라 역할 40) 단종실록 단종 1년(1453) 4월 24일. 41) 중종실록 중종 4년(1509) 3월 24일. 42) 명종실록 명종 2년(1547) 2월 13일, 22년(1567) 5월 16일. 43) 東 萊 府 誌 (1740) 建 置 沿 革.
101 93 - 이 강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방관의 지위부터 올렸던 것이다. 1544년 사량진왜변이 발발한 후, 정미약조를 체결하기 전에 이미 제포를 폐쇄하고 부산포만 여는 것이 조선 조정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그 논의에서 동래 관아에는 各 司 노비들을 더 충원하고, 부산포에 土 兵 을 늘이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그 뿐 아니라 더 이상 제포가 개항되지 않기 때문에 제포첨사를 당상관으로 임명하지 않았고, 제포 와 웅천의 군졸을 줄이는 조치가 취해졌다. 삼포왜관 시기에는 제포를 관할하는 웅천 현 수령은 가족을 동반하고 가지 못했지만 동래현은 가족을 데리고 살 수 있었다. 그 런데 왜관이 부산포로 단일화되면서 동래의 수령도 제포와 같이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없었다. 더욱이 부산포로 왜관이 단일화된 이후에는 일본인이 올 수 있는 유일한 곳 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軍 鎭 을 강화하고 수군 배치를 늘이고, 경상좌수영을 移 設 하자 는 것도 논의되었다. 무엇보다 조일무역의 창구가 되면 동래는 예단품, 무역품 등의 수송에 많은 인력을 배치해야 하므로 이웃고을에서 운송의 부담을 나누어 가지도록 하는 방안, 노비 80명 충원 방안이 구체화되었다. 44) 이와 같이 1544년 사량진왜변, 1547년 정미약조 체결을 계기로 왜관은 부산포 1곳 에만 있게 되고 이에 따른 행정제도, 관방제도가 변화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래는 邑 格 이 縣 에서 府 가 되었다. 한편 개항 포소라는 외형적 성격은 변함이 없었으나 조일 관계에서 차지하는 지역의 위상이 높아졌다. 무엇보다 동래 사람들은 제포, 염포와 달리 일본인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고 연속 될 수 있었다. 국가적으로는 16세기에 삼포왜란, 사량진왜변, 을묘왜변 등 크고 작은 왜변으로 불안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나 동래 지역에서는 국가적 양상과는 다른 양상이 나타날 수 있었다. 1547년 이후의 부산포왜관과 주변 지역의 상황을 알 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조종조에서 倭 人 을 접대한 것이 지금까지 2백년이 되었으나 수령들이 손을 잡 고 매매하는 것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近 年 이래 탐욕스런 풍조가 크 게 일어나고 교활함이 함부로 생겨나서 이익이 있는 일이면 百 計 로써 이익을 도 모합니다. 倭 寇 들이 海 路 를 통하여 중국을 도적질한 후 明 珠, 寶 貝, 진귀한 비단, 金 銀 이 모두 釜 山 浦 에 모입니다. 그러므로 수령이나 변방의 장수인 자와 그 상인 들이 米 布 를 실어가지고 끊임없이 本 鎭 (부산진)으로 폭주합니다. 심지어는 他 道 의 수령들까지도 배로 운반하거나, 육지로 수송해 와서 物 貨 를 교역하여, 남쪽 백성 의 命 脈 이 모두 왜구의 손에 들어가도록 합니다. 만약 이 폐단을 혁파하지 않으 면 뒷날 끝없는 우환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僉 使 柳 忠 貞 은 한 군진의 主 將 으로서 마땅히 금하고 막아야 하는데, 오직 자기에게 이익이 들어오는 것만 알기 때문에 교역하게 하였으니 매우 모양을 이루기 어렵습니다.(하략) 45) 44) 중종실록 중종 39(1544) 9월 14일, 18일. 45) 명종실록 명종 19년(1564) 10월 23일.
102 94 - 위 사료는 부산포 주변 지역의 수령과 軍 鎭 의 장수까지도 대일무역에 적극 참여하 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 대일무역은 서울의 東 平 館, 일본 사절이 상경하는 상 경도로의 客 館 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었으나 항거왜인이 모여있고, 물화가 집적되는 부산포왜관에서 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왜관이 단일화되면서 무역품이 모두 부산포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대일무역이 이루어진지 200년 가까이 되면서 무역상인 뿐 아니라 지역의 수령이나 장수들도 무역에 참여하여 이익 을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왜관을 관할해야 하는 장수가 대일무역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道 의 수령은 당연히 선운, 육운을 통해 물자를 가지고 와서 대일무역을 하였다. 이는 무역상인이 지방 수령층으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일본인이 중국 에서 가지고 오는 중국물화를 사들이기 위해 조선의 쌀과 베를 지급하므로, 무역에 경상도 일대 백성의 명맥이 매달리는 모양인데, 그만큼 대일무역의 규모가 커졌거나, 지방 수령이 그만큼 대일무역에 주력한다는 의미이다. 중국 물화와 조선의 米 布 가 교 역되는 점에서 조선후기 공작미가 수출되기 전에, 쌀과 베가 조선전기 대일무역의 주 요 수출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柳 忠 貞 은 부산진첨사의 지위로 대일무역이 잘 이루어지도록 주선하고 그 이 익이 자신에게 나누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각 지역의 수령들이 행하는 대일무역을 방지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무역이 오히려 더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 라고 하고 遞 職 의 처벌을 받았다. 지방 수령이 대일무역에 참여하 고, 그 아래 상인들이 부산포로 몰려드는 것은 부산포왜관으로 단일화된 이후 이미 오래된 관례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인과 外 官 職 장수들의 결탁을 막고 왜관을 관할하기 위해서 동래부사를 文 官 으로 차출하는 것이 1547년 이후였다. 부산포왜관은 임진왜란 직전까지 존속하면서 양국 외교의 창구로서 그 역할을 담당 하였다. 1591년 10월 전에는 玄 蘇, 平 義 智 가 사절단으로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명을 칠 것이므로, 조선에서 길을 알려달라 는 요구를 하기도 하였다. 또 이보다 전에 부산 포에 왔던 平 調 益 이란 일본인은 당시 동래부사인 宋 象 賢 에게 후한 대접을 받은 적이 있어, 전쟁이 발발하자 송상현에게 성을 버리고 피신할 것을 권유했다는 이야기에서 도 46) 임진왜란 직전까지 외교사절을 접응하는 역할을 부산포왜관이 있는 동래부가 담 당하였고 또 이에 따른 교역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화가 집적되고 조선 과 일본의 상인이 모여들고, 왜관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동래 지역의 사람들은 일본인 과의 접촉 기회를 늘일 수 있었다. 46) 선조실록 선조 24년(1591) 10월 24일. 충렬사 안락서원 편, 충렬사지, 2011, 13쪽( 宋 東 萊 傳 ).
103 95-3. 임진왜란 후 교류 공간으로서의 부산포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은 1601년 和 好 를 요청하는 대마도에 대해 화호는 급한 일 이라고 하고, 가지고 온 물품을 경상좌수사가 사들이는 무역만을 허락하였다. 즉 외교 를 맺는 것에는 조선 조정이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국교를 재개하기 전에 開 市 를 공식적으로 허가하는 것에 대해서 정2품 당상 29명 에게 일일이 의견을 수렴했을 정도였다. 47) 대마도측에서 화호 요청을 위해 사절을 파 견해도, 조선전기에 입항했던 부산포에는 제대로 정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절영도에 왜관이 들어서게 되었다. 일본에서 온 사절들은 교역물품을 함께 가져왔으므로, 조선 측에서는 이들 사절을 배척하지 않는 이상은 무역을 허락하였다. 비변사에서 요청한 절영도 개시 허가 여부 건에 대해 정2품 당상 29명이 개진한 의견의 개요를 정리하 면 1) 일본은 절대 통교할 수 있는 관계는 아닌데, 지금은 再 亂 에 대비할 수 없어, 화 호를 거절할 상황이 안되므로 羈 縻 策 의 일환으로 개시를 허락하자는 것, 2) 개시를 허락하여 羈 縻 策 을 실시하는 동안 富 國 을 이루고 변방을 대비하자는 것, 3) 일본의 상황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개시를 하면서 일본의 동태 등 추이를 보자는 것으로, 이미 전란 이전에 대마도와는 기미책으로 관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絶 交 하기 어려운 상황이며, 계속 기미책으로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 4) 개시를 허락하면 이후 歲 遣 船 파견, 上 京 요청까지 이어질 우려가 있다는 것, 5) 사절이 왔을 때의 단순한 교역이 아니라 공식적인 開 市 허락은 중국측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 6) 이미 절영도 왜 관에서 교역을 허락한 것은 사절의 접대를 허락한다는 전례가 되었다든지, 이미 釜 山 開 市 를 허락하여 京 商 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산포로 간 것은 이미 개시를 허락한 것으 로 보아야 한다는 것, 7) 사절 왕래가 가능한 것은 이미 기미책을 실시하고 있는 것 이라는 의견 등이었다. 48) 정식 국교 재개 이전에도 대일무역은 이어졌고 그것을 공식 화하는데 어떠한 명분을 가지려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상인과 일본상인의 거래는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상황에서도 중단되지 않았다. 이 중에는 전쟁 이전 서울 동평관에서 얼굴을 익힌 사람들이라는 관계가 발각되었 다. 49) 즉 임진왜란이란 국가적 차원의 國 難 에서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국가적 상황 과 동일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전쟁 이후 1601년 일본 사절이 가져 47) 양흥숙, 조선후기 東 萊 지역과 지역민 동향- 倭 館 교류를 중심으로-, 부산대 박사학위논 문, 2009, 14쪽. 48) 선조실록 선조 36년(1603) 8월 8일, 9월 3일. 49) 선조실록 선조 29년(1597) 8월 28일, 9월 1일.
104 96 - 온 물품을 부산포에 있는 경상좌수사가 관할하여 무역을 한 상황에서는 이러한 개시 여부 논의가 무의미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이미 개시를 허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며 추이를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정치적 상황에 민감한 상인들이 개시를 허락하자는 조정의 논의에 좌시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였다. 부산포 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京 商 까지 내려갔다는 의미는 부산포와 가까운 지역의 상인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 상인이 대일무역을 위해 부산포에 모였다는 의미이다. 이는 전쟁 이전에 상인들이 부산포로 집중되던 것과 유사하다. 또한 개시 허가 논의에서 李 光 庭 은 開 市 歲 遣 船 上 京 의 순서로 50) 일본측이 요구 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 순서는 절영도(부산)에서 서울까지라는 교류 공간 의 확대, 무역에서 무역+외교 관계로 이어지는 두 나라간의 교류의 진전을 의미한다. 즉 개시는 단순히 무역시장을 연다는 의미가 아니라 두 나라 간의 관계가 강화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한 것이다. 개시라는 제도의 마련 속에서 지역 사람들이 왜관의 일 본인과 맺는 관계도 빈번하면서도 다양해질 수 있었다. 절영도에 개시를 허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606년 경 왜관을 새로 조성하는 문 제가 대두되었다. 섬에 위치한 왜관은 조선측이나 일본측이나 모두 불편을 겪어야 했 다. 더욱이 제1회 회답겸쇄환사 파견과 國 交 재개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는 새로운 왜관이 필요하였다. 51) 1606년 이전에는 일본측은 국교 재개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주 력했기 때문에 절영도라는 섬에 왜관을 두어도 왜관 자체에는 큰 불만을 제기할 상황 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왜관을 옮겨야 하는 시점에서, 왜관을 그대로 부산포에만 둘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는 상인을 비롯한 지역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제였다. 부산포로 왜관을 단일화해서 유지한다는 것은 제1회 회답겸쇄환사 파견 직전 비변 사에서의 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1607년 회답겸쇄환사 파견을 앞두고 비변사에서는 일본측에서 조선 사절에게 할 수 있는 예상질문을 만들고 답변내용까지 만들었다. 답변내용은 예상질문에 대한 9개 의 답변과 회답겸쇄환사가 꼭 해야하는 2가지 내용이었다. 일본측의 예상질문은 전란 후 일본 사절이 오고가면서 요구했던 사안들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예상답 변은 사절을 파견하는 조선측의 입장, 사절 파견의 명분을 명시하고 일본의 巨 酋 諸 酋 에게 관직 제수 등 舊 例 회복 요청, 중국과 일본의 통교에서 조선의 노력 요청, 중 국 군대 배치 정보 요청, 武 弱 한 조선의 상황에 대한 설명 요청에 대한 답변이었다. 舊 例 를 회복하자는 예상질문에는 조선전기의 交 隣 과 通 好 의 三 路 를 다시 재개해 달 50) 선조실록 선조 36년(1603) 9월 3일. 51) 양흥숙, 17세기 두모포왜관의 경관과 변화, 지역과 역사 15, 2004, 174쪽.
105 97 - 라는 것이 포함되었다. 다만 이 논의에서는 三 路 를 웅천, 제포, 부산이라고 하여, 웅 천과 제포를 구분하고 염포는 빠져 있다. 일본측이 부산 한 길[ 一 路 ]만을 연 것은 나 라의 문을 닫으려는 것이고 사신 왕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 길을 모두 열어 달라는 요청을 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그 답변은 양국의 信 義 만 있으면 부산 한 길 만 있어도 되고, 웅천과 제포의 두 길은 선조 때부터 막은 것이 이미 오래되어 지금 다시 열 수 없다는 것이었다. 52) 이러한 비변사의 논의 내용을 볼 때 일본측에서는 그 사이 삼포왜관의 복설을 요구했던 것으로 예상되며,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부산포 한 곳만 열어두는 것으로 결정을 하였다. 일본측의 제포에 대한 생각은 두모포에서 초량으로 왜관을 옮길 때 다시 일어났다. 제포왜관을 여전히 舊 館 이라고 칭하고 제포를 이전 부지 후보에 올렸다. 53) 이러한 논의 속에서 왜관은 단일하게 유지하는 것이 확정될 수 있었다. 동래는 일 본과의 접경 뿐 아니라 접응, 외교, 무역 장소로 정착되었다. 절영도에서 두모포로 왜관을 옮겨 조성하고 북 동 서쪽 3면에 담장을 세우고, 남쪽 바닷가에는 水 柵 을 세워 조선인 마을과 분리시켰다. 담장 주변에는 조선 군인의 초소 를 세워 왜관 출입과 관련한 경계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54) 그러나 두모포왜관이 조성 된 지 10년이 지나자 왜관에 머무는 일본인이 1000여명에 이르는 등, 왜관 규모에 비해 훨씬 많은 일본인이 머무는 상황이 상시적으로 발생하였다. 이들을 접대하는 조 선측의 인력과 비용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제대로 접대를 하지 못하고 기다리게 하 면 일본인의 久 留 문제가 발생하였다. 1618년 경상감사 朴 慶 新 은 일본인이 오래 머물게 되면 橫 行 閭 里 즉 조선인 마을 을 돌아다니게 되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하였다. 55) 왜관의 담장과 초소가 있어 도 일본인들이 왜관에 머물다가 조선인 마을을 출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담장과 초 소로써 왜관을 에워싸더라도 조선인과 일본인의 관계는 단절되지 않을 수 있는 / 단 절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上 京 이 더 이상 용인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기존의 해오던 교류 방식이 모두 동래(부산포)에서 이루어져야 하므로 왜관 뿐 아니라 이곳의 조선인 마을에서 접촉 교류하는 빈도는 많아지고 교류의 내용도 다양해질 수 밖에 없었다. 또 일본인이 구류하는 이유에 대해서 潛 商 이 거론되었다. 당시 잠상의 기찰은 收 稅 52) 선조실록 선조 39년(1606) 11월 9일. 염포를 빼고 웅천과 제포를 나누어 부산과 함께 三 路 라고 한 것은 실수인 듯하고, 결국 삼포를 강조하기 위해 세 곳을 언급한 것이다. 53) 장순순, 조선후기 왜관의 설치와 이관교섭, 한일관계사연구 5, 1996, 100쪽; 윤용출, 17세기 중엽 두모포 왜관의 이전 교섭, 한국민족문화 13, 1999, 116, 119~120쪽. 54) 양흥숙, 앞의 논문, 2004, 179쪽. 55)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군 10년(1618) 7월 11일.
