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원리로서의 공감(共感) 에 관한 연구 - 맹자(孟子)와 퇴계(退溪)의 감정이해방식을 중심으로 - 김 성 실* 1) Ⅰ. Ⅱ. Ⅲ. Ⅳ. Ⅴ. 들어가는 말 공감(共感)의 토대로서의 성선(性善) 감정(感情)의 이해방식으로 본 공감의 원칙 얼굴없는 도시에서 공감의 도시로 나가는 말 국문초록 최근 인기를 끌었던 <응답하라 1988>은 도시공동체에서 정(情)문화가 무 엇인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드라마였다. 과거 추억 속의 이야기에 우리 가 공감을 하고 호응하는 까닭은 그 시대만의 따뜻했던 정(情)을 기억하고 있어서이다. 무분별하게 그리고 급속히 개발되었던 도시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기도 전에 금방 변해버렸고 또 지금도 변하는 중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혹은 다른 이유로 모여든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살면서 살아 있음을 느끼는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게 하는 핵심요소는 바로 사람과 사람 * 국민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교차학협동과정 강사 299
제31호(2016) 간의 공감(共感) 일 것이다. 인문학적 도시라는 말은 곧 사람사는 도시 라는 말과 다름없다. 도시는 사람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좋았다가도 싫어지는 다양한 감정변화를 인지하고 있듯이 우리의 삶의 모습은 감정의 발현이다. 감정은 마음의 알맹 이이자 우리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한 감정을 지닌 개개인이 어떻 게 보편성을 가지고 소통하는 공감 으로 나아가는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도시공동체가 작동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은 분명하다. 오늘날 일어나는 여러 가지 도시문제의 본질은 결국 단절과 무관심 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원리로서의 공감 에 대해 살펴보 고자 한다. 특히 감정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이해를 다루었던 대표적 동양 철학자인 맹자와 퇴계의 감정이해방식을 중심으로 공감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먼저 맹자의 감정이해방식과 퇴계의 감정이해방식을 통해 공감 에 대 해 고찰한 뒤 공감 의 도시를 향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 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주제어 -----------------------------------------------------------------------------------도시인문학, 공감(共感), 맹자(孟子), 퇴계(退溪), 정(情). 300
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원리로서의 공감(共感) 에 관한 연구(김성실) Ⅰ. 들어가는 말 도시라는 공간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장소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 은 곧 살아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우리가 도시 를 말할 때 사람을 빼놓고서 는 살아있는 도시를 논할 수 없다. 그래서 인문학적 도시 라고 할 때에 수많 은 연구와 정의가 있겠지만1), 바로 살아있는 도시임을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이냐에 대한 논의가 바로 인문학적 도시 담론일 것이다. 즉, 살아있음을 느끼는 도시의 핵심원리가 무엇인가를 살펴봄으로써 기존의 도시담론과 다 른 인문학적 성찰에 근원을 둔 인문학적 도시에 대한 탐구가 가능한 것이 다.2) 최근 열풍을 일으켰던 응답하라 시리즈의 드라마3)는 우리의 그런 욕구를 1) 도시인문학의 관심은 과거 개발지향적 도시개발에 대한 반발과 인간에 대한 관심의 증대, 인문학의 열풍 등 여러 복합적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구의 도시문 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서의 인문학적 고찰 등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국내에 연구되기 시작하면서 도시인문학 연구가 활성화되고 있다. <서우석, 도시인문학의 등장, 도 시인문학연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2014, 이성백, 21세기 도시연구의 새 로운 방향, 도시인문학연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2014, 허경, '도시인 문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황해문화, 새얼문화재단. 2015.> 등 도시인문 학 현상 자체에 대한 탐구와 그에 따른 연구방향 등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허경의 '도시인문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은 도시인문학의 연구가 시작 된 시기와 용어사용 등을 계보학적으로 분석한 흥미로운 논문이다. 또 삭막한 도시를 살 만한 곳으로 바꾸고 있는 7명의 도시기획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도시기획자들 (천 호균 외, 소란출판사, 2013)이나 도시를 읽는 새로운 시선 (최재정, 홍시, 2015), 서 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코난북스, 2014) 등 새로운 도시인문학 연구가 여전히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2) 도시는 거주가능한 지구 면적의 10%에 불과하다고 한다. <미셸 르 뒥, 사람들은 왜 도시에 살까?, 박빈희 옮김, 공간사, 2005>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에 사람들이 모이는 까닭은 경제적인 이유나 생활의 편의 등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과거에 비해 점차 거대해지는 도시구조 속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는 인문학적 성찰은 반드시 필요하다. 3) 방송채널 tvn 드라마시리즈로 2012년 첫 방영된 <응답하라 1997>을 시작으로 최근 (2016년1월) 종영된 <응답하라 1988>까지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그 시 대의 삶과 사랑, 우정, 가족애 등을 담은 드라마. 301
제31호(2016) 적절히 충족시켰던 데 그 성공요인이 있다. <응답하라 1988>의 경우 쌍문동 골목길을 두고 마주하는 가정단위의 공동체가 모여 사는 마을공동체였다. 그 시절과 비교해 물질적 풍요와 편의성을 만끽하고 있는 오늘날에 그때의 이 야기가 공감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공감이 오늘날 인문학적 도시 를 향한 열쇠가 아닐까? 한국문화의 대표적 특성을 말한다면 정(情)문화 를 든다. 정(情)이 있다, 정답다, 정겹다 등등의 수많은 수식어들은 단순히 언어적 수사가 아닌 우 리의 삶 문화 속에 베여져 나온 까닭에 정(情) 이라는 한 단어로 우리의 문 화를 대표하기에 손색이 없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이러한 정문화 가 단순히 우리만의 문화적 특수성으로 설명되기에는 공통적으로 지닌 보편성 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등장한 가정의 소중함, 따스함, 정(情)문화 는 비 단 한국에서만 그 특수성을 지닌 것이 아닌, 정반대에 있는 미국에서도 유럽 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가 가정을 지키는 것 으로 시작해서 나라를, 세계를 지키는 것으로 이어지는 형태로 주로 이어진 다는 점을 상기해보면4), 인간의 보편적 감정에 대한 공감은 동서를 막론하 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무언가 를 토대로 형성하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도시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 이지만, 낯선 사람들 간의 마주침과 지나감의 연속이다. 