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논집제 35 집 2013 년 11 월 Sogang Journal of Philosophy Vol. 35, Nov. 2013, pp.211-233 인간의고통과치유의하느님 * 1)1) 김선희 이화여대 주제분류 철학적인간학, 철학실천, 철학상담 주제어 고통, 무고한자의고통, 욥기, 치유의하느님, 치유, 위로 / 위안, 철학상담 요약문 이논문은무고한자의고통의문제를다루고있는구약의 욥기 텍스트를토대로하여인간의고통의문제를새로운방식으로접근해야한다는것을논의한다. 욥처럼죄없는무고한자의고통을생각한다면인간의고통이나악의문제에대한물음은달리제기되어야한다. 그것은고통이나악의존재이유를정당화하기위한물음이아니라, 고통받는자를진정으로위로하거나치유하기위한물음이어야한다. 이는인간의고통과악을정당화하거나설명하려는이론적물음으로부터인간의고통과상처에대하여어떻게공감하고위로하며치유할것인지하는실천적물음으로전환하는것이다. 나아가현대를살아가는그리스도인은자신의고통과타인의고통을치유하기위하여고통안에서새로운하느님의상을묵상하는것이필요하다. 즉인간의고통을단죄하는윤리적신이아니라, 인간의고통을위로하는치유자로서의하느님의모습을드러내는것이요청된다. 필자는구약의욥기에서시작하여성서안에서치유자로서의하느님의모습을추적하면서고통의치유에대한접근을시도하고자한다. 성서에나타나있는위로와치유의하느님모습을통하여, 오늘날인간의고통을치유하는프랙티스과정에서어떤메시지를읽고실천해야하는지논의하고자한다. 투고일 : 10 월 31 일, 심사완료일 : 11 월 21 일, 게재확정일 : 11 월 28 일 * 이논문은 2012 년 3 월가톨릭여성연구원심포지움에서발표했던글을수정 보완한것이다.
212 철학논집 ( 제 35 집 ) 1. 고통의문제는무엇인가? 악의존재를비롯하여고통의존재를해명해야하는일은그리스도교리와신학의커다란과제가되어왔다. 이문제에대하여선행을보상하고악행을처벌한다는인과응보론, 보다큰선을위하여악이필요하다는것을설명하려는여러가지형태의신정론및인간의자유의지에의해악이이세상에들어왔다는신학적설명등이제시되기도하였다. 이런종류의설명에는암암리에신의정의, 보상과처벌, 고통에대한도덕과책임의개념등으로이루어진윤리적패러다임이전제되어있다. 또한이런접근방식은인간의고통을자신의책임으로간주하거나보다큰선을위한희생으로서악을인정하도록요구한다. 결국악의존재가 ( 혹은그로부터초래되는고통이 ) 어떻게정당화되는지에초점이맞추어져있다. 그러나인간의삶에들어있는수많은고통들이도덕의영역에속한다는생각은편견이거나지나치게협소한것이다. 삶의깊이에도달할수록우리는윤리영역을넘어서는인간실존의고통을체험하게된다. 사랑하는사람의죽음과이별, 전쟁과재난에의한불행과상실, 생로병사의실존적고통, 무고한자의고난등은도덕의영역과무관한고통이다. 이런종류의고통과불운을단죄와처벌의윤리적개념틀로바라보는것은피상적관점일따름이다. 그것은인간의삶의정황을이해하지못하는것이며고통받는이에게더욱깊은상처를주는일이된다. 그렇다면인간의고통에대한문제는정당화의문제가아니라다른방식으로접근해야하는문제이다. 더구나죄없는무고한자의고통을생각한다면 ( 순진무구한아이나무죄한자의고통등 ), 인간의고통이나악의문제에대한물음은달리제기되어야한다. 그것은악 / 고통의존재이유를정당화하기위한물음이아니라, 진정으로고통을위로하거나치유하기위한실천적물음이어야한다. 즉인간의고통 ( 특히무고한자의고통 ) 을어떻게공감하고위로할것인가? 그리하여고통의치유에동참할것인가? 이것은
인간의고통과치유의하느님 213 인간의고통과악을정당화하거나설명하려는이론적물음으로부터인간의고통과상처에대하여어떻게공감하고위로하며치유할것인지하는실천적물음으로전환하는것이다. 우리가만나는고통의진정한문제는위로와치유를지향하는실천적물음이라는것이다. 나아가현대를살아가는그리스도인은자신의고통과타인의고통을치유하기위하여고통안에서새로운하느님의상을묵상하는것이필요하다. 즉인간의고통을단죄하는윤리적신이아니라, 인간의고통을위로하는치유자로서의하느님의모습을드러내는것이요청된다. 필자는구약의욥기에서시작하여성서안에서치유자로서의하느님의모습을추적하고자한다. 1) 그리하여성서에나타나있는위로와치유의하느님모습을통하여, 오늘날인간의고통을치유하는프랙티스과정에서어떤메시지를읽고실천해야하는지논의하고자한다. 2. 보상과처벌의윤리적신 인간의고통에대한인과응보적관점은보상과처벌의신개념을전제한다. 그에따르면인간의선행을보상하고악행을벌하는것이하느님의정의이다. 보상-처벌의신은행위의옳고그름을평가하고그것에합당한책임을부여한다는의미에서윤리적신이기도하다. 인간에게보상-처벌의신은자신의잘잘못을가리고단죄하는두려움의대상이다. 또한악에걸려넘어지는유한한인간에게사후의세계는공포의대상이될수도있다. 죽음의공포배후에는자신의죄와과오에대해처벌하는신에대한공포 1) 필자는이작업을위해욥기에대한 2차문헌에의존하기보다욥기텍스트에드러난욥의발화에직접주목하고자한다. 즉이논문의중심목표는텍스트안에서욥이말하는방식을직접추적함으로써악의문제를새롭게조명하는것이다.
