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거론하며 금산( 錦 山 )의 안성면( 安 城 面 )을 떼어 붙여 현( 縣 )을 승격시켜 부( 府 ) 로 만들고, 현감을 승진시켜 부사로 만들어 방비를 강화하자는 주장을 펼쳐 결국 안성은 무주에 할속 되었다. 한편, 고을에서 역적 또는 강상의 죄인이 발생하거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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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희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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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권 생명의 고향 미래의 땅 제5절 조선후기 1. 행정제도의 변천 1) 행정구역의 조정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46 지금의 금산군은 조선시대에는 금산군과 진산군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일제강점 기인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금산군( 錦 山 郡 )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의 변화 는 조선시대에도 종종 이루어져 금산군과 진산군의 일부 지역은 인근 고을과 하나 로 합쳐지거나 다시 분리되는 등의 과정을 겪었다. 금산군에서는 일부 지역이 무주로 할속( 割 屬 )되기도 하였다. 인조 23년(1645) 전 라감사 윤명은( 尹 鳴 殷 )이 무주의 적상산성( 赤 裳 山 城 )에 대해 논의하면서 금산 옥 천 영동 등 주변고을의 일부 지역을 적상산성에 할속 시키기를 조정에 청한 일이 있었다. 적상산은 신라와 백제가 각축을 벌였던 요지이며 고려시대 거란이 침입했 을 때 인근 수십 군현이 큰 피해를 입었을 때에 적상산에 살았던 사람들만 안전할 만큼 최고의 자연 요새였다. 조선 세종 때는 체찰사( 體 察 使 ) 최윤덕( 崔 潤 德 )이 산 성을 쌓고 보존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지만 임진왜란 이후에 성을 쌓고 광해군 4년 (1612) 실록전( 實 錄 殿 )이 세워져 5대 사고( 史 庫 )의 하나가 되었다. 인조 19년(1641) 에는 선원각( 璿 源 閣 ) 군기고( 軍 器 庫 ) 대장관( 大 將 館 )이 건립되었던 곳이다. 무 주의 곡식을 산성에 운반해 위급한 때를 대비하였지만, 무주가 워낙 산중의 고을이 라 척박하므로 다른 고을을 떼 내어 여기에 보태자는 논의가 이미 있었다. 전라감 사 윤명은이 할속을 청하였던 금산 땅은 안성( 安 城 )이었다. 안성은 고려시대 안성 소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안성에 거주하는 백성들도 적상산성에 소속시켜주기를 바란다고 하였고 전라감사는 주변 고을의 일부 지역을 산성에 할속 시킨 후 읍호를 승격시켜 지방관을 보내어야 한다고 청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이때에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현종 14년(1673)에 전라감사 이동직( 李 東 稷 )이 다시 한번 무주 적상산성의 중요
2 성을 거론하며 금산( 錦 山 )의 안성면( 安 城 面 )을 떼어 붙여 현( 縣 )을 승격시켜 부( 府 ) 로 만들고, 현감을 승진시켜 부사로 만들어 방비를 강화하자는 주장을 펼쳐 결국 안성은 무주에 할속 되었다. 한편, 고을에서 역적 또는 강상의 죄인이 발생하거나, 변란과 재해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게 되어 독립 군현으로 기능하기가 곤란할 때에는 군현의 등급을 강등하 거나 폐합되는 경우도 있었다. 금산군은 인조 24년(1646) 역적의 출신지라는 이유 로 현으로 강등되었고, 진산군은 정조 15년(1791) 제사( 祭 祀 )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 태워 버린 후 가톨릭교식으로 제례( 祭 禮 )를 지낸 윤지충과 권상연의 고을이므로 현 ( 縣 )으로 강등되었다. 2) 면리편제와 호구 조선 초기 경국대전( 經 國 大 典 ) 에는 면에 권농관, 리에는 이정을 두어 촌락을 교화하고 통제하며 면리( 面 里 )의 수취체제를 운영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면리제가 전국의 말단행정구역까지 보급되는데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어 17 세기에 이르러서야 실질적인 면리제가 시행될 수 있었다. 이와같은 변화는 조선 후 기에 편찬된 지리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표 10] 조선 후기 금산지역의 면리편제 해동지도(1750년) 여지도서(영조년간) 호구총수(1789년) 금산 면 리 진산 면 리 해동지도 의 제작은 영조연간에 작성된 도별읍지를 모은 여지도서 의 제작연 대(1759년~1765년경)와 같은 시기로 추정되며 도별 읍지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 진 지도책으로서 지도와 함께 지도가 작성될 당시의 각 동리의 현황이 쓰여져 있 다. 이렇게 비교해보면 두 고을 중 금산군은 진산군의 2배 가까운 면을 관할하고 있 었다. 금산과 진산 모두 여지도서 에 동리가 표기되지 않아 몇 개리가 소속되었는 지는 알 수 없다. 해동지도 에서 여지도서 로 변화하는 동안 면의 수는 모두 증가 하였고, 면 명칭의 경우에 큰 변화는 없다. 주목되는 점은 금산군에 속한 면중 역 리면( 驛 里 面 ) 인데 소속된 리( 里 )는 전혀 없으나 원호가 349호, 인구 1,324명이라 는 것이다. 금산의 관아 시설이 밀집한 군일면과 군이면이 총 14개리, 872호, 총 인 구 3,428명이므로 제원역과 그 일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제1장 전통사회 547
3 <그림 2> 해동지도(금산군과 진산군) [표 11] 해동지도 와 여지도서 금산군의 면과 호구 해동지도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48 여지도서 면명 관문으로부터의 위치 군이면(郡二面) 군이읍내면(郡二邑內面) 읍내 부북면(富北面) 부북면(富北面) 15리 동일면(東一面) - 부서면(富西面) 부동면(富東面) 동일면(東一面) 제원역(濟原驛) 부서면(富西面) 8리 10리 15리 부동면(富東面) 20리 서일면(西一面) 20리 군일면(郡一面) 군일면(郡一面) 서이면(西二面) 서이면(西二面) 15리 남이면(南二面) 남이면(南二面) 30리 부남면(富南面) 부남면(富南面) 60리 군북면(郡北面) 40리 서일면(西一面) 남일면(南一面) 군북면(郡北面) 남일면(南一面) 편호 : 6,828호 인구 : 24,596명(남 11,776구, 여 12,820구) 7리 30리
4 [표 12] 호구총수 금산군의 면리와 호구 면 리 원호 구 전체 남 여 14면 83 6,092 20,795 9,518 11,277 군일면 ( 郡 一 面 ) 관상리( 舘 上 理 ), 계진리( 桂 珎 里 ), 중관리( 中 舘 里 ), 하관리( 下 舘 里 ), 암동리( 暗 洞 里 ), 양지리( 陽 地 里 ), 음지리( 陰 地 里 ), 와정리( 臥 亭 里 ), 아인리( 衙 仁 里 ) 436 1, 군이면 ( 郡 二 面 ) 남일면 ( 南 一 面 ) 남상면 ( 南 上 面 ) 남하면 ( 南 下 面 ) 서일면 ( 西 一 面 ) 서이면 ( 西 二 面 ) 부서면 ( 富 西 面 ) 부동면 ( 富 東 面 ) 옥거리( 玉 巨 里 ), 이중흥리( 二 中 興 里 ), 이중리( 二 中 里 ), 성내리( 城 內 里 ), 영처리( 寧 處 里 ) 삼태곡리( 三 台 谷 里 ), 마장리( 馬 莊 里 ), 원동리( 院 洞 里 ), 신동 리( 新 洞 里 ), 신천리( 新 川 里 ), 대보리( 大 甫 里 ), 수철리( 水 鐵 里 ), 초현리( 草 峴 里 ), 동소리( 東 所 里 ), 황풍정리( 皇 風 亭 里 ) 성곡리( 星 谷 里 ), 심천리( 深 川 里 ), 매곡리( 梅 谷 里 ), 고답리 ( 高 畓 里 ) 구석리( 龜 石 里 ), 금천리( 金 川 里 ), 역평리( 驛 坪 里 ), 건천리 ( 乾 川 里 ) 상탄리( 上 炭 里 ), 하탄리( 下 炭 里 ), 와사리( 臥 沙 里 ), 세곡리 ( 細 谷 里 ), 전평리( 田 坪 里 ), 파초리( 芭 蕉 里 ), 가차리( 佳 次 里 ), 두곡리( 杜 谷 里 ), 석현리( 石 峴 里 ) 유곡리( 柳 谷 里 ), 음지리( 陰 地 里 ), 소곡리( 小 谷 里 ), 마수리 ( 馬 首 里 ), 신곡리( 薪 谷 里 ), 와여벌리( 瓦 余 伐 里 ) 피파리( 皮 破 里 ), 선원리( 仙 院 里 ), 기물리( 機 勿 里 ), 가덕리 ( 加 德 里 ), 내답리( 乃 沓 里 ) 경당도리( 京 堂 道 里 ), 노치리( 蘆 峙 里 ), 밀양리( 密 陽 里 ), 평촌 리( 坪 村 里 ), 승재벌리( 承 在 伐 里 ), 도파리( 道 波 里 ), 내장리 ( 乃 場 里 ), 어재리( 於 在 里 ), 전도리( 前 島 里 ) 436 1, , , , , , , , ,015 부남면 ( 富 南 面 ) 군북면 ( 郡 北 面 ) 동일면 ( 東 一 面 ) 부북면 ( 富 北 面 ) 역리면 ( 驛 里 面 ) 평당리( 平 堂 里 ), 대치리( 大 峙 里 ), 대소리( 大 所 里 ), 도소리 ( 島 所 里 ), 대곡리( 大 谷 里 ) 부곡리( 釜 谷 里 ), 한우리( 閑 右 里 ), 헌대리( 獻 垈 里 ), 보광리 ( 寶 光 里 ), 골남리( 骨 南 里 ), 한좌리( 閑 左 里 ) 왕성리( 王 城 里 ), 수탕리( 水 湯 里 ), 명곡리( 明 谷 里 ), 구억리 ( 九 億 里 ), 동곡리( 東 谷 里 ), 추곡리( 秋 谷 里 ) 대산리( 大 山 里 ), 천내리( 川 內 里 ), 용화리( 龍 化 里 ), 금성동리 ( 金 姓 洞 里 ), 수파리( 水 波 里 ) 519 1, ,216 1,114 1, , , [내용없음] 349 1, 제1장 전통사회 549 [표 13] 해동지도 와 여지도서 진산군의 면과 호구 해동지도 여지도서 면명 호구 남 여 - 군 내( 郡 內 ) 267호 서 면( 西 面 ) 서 면( 西 面 ) 313호 북 면( 北 面 ) 북 면( 北 面 ) 441호
5 남 면( 南 面 ) 일남면( 一 南 面 ) 242호 이남면( 二 南 面 ) 355호 동일면( 東 一 面 ) 동일면( 東 一 面 ) 335호 동이면( 東 二 面 ) 동이면( 東 二 面 ) 406호 편호 : 2,359호 인구 : 남 5525, 여 5467 [표 14] 호구총수 진산군의 면리와 호구 구 면 리 원호 전체 남 여 ,961 7,940 3,729 4,211 군내면 ( 郡 內 面 ) 상리( 上 里 ), 북리( 北 里 ), 중리( 中 里 ), 동리( 東 里 ), 방축리 ( 防 築 里 ), 교동( 校 洞 ), 피촌( 皮 村 ) 서 면 ( 西 面 ) 북 면 ( 北 面 ) 지곡리( 紙 谷 里 ), 태봉( 胎 峰 ), 갑암( 甲 巖 ), 묵산( 墨 山 ), 청림동( 靑 林 洞 ), 영정 동( 永 貞 洞 ), 장전( 長 田 ), 모동( 茅 洞 ), 지방동( 芝 芳 洞 ), 장대동( 長 大 洞 ), 마근 담( 麻 根 淡 ), 상막기미( 上 莫 其 味 ), 하막기미( 下 莫 其 味 ), 주암( 珠 巖 ) 신대( 新 垈 ), 만산리( 萬 山 里 ), 지량리( 之 良 里 ), 신치( 新 峙 ), 문암( 門 巖 ), 기이리( 其 耳 里 ), 백암( 白 巖 ), 분동( 粉 洞 ), 개치( 介 峙 ), 효동리( 孝 洞 里 ), 목금리( 木 金 里 ), 수영동( 壽 永 洞 ), 연흥리( 延 興 里 )), 탄치( 炭 峙 ) , 동일면 ( 東 一 面 ) 숭암( 崇 巖 ), 장대( 場 垈 ), 추동( 楸 洞 ), 마전( 馬 田 ), 마삭( 旀 朔 ), 마음( 馬 音 ), 남산( 南 山 ) 동이면 ( 東 二 面 ) 자부리( 自 富 里 ), 수례동( 脩 禮 洞 ), 요광원( 要 光 院 ), 행정( 杏 亭 ), 검한리( 儉 閑 里 ), 장동 ( 獐 洞 ), 원당리( 元 堂 里 ), 벌리( 伐 里 ), 검동( 檢 洞 ), 성덕리( 聖 德 里 ), 서대리( 西 臺 里 ), 율 목동( 栗 木 洞 ) 329 1,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50 남일면 ( 南 一 面 ) 남이면 ( 南 二 面 ) 곡남리( 谷 南 里 ), 다복동( 多 卜 洞 ), 용진리( 龍 津 里 ), 자라전( 者 羅 田 ), 두만리 ( 斗 滿 里 ), 정장리( 正 壯 里 ), 지동( 池 洞 ) 초미고개( 初 味 古 介 ), 탱석리( 撑 石 里 ), 엄정리( 嚴 正 里 ), 삼가동( 三 佳 洞 ), 방 각동( 方 角 洞 ), 와돌막리( 瓦 乭 莫 里 ), 오항동( 烏 項 洞 ), 건천리( 乾 川 里 ), 목동 ( 木 洞 ), 가막동( 可 莫 洞 ), 피사리( 皮 沙 里 ) 272 1, , 조선 후기 군현의 인구는 1757년에 편찬한 여지도서 에서 확인 해 볼 수 있는 데,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이 편찬된 이후에 작성된 각 군 읍지들을 정리하고 종 합한 지리지이다. 금산군 방리조에 의하면 편호가 6,828호이고 인구는 24,596명, 남자는 11,776 명, 여자는 12,820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정조 13년(1789)에 편찬한 호구총 수 에는 이보다 더 자세한 기록으로 당시 금산군은 14개면에 83개 마을, 총 6,092 호에 20,79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의 작성시기에 비해 호구가 모두 감소 했음을 알 수 있다. 면의 수도 1개 증가하여 남이면이 남상면과 남하면으로 분리될 정도였으므로 금산군의 경제규모가 줄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6 금산군의 한전(旱田)은 3,058결 32부 6속, 수전(水田) 1,718결 50부 2속, 시기한 전(時起旱田) 1,538결 54부 5속, 수전(水田) 1,153결 20부 6속, 면세결(免稅結) 327 결 80부 1속이었다. 이것은 조선 전기 간전 3,952결에 비해 크게 증가한 수치였다. 특히 안성이 무주에 할속된 후의 전결이므로 그 사이에 경작면적이 늘었음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 진산군의 인구는 편호는 2,359호, 인구는 총 10,992명(남 5,525, 여 5,467)이었고 호구총수에서는 편호가 1,961호, 인구는 총 7,940명(남 3,729, 여 4,211) 금산군과 마찬가지로 호구가 모두 감소하였다. 진산군도 그 원인을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다. 진산군의 한전은 잡탈(雜頉)을 합쳐 840결 1부 1속이고 수전은 잡탈을 합하여 306결 46부 8속이었다. 조선 전기에 1,207결이었던 간전과 비교해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제1장 전통사회 551 <그림 3> 1982년 지방지도(금산군과 진산군) 3) 제원역의 운영 제원역은 조선 전기 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금산군에 위치했던 역참이다. 현재 제원면 제원리 제원초등학교 일대가 제원역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제원역에 부임
7 했던 찰방의 선정비군이 남아있기도 하다. 제원역 일대는 금산군의 1개 면으로 편 제될 정도로 인구가 많고 유동인구도 많은 지역이었다. 단일면에 소속된 리가 없음 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만 349호 1,324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호구총수 배 치되는 관원 역시 금산군수가 음관( 蔭 官 ) 종5품인 것과 비교하여 종6품의 문 무관 이 교대로 임명되도록 하였다. 제원역 관련 기록은 여지도서 와 호남읍지 등에 제원역지 가 포함되어 있어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제원역지에는 민호 347호가 거주하는 것으로 되어 호구총 수 와는 2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제원역에는 아사( 衙 舍 ) 문루( 門 樓 ) 비선각( 飛 仙 閣 ) 망운정( 望 雲 亭 ) 창고 ( 倉 庫 ) 등의 건물이 있었고 역승 외에 군관( 郡 官 ) 12명, 아전( 衙 前 ) 15명, 지인( 知 印 ) 8명, 사령( 使 令 ) 8명, 관노( 官 奴 ) 6명, 관비( 官 婢 ) 3명이 배치되었다. 역에 속한 사 찰도 있어서 남산( 南 山 )에 있는 남사( 南 寺 )가 있었고 주산( 主 山 )은 덕곡( 德 谷 )이었 다. 사창도 소속되어 있었다. 제원역에서 관할하는 소속 역은 네 곳이었는데 각각 의 역의 위치와 역에 속한 마필은 다음과 같다.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제원역( 濟 原 驛 ) : 상등마( 上 等 馬 ) 2마리, 중등마( 中 等 馬 ) 3마리, 하등마( 下 等 馬 ) 5마리. - 소천역( 所 川 驛 ) : 무주에 있는데, 동쪽으로 70리이다. 상등마 1마리, 중등마 9마리. - 달계역( 達 溪 驛 ) : 용담( 龍 潭 )에 있으며, 남쪽으로 50리이다. 상등마 1마리, 하등마 7마리. - 단령역( 丹 嶺 驛 ) : 진안( 鎭 安 )에 있으며, 남쪽으로 1백 리이다. 중등마 2마리, 하등마 3마리. - 옥포역( 玉 包 驛 ) : 고산( 高 山 )에 있으며, 서쪽으로 90리이다. 중등마 4마리. 제원역에는 부임했던 관리들 중 미수( 眉 叟 ) 허목( 許 穆, )의 일화가 전 해지고 있다. 효종대에 허목이 제원역의 찰방으로 부임하였는데, 당시 제원역에 화 재가 잦아서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 원인이 제원역의 말에 귀신이 붙어 그 런 것이라 하며 믿었는데, 허목이 바위산을 깎고 바람을 모시는 뜻으로 어풍대( 御 風 臺 )라고 글자를 새기자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어풍대 바위 글자가 남 아있다. 한편, 우암 송시열은 현종 7년(1666)에 제원역의 비선각과 망운정에 2개의 기문 을 남기기도 하였다. 제원역비선각기( 濟 原 驛 飛 仙 閣 記 ) 飛 仙 閣 在 濟 原 郵 館 之 後 絶 頂 之 上 望 之 縹 緲 夐 絶 其 名 眞 不 爽 於 實 也 又 馬 丞 之 來 居 者 無 朱 墨 鞅 掌 之 煩 詞 訟 喧 聒 之 擾 故 點 閱 毛 足 之 外 兀 然 若 雲 水 間 閒 人 又 時 乘 先 影 之 逸
8 蹄 滅 沒 乎 蒼 松 白 沙 之 逕 則 有 似 跨 鶴 之 侶 轇 轕 乎 琪 樹 紫 煙 之 境 也 其 於 是 閣 也 無 不 宜 者 爾 之 閣 也 創 於 萬 曆 丙 辰 蓋 察 訪 權 恰 之 所 構 也 今 趙 君 爾 炳 到 任 之 初 亟 新 其 壞 破 而 俾 余 書 其 事 余 惟 趙 君 以 儒 學 世 其 家 宜 其 塞 淵 其 心 勤 事 撫 民 而 亦 胡 爲 淸 眞 之 是 尙 耶 無 乃 有 丞 負 之 歎 而 自 托 於 此 以 自 遣 耶 旣 而 思 之 官 無 卑 未 嘗 無 米 鹽 凌 亂 之 事 也 亦 或 有 升 沈 得 失 之 汩 其 心 者 也 苟 於 此 埋 沒 惱 懊 則 其 職 事 瘝 曠 亦 不 暇 恤 況 於 淸 眞 之 趣 豈 不 如 窮 髮 之 視 珍 髢 哉 況 晦 庵 夫 子 身 任 孔 孟 之 統 而 亦 自 稱 空 同 道 士 又 自 謂 雲 臺 眞 逸 則 其 所 以 托 意 寓 言 者 有 非 人 之 所 能 知 者 耶 抑 眞 欲 長 年 度 世 如 屈 子 之 欲 見 時 人 出 場 耶 然 則 修 是 閣 而 居 之 者 非 惟 無 損 於 職 事 亦 不 妨 於 學 儒 之 道 也 噫 趙 君 其 獨 觀 昭 曠 之 原 乎 然 毛 山 之 驛 有 仙 女 吹 簫 之 異 則 晦 翁 又 徵 郵 童 之 言 而 辨 其 誕 若 好 事 者 藉 閣 名 之 好 詑 山 水 之 勝 其 以 爲 子 晉, 洞 賓 時 或 飛 過 於 此 則 亦 必 有 郵 卒 之 輩 證 其 無 有 矣 此 則 吾 必 曰 趙 君 儒 學 之 化 也 제원역망운정기( 濟 原 驛 望 雲 亭 記 ) 趙 侯 爾 炳 爲 督 郵 之 明 年 構 一 亭 於 飛 仙 閣 之 左 名 以 望 雲 而 請 余 記 之 余 問 其 名 之 之 義 侯 悵 然 而 言 曰 吾 早 失 先 人 惟 慈 母 是 依 未 嘗 相 離 也 今 猥 忝 科 第 爲 官 於 此 定 省 之 曠 已 有 月 矣 不 堪 孺 慕 之 私 聊 取 古 人 之 事 而 寓 此 名 於 亭 以 爲 朝 夕 登 望 之 地 爾 余 泫 然 而 泣 曰 有 是 哉 子 之 意 也 如 余 永 感 者 雖 欲 爲 子 之 所 爲 其 可 得 乎 旣 而 曰 子 之 意 則 然 矣 後 人 之 登 斯 者 豈 皆 不 如 余 而 如 子 哉 如 子 則 誰 不 如 子 心 而 如 余 則 其 於 此 不 亦 虛 乎 旣 以 此 語 侯 又 從 而 思 之 吾 之 言 其 亦 有 蓬 之 心 也 夫 昔 朱 夫 子 記 瓊 州 之 知 樂 亭 曰 北 望 觀 闕 於 雲 天 縹 緲 之 間 以 爲 瞻 佇 祝 延 之 地 夫 君 親 雖 有 二 致 忠 孝 本 是 一 理 後 之 人 雖 銜 恤 如 余 者 其 孰 無 愛 君 之 心 而 如 朱 子 之 言 乎 雖 如 侯 者 當 其 登 望 之 時 想 像 之 懷 豈 偏 在 於 慈 顏 哉 況 古 人 有 憶 弟 懷 友 者 皆 托 於 雲 則 登 是 亭 者 蓋 將 無 所 不 宜 矣 噫 人 心 喜 遷 隨 感 異 情 況 爲 官 者 前 有 朱 墨 之 煩 上 有 官 長 之 責 而 其 或 有 橫 目 自 營 者 則 又 有 焦 火 凝 氷 之 惱 其 中 矣 又 安 能 臨 淸 曠 之 地 寄 情 於 君 親 兄 弟 朋 友 之 間 哉 余 爲 是 之 歎 因 侯 之 請 而 推 廣 其 說 如 此 云 제1장 전통사회 사회구조와 지방재정 1) 성씨의 변화 (1) 금산군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금산지역에는 보다 더 많은 성씨들이 등장한다. 조선 후
9 기 읍지류에서는 토성과 속성의 구분이 없어지게 되었으며 몇몇 새로운 성씨들도 기록된다. 1793년에 편찬된 금산군읍지 에서는 새로운 성씨로 전( 全 ) 길( 吉 ) 성( 成 ) 조( 趙 ) 서문( 西 門 ) 임( 林 )씨가 새롭게 등장한다. 금산군읍지 성씨조 : 김( 金 ) 한( 韓 ) 이( 李 ) 손( 孫 ) 양( 梁 ) 백( 白 ) 정( 程 ) 임 ( 任 ) 황( 黃 ) 장( 張 ) 배( 裵 ) 하( 河 ) 석( 石 ) 안( 安 ) 정( 鄭 ) 박( 朴 ) 최( 崔 ) 정( 丁 ) 전( 全 ) 길( 吉 ) 성( 成 ) 조( 趙 ) 서문( 西 門 ) 임( 林 ) 그러나 이렇게 몇몇 성씨가 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700년대까지 금산지역의 토착성씨들은 향촌 사회 내에서 굳건하게 자리매김하였으며, 이들 토성세력들은 고려 말까지 지방의 토호적 성격을 가지면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호장층 으로 조선 건국 후 중앙정부의 집요한 노력에 의하여 대부분 행정실무 층으로 자리 를 굳히게 된다. 세종대까지도 이들은 세도를 유지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성리학적 소양을 가진 이거사족들과 혼인관계를 맺거나 혹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사족가문 으로 변신, 향촌사회에서의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 한편, 전통적으로 금산향교에 출입해 온 성씨로는 김해김씨( 金 海 金 氏 ), 밀양박 씨( 密 陽 朴 氏 ), 해평길씨( 海 平 吉 氏 ), 영산신씨( 靈 山 辛 氏 ), 반남박씨( 潘 南 朴 氏 ), 남원 양씨( 南 原 梁 氏 ), 천안전씨( 天 安 全 氏 ), 전주이씨( 全 州 李 氏 ), 청주한씨( 淸 州 韓 氏 ), 상 산김씨( 商 山 金 氏 ), 관성육씨( 管 城 陸 氏 ), 경주김씨( 慶 州 金 氏 ) 등이 있다. (2) 진산군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조선 후기 지리지인 여지도서 진산군조에서는 또 새로운 성씨가 등장하는데 역 시 이 때는 토성과 속성을 구분하여 기록하지 않았으며, 정( 鄭 ) 오( 吳 ) 양( 楊 ) 안( 安 ) 최( 崔 )씨가 새롭게 등장한 성씨이다. 554 [표 15] 진산군 성씨기록의 변화 지역 구분 세종실록지리지 1454년(단종 2) 하( 河 ) 진( 陳 ) 장( 蔣 ) 본군( 本 郡 ) 토성( 土 姓 ) 변( 邊 ) 문[ 文, 문( 門 )] 속성( 續 姓 ) 박( 朴 ) 김( 金 ) 손( 孫 ) 고( 高 ) 제[ 提, 강산( 犺 山 ) 제( 堤 )] 김( 金 )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중종 25) 하( 河 ) 진( 陳 ) 장( 蔣 ) 변( 邊 ) 문[ 文, 문( 門 )] 손( 孫 ) 고( 高 ) 제[ 提, 제( 堤 )] 속성( 續 姓 ) 지( 池 ) 김( 金 ) 지( 池 ) 금암( 金 岩 ) 정( 鄭 ) 김( 金 ) 명( 明 ) 김[ 金, 전( 全 )] 명( 明 ) 정( 鄭 ) 횡정( 橫 程 ) 고( 高 ) 박( 朴 ) 김( 金 ) 이( 李 ) 여지도서 호남읍지 (1765년 사이) (1871년, 1895년) 정( 鄭 ) 전( 全 ) 오( 吳 ) 양( 楊 ) 진( 陳 ) 하( 河 ) 안( 安 ) 최( 崔 ) 이( 李 ) 박( 朴 ) 정( 鄭 ) 전( 全 ) 오( 吳 ) 양( 楊 ) 진( 陳 ) 하( 河 ) 안( 安 ) 최( 崔 ) 이( 李 ) 박( 朴 )
10 여지도서 인물조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 기록되어 있던 김천석( 金 天 錫 ) 이외에도 다른 인물들들 추가 보안되고 있다. 토성인 진( 陳 )씨로 보이는 진순도( 陳 舜 道 ), 속성( 續 姓 )인 박( 朴 )로 보이는 박태원 ( 朴 泰 元 ), 그리고 성씨의 기록에 보이진 않으나 인물조에 추가되어 있는 전추( 田 秋 ) 가 있으며, 서소사( 徐 召 史 ), 이소사( 李 召 史 ), 배소사( 裴 召 史 ) 등의 열부나 효부들이 다. 특히 배소사( 裴 召 史 )는 숙종실록 1710년(10월 20일) 기사에 전라도( 全 羅 道 ) 진산군( 珍 山 郡 )의 사인( 士 人 ) 이국량( 李 國 亮 )이 호랑이에게 물렸는데, 그 처 배씨 ( 裵 氏 )가 낫을 들고 쫓아가서 치니, 호랑이가 마침내 이국량을 버리고 배씨를 잡아 먹었다. 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의 남편 이국량( 李 國 亮 )이 진산인으로 속성 중 하 나인 이( 李 )씨 임을 추측하여 볼 수 있다. 이후의 읍지인 호남읍지(1871), 호남읍지(1895) 등 다른 기록들은 여지도 서 의 기록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보여 지고 있어, 이후의 성씨 변화를 추측하기 에 어려움이 많다. 2) 조세와 진휼 조선의 재정조직은 국민의 조세부담에 의존하였고 가장 절대적인 비중은 농민 부담에 있었다. 따라서 국가는 조세 제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적절한 제도의 시 행을 위하여 여러차례 운영 방식을 변경하며 불합리한 세제를 시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농민이 부담하는 조세는 전세 공세 요역 및 군역 잡세 등으로 분류 되는데 각각의 과세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천을 거듭하였다. 금산지역에 부과되었던 조세는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 에서 그와 관련 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여지도서 편찬의 주요 목적 중의 하나가 바로 조세수 취를 위한 현황파악에 있었으므로 각 군현별 호구와 전결수는 물론이고 진상, 공납 을 위한 품목과 전세( 田 稅 ), 군병( 軍 兵 ) 등의 사항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1장 전통사회 555 (1) 금산군 금산군 토산조의 특징은 금산이 산지가 많았던 까닭에 산에서 생산되는 임산물 이 많다는 점이다. 또한 조선 후기 상황을 잘 반영하는 여지도서 (1759~1765)를 근거로 보면 조적의 분량과 전세까지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적( 糶 糴 )은 국가 기관에서 쌀을 비축하고 배포하여 물가를 조절하거나 백성을 진휼할 목적으로 거두는 곡식이었는데 금산군에서는
11 - 쌀( 米 ) : 4천 5백 8석( 石 ) 1두( 斗 ) 5홉( 合 ) 1작( 勺 ) 8리( 里 ) - 벼( 租 ) : 1천 2백 80석 6두 8승( 升 ) 3홉 8작 1리 - 콩( 太 ) : 76석 13두 5승 4홉 4작 4리 - 이전미 단대조( 移 轉 米 單 代 租 ) : 1천 5백석 - 겉보리[ 皮 牟 ] : 3백 42석 11두 1승 2홉 3작 2리 - 사창미( 社 倉 米 ) : 4천 4백 28석 을 거두었다. 그리고 전세( 田 稅 )는 원미( 元 米 ) 3백 77석 6두 4승 3홉 2작 원태( 元 太 ) : 4백 2석 8숭 1홉 2작 2리 삼수량미( 三 手 粮 米 ) : 2백 41석 8두 4승 2작 4리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56 를 거두었는데 한해의 농사가 풍년인가 흉년인가 여부에 따라 혹은 늘어나기도 하 고 더러 줄어들기도 했다. 2월에 거두어 들여서 3월에 함열현( 咸 悅 縣 ) 성당창( 聖 堂 倉 )에서 짐을 꾸려 충청도 안흥( 安 興 ), 원산( 元 山 ) 등의 포구를 거쳐서 서울 광흥창 ( 廣 興 倉 )에 이르는데 열닷새 걸린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부세가 있는데 균세( 均 稅 )는 면세미( 免 稅 米 ) 23석 9두 4승, 면세목( 免 稅 木 ) 1동 16필 15척( 尺 ) 9촌( 寸 ), 면세전( 免 稅 田 ) 1백 22냥 7전( 錢 ), 결전 ( 結 錢 ) 1천 5백 36냥 5전 2푼( 分 )이다. 또한 여지도서 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후기 금산군에 부과되어 있는 군병( 軍 兵 ) 은 다음과 같다. - 훈련도감( 訓 練 都 監 ) 납부 : 포보( 砲 保 ) 2백 17명이다. - 어영청( 御 營 廳 ) 납부 : 보인( 保 人 ) 1백 6명, 별파진( 別 破 陳 ) 25명, 제번( 除 番 ) 자보( 資 保 ) 33명, 정군자보( 正 軍 資 保 ) 38명이다. - 병조( 兵 曹 ) : 기병( 騎 兵 ) 9백 44명, 보병( 步 兵 ) 7백 49명, 금구( 金 溝 )에서 옮겨온 기병 4명, 여산( 礪 山 )에서 옮겨온 기병 16명, 잡번( 雜 番 ) 58명, 충순위( 忠 順 衛 ) 50명이다. - 군기시( 軍 器 寺 ) : 별파진 20명이다. - 선공감( 鐥 工 監 ) 납부 : 보인 43명이다. - 공조( 工 曹 ) 납부 : 보인 99명이다. - 금위영( 禁 衛 營 ) 납부 : 보인 1백 35명, 제번 자보 99명, 정군자보 39명이다. - 장악원( 掌 樂 院 ) 납부 : 호수( 戶 首 ) 자보 43명이다. - 교서관( 校 書 館 ) 납부 : 창준보( 唱 準 保 ) 20명이다.