그래서 도시는 북적 거리되 화(和)하지 못하고 모여 있되 녹아들지 못한다.5) 그 근원에는 사람이 중심이 아닌 얼굴 없는 자본이, 인정 없는 경제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도 경제도 결국 사람이 중심이다. 그래서 사람을 먼저 이해하고자 하는 4) 클로테르 라파이유, 컬처코드, 김상철 역, 리더스북, 2007년, 142~168쪽 5)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루소는 에밀 (한길사, 2003)에서 도시를 인류의 가래침 이라 했고, 릴케는 말테의 수기 (민음사, 2005)에서 도시는 고향도 어머니도 없다 고 하 며 부정적 인식을 보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뒤로하고 농촌으로 자연으로 가는 까닭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302
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원리로서의 공감(共感) 에 관한 연구(김성실) 인문학은 도시에 살아 숨쉬는 생명을 불어 일으키는 요소이다.6) 살아있음은 바로 느낄 때[情] 알 수 있다. 필자는 인문학적 도시의 숨결을 불어넣을 핵심원리가 감정(感情) 에 있다 고 보고 있다. 도시라는 장소에서 낯섦과 낯섦이 마주치고 지나가는 사태 이 면에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간에 그 어떠한 공감의 토대가 전혀 형성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는 외딴 섬이 되고 만다. 따라서 본고에서 감정 에 대한 철학적 이해의 바탕 위에 공감(共感)이 어떻게 도시 공동체에 작동하는가에 대해 고찰보고자 한다. 다만 본고에서 감정 의 철학 적 이해라고 하면, 광범위하기에 동양철학적 범위 내에서 감정에 가장 충실 하다고 판단되는 맹자 와 퇴계 의 이해방식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러 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원리로서의 공감이 어떻게 작 용하는지를 그리고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Ⅱ. 공감(共感)의 토대로서의 성선(性善) 감정은 역사 이래로 항상 못미더울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모든 것에 이성 적이길 강요한 계몽의 역사 이후에 이성적이란 말은 합리적이란 말과 동의 로 여겨져 왔다.7) 그래서 우리는 이성적이지 못한 감정을 두고 너무 감정적 으로 대했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했다 등으로 감정은 이성에 의해 바로 6)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클럽 마드리드 공동 주최로 열린 국제 콘퍼런스(2007)에서 영국 런던대의 피터 홀 교수는 도시란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다 고 보았고, 하버드의 에드워드 윌슨 교수 역시 도시는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 로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에 살아있는 숨결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본질과 문화에 관해 다루는 인문학이 아닐까 싶다. 7) 아드르노는 사회 속에서의 자유가 계몽적 사유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데 대해서 어떤 의심을 갖고 있지 않는데 대해 경계하며, 계몽의 퇴행적 계기에 대한 자각을 하지 못하면 스스로가 돌이킬 수 없게 되는 운명에 직면할 것이라고 보았다. <Th.아도르노, M.호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1년, 15쪽> 303
제31호(2016) 잡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와 사회분위기는 감정 이 더 이상 이성에 비해 열등하거나 못미더울 것이 아니라 충분히 제 역할 을 하며, 오히려 감정 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문화의 대표적 특징으로 대변되는 정(情) 은 말 그대로 우리의 감정이 다. 있는 그대로 느끼는 바대로 표현되는 작용이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떠 서 눈을 감을 때까지 우리의 감정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아침 출근길에 어깨 를 부딪혀 짜증이 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퇴근할 때에는 한결 여유있 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는 경우에서처럼 우리의 감정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처럼 변화하는 감정은 다시 이해하면 감정이 생생히 살아있음을 말하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즉 우리의 삶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바로미터 (barometer)인 셈이다. 공감은 감정과 감정이 소통하는 것이다. 감정과 감정이 소통하려면 보편타 당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감정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의 것이지만, 각자가 느끼는 고유한 감정을 지니고 있기에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개별적 인 것이다. 이러한 감정과 감정이 소통하는 공감 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보편타당한 그 토대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맹자는 감정에 대한 토대로서 성선(性善) 을 제시하였다. 인간의 본성의 선함이 드러나는 것이 감정 이라 는 것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모두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선왕에게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서 곧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 는 정치가 있었다.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를 하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손바닥 위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 이다. 사람들에게 모두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근거 가 되는 것은 지금 사람들이 갑자기 어린 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 고는 모두 깜짝 놀라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이니, 그렇게 함으로 써 어린 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함으로써 향당 과 친구들에게 명예롭게 되기를 구하려는 것도 아니며, 그 (비난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해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살펴본다면, 측은하게 304
