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거론하며 금산( 錦 山 )의 안성면( 安 城 面 )을 떼어 붙여 현( 縣 )을 승격시켜 부( 府 ) 로 만들고, 현감을 승진시켜 부사로 만들어 방비를 강화하자는 주장을 펼쳐 결국 안성은 무주에 할속 되었다. 한편, 고을에서 역적 또는 강상의 죄인이 발생하거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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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권 생명의 고향 미래의 땅 제5절 조선후기 1. 행정제도의 변천 1) 행정구역의 조정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46 지금의 금산군은 조선시대에는 금산군과 진산군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일제강점 기인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금산군( 錦 山 郡 )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의 변화 는 조선시대에도 종종 이루어져 금산군과 진산군의 일부 지역은 인근 고을과 하나 로 합쳐지거나 다시 분리되는 등의 과정을 겪었다. 금산군에서는 일부 지역이 무주로 할속( 割 屬 )되기도 하였다. 인조 23년(1645) 전 라감사 윤명은( 尹 鳴 殷 )이 무주의 적상산성( 赤 裳 山 城 )에 대해 논의하면서 금산 옥 천 영동 등 주변고을의 일부 지역을 적상산성에 할속 시키기를 조정에 청한 일이 있었다. 적상산은 신라와 백제가 각축을 벌였던 요지이며 고려시대 거란이 침입했 을 때 인근 수십 군현이 큰 피해를 입었을 때에 적상산에 살았던 사람들만 안전할 만큼 최고의 자연 요새였다. 조선 세종 때는 체찰사( 體 察 使 ) 최윤덕( 崔 潤 德 )이 산 성을 쌓고 보존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지만 임진왜란 이후에 성을 쌓고 광해군 4년 (1612) 실록전( 實 錄 殿 )이 세워져 5대 사고( 史 庫 )의 하나가 되었다. 인조 19년(1641) 에는 선원각( 璿 源 閣 ) 군기고( 軍 器 庫 ) 대장관( 大 將 館 )이 건립되었던 곳이다. 무 주의 곡식을 산성에 운반해 위급한 때를 대비하였지만, 무주가 워낙 산중의 고을이 라 척박하므로 다른 고을을 떼 내어 여기에 보태자는 논의가 이미 있었다. 전라감 사 윤명은이 할속을 청하였던 금산 땅은 안성( 安 城 )이었다. 안성은 고려시대 안성 소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안성에 거주하는 백성들도 적상산성에 소속시켜주기를 바란다고 하였고 전라감사는 주변 고을의 일부 지역을 산성에 할속 시킨 후 읍호를 승격시켜 지방관을 보내어야 한다고 청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이때에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현종 14년(1673)에 전라감사 이동직( 李 東 稷 )이 다시 한번 무주 적상산성의 중요

2 성을 거론하며 금산( 錦 山 )의 안성면( 安 城 面 )을 떼어 붙여 현( 縣 )을 승격시켜 부( 府 ) 로 만들고, 현감을 승진시켜 부사로 만들어 방비를 강화하자는 주장을 펼쳐 결국 안성은 무주에 할속 되었다. 한편, 고을에서 역적 또는 강상의 죄인이 발생하거나, 변란과 재해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게 되어 독립 군현으로 기능하기가 곤란할 때에는 군현의 등급을 강등하 거나 폐합되는 경우도 있었다. 금산군은 인조 24년(1646) 역적의 출신지라는 이유 로 현으로 강등되었고, 진산군은 정조 15년(1791) 제사( 祭 祀 )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 태워 버린 후 가톨릭교식으로 제례( 祭 禮 )를 지낸 윤지충과 권상연의 고을이므로 현 ( 縣 )으로 강등되었다. 2) 면리편제와 호구 조선 초기 경국대전( 經 國 大 典 ) 에는 면에 권농관, 리에는 이정을 두어 촌락을 교화하고 통제하며 면리( 面 里 )의 수취체제를 운영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면리제가 전국의 말단행정구역까지 보급되는데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어 17 세기에 이르러서야 실질적인 면리제가 시행될 수 있었다. 이와같은 변화는 조선 후 기에 편찬된 지리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표 10] 조선 후기 금산지역의 면리편제 해동지도(1750년) 여지도서(영조년간) 호구총수(1789년) 금산 면 리 진산 면 리 해동지도 의 제작은 영조연간에 작성된 도별읍지를 모은 여지도서 의 제작연 대(1759년~1765년경)와 같은 시기로 추정되며 도별 읍지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 진 지도책으로서 지도와 함께 지도가 작성될 당시의 각 동리의 현황이 쓰여져 있 다. 이렇게 비교해보면 두 고을 중 금산군은 진산군의 2배 가까운 면을 관할하고 있 었다. 금산과 진산 모두 여지도서 에 동리가 표기되지 않아 몇 개리가 소속되었는 지는 알 수 없다. 해동지도 에서 여지도서 로 변화하는 동안 면의 수는 모두 증가 하였고, 면 명칭의 경우에 큰 변화는 없다. 주목되는 점은 금산군에 속한 면중 역 리면( 驛 里 面 ) 인데 소속된 리( 里 )는 전혀 없으나 원호가 349호, 인구 1,324명이라 는 것이다. 금산의 관아 시설이 밀집한 군일면과 군이면이 총 14개리, 872호, 총 인 구 3,428명이므로 제원역과 그 일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제1장 전통사회 547

3 <그림 2> 해동지도(금산군과 진산군) [표 11] 해동지도 와 여지도서 금산군의 면과 호구 해동지도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48 여지도서 면명 관문으로부터의 위치 군이면(郡二面) 군이읍내면(郡二邑內面) 읍내 부북면(富北面) 부북면(富北面) 15리 동일면(東一面) - 부서면(富西面) 부동면(富東面) 동일면(東一面) 제원역(濟原驛) 부서면(富西面) 8리 10리 15리 부동면(富東面) 20리 서일면(西一面) 20리 군일면(郡一面) 군일면(郡一面) 서이면(西二面) 서이면(西二面) 15리 남이면(南二面) 남이면(南二面) 30리 부남면(富南面) 부남면(富南面) 60리 군북면(郡北面) 40리 서일면(西一面) 남일면(南一面) 군북면(郡北面) 남일면(南一面) 편호 : 6,828호 인구 : 24,596명(남 11,776구, 여 12,820구) 7리 30리

4 [표 12] 호구총수 금산군의 면리와 호구 면 리 원호 구 전체 남 여 14면 83 6,092 20,795 9,518 11,277 군일면 ( 郡 一 面 ) 관상리( 舘 上 理 ), 계진리( 桂 珎 里 ), 중관리( 中 舘 里 ), 하관리( 下 舘 里 ), 암동리( 暗 洞 里 ), 양지리( 陽 地 里 ), 음지리( 陰 地 里 ), 와정리( 臥 亭 里 ), 아인리( 衙 仁 里 ) 436 1, 군이면 ( 郡 二 面 ) 남일면 ( 南 一 面 ) 남상면 ( 南 上 面 ) 남하면 ( 南 下 面 ) 서일면 ( 西 一 面 ) 서이면 ( 西 二 面 ) 부서면 ( 富 西 面 ) 부동면 ( 富 東 面 ) 옥거리( 玉 巨 里 ), 이중흥리( 二 中 興 里 ), 이중리( 二 中 里 ), 성내리( 城 內 里 ), 영처리( 寧 處 里 ) 삼태곡리( 三 台 谷 里 ), 마장리( 馬 莊 里 ), 원동리( 院 洞 里 ), 신동 리( 新 洞 里 ), 신천리( 新 川 里 ), 대보리( 大 甫 里 ), 수철리( 水 鐵 里 ), 초현리( 草 峴 里 ), 동소리( 東 所 里 ), 황풍정리( 皇 風 亭 里 ) 성곡리( 星 谷 里 ), 심천리( 深 川 里 ), 매곡리( 梅 谷 里 ), 고답리 ( 高 畓 里 ) 구석리( 龜 石 里 ), 금천리( 金 川 里 ), 역평리( 驛 坪 里 ), 건천리 ( 乾 川 里 ) 상탄리( 上 炭 里 ), 하탄리( 下 炭 里 ), 와사리( 臥 沙 里 ), 세곡리 ( 細 谷 里 ), 전평리( 田 坪 里 ), 파초리( 芭 蕉 里 ), 가차리( 佳 次 里 ), 두곡리( 杜 谷 里 ), 석현리( 石 峴 里 ) 유곡리( 柳 谷 里 ), 음지리( 陰 地 里 ), 소곡리( 小 谷 里 ), 마수리 ( 馬 首 里 ), 신곡리( 薪 谷 里 ), 와여벌리( 瓦 余 伐 里 ) 피파리( 皮 破 里 ), 선원리( 仙 院 里 ), 기물리( 機 勿 里 ), 가덕리 ( 加 德 里 ), 내답리( 乃 沓 里 ) 경당도리( 京 堂 道 里 ), 노치리( 蘆 峙 里 ), 밀양리( 密 陽 里 ), 평촌 리( 坪 村 里 ), 승재벌리( 承 在 伐 里 ), 도파리( 道 波 里 ), 내장리 ( 乃 場 里 ), 어재리( 於 在 里 ), 전도리( 前 島 里 ) 436 1, , , , , , , , ,015 부남면 ( 富 南 面 ) 군북면 ( 郡 北 面 ) 동일면 ( 東 一 面 ) 부북면 ( 富 北 面 ) 역리면 ( 驛 里 面 ) 평당리( 平 堂 里 ), 대치리( 大 峙 里 ), 대소리( 大 所 里 ), 도소리 ( 島 所 里 ), 대곡리( 大 谷 里 ) 부곡리( 釜 谷 里 ), 한우리( 閑 右 里 ), 헌대리( 獻 垈 里 ), 보광리 ( 寶 光 里 ), 골남리( 骨 南 里 ), 한좌리( 閑 左 里 ) 왕성리( 王 城 里 ), 수탕리( 水 湯 里 ), 명곡리( 明 谷 里 ), 구억리 ( 九 億 里 ), 동곡리( 東 谷 里 ), 추곡리( 秋 谷 里 ) 대산리( 大 山 里 ), 천내리( 川 內 里 ), 용화리( 龍 化 里 ), 금성동리 ( 金 姓 洞 里 ), 수파리( 水 波 里 ) 519 1, ,216 1,114 1, , , [내용없음] 349 1, 제1장 전통사회 549 [표 13] 해동지도 와 여지도서 진산군의 면과 호구 해동지도 여지도서 면명 호구 남 여 - 군 내( 郡 內 ) 267호 서 면( 西 面 ) 서 면( 西 面 ) 313호 북 면( 北 面 ) 북 면( 北 面 ) 441호

5 남 면( 南 面 ) 일남면( 一 南 面 ) 242호 이남면( 二 南 面 ) 355호 동일면( 東 一 面 ) 동일면( 東 一 面 ) 335호 동이면( 東 二 面 ) 동이면( 東 二 面 ) 406호 편호 : 2,359호 인구 : 남 5525, 여 5467 [표 14] 호구총수 진산군의 면리와 호구 구 면 리 원호 전체 남 여 ,961 7,940 3,729 4,211 군내면 ( 郡 內 面 ) 상리( 上 里 ), 북리( 北 里 ), 중리( 中 里 ), 동리( 東 里 ), 방축리 ( 防 築 里 ), 교동( 校 洞 ), 피촌( 皮 村 ) 서 면 ( 西 面 ) 북 면 ( 北 面 ) 지곡리( 紙 谷 里 ), 태봉( 胎 峰 ), 갑암( 甲 巖 ), 묵산( 墨 山 ), 청림동( 靑 林 洞 ), 영정 동( 永 貞 洞 ), 장전( 長 田 ), 모동( 茅 洞 ), 지방동( 芝 芳 洞 ), 장대동( 長 大 洞 ), 마근 담( 麻 根 淡 ), 상막기미( 上 莫 其 味 ), 하막기미( 下 莫 其 味 ), 주암( 珠 巖 ) 신대( 新 垈 ), 만산리( 萬 山 里 ), 지량리( 之 良 里 ), 신치( 新 峙 ), 문암( 門 巖 ), 기이리( 其 耳 里 ), 백암( 白 巖 ), 분동( 粉 洞 ), 개치( 介 峙 ), 효동리( 孝 洞 里 ), 목금리( 木 金 里 ), 수영동( 壽 永 洞 ), 연흥리( 延 興 里 )), 탄치( 炭 峙 ) , 동일면 ( 東 一 面 ) 숭암( 崇 巖 ), 장대( 場 垈 ), 추동( 楸 洞 ), 마전( 馬 田 ), 마삭( 旀 朔 ), 마음( 馬 音 ), 남산( 南 山 ) 동이면 ( 東 二 面 ) 자부리( 自 富 里 ), 수례동( 脩 禮 洞 ), 요광원( 要 光 院 ), 행정( 杏 亭 ), 검한리( 儉 閑 里 ), 장동 ( 獐 洞 ), 원당리( 元 堂 里 ), 벌리( 伐 里 ), 검동( 檢 洞 ), 성덕리( 聖 德 里 ), 서대리( 西 臺 里 ), 율 목동( 栗 木 洞 ) 329 1,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50 남일면 ( 南 一 面 ) 남이면 ( 南 二 面 ) 곡남리( 谷 南 里 ), 다복동( 多 卜 洞 ), 용진리( 龍 津 里 ), 자라전( 者 羅 田 ), 두만리 ( 斗 滿 里 ), 정장리( 正 壯 里 ), 지동( 池 洞 ) 초미고개( 初 味 古 介 ), 탱석리( 撑 石 里 ), 엄정리( 嚴 正 里 ), 삼가동( 三 佳 洞 ), 방 각동( 方 角 洞 ), 와돌막리( 瓦 乭 莫 里 ), 오항동( 烏 項 洞 ), 건천리( 乾 川 里 ), 목동 ( 木 洞 ), 가막동( 可 莫 洞 ), 피사리( 皮 沙 里 ) 272 1, , 조선 후기 군현의 인구는 1757년에 편찬한 여지도서 에서 확인 해 볼 수 있는 데,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이 편찬된 이후에 작성된 각 군 읍지들을 정리하고 종 합한 지리지이다. 금산군 방리조에 의하면 편호가 6,828호이고 인구는 24,596명, 남자는 11,776 명, 여자는 12,820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정조 13년(1789)에 편찬한 호구총 수 에는 이보다 더 자세한 기록으로 당시 금산군은 14개면에 83개 마을, 총 6,092 호에 20,79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의 작성시기에 비해 호구가 모두 감소 했음을 알 수 있다. 면의 수도 1개 증가하여 남이면이 남상면과 남하면으로 분리될 정도였으므로 금산군의 경제규모가 줄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6 금산군의 한전(旱田)은 3,058결 32부 6속, 수전(水田) 1,718결 50부 2속, 시기한 전(時起旱田) 1,538결 54부 5속, 수전(水田) 1,153결 20부 6속, 면세결(免稅結) 327 결 80부 1속이었다. 이것은 조선 전기 간전 3,952결에 비해 크게 증가한 수치였다. 특히 안성이 무주에 할속된 후의 전결이므로 그 사이에 경작면적이 늘었음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 진산군의 인구는 편호는 2,359호, 인구는 총 10,992명(남 5,525, 여 5,467)이었고 호구총수에서는 편호가 1,961호, 인구는 총 7,940명(남 3,729, 여 4,211) 금산군과 마찬가지로 호구가 모두 감소하였다. 진산군도 그 원인을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다. 진산군의 한전은 잡탈(雜頉)을 합쳐 840결 1부 1속이고 수전은 잡탈을 합하여 306결 46부 8속이었다. 조선 전기에 1,207결이었던 간전과 비교해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제1장 전통사회 551 <그림 3> 1982년 지방지도(금산군과 진산군) 3) 제원역의 운영 제원역은 조선 전기 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금산군에 위치했던 역참이다. 현재 제원면 제원리 제원초등학교 일대가 제원역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제원역에 부임