12 - 충훈부( 忠 勳 府 ) 납부 : 충익위( 忠 翊 衛 ) 75명이다. - 균역청( 均 役 廳 ) 납부 : 선무군관( 選 武 軍 官 ) 1백 28명이다. - 순영( 巡 營 ) 납부 : 재포( 灾 布 ) 44명, 재가포( 在 家 布 ) 95명, 배지보( 陪 持 保 ) 44명이다. - 순영 중군( 中 軍 ) 납부 : 군물군( 軍 物 軍 ) 6명, 초관( 哨 官 ) 2명이다. - 순영 중영( 中 營 ) 납부 : 군물군 14명이다. - 병영( 兵 營 ) 납부 : 신선( 新 選 ) 93명, 남한산성 고승( 南 漢 山 城 雇 僧 ) 2명, 위봉산성 정초 초관( 威 鳳 山 城 精 哨 哨 官 ) 1명, 성당창 조군보( 聖 堂 倉 漕 軍 保 ) 13명, 군산진 조군보( 羣 山 鎭 漕 軍 保 ) 33명, 적상산성 별파진( 赤 裳 山 城 別 破 陣 ) 43명이다. - 감영( 監 營 ) : 아병파총( 牙 兵 把 摠 ) 1명, 초관 1명, 기패관( 旗 牌 官 ) 1명, 보군( 步 軍 ) 1백 5명이다. - 후영진( 後 營 鎭 ) : 속오천총( 束 伍 千 摠 ) 1명, 파총( 把 摠 ) 1명, 초관 5명, 기패관 5명, 화 포교사( 火 砲 敎 師 ) 7명, 별대( 別 隊 ) 65명, 보군 7백 55명이다. 이 시기 금산군의 인구와 비례해 군병의 비율 높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금산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진산군 부세와 관련된 자료로는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 에 자세하게 나타 난다. 이중 진공조( 進 貢 條 )에서 진상품 목록을 확인 할 수 있다. - 토산조 -창출( 蒼 朮 ) 도라지 더덕 당귀( 當 歸 ) - 진공조 -생치( 生 雉 )[날 꿩고기] 건치( 乾 雉 )[말린 꿩고기] 건시( 乾 柿 )[곶감] 생장 ( 生 獐 )[날 노루고기] 대맥( 大 麥 )[보리] 소맥( 小 麥 )[밀] 신도미( 新 稻 米 )[햅쌀] 선 자( 扇 子 )[부채] 거핵( 去 核 )[솜] 백포( 白 布 )[줄바] 초석( 草 席 )[짚자리] 상자( 箱 子 ) 진휼을 목적으로 하는 조적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전통사회 원회부( 元 會 付 ) : 쌀( 米 ) 8석( 石 ) 9두( 斗 ) 3승( 升 ) 4홉( 合 ) 3작( 勺 ) 5리( 里 ), 콩( 太 ) 14석 9두 5승 6홉 7작 7리, 겉보리( 皮 牟 ) 3석 9두 3승 4작 8리이다. - 상진( 常 賑 ) : 쌀 20석 8두 9승 1홉 1작 9리, 콩 15석 5두 7승 9작 6리, 벼( 租 ) 4석 7두 7홉 8작이다. - 사비( 私 備 ) : 쌀 8두 3승 6홉 6작 4리 3분( 分 ), 콩 3두 6승 5홉 3작 5분, 벼 20석 7승 8홉 6작 8리 9분, 겉보리 32석 6두 7승 4홉 6작 3부이다. - 별검( 別 檢 ) : 쌀 1석 3승 7홉 9작 1리, 벼 7두 9승 9홉 5작 6리 8분이다. - 휴번( 休 番 ) : 쌀 14두 7승 7작 5리 5분, 콩 3석 7두 9승 7홉 8작 2리, 벼 4석 10두 9승 3작
13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58 6리 2분이다. - 군작미( 軍 作 米 ) : 14두 5승 3홉 7작 1리 8분, 승번미( 僧 番 米 ) 80석 10두, 병신년 별치미( 丙 申 別 置 米 ) 2석 8두 2홉 5작 6리이다. - 화성진( 華 城 賑 ) : 쌀 1석 8두 3승 6홉 8작 9리 2분, 겉보리 12석 9두 8작 3리 8분이다. - 영호( 嶺 湖 ) : 콩 3석 13두 9승 1홉 7작 2리 2분, 벼 12두 4승 8홉 6리 4분, 제도조 ( 濟 島 租 ) 3석 1두 9승 9홉 9작 5리, 군이작미( 軍 移 作 米 ) 2석 3두 2승 2 홉 4작 1리 8분, 임술년 이획미( 壬 戌 移 劃 米 ) 47석 9두 4승 1홉 7작 8리 8분, 갑오년 별치미( 甲 午 別 置 米 ) 15석 12두 5승 3홉 9작 5리, 계축년 회록조( 癸 丑 會 錄 租 ) 17석 2두 9승 7홉 1작 4리 8분, 기유년 이속미( 己 酉 移 屬 米 )4석 5수 9승 6홉 4리, 나포조( 羅 鋪 租 ) 3석 7두 7승 7홉 4리 2 분이다. - 영진( 營 賑 ) : 쌀 6백 19석 4두 9승 1홉 3리 3분, 콩 11두 7승 9작 9리 4분, 겉보리 42석 7두 4승 5홉 2작 9리 8분, 벼 9석 12두 3승 2홉 6리 2분 - 순검( 巡 檢 ) : 쌀 7석 6두 2승 4홉 2작 8리 9분, 콩 9두 2승 5작 3분, 벼 2석 7두 8승 2홉 1작 2리 1분, 겉보리 24석 10두 5승 9홉 2작 1리 4분이다. - 균고( 均 庫 ) : 쌀 2석 1두 5승 2홉 7작 1리, 벼 7석 9두 4승 2홉 5작 4리 3분, 겉보리 26석 8두 9홉 9작 4리 2분이다. - 영고( 營 庫 ) : 쌀 2석 9승 7홉 4작 1리 3분이다. - 보군( 補 軍 ) : 쌀 1석 3두 9승 1작 5리 3분, 콩 5석 7두 2승 6홉 7작 7리 6분, 병수 겉 보리[ 兵 需 皮 牟 ] 1백 72석 11두 6승 2홉 3리 4분, 무진년 별치 겉보리( 戊 辰 別 置 皮 牟 ) 24석 4두 6승 5홉, 신유년 이전미( 辛 酉 移 轉 米 ) 2백 20석, 병인년 별비미( 丙 寅 別 備 米 ) 1백 석, 사환미( 社 還 米 ) 1천 석이다. 이외에도 전세( 田 稅 )는 원미( 元 米 ) 84석 7두 4승 6홉, 원태( 元 太 ) : 1백 48석 14두 5 승 1홉, 삼수미( 三 手 米 ) : 62석 6두 6승 6홉에 달하였다. 또한 균세( 均 稅 )는 균역청( 均 役 廳 ) 납부 선무포( 選 武 布 ) : 45필, 결전( 結 錢 ) : 1천 5백 36냥 5전 2푼( 分 )으로 기록 되 어 있다. 또한 여지도서에 수록되어 있는 진산군에 부과되는 군병은 다음과 같다. - 훈련도감( 訓 練 都 監 ) : 포수보( 砲 手 保 ) 52명, 군향보( 軍 餉 保 ) 4명이다. - 어영청( 御 營 廳 ) : 정군( 正 軍 ) 10명, 정군보( 正 軍 保 ) 11명, 관납포군( 官 納 布 軍 ) 20명이다. - 금어영( 禁 御 營 ) : 정군 27명, 정군보 29명, 관납포군 92명이다. - 병조( 兵 曹 ) : 기병( 騎 兵 ) 2백 99명, 보병( 步 兵 ) 69명, 금군보( 禁 軍 保 ) 36명, 호련대보 ( 扈 輦 隊 保 ) 3명, 경역보( 京 驛 保 ) 5명이다. - 장악원( 掌 樂 院 ) : 악공보( 樂 工 保 ) 8명이다. - 호조( 戶 曹 ) : 조군( 漕 軍 ) 40명이다.
14 - 군기시( 軍 器 寺 ) : 별파진 44명이다. - 감영( 監 營 ) : 아병 기패관( 牙 兵 旗 牌 官 ) 1명, 제번군관( 除 番 軍 官 ) 4명, 약재진상 배지 보( 藥 材 進 上 陪 持 保 ) 30명, 아병군뢰( 軍 牢 ) 2명, 기수( 旗 手 ) 1명, 보군( 步 軍 ) 23명, 수군 여군( 水 軍 餘 軍 ) 4명이다. - 위봉산성( 威 鳳 山 城 ) : 기패관 1명, 산성정초군( 山 城 精 抄 軍 ) 11명이다. - 병영( 兵 營 ) : 신선( 新 選 ) 25명이다. - 금성진( 金 城 鎭 ) : 사부( 射 夫 ) 1명이다. - 여산진( 礪 山 鎭 ) : 속오초관( 束 伍 哨 官 ) 2명, 기패관 2명, 화포교사( 火 砲 敎 師 ) 3명, 별 대보( 別 隊 保 ) 8명, 별대( 別 隊 ) 4명, 보군 수솔( 隨 率 ) 총 1백 86명 이다. 3. 왜란 호란과 금산전투 임진왜란( 壬 辰 倭 亂 )은 선조 25년(1592)부터 선조 31년(1598)까지 2차에 걸친 왜 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임진년에 발발되어서 보통 임진왜란 이라고 하 고 1597년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만을 따로 언급할 때는 정유재란( 丁 酉 再 亂 ) 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이라 하면 정유재란까지 포함한 7년간에 걸친 전쟁을 말한다. 왜군의 본격적인 침략은 선조 25년(1592) 임진년 4월 14일에 부산포에 상륙한 뒤 부산진과 동래성을 공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뒤를 이어 한양 개성 평양이 전 란 발발 2개월 만에 모두 함락되게 되었다. 육상에서 관군이 왜의 속공으로 연패를 당하고 있을 때, 해상에서는 이순신( 李 舜 臣 )과 그의 함대가 남해를 제압하여 왜적 의 공격과 그 보급로를 차단하는 방벽이 되었다. 당시 왜군은 부산에서 남서해안을 돌아 바다와 육지에서 호응해가며 북진을 기도하였는데, 이순신 휘하의 조선함대 는 적의 수군을 격파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그들의 병력 이동과 보급수송을 차 단시켜 일본군의 수륙양면 작전 뿐만 아니라 육군의 활동에도 커다란 차질과 타격 을 주었다. 왜군은 수륙양면 작전에 차질을 받자 전라도로 진격하기로 계획하였다. 전라도 지방은 호남평야와 만경평야 등이 넓게 펼쳐진 곡창지대로 왜군이 반드시 점령해 야 하는 땅이었다. 전라도가 왜군에게서 점령당하지 못 했던 이유는 전라도로 들어 가기 위해서는 험준한 산맥들을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해상에서는 이순신 장 군이 남해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상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제1장 전통사회 559
15 금산의 지세는 영남에서 추풍령을 넘어 전주( 全 州 )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거쳐 야 하는 요충지에 해당된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9개 군진을 나누어 전국 토를 유린하면서 한양과 의주로 진격하였는데, 그 중 제6진은 1만 7천여 군으로 6 월 영남을 거쳐 금산으로 침입하였다. 전라도로 침입하려는 왜군은 고바야카와 다 카카게[ 小 早 川 隆 景 ]의 군대였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별동대인 안코쿠지 에케 이[ 安 國 寺 惠 瓊 ]의 부대는 전라도를 맡게 되어 남원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고자 하였 으나 곽재우( 郭 再 祐 )의 군에게 저지되었다. 이들은 서울의 본진과 합세하여 전라도 로 침입하기 위하여 금산으로 진격하였다. 이들 왜군은 금산을 점령한 뒤, 호남의 웅부이자 조선왕실의 본관지인 전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당시 왜군들은 금산을 침공하기 위해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양산 순양 부리를 지나 무주로 향하는 길과 충북 영동에서 월영산을 끼고 흐르는 천내강을 따라 갯터(제원)으로 진격하는 길이 있었다. 무주로 향하는 길은 멀고 좁아 많은 군사들이 이동하기 곤란하였다. 따라 서 왜군은 보다 편한 길로 제원까지 진격한 것으로 보인다. 왜군이 전란 초기 금산에 진격하는 과정에서 갯터(제원) 전투가 발생했으며, 전 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금산에서 전주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웅 치 전투와 이치 전투가 치러졌고, 금산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고경명의 의병이 공격 했던 1차 금산전투, 조헌과 영규대사가 이끌었던 의병이 공격했던 2차 금산전투 등 이 있었다.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60 1) 웅치전투와 이치대첩 금산을 점령한 왜군이 전주로 향하는 길은 진산을 거쳐 대둔산 옆으로 지나 이치 ( 梨 峙 )를 넘는 길과 남일 진안을 거쳐 웅치( 雄 峙 )로 넘는 길이 있었다. 이러한 지 리적 여건을 미리 파악한 권율( 權 慄 )과 황진( 黃 進 )이 이치에 진을 치고 왜군을 기다 리고 있었으며, 나주판관 이복남( 李 福 男 ), 해남현감 변응정( 邊 應 井 ), 김제군수 정 담( 鄭 湛 )이 웅치에 진을 치고 있었다. 웅치전투는 1592년 7월 7일부터 9일까지 진안과 전주 사이에 있는 웅치에서 발 발하였다. 안코쿠지 에케이의 병력이 전주로 진격하려는 것을 미리 파악한 전라도 관찰사 이광( 李 洸 )은 나주판관 이복남, 해남현감 변응정, 김제군수 정담에게 웅치 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에 전주의 황박이 의병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복남이 제1선, 의병장 황박이 제2선, 정담은 가장 높은 지역에서 제3선의 진지를 구축하여 적의 진격에 대비했다. 7일 왜군의 선봉부대가 공격을 개시하자 황박과 이복남은 많은 적을 죽였다. 이튿날 왜군이 전 병력을 동원해 전면공격을 감행하여, 제1 2
16 선이 무너지고 황박과 이복남도 전사했다. 제3선을 지키던 정담도 화살이 다하도 록 최후까지 싸운 다음 백병전을 전개하다가 전사했다. 또한 이 전투에 참가한 해 남현감 변응정은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왜군은 이 전투에서 죽은 조선군의 시체 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어 그 위에 조조선국충간의담( 弔 朝 鮮 國 忠 肝 義 膽 ) 이라는 표목을 세워놓고, 웅치를 넘어 전주성으로 향했다. 한편 안코쿠지 에케이가 웅치를 공격하는 동시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일부 병력을 금산에 남겨두고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이치를 경유하여 전주로 향하고 있 었다. 이에 전라도절제사 권율은 이치에서 진을 치고 전주방면을 지키려고 했다. 7 월 8일 아침에 왜군이 공격을 시작하자, 조선군은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의 지휘 하 에 맞서 싸웠다. 전투 도중 황진은 활로 많은 적들을 죽이다가 일본군의 조총을 맞 아 총상을 당하기도 했다. 종일 쉴 새 없이 공방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일본군은 많 은 사상자를 내고 달아나버렸다. 이 전투는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금산과 웅치에서의 패배와 달리 조선군의 승리 로 끝났으며, 일본군은 이 전투를 조선 3대전의 하나로 꼽았다. 당시 도승지였던 이항복( 李 恒 福 )은 적이 다시 호남을 엿보지 못하게 하고 여기를 근본으로 삼아서 나라가 여러 해 동안 지탱하게 되었으며, 동서로 나르고 끌고 하여 군수품이 한번 도 부족 됨이 없게 하였으니 그 공이 크다. 고 칭찬하기도 했다. 이 전투는 일본군 의 전주 침입을 막기 위한 웅치전투 및 금산전투와 거의 동시에 벌어졌는데, 웅치 와 금산전투에서 아군이 비록 패하였지만, 이 전투에서는 끝내 왜군을 격파함으로 써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 전투로 말미암아 전 라도가 보존되어 후방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이치전투는 호남 및 전주로 쳐들어오는 적을 물리쳐 안전을 도모하게 하였다. 2) 금산전투의 전개 제1장 전통사회 561 (1) 1차 금산전투 1차 금산전투는 1592년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틀간에 걸쳐 전라좌도 의병장 고 경명( 高 敬 命 )을 중심으로 약 6천명의 의병들이 금산에 머무르고 있던 일본군 소조 천융경과 치렀던 격전으로 전라도 의병활동에 있어 매우 큰 의미를 차지한다. 전주 에서 의병을 모으던 고경명은 북상을 서둘러 은진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황간에 있 던 적이 금산을 넘어 전주로 진군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에 연산을 거쳐 진산에 이르렀을 때 금산군수 권종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날 고경명
17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62 은 유팽로( 柳 彭 老 )에게 지시하여 호서의병장 조헌( 趙 憲 )에게 전격함으로써 금산의 적을 함께 토벌하고자 약속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산에서 전군을 재편성하되 일진을 그곳에 두고 본진으로 삼아 군 량 공급의 임무를 부여한 다음 유팽로를 선봉장으로, 안영( 安 瑛 )을 후군장으로 각 각 임명하였다. 7월 8일 금산성을 향해 진격하였고 9일에 전라방어사 곽영( 郭 嶸 )의 관군과 합세할 것을 약속한 후 성 밖 4km 지점의 누운벌에 군대를 배치하였다. 고 경명은 정예 수백을 선발하여 적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에 재 인 30여 명을 시켜 성 밑에 잠입하여 성 밖의 관사와 성내의 창고에 불을 붙였다. 따 라서 서전을 유리하게 이끈 의병 측에서는 이제 여유를 갖고 회군하였다가 다시 기 회를 보는 것이 타당하다하여 현지에서 철군하자는 견해가 나왔으나 고경명의 반 대로 그렇게 되지는 못하였다. 다음날 10일 아침에 의병과 방어사군은 다시 적진을 공격하였는데, 관군은 북문을, 의병은 서문을 향해 공격하였다. 이 때 왜군은 관군 의 취약함을 알고 집중공격을 하자 무너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서 의병도 무너지게 되었다. 진이 무너지면서 고경명이 위급에 처하게 되었고 그의 종사관 안영과 유팽 로 등이 그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고경명의 아들 인후( 因 厚 )까지 함께 전사하였다. 이렇게 1차 금산전투는 수많은 의병장들이 전사하면서 아군의 패배로 끝났다. 1차 금산전투는 이치전투에서 피해를 입은 왜군이 다시 금산으로 퇴군, 크게 위 축된 상황에서 전개된 공격전이었다는 점에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당시 국력회복 의 근본이 되어 있었던 전라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적을 섬멸하지는 못하 였지만 왕성한 적세를 꺾어 호남만은 보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근왕을 목표 로 북상하던 의병이 눈앞에 적을 둔 상황에서 우선 호남 침공을 저지한 다음 다시 북상하려 하였으니, 그들이 직접적인 근왕의 목표를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국가의 중흥기지를 수어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근왕활동의 목표를 달성한 것이었다. (2) 2차 금산전투 2차 금산전투는 1592년 8월 17일부터 18일까지 이틀간에 걸쳐 금산성에 주둔하 고 있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안코쿠지 에케이의 왜군 1만여 명을 조헌과 영규대 사( 靈 圭 大 師 )의 승병 1,300여 명이 공격하여 패전했던 전투였다. 1차 금산전투를 비롯하여 관군이 곳곳에서 왜군에게 패하게 되자 전국에서 의 병이 일어났는데, 호서지방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 조헌이다. 조헌은 1592년 5월 3일 옥천에서 1차 봉기하였으며, 7월 4일 공주에서 의병 1,000여 명을 모집한 뒤 공주의 의승장 영규와 함께 8월 1일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청주전 이후 조헌은 근왕을 결의하고 북행길에 올라 온양에 도착했을 때 충청도
18 순찰사 윤국형( 尹 國 馨 )이 전라도 금산에 왜적이 창궐하여 인명의 피해와 재산의 약탈이 심할 뿐만이 아니라 곡창인 호남지방으로 향할것 같으니 먼저 후방을 교란 시키는 왜적을 토벌하라 고 하자 후원병을 보내줄 것을 부탁하고 승장 영규와 의병 700명을 거느리고 금산성의 고바야가와군을 무찌르기 위해 공주로 돌아왔다. 공주에 돌아와 보니 의병들이 흩어져 700여 명 밖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금산성 을 향해 진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앞서 권율이 이끄는 관군과 함께 8월 18일에 금산 을 공격하기로 했으나 조헌은 날짜를 바꾸자는 편지를 미처 받지 못하였다. 18일 단 독으로 성을 향해 진격하자 왜군은 성에서 나와 선제공격을 가해왔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전날 밤 의병의 배후에 투입되었던 왜군도 의병의 배후를 공격해 왔다. 이 렇게 하여 적에 의해 포위 상태에 빠진 조헌 군은 화력과 군세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네 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하였으나 결국 조헌과 승장 영규를 따르 던 호서 의병 700명은 연곤평 벌판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으며, 이로써 금산 성의 제2차 공격도 또 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592년 8월 27일에 2차 금산전투의 후속전의 성격을 띤 3차 금산전투가 발발하 였다. 웅치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던 해남현감 변응정은 조헌이 전사하였다는 소식 을 듣고 27일 금산으로 진격하였으나 패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한편 이 싸움에서 왜군도 죽 은 자가 많아 3일간 그 시체를 불태우고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왜병과 함께 퇴각해 버렸 다. 이 금산성의 전투로 호남 호서 지방이 안전하게 되었으 며 나라를 회복하는 하나의 계 기가 마련되었다. 이 해 9월 왜 군이 물러간 뒤 조헌의 문인 박 정량( 朴 廷 亮 )과 전승업( 全 承 業 ) <사진 9> 칠백의총 등이 아군 700명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 한곳에 합장을 하였는데 후세에 이를 칠백의총( 七 百 義 塚 ) 이라 불렀다. 칠백의총은 한말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헐리게 되었고, 또한 이곳에 속한 땅과 재산이 강제로 처분되어 폐허가 되었다. 이후 광복이 되자 이곳 주민들은 의총을 보수하고 순의비( 殉 義 碑 )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1963년 이곳을 사적 105호로 지정하고 단장했다. 현재 금산읍에서 추부면을 지나 대전으로 가는 왼쪽길 에 보이는 칠백의총은 2만평의 잘 정비된 터 위에 순의비, 사당, 기념관 등이 갖추 어져 있다. 제1장 전통사회 563
19 4. 성씨의 변화와 사족활동 1) 사족의 입향과 정착 조선 중기에는 또다시 일군의 사림계 거목들이 속속 이곳에 유서를 마련하였다. 예를 들면 호란 후인 1637년 미촌 윤선거와 시남 유계가 남일면 마가산 밑에 은거 하여 산천재에서 강학하고, 초려 이유태가 영변유배에서 풀린 뒤, 형인 이유택이 거처하던 금성면 하류리 문회당에 머물렀다. 그런가하면 소론의 영수로 지목되는 명재 윤증이 사직 후 돌아와 강론한 곳도 금산 땅이었다. 이처럼 당세의 명망가들이 일시에 금산을 찾아들어 각각 자신의 학문을 강론하 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금산은 이후 충절과 학문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앞서는 곳으 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물론 이 같은 인맥과 학맥의 중첩은 상대적인 입장의 차이 에 따라 복잡한 대립과 반목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금산 땅이 그러한 조선시대의 분위기를 잘 간직하면서 보존해온 몇 안 되는 지역의 하나임에 는 틀림없다. 현재도 수많은 서원과 사우, 그리고 충효열 삼강의 행적을 찬양하는 비석들이 금산 땅 여기저기에 산재하며, 그것을 자랑삼는 사람들이 많은 곳도 금산 이다. (1) 금산군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김해김씨 [김칭( 金 稱, 1455~1532)] 본명은 종( 鐘 )으로 그의 휘는 칭( 稱 ), 호는 수은( 繡 隱 )이며 벼슬은 훈도( 訓 導 )를 증직받았다. 김칭은 부모가 생존해 있을 때는 지성으로 봉양하고, 돌아가신 후에 는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며 매 끼니를 죽으로 식사하고 상복을 벗은 적이 없었다. 또 한 부모에게 뿐 아니라 임금에게도 삼년상을 지냈는데 중종과 인조의 국상을 당해 서도 3년간 상복을 입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 또한 문 밖에 나가지 않고 애통 해 하기를 마치 부모상을 당했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에 따르면 김칭이 무덤에서 여막( 廬 幕 )살이를 하며 아침저녁으로 제물을 집적 만들고 사당에 신주를 모시여 부모가 살아계실 때처럼 정성껏 받드는 모습과 같은 효행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명종이 이 소문을 듣고 정려를 금산성 동문밖에 세우게 했 으며 그 근방의 지명을 효자평( 孝 子 坪 ) 이라고 했고 김칭에게는 훈도( 訓 導 )의 벼 슬을 내렸다. 명종실록 에 그가 정려 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묘는 금산읍 상
20 지리에 있으며 부인은 해주오씨( 海 州 吳 氏 ) 철상( 喆 相 )의 딸이다. [김학술( 金 學 述, 1863~1920)] 자는 학도( 學 度 ), 호는 천효재( 天 孝 齋 )이다. 부인은 충주지씨( 忠 州 池 氏 )와 안동 김씨( 安 東 金 氏 )이다. 중시조 안경공 김영정( 金 永 貞 )의 20세손이자, 김해김씨 금산 군 군북면 입향조인 호조참판 희운( 希 運, 1546~1625)의 10세손이다. 김희운은 임 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를 피해 이곳 금산군 군북면에 입향하였다. 김학술은 부모를 섬김에 항상 지극하였으며 부모의 몸을 편하게 해 드리고 입에 맞는 음식을 드렸다고 한다. 부모가 병환이 있을 때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소 생시켰고, 우연히 동삼을 얻어 그 부모의 수명을 연장시켰다고 전해진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시묘살이 3년 동안 호랑이가 와서 호위하였으며, 묘 앞에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김학술의 아들 김만식( 金 滿 植 )도 아버지를 본받아 부상( 父 喪 ) 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슬픈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2 반남박씨 [박린( 朴 麟, 1414~1458)] 박힐( 朴 詰 )의 증손이며 호가 의율( 擬 栗 )이고, 반남박씨의 금산 입향조이다. 남효 온, 원호와 종유하여 도의로 사귀었다. 장릉( 莊 陵 )의 명을 받아 진산군수로 있던 중 단종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직하여 영월로 가려 하자 아들인 박희권( 朴 希 權 )이 뒤를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 모친이 병환이 들어 위독해지자 단념하고 초야에서 지냈으며, 매년 10월 24일이면 후원에 단을 쌓고 곡하며 제사지냈다. 그 의 이러한 충절로 주위에서는 도연명이 벼슬을 버리고 율리( 栗 里 )로 돌아와서 숨어 살던 절개와 같다 하여, 그의 충절을 드높이고자 호를 의률( 擬 栗 ) 이라 하였다. 묘 는 부리면 내장리에 있다. [박희권( 朴 希 權, 1447~?)] 박린( 朴 麟 )의 아들로 호는 임회( 臨 淮 )이다. 일찍이 가훈을 이어받아 학문에 연원 을 두었고 아버지를 따라 진산에 있을 때, 단종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아버 지를 따라 영월로 가려 하였다. 효심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병환이 났을 때는 손을 잘라 피로 연명케 하였으며,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또한 학문에 도 뛰어나 제자들과 강론하여 고을 사람들이 그 집을 칭송하여 선생님 댁이라고 하 였다. 이러한 행적으로 동몽교관( 童 蒙 敎 官 )을 증직 받았으며, 다시 중종 8년(1513) 사 헌부감찰( 司 憲 府 監 察 )을 증직 받았다. 그는 무주 도산사( 道 山 祠 )에 배향되기도 하 제1장 전통사회 565
21 였으며, 그의 행장을 유희춘( 柳 希 春 )이, 그 사적을 이유태( 李 惟 泰 )가 기록하였다. [박천주( 朴 天 宙,?~1616)] 반남 박씨의 금산 입향조인 박린( 朴 麟, 1414~1458)의 11대 손이며 박공( 朴 恭, 1494~1568)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후하였으며 부모를 섬기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어머니인 제주고씨가 병이 위중하자 자기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먹여 소생시켰다. 이에 판결사( 判 決 事 )를 증직하고 정려를 내렸다. 3 천안전씨 천안전씨가 처음으로 입향하게 된 것은 전충노( 全 忠 老 )에 의해서다. 전충노는 담양군수를 지낸 전순생( 全 順 生 )의 첫째 아들이며, 부인은 순창설씨( 淳 昌 薛 氏 )이 다. 전충노의 묘비와 제보자에 의하면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 셋째 아들인 이 손( 利 孫 )만을 데리고 금산 산안리( 山 安 里 )로 입향했다고 한다. 묘는 금성면 대암리 에 있다. 금성면 대암리에 천안전씨 선산이 있으며 이 중 입향조의 셋째아들 전이손 ( 全 利 孫,?~1653)의 묘와 입향조의 7대손이며 통정대부를 지낸 전명달( 全 命 達, 1602~1678)의 묘가 있다. 전이손의 묘비는 1685년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66 [전재례( 全 在 禮, 1706~1729)] 천안인으로 금산에 처음 입향한 전충노( 全 忠 老,?~?)의 10대손이며, 전덕류( 全 德 流, 1659~1717)의 아들이다. 부인은 상산김씨( 商 山 金 氏 ) 이다. 어려서부터 효심 이 깊었는데, 11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퍼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으며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전재례는 제원역에 유배왔던 미호( 渼 湖 ) 김 원행( 金 元 行, 1702~1772)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타고난 총명함으로 사서삼경을 짧은 기간에 모두 마쳤다. 생활은 비록 가난했지만 집안의 화목을 위해 솔선했고, 홀로 된 어머니를 효성으로 모셨다. 그러나 병이 깊어 결국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 묘살이 하며 죽으로 연명하고 조석으로 슬피 울며 지내다 영양 부족으로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암행어사 홍택( 洪 澤 )이 보고하여 임금이 군북면 내부리에 정각을 짓게 하였다. 묘는 금성면 하신리에 있다. 4 남원양씨 남원양씨의 금산 입향조는 양제( 梁 濟, 1550~1593)의 조부인 양우( 梁 佑 )이며, 부