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원리로서의 공감(共感) 에 관한 연구(김성실)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시비(是非)를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단서이고, 부 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단서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단서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知)의 단서이다. 사람이 이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는 할 수 없다고 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 임금은 할 수 없다고 하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이다. 무릇 사단이 나에 게 있는 것을 모두 넓혀서 채울 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며 샘물이 처음 솟아나는 것과 같을 것이니, 진실로 이것을 채울 수 있다면 사해를 보호할 수 있거니와 진실로 이것을 채우지 못하면 부모를 섬길 수도 없을 것이다.8) 맹자에게 있어 감정은 마음속에서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이다. 즉, 어 떤 생각이나 판단을 하기 이전에 느끼는 그대로가 표현되는 것이 감정인 것 이다. 또 맹자에게 있어 감정은 선한 본성의 단서이다. 그래서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감정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인 인의예지(仁義禮智)을 알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측은, 수오, 사양, 시비는 정이다. 인의예지는 성이다. 심은 성과 정을 거느 리는 것이다. 끝은 실마리이다. 정의 드러남으로 인하여 성의 본연을 볼 수 있 는 것은 물건이 가운데 있어서 그 실마리가 밖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9) 이때의 본성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졌을 때 측은해하는 감정을 불러일으 8) 孟子 公孫丑上 6 : 孟子曰 人皆有不忍人之心. 先王有不忍人之心, 斯有不忍人之政 矣.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治天下可運之掌上.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 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怵惕惻隱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 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 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 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不 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 9) 孟子集註 公孫丑上 6 : 惻隱 羞惡 辭讓 是非, 情也. 仁義禮智, 性也. 心, 統性情者 也. 端, 緖也. 因其情之發, 而性之本然可得而見, 猶有物在中而緖見於外也. 305
제31호(2016) 키는, 그래서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선한 본성이다. 선한 본성에 서 나온 감정 역시도 선할 뿐이다. 그래서 맹자는 그 정(情)이 선(善)한 것 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래서 선하다는 것이다. 불선(不善)하는 것은 재(才) 의 죄가 아니다 10)라고 하여 정은 선할 뿐이며, 불선하다고 여기는 것은 정 (情)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공감의 토대로서 성(性)이 선(善)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감 정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또 각자만의 고유한 감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만의 고유한 감정의 공통된 근거가 없게 된다면 각자가 느끼 는 바대로가 원칙이 되어 혼란에 빠지게 되고 만다. 예를 들어 한 교실에 여 러 학생이 있는데 한 학생이 더워서 에어컨을 틀었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학생은 추워서 끈다고 생각해보자. 그럴 경우에 어떤 것이 상충되고 있는가? 덥다고 느끼는 것과 춥다고 느끼는 것 사이에서 대립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느끼는 바대로가 원칙이고 진리라고 여긴다면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만이 남게 될 것이다.11) 그런 의미에서 맹자가 제시한 성선의 원칙은 감정의 토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가 싫다고 느끼는 것 과 그것을 나쁜 것이라고 여기는 것과는 엄밀히 말해서 다르다. 에어컨을 켜 고 끄는 것에서도 호 불호(好 不好)가 있지만 그것을 행하는 주체가 선하다 는 토대 위에서는 공감과 이해의 토대가 성립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맹자가 제시한 성선의 원칙은 성선에 바탕을 둔 인의(仁義)의 정치, 즉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12)를 해 나갈 것을 당시대 제 후들에게 주문한다. 10) 孟子 告子上 6 : 孟子曰 乃若其情則可以爲善矣, 乃所謂善也. 11) 사회계약설이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전제 하에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여긴 점을 상기해보라.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전제는 끊임없는 불안과 두려움, 공 포를 낳고 갈등과 투쟁의 상대로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최소한의 안전과 그리고 사회적 질서를 위한 계약적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12) 孟子 公孫丑上 6 : 孟子曰 人皆有不忍人之心. 先王有不忍人之心 斯有不忍人之政 矣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治天下 可運之掌上 306
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원리로서의 공감(共感) 에 관한 연구(김성실) 신은 호흘(胡齕)이란 자가 한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언젠가 왕께서 대전 (大殿)에 앉아 계실 때 어떤 사람이 대전 아래로 소를 끌고 지나가자 왕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흔종 (釁鍾)에 쓰려고 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왕께서 그 소를 놓아주 어라. 부들부들 떨면서 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나는 차마 못 보 겠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흔종 의식을 폐 지할까요? 그러자 왕께서는 흔종을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소 대신 양으 로 바꾸어라 고 하셨다는데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13) 맹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쓰려던 소가 벌벌 떨면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차마 볼 수가 없어 양으로 바꾸었다. 물론 맹자는 양을 바꾼 것까지도 지적 하였지만, 맹자가 본 것은 벌벌 떨면서 나가는 모습의 소가 불쌍하게 여긴 양혜왕의 그 마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마음을 지닌 존재라고 본 것이 다. 그런 마음이 때로는 가리워지고 때로는 알지 못하게 되어버릴 때에도 우 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것이 감정이란 형태로 올라오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공감(共感) 은 그런 마음의 본질을 꿰뚫고 그러한 속성을 지닌 감정 과 감정이 소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소통의 밑바탕에는 바로 성선(性善) 이 자리잡고 있다. 