7 했던 찰방의 선정비군이 남아있기도 하다. 제원역 일대는 금산군의 1개 면으로 편 제될 정도로 인구가 많고 유동인구도 많은 지역이었다. 단일면에 소속된 리가 없음 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만 349호 1,324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호구총수 배 치되는 관원 역시 금산군수가 음관( 蔭 官 ) 종5품인 것과 비교하여 종6품의 문 무관 이 교대로 임명되도록 하였다. 제원역 관련 기록은 여지도서 와 호남읍지 등에 제원역지 가 포함되어 있어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제원역지에는 민호 347호가 거주하는 것으로 되어 호구총 수 와는 2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제원역에는 아사( 衙 舍 ) 문루( 門 樓 ) 비선각( 飛 仙 閣 ) 망운정( 望 雲 亭 ) 창고 ( 倉 庫 ) 등의 건물이 있었고 역승 외에 군관( 郡 官 ) 12명, 아전( 衙 前 ) 15명, 지인( 知 印 ) 8명, 사령( 使 令 ) 8명, 관노( 官 奴 ) 6명, 관비( 官 婢 ) 3명이 배치되었다. 역에 속한 사 찰도 있어서 남산( 南 山 )에 있는 남사( 南 寺 )가 있었고 주산( 主 山 )은 덕곡( 德 谷 )이었 다. 사창도 소속되어 있었다. 제원역에서 관할하는 소속 역은 네 곳이었는데 각각 의 역의 위치와 역에 속한 마필은 다음과 같다.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제원역( 濟 原 驛 ) : 상등마( 上 等 馬 ) 2마리, 중등마( 中 等 馬 ) 3마리, 하등마( 下 等 馬 ) 5마리. - 소천역( 所 川 驛 ) : 무주에 있는데, 동쪽으로 70리이다. 상등마 1마리, 중등마 9마리. - 달계역( 達 溪 驛 ) : 용담( 龍 潭 )에 있으며, 남쪽으로 50리이다. 상등마 1마리, 하등마 7마리. - 단령역( 丹 嶺 驛 ) : 진안( 鎭 安 )에 있으며, 남쪽으로 1백 리이다. 중등마 2마리, 하등마 3마리. - 옥포역( 玉 包 驛 ) : 고산( 高 山 )에 있으며, 서쪽으로 90리이다. 중등마 4마리. 제원역에는 부임했던 관리들 중 미수( 眉 叟 ) 허목( 許 穆, )의 일화가 전 해지고 있다. 효종대에 허목이 제원역의 찰방으로 부임하였는데, 당시 제원역에 화 재가 잦아서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 원인이 제원역의 말에 귀신이 붙어 그 런 것이라 하며 믿었는데, 허목이 바위산을 깎고 바람을 모시는 뜻으로 어풍대( 御 風 臺 )라고 글자를 새기자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어풍대 바위 글자가 남 아있다. 한편, 우암 송시열은 현종 7년(1666)에 제원역의 비선각과 망운정에 2개의 기문 을 남기기도 하였다. 제원역비선각기( 濟 原 驛 飛 仙 閣 記 ) 飛 仙 閣 在 濟 原 郵 館 之 後 絶 頂 之 上 望 之 縹 緲 夐 絶 其 名 眞 不 爽 於 實 也 又 馬 丞 之 來 居 者 無 朱 墨 鞅 掌 之 煩 詞 訟 喧 聒 之 擾 故 點 閱 毛 足 之 外 兀 然 若 雲 水 間 閒 人 又 時 乘 先 影 之 逸

8 蹄 滅 沒 乎 蒼 松 白 沙 之 逕 則 有 似 跨 鶴 之 侶 轇 轕 乎 琪 樹 紫 煙 之 境 也 其 於 是 閣 也 無 不 宜 者 爾 之 閣 也 創 於 萬 曆 丙 辰 蓋 察 訪 權 恰 之 所 構 也 今 趙 君 爾 炳 到 任 之 初 亟 新 其 壞 破 而 俾 余 書 其 事 余 惟 趙 君 以 儒 學 世 其 家 宜 其 塞 淵 其 心 勤 事 撫 民 而 亦 胡 爲 淸 眞 之 是 尙 耶 無 乃 有 丞 負 之 歎 而 自 托 於 此 以 自 遣 耶 旣 而 思 之 官 無 卑 未 嘗 無 米 鹽 凌 亂 之 事 也 亦 或 有 升 沈 得 失 之 汩 其 心 者 也 苟 於 此 埋 沒 惱 懊 則 其 職 事 瘝 曠 亦 不 暇 恤 況 於 淸 眞 之 趣 豈 不 如 窮 髮 之 視 珍 髢 哉 況 晦 庵 夫 子 身 任 孔 孟 之 統 而 亦 自 稱 空 同 道 士 又 自 謂 雲 臺 眞 逸 則 其 所 以 托 意 寓 言 者 有 非 人 之 所 能 知 者 耶 抑 眞 欲 長 年 度 世 如 屈 子 之 欲 見 時 人 出 場 耶 然 則 修 是 閣 而 居 之 者 非 惟 無 損 於 職 事 亦 不 妨 於 學 儒 之 道 也 噫 趙 君 其 獨 觀 昭 曠 之 原 乎 然 毛 山 之 驛 有 仙 女 吹 簫 之 異 則 晦 翁 又 徵 郵 童 之 言 而 辨 其 誕 若 好 事 者 藉 閣 名 之 好 詑 山 水 之 勝 其 以 爲 子 晉, 洞 賓 時 或 飛 過 於 此 則 亦 必 有 郵 卒 之 輩 證 其 無 有 矣 此 則 吾 必 曰 趙 君 儒 學 之 化 也 제원역망운정기( 濟 原 驛 望 雲 亭 記 ) 趙 侯 爾 炳 爲 督 郵 之 明 年 構 一 亭 於 飛 仙 閣 之 左 名 以 望 雲 而 請 余 記 之 余 問 其 名 之 之 義 侯 悵 然 而 言 曰 吾 早 失 先 人 惟 慈 母 是 依 未 嘗 相 離 也 今 猥 忝 科 第 爲 官 於 此 定 省 之 曠 已 有 月 矣 不 堪 孺 慕 之 私 聊 取 古 人 之 事 而 寓 此 名 於 亭 以 爲 朝 夕 登 望 之 地 爾 余 泫 然 而 泣 曰 有 是 哉 子 之 意 也 如 余 永 感 者 雖 欲 爲 子 之 所 爲 其 可 得 乎 旣 而 曰 子 之 意 則 然 矣 後 人 之 登 斯 者 豈 皆 不 如 余 而 如 子 哉 如 子 則 誰 不 如 子 心 而 如 余 則 其 於 此 不 亦 虛 乎 旣 以 此 語 侯 又 從 而 思 之 吾 之 言 其 亦 有 蓬 之 心 也 夫 昔 朱 夫 子 記 瓊 州 之 知 樂 亭 曰 北 望 觀 闕 於 雲 天 縹 緲 之 間 以 爲 瞻 佇 祝 延 之 地 夫 君 親 雖 有 二 致 忠 孝 本 是 一 理 後 之 人 雖 銜 恤 如 余 者 其 孰 無 愛 君 之 心 而 如 朱 子 之 言 乎 雖 如 侯 者 當 其 登 望 之 時 想 像 之 懷 豈 偏 在 於 慈 顏 哉 況 古 人 有 憶 弟 懷 友 者 皆 托 於 雲 則 登 是 亭 者 蓋 將 無 所 不 宜 矣 噫 人 心 喜 遷 隨 感 異 情 況 爲 官 者 前 有 朱 墨 之 煩 上 有 官 長 之 責 而 其 或 有 橫 目 自 營 者 則 又 有 焦 火 凝 氷 之 惱 其 中 矣 又 安 能 臨 淸 曠 之 地 寄 情 於 君 親 兄 弟 朋 友 之 間 哉 余 爲 是 之 歎 因 侯 之 請 而 推 廣 其 說 如 此 云 제1장 전통사회 사회구조와 지방재정 1) 성씨의 변화 (1) 금산군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금산지역에는 보다 더 많은 성씨들이 등장한다. 조선 후

9 기 읍지류에서는 토성과 속성의 구분이 없어지게 되었으며 몇몇 새로운 성씨들도 기록된다. 1793년에 편찬된 금산군읍지 에서는 새로운 성씨로 전( 全 ) 길( 吉 ) 성( 成 ) 조( 趙 ) 서문( 西 門 ) 임( 林 )씨가 새롭게 등장한다. 금산군읍지 성씨조 : 김( 金 ) 한( 韓 ) 이( 李 ) 손( 孫 ) 양( 梁 ) 백( 白 ) 정( 程 ) 임 ( 任 ) 황( 黃 ) 장( 張 ) 배( 裵 ) 하( 河 ) 석( 石 ) 안( 安 ) 정( 鄭 ) 박( 朴 ) 최( 崔 ) 정( 丁 ) 전( 全 ) 길( 吉 ) 성( 成 ) 조( 趙 ) 서문( 西 門 ) 임( 林 ) 그러나 이렇게 몇몇 성씨가 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700년대까지 금산지역의 토착성씨들은 향촌 사회 내에서 굳건하게 자리매김하였으며, 이들 토성세력들은 고려 말까지 지방의 토호적 성격을 가지면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호장층 으로 조선 건국 후 중앙정부의 집요한 노력에 의하여 대부분 행정실무 층으로 자리 를 굳히게 된다. 세종대까지도 이들은 세도를 유지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성리학적 소양을 가진 이거사족들과 혼인관계를 맺거나 혹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사족가문 으로 변신, 향촌사회에서의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 한편, 전통적으로 금산향교에 출입해 온 성씨로는 김해김씨( 金 海 金 氏 ), 밀양박 씨( 密 陽 朴 氏 ), 해평길씨( 海 平 吉 氏 ), 영산신씨( 靈 山 辛 氏 ), 반남박씨( 潘 南 朴 氏 ), 남원 양씨( 南 原 梁 氏 ), 천안전씨( 天 安 全 氏 ), 전주이씨( 全 州 李 氏 ), 청주한씨( 淸 州 韓 氏 ), 상 산김씨( 商 山 金 氏 ), 관성육씨( 管 城 陸 氏 ), 경주김씨( 慶 州 金 氏 ) 등이 있다. (2) 진산군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조선 후기 지리지인 여지도서 진산군조에서는 또 새로운 성씨가 등장하는데 역 시 이 때는 토성과 속성을 구분하여 기록하지 않았으며, 정( 鄭 ) 오( 吳 ) 양( 楊 ) 안( 安 ) 최( 崔 )씨가 새롭게 등장한 성씨이다. 554 [표 15] 진산군 성씨기록의 변화 지역 구분 세종실록지리지 1454년(단종 2) 하( 河 ) 진( 陳 ) 장( 蔣 ) 본군( 本 郡 ) 토성( 土 姓 ) 변( 邊 ) 문[ 文, 문( 門 )] 속성( 續 姓 ) 박( 朴 ) 김( 金 ) 손( 孫 ) 고( 高 ) 제[ 提, 강산( 犺 山 ) 제( 堤 )] 김( 金 )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중종 25) 하( 河 ) 진( 陳 ) 장( 蔣 ) 변( 邊 ) 문[ 文, 문( 門 )] 손( 孫 ) 고( 高 ) 제[ 提, 제( 堤 )] 속성( 續 姓 ) 지( 池 ) 김( 金 ) 지( 池 ) 금암( 金 岩 ) 정( 鄭 ) 김( 金 ) 명( 明 ) 김[ 金, 전( 全 )] 명( 明 ) 정( 鄭 ) 횡정( 橫 程 ) 고( 高 ) 박( 朴 ) 김( 金 ) 이( 李 ) 여지도서 호남읍지 (1765년 사이) (1871년, 1895년) 정( 鄭 ) 전( 全 ) 오( 吳 ) 양( 楊 ) 진( 陳 ) 하( 河 ) 안( 安 ) 최( 崔 ) 이( 李 ) 박( 朴 ) 정( 鄭 ) 전( 全 ) 오( 吳 ) 양( 楊 ) 진( 陳 ) 하( 河 ) 안( 安 ) 최( 崔 ) 이( 李 ) 박( 朴 )

10 여지도서 인물조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 기록되어 있던 김천석( 金 天 錫 ) 이외에도 다른 인물들들 추가 보안되고 있다. 토성인 진( 陳 )씨로 보이는 진순도( 陳 舜 道 ), 속성( 續 姓 )인 박( 朴 )로 보이는 박태원 ( 朴 泰 元 ), 그리고 성씨의 기록에 보이진 않으나 인물조에 추가되어 있는 전추( 田 秋 ) 가 있으며, 서소사( 徐 召 史 ), 이소사( 李 召 史 ), 배소사( 裴 召 史 ) 등의 열부나 효부들이 다. 특히 배소사( 裴 召 史 )는 숙종실록 1710년(10월 20일) 기사에 전라도( 全 羅 道 ) 진산군( 珍 山 郡 )의 사인( 士 人 ) 이국량( 李 國 亮 )이 호랑이에게 물렸는데, 그 처 배씨 ( 裵 氏 )가 낫을 들고 쫓아가서 치니, 호랑이가 마침내 이국량을 버리고 배씨를 잡아 먹었다. 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의 남편 이국량( 李 國 亮 )이 진산인으로 속성 중 하 나인 이( 李 )씨 임을 추측하여 볼 수 있다. 이후의 읍지인 호남읍지(1871), 호남읍지(1895) 등 다른 기록들은 여지도 서 의 기록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보여 지고 있어, 이후의 성씨 변화를 추측하기 에 어려움이 많다. 2) 조세와 진휼 조선의 재정조직은 국민의 조세부담에 의존하였고 가장 절대적인 비중은 농민 부담에 있었다. 따라서 국가는 조세 제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적절한 제도의 시 행을 위하여 여러차례 운영 방식을 변경하며 불합리한 세제를 시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농민이 부담하는 조세는 전세 공세 요역 및 군역 잡세 등으로 분류 되는데 각각의 과세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천을 거듭하였다. 금산지역에 부과되었던 조세는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 에서 그와 관련 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여지도서 편찬의 주요 목적 중의 하나가 바로 조세수 취를 위한 현황파악에 있었으므로 각 군현별 호구와 전결수는 물론이고 진상, 공납 을 위한 품목과 전세( 田 稅 ), 군병( 軍 兵 ) 등의 사항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1장 전통사회 555 (1) 금산군 금산군 토산조의 특징은 금산이 산지가 많았던 까닭에 산에서 생산되는 임산물 이 많다는 점이다. 또한 조선 후기 상황을 잘 반영하는 여지도서 (1759~1765)를 근거로 보면 조적의 분량과 전세까지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적( 糶 糴 )은 국가 기관에서 쌀을 비축하고 배포하여 물가를 조절하거나 백성을 진휼할 목적으로 거두는 곡식이었는데 금산군에서는

