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of Gεography (Jirihak Nonchong) Monography Series 45 Apr.2002 Geographical Study on the Boundary and the Administrative District of the Cap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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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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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대학교 국토문제연구소 논문집 별호 훌규 羅 王 京 의 훌쉴 圍 와 區 城 에 대한 地 理 tjtj1i퓨갖릎 李 훌료 職 서 울대 학교 국토문제 연구소
2 Journal of Gεography (Jirihak Nonchong) Monography Series 45 Apr.2002 Geographical Study on the Boundary and the Administrative District of the Capital of Shil-la Dynasty Yi, Ki-bong Institute for Korean Regional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3 地 理 學 論 講 별호는 서울대학교 극토문제연구소에서 펴내는 단행본 시리즈이다. 이 연구물은 편접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실린다. 편집위원회 편집인 박삼옥 편집위원회 검 인 박기호 닙~4-흐 ζ 박영한 è - 일 안영진 이재덕 이재하 이정록 이정만 이희열 주성재 유곤배 최병두 유우익 허우긍 Chang, Heejun Choi, Jong Nam Kim, D oo-chul Park, Bae-Gyoon Park, Soojin Seong, Jeong-Chang Y oon, Hong-ki 편집간사 검성환 조현정 <> 題 揮 i 會 海 金 昌 煥 先 生
4 Editorial Board Editor Park, Sam Ock Editorial Board Members Ahn, Young-Jin Chang, Heejun Choi, Byung-Doo Choi, J ong N am Choo, Sungjae Huh, Woo-kung Kim, Doo-Chul Kim, lnn Lee, Hee-yul Lee, Jaeduk Lee, Jaeha Lee, Jeongman Lee, Jeong-Rock Park, Bae-Gyoon Park, Key-ho Park, Soo-hong Park, Soojin Park, Young-han Seong, Jeong-Chang Son, lll Yoon, Hong-ki Yu, Keun Bae Yu, Woo-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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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국문초록 新 羅 王 京 의 範 圍 와 區 域 에 대한 지라적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지리학과 이기봉 본 논문에서는 신라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이 구체적인 공간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었는지를 時 系 列 的 인 차원에서 구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규명 을 위해 가장 기본이 된 것은 文 敵 記 錄 과 牌 文 에 나타난 각종 지리적 자료이며, 지도와 답사 및 고고학적 발굴 내용을 통해 그러한 자료에 대한 확인작업을 병행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규명된 신라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의 변화가 신라의 사 회 정치적 변화와 각종 지리적 자료의 해석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도출된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왕경의 母 服 인 六 村 은 츠 國 史 記 와 三 國 遺 事 에 신라 건국 이전부 터 형성되어 있었으며, 安 康 以 南 의 兄 山 江 流 域 과 東 海 뿜 太 和 江 의 일부를 포함 하고 있는 범위로 나온다. 이와 같은 문헌기록은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이 6개 의 작은 유역권으로 나누어져 있어 신라 건국 이전에 村 이 형성 확장될 경우에 6개의 촌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증명될 수 있다. 그리고 6촌 의 경계션이 가장 불분명한 경주시내는 문헌기록과 홍수 사 북천의 물이 흐르던 휴 皇 폼 皇 龍 좋 址 - 雅 願 池 북쪽 - 月 城 북쪽 - 月 城 서쪽을 잇는 션을 통해 복 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明 活 山 高 耶 村 ( 習 比 部 )은 北 川 面 의 신당천 유역에 關 川 楊 山 村 ( 梁 部 )은 경주시내와 見 삼 面 의 소현천 유역에 않 山 大 樹 村 (후 梁 部 )은 西 面 乾 川 뭄의 대천 유역에, 突 山 高 塊 村 ( 沙 梁 部 )은 太 和 江 의 일부를 포함하는 兄 山 江 본류 유역에, 뽑 山 珍 支 村 ( 本 彼 部 )은 동천강 상류 일부를 포함하여 月 城 - 狼 山 - 明 活 山 을 잇는 선의 남쪽인 南 川 유역에 金 山 加 利 村 ( 漢 祝 部 )은 東 海 품의 감 浦 몸 陽 北 面 陽 南 面 을 포함하여 분황사-낭산을 잇는 선의 동쪽인 北 川 유역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 다. 그리고 麻 居 世 로 상징되는 外 來 集 團 과 關 英 六 村 長 으로 상징되는 土 훌 集 團 의 연합에 의해 신라가 건국됨에 따라 6촌의 범위와 경계는 그대로 小 國 신라의 영 역과 지역구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6촌은 신라 건국 이전에 六 村 長 會 議 體 와 같은 聯 合 體 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 고 외래집단과 토착집단의 연합에 의해 신라가 건국되었기 때문에 6촌장집단의
7 기반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신라의 건국은 麻 居 世 와 그의 紀 인 關 英 으로 대표되는 王 室 集 團 의 출현을 가져왔으며, 동시에 6촌장집단과는 다른 왕실집 단의 독자적 주거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삼국유사 의 기록에 의해 확인되듯이 왕실집단의 초기 주거지는 6촌 중의 하나인 突 山 高 體 村 ( 沙 梁 部 )의 중심지 근처이며 범람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현재 의 昌 林 좀 址 ( 南 山 西 北 麗 )에 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新 羅 本 紀 에는 건국 약 20년 후에 王 城 인 金 城 을 건설하는 것으로 나온다. 금성의 위치는 문헌기록과 도 시계획의 흔적, 고분의 분포, 北 川 의 범람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구체적인 위치는 기존의 6촌 중심지와 관계가 없으며 하천 범람의 위 험이 常 存 하는 경주시내 그 중에서도 현재의 擔 星 臺 나 그 근처로 比 定 되었다. 왕 실집단의 거주지 이동과 금성의 위치는 왕실집단이 6촌장집단과의 사회 정치적 차이를 주거지의 공간적 분리를 통해 적극적으로 이루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 고 그 과정에서 후대 도시의 중심이 되었던 政 治 中 心 區 域 이 경주시내에 자리잡게 되었다. 삼국사기 와 三 國 遺 事 에는 f 需 理 尼 師 今 9년 (32) 에 六 村 이 六 部 로 개편되 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 6촌 이름의 6부 이름으로의 改 名, 6 부의 姓 ll; 陽 與 十 七 等 官 等 制 의 설치가 나온다. 이 세 기록 모두 글자 그대로 볼 수는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6촌 개편 이전에 됐 公 이나 脫 解 로 대표되는 외래집단의 합류로 인해 왕실집단의 힘이 강화되고 있었다. 그리 고 6부 중심지에도 왕실집단이 살았다는 1-2세기의 기록과 대조 검토하면서 이 때의 개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개편 내용은 왕실집단이 6촌 중심 지로 이동하여 6촌장집단을 6촌 중심지에서조차 2급 지배층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었다. 그 결과 小 國 신라는 이제 명실상부한 왕실집단의 - 元 的 인 지배체계에 의 한 共 同 運 命 體 的 地 域 單 位 로 變 鏡 하였고 6부는 그 下 部 행정단위로 재편되었다. 신라는 1 세기 중반부터 辰 韓 地 域 으로의 대외팽창을 시작하여 3세기 말이나 4 세 기 초에 진한지역 전체를 완전한 지방으로 편입한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에는 정 복된 소국의 반란이나 이탈 시도 등이 나타나는 등 아직 불완전한 관계가 지속된 다. 이것은 元 新 羅 (6부) 지역을 비롯하여 정복된 辰 韓 小 國 들 사이에 기존의 地 域 區 分 意 識 이 지속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元 新 羅 지역인 6부 전체가 정복된 지 역에 비해 정치적으로 우위에 서게 됨에 따라 특권적 지역성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복과정에서 지방에 대비되어 형성되기 시작한 王 京 은 그 범위가 6부의 범
8 위로 고정되게 되었던 것이다. 진한지역을 지방으로 완전히 편입한 4-5세기에도 왕경과 지방의 차별정책은 이 어진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신라의 전 영역을 지칭하는 新 羅 라는 국호와 지방에 대비되어 特 權 化 된 왕경을 지칭하는 흉rr 羅 라는 국호가 二 重 的 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의 증거는 왕경과 지방에 造 營 된 古 慣 의 형식이 전혀 다르며, 규모와 부장품의 종류 및 量 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왕경 과 지방의 차별정책으로 인해 왕경의 범위는 건국 이전 6촌 전체의 범위로부터 변화될 수 없었다. 1-3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왕경과 지방의 불안정한 관계는 왕경으로의 일방적 인 물자흐름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6부 각각의 생산지로서의 중요성이 유지되었으며, 왕경과 지방의 차별적인 지위 때문에 6부 각각의 인적 자원에 대한 중요성도 감소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지방과 6부 중심지로부터 정치중심구역으로 의 지배층을 비롯한 인구의 집중이 크게 일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6부 행정구역 은 파괴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다. 4-5세기에 강화된 지방 지배는 경주시내에 超 大 型 積 石 木 橫 慣 이 집중적으로 조 영된 사실을 통해 볼 때 왕경 그 중에서도 정치중심구역으로의 일방적인 물자흐 름을 발생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6부 중심지에 거주하던 왕실집단이 정 치중심구역으로 집중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지방과 6부로부터 정치중심구역으로의 피지배층의 집중도 나타났다. 이로 인해 정치중심구역이 확장되었는데, 그 구체적 인 범위는 南 川 을 경계로 나누어져 있던 梁 部 와 沙 梁 部 에 걸쳐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도시계획의 흔적, 범람의 위험성, 迎 日 冷 水 里 牌 (503) 와 薦 珍 鳳 짝 牌 (524) 에 양부와 사량부의 인물이 압도적인 비율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 다. 이러한 정치중심구역의 확장은 행 里 와 같은 하부 행정단위를 출현시키는 배경 이 되었지만 건국 전부터 3세기까지 이어져 온 6촌 또는 6부적 행정구역의 전통 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6세기 이후에도 정치중심구역으로의 인구집중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인구집중은 8세기 이후에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왕경과 지방의 차별정책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둘째, 최고지배층인 진골집단의 대부분 이 왕경 출신이며, 신분 내혼을 통한 폐쇄적인 신분제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왕 경을 떠나기가 어려웠다. 셋째 官 更 登 用 制 度 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花 郞 徒 가 인적 결합을 중요하게 여기는 제도였으며 그 정점에는 王 京 에 살았을 혈
9 骨 貴 族 이 있었다. 따라서 관직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진골귀족 뿐만 아니라 중 하 위 지배층도 왕경을 떠나기가 어려웠다. 넷째, 8세기 중반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정치적 혼란은 지배층 사이에 호화 사치생활을 통한 사회적 경쟁을 강화시켰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경쟁을 위해 필요한 물자의 공급을 담당하던 商 人 과 E 人 層 도 왕경으로 집중하는 경향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인구 집중으로 인해 정치중심구역은 계속 확장될 수밖에 없었다. 6-7 세기에는 경주시내 서쪽의 저지대에 해당되는 西 川 邊 과 北 川 의 범람을 가장 잘 방어할 수 있는 위치에 집중적으로 사찰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분포를 통해 하천 변에 대대적인 제방공사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결 과 7세기까지의 정치중심구역의 범위는 며 川 - 北 川 - 狼 山 - 南 山 으로 둘러싸인 지역 에 걸쳐 있었다. 이것은 도시계획의 흔적 평지사찰의 분포 6-7세기의 牌 文 에 梁 部 와 沙 梁 部 및 일부의 本 彼 部 인물이 등장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8세기 이후에는 北 川 북쪽 明 活 山 望 德 츄 址 輔 石 亨 址 까지 정치중심구역이 확장되었다. 이것 역시 도시계획의 흔적 평지사찰의 분포 35 金 入 힘의 기록에 川 北 漢 祝 部 本 彼 部 지역까지 金 入 힘이 있었다는 기록 등을 통해 확인된다. 이러한 정치중심구역의 확장을 통해 왕경 내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을 가능성 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三 國 史 記 地 理 志 에 나오는 今 按 新 羅 始 祖 麻 居 世 前 漢 五 鳳 元 年 甲 子 開 國 王 都 長 三 千 七 十 五 步 廣 츠 千 一 十 八 步 르 十 五 里 六 部 이라는 기록을 王 都 안에 三 十 五 里 와 六 部 가 있었다 와 같이 기존처럼 해석기보다는 지 금 살펴보건데 신라시조 輪 居 世 는 前 漢 五 鳳 元 年 (B.C.57) 에 開 國 하였다. (그 國 의 범위에는 첫째) 王 都 가 있었는데 (그 규모가) 長 이 步 廣 이 步 이고 츠 十 五 里 가 있었다. (둘째) 六 部 가 있었다. 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함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해석하면 왕경이 기존의 6부에서 왕도와 6부로 개편되었다고 볼 수 있 게 된다. 이와 같은 행정구역 개편에 대한 증거는 경덕왕 ( ) 이후 왕경의 행정을 담당하는 官 府 로서 京 城 周 作 典 과 典 둠 暑 라는 두 개가 있었던 사실을 통해 확인된 다. 이 중 典 뭄 暑 는 六 部 를 담당하는 官 府 였음이 기록에 분명하게 나온다. 또한 京 城 周 作 典 에서의 京 城 이란 용어가 왕경 전체가 아니라 이후의 왕도인 도시부분 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기록에 나오는 왕도의 범위인 長 3, 018보(약 5.4km), 廣 3, 075보(약 5.5Km)를 구체적인 空 間 上 에서의 정치중심구역 의 최대 확장 범위와 비교해 보아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이러한 왕도와 6부로 - IV -
10 의 분리시기는 경성주작전이 설치되는 聖 德 王 31 년 (732) 煩 으로 파악되었다. 그 이전에 왕경의 행정을 담당하던 官 府 로는 六 部 小 藍 典 이었다. 다만 r 三 國 史 記 地 理 志 에 나오는 商 城 那 과 大 城 那 에 대한 분석을 통해 동해안의 it 浦 둠 陽 北 面 陽 南 面 지역이 縣 이 대대적으로 설치될 때 約 章 縣 으로 분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경의 범위가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이며 내부적으로 왕도와 6부로 개편되 었다는 사실을 통해 삼국유사 에 나오는 新 羅 全 盛 之 時 京 中 十 七 萬 八 千 九 百 三 十 八 戶 - 千 三 百 六 十 均 五 十 五 里 라는 기록도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기록에 나오는 京 中 의 京 은 王 都 정도의 규모가 아니라 王 都 와 六 部 를 합한 王 京 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王 都 를 王 京 으로 보고 이 범위 안에 55리와 1,360 방, 178, 936호가 있었다고 보았던 기존의 해석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되며, 아 울러 이 기록의 신빙성도 높아진다. 주요어: 新 羅 王 京, 範 圍, 行 政 區 域, 六 村, 六 村 長, 王 室 集 團, 政 治 中 心 區 域, 六 部, 特 權 的 地 域 性, 王 都 학번: v -
11 목 차 제 1 장 서론... 1 제 1 절 연구의 목적과 방법 연구의 목적 연구방법과 자료 논문의 구성 연구의 범 위 와 한계 제 2 절 연구 동향과 문제점 선 행 연 구의 쟁 점 과 검 토 선 행 연 구의 문제 점 제 2장 경주시내의 하천과 지형 제 1 절 기록을 통해 본 하천의 범람과 지형 하천 의 범 람과 북천 제 방과 숲( 數 ) 제 2 절 유적 발굴을 통해 본 하천의 범람과 지형 유적 발굴지 의 원지 반층... 쟁 2-2 2차 퇴 적 층과 빨 층 제 3절 신라 건국 전후 경주시내의 하천과 지형... 않 제 3장 건국 전후의 6촌과 정치중심구역 제 1 절 6촌의 위 치 와 경 계 r 삼국유사 에 나오는 6촌의 위치 얄천양산촌과 금산가리촌의 위치 촌의 위 치 와 경 계 제 2 절 신라의 건국과 6촌의 존속 및 정치중심구역의 형성 신라 건국 이전의 6촌 관계... 검 2-2 신라의 건국과 6촌의 존속 정치중심구역의 형성과 위치 제 4장 6촌의 개편과 왕경의 형성 제 1 절 6촌의 행 정 구역 으로의 개 편 유리니사금 9년 (32) 전후 왕실집단의 강화 VI -
12 1-2 6촌에서 6부로의 개편 부의 행정구역화 제 2 절 왕경 의 형 성 과 공간적 규모 부의 특권지역화와 왕경으로의 변화 왕경 의 특권적 지 역 성 강화 제 3 절 6부 행정구역의 존속과 방리제의 시행 인구이 동의 경 향 정 치 중심 구 역 의 확장 부 사이의 관계 변화와 행 里 制 의 시행 제 5장 왕경 내 행 정 구역 의 개 편 제 1 절 왕경 으로의 인구집 중 경 향 왕경 인과 지 방인의 차별 지 배 층의 왕경 집 중 경 향 피 지 배 층의 왕경 집 중 경 향 제 2 절 정 치 중심 구역 의 확장 세 기 사찰의 건 립 신궁의 건설과 위 치 주거 지 의 확장 제 3절 왕도와 6부로의 행정구역 개편 왕도와 6부로의 분리 왕도와 6부의 관할 관부 왕도와 6부로의 분화시 기 왕도와 6부의 범 위 제 4 절 전성기 왕경의 호수와 하부행정단위의 성격 통 일 신 라 전 체 의 호수 전성 기 왕경 의 호수 호수의 분포와 하부 행정단위의 성격 제 6장 요약 및 결론 < A 日 참 m 本 고 따 據 문 쉰 헌 > 때 m μ댔 - VII -
13 표목차 표-1. 신 라 왕경 연 구의 시 기 구분 표 -2 월성 해자 다 와 라 지역의 토양층... μ 표 -3 월성 해자 다 지역 외곽의 집터 토양층 표 -4 계림북편 127~ 집터의 토양층 표 -5 황룡사 발굴지의 토양층 표 -6 경 주지 역 의 강수 량 표 -7 r 삼국유사 에 나오는 6촌의 위치 및 소속 村 표 -8 유리니사금 9년 (32) 전후의 사회 정치적 변화 표 -9 니사금기 (27-356) 신라의 진한지역 정복 기록 표 -10 r 삼국사기 에 나오는 2세기 전후의 가야 및 3세기 전후의 백제와의 전투 기 록 표 -11 5세기까지의 금성 월성 명활성에 대한 기록 표 -12 냉수리비 (503) 에 등장하는 인물의 부별 분포 표 -13 봉평 비 (523) 에 등장하는 인물의 부별 분포 표 -14 경 위 와 외 위 표 년 이전에 창건된 사찰과 그 위치 표 -16 8세기 이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하는 宮 표 -17 r삼국사기 잡지 직관 부분에 나오는 宮 표 -18 단양 적성비 (551 이전)에 등장하는 인물의 분포 표 -19 마운령 비 (568) 에 등장하는 인물의 분포 표 -20 왕경 의 행 정 체 계 표 -21 경 성 주작전 전읍서 대 일 임 전 표 -22 육부소감전 VIII -
14 그렴목차 그림 -1. 고려 초기 東 京 留 守 官 慶 州 의 범 위... 8 그 림 -2. 경 주시 내 의 하천 과 지 형... 9 그림 -3. 경 주시 내 의 항공사진 (1967) 그림 -4 하천 범람을 막아주던 경주시내의 林 數 그 림 -5 경 주시 내 의 유적 발굴지 그림 -6 경주시내의 지형 그림 -7 경 주시 내 6촌의 경 계 그림 -8 6촌의 경 계 와 위 치 그 림 -9 금성 의 위 치 그 림 -10 왕실 집 단의 주거 지 이 동 그 림 -11 5세 기 경 상도 지 역 의 고분 분포 그림 세기 물자와 인구이동의 경향 그림 세기 경주지역 돌무지덧널무텀(적석목곽분)의 분포 그림 세기 물자와 인구이동의 경향 그림 세 기 주거 지 와 확장방향 그림 -16 통일이전에 건립된 사찰 및 사지 그림 -17 6세 기 이 후 주거 지 의 확장 방향 그럼 -18 기존의 6부 경계 및 사찰의 분포와 왕도 그림 -19 왕도와 6부 및 약장현 그림 -20 경 주지 역 신 라 요지 의 분포 사진목차 사진 -1 북천의 河 皮... 엄 사진 -2 남천 의 河 æ 사진 -3 일제시대까지 남아 있던 북천 변의 제방 사진 -4 양지 뜰에 서 바라본 황룡사지 사진 -5 분황사에 서 바라본 황룡사지 사진 -6 양지뜰 사진 -7 월 성 서 쪽의 월 정 교지 I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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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제 1 장 서론 제 1 절 연구의 목적과 방법 1-1 연구의 목적 인류가 국가라는 조직체를 만든 이후 어디에서든 최고 통치기능1)이 입지한 지 역이 있었다. 전통시대에는 왕이 거주하는 지역이 바로 이러한 최고 통치기능이 입지한 곳이었다. 신라에 대한 문헌과 금석문의 기록에도 최고 통치기능이 입지한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2) 이러한 용어 중 王 京 이 新 羅 史 연구자들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王 京 이란 용어에는 최고 통치기능이 입지해 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영역 적 의미도 담겨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의 왕경은 구체적 공간에서 분명하게 경계 선이 그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선 안의 땅은 지방과 대비되는 지역으로서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출신지나 소속감의 단위로서 기능하였다.3) 하지만 신라사 연구자들이 王 京 이란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구체적인 공간에서의 범위에 대해서는 공통된 견해의 일치를 보고 있지 1) 임덕순은 중앙정부가 국가체제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 전개하는 국방 외교 등의 정부적 행위를 통치라고 규정하고 한 나라의 最 高 統 治 機 能 이 所 在 하는 도시를 수도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수도는 그 기능이 해당국가 전체의 통치와 관련된 기능이 입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도시와는 다르다고 보았다. 수도의 이러한 기능으로는 전국을 조직 적으로 관장 통제하면서 주도해 나가는 통어기능 (head function) 국민을 하나로 묶는 결속기능 (keystone function), 외국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외국과의 연결을 유지하는 연결기능Oink function) 변경지방에 존재할 수 있는 원심적 요인을 제거하고 국경충돌 을 방지하는 변경통제기능 (frontier-organizer function) 을 들고 있다. (임덕순, 1985:2,18-20) 2) 문경현은 신라 왕경의 명칭에 대해 첫째 신라 왕경의 고유명칭 둘째 일국의 수도란 의 미의 보통명칭으로 나누어 구별하였다. 첫째에 해당되는 용어로는 金 城, 新 羅, 新 羅 城, 斯 羅, 東 京, 東 都, 金 京 이 있었다고 하며, 두 번째에 해당되는 용어로는 京 都, 王 京, 王 都, 王 城, 京, 大 京, 京 城, 京 몸, 京 師, 玉 京, 都, 둠, 健 후 羅 등이 있었다고 한다.(문경현, 1995: ) 3) r 三 國 史 記 卷 第 四 十 一 列 傳 第 一 김유신전에는 金 演 信 王 京 人 也 라고 기록되어 있고,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지만 영일 냉수리비 (503) 와 울진 봉평비 (524) 에는 지방 과 대비되는 용어로서 왕경을 지칭하는 斯 羅 와 新 羅 六 部 라는 용어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 4장 참조) 이러한 용어의 사용은 왕경이 분명한 경계선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출신지나 소속감의 단위로서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17 못하다. 이러한 견해의 불일치는 우선 왕경의 이해에 출발점이 되고 있는 6촌 기 록을 비롯한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나오는 신라사 초기기록의 신빙성에 대한 학계의 논쟁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4) 또한 왕경의 범위가 신라의 역사적 전 개과정에서 과연 어떻게 바뀌었는가에 대한 분명한 기록이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r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어디에도 왕경의 범위가 바 뀌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왕경의 범위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유추를 할 수 있는 기록만이 몇 군데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왕경의 범위를 짐작할 수 있게 기 록한 삼국사기 卷 第 一 雜 志 第 三 地 理 一 부분도 애매하게 기술되어 있어 이 러한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5) 이와 같은 왕경의 범위 문제는 내부의 행정구역 문제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왕경의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내부의 행정구역의 공간적 규모나 범 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으로 내부의 행정구역의 공간 적 규모나 범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왕경의 범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하 지만 일부의 연구자를 제외하면 왕경 내부의 하위 행정구역이 구체적인 공간상에 서 어떠한 경계를 가지고 어떠한 범위에 걸쳐 있었는가에 대해 크게 주목한 경우 는 별로 없다. 그 동안 역사학계에서는 왕경의 범위나 내부 행정단위의 맹아로 볼 수 있는 6 촌이나 6부의 문제에 대해 다양한 의견 차이를 보여 왔다. 다수의 연구자가 6촌에 대한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6세기초의 비 문인 영일냉수리비 (503) 와 울진봉평비 (524) 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6부의 존재 에 대해서는 왕경의 하부 행정단위로 인정하였다. 그에 따라 과연 6부가 언제, 어 떠한 계기에 의해 형성되었고, 6촌과는 어떠한 관련을 갖고 있으며, 신라 역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였는가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하지 만 이러한 6부의 문제는 대부분 정치사나 사회사의 일환으로 연구되었다. 따라서 일부의 연구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구체적인 공간이 결여된 행정단위 사이의 정치 4)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다음 논문을 참조. 이종욱, 한국 고대사연구 100 년: 과거 문제 -비극과 희극의 세기를 넘어서며 r 한국사연구.!I 104 집, ) 이 기록에는 첫째, 新 羅 始 祖 納 居 世 前 漢 五 鳳 元 年 甲 子 開 國 王 都 長 三 千 七 十 五. 步 廣 조 千 十 八 步 三 十 五 里 六 部 라는 부분이 나온다. 이 기록에는 왕도와 35 리, 6부의 관계가 분명하게 나오고 있지 않다. 따라서 과연 이 기록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왕경에 대한 이해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같은 부분에 고려시대의 경주에 소속된 신라 의 행정구역으로 임관군 대성군, 상성군이 나온다. 이중 대성군과 상성군이 경주시내나 그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18 적 사회적 관계만으로 6부를 연구하였던 것이다.6부라는 행정단위가 정치적 사 회적 의미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국가를 경험하지 못한 상태 에서 부족적 전통이 강한 집단이 연합하여 국가를 만들었을 경우에는 행정단위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가 더욱 강해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6부라는 행정단위는 분명히 구체적 공간상에서 존재했으며, 또한 구체적인 범위와 경계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다양한 인구집단 이 구체적인 공간을 점유하고 살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고려되지 않은 상태 에서 6부라는 행정단위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만을 추구할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 할 소지가 있다. 구체적 공간과 분리된 상태에서 6부를 연구할 경우 실질적으로는 인구의 분포 때문에 나타난 문제가 행정단위로 표현된 집단들 사이의 정치적 사 회적 힘의 역관계만으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6부를 공간과 분리된 행정단위나 정치적 사회적 집단의 힘의 역 관계라는 차원만이 아니라 행정구역의 차원에서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행정 구역은 공간적 단위의 하나로 정치적 제도적 차원에서 몇 개의 하위영역으로 구 분된 것이며 6), 일체의 행정작용이 미치는 범위 또는 공공기관이나 단체의 관할권 이 미치는 지역이다,7) 따라서 행정구역의 입장에서 신라 왕경 내부의 행정단위를 다룬다는 것은 먼저 행정단위가 구체적인 공간 속에서 영역적으로 어떻게 존재했 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영역적인 문제를 밝히는 것은 범위와 경계가 어떻 게 이루어져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기도 하다.8) 그리고 행정구역은 설정된 뒤 오랜 시일이 경과하면서 주민 생활과 밀접한 관 계를 맺게 되고 행정구역과 주민 자신이 일체화되면서 정치 행정적으로 뿐만 아 6) 임석회, 공간조직의 관점에서 본 한국행정구역의 문제와 개편방향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7. 임석회는 이 논문에서 자연발생적인 등질지역이나 기능지역 과 행정구역의 가장 큰 차이점이 전자는 분명한 경계선을 갖고 있지 않은 반면에 후자는 명확한 경계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일정한 행정구역으로 구 획된 경계선 안의 땅에서는 행정적인 차원에서 다른 행정구역과 분명하게 구분되 는 등질지역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7) 최창호 r지방행정구역론 J, 법문사, 1981:13 8) 행정구역의 엽장에서 행정단위를 연구할 경우 행정 중심지 사이의 계층성과 상호 간의 기능적 관계를 중요한 연구주제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신라 왕경에 대한 연 구에서는 행정단위의 중심지가 구체적으로 어디였는지 가 몇 또 중심지 사이의 계층구조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료나, 유물, 유적이 거의 전무하 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의 고고학적 발굴과 같은 새로운 자료가 출현한 이후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다. 잉 니
19 니라 정신적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9) 행정구역은 인위적이고 계획 적으로 구획되는 형식지역이긴 하여도 일단 한번 설정되고 나면 쉽게 변화하기 어려운 시 공간적 지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즉 행정구역은 사회적으로 구성되 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변동에 대하여 상당한 시간적 지체 (time lag) 를 가지게 되 는 것이며, 특히 제도화는 그러한 지속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1 0 ) 행정 구역은 현재의 상황을 반영하는 정치 행정적인 제도임과 동시에 과거의 흔적을 담고 있는 역사적인 제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일정 시기의 행정구역은 당시 의 상황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왕경과 그 내부의 행정 구역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었는지를 시계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제기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정치중심구역 11) 의 팽창으 로 인해 왕경의 범위나 내부의 행정구역에서 변화가 있었음을 긍정하였다. 하지만 그 변화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마다 극단적인 반대 양상을 보이는 등 다양한 견해를 피력해 왔다 12) 이와 같이 다양한 견해가 피력된 것은 단순히 사료가 부족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부의 연구자를 제외하면 왕경과 하위 행정구 역의 변화를 추동시킨 정치중심구역의 형성과 확장에 대해 구체적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구체적인 공간상에서의 정치중심구역의 형성과 확장이 왕경 내 부의 행정구역과는 어떠한 관계 속에서 일어났으며 그것이 행정단위 사이의 관계 나 행정구역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9) 최창호, 같은 책, 13 10) 임석회, 같은 책, 1995: 그는 이와 같은 행정구역의 시 공간적 지속을 행정 구역이 갖고 있는 지역적 성격의 하나로 보았다. 11) 신라 왕경에서 최고통치기능이 구체적으로 입지한 좁은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로 는 보통 王 都 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이 용어조차도 史 書 에 7세기 이후 에나 등장하며, 그 이전에는 왕경 내에서 최고통치기능이 입지한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를 찾기가 어렵다. 또한 王 都 라는 용어가 단순히 최고통치기능이 입지한 지역 이라는 의미 이외에 일정한 시기부터 구체적인 행정구역의 명칭으로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전 시기를 관통하여 사용하면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당시의 용어는 아니지만 왕경 내에서 최고 통치기능이 입지 한 지역을 중요시하여 이종욱이 사용한 政 治 中 心 區 域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 다. (이종욱, 1982) 그리고 王 都 라는 용어는 구체적인 행정구역으로 설정되었을 경우 에만 사용하기로 한다. 12) 기존의 연구에서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왕경과 하위 행정구역의 변화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1. 왕경의 범위가 변화되지 않았지만 하위 행정구역은 왕도와 왕기로 분화되었다는 견해 2. 왕경의 범위가 도시가 발달했던 현재의 경주시내 정도로 축 소되었으며, 그에 따라 6부도 이 누어진다. (제 1 장 제 3 절 참조) 범위 안에서만 존재하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로 나 - 4 -
20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 왕경의 범위와 내부의 행정구역은 아직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할 만큼 분명하지 못하며, 그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삼은 경 우도 거의 없다. 따라서 왕경의 범위와 내부의 행정구역이 어떻게 형성 변화했는 지를 밝히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연구는 정치적 사회적 연구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신라 역사에 대한 史 書 와 金 石 文 에 등장하는 왕경을 지칭하는 용어들이 단순히 공간적 의미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용어들이 지칭하는 공간적 범위와 경계가 밝혀지고, 그 속에서의 인구나 지배층의 분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사회 정치적 문제들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서에 등장하는 단편적인 지리적 인구적 자료들은 왕경과 내부의 행정 구역의 범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부분들은 신라 왕경의 도시계획에 대한 연구에도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지금 까지 신라 왕경의 도시계획에 대한 연구자들은 주로 도시계획의 흔적과 유적 발 굴을 통한 도시계획의 범위와 구체적인 단위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 에 따라 史 書 나 金 石 文 에 등장하는 지리적 단위에 대한 용어들을 도시계획의 차 원에서만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왕경의 범위나 행정구역 의 문제는 도시계획의 차원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왕경의 범위나 행 정구역에 대한 이해는 기록과 구체적인 발굴 사이의 간극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지금까지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신라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 이 구체적인 공간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었는지를 시계열적 차원에서 규 명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이와 같은 연구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6촌의 경계와 범위, 정치중심구역의 위치를 파악하고 신라의 건국과정 속 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밝힌다. 둘째, 진한지역으로의 대외팽창과 통치 속에서 왕경이 형성되는 과정을 파악하 고, 그 과정에서 왕경의 범위와 내부의 행정구역이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밝힌다. 셋째, 6세기초 이후의 정치 사회적 개혁과 인구의 집중 속에서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밝힌다. R 녕
21 1-2 연구방법과 자료 (1) 연구지역 왕경의 범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연구자들 사이에 다양한 견해차이가 존재 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의 주요 연구대상인 신라 왕경의 범위와 구체적인 연구 지역이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점은 정확한 경계선이 남아 있지 않은 과거를 연구하는 경우에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 러한 한계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연구지역을 왕경의 범위를 살펴보기 위해 필요한 범위의 지역으로 잡고자 한다. 이러한 필요를 만족시키는 연구지역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 하면서 경주로 설정되고 고려 태조 23년 (940) 에 개편된 13) 공간 범위이다. 이 때 설정된 경주의 공간범위는 신증동국여지승람 卷 之 二 十 一 慶 州 府 의 영역을 통 해 이해할 수 있다. 이 때 경주부의 영역 안에 있었던 안강현, 기계현, 자인현, 신 광현, 구사부독, 죽장부곡, 북안곡부콕은 古 跳 조가 아닌 屬 縣 조에 실려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오랫동안 독자적인 행정구역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1 4 ) 따라서 고 려 초기의 東 京 留 守 官 慶 州 의 직접적인 관할 영역은 조선시대 경주부의 영역에서 위의 지역을 제외한 지역이어야 한다. 이 지역은 지금의 경주시 시내, 천북면, 현 곡면, 서면, 건천읍, 산내면, 내남면, 외동면, 감포읍, 양북면, 양남면과 울산광역시 울산광역시 두동면 두서면 지역이다. 이 지역은 크게 보면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과 동해 바다에 인접한 감포읍 양북면 양남면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그 외에 울산만으로 빠지는 동천의 상류 일 부가 외동면 남쪽 부분에 걸쳐 있으며 태화강의 지류 일부가 울산광역시 두동 두서면 남쪽 부분을 흐르고 있다. 이 두 지역은 수계는 다르지만 지형적으로는 동 천이나 태화강의 중 하류보다 형산강 유역과 잘 연결된다 15) 13) r 고려사 卷 第 五 十 七 志 第 十 一 地 理 二 14) 안강현은 경주시 안강읍 강동면 지역, 기계현은 포항시 기계면 기북면 지역, 자 인현은 경산시 자인면 남산면 용성면, 신광현은 포항시 신광면 지역, 구사부곡은 경산시 진량면의 일부, 죽장부콕은 포항시 죽장면 지역, 북안콕부독은 영천시 북안 면의 일부이다. (한글학회 r 한국지명총람 JI, 경북편 0, IV), 1978) 15) 답사해 본 결과 태화강의 지류로서 두동 두서면 남쪽을 흐르는 대콕천과 구량천 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옛 언양현)과의 사이에 양쪽이 높은 절벽으로 이루어 진 긴 협콕이 있어 사람의 왕래가 거의 어려운 지형을 이루고 있다. (울주 반구대 - 6 -
22 형산강 유역은 크게 낙동강 하구에서 시작되어 양산, 언양, 경주시내, 포항시 신 광면을 지나는 양산단층선과 울산만에서 시작되어 불국사, 천북면 지역을 지나는 불국사단층선 위에 형성되어 있는 침식분지다. (조화룡, 1997) 이 두 단층은 活 斷 層 으로 佛 國 좋 統 의 화강암이 침식되어 곳곳에 많은 合 流 扁 狀 地 가 연속적으로 분포 한다. (조화룡, 황상일 윤순옥, 2001) 형산강은 남쪽의 울산광역시 두동 두서면에서 발원하여 대천 남천 북천 소 현천 신당천을 합류시켜 동쪽으로 꺾여 포항시로 빠져나간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형산강유역이라는 하나의 유역권으로 분류되면서도 형산강 본류인 서천과 각 지 류가 만들어 놓은 분지형태의 작은 유역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이러한 형산강유역 은 서쪽으로는 금호강 유역, 동쪽으로는 대종천 유역, 남쪽으로는 태화강 유역, 북 쪽으로는 안강평야와 접해 있다. 형산강 유역은 서쪽의 영천 방향과 남쪽의 울산 방향으로는 분수계에 의해 분리되지만 큰 고개가 없어 연결성이 제약되지는 않는 다. 그리고 북쪽의 안강방향도 큰 협곡 등의 제약요인이 없어 계속 연결되어 있다 고 볼 수 있다. 다만 동쪽으로 토함산 (745m) 줄기 의 높은 산지 에 의 해 가로막힌 형세를 취하고 있다. 토함산 동쪽의 동해안은 서쪽의 급경사에 비해 완만한 형세 의 산지가 이어지고 있으며, 대종천 등의 작은 하천이 발달해 있다. 대릉원 노동동 노서동, 황남동 교동 등의 초대형고분과 월성, 분황사, 황룡사 지 등 많은 유적이 현재의 경주시내 평지에 밀집되어 있다. 이러한 경주시내는 서 쪽으로는 선도산 (380m) 과 옥녀봉 (215m) 이, 동쪽으로는 명활산 (245m) 이 대칭적으 로 솟아 있다. 북쪽으로는 소금강산(1 78m) 과 그 줄기가 하나의 경계션을 이루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산 (466m) 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이 네 산 사이에는 동서 약 5-6km, 남북 약 3-6km 의 넓은 평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 평지에는 크게 세 개의 하천이 합류한다. 경주시내 서쪽의 선도산 옥녀봉 끝자락에는 형산강 본류인 서천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경주시내 동남 쪽에서 흘러온 남천은 월성에 부딪혀 서쪽으로 꺾여 서천에 합류하는데 선라시대 에는 故 川 이라고 불렀다. 동쪽의 높은 산악지대에서 흘러온 북천은 소금강산 줄기 와 명활산 사이의 좁은 협곡을 지나 서북쪽으로 꺾여 서천에 합류하는데 신라시 대에는 關 川 과 東 川 으로도 불렸다. 경주시내는 이 세 개의 하천과 동쪽의 명활산 암각화 부근) 반면에 형산강 상류와는 낮은 분수계만을 이루고 있어 수계상으로는 태화강에 속하지만 지형적으로는 형산강 유역에 연결되고 있다. 외동읍 남쪽에 있 는 동천의 상류도 울산과의 경계선에서 작은 협독이 나타나며 형산강의 지류인 남 천과는 육안으로는 거의 구분되지 않는 낮은 분수계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23 l l { 아 땐 까이 觀 파 펀 짧 퍼 뽑 { K써 깨 T 띠 뎌.{ 땐 머 때 버 야. 임 F 사 매 양.N{ F 마 양.{{ F 메 { 어.g ( 칭 때 ) F 때 바.{} ( 킹 메 ) F τ 바. F 매 중.h - 믿 { 츄 { 킹. ψ 따 찌 찌.m F τ.f F 바 께 폐. 이 F 마 F.N { 프 싸 F.{
24 ( 原 圖 If' 朝 蘇 古 廣 圖 諸.n, 朝 蘇 總 督 府, 1916) 그림 -2. 경주시내의 하천과 지형 - 9 -
25 그림 -3. 경주시내의 항공사진(1 967)
26 자락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동서 5-6km, 남북 3-6km 의 평야로서 남쪽과 남동쪽, 북쪽으로 열린 모습을 하고 있으며 서쪽은 선도산에 의해, 동쪽은 명활산 자락에 의해 차단되어 있다. (2) 연구시기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등에는 신라가 B.C.57년에 진한 소국 중의 하나 로 건국되었다가 A.D. 935년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멸망한 나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신라는 약 년에 가까운 992년간 유지된 나라이 다. 이 1, 000년이란 기간은 세계 여러 지역의 국가흥망사 속에서 보아도 결코 적 지 않은 기간이다. 따라서 신라의 역사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신라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들도 국가의 존속기간을 고려하고, 대 외팽창과정 및 정치적 상황의 변화를 첨가하여 다양한 시기구분을 행하여 왔다. 삼국유사 에서는 제 1 대 혁거세거서간으로부터 제 22 대 지증마립간까지 (B.C ) 를 上 古 제 23 대 법흥왕으로부터 제 28 대 진덕(여)왕까지 ( ) 를 中 古, 그 이하 ( ) 를 下 古 로 나누고 있다.1 6 ) 이 때 상고와 중고의 구분은 王 號 를 기준으로, 중고와 하고는 王 統 의 성격을 기준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r 삼 국사기 에서는 정치권력의 성격변화를 기준으로 상고와 중고를 上 代 (B.C ) 로, 태종무열왕계가 왕위를 이어갔던 제 29 대 태종무열왕으로부터 제 36 대 혜공왕까지를 中 代 ( ) 로 나머지를 下 代 ( ) 로 구분하였다 17) 지금까지 의 역사학계는 두 가지 시기 구분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이용해 왔다. 본 논문에서는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이라는 측면에서 신라가 건국되어 멸망 할 때까지의 전 시기를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신라 역사 992 년 동안 왕경 의 범위와 행정구역이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기구분을 행하여 연구하려 한다. 그런데 여기서 시기구분의 구체적인 기준이 무엇인가? 에 대한 문 제가 나타난다. 이런 문제가 나타나는 이유는 왕경의 행정구역이나 인구규모 그 리고 정치중심구역의 변화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자료가 기록이나 유적으로 분명하게 파악될 수 있다면 질적 변화의 전환 점을 쉽게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시기를 구분하기가 어렵지만 본 논 16) ~ 三 國 遺 事 卷 第 一 王 歷 第 一 17) ~ 三 國 벚 記 卷 第 1-τ 新 羅 ~ 紀 第 τ 경순왕 9 년
27 문에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를 참조하고 왕경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의 변화라는 차 원에서 시기구분을 행하려고 한다. 표-l. 신라 왕경 연구의 시기구분 B.c. 57년 lc중반 3C 말 (4C 초) 6C초 7C후반 935 년 (멸망) 시기구분 I 맹아기 형성 정립기 번 영;기 신라의 건국부터 유리니사금까지의 시기 (B.C.57-A.D.57) 는 대체적으로 신라가 대외팽창을 하기 이전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6촌을 중심으로 건국되 면서 후대 왕경의 모태가 되는 공간규모가 거의 확정되고 현재의 경주시내에 정 치중심구역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따라서 이 시기를 왕경의 맹아기라는 입장에서 하나의 연구시기로 잡고자 한다. 신라의 진한지역으로의 대외팽창이 시작되는 1 세기 중반부터 5세기까지를 하나 의 시기로 잡고자 한다. 1 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어 3세기말 또는 4세기초에는 완성 된 진한지역으로 대외팽창 과정에서 왕경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4세기 와 5세기 동안 신라는 더 이상의 대외팽창을 하지 않으며, 진한지역에 대한 통치 를 강화한다. 따라서 이 시기를 왕경이 형성 정립되는 시기로 잡고자 하며, 이 시기 중 진한 지역에 대한 정복이 완료되는 3세기말 또는 4세기초를 작은 획기로 잡고자 한다. 신라의 역사에서 사회 정치적 변화가 가장 컸던 시기는 6세기초이다. 기록상으 로 보았을 때 지증마립간과 법흥왕 시기 ( ) 에 州 에 대한 軍 主 의 파견을 통 한 지방행정제도의 개편, 신라라는 국호의 확정, 왕이라는 칭호의 도입, 순장의 금 지, 율령의 반포, 대외적 사신의 파견, 불교의 도입 등 혁신적인 정치가 이루어졌 다. 이러한 혁신적인 정치는 왕경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도 그 이전과 이후를 나누 는 큰 획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6세기초를 본 논문에서는 가장 큰 변혁기로 보 고자 한다. 신라는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 백제와의 치열한 교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에너지를 전쟁에 쏟아 부었다. 그러다가 제 30 대 문무왕 16 년 (676 년) 당과의 마지 막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를 통일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 는 전쟁에 쏟았던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신라 왕경의 입
28 장에서도 이와 같은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통일전쟁이 끝나면서 전쟁에 투입되었던 상당한 에너지가 왕경에 투입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 서 6세기초 이후의 기간에서 통일 전후를 작은 획기로 잡고자 한다. (3) 연구방법과 자료 지리학에서 過 去 에 대한 연구는 무엇을 중요한 연구목적으로 삼느냐에 따라 크 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18) 첫째, 경관 변화의 연속적인 단계에 있는 어느 한 시기의 단면을 끊어 복원하는 수법을 사용하는 과거의 연구 (the study of the past)'가 있다. 둘째, 역사적 변천에 대해 일정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지리 적 현상의 변화 과정을 추적하는 역사적 변천에 대한 연구 (the study of change through time)'가 있다. 셋째, 현재를 과거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현재로부터 덜 알려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현재 속의 과거 연구 (study of the past in the persent) 가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세 가지 유형 가운데 주로 두 번째 유형인 역사적 변천 에 대한 연구를 채택하여 신라 왕경의 범위와 내부의 행정구역에 대해 살펴보기 로 한다. 따라서 논문 전체적으로는 시기를 셋으로 나누고 왕경의 범위와 내부의 행정구역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떠한 계기에 의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시 계열적인 연결관계를 중심으로 연구한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일정한 시기의 단면만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연구주제의 시간적 지속성과 역사성을 이해할 수 있 을 것이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세 번째의 관점인 현재 속의 과거 연구를 이용한다. 이 연 구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역행적 접근 (retrogressive approach) 인데 현재를 검 토함으로써 과거를 이해하는 연구방법이다 19) 이와 같은 연구 방법은 과거에 대한 자료가 적기 때문에 자료가 많은 현재를 출발점으로 하여 과거로 소급해서 추적 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방법에서 말하는 현재는 단순히 일상생활 속에서 존재하는 18) Norton, W., 1984, IT'Historical analysis in geography J, New York Longman, inc, pp.27 19) 한국지리연구회 옮김 / 존스톤 그레고리 스미스 엮음IT'인문지리학사전 J, 도 서출판한울, 1992:
29 현재만은 아니다. 다니오까(유 周 武 雄 )는 역행법을 직접적 비약적 방법과 간접 적 소급적 방법으로 나누었다, 20) 전자는 과거에 존재했던 고지도 고문서 유 물 유적이나 과거에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의미가 사라진 지명 등을 통해 과거를 연구하는 방법이다. 후자는 현재의 경관 속에 살아 있는 과거의 역사적 요소를 끄 집어내어 차례로 오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하는 방법이다. 본 논문에서도 과거의 지도나 기록 그리고 현재도 남아 있는 지명과 유물 유적을 통해 과거의 지리적 상황을 추적한다. 또한 현재의 경관 속에 남아 있는 도시계획의 흔적이나 비계획적인 도로망을 통해 과거의 주거지 확장 등을 이해하는 단서로 사용한다. 이러한 역행적 접근은 그 출발점을 현재로만 한정짓지 않는다. 과거의 문헌 기 록이 풍부하여 잘 알 수 있는 시기를 출발점으로 삼아 문헌 기록이 없는 그 이전 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하여 역행법을 자주 사용한다, 2 1) 본 논문에서도 이 와 같은 방법을 부분적으로 사용한다. 신라 왕경의 범위와 내부의 행정구역에 대 한 자료가 시계열적으로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때로는 분석할 자 료가 많은 시점을 먼저 파악하고 그로부터 그 이전 시기의 상황을 추론해 내는 방법을 선택한다. 또한 신라사에서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자료가 적고 자료마다 내용이 다른 경 우도 있으며, 많은 유적 유물이 사라져 기록 속에 나오는 위치와 경계에 대해서 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이럴 경우 위치와 경계가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작업 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확인된 위치를 통해 역으로 그러한 위치 가 역사적 흐름 속에서 어떤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추론하는 방 법을 취한다. 이럴 경우에는 원인과 결과 중 결과를 먼저 살펴보고, 그것이 어떤 원인에 의해 나타났는지를 살펴보는 방식이다. 따라서 자료가 많은 현대를 연구대 상으로 삼을 때와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논리를 전개시키는 경우도 나타날 수 있 다. 구체적인 연구 방법으로는 우선 사료에 대한 검토를 행하였다. 신라의 대해 가장 자세히 기록해 놓은 문헌은 1,1 45년에 김부식에 의해 편찬된 역사에 삼국사 기 와 년경에 승려 일연에 의해 만들어진 삼국유사 이다. 이 두 기 록은 모두 고려 중 후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라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는 단 20) 氣 地 利 夫 Ir 歷 벚 地 理 學 方 法 論.JI, 日 本 東 京 : 大 明 堂, 1987 / 윤정숙 역 역사지 리학방법론 이회문화사, 1995:144에서 재인용 21) 氣 地 利 夫 Ir 歷 史 地 理 學 }j 法 論.JI, 日 本 東 京 : 太 [껴 堂, 1987 / 윤정숙 역 역사지 리학방법론 이회문화사, 1995:
30 점이 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많은 기록을 참고했고, 신라사에 대해 가장 광범위하고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 는 사료로 간주하고자 한다. 그리고 당대에 기록된 것으로서 현재까지 분명하게 남아 있는 각종 金 石 文 도 중심되는 사료로 간주한다. 이 중 포항시 신광면 냉수리에서 발견된 영일 냉수리 비 (503) 와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서 발견된 울진 봉평비 (524) 는 5세기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최고의 자료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자료로 사용한다. 기타 여러 개의 진흥왕 순수비 명활성비 남산 신성비 등의 6-7세기 비문 및 통일 이후의 각종 금석문도 필요할 때마다 자료로서 사용한다. 다음으로 진한과 신라의 모습을 기록해 놓은 중국 문헌이 있다. 이러한 문헌 중 신라초기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자세한 것은 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 진 三 國 志 鍵 書 東 몇 傳 辰 井 韓 조이다. 이후의 진한에 대한 기록은 이 기록을 그대로 전사하거나 약간만 바꾸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신라초기에 대한 기록으로는 이 문헌을 중심으로 살펴본다.6세기의 내용을 담은 중국 문헌으로는 梁 書 東 렷 列 傳 新 羅 조가 당대의 상황을 가장 잘 알려주는 기 록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이 기록을 주로 참조한다. 통일과정 및 그 이후의 신 라에 대한 중국기록으로 주목되는 것은 舊 康 書 東 헛 列 傳 新 羅 조와 新 康 書 東 헛 列 傳 新 羅 조인데 이들 기록에는 왕경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나오기 때문 에 참고한다. 기타 일본에 있는 자료로서 주목되는 것은 정창원에 보관되어 있는 문서이다. 이 문서도 신라 및 신라 왕경에 대해 관계 있는 경우에 한하여 이용한 다. 이들 사료에 대한 이용은 단순히 기록을 인용하는 수준에서 머물 수 없다. 이것 은 첫째, 기록된 문장구조 자체가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해 석될 수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사료에 나오는 왕경과 관련된 용어들 이 갖고 있는 범위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며 구체적 위치 등이 많은 논란 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사료 자체가 후대의 사가들에 의해 왜곡되 었거나 잘못 옮겨진 경우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료의 이용 자체가 극히 제한된 범위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사료 자체가 신라의 전체적 인 역사적 전개 과정 속에서 어떤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기록되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단순히 사료가 갖고 있는 역사적 사실의 문제가 아
31 니라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당시 또는 후대의 기록자가 어떻게 인식하여 표현했 는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사료를 이용할 때 역사가가 어떤 역사적 사실을 표현하 기 위해 왜 그런 기록을 채택하고 남기게 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22) 이럴 경우 사료가 당시의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지 않더라도, 또는 일정부분 시 기나 구체적 용어에서의 잘못이 있더라도 일단 기록자가 그런 사료를 남기게 된 근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에서는 사료의 이용과 해석에서 기록자가 지리적 측면에서의 어떤 역사적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그 사 료를 기록하게 되었는가를 먼저 파악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또한 史 書 에는 왕경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나오지 않더라도 다른 사료를 통 해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면서 왕경의 변화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 것은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가 과거의 사실이나 기존부터 전해져온 내용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어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표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23) 따라서 신라의 대외확장과 지방에 대한 대우 사회적 정치적 변화가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게 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도 연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왕경에 관한 사료만 이용 하는 것이 아니라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지는 22) r 삼국사기 원전의 성립과정에 대한 연구를 보면 편저자인 김부식은 자료를 취사선 택은 하였을 망정 왜곡하거나 삽입 과장하지는 않았다고 한다.(이강래, 1996) 23) r삼국사기 편찬자의 책임자인 김부식이나 삼국유사 의 저자인 일연 모두 역사를 해석하기보다는 과거의 사실이나 기존부터 전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기록하 는 것을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다음과 같은 표현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라말의 유명한 유학자 최치원이 제왕연대력을 지었는데 모두 某 王 이라 칭하고 居 西 千 등의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그 말이 圖 野 하다 해서 칭할 수 없겠는가? 左 傳 과 漢 書 는 中 國 史 書 임에도 오히려 楚 語 인 觀 於 옳와 셉 fjj. 듭닫인 孤 쫓 등이 남아 있다. 지금 新 羅 의 사실을 기록함에 그 方 듬을 그대로 두는 것 또 한 마땅하다. ( 羅 末 名 倚 崔 致 遠 作 帝 王 年 代 層 皆 稱 某 王 不 言 居 西 千 等 皆 以 其 듭 制 野 不 足 稱 也 揮 첼 日 左 漢 中 國 史 書 也 觸 存 楚 語 觀 語 훈셉 如 語 擺 짧 孤 쏠 等 今 記 新 羅 事 其 存 方 듭 亦 宜 훗)" ( r 三 國 史 記 대저 卷 第 四 新 羅 本 紀 第 四 지증마립간 즉위)" 옛 성인은 바야흐로 禮 樂 으로 나라를 홍하게 했으며, 인의로서 가르침을 베 풀었으니 怪 力 亂 神 은 말하지 않은 바가 있다. 명을 얻고, 도록을 받아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神 異 한 점이 의 하지만 제왕이 장차 흥할 때에는 부 있다... 그러한 즉 삼국 시조가 모드 神 異 함에서 發 하였다고 해도 어찌 괴이하다 할 수 있겠는가? 이 紀 異 를 다른 編 보다 앞에 두는 이유는 그 뜻이 여기에 있다. ( 大 批 古 之 聖 人 方 其 禮 樂 興 채 仁 義 設 敎 則 怪 力 亂 神 在 所 不 言 然 而 帝 王 之 將 興 也 鷹 符 命 受 圖 錄 必 有 以 異 於 人 者... 然 텃iJ프 國 之 始 祖 皆 發 於 神 異 : { 可 足 怪 歲 此 紀 異 之 所 以 漸 諸 編 也 意 (E 斯 훤)" ( r 二 E 候 l 遺 事 卷 第 一 紀 異 第 一 )
32 사료를 이용함으로써 부족한 사료를 보충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신라 왕경의 행정구역 및 유적 전설 등에 대해 기록해 놓은 그 이후의 기록을 통해 그 이전의 기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을 조 서 L 시대와 보 충하는 방법을 택한다. 조선시대의 기록 중 가장 자주 이용되는 것은 新 增 東 國 瓚 地 勝 寶 과 東 京 雜 記 이다. 이 두 기록은 선라의 역사를 간직한 경주에 대해 가장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유적의 구체적인 위치까지 기록해 놓은 경우도 많다. 조선시대의 다른 기록들은 기본적으로 위의 두 기록을 그대로 옮겨 쓴 경우가 많 기 때문에 특별한 내용이 있거나 위의 기록과 차이가 날 경우에만 참고할 것이다. 일제시대의 기록으로는 조선총독부에서 1916년과 1917년에 발간한 朝 蘇 古 題 圖 讀 4- 新 羅 統 i 時 代 1-, 朝 蘇 古 題 圖 諸 5- 新 羅 統 一 時 代 2- J 가 현재는 사라 진 유적 및 유물이 기록되어 있어 참고한다. 해방 이후의 기록으로는 경주시사편 찬위원회에서 1971 년에 발간한 慶 州 市 誌 와 경주시에서 1980년에 발간한 新 羅 의 빛 이 각종 유물과 유적의 위치 등에 대해 당시까지의 연구를 중심으로 자 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한글학회에서 1978년에 발행한 한국지명총람 J 5( 경북 편 I)의 경주시 부분과 1979년에 발행한 같은 책 7( 경북편 IV) 의 월성군 부분은 지명과 과거의 지리적 변화에 대해 가장 자세한 기록이 있어 참고한다. 조선시대 이후의 이러한 문헌자료들이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나타나 는 왕경 관련 사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보충자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록 들 역시 신라 왕경의 구체적인 상황을 모두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볼 수 없다. 또 한 그 이전의 기록인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의 내용과 상치되는 부분도 있 다. 따라서 이 기록에 나오는 자료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전 시기의 기록과 꼼꼼한 대조를 하면서 이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문헌자료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기 위해 고하는 방법을 택한다. 일제시대의 지도자료로서 주목되는 地 形 圖 l:50,oooj 그리고 조선총독부에서 1916년에 발간한 우선 지도 자료를 참 것은 舊 韓 末 韓 半 島 近 世 韓 國 五 萬 分 之 一 地 形 圖 朝 蘇 總 督 府 製 作 一 萬 分 一 朝 蘇 地 形 因 集 成 J, r 朝 蘇 古 題 圖 諸 ÎJ 에 나오 는 지도 등이다. 이들 지도에는 우선 경주 지역의 자연지리적 특징을 이해하는데 O 돕 주 자료가 들어가 있다. 현재는 북천의 상류에 보문호와 덕동호가 만들어져 있고, 하 천 변에 제방이 충분히 건설되어 있어 홍수 시 범람의 위험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북천의 경우는 하천의 폭이 일제시대에 비해 % 정도로 줄어드는 등
33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제시대 초기의 지도에는 현재보다는 인공적인 제한이 덜 가해진 상태의 하천 상태가 표현되어 있어 고대 경주 지역의 지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또한 이들 지도에는 시가지의 확대 도로의 건설 경지정리 등 현대적인 기술로 재정비되기 이전 경주지역의 도로망 논밭의 경계선이 표시되어 있다. 특히 직선 으로 남아 있는 도로망과 논밭의 경계선 상태는 도시계획에 대한 연구자들에게 신라 때의 격자형 도시계획의 흔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비격자형 도로망이 나 논밭의 경계선은 격자형 도시계획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초기주거지나 주거지 가 확장되지 않은 외곽지역의 흔적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들 지도에 나타난 도 로망과 논밭의 경계선을 통해 주거지 형성과정과 범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 현대의 지도 중에는 경주국립박물관과 경주시에서 1997년에 발행한 1:10,000 축 적의 慶 州 遺 題 地 圖 를 가장 중요한 자료로서 이용한다. 이 지도에는 각종 기록 과 민간에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 유물과 유적에 대한 발굴을 종합하여 1997년 까지 확인된 경주통합시 지역의 각종 유물 및 유적의 위치와 범위 등에 대한 자 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유물 및 유적의 연대와 색인까지 꼼 꼼하게 해 놓았다. 이러한 유물 및 유적의 위치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신라 왕경의 변화를 살펴 보는데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왕경의 변화에 대한 이해가 정치적 사회적 차 원에서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지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려면 기록에 나오거나, 또 는 기록에 나오지 않더라도 존재했던 많은 유물과 유적의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 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물과 유적의 위치 파악과 시대적 변화 양상을 통해 왕경의 전체적인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 에서 이 지도의 자료적 가치는 높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지도에서 가장 많이 수록된 사찰의 위치는 왕경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 다. 경주시내에 분포되어 있는 평지사찰은 사찰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6세기 이 후의 주거지 확장과정과 범위를 이해하는데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특 별한 잘못이 확인되지 않는 한 이 지도를 신라시대의 유적 및 유물의 위치를 알 려주는 가장 중요한 지표로 삼고자 한다. 경주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의 조사보고서도 중요한 자료로서 이용한다. 이러한 유적의 조사보고서에는 발굴된 유적지의 상세한 내용과 추정연대가 기록되어 있
34 다. 이러한 내용 중 士 層 에 대한 기록은 고대 경주시내의 지형적 특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특히 유적이 만들어진 연대가 밝혀진 경우 유적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토층 상태를 통해 인간에 의해 인공적인 교란이 발생하기 이 전 경주시내의 지형적 특정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 또한 유적 이 만들어진 위치와 연대에 대한 확인을 통해 신라인들이 경주시내의 지형적 특 징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시사점도 제공받을 수 있다. 유적의 조사보고서는 이러한 지형적 특징과 변화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주거 지의 확장 방향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우선 지표에서 나타 난 도로망이나 논밭의 경계션을 통해 추측된 주거지가 과연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지하 유구에 대한 발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표에는 나타나지 않 지만 지하에 묻혀 있을 수도 있는 고분의 유무를 확인함으로써 지표의 상태를 통 해 추측한 주거지역이 맞는 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유적지가 조 성된 연대와 위치를 통해 기록의 내용을 확인하고 그 지역으로의 주거지 확장에 대한 시사점을 찾아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각종 문헌과 지도 발굴보고서에서 확인되는 유적과 유물의 위치 및 경주지역의 지형적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1998년부터 2001 년 사이에 5차례에 걸 쳐 현지답사를 행하였다. 현지답사가 측량이나 새로운 자료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 의 형태를 띄지는 못했지만 기록이나 지도에서는 알아내기 힘든 유적과 지형의 구체적인 특징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유적과 지형 사이의 관계를 비롯하여 경주시내와 관련된 하천의 河 皮 및 河 福 상태, 경사도 등 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경주시내뿐만 아니라 형산강의 지류들이 만들어 놓은 작은 유역권을 직접 답사하면서 삼국사기 나 삼국유 사 에 등장하는 6촌(부)의 위치 및 형성원인과 과정에 대한 전체적인 상을 그려 나갈 수 있게 되었다. 1-3 논문의 구성 기존의 신라사 연구는 주로 역사학 고고학 도시계획학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으 며, 이 중에서 역사학계의 연구가 가장 활발했다. 하지만 신라 왕경의 범위와 행 정구역과 같은 지리적 문제는 각 분야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의 입 장에서 다루어져 왔다. 본 논문은 신라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의 문제가 그 자체
35 만으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지리적 공간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문제제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제기를 해결하기 위해 신라 왕경 의 범위와 행정구역을 시계열적 차원에서 밝히는 것을 연구목적으로 삼았다. 이러 한 연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논문을 구성하였다. 제 1 장에서는 구체적인 연구를 진행시키기에 앞서 연구의 목적과 연구 지역, 연 구시기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선행연구의 쟁점을 검토하고 연구 성과와 한계를 파 악하여 본 논문의 의 의 를 알아보았다. 제 2 장에서는 경주시내의 하천과 지형적 특징을 알아보았다. 현재는 제방공사와 댐의 건설 등으로 인해 하천과 지형이 많이 바뀌었다. 따라서 각종 기록과 발굴조 사보고서, 지도 자료를 통해 인공적인 제한이 가해지기 이전 경주시내의 하천 범 람과 지형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신라 왕경에서 가장 중요한 지 역이었던 경주시내에서의 6촌의 경계, 왕성의 위치, 도시의 확장 방향 등을 이해 하는데 기초로서 이용될 것이다. 제 3장에서는 신라 건국 전후 6촌의 경계와 정치중심구역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과 경주시내의 지형적 특징을 중심으로 6촌의 위치와 경 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았 다. 그리고 신라의 건국과정에서 이러한 6촌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국가의 형성과 함께 등장한 정치중심구역의 위치와 그것이 상징하는 사회 정치적 의미 에 대해 알아보았다. 제 4장에서는 먼저 6촌이 어떻게 6부로 개편되었으며 이것이 지배층의 분포와 정치적 사회적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았다. 다음으로 신라의 진한 지역으로의 대외팽창과 통치과정 속에서 형성 정립된 왕경의 범위가 6부와는 어 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신라의 팽창된 영토 속에서 물자와 인구의 이동경향을 파악하고 그것이 왕경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상에서 지배층을 비롯한 인구의 분포에 어떻게 나타났으며 행정구역 사이의 관계변화나 새로운 행 정단위의 출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았다. 제 5장에서는 먼저 6세기와 9세기 사이에 왕경으로의 인구 및 물자의 집중 경향 이 어떠했으며, 그것이 구체적 공간상에서 정치중심구역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 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중심구역의 변화가 왕경의 범위, 행정구역 사이의 관계나 개편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아 보았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정치중심구역이나 행정구역의 변화에 대한 규명을 바
36 탕으로 왕경의 전체 호수를 알아보고 그러한 호수의 대략적인 분포를 통해 각 행 정단위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제 6장에서는 앞에서 분석한 내용을 요약 정리하고 본 논문의 의의와 한계를 논한다. 1-4 연구의 범위와 한계 본 논문에서는 왕경을 다루면서도 범위와 내부의 행정구역에만 초점을 맞추었 다. 이러한 초점에 따라 왕경의 핵심부분인 정치중심구역에 대해서도 최초의 입지 와 확장 과정이 행정구역 사이의 관계나 개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차원 에서만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정치중심구역으로 표현된 도시부분의 구체적 인 구조에 대해서는 살펴보지 못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발굴과 도 시계획에 대한 면밀한 연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 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행정구역에 대해 공간적 범위 경계 위치 등을 알려주는 정확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공간상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다. 본 논문에서 살펴 본 범위와 경계도 100%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다만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잘 반영하고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정확성만을 가지고 있 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더 정밀한 자료가 나타날 경우에는 세세한 부분에서의 교정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료의 부족을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하였 지만 그렇더라도 충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들도 이용하였으며 그로 인해 상황의 변화를 간접적 으로 알려주는 자료를 통한 추론의 형식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을 다루면서도 주로 왕경 전체와 6촌, 6부, 왕도와 6부 와 같은 큰 단위만을 대상으로 놓았다. 작은 단위의 구체적인 경계나 위치 등은 연구대상으로 놓지 않았으며 전체적인 변화나 체계를 설명해야 할 경우에만 다루 었다. 이것은 큰 단위의 행정구역 문제도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이 문제 를 밝히는 것 자체가 본 논문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 이외에도 작은 단위의 행정구역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 서 만약 큰 단위의 행정구역 문제가 밝혀졌다고 하더라도 작은 단위의 행정구역 문제까지 밝히려면 사료나, 유적에 대한 더 많은 자료가 수집되어야 할 것이다
37 제 2 절 연구 동향과 문제 점 2-1 션행연구의 쟁점과 검토 신라 왕경에 대한 논의와 연구는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해 시작되었고 해방이후 한국인 학자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많은 축적이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서로 하나의 합일점을 찾기보다는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이러 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신라시대의 왕경에 대한 문헌 자료가 극 히 부족하고, 유물 및 유적의 상당 부분이 오랜 시간 속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 다. 그에 따라 왕경의 범위와 내부의 행정구역 자체를 연구의 대상으로 놓기보다 는 다른 연구의 일환으로 부분적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선행연구의 검토가 종합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쟁점이 되 는 부분을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살펴보고 그 성과와 한계점이 무엇인지를 알아봄으로써 본 논문이 취해야 할 방향을 정립할 수 있도록 한다. (1) 6촌(부)의 형성시기와 위치 6촌(부)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를 비롯한 대부분의 문헌 속에서 신라가 건국될 때부터 신라가 멸망한 고려 초 (940) 까지 계속적으로 나온 다. 이러한 여러 기록 속에서 6촌(부)은 신라 건국의 모태가 되고 있으며, 신라 초 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약간씩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왕경의 지역구 분 단위의 하나로서 묘사되고 있다. 또한 이 6촌(부) 지역은 신라사 연구자들에게 보통 신라가 대외팽창을 하기 전의 원사로국 지역이며 나중에 왕경으로 변모하는 지역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제시대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삼국사 기 의 초기기록에 대한 신빙성문제가 제기된 이후 지금까지도 6촌(부)에 대한 여 러 기록에 대해 찬 반 두 가지의 입장으로 나뉘어져 합일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6촌(부)에 대한 연구는 왕경이라는 구체적인 지역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크 게 두 가지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나중에 왕경으로 변모하는 6촌(부)이 언제부터 존재하면서 하나의 공동운 명체적 단위로서 인정되었는가의 문제이다. 6촌(부)이 신라의 대외팽창과정에서 공동운명체로서의 역사적 경험을 얼마나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왕경의 범위와 성
38 격이 결정된다. 이렇게 결정된 왕경의 범위와 성격은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끈질 기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이러한 6촌(부)의 형성시기 문제는 단순히 신라 초기 의 역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둘째 6촌(부)의 위치 및 범위의 문제도 신라 초 기의 정치중심지가 형성되는 배경뿐만 아니라 나중에 나타나는 왕경의 범위나 행 정구역의 변화, 인구규모 등의 문제와도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6촌(부) 의 규모를 크게 보느냐 작게 보느냐에 따라 왕경의 지역구분에 대한 여러 기록의 검토가 달라질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왕경의 인구규모에 대해서도 왕경의 공간 규모 문제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6촌(부)의 형성시기와 위치 및 범위에 대한 선행연구의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6촌(부)의 형성시기에 대한 견해는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의 초기 기록 24) 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쉰다.1. 두 사서의 초기기록 대부분을 신뢰하는 입장에서는 건국 당시에 이미 6촌(부)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종욱, 최재석, 등) 이런 견해의 입장에 서면 6촌(부)은 신라 초기부 터 하나의 역사적 공동운명체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 된다. 2. 두 사서의 초기기록을 신뢰하지 않거나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서는 6촌(부)에 대한 설 화가 후대에 만들어진 후 소급되어 정착되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6촌(부)은 신 라 건국 당시부터 있었다기보다는 신라의 대외팽창 과정에서 나타난 산물로 보고 있다. 이러 견해 내부에도 두 가지의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6촌(부)은 신라 가 진한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麻 立 千 期 ( ) 이후에나 형성되었다고 보는 견 해가 있다. 이 견해 내부에도 지방의 지배세력을 중앙의 귀족으로 전화시키는 과 정에서 성립되었다고 하는 설( 末 松 保 和 1936:1954. 김철준 :1990. 노중 국, 등)과 자체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설( 武 田 幸 男, 주보돈, 1992.) 로 나 뉘어진다. 둘째, 경주나 그 인근지역에 위치한 지역집단들을 모체로 6부가 성립되 었다고 보면서도 신라 건국부터가 아니라 니사금시기 (B.C ) 의 늦은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간주한다. (전재덕, 1996) 24) r삼국사기 에는 첫째, 신라 건국 전부터 ( 古 ) 朝 蘇 의 유민들이 경주지역의 山 갑 間 에 흩어져 6촌을 이루고 살았다는 사실과 둘째 6촌장이 양산 밑의 나정 곁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키워다 왕으로 세웠다는 사실과 셋째 유리니사금 9년 (32) 에 6부 를 개편하여 성을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r 삼국유사 에는 이러한 사 실과 함께 고려 태조 23 년 (940) 다시 한번 6부의 개편이 있었으며 그 때 부가 있 는 위치의 방향과 각각의 부에 소속된 마을 2-4 개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39 6촌(부) 지역이 왕경으로 바뀌게 된 시기에 대해서도 연구자마다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왕경이 언제 형성되었는가의 문제도 신라의 대내적 대외적인 정 치적 성장과정에 대한 이해 차이로부터 발생된다. 즉 신라가 정복지를 언제 지방 으로 편재하게 되었는가, 또는 정복지의 주민들이 6부를 언제부터 왕경으로 인식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이 부분에서도 신라의 초기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l. 신라에 대한 삼국사기 와 삼국 유사 의 기록을 신빙하여 1 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진한지역으로의 대외적 팽창 과정에서 왕경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종욱 1982) 2. 4세기 중반부 터 시작된 마립간시대에 이미 정복지를 지방으로 편재했다고 보고 이 때 왕경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강종원 김창호 등) 3. 5세기말 또는 6세기초가 되야 정복지를 완전히 지방으로 편입했다고 보아 이 때 왕경( 王 京 )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6촌(부)의 위치 및 규모에 대한 문제는 그 형성시기에 대한 문제보다 별로 많이 다루어지지는 못했다. 이것은 역사학계의 6촌(부)에 대한 연구가 대부분 왕과 6부 의 정치적 관계 및 대외적 관계에서의 신라의 정치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 문이다. 따라서 6촌(부)의 위치 및 규모에 대한 연구가 적을 뿐만 아니라 연구 자 체도 형성시기에 대한 입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부분 에 대해서도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의 초기기록을 신빙하느냐의 문제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지고 있다.1. 두 사서의 기록을 대체적으로 신빙하는 견해 에 서 는 삼국유사 卷 第 一 紀 異 第 新 羅 始 祖 麻 居 世 王 조에 나오는 6촌(부)의 위치에 대한 방향과 주요 촌락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안강 이북을 제외한 형산강 유역에서 찾고 있다. (이종욱 1982:1984.) 2. 두 사서의 초기기록을 불신하거나 비 판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서는 지금의 경주 시내와 그 주변에서만 6촌(부)의 위치 를 찾고 있다. (이병도 김원룡 이기동 등) 이 견해 중 6촌 설 화에서 각 촌장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산을 중심으로 살펴본 연구(이병도, 1959) 와 고분의 분포라는 입장에서 살펴본 연구(김원룡 1976) 로 나누어진다. 그 외에 6 촌 중 3촌이 경상북도 지역에 있었다가 경주 평야로 옮기게 되었다는 견해(김철 준, :1990) 와 토성을 중심으로 6촌의 위치를 알아본 견해(오영훈, 1992), 신라 초기의 고분을 가지고 6촌 중 일부의 1997) 위치를 비정한 견해도 있다. (권오영,