성선은 다 좋다 는 것을 의미한다.14) 다 좋음 을 바탕에 두고 감정을 이해하면, 감정을 억제하려하거나 컨트롤하려하는 행위를 할 필 요가 없어진다. 화를 내는 감정의 경우를 살펴보면, 내가 화가 나는 까닭은 무언가가 싫거나 미워해서가 아니라 다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경우 에 화나는 감정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13) 孟子 梁惠王上 7 : 臣聞之胡齕, 曰, 王坐於堂上, 有牽牛而過堂下者, 王見之, 曰, 牛何之, 對曰, 將以釁鍾, 王曰, 舍之, 吾不忍其觳觫若無罪而就死地, 對曰, 然則廢釁鍾 與, 曰, 何可廢也, 以羊易之, 不識, 有諸. 14) 본성이 선하다는 것은 본성이 악할 수도 선할 수도 있는 선택가능한 문제가 아닌 존재는 모든 것이 선하다는 의미이다. 이는 선악의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닌 존재자 체의 문제이며, 존재하는 것이 선하다는 의미는 있는 것은 다 좋다 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의 다 좋다 는 것은 완전하다 는 의미이자, 영원무한하다는 의미이다. 좋다가 시간이 지나면 나빠질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307
제31호(2016) 맹자의 성선(性善)과 대비하여 순자, 로크, 루소 등으로 대별되는 성악설 (性惡說)은 감정의 토대가 될 수가 없다. 성악설의 핵심은 인간의 본성이 태 어날 때부터 악한 것15)이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교육으로 교정해야 된 다고 본 것인데, 인간의 본성이 본래부터 악한 것이라면 우리는 강력범죄나 테러, 전쟁과 같은 뉴스를 접하면서 분노를 일으킬 필요가 없을 것이다. 본 성대로 행한 행위를 보고서 분노할 일이 만무하기 때문이다. 본성이 악하다 면 불의를 보면 기뻐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불의를 보면 분노하는 것이고,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면 측은한 마음이 생 기는 것이다. 감정이 인간의 본성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남에게 화를 내고 분노 를 표출하는 것 역시도 선한 본성의 발로일까? 이러한 문제는 오랫동안 논 란이 되어왔다. 특히 공맹으로 대변되는 유교철학적 관점에서는 인간을 선하 다고 규정해놓고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상당 한 고민을 할애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인간의 마음과 본성, 그리고 감 정의 세 관계를 잘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였다. 성 리학의 집대성자로 여겨지는 주자(朱子)의 경우 공맹(孔孟)의 사상을 근거로 하여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인간의 마음에 대해 분석하였다. 우리가 보통 좋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 등으로 표현하는 마음 은 곧 정(情) 으로 이해된다. 좋아하는 마음은 곧 좋아하는 감정으로 드러났을 때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주자는 심통성정(心統性情) 이라는 개념으로 설명 하였다.16) 심(心)은 두 개의 사물을 포괄하는 것인데, 성(性)은 심의 체(體)요 정(情) 은 심의 용(用)이다.17) 15)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니 그것이 선하다고 하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 荀子 性惡 1 : 人之性惡,其善者僞也.> 16) 본래 심통성정(心統性情)의 개념은 장재(張載)에게서부터 시작되는데 주자는 당시대 북송오자(北宋五子)의 철학을 집대성하여 공맹의 철학을 계승한 성리학을 구축한다. 308
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원리로서의 공감(共感) 에 관한 연구(김성실) 심이 성정을 통하니, 통은 겸한다는 뜻과 같다.18) 성은 리를 가지고 말한 것이고 정은 드러나서 작용한 것이며 심은 성정을 주관하고 통섭하는 것이다.19) 성은 체요 정은 용이며 성정은 모두 심에서 나오니, 심은 그것을 거느릴 수 있다. 통은 군사를 거느린다고 할 때의 그 통인데, 말하자면 주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20) 성은 심의 리이고 정은 심의 작용이며, 심은 성정의 주인이다.21) 주자는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발현하는 감정을 포괄하고 통솔한 다고 보았다. 우리가 논리적으로 성과 정, 마음을 떼어놓고 설명을 하고 이 해를 하지만 실재에 있어서는 마음 이라 통칭하는 것으로 감정이라는 작용 이 일어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맹자가 말한 바대로 선한 본성에서 발현한 감정은 선할 수밖에 없어야 하는데 불선함을 느끼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에 대해 주자는 기질의 문제를 언급한다. 맹자는 이미 성이 선하다는 것을 보였지만 이것은 단지 큰 근본처에서 이해 한 것일 뿐이고, 다시 현실에서 선악이 말미암아 일어나는 곳에 기품이 각기 다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후인이 잘못 이해하여 선악 이 섞여 이루어진 설을 허다하게 이끌어내어 서로 떠들었으나, 정자의 설이 비교적 정밀하다. 그래서 성만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으면 미비하고, 기를 논 17) 朱子語類 卷119 : 心是包得這兩個事物, 性是心之體, 情是心之用.(이하 주자어류 는 진래, 주희의 철학, 이종란 역, 예문서원, 2002, 재인용) 18) 朱子語類 卷98 : 心統性情, 統猶兼也. 19) 朱子語類 卷98 : 性以理言, 情乃發用處, 心卽管攝性情者也. 20) 朱子語類 卷98 : 性是體, 情之用, 性情皆出于心, 故心能統之, 統如統兵之統, 言有 以主之也. 21) 朱子語類 卷67 : 性者心之理也 情者心之用也 心者性情之主也 309
제31호(2016) 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밝지 못하니 둘로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고 말한 것 이다.22) 주자는 사람이 선하기도 하고 불선하기도 한 것은 단지 품부받은 기질에 각기 맑고 탁함의 차이가 있기 때문23)이라고 보았다. 우주만물이 생겨남에 있어 인간은 최령한 존재로서 최고의 기질을 품부하였지만, 만물은 그러지 못하고 편벽되게 품부했다고 본 것이다. 또 사람에게 있어서도 기질의 경향 은 각기 달라서 치우친 사람과 중화(中和)를 이룬 사람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주자의 기질에 대한 언급이 곧 선악 (善惡)문제로 직결된다고 이해했다.24) 특히 조선시대 대표적 논변이라 할 수 있는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도 사단이라는 감정과 칠정이라는 감정을 두고 좋은 감정이냐 나쁜 감정이냐에 대한 논의였다. 퇴계는 주자를 계승하 되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을 보완하고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켰는데, 특히 그가 이해하는 감정이해방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 렇다면 사단칠정논변에서 나타난 핵심개념을 통해 감정의 올바른 이해방식 을 살펴보도록 하자. 22) 朱子語類 卷59 : 孟子已見得性善 只就大本處理會 更不思量這下面善惡所由起 處 有所謂氣稟各不同. 後人看不出, 寸所以惹得許多善惡混底說來相說來相炒, 程子 說得較密 因舉論性不論氣不備, 論氣不論性不明, 二之則不是. 23) 朱子語類 卷4 : 人之所以有善有不善, 只緣氣質之棄,各有淸濁. 24) 많은 연구가들이 맹자가 말하는 정은 사단지정으로 선한 본성에서 바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선하지만 일반적인 우리의 감정, 희노애구애오욕으로 표현되는 칠정에는 악 한 감정도 있다고 보았다. 주희철학에서 볼 때, 정에는 악도 있고 선도 있다. 그래서 정의 범주는 선한 지식과 사고의 영역인 사단에만 한정되지 않고, 선하지 않은 많은 지식과 사려까지 포함하고 있는 칠정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된다. 따라서 정은 주희 철학에서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성리가 직접 발현하는 사단으로 작용하는 것, 칠정 을 총괄하여 가리키는 것, 그 안에 있는 어떤 구체적 사유를 포괄하는 것이 그것이다. <진래, 주희의 철학, 이종란 역, 예문서원, 2002, 235쪽> 310