214 철학논집 ( 제 35 집 ) 와그로인해고통이지속되는사후세계에대한공포가도사리고있다. 이런사고는죽음의공포를치유하고자했던에피쿠르스의처방에도암시되어있다. 그는인간이죽음과동시에더이상존재하지않는다는사실이역설적으로우리를죽음의공포에서벗어나게해준다고보았다. 그는사람들이죽음에대해공포를느끼는이유가죽은후의경험에대한염려와공포때문이라고보았다. 그런것이없다면죽음의공포를느낄이유도없다. 그는죽음이후의세계나경험을부정하는자연학, 인간론과영혼론을논증한다. 2) 이렇게사후세계를부정할경우, 그리하여사후에우리를보상하거나처벌하는신이없다면죽음의공포문제도해소될것이다. 3) 욥기라는구약의지혜서는바로이런윤리적신개념에문제를제기한다. 보상과처벌의윤리적신개념과도덕적세계관에따르면, 기쁨과고통은행위에대한인과응보이며인간의고통은벌의성격을갖는다. 여기서하느님은심판관으로등장한다. 그러나욥기는보상-처벌의윤리적신개념에의문을제기하면서그러한도덕적세계관에종말을고한다. 욥은악의문제를사람의잘못으로돌릴수없음을증언한다. 욥은비록자신이고난당하고있지만결백하다고주장한다. 즉자신의고통이죄의인과응보나신 2) 에피쿠로스에의하면, 진리의기준은감각인데, 인간이죽게되면영혼은흩어져없어지고영혼이흩어진다음남게되는영혼의원자들은육체와더는연결되지않기때문에감각능력을갖지못한다. 그리하여우리는죽음을경험하지못하며죽음이란우리에게아무것도아니라는결론이도출된다. 왜냐하면모든좋고나쁨은감각에있는데, 죽으면감각을잃게되기때문이다. B. 러셀, 서양철학사, 서상복역, 서울 : 을유문화사, 2009, 331~345 참고. 3) 에피쿠로스는죽음이후의나의부재가나를죽음의공포에서벗어나게해준다고주장한다. 왜냐하면내가죽었을때내가더이상존재하지않는다면죽음을경험할수도없고죽음에대하여공포를느낄수도없기때문이다. 우리는결코죽음을경험할수없다 : 내가있는곳에죽음은없고, 죽음이있는곳에내가없다 죽음은삶의종국이며고통이나공포와같은모든감각을종식시킨다는것에서위안을얻을수있다. 에피쿠로스, 쾌락, 오유석역, 서울 : 문학과지성사, 1998.
인간의고통과치유의하느님 215 이내린벌이라는것을부정한다. 욥의친구들은욥이당하는고통 / 고난을벌로간주하기위해과거의죄, 알지못하는죄, 조상이지은죄, 백성의죄등을들먹이지만욥은그것에동의하지않는다. 4) 욥은하느님에대한믿음과신앙을포기하지않지만, 그분이윤리적하느님이라는것은부정한다. 결론적으로, 하느님역시욥이옳았다고말한다. 하느님은욥의친구들이하느님에대해올바르게말하지않았으며, 욥이하느님에대해올바르게말했음을인정한다. 5) 욥의친구들은전형적인보상-처벌의윤리적신개념에머물러있거나, 신학적답변에머물러있었다. 하지만욥은자신의하느님이윤리적하느님을넘어선분이라는것을간파하였다. 욥은자신의고통이인과응보론에입각한신의벌이아니라는것을확신하였으며, 그의신앙은윤리적신관을넘어서있었다. 욥은무고하지만고통을당했으며, 자신의고통을정당화하거나윤리적개념을개입시키지않았다. 그고난의상황에서욥은진정하느님이누구인지어떤분인지증언해야하고그리하여새롭고성숙한신앙을찾아야했다. 욥은윤리적신개념으로는자신의결백과고통을모순없이조화시킬수없었기 4) 욥기 ; P. 리꾀르, 악의상징, 양명수역, 서울 : 문학과지성사, 1994, 292. 고난당하고있지만자신은결백하다는것이욥의주장이다. 그것은흠없는자의고난 ( 고난받는종 ) 을생각함으로써윤리적세계관의핵심을해체한다. 5) 욥기, 42장 7-8절참고. 욥기의결론을보면, 하느님과사탄의내기는 욥이어떻게말하는가 에있다는것을명시하고있다. 욥의문제는단지신앙을지키는것에한정된것이아니다. 욥은신앙을지킬뿐아니라자신이믿는분이어떤하느님인지에대해서도올바르게말해야하는과제를갖고있다. 이는마지막에가서하느님이욥의친구인엘리파즈를향하여다음과같이판결을내리고있다는데서알수있다. 나는너와너의두친구들을거슬러분노에불타고있다. 너희는나의종욥이했던것처럼나에관해올바르게말하지않았기때문이다. ( 욥기, 42,7) 이제욥기의핵심문제는 < 죄없이고통을당하고있는무고한사람이하느님에대해어떻게말할것인가?> 라는것임이밝혀지고, 욥이수행해야할과제도바로이문제라는것을알수있다.
216 철학논집 ( 제 35 집 ) 때문에, 새로운하느님의상이필요했다. 6) 3. 신의죽음 : 어떤신이죽었는가? 욥기에나타난인간과신의관계에대한정황은, 보상과처벌의윤리적신관이나도덕적세계관이인간의고통을설명하는데매우취약하다는것을보여준다. 첫째, 윤리적신개념은신앙의유아단계에머물러있다. 신의처벌이두려워선행을하고신의명령을따른다면성숙한신앙이라고할수없다. 그것은인간이착하게사는것은신의처벌이두렵기때문이라고말하는것과같다. 여기서신과인간의관계는두려움을바탕으로하는명령과복종의관계로전락한다. 니체의표현을빌리면, 이는노예의종교이며노예의지의산물에불과하다. 둘째, 인간의행위에합당한방식으로보상하고벌을내리고정의를실현하는윤리적신개념에의하면, 결국윤리가신의자리를대체하게된다. 신의역할은도덕법칙에종속될것이다. 그렇다면왜굳이신이필요한가! 셋째, 초보적인수준의도덕적세계관에서비롯된인과응보론은세상의불행과인간의고통을모두설명하지못한다. 특히무고한자의고난과고통에대해서아무런해명도할수없다. 그런이유로현대인에게처벌-보상의신은호소력을상실하였다. 신의죽음이선언된다. 현대인에게 ( 보상-처벌의 ) 윤리적신은죽었거나불필요해졌다. 신은부정되었으며 ( 욥 ), 윤리에의해대체되었으며 ( 윤리신학 ), 신의죽음이선언되었다 ( 니체 ). 신은죽었다. 그러나어떤신이죽었는가? 리꾀르는 ( 니체에의해선언된 ) 신의죽음에대해, 어떤신이죽었는가? 를묻는다. 욥이부정한것은 6) 여기에보상 - 처벌의윤리적신은존재하지않으며무고한자의고난이라는인 간의비극이있다. 또한무죄한자의고통과연결된인간의조건에스스로제 약받고고통받는하느님이라는신관이중심에떠오른다.