22 인은 반남박씨 직장 박호의의 딸이다. 양우가 어떠한 연고로 금산에 와서 거주하게 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인근 지역인 마장 1리 무내미 마을에 반남박씨가 집 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때, 처가와의 관계로 인해 금산에 거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양제( 梁 濟, 1550~1593)] 자는 제부( 濟 夫 ), 호는 송제( 松 濟 )이다. 아버지는 순릉 참봉( 順 陵 參 奉 )을 지낸 익 상( 益 祥 )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 南 陽 洪 氏 )이고, 부인은 해평길씨( 海 平 吉 氏 ) 수온 ( 守 溫 )의 딸이다. 내금위장( 內 禁 衛 將 )을 지냈으며 호조좌랑( 戶 曹 佐 郞 )을 증직 받았 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전에서 창의사 김천일( 金 千 鎰 ), 최경회( 崔 慶 會 ), 그 리고 충청도의 황진( 黃 進 )과 함께 왜적을 토벌하는 전적을 세웠다. 그러나 왜적의 최후 공격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양제는 이에 격분하여 촉석루에 서 남강에 투신자결 하였다. 이러한 행적은 충의실록에 실려 있다. 경종 1년(1721) 절도사 최진한( 崔 鎭 漢 )이, 영조 16년(1740) 절도사 남덕하( 南 德 夏 )가 3년 후 영의정 김재노( 金 在 魯 )가 경연 석상에서 양제의 포상을 주청하였다. 이때 특별히 순절한 여러 신하들을 함께 포창하면서 양제에게는 호조좌랑( 戶 曹 佐 郞 )을 증직하였고, 충 민사( 忠 愍 祠 )와 창열사( 彰 烈 祠 )에 배향하도록 하였다. 묘는 금성면 백동산 후록에 있다. [삼덕( 三 德 )] 양탕( 梁 湯 )의 아내이다. 삼덕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의 읍지류 열 행( 烈 行 )편 첫머리에 나오는데, 남편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호랑이에 물려가자 삼덕은 호랑이를 쫓아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들어 왼손으로 남편의 다리를 잡고 오 른손으로 낫을 들어 호랑이를 수없이 찍어 남편을 구했는데, 집에 돌아와 지성껏 간호했으나 죽자 애통해하며 종신토록 수절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삼덕의 열행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으며 복호( 復 戶 )되었다. 제1장 전통사회 평양조씨 [조여충( 趙 汝 忠,?~1592)] 호는 고봉( 高 峰 )으로 절충장군 조구( 趙 球 )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에 동생 돌고 와 함께 권율장군의 부하로 들어가 이치 싸움에 큰 전공을 세우고 주부( 主 簿 )의 벼 슬을 받고 행주산성의 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현재 금성면 의총리 원의총 마을 에는 조여충의 묘라 추정되는 묘가 있는데 비도 세워지지 않은 채 봉분만 남아있다.
23 6 온양이씨 금성면 하신리는 원래 온양이씨의 세거지로서 온양이씨가 이곳에 세거하기 시작 한 것은 시조 이흥서( 李 興 瑞 )의 3세손인 이만립( 李 萬 立, 1606~1684)부터이다. 온 양이씨 족보에 의하면 이만립은 노년에 산수가 좋은 곳을 찾던 중 금산 신곡(현재 금성면 하신 1리)으로 이거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후손들이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 다. 이만립의 묘소는 신곡 대장산(현 하신 1리 대장골)에 있다. 7 벽산이씨 [이희현과 이희철] 금산에 처음 입향한 이인보( 李 仁 保,?~?)의 27세손들이다. 금산 입향조인 이인 보는 고려시대에 상주에서 난리를 피해 금산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그 이후로 벽 진이씨는 금산이씨로 분적하게 되었다. 그러나 약 10여년 전 다시 벽진이씨로 환적 하였다고 한다. 현재 금성 파초리의 반초마을은 벽진이씨의 집성촌으로 39대손까 지 살고 있으며 후손이 약 28가구가 살고 있다. 금성면 두곡리에 금산이씨 입향조 인 이인보의 사당이 있다. 8 안동권씨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안동권씨가 처음 금산에 이거하게 된 것은 권혁의 현손인 권극인( 權 克 仁, 1791~1868)에 의해서이다. 권극인은 홀로 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안동권씨 568 <그림 3> 안동권씨 계보도
24 의 선산이 있는 금산 두곡리에서 살기를 원하시므로 이곳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 다고 한다. 이후 그의 후손들에 이 마을에 세거하게 되었다. 원래 안동권씨의 선산은 청풍에 있었는데 권혁이 그의 부친 상유( 尙 遊 )과 맏형 소( 熽 )의 묘소를 명당인 이곳 금산 두곡으로 이장하고, 자신의 묘소 또한 이곳에 마 련하였다고 한다. 금산의 안동권씨들은 권혁의 현손인 권극인이 묘소 아래에 거주 하기 시작하면서 둑실 일대에 세거하게 되었다. [권상유( 權 尙 游, 1656~1724)] 자는 계문( 季 文 ) 유도( 有 道 )로 아버지는 영의정에 증직된 권격( 權 格 )이며, 어머 니는 함평이씨( 咸 平 李 氏 )로 돈녕부도정( 敦 寧 府 都 正 ) 이초노( 李 楚 老 )의 딸이다. 처 음에는 맏형인 수암( 遂 菴 ) 권상하( 權 尙 夏 )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송시열( 宋 時 烈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숙종 20년(1694)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 원에 등용되었으며, 봉교( 奉 敎 )와 춘방설서( 春 坊 說 書 )를 거쳐 사간원정언으로 승 진되었다. 곧 옥당( 玉 堂 )에 참여, 수찬 교리가 되었다가 병조좌랑 사간원헌납 지제교( 知 製 敎 ) 등을 거쳐 부응교 겸 필선에 승진하였다. 권상유는 윤휴가 주자학을 호만( 浩 漫 )하다고 비판하고 박세당( 朴 世 堂 )이 사변 녹( 思 辨 錄 ) 을 지어 주자학을 배척하였으므로 왕명에 의하여 그 책이 불태워질 때 두 사람을 공박하는 내용의 변설문( 辨 說 文 )을 작성하여 금창협( 金 昌 協 )으로부터 그 학식을 높이 칭찬받았다. 또 경연( 經 筵 )에서 호족의 폐해와 군제( 軍 制 )의 개혁을 주 장하고, 또한 궁장( 宮 庄 )의 절수( 折 受 )가 성덕의 허물이 됨을 주장하였다. 1703년에는 수원부사가 되어 관리의 비행을 숙정( 肅 正 )하는 등 치적을 남겼고, 1704년 대사간이 되고, 동부승지 이조참의 예조참의 공조참의 등을 거쳐 전라 관찰사가 되었다. 1709년에는 개성유수를 거쳐 평안감사에 임명되었으나, 공의( 公 議 )에 따라 대사성으로 옮긴 뒤 도승지가 되었다. 또 대사헌 정호( 鄭 澔 )가 윤증( 尹 拯 )을 논핵한 일로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갈 때 연루되어 면직되었다가 곧 서용 ( 敍 用 )되어 이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5조참판을 역임한 뒤, 한성좌윤과 부 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국경의 확정문제로 관서접반사( 關 西 接 伴 使 )가 되었고, 해적의 진무를 위해 호남순무사가 되기도 하였다. 1715년 형조판서, 1716년 호조판서가 되었다가 예조판서 한성판윤 우참찬 등 을 지냈다. 그 뒤 이조판서가 되어 숨은 인재를 많이 등용했으나, 경종 1년(1721)신 임사화 때 탄핵을 받아 삭직되어 문외출송( 門 外 黜 送 )을 당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그 뒤 향리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성리설에 밝았으며 특히 논어 와 주역 에 관 통하였다. 시호는 정헌( 正 獻 )이다. 제1장 전통사회 569
25 [권혁( 權 爀, 1694~1759)] 자는 자장( 子 章 )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상유( 尙 游 )이며, 어머니 원주원씨는 한 성부 우윤 만춘( 萬 春 )의 딸이다. 영조 4년(1728) 이인좌( 李 麟 佐 )의 난이 일어나자, 정언으로서 서울을 버리고 피난하자는 영의정 이광좌( 李 光 佐 )의 주장을 적극 반대 하여 좌절시켰다. 또한 난이 일어났을 때 신속히 대처하지 못한 호서관찰사 권첨 ( 權 詹 )을 그의 본가가 있는 도에 충군( 充 軍 )한 것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하고 극변 ( 極 邊 )에 충군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어 부수찬 교리를 거쳐 이듬해 다시 부수찬이 되어 실각한 소론( 少 論 )을 비호 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당론에 치우친다 하여 삭직되었다. 그러나 곧 부수찬에 복직 되고 부교리 정의현감을 거쳐 수찬으로 재직하던 중, 1732년 당론을 논의하다가 해남에 정배되었다. 그러다 1734년 석방되어 헌납 용강현령 이조좌랑 필선 응교를 역임하고, 1737년 사간이 된 뒤 승지 등을 거쳐 1741년 대사간이 되었다. 강 원도관찰사,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1747년에는 이조참의 강화부유수를 역임하 였으며 1748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암행어사 김치인( 金 致 仁 )의 탄핵으로 파 직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우의정 정우량( 鄭 羽 良 )의 천거로 대사헌에 등용되었고, 1752년 부제학을 거쳐 1755년에 호조참판, 이듬해 우부빈객 함경도관찰사 지돈 녕 등을 지냈다. 1758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759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조 20년(1796) 청백리에 책록되었고, 시호는 정간( 靖 簡 )이다. 9 경주이씨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70 이서의 묘가 있는 화림리 서당말에는 경주 이씨의 재실인 영모재( 永 慕 齋 ) 가 있는데, 후손의 전언에 의하면 중수과정에서 경비의 부족으로 현판을 세우지 못했 다고 한다. 한편 금성면 하신 2리에는 1959년에 이규헌( 李 圭 憲 )이 기( 記 )한 경주이 씨세거기적비( 慶 州 李 氏 世 居 紀 績 碑 ) 가 세워져 있다. [이서( 李 曙, 1570~1616)] 자는 자양( 子 暘 )이고, 자호는 월봉( 月 峯 )이다. 이대방( 李 大 邦 )과 전주이씨( 全 州 李 氏 )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효심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병들었을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드렸고, 상을 당해서는 묘막을 짓고 정성으로 시묘살 이를 하였다. 광해군 8년(1616)에 형 이시( 李 時 )를 따라 서울 남소문동에서 금산으 로 내려왔는데, 형은 현재의 금성면 하신 2리 윗삽실 마을에 터를 잡았고, 이서는 유곡(현재 금성면 하류리)에 터를 잡아 금산의 경주이씨 터전을 만들었다. 당시 금 산군수인 이안눌( 李 安 訥, ~ 재임)의 시 금산십승( 錦 山 十 勝 ) 에 이
26 서 형제들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서와 부인 청풍김씨는 아들 다섯을 두었는 데, 장남 이유택( 李 惟 澤 )은 현감이고, 둘째 이유부( 李 惟 孚 )는 참봉, 이유태( 李 惟 泰 ) 는 호가 초려( 草 廬 )로 승지가 되었고, 이유익( 李 惟 益 )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이유 겸( 李 惟 謙 )은 현감이다. 현종조에 아들인 이유태가 귀하게 되어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추증되었고, 부인은 정부인을 증직하였다. 부인 청풍김씨는 남 이면 석동리 보석사 뒷산에 묘소가 있다. 10 경주정씨 경주정씨가 금산에 들어온 것은 정인조의 둘째 아들인 정재( 鄭 齋,?~?)에 의해서 이다. 족보에 의하면 정재가 고산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금산에 있는 아버지의 묘를 모시기 위하여 인근지역인 추정리로 들어와서 세거하였다고 한다. 정재의 추정리 로의 입향과정은 충렬사 옆 구거비( 舊 居 碑 )에 자세하다. 정인조의 후손들은 교수 공파와 고산 공파로 나뉘는데, 즉 고산현감을 지내고 금산으로 입향한 인조의 둘째 아들 정재의 후손들은 고산공파, 순천에서 살고 있는 정인조의 첫째 아들 정림( 鄭 霖 )의 후손들은 교수공파이다. 현재 추정리는 경주정씨 고산공파의 집성촌이다. 원 래 경주정씨가 추정리에 들어왔을 때는 유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고 한다. 추부면 추정리에는 려말선초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였던 정인조( 鄭 仁 祚 ) 장군을 배향한 사당인 충렬사( 忠 烈 祠 )가 있다. 묘는 추부면 자부리 남산마을에 자리잡고 있으며 후손들에게는 불천지위( 不 遷 之 位 )로 모셔지다가 1979년에 금산군의 지원으 로 사당이 건립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일에 유림 향사를 지내고 있다. [정인조( 鄭 仁 祚,?~?)] 시호는 충렬( 忠 烈 )이며, 정종철( 鄭 宗 哲 )의 아들이다. 태조 3년(1394)년에 이조판 서( 吏 曹 判 書 )가 되었고, 태종 12년(1414)에 월성군( 月 成 君 )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시호를 받았다. 생몰년은 족보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금산군읍지, 조선환여 승람 에도 행적만 소략하게 남아있으며, 후세의 기록에서도 근거가 없다. 정인조는 금산지역에 왜적이 들끓자 1402년 그가 거주하던 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금 성면 대암리 삽재성과 동정리 동정성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전투가 끝난 것으로 오 인하여 한 시내에서 물을 먹다가 잔류적의 화살을 맞고 순절하였다고 한다. 이를 근 거로 후손들은 정인조가 1402년 어간에 순절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전투경로가 순천에서 금산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정인조의 묘소와 신 도비는 추부면 자부리 남산 마을에 위치하며 부인은 밀양박씨 윤겸( 允 謙 )의 딸이다. 제1장 전통사회 571
27 11 해주오씨 해주오씨가 금산에 자리잡게 된 것은 오국헌의 5대조인 오유종( 吳 有 終, 1443~1500) 때 부터이다. 오유종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던 오고( 吳 考 )의 둘째 아들로, 호는 행정 이다. 세조 12년(1466)에 생원에 합격하였고 점필재 김종직( 金 宗 直 )의 천거로 전라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 절도사를 지냈다. 성종실록 에 의하면, 성종 16년 큰 가뭄이 들어 백성 가운데 사재를 가진 자를 모아 어려운 백성에게 나눠주도록 하였는데, 당시 진천 에 사는 상장( 上 將 ) 오유종이 거만의 곡식을 가지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오 유종 일가는 진천에 세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후손들에 의하면 평소 김종직과 친분이 있었던 오유종이 1498년 무오사화 때 연루 되어 진산으로 귀향을 오게 되었고, 진산 동쪽인 요광리에 있는 은행나무 아래 정자를 짓고 그 주위에서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요광리에는 해주 오씨 행정공파가 뿌리 내리고 살고 있다. 2002년 건립한 행정공의 재실과 신도비가 마전리에 있다. 해주 오씨는 요광2리와 3리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72 [오국헌( 吳 國 獻, 1599~1672)] 자는 중현( 中 賢 ), 호는 어은( 漁 隱 )이며,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知 中 樞 府 事 )를 지낸 오산립( 吳 山 立 )이다. 오국헌의 효행과 학행은 여지승람, 조선환여승람, 대한 충효등록 에 기록되어 있는데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 병환 중에는 지성 으로 간호하였고, 집 뒤에 단을 쌓아 혈서를 써 놓고 밤마다 하늘에 기도하였으며,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다. 부친이 잉어 회를 먹고 싶다 하니 한겨 울에 얼음이 언 연못에서 기적적으로 잉어를 얻었으며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 안 시묘살이를 하여 인근 사람들이 크게 감탄하였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송시열과 동문수학하여 송시열이 오국헌에게 어은( 漁 隱 ) 이 란 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수암 권상하는 오국헌의 기문과 묘표를 지어주었 다. 숙종 38년(1712) 문충공( 文 忠 公 ) 민진원( 閔 鎭 遠 )의 보고로 효자에게 내려주는 하사미를 받기도 하였고, 승훈랑 호조좌랑( 承 訓 郞 戶 曹 佐 郞 )에 추증되었다. 고종 25년(1888)에 가선대부 호조참판( 嘉 善 大 夫 戶 曹 參 判 )에 가증( 加 贈 )되고, 아들 달휘 ( 達 輝 ) 연휘( 延 輝 ) 수휘( 遂 輝 ) 일휘( 逸 輝 ) 건휘( 建 輝 ) 오형제와 손자 석규( 碩 奎 ) 후손 태증( 泰 增 ) 태준( 泰 俊 )과 함께 효행으로 명정 받아 1904년 해주 오씨 9효 자가 함께 모셔진 정려가 건립되었다. 정려기에 따르면 오국헌은 병자호란( 丙 子 胡 亂 ) 때 강화한 것을 통탄하다가, 금산 에서 경상도 생지량면 어은동으로 부인과 장남 오달휘와 막내 오건휘만 데리고 이 거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지냈다고 하나 건휘의 나이를 따져 보면 정확하지 않
28 고 금산을 떠난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문집이 있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묘는 경상도 생지량면 어은동에 있으며, 부인은 감찰사( 監 察 使 )를 지낸 초계하씨 ( 草 溪 下 氏 ) 하준( 下 晙 )의 딸이다. [오달휘( 吳 達 輝, 1627~1713)] 효자 오국헌의 장남으로, 자는 효여( 孝 餘 ), 호는 화락당( 和 樂 堂 )이다. 우암 송시 열의 문인이었으며 호는 민진원( 閔 鎭 遠 )이 지어주었다. 달휘가 어버이상을 당하여 네 아우와 6년간 여묘( 廬 墓 )를 살며 무덤을 돌볼 때 호랑이가 나타나 밤마다 초막을 지켜주었다 한다. 또한 모친이 병석에서 입맛을 잃고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기에 엄동설한에도 강가에 가서 얼음을 깨고 앉아 있었더니 잉어 한 마리가 불쑥 뛰어 올 라 잡아다가 공양하여 낫게 하였다고 한다. 묘는 경상도 증봉( 甑 峰 )선영( 先 塋 )에 있 으며, 부인은 안동김씨( 安 東 金 氏 ) 김석남( 金 碩 南 )의 딸이다. [오연휘( 吳 延 輝, 1631~1716)] 효자 오국헌의 둘째 아들로 자는 의여( 義 餘 ), 호는 무하당( 無 夏 堂 )이다. 우암 송 시열의 문인이었다. 묘는 금산군 추부면 비례리( 備 禮 里 )에 있으며, 부인은 성산이 씨( 星 山 李 氏 ) 이곤형( 李 坤 亨 )의 딸이다. 오수휘( 吳 遂 輝, 1634~1704)는 효자 오국 헌의 셋째 아들로 자는 순지( 順 之 )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었다. 묘는 금산군 추 부면 자라리( 自 羅 里 )에 있으며, 부인은 양덕황씨( 陽 德 黃 氏 )와 남양방씨( 南 陽 房 氏 ) 이다. [오일휘( 吳 逸 輝, 1647~1718)] 국헌의 넷째 아들로, 자는 일휴( 日 休 ), 호는 용포( 龍 浦 )이다. 용포라는 호는 우암 송시열이 지어준 것이다. 묘는 공주에 있으며, 부인은 여흥민씨 민인간( 閔 仁 幹 )의 딸이다. 오건휘( 吳 建 輝, 1650~1720)는 국헌의 막내 아들로 자는 여빈( 輿 彬 ), 호는 도암( 道 菴 )이다. 묘는 경상도 생지량면에 있으며, 부인은 안동김씨 김안절( 金 安 節 ) 의 딸이다. 제1장 전통사회 573 [오석규( 吳 碩 奎, 1662~1732)] 효자 연휘의 장남으로 자는 서오( 瑞 五 ), 호는 현산( 峴 山 )이다. 우암 송시열과 수 암 권상하의 문인이였다. 그의 호를 권상하가 지어주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아버 지 효행을 본받아 어려서부터 부모 섬기기를 지성으로 하였다. 부모가 병중에 계시 면 음식을 전폐하고 오로지 병간호에 몰두하였고, 밤이면 혈서로 축문을 만들어 하
29 느님께 기도하였다. 54세에 양친이 한해에 별세하자 3년을 하루같이 여막에서 시 묘하였다. 묘는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장산에 있으며, 부인은 교하노씨( 交 河 盧 氏 ) 노상검( 盧 尙 儉 )의 딸이다. [오태증( 吳 泰 增, 1758~1831)] 효자 오국헌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오언온( 吳 彦 溫 )이다. 자는 사강( 士 剛 ), 호는 계옹( 溪 翁 )이다. 선조들의 효행을 이어받아 아우 오태준( 吳 泰 俊 )과 함께 효성이 지 극하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다. 묘는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에 장산에 있으며, 부인은 연안이씨( 延 安 李 氏 ) 이희백( 李 希 白 )의 딸이다. 오태준( 吳 泰 俊, 1761~1822) 는 효자 오태증의 아우로 자는 학지( 學 之 ), 호는 석탄( 石 灘 )이다. 성담( 性 潭 ) 송문경 공( 宋 文 敬 公 )을 스승으로 섬겼고, 선조의 효행을 본받아 효자로 알려져 태증( 泰 增 ) 과 함께 교관( 敎 官 )을 제수하였다. 묘는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장산에 있으며, 부인 은 안동김씨( 安 東 金 氏 ) 김유정( 金 由 正 )의 딸이다. 12 옥천전씨 후손들은 전지영을 금산지역 옥천전씨의 입향조로 보고 있다. 전언에는 전지영 이 연산군의 폭정을 피해 이 마을에서 은거하였다고 하지만, 족보에 의하면 효( 孝 ) 로서 귀향하기를 청하여 처음으로 진산 지봉산 아래에 소당( 小 堂 )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현재 요광 1리에 옥천전씨는 20여호 정도 거주한다.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74 [전지영( 全 摯 穎, 1499~1579)] 자는 영신( 穎 愼 ), 호는 죽담( 竹 潭 )이다. 할아버지인 전희철( 全 希 哲 )은 수양대군 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은거하면서 평생 세상에 나아가지 않 았던 인물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내자사첨정( 通 訓 大 夫 內 資 寺 僉 正 )을 지낸 전호 ( 全 琥 )이고 어머니는 박원효( 朴 元 孝 )의 딸이다. 학문이 뛰어나 이담( 李 潭 )의 천거로 연풍 부산 경원 거제 등의 지방관을 지냈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나 있었 는데 거제부사를 지낼 당시 친상을 당하자 부모에 대한 그리운 정을 시로써 남겼다 고 한다. 그리하여 그 고을 사람들이 효자사또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송강 정철( 鄭 澈 )이 찬( 撰 )한 행장이 있어 진산지( 珍 山 誌 ) 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전해지 지 않는다. 13 상산김씨 상산김씨는 현재 용화리에 거주하는 주민 중 가장 먼저 터를 잡았다. 상산김씨의
30 용화 입향조는 노은 김자정( 老 隱 自 精, 1630~1693)으로 주민들에 의하면 임진왜란 이후 계속 된 금산지역의 전란을 피해 금산읍 아인리 박금촌( 朴 金 村 )에서 용화리로 이주해 왔다고 전한다. 김자정이 용화리에 터를 잡은 시기는 대체로 1650~60년대를 전후한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금산지역은 잦은 전란으로 향촌사회는 황폐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유랑민이 급증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가산을 버리고 새로운 주거지를 찾아 이 주하는 주민들이 늘어났다. 김자정도 역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용화리로 이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집안에 김지( 金 摯 )의 왕지( 王 旨 ) 2매가 전해지며 후손들이 금산 일원에 거주하여 20여대를 세거해오고 있다. 왕지는 모두 태종 10년(1410)의 것으로 4월 10일 김지 ( 金 摯 )를 통정대부예조우참의보문각직제학세자우보덕( 通 政 大 夫 禮 曺 右 參 議 寶 文 閣 直 提 學 世 子 右 補 德 )으로, 9월에 가선대부검교한성윤( 嘉 善 大 夫 檢 校 漢 城 尹 )으로 임 명하는 내용이다. [김윤식( 金 潤 植, 1870~1950)] 자( 字 )는 중범( 仲 範 )이며 호( 號 )는 용암( 龍 巖 )이다. 그는 금산 용화리에 입향한 김자정( 金 自 精 )의 7대손이며 효자 김홍중( 金 弘 重, 1754~1850)의 손자이다. 김윤식 은 가세가 빈곤하여, 주경야독하며 성현의 가르침을 전승하였다. 그러다 재산이 늘 고 여유가 생기자 빈민들을 구휼하고, 토지를 마을에 기증하여 주민들이 감사의 의 自 자정(1630~1693) 精 : 입향조 鑊 泰 寶 泰 珪 慶 益 慶 澤 達 重 在 重 履 重 儀 重 弘 重 (1754~1850) 晋 重 (1763~1808) 元 欽 德 欽 學 洙 仁 洙 連 洙 勉 植 (1790~1842) 敬 植 (1851~1933) 潤 植 (1870~1950) 炳 龜 (1892~1969) 제1장 전통사회 575 <그림 4> 상산김씨 시랑공파 계보
31 미로 보덕비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금산향교의 장의( 掌 議 )와 전교( 典 敎 )를 맡아 봉 사( 奉 祀 )와 유도( 儒 道 )의 선양에 힘썼으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종용사( 從 容 祠 ) 의 보수에도 공이 컸다. 부인은 천안전씨( 天 安 全 氏, 1868~1943)로 전부엽( 全 富 燁, 1835~?)의 딸이다. 김윤식과 천안전씨의 묘는 모두 남이면 석동리에 있다. 14 해평길씨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길사덕( 吉 思 德, 1756~1811)] 자는 명윤( 明 潤 ), 호는 현촌( 賢 村 )이다. 부인은 증금인( 贈 今 人 ) 은진송씨( 恩 津 宋 氏 )로 송홍석의 딸이다. 효자 길용거( 吉 龍 擧 )의 증손이며, 길경익( 吉 慶 益 )의 손자 이고 길사희( 吉 思 羲 )와 사촌지간으로, 효자로 소문이 나서 길사덕과 아울러 사효 ( 四 孝 ) 라 일컬었다. 교관( 敎 官 )을 증직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부모님 모시기를 다하여 어버이가 즐기시는 것은 비록 멀더라고 반드시 구하여 맛있는 음식이 일찍이 빠지는 것이 없었다. 부 친이 병석에 누웠을 때에는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엄동설한에도 강가에 가서 얼음 을 깨고 약재를 구하는 등 그 효행이 뛰어났다. 상을 당하자 시묘할 때 호랑이가 와서 스스로 호위하였고, 체질이 약해지고 병이 들어서도 추운 방에서 상제를 마쳤는데 병이 없어지고 몸이 건강하였다. 또한 아들 과 조카도 잘 가르쳐 학행을 이루게 하였고, 야은 길재( 吉 再 )의 유지( 遺 址 )에 두어 칸을 지어서 현촌이라 이름하고 숨어살면서 스스로 편안히 하고 몸을 단속하기를 예로써 하였다. 이러한 길사덕의 효행에 일가들과 마을 사람들이 감화해서 착하게 된 사람이 많았다. 묘는 부리면 현내리에 있다. 15 밀양박씨 576 청주에 세거하던 밀양박씨가 금산으로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이후 박사현의 아들 인 박수정( 朴 守 正 )때 부터인데 정확한 입향 이유는 알 수 없다. 그 후 박사현의 손자 일환( 日 煥 )은 통정대부에 올랐고, 증손( 曾 孫 ) 박재선( 朴 載 善 )은 가선대부에 올랐다. [박훈( 朴 薰, 1484~1540)] 자는 형지( 馨 之 ), 호는 강수( 江 叟 )로 박증영의 아들이다. 천거를 받아 벼슬길에 올라 감찰, 지평 등을 지내고 중종 14년(1519)에 현량과의 병과에 급제하고 장령, 동 부승지를 지냈다. 1519년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15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으며, 시 호는 문도( 文 度 )이다. 청주의 신항서원( 莘 巷 書 院 )과 금산의 덕산사에 배향되었다.