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원리로서의 공감(共感) 에 관한 연구(김성실) Ⅲ. 감정의 이해방식으로 본 공감(共感) 의 원칙 앞서 논의한 바를 통해 보면 감정과 감정의 소통을 본질로 삼는 공감 은 성선이라는 토대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으로 남 는 것은 소위 말하는 악하다고 혹은 안좋다고 느끼는 감정들 분노하고 화 내는 감정, 질투하는 감정 등 을 이해할 수 있는가이다. 그러한 논의는 비 단 오늘날 뿐 아니라 과거에도 계속 이어져왔는데 우선 그러한 논의의 핵심 은 무엇인지 퇴계의 이해방식으로 파악해보자. 사단칠정논변은 조선시대 3대 논변 중 하나로 사단(四端)이라는 감정과 칠정(七情)이라는 감정이 어디서 발현되었는가에 대한 논의로 시작하여 리기 (理氣), 성정(性情), 선악(善惡), 지행(知行) 등 주요한 철학적 개념을 검토하 는 중요한 논변이었다. 이는 단순히 조선시대 벌어진 논변이 아닌 세계지성 사에서 유래없는 감정에 관한 심도있는 논의였기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 한 의미를 지닌다. 사단칠정논변은 추만 정지운(秋巒 鄭之雲)이라는 사람이 처음 그렸던 천 명도(天命圖) 를 퇴계가 수정하면서 시작되는데, 수정된 천명도(天命圖) 를 본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昇)이 이의제기를 하면서 8년여간의 사단칠정논변 (四端七情論辨)이 이루어진다. 고봉이 이의를 제기한 부분은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 는 구절이었는데, 너 무 이원론적으로 나눔이 심하다고 보았다. 이에 퇴계는 사단(四端)의 발함은 순선한 리(理)이므로 선(善)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七情)의 발함은 기(氣)를 겸하기 때문에 선악(善惡)이 있게 된다(四端之發, 純理故無不善, 七情之發, 兼氣故有善惡) 는 것으로 수정하면서 본격적인 논의를 진행하게 된다. 논변 도중에 퇴계는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 情發於氣) 는 구절이 주자가 언급했던 내용과 동일한 것임을 밝히고 그것을 확정짓고자 하였지만25), 고봉은 퇴계의 주장이 분별됨이 너무 심하다고 보 25) 경신년(1560) 8월 6일. 兩先生四七理氣往復書 上, 第二節 : 四端發於理, 七情發 311
제31호(2016) 았다. 결국 사칠논변은 고봉이 퇴계의 최종 수정 내용에 동의하는 것으로 마 무리되었지만, 실제 동의했다기 보다는 본질적 차이만 확인하고 서둘러 마무 리되었을 뿐이었다.26) 본고의 주제와 관련하여 사단칠정논변의 핵심쟁점은 3가지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사단(四端)이라는 감정과 칠정(七情)이라는 감정은 모두 다 선(善)한 감 정인가? 아니면 선한 감정과 악(惡)한 감정이 따로 있는가? ② 리(理)와 기(氣), 본연(本然)과 기질(氣質)의 문제에서 기(氣) 혹은 기질 (氣質)에도 좋고 나쁨이 있는 것인가? ③ 리발과 기발의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고봉은 사단이라는 감정은 맹자가 말한 대로 선한 본성에서 나온 감 정이므로 선하지만, 칠정이라는 감정은 선과 악이 뒤섞여 있다고 보았다. 이 에 반해 퇴계는 감정이라는 것은 선한 본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선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퇴계와 고봉의 논변은 주자가 주장한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 서 발한다 는 구절을 계승한 퇴계가 고봉의 이의제기를 반영하여, 사단은 리 에서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에서 발하여 리가 탄다 라고 수정하면서 최종적으로 마무리하는데, 이때 사단리발, 칠정기발은 퇴계 호발설의 근거로 언급된다. 그러나 퇴계가 이해하는 리발이기수지, 기발이이승지 의 개념은 리발 도 있고 기발 도 있는 호발(互發)설이 아닌 오직 리발 만을 언급한 것 이다. 즉 선과 악이 따로 따로 존재하는데 선 한편을 들어 말하는 것을 선 이라 본 것이 아니라, 오직 선 만이 있을 뿐인데 그렇지 않다고 착각하는 경 우를 지칭해 악 이라고 말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는 시비(是非) 의 개념 於氣 此二句, 鄭丈著之於圖者, 正與朱子所言不殊, 若曉得時, 豈有病乎? 26) 병인년(1566) 11월 6일. 退溪先生文集 卷17, 重答奇明彦 : 滉曾以此言爲本同末 異者, 鄙見固同於此說, 所謂本同也. 顧高明因此而遂謂四七必不可分屬理氣, 所謂末 異也. 苟向日明見崇論, 如今來兩說之通透脫洒, 又何末異之有哉? 312
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원리로서의 공감(共感) 에 관한 연구(김성실) 과도 같다. 옳고 그름을 가린다고 했을 때 옳은 것(是)이 있고, 그른 것(非) 이 있는 것이 아닌, 옳은 것인데 옳지 않다는 착각을 가리켜 비(非) 라고 말 하는 것과 같은 이해방식인 것이다. 퇴계는 고봉과의 사칠논변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완성하고 만년에 어린임 금 선조에게 바치는 성학십도(聖學十圖) 를 통해 이러한 감정이해방식을 재 확인한다. 성학십도 제6도 심통성정도 하도(下圖)는 퇴계가 이해하는 감 정이해방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데 사칠논변에서 설명하는 리발이기수지 (理發而氣隨之), 기발이리승지(氣發而理乘之)의 올바른 이해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성학십도 심통성정도 하도의 그림을 보면, 사단과 칠정은 발위(發 爲)한 감정으로부터 사단과 칠정이 대대(待對)로 나란히 병렬되게 그린 것이 아니라 사단 밖에 칠정을 따로 일렬로 그려놓고 있다. 이는 고봉의 주장처럼 칠정 안에 사단을 넣은 것도 아니며, 리발의 사단과 기발의 사단이 앞서 언 급된 A와 B의 그림처럼 실재하는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단은 실재하지만 칠정은 기발이승이기에 착각이라는 점이다. <그림1- 성학십도(聖學十圖)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 313
제31호(2016) 퇴계의 언급을 살펴보자. 사단지정은 리가 발하여 기가 따른다는 것이니 그대로 좋을 따름 나쁨이 란 없다.(如四端之情, 理發而氣隨之, 自純善無惡.) 반드시 리가 발한다 못하면 기에 가려진다면서 뒤이어 좋지 않다 한다.(必理發未遂, 而揜於氣然後, 流爲 不善.) 칠자지정은 기가 발하여 리가 탄다는 것이니 그래도 좋지 않은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다.(七者之情, 氣發而理乘之, 亦無有不善.) 어쩌다 기가 발한 다 해버리면 알맹이가 빠지듯 그 리가 없어진 듯 곧 멋대로 나쁘다 한다.(若 氣發不中, 而滅其理則放, 而爲惡也.) 27)28) 성학십도 심통성정도 하도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리발(理發)은 필연적 [必理發]이고 기발은 가정[若氣發]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리발(理發)의 필연 성은 自純善無惡 한 것으로서 기에 가려졌다(揜於氣), 기가 발했다(若氣發) 고 착각하게 되면 자순선무악(自純善無惡) 한 것임에도 위불선(爲不善), 위 악(爲惡) 하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착각하더라도 우리의 정(情) 은 실제로는 선하지 않음이 없음(無有不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29) 사칠논변에서 퇴계가 감정을 이해하는 방식의 핵심은 감정은 순선하다 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는 선한 본성에서 발현한 감정은 선할 수밖에 없다는 기 초적인 것을 다시금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의 논의에 서 맹자는 감정의 토대로서 선한 본성을 언급하였고, 퇴계는 맹자의 사상을 27) 본문의 해석은 감정의 순선함에 대한 강조를 위한 필자의 해석임을 밝힌다. 