인간의고통과치유의하느님 217 보상-처벌의윤리적신이다. 욥이고통과고난중에도자신의결백과무죄를주장한것은인과응보의윤리적신을부정하는것이다. 욥은 ( 정의에따라심판하고보상과벌을내리는 ) 윤리적신을거부했으나, 하느님에대한믿음과신앙을포기한것은아니었다. 하느님을믿는다! 그러나그하느님은윤리적인신이아니다! 욥은신과논쟁을벌이며저항하는순간에도그의항변과탄원은신을향한것이었다. 다만그는윤리적신앙을넘어서는새로운신앙의길을찾아야했다. 그리하여윤리적신이아닌새로운하느님에대한믿음의길을찾아야했다. 그것이죄없는자신의고난에대한이해이고구원이될것이기때문이다. 리꾀르는욥이바라본새로운하느님의상을 비극적신 으로표현하였다. 리꾀르에의하면, 욥기는윤리적신관에서비극적신관으로바뀌는전환을뚜렷하게보여주는텍스트이다. 7) 죄없이도아무런과오없이도인간은고통과고난을받을수있다. 하느님역시인간의고통과무관하지않으며인간의고통에동참하여스스로제약을가한다. 무고한자의고통에는하느님의고통이대응한다. 욥기텍스트는윤리적신개념의틀로욥의고통을끼워맞추려는욥의친구들이올바르게말하지않았다고지적한다. 반면에자신의고난에대해결백을주장하고고통이신의벌이라는것에저항한욥이올바르게말한것이라고인정한다. 욥의친구들은욥이고통을당할때신학적언어만을구사했던것이다. 누군가고통을당하고있을때, 윤리적답변 ( 인과응보론 ) 이나지성적인신학적답변 ( 신정론 ) 을늘어놓는것은그를위해만족스럽거나도움이되지않는다. 욥의친구들은종교이고욥은믿음이라고할수있다... 믿음은우상파괴를일으킨다. 욥은고통의의미에대해서아무런설명을얻지못했지만그는믿음으로도덕적세계관을 ( 그리고윤리적신관 ) 을빠져나왔다. 그에게는위대한전체만보일뿐이다. 유한한관점은그위대한전체에서곧바로 7) P. 리꾀르, 악의상징, 294.
218 철학논집 ( 제 35 집 ) 의미를얻는다. 그리하여새로운길이열렸다... 나는 ( 부분적인 ) 내관점을포기하고전체를 < 있는그대로 > 사랑한다. 8) 도덕적세계관은전체로서의삶을이해하고바라보는상의문제로전환된다. 즉삶안에서겪는자신의고통의의미는도덕적기준이아니라전체로서의삶안에서이해되고의미를얻어야한다. 그때비로소자신의삶에대한자기이해를통해고통을치유할수있다. 의로운자의고난과고통의문제는정의의하느님이나윤리적인신개념의한계를보여주며, 새로운하느님으로의전환을요청한다. 무죄한자의고통에대해신정론이나신학적설명을나열하는것은헛도는말을내뱉는것에불과하다. 하느님을향해일말의의심도없이자기고통의무고함과자신의무죄를주장하는욥의항변은이모든이론을무력화시키기에충분하다. 욥은보상-처벌의신을부정하는데그러한신앙은어쩌면너무나도쉬운것이며, 윤리적인신앙은사실상윤리에의해대체되거나제거될수있는뿌리약한신앙이다. 반면에욥은자신에게이해할수없는고난을주는신에대하여저항하면서도신앙을버리지않고끝까지하느님에게이해를구하며항변하였다. 결국하느님은 ( 욥의부르짖음을외면하지않고 ) 욥의면전에나타나대응해주신다. 그리고친구들이아니라 네가옳았다 고말씀하신다. 4. 고난받는사랑의하느님 자신에게왜이런고통을주느냐고항변하는욥의탄원을듣고하느님 8) P. 리꾀르, 해석의갈등, 양명수역, 서울 : 아카넷, 2001, 383. 여기서리꾀르 가말하는 위대한전체 혹은 전체로서의삶 은비트겐슈타인의상보기, 전 체로서의세계를바라보는방식과유사하다.