106 98 - 官 이 담당하고 있었으나 동래부사도 추가로 감찰하도록 하였다. 56) 일본 상인이 왜관 에 와서 조선 상인과 밀거래를 통해 倭 銀 을 수수하고, 조선 상인이 중국에 가서 해당 물품을 사가지고 올 때까지 일본 상인이 왜관에서 머무른다고 하여 수개월 이상의 왜 관 구류는 당연한 것이었다. 구류 문제는 1610년 부산 왜관에 개시를 월 6회로 정례화 할 때 이미 제기된 사안 이기도 하였다. 1610년 이전에는 월 3회 밖에 무역시장이 열리지 않는 상황에서, 57) 거래를 마치기 위해서는 일본 상인이 왜관에서 오래 머물면서 거래를 계속하는 방법 과 시장이 열리지 않을 때 잠매를 통하는 방법이 이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 본 상인의 구류를 방지하는 방안으로 개시 횟수를 늘였다. 또 잠상을 방지하는 방안 으로 동래부사에게 대일무역과 관련한 업무를 부과하게 된 것이었다. 무역 거래 현황, 상인의 行 狀 소지 여부, 무역품의 수량, 수세의 양은 동래부사가 정리해서 호조와 비 변사에 매월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만큼 대일무역이 운영되는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 하고 있어야 하는 업무였다. 58) 동래부사에게 이러한 업무가 부과된 것은 잠상이 증가 하자 경상감사가 잠상의 기찰을 서울에서 파견되는 수세관 외, 동래부사에게도 강조 한다는 의미이다. 조선후기 내내 동래부사가 대일 업무와 관련해 징계와 처벌을 받는 비율이 높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거래로 시작된 관계가 구류라는 환경을 만들고, 구류는 이웃인 조선인과 접촉 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는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관이 있는 동래부, 동래부를 관할하는 동래부사에게 왜관과 관련한 업무들이 주어지면서 지역의 서사가 조선 조정 으로 전달될 수 있고, 지역의 특수성이 잘 드러날 수 있는 제도가 갖추어 질 수 있었 다. 왜관과 관련한 지역만들기가 진행될 수 있었다. 일반 민들은 왜관이 유지되면서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과의 관계맺기가 항상적일 수 있었다. 4. 교류의 장, 開 市 를 출입하는 동래 사람들 1407년 제포와 부산포가 열린 浦 所 로 지정된 이후 倭 里 와 倭 館 이 들어서고, 임진 왜란기를 제외하고는 긴 단절 없이 조선후기에도 왜관은 늘 부산포에 자리하였다. 동 래부사가 하는 일, 동래부 관청의 부속 건물과 아전들의 업무, 통신사 儀 典, 雜 役 부 담 등으로 왜관이란 공간에 대해서는 동래 사람들은 익히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또한 56) 광해군일기 (중초본 및 정초본) 광해군 10년(1618) 7월 11일. 57)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군 2년(1610) 9월 9일. 증정교린지 권4 開 市. 58) 광해군일기 (정초본) 광해군 2년(1610) 9월 9일. 양흥숙, 17세기 두모포왜관 운영을 위 한 행정체계와 지방관의 역할, 한국민족문화 31, 2008, 23쪽.
107 99 - 왜관 주변에 사는 민들은 왜관의 건물, 밖으로 나온 일본인 등 倭 色 경관을 볼 수 있 었기 때문에 왜관과 일본인에 대해서는 좀 더 일상적인 이해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민들이 이유없이 아무 곳에서나 왜관 일본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 다. 금지구역이 설정되었고, 정해진 공간과 시간이 있었다. 또한 출입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 가능했다. 왜관은 통제 공간으로 조성되었지만, 민들은 열린 틈새 공간 을 찾아 일본인과 접촉 교류가 가능하였다. 동래 사람들을 위시한 민 들이 일본인과 접촉 교류할 수 있는 기회로써 開 市, 朝 市, 賣 買 春, 수시로 동원되는 雜 役, 雇 用 등이며, 양반층 또는 식자층은 일본인 문인과의 문학교류, 일본측의 요청으로 왜관에 들어가는 조선인 기술자와 예술가 등이 고찰된 바 있다. 물론 왜관 운영과 관련된 직임을 가진 아전, 역관, 통사, 군관, 소동 등은 특별한 기회가 없이도 왜관을 출입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59) 이 가운데 일반 민이 합법적으로, 규칙적이며, 반복적으로 일본인과 소통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은 開 市 였다. 이러한 시장은 주어진 役 이나 職 任 과는 달리 능동적이 고, 일상적인 교류의 단면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시장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앞서 언급한 여러 사람의 의견처럼 물품의 거래/매매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開 市 하는 일은 利 窟 속에 있는 것이므로 각항마다 간사한 폐단이 하나만이 아니 다. (중략) 작은 일은 (동래부사가) 경상감사에게 보고하여 처리하고, 큰일은 (범법 자를) 가둔 후 直 啓 하여 법에 따라 엄중히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왜관 시장[ 館 市 ]이 혼잡되는 폐단 없도록 해야 합니다. 60) 라고 했듯이 開 市 는 위정자들이 말하는 여러 가지의 폐단 이 생길 수 있는 곳이었 다. 그러므로 동래부사가 直 啓 해야 하는 사안에 개시와 관련된 범죄를 넣은 것이다. 폐단 은 다름 아닌 민들의 움직임이었다. 1) 大 廳 開 市 와 雜 商 동래와 왜관 주변 지역에서 開 市 는 開 市 貿 易 을 의미하는 大 廳 開 市, 아침시장[ 朝 市 ]을 의미하는 朝 開 市, 五 日 開 市, 別 開 市 등 다양한 용례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것 이 넓은 의미의 개시고, 대청개시가 좁은 의미의 개시로 파악된 바 있다. 61) 개시를 59) 양흥숙, 앞의 박사학위논문, )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군 2년(1610) 9월 9일. 61) 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에 참가한 상고도중의 규모와 활동, 한일관계사연구 8, 1998, 91쪽; 김동철, 조선 후기 倭 館 開 市 貿 易 과 東 萊 商 人, 민족문화 21, 1998, 58~62쪽.
108 100 - 왜관에서 열리는 시장이란 의미로 館 市, 국가의 關 門 에서 열리는 시장이라고 하여 關 市 라고도 사용된다. 대청개시를 六 度 開 市, 一 朔 六 次 開 市, 六 開 市, 六 大 開 市, 大 開 市, 本 開 市 62)라 하는 것은 일본인과의 거래를 위해 열리는 시장[ 開 市 ] 중에 정례적이며, 중심되고, 규모가 크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장을 개시라고 대표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명칭으로 보면 小 開 市, 副 開 市 등의 의미를 가진 개 시들이 존재해야 하나 조개시, 오일개시, 別 市 등이 대청개시의 상대적 명칭으로 존 재하였다. 대청개시에는 동래 사람들이 자격이 갖추어진 상인으로 모두 참여한 것은 아니었 다. 대청개시는 기존의 연구에서도 많이 고찰된 바와 같이 공간은 大 廳 63)이고, 그 상 인은 行 狀 을 지닌 京 外 商 人 (1610), 호조 差 帖 을 가진 定 額 의 京 商 (1678), 輪 番 하는 京 商 (1680), 도중상고, 定 額 의 有 根 着 稍 識 事 理 者 / 商 賈 都 中 (1691)이라 불리는 상인이 참여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동래 사람들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1644년경 부산의 大 小 商 人 이 호조의 행장을 지참하지 않고 마음대로 왕래한다고 64) 한데서 가 장 큰 개시가 열리는 大 廳 이라는 공간의 한계와 대청개시에 참여하는 상인의 혼잡 을 짐작할 수 있다. 1623년 은화 7만냥에 이르는 부를 누리고 동래부사와 역관을 매 수했다고 여겨진 잠상 林 素 가 동래 사람인 것을 보면, 65) 동래 지역 사람들이 반드시 호조의 행장을 가지고 있지 못하더라도 대청개시에 참여하거나 잠상으로 대일무역에 는 참여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과 거래를 할 수 있는 왜관이라는 공간이 가까이 있고,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는 다양한 開 市 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출입할 수 있는 기회가 동래 사람들에게 주 어질 수 있었다. 開 市 가 허락된 후에는 생겨날 수 있는 각종 폐단 중에 이렇게 통제 되지 않는 지역 민의 존재도 포함될 수 있었다. 行 狀 制 가 유효한 시기에도 불구하고 대청개시의 공간을 다시 확인하고, 개시를 할 때의 大 要 를 정한 것이 釜 山 開 市 事 目 (1641)이며, 이어 倭 館 開 市 事 目 (1652)과 開 市 事 目 (1653)이 재차 정해졌다. 66) 부산개시사목 의 구체적 내용은 없지만 潛 商, 收 稅, 牟 利 奸 細 輩, 밤 시간대의 임의적인 왜관 출입 67) 등이 문제로 지적되는 것으로 보 아, 대청개시를 출입하는 행장 소지 상인과는 별도로 움직이는 상인들의 존재가 적지 62) 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 신서원, 2000, 72쪽; 김동철, 17~19세기 부산 왜관의 開 市 와 朝 市, 한일관계사연구 41, 2012, 226~231쪽. 63) 두모포왜관에서의 開 市 大 廳 의 존재 여부가 논쟁점이긴 하지만 외대청, 중대청 등과 아울 러 대청개시가 열리는 공간이다. 64) 김동철, 앞의 논문, 2012, 241~252쪽. 65) 인조실록 인조 1년(1623) 7월 4일. 66) 대일무역과 관련한 事 目, 節 目 은 양흥숙, 앞 박사학위논문, 71~72쪽 참조. 67) 인조실록 인조 19년(1641) 12월 2일.
109 101 - 않았음을 찾을 수 있다. 왜관개시사목 과 개시사목 도 잠상 금지라는 목적에서는 부산개시사목 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관개시사목 에서 東 萊 府 使, 倭 館 의 守 門 軍 官, 開 市 軍 官, 鄕 通 事, 開 市 次 知 등이 잠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애초부터 잠상으로 왜관을 출입하는 상인은 물론, 대청개시 운영 및 통제에 관련된 동래부 官 屬 들도 마찬가지로 대청개시 를 기회로 한 잠상으로 간주되었다. 68) 군관, 소통사 등 동래 지역 출신은 관속으로 호조의 행장 없이 무역을 하였다는 의미이다. 개시사목 은 1653년 맺어진 禁 散 入 各 房 約 條 의 내용 일부이다. 69) 17세기 중엽 일본인에게 진 負 債 가 외교문제로 확대되면서 負 債 및 잠상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어, 사목과 약조가 체결되었다. 부채인으로 지목된 것은 商 人 뿐 아니라 倭 學 譯 官 도 포함 되었고, 무엇보다 왜관을 마음대로 돌아다녔던 雜 人 들이었다. 허가되지 않았거나 공 식적이지 않는 상인이란 의미이다. 전부터 雜 人 은 왜관출입이 금지되었는데 기강이 해이해져 소통하고 왕래하고,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어 이런 일이 발생하였다고 여겨, 사목에 이어 약조가 나오게 된 것이었다. 70) 왜관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이러 한 잡인의 모습은 1644년경 행장 없이 돌아다니던 부산의 大 小 商 人 과 유사하다. 대청개시, 잠상과 관련하여 사목, 약조가 계속 나오는 배경에는 대청개시 규례가 허 물어진 것과 관련이 있다. 丁 丑 年 (1637) 이후 大 廳 開 市 는 폐지되었다고 할 정도로 71) 쇠퇴되어 있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京 商 등 상인들이 왜관에 오는 길 이 끊어졌고, 이와는 다른 부류 流 離 之 人 이 가끔 인삼을 가지고 와서 왜관에서 거래 하고 자생할 정도였다. 72) 대마도에서 요청하는 말, 매, 두루미조차 行 商 하는 사람이 없어 거래가 어렵고, 적극 거래에 참여할 私 商 도 없는 때도 있었다. 73) 이렇게 대청개 시가 유명무실해진 상황에서는 무역세를 내야하는 대청개시 대신 임의적인 各 房 開 市 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大 廳 開 市 廢 之 已 久 各 房 開 市 彼 此 有 利 ). 收 稅 하지 않으므로 68) 비변사등록 효종 3년(1652) 6월 13일. < 事 目 > 1. 續 錄 의 禁 制 條 에 鄕 通 事 및 潛 商 人 이 왜인과 밤에 만나 은밀히 들어가 매매한 자는 潛 賣 禁 物 條 에 의하여 논한다. 禁 物 條 에 가 벼운 경우에는 杖 1백에 徒 3년이요, 무거운 자는 絞 首 한다 하였으니 이 律 에 의하여 단 죄한다. 1. 東 萊 府 使 倭 館 守 門 軍 官 開 市 때의 軍 官 등도 위 律 로서 시행한다. 1. 潛 商 人 등은 本 律 에 의하여 시행한다. 1. 평소에 檢 飭 하는 開 市 次 知 가 모두 東 萊 府 에 있는데, 만약 발각되어 체포된 자가 있는 경우 부사의 檢 擧 하지 못한 죄는 그 潛 商 物 品 의 다과에 따르고 臨 時 稟 旨 하여 처리한다. 1. 미진한 조건은 추후에 마련하여 재가한다. 69) 증정교린지 권4 약조. 70) 효종실록 효종 3년(1652) 5월 16일, 6월 5일. 71) 비변사등록 효종 3년(1652) 9월 30일. 金 堉, 潛 谷 遺 稿 제7권 啓 辭. 72) 양흥숙, 앞의 박사학위논문, 72~73쪽. 73) 왜인구청등록 제1책, 정축년(1637) 11월 8일. 東 萊 事 例 (규-16024) 정축년 11월 15 일.
110 102 - 두 나라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었고, 금지시키기가 어려울 정도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 러한 各 房 을 개시 공간에서 제외하고 대청으로만 제한하는 방안이 나왔고, 이에 왜관 일본인이 난출을 감행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74) 두 호란이 수습되고, 일본과의 兼 帶 制 실시 이후 무역선이 도래하고 대일무역이 활 성화되자, 다시 대청개시 규례를 고착시키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행장을 가진 자와 가지지 않는 자 등 상인 간의 차별을 두고, 대청 이란 장소를 확정짓고, 거래 시간을 정하는 사목과 약조가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雜 物 을 파는 상인의 존재는 계속 발견되었다. 1672년 3월에 磁 器, 蛤 具 등의 물화를 왜관에서 사사로이 매매한 일로 김검( 金 黔 ), 검생( 黔 生 ) 75), 末 叱 生, 莫 立, 愛 男, 李 隱 得, 張 三 伊, 金 卜 男 이 잡혔는데, 모두 雜 犯 으로 처리되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磁 器 와 같은 물건을 私 自 賣 買 한 것은 대단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죄의 경중을 구분해서 처리하도록 回 啓 를 받았다. 위 사건을 보면 대단하지 하지 않 는 거래에, 많은 사람이 관여하고 있어 참여자의 일부분은 동래 사람일 가능성이 높 다. 6월에는 潛 商 全 夢 實, 南 一 生 이 발각되었는데 이들 역시 磁 器, 蛤 具 을 거래하였 다. 이들은 밀양으로 이송되는 것으로 보아 밀양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76) 동래 사람 이 아니더라도 雜 物 을 私 自 賣 買 하는 雜 犯 의 존재는 지역 사람들이 열린 시장 왜관 을 부단히 출입하였음을 알려준다. 潛 商, 行 商, 大 小 商 人, 雜 人 으로 치부된 상인들은 통제의 대상, 삭제의 대상으로 지 목되는 지역민의 일부였다. 1709년경에는 동래부사 권이진에 의해 조시에서 쌀 거래 하던 상인이 대청개시일에 들어가 쌀 거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77) 행장제 상인이나 정액제 상인으로 대청개시를 주도하던 상인층 외에 대청개시일에는 雜 商 層 이 왜관에 서 시장을 열어 거래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쌀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물화를 거래하는 雜 商 들은 끊임없는 왜관 드나들기를 통해 18세기 중엽에는 공식적으로 개시대청 앞에 서 別 肆 할 수 있었다. 다만 이들이 개시를 하는 공간은 개시대청 주변이면서도, 왜관 안이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倭 房 으로 개시공간을 확대할 수도 있었고, 잡상이 倭 房 에서 거래하는 잠상이 될 가능성도 높았다. 또한 잡물을 가지고 들어온 상인들이 대청개시일에 왜관 안을 돌아다니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대청개시 때의 감시 인원인 조선측 훈도와 별차, 收 稅 官, 開 市 監 官 외 부산(진)에서 별도로 軍 官 을 파견하여 늘어 나는 雜 商 의 움직임을 살폈다. 78) 잡상이 늘어남에 따라 통제 인력의 배정도 변화하였 74) 승정원일기 효종 3년(1652) 10월 4일, 11월 16일. 75) 김검생인지, 별개의 2명인지 확실하지 않다. 변례집요 를 탈초하고 인쇄하는 과정에서 오기라고 보인다. 76) 변례집요 권14, 潛 商 路 浮 稅 幷 錄 附 雜 犯, 임자년(1672) 3월, 6월. 77) 권이진, 유회당집 권5 再 度.
111 103 - 다. 2) 또 다른 개시, 五 日 開 市 와 雜 商 대청개시와는 다르게 운영된 五 日 開 市 의 경우에도 雜 商 이 발견된다. 일본인과의 거 래와 관련하여 약조 및 禁 條 가 차례로 맺어지고, 商 賈 定 額 制 실시 등으로 대청개시에 대한 통제가 증가하지만 雜 物 을 거래하면서 왜관 출입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한편으 로는 지역민은 五 日 開 市 나 朝 市 를 통해 거래를 확대해 나갔다. 1708년경 오일개시가 혁파되면서 이 개시를 드나들던 상인들은 품목 등에 따라서 대청개시나 조시 등 다른 개시장으로 들어갔다. 79) 오일개시는 동래부에서 왜관에 지급하는 五 日 雜 物 과 관련이 있었다. 80) 잡물 지급을 주관하는 色 吏 에게 세금을 先 支 給 하면, 상인들은 왜관을 출입할 수 있는 標 를 지급받 았다. 그 후 왜관에 들어가서 쌀과 곡식을 거래하였다. 동래부의 색리가 왜관 출입의 標 를 발급하고, 거두어들인 세금은 호조로 상납하지 않고 동래부의 재정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동래부에서는 雜 類 가 세금을 내고 임의로 왜관에 들어가도 굳 이 막을 필요가 없었다. 81) 1702년 잠상으로 지목된 米 主 崔 今 善, 都 將 千 鶯 立 은 모두 동래 사람들로, 쌀 198 석을 거래하고자 쌀을 배에 싣고 왜관에 도착하였다. 천앵립이 쌀의 거래량을 115석 줄여서 보고하고, 감소분은 왜관에서 잠매하려고 하였다. 82) 거래량을 신고한다는 의 미에서 오일개시에 쌀을 싣고 온 상인들로 보이는데, 처음에는 잠상이 아니었지만 일 부분의 쌀을 잠매하려고 하여 잠상이 되었다. 오일개시에서 쌀이 주로 거래되는 것은 조시에서 거래되는 소규모의 쌀로는 일본인들이 양식으로 삼기에 충분하지 못했기 때 문이었다. 83) 동래부 색리에게 세금을 내고 왜관을 출입하는 이 방식은, 왜관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받을 뿐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별도의 규제가 없어 상인이 왜관에 머물면서 거래 외의 교류도 가능하였다. 雜 類 의 상인이 왜관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오일개시가 열리는 시간과 관련이 있었 다. 오일개시는 오일잡물을 지급할 때 열리기 때문에, 大 廳 開 市 와 같은 날 서기도 하 78) 변례집요 권9 開 市, 己 巳 年 (1749) 4월. 草 梁 話 集, 館 近 所 市 日 之 事 ( 對 馬 歷 史 民 俗 資 料 館 소장본). 79) 김동철, 앞의 논문, 2012, 237쪽. 80) 김동철, 앞의 논문, 2012, 229쪽. 81) 전객사별등록 무자년(1708) 5월 15일. 비변사등록 숙종 34년(1708) 5월 15일. 82) 변례집요 권14, 잠상노부세병록, 임오년(1702) 6월, 7월. 83) 전객사별등록 무자년(1708) 5월 15일.