40 (2) 6부 사이의 관계 6부 사이의 관계는 그 동안 역사학계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 중의 하나이 다.25) 이것은 그 동안 역사학계에서 6부를 행정구역의 차원에서 접근하기보다는 행정단위로 표현된 집단 사이의 정치적 사회적 힘의 역학관계의 차원에서 연구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가 활성화된 것은 6-7세기에 만들어진 비문에 나오 는 거의 모든 6부인의 이름 앞에 部 名 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6부라는 행정단위의 정치적 사회적 관계를 비문에 나오는 部 名 을 붙인 인물의 수의 비율 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특히 6세기초의 영일냉수리비 (503) 와 울진봉평비 (524) 에는 왕과 갈문왕 앞에까지 部 名 이 붙어 있기 때문에 6부라는 행정단위는 왕 과 6 部 主 (또는 6 部 千 支 ) 사이의 정치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까지 이해되었다. 이러한 6부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구체적인 공간상에서의 왕경의 행정구 역이라는 지리적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첫째 6부 사이의 관계의 변화는 정치적 사회적 힘의 역학관계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의 공 간적 이동과 그로 인한 분포의 차이라는 차원에서도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6세기 이후의 비문에서 나타나는 部 名 을 관칭한 인물의 수적 비율이 정치중 심구역의 확장 방향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6부 사이의 관계를 이와 같은 두 가지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왕경의 행정구역의 개편이 왜 지연되었으며, 그러한 지 연 요소가 어떻게 극복되었는지를 밝힐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해결하 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6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역사학계의 쟁점을 포괄적으로 정 리해 본다. 6부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지고 있다. 이 두 가지 입장 역시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삼국사기 와 삼국유 사 에 나타나는 신라사 초기기록에 대한 신빙성 문제에 대한 견해차이로부터 발 생하고 있다 26) l. 신라사 초기기록을 신빙하지 않거나 비판적으로 신빙하는 입장에서는 6부를 단위정치체나 부체제로서 연구하였다. (노태돈 이문기, 노중국 전재덕, 주보돈, 등) 이 연구는 내부적으로 다양한 견해의 차이가 있으 25) 6촌(부)에 대한 정치 사회사적 연구의 입장 차이는 한국고대사회에서 펴낸 韓 國 古 代 史 빠 究 17 J, 서경문화사, 2000 에 잘 나와 있다. 26) 이 부분에 대한 정리는 전덕재 r신라육부체제연구 JJ, 일조각, 1996 pp.l -9를 참 조
41 나 6부 각각의 사이나 왕과 6부주 사이의 정치적, 사회적 힘의 역관계를 강조하였 다. 그리고 이러한 6부의 독자성이 6세기나 더 이후에 왕권의 강화와 함께 사라지 면서 왕경의 행정단위로 변모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 사이에도 6부의 공 간적 위치를 비정한 경우가 있으나 그것을 6부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데는 거의 활용하고 있지 않다. 2. 신라사 초기기록을 신빙하는 입장에서는 유리니사금 9년 (32) 6촌에서 6부로 의 개편기록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이미 이 시기에 6촌이 사로국 내의 행정구역 단위로 개편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종욱 1982) 이 견해는 6촌이 이미 행정구역단 위로 변모하였기 때문에 6부의 세력이 왕보다 낮은 지위로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왕의 명령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고 보았다. 특히 이 견해는 6촌의 전체적 범위를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으로 보고 삼국유사 의 기록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6촌의 대략적인 위치를 비정하였다는 점 정치중심구역을 구체적 공간상에서 살펴 보고 논리를 전개시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3) 중대 ( ) 이후 신라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 이미 연구의 목적에서 살펴보았듯이 삼국사기 의 지리지에는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경주시 내의 신라 유적에 대한 발굴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왕경의 도시계획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었고 그에 따라 도시계획의 단위와 범위가 서서히 밝혀지게 되었 다. 하지만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 자체가 애매하기 때문에 연구자들마다 왕 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대해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또한 왕경의 도시계획 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도시계획이 이루어진 범위 안에서만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대한 논쟁이 이루어지는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다. 중대 ( ) 이후 이러한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의 문제는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에 나오는 각종 지리적 인구적 자료에 대한 이해를 달라지게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신라 왕경의 번영 정도, 도시계획의 범위와 단위의 문제와 직 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중대 (654-78이 이후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왕경의 범위는 행정구역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었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 라서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의 문제는 동시에 논의될 수 있다. 선행연구에서 이
42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입장을 밝힌 경우는 별로 없지만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왕경을 작게 보는 입장이 있는데 이러한 견해 내부에도 다양한 입장이 존재 한다. 첫째Ir삼국사기 지리조의 王 都 長 三 千 七 十 五 步 廣 三 千 十 八 步 츠 十 五 里 六 部 라는 기록에 나오는 왕도만을 왕경으로 본다고 분명하게 규정지은 견해가 있다. ( 村 上 四 男, 木 村 誠, 1984.) 이러한 견해는 위의 문장을 長 3, 075보, 廣 3,018 보의 공간규모를 갖는 왕도에 35 리와 6부가 있었다 고 해석하였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분명하게 규정짓지는 않았지만 연구과정 속에서 암묵적으로 표시한 경우 로서 현재의 경주시내 정도로 작게 보는 입장( 購 島 玄 治 郞, 윤무병, 田 中 俊 明, 김한배, 등)이 있다. 이 견해는 도시계획을 연구하면서 도시계 획이 이루어진 부분을 주로 왕경으로 인정하고 있다. 셋째 r 삼국사기 지리조의 王 都 長 3, 075보, 廣 3, 018 의 기록을 적극적으로 해 석하여 동서로는 명활산과 선도산 남북으로는 소금강산과 포석정 또는 삼롱 사이 로 보는 입장(장순용 민덕식 등)이 있다. 이 견해 역시 도시계획의 차원에서 왕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왕경의 범위를 도시계획이 이루어진 범위 얼 것으로 설정하고 있음은 둘째의 견해와 같지만 더 넓은 범위로 보는 점이 다 르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의 입장에서 서면 6-7세기 또는 중대 ( ) 의 어느 시기 에 왕경의 범위가 축소되었으며 6부 역시 경주시내 정도의 규모에서 새롭게 재편 된 것으로 보게 된다. 2. 왕경을 크게 보는 입장이 있다. 이 입장은 기본적으로 6촌(부)이 신라 초기부 터 있었으며, 그 위치가 안강 등을 제외한 형산강 유역에 있었다는 입장을 표시하 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는 왕경이 王 都 와 王 離 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 때 왕도는 삼국사기 지리조에 나오는 크기이고 왕기는 그 외부에 배치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井 上 秀 雄 오영훈 이종욱 등). 이러한 견해 사이에 도 왕도와 6부(왕기)의 분화시기에 대해 신라 초기부터 있었다는 견해(이종욱, 1982), 문무왕 때쯤 분화되었다는 견해(오영훈, 1992), 경덕왕대에 있었다는 견해 ( 木 村 誠, 1984) 등이 있다. 이와 같은 견해의 입장에 서면 왕경의 범위가 축소되지 않았으며,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왕경 안에서 왕도와 왕기로의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다고 보게 된다
43 지금까지는 왕경의 범위와 상위 행정구역에 대해서만 살펴보았다. 그런데 삼 국사기 신라본기에 자비마립간 12 년 (469) 에 京 都 의 功 里 이름을 정하였다는 기록 이 있다.27) 그리고 삼국유사 에 55 리.1, 360방과 360방이라는 두 개의 기록이 동시에 나오고 있다. 여기서 행은 도시계획의 단위로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도시 계획의 연구자들에게 방이 왕경 내에 몇 개가 있었는가에 대한 견해차이가 발생 하였다. 이것은 도시계획의 단위인 功 의 크기에 대한 문제임과 동시에 도시계획이 어디까지 이루어져 있었느냐는 범위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겨서 미리 지적하고 넘 어가야 할 것은 기존의 연구자들은 대부분 행이 도시부분에만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정 리하면 다음과 같다. 購 島 玄 治 郞 은 방의 수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대략 개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 顧 島 玄 治 郞 1930) 김병모도 방의 수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 하지는 않았지만 도시계획의 기본 단위가 총 5767R 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김병 모, 1884) 이에 비해 윤무병은 동서와 남북으로 6개의 방이 있어 36방이 있었다고 분명하게 언급하면서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35리를 35개의 방 중 왕궁이 제외된 35방으로 해석하였고 360방은 36방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윤무 병, 1987) 민덕식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왕도 長 3, 075보, 廣 3, 018보의 기록을 현재의 5.60아n.5,593m로 보고 방이 이 범위 안에 모두 들어간다고 보았다. 이외의 학자들은 방의 수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 2-2 선행연구의 문제점 신라 왕경에 대해서는 주로 역사학 고고학 도시계획학에서 연구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를 통해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대한 여러 문제들이 논쟁의 대상 으로 부각되었으며 상당한 연구성과가 축적되었다. 하지만 선행연구의 검토과정 에서 신라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대한 견해 차이가 매우 심하게 나타나고 있 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근본적으로 이 문제 를 규명할 만한 자료가 극히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나오는 신라 초기기록에 대한 신빙성 논쟁도 왕경의 범위와 행정 구역에 대한 견해 차이를 크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 차이가 발생한 것이 27) Ii프 國 벚 記 卷 第 三 新 / 羅 本 紀 第 갚 자비마립간 12년
44 단순히 자료의 부족이나 기록에 대한 신빙성 논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차 원에서 선행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의 문제를 구체적인 공간이 결여된 행정단위라는 차원에서 살펴보는 경우가 많았다. 왕경이나 그 내부의 행정구역이나 모두 구체적인 공간상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일정한 영역적 범위와 경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연구가 주 로 역사학계에서 이루어짐에 따라 행정단위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에 초점을 맞 추게 되어 구체적 공간상에서의 문제는 상당히 등한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하지 만 이미 앞에서 여러 번 강조했듯이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이 구체적으로 어떻 게 이루어져 있었는가는 왕경과 행정단위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전제조건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대한 문제를 구체적인 공간상에서 바라보는 지리적 차원의 연구 필요성이 제기된다. 두 번째로 왕경 내 행정구역 사이의 관계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지배층을 비롯 한 인구이동과 재분포 그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중심구역의 형성 확장과의 연계 속에서 파악하는 관점이 미흡했다. 왕경과 지방, 왕경 내에서도 정치중심구역과 다른 지역 사이에 지배층을 비롯한 인구의 이동이 있을 수 있으며 행정구역 사이의 관계 변화를 이러한 인구의 이동 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볼 펼요가 있다. 특히 지배층의 이동은 행정단위로 표현된 집단의 정치적 사회적 힘의 역관계를 바뀌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 구이동과 재분포의 핵심에는 정치중심구역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정치중심구역 의 형성과 확장이 기존의 행정구역의 경계와 어떤 관련이 있으며 그것이 행정구 역과 연관되어 금석문이나 사서의 자료에 어떻게 기록되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필 요가 있다. 세 번째로 왕경의 범위나 행정구역의 문제를 형성과 변화라는 시계열적 차원에 서 바라보는 관점 이 미 약했다. 왕경의 범위나 행정구역 모두 당시대의 필요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 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역사성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 라서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이 신라의 역사 속에서 시계열적으로 어떻게 변모했 는가를 살펴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것은 신라가 건국되기 이전 신라의 범위가 과연 지역적으로 어떻게 구분되어 있었으며, 각 지역단위 사이에는 어떠한 정치 적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
45 고 신라의 건국과 대외팽창 속에서 건국이전의 상태가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으 로 어떻게 계승 변화되었지를 연속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네 번째로 왕경의 범위를 도시계획의 흔적이 나타나는 범위만으로 한정시키는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에 기록되어 있는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대한 사료를 도시계획의 틀에 맞추어 이해할 필요는 없다. 도시계획에 대한 연구가 구 체적인 계획의 단위와 도시의 내부구조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 있는 것은 분 명하지만 그것이 왕경 전체에 대한 지리적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왕경은 도시, 그것도 계획된 도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 라서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에 기록되어 있는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에 대한 사료를 도시계획의 틀을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도시계획의 연구성과를 바라볼 필요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된다면 오히려 도시계획의 틀 속에서 사료를 바라볼 때보다 도시계획의 단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46 제 2장 경주시내의 하천과 지형 제 1 절 기록을 통해 본 하천의 범람과 지형 1-1 하천의 범 람과 북천 경주시내는 형산강 본류인 서천과 남천 북천 등 세 개의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 에 있다. 현재는 곳곳에 人 工 提 防 이 만들어져 있고, 북천 상류에는 보문호와 덕동 호가 건설되어 있어 이들 하천의 범람 위험이 적다. 하지만 일제시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경주시내는 범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던 지역이다. 이런 사실은 고대 에도 마찬가지였으며Ir삼국사기 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 다. 자료 2-1) (아달라니사금) 7 년(1 60) 여름 4월에 暴 雨 가 내려 알천(북천)의 물 이 넘쳐 人 家 가 표류하였고 金 城 北 門 이 저절로 무너졌다1) 자료 2-2) (유례니사금) 7년 (290) 여름 5월에 큰 물이 나서 월성이 무너졌다, 2) 자료 2-3) (흘해니사금 41 년 (350)) 여름 4월에 큰 비가 열흘이나 내려 평지의 물이 3-4R 이나 되었고, 官 私 屋 舍 가 漂 沒 하였으며, 산이 13 개소나 무너졌다, 3) 자료 2-4) (소지마립간 18년 (496)) 여름 5월에 큰 비가 내려 알천(북천)의 물 이 불어나 人 家 200 여가가 표류하였다, 4) 위의 자료는 경주시내와 분명하게 관련되어 있는 범람 기록만 뽑은 것이다, 5) 큰 1) 七 年 夏 四 月 暴 雨 關 川 水 益 漂 流 人 家 金 城 北 門 自 짧( D" 二 츠 國 벚듭ê J 卷 第 二 新 羅 本 紀 第 τ 阿 達 羅 尼 師 今 7 년) 2) 七 年 헐 t1. 月 大 水 月 城 頻 짧Jr-~ 國 ~ 記 卷 第 新 羅 本 紀 第 유례니사금 7 년) 3) 夏 四 月 太 샤IT?셋 句 츠f J:번 水 三 四 }긍 j폈 沒 官 私 넓: 舍 IJI 朋 十 프( Jr츠 國 필 記 卷 第 τ 新 羅 本 紀 第 품 解 尼 師 今 41 년) 4) 夏 liη 大 n~ 關 川 水 振 렌 沒 그 白 - 餘 家 ( Jr 三 國 닷] 記 卷 第 三 新 羅 木 紀 第.드즈 소지마립간 18 년) 5) Ir삼국사기 에 6세기 이후에는 홍수 시 범람에 의한 경주시내의 피해상황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 이것은 6세기 이후 제방 건설이 충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으 로 볼 수 있다. 다만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북천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선덕왕이 죽음에 이르러 아들이 없자 群 댄이 후사를 논의하여 왕의 族 子 댐 )C 을 세우려고 하였다. 주원의 집은 京 北 20 리에 있었는데 때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나 주원이 건널 수 없었다. 혹자가 말하기를 人 君 의 큰 자
47 홍수가 나면 고지대에 해당되는 月 城 이 무너질 정도이고 평지에는 3-4R 이나 물 이 고일 정도라면 경주시내가 모두 물에 잠기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위와 같은 대홍수는 매년 일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며, 몇 십 년만에 한 번씩 일어 났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대홍수의 상황을 통해 볼 때 몇 년에 한 번 일 어나는 홍수일지라도 그 영향이 결코 작지 않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홍수 시 이 러한 범람에 대한 기록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경우에도 찾을 수 있다. 자료 2-5) 東 川 : 北 川, 關 川 이라고도 하는데 부의 동쪽 5 리에 있다. 樹 領 에서 나와 握 淵 으로 들어간다.%- 傳 에 뱃물이 동북쪽으로부터 읍의 거주지로 곧장 뚫고 들어오므로 고려 현종 때 전라 충청 경상 3도의 군정을 징발하여 돌을 쌓아 제방을 만들고,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조성해 수해를 방지했다 고 한다.6) 자료 2-6) 奉 德 츄 鍾 : 신라 혜공왕이 종을 주조하였는데 구리의 무게가 12만 근이었다... 뒤에 봉덕사가 북천에 잠기자 天 順 4 년(1 460) 경진에 靈 妙 좋로 옮겨 달았다.7) 자료 2-7) 공조 (I 費 )에서 경상도 제언 순찰사( 慶 尙 道 提 體 逃 察 使 ) 선형( 宣 炯 ) 의 계본(햄 本 )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경주( 慶 州 ) 북천( 北 川 )의 물길이 바로 읍 성(몸 城 )으로 향하고 또 성밑에 해자( 核 字 )가 모두 메어서 막혔습니다. 본주( 本 州 )는 다른 고을의 예( 例 )와 같지 아니하여 집경전( 集 慶 觀 )이 있고, 또 객인( 客 人 )이 경유하는 곳이니, 청컨대 명년 농한기에 본주의 백성을 뽑아 내어서 제방 ( 提 防 )과 해자를 수축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8) 자료 2-8)... 이번의 수재는 개벽이래 없었던 것이다. 경주는 府 內 가 큰 바다로 변해버려 민가가 잠기지 않은 것이 없었다... 9) 자료 2-9) 본조 영조 18년 9월에 경주에 큰 물이 나서 신라 헌덕왕릉을 무너 뜨리니 상께서 香 祝 을 보내고, 道 뚝에게 명해서 그것을 수리하게 했다. 좌의정 송인명이 장계를 올려 말하기를 경주의 신라 헌덕왕릉은 북천변에 있습니다.8 월 22 일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는데 물길이 陸 寢 을 비껴 충돌하여 동서 長 리는 진실로 사람들이 도모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今 日 에 폭우가 내 리니 하늘이 혹 주원을 세울 수 없게 한 것이 아닌가... 끼 三 國 벚 記 卷 第 十 新 羅 本 紀 第 十 원성왕 즉위) 이와 같은 내용은 삼국유사 卷 第 二 紀 異 第 二 원성대 왕 부분에 도 비 슷하게 나온다. 6) 東 川 ~r;. 北 )11 - 될 關 川 在 府 東 五 里 出 微 領 立 鋼 淵 [ 新 增 H깜 傳 川 流 自 東 北 直 衝 둠 居 故 高 麗 顯 宗 朝 發 全 羅 忠 淸 慶 尙 三 道 軍 T 藥 石 寫 提 盛 植 林 數 以 防 水 害 :Zi;( r 東 京 雜 記 卷 一 llj 川 ) 7) 奉 德 좋 鐘 新 羅 惠 悲 王 驚 鐘 鋼 重 十 二 萬 ft... 後 좋 倫 於 北 川 天 順 四 年 康 辰 移 縣 手 靈 妙 좋( r 新 增 東 國 與 地 勝 寶 卷 之 : 十 一 慶 州 府 古 題 ) 8) r 朝 蘇 王 朝 實 錄 세조 12 년 1 월 19 일 9)... 今 此 水 % 乃 開 關 以 來 之 所 未 有 者 慶 州 則 府 內 變 寫 大 海 間 舍 無 不 휠찬 沒... ( r 朝 蘇 王 朝 實 錄 선조 38년 7 월 23 일)
48 廣 44 척을 허물어 무텀을 범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內 外 의 계단과 섬돌 도 모두 파괴되어 깊은 내를 이루었으니 10) 위의 기록을 통해 고려와 조선에서도 범람의 위험이 상당히 강하게 존재했으며, 범람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곳에 입지해 있었을 읍의 거주지나 읍성조차도 위협받 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범람의 위협이 몇 십 년만에 한 번씩 일어나는 것일 지라도 주요 건물과 거주지까지 위협하는 일은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기록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알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사 실은 홍수 시 경주시내에 범람 위험을 일으키는 하천은 關 川 즉 北 川 이라는 사실 이다.11) 북천은 길이가 21km 이고 유역 면적이 85.9k따로서 형산강 본류인 서천은 말할 것도 없고 길이가 21km 이고 유역 면적이 112.9knf 인 남천( 故 川 )보다도 작 다.1 2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천이 경주시내의 범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유는 그림 -2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림 -2를 보면 북천은 동쪽 높은 산지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가 합해져 내려 오다가 소금강산과 명활산 줄기의 협곡을 통과하자마자 바로 경주시내의 평지로 쏟아져 나온다. 반면에 남천은 토함산 줄기의 서쪽 급경사지에서 발원하지만 곧바 로 평탄한 들을 만나 오랫동안 흐른 후 월성 남쪽에서 경주시내에 들어선다. 이러 한 두 하천의 특정은 경주시내와 맞닿는 부분에서의 하천 바닥의 퇴적물을 통해 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1 은 소금강산과 명활산 줄기의 협곡에 있는 북천을 찍은 것이다. 하천 바 닥에는 여러 크기의 바위 자갈 모래가 뒤섞여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경주시내 서북쪽에서 형산강 본류와 합류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이것은 북천의 구배가 경주시내에 도착할 때까지도 급격히 약화되지 않아 홍수시 하천의 운반능력이 컸 기 때문이다. 사진 -2는 윌성 남동쪽 끝에서 찍은 남천의 모습이다. 하천 바닥은 순수한 모래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곳보다 경사가 급한 곳에는 돌과 자갈이 섞여 있으나 북천에 비해서는 모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남천이 이 10) 本 朝 英 祖 十 八 年 九 月 慶 州 大 水 짧 新 羅 憲 德 王 陸 上 遺 香 祝 命 道 ê 修 之 左 議 政 宋 寅 明 햄 日 慶 'l '1 新 羅 憲 德 王 陸 處 於 北 川 邊 八 月 二 十 二 日 大 風 雨 水 勢 橫 衝 陸 寢 뿔 破 東 西 長 廣 四 十 四 R 至 犯 瑩 域 內 外 階 柳 亦 皆 :f: E 破 使 成 深 川... ( rr 文 敵 備 考, 朝 蘇 σ) 林 數 JJ, 朝 蘇 總 督 府 林 業 試 驗 場 1928:39에서 재인용) 11) 북천이 역사적으로 경주지역에서 가장 범람이 심한 하천이었음은 朝 蘇 η 林 數 J, 朝 蘇 總 督 府 林 業 試 驗 場 1928:41-42 에 잘 정리되어 있음. 12) 0" 慶 州 市 둡JE, 경주시사편찬위원회, 1971:34,
49 탁 트인 평지가 시작되는 소금강산과 명활산 사이의 협콕인 숲머리에서 찍은 사진. 하상 에는 돌과 자갈 모래가 뒤섞여 있고 하천 뒤쪽으로는 보문호의 둑이 보이고 있다. 사진 -1 북천의 河 皮 월성 동남쪽, 경주국립박물관 서쪽에서 찍은 사진. 하상에는 모래만이 쌓여 있다. 가운데 에 보이는 바위는 새로 발굴한 일정교지의 흔적이다. 사진 -2 남천의 河 皮
50 미 완만한 평지를 지나면서 운반력이 급격히 약화된 후 월성 남쪽을 지나기 때문 에 나타난 것 이 다 13) 이러한 두 하천의 특징 때문에 河 福 의 차이가 매우 컸다. 남천은 길이는 북천과 비슷하지만 유역면적이 넓음에도 불구하고 하폭은 북천보다 훨씬 작다. 그림 -2와 그림 -6은 1916년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북천 상류에 보문호나 덕동호가 만 들어지기 전이다. 이 지도를 통해 북천의 하천폭이 그 길이와 유역면적에 비해 서 천이나 남천보다 지나치게 넓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홍수 시 갑작스런 유량증가 에 의한 북천의 범람 위험이 매우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 1-2 제방과 숲( 數 )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경주시내는 범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인해 범람을 막아내기 위한 제방의 건설과 숲의 조성에 대한 각종 기록도 많을 수밖에 없다. 최원석에 의하변 경상도 지역에서 비보숲이 가장 많은 지역이 바로 경주라고 한다. 그에 의하변 경주에는 총 15개소의 數 林 이 분포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 9 개소의 안동 5개소의 진주 4개소의 고령 3개소의 밀양 함안 청도 영해가 잇고 있다. 그리고 그가 조사한 총 15개소의 數 林 중 수해 방비용으로 사용 된 것은 7개소라고 하는데 모두 경주시내에 있다. 그리고 수해 방지용이 아닌 8 개 중 4개도 경주시내에 있다. (최원석 2000: )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경주의 중심지가 경상도의 다른 어떤 고을의 중심지보다도 범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 으며, 그에 대한 방비도 가장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북천 변에 제방이 건설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제시한 자료 2-5 와 자료 2-7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북천 변에 제방의 건설과 보수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속담의 유래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알 13) 이러한 남천의 상황 때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올 수 있었다. 문천은 일명 남천이 오... 배반 인왕 양리의 사이에 跳 珠 懶 玉 하는 淸 流 를 이루다가 반월성을 지나 서로 서천 에 流 注 하는 동안은 흐름이 아주 완만하여 북천의 石 傑 을 굴러 내리게 하는 급류와 대 조적이다. 옛날은 지금처럼 뱃바닥이 돋아지지 않아 故 川 倒 沙 라 일렀던 만큼 물이 서로 흐르는지, 동으로 흐르는지 모래가 치오르는 듯하여 白 沙 뿜 流 는 언덕의 푸른 잔디와 천 경림 남정수 등 앞뒤의 숲들 그 남쪽에 萬 졌 笑 森 처럼 전개하는 남산의 봉우리들 그 佳 麗 한 풍광은 자고로 騎 人 팎 客 의 歌 詩 에 많이 올랐음."( r 慶 州 -n]~.펴, 경주시사편찬위 원회, 1971:38) 맨 냉
51 수 있다. 자료 2-10) 북천 범람에 대처하기 위해 조선 초부터 治 邊 七 둠이라는 연일, 장 기 등 屬 둠의 民 夫 를 매년 동원하여 제방을 쌓게 하였다. 하지만 원거리 出 않 民 夫 의 곤란함이 커서 각 읍에서는 노임의 대가를 현금으로 매년 경주에 납입 하였고, 경주부에서는 이 돈으로 彼 T 을 사서 제방을 쌓도록 하였다. 그 돈을 이 지방에서는 물아랫 돈 이라 하였는데 근세 말기에 기강이 문란해짐에 따라 북천의 提 防 은 名 存 實 無 로 되었고, 그 돈은 그대로 관리들의 뱃속으로 들어가 는 예로 되었다. 경주 아전들이 빚쟁이에게 졸리면 의례히 물아랫 돈 올라오면 갚겠다 는 것이 이 지방의 속담으로 되었다. 이로 인해 상류의 산림남별과 함께 제방이 허술한 북천의 범람피해는 더욱 커졌다. 지금은 提 防 實 施 와 함께 그 위 에 경주의 東 湖 라 할 수리조합저수지가 수량을 조절하여 범람의 勢 가 감소되어 하류 沙 績 이 도루 市 街 地 化 하고 있다 14) 이와 같은 속담 유래가 나타난 것은 북천 제방의 修 葉 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 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일상적인 홍수 시에도 북천 범람의 위험이 상존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총독부에서 1929년에 발행한 朝 蘇 河 川 調 홉 書 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제방으로서 9개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경주 북천의 제방이다 15) 그리고 이 북천의 제방이 사진 -3 처 럼 실려 있다. 이것은 경주의 중심지가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범람 위험에 취약 한 곳이며, 그 위험의 가장 큰 이유가 북천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북천 남쪽과 북쪽에는 다음과 같은 數 에 대한 기록이 남게 되었다. 자료 2-1 1) 五 里 數 : 부 동쪽 8 리의 동천변에 있는데 5리에 걸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6) 자료 2-12) 五 里 數... 경주 읍내로부터 동쪽으로 3km 정도, 형산강의 지류인 북 천 南 뿜에 이르는데 경주로부터 감포읍에 이르는 街 道 부근의 연장 2,OOOm 정 14) r 慶 州 市 誌 J, 경주시사편찬위원회, 1971:35에서 문장이 어색한 부분은 고침. 이 기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경주시내 북쪽의 북천 하폭은 일제시대에 비해 현 재는 반으로 줄었다. 지금의 하천은 일제초기까지 있었던 북천의 남쪽부분으로서 북쪽 부분은 모두 농경지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시가지로 변했다. 하지만 현재도 북천의 하폭 은 남천의 두 배 정도는 된다. 15) 9 개를 모두 열거하면 경주 북천제방, 대구부 신천제방, 남원읍 요천제방, 담양읍 영산강관방제, 강동읍 수창천제방, 양양읍 남대천제방, 강릉읍 남대천제방, 서흥읍 서흥강제방이다. ( 朝 蘇 總 督 府 Ir 朝 蘇 河 川 調 좁뿔 J, 1929:4) 16) 五 里 數 在 府 東 八 里 東 川 邊 延 쫓 五 里 故 名 ( Ir 東 京 雜 記 卷 數 )
52 도에 걸쳐 있는 하반 평탄지 17) 자료 2-13) 오리-숲[오리쑤, 오리수, 아리숲, 아리쑤] 구황룡 북쪽 북천결 남쪽 가에 있는 숲. 고려 제 8 대 현종 때, 북천결의 뱃물이 자주 범람하여 경주시 인 가로 들어가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전라, 충청, 경상의 3도 군정( 軍 丁 )을 정발하여 돌로 뱃둑을 튼튼히 쌓고, 나무를 심어 그 길이가 5리나 되었음.(2) 보문동의 웃수 아래쪽이 됨 18) 자료 2-14) 古 城 數... 경읍 시가로부터 북쪽 0.5km 내외의 북천 南 뿜에 해당하 는 연장 3,어Om 정도의 하반평탄지... 문헌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음. 읍성의 북 쪽 성동리, 성건리에 걸쳐 북천 남안 약 3km 서천 합류지점까지 있음....)19) 자료 2-15) 고성-쑤[고성수, 산조수] 성건동과 성동리에 걸쳐 있는 북천가에 있는 숲. 길이 약 3km로 산림이 울창하였는데 지금은 여기 저기에 해송과 포 플러만 드문드문 있을 뿐임. 산조(멧대추나무)가 있었으므로 산조수라고도 하였 음.20) 자료 2-16) 林 井 數 : 府 동북쪽 5 리 백률사 서쪽에 있다. 高 陽 數 : 府 북쪽 4 리 에 있는데 옛날에 이른 바 論 虎 數 이다. 지금 %에서는 고양수라 칭한다. 옛날에 는 임정수와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好 民 들이 떼어내어 경작하는 밭을 만들어 나누어져 둘이 되었다.2 1) 오리수는 분황사로부터 지금의 보문호 제방 아래쪽인 숲머리라는 동네까지 이 어져 있었던 숲이었다. 이 숲은 동북쪽의 협곡으로부터 내려온 북천의 물이 남서 쪽으로 범람하는 것을 막아주던 역할을 했다. (그림 -4 참조) 이 숲의 존재 때문에 북천의 물은 분황사 지역에서 서북쪽으로 향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은 결국 조선시 대의 읍성이 있었던 지역으로의 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오리수는 자료 2-13에서 보듯 고려와 조선에서 읍성과 그 주변 으로의 북천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 수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숲으로 알려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성수는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일제시대의 기록부터 나온다. 이 것은 북천과 서천이 합쳐지는 지점으로부터 북천 남쪽에 약 3km 에 걸쳐 조성된 숲으로서 북천이 경주읍성으로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조성된 것으로 볼 수 17) r 朝 蘇 σ) 林 數 J, 朝 蘇 總 督 府 林 業 試 驗 場, 1928:39 18) r 한국지명총람 J 5( 경북펀1), 한글학회, 1978:162 19) r 朝 蘇 σ) 林 數 J, 朝 蘇 總 督 府 林 業 試! 驗 場, 1928: ) r 한국지명총람 J 5( 경북편1), 한글학회, 1978:185 21) 林 井 數 在 府 東 北 五 里 teî 票 좋 西. 高 陽 數 효 府 北 四 里 옵 n 古 所 謂 論 虎 數 也 今 則 倚 稱 高 陽 數 古 與 林 井 數 相 連 令 f펑 好 民 좀Ijfjf 之 버 分 而 寫 二. ( r 東 京 雜 記 卷 數 )
53 사진 위쪽으로 보이는 것은 명활산임. 아래 사진의 왼쪽 위로는 소금강산과 명 활산의 협콕이 보이며, 그 아래의 숲은 북천의 범람 때문에 침몰 위협을 받던 (전)헌덕왕릉. (자료 IF 朝 蘇 河 川 調 훌흙 J, 조선총독부, 1929:5) 사진 -3 일제시대까지 남아 있던 북천 변의 제방
54 었다. (그림 -4 참조) 엄정수와 고양수는 북천이 지금의 황성동 지역으로 범람하는 것을 막아주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 -4 참조) 북천이 분황사 지역 에서 서북쪽으로 꺾여 형산강 본류인 서천으로 합류하기 때문에 범람이 심할 경 우 더 서북쪽에 있는 황성동 지역으로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북천처럼 범람에 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하지 않는 서천 가에서도 숲에 대한 기 록은 풍부하게 남아 있다. 우선 삼국사기 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자료 2-17) 진흥대왕 즉위 5년 甲 子 (않4) 에 大 興 輪 좋를 만들었다.[ 國 史 와 鄭 傳 을 살펴보면 실은 법흥왕 14년 T 未 (527) 에 공사를 시작하였고, 21 년 Z :!1P(많5) 에 天 鏡 林 을 大 代 하여 비로소 공사를 크게 했다. 梁 陳 의 재목은 모두 그 숲에 서 취해도 충분했으며, 階 體 石 龜 도 모두 거기에 있었다. 진흥왕 5년 甲 子 (544) 에 이르러 절이 완성되어 甲 子 라 운운한 것이니 增 傳 에 7년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22) 위의 기록에 나오는 홍륜사의 위치는 서천가에 있는 지금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정) 이 지역에 있었던 天 鏡 林 은 흥륜사 창건 시 필요했던 梁 陳 의 재목을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였으며, 잘 보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의 경우는 아니지만 조선시대와 20세기 초반까지도 서천가에 숲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다음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자료 2-18) 南 享 數 하나는 故 川 북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문천 남쪽에 있었 다. 南 數 가 곧 五 陸 이며 北 數 는 지금 廢 해졌다.24) 자료 2-19) 천경림( 天 鏡 林 ) [숲] 국대이 서남쪽, 남천 가에 있는 숲. 길이 약 500m로 소나무, 버드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으나 신라 진흥왕 때는 경주에서 가장 큰 숲으로, 홍륜사를 비롯 많은 절을 짓는 데에 이 숲의 나무를 베어 썼 다고 함. 천경림-밭( 天 鏡 林 -) [논] 앞사정 서남쪽 곧 남천과 서천이 합류하는 부근에 있는 논. 본래 이곳도 천경림의 숲이었는데, 개간하여 밭이 되었다가, 그 뒤 다시 논으로 만들었음.25) 22) 員 興 大 王 郞 位 五 年 甲 子 造 大 興 輪 좋[ 按 國 史 與 獅 傳 實 法 興 王 十 四 年 T 未 始 開 = 十 一 年 ζ 째 大 代 天 鏡 林 始 興 工 梁 陳 之 材 皆 於 其 林 中 取 足 而 階 廳 石 題 皆 有 之 至 員 興 王 五 年 甲 子 좋 成 故 i 甲 子 慣 傳 i 七 年 誤 ]( r 三 國 遺 事 卷 第 三 興 法 第 三 原 宗 興 法 散 觸 滅 身 ) 23) IT" 慶 州 遺 題 地 圖 J, 국립경주박물관 : 경주시, 1997:36 24) 南 亨 數 在 故 川 北 一 在 故 川 南 南 數 則 五 陸 也 北 顧 今 廢 ( r 東 京 雜 記 卷 二 數 ) 25) IT"한국지명총람 J 5( 경북편1), 한글학회, 1978:181. 이 기록에 나오는 천경림은 지금
55 자료 2-20) 어대-쑤[어대수] 서천의 뱃가, 곧 장승배기에서 삼랑사터까지 약 1km의 숲. 지금은 버드나무, 포플러들만 드문드문 있을 뿐임.26) 문천 북쪽에 있었던 北 數 가 기록 당시에는 폐해져 있었다는 東 京 雜 記 의 기 록을 통해 조선 초기에도 천경림의 남쪽에 숲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 는데 r 한국지명총람 에는 北 數 가 천경림과 천경림-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 고 (추정)홍륜사지 북쪽에 있는 삼랑사터로부터 장승배기까지 약 1km 에 걸쳐 있 었다는 어대수에 대한 기록을 통해 조선후기 또는 일제초기까지도 서천가에는 길 게 숲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홍륜사가 만들어졌다는 天 鏡 林 이라는 숲도 서천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던 숲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러한 천경림과 같은 숲의 기능은 서천의 범람을 막아주던 제방의 역할 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서천은 울산광역시 두동면 두서면에서 발원하여 주변의 높은 산지에서 흘러 나오는 작은 지류들을 합해 경주시내에 들어선다. 하지만 이미 내남면 지역의 넓 은 평지를 지나게 되어 하천의 구배가 급격히 감소하며 그에 따라 범람의 위험은 작아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서면과 건천읍의 넓은 평지를 지나다 갑자기 협콕을 지나며 합류되는 대천과 그 약간 북쪽에서 합류되는 남천을 고려하면 경주시내에 대한 범람 위협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하천 변을 따라 경주시내의 평탄한 지형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위험성은 항상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람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한 것은 경주시내의 고도가 서 천보다 높고,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서천 변의 저지대에는 숲이 조성되어 있 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진흥왕 ( ) 때까지도 잘 보전되던 천경림의 존재를 통해 서천 범람의 기록이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를 해명할 수 있게 된다. 남천가에는 범람을 방지하기 위한 숲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이 것은 경주시내에서 고지대에 해당되는 월성이 경주시내 방향으로의 남천의 범람 가능성을 이미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 홍륜사가 있는 자리를 지칭한다. 하지만 이곳은 흥륜사지가 아니라 영묘사지로 새롭게 비정되고 있다.( r 慶 州 遺 題 地 圖 J, 국립경주박물관 : 경주시, 1997;36) 26) w'한국지명총람.!i 5( 경북편1), 한글학회, 1978:
56 혔낭산 蠻 輔 o lkm l. 오리수 2. 고성수 3. 고양수 4. 엄정수 5. 어대수 6. 천경림 7. 남정수의 북수 8. 남정수의 남수(오릉) ( 原 圖 r 朝 蘇 古 廣 圖 諸.!I, 朝 蘇 總 督 府, 1916) 그림 -4 하천 범람을 막아주던 경주시내의 林 數
57 제 2 절 유적 발굴을 통해 본 하천의 범람과 지형 2-1 유적 발굴지의 원지반층 지금까지 여러 기록에 대한 검토를 통해 경주시내가 범람이 심한 지역이었음을 알아보았다. 또한 신라의 건국이래 이러한 범람에 대처하기 위해 제방의 건설과 숲의 조성 및 보호와 같은 여러 가지 조처가 취해졌음도 알아보았다. 이러한 범람 에 대한 사실은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유적에 대한 발굴과정에서도 나 타나고 있다. 우선 월성해자와 해자 외곽의 집터, 계림북편의 집터 발굴은 경주시내의 지역이 과거에 하천과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그림 -5 참조) 일 단 월성해자의 북편인 다 지역에서는 해자일 때 퇴적된 빨층 밑의 원 지반층은 거의 모든 지역이 자갈섞인 청회색사질토층이었다. 또한 월성해자의 서편인 라 지역에서는 빨층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청회색모래층을 비롯한 자갈섞인 모래층이 두럽게 발견된다고 한다. 이 때 모래층이 청회색을 띄는 것은 빨층 밑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계림북편의 127R 집터 발굴 결과 이곳도 약 1m 이하에서 발 견되는 거의 모든 원 지반층이 강바닥에서 볼 수 있는 자갈섞인 모래층, 또는 모 래층이었다.낀) 이렇게 원 지반층이 자갈섞인 모래층 또는 모래층이라는 사실은 월성 해자와 주변 집터의 발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경주시내의 한복판인 봉황대총 바 로 북쪽인 노동동 249-5번지의 발굴 결과 약 m 이하의 원지반층은 모래+ 자갈층이었으며 했다고 한다.28) 발굴과정에서 지표 하 O.4m부터 물이 새어나와 양수작업을 병행 또한 대릉원 주차장 서쪽인 황남동 번지 건물신축부지 발굴 조사에서도 약 1.6m 밑으로는 자갈섞인 황갈색 모래층이었다고 하며 29), 대릉원 주 차장 동쪽인 황남동 건물신축부지 발굴조사에서도 지표 약 1.4m-2m 아 래에서는 황갈색 점토+자갈층이 확인되었다고 한다.3이 그리고 황남동 번지 의 발굴조사에서도 깊이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원지반층은 자갈섞인 황갈색 모 27) r 月 城 核 字 發 抽 調 훌 報 告 書 1, 慶 州 古 題 發 握 調 훌 團, ) r 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 J (낀급발굴조사보고서 n, 경주문화재연구소, 1992: ) r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 J (긴급발굴조사보고서 D, 경주문화재연구소, 1992:227 30) r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 J (긴급발굴조사보고서 n, 경주문화재연구소, 1992:
58 래층으로 확인되었으며 이 층에서 지하수가 많이 새어 나와 양수작업을 병행했다 고 한다.31)( 그림 -5 참조) N A 긴 1. 월성해자 다 지역 2. 월성해자 라 지역 3. 계림북편 집터 4. 황룡사지 5. 황 남동 번지 6. 노동동 249-5번지 7. 황남동 99, 황남동 번지 ( 原 圖 r 朝 蘇 古 題 圖 諸 JJ, 朝 蘇 總 督 府, 1916) 그림 -5 경주시내의 유적 발굴지 31) r 경주 황성동 번지 황남동 번지 발굴조사보고서 J, 국립경주문화재연구 소, 1995:
59 표 -2 월성 해자 다 와 라 지역의 토양층 (단위: cm) 다480 다570 라 150W50 표토 有 적갈색유기질층 갈색부식토층 적갈색산화층 갈색점질토층 황찰책Jl.~충 (+ 과갈) 빨층 À}갈챔언 G α o 청회책 λ}찰뿔총 *0 표시는 원 지반층이면서 두께에 대해 언급이 없는 경우임 * 빈 칸은 없는 경우임. * 자료 r 月 城 核 字 發 握 調 훌 報 告 書 1, 慶 ) l 古 題 發 握 調 훌 團, 1990에서 재편집 표 -3 월성 해자 다 지역 외곽의 집터 토양층 ~:;J펀 집터 집터 집터 집터 집터 표토 갈썩쪼 211 총 (적)갈색 점토층 À} 철섞<il 갈썩사철토 빨층 자찰섞얀 창회색모래총 Q 집터 첩토 사철 125 (단위: cm) 집터 집터 (사질토) *0 표시는 원 지반층이면서 두께에 대해 언급이 없는 경우임 * 빈 칸은 언급이 없는 경우임. 자료 r 月 城 核 字 發 握 調 흉 報 告 書 1, 慶 州 古 廣 發 握 調 흉 團, 1990에서 재편집
60 표 -4 계림북편 12 개 집터의 토양층 표토 흑갈색부식토 갈색점질토층 자갈섞얀 황갈색 5!.l!헤총 자갈섞얀 포래총 앓음 o 1짧아상 o Q :-30 (단위: cm) Q 갓 60 o m o *0 표시는 확인되었지만 두께에 대해 언급이 없는 경우임 * 빈 칸은 언급이 없는 경우임. 자료 r 月 城 核 字 發 握 調 흉 報 告 書 I 慶 州 古 鐘 發 握 調 흉 團 1990:72-88에서 재편집 표 -5 황룡사 발굴지 의 토양층 (단위: cm) 금당지 E 構 목탑지 A 構 동금당지 A 構 서금당지 A 構 황색점질토-적 황 λ } 흑색부식토-황갈색 색점질토-적갈색점 점토-적갈색점질토- 토 ( 깊 이 ) "õ' 효증 질토 (깊이 300) 갯형훌벌잭토 암적색점토-암갈색 점토-적색점토 (깊이 408) 짚황헬짧.::l: n홉 黑 f5 ì 尼 :1: 혹깃씩 λ}짧 f풍 級 홉좋 色 ^t 찰과 총 훌뿔 石 훈캡사찰토 샤쩔 I료 자갈총 * 鐘 樓 址 와 經 樓 址 는 성토층과 생토층을 구별하기 어렵게 기록하여 정리 안 함. 자료Ir별 龍 총 유적발굴조사보고서 1, 문화재관리국, 1984에서 편집 이와 같은 상황은 황룡사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그림 -5 참조) 금당지의 E 構 에서는 盛 土 層 밑에 갚이 약 50cm의 黑 色 i 尼 士 가 깔렸 으며, 그 밑으로는 河 皮 面 으로 추정되는 춤까 色 傑 石 混 入 妙 質 士 가 깔려 있었다.3 2 ) 목탑지의 A.B.C.D 士 層 試 鋼 構 모두에서도 성토층 밑은 흑색니토층이었고, 그 밑에는 까좁 色 자갈과 妙 質 土 로 되어 있었다, 33) 동금당지의 거의 모든 토층시굴구 에서도 토층의 순서는 盛 土 層 인 흑색부식토 - 황갈색점질토 자갈 및 互 片 이 섞 인 황갈색점토 - 적갈색점질토 - 암적색점토 - 암갈색점토 - 적색점토와 그 밑의 32) 33) 휠 龍 좋 유적발굴조사보고서 1, 문화재관리국, 1984:50 떤 龍 칸 유적발굴조사보고서 1, 문화재관리국, 1984:
61 生 士 層 은 黑 色 i 尼 士 - 자갈층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34) 이와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경주시내 전체가 원 지반층이 주로 자갈섞인 모래층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지역이 과거에는 대부분 하천 범람의 영향을 받던 지역이었음을 알려준다. 이와 같은 상황은 경주 및 울산시 불국사단 층선 지역에 광범위한 선상지가 분포하고 있다는 연구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 (황 상일 윤순옥, 2001) 이 연구가 경주시내를 대상으로 놓지는 않았지만 월성 동쪽 과 낭산 동쪽의 보문동이 모두 선상지로 분류된 것으로 보아 경주시내도 선상지 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경주시내는 산지로부터 떨어져 하천변에 있는 곳 이기 때문에 이 연구에서 약 년 전에 끝난 최후빙기에 형성되었다고 본 선 상지의 저위면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산지에서 멀리 떨어진 남천 변 바로 주위 는 선상지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표시되어 있어 저위면 선상지보다 더 이후에 퇴적된 층으로 볼 수도 있다 차 퇴적층과 빨층 표 -2를 보면 월성해자 발굴에서는 빨층 위에도 갈색 또는 황갈색 사질토층이나 자갈석인 모래층이 두럽고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또한 표 -3을 보면 월성해자 외곽 집터의 발굴에서도 빨층 위에 황갈색 사칠토층이나 자갈섞인 모래층이 역시 광범 위하게 존재한다. 이 층 모두 인위적인 객토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최소한 2 차례 이상의 홍수에 의해 퇴적된 것으로 조사자는 지적하고 있다,35) 특히 자갈은 강바닥에서 볼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월성해자의 기능이 약화된 시기가 7세기 후반기보다 이른 시기였다는 연구(김낙중, 1997) 를 통해 볼 때 이 지역으로의 홍 수 범람에 의한 퇴적이 7세기경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표 -5에서 보듯이 황룡사는 빨층 위에 바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황룡사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그곳이 연못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과도 잘 부합되고 있다. 자료 2-2 1) (진흥왕) 14년 봄 2월에 왕이 所 司 에게 명하여 월성 동쪽에 新 宮 을 짓게 했더니 그곳에서 黃 龍 이 나타났다. 왕이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 佛 좀로 34) r 皇 龍 좋 유적발굴조사보고서 1, 문화재관리국, 1984: ) r 月 城 孩 字 發 握 調 훌 報 告 書 1, 慶 jh 古 題 發 振 調 훔 團, 1990:
62 N A4 l. 고분군(노서동 노동동 대릉원 황오동 인왕동) 2. 고분군(교동 황남동) 3. 분황사 4. 황룡사지 5. 안압지 6. 월성해자 I 다 l 지구 7. 월정교지 8. 계림 9. 양지뜰 Q 홍수 시 북천의 물이 자주 범람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방향 ( 原 圖 Ir황} 蘇 古 題 圖 l 諸.!I, 朝 蘇 總 督 府, 1916) 그림 -6 경주시내의 지형
63 고치게 하고 號 를 내려 皇 龍 이라고 했다.36) 자료 2-22)... 세번째는 龍 宮 의 남쪽이요[지금의 황룡사다. 진흥왕 쫓멜년에 공 사가 시작되었다], 네 번째는 용궁의 북쪽이다.[지금의 분황사다. 선덕왕 떠떠년 에 공사가 시작되었다]....37) 新 宮 을 만들 때 黃 龍 이 나타났기 때문에 黃 龍 좀로 바꾸었다는 기록을 통해 그 곳이 연못 또는 습지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龍 宮 의 남쪽이 황룡사 이고, 북쪽이 분황사라는 표현에서의 龍 宮 은 실질적인 宮 이라기 보다는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에 있는 신령스러운 연못일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앞에서 살펴본 황 룡사 발굴조사보고서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될 수 있다. 그렇 다면 황룡사지의 일부는 사찰이 만들어지는 진흥왕 13 년 (552) 까지도 연못으로 유 지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을 통해 6세기 중반까지도 이곳의 지형 적 상황이 현재와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월성 해자가 기능이 정지된 이후에 퇴적된 자갈섞인 모래층과 그냥 모 래층의 공급원은 남천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남천은 월성에 의해 이곳으로의 범 람이 차단될 뿐만 아니라 이곳의 고도가 더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와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남천은 사진 -2와 같이 자갈보다는 모래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천 퇴적물의 공급처는 어디일까? 서천은 월성해자지역보다 낮은 지역에 있기 때문에 이곳까지 범람할 수가 없다. 남천은 낭산과 월성을 잇는 선이 하나의 분수계 역할을 하며 월성 자체가 이곳으로의 범람을 막아주고 있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역사 기록 속에서 범람에 의해 경주시내를 위협했던 하천은 북천밖에 없다. 이미 사진 -1 에서 보았듯이 경주시내 부근의 북천은 돌, 자 갈, 모래가 섞인 하상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월성해자의 빨층 위 에 광범위하게 쌓인 자갈섞인 모래층의 공급처가 북천이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그림 -6을 보면 지금의 대릉원과 그 동쪽의 황오동 인왕동 고분군은 작은 분수 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월성해자와 안압지 북쪽으로 작은 골짜기가 형성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이 작은 골짜기 위에 있는 양지뜰이라 불리는 황 36) 十 四 年 春 二 月 王 命 所 司 藥 新 宮 於 月 城 東 黃 龍 見 其 地 王 疑 之 改 寫 佛 극놓 陽 號 R 띈 龍 ( r 三 國 史 記 卷 第 四 新 羅 本 紀 第 四 진흥왕 14 년) 37)... 츠틴 龍 宮 南 [ 今 띔 龍 츄 현 興 王 쫓때 始 聞 ] 四 R 龍 宮 北 [ 今 쳤띈좋 월중 德 甲!f 始 開 1... ( r f 國 遺 事 卷 第 興 法 第 즈드 阿 道 첼 羅 )
64 사진 왼쪽에 나타나 있는 숲과 건물이 분황사이고 그 오른쪽에 소금강산과 명활산 줄기 사이의 좁은 협곡이 보임. 이곳으로 북천이 빠져 나와 분황사 북쪽을 지나감. 사진 가운 데의 황룡사지가 앞쪽의 양지뜰이나 왼쪽의 분황사 지역보다 고도가 약간 높음을 알 수 있으 사진 -4 양지뜰에서 바라본 황룡사지 사진 가운데 지평선부분이 황룡사지. 오른쪽 건물은 사진 -4에서 나타난 건물임. 황룡사 지가 분황사보다 높게 조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음. 사진 위쪽의 산은 남산임. 사진 -5 분황사에서 바라본 황룡사지
65 룡사 서쪽, 분황사 남쪽, 안압지 북쪽 지역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그리고 이 지 역의 물은 모두 월성 북쪽과 계림을 통과하여 월성 서쪽의 윌정교지 밑으로 빠져 나간다. 이와 같은 사실은 현재의 분황사 지역에 제방이 없는 상태에서 홍수가 발 생했을 경우 북천의 물 중 일부가 이곳으로 흘렀을 가능성을 알려준다,38) 이와 같은 가능성은 표 -5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황룡사가 연못이었던 빨층 위 에 약 3m 이상 盛 士 한 후 건설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더욱 높아진다. 사진 -4와 사 진 -5에서 볼 수 있듯 양지뜰 분황사와 황룡사지 사이에는 분명한 고도차가 나타 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도의 차이는 황룡사를 건설할 때 인위적인 盛 士 에 의 해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황룡사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현재의 양 지뜰이나 분황사로부터 황룡사지까지 큰 고도의 차이가 나지 않는 평탄한 지형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조선시대 읍성을 비롯한 지금의 경주시내로 향하는 북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분황사로부터 숲머리까지 제방을 쌓고 1ï. Æ 數 를 조성했던 사실을 상기할 필 요가 있다. 이러한 제방과 숲은 분황사로부터 숲머리 사이의 구간이 북천의 범람 에 취약한 부분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곳이 무너지면 소금강산과 명활산 줄 기의 협곡을 통과한 물이 곧장 양지뜰을 지나 경주시내로 들어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분황사 동쪽 지역의 가스관 매설지 발굴 시 현재의 북천보다 남 쪽으로 100m 지점에서 자갈이 많이 섞인 모래층이 지표 아래 1.5m까지 확인되었 고, 제방 축조 시에 사용된 돌망태의 흔적도 일부 확인되었다고 한다,39) 결국 분 황사로부터 숲머리까지 조성된 제방과 오리수는 동북쪽에서 흘러온 북천의 방향 을 서북쪽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북천의 범 람을 막기 위해 읍성 바로 북쪽의 북천 변에 제방을 쌓는 것보다도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결국 북천의 주 유로가 지금과 같았을지라도 인공제방이 튼튼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홍수 시 분황사 황룡사 - 안압지 북쪽 - 월성 북쪽 - 월정교지 의 선을 잇는 지역은 북천의 범람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40) 38) 북천을 답사해본 결과 모래와 자갈뿐만 아니라 자갈보다는 크고 바위보다는 작은 크기 의 둥근 돌이 함께 섞여 있었다. 월성의 북쪽과 서쪽, 그리고 계림북편에서 발견되는 자 갈은 그 크기가 이러한 돌보다 작은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북천의 주 유로는 지금과 같았고, 이 지역은 홍수 시 범람할 경우에만 영향을 받던 지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39) 0"왕경지구내가스관매설지 발굴조사보고서.JI,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오영훈은 황룡사지, 안압지, 월성해자 등의 발굴조사에서 이 지역이 원래 커다란 늪지였음이 밝혀진 바 있다고 보았다. (오영훈, 1992:22)
66 이곳은 월성 해자 다 지구와 해자 외곽의 집터 발굴을 통해 해자 건설 이후에도 홍수의 범람으로 자갈 섞인 모래층이 퇴적된 곳이다. 그리고 이러한 퇴적층의 공 급처는 북천이다. 또한 황룡사는 빨층 위에 약 3m의 盛 士 를 통해 건설된 것으로 서 이러한 盛 士 가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이곳이 연못으로서 현재보다 고도가 약 3m 낮았다. 따라서 홍수 시 동북쪽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온 북천의 물 중 일부가 분황사와 황룡사 사이 또는 근처를 통과하여 안압지 북쪽 - 월성해자 북쪽 - 월 정교지를 통과하여 남천과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고려와 조선에서는 분황사로부터 소금강산과 명활산의 협곡에 이르는 지역에 제 방을 쌓고, 五 里 數 를 조성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진 왼쪽의 숲이 앞뒤로 안압지와 월성임. 논으로 경작되고 있는 사진 앞쪽 양지뜰의 물은 월성 오른쪽 끝을 지나 남천으로 빠져나감. 사진 -6 양지뜰
67 양지뜰 안압지 등의 물은 사진 왼쪽의 나무가 무성한 계림을 통과하여 월정 교지와 월성 사이를 빠져 남천으로 들어감. 사진 -7 월성 서쪽의 월정교지 제 3 절 선라 건국 전후 경주시내의 하천과 j 지팽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경주시내는 하천 범람에 j 대한 사서의 기록이 많으 며,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과 숲도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았다. 그런데 이곳이 특별 한 多 雨 地 였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의 연평균 강수 량은 지역마다 600-1,500mm 정도에 있다고 하며, 전국의 평균치는 1,190mm 정도 라고 한다.41) 그런데 경주지역의 연평균 강수량은 mm 정도로 알려져 있 다.42) 따라서 경주지역의 연평균 강수량은 전국 평균보다 약간 낮은 편이다. 41) 권혁재Ii 韓 國 地 理 jj, 법문사, 1993:
68 표 -6 경주지역의 강수량 평균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월 걷~7JY 랴 * 평균강수량: 1,098.0mm (표에 나오는 평균은 년 사이의 평균일 뿐임) * 년 사이의 7월의 강수량 집중률: 24.3% * 년 사이의 6-9 월의 강수량 집중률 64.5% * 자료: 경주시사편찬위원회 경주시지 J, 1971:7 에서 재편집 또한 경주지역은 강수량의 계절적 분포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경향과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雨 期 는 6-9월의 4개월간이며, 이 때 연강수량의 60% 이상이 내리고 그 중에서 장마철인 7월의 강수량은 연강수량의 거의 30% 를 차지 한다고 한다.43) 표 -6 에서 경주지역의 년 사이 평균 강수분포를 보면 6-9월의 강수집중률은 64.5% 이며, 7월의 강수집중률은 24.3% 이다. 따라서 경주지 역은 하계집중률이 높은 우리 나라의 일반적인 강수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경주지역에서 하천 범람과 제방의 건설, 숲의 조성에 대한 기록이 많은 것은 특이한 강수현상 때문이 아니다. 고을의 중심지가 형산강 본류인 서천과 그 지류인 북천, 남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평탄한 지형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 다. 특히 북천의 범람은 동쪽 계곡에서 모인 물이 소금강산과 명활산 줄기 사이의 협독을 지나 평지로 바로 쏟아져 나오는 지형적 조건 때문에 홍수 시 경주시내에 42) 경주시사편찬위원회 11 경주시지.JI, 1971:7 43) 권혁 재 r 韓 國 地 理 J, 법문사, 1993:115 만 써
69 가장 위협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북천 변에는 고려-조선-일제시 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제방 공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제방 위에는 오리수와 고성수, 고양수, 임정수 등의 숲이 조성되었다. 서천은 경주시내에 도착하기 전에 내남면의 평지를 흐르면서 구배가 완만해져 사서의 기록에는 범람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경주시내의 서천 변 을 따라 북쪽으로부터 어대수 천경림, 남정수의 북수, 남정수의 남수(오릉) 등 범 람 방지용의 숲이 조성되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경주시내 중심부까 지는 아니더라도 서쪽의 저지대는 서천 범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남천은 이미 옛 내동면의 평지를 흐르면서 구배가 완만해졌고, 월성에 의해 경주시내로의 범람이 차단된다. 따라서 사서의 기록에 범람의 흔적이 나타나 지 않았으며, 범람 방지용의 숲에 대한 기록도 전무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천 변에는 인공적인 제방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경우 주거 지가 만들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북천의 남쪽 변은 홍수 시 범람의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서천의 동쪽 지역도 저지대를 중심으로 주거지가 형성되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남천 변에는 범람의 위 험이 상대적으로 적어 주거지가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경주시내 는 지금의 대릉원-황오동고분군-인왕동고분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작은 분수계 가 형성되어 있다. 또한 남천 범람의 위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작은 분수계 남쪽 도 서천이나 북천의 범람에 대해 그래도 안전한 곳이 된다. 따라서 경주시내에 주 거지가 형성될 경우 서천이나 북천의 범람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고분군 위나 그 남쪽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 이외에도 신라 건국 전후에는 북천이 일상적인 홍수 시 현재의 하도 뿐만 아니라 분황사 황룡사-안압지 북쪽-월성 북쪽-월정교지를 잇는 선으 로도 자주 범람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북천의 범람은 분황사와 황룡사 지역 에 대대적인 제방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이곳에 거주지가 들어서기 어려 웠음을 알려준다. 이러할 경우 이곳은 버려진 땅으로 남게 되며, 범람에 대한 완 충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경주시내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던 북천의 상류에 보문호와 덕동호가 만들어져 있고, 제방공사도 충실하게 이루어져 있다. 이에 따라 북천의 하폭은 일 제시대보다 %로 축소되었고 하천 변도 주거지나 농업용지로 사용되고 있다. 또 한 분황사 황룡사-안압지북쪽-월성북쪽-월정교지를 잇는 선도 작은 실개천이 흐
70 를 뿐 북천의 범람과는 상관없는 넓은 들로 변해 있다. 하지만 인공적인 제방 공 사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신라 건국 전후나 초기에 주거를 비롯한 여러 기능 이 경주시내에 입지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자연지리적 특징이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같은 시기에 행정구역 사이의 경계선이 경주시내에서 그어 졌을 경우 그것을 알아보는 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자연지리적 특징이 고려되어야 한다. 뾰
71 제 3장 건국 전후의 6촌과 정치중섬구역 제 1 절 6촌의 위치와 경계 1-1 r 삼국유사 에 나오는 6촌의 위 치 6부의 규모 및 위치에 대해 가장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자료는 다음과 같은 三 國 遺 事 의 기록이다. 자료 3-1) 辰 韓 의 땅에는 옛날에 6촌이 있었다. 첫 번째는 關 川 楊 山 村 이라 하 는데 남쪽이 지금의 뚫 嚴 좋이다. 촌장은 調 平 이라고 하는데 처음에 짧밟 rt 逢 에 내려왔으며, 及 梁 部 李 民 의 祖 [쩔 禮 王 9년에 설치하고 급량부라 명명했다. 本 朝 (고려) 태조 天 福 5년 (94이 康 子 에 中 興 部 로 개명했다. 波 價 東 山 彼 上 등의 東 村 이 속해있다.]가 되었다. 두 번째는 突 山 高 塊 村 이라고 한다. 촌장은 蘇 代 都 利 라고 하는데 처음에 兄 山 에서 내려왔으며, 沙 梁 部 [ 梁 은 道 라 읽으며, 혹 緣 이 라고도 쓰는데 역시 音 은 道 이다] 정씨의 祖 가 되었다. 지금은 南 山 部 라고 부른 다. 구량별 마등오 도북 회덕 등의 남촌이 속해있다.[지금( 今 )이라고 칭한 것 은 태조가 설치한 것이다. 이하는 같다] 세 번째는 歲 山 大 樹 村 이라고 한다. 촌 장은 煩 [낀L 라고도 쓴다] 禮 馬 인데 처음에 伊 山 [ 皆 比 山 이라고도 쓴다]에 내려왔으 며. 漸 梁 [ 滅 이라고도 쓴다] 部 또는 후 梁 部 孫 씨의 祖 가 되었다. 지금은 長 福 部 라고 부른다. 朴 삼 村 등 西 村 이 속해있다. 네 번째는 題 山 珍 支 村 [훨 之 또는 寶 子 또는 永 之 라고도 쓴다]이라고 한다. 촌장은 智 伯 虎 인데 처음에 花 山 에 내려 왔으며, 本 彼 部 崔 民 의 祖 가 되었다. 지금은 通 仙 部 라고 부른다. 뽕 巴 등 東 南 村 이 속해있다. 최치원이 곧 본피부인인데 지금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崔 候 의 고택임이 거의 분명하다. 다섯째는 金 山 加 利 村 [지금의 金 剛 山 相 票 좋의 北 山 이다]이라고 한다. 촌장은 祝 沈 [ 只 他 라고도 쓴 다]인데 처음에 明 活 山 에 내려왔으며 漢 l 技 部 또는 韓 I 技 部 라고도 쓰는데 裵 民 의 祖 가 되었다. 지금은 加 德 部 라고 부른다. 上 下 西 知 乃 兒 등 東 村 이 속해있다. 여섯 번째는 明 活 山 高 耶 村 이라고 한다. 촌장은 虎 珍 인데 처음에 金 剛 山 에 내려 왔으며, 習 比 部 홈 a;의 祖 가 되었다. 지금은 臨 川 部 라고 부른다. 꺼 伊 村, 仍 δl 祐 村, 關 유[훌씁이라고도 쓴다] 등 동북촌이 속해있다. 위의 문장을 살펴보면 이 6부의 祖 는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쩔 禮 王 9 년 (32) 에 6부의 이름을 고치고 6 姓 을 하사했다. 지금 倚 에 중홍부를 母 로 여기고 장복부를 父 로 여기 며, 임천부를 子 로 여기고, 가덕부를 女 로 여긴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자세하
72 지는 않다1) 이 기록에서 6촌의 규모와 위치를 이해하는데 주목되는 것은 일연 ( ) 이 三 國 遺 事 를 저술할 당시로 생각되는 6부 위치의 방향과 거기에 소속된 마을 의 이름이다. 여기서 우선 그러한 방향과 마을 이름이 일연이 三 國 遺 事 를 저 술할 당시의 것인가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6촌 중 두 번째로 기록된 突 山 高 塊 村 의 마지막 부분에 일연은 稱 今 日 者 太 祖 所 置 也 下 例 知 란 세주를 달고 있 다. 그리고 고려 태조 23 년 (940) 에 개명된 6부의 이름 앞에는 今 칼, 今 日, 今 등 의 표현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今 이란 것은 고려 태조 23년 (940)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일연이 삼국유사 를 저술할 당시를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일연이 세주에서 말하는 것은 今 日 이라 칭하는 것은 태조 때 설치한 것이다 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본다면 고려 때 개명된 신라의 6부가 고려후기까지도 경 주의 지역단위로서 존속했으며 그 소속된 마을 역시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었음 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일연이 기록한 6부의 방향도 삼국유사 를 저술할 당시의 기준 아래에서 설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6촌 영역에 소속된 마을들의 방향을 설정하게 된 기준은 무엇일까? 고 려후기라면 이미 신라 왕경으로서 번창했던 경주의 모습은 대부분 사라졌을 것이 고 2) 이미 지방의 큰 고을에 불과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렬 경우 방향의 기준은 관아가 있는 읍성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읍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자리에 1) 辰 韓 之 地 古 有 六 村 一 目 關 川 楊 山 村 南 今 뚫 嚴 좋 長 日 調 平 初 降 3 二 짧밟~짧 是 寫 及 梁 部 李 lfj 祖 [쩔 禮 王 九 年 置 名 及 梁 部 本 朝 太 祖 天 福 五 年 康 子 改 名 中 興 部 波 瓚 東 山 彼 上 東 村 屬 휠J= R 突 L1J 高 塊 村 長 日 蘇 tt<: 都 利 初 降 手 兄 山 是 寫 沙 梁 部 [ 梁 讀 둡 道 或 作 緣 亦 音 道 ] 鄭 lfj 祖 今 R 南 山 部 d 良 1x 麻 等 烏 道 北 뺑 德 等 南 村 屬 휠[ 稱 今 日 者 太 ifi 且 所 置 也 下 例 知 ] 三 日 끊 山 大 樹 村 長 日 煩 [-~ 作 검tJ 禮 馬 初 降 手 伊 LlJ [- 作 皆 比 山 ] 是 寫 漸 梁 [ 一 作 淑 ] 部 又 후 梁 部 孫 民 之 ~rfi 今 될 長 福 部 朴 갑 村 等 西 村 屬 馬 四 目 頻 山 珍 支 村 [ 一 作 좁 支 又 좁 子 又 7k 之 ] 長 R 智 伯 虎 初 降 又 花 山 是 寫 本 彼 部 崔 民 祖 今 日 通 仙 部 榮 巴 等 東 南 村 屬 휠 致 遠 乃 本 彼 部 人 也 今 皇 龍 좋 南 味 香 좋 南 有 古 塊 -r:. 是 崔 候 古 현 也 챔 明 횟 五. 日 金 LLJ 加 利 村 [ 今 金 剛 llj 相 票 좀 之 北 山 也 ] 長 R 祝 花 [ --- 作 只 他 ] 初 降 手 明 活 山 ; 足 寫 漢 l뼈 部 又 f!= 韓 l 技 部 裵 lfj 祖 今 :Z:;; Jm 德 部 上 下 西 知 乃 兒 等 東 村 屬 휠 六 R 明 活 山 高 耶 村 長 日 虎 珍 初 降 f 金 剛 山 是 寫 習 比 部 醒 lfj~rfi 今 臨 川 部 꺼 伊 村 仍 1ft 林 村 關 삽[ 一 作 훌갑] 等 東 北 村 屬 뀔 按 上 文 此 六 部 之 祖 似 皆 從 天 而 降 쩔 禮 王 九 年 始 改 六 部 名 又 陽 六 姓 今 깎마1 興 部 寫 母 長 福 部 寫 父 臨 川 部 寫 子 加 德 部 寫 女 其 實 未 詳 ( r 三 國 遺 事 卷 第 一 紀 異 第 新 羅 始 ~rfi 納 居 i:it 王 ) 2) 11 高 麗 史 卷 第 四 世 家 第 四 에는 현종 3 년(1 012) 5월에 澈 慶 州 朝 遊 宮 以 其 材 修 黃 龍 극툰 搭 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에 나오는 朝 遊 宮 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朝 宮 과 遊 宮 을 합해놓은 용어일 것이다. 여기서 朝 宮 은 훗 宮 에 해당되고 遊 宮 은 離 宮 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까지는 대부분의 신라 宮 들이 파괴되 었다고 생각된다
73 있었다고 하며, 그 최초의 설치시기는 고려 현종 3 년(1 012) 으로 알려져 있다. (김태 중, 1992) 이런 연구를 받아들인다면 일연이 조선시대의 읍성을 기준으로 6촌의 방향을 설정했다고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일연이 설정한 6촌 의 방향과 그 영 역 에 소속된 마을을 도표화해 보면 표 -7과 같다. 표 -7을 보면 東 村 이란 표현이 알천양산촌과 금산가리촌 두 지역에 모두 기록되 어 있다. 이 중 금산가리촌의 마을로 나오는 上 먼 知, 下 西 知, 乃 兒 등의 마을은 조 선시대의 기록 속에서도 그 위치가 확인된다. 조선초기의 기록인 新 增 東 國 與 地 勝 寶 慶 州 府 古 題 조에 下 西 知 木 冊 이 부 동쪽 60 리 에 있다 고 기 록되 어 있다.3) 또한 조선후기의 기록인 戶 口 總 數 慶 州 東 海 面 부분에 羅 兒 里, 上 西 里, 下 西 里 란 마을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세 마을이 일연이 기록한 금산가리촌의 마을임 은 분명하며 지금의 양남면 하서리, 나아리 지역이다. (그림 -8 참조) 이 지역은 경 주시내에서 동남쪽으로 약간 치우쳐진 방향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의 기록에도 동쪽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일연이 설정한 東 村 이란 방향은 크게 틀리지 않는 다. 표 -7 r 삼국유사 에 나오는 6촌의 위 치 및 소속 村 6촌명 (개국 당시) 신라 6부명칭 고려명칭 (유리왕 9년 (32)) (940) 위치(삼국유사)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유사) 알천양산촌 梁 部 及 梁 部 中 興 部 남쪽은 뚫 嚴 총. 波 價, 東 山, 彼 上 등 동촌. 돌산고허촌 沙 梁 部 좌동 南 山 部 겐L 良 (X, 麻 等 烏, 道 北, 뺑 德 등 남촌 끼E.. λ ~디 냐~끼A 一 초 후 梁 部 좌동 長 福 部 朴 삼 村 등 서촌 뽑 山 珍 支 村 本 彼 部 좌동 通 仙 部 榮 巴 등 동남촌 금산가리촌 漢 祝 部 漢 l 技 部 加 德 部 上 下 西 知, 乃 兒 등 동촌. 명활산고야촌 習 比 部 좌동 臨 川 部 꺼 伊 村, 仍 δl 하 村, 關 갑(혹 훌훌유) 등 동북촌. 그러면 알천양산촌에 속하는 동촌은 어디일까? 알천양산촌에 소속된 마을로 나 오는 波 價 東 山 彼 上 등의 이름은 역사 기록 속에서는 더 이상 찾아지지 않는 다.4) 하지만 알천양산촌의 남쪽 경계가 뚫 嚴 츄로 나오는데 이 사찰은 지금의 오 3) 下 西 知 木 細 : 在 府 東 六 十 里 內 有 - 池 二 井 4) 파잠촌을 경주시 용강동의 파잠부락, 피상촌을 경주시 동천동의 윗마을부락, 동산 촌을 천북면의 동산리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경주시사편찬위원회 11 慶 州 市 誌.lI, 1971:90) 이 중 용강동은 읍성의 북쪽에 있어 문제가 되며, 그곳에 있었다는 파잠
74 릉 남쪽에 있었다. 따라서 경주시내는 알천양산촌에 소속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도 지금의 경주시내가 가장 발달한 지역이 되었을 것이며, 읍성은 경주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 에 나오는 통촌은 읍성 동쪽 또는 동북쪽 동남쪽의 경주시내에 있었던 마을들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무산대수촌은 西 村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소속된 마을로 나 오는 朴 씁 村 역시 戶 口 總 數 慶 州 西 面 부분에는 朴 씁 里 로 기록되어 있다. 박곡 리의 지금 위치는 건천읍 방내리 부근이다, 5)( 그림 -8 참조) 남촌으로 기록된 돌산 고허촌에 해당되는 네 개의 마을 중 h 良 佳 이 조선시대의 기록 속에서 발견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역원조에 1ft 良 火 村 院 이 부의 남쪽 46 리에 있다(1ft 良 火 村 院 在 部 南 四 十 六 里 ) 고 되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일연이 기록한 d 良 않일 것 이다. 火 는 뜻을 代 은 음을 따서 기록한 것으로서 서로 불 벌 등의 우리말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6) 이곳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두서면 구량리로서 태화강 의 상류에 있다,7)(그림 -8 참조) 뽑 山 珍 支 村 에 소속된 마을은 기록 속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다,8) 하지만 읍성을 기준으로 동남촌에 해당된다는 사실과 미탄사 남쪽에 있었던 최치원의 고택이 그 북쪽 한계였다는 기록을 통해 대략적인 위치는 찾을 수 있다, (그림 -7 참조) 낭산 의 서쪽 기숨에 유형문화재인 讀 書 堂 이 있는데 최치원의 故 흰 地 로 알려져 있다, 9) 購 山 珍 支 村 은 이곳을 최북단으로 하여 동남쪽의 남천 유역에 있었다고 볼 수 있 다. 그리고 외동면 패릉리 활성리 말방리 죽동리, 연안리, 개곡리 일대가 조선중기까 지 寶 山 珍 支 村 에서의 珍 支 의 다른 표현인 寶 子 행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이곳까지 뽑 山 珍 支 村 이었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홉 山 珍 支 村 은 남천유역 뿐만 아니라 울 산만으로 빠져나가는 동천강의 상류인 외동읍까지 포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0) 부락은 현재 위치가 확인되고 있지 못하다. 또한 천북변의 동산리는 같은 기록에 명활산고야촌(습비부)의 영역에 소속된 村 으로 나오는 갈곡리와 접하고 있어 문제 가 된다. 다만 피상촌으로 비정된 경주시 동천동의 윗마을부락만은 일연이 설정한 東 村 이 란 방향과 맞는다. 5) 11" 舊 韓 末 韓 半 島 地 形 圖 1:50,000.J] 4 권, 경주부분에 朴 室 洞 으로 표시되어 있다. 6) 11" 三 國 史 記 上, 이병도 譯 註, 을유문화사, 1983:31 7) 경주부에 속했던 두동면과 옛 언양현의 땅이었던 언양읍을 연결하는 대곡천은 두 고을 사이의 경계선에서 깎아지른 퇴적암의 절벽이 2km 이상 계속 이어져 따라서 하천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두동면과 언양읍은 연결되어 있지만 인간 교류 의 차원에서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8) 樂 E 를 외동면 蘇 漢 里 에 비정하기도 한다. (경주시사편찬위원회11" 慶 州 市 誌 J, 1971:90) 하지만 이 견해에서는 그 근거를 대지 않아 확인할 수가 없다. 9) 권오찬11"신라의 빛.J], 경주시, 1980:56 있다
75 명활산고야촌에 소속된 마을로 나오는 훌갑은 戶 口 總 數 慶 州 川 北 面 부분에 는 훌씁 里 로 나오고 있는데 지금의 천북면 갈곡리에 해당된다. (그림 -8 참조) 그리 고 같은 부의 物 伊 村 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의 경주부분에 부의 북쪽 에 있는 磁 器 所 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11) 따라서 읍성 동북쪽에 있는 지금의 천 북면 지역에 해당된다고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삼국유사 기록의 검토를 통해 알게 된 6촌의 위치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알천양산촌은 최소한 경주시내를 포함하고 있었고, 돌산고 허촌은 오릉 바로 남쪽에 있었던 담엄사 남쪽으로부터 지금의 울산광역시 두서면 구량리에 이르는 형산강 본류 지역과 태화강의 상류 일부에 있었다. 무산대수촌은 지금의 건천읍과 서면지역이며 뽑 山 珍 支 村 은 월성과 낭산을 잇는 선의 동남쪽인 남천과 동천의 상류 일부에 있었다. 금산가리촌은 최소한 동해안의 양남면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고 명활산고야촌은 지금의 천북면에 있었다. 그리고 6촌 각각의 위 치를 종합해 보면 6촌 전체의 규모가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과 태화강, 동천의 상류 일부와 동해안 지역을 아우르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러한 6촌의 규모를 알려주는 고려시대의 6부는 앞의 기록에서 확인되듯이 신 라가 멸망한 직후인 940년에 개명된 것이다. 따라서 그 위치와 규모의 차원에서 볼 때 신라 하대의 6부와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신라 멸망 직후에 개편된 것이기 때문에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삼국유사 에 기록 된 6촌의 위치 및 범위에 대한 검토만으로 경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 니다. 특히 알천양산촌과 금산가리촌의 위치는 가장 모호하다. 따라서 이제부터 다른 자료에 대한 검토를 통해 더 보완하려고 한다. 10) 경주시사편찬위원회 r 慶 州 市 誌 J, 1971:90. 외동읍의 일부는 동천 상류에 해당되는데, 지형적으로는 남천 유역과 서로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분수계가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경주시와 울산광역시 사이의 동천은 산지 사이의 좁은 협독에 해당되어 8세기에는 일 본의 침입에 대비하여 關 門 城 이 동서를 관통하는 長 城 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 관문성이 왕성으로 들어오는 첫 관문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1) 물이촌을 천북면 물천리 즉 무내부락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 (경주시사편찬위원 회Ii 慶 州 市 誌.n, 1971:90)
76 1-2 얄천양산촌과 금산가리촌의 위치 (1) 형산강의 6 개 지류와 6촌 고구려나 백제의 왕경에도 행정구역의 구분이 있었다 r 新 居 書 東 몇 列 傳 高 句 麗 傳 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내부(황부). 북부(후부). 동부(좌부). 남부(전부). 서부 등 5개가 있었다 r 北 史 列 傳 百 濟 傳 에 의하면 백제에도 상부 전부 중부 하 부 후부 등 5개가 있었다. 두 나라 모두 왕경의 행정구역을 중심과 네 방향을 기 본으로 하여 5개로 나누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2) 그런데 신라에서는 유독 왕경 의 행정구역을 나누는데 6 이라는 숫자와 고유 명칭을 끝까지 고수하고 었다. 이 러한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왜 신라에서만 6 이라는 숫자가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제기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 村 上 四 男 1962) 하지만 6부의 형성시기를 신 라 건국 이전이 아니라 훨씬 후대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6 이라는 숫자의 사용을 신라인의 관념이나 동아시아에서의 수의 의미 등으로부터 이해하려고 했다. 만약 6촌이 신라 건국 이전에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 문제는 쉽게 풀린다. 이 점 에서 주목되는 것이 다음과 같은 자료이다. 자료 3-2) 始 祖 는 성이 박씨이고 譯 는 혁거세이다. 前 漢 孝 宣 帝 五 鳳 元 年 (B.C.57) 甲 子 4월 內 申 [일설에는 정월 15일이라고도 한다]에 즉위하였는데 居 西 千 이라고 불렀다. 그 때의 나이는 13세였고 국호는 徐 那 代 이었다. 이보다 먼 저 조선유민이 山 삼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을 이루었다. 첫째는 關 川 楊 山 村, 둘째는 突 山 高 塊 村, 셋째는 짧다l 珍 支 村 [ 手 珍 村 이라고도 함J, 넷째는 皮 山 大 樹 村, 다섯째는 金 山 加 利 村 여섯째는 明 活 LlJ 高 耶 村 이라고 한다. 이것이 辰 韓 六 部 이 다 13) 위의 기록 중 일찍이 朝 解 의 遺 民 들이 이곳에 와서 山 싼 間 에 나뉘어 살며 여섯 촌락을 이루었다 는 부분은 6촌이 어떤 관념이나 인위적인 개편에 의해 이루어진 12) 고려의 개경에는 동부 남부 서부 북부 중부가 있었다. (박용운, 1996:95) 조선 의 한성부에서도 동부 남부 서부 북부 중부가 있었다. ( [j 戶 口 總 數 J, 서울대학 교 규장각, 1996) 13) 始 祖 姓 朴 民 讓 1m 居 ~t!t 前 漢 孝 훤 帝 五 鳳 元 年 甲 子 四 月 內 辰 [--되 正 月 十 五. 日 ] 帥 位 號 居 西 子 時 年 十 三 國 號 徐 那 {j(: 先 是 朝 蘇 遺 民 分 居 山 까 之 間 寫 六 村 ---- E3 關 川 楊 山 村 二 R 突 山 高 塊 村 프 R 뿜 山 珍 支 村 [ 或 ~-r 珍 村 ] 四 日 않 山 大 樹 村 五 日 金 111 JJn 利 村 六 R 明 活 Ll J 高 耶 村 ;딸 寫 辰 韓 六 部 ( 0'" τ 國 닷1 記 卷 第 - 新 羅 ; 木 紀 第 - 始 祖 元 年 )