인간의고통과치유의하느님 219 이나타난다. 폭풍우속에서욥이만난하느님은어떤분인가? 하느님은욥의질문과항변에직접답하는대신창조의역사를말씀으로보여주신다. 창조의사업이사람만이아니라들판의초목과들짐승에이르기까지먹을것을염려하고보살피는사랑의마음으로이루어졌으며그사랑으로유지되고있음을보여주신다. 즉야훼는욥에게 사랑의창조주 로자신을드러낸다. 하느님은욥의물음에답변하는것이아니라 ( 그질문은참된물음이아닐지도모른다 ), 사랑의창조주라는것을보여줌으로써욥을이해시키고욥은신에대한항변을거둬들인다. 9) 욥은고난의시초부터시종일관자신의무죄를아내와친구들과하느님께주장하였다. 그리고하느님께무고한자신의고통과불행에대하여설명해줄것을요구하였다. 하지만욥은 ( 하느님을만났을때에도 ) 자신의고통의이유와의미에대해서하느님으로부터아무런설명도듣지못한다. 하느님은그러한욥의물음과항변에답변하는데관심이없는듯하다. 욥이왜고통을당하는지대답이주어지는대신에, 오히려하느님은욥을향해벼락같은질문들을던진다. 욥의항변에답변하기보다는욥을향한연이은질문을통해창조주로서의자신의모습을드러내는데초점을맞추고있다. 그리고욥은하느님의물음과말씀을경청하면서점차 ( 자신만의물음에서빠져나와 ) 진정한하느님의상을묵상하기시작한다. 하느님의물음들은답변을듣기위한것이라기보다욥을일깨우기위한것이다. 그물음들의핵심은하느님의창조사업에서 ( 우리자신이존재하기위해서 ) 지상의티끌에서인간에이르기까지먹이고입히고염려하는하느님의사랑이얼마나큰것인지보여준다. 그는사랑의창조주로서의하느님을묵상하는순간침묵속에서뉘우친다. 하느님에대한자신의항변이의미도모르고한소리라는것을깨닫는다. ( 욥은하느님의말씀을들으면서그는자신이누구인지자기존재의가치에대해깨닫기시작한다. 자신이고통받는동안에하느님도연민으로함께고통받으며지켜보셨다는것과자신의 9) 욥과하느님의대면과대화에대해서는 < 욥기 38 장 -42 장 > 을참고.
220 철학논집 ( 제 35 집 ) 고통에하느님도사랑과연민으로동참하고있었다는것을깨닫는순간 왜내게고난을주느냐 는욥의항변은해소되어버린다. 욥은하느님의사랑을확인했으므로, 그리하여자신이 옳았다 는것을알았으므로답변을들을필요가없어진것이다.) 그럼에도결국하느님은욥이야말로하느님에대해 올바르게 말했음을인정한다. 올바르게말하지못한것은욥의친구들임이밝혀진다. 10) 즉하느님은보상-처벌의윤리적신이아니며, 욥의고통은하느님의벌이아니라는것이다. 그는자신의주장대로결백했으며죄가없음에도고난과고통을당한것이다. 그러면욥의고난의의미는무엇일까? 욥의고난의의미를묻는것은무의미한일인가? 욥기는그물음에직접답하고있지않으나, 우리로하여금적어도다음의물음을묻게만든다. 욥의고난에 ( 혹은무고한인간의고통에 ) 하느님은어떻게관계하는가? 윤리적세계관에서는인간의고통은인간의잘못에대한벌로간주되지만, 욥기에서는오리려악의혐의를신에게두고있다. 11) 무고한욥의고난을허락한혐의는인간이아니라신에게있음을보여주고있다. 사탄은욥을두고하느님과내기를걸었으며, 신또한사탄의내기에응했기때문이다. 12) 어떤의미에서욥의고통에신이개입했기때문이다. 그런점에서욥은하느님과사탄의내기에걸려있는인간, 즉시험에들어있는비극적인간이다. 욥의고통은그자신의잘못에서나온것이아니라하느님의시험에든것이다. 그리하여욥의고통은윤리적신관이나도덕적세계관으로는더이상설명할수없는사건이된다. 그러나하느님이인간을시험하는순간하느님에게도제약이가해진다. 욥의신앙을시험하는사탄과의내기에서, 하느님역시욥의고통과분리될수없으며욥이어떻게말하는지무지의상태에서지켜보아야한다는 10) 욥기, 42장 7절. ~ 너희는나의종욥이한것처럼올바르지못하게말하였기때문이다. 11) 리꾀르도이해석을지지하고있다. 해석의갈등, 336 참고. 12) 욥기, 1장 6-12절 ; 2장 5-6절.
인간의고통과치유의하느님 221 점에서스스로인식적한계를수용한다. 즉그내기로인해서하느님역시욥의고통상황속으로자신을밀어넣으며스스로제약받게된다. 고통은전적으로인간의잘못이아니며신역시인간의고통과연결되어있다. 동시에인간의고통에연루된하느님은인간의조건에스스로얽매이고제약받게된다. 하느님은욥이고난을받는상황에서도올바른신앙을유지하며올바르게말하는지지켜봐야한다. 그이전에는신이라할지라도알수없는것이다. 이처럼욥을시험하는하느님이인식적제약을받는다면, 인간을사랑하기때문에겪는예수의고난은인간의육체적실존적제약을받아들여야한다. 정의를심판하는자는타인으로부터상처를입지않는다. 그러나타인을사랑하는자는그로부터상처를받을수있다. 타인의조건에스스로매이거나제약받기를자처한다. 욥의하느님은인간의고통에연루된제약받는하느님이기도하다. 그런점에서욥의하느님은인간의사랑을갈구하기에사탄의내기에붙들린하느님, 인간의고통과상처에대해 ( 가슴이미어지는 ) 단장의슬픔을느끼는하느님, 그리하여몸소인간이되어인간을위해고난받는십자가에달린하느님을연상하게해준다. 또한욥의고난은예수의고난을예고한다. 그러나그고난은인과응보의틀을뛰어넘는새로운의미를획득한다. 그것을리꾀르는다음과같이잘요약하고있다. < 의인의고난 >, < 고난받는종 > 은인과응보의도식을의문에부치고, 새로운의미를얻는다. 그것은 < 은총으로서의고난 > 이다. 여기서고난은질적으로새로운의미를일으키며고난과허물의관계를완전히뒤집어놓는다. 새로운고난은인과응보밖에있는 < 의문의고난 > 이다. 욥의사건과같은의문의고난은벌을자비로바꾸는중재역할을하며, 그때허물은전혀다른차원이된다. 심판의대상인허물이아니라자비와사랑의대상인허물이된다. 13) 13) P. 리꾀르, 악의상징, 303~304.
