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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고려시대 분묘유적을중심으로 * 신은제 ** 허선영 *** 1) - 목차 - 1. 머리말 3. 銅器의유행과그원인 2. 고려분묘연구의경향과분묘 1) 원간섭기고려에서의동기유부장품에대한분석행 1) 연구의경향과문제점 2) 銅器유행의배경과결과 2) 고려시대분묘유적의편년과 4. 맺음말그특징 개 요 14세는고려청자는현저하게변화되었다. 간지명청자의등장, 도식화된문양등은청자변화의구체적실례였다. 청자변화의원인은주로생산체계의변화, 소비의확대로이해되었다. 그러나최근구제발굴로조사가급증한고려분묘에대한연구에의하면, 14세기들어청자의출토량은이전시기와감소하거나큰변동은없다. 대량생산에도불구하고분묘에서의소비는크게증가하지않게되는것이다. 이에본연구는고려시대분묘유적의출토품을검토하였다. 지역성과시기를고려해상주청리, 청주용암, 진안수천리, 부산덕천동, 안산대부도육곡, 단양현곡리, 경주검단리, 청도대전리, 고양더부골고려분 * 본논문은 2010 년도재단법인한국문물연구원의연구지원비를받아작성되었음. ** 한신대학교강사 *** 한국문물연구원

2 石堂論叢 51 집 묘유적을조사하여다음과같은결론을내릴수있었다. 첫째, 같은시기라고하더라도지역에따라청자가주로출토되는지역과청동기가비교적다수출토된지역이있었다. 상주청리는청자만주로출토된반면, 청주용암유적에서는다수의동기가출토되었다. 이러한차이는지역적차이일가능성이높다. 둘째, 지역적차이에도불구하고전체적으로 11~13세기중반까지분묘의부장품에는청자가다수를차지하고동합 동발 동접시등이공반출토되고있었다. 셋째, 13세기후반이후동기의출토가급증하였다. 14세기로편년되는분묘에서는청자와함께다수의청동기가공반출토되고있었다. 따라서분묘의출토양상으로보자면 14세기에동기가유행하였다. 당시동기의유행은문헌을통해서도확인할수있다. 홍자번의상소등여러문헌에의하면, 원간섭기고려에서는동기가상당히유행하고있었다. 동기확산의배경에는중국화폐제도의변화와지배층의취향이자리잡고있었다. 원은고래의銅錢을기축화폐로사용하지않고은으로지불보증된보초를기축화폐로삼았다. 기축화폐의변화는동을다른용도로사용할수있도록허락했다. 그결과이전보다자유롭게동을이용해동기혹은銅像을주조할수있었다. 물질적배경이외에문화적변화도있었다. 새롭게중국의지배층이된몽고족은유목민의전통에따라자기보다는금속기를선호했고고려역시이영향으로부터자유로울수없었다. 이런분위기에서고려에서는자기가아닌동기를선호하게되었던것이다. 그리고이것이자기산업의쇠퇴와자기의질하락을가져온한배경이었을것이다. 주제어 : 청자, 銅器, 고려분묘, 화폐제도, 銅錢 1. 머리말 14 세기는격동의시대이다. 징기스칸이후전세계를지배하던몽골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3 제국이붕괴해갔으며, 13세기동안세계적풍요를가져온교역체계소위 13세기세계체제 가해체되어갔다. 1) 격동의바람은고려에도불어닥쳤다. 오랜여몽전쟁과일본정벌로민생은도탄에빠져있었고, 원의간섭이래만연한 측근정치 로정치는불안했으며집권정치세력이빈번하게교체되어重朝라는전대미문의현상까지낳았다. 물론새로운혁신도있었다. 과거어느때와도비교될수없이많은이들이중국과의교류에나섰다. 많은고려의지식인들이중국의과거에응시하였고 2) 중국의문사들과교류하였다. 3) 고려인과중국인들사이의혼인이빈번하게이루어졌고, 그가운데에는別兒怯不花와같은원조정의실력자와혼인관계를맺는경우, 심지어원황실의황후가된경우도있었다. 인간들의교류는다른변화도수반했다. 중국으로부터신유학이도입되었으며목화와화약같은물품들이처음고려에들어왔다. 또많은상인들이중국에서고려로, 다시고려에서중국으로물자를실어날랐다. 신안앞바다에서발견된원대교역선들은당시왕성한교류의증거이다. 4) 그런데 14세기고려에서는흥미로운변화가발생한다. 고유의비색과상감기법으로알려진고려청자가기형, 문양, 제작기법에서새로운경향을보이기시작하였다. 우수한품질의청자가사라지고도식화된문양, 기형의변화, 조악한유색, 두꺼워진기벽, 인화문의등장, 紀年과 1) 제닛아부 - 루고드, 유럽패권이전 : 13 세기세계체제, 까치, 2006. 2) 당시수많은고려의문사들이원나라制科에응시하여급제하였다. 예컨대安震과같은인물은충숙왕 5 년 6 월원나라제과에급제하기도했다. 3) 이제현은만권당에서중국의문사들과폭넓게교유하였다.( 송서평, 익제이제현의중국에서의행적과원대人士들과의교류에대한연구, 남명학연구 6 집 ) 4) 至治 3 년명목패와至大通寶가실려있던신안선은당시원, 고려, 일본의교역이활발하게전개되었음을확인시켜주는사례이다.( 우리문화속의중국도자기, 국립대국박물관, 2004.)

4 石堂論叢 51 집 관아의이름이새겨진청자의등장은당시변화의구체적내용으로지목되었다. 5) 이러한변화는고려의수공업생산체계였던소체제의해체와상공업의진전으로인한요업의발달 6), 지배층의과도한수취와민들의유리, 새로운자기수요층으로서의신진사대부의등장 7), 여말자기사용장려책, 원나라자기의영향 8) 에의해발생한것으로이해하고있다. 그러나모든의문이해결되는것은아니다. 국가의과도한수탈로인한수취체제의문란, 고려후기사족층의확대로인한수요층의확대, 자기장려책등을청자의변화원인으로이해한다하더라도, 몇가지해명해야할과제는여전히남아있다. 우선사료를보다정치하게살펴볼필요가있다. 14세기청자사용증대의주요한논거로이용되어온것이공양왕대올린방사량의상소이다. 필자의검토에의하면기존해석과달리방사량의금속기사용금지상소는사치방지와화폐문제를논하면서언급한것이므로, 이를단선적으로청자사용과연관시킬경우당시상황을오독할수있어조심스런접근이필요하다. 9) 5) 14 세기청자의기형과변양변화에대해서는다음의논문을참조하라. 이종민, 14 세기후반고려상감청자의신경향, 미술사학연구 201, 1994. 한성욱, 고려후기청자의기형변천, 미술사학연구 232, 2001. 박경자, 14 세기강진자기소의해체와요업체제의이원화, 충북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2. 김윤정, 고려후기상감청자에보이는원대자기의영향, 한국미술사학회 249, 2006.3. 6) 박경자, 앞의글, 2002. 7) 이종민, 앞의글, 1994. 8) 김윤정은龍泉窯靑磁, 景德鎭청백자 卵白釉磁 청화백자의영향으로고려청자의문양과기형에변화가발생하여, 口緣外反式대접, 高足杯, 귀대접과같은기형이출현하였고, 용문 봉황문 魚文 연화당초문이유행하였음을지적하였다.( 김윤정, 앞의글, 2006) 9) 공양왕 3 년 3 월에올려진방사량의상소는 고려사 식화지화폐와市估조에각각 1 조, 형법지 금령, 병지 오군, 세가에각각나누어져기록되어있다. 방사량의상소는주로경제와국방에대한문제에집중되어있고특히금속기사용금지는베를화폐로사용하지말고금속으로화폐를주조해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5 자기수요의증대를사족층의확대의결과로이해하기위해서는향리층과사족층의경제적격차에대한검증이필요하다. 물론 14세기들어사족과이족이분화하기시작했고 10) 이러한현상은후대로갈수록가속화되었다. 그러나그것을청자수요의증대를결과하였다고보기는어렵다. 고려전기지방에위치한분묘에서도다수의청자가매장되었기때문이다. 분묘출토양상을보면, 고려전기향리층을자기수요층에서제외할수없다. 최근곳곳에서발표되고있는고려시대분묘에대한보고서를검토해보면지방의향리들역시상당한수준의청자를사용하고있었다. 11) 사료의편중은 14세기청자의변화의문제를미궁에빠뜨리는또다른이유였다. 필자가보기에, 청자에대한연구는주로가마터에대한발굴조사혹은자기를수송하다침몰된수중유적을중심으로진행되어왔다. 당연히이유는있다. 이들유적은방대한정보를제공해준다는점에서, 때로절대편년을제공하거나층위를통해청자를편년화하는데매우유용하다는점에서그사료적가치가높다. 그러나주지하듯이들유적만으로당시청자의소비양상까지규명하기는어렵다. 늘그렇듯이생산은소비와직결되어있다. 때문에 14세기청자의변화를소비문제와연관된것으로간주하기도했다. 12) 본고는 14세기청자의양상에대한연구에주목하면서, 선행연구에서다루지못한고려시대지방분묘유적을검토해그의미를살펴보려한다. 90년대중반이후구제발굴로인해전국에서는다수의고려시대분묘들에대한발굴조사가진행되었고상당량의보고서도간행되었 야한다는또다른조목과연관된것이다. 10) 재지이족과사족의분화양상에대해서는 이수건, 영남사림파의형성과전개 ( 영남대학교출판부, 1995) 를참조하라. 11) 대표적인사례로단양현곡리유적을들수있다 ( 서울시립대학교, 단양현곡리고려고분군, 2008). 12) 이종민, 앞의글, 1994.