退溪先 生文集, 卷7, 箚 進聖學十圖箚 <心統性情圖>: 如四端之情, 理發而氣隨之, 自純 善無惡, 必理發未遂, 而掩於氣, 然後流爲不善. 七者之情, 氣發而理乘之, 亦無有不善, 若氣發不中, 而滅其理, 則放而爲惡也. <김성실, 退溪의 理發氣隨 情學 硏究, 성균 관대학교 박사논문, 2015년, 86~87쪽> 28) 심통성정도 하도에 대한 일반적은 번역은 다음과 같다. 예컨대 사단(四端)의 정은 이(理)가 발현함에 기(氣)가 따르니 자연히 순선(純善)하여 악이 없지만, 이가 발현 하여 미처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에 가리어진 뒤에는 불선(不善)으로 흘러갑니다. 또 일곱 가지 정은 기가 발현함에 이가 타서 또한 불선함이 없지만, 기가 발현하여 절도 에 맞지 못하여 그 이를 멸하면 방탕하여 악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고전종합DB 참조) 29) 김성실, 퇴계 리기호발설의 비판적 고찰, 퇴계학논집 제16집, 영남퇴계학연구 원, 2015년, 127쪽 재인용. 314
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원리로서의 공감(共感) 에 관한 연구(김성실) 계승하여 감정 역시도 선함을 밝혔다. 또한 시비의 이해방식처럼 감정 역시 도 다 좋을 뿐인데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감정은 착각이 산물일 뿐이라는 것을 리발기수와 기발이승의 이해방식을 통해 설명해주었다. 즉, 감정은 본 래 다 좋을 뿐인데 그렇지 않다고 착각(악한 감정이 있다고 여기는 경우)하 는 그 사태를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림2- 감정의 이해방식 : 다 좋음> 감정은 그 사람을 나타내는 고유의 정체성이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감정은 과학이며, 진실하다. 감정은 속일래야 속일 수 없어서 말로서 표현하지 않으면 몸이 가만히 내버 려두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거짓으로 감정을 속이고 착각이 마치 실재로 있 는 것인양, 혹은 악한 감정이 있다는 주장 등을 하게 될 때에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서 그것이 아니라는 신호를 몸을 통해서 느낌을 통해 생생히 전달 된다. 감정은 사람을 사람이게끔 하는 생생함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성(性) 자를 파자해보면, 마음(忄) 이 살아있음(生) 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성이 발하여 정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공감하는 사회는 열린사회이며,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는 닫힌 사회이다. 오늘날 도시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범죄와 강력사건 등은 사람과 사람이 가 족과 가족 간에 공감하지 못하고, 감정의 선함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비롯 315
제31호(2016) 된다. 별것 아닌 일에서부터 시비와 싸움이 일어나듯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따로 있어서 좋은 것은 자기가 챙기고 나쁜 것은 버려야 하는, 혹은 없애야 하는 사고방식으로 천착되어 버리는 것이다. 다 좋은 사람인데, 다 좋은 세 상일 수밖에 없는 왜 그럴까에 대한 이해를 바탕에 둔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가 더 이상 삭막하거나 낯선 곳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소통과 공감의 사회는 곧 도시의 생생함으로 연결된다. 그렇다면 공감의 작용이 어떻게 정 감있는 도시로, 살아있는 생생한 도시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 로 하자. Ⅳ. 얼굴없는 도시에서 공감(共感)의 도시로 한국의 도시화 과정을 살펴보면 대체로 경제개발과 관련하여 인위적으로 조성된 측면이 많다. 도시라는 것이 살기좋은 곳에 사람이 모여사는 것이 자 연스러운데 반해, 경제개발의 논리에 따라 특정지역의 공업단지 조성, 수도 권 중심정책 등에 따라 수도권을 비롯한 광역시에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을 보여왔다. 또한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농촌 등의 인구구조의 공동화현상과 개발낙후 현상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였고, 수도권 등의 과밀한 인구문제 해결을 위해 계획적으로 신도시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신도시는 이미 서구사 회에서 폐기되었던 도시정책 중 하나였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부동산정책에 힘입어 끊임없이 팽창, 발전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무분별한 도시개발과 도시계획 속에서 삭막해가는 도시의 삶은 어제오늘일이 아니다. 그러나 인공 역시도 자연이 허락하였기에 인공인 것처럼 도시 역시도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다. 도시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환경정비를 잘하고, 시설관 리를 철저히 해서 깨끗한 도시, 편리한 도시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곳을 살아가는 주체인 인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 316
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원리로서의 공감(共感) 에 관한 연구(김성실) 람다운 도시가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도시공동체의 근간에는 사람과 사 람의 정(情)이 소통하는 것의 핵심이 된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커다란 호응 을 일으킨 까닭은 그 시대의 아련한 추억뿐 아니라 그 추억 속에 담긴 정 (情)을 캐치했기 때문이었다. 정(情)은 오래전 일도 마치 어제같은 느낌으로 영원히 우리에게 남는다. 그래서 그때의 따뜻함은 오늘도 여전히 갈구하는 것이다. 가족, 우정, 사랑 이 모든 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도시구성에는 직접적으 로 상관이 없다. 하지만 도시를 도시답게 살아 숨쉬는 도시로 만들어주는 것 은 바로 사람과 사람의 정인 것이다. 정(情)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도시 는 죽은 도시다. 또한 도시는 얼굴이 없다. 아침에 사람들이 똑같은 복장으 로 무언가에 쫓기듯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빌딩숲으로 들어가고 나서는 해가 질 때 즈음에 다시 황급히 나와 낯선 도시 속으로 사라진다. 이웃이 누구인 지도, 심지어 같은 곳에서 일하는 동료와도 소통이 낯설다. 도시라는 이름을 가졌으되 단지 시공간 상에 같은 장소를 공유하는 사람들 간의 집합체 정도 의 의미만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은 살아 숨쉬는, 정감 있는 도시를 위한 핵심요소이다. 살아 숨쉬는, 정감있는 도시의 핵심요소가 공감이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어떻게 공감의 요소를 도시에 불어넣을 수 있는가에 대해 의구심 을 가질 것이다. 정감있는 도시를 위해 <응답하라 시리즈>의 드라마처럼 인 위적으로 마을공동체를 조성하고 골목길 등을 만들 것인가?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그때와 같은 방식으로 비슷한 환경을 조성하면 정감있는 도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들은 오히려 정감있는 도시를 해치게 된다. 마치 어머니가 담근 김치 맛이 가장 맛있다는 얘기에 회사에서 보통의 어머니들이 김치를 담그는 방법을 조사하여 간은 어떻게 절이고, 속은 어떻 게 만들며, 얼마나 숙성하는지 등등을 통계적으로 계량적으로 분석하여 상품 을 내놓는 방식과 비슷하다. 비슷하지만 그 맛이 그 맛이 아닌 것만 같은 느 낌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은 무언가가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317