11 - 쌀( 米 ) : 4천 5백 8석( 石 ) 1두( 斗 ) 5홉( 合 ) 1작( 勺 ) 8리( 里 ) - 벼( 租 ) : 1천 2백 80석 6두 8승( 升 ) 3홉 8작 1리 - 콩( 太 ) : 76석 13두 5승 4홉 4작 4리 - 이전미 단대조( 移 轉 米 單 代 租 ) : 1천 5백석 - 겉보리[ 皮 牟 ] : 3백 42석 11두 1승 2홉 3작 2리 - 사창미( 社 倉 米 ) : 4천 4백 28석 을 거두었다. 그리고 전세( 田 稅 )는 원미( 元 米 ) 3백 77석 6두 4승 3홉 2작 원태( 元 太 ) : 4백 2석 8숭 1홉 2작 2리 삼수량미( 三 手 粮 米 ) : 2백 41석 8두 4승 2작 4리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56 를 거두었는데 한해의 농사가 풍년인가 흉년인가 여부에 따라 혹은 늘어나기도 하 고 더러 줄어들기도 했다. 2월에 거두어 들여서 3월에 함열현( 咸 悅 縣 ) 성당창( 聖 堂 倉 )에서 짐을 꾸려 충청도 안흥( 安 興 ), 원산( 元 山 ) 등의 포구를 거쳐서 서울 광흥창 ( 廣 興 倉 )에 이르는데 열닷새 걸린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부세가 있는데 균세( 均 稅 )는 면세미( 免 稅 米 ) 23석 9두 4승, 면세목( 免 稅 木 ) 1동 16필 15척( 尺 ) 9촌( 寸 ), 면세전( 免 稅 田 ) 1백 22냥 7전( 錢 ), 결전 ( 結 錢 ) 1천 5백 36냥 5전 2푼( 分 )이다. 또한 여지도서 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후기 금산군에 부과되어 있는 군병( 軍 兵 ) 은 다음과 같다. - 훈련도감( 訓 練 都 監 ) 납부 : 포보( 砲 保 ) 2백 17명이다. - 어영청( 御 營 廳 ) 납부 : 보인( 保 人 ) 1백 6명, 별파진( 別 破 陳 ) 25명, 제번( 除 番 ) 자보( 資 保 ) 33명, 정군자보( 正 軍 資 保 ) 38명이다. - 병조( 兵 曹 ) : 기병( 騎 兵 ) 9백 44명, 보병( 步 兵 ) 7백 49명, 금구( 金 溝 )에서 옮겨온 기병 4명, 여산( 礪 山 )에서 옮겨온 기병 16명, 잡번( 雜 番 ) 58명, 충순위( 忠 順 衛 ) 50명이다. - 군기시( 軍 器 寺 ) : 별파진 20명이다. - 선공감( 鐥 工 監 ) 납부 : 보인 43명이다. - 공조( 工 曹 ) 납부 : 보인 99명이다. - 금위영( 禁 衛 營 ) 납부 : 보인 1백 35명, 제번 자보 99명, 정군자보 39명이다. - 장악원( 掌 樂 院 ) 납부 : 호수( 戶 首 ) 자보 43명이다. - 교서관( 校 書 館 ) 납부 : 창준보( 唱 準 保 ) 20명이다.

12 - 충훈부( 忠 勳 府 ) 납부 : 충익위( 忠 翊 衛 ) 75명이다. - 균역청( 均 役 廳 ) 납부 : 선무군관( 選 武 軍 官 ) 1백 28명이다. - 순영( 巡 營 ) 납부 : 재포( 灾 布 ) 44명, 재가포( 在 家 布 ) 95명, 배지보( 陪 持 保 ) 44명이다. - 순영 중군( 中 軍 ) 납부 : 군물군( 軍 物 軍 ) 6명, 초관( 哨 官 ) 2명이다. - 순영 중영( 中 營 ) 납부 : 군물군 14명이다. - 병영( 兵 營 ) 납부 : 신선( 新 選 ) 93명, 남한산성 고승( 南 漢 山 城 雇 僧 ) 2명, 위봉산성 정초 초관( 威 鳳 山 城 精 哨 哨 官 ) 1명, 성당창 조군보( 聖 堂 倉 漕 軍 保 ) 13명, 군산진 조군보( 羣 山 鎭 漕 軍 保 ) 33명, 적상산성 별파진( 赤 裳 山 城 別 破 陣 ) 43명이다. - 감영( 監 營 ) : 아병파총( 牙 兵 把 摠 ) 1명, 초관 1명, 기패관( 旗 牌 官 ) 1명, 보군( 步 軍 ) 1백 5명이다. - 후영진( 後 營 鎭 ) : 속오천총( 束 伍 千 摠 ) 1명, 파총( 把 摠 ) 1명, 초관 5명, 기패관 5명, 화 포교사( 火 砲 敎 師 ) 7명, 별대( 別 隊 ) 65명, 보군 7백 55명이다. 이 시기 금산군의 인구와 비례해 군병의 비율 높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금산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진산군 부세와 관련된 자료로는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 에 자세하게 나타 난다. 이중 진공조( 進 貢 條 )에서 진상품 목록을 확인 할 수 있다. - 토산조 -창출( 蒼 朮 ) 도라지 더덕 당귀( 當 歸 ) - 진공조 -생치( 生 雉 )[날 꿩고기] 건치( 乾 雉 )[말린 꿩고기] 건시( 乾 柿 )[곶감] 생장 ( 生 獐 )[날 노루고기] 대맥( 大 麥 )[보리] 소맥( 小 麥 )[밀] 신도미( 新 稻 米 )[햅쌀] 선 자( 扇 子 )[부채] 거핵( 去 核 )[솜] 백포( 白 布 )[줄바] 초석( 草 席 )[짚자리] 상자( 箱 子 ) 진휼을 목적으로 하는 조적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전통사회 원회부( 元 會 付 ) : 쌀( 米 ) 8석( 石 ) 9두( 斗 ) 3승( 升 ) 4홉( 合 ) 3작( 勺 ) 5리( 里 ), 콩( 太 ) 14석 9두 5승 6홉 7작 7리, 겉보리( 皮 牟 ) 3석 9두 3승 4작 8리이다. - 상진( 常 賑 ) : 쌀 20석 8두 9승 1홉 1작 9리, 콩 15석 5두 7승 9작 6리, 벼( 租 ) 4석 7두 7홉 8작이다. - 사비( 私 備 ) : 쌀 8두 3승 6홉 6작 4리 3분( 分 ), 콩 3두 6승 5홉 3작 5분, 벼 20석 7승 8홉 6작 8리 9분, 겉보리 32석 6두 7승 4홉 6작 3부이다. - 별검( 別 檢 ) : 쌀 1석 3승 7홉 9작 1리, 벼 7두 9승 9홉 5작 6리 8분이다. - 휴번( 休 番 ) : 쌀 14두 7승 7작 5리 5분, 콩 3석 7두 9승 7홉 8작 2리, 벼 4석 10두 9승 3작

13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58 6리 2분이다. - 군작미( 軍 作 米 ) : 14두 5승 3홉 7작 1리 8분, 승번미( 僧 番 米 ) 80석 10두, 병신년 별치미( 丙 申 別 置 米 ) 2석 8두 2홉 5작 6리이다. - 화성진( 華 城 賑 ) : 쌀 1석 8두 3승 6홉 8작 9리 2분, 겉보리 12석 9두 8작 3리 8분이다. - 영호( 嶺 湖 ) : 콩 3석 13두 9승 1홉 7작 2리 2분, 벼 12두 4승 8홉 6리 4분, 제도조 ( 濟 島 租 ) 3석 1두 9승 9홉 9작 5리, 군이작미( 軍 移 作 米 ) 2석 3두 2승 2 홉 4작 1리 8분, 임술년 이획미( 壬 戌 移 劃 米 ) 47석 9두 4승 1홉 7작 8리 8분, 갑오년 별치미( 甲 午 別 置 米 ) 15석 12두 5승 3홉 9작 5리, 계축년 회록조( 癸 丑 會 錄 租 ) 17석 2두 9승 7홉 1작 4리 8분, 기유년 이속미( 己 酉 移 屬 米 )4석 5수 9승 6홉 4리, 나포조( 羅 鋪 租 ) 3석 7두 7승 7홉 4리 2 분이다. - 영진( 營 賑 ) : 쌀 6백 19석 4두 9승 1홉 3리 3분, 콩 11두 7승 9작 9리 4분, 겉보리 42석 7두 4승 5홉 2작 9리 8분, 벼 9석 12두 3승 2홉 6리 2분 - 순검( 巡 檢 ) : 쌀 7석 6두 2승 4홉 2작 8리 9분, 콩 9두 2승 5작 3분, 벼 2석 7두 8승 2홉 1작 2리 1분, 겉보리 24석 10두 5승 9홉 2작 1리 4분이다. - 균고( 均 庫 ) : 쌀 2석 1두 5승 2홉 7작 1리, 벼 7석 9두 4승 2홉 5작 4리 3분, 겉보리 26석 8두 9홉 9작 4리 2분이다. - 영고( 營 庫 ) : 쌀 2석 9승 7홉 4작 1리 3분이다. - 보군( 補 軍 ) : 쌀 1석 3두 9승 1작 5리 3분, 콩 5석 7두 2승 6홉 7작 7리 6분, 병수 겉 보리[ 兵 需 皮 牟 ] 1백 72석 11두 6승 2홉 3리 4분, 무진년 별치 겉보리( 戊 辰 別 置 皮 牟 ) 24석 4두 6승 5홉, 신유년 이전미( 辛 酉 移 轉 米 ) 2백 20석, 병인년 별비미( 丙 寅 別 備 米 ) 1백 석, 사환미( 社 還 米 ) 1천 석이다. 이외에도 전세( 田 稅 )는 원미( 元 米 ) 84석 7두 4승 6홉, 원태( 元 太 ) : 1백 48석 14두 5 승 1홉, 삼수미( 三 手 米 ) : 62석 6두 6승 6홉에 달하였다. 또한 균세( 均 稅 )는 균역청( 均 役 廳 ) 납부 선무포( 選 武 布 ) : 45필, 결전( 結 錢 ) : 1천 5백 36냥 5전 2푼( 分 )으로 기록 되 어 있다. 또한 여지도서에 수록되어 있는 진산군에 부과되는 군병은 다음과 같다. - 훈련도감( 訓 練 都 監 ) : 포수보( 砲 手 保 ) 52명, 군향보( 軍 餉 保 ) 4명이다. - 어영청( 御 營 廳 ) : 정군( 正 軍 ) 10명, 정군보( 正 軍 保 ) 11명, 관납포군( 官 納 布 軍 ) 20명이다. - 금어영( 禁 御 營 ) : 정군 27명, 정군보 29명, 관납포군 92명이다. - 병조( 兵 曹 ) : 기병( 騎 兵 ) 2백 99명, 보병( 步 兵 ) 69명, 금군보( 禁 軍 保 ) 36명, 호련대보 ( 扈 輦 隊 保 ) 3명, 경역보( 京 驛 保 ) 5명이다. - 장악원( 掌 樂 院 ) : 악공보( 樂 工 保 ) 8명이다. - 호조( 戶 曹 ) : 조군( 漕 軍 ) 40명이다.

14 - 군기시( 軍 器 寺 ) : 별파진 44명이다. - 감영( 監 營 ) : 아병 기패관( 牙 兵 旗 牌 官 ) 1명, 제번군관( 除 番 軍 官 ) 4명, 약재진상 배지 보( 藥 材 進 上 陪 持 保 ) 30명, 아병군뢰( 軍 牢 ) 2명, 기수( 旗 手 ) 1명, 보군( 步 軍 ) 23명, 수군 여군( 水 軍 餘 軍 ) 4명이다. - 위봉산성( 威 鳳 山 城 ) : 기패관 1명, 산성정초군( 山 城 精 抄 軍 ) 11명이다. - 병영( 兵 營 ) : 신선( 新 選 ) 25명이다. - 금성진( 金 城 鎭 ) : 사부( 射 夫 ) 1명이다. - 여산진( 礪 山 鎭 ) : 속오초관( 束 伍 哨 官 ) 2명, 기패관 2명, 화포교사( 火 砲 敎 師 ) 3명, 별 대보( 別 隊 保 ) 8명, 별대( 別 隊 ) 4명, 보군 수솔( 隨 率 ) 총 1백 86명 이다. 3. 왜란 호란과 금산전투 임진왜란( 壬 辰 倭 亂 )은 선조 25년(1592)부터 선조 31년(1598)까지 2차에 걸친 왜 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임진년에 발발되어서 보통 임진왜란 이라고 하 고 1597년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만을 따로 언급할 때는 정유재란( 丁 酉 再 亂 ) 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이라 하면 정유재란까지 포함한 7년간에 걸친 전쟁을 말한다. 왜군의 본격적인 침략은 선조 25년(1592) 임진년 4월 14일에 부산포에 상륙한 뒤 부산진과 동래성을 공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뒤를 이어 한양 개성 평양이 전 란 발발 2개월 만에 모두 함락되게 되었다. 육상에서 관군이 왜의 속공으로 연패를 당하고 있을 때, 해상에서는 이순신( 李 舜 臣 )과 그의 함대가 남해를 제압하여 왜적 의 공격과 그 보급로를 차단하는 방벽이 되었다. 당시 왜군은 부산에서 남서해안을 돌아 바다와 육지에서 호응해가며 북진을 기도하였는데, 이순신 휘하의 조선함대 는 적의 수군을 격파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그들의 병력 이동과 보급수송을 차 단시켜 일본군의 수륙양면 작전 뿐만 아니라 육군의 활동에도 커다란 차질과 타격 을 주었다. 왜군은 수륙양면 작전에 차질을 받자 전라도로 진격하기로 계획하였다. 전라도 지방은 호남평야와 만경평야 등이 넓게 펼쳐진 곡창지대로 왜군이 반드시 점령해 야 하는 땅이었다. 전라도가 왜군에게서 점령당하지 못 했던 이유는 전라도로 들어 가기 위해서는 험준한 산맥들을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해상에서는 이순신 장 군이 남해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상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제1장 전통사회 559