77 것이 아니라 초기의 定 看 民 들이 촌락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형성되면서 6개의 촌으 로 나누어지게 된 기준도 山 各 間 이라는 표현 속에서 찾아진다. 山 유 間 을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산줄기에 의해 구분되는 하천의 유역권 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형산강 유역이 지형적으로 어떻게 구분되고 있는지를 파악한다면 6촌의 위치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6촌은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과 토함산 동쪽의 동 해안 지역을 포괄하고 있다. 이 중에서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동해안 지역을 제외하면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만이 남는다. 형산강은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두 동면과 두서면에서 발원하여 여러 개의 지류를 합류시키며 북쪽으로 흘러 안강에 도착한다. 이러한 형산강 유역은 안강에 도착하기까지 크게 여섯 개의 작은 유역 권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형산강 본류 지역인 울산광역시 두동면 두서면의 일부 와 경주시 내남면 지역이다. 둘째, 영천과의 경계선에서 발원하여 경주시내 서쪽 에서 형산강과 합류하는 경주시 서면, 건천읍의 대천 유역이다. 셋째, 경주 동남쪽 의 외동읍에서 발원하여 경주시내에서 형산강과 합류하는 옛 내동면의 남천 유역 이다. 넷째, 동쪽의 토함산 줄기에서 발원하여 경주시내에서 형산강과 합류하는 북천 유역이다. 다섯째, 지금의 현곡면을 가로지르는 소현천 유역이다. 여섯째, 최 북단의 천북면 평지를 이루고 있는 신당천 유역이다. 이 여섯 개의 작은 유역권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경주시내를 제외한 부분에서는 서로 산줄기에 의해 분명하게 구분되고 있다. 따라서 초기 정착민들의 촌락이 확장되면서 크게 6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지형적으로 보았을 때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14) 이러한 6개의 유역권은 서로 분리되기도 하지만 형 산강이라는 큰 하천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6 개의 집단이 하나의 연 합체를 맺어 통합성을 유지하기에도 유리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신라에서 왕경의 지역구분 단위로 6 이라는 숫자를 사용하게 된 근본 원인이 바로 형산강 14) 6촌이 신라 건국 전부터 있었다는 삼국사기 와 r 삼국유사 의 기록은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믿을만한 것이다. 만약 4-5세기 이후에 옛 진한 소국의 지배세력을 옮겨오면 서 6부가 완성되었다고 본다면 6 이라는 숫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경주지역 으로 徒 民 된 소국의 세력이라면 진골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6두품 정도의 대우는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4-5세기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돌무지덧널무덤의 분포가 주 로 경주시내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귀족들이 형산강 유역에 흩어져 살았을 가능 성은 별로 없다. 이럴 경우 일단 고려시대 6부의 공간적 범위가 형산강 유역과 동해안 까지 아우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78 유역의 지형적 특징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6촌이 후대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신라 건국 이전에 촌락의 성립 확산에 의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임도 알려준다. 그렇다면 三 國 史 記 와 三 國 遺 事 의 6촌에 대한 기록이 틀린 것이 아님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산강 유역의 6개의 작은 유역권과 삼국유사 에 나오는 6촌의 위치 에 대한 기록을 비교해 보면 돌산고허촌, 무산대수촌, 뽑 山 珍 支 村, 명활산고야촌은 대체로 합치되고 있다. 무산대수촌은 현재의 건천읍과 서면지역인 대천유역에, 돌 산고허촌은 담엄사 남쪽의 형산강 본류지역을 중심으로 태화강 상류 일부에, 購 山 珍 支 村 은 남천 유역과 동천강의 상류 일부에, 명활산고야촌은 지금의 천북면인 신 당천 유역에 있었다고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양부와 소현천 유 역, 한기부와 북천 유역이 서로 연결되기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따라서 다른 자료를 더 검토하여 살펴볼 필요가 었다. (2) 얄천 양산촌과 금산가리 촌 6촌의 위치와 경계를 살펴보는데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지역은 현재의 경주시 내이다. 신라가 이곳을 왕경의 핵심지역으로 삼은 이후 고려-조선-현재에 이르기 까지 계속 중요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신라 건국 이전에도 이곳이 중심적인 위치 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이미 제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경주시내는 형산강 본류와 북천 및 남천이 만나는 평지에 위치하고 있어 범람이 심한 지역이었기 때 문이다.1 5 ) 따라서 경주시내에는 제방을 축조하지 않은 상태라면 마을이 입지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렇다면 신라 건국 이전의 6촌 시대에 지금의 경주시내가 알 천양산촌(양부)에 소속된 것으로 나오지만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신라 건국 이후 경주시내가 최고의 중심지였다 15) 황상일 윤순옥에 의하면 기원전후부터 BP 1, 800년경 (A.D.200년경)에 걸쳐 상대 적 高 海 面 期 였으며, 이로 인해 한반도에서 홍수와 태풍의 빈도가 크게 늘어났을 가 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로 인해 대구지역에서 초기철기시대까지 주요 거주지와 경 작지로 이용되던 자연제방과 범람원이 홍수의 위협을 받게 되고 鐵 製 利 器 의 보급 으로 침식구릉지 사이의 곡저평야 지역으로 거주지가 옮겨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한 초기철기시대까지 주요 거주지와 농경지로 이용되던 지역 중의 하나였던 월배 선상지지역에서도 범람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선상지를 떠나 주변 침식구릉지로 옮 겨갔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황상일 윤순옥, 1998:480) 이와 같은 연구를 참조할 때 대구와 거의 같은 위도 상에 있고, 경주시내가 평지에 위치하기 때문에 기원을 전 후하여 범람의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79 는 사실만으로서 알천양산촌(양부)의 중심지가 이곳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는 없다. 6촌의 하나인 알천양산촌(양부)의 중심지가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 게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주요 거주 촌락들은 경주시내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 다고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촌락의 분포지로 주목되는 곳이 바로 현곡면의 소현천 유역과 황성동 지역이다. 특히 황성동 지역에서는 製 鐵 遺 題 과 3세기 -4세기 초엽으 로 편년되는 토광묘가 발견된 바 있다. (최병현 1992:82.90) 두 지역은 형산강 본류 를 가운데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의 기록에는 이곳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것은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신라의 건국 이후부터 경주시내가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알천양산촌은 이 두 곳을 중심으로 경주시내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삼국유사 의 6촌에 대한 기록 속에서 금산가리촌의 위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양남면 나아리 하서리 부분이 속했다는 사실과 경주시내의 동쪽에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따라서 그 정확한 위치와 범위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는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우선적으로 주목되는 부분은 삼국사 기 와 三 國 遺 事 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다. 자료 3-3) 孝 女 知 恩 한기부의 백성인 連 權 의 딸이었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 러웠는데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홀로 그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大 王 이 듣고 또 벼 500석과 집 한 채를 하사하고 다시 부역을 면제하였다. 곡물이 많아서 도둑에게 빼앗길 염려가 있으므로 관계관청에 명하여 군사를 보내어 차례로 지 키게 하고, 그 마을을 표방하여 孝 養 행이라 하였다 16) 자료 3-4) 負 女 養 母 효종랑이 남산 포석정(혹은 三 花 述 이라고도 한다)에서 놀 았는데 門 客 들이 모두 급히 달려왔으나, 오직 두 사람만이 뒤늦게 왔다. 효종랑 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들이 대답했다. 분황사의 東 里 에 여인이 있는데 나이는 20세 안팎이었습니다... 이 일이 왕에게 알려지자 그때 진성왕은 독식 5 백석과 집 한 채를 내려주고 또 군사들을 보내서 그 집을 호위해서 도둑을 막도록 했 다. 또 그 행을 표창해서 孝 養 의 里 라 했다 17) 16) 孝 女 知 恩 韓 ú 皮 部 百 姓 連 權 女 子 也 性 至 孝 少 喪 父 獨 養 其 母... 大 王 聞 之 亦 陽 租 五 百 石 家 區 復 除 正 投 以 藥 多 恐 有 票 購 者 命 所 司 差 兵 훔 守 標 精 其 里 R 孝 養 均... ( r 프 國 史 記 卷 第 四 十 八 列 傳 第 八 孝 女 知 恩 ) 17) 負 女 養 母 孝 宗 郞 遊 南 山 輯 石 亨 [ 或 i 츠 花 述 ] 門 客 星 뽕번 有 二 客 獨 後 郞 問 其 故 R 줬 皇 좋 之 ; 東 里 有 女 年 二 十 左 右... 事 達 震 體 時 員 聖 + 陽 뤘 五 百 fî 井 켠 二 魔 遺 후 徒 衛 其 家 以 f 敬 행 琮 h훈
80 효녀지은조와 빈녀양모조는 같은 사건을 약간 다르게 기록한 것으로서 진성여 왕 ( ) 때에 있었던 일이다. 효녀지은조에는 효녀지은이 한기부(금산가리촌) 의 백성인 連 權 의 딸로 나오며, 빈녀양모조에는 주인공이 분황사 동쪽 마을에 살 았다고 나온다. 여기서 아버지가 한기부의 백성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효녀지은도 한기부와 관련된 땅에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효녀지은과 빈녀양모조의 주 인공은 같은 인물이기 때문에 한기부와 분황사의 東 里 는 어떤 연관이 있을 것으 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 東 里 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동리의 위치를 표시하 기 위해 분황사라는 기준을 사용한 것을 보면 분황사로부터 그렇게 먼 지역은 아 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삼국사기 지리지의 백결선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자료 3-5) 백결선생: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낭산 아래에 살았는데 집이 극히 가난하여 옷이 백 군데나 꿰매어 메추라기를 (주렁주렁) 달아놓은 것과 같았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이 東 里 의 백결선생이라고 불렀다 18) 東 里 의 百 結 先 生 이라고 불린 것은 백결이 東 里 에 살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낭산 아래에 살았다고 하며 낭산은 분황사 남동쪽 약 lkm에 있다. 따라서 동리는 분황사와 낭산 근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 辰 韓 조의 35금입택 기록에는 총 39 개의 힘 중에 法 流 좀 남쪽에 있었다는 漢 l뼈힘과 훌 六 힘이 나온다. 한기택이라는 이름을 볼 때 최소한 이 두 개의 힘만큼은 한기부 (금산가리촌)와 관련 있는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金 入 흰이 신라 최 고 지배층의 집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한기부(금산가리촌)의 땅은 당시의 중 심지였던 경주시내에서 멀지 않았던 곳에도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주시 보문동에 진평왕릉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 54년조를 보면 진평왕의 무텀은 漢 只 에 만들어졌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調 露 二 年 名 벽돌에는 漢 只 代 部 君 若 小 옮라는 글이 적혀 있는데 여기서 漢 只 代 部 는 한기부 를 의미한다 19) 따라서 진평왕이 묻혔다는 漢 只 는 한기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其 행 寫 孝 養 之 里... ( ß" 三 國 遺 事 卷 第 五 孝 善 第 九 負 女 養 母 ) 18) 百 結 先 生 不 知 何 許 人 居 狼 UJ 下 家 極 負 衣 百 結 若 縣 藉 時 人 號 寫 東 里 百 結 先 生... ( r 三 國 벚 記 卷 第 四 f 八 列 傳 第 八 ) 19) r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제 2 권(신라 1. 가야 편),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209쪽
81 지금의 진평왕릉이 정확한 것이라면 낭산 동쪽의 보문동 지역이 한기부 땅에 소 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東 京 雜 記 山 川 조의 명활산 부분에 대한 기록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자료 3-6) 明 活 山 : 부의 동쪽 11 리에 있다. 산 아래 별판이 있는데 閔 地 原 이라 고 부른다. 곧 府 城 의 來 服 이다. 예로부터 나무를 심어 숲( 數 )을 이루었는데 嘉 靖 임오년(1 522)으로부터 많은 백성들이 함부로 경작하여 산맥을 끊고 물을 대 어 어 관개를 했다. 天 햄 계해년(1 623) 에는 沙 里 購 의 羅 후이 馬 位 田 을 民 田 과 바꾸 여기로 이사와서 살았다. 그런데 금년에 둠 人 이 來 服 을 상했다는 訴 狀 을 올 려 沙 里 舊 購 을 옮기도록 藍 司 에게 청하였다.[지금 살펴보건데 명활산의 한 줄기 가 낭산이 되고, 낭산으로부터 월성이 된다. 그리고 한 줄기가 府 의 龍 興 地 가 되니 勝 寶 에서 낭산을 진산으로 본 것은 잘못이다.]20) 위의 기록에 의하면 명활산으로부터 낭산에 이르는 산줄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산줄기의 이름을 閔 地 原 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여기서 閔 地 는 漢 只 와 발음이 같다.2 1) 따라서 한기부에 대한 지명이 전해내려 오다 다른 한자로 바뀌어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이 맞는다면 명활산과 낭산 사이의 보문동지역은 당연히 한기부의 땅에 해당된다. 이 지역은 r 삼국유사 의 6촌에 대한 기록에서 한기부가 동촌에 해당된다는 기록과도 부합된다. 그리고 효녀지은 이 살았다는 분황사의 東 里 나 35금입택 기록의 漢 l뼈흰과 훌훌 7차힘도 바로 이 지역 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22) 보문동 지역은 경주시내로부터 그렇게 멀리 떨어진 지 역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아 합리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북천의 범람이 발생하던 분황사-황룡사와 현재의 낭산을 잇는 동쪽의 북천 유역은 한기부의 영 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23) 20) 明 活 山 在 府 東 十 一 里 [ 新 增 ] 山 下 有 原 名 日 閔 地 原 乃 府 城 來 服 也 自 古 種 樹 成 數 自 嘉 靖 王 午 年 間 民 多 冒 藉 而 擊 斷 山 ll1i 引 水 灌 田 天 탱쫓짖 年 間 沙 里 羅 쭈 以 馬 位 田 換 得 民 田 移 居 於 此 今 年 因 둠 人 묻 狀 寫 其 有 傷 來 師 申 請 藍 司 澈 移 沙 里 舊 購 [ 今 按 明 活 山 一 技 寫 狼 山 입 狼 山 寫 月 城 而 -- 技 寫 府 龍 興 地 勝 寶 以 狼 山 寫 鎭 山 者 非 也 ]( r 東 京 雜 記 卷 - 山 ) 11) 21) r 한국지명총람 에서도 한지원을 한기부의 땅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위치를 보문동과 구황동의 경계 곧 낭산과 명활산 사이에 있는 버덩으로 보고 있다.( 국지명총람 J 5( 경북편1): 179쪽) 22) r 삼국유사 卷 第 츠 搭 像 第 四 졌 皇 좋 千 手 大 悲 읍 兒 得 眼 조에는 경덕왕 때에 漢 l 技 뿔에 사는 여자 希 明 의 아이가 눈이 멀었는데 어머니가 아이의 눈을 뜨게 하기 위 해 분황사 左 願 북쪽 벽에 그린 千 手 觀 音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기록에 한기리라는 지명과 분황사라는 사찰이 관련되어 나오는 것도 지리적인 근 접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r 한
82 o lkm * 알파뱃 a. 분황사 b. 숲머리 C. 진평왕릉 d. 미탄사지 * 숫자:1. 알천양산촌 2. 돌산고허촌 3. 자산진지촌 4. 금산가리촌 5. 명활 산고야촌 6. 무산대수촌 - 숫자의 위치가 중심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넘 다 홍수 시 북천의 물의 범람 방향 그림 -7 경주시내 6촌의 경계 23) 조선시대에도 황룡사와 안압지 사이의 도로를 경계선으로 읍내면과 내방면이 나 뉘어져 있었다.( r 戶 R 總 數.11, 서울대학교규장각, 1996:258) 일제시대에도 이 경계선 은 바뀌지 않았고 다만 부내면과 내동면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러한 경계 선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형적으로 뚜렷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 곳에 경계선이 있다는 사실은 과거에 이곳에 지형 또는 행정적인 차원에서 구분될 수 있는 기준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신라초기부터 이곳에 경 계선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러한 경계선이 그어질 당시에는 지형적으로 분 명한 구별기준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83 그러면 과연 토함산 동쪽 동해안의 양남면 양북면 감포읍 지역이 신라 건국 이전에도 금산가리촌(한기부)에 속해 있었는가? 신라 건국 이전의 기록이 매우 소 략하기 때문에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신라 건국 직후에는 이 지역이 초기 신라의 영토 안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 4 대 탈해니사금의 설 화에 대한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고 있다. 자료 3-7) 탈해는 본래 多 婆 那 國 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慶 國 동북쪽 1 천리 에 있다. 처음에 그 國 王 이 女 國 王 의 딸과 결혼하여 처를 삼았는데 임신한지 7 년만에 큰 알을 나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 라고 했다... 처음에는 金 官 國 해변에 이르렀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기어 취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辰 韓 의 阿 珍 浦 口 에 이르렀는데 시조 혁거세가 재위한 지 39년이 되던 해이다. 그 때 해 변의 老 母 가 줄로써 해안가에 끌어매어 궤짝을 열어 보니 한 작은아이가 있었 다. 그 노모가 그것을 취하여 길렀는데 장성해지자 키가 9 척이나 되었고, 풍채 가 수려 명랑하고 지식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탈해는 처음에 흙월 對 로써 업을 삼아 그 노모를 공양하였는데 일찍이 게을리 한 기색도 없었다. 그 노모 가 (탈해에게) 이르기를 너는 비상한 사람이고 骨 相 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에 종사하여 功 名 을 세워야 한다. 라고 했다. 이에 학문에 정진하였고 아울러 地 理 를 알게 되었다. 楊 山 아래에 있는 웰 公 힘을 바라보고 吉 地 라 여기게 되어 거 짓 꾀를 내어 그것을 취해 살았다. 그 땅은 후에 월성이 되었다... 24) 자료 3-8) 탈해니질금[토해니사금이라고도 쓴다.]은 남해왕 때[ 古 本 에 王 寅 년 에 이르렀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가까운 일이라면 노례왕 즉위 초보다 뒤의 일일 것이니 양위를 다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앞의 일이라면 혁거세의 치세 에 에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러므로 王 寅 년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락국 海 中 와서 정박한 배가 있었다. 그 나라 수로왕이 멀 民 과 더불어 북을 치면서 맞 이하여 그 배를 머무르게 하려고 했으나 배는 날 듯이 달려 계림 동쪽의 下 西 知 村 阿 珍 浦 [지금 상서지 하서지촌의 이름이 있다]에 이르렀다. 그 때 아진포 가에 어떤 할멈( 樞 )이 있었는데 이름은 阿 珍 義 先 이었다. 즉 혁거세왕의 海 }긋 之 母 였다. 그곳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이 海 中 에는 원래 石 범이 없는데 어째서 까 24) 脫 解 本 多 婆 那 國 所 生 也 其 國 在 흩 國 東 北 一 千 里 初 其 國 王 뿔 女 國 王 女 寫 姜 有 振 七 年 乃 生 大 뻐 王 日 人 而 生 때 不 群 也 宜 棄 之... 初 至 金 官 國 海 邊 金 官 國 人 怪 之 不 取 又 至 辰 韓 阿 珍 浦 n 是 始 祖 ifm 居 世 在 位 三 十 九 年 也 時 海 邊 老 母 以 觸 引 驚 海 뿜 開 慣 見 之 有 --_... 小 兒 在 馬 其 母 取 養 之 及 밤 身 長 九 R 風 神 秀 期 智 識 過 人... 脫 解 以 뺑 휩 寫 業 供 養 其 母 未 홉 有 解 色 母 謂 E3tiJ: 非 常 人 骨 相 珠 異 宜 從 學 以 立 功 名 於 是 專 精 學 問 暴 知 地 理 望 楊 山 下 짧 公 흰 以 寫 吉 地 設 誼 計 - 以 取 二 居 之 其 地 後 寫 月 城...( r 프 國 史 記 卷 第 一 新 羅 本 紀 第 A 脫 解 尼 師 今 원년)
84 치가 모여 우는가? 고 했다. 배를 끌어 당겨 그것을 살펴보니 가치가 배 어떤 배 위에 모여 있었고 배 안에는 궤짝이 있었다. 長 은 20척이고 廣 은 13척이었 다. 그 배를 끌어다가 숲 아래에 두고서는 흉한 것인지 길한 것인지 몰라 하늘 을 향해 고했다. 이에 열어보니 단정한 남자아이가 있었고 아울러 七 寶 와 如 輝 가 그 안에 가득 차 있었다... 25) 두 사서의 기록에 약간씩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탈해가 처음에 阿 珍 浦 에 도 착했다는 사실만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삼국유사 에는 그 阿 珍 浦 가 바로 鍵 林 동쪽의 下 西 知 村 이라고 되어 있으며 일연 당시에도 上 西 知 村 下 西 知 村 이 존재하 고 있었음을 세주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개의 마을이 앞에서 금산가리촌(한기 부)의 소속으로 언급된 곳과 같은 지역임은 물론이다. 탈해 설화는 두 기록만을 놓고 보더라도 후대에 많은 이야기가 덧붙여진 것 같다. 하지만 그 설화의 무대가 아진포였다는 사실만람은 두 사서에 모두 같게 기록된 점으로 보아 크게 툴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 에는 탈해를 발견한 것으로 나오는 할멈( 樞 )이 麻 居 世 王 과 관련 있는 인물로 묘사되 고 있다. 이 런 기 록들을 통해 보았을 때 아진 포라는 곳이 탈해가 도착했던 혁거세거서간이나 남해차차웅시기의 사로국에 속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신라 건국 직후에는 동해안의 양남면 양북 면 감포읍 지역이 한기부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보아 크게 모순되지 않는다. 또한 한기부에 소속되어 있던 북천 유역은 보문동 지역을 제외하고는 다른 5 개 유역에 비해 매우 좁은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에 따라 지금의 1-27H 면에 해 당되는 다른 5개의 유역권에 비해 북천 유역은 1 개 면의 %도 안 되는 마을만을 포함하고 있다. 만약 한기부가 북천 유역에만 해당되었다면 이와 같은 현격한 차 이 때문에 6촌의 하나로서 대등하게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한기부의 이러한 열등한 위치를 보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동해안 지역을 차지하고 있 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동해안의 양남면 양북면 감포읍 지역은 서쪽의 영천 남쪽의 울산, 북쪽의 안강 등의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부와 고립되어 있는 작 은 지역이다. 따라서 독자적으로 다른 지역과 대등한 입장의 연합체나 소국을 만 25) 脫 解 國 Pt 今 [ 一 作 ~ 土 解 尼 師 今 ] 南 解 王 時 [ 古 本 i 王 寅 年 至 者 翊 훗 近 則 後 於 쩔 禮 펌 n 位 之 初 無 爭 讓 之 事 前 則 在 於 麻 居 之 世 故 知 王 寅 非 也 ] 罵 洛 國 海 中 有!íJI 來 빔 其 國 首 露 王 與 많 民 鼓 課 而 迎 將 欲 留 之 而 紅 乃 飛 走 至 於 짧 林 東 下 西 知 村 阿 珍 浦 [ 今 有 上 西 知 下 西 知 村 名 ] 時 浦 邊 有 -;- --- 樞 名 阿 珍 義 先 乃 1m 屆 王 之 海 차 之 母 望 之 謂 R 此 海 中 元 無 石 범 何 因 聽 集 而 嗚 쫓!íJI 尋 之 體 集 一 紅 上!íJI 中 有 - 體 子 長 二 十 R 廣 十 프저 명 其 船 置 於 4 樹 林 下 i띠 未 知 ~j 乎 吉 乎 向 天 I띠 警 爾 散 IÎ디 乃 開 兒 有 端 IE 男 f 井 七 寶 fjy. 峰 滿 載 其 中... ( fi" 三 國 遺 事 卷 第 紀 異 第 -- 第 四 f\: 脫 解 :E)
85 들 수 있을만한 지역은 아니다. 이런 지역이었기 때문에 6촌 세력이 신라 건국 이 전이나 직후 영향력의 확대를 꾀할 때 금산가리촌(한기부)의 소속으로 되었을 것 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동해안의 이 었던 자연적 조건 때문이다. 동해안의 이 지역이 한기부와 가장 잘 연결될 수 있 세 지역 중 가장 넓은 평지를 가지고 있 는 양북면의 대종천 유역은 형산강의 다른 지역보다 북천유역으로부터의 접근이 가장 용이하다. 현재 경주지역에서 동해안으로 연결된 도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북천-추령-대종천을 잇는 4 번 국도이다. 1895년에 제작된 구한말한반도지형도에 도 이 도로가 토함산 줄기를 넘는 도로 중 가장 큰 규모의 것으로 나오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 卷 第 二 紀 異 第 二 萬 波 息 짧조에는 신문대왕이 동해안에 있는 감은사에서 출발하여 기림사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역시 북천-대종천을 잇는 선이다. 이러한 지리적 연결성 때문에 동해안의 이 지역이 금 산가리촌(한기부) 소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금산가리 촌(한기부)은 북천 유역을 중심으로 최소한 신라 건국 직후에는 동해안의 양남 면 양북면 감포읍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촌의 위치와 경계 6촌의 경계를 살펴보는데 가장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경주시내이다. 경주시내는 신라 이후 제방 건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신라 건국 전후와는 지형적으 로 많이 바뀌었다. 특히 현재는 범람이 가장 섬했던 북천 상류에 보문호와 덕동호 가 만들어져 있고 제방기술이 발달하여 거주지와 경작지로의 범람이 거의 없어졌 다. 따라서 경주시내 서쪽의 서천으로부터 동쪽의 명활산까지 거주지와 경작지가 특별한 지형적 구분 없이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와 일제시대까지도 안압 지와 황룡사지 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르는 도로를 경계선으로 면의 행정경계가 그 어져 있었다. 또한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의 기록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이곳 에서 알천양산촌 費 山 珍 支 村 금산가리촌의 경계가 나누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계션은 제 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 건국 전후 경주시내의 지형 적 특징이 그 이후와 달랐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분황사 황룡사지 - 안압지 북쪽 - 월성 북쪽 - 월정교지가 홍수 시 북천의 물 중 일부가 흐르던
86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이곳은 신라 건국 전후에 거주지나 경작지로 변 하지 못하고 습지와 같은 형태로 보존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이곳이 6촌의 경계선이 될 수 있었고, 그 영향이 조선시대와 일제시대에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게 된다.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중심으로 6촌의 위치와 경계에 대해 종합적으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무산대수촌(모량부)은 지금의 건천읍과 서면 지역인 대천 유역 에 있었다. 이곳은 지형적으로 다른 곳과 분명하게 구분되며, 경주시내 서쪽의 선 도산과 벽도산 사이의 좁은 계곡이 동쪽 마지막 경계가 되었을 것이다. 명활산고 야촌(습비부)은 지금의 천북면인 신당천 유역에 있었다. 이곳은 신당천이 서쪽으 로 형산강 본류와 합류되는 좁은 입구를 제외하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넓은 평지를 이룬 분지의 형태를 띄고 있다. 북쪽으로는 안강에서 東 流 하는 형산강 이 남지역도 포함됐을 것이다. 돌산고허촌(사량부)은 남천 남쪽의 형산강 본류와 태 화강 상류인 경주시 내남면과 울산광역시 두동면 두서면에 있었다.26) 이곳 역시 지형적으로 다른 곳과 분명하게 구분되고 있다. 알천양산촌(양부)은 지금의 현곡 면인 소현천 유역과 남천의 북쪽, 황룡사의 서쪽에 있는 경주시내를 포함하고 있 었다. 뽑 山 珍 支 村 (본피부)은 월성과 낭산을 잇는 선의 남동쪽인 남천 유역과 동천 의 상류인 외동면을 포함하고 있었다. 금산가리촌(한기부)은 분황사-황룡사-낭산 서쪽의 북천 유역과 동해안의 양남면 양북면 감포읍을 포함하고 있었다. 결국 6촌 사이의 경계선은 형산강 유역의 6 개 지류라는 작은 유역권을 중심으 로 태화강 상류의 일부, 동천의 일부, 동해안의 감포읍 양북면 양남면까지 확장 된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다만 지금의 경주 중심지는 신라의 건국 전후에는 유 역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어느 촌에 속했는지 단정지을 수 없는 지역이다. 하지 만 이곳은 지금까지의 검토를 통해 알천양산촌(양부)에 소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이 알천양산촌(양부)에 소속되게 된 것은 6촌간의 협의 속에 서 이루어진 것으로밖에 달리 생각할 방법이 없다. 26) r 삼국유사 의 기록에는 사량부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던 양부의 남쪽 경계가 뭘 嚴 좋 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뚫 嚴 좋 약간 북쪽에 있는 오롱 옆의 關 英 井 은 삼국유사 新 羅 始 祖 麻 居 世 王 조에 沙 梁 里 에 있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이 알영정은 조선 초기인 新 增 東 國 짧 地 勝 寶 에도 기록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일연 당시에도 존재했을 가능 성이 높다. 일연이 뚫 嚴 좋를 양부 남쪽 경계의 지표로 삼은 것은 일연의 다른 기록에도 많이 보이는 것과 같이 당시 남아 있던 사찰을 중심으로 위치를 표시하려 했기 때문으 로 보인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양부와 사량부의 경계가 남천이었다고 볼 수 있다
87 * 알파뱃 a. 박실동(박곡리) b. 구량리 c. 하서리 d. 나아리 e. 갈곡리 * 숫자l. 알천양산촌(양부) 2. 돌산고허촌(사량부) 3. 자산진지촌 (본피부) 4. 금산가리촌(한기부) 5. 명활산고야촌(습비부) 6. 무산대수촌(모량부) - 숫자의 위치가 중심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 그림 -8 6촌의 경계와 위치
88 紀 제 2 절 선라의 건국과 6촌의 존속 및 정치중섬구역의 형성 2-1 선라 건국 이전의 6촌 관계 지금까지 알아본 바를 종합해 볼 때 6촌은 三 國 史 記 와 三 國 遺 事 의 기 록처럼 신라가 건국되기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 공간적 범위는 형산 강 유역과 동해안에 걸쳐 있었다. 물론 6촌이 정확히 언제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는 없다. 다만 자료 3-2 에 일찍이 朝 蘇 의 遺 民 들이 이곳에 와서 山 갑 間 에 나뉘어 살며 여섯 촌락을 이루었다. 는 기록을 통해 그 대강의 시기는 짐작할 수 있다. 위 만이 고조선의 준왕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았던 기원전 194년이나 한나라에게 고조 선이 멸망당했던 기원전 108년경은 북쪽으로부터 조선의 유민들이 대거 유입될 수 있는 충분한 정치 사회적인 조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선진 문물을 가 지고 있었던 이러한 조선 유민들의 유입은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새로운 정치적 파동을 만들어 냈을 것이며 경주지역의 6촌도 그러한 파동과 함께 형성되었을 것 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6촌은 신라 건국 직전까지 느슨한 회의체를 구성하고 있었 다 r 三 國 遺 事 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6촌의 이러한 모습을 알려주고 있다. 자료 3-9) 前 漢 地 節 元 年 준 子 (B.C.69)[ 古 本 에는 建 虎 元 年 (A.D.25) 이라고 하 고 또 建 元 3년 (B.C.1 38) 이라고도 하나 모두 잘못이다] 3월 초하루( 湖 )에 6부의 祖 가 각각 子 弟 를 거느리고 모두 알천 뿜 上 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은 위로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가 없어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고 스스로 하고자 하는 바 를 따를 뿐이다.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그를 군주로 삼아 立 해 設 都 하지 않겠는가? 라고 했다. 이에 높은 데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 곁 에 이상한 기운이 있었는데 번개 빛이 땅에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마리의 백마가 鏡 拜 하는 모양을 하고 있어 그곳을 찾아 조사해 보았더니 하 나의 자주 빛 알[일설에는 춤 大 꽤이라고도 한다]이 있었다. 말이 사람을 보고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어 남자 아이를 얻었는데 형체가 단아하여 그것을 보고 놀라 이상하게 여겨 東 川 [ 東 川 좋는 詞 腦 野 북쪽에 있다] 에서 목욕시켰다... 27) 27) 前 漢 地 節 元 年 王 子 [ 古 本 굽 建 虎 元 年 又 될 建 元 三 年 等 皆 誤 ] 三 月 湖 六 部 祖 各 率 子 弟 煩 會 於 關 川 뿜 上 議 日 我 輩 上 無 君 主 臨 理 薰 民 民 皆 放 速 自 從 所 欲 蓋 竟 有 德 人 寫 之 君 主 立 웹 設 都 呼 於 是 乘 高 南 望 楊 山 下 羅 井 f 旁 異 氣 如 電 光 重 地 有 一 白 馬 鏡 拜 之 狀 尋 檢 之 有 i 緊 꽤[ Ã 춤 大 꽤] 馬 見 人 長 聊 上 天 꼼U 其 聊 得 童 男 形 嚴 端 美 驚 異 之 洛 於 東 果 [ 東 果 좋 在 詞 腦 野 北 J.... ( r 三 國 遺 事 卷 第 i 異 第 新 羅 始 祖 輪 居 世 王 )
89 신라 건국 직전의 6촌의 관계는 자료 3-9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각 촌마다 村 長 이 있었고 이들 사이에는 6촌장회의체가 결성되어 있었다. (이종욱, 1982;43) 이러 한 6촌장회의체는 어느 한 세력이 일방적으로 전체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독립적인 관계에서 내 외적으로 중요한 일에 대해 협의하여 처리하는 정도였다. 6촌이 이러한 6촌장회의체와 같은 하나의 지역연맹체로서 묶일 수 있었던 객관적 인 배경은 역시 형산강 유역의 지형적 조건 속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형산강 유역에서 6촌이 하나의 지역단위로서 묶였던 시기에 낙동강 유역의 다 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나타났다고 보아야 한다 r 삼국사기 와 삼 국유사 에 신라가 정복한 것으로 나오는 여러 소국과 三 國 志 鍵 書 東 헛 傳 韓 조에 나오는 辰 韓 井 辰 의 24국과 같은 소국들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소국 이전의 지역연맹체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首 露 가 가락국을 건국하기 이 전에 그 지역에 九 千 이나 九 村 이 있었다는 기록도 모두 이와 같은 경향을 보여주 고 있는 것이다.쟁) 여기서 九 村 은 형산강 유역의 6촌과 같은 지역연맹체였을 것이 고, 九 千 은 6촌장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역연맹체 사이에도 분 명히 경계가 있었을 것이다 r 삼국지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자료 3-10) 그 나라의 풍속은 山 川 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각기 구분이 있 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중략)....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면 별로 生 口 와 소 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責 福 라 한다.29) 澈 에서는 산천에는 모두 구분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구분은 산천이 어디 소속 인가를 분명하게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각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 게 했다는 것을 통해 서로간의 경계가 분명하게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 록은 藏 조에만 보이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韓 에서도 天 神 의 蔡 司 長 인 天 君 이 다스리는 蘇 쫓라는 특수한 지역은 죄를 짓고 도망한 자가 들어오면 누구든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 역시 지역마다 일정 한 경계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에는 파사니사금 23 년 (1 0 1)에 音 rr1것 國 과 意 直 유 國 이 영역을 다투어 선라에 중재를 부탁하는 내용이 나 28) rr- 三 國 遺 事 卷 第 : 紀 異 第 = 罵 洛 國 記 三 國 史 記 卷 第 四 十 一 列 傳 第 一 金 與 信 士. 29) 其 倚 重 山 川 山 川 各 有 部 分 不 得 흉 相 涉 入... 其 뭄 落 相 慢 犯 朝 [ 相 뽑 責 生 n 牛 馬 名 之 寫 責 과뻐 ( IJ" 三 國 志 鍵 書 東 횟 傳 滅 )
90 오는데 이것 역시 마찬가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3이 그러면 이러한 경계션을 긋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山 川 을 기준으로 하는 것 이다. 그 중에서도 산줄기( 分 水 界 )에 의해 나누어지는 유역권이 가장 분쟁의 소지 가 없게 된다. 지역연맹체 사이에 확실한 우위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간 의 영토분쟁을 해결하려면 자연적 구분를 중심으로 서로간의 경계션을 결정하는 방향이 가장 자연스럽다. 물론 확실한 우위가 확보되었다면 자연적 조건을 무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가 형성되지 않은 당시로서는 그런 상태가 지속적으로 유 지되기가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형산강 유역의 서쪽에는 영천의 금호강 유역이 남쪽에는 울산의 태화강 유역 이, 북쪽으로는 같은 형산강 권역이지만 지형적으로 구분되는 안강 기계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이 세 지역은 그 규모에 있어 경주의 형산강 유역에 버금가는 규모이기 때문에 6촌과 같은 지역연맹체가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동쪽 의 에 어 대종천 유역만은 그 규모가 작아 앞에서도 살펴본 것과 같이 6촌의 영향권 안 들어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6촌장회의체와 같은 지역연맹체가 결성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6촌이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지역과 구별되 어 통합성을 유지시킬 수 있는 형산강 유역의 지형적 특징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6촌의 바깥 경계선은 지금의 분수계라는 입장에서 살펴보면 크게 틀 리지 않을 것이다. 서쪽과 남쪽의 경계선이 지형의 고도라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 경계가 불분명할 수도 있지만 分 水 界 라는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 도 아니었을 것이다. 6촌장회의체와 같은 지역연맹체는 이러한 지형적 조건에 의해 일찍부터 하나의 단위로서 형성된 것 같으며 대내외적 문제에 대해 공동으로 대처하는 과정에서 그 결합력을 높여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6촌 전체를 다스리는 국가가 만들어지 지 않았기 때문에 상호 독립적인 동등한 입장에서의 결합이었다. 따라서 6촌은 대 외적 문제뿐만 아니라 대내적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협의하여 공동으로 대처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6촌간에도 서로간의 영역에 대한 확정 작업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형적으로 분명한 구별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서는 서로간의 합의에 의 해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지금의 경주시내이다. 이 곳 은 북천과 남천 그리고 형산강 본류가 맞나는 지점으로서 유역권으로서는 서로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알천양산촌(양부)의 소속으로 되어 30) ~ 三 國 벚 記 卷 第 一 wfr 羅 本 紀 第 一 파사니사금 23년 % 써
91 있다. 이것은 서로간의 협의가 있었다는 지리적 증거 중의 하나이다. 2-2 신라의 건국과 6촌의 존속 신라의 건국은 6촌 자체의 성장을 통해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三 國 史 記 와 三 國 遺 事 의 건국신화를 분석해 보면 신라의 건국 시조인 麻 居 世 집단은 신라 건국 이전부터 존재하던 토착세력이 아니라 외래집단이다. 신화 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혁거세의 탄생 신화와 관련되어 나오는 말( 馬, 白 馬 )이나 알( 大 꽤, 緊 꽤, 춤 大 꽤)과 같은 존재는 天 神 族 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외래집단을 의 미한다고 한다. 반면에 혁거세의 紀 인 알영의 탄생에서 나타나는 龍 鍵 龍 등은 地 神 族 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토착집단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도흠, 2000;39-47)31) 이러한 신화에 대한 연구를 참조할 때 신라의 건국은 외래집단과 토착집단의 연 합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또한 두 사서 모두 혁거세가 6촌인들의 자발적인 추 대에 의해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정복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추 대로 왕이 된 것으로 나와 있는 기록 속에도 외래집단인 혁거세 집단이 알영으로 상징되는 집단과는 또 다른 토착집단인 6촌 세력과의 연합에 의해 신라를 건국했 음이 암시되어 있다. 이러한 건국신화는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고구려나 백제의 건 국신화 모두 건국 시조가 어디 출신이며 왜 이주하여 왔는지 등에 대해서 아주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만은 건국 시조인 혁거세 집단의 출신이나 이 주 동기 등에 대해 기록해 놓은 것이 없다. 이런 사실을 통해 보더라도 신라의 건 국이 외래집단의 일방적인 정복이나 힘의 우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라 건국의 이런 특징 때문에 토착집단인 6촌 세력은 거세되거나 극단 적으로 약화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3 2 ) 따라서 신라가 31) 김두진도 신라 건국신화를 천신족과 지신족의 결합으로 보았으며 천신족인 혁거 세집단을 유이민 세력으로, 지신족인 알영 세력을 먼저 이주해 살던 토착세력으로 간주 하였다. (김두진, 新 羅 建 國 神 話 의 神 聖 族 관념 r 한국고대의 건국신화와 제의.J1, 1999) 32) 신라에서 6촌에 대한 신화(또는 설화)가 후대에까지 전달펼 수 있었던 것도 이러 한 이유 때문이다. 만약 외래집단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정복되었다면 토착집단의 신화(또는 설화)가 후대에까지 전달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에 서는 방향을 위주로 한 5 라는 숫자가 왕경 행정구역의 단위로 사용된 반면에 신 라에서는 6 이라는 숫자가 사용된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부 분에서도 신라의 토착적인 성격은 강한 편이었다
92 혁거세 집단이라는 외래집단을 중심으로 건국되기는 했지만 6촌 각각의 내부구조 는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라의 건국과 함께 6촌 지역의 세력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게 되 었다. 신라의 건국은 혁거세가 6촌장보다 높은 위치에서 6촌 전체를 다스리는 우 두머리( 居 西 千 )가 되었음을 의미한다Ií삼국유사 卷 第 一 紀 異 第 一 新 羅 始 祖 械 居 世 王 에서 혁거세의 세주에는 ( 輪 居 世 의 이름은) 대개 獅 言 인데 간혹 했 短 內 王 이라고도 쓴다.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라는 내용이 있다.33) 이를 통해 신라인들이 혁거세 거서간의 출현을 세상을 다스리는 자의 출현으로 인식하고 있 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혁거세가 6촌 전체를 다스리는 자로서 출현했음을 상 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의 건국이 이러한 우두머리(또는 왕)의 출현만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니다. 혁거세와 알영의 결합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집단의 출현도 있 었다.싫) 이 집단은 6촌장 집단과는 다른 것이다. 알영으로 상징되는 토착집단이 6 촌장 집단과 일정정도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는 추측되지만 혁거세 집단과의 결합 을 통해 새로운 집단으로 태어났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신라의 건국이 기본적으로는 기존의 6촌 세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기 때문에 6촌의 구조와 6촌장 세력의 지위를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었다. 그렇더 라도 최소한 두 가지의 변화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6촌 세력과 대등하거 나 우위에 있는 집단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후에 왕실을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왕 실집단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는 혁거세 집단과 알영 집단은 6촌장 집단과는 전혀 다른 집단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3 5 ) 둘째 이제 6촌은 단순한 지역연합체가 아니라 혁거세라는 우두머리에 의해 결합되어 있는 국가가 된 것이다. 신라 건국 이전에도 6촌간에는 상당한 공동체적 의식이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공동 체적 의식은 내부의 독립성과 분열가능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신라의 건국은 6촌 사이에 존재하던 이러한 내부 독립성과 분열가능성을 약화시키고 한 단계 높아진 지역단위를 탄생시키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33) 蓋 獅 듬 也 或 作 했 短 內 王 듬 光 明 理 世 也 34) 알영 집단을 김씨족으로 보는 연구가 있어 주목된다. (김두진, 新 羅 建 國 神 話 의 神 聖 族 관념 r 한국고대의 건국선화와 제의.B, 1999) 이 연구에서는 후에 나타나는 알지 설화의 김씨족과 다르기는 하지만 알영 집단도 김씨 계열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 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김씨족을 자칭하는 집단은 신라 건국 당시에는 이미 토착세 력이었다는 사실이다. 35) 이종욱은 왕실세력을 王 族 王 如 族 王 母 族 으로 보았다. (이종욱, 1982;124)
93 2-3 정치중심구역의 형성과 위치 (1) 왕질집단의 초기 거주지 혁거세가 탄생한 지역을 삼국사기 卷 第 一 新 羅 本 紀 第 一 始 祖 부분에는 양 산 기숨에 있는 나정 곁의 숲( 望 楊 山 麗 羅 井 { 旁 林 間 ) 이라고 했고 삼국유사 卷 第 一 紀 異 第 - 新 羅 始 祖 麻 居 世 王 부분에 는 양산 아래 나정 옆( 楊 山 下 羅 井 佛 ) 이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양산은 지금의 나정 동쪽 양산정이 있는 곳을 지칭한다고 알려져 있다.3 6 ) 그리고 혁거세의 비 알영이 탄생한 알영정은 삼국유사 에 의하 면 사량리에 있었다고 나온다. 이 두 유적의 위치에 관한 기록은 이미 초선 초기 의 기록인 新 增 東 國 團 地 勝 寶 慶 州 府 古 題 조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이 기록에는 나정은 부의 남쪽 7 里 에, 알영정은 부의 남쪽 5 里 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지금의 위치와 같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卷 第 - 紀 異 第 一 新 羅 始 祖 納 居 世 王 부분에는 남산 서쪽 기숨에 宮 室 을 세우고 혁거세와 알영을 길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세주에 남산 서쪽 기숨이 바로 당시의 창림사로 나오 고 있다 r 新 增 東 國 瓚 地 勝 寶 慶 州 府 古 題 조 창림사 부분에는 창림사지에 신라 때의 궁전 유지가 있는데 후대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 창림사를 세웠다고 기록되 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과 유적을 종합해 보았을 때 지금의 나정, 알영정, 창림사 지 근처가 초기 왕실집단의 중요 거주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0 참조) 특히 창림사지는 삼국유사 와 新 增 東 國 與 地 勝 寶 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혁거세와 그의 ~ê. 알영 및 중요한 왕실집단이 신라 건국 직전과 직후에 거주하였던 곳으로 볼 수 있다. 이곳은 앞의 6촌 위치를 고찰해 보았을 때 돌산고허촌(사량부) 소속의 땅이었 다. 이러한 사실은 알영정이 사량리에 있었다는 삼국유사 의 기록과도 일치된 다. 그런데 여기서 關 英 井 이 사량리에 있었다는 기록은 초기 왕실집단과 6촌장 세 력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 점에서 자비마립간 12 년 (469) 京 都 에 행 里 이름을 정했다 는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7) r 삼국유사 卷 第 一 紀 異 第 一 辰 韓 부분에는 京 中 에 행과 55 里 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 다. 행 里 制 에 대해서는 제 5장에서 다시 살펴볼 것이지만 최소한 자비마립간 12년 36) ["신라의 빛.!I, 권오영, 경주시, 1980:26 37) [" 三 國 벚 記 卷 第 三 新 羅 本 紀 第 프 자비마립간 12년
94 (469) 이후 왕경의 6부 밑에 행과 里 라는 행정구역이 새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방 리제가 시행된 이후 里 는 최소한 部 밑의 하부단위였다. 그런데 삼국유사 에 등장하는 里 의 이름 중 部 의 이름과 동일한 이름이 다수 등장한다. (표 -30 참조) 삼국유사 에 나오는 설화의 장소로서 部 와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는 里 의 경 우는 총 9 번이다. 그리고 6부의 명칭을 분명하게 部 로서 기록한 것은 6촌과 6부의 관계를 설명한 부분을 제외하면 7 번 나오고 있다. 그러면 같은 명칭을 部 와 里 로 서 다르게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部 를 里 로 잘못 기록했다고 볼 수 있 을까?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r 삼국유사 에서는 여러 설화의 장소로서 部 보다 는 里 라는 행정단위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일연에 의해 의도적 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일연은 내려오는 기록이나 구전에 충실하려 했 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화를 기록하거나 입에서 입으로 전했던 신라인들 자체가 설화의 무대로서 部 보다는 里 라는 단위를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리고 삼국유사 에 호로 나올 정도로 번창했던 왕경이었 음을 고려할 때 통일이후에는 部 보다 里 가 신라인들의 생활에 더 중요했을 것이 다. 이렇게 본다면 부와 동일한 명칭을 갖고 있는 里 는 기록 그대로 部 가 아닌 里 를 지칭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부의 이름과 동일한 명칭을 갖게 된 것은 그러한 里 가 있는 곳이 그 이전부터 部 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알영정이 사량리에 있었다는 삼국유사 의 기록을 통해 알영정 을 비롯해 나정 창림사지가 있는 곳이 바로 사량부의 중심지였다고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신라 건국 이전의 6촌 중섬지가 후대의 6부 중심지와 동일하다고 본 다면 혁거세와 알영을 비롯한 왕실집단은 사량부의 전신인 돌산고허촌의 중섬지 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왕실집단이 비록 6촌장 세력보 다 한 단계 높은 집단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주지라는 공간적 입장에서 보 았을 때 6촌장 집단과 혼재되어 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물론 같은 지역 내에서 도 6촌장의 거주지와 혁거세의 거주지는 분리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큰 범위 에서 거주지가 혼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초기 왕실집단의 힘이 6촌 장집단과의 공간적 분리를 이루어낼 수 있을 만큼 강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역으로 신라가 외래집단과 토착세력의 연합에 의해 건국되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95 (2) 금성의 건설과 정치중섬구역의 금성의 위치 삼국사기 신라본기 始 祖 21 년 (B.C.37)조에는 京 城 을 쌓아 金 城 이라고 불렀 다 고 나오며 26 년 (B.C.32)조에는 정월에 금성에 宮 室 을 지었다 는 기록이 나온다. 이런 기록을 토대로 한다면 금성은 신라 건국과 동시에 건설된 것이 아니라 건국 후 약 2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건설된 것이다. 여기서 한 번쯤 신라의 건국과 금성의 건설이 왜 동시에 이루어지지 못했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 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금성의 위치가 어디인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금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r 삼국사기 지리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자료 3-11) 처음에 혁거세 21 년 (B.C.21) 에 宮 城 을 쌓고 금성이라 불렀다. 파사 왕 22년 (01) 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고 이름을 月 城 이라 하였는데 在 城 이라 고도 불렀다. 둘레는 1, 203보이다. 新 月 城 북쪽에 滿 月 城 이 있는데 둘레가 1,838 보이다. 또 신월성 동쪽에 明 活 城 이 있는데 둘레가 보이다. 그리고 신월성 남쪽에는 南 山 城 이 있는데 둘레가 2,804보이다.38) 이 기록에 나오는 월성은 지금도 남아 있어 금성의 위치를 이해하는 하나의 지 표가 될 수 있다. 여기서 금성 동남쪽에 월성을 쌓았다는 것은 반대로 금성이 월 성의 서북쪽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월성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그 서북쪽은 지금의 경주시내를 지칭한다. 물론 이 기록보다는 앞에서 이미 살펴본 창림사지 (이종욱, 1984) 로 본 견해도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다음과 같은 기 록을 통해 금성이 지금의 경주시내 어딘가에 있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자료 3-12) (아달라니사금) 7년 (60) 여름 4월에 暴 雨 가 내려 알천의 물이 넘 쳐 人 家 가 표류하였고 金 城 北 門 이 저절로 무너졌다,39) 38) 初 麻 居 世 二 十 一 年 藥 宮 城 號 金 城 婆 꽃 王 二 十 二 年 於 金 城 東 南 藥 城 號 月 城 或 號 在 城 周 一 千 二 十 三 步 新 月 城 北 有 滿 月 城 周 一 千 八 百 프 十 八 步 又 新 月 城 東 有 明 活 城 周 千 九 百 六 步 又 新 月 城 南 有 南 山 城 周 二 千 八 百 四 步 ( r 三 國 史 記 卷 第 三 十 四 雜 志 第 三 地 理 一 ) 39) 七 年 夏 四 月 暴 雨 關 川 水 찮 漂 流 A 家 金 城 北 門 自 짧( r 三 國 史 記 卷 第 二 新 羅 本 紀 第 : 阿 達 羅 尼 師 今 7 년)
96 아달라니사금 7년 (160) 의 기록은 폭우가 와서 關 川 의 물이 범람하여 人 家 가 漂 流 하였다 는 부분과 金 城 北 門 이 저절로 무너졌다 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 다. 이 두 부분은 서로 관계가 없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으나 문맥의 흐름상 금성 북문이 저절로 무너진 것은 알천(북천)이 범람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얄천의 범람이 특별히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이 때의 홍수는 일상적인 경우보 다 훨씬 큰 규모였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금성은 알천의 큰 범람에 의해 북문이 저절로 무너질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금성은 큰 홍수가 발생했을 때 지금의 북천인 알천의 범람 영향을 받는 지역에 있어야 한다. 이제 금성이 월 성의 서북쪽 경주시내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그 대략적인 위치가 어디 인지를 알아본다. 금성의 위치를 경주시내의 경주읍성 자리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김병모, 강종원, 購 田 元 春, 1929.) 하지만 인공제방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경주 읍성 자리는 북천 변에 있기 때문에 범람의 영향을 수시로 받는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경주시내에서는 대릉원과 그 동쪽의 소규모 고분들이 연결되는 선덕여자중고등학교까지의 선이 하나의 작은 분수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북쪽은 북천과 서천으로, 남쪽은 남천으로 물이 흘 러간다. 그렇다면 분수계의 북쪽에 있는 경주읍성 자리는 홍수 시 북천 본류의 영 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지역으로서 신라 초기의 주거지로서는 적합하지 않았을 가 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사실은 대릉원의 고분들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조성되었다는 고고학 적 의 연구와도 부합한다. (윤무병, 1984) 이러한 고고학적 연구를 참조한다면 대릉원 북쪽은 고분이 계속 확장되어 조성될 만큼 큰 장애물 즉 주거지와 같은 것이 없었다. 또한 도시계획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서도 경주읍성과 그 주변은 격자형 도시계획의 흔적이 가장 분명하게 남아 있는 지역 중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그 림 -9 참조) 그런데 이렇게 분명한 도시계획의 흔적이 남기 위해서는 비계획적인 형태를 띄었을 기존의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지 않은 곳일 경우에 가능하다. 따라 서 경주읍성 자리는 보다 후대에 조성된 주거지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금성은 대릉원을 비롯한 북쪽 고분군이나 그 남쪽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 지역은 일단 작은 분수계 상이나 남쪽에 있기 때문에 일상적인 홍수 때 북천 본류의 직접적인 영향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다. 동쪽은 홍수 때 범람하 던 지역이어서 북천으로부터 범람한 물이 월성 북쪽을 돌아 서남쪽으로 빠져나가
97 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남쪽에는 범람의 기록이 나오지 않는 남천이 있다. 서쪽에 는 형산강 본류인 서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지만 역시 범람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리고 서천가에 있었던 홍륜사가 天 鏡 林 이라는 숲의 나무를 베어 만들어졌 다는 기록을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남북으로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 다.40) 또 홍륜사의 기둥과 들보에 쓸 재목이 모두 이 숲에서 조달되었다는 기록을 볼 때 이 숲의 규모가 컸으며, 그것은 서천의 범람을 막는 인공제방의 역할을 했 다고 생각된다. 결국 북천의 대규모 범람이 없는 경우라면 경주시내에서는 이 지 역이 홍수로부터 가장 안전한 곳이 된다. 그렇다면 금성과 초기 주거지가 바로 이 지역에 건설되었다고 보아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이 지역 중 금성의 구체적인 위치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자료 3-12와 함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자료 3-13) (지마니사금 12년(1 23)) 5월에 금성 동쪽의 民 屋 이 땅 속으로 함몰 되어 못이 되고 연꽃( 英 覆 )이 나왔다.4 1) 자료 3-14) (미추니사금) 원년 (262) 봄 3월에 용이 궁 동쪽의 연못에 나타났 다. 가을 7월에 금성 서문에 화재가 나서 인가 300 餘 區 가 불탔다.42) 지마니사금 12년 (123) 에 금성 동쪽의 民 屋 이 함몰되어 연못이 된 이유는 발생 시기가 5 月 (음력)임을 통해 보았을 때 장마철의 홍수 때문이었다고 유추된다. 다 만 그 홍수가 아달라니사금 7년보다는 작은 규모였기에 얄천의 범람에 대해 특별 히 기록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을 통해 금성 동쪽에도 주거지가 있 었지만 홍수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후 연꽃( 英 葉 )이 필 수 있는 연못과 같 은 곳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분황사- 황룡사 안압지북쪽-월성북쪽-월정교지에 이르는 지역이 홍수 시 북천의 범람 영향을 가 장 잘 받는 지역이었다고 언급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금성 서문에 불이 나자 인가 300 여구가 불에 탔다는 기록을 볼 때 금성 서쪽에 는 주거지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주거지는 격자형의 도시계획이 이 루어지기 이전에 형성된 것이다. 경주시내에서 가장 비계획적인 도로망의 흔적이 40) ~ 三 國 遺 事 卷 第 三 興 法 第 三 阿 道 基 羅 조와 原 宗 興 法 散 觸 滅 身 41) 五 月 金 城 東 民 屋 階 寫 池 笑 覆 生 ( r 三 國 史 記 卷 第 一 新 羅 本 紀 第 4 지마니사금 12 년) 42) 元 年 春 三 月 龍 見 宮 東 池 秋 七 月 金 城 西 門 % 延 燒 人 家 三 百 餘 區 ( Ir 三 國 史 記 卷 第 新 羅 ; 本 紀 第 미추니사금 원년)
98 남아 있는 곳은 북쪽으로 대릉원 - 황오동고분군 - 인왕동고분군을 잇는 선이며, 남쪽으로는 남천까지이다. (그림 -3과 그림 -9 참조) 따라서 이 범위 안에 금성과 초 기주거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에는 금성에 대한 기록이 5 세기까지 지속적으로 나온다. 따라서 4-5세기에 조영된 고분군 지역에는 금성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금성과 초기주거지는 북쪽에 있는 대릉원 황오 동 인왕동 고분군과 남쪽의 황남동 교동 고분군 사이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 다.43) 이 지역은 남북 약 m 의 폭을 갖고 동서로 길게 누워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아직까지 고분이 발굴되지 않고 있다.μ) 이 지역을 신라 초기의 주거지로 본다면 금성은 서쪽에 주거지가 형성되고, 동쪽에 民 屋 이 연못으로 변할 수 있는 지역에 있어야 한다. 이런 위치로 가장 적절한 지역은 바로 현재의 첨성 대나 그 근처이다.껑) 43) 顧 島 玄 治 郞 도 대릉원 남쪽의 비격자형 도로망의 흔적이 경주 시내에서 최초의 주거지 를 보여주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 購 옮 玄 治 郞, 193이 44) 첨성대의 동쪽과 바로 남쪽 지역에서 몇몇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현재까지는 고분이 잔혀 발굴되지 않고 있다. 이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는 다음과 같다. 계림북 편( r 월성해자 발굴조사보고서 1, 문화재연구소 경주고적발굴조사단, 1990), 인왕동 번지, 황남동 번지, 황남동 99, 98-1 번지(이상 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 (긴급발굴조사보고서 1), 경주문화재연구소, 1992), 황남동 번지( r 경주 황성동 번지 황남동 번지 발굴조사보고서 J,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1995). 45) 그 동안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서는 천문대 제사처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해 왔 다. (김한배, 1998;67) 이러한 여러 견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첨성대가 국가의 安 危 와 관 련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장소라는 것만름은 동일하다. 그렇다면 선덕왕은 그렇게 중요 한 첨성대를 왜 그곳에 만들게 되었는가에 대해 살펴볼 펼요가 있다. 그리고 주변과 비 교하여 지형적 특징이 두드러지지 않은 곳이면서도 그렇게 중요한 시설을 입지시킬 장 소로 인식된 곳이라면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첨성대 가 설치되는 선덕왕 ( ) 때에는 금성이 이미 왕성으로서의 기능이 정지된 상태였 다는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 ( 鬼 頭 淸 明, 1979) r 三 國 史 記 新 羅 本 紀 에 금성에 대한 기록 은 소지마립간 22 년 (500) 을 끝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라 삼국사 기 지리조에는 월성과 만월성 명활성 남산성 등의 둘레 길이가 모두 나옴에도 볼구하 고 금성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각 성의 둘레 길이를 측정할 때 금성은 이미 사라져서 기록을 남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Ir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성의 둘레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진평왕 13 년 (59 1)의 에 남산성, 명활성, 서형산성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금성은 6세기의 어느 시점에 이미 왕성으로서의 기능이 사라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더라도 400년 이상 왕성의 하나로서 기능했던 장소성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러한 장소성은 선덕왕 ( ) 으로 계속 전해졌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때까지도 유형 무형 선덕왕이 국가의 안위와 관련된 첨성대를 금 성 옛터에다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한배도 신라 건국 전후의 지형적 특징을 염두 에 둔 것은 아니지만 첨성대를 금성의 위치로 비정하고 있다. (김한배, 1998;62) 이곳 은 금성에 대한 여러 기록과 잘 부합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99 1. 추정 금성의 위치 2. 노서동고분군 3. 노동동고분군 4. 대릉원 5. 황오동고분 군 6. 인왕동고분군 7. 황남동고분군 8. 교동고분군 --컴느 홍수 시 북천이 자주 범람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방향 _.-. 비계획적인 도로망 흔적의 범위 추정 초기주거지 그림 -9 금성의 위치
100 @ 정치중심구역의 형성과 의의 경상도 지방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고분군이 구릉이나 야산의 정상부 등에서 발견되는데 비해 신라의 고분군이 경주시내와 같은 평지에 조영된 것은 아주 특 이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한다. (최병현 1992:60) 이와 마찬가지로 금성과 같은 정 치 중심지가 지금까지 밝힌 바와 같이 경주시내의 평지에 조영된 것 역시 당시의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을 것이다.뼈) 경주시내는 홍수 때 북천 범람의 위험이 항 상적으로 내재해 있는 지역이다. 특히 홍수가 심할 경우에는 흘해니사금 41 년 (350) 의 기록과 같이 물이 3-4척이나 괴고 官 私 屋 舍 가 떠내려갈 정도로 위험한 지 역이다. 이런 경우는 앞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인공제방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었던 고려와 조선에서도 일어났다. 그렇다면 초기 신라인들은 이렇게 영구적 정 착지가 만들어지기에는 불리한 곳에 왜 금성을 만들게 되었을까? 금성은 신라의 건국과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약 20년 정도의 시간이 지 나 만들어졌다. 여기서 약 20년이라는 기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 각할 필요가 었다. 신라의 건국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외래집단인 혁거세 집단 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토착세력과의 연합에 의해 이루어 졌다. 이러한 사회 정치적 흐름은 신라 건국 전후에 혁거세와 알영으로 상징되는 왕실집단의 거주지가 6촌의 하나인 돌산고허촌(사량부)의 중심지 근처에 자리잡았 다는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왕실집단은 공간적으로도 6촌장 세력과의 차별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로 아직은 그 힘이 약했다는 것이다. 46) 북천이나 남천보다 규모가 약간 작은 우리 나라 소하천 유역의 취락입지에 대해 연구한 손일에 의하면 이러한 지역에서 취락은 대부분 산록완사면에 입지한다고 한다. (손일, 1985)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은 小 流 流 域 益 地 內 하천의 水 文 特 性 이 하계집중강수현상에 따라 건기 우기의 뚜렷한 구분, 비교적 함 度 가 큰 퇴적물 의 하도내 공급, 극심한 유량변동, 그리고 급한 河 皮 順 料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網 狀 流 路 의 형성여건과 일치한다고 하며, 실제로 제방내의 직선하도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妙 傑 堆 積 地 가 하천 주변에 펼쳐져 있는 망상하도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 다고 한다. 이와 같은 특성으로 인해 소하천 유역의 범람원은 하천치수기술이 발달 하기 이전에는 경작 및 거주가 불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경주시내는 이러 한 소하천보다 약간 큰 규모이기는 하지만 유적발굴과정에서 지표 약 1-2m 이하 에서 자갈섞인 모래층이 광범위하게 발견된다고 하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손일이 연구한 소하천 유역의 특징과 비슷한 경향성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경 주시내에 제방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주거지나 경작지가 형성되기에 부적당한 지 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거지나 경작지가 형성될 경우 홍수 시 범람의 영 향을 가장 적게 받는 지역이 선택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101 o. 뼈 1. 창림사지(초기 주거지) 2. 추정 금성지 3. 알영정 4. 나정 그림 -10 왕실집단의 주거지 이동 그리고 신라의 건국 직후 금성과 같은 왕성이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것 역시 왕실집단의 힘이 아직 미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렇게 본다면 약 20 년 후에 왕성인 금성이 축조되었다는 기록은 이제 왕실집단의 힘이 6촌장 세력보다 보다 강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혁
102 거세를 비롯한 왕실집단은 약 20 년 동안 자신들의 힘을 키웠으며 그 과정에서 6 촌장 세력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게 되었음을 금성의 축조라는 기록으로 남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금성의 위치를 통해 더욱 분명해 진다. 금성이 세워진 경주시내 는 홍수의 범람으로부터 항상적으로 위협받는 지역이기 때문에 일반인의 거주도 그리 쉬운 지역은 아니었다. 그리고 경주시내는 비록 알천양산촌(양부)에 속하기 는 했지만 그 중심지는 아니었다. 혁거세를 비롯한 왕실집단이 이런 곳에 금성을 축조했다는 것은 6촌장 세력과의 차별성을 분명하게 부각시키려는 사회 정치적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왕실집단은 6촌장 세력과의 공간적 분 리를 이루어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왕실집단의 존재를 가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금성의 건설과 그 위치를 통해 혁거세의 6촌 장에 대한 정치적 우위와 왕실집단의 6촌장 집단에 대한 사회적 분리가 분명하게 일어났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존의 6촌장 세력의 중심지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정치 중심구역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정치중심구역에는 왕(혁거세)를 비롯한 고위 왕실집단이 살게 되었으며 신라 전체의 일을 관장하는 정치권력이 집중되게 되었 다. 이제 6촌 중심지보다 한 계층 높은 새로운 중심지가 만들어짐에 따라 공간적 으로도 국가다운 위계질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의 건국 신화가 출현 했던 남산 서북록은 더 이상 신화나 설화의 무대로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호공이 나 석씨 계통의 탈해설화, 김씨 계통의 알지설화의 무대인 월성 47) 과 계림이 모두 금성 주변에 있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6촌장 세 력은 아직도 그 중심지에서 자신의 세력 기반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금성 지역 에 살던 혁거세를 비롯한 왕실집단은 6촌장 세력보다 더 우위에 서게 되었지만 아직은 6촌의 독자성을 박탈할만한 힘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 다. 47) 월성은 뒷부분에서 다시 다룰 것이지만 혁거세거서간 재위 시에 마한에 사신으로 파견된 호공과 혁거세거서간 말년이나 제 2 대 남해차차웅, 제 3 대 유리니사금 시기에 활약했던 탈해가 모두 살았던 지역이다. 그리고 이들이 신라의 정치에서 중요한 역 할을 했던 인물임을 고려할 때 금성과 아주 가까운 곳에 살았을 것으로 볼 수 있 다. 하지만 금성의 위치로 비정된 곳 중의 하나인 창림사지는 월성으로부터 북쪽으 로 2km 이상 떨어져 있다. 과연 신라 건국 전후에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이렇게까지 먼 곳에서 살았을까 의문스럽다. 반면에 첨성대 지역은 월성과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어 이러한 의문점이 크게 일어나지 않는다
103 제 4장 6촌의 개편과 왕경의 형성 제 1 절 6촌의 행정구역으로의 개편 1-1 유리니사금 9년 (32) 전후 왕설집단의 강화 유리니사금 9년 (32) 이전에 신라에서는 외래집단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집단이 왕실 세력으로 합류하고 있었다. 첫 번째 예는 聊 公 의 출현인데 삼국사기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자료 4-1) (혁거세거서간) 38년 (B.C.20) 봄 2월에 짧 公 을 파견하여 마한에 修 體 했다. 마한왕이 호공에게 꾸짖기를 辰 下 2 韓 은 우리의 속국이 되었는데 최 근에 職 頁 을 보내지 아니하니 대국을 섬기는 예가 이와 같습니까? 라고 했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2 聖 이 일어나고부터 人 事 가 닦이고, 天 時 가 화 합되어 창고가 충실하고 인민이 존경하고 겸손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진 한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지 않은 바가 없게 되 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왕께서 겸허하여 신을 보내 修 體 하게 하였으니 禮 에 어 긋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대왕께서 매우 노해 兵 으로써 위협하니 이것 은 무슨 의도입니까? 라고 했다. (마한)왕이 분하게 여겨 그를 죽이려고 하자 좌우 신하가 그렇게 하지 말도록 課 하여 이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중 략)... 호공이란 자는 그 族 姓 이 상세하지 않다. 본래 優 人 인데 처음에 표주박 (웰)을 허리에 매고 바다를 건너 왔다. 그것 때문에 호공이라 칭했다1) 호공이 마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것을 볼 때 신라 정치에서 차지하는 위 치는 적지 않았다. 호공은 다음에 인용될 탈해전설 속에서 탈해 이전에 월성 지역 에 살았던 인물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호공이 탈해니사금 2 년 (58) 에는 大 輔 로 임명되고 있다. 이 기록은 호공에 대한 기록이 첫 번째로 나타나는 시조 38 년 (B.C. 20) 과의 사이에 78년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호공의 실존성에 대해 의문을 1) 三 十 八 年 春 二 月 週 웰 公 體 於 馬 韓 馬 韓 王 讓 짧 公 日 辰 下 二 韓 寫 我 屬 國 比 年 不 輸 職 頁 事 大 之 禮 其 若 是 乎 對 R 我 國 自 二 聖 筆 興 人 事 修 天 時 和 용 庫 充 實 A 民 敬 讓 自 辰 韓 遺 民 以 至 下 韓 樂 浪 훌 人 無 不 뽑 懷 而 홈 王 讓 虛 遺 下 몹 修 體 可 謂 過 於 禮 훗 而 大 王 1m 짧 행 之 以 兵 是 何 意 耶 王 慣 欲 殺 之 左 右 課 止 乃 許 歸... 됐 公 者 未 詳 其 族 姓 本 援 人 初 以 됐 驚 體 週 海 따 來 故 稱 됐 公 ( r 三 國 史 記 卷 第 一 新 羅 本 紀 第 始 祖 38년)
104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초기 기록이 구전에 의해 전해지다가 후대에 문자로 정 착된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연대의 잘못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호 공이 신라 초기에 실재했던 인물임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사 실은 호공의 출신지가 위의 기록에 의하면 慶 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후대에까지 慶 人 으로 기록된 존재라변 호공이 외부에서 온 존재라고 생각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예로는 탈해가 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니사금 즉 위조와 삼국유사 第 四 代 脫 解 王 조에는 자료 3-7, 3-8과 같은 탈해 전설이 실려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탈해 역시 신라 토착인은 아니다. 그가 기록처럼 왜국 동북쪽 에서 온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신라 외부에서 온 세력임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탈해가 월성 지역에 있었던 호공의 저택을 뺏는 과정에서 자신의 선조가 대장장이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아 신기술을 가지고 들어온 외부세력임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2) 신라는 초기부터 고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마한 변한 뿐 만 아니라 낙랑 왜국 등과의 대외적인 관계를 계속 갖고 있었다. 그리고 三 國 史 記 卷 第 i 新 羅 本 紀 第 一 유리니사금 14년 (37) 에 고구려왕 무흘이 낙랑을 멸 하자 낙랑인 5천명이 투항해 와서 6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그 기록의 員 碼 여부를 떠나 외부세력의 유입이 계속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3) 이와 같은 흐름을 통해 볼 때 호공이나 탈해와 같은 외부세력이 계 속해서 신라 사회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온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이렇게 편입 된 세력 중 호공이나 탈해는 왕실집단으로 합류하여 후대에까지 전해졌기 때문에 기록될 수 있었던 인물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들이 홀로 신라에 들어온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탈해는 후에 제 4 대 니사금으로 재위하며 그 자손들은 제 12 대 미추니사금 ( )을 제외한 제 대 ( ) 까지 약 160년을 재위한다. 이런 탈해계통의 성공은 탈해가 홀로 왔을 경우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탈해의 설화는 탈해로 상징되는 외부집단의 출현 을 탈해 한 인물에 대한 묘사로서 전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호공은 이후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해 그 설화가 탈해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지지는 못했지만 후대 2) 김두진은 탈해신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탈해는 보다 우수한 물질문명인 철제 무기의 제 조기술과 무사단을 이끌고 주위 소국을 정복하면서 신라사회로 들어왔다고 보았다.(김 두진, 新 羅 脫 解 神 話 의 형성기반- 英 雄 傳 承 的 성격의 再 定 立 r 한국고대의 건국신화 와 제의 J, 1999) 3) 高 句 麗 王 無 뼈 輯 樂 浪 滅 之 其 國 人 五 千 來 投 分 댐 六 部
105 에까지 전해졌던 것을 통해 볼 때 역시 집단을 이루어 신라에 들어왔다고 볼 수 도 있다. 이러한 외래집단의 신라로의 유입은 신라사회에서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을 것 이다. 특히 외래집단은 탈해설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새로운 신기술을 갖고 있거 나 선진문화를 습득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토착세력인 6촌장 계 통보다는 외래집단과 토착집단의 연합세력인 왕실집단으로부터 환영받았던 것으 로 볼 수 있다. 왕실집단은 이들 세력을 흡수 융합함으로써 6촌장 세력에 비해 그 힘을 키워나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공이나 탈해가 왕실집단의 거주 지에 인접한 월성 지역을 차지했다는 기록이 그런 상황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금성의 건설을 통해 6촌장 거주지와의 공간적 분리를 분명히 한 왕실집단이 호공이나 탈해의 월성 거주를 허락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들 세력의 흡수 융합을 의미한다. 결국 금성 건설 이후부터 유리니사금 9년 (32) 이전까지 신라에서 벌어 진 사회 정치적 변동은 바로 외래집단의 흡수 융합을 통한 왕실집단의 성장과 강화이다 촌에서 6부로의 개편 지금까지 살펴본 왕실집단의 성장과 강화는 왕실집단과 6촌장집단 사이의 사 회 정치적 관계에 대해 새로운 재편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기존에도 왕실집단 이 6촌장집단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지만 6촌장집단의 독자성을 부정하 지는 못한 단계에 있었다. 물론 신라 건국 이후 6촌집단의 독자성에 대한 기록은 史 書 에 나타나고 있지 않다. 하지만 6촌장에 대한 설화가 후대에까지 전해졌다는 사실과 앞에서 살펴본 왕실집단의 공간적 분리가 쉽게 이루어지지는 못했다는 사 실을 통해 그러한 사실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왕실집단의 성장과 강화에 의한 새 로운 재편은 바로 이러한 6촌장 세력의 독자성을 부정하는 방향이었을 것이다. 그 러한 내용이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료 4-2) (유리니사금) 9년 (32) 봄에 6부의 이름을 고치고 姓 을 사여하였다. 양산부는 양부로 되었는데 성은 李 이다. 고허부는 사량부로 되었는데 성은 崔 이다. 대수부는 점량부[모량이라고도 한다]로 되었는데 성은 孫 이다. 手 珍 部 는 본피부로 되었는데 성은 鄭 이다. 가리부는 한기부로 되었는데 성은 裵 이다. 명 활부는 습비부로 되었는데 성은 靜 이다. 또 官 을 설치하였는데 17등이 있었다
106 1. 이별찬 2. 이척찬 3. 잡찬 4. 파진찬 5. 대아찬 6. 아찬 7. 일길찬 8. 사찬 9. 급별찬 10. 대내마 11. 내마 12. 대사 13. 소사 14. 길사 15. 대오 16. 소오 17. 조위... 4) 자료 4-3)... 劉 聖 公 更 始 元 年 쫓 未 (23) 에 즉위[연표에는 甲 申 에 즉위했다고 되어 있다]하였고, 6부의 호칭을 개정하였으며 6성을 하사했다... 5) 삼국사기 에는 유리니사금 9년 (32) 에 6촌 이름의 개명과 6부의 성씨 사여, 17등 관등제의 설치가 동시에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에 비해 삼국유사 에는 자료 3-1 과 위의 자료에서 보는 것과 같이 6부 이름의 개명과 6부의 성씨 사 여만이 나타나고 있다 r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탈해니사금 11 년 (67) 에 順 貞 을 제 1 관등에 해당하는 伊 代 滾 으로 삼아 政 事 를 맡기었다는 기록이 나온 이후 17등 관 등의 일부가 계속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 의 초기기록을 완전히 부정 하지 않는 한 최소한 유리니사금 9년 (32) 이 아니더라도 가까운 시기에 17등 관등 제의 일부가 설치되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유리니사금 9년 (32) 의 6 촌 개편과 관등제의 설치를 이 시기의 전반적인 변화를 상징하는 기록으로 보고 함께 다루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후대의 신라인들은 서로 관계가 없는 듯한 세 가지의 사항을 왜 동일한 연 도에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한 것일까? 우선 6촌 이름을 6부 이름으로 개명한 사실부터 알아보자. 여기서 개명되었다는 6부의 이름은 당시에 사용하던 것이 아니다.6세기초의 금석문에 나오는 6부의 이 름은 이 기록에 나오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6) 하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 기기록에 나오는 대부분의 용어틀이 후대에 사용되던 것을 소급해서 적용하고 있 기 때문에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기록의 내용 에서 중요한 것은 6촌의 이름 그 자체가 아니라 이름을 개명했다는 사실이다. 이 름을 바꾸는 것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미 이름 자체가 역사성 4) 九 年 春 改 六 部 之 名 仍 陽 姓 楊 山 部 馬 梁 部 姓 李 高 處 좀[5 寫 沙 梁 部 姓 崔 大 樹 部 寫 漸 梁 部 [ 一 p. 후 梁 ] 姓 孫 手 珍 部 寫 本 彼 部 姓 鄭 加 利 部 寫 漢 I 批 좀ß 姓 裵 明 活 部 寫 習 比 部 姓 薦 又 設 官 有 十 七 等 一 伊 {x 滾 二 伊 R 浪 드크 i띤 滾 四 波 珍 浪 五 大 阿 浪 六 阿 滾 七 一 吉 滾 八 沙 滾 九 級 tzt 食 十 大 奈 麻 十 一 奈 麻 十 二 大 舍 十 三 小 舍 十 四 吉 舍 十 五 大 烏 十 六 小 烏 十 七 造 位.. ( r 三 國 史 記 卷 第 一 新 羅 本 紀 第 一 유리니사금 9 년) 5)... 劉 聖 公 更 始 元 年 쫓 未 맴 位 [ 年 表 둡 甲 E껴펌 n 位 ] 改 正 六 部 號 仍 陽 六 姓... ( r 三 國 遺 事 卷 第 一 紀 異 第 一 쩔 禮 王 ) 6) 6세기초의 금석문에는 梁 部 가 像 퓨 li 로, 沙 梁 部 가 沙 緣 部 로, 習 比 部 가 斯 彼 部 로,* 梁 곰1) 또는 漸 梁 퓨[)가 켠 陽 部 로 표기되어 있다