222 철학논집 ( 제 35 집 ) 욥의고난, 무고한자의고난은뒤에올그리스도의고난을예고한다. 그고난은인간을구원하는사랑의고난인동시에은총의고난이된다. 그렇다면욥의사건은단지인간의고통만이문제되지않는다. 하느님의시험에든욥의수난사건은이제인간 ( 욥 ) 에게만이아니라하느님에게도중대한과제를부과한다. 욥에게는하느님의시험을성공적으로통과해야하는과제가있다. 그것은단지욥이하느님을믿는다는것으로충족되는것이아니라그가믿는하느님이어떤하느님인지올바르게말해야하는어려운과제를동반한다. 즉그는그의신앙의올바름과깊이를증명해야한다. 이것은오늘날우리에게주어진과제이기도하다. ( 욥의친구들도윤리적신을믿었다. 그신앙은의심의여지가없었다. 그러나그들은하느님에대해올바르게말하지못했다 ). 14) 욥이제시하는인간의과제는단지하느님에대한믿음 / 신앙에있는것이아니라, 하느님에대해올바르게말하는것, 즉올바른신앙에있다. 올바른신앙을찾아야, 그리고하느님 ( 의고통 ) 에대해올바르게말할수있어야, 그리스도인으로서무고하게고통받는사람들을진정위로하거나치유할수있다. 하느님역시인간의고통에연루되어있으며이제더이상수수방관할수없다. 사랑하는이는사랑받는이와무관할수없듯이사랑의하느님은인간의고통에무관심할수없다. 죄없는자의고난, 의인의고난이단지고난으로끝나서는안되었다. 고난의새로운의미와질적비약이필요하다. 사랑의하느님이인간이되어인간의고난속으로들어오셨다. 고난이은총으로바뀐다. 간디가이미간파했듯이, 고난받는사랑 이야말로성육화교리의핵심이다. 15) 인간의모습으로인간안으로들어오신하느님의 14) 욥기, 42장 7-8절. 15) 제임스 W. 더글라스, 간디에서그리스도까지 : 고통받는사랑의하느님, 로버트엘스버그엮음, 간디그리스도교를말하다, 조세종역, 서울 : 생활성서, 2005, 249. 간디에게예수의고난은사랑의법칙이었으며, 고난과사랑은단일한생명의불꽃으로보였다. * 또한이사야서 (42장이후 ) 의 야훼의종, 고난
인간의고통과치유의하느님 223 육화사건은고난받는사랑의상징이다. 욥의하느님에서시사되었던인간의인식적, 육체적, 실존적제약을스스로짊어지고인간의고통에마음아파하는하느님의 고난받는사랑 이야말로그리스도교의실체를드러내준다. 16) 5. 상처입은치유의하느님 욥이새로운신앙의길에서만난하느님의상은강하고두려운하느님에서자비로운사랑의창조주하느님으로, 윤리적하느님에서고통받는비극의하느님으로, 보상과처벌의심판관으로부터위로와치유의하느님으로전환된다. 인간의무죄한고통앞에서하느님은스스로순종하고제약받는 고난받는사랑 을통하여인간의고통을위로하는치유자가된다. 상처입은치유의하느님모습은욥의하느님만이아니라니느웨의사람들을동정하며마음아파하는요나의하느님, 인간의고통에대해단장의슬픔을느끼는하느님등, 성서의곳곳에서드러나있다. 죄와단절시킨고난의새로운의미에의해, 또한사랑때문에고난을당하는상처입은하느님에의해고통에대한메시지는분명해졌다. 그것은고난받는사랑의실천으로그고통에동참해야한다는것이다. 필립얀시는 고통의영성 에서, 고통의메시지는고통당하는사람들과사랑으로연합하라 는우리를향한부름인동시에그것에순종하는것이라고말한다. 십자가는하느님의고통을보여주며, 하느님은인간으로하여금그분의수치와고통을목격하게하심으로써인간과연합하셨다. 17) 받는주님의종 은이를잘드러내고있다. 여기서예수는자신의메시아적사명을엄청난고난과계속연결해나간다. 16) 제임스 W. 더글라스, 간디에서그리스도까지 : 고통받는사랑의하느님, 225. 그런의미에서예수그리스도에대한참된신앙고백은 고난받는종예수 에대한신앙고백이다.
224 철학논집 ( 제 35 집 ) 인간의고통이하느님의고통과연결되어있다면, 인간의고통은과연하느님께어떤영향을미치는가? 하느님은성육신을통하여당신자신을비우시고우리와같이됨으로써피조물들에게고통을담은사랑을보여주셨다 그분은결핍때문에고통당하는것이아니라흘러넘치는사랑때문에고통을당하시는것이다." 18) 성육신은하느님스스로인간의육체적, 실존적제약을가지고우리가운데사셨던것이며, 인간의고통을직접당하고있는그대로느끼셨다. 인간의고통이하느님의고통이되었다 그리하여성육신은인간의고통에동참하는하느님을드러낸다. 누군가를사랑하는사람은그를위해모험을감수해야한다는점에서안전하지않다. 신이라할지라도마찬가지이다. 누구도사랑하는이의고통을무심하게바라볼수는없으며그고통에동참할수밖에없다. 욥기는욥의고통과연루된그런하느님을보여주고있다. 욥의사랑을확인하기위해하느님도내기에참여해야한다. 어떤의미에서욥만이아니라, 욥의시련속에서하느님도시험과내기에든것이라고할수있다. 욥의고통은죄와분리된고통이며사랑으로연루된고통이기도하다. 인간의고통에대한메시지가고통당하는사람들과사랑으로연합하라는부름이라면, 우리는이웃의고통에대하여어떻게말하고어떻게동참해야하는가? 하느님의상처와고통을기억하는고통의영성치유는무엇을말하는것인가? 즉상처입은 / 고통받는치유자 / 위로자로서의하느님을묵상할때 19), 인간의고통에대한공감, 위로, 치유의길은무엇인가? 우리는다음세가지물음안에서이정표를발견할수있을것이다. ( 무고하게 ) 고통당하는사람들에게 ( 하느님에대해 ) 어떻게말해야하는가? 어떻게그들을위로할수있는가? 무죄한자의고난 / 고통뒤에는어떤하느님이함께하는가? 17) P. 얀시, 고통의영성, 최규택역, 서울 : 그루터기하우스, 2008, 147, 158. 18) P. 얀시, 고통의영성, 153. 19) 이사야서, 51 장 12 절. 내가바로너희의위로자이다.