112 104 - 고, 서로 앞뒤로 어긋나기도 하였다. 84) 대청개시일에 오일개시가 서면 훈도와 별차, 개시군관 등의 통제를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왜관 내에서의 왕래가 자 유로울 수 있었다. 수세는 색리만 한 것은 아니고, 동래부 軍 官 도 관여하였다. 일찍이 東 萊 開 市 의 일 때문에 아뢴 바가 있습니다. (중략) 대저 朝 開 市, 五 日 開 市 때에 거래를 마치면 즉시 시장을 파하는 것이 곧 옛 규례[ 舊 規 ]입니다. 동래부에 서는 상인들에게 銀 貨 를 收 稅 하는 것 外, 특별히 開 市 處 에 收 稅 廳 을 두었습니다. 군관과 하인을 보내어 물화의 다소를 막론하고 일일이 모두 세금을 거두어 들입니 다. 그러므로 매매하는 상인이 종일 이어져 극히 난잡하다고 합니다. 이는 동래부가 (일본과의 일이) 크고 번잡해서 말미암은 듯합니다. 그러나 새 규례[ 新 規 ]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중략) 동래부에 있는 이른바 收 稅 廳 을 빨리 철거해라고 하 는 것은 어떻습니까? 85) 위 사료는 조시나 오일개시 수세에 대해 동래부의 군관이 한다는 점이다. 또 주목 되는 것은 시장 통제의 일환으로 收 稅 를 하지만, 수세를 한 후에는 상인이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종일 이어져 시장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동래부가 일본 사 절 접응 등 관련 업무로 많은 재정이 소용되어, 대청개시 수세 외 추가 수세를 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개시하는 곳, 즉 오일개시하는 곳에도 수세청, 조시하는 곳에도 수세청을 설치하였다. 수세는 통제의 목적이 아니라 지방 관청의 재정 확보의 방안으 로 확대되었다. 그러므로 동래부는 재정이 증가할 수 있었으나, 상인 外 雜 人, 동래 부 官 吏 가 연속해서 왜관을 출입하여 실제 濫 雜 의 弊 가 많다. 나라의 비밀스런 일들 을 왜관의 일본인에게 몰래 전해줄 우려가 없다고는 보장하지 못한다 라고 생각한 조 정 관료들은 상인들을 통제하고자 수세청을 철거하도록 명하였다. 86) 동래부에서 왜관 출입 標 를 받은 상인 역시 雜 人 으로 여겨졌다. 오일개시가 쌀 거래 시장으로 확대되 고 상인들이 증가하자 1708년 혁파되었다. 87) 동래부에서는 인정한 개시가 중앙 조정 의 논의에 의해 사라졌다. 지역사람들은 개시 공간의 일부가 없어졌지만 또 다른 개 시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3) 朝 ( 開 ) 市 와 동래 사람들 朝 市 에 魚 菜 를 가지고 오는 곳은 釜 山 豆 毛 浦 ( 古 館 ) 大 峙 沙 道 堂 洞 이다 84) 춘관지 권3 開 市, 市 易 事 蹟. 양흥숙, 앞의 박사학위논문, 102쪽. 85) 승정원일기 숙종 30년(1704) 10월 21일 86) 전객사별등록 계미년(1703) 11월 23일. 김동철, 앞의 논문, 2012, 252쪽. 87) 양흥숙, 앞의 박사학위논문, 103쪽.
113 105 - 위는 18세기 말 草 梁 話 集 의 기록이다. 이 뿐만 아니라 왜관과 가장 가까운 마을 에 해당되는 草 梁 村 도 조시 상인의 주요 거주지였다. 88)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동 래부 내륙 지역보다는 왜관과 가까운 지역의 사람들이 개시와 조시에 상인으로 참여 하였다. 조시에는 수백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상인도 참여하였지만 대부분 왜관 주변 의 지역민이 참여하고 있어 개시(넓은 의미)에서 지역민의 비중에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일개시가 亂 雜 의 폐단이 많아진다는 이유로 혁파된 것에 비해 조시는 일본인의 생활 편의를 마련하는 시장이었으므로 통제가 더해질 뿐 혁파되지는 못하였다 년 왜관 외곽에 設 門 을 세워, 왜관 출입을 강화한 동래부사 권이진 또한 조시를 혁파 하지는 않았다. 권이진은 조시에서 1석을 넘고 여러 필의 포목을 거래할 때에는 수세 하고, 나머지 잡물에 대해서는 貧 民 을 위하고, 遠 人 (일본인)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수 세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조시 역시 날마다 문을 열고 종일 거래하기 때문에 그 난잡함으로 조정에서 우려하는 대상이었다. 1709년 동래부사 권이진은 조시에서의 거래 상황을 목도하고, 시장이 종일 열리는 것을 막고자 어채 거래는 아침에 하고, 쌀 거래는 대청개시일에 들어가서 하도록 하였다. 89) 1708년에 주요 쌀 거래 시장이 었던 오일개시가 혁파되고, 쌀 상인들이 조시로 대거 유입됨에 따라 대량 쌀 거래가 이루어졌는데, 조시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한 동래부의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조시는 조선인 빈민들이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폐지하기 어렵고, 무엇 보다 일본인의 식생활에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오일개시처럼 혁파할 수 는 없었다. 조시는 일본인을 상대하기 때 문에 정지하면 잠시라 하더라도 먹거리에 지장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매우 불쌍한 일이 니 3일 동안은 어류와 조류는 그만두고, 야채만 가지고 오도 록 지시해야할 것이고, 이번에 하루라도 조시를 정지해서는 안 됩니다( 朝 市 之 義 ハ 日 本 人 ニ 對 候 而 之 事 ニ 候 處 差 留 候 而 者 纔 之 間 なから 食 用 差 支 申 筈 ニ 候 左 樣 有 之 候 而 ハ 至 而 氣 毒 成 義 ニ 초량화집 에 나타난 조시와 개시 상인의 거주지 88) 조시 상인의 거주지에 대해서는 김동철, 앞의 논문, 2012, <4. 주체(상인)>에 자세하다. 89) 권이진, 유회당집 권5 再 度.
114 106 - 候 間 三 日 之 內 ハ 魚 鳥 差 留 野 菜 物 計 持 參 候 樣 ニ 被 申 付 候 由 ニて 今 度 者 一 日 茂 朝 市 差 留 不 被 申 候 ) 90) 위 사료는 조시가 왜관 거주 일본인에게 아주 긴밀한 생활 공간임을 알려주는 것이 다. 1728년(영조 4) 당시 세자(진종 추존)가 사망하였을 때의 기록인데 비단 이번 국 상 뿐 아니라 조선에서 국상이 나면 개시는 물론 조시까지도 모두 정지하였다. 조시 뿐 아니라 왜관 내에서 노래, 춤, 사냥, 왜관 공사 등도 중지되는데 다만 조시는 일본 인의 먹거리만 관계되어 예외를 적용해 달라는 일본측의 요청 내용이다. 조시를 중지 시켰을 때 국상 成 服 전에 停 市 하는 前 例 를 잘 몰라서 왜관의 일본인이 소동을 일으 키는 경우도 있었다. 91) 일본인의 생활과 관련되어 조시를 최대한 개장할 수밖에 없었다. 난잡되는 폐단은 통제하되 유지시켜야 하는 공간이 조시였다. 이를 위해 조선측에서는 守 門 將 과 通 事, 일본측에서는 禁 徒 倭 와 小 禁 徒 가 조시에 참여하였다. 92) 개시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수 세를 통해 일정한 통제를 받았다. 이는 조시가 지속됨으로써 양국의 사람들이 교류를 이어나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럼 지역민들에게는 가장 안정된 공간이며, 일본인과 교류하는 조시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朝 市 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지금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변례집요 권9 開 市 附 朝 市 의 조항에 조시와 관련된 내용이 1665년부터 기록되고 있어, 1665년 이전에 생 겼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그런데 和 館 事 考 에 실린 館 中 定 式 을 통해 조시가 조성된 시기를 찾을 수 있다. 和 館 事 考 가 1678년 초량왜관 조성과 더불어 편찬되 어 왜관사무 처리용으로 마련된 것이고 93) 그 기록의 배열은 시대순으로 되어 있다. 三 浦 和 館 事 考, 釜 山 和 館 事 考 다음으로 館 中 定 式 이고, 그 다음이 館 守 事 考 이 다. 부산화관은 1607년 信 使 가 일본에 간 후 부산에 조성되었다는 말에서 두모포왜관 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館 中 定 式 은 두모포왜관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규칙들이다. 모두 5개 조항으로 아래와 같다. 1. 僉 官 이 바다를 건너올 때에 萬 戶 判 事 는 배를 타고 나와 맞이할 것 1. 館 直 門 直 건 -관지기는 첨관의 관사를 청소하는 자, 문지기는 왜관 안에서 두루 쓰이는[ 通 90) 국사편찬위원회, 分 類 紀 事 大 綱 Ⅰ, 2005, 270쪽( 分 類 紀 事 大 綱 四, 朝 鮮 世 子 薨 去 之 事, 享 保 13년(1728)). 91) 전객사일기 영조 33년(1757) 3월 13일. 92) 증정교린지 권4, 조시. 93) 김의환, 對 馬 島 宗 家 文 庫 本 중 和 館 事 考 에 대하여 千 寬 宇 先 生 還 曆 紀 念 韓 國 史 學 論 叢, 1985, 648쪽.
115 107 - 用 ] 자 94) 1. 매일 魚 菜 를 朝 市 하는 것 1. 炭 薪 은 매일 왜관에 들여보낼 것 1. 日 本 船 이 오는 것을 보고하는 것 첨관은 1637년 왜관에 館 守 가 파견되기 이전에 왜관의 일을 주관하는 사람이 없었 을 때 업무를 주관했던 대마도의 관리였다. 送 使 의 첨관이 그 일을 맡았고, 代 官, 裁 判 등도 관수를 대신하여 업무를 보았다. 95) 연례송사의 세견선이 처음 도래한 것은 1611년이므로 첨관의 영접의 일은 1611년 이후이거나 미리 영접의 격식을 마련해 놓 을 수 있었다. 더욱이 왜관의 일을 도와줄 조선측 관지기와 문지기의 배정, 일본인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시탄의 조달, 邊 情 과 관련한 일본선박의 출입 등의 내 용은 왜관이 조성되면 반드시 뒤따라야하는 항목들이므로 定 式 으로 정리되었던 듯하 다. 이들 내용으로 보아 일본인에게 생필품을 제공하기 위한 조시는 두모포왜관 조성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 조선에서도 일본인이 부산 진의 조시를 출입하도록 허가를 하였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처음에는 불편함을 감소 하고 부산진 마을 도로변에서 열리는 조시를 왕래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조선인 민가를 출입하게 되는 등의 폐단이 발생하자, 1654년 이전에 부산진 조시와는 별도의 조시를 왜관의 守 門 밖에 조성하였다. 96) 일본인의 생필품 조달을 위해 두모포왜관 초 기부터 아침시장이 필요하였고 그들의 생활 편의를 위해, 부산진 마을에서 열리는 조 시를 이용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일본인은 5리 이상 떨어진 왜관과 부산진을 오고 갈 수 있었으며 부산의 경관이나 부산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지역민이 살고 있는 가옥까지 출입하는 교류가 있자 조시를 아예 왜관 앞에 두었다. 개시일에 조선인이 倭 房 을 출입하지 못하도록 한 것처럼, 일본인은 조선인 가옥을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 였다. 조시는 생필품 시장에서 양국 사람들의 교류 장소로 그 성격이 변질될 가능성이 있 기 때문에 17세기 중엽 이전에 왜관 수문 앞으로 그 공간이 이동되었다. 또 상인들이 점차 늘어나는 난잡 상황에 이르자 1704년경에는 조시에서도 세금을 거두었다. 앞서 동래부사 권이진이 시행한 것처럼 조시에서 쌀의 대규모 거래가 이루어지자 일부 상 인을 대청개시로 보내어, 상인을 분산시켰다. 양국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하 지만 조선의 국상제도 등 풍속이 관철되기도 하였다. 혁파되지 않았지만 규모가 점차 커지는 추세에 있었고, 조시 상인이 되기 위해서 94) 김의환, 앞의 글의 654~655쪽에 수록된 원문을 참조. 95) 田 代 和 生, 近 世 日 朝 通 交 貿 易 史 の 硏 究, 創 文 社, 1981, 177~178쪽. 96) 양흥숙, 앞의 박사학위논문, 104~105쪽.
116 108 - 특별한 자격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양국의 사람이 만나는 개시장이었기 때문에 일 정한 통제는 받았다. 조시에 대한 통제-유지가 반복되었다. 조정의 관료, 동래부사 등 爲 政 者 들이 우려한 시장의 난잡 / 濫 雜 은 왜 문제가 되었는가? 잘 알려진 바로는 생필품 대신 여자를 파는 賣 買 春 의 공간, 오랜 시간 交 雜 되어 지 내므로 조선의 사정이 자세히 알려지는 공간으로 여겨진 점이다. 조시에서 대량 쌀의 거래가 금지된 이후에도 쌀 거래가 행해지는 등 잠상의 공간 97) 이 되어갔다는 점이다. 동래부사 권이진이 조시 개장 시간 단축, 일부 품목 수세, 조시에서의 대량 쌀 거래 금지 등의 내용으로 조시 환경을 바꾸려고 하자 조시 상인들은 일본인을 부추겨 난출 을 감행하도록 하는 등 일본인과 지역민 간의 연대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98) 신초량리 에 사는 朝 市 軍 辛 自 先 은 副 特 送 使 의 從 人 과 공모하여, 그 종인이 왜관 안에서 훔쳐 나온 環 刀 를 팔려다가 발각이 된 사건이 있었다. 이 일로 신초량리에 거주한 신자선 은 根 着 不 明 之 雜 流 가 되고 조시를 칭탁해서 왜관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 교활한 일 본인과 和 應 해서, 도적질한 것을 받아오는 전에 없는 변괴를 일으킨 자가되었다. 99) 왜관 밖에서 인기가 높은 일본 칼을 훔쳐내어 파는 범죄를 서로 공모하는 사이일 정 도의 관계도 생겨나기도 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閒 雜 人 이 왜관을 출입하고 있어도 애초에 막지 않고, 私 商 의 무리들이 몰래 매매를 하는데, 부산과 초량의 조시 상인 50~60명은 매번 朝 市 軍 이라는 자들을 데리고 함께 왜관에 들어가서 어채를 교역한 후에 즉시 나오지 않고 일본인과 같이 버릇처럼 익숙하게 될 정도였다. 조선의 事 情 을 전하지 않는 것이 없고 심한 사람은 저녁이 되어야 왜관을 나오기도 하였다. 100) 이 무렵 조시는 조시상인이 왜관 안에 들어가 거래를 하면서 그 공간이 왜관 수문 밖 에서 왜관 안까지 확대되었다. 또한 조시가 점차 성황을 이루자 조시 내에서도 상인 과 물건을 운반하는 朝 市 軍 으로 분화되었고 이들은 함께 거래를 위해 왜관에 머물며 일본인과 교분을 쌓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爲 政 者 들은 대청개시, 오일개시, 조시 등의 개시장에 대해 잡상, 잡인, 잡류가 모이는 공간으로 여기고, 난잡되는 것을 크게 우려하였다. 밀거래는 물론 정보 누설, 풍속 문란, 범죄 발생의 공간으로 개시를 바라보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개시가 어지러워졌다는 것은 지역민들이 그만큼 적극적으로 거래에 나섰고, 개시가 유지되고 있는 시간 속에서 다양한 관계들을 형성하였다는 의미이다. 97) 양흥숙, 앞의 박사학위논문, 107쪽. 98) 권이진, 유회당집 권5 再 度. 99) 승정원일기 헌종 3년(1837) 9월 17일. 100) 각사등록 49( 수계 제2책) 239~240쪽. 고종시대사 고종 4년(1867) 7월 20일.