107 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다. 그런 익 숙한 것을 바꾼다는 것은 큰 변화가 전제되지 않고는 일어나기 힘든 것이다. 이미 고려 태조 23 년 (94이에 6부의 이름을 개명한 것이 단순한 이름의 개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측면의 변화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유리니사금 9 년 (32) 6촌 이름의 개명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6촌 지역에 서 이 시기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변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부분에서 6부의 성씨 陽 與 기록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이 기록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신라에서의 姓 民 의 사용이 중고 ( ) 때에나 있었던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7) 하지만 姓 民 가 이 시대에 사용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 기록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다. 후대인들이 이러 한 성씨 사여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은 어떤 근거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과연 그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왕실집단의 성 인 박 석 김은 모두 시조설화 속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 다. 그렇다고 시조 시대에 이미 이런 성씨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성 씨가 기록된 시기 경으로부터 그러한 왕실집단이 다른 집단과 구별되기 시작하였 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되었으며 후대에 그러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각 성씨 의 기원으로 삼았다고 볼 수는 있다. 6부의 성씨 사여 기록도 이런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후대에 6두품의 주 요 성씨가 되는 6부의 성이 이 때부터 사용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 시기에 그 성씨를 사용하는 집단의 조상들이 다른 집단과 구별되기 시작했고, 그 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되었다고 볼 수는 있다 r 삼국유사 에는 6부 성씨의 조상 인 6촌장의 이름과 天 降 설화가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씨의 사여는 그 후인 유리니사금 9년 (32) 에 이루어졌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6촌장 집단의 구별이 유리니사금 9 년 (32) 이전에는 특별히 필요하지 않거나 큰 의미가 없다가 이 때부 터 중요하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6촌장 집단의 구별을 위한 어떤 조치가 이 때쯤 시행되었기 때문에 후대인들이 6부의 성씨 사여가 이 때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7) 예를 들어 전덕재는 신라에서 성씨의 사용이 아무리 빨라도 중고기 이상으로 소급 할 수 없으며, 6 部 姓 이 모두 발견되는 시기는 통일기로 보면서 유리니사금 9 년 (32) 의 기록과 아울러 6촌 설화에 대한 부정의 근거로 삼고 있다. (전덕재, 1996;11-12)
108 6촌장 집단의 구별을 위한 조치는 왕실집단의 성장과 강화에 의해 이루어진 것 이며, 그것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6촌장 집단의 독자성을 제한하는 방향이었을 것 이다. 그렇다면 6촌장의 독자성에 대한 제한과 6촌장 집단의 구별이 어떻게 연결 되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6촌장 집단의 거주지와 왕실집단의 거주지가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상 기할 필요가 있다. 거주지가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특별한 사회적 장치가 없어도 두 집단의 구별이 가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6촌장 집단의 독자성을 전제로 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6촌장 집단의 독자성을 제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거주지의 공간적 분리에 대한 새로운 조정이 필요하게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료 4-4) 婆 꽃 尼 師 今 이 즉위하니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다.[또는 유리의 동생 인 奈 老 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紀 는 김씨 史 省 夫 人 으로 許 童 算 文 王 의 딸이다.. 자료 4-5) 祝 摩 尼 師 今 이 즉위하니[간혹 祝 味 라고도 한다] 파사왕의 적자이고 모는 史 省 夫 人 이다. 紀 는 김씨인데 愛 禮 夫 人 으로 갈문왕 摩 帝 의 딸이다. 처음 에 파사왕이 檢 滾 의 澤 에서 사냥할 때 태자가 따라갔다. 사냥 후 韓 政 部 를 지 나가는데 이찬 許 童 가 그들을 잔치하여 대접하였고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허루 의 처가 문을 열자 소녀가 나와 춤을 추게 했다. 마제 이찬의 처도 역시 그 딸 을 데리고 나왔다. 태자가 마제의 딸을 보고 기뻐하였는데 허루는 기뻐하지 않 았다. 왕이 허루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곳의 지명은 大 웹인데 공이 여기서 盛 購 과 맛있는 술( 美 臨 )을 차려 잔치하여 즐기게 하니 마땅히 酒 多 에 자리를 놓아 이찬의 위에 있게 하고 마제의 딸은 태자와 짝하게 하라 고 했다. 酒 多 는 후에 角 千 이라고 이른다.9) 위의 기록에 의하면 파사니사금 (80-112) 때 한기부에 살았던 것으로 나오는 허 루와 마제는 그 딸들이 모두 김씨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들은 17등 관등 중 제 2위에 속하는 伊 浪 으로 기록될 정도로 높은 지위에 있었다 1이 그리고 허루의 딸은 8) 婆 홉 尼 師 今 立 偏 理 王 第 二 子 也 [ 或 ~t 需 理 弟 奈 老 之 子 也 ] 紀 金 民 史 省 夫 人 許 童 훌 文 王 之 女 也 ( r 三 國 史 記 卷 第 一 新 羅 本 紀 第 一 파사니사금 즉위조) 9) 祖 摩 尼 師 今 立 [ 或 祝 味 ] 婆 꽃 王 觸 子 母 史 省 夫 金.Ef; 愛 禮 夫 人 훌 文 王 摩 帝 之 女 也 初 婆 쏠 王 繼 於 輸 滾 之 澤 太 子 從 馬 繼 後 過 韓 l냥 部 伊 滾 許 童 響 之 酒 醒 許 盡 之 좋 出 門 少 女 子 出 舞 摩 帝 伊 滾 之 쫓 亦 引 出 其 女 太 子 見 而 뺑 之 許 盡 不 밤 王 謂 許 重 日 此 地 名 大 힘 公 於 此 置 盛 購 美 醒 以 홍짜 之 宜 位 酒 多 在 伊 浪 之 上 以 摩 帝 之 女 配 太 子 휠 酒 多 後 킬 角 千 ( r 三 國 史 記 卷 第 新 羅 本 紀 第 一 祝 摩 尼 師 今 즉위조)
109 제 5 대 파사니사금 (80-112) 의 왕비였으며, 마제의 딸은 제 6 대 지마니사금 ( ) 의 왕비가 되었고 허루는 관등 제 1 위에 해당하는 酒 多 (서불한 각간)에 오르기도 한다. (이병도, 1983;34) 이와 같은 사실들을 통해 볼 때 허루와 마제는 왕실집단의 일원이다.11) 이 기록을 통해 왕실집단이 한기부에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왕실집 단이 다른 部 에도 살았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기록이 었다. 자료 4-6) (파사니사금) 23년 (102) 가을 8월에 音 rr1것 國 과 意 直 갑 國 이 영토를 다투어 왕에게 이르러 재결을 청하였다. 왕이 그것을 어렵게 여겨 이르기를 금 관국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 하니 그를 불러 물어 봅시다 라고 하 였다. 수로가 의논하여 다투는 땅을 음즙별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 에 명하여 모여서 수로왕에게 잔치를 베풀도록 했다.5부는 모두 이찬을 훈로 삼았는데 오직 한기부만이 位 뿜 者 로서 그것을 주관하게 했다. 수로가 노하여 없 麻 下 里 에게 명하여 漢 祝 部 훈 保 齊 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폈는 音 rrtlt솟 階 짧B 千 의 집에 도망하여 의지하였는데 왕이 사람을 보내 그 如 를 수색하게 했 다. 타추가 보내지 않자 왕이 노하여 병사로써 음즙벌국을 치게 하자 그 主 와 무리들은 스스로 항복하였고 실직 압독 2 國 의 王 도 항복해 왔다 12) 10) 이 기록에 나오는 伊 滾 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이찬과 같 이 높은 지위에 있었던 자를 그렇게 기록한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정치중심구역이 아 닌 6부 지역에 있었던 자들은 이찬과 같은 관등을 칭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은 영일냉수리비 (503) 와 울진봉평비 (524) 에 이것 훼부(양부), 사훼부(사량부) 출신자가 관등을 칭했던 반면에 본피부 잠훼부(모량부) 사피부(습비부) 출신이 千 支 만을 칭했던 것을 통해 유추될 수 있다. 하지만 관등이 순서대로 적혀 있는 울빈봉평비 (524) 에 千 支 가 갈 문왕 다음, 태아간지 (5위) 앞에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그 지위가 결코 낮지 않았으며, 진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기록에 나오는 伊 滾 은 후대에 역사서를 편찬할 때 이찬과 같이 높은 지위에 있었던 자를 그렇게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11) 여기서의 허루와 마제를 부족의 우두머리로 상정하여 部 內 部 의 근거로 보는 경우도 있 다. (노태돈, 1975) 위의 견해에서는 고구려와 신라를 비슷한 입장에서 다루고 있다. 하 지만 과연 지금의 경주통합시 정도의 공간규모에서 이렇게 많은 부족들이 존재했을 지 는 의심스럽다. 초기 고구려의 영토가 어느 정도였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경상 도만큼의 규모는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호수 기록도 r 三 國 志 鍵 書 東 횟 傳 에는 진한 의 대국이 4-5천가였던 것에 비해 3만호로 나오고 있다. 이럴 경우 고구려의 部 는 자체 적으로 행정체계를 이루고 있어야 했을 것이며, 그 밑에 여러 세력이 존재했을 가능성 도 있다. 하지만 신라의 6부는 모두 합해야 지금의 경주통합시 정도 밖에 안 된다. 호수 규모도 잘 해야 모두 합해 4-5천가에 불과하다. 당시의 고구려 영토나 인구와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예를 신라의 6부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 다고 생각된다. 12) 二 十 三 年 秋 八 月 音 tttt 國 與 意 直 삼 國 爭 훌훌 듭릅 王 請 決 王 難 之 謂 金 官 國 首 露 王 年 老 多 智 識 검 問 之 首 露 立 議 以 所 爭 之 地 屬 音 tttt 國 漢 祝 部 以 位 뽑 者 主 之 首 露 恐 命 ~~t 下 里 於 是 王 命 六 部 會 響 首 露 王 五 部 皆 以 伊 滾 馬 主 唯 殺 漢 祝 部 主 保 齊 而 歸 폈 逃 依 音 tt{j(: 主 I 泡 짧ß 千 家 王 使 人 索 其 폈 施 都 不 送 王 찜 以 兵 {j(: 音 n{j(: 國 其 主 與 樂 自 降 意 直 裡 督 國 王 來 降 ( r 츠 國 史
110 위의 기록에 의하면 17등 관등의 제 2위에 해당하는 伊 浪 이 한기부를 제외한 5 부에도 있었다. 이렇게 伊 浪 으로 기록된 인물들은 허루와 마제의 경우를 참조하거 나, 후대 관등제의 입장에서 보거나 당연히 왕실집단의 일원이다 13) 따라서 6부 모두 왕실집단이 최고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왕실집단과 6촌장 집단 사이에 있었던 거주지의 공간적 분리가 이 시기에 무너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외래집단의 합류로 인해 성장 강화된 왕실집단은 6촌장 집단 의 독자성을 제한하기 위해 6촌 중심지로의 이동을 시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왕실집단은 6촌 중심지에서조차 최고지배층으로 군림하게 되 었으며, 6촌장 집단은 이제 2급 지배층으로 격하되었다. 그런데 이럴 경우 거주지의 공간적 분리를 통해 사회 정치적 차이를 표시하던 기존의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다. 이미 왕실집단과 6촌장 집단이 섞여 살 게 되었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새로운 구별 체계를 만들어 내야만 하는 것이다.6 부의 성씨 사여는 바로 이러한 구별 체계의 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 다. 유리니사금 9년 (32) 경에 후대의 성씨와 같은 것을 6촌장집단에게 부여함으로 써 왕실집단과의 구별을 확실하게 하려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가 취해진 이후 6 촌장 집단의 독자성은 완전히 부정되었다고 생각되며 이제 6촌 중심지에서조차도 왕실집단이 최고의 지배층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6부의 성씨 사여는 후대의 골품제와 같은 신분제의 출현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왕실집단과 6촌장집단의 신분적 분리는 후대 골품제의 가장 큰 특징인 골 -두품의 구별과 거의 같은 현상이기 때문이다 부의 행정구역화 유리니사금 9 년 (32) 의 6촌 개편을 통해 신라 건국 이후 존재하던 6촌장 집단과 왕실집단 사이의 정치 연합적 성격은 거의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6촌장 집단은 6촌 중심지에서조차 왕실집단보다 하위의 지배계급으로 존재하게 되었으 記 卷 第 一 新 羅 本 紀 第 一 파사니사금 23 년) 13) 이들을 6촌장의 후손들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종욱, 신라상대의 왕경육부Ir역 사학보 제 161 집, 1999) 하지만 6촌장의 후손들은 박 석 김의 성씨를 사용할 수 없었고, 기본적으로 6두품 밖에 될 수가 없었다. 이 기록에 나오는 허루와 마제는 김씨 계열로 나오고 있으며, 이찬은 후대의 관등제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6두품이 오를 수 없는 위치이다. 따라서 이들을 6촌장의 후손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그록 그 대로 왕실집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111 며, 더 이상 독자적인 기반을 가질 수도 없게 되었다. 이것은 그 이전에 존재하던 왕실집단과 6촌장집단의 공간적 분리가 해소되었음을 의미하며 6부 전체가 왕실 집단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6부 전체를 하 나의 정치적 체계로서 재편할 필요성을 발생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 는 것이 바로 유리니사금 9년 (32) 17등 관둥제의 설치에 관한 기록이다. 물론 이 때 17등 관등제가 모두 설치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다. 또한 이 기록에 나오는 관 등의 명칭 역시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후대의 용어를 그대로 썼다. 그렇다고 하더 라도 후대의 사실이 부회 소급되어 기록된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후대의 역 사가들이 이 시기에 이런 기록을 남긴 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후대의 관등제는 구체적인 운영과정에서 개인이 속한 사회적 신분의 제한을 받 았다. 따라서 신라에서 관등제와 신분제는 상호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운영되었으 며, 사회를 움직이던 양대 축으로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이러한 사회 운영의 원리는 가야-백제-고구려를 차례대로 정복하는 큰 정치적 사회적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반대로 그 형성시기가 오래되었으며 두 가지가 순차적으로 형성되었다기보다는 거의 동 시에 발생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준다. 이미 6부의 성씨 사여 기록을 통해 후대의 골품제와 같은 신분제가 신라 초기에 출현했음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왕실집단의 수적 증가와 6부 중심지로까지 확대된 통치기능의 확대는 지 배층 사이의 위계질서를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성을 제기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필요성을 만족시키는 것은 후대의 관등제이다. 따라서 후대 관등제의 모체가 이 시기에 실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유리니사금 9 년 (32) 의 관등제 설치 기록은 바 로 그러한 역사적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6부의 성씨 사여와 관등제의 설치는 사회적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6부 전체가 일원화된 지 배질서에 의해 재편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원화된 지배질서의 성립이 이전부터 있어 오던 6촌의 내부 구 조까지 파괴할 수는 없었다.6촌의 개혁이 새로운 지역구분의 창출로 이어지지 못 하고 이름을 개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그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 여주고 있다. 이것은 역으로 6촌의 역사적 뿌리가 상당히 깊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도 하다. 이 점에서 주목되는 것은 자료 4-6에 등장하는 漢 祝 部 主 保 齊 라는 용어 이다. 이 용어를 통해 6부에는 모두 部 主 가 있었으며, 이들이 6부 각각을 다스리
112 표 -8 유리니사금 9 년 (32) 전후의 사회 정치적 변화 B.C.37 사회 정치적 변화 A.D.32 6촌 왕실집단 금성의 건설 6촌장집단 중심지 6촌장 집단의 독자성 6촌장집단 6촌장 집 지배층 약화 시도 왕실집단 거주지 정치중 단과 왕실집 호공 및 탈해 등 외 심구역 단의 공간적 의 6촌 지역으로의 이 왕실집단 왕실집단 래집단의 합류 동 6촌 이름의 개명 6촌장집단 분리 왕실집단의 강화 신분의 구분 정치적 서열체계 왕실집단과 6촌장집단 의 거주지 혼재로 새로 성씨와 거주지 운 신분 구분체계의 필 같은 체계 요성 대두 왕실집단의 수적 증가, 거주지의 공간적 확산,? 일원적 신분제로 개인 관등제와 같은 체계 의 정치적 서열 체계 필요 던 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들이 기존의 6촌 구조를 파괴하지 않고, 6촌장 들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 행정적 지위를 대신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왕 으로부터 수시로 임명 교체되는 지방관이라기보다는 6촌장과 같이 6부 내부의 통치에 대해서는 일정한 독자성을 보장받은 존재였다. 다만 이들은 최소한 伊 滾 과 같거나 그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였을 것이기 때문에 왕실집단의 일원이며, 이 점이 바로 기존의 6촌장과 다른 측면이다. 하지만 자료 4-6에서 보듯 이들은 왕의 명령을 받는 위치에 있었던 자들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유리니사금 9 년 (32) 의 6촌 개편 기록은 단순히 왕과 6촌장 집단과의 정치 적 관계의 변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시기의 6촌 개편은 왕실집단의 성장 강화를 통해 6촌장 집단과 왕실집단 사이에 존재하던 지리적 사회적 이중 구조를 단일 구조로 변모시킨 급진적인 변화이다. 금성을 중심으로 한 정치중심구 역을 비롯하여 6촌 중심지에도 왕실집단이 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6부 전 지역 에서 6촌장 집단을 2급 지배계층으로 떨어뜨렸다. 이러한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6 부 성씨와 같은 사회적 조치를 통해 신분 사이의 위계를 분명히 하였으며, 관등제 와 같은 정치적 조치를 통해 지배층 사이의 위계질서를 확립할 수 있게 하였다. 이제 6부는 공동운명체적 단위지역으로 변모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113 기존에 존재하던 6촌의 독자성이 상당히 부정된 신라 내의 행정구역으로 변모했 다는 것을 알려준다. 제 2 절 왕경의 형성과 공간적 규모 2-1 6부의 특권지역화와 왕경으로의 변화 삼국사기 와 r 삼국유사 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신라는 유리니사금 19 년 (42) 에 지금의 청도군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伊 西 國 에 대한 정복을 시작으로, 첨해니사금 ( ) 시기에 지금의 상주인 사별국을 정복함으로써 진한지역으로 의 대외팽창을 마무리짓는다. 그리고 유례니사금 14년 (297) 伊 西 古 國 의 金 城 침입 기록 이후 진한 지역의 소국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신라가 3 세 기 후반 경에 진한지역에 대한 정복을 완성했다는 이와 같은 사실은 중국의 기록 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r 쯤 書 東 헛 列 傳 辰 韓 조에는 년에 (이 지역의) 王 이 사신을 보내 조공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4) 왕이 며쯤에 조공 사절을 보낼 정도였다면 진한지역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통합성을 유지하고 있었 던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15)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통합의 중심이 신라였을 것이 기 때문에 이 때의 왕은 신라의 왕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기록들을 종합 해 때 3세기 말경에는 신라가 진한지역을 모두 정복했다고 볼 수 있다. 표 -9를 보면 신라의 진한지역에 대한 정복은 경주 주변의 소국을 정복하는 A.D. 100년을 전후한 1차 팽창기와 낙동강 중상류 지역의 소국을 정복하는 A.D. 200 년 전후의 2차 팽창기로 나누어지고 있다. 그리고 1 차 팽창기에는 실직국(1 04) 과 압독국(1 46) 의 반란이 있었으며 2차 팽창기 이후에는 사량별국 ( )의 이 탈, 이서고국 (297) 의 반란 기록이 나온다. 또한 같은 지역으로 보이는 우시산국 14) 武 帝 太 康 元 年 其 王 遺 使 敵 方 物 = 年 復 來 朝 責 七 年 又 來 15) 폼에 조공사절을 보냈다는 것이 신라가 진한지역을 완전히 통합했다는 사실을 암시하 는 것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통합한 시기는 그 이전일 수도 있다. 이 부분에서 참조되는 것이 r 三 國 志 鍵 書 東 훗 傳 井 辰 傳 에 (진한) 12국은 辰 王 에게 속해 있다( 其 十 二 國 屬 辰 王 ) 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변한) 사실이다. 이 12국에도 역시 왕이 있다( 十 二 國 亦 有 王 ) 라고 표현된 두 기록을 대조해 보면 변한에는 각 國 마다 왕이 있었던 반면에 진한에는 그렇지 못했으며 왕이라는 호칭은 辰 王 만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종욱, 1982;243) 그렇다면 신라가 진한지역을 완전 정복한 시기는 三 國 志 의 대상 시 기였던 중국의 삼국시대 ( ) 라고 볼 수 있게 된다
114 (57-80) 과 굴아화촌 (80-112) 음즙벌국 (102) 과 음질국 ( ) 등의 항복 또는 정 복 연대가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서로 다르게 나오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신라의 대외팽창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서 고국 (297) 이 금성을 공격하였던 경우가 그러한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자료 4-7) (유례니사금 14년 (297) ) 伊 西 古 國 이 금성을 공격해 왔는데 우리가 크게 병사를 일으켜 방어했으나 물리칠 수 없었다. 갑자기 이상한 병사가 왔는 데 그 수는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竹 葉 을 꽂고 아군과 더불어 함께 적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후에 그 돌아간 곳을 몰랐다. 사람들이 혹 竹 長 陸 에 竹 葉 수만개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로부터 國 人 들이 선왕 이 陰 兵 으로써 싸움을 도왔다고 했다 16) 자료 4-8) 제 14 대 유리왕 때 伊 西 國 人 이 금성을 공격하였는데 우리가 크게 일 으켜 방어를 했으나 오랫동안 대항할 수 없었다. 갑자기 이상한 병사가 와서 도와주었는데 모두 竹 葉 을 꽂고 있었고, 아군과 더불어 힘써 적을 공격하여 격 파했다. 군이 퇴각한 후 간 곳을 몰랐는데 단지 미추릉 앞에 쌓여 있는 죽엽만 이 보였다. 이에 선왕이 음덕으로 도와주어 공이 있음을 알고 인하여 竹 現 陸 이 라고 불렀다 17) 이서국은 삼국유사 에 의하면 유리니사금 19 년 (42) 에 이미 신라에 의해 멸망 당했다. 그런데 위의 두 기록에 의하면 이미 멸망했던 나라가 297년에 신라의 왕 성인 금성을 공격하고 있으며 신라의 군사적 힘만으로는 물리치기 어려울 정도의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힘든 싸움이었기에 전왕 미추니사금의 힘을 벌어 물리쳤다는 전설이 후대에까지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기록을 통해 정복된 소국 지역이 반발할 경우 그 힘이 의외로 클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따라서 신라가 정복된 소국의 최고지배층을 쉽사리 제거하지는 못했으며, 그 러한 과정 속에서 끊임없는 긴장과 전쟁 전투가 이어졌을 것이다. 16) 伊 西 古 國 來 攻 金 城 我 大 學 兵 防 響 不 能 擺 忽 有 異 兵 來 其 數 不 可 勝 紀 人 皆 理 竹 葉 與 我 軍 同 擊 戰 破 之 後 不 知 其 所 歸 人 或 見 竹 葉 數 萬 積 於 竹 長 陸 由 是 國 人 謂 先 王 以 陰 兵 助 戰 也 ( r 三 國 史 記 卷 第 二 新 羅 本 紀 第 二 유례니사금 14 년) 17) 第 十 四 偏 理 王 代 伊 西 國 人 來 攻 金 城 我 大 驚 防 藥 久 不 能 抗 忽 有 異 兵 來 助 皆 타 竹 葉 與 我 軍 뾰 力 擊 戰 破 之 軍 退 後 不 知 所 歸 但 見 竹 葉 積 於 味 鄭 婆 前 乃 知 先 王 陰 嘴 有 功 因 呼 竹 現 陸 ( r 三 國 遺 事 卷 第 一 紀 異 第 一 未 鄭 王 竹 葉 軍 )
115 표 -9 니사금기 (27-356) 신라의 진한지역 정복 기록 1 차 팽창기 2차 팽창기 왕력 서기 구분 대상 유리 져 보 -, 이서국 탈해 ;져 효 흐 우시산국 탈해 처 보 거칠산국 파사 ;져 효 -1I 동 L 효 -1 음즙별국 파사 항복 실직국 파사 항복 압독국 파사 반란진압 실직국 파사 Aà 효 1. 비지국 파사 저 보 -, 다별국 파사 Aà 효 -1I 초팔국 파사 저 보 ~? 굴아화촌 지마 저 보 -, 압량소국 지마 져 보 -, 音 質 國 裡 梁 國 일성 반란진압 압독국 별휴 정복 소문국 조분 Aà 효 초 감문국 조분 항복 골별국 첨해 저 보 ~? 사별국 첨해 이탈진압 사량별국 유례 반란진압 이서고국??? 고령가야국 지리 는 왕력만 표시되어 있고 연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 현 위치 청도? 동래 안강 삼척 경산 삼척??? 울산 경산 안강 양산 경산 의성 김천 영천 상주 ^JT 청도 상주 함창 출천 유사(기이) 열전(거도) 열전(거도) 본기 지리 본기 지리 본기 본기 본기 본기 본기 지리 지리 유사(왕력) 본기 본기 지리(?) 본기 지리(?) 본기 지리 지리 열전(석우로) 본기 지리(?) 지리(?) 는 광력도 연도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 정복? 는 확실하지 않지만 심증이 가는 것. 출전에서 유사라 쓰인 것은 r 츠 國 遺 事 이고 나머지는 모두 r 삼국사기 신라는 진한지역으로의 이러한 정복과 반란진압과정뿐만 아니라 외부세력과의 사이에서도 끊임없는 전쟁과 전투를 지속하였다 r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탈해니사금 (57-80) 시기부터 백제 가야, 왜와의 전투가 시작된다. 그리고 파사니 사금 (80-112) 시기와 지마니사금( ) 초기에는 가야와의 대규모적인 전쟁을 벌인다. 이러한 외부세력과의 전투나 전쟁 양상은 신라의 대외팽창 기록과 거의 같은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116 표 -10 r 삼국사기 에 나오는 2세기 전후의 가야 및 3세기 전후의 백제와의 전투기록 왕력 서기 구분 대상 전투 위치 내용 탈해 전투 가야 黃 山 律 口 아찬 吉 門 이 승리. 1 천여명 죽임. 파사 8 87 침입대비 加 집 馬 頭 2성을 쌓음. 파사 침입격퇴 가야 馬 頭 城 성 포위. 아찬 吉 元 이 기병 1 천 동원. 96 파사 17 침입격퇴 가야 남계 加 城 主 長 世 사망. 왕이 친히 5천 동원하 여 물리침. 파사 침공보류 가야 가야 침공 논의. 사신을 보내와 그만둠 파사 침공 가야 馬 頭 城 主 에 명하여 가야 침. 가야가 먼저 침입. 왕이 보기병 동원하여 지마 침입침공 가야 黃 山 河 황산하를 건너 침공. 패배. 지마 침공실패 가야 왕이 정병 1 만 동원. 실패. 아찬 吉 宣 이 모반하다 백제로 도망. 백제 아달라 침공실패 백제 공격. 군량 다해 돌아 옮. 아달라 침입 백제 나라서쪽 國 며 2성 함락됨. 民 口 1 천 포로됨. 아달라 침공 백제 漢 水 일길찬 興 宣 2 만. 왕 8천 동원. 백제가 포로 돌려주어 돌아옴. 아달라 침입 백제 변경 노략 벌휴 침입 백제 母 山 城 파진찬 1ft 道 에 게 막게 함. 별휴 전투승리 백제 狗 樓 5백여명을 죽임.. 벌휴 침입패배 백제 圓 山 獅 告 부곡성 포위. 구도가 5 백명으로 추적. 와 김 城 睡 山 산에서 패배. 그 책임으로 강등 내해 침입 백제 국경 내해 國 西 의 백제가 성주 韓 夫 를 죽임. 이벌찬 利 音 이 침입격퇴 백제 要 車 城 정병 6천으로 沙 l뼈 城 을 깨뜨림. 내해 침입격퇴 백제 獲 山 城 왕이 친히 물리침. 내해 침입패배 백제 熊 유 牛 頭 州 침입 이별찬 忠 萱 이 熊 유 패배. 이별찬 連 珍 이 1 천여명 살획. 봉산성 축 내해 전투승리 백제 峰 LlJT 첨해 침입패배 백제 塊 유 西 일별찬 翊 宗 이 전사. 첨해 침공실패 백제 峰 山 城 첨해 비우호관계 백제 사신을 보내와 화를 청했으나 거절. 미추 침입격퇴 백제 峰 山 城 城 主 直 宣 이 200 명을 거느리고 물리침. 미추 침입 백제 변경 미추 침입 백제 塊 삼 城 파진찬 正 源 에 게 막게 함. 미추 침입 백제 塊 유 城 일길찬 良 質 에게 막게 함. 유례 우호관계 백제 사신을 보내 화를 청함 흘해 우호관계 백제 사신을 보내 體 禮. s.ζ-. 특히 파사니사금과 지마니사금 시기에는 진한 지역에 대한 신라의 대외팽창이 가장 강하게 실시되던 시기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가야와의 대규모적인 전쟁은
117 이 시기에 진 변한 지역에서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알려준다고 생각된다. 즉 진 변한 소국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발생하였으며, 그러한 경쟁 과정에서 두각을 나 타낸 신라와 금관가야로 추정되는 가야가 큰 세력다툼을 벌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전쟁은 남쪽으로 세력을 뻗치던 신라와 그것을 저지하던 가야 세력이 낙 동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이후 가야와의 대규모 전쟁 기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이 전쟁은 서 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선에서 마무리된 듯하다. 또 별휴 내해 조분 첨해니사금 시기( )를 전후하여 백제와의 전투가 격화된다. 이 역시 별휴니사금 2 년(1 85) 소문국을 시작으로 감문국 (23 1), 골별국 (236), 사량벌국 ( ) 등을 차례로 병합하는 신라의 대외팽창 과정과 같은 경 향을 보여주고 있다 r 삼국사기 지리조 석우로전을 보면 사량별국은 신라와 백 제 사이에서 두 세력을 견제하면서 생존을 모색하다가 신라에 병합된다. 이렇게 본다면 200년을 전후하여 진한지역 내에서 다시 한번의 큰 변화가 있었으며, 그러 한 변화의 와중에서 신라와 백제가 공방전을 벌인 것이다.3세기말과 4세기초에는 두 나라 사이의 전투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소백산맥 부근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마무리된 듯하다. 가야와 백제 이외에도 왜, 고구려, 말 갈 등이 신라의 전투 상대로 등장하나 큰 전쟁을 치르지는 않았다. 제 1 절에서 살펴볼 것처럼 유리니사금 9년 (32) 을 전후하여 신라의 핵심지역인 6 부가 하나의 공동운명체적 지역단위로서 행정구역화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이 신라에서만 일어났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진 변한 지역의 다른 곳에서 도 비슷하게 발생했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가 정복한 진한 소국 지역에서도 기원 을 전후하여 내부적인 통합성이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신라에 의해 정복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직국과 압독국처럼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반란은 신라에 의해 진압된 것 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신라는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강한 통합성을 갖고 있었던 정복된 소국 지역을 어떻게 통제해 나갔을까? 신라는 정복한 지역 중 통합성이 아주 낮았거나 반란을 꾀하거나 한 일부지역 을 제외하면 정복된 소국의 지배층으로 하여금 계속 위임통치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신라왕(니사금)에게 복종하는 대신 관할 구역에 대한 통치권을 인 정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사용하던 소국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을 것 이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진한 변진조에 진한지역에 12국이
118 있었음이 기록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책에 (진한) 12국이 辰 王 에 게 속해 있다. ( 其 十 二 國 屬 辰 王 ) 고 되어 있는 기록이 나오며 변한 소국에 대해서 는 (변한) 12국에도 왕이 있다( 十 二 國 亦 有 王 ) 고 표현되어 있다. 변한 12국에는 왕 이 있음을 표시하여 상호간의 독자성을 강조한 것과 달리 진한 12국에는 각각 왕 이 있다는 표현이 없고 辰 王 에게 속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진 한의 12국이 완전한 독립 소국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진왕을 신라(사 로국)의 왕으로 본다면 진한 12국의 통치자들은 최소한 신라의 왕보다는 낮은 위 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따라서 최소한 1-3세기 동안에는 정복된 소국의 지 배층에게 관할 구역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줌으로써 내부 반발을 무마시키려고 했 던 것으로 볼 수 있다.1 8 )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신라는 1 세기 중반부터 3세기말까지 진행된 대외팽창의 과정 속에서 정복된 지역에 대해 위임통치에 의한 간접통치를 시행하였다. 이러한 간접통치는 정복된 지역이 신라의 정치적인 영향권 하에 들어왔지만 내부적으로 는 독자적인 사회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각 지역들 사이 의 구분 의식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으며 신라의 핵심지역인 6부 역시 마 찬가지였다. 하지만 신라의 대외팽창 과정에서 6부는 정치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위임 통치 지역은 신라의 감시와 통제를 받는 상태에서의 독 자성을 보장받고 있었을 뿐이다. 그에 따라 신라 전체적으로는 6부-비 6부의 대립 적 구도가 나타나게 되었으며 6부는 비 6부 지역에 대해 특권적인 지역으로 변모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6부의 특권적 지역성은 정복된 소국의 반란과 이탈 과정 속에서 강화 되고 공고화되었다. 일부지역에서의 반란과 이탈 시도에 대한 기록을 통해 정복된 지역에서의 옛 소국 상태로의 복귀 의식과 반신라적인 감정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18) 간접통치 속에서 지방 최고지배층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시대의 其 人 制 와 같은 인 질제도가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IJ 삼국유사 에 나라의 제도에 매번 지방에 있는 州 의 獅 更 1 인을 京 中 의 여러 관청에 올라와 복무하게 했는데 지금의 其 人 制 이다. ( 國 之 制 每 以 外 州 之 更 一 人 上 守 京 中 諸 費 注 今 之 其 人 也 )"라는 기록을 통해 이 러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 IJ 드 國 遺 事 卷 第 二 紀 異 第 二 文 虎 ( 武 ) 王 法 敏 ) 이 기록은 문무왕 ( ) 때의 사건을 바탕으로 작성되었고, 무주가 설치된 시기이 므로 670년대에 있었던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중앙집권제가 강화되어 縣 단위에까지 지방관이 파견되었기 때문에 지방 향리층에 대한 견제책으로서의 인질제도는 의미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구 시대의 잔재가 남아 있었던 것 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논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가능 성 정도로만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119 알 수 있다. 신라는 파사니사금 25년 (104) 에 일어난 意 直 國 의 반란과 일성니사금 13 년 (146) 에 일어난 압독국의 반란을 진압한 후 남은 무리들을 원래의 근거지로부 터 다른 지역으로 옮겨 버린다.1 9 ) 이러한 반란에 대한 진압과 처리의 과정을 통해 볼 때 그 반란이 상당히 강했으며 그것에 대한 군사적 진압 역시 철저하게 이루 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신라의 핵심지역인 6부 출신자와 비 6부 출신자를 동등하게 대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은 반란과 이탈을 직접적으로 시도한 지역에만 해당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복된 소국 지역 의 상당 부분에서 잠재적인 반란과 이탈 의식이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세기 중반에서 3세기말까지 계속된 대내외적 전쟁과 전투 역시 6부의 특권적 지역성을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전쟁과 전투에는 6부인으 로 구성된 군대만이 동원된 것이 아니라 정복된 소국 지역 출신자의 군대 역시 동원되었다. 하지만 반란과 이탈 시도가 직접적으로 일어났거나 아니면 잠재된 상 태에 있었던 정복된 소국 지역의 군대를 핵심 전력으로 동원할 수는 없었을 것이 다. 따라서 끊임없이 지속된 전쟁과 전투에서 6부의 군대는 다른 군대에 비해 더 정예화되고 특권화된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6부라는 지역 자체가 비 6부 지역에 비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특권화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 요인들이 겹치면서 6부-비 6부의 대립적 구도는 특권-비특권의 공간적 차별 구도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6부의 특권지역으로의 변모 과정은 왕경이 형성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1-3세기에 정복된 소국 지역은 이 미 신라의 정치적 영향권 아래에 들어와 있었고 신라왕의 통제와 감시 하에 관할 권 내부의 통치권을 인정받은 것이기 때문에 독립국가로서의 성격은 상실했다. 물 론 과거의 독립국가로 회귀하려는 성향이 잠재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대와 같은 완전한 의미의 지방이 되었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독립 을 쟁취한 소국이 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통해 볼 때 아직 불완전한 상태이기 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신라의 지방으로 변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방 에 대비되는 왕경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왕경의 형성이 6부-비 6부의 대립적 구도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6부 전체가 하나의 왕경으로 변모 19) = 十 五 年... 秋 七 月 意 直 級 發 兵 討 平 之 徒 其 餘 짧 於 南 圖 ( r 三 國 史 記 卷 第 一 新 羅 本 紀 第 파사니사금 25 년) 十 三 年 쪽 十 月 뼈 督 級 發 兵 討 平 之 徒 其 餘 짧 於 南 地 r 三 國 史 記 卷 第 新 羅 本 紀 第 i 일성니사금 13 년)
120 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라 왕경의 공간적 범위가 과거 6촌의 그것과 같게 되었 으며, 지방에 비해 특권적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2-2 왕경의 특권적 지역성 강화 첨해니사금 ( ) 시기에 신라는 진한지역의 소국에 대한 정복을 완성했다. 그리고 유례니사금 14년 (297) 에 이서고국의 금성침입에 대한 기록을 끝으로 더 이 상의 반란 기록도 나오지 않는다. 이와 같은 상황을 통해 볼 때 3세기말과 4세기 초를 거치면서 1 세기 중반에서 3세기 중반까지 존재하던 불완전한 대내관계가 거 의 사라지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신라는 대내관계에 대한 새로 운 정립 필요성을 인식했을 것이며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이점에서 주목되는 것이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나오는 다음과 같 은 기록이다. 자료 4-9) (기림니사금) 10년 (307) 국호를 신라로 회복하였다.2이 자료 4-10) T째년 (307) 에 국호를 정해 신라라고 했다. 新 이라는 것은 德 業 이 날로 새롭고 羅 라는 것은 四 方 의 백성을 網 羅 한다는 뜻이다. 혹자는 지 증 법흥왕 때에 관계된 일이라고도 한다.20 삼국사기 에는 국호를 다시 신라로 하였다고 되어 있고 삼국유사 에는 국호를 신라로 정했다고 나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 에 신라를 국호로 삼았다는 기록은 기림니사금 10년 (307) 에 처음으로 나온다. 따 라서 기록상으로 보았을 때 신라라는 국호는 이 때에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따라서 두 사서의 기록이 다르다고 볼 수는 없다. 삼국유사 에 지증 법흥왕 때의 일인지도 모른다고 나오는 기록도 삼국사 기 와 크게 다르지 않다 r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4 년 (503) 조에는 다음 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자료 4-1 1) (지증마립간) 4년 (503) 겨울 12월에 군신들이 다음과 같이 (왕에 20) 十 年 復 國 號 新 羅 ( r 三 國 史 記 卷 第 二 新 羅 本 紀 第 그 기림니사금 10년) 21) T째 年 定 國 號 R 新 羅 新 者 德 業 日 新 羅 者 網 羅 四 方 之 民 킬 或 系 智 證 法 興 之 世 ( r 三 國 遺 事 卷 第 一 王 層 第 4 15 대 기림니사금)
121 게) 아뢰었다. 시조가 창업한 이래 國 名 이 하나로 정해지지 않아 斯 羅 라 칭하 기도 하고, 斯 盧 라 칭하기도 하며, 新 羅 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면들이 생각하건 데 新 이라는 것은 德 業 이 날로 새롭다는 뜻이고, 羅 라는 것은 四 方 을 網 羅 한 다는 뜻인즉 (신라를) 국호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22) 위의 기록에 의하면 지증마립간 4 년 (503) 에 신라라는 국호가 확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기림니사금 10년 (307) 의 기록을 잘못된 기록이라고 보아야 하 는가? 그렇지는 않다. 지증마립간과 법흥왕 때는 뒤에서 다시 살펴볼 것이지만 신 라의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서 거의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러한 혁명적인 변화 중의 하나가 바로 신라라는 국호의 확정이라고 볼 수 있고, 반대로 신라라는 국호의 확정이 정치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획기적인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림니사금 10 년 (307) 의 신라 국호의 사용 기록도 이 시기에 있었던 큰 변화를 상징하는 기록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 가 바로 1 세기 중반으로부터 3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 동안 존재했던 불완전한 대내관계의 청산이라고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신라라는 국호 의 사용이 불완전한 대내관계의 청산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증마립간 4년 (503) 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 시기까지 斯 羅 斯 盧 新 羅 라는 세 개의 국호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낌) 斯 盧 라는 이름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진한 변진조에 24개의 소국 중 하나로 나오고 었다. 따라서 최소한 3세기에도 사 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斯 羅 라는 이름은 영일냉수리비 (503) 의 첫머리에 나 온다. 新 羅 라는 이름은 광개토대왕비 (414) 와 중원고구려비 (5세기 중반 전후)에 나 오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5세기 이후에는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울진봉평비 (524) 에도 新 羅 라는 이름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지증마립간 4 년 (503) 의 신라 국 호 확정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5세기까지 이렇게 몇 개의 국호가 사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기림니사금 10 년 (307) 기록이 의미하는 변화의 내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5세기까지 신라는 대내적, 대외적인 측면에서 서로 다른 22) 四 年 쪽 十 月 훌텀i 上 듬 始 祖 創 業 已 來 國 名 未 定 或 稱 斯 羅 或 稱 斯 盧 或 듬 新 羅 þ! 等 以 寫 新 者 德 業 日 新 羅 者 網 羅 四 方 之 義 則 其 寫 國 號 宜 옷... ( u"츠 國 史 記 卷 第 四 新 羅 本 紀 第 四 지 증마립간 4 년) 23) 이 세 개의 국호 이외에도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는 徐 那 代 徐 羅 代 徐 {x. 鍵 林 등도 나온다
122 국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한 연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보돈, 1994) 영일냉수리비 (503) 에는 斯 羅 I 像 斯 夫 智 王 乃 智 王 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24) 반 면에 울진봉평비에는 新 羅 六 部 췄짧 牛 라는 표현이 나온다, 25) 두 비문 모두 지방에 서 벌어진 일을 왕과 6부내 최고위층 귀족의 집단적인 토의과정을 통해 처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6) 따라서 斯 羅 와 新 羅 六 部 는 모두 신라 영토 내의 다른 지역과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된 용어로서 斯 羅 = 新 羅 六 部 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다. 그 런데 新 羅 六 部 는 신라라는 국호가 유일하게 사용된 이후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新 羅 의 6 部 라는 뜻이다. 그리고 斯 羅 는 특별한 수식어 없이 신라 내의 다른 지역 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6부를 지칭하고 있음을 알 24) 영일 냉수리비의 해석문은 다음과 같다. 斯 羅 의 陽 斯 夫 智 王 과 乃 智 王 두 왕이 敎 示 를 내려 珍 而 麻 村 의 節 居 利 로써 증거 를 삼아 그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쫓 未 年 9월 25 일, 沙 隊 의 至 都 盧 훌 文 王, 斯 德 智 阿 千 支, 子 宿 智 居 代 千 支 와 陽 의 수 夫 智 졸 千 支, 只 心 智 居 ft 千 支 와 本 彼 의 頭 願 智 千 支 와 斯 彼 의 幕 斯 智 千 支 이 7 王 들이 함께 의논하여( 共 論 ) 교시 하였으니, 前 世 의 두 王 의 교시로써 증거를 삼아 財 物 을 모두 절거리로 하여금 얻 게 하라고 하셨다. 또 敎 示 하셨으니 節 居 利 가 만약 먼저 죽으면 그 집 하여금 그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다시 교시하셨으니 末 都 와 斯 申 支 이 람은 뒤에 다시는 이 아이 斯 없로 두 사 재물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만약 다시 말썽을 일으 키면 重 罪 를 준다고 교시하셨다. 典 事 人 은 沙 緣 의 졸 夫 智 奈 麻, 到 盧 짧, 須 감L 休 와 緣 의 ~t 須 道 使 心 뿔 公 과 緣 의 沙 夫 那 斯 利 沙 隊 의 蘇 那 支 이다. 이 7 人 이 삼가 사 흰바 일이 완결되어 소를 잡고 널리 고하였기에 이에 기록한다. 村 主 멋 支 千 支 와 須 支 졸 今 智 이 두 사람이 그 해에 일을 마쳤으므로 이에 기록한다," (한국고대사회 연구소 편 IF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제 2 권(신라 1. 가야 편). 1992:7 에서 전재) 25) 울진 봉평 비 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甲 辰 年 正 月 十 五 日 隊 部 후맴 智 媒 鎬 王 沙 隊 部 徒 夫 智 算 文 王 本 波 部 口 夫 智 / 千 支 확 爆 部 口 H타 智 下 支 沙 陽 音 1) 而 口 智 太 阿 千 支 吉 先 智 阿 千 支 i 毒 夫 智 一 告 千 支 陽 꺼 力 智 一 吉 千 支 / 慣 口 智 居 代 千 支 一 夫 智 太 奈 麻 一 小 智 太 奈 麻 후 心 智 奈 麻 沙 隊 部 十 斯 智 乃 麻 폼 수 智 奈 麻 等 所 敎 事 / 別 敎 令 居 {x 후 羅 男 하 只 本 是 如 人 雖 是 如 人 前 時 王 大 敎 法 道 俠 昨 盤 깜 所 界 城 失 火 適 城 村 大 軍 起 若 有 / 者 '- 行 寫 之 효 口 七 口 王 太 如 村 슐 共 f 直 口 其 餘 事 種 種 없 人 法 / 新 羅 六 部 熱 짧 牛 디 休 찢 事 大 人 Q 家 部 內 沙 智 奈 麻 沙 隊 部 一 登 智 奈 麻 男 次 部 足 智 隊 部 比 須 盡 邱 足 智 居 {x 후- 羅 道 / 使 本 洗 小 舍 帝 智 惠 支 道 使 烏 盡 次 小 舍 帝 智 居 {x 후 羅 尼 추 利 一 {x 口 宜 접I 波 닫 口 只 斯 利 一 口 칩1 阿 大 兮 村 使 人 / 奈 앙 利 柱 六 十 寬 F 口 村 使 人 奈 앙 利 居 口 R 男 爛 只 村 使 人 異 口 村 百 於 엽 IJ 규 利 柱 百 훈 支 軍 主 隊 部 수 夫 智 奈 / 麻 節 書 人 후 珍 斯 利 公 吉 之 智 沙 陽 部 若 文 吉 之 智 新 人 陽 훌 1) 述 刀 小 烏 帝 접1 沙 陳 部 후 利 智 小 烏 帝 智 / 立 石 硬 人 媒 部 博 士 手 時 敎 之 若 此 者 獲 罪 於 天 / 居 代 후 羅 異 知 巴 下 千 支 辛 日 智 一 R 世 中 子 三 百 九 十 八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IF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저112권(신라 1. 가야 편), 1992:15에서 전재. / 표시는 행을 달리하는 경우임. 口 는 확인되지 않았거나 확인되 었더라도 사전에 나오지 않는 경우임, ) 26) 이 부분에 대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居 代 후 羅 男 鋼 只 本 是 如 人 雖 是 如 人 太 없 村 뚫 Jtfl 直 口 其 餘 事 種 種 [fjx. 人 法
123 수 있다. 그렇다면 斯 羅 =6부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되며 斯 羅 라는 국호가 대내적 인 구별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斯 羅 가 대내적인 것과 대외 적인 것 모두에 사용되었다면 신라 영토 내의 다른 지역과의 구별을 위한 문장에 서는 사용할 수 없다. 결국 斯 羅 라는 국호는 대내적으로 6부와 다른 지역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울진봉평비의 新 羅 六 部 라는 표현은 대내용의 斯 羅 라는 국호의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신라 영토 내의 다른 지역과의 구별을 위해 六 部 라는 용어를 특별히 삽입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일냉수리 비가 만들어진 지증마립간 4 년 (503) 9월 25일경에는 신라 전체를 지칭하던 이름이 따로 있어야만 한다. 그러한 이름이 바로 新 羅 였다고 생각되며 광개토대왕비와 중원고구려비 등에 斯 羅 가 아닌 新 羅 라는 국호가 사용된 것이 하나의 증거가 된 다. 이와 같은 결과와 국호의 변화에 대한 기록이 기림니사금 10년 (307) 과 지증마 립간 4년 (503) 사이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 볼 때 4-5세기에는 대내 용의 국호인 斯 羅 와 대외용의 국호인 新 羅 가 이중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 다. 그리고 기림니사금 10년 (307) 의 신라 국호의 사용 기록은 이러한 대외적 국호의 사용을 선언한 것이 된다. 그런데 斯 盧 와 斯 羅 는 같은 지역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 고 생각된다 r 삼국지 위서 동이전 辰 韓 井 辰 조에는 斯 盧 國 이 24 개 소국 중의 하나로 나온다. 따라서 사로국은 신라 건국의 핵심지역이었던 6부를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斯 盧 = 斯 羅 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다. 그리고 두 이 름은 발음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후대에 미화된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같은 발음 을 문자로 기록할 때의 차이라고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분석을 토대로 기림니사금 10년 (307) 의 기록이 보여주고 있는 변화 의 내용을 정리해 본다. 1-3세기에는 대내용과 대외용의 이중적 국호가 사용되지 않았고, 단순히 원신라 지역인 6부를 지칭하는 斯 盧 (또는 斯 羅 )라는 국호만이 사 용되었다.27) 이것은 신라가 진한지역의 소국을 정복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불완전 27) IT"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진서 동이열전에 新 羅 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은 것 은 당시 이 국호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당시에 진한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史 書 에 진한이라는 문자로 정 착된 것이며, 신라는 이 용어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국호를 만들지는 못했다고 보 아야만 한다. 그에 따라 낙랑과 중국본토에서는 斯 盧 國 이 진한지역을 거의 정복했 음에도 불구하고 국호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더욱 인식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사로국이 정복한 진한 소국의 기존 국명도 정복 후에 그
124 돌무지덧널무텀(적석목곽분)0 구덩이식돌덧널무텀( 堅 컨 式 石 構 ) * 원의 크기는 최고 고분의 봉분 크기 (3단계 계층으로 보았음) (자료: 이성주, 1998:236 에서 재편집. 편년은 5세기로 고침) 그림 -11 5세기 경상도 지역의 고분 분포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지명으로서 계속 사용되었다고 보인다. 그것 때문에 낙랑이나 중국본토에서는 그런 지역을 독립국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125 한 대내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첨해니사금 ( ) 시기에 진 한지역의 소국에 대한 정복을 완성하고, 유례니사금 14 년 (297) 에 이서고국의 마지 막 반란을 진압하면서 불완전한 대내관계를 완전히 해소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에 따라 신라가 정복한 모든 지역 안에서의 분열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 었다는 인식이 나타날 수 있게 되었고,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일국가가 되었 음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할 필요성이 대두하였다, 28) 그것이 新 羅 라는 국호의 사용 에 대한 결정이며, 대외적으로는 이제 모든 지역이 동등한 신라의 영토가 된 것이 다. 하지만 대내외적 이중 국호의 사용은 왕경인과 지방인을 차별하기 위한 것이었 다. 영일 냉수리비 (503) 와 울진 봉평비 (524) 에는 왕경인 6부와 지방을 차별하는 내 용이 나온다. 울진 봉평비에는 왕경인 6부가 아닌 지역에 대해 如 人, 太 如 村 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울진 봉평비에는 居 代 후 羅 男 觸 只 村 에서 발생한 소요 사건을 해결하고 나서 얼룩소를 잡고 술을 빚어 제사를 지내는 주체는 新 羅 六 部 로 나온다, 29) 영일 냉수리비에도 일이 완결되어 소를 잡고 널리 고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30) 그 주체가 분명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울진 봉평비와 비교해 볼 때 제 사의 주체는 六 部 ( 斯 羅 )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은 지방의 일을 처리하는 실질 적인 주체가 왕과 고위 왕실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왕경인 6부 전체가 지방보다 우 위에 있음을 제사라는 의식을 통해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왕경인 6부 가 다른 지역에 비해 지역적으로 특권화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도 이해될 수 있다, 4-5세기 동안 왕 경에서는 돌무지덧널무텀( 積 石 木 橫 慣 )이 초대형까지 조영된 반면에 지방에서는 구 덩이식돌덧널무덤( 堅 六 式 石 橫 慣 )이 한 단계 낮은 대형부터 조영되었다,3D 그리고 28) 4-5세기 동안 대내용과 대외용의 국호가 달랐음을 지적하고 그 의미를 분석한 연 구자는 이미 지적했듯이 주보돈이다. 하지만 그는 1-3세기에는 진한연맹체가 존재 했다고 설정하고 있으며 4-5세기에는 사로국과 주변 제 세력의 관계가 연맹관계를 뛰어넘어 지배-피지배 관계로 전환된다고 보면서도 아직도 연맹체적 성격을 보유 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주보돈 1994) 본 논문에서는 1-3세기는 연맹체 관계가 아니 라 삼국사기 와 삼국지 의 기록 모두 불완전하지만 분명한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4-5세기는 고분의 형식 규모 부장품의 현격한 격차를 통해 볼 때 완전한 의미에서의 지배-피지배 관계가 설정되었다고 보고 있어 같은 기록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29) 이 부분에 해당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新 羅 六 部 黨 헬 牛 口 休 찢 30) 이 부분에 해당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熱 牛 投 語 故 記
126 고분에서 발굴되는 유물의 종류와 양의 측면에서도 왕경은 지방보다 훨씬 우위의 입장에 있었다. 그리고 지방인들이 자신들보다 한두 단계 위에 있었던 중앙의 지 배층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모방하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4-5세기 내내 왕경과 지방에서 전혀 다른 형식의 무텀 양식을 유지했다는 것은 두 지역의 차이를 유지함으로써 서로 구분하려 했던 정치적 사회적 장치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결국 1-3 세기에 형성된 왕경과 지방의 차별 성은 4-5세기에 들어와 계속 유지됐을 뿐만 아니라 더욱 강화되었으며, 왕경의 공 간적 범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제 3 절 6부 행정구역의 존속과 방라제의 시행 3-1 언구이동의 경향 (1) 1-3세기 인구이동의 지방과 왕경 1-3세기 동안 정복된 소국 지역으로부터 왕경으로의 인구 유입이 별로 없었을 것이라는 점은 진한지역의 소국에 대한 정복과정의 불완전성과 정복 후에 시행된 간접통치를 통해 추측될 수 있다. 이미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삼국지 위서 동 이전 진한 변진 부분에 이미 신라에 의해 정복된 소국의 이름이 127R 나 등장할 정도로 정복된 소국지역의 내부 문제에 대한 독자성은 강했다. 따라서 정복된 소 국의 최고지배층은 제거되었다기보다는 신라의 니사금(왕)보다 낮은 위치로 격하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라는 이들 최고지배층의 실질적인 지배력을 인정 승인하면서 그들에게 자신의 세력권에 대한 간접통치를 위임했을 것으로 앞에서 분석했다. 이럴 경우 정복된 소국의 지배층은 대부분 왕경으로 거주지를 31) 최병현은 경주에서 積 石 木 構 慣 이 축조된 시기를 4세기 전반기의 中 頭 부터 6세기 초엽까지 약 200년간으로 보고 있다. (최병현, 1992;378) 그리고 신라전기에 있어서 경주의 積 石 木 柳 慣 이라는 독특한 묘제는 경주를 제외한 全 영남지방의 堅 뤘 式 石 構 慣 으로 포위된 상태를 이루게 되었고, 이와 같은 묘제의 포위상태는 경주세력이 적 석목곽분의 축조를 포기하는 신라전기 말까지 계속되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최병 현, 1992;395)
127 옮기지 않고 자신의 원거주지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뿐만 아니 라 피지배층 역시 정복된 소국에 남아 있는 지역적 통치체계 속에 철저하게 예속 된 상태이기 때문에 자신의 출신지를 떠나 왕경으로 옮겨올 가능성은 별로 없게 된다. 결국 1-3세기 동안 지방으로부터 왕경으로의 인구의 유입은 별로 없었으며, 있더라도 극히 적은 수에 한하였을 것이다. 물론 왕경에서 지방으로의 인구이동 역시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왕경 내 인구이동의 경향 유리니사금 9년 (32) 의 6촌 개편에 대한 기록에 대해서는 이미 제 1 절에서 분석한 바 있다. 그 분석 결과 6촌 개편의 핵심이 왕실집단의 6촌(부) 중심지로의 이동을 통해 6촌장 집단의 독자성을 없애는 방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이후 왕 실집단의 상당수가 6부의 중심지에 거주하게 되었음이 몇몇 기록을 통해 확인되 었다. 이것은 이제 정치중심구역과 6부 중심지 사이에 기능적 서열이 확실하게 상 하관계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6부의 책임자는 부 내부의 문제에 대해 서는 독자적으로 처리했을 것이지만 중요한 일일수록 더 높은 중심지인 정치중심 구역으로부터의 의사결정에 의해 영향받았을 것이다. 그러면 6촌 개편 이후 나타난 인구이동에는 정치 중심지로부터 6촌 중심지로의 왕실집단의 이동이라는 흐름만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 6촌 개 편을 통해 6부 전체가 왕실집단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들어왔기 때문에 6부라는 분명한 지역구분이 존재하는 속에서도 전체적으로는 공동운명체적 단위지역의 성 격이 강화되었다. 따라서 6부 중심지와 정치중심구역 사이의 인구이동이 대규모로 그리고 수시로 일어났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이전보다 쉽게 일어날 수는 있게 되었다고 생각된다.6부에서 정치중심구역으로의 인구이동을 보 여주는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다음과 같은 1 개의 사례만이 나타나 고 있다. 자료 4-12) (첨해니사금 5년 (25 1) ).... 한기부 사람 夫 道 란 자는 집이 가난하였지 만 아첨함이 없고 書 算 을 잘하여 당시에 저명하였다. 왕이 그를 불러 阿 滾 을 삼고 物 藏 庫 의 사무를 맡게 했다.3 2 ) 32) 漢 祝 部 人 夫 道 者 家 負 無 짧 工 뿔 算 著 名 於 時 王 徵 之 寫 阿 j 食 委 以 物 藏 庫 事 務 ( r 三 國 史 記
128 부도란 자는 후대의 17등 관등 중 제 6위에 해당하는 阿 浪 을 除 授 받고 있는 것 을 통해 볼 때 일반 백성은 아니었고 최소한 왕실집단이거나 6촌장집단의 일원이 었다고 보아야 한다.33) 하지만 그가 신분적으로 어디에 속했든 그의 원거주지는 한기부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가 한기부의 중심지로부터 정치중심구역으로 이 동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하나의 사례만을 가지고 6부 중심지로부터 정치중 심구역으로의 인구이동이 자유로웠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이동 이 가능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시기에 6부에서 정 치중심구역으로의 인구집중이 급속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미 분석한 바와 같이 최고위급 왕실집단이 6부 중심지에 살고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대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뒷 받침될 수 있다. 지금까지도 6부의 중심지가 어디였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거의 없다. 경주시 조양동 산기숨에서 발굴된 고분군은 기원전 1 세기말에서 4세기 전반 기까지 고분양식의 변화와 함께 지속적으로 조영되었다고 한다. (최병현, 1992) 그 런데 이 고분군에서 발굴되는 유물의 종류나 양으로 보아 피장자의 사회적 지위 가 결코 낮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경주시내의 월 성로, 황성동과 서면 사라리에서 발군된 고분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앞으로 더 많은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져야 확실하게 밝혀질 수 있는 것이지만 최소한 정 치중심구역인 경주시내뿐만 아니라 6부 중심지에도 3세기까지는 상당한 지위의 지배자가 다수 살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고고학적 발굴은 지금까지 분석한 삼국 사기 신라본기의 기록과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따라서 1-3세기에는 경주시내 에 있는 정치중심구역으로의 인구집중이 극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인구집중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지만 6부 중심지보다 월등한 규모의 도 시가 형성되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卷 第 新 羅 本 紀 第 二 첨해니사금 5 년) 33) 만약 유리니사금 9년 (32) 에 단행된 6촌 개편의 본질이 왕실집단의 이동이 전제되지 않 은 상태에서의 6촌장 집단의 지위하락을 통한 6촌의 행정구역화 정도로 볼 경우에는 한기부 출신인 夫 道 가 6촌장 계열이라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6촌 개편이 왕실집단의 이동을 통한 6촌장 집단의 신분하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夫 道 가 받은 阿 浪 이 란 관등을 볼 때 그는 왕실집단의 일원일 수도 있고, 6촌장 집단의 일원일 수도 있게 된다. 이후 夫 道 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가 어느 집단의 일원이 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129 물자이동 인구이동 지방 수도 i-f--낸. 6부중심지 그림 세기 물자와 인구이동의 대외팽창의 불완전성과 6부의 생산력 유지 경주시내에 있는 정치중심구역으로의 인구집중이 급격히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 는 기본적으로 신라의 대외팽창이 가지고 있는 불완전성에서 기인한다. 이미 앞에 서 1 세기 중반부터 3세기 중반까지 진행된 대외팽창의 불완전성 때문에 지속적인 전쟁과 전투의 수행과정 속에서 6부 출신자에 대한 우대를 계속 유지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알아보았다. 이와 같은 것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 지였을 것이다. 신라가 비록 진한 지역에 있었던 소국들을 정복하기는 했지만 각 지역의 내부통치에 대한 독자성을 제거하지는 못했던 단계에 있었다. 그에 따라 이들 정복 지역의 반란과 이탈 가능성이 항상적으로 존재해 있었다고 보았다. 이 런 상태에서 이들 정복지역에 대한 경제적 수탈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는 힘들었 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는 정복된 소국의 반란과 이탈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경제적 수 탈을 진행해야만 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럴 경우 일방적인 수탈은 거의 불가능하 다. 정치적 우위를 통한 물자의 유입도 있었겠지만 그 반대급부도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반대급부의 하나가 정복된 소국지역의 지배층에게 계속적인 지배권 을 부여하는 것임은 당연하다. 이미 앞에서 이와 같은 지배권의 부여를 통해 위임 통치에 기반한 간접통치가 이 시기 지방에 대한 통치의 주를 이루었다는 것에 대 해 의 이미 알아보았다. 하지만 이런 상태라면 지배권의 부여 이외에도 각종 하사품 陽 與 가 상정될 수 있다. 결국 물자의 흐름이 1-3세기에는 정복된 지역으로부터 왕경으로의 일방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럴 경우 왕경 내 6부 지역
130 에서의 생산력은 계속 유지되어야만 하고, 그것 때문에 6부 중심지의 역할 역시 감소되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경주시내에 있었던 정치중심구역으로의 인구집중이 급속히 일어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2) 4-5세기 인구이동의 지방과 왕경 4세기로부터 5세기까지는 1-3세기에 비해 지방에 대한 왕경의 영향력이 더 강 화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방 지배층의 왕경으로의 유입이 1-3세기에 비 해 특별히 더 강하게 일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4-5세기에도 왕경과 지방의 지역 적 차별이 지속되어 지방 지배층의 중앙으로의 진출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 만 지방의 반란이나 이탈 가능성이 거의 없어지고, 신라가 확실한 통일국가로 등 장함에 따라 1-3세기에 비해서 인구 이동이 더 자유로와 질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에서 귀족의 노비나 하인과 같은 하층신분의 구 성원들이 지방에서 왕경으로 유입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유입된 인구는 대부분 귀족이 거주하고 있었던 정치중심구역에 거주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정치 중심구역의 확장에 하나의 요인으로서 작용하게 되었을 왕경 내 인구이동의 경향 왕경 내에서의 인구이동은 1-3세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첫 번째의 흔적은 바로 4-5세기에 조영된 대형고분의 분포이다. 이미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4-5세기 왕실집단(귀족)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돌무지 덧널무덤( 積 石 木 構 瓚 )은 경주시내와 건천읍의 금척리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특히 경주시내에서 발견되는 고분은 초대형으로부터 대형-중소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 다. 그에 비해 금척리 고분군은 한 두 단계 낮은 수준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피부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경주시 조양동에서 발견된 기원 전 1 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까지의 고분에 상당한 지위의 지배층이 묻혔을 것이라 는 사실과 대조되고 있다. 이 곳에서는 경주시내에서 발견되는 돌무지덧널무덤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고분이 일정 지역에 집중되어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131 1. 경주시내: 황남동, 노서동, 노동동, 인왕동, 교동고분군 2. 서악동고분군 3. 금척리고분군 (자료Ií 慶 州 遺 題 地 圖 J, 국립경주박물관 : 경주시, 1997에서 재편집) 그림 세기 경주지역 돌무지덧널무텀(적석목곽분)의 분포
132 통해 왕경에 살았던 지배층의 상당수가 경주시내의 핵심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고 볼 수 있다. 물론 6부의 중심지에도 아직 일부의 왕실집단이 거주하고 있었음 이 삼국유사 紀 異 第 二 智 哲 老 王 조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자료 4-13) (지철로)왕은 음경의 길이가 1 척 5촌이나 되어 배필( 嘉 觸 )에 어려 움이 있었다, 3 道 에 사신을 보내 구했는데 사신이 모량부 동노수 아래에 이르 러 두 마리의 개가 북처럼 큰 똥덩어리를 물고 양끝을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 다. 마을 사람에게 묻자 어떤 소녀가 고해 말하기를 이 部 相 公 의 딸이 이곳에 서 빨래를 하다가 숲에 숨어서 남긴 것입니다. 라고 했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 보니 커가 7 척 5촌이나 띄었다.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이 수레를 보 내어 宮 中 으로 맞이하고 봉하여 황후로 삼았다. 군선이 모두 뿔 禮 했다.싫) 삼국사기 에는 연제부인이 왕실집단의 성씨인 박씨라고 나와 있고,$) 위의 기록에서는 그 연제부인의 아버지가 相 公 으로 되어 었다. 따라서 연제부인과 그 아버지는 왕실집단의 일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설화의 무대가 모량부이 며, 그 아버지 역사 모량부괴 상공으로 되어 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왕실집단의 일부가 5세기 후반기에도 모량부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 실은 영일맹수리비 (503) 에 나오는 본피의 두복지 간지, 사피의 모사지 간지와 울 진봉평비 (524) 에 나오는 본피부 口 부지 간지 잠훼부 口 흔지 간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들 千 支 가 지방에서 발생한 아주 중요한 일에 왕 및 갈문왕과 함께 의 논하는 회의에 참가하는 것을 통해 볼 때 왕실집단 최고위층의 일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36) 이렇게 본다면 6세기초에도 일부 왕실집단이 6부의 중심지에 살고 있 었음이 확인된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최고위층의 일원이 묻혔을 초대형 또는 대형의 돌무지덧널무텀( 積 石 木 擺 慣 )이 경주시내와 건천읍의 금척리를 제외하면 아 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34) 王 陰 長 一 R 五 # 難 於 嘉 觸 發 使 三 道 求 之 使 至 후 梁 部 송 老 樹 下 見 二 狗 n휩 一 保 塊 如 鼓 大 爭 n협 其 兩 端 誌 於 里 人 有 一 小 女 告 될 此 部 相 公 之 女 子 洗 漸 手 此 隱 林 而 所 遺 也 尋 其 家 檢 之 身 長 七 R 五 # 具 事 奏 聞 王 遺 車 選 入 宮 中 封 寫 皇 尼 群 神 皆 買 ( r 三 國 遺 事 卷 第 一 紀 異 第 - 智 哲 老 王 ) 35) 지증마립간 ( ) 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즉위조에 의하면 64세에 왕 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원자이며, 비인 연제부인의 아들이 바로 법홍왕이다. 따 라서 위에서 연제부인을 부인으로 맞은 것이 마치 지증마립간이 왕이 된 후에 이루어 진 것처럼 되어 있으나 그것은 후대에 전해지면서 이야기가 바뀐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6) 영일 냉수리비 (503) 와 울진 봉평비 (524) 에서 지방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논의에 참 여한 인물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33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4-5세기에는 왕실집단 및 하위 귀족의 무텀이 일 정한 지역에 집단적으로 조성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주로 경주시내에, 일부는 모량부의 땅인 건천읍 금척리 지역에 집단적으로 조성되었다고 여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일부 왕실집단의 주거지가 경주시내의 핵심지 역이 아닌 6부 중심지에 있었을 지라도 무텀은 경주시내나 건천읍의 금척리 지역 에 시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금척리 고분군에 묻힌 중 하위 지배층 역 모두 모량부 출신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사실이 지배층의 상당수 가 경주시내를 위주로 한 정치중심구역에 모여 살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근 거가 되지는 못한다. 이렇게 일부 지역, 그것도 경주시내에 최고지배층을 비롯한 대다수의 지배층 무덤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들의 거주지가 핵심지역 에 밀집되어 있었다는 이유 이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기 권력과 물자의 공간적 집중 그러면 이렇게 왕경 내 지배층의 인구분포가 핵심지역으로 집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바로 3세기말과 4세기초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의 강화라는 변화로부터 풀어야 한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 와 같이 기림니사금 10년 (307) 에 신라라는 국호를 확정한 이후 진한지역은 이제 영 일 냉수리 비 (503) 울진봉평비 (524) 인물 출신 인물 출신 至 都 盧 흉 文 王 沙 隊 후홈 n 智 陳 鎬 王 隊 部 斯 德 智 阿 千 支 徒 夫 智 훌 文 王 沙 隊 部 子 宿 智 居 {x 千 支 口 夫 智 千 支 本 彼 部 앙 夫 智 졸 千 支 R흉 口 H타 智 千 支 능한 隊 部 只 心 智 居 代 주 支 而 口 智 太 阿 千 支 沙 隊 部 頭 願 智 千 支 本 彼 吉 先 智 阿 千 支 幕 斯 智 千 支 斯 彼 一 毒 夫 智 一 吉 千 支 까 力 智 一 吉 주 支 R옳 慣 口 智 居 tt 千 支 " 一 夫 智 太 奈 麻 一 小 智 太 奈 麻 후 心 智 奈 麻 " 十 斯 智 奈 麻 沙 緣 部 경몫수 智 奈 麻 7 명 14 명
134 완전한 의미의 통일국가인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그에 따라 신라 내부에서의 반 란과 이탈 가능성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지방세력은 중앙에 철저하게 예속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중앙세력은 지방세력의 세금납부에 대해 반대급부의 물자를 제 공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단지 금동관을 비롯한 위세품의 하사와 같이 그들 세력 의 권위를 유지시켜주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1-3세기에 비해 중앙의 지방에 대한 경제적 수탈이 훨씬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음을 알려준다. 이에 따라 물자의 흐름이 1-3세기에 쌍방적이었던 것에서 지방에서 중앙으로의 일방적인 성격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중앙 세력은 이러한 물자의 원활한 흐 름을 위해 중앙과 지방 사이의 연결 시스템을 강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 황 때문에 郵 羅 제도의 정비가 그 어떤 제도보다도 가장 이른 시기인 소지마립간 9년 (487) 에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4-5세기에 왕경으로의 물자의 유입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사례는 역시 경주시내의 초대형 돌무지덧 널무덤( 積 石 木 擺 慣 )이다. 돌무지덧널무텀은 고분의 규모뿐만 아니라 발굴된 유물 의 양과 종류를 통해 당시의 귀족들이 얼마나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를 가 장 잘 대변해 준다.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의 엄청난 양과 화려함의 근원은 역시 지방으로부터의 경 제적 수탈을 통한 왕경으로의 물자유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라 왕경 내에서 지배층의 인구분포가 정치중심구역에 집중하도록 만든 근본적인 힘이었다. 외부로부터의 물자유입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되자 1-3세기에 비해 6부 생산력의 중요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6부의 농경지가 대부분 필요 없 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왕실집단이 6부의 생산력 유지에 그렇게 큰 의미부여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왕실집단을 비롯한 귀족들이 굳이 6부의 중심지에 계속 거주할 필요성은 없게 되었다. 이것은 반대로 신라라는 국가 전체의 경영을 위해 6부의 중심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37) 37) 4-5세기에 6부의 경제적 중요성은 크게 약화되었지만 인적 자원이라는 차원에서 의 중요성은 그렇게 약화되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4-5세기에도 끊임없이 계 속된 백제와 고구려 및 왜 등과의 전쟁 전투의 수행과정에서 주력부대를 구성한 것은 역시 6부 출신자들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3세기에 비해 지방출신자들에 대한 전투수행원의 차출이 훨씬 쉬워졌을 것이기는 하지만 왕경과 지방의 차별적 구도가 존속 강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들을 주력부대의 일원으로서 대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력부대를 구성하고 있었던 일반 전투병의 인적 공급처인
135 --' 또한 4세기 이후에는 전체적인 정치적 기능에서 차지하는 지방에 대한 업무의 비중이 1-3세기에 비해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그에 따라 권력의 토대가 6부보다 는 지방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감시 통제하느냐의 문제에 더 의존하게 되었을 것 이고, 이것은 왕(마립간)과 일부 최고위층 귀족의 힘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것을 공간적으로 본다면 왕이 거주하는 특정 지역에 권력이 집중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정치적 기능의 양적 확대에 의해 정책결정과정이 보다 일상화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러한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하는 고위 지배층의 거주지가 왕의 거주지와 보다 가까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수도 물자이동 -. 4룰-- 지방 정치 6부 인구이동 ---. 중심구역..- 중심지 그림 세기 물자와 인구이동의 경향 3-2 정치중섬구역의 확장 (1) 정치적 기능의 입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파사니사금 22 년(1 01) 2월에 月 城 을 쌓고, 7월 에 왕이 이곳으로 移 居 했다고 나온다.3 8 ) 이 기록에 토대를 둔다면 이미 金 城 이라 는 왕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월성이라는 王 城 을 조영한 것이 된다. 그 러면 굳이 새로운 왕성을 조영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신라의 6부에 대한 효율적 관리의 필요성은 계속 유지되었을 것이며, 이런 이유로 인해 6 부 중심지에 살았던 왕실집단이 경주시내의 정치중심구역으로 모두 거주지를 옮기 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38) 二 十 二 年 春 二 月 藥 城 名 月 城 秋 七 月 王 移 居 月 城 ( Ii 三 國 史 記 卷 第 一 新 羅 本 紀 第 i 파사니사금 22년)
136 新 어떠한 역사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월 성이 갖고 있는 자연지리적 특징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월성의 남쪽에는 남천 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나가며 급경사를 만들어 놓고 있어서 자연적인 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북쪽에서는 최근에 해자가 발굴되었는데 그 최초 축조시기는 5 세기 후반기라고 한다. (김낙중 1998) 하지만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신라의 건 국전후에도 월성의 북쪽은 홍수 시 북천이 범람하던 지역이어서 자연적인 해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방어의 측면에서 보아 월성은 경주시내에서 가장 뛰 어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월성의 축조는 바로 이러한 방어의 측면에 대한 고려가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 각된다. 이미 제 2 절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파사니사금 (80-112) 때는 신라 초기에 대외정복활동과 가야 등 외부세력과의 전쟁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기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방어에 대한 필요성이 큰 시기였으며 그러한 필요성을 만족시 키기 위해 월성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금성은 방어에 있어서 만큼은 월성에 비해 훨씬 불리한 입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이것은 금성이 지 금의 첨성대나 그 부근의 평지에 있었다고 보았을 때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런 이유로 파사니사금이 월성의 축조와 함께 移 居 했다는 기록이 나오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파사니사금이 월성으로 移 居 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성은 사 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5세기까지의 기록에 월성보 다 금성이 훨씬 많이 나온다. 따라서 금성은 월성의 축조 이후에도 중요한 정치적 중심의 하나로서 계속 존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39 ) 1 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신라의 대외팽창은 정치적 기능의 확대도 초래했을 것 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적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상설적인 기구가 필요했을 것 이며, 그것이 바로 일성니사금 5 년(1 38) 에 금성 안에 만들어진 政 事 堂 이라고 볼 수 있다.때) 정사당의 설치는 파사니사금 (80-112) 시기에 가장 활발했던 신라의 1 차적인 대외팽창의 결과물이라 보아야 한다. 즉 대외팽창으로 인한 정치적 기능의 39) 파사니사금 22 년 (101)의 월성 移 居 기록 이후 금성으로 다시 移 居 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2 세기 이후에는 보통 월성이 왕성으로 기능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표 -11 을 보면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일단 5세기초까지의 월성에 대한 기록은 축조 시기를 포함하여 3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에 비해 금성은 월성 축조 이후에도 14 번 정도 나 오고 있어 기록된 횟수가 월성보다 훨씬 많다. 그 뿐만 아니라 눌지마립간 28년 (444) 까 지 왜병이나 이서고국 등이 경주시내까지 침입하여 공격한 곳은 금성이 5번이고, 명활 성이 2 번이다. 반면에 월성 포위 기록은 자비마립간 2년 (459) 에 처음으로 나온다. 이러 한 기록들을 검토해 볼 때 40) 五 年 春 二 月 置 政 事 堂 於 金 城 ( ff" 드 國 史 記 卷 第 4 월성이 王 城 이었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羅 本 紀 第 一 일성니사금 5년)