15 금산의 지세는 영남에서 추풍령을 넘어 전주( 全 州 )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거쳐 야 하는 요충지에 해당된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9개 군진을 나누어 전국 토를 유린하면서 한양과 의주로 진격하였는데, 그 중 제6진은 1만 7천여 군으로 6 월 영남을 거쳐 금산으로 침입하였다. 전라도로 침입하려는 왜군은 고바야카와 다 카카게[ 小 早 川 隆 景 ]의 군대였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별동대인 안코쿠지 에케 이[ 安 國 寺 惠 瓊 ]의 부대는 전라도를 맡게 되어 남원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고자 하였 으나 곽재우( 郭 再 祐 )의 군에게 저지되었다. 이들은 서울의 본진과 합세하여 전라도 로 침입하기 위하여 금산으로 진격하였다. 이들 왜군은 금산을 점령한 뒤, 호남의 웅부이자 조선왕실의 본관지인 전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당시 왜군들은 금산을 침공하기 위해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양산 순양 부리를 지나 무주로 향하는 길과 충북 영동에서 월영산을 끼고 흐르는 천내강을 따라 갯터(제원)으로 진격하는 길이 있었다. 무주로 향하는 길은 멀고 좁아 많은 군사들이 이동하기 곤란하였다. 따라 서 왜군은 보다 편한 길로 제원까지 진격한 것으로 보인다. 왜군이 전란 초기 금산에 진격하는 과정에서 갯터(제원) 전투가 발생했으며, 전 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금산에서 전주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웅 치 전투와 이치 전투가 치러졌고, 금산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고경명의 의병이 공격 했던 1차 금산전투, 조헌과 영규대사가 이끌었던 의병이 공격했던 2차 금산전투 등 이 있었다.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60 1) 웅치전투와 이치대첩 금산을 점령한 왜군이 전주로 향하는 길은 진산을 거쳐 대둔산 옆으로 지나 이치 ( 梨 峙 )를 넘는 길과 남일 진안을 거쳐 웅치( 雄 峙 )로 넘는 길이 있었다. 이러한 지 리적 여건을 미리 파악한 권율( 權 慄 )과 황진( 黃 進 )이 이치에 진을 치고 왜군을 기다 리고 있었으며, 나주판관 이복남( 李 福 男 ), 해남현감 변응정( 邊 應 井 ), 김제군수 정 담( 鄭 湛 )이 웅치에 진을 치고 있었다. 웅치전투는 1592년 7월 7일부터 9일까지 진안과 전주 사이에 있는 웅치에서 발 발하였다. 안코쿠지 에케이의 병력이 전주로 진격하려는 것을 미리 파악한 전라도 관찰사 이광( 李 洸 )은 나주판관 이복남, 해남현감 변응정, 김제군수 정담에게 웅치 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에 전주의 황박이 의병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복남이 제1선, 의병장 황박이 제2선, 정담은 가장 높은 지역에서 제3선의 진지를 구축하여 적의 진격에 대비했다. 7일 왜군의 선봉부대가 공격을 개시하자 황박과 이복남은 많은 적을 죽였다. 이튿날 왜군이 전 병력을 동원해 전면공격을 감행하여, 제1 2

16 선이 무너지고 황박과 이복남도 전사했다. 제3선을 지키던 정담도 화살이 다하도 록 최후까지 싸운 다음 백병전을 전개하다가 전사했다. 또한 이 전투에 참가한 해 남현감 변응정은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왜군은 이 전투에서 죽은 조선군의 시체 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어 그 위에 조조선국충간의담( 弔 朝 鮮 國 忠 肝 義 膽 ) 이라는 표목을 세워놓고, 웅치를 넘어 전주성으로 향했다. 한편 안코쿠지 에케이가 웅치를 공격하는 동시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일부 병력을 금산에 남겨두고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이치를 경유하여 전주로 향하고 있 었다. 이에 전라도절제사 권율은 이치에서 진을 치고 전주방면을 지키려고 했다. 7 월 8일 아침에 왜군이 공격을 시작하자, 조선군은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의 지휘 하 에 맞서 싸웠다. 전투 도중 황진은 활로 많은 적들을 죽이다가 일본군의 조총을 맞 아 총상을 당하기도 했다. 종일 쉴 새 없이 공방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일본군은 많 은 사상자를 내고 달아나버렸다. 이 전투는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금산과 웅치에서의 패배와 달리 조선군의 승리 로 끝났으며, 일본군은 이 전투를 조선 3대전의 하나로 꼽았다. 당시 도승지였던 이항복( 李 恒 福 )은 적이 다시 호남을 엿보지 못하게 하고 여기를 근본으로 삼아서 나라가 여러 해 동안 지탱하게 되었으며, 동서로 나르고 끌고 하여 군수품이 한번 도 부족 됨이 없게 하였으니 그 공이 크다. 고 칭찬하기도 했다. 이 전투는 일본군 의 전주 침입을 막기 위한 웅치전투 및 금산전투와 거의 동시에 벌어졌는데, 웅치 와 금산전투에서 아군이 비록 패하였지만, 이 전투에서는 끝내 왜군을 격파함으로 써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 전투로 말미암아 전 라도가 보존되어 후방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이치전투는 호남 및 전주로 쳐들어오는 적을 물리쳐 안전을 도모하게 하였다. 2) 금산전투의 전개 제1장 전통사회 561 (1) 1차 금산전투 1차 금산전투는 1592년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틀간에 걸쳐 전라좌도 의병장 고 경명( 高 敬 命 )을 중심으로 약 6천명의 의병들이 금산에 머무르고 있던 일본군 소조 천융경과 치렀던 격전으로 전라도 의병활동에 있어 매우 큰 의미를 차지한다. 전주 에서 의병을 모으던 고경명은 북상을 서둘러 은진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황간에 있 던 적이 금산을 넘어 전주로 진군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에 연산을 거쳐 진산에 이르렀을 때 금산군수 권종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날 고경명

17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62 은 유팽로( 柳 彭 老 )에게 지시하여 호서의병장 조헌( 趙 憲 )에게 전격함으로써 금산의 적을 함께 토벌하고자 약속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산에서 전군을 재편성하되 일진을 그곳에 두고 본진으로 삼아 군 량 공급의 임무를 부여한 다음 유팽로를 선봉장으로, 안영( 安 瑛 )을 후군장으로 각 각 임명하였다. 7월 8일 금산성을 향해 진격하였고 9일에 전라방어사 곽영( 郭 嶸 )의 관군과 합세할 것을 약속한 후 성 밖 4km 지점의 누운벌에 군대를 배치하였다. 고 경명은 정예 수백을 선발하여 적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에 재 인 30여 명을 시켜 성 밑에 잠입하여 성 밖의 관사와 성내의 창고에 불을 붙였다. 따 라서 서전을 유리하게 이끈 의병 측에서는 이제 여유를 갖고 회군하였다가 다시 기 회를 보는 것이 타당하다하여 현지에서 철군하자는 견해가 나왔으나 고경명의 반 대로 그렇게 되지는 못하였다. 다음날 10일 아침에 의병과 방어사군은 다시 적진을 공격하였는데, 관군은 북문을, 의병은 서문을 향해 공격하였다. 이 때 왜군은 관군 의 취약함을 알고 집중공격을 하자 무너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서 의병도 무너지게 되었다. 진이 무너지면서 고경명이 위급에 처하게 되었고 그의 종사관 안영과 유팽 로 등이 그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고경명의 아들 인후( 因 厚 )까지 함께 전사하였다. 이렇게 1차 금산전투는 수많은 의병장들이 전사하면서 아군의 패배로 끝났다. 1차 금산전투는 이치전투에서 피해를 입은 왜군이 다시 금산으로 퇴군, 크게 위 축된 상황에서 전개된 공격전이었다는 점에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당시 국력회복 의 근본이 되어 있었던 전라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적을 섬멸하지는 못하 였지만 왕성한 적세를 꺾어 호남만은 보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근왕을 목표 로 북상하던 의병이 눈앞에 적을 둔 상황에서 우선 호남 침공을 저지한 다음 다시 북상하려 하였으니, 그들이 직접적인 근왕의 목표를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국가의 중흥기지를 수어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근왕활동의 목표를 달성한 것이었다. (2) 2차 금산전투 2차 금산전투는 1592년 8월 17일부터 18일까지 이틀간에 걸쳐 금산성에 주둔하 고 있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안코쿠지 에케이의 왜군 1만여 명을 조헌과 영규대 사( 靈 圭 大 師 )의 승병 1,300여 명이 공격하여 패전했던 전투였다. 1차 금산전투를 비롯하여 관군이 곳곳에서 왜군에게 패하게 되자 전국에서 의 병이 일어났는데, 호서지방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 조헌이다. 조헌은 1592년 5월 3일 옥천에서 1차 봉기하였으며, 7월 4일 공주에서 의병 1,000여 명을 모집한 뒤 공주의 의승장 영규와 함께 8월 1일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청주전 이후 조헌은 근왕을 결의하고 북행길에 올라 온양에 도착했을 때 충청도

18 순찰사 윤국형( 尹 國 馨 )이 전라도 금산에 왜적이 창궐하여 인명의 피해와 재산의 약탈이 심할 뿐만이 아니라 곡창인 호남지방으로 향할것 같으니 먼저 후방을 교란 시키는 왜적을 토벌하라 고 하자 후원병을 보내줄 것을 부탁하고 승장 영규와 의병 700명을 거느리고 금산성의 고바야가와군을 무찌르기 위해 공주로 돌아왔다. 공주에 돌아와 보니 의병들이 흩어져 700여 명 밖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금산성 을 향해 진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앞서 권율이 이끄는 관군과 함께 8월 18일에 금산 을 공격하기로 했으나 조헌은 날짜를 바꾸자는 편지를 미처 받지 못하였다. 18일 단 독으로 성을 향해 진격하자 왜군은 성에서 나와 선제공격을 가해왔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전날 밤 의병의 배후에 투입되었던 왜군도 의병의 배후를 공격해 왔다. 이 렇게 하여 적에 의해 포위 상태에 빠진 조헌 군은 화력과 군세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네 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하였으나 결국 조헌과 승장 영규를 따르 던 호서 의병 700명은 연곤평 벌판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으며, 이로써 금산 성의 제2차 공격도 또 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592년 8월 27일에 2차 금산전투의 후속전의 성격을 띤 3차 금산전투가 발발하 였다. 웅치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던 해남현감 변응정은 조헌이 전사하였다는 소식 을 듣고 27일 금산으로 진격하였으나 패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한편 이 싸움에서 왜군도 죽 은 자가 많아 3일간 그 시체를 불태우고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왜병과 함께 퇴각해 버렸 다. 이 금산성의 전투로 호남 호서 지방이 안전하게 되었으 며 나라를 회복하는 하나의 계 기가 마련되었다. 이 해 9월 왜 군이 물러간 뒤 조헌의 문인 박 정량( 朴 廷 亮 )과 전승업( 全 承 業 ) <사진 9> 칠백의총 등이 아군 700명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 한곳에 합장을 하였는데 후세에 이를 칠백의총( 七 百 義 塚 ) 이라 불렀다. 칠백의총은 한말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헐리게 되었고, 또한 이곳에 속한 땅과 재산이 강제로 처분되어 폐허가 되었다. 이후 광복이 되자 이곳 주민들은 의총을 보수하고 순의비( 殉 義 碑 )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1963년 이곳을 사적 105호로 지정하고 단장했다. 현재 금산읍에서 추부면을 지나 대전으로 가는 왼쪽길 에 보이는 칠백의총은 2만평의 잘 정비된 터 위에 순의비, 사당, 기념관 등이 갖추 어져 있다. 제1장 전통사회 563

19 4. 성씨의 변화와 사족활동 1) 사족의 입향과 정착 조선 중기에는 또다시 일군의 사림계 거목들이 속속 이곳에 유서를 마련하였다. 예를 들면 호란 후인 1637년 미촌 윤선거와 시남 유계가 남일면 마가산 밑에 은거 하여 산천재에서 강학하고, 초려 이유태가 영변유배에서 풀린 뒤, 형인 이유택이 거처하던 금성면 하류리 문회당에 머물렀다. 그런가하면 소론의 영수로 지목되는 명재 윤증이 사직 후 돌아와 강론한 곳도 금산 땅이었다. 이처럼 당세의 명망가들이 일시에 금산을 찾아들어 각각 자신의 학문을 강론하 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금산은 이후 충절과 학문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앞서는 곳으 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물론 이 같은 인맥과 학맥의 중첩은 상대적인 입장의 차이 에 따라 복잡한 대립과 반목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금산 땅이 그러한 조선시대의 분위기를 잘 간직하면서 보존해온 몇 안 되는 지역의 하나임에 는 틀림없다. 현재도 수많은 서원과 사우, 그리고 충효열 삼강의 행적을 찬양하는 비석들이 금산 땅 여기저기에 산재하며, 그것을 자랑삼는 사람들이 많은 곳도 금산 이다. (1) 금산군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김해김씨 [김칭( 金 稱, 1455~1532)] 본명은 종( 鐘 )으로 그의 휘는 칭( 稱 ), 호는 수은( 繡 隱 )이며 벼슬은 훈도( 訓 導 )를 증직받았다. 김칭은 부모가 생존해 있을 때는 지성으로 봉양하고, 돌아가신 후에 는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며 매 끼니를 죽으로 식사하고 상복을 벗은 적이 없었다. 또 한 부모에게 뿐 아니라 임금에게도 삼년상을 지냈는데 중종과 인조의 국상을 당해 서도 3년간 상복을 입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 또한 문 밖에 나가지 않고 애통 해 하기를 마치 부모상을 당했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에 따르면 김칭이 무덤에서 여막( 廬 幕 )살이를 하며 아침저녁으로 제물을 집적 만들고 사당에 신주를 모시여 부모가 살아계실 때처럼 정성껏 받드는 모습과 같은 효행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명종이 이 소문을 듣고 정려를 금산성 동문밖에 세우게 했 으며 그 근방의 지명을 효자평( 孝 子 坪 ) 이라고 했고 김칭에게는 훈도( 訓 導 )의 벼 슬을 내렸다. 명종실록 에 그가 정려 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묘는 금산읍 상