117 맺음말 조선의 대일관계와 동래 사람들 이란 주제는 외교와 교류, 무역 등으로 대표되는 국가사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동래 사람들의 존재 양상에 대한 것이다. 동래는 1407년 이후 일본인이 거주하고, 일본 사절을 접대할 수 있는 浦 所 로 지정되면서 지 역 사람들이 일본인과 관련되어 지는 양상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왜관과 왜리 주변에 배치된 赴 防 軍 으로 편입되어, 통제 인력으로 일본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고, 일본 사절이 오면 위로연 등 각종 연회가 베풀어지므로 이와 관련된 인력 등 官 屬 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상인과 무역을 하는 조선상인 중에 동래 사람들이 있고, 왜관을 드나들던 소상인(소위 雜 商 이라고 불리던 사람들)과 雜 人 등 다양하다. 또한 문학을 논하는 교류가 있기도 하고, 지역사람들과 일본인 사이의 범죄가 발생되기도 한다. 양 국 사람들 모두 異 國 을 구경하는 관광객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왜관이 한 곳에 존속 하면서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 다양한 관계가 발생하고 왜관이 하나의 문화 현장으 로 기능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조선전기 제포왜관보다 규모가 적고 인구도 적었던 부산포왜관이 단일화되면서 일 본인이든 조선인이든 부산으로 와야 하는 구조가 만들어 졌다. 또한 조선후기에는 上 京 까지 금지되면서 오로지 왜관과 동래가 사람들의 연결망 장소로 고착되었다. 일본 상인은 부산 왜관으로 와서 동래에서 활동하는 상인, 지역 사람들을 통하지 않으면 무역을 이룰 수 없는 구조였다. 동래부사 권이진이 동래 사람들은 서울의 상인이 좋 은 옷을 입고 살진 말을 타고 오면 도로에 나가 맞이하고 교우한다 라고 한 것처럼 그 인적망은 서울 등 각 지역으로 펼쳐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조시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즉 왜관과 그 주변 지역이,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국 가 경계를 넘어 모여, 거리를 좁혀나갈 수 있는 관계들을 형성시킨다는 점이다. 또한 왜관이 존속하고 있고 開 市 가 있어왔다는 역사에 대한 이해는 공간의 차단, 어떠한 통제책, 사건으로 인한 단절 등 잠시 관계가 끊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이어가는 기억이나 경험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잡상으로 잡인으로 잡류로 끊임없이 왜관과 그 주변 지역에 등장하면서 그들의 활동과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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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111 - 토 론 문 조선의 對 日 關 係 와 東 萊 사람들 장순순(전북대) 논문의 의의 - 본 연구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대일창구였던 동래지역 사람들을 왜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조선 전시기를 대상으로 왜관이 부산포로 단일화되어 가는 과정에 주 목하고, 외교와 무역이라는 큰 구조 속에서 지역사람으로서 동래 사람들을 다루었다. - 발표자는 왜관에 관한 전문연구자로서 '열린 틈새'로서의 왜관, 지역으로서 부산 이라는 키워드로 지속적인 연구를 해왔고, 그 결과 왜관은 통제된 공간이었지만 조선 과 일본의 다양한 교류가 이뤄진 공간, '열린 공간'이이기도 하였음을 사실적으로 증 명한 많은 연구 논문을 발표해 왔다. 또한 지역민 즉, 부산, 동래 및 그 주변 지역민 들이 왜관과 어떠한 관련을 맺으며 삶을 영위해 왔는지는 발표자의 오랜 연구 주제였 기 때문에 오늘 발표도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의견 및 질문 1 조선전기 왜관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미진한 부분의 하나는 1547년 정미조약 이후 부산포왜관에 관한 연구일 것이다. 발표자께서는 1547년 이후 부산포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료로 1551년 경상감사의 장계와 명종실록 을 들고 있다. 그리고 동래 邑 格 의 상향 및 동래 관아의 노비 충원 과 부산포 士 兵 의 증원 사실 등을 들고 있으며, 조선상인과 일본상인과의 관계가 심 지어 임진왜란 중에도 중단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16세기는 동래지역의 모습 이 국가적 양상과 다른 모습, 예컨대 부산포 주변 지역의 수령과 軍 鎭 의 장수까지도
120 112 - 대일무역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는 삼포왜란, 사량진왜변, 을묘왜 변 등 크고 작은 왜변으로 불안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동래지역에서는 국가적 양상과 다른 모습이 전개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직전에 왜관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모두 철수하였다는 기존연구와 배치된다고 하겠다. 대단히 흥미 로운 시각이다. 그러나 제시하신 사료에서 보이는 임진왜란 중에 이루어진 조일 상인의 접촉은 "부 산에 있는 왜적들이 아직도 모두 철수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 선조실록 선 조 29년 9월 1일)이었으므로, 이전에 전개된 조일간의 민의 접촉과 같은 것으로 일반 화 시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다. 2 제4장에서 "왜관이란 공간에 대해서는 동래 사람들은 익히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또한 왜관 주 변에 사는 민들은 왜관의 건물, 밖으로 나온 일본인 등 倭 色 경관을 볼 수 있었기 때 문에 왜관과 일본인에 대해서는 좀 더 일상적인 이해가 가능하였다"라고 기술하였다. 그리고 '개시'와 '조시', '오일개시'에 참여한 동래 내지 주변지역의 민들의 활동에 대 해서도 기술하였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통한 왜관과 일본인에 대한 일상적인 이해의 구체적인 예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준다면, 본 발표문이 더욱 돋보일 것이다. 더불어 동래는 일본을 경험한(표류민, 통신사, 문위행) 조선인들이 머물기도 하였고, 왜관이 존재하는 곳인 만큼 일반의 조선인들이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문화, 물산, 인 물군을 접할 수 있었다. 어려울 수 있는 질문이기는 하나 동래민들의 일상성에서 타 지역과 구별되는 국경지역 사람들만의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3 동래사람들을 위시한 '민'들이 일본인과 접촉 교류할 수 있는 기회의 하나로 ' 賣 買 春 '을 들고 있는데, 실상(빈도수)이 개시나 조시 등처럼 일반화시킬 수 있는가? 4 논지 전개에서 사용하고 있는 ' 雜 商 ', ' 雜 人 ', ' 小 商 工 人 ' 은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인가? 또한 공식성(허가된 상인)과 비공식성(잠상)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가? 기타 -5쪽 "양국 외교의 창구로서 그 역할을" 양국 외교와 무역의 창구로서 그 역할을
121 113 - 주 16) 선조실록 선조 29년(1597) 8월 28일, 9월 1일 선조실록 선조 29년 (1596) 8월 28일, 9월 1일 - 7쪽 "접응, 외교, 무역장소로 정착되었다." 숙박, 외교, 무역 장소로 정착되었다. - 14쪽에서 첨관에 대해서 "1637년 왜관에 관수가 파견됙 이전에 왜관의 일을 주 관하는 사람이 없었을 때 업무를 주관했던 관리였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후 사료에 나오는 첨관은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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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115 - 제5주제 : 朝 鮮 의 對 日 關 係 와 巨 濟 사람들 ~80년대 巨 濟 府 舊 助 羅 里 [ 項 里 ] 주민의 日 本 難 破 船 救 助 를 중심으로 - 정성일(광주여대) 목차 Ⅰ. 머리말 Ⅱ. 거제부의 지형적 위치와 대마도 Ⅲ. 대마도 선박의 거제도 불시착과 거제 주민의 구조 사례 Ⅳ. 거제 주민의 대마도 선박 구조에서 보이는 특징 Ⅴ. 맺음말 Ⅰ. 머리말 흔히 외교( 外 交 )를 공공재( 公 共 財, public goods)라고 말한다. 이것은 한 나라의 국 민이면 누구나 소비할 수 있는 재화라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는 국방( 國 防 )도 마찬가 지이다. 심지어 세금을 납부하지 않은 사람조차도 그들이 외교나 국방 서비스의 수혜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공재의 경우에 는 무임승차( 無 賃 乘 車, free ride)가 가능하다. 이 글은 조선시대 경상도 거제부[ 巨 濟 都 護 府 ]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거제 주민들은 무임승차는 고사하고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를 지탱하느라 다른 지 역에서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부담을 져야 했다. 최근까지도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 계 때문에 특정한 지역이나 개인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조
124 116 - 선시대 국경 지역 사람들이 조선의 대외관계 유지를 위해 어떠한 역할을 담당해야 했 는지 거제부 구조라리( 舊 助 羅 里 ; 項 里 ) 주민들의 사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기존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한일관계와 동래부의 관련성에 대하여 집중해 왔다. 동 래부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거제부에 대해서는 학문적 관심도 멀어져 있 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자료 문제를 들 수 있다. 다만 1713년 거제부가 동래부로 보 낸 관문( 關 文 )이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대마도 기록물[ 對 馬 島 宗 家 文 書 ]에 실려 있 는데, 이 사료에 대해서는 이미 분석이 이루어진 바 있다. 2) 최근 들어 구조라리[ 舊 助 羅 里 ; 項 里 ] 고문서를 분석한 이종길 3) 과 김현구 4) 의 논문이 발표되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이들 연구에서는 같은 지역의 고문서를 이용하면서도 해난사고에 관해서는 본 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5) 전갑생이 집필한 일운면사( 一 運 面 史 ) 6) 와 박광순의 논문 1) 이 글은 필자의 이전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미리 밝혀 둔다(정성일, 2013, 조선 후기 한일 외교를 떠받친 사람들 경상도 거제부 주민을 중심으로, 제4회 전국해양문 화학자대회 자료집 1,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사) 여수지역사회연구소, 국립해양문 화재연구소, (사) 장보고기념사업회, 쪽 참조). 2) 이훈, 2000, 朝 鮮 後 期 漂 流 民 과 韓 日 關 係, 경인문화사, 쪽 / 윤유숙, 2011, 近 世 日 朝 通 交 と 倭 館, 일본 岩 田 書 院, 쪽 ; 정성일, 2013, 전라도와 일본 조선시대 해난사고 분석, 경인문화사, 쪽. 원 사료는 御 米 漕 船 其 外 渡 海 之 船 朝 鮮 地 へ 脇 乘 之 節 彼 國 より 馳 走 之 定 格 正 德 三 癸 巳 年 約 條 相 究 候 記 錄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대마도종가문 서 기록류, No. 3855). 3) 이종길, 2012, 戶 籍 資 料 를 통해 본 朝 鮮 後 期 漁 村 社 會 의 家 族 關 係 巨 濟 島 舊 助 羅 項 里 戶 籍 中 草 를 중심으로, 동아법학 57, 동아대학교 법학연구소, 1-52쪽 ; 이종길, 2012, 19세기 巨 濟 島 項 里 漁 村 社 會 相 에 대한 一 考 巨 濟 島 舊 助 羅 古 文 書 를 중심으로, 장서각 30, 한국학중앙연구원, 44-79쪽. 4) 김현구, 1995, 18-19세기 巨 濟 府 의 海 稅 運 營 과 民 庫, 역사와 세계( 舊 釜 大 史 學 ) 19, 부산대학교 호원사학회, 쪽 ; 김현구, 2001, 조선 후기 沿 海 民 의 생활상 18~19 세기 巨 濟 府 를 중심으로, 지역과 역사 8, 부경역사연구소, 45-90쪽. 5) 다만 김현구의 논문에서는 조선 시대 빈번한 왜의 표류민들로 인하여 거제민에게 심각한 폐해를 낳고 있었다 든가, 항리( 項 里 )를 비롯한 이웃 동리는 빈번한 漂 倭 人 의 출몰과 체류 에 따른 부대비용을 고스란히 떠맡고 있었으며, 통영과 옥포진 등에 수시로 드나드는 연락 선박의 제공도 이들이 번갈아 가며 맡았다 고 기술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김현구는 1873 년의 경우 항리를 비롯한 인근의 望 峙, 楊 花, 倭 仇, 臥 峴 5 洞 의 洞 首 와 頭 民 이 支 供 의 분 담을 하고 있다 고 적었으며, 日 省 錄 의 기사를 인용하여 실제로 전 거제부사 權 煥 의 原 情 에 따르면 읍의 大 同 米 를 순영으로부터 해마다 400석을 획급받아 漂 倭 의 供 給 之 需 로 삼았 고, 묵은 쌀은 改 色 할 때 還 貿 하여 시가 차익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고 했다. 또 그는 경 상우도 암행어사 趙 基 謙 의 별단에 의하면 거제와 熊 川 양읍의 漂 倭 支 供 의 부족수가 천여 석에 이르러 收 租 하여 획급함이 2,3할밖에 감당되지 않았다. 과외로 백성에게 거두게 되니 유망이 잇따르게 되었으므로 나중 道 臣 에게 加 分 耗 1천 석을 해마다 양읍에 분배하여 왜 량의 부족수를 보충하도록 조치하고 있었다. 고 보았다. 이미 19세기 초두에 각종 公 用 과 왜공의 民 瘼 을 해결하기 위하여 懋 悅 庫 란 일종의 민고를 운영하게 된 것도 그 일환이었 다 고 주장한 바 있다. 김현구, 위의 논문(2001), 82-83쪽, 88쪽. 6) 가령 이 책에는 거제부 구조라리 고문서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1836년(병인년)부터 1887년 (정해년)까지 표류한 왜선들을 맞아들였던 기록과 함께, 그 결과를 만호와 진장( 鎭 將 )이었던
125 117 - 에서도 7) 거제 주민들이 일본 난판선을 구조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지만, 해난사고에 관한 체계적인 분석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밖에 일제 강점기 거제와 통영 지역에 일 본인이 이주하여 세운 이른바 일본인 이주 어촌에 대해서는 여박동의 연구가 알려져 있는 정도이다. 8) 이 글에서는 구조라리[ 舊 助 羅 里 ; 項 里 ] 고문서에서 보이는 일본 선박의 해난사고 처리 기록을 일본 자료인 왜관의 관수매일기( 館 守 每 日 記 )와 외무성기록( 外 務 省 記 錄 ) 등과 대조해가면서 거제 주민의 일본 난파선 구조( 救 助 )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서 세 가지 잠정적인 결론을 얻었다. 첫째, 기존 연구에서 일본인의 조선 표착( 漂 着 ) 사고로 간주하였던 해난사고 속에 구조라리 고문서에 나타나는 대마도 선 박의 해난사고 건수가 포함되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일본인의 조선 표착 건수에 추가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1836년부터 1887년까지 구조라리( 舊 助 羅 里 ; 項 里 )를 비롯한 네 고을의 주민들이 대마도 선박의 구조( 救 助 )와 이송( 移 送 ), 그 밖 의 관계 기관 보고( 報 告 ) 등에 동원되었으며, 이와 관련된 부담을 인근 네 고을이 번 갈아가면서 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 1887년 이후 구조라리 고문서에서 일본 대 마도 선박의 해난사고 기록이 모습을 감춘 것은 전년도인 1886년 조선과 일본 사이 에 표민경비상환법( 漂 民 經 費 償 還 法 ) 이 개정되어 실비상환( 實 費 償 還 ) 즉 해난을 당 한 사람 본인이 구조와 구호에 들어간 비용을 부담하는 방식으로 바뀐 점과 깊은 관 련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Ⅱ. 거제부의 지형적 위치와 대마도 1872년에 제작된 거제부지도( 巨 濟 府 地 圖 )를 보면 거제부의 읍치( 邑 治 )는 주산인 계 룡산( 鷄 龍 山 ) 밑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도의 가운데 부분에 동헌( 東 軒 )과 객사( 客 舍 ), 향교( 鄕 校 ) 같은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바닷가 쪽으로는 신당( 神 堂 ) 이 모습을 보인다. 읍치의 동쪽으로는 북에서 남으로 높은 산이 이어져 있어서 동쪽 [진장이 있었던? 인용자주] 옥포와 지세포 그리고 통영에 사람을 보내어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용과 노력을 한 마을이 부담하기에는 너무나 벅차기에 같은 계방촌(형제 지의를 맺었다)인 인근 5개동과 부담을 나누어 가지는 현명함을 보였다. 고 적었을 뿐이다 (전갑생 편저, 2010, 一 運 面 史, 일운면지편찬위원회, 478쪽). 7) 박광순, 2013, 역사적으로 본 거제도와 일본 知 世 浦 의 歷 史 公 園 화를 중심으로, 韓 國 島 嶼 硏 究 24, 한국도서(섬)학회, 15-16쪽. 8) 여박동, 1994, 日 帝 下 統 營 巨 濟 地 域 의 日 本 人 移 住 漁 村 形 成 과 漁 業 組 合, 일본학지 13, 계명대학교 국제학연구소, 63-84쪽 ; 여박동, 1995, 日 帝 時 代 巨 濟 島 이리사무라( 入 佐 村 )의 形 成, 일본학지 14, 계명대학교 국제학연구소, 55-70쪽.