6 石堂論叢 51 집 다. 자료의증대는연구로이어져 90년대후반이후고려시대분묘에대한연구가나오기시작했다. 따라서고려시대분묘연구에대한검토로부터논의를시작해보려한다. 2. 고려분묘연구의경향과분묘부장품에대한분석 1) 연구의경향과문제점고려시대분묘연구는크게두가지측면에서진행되었다. 우선고려시대분묘의편년설정과피장자의계층규명에목적을둔연구가있다. 편년은고고학연구의기초이므로상당수의연구는이문제에천착하고있다. 고려분묘편년설정에대한연구는고려시대대표적인묘제인석곽묘와토광묘의선후관계에집중되었다. 그결과석곽묘에서토광묘로묘제가변화하였다는점에대해서는연구자들의견해가일치하지만, 그변화의시기에대해서는고려후기즉 13세기말로파악하는견해 13) 와기본적으로고려시기까지는두묘제가혼재하다조선전기에이르러토광묘로수렴된다는견해 14) 가각각제출된바있다. 석곽묘와토광묘의계급성에대해서대다수의연구자들이석곽묘의피장자가토광묘의피장자보다우월했음을인정하나, 큰계급적차이를가지고있지않다는데동의하고있다. 15) 다만석곽묘와토광묘의 13) 고성영, 고려석곽묘와토광묘연구, 명지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4. 양미옥, 충청지역고려시대무덤연구, 한남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5. 김은경, 청자로본영남지방고려시대분묘, 경북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8. 이수정, 충북지역고려고분연구, 숭실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9. 14) 이희인, 중부지방고려시대고분연구, 성균관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3.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7 피장주체인지방하층민이구체적으로고려에서어떤지위에있었는지에대해서는논란의여지가있다. 토광묘의피장자를일반民으로간주하기도하나 16) 석곽묘에서출토되는청자의수준이나금속기의존재를고려할때지방의유력자즉향리세력으로보는것이타당하리라판단된다. 한편관인분묘로규정한묘역시설을갖춘분묘 17), 중부지역석곽묘 18), 토광묘 19) 를기본자료로삼아출토유물을기준으로고려전기와후기혹은고려전기, 중기, 후기의각묘제의축조수법혹은부장품양상을분석하기도했다. 이에반해분묘의편년이나피장자에대한관심보다분묘에서출토된부장품에주의를기울인연구도있다. 상주청리고려고분군출토청자의편년을시도한연구와경기지역고분출토질그릇을검토하여편년화하고그특징을살펴본연구가대표적이다. 20) 이밖에도몇몇연구자들이고려분묘에서출토된청자에관심을기울여연구를진행하였는데, 개성지역출토청자를개괄한연구 21), 분묘출토청자의기종과조합을검토하여소비방식에주의를기울인연구 22), 왕릉과각지역별분묘출토청자의특징을검토한연구 23) 가제출된바있다. 15) 이희인은고려시대분묘를石室墓, 板石造石槨墓, 割石造石槨墓, 土壙墓로구분하고석실묘와판석조석곽묘는왕족과중앙의고위관료들의묘제로, 할석조석곽묘와토광묘를지방하층민의묘제로파악하였다. 16) 김인철, 고려무덤발굴보고, 사회과학출판사, 2002. 17) 주영민, 고려시대지배층분묘연구, 지역과역사 17, 2005. 18) 황정욱, 고려시대석곽묘연구, 단국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2. 19) 박미욱, 고려토광묘연구, 부산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6. 20) 남진주, 상주청리고려고분군출토청자, 충북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98. 한혜선, 경기지역출토고려시대질그릇연구, 단국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1. 21) 방병선, 개성출토고려청자의연구, 강좌미술사 17, 2001. 22) 이종민, 고려분묘출토도자연구, 호서사학 46, 2007. 23) 강진청자박물관, 고려시대분묘출토청자유물특별전, 2007.

8 石堂論叢 51 집 이들연구가운데고려분묘의묘제와부장품을검토해그변화상을추적한연구가내린결론에주목할필요가있다. 토광묘의부장품을분석한박미욱은고려시대를 3기로시기구분하고 1기는 9세기말에서 11 세기말, 2기는 12세기에서 13세기중엽, 3기는 13세기중엽~14세기말까지로편년한후각각의시기의부장품양상을정리하였다. 정리에의하면 1기에는부장품양상이빈약하고청자류가절대다수를차지하는반면 2기에는다양한청동식기, 청자류가출토되고있으며중국동전의출토가현저하다. 3기에이르면동전은대폭감소하고동기의부장례는소폭감소하며도기류가확대되고있다. 이러한분석을바탕으로박미욱은고려시대토광묘는 처음지방토호세력과중간계층 이주로사용하다고려말에이르러하층계층이토광묘제를채택함에따라부장품의변화즉부장품의종류가단순해지고청자의부장이감소하는현상이발생했다고결론지웠다. 이러한결론은기존의고려시대청자연구에중요한시사점을제공한다. 앞서언급한것처럼 14세기들어청자가대중화되고대량생산되어청자의질이조악해진다는연구와서로상충하기때문이다. 그런데박미욱연구를검토해보면그의분석에문제점을발견할수있다. 첫째, 출토품을분류하는방식에문제가있다. 청동식기에靑銅匙箸와청동발 ( 완 ) 합을합산하였는데, 匙箸와器皿을하나로범주화하는방식은청동그릇과자기그릇사이의관계를이해하는데적절하지못하다고판단된다. 따라서시저와기명을분리해보면다른양상을확인할수있을것이다. 둘째, 고고학적접근이가지는특징이겠지만, 박미욱은개별분묘에대한분석을하지않고전체고려분묘출토품을 형식분류 한후순서배열법에따라편년하였다. 그러나청자는이미다수의절대편년자료가확보되어있고이를바탕으로청자에대한편년이이루어져있으므로이를근거로하면개별분묘들에대한개략적인편년이가능하다.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9 실제단양현곡리유적의경우출토청자를바탕으로개별분묘에대한편년이이루어져있다. 따라서전체를통합하지않고개별유적의분묘출토청자를바탕으로편년을시도하면새로운결론을도출할여지가있다. 이러한문제의식을바탕으로본고는비교적대규모의분묘가확인된 9개유적을분석하되, 각각의분묘에서출토된청자를기초로각유적의개별분묘에대한편년을시도하였다. 그리고이를토대로분묘출토품의시대적양상을살펴보았다. 2) 고려시대분묘유적의편년과그특징앞서언급한것처럼 90년대이후왕성한구제발굴로인해상당수의고려분묘에대한조사가진행되었다. 24) 지면의한계, 더직접적으로는필자의한계로인해전체유적을다분석의대상으로삼지못했다. 여기서는 9개의유적을중심으로논지를전개해나갈것이다. 본고에서 9 개의유적을검토대상으로삼은것은몇가지이유가있다. 우선분묘의규모를고려했다. 90년대이후상당수의고려시대분묘에대한발굴조사가이루어져왔다. 그러나현상변경지역만을발굴하는구제발굴의특성상소수의분묘가출토된유적이많다. 25) 지면의한계상이들 24) 현재발굴조사된고려시대분묘가정확하게몇기에달하는지는정확히확인하기어렵다. 2009 년까지여러연구를통해소개된유적만도 69 곳에달한다. 25) 69 곳의유적가운데 42 곳에서 10 기미만의고려분묘가확인되었고 10 기이상발견된곳은 27 곳이다. 27 곳의유적과분묘는아래표와같다. 분묘수는발굴자가고려시대분묘로규정한것을따르되일부유적의분묘수는청자가출토된분묘만을계산했다. 출토품이없는분묘의경우정확한조성연대를확인할수없기때문이다 ( 본고에서점토한유적은짙은색표시 )

10 石堂論叢 51 집 유적을모두검토할수없었다. 이에비교적유적규모가큰유적과부장유물이풍부하여분묘의편년이가능한유적을검토의대상으로삼았다. 둘째본고의출발점은 14세기자기변화의원인을소비의차원에서규명하려한것이다. 이를해명하기위해서는 14세기와다른시기분묘부장품을양상을검토할필요가있다. 따라서고려전기의대표적분묘유적과후기의대표적분묘유적혹은그조성시기가고려전체시기에걸쳐있는유적을선정하였다. 1 상주청리유적상주청리유적은경부고속전철차량제작지건설부지로 1996년 5월부터 1998년 4월까지 2차에걸쳐발굴조사가진행되었다. 삼국시대~조선시대에걸친 680여기의분묘가조사되었으며이가운데고려시대이후분묘는 500여기에달한다. 상주청리유적에서는고려전기로추정되는녹청자가다수출토되었고남진주는이녹청자를면밀히검토해청리출토녹청자가 10~11세기지방양식의청자로 결론지웠다. 26) 그러나보고자들은청자가출토된분묘를대략 11세기에서 12세기전반으로편년했다. 27) 고려시대분묘 (10 기이상확인된유적 ) 유적명 분묘수 유적명 분묘수 유적명 분묘수 1 고양더부골유적 65 10 충주호암동 24 19 경주검단리유적 20 2 안산대부도육곡1,2 47 11 충주직동 15 20 고령지산동유적 27 3 용인좌항리유적 16 12 청주명암동유적 1,2 40 21 봉화금봉리분묘군 17 4 용인마북리 14 13 청주용암동금천유적 260 22 산청생초유적 11 5 여주하거리방미기골 19 14 단양현곡리 33 23 산청평촌리유적 89 6 보령구룡리유적 13 15 옥천옥각리 11 24 상주청리 29 7 보은부수리고분군 13 16 진안수천리 90 25 포항호동유적 12 8 공주신기리 13 17 경산임당유적 31 26 부산덕천동유적 16 9 충주단월동1,2,3 36 18 경주물천리 10 27 청도대전리유적 49 26) 남진주, 앞의글, 1998. 27)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상주청리유적 Ⅴ Ⅵ, 1998. 남진주는개별유구별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11 보고서에의하면상주청리의 A( 가, 나, 다 ) 지구에서확인된고려시대이후분묘는모두 425기이다. 이가운데청자대접과완이출토된분묘는모두 29기이고이를정리한것이 < 표1> 이다. < 표1> 에서확인되듯이, 편년가능한분묘가 28기이며 11~12 세기로편년되는유구는 20기, 14세기가 1기, 15세기가 7기이다. 한편상주청리유적에서청동합 ( 발 ) 이출토된분묘는모두 11개소이고이를정리한것이 < 표2> 이다. 청자와달리청동합은출토수량이작고편년도용이하지않아자기가공반하는 5개소의분묘만편년했다. 11~12세기전반기가 2기, 14세기가 1 기, 조선시대가 3기였다. < 표1> 과 < 표2> 를통해청자대접과청자완은주로 12세기전반기이전에출토되고청동합은 14세기이후에주로출토됨을확인할수있다. 문제는이것이지역적인현상인아니면시대적인현상인지이다. 이는다른유적의양상을검토해보면확인할수있을것이다. < 표 1> 상주청리분묘중청자기명이출토된분묘 번호 유구명 도기병 청자완 청자대접 청자접시 1 청리A-나64토광 3분청 2 15c 2 청리A-나28토광 1 1분청 15c 3 청리A-나49토광 1분청 15c 4 청리A-나68토광 2분청 15c 5 청리A-가146토광 1분청 1 15c 6 청리A-가150토광 1 1팔각 1 1 1 14c 7 청리A-가89토광 1 1 11전~12전 8 청리A-가94토광 1 1 11전~12전 9 청리A-가151토광 1 1 1 11전~12전 10 청리A-다42토광 1 1 11전~12전 11 청리A-가53토광 2 1 1 1 11전~12전 12 청리A-나6 토광 1 11전~12전 13 청리A-가162토광 1 1 11전~12전 14 청리A-가226토광 1 1 11전~12전 청자병 청동합 청동시 청동저 동곳 편년 로편년하지않아본고에서는일단개별유구를편년한보고자의견해를일단따랐다.