20 지리에 있으며 부인은 해주오씨( 海 州 吳 氏 ) 철상( 喆 相 )의 딸이다. [김학술( 金 學 述, 1863~1920)] 자는 학도( 學 度 ), 호는 천효재( 天 孝 齋 )이다. 부인은 충주지씨( 忠 州 池 氏 )와 안동 김씨( 安 東 金 氏 )이다. 중시조 안경공 김영정( 金 永 貞 )의 20세손이자, 김해김씨 금산 군 군북면 입향조인 호조참판 희운( 希 運, 1546~1625)의 10세손이다. 김희운은 임 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를 피해 이곳 금산군 군북면에 입향하였다. 김학술은 부모를 섬김에 항상 지극하였으며 부모의 몸을 편하게 해 드리고 입에 맞는 음식을 드렸다고 한다. 부모가 병환이 있을 때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소 생시켰고, 우연히 동삼을 얻어 그 부모의 수명을 연장시켰다고 전해진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시묘살이 3년 동안 호랑이가 와서 호위하였으며, 묘 앞에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김학술의 아들 김만식( 金 滿 植 )도 아버지를 본받아 부상( 父 喪 ) 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슬픈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2 반남박씨 [박린( 朴 麟, 1414~1458)] 박힐( 朴 詰 )의 증손이며 호가 의율( 擬 栗 )이고, 반남박씨의 금산 입향조이다. 남효 온, 원호와 종유하여 도의로 사귀었다. 장릉( 莊 陵 )의 명을 받아 진산군수로 있던 중 단종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직하여 영월로 가려 하자 아들인 박희권( 朴 希 權 )이 뒤를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 모친이 병환이 들어 위독해지자 단념하고 초야에서 지냈으며, 매년 10월 24일이면 후원에 단을 쌓고 곡하며 제사지냈다. 그 의 이러한 충절로 주위에서는 도연명이 벼슬을 버리고 율리( 栗 里 )로 돌아와서 숨어 살던 절개와 같다 하여, 그의 충절을 드높이고자 호를 의률( 擬 栗 ) 이라 하였다. 묘 는 부리면 내장리에 있다. [박희권( 朴 希 權, 1447~?)] 박린( 朴 麟 )의 아들로 호는 임회( 臨 淮 )이다. 일찍이 가훈을 이어받아 학문에 연원 을 두었고 아버지를 따라 진산에 있을 때, 단종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아버 지를 따라 영월로 가려 하였다. 효심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병환이 났을 때는 손을 잘라 피로 연명케 하였으며,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또한 학문에 도 뛰어나 제자들과 강론하여 고을 사람들이 그 집을 칭송하여 선생님 댁이라고 하 였다. 이러한 행적으로 동몽교관( 童 蒙 敎 官 )을 증직 받았으며, 다시 중종 8년(1513) 사 헌부감찰( 司 憲 府 監 察 )을 증직 받았다. 그는 무주 도산사( 道 山 祠 )에 배향되기도 하 제1장 전통사회 565

21 였으며, 그의 행장을 유희춘( 柳 希 春 )이, 그 사적을 이유태( 李 惟 泰 )가 기록하였다. [박천주( 朴 天 宙,?~1616)] 반남 박씨의 금산 입향조인 박린( 朴 麟, 1414~1458)의 11대 손이며 박공( 朴 恭, 1494~1568)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후하였으며 부모를 섬기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어머니인 제주고씨가 병이 위중하자 자기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먹여 소생시켰다. 이에 판결사( 判 決 事 )를 증직하고 정려를 내렸다. 3 천안전씨 천안전씨가 처음으로 입향하게 된 것은 전충노( 全 忠 老 )에 의해서다. 전충노는 담양군수를 지낸 전순생( 全 順 生 )의 첫째 아들이며, 부인은 순창설씨( 淳 昌 薛 氏 )이 다. 전충노의 묘비와 제보자에 의하면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 셋째 아들인 이 손( 利 孫 )만을 데리고 금산 산안리( 山 安 里 )로 입향했다고 한다. 묘는 금성면 대암리 에 있다. 금성면 대암리에 천안전씨 선산이 있으며 이 중 입향조의 셋째아들 전이손 ( 全 利 孫,?~1653)의 묘와 입향조의 7대손이며 통정대부를 지낸 전명달( 全 命 達, 1602~1678)의 묘가 있다. 전이손의 묘비는 1685년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66 [전재례( 全 在 禮, 1706~1729)] 천안인으로 금산에 처음 입향한 전충노( 全 忠 老,?~?)의 10대손이며, 전덕류( 全 德 流, 1659~1717)의 아들이다. 부인은 상산김씨( 商 山 金 氏 ) 이다. 어려서부터 효심 이 깊었는데, 11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퍼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으며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전재례는 제원역에 유배왔던 미호( 渼 湖 ) 김 원행( 金 元 行, 1702~1772)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타고난 총명함으로 사서삼경을 짧은 기간에 모두 마쳤다. 생활은 비록 가난했지만 집안의 화목을 위해 솔선했고, 홀로 된 어머니를 효성으로 모셨다. 그러나 병이 깊어 결국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 묘살이 하며 죽으로 연명하고 조석으로 슬피 울며 지내다 영양 부족으로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암행어사 홍택( 洪 澤 )이 보고하여 임금이 군북면 내부리에 정각을 짓게 하였다. 묘는 금성면 하신리에 있다. 4 남원양씨 남원양씨의 금산 입향조는 양제( 梁 濟, 1550~1593)의 조부인 양우( 梁 佑 )이며, 부

22 인은 반남박씨 직장 박호의의 딸이다. 양우가 어떠한 연고로 금산에 와서 거주하게 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인근 지역인 마장 1리 무내미 마을에 반남박씨가 집 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때, 처가와의 관계로 인해 금산에 거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양제( 梁 濟, 1550~1593)] 자는 제부( 濟 夫 ), 호는 송제( 松 濟 )이다. 아버지는 순릉 참봉( 順 陵 參 奉 )을 지낸 익 상( 益 祥 )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 南 陽 洪 氏 )이고, 부인은 해평길씨( 海 平 吉 氏 ) 수온 ( 守 溫 )의 딸이다. 내금위장( 內 禁 衛 將 )을 지냈으며 호조좌랑( 戶 曹 佐 郞 )을 증직 받았 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전에서 창의사 김천일( 金 千 鎰 ), 최경회( 崔 慶 會 ), 그 리고 충청도의 황진( 黃 進 )과 함께 왜적을 토벌하는 전적을 세웠다. 그러나 왜적의 최후 공격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양제는 이에 격분하여 촉석루에 서 남강에 투신자결 하였다. 이러한 행적은 충의실록에 실려 있다. 경종 1년(1721) 절도사 최진한( 崔 鎭 漢 )이, 영조 16년(1740) 절도사 남덕하( 南 德 夏 )가 3년 후 영의정 김재노( 金 在 魯 )가 경연 석상에서 양제의 포상을 주청하였다. 이때 특별히 순절한 여러 신하들을 함께 포창하면서 양제에게는 호조좌랑( 戶 曹 佐 郞 )을 증직하였고, 충 민사( 忠 愍 祠 )와 창열사( 彰 烈 祠 )에 배향하도록 하였다. 묘는 금성면 백동산 후록에 있다. [삼덕( 三 德 )] 양탕( 梁 湯 )의 아내이다. 삼덕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의 읍지류 열 행( 烈 行 )편 첫머리에 나오는데, 남편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호랑이에 물려가자 삼덕은 호랑이를 쫓아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들어 왼손으로 남편의 다리를 잡고 오 른손으로 낫을 들어 호랑이를 수없이 찍어 남편을 구했는데, 집에 돌아와 지성껏 간호했으나 죽자 애통해하며 종신토록 수절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삼덕의 열행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으며 복호( 復 戶 )되었다. 제1장 전통사회 평양조씨 [조여충( 趙 汝 忠,?~1592)] 호는 고봉( 高 峰 )으로 절충장군 조구( 趙 球 )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에 동생 돌고 와 함께 권율장군의 부하로 들어가 이치 싸움에 큰 전공을 세우고 주부( 主 簿 )의 벼 슬을 받고 행주산성의 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현재 금성면 의총리 원의총 마을 에는 조여충의 묘라 추정되는 묘가 있는데 비도 세워지지 않은 채 봉분만 남아있다.

23 6 온양이씨 금성면 하신리는 원래 온양이씨의 세거지로서 온양이씨가 이곳에 세거하기 시작 한 것은 시조 이흥서( 李 興 瑞 )의 3세손인 이만립( 李 萬 立, 1606~1684)부터이다. 온 양이씨 족보에 의하면 이만립은 노년에 산수가 좋은 곳을 찾던 중 금산 신곡(현재 금성면 하신 1리)으로 이거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후손들이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 다. 이만립의 묘소는 신곡 대장산(현 하신 1리 대장골)에 있다. 7 벽산이씨 [이희현과 이희철] 금산에 처음 입향한 이인보( 李 仁 保,?~?)의 27세손들이다. 금산 입향조인 이인 보는 고려시대에 상주에서 난리를 피해 금산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그 이후로 벽 진이씨는 금산이씨로 분적하게 되었다. 그러나 약 10여년 전 다시 벽진이씨로 환적 하였다고 한다. 현재 금성 파초리의 반초마을은 벽진이씨의 집성촌으로 39대손까 지 살고 있으며 후손이 약 28가구가 살고 있다. 금성면 두곡리에 금산이씨 입향조 인 이인보의 사당이 있다. 8 안동권씨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안동권씨가 처음 금산에 이거하게 된 것은 권혁의 현손인 권극인( 權 克 仁, 1791~1868)에 의해서이다. 권극인은 홀로 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안동권씨 568 <그림 3> 안동권씨 계보도

24 의 선산이 있는 금산 두곡리에서 살기를 원하시므로 이곳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 다고 한다. 이후 그의 후손들에 이 마을에 세거하게 되었다. 원래 안동권씨의 선산은 청풍에 있었는데 권혁이 그의 부친 상유( 尙 遊 )과 맏형 소( 熽 )의 묘소를 명당인 이곳 금산 두곡으로 이장하고, 자신의 묘소 또한 이곳에 마 련하였다고 한다. 금산의 안동권씨들은 권혁의 현손인 권극인이 묘소 아래에 거주 하기 시작하면서 둑실 일대에 세거하게 되었다. [권상유( 權 尙 游, 1656~1724)] 자는 계문( 季 文 ) 유도( 有 道 )로 아버지는 영의정에 증직된 권격( 權 格 )이며, 어머 니는 함평이씨( 咸 平 李 氏 )로 돈녕부도정( 敦 寧 府 都 正 ) 이초노( 李 楚 老 )의 딸이다. 처 음에는 맏형인 수암( 遂 菴 ) 권상하( 權 尙 夏 )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송시열( 宋 時 烈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숙종 20년(1694)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 원에 등용되었으며, 봉교( 奉 敎 )와 춘방설서( 春 坊 說 書 )를 거쳐 사간원정언으로 승 진되었다. 곧 옥당( 玉 堂 )에 참여, 수찬 교리가 되었다가 병조좌랑 사간원헌납 지제교( 知 製 敎 ) 등을 거쳐 부응교 겸 필선에 승진하였다. 권상유는 윤휴가 주자학을 호만( 浩 漫 )하다고 비판하고 박세당( 朴 世 堂 )이 사변 녹( 思 辨 錄 ) 을 지어 주자학을 배척하였으므로 왕명에 의하여 그 책이 불태워질 때 두 사람을 공박하는 내용의 변설문( 辨 說 文 )을 작성하여 금창협( 金 昌 協 )으로부터 그 학식을 높이 칭찬받았다. 또 경연( 經 筵 )에서 호족의 폐해와 군제( 軍 制 )의 개혁을 주 장하고, 또한 궁장( 宮 庄 )의 절수( 折 受 )가 성덕의 허물이 됨을 주장하였다. 1703년에는 수원부사가 되어 관리의 비행을 숙정( 肅 正 )하는 등 치적을 남겼고, 1704년 대사간이 되고, 동부승지 이조참의 예조참의 공조참의 등을 거쳐 전라 관찰사가 되었다. 1709년에는 개성유수를 거쳐 평안감사에 임명되었으나, 공의( 公 議 )에 따라 대사성으로 옮긴 뒤 도승지가 되었다. 또 대사헌 정호( 鄭 澔 )가 윤증( 尹 拯 )을 논핵한 일로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갈 때 연루되어 면직되었다가 곧 서용 ( 敍 用 )되어 이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5조참판을 역임한 뒤, 한성좌윤과 부 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국경의 확정문제로 관서접반사( 關 西 接 伴 使 )가 되었고, 해적의 진무를 위해 호남순무사가 되기도 하였다. 1715년 형조판서, 1716년 호조판서가 되었다가 예조판서 한성판윤 우참찬 등 을 지냈다. 그 뒤 이조판서가 되어 숨은 인재를 많이 등용했으나, 경종 1년(1721)신 임사화 때 탄핵을 받아 삭직되어 문외출송( 門 外 黜 送 )을 당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그 뒤 향리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성리설에 밝았으며 특히 논어 와 주역 에 관 통하였다. 시호는 정헌( 正 獻 )이다. 제1장 전통사회 569

25 [권혁( 權 爀, 1694~1759)] 자는 자장( 子 章 )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상유( 尙 游 )이며, 어머니 원주원씨는 한 성부 우윤 만춘( 萬 春 )의 딸이다. 영조 4년(1728) 이인좌( 李 麟 佐 )의 난이 일어나자, 정언으로서 서울을 버리고 피난하자는 영의정 이광좌( 李 光 佐 )의 주장을 적극 반대 하여 좌절시켰다. 또한 난이 일어났을 때 신속히 대처하지 못한 호서관찰사 권첨 ( 權 詹 )을 그의 본가가 있는 도에 충군( 充 軍 )한 것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하고 극변 ( 極 邊 )에 충군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어 부수찬 교리를 거쳐 이듬해 다시 부수찬이 되어 실각한 소론( 少 論 )을 비호 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당론에 치우친다 하여 삭직되었다. 그러나 곧 부수찬에 복직 되고 부교리 정의현감을 거쳐 수찬으로 재직하던 중, 1732년 당론을 논의하다가 해남에 정배되었다. 그러다 1734년 석방되어 헌납 용강현령 이조좌랑 필선 응교를 역임하고, 1737년 사간이 된 뒤 승지 등을 거쳐 1741년 대사간이 되었다. 강 원도관찰사,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1747년에는 이조참의 강화부유수를 역임하 였으며 1748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암행어사 김치인( 金 致 仁 )의 탄핵으로 파 직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우의정 정우량( 鄭 羽 良 )의 천거로 대사헌에 등용되었고, 1752년 부제학을 거쳐 1755년에 호조참판, 이듬해 우부빈객 함경도관찰사 지돈 녕 등을 지냈다. 1758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759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조 20년(1796) 청백리에 책록되었고, 시호는 정간( 靖 簡 )이다. 9 경주이씨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70 이서의 묘가 있는 화림리 서당말에는 경주 이씨의 재실인 영모재( 永 慕 齋 ) 가 있는데, 후손의 전언에 의하면 중수과정에서 경비의 부족으로 현판을 세우지 못했 다고 한다. 한편 금성면 하신 2리에는 1959년에 이규헌( 李 圭 憲 )이 기( 記 )한 경주이 씨세거기적비( 慶 州 李 氏 世 居 紀 績 碑 ) 가 세워져 있다. [이서( 李 曙, 1570~1616)] 자는 자양( 子 暘 )이고, 자호는 월봉( 月 峯 )이다. 이대방( 李 大 邦 )과 전주이씨( 全 州 李 氏 )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효심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병들었을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드렸고, 상을 당해서는 묘막을 짓고 정성으로 시묘살 이를 하였다. 광해군 8년(1616)에 형 이시( 李 時 )를 따라 서울 남소문동에서 금산으 로 내려왔는데, 형은 현재의 금성면 하신 2리 윗삽실 마을에 터를 잡았고, 이서는 유곡(현재 금성면 하류리)에 터를 잡아 금산의 경주이씨 터전을 만들었다. 당시 금 산군수인 이안눌( 李 安 訥, ~ 재임)의 시 금산십승( 錦 山 十 勝 ) 에 이