126 118 - 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그 산 아래 해안을 따라 마을이 들어서 있는 데, 그곳에서 바다를 건너면 바로 일본의 대마도 땅이다. <그림 6> 거제부의 위치와 지형 자료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거제부지도(奎, v.2-10)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후기 지방지도 경상도편 상. 거제부지도(1872년)를 보면 거제도와 대마도의 위치를 잘 알 수 있다. 거제부지도의 오른쪽(동쪽)에 대마도 산천 수로 480리(對馬島山川水路四百八十里) 라 적혀 있다. 거제의 포구가 나란히 바다를 사이에 두고 대마도와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다. 지도 의 오른쪽(동쪽) 끝에는 지세포진(知世浦鎭)이 있고, 그 반대편인 왼쪽(서쪽) 끝에는
127 119 - 율포진( 栗 浦 鎭 )과 가배량진( 加 背 梁 鎭 )이 보인다. 두 진 사이의 바닷가를 따라가다 보 면 일곱 개 가량의 포구가 마치 입을 벌리고 있는 듯이 줄지어 있다. 이곳은 바람과 파도를 피해 배를 대 놓기에 알맞은 천혜의 항구이자 외적의 침입을 막기에 좋은 관 방( 關 防 )의 요새( 要 塞 )이다. 지도에는 포구를 따라 집이 그려져 있는데, 이 지역의 마 을 이름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지도의 오른쪽(동쪽)에서 왼쪽(서쪽) 방향으로 1 왜구 리( 倭 仇 里 ), 2 와현리( 臥 峴 里 ), 3 구조라리( 舊 助 羅 里 ), 4 망치리( 望 峙 里 ), 5 양화리 ( 楊 花 里 ), 6 학동리( 學 洞 里 ), 7 도장리( 陶 藏 里 ), 8 고다대리( 古 多 大 里 ), 9 저구리( 猪 仇 里 )가 자리 잡고 있다(<그림 1> 참조). <그림 7> 거제와 대마도의 위치 자료 : 구글지도 조선후기를 통하여 대마도 선박이 조선으로 내왕할 수 있는 바닷길은 대마도 북쪽 관소( 關 所 ) 와니우라[ 鰐 浦 ], 사스나[ 佐 須 奈 ] 에서 동래부 초량왜관( 草 梁 倭 館 )에 이르 는 항로였다. 따라서 원칙대로 한다면 거제부가 직접 대마도 사람들과 접촉을 하거나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뜻하지 않게 해난사고가 발생하여 거제 해안으로 대마도 선박이 표류해 오면 거제 주민들은 일본 난파선을 구조하여 옥포( 玉 浦 )까지 호송하는 일을 맡았다. <그림 2>에서 한려해상국립공원 이라 적힌 바로 위 포구가 항리[구조라리]를 비롯한 네 개 마을이 자리 잡은 곳이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거제시 라 되어 있는 곳의 우측 해안에 옥포가 위치하고 있다. 일본 난파선을 구조하여 옥포까지 이송( 移 送 )한 거제 주민들은 그 사실을 통영( 統
128 120 - 營 )에도 배를 띄워서 알리게 되어 있었다. 통영은 거제의 서쪽에 인접한 곳인데, 고성 반도의 남부에 자리 잡고 있는 군사 요충지이다. 통영이란 지명 자체가 삼도수군통제 사( 三 道 水 軍 統 制 使 )의 군영( 軍 營 )을 뜻하는 통제영( 統 制 營 )에서 온 말인 것에서도 이 를 잘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일본 난파선이 거제 해안으로 표류해 온 사실을 거제 주민들이 통영에 보고하는 것은 국방 측면에서, 그리고 일본 난파선을 옥포까지 이송 하는 것은 외교 측면에서, 거제 연안 주민들이 마땅히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될 임무였 다고 말할 수 있다. Ⅲ. 대마도 선박의 거제도 불시착과 거제 주민의 구조 사례 1. 일본 선박의 경상도 해안 불시착[가미노리 ; 시모노리] 현재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관수) 매일기 를 보면 대마도에서 동 래부( 東 萊 府 )의 초량왜관(현재의 부산광역시 용두사공원 일대)으로 건너오는 선박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 1836년(헌종 2, 天 保 7) 1월 16일[서력 3.3] 기록을 보면, 지 난 14일[1.14] 대선( 大 船 ) 한 척이 고다대포( 古 多 大 浦 )에, 같은 대선 한 척이 지세포 ( 知 世 浦 )에 닿았다고 (동래부 소속 역관인) 소통사( 小 通 事 )가 (관수에게) 알렸다 고 되 어 있다. 이틀 뒤인 1월 18일 (관수) 매일기 는 지난 14일[1.14] 바다를 건넜다가 지세포에 불시착했던 선박이 무사히 왜관으로 돌아왔다 고 적고 있다. 9) 이것은 <그림 2>의 한려해상국립공원 이라 적힌 곳의 바로 왼쪽 편의 포구로 표류해 온 대마도 대 선 한 척이 고다대포 지세포 초량왜관으로 이동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 이 배는 10) <그림 2>의 우측 하단에 보이는 대마도의 북쪽 끝 와니우라[ 鰐 浦 ] 나 사스나[ 佐 須 奈 ]에서 출발하여 동래부의 부산 왜관으로 가는 것이 정상 항로였다. 그런데 이때는 대마도 선박이 항로를 이탈하여 거제부의 포구에 불시착한 것이다. 대 마도 기록에서는 이런 경우를 가리켜 와키노리[ 脇 乘 ]라고 했다. 그 중에서도 대략 낙 동강을 경계로 하여 위아래를 구분한 다음, 낙동강의 동쪽 해안에[경상좌도] 닿는 것 을 가미노리[ 上 乘 ]라 적었고, 서쪽 해안에[경상우도] 불시착하는 것을 시모노리[ 下 乘 ] 이라 불렀다. 따라서 1836년 1월의 경우 대마도식 표현대로 한다면 일본 배가 시모 노리 를 한 셈이다. 이처럼 정해진 항로를 이탈하는 것은 두 나라가 합의한 규정에 어긋나는 일임은 더 9) (관수) 매일기, 天 保 7년(1836) 1월 16일, 18일(일본 國 立 國 會 圖 書 館 古 典 籍 資 料 宗 家 記 錄 823-8). 10)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 배는 對 馬 藩 당국이 소유하고 있던 御 手 船 大 寶 丸 이었으며, 이 배의 水 夫 는 12명이었고, 船 頭 는 龍 井 次 郞 이었다( ( 館 守 ) 每 日 記 1836년 1월 18일).
129 121 -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만 당시 선박이나 항해 수준 때문에 일본 배가 바람과 조류 의 흐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부산 왜관이 아닌 경상도의 다른 포구로 불시착하 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중에는 대마도 선원들이 조선 측의 후한 접대를 노리고 불 시착을 가장하여 의도적으로 그 지역으로 들어가는 일도 있어서 두 나라 사이에 말썽 이 되기도 하였다. 고의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도 거제도를 비롯한 경상도 연안 주민들은 대마도 선박을 구조하여 그 배가 안전하게 부산 왜관으 로 돌아갈 수 있도록 구호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11) 2. 거제도 주민의 일본 선박 구조 사례 가. 1836년 1월 : 四 洞 倭 船 公 事 置 簿 의 첫 사례 1836년 1월 13일 거제도 주민들이 대마도 선박의 불시착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했 는지를 보여주는 고문서가 남아 있다. 199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 원)이 수집하여 펴낸 古 文 書 集 成 35 巨 濟 舊 助 羅 里 篇 四 洞 倭 船 公 事 置 簿 (1836~1887) 의 맨 첫 장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丙 申 正 月 13 日 多 大 止 泊 倭 船 各 ( 船 ) 支 供 一 體 施 行 統 營 公 事 1 次 去 乙 未 12 月 13 日 倭 船 望 峙 陶 藏 過 浹 1 次 項 里 倭 學 過 浹 1 次 望 峙 交 付 船 1 次 望 峙 11) 당시 대마도 선박의 난파를 대하는 중앙과 지역의 입장과 시각이 크게 엇갈리고 있었음을 다음에 소개하는 1729년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가령 부산첨사( 釜 山 僉 使 ) 김박( 金 鑮 ) 이 아뢰기를, 왜인들이 거제와 웅천 두 고을에서 먹거리를 지급받는 것을 달갑게 여겨 바람의 순 불순( 順 不 順 )을 가릴 것 없이 걸핏하면 고의로 길을 돌아 거제와 웅천을 거쳐 서 부산의 왜관으로 가는 바람에, 그들을 접대하는 데 들어간 대동미( 大 同 米 ) 수량이 해마 다 몇 천 석에 이르고 있으니, 이 폐단을 막기 위하여 대마도주( 對 馬 島 主 )에게 이문( 移 文 : 書 契 發 送 )하자 고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비변사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서 부 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왜선의 왕래가 곧장 관소에 정박하는 것은 십상팔구( 十 常 八 九 ) 그 러하지만 혹 서북풍을 만나면 바람에 실려 거제도 등지에 표류하는 일이 있으나, 1년 접 대비가 어찌 몇 천 석에 이르기야 하겠는가? 또 이는 오로지 풍세( 風 勢 )의 여하에 매인 일이다. 지금 만일 반드시 곧장 관소로 가라고 한다면 저들은 필시 바람을 핑계로 댈 것 이니 소득은 없고 국가의 체면만 손상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가 진달한 사항은 덮어 두는 것이 어떤지? 결국 영조는 실익이 없고 국가의 체면만 손상시키게 될 것 이라는 비변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 일로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備 邊 司 謄 錄 1729년(영조 5) 1월 17일, 3월 1일.
130 122 - 倭 學 過 浹 1 次 項 里 玉 浦 公 事 1 次 加 去 楊 花 項 里 望 峙 楊 花 각 里 任 의 手 決 이 자료의 제목에 등장하는 사동( 四 洞 ) 이란 왜구리( 倭 仇 里 ; 曳 龜 里 ), 항리( 項 里 ; 舊 助 羅 里 ), 망치리( 望 峙 里 ), 양화리( 楊 花 里 )의 네 고을 을 말한다(<그림 3>의 와현리, 구조라리, 망치리 일대). 먼저 이 고문서의 첫 머리에는 병신 정월 13일 다대( 多 大 ) 에 왜선( 倭 船 )이 정박하였다 고 적혀 있다. 이것은 1836년 1월 13일에 대마도 선박이 거제도의 고다대포( 古 多 大 浦 )에 닿아서 배를 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당시 정식 지 명이 고다대( 古 多 大 ) 였지만, 그곳 주민들은 관행적으로 그곳을 다대 로 불렀던 모양 이다. 이것은 거제부지도(1782년)에 나오는 구조라리( 舊 助 羅 里 ) 란 지명이 그곳 주민 들이 남긴 고문서에는 그곳이 항리( 項 里 ) 로 기재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2) 아 무튼 앞의 (관수) 매일기 가 지난 14일[1.14] 지세포에 불시착[시모노리]을 한 배 라 고 적은 것이 바로 1월 13일 다대에 머물고 있었던 왜선 (구조라리 고문서)을 가리 키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림 8> 구조라리와 옥포, 통영의 위치 자료 : 구글지도 구조라리 고문서의 두 번째 줄에 적혀 있는 것은 거제도 연안 주민들이 왜선에 물 12) 강정태 엮음, 1982, 一 運 面 舊 助 羅 里 誌, 거제군.
131 123 - 과 음식 등을 제공 하였음을 말해 준다. 그 다음으로 망치리( 望 峙 里 )와 항리( 項 里 ), 양 화리( 楊 花 里 )에서 사건 처리와 보고 등 공식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곳 주민들이 배편을 제공하였음을 적은 것이다. 이를 통해서 네 고을 주민들이 대마도 선박의 불 시착 사실을 통영과 옥포에 알려야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일본 배가 고다대리 ( 古 多 大 里 )에서 도장리( 陶 藏 里 )를 통과할 때와 통역 업무를 맡은 왜학역관( 倭 學 譯 官 ) 이 이동할 때에도 그곳 주민들이 배편을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언제 어느 고을에서 어떤 업무를 위해서 배를 띄웠는지를 매번 장부에 적은 까닭은 대마도에서 건너온 선박의 불시착과 관련하여 네 고을 의 역( 役 ) 부담을 공평하게 관리하기 위함 이었다고 판단된다. 나. 1870년 윤10월 : (관수) 매일기 의 마지막 사례 앞에서 소개한 (관수) 매일기 는 1870년( 明 治 3) 윤 10월로 끝을 맺고 말았다. 이 것은 1871년에 일본의 메이지 정부가 과거의 번( 藩 )을 폐지하고 새롭게 현( 縣 )을 설치 하는 행정개혁을 단행한 것과[ 廢 藩 置 縣 ], 1872년 9월 일본 외무성이 대마번의 관리들 을 왜관에서 강제 퇴거시킨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관수) 매일기 에서 위의 네 고을과 관련된 마지막 기사는 1868년 6월 28일조에 보인다. 대마도의 국덕 환( 國 德 丸 )이란 선박이 지난 25일[6.25] 옥포( 玉 浦 )에 불시착을[ 下 乘 ] 했다가 오늘 [6.28] 무사히 왜관으로 돌아갔다 고 되어 있다. 그런데 위의 거제도 구조라리 고문서 [ 四 洞 倭 船 公 事 置 簿 ]에는 6월 27일 옥포에 배를 대고 머물렀다[ 止 泊 玉 浦 ] 고 적혀 있 다. 두 자료 사이에 이틀 차이가 나는데, 아마도 이것은 최초 불시착 장소와 경유지 인 옥포 정박 사이의 시차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관수) 매일기 1870년 윤10월 5일 기록에는 지난 2일[윤10.2] 바다를 건 넜다가 3일 기장( 機 張 )에 불시착한[ 脇 乘 ] 배가 오늘[윤 10.5] 무사히 왜관으로 돌아갔 다 고 되어 있다. 이때는 경상좌도인 기장에 불시착 한 것이므로 대마도 식 표현대로 한다면 가미노리가 된다. 이것이 대마도 기록인 (관수) 매일기 에서 보이는 마지막 불시착 기록인 셈이다. 다. 1887년 윤4월 : 四 洞 倭 船 公 事 置 簿 의 마지막 사례 구조라리 고문서[ 四 洞 倭 船 公 事 置 簿 ]를 보면 거제도 주민들이 오랜 동안 일본 선박 의 불시착과 관련하여 종래대로 구조와 송환 업무를 계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87년 윤 4월 25일 표류해온 일본 배가 통영과 옥포에 정박 하였으며, 이 일로 양화( 楊 花 ), 망치( 望 峙 ), 항리( 項 里 )와 옥포( 玉 浦 )에서 각각 한 차례씩 배를 댔다 고 기록되어 있다. 구조라리의 또 다른 고문서인 倭 船 公 事 井 間 第 次 冊 (1846~1887) 의
132 124 - 마지막 장에도 표왜선( 漂 倭 船 )의 공사( 供 事 ) 와 관련하여 박완이( 朴 完 伊 )가 통영으로 한 차례 배를 띄웠다[ 統 一 次 發 船 ] 고 적혀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일본 선박의 불시착과 관련하여 구조라리 지역 주민들이 남 긴 기록이 1887년 윤 4월로 끝이 난 점이다. 일본 선박의 불시착이야 그 뒤로도 이 어졌을 터인데, 왜 이 때를 마지막으로 해서 더 이상 기록이 작성되지 않았던 것일 까?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살펴보아야 함은 물론이다. 다만 한 가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1886년 9월 7일[음력 8.11] 조선과 일본이 합의하여 표민경비상환법 ( 漂 民 經 費 償 還 法 )을 개정 함에 따라, 양국 간 해난사고 처리 방식이 표류민 개인이 구조와 구호에 들어간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실비상환( 實 費 償 還 ) 방식으로 제도가 새롭게 바뀌게 된 것과 이것이 서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13) 라. 조선 기록과 일본 기록의 대조 : 1836년의 사례 구조라리 고문서[ 四 洞 倭 船 公 事 置 簿 ]와 대마도 기록[ 館 守 每 日 記 ]를 보면 대조해 보면 어떨까? 1836년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연 번 對 馬 출항 (일본 월일 朝 鮮 倭 館 표착 도착 (조선) (일본 ) <표 1> 조선 기록과 일본 기록의 대조(1836년) 지역 ( 漂 着 ) 선박명 척 수 船 頭 船 主 水 夫 ) 古 多 太 浦 거제 사료와 일치 知 世 浦 知 世 浦 御 手 船 大 寶 丸 1 龍 井?? 次 郞 12인 (?) 0120 古 多 太 浦 御 手 船 明 神 丸 1 印 束 佐 兵 衛 橫 目 (왜관) 등 知 世 浦 御 手 船 組 下 橫 目 (왜관) 1 佐 護 喜 八 住 德 丸 등 盜 藏 浦 御 手 船 당년조 거제 사료와 1 桐 谷 市 次 郞 住 若 丸 제1선송사 일치 知 世 浦 御 手 船 당년조 1 高 田 傳 七 불시착[ 下 乘 ] 쌀 小 吉 丸 제2,3선송사 등 받아감 8 왜관 0506 玉 浦 5.6 왜관 출발, 御 手 船 옥포 표착 후 明 神 丸 歸 館 加 德 豊 飛 船 知 世 浦 御 借 船 당년조 柳 傳 右 衛 門 1특송사 2호선 加 德 관수 일기 加 德 御 手 船 高 田 傳 七 당년조 비고 13) 정성일, 앞의 책, 383쪽.