인간의고통과치유의하느님 225 첫째물음은, 고통받는이에게어떻게말해야하며, 무슨말을해야하는가? 이다. 특히무고한자의고난에대해어떻게말하고어떻게동참해야하는가? 욥기를상기해보면, 고통은죄의대가이며벌이라고말하는것 ( 인과응보의개념 ) 은올바른말이아니다. 남의고통에대해처벌의윤리적언어, 단죄와심판의언어로말하는것은고통받는이의상처를깊게할퀴는비수가될것이다. 욥의친구들의말이욥에게비수가되었듯이, 그것은고통에대해올바른논리가아니다. 실제로그들은친구라기보다는원수처럼행동했다. 오늘날의우리또한고통받는사람들에게마찬가지로행동하고있는지모른다. 또한악은보다큰선을위한수단이나필수조건이라는신정론의논리역시올바르게말한것이아니다. 악은결코정당화될수없기때문이다. 악이나고통은인간의자유의지의결과라는논리도불충분하다. 자기탓이아닌고통으로괴로워하는양심에게고통은결코정당화될수없기때문이다. 그런종류의말은참된말이아니다. 인간의극심한고통앞에서우리는할말을잃는다. 우리에게는할말이없다. 어떤지성적논리도거기에올바르게대응하지못하기때문이다. 우리는그사실을겸허하게받아들여야한다. 우리는아무런말도못찾아입을열수없거나, 아니면욥처럼하느님을향해탄원할수있을뿐이다. 두번째물음은, 고통받는이에대한진정한위로와진정한공감은무엇인가? 이다. 나우웬은다음과같이말한다. 언제우리는진정한위안을받는가? 누군가우리에게어떻게행동해야하는지가르쳐줄때인가? 무엇을해야하는지조언을받을때인가? 혹은확신과희망의말을들을때인가? 때로는그럴수도있다. 하지만정말로중요한것은, 고통과고난의순간에함께있어주는것이다. 어떤구체적인행동이나충고의말보다더중요한것은우리에게관심을가지는누군가가우리와함께있어주는것이다. 20) 오늘날유용성과효율성의논리가난무하는시대에우리는아무도움도 20) H. 나우웬, 긍휼, 김성녀역, 서울 : Ivp, 2002, 29~30.
226 철학논집 ( 제 35 집 ) 되지않을때단지함께있어주는것을어려워한다. 그것은무익하고아무소용이없기때문이다. 하지만진정한위로와공감은무언가유익한것을해주는것이아니라, 무익한가운데함께있어주는것이다. 고통을함께나누며무익하지만겸손하게고통의시간을함께겪는것이다. 무익한시간을보내는것은살아야할시간을내주는것이니일시적인죽음에들어가는행위인것이다. 또한이무상성은자기존재의일부를바치는순수한기도이기도하다. 그때비로소우리는고통을나눌수있다. 합리성과유용성의기준을들이대지말고무익하지만함께있어주는것, 너의존재가그자체로가치있다고믿어주는것에서부터공감이싹트고위로와치유가시작된다. 셋째물음은, 위로와치유의하느님은어떤하느님인가? 이다. 그분은인간의고통에마음아파하는하느님이다. 고통을함께겪으며위로하는치유자이다. 예수는치유하기이전에 단장의아픔 을먼저느낀다. 그아픔이예수의마음을움직인다. 우리의고통에마음이움직이는공감과긍휼의신만이인간을진정으로치유할수있다. 진정한공감으로이루어진위로없이고통의치유는이루어지지않는다. 그러면고난당하는무죄한자에게진정위로가되는신은어떤신일까? 정의의신, 윤리적신은도움이되지않는다. 이미정의가배반당한불의한고통 ( 무고한자의고통 ) 의상황이기때문이다. 또한후세의보상약속이그에게위안을줄수도없다. 우리의고통은언제라도교환가치로환원될수있는그런것이아니기때문이다. 영성이란하느님과의관계이며, 하느님의임재가운데살아가는삶의방식 이다. 그것은하느님을생각나게하는사람으로사는것, 즉그리스도의긍휼의마음으로인간의고통에참여하는삶을사는것이다. 고통의영성치유는인간의고통이하느님의고통과연결되어있다는믿음, 고통받는사랑의하느님이거기에대응한다는믿음에서출발한다. 그리고고통받는이와함께하는사랑의연합을통해치유의힘을얻는다.