137 확대에 따라 정치적 행위가 보다 일상화되었고 그것을 수시로 담지할 수 있는 장 소의 분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설치된 것이다. 200년을 전후한 신라의 2차적인 대 외팽창도 1차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기능의 확대를 초래했을 것이다. 특히 이 시기 에는 진한 지역을 거의 정복한 상태이기 때문에 지방에 대한 통치력이 더 강화되 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정치적 기능의 확대가 전 시기보다 더 크게 일어 났을 것이며, 그것이 첨해니사금 3 년 (249) 南 堂 의 설치로 나타났다. 표 -11 5세기까지의 금성 월성 명활성에 대한 기록 연도 대상 내 용 파사22(0 1) 월성 3: 二 -ζ'1. 파사32(11) 금성 금성문이 저절로 무너짐. 지마9(20) 월성 큰 별이 월성 서편에 떨어짐. 지마 12(23) 일성 5(38) 아달라7(60) 벌휴 13(96) 二 n그셔 二 n그 λ4 二 n그 λ4 二 n그_a-i 금성 동쪽의 民 屋 이 땅 속으로 들어가면서 못이 되고 연꽃이 나옴. 금성에 정사당을 둠. 폭우로 금성 북문이 저절로 무너짐. 벼락이 금성 동문에 침. 내해 10(205) 二 n그서 금성과 시조묘정에서 여우가 옮. 조분 3(232) 二 n그셔 왜인이 금성을 포위. 첨해 7(253) 금성 금성 남쪽의 쓰러진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남. 미추 1(262) 二 nl/셔 금성 서문에 불이 나서 인가 300여구가 불탐. 유례 7(290) 월성 홍수가 나서 월성이 무너짐. 유례 14(297) 금성 이서고국이 금성 공격. 흘해 37(346) 금성 왜병이 금성 포위 내불 38(393) 금성 왜인이 5 일 동안 금성 포위 실성 4(405) 명활성 왜병이 명활성 공격 실성 14(415) 二 n그 λ ~ 금성 남문에 나가 활쏘는 것 구경. 눌지 15(431) 명활성 왜병이 명활성 공격. 눌지 28(444) 二 Dlλd내 왜병이 10 일간 금성 포위. 눌지 42(458) 二 nlλ } 지진으로 금성 남문이 흔들림 자비 2(459) 월성 왜인이 월성 포위. 왕성을 잘 지키어 적을 격파. 자비 4(46 1) 금성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남. 자비 16(473) 명활성 -까r~. 자벼 18(475) 명활성 왕이 명활성으로 옮김. 소지 4(482) 二 nlλo내 금성 남문에 불이 남. 소지 9(487) 월성 수축. 소지 10(488) 월성 왕이 월성으로 옮김. 소지 22(500) 二 n그 λ4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남. 자료Ir삼국사기 신라본기
138 자료 4-14) (첨해니사금 3 년 (249)) 가을 7월에 宮 南 [ 南 堂 은 都 堂 이라고도 한 다]에 南 堂 을 만들었다, 4 1) 자료 4-15) (미추니사금 7년 (268))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자 南 堂 에서 群 댄 을 모아놓고 친히 政 께의 得 失 을 물었다. 또 사신 5 명을 보내 百 姓 들의 苦 뽑 을 파 問 하게 했다, 42) 자료 4-16) (눌지마립간) 7년 (423) 여름 4월에 南 堂 에서 노인들을 봉양했다. 왕이 친히 식사을 대접하였으며, 觀 펌을 내렸는데 차등이 있었다, 43) 자료 4-17) (진평왕) 7년 (585) 봄 3월에 가뭄이 들었다. 왕이 正 願 을 피하고 常 睡 을 감하였으며, 南 堂 에 납시어 친히 죄수의 일을 처리하였다, 44) 이후 삼국사기 선라본기에는 남당에 대한 기록이 3 번 더 나타나며, 왕이 養 老 홍까지 여는 등의 내용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일상적인 정치가 수시로 열리 는 장소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또한 6세기초인 법흥왕 4년 (517) 에 병부라는 관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정치적 기능을 담당하는 새로운 기구의 출현을 알려 주는 기록이 전혀 없다. 이것은 5세기까지도 정치적 기능의 양적 확대는 지속적으 로 일어났지만 질적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았음을 알려준다, 45) (2) 거주지의 확장 1-3세기에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외부로부터 수도로의 인구유입도 크지 않았으며, 왕경 내에서도 6부 중심지로부터 핵심지역으로의 일방적인 인구이동은 41) 秋 七 月 作 南 堂 於 宮 南 [ 南 堂 或 킬 都 堂 ])(프 國 史 記 卷 第 = 新 羅 本 紀 第 二 첨해니사금 3 년) 42) 七 年 春 夏 不 雨 會 흘 ê 於 南 堂 親 問 政 페 得 失 X 遺 使 五 人 i젠 問 百 姓 苦 愚 ( r 三 國 史 記 卷 第 二 新 羅 本 紀 第 二 미추니사금 7 년) 43) 七 年 夏 四 月 養 老 於 南 堂 王 親 執 食 陽 뤘범 有 差 ( r 三 國 史 記 卷 第 三 新 羅 本 紀 第 三 눌 지마립간 7 년) 44) 七 年 春 三 月 멀- 王 避 正 觀 減 常 睡 倒 南 堂 親 錄 因 ( r 三 國 史 記 卷 第 四 新 羅 本 紀 第 四 진 평왕 7 년) 45) 이러한 남당은 정사당이 금성 안에 설치된 것으로 나오는 것과 달리 宮 南 에 설치되었 다 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宮 이 무엇이고, 어디를 지칭하느냐에 따라 남당의 위치가 결정될 것이다. 그 동안 남당의 위치에 대해서는 월성 남쪽의 도당산성(박방룡, 1995) 이 나 월성 안( 鬼 頭 淸 明, 1979) 이라는 견해가 있어 왔다. 도당산성이라는 견해는 월성을 왕 성으로 보고 비정한 것이다. 하지만 금성을 왕성으로 본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월성 안이라는 견해는 정사당과 남당이 공존한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설정된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기능을 했던 기구가 공존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남당이 정사당을 대체했을 가능성이 높다
139 없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금성을 비롯한 정치중심구역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에 따라 금성을 중심으로 후대에 비해서는 작은 규 모의 지역에 거주지가 밀집해 있었을 것이다. 표 -12 냉수리비 (503) 에 등장하는 인물의 부별 분포 낀~프 三 양부 사량부 모량부 본피부 한기부 습비부 오 J (2) 갈문왕 기타 3 3 l( 千 支 ) l( 千 支 ) 합계 5(2) 7 1 * 왕에 (2) 라고 표시된 것은 비문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죽은 인물. * 양부의 기타에 표시된 3 명 중에는 歌 須 道 使 라는 직책이 1 명 있음. * 기타 6 명 중에는 村 主 이면서 千 支 라 표시된 1 명이 있음. 출전 r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의 번역을 따름. 기타 6 6 표 -13 봉평비 (523) 에 등장하는 인물의 부별 분포 t 1r11 r:r 양부 사량부 모량부 본피부 한기부 습비부 기타 왕 1 갈문왕 기타 l(박사) l( 千 支 ) l( 千 支 ) 9 합계 * 기타는 이 비가 세워지게 된 南 爛 只 村 사람임. 이들 중에는 외위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음. * 출전 r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의 번역을 따름
140 4-5세기에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외부로부터의 물자유입이 많아져 6부 중 심지에 살았던 상당수의 왕실집단이 경주시내의 정치중심구역에 집중되고 그에 부수되는 피지배층도 증가되었다. 이에 따라 주거지는 계속 확장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주거지의 확장이 구체적인 공간상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는 5세 기 지배층의 주거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6세기초의 영일냉수리비 (503) 와 울진 봉평 비 (524) 의 인물분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영일냉수리비 (503) 에는 비가 쓰여진 당시의 사람들로 등장하는 총 14 명 중 5 명 이 양부 거주자로 7명이 사량부 거주자로 되어 있다. 울진봉평비에는 총 26 명 중 14 명이 양부거주자로 10명이 사량부 거주자로 되어 있다. 이 두 비문은 5세기의 경향성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으로서 정치적 인물의 분포가 나머지 4부에 비해 양 부(훼부). 사량부(사훼부) 2부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정치적 인물은 수하 에 많은 하인을 거느렸을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인구의 집적이 있었을 것임을 알 려준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양부와 사량부는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 것일 까? 금성을 위주로 그 서쪽에 펼쳐져 있었을 1-3세기의 주거지는 당연히 양부에 속 해 있다. 따라서 4-5세기에도 이곳이 중요한 거주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4-5세기 에는 정치중심구역의 인구가 증가했을 것이기 때문에 거주지 역시 확장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거주지의 확장은 일단 경주시내가 소속되어 있는 양부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제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경주시내의 서쪽과 북쪽은 홍수 시 하천 범람의 위험이 상존해 있었다. 또한 동쪽에는 홍수 시 북천을 범람한 물 이 흐르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지역에는 거주지가 확장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이 지역에 격자형 도시계획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다, (그림 -3, 그림 -9 참조) 이러한 격자형 도시계획은 제방이 건설된 후대에 이루 어진 것으로서 5세기까지는 이곳에 주거지가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경주시내에서의 거주지 확장은 범람으로부터 그래도 안전한 남쪽으로 밖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 점에서 영일 냉수리비와 울진 봉평비에 사량부의 인 물이 많이 동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제 3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남천 남쪽은 사량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두 비문에 나오는 사량부의 인 물은 남천 남쪽 남산 북 서북쪽에 살았다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6) 이곳은 46) 두 비문에 나오는 사량부의 인물들은 갈문왕과 고위 관등을 소지한 자가 나오는
141 혔 聽 o lkm 1. 추정 금성지 2. 월성 3. 도당산토상 4. 남산토성 5. 고분군(노동동 노서동 대릉원 황오동 인왕동) 6. 고분군(황남동 교동) 7. 오롱 1-3세기의 주거지 _._.- 4-5세기의 주거지 * 원은 고분을 표시한 것이지만 정확한 숫자를 보여주는 것은 아님 그림 세기 주거지와 확장방향 등 양부의 인물에 비해 신분적으로 결코 낮지 않은 자들이다 따라서 이렇게 높은 신분의 자들이 정치중심구역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먼 곳에서 거주했다고 볼 수는 없다. 비록 비문에는 양부와 사량부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지만 거주지라는 차원에 서는 서로 연결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142 사량부 전체의 일부분에 해당되지만 어쨌든 사량부의 땅이었기 때문에 거주지를 표시할 경우 사량부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이곳은 남산으로부터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남천이 범람하더라도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는 곳이다. 다시 말해 주거지의 안정성이 보장된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5세기에 방어의 중요성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예상되는 남 산토성이나 도당산토성도 존재하고 있다.47) 결국 6세기초의 비문에 사량부에 분포 한 주요 정치적 인물이 나타나는 것은 경주시내의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남천 남 쪽의 남산쪽으로 주거지가 확장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쟁) 이곳은 대릉원 과 교동고분군 및 월성과 아주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대롱원 남쪽처럼 비계획적인 형태의 도로망과 경지가 남아 있는 곳이다. (그림 -3, 그림 -9 참조) 따라서 이곳에 주거지가 형성된 것은 격자형 도시계획이 이루어지기 이전이라고 보아야 한다.49) 3-3 6부 사이 의 관계 변화와 행 里 制 의 시 행 (1) 6부 사이의 관계 변화 지금까지 인구이동의 경향성과 그것이 구체적인 공간상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가 를 살펴보았다. 이와 같은 분석의 결과 6부 사이의 지배층 분포가 어떻게 이루어 져 있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된다. 1-3세기에는 정치중심구역으로의 급격한 인구집중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구체적인 공간 속에서도 주거지가 양부의 땅에 속해 있었던 현재의 첨성대와 그 서쪽 지역에만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6부 사이의 지배층 분포라 는 차원에서 보았을 때 장기적으로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유리니 47) 6세기 이후에 건설되거나 수축된 城 은 모두 石 城 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5세기 말 엽에 수축된 월성과 명활산성은 토성이다. 이와 같은 경향성을 볼 때 도당산토성과 남산토성은 5세기에 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48) 남천의 남쪽에 해당되는 월정교지 남쪽의 교동 162-2, 162-3번지의 발굴과정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고신라문화층과 선사시대문화층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중 2호 유구가 고신라문화층과 직접 관련된 생활유적이라고 하며, 조사자는 이런 발굴을 통해 이 지역일대가 집단취락지역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보았다. 상대편년은 3-5세 기대로 보았으며, 중심년대는 4세기대로 추정되었다.( r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 J (긴급 발굴조사보고서 I), 경주문화재연구소, 1992:78-79) 49) 顧 島 잦 治 郞 은 대릉원 남쪽의 비격자형 도로망의 흔적이 경주 시내에서 최초의 주거지 를 보여주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 顧 島 짖 治 郞, 1930)
143 사금 9 년 (32) 년의 경우와 비교하여 큰 변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태 때 문에 지방에 대한 왕경의 공간적 특권성이 발생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약 300 년 동안 6부의 공동운명체적 성격이 파괴되지 않고 존속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 다. 4세기 이후에는 정치중심구역으로 권력과 물자가 집중함에 따라 6부 중심지에 거주하던 왕실집단이 정치중심구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왕실집단의 이동 은 지방과 6부 지역에서 정치중심구역으로의 피지배층의 집중도 함께 초래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정치중심구역이 확장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확 장이 구체적인 공간상에서는 1-3세기에 정치중심구역이 존재했던 양부의 땅에서 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양부와 남천을 경계로 삼고 있던 사량부의 땅으로까지 주거지가 확장되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양부와 사량부에 거주하는 지배층의 비율 이 의 에 다른 4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게 된 것이다. 이러한 6부간 지배층의 분포에서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6세기초의 비문에서 사량부와 양부의 인물이 다른 4부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격차에도 불구하고 6부 자체에 대한 행정구역의 개편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리고 6세기초의 영일냉수리비 (503) 를 보면 5세기의 실성니사금 ( ) 으로 비정되는 斯 夫 智 王 과 調 禮 王 ( )으로 비정되는 乃 智 王 의 이름 앞에조차도 隊 (양부)라는 6부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밍) 물론 비가 건립된 시기에 살았던 至 都 盧 훌 文 王 (지증마립간)을 비롯한 6부인의 이름 앞에도 모두 部 名 이 기 록되어 있다. 따라서 6부라는 행정구역이 출신지나 또는 거주지를 표시하는 중요 한 행정단위가 되고 있으며 그것이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인정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을 部 라는 행정단위로 표시된 집단의 정치적 힘의 역관계 로 이해하는 경우도 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견해들은 구체적인 공간상에서 정치 중심구역이 양부와 사량부에 걸쳐 있었다는 점 그리고 장 단기적으로 지배층이 거주지를 이동할 수 있었다는 측면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다. 만약 지배층을 비롯한 6부인들이 부의 경계를 넘어 장 단기적으로 이동할 수 있을 경 우에는 정치적 힘의 역관계라는 하나의 요인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게 된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오랜 사회적 관습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 큰 설명력 을 가질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6촌은 신라 건국 전부터 존재했으 며, 당시에는 상호 간의 독립을 전제로 한 연합체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50) ~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제 2 권(신라 1. 가야 편), 韓 國 古 代 社 會 짧 究 所 編, 1992:
144 간의 구체적인 경계와 소속감 출신지가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었다. 신라가 건국 되면서도 6촌은 파괴되지 않았으며, 왕실집단의 힘의 강화 속에서도 6부로 개편되 었을 뿐이다. 그 뿐만 아니라 1-3세기 동안 진한지역으로의 대외팽창 과정에서도 6부 사이의 지배층 분포에서 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신라 전부터 존 재했던 소속감이나 출신지의 단위로서 6촌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적 관습이 정치 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크게 바뀔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오랜 역사적 과 정 속에서 형성 유지된 사회적 관습은 4세기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6부간 지배 층 분포의 격차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쉽게 사라질 수는 없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5 1) (2) 방라채의 시행 6부 자체의 행정구역 변경은 실시되지 않았지만 그 하부 행정단위의 개편이 있 었음을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자료 4-18) (자비마립간) 12년 (469) 봄 正 月 에 京 都 의 행 里 이름을 정하였 다.52) 이 기록에 나오는 京 都 라는 용어는 삼국사기 의 기록에 기후나 천재지변이 발생했을 경우 신라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된 용어이다. 하지만 이 용어가 어느 정도의 공간범위를 지칭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위의 51) 4-5세기의 이러한 상황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6세기초의 금석문에 서 나타나는 6부간 현실적인 격차와 제사와 같은 의식적인 차원에서의 6부의 동등함이 라는 이중구조는 4-5세기에도 이미 확고하게 형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6 부의 형성시기는 최소한 4세기 이전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러한 이중구조가 파괴되 지 않고 약 200년 후인 6세기초까지도 계속 유지되려면 6부가 하나의 지역단위가 된 상태에서의 상당한 역사적 경혐의 공유가 필요하다. 그러한 역사적 경험의 공유가 없었 다면 부간 현실적 격차의 발생 강화 과정에서 의식적 차원에서의 동등함은 쉽게 파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4-5세기의 상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4세기초 이전에 6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만은 아니다.6촌이 형성된 후 상당히 오랜 동안 역사 적 경험의 공유가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기간이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말 할 수 없다. 하지만 三 國 史 記 와 三 國 遺 事 의 기록에 6촌이 신라 건국 전에도 있 었다고 나오는 것이 그렇게 틀리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신라의 건국과 함께 6촌은 하 나의 공동운명체가 되었고, 1-3세기의 대외팽창과정에서 그 내적 결속력이 강화 유지 되었다고 보면 4-5세기 및 6세기초의 상황이 쉽게 이해된다. 52) 十 二 年 春 正 月 定 京 홉 1) 均 里 名 ( Ir E 國 닷] 記 卷 第 τ슨 新 羅 本 紀 第 코 자비마립간 12 년)
145 기록만 가지고는 행 里 制 가 과연 어느 공간범위까지 시행된 것인지 분명하게 이해 할 수 없다. 제 5장에서 다시 살펴볼 것이지만 후대의 기록을 통해 볼 때 功 里 는 왕경 전체에 걸쳐 있었으며, 里 는 功 보다 한 단계 높은 행정단위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행 里 가 처음으로 실시된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본다면 방리제 의 시행으로 왕경은 部 - 里 -행의 행정체계를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굳이 5세기 중 후반기에 방리제가 왕경에서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나타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당시 왕경의 공간적 범위는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과 동해안의 감포읍 양북 면 양남면 지역을 아우르는 넓은 범위였다. 따라서 왕경 전체적으로 행정체계의 변화를 추구하게 할만큼 인구가 동시에 증가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일부지역에서 기존의 형태로는 사회적 정치적 통제가 어렵게 될 정도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주거지가 확장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게 된다. 이 점에서 4 세기 이후 정치중심구역으로 인구가 집중하게 되어 거주지가 확장되었다는 사실 을 고려하게 된다. 즉 5세기 중 후반쯤에는 정치중심구역의 인구가 증가하고 거 주지가 확대되면서 사회 정치적 통제를 위한 새로운 행정체계의 설정이 필요하 게 된 것이다.많) 그로 인해 部 보다 하위 단위인 里 와 행이라는 새로운 행정단위를 공식적으로 만들게 되었으며 이러한 행정체계의 변화는 정치중심구역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6부 전체로까지 확대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딩) 53) 기록이나 비문에서 자비마립간 12 년 (469) 이외에 里 의 존재가 최초로 확인되는 것 은 남산신성비 (591) 제 3 비의 隊 部 主 刀 里 와 里 作 上 人 이란 표현이다.( r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제 2권(신라 1. 가야 편), 韓 國 古 代 社 會 짧 究 所 編, 1992:114) 54) 야뿔 制 의 시행을 격자형 도시계획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오영훈, 1992) 이 와 같은 견해는 첫째 신라 초기 주거지역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첨성대 서쪽 과 남천 남쪽에 가장 비계획적인 형태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 둘째, 방리제의 시행은 도시부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왕경 전체에 걸쳐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약간 무리한 추측이라고 생각된다
146 제 5장 왕경 내 행정구역의 개편 제 1 절 광경으로의 언구접중 경향 1-1 왕경인과 지방언의 차별 신라의 지배층은 지증마립간 4 년 (503) 에 신라라는 국호를 확정하고, 같은 왕 6 년 (505) 에 주에 군주를 파견하면서 왕경과 지방을 일원적인 체제에 의해 운영하겠 다는 의지를 표명한다.1) 하지만 이것이 5세기까지 존재하던 왕경과 지방의 차별 성을 없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신라 내의 모든 일을 法 이라는 단일 한 기준에 의해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일 뿐이다. 그에 따라 왕경과 지방 의 어 여러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것이 종합되 법흥왕 7년 (520) 에는 율령이 반포된다.5세기까지 계속 강화되어 온 왕경과 지 방의 차별성 역시 이러한 과정 속에서 여러 제도로 정착되게 된다. 신라에서 왕경인의 편재는 유리니사금 9년 (32) 경에 설치된 관등제를 통해 표시 되었다. 하지만 이 관등제는 지방인 비 6부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6세 기초의 개혁정치 과정에서 지방인들의 편재에 대해서도 중앙에서 관여하게 되었 으며, 지방의 모든 지역에 단일한 기준을 적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관등제를 지방에까지 그대로 확대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았 다. 이미 1-5세기 사이에 유지 강화되어 온 왕경과 지방의 차별성 때문에 두 지 역의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지방인들의 편재 를 위해 외위제라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외위제는 경위제와 의 비교 속에서 운영되었지만 서로 다른 체계를 갖고 있었다. 만약 외위와 경위가 같은 등급에 해당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음을 표시 해 주는 것은 아니다. 경위를 가진 자는 중앙에서 선출하는 관리로 진출할 수 있 었지만 외위를 가진 자는 지방의 촌주밖에 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경위제와 외위제의 구별은 이미 5세기까지 존재하던 왕경과 지방의 차별성을 제도화한 것 일 뿐이다. 개인의 정치적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관등은 계속 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 1) r 프 國 낮1 記 卷 第 四 新 羅 本 紀 第 四 지증마립간 4 년.6년
147 든 개인이 그 능력에 따라 계속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인이 속한 신분 에 따라 승진의 한계가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정하는 신분제로 알 려져 있는 것이 바로 골품제이다. 골품제는 크게 骨 과 두품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골품제의 가장 큰 특징인 골과 두품의 구별은 이미 앞에서 유리니사금 9 년 (32) 경부터 사회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고 알아본 바 있다. 그리고 4-5세기의 경주시내 고분의 위계성을 통해 이 시기에도 골품제와 같은 신분제가 운영되고 있었다는 연구도 있다. (최병현, 이종선, 2000: ) 따라서 골품제가 6 세 기에 갑자기 출현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지증마립간으로부터 시작된 여러 사회적 관습에 대한 제도화라는 큰 흐름에 따라 법흥왕 7년 (520) 에 제도로서 정착 된 것이라고 볼 필요가 있다. 표 -14 경위와 외위 이러한 신분제 역시 제도화의 처음부터 지역적 차별성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 었다. 경위제 자체가 신라의 왕경인 6부의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과 마찬가지 로 골품제라는 신분제 역시 6부의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48 이것은 관등제와 신분제가 그 발생 초기부터 신라의 핵심지역인 6부인만의 편재 를 위해 설치된 것이며 1 세기 중반이후 진행된 왕경과 지방의 차별성이 두 제도 의 공간적 확산을 방해했기 때문이다.6세기 이후에도 이러한 왕경과 지방의 차별 성을 철폐하지 못하고 제도화시키는 선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골품제라는 신분제 역시 지역적 제한성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골품제라는 큰 테두리 속에 서 개인의 정치적 지위를 표시하기 위한 경위제가 실시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두 제도는 모두 왕경인 6부인의 편재를 위해서만 사용되었다. 반면에 지방 사람들 은 기본적으로 중앙에서 선출하는 관리로 진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지방인이 맡 을 수 있는 직책의 수는 극히 한정되어 있었으며 그들이 미칠 수 있는 영향권도 출신지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리 고 신라까지 정별하려는 당나라 군대와의 전쟁을 676년에 최종적으로 승리함으로 써 치열하게 진행된 삼국간의 전쟁을 끝마치게 된다. 이러한 전쟁의 과정에서 신 라 사회는 왕권의 강화 등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여러 변화 중에서 도 왕경과 지방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이 바로 外 位 制 의 폐지이다. 외위 제의 폐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잡지제구 직관 하 外 官 조의 다음과 같은 기록 이 많이 참조되고 있다. 자료 5-1) 外 位 : 문무왕 14년 (674) 에 六 徒 의 진골로써 5경. 9주에 나가 살게 하고 별도로 官 等 이름을 칭하게 했다. 그 位 는 京 位 에 준한다.2) 위의 기록에서 外 位 가 문무왕 14년 (674) 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이미 6-7세기의 여러 금석문에 나타나는 外 位 를 통해 잘못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위의 기록은 오히 려 외위의 폐지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봄이 타당하다고 한다. (이종욱: 1974;60) 즉 외위 소지자에게 일괄적으로 경위를 지급하기 위해 비교 설정한 기준을 삼국 사기 의 擺 者 들이 거꾸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외위가 폐지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문무왕 13 년 (673) 에 백제 유민에게 부여한 경위라고 한다. (주보 돈, 1998) 이 때 부여된 관등은 백제 본국에서의 관등에 따라 경위와 외위가 모두 주어졌다.3) 그에 비해 신문왕 6 년 (686) 에 고구려 유민에게는 경위만이 주어졌다.4) 2) 外 位 文 武 王 十 四 年 以 六 徒 直 骨 出 居 於 五 京 九 州 別 稱 官 名 其 位 視 京 位 ( r 三 國 史 記 卷 第 四 十 籍 志 第 九 職 官 下 ) 3) 이 때 백제인에게 부여된 최고 경위가 제 11 위인 대내마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149 이 양자의 차이를 통해 문무왕 14 년 (674) 의 외위 설치 기록이 외위 소멸 기록을 잘못 인식했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 고구려 유민에 대한 경위의 부여는 통일 전쟁에서 많은 역할을 했던 신라의 지방민들에게까지 경위를 부여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 시기 이후로는 외위에 대한 기록이 일부의 흔적 을 제외하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종욱 1974) 또한 통일 이후 지방인 이 외위가 아닌 경위를 갖게 되었음이 여러 기록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5) 이 제 최소한 관등제의 측면에서는 통일 이전까지 유지되어 왔던 京 小 京 출신자와 지방 출신자 사이의 차별성이 철폐되었다고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정 치적 사회적 대우에 있었서의 차별성은 변화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사료는 이 와 같은 사실을 알려 준다. 자료 5-2) 外 員 村 主 는 5( 두)품과 같고, 次 村 主 는 4( 두)품과 같다.6) 비록 촌주층들이 관등 제 8위인 사찬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만 7) 그 사회적 대우 는 관등 제 10위인 대내마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5두품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왕경인과 지방인의 차별대우가 통일 이후에도 지 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차별은 장기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지배층이 왕도를 벗어나기 힘들게 만든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 이 시기에 일괄적으로 적용된 것일 뿐 실질적으로는 더 높은 관등을 부여받은 경우도 있었다 r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 (661)조에 항복한 백제인인 達 率 (백제관등 2 위) 助 服 과 恩 率 (백제관등 3위) 波 빼에게 급찬 (9 위)의 관등이 부여되었으며, 助 服 에게는 아울러 太 守 가 제수되 었다. 4) 이 때 고구려 유민에게 부여된 최고 관등은 일길찬 (7위)으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이 때 일괄적으로 적용된 기준일 뿐 실질적으로 더 높은 관등을 부여받은 경우도 있다. 고구려 유민 安 勝 에게는 고구려왕, 보덕왕 등의 칭호와 함께 경위 제 3위인 蘇 判 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문무왕의 妹 와 결혼시키기까지 했다.( r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 왕 10 년, 20년과 신문왕 3 년) 5) 이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金 石 文 으로는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제 2 권(신라 1. 가야 편)에 나오는 永 川 훔 提 牌 貞 元 銘 (798) 쫓 西 銘 阿 鋼 院 三 三 尊 四 面 石 像 (673 년 추정), 쫓 西 銘 三 尊 千 佛 醒 像 (673 년 추정)이 있고, 같은 책 제 3권(신라 발해 편)에서는 運 池 좋 鐘 銘 (833)과 觀 興 좋 鐘 銘 (856) 등이 있다. 6) 外 員 村 主 與 五 品 同 次 村 主 與 四 品 同 ( r 三 國 史 記 卷 第 三 十 三 雜 志 第 二 屋 舍 ) 7) 上 村 主 三 重 沙 千 뚫 王 口 口 口 第 츠 村 主 沙 千 龍 河 口 口 口 第 뜨 村 主 及 (?) 千 貴 珍 口 (?) ( rr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제 3권 (신라 발해 편), 한국고대사연구회 편, 1992, 제 7장 6. 觀 興 좋 鐘 銘 ) 이 종은 856년에 만들어졌다. 이 기록에 나오는 프 重 沙 千 의 ;즈 重 이 란 표현은 촌주층이 沙 千 (제 8위 사찬)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는 重 位 制 를 의미한 다
150 다. 1-2 지배층의 왕경 집중 경향 (1) 진골의 신분적 폐쇄성 신라 관리등용제도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신분에 의해 관등과 관직의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8) 이 중 관등 제 5위인 대아찬 이상의 지위에는 진골만 이 될 수 있었고 각종 관부의 우두머리인 영과 주의 도독 등 관직의 핵심 역시 진골만이 될 수 있었다. 이들 진골의 뿌리는 기본적으로 5세기 이전의 있으며, 그 이후 진골로 편입된 것은 금관가야 출신의 김유신 가문과 왕실집단에 고구려의 안 승 등 일부에 불과하다. 이 중 안승의 집안은 더 이상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이후 진골의 지위를 계속 유지한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진 골 집단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극단적인 신분 내혼을 행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자료 5-3) 國 人 (의 성씨에는) 金 朴 두 姓 이 많은데 성 이 다르면 혼인하지 않는다.9) 자료 5-4) 그 族 名 은 제 1 골과 제 2골로 자연히 구별된다. 형제의 딸이나 모 이모 從 妹 妹 를 다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다. 왕족은 제 1 골이며, 아내도 시 그 족으로 아들을 낳으면 모두 제 1 골이 된다. (제 1 골의 남자는) 제 2골의 고 역, 여 자에게 장가를 가지 않으며 간다 하더라도 언제나 購 쫓으로 삼는다 10) 위의 기록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중의 하나는 신분 내혼이 극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신분 내혼을 벗어나는 것은 신분 하락을 의미하고 있음을 신당서 의 기록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즉 같은 제 1 골끼리 8) r 삼국사기 卷 第 四 十 七 列 傳 第 七 설계두전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신 라에서는 사람을 쓰는데 骨 品 을 따지므로, 정말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더라도 뛰어념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인식을 갖고 있었던 설계두 는 진평광 43 년(62 1)에 당나라로 들어간다. 이것을 볼 때 관등과 관직의 높낮이에 신분적 한계가 있었음은 신라 하대만의 특정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9) 國 人 多 金 朴 兩 姓 異 姓 不 寫 婚 ( r 舊 居 書 東 東 列 傳 新 羅 ) 10) 其 族 名 第 - 骨 第 二 骨 以 팀 別 兄 弟 女 始 煥 從 械 妹 皆 뿜 一 寫 쫓 王 族 寫 第 骨 쫓 亦 其 族 生 子 皆 寫 第 一 骨 不 뿔 第 骨 女 雖 聚 램 寫 홍: 觸 ( r 新 庸 書 束 횟 列 傳 新 羅 )
151 결혼해야 그 자식도 제 1 골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신분이 아니면 신분이 하락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나올 수 있는 표현이다. 그 다음에 (제 1 골의 남자는) 보통 제 2골의 여자와 결혼하지 않으며,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購 훌으로 삼 는다는 표현 속에서 그러한 신분하락의 내용이 암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신분하 락( 族 降 )이 있었던 사실은 성주사 낭혜화상탑비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통해 잘 알 려져 있다. 자료 5-5) (낭혜화상의) 洛 性 은 김씨로 태종무열왕이 8 대조이시다. 할아버지는 周 川 으로 골품은 진골이고 韓 짧( 大 阿 滾 )을 지냈으며 고조부와 증조부는 모두 조정에서 재상, 나가서는 장수를 지내 집집에 널리 알려졌다. 아버지는 範 淸 으 로 골품이 진골에서 한 등급 떨어져서 得 難 이 되었다.[나라에 5품이 있는데 聖 而, 員 骨, 得 難 등이다. ( 得 難 은) 귀성을 얻기 어려움을 이야기한 것이다Ii" 文 購 에서 혹 구하기는 쉽지만 얻기는 어렵다 고 말한 것을 따서, 6두품의 수가 많지만 귀성이 되기는 제일 낮은 관등( 一 命 )에서 가장 높은 관등( 九 命 )에 이르 는 것과 같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니 4.5두품은 말할 필요도 없다 ]10 낭혜화상은 애장왕 원년 (800) 에 태어나 진성여왕 2년 (888) 에 죽었다. 따라서 그 의 아버지의 신분하락이 있었던 것은 8세기 중반 이후에 있었던 일이다. 위의 기 록을 통해 8세기 중반 경에도 진골로부터의 신분하락이 일어났으며 6.5.4두품 에서 진골로의 신분상승이 일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 은 신분하락의 흔적은 감산사미륙아미타상조상기에 나오는 重 阿 滾 金 志 誠 과 황룡 사구층목탑사리합기에 나오는 重 阿 千 金 堅 其 12), 삼국사기 卷 第 十 新 羅 本 紀 第 十 원성왕 7년조에 나오는 三 重 阿 浪 金 言 의 예에서도 보이고 있다. 김씨 성은 기 본적으로 왕족만이 사용하던 것으로서 진골들의 성씨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 해 김지성과 김견기 김언의 조상은 진골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갖 고 있는 중아찬과 삼중아찬은 6두품만이 가질 수 있는 관등이다. 따라서 그들의 가계는 언제인지는 몰라도 신분하락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신분하락 의 원인이 무엇인지 위의 기록에는 나오고 있지 않다. 하지만 구당서 와 신 당서 에서 검토한 것을 참조해 볼 때 6두품 신분과의 결흔 때문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11) r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제 3 권(신라 발해 편) 제 1 장 7. 聖 住 좋 朋 慧 和 尙 搭 牌 12) r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제 3권(신라 발해 편),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52 이러한 진골신분의 신분적 페쇄성은 그들의 거주 공간을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 했다고 볼 수 있다. 진골신분은 그 이전부터 왕경에 거주했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어떤 진골신분의 소유자가 신분 내흔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다수의 진골신분이 사 는 왕경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조건을 무릅쓰면서까지 지방으로 낙향한다면 자신의 후손들이 진골신분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 다. 그런데 신분에 따른 대우가 현격하게 차이가 났던 신라 사회 속에서 이러한 선택을 한다는 것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얼은 거 의 일어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1 3 ) 진골신분을 유지하면서도 지방에 낙향했던 경 우로써 잘 알려진 인물은 제 37 대 선덕왕 ( ) 의 뒤를 이어 왕으로 추대되었다 가 제 38 대 원성왕 ( ) 에 의해 밀려난 김주원이다 r 三 國 遺 事 卷 第 二 紀 異 第 二 元 聖 大 王 조에 의하면 이 일을 겪은 이후 그는 명주(강롱)로 물러가 살았다고 한다 14)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릉대도호부 인물조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 이 나오고 있다. 자료 5-6) 김주원( 金 周 元 ) : 태종왕( 太 宗 王 )의 손자이다. 당초에 선덕왕( 宣 德 王 ) 이 죽고 후사( 後 關 )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는 정의태후( 貞 廳 太 텀)의 교지( 敎 답) 를 받들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왕족 상대장등( 上 大 長 等 ) 경 신( 敬 信 )이 중인(짧 人 )을 위협하고 먼저 궁( 宮 )에 들어가서 왕이 되었다. 주원은 화를 두려워하여 명주로 물러가고 서울에 가지 않았다. 2년 후에 주원을 명주 군 왕으로 봉하고 명주 속현인 삼척 근을어(규 ζ 於 ). 울진( 薦 珍 ) 등 고을을 떼 어서 식읍( 食 련)으로 만들게 하였다. 자손이 인하여 부( 府 )를 관향( 實 獅 )으로 하 13) 이와 같은 사실에 반하는 듯한 내용이 츠 國 遺 事 卷 第 二 紀 異 惠 泰 王 부분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7월 7 일 大 悲 角 千 이 반란을 일으키자( 戰 起 ) 王 都 및 五 道 州 那 의 모두 96 角 千 이 서로 싸워 큰 난이 일어났다. 大 행 角 千 家 가 망하자 그 집의 資 寶 범을 왕궁으로 옮기었다... 이 기록을 글자 그대로 보면 州 那 에도 각간이 많이 거주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첫째, 17등 관등제의 제 1 위에 해당하는 角 千 이 96 명이나 있을 수는 없다. 여기서 角 千 이 96 명이나 되었다는 표현은 고위 진골 또는 진골가문 성원의 상당 부분이 이 사건에 관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으로 보아야 한다 r 三 國 史 記 新 羅 本 紀 第 九 혜공왕 4년조에는 대공과 그의 아우 대겸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의 관등이 각각 - 吉 滾 (7 위)과 阿 滾 (6 위)으로 나온다. 둘 째, 王 都 및 五 道 州 那 이란 표현에서 州 部 은 그들의 거주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 라 진골귀족이면서 都 督. f 士 품 太 守 등으로 파견되었던 지방이란 뜻으로 보는 것 이 합리적이다. 이렇게 보면 위의 기록은 왕경에 있건, 지방에 파견되었건 고위 진 골귀족이라면 大 悲 角 千 의 亂 에 거의 모두 간여할 정도로 큰 혼란이 있었다는 뜻으 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4) 周 元 退 居 펼 州
153 였다. 김종기( 金 宗 基 ) : 주원의 아들인데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김정여( 金 貞 節 ): 종기의 아들이다. 비로소 조정( 朝 廷 )에 벼슬하여 상대등( 上 大 等 )에 이르렀고, 명 원공( 演 源 公 )으로 봉함을 받았다. 김양( 金 陽 ): 정여의 아들이다. 김명( 金 明 )의 반 란 때에 신무왕( 神 武 王 )을 도와서 사직( 社 樓 )을 안정시켰다. 벼슬이 시중겸 병 부령( 兵 部 令 )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명원군 왕으로 봉하게 되었다 15) 위의 기록을 통해 볼 때 김주원이 명주에 와서 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 된다. 하지만 김주원이 왕경에 있었던 자신의 모든 재산을 버리고 완전히 명주로 낙향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r 삼국사기 卷 第 十 新 羅 本 紀 第 十 헌덕왕조를 보면 그의 아들인 김헌창은 헌덕왕 5 년 (813) 에 이찬의 지위로서 무진주 도독을 맡 고 있었다. 다음 해에는 시중이 되었으며, 같은 왕 8년 (816) 에 청주도독이, 13년 (821)에는 웅천주도독이 되어 14년 (822) 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다. 또 삼국 사기 卷 第 四 十 四 列 傳 第 四 김양조에 의하면 김주원의 또 다른 아들인 김종기 는 소판 (3 위)이었으며, 손자인 정여는 파진찬 (4위)이었고, 증손자인 金 陽 은 흥덕왕 3년 (828) 에 고성군 태수로 임명되었고 같은 왕 11 년 (836) 이전에 무주 도독이 되 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김주원이 명주로 낙향했던 것은 개인에 한정되었든가, 아니면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r신 증동국여지승람 의 김주원 가계에 대한 기록은 후대에 성씨의 본관과 조상이 중 요하게 여겨지면서 일부 후손들에 의해 덧붙여진 것으로 여겨된다. 여기서 김주원 이 명주로 잠시 낙향했던 것은 위의 기록대로 그의 食 둠이 이곳에 있었던 연고 때문이라고 생각되며 그렬 경우 별장이나 그것을 관리하는 형태의 것이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16) 15) r 고전국역총서 신증 동국여지승람 J 5( 색인) 강릉대도호부 인물, 민족문화추진회, ) r 三 國 遺 事 卷 第 三 搭 像 第 四 臺 山 五 萬 員 身 부분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 다. 자장이 신라에 돌아왔을 때 햄 神 大 王 의 태자 寶 川 孝 明 두 형제 L...J가 河 西 府 [지금의 명주의 (이름)에도 河 西 都 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다. 河 曲 縣 이라고도 쓴 다. 지금의 劇 州 는 이것이 아니다.J 世 敵 角 千 之 家 에 이르러 一 宿 을 했다... 이와 같 은 내용이 三 國 遺 事 卷 第 三 搭 像 第 四 펼 j I[ 古 河 西 府 也 ] 五 臺 山 寶 Pt 徒 太 子 傳 記 에도 나온다. 角 千 은 17등 관등제에서 제 1 위에 해당하는 높은 지위로서 진골만이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일연에 의하면 태자 寶 川 孝 明 은 신문왕 ( )의 이므로 위의 일은 7세기 후반에 있었던 일이다. 위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7 세 기 후반에 진골의 집이 지금의 강릉 지역에 있었던 것이 되며, 강롱이 흙 州 의 州 治 였기 때문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角 千 과 같이 높은 지위의 사람이 당시에 강릉 지역에만 집이 있었다고 상정하기는 어렵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집안 은 왕경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사회 정치적 접촉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상태가 아들
154 (2) 관리둥용제도의 혜쇄성 신라사회에서 관리등용의 최초 통로로서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것은 화랑도와 독서삼품과 정도이다. 그 외의 다른 통로에 대해서는 기록 속에 나타나고 있지 않 아 구체적인 실상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신라의 관리등용제도가 갖고 있는 지리적 성격은 이 두 제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대강의 모습을 유추할 수밖 에 없다. 화랑도는 삼국사기 에 의하면 진흥왕 37년 (576) 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삼국유사 에 제 48 대 경문대왕 ( ) 이 18세에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國 仙 이 되었고 17), 진성여왕대 ( ) 에도 화랑인 孝 宗 郞 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18) 거의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유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화랑도에 대한 r삼국사 기 의 기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자료 5-7) 37년 (576) 봄 처음으로 源 花 를 받들었다. 처음에는 君 닮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근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모여서 떼지어 놀게 하여 그 行 義 를 관찰한 이후에 천거하여 쓰려고 했다. 드디어 美 女 2 인을 뽑아서... 그 후 美 鏡 의 럼 남자를 취해 장식하여 화랑이라 이름짓고 그를 받들게 하니 徒 聚 이 구름처 모이고 혹 서로 道 義 로써 연마하고, 혹 歌 樂 으로써 기뻐했다. 山 水 를 유람하 며, 즐기는데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邱 正 을 알게 되고, 善 한 자를 가려서 그를 조정에 천거한다. 그러므로 김대문이 花 郞 世 記 에서 賢 住 忠 멀이 이곳으로부터 두드러졌고, 良 將 勇 후이 이것을 통해 나왔 다. 라고 말했다 19) 되므로 각간의 지위에 있었던 본인은 문제가 없지만 그의 자식들은 불이익을 당하 고 있다는 결과가 된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角 千 의 집은 왕경과 지방에 동 시에 있을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집들 중 왕경에 있는 것이 本 家 이고, 지방에 있었던 食 둠이나 莊 園 과 관련되어 존재한 것은 별장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게 된다. 식읍이나 장원과 관련된 진골의 집이 지방에 있었을 것으로 예상 되는 자료가 三 國 遺 事 卷 第 프 搭 像 第 四 伯 嚴 좀 石 搭 舍 利 부분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輝 宗 의 伯 嚴 좋는 草 八 縣 [지금의 초계]에 자리잡았다... 前 代 신라 때 北 흰 廳 基 에 이 절을 輪 置 하였다... 이 기록에 나오는 北 힘은 35금입택의 하나로 나 오므로 왕경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北 켠 廳 은 아마도 북택의 食 몹 또는 莊 園 과 관련되어 지금의 합천군 초계면의 어딘가에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왕 경에 사는 어떤 인물이 北 힘 廳 에 하루를 묶었다면 00 角 千 之 家 로 기록할 가능성 은 충분히 있다. 17) r 三 國 遺 事 卷 第 二 紀 異 第 二 第 四 十 八 代 景 文 大 王 경문왕 ( ) 시절에 國 仙 邊 元 郞, 學 H타 郞, 桂 元, 寂 宗 郞 등이 있었음도 기록되어 있다. 18) r 三 國 史 記 卷 第 四 十 八 列 傳 第 八 孝 女 知 恩 과 三 國 遺 事 卷 第 五 孝 善 第 九 負 女 養 母 에 나온다
155 위의 기록에 의하면 화랑도의 설치목적은 인재의 양성과 선발에 있었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라에서는 명산대천을 집단적으로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지도력이 강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눈에 띄게 만드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렸을 때부터 다른 신분끼리 어울리게 하여 신분간의 위화감이나 갈등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기동 1984;357) 화랑도의 이러한 특징 은 신라 사회에서 인재의 양성과 선발에 인맥을 통한 결합이 매우 중요했음을 알 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인맥의 형성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의 기록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자료 5-8) 劍 君 은 감L 文 大 舍 의 아들이고 사량궁 舍 人 인 되었다. 건복 44년 정 해 (627) 8월에 서리가 내려 각종 곡식을 해치고 다음 해에 봄과 여름에 큰 기 근이 들어 백성들은 자식을 팔아 끼니를 구했다. 이 때 宮 中 의 여러 사인들이 공모하고 唱 醫 홈의 곡식을 훔쳐서 나누었는데 검군만이 홀로 받지 않았다. 사 인들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이 다 받는데 검군만이 거절하니 무슨 까닭인가? 만일 적은 것을 싫어해서라면 청하는대로 다시 더해 주겠다 고 하였다. 검군이 웃으며 내가 近 郞 의 門 徒 에 이름을 두고 風 月 徒 의 마당에서 수행하였는데, 진 설로 그 義 가 아니면 비록 천금의 利 라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고 하였다. 그 때 大 日 이찬의 아들이 화랑이 되어 이름을 근랑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검군은 (그들이 자신을) 짧 殺 할 것을 알고 근랑을 작별하며 말 하기를 금일 이후로는 다시 서로 만나지 못하겠습니다 고 하였다. 근낭이 (그 이유를) 물었지만 검군이 말하지 않았고 再 三 물으므로 이에 그 이유를 대략 말했다. 근낭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관리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검군 이 알면서도 억지로 먹고 곧 죽었다... 20) 자료 5-9) 제 32 대 효소왕 때에 竹 율 郞 의 무리 가운데에 得 烏 [또는 得 갑] 級 千 이 있어서 風 流 黃 卷 에 이름을 올려놓고 날마다 출근하고 있었는데, 어느 땐가 19) 三 十 七 年 春 始 奉 源 花 初 君 많 病 無 以 知 人 欲 使 類 聚 훨 遊 以 觀 其 行 義 然 後 學 而 用 之 途 簡 美 女 二 人... 其 後 更 取 美 鏡 男 子 뼈f 겉w 之 名 花 郞 以 奉 之 徒 짧 雲 集 或 相 廳 以 道 義 或 相 밤 以 歌 樂 遊 興 山 水 無 遠 不 至 因 此 知 其 人 邱 正 擇 其 善 者 薦 之 於 朝 故 金 大 問 花 郞 世 記 日 賢 住 忠 ê 從 此 而 秀 良 將 勇 후 由 是 而 生... ( r 三 國 史 記 卷 第 四 新 羅 本 紀 第 四 진흥왕 36 년) 20) 劍 君 h 文 大 舍 之 子 寫 沙 梁 宮 舍 A 建 福 四 十 四 年 T 종 秋 八 月 P월 露 殺 諸 좋양 明 年 春 夏 大 創 民 賣 子 而 食 於 時 宮 中 諸 舍 人 同 護 짧 P 昌 흉흉흉 顆 分 之 劍 君 獨 不 受 諸 舍 人 日 왔 人 皆 受 君 獨 去 P 之 何 也 若 構 小 請 更 加 之 劍 君 笑 되 樓 編 名 於 近 郞 之 徒 修 行 於 風 月 之 底 챔 非 其 義 雖 千 金 之 利 不 動 心 휠 時 大 日 伊 滾 之 子 寫 花 郞 號 近 郞 故 i 爾... 劍 君 知 其 課 殺 離 近 郞 R 今 日 之 後 不 復 相 見 郞 問 之 劍 君 不 言 再 三 問 之 乃 略 픔 其 由 郞 日 胡 不 듬 於 有 司... 劍 혐 知 而 彈 食 乃 死... ( Ir 三 國 史 記 卷 第 四 十 八 列 傳 第 八 劍 君 )
156 i 10 일이 념도록 보이지 않았다. 죽만랑은 그의 어머니를 불러 그대의 아들이 어 디 있는가를 물으니 어머니는 말한다. I 健 典 모량(리)의 益 宣 阿 千 이 내 아들을 富 山 城 용 直 으로 보냈으므로 빨리 달려가느라고 미처 죽만랑에게 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죽만랑이 말한다.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간 것이라면 찾아볼 펼요가 없겠지만 이제 공사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대접해야겠소. 이에 굵 館 한 그릇과 술 한 병을 가지고 左 人 [우리말에 皆 % 知 라는 것이니 이는 없 模 을 말한다]을 거느리고 찾아가니 낭의 137 명도 위의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 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得 烏 失 이 어디 있는가고 물으니 문지기는 대답한다. 지금 익선 아간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을 하고 있습니다. 낭은 받으로 찾아 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을 대접했다.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오려 했으나 익선은 굳이 반대하고 허락하지 않는다. 이 때 使 更 쩌 珍 이 推 火 那 能 節 의 租 30석을 거두어 싣고 성안으로 가고 있었다. 죽만랑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풍미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고집불통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 던 30석을 익선에게 주면서 휴가를 주도록 함께 청했으나 오히려 허락하지 않 는다. 이번엔 珍 節 舍 知 의 말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했다. 조정의 花 主 가 이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서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럽고 추한 것을 씻어주려 하니 익선은 도망하여 숨어버렸다. 이에 그의 맏아들을 잡아갔다. 때는 件 장 몹시 추 운 날인데 성 안에 있는 못에서 목욕을 시키니 열어붙어 죽었다. 효소왕이 그 말을 듣고 명령하여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에 오른 자는 모조리 쫓아내어 다시 는 관청에 붙이지 못하게 하고 增 衣 를 입지 못하게 하고 만일 중이 된 자라도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2 1) 자료 5-10) 孝 女 知 恩 한기부의 백성인 連 權 의 딸이었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 스러웠는데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홀로 그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 때 효종 랑이 나가 놀다가 그것을 보고 돌아와 부모에게 청하여 집의 조 100석과 衣 物 을 날라다 주었다. 또 주인에게 보상하고 양민이 되게 하였다. 낭도 수천인도 각각 조 1 석을 내어 주었다 22) 21) 第 三 十 二 孝 昭 王 代 竹 憂 郞 之 徒 有 得 烏 [-동갑] 級 子 課 名 於 風 流 黃 卷 追 日 什 進 隔 句 日 不 見 郞 煥 其 母 問 爾 子 何 在 母 日 l 鐘 典 ~ 梁 益 宣 阿 千 以 我 子 差 富 山 城 홈 直 騙 去 行 急 未 마끊 解 於 郞 郞 日 # 子 若 私 事 適 彼 則 不 須 尋 誌 今 以 公 事 進 去 須 歸 亨 롯 乃 以 둠 館 一 合 酒 一 닮 率 左 人 [ 獅 i 皆 Pt 知 言 fjx 模 也 ] 而 行 영 1) 徒 百 三 十 七 人 亦 具 樓 待 從 到 富 山 城 問 圍 人 得 烏 失 쫓 在 人 R 今 在 益 宣 田 隨 例 走 t 投 郞 歸 田 以 所 將 酒 館 響 之 請 圍 於 益 宣 將 欲 f 皆 還 益 宣 固 禁 不 許 時 有 使 更 1Jit 珍 管 收 推 火 那 能 節 租 프 十 쉰 輸 送 城 中 美 郞 之 重 士 風 味 圖 宣 暗 塞 不 通 乃 以 所 領 三 十 石 體 益 宣 助 請 增 不 許 又 以 珍 節 舍 知 騎 馬 較 具 貼 之 乃 許 朝 廷 花 主 聞 之 遺 使 取 益 宣 將 洗 溶 其 ~ 醒 宣 逃 隱 琮 其 長 子 而 居 時 며장 極 寒 之 日 洛 洗 於 城 內 池 中 仍 合 演 死 大 王 聞 之 動 후 梁 里 人 從 官 者 ~ 合 點 遺 更 不 接 公 暑 不 著 黑 衣 若 寫 增 者 不 合 入 鐘 鼓 좋 中... ( r 三 國 遺 事 卷 第 二 紀 異 第 τ 孝 n김 ::Ef\:: 竹 답 郞 ) 22) 孝 女 知 恩 韓 l뼈 部 百 姓 連 權 女 f 也 性 至 孝 少 喪 父 獨 養 其 母... 時 孝 宗 郞 出 遊 見 之 歸 請 父 母 輸 家 藥 百 - 石 及 衣 物 予 之 又 借 買 ~t 以 從 良 郞 徒 幾 千 人 各 出 異 四 十 八 列 傳 第 八 쭈: 女 솟!] 恩 ) 石 寫 曾... ( r 三 國 史 記 卷 第
157 자료 5-11) 효종랑이 남산 포석정(혹은 三 花 述 이라고도 한다)에서 놀았는데 門 客 들이 모두 급히 달려왔으나, 오직 두 사람만이 뒤늦게 왔다.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들이 대답했다. 분황사의 東 里 에 여인이 있는데 나이는 20세 안팎이었습니다낭은 그것을 듣고 숙연하여 독식 100웹을 보냈으며, 낭의 부 모님 역시 한벌의 옷을 보냈다. 낭의 千 徒 는 租 석을 거두어 보냈다... 23) 자료 5-8을 보면 진평왕대 ( ) 의 화랑인 근랑과 낭도인 검군의 관계가 매우 돈독했음을 알 수 있다. 자료 5-9를 보면 효소왕대 ( ) 에 살았던 竹 壘 郞 과 得 烏 와의 인적 관계는 租 30 石 과 말안장을 주고서라도 휴가를 얻어내려 할 정도로 아주 강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죽만랑 무리의 다른 낭도로 나오는 137 명 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한 자료 5-10과 5-11 을 통해 진성여왕 ( ) 때의 효종랑과 그의 무리 수천 또는 1,000명도 門 客 이란 표현과 힘을 모아 가난한 사람 을 도와주는 것을 통해 볼 때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이 러한 끈끈한 인적 관계는 후에 관직으로 진출한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낭도의 무리가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개 있었다고 알려 져 있으며, 각 무리의 수도 효종랑의 예에서 보듯 명 이상인 경우에 이를 정 도로 많았다고 한다.(이기동 1984;334) 이와 같은 사실을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면 관직으로의 첫 진출에서 화랑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 이것은 화랑도에 참여했던 자와 그렇지 않았던 자의 사이에는 이후 관직으로의 진출과 승진에서 현실적인 격차가 컸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관직으로 진출하려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랑도에 참여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화랑도의 최고 위치인 화랑(또는 國 仙 )에는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볼 때 거의 진골귀족 출신만이 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기동 1984;335) 이 진 골귀족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대부분 왕경에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화랑도 무리의 일상적인 인맥 관계는 주로 왕경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만약 이들의 일부가 지방으로 낙향할 경우 그러한 인맥 관계는 매우 약화될 것이다. 또 지방에 거주하는 자들이 화랑도에 참여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일시적으로라도 왕경으로 거주지를 옮겨야만 했을 것이다. 특히 화랑도는 성인이 되기 이전부터 수련이 시 작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방 출신자들일지라도 일찍부터 왕경에 와서 살거나 23) 孝 宗 郞 遊 南 山 願 石 亨 [ 或 i 三 花 述 ] 門 客 星 騙 有 二 客 獨 後 郞 問 其 故 R 췄 皇 좋 之 東 里 有 女 年 : 十 左 右... 郞 聞 之 裡 然 送 쫓앉 i 百 혐t 郞 之 二 親 亦 送 衣 務 i 聲 郞 之 千 徒 敏 租 -- 千 石 遺 之... ( r 코 國 遺 事 卷 第 五 孝 善 第 九 負 女 養 母 )
158 관계를 맺고 있어야 화랑도에 쉽게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에서 또 다른 관리 등용의 최초 통로로 나오는 것이 원성왕 4년 (788) 에 설 치된 讀 書 三 品 科 이다. 그런데 이 독서삼품과는 신문왕 2 년 (682) 에 설치된 國 學 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 국학에 입학할 수 있는 신분은 관등( 位 )이 대내마와 내마에 이른 다음 학교를 나가게 한다 라는 구절을 통해 짐작할 수 있 다.24) 학교를 나가는 관등이 5두품까지 소유할 수 있는 대내마(1 0위)나 내마(1 1 위) 라는 사실을 통해 최소한 5두품 이상이 입학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내마가 5두품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 관등임과 30세 이전에는 학교를 나가야 했음을 고려해 볼 때 실질적으로는 6두품 이상이었을 것이다. 국학에 입학할 수 있는 신분이 이렇다면 관리 등용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독서삼품과가 왕경에 있었던 國 學 의 재학생만을 대상으로 실시되었기 때 문에 이 통로를 통해 관직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자는 임시적으로라도 왕경에 거 주지를 마련해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신라에서는 관리등용의 대표적인 통로였던 화랑도와 독서삼품과의 운영을 통해 볼 때 관직으로의 진출에서 왕경에 거주한다는 것은 하나의 큰 특권과 같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진골귀족 뿐만 아니라 6.5.4두품과 같은 중 하 위 지배층 역시 왕경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3 펴지배층의 왕경 집중 경향 (1) 진골귀족의 경제력과 인구 장악력 전통사회에서는 잉여 생산물의 대부분이 지배층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특히 최 고 지배층이 잉여생산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최고 지배층의 공간적 분포는 물자의 분산과 집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신라에서는 최고 지 배층의 거의 대부분이 왕경에 집중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잉여생산물의 공간적 집중성은 상당히 높았을 수밖에 없다. 이 럴 경우 신라 왕경으로의 인구 및 물자의 집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이해하는데 당시의 최고 지배층이었던 진골집단의 경 제력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한 파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점에서는 우선 다음 24) r 프 國 벚 記 卷 第 프 十 八 짧 志 第 七 職 템, c
159 과 같은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료 5-12) 재상가는 禮 이 끊이지 않고 폈 僅 이 3, 000명이며 甲 兵, 소, 말, 돼지 의 숫자도 그 수와 비슷하다. 바다 가운데 있는 산에서 목축하고 잡아먹어야 할 때 쏘아 잡는다.25) 자료 5-13) 째 時 에 武 州 남쪽 경계에 있는 黃 훗 島 i 尼 浦 에 도착해서 정박했다. 묘 草 島 라고도 한다.4.5 명이 산 위에 있어서 사람을 보내 잡으려고 했는데 그 들이 달아나 버려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여기는 신라국의 第 三 宰 相 이 말을 방 목하는 곳이다. 高 移 島 에서 구초도에 이르기까지 섬들이 서로 연달아 있다. 동 남쪽으로 멀리 탐라도가 보인다.(847년 9월 6 일 )26) 우선 신당서 에서 표현한 재상이 1 명이 아님은 엔닌( 圓 仁 )의 일기에 기록된 第 三 宰 相 이라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27) 그리고 이러한 재상이 아니더라도 각 관부의 우두머리인 令 이나 주의 우두머리인 도독을 맡고 있었던 진골귀족 역시 재상에 못지 않은 권력과 부를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정) 그리고 이들 진골귀족들 은 삼국유사 에 기록된 금입택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진골귀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재상가의 인적 물적 자원은 r신당서 에 표현된 것을 그대로 믿는다 면 후대의 어떤 지배층보다도 규모가 컸다. 우선 인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재상가 소속이었던 노동 3.000명은 결코 작지 않은 숫자이다. 물적 측면에서도 소 말 돼지의 숫자가 각각 3.000에 가까우며 소유 토지로부터 들어오는 禮 도 끊이지 않 고 들어왔다고 표현될 정도로 많았다. 25) 宰 相 家 不 總 綠 (v( f 童 三 千 A 甲 兵 牛 馬 錯 稱 之 룹훔 救 海 中 山 須 食 乃 射 ( r 新 庸 書 東 奏 列 傳 新 羅 ) 26) r 입당구법순례행기 J, 圓 仁 지음 / 신복룡 번역 주해, 정신세계사, ) IT" 三 國 史 記 卷 第 四 十 八 列 傳 第 八 孝 女 知 恩 부분에도 효종랑의 아버지가 第 三 宰 相 이 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28) 신라 관부의 令 은 총 31 명이며 이중 좌이방부와 우이방부의 令 4 인은 잡찬 (3 위)에 서 급찬 (9위)까지 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대아찬 (5위)에서 각간(1위)이나 그 위까지 가능했다. 이찬 (2 위)에서 급찬 (9위)까지 할 수 있었던 도독이 9 명이고, 파진찬 (4 위) 에서 급찬 (9위)까지 할 수 있었던 사신이 5명이었다. 이외에 3궁을 관장하며, 관등 이 대아찬 (5 위) 또는 파진찬 (4 위) 이상이었던 私 댄이 1 명 있었다. 이들의 수는 총 46 명이며, 이외에 무관으로 급찬 (9위)에서 각간(1위)까지 할 수 있었던 諸 軍 官 이 39 명 있었다. 이들을 합하면 모두 85 명이다. 이 숫자에는 겸임과 형제나 부자지간 등 이 포함된 것이기 때문에 당시 최고 진골귀족 집안의 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만 대략적인 이해에는 도움을 줄 수 있다
160 자료 5-14) (문무왕 9년 (699) 왕이) 馬 많 174곳을 나누어주었는데 所 內 에 22 곳, 官 에 10곳을 속하게 했다. 유신 태대각간에게 6 곳, 인문 태각간에게 5 곳, 각 간 7 인에게 각각 3 곳, 이찬 5 인에게 각각 2 곳, 소판 4 인에게 각각 2 곳, 파진찬 6 인과 대아찬 12 인에게 각각 1 곳을 나누어주었고, 나머지 74 곳은 적절하게 나 누어주었다, 29) 일단 바다 가운데 있는 산에서 목축하고 필요할 때 잡아먹는다. 는 표현 자체가 틀리지 않았음은 엔년( 圓 仁 )의 일기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문무왕 9년 (699) 에 馬 많를 나눠준 기록도 신당서 의 기록을 이해하는데 참고될 수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볼 때 진골 집안의 대부분이 문무왕 9년 (699) 경에 최소한 1 개 이 상의 馬 많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과연 말의 숫자가 3, 000 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결코 적지 않은 수 의 말을 키웠다고 볼 수 있다. 재상가의 녹이 끊이지 않았다 는 표현도 그렇게 과 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 기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항복해온 금관국의 김구해에게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했는데 30) 이 규모는 통일 신라시대의 입장에서 보면 최소한 3 개 이상의 현의 규모와 맞먹는다. 이와 비슷한 규모의 식읍에 대한 흔적은 선덕왕 ( ) 사후 왕위 후보 1순위였다가 원성왕 에 의해 빌려났던 진골귀족 김주원의 기록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자료 5-6에 의 하면 명주 관할의 三 斷, JTζ 於, 薦 珍 등 3 개 고을이 김주원의 식읍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식읍의 규모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은 검유신과 김인문에게 내려진 식읍 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자료 5-15) (문무왕 2년 (662))... 功 을 논하여 본피궁의 財 貨 田 莊 없 樓 을 中 分 하여 演 信 과 仁 問 에게 하사하였다,3 0 자료 5-16) (문무왕 3 년 (663)) 겨울 11 월 20 일에 京 에 이르자 與 信 에게 田 500 結 을 하사하였다. 그 나머지 장졸에게도 상을 내렸는데 차등이 있었다, 32) 자료 5-17) (문무왕 8년 (668))... 이에 (김유신에게) 太 大 함 發 輪 의 職 과 食 둠 29) 領 馬 많 凡 一 百 七 十 四 所 屬 所 內 二 十 = 官 十 ~E훤 信 太 大 角 千 六 仁 問 太 角 千 五 角 千 七 人 各 三 伊 滾 五 人 角 二 蘇 判 四 人 各 二 波 珍 滾 六 人 大 阿 浪 十 二 A 各 一 以 下 七 十 四 所 隨 宜 陽 之 ( r 三 國 史 記 卷 第 六 新 羅 本 紀 第 六 문무왕 9 년) 30) r프 國 史 記 卷 第 四 新 羅 本 紀 第 四 법흥왕 19년 31) 論 功 中 分 本 彼 宮 財 貨 田 莊 如 樓 以 陽 庸 信 仁 問 ( r 三 國 史 記 卷 第 六 新 羅 本 紀 第 六 문무 왕 2 년) 32) 장 十 一 月 二 十 日 至 京 陽 l 東 f듭 田 Il~ 百 結 其 餘 將 쭈 賞 陽 有 差 ( r 三 國 史 記 卷 第 四 十 二 列 傳 第 二 金 l 東 信 中 )
161 500호를 제수했다.잃) 자료 5-18)... 태종이 그 공을 기록하고 (김인문에게) 식읍 300호를 제수하였 다... 문무대왕이 (668년에) 인문의 英 略 勇 功 을 特 異 常 倫 하다고 여겨서 故 大 珠 角 千 朴 組 의 식읍 500호를 하사했다.3 4 ) 김인문이 문무왕 8년에 故 大 珠 角 千 朴 組 의 식읍 500호를 하사 받았다는 구절 을 통해 실질적으로 내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록상에서 찾을 수 있는 食 둠은 김유신이 500호이고 김인문이 800호이다. 이 숫자만으로도 김유신과 김인문이 받 은 식읍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숫자가 김유신과 김인 문이 받은 식읍의 전부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김인문보다 전쟁과정에서 더 많 은 역할을 했던 김유신이 더 적은 식읍을 하사 받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특별한 공을 세웠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는 大 隊 角 千 朴 組 와 김유신이 食 둠 500호로 같았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어쨌든 김유신과 김인문 의 식읍은 기록에 나오는 것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大 쨌 角 千 박뉴의 예를 통해 볼 때 고위 관등의 진골귀족이 대부분 상당한 규모의 식읍을 소유하고 있었 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식읍의 소유는 김주원의 예를 통해 볼 때 후대에도 계속 되었으며, 고위 관동을 소지한 진골귀족 대부분이 상당한 규모의 식읍을 하사 받 을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王 都 출신으로서 김씨 성을 가지고 있으나 어머니가 伊 民 인 점을 보아 진골귀족 에서 신분이 하락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증대사 ( ) 도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莊 12 區 500결의 땅을 사찰에 희사하였다.3 5 ) 같은 비문에 의하면 그는 9살에 아버 지가 죽자 바로 사찰에 들어갔으며 17살에 具 足 폈를 받았다. 이와 같은 상황을 참조할 때 그 스스로 재산을 모았을 가능성은 별로 없으며 그가 사찰에 희사한 500결의 땅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이외에도 규모가 얼마인지 는 모르나 개인토지를 사찰에 희사하는 기록은 상당히 많이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개인토지들은 지방 곳곳에 산재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33)... 於 是 授 太 大 웹 發 輪 之 職 食 둠 五 百 戶 ( r 르 國 史 記 卷 第 四 十 三 列 傳 第 三 金 康 信 下 ) 34)... 太 宗 錄 其 功 授 食 둠 三 百 戶... 文 武 大 王 以 仁 問 英 略 勇 功 特 異 常 倫 陽 故 大 珠 角 千 朴 組 食 둠 五 百 戶 ( r 프 國 史 記 卷 第 四 十 四 列 傳 第 四 金 仁 問 ) 35) ["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제 3권(신라 발해 편) 제 1 장 11. 鳳 嚴 좋 智 證 大 師 搭 牌. 이 때 500 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정창원소장신라촌락문서에 나오는 4개 촌의 전답이 모두 합해 약 564결이며, 인구는 462명이라는 사실을 통해 대 략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이인철, 1996; )
162 바로 開 仙 총 石 燈 記 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다. 자료 5-19) 龍 紀 3년(진성여왕 5 년, 891 년) 辛 玄 10월 어느 날 승려 入 雲 은 서 울에서 보내 준 租 (혹은 서울에 보내야 할 租 ) 1 백석으로 烏 乎 比 所 里 의 公 書 와 俊 休 에게서 그 몫의 石 댈 t 平 大 業 에 있는 물가의 논 4 결[ 注 : 논은 5돼기로 되어 있는데, 동쪽은 令 行 의 토지이고, 북쪽도 마찬가지다. 남쪽은 洗 렬의 토지이고 서쪽은 개울이다]과 물가로부터 멀리 있는 논 10결[ 注 : 논은 8돼기로 되어 있는 데, 동쪽은 令 行 의 토지이고 서쪽과 북쪽도 같은 토지이다. 남쪽은 洗 힘의 토지 이 다]을 영 구히 샀다.36) 개선사석등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학선리에 있는 것으로서 왕경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이다. 위의 기록에서는 石 保 첼에 35금입택의 하나로 나오는 池 힘의 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석보평을 개선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왕경에 거주하는 진골귀족이 사적으로 소유한 토지가 지방에도 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지방 토지의 상당수가 왕경에 거주하는 자들의 사적 토지이며, 이곳에서 생산된 것은 주로 왕경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진골귀족의 경제력이 얼마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寶 林 좋 普 照 輝 師 搭 牌 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참조 할 수 있다. 자료 5-20) 敎 를 내려 望 水 里 南 등의 힘도 金 160 分, 租 2, 000햄을 내놓아 공덕을 꾸미는데 도와 충당하고 가지산사는 宣 敎 省 에 속하게 하였다.37) 위의 기록에서 나오는 里 南 힘은 35금입택의 하나이며 望 水 흰도 35금입택 중의 하나인 水 望 힘이라고 생각된다. 이들이 보림사에 희사한 辦 -1햄은 10 斗 -은 결코 적지 않은 양이다. 개선사석등기에는 100 碩 으로 14결의 논을 산 것으로 되어 있다. 웹과 碩 을 같다고 본다면 2 ω0햄은 논 280 結 을 살 수 있는 양인 것 이 다. 따 라서 이남택과 망수택은 租 만으로 보더라도 각각 140 結 의 논을 희사한 것과 같다 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양이 얼마의 가치가 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두 힘에서 희사한 金 160 分 도 결코 적지 않은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절에 희사한 것은 전 재산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금입택 36) w"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제 3권(신라 발해 편) 제 3장 4. 開 仙 좋 石 燈 記 37) w"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제 3권(신라 발해 편) 제 1 장 4. 寶 林 좋 普 照 輝 師 搭 碼
163 에 살았던 진골귀족의 부가 상당했음을 상상할 수 있다. 결국 지금까지 알아본 진 골귀족의 경제력을 볼 때 재상가는 녹이 끊이지 않았다 는 신당서 의 기록은 결코 큰 과장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2) 사회적 경쟁의 강화와 호화 사치 생활 7세기 후반에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와의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신라에서의 공식적인 대외전쟁은 마감된다.8세기 초반에 일본 발해와의 긴 장관계가 발생되기도 했지만 대규모의 전쟁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8세기 중반 이후 발해와 당의 대립관계가 해소되면서 신라는 대외적으로 장기간의 평화 를 이루게 된다. 백제 고구려와의 치열한 전쟁 과정에서 신장된 왕권의 힘은 귀 족 세력간의 분열을 막는 억제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기간의 대외적 평화로 인해 이러한 억제력은 8세기 중반을 고바로 급속히 약화되었으며, 그에 따 라 귀족 세력 사이에 본격적인 정치적 투쟁이 시작된다. 태종무열왕계였던 제 36 대 혜공왕 ( ) 은 세 번의 모반 사건을 진압하기는 했지만 결국엔 네 번째의 모 반 사건에서 살해되었다. 이후 비무열왕계인 선덕왕이 즉위하게 되었고, 진골귀족 사이의 왕위쟁탈전이 본격화되어 이후 120년 사이에 총 15명의 왕이 등장하게 되 었다. 이러한 왕권의 약화로 인한 귀족 사이의 힘의 경쟁은 단순히 정치적 차원에 만 머무르지 않고 일상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나타났다. 이와 같은 현상을 다음과 같은 자료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자료 5-2 1) 흥덕왕 즉위 9년 (834) 太 和 8년에 下 敎 하기를 사람에게는 上 下 가 있고, 지위에는 尊 뽑가 있어 名 例 가 같지 않고 의복 또한 다르다. 풍속이 점점 경박해지고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 호화를 일삼아 다만 외래품의 진기함만 숭 상하고, 오히려 토산품의 圖 野 함을 싫어하게 되었다. 예절은 자주 참람함에 잃 어가고, 풍속은 陸 奏 함에까지 이르렀다. 굳게 옛 법에 따라 염명을 펴서 분명히 하니, 만약 혹 고의로 범하면 나라에는 常 께이 있을 뿐이다 고 하였다.38) 흥덕왕 즉위 9년 (834) 은 이미 귀족 사이의 정치적 경쟁이 활발해진 시기이다. 38) 興 德 王 郞 位 九 年 太 和 八 年 下 敎 日 人 有 上 下 位 有 尊 뽑 名 例 不 同 衣 服 亦 異 % 漸 燒 灌 民 鏡 著 華 只 尙 異 物 之 珍 奇 去 n 構 土 옳 之 圖 野 禮 數 失 於 遍 { 替 風 倚 至 於 陸 몇 敢 率 舊 章 以 申 明 命 혐 或 故 犯 國 有 常 쩨( u" 三 國 史 記 卷 第 프 十 뜨 雜 志 第 τ; 色 服 )
164 위의 기록은 이러한 귀족 사이의 경쟁이 단순히 정치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았 음을 알려주고 있다. 의 식 주와 같은 일상생활 속에서 호화 사치스러운 것을 추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려는 사회적 경쟁도 함께 나타났음 을 알려준다. 이러한 사실은 위의 기록에 연이어서 나오는 色 服 車 騎 用 器 屋 舍 조의 여러 조항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항들에는 외래품의 진기함 만을 숭상한다 는 위의 기록을 증명해 주듯이 각종 외래품이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색복조 진골여인 부분에 나오는 弱 짧 毛 는 캄보디아와 같은 동남아시아산 弱 짧 鳥 의 털로서 사치스럽고 잡기 어려운 珍 鳥 라고 하며 끊훌똘 細 은 타쉬켄트산의 뿜 色 보석으로 만든 비녀와 같은 장식품이라고 한다.5두품여인 부분에 나오는 햄 環 는 보르네오 필리핀 자바 등지에서 잡히는 거북이의 등 껍질이라 하며, 屋 舍 車 材 많 橋 (빗) 등에도 장식품으로 사용된 것으로 나온다. 이 외에도 수마트라 등에서 나오는 緊 禮 沈 香 등이 車 騎 조에 나오고 있으며 페르샤산의 援 樓 趣 훌 등 도 나오고 있다.(이용범 1969) 신라인들은 이와 같이 외국산 제품들이 여러 곳에 쓰일 만큼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이와 같은 호화 사치 생활이 도시의 경관에도 반영되고 있음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자료 5-22) 9월 9 일에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月 上 樓 에 올라 사방을 바라 보니 서울에 민가가 이어졌고, 음악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왕이 돌아보며 待 中 敏 옆에게 일러 말했다. 내가 들으니 지금 민간에서는 집을 덮는데 기와로써 하 지 짚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며 밥을 짓는데 숭으로 하지 빨감으로 하지 않는 다고 하니 이런 일이 있습니까? 민공은 신도 또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 다. 라고 대답하였다.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陰 陽 이 조화롭고 風 雨 가 순조로와 해마다 풍년이 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충분히 먹을 수 있었고, 변경은 평온하며 市 井 은 즐거우니 전하의 성덕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경들이 보좌한 덕분입니다. 짐이 무슨 덕 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39) 자료 5-23) 제 49 대 헌강대왕대 城 中 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고, 처마와 담이 이어져 있었으며, 노래와 악기소리가 길에 가득하고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40) 39) 九 月 九 日 王 與 左 右 登 月 上 樓 四 望 京 都 民 屋 相 屬 歌 吹 連 聲 王 顧 謂 待 中 敏 悲 日 孤 聞 今 之 民 間 覆 屋 以 互 不 以 풍 吹 飯 以 벚 不 以 흙 有 是 耶 敏 悲 對 日 면 亦 홈 聞 之 如 此 因 奏 日 上 則 位 以 來 陰 陽 和 風 雨 11 頂 歲 有 年 民 足 食 邊 境 識 靜 市 井 歡 媒 此 聖 - 德 之 所 致 也 王 欣 然 日 此 뼈 等 輔 住 之 力 也 股 何 德 초등( r 프 國 史 記 卷 第 十 新 羅 本 紀 第 十 --< 헌강왕 6 년) 40) 第 四 十 九 憲 康 大 王 代 城 中 無 -한 屋 接 角 連 t짧 歌 吹 滿 路 를훌 夜 不 絡 ( Ir 三 國 遺 事 卷 第