32 [박사현( 朴 嗣 賢,?~1592)] 호는 퇴우당( 退 憂 堂 )으로 박훈의 손자이다. 임진왜란 때 조헌의 의병에 종군하였 다. 청주성을 수복할 때 왜적의 탄환에 맞아 상처가 심하여 치료하고 있는데, 금산 에서 조헌이 700의사와 함께 옥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분을 참지 못하여 독약 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종용사와 덕산사에 배향되었다. 남원양씨 평촌리에 남원 양씨가 인연을 맺은 것은 광해군 때(1609~1622)에 한산군수를 그 만두고, 경기도 광주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한 양응해[ 梁 應 海, 호:천음( 天 蔭 ), 양성지의 6세손]로부터 비롯된다. 그가 왜 이곳을 세거지로 선택하여 입향 하였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양성지( 梁 誠 之, 1415~1482)] 조선 초기의 학자 문신으로 자는 순부( 純 夫 ), 호는 눌재( 訥 齋 ) 또는 송파( 松 坡 ) 이다. 양성지는 고려 초기(11세기초) 남원부의 향리를 지낸 양능양의 12대손이다. 시조 양능양의 7대손까지는 향리직을 세습하여 호장을 지내었으며, 8대손 양준에 이르러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 좨주의 문반직을 갖기에 이르렀다. 양성지는 여말의 학자로 이제현과 정몽주, 그리고 선초의 학자로는 정도전과 권 근을 추앙하였으며, 서거정, 신숙주, 김수온 등과 비교적 두터운 교우관계를 맺었 다. 그리고 학문영역은 매우 넓고 다채로웠는데 경학 사학 병법 지리 의학 음악 농법 등 거의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사학, 지리, 병 법에 흥미를 기울였다. 정조도 눌재집 에서 그의 학문을 크게 칭찬하였다. 눌재 집 을 편찬한 이병모도 양성지의 학문이 경제실용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26 세에 관계에 투신하여 68세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40여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330 여 조의 상주문을 지었고, 저서도 약 30여 종이 있다. 양성지는 당시 중국의 요순만을 유일한 이상적 군주로 여겼던 시절에 단군을 국 조로 받들기를 주장하였으며, 우리의 동국사를 배울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고, 온 세상이 중국의 풍속에 휩쓸리던 시대에 나라의 고유한 풍속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 장하였다. 또한 군사의 정병주의를 주장하여 시험을 치러 우수한 군사를 뽑도록 하 였다. 특히 병역의 토대가 되는 호적의 정확성을 기할 것, 독자의 군복무면제 등을 징병에 있어 3대원칙으로 삼은 것은 그의 탁월한 정치적 안목으로 볼 수 있다. 세종의 명에 의하여 편찬한 팔도지리지 와 연변방수도 는 매우 정밀한 것으로 실제 측량한 지도가 없던 그 당시로서는 매우 위대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제1장 전통사회 577
33 는 또 농정에도 힘을 써서 국가에 건의하기를, 농사의 근본은 지력을 잘 이용하는 데 있는 것이므로 개간사업을 일으켜서 해변과 강 육지에도 방축을 세워 수전을 만들자고 주장하였으며, 직업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모아서 농사를 짓게 하고, 그 밖에 여가가 있을 때에는 무예를 익히게 하면 일거양득이 된다고 하였다. 1482년(성종 13) 6월 11일에 통진 대포곡 ( 通 津 大 浦 谷,김포군 양촌면 대포리)에서 68세의 일기로 작고하였고 시호는 문양( 文 襄 )이다. 그 후 구암사를 비롯하여 김포의 대포서원( 大 浦 書 院 ), 담양의 월곡서원( 月 谷 書 院 )에 배향되었다. 2) 서원 사우의 건립 조선시대 지역내 사족활동의 핵심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서원( 書 院 )과 사우 ( 祠 宇 )의 건립 및 운영실태이다. 사우는 선현을 추모하고 유덕( 遺 德 )을 기리는 제사 적 기능을 가지며, 서원은 제향처( 祭 享 處 )이자 후진을 교육시키는 교육처였다. 조 선후기에 서원의 역할은 단순한 제향과 교육시설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영 향력이 심대하여 해당 학파의 본거지로 존재하며 정치성을 띄게 되었다. 각 서원의 성격은 제향된 인물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는데 제향인의 성격이 충절인이 아 닌 문신이나 학자일 경우에는 특정 학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을 가능성이 크다. 금산지역의 서원 사우는 다음의 표와 같다. [표 16] 금산 지역의 서원 사우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78 서원 소재지 창건연대 배향인물 星 谷 書 院 남이면 성곡리 1613년(광해 5) 金 侁, 尹 澤, 吉 再, 金 淨, 高 敬 命, 趙 憲 龍 江 書 院 제원면 용화리 1716년(숙종 42) 宋 時 烈, 宋 浚 吉, 金 元 行, 兪 棨, 宋 明 欽 淸 風 書 院 ( 不 二 影 堂 ) 부리면 불이리 1672년(현종 12) 吉 再 草 廬 書 院 ( 磻 溪 書 院 ) 금성면 하류리 1632년(인조 11) 李 惟 泰 山 泉 齋 書 院 남일면 음대리 1663년(현종 4) 尹 宣 擧, 尹 拯 從 容 祠 금성면 의총리 1647년(인조 25) 高 敬 命, 趙 憲, 高 因 厚, 邊 應 井, 柳 彭 老, 安 瑛, 李 光 輪, 趙 完 基, 韓 楯, 趙 憲 幕 佐, 高 敬 命 幕 佐, 高 敬 命 士 卒, 趙 憲 士 卒 忠 烈 祠 금성면 상가리 1831년(순조 31) 吳 應 鼎, 吳 稶, 吳 稷, 吳 邦 彦 柳 谷 祠 ( 柳 谷 書 院 ) 금성면 하류리 1702년? 韓 皦, 李 惟 澤 趙 憲 祠 堂 ( 表 忠 祠 ) 복수면 곡남리 1649년(인조 27) 趙 憲 石 浦 齋 書 院 부리면 창평리 숙종말 許 穆
34 금산 지역은 조선시대 전라도에 속해있었지만 충청도와 경계를 접하여 거리상 가까웠고 충청도의 명문가와 학맥, 혼인관계 등으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조 선중후기 김장생 문인의 근거지를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전라도가 충청도 다음으 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이들중 대부분이 전주목 지역에 집중되 어 있어 금산과 진산의 사족 활동이 충청도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 으로 추측된다. 김장생의 문인 비율과도 연계되는 충청도 연산의 돈암서원 봉안시 (1635) 참여록에서 참석자의 거주지를 분석한 자료에서도 공주목, 홍주목, 청주목 의 군현과 함께 전주목의 여러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서원과 사우에 배향된 인물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금산 지역의 유풍이 조선초기 의 성리학자인 윤택과 길재 등에게서 비롯되어 이유택, 이유태 형제와 중봉 조헌에 게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고, 후에 서인 노론계의 대표적인 인물인 송시열, 송 준길, 김원행, 유계, 송명흠와 소론계의 윤선거, 윤증 등과 연계되는 양상을 보인다. (1) 반계서원( 磻 溪 書 院 草 廬 書 院 ) 반계서원은 금산군 금성면 파초리에 있었던 서원으로 초려 이유태( 草 廬 李 惟 泰 ) 를 배향했으나, 현재 서원의 유적을 찾을 수 없다. 반계( 磻 溪 ) 의 이름은 파초리 앞의 내에 반석( 磻 石 )이 있으므로 반초( 磻 蕉 ) 또는 반계 라고 한데서 나왔고, 이 것이 파초( 芭 蕉 ) 로 변하였다고 한다( 금산군지,1987). 초려집( 草 廬 集 ) 의 성곡서원유생권학규( 星 谷 書 院 儒 生 勸 學 規 ) 와 시남집( 市 南 集 ) 문화당기( 文 會 堂 記 ) 에 의하면 초려 이유태가 여러 형제들과 함께 유곡리 (파초리의 인근마을)에 문회당( 文 會 堂 )을 건립하여 수천권의 경서를 비치하고 향수 재와 자제들을 강학하였다고 한다. 반계서원에 대하여 알 수 있는 확실한 자료는 열읍원우사적( 列 邑 院 宇 事 蹟 ) 뿐 이다. 이 자료에서는 이유태가 죽은 10년 후인 숙종 20년(1694)에 본읍 유생 이진환 ( 李 震 煥 ) 등이 상소하여 서원건립을 요청하였으나, 1721년에 이르러서야 창건되어 이유태를 독향( 獨 享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영조 18년(1742)의 서원정리 정책(숙종 40년 이후에 건립된 영당이나 사우는 철폐)으로 반계서원도 철폐된 것으 로 보인다. 한편 조두록( 俎 豆 錄 ) 과 동국원우록( 東 國 院 宇 錄 ) 에는 향현사( 鄕 賢 祠 )의 이름으로 윤선거와 이유태를 병향( 並 享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영조 41년(1765)에 편찬된 금산군읍지( 錦 山 郡 邑 誌 ) 에 따르면 금성면은 서일면 ( 西 一 面 )과 서이면( 西 二 面 )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따라서 파초리( 芭 蕉 里 )는 서일면 에, 하류리( 下 柳 里 )는 서이면에 각각 나뉘어 소속되었으나 두마을은 실제로는 가깝 게 붙어 있었다. 이러한 행정편제는 1914년에 현재와 같이 금성면으로 통합 개편 제1장 전통사회 579
35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유림교본( 儒 林 敎 本, 금산향교, 1991) 의 서원 사우의 연혁 에서는 초려 서원과 반계서원이 서로 다른 지역에 설립된 별개의 서원으로 서술하였다. 즉 초려 서원은 인조 11년(1632) 하류리 유곡동에 미촌 윤선거( 美 村 尹 宣 擧 )가 사숙을 개설 하였고, 숙종 때에 이유태가 여기에서 후학을 가르쳤으므로 윤선거와 이유태를 배 향하고 향사하다가, 고종 8년(1871)에 훼철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반계서원은 숙 종 20년(1694)에 파초리에 세워 이유태가 후학을 가르쳤으므로, 후학들이 이유태 를 배향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서로 가까운 두 마을의 다른 서원에서 각각 이유태를 배향하였으리라고 는 생각되지 않는다. 행정편제상에서는 위와 같이 서로 구분되었으나 서로 거리가 가까운 위치에 있고, 숙종 때에 이유태가 같은 지역의 두 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반계서원과 초려서원을 별개 의 서원으로 보는 것보다는 동일의 서원에 대한 다른 이름일 것으로 보인다. (2) 산천재서원( 山 泉 齋 書 院 )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80 산천재( 山 泉 齋 ) 에 대해서 기록한 조선시대의 자료는 열읍원우사적( 列 邑 院 宇 事 蹟 ), 노서유고( 魯 西 遺 稿 ) 의 연보 와 유계( 兪 棨 ), 박세채( 朴 世 采 )가 각각 쓴 행장, 그리고 시남집( 市 南 集 ) 에 수록된 유계의 산천재기( 山 泉 齋 記 ) 등이 단 편적으로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위의 자료에서 어느 곳에서도 산천재서원 이라 는 말은 없었고, 단지 산천재 라고만 기록되어 있었다. 현재 건물의 자취는 찾아 볼 수 없고, 유일한 산천재의 위치를 추측케하는 윤증 ( 尹 拯 )의 비( 碑 )만이 남일면 음대리 금일초등학교 앞의 795번 국도(금산-진안간) 건너편에 세워져 있을 뿐이다. 열읍원우사적 에 의하면 산천재에는 미촌 윤선거 ( 美 村 尹 宣 擧 ), 명재 윤증( 明 齋 尹 拯 ), 농은 윤추( 農 隱 尹 推 ) 3인이 배향되어 있었음 을 확인할 수 있다. 병자호란을 겪은 후인 인조 15년(1637) 겨울에 윤선거와 유계가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 마하산 아래에 은둔하여, 학문을 연구하며 성리학의 진리와 예론을 연구하 고 산수를 즐기며 생활하였다. 1642년에는 이미 작은 재( 齋 )를 짓고 산천재( 山 泉 齋 ) 라고 편액하였다. 유계의 시남집 에 산천재기 가 실려 있고, 여기에서 산천 재 라고 편액한 이유를 기록하고 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몽( 蒙 ) 이라는 것은 만물의 싹이니 성인이 만물의 싹을 기르지 않을 수 없다. 고로 설 괘의 계사(출전 : 周 易 )에서 이르기를 동몽( 童 蒙 )이 나에게서 구한다는 것은 군자가 덕을
36 기름을 수행하는 것이고, 어린이는 바르게 키워서 성( 聖 )하게 됨을 이른 것이다. 상( 象 ) 에 이르기를 산밑에서 샘이 나온다 고 하였으니, 지금 재( 齋 )는 동몽을 위하여 만들었고 산천( 山 泉 )의 편액은 이로부터 나온 것이다 천하의 물건에 어린이를 깨우칠 수 있는 것은 많다. 성인이 어린이를 표현함을 왜 산천에서 얻는가. 대개 물의 성질은 본래 고요 하고 맑으니 산밑의 샘이 대개 그 근원이다. 물이 조금씩 흐르기 시작하여 흐름과 깊이에 더함이 없고 맑고 탁함의 나뉨이 없으니, 그것은 사람의 어린 것과 같지 않은가. 이로부터 깨끗이 씻어내고 흐르고 이끌어 깨끗함이 상존에 오르고 신명에 천거할 수 있 고, 도달이 산골짜기에 이르고 내에 이르고 강에 이르고 바다에 이르는 것 모두가 돌아가 는 성질이다. 그것이 혹시 더러운 곳에 빠져있고 자갈로 막혀 어지러워지고 탁해지고 묻 히고 막히는 것은 또한 이와는 구분된다. 이것이 성인이 산천으로 어린이를 표현하여 그 를 기르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하늘이고, 어린이를 기르는 것은 사람이다. ( 夫 蒙 者 物 之 穉 也 聖 人 以 物 穉 不 可 不 養 也 故 設 卦 以 繫 之 辭 曰 童 蒙 求 我 曰 君 子 以 果 行 育 德 曰 蒙 以 養 正 聖 功 也 其 象 曰 山 下 出 泉 今 齋 爲 童 蒙 設 山 泉 之 扁 其 以 此 夫 天 下 之 物 可 以 喩 蒙 者 多 矣 聖 人 象 蒙 曷 爲 於 山 泉 乎 取 之 夫 水 之 爲 性 本 靜 以 淸 山 下 之 泉 盖 其 源 也 涓 涓 乎 始 達 䟽 浚 未 加 淸 濁 未 分 其 猶 人 之 蒙 乎 由 是 而 澄 之 渫 之 浚 之 導 之 其 潔 也 可 以 登 上 尊 薦 神 明 其 達 也 可 以 之 澗 之 川 之 江 之 海 者 皆 回 性 也 厥 或 糞 壤 游 之 沙 礫 壅 之 以 汨 以 濁 以 埋 以 塞 者 亦 於 是 乎 判 此 聖 人 所 以 以 山 泉 象 蒙 而 養 之 故 曰 蒙 天 也 養 蒙 人 也 ( 市 南 集 卷 19 山 泉 齋 記 ) 위 글에서 볼 수 있듯이 편액에 쓰여진 산천( 山 泉 ) 이라는 이름의 뜻은 산 밑의 깨끗한 물이 근원에서 시작하여 계곡, 시내, 강을 거쳐 바다에 이르는 과정을 어린 이가 성장하여 성인( 聖 人 )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비유하였다. 즉 원래 고요하고 맑 은 물을 본래 어린이의 본성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자람으로, 물이 깊어지는 것을 배움으로, 강과 바다에 이름을 성인( 聖 人 )으로 연결시켰다. 이로서 윤선거와 유계가 산천재를 설립한 목적을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윤선거는 산천재 를 설립한 후에 산천재( 山 泉 齋 ) 를 그의 호( 號 )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산천재에 관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산천재의 구 체적인 성격과 변화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산천재서원의 명칭도 사용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인조 24년(1646) 유계( 兪 契 )가 무안현감으로 부임하자 윤선거가 산천재서원에 남아 유생 강론과 학문 연구를 계속하였고, 현종 10년(1669) 윤선거가 죽은 후에는 아들인 윤증이 산천재서원을 강학과 학문탐구의 본거지로 활용하였다. 윤증 강학 ( 講 學 )의 장( 場 )이 되었다. 산천재서원은 숙종 12년(1686) 윤증이 사망하자 후학들 이 면재 윤증의 영상( 影 傷 )과 위패( 位 牌 )를 봉안하고 130여년간이나 학통을 계승 제1장 전통사회 581
37 하다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손되었다. 고종 33년(1896) 그 유허( 遺 墟 )에 후학 유생들에 의해 건립된 유허비( 遺 墟 碑 )만이 그 터를 지키고 있다. (3) 성곡서원( 星 谷 書 院 )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82 성곡서원은 금산지역의 서원 중에서 가장 먼저 창건되었고, 금산지역의 유일한 사액서원이었다. 그러나 대원군 때 훼철되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열읍원우사적( 列 邑 院 宇 事 蹟 ) 에 의하면 성곡서원의 건립은 광해군 즉위 초기 인 1613년에 다수의 선비들의 요청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의 율 정 윤택( 栗 亭 尹 澤, 1289~1370)이 관직에서 물러나 살았던 진악산( 進 樂 山 ) 아래 에 당시의 금산군수 이안눌( 李 安 訥, ~ 재임)이 주도하여 창건하 였고, 1617년에 군수 김원록( 金 元 錄, ~ 재임)에 의해 봉안되었다. 원기( 院 記 ) 는 김원록이 지었고, 제영( 題 詠 )은 이안눌과 서산군수 김대덕[ 金 大 德, 1577~1639, 호 : 소봉( 蘇 峰 ) 이안당( 易 安 堂 ), 김원록의 아들]이 지었다. 서원에 배향된 인물은 서원이 건립되면서 6명이 함께 배향되는데, 고려 말의 요 양행성 참정( 遼 陽 行 省 參 政 )을 역임한 낙천재 김신( 樂 天 齋 金 侁 ), 율정 윤택( 栗 亭 尹 澤 ), 야은 길재( 冶 隱 吉 再 ), 기묘사화 때 8현 중의 한사람인 김정( 金 淨 ), 그리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헌( 趙 憲 )과 고경명( 高 敬 命 ) 등이다. 현종 4년(1663)에 본읍 유생 한수신( 韓 秀 臣 )이 상소하여 예조좌랑 정동엽( 鄭 東 燁 )을 보내어 치제( 致 祭 )하고, 성곡서원( 星 谷 書 院 ) 의 이름으로 사액한 후 복호미 4결을 내려주어 경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 同 春 堂 宋 浚 吉 )이 썼고, 학규( 學 規 )는 초려 이유태( 草 廬 李 惟 泰 )와 진보현감 이진병( 眞 寶 縣 監 李 震 炳 )이 함께 지었고, 원규( 院 規 )도 이유태가 지었다. 성곡서원에는 원장 1인, 장의 2인, 유사 2인, 훈도 1인을 두고 원생 25인을 뽑아 지방교육에 힘썼고, 삼남의 유생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으며 지방유림들이 전답을 헌납하여 재정도 풍부하여 지방교육에 이바지한 공이 컸었다.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성곡서원이 있었다고 전해 지는 곳은 현재 밭으로 변해 있었고, 성곡서원유허비( 星 谷 書 院 遺 墟 碑 ) 만이 있어 서 서원의 자리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4) 용강서원( 龍 江 書 院 ) 제원면 용화리( 龍 化 里 ) 금강 상류인 용강변( 龍 江 邊 )에 자리잡고 있던 용강서원 ( 龍 江 書 院 )은 숙종 42년(1716)에 세워진 서원으로, 송시열 송준길 유계를 제향
38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書 院 撤 廢 令, 1871)으로 훼철( 毁 撤 )되었으나, 1910년경 지역 유림들이 헐린 재목의 일부를 모아서 용강서당( 龍 江 書 堂 )을 짓고 유 림의 회합 및 자제교육의 장으로 이용하였다. 용강서원에 대해서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로는 청금록( 靑 衿 錄 ) (1716년) 용강 선안( 龍 江 仙 案 ) (18세기말) 유생천거장( 儒 生 薦 擧 帳 ) (1794) 용강서원원장안 ( 龍 江 書 院 院 長 案 ) (1806) 청아록( 菁 莪 錄 ) (1819) 용강서원도기( 龍 江 書 院 到 記 ) (1836) 재임안( 齋 任 案 ) (1866) 용강서당유계록( 龍 江 書 堂 儒 稧 錄 ) (1885) 등이다. 용강서원이 건립되는 시기가 노론이 정계를 주도하던 때이고, 건립 당시에 배향되 는 인물이 당시의 정계 학계를 주도했던 우암 송시열( 尤 庵 宋 時 烈 ) 동춘 송준길 ( 同 春 宋 浚 吉 ) 시남 유계( 市 南 兪 棨 ) 등이었던 것을 보아도 이 지역의 노론계 재지사 족이 중심이 되어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용강서원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미호 김원행( 渼 湖 金 元 行 )과 역천 송명흠( 櫟 泉 宋 明 欽 )이 용강서원과 관계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미호 김원행이 용 강서원과 교분을 맺게 되는 계기는 신임사화( 辛 壬 士 禍, 1721)로 노론 4대신이었던 김원행의 할아버지 김창집( 金 昌 集 )이 사사( 賜 死 )되고 김원행의 집은 용화리와 인접 한 제원면 천내리에 유배되어 용강서원에 출입하면서 강론을 하게 된다. 또한 역천 송명흠도 당시의 노 소론간의 치열한 당쟁을 피해 아버지 묵옹 요좌( 黙 翁 堯 佐 )와 함께 옥천( 沃 川 )에 살면서 용강서원에 출입하며 강론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은 금산지역의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용강서원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말았 다. 다행히 당시의 지역유림 김조수( 金 祖 洙 )의 노력으로 강당( 講 堂 )만은 형태를 유 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용강서원의 명맥은 유지될 수 있었다. (5) 종용사( 從 容 祠 ) 종용사는 임진왜란 당시 금산 연곤평( 延 崑 坪 )에서 순국한 중봉 조헌( 重 峰 趙 憲 ) 과 승장 영규대사( 僧 將 靈 圭 大 師 ), 눈벌[ 臥 隱 坪 ]싸움에서 순국한 전라도 의병장 제 봉 고경명( 霽 峰 高 敬 命 ), 그리고 횡당촌(진악산 밑 서당골)싸움에서 순국한 변응정 ( 邊 應 井 )과 그들의 막료( 幕 僚 ) 및 사졸( 士 卒 ), 무명의사 등 칠백의사를 모두 21위의 위패에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1592년 왜군이 금산을 침입하자 조헌과 승장 영규대사는 8월 1일 청주성을 탈환한 후 다시 금산의 적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하였다. 이 때 금산에는 호남으로 진격하려 던 왜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 早 川 隆 景 ] 휘하의 강력한 적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7월 7일 웅치( 熊 峙 )에서 김제군수 정담( 鄭 湛 )의 군과 혈전을 감행하였고, 7 제1장 전통사회 583
39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84 월 8일에는 이치( 梨 峙 )에서 권율장군의 군과 싸워 패하였으며, 7월 9일에는 금산 눈벌에서 초토사 고경명( 招 討 使 高 敬 命 )과 방어사 곽영( 防 禦 使 郭 嶸 )의 7천군과 싸 웠는데 고경명의 의병부대는 필사적인 결의로 장렬히 싸워 적군에 적지 않은 타격 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헌은 권율장군의 관군과 8월 17일에 금산의 왜군을 공격하기 로 기약하고 영규대사가 거느린 승군과 합세하여 목숨을 건 싸움에 임할 것을 결심 하였다. 8월 18일 아침 조헌이 거느린 아군은 금산 연곤평에서 적군과 싸우게 되었 다. 조헌은 군중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오늘의 사태는 죽음 한가지만이 있을 뿐이 다. 죽든지 살든지 앞서든지 물러서든지 간에 다만 의( 義 )라는 글자에 부끄럽지 않 아야 한다. 고 하였다. 조직적인 훈련이 부족했던 의병부대로써 강력한 적군의 공 격을 세 번에 걸쳐 격퇴하였으나 무기가 다하고 드디어는 백병전이 전개되어 사람 과 말이 엉키고 베고 찌르는 처참한 혈전이 벌어졌다. 이에 조헌을 위시한 승장 영규대사와 이광륜( 李 光 輪 ), 임정식( 任 廷 式 ), 김절( 金 節 ), 변계온( 邊 繼 溫 ), 양응춘( 楊 應 春 ), 곽자방( 郭 自 防 ), 김희철( 金 希 哲 ), 강충서( 姜 忠 恕 ), 조헌의 아들 조완기( 趙 完 基 ) 등을 포함한 칠백의사가 모두 전사하였으며 적 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해 8월 22일 조헌의 제자인 박정량( 朴 庭 亮 )과 전승업 ( 全 承 業 )이 시체를 거두어서 순국한 장소인 금산군 서이면(현 금성면 의총리)에 한 무덤을 만들어 칠백의총( 七 百 義 塚 )이라 하였다. 그리고 다시 10년 후인 선조 36년 (1603) 의총 앞에 양호( 兩 湖 )의 유생들이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 重 峰 趙 先 生 一 軍 殉 義 碑 )를 건립하였다. 비문은 월정 윤근수( 月 汀 尹 根 壽 )가 찬( 撰 )하고, 남창 김현 성( 南 窓 金 玄 成 )과 습정 송방조( 習 靜 宋 邦 祚 )의 기( 記 )와 문곡 김수항( 文 谷 金 壽 恒 ) 의 음기( 陰 記 )가 새겨져 있다. 1634년 금산군수 김성발( 金 聲 發 )과 제원찰방 조평( 趙 平 )이 의총 앞의 언덕에 순의단( 殉 義 壇 )을 세워 칠백의사의 충혼을 위로하였다. 이 때 중봉이 순절한 곳과 불과 5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순절한 고경명, 변응 정, 영규대사 등을 함께 제사하였다. 1647년 당시의 금산군수였던 홍처대( 洪 處 大 )와 호서 호남 유림들이 사우를 건립 하였고, 1661년에 초려 이유태( 草 廬 李 惟 泰 )가 사액상소를 올린 이후 1663년에 현종 이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종용사( 從 容 祠 ) 라 사액하고 제토를 내렸다. 열읍원우사 적( 列 邑 院 宇 事 蹟 ) 에 의하면 당시 배향의 위치는 고경명과 조헌을 주향( 主 享 )으로 하 였고, 동벽 제1위에 고인후( 高 因 厚 ), 제2위에 이광륜, 제3위에 조완기를 배향하였고, 서벽에는 제1위에 변응정, 제2위에 유팽로( 柳 彭 老 ), 제3위에 안영( 安 瑛 ), 제4위에 한 순( 韓 楯 )을 배향하였다. 그리고 동북면에는 제봉의 막좌( 幕 佐 )를 서북면에는 조헌의 막좌를 배향하였고, 사우의 문밖에 동서로 협실( 夾 室 )을 지어 역시 고경명과 조헌의