133 125 - 明 神 丸 아명송사 機 張 御 手 船 寶 德 丸 1 武 田 佐 助 橫 目 등 盜 藏 浦 거제 사료와 일치 盜 藏 浦 加 德 鰐 浦 飛 船 1 治 七 加 德 佐 須 奈 飛 船 1 與 市 橫 目 등 자료 : 四 洞 倭 船 公 事 置 簿 ( 古 文 書 集 成 35 巨 濟 舊 助 羅 里 篇 ) ; 館 守 每 日 記 (일본 국립국회 도서관) 주 : 조선과 일본 자료의 월일은 각각 조선과 일본의 역법( 曆 法 )에 따른 것임. 1836년 한 해 동안 (관수) 매일기 는 모두 9건 1/14, 2/11, 3/5, 3/6, 6/15, 7/1, 9/2, 11/8, 11/24 의 대마도 선박 불시착 기사를 적었다. <표 1>에서 보는 것 처럼 이 가운데 1월 14일( 古 多 太 浦, 知 世 浦 )과 3월 5일( 盜 藏 浦 ), 11월 24일( 盜 藏 浦 ; 陶 藏 浦 )에 발생한 대마도 선박 불시착에 대해서는 구조라리 고문서에 관련 기록이 보 인다. 다시 말해서 세 차례 사건에 대해서는 거제의 구조라리 고문서와 대마도의 관 수매일기 기록이 완전히 일치한다. 그런가 하면 구조라리 고문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대마도 선박의 해난사고 가 더 있었다는 점을 (관수) 매일기 가 보여준다. 그 가운데는 구조라리와 비교적 가 까운 지세포( 知 世 浦 )나 옥포( 玉 浦 )에 대마도 선박이 불시착을 한 경우도 있었고, 거제 의 동쪽에 인접한 가덕도( 加 德 島 )에 대마도 사람들이 표착한 경우도 있었다[이상 시모 노리]. 심지어는 경상좌도에 해당하는 기장( 機 張 )에 대마도 선박이 닿은 경우도[가미노 리] 있었음을 <표 1>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구조라리 고문서[ 四 洞 倭 船 公 事 置 簿 ]를 보면 대마도 기록[ 館 守 每 日 記 ]에서 보이 지 않는 거제 주민의 대마도 난파선 구조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표 2>는 1836년 한 해 동안 네 고을 즉 구조라리[항리], 망치리, 양화리, 왜구리[예구리]에서 배를 띄 운 횟수와 그 배가 맡았던 용무를 잘 보여준다. <표 2> 巨 濟 府 洞 別 出 船 과 日 本 難 破 船 救 助 (1836년) No 기 재 시작 종료 지역 제목 용무 項 望 楊 花 倭 월 일 월 일 里 峙 ( 楊 荷 ) 仇 비고 多 大 止 泊 倭 船 統 營 公 事 1 을미(1836) 12월 13일 倭 船 / 楊 荷 = 楊 花 ( 鄭 ) 2 陶 藏 過 浹 1 倭 (?) 支 供 一 體 施 行 1 3 倭 學 過 浹 1 4 交 付 船 1 5 倭 學 過 浹 1 6 玉 浦 公 事 1 加 去 楊 花
134 倭 船 支 供 過 浹 抄 統 營 公 使 1 2 玉 浦 公 使 1 3 統 營 公 使 交 付 船 1 5 統 營 公 使 1 6 玉 浦 公 使 1 7 倭 米 加 串 1 8 倭 學 過 浹 陶 藏 浦 過 浹 1 2 統 公 事 1 3 玉 浦 公 事 1 4 統 營 公 事 1 5 邑 公 事 1 6 知 世 統 公 事 1 8 玉 浦 公 事 2 9???? 公 事 1 10 統 公 事 1 11 統 公 事 1 12 玉 浦 公 事 3 13 邑 公 事 1 統 營 公 事 一 次 楊 花 不 去 丁 酉 (1837)11 月 倭 船 去 자료 : 四 洞 倭 船 公 事 置 簿 ( 古 文 書 集 成 35 巨 濟 舊 助 羅 里 篇 ) ; 館 守 每 日 記 (일본 국립국 회도서관) 주 : 지역별 숫자는 배를 띄운 次 數. 먼저 네 고을에서 1836년 1년 간 세 사례에 걸쳐 모두 31척의 배를 띄웠음을 알 수 있다. 통영에 대마도 난파선의 표착 사실을 알리고, 옥포까지 대마도 선박을 이송 하였으며, 통역을 맡은 왜학역관을 실어 나르는 등 조선의 외교와 국방과 관련된 일 을 거제 주민들이 도맡았던 사실을 이 자료를 통해서 살필 수 있다(<표 2> 참조). Ⅳ. 거제 주민의 대마도 선박 구조에서 보이는 특징 1. 일본인의 조선 표착 사고 건수와 관련하여 임진 정유왜란과 정묘 병자호란 이후 동아시아 정세가 안정되는 년대 이후 표류민의 송환 체제가 확립되기 시작했음은 이미 선행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14) 대마 도 기록과 외무성기록을 통해서 17세기 초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해난사고 건수를 비 롯한 장기 통계가 어느 정비된 것도 사실이다. 15) 선행연구에 기초하여 이 글의 분석 대상 기간인 년대에 조선으로 표류해온 일본인의 해난사고를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14) 池 內 敏, 1998, 近 世 日 本 と 朝 鮮 漂 流 民, 일본 臨 川 書 店, 37-39쪽 ; 이훈, 앞의 책, 쪽, 쪽. 15) 정성일, 앞의 책, 66-68쪽, 73-74쪽.
135 127 - <표 3> 조선으로 표류해 온 일본인의 해난사고 일람표(1831~1884년) 연번 연도( 日 ) 월일( 日 ) 출신지 표착지 표착지 척수 인원 비고 사쓰마 전라도 제주 정의현 위미포 경상도 울산부 서생진 강원도 평해 경상도 고성현 唐 浦 達 牙 江 히라도 生 月 浦 전라도 제주 경상도 장기 凡 津 사쓰마 전라도 제주 (불명) (불명) (불명) 사쓰마 전라도 제주 대정현 3 94 유구인 17인 동승 사쓰마 小 琉 球 人 秋 目 浦, 전라도 제주 대정현 사계포 1 31 동승 鹿 兒 島 사쓰마 전라도 제주 대정현 浮?? 浦 사쓰마 전라도 제주 대정현 竹 島 경상도 경주 사쓰마 鹿 兒 島 전라도 제주 정의현 法 還 浦 히라도 전라도 제주목 無 注 浦 경상도 흥해군 曲 江 津 경상도 청하현 松 羅 浦 사쓰마 가고시마 전라도 제주 명월포 (불명) (불명) 가고시마 秋 目 浦 전라도 제주 가고시마 전라도 제주 정의군 方 頭 浦 가고시마 전라도 제주 대정군 和 順 浦 쓰시마 이즈하라 전라도 순천 방답진 사쓰마 전라도 제주 나가토 전라도 제주 쓰시마 이즈하라 전라도 제주 1 5 제주 해역 의 어업자원 쓰시마 전라도 제주 2 21 풍 부 하 다 는 이즈하라 정보 듣고 출어 쓰시마 이즈하라 전라도 제주 야마구치 전라도 제주 1 5 자료 : 池 內 敏, 앞의 책, 부록 近 世 日 本 人 の 朝 鮮 漂 着 年 表, 쪽에서 작성. 이케우치 사토시[ 池 內 敏 ]의 연구에 따르면 1830~80년대에 일본인 이 경상도 지역 에 불시착[표류, 표착]한 사례는 6건에 지나지 않는다(<표 1>의 No. 2, 4, 6, 13, 16,
136 참조). 그런데 이 수치는 이케우치가 대마도[대마번]의 기록물인 표민피앙상( 漂 民 被 仰 上 효민오세아게라레)에 근거한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이케우치는 구조라리 고 문서를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작성한 연표에 빠져 있는 일본 선박의 조선 표착 사건 이 결코 적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1864년의 경우를 보자. <표 3>의 No. 14에서 보는 것처럼 일본 사쓰마[ 薩 摩 ] 선박이 해난사고를 당하여 제주 정의현 법환포( 法 還 浦 )에 표착한 일이 있었다. 이 배 가 부산의 초량왜관까지 이송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대마도의 기록물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먼저 (일대관) 매일기 5월 5월 기록에 화표민( 和 漂 民 )이 시모[ 下 モ] 경상좌도를 의미(인용자주) 가덕( 加 德 )까지 배를 타고 통과했다고 알려옴 이라는 기사가 보인다. 여기에서 화표민( 和 漂 民 )이 일본 표류민을 가리키는 것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또 같은 자료 5월 8일자에 사쓰마[ 薩 州 ] 화표민이 어제[5.7] 저녁 다대포 원문에는 太 多 浦 (인용자주) 에 로 돌아왔다 고 적혀 있다. 16) 이것을 보면 그해 2월 6일 제주 정 의현 법환포에 닿았던 일본 사쓰마의 배가 구조되어 5월 5일에는 가덕, 5월 7일 저녁 에는 다대포까지 이송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마도가 기록한 다른 자료인 (관수) 매 일기 5월 1일 기록을 살펴보면, 화표민[일본 표류민]이 지난 13일[4.13] 전라도 영암 의 이진창( 梨 津 倉 )이라고 하는 곳까지 배로 통과했는데, 지난 25일[4.25] 그곳에서 배 를 띄워 전라도 남포( 南 浦 )라는 곳에 배를 댔다고 오늘[5.1] 밤 조선 측 역관[ 任 官 ]이 알려 왔다고 왜관의 조선어 통사인 가와모토[ 川 本 信 助 ]와 쓰요시[ 津 吉 軍 八 ]가 (관수에 게) 보고하였다 고 적혀 있다. 17) 그리고 (관수) 매일기 5월 5일조에는 그제 3일[5.3] 화표민이 가덕까지 통선( 通 船 )했다고 조선 측이[ 外 向 ] (왜관에) 알려왔다 고 되어 있 다. 같은 자료의 5월 8일과 9일, 10일에도 화표민[일본 표류민]에 관한 언급이 있는 데, 이것은 모두 사쓰마 주민에 관한 것이다. 이 자료를 통해서 제주[2.6]에서 영암 이진[4.13]까지 바다를 건넌 다음, 연안을 따라 남포[4.25] 가덕[5.3] 다대포 [5.7] 부산 초량왜관으로 이동하는 사쓰마 표류민의 이동 경로를 확인할 수 있다. <표 4> 巨 濟 舊 助 羅 里 古 文 書 에 보이는 日 本 難 破 船 救 助 (1836~1887년) 倭 船 公 事 井 間 第 次 冊 四 洞 倭 船 公 事 置 簿 연번 간지 서력 월 일 제목 연번 간지 서력 월 일 제목 1 병신 多 大 止 泊 倭 船 2 병신 倭 船 支 供 過 浹 抄 3 병신 ) ( 一 代 官 ) 每 日 記 1864년 5월 5일(맑음), 5월 8일(맑음), 일본 對 馬 歷 史 民 俗 資 料 館 宗 家 文 庫 日 記 類 Dc 14). 17) ( 館 守 ) 每 日 記 1864년 5월 1일, 5월 5일, 5월 8일과 5월 9일, 5월 10, 일본 國 立 國 會 圖 書 館 古 典 籍 資 料 宗 家 記 錄
137 129-4 정유 倭 船 過 浹 及 公 事 第 次 抄 各 處 公 事 三 洞 一 體 施 行 5 무술 陶 藏 浦 倭 船 移 項 里 過 / 三 洞 各 處 公 事 一 體 施 行 6 무술 項 里 止 泊 倭 船 公 事 一 體 擧 行 7 무술 陶 藏 浦 止 泊 倭 船 公 事 條 8 기해 項 里 倭 二 隻 公 事 條 9 경자 陶 藏 浦 止 泊 倭 船 公 事 置 付 10 경자 陶 藏 浦 止 泊 倭 船 支 供 條 11 신축 신축 임인 倭 船 浮 留 公 事 抄 14 계묘 長 奇 島 倭 船 公 事 抄 15 불명 불명 불명 불명??????? 陶 藏 浦 過 浹 一 次 1 병오 公 事 抄 16 병오 倭 船 公 事 抄 2 정미 陶 藏 浦 倭 船 公 事 第 次 記 17 정미 倭 船 四 洞 公 事 抄 3 무신 公 事 抄 18 무신 倭 船 公 事 抄 4 경술 倭 船 陶 藏 及 本 洞 公 事 19 경술 倭 船 公 事 置 付 5 신해 1851 윤 신해 1851 윤8 1 6 신해 倭 船 公 事 記 7 신해 公 事 置 付 21 신해 公 事 會 契 記 8 계축 계축 倭 船 公 事 第 次 記 9 을묘 倭 船 公 事 抄 10 무오 倭 船 公 事 抄 23 무오 四 洞 倭 船 公 事 冊 11 경신 倭 船 陶 藏 浦 止 泊 過 浹 12 신유 倭 船 公 事 抄 24 신유 倭 船 公 事 抄 13 신유 신유 신유 四 洞 公 事 抄 15 갑자 漂 倭 船 公 事 抄 26 갑자 倭 船 公 事 抄 16 을축 倭 船 公 事 抄 27 을축 倭 船 公 事 抄 17 병인 倭 船 公 事 抄 28 병인 倭 船 公 事 井 間 18 정묘 倭 船 公 事 抄 29 정묘 倭 船 公 事 抄 30 무진 漂 倭 船 公 事 抄 19 신미 倭 船 公 事 抄 31 신미 倭 船 日 發 公 事 抄 20 갑술 公 事 抄 32 신미 임신 倭 船 公 事 抄 33 임신 倭 船 公 事 抄 22 임신 倭 船 公 事 抄 34 임신 倭 船 公 事 抄 35 정유 倭 船 公 事 抄 23 계유 倭 船 公 事 抄 24 계유 本 泊 倭 船 公 事 井 間 25 계유 飄 倭 船 公 事 抄 36 계유 倭 船 公 事 抄 26 을해 漂 倭 船 公 事 抄 37 을해 倭 船 公 事 抄 27 병자 倭 船 公 事 抄 38 병자 漂 倭 船 公 事 抄 28 병자 倭 船 公 事 抄 39 병자 四 洞 倭 船 公 事 抄 40 병자 四 洞 倭 船 公 事 抄 29 무인 倭 船 公 事 抄 41 무인 四 洞 倭 船 公 事 抄 42 을묘 倭 船 公 事 抄 30 경진 供 事 抄 31 병술 漂 倭 船 公 事 抄 43 병술 漂 倭 船 公 事 抄 32 정해 1887 윤4 25 漂 倭 船 公 事 抄 44 정해 1887 윤4 25 漂 倭 公 事 抄 자료 : 古 文 書 集 成 35 巨 濟 舊 助 羅 里 篇 그런데 <표 4>에서 보는 것처럼 구조라리 고문서에도 같은 해인 1864년 5월 1일에 일본 선박을 구조한 일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이날 옥포( 玉 浦 )에는 김원옥( 金 原 玉 )과
138 130 - 노갑준( 盧 甲 準 )이 보고를 하였으며, 통영( 統 營 )의 경우는 김원옥( 金 原 玉 )이 그리고 거 제읍( 巨 濟 邑 )은 박관성( 朴 官 成 )이 보고자로 되어 있다. 18) 그렇다면 이 해난사고는 위 에서 본 (일대관) 매일기 와 (관수) 매일기 에 기술된 것과 동일한 사건일까? 필자 의 판단으로는 <표 4>의 1864년 5월 1일 사건과 <표 3>의 1864년 사건이 비록 같은 해에 일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전혀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래에 소개하는 (관 수) 매일기 를 읽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1864년 5월 14일 기록에 지난 12일[5.12] 옥포( 玉 浦 )에 대선( 大 船 ) 한 척이 불시착 [시모노리]을 했다고 조선 쪽에서[ 外 向 ]에서 (왜관에) 알려왔다 는 내용이 보인다. 이 어서 오늘[5.14] 신시 무렵 아래쪽 포구에서 중선( 中 船 ) 한 척이 보였다고 (왜관의) 선박 감시소[ 船 見 ]가 (관수에게) 보고하였다 는 기술이 보인다. 그와 함께 곧이어 포 구로 들어 왔는데 그 배는 묘견환( 妙 見 丸 )이었으며, 그 배에는 송장( 送 狀 )에 적힌 대 로 화물이 실려 있었으나, 밤중이라서 선박 검사는 그날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 되어 있다. 19) 배의 크기가 조선쪽에서 알려주었을 때는 대선 이라고 했지만, 왜관의 대마 도 사람들이 그 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뒤에는 중선 으로 적은 것이 흥미롭다. 아 무튼 이 배는 5월 1일 구조라리[항리] 등 네 고을 주민에 의해 구조되어 5월 12일 옥 포로 이송되었다가 5월 14일 저녁 왜관에 닿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처럼 지금까지 연구자들이 본격적으로 분석하지 않았던 거제 구조라리 고문서의 해난사고 기록과 (관수) 매일기 등 대마도 기록물의 관련 기사를 면밀히 살펴본다 면, 기존의 표류 표착 통계에 잡히지 않은 새로운 사례가 추가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거제를 비롯한 경상도 연안 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대마도 사람이든 대마 도 이외 지역 사람이든 그들은 모두 일본인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그들을 구조 구호하 여 왜관까지 이송하는 데 적지 않은 물력이 동원된 사실을 감안한다면, 기존 연구에 서 배제된 대마도 난파선도 조선 표착 일본 선박 의 범주에 포함시켜서 논의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그 동안 일본인의 조선 표착 건수 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대마도 선박의 해난사고가 거제 구조라리( 舊 助 羅 里 ) 고문 서와 (관수) 매일기 등에 적혀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 입장에서 볼 때 구 18) 倭 船 公 事 井 間 第 次 冊 (1846~87년), 古 文 書 集 成 35 巨 濟 舊 助 羅 里 篇. 19) ( 館 守 ) 每 日 記 1864년 5월 14일, 일본 國 立 國 會 圖 書 館 古 典 籍 資 料 宗 家 記 錄
139 131 - 조라리 인근 네 고을에 해당하는 40건 정도가 기존 통계에서 누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세포( 知 世 浦 ), 옥포( 玉 浦 ), 가덕( 加 德 ), 기장( 機 張 )과(<표 1> 참조), 그 밖에 웅 천( 熊 川 ), 울산( 蔚 山 ) 등 경상도 여러 연안 지역까지 포괄한다면 이러한 사례는 앞으 로 더 많이 추가될 수 있다 ~87년 사례에서 보듯이 구조라리[항리] 등 인근 네 고을이 일본 선박의 구조와 이송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보고와 지원에 동원되었 으며, 그 부담을 여러 마을이 나누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와 유사한 공동 조직이 경상도 다른 지역에서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년 이후 구조라리 고문서에서는 일본 선박의 불시착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 에 대해서는 해당 고문서에서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추정컨대 1886년 표민경비상환 법( 漂 民 經 費 償 還 法 ) 개정에 따라, 설령 거제 연안에 불시착하여 구조되더라도 그에 따른 비용을 구조를 받은 일본 선박의 선주( 船 主 )가 부담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 이 러한 변화의 배경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요컨대 일본 대마도와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 때문에 경상도 지역 주민들이 여 러 가지 형태로 대일 외교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부담하고 있었다. 대마도에 서 부산 왜관으로 건너오는 선박이 바람과 조류의 영향 때문에 지정 항로를 이탈하는 경우, 경상우도 중에서는 거제( 巨 濟 ) 경상좌도 중에서는 기장( 機 張 )으로 표류하는 일 이 잦았다. 그런 만큼 그 지역의 연안 주민들은 조난당한 일본 배를 구조하여 일본인 들을 부산의 왜관까지 송환하는 과정에서 해마다 쌀 천 석에 해당하는 지공( 支 供 )과 그 밖의 배편을 조달하기 위하여 적지 않은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한 주민들의 노력과 희생의 결과로 26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조선과 일본 사이에 선린과 우 호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끝)
140
141 133 - 토 론 문 朝 鮮 의 對 日 關 係 와 巨 濟 사람들 ~80년대 巨 濟 府 舊 助 羅 里 [ 項 里 ] 주민의 日 本 難 破 船 救 助 를 중심으로 - <토론문> 이훈(동북아역사재단) 1. 논문의 의의 위 논문에서는 조선시대(1830~1880년대) 경상도 거제부 사람들이 표류민 송환이라 는 제도 속에서 어떻게 동원되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검토함으로써, 국경지대 주민 들과 대외관계를 밝혔으며 그 연구사적 의미가 크다. 1990년대 이후 한국측 한일관계사 연구를 보면 조선의 중앙정부 사료를 바탕으로 주로 국가 중심의 제도사적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또 일본측 자료를 활용한 경우라 하더라도 대마도종가문서 등에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본 논문은 조선 의 지역사료를 동시대의 대마도 종가문서와 일일이 대조 분석함으로써 지역이라는 관 점에서 한일관계의 실태를 검토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리하여 그동안 동래부에 편중되었던 시각을 거제부를 포함하여 표류가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국경지대로까지 확장하는 한편, 한일관계사 연구에서 서술의 주체도 국가가 아니라, 지역, 또는 지역 주민으로 구체화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일 양국의 지역 사료를 분석했기 때문에, 그동안 선행연구의 통 계에서 누락되었던 불시착 사례들을 표류 통계에 보완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접촉 실태나 정도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2. 질문
142 巨 濟 府 舊 助 羅 里 고문서( 四 洞 倭 船 公 事 置 簿 ) 한문인가? 이두인가? 過 浹 의 의미 - 거제도 사동 주민이 19세기 중후반에 걸쳐 일본 표류민을 구조한 횟수는 위 연구 를 통해 역사적 사실로서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단, 표선 구조 활동(통영에 보고체계, 표선의 구조와 옥포 이송, 왜학역관에 배편 제공)이 고을에 부과된 役 이라면, 거제 주민의 구조활동에 드는 부담은 어떻게 마련 하고 운용되었는지 궁금하다. 즉 주민 자체의 부담은 물론이고 조선의 부역체계나 지 방행정에서는 이 비용을 어떤 식으로 운용하고 있었는지, 거제 주민들은 이러한 부담 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구체적인 언급이나 분석이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연구검토 시기를 19세기 중후반(1830~1880년대)으로 잡은 만큼, 거제 주민들 의 표류민 구조활동으로 인한 비용부담과 운용이, 검토대상 시기를 전후한 18세기 말~19세기초, 19세기말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충설명해 주기 바란다.