인간의고통과치유의하느님 227 VI. 그리스도인을위한철학상담의가능성 : 철학의위안 인간의고통, 그리고거기에연루된하느님의고통을다룬욥의이야기는현대인에게어떤의미를갖는가? 욥이비참한고통에처해있을때하느님에대해어떻게말할것인가하는문제못지않게, 오늘날우리에게또한 고통에처한사람에게어떻게말할것인가? 의문제가중요하다. 욥의물음은이제우리의물음이되었다. 이물음은타인의고통만이아니라자신의고통에대해서도마찬가지로적용된다. 현대인은유용성과소유의논리에따라살아가면서자신의존재가치를잊곤한다. 그만큼고통에취약하고악의가상적힘에휘둘리기쉽다. 철학상담사를방문한내담자를만날때, 우리는욥의사건으로부터다음과같은물음을묻게된다. 무고하게고통받는사람을위해철학은어떻게위로와위안을줄수있는가? 혹은고통받는그리스도인을위한철학상담은어떻게가능한가? 과거 6세기경에보에티우스는 철학의위안 에서바로이물음을묻고있다. 비방적인고발로인해사형이언도된그는어떻게철학이중상모략으로고발당한청렴하고무고한사람을위로할수있는가를스스로에게묻고있다. 그물음은욥의물음과겹치는물음이다. 또한그물음은오늘날철학상담소를찾아와비슷한한탄을하고있는방문자 / 내담자의문제와도연관된다. 정도의차이는있으나그와비슷한일은우리에게도일어날수있다. 즉욥의사건은한번으로그치는것이아니라오늘날에도반복되며우리에게같은종류의물음을제기하고있다. 21) 21) 익명의한심사위원은욥의상황을보에티우스의상황과일치시키고, 보에티우스가철학으로부터얻은위안을철학상담으로연결시키는것에논리적비약이있다고지적하였다. 필자의논의에의하면, 욥의상황과보에티우스의상황은무고하고의로운자의고통이라는점에서동일하며현대에도무고하게고통받는사람들이존재한다는점에서욥의고통은우리의고통일수도있다고본다. 그상황에서신에게탄원하며물음을제기하는그리스도인은욥과다르지않다. 욥기텍스트에서욥은하느님을만나는순간침묵에잠긴
228 철학논집 ( 제 35 집 ) 무고하게고통받는이들에게어떻게위로할수있는가? 혹은그들은어떻게위안을얻을수있을것인가? 비방적인잡담과중상모략, 관계로부터배제하는것등은견디기어려운고통과분노를일으키곤한다. 보에티우스에게가장끔찍스러운것은그들의고발이마치정당성을갖는듯이보여지고있다는사실이었다. 그를가장슬프고고통스럽게했던것은선한신이존재함에도불구하고악이징벌을당하지도않고묵과될수있다는사실이었다. 사악함이지배하고번성할때덕은보상받지못할망정사악한자에게짓밟히고, 심지어악이받아야할처벌을선이대신받는다는사실이었다. 보에티우스에게그것은당황스러움이나불만을넘어선경악할만한일이었다. 22) 그의비탄은욥의비탄과유사한측면이있다. 이제비탄에잠긴타인을향해서는어떻게위안을해야하는가? 그리고자신을향해서는비방적인고발이정당화되는상황에서어떻게두려움과위협에서벗어날것인가? 욥의친구들은욥을단죄한다. 그들은악을, 욥의고통을정당화하고자하였기에그를위안하지않는다. 우리는욥의탄원에경청을기울이는것이중요하다. 또한우리는 ( 욥이그랬듯이 ) 자신에게쏟아진비방적고발에대하여악에굴복하지않는것이중요하다. 보에티우스는철학으로부터위안을얻는다. 비탄에잠긴보에티우스에게철학이건넨위로는무엇이었는가? 즉철학은어떻게그를위안하였는가? 그책에등장하는철학의여인은 악한것은결코선을이길수도없고 다. 이상황에서철학적대화로서의철학상담의과제는고통받는그리스도인을위해어떻게대화를할것인지가중심문제가된다 ( 김선희, 2009, 2010, 2012 참고 ). 보에티우스는바로그러한상황에서철학적대화의한가능성을제시한것이다. 그것의요지는 6장에서잘보여주고있다. 즉보에티우스가철학적성찰과대화를통하여자신의고통중에도악의논리에빠지거나희망을잃지않고신을향한믿음으로위안을얻었다면, 바로거기에그리스도인을위한철학상담의길이있다고본다. 22) A. 보에티우스, 철학의위안, 박병덕역, 서울 : 육문사, 2001, 제4권, 157~158.
인간의고통과치유의하느님 229 행복에도달할수도없으며, 악은결국힘을잃게된다는것 을논증한다. 23) 우리가제대로대응한다면악은힘을상실하며아무것도아닌것임을알게된다는것이다. 물론철학이논증한것은비방과모략에의한고통의존재를부정한다는것을의미하지않는다. 누군가부당하게고발당해고통받는사람에게그런모욕이실제로없다거나아무것도아니라고말한다면기막힌노릇이될것이다. 오히려그논증은보에티우스가고통속에서이끌어내려는결론 ( 즉악이정당성을갖는듯이보이는것 ) 을문제삼는것이다. 린셋은이를다음과같이기술한다. 그런모욕은하나의사실이다. 그러나그것은존재해서는안된다. 악은결코타당성을인정받을수없다. 악의질서는결코정당화될수없다. 악의질서는어떤존재력에도근거하지않는다. 그렇다면어떻게그것이우리를해치고상처입힐수있단말인가? 그것은존재력이아니라가상력으로서우리를해칠수있다. 그것은상처를입히는가상이다. 악의질서는, 만일우리가그것을체험한다면, 그체험에서그것에대한믿음속에서사물의악한질서가그것의삶을살게된다. 24) 악은가상이지만우리가그것의질서를믿을때살아있는힘이되고지속적인상호작용을통해점차강화될수있다는것이다. 하지만악은결코승리할수없으며무력한것이라는것을깨닫게해주는것이철학이주는위안이다. 즉 철학의위안의본질은악의힘이실없음을내가통찰하는것이다. 더불어우리가그힘의지배하에있을때경험하는고통을 ( 의연하게 ) 받아들일수있는것이다. 그럼으로써고통은그의가시를잃어버린다. 나는위안을받는다. 25) 23) A. 보에티우스, 철학의위안 참고. 24) Anders Lindseth, Zur Sache der Philosophischen Praxis: Philosophieren in Gesprächen mit ratsuchenden Menschen, Freiburg: Alber, 2005, 131~147. 25) Anders Lindseth, Zur Sache der Philosophischen Praxis: Philosophieren in Gesprächen mit ratsuchenden Menschen 참조.