40 사졸들을 배향하였으며, 사우의 서편에 승장 영규와 그의 사졸을 모시기 위한 별사 ( 別 祠 )를 지었다. 종용사에 모셔진 주향과 배향, 막좌의 제사에 필요한 제수( 祭 需 )는 관비로 충당하고, 사졸들의 제향에 드는 50두( 斗 )의 비용을 유림들이 자비로 부담하 였다. 효종 6년(1655)에는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쓴 제기( 齋 記 )를 붙였고, 효종(3년 : 1653) 이후 현종(11년 : 1670)과 숙종대(10년 : 1684, 25년 : 1699, 38년 : 1712, 43년 : 1717)에 계속 나라에서 예관( 禮 官 )을 파견하여 제사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철종 6년(1855)에 당시의 금산군수 김재헌( 金 在 獻, ~ 재 임)이 종용사의 건물이 허물어지자 재임( 齋 任 )이던 김조수( 金 祖 洙 ) 박승문( 朴 勝 文 ) 이하권( 李 夏 權 ) 등과 함께 중수하였다( 금곡집( 錦 谷 集 ) 권 11 종용당중건기 ( 從 容 堂 重 建 記 ) ). 그런데 1940년 일제하에서 일인들이 항일유적 말살정책의 일환 으로 분묘를 훼손하고, 조선생 일군순의비를 폭파할 때에 종용사도 강제로 헐리고 말았다. 광복 후 1952년 칠백의사 순국 360주년을 맞이하여 이 지역 유림들에 의하여 복 원되어, 다시 제사를 받들어 오다가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경역을 확장하 고 재단장하였다. 현재의 종용사의 현판은 박대통령의 친필이며 1976년 경내의 재 조경사업을 마무리한 후에 그해 9월 23일 제향에 직접 참석하였다. 이후로 정부에서는 매년 9월 23일을 제향일로 정하여 칠백의사의 고귀한 순국정 신을 추모하는 제향을 받들게 되었다. 현재 종용사에는 21기의 위패를 배향하고 있 으며, 각 의군의 대표는 장단( 將 壇 )에 모시고 좌우에 막좌 및 사졸과 무명 의사의 위 패를 모셨다. (6) 유곡사( 柳 谷 祠 柳 谷 書 院 ) 유곡사는 고려의 문신이며 효자로 알려진 문충공 한교( 文 忠 公 韓 皦 )와 현종 때의 대흥현감( 大 興 縣 監 ) 유곡 이유택( 柳 谷 李 惟 澤 ) 양위를 배향한 향현사( 鄕 賢 祠 )로 유 곡서원이라고도 불려진다. 그러나 유곡사의 내력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는 없고, 다 만 월성이씨가승( 月 城 李 氏 家 乘 ) 과 금계한씨족보( 錦 溪 韓 氏 族 譜 ) 에서 간단한 내력을 살필 수 있었다. 위의 가승 과 족보 에 따르면 원래 명종 5년(1550)에 유곡(현재 금성면 하류리 버드실)에 정려를 건립하고 효자비를 세운 바가 있고, 현종 4년(1664)에 유곡사를 현재의 위치에 창건하여, 한교를 제사하였다. 이 무렵 이유택은 대흥현감이 되었으 나 모친의 봉양을 위하여 사직하고 모친의 상을 당해서는 69세의 노쇠한 몸으로 3 년 시묘를 하였으며 상복을 벗지 않고 소대상을 마친 후에 옷을 갈아 입었다. 초려집( 草 廬 集 ) 의 성곡서원유생권학규( 星 谷 書 院 儒 生 勸 學 規 ) 와 시남집( 市 제1장 전통사회 585
41 南 集 ) 의 문회당기( 文 會 堂 記 ) 에 의하면 초려 이유태가 형인 이유택 등의 여러 형 제들과 함께 유곡리(파초리의 인근마을)에 문회당( 文 會 堂 )을 건립하여 수천권의 경 서를 비치하고 향수재와 자제들을 강학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유택이 현종 9년(1668)에 죽은 후, 유곡사에서 추배하면서 숙종 28년(1702)에 향현사( 鄕 賢 祠 )로 사액을 받고[이세후( 李 世 垕 )의 사액상소가 있었음] 복호미( 復 戶 米 ) 2결을 받았다. 그후 금산군수 서각수( 徐 覺 修, ~ 재임)가 지은 사우중건상량문( 祠 宇 重 建 上 樑 文 ) 에는 영조 42년(1766)에 여러 사림들의 뜻을 모 아 유곡사를 중건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유곡사는 다른 서원 사우들과 마찬가지로 고종 8년(1871)에 훼철되었 다가, 다시 1982년에 한교와 이유택의 후손들에 의하여 유곡사가 복원되었다. 강당 으로 경앙재( 景 仰 齋 )가 사우복원과 함께 복원되었고, 문충공한선생원허( 文 忠 公 韓 先 生 院 墟 ) 라고 새겨진 비석이 사당의 왼편에 서 있다. (7) 조헌사당( 趙 憲 祠 堂 表 忠 祠 )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86 조헌사당은 복수면 곡남리에 있는 면소재지로부터 유등천( 柳 等 川 ) 건너편의 대상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의 주변에는 수심대( 水 心 臺 )라고 새겨진 바위와 큰 소 나무가 유등천 상류의 물줄기와 어우러져 자연의 조화된 운치를 더해 준다. 조헌사당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금산 연곤평( 延 崑 坪 )싸움에서 전라도로 진격하 려고 금산에 머물던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한 중봉 조헌( 重 峰 趙 憲 )이 단독으로 모 셔져 있다. 조헌은 종용사에 제봉 고경명과 함께 주향으로 모셔져 있다. 1970년대 에 종용사가 건립되어 증축되는 과정에 복수면의 조헌사당에 있던 관련자료들을 모두 종용사로 옮겨 갔다. 조헌사당은 곡남리의 진동산에 있었다. 조헌사당이 곡남리에 세워지게 된 것은 이 지역에 조헌의 후손들이 세거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조헌은 주로 옥천 안읍 밤티[ 栗 峙 ]에서 생활하였지만, 자주 복수지역에 왕래하면서 이 지역의 인사들 과 교유하였고, 후손에게 수심대가 있는 이곳에서 살 것을 분부하였다고 한다. 조헌과 이 지역과의 관련성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복수면 지량리와 대전시 산 직동 사이에 조중봉산 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산이 있다. 확실한 근거는 알 수 없으나 금산의 땅이름 (안용산 엮음, 금산문화원, 1995)과 지역주민들의 말에 의 하면 임진왜란 당시에 조헌이 의병을 거느리고 모여들었다 하여 조헌산이라고 한 다 는 것이다. 또한 조헌사당의 뒷편에 있는 바위에 수심대( 水 心 臺 ) 라고 새겨진 대자( 大 字 )글 씨는 송시열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송시열이 이유태와 더불어 이곳 수심대
42 에서 자주 회동하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현재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기금을 모금하여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운것으로 매 년 음력 8월 17일에 문중이 모여 향사를 올리고 있다. (8) 청풍사( 淸 風 祠 不 二 影 堂 ) 청풍사는 금산읍에서 무주로 가는 37번 국도를 따라 동남쪽으로 약 7km되는 곳 의 왼편에 있으며, 고려말 삼은( 三 隱 )의 한 사람인 야은 길재( 冶 隱 吉 再 )의 진영( 眞 影 )과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이곳에는 청풍사 이외에 길재가 손수 심었다고 전하 는 소나무 두 그루가 있다. 그리고 야은선생유허비( 冶 隱 先 生 遺 墟 碑 ) 와 해주 수양 산( 首 陽 山 )의 청성묘( 淸 聖 廟 )에 있는 주자의 글씨 백세청풍( 百 世 淸 風 ) 의 4대자를 새긴 비가 비각 안에 서 있으며, 중국 이제묘( 夷 齊 廟 )에 쓰여 있는 지주중류( 砥 柱 中 流 ) 라는 4대자를 새기고 서애 유성룡( 西 厓 柳 成 龍 )이 음기를 쓴 비가 사우 입구 왼편에 있다. 부리면( 富 利 面 )은 본래 백제시대에 부시이현( 富 尸 伊 縣 )에 속해 있었고, 고려초 에 부리현( 富 利 縣 )에 속해 있었다. 후에 금주( 錦 州 )에 병합되었고, 그 땅은 중랑장 신만( 中 郞 將 申 晩 )의 장원이 되었다. 길재는 고려 공민왕 2년(1353)에 선산의 봉 계리( 鳳 溪 里 )에서 태어났다. 부친 원진( 元 進 )이 금주지사( 錦 州 知 事 )로 부임하였을 때, 길재도 함께 따라 왔다가 신씨의 가문에 장가들어 그곳에 살게 되었다. 불이 ( 不 二 ) 라는 지명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될 때 함께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후인들이 그의 절의를 사모하여 불사이군( 不 事 二 君 ) 의 문구를 따서 불이리( 不 二 里 ) 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길재의 탄생지인 선산에는 선생의 묘소와 손수 심은 대나무밭 이 있고, 이미 금 오서원( 金 烏 書 院 )에 향사하고 채미정( 採 薇 亭 )을 건축하였으며, 낙동강변에 지주 중류비( 砥 柱 中 流 碑 ) 를 세워 길재의 절의를 사모하고 있었다. 길재가 초년에 시묘 살이하였던 금산 부리에는 현종 12년(1671)에 불이사( 不 二 祠 )를 창건하여 1678년 (숙종 4) 후손 길상복( 吉 尙 復 )과 길협구( 吉 協 龜 )가 고을의 여러 선비들과 함께 사우 에 진영을 모셨다가, 영조 17년(1741)의 서원남설 금령에 저촉되어 훼철되었다. 그 후 영조 37년(1761)에 금산군수 민백흥( 閔 百 興, ~ 재임)이 주선 하여 해주 청성묘에 붙인 주자의 글씨 백세청풍 4대자를 본떠 새긴 비를 유허에 세우고, 또 그 옆에 따로 작은 비를 세워 병계 윤봉구( 屛 溪 尹 鳳 九, 1681~1767)와 역천 송명흠( 櫟 泉 宋 明 欽, 1705~1768)이 차례로 비문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자락 헌 유최기( 自 樂 軒 兪 最 基, 1689~1768)가 쓴 불이당기( 不 二 堂 記 ) 에서는 제1장 전통사회 587
43 세대가 떨어지고 자손이 미약하니 우리들이 이 선조의 끼친 터를 보존한 줄 누가 알겠 는가. 선산은 선생의 나신 곳이요 금주는 선생이 사시던 땅이니 덕화가 남은 곳으로 말하 면 금주가 선산에 뒤질 바 없지만 다만 선생의 묘소와 손수 심은 대나무밭이 선산에 있고 금주에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산에 율리( 栗 里 )가 있는 줄만 알고 금주에 불이( 不 二 )가 있는 줄은 아는 이가 적다. 만일 이대로 여러 대를 지나면 향촌의 후진들은 또 부 리( 富 利 ) 가 불이( 不 二 ) 로 개칭된 것과 불이가 선생의 유적인 것인들 어찌 알랴. 장차 파묻혀 전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니 더구나 우리 미약한 후손이 여기 사는 줄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운수라는 것은 우리의 알 바가 아니나 우리는 우리의 할 수 있는 일에는 힘을 다하여 천운을 기다릴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할 수 있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선조의 유허가 풀밭이 되지 않게 하고 후손들이 분발해야 할 것이다. 고대에 향리에 학숙의 제도가 있었으니 지금 만일 그것을 모방 하여 몇 간의 초당을 불이사( 不 二 祠 )의 터에 세워서 한편으로는 선조를 추모하고 한편으 로는 자손의 공부하는 처소로 삼아 스스로 힘쓰면 가하지 않겠는가.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88 라 한 바있다. 순조 원년(1800) 가을에 당시의 도백( 道 伯 )이었던 김달순( 金 達 淳 )이 이곳을 순시 하다가 선생의 유허지가 황량함을 보고 선비들의 뜻을 따라 다시 사당을 세우기를 계획하여 이듬해에 착수하였다. 당시의 금산군수 홍희정( 洪 羲 正, ~ 재임)에게 공사를 지원하도록 지시하여 4년만인 1804년에 준공하였다. 그러나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다시 철폐되는 비운을 겪었고, 그 후에 1928년 청풍비각( 淸 風 碑 閣 )을 창건할 당시에 청풍사( 淸 風 祠 ), 청풍서원( 淸 風 書 院 )을 중수함으로서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77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휘호로 청풍서원( 淸 風 書 院 ) 이라는 현판을 써서 걸게 되어 그 찬란한 빛을 더 하게 되었던 것이다. 3) 가례원류의 편찬과 논란 시남 유계가 다른 호서사림과의 교유 중에서 가장 긴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었던 것이 바로 노성의 파평윤씨 일가이다. 유계와 노성의 파평윤씨와 인연은 호란 때부 터 시작된다. 척화신에 대한 논죄가 일어났을 때, 파평윤씨 윤황( 尹 煌 )과 유계는 정 배되고, 유계와 동항인 유황( 兪 榥 )은 관직이 삭탈된다. 이러한 유계와 윤황의 동시 정배 인연은 윤황의 아들들과의 관계로 이어진다. 윤황의 아들들이 바로 윤순거( 尹 舜 擧 ) 윤문거( 尹 文 擧 ) 윤선거( 尹 宣 擧 )로 모두 사계, 신독재의 문인이기도 하여 동학인 시남과는 교분을 더욱 두텁게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市 南 과 尹 氏 家 와는 혼연으로도 맺어졌다. 市 南 의 아들 兪 命 興 은 윤문거의 딸과 결혼하였고, 윤문거의
44 아들 尹 搏 은 송시열의 딸과 결혼하여 이들은 겹사돈이 되었다. 市 南 과 윤씨 일가는 학연, 지연, 혈연, 색연 등으로 엮어진 가문의 공동체와 같은 긴밀한 관계였다.] 유 계는 인조 11년(1633) 27세 때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석호( 石 湖 ) 윤문거 ( 尹 文 擧 )도 이때에 급제하였고, 조익에게 함께 수학하기도 하여 평생 동안 긴밀한 친교를 갖게 되었다. 한편 척화주장으로 유계가 임천 유배지에서 4년을 살았는데, 윤씨가( 尹 氏 家 )가 살고 있는 노성과는 지척 간으로 윤선거 형제들과 왕래가 빈번하였고 유배 기간의 외로움은 이들의 교류 심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유계가 가례집해 ( 家 禮 集 解 ) 를 시편하고 뒷날 이를 중수할 때 윤선거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아 이 때에도 예서( 禮 書 ) 편찬에 서로의 교감이 있었을 것이다. 금산은 회니시비와 함께 노 소 대립의 사단이 되었던 가례원류 의 편찬시비가 이루어지는 배경이기도 했다. 유계는 35세되던 인조 19년(1641) 양한지지( 養 閒 之 地 ) 로 지목되는 금산 마하산( 麻 霞 山 ) 아래 남일면 대보촌으로 옮겨 살게 되는데, 이 때 윤선거 형제는 봉친과 피란을 위해 금산에 은거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미촌 윤선거는 아들 명재를 유계의 문하로 보내 수학하게 하였다. 유계는 이사 온 다음 해(1642년)에 마하산 아래에 서실을 짓고, 산천재( 山 泉 齋 ) 라 편액하였다. 산천재로 편액한 이유는 산천재기( 山 泉 齋 記 ; 市 南 集 19)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어린 것은 만물의 싹이니 성인이 만물의 싹을 기르지 않을 수 없다. 고로 設 封 의 계사 ( 주역( 周 易 ) )에서 이르기를 동몽( 童 蒙 )이 나에게서 구하는 것은 군자가 덕을 기름을 수행하는 것이고, 어린이를 바르게 키위서 성( 聖 )하게 됨을 이른 것이다. 상( 象 )에 이르 기를 산 밑에서 샘이 나온다. 고 하였으니, 지금 재( 齋 )는 동몽을 위하여 만들었고, 산 천( 山 泉 )의 편액은 이로부터 나온 것이다. 제1장 전통사회 유계가 일생 중 가장 가장 득의( 得 意 )한 시절 로 산천재에서의 5년(1641~1645) 을 회고하듯이, 그가 학문적으로 가장 성숙하고 호서사림과의 유대가 깊게 맺어진 때가 금산에서의 생활이었다. 호서사림의 거물인 송시열, 송준길을 비롯하여 금산 에 살고 있던 이유태, 이웃의 윤선거, 윤석호와 유계는 모두 같은 연배 층으로 지기 지우( 知 己 之 友 )가 되었다. 특히 그 집회의 장소가 산천재( 山 泉 齊 )였다[( 山 泉 齋 에서 尤 庵, 同 春, 草 藘 등과 會 講 을 여는데, 이때 石 湖, 美 村 형제는 동석하여 항상 자리 를 같이 하였다.)]. 후일 유계가 이들이 자주 회강( 會 講 )하며 교유를 넓혀 뒷날 충청 오현( 忠 淸 五 賢 )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지금은 시비의 근원이 되고 있지만 가례 원류 가 두 가문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던 곳도 바로 산천재였다.[( 市 南 은 산천재 생 589
45 활에서 家 禮 集 解 의 미비함을 보완하는데 美 村 頻 相 往 來 助 書 ( 市 南 年 譜 )하여 윤선거의 도움으로 家 禮 源 流 를 완성하였다.)] 유계는 병자 척화건( 丙 子 斥 和 件 )으로 임천( 林 川 )에 유배 중이던 인조 16년(32 세, 1638)에 가례집해( 家 禮 集 解 ) 를 찬술했고, 이는 몇 년 후 본격화 되는 가례원 류( 家 禮 源 流 ) 편찬의 유서가 된다. 그 후 시남은 금산 산천재( 山 泉 齋 )에 사우( 士 友 ) 들을 모아 강회를 열기도 하고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이 무렵 가례원류( 家 禮 源 流 )도 성편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미촌( 美 村 )은 예서( 禮 書 )는 부문이 많아 알아보기 어렵다고 해서 이에 문공가례( 文 公 家 禮 )를 대본 ( 臺 本 )삼아 강( 綱 )과 분목( 分 目 )을 세우고는 고례( 古 禮 ) 경전 및 선현의 예설과 아울러 동방의 여러 학자들 학설 저서들을 취해 분류해서 조목에 따라 붙이고는 이름 하기를 가례원류( 家 禮 源 流 ) 라고 했다. 향사례 향음주례 같은 의례는 학생들로 하여금 해( 講 ) 익히도록 했고, 집안의 관례( 冠 禮 ) 혼례( 婚 禮 )는 한결같이 문공가례( 文 公 家 禮 )에 따르되 고금( 古 今 )을 참작해서 행하도록 했다.( 市 南 선생문집 부록 권1 행장 : 以 禮 書 多 門 有 難 領 會 乃 就 文 公 家 禮 立 綱 分 目 而 取 古 禮 經 傳 及 先 賢 禮 說 倂 東 方 諸 儒 先 論 著 文 字 類 附 於 逐 條 之 下 名 之 曰 家 禮 源 流 如 鄕 射 鄕 飮 酒 等 儀 使 諸 生 講 而 習 之 一 家 冠 婚 之 禮 一 依 文 公 禮 參 酌 古 今 而 行 之 )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90 라고 한다. 가례원류( 家 禮 源 流 ) 는 주자의 가례( 家 禮 ) 의 본문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경전의 내용을 뽑고 주를 붙여 그것을 원( 源 ) 이라 하고, 후대의 여러 유학자 들의 예설을 조사하여 류( 流 ) 라 하여 역사상의 예설( 禮 說 )들을 밝힌 것이다. 이 가례원류 는 효종조에 완성은 되나 간행 배포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713 년 좌의정 이이명( 李 頤 命, 1658~1722)이 경연에서 유계의 손자 유상기( 兪 相 基, 1651~1718)가 용담 현령으로 출판하려고 하였으나 고을의 여력이 심히 부족하여 출판하지 못하고 있으니 도신에게 분부하여 책을 간행하면 세교에 도움이 클 것이 라고 임금에게 아뢰어 윤허를 받았고, 권상하( 權 尙 夏 )의 서문과 후서, 정호( 鄭 澔, 1648~1736)가 발문을 붙여 1715년에 14권 9책으로 간행하였다. 그런데 이 가례원류가 시남과 명재 사이의 시비의 발단이 되는 것은 유계와 윤선 거가 공찬했다는 가례원류 의 찬자와 간행 문제로 제2의 배사 문제로 비화된다. 윤증의 스승이자, 부친 윤선거와 친숙한 유계는 김장생에게서 배운 예학을 발전시 켜 가례원류 를 찬술하였는데, 윤선거와 함께 교정 보완 작업을 하였고 교정을 제 자인 명재에게 부탁하였다. 효종 9년(1658)의 일이었다. 그러자 명재 윤증은 곧 바 로 교정에 착수했다는 글을 올렸고, 이에 답서를 보내어 격려를 하였다. 시남은 또 말년에 이단상( 李 端 相, 1628~1669)에게도 교정을 부탁하였는데 명재와 이단상은
46 모두 시남의 생전에 가례원류 의 교정을 완료, 간행하지 못했다. (이단상이 지녔 던 초고본을 시남의 장자인 유명윤이 1666년 되찾아 왔고 이것이 숙종 때 간행의 저 본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명재가 (1) 가례원류 는 유계 단독 찬술이 아니고 윤선거와의 공편이며, (2) 또 유계의 가례원류 의 근본은 김장생의 가례 집람( 家 禮 輯 覽 ) 에 있는 것이므로 다시 간행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유계의 손자 유상기( 兪 相 基 )는 명재 말년부터 간행을 독촉하였으나 뜻을 이루 지 못하였다. 그런데 가례원류의 초고본을 정양( 鄭 瀁, 1660~1668)이 등사하여 집 에 보관되었던 것[중본( 中 本 )]이 그 손자에게 전해졌다. 유상기는 명재 사후 이 가 례원류 초고본을 갖고 노론 재상인 이이명에게 청하여 조정의 명으로 간행을 하게 되었다. 이때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와 정호가 발문을 붙였는데, 그 글에서 명재 가 스승 유계를 배반하여 교정의 유탁을 저버리고 윤선거와의 공찬이라는 등의 간 사한 말을 하였다고 공격한 것이다. 가례원류 가 유상기 등 노론 측의 말대로 유계 의 단독 찬술물인지 혹은 명재의 말했다는 것과 같이 유계와 윤선거의 공찬인지는 현존하는 상반된 주장의 문헌만으로는 밝힐 수 없다. 그리고 윤선거의 역할과 윤증의 참여문제는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게 주요한 문 제가 아닐 수도 있다. 윤증은 시남과 부친 윤선거에게서 배웠고, 윤증은 30세 때부 터 가례원류의 교정 작업에 참여해서 그 베껴 쓰는 일을 도운 적이 있고 이후로도 그 자신이 직접 가례원류에 대한 본격적인 수정작업과 교정 작업을 전개하였기 때 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가례원류 사건이 생긴 이후 명재는 앞서 스승인 송시열 을 배반한 불의를 일으켰을 뿐 만 아니라 다시 스승인 유계를 배사한 불의인으로 지 목되어 회니시비에 있어서 두 가지의 배사론이 겹치게 되었다 4) 금산의 향약 용화리에 보존된 고문서 자료중에는 조선후기 금산지역의 향약 모습을 전해주는 자료로 금란계( 金 蘭 稧 ), 금란계시집( 金 蘭 稧 詩 集 ), 향약[ 鄕 約, 용화리( 龍 化 里 )], 등 이 있다. 그 하나는 유생들의 시회계( 詩 會 契 )인 금란계( 金 蘭 稧 ) 관련 문서와 향약은 19세기 금산군에서 군수가 주도가 되어 시행했던 향약[ 鄕 約, 面 約 ]체제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향약 문서의 표지에 부북면( 富 北 面 ) 용화리( 龍 化 里 )라고 기록되어 있고 말미에 향교에서 규찰하여 관청에 보고하도록 한 내용을 미루어 향교가 향약의 실시 주체 가 되고 수령과 일정하게 연관된 주현의 향약임을 알 수 있다. 이 자료를 통해서 우 제1장 전통사회 591
47 리는 금산지역의 각 면마다 이러한 향약이 작성되었을 것임을 추측할 수가 있다. 이 자료는 금산군의 향약이기도 하지만 책의 앞에는 유명한 기존의 여러 향약조 목들을 참고 자료로 수록하고, 면약을 첨부하였다. 이같은 향약을 학계에서는 수령 향약, 혹은 주현향약( 州 縣 鄕 約 )이라고 부르는데 주현향약은 수령을 중심으로 하여 군현( 郡 縣 ) 전체에 실시하지만, 면약( 面 約 )과 리약( 里 約 )을 추가로 만들도록 하는 것이 다르다. 명칭은 보통 면단위 이상일 경우는 향약이라고 하나 면마다 면약이 별도로 마련되고, 자세한 경우는 리약까지 첨부되는 경우도 있다. 용화리의 향약은 바로 그러한 체계 속에서 마련된 부북면의 면약인 것이다. 이 향약에는 앞부분에 남전여씨향약( 藍 田 呂 氏 鄕 約 )과 주자증손여씨향약( 朱 子 增 損 呂 氏 鄕 約 )을 먼저 소개하고 있는 것이 주목 된다. 금산군 향약은 이를 토대로 하 되, 습속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변통하여 5조목을 추가한 것이 다르다. 따라서 이 자료는 덕업상권( 德 業 相 勸 ), 과실상규( 過 失 相 規 ), 예속상교( 禮 俗 相 交 ), 환난상휼 ( 患 難 相 恤 )의 네 덕목과 그에 대한 범례 외에 정륜상( 正 倫 常 ), 무생업( 懋 生 業 ), 휼재환( 恤 災 患 ), 외법령( 畏 法 令 ), 흥학교( 興 學 校 )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92 의 조목이 추가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들의 내용을 대략 살펴보면 정륜상( 正 倫 常 )에서는 부모와 자식 형제, 이웃간에 마땅히 예의와 도리를 지켜야 하며 무생 업( 懋 生 業 )에서는 사농공가( 士 農 工 賈 )의 업( 業 )에 따라 근면할 것과 특히 농사를 지 을 때 이웃간에 서로 도와 줄 것을 강조하고 있다. 휼재환( 恤 災 患 )에서는 이웃에 재 난, 질병 등으로 어려운 자가 있으면 곡식, 의복으로 도와줄 것과 외법령( 畏 法 令 )에 서는 여러 가지 불법사항에 대해 열거하고 이를 어기지 말 것을 권장하고 있다. 흥 학교( 興 學 校 )에서는 8세 이상의 사족 자제들에게 소학을 가르쳐 오륜과 어른을 공 경하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추가된 약조의 내용을 보면 면약의 체제를 따른 부북면 향약으로 만들어 졌지만, 예컨대 위의 조약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매 삭망 리회( 里 會 ) 때 그 경중에 따라 면책, 태벌( 笞 罰 ), 관에 고하여 법으로 처리하는 등 각 마을별로 실행한 구체 적인 방안들이 적혀 있다. 이 향약의 작성 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내용상으로도 특별한 시대상을 반영 하는 내용보다는 일반적인 교화의 강령과 내용들이 열거되고 있어서 명확하게 시 대를 밝히기 어렵다. 다만 향약-면약-리약의 구조가 보여져 수령향약의 성격이 드 러나는 것이나, 향교가 그 시행의 주체로서 동원되는 것, 추가된 조목의 내용이 19 세기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여질 뿐이다.