12 石堂論叢 51 집 15 청리A-다25토광 1 1 1광구 1 11전~12전 16 청리A-가22토광 1 1 1 11전~12전 17 청리A-가158토광 1 1 11전~12전 18 청리A-가52토광 1 1 11전~12전 19 청리A-나56토광 1 1광구 11전~12전 20 청리A-나66토광 1 1철화 11전~12전 21 청리A-나95토광 1 1광구 11전~12전 22 청리A-다90토광 1 1 1 1 11전~12전 23 청리A-가217토광 2 1 11전~12전 24 청리A-다60토광 2 1 11전~12전 25 청리A-나59토광 1 1 11전~12전 26 청리A-가19토광 1 1 11전~12전 27 청리A-가108토광 1 1 1 11전~12전 28 청리A-가65토광 1분청 15c 29 청리A-가169토광 1 1광구 < 표 2> 상주청리분묘중銅器가출토된분묘 번호 유구명 도기병 청자완 / 대접 청자접시 청자병 백자백자대접접시 동전 청동합 / 발 청동시 / 철제가저위 1 청리A-가228토광 1 1/ 11전~12전 2 청리A-가22토광 1 1/ 1/ 11전~12전 3 청리A-가150토광 1 1팔각 1/ 1/1 14c 4 청리A-나67토광 1/ 1/ 15c초 5 청리A-가192토광 1 1/ 1/ 조선 6 청리A-가224토광 1 1/ 1/ 1(x자 ) 조선 7 청리A-나96토광 1/ 1/ 8 청리A-가166토광 1/ 1/ 9 청리A-가141토광 1/ 1/ 10 청리A-다81토광 1 1/ 11 청리A-가46토광 1/ 1/1 편년 2 청주용암유적Ⅱ 청리유적에서확인한결과를보증하기위해, 고려전기분묘유적으로유명한청주용암유적Ⅱ를살펴보자. 청주용암택지개발의일환으로시작된용암금천동 Ⅱ-1 2유적에서모두 260기의고려시대이후분묘가조사되었다. 28) 조사결과중심연대가 11~12 세기로추정되는다수의고려시대분묘가확인되었고상당량의청자류, 도기류, 청동제품 28)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청주용암유적 Ⅱ, 2000.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13 이출토되었다. 여느유적과마찬가지로용암유적역시출토청자를중심으로편년이이루어졌으므로청자대접 / 완와청동발 / 합을중심으로하여공반출토양상을살펴보았다. 전체 260기의분묘에서청자대접 / 완이출토된분묘는모두 42개소이고이가운데 9개소는편년이불확실하고나머지 33개소는그편년이가능하였는데 11세기에조성된분묘는소수이고대다수는 12세기에조성된것으로조사자들은판단하였다. 이가운데청동발 / 완이출토되는유구가운데조성시기를확인할수있는유구는모두 10기이며 12세기로편년되는분묘가 5기, 조선시대로편년되는분묘가 5기이다. 특히銅器이외에도용암유적에서는다수의동전과동경등이출토되고있어동기의부장이청리보다많았음을알수있다. 이러한차이의원인은무엇일까? 상주청리유적을대략용암유적보다조금앞선시기로편년한연구 29) 를고려하면시기적차이로간주할수도있으나, 지역적차이일가능성도배제할수없다. < 표 3> 청주용암유적 Ⅱ 분묘중청자기명이출토된분묘 번호 유구명 유물명 청자대접 / 완 청자접시 청자병 청자유병 동청동발 / 청동시 / 전합저 철제가위 1 금천2-2,28호토광 1 분청 1 분청 15c 2 금천2-1,105호토광 1 1 12c초 3 금천2-1,220호토광 1 녹청자 1 12c초 4 금천2-1,87호토광 2 12c초 5 금천2-1,133호토광 1 1 12c초 6 금천2-1,17호토광 1 연판문 12c? 7 금천2-2,8호토광 1 12c? 8 금천2-1,207호토광 1 잔 1흑갈유 5 2발, 접시 1 1 8자형 12c? 9 금천2-1,83호토광 1 12c 10 금천2-1,93호토광 1 1 12c 11 금천2-2,17호토광 1 1 12c 12 금천2-1,47호토광 1 연판문 1 12c 13 금천2-1,89호토광 1 1 1 8자형 12c 편년 29) 박미욱, 앞의논문, 2006; 남진주, 앞의논문, 1998.

14 石堂論叢 51 집 14 금천2-1,129호토광 1 1 1 12c 15 금천2-1,28호토광 1 1 5 1 12c 16 금천2-1,136호토광 1 12c 17 금천2-1,167호토광 1 1 1 8자형 12c 18 금천2-1,126호토광 1 1 12c 19 금천2-1,154호토광 1 1 소병 1 12c 20 금천2-1,204호토광 1 1 12c 21 금천2-1,206호토광 1 1 1 8자형 12c 22 금천2-1,148호토광 1 연판문 1압출 1 12c 23 금천2-2,15호토광 /1 압출 1 1편 12c 24 금천2-1,128호토광 1 1 광구 12c 25 금천2-1,90호토광 1 1 1 12c 26 금천2-1,49호토광 1 연판문 6 12c 27 금천2-1,113호토광 1 연판문 1 12c 28 금천2-1,100호토광 1 연판문 1 1 12c 29 금천2-1,64호토광 1 1 7 1 12c 30 금천2-2,7호토광 1 12c 31 금천2-1,16호토광 /1 1 8자형 11~12초 32 금천2-1,20호토광 1 1 11~12? 33 금천2-1,1호토광 1 1 11~12 34 금천2-1,180호토광 1 편1 35 금천2-1,211호토광 1 1 3 1 36 금천2-1,183호토광 1 1 37 금천2-2,9호토광 1 1 1 38 금천2-1,117호토광 1 1 1 X자 형 39 금천2-1,216호토광 1 1 40 금천2-1, 호176토광 /1 1 8자형 41 금천2-2,6호토광 1편 1 1 1 42 금천2-2,22호토광 1 잔 < 표 4> 청주용암유적 Ⅱ 분묘중동기가출토된분묘 번호 유구명 유물명 청자대접 / 완 청자접시 청자병 백자 동 전 청동발 / 청동합 / 접시시 / 저 동곳 철제가위 1 금천2-1,23호토광 1/ / 2 금천2-1,30호토광 1 3 1/ / 1 1 1 8자형 3 금천2-1,50호토광 13 1/ / 1 4 금천2-1,52호토광 2 소호 1/ / 1 조선 5 금천2-1,56호토광 1/ / 1 6 금천2-1,58호토광 1 1/ / 1 1 7 금천2-1,60호토광 1/ / 1 1 1 8자형 8 금천2-1,70호토광 1/ / 1 9 금천2-1,74호토광 1/ / 1/1 1 1 8자형 편년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15 10 금천2-1,79호토광 1 1/ / 1/1 12c 11 금천2-1,82호토광 1 1/ / 2 12 금천2-1,102호토광 1/ / 1 1 1 8자형 13 금천2-1,112호토광 1/ / 1 14 금천2-1,118호토광 1/ / 1 15 금천2-1,123호토광 1/ / 1 16 금천2-1,194호토광 1/ / 1 17 금천2-1,196호토광 1분청종지 1/ / 1/1 15c 18 금천2-1,151호토광 1압출 1/ / 1 12c 19 금천2-1,185호토광 10 / /1 1 1 8자형 20 금천2-1,73호토광 1 광구 5 / /1 1 1 8자형 12c 21 금천2-1,55호토광 1 유병 5 1/ /1 1 1 1 8자형 22 금천2-1,57호토광 5 1/ /1 1 1 8자형 23 금천2-1,127호토광 1흑갈유 10 1/ /1 1/1 12c 24 금천2-1,114호토광 1/ /1 1/1 조선 25 금천2-1,122호토광 1/ /1 1 26 금천2-1,163호토광 4 1/ /1 1/1 27 금천2-1,175호토광 1/ /1 1 1 1 8자형 28 금천2-1,207호토광 /1완 1흑갈유 5 1/ /1 1 1 8자형 12c 29 금천2-2,6호토광 1 1 1/ / 1 30 금천2-1,26호토광 1 분청 2 접시 /1/ 1/1 1 조선 31 금천2-1,29호토광 /1/ 1 조선 3 진안수천리고려분묘그럼다른지역에서의양상은어떨까? 수천리고려고분군은중심연대가 11~12세기중반으로편년되는유적이다. 30) 따라서수천리유적의양상을확인해볼필요가있다. 수천리유적에서는모두 98기의고려시대이후분묘가조사되었으나조선시대석곽묘 5기와회곽묘 3기도조사되었으므로, 이들을제외한 90기의고려시대분묘 ( 석곽묘 53기와토광묘 37기 ) 를검토하였다. 청자대접 / 완과청동합 / 발을중심으로분류한것이 < 표5> 와 < 표6> 이다. 90기의분묘가운데청자완 / 발 ( 대접 ) 이출토된곳은모두 18개소이고이가운데편년이가능한곳은 13개소이며중심연대는 11~12세기전반기이다. 특히수천리유적에서는초기청자인해무리굽완이비 30) 원광대학교마한 백제문화연구소, 수천리고려고분군, 2001.