165 자료 5-24) 제 49 대 헌강대왕 시대에는 京 師 로부터 海 內 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 이 연이어져 있었으며, 초가가 하나도 없고 피리와 노래 소리가 도로에 끊이지 않았다. 風 雨 는 사철에 조화로웠다.4 1) 위의 기록들을 검토해 보면 京 都 에는 草 家 가 하나도 없고 互 家 가 대부분이었다 고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이 과장이 아님은 삼국사기 에 4두품과 백성에 이르기까지도 막새기와( 庸 互 )를 덮지 않는다 는 금지조항이 있는 것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42) 이러한 금지조항은 당시에 상당수의 4두품과 백성이 막새기와 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 표현이다. 그런데 이러한 금지조항이 실제 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면 헌강왕 때의 互 家 로 가득 찬 도시 풍 경에 대한 기록은 그렇게 과장만도 아닐 것이다. 또 밥을 짓되 숭으로 했지, 나무 로 하지 않았다 는 표현도 그렇게 과장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통일신라시대의 경주지역에는 온돌이 보급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43) 그렇다면 신라 왕 경에는 보온을 위해 연료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이럴 경우 매우 호 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던 귀족들이 나무가 아닌 숨으로 밥을 해먹었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와 같은 왕경의 경관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35금입택의 기록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r삼국유사 의 저자인 일연은 細 主 에서 金 入 힘을 富 潤 大 毛 이라고 했다. 이 부윤대택이 金 入 힘 이라는 이름을 얻 었다는 것은 그 규모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호화로운 저택이었음을 의미 한다.여) 그리고 그것은 귀족들의 호화 사치 생활을 통한 사회적 경쟁의 대표적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통일 이후의 신라에서 정치적 혼란이 사회적 경쟁으로 쉽게 전화된 이 유는 무엇일까? 크게 보면 통일 이후 장기간의 대외적 평화로 인해 전쟁에 쏟아 붓던 물자가 일상생활로 전용될 수 있었던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만약 당 발 해 일본과의 긴장된 대외관계가 계속 유지되거나 대규모의 전쟁이 지속적으로 一 紀 異 第 一 又 四 節 遊 힘) 41) 第 四 十 九 憲 康 大 王 之 代 自 京 師 至 於 海 內 比 屋 連 t옮 無 一 草 屋 쫓 歌 不 總 道 路 風 雨 調 於 四 是 ( r 三 國 遺 事 卷 第 = 紀 異 第 = 處 容 郞 望 海 좋) 42) rr- 三 國 史 記 卷 第 三 十 三 雜 志 第 = 屋 舍 43) 온돌이 고려시대에 소백산맥 남쪽에서까지 이용되었던 것을 보여주는 유적이 발 굴되기는 했지만 이 지역에서는 조선시대에도 그렇게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 (신 영 훈, 1983; ) 44) 신영훈은 조선시대에 1 品 의 고관에게 주었던 35부(1, 365평)보다도 금업택이 훨씬 컸을 것으로 추측했다. (신영훈, 1983;94)
166 벌어졌다면 잉여생산량의 상당 부분이 이런 방향으로 지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 다. 이럴 경우 신라인들의 호화 사치스런 생활은 상당한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통일 이후 신라인들의 풍요로운 삶의 이면에는 장기간의 대외적 평화관계 가 자리잡고 있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만으로 호화 사치스런 생활의 발생 확산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지배층이 왕경에 집중해 살았다 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라에서는 진골귀족의 대부분이 왕경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호화 사치생 활에 대한 확산속도와 강도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 왕경에서의 진골귀족 사 이의 사회적 접촉은 일상생활과 같이 수시로 일어났을 것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정보에 대한 교류가 간접적인 형태가 아니라 직접적인 대면접촉의 형태로 나타났 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호화 사치생활에 대한 확산속도는 상상 이외로 빨랐으며, 그 강도 또한 강했을 것이다. 이러한 확산속도와 강도뿐만 아니라 새로운 호화 사치 생활의 패턴에 대한 창출도 훨씬 쉬웠을 것이다. 진골귀족 사이의 일상적인 대면접촉은 서로간의 사회적 경쟁심을 더욱 크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새 로운 것에 대한 창출과 수용을 통해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컸을 것이며, 호 화 사치생활에서의 혁신이 계속적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왕경에 살고 있던 6두품 이하의 귀족과 백성 역시 진골귀족의 호화 사치 풍조를 그대로 모방했을 것이다. (3) 상업 수공업의 발달 왕경에 집중된 경제력과 사회적 경쟁의 강화로 인한 귀족들의 호화롭고 사치스 런 생활은 경제력이 집중되었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띄고 있다. 왕경에 거주한 대부분의 귀족들은 호화롭고 사치스런 생활을 통해 서로 과시하려는 욕구를 가지 고 있었기 때문에 의 식 주의 모든 측면에서 더 크고, 더 화려하며, 더 진귀한 것을 찾았다. 이것은 왕경에서 소비되는 물품의 종류가 매우 다양화되었으며, 그 런 물품의 소비량 역시 적지 않았을 것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방에서 조달되는 물자는 대부분 곡물을 비롯한 농업생산물에 불과했을 것이다, 45) 기존에 향 부곡 을 특수 촌락으로 간주하여 이런 촌락에서 수공업품을 만들어 받쳤다는 견해도 45) 정창원소장신라촌락문서에는 짧 田 麻 田 쫓 相 子 木 秋 子 木 馬 牛 등 1 차 생산 품에 대한 기록만 있을 뿐 이것들에 대한 가공품의 기록은 없다. 물론 이들 촌에서 1차 생산품을 가공하여 받쳤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167 있었다. 하지만 이미 향 부곡은 생산품의 차이가 아니라 규모의 차이에서 나타난 행정단위임이 밝혀진 바 있다.(이우성, ) 그렇다면 왕경에 사는 귀족들의 호화 사치 생활을 뒷받침하기 위한 물품의 생 산과 조달은 일차적으로 상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엽의 발달을 알려 주는 것 중의 하나가 외국산 물품의 수입이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삼국사기 卷 第 三 十 三 雜 志 第 二 色 服 車 騎 容 器 屋 舍 조에는 다양한 외래 품이 등장하고 있으며, 기록만을 놓고 볼 때 외래품의 쓰임새는 적지 않았다. 이 러한 외래품이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왕경에 거주하는 귀족들 사이에 사회적 경 쟁의 강화로 인한 과시 욕구가 팽배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신 라 왕경에서의 이러한 과시욕구는 국제교역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조건으 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장보고가 9세기 전반기에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무역 을 장악하여 신라의 왕위 쟁탈전에까지 가담할 수 있었던 이면에도 신라 왕경에 서의 사회적 경쟁의 강화로 인한 호화 사치 생활의 유행이 큰 몫을 담당했을 것 이다. 해외무역뿐만 아니라 국내 상업도 발달했을 것이다. 신라에서는 소지마립간 12 년 (490) 에 왕경( 京 師 )에 시장( 市 )이 개설되며 46) 지증마립간 10년 (510) 에는 東 市 가 개설된다 47). 그 이후 시장의 개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다가 효성왕 4년 (695) 에 西 市 와 南 市 가 개설된다.생 r 삼국사기 卷 第 三 十 九 雜 志 第 七 職 官 上 에 東 市 塵 西 市 塵 南 市 塵 만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더 이상의 시장 개설은 없었던 것 같다. 시장의 규모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시장의 수로서 상 업이 발달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상엽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다고 할 수 는 있다. 또한 왕경에 사는 귀족들의 호화 사치 생활을 뒷받침하기 위한 물품의 생산과 조달은 수공엽의 발달에 의해 가능해졌을 것이다. 이러한 상엽과 수공엽에 의해 조달되는 물자의 최종 목적지는 경제력이 집중되어 있고, 호화 사치 생활의 근원지였던 왕경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왕경으로의 피지배층의 집중에 일조를 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46) r 三 國 史 記 卷 第 三 新 羅 本 紀 第 三 소지마립간 12 년 47) r 三 國 史 記 卷 第 四 新 羅 本 紀 第 四 지증마립간 10년 48) r 三 國 史 記 卷 第 九 新 羅 本 紀 第 九 효성왕 4년
168 제 2 절 정치중섬구역의 확장 세 기 사찰의 건 립 6세기초는 신라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변화가 열어났던 시기이다. 불교의 수용도 그러한 획기적인 변화 중의 하나로서 신라인의 종교생활 및 세계관에서 일대 혁신을 불러 일으켰다. 이미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13 년 (372), 백제에서는 침류왕 2년 (384) 에 불교가 전해지고 왕실로부터 수용되었다. 신라에서도 고구려나 백제보다 약간 늦지만 5세기에는 이미 불교가 전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 만 그러한 불교가 왕실로부터 정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법흥왕 15년 (528) 이차돈 의 순교를 통해서이다. 이렇게 신라에서 불교의 수용이 늦어진 것은 4-5세기 동안 팽배해 있었던 신라 전체의 보수적인 사회분위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장한식, 1999)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이러한 보수적인 분위기는 마찬가지였으며, 그에 따라 신라에서는 전통신앙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6세기초에 시작된 사회 여러 부분에서의 급진적인 변화와 동시에 불교 가 수용됨에 따라 그 확산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거기다가 불교 수용의 주체가 왕실이 되었기 때문에 신라불교는 처음부터 왕실불교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었 다. 법흥왕은 불법을 일으켰다는 의미에서 法 興 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 뿐만 아니라 진흥왕은 그의 아들 이름을 초기 경전에 불법의 바퀴를 돌림으로써 천하 를 정복해 나가는 위대한 왕으로 나오는 轉 輪 聖 王 의 설화를 본 따서 鋼 輪 이라 지 었다고 한다. 이것은 진흥왕 본인은 銀 輪 이며 볍홍왕은 金 輪 에 해당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한다. 진흥왕은 죽기 전에 스스로 중이 되었으며 왕비 역시 마찬가지 였다. 그뿐만 아니라 진평왕 대에는 신라의 왕실이 곧 석가모니의 일족이라는 員 種 說 도 나타났다. 그에 따라 진평왕 자신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아버지인 白 痛 으 로, 왕비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摩 耶 夫 人 으로 두 동생을 각각 석가모니 의 작은아버지 이름인 伯 飯 과 國 飯 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 27 대 선덕왕의 이름인 德 윷과 제 28 대 다. (김기흥, 2(00) 진덕왕의 이름인 勝 볼도 모두 불교 경전에서 따 왔다고 한 이러한 불교의 승인과 수용은 곧바로 사찰의 건립으로 이어졌다. 물론 불교가 승인되기 이전에도 신라 왕경 내에 사찰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미 앞에서 살 펴본 프 國 遺 事 卷 第 프 興 法 第 三 阿 道 基 羅 부분에는 홍륜사는 원래 아도화상
169 이 미추왕 때 처음 절터를 잡을 곳이라고 되어 있으며 같은 책 卷 第 - 紀 異 第 一 射 琴 뻗 부분에도 內 顧 에서 禁 香 修 道 하던 중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사찰 건립에 대한 설화가 과연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왕경 내부의 도시형태에 큰 혁신을 일으켰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법흥왕의 불 교 승인 이후 진흥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건립된 사찰은 5세기까지 유지되어 왔던 정치중심구역의 확장 방향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기폭제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러한 혁신이 일어나게 된 것은 단순히 사찰의 수가 많아졌기 때문만은 아 니다.6세기 이후 사찰의 건립이 하천의 범람에 완충작용을 하던 지역에 선택적으 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 표 년 이 전에 창건된 사찰과 그 위 치 이름 창건 위치 홍륜사 닮4 경주공업고고(추정) 영홍사 540년경 경주공업고교부근(추정) 황룡사 많J6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 남쪽 祝 園 좋 당J6? 실제사 많J6? 南 山 之 좋 -587? 金 섭좋 -589 경주시 안강읍 삼랑사 597 경주시 성건동 천주사 진평왕대 경주시 구황동(추정) 동천사 진평왕대 경주시 동천동(추정) 神 元 춤 -진평왕대 오릉부근(추정) 安 興 춤 -진평왕대? 분황사 634 경주시 구황동 영묘사 635 경주시 탑정동 황복사 -644 경주시 구황동 生 義 좋 644 남산 삼화령 金 光 휴- 640년경 남산 서북록(추정) 金 剛 춤? 道 中 츄 -선덕왕대? 석장사 선덕왕대 경주시 탑정동 法 林 춤 선덕왕대? 元 寧 좋 646? 神 仙 츄 단석산 法 流 좋? 驚 仙 놓 670년경? 자료 r 삼국사기.JI, r 삼국유사 참고: 田 中 俊 明,
170 월린 볕낭산 I 야 醫 빽 o Ikm 1. 삼랑사지 2. (추정)영흥사지 3. (추정)홍륜사지 4. 영묘사지 5. (전)신원사 지 6. 담엄사지 7. (전)금광사지 8. (전) 동천사지 9. 분황사 10. 황룡사지 11. (전)도림사지 12.( 전)천주사지 13. 황복사지 14. 옥다리들사지 (자료If" 慶 州 遺 題 地 圖 J, 국립경주박물관 : 경주시, 1997에서 재편집) 그림 -16 통일이전에 건립된 사찰 및 사지
171 표 -15는 불교가 승인된 6세기초반부터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성하기까지 건립된 사찰로서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에 나오는 것을 도표화한 것이다. 이런 사 찰 중의 상당수가 지금은 그 대략적인 위치조차도 추정할 수 없다. 하지만 경주시 내에 건립되어 그 위치가 알려져 있거나 추정되는 사찰만으로도 당시 사찰의 건 립이 정치중심구역의 확장 방향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림 -16을 보면 사찰의 대다수가 서천변과 기존에 북천의 범람 영향을 받던 지역 에 건설되었음을 알 수 었다. 그렇다면 6-7세기에 경주시내에 만들어진 사찰은 하 천의 범람으로부터 보호해 주던 완충공간을 파괴했음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황룡사의 건립이다. 황룡사는 원래 신궁을 지으려다 용이 올라가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 사찰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49) 이유야 어떻든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황룡사가 과거의 연못을 메우고 그 위에 지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연못의 파괴는 홍수 시 경주시내로 향하는 북 천의 범람에 대한 완충공간을 파괴한 것이 된다. 그리고 진평왕 18년 (596) 에 영흥 사에 화재가 일어나 가 불탔다는 기록은 그 사찰 주변에 상당한 거주지가 들어서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50) 이 영홍사 추정 위치는 천경림에 지 었다는 (추정)흥륜사지 바로 서쪽 서천가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정확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서천의 범람을 막아주던 숲이 거주지의 건설 등에 의 해 파괴되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천의 범람을 막을 수 있는 어떤 조치가 이 시기에 취해졌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범람을 막아주던 완충공간의 파괴로 인해 도시 내에 비극을 가져왔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의 기록에는 그러한 비극적인 내용이 나오고 있지 않다. 따라서 제방공사가 이 시기 에 의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사찰의 건립은 그런 제방공사 일부분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사찰 입지의 분포 속에서 확인된다. 서천가에 는 북쪽으로부터 삼랑사지. (전) 남항사지. (추정)흥륜사지. (추정)영홍사지 영묘 사지. (전)신원사지 담엄사지. (전)곤원사지 등이 줄을 지어 들어서 있다. 이러한 사지들은 지금까지도 그 위치가 확인되거나 추정되는 사찰일 뿐이다. 아마도 더 많은 사찰이 이곳에 들어서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사찰은 그 위치로 보아 49) 十 四 年 春 = 月 王 命 所 司 藥 新 宮 於 月 城 東 黃 龍 見 其 地 王 疑 之 改 寫 佛 츄 陽 號 日 皇 龍 ( Il" 三 國 벚 記 卷 第 四 新 羅 本 紀 第 四 진흥왕 14 년) 50) 十 八 年... 쪽 十 月 永 興 좋 火 延 燒 三 百 五 十 家 王 親 臨 救 之 ( r 三 國 史 記 卷 第 四 新 羅 本 紀 第 四 진평왕 18 년)
172 서천의 범람을 막아주던 역할도 분명히 겸하고 있었을 것이다.5 1) 북천 변에 있는 분황사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이곳은 보문호 골짜기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북천의 물이 서북쪽으로 휘어지는 장소이다. 따라서 범람이 이루어지기 쉬운 곳이 며, 이를 통해 분황사가 종교적 기능과 함께 하천관리의 역할을 동시에 겸하고 있 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사찰만으로 하천의 범람을 다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천 변에 대대적인 제방공사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법흥왕 18년 (53 1)에 유사에게 명하여 제 방을 수리하게 했다는 기록도 그러한 제방공사의 하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52) 아 쉽게도 더 이상의 제방공사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이미 살펴본 사찰의 분포 와 산성에 대한 축성과 수축 기록이 6-7세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제방 공사가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결국 5세기까지 거주지의 확장 한계로 작용하던 하 천 범람에 대한 완충공간의 파괴는 새로운 제방공사와 동시에 이루어짐으로써 거 주가능 구역의 확장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거주지 및 기타 시설의 입지에서 5세기에 비해 보다 자유로운 입장에 설 수 있게 되었다고 보이며, 그것은 한편으로 도시가 보다 계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배경을 제공 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2-2 선궁의 건절과 위치 6세기초는 신라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이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이런 개혁 중의 하나가 왕권의 강화이다. 이것은 왕권이 그 이전보다 더 강화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왕 개인의 지위가 높아진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 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왕의 가족들은 員 種 說 에 따라 석가모니의 가계와 동등하게 인식되었으며, 진골중의 진골이라 할 수 있는 성골의식이 팽배하여 극단 적인 근친혼이 실행될 정도였다. 따라서 왕권의 강화는 왕뿐만 아니라 그 가계가 다른 집단에 비해 훨씬 높은 위치에 서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 51) 최광식은 三 國 遺 事 卷 第 三 興 法 第 三 阿 道 基 羅 부분에 나오는 7개의 七 處 빼 藍 之 塊 위에 세원진 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사천왕사 담엄사 지역이 상대 토착신앙의 察 場 이었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최광식, 1995) 다만 왜 그런 곳이 토 착신앙의 제장으로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사천왕사를 제외한 6개 의 사찰 지역이 하천과 가까운 지역에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범람에 대한 완충공간이었 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52) -f- 八 年 春 三 月 命 有 닙] 修 理 - 限 防 ( ~프 國 벚 記 卷 第 四 新 羅 本 紀 第 ~J 법흥왕 18년)
173 다. 진골집단으로부터의 성골집단의 분화는 6세기초 이후 신라사회에서 나타난 왕 과 그 가족의 신성화 작업, 즉 성골화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성 화 작업이 단순히 사회 정치적인 차원에서만 벌어졌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개 인을 포함한 어느 집단도 자신의 신성성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고 과시하기 위해 서는 거주 공간 그 자체를 신성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 된다.53)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新 宮 의 건설 시도가 나타나게 된 다. 자료 5-25) (진흥왕) 14년 (553) 봄 2월에 왕이 所 司 에게 명하여 新 宮 을 월성 동쪽에 짓도록 했다. 그 땅에서 黃 龍 이 나타나자 왕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 여 佛 좋로 바꾸도록 하고 皇 龍 이란 호칭을 내렸다.딩) 자료 5-26) 신라 제 24 대 진흥왕 즉위 14년 (553) 쫓 西 2월에 장차 용궁 남쪽에 緊 宮 을 지으려 하였는데 黃 龍 이 그 땅에서 나타났다. 이에 佛 좋로 고치고 黃 龍 좋라 부르게 했다.6 표년 (569) 에 이르러 담장을 주위에 둘러 17년이 걸려 바야 흐로 완성했다.또)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진흥왕은 불교 초기경전의 轉 輪 聖 王 을 본 따서 태 자의 이름을 鋼 輪 이라 하고, 손자인 진평왕의 이름을 부처의 아버지인 白 浦 으로 지은 장본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왕과 그 가족의 신성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 어졌다고 보아 크게 툴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성골집단이 살 수 있는 宮 을 더 만들 필요성이 나타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가능성이 위의 기록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新 宮 또는 緊 宮 의 건설 시도로 나타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황룡사유적발굴조사보고서 에 의하면 황 룡사터에 지어진 최초의 건물이 사찰이 아닌 왕궁이었을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56) 그렇다면 위의 기록에서 新 宮 또는 榮 宮 을 지으려고 했던 것이 과장이 아니라 실 질적으로 있었던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원래의 신궁터가 황룡사로 53) 이종욱은 6세기에 왕과 그 가족으로 구성된 성골집단은 三 宮 에서 살았으며, 이들 이 궁을 떠난다는 것은 신분이 하강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이종욱, 2000: ) 54) 十 四 年 春 二 月 王 命 所 司 藥 新 宮 於 月 城 東 黃 龍 見 其 地 王 疑 之 改 寫 佛 좋 陽 號 日 皇 龍 ( r 三 國 史 記 卷 第 四 新 羅 本 紀 第 四 진흥왕 14 년) 55) 新 羅 第 느 十 四 員 興 王 郞 位 十 四 年 쫓 西 二 月 將 葉 몇달힘 於 龍 宮 南 有 黃 龍 現 其 地 乃 改 置 혔 佛 좋 號 黃 龍 좋( r 프. 國 遺 事 卷 第 三 搭 像 第 四 별 龍 좋9: 六 ) 56) r 황룡사 유적발굴조사고보서 1,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74 바뀌었더라도 다른 장소에 신궁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다음의 자료를 통해 최소한 6세기 후반 경에는 三 宮 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자료 5-27) (진평왕 44년 (632)) 2월에 이찬 龍 樹 로써 內 省 私 民 을 삼았다. 처음 에는 (진평)왕 7 년(않5) 에 대궁 양궁 사량궁 3 개소에 각각 私 품을 두었었는 데, 이 때에 이르러 內 省 私 면 1 인을 두어 三 宮 을 겸하여 맡게 했다.57) 자료 5-28) 內 省 은 경덕왕 18년에 顧 中 省 으로 고쳤다가 후에 다시 전대로 하 였다. 私 民 이 1 명이다. 진평왕 7 년 (585) 에 三 宮 에 각각 私 닮을 두니, 대궁에는 和 文 대아찬이요, 양궁에는 首 將 夫 아찬이며, 사량궁에는 쩔 知 이찬이었다. (진 평왕) 44년 (622) 에 이르러 1 員 으로 삼궁을 겸하여 맡게 했다... 58) 위의 두 기록을 통해 보면 최소한 진평왕 7년(많5) 에 三 宮 이 갖추어져 있었으 며, 이 때 각 궁의 업무를 관장하던 私 둠을 두고 있다.59) 그리고 같은 왕 44년 (622) 에 三 宮 을 겸하는 私 몸을 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三 宮 과 같은 기록은 6-7세기에만 보이고 있다. 통일 이후에도 무수한 宮 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세 개의 宮 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어 三 宮 과 같은 용어로 정착된 현상은 최소한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을 조금 확대하여 생각해 보면 6-7세기에는 三 宮 이 보다 특 별한 의미를 지녔던 것이 되며 그것은 성골집단의 출현과 그들 거주지의 신성공 간화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골의식은 진골출신의 제 29 대 태종무열왕 ( ) 이후에는 사라진 것으로 생각되며 그에 따라 三 宮 과 같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존재 역시 사라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60) 태종무열왕에 뒤이 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문 무왕 ( )은 대 대 적 인 궁궐 중수를 행 한다. 자료 5-29) (문무왕 14년 (674)) 2월에 첨 內 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57) 二 月 以 伊 滾 龍 樹 寫 內 省 私 많 初 王 七 年 大 宮 梁 宮 沙 梁 宮 三 所 各 置 私 많 至 是 置 內 省 私 ê 人 暴 掌 츠 宮 ( r 三 國 史 記 卷 第 四 新 羅 本 紀 第 四 진평왕 44 년) 58) 內 省 景 德 王 十 八 年 改 寫 散 中 省 後 復 故 私 많 一 人 헐 平 王 七 年 三 宮 各 置 私 많 大 宮 和 文 大 阿 浪 梁 宮 首 B 兮 夫 阿 滾 沙 梁 宮 쩔솟n 伊 滾 至 四 十 四 年 以 i 員 暴 掌 三 宮... ( r 三 國 史 記 卷 第 三 十 九 雜 志 第 八 職 官 中 ) 59) 이종욱은 삼궁 중 대궁은 월성에, 사량궁은 금성에, 양궁은 만월성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이종욱, 1998:20) 60) 물론 즈 宮 그 자체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三 宮 은 그 이후에도 계속 宮 으로서 기능했을 것이다. 즈 宮 체제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다만 성골집단의 거주지라는 특별한 의미에서의
175 심고, 珍 萬 과 奇 數 를 길렀다,6 1) 자료 5-30) (문무왕 16년 (676)) 壞 宮 을 만들었다, 62) 자료 5-31) (문무왕 19 년 (679) 2월) 궁궐을 重 修 하였는데 극허 jj:i 麗 하였다... 東 宮 을 창건하고 처음으로 內 外 諸 門 의 願 號 를 정하였다, 63) 자료 5-32) (문무왕 21 년 (681) 6월) 왕이 京 城 을 새롭게 하려고 浮 屬 의상에게 물어봤다, (의상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비록 草 野 쫓 屋 에 있더라도 正 道 를 행하 면 福 業 이 오래갈텐데 진실로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여 城 을 만들어도 또한 이익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왕이 이에 投 事 를 멈 추었다.여) 위의 기록들을 통해 통일을 전후하여 안압지 건설 양궁 창건 궁궐 중수 동궁 창건 내외제문의 액호를 정함 등 궁궐에 대한 대대적인 수리가 이루어 진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무왕 14년 (674) 의 기록에 宮 內 에 왔다고 나오는 연못은 지금의 안압지로 알려지고 있다. 이 안압지 바로 동북쪽에는 東 宮 이 문무 왕 19년 (679) 에 만들어지며, 바로 서쪽에는 각종 연회가 벌어지던 임해전이 있었 다,65) 그리고 문무왕 16년 (676) 에 만들어졌다는 壞 宮 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66) 양 궁이 안압지나 동궁 등 대대적인 궁궐수리 기간에 만들어진 것을 감안할 때 비슷 한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안압지 북쪽의 들은 壞 井 싹 양지잇더루 양정렬 양정들 양지들 등으로 불리고 있다, 67)( 그림 -6, 그림 -17 참 조) 이와 같은 사실들을 壞 宮 과도 연결시켜 보면 안압지 북쪽에 있었다고 볼 수 61) 二 月 宮 內 穿 池 祖 山 種 花 草 養 珍 萬 奇 數 ( r 츠 國 史 記 卷 第 七 新 羅 本 紀 第 七 문무왕 14 년) 62) 作 壞 宮 ( r 三 國 史 記 卷 第 七 新 羅 本 紀 第 七 문무왕 16년) 63) 重 修 宮 關 願 極 밤 麗... 創 造 東 宮 始 定 內 外 諸 門 願 號 ( r 三 國 史 記 卷 第 七 新 羅 本 紀 第 七 문무왕 19년) 64) 王 欲 新 京 城 問 浮 뽑 義 相 對 日 雖 在 草 野 풍 屋 行 正 道 則 福 業 長 챔 寫 不 然 雖 勞 AfF 城 亦 無 所 益 王 乃 止 投 ( r 三 國 史 記 卷 第 七 新 羅 本 紀 第 七 문무왕 21 년) 65) 임해전은 三 國 史 記 卷 第 八 新 羅 本 紀 第 八 효소왕 6년 (697) 부분에 9월에 임 해전에서 여러 선하틀에게 연회를 배풀었다( 九 月 홍 群 ê 於 臨 海 願 ) 란 기록으로 처 음 나온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임해전은 효소왕 6년 (697) 이전에 만들어졌다. 임해전 의 위치가 안압지 서변에 있었다는 사실을 참고하면 안압지와 동궁이 만들어지는 년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66) 永 昌 宮 成 典 이 설치된 것은 문무왕 17 년 (677) 이다,( r 三 國 史 記 卷 第 츠츠 八 雜 志 第 七 職 官 上 ) 이것을 궁이 창건된 것으로 본다면 壞 宮 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 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양궁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예상은 되나 분명한 위치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어 단정짓기는 어렵다. 67) 한글학회 r 한국지명총람 J, 1978:
176 있게 된다. 표 -16 8세기 이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하는 宮 궁의 이름 시기 기록 내용 新 宮 성덕왕 16(717) 3월에 新 宮 을 창건하였다 永 昌 宮 성덕왕 26(727) 12월에 永 昌 宮 을 수리하였다. 善 天 宮 효성왕 3(739) (정월에) 善 天 宮 이 낙성되었다. 永 明 新 宮 경덕왕 7(748) 7월에 태후가 永 明 新 宮 으로 이거하였다. 永 昌 宮 경덕왕 16(757) 7월에 영창궁을 중수하였다. 外 宮 원성왕 1(785) 3월에 前 紀 具 足 王 I즙을 外 宮 으로 내보내고 租 34,000석을 내렸다. 月 池 宮 헌덕왕 14(822) 정월에 母 弟 秀 宗 을 副 君 으로 삼아 月 池 宮 에 들게 했다. 北 宮 진성왕 11(897) 6월에 讓 位. 12월 ζe 에 왕이 北 宮 에서 돌아가셨다. 後 宮 경애왕 4(927) 경애왕이 견훤의 군대를 피해 후궁에 숨었다 잡힘. 표 -17 r 삼국사기 잡지 직관 부분에 나오는 宮 궁의 이름 설치시기 大 宮 제 5위 대아찬 진평왕 44(622) 이후 私 많 1 명 (5위 대아찬 -1 위 태 梁 宮 진평왕 7(585) 제 6위 아찬 대각간), 경 2 명 01 위 내마 -6위 아찬), 감 2 명 01 위 沙 梁 宮 제 2 위 이찬 내마 -8위 사찬), 대사 1 명, 사지 1 명 永 昌 宮 成 典 문무왕 17(677) 경 1 명 (9위 급찬 -6위 아찬), 대사 2 명 03 위 사지 -11 위 내마), 사 4 명 盧 本 彼 宮 신문왕 1(681) 1 명, 私 母 1 명, I켰 2 명, 典 줬 1 명, 사 4 명 / 신라본기 문무왕 2 년 (662) 에도 나옴 新 宮 감 1 명 (11 위 내마 -10위 성덕왕 16(717) 대내마), 대사 2 명 03 위 사지 -11 위 내마), 사 4 명 數 宮 典? 대사 2 명, 사 2 명 좁 淵 宮 典? 대사 2 명, 사 2 명, 宮 웠 1 명 / 경덕왕 때 造 秋 훔으로 고치기도 함. 夫 폈 宮 典? 대사 2 명, 사 2 명, 宮 컸 1 명 且 熱 音 宮 典? 대사 2 명, 사 4 명, 宮 컸 1 명 坐 山 ( 宮 ) 典? 대사 2 명, 사 3 명, 宮 줬 1 명 햄 村 宮 典? 대사 2 명, 사 2 명, 흰줬 1 명 / 경되왕 때 玄 龍 훈으로 고치기도 함 北 l 止 只 宮 典? 대사 2 명, 사 2 명, 宮 컸 1 명 弘 l뼈 宮 典? 대사 2 명, 사 2 명 훌 川 宮 典? 대사 2 명, 사 2 명 善 t 平 宮 典? 대사 2 명, 사 2 명 5 宮 을 합해 古 奈 宮 이라고 함 伊 同 宮 典? 대사 2 명, 사 2 명 平 立 宮 典? 대사 2 명, 사 2 명 南 下 所 宮? 옹 1 명, 助 4 명 北 園 宮? 옹 1 명 新 좁 淵 힘? 옹 1 명
177 그렇다면 문무왕 시절의 궁궐 중수는 안압지 동궁 임해전 지역뿐만 아니라 그 북쪽 지역으로도 궁궐이 확장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미 황 룡사와 분황사의 건설을 통해 북천의 범람을 막아주는 제방이 북천 남쪽에 건설 되었을 것임을 살펴보았다. 문무왕 시절의 안압지와 양궁의 건설은 이곳으로의 하 천 범람의 위험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이 지역에 왕궁 뿐만 아니라 주거지가 들어설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8세기 이후의 기록에도 새로운 여러 궁이 등장하며 그것을 정리한 것이 표 -16 과 표 -17 이다. 이러한 궁들 대부분의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아 크게 주목받고 있 지 못하다. 다만 월성 정 북쪽 북천변에서 발견된 성동동 전랑지일 것으로 추측되 는 北 宮 에 대한 기록이 주목되고 있다. (그림 -17 참조) 북궁에 대해 三 國 遺 事 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자료 5-33)... 北 宮 底 가운데에 먼저 땅에 떨어진 두 개의 별이 있었는데 또 하나의 별이 떨어졌다. 세 별이 모두 땅으로 들어갔다. 이 때보다 먼저 宮 북쪽 뒷간( 剛 團 )에서 두 줄기의 運 이 나왔고 또 奉 城 좋 밭에서 運 이 나왔다. 호랑이 가 성안에 들어와 막아서자 추적하여 찾았으나 놓쳤다... 68) 위의 사건은 혜공왕 3년 (767) 에 있었던 것으로서 北 宮 이 이미 이 시기에 존재했 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표 -16을 보면 진성여왕 ( ) 시기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북궁이 성동동전랑지를 의미한다면 8세기경에는 이미 북천에 대한 제 방 건설이 충분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성동동전랑지는 일부가 북 천에 의해 유실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이러한 위험이 없었기 때문에 북 천 변에 북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8세기에 만 들어진 봉덕사가 북천의 범람으로 조선시대에 침몰되어 사라진 것을 통해서도 이 해할 수 있다. (자료 2-6 참조) 봉덕사와 같은 중요한 사찰이 북천 남쪽에 만들어졌 다는 것 역시 북천 범람에 대한 대비가 충분하게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68) 北 宮 健 中 先 有 星 慶 地 X 一 星 慶 三 星 皆 沒 入 地 先 是 宮 北 測 固 中 二 판 運 ~f:. 又 奉 검븐츄 田 中 生 運 虎 入 禁 城 다 1 追 흉 失 之 ( r 드드 國 遺 事 卷 第 紀 異 第 τ: 惠 옆 王 )
178 2-3 주거지의 확장 (1) 6-7 세기의 주거지 확장 6 세기초에 실시된 개혁정치로 인해 권력의 공간적 집중화는 더욱 강화되었고 그로 인해 왕경 내부에서도 귀족층들의 경주시내로의 인구이동이 계속 있었을 것 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짐작하게 하는 것은 6세기초의 영일냉수리비 (503) 와 울진 봉평비 (504) 에 보이는 千 支 와 같은 인물이 그 이후의 비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비문에 본피부의 몇몇 인물을 제외하면 모량부, 한기부, 습 비부의 인물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미 6부 중심지에 살던 왕실집단의 거의 전부가 정치중심구역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최소한 이 시기에 왕경 출신이 아닌 금관가야의 김유신 가문과 같은 상층지배층 이 정치중심구역으로 이주하고 있다,69) 이와 같은 상층지배층의 집중은 그들의 삶 을 보좌하던 각종 인구도 함께 유입되게 만들었을 것이다. 또한 사찰의 건립도 그 에 부수된 인원이 적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인구집중에 일조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변 경주시내에서 주거지가 계속 확장되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이런 주거지의 확장은 5세기까지의 경향과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 을 것이다. 이러한 주거지의 확장 방향은 경주시내의 평지에 입지한 사찰의 위치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것과 동시에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대대적인 제방의 축조는 기존에 하천의 범람을 막는 완충공간의 보존을 위해 사람들의 거 69) 금관가야 지배층이 신라로 포섭되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법홍왕) 19년 (532) 금관국 주 김구해가 姐 및 큰아들 如 宗, 둘째아들 武 德, 셋째아들 武 力 등 세 명의 아들과 더 불어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 왕이 禮 로서 그들을 대우하여 上 等 의 位 를 주 고 本 國 으로 食 몹을 삼게 했다. 아들 무력은 벼슬하여 角 千 에까지 이르렀다. ( 十 九 年 官 國 主 金 깐L 玄 己 及 三 子 長 日 如 宗 件 B 武 德 季 B 武 力 以 國 뿜 寶 物 來 降 王 禮 待 之 授 位 上 等 以 本 國 寫 食 몸 子 武 力 tt 至 角 千 )"( r 三 國 史 記 卷 第 四 新 羅 本 紀 第 四 법홍왕 19 년) 금관국주의 셋째 아들 무력은 위의 기록에서 나오는 것처럼 경위 제 1 위인 角 千 ( 伊 fj(: 浪 ) 에까지 이르렀던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그는 단양 적성비 (550년경)에는 沙 陳 部 智 阿 二 F 支 로 나오며, 창령 진홍왕척경비 (561)와 마운령 진흥왕순수비 (568) 에 나오는 沙 嗤 되 力 智 述 千 과 같은 인물로 추측되기도 한다.( r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 2 권(신라 1. 가야 편),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37,63,94) 그의 이름 앞에 사훼부 또는 사 훼라는 6부 이름이 붙고 있고, 경위를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왕경으로 옮겨 살 았던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력의 예를 통해 볼 때 왕과 왕비 및 나머지 형제도 왕경으로 옮겨 살았으며, 이들 모두가 진골귀족으로 대우받았다고 보아 도 크게 툴리지는 않을 것이다. 金 武 力
179 주가 허락되지 않던 지역까지 주거지가 확장되었을 가능성을 알려준다. 그러면 이 와 같은 변화를 종합해 볼 때 거주지의 확장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일어났을 까? 첫째 진흥왕 5 년 (544) 홍륜사의 완성과 함께 대릉원 서쪽으로 거주지가 확장되 었을 것이다. 이 지역은 원래 숲으로 보호되던 지역이었는데 홍륜사의 건설과 함 께 거주지도 함께 조성되었을 것이다. 진평왕 18년 (596) 에 홍륜사 바로 서쪽에 있 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영흥사에 화재가 일어나자 3507}가 동시에 불에 탔다는 기 록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7이 둘째 진흥왕 14년 (553) 에 시작된 황룡사와 분황 사 (634) 의 조영 문무왕 때의 안압지 건설과 궁궐 중수를 통해 볼 때 이 지역으로 도 거주지가 확장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의 상당 부분은 원래 홍수 시 북천 범람의 영향권 안에 있었는데 황룡사와 분황사 등이 제방의 축조와 함께 건 설되어 홍수로부터 안전한 지역으로 변모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거주지도 동시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셋째 대릉원 북쪽으로도 최소한 삼랑사가 준성되는 진평왕 19 년 (597) 이후에는 주거지가 확장되었을 것이다. 이 곳에도 원래 주거지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사찰의 건설과 제방 축조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후 서서히 주거 지가 들어섰을 것으로 생각된다.(그림 -16 참조) 그런데 남천 너머의 남쪽으로는 주거지의 공간적 확대가 크게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6-7세기에 들어 경주시내에서도 주거지의 확대가 가 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정치 중심지로부터 거리가 더 멀어지는 남 천 너머의 기존 주거지 남쪽으로까지 주거지가 확산될 필요는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6-7세기의 주요 거주지는 서천과 북천, 낭산과 남산 서북록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 -17 참조) 이와 같은 지역은 당 시의 사찰 분포의 바깥 한계선과도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이중 경주 시내의 서 북 동쪽은 기존에 주거지가 거의 없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일정한 계획 하에 만 들어졌을 것이다. (그림 -5 참조) 이로 인해 일제시대까지도 이 지역에 도시계획의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주거지의 확장 과정은 6-7세기의 금석문에 나타나는 인물의 분포와도 대체적으로 부합한다. 표 -18과 표 -19를 보면 단양적성비 (551 이전)와 마운령비 (568) 에는 양부의 인물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며 다음으로 사량부의 인물이 많다. 그리고 본피부의 인물 70) 十 八 年... 장 f 月 永 興 좋 火 延 燒 三 百 1i t 一 家 王 親 臨 球 之 ( r 츠 國 史 記 卷 第 P되 新 / 羅 本 紀 第 四 진평왕 18 년)
180 표 -18 단양 적성비 (551 이전)에 등장하는 인물의 분포 t τ1lr1 r=r 양부 사량부 모량부 본피부 한기부 습비부 기타 왕 갈문왕 (?) 합계 6 3 1(?) * (?)는 추정. * 출전 r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의 번역을 따름. 1(왕) 표 -19 마운령비 (568) 에 등장하는 인물의 분포 1 :1 1 r = 양부 사량부 모량부 본피부 한기부 습비부 기타 왕 1 갈문왕 기타 2 합계 * 8등과 14등의 인불과 堂 來 客, 훌 來 客 50 명이 보이나 소속부의 이름을 알 수 없음. * 기타 2 명은 승려. * 출전 r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의 번역을 따름. 이 일부 등장하며 나머지 모량부, 한기부, 습비부의 인물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상황은 다른 비문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위의 두 비문 이외 에 명활산성비 (55 1)에 나오는 本 波 部 의 伊 皮 수 利 吉 之 나 창령진흥왕척경비 (56 1)에 나오는 本 彼 의 末 口 智 及 R 千 등 2 명을 제외하면 모두 훼부(양부)와 사훼부(사량 부)만 있고, 나머지 3부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71) 이것은 6세기에 훼부(양부)
181 와 사훼부(사량부)로 표현된 지역에 정치적 인물들이 모여 살았다는 것임과 동시 에 거주지의 확장도 그 범위 안에서만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6세기초 의 비문인 냉수리비 (503) 와 울진봉평비 (524) 보다 양부의 인물 비율이 많아졌다는 사실도 양부 내에서의 거주지 확장이 더 많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사찰의 분포를 통해 추정한 6-7세기 정치중심구역의 공간범위는 양 부와 사량부에 주로 걸쳐 있으며 그 외에 일부 본피부가 들어가 있다. 이 지역에 해당되는 월성과 낭산 사이는 지금도 안압지쪽과 남천쪽으로 물이 갈라지는 작은 분수계의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6세기 이후에 당시의 왕성이었던 월성의 동쪽 인 이곳으로도 주거지가 확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 이전의 사지로 알려진 구황동 옥다리들사지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그런 가능성을 높여준다.7 2 ) 이렇게 본다면 6세기의 비문에 등장하는 일부 본피부의 인물도 정치중심구역 안에 살았 다고 볼 수 있게 된다.7 3 ) (2) 통일 이후의 주거지 확장 통일을 계기로 하여 왕경의 인구가 증가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에 대해서는 이 미 제 1 절에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는 당연히 주거지의 확장을 초래했 을 것이다. 그러면 도시부분의 주거지 확장이 어떤 방향으로 어느 부분까지 이루 어졌을까? 이것에 대한 시사점은 우선 35금입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찾아낼 수 있다. 자료 5-34) 선라 전성기에는 京 中 에 178, 936 호, 캉, 55 리, 35 개의 金 入 힘 [ 富 潤 大 힘을 말함]이 있었다. 이것은 南 毛, 北 좀, 판 比 所 힘, 本 彼 흰, 梁 흰, 池 上 毛 [ 本 彼 部 J, 財 買 井 힘[ 庫 信 公 祖 宗 J, 北 維 힘, 南 維 켠[ 反 香 츄- 下 tjj J, 隊 힘, 寶 支 힘[ 反 香 츄 北 J, 長 沙 毛, 上 樓 흰, 下 樓 흰, 水 望 힘, 황종, 楊 上 힘[ 梁 南 J, 漢 l 技 힘[ 法 流 몫 南 J, 71) 본피부 출신으로 나오는 2명도 월성과 낭산을 잇는 선이나 그 바로 남쪽에 살았 을 가능성이 높다. 이곳은 제 2장에서 본피부의 땅이라고 비정한 바 있으며, 이것이 맞는다면 도시가 팽창하는 연장선상에서 보아도 합리적이다. 72) r 慶 州 遺 題 地 圖 J, 국립경주박물관 : 경주시, 1997:348 73) r 三 國 史 記 卷 第 六 新 羅 本 紀 第 六 문무왕 2년 (662) 기록에 論 功 中 分 本 彼 宮 財 貨 田 莊 :fj:x 樓 以 陽 庫 信 仁 問 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기록을 통해 문무왕 2년 (662) 경에 본피 궁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宮 이 주거 밀집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없다고 본다면 본피궁은 본피부의 땅이면서 월성과 아주 가까운 동쪽이나 동남쪽에 있었을 것 으로 볼 수 있다
182 훌륭 六 흰[ 上 同 ], 板 積 힘[졌 皇 몫 上 야], 別 敎 힘[j ll 北 J, 衝 南 힘, 金 楊 宗 힘[ 梁 官 좋 南 ], 曲 水 종[) 11 北 ], 柳 也 힘, 좋 下 힘, 沙 梁 힘, 井 h 힘, 里 南 힘[단 所 힘], J면 內 曲 힘, 池 힘, 츄 上 毛 [ 大 宿 힘J, 林 上 毛 [ 南 龍 之 좋 東 方 칩 池 J, 橋 南 힘, 替 Ilt 毛 [ 本 彼 部 J, 樓 h 후, 里 上 힘, 佈 南 힘, 井 下 힘이었다,74) 35금입택 기록에 나오는 39개의 힘 중에서 6부의 이름과 동일한 힘의 이름으로 梁 힘 沙 梁 힘 本 彼 힘 漢 l 技 힘 등 4 개가 나온다. 이것을 통해 9세기 중반 또는 후 반경에는 도시가 양부 사량부 본피부 한기부 지역에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그리고 기존의 한기부 지역에 있으리라고 추측되는 곳으로는 한기택과 마찬가 지로 법류사 남쪽에 있었다는 옳 六 힘이 있다. 또한 본피부의 이름이 세주에 특별 히 기록된 池 上 힘과 흉Ilt힘이 있으며 망덕사 남쪽에 있었다는 長 沙 라는 모래사 장 75) 과 이름이 같은 長 沙 힘도 기존의 본피부 지역으로 볼 수 있다,76) 마지막으로 지금의 北 川 으로 추측되는 川 의 북쪽에 있었다는 別 敎 힘과 曲 水 힘이 보인다. 나머 지의 힘들은 지금도 남천 북쪽에 우물이 남아 있어 그 위치가 확인되는 財 買 井 힘 과 분황사 上 행에 있었다고 기록된 板 積 힘 이외에는 분명한 위치를 알기가 어렵 다,77) 하지만 금입택이 최소한 도시부분에 일반 거주지와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면 이와 같은 결과만으로도 통일 이후 거주지의 확장 방향이 추측될 수 있다. 기존의 한기부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2개의 毛 은 낭산과 명활산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78) 74) 新 羅 全 盛 之 時 京 中 十 七 萬 A 千 九 百 三 十 六 戶 一 千 三 百 六 十 행 五 十 五 里 三 十 五 金 入 힘[ 言 富 潤 大 힘 也 ] 南 켠 北 펀 란 比 所 힘 本 彼 힘 梁 켠 池 上 힘[ 本 彼 部 財 買 井 힘[ 演 信 公 祖 宗 ], 北 維 럴 南 維 켠[ 反 香 좋 下 행]. 隊 흰 홉 支 힘[ 反 香 좋 北 ]. 長 沙 힘 上 樓 힘 下 樓 흰 水 望 흰 果 힘 楊 上 흰[ 梁 南 ]. 漢 l뼈흰[ 法 流 좋 南 ]. 量 六 흰[ 上 同 ]. 板 積 혐[췄 皇 좋 上 행]. 別 敎 힘[J II 北 ]. 衝 南 흰 金 楊 宗 힘[ 梁 官 좋 南 ]. 曲 水 켠[ 川 北 ]. 柳 也 현 좋 下 힘 沙 梁 흰 井 上 켠 里 南 흰[닫 所 펀]. 思 內 曲 흰 池 흰 좋 上 흰[ 大 宿 펀]. 林 上 켠[뿜 龍 之 츄 東 方 有 池 ]. 橋 南 펀 흉 Pt 흰[ 本 彼 部 ]. 樓 上 켠 里 上 힘 倫 南 현 井 下 켠( If"프 國 遺 事 卷 第 一 紀 異 第 一 辰 韓 ) 75) ~프 國 遺 事 卷 第 一 紀 異 第 一 奈 까I 王 金 [ 朴 ] 提 上 76) 이기동도 이곳을 장사택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기동, 1984) 77) 이기동은 방대한 자료를 종합하여 금입택의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기동 은 6부를 경주시내와 그 주변에만 있는 것으로 비정하고 있고, 방향도 한기부와 습 비부, 사량부와 양부가 본 논문과 다르다. (이기동, 1984: ) 따라서 이기동의 금입택 위치 비정은 일부를 제외하면 수용하기가 어렵다. 78) ~프 國 벚 記 卷 第 IZ:C I 十 四 列 傳 第 四 金 陽 부분에는 陽 於 是 突 圍 而 出 至 韓 l뼈[ 作 漢 ìt!l1] 市 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기록에 나오는 韓 l 技 市 또는 漢 祝 市 는 한기부의 이름과 같은 것을 통해 볼 때 지금의 낭산과 명활산 사이의 어디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83 o 1km l. 양부 2. 사량부 3. 본피부 4. 한기부 5. 습비부 6. 모량부 a. 문무왕 때 만들어진 안압지와 추정 壞 힘 터 b. 성동동전랑지 통일 이전의 사찰 및 사지 통일 이후의 사찰 및 사지 -'-'- 5세기의 주거지 범위... 통일 이전 확장 방향 Q 통일 이후 확장방향 (자료Ií 慶 州 遺 隨 地 圖 J, 국립경주박물관 : 경주시, 1997 에서 재편집) 그림 -17 6세기 이후 주거지의 확장 방향 이 사건은 836년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9세기 중반 경에 원래 한기부 지역이었던 낭 산과 명활산 사이까지 시가지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4 그리고 기존의 본피부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4 개의 r쉰은 월성과 낭산을 잇는 선의 남쪽과 동남쪽에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통일 이전에 비해 도시 부분의 거주지가 낭산 동쪽과 동남쪽, 그리고 북천 북쪽으로 확장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통일 이후에 건립된 평지사찰의 분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7에서 평지사찰의 분포를 보면 35금입택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북천 북쪽과 낭산 동쪽 동남쪽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거기다가 35금입택 의 기록에서는 확인될 수 없었던 서천(형산강 본류)의 남쪽으로도 계속 확산되고 있음도 보이고 있다. 이것을 통해 도시가 지금의 포석정지 부근까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일부 도시계획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확인되고 있 다. (장순용, 민덕식, 등) 이들에 의하면 도시계획의 흔적이 이미 앞에 서 설정한 범위까지 나타난다고 한다. 제 3 절 왕도와 6부로의 행정구역 개편 3-1 왕도와 6부로의 분리 신라 왕경의 행정단위는 유리니사금 9 년 (32) 6촌에서 6부로의 개편 기록과 자 비마립간 12 년 (469) 정월에 京 都 의 均 里 이름을 정했다 는 기록 이후에 행정단위 의 변화나 행정구역의 개편에 대한 특별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다음과 같 은 기록을 통해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자료 5-35) 今 按 新 羅 始 祖 麻 居 世 前 漢 五 鳳 元 年 甲 子 開 國 王 都 長 三 千 七 十 五 步 廣 三 千 一 十 八 步 三 十 五 맺 六 部 79) 위의 기록에 나오는 왕도의 규모를 지금의 단위로 환산하면 長 3.075보는 약 5.5km 이 고 廣 3, 018보는 약 5.4km 이다. (이종욱 1998:17) 이 규모는 지금의 rl.:::z. /at 시내에 있는 평지의 동서 길이와 대략적으로 비슷하다. 지금까지 일부 학자들은 이 왕도의 규모를 신라 왕경의 전부로 이해한 상태에서 다른 기록들을 검토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견해들은 위의 기록을 王 都 는 長 이 3, 075 步 이고 廣 이 3,018 79) 三 國 뀐듭C..I 卷 第 f 十 四 雜 : 志 第 -단 地 理
185 i 步 인데 (그 안에는) 35 里 와 6 部 가 있었다 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80) 이렇게 해 석하면 35 리와 6부는 왕도 안에 있는 것으로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은 역사 서 편집자가 행정단위의 위계를 무시한 채 기록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만약 왕도를 왕경의 전체라고 볼 때 왕도 안에 6부가 있었다면 部 가 里 보다 더 상급의 행정단위이기 때문에 왕도 -6부 -35 리의 순서로 기록되어야 합당하다. 하지만 위의 기록에는 분명히 왕도 -35 리 -6부의 순서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을 역사서 편 집자의 실수로도 볼 수 있지만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 논문에서는 이와 같은 모순점을 극복하기 위해 다음의 해석문처럼 이해해야 된다 고 본다. 자료 5-36) 지금 살펴보건데 신라시조 輪 居 世 는 前 漢 五 鳳 元 年 (B.C.57) 에 開 國 하였다. (그 國 의 범위에는 첫째) 王 都 가 있었는데 (그 규모가) 長 이 3, 075 步, 廣 이 3,018 步 이고 35 里 가 있었다. (둘째) 6 部 가 있었다. 위의 해석문처럼 본다면 혁거세가 개국한 영역이 후에 거의 그대로 왕경이 되 었으며, 왕경 안에는 왕도와 6부가 있게 된다. 그리고 35리는 문장 순서에 맞게 왕도 안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그 동안 많은 논 란이 되어 왔던 r 삼국유사 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이해될 수 있다. 자료 5-37) 신라 전성기에는 京 中 에 178,936호, 1,360 방, 55 리, 35개의 金 入 힘 [ 富 潤 大 흰을 말함]이 있었다,81) 위의 기록은 호-방-리의 체계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행정단위의 위계 순서를 벗어나고 있지 않다,82) 다만 里 보다 상급 단위인 6 部 가 적혀 있지 않아 약간의 모 80) 이 병 도는 왕도( 王 都 )는 길 이 가 3, 075보( 步 ), 너 비 는 3, 018보( 步 ), 35 리 ( 里 ) 6부( 部 ) 가 있었다 로 해석하고 있다. ( Ií삼국사기 하, 김부식 지음/이병도 역주, 을유문화 사, 1983:205) 81) 新 羅 全 盛 之 時 京 中 十 七 萬 八 千 九 百 三 十 八 戶 千 츠 百 六 十 야 五 十 五 里 프 十 五 金 入 毛 [듬 富 潤 大 흰 也 ]( r 三 國 遺 事 卷 第 一 紀 異 第 一 辰 韓 ) 82) 행은 왕도 밑의 행정단위이고 里 는 6부 밑의 행정단위라는 견해가 있다. (이종욱, 1999:399)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이와 같은 견해를 받아 들일 수 없다. 첫째, 행맺는 왕도와 6부가 분리되기 훨씬 이전인 자비마립간 12 년 (469) 에 만들어졌다. 둘째Ií삼국유사 의 기록 속에 왕도의 범위인 長 약 5.5km, 廣 약 5.4km 안에 뿔가 있음이 사량리, 월명리, 분황사 동리 등 여러 곳에서 발견 되고 있다. 셋째Ií뜨; 國 遺 事 에는 분명히 178, 936호 -1, 360방 -55 리의 순서로 기재
186 순점이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미 살펴본 삼국사기 의 기록과 대조해 본다 면 오히려 6 部 가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록은 타당성을 지니게 된다. 보통 위의 기록에 나오는 京 中 의 京 을 삼국사기 의 기록 속에 나오는 王 都 정도로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럴 경우 삼국사기 에 나오는 35 리와 삼국유사 에 나오는 55 리라는 두 개의 기록이 충돌된다.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해 두 기록 중의 하나가 틀렸다고 보거나 里 의 수가 35개에서 55개로 증가한 것이라고 보게 된다. 본 논문에서는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모두 틀린 기록이 아니며, 최 전성기의 상황에 대한 기록을 다르게 서술해 놓은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문점을 풀기 위해서는 京 中 의 京 을 왕도 정도의 규모가 아니라 지금 의 경주통합시 정도의 면적 즉 신라 건국시의 6촌 규모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 의 기록에 대한 본 논문의 해석을 따른다면 京 中 의 京 에는 왕도와 6 부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里 라는 단위 위에는 왕도와 6부가 모두 있 게 된다. 그렇다면 삼국유사 의 기록에 里 뒤에 6 部 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ó} 주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이제 이와 같은 해석을 바탕으로 신라 왕경의 행정단위 를 위계별로 정리해 보면 표 -20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표 -20 왕경의 행정체계 왕경 -[ 님 왕도 35 리 (합 55 리) 20 리 - 1, 360방 호 위의 표를 바탕으로 보면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의 기록 어느 것도 툴리 지 않은 것이 된다 r 삼국사기 에는 왕경에서 35리를 포괄하고 있던 왕도와 6부 만을 기록한 것이 된다. 이것은 6부가 있었다는 新 羅 本 紀 의 기록들을 무시하지 않 으면서도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왕도에 중점을 두고 기 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r 삼국유사 는 왕경을 55 리와 1, 360 방의 입장에서만 하여 방이 리의 하부단위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기석도 조선시대 (671) 경주의 행 정구역상에 읍내 6방 이외에 동면에 5 방, 남면에 4 방, 서면에 4 방, 천북면에 2방 등 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왕도(본문에는 왕경이라 적혀 있음)뿐만 아니라 주변지역 까지 방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기석, 1999:11)
187 기록한 것이 된다. 이것은 뒤에서 다시 설명할 것이지만 통일 이후 신라인들의 실 질적인 생활단위가 되었던 里 를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 들을 통해 왕경에 있었던 6부가 언제부턴가 왕도와 6부로 나누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잃) 3-2 왕도와 6부의 관할 관부 삼국사기 卷 第 三 十 八 雜 志 第 七 職 官 上 에 의하면 신라의 왕경을 관장했던 관부로는 京 城 周 作 典 典 뭄 暑 大 日 任 典 六 部 少 藍 典 등 4 개가 나오고 있다. (이종 욱, 1999:35) 이 4개의 관부 중 육부소감전만은 경덕왕 18 년 (759) 에 있었던 관부 및 관직 명칭의 변경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이 때의 명칭변경은 신라고유의 명칭을 버리고 중국식 명칭으로 바꾸었던 것으로서 최소한 관직의 이름 하나라도 바뀌지 않은 관부가 없을 정도였다. 이 때 경성주작전도 수성부로, 전읍서는 전경 부로 바뀌며 대일임전은 아예 전경부에 합쳐진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육부소감전만 이 명칭의 변경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것은 경덕왕 18 년 (759) 당시에는 없 었던 관부라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경덕왕 때부터는 경성주작전(수성부)과 전읍 서라는 두 관부만이 있었던 것이 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 시기에 왕경을 관장하던 관부가 왜 둘이 있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 관부의 격을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경성 주작전은 우두머리인 令 이 5명이나 될 뿐만 아니라 관등도 대아찬 (5위)에서 대각 간(1위 )까지로 되어 있어 진골귀족만이 임명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원성왕 6년 (800) 이전의 전읍서의 우두머리인 6 명의 藍 은 내마(1 1 위)에서 대 내마 (10위)까지만 할 수 있었다. 원성왕 6 년 (800) 에 승격된 전읍서 2 명의 柳 도 내 마(1 1 위)에서 사찬 (8위)까지만 할 수 있었다. 관부의 우두머리라는 입장에서 보았 을 때 전읍서는 경성주작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예를 들어 전읍서의 최고관등은 경성주작전의 차관급인 6 명의 聊 이 내마 01 위)에서 아찬 (6 위)까지 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서도 더 낮은 편이다,84) 그런데 경성주작전과 전읍서는 상하 83) 기존의 연구에서는 6부라는 용어 대신에 王 離 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종욱, 井 上 秀 雄, 木 村 誠, 오영훈, 등) 하지만 王 離 라는 용어는 역 사기록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왕기라는 용어 대신에 중대 ( ) 이후에도 계속 등장하는 6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84) 전읍서의 경은 지방행정구역인 현령 최고관등과 감은 소수의 최고관등과 같다
188 관계에 있는 관부였다는 기록도 없다.85) 또한 경성주작전에서 우두머리였던 令 밑 의 柳 이 6명이었다는 기록과 원성왕 6 년 (800) 에 전읍서의 우두머리가 柳 이 2 명, 藍 이 4 명이었다는 기록을 대조해봐도 상하관계를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두 관부는 상하관계가 없는 독립적인 것이었다고 밖에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격이 현격하게 차이나는 두 개의 관부가 동시에 왕경의 사무 를 관장하면서 존재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이미 신라 최 전성기에 왕경이 왕도와 6부로 나누어져 있었다는 사실과 연결시킬 수 있게 된다. 즉 경성주작전은 왕도를 관장하던 관부였고 전읍서는 6부를 관장하던 부서였다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8 6 ) 왕도는 내부에 35 里 라는 하급 행정단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독자적인 하 나의 단위였기 때문에 5명의 令 이 합의제로 일을 처리했던 것으로 보인다.8 7 ) 반면 에 전읍서의 우두머리인 6 명의 藍 중 원성왕 6년에 2 명이 聊 으로 승격되는 것을 통해 볼 때 합의제라기보다는 6명이 6부 각각의 일을 맡아서 처리했던 것 같다. 이것은 전읍서에 붙어 있는 세주에 본래 藍 6 인을 두어 6부를 나누어 다스리게 했는데 원성왕 6년 (800) 에 2 인을 승격시켜 聊 으로 삼았다 라고 한 기록을 통해서 도 확인된다. 85) 상하관계에 있는 관부의 예를 들면 賞 陽 暑 는 홈 部 에, 大 道 暑 國 學 音 聲 暑 典 祝 暑 司 範 暑 은 禮 部 에 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三 國 史 記 卷 第 츠 十 八 雜 志 第 七 職 官 上 ) 86) 6부의 통치를 위한 관부가 육부소감전, 전읍서(전경부), 대일임전이며, 왕도의 도 시계획을 담당하고 관리하기 위하여 京 城 周 作 典 ( 修 城 府 )이 설치 운용되었다는 견해 가 있다. (이종욱 1999:399) 본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이 견해와 약간 다 르게 보고 있다. 첫째 육부소감전은 왕도와 6부가 분리되기 이전 6부의 행정을 맡 아보던 관부였다고 보았으며 행정도 맡아보았다고 보았다. 둘째 경성주작전은 왕도의 도시계획뿐만 아니라 일반 오영훈은 왕도는 대일임전이, 왕기는 육부소감전이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았지만 정확한 시대를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영훈, 1992) 여호규는 중고기에는 육부소감전이, 중대에는 전경부가 왕경을 맡아보았다고 보았는데, 그는 왕경이 중대에 지금의 경주시내와 그 주변으로 축소되었다고 보았 다. (여호규, 2001) 87) ~ 新 居 뿔 東 東 列 傳 新 羅 부분에는 귀족들의 합의제도인 和 白 에 대한 기록이 나 온다. 이와 같은 합의제 전통은 선라 사회에서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다. 예를 들 어 우두머리인 令 의 수가 병부 3 명, 조부 2 명, 예부 2 명, 승부 2 명, 영객부 2 명, 위 화부 2 명, 좌이방부 2 명, 우이방부 2 명 등이다. 이와 같이 각 관부의 令 이 2 명 이상 인 것은 신라 사회의 귀족연합적인 성격에 의한 합의제적 전통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다
189 표 -21 경성주작전 전읍서 대일임전 관부 이름 경성주작전 전읍서 대일임전 설치시기 성 덕왕 31 년 (732)? 태종왕 4년 (657) 관리 가 까- t Ir;t 二 r 7 까 - t :1r1; I5:- -까 ~τ1; [5 二 - 영 경 감 대사 대사읍 대도사 사지 중사읍 소도사 사 소사읍 도사대사 사 16 소사사지 목척 70 도알사지 도인사지 당 이하 27 경덕왕 수성부로 고침 전경부로 고침 전경부와 함침 혜공왕 경성주작전으로 고침 전읍서로 고침 원성왕 6년 (780) 감 경 6명은 성덕왕 32년 기타 2 명을 경 (8-11) 으로 (733) 에 둠 승격 표 -22 육부소감전 양부 藍 郞 1 大 奈 麻 1 大 舍 2 舍 知 1 史 6 사량부 藍 郞 1 大 奈 麻 1 大 舍 2 舍 知 1 史 5 본피부 藍 郞 1 藍 大 舍 1 舍 知 1 籃 I 樓 5 史 1 모량부 폼슴('2 1 大 舍 1 舍 知 1 藍 樓 5 史 1 한기부 톰슴('2 1 大 舍 1 舍 知 1 籃 l 睡 3 史 1 습비부 藍 ('2 1 大 舍 1 舍 知 1 藍! 樓 3 史 왕도와 6부로의 분화시 가 왕경이 언제부터 왕도와 6부로 분화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따라 서 다른 기록을 가지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경성주작전의 우두머리인 5 명 의 令 이 성덕왕 31 년 (732) 에, 그 다음인 6명의 g~o 이 같은 왕 32 년 (733) 에 처음으로 두어졌다는 기록이 우선적으로 참조된다. 이와 같은 기록에 토대를 둘 때 성덕왕 31 년 (732) 에 경성주작전이 처음으로 설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읍서의 설치 연 대는 기록에 나오지 않아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경덕왕 19년 (759) 이후 경성주작 전과 함께 왕경의 사무를 맡았던 사실만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성덕왕
190 31 년 (732) 에는 왕도와 6부로의 행정구역의 분화가 확실하게 이루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성덕왕 31 년 (732) 이전에 왕경의 업무를 관장하던 관부는 어디였을 까?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일냉수리비 (503) 와 울진봉평비 (524) 까지의 비문에 양부와 사량부를 제외한 나머지 4부 중 2부의 千 支 가 왕 및 고위 관등소 유자와 함께 지방의 일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볼 때 최소 한 이 때까지는 6부의 우두머리가 임명직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양적성비 (550 년 경)부터는 양부와 사량부 이외에는 고위관등을 소지한 자가 거의 나오고 있지 않 다. 따라서 울진봉평비 (524) 와 단양적성비 (550년경)의 어느 시기부터 6부를 관장하 던 임명직의 관부가 설치되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바로 六 部 少 藍 典 이었다고 볼 수 있다,88) 육부소감전에는 6부의 이름과 6부 각각을 관장하던 관직 및 인원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관직의 이름에 후대에 사용되지 않던 大 奈 麻 라는 관등이 그대로 사용되기 도 했다. 그런데 三 國 史 記 卷 第 三 十 八 雜 志 第 七 職 官 上 에 신문왕 4 년 (684) 에 설치된 것으로 나오는 永 興 츄 成 典 에도 大 奈 麻 라는 관직이 나온다. 하지만 같은 기록에 경덕왕이 이 대내마를 藍 으로 고쳤다고 나온다. 이를 통해 볼 때 대내마라 는 관직 명칭이 최소한 신문왕 4 년 (684) 부터 경덕왕 19 년 (75 1)까지 존재하다가 籃 이라는 명칭으로 바뀌면서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대내마라는 관직의 이름이 나오기는 하지만 藍 으로 개편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육부소감전은 경덕왕 19 년 (751) 에는 없었던 관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경덕왕 18 년 (759) 에 개편되었다는 기록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육부소감전이 법홍 왕 3년 (516) 에 병부를 시작으로 설치된 초기 관부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육부소감전의 우두머리인 藍 郞 이나 藍 많의 관등은 그 밑에 대내마(1 0 위)가 나오 는 것으로 보아 관등의 입장에서는 대내마보다 높거나 같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 을 원성왕 6 년 (790) 이전 전읍서의 우두머리였던 6 명의 藍 이 내마(1 1 위)에서 대내 마(1 0 위)까지 할 수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육부소감전은 전읍서보다 한 단계 높게 취급받던 관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육부소감전이 성덕왕 31 년 (732) 까지 광경의 업무를 처리하던 관부였다고 보아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당시까 88) 남산신성비 (59 1) 제 3비에도 이와 같은 가능성을 알려주는 陳 部 主 刀 里 受 作 it 一 步 一 村 部 藍 口 口 口 次 大 舍 검L 生 次 大 舍 文,R f 九 口 口 小 舍... 라는 기록이 나온다.( r 譯 註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저!13 권(신라 발해 편), 韓 國 古 代 社 會 짧 究 所 編 1992:113) 이 기록에 나온 部 籃 口 를 이미 육부소감전의 직명으로 본 견해가 있다. (이종욱, 1974)
191 지는 왕경의 행정구역이 기본적으로 6부로만 나누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 한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3 년 (683) 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자료 5-38) (신문왕 3년 (683)) 일길찬 김흠운의 少 女 를 부인으로 삼았다... 5월 7 일 이찬 文 顧 과 뽑 元 을 보내 그 집에 이르게 하여 책봉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그날 때 時 에 파진찬 大 常 孫 文 과 아찬 坐 耶 吉 됐 등이 각각 쫓 娘 및 급량 사량 2부의 樞 30인과 더불어 부인을 맞아 왔는데 乘 車 와 좌우시종, 官 人 및 娘 樞 가 매우 성대했다. 왕궁 북문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려 大 內 로 들어 왔다,89) 위의 기록에는 왕비를 맞아오는데 각각 2 명의 파진찬 (4 위). 아찬 (6위)의 쫓 娘 과 급량 사량 2부의 樞 각 30 인을 동원하고 있다. 이 때 동원된 두 部 의 樞 30 인은 파진찬 아찬의 棄 娘 의 예를 통해 볼 때 결코 낮은 신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 다면 이들 대부분은 후대의 王 都 에 살았을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곳을 급량 사량부로 칭하는 것으로 보아 행정적으로는 아직 왕도와 6부로의 분화가 이루어 져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경성주작전이 생기던 성덕왕 31 년 (732) 까지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왕경의 업무 처리라는 행정적인 측면 이 아닌 사회적 인식의 측면에서는 후대의 왕도 -6부와 같은 분리 의식이 존재할 수 있다. 이미 6세기 이후에는 최고지배층의 대부분이 중심지에 집중해 살고 있었 으며, 왕궁 사찰 및 기타 여러 시설이 입지해 있는 후대의 왕도와 그 외 지역과 의 차이가 심하게 나타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문무왕 6년 (666) 에 처음으로 王 都 라는 표현이 나온 다. 신라 건국부터 멸망할 때까지 왕경에서 지진이나 기후 등 천재지변이 발생했 을 경우에는 항상 京 都 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문무왕 6 년 (666) 이후에는 수도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王 都 라는 표현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선덕왕 ( ) 때의 인물인 竹 竹 전에 王 都 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것을 통해 늦어도 7세기 중반부터는 왕경의 중심 부를 王 都 나 그에 준하는 용어로 칭하는 사회적 인식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발견 할 수 있다.90) 자료 5-32와 다음의 자료는 이와 같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89) 納 一 吉 滾 金 敎 運 少 女 寫 夫 人... 五 月 七 日 遺 伊 滾 文 頻 뽑 元 低 其 흰 冊 寫 夫 人 其 日 gp 時 遺 波 珍 滾 大 常 孫 文 阿 滾 坐 耶 吉 l됐 等 各 與 쫓 娘 及 梁 沙 梁 二 홈ß 樞 各 프 十 人 迎 來 夫 人 乘 車 左 右 待 從 官 人 及 娘 樞 甚 盛 至 王 宮 北 門 下 車 入 內 11" ~: 國 벚 記 卷 第 八 新 羅 本 紀 第 八 신문왕 3 년) 90) 강경구에 의하면 신라에서 l. 거칠부의 상고사 편찬, 2. 중대 왕조의 상고-중고(즉 상
192 표 -23 r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660년 이후 나오는 왕경에 대한 호칭 연도 호칭 내용 태종 6년 (666) 王 都 항복해온 고구려 유민을 王 都 와 州 府 에 안치. 문무 21 년 (68 1) 京 城 왕이 京 城 을 새롭게 하려고 의상에게 물어봄. 신문 원년 (68 1) 京 城 흠돌의 난이 京 城 에서 일어남. 신문 3년 (683) 京 都 안승을 京 都 에 머무르게 함 효소 8년 (699) 王 都 동해에서 水 戰 이 있었는데 소리가 王 都 에까지 들림. 원성 2 년 (786) 王 都 9월에 王 都 에 기근이 있어 구흉. 헌덕 14년 (822) 王 京, 王 都 김헌창의 난 때 완산주의 長 史 崔 雄 등이 王 잉으로 도망 와서 고 함... 王 都 의 A 方 을 지 키 게 하고 군사를 출동. 헌강 6년 (880) /?-. 都 9 월 헌강왕이 월상루에 올라 京 都 의 민가가 즐비함을 봄. 경애 2년 (925) 王 都 10월 고울부 能 文 가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자 王 都 에 가깝다는 이유 로 돌려 보냄 경 애 4년 (927) 王 京 견훤이 갑자기 王 京 에 쳐들어 옴. 경순 9년 (935) 王 都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여 신료를 이끌고 王 都 를 떠남. * r 삼국사기 에서는 천재지변이나 기후 변동에 대해서 건국부터 멸망까지 일관되게 京 都 라고 서술하였음. 따라서 이런 기록은 제외함. * 단순히 京 이라고 기록된 것은 제외함. * r삼국사기 地 理 조에 王 都 가 1 번 나오고 職 官 武 官 조에는 5번 나옴. * r삼국사기 열전 竹 竹 조에 王 都 가 1 번 나오고 견훤조에 2 번 나옴. 견원조에는 王 京 이란 용 어도 1 번 나옴 자료 5-39) 절은 京 城 동남쪽 20여리에 있다... 開 元 7년 己 未 (719) 2월 15 일 에 중아찬 全 忘 誠 이 그의 죽은 아버지 仁 章 일길간과 죽은 어머니 觀 웹 里 夫 人 을 위해 캅 山 좋 一 所 와 石 爛 動 一 騙 를 공경스럽게 만들고... 91) 문무왕이 새롭게 하려고 했던 京 城 은 의상의 대답을 고려할 때 왕경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왕도가 되는 도시부분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단 山 좋는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패릉리에 있음을 고려할 때 20 여 리 떨어져 있었 다고 표현된 京 城 은 왕경 전체가 아니라 역시 후대에 왕도가 되는 도시부분을 의 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예를 통해 볼 때 京 城 이란 용어가 후대에 王 都 대) 역사 편찬, 3. 하대 왕조의 상대-중대역사 편찬이 있었음이 확인된다고 한다. (강경 구, 1997:325) 그렇다면 문무왕 6년과 죽죽전에 나오는 王 都 라는 표현은 중대 ( ) 나 하대 ( ) 의 행정체계에 대한 인식을 보여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왕도라는 행정체계가 중대 이후에나 자리잡았다는 것이 된다. 91) 좋 在 京 城 東 南 = 二 十 許 里... 開 元 七 年 己 未 -τ 月 十 五 日 重 阿 l 樓 全 忘 誠 寫 亡 考 仁 章 一 吉 극 二 [ 千 ] 亡 如 [ 批 ] 觀 원먼 夫 人 敬 造 HLLJ 몫 一 所 ri 鋼 휩J- 騙... ( li-:: 國 遺 事 卷 第 드즈 참 像 第 四 南 月 LlJ)
193 가 되는 도시부분을 일컬는 용어임을 알 수 있으며 경성주작전이란 이름도 이것 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경덕왕 18년 (759) 에 전읍서에 합쳐지는 대일임전은 육부 소감전과 지역은 같지만 업무가 달랐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전읍서에 합쳐지는 것 을 통해 볼 때 최소한 후대의 왕도 부분에 대한 업무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아 마 태종무열왕 4년을 즈음해서 후대의 왕도가 아닌 지역에 있었던 특별한 업무를 보기 위해 특별히 설치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92) 하지만 왕도와 6부로의 확실한 행정구역의 분화가 나타난 것은 역시 성덕왕 31 년 (732) 이라고 보아야 한다, 93) 이 때 육부소감전은 경성주작전과 전읍서로 개편되 면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때의 개편은 단순한 양적 팽창이 아니라 질 적 전환이라고 보아야 한다. 경성주작전의 우두머리인 5 명의 令 은 관등이 대아찬 (5위)에서 대각간(1위 )까지임을 통해 볼 때 진골귀족만이 할 수 있었다. 또한 신 라의 모든 관부 중에서 令 의 수가 가장 많으며 병부에 있었던 3 명의 令 이 세 시 기에 걸쳐 순차적으로 두어진 반면에 경성주작전의 5명의 令 은 한 해에 두어졌다. 이것은 성덕왕 31 년 (732) 에 왕경의 행정업무에 대한 혁신적인 인식의 전환이 있었 음을 알려준다. 그러한 혁신적인 인식전환의 하나가 왕경의 행정업무를 최고 지배층인 진골신 분에게까지 적용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전에 왕경의 행정업무를 처리했 던 육부소감전의 우두머리는 관등으로 볼 때 5두품이거나 6두품의 하위관등이다. 따라서 진골귀족이나 6두품에 관한 행정업무를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다른 관 부에서 이 일을 맡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경성주작전의 令 은 진골귀족이었을 뿐 만 아니라 그 수도 5 명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을 합의해서 처리했다는 것을 92) 이종욱은 전읍서는 6부의 통치 일반에 걸친 문제를 다루었고 육부소감전은 군사 적인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대일임전은 어쩌면 조세수취 등 재정적인 업무를 담당 한 관부로 추측했다, (이종욱, 1999:53) 본 논문에서는 전읍서와 육부소감전이 시기 를 달리하는 관부였다고 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추측올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다만 육부소감전과 대일임전, 전읍서와 대일임전의 존재시기가 겹치는 것을 통해 볼 때 관할 지역은 같아도 업무를 달리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은 고려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여호규는 대일임전이 도성에서 거행된 국가의례를 주관하던 관부로 보았고, 전읍서는 도성의 서 일반행정을 담당하던 관부로 보았다. (여호규, 2001) 여기 대일임전이 국가의례를 주관하던 관부라는 측면은 고려될 수 있는 부분이다. 다 만 대일임전과 전읍서가 도성, 즉 왕도를 관장하던 관부라는 측면은 본 논문과 다 르다. 93) 왕도와 6부(왕기)의 분화시기에 대해 신라 초기부터 있었다는 견해(이종욱, 1982), 문무왕 때쯤 분화되었다는 견해(오영훈, 1992), 경덕왕대에 있었다는 견해( 木 村 誠, 1984) 등이 있다
194 의미하며, 그러한 일 중의 하나가 진골귀족 자신들의 일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혁신적인 인식전환이 바로 정치중심구역과 그 밖의 지역 사이에 나 타나는 실질적인 격차를 인정하여 행정엽무의 처리에 반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다. 신라에서 6부의 전통은 건국 전후부터 생긴 것으로서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도 강하게 존속했음은 이미 제 3장과 제 4장에서 알아본 바 있다. 이러한 전통 때문 에 왕경에서 정치중심구역과 그 이외 지역의 격차가 실질적으로 발생했음에도 불 구하고 행정구역의 변경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성덕왕 31 년 (732) 에 바로 이러한 전통을 깨고 정치중심구역과 그 외 지역 사이의 격차를 실질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며, 그 때문에 왕경이 왕도와 6부로 이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두 가 지의 인식전환이 있었기 때문에 육부소감전의 단순 개편이 아니라 완전 폐지와 경성주작전-전읍서로의 새로운 재편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표 -24 왕경 행정체계의 시대적 변화 B.C 세기초반 6세기 중반 멸망 단위 6촌 6부 6부 왕도 6부 행정관부 우두머리 (수) 임명여부 4-1f-~ {}{! 초l 一 자 Q 部 :t 감랑 (3) 및 감신 (3) O 대일임전 경성주작전 전읍서 令 (5) 籃 (6) 籃 (4) 및 聊 (2) O O 최고 관등은 대아찬 (5위)-대각간(1위 ) τ낀!프 三 6촌장 왕실집단 대내마(1 0 위) 이거나 감: 대내마(1 0위)-내마 (11 위) 약간 높음 경 사찬 (8 위)-내마(1 1 위) 기타 판[) 主 는 금석문엔 대일임전은 까지 존속 우두머리의 관등은 사 部 千 支 로 나옴 지 (1 3 위 )-내마(1 1 위 )이 다
195 3-4 왕도와 6부의 범 위 (1) 왕도의 범위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왕도의 범위는 지금의 단위로 환산하면 長 3, 075보는 약 5.5km 이 고 廣 3, 018보는 약 5.4km 이 다.94) 이 길 이 는 동서 로는 경 주시 내 서 쪽의 선 도산 자락으로부터 동쪽의 명활산 자락까지의 길이와 대체로 비슷하다. 남북으로 는 남쪽의 포석정지로부터 북쪽의 소금강산 자락까지의 길이와 대체로 비슷하다. 이 범위 안에 각종 왕궁과 관아를 비롯하여 귀족 및 백성의 주택이 가장 밀집되 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35금입택의 기록을 통해서도 이 해할 수 있다. 39개의 금입택 중 池 上 힘과 흉 Pt힘 2개에만 本 彼 部 라는 세주가 달려 있다. 그런 데 이 세주는 일연이 직접 답사하여 붙인 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 일연이 살았던 13세기에는 신라의 왕경인 경주가 피폐해 있어 00 上 행.00 下 행 과 같이 자세 하게 조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95) 따라서 세주는 일연이 기존의 기록 을 참조하여 붙인 것이며 기존의 기록 작성자는 00 上 행.00 下 행 의 세주 등 이 붙어 있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신라 당시의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세 주의 참고가 된 기존의 기록에는 당시의 행정체계에 대한 인식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본피부라는 세주가 2개의 힘에만 붙어 있고 나머지 37개의 힘 에는 어떤 部 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와 같은 사실은 6부의 이름과 동일한 힘의 명칭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39개의 금입택 중에는 本 彼 힘 梁 힘 漢 l뼈흰 沙 梁 현 등 6부의 이름을 칭한 r휩이 4개나 있지만 이 4개의 힌 뒤에는 部 의 이름이 특별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것 94) 당 長 安 城 의 羅 城 규모는 東 댈 7,970m, 西 慶 8,470m, 南 댈 9,550m, 北 많 9,570m 라 고 하며, (민덕식, 1989)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동서 9,721m, 남북 8,651m로 밝혀 졌다고 한다. (성주탁역주, 1993:67) 일본의 平 城 京 ( ) 은 동서 2,100m, 남북 4, 800m 이며, 동쪽으로 동서 1,600m, 남북 2, 700m 의 외경도 있었다고 한다. 발해의 동경성은 동벽 3,358.5m, 서벽 3,406m, 남벽 4,568m, 북벽 4, 946m 라고 한다. (민덕식, 1989) 95) 이와 같은 사실은 일연이 고려시대 6부에 속한 마을을 00 村 으로 기록한 것을 통해서 도 알 수 있다. 특히 다른 부는 몰라도 경주시내를 차지하고 있었던 中 興 部 (양부)의 중 요 마을까지 00 村 으로 기록한 것을 보면 경주시내에서도 이미 均 이 아닌 村 으로 행 정명칭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야의 정확한 위치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 다. 또한 몽고의 침입 이후이기 때문에 이 기록에 나오는 사찰의 대부분이 소실된 상태 일 것이다. 따라서 세주를 일연이 직접 조사해서 붙였을 가능성은 별로 없으며, 기존의 자료를 취합하여 붙였다고 생각된다