48 5) 충 효 열 인물 조선왕조실록 에서 금산군의 충 효 열 인물을 처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세 종 2년(1420)의 기사이다. 이후 철종실록 까지의 역대 실록 에서 금산군의 충 효 열 인물을 찾아보면 금산현의 충 효 열 포장사례 8건(효자 4건, 열녀 4건) 진산현의 충 효 열 포장사례 1건(열녀)으로 모두 9건이다. 이들을 정리하면 다음 의 표와 같다. [표 17] 역대 실록 에 기록된 금산군의 충 효 열 포장사례 연대 고을 성명 충 효 열 행적 포상내용 근거 1420 금산 전산원 이익 처 소사 ( 前 散 員 李 益 妻 召 史 ) 열녀(수절) 정문, 복호 세종실록 7, 2/1/경신 금산 부정임영순 처 한씨 ( 副 正 林 英 順 妻 韓 氏 ) 열녀(수절) 정문, 복호 세종실록 7, 2/1/경신 1455 금산 유학 이효성 처 길씨 ( 幼 學 李 孝 誠 妻 吉 氏 ) 효부 복호 단종실록 13, 3/2/을사 1471 금산 양탕 처 삼덕 ( 梁 湯 妻 三 德 ) 열녀[박호( 撲 虎 ),수절] 정문, 복호 성종실록 10, 2/6/갑자 1476 금산 1544 금산 1710 진산 1816 금산 1822 금산 어모장군 이원곤 ( 禦 侮 將 軍 李 元 坤 ) 훈도 김칭 ( 訓 導 金 稱 ) 사인 이국량 처 배씨 ( 士 人 李 國 亮 妻 裵 氏 ) 백성 명관덕 ( 百 姓 明 觀 德 ) 사인 박희묵 처 김씨 ( 士 人 朴 希 黙 妻 金 氏 ) 효자(시묘) 서용 성종실록 72, 7/10/정축 성종실록 161, 14/12/정묘 효자(상분,시묘) 가자 중종실록 102, 39/4/을유 열녀[박호, 撲 虎 ] 정려 숙종실록 49, 36/10/신사 효자 복호 순조실록 19, 16/6/병진 열녀 정려 순조실록 25, 22/3/병진 조선시대의 윤리서에는 금산군의 인물이 모두 7명이 등재되어 있다. 동국신속 삼강행실도 효자도에 4명, 열녀도에 3명으로, 모두 금산군의 인물이다. 제1장 전통사회 593 [표 18] 동국삼강행실도 에 수록된 금산 지역 인물 수록부분 권수 지역 시대 인물 행적 권1 고려 판사 윤구생( 判 事 尹 龜 生 ) 구생각석( 龜 生 刻 石 ) 동국신속 삼강행실도 효자도 ( 孝 子 圖 ) 권3 조선 참정 김신( 參 政 金 侁 ) 김신감천( 金 侁 感 天 ) 금산 권3 조선 훈도 김칭( 訓 導 金 稱 ) 김칭여묘( 金 稱 廬 墓 ) 권6 조선 첨지 박천주( 僉 知 朴 天 宙 ) 천주단지( 天 宙 斷 指 )
49 동국신속 삼강행실도 열녀도 ( 烈 女 圖 ) 권1 조선 양탕 처 삼덕( 梁 湯 妻 三 德 ) 삼덕격호( 三 德 擊 虎 ) 권4 금산 조선 전경선 처 김씨( 全 景 瑄 妻 金 氏 ) 김씨액사( 金 氏 縊 死 ) 권6 조선 왕언홍 처 양녀구질개 ( 王 彦 弘 妻 良 女 仇 叱 介 ) 구질개투연( 仇 叱 介 投 淵 ) 지리지에 금산군의 충 효 열 인물이 등재되어 있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 부터이다. 금산군과 진산군에 각각 1인씩 2인이 기록되어 있는데, 금산군의 열녀 양적 처 삼덕( 三 德 )과 진산군의 효자 김천석( 金 天 錫 )이 있다. 진산군의 경우 효자조가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인물조에 효행 및 명정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중 열녀 삼덕은 실록 에 열행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효자 김천석은 실록 에서 보이지 않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도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웠다. 벼슬은 관찰사를 지냈다 고 하여 매우 간략하게 적고 있다. 조선 후기의 읍지인 여지도서 에는 충 효 열 인물로 금산군에 13명(효 10, 열 3), 진산군에 6명(효 3, 열 3)이 기록되어 있다. 금산군은 정려가 내려진 것이 10건, 증직 1건, 급복 3건, 서원배향 1건으로 증직 1건은 정려를 받은 인물이다. 진산군은 인물조 내에 효 열인이 포함된 것으로 정려가 내려진 것이 1건, 관찰사가 쌀을 지 급한 것[ 巡 營 給 米 ]이 2건이다. [표 19] 여지도서 에 수록된 금산 지역의 충 효 열 인물 지 역 행 적 인 물 포상내역 비 고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94 금산 효자 한교( 韓 皦 ) 상분, 시묘 금산 효자 김신( 金 侁 ) 성곡서원배향-금무( 今 無 ) 금산 효자 윤구생( 尹 龜 生 ) 정려 금산 효자 이유택( 李 惟 澤 ) 정려, 급복, 입사( 立 祠 ) 금산 효자 김칭( 金 稱 ) 정려 여묘 금산 효자 서인 송영립 ( 庶 人 宋 永 立 ) 정려 호환 금산 효자 박천주( 朴 天 宙 ) 정려, 증직 단지( 斷 指 ) 금산 효자 설방영( 薛 邦 英 ) 정려 단지 금산 효자 전재례( 全 在 禮 ) 정려 3년 여묘 금산 효자 전자망( 全 自 望 ) 급복 단지 금산 효자 김선억( 金 善 億 ) 급복 금산 열녀 양녀 삼덕( 良 女 三 德 ) 정려 금산 열녀 생원김하규 자부 김씨 ( 生 員 金 夏 圭 子 婦 金 氏 ) 정려 금산 열녀 사인 이주한 처 하씨 ( 士 人 李 柱 漢 妻 河 氏 ) 정려
50 진산 효자 김천석( 金 天 錫 ) 정려,삼강행실 진산 효자 박태원( 朴 泰 元 ) 순영급미( 巡 營 給 米 ) 단지, 봉양 진산 효부 서소사( 徐 召 史 ) 시모봉양 진산 효녀 이소사( 李 召 史 ) 진산 열녀 배소사( 裵 召 史 ) 현재 국내에 전하는 전라도 읍지 중에서 가장 앞선 시기의 통지( 統 誌 )인 호남읍 지 (1872년경)에는 금산군읍지와 진산군읍지가 수록되어 있다. 금산군읍지의 인물 조에는 효자 11인, 열녀 3인이 있고, 진산군읍지는 충 효 열 구분 없이 인물조만 있는데, 내용상 효자 2인, 효부 1인, 열녀 2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호남읍지 (1895년경)는 갑오개혁 직후에 편찬되어 당시의 지방 재정상태가 잘 나타나 있는 것이 특징인 읍지이다. 여기에는 금산군지와 진산군여지승람( 珍 山 郡 輿 地 勝 覽 )이 수록되어 있는데, 금산군지에는 인물조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 진산 군지의 인물조는 충 효 열 구분 없이 내용상 효자 2인, 열녀 2인으로 구분이 가 능하다.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금산의 읍지로는 1934년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 朝 鮮 輿 勝 覽 ) 의 전라도 금산군편이 있다. 여기에는 정려조가 설정되어 있어서 9기의 정려 가 소개되어 있고, 정려조와 별도로 충신 8인, 절의 15인, 효자 42인, 효부 10인, 효 녀 1인, 정열( 貞 烈 ) 17인, 여행( 女 行 ) 13인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정려조 와 중복되는 인물도 있다. 이 조선환여승람 의 금산군편은 1914년에 진산군과 통 합되어 이루어진 금산군의 군지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금산군과 비슷한 영역을 다 루고 있어서 도움이 된다. 이상의 문헌에서 확인된 금산군의 정려사례는 모두 21건 이다. [표 20] 문헌상 확인된 금산군의 정려 사례 유형 이름 지역 실록 여지 도서 호남 읍지 환여 승람 효자 한교( 韓 皦 ) 금산군 효자 이유택( 李 惟 澤 ) 금산군 비 고 효자 김칭( 金 稱 ) 금산군 여묘 효자 서인 송영립 ( 庶 人 宋 永 立 ) 금산군 호환 효자 박천주( 朴 天 宙 ) 금산군 단지 효자 윤구생( 尹 龜 生 ) 금산군 효자 전재례( 全 在 禮 ) 금산군 3년여묘 제1장 전통사회 595
51 효자 설방영( 薛 邦 英 ) 금산군 단지 효자 김천석( 金 天 錫 ) 진산군 효자 오국헌( 吳 國 獻 ) 효자 박인수( 朴 仁 壽 ) 효자 김학술( 金 學 述 ) 효부 열녀 열녀 열녀 열녀 열녀 열녀 열녀 열녀 강나영 처 한씨 ( 姜 羅 永 妻 韓 氏 ) 양녀 삼덕 ( 良 女 三 德 ) 생원김하규자부 김씨 ( 生 員 金 夏 圭 子 婦 金 氏 ) 전산원이익 처 소사 ( 前 散 員 李 益 妻 召 史 ) 부정림영순 처 한씨 ( 副 正 林 英 順 妻 韓 氏 ) 양탕 처 삼덕 ( 梁 湯 妻 三 德 ) 사인박희묵 처 김씨 ( 士 人 朴 希 黙 妻 金 氏 ) 사인이주한 처 하씨 ( 士 人 李 柱 漢 妻 河 氏 ) 사인이국량 처 배씨 ( 士 人 李 國 亮 妻 裵 氏 ) 금산군 금산군 금산군 수절 금산군 수절 금산군 박호,수절 금산군 금산군 진산군 박호 [표 21] 예조효행등제등록 인물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년(현종 10) 1674년(현종 15) 1687년(숙종 13) 1687년(숙종 13) 1691년(숙종 17) 1716년(숙종 42) 등 록 포상내역 인 물 효자정문 ( 孝 子 旌 門 ) 상물( 賞 物 ) 효자정문 ( 孝 子 旌 門 ) 복호( 復 戶 ) 제직( 除 職 ) 제직( 除 職 ) 면역( 免 役 ) 효자정문 ( 孝 子 旌 門 ) 열녀정문 ( 烈 女 旌 門 ) 금산 충의 설방영 ( 錦 山 忠 義 薛 邦 英 ) 금산 신급 처 김씨 ( 錦 山 辛 伋 妻 金 氏 ) 금산 고현감 이유택 ( 錦 山 故 縣 監 李 惟 澤 ) 금산 전신렴 자 자망 ( 錦 山 全 信 溓 子 自 望 ) 금산 유학 이문웅 ( 錦 山 幼 學 李 文 雄 ) 금산 유학 이문웅 ( 錦 山 幼 學 李 文 雄 ) 금산 보병 이계민 ( 錦 山 步 兵 李 戒 敏 ) 금산 향리 임재흥 ( 錦 山 鄕 吏 任 再 興 ) 금산 이주한 처 강씨 ( 錦 山 李 柱 漢 妻 康 氏 )
52 1716년(숙종 42) 1723년(경종 3) 복호 정문( 旌 門 ) 상물( 賞 物 ) 1743년(영조 19)~1745년(영조 21) 제직( 除 職 ) 1760년(영조 36)~1772년(영조 48) 정려( 旌 閭 ) 1822년(순조 22) 열녀 정려 ( 烈 女 旌 閭 ) 금산 역리 김선억 ( 錦 山 驛 吏 金 善 億 ) 금산 고역리 김선억 자 광추 ( 錦 山 故 驛 吏 金 善 億 子 光 秋 ) 금산 김광추 자 창운 ( 錦 山 金 光 秋 子 昌 運 ) 금산 사인 길상원 ( 錦 山 士 人 吉 尙 元 ) 금산 고사인 이희현 처 조씨 ( 錦 山 故 士 人 李 希 賢 妻 趙 氏 ) 금산 고사인 이희철 처 김씨 ( 錦 山 故 士 人 李 希 哲 妻 金 氏 ) 금산 고사인 박희묵 처 김씨 ( 錦 山 故 士 人 朴 希 黙 妻 金 氏 ) 6) 문중서원의 건립 (1) 충렬사( 忠 烈 祠 ) 금성면 상가리에 있는 충열사는 해주오씨( 海 州 吳 氏 )의 삼세사충신( 三 世 四 忠 臣 )을 배향한 문중 사우이다. 삼세사충신은 정유재란 때의 순천도부사였던 완월당 오응 정( 翫 月 堂 吳 應 鼎 )과 그의 장자인 오욱( 吳 稶 ), 차자로 광해군 때 무오심하지역[ 戊 午 深 河 之 役, 1618년에 명( 明 )의 요청으로 건주위( 建 州 衛 ) 후금( 後 金 )을 치기 위하여 강홍립( 姜 弘 立 )과 함께 북정( 北 征 )한 일]에 나아갔던 삼송정 오직( 三 松 亭 吳 稷 ), 병 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전사한 오직의 아들 순풍정 오방언( 吳 邦 彦 順 風 亭 ) 등 3대 에 걸쳐 활약한 해주오씨의 4충신을 말한다. 최근에 건립된 삼세사충비( 三 世 四 忠 碑 )를 제외하고 사우에 관한 관련자료가 거 의 없기 때문에 원래의 충렬사와 금곡서원에 대해서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충렬사 는 원래 순조 31년(1831)에 후손과 지역유림들에 의해 창건되어 화림리 가는 길가 에 건립되었다가 1871년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 1960년경까지만 해도 초라한 모습 의 충렬사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문화말살정책에서도 훼손을 피할 수 있었던 것 도 사우의 규모가 보잘것없는, 눈에 띄지도 않는 초라한 모습(당시 주변에 논과 가 옥이 함께 있었다고 함)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충렬사는 1956년에 구건물이 있었던 곳으로부터 약 300m 떨어진 현위치에 복건 하였으며, 1969년 당시의 군수 김현구( 金 賢 九 )의 배려로 도비와 군비로 중수하고, 1970년 삼세사충비를 건립하여 사충신의 행장을 기록하였다. 매년 음력 9월 20일 에 금산의 유림들이 제향을 올린다. 제1장 전통사회 597
53 (2) 구암사( 龜 巖 祠 )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598 구암사는 조선시대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40여년간 조정에서 벼슬을 하면서 학문을 빛낸 문양공 눌재 양성지( 文 襄 公 訥 齋 梁 誠 之 )를 모신 사당이다. 평촌리에 남원양씨가 인연을 맺은 것은 광해군 때에 한산군수를 그만두고, 경기 도 광주에서 이곳에 이주해 정착한 양응해[ 梁 應 海, 호:천음( 天 蔭 ), 양성지의 6세손] 로부터 비롯된다. 남원양씨족보( 南 原 梁 氏 族 譜 ) 에는 양각산 아래에 정착한 것으 로 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평촌리 서당골로 추측된다. 그러나 입향동기나 정 확한 시점은 알 길이 없다. 이곳에 구암사가 건립되는 계기도 양응해가 선대인 양성지의 뜻을 기리고 후손 에게 학업의 장소로 구암사숙( 龜 巖 私 塾 )을 열고, 평촌리 서당골 북동쪽 동산에 귀 래정( 歸 來 亭 )을 짓고 시문과 벗하며 소요한 것으로 구전으로 전한다. 따라서 이전 의 구암사의 연혁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현재 구암사에 관련된 자료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고종 20년(1883)에 송근수( 宋 近 洙 )가 써준 중수기( 重 修 記 ) 현판이 있다. 현재의 구암사가 건립된 것은 1922년이다. 구암사숙의 터에 후손 및 유림들이 눌 재 양성지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여 현판을 구암사( 龜 巖 祠 ) 라 하고, 그 후부터 는 매년 9월 9일에 제향을 올린다. 구암사에는 사당이 건립되던 당시에 구암사에 출입했던 유림들을 기록한 구암사청금록( 龜 巖 祠 靑 衿 錄 ) 이 보관되어 있다. 여기 에는 출입인사(65명)의 이름과 생년, 자, 본관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을 본관별로 나누면 25개의 본관으로 구분된다. 이들 중에서 남원양씨(6), 영산신씨(8), 천안전 씨(6), 상산김씨(6), 해평길씨(5), 제주고씨(4) 등의 수가 다른 본관보다 많은 편이 고, 그 이외에는 1~2 정도의 수로 나타날 뿐이다. 따라서 구암사의 건립 당시의 건 립의 중심은 양성지의 후손인 남원양씨 이외에 영산신씨, 천안전씨, 상산김씨, 해 평길씨, 제주고씨 등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구암사 경내에는 양성지의 일생과 행장 및 공훈을 기록한 눌재양선생묘비( 訥 齋 梁 先 生 廟 碑 ) 가 1933년에 세워졌으며, 비각은 1973년에 건립되었다. 그 옆에는 남 원양씨가 이곳에 자리잡았다는 표시인 듯한 거북바위[귀암( 龜 巖 ) ; 충남지정 문화 재자료 제301호, 지정)가 앉아 있다. 또한 평촌리 마을 입구 오른편 산자락 바위에 관암대( 冠 巖 臺 )라고 새겨진 각자 ( 刻 字 )도 볼 수 있는데, 이것 역시 양씨와 연관된 것이다. 글자가 새겨진 곳의 파인 바위는 후손들이 양성지의 관석( 冠 石 )을 만들기 위해 떼어낸 것이라고 한다.