16 石堂論叢 51 집 교적다수출토되어이른시기부터조성되었음을확인할수있다. 청자완 / 대접이출토된분묘가운데청동합 / 발을공반출토된분묘는모두 5 개소이고이는청동합과발이출토된 12기의분묘의 41.7% 를차지한다. 상주청리유적과는달리 11세기로편년되는해무리굽과함께청동합과발이공반출토되고있어비교적이른시기부터청동합이출토되고있다. 또청주용암유적과는달리다수의청동기가확인됨에도불구하고동전이전혀출토되지않고있다. 따라서비슷한시기의상주청리, 청주명암유적과는그양상이다르다. 이러한차이의원인은보다면밀히검토가필요할터이나, 현재로는지역적차이로파악하는것이타당할것으로보인다. < 표 5> 진안수천리분묘가운데청자기명이출토된분묘 번 유물명 도기 청자완 / 발청자 청자병 동전청동 청동합 청동 동 편년 호 유구명 접시 병 / 발 시 / 저 곳 1 수천리22호토광 1/ 발1 2 수천리23호석곽 1발 1/ 발1 2/1 12c 3 수천리28호석곽 1/ 1 광구병 4 수천리9호토광 1병 1/ 1 2 유병 1 12c 5 수천리18호석곽 1( 당초 )/ 연판 2병, 2연판문발문1 1주자 12 말 ~ 13 초 6 수천리7호석곽 1발 1해무리 1 11c 7 수천리5호석곽 2해무리 1편병 1접시 /2 1/ 11c 8 수천리35호석곽 1발, 2병 1해무리 1접시 /3 11c ( 광구, 유병 ) 9 수천리42호석곽 2발 1해무리 1연판광구 1/ 1/ 11c 10 수천리49호석곽 1해무리 1/ 11c 11 수천리10-1호토광 1병 /1 1 1유병 12c 12 수천리30호석곽 /2 1 1철화광구 12c 13 수천리26호토광 /1 분청 1/ 조선 14 수천리48호석곽 1병 /1 녹청 1 2/ 1 12c 15 수천리44호석곽 /2 녹청 1 1흑갈유 1/1 16 수천리39호석곽 /1 무문발 1/ 17 수천리17호토광 1병 /1 발 1 18 수천리27-2호석곽 /1발( 연판 ) 12c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17 < 표 6> 진안수천리분묘가운데동기가출토된분묘 번호 유물명유구명 도기 청자완 / 대접청자접시 청자병 동전 청동청동청동접시합 / 발시 / 저 동곳 철제편년가위 1 수천리44호석곽 /2녹청 1 1흑갈유 1/1 2 수천리31호석곽 1/ 3 수천리42호석곽 2발 1해무리 / 1연판광구 1/ 1/ 11c 4 수천리8호토광 1/ 1/1 5 수천리23호석곽 1발 1/1연판문발 2/1 12c 6 수천리45호석곽 2/ 1/1 2 조선 7 수천리12호석곽 1 /1 8 수천리36호석곽 /1 1/ 9 수천리41호석곽 1발, 1편병 1 1흑유 /1 10 수천리32호토광 1상감유병 /1 1/ 13c 11 수천리5호석곽 2해무리 / 1편병 1 /2 1/ 11c 12 수천리35호석곽 1발, 2병 ( 광구, 유병 ) 1해무리 / 1 /3 11c 4 부산덕천동유적그럼시간적차이는확인되지않을까? 이를위해 12세기후반기에서 13세기전반기가중심연대로파악되는부산덕천동유적을살펴보자. 동아대학교에의해 2002~2006년까지발굴된부산덕천동유적에서는모두 16기의고려시대토광묘가확인되었다. 31) 부장품이상대적으로풍부하게나온이유적에서청자대접이출토된분묘는모두 11기로전체의 64% 에달한다. 출토된대접은주로 12세기에서 13세기전반기로편년되며청자는상감청자가다수를차지하고음각혹은양각의문양이시문된청자도확인되었다. 銅器는유일하게 9호토광묘에서확인되었는데상감마상배와함께청동접시 1, 청동합 1, 청동발 1, 청동시저각 1벌이출토되었다. 32) 이외청자대접 / 완이출토된분묘에서銅器는확인되지않는다. 다만 1호토광에서 16매의동전이출토되었으며, 31) 동아대학교박물관, 구포덕천동유적, 2006. 32) 9 호토광묘의조성연대를 13 세기중엽으로산정하였으나유사한마상배가진도용장성에출토된바있으므로 9 호토광묘의연대는 13 세기후반까지내려볼수도있다.

18 石堂論叢 51 집 표에는제시되지않았지만, 1호 6호 16호토광묘에서동경이출토되었다. 고급의청자가부장이풍부한데반해동제품은청동숟가락이다수를차지할뿐동기의부장은빈약하다. 따라서덕천동유적을통해서 12세기후반기부터銅器가감소하는경향을추론할수있다. 그러나아직은추론에불고하다. 이역시지역적차이일가능성도높기때문이다. 이러한문제를해결하기위해비교적긴시간에조성된유적을검토할필요가있다. 안산대부도육곡유적과단양현곡리유적은 11세기부터 14세기에조성된분묘로잘알려져있어유익한정보를제공받을수있을것으로기대된다. < 표 7> 부산덕천동고려분묘가운데청자기명이출토된분묘 번 유구명 도기청자 청자 청자 청자 청자 동청동청동청동청동 동 편년 호 병 완 대접 접시 병 유병 전접시 합 발 시 / 저 곳 1 덕천고려8호토광 1 1 2 덕천고려3호토광 1 1 1/ 1 12c 3 덕천고려14호토광 1 4 덕천고려5호토광 1 1 상감 2 1/ 13c전반 5 덕천고려2호토광 1 양각 2 1녹유 1/ 12말~13c 6 덕천고려4호토광 1 반구 1 2 1/ 13c전반 7 덕천고려16호토광 1 반구 1 1 2 1 1/ 1 12c후반 8 덕천고려10호토광 2 상감 1/ 13c전반 9 덕천고려6호토광 2 1상감 1향합 1 상감 1/ 13c전반 10 덕천고려15호토광 2 2 1/ 13c전반 11 덕천고려1호토광 1 반구 3상감 2 1녹유 16 1/1 12말~ 13c전반 12 덕천고려9호토광 1마상배 1 1 1 1/1 13c 5 안산대부도육곡고려고분군 Ⅰ Ⅱ 안산대부도육곡고려고분군은한양대학교박물관에의해고려시대석곽묘 10기와토광묘 37기총 47기의고려분묘가발굴조사되었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19 다. 33) 이가운데편년가능한청자완 / 대접이발굴된분묘는총 17기이고, 자기편만발견된 14호토광을제외한 16기의분묘는편년가능하다. 11~12 세기로편년되는분묘가 4기, 13세기로편년되는분묘가 1기, 14세기로편년되는분묘가 11기이다. 이들분묘가운데청동합 / 발이공반출토된분묘는 3기이며모두 14세기의분묘인데, 청동합 / 발이출토된전체분묘 6기의 50% 에해당한다. 특히銅器가출토된 6기의분묘가운데 14세기로편년되는유구가 4기나된다는사실이주목된다. 이를통해안산대부도육곡고려고분군유적에서는銅器가 14세기에비교적많이출토되고있음을알수있다. < 표 8> 안산대부도육곡유적가운데청자기명이출토된분묘 번호 유구명 도기병 청자완 / 대접 청자첩시 청자병 청자유병 백자동청동청동전합 / 발시 / 저 동철제곳가위 1 대부도7호석곽 주름11/ 1 11~12 2 대부도7호토광 /1 1 1정요 8 12c 3 대부도13호토광 /1 1상감 1상감 / 편1 1 14c 4 대부도26호토광 /1 1 /1 /1 14c 5 대부도34호토광 편병1/1 / 편1 1 x 14c 6 대부도3호토광 /2 /1 14c 7 대부도4호석곽 1 /3 1화형 1 1접시 1 14c 8 대부도22호토광 /2( 상감국화 )1 1 /1 14c 9 대부도24호토광 1 /2( 양각연판, 상국국화 ) 13c중 10 대부도1호토광 /1상감국화 1화형 1상감 /1 14c초 11 대부도35호토광 /1상감국화 1상감 /1 1 1 x14c 12 대부도16호토광 /1상감운학 /1 /1 14c 13 대부도33호토광 /1상감횡선 2 14c 14 대부도2호토광 /1양각당초 / 편1 11~12 15 대부도9호석곽 /1양인각 1광구 12c 16 대부도30호토광 /1청자잔 1 1 / 편1 14c 17 대부도14호토광 / 편1 / 편1 편년 33) 한양대학교박물관, 안산대부도육곡유적 1 2, 2002 2006.