196 을 部 의 이름을 특별히 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머지 33 개의 힘 뒤에도 部 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과 비교 해 보면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 그림 -18에서 기존의 6부 경계와 왕도의 범위인 長 약 5.5km, 廣 약 5.4km를 비교해 보면 왕도는 양부 사량부 본피부 한기부 에 걸쳐 있게 된다. 이와 같은 결과를 토대로 살펴본다면 本 彼 힘 梁 현 漢 l 技 힘 沙 梁 힘 등이 6부의 이름을 칭한 것은 기존의 6부 중 왕도 안에 들어가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게 된다. 즉 이 네 개의 힘이 기록될 당시에는 그 위치가 이미 6부가 아닌 왕도에 있었기 때문에 部 의 이름을 특별히 적어놓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33 개의 금입택 대부분도 역시 왕도 안에 있었기 때문 에 부의 이름을 특별히 기록해 놓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96) 이러한 논리의 입장에 서면 왕도는 35금입택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진골귀족이 밀집되어 거주했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진골귀족만이 밀집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왕궁 관아 그리고 사찰은 물론이고 6두품 이하의 귀족 및 백성의 거주지도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알려줄 만한 유적은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사찰의 분포를 통해 정치중심구역 이 어디까지 확장했는지를 알아보았다. 이와 같은 정치중심구역의 범위는 일부 도 시계획에 대한 연구에서도 계획의 흔적 범위와 일치하고 있다. 96) 왕도를 벗어나는 위치에 진골귀족의 집이 있었을 가능성을 알려주는 기록도 나온 다. 첫 번째 예로 선덕왕 ( ) 사후 원성왕과 왕위를 다투었던 김주원의 집이 京 北 二 十 면 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r 三 國 史 記 卷 第 十 新 羅 本 紀 第 十 원성왕 즉위조) 여기서 京 이 어느 범위를 의미하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20 리라는 거리를 고려하면 왕도에 있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삼국유사 에는 김주원의 집이 川 北 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지금의 북천 북쪽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 Ir 三 國 遺 事 卷 第 二 紀 異 第 二 - )L 펀띈 太 王 ) 만약 이 기록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북천을 방 향의 기준점으로 잡은 것을 통해 볼 때 김주원의 집이 과연 京 北 20리와 같이 먼 곳에 있었을까 의심스럽기도 하다. 또 하나의 예는 혜공왕 4 년 (768) 에 일어난 太 悲 의 난을 평정한 후 沙 梁 후 梁 等 면 에 있었던 i면 黨 의 寶 뤘을 왕궁으로 옮겼다는 기 록이다.( r 三 國 遺 事 卷 第 二 紀 異 第 二 惠 옆 王 ) 이 기록에 나오는 사량리는 왕도 안에 들어가 있었지만 모량리는 왕도 밖에 있었다. 따라서 모량리에도 遊 黨 이 살았 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역당 중 높은 진골가문 출신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기록 들을 검토하면 나머지 33 개의 금입택이 모두 왕도에 있었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일연 자신도 모든 금입택의 위치를 자세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세주를 붙이 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97 o 1 11m 통일 이전의 사지 l 통일 이후의 사지 1. 양부 2. 사량부 3. 모량부 4. 본피부 5. 한기부 6. 습비부 (자료Ir 慶 州 遺 題 地 圖.JJ, 국립경주박물관 : 경주시, 1997 에서 재편집) 그림 -18 기존의 6부 경계 및 사찰의 분포와 왕도
198 그림 -18은 국립경주박물관과 경주시가 1997 년에 발행한 1:10,000 축적의 경주 유적지도 에 나오는 사찰유적의 분포를 재편집하여 왕도의 규모를 비교하여 지 도화한 것이다. 지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러한 평지사찰유적의 범위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長 약 5.5km 廣 약 5.4km 의 왕도를 경주시내를 중심으로 배치했 을 때 나타나는 규모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왕도 는 왕궁 및 관아 그리고 진골귀족을 포함한 거주지, 평지사찰 등이 밀집되어 있었 던 지역이라고 볼 수 있게 된다. (2) 6부의 범위 왕도의 범위를 이와 같이 설정할 때 6부의 범위는 당연히 기존 6부의 영역인 안강이남의 형산강 유역과 동해안의 감포읍 양북면 양남면 지역에서 왕도를 뺀 영역이 될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자료가 삼국사기 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자료 5-40) 대성군은 본래 구도성 경내에 있었던 솔이산성과 가산현[오산성이라고도 함]. 오도산성 등 3성인데 지금은 청도군에 합하였다. 약장현은 본래 악지현이 었는데 경덕왕이 개명하였고 지금은 경주에 합하였다. 동기정은 본래 모지정인 데 경덕왕이 개명하였고 지금은 경주에 합하였다. 상성군은 본래 서형산군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고, 지금은 경주에 합하였다. 남기정은 본래 도품혜정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고, 지금은 경주에 합하였다. 중 기정은 본래 근내정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고 지금은 경주에 합하였다. 서기정 은 본래 두량미지정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고 지금은 경주에 합하였다. 북기정 은 본래 우곡정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고 지금은 경주에 합하였다. 막야정은 본래 관아량지정[일설에는 북아량)인데 경띄왕이 개명하였고, 지금은 경주에 합 하였다.97) 97) 大 城 那 本 {ft 刀 城 境 內 率 伊 LLJ 城 짧 山 縣 [ ---둡 驚 LlJ 城 ] 烏 刀 山 城 等 三 城 今 合 屬 淸 道 那 約 章 縣 本 惡 支 縣 景 德 王 改 名 今 合 屬 慶 州 東 鍵 停 * 毛 只 停 景 德 王 改 名 今 合 屬 慶 ) l 1/ 商 城 那 本 西 兄 山 那 景 德 王 改 名 今 合 屬 慶 州 南 離 停 本 道 品 兮 停 景 德 王 改 名 今 合 屬 慶 州 中 鍵 停 本 根 乃 停 景 德 王 改 名 今 合 屬 慶 州 西 聽 停 本 편 良 爛 슷[] 停 景 德 王 改 名 今 合 屬 慶 州 北 幾 停 本 Wi 유 停 景 德 王 改 名 今 合 屬 慶 J 莫 耶 停 本 官 阿 良 支 停 [--~ 北 阿 良 ] 景 德 王 改 名 今 合 屬 慶 州 11"-: 國 핏 記 卷 第 ] 十 四 雜 志 第 二 5 地 理. )
199 ( r -- { W { 캉 W. 이 마 { }.N 버 혜.{ { W 캉{ W 야 ν { 어 버 해 { } { 매 1 며 l 앙 F l
200 자료 5-40 에 나오는 대성군과 상성군에 대한 서술을 보면 그것이 왕경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져 문제가 된다. 이 중 대성군조에는 약장현이라는 지방행정단위도 포 함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왕경이 왕도와 6부로 분화되었다고 본 것과 모순되게 보인다. 따라서 위의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분석이 전 제되지 않으면 왕경에 대한 이해가 어렵게 된다. 그런데 대성군과 상성군에 대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특이점이 발견되고 있다. 첫째 대성군이 위의 기록에는 청 도군에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 반면에 三 國 史 記 卷 第 三 十 二 雜 志 第 一 蔡 祝 의 中 祝 부분에는 왕경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는 토함산과 북형산성 98) 이 대성군으로 나오고 있다. 둘째 지방에 있었던 다른 那 에 보이는 領 縣 이란 표현이 없다. 셋째, 하위 행정단위로서 다른 군에는 보이지 않는 00 停 이란 표현이 나온다. 대성군이 본래 있었던 지역은 기록대로 청도군 지역에 있었던 세 지역의 城 일 것이다. 그런데 토함산이 대성군 소속으로 되어 있으며 東 離 停 이 하위 행정단위 로 나오는 것을 통해 볼 때 언젠가 왕경의 동쪽 지역으로 옮겨졌다고 보아야 한 다, 99) 그러면 왜 이렇게 옮겨 설치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대성군과 상 성군의 하위 행정단위로 나오는 6 개의 停 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 군대 의 단위 또는 군의 주둔지를 停 라고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00) 대성군과 상 성군에 나오는 6 개의 停 도 글자 그대로 군의 주둔지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三 國 史 記 卷 第 九 新 羅 本 紀 第 九 경덕왕 16 년 (757) 조를 보면 양주에는 34 개의 현이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같은 책 지리 부분에 나오는 양주의 현도 6개의 停 을 제 외하면 34 개이다. 따라서 6개의 停 은 현과 같은 행정단위로 인정되지 않았음을 알 98) 북형산성은 경주시 강동면 형산강 남안에 있는 형산의 산성유지로 생각된다. 이곳은 형산강이 포항지역으로 빠져나가는 좁은 협독의 산정에 위치해 있으며IJ"신증동국여지 승람 경주 산천조에도 신라 때 북형산으로 불렸으며 중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프 國 史 記 卷 第 三 十 二 雜 志 第 정짝피E 부분에는 토함산과 북형산성 이외에도 大 祝 를 지내던 三 Ll J 중의 하나인 칸 禮 小 祝 를 지내던 三 l 技 등이 대성군에 속했던 것으로 나오는데 경주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이러한 제 사처가 왜 대성군에 속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99) 대성군은 청도와 경주에 동시에 있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고, 청도군에 합해졌다 는 세 지역은 密 城 部 (지금의 밀양)의 영현 부분에도 나온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들어 대성군이 본래 정도군 지역이었다는 기록은 후대에 잘못 판단하여 삽입된 것 으로 본 견해가 있다, (김윤우, 1987) 이 견해는 대성군을 보통의 都 과 같은 행정단 위로 상정하여 지역적으로 이동할 수 없다고 본 점에서 본 논문과 견해를 달리하 고 있다. 100) r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조 동기정의 세주에도 [김부식이 이르기를 신 라인들은 營 을 停 이라 불렀다 고 했으니 곧 따 營 의 땅이다]라고 나온다
201 수 있다. 또한 대성군과 상성군에는 모두 城 이라는 문자가 들어가며, 상성군의 원 이름인 서형산군의 서형산도 진평왕 15년에 쌓은 서형산성이 있었던 선도산을 의 미한다 10 1) 이와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대성군과 상성군은 군의 주둔지였던 停 을 관할했으며, 그 자체도 군의 주둔지였다고 볼 수 있게 된다 102) 그런데 군의 주둔지는 일반 행정구역에 비해 자주 옮겨 다닌다. 그렇다면 대성군 역시 옮겨질 수 있는 것 이 다.1 03 )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성군의 하위 행정단위인 약장현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설명 이 필요하다. 일단 현이라는 행정단위가 6세기 이후에나 만들어진 것으로 볼 때 약장현도 이 때 설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약장현의 위치에 대해서 알려주는 초 선초기까지의 문헌은 찾을 수가 없다. 다만 대성군이 남천-형산강 동쪽에 있었다 는 것을 통해 볼 때 약장현도 마찬가지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지역 중 지형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곳은 지금의 감포읍 양북면 양남 면 지역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곳에 약장현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김정 호도 대동여지도에서 이곳을 약장현으로 비정한 바 있다. 이곳은 제 3장에서 후에 왕경으로 변모하는 6촌 중 금산가리촌(한기부) 소속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 때 현이 새로 설치되었다는 것은 왕경이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으로 축소되 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6세기초 이후 현이 설치될 때 왕경의 일부인 감포 읍 양북면 양남면 지역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104) 하지만 왕경에 설치되었던 대성군과 상성군은 왕경의 일반적인 행정과는 관련이 없었다. 이렇게 볼 때 8세기 이후의 6부는 기존의 6부에서 감포읍 양북면 양남면 지역 을 제외한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 중 경주시내를 중심으로 한 왕도를 제외한 101) Ií 新 增 東 國 瓚 地 勝 寶 卷 之 二 十 一 慶 州 府 山 川 102) 김윤우는 대성군의 치소를 명활성으로 상성군의 치소를 서형산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김윤우, 1987) 103) Ií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 고적조에는 西 離 停 의 원래 이름이었던 豆 良 觸 知 停 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덧붙여져 있다. [이첨이 말하기를 지금의 밀양부 豆 也 保 部 曲 이 바로 그 땅이다 하였다. 良 과 也 띤훨처]와 保 는 방언에 서로 비슷한 것이니 이첨의 말이 옳은 것 같다] 이 기록도 두량미지정이 원래 밀양부에 있다가 왕경으 로 옮겨온 것으로 이해한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기타 다른 停 도 지명을 띄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옮겨왔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104) 이곳에 약장현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이곳이 원래 6부 소속이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에 현을 설치하면서도 다른 部 의 領 縣 으로 소속시키지 않았다는 사실, 왕경에 있었던 군의 주둔지인 停 을 관할하던 대성군에 어울리지 않 게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이곳이 원래부터 왕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지역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02 지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제 4 절 전성기 광경의 호수와 하부행정단위의 성격 4-1 통엘신라 전체의 호수 왕경의 인구가 과연 얼마가 될 수 있었는지는 왕경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 라 전체의 인구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신라의 전체 인구수에 대한 파 악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신라 전체의 인구나 호수에 대한 통계는 기록 에서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다른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유추해볼 필요가 있다. 표 -25 신라 고구려 백제 지역에 대한 호수와 인구에 대한 기록 (단위: 명) 건경 참조: 윤종주, 1985 표 -25를 보면 고구려나 백제의 인구나 호수에 대한 통계가 크게 보면 두 가지 계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적게 보는 통계가 그 한 가지요, 많 게 보는 통계가 다른 한 가지이다.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적게 보는 통계 를 주로 인용하였고 많게 보는 통계는 과장된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꼭 그렇
203 게 보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답하기 어렵다 r 삼국유사 의 기록 은 고구려와 백제의 全 盛 時 라고만 되어 있을 뿐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 분명 하지 않다. 이에 반해 많게 보는 통계들은 시기가 분명하다는 이점이 있다. 庸 平 百 濟 國 牌 銘 의 기록은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의 기록임이 분명하며 r 구당서 와 신당서 및 삼국사기 에 나오는 백제 고구려의 호수에 대한 기록도 각각 멸망하기 직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선 이러한 호수의 통계를 살펴보기 이전에 기원 전후로부터 삼국시대 까지 농업발전이나 인구 증가에서 어떤 시기였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시기는 우리 나라의 농업부분에 철기문화가 완전히 정착하던 시대였다는 사실 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이현혜에 의하면 압록강 중류유역에서는 기원전 3-2 세기경 이미 중국 戰 國 계 철제농기구가 유입되었고 기원후 1-3세기경에는 첼 鋼 도 실시되었다고 한다. 중부 이남지역에서는 1-3세기를 거치면서 철제 따비, 팽이, 쇠 스랑, 철제삽 등 철제기경구 보급이 진행되어 4세기 이후에는 지배계급을 중심으 로 대량 보급이 이루어졌으며, 5-6세기경에는 첼 特 이 실시되었다고 한다. (이현혜, 1988:21) 인류사에서 신석기 혁명이 일어나면서 농업이 주요 식량공급원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청동기시대를 거치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농기구의 재 료에서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즉 석기와 목기가 농기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철기의 등장은 농기구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거의 혁명적인 변화였다. 철기는 청 동기와 달리 무기를 비롯한 전쟁도구의 혁신뿐만 아니라 농기구의 혁선도 이루었 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을 전후하여 철기가 농기구로 전환되면서 석기 와 목기를 거의 대체하게 된 것이다. 이 기간 중 1-3세기(삼한시대)에는 농경기술이나 재배작물 상에는 근본적인 변 화가 없이 농기구의 철기화로 인한 可 觀 地 의 확대와 농업생산력 증대과정이 인정 된다고 한다. (이현혜 1998:127) 이에 비해 4.5세기 이후에는 철제농토목구의 사 용이 보편화되면서 기경 파종 제초 수확 등 전 과정에서 노동력이 절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절약된 노동력을 이용한 새로운 농경지 개간과 재배작물의 다양화 역시 농업생산력 증대를 가속화시킨 계기로 작용하였다고 한다. (이현혜, 1998: ) 이와 같은 견해를 토대로 본다면 기원 전후로부터 삼국통일이 이루 어지는 7세기 중반까지는 한반도에서 가장 큰 농엽 혁명이 일어났던 시기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농엽혁명을 주도했던 것은 농기구의 철기화와 대중화이다. 특히 4세기 중반부터 본격화된 3국간의 장기전은 철 생산에서의 큰
204 전기를 마련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면전의 양상을 띄지 않았기 때문에 3국 모두 전선 안쪽에서의 농업생산력의 확대에 전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이런 배경을 참고 로 할 때 1-7세기 그 중에서도 4-7세기에는 농업생산량의 확대를 가능하게 하는 2가지 축인 농경지의 확대와 단위 토지당 생산력의 증가 두 부분 모두에서 생산 량이 획기적으로 증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해 볼 때 1 세기에서 7 세기, 그 중에서도 삼국이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게 되는 4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반까지의 기간에는 한반도에서 전근 대 사회를 통 털어 가장 높은 인구증가율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105) 다만 어 느 정도의 인구증가율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만큼의 인구통계가 존재하지 않 기 때문에 분명한 인구증가율을 파악할 수 없을 뿐이다. 따라서 인구통계가 어느 정도 남아 있고, 농업생산량의 증가가 비교적 높게 일어난 조선후기와 비교하면서 볼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의 인구증가율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 다 106) 이 중 기존 연구와 자료에 대한 가장 면밀한 검토를 했던 이영구 이호철 은 년 사이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을 0.338% 로 추정했다. 그런데 1-7세기, 그 중에서도 4-7세기의 농기구의 철기화로 인한 농업생산량의 증가는 조선후기의 그것과 최소한 비슷하거나 더 높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에서 제시된 호구 통 계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점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시켜야 한다. 이제 이와 같은 시대상을 배경으로 먼저 삼국유사 에 나오는 백제와 고구려 全 盛 時 의 호수 기록을 검토해 본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 에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全 盛 期 에 백제는 152, 300호, 고구려는 210, 508호로 나와 있다. 기록된 호의 숫자가 일의 단위까지 나오는 것을 통해 볼 때 일연 스스로 만들어 기록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기록을 근거로 작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일연이 참고 한 기록 역시 단순한 추측에 의해 작성한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 서 일연이 말한 고구려의 全 盛 之 日, 백제의 全 盛 之 時 를 과연 언제로 잡느냐에 따 라 이 기록이 갖고 있는 의미는 달라진다 107) 105) 윤종주는 연평균증가율을 576년 이전은 0.113%, 이후부터 668년까지는 0.338%로 계산하였다. (윤종주, 1985) 그의 이와 같은 계산에는 두 시기에 약 3 배의 차이가 나 는 이유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고 있다. 106) 까지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을 석남국은 l.028%, 권태환 신용하는 0.318%, 이영구 이호철은 0.338%로 추정하고 있다. (이영구 이호철, 1989에서 재 인용) 107) 윤종주는 고구려는 장수왕 때인 491 년, 백제는 성왕 때인 또4년으로 설정하고 있 다. (윤종주, 1985)
205 U 표 -26 고구려 백제 지역의 3세기 중반의 호수 * * 이 * 부여 낙랑 - 군 마한의 걷 고 뀐 구려 3 세 = 관 =봐 - 은 - K 때여 니 젠 백 쩨 중 반 경l L = = = = = - = = --l-= r= 동- 옥- 저 얀- 4 군얘 1 十 L = 마 랑 한 - = = = 으 - - 口 = = = 7/ 녁 - 꽤 로 썼 - 년 = - - 만 에 의이 라는끼을기 록 은 m 만 봐 Wu E 로 끼 산 r -- 전성 가느 一 앙 써 사 화 =뾰 - 핀 - 얀 의 4 - 아 = 기 ι- = 적고 록 을 m 만에 인용 한 째 썼 표 현 뾰 호수 (단위: 명) 210, ,300 보 아 합계 m E 마 362,808 사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호수가 어느 시기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 하지 않다. 다만 아무리 늦어도 기록의 주요 무대였던 중국의 삼국시대 ( ) 일 것이기 때문에 편의상 위의 기록을 3세기 중반으로 인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해 본다. 또 한서에 기록된 낙랑군의 기록도 시기 차이가 있지만 논의의 편의를 위해 3세기 중반으로 가정한다. 그리고 통일 이전 신라의 호수 기록이 나오지 않기 때 문에 백제 고구려의 호수만을 대상으로 삼아 비교해 본다 r 삼국유사 에 나오 는 백제와 고구려의 전성기 호수를 합하면 362, 808호이다. 그런데 같은 지역이었 을 것으로 예상되는 3세기 중반 이전의 호수를 모두 합하면 약 32 만호 정도가 된 다. 그렇다면 약 13% 의 증가만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런데 만약 백제의 全 盛 之 時 와 고구려의 全 盛 之 H 을 모두 멸망 당시로 간주할 경우 약 400년간 이 지역에서는 戶 數 의 증감이 거의 없었던 것이 된다. 하지만 이 미 앞에서 서술했듯이 이 시기의 400년은 한반도에서 가장 큰 농업발전이 있었던 보 시기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호수의 증감이 없을 수가 없다. 그렇게 백제 수 의 全 盛 之 時 와 고구려의 全 盛 之 日 은 멸망할 때를 표현한 것이라고 li!. E코 없다. 맨 삼국유사 의 기록이 정확한 통계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삼국지 위서 동이 전의 기록 시기에서 멸지 않은 시기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백제 고구려의 멸망 시 호수에 대한 기록을 검토해 본다. 屆 平 濟 牌 에 는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그 지역을 5 도독, 37주, 250 현으로 재편하였으며, 그 곳에는 24만호, 620만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 0 8) 이 기록 중 일단 戶 를 口 의 비율로 나누어 보면 대략 1:25.8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비율 때문에 이 108) r 譯 註 1992:459. 韓 國 古 代 金 石 文 제 1 권 (고구려 백제 낙랑편),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펴 '-,
206 기록에는 어떤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24 만을 74 만의 ;핏닙니로 보는 경우도 있었다 109) 하지만 비문에 24 에 대한 한자 표현이 u- 때 로 되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74를 잘못 표기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만약 이 기록이 誤 記 라 면 124 萬 戶 X5 口 =620 萬 n 로 딱 떨어지는 것을 보아 124 만을 24 만으로 잘못 기록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본다면 620 萬 口 는 실제 조사된 수가 아니라 124 만호에 1 호당 5구씩 계산해서 나온 수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당평백제비명 에 나오는 620 만구는 백제를 정복한 소정방의 전공을 과장하려는 욕구에서 나온 수치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과장 욕구에 의해 나온 수치라고 하더라도 실제보 다 10 배를 부풀리는 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과장을 하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에는 백제가 멸망할 때 5부, 37 군, 200 성, 76만호가 있었다고 나와 있다 r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덕왕 16년조에 의하면 옛 백제지역에 설치된 웅천주 완산주 무주에는 3주.2소경.37군.104 현이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110) 이 숫자를 앞의 기록과 대조해 보면 일단 5 부, 37군의 숫자는 거의 비슷하다. 200성과 104 현의 차이는 성이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 관할 구 역의 차이가 다양했을 전쟁 시기와 호구나 전정에서 고을간의 차이를 거의 없게 만들었을 평화기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5부, 37군이 백제 땅에 있었다는 기록은 거의 맞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200성에 대한 기록 역시 크게 틀리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독 76만호에 대한 기록만 틀리다고 할 수 있 을까?11 1)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고구려에 대한 기록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r 구 당서 에는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5부.176성.69 만7천호로 나오며 r 신당서 와 삼국사기 에는 5부.176성.69 만호로 나와 있다. 이 숫자에 대해서도 과장이라 고 생각할 수가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기록들을 참조할 때 꼭 그렇게만 볼 수 는 없다. 자료 5-41) (문무왕 8년 (668)) 9월 21 일 (당나라) 大 軍 과 합하여 평 양을 포위 하였다. 고구려왕이 먼저 果 男 폈옳 등을 보내 英 公 ( 李 動 )에게 항복을 청하였 다. 이에 영공은 왕 寶 藏 과 왕자 福 男 德 男, 大 많 등 20 萬 餘 口 를 데리고 당으 109) u" 삼국사 하, 김부식 지음 / 이병도 역주, 을유문화사, 1983: ) 熊 川 州 寫 熊 州 領 州 一 小 京 一 那 十 프 縣 二 十 九... 完 山 州 寫 全 j" 領 州 一 小 京 一 都 十 縣 f 十 一 武 珍 州 寫 武 ) l 領 州 一 郵 十 四 縣 四 十 四 ( r 三 國 史 記 卷 第 九 新 羅 本 紀 第 九 경 덕왕 16 년) 11 1) 이종주는 백제와 고구려 멸망시의 戶 數 를 모두 口 數 로 간주하여 인구증가율을 계산하였다. (이종주, 1985:6)
207 로 돌아갔다 112) 자료 5-42) (보장왕 27년 (668)) 여름 4월에 (당) I되 宗 이 38, 300호를 양자강 회 수의 남쪽 및 산남 경서 諸 州 의 빈 땅에 옮기었다 113) 자료 5-43) 總 章 2년 (669) 에 고(구)려민 3 만을 江 #와 山 南 으로 옮겼다 114) 자료 5-44) 總 章 2 년 (669) 에 고(구)려의 28, 200 호, 수레 1, 080 乘, 소 3,300 頭, 말 2, 900 따, 낙타 60 頭 를 내지로 옮겼는데 115) 위의 기록들을 검토해 볼 때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상당수의 고구려 사람 을 포로로 데려간 사실을 알 수 있다. 신형식은 고구려 멸망을 전후하여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인의 수를 42만으로 보고 있다. (신형식, 1990) 이 42만이라는 숫자가 과연 얼마나 합당한지는 제쳐 두더라도 위의 기록들을 보면 최소 20만 안팎은 되 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일시에 옮겨간 고구려민의 숫자가 고구 려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 정도일까? 그 비율을 정확하게 추산한다는 것 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고구려가 기본적으로 유목이 아닌 농경을 기본으로 하 고 있었다는 사실을 참고한다면 그 비율은 한 자리수를 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멸망시의 697, 000호를 인구로 계산한다면 약 29% 의 인구가 당으로 일시에 옮겨갔다는 결과가 되어 문제가 된다. 반면에 기록 그대로 戶 로 인정하면 1 호당 5명으로 치더라도 약 5.7% 가 되어 설득력이 높아진다. 그러면 이러한 호수의 기록과 3세기 중반 이전의 호수 기록을 검토해 본다. 후 대에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였던 지역의 3세기 중반 이전의 호수는 약 32 만호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두 나라가 멸망할 때의 호수를 합하면 1,457, 000호로 기록 되어 있어 약 4.6 배 증가하였던 셈이 된다. 그런데 이 시기를 계산의 편의상 400 년으로 간주하여 인구증가율을 0.3% 로 계산하면 약 3.3 배, 0.4%로 계산하면 약 4.9 배, 0.5% 로 계산하면 약 7.4배, 0.6% 로 계산하면 약 10.9 배의 인구 증가가 있게 된다. 그리고 조선후기의 인구증가율로 추정된 것 중의 하나인 0.338% 로 계산하 면 약 3.9 배가 나온다. 조선후기보다도 더 높은 농업생산량의 증가가 이 시기에 112) 與 大 軍 合 圍 平 壞 高 句 麗 王 先 週 챙양3 뚫 等 5룹 英 公 請 降 於 是 英 公 以 ~E 質 ; 藏 王 T l!i테펀 德 망 太 텀i 等 느 十 餘 萬 口 뺑 庸 ( r 프 國 史 記 卷 第 六 新 羅 本 紀 第 六 문무왕 8 년) 113) 夏 四 月 高 宗 移 三 萬 八 千 三 펌 戶 於 江 推 之 南 及 Ll l 南 京 西 諸 州 空 購 之 地 ( r 갚 國 씻띔 卷 第 二 十 二 高 句 麗 本 紀 第 十 보장왕 27년) 114) 總 章 二 年 徒 高 麗 民 三 萬 於 江 堆 LiJ 南 ( r 新 t함뿔 東 핏 列 傳 高 句 麗 ) 115) 移 高 麗 戶 二 萬 八 千 τ 百 車 千 八 十 乘 牛 브 千 갇 百 頭, t,앙 τ: 千 九 펌 [LÇ 땐 六 十 頭... ( r 舊 펌 뽑.!I I힘 宗 本 紀 總 長 2 년 5월 - r~r 國 JE~ 朝 蘇 傳 댐;쇠 " 國 ~ 編 짧 委 ilt한, 1987:589 에 서 재인용)
208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백제와 고구려 멸망시의 총 호수 기록이 크게 틀렸다 고 볼 수는 없다. 표 -27 7세기 중반 고구려+백제의 호수 (단위: 명) 기록 속의 호수 시기 3세기 중반 I 7세기 중반 * 7세기 중반 경에는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3세기 중반의 호 수에 들어가 있지 않은 요동과 비교하여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았음. * 계산된 호수는 두 시기의 차이를 400년으로 간주하여 계산한 것임. 표 -28 7세기 중반 백제의 호수 (단위: 명) 시기 기록 속의 호수 3세기 중반 I 7세기 중반 0.6% 고구 려 + 백 제 87, , , 75이 341, , , ,750 * 7세기 중반 경에 신라가 장악한 한강 유역을 마한의 3/10 이라고 간주했음. * 계산된 호수는 두 시기의 차이를 400년으로 간주하여 계산한 것임. 다음으로 수전 농업을 비롯한 각종 농업발전이 고구려보다도 활발하게 진행되 었을 백제지역만을 대상으로 검토해 본다. 후에 백제가 점령하는 마한지역은 삼 국지 위서 동이전에 10여만 호로 나온다. 이 10여만이란 표현은 20만보다는 작다 는 표현일 것이며, 보통 10 만에서 20만 사이 중 10 만에 가까운 수를 지칭할 것이 다. 이렇게 볼 때 10 여만호를 대략 125, 000호로 잡고 계산해도 큰 착오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116) 백제가 멸망할 때 경기도와 충청북도 지역을 상실했다고 상정하 116) 마한지역의 國 과 戶 의 수에 대한 三 國 志 鍵 書 東 몇 傳 韓 傳 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a 凡 五 十 餘 國 大 歐 l 萬 餘 家 小 國 數 千 家 總 f 餘 萬 戶... 실제로 國 이라 표시되어 있는 것은 55 개이다. 小 國 數 千 家 란 표현은 작게 잡아도 2, 000 家 로 볼 수 있게 된다. 대국을 계산의 편의상 1 만가로 보면 대국이 1 개일 경우 118, 000 家, 2 개일 경우 126,000 家, 3 개일 경우는 134,000 家 등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10 여만이란 숫자를 125, 000으로 계산한 것이 그렇게 무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209 면 더 적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상실했던 지역이 조선후기와 비슷하다고 보 면 이 지역의 호수는 호구총수 의 기록을 통해 전체 마한 지역에서 약 30% 을 차지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117) 그렇다면 백제지역에는 3세기 중반 경에 87,500호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 동안 조선후기와 같은 0.338% 의 인구증가율이 있었다고 본다면 두 시기의 격차인 약 400 년 후에는 3.9 배인 약 341, 250호가 된다. 만약 더 높은 인구증가율이 있었다고 가정하면 0.4%일 경우에는 약 428, 750호, 0.5% 일 경우에는 약 647, 500호, 0.6% 일 경우에는 953,750 호 등 다양하게 나온다. 이렇게 볼 때 백제 멸망시의 76만호가 과장되었다고 하더 라도 약 152, 000 戶, 76 萬 口 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76만호가 과연 어 느 정도 정확한 기록인지에 대해서는 단정지어 얘기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무조 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특히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은 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기존의 호구통계에 대해 소중하게 다루었을 것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이와 같은 관점 하에서 본 논문에서는 멸망 시 백제의 호수를 기록에 나오는 76만호를 상한선으로 잡고자 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조선후기의 인구증가율과 비 슷한 인구증가율이 있었다고 볼 때 341, 250호가 된다는 점을 참고하여 76만 호의 %인 38만호를 하한선으로 잡고자 한다 r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신라의 州 那 縣 및 소경의 총수는 4327H 인데 백제지역의 3주에는 총 1467H 가 있었다. 따라서 수만으로 단순 비교하면 통일신라의 영토 안에는 백제 멸망시의 약 2.96 배 에 해당하는 호수가 있게 된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황해도 강원도 이남을 통일신 라의 영토로 보고 백제 멸망시의 지역을 전라도와 충청남도 및 충청북도의 일부 지역으로 상정하여 호구총수 에 나오는 두 지역의 호수를 비교하면 전자는 후 자의 약 2.68배에 해당된다 118) 통일신라나 조선이나 농업사회라는 측면에서는 마 찬가지라고 생각하여 통일신라에는 백제의 약 2.68배에 해당하는 호수가 있었다고 간주하여 전체 호수를 계산하면 약 1, 018,400호에서 2, 036, 800호 사이가 된다 119) 117) r 호구총수 에 나오는 경기도 전라도 충청도의 호수를 모두 합하면 699, 945호 이고, 이 중 경기도와 백제지역이 아닌 충청도의 호수를 모두 합하면 220,461 호이 다. 양자를 비교하면 후자의 비율이 약 % 가 된다. 이 때 충청도 중 비백제지역 으로 본 고을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기록을 중심으로 따져 볼 때 충주, 진천, 옥천,보은, 직산,괴산, 제천, 청풍, 영동, 청산,단양, 황간, 연풍,음성, 평택, 영춘 이다. 118) r 호구총수 에 나오는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호 수는 총 1, 284, 082호이 다
210 그리고 통일 후에 호수의 증가가 있었을 것으로 상정하더라도 이 범위를 크게 벗 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기존에 통일신라의 인구를 만 사이로 간주했던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러한 인구 파악은 기본 적으로 1-7 세기, 그 중에서도 4-7세기 사이에 농업생산량의 증가가 있었을 가능 성을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4-2 전성기 왕경의 호수 신라 왕경의 호수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에 나오는 자료 5-37과 다음과 같 은 자료 두 개밖에 없다. 자료 5-45) 남산 동쪽 산기숨에 避 里 村 이 있는데 그 村 에 절이 있어서 避 里 츄 라 명명했다. 그 절에 기이한 중이 있었는데 이름과 성씨는 말하지 않았다. 항 119) 고려시대에도 호구가 계속 증가되었을까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서 판단 해야 한다. 고려시대는 대외적인 전쟁이 끊임없이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전 국토를 황폐화시키는 경우가 많았던 시기이다. 특히 40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대몽항쟁 은 그 피해가 막심했다. 따라서 농업생산량의 극심한 격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 며, 마찬가지로 인구도 상당히 격감했을 것이다. 또한 14세기에 100년 가까이 격화된 홍 건적 왜구 등과의 끊임없는 전쟁 상태 또한 농지의 황폐화 등으로 인해 농업생산량의 감소를 초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만약 고려 초기에 인구 증가가 있었다고 하 더라도 고려 전체적으로는 인구 증가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볼 때 통일신라 의 인구나 호수가 조선 건국시보다 더 적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문제가 있다. 여기서 조 선 건국시의 인구수에 대한 기존의 추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철 (1 965) 김재진 (1967) 한영우 (1977) 권태환 신용하 이영구 이호철 (1977) (1988) 약 1, 000만 만 약 550만 554 만 750만 (자료: 이영구 이호철 1987 에서 재인용) 위의 표를 보면 조선초기의 인구는 약 400 만에서 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추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이영구 이호철은 앞의 연구들을 비판하면서 정밀한 통계기법을 통해 조선초기의 인구를 750만으로 추계하였다. 그런데 호구 총수 에 나오는 18세기 조선 전체의 호구는 1, 708, 908호이고, 평안도와 함경도의 호수는 합계 호이다. 따라서 전자는 후자의 약 24.9% 에 해당한다. 이것을 조선 건국시의 인구추정치 과 비교하면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지역에 5, 632, 500 명이 있게 된다. 1 호당 5 口 로 계산하면 1,1 26, 500 호, 4fJ 로 계산하면 1,408,1 25호이다. 이와 같은 계산은 본 논문에서 추정한 통일신라의 호수 범위 안에 들어가 있다
211 상 鋼 P't: 를 염하여 그 소리가 城 中 에까지 들려서 360방 17만호가 그 소리를 듣 지 않음이 없었다 120) 삼국유사 에 나오는 왕경의 호수 178, 936호나 17만호에 대해 지금까지 대부 분의 학자들은 口 를 戶 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인정해 왔다 12 1) 심지어는 이 호수 에 대한 기록을 통일이전 신라 전체의 호수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윤종주, 1985) 하지만 이와 같은 관점은 일연이나 그가 참고한 기존 자료를 기록한 사람 이 큰 실수를 범했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인정하기 어렵다. 그러 면 178, 936호 또는 17만호가 京 中 에 있었다는 것이 과연 사실에 얼마나 가까울 까?122)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京 中 의 京 이 의미하는 공간 범위가 어디 까지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장의 제 3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京 中 의 京 은 현재의 경주시내 정도에 있었던 왕도가 아니라 안강 이남의 형상강 유역을 포괄 하고 있던 왕경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 왕경은 경주시내의 사방 약 5.5km 의 범위에 있었던 왕도와 그 주변을 감싸고 있었던 6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 한 전제하에 京 中 에 있었던 178, 936호가 과연 얼마나 합당한 기록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다음과 같은 자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료 5-46) (원성왕 2년 (786)) 秋 7월에 가뭄이 있었다.9월에 王 都 백성( 民 )이 120) 南 山 東 麗 有 避 里 村 村 有 좋 因 名 避 里 좋 좋 有 異 增 不 言 名 ~ 常 ;융 播 隔 聲 聞 子 城 中 三 百 六 十 행 十 七 萬 戶 無 不 聞 聲... ( r 三 國 遺 事 卷 第 五 避 隱 第 八 念 佛 師 ) 121) 이 기록을 그대로 신빙한 학자로는 손정목이 있다. (손정목 1990) 그는 고대 도시일수 록 인구가 100만에 가까운 도시가 많았으며, 기록의 숫자가 일의 자리까지 자세히 언급 된 것은 면밀한 호구조사의 집계 결과일 것이라고 보아 기록을 신빙하는 입장을 취하 고 있다. 122) 당의 장안에 얼마만한 인구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다르게 계산하고 있다. 장안성의 인구는 舊 -투환뿔 지리지에는 天 寶 ( ) 년간에 京 샌 府 가 1, 967,l 00 명이라 하고 新 1휩뿔 에는 天 寶 1 년 (742) 에 1, 960,l 80명이라고 되어 있는 데 京 ~~ 府 는 장안성을 포함하여 주변 지역을 모두 포괄하는 범위이다. 따라서 장안 성 자체의 인구를 알 수는 없는데 {평 樂 成 은 약 50 만 정도로 보았다고 한다. (민덕 식, 1989) 하지만 성내의 총 인구를 100 만 명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성주탁 역 주, 1993:67) 이 점에서 참고되는 것이 북송의 왕경이었던 開 封 의 호수가 년에 18만 호, 년에 23 만호, 년에 26만 호였다는 사실이다. 이 호수와 군인 14 만 명 북송말기의 40만구를 더하게 되면 도시의 실제인구는 1 호당 4-5구로 칠 경우 만 명까지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남송의 왕경이었던 抗 州 역시 최고 120만 명 정도가 있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성주탁 역주, 1993: ) 박한제는 개봉 인구가 宋 초에는 100 만 정도였다가 宋 말에는 170 만 정도로 증가하였다고 보고 있다. (박한제, 2000)
212 굶주려 조( 藥 ) 石 을 내어 騙 給 하였다. 쪽 10월에 또 조( 藥 ) 33, 000쉰을 내 어 주었다 123) 위의 기록을 보면 9월에 굶주리는 왕도 백성( 民 )을 위해 조 石 을 내어 구 홀하고 있으며, 10월에도 33, 000 石 을 내고 있다. 이 기록에는 秋 7월의 가뭄으로 인해 王 都 民 을 대상으로 1 개월 동안 구흉한 것이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또한 기록된 단위가 10 의 자리까지 되어 있어 후대에 조작된 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 다. 이렇게 볼 때 이 기록은 왕경의 인구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다만 1 인 또는 1 호에 얼만 큼씩 주었는지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 다. 이 점에서 신라의 것은 아니지만 우선 표 -29와 같은 조선시대의 예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호구총수 에 의하면 18세기 후반 한성부의 총 호수는 이고 인구수는 189,l 53명으로 1 호당 약 4.3 명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참고한다면 京 廳 發 賣 式 에 의 해 살 수 있는 것이 1 인당 1 개월에 평균 1 斗 안팎에서 결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外 몸 分 騙 式 에 의한 것도 잘해야 1 인당 1 개월에 평균 1. 2 斗 를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최빈궁자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것도 1 인당 1 개월 에 평균 1 斗 를 약간 상회하는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구흘 정책이 1 인당 1 개월에 1 斗 나 그것을 약간 상회하는 선에서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흉년이 심할 때는 1 斗 정도에서 구흘정책을 시행했을 것으로 볼 수 있 다. 다음은 신라에서 구흘의 기준이 어떻게 정해졌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자료 5-47) 성되왕 6년 (707) 봄 정월에 백성이 많이 굶주리고 죽어서 조( 藥 )를 사람( 人 )들에게 1 일에 3 升 씩 주었는데 7월까지 시행하였다 124) 자료 5-48) 제 33 대 성덕왕 神 龍 二 年 며 午 (706) 에 흉년이 들어 인민이 섬하게 굶주려 정미년 (707) 1 월 1 일부터 7월 30 일까지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租 를 나누어주었다. 1 口 에 1 일 3 升 씩을 기준으로 삼았는데 일을 마치고 계산해 보니 300,500석 이 었 다 125) 123) 秋 七 月 뿔 九 月 王 都 民 購 出 藥 三 萬 - 三 千 二 百 四 十 石 以 騙 給 之 장 十 月 又 出 藥 三 萬 三 千 1~î 以 給 之 ( u" 三 國 史 記 卷 第 十 新 羅 本 紀 第 十 원성왕 2 년) 124) 六 年 春 正 }j 民 多 購 死 給 藥 人 一 R~ 三 升 - 꽃 七 月 ( u" 三 國 史 記 卷 第 八 新 羅 本 紀 第 八 성덕왕 6 년) 125) 第 f 十 代 聖 德 王 神 龍 二 年 內!F(706) 歲 ;[ 未 ] 不 登 人 民 創 甚 [ 未 (707) 正 月 初 一 H 전 七 月 -~ 1- 日 救 R 給 돼 一 ~l 一 R 돗 1- 寫 式 終 事 而 란 드 i 一 萬 lièf 碩 也.( r 三 國 遺 事 철 第 紀 賢 - 第 -τ 검F1 德 王 )
213 표 -29 조선시대의 구홀에 관한 규정 잉 廳 發 買 式 大 戶 中 戶 小 戶 獨 戶 (I개월) 5 斗 4 斗 3 斗 2 斗 最 負 罷 白 給 式 3 口 이상 2 口 1 口 없짧흉 獨 양반가호는 3 斗 2 斗 1 斗 1.5 斗 1 斗 를 더함 外 둠 分 騙 式 男 밤 男 老 女 밤 女 老 男 弱 女 弱 (I개월) 1.5 斗 1. 2 斗 0.9 斗 * 잉 廳 發 賣 式 - 흉년에 한성부 소재 진흉청에서 싼 값에 大 米 (쌀)와 小 米 (좁쌀)을 發 품 하는 기준. * 最 質 第 白 給 式 - 최빈궁자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기준. 기간은 나와 있지 않지만 앞뒤의 경우를 통해 1 개월로 볼 수 있음. * 外 몸 分 騙 式 - 지방에서 구흉하는 기준. (자료 r 萬 機 要 贊 財 用 編 五 흙 政 ) 이 기록에는 구흘한 지역의 범위가 나오지 않아 인구통계로 사용하기는 곤란하 지만 1 일에 1 호당 얼마씩 구흘했는가를 추측할 수 있다. 1 일에 3 升 씩 人 또는 1 口 에 게 주었다는 표현은 조선시 대의 예를 통해 볼 때 1 호를 대표하는 사람에 게 주 었던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1호당 1 개월에 9 斗 를 받았다는 것이 되며, 이것을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1 호당 약 4.3 인이 있었다고 가정하면 1 인당 1 개월에 약 2.1 斗 를 받은 것이 된다 126) 이것을 조선시대와 비교하면 약 2 배에 가 까워 지나치게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7개월 동안 구홀할 정도였다면 대단히 큰 가뭄이 들었던 시기로서 이렇게까지 많은 양을 주었을까 의섬스럽기도 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흉년 때 1 인당 1 개월에 약 1 斗 에서 2 斗 의 구홀을 받았다고 보고 자료 5-46 의 기록을 인구수로 환산해 보기로 한다. 만약 民 1 명에게 1 개월에 1 말( 斗 )의 폈을 주었다고 보면 9 월에는 총 332,400 명, 10월에는 330, 000명의 왕도 백성이 구흘 받은 것이 된다. 그리고 만약 民 1 명에게 1 개월에 2 말( 斗 )을 주었다고 보아도 9월에는 총 166, 200 명, 10월에는 165, 000 명의 왕도 백성이 구흘 받은 것이 된다. 따라서 최소 165, 000에서 최대 332,400 명의 왕 도 백성( 民 )이 구흘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왕도에는 이렇게 구흘 받지 않 126) 이 기록에는 구흉된 지역의 범위가 나오지 않지만 앞의 경우를 참조할 경우 왕 경 그 중에서도 왕도일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7개월 동안 구흉한 300, 500석을 1 개월에 1 인당 2.1 斗 씩 구흉 받았다고 계산하면 약 204,4 21 명, 1 斗 씩 구흘 받았다고 계산하면 약 429, 286 명이 된다
214 은 사람도 살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왕도에 살았던 진골귀족이나 두품, 그리고 진골귀족이 거느렸던 인구 만큼은 가뭄에도 구홀을 받을 정도는 아 니었을 것이다. 이런 인구 비율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지만 적지 않 은 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왕도에는 원성왕 2 년 (786) 경에 최소 165,O()()+ cx:(구흘 받지 않은 인구)에서 최대 332,400+ cx:(구흘 받지 않은 인구)라는 인구가 살 았던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수치를 京 中 에 178,936호 또는 17만호가 있었다는 삼국유사 의 기 록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왕도에는 里 의 ul 율을 그대로 적용하면 178, 936호의 35/55 인 약 113, 868호, 그리고 호구총수 의 평균처럼 1 호당 4.3 명으로 계산하면 약 489,632 명 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호수가 있었다는 新 羅 全 盛 之 時 는 헌강왕 ( ) 때나 빨라도 9세기 중반 정도이다. 신라는 혜공왕 (765-78이이 피 살된 후 선덕왕 ( ) 이 즉위하면서 태종무열왕계가 몰락한 이후 왕위쟁탈전이 본격화된다. 이러한 왕위쟁탈전의 격화는 귀족 간 정치적 경쟁을 강화시켰으며, 그것은 한편으로 귀족들의 호화 사치스런 생활을 통한 과시를 더욱 부추겼다. 그 에 따라 흥덕왕 9 년 (834) 호화 사치 풍조를 금지하기 위한 조서까지 반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귀족들의 호화 사치스런 생활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물자를 필요로 했으며, 그 양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상업과 수공업이 더 욱 활성화되었을 것이고, 이것은 상인 장인층을 위주로 하여 상당한 인구를 흡입 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헌강왕 ( ) 또는 9 세 기 중반 때의 호수는 원성왕 ( ) 때보다도 더 많아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 다면 9세기 중반이나 헌강왕 때 왕도에 178, 936호의 35/55 인 약 113, 868호가 있었 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따라서 178, 936호가 京 中 에 있었다는 기록이 인구를 호수로 잘못 기록할 만큼 그렇게 과장된 것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127) 127) 민덕식은 주택의 평균 면적을 186m 2 ( 약 55.8평)로 보고 왕경의 공간규모로 보았 던 사방 약 5,600m 의 범위 안에 들어설 수 있는 주택수를 시험적으로 계산하였다. 그 결과 주택이 전 면적의 50% 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67, 864 채, 70% 를 차지하고 있 었다면 95, 009채가 들어설 수 있었다고 보았으며, 이 수치를 기준으로 178, 936호를 인구의 誤 記 로 결론짓고 있다. (민덕식, 1989) 하지만 京 中 의 京 을 왕도 정도로 작 게 보고 민덕식이 본 사방 약 5,600m 안에 약 113, 868호가 있었다고 간주할 경우 그 의 계산 결과는 오히려 삼국유사 의 기록이 인구를 호로 誤 記 한 것은 아니라는 근 거가 될 수 있다. 또한 일본 平 城 京 의 인구가 2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고 한다. (이기 동, 1984) 그런데 일본의 平 城 京 ( ) 은 동서 2,lOOm, 남북 4,800m 이며, 동쪽으 로 동서 1,600m, 남북 2, 700m 의 외경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신라 왕도의 사방
215 만약 통일신라 전체의 인구를 만 사이로 보고 전체 호수를 1 戶 당 5rJ 로 잡으면 40-60만호 밖에 안 된다. 그럴 경우 왕경에 살았다는 178, 936호는 통일신 라 전체 호수의 44.7%-29.8%가 되어 기록의 사실 가능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 다.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의 호수 기록과 1-7세기, 그 중에서도 4-7세기의 높은 농업생산량의 증가를 감안하여 이미 약 1,018,400호 -2, 036, 800호 정도가 통일신라의 영토 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아본 바 있다. 그렇다면 신라 왕경에 있었던 178, 936호는 통일신라 전체 호수의 약 8.8%-17.6% 에 해당된 다. 물론 조선후기인 1789년의 호구통계를 기록한 호구총수 에는 한성부 거주자 비율이 2.5% 정도이다.128) 이것을 감안할 때 위와 같은 비율은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다. 하지만 통일신라의 왕경은 조선의 한성부에 비해 정치 경제 인구적 집 중성이 훨씬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최고지배층의 거주라는 측면에서 보 았을 때 조선은 한성부뿐만 아니라 전국에 흩어져 있었다. 그에 비해 통일신라의 최고지배층인 진골귀족은 거의 100% 에 가까운 왕경 집중성을 보이고 있다.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이미 제 3절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통일신라에서 호수의 왕경 집중성이 조선의 그것보다 훨씬 높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약 8.8%-17.6% 정도의 호수가 왕경에 집중해 있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라고만 단정지을 수는 없다. 4-3 호수의 분포와 하부 행정단위의 성격 (1) 6부의 생산공간화 왕도와 6부로 분화된 것은 기본적으로 인구가 집중했을 뿐만 아니라 왕도의 인 구밀도가 6부에 비해 윌등히 높았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많의 분포비율과 戶 의 분포비율이 같다고 가정하면 6부에도 약 65, 068호가 있었으며, 약 55,OOOm x 54,OOOm보다 작은 규모이다. 따라서 만약 일본의 예를 들어봐도 경중 의 경을 왕경으로 보고 왕도에 178, 936호 중 약 113, 868호와 약 489, 362 명이 있었을 것이라는 본 논문의 추계가 그렇게 툴리다고 보기는 어렵다. 128) r호구총수 에 나오는 8도의 총 호수는 1,708,908호이고 여기에 한성부의 호수 43, 929호를 더하면 조선의 총 호수는 1, 752, 837호이다. 따라서 왕경의 호수집중 비 율은 전국의 약 2.5%이다
216 이것을 6으로 나누면 각 부당 약 호가 있었던 것이 된다. 이 수치보다 더 적은 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6부 각각의 공간규모가 지방의 군현보다 작았 다는 사실을 참고하면 6부에 상당히 높은 인구집중률을 보이고 있었음을 알려준 다. 그러면 이와 같은 상황은 왜 나타난 것일까? 왕경 거주 귀족들의 호화 사치 생활을 위해 조달되었던 물품의 다양성과 지금도 남아 있는 수많은 석탑과 불상 을 통해 볼 때 장인층의 수가 적지 않았을 것임은 쉽게 짐작된다. 이러한 장인층 의 상당수가 왕경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129) 이와 같은 예는 우선 신라시대 요지가 도시 주변에 광범위하게 분포한다는 사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그림 -20은 국립경주박물관과 경주시에서 1997년에 발행한 1: r 慶 州 遺 題 地 圖 를 참고로 하여 신라의 요지만을 표시해 본 것이다. 이 지도를 통해 요지가 경주시내가 아닌 외곽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 금까지 발굴된 憲 址 유적은 당시에 있었던 요지의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또 안압 지 에 서 출토된 調 露 二 年 (680) 銘 벽 돌( 博 )에 도 漢 只 代 部 君 若 小 舍... 三 月 三 日 作... 이란 글귀가 쓰여 있는데 이것을 통해 한기부 지역에 벽돌을 만들던 요지가 있었 음을 추측할 수 있다 130) 그리고 실제로 한기부 지역으로 비정한 보문동 지역에서 요지가 발굴된 바 있다. 이러한 요지에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짚으로 지붕을 덮지 않고 기와로만 덮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많은 수요가 있었던 기 와를 비롯한 토기가 생산되었을 것이다. 6부 지역에서는 요지와 같은 수공업 생산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가 그러한 상황을 알려준다. 자료 5-49) 白 川 룹 宿 典 - 대사 1 명, 사 1 명. 漢 祝 首 7홉 典 - 대사 1 명, 사 1 명. 129) 신라의 문화가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이 지배적이며, 매우 정교하고 화려한 특징을 가 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장인의 대부분이 왕경에 거주했을 것이라는 유추를 할 수 있 다. 예를 들어 신라의 석탑은 7세기 후반을 고비로 새로운 전형석탑 (3층석탑)이 나타나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석탑 양식으로서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장한식, 145쪽) 이러한 전형석탑의 유행은 왕경이나 지방 모두에서 벌어진 일이며, 지방에서 만 들어진 석탑도 정교할 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 우수하다. 이것은 지방에서 만들어진 신 라의 석탑이 뛰어난 석공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석공의 이러한 뛰어난 자질은 수없이 계속된 작업 속에서 이루어졌을 것인데 그것이 가능했던 지역은 지금도 수많은 석탑과 불상이 남아 있는 왕경밖에 없다. 그리고 왕경에 있는 3 층 석탑 을 대부분 그대로 모방했다는 사실과 모방도 어설픈 모방이 아니라 왕경에 있는 석탑 을 그대로 옮겨놓은 수준이라는 사실도 석공의 주요 무대가 왕경이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130) [f'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 2 권(선라 1. 가야 편),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217 l N N l 버 메 { 이{ K여 { 띠 덩 맘 { κ ι F φ N l T V 며 ( 따 힘 g κ? - τ N h a { - { 싸 F { 메 뻐 람 바 m K때 바 내 - 멜 뀔 빼 벌 網 뼈 { κ여 口 뼈 { κ)
218 故 川 首 宿 典 - 대사 1 명 사 1 명. 本 彼 휩 宿 典 - 대사 1 명, 사 1 명 13 1) 위 의 기 록에 나오는 首 휩이 란 마소의 사료 또는 비 료로 쓰는 콩과의 풀 이 다. 그렇다면 식량 생산을 위한 농업은 아니며 首 宿 은 宮 이나 官 에서 사용하던 말 ( 馬 )을 수시로 먹이기 위해 키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기나 본피라는 지명은 6부 이름 중의 하나이다. 또한 힘 宿 이 인구 밀집지역에서 재배된 것이 아닐 것이 기 때문에 한기나 본피라고 지칭된 지역은 왕도가 아닌 6부일 것이다. 또한 故 川 은 지금의 남천을 지칭하던 신라시대의 이름으로 이 역시 인구 밀집지역이 아닌 곳일 것이기 때문에 6부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白 川 은 어디인지 분명하지는 않지 만 다른 세 개의 예를 통해 볼 때 마찬가지로 6부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6부 지역이 수공업품의 생산뿐 아니라 비곡물농업적 생산공간으로도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6부 지역에 수공업이나 비곡물농업적 생산기능이 입지해 있었다는 사 실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더 이상 없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 예를 통해 6부 지역 이 왕도에 밀집되어 있던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 곳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가능성을 6부 지역에 많은 인구가 살 았다고 보이는 호수 자료와 연결시키면 6부 지역이 단순히 지방에서 생산된 물자 가 왕도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6부 지역은 왕 도의 소비물자를 직접 생산하는 공간이었다고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역으로 생 각하면 6부 지역에 인구가 집중했던 것은 이곳이 수공업품과 비독물농업적 생산 물을 만들어내던 생산공간으로 기능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왕도와 지방 사이에 6부와 같은 완충적인 생산공간이 존재했다는 것은 쉽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신라의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비롯된 인적 물적 자원의 과도한 집중이 없었다면 나타나기 힘든 상황이다. 신라의 역사는 최 고지배층인 진골귀족의 대다수가 왕경에 살게 만들었으며 또한 중 하층 지배층 역시 왕경으로 집중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그 뿐만 아니라 8세기 부터는 귀족간 정치적 경쟁의 격화가 호화 사치 생활을 통한 사회적 과시욕구를 자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다양하고 많은 물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이들 물자를 생산할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신라 역사의 특징 때문에 6부의 생산공간화라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며 이것은 왕경으로의 인구 집 131) rτ 國 史 記 卷 第 J 十 九 雜 志 第 八 職 官 냐
219 중을 더욱 부채질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2) 里 중심의 지역인식 왕도와 6부의 행정 편재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잠깐 설명한 바가 있다. 여기 서는 더 자세히 논하면서 왕경 사람들이 어떤 단위를 중심으로 지역인식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왕경에 均 과 里 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행 里 가 처음 설치된 것으로 알려진 자비 마립간 12 년 (469) 의 기록에도 京 都 에 행 里 의 이름을 정했다 고 나와 있어 처음부 터 행과 里 가 동시에 설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남산신성비 (591) 제 3 비에 隊 部 主 刀 里 受 作 tr 一 步 --t 이란 문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6세기에도 里 라는 행정단위가 존재했으며, 力 投 동원의 단위였음도 알 수 있다. (이종욱, 1974) 하지 만 7세기까지 왕경 사람들의 출신지나 소속감의 단위는 기본적으로 部 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6-7세기의 각종 비문에서 인명 앞에 部 名 을 칭했던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Ii삼국사기 의 열전에 기록된 인물들 중에서 진골이 아닌 신분의 경우 는 部 名 을 칭하는 경우가 자주 보이는데 이것도 6-7세기의 일반적인 경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 132) 8세기로 들어오면서 왕경 사람들의 지역인식의 단위가 部 에서 별로 바뀌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자료 5-9를 보면 효소왕 ( ) 때 모량리 출신 익선 아간의 형별로 인해 모든 里 의 구성원이 관직이나 增 에 대한 제재를 받는 경우가 나온다. 이것을 통해 里 가 이제 중요한 지역인식의 단위로 변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133) 또한 8세기 이후 신라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삼국유사 의 기록에 사건이 벌어지거나 출신지가 표시된 것으로는 뿔가 가장 132) r 삼국사기 열전에 출신지로 部 의 명칭이 나오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출신 시기 이름 출신 시기 귀산 사량부인 602년 사망 눌최 사량인 624 년 사망 7J- 끼A 一 중원경 사량인 7세기 중후반 키u 여 τ r 사량인 660 년 사망 취도 사량인 684년 사망 필부 사량인 660 년 사망 해론 모량인 618년 사망 최치원 왕경 사량부인 9세기 후반 133) 이 기록을 효소왕 때가 아닌 진평왕 때로, 모량 또는 모량리를 모량부로, 익선 아간을 모량부의 長 으로 본 견해가 있다. (노태돈 1975) 하지만 이 기록에 나오는 연대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모량리를 모량부로 바꾸어 보는 것은 문제가 있 다. 이미 진평왕 때에도 里 가 행정단위로 기능했기 때문에 모량부가 아닌 모량리일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220 [11 표 -30 w' 三 國 遺 펄 에 기 록된 끔 1) 및 功 단위 이름 출전 시기 내용 사량리 신라시조혁거세 기원전 1 세기 사량리에 알영정이 있었음. 모량부 지철로왕 5 서l 기후반 지증왕비를 찾아 모량부 장 老 樹 에 감. 모량리 왕력 6세기초반 진흥왕의 어머니는 모량리 英 失 角 千 의 딸. 모량리 원종흥법 염촉멸선 6세기초반 진흥왕의 어머니는 모량리 英 失 角 千 의 딸. 사량부 원광서학 6세기후반 귀산은 사량부 사람이다. 사량부 도화녀 비형랑 6세기후반 도화녀는 사량부의 여자. 萬 善 北 里 사복불언 7세기중반 京 師 만선북리에 있는 과부가... 분황 西 멸- 과 더 어 口 자 7세기후반 광독은 분황 서리에 숨어 살면서... 한기부 문호(무)왕 볍민 7세기후반 한기부의 모량리 효소왕대 죽지랑 7세기후반 級 千 의 종이 네 아이를 낳음. 모량리의 사람으로 관직에 아냄. 있는 자는 모두 쫓 사량부 백률사 7세기후반 부례랑의 어머니를 사량부 鏡 井 宮 主 로 삼음. 사량부 7세기후반 꿈속에 나타난 사람의 고향은 사량부 구원사 선율환생 구원사 서남리 이후 서남쪽 마을 한기리 분황사천수대비... 8 서l 기중반 본피부 황룡사종... 8세기중반 경덕왕 때에 가... 분황사의 부 彈 古 乃 末 월명리 월명사 도솔가 8세기중반 사천왕사 앞을 월명리라 함. 한기리에 사는 여자 希 明 의 아이 약사여래불의 동상을 만든이는 본피!뽑 金 里 민장사 8세기중반 우금리에 사는 가난한 여자... 모량리 대성 효이세부모 8세기중반 모량리의 가난한 여인 경조에게... 모량리 사량리 혜공왕 8세기후반 사량 모량 등 맺에 모량리 손순매아 9세기초반 손순은 모량리인이다. 분황사의 東 里 빈녀양모 9세기후반 빈녀가 살던 곳은 분황사의 동리 * 해 멋 해의 단위가 틀어가지 않은 것은 제외했음. * 신라시조혁거세왕 부분의 6부 이름은 제외했음 김 있는 역적들의 보물을 옮 * 방위명이 들어간 며맺 東 면가 실저1 로 f권의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삼국사기 열전 제 8 의 꾀 結 先 生 부분을 보면 그가 낭산 아래에 살았으며, 당시 사람들이 그룹 東 볕띤 結 先 生 으로 불렀다고 나온다. 그렇다면 분황사 동쪽, 것은 분황사동리라는 표현과 정확히 일치된다. 낭산 부근이 당시에 東 펀라는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으며, 이 많다l3 4) 특히 표 -24에서 보듯이 8세기 이후에는 1 개의 예를 제외하면 모두 및로 134) 斷 倚 칸 神 行 輝 師 碼 에는 미 點 rit {t;:판 金 民 東 京 徒 p뀐 人 也 라는 기록이 있어 선행선사 ( )7t 동경(왕경)의 徒 P 댄- 출신임을 알려주고 있다 J w'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 3 권(신라 발해 편), 한국고대사회연구소, 1992:18) 8 세기 이후의 비문에 출신 지 역으로 왕경 안의 먼가 표시된 것은 이 경우가 유일하다. 그렇더라도 왕경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인 京 都 京 n[!î 등과 더불어 왕경 안의 떤가 출신지를 표시할 수 있
221 되어 있다. 이렇게 기록 속에 部 나 행이 아닌 里 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里 가 왕경 사람들의 출신지나 거주지 표시, 그리고 소속감 등을 표현하는 기본적 지역 단위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 일차적인 이유는 당연히 왕경 의 의 인구 증가 때문이다. 하지만 인구 증가가 일어난 이후에도 지역인식에 대한 部 전통이 쉽게 바뀌지 않았음은 이미 앞에서 알아본 바와 같다. 따라서 결정적인 이유는 선덕왕 31 년 (732) 에 있었던 왕도와 6부로의 분화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 한 행정구역의 변화로 7세기까지도 왕경 사람들의 지역인식에 강하게 영향을 미 치던 部 의 전통이 달라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里 를 기본적인 지역단위로 설정 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지방인들에 대한 지역인식의 기본 단위가 직할지를 관할한다는 의미에 서의 州 那 과 縣 이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135) 이런 사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왕경에서 지역인식의 단위가 里 로 되어 있었다는 것은 里 의 인구 또는 호수의 규 모가 州 那 縣 과 비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왕경에 있었던 178,936호를 55 리로 나누면 1 里 당 약 3.253호가 있었던 것이 되며 1행당 약 132 戶 가 있었던 것이 된다.1 36 ) 또한 6부에는 178, 936호의 20/55 에 해당하는 약 65, 068호가 있게 되 어 부마다 각각 10 없4호가 있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수치와 앞에서 추정한 통 일신라의 호수 1, 018,400호 -2, 036, 800를 432개의 고을로 나눈 1 고을 당 약 2, 357호 -4, 715호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지방의 고을과 비슷한 인구 규모는 部 나 功 이 아니라 里 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호수의 규모를 통해 보아도 里 가 왕 경의 지역인식에서 기본적인 단위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런 이 유 때문에 삼국유사 卷 第 一 紀 異 第 一 辰 韓 조에도 호-방-리의 순서로 기재했 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는 단위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조로 왕경 안의 部 가 출신지로 표시된 경우는 8세기 이후의 금석문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135) IT"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지방출신 인물은 다음과 같다. 출신 시기 소나 백성군 사산(현)인 675년 사망 1;zF. 그 ;xf 대야주인 642년 사망 향덕 웅천주 판적향인 8세기중반 성각 청주인 8세기중반 이후 136) 里 의 호수 평균이 지방행정단위인 州 那 縣 의 호수 평균과 같다고 본다면 지 방에는 3, 253호 x432 고을 =1,405, 296호가 된다. 이와 같은 계산 역시 앞에서 추계한 통일신라 전체의 호수의 통계 안에 들어간다
222 (3) 격자형 도시계획과 행 신라 때 지금의 경주시내에 격자형의 도시계획이 실시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도시계획이 실시된 범위와 야의 수 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마다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왔다. 이러한 연구들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삼국유사 의 178, 936호 -1, 360방 -55 리의 기록을 참조하지 않고 왕경 내 도시구역의 범위를 격자형 도시계획이 이루어진 부분에만 한정하여 살펴보려 했다. 둘째 삼국유사 의 기록을 참조하되 기록 속에 나오는 京 의 범위를 좁게 이해하여 살펴보려 했다. 이 중 첫째 부분에 대해 서는 도시구역의 모든 지역이 격자형의 도시계획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1 37 ) 일단 6세기 이전의 거주지는 이러한 도시계획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격자형을 띄지 않을 수 있으며 9세기에 팽창된 지역도 정치적 혼란 속에 서 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무질서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 격자형의 도시계획 흔적만으로 도시구역의 범위를 설정하려는 것은 재고될 필 요가 있다. 격자형 도시구획의 크기에 대해서는 발굴된 유적과 지금까지의 학자들의 견해 를 종합해 보면 동서와 남북의 폭이 대략 m 범위 안에 있었던 것으로 알 려져 있다.1 38 ) 이것의 대략적인 평균치인 150m를 기준으로 삼아 왕도의 규모인 사방 약 5,500m를 계산해 보면 대략 36X36 이 되어 왕도에는 1, 2967R 의 격자형 도 시구획이 있을 수 있게 된다. 이 격자형 도시구획을 1 개의 행으로 상정하면 자연 137) 당의 長 安 이나 일본의 平 城 京, 발해의 上 京 龍 없 府 ( 東 京 城 ) 등은 처음부터 계획적 으로 조성된 도시이기 때문에 격자형 도시계획의 흔적을 통해 도시의 규모를 대략 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의 왕경은 도시계획이 실시되기 수 백 년 전부터 존재했으며 8세기 이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번영했던 도시이다. 따 라서 도시계획의 흔적만으로 도시구역의 범위를 찾는 것은 당 일본 발해와 신라 의 역사적 차이점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138) 계획된 방의 크기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료: 민덕식, 1989와 김경대, 1997:55 에서 재편집) 연구자 방의 크기 顧 島 玄 治 郞 140X 140m τor-n R δ} 160x 140m 齊 顧 忠 152X 142m 田 * 俊 明 160x 160m 민덕식 164.5X 140m 김경대 160x 140m 과 160x 150m
223 스럽게 1, 2967H 의 방이 왕도에 있었던 것으로 될 수 있다. 하지만 왕도의 범위 안 에는 상당 비율의 산지와 하천, 고분 등이 입지하고 있어 그런 지역에는 방이 설 치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왕도에 있었던 방은 1, 2967H 보다 더 적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을 삼국유사 의 기록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본 논문처럼 京 中 의 京 을 왕도로 좁혀서 보지 않는다면 기록 속에 나오는 1, 360방이 모두 왕도 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39) 里 와 야의 분포 비율이 같다고 가정한다면 왕도에는 1, 360방의 35/55 에 해당되는 약 8657H 의 행이 있었던 것이 된다. 여기서 8657H 의 방은 앞에서 계산한 1, 2967H 의 약 66.7% 에 해당되는데 이것은 왕도의 33.3% 정도 에는 방이 없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와 같은 수치들이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지 만 산지와 하천, 고분 등이 있어 방이 설치될 수 없었던 지역과 연계하여 생각하 면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왕도의 모든 지역이 격자형 도시구획으로 나누 어져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행의 규모는 격자형 도시구획과 거의 비슷 한 호수 규모로 맞추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것 이다. 또한 178,936호를 1,360방으로 나누어 단순 계산하면 1 행당 약 132호가 되며, 1L5X 늑 132호가 되기 때문에 1 방을 정사각형으로 볼 경우 1 변 당 호가 들 어가 있는 것이 된다. 여기서 1 방 한 변의 길이를 약 150m로 본다면 1 호의 한 변 의 길이는 약 13m가 되며, 대지 면적은 총 169m 2 즉 약 51 평이 된다. 이와 같은 51 평이라는 규모는 1 호의 평균적 규모로서 결코 작지 않은 크기이다. 물론 도로 등 戶 로 계산될 수 없는 공간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 점을 고려하면 호의 대 지 면적은 더 줄어들 것이다.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방에 비해 호가 지나치게 많다고 볼 수 없다. 이것은 왕도의 면적 안에 178, 936호의 35/55 인 약 113, 868호가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140) 139) 민덕식은 유일하게 1, 360방의 존재를 긍정하였고 왕경의 범위를 현재의 조방제 흔적이 있는 지역만으로 한정시킨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민덕식, 1989) 하지만 민 덕식은 京 中 의 京 을 王 都 정도로 작게 보고 1, 360방이 남북 5,600m, 동서 5,593m 안에 모두 있었다고 설정했다. 따라서 전답, 임야, 산지, 능묘, 하천, 숲, 못에까지도 모두 방이 설정된 것으로 보고 1.360방을 긍정한 점이 본 논문과 다르다. 140) 당 장안에는 총 108 개의 jjj 이 있었는데 방의 크기는 작은 것은 남북 m, 동서 m 이며, 큰 것은 남북 m, 동서 1, 020-1,l 25m라고 한다. (성주탁 역주, 1993:70) 일본 꽉 城 京 의.t}j 은 1 변의 길이가 약 133m 인 야이 4X4 개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을 합친 532m와 도로를 합한 구역이 1 펴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민덕식, 1989) 그렇다면 당과 일본의 방은 신라에서는 里 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 3607~ 의
224 표 -31 펄 행과 도시계획의 관련성 1 리당 방수 I 1 방의 크기 I 1 방당 호수 I 1 호 한변 길이 I 1 호의 면적 24.7 개 사방 약 150m I 약 132호 약 11.5m 약 169m 2 (51 평 ) 결국 신라의 도시계획은 약 132호 안팎의 규모를 갖는 均 을 단위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도시계획의 상황 때문에 구체적인 지역에 대 한 지칭은 里 보다는 방을 단위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흔적은 35금입택의 위치 표시에 방이 등장한다는 사실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들 은 1, 캉과 360방에 대한 기록 중 360 l 강이 잘못된 것임을 알려준다 14 1) 방을 55리로 나누면 1 里 당 약 24.77ß 의 방이 있었던 것이 된다. 이것은 격자형 도시구 획으로 이루어진 지역에서는 5X5=25 均 이 하나의 里 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 한다. 그렇다면 격자형으로 구획된 지역의 1 里 는 사방 약 750m 의 크기를 갖게 되는 것 으로 볼 수 있다. 141) 1, 360방과 360방의 두 기록 중 하나가 틀렸다면 호 방 -55리와 같이 1 의 자리까지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 17 만호 -360방에서의 17만호처럼 대략적인 숫 자를 기록한 것보다 정확하다고 보는 것이 타딩-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기록자가 설 수하였다면 - 千 이란 문자를 삽입하는 것보다는 생략하는 것이 더 자주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225 제 6장 요약 및 결론 신라의 왕경은 구체적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영역과 경계를 가지고 있 다. 또한 왕경 내에도 일정한 영역과 경계를 가지고 있는 행정구역이 존재한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점에 초점을 맞추어 신라 왕경의 범위와 행정구역이 구체 적인 공간 속에서 어떻게 형성 변화되었는지를 시계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경주시내는 형산강 본류인 서천과 그 지류인 북천 남천이 합류하는 평 지에 입지해 있다. 그에 따라 신라-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하천의 범람에 대한 기록이 사서에서 자주 발견된다. 또한 범람에 대처하기 위한 제방의 건설과 숲 ( 數 )의 조성 기록도 경상도에서 가장 풍부하게 남아 있게 되었다. 특히 경주시내 동쪽의 계곡을 흐르다 소금강산과 명활산의 협곡을 지나며 갑자기 현재의 경주시 내 평지와 만나는 북천의 범람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따라 북천 남쪽 변에는 조선시대에 제방의 건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五 里 數 와 古 城 數 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북천의 북쪽 변에는 高 陽 數 (또는 論 虎 數 ), 林 井 數 가 조성되어 있었다. 형산강 본류인 서천의 범람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경주시내 서쪽의 저지대인 서천 동쪽 변을 따라 북쪽으로부터 어대수-천경림-북정수-남정수(오롱) 등의 숲 이 조성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것은 서천이 경주시내 핵심부까지 범람하지 는 않았지만 서쪽의 저지대로 범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경주 시내 남쪽을 흐르는 남천은 범람 기록도 없고 범람에 대처하기 위한 숲의 조성 사실도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은 남천이 이미 경주시내 동남쪽의 넓은 평야를 지나 오며 하천의 운반능력이 현저히 떨어졌으며 월성이라는 자연적인 장애물에 막혀 경주시내로의 범람이 차단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남천 변은 하천의 범람에 그래 도 안전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경주시내가 하천의 범람에 취약한 지역이었다는 사실은 유적의 발굴조사보고서 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경주시내에서 발굴된 유적지의 거의 전지역에서 인간의 간 섭을 받지 않았고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 원지반층은 하천바닥에서 볼 수 있는 자 갈 섞인 모래층이었다. 또한 월성해자 북쪽 지역인 다 지구와 주변 집터의 발굴에 서는 해자가 기능했던 시기에 쌓였던 빨층 위에도 수 차례의 홍수에 의해 퇴적된 자갈 섞인 모래층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해자의 기능이 상실된 7세기 어느 시
226 점에도 이곳으로 하천의 범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자갈 섞 인 모래층의 공급처는 지금도 돌과 자갈, 모래가 뒤섞인 河 많을 이루고 있는 북천 이었다. 따라서 지금의 분황사와 황룡사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홍수 시 북천의 물 중 일부가 분황사 황룡사지 - 안압지 북쪽 - 월성 북쪽 - 월정교지 - 남천의 선을 따라 범 람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주시내의 이와 같은 지형적 특징은 경주시내와 관련된 과거의 지리적 사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주었다. 특히 현재의 지형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정치 행정적 경계선의 존재나 주거지의 형성과 확장 방향을 이해하는데 많 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선 경주시내에 존재했던 6촌의 경계선을 파악하는데 도움 을 주었다. 기록의 검토를 통해 알천양산촌(후대의 양부)과 금산가리촌(후대의 한 기부), 뽑 山 珍 支 村 (후대의 본피부)의 경계선이 월성 황룡사 낭산으로 이루어진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계선은 경작지와 주거지가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현재의 지형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홍수 시 북천의 물 중 일부가 분황사 황룡사지 - 안압지 북쪽 - 월성 북쪽 - 월정교지 - 남천의 선을 따라 범람하던 지역이 신라 건국 전후에는 村 사이의 경계선 역할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황룡사-낭산을 잇는 선의 동쪽 보문동 지역이 금 산가리촌의 소속이었음을 밝힌 것은 본 논문의 작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경주시내에 존재했던 이와 같은 경계션을 비롯하여 본 논문에서 살펴본 6촌의 경계와 위치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알천양산촌은 황룡사 서쪽의 경주시내와 소현천 유역의 현곡면 지역에, 돌산고허촌(후대의 사량부)은 경주시내 남쪽의 남 천을 북쪽 경계선으로 하여 형산강 본류와 태화강 지류의 일부를 포함하는 내남 면 두동면 두서면 지역에, 무산대수촌(후대의 모량부)은 대천 유역인 서면과 건 천읍 지역에 있었다. 錯 山 珍 支 村 은 월성-황룡사지-낭산을 잇는 션을 북쪽 한계선 으로 하는 동남쪽의 남천 유역에 금산가리촌은 황룡사지-낭산을 서쪽 경계선으로 하는 북천유역과 동해안의 감포읍 양북면 양남면 지역에, 명활산고야촌(후대의 습비부)은 신당천 유역인 천북면 지역에 있었다. 이와 같은 6촌의 위치와 경계를 통해 6촌이 기본적으로는 안강 이남의 형산강 유역에 있는 6 개의 작은 유역권을 중심으로 일부 확장된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신라에서 멸망할 때까지도 끝까지 고수했던 6부라는 행정구 역의 6 이라는 숫자가 인위적인 개편이나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안