26 서 형제들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서와 부인 청풍김씨는 아들 다섯을 두었는 데, 장남 이유택( 李 惟 澤 )은 현감이고, 둘째 이유부( 李 惟 孚 )는 참봉, 이유태( 李 惟 泰 ) 는 호가 초려( 草 廬 )로 승지가 되었고, 이유익( 李 惟 益 )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이유 겸( 李 惟 謙 )은 현감이다. 현종조에 아들인 이유태가 귀하게 되어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추증되었고, 부인은 정부인을 증직하였다. 부인 청풍김씨는 남 이면 석동리 보석사 뒷산에 묘소가 있다. 10 경주정씨 경주정씨가 금산에 들어온 것은 정인조의 둘째 아들인 정재( 鄭 齋,?~?)에 의해서 이다. 족보에 의하면 정재가 고산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금산에 있는 아버지의 묘를 모시기 위하여 인근지역인 추정리로 들어와서 세거하였다고 한다. 정재의 추정리 로의 입향과정은 충렬사 옆 구거비( 舊 居 碑 )에 자세하다. 정인조의 후손들은 교수 공파와 고산 공파로 나뉘는데, 즉 고산현감을 지내고 금산으로 입향한 인조의 둘째 아들 정재의 후손들은 고산공파, 순천에서 살고 있는 정인조의 첫째 아들 정림( 鄭 霖 )의 후손들은 교수공파이다. 현재 추정리는 경주정씨 고산공파의 집성촌이다. 원 래 경주정씨가 추정리에 들어왔을 때는 유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고 한다. 추부면 추정리에는 려말선초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였던 정인조( 鄭 仁 祚 ) 장군을 배향한 사당인 충렬사( 忠 烈 祠 )가 있다. 묘는 추부면 자부리 남산마을에 자리잡고 있으며 후손들에게는 불천지위( 不 遷 之 位 )로 모셔지다가 1979년에 금산군의 지원으 로 사당이 건립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일에 유림 향사를 지내고 있다. [정인조( 鄭 仁 祚,?~?)] 시호는 충렬( 忠 烈 )이며, 정종철( 鄭 宗 哲 )의 아들이다. 태조 3년(1394)년에 이조판 서( 吏 曹 判 書 )가 되었고, 태종 12년(1414)에 월성군( 月 成 君 )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시호를 받았다. 생몰년은 족보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금산군읍지, 조선환여 승람 에도 행적만 소략하게 남아있으며, 후세의 기록에서도 근거가 없다. 정인조는 금산지역에 왜적이 들끓자 1402년 그가 거주하던 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금 성면 대암리 삽재성과 동정리 동정성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전투가 끝난 것으로 오 인하여 한 시내에서 물을 먹다가 잔류적의 화살을 맞고 순절하였다고 한다. 이를 근 거로 후손들은 정인조가 1402년 어간에 순절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전투경로가 순천에서 금산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정인조의 묘소와 신 도비는 추부면 자부리 남산 마을에 위치하며 부인은 밀양박씨 윤겸( 允 謙 )의 딸이다. 제1장 전통사회 571

27 11 해주오씨 해주오씨가 금산에 자리잡게 된 것은 오국헌의 5대조인 오유종( 吳 有 終, 1443~1500) 때 부터이다. 오유종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던 오고( 吳 考 )의 둘째 아들로, 호는 행정 이다. 세조 12년(1466)에 생원에 합격하였고 점필재 김종직( 金 宗 直 )의 천거로 전라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 절도사를 지냈다. 성종실록 에 의하면, 성종 16년 큰 가뭄이 들어 백성 가운데 사재를 가진 자를 모아 어려운 백성에게 나눠주도록 하였는데, 당시 진천 에 사는 상장( 上 將 ) 오유종이 거만의 곡식을 가지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오 유종 일가는 진천에 세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후손들에 의하면 평소 김종직과 친분이 있었던 오유종이 1498년 무오사화 때 연루 되어 진산으로 귀향을 오게 되었고, 진산 동쪽인 요광리에 있는 은행나무 아래 정자를 짓고 그 주위에서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요광리에는 해주 오씨 행정공파가 뿌리 내리고 살고 있다. 2002년 건립한 행정공의 재실과 신도비가 마전리에 있다. 해주 오씨는 요광2리와 3리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72 [오국헌( 吳 國 獻, 1599~1672)] 자는 중현( 中 賢 ), 호는 어은( 漁 隱 )이며,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知 中 樞 府 事 )를 지낸 오산립( 吳 山 立 )이다. 오국헌의 효행과 학행은 여지승람, 조선환여승람, 대한 충효등록 에 기록되어 있는데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 병환 중에는 지성 으로 간호하였고, 집 뒤에 단을 쌓아 혈서를 써 놓고 밤마다 하늘에 기도하였으며,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다. 부친이 잉어 회를 먹고 싶다 하니 한겨 울에 얼음이 언 연못에서 기적적으로 잉어를 얻었으며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 안 시묘살이를 하여 인근 사람들이 크게 감탄하였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송시열과 동문수학하여 송시열이 오국헌에게 어은( 漁 隱 ) 이 란 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수암 권상하는 오국헌의 기문과 묘표를 지어주었 다. 숙종 38년(1712) 문충공( 文 忠 公 ) 민진원( 閔 鎭 遠 )의 보고로 효자에게 내려주는 하사미를 받기도 하였고, 승훈랑 호조좌랑( 承 訓 郞 戶 曹 佐 郞 )에 추증되었다. 고종 25년(1888)에 가선대부 호조참판( 嘉 善 大 夫 戶 曹 參 判 )에 가증( 加 贈 )되고, 아들 달휘 ( 達 輝 ) 연휘( 延 輝 ) 수휘( 遂 輝 ) 일휘( 逸 輝 ) 건휘( 建 輝 ) 오형제와 손자 석규( 碩 奎 ) 후손 태증( 泰 增 ) 태준( 泰 俊 )과 함께 효행으로 명정 받아 1904년 해주 오씨 9효 자가 함께 모셔진 정려가 건립되었다. 정려기에 따르면 오국헌은 병자호란( 丙 子 胡 亂 ) 때 강화한 것을 통탄하다가, 금산 에서 경상도 생지량면 어은동으로 부인과 장남 오달휘와 막내 오건휘만 데리고 이 거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지냈다고 하나 건휘의 나이를 따져 보면 정확하지 않

28 고 금산을 떠난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문집이 있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묘는 경상도 생지량면 어은동에 있으며, 부인은 감찰사( 監 察 使 )를 지낸 초계하씨 ( 草 溪 下 氏 ) 하준( 下 晙 )의 딸이다. [오달휘( 吳 達 輝, 1627~1713)] 효자 오국헌의 장남으로, 자는 효여( 孝 餘 ), 호는 화락당( 和 樂 堂 )이다. 우암 송시 열의 문인이었으며 호는 민진원( 閔 鎭 遠 )이 지어주었다. 달휘가 어버이상을 당하여 네 아우와 6년간 여묘( 廬 墓 )를 살며 무덤을 돌볼 때 호랑이가 나타나 밤마다 초막을 지켜주었다 한다. 또한 모친이 병석에서 입맛을 잃고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기에 엄동설한에도 강가에 가서 얼음을 깨고 앉아 있었더니 잉어 한 마리가 불쑥 뛰어 올 라 잡아다가 공양하여 낫게 하였다고 한다. 묘는 경상도 증봉( 甑 峰 )선영( 先 塋 )에 있 으며, 부인은 안동김씨( 安 東 金 氏 ) 김석남( 金 碩 南 )의 딸이다. [오연휘( 吳 延 輝, 1631~1716)] 효자 오국헌의 둘째 아들로 자는 의여( 義 餘 ), 호는 무하당( 無 夏 堂 )이다. 우암 송 시열의 문인이었다. 묘는 금산군 추부면 비례리( 備 禮 里 )에 있으며, 부인은 성산이 씨( 星 山 李 氏 ) 이곤형( 李 坤 亨 )의 딸이다. 오수휘( 吳 遂 輝, 1634~1704)는 효자 오국 헌의 셋째 아들로 자는 순지( 順 之 )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었다. 묘는 금산군 추 부면 자라리( 自 羅 里 )에 있으며, 부인은 양덕황씨( 陽 德 黃 氏 )와 남양방씨( 南 陽 房 氏 ) 이다. [오일휘( 吳 逸 輝, 1647~1718)] 국헌의 넷째 아들로, 자는 일휴( 日 休 ), 호는 용포( 龍 浦 )이다. 용포라는 호는 우암 송시열이 지어준 것이다. 묘는 공주에 있으며, 부인은 여흥민씨 민인간( 閔 仁 幹 )의 딸이다. 오건휘( 吳 建 輝, 1650~1720)는 국헌의 막내 아들로 자는 여빈( 輿 彬 ), 호는 도암( 道 菴 )이다. 묘는 경상도 생지량면에 있으며, 부인은 안동김씨 김안절( 金 安 節 ) 의 딸이다. 제1장 전통사회 573 [오석규( 吳 碩 奎, 1662~1732)] 효자 연휘의 장남으로 자는 서오( 瑞 五 ), 호는 현산( 峴 山 )이다. 우암 송시열과 수 암 권상하의 문인이였다. 그의 호를 권상하가 지어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아버 지 효행을 본받아 어려서부터 부모 섬기기를 지성으로 하였다. 부모가 병중에 계시 면 음식을 전폐하고 오로지 병간호에 몰두하였고, 밤이면 혈서로 축문을 만들어 하

29 느님께 기도하였다. 54세에 양친이 한해에 별세하자 3년을 하루같이 여막에서 시 묘하였다. 묘는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장산에 있으며, 부인은 교하노씨( 交 河 盧 氏 ) 노상검( 盧 尙 儉 )의 딸이다. [오태증( 吳 泰 增, 1758~1831)] 효자 오국헌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오언온( 吳 彦 溫 )이다. 자는 사강( 士 剛 ), 호는 계옹( 溪 翁 )이다. 선조들의 효행을 이어받아 아우 오태준( 吳 泰 俊 )과 함께 효성이 지 극하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다. 묘는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에 장산에 있으며, 부인은 연안이씨( 延 安 李 氏 ) 이희백( 李 希 白 )의 딸이다. 오태준( 吳 泰 俊, 1761~1822) 는 효자 오태증의 아우로 자는 학지( 學 之 ), 호는 석탄( 石 灘 )이다. 성담( 性 潭 ) 송문경 공( 宋 文 敬 公 )을 스승으로 섬겼고, 선조의 효행을 본받아 효자로 알려져 태증( 泰 增 ) 과 함께 교관( 敎 官 )을 제수하였다. 묘는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장산에 있으며, 부인 은 안동김씨( 安 東 金 氏 ) 김유정( 金 由 正 )의 딸이다. 12 옥천전씨 후손들은 전지영을 금산지역 옥천전씨의 입향조로 보고 있다. 전언에는 전지영 이 연산군의 폭정을 피해 이 마을에서 은거하였다고 하지만, 족보에 의하면 효( 孝 ) 로서 귀향하기를 청하여 처음으로 진산 지봉산 아래에 소당( 小 堂 )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현재 요광 1리에 옥천전씨는 20여호 정도 거주한다.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74 [전지영( 全 摯 穎, 1499~1579)] 자는 영신( 穎 愼 ), 호는 죽담( 竹 潭 )이다. 할아버지인 전희철( 全 希 哲 )은 수양대군 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은거하면서 평생 세상에 나아가지 않 았던 인물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내자사첨정( 通 訓 大 夫 內 資 寺 僉 正 )을 지낸 전호 ( 全 琥 )이고 어머니는 박원효( 朴 元 孝 )의 딸이다. 학문이 뛰어나 이담( 李 潭 )의 천거로 연풍 부산 경원 거제 등의 지방관을 지냈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나 있었 는데 거제부사를 지낼 당시 친상을 당하자 부모에 대한 그리운 정을 시로써 남겼다 고 한다. 그리하여 그 고을 사람들이 효자사또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송강 정철( 鄭 澈 )이 찬( 撰 )한 행장이 있어 진산지( 珍 山 誌 ) 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전해지 지 않는다. 13 상산김씨 상산김씨는 현재 용화리에 거주하는 주민 중 가장 먼저 터를 잡았다. 상산김씨의

30 용화 입향조는 노은 김자정( 老 隱 自 精, 1630~1693)으로 주민들에 의하면 임진왜란 이후 계속 된 금산지역의 전란을 피해 금산읍 아인리 박금촌( 朴 金 村 )에서 용화리로 이주해 왔다고 전한다. 김자정이 용화리에 터를 잡은 시기는 대체로 1650~60년대를 전후한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금산지역은 잦은 전란으로 향촌사회는 황폐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유랑민이 급증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가산을 버리고 새로운 주거지를 찾아 이 주하는 주민들이 늘어났다. 김자정도 역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용화리로 이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집안에 김지( 金 摯 )의 왕지( 王 旨 ) 2매가 전해지며 후손들이 금산 일원에 거주하여 20여대를 세거해오고 있다. 왕지는 모두 태종 10년(1410)의 것으로 4월 10일 김지 ( 金 摯 )를 통정대부예조우참의보문각직제학세자우보덕( 通 政 大 夫 禮 曺 右 參 議 寶 文 閣 直 提 學 世 子 右 補 德 )으로, 9월에 가선대부검교한성윤( 嘉 善 大 夫 檢 校 漢 城 尹 )으로 임 명하는 내용이다. [김윤식( 金 潤 植, 1870~1950)] 자( 字 )는 중범( 仲 範 )이며 호( 號 )는 용암( 龍 巖 )이다. 그는 금산 용화리에 입향한 김자정( 金 自 精 )의 7대손이며 효자 김홍중( 金 弘 重, 1754~1850)의 손자이다. 김윤식 은 가세가 빈곤하여, 주경야독하며 성현의 가르침을 전승하였다. 그러다 재산이 늘 고 여유가 생기자 빈민들을 구휼하고, 토지를 마을에 기증하여 주민들이 감사의 의 自 자정(1630~1693) 精 : 입향조 鑊 泰 寶 泰 珪 慶 益 慶 澤 達 重 在 重 履 重 儀 重 弘 重 (1754~1850) 晋 重 (1763~1808) 元 欽 德 欽 學 洙 仁 洙 連 洙 勉 植 (1790~1842) 敬 植 (1851~1933) 潤 植 (1870~1950) 炳 龜 (1892~1969) 제1장 전통사회 575 <그림 4> 상산김씨 시랑공파 계보