제31호(2016) 비슷하면서 아닌 것을 미워하노니, 가라지를 미워함은 벼싹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해서이다 30)라고 하여 비슷하면서도 아닌 것, 즉 사이비(似而非)를 경계하였다. 그렇다면 정감있는 도시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정감있는 도시를 만드는 것을 해친다면 정감있는 도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는 지행(知行) 의 논리, 학(學)과 사(思)의 논리로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지(知)와 행(行)의 논리를 두고 아는 만큼 행한다, 모르고 행 한다, 아는데 행동하지 못한다, 몰라서 행동하지 못한다 의 개념을 떠올려볼 수 있다. 특히 알긴 아는데 실천이 어렵다는 표현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데, 사실 그럴 때에 우리는 모른다고 보아야 한다. 가령 금연을 하면 건강해진다 는 걸 알지만 그걸 실천을 못한다는 것은 건강해지는 걸 정말 안다면 금연 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지만 정말 건강해질 건가에 대해 의구심을 여전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감있는 도시를 위한 소통과 공감을 불어 넣기 위한 올바른 감정이해는 사실 알지만 실천을 못하고 있다는 주장과 비 슷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감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란 다름 아 닌 올바른 앎으로부터 출발한다. 온갖 금연도구, 정책, 심지어 담배 값을 올 려도 금연을 할 수 없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금연을 하게 되는 경우는 담배 에 정(情)이 떨어진 사람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다(知)는 것은 바로 정 (情)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올바른 이해에는 반드시 학(學)과 사(思)의 과정이 함께 담겨져 있다. 감정 의 이해방식과 마찬가지로 불학(不學)과 불사(不思)가 실제로 있어서 그것을 없애버려야 하는 것이 아닌 올바른 앎을 통해 원래는 없는 불학과 불사라는 착각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 둡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31)라고 하여 학(學)과 사(思)의 관계 를 설명하였다. 정(情)을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성선의 바탕 위에서 다 좋 30) 孟子 盡心下 37 : 孔子曰 惡似而非者, 惡莠, 恐其亂苗也. 31) 論語 爲政 15 :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318
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원리로서의 공감(共感) 에 관한 연구(김성실) 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까닭에 대해 생각하고 배우는 것을 의미하는데, 공 자는 그렇지 않으면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 면 위태롭다 고 본 것이다. 또 맹자는 마음은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얻 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32)고 하여 마음의 기능을 생각하는 것이라 고 보았다. 마음의 알맹이는 감정33)으로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는 데, 이때에 우리는 드러나는 감정을 학(學)과 사(思)를 통해 올바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림3- 학(學)과 불학(不學), 사(思)와 불사(不思)의 이해방식> 우리의 삶에 있어 우리는 늘 언제나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을 싫어한다. 그런 의미에서 감정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통계와 확률로 32) 孟子 告子上 15 : 心之官則思, 思則得之, 不思則不得也. 33) 주자와 퇴계가 언급한 심(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괄한다는 점은 마음이 본성과 감정이 함께 기능함을 의미한다. 마음의 기능이 생각하는 것이라면 잘못 생각하면 감정이 나쁠 수도 본성이 나쁠 수도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319
제31호(2016) 설명하는 과학과는 달리 오차가 없는 과학이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억지 로 하게 되면 겉으로 그렇지 않다고 말을 해도 몸이 말을 하는 것이다. 감정 의 진실함과 마주대할 때 공감의 길은 차츰 열리게 된다. 이제 도시가 살아 숨쉬는 도시로서 기능하기 위해서 사람과 사람 간의 정 (情)이 소통하는 공감의 도시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한 공감은 어떠한 행위 를 통한 결과의 예측을 기대하는 방식으로서의 탐색이 아닌, 올바른 앎[知] 을 통해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때의 올바른 앎이란 바로 감정은 선한 본 성에 토대를 두고, 그 감정의 발출 역시 선할 수밖에 없다는 이해, 그러한 이해방식으로 사람과 도시를 바라는 보는 것을 의미한다.34) 조금 더 관심있 게 사람을 보고 사람을 이해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통해 남 역시도 좋 은 점을 이해해보려는 태도, 그리고 느끼는 바가 모두 다 좋을 수밖에 없는 데 남들이 싫어하는 경우에 대해 대립과 갈등이 아닌 이해를 위한 올바른 생각(思)과 배움(學),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정감있는 도시로 우리를 향하게 할 것이다. 공감(共感)은 단지 적절한 타협이 아닌 우리 마음의 알맹이가 소통하는 것 이기에 숨길래야 숨길 수 없고 꾸밀래야 꾸밀 수 없다. 정(情)이 살아있는 도시, 이것이 바로 앞으로의 도시가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닐까. Ⅴ. 나가는 말 오늘날 이성적이길 강요된 사회에서 감정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고 있다. 34) 공감은 지위, 재산, 학력, 명예 등으로 공통의 관심사를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정과 정의 소통이다. 감정은 좋은 것은 좋아하고 싫은 것은 싫어하기에 싫어하는 감정이 생길 때 왜 내가 싫어하는지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싫은 것은 없애버려야 할 것으로 혹은 무시해야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 다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싫은 감정으로 표현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싫다고 없애버리려는 대표적인 예가 폭력이고 전쟁이다. 320