227 강 이남 형산강 유역의 지형적 특징 때문에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것을 통해 신라 건국 이전에 초기의 정착민들이 촌락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6 촌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의 기록 역시 신빙성 이 높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6촌은 신라 건국 이전에 상호간의 독립성이 전제되면서도 연합적인 성 격을 갖고 있는 6촌장회의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라의 건국 과정에서도 해체되지 않고 유지되었는데, 신라의 건국이 혁거세로 대변되는 외래세력의 일방 적인 정복이 아니라 6촌장으로 대변되는 토착세력과의 연합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6촌의 범위는 그대로 신라의 영역으로 되었으며, 6촌의 경계는 그대로 신라 내부의 경계선으로 존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신라의 건국은 6 촌장 세력 이외에 왕과 그 가족을 비롯한 왕실집단이라는 새로운 집단을 탄생시 켰다. 이 왕실집단은 건국 당시에는 돌산고허촌(사량부)의 중심지 부근인 현재의 창림사지에 거주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건국 약 20년 후에는 6촌장 세력과의 거 주지 분리를 통해 사회 정치적으로 분명한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게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건국 20년 후에 만들어지는 금성과 정치중심구역의 위치를 통해 추 론할 수 있었다. 금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견해가 존재했는데, 본 논문에서는 우 선 금성 동남쪽에 월성을 건설했다 는 기록과 알천(북천)의 범람 후 금성 북문이 스스로 무너졌다 기록을 통해 금성이 경주시내에 있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공 적인 제방이 수축되지 않았을 경우 서천과 북천의 범람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지 역은 대릉원-황오동고분군-인왕동고분을 잇는 작은 분수계나 그 남쪽이었으며, 경주시내에서 가장 비계획적인 도로망이 남아 있는 곳도 같은 지역임을 근거로 이 지역을 신라 초기의 주거지로 보았다. 그리고 금성 서문에 불이 나자 인가 300여구가 불에 탔다 는 기록을 통해 서쪽에는 주거지가 형성되었다고 추론하였 다. 또한 음력 5월에 동쪽의 民 屋 이 함볼되어 연못이 되었다 는 기록을 홍수 시 북천의 물 중 일부가 범람하던 분황사 황룡사지 - 안압지 북쪽 - 월성 북쪽 - 월정교지 - 남천의 선과 연결시켰다. 이런 추론의 결과 지금의 첨성대나 그 부근 에 금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어내게 되었다. 이러한 금성의 건설과 새로운 정치중심구역의 탄생은 그 위치에 대한 파악을 통해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추론해낼 수 있었다. 일단 금성이 있었던 현재의 경 주시내는 하천 범람의 위험이 상존해 있어 인공적인 제방이 건설되기 이전에는
228 주거지의 형성에 적합하지 못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6촌 중의 하나인 알천양산촌에 속해 있었지만 그 중심지는 아니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사실을 통 해 왕실집단은 6촌장 세력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던 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정 치중심구역을 적극적으로 건설하려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왕실집단 이 6촌장 집단과의 공간적 분리를 이루어냄으로써 사회 정치적으로도 6촌장 집 단과 분명한 차이를 표현하려 했음을 의미한다고 추론할 수 있었다. 이러한 6촌의 영역은 1-5세기에 그대로 왕경의 범위로 변했으며, 6촌의 경계는 왕경 내부의 행정구역인 6부의 경계로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 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왕실집단의 힘은 기원을 전후하여 호공이나 탈해와 같은 외래세력이 합류함으 로써 계속 강화되었다. 이렇게 강화된 힘을 바탕으로 6촌장 집단의 독자성을 박탈 하고자 하는 개편을 단행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이 유리니사금 9년 (32) 6촌 이 름의 6부 이름으로의 改 名 성씨의 사여, 관등제의 실시라는 형태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세 가지를 분석해본 결과 이 때의 개편 내용이 왕실집단의 일 부가 6촌 중심지로 거주지를 옮김으로써 6촌 지역에서조차 6촌장 집단을 2급 지 배층으로 격하시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6촌의 개편은 6촌 이름의 6부 이름으로의 개명이라는 형태를 띄고 있었던 것을 통해 볼 때 6촌적인 구조를 완전히 해체하는 방향이 아니라 구조는 유지하면서도 내용을 바꾸는 형태 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6촌 개편을 통해 6부 지역은 신라 내의 행정구역으로 변모했으며 6촌장 집단의 독자성이 보장된 기존의 6촌보다 내 부적인 결합력이 더 강화된 지역단위로 변화되었다. 신라는 1 세기 중반부터 진한지역으로의 대외팽창을 시작하여 3세기말이나 4세 기초에는 진한 지역 전체를 완전한 지방으로 편입한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에는 정복된 소국지역에서 반란이나 이탈 시도 등이 나타날 정도로 아직 불완전한 관 계가 유지되었다. 따라서 신라는 정복된 소국지역에 대해 위임통치에 기반을 둔 간접통치 정책을 편다. 이러한 요인들이 겹쳐서 원신라 지역인 6부를 비롯하여 정 복된 소국까지도 상호간의 지역 구분 의식을 아직도 강하게 유지하게 되었다. 또 한 정치적으로 우위의 입장에 서게 된 원신라 지역인 6부 지역과 지방으로 편입 된 비 6부 지역 사이의 대립구도가 나타났다. 따라서 6부 지역은 특권적 지역성을 띄게 되었고, 이러한 구도 때문에 6부 지역 전체가 왕경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진 한지역에 대한 완전한 정복을 통해 통치를 강화시킨 4-5세기에도 신라의 지배층
229 은 왕경과 지방에 대한 차별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 과정에서 왕경의 특권적 지역성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것은 왕경의 공간적 범위가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다. 1-5세기에 왕경의 범위와 6부라는 행정구역이 그대로 존속하였지만 왕경 내에 지배층을 비롯한 인구분포의 차이가 나타나 6부 사이의 관계가 변하고, 방리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 다. 왕경과 정복된 소국지역인 지방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 때문에 1-3세기에는 지 방으로부터 왕경으로의 인구 유입이 크게 일어나지 않았으며 또한 물자의 흐름도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6부의 생산력 유지가 필요했으며, 6부의 중심지가 갖는 중요성도 낮아지지 않았다. 따라서 6부 의 중심지와 정치중심구역 사이의 지배층의 이동도 일방적인 흐름이 나타나지 않 았으며, 그로 인해 피지배층의 이동 역시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4-5세기 에는 지방에 대한 강화된 통치로 인해 물자 흐름이 지방에서 왕경으로의 일방적 인 방식으로 바뀌었다. 또한 지방에 대한 통제의 강화는 정치중심지로의 권력의 집중도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6부의 중심지에 대한 중요성이 줄어들게 되었으며, 이곳에 살던 상당수의 왕실집단이 정치중심구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또한 이들 의 삶을 보좌하는 피지배층도 지방과 6부 지역에서 정치중심구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볼 수 었다. 이러한 인구이동의 흐름은 정치중심구역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 1-3세기에는 인구이동의 흐름이 일방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중 심구역이 별로 확장되지 못했으며 그에 따라 초기주거지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4-5세기에는 지배층을 비롯한 인구가 집중함에 따라 정치중심구역이 확장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확장의 방향이 북천과 서천의 범람 위 험 때문에 양부 지역인 경주시내에서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고 남천 남쪽, 남산 서북쪽의 사량부의 땅으로 확장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대릉원 을 중심으로 서쪽 북쪽 동쪽 지역에는 격자형 도시계획의 흔적이 뚜렷하여 후 대에 주거지가 만들어진 지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남천 남쪽은 대릉원 남 쪽과 마찬가지로 가장 비계획적인 도로망과 토지이용이 이루어지던 곳으로서 초 기주거지가 입지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6부 사이의 지배층 분포가 달라지게 되었다. 이것은 6세기초의 비문
230 인 영일냉수리비 (503) 와 울진봉평비 (524) 에 양부와 사량부의 인물이 압도적인 비 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속에서 확인된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은 정치 중심구역이 남천을 중심으로 양부와 사량부에 걸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집중펀 인구와 확장된 거주지로 인해 정치중심구역에는 기존의 행정체계로서는 정치적 사회적 통제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나타났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수 백년 동안 이어져온 6부 행정구역의 전통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하부 행정구역 인 t쉰댈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6세기 이후에도 정치중심구역으로의 인구집중이 계속 이루어졌고, 통일 이후에 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에 따라 정치중심구역이 계속 확장되었는 데, 이러한 인구집중이 일어난 배경과 정치중심구역의 확장 방향과 범위는 다음과 같다. 6세기초 이후 개혁정책이 시행되었지만 그것이 왕경의 특권적 지역성을 바꾸지 는 못했다. 다만 경위제와 외위제라는 형태로 제도화시켰을 뿐이다. 백제 고구려 를 멸망시키는 7세기 후반에 외위제를 폐지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대우면에서는 왕경인과 지방인의 차별이 계속 이어졌다. 또한 진골귀족들의 신분적인 폐쇄성이 극단적인 신분 내혼을 통해 계속 유지되었으며 이것은 이들이 자신과 같은 신분 이 살고 있는 왕경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관리등용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화랑도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형성되는 인적 관계가 매우 중 요했다. 그리고 인적 관계의 정점에 진골귀족이 있었기 때문에 6.5.4두품 역시 왕경을 떠나기가 어려웠다. 관리등용제도의 또 다른 축인 독서삼품과 역시 왕경에 있었던 국학의 재학생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귀족이 왕경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대부분 왕경에 살았던 진골귀족의 인구 장악력은 新 康 훔 에 없 f 童 이 3, 000 명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컸다. 또한 경제력도 食 텀과 莊 園 을 바탕으로 하여 후대의 어느 지배층보다도 컸다. 또한 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귀족간 왕위 쟁탈전 은 호화 사치 생활을 통한 사회적 경쟁을 유발시켰으며 이로 인해 왕경에서 사 용되는 물자의 양과 종류는 더욱 많아지고 화려해졌다. 이러한 진골귀족의 경제력 과 사회적 경쟁의 강화는 이들이 펼요로 하는 물자를 제공하던 상업과 수공업을 활성화시켰으며 이것은 이런 업종에 종사하던 피지배층의 왕경으로의 집중도 강 화시키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6세기초 이후의 왕경으로의 계속된 인구 집중은 구체적인 공간상에서는 정치중
231 심구역의 확장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러한 확장의 방향은 5세기까지의 경향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6-7세기 정치중심구역의 확장 방향은 같은 시기에 건 립된 사찰의 분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사찰이 기존에 하천 범람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예상되는 서천과 북천 변에 건립된 것을 통해 이 시기에 하천 변의 제방 공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추론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그 이전에 홍수 시 북천의 물이 범람하던 분황사 황룡사지 - 안압지 북쪽 - 월성 북쪽 - 월정교지 를 잇는 선도 서서히 범람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이에 따라 6-7세 기의 주거지 확장은 남천 남쪽이 아니라 주로 남천-서천-북천-낭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에서도 발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과 결합되면서 6-7세기 정치중심구역의 대 략적인 범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우선 6-7세기의 비문에 본피부를 칭하는 일부를 제외하면 양부와 사량부를 칭하는 인물만이 나온다는 사실을 통해 정치중 심구역이 주로 양부와 사량부에 그리고 일부 본피부에 걸쳐 있었을 가능성이 있 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6-7세기에 건립된 사찰의 분포가 서천-북천-낭산-남산 서북록이 바깥 한계선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주로 양부와 사량부, 그리고 일부는 본피부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계선은 도 시계획의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지역의 공간적 범위이기도 하다. 통일 이후에는 전쟁의 종결과 귀족간 경쟁의 심화로 더욱 많은 인구가 유입되 었기 때문에 정치중심구역이 계속 확장되었다. 이러한 확장 범위는 35금입택의 기 록에 일부 금입택이 북천 북쪽, 한기부 지역인 낭산 동쪽의 보문동, 월성 동남쪽 에 있었던 본피부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유추할 수 있었다. 이러 한 사실은 통일 이후 건립된 평지 사찰이 연속적으로 분포하는 범위가 북쪽으로 는 북천 위쪽의 소금강산 아래까지 동쪽으로는 보문동의 명활산까지, 서쪽으로는 서천까지 서남쪽으로는 지금의 포석정지까지 동남쪽으로는 망덕사지까지였다는 사실과도 부합된다. 또한 도시계획의 흔적을 통해 도시의 범위를 상정한 일부 연 구자들의 견해와도 거의 일치한다. 6세기 이후에는 이러한 정치중심구역의 확장과 함께 행정체계와 행정구역의 개 편도 나타났다.6세기 중반 경에는 왕경 내 행정처l 계의 개편이 이루어져 6부의 업 무를 담당하는 六 部 小 藍 典 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8세기 초반에는 왕경 내부의 행 정구역이 기존의 6부에서 왕도와 6부로 분화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음과 같 은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232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史 書 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삼국 사기 지리지에 今 按 新 羅 始 祖 麻 居 ttt 前 漢 五 鳳 元 年 甲 子 開 國 王 都 長 三 千 七 1- 五 步 1뚫 三 千 - 十 八 步 三 十 五 및 六 꼼[) 이라는 기록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행정구역 개편 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 기록을 왕도 안에 35 리와 6부가 있었다 와 같이 기존처럼 해석하면 기록자가 행정단위의 위계인 왕도-부-리의 순서를 무시 하거나 착각한 것이 된다. 하지만 기록자가 착각하거나 무시한 것이 아니라면 기 존의 해석과는 달리 지금 살펴보건데 신라시조 輪 탬 世 는 前 漢 五 鳳 元 年 (B.C.57) 에 開 國 하였다. (그 國 의 범위에는 첫째) 王 都 가 있었는데 (그 규모가) 長 이 3,075 步, 廣 이 3, 018 步 이고 35 里 가 있었다. (둘째) 6 部 가 있었다. 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와 같이 해석하면 왕경이 기존의 6부에서 왕도와 6부로 개편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경덕왕 ( ) 이후 왕경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부로서 京 城 周 作 典 과 典 련 暑 라는 두 개가 있었던 사실을 통해 확인된다. 이와 같이 왕경의 행정을 담당 하는 관부로서 두 개가 존재한 사실을 왕경이 기존의 6부에서 왕도와 6부로 분리 되었다고 본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 중 전읍서는 6부를 담당하는 관부였음 이 기록에 분명하게 나온다. 또한 京 城 周 作 典 에서의 京 城 이란 용어가 왕경 전체 가 아니라 이후의 왕도인 도시부분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용례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기록에 나오는 왕도의 범위인 長 3,018보(약 5.4km), 廣 3, 075보(약 5.5Km) 를 구체적인 공간상에서의 정치중심구역의 최대 확장 범위와 비교해 보아 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이러한 왕도의 범위는 기존의 양부 사량부 본피부 한기부에 걸쳐 있게 되는데 35금입택의 기록에 양택 사량택 본피택 한기택이 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것과도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35금입택의 기록 중 두 힘의 이름 뒤에만 본피부라는 세주가 붙은 것도 이 두 택이 왕도가 아년 6부의 영역의 본피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왕도와 6부로의 분리시기는 경성주작전이 설치되는 성덕왕 31 년 (732) 경 으로 파악되었다. 그 이전에 왕경의 행정을 담당하던 관부로는 六 部 小 藍 典 이었다 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六 部 小 藍 典 에 나오는 관리의 명칭에 8세기 중반 경에는 사용되지 않는 大 奈 麻 가 나오며, 경덕왕 19 년 (75 1) 대부분의 관부와 거기 에 소속된 관리의 명칭이 변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육부소감전에는 그런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 육부소감전이 설치된 시기는 울 진 봉평비 (524) 와 단양 적성비 (550년경) 사이로 파악되었다. 이것은 울진봉평비 (524) 까지는 6부를 담당하던 f 支 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반면 단양 적성비에는
233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육부소감전의 설치는 비록 행정구역의 변화가 나 타나지는 않았지만 6부의 행정업무를 담당하던 자를 이제 임명직으로 바꿈으로써 행정체계를 변화시켰음을 알려준다. 성덕왕 31 년 (732) 경의 행정구역 개편은 단순한 양적 변화가 아니라 질적인 변 화이다.7세기까지는 6부 사이의 지배층 분포의 변화와 인구집중에 의한 정치중심 구역의 확장, 정치적 사회적 개혁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6부 행정구역이 변화되지 못했다. 이러한 6부적 전통이 성덕왕 31 년 (732) 경에 바뀌었다는 것만으로도 질적 변화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경성주작전의 우두머리인 5명의 令 이 최고의 진골만 오를 수 있었던 대아찬 (5 위) 에서 대각간 (1 위 )까지 할 수 있었던 사실을 통해서도 질적 변화가 나타났음을 확인할 수 었다. 왕경의 범위도 6세기경에 지형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동해안의 감 포읍 양북면 양남면 지역이 약장현으로 분리되면서 약간 축소되었다. 따라서 개 편된 6부의 범위는 기존의 왕경에서 왕도와 약장현을 제외한 범위였음을 알 수 있다. 왕경이 왕도와 6부로 개편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삼국유사 에 나오는 新 羅 全 盛 之 時 京 中 十 七 萬 八 千 九 百 三 十 八 戶 一 千 三 百 六 十 행 五 十 五 里 라는 기록도 새롭 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기록에 나오는 京 中 의 京 은 왕도 정도의 규모가 아니라 왕도와 6부를 합한 왕경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왕도를 왕경으로 보고 이 범위 안에 55 리와 1, 360 방, 178, 936호가 있었다고 보았던 기존의 해석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Ií삼국사기 지리부분의 왕도 -35 리 -6부 라는 기록과 대조해 보 면 왕도에는 35 리 6부에는 20리가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1, 360방도 왕도 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왕도와 6부에 모두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78, 936호도 사방 약 5.4Krn, 5.5km 범 위 인 왕도가 아니 라 왕도와 6부를 합한 왕 경에 있었던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사실에 입각하고 里 와 해 戶 의 분포가 같다고 가정하면 왕도에는 약 8657H 의 방과 호가 있었던 것이 된다. 기존의 도시계획에 대한 연구자 들이 제시한 방의 대략적인 평균 크기인 사방 약 150m를 적용하여 계산하면 865 개의 방은 왕도의 범위인 사방 약 5.5km 의 66.7% 지역에만 있었던 것이 된다. 따 라서 1, 360방의 기록이 툴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한 호와 방의 비율을 보면 1 방 당 약 132호가 있었던 것이 되며, 1 호의 공간규모도 약 51 평 정도의 크 기가 되어 그렇게 무리한 수치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도시계획의 단위인 방에
234 대한 기존의 연구와 기록에 나타난 방과의 사이에 큰 괴리가 나타나지 않으 며, 京 中 에 있었다는 178, 936호에 대한 기록의 선빙성도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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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Abstract Geographical Study on the boundary and the administrative district of the Capital of Shil-la Dynasty Yi Ki-bong Department of Geography Graduate School Seoul National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clarify how the boundary and the administrative district of the capital of Shil-la Dynasty had been forrned and changed historically in a concrete space. For this research, various geographical data in the old documents and epigraphy were investigated and map, field research and archaeological study were also supplemented. The outcome can be summarized like below: Before the founding of Shil-la(B.C. 57), Yukchon(6 towns, 六 村 ) were forrned in the current Kyunju-si(City) area of Kyungsangbuk-do(Province), mainly by the refugees from the collapsed Chosun Dynasty. Every six town has its own center on the small basin. That is, 6 streams fostering each small basin comprise 1 mainstream of Hyungsan-gang(River) located in the south of Ahngang and 5 small streams including Shindang-chun(Stream), Sohyun-chun, Dae-chun, Nam-chun, Buk-chun. It means that the current city area of Kyunju-si (the plain surrounded by Seo-chun, Buk-chun and Nam-chun) contained the boundary of 4 towns out of 6. The local alliance of 6 towns was constituted in terrns of "A Council of 6 town Chiefs". Shil-la was founded by the alliance between the alien group whose representative was Hyukuse(The first King of Shil-la, 麻 힘 世 ) and the native one which was united by 6 town chiefs. Accordingly, the unique status as well as the power system of each 6 town-chief were maintained. Therefore, the spatial boundary of Shil-la at the founding point was coincident with that of 6 towns. And Shil-la has 6 regional districts internally. But, afterwards, a royal group - symbolized with Hyukuse-Kusukan(King, ~파댐 tttj꼼lz되 ~r-) and his
246 wife, Alyoung( 關 英 ) - came into power regarding themselves as superior to 6 town chiefs. The emergence of such royal group gave birth to the construction of the new highest center for their residence which was embodied in B.C. 37 (20 years after the founding of Shil-la). They constructed Keum-sung(Fortress, 金 城 ) for their royal residence in the city area of Kyungju-si. But the current city area of Kyungju-si was at risk of inundation and was not a base of operations of 6 town -chiefs. In this situation, the royal group wanted to show ostentatiously their social and political predominance over the 6 town-chiefs. The power of the royal group became strengthened as the alien group, whose representatives were Hogong( 됐 公 ) with high political position and Talhae( 脫 解 ) who had ascended to 4th King of Shil-la(AD 57-80), joined. In AD 32, Yukchon(6 towns) were reorganized in the form of Yukbu( 六 部 ) with the help of fortified power. In this process of reorganization a part of royal group moved into the base of 6 town-chiefs and resulted in depriving of their unique status as town -chiefs. On the other hand, the intemal solidarity of Shil-la became more fortified. And regional classification composed of 6 regions was maintained without change. Between mid 1 C. and mid 3 C., the territory of Shil-la was expanded because Shil-la conquered Jinhan ( 辰 韓 ) - nearly the same of Kyungsangbukdo - where many small countries like Shil-la were located. As the conquests was under way continuously, the unstable situations continued with successive rebellions and secession attempts. In this process,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rimination between Shil-la with political superiority and the small countries conquered by Shil-la occurred. In the mean time, the region which had been the territory of Shil-la before conquest was transformed into the privileged region. That is, the previous Shil-la territory became a capital area including 6 towns and endowed with the privileged status. During 4-5 century, the ruling class of Shil-la sustained its policy discriminating between the capital and the local area. Therefore, both names of a country - Shil-la which means the whole integrated area(this is used
247 externally), Sara which means the capital distinguished from local area(used intemally)- were used at the same time. In addition, there found differences between ancient tombs in the capital and local regions in terms of the form, the size, the categories and the quantities of grave goods. But, during 1-3 century, centralization of population and goods to the capital was rarely occurred because of incomplete relationships between the capital and local area. Therefore the highest center in the capital didn t expand rapidly and the 6-regions classification in the capital didn t changed. But, during 4-5 century, more reinforced control over periphery regions brought the intensification of not only power but also commodities into the highest center. Accordingly, many royal groups residing in Yukbu center moved to the highest center promoting the expansion of the resident area into the boundary of 2 towns around N am -chun. These spatial spread of the highest center brought the change of population distribution including the ruling class of Yukbu. A new administrative unit, Bangri(행 里 ) one-level lower than Yukbu in the administrative system was introduced, but the Yukbu administrative system lasted. In addition the highest center which had developed as a city failed to become an independent administrative unit. In 6 century, Shil-la occupied Kaya territory corresponding to the current range of Kyunsannam-do and the Han-gang(River) basin including Kyunggi-do, Kangwon-do, and Chunchungbuk-do. After Shil-la ruined Baekje in 660 and Koguryo in 668, she accomplished unification of Korean peninsular, the southem part of Daedong-gang(River) In this process of territory expansion, the policy discriminating between the capital and the local areas continued without dramatic changes of its privileged status and the spatial boundary of the capital. Besides, centralization of population and commodities into the city continued on the basis as follows First, the highest elites came from the capital and kept their status through the intemal marriage. So they rarely left the capital. Secondly, the middle and lower elites also hesitated to leave the capital because human connections with the highest ruling elites were so imperative in getting the position of higher
248 officials. Thirdly, the more intense the political struggle for the throne became since the mid-8, the severer the social competition seeking more luxurious life. In order to support the extravagant lifestyle of the ruling class, the concentration of merchants and craftsmen who provided the capital with various commodities was also intensified. As a result, the gravitation of the population and the expansion of the highest center continued and even fortified. Meanwhile, since Buddhism was accepted publicly in 6C, large temples started to be constructed around the levees from the mid 6 Century. It means that the royal authority built the levees in order to prevent inundation through the temple construction. Consequently, the resident area was expanded into the Seo-chun(the mainstream of Hyungsan-gang) and the Buk-chun area. And the capital was developed to the extent of the area surrounded by the above 2 streams and Nang-san(Mountπta머ln띠Ü in the east and Nam-san in the south and kept expanding until the 7th century. During 8-9 century, it reached its limit into Seo-chun, Sokeumkang-san, Myunghwal-san, Mangduksaji(temple), Posukjung at its peak. Not only the relics of temples remains but also the vestiges of urban planning within the above area have been confirmed by some researchers on urban planning. Although the highest center kept expanding, the city area wasn t regarded as an independent administrative district until 7C. The previous administrative system Yukbu sustained tenaciously and a new administrative organization, "Yukbusogamjeon( 六 部 少 藍 典 ), in charge of Yukbu was established. Of course, the change was so dramatic considering that the chiefs of Yukbu were not appointed until the early 6th century. In the early 8th century, Wangdo(the royal capital, 王 都 ) was established as an independent administrative unit in the urban area. Accordingly, the capital area was divided into Wangdo(5.5 x 5.5 때) corresponding to the urban part and the rest region of Yukbu. With the reorganization of administrative system, Yukbusogamjeon was abolished and two new administrative organizations were established. The one, Kyung seongj uj akj eon ( 京 城 周 作 典 ), was in charge of Wangdo and the other, J eoneupseo( 典 린협 一 ), the Yukbu. The reorganization of administrative system in
249 the capital in the early 8th century was revolutionary action considering the tradition of 6 regions continued for almost 700 years. Finally, l' d like to suggest that this thesis on the boundary of the royal capital and the reorganization of administrative system in the early 8th century contribute to shedding a light on the record of Samkukyusa( 三 國 遺 事 ) which says, There were 178,936 households, 1,360 Bang, 55 Ri in the Capital'. It has been taken for granted by the majority of researchers until now that 178,936 household is a mere mistake and the correct original number is 178,936 person and that 1,360 bang is too enormous to exist in the royal capital. Because they regard the capital as Wangdo, they conclude that it is impossible to accommodate 178,936 households and 1,360 bang physically in the royal capitai(5.5 x 5.5 knf). However, if the boundary of the capital is expanded into the area including Wangdo plus Yukbu, this problem can be solved automatically and the validity of the old record on Samkukyusa can be verified. Key Words: the Capital of Shil-la, local area, boundary, administrative district, Yukchon(6 town), 6 town chiefs, the royal group, the highest center, Yukbu(6 town), privileged regional status, WangdoÜhe royal capitai) Student Number:
250 日 本 文 要 約 新 羅 王 京 φ 範 圍 t: ß 域 ζ 開 놓& 地 理 的 班 究 './ r) 1ν 大 풍 大 풍 院 地 理 렇 科 李 起 屬 :'(J) 論 文 따 時 系 列 的 찮 觀 J원7J )G 新 羅 王 京 m 範 閒 ε 行 政 E 域 하 具 # 的 1농 空 間 j 上 τ ~'(J) J: :j,~ 形 成 裵 化 L t=- (J) 7J)' ζ/기/ τ 明 G 7J)'~ 才 ξ : ε 창덤 的 ε L --C1t ~o (J) 冊 究,~휩 ~t~ 最 $ 基 鍵 的 1농 資 料 따 文 敵 記 錄 ε 牌 文 져 )G 誌 l-j.. 取 n,정 地 理 的 資 料,~ J: /그 --C v ~o :.t나 ζsìé 行 L --C 地 댐추 考 古 좋 的 tt.짧 握 內 容 훈 參 考,~ L t=- ~ 74-;νF? -!J 훈 行 t=- ~ Lτ 上 記 資 料,~첼T~ 確 認 作 業 行 σf는 :. (J) J: :j 7쌓 作 業 '~J: ":::>--C 確 認 흔 nt=- 新 羅 王 京 φ 範 閒 ε 行 政 E 域 m 裵 化 7J~ 新 羅 (J) ti승 政 1 台 的 裵 化 t~ ε 7J) 地 理 ; 開 連 T~ 各 種 資 料 σ 解 R ~~ (:" (J) J: :j 7농 影 響 훈 及,;t L :j Q (J)7J) εl :j ε 송 樓 즙tT ~(J) 지~ :. (J) 論 文 m 試 *τ lb~ 冊 究 結 果 훈 整 理 꺼rε ε 'I!A(J) ε 힘 τ? lbε 新 羅 王 京 m 母 { 本 εu *-~r 六 村 따 三 固 史 記 용 三 固 遺 事 ~(J) 記 錄 {ζ J:정 ε 新 羅 建 圖 以 前 {ζ 形 成 흔 n 촌 m 範 閒 따 安 康 J:~ 南 (J) 兄 山 江 流 域 ε 東 海 뿜 太 和 江 m - 部 훈 含 합 εu 5 安 康 J:~ 南 m 兄 山 江 流 域 따 六 "':) (J) lj 흔 b 流 域 團,~ 分 너 Gnτu 강하 :.n''i 新 羅 建 固 J: ~t 前 ~~ r 村 하 形 成 批 張 Lt=- 場 合 {ζ 六 "':)(η 村 힘 自 然 {ζ 形 成 흔 hε 可 能 性 힘 lb~εl :j:. εm 基 盤 ε t t. Q 慶 州 市 內 ~~힘,tε 六 村 m 境 界 線 따따":::>혼 ~ L --C v 7옮 U 힘 文 敵 記 錄 ε 洪 水 時 北 川 혀 m 藍 Tδ 可 能 性 7J ~lb":::>1는했 皇 츄 皇 龍 츄 址 - 雅 觸 池 北 但 11- 月 城 北 1j1JJ- 月 城 西 個 IJ 훈?찮 線 용":t=- ε τ 復 元 TQ-:' ε 7J~ 可 能 t~ ε 言 소J::j 以 上 7J) G 明 活 山 高 耶 村 (협 比 部 ) 따 北 川 面 φ 新 堂 川 流 域 ζ 關 川 楊 山 村 ( 梁 部 ) 따 慶 州 市 內 ε 見 짝 面 φ 小 見 川 流 域,~ 歲 山 大 樹 村 (후 梁 部 ) 따 西 面 乾 川 뭄 m 大 川 流 域 ~;: 突 山 高 塊 村 ( 沙 梁 部 ) 따 太 和 江 m 一 部 훈 含 ~정 南 )11σ 南 얘IJ~ lb~ 兄 山 江 本 流 流 域,~ 홉 山 珍 支 村 ( 本 彼 部 ) 따 月 城 - 狼 山 - 明 活 山 {ζ 連 찮 5 線 φ 南 얘IJτ &정 南 川 流 域,~ 金 山 加 利 村 ( 漢 紙 部 ) 따 東 海 뿔(J)1t 浦 현 陽 北 面 陽 南 面 훈 含 Iv얀휩 했 皇 츄- 狼 山 ζ 連 찮증 線 m 東 1j1JJ~ lb~ 北 川 流 城 {ζ 흙 t: ε 훈 確 認 TQ-:' ε 7J ~τ 혼 f는 'i. 1는 ~ 居 世,~ 代 表 흔 hε J: :j t. 外 束 集 댐추 關 英 六 村 長 ι 代 表 흔 n ε J::j찮 士 著 集 댐 φ 連 合 ζ J: τ 新 羅 7J~ 建 固 호 nt=-t=-~ 六 村 m 範 閒 ε 境 界 따준 m 뚫놓 新 羅 φ 領 域 ε 地 域 E 分,~ 受 너 維 7J ~nt=- 六 村 따 新 羅 建 圖 J: ~t 前 ~~ 六 村 長 승 議 #ε J:,'fn~i 曺 合 #훈 構 成 Lτ v t=-o 'i. t=- 先,~ ti한.rz t=- ε j3~ 新 羅 σ 建 固 하 外 束 集 댐 士 著 集 댐 σ 連 合 {ζ J: ":::> t=-1는 't/) 六 村 長 基 盤 송준 φ 옮 維 持 캉증 :ε ;;j ~τ? 혼 t=- 新 羅 m 建 固 따옮 f는 練 居 世 ε 깐 (J)~ 己 τ lbδ 關 英 훈 代 表 εtq 王 室 集 댐 m 出 現 T tlb":::>1는 t=-~ 六 村 長 集 댐 ε 따 異 찮깅 王 室 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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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地 理 學 論 홉쫓 별호 년 4월 30 일 발행처 : 서울대학교 국토문제연구소 발행인 : 이정만 편집인 : 박삼옥 인쇄소 : 신일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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緊 張 冷 戰 體 制 災 難 頻 發 包 括 安 保 復 舊 地 震 人 類 史 大 軍 雷 管 核 禁 忌 對 韓 公 約 ㆍ 大 登 壇 : : : 浮 上 動 因 大 選 前 者 : : : 軸 : : : 對 對 對 對 對 戰 戰 利 害 腹 案 恐 喝 前 述 長 波 大 産 苦 逆 說 利 害 大 選 大 戰 略 豫 斷 後 者 惡 不 在 : : 對 : 軟 崩 壞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第 6 條 ( 壹 株 의 金 額 )..
제 정 1973. 2. 28 개 정 2010. 3. 19 定 款 삼성전기주식회사 http://www.sem.samsung.com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Readings at Monitoring Post out of 20 Km Zone of Tokyo Electric Power Co., Inc. Fukushima Dai-ichi NPP(18:00 July 29, 2011)(Chinese/Korean)
碘 岛 监 结 30km 20km 10km 碘 达 碘 测 时 提 高 后 的 上 限 [250,000 微 西 弗 / 年 ] [10,000 微 西 弗 / 年 ] 巴 西 瓜 拉 帕 里 的 辐 射 (1 年 来 自 地 面 等 ) > 辐 射 量 ( 微 西 弗 ) 250,000 100,000 50,000 10,000 注 : 本 资 料
<C3CAC1A12031322DC1DFB1B92E687770>
24 2004. 12 2004. 11 25 26 2004. 12 % 50 40 30 20 10 0 華 東 華 北 中 南 西 南 東 北 西 北 전 체 중 대 형 차 중 형 차 소 형 차 경 차 2004. 11 27 帕 28 2004. 12 2004. 11 29 30 2004. 12 2004. 11 31 32 2004. 12 2004. 11 33 3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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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제 의식의 원칙 논문은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야 한다. 주제 의식은 논문을 쓰는 사람의 의도나 글의 목적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협력의 원칙 독자는 필자를 이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나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노력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논리적 엄격성의 원칙 감정이나 독단적인 선언이
211 1-5.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石 村 洞 百 濟 初 期 積 石 塚 이도학, (서울의 백제고분) 석촌동 고분, 송파문화원, 2004. 서울 特 別 市, 石 村 洞 古 墳 群 發 掘 調 査 報 告, 1987. 1-6. 고창지석묘군 高 敞 支 石 墓 群 문화재관리국,
210 참고문헌 1. 능묘 1-1. 경주황남리고분군 慶 州 皇 南 里 古 墳 群 경상북도, 文 化 財 大 觀, 1-V, 慶 尙 北 道 編, 2003. 문화재관리국, 天 馬 塚 發 掘 調 査 報 告 書, 1974. 1-2. 함안도항리 말산리고분군 咸 安 道 項 里 末 山 里 古 墳 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咸 安 道 項 里 古 墳 群 5, 2004.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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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 2 - - - - 4 - - 5 - - 6 - - 7 - - 8 - 4) 민원담당공무원 대상 설문조사의 결과와 함의 국민신문고가 업무와 통합된 지식경영시스템으로 실제 운영되고 있는지, 국민신문 고의 효율 알 성 제고 등 성과향상에 기여한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를 치 메 국민신문고를 접해본 중앙부처 및 지방자 였 조사를 시행하 였 해 진행하 월 다.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발행일 : 2013년 7월 25일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정]--------------------------------------------
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7단원 1(252~269)교
7 01 02 254 7 255 01 256 7 257 5 10 15 258 5 7 10 15 20 25 259 2. 어휘의 양상 수업 도우미 참고 자료 국어의 6대 방언권 국어 어휘의 양상- 시디(CD) 수록 - 감광해, 국어 어휘론 개설, 집문당, 2004년 동북 방언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제주 방언 어휘를 단어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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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Story 2013. 1. 30. Story 2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3 STORY STORY 12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3 Korean Wave Story 2013 (2012년 1/4분기) 12 12 2012. 4. 9. 2 3 4 5 6 乱 世 佳 人 花 絮 合 集 梦 回 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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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Story 2012. 9. 13. Story 1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2 STORY STORY 12 호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2 Korean Wave Story 2012 (2012년 1/4분기) 12 호 12 호 2012. 4. 9. 2 3 4 5 轩 辕 剑 之 天 之 痕 我 的
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棄 権 DNS: 欠 場 ) 順 位 氏 名 記 録 順 位 氏 名 記 録 順 位 氏 名 記 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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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2002 年 2 月 昌 原 大 學 校 大 學 院 音 樂 科 安 明 基 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Sonata for B-fl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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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2) 2호 주거지 주거지는 해발 58.6m의 조사지역 중앙부 북쪽에 3호 주거지와 중복되어 위치하고 있다. 주거지는 현 지표층인 흑갈색사질점토층(10YR 2/3)을 제거하자 상면에 소토와 목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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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Shipping Association 조합 뉴비전 선포 다음은 뉴비전 세부추진계획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 조합은 올해로 창립 46주년을 맞았습니다. 조합은 2004년 이전까 지는 조합운영지침을 마련하여 목표 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추진해왔습니 다만 지난 2005년부터 조합원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창출로 해운의 미래를 열어 가자 라는 미션아래 BEST
다문화 가정 중학생의 문식성 신장 내용
교육연구 제58집 성신여대 교육문제연구소 2013년 12월 30일 2009 改 定 敎 育 課 程 에 따른 中 學 校 漢 文 敎 科 書 의 多 文 化 敎 育 에 對 한 一 見 이돈석 청주대학교 한문교육과 Ⅰ. 들어가는 말 Ⅱ. 한문 교과 교육과정 목표에 대한 검토 Ⅲ. 중학교 한문 교과서 분석 목 차 1. 재제 출전의 문제 2.. 교육 내용과 제시 방법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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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비계획의 기본구상 5.1 유적 및 유구 정비 복원 사례연구 5.1.1 미륵사지(彌勒寺址) 미륵사지는 삼국유사 백제 무왕조에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로 가는 길에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왕비의 청에 의하여 이곳을 메우고 3개의 불당과 탑, 회랑 등을 세웠 다는 기록이 있으며, 미륵사의 배치는 삼원병렬식(三院竝列式)으로 동 서
2. 4. 1. 업무에 활용 가능한 플러그인 QGIS의 큰 들을 찾 아서 특징 설치 마 폰 은 스 트 그 8 하 이 업무에 필요한 기능 메뉴 TM f K 플러그인 호출 와 TM f K < 림 > TM f K 종항 그 중에서 그 설치 듯 할 수 있는 플러그인이 많이 제공된다는 것이다. < 림 > 다. 에서 어플을 다운받아 S or 8, 9 의 S or 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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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1 前 言 現 行 考 銓 制 度 一 現 行 考 銓 制 度 對 人 事 行 政 的 重 要 性 : 強 烈 建 議 考 人 事 行 政 的 同 學 們, 一 定 要 精 讀 現 行 考 銓 制 度! 熟 讀 現 行 考 銓 制 度 的 好 處, 可 以 從 以 下 幾 個 角 度 來 分 析 : 相 對 重 要 程 度 高 : 現 行 考 銓 制 度 在 人 事 行 政 三 個 主 要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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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02 8 9 32 33 1 10 11 34 35 가족 구조의 변화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원만한 생활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기능 사회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동 가구 가족 규모의 축소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 1인 또는 1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 타나는 가족 구조의
건강증진 시범보고서 운영을 위한 기술지원 연구
짧활 康 t합샤훌 示 範 띔 健 所 運 營 응 위한 技 術 支 援 웹 JE - 示 範 保 健 所 模 型 開 發 을 中 心 으로l' 鍾 和 李 順 英 鄭 基 뽑 編 著 韓 國 띔 健 社 會 댐 究 院 머 리 말 美 國 이나 日 本 등 先 進 國 의 경우 이미 1970년대 부터 人 口 의 高 敵 化 와 生 活 樣 式 의 變 化 에 기인한 成 人 病 증가와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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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이 책에서는 단순히 가난한 관리들의 이야기보다는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사심 없이 헌신한 옛 공직자들의 사례들을 발굴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공과 사를 엄정히 구분하고,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공무를 처리한 사례,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최부, 송흠
152*220
152*220 2011.2.16 5:53 PM ` 3 여는 글 교육주체들을 위한 교육 교양지 신경림 잠시 휴간했던 우리교육 을 비록 계간으로이지만 다시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 선 반갑다. 하지만 월간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솔직히 나는 우리교 육 의 부지런한 독자는 못 되었다. 하지만 비록 어깨너머로 읽으면서도 이런 잡지는 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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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 융합 과학 2011년도 1학기 중간고사 대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 빅뱅 우주론에서 수소와 헬륨 의 형성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4 서술형 다음 그림은 수소와 헬륨의 동위 원 소의 을 모형으로 나타낸 것이. 우주에서 생성된 수소와 헬륨 의 질량비 는 약 3:1 이. (+)전하를 띠는 양성자와 전기적 중성인 중성자
35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5권 1883.01.24 釜 山 口 設 海 底 電 線 條 欵 / 海 底 電 線 設 置 ニ 關 スル 日 韓 條 約 漢 日 1883.06.22 在 朝 鮮 國 日 本 人 民 通 商 章 程 / 朝 鮮 國 ニ 於 テ 日 本 人 民 貿 易 ノ
근현대 한일간 조약 일람* 22) 1. 조선 대한제국이 일본국과 맺은 조약 주) 1. 아래 목록은 國 會 圖 書 館 立 法 調 査 局, 1964 舊 韓 末 條 約 彙 纂 (1876-1945) 上 ; 1965 舊 韓 末 條 約 彙 纂 (1876-1945) 中 ; 外 務 省 條 約 局, 1934 舊 條 約 彙 纂 第 三 巻 ( 朝 鮮 及 琉 球 之 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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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4 45 2012 46 47 2012 48 49 추억의 사진 글 사진 최맹식 고고연구실장 죽음을 감지하고 미리 알아서 죽은 미륵사지 느티나무 이야기 느티나무가 있던 자리 미륵사지는 가장 오랫동안 발굴 작업이 이뤄진 곳 미륵사지는 발굴 종료 당시,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가장 오랫 동 안 발굴했던 유적이다. 1980년 7월 7일 발굴을 시작해 1996년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 평균 ( 만원 ) 자녀상태 < 유 자 녀 > 미 취 학 초 등 학 생 중 학 생 고 등 학 생 대 학 생 대 학 원 생 군 복 무 직 장 인 무 직 < 무 자 녀 >,,.,.,.,.,.,.,.,.
. 대상자의속성 -. 연간가수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평균 ( 만원 ) 전 국,........,. 지 역 도 시 지 역 서 울 특 별 시 개 광 역 시 도 시 읍 면 지 역,,.,.,.,.,. 가주연령 세 이 하 - 세 - 세 - 세 - 세 - 세 - 세 세 이 상,.,.,.,.,.,.,.,. 가주직업 의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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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1441 1457 5 1441 7 23 1448 1 145 1451 1452 2 1455 3 1457 3 1 4 1681 7 5 1698 6 [] 7 2 1457 3 6 1452 ~ 1455 196 1581 1 12 31448 4 3 ; 2 145 7 2 ; 1 1 21796 3684 2 1 1452 5 18 3 1 11455 6 11 4 1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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固 城 栗 垈 2 農 工 團 地 造 成 事 業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2003. 11 慶 南 發 展 硏 究 院 歷 史 文 化 센터 固 城 栗 垈 2 農 工 團 地 造 成 事 業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Ⅰ. 調 査 槪 要 1. 調 査 目 的 고성군에서 추진중인 율대 농공단지 확장예정지에 대해 문화재보호법 제74-2와 동법 시행령 제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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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학보 제18권 제1호 The Korean Journal of Economics Vol. 18, No. 1(Spring 2011)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 吳 鎭 錫 ** 요 약 본고는 1940년대 전반 전력국가관리의 수립을 대상으로 정책 결정의 주체 에 주목하여 정책의 원안이 등장하여 최종안에 이르는 변천과정을 면밀하 게 분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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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발ζ틸록번호 1 1 4 0 % 0 2 0 - m O O 4 4 - 이 연 구 보 고 2 0 0 2-0 1 I R 애싱 -대도시 징탄성매때지역 증싱으로 g 김승뀐 조애저 김유곁 손승영 한혀 결 김성아 ~잉 z -ι7 / v / ι ζ a Tι r 鉉 ; ιo t n ι a 톨 상r X a 흥 낀 ~ ~ r - * 서 7 A * r - 엉 뇨려 - r M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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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 2. 3. 4. 제2장 아동복지법의 이해 12 4).,,.,.,.. 1. 법과 아동복지.,.. (Calvert, 1978 1) ( 公 式 的 ).., 4),. 13 (, 1988 314, ). (, 1998 24, ).. (child welfare through the law) (Carrier & Kendal, 1992). 2. 사회복지법의 체계와
16 經 學 研 究 集 刊 特 刊 一 墓 誌 銘 等 創 作 於 高 麗 時 代 與 朝 鮮 朝 時 代, 此 是 實 用 之 文 而 有 藝 術 上 之 美. 相 當 分 量 之 碑 誌 類 在 於 個 人 文 集. 夢 遊 錄 異 於 所 謂 << 九 雲 夢 >> 等 夢 字 類 小 說.
經 學 研 究 集 刊 特 刊 一 2009 年 12 月 頁 15~36 高 雄 師 範 大 學 經 學 研 究 所 15 韓 國 漢 文 學 硏 究 之 最 近 傾 向 김동협 金 東 協 教 授 / Professor Kim Donghyub 摘 要 我 想 對 於 韓 國 漢 文 學 最 初 之 專 門 著 書 是 金 台 俊 之 >. 此 冊 刊 行 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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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v vi vii viii ix x xi 61 62 63 64 에 피 소 드 2 시도 임금은 곧 신하들을 불러모아 나라 일을 맡기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하 산을 만난 임금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어요. 원하시는 대로 일곱 번째 다이아몬드 아가씨를
연구노트
#2. 종이 질 - 일단은 OK. 하지만 만년필은 조금 비침. 종이질은 일단 합격점. 앞으로 종이질은 선택옵션으로 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종이가 너무 두꺼우면, 뒤에 비치지 는 않지만, 무겁고 유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두꺼우면 고의적 망실의 위험도 적고 적당한 심리적 부담도 줄 것이 다. 이점은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 필자의
그렇지만 여기서 朝 鮮 思 想 通 信 이 식민본국과 피식민지 사이에 놓여 있는 재조선일본인의 어떤 존재론적 위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식민본국과 피식민지의 Contact Zone 에 위치한 재조선일본인들은 조선이라는 장소를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기
식민지의 목소리 - 朝 鮮 思 想 通 信 社 刊, 朝 鮮 及 朝 鮮 民 族 (1927)을 중심으로 鄭 鍾 賢 ( 成 均 館 大 ) 1. 伊 藤 韓 堂 과 朝 鮮 思 想 通 信 伊 藤 韓 堂 이 발간한 朝 鮮 思 想 通 信 은 1925 년에 발행을 시작하여 1943 년 그가 죽은 직후에 폐간될 때까지 대략 18 년 동안 간행된 조선문을 번역한 일본어 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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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October 2005 현 대는 이미지의 시대다. 영국의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이미지를 새롭 게 만들어진, 또는 재생산된 시각 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에 따르 면, 이미지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보는 사람의, 혹은 이미지를 창조하는 사람의 믿음이나 지식에 제한을 받는다. 이미지는 언어, 혹은 문자에 선행한다. 그래서 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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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년예산개요 Ⅱ 경상북도예산규모 1. 예산총계규모 2. 세입예산규모 3. 세출예산규모 2019 예산개요 7 8 2019 년도예산개요 근거 : 지방자치법제 133 조 ( 예산편성후행정안전부보고 ) 예산편성심의의결후행정안전부보고, 예산에대한이해의도모와 단체간비교가용이토록정리 예산규모 총계규모 : 24조 478억원 ( 일반 20조 9,774억원, 특별 3조
항일 봉기와 섬멸작전의 사실탐구
抗 日 蜂 起 와 殲 滅 作 戰 의 史 實 探 究 - 韓 國 中 央 山 岳 地 帶 를 中 心 으로- 이노우에 가츠오( 井 上 勝 生 ) 1) 머리말 지난 해(2015년) 10월과 11월, 日 本 軍 東 學 黨 討 伐 隊 의 進 軍 路 를 한국의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조사할 수 있었다. 後 備 第 19 大 隊 (당시 東 學 黨 討 伐 隊 라고 불리었다) 第 1
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몸이란? 자 기 반 성 유 형 밀 당 유 형 유 레 카 유 형 동 양 철 학 유 형 그 리 스 자 연 철 학 유 형 춤이란? 물 아 일 체 유 형 무 아 지 경 유 형 댄 스 본 능 유 형 명 상 수 련 유 형 바 디 랭 귀 지 유 형 비 타 민 유 형 #1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 관한 개략적인 소개가 있었지만, 1) 여전히 많은 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실정이다. 본고 또한 여전히 짧고 소략한 내용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39-44, 2008년 6월 Yonsei J Med Hist 11(1): 39-44, 2008 일반논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 신창희( 申 昌 熙 )의 생애와 활동 박 형 우(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홍 정 완(연세대 의사학과)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POWERSHELL CONTROLLER + BATTERY Setup Guide English............................... 4 繁 體 中 文.............................. 12 한국어............................... 20 www.logitech.com/sup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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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60 1 1 200 2 6 4 7 29 1975 30 2 78 35 1 4 2001 2009 79 2 9 2 200 3 1 6 1 600 13 6 2 8 21 6 7 1 9 1 7 4 1 2 2 80 4 300 2 200 8 22 200 2140 2 195 3 1 2 1 2 52 3 7 400 60 81 80 80 12 34 4 4 7 12 80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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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연구 http://www.kbc.go.kr/ 텔레비전의 폭력행위는 어떠한 상황적 맥락에서 묘사되는가에 따라 상이한 효과를 낳는다. 본 연구는 텔레비전 만화프로그램의 내용분석을 통해 각 인 물의 반사회적 행위 및 친사회적 행위 유형이 어떻게 나타나고 이를 둘러싼 맥락요인들과 어떤 관련성을 지니는지를 조사하였다. 맥락요인은 반사회적 행위 뿐 아니라 친사회적
41호-소비자문제연구(최종추가수정0507).hwp
소비자문제연구 제41호 2012년 4월 해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이용약관의 약관규제법에 의한19)내용통제 가능성* : Facebook 게시물이용약관의 유효성을 중심으로 이병준 업 요약 업 규 규 논 업 쟁 때 셜 네트워 F b k 물 규 았 7 계 건 됨 규 규 업 객 계 규 므 받 객 드 객 규 7 말 계 률 업 두 않 트 접속 록 트 른징 볼 규 업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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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물류정책의 통합 조정 기능이 필요하다 문화도 경제다 미국의 선박 밸러스트 수( ) 규제 동향 최근 세계 양식업의 명암 35,000 31,564 30,000 23,040 25,000 20,000 15,000 10,149 9,486 10,743 9,373 금액(US$M il.) 중량(천 M/T) 10,000 5,000 5,590 1,646 452 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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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파 방송의 여성인력 현황 및 전문화 방안 연구 한국여성개발원 발간사 Ⅰ....,.,....... .. Ⅱ. :...... Ⅲ.,,. ..,.,.... 9 1 1.. /.,. PD,,,,, / 7.93%. 1%... 5.28% 10.08%. 3.79%(KBS MBC), 2.38 %(KBS MBC) 1%...,. 10. 15.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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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DVD CHOICE dvd dvd?!!!! [1] [2] DVD NO. 1898 [3] Days of Being Wild 지금도 장국영을 추억하는 이는 많다. 그는 홍콩 영화의 중심에 선 배우였고,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거짓말 같던 그의 죽음은 장국 영을 더욱 애잔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 이 장국영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 피터드러커의 혁신과 기업가정신 허연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Doing Better Problem Solving Doing Different Opportunity ! Drucker, Management Challenges for the 21st Century, 1999! Drucker, Management: Tasks, Responsibi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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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 文 科 學 제101집 2014년 8월 漢 字 문자 그 이상의 상징 체계 Ⅰ. 서론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한자의 본격적인 개혁운동은 5.4 白 話 運 動 이 후 지식인들에 의한 표음문자화를 지향하는 漢 字 革 命 論 이다. 근대 알파 벳 문자를 이상적 원형으로 사유하는 서구학계의 깊은 인식론의 영향으로 1954년 中 國 文 字 改 革 委 員 會 성립 이후
나하나로 5호
Vol 3, No. 1, June, 2009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KACPR) Newsletter 01 02 03 04 05 2 3 4 대한심폐소생협회 소식 교육위원회 소식 일반인(초등학생/가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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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도서관총서 1 경기도 도서관 총서 경기도도서관총서 1 지은이 소개 심효정 도서관 특화서비스 개발과 사례 제 1 권 모든 도서관은 특별하다 제 2 권 지식의 관문, 도서관 포털 경기도 도서관 총서는 도서관 현장의 균형있는 발전과 체계적인 운 영을 지원함으로써 도서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간되 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를 통해 사회전반의 긍정적인
7 청보 86. 3. 29( 對 삼성 )~4. 5( 對 빙그레 ) NC 13. 4. 2( 對 롯데 )~4. 10( 對 LG) 팀별 연패 기록 삼 미 18 연패 ( 85. 3. 31~4. 29) 쌍방울 17 연패 ( 99. 8. 25~10. 5) 롯 데 16 연패 ( 0
전반, 타격, 투수, 수비 진기록 전반 시즌 최고 승률 0.706 85 삼성 (110 경기 77승 32패 1 무) 기별 최고 승률 0.741 85 삼성 ( 전기 55경기 40승 14패 1 무) 시즌 최저 승률 0.188 82 삼미 (80 경기 15승 65 패) 기별 최저 승률 0.125 82 삼미 ( 후기 40경기 5승 35 패) 시즌 최다 승리 91 00
CR2006-41.hwp
연구책임자 가나다 순 머 리 말 2006년 12월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원장 - i - - ii - - iii - 평가 영역 1. 교육계획 2. 수업 3. 인적자원 4. 물적자원 5. 경영과 행정 6. 교육성과 평가 부문 부문 배점 비율(%) 점수(점) 영역 배점 1.1 교육목표 3 15 45점 1.2 교육과정 6 30 (9%) 2.1 수업설계 6 3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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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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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48.6% 남 51.4% 40대 10.7% 50대 이 상 6.0% 10대 0.9% 20대 34.5% 30대 47.9% 초등졸 이하 대학원생 이 0.6% 중졸 이하 상 0.7% 2.7% 고졸 이하 34.2% 대졸 이하 61.9% 직장 1.9% e-mail 주소 2.8% 핸드폰 번호 8.2% 전화번호 4.5% 학교 0.9% 주소 2.0% 기타 0.4% 이름
1. 2. 3. 4. 5.
1. 2. 3. 4. 5. 1 10 11 12 13 14 부여는 그 도장에 예왕지인( 濊 王 之 印 : 예왕의 인장)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나라에는 오래된 성이 있는데, 이름을 예성( 濊 城 )이라 고 한다. 본래 예맥의 지역인데, 부여가 그 가운데 왕으로 있었다. 1 15 16 17 18 19 20 1 2 21 2 22 1 2 23 24 1 2 2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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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히 묻고 가까이 실천하는 선진 산림과학 3.0 시대를 열겠습니다! 01 03 05 05 06 07 08 08 10 10 11 임업인에게는 희망을, 국민에게는 행복을 带 NIFoS 1 중국 닝샤회족자치구() 중국 무슬림 인구 주요 분포도 중국 닝샤의 회족 자치구 3 중국 무슬림 인구 Top 11 지역 순위 지역( 省 ) 인구(만)
내지-교회에관한교리
내지-교회에관한교리 2011.10.27 7:34 PM 페이지429 100 2400DPI 175LPI C M Y K 제 31 거룩한 여인 32 다시 태어났습니까? 33 교회에 관한 교리 목 저자 면수 가격 James W. Knox 60 1000 H.E.M. 32 1000 James W. Knox 432 15000 가격이 1000원인 도서는 사육판 사이즈이며 무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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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財 ) 東 亞 文 化 硏 究 院 地 表 調 査 報 告 第 14 輯 진영읍 신용리 아름다운아파트 신축공사 구간내 文 化 遺 蹟 地 表 調 査 報 告 書 2 0 0 4. 10 目 次 Ⅰ 7. 조사개요 Ⅱ. 역사 ㆍ 고고분야의 조사 8 1. 김해시의 자연환경 1. 8 2. 김해의 역사적 환경 2. 10 3. 조사대상지역 개관 3. 28 Ⅲ 29. 현지조사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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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연구보고서 220-10 대학평생교육원의 운영 방안 한국여성개발원 발 간 사 연구요약 Ⅰ. 연구목적 Ⅱ. 대학평생교육원의 변화 및 외국의 성인지적 접근 Ⅲ. 대학평생교육원의 성 분석틀 Ⅳ. 국내 대학평생교육원 현황 및 프로그램 분석 Ⅴ. 조사결과 Ⅵ. 결론 및 정책 제언 1. 결론 2. 대학평생교육원의 성인지적 운영을 위한 정책 및 전략 목
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전문용어의국어화 강현화 1. 들어가기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 사용의 전형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전문 용어의 사용자가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포 될 수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출발점을 시작으로 과연 전문 함 용어의 국어화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2. 전문 용어 연구의 쟁점 2.1. 전문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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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산업중분류, 조직형태 및 동별 사업체수, 종사자수 단위 : 개, 명 금정구 서1동 서2동 서3동 Geumjeong-gu Seo 1(il)-dong Seo 2(i)-dong Seo 3(sam)-dong TT전 산 업 17 763 74 873 537 1 493 859 2 482 495 1 506 15 519 35 740 520 978 815 1 666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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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소 직물업의 발흥과 그 배경 류상윤( 서울대학교대학원 경제학부 박사과정 수료) 1. 머리말 1960 년대 이후 한국은 고도성장을 경험하였다. 고도성장의 원인 또는 배경이 무엇이었는 지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하여 왔다. 그 중에는 해방 후의 경제성장을 식민지기 조선이 경험했던 것들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들도 있다. 이들은 각각 자본주의
UDI 이슈리포트제 20 호 울산권개발제한구역의효율적관리방안 도시계획연구실정현욱연구원 052) / < 목차 > 요약 1 Ⅰ. 서론 3 Ⅱ. 울산권개발제한구역의현황및문제점 4 Ⅲ. 외국의개발제구역대안적관리사
UDI 이슈리포트제 20 호 울산권개발제한구역의효율적관리방안 2009. 12. 7. 도시계획연구실정현욱연구원 052) 283-7752 / [email protected] < 목차 > 요약 1 Ⅰ. 서론 3 Ⅱ. 울산권개발제한구역의현황및문제점 4 Ⅲ. 외국의개발제구역대안적관리사례 10 Ⅳ. 울산권개발제한구역의효율적관리방안 16 Ⅴ. 결론 21 울산권개발제한구역의효율적관리방안
國 統 調 9 0-1 2-1 0 7 南 北 韓 社 會 次 化 力 量 綜 출 評 價 統 院 調 査 硏 究 室 책 을 내 면 서 南 北 韓 이 分 斷 以 後 각기 相 反 된 政 治 理 念 과 政 治. 經 濟 的 制 度 에 토대를 둔 體 制 成 立 으로 相 異 한 社 會 文 化 를 形 成 해온 지도 벌써 4 5 年 이 지 났다. 이 기간동안 南 과 北 의 社 會
기본소득문답2
응답하라! 기본소득 응답하라! 기본소득 06 Q.01 07 Q.02 08 Q.03 09 Q.04 10 Q.05 11 Q.06 12 Q.07 13 Q.08 14 Q.09 응답하라! 기본소득 contents 16 Q.10 18 Q.11 19 Q.12 20 Q.13 22 Q.14 23 Q.15 24 Q.16 Q.01 기본소득의 개념을 쉽게 설명해주세요. 06 응답하라
특수의약품 개발 및 수요전략- 現況및 問題點中心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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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문 * 웅 입주자격소득초과 34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송 * 호 입주자격소득초과 35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나 * 하 입주자격소득초과 36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최 * 재 입주자격소득초
1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주 830516 입주자격소득초과 2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연 711202 입주자격소득초과 3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이 * 훈 740309 입주자격소득초과 4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이 * 희 780604 입주자격소득초과 5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안 * 현
제국주의로서의 근대일본자유주의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제28차 워크숍 2016-04-08 제국주의로서의 근대일본자유주의 -가와이 에이지로의 제국일본 인식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용철(한림대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 1. 연구의 목적 및 필요성 2. 식민지 인식과 정당화논리 2.1 이상주의적 자유주의와 국민적 자유론 2.2 식민지 정당화의 논리 3. 전쟁 인식과 정당화논리 3.1 이상주의적
한국 시장경제체제의 특질에 관한 비교제도분석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Working Paper Series 韓 國 市 場 經 濟 의 특질 - 地 經 學 的 조건과 社 會 文 化 의 토대에서- 이 영 훈 Working Paper 2014-07 Nov, 2014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31gil 5, Bongcheon-ro,
需給調整懇談会の投資調整―石油化学工業を中心に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17 논문 5 朝鮮總督府의 臨時資金調整法 운용과 資金統制 박현 연세대학교 1. 머리말 1937 년 7 월에 시작된 中日戰爭은 전쟁 당사국인 일본뿐만 아니라 그 식민지인 조선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강화되고 전시 경제통제가
20세기초 언양의 농민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Working Paper Series 20세기 전반 彦 陽 의 小 農 社 會 이 영 훈 Working Paper 2015-03 Arp, 2015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31gil 5, Bongcheon-ro, Kwanak-ku, Seoul,
名門家 명문가 기록관리의 변천 2011년 부천 족보전문 도서관 變遷 序 文 나이 스물을 조금 넘겨 군대 생활을 할 때 우연찮게 족보를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즈음에는 문맹률도 높았고 그래서, 당히 각 가정에서 책을 구경하기란 아마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얘기 같지만 국민학교 교과서 정도가 전부이지 동화나 소설이나 잡지는 구경할 수도 없었다. 혹여 나름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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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작물실용화사업단 인식조사 및 실용화 방향 설정 GM작물 인식조사 및 실용화 방향 설정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김욱 박사 1. 조사목적 GM 작물 관련 인식조사는 사회과학자들을 바탕으로 하여 국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GM 작물 관련 인식 추이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모니터링하여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탐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2. 조사설계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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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17일 발행 통권 제112호 112 발행인:李圭衡/편집인:金尙勳/주간:金泰詢/발행처:社)退溪學釜山硏究院 (우614-743) 釜山市釜山鎭區田浦洞608-1 819-8587/F.817-4013 出處가 분명한 공직사회 인간이 가지는 인성은 그 특성이 다양하여 일률적으로 판단 한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관점과 측면에서 논하느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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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 심리록에 수록된 사례를 중심으로 - 김 용 희 * 차 례 Ⅰ. 서 설 Ⅱ. 심리록에 나타난 지방관리들의 사법행정능력 1. 검험의 기준 2. 검험조서 Ⅲ. 심리록에 나타난 재판의 기본원칙 1. 관용의 원칙 2.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in dubio pro re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