31 미로 보덕비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금산향교의 장의( 掌 議 )와 전교( 典 敎 )를 맡아 봉 사( 奉 祀 )와 유도( 儒 道 )의 선양에 힘썼으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종용사( 從 容 祠 ) 의 보수에도 공이 컸다. 부인은 천안전씨( 天 安 全 氏, 1868~1943)로 전부엽( 全 富 燁, 1835~?)의 딸이다. 김윤식과 천안전씨의 묘는 모두 남이면 석동리에 있다. 14 해평길씨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길사덕( 吉 思 德, 1756~1811)] 자는 명윤( 明 潤 ), 호는 현촌( 賢 村 )이다. 부인은 증금인( 贈 今 人 ) 은진송씨( 恩 津 宋 氏 )로 송홍석의 딸이다. 효자 길용거( 吉 龍 擧 )의 증손이며, 길경익( 吉 慶 益 )의 손자 이고 길사희( 吉 思 羲 )와 사촌지간으로, 효자로 소문이 나서 길사덕과 아울러 사효 ( 四 孝 ) 라 일컬었다. 교관( 敎 官 )을 증직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부모님 모시기를 다하여 어버이가 즐기시는 것은 비록 멀더라고 반드시 구하여 맛있는 음식이 일찍이 빠지는 것이 없었다. 부 친이 병석에 누웠을 때에는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엄동설한에도 강가에 가서 얼음 을 깨고 약재를 구하는 등 그 효행이 뛰어났다. 상을 당하자 시묘할 때 호랑이가 와서 스스로 호위하였고, 체질이 약해지고 병이 들어서도 추운 방에서 상제를 마쳤는데 병이 없어지고 몸이 건강하였다. 또한 아들 과 조카도 잘 가르쳐 학행을 이루게 하였고, 야은 길재( 吉 再 )의 유지( 遺 址 )에 두어 칸을 지어서 현촌이라 이름하고 숨어살면서 스스로 편안히 하고 몸을 단속하기를 예로써 하였다. 이러한 길사덕의 효행에 일가들과 마을 사람들이 감화해서 착하게 된 사람이 많았다. 묘는 부리면 현내리에 있다. 15 밀양박씨 576 청주에 세거하던 밀양박씨가 금산으로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이후 박사현의 아들 인 박수정( 朴 守 正 )때 부터인데 정확한 입향 이유는 알 수 없다. 그 후 박사현의 손자 일환( 日 煥 )은 통정대부에 올랐고, 증손( 曾 孫 ) 박재선( 朴 載 善 )은 가선대부에 올랐다. [박훈( 朴 薰, 1484~1540)] 자는 형지( 馨 之 ), 호는 강수( 江 叟 )로 박증영의 아들이다. 천거를 받아 벼슬길에 올라 감찰, 지평 등을 지내고 중종 14년(1519)에 현량과의 병과에 급제하고 장령, 동 부승지를 지냈다. 1519년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15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으며, 시 호는 문도( 文 度 )이다. 청주의 신항서원( 莘 巷 書 院 )과 금산의 덕산사에 배향되었다.

32 [박사현( 朴 嗣 賢,?~1592)] 호는 퇴우당( 退 憂 堂 )으로 박훈의 손자이다. 임진왜란 때 조헌의 의병에 종군하였 다. 청주성을 수복할 때 왜적의 탄환에 맞아 상처가 심하여 치료하고 있는데, 금산 에서 조헌이 700의사와 함께 옥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분을 참지 못하여 독약 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종용사와 덕산사에 배향되었다. 남원양씨 평촌리에 남원 양씨가 인연을 맺은 것은 광해군 때(1609~1622)에 한산군수를 그 만두고, 경기도 광주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한 양응해[ 梁 應 海, 호:천음( 天 蔭 ), 양성지의 6세손]로부터 비롯된다. 그가 왜 이곳을 세거지로 선택하여 입향 하였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양성지( 梁 誠 之, 1415~1482)] 조선 초기의 학자 문신으로 자는 순부( 純 夫 ), 호는 눌재( 訥 齋 ) 또는 송파( 松 坡 ) 이다. 양성지는 고려 초기(11세기초) 남원부의 향리를 지낸 양능양의 12대손이다. 시조 양능양의 7대손까지는 향리직을 세습하여 호장을 지내었으며, 8대손 양준에 이르러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 좨주의 문반직을 갖기에 이르렀다. 양성지는 여말의 학자로 이제현과 정몽주, 그리고 선초의 학자로는 정도전과 권 근을 추앙하였으며, 서거정, 신숙주, 김수온 등과 비교적 두터운 교우관계를 맺었 다. 그리고 학문영역은 매우 넓고 다채로웠는데 경학 사학 병법 지리 의학 음악 농법 등 거의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사학, 지리, 병 법에 흥미를 기울였다. 정조도 눌재집 에서 그의 학문을 크게 칭찬하였다. 눌재 집 을 편찬한 이병모도 양성지의 학문이 경제실용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26 세에 관계에 투신하여 68세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40여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330 여 조의 상주문을 지었고, 저서도 약 30여 종이 있다. 양성지는 당시 중국의 요순만을 유일한 이상적 군주로 여겼던 시절에 단군을 국 조로 받들기를 주장하였으며, 우리의 동국사를 배울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고, 온 세상이 중국의 풍속에 휩쓸리던 시대에 나라의 고유한 풍속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 장하였다. 또한 군사의 정병주의를 주장하여 시험을 치러 우수한 군사를 뽑도록 하 였다. 특히 병역의 토대가 되는 호적의 정확성을 기할 것, 독자의 군복무면제 등을 징병에 있어 3대원칙으로 삼은 것은 그의 탁월한 정치적 안목으로 볼 수 있다. 세종의 명에 의하여 편찬한 팔도지리지 와 연변방수도 는 매우 정밀한 것으로 실제 측량한 지도가 없던 그 당시로서는 매우 위대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제1장 전통사회 577

33 는 또 농정에도 힘을 써서 국가에 건의하기를, 농사의 근본은 지력을 잘 이용하는 데 있는 것이므로 개간사업을 일으켜서 해변과 강 육지에도 방축을 세워 수전을 만들자고 주장하였으며, 직업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모아서 농사를 짓게 하고, 그 밖에 여가가 있을 때에는 무예를 익히게 하면 일거양득이 된다고 하였다. 1482년(성종 13) 6월 11일에 통진 대포곡 ( 通 津 大 浦 谷,김포군 양촌면 대포리)에서 68세의 일기로 작고하였고 시호는 문양( 文 襄 )이다. 그 후 구암사를 비롯하여 김포의 대포서원( 大 浦 書 院 ), 담양의 월곡서원( 月 谷 書 院 )에 배향되었다. 2) 서원 사우의 건립 조선시대 지역내 사족활동의 핵심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서원( 書 院 )과 사우 ( 祠 宇 )의 건립 및 운영실태이다. 사우는 선현을 추모하고 유덕( 遺 德 )을 기리는 제사 적 기능을 가지며, 서원은 제향처( 祭 享 處 )이자 후진을 교육시키는 교육처였다. 조 선후기에 서원의 역할은 단순한 제향과 교육시설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영 향력이 심대하여 해당 학파의 본거지로 존재하며 정치성을 띄게 되었다. 각 서원의 성격은 제향된 인물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는데 제향인의 성격이 충절인이 아 닌 문신이나 학자일 경우에는 특정 학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을 가능성이 크다. 금산지역의 서원 사우는 다음의 표와 같다. [표 16] 금산 지역의 서원 사우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78 서원 소재지 창건연대 배향인물 星 谷 書 院 남이면 성곡리 1613년(광해 5) 金 侁, 尹 澤, 吉 再, 金 淨, 高 敬 命, 趙 憲 龍 江 書 院 제원면 용화리 1716년(숙종 42) 宋 時 烈, 宋 浚 吉, 金 元 行, 兪 棨, 宋 明 欽 淸 風 書 院 ( 不 二 影 堂 ) 부리면 불이리 1672년(현종 12) 吉 再 草 廬 書 院 ( 磻 溪 書 院 ) 금성면 하류리 1632년(인조 11) 李 惟 泰 山 泉 齋 書 院 남일면 음대리 1663년(현종 4) 尹 宣 擧, 尹 拯 從 容 祠 금성면 의총리 1647년(인조 25) 高 敬 命, 趙 憲, 高 因 厚, 邊 應 井, 柳 彭 老, 安 瑛, 李 光 輪, 趙 完 基, 韓 楯, 趙 憲 幕 佐, 高 敬 命 幕 佐, 高 敬 命 士 卒, 趙 憲 士 卒 忠 烈 祠 금성면 상가리 1831년(순조 31) 吳 應 鼎, 吳 稶, 吳 稷, 吳 邦 彦 柳 谷 祠 ( 柳 谷 書 院 ) 금성면 하류리 1702년? 韓 皦, 李 惟 澤 趙 憲 祠 堂 ( 表 忠 祠 ) 복수면 곡남리 1649년(인조 27) 趙 憲 石 浦 齋 書 院 부리면 창평리 숙종말 許 穆

34 금산 지역은 조선시대 전라도에 속해있었지만 충청도와 경계를 접하여 거리상 가까웠고 충청도의 명문가와 학맥, 혼인관계 등으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조 선중후기 김장생 문인의 근거지를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전라도가 충청도 다음으 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이들중 대부분이 전주목 지역에 집중되 어 있어 금산과 진산의 사족 활동이 충청도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 으로 추측된다. 김장생의 문인 비율과도 연계되는 충청도 연산의 돈암서원 봉안시 (1635) 참여록에서 참석자의 거주지를 분석한 자료에서도 공주목, 홍주목, 청주목 의 군현과 함께 전주목의 여러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서원과 사우에 배향된 인물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금산 지역의 유풍이 조선초기 의 성리학자인 윤택과 길재 등에게서 비롯되어 이유택, 이유태 형제와 중봉 조헌에 게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고, 후에 서인 노론계의 대표적인 인물인 송시열, 송 준길, 김원행, 유계, 송명흠와 소론계의 윤선거, 윤증 등과 연계되는 양상을 보인다. (1) 반계서원( 磻 溪 書 院 草 廬 書 院 ) 반계서원은 금산군 금성면 파초리에 있었던 서원으로 초려 이유태( 草 廬 李 惟 泰 ) 를 배향했으나, 현재 서원의 유적을 찾을 수 없다. 반계( 磻 溪 ) 의 이름은 파초리 앞의 내에 반석( 磻 石 )이 있으므로 반초( 磻 蕉 ) 또는 반계 라고 한데서 나왔고, 이 것이 파초( 芭 蕉 ) 로 변하였다고 한다( 금산군지,1987). 초려집( 草 廬 集 ) 의 성곡서원유생권학규( 星 谷 書 院 儒 生 勸 學 規 ) 와 시남집( 市 南 集 ) 문화당기( 文 會 堂 記 ) 에 의하면 초려 이유태가 여러 형제들과 함께 유곡리 (파초리의 인근마을)에 문회당( 文 會 堂 )을 건립하여 수천권의 경서를 비치하고 향수 재와 자제들을 강학하였다고 한다. 반계서원에 대하여 알 수 있는 확실한 자료는 열읍원우사적( 列 邑 院 宇 事 蹟 ) 뿐 이다. 이 자료에서는 이유태가 죽은 10년 후인 숙종 20년(1694)에 본읍 유생 이진환 ( 李 震 煥 ) 등이 상소하여 서원건립을 요청하였으나, 1721년에 이르러서야 창건되어 이유태를 독향( 獨 享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영조 18년(1742)의 서원정리 정책(숙종 40년 이후에 건립된 영당이나 사우는 철폐)으로 반계서원도 철폐된 것으 로 보인다. 한편 조두록( 俎 豆 錄 ) 과 동국원우록( 東 國 院 宇 錄 ) 에는 향현사( 鄕 賢 祠 )의 이름으로 윤선거와 이유태를 병향( 並 享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영조 41년(1765)에 편찬된 금산군읍지( 錦 山 郡 邑 誌 ) 에 따르면 금성면은 서일면 ( 西 一 面 )과 서이면( 西 二 面 )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따라서 파초리( 芭 蕉 里 )는 서일면 에, 하류리( 下 柳 里 )는 서이면에 각각 나뉘어 소속되었으나 두마을은 실제로는 가깝 게 붙어 있었다. 이러한 행정편제는 1914년에 현재와 같이 금성면으로 통합 개편 제1장 전통사회 579

35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유림교본( 儒 林 敎 本, 금산향교, 1991) 의 서원 사우의 연혁 에서는 초려 서원과 반계서원이 서로 다른 지역에 설립된 별개의 서원으로 서술하였다. 즉 초려 서원은 인조 11년(1632) 하류리 유곡동에 미촌 윤선거( 美 村 尹 宣 擧 )가 사숙을 개설 하였고, 숙종 때에 이유태가 여기에서 후학을 가르쳤으므로 윤선거와 이유태를 배 향하고 향사하다가, 고종 8년(1871)에 훼철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반계서원은 숙 종 20년(1694)에 파초리에 세워 이유태가 후학을 가르쳤으므로, 후학들이 이유태 를 배향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서로 가까운 두 마을의 다른 서원에서 각각 이유태를 배향하였으리라고 는 생각되지 않는다. 행정편제상에서는 위와 같이 서로 구분되었으나 서로 거리가 가까운 위치에 있고, 숙종 때에 이유태가 같은 지역의 두 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반계서원과 초려서원을 별개 의 서원으로 보는 것보다는 동일의 서원에 대한 다른 이름일 것으로 보인다. (2) 산천재서원( 山 泉 齋 書 院 )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80 산천재( 山 泉 齋 ) 에 대해서 기록한 조선시대의 자료는 열읍원우사적( 列 邑 院 宇 事 蹟 ), 노서유고( 魯 西 遺 稿 ) 의 연보 와 유계( 兪 棨 ), 박세채( 朴 世 采 )가 각각 쓴 행장, 그리고 시남집( 市 南 集 ) 에 수록된 유계의 산천재기( 山 泉 齋 記 ) 등이 단 편적으로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위의 자료에서 어느 곳에서도 산천재서원 이라 는 말은 없었고, 단지 산천재 라고만 기록되어 있었다. 현재 건물의 자취는 찾아 볼 수 없고, 유일한 산천재의 위치를 추측케하는 윤증 ( 尹 拯 )의 비( 碑 )만이 남일면 음대리 금일초등학교 앞의 795번 국도(금산-진안간) 건너편에 세워져 있을 뿐이다. 열읍원우사적 에 의하면 산천재에는 미촌 윤선거 ( 美 村 尹 宣 擧 ), 명재 윤증( 明 齋 尹 拯 ), 농은 윤추( 農 隱 尹 推 ) 3인이 배향되어 있었음 을 확인할 수 있다. 병자호란을 겪은 후인 인조 15년(1637) 겨울에 윤선거와 유계가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 마하산 아래에 은둔하여, 학문을 연구하며 성리학의 진리와 예론을 연구하 고 산수를 즐기며 생활하였다. 1642년에는 이미 작은 재( 齋 )를 짓고 산천재( 山 泉 齋 ) 라고 편액하였다. 유계의 시남집 에 산천재기 가 실려 있고, 여기에서 산천 재 라고 편액한 이유를 기록하고 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몽( 蒙 ) 이라는 것은 만물의 싹이니 성인이 만물의 싹을 기르지 않을 수 없다. 고로 설 괘의 계사(출전 : 周 易 )에서 이르기를 동몽( 童 蒙 )이 나에게서 구한다는 것은 군자가 덕을