143 메 모
144
145 뒷표지 그림 : 구조라리(항리) 고문서(한중연 고문서집성 수록) 관수매일기 기사
146 <뒷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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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20
152*220 2011.2.16 5:53 PM ` 3 여는 글 교육주체들을 위한 교육 교양지 신경림 잠시 휴간했던 우리교육 을 비록 계간으로이지만 다시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 선 반갑다. 하지만 월간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솔직히 나는 우리교 육 의 부지런한 독자는 못 되었다. 하지만 비록 어깨너머로 읽으면서도 이런 잡지는 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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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第 6 條 ( 壹 株 의 金 額 )..
제 정 1973. 2. 28 개 정 2010. 3. 19 定 款 삼성전기주식회사 http://www.sem.samsung.com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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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 2 - - - - 4 - - 5 - - 6 - - 7 - - 8 - 4) 민원담당공무원 대상 설문조사의 결과와 함의 국민신문고가 업무와 통합된 지식경영시스템으로 실제 운영되고 있는지, 국민신문 고의 효율 알 성 제고 등 성과향상에 기여한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를 치 메 국민신문고를 접해본 중앙부처 및 지방자 였 조사를 시행하 였 해 진행하 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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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004. 12 2004. 11 25 26 2004. 12 % 50 40 30 20 10 0 華 東 華 北 中 南 西 南 東 北 西 北 전 체 중 대 형 차 중 형 차 소 형 차 경 차 2004. 11 27 帕 28 2004. 12 2004. 11 29 30 2004. 12 2004. 11 31 32 2004. 12 2004. 11 33 34 2004.
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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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가해하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쌍해서이다 가해하고 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을 것 같아서이다 보복이 두려워서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화가 나고 나쁜 아이라고 본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이 없다 따돌리는 친구들을 경계해야겠다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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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제 의식의 원칙 논문은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야 한다. 주제 의식은 논문을 쓰는 사람의 의도나 글의 목적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협력의 원칙 독자는 필자를 이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나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노력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논리적 엄격성의 원칙 감정이나 독단적인 선언이
나하나로 5호
Vol 3, No. 1, June, 2009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KACPR) Newsletter 01 02 03 04 05 2 3 4 대한심폐소생협회 소식 교육위원회 소식 일반인(초등학생/가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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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koroad.or.kr E-book 10 2016. Vol. 434 62 C o n t e n t s 50 58 46 24 04 20 46 06 08, 3 3 10 12,! 16 18 24, 28, 30 34 234 38? 40 2017 LPG 44 Car? 50 KoROAD(1) 2016 54 KoROAD(2), 58, 60, 62 KoROAD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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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60 1 1 200 2 6 4 7 29 1975 30 2 78 35 1 4 2001 2009 79 2 9 2 200 3 1 6 1 600 13 6 2 8 21 6 7 1 9 1 7 4 1 2 2 80 4 300 2 200 8 22 200 2140 2 195 3 1 2 1 2 52 3 7 400 60 81 80 80 12 34 4 4 7 12 80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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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 객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객사는 영조 35년(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입니다. 원래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습니다. 정당에서는 전하 만만세 라고 새 긴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Readings at Monitoring Post out of 20 Km Zone of Tokyo Electric Power Co., Inc. Fukushima Dai-ichi NPP(18:00 July 29, 2011)(Chinese/Korean)
碘 岛 监 结 30km 20km 10km 碘 达 碘 测 时 提 高 后 的 上 限 [250,000 微 西 弗 / 年 ] [10,000 微 西 弗 / 年 ] 巴 西 瓜 拉 帕 里 的 辐 射 (1 年 来 自 地 面 等 ) > 辐 射 量 ( 微 西 弗 ) 250,000 100,000 50,000 10,000 注 : 本 资 料
35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5권 1883.01.24 釜 山 口 設 海 底 電 線 條 欵 / 海 底 電 線 設 置 ニ 關 スル 日 韓 條 約 漢 日 1883.06.22 在 朝 鮮 國 日 本 人 民 通 商 章 程 / 朝 鮮 國 ニ 於 テ 日 本 人 民 貿 易 ノ
근현대 한일간 조약 일람* 22) 1. 조선 대한제국이 일본국과 맺은 조약 주) 1. 아래 목록은 國 會 圖 書 館 立 法 調 査 局, 1964 舊 韓 末 條 約 彙 纂 (1876-1945) 上 ; 1965 舊 韓 末 條 約 彙 纂 (1876-1945) 中 ; 外 務 省 條 約 局, 1934 舊 條 約 彙 纂 第 三 巻 ( 朝 鮮 及 琉 球 之 部
4 7 7 9 3 3 4 4 Ô 57 5 3 6 4 7 Ô 5 8 9 Ô 0 3 4 Ô 5 6 7 8 3 4 9 Ô 56 Ô 5 3 6 4 7 0 Ô 8 9 0 Ô 3 4 5 지역 대표를 뽑는 선거. 선거의 의미와 필요성 ① 선거의 의미`: 우리들을 대표하여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을 말합니다. ② 선거의 필요성`: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의 일을 의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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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v vi vii viii ix x xi 61 62 63 64 에 피 소 드 2 시도 임금은 곧 신하들을 불러모아 나라 일을 맡기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하 산을 만난 임금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어요. 원하시는 대로 일곱 번째 다이아몬드 아가씨를
(012~031)223교과(교)2-1
0 184 9. 03 185 1 2 oneclick.law.go.kr 186 9. (172~191)223교과(교)2-9 2017.1.17 5:59 PM 페이지187 mac02 T tip_ 헌법 재판소의 기능 위헌 법률 심판: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면 그 효력을 잃게 하거 나 적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 탄핵 심판: 고위 공무원이나 특수한 직위에 있는 공무원이 맡
항일 봉기와 섬멸작전의 사실탐구
抗 日 蜂 起 와 殲 滅 作 戰 의 史 實 探 究 - 韓 國 中 央 山 岳 地 帶 를 中 心 으로- 이노우에 가츠오( 井 上 勝 生 ) 1) 머리말 지난 해(2015년) 10월과 11월, 日 本 軍 東 學 黨 討 伐 隊 의 進 軍 路 를 한국의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조사할 수 있었다. 後 備 第 19 大 隊 (당시 東 學 黨 討 伐 隊 라고 불리었다) 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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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02 8 9 32 33 1 10 11 34 35 가족 구조의 변화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원만한 생활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기능 사회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동 가구 가족 규모의 축소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 1인 또는 1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 타나는 가족 구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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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희망캠페인 쪽방의 겨울은 유난히 빨리 찾아옵니다. 하늘 높은지 모르고 오르는 기름 값은 먼 나라 이야기 마냥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내 몸 하 나 간신히 누일 전기장판만으로 냉기 가득한 방에서 겨울을 보내야 합니다. 한 달에 열흘정도 겨우 나가는 일용직도 겨울이 되면 일거리가 없어, 한 달 방값을 마련하 기 어렵고, 일을 나가지 못하면 밖으로 쫓겨 날
화보 끝없는,, 끝나지 끝나지 않는 않는 즐거움 끝없는 얼음벌판 인제빙어축제 강원도 인제군 내설악 지류와 내린천의 관문인 소양호, 눈 덮인 내설악의 환상적인 경관을 배경으로 은빛 빙어를 주제로 펼쳐 지는 축제가 있다. 바로 인제빙어축제이다. 인제빙어축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 민국 대표축제이다. 10회 축제기간 동안 방문객 100만 명 돌파(2007년 기준,
211 1-5.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石 村 洞 百 濟 初 期 積 石 塚 이도학, (서울의 백제고분) 석촌동 고분, 송파문화원, 2004. 서울 特 別 市, 石 村 洞 古 墳 群 發 掘 調 査 報 告, 1987. 1-6. 고창지석묘군 高 敞 支 石 墓 群 문화재관리국,
210 참고문헌 1. 능묘 1-1. 경주황남리고분군 慶 州 皇 南 里 古 墳 群 경상북도, 文 化 財 大 觀, 1-V, 慶 尙 北 道 編, 2003. 문화재관리국, 天 馬 塚 發 掘 調 査 報 告 書, 1974. 1-2. 함안도항리 말산리고분군 咸 安 道 項 里 末 山 里 古 墳 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咸 安 道 項 里 古 墳 群 5, 2004.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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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DVD CHOICE dvd dvd?!!!! [1] [2] DVD NO. 1898 [3] Days of Being Wild 지금도 장국영을 추억하는 이는 많다. 그는 홍콩 영화의 중심에 선 배우였고,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거짓말 같던 그의 죽음은 장국 영을 더욱 애잔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 이 장국영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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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히 묻고 가까이 실천하는 선진 산림과학 3.0 시대를 열겠습니다! 01 03 05 05 06 07 08 08 10 10 11 임업인에게는 희망을, 국민에게는 행복을 带 NIFoS 1 중국 닝샤회족자치구() 중국 무슬림 인구 주요 분포도 중국 닝샤의 회족 자치구 3 중국 무슬림 인구 Top 11 지역 순위 지역( 省 ) 인구(만)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발행일 : 2013년 7월 25일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정]--------------------------------------------
연구노트
#2. 종이 질 - 일단은 OK. 하지만 만년필은 조금 비침. 종이질은 일단 합격점. 앞으로 종이질은 선택옵션으로 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종이가 너무 두꺼우면, 뒤에 비치지 는 않지만, 무겁고 유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두꺼우면 고의적 망실의 위험도 적고 적당한 심리적 부담도 줄 것이 다. 이점은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 필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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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2002 年 2 月 昌 原 大 學 校 大 學 院 音 樂 科 安 明 基 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Sonata for B-flat
한류동향보고서 16호.indd
Story Story 2012. 9. 13. Story 1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2 STORY STORY 12 호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2 Korean Wave Story 2012 (2012년 1/4분기) 12 호 12 호 2012. 4. 9. 2 3 4 5 轩 辕 剑 之 天 之 痕 我 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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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Story 2013. 1. 30. Story 2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3 STORY STORY 12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3 Korean Wave Story 2013 (2012년 1/4분기) 12 12 2012. 4. 9. 2 3 4 5 6 乱 世 佳 人 花 絮 合 集 梦 回 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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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문제연구 제41호 2012년 4월 해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이용약관의 약관규제법에 의한19)내용통제 가능성* : Facebook 게시물이용약관의 유효성을 중심으로 이병준 업 요약 업 규 규 논 업 쟁 때 셜 네트워 F b k 물 규 았 7 계 건 됨 규 규 업 객 계 규 므 받 객 드 객 규 7 말 계 률 업 두 않 트 접속 록 트 른징 볼 규 업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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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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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리-내지(6장~8장)최종 2007.8.3 5:43 PM 페이지 168 in I 덕수리 민속지 I 만 아니라 마당에서도 직접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장팡뒤의 구조는 본래적인 형태라 고 할 수는 없으나, 사회가 점차 개방화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폐쇄적인 안뒤공간에 위치하던 장항 의 위치가 개방적이고 기능적인 방향으로 이동해가는 것이 아닌가 추론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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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ㅣ반딧불이ㅣ뒤엉켜 버린 삶, 세월이 흘러도 풀 수 없는.. 실타래 벌써 3년째 시간은 흘러가고 있네요. 저는 서울에서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가족들과 제주로 내려오게 되었답 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엄마의 죽음을 잊으려고 하였습 니다. 그러다 여기서 고향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분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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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85 86 87 88 89 1 12 1 1 2 + + + 11=60 9 19 21 + + + 19 17 13 11=60 + 5 7 + 5 + 10 + 8 + 4+ 6 + 3=48 1 2 90 1 13 1 91 2 3 14 1 2 92 4 1 2 15 2 3 4 93 1 5 2 6 1 2 1 16 6 5 94 1 1 22 33 55 1 2 3 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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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는 선 5 월 월말 성취도 평가 국어 2쪽 사회 5쪽 과학 7쪽 자르는 선 학년 5 13 4 47 1 5 2 3 7 2 810 8 1113 11 9 12 10 3 13 14 141 1720 17 15 18 19 1 4 20 5 1 2 7 3 8 4 5 9 10 5 월말 성취도평가 11 다음 보기 에서 1 다음 안에 들어갈 알맞은 말을 찾아 쓰시오. 각 나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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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2 / 6 첨부 1. 공급품 목록 및 납기일정 번호 품명 모델명/사양 Vendor 단위 수량 납기 비고 1 (샘플기판) 6Layer, FR-4, 1.6T, 1온스, 2 (샘플기판) 3 (샘플기판) 4 (샘플기판) 5 (샘플기판) FRONT PANEL BOARD 3종 1. 샘플기판은 Board 별 성능시험용 2. 샘플 기판 후 Board 별 육안점검 및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 피터드러커의 혁신과 기업가정신 허연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Doing Better Problem Solving Doing Different Opportunity ! Drucker, Management Challenges for the 21st Century, 1999! Drucker, Management: Tasks, Responsibi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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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Group 2006 AUTUMN Volume. 02 Focus Group 2006 AUTUMN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 모두를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 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7단원 1(252~269)교
7 01 02 254 7 255 01 256 7 257 5 10 15 258 5 7 10 15 20 25 259 2. 어휘의 양상 수업 도우미 참고 자료 국어의 6대 방언권 국어 어휘의 양상- 시디(CD) 수록 - 감광해, 국어 어휘론 개설, 집문당, 2004년 동북 방언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제주 방언 어휘를 단어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다문화 가정 중학생의 문식성 신장 내용
교육연구 제58집 성신여대 교육문제연구소 2013년 12월 30일 2009 改 定 敎 育 課 程 에 따른 中 學 校 漢 文 敎 科 書 의 多 文 化 敎 育 에 對 한 一 見 이돈석 청주대학교 한문교육과 Ⅰ. 들어가는 말 Ⅱ. 한문 교과 교육과정 목표에 대한 검토 Ⅲ. 중학교 한문 교과서 분석 목 차 1. 재제 출전의 문제 2.. 교육 내용과 제시 방법의 문제
(중등용1)1~27
3 01 6 7 02 8 9 01 12 13 14 15 16 02 17 18 19 제헌헌법의제정과정 1945년 8월 15일: 해방 1948년 5월 10일: UN 감시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제헌 국회의원 198명 선출 1948년 6월 3일: 헌법 기초 위원 선출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 소집. 헌법 기 초위원 30명과 전문위원 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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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Winter 02 08 10 News 14 Article Report 42 NARS Report 60 NARS Report Review 68 World Report 84 Column 94 Serial 116 2011 Winter 11 www.nars.go.kr 01 02 w w w. n a r s. g o. k r 03 04 01 02 03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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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교회에관한교리
내지-교회에관한교리 2011.10.27 7:34 PM 페이지429 100 2400DPI 175LPI C M Y K 제 31 거룩한 여인 32 다시 태어났습니까? 33 교회에 관한 교리 목 저자 면수 가격 James W. Knox 60 1000 H.E.M. 32 1000 James W. Knox 432 15000 가격이 1000원인 도서는 사육판 사이즈이며 무료로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2 목차 편집자의 말 ------------------------------------------------------------------------------------- 3 한국의 * 상1 개괄 한국의 병역거부운동 -------------------------------------------------------------------------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 평균 ( 만원 ) 자녀상태 < 유 자 녀 > 미 취 학 초 등 학 생 중 학 생 고 등 학 생 대 학 생 대 학 원 생 군 복 무 직 장 인 무 직 < 무 자 녀 >,,.,.,.,.,.,.,.,.