20 石堂論叢 51 집 < 표 9> 안산대부도육곡유적가운데동기가출토된분묘 번호 유구명 청자완 / 대접 청자접시 청자병 청자유병 백자 동전청동합 청동발 청동시 / 저 동곳 철제가위 1 대부도29호토광 1 1분합 1 1x형 14c 2 대부도1호토광 /1상감 1접시 1상감 1 14c초 3 대부도26호토광 /1 1 굽1 1/ 14c 4 대부도2호석곽 편1 5 대부도9호토광 1광구 30 편1 12c 6 대부도16호토광 /1상감 편1 1/ 14c 편년 6 단양현곡리고려고분군충북단양군적성면현곡리에위치한현곡리고려고분군은중앙고속도로구간에편입되어서울시립대학교에의해긴급구제발굴되어세간에알려지게되었다. 조사결과전체 35기의분묘가운데 33기가고려시대분묘로확인되었고석곽묘가 27기, 토광묘가 6기였다. 현곡리고려고분군에서는다수의자기와도기및동기가발굴되었을뿐아니라인골도확인되어고려사회를이해하는데중요한정보를얻을수있었다. 34) 특히현곡리고려고분군은형태에따라분묘를분류하여그성격을검토하거나, 출토자기를중심으로개별유구에대한편년을시도하였으며, 인골에대한 AMS 검사를실시해개별분묘의축조시기를분석하기도했다. 때문에비록시기에따라부장양상이어떻게변화하였는가를파악하는데현곡리고려고분군은중요한정보를제공해준다. < 표 10> 단양현곡리고려고분군분묘가운데편년가능분묘 번 유물명도기호청자완 / 대접청자접시 / 병백자 동청동청동 청동 동 철제가 편년 호유구명 / 병 / 유병 대접 전 병 합 시 / 저 곳 위 1 현곡5호석곽 1 해무리 / /1 10후~11전 2 현곡22호석곽 /1광구/ 12~13전 3 현곡27호석곽 /1발 /1호/ 1 12~13전 4 현곡9호석곽 /1광구 /1발( 앵무문 )/1 1(8자형 ) 12~13전 34) 서울시립대학교, 단양현곡리고려고분군, 2008.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21 5 현곡6호석곽 /1유병 /1편 1 1(8자형 ) 12~13전 6 현곡2호토광 /1발 /1/ 12~13초 7 현곡8호석곽 1/ /1발 1 1(8자형 ) 12C 8 현곡16호석곽 /1압출발 1/1광구 / 12C 9 현곡10호석곽 1화문접시 // 12C 10 현곡2호석곽 /1광구 1압출 / 1완 12중후 11 현곡24호석곽 /1 /1발 1 1(8자형 )12후~13 12 현곡6호토광 1/ 편1 1 1(8자형 )12후~13전 13 현곡18호석곽 1/ 1백퇴화문 // 1 1/ 13c 14 현곡23호석곽 1압출 /1잔 1백퇴화문 /1 병,1상감주자/ 1잔 13c 15 현곡1호토광 /1발( 압출 ) 1 광구 13C 16 현곡25호석곽 /1발 /1광구/1 1 13C 17 현곡12호석곽 1/1 1 1 13C 18 현곡11호석곽 /1발 /1/ 13C 19 현곡7호석곽 /2 유병 /1발 1 13C 20 현곡21호석곽 /1 /1 1 1/ 1(x형 ) 13후~14c 21 현곡15호석곽 /1표형 1평저 // 1 1/ 13후~14c 22 현곡14호석곽 1 1/1 14c 23 현곡5호토광 /1 1 1/1 14c 24 현곡3호토광 1/ 2// 1 1/1 1 1(x형 ) 14c 25 현곡26호석곽 /1 /1발, 1발편 /1광구/1 1/1 1 14c 26 현곡17호석곽 1소호 / 편1 1/ 14C 27 현곡4호토광 1/ /1발( 상감 ) 1 1/ 14c말 28 현곡3호석곽 /1잔 후기 위표는보고자들의편년에따라정리한것이다. 35) 전체 33기의분묘가운데편년가능한분묘는모두 28기이고이가운데 10세기후반에서 11세기전반기에해당하는분묘가 1기, 12세기전반에서 13세기에해당하는분묘가 18기, 13세기후반부터 14세기에해당하는분묘가 8기, 고려후기로편년되는분묘가 1기이다. 따라서현곡리고분군의중심축조연대는 12~13 세기로볼수있다. 우리의주제와관련하여주목되는점은銅器의출토양상이다. 아래 < 표 11> 에서확인할수있듯이銅器가출토된분묘는모두 11이다. 그가운데편년할수없는분묘가 1기이고나머지 10기는공반출토된청자를통해편년하였는데, 3기는 35) 단양현곡리고려고분군에대한편년은보고서의별고로강경숙이진행한바있고본고는그편년을따랐다.

22 石堂論叢 51 집 12세기후반~13세기, 7기은 13세기후반~14세기에조성된것이다. 따라서현곡리고려고분군에서도 13세기후반이후로銅器가다수출토되고있음을확인할수있다. 그럼 14세기를중심연대로하는다른유적들은어떨까? 이제 14세기가중심연대인경주검단리유적, 고양더부골유적, 청도대전리고려 조선고분군을검토해보자. < 표 11> 단양현곡리고려고분군가운데청동합 / 발이출토된분묘 번호 유물명유구명 청자대접 청자접시청자병청동병청동합청동시 / 저 동곳 철제가위 1 현곡4호석곽 1호 1 1 1(8자형 ) 2 현곡6호토광 편1 1 1(8자형 )12후~13전 3 현곡18호석곽 1백퇴화문 1 1/ 13c 4 현곡12호석곽 1 1 13C 5 현곡15호석곽 1평저 1 1/ 13후~14c 6 현곡21호석곽 1 1 1/ 1(x형 ) 13후~14c 7 현곡3호토광 2 1 1/1 1 1(x형 ) 14c 8 현곡14호석곽 1 1/1 14c 9 현곡5호토광 1 1/1 14c 10 현곡17호석곽 편1 1/ 14C 11 현곡4호토광 발1( 상감 ) 1 1/ 14c말 편년 7 경주검단리유적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2005년발굴한경주검단리유적에서는모두 110기의고려시대이후토광묘가확인되었다. 36) < 표 12> 에서확인할수있듯이, 이가운데청자대접과접시가출토된분묘는모두 20기로전체의 18% 정도를차지한다. 이중대접과접시가공반출토된분묘가 9기, 대접만출토된분묘가 5기, 접시만출토된분묘는 6기이고편년가능한분묘는 19기이다. 이 19기에서출토된청자는도식화된상감문양과기형에서전형적인 14세기청자의특징을가지고있어모두 14세기에제작된것으로판단된다. 한편검단리유적에서는다수의銅器도출토되었다. < 표 13> 은검 36)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경주검단리유적, 2007.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23 단리유적에서銅器가출토된분묘를정리한것이다. 전체 110기의분묘가운데 26기가확인되어전체의 23.6% 에달하는분묘에서銅器가출토되었다. 이중청동발 ( 완 ) 과접시가공반출토된분묘가 3기, 청동합만출토된분묘가 2기, 청동발 ( 완 ) 만출토된분묘가 21기이며, 편년가능한분묘는 14기이다. 이가운데 13기는공반하는청자를통해그조성연대를확인할수있고 31호토광묘의경우출토된도기호가전형적인 14세기도기호로판단되어 14세기로편년했다. 37) < 표 12> 경주검단리유적가운데청자기명이출토된분묘 번호 유구명 유물명 도기병청자완 청자대접 청자접시 동전 청동병 청동합 / 청동청동시접시발 / 저 동철제곳가위 1 검단리92호토광 1 1 /1 1 1/ 14c 2 검단리28호토광 1 1 1 1 1/ 14c 3 검단리36호토광 1녹유 1 1 1 1/ 1 14c 4 검단리61호토광 1 1 1 1/ 14c 5 검단리69호토광 1 1 1 1 1/ 14c 6 검단리50호토광 1 2 1 1/1 14c 7 검단리47호토광 1 1 1 1/1 14c 8 검단리37호토광 1 14c 9 검단리58호토광 1 1/ 14c 10 검단리59호토광 1 1 14c 11 검단리17호토광 1 1 1 1/ 1/ 14c 12 검단리57호토광 1 2 1 1/ 14c 13 검단리19호토광 2 3( 접시, 종지 ) 1 1/ /1 14c 14 검단리91호토광 1 1( 팔각 ) 14c 15 검단리51호토광 2 1 /1 1 1/1 1 14c 16 검단리63호토광 1 1 1/1 1 14c 17 검단리67호토광 1 1 1/ 14c 18 검단리43호토광 1 1( 팔각 ) /1 1 1/1 14c 19 검단리3호토광 1 1화형종지 1 1/1 12~13 20 검단리18호토광 1 1 1 편년 37) 14 세기호의특징에대해서는 주영민, 앞의논문, 2005 를참조.