54 (3) 덕산사( 德 山 祠 ) 덕산사는 부리면 불이리 배정이에 있는 밀양박씨의 문중사당으로 눌재 박증영 ( 訥 齋 朴 增 榮 ), 강수 박훈( 江 叟 朴 薰 ), 퇴우당 박사현( 退 憂 堂 朴 嗣 賢 ) 세사람의 위패 를 모신 사당이다. 이들의 선대로는 고려시대의 태사인 규정공 현( 糾 正 公 鉉 )이 중시조이고, 강생 ( 剛 生, 자는 柔 之, 호는 蘿 山 耕 叟 )은 박증영의 4대조로서 고려말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에 들어와서 개국공신에 올랐으며 집현전 부제학에 이르렀다. 이들의 가계가 금산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이후 박사현의 아들인 박수정( 朴 守 正 )에서부터이다. 그 후 박사현의 손자 박일환( 朴 日 煥 )은 통정대부에 올랐고, 증손 박재선( 朴 載 善 )은 가선대부에 올랐다. 덕산사의 앞에는 박사현의 자손인 박준영( 朴 準 英 )의 효행을 효자이암박공지비 ( 孝 子 梨 庵 朴 公 之 碑 )를 세워 기록해 놓았다. 박준영은 정조 10년(1786) 출생으로 부 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주변인사들이 군 도의 어사( 御 史 )에게 추천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서 포상을 받았다. 그 후 고종 29년(1892)에 동몽교관을 증직하였다. 덕산사가 창건된 것은 1961년에 지역 유림과 후손의 정성으로 이루졌으며, 1966 년 박정희대통령이 덕산사( 德 山 祠 ) 라는 친필을 내려주었다. 현재 덕산사는 매년 음력 2월 중정( 中 丁 )에 금산향교를 중심으로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향사하고 있다. 5. 사회혼란과 변화 1) 자연재해와 기근 왜란과 호란이라는 긴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부분 에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각 시기별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17세기는 잦은 기근과 전염병의 피해, 관리 의 탐학 등으로 위기 의 시기였고, 영조~정조 연간인 18세기는 부흥과 안정의 시 기였으며, 19세기는 내부의 모순으로 갈등이 심화되어갔다는 것이다. 금산지역에 서도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병자호란 직후 특히 금산지역은 매우 혼란한 상태였다. 인조 24년(1646) 5월 금 산 출신의 인물이 역모를 꾸몄다가 형벌을 받자 금산군은 역적의 출신지라는 이유 로 금산현으로 강등되기까지 하였다. 제1장 전통사회 599
55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현종 12년(1671) 금산의 좌수( 座 首 ) 이광성( 李 光 星 )이 무리를 모아 도둑질을 했 던 사건도 주목된다. 이때는 바로 조선시대에 유례를 찾기 힘든 참혹한 시기로 이 른바 경신 대기근 이라 불리우는 때였다.[현종 11년(1670 경술년)부터 현종 12년 (신해년)] 당시 기근의 원인은 계속된 자연재해로 가뭄, 홍수, 풍해, 충해 등 한두가 지 요인이 아니었다. 현종 11년 8월 전라감사 오시수( 吳 始 壽 )는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깔렸고, 무리를 지어 겁탈까지 했으며, 조금 익 어 가는 곡식이 있으면 전주( 田 主 )를 묶어 놓고 공공연히 베어 가며 들판에 방목하 는 소와 말을 대낮에 잡아먹지만 감히 물어보지도 못합니다. 라 하였고 다음해 1월 의 보고에도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해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는데 집에 조금 의 양식이 있는 자는 곧 겁탈의 우환을 당하고 몸에 베옷 한 벌이라도 걸친 자 또한 강도의 화를 당합니다. 심지어 무덤을 파내 관을 쪼개 시신의 염의( 斂 衣 )를 훔치기 도 합니다. ( 현종개수실록 12년 1월 11일) 라고 할 정도였다. 같은해 6월에 이달 에 서울에서 굶거나 병을 앓아 죽은 자가 1,460여 명이었고 각 도에서 죽은 수가 1 만7,490여 명이었다 도적이 살해하고 약탈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호남 영남 이 가장 심했고, 두 도에서 돌림병으로 죽은 소와 가축도 다 헤아릴 수 없었다. ( 현 종실록 12년 6월 30일) 라는 것으로 보아 2년간 최악의 기근이 휩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의 좌수 이광성의 사건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좌수 라 하면 수 령을 견제하는 향촌자치 기구인 향청( 鄕 廳, 留 鄕 所 또는 鄕 所 )의 우두머리였다. 가 장 먹고 살만한 계층이 도적질을 주도할 만큼 상황은 극단적이었던 것이다. 이광성 은 아우와 교생 몇을 모아 도둑질을 모의하고 50여 명의 무리와 함께 덕유산 골짜 기에 진을 치고 용담( 龍 潭 ) 무주현의 무기와 곡식을 탈취하려하였다. 그러나 곧 발각되어 반역으로 규정되어 39명이 사형당했다. 이 사건의 전말이 현종실록 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600 금산( 錦 山 )의 도둑 이광성( 李 光 星 )을 경상( 境 上 )에서 처형하여 뭇사람을 경계하였다. 이광성은 금산의 좌수( 座 首 )였는데 그의 아우 문성( 文 星 ) 두성( 斗 星 ) 및 교생( 校 生 ) 우 명침( 禹 明 侵 ), 장관( 將 官 ) 김영일( 金 英 逸 ) 등과 함께 도둑질하기로 모의하고 50여 인의 무리를 모아 여러 곳에서 겁탈하였다. 이광성이 인명을 살상하는 것은 무리를 모으는 도리가 아니다. 고 하여 그의 무리들에게 일체 사람을 해치지 말라고 경계하고, 드디어 용담현( 龍 潭 縣 )의 군기( 軍 器 )와 무주( 茂 朱 ) 적상 산성( 赤 裳 山 城 ) 서창( 西 倉 )의 향곡( 餉 穀 ) 을 겁탈하고자 덕유산( 德 裕 山 )의 깊은 골짜기 속에다 진을 치고 웅거하면서 근처의 사 냥하는 포수 및 중들과 결탁하여 그 세력을 폈다. 금산 고을의 아전인 황우룡( 黃 雨 龍 )이 그의 사위 권립( 權 立 )을 통하여 적의 동태를 알아내 관가에 고하였는데, 대개 권립이 도
56 둑에게 협박을 당하여 그들에게 들어가기로 약속하고 그 모의를 은밀히 탐지하여 황우 룡에게 말한 것이다. 군수 이정( 李 晸 )이 여러모로 책략을 써서 50여 인을 붙잡았는데, 자복한 자가 42인이나 되었다. 이정이 또 권립을 시켜 달아난 도둑을 정탐하게 하였으 나, 권립이 곧 도둑의 무리에게 살해되었다. 또 명화적( 明 火 賊 ) 1백여 인이 징을 두드리고 뿔피리를 불면서 관문( 官 門 )과 매우 가 까운 곳에서 겁탈하였다. 이때부터 밤 사이에 읍리( 邑 里 )가 자주 놀랐고 본군의 계엄이 거의 대여섯 달에 이르렀다. (현종 12년 6월 30일) 금산군수 이정은 도적을 잡아들인 공을 인정받아 능주목사로 승진하였다. 기근 과 전염병으로 죽은 농민이 전국에 100만 명에 이른다 할 만큼 어려운 상황 속에서 도적이 횡횡하고 역모사건까지 벌어질 정도였지만 조선왕조가 흔들림 없이 유지 되었던 것은 진휼정책과 대동법의 운영 덕분이었다. 국가적 위기를 수차례 넘기며 조선 사회는 문화중흥기로 진입하고 있었다. [표 22] 자연재해와 기이 연대 재해 군현 피해상황 태종 6년 4월 8일(무진) 서리 금주 태종 6년 4월 12일(임신) 눈 금주 태종 6년 4월 16일(병자) 서리 금주 태종 13년 1월 10일(경인) 지진 금주 태종 13년 1월 16일(병신) 기이현상 금주 소가 암송아지 3마리를 낳다 태종 13년 4월 13일(신유) 기이현상 금주 소가 암송아지 3마리를 낳다 태종16년 4월 29일(신묘) 서리 진산 세종 4년 3월 9일(병인) 지진 금산, 진산 세종 9년 9월15일(경자) 지진 금산 단종 즉위년 5월 23일(을묘) 지진 금산 향과 축문을 내려 해괴제를 지냄 단종 즉위년 9월 4일(계사) 지진 금산 향과 축문을 내려 해괴제를 지냄 단종 즉위년 9월 5일(갑자) 지진 금산 향과 축문을 내려 해괴제를 지냄 단종 2년 3월 18일(기사) 지진 진산 향과 축문을 내려 해괴제를 지냄 단종 3년 4월 24일(기해) 서리 진산 단종 3년 4월 26일(신축) 서리 금산 단종 3년 5월 3일(정미) 서지 진산 세조 4년 3월 17일(갑진) 지진 금산 향과 축문을 내려 해괴제를 지냄 연산 9년 3월 9일(병자) 지진 금산, 진산 중종 12년 4월 1일(병오) 우박 금산, 진산 중종 12년 5월 4일(무인) 우박 진산 중종 12년 윤12월 6일(정축) 뇌진 진산 중종 13년 4월 27일(병신) 우박 금산 중종 13년 7월 24일(신유) 지진 진산 중종 14년 4월 14일(정축) 지진 금산 제1장 전통사회 601
57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602 중종 14년 8월 9일(경오) 지진 금산, 진산 중종 14년 10월 6일(병인) 지진 금산 중종 15년 3월 17일(을사) 서리 금산 중종 15년 4월 4일(신유) 서리 진산 3일 잇따라 내렸다. 중종 15년 4월 5일(임술) 서리 금산 중종 15년 4월 12일(기사) 서리 금산 중종 16년 1월 7일(경신) 우뢰 금산 중종 16년 1월 8일(신유) 지진 금산, 진산 중종 16년 2월 4일(정해) 지진 진상 중종 16년 3월 15일(정묘) 서리 금산, 진산 중종 16년 3월 29일(신사) 서리 금산 중종 16년 11월 25일(계유) 뇌성 금산 중종 18년 윤4월 4일(갑진) 우박 금산 중종 18년 12월 2일(무술) 천둥 금산 중종 19년 3월 15일(경진) 우박 금산 중종 21년 3월 23일(병오) 우박 금산 중종 22년 5월 5일(신사) 우박 금산 중종 23년 4월 13일(갑인) 흙비 금산 중종 23년 4월 14일(을묘) 서리 금산 중종 24년 4월 7일(임신) 우박 금산 중종 26년 9월 6일(병진) 지진 금산 중종 26년 11월 2일(임자) 천둥 금산 중종 26년 11월 2일(임자) 지진 진산 중종 30년 4월 30일(경신) 우박 금산 중종 30년 8월 17일(을사) 지진 진산 중종 33년 9월 29일(기해) 천둥 금산 중종 37년 12월 22일(정유) 지진 금산 중종 37년 12월 22일(정유 지진 진산 중종 39년 2월 3일(임신) 지진 금산, 진산 명종 즉위년 9월 23일(계미) 천둥, 번개, 우박 진산 명종 2년 4월 16일(정유) 서리 금산 명종 2년 5월 15일(을축) 전염병 금산 명종 3년 2월 11일(무오) 지진 금산 명종 3년 9월 15일(정해) 천둥/번개 금산 명종 7년 6월 18일(기사) 지진 금산, 진산 명종 9년 11월 10일(정미) 지진 진산 명종 11년 7월 4일(경신) 충해 금산 논에 흑황색의 벌레가 생김 명종 11년 9월 14일(기사) 우박 진산 명종 12년 4월 7일(경인) 기이현상 금산 기형 병아리가 태어남 명종 13년 윤7월 7일(임오) 서풍/비/우박 금산 명종 13년 8월 15일(기미) 기이현상 금산 겨드랑이로 아이출산 명종 15년 7월 7일(신미) 벼락 금산 여자가 벼락 맞아 죽음 명종 16년 11월 23일(기유) 지진 금산 명종 16년 11월 26일(임자) 천둥 금산 명종 18년 11월 5일(경진) 천둥 금산
58 명종 21년10월 16일(계유) 천둥 금산 선조 33년 4월 13일(병술) 서리 금산 선조 39년 7월 26일(계사) 번개 진산 인조 7년 6월 2일(을묘) 누리(우박) 금산, 진산 인조 18년 6월 4일(갑인) 우박 금산 인조 19년 9월 4일(정축) 지진 금산, 진산 인조 22년5월 10일(정유) 서리 금산 진산도정( 珍 山 都 正 ) 이유령( 李 有 齡 )의 아내 신씨( 申 氏 ) 및 여종이 벼락 맞아 죽음 효종 3년 4월 28일(기사) 서리 금산 수령의 실정을 파악하라고 명함 효종 7년 5월 15일(계사) 서리 금산 효종 8년 6월 21일(임진) 폭우 금산 산이 무너져 백성이 압사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고 전세를 감면하도록 함 효종 8년 6월 29일(경자) 수재 금산 사망자가 무려 40여 명이나 됨 현종 5년 8월 23일(임오) 우박 진산 현종 6년 5월 6일(신묘) 우박 진산 현종 7년 1월 26일(정미) 기이현상 금산 소가 몸통은 하나에 머리가 둘인 송아지를 낳다 현종 11년 4월 19일(을사) 서리 금산 기장과 목화밭이 많은 손상 현종 11년 12월 25일(무신) 지진 진산 숙종 9년 1월 18일(경신) 지진 금산 숙종 41년 8월 1일(갑자) 우박 금산 경종 1년11월 15일(임인) 지진 진산 하루에 두 차례나 지진이 일어남 경종 3년( 3월 27일(병오) 서리 진산 벼가 손상됨 영조 4년 6월 10일(기축) 기이현상 금산 머리가 둘이고 눈이 넷이고 귀가 셋이고 입이 둘이고 코가 둘이었다. 영조 7년(6월 11일(임인) 우박, 서리 진산 5월에 우박이, 6월에는 서리가 내렸다. 영조 13년 1월 5일(갑오) 천둥, 번개 금산 병진년(작년) 12월 21일 천둥, 번개 영조 22년 4월 12일(정축) 역병 금산 금산 등 21개 고을에 사망자 949인 2) 진산사건(신해사옥) 제1장 전통사회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은 초기 천주교 전래에 큰 역할을 한 인물로 당색은 남인이 었다. 1791년 전라도 진산군( 珍 山 郡 )의 선비 윤지충( 尹 持 忠 )과 권상연( 權 尙 然 :윤치 중의 外 弟 )이 윤지충의 모친이 사망했을 때 제사( 祭 祀 )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워 버리고, 가톨릭교식으로 제례( 祭 禮 )를 지냈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문제가 야기되었다. 특히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조선 전통사회에서 조상숭배를 거부하여 신주를 불태워 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던 사실은 일거에 조선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체포되어 전라도 전주로 압송되어 사형 이 집행되었고 지방 각지의 천주교신자들은 속속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거나 배교를 선언하고 풀려 났다. 603
59 이것을 1791년의 진산사건 또는 신해박해라고 하는데 조선에서 발생한 최초의 본격적인 천주교 탄압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진산사건은 1790년 북경 구베 아 주교(Gouvea, 프란치스코회)가 교황청의 금령( 禁 令 )에 따라 조선에 전한 조상제 사금지의 서한( 書 翰 )이 배경이 되었다. 특히 관련자들이 대부분 당시 집권파였던 남인( 南 人 ) 계통에 속하였기 때문에 문 제는 더욱 심각하게 확대되었다. 이 문제로 남인은 신서파( 信 西 派 :가톨릭교 신봉을 묵인)와 공서파( 攻 西 派 :가톨릭교 탄압)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정조실 록 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일을 제일 먼저 공론화 한것은 홍낙안( 洪 樂 安 )으로 정조실록 15년(1791) 10 월 23일 기사에는 권상연 윤지충의 처벌을 청한 글과 홍낙안이 좌의정 채제공에 게 보낸 편지가 소개 되어 있어 그 심각성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일부를 간략히 소개 하여 보면,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604 우리 나라는 예의로 나라를 세워 지금 수천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지극히 패 란하고 무도한 자가 있더라도 부모가 살았을 때는 섬기고 죽으면 장사지내는 예를 감히 어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혹 예법에 틀리고 어긋나는 일이 무식하여 함부로 행동하는 저 시골구석의 천민들 속에서 나오더라도 오히려 동네에서 배척하고 수령이 징계하여 한 치도 이를 어기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저 윤지충의 무리들은 (중 략) 제사를 폐지하는 것도 모자라 초상을 당하더라도 혼백( 魂 帛 )을 세우지 않고 부모 가 죽어도 조문을 받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기까지 합니다. 그런 줄을 모르고 가서 조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대답하기를 축하할 일이지 위로할 일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아, 실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천리가 생긴 이후 어찌 이런 변괴가 있었겠습니까. 율문에 이르기를 남의 신주를 손상시킨 자는 그 죄가 살인과 같다. 고 하였는데, 더 구나 제 손으로 그 조상의 신주를 태워버렸으니, 이는 시역( 弑 逆 )의 변괴와 조금도 다 를 것이 없습니다. (중략) 그 죄악을 따져 보면 흉역보다 백 배나 더하니, 이런 것 을 분명히 처벌하지 않는다면 삼강 오륜은 다시는 찾을 길이 없고 4백 년 동안 예의를 지켜 온 우리 나라가 장차 침몰해서 짐승과 오랑캐의 구역이 되고 말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 어찌 가슴이 막히지 않겠습니까. 라고 비판 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당쟁과 관계지어 졌으며, 결국 국가적 문제로 대두되어 아래로 는 관학의 유학생들부터 위로는 조정의 대신 신료들까지 관계되는 사건으로 번져 갔다.
60 전라도 진산의 양반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은 남인의 명문세족으로 7 대조가 윤선도이며, 증조모는 이수광의 증손녀였다. 권상연은 권근의 후예로 윤지 충과 고종사촌이 된다. 1784년 천주교에 입교한 윤지충은 3년동안 천주실의, 칠 극 등을 공부한 후 1787년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 바오로라는 세례명으 로 세례를 받았다. 권상연은 윤지충으로부터 책을 빌려 읽고 신앙에 눈을 떠 윤지 층으로부터 야고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1790년 윤유일을 통해 북경으로부터 조상 제사를 금하는 소식이 전해진 것을 알고 있던 윤지충은 1792년 5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초빈만 치른 뒤, 신주를 모시지 않고 유교의식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자, 조문 왔던 친척들에 의해 고발 되었다. 윤지충은 전라감영에 잡히어 자신이 천주교에 입교한 과정, 천주실의 와 칠 극 의 내용, 하느님은 인류의 아버지이며 창조주시라는 것,사람은 영혼과 육신으 로 결합되었다는 것, 충과 효는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것 등의 최초의 호교론을 작 성하여 제출하였다. 그는 신주를 폐기하고 제사를 드리지 않는 이유를 첫째, 신주 는 목수가 만든 나무조각에 불과하고, 둘째, 죽은 사람을 위해 음식을 바치는 것은 비논리적이며, 주무시는 동안도 음식을 드리지 않는데 하물며 죽음이라는 긴 잠을 드신 분들에게 음식을 드리는 것은 허례허식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형조는 이들의 죄목에 마땅히 벌줄만한 법조문이 없어 신주를 불사른 것은 무덤 을 파헤친 발총죄에 해당하고 요사스런 글과 사악한 술수로 천주교를 전한 것은 무 당의 사술과 같은 사무사술 에 해당한다 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1791년 11월 13일 윤지충은 서른 셋의 나이로 오후 3시에 전주형장(지금의 전주 전동성당 자리)에서 권상연과 같이 처형되었다. 결국 이렇게 정조는 1791년 11월 8일 윤지충과 권상연을 사형에 처하고 또한 진 산군( 珍 山 郡 )은 5년을 기한으로 현( 縣 )으로 강등하고, 진산 군수 신사원( 申 史 源 )을 그 지방에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경외에 효유하여 집안에 서양 책을 소장한 자는 관청에 자수하게 하고, 묘당과 각도( 各 道 )로 하여금 각기 글을 읽고 행실을 닦 는 선비들을 천거하도록 하였다.( 정조실록 15년 11월 8일) 그러나 조정은 계속 이 사건을 둘러싸고 남인 계통이면서 당시의 상신( 相 臣 )인 채제공( 蔡 濟 恭 )을 중심으로 한 신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홍의호( 洪 義 浩 ) 홍낙안 ( 洪 樂 安 ) 등의 공서파가 대립하여 순조 1년(1801)의 신유박해( 辛 酉 迫 害 )로 신서파 가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 때까지 10년간의 암투가 계속되었다. 제1장 전통사회 605 집필 : 이해준(공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61 부록 [표 23] 금산군읍지( 錦 山 郡 邑 誌 )에 기록된 선생안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606 박숭문( 朴 崇 文 ) 김언거( 金 彦 据 ) 이문병( 李 文 炳 ) 유충관( 柳 忠 寬 ) 김지( 金 祗 ) 이은우( 李 殷 雨 ) 양자유( 楊 子 由 ) 이무강( 李 無 疆 ) 권임( 權 任 ) 김언거( 金 彦 据 ) 윤희손( 尹 喜 孫 ) 임억령( 林 億 齡 ) 유약( 柳 約 ) 김생해( 金 生 海 ) 안윤손( 安 閏 孫 ) 노대축( 盧 大 畜 ) 장충보( 張 忠 輔 ) 신희복( 愼 希 復 ) 정종보( 鄭 宗 輔 ) 안종전( 安 從 琠 ) 모두 상고할 수가 없음. 이사공( 李 思 恭 ) 이억상( 李 億 祥 ) 권성( 權 晟 ) 이력( 李 櫟 ) 정광보( 鄭 光 輔 ) 이의신( 李 義 臣 ) 정웅( 鄭 熊 ) 이정( 李 侹 ) 김극제( 金 克 悌 ) 조유성( 趙 惟 誠 ) 임만근( 林 萬 根 ) 임희무( 林 希 茂 ) 최극성( 崔 克 成 ) 홍인범( 洪 仁 範 ) 정세소( 鄭 世 紹 ) 신희남( 愼 喜 南 ) 노종원( 盧 從 元 ) 1580~1581 파직 송정순( 宋 廷 筍 ) 1581~1586 체직 떠남 심희수( 沈 喜 壽 ) 1586~1588 박정립( 朴 挺 立 ) 1589~1591 파직 김현성( 金 玄 成 ) 1591~1592 파직 권종( 權 悰 ) 1592~1592 파직 이천문( 李 天 文 ) 1592~1594 파직 오정방( 吳 定 邦 ) 1594~1594 체직 김거병( 金 去 病 ) 1594~1596 파직 심은( 沈 訔 ) 1596~1596 파직 홍창세( 洪 昌 世 ) 1597~1598 파직 김극충( 金 克 忠 ) 1598~1599 파직 김홍원( 金 弘 遠 ) 1599~1600 사임 구의강( 具 義 剛 ) 1600~1601 사임 이심( 李 ) 1601~1601 파직 이대수( 李 大 遂 ) 1601~1603 사임 이익빈( 李 翼 賓 ) 1603~1608 체직 김태국( 金 泰 國 ) 1608~1608 파직 우복룡( 禹 伏 龍 ) 1608~1610 사임 권희문( 權 憘 文 ) 1610~1611 파직 이안눌( 李 安 訥 ) 1611~1613 체직 김원록( 金 元 祿 ) 1613~1618 체직
62 민성징( 閔 聖 徵 ) 1618~1620 체직 권성기( 權 成 己 ) 1620~1623 체직 김덕겸( 金 德 謙 ) 1623~1624 파직 이인민( 李 仁 民 ) 1625~1627 파직 윤형은( 尹 衡 殷 ) 1627~1630 파직 심액( 沈 詻 ) 1630~1632 체직 김성발( 金 聲 發 ) 1632~1636 사임 윤천구( 尹 天 衢 ) 1636~1638 체직 김련( 金 鍊 ) 1638~1642 체직 조수익( 趙 壽 益 ) 1642~1644 체직 정복길( 鄭 復 吉 ) 1645~1645 체직 이만영( 李 萬 榮 ) 1645~1646 파직 홍처대( 洪 處 大 ) 1646~1648 파직 임서( 林 瑞 ) 1649~1649 파직 심지한( 沈 之 漢 ) 1650~1651 파직 남두첨( 南 斗 瞻 ) 1651~1654 체직 김삼락( 金 三 樂 ) 1654~1654 파직 심억( 沈 檍 ) 1655~1656 파직 변명익( 邊 命 益 ) 1656~1659 파직 안헌징( 安 獻 徵 ) 1659~1662 체직 엄정구( 嚴 鼎 耈 ) 1662~1664 사임 김종일( 金 宗 一 ) 1664~1665 파직 이민장( 李 敏 章 ) 1665~1669 사임 정재후( 鄭 載 厚 ) 1669~1670 파직 이최( 李 最 ) 1670~1672 체직 이성뢰( 李 聖 賚 ) 1672~1672 체직 정시성( 鄭 始 成 ) 1672~1672 체직 이명하( 李 鳴 夏 ) 1673~1673 파직 이중휘( 李 重 輝 ) 1673~1676 파직 채시구( 蔡 時 龜 ) 1676~1677 체직 안명로( 安 命 老 ) 1677~1678 파직 이국헌( 李 國 憲 ) 1678~1683 체직 권양( 權 讓 ) 1683~1685 파직 권특( 權 特 ) 1685~1687 체직 송기태( 宋 基 泰 ) 1687~1688 파직 송도흥( 宋 道 興 ) 1688~1688 체직 이성조( 李 成 朝 ) 1688~1690 파직 이형상( 李 衡 祥 ) 1690~1690 체직 목창기( 睦 昌 期 ) 1690~1692 체직 성대경( 成 大 經 ) 1692~1694 체직 여성거( 呂 聖 擧 ) 1694~1695 파직 김만준( 金 萬 埈 ) 1695~1695 파직 이이명( 李 頤 命 ) 1695~1696 체직 제1장 전통사회 607
63 제2편 금산군의 발자취 608 정추( 鄭 推 ) 1696~1699 체직 이당( 李 堂 ) 1699~1701 체직 정필동( 鄭 必 東 ) 권민( 權 愍 ) 1701~1702 체직 조원붕( 趙 遠 朋 ) 1702~1703 체직 심제현( 沈 齊 賢 ) 1703~1705 파직 이세면( 李 世 勉 ) 1705~1708 체직 권상( 權 尙 ) 1708~1709 파직 이문흥( 李 文 興 ) 1709~1711 파직 여필관( 呂 必 寬 ) 1712~1714 체직 이정신( 李 正 臣 ) 1714~1715 체직 윤홍( 尹 泓 ) 1716~1718 체직 구봉창( 具 鳳 昌 ) 1719~1721 체직 송요좌( 宋 堯 佐 ) 1721~1722 체직 이우하( 李 宇 夏 ) 1722~1724 체직 홍응몽( 洪 應 夢 ) 1725~1725 체직 강계부( 姜 啓 溥 ) 1725~1726 파직 김시발( 金 時 發 ) 1726~1726 파직 이제항( 李 齊 恒 ) 1727~1727 체직 이덕린( 李 德 隣 ) 1727~1728 체직 박창징( 朴 昌 徵 ) 1728~1730 체직 이형( 李 炯 ) 체직 조명종( 曺 命 宗 ) 1730~1733 체직 조동점( 趙 東 漸 ) 1733~1734 체직 조상기( 趙 尙 記 ) 1734~1737 체직 박필기( 朴 弼 基 ) 1737~1739 체직 윤심( 尹 審 ) 1739~1739 체직 이정점( 李 廷 漸 ) 1741~1745 파직 박사한( 朴 師 漢 ) 1745~1749 파직 김술노( 金 述 魯 ) 1749~1754 체직 송진흠( 宋 晉 欽 ) 1754~1757 체직 민백흥( 閔 百 興 ) 1757~1761 체직 서각수( 徐 覺 修 ) 1761~1766 체직 서유경( 徐 有 慶 ) 1766~1770 체직 조재한( 趙 載 翰 ) 1770~1773 체직 이학원( 李 學 源 ) 1773~1776 체직 김두열( 金 斗 烈 ) 1776~1776 체직 김이안( 金 履 安 ) 1776~1779 체직 이홍지( 李 弘 之 ) 1779~1781 체직 박존원( 朴 存 源 ) 1782~1785 사임 이운영( 李 運 永 ) 1785~1789 체직 윤회동( 尹 晦 東 ) 1789~1792 세상을 떠났다.
64 참 고 문 헌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사마방목 곽호제, 1999, 壬 辰 倭 亂 期 湖 西 義 兵 硏 究, 충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곽호제, 2000, 임진왜란기 이치대첩의 의의와 재검토, 충남사학 12, 충남사학회. 금산군, 1987, 錦 山 郡 誌, 금산군지편찬위원회. 김면성, 2006, 태조대왕태실에 관하여, 금산역사문화연구 제3호, 금산역사문화연구소. 김상기, 2000, 임진왜란기 권율의 이치대첩, 충남사학 12, 충남사학회. 변원종, 2006, 가례원류의 구성과 市 南 의 禮 生 인식, 市 南 兪 棨 의 생애와 사상 (한남대 충청학연구소). 성주탁, 2001, 明 齋 尹 拯 의 생애와 사상, 충남대 유학연구소. 이정우, 1998, 朝 鮮 後 期 在 地 士 族 의 動 向 과 儒 林 의 鄕 村 支 配 - 全 羅 道 錦 山 郡 書 院 鄕 校 의 치폐와 古 文 書 類 의 작성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7, 조선시대사학회. 이해준 편, 1997, 금산지역의 고문서, 금산문화원. 조원래, 2000, 임란 초기 두 차례의 금산전투와 그 전략적 의의, 충남사학 12, 충남사학회. 조원래, 2000, 任 亂 初 期 두차례의 금산전투와 그 戰 略 的 의의, 충남사학. 최근묵, 2000, 壬 辰 倭 亂 期 錦 山 戰 鬪 의 殉 節 과 梨 峙 大 捷 에 대한 崇 揚, 忠 南 史 學. 충청남도, 1999, 충남의 향교. 충청남도, 1999, 충남의 서원 사우. 충청남도, 2003, 문화유적분포지도(금산군). 충청남도지편찬위원회, 2008, 충청남도지 6 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허경진, 2004, 금산 지리지, 금산군. 제1장 전통사회 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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緊 張 冷 戰 體 制 災 難 頻 發 包 括 安 保 復 舊 地 震 人 類 史 大 軍 雷 管 核 禁 忌 對 韓 公 約 ㆍ 大 登 壇 : : : 浮 上 動 因 大 選 前 者 : : : 軸 : : : 對 對 對 對 對 戰 戰 利 害 腹 案 恐 喝 前 述 長 波 大 産 苦 逆 說 利 害 大 選 大 戰 略 豫 斷 後 者 惡 不 在 : : 對 : 軟 崩 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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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KR000****4 설 * 환 KR000****4 송 * 애 김 * 수 KR000****4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第 6 條 ( 壹 株 의 金 額 )..
제 정 1973. 2. 28 개 정 2010. 3. 19 定 款 삼성전기주식회사 http://www.sem.samsung.com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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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회의원 명단 당적표시는 당선당시(총선결과, 재 보궐당선, 의석승계) 소속정당을 나타냄. 제9 10대 국회의원의 당적중 국민회의 표시부분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선출한 국회의원임. 제헌국회 (당적은 당선당시의 당적임) 성 명 선 거 구 당 적 비 고 성 명 선 거 구 당 적 비 고 姜 己 文 산 청 無 所 屬 金 若 水 동 래 朝 鮮 共 和 黨
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棄 権 DNS: 欠 場 ) 順 位 氏 名 記 録 順 位 氏 名 記 録 順 位 氏 名 記 録
7 청보 86. 3. 29( 對 삼성 )~4. 5( 對 빙그레 ) NC 13. 4. 2( 對 롯데 )~4. 10( 對 LG) 팀별 연패 기록 삼 미 18 연패 ( 85. 3. 31~4. 29) 쌍방울 17 연패 ( 99. 8. 25~10. 5) 롯 데 16 연패 ( 0
전반, 타격, 투수, 수비 진기록 전반 시즌 최고 승률 0.706 85 삼성 (110 경기 77승 32패 1 무) 기별 최고 승률 0.741 85 삼성 ( 전기 55경기 40승 14패 1 무) 시즌 최저 승률 0.188 82 삼미 (80 경기 15승 65 패) 기별 최저 승률 0.125 82 삼미 ( 후기 40경기 5승 35 패) 시즌 최다 승리 91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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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2002 年 2 月 昌 原 大 學 校 大 學 院 音 樂 科 安 明 基 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Sonata for B-fl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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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요 보직자 명단 (2014년 4월 1일 현재) (1) 교무위원 총장 부총장(인사캠) 부총장(자과캠) 부총장(의무) 일반대학원장 학부대학장 유학대학장 문과대학장 법과대학장 사회과학대학장 경제대학장 경영대학장 자연과학대학장 정보통신대학장 공과대학장 약학대학장 사범대학장 생명공학대학장 스포츠과학대학장 의과대학장 예술대학장 기획조정처장 교무처장 학생처장 산학협력단장
다문화 가정 중학생의 문식성 신장 내용
교육연구 제58집 성신여대 교육문제연구소 2013년 12월 30일 2009 改 定 敎 育 課 程 에 따른 中 學 校 漢 文 敎 科 書 의 多 文 化 敎 育 에 對 한 一 見 이돈석 청주대학교 한문교육과 Ⅰ. 들어가는 말 Ⅱ. 한문 교과 교육과정 목표에 대한 검토 Ⅲ. 중학교 한문 교과서 분석 목 차 1. 재제 출전의 문제 2.. 교육 내용과 제시 방법의 문제
211 1-5.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石 村 洞 百 濟 初 期 積 石 塚 이도학, (서울의 백제고분) 석촌동 고분, 송파문화원, 2004. 서울 特 別 市, 石 村 洞 古 墳 群 發 掘 調 査 報 告, 1987. 1-6. 고창지석묘군 高 敞 支 石 墓 群 문화재관리국,
210 참고문헌 1. 능묘 1-1. 경주황남리고분군 慶 州 皇 南 里 古 墳 群 경상북도, 文 化 財 大 觀, 1-V, 慶 尙 北 道 編, 2003. 문화재관리국, 天 馬 塚 發 掘 調 査 報 告 書, 1974. 1-2. 함안도항리 말산리고분군 咸 安 道 項 里 末 山 里 古 墳 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咸 安 道 項 里 古 墳 群 5, 2004.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Readings at Monitoring Post out of 20 Km Zone of Tokyo Electric Power Co., Inc. Fukushima Dai-ichi NPP(18:00 July 29, 2011)(Chinese/Korean)
碘 岛 监 结 30km 20km 10km 碘 达 碘 测 时 提 高 后 的 上 限 [250,000 微 西 弗 / 年 ] [10,000 微 西 弗 / 年 ] 巴 西 瓜 拉 帕 里 的 辐 射 (1 年 来 自 地 面 等 ) > 辐 射 量 ( 微 西 弗 ) 250,000 100,000 50,000 10,000 注 : 本 资 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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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명 497 색 인 인 명 (ㄱ) 강경중 姜 敬 重 182, 193 강덕상 姜 德 相 137 강만철 姜 萬 哲 149, 159 강만희 姜 萬 熙 135 강무형 姜 懋 馨 134 강문선 姜 門 善 88 강병학 姜 丙 學 390 강봉상 姜 奉 相 137 강봉진 姜 奉 辰 150 강석희 姜 奭 熙 133, 139, 158, 225 강선보 姜 善 甫 128,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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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004. 12 2004. 11 25 26 2004. 12 % 50 40 30 20 10 0 華 東 華 北 中 南 西 南 東 北 西 北 전 체 중 대 형 차 중 형 차 소 형 차 경 차 2004. 11 27 帕 28 2004. 12 2004. 11 29 30 2004. 12 2004. 11 31 32 2004. 12 2004. 11 33 3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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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1 前 言 現 行 考 銓 制 度 一 現 行 考 銓 制 度 對 人 事 行 政 的 重 要 性 : 強 烈 建 議 考 人 事 行 政 的 同 學 們, 一 定 要 精 讀 現 行 考 銓 制 度! 熟 讀 現 行 考 銓 制 度 的 好 處, 可 以 從 以 下 幾 個 角 度 來 分 析 : 相 對 重 要 程 度 高 : 現 行 考 銓 制 度 在 人 事 行 政 三 個 主 要 等
名門家 명문가 기록관리의 변천 2011년 부천 족보전문 도서관 變遷 序 文 나이 스물을 조금 넘겨 군대 생활을 할 때 우연찮게 족보를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즈음에는 문맹률도 높았고 그래서, 당히 각 가정에서 책을 구경하기란 아마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얘기 같지만 국민학교 교과서 정도가 전부이지 동화나 소설이나 잡지는 구경할 수도 없었다. 혹여 나름대로
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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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Story 2012. 9. 13. Story 1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2 STORY STORY 12 호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2 Korean Wave Story 2012 (2012년 1/4분기) 12 호 12 호 2012. 4. 9. 2 3 4 5 轩 辕 剑 之 天 之 痕 我 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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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Story 2013. 1. 30. Story 2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3 STORY STORY 12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3 Korean Wave Story 2013 (2012년 1/4분기) 12 12 2012. 4. 9. 2 3 4 5 6 乱 世 佳 人 花 絮 合 集 梦 回 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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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이 책에서는 단순히 가난한 관리들의 이야기보다는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사심 없이 헌신한 옛 공직자들의 사례들을 발굴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공과 사를 엄정히 구분하고,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공무를 처리한 사례,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최부, 송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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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고 대한변호사협회공고... 공증합동 법무법인 구성원 등 변경사항----------------------------------------------- 변협공고 2006-1 공증합동 법무법인의 구성원변동, 소속변호사변동 등을 협회 공증합동법률사무소설립등에관한규 칙 제7조 및 법무법인의설립등에관한규칙 제7조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공고한다. 2006. 1. 1.