36 기름을 수행하는 것이고, 어린이는 바르게 키워서 성( 聖 )하게 됨을 이른 것이다. 상( 象 ) 에 이르기를 산밑에서 샘이 나온다 고 하였으니, 지금 재( 齋 )는 동몽을 위하여 만들었고 산천( 山 泉 )의 편액은 이로부터 나온 것이다 천하의 물건에 어린이를 깨우칠 수 있는 것은 많다. 성인이 어린이를 표현함을 왜 산천에서 얻는가. 대개 물의 성질은 본래 고요 하고 맑으니 산밑의 샘이 대개 그 근원이다. 물이 조금씩 흐르기 시작하여 흐름과 깊이에 더함이 없고 맑고 탁함의 나뉨이 없으니, 그것은 사람의 어린 것과 같지 않은가. 이로부터 깨끗이 씻어내고 흐르고 이끌어 깨끗함이 상존에 오르고 신명에 천거할 수 있 고, 도달이 산골짜기에 이르고 내에 이르고 강에 이르고 바다에 이르는 것 모두가 돌아가 는 성질이다. 그것이 혹시 더러운 곳에 빠져있고 자갈로 막혀 어지러워지고 탁해지고 묻 히고 막히는 것은 또한 이와는 구분된다. 이것이 성인이 산천으로 어린이를 표현하여 그 를 기르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하늘이고, 어린이를 기르는 것은 사람이다. ( 夫 蒙 者 物 之 穉 也 聖 人 以 物 穉 不 可 不 養 也 故 設 卦 以 繫 之 辭 曰 童 蒙 求 我 曰 君 子 以 果 行 育 德 曰 蒙 以 養 正 聖 功 也 其 象 曰 山 下 出 泉 今 齋 爲 童 蒙 設 山 泉 之 扁 其 以 此 夫 天 下 之 物 可 以 喩 蒙 者 多 矣 聖 人 象 蒙 曷 爲 於 山 泉 乎 取 之 夫 水 之 爲 性 本 靜 以 淸 山 下 之 泉 盖 其 源 也 涓 涓 乎 始 達 䟽 浚 未 加 淸 濁 未 分 其 猶 人 之 蒙 乎 由 是 而 澄 之 渫 之 浚 之 導 之 其 潔 也 可 以 登 上 尊 薦 神 明 其 達 也 可 以 之 澗 之 川 之 江 之 海 者 皆 回 性 也 厥 或 糞 壤 游 之 沙 礫 壅 之 以 汨 以 濁 以 埋 以 塞 者 亦 於 是 乎 判 此 聖 人 所 以 以 山 泉 象 蒙 而 養 之 故 曰 蒙 天 也 養 蒙 人 也 ( 市 南 集 卷 19 山 泉 齋 記 ) 위 글에서 볼 수 있듯이 편액에 쓰여진 산천( 山 泉 ) 이라는 이름의 뜻은 산 밑의 깨끗한 물이 근원에서 시작하여 계곡, 시내, 강을 거쳐 바다에 이르는 과정을 어린 이가 성장하여 성인( 聖 人 )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비유하였다. 즉 원래 고요하고 맑 은 물을 본래 어린이의 본성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자람으로, 물이 깊어지는 것을 배움으로, 강과 바다에 이름을 성인( 聖 人 )으로 연결시켰다. 이로서 윤선거와 유계가 산천재를 설립한 목적을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윤선거는 산천재 를 설립한 후에 산천재( 山 泉 齋 ) 를 그의 호( 號 )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산천재에 관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산천재의 구 체적인 성격과 변화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산천재서원의 명칭도 사용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인조 24년(1646) 유계( 兪 契 )가 무안현감으로 부임하자 윤선거가 산천재서원에 남아 유생 강론과 학문 연구를 계속하였고, 현종 10년(1669) 윤선거가 죽은 후에는 아들인 윤증이 산천재서원을 강학과 학문탐구의 본거지로 활용하였다. 윤증 강학 ( 講 學 )의 장( 場 )이 되었다. 산천재서원은 숙종 12년(1686) 윤증이 사망하자 후학들 이 면재 윤증의 영상( 影 傷 )과 위패( 位 牌 )를 봉안하고 130여년간이나 학통을 계승 제1장 전통사회 581

37 하다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손되었다. 고종 33년(1896) 그 유허( 遺 墟 )에 후학 유생들에 의해 건립된 유허비( 遺 墟 碑 )만이 그 터를 지키고 있다. (3) 성곡서원( 星 谷 書 院 )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82 성곡서원은 금산지역의 서원 중에서 가장 먼저 창건되었고, 금산지역의 유일한 사액서원이었다. 그러나 대원군 때 훼철되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열읍원우사적( 列 邑 院 宇 事 蹟 ) 에 의하면 성곡서원의 건립은 광해군 즉위 초기 인 1613년에 다수의 선비들의 요청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의 율 정 윤택( 栗 亭 尹 澤, 1289~1370)이 관직에서 물러나 살았던 진악산( 進 樂 山 ) 아래 에 당시의 금산군수 이안눌( 李 安 訥, ~ 재임)이 주도하여 창건하 였고, 1617년에 군수 김원록( 金 元 錄, ~ 재임)에 의해 봉안되었다. 원기( 院 記 ) 는 김원록이 지었고, 제영( 題 詠 )은 이안눌과 서산군수 김대덕[ 金 大 德, 1577~1639, 호 : 소봉( 蘇 峰 ) 이안당( 易 安 堂 ), 김원록의 아들]이 지었다. 서원에 배향된 인물은 서원이 건립되면서 6명이 함께 배향되는데, 고려 말의 요 양행성 참정( 遼 陽 行 省 參 政 )을 역임한 낙천재 김신( 樂 天 齋 金 侁 ), 율정 윤택( 栗 亭 尹 澤 ), 야은 길재( 冶 隱 吉 再 ), 기묘사화 때 8현 중의 한사람인 김정( 金 淨 ), 그리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헌( 趙 憲 )과 고경명( 高 敬 命 ) 등이다. 현종 4년(1663)에 본읍 유생 한수신( 韓 秀 臣 )이 상소하여 예조좌랑 정동엽( 鄭 東 燁 )을 보내어 치제( 致 祭 )하고, 성곡서원( 星 谷 書 院 ) 의 이름으로 사액한 후 복호미 4결을 내려주어 경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 同 春 堂 宋 浚 吉 )이 썼고, 학규( 學 規 )는 초려 이유태( 草 廬 李 惟 泰 )와 진보현감 이진병( 眞 寶 縣 監 李 震 炳 )이 함께 지었고, 원규( 院 規 )도 이유태가 지었다. 성곡서원에는 원장 1인, 장의 2인, 유사 2인, 훈도 1인을 두고 원생 25인을 뽑아 지방교육에 힘썼고, 삼남의 유생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으며 지방유림들이 전답을 헌납하여 재정도 풍부하여 지방교육에 이바지한 공이 컸었다.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성곡서원이 있었다고 전해 지는 곳은 현재 밭으로 변해 있었고, 성곡서원유허비( 星 谷 書 院 遺 墟 碑 ) 만이 있어 서 서원의 자리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4) 용강서원( 龍 江 書 院 ) 제원면 용화리( 龍 化 里 ) 금강 상류인 용강변( 龍 江 邊 )에 자리잡고 있던 용강서원 ( 龍 江 書 院 )은 숙종 42년(1716)에 세워진 서원으로, 송시열 송준길 유계를 제향

38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書 院 撤 廢 令, 1871)으로 훼철( 毁 撤 )되었으나, 1910년경 지역 유림들이 헐린 재목의 일부를 모아서 용강서당( 龍 江 書 堂 )을 짓고 유 림의 회합 및 자제교육의 장으로 이용하였다. 용강서원에 대해서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로는 청금록( 靑 衿 錄 ) (1716년) 용강 선안( 龍 江 仙 案 ) (18세기말) 유생천거장( 儒 生 薦 擧 帳 ) (1794) 용강서원원장안 ( 龍 江 書 院 院 長 案 ) (1806) 청아록( 菁 莪 錄 ) (1819) 용강서원도기( 龍 江 書 院 到 記 ) (1836) 재임안( 齋 任 案 ) (1866) 용강서당유계록( 龍 江 書 堂 儒 稧 錄 ) (1885) 등이다. 용강서원이 건립되는 시기가 노론이 정계를 주도하던 때이고, 건립 당시에 배향되 는 인물이 당시의 정계 학계를 주도했던 우암 송시열( 尤 庵 宋 時 烈 ) 동춘 송준길 ( 同 春 宋 浚 吉 ) 시남 유계( 市 南 兪 棨 ) 등이었던 것을 보아도 이 지역의 노론계 재지사 족이 중심이 되어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용강서원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미호 김원행( 渼 湖 金 元 行 )과 역천 송명흠( 櫟 泉 宋 明 欽 )이 용강서원과 관계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미호 김원행이 용 강서원과 교분을 맺게 되는 계기는 신임사화( 辛 壬 士 禍, 1721)로 노론 4대신이었던 김원행의 할아버지 김창집( 金 昌 集 )이 사사( 賜 死 )되고 김원행의 집은 용화리와 인접 한 제원면 천내리에 유배되어 용강서원에 출입하면서 강론을 하게 된다. 또한 역천 송명흠도 당시의 노 소론간의 치열한 당쟁을 피해 아버지 묵옹 요좌( 黙 翁 堯 佐 )와 함께 옥천( 沃 川 )에 살면서 용강서원에 출입하며 강론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은 금산지역의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용강서원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말았 다. 다행히 당시의 지역유림 김조수( 金 祖 洙 )의 노력으로 강당( 講 堂 )만은 형태를 유 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용강서원의 명맥은 유지될 수 있었다. (5) 종용사( 從 容 祠 ) 종용사는 임진왜란 당시 금산 연곤평( 延 崑 坪 )에서 순국한 중봉 조헌( 重 峰 趙 憲 ) 과 승장 영규대사( 僧 將 靈 圭 大 師 ), 눈벌[ 臥 隱 坪 ]싸움에서 순국한 전라도 의병장 제 봉 고경명( 霽 峰 高 敬 命 ), 그리고 횡당촌(진악산 밑 서당골)싸움에서 순국한 변응정 ( 邊 應 井 )과 그들의 막료( 幕 僚 ) 및 사졸( 士 卒 ), 무명의사 등 칠백의사를 모두 21위의 위패에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1592년 왜군이 금산을 침입하자 조헌과 승장 영규대사는 8월 1일 청주성을 탈환한 후 다시 금산의 적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하였다. 이 때 금산에는 호남으로 진격하려 던 왜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 早 川 隆 景 ] 휘하의 강력한 적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7월 7일 웅치( 熊 峙 )에서 김제군수 정담( 鄭 湛 )의 군과 혈전을 감행하였고, 7 제1장 전통사회 583

39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84 월 8일에는 이치( 梨 峙 )에서 권율장군의 군과 싸워 패하였으며, 7월 9일에는 금산 눈벌에서 초토사 고경명( 招 討 使 高 敬 命 )과 방어사 곽영( 防 禦 使 郭 嶸 )의 7천군과 싸 웠는데 고경명의 의병부대는 필사적인 결의로 장렬히 싸워 적군에 적지 않은 타격 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헌은 권율장군의 관군과 8월 17일에 금산의 왜군을 공격하기 로 기약하고 영규대사가 거느린 승군과 합세하여 목숨을 건 싸움에 임할 것을 결심 하였다. 8월 18일 아침 조헌이 거느린 아군은 금산 연곤평에서 적군과 싸우게 되었 다. 조헌은 군중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오늘의 사태는 죽음 한가지만이 있을 뿐이 다. 죽든지 살든지 앞서든지 물러서든지 간에 다만 의( 義 )라는 글자에 부끄럽지 않 아야 한다. 고 하였다. 조직적인 훈련이 부족했던 의병부대로써 강력한 적군의 공 격을 세 번에 걸쳐 격퇴하였으나 무기가 다하고 드디어는 백병전이 전개되어 사람 과 말이 엉키고 베고 찌르는 처참한 혈전이 벌어졌다. 이에 조헌을 위시한 승장 영규대사와 이광륜( 李 光 輪 ), 임정식( 任 廷 式 ), 김절( 金 節 ), 변계온( 邊 繼 溫 ), 양응춘( 楊 應 春 ), 곽자방( 郭 自 防 ), 김희철( 金 希 哲 ), 강충서( 姜 忠 恕 ), 조헌의 아들 조완기( 趙 完 基 ) 등을 포함한 칠백의사가 모두 전사하였으며 적 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해 8월 22일 조헌의 제자인 박정량( 朴 庭 亮 )과 전승업 ( 全 承 業 )이 시체를 거두어서 순국한 장소인 금산군 서이면(현 금성면 의총리)에 한 무덤을 만들어 칠백의총( 七 百 義 塚 )이라 하였다. 그리고 다시 10년 후인 선조 36년 (1603) 의총 앞에 양호( 兩 湖 )의 유생들이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 重 峰 趙 先 生 一 軍 殉 義 碑 )를 건립하였다. 비문은 월정 윤근수( 月 汀 尹 根 壽 )가 찬( 撰 )하고, 남창 김현 성( 南 窓 金 玄 成 )과 습정 송방조( 習 靜 宋 邦 祚 )의 기( 記 )와 문곡 김수항( 文 谷 金 壽 恒 ) 의 음기( 陰 記 )가 새겨져 있다. 1634년 금산군수 김성발( 金 聲 發 )과 제원찰방 조평( 趙 平 )이 의총 앞의 언덕에 순의단( 殉 義 壇 )을 세워 칠백의사의 충혼을 위로하였다. 이 때 중봉이 순절한 곳과 불과 5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순절한 고경명, 변응 정, 영규대사 등을 함께 제사하였다. 1647년 당시의 금산군수였던 홍처대( 洪 處 大 )와 호서 호남 유림들이 사우를 건립 하였고, 1661년에 초려 이유태( 草 廬 李 惟 泰 )가 사액상소를 올린 이후 1663년에 현종 이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종용사( 從 容 祠 ) 라 사액하고 제토를 내렸다. 열읍원우사 적( 列 邑 院 宇 事 蹟 ) 에 의하면 당시 배향의 위치는 고경명과 조헌을 주향( 主 享 )으로 하 였고, 동벽 제1위에 고인후( 高 因 厚 ), 제2위에 이광륜, 제3위에 조완기를 배향하였고, 서벽에는 제1위에 변응정, 제2위에 유팽로( 柳 彭 老 ), 제3위에 안영( 安 瑛 ), 제4위에 한 순( 韓 楯 )을 배향하였다. 그리고 동북면에는 제봉의 막좌( 幕 佐 )를 서북면에는 조헌의 막좌를 배향하였고, 사우의 문밖에 동서로 협실( 夾 室 )을 지어 역시 고경명과 조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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