24 石堂論叢 51 집 < 표 13> 경주검단리유적가운데銅器가출토된분묘 번호 유물명유구명 도기병 청자대접 청자접시 동청동합청동전 / 접시발 청동시 / 저 동곳 철제가위 1 검단리50호토광 1 2 1 1/1 14c 2 검단리51호토광 2 1 /1 1 1/1 1 14c 3 검단리92호토광 1 1 /1 1 1 14c 4 검단리36호토광 1녹유 1 1 1 1 1 14c 5 검단리43호토광 1 1( 팔각 ) /1 1 1/1 14c 6 검단리69호토광 1 1 1 1 1 14c 7 검단리47호토광 1 1 1 1/1 14c 8 검단리67호토광 1 1 1 14c 9 검단리63호토광 1 1 1/1 1 14c 10 검단리61호토광 1 1 1 1 14c 11 검단리28호토광 1 1 1 1 1 14c 12 검단리17호토광 1 1 1 1/ 1/ 14c 13 검단리19호토광 2 3 1/ /1 14c 14 검단리31호토광 1호 1 1( 편 ) 14c 15 검단리3호토광 1 1화형종지 1 1/1 16 검단리38호토광 1 1 17 검단리54호토광 1 1 18 검단리53호토광 1 1/1 19 검단리71호토광 1 1 20 검단리44호토광 1 1 21 검단리90호토광 1 1 22 검단리35호토광 1 1 23 검단리87호토광 1 1 1 24 검단리52호토광 1 1 25 검단리100호토광 1 1 1 26 검단리84호토광 1 1 1 편년 이상과같은양상을지닌검단리유적은비록전체출토품의수에서는청자기명에미치지는못하지만, 銅器가출토된분묘가청자기명이출토된분묘보다많다는사실이주목된다. 이는앞서살펴본다른유적에서는찾아보기어려운현상이다. 더불어청자기명과銅器가공반출토되는분묘가많고모두 14세기로편년된다는점이주목된다. 즉현곡리와대부도육곡의사례에서확인할수있듯이 14세기銅器의부장이증가하고있음을보여준다. 그러나역시이같은양상이지역적특징으로간주될수있으므로다른지역의양상이어떠한지검토해보자.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25 8 청도대전리고려 조선고분군성림문화재연구원에의해발굴조사된청도대전리고려 조선고분군에서는총 160기의고려시대이후토광묘가조사되었다. 38) 이중청자대접 완 접시가출토된분묘는모두 49기로전체분묘가운데 30.6% 를차지한다. 49기의분묘가운데 46기는출토자기를통해그조성연대를확인할수있다. 13세기에축조된것이 4기, 14세기에축조된것이 37기, 15세기에축조된것이 5기로 14세기에축조된분묘가 80.4% 를차지한다. 한편청도대전리고려 조선고분군에서는다수의銅器도발굴되었다. 銅器 ( 청동합 / 발 ( 완 )/ 접시 ) 등이출토된분묘는총 66기로전체 160 기의분묘가운데 41.25% 를차지한다. 전체출토품의총수에서는자기보다적지만출토분묘는자기보다많아당시銅器의소비가적지않았음을추정할수있다. 또銅器가출토된분묘중공반출토된청자등을통해그조성연대를확인할수있는것은 35기로, 이가운데 13세기조성된것으로파악되는분묘는 2기에불과하고나머지 33기의분묘는모두 14세기에축조된것으로판단된다. 청도대전리에서도 14세기銅器의부장이유행하였음을확인할수있다. 마지막으로 14세기말에조성된것으로파악되는고양더부골유적을살펴보자. < 표 14> 청도대전리고려조선고분군중청자기명이출토된분묘 번호 유구명 도기청자완 / 청자병대접접시 청자병 / 유병 동전 청동청동접시합 청동발 청동시 / 저 동곳 철제가위 1 대전2-93토광 /1 1 1/ 15c 2 대전2-16토광 1분청호 / 15c 3 대전2-1토광 /1분청 1분청 1편 / 15c 4 대전2-117토광 /1분청 1분청 1/ 15c 5 대전2-107토광 /1분청 2분청 1편 /2 15c 6 대전1-19토광 1 1 1/ 14c 7 대전2-61토광 1 /1 2 1 1/1 14c 편년 38) 성림문화재연구원, 청동대전리고려 조선고분군 Ⅰ Ⅱ, 2008.

26 石堂論叢 51 집 8 대전2-101토광 1 /1 /1 1 1 1/1 1 1(x자형 )14c 9 대전2-81토광 1 /1 편1 1/ 14c 10 대전1-20토광 /2 3팔각 14c 11 대전2-99토광 1 /1 3 /1청자합 1 1/1 1(x자형 )14c 12 대전2-80토광 1 /1 3 1 1 1/1 14c 13 대전2-114토광 1 1 1/ 2 1/1 1 14c 14 대전2-68토광 1 1팔각 1 1/ 14c 15 대전1-14토광 2 /1상감 1 1/ 1 14c 16 대전2-51토광 1 1/ 1 1 1/ 14c 17 대전2-71토광 1/ 1 1 1/1 14c 18 대전2-146토광 1 1/ 2 1 1/1 14c 19 대전2-141토광 1/ 2 1 1/1 14c 20 대전2-145토광 1 1/ 1팔각 1 1/1 14c 21 대전1-24토광 1 1/ 1팔각 1 1 1/ 14c 22 대전2-79토광 2 1팔각 1 1/ 14c 23 대전2-82토광 1 1/ 1/ 14c 24 대전2-147토광 1 1/ 1 1/ 14c 25 대전2-57토광 1/1 2 /1상감 1/ 1(x자형 )14c 26 대전2-35토광 1 1 1 1/ 14c 27 대전2-58토광 1 1 1 1/ 14c 28 대전2-123토광 1상감 / 1 1/ 14c 29 대전1-7토광 1상감 1/1 1 1/1 14c 30 대전2-112토광 1 1상감 /1 1 1/1 1 14c 31 대전2-67토광 1 1팔각 1/ 편1 1/ 14c 32 대전2-41토광 2 3 1 1 1/1 14c 33 대전2-95토광 1 1팔각 1 1/ 14c 34 대전2-110토광 1 1팔각 1 1/ 14c 35 대전2-119토광 1/ 1 1/ 14c 36 대전2-50토광 1 2/ 1 1 1/1 14c 37 대전2-44토광 1 /1상감 1 1/ 1 1(8자형 )14c 38 대전2-60토광 1 /1상감 2 2 1/1 1 14c 39 대전2-85토광 /1 1 1/ 14c 40 대전2-108토광 /1분청 1분청 1/ 15c 41 대전2-124토광 /1 14c 42 대전2-102토광 1팔각 1 14c 43 대전2-75토광 1 1/1 1 13c 44 대전2-49토광 /1상감 1/ 1 13c 45 대전2-37토광 1 /1 1 1 1/ 1 13말 46 대전2-36토광 1/1 1/1 13말 47 대전2-40토광 1녹청 / 1 48 대전2-84토광 1/ 1 1/ 49 대전2-76토광 1 1/ 1/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27 < 표 15> 청도대전리고려조선고분군가운데銅器가출토된분묘 번호 유구명 도기청자완청자청자병 / 병 / 대접접시유병 동전 청동청동청동접시합발 청동시 / 저 동곳 철제가위 1 대전2-95토광 1 1팔각 1 1/ 14c 2 대전2-146토광 1 1/ 2 1 1/1 14c 3 대전2-41토광 2 3 1 1 1/1 14c 4 대전2-80토광 1 /1 3 1 1 1/1 14c 5 대전2-50토광 1 2/ 1 1 1/1 14c 6 대전2-81토광 1 /1 편1 1/ 14c 7 대전2-101토광 1 /1 /1 1 1 1/1 1 1(x자형 )14c 8 대전2-67토광 1 1팔각 1/ 편1 1/ 14c 9 대전2-116토광 2 1 1 1/1 1(x자형 )14c 10 대전2-114토광 1 1 1/ 2 1/1 1 14c 11 대전2-60토광 1 /1상감 2 2 1/1 1 14c 12 대전2-19토광 1 /1 1 1 1/ 14c 13 대전1-7토광 1상감 1/1 1 1/1 14c 14 대전2-32토광 1 1/ 14c 15 대전2-35토광 1 1 1 1/ 14c 16 대전2-147토광 1 1/ 1 1/ 14c 17 대전2-44토광 1 /1상감 1 1/ 1 1(8자형 )14c 18 대전2-99토광 1 /1 3 /1합 1 1/1 1(x자형 )14c 19 대전2-51토광 1 1/ 1 1 1/ 14c 20 대전2-145토광 1 1/ 1팔각 1 1/1 14c 21 대전2-141토광 1/ 2 1 1/1 14c 22 대전2-123토광 1상감 / 1 1/ 14c 23 대전2-58토광 1 1 1 1/ 14c 24 대전2-61토광 1 /1 2 1 1/1 14c 25 대전2-68토광 1 1팔각 1 1/ 14c 26 대전2-119토광 1/ 1 1/ 14c 27 대전2-71토광 1/ 1 1 1/1 14c 28 대전2-79토광 2 1팔각 1 1/ 14c 29 대전2-110토광 1 1팔각 1 1/ 14c 30 대전2-85토광 /1 1 1/ 14c 31 대전1-24토광 1 1/ 1팔각 1 1 1/ 14c 32 대전2-112토광 1 1상감 /1 1 1/1 1 14c 33 대전2-102토광 1팔각 1 14c 34 대전2-75토광 1 1/1 1 13c 35 대전2-37토광 1 /1 1 1 1/ 1 13말 36 대전2-38토광 2 1 1 1/1 37 대전2-104토광 1 1 1/1 38 대전2-84토광 1/ 1 1/ 39 대전2-118토광 1 1 1/1 40 대전2-69토광 1 41 대전2-121토광 1 1/ 42 대전2-56토광 1 1 1/ 편년