항일 봉기와 섬멸작전의 사실탐구
抗 日 蜂 起 와 殲 滅 作 戰 의 史 實 探 究 - 韓 國 中 央 山 岳 地 帶 를 中 心 으로- 이노우에 가츠오( 井 上 勝 生 ) 1) 머리말 지난 해(2015년) 10월과 11월, 日 本 軍 東 學 黨 討 伐 隊 의 進 軍 路 를 한국의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조사할 수 있었다. 後 備 第 19 大 隊 (당시 東 學 黨 討 伐 隊 라고 불리었다) 第 1
98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주요어 : 농업기술, 농서집요, 농상집요, 수도, 휴한법, 연작법 1. 머리말 한국사에서 14세기는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국가 지배체제가 크게 격변한 시기였다. 고려말 고려 사회 내부와 외부에서 발생한 여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 염 정 섭** < 국문초록 > 15세기 초반 태종대에 만들어진 농서로 현재 農 書 輯 要 가 남아 있다. 이 농서는 元 代 의 農 書 인 農 桑 輯 要 를 抄 錄 하고 吏 讀 를 붙여 간행한 것이었다. 간행연대가 아직 불확실하지만 15세기 초반 태종대로 추정된다. 고려말
POWERSHELL CONTROLLER + BATTERY Setup Guide English............................... 4 繁 體 中 文.............................. 12 한국어............................... 20 www.logitech.com/support................
노상추 일기
1768년 11월 13일: 丁 酉 비가 떨어지다가 맑음. 아침에 가묘( 家 廟 )의 제사( 祭 祀 )에 참여 ( 參 與 )함. 늦게야 별묘( 別 廟 :가묘에서 받들 수 없이 된 신주( 神 主 )를 모시는 사당( 祠 堂 ))의 제사( 祭 祀 )에 參 與 함, 점심때가 될 때 월파( 月 波 )와 형곡( 衡 谷 )의 삼종 대부( 三 從 大 夫 ) 및 백송족숙( 白
문서, 셋째 이응인의 사실진술서인 초사, 넷째 증인인 이희무의 초사, 다섯째 경주 부 공증문서인 사급입안으로 구성되어 있다. 점련된 순서대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 번째 소지에서 이전인이 자신의 동생인 이응인과 노비를 교환한 사실에 대해 사 급입안을 발급해줄 것을 경주
양반문화의 명암 - 적자와 서자 安 承 俊 (한국학중양연구원 책임연구원) 조선왕조가 활력을 잃고 결국은 국망이 길을 가게 된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인재등용의 실패, 요컨대 인력 등용시스템을 제때에 업그레이드하 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닌가한다. 양반들에게 노비의 세전( 世 傳 )을 사실상 허용해주거나, 조선 말까지 중인층(서얼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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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명 455 색 인 인 명 (ㄱ) 가츠라 타로 桂 太 郞 342, 343, 344 강건회 姜 建 會 164, 294, 295, 313 강규 姜 奎 32, 218 강기만 姜 基 萬 130, 177, 300 강기영 姜 基 永 61, 255, 412 강대근 康 大 根 176 강문 姜 汶 46, 240 강병업 康 昞 業 176, 327, 335, 349 강병주 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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固 城 栗 垈 2 農 工 團 地 造 成 事 業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2003. 11 慶 南 發 展 硏 究 院 歷 史 文 化 센터 固 城 栗 垈 2 農 工 團 地 造 成 事 業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Ⅰ. 調 査 槪 要 1. 調 査 目 的 고성군에서 추진중인 율대 농공단지 확장예정지에 대해 문화재보호법 제74-2와 동법 시행령 제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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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보 자 명 단 비례대표 국회의원선거 후보자(정당) 명단 비례대표국회의원선거 기 호 정 당 명 비 고 1 새 누 리 당 2 더 불 어 민 주 당 3 국 민 의 당 4 정 의 당 5 기 독 자 유 당 6 민 주 당 7 코 리 아 8 일제 위안부 인권정당 9 개 혁 국 민 신 당 10 고용복지연금선진화연대 11 공 화 당 12 불 교 당 13 기 독 당 14
2009-12-17-탁양현-조선 사대부와 ‘정치’라는 숙명.hwp
1 조선 사대부와 정치 라는 숙명 탁양현(20091217) 1. 여는 말 역사( 歷 史 )라는 말에는 흔히 Geschichte와 Historie라는 의미가 동시에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임수길은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 의 제2편 각주에서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의 의 원어는 Geschichte가 아니라 Historie이다. Geschichte는
33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문 * 웅 입주자격소득초과 34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송 * 호 입주자격소득초과 35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나 * 하 입주자격소득초과 36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최 * 재 입주자격소득초
1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주 830516 입주자격소득초과 2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연 711202 입주자격소득초과 3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이 * 훈 740309 입주자격소득초과 4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이 * 희 780604 입주자격소득초과 5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안 *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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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韓 國 禪 學 제36호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의 贈 序 文 에 보이는 불교 인식 * 김상일(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Ⅱ 목 차 Ⅱ Ⅰ. 시작하는 말 Ⅱ. 조선전기 문인사대부와 불교 관련 증서류 산문 Ⅲ. 불교적 가치관에 대한 비판과 유교 윤리 권면 Ⅳ. 유불 교유론 Ⅴ. 유불 조화론 1. 김수온: 唯 心 一 理 的 儒 佛 融 通 論 2. 성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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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도 한일공동이공계학부유학생 선발시험 응시대상자 명단 국제교육진흥원 연번 출신지역 성명 한자명 성별 출신학교 비 고 1 강원도 김경연 金 慶 演 남 원통고등학교 2 강원도 김수리 金 수리 여 춘천여자고등학교 3 강원도 김현석 金 玹 奭 남 강원과학고등학교 4 강원도 변준환 邊 俊 煥 남 강원과학고등학교 5 강원도 송강일 宋 江 一 남 민족사관고등학교
토픽 31호(2016.3.7).hwp
절실히 묻고 가까이 실천하는 선진 산림과학 3.0 시대를 열겠습니다! 01 03 05 05 06 07 08 08 10 10 11 임업인에게는 희망을, 국민에게는 행복을 带 NIFoS 1 중국 닝샤회족자치구() 중국 무슬림 인구 주요 분포도 중국 닝샤의 회족 자치구 3 중국 무슬림 인구 Top 11 지역 순위 지역( 省 ) 인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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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征 日 記 신류 申 瀏 1619~1680 본관 평산 平 山 훈련원부정 삼도수군통제사 등 역임, 1658년 영장 領 將 으로 나선정벌 羅 禪 征 伐 신기석 역, ꡔ북정일기ꡕ, 탐구당, 1980 북정일기 북 정 일 기 北 征 日 記 포사수( 砲 射 手 ) 방포( 放 砲 ) 시재( 試 才 ) ꡔ북정일기ꡕ 무술 효묘 9년 순치15년 4월 初 十 日 晴 往 會 寧
완치란 일반인들과 같이 식이조절과 생활관리를 하지 않아도 다시 통풍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의 통풍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로릭과 진통 소염제로 버텼는지 이제 저한테 하소연 하시고 완치의 길로 가면 다. 어렵지 않습니다. 1 2015 11 10
완치란 일반인들과 같이 식이조절과 생활관리를 하지 않아도 다시 통풍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의 통풍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로릭과 진통 소염제로 버텼는지 이제 저한테 하소연 하시고 완치의 길로 가면 다. 어렵지 않습니다. 1 2015 11 10 # 2012 000081 1 000 95% 95% 60 5 B 507 070 4651 37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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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연구 2006 겨울호 제29권 제4호(통권 105호) pp. 119~148. 硏 究 論 文 주자학에서 혼백론의 구조와 심성론과의 관계 * 김 우 형 ** 1) Ⅰ. 서론: 귀신론과 혼백론 Ⅱ. 북송시대 주자학에서의 혼백과 귀신 Ⅲ. 주희 혼백론의 구조 Ⅳ. 혼백론에서 심성의 지각론으로 Ⅴ. 결론: 혼백론을 통해 본 주자학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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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 1) 명 경 일 ** 1. 머리말 2. 判 付 의 개념과 구성요소 3. 判 付 의 작성절차에 따른 서식의 변화 4. 맺음말 초록: 조선시대 주요 관아가 각자 맡은 업무에 관하여 국왕에게 아뢸 때 사용한 문서를 계 啓 라고 했다. 그리고 啓 에 대한 국왕의 처결을 判 付 라고 했다. 본 논문은 판부의 작성 절차와 서식을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 관한 개략적인 소개가 있었지만, 1) 여전히 많은 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실정이다. 본고 또한 여전히 짧고 소략한 내용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39-44, 2008년 6월 Yonsei J Med Hist 11(1): 39-44, 2008 일반논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 신창희( 申 昌 熙 )의 생애와 활동 박 형 우(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홍 정 완(연세대 의사학과)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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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 객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객사는 영조 35년(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입니다. 원래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습니다. 정당에서는 전하 만만세 라고 새 긴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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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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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지구총재 354-A지구 1961-1963 全 禮 鎔 (전예용) 서 울 1963-1964 朴 乾 源 (박건원) 서 울 1964-1965 李 大 偉 (이대위) 서 울 1965-1966 鄭 準 謨 (정준모) 서 울 1966-1967 姜 錫 福 (강석복) 서 울 1967-1968 申 禮 鎔 (신예용) 서울남서울 신안과병원 원장 1968-1969 姜 聲 泰 (강성태)
35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5권 1883.01.24 釜 山 口 設 海 底 電 線 條 欵 / 海 底 電 線 設 置 ニ 關 スル 日 韓 條 約 漢 日 1883.06.22 在 朝 鮮 國 日 本 人 民 通 商 章 程 / 朝 鮮 國 ニ 於 テ 日 本 人 民 貿 易 ノ
근현대 한일간 조약 일람* 22) 1. 조선 대한제국이 일본국과 맺은 조약 주) 1. 아래 목록은 國 會 圖 書 館 立 法 調 査 局, 1964 舊 韓 末 條 約 彙 纂 (1876-1945) 上 ; 1965 舊 韓 末 條 約 彙 纂 (1876-1945) 中 ; 外 務 省 條 約 局, 1934 舊 條 約 彙 纂 第 三 巻 ( 朝 鮮 及 琉 球 之 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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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Social Awareness and the Strengthening of Organization by the New faction of Chundogyo in the Early 1930s 1)정 용 서(Jeong, Yong Seo)** Ⅰ. 머리말 Ⅱ. 신간회 해소에 대한 인식 Ⅲ. 반종교운동에 대한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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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財 ) 東 亞 文 化 硏 究 院 地 表 調 査 報 告 第 14 輯 진영읍 신용리 아름다운아파트 신축공사 구간내 文 化 遺 蹟 地 表 調 査 報 告 書 2 0 0 4. 10 目 次 Ⅰ 7. 조사개요 Ⅱ. 역사 ㆍ 고고분야의 조사 8 1. 김해시의 자연환경 1. 8 2. 김해의 역사적 환경 2. 10 3. 조사대상지역 개관 3. 28 Ⅲ 29. 현지조사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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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pectives J of Oriental Neuropsychiatry 2012:23(1):1-15 http://dx.doi.org/10.7231/jon.2012.23.1.001 심신치유를 위한 불교의학, 사상의학, 한의학에서의 心 의 연구 김근우, 박성식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신경정신과 교실,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사상체질과 교실 The Study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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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15일 토요일 제 1444 호 ㅣ 법원행정처 ㅣ 2 제 1444호 법 원 공 보 2014년 3월 15일(토요일) 목 차 내 규 521 대법원사건의 배당에 관한 내규 일부개정내규 예 규 523 법관 및 법원공무원 행동강령 운영지침 일부개정예규 신법령 목록 525 인 사 528 공지사항 599 520 2014년 3월 15일(토요일) 법 원 공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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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umn 2005 No.53 AUTUMN 2005 vol.53 14 28 06 22 우리고장의 역사기행 어진 곳에 있다. 위폐는 국사공배선생(國師公裵先 生) 으로 되어 있으며 현판 역시 려조(麗朝)라고 하 여야 될 것을 라조(羅朝)라고 표기되어 있다. (려조 는 고려를 나타내고, 라조는 신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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腎 系 內 科 學 1. 腎 에 관한 역대 醫 論 簡 略 2 2. 腎 의 해부학적 인식 및 오행적 속성 7 3. 腎 의 생리적 기능 9 4. 腎 과 他 臟 腑 와의 관계 12 5. 命 門 14 6. 腎 膀 胱 의 病 理 16 7. 腎 病 의 辨 證 18 2 1 腎 에 관한 역대 醫 論 簡 略 1. 黃 帝 內 經 에서의 腎 현대 우리나라 한의학의 여러 다른 분야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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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 심리록에 수록된 사례를 중심으로 - 김 용 희 * 차 례 Ⅰ. 서 설 Ⅱ. 심리록에 나타난 지방관리들의 사법행정능력 1. 검험의 기준 2. 검험조서 Ⅲ. 심리록에 나타난 재판의 기본원칙 1. 관용의 원칙 2.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in dubio pro r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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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연구 49(2014.6.30), pp.103-128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870년대 이후 分 院 官 窯 변천 1)방병선* 국문초록 본 논문은 1870년대부터 1910년까지 조선시대 왕실용 자기 생산을 담 당했던 사옹원 분원의 변천 과정과 원인, 이와 관련된 장인과 관리, 제작 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연구 방법은 문헌자료 분석을 중심으로 하였 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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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월말 정년퇴직교원 정부포상자 명단 =================================================================== 연번 이름 한자 직급 소속 =================================================================== 청조근정훈장(4명) 1 선우중호 鮮 于 仲
2020 나주도시기본계획 일부변경 보고서(2009).hwp
2020 나주도시기본계획일부변경 2009 나주시 목 차 Ⅰ. 나주도시기본계획변경개요 1. 도시기본계획변경의배경및목적 1 2. 도시기본계획변경의기본원칙 2 3. 도시기본계획변경의범위 3 4. 추진절차 4 Ⅱ. 도시현황및특성 1. 도시현황및특성 5 2. 역사적 문화적특성 20 3. 도시세력권 24 4. 도시기능 25 5. 상위및관련계획검토 26 6. 개발잠재력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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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학보 제18권 제1호 The Korean Journal of Economics Vol. 18, No. 1(Spring 2011)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 吳 鎭 錫 ** 요 약 본고는 1940년대 전반 전력국가관리의 수립을 대상으로 정책 결정의 주체 에 주목하여 정책의 원안이 등장하여 최종안에 이르는 변천과정을 면밀하 게 분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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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대 초반 대일정책의 전개와 그 특징 1) 김 태 훈 * 1. 머리말 2. 己 酉 約 條 의 성립과 倭 使 上 京 금지 조치 3. 대일정책상의 異 見 조정과 명분 확보 4. 대일정책의 功 利 的 宥 和 的 기조 5. 맺음말 초록: 본 연구에서는 조선후기 대일외교의 출발선이었던 광해군대 초반 대일정책을, 외형적 측면에서 통교틀의 마련, 정책추진의 안정적 기반
중국기본고적 데이타베이스 기능수첩
중국기본고적고 사용설명서 1 로그인( 進 入 ) 1.1시작을 클릭하신후 왼쪽 프로그램에서 AncientBook 을 찾으신후, AncientBookClient 를 클릭하세 요. 1.2 服 務 器 (ip), 用 戶 名 (id), 密 碼 (pw)를 입력 후 진입( 進 入 ) 클릭하세요. 1-3. 아이콘 설명 : 메인페이지 : 최소화 : 화면 닫기 2. 검색( 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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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전 병 술 건국대학교 접 수 일 : 2011년 11월 6일 심사완료일 : 2011년 11월 21일 게재확정일 : 2011년 11월 23일 주제분류 동양철학, 유가, 종교학, 죽음학 주 요 어 삶과 죽음, 생명의 학문, 명( 命 ), 사생취의, 초혼재생 초 록 동양철학의 특질을 생명의 학문 이라 규정하는 견해가 있다. 생명의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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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 2 - - - - 4 - - 5 - - 6 - - 7 - - 8 - 4) 민원담당공무원 대상 설문조사의 결과와 함의 국민신문고가 업무와 통합된 지식경영시스템으로 실제 운영되고 있는지, 국민신문 고의 효율 알 성 제고 등 성과향상에 기여한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를 치 메 국민신문고를 접해본 중앙부처 및 지방자 였 조사를 시행하 였 해 진행하 월 다.
33 경기도 김민수 金 旼 秀 KIM MIN SU 남 일산동고등학교 34 경기도 김범희 金 凡 喜 KIM BEOM HEUI 남 소래고등학교 35 경기도 김선준 金 善 俊 KIM SUN JUN 남 경기북과학고등학교 36 경기도 김성수 金 聖 洙 KIM SUNG SOO 남
2009 한일공동이공계학부유학생 선발시험 응시대상자 명단 국립국제교육원 연번 출신지역 성명 한자명 영문명 성별 출신학교 비 고 1 강원도 김진열 金 眞 烈 KIM JIN YIOL 남 속초고등학교 2 강원도 손동근 孫 東 根 SON DONG GEUN 남 속초고등학교 3 강원도 송용남 宋 容 男 SONG YONG NAM 남 강릉고등학교 4 강원도 안배현 安 倍
5 291
1 2 3 4 290 5 291 1 1 336 292 340 341 293 1 342 1 294 2 3 3 343 2 295 296 297 298 05 05 10 15 10 15 20 20 25 346 347 299 1 2 1 3 348 3 2 300 301 302 05 05 10 10 15 20 25 350 355 303 304 1 3 2 4 356 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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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_특강3] 탁주 일배 앞에 놓고 남한산성의 고금흥망을 이야기하다 - 남한산성과 문학 - 이 승 수 (한양대학교 교수) 1. 사림문로( 史 林 文 路 )의 산책자 넘실넘실 장강은 동쪽으로 흘러가며 물거품이 영웅들을 모두 다 쓸어가니 세상의 시비 성패 잠깐 사이 간 곳 없네 청산은 예전 있던 그대로건만 그새 석양은 몇 번이나 붉었는가 강가에는 백발의 어부와
5권심층-양화1리-1~172
526 527 528 529 530 531 532 332 333 332 사갑 제례 음식준비 334 335 333 진설 334 사갑제례 335 음복 8시부터 8시 30분 사이에 제사에 참여했던 가족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고인의 부인은 제사에 참여한 이 들에게 제사 음식과 반찬거리(깻잎 등)를 골고루 싸 주었고 마을에 거주하는, 제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건강증진 시범보고서 운영을 위한 기술지원 연구
짧활 康 t합샤훌 示 範 띔 健 所 運 營 응 위한 技 術 支 援 웹 JE - 示 範 保 健 所 模 型 開 發 을 中 心 으로l' 鍾 和 李 順 英 鄭 基 뽑 編 著 韓 國 띔 健 社 會 댐 究 院 머 리 말 美 國 이나 日 本 등 先 進 國 의 경우 이미 1970년대 부터 人 口 의 高 敵 化 와 生 活 樣 式 의 變 化 에 기인한 成 人 病 증가와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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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39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이승일 김대호 정병욱 문영주 정태헌 허영란 김민영 지음 발간사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동북아 세 나라는 오랜 옛날부터 독자의 문화를 꽃피움과 동시에 여러 면에서 문화를 공유해왔습니다. 한자라는
見 積 書
2 한국일본문화학회 회 장 인 사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원 여러분께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물러가고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높고 파란 하늘이 성 큼 다가와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합니다. 한 여름이 지나고 찾아온 10월은 너무도 아름답습 니다. 파아란 하늘, 빠알간 단풍잎, 노오란 은행잎을 맘껏 즐기고
제 출 문 한국고전번역원장 귀하 본 보고서를 연구과제인 일제강점기 전통지식인의 문집 간행 양상과 그 특성에 관한 연구 의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연구과제명 일제강점기 전통지식인의 문집 간행 양상과 그 특성에 관한 연구 연구기간 2012. 11. 7. ~ 2013. 3
2012년도 한국고전번역원 연구과제 최종보고서 ITKC-2012-RR-01 고전번역기본/고전번역연구/연구과제 연구책임자 : 황 위 주 2013년 3월 제 출 문 한국고전번역원장 귀하 본 보고서를 연구과제인 일제강점기 전통지식인의 문집 간행 양상과 그 특성에 관한 연구 의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연구과제명 일제강점기 전통지식인의 문집 간행 양상과 그 특성에
70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비 롯한 국학연구 기관들과 국립과천과학관, 한국천문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 는 조선시대 역서들의 숫자들을 모두 합하더라도 불과 수백 책의 수준을 넘
조선의 역서( 曆 書 ) 간행과 로컬사이언스* 박권수 (충북대학교) 1. 조선의 역서( 曆 書 )와 역법( 曆 法 ) 서운관지( 書 雲 觀 志 ) 와 내각일력( 內 閣 日 曆 ), 일성록( 日 省 錄 ) 등에 의거하건대, 조선시대 역서( 曆 書 )의 간행부수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급격 하게 늘어나기 시작해서 정조( 正 祖 ) 22년( 戊 午 年, 1798)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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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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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2007 SUMMARY PartⅠ 아파트 시장동향 1. 매매가격동향 2. 전세가격동향 3. 분양실적 및 계획 PartⅡ 토지 시장동향 1. 권역별 지가동향 2. 용도지역 이용상황별 지가동향 3. 토지거래동향 주요 News Real Estate Trend June 2007 Vol.11 KOREA APPRAISAL BOARD 2 3 4 5 Real E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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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 洲 趙 絅 散 文 의 美 學 The Aesthetics of Prose by Yong-Ju Jo, Kyung( 龍 洲 趙 絅 ) - Centering around the Comparison with the Prose by Nong-Am Kim, Chang-Hyup( 農 巖 金 昌 協 ) - 저자 (Authors) 申 承 勳 Shin Seung-hun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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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연구 1999 여름호 제22권 제2호(통권 75호) pp. 151~184 硏 究 論 文 徐 命 膺 의 생애와 규장각 활동 김 문 식 1)* Ⅰ 머 리 말 Ⅱ 생 애 Ⅲ 家 系 와 교유 인물 Ⅳ 奎 章 閣 기구의 정비 Ⅴ 奎 章 閣 의 국가적 편찬 사업 Ⅵ 맺 음 말 Ⅰ. 머 리 말 保 晩 齋 徐 命 膺 ~ 은 세기 소론계의 名 家 인 達 城 徐 氏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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硏 究 論 文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오현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통합과정 수료, 한국고대사 전공 [email protected] I. 머리말 II. 갈석 과 요수 조문의 사료 맥락 검토 III. 갈석 과 요수 의 위치 고증 IV. 연장 진개 침입 이전 고조선의 중심지 V. 맺음말 I. 머리말 근대사학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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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調 의 형성과 새로운 시대의 開 幕 윤 석 산(한양대학교 명예교수) 1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 같이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고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줄이 있으랴 이 시조들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방원(훗날 태종)의 하여가( 何 如 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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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 학 수 * 30) Ⅰ. 머리말 Ⅱ. 부임에 얽힌 사연 1. 임명에서 부임까지의 역정 2. 풍기 예안을 거쳐 부임한 뜻 Ⅲ. 다스림의 방식과 그 자취 1. 관료적 권위와 학자적 포용성 1) 원칙과 권위의 리더십 2) 鄕 論 끌어안기 - 尊 賢 및 同 門 意 識 의 표명- 2. 士 論 장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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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록을 통해 본 조선 문사의 반산 유람 신익철 1. 머리말 계주( 薊 州 ) 서북쪽에 위치한 반산( 盤 山 )은 반룡산( 盤 龍 山 )이라고도 불리는데, 북경에 도읍을 정한 명청 시대의 황제들이 경동제일산( 京 東 第 一 山 ) 이라 하며 즐겨 찾았다. 특히 건륭( 乾 隆 ) 황제 때에는 반산에 행궁( 行 宮 )이 건립되었으며, 청나라의 역대 황제는 특히
16 經 學 研 究 集 刊 特 刊 一 墓 誌 銘 等 創 作 於 高 麗 時 代 與 朝 鮮 朝 時 代, 此 是 實 用 之 文 而 有 藝 術 上 之 美. 相 當 分 量 之 碑 誌 類 在 於 個 人 文 集. 夢 遊 錄 異 於 所 謂 << 九 雲 夢 >> 等 夢 字 類 小 說.
經 學 研 究 集 刊 特 刊 一 2009 年 12 月 頁 15~36 高 雄 師 範 大 學 經 學 研 究 所 15 韓 國 漢 文 學 硏 究 之 最 近 傾 向 김동협 金 東 協 教 授 / Professor Kim Donghyub 摘 要 我 想 對 於 韓 國 漢 文 學 最 初 之 專 門 著 書 是 金 台 俊 之 >. 此 冊 刊 行 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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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 文 科 學 제101집 2014년 8월 漢 字 문자 그 이상의 상징 체계 Ⅰ. 서론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한자의 본격적인 개혁운동은 5.4 白 話 運 動 이 후 지식인들에 의한 표음문자화를 지향하는 漢 字 革 命 論 이다. 근대 알파 벳 문자를 이상적 원형으로 사유하는 서구학계의 깊은 인식론의 영향으로 1954년 中 國 文 字 改 革 委 員 會 성립 이후
그렇지만 여기서 朝 鮮 思 想 通 信 이 식민본국과 피식민지 사이에 놓여 있는 재조선일본인의 어떤 존재론적 위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식민본국과 피식민지의 Contact Zone 에 위치한 재조선일본인들은 조선이라는 장소를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기
식민지의 목소리 - 朝 鮮 思 想 通 信 社 刊, 朝 鮮 及 朝 鮮 民 族 (1927)을 중심으로 鄭 鍾 賢 ( 成 均 館 大 ) 1. 伊 藤 韓 堂 과 朝 鮮 思 想 通 信 伊 藤 韓 堂 이 발간한 朝 鮮 思 想 通 信 은 1925 년에 발행을 시작하여 1943 년 그가 죽은 직후에 폐간될 때까지 대략 18 년 동안 간행된 조선문을 번역한 일본어 신문이다.
화보 끝없는,, 끝나지 끝나지 않는 않는 즐거움 끝없는 얼음벌판 인제빙어축제 강원도 인제군 내설악 지류와 내린천의 관문인 소양호, 눈 덮인 내설악의 환상적인 경관을 배경으로 은빛 빙어를 주제로 펼쳐 지는 축제가 있다. 바로 인제빙어축제이다. 인제빙어축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 민국 대표축제이다. 10회 축제기간 동안 방문객 100만 명 돌파(2007년 기준,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발행일 : 2013년 7월 25일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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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가을 24호 2_ . 02 03 04 08 10 14 16 20 24 28 32 38 44 46 47 48 49 50 51 _3 4_ _5 6_ _7 8_ _9 10_ _11 12_ _13 14_ _15 16_ _17 18_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개식사를 하는 김구(1940.9.17) 將士書) 를 낭독하였는데, 한국광복군이 중국군과 함께 전장에
南 北 體 育 會 談 第 5 次 實 務 代 表 接 觸 會 議 錄 $은 幣 K7를구 淸 를9 를3 는r구# 國 土 統 - Q ( 漆 北 對 話 事 務 局 ) < 目 次 l - 般 事 項 l l l l l l l 3 l l l l l l l l l 3 2 會 議 錄 7 附 錄 : 代 表 團 記 者 會 見 9 7-7 - 린 一 般 事 項 가 日 時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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低 所 得 偏 父 母 家 族 의 生 活 實 態 와 政 策 課 題 金 美 淑 朴 敏 妌 李 尙 憲 洪 碩 杓 趙 炳 恩 元 永 憙 韓 國 保 健 社 會 硏 究 院 머 리 말 배우자의 사별, 별거, 이혼 등으로 초래되는 偏 父 母 家 族 은 産 業 化 의 진전에 따른 개인주의 팽배로 이혼이 증가하였고 經 濟 危 機 로 인한 가 족해체가 확산되어 최근 증가 추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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