230 철학논집 ( 제 35 집 ) 여기서린셋은악이실체가없으며악의힘이실없음을깨닫는것의중요성을강조한다. 그와동시에악은실제적힘을갖지않을지라도잘못하면우리자신이악의가상적힘에휘둘릴수있음을경고하고있다. 인간의약점과결부되면악의힘의지배를받을수도있다. 그경우악의질서는 그것에대한우리의믿음속에서 살아있는힘으로작용한다. 그렇다면욥이나보에티우스나현대인들이비방과중상모략과악의힘의지배아래서무고한고통을당할때, 우리는악이실제력을갖지않는다는것을굳게믿으면서, 욥이했던것처럼자신과신을포기하지않으면서악의가상적인위협을이겨내는것이중요하다. 욥은악이결코정당화될수없고정당성을인정받을수도없다는것을시종일관주장하였으며, 악의정당화가능성에결코타협하지않았다. 자신의고통중에도하느님이결국일으켜주실것이라는확신이그를지켰으며, 자신이고통받는동안에하느님이사랑으로함께동참하셨다는깨달음이욥의고통을위로하고치유하였다. 마찬가지로보에티우스는철학의인도에의해악이어떤근거도갖지않으며어떤존재의힘도갖지못한다는것을깨달음으로써철학의위안을얻게된다. 철학의위안은우리에게존재의힘을강화해준다. 린셋에의하면, 악이가상력이라면위안은존재력이다. 위안은우리가공격받을때우리자신을다시금바로세우는존재의힘이며, 스스로드러나는삶의확실성이며, 나의존재가치를신뢰하게해주는힘이다. 즉우리가고통으로무너지거나제정신이아닐때, 위안은우리를제정신으로돌아오게하며우리를바로세워주는존재의힘이된다. 반면에악은가상력이며실체가아닐지모르나그것의가상적힘은우리를위협할만큼강력한힘을발휘하기도한다. 즉악은존재하지않으나우리는악의가상적힘을잘다루어야한다. 그렇지않으면인간의약점과불확실성등과관계하여악의가상력은위협과공포를일으킬수있다. 그때자기분열이일어나거나자제력을상실하고악의두려움에사로잡힐수있다. 26)
인간의고통과치유의하느님 231 그렇다면고통중에있는무고한자를위해, 철학자는위안의존재적힘이악의가상적힘을이길수있도록도와야한다. 철학의위안이존재의힘을강화할수있도록, 그리하여악의힘에의연하게대처할수있도록도와야한다. 즉철학상담의역할은죄없이고통받는중에도악의가상력에대항하고극복할수있는존재의힘을기르는데있다. 자신의삶에서악의질서가살아가도록방치하지않는것, 고통중에도좌절하지않고악에굴복하지않는것이중요하다. 27) 그러나더욱중요한것은악을정당화하거나이해하고타협하려고하기보다, 악을극복하려는노력안에서 ( 고통을방관하지않는 ) 사랑의하느님을발견하고자신의존재가치를자각하는것이다. 동시에악이극복될수있다는확신을가지고악에대항하여싸우는것이다. 28) 이것이악에대해우리가가져야하는태도이다. 악의힘이실없음을통찰하고고통중에도악의힘에의연히맞설수있을때, 우리는고난받는신의사랑과연합을이루기를기대할수있다. 26) Anders Lindseth, Zur Sache der Philosophischen Praxis: Philosophieren in Gesprächen mit ratsuchenden Menschen 참조. 27) 욥처럼올바른신앙을갖지못할때, 비록자신의잘못이아닐지라도, 우리는악에흔들리거나휘둘릴수있고그럼으로써악이우리를지배하도록방치할수도있다. 28) F. 바리용, 그리스도인으로사는기쁨, 심민화역, 서울 : 생활성서, 2000, 160~161. 악은이해의대상이아니라싸워야하는대상이다. 즉악에대항하여분노할수있어야하고, 악은극복된다는확신을가지며 ( 기쁨을향한소명이악보다강하다 ), 소유 ( 이기심 ) 에서존재 ( 사랑 ) 로통과해야한다 (162~168).
232 철학논집 ( 제 35 집 ) 참고문헌 구약성서, 욥기 김선희, 자아정체성에기초한철학상담방법론, 철학연구, 제85 집, 철학연구회, 2009, 227-248., 톨스토이의참회록에나타난의미의위기에대한철학상담, 철학실천과상담, 제1집,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 2010, 197~220., 철학상담 / 철학실천의정신과방법, 철학실천과상담, 제3집, 한국철학상담치료학회, 2012, 113-142. Boethius, A., 철학의위안, 박병덕역, 서울 : 육문사, 2001. Douglas, J. W., 간디에서그리스도까지 : 고통받는사랑의하느님, 로버트엘스버그엮음, 간디그리스도교를말하다, 조세종역, 서울 : 생활성서, 2005. Epicurus, 쾌락, 오유석역, 서울 : 문학과지성사, 1998. Lindseth, A., Zur Sache der Philosophischen Praxis: Philosophieren in Gesprächen mit ratsuchenden Menschen, Freiburg: Alber, 2005. Nouwen, H., 긍휼, 김성녀역, 서울 : Ivp, 2002. Ricoeur, P., 악의상징, 양명수역, 서울 : 문학과지성사, 1994., 해석의갈등, 양명수역, 서울 : 아카넷, 2001. Russell, B., 서양철학사, 서상복역, 서울 : 을유문화사, 2009. Varillon, F., 그리스도인으로사는기쁨, 심민화역, 서울 : 생활성서, 2000. Yancey, P., 고통의영성, 최규택역, 서울 : 그루터기하우스, 2008.
인간의고통과치유의하느님 233 <Abstract> The Problem of Human Suffering and The God of healing Kim, Sun-Hie (Ewha Womans University) In this paper, I will argue that the problem of human suffering should be approached in a new way, on the base of the text of Job in the Old Testament that is dealing with the problem of the innocent's suffering. If we consider the innocent's suffering like Job's, the question about the problem of evil and human suffering should be raised otherwise. It is not the question of justifying existence of evil and suffering, but the question concerning the healing and consolation for sufferers. We should shift our concern from theoretical questions regarding the justification of human suffering and evil to practical questions regarding healing of human suffering. Furthermore, the Christian need to meditate a new phase of God, in order to heal suffering of others, especially the innocent's pain like Job's predicament. It is asked to reveal the God as a healer, not the moral God as a judge. I will trace the image of God as a healer in the Bible. Then I try to explore how to comfort innocent sufferers which visit philosophical counselor in these days. Key words: human suffering, pain, Job, the God of healing, healing, consolation, philosophical counsel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