. 대상자의속성 -. 연간가수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평균 ( 만원 ) 전 국,........,. 지 역 도 시 지 역 서 울 특 별 시 개 광 역 시 도 시 읍 면 지 역,,.,.,.,.,. 가주연령 세 이 하 - 세 - 세 - 세 - 세 - 세 - 세 세 이 상,.,.,.,.,.,.,.,. 가주직업 의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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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가을 24호 2_ . 02 03 04 08 10 14 16 20 24 28 32 38 44 46 47 48 49 50 51 _3 4_ _5 6_ _7 8_ _9 10_ _11 12_ _13 14_ _15 16_ _17 18_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개식사를 하는 김구(1940.9.17) 將士書) 를 낭독하였는데, 한국광복군이 중국군과 함께 전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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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도서관총서 1 경기도 도서관 총서 경기도도서관총서 1 지은이 소개 심효정 도서관 특화서비스 개발과 사례 제 1 권 모든 도서관은 특별하다 제 2 권 지식의 관문, 도서관 포털 경기도 도서관 총서는 도서관 현장의 균형있는 발전과 체계적인 운 영을 지원함으로써 도서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간되 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를 통해 사회전반의 긍정적인
기본소득문답2
응답하라! 기본소득 응답하라! 기본소득 06 Q.01 07 Q.02 08 Q.03 09 Q.04 10 Q.05 11 Q.06 12 Q.07 13 Q.08 14 Q.09 응답하라! 기본소득 contents 16 Q.10 18 Q.11 19 Q.12 20 Q.13 22 Q.14 23 Q.15 24 Q.16 Q.01 기본소득의 개념을 쉽게 설명해주세요. 06 응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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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0 http://www.homeplus.co.kr 11 http://www.homeplus.co.kr 12 http://www.homeplus.co.kr 13 http://www.homeplus.co.kr Interview 14 http://www.homeplus.co.kr Interview 15 http://www.home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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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1 2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3 4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2000 年 度 國 監 - 農 林 海 洋 水 産 ( 附 錄 )) 5 6 (2000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안 경 광 학 과 세부내용 - 남을 도와 준 경험과 보람에 대해 말해 보세요. - 공부 외에 다른 일을 정성을 다해 꾸준하게 해본 경험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 남과 다른 자신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말해 주세요. - 지금까지 가장 고민스러웠던 또는 어려웠던 일과 이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 자신의 멘토(조언자) 또는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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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0 0 9 M I N I S T R Y O F C U L T U R E, S P O R T S A N D T O U R I S M 2009 M I N I S T R Y O F C U L T U R E, S P O R T S A N D T O U R I S M 2009 발간사 현재 우리 콘텐츠산업은 첨단 매체의 등장과 신기술의 개발, 미디어 환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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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책임자 가나다 순 머 리 말 2006년 12월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원장 - i - - ii - - iii - 평가 영역 1. 교육계획 2. 수업 3. 인적자원 4. 물적자원 5. 경영과 행정 6. 교육성과 평가 부문 부문 배점 비율(%) 점수(점) 영역 배점 1.1 교육목표 3 15 45점 1.2 교육과정 6 30 (9%) 2.1 수업설계 6 3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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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GONS JEONNAM DRAGONS FOOTBALL CLUB MATCH MAGAZINE VOL.136 / 2014.10.16 Preview Review News Poster PREVIEW K LEAGUE CLASSIC 32R JEONNAM VS SEOUL / 14.10.18 / 14:00 / 광양축구전용구장 서울과 뜨거운 한판 승부! 전남드래곤즈가 오는
소식지수정본-1
2010. 7 통권2호 2 CONTENTS Korea Oceanographic & Hydrographic Association 2010. 7 2010년 한마음 워크숍 개최 원장님께서 손수 명찰을 달아주시면서 직원들과 더욱 친숙하게~~ 워크숍 시작! 친근하고 정감있는 말씀으로 직원들과 소통하며 격려하여 주시는 원장님... 제12차 SNPWG 회의에 참석 _ 전자항해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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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이 스승님이 스승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알라는 위대하다! 위대하다! 알라는 알라는 위대하다! 특집 특집 기사 특집 기사 세계 세계 평화와 행복한 새해 경축 세계 평화와 평화와 행복한 행복한 새해 새해 경축 경축 특별 보도 특별 특별 보도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도가니! 스승님과의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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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102 103 104 105 혁신 17과 1/17 특히 05. 1부터 수준 높은 자료의 제공과 공유를 위해 국내 학회지 원문 데이 >> 교육정보마당 데이터베이스 구축 현황( 05. 8. 1 현재) 구 분 서지정보 원문내용 기사색인 내 용 단행본, 연속 간행물 종 수 50만종 교육정책연구보고서, 실 국발행자료 5,000여종 교육 과정 자료 3,000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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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Sanhak Foundation News VOL. 150 * 2011. 12. 30 논단 이슈별 CSR 활동이 기업 충성도에 미치는 영향 : 국가별 및 산업별 비교분석 최 지 호 전남대 경영학부 교수 Ⅰ. 서론 Ⅰ. 서론 Ⅱ. 문헌 고찰 및 가설 개발 2. 1. 호혜성의 원리에 기초한 기업의 사회적 투자에 대한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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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Shipping Association 조합 뉴비전 선포 다음은 뉴비전 세부추진계획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 조합은 올해로 창립 46주년을 맞았습니다. 조합은 2004년 이전까 지는 조합운영지침을 마련하여 목표 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추진해왔습니 다만 지난 2005년부터 조합원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창출로 해운의 미래를 열어 가자 라는 미션아래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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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 在 朝 日 本 人 의 전쟁협력 실태와 그 성격 99 연 구 논 문 동학농민혁명기 在 朝 日 本 人 의 전쟁협력 실태와 그 성격 * 박 맹 수 ** 32) 1. 머리말 2. 在 朝 日 本 人 增 加 推 移 와 그 背 景 3. 在 朝 日 本 人 의 戰 爭 協 力 實 態 와 그 性 格 4. 스파이활동 事 例 分 析 5. 맺음말 1. 머리말 18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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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대 초반 대일정책의 전개와 그 특징 1) 김 태 훈 * 1. 머리말 2. 己 酉 約 條 의 성립과 倭 使 上 京 금지 조치 3. 대일정책상의 異 見 조정과 명분 확보 4. 대일정책의 功 利 的 宥 和 的 기조 5. 맺음말 초록: 본 연구에서는 조선후기 대일외교의 출발선이었던 광해군대 초반 대일정책을, 외형적 측면에서 통교틀의 마련, 정책추진의 안정적 기반
건강증진 시범보고서 운영을 위한 기술지원 연구
짧활 康 t합샤훌 示 範 띔 健 所 運 營 응 위한 技 術 支 援 웹 JE - 示 範 保 健 所 模 型 開 發 을 中 心 으로l' 鍾 和 李 順 英 鄭 基 뽑 編 著 韓 國 띔 健 社 會 댐 究 院 머 리 말 美 國 이나 日 本 등 先 進 國 의 경우 이미 1970년대 부터 人 口 의 高 敵 化 와 生 活 樣 式 의 變 化 에 기인한 成 人 病 증가와 이에
레이아웃 1
Seed Money Bank Savings Banks vol.126 Seed Money Bank Savings Banks + vol.126 www.fsb.or.kr 20163 + 4 Contents 20163 + 4 vol.126 www.fsb.or.kr 26 02 08 30 SB Theme Talk 002 004 006 SB Issue 008 012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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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이 책에서는 단순히 가난한 관리들의 이야기보다는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사심 없이 헌신한 옛 공직자들의 사례들을 발굴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공과 사를 엄정히 구분하고,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공무를 처리한 사례,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최부, 송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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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지원단체 지원품목 수량 금 액 지원경로 2000 북한동포돕기제주도민운동본부 감귤 3,000톤 237 독자창구 강 원 도 농업용 비닐 27,000롤(415톤) 55 한적 북한동포돕기제주도민운동본부 당근 2,000톤 58 독자창구 강 원 도 연어치어55만미방류자재1식(21종)등 13 솔잎혹파리 공동방제 관련 약제 23 한적 남북강원도협력협회 농업용비닐 195톤
문화재이야기par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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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100 No.39 101 110 No.42 111 문 ᰍℎ᮹ šᯙŝ $* ᗭ} 화 재 이 야 기 De$** 남기황 ᰍℎ šᯙŝ $* ᗭ} 관인은 정부 기관에서 발행하는, 인증이 필요한 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편찬토록 하여 그 이듬해 문서 따위에 찍는 도장 이다. 문화재청은 1999년 (1447) 만든 석보상절을 읽고나서 지은 찬불가(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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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 융합 과학 2011년도 1학기 중간고사 대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 빅뱅 우주론에서 수소와 헬륨 의 형성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4 서술형 다음 그림은 수소와 헬륨의 동위 원 소의 을 모형으로 나타낸 것이. 우주에서 생성된 수소와 헬륨 의 질량비 는 약 3:1 이. (+)전하를 띠는 양성자와 전기적 중성인 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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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 2. 3. 4. 제2장 아동복지법의 이해 12 4).,,.,.,.. 1. 법과 아동복지.,.. (Calvert, 1978 1) ( 公 式 的 ).., 4),. 13 (, 1988 314, ). (, 1998 24, ).. (child welfare through the law) (Carrier & Kendal, 1992). 2. 사회복지법의 체계와
98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주요어 : 농업기술, 농서집요, 농상집요, 수도, 휴한법, 연작법 1. 머리말 한국사에서 14세기는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국가 지배체제가 크게 격변한 시기였다. 고려말 고려 사회 내부와 외부에서 발생한 여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 염 정 섭** < 국문초록 > 15세기 초반 태종대에 만들어진 농서로 현재 農 書 輯 要 가 남아 있다. 이 농서는 元 代 의 農 書 인 農 桑 輯 要 를 抄 錄 하고 吏 讀 를 붙여 간행한 것이었다. 간행연대가 아직 불확실하지만 15세기 초반 태종대로 추정된다. 고려말
한국사 문제1급
1 2. 1. 3. 2 4. 5. 6. 7. 8. 3 9. 10. 11. 12. 4 13. 다음 중에서 고려 시대 문화재를 모두 고른 것은? [2점] 15. 다음 주장을 입증하는 근거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전까지는 제도 운영, 국왕 및 왕실 구성원 명칭, 국가 의례에서 실질적인 황제국을 지 향하였다. ① 원구단을 만들어 하늘에
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몸이란? 자 기 반 성 유 형 밀 당 유 형 유 레 카 유 형 동 양 철 학 유 형 그 리 스 자 연 철 학 유 형 춤이란? 물 아 일 체 유 형 무 아 지 경 유 형 댄 스 본 능 유 형 명 상 수 련 유 형 바 디 랭 귀 지 유 형 비 타 민 유 형 #1
2015년9월도서관웹용
www.nl.go.kr 국립중앙도서관 후회의 문장들 사라져 버릴 마음의 잔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이번 해에도 배추농사에서 큰돈을 남은 평생 머릿속에서 맴돌게 될 그 말을 다시 떠올려보 만졌다 하더라도 지난 여름 어느 날 갑자기 들기 시작한 았다. 맺지 못한 채 끝나버린 에이드리언의 문장도 함께. 그 생각만은 변함없을 것 같았다.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 그래서
目 次 第 1 篇 1995 年 度 水 産 業 動 向 1 第 1 章 世 界 水 産 業 動 向 3 第 1 節 水 産 物 生 産 3 第 2 節 水 産 物 交 易 5 第 2 章 우리나라 水 産 業 動 向 7 第 1 節 漁 業 構 造 7 第 2 節 漁 家 經 濟 22 第 3 節 水 産 物 生 産 30 第 4 節 水 産 物 輸 出 入 40 第 5 節 水 産 物 需 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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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연구 http://www.kbc.go.kr/ 텔레비전의 폭력행위는 어떠한 상황적 맥락에서 묘사되는가에 따라 상이한 효과를 낳는다. 본 연구는 텔레비전 만화프로그램의 내용분석을 통해 각 인 물의 반사회적 행위 및 친사회적 행위 유형이 어떻게 나타나고 이를 둘러싼 맥락요인들과 어떤 관련성을 지니는지를 조사하였다. 맥락요인은 반사회적 행위 뿐 아니라 친사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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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征 日 記 신류 申 瀏 1619~1680 본관 평산 平 山 훈련원부정 삼도수군통제사 등 역임, 1658년 영장 領 將 으로 나선정벌 羅 禪 征 伐 신기석 역, ꡔ북정일기ꡕ, 탐구당, 1980 북정일기 북 정 일 기 北 征 日 記 포사수( 砲 射 手 ) 방포( 放 砲 ) 시재( 試 才 ) ꡔ북정일기ꡕ 무술 효묘 9년 순치15년 4월 初 十 日 晴 往 會 寧
2저널(11월호).ok 2013.11.7 6: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
24 2저널(11월호).ok 2013.11.7 6: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sibility Study) 등을 수행하여 인니전력 이다. 공사(PLN)를 비롯한 인니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 관한 개략적인 소개가 있었지만, 1) 여전히 많은 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실정이다. 본고 또한 여전히 짧고 소략한 내용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39-44, 2008년 6월 Yonsei J Med Hist 11(1): 39-44, 2008 일반논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 신창희( 申 昌 熙 )의 생애와 활동 박 형 우(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홍 정 완(연세대 의사학과)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Gwangju Jungang Girls High School 이상야릇하게 지어져 이승이 아닌 타승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텔에 여장을 풀고 먹 기 위해 태어났다는 이념 아래 게걸스럽게 식사를 했다. 피곤하니 빨리 자라는 선생님의 말 씀은 뒷전에 미룬 채 불을 끄고 밤늦게까지 속닥거리며 놀았다. 몇 시간 눈을 붙이는 둥 마 는 둥 다음날 이른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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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48.6% 남 51.4% 40대 10.7% 50대 이 상 6.0% 10대 0.9% 20대 34.5% 30대 47.9% 초등졸 이하 대학원생 이 0.6% 중졸 이하 상 0.7% 2.7% 고졸 이하 34.2% 대졸 이하 61.9% 직장 1.9% e-mail 주소 2.8% 핸드폰 번호 8.2% 전화번호 4.5% 학교 0.9% 주소 2.0% 기타 0.4% 이름
Microsoft Word - km20020132.doc
經 營 學 碩 士 學 位 論 文 韓 國 船 舶 管 理 業 의 競 爭 力 提 高 와 國 際 市 場 進 出 方 案 에 關 한 硏 究 - 國 籍 外 航 船 社 의 船 舶 管 理 部 門 을 中 心 으로 - A Study on Competitiveness Analysis and Entries into International Market of Korean Ship Management
내지(교사용) 4-6부
Chapter5 140 141 142 143 144 145 146 147 148 01 02 03 04 05 06 07 08 149 활 / 동 / 지 2 01 즐겨 찾는 사이트와 찾는 이유는? 사이트: 이유: 02 아래는 어느 외국계 사이트의 회원가입 화면이다. 국내의 일반적인 회원가입보다 절차가 간소하거나 기입하지 않아도 되는 개인정보 항목이 있다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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低 所 得 偏 父 母 家 族 의 生 活 實 態 와 政 策 課 題 金 美 淑 朴 敏 妌 李 尙 憲 洪 碩 杓 趙 炳 恩 元 永 憙 韓 國 保 健 社 會 硏 究 院 머 리 말 배우자의 사별, 별거, 이혼 등으로 초래되는 偏 父 母 家 族 은 産 業 化 의 진전에 따른 개인주의 팽배로 이혼이 증가하였고 經 濟 危 機 로 인한 가 족해체가 확산되어 최근 증가 추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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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4 45 2012 46 47 2012 48 49 추억의 사진 글 사진 최맹식 고고연구실장 죽음을 감지하고 미리 알아서 죽은 미륵사지 느티나무 이야기 느티나무가 있던 자리 미륵사지는 가장 오랫동안 발굴 작업이 이뤄진 곳 미륵사지는 발굴 종료 당시,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가장 오랫 동 안 발굴했던 유적이다. 1980년 7월 7일 발굴을 시작해 1996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