28 石堂論叢 51 집 43 대전2-126토광 1 1/ 44 대전2-137토광 1 1/ 45 대전2-54토광 1 1 1/1 46 대전2-142토광 1 1/ 47 대전2-53토광 1 1 1/ 48 대전2-46토광 1 1/1 49 대전2-40토광 1녹청 / 1 50 대전2-148토광 1 1 1/ 51 대전2-24토광 1 1 1/ 52 대전2-27토광 1 1 1 53 대전2-86토광 2 1/ 54 대전1-29토광 1 1 1 1(8자형 ) 55 대전2-113토광 2 1 1 /1 1 56 대전2-88토광 1 1 1 1/1 57 대전2-92토광 1편 58 대전2-29토광 1 1 1 1/1 59 대전2-47토광 1 1 1 1/1 60 대전2-87토광 1 1/ 61 대전2-96토광 1 1/ 62 대전2-91토광 1 1 1(8자형 ) 63 대전2-103토광 1 1 1/ 64 대전2-98토광 1 1 1/ 65 대전2-125토광 1 1/ 66 대전2-134토광 1 9 고양더부골유적 1992년명지대학교에의해조사된고양더부골유적에서는모두 65기의고려시대이후토광묘가발굴되었다. 중심연대가 14세기말에서 15 세기로편년되는이유적에서는다수의청자와동기가확인되었다. 전체 65기의토광묘가운데청자대접과접시가출토된분묘는 23기로 35.4% 에해당하며, 이가운데 17기의분묘는 14세기에조성된것으로판단된다. 이가운데銅器가출토된분묘는 28기로전체분묘중 43.1% 를차지하고이가운데 13세기후반에서 14세기로편년되는분묘는 25기에달한다. 따라서고양더부골유적에서도 14세기에銅器의부장이집중하고있음을확인할수있다.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29 < 표 16> 고양더부골유적중청자대접 / 접시가출토된분묘 번호 유구명도기호청자대접청자청자백자백자병접시병대접 / 접시 동청동전병 청동청동시철제합 / 발 / 저가위 1 더부골19호 1 1 1 1/ 13c 2 더부골60호 1 1 /1 1/ 13후반 3 더부골3호 2( 상감국화1) 1/ 13후반 4 더부골9호 1 /1 1/ 13후반 5 더부골57호 1편호 1 1 /1 1/ 14c 6 더부골12호편1 1 /1 1/ 14c 7 더부골23호 1편호 1 완1 /1 1/ 14c 8 더부골39호 1 1 14c 9 더부골56호 1편호 1 /1 1/ 14c 10 더부골22호 1 1 14c 11 더부골31호 1 2 1/ 14c 12 더부골16호 2 14c 13 더부골36호 2 1 2 1 /1 1/ 14c 14 더부골28호 3( 상감국화 ) 1 /1 1/ 14c 15 더부골42호 1 2 /1 1/ 14c 16 더부골35호 1 1 1 /1 1/ 14c 17 더부골38호 1 1 14c 18 더부골49호 1 1호 /2 /1 1/ 14c 19 더부골30호 1 2( 상감운학1) /3 /1 1/ 14c 20 더부골37호 1편호 1 1 /1 1/ 14c 21 더부골61호 2( 편호1) 1 1 /1 1/ 14c말 22 더부골51호 1 2 1/ 15c 23 더부골2호 1 1분청 1 조선 편년 < 표 17> 고양더부골유적중銅器가출토된분묘 번호 유구명 도기호 청자대접 청자청자백자백자호접시호대접 / 접시 동전 청동병 청동합 / 발 청동시 / 저 철제가위 1 더부골48호 1 /1 1/? 2 더부골34호 1 /1 1/? 3 더부골60호 1 1 /1 1/ 13c말 4 더부골9호 1 /1 1/ 13후반 5 더부골4동 1 /1 1/ 13후반 6 더부골25호 /1 1/ 13후반 7 더부골10호 /1 13후반 8 더부골12호 1 1 /1 1/ 14c 9 더부골46호 1 1/ 1/ 14c 10 더부골23호 1 1 1완 /1 1/ 14c 11 더부골28호 3 1 /1 1/ 14c 12 더부골30호 1 2 /3 /1 1/ 14c 13 더부골36호 2 1 2 1 /1 1/ 14c 편년

30 石堂論叢 51 집 14 더부골35호 1 1 1 /1 1/ 14c 15 더부골17호 1 1/ 1/1 14c 16 더부골37호 1 1 1 /1 1/ 14c 17 더부골40호 1 /1 1/ 14c 18 더부골42호 1 2 /1 1/ 14c 19 더부골57호 1 1 1 /1 1/ 14c 20 더부골47호 /1 1/ 14c 21 더부골63호 1 /1 1/ 14c 22 더부골55호 1 /1 1/ 14c 23 더부골56호 1 1 /1 1/ 14c 24 더부골49호 1 1/2 /1 1/ 14c 25 더부골44호 1 /1 1/ 14c말 26 더부골61호 2 1 1 /1 1/ 14c말 27 더부골27호 1 1 /1 /1 1/ 1 14c말 28 더부골26호 1/ /1 조선 방만하게살펴본내용을정리해보자. 우선상주청리, 청주용암, 진안수천리유적은 11~12 세기에속하는분묘가다수를차지한다는점에서시기적공통성을가지고있고모두청동숟가락이다수출토되었다. 그러나차이도있었다. 청자와銅器의공반여부, 동전의출토여부등에서세유적은지역적차이를보이고있다. 12~13세기로편년되는덕천동유적에서는전체 16기의토광묘가운데마상배가출토된 9호토광묘에서청동합과발이각 1점접시 1점이출토되었을뿐이다. 다른청동기는 1호토광묘에서 16매에달하는동전과동경이출토되었고, 6호와 16호토광묘에서동경각각 1점출토되었다. 한유적의사례이지만덕천동유적의경우 12세기후반이후부터동기의부장이감소되고있는추세를확인할수있다. 이러한양상은 11~14 세기까지분묘가축조된안산대부도육곡유적에서도확인되는데, 13세기분묘에서銅器는출토되지않는다. 그러나안산대부도육곡유적은 13세기로편년되는분묘가 1기밖에되지않아 12세기말이후銅器의감소되어간다고확언하기어렵다. 실제단양현곡리유적의경우 12세기말이전으로편년되는분묘에서는銅器가확인되지않다가 12세기말부터銅器가확인된다. 따라서덕천동유적을전국적현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31 상으로일반화시키기에는무리가있다. 그럼에도전체적으로보자면, 11~13 세기중엽까지동기는청자보다부장된예가많지않으나지역에따라차이가있어청주용암유적에서는적잖은부장례가확인된다. 한편대부도육곡과단양현곡리유적은또다른중요한시사점을준다. 14세기로편년되는분묘에서청동합 / 발의출토가집중되고있기때문이다. 상주청리유적에서도팔각접시가출토되어 14세기로편년되는분묘에서청동합이출토되었고청주용암유적에서도 14세기로편년되는분묘에서청동발이출토되었다. 이러한추세는경주검단리, 청도대전리, 고양더부골유적에서확인되었다. 이들유적에서출토된청자의문양과기형을살펴보면, 그중심연대가모두 14세기이다. 이세유적에서는이전유적과비교가안될정도로많은청동발 / 합이출토되었다. 이러한내용을정리한것이 < 표 18> 이다. < 표 19> 전체유적중청자와銅器의출토양상 상주청리 청자 ( 대접 ( 발 )/ 완 / 접시 ) 동기 ( 합 / 발 / 접시 ) 분묘청자출토분묘동기출토분묘청자총수전체편년분묘편년유구전체편년분묘유구총수편년 (%) (%) 수 (%) (%) 수 11c~12c 21 11c~12c 2 425 29(6.8) 27(93.1) 13c 0 13c 0 34 11(2.5) 6(54.5) 13말~14c 1 13말~14c 1 조선 5 조선 3 11c~12c 32 11c~12c 5 33(78.6) 13c 0 31 13c 0 51 10(32.3) 13말~14c 0 (11.9) 13말~14c 0 조선 1 조선 5 11c~12c 11 11c~12c 4 13(72.2) 13c 1 12 13c 1 25 6(50) 13말~14c 0 (13.3) 13말~14c 0 조선 1 조선 1 청주용암 260 42 (16.5) 진안수천 90 18 (20) 구포덕천 16 12 (75) 10(75) 11c~12c 2 11c~12c 0 13c 8 32 1(6.3) 1(100) 13c 1 13말~14c 0 13말~14c 0 조선 0 조선 0 청동총수 11 41 22 3

32 石堂論叢 51 집 대부도육곡 47 17 (36.2) 단양현곡 33 28 (84.8) 경주검단 110 20 (18.2) 청도대전 160 49 (30.6) 고양더부 65 23 (35.4) 계 1,206 238 (19.7) 16(94.1) 28(100) 19(95) 46(93.9) 23(100) 215 (90.3) 11c~12c 4 11c~12c 1 13c 1 13c 0 31 6(12.8) 5(83.3) 13말~14c 11 13말~14c 4 조선 0 조선 0 11c~12c 12 11c~12c 0 13c 8 11 13c 3 27 10(90.9) 13말~14c 8 (33.3) 13말~14c 7 조선 0 조선 0 11c~12c 0 11c~12c 0 13c 1 26 13c 0 33 14(53.8) 13말~14c 18 (23.6) 13말~14c 14 조선 0 조선 0 11c~12c 0 11c~12c 0 13c 2 66 13c 1 71 35(53) 13말~14c 38 (41.3) 13말~14c 34 조선 6 조선 0 11c~12c 0 11c~12c 0 13c 1 28 13c 0 34 26(92.9) 13말~14c 20 (43.1) 13말~14c 25 조선 2 조선 1 11c~12c 82 11c~12c 11 13c 22 192 113 13c 7 338 13말~14c 96 (15.9) (58.9) 13말~14c 84 조선 15 조선 10 6 11 29 85 29 237 일러두기 : () 는청자혹은銅器출토유구가운데편년가능한유구의비율이다. 청자총수에서청자병은제외했고銅器의총수에서도청동병은제외했다. 그런데이러한결론은기왕의연구와충돌한다. 선행연구자들에의하면원간섭기에는소의해체로인해동의생산이감소하거나 39) 동기의사용이감소하였다. 40) 특히후자의연구자들은 고려도경, 고려 39) 이정신, 고려시대동의사용현황과동소, 한국사학보 25, 2006 년 11 월. 이정신은소체제의해체가동생산의감소를초래했고이것이결과적으로조선시대일본에서동을수출하게되는원인이었음을지적한바있다. 본논문에서동의생산문제까지본격적으로검토할수없다. 다만동기의유행과생산문제는밀접한연관이있으므로논지를서술해나가면서부분적으로언급할것이다. 40) 14 세기동기가유행하지않았다는점은이종민과박미욱에의해언급된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33 사 의기록을바탕으로 12세기까지동기가유행하다 14세기부터동기가감소한다고이해하고있다. 따라서문헌기록에대한검토를피할수없다. 3. 銅器의유행과그원인 1) 원간섭기고려에서의동기유행 고려중기銅器 41) 가널리사용되다고려후기銅器의사용이감소했다는통설은몇안되는고려시대器皿기록에근거하고있다. 인종원년고려에사신으로온徐兢은 高麗圖經 이라는책을통해고려의모습을비교적상세하게전하고있다. 서긍에의하면 水米같은음료는모두동항아리에저장해두었으며 ( 水米飮歠, 並貯銅罌 ) 42), 고려인들은평소榻위에작은소반과동으로만든그릇을사용했다. 43) 또서긍은고려에는금과은이적고구리가많이난다고기술했다. 44) 이러한서긍의관찰을통해보면인종조銅器가적지않게사용되었음을확인할수있다. 물론그렇다고자기나질그릇이사용되지않은것은아니다. 서긍은고려의여러기명들을소개하면서陶尊을언급하였고이어고려사람들이대접ㆍ접시ㆍ술잔ㆍ사발ㆍ꽃병ㆍ湯琖도만들수있다고 바있다. 여기에대해서는박미욱, 앞의글, 이종민앞의글, 1994 를참조. 41) 통상銅器에는청동으로만든기물예컨대청동향로, 청동합, 청동발, 청동시저등을모두포함한다. 본고에서는이들모두를검토의대상으로삼지않고단지청동합, 발, 접시만을검토의대상으로삼았다. 이들기명을검토의대상으로삼은것은이들기명이자기와대체관계가있고분묘에서주로출토되기때문이다. 42) 고려도경 권 20, 부인, 戴. 43) 고려도경 권 22, 잡속鄕飮 44) 고려도경 권 23 잡속 2 土産