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원리로서의 공감(共感) 에 관한 연구(김성실) 더 이상 감정이 비이성적이라는 편협된 인식이 설 자리는 점차 좁아지고 있 다. 감성의 풍부함, 감정이 소통하는 사회로의 전진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 는 게 오늘날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마음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감정이 선한 본성의 토대 위에 있으 며, 또 선한 본성에서 발현된 우리 감정 역시도 선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감정은 다 좋음의 바탕 위에서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사람과 사람의 정(情)이 소통하는 공감(共感) 은 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요소이다. 맹 자와 퇴계는 감정의 선함을, 다 좋음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감 정의 올바른 이해방식을 통해 진정한 공감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공감의 도시는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공감하기 위한 어떠한 행위를 조장하 는 것보다 올바른 앎[知]을 통해서 감정의 진실함과 마주대할 때 만들어진 다. 인문학과 도시의 끊임없는 결합과 연구는 어쩌면 그동안 도시가 사람 사 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동떨어진 채 급속히 성장해온데 대한 반대급 부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도시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꾸준히 이어져 온다 면 도시는 더 이상 사람과 동떨어진 것이 아닌 사람사는 공동체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정(情) 떨어지는 도시가 아닌 정(情)이 가득한 도시가 되는 것이다. 사람사는 공동체는 결국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고 공감하는 사회를 말한다. 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원리로서의 공감 은 그동안 소홀히 여겨왔던 우리의 정(情)을 올바로 이해한 토대 위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과 사람에 대한 관심과 이해로부터 출발하여 사람사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더욱이 정(情)으로 대표되는 한국문화 속에서의 인문학적 도시는 늘 우리 곁에 함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은 2016년 11월 10일에 투고 완료되어 2016년 11월 16일부터 12월 6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16년 12월 7일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된 논문임. 321
제31호(2016) 참고문헌 1. 원전류 論語 孟子 荀子 退溪集 朱子語類 2. 논문류 김성실, 退溪의 理發氣隨 情學 硏究, 성균관대학교 박사논문, 2015년. 김성실, 퇴계 리기호발설의 비판적 고찰, 퇴계학논집 제16집, 영남퇴계학연구 원, 2015년 우 석, 도시인문학의 등장, 도시인문학연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2014. 이성백, 21세기 도시연구의 새로운 방향, 도시인문학연구, 서울시립대 도시 인문학연구소, 2014. 허 경, '도시인문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황해문화, 새얼문화재단, 2015. 3. 단행본 및 기타 류동민,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코난북스, 2014. 미셸 르 뒥, 사람들은 왜 도시에 살까?, 박빈희 옮김, 공간사, 2005. 성백효, 맹자집주, 전통문화연구회, 1990. 순자 저, 순자, 이운구 역, 한길사, 2006 이기동, 맹자강설,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91. 진 래, 주희의 철학, 이종란 역, 예문서원, 2002. 천호균, 도시기획자들, 소란출판사, 2013. 최재정, 도시를 읽는 새로운 시선, 홍시, 2015.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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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호(2016) Abstract A study about Empathy(共感) as a key principle of Urban Humanities Kim, Sung-sil Recently attracted Popular <Please respond 1988> drama was the most appropriate representation of what Feeling(情) culture in urban communities. Because we miss and empathy to the story in the memories of the past are remembered in a Feeling(情) had its only warm era. Recklessly and rapidly developing city that was abandoned before it changed quickly look back at our lives yet still being changed. For economic reasons or for other reasons, a key element that enables you to gather transformed into a space that feels units with smoke and people who live in the living space of any city it would be 'empathy(共 感)' between directly from person to person. The word humanities and the city is no different city soon people living word. Because the city is where people live. As we are well aware of the variety of emotions that change several times a day is not like feeling good degree view of our life is the expression of feelings. Feelings of the heart lining and shows a picture of us. Seeing how the individual having such feelings look at the 'empathy(共感)' to communicate with the universality got to work today, urban communities will play an important role is clear. Several 324
인문학적 도시의 핵심원리로서의 공감(共感) 에 관한 연구(김성실) nature of urban problems happening today is because disinterest stemmed etc. and eventually disconnected. Therefore, this paper explores for 'empathy(共感)' as a core principle of the humanistic city. Especially around the endless agony and philosopher Mencius(孟子) typical oriental way of understanding emotions and Toegye(退溪) dealt understanding of the emotional and character dealing with the 'empathy(共感)'. First, consider how you will look back with feelings and understanding of Mencius and Toegye feelings toward the city in order to understand how the 'empathy(共感)' for what we can do. Key words: Urban Humanities, empathy(共感), Mencius(孟子), Toegye(退溪), Feeling(情). 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