34 石堂論叢 51 집 했다. 45) 또인종대는고려의비색청자의발전이절정에달하였을때이므로자기의사용을경시해서는안될것이다. 선행연구에의하면이러한상황은고려후기가되면서변화한다. 銅器가감소하고자기의수요가증가하거나자기의사용이권장되었다는것이다. 46) 銅器의감소와관련하여房士良의상소가주목되어왔다. 공양왕 3년 3월방사량은 鍮銅는本土에서생산되는물건이아니니이제부터구리와쇠 [ 銅鐵 ] 로만든그릇을금하고오로지瓷器와木器를써서습속을고치도록바라는 47) 상소를올렸다. 이상소는고려말동기가부족한현상을보여주는근거로인용되었으며銅器부족의원인은원의과도한수탈로이해되었다. 원종 3년몽고는고려에 好銅 즉놋쇠 [ 鍮鉐 ] 를바칠것을요구하자 48) 고려는몽고가요구한 2만근을채우지못함을사과하며 612근의 好銅 을보냈다. 49) 또충렬왕대쿠빌라이칸은法物인鐘 磬 銅鏡 古銅甁 鼎과熟銅으로만든器物을제외한나머지銅錢과生銅으로만든기물을황제의명령이도달한때로부터백일내에모두소재지관청에납입하라는지시를내렸다가얼마뒤중지한바있다. 50) 요컨대통설에의하면, 원의과도한수탈로인해고려에서銅器가부족해졌고, 때문에동기와철기의사용을중지하고자기와목기의사용을장려하는방사량의소가올라왔다는것이다. 하지만, 원간섭기의상황과방사량의상소를면밀히살펴보면이러한해석에동의하기어렵다. 고려사 형법지에실린이상소는공양왕 3년 3월방사량이올린 11조의개혁안가운데하나이다. 고려사 이상소문을세가와지에각각나누어기재하였고 고려사절요 에는 11조 45) 고려도경 권 32 기명 3 陶尊 46) 이종민, 앞의글, 1994. 47) 고려사 권 85, 형법금령공양왕 3 년. 48) 고려사 권 25, 세가원종 3 년 9 월경오일. 49) 고려사 권 25, 세가원종 3 년 9 월경진일. 50) 고려사 권 30, 충렬왕 11 년 6 월기유일.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35 의상소를한데모아두었다. 방사량은상소에서 근검절약과근면할것, 사치를금지하여귀천을구분할것, 혼례에비단요와이불의사용을금지하고오직면포만사용할것, 商稅를징수할것, 자기와목기를사용할것, 추포를화폐로사용하지말고楮幣를사용하고錢을주조할것, 서북면의군관은양부와 6조에서천거한인물로충당할것, 국경을넘어소와말을매매하는자를단속할것, 기인제도의폐단을개혁할것, 무덤에서나무를하지못하도록할것, 안우와이방실등을추증할것 을주장했다. 51) 방사량의상소의전체내용을살펴보면, 방사량이자기와목기의사용을장려한것은, 천민들이비단옷을입는사치를방지하자는맥락에서이거나아니면당시화폐로이용되던추포의사용을금지하고楮幣와錢즉銅錢을주조하자는맥락에서였다. 이렇게본다면어느쪽이유에서건이기록만으로동기가부족했다고볼근거는없다. 오히려천민들까지동기를사용하였기때문에이를방지하기위해건의했거나동전주조를위한동의확보차원에서자기와목기의사용을건의했다고보아야한다. 물론원간섭기동부족의근거로제시된사료는이것만이아니다. 원종 3년몽고에서按脫夌徹兒와예부시랑劉憲을보내새매와好銅을요구하였고 52) 충렬왕 11년에원은李熙載를보내法物인鐘 磬 銅鏡 古銅甁 鼎과熟銅으로만든器物을제외한銅錢과生銅으로만든기물을거두어들이라는명령을내린바있으므로 53) 원의동에대한수탈로고려에서동이부족하게되었다고해석하기도했다. 54) 하지만당시관련기록을검토해보면이역시재검토되어야한다. 원종 3년몽고는고려에好銅을요구하였는데당시고려사람들은 51) 고려사절요 권 35 공양왕 3 년 3 월. 52) 고려사 권 25 세가원종 3 년 9 월경오일. 53) 고려사 권 30 세가충렬왕 11 년 6 월기유일. 54) 이종민, 앞의글, 1994, 9 쪽.

36 石堂論叢 51 집 그것을赤銅이라판단했으나원은鍮銅 55) 을요구하였고고려는관료들로부터거두어들인유동 612근만을몽고로보내면서압록강이남에유동이나지않음을언급했다. 56) 당시고려에서몽고로유입된동은 612근에불과했다. 광종 10년후주에銅 5만근을보낸사실 57) 을염두에두면 612근의동이원으로유출되었다고고려에동이부족해졌다고보기어렵다. 충렬왕대동전을거두어들이라는지시또한곧중지해그실효성이의심스럽다. 58) 특히당시이조서는고려를대상으로한 55) 당시원이요구한유동이어떤동인지는확언할수없다. 통상동은그합금되는방식에따라청동, 황동, 백동등으로구분한다. 청동은구리와주석을합금한것이고, 황동은구리와주석과아연을합금한것이며, 백동은구리와니켈을합금한것이다. 그러나과거에동은이렇게분류되지않았다. 조선후기문헌인 五洲書種博物考辨 에의하면조선후기동은중국, 일본, 조선의동으로분류되었고그합금정도에따라黃銅 ( 구리 + 아연 ), 白銅 ( 구리 + 비소 ), 烏銅 ( 구리 + 납 ), 靑銅 ( 구리 + 礬石 + 硝石 ), 響銅 ( 구리 + 주석 ), 鑄銅 ( 다수의아연 + 구리 ), 鍮石銅 ( 구리 + 아연 + 납 ) 으로구분했다.( 이규경지음, 최주주역, 오주서종박말고변, 학연문화사, 2008) 다만아연과납이함유된동기는그들의독성때문에식기로사용되지않았고구리와주석을합금하여만든동기 ( 구리 75: 아연 25 혹은구리 80: 아연 20) 가주로식기로사용되었다. 이합금동기를주로 놋 이라고불렀고이를한자로鍮혹은鍮銅, 鍮鐵이라썼다.( 전상운, 한국과학기술사, 정음사, 1988, 273~283 쪽 ) 그런데홍자번의상소등을고려해보면 14 세기고려에서유동이상당히유행하였던것으로보인다. 문제는유동이어떤동인가인데, 아연이함유된황동과같은것인지아니면주석만함유된것인지가불분명하다. 이를해결하기위해서는 14 세기분묘에서출토된동기에대한함유량분석이필요하나부분적인분석만존재해일반화시키기에는어려움이있다. 이문제역시별도로검토될필요가있다. 56) 고려사 권 25 세가원종 3 년 9 월경진일. 57) 冬, 遣使如周, 獻銅五萬斤 紫白水精各二千顆.( 고려사 권 2, 세가, 광종 10 년겨울 ) 58) 詔天下拘收銅錢, 申禁私造酒麯 ( 원사 권 13 본기세조지정 22 년 2 월 ); 初, 民間酒聽自造, 米一石官取鈔一貫. 盧世榮以官鈔五萬錠立榷酤法, 米一石取鈔十貫, 增舊十倍. 至是, 罷榷酤, 聽民自造, 增課鈔一貫為五貫. 敕拘銅錢, 餘銅器聽民仍用 ( 원사 권 13 본기세조지정 22 년 9 월 )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37 것이아니라원제국전체를대상으로한것이었다. 따라서이조서만으로고려에동이부족하였다고볼수는없다. 59) 기실당시사료를면밀히검토해보면오히려발굴성과와같이동기가광범위하게사용되었음이드러난다. 공민왕 6년司天少監于必興은 모든산에소나무를빽빽하게심고모든기물은鍮銅과瓦器로만들어土風에순응하게하라 는상소를올렸고공민왕은그의견에따랐다. 60) 우흥필은동기의사용을권장하고있는것이다. 銅器의폭넓은사용의사례는충목왕대에도확인된다. 충목왕이즉위하자장문의개혁상소를올리면서이제현은 금은과비단은우리나라에서생산되지않기때문에선배공경들도흰포목과명주만써서옷을지어입었고그릇은놋쇠와자기와질그릇만썼습니다 ( 金銀錦繡, 不産我國, 前輩公卿, 被服只用素段子若紬布, 器皿只用鍮銅瓷瓦 ) 라고했다. 61) 이제현의상소에따르면당시유동과자기와질그릇은비교적널리사용되고있었다. 유동의사용은충렬왕 22년홍자번이올린개혁상소에서도드러난다. 홍자번은 근래에鍮銅匠들이지방에많이거주하고있기때문에, 州縣의관리및어명을받고파견나간관원들이백성들로부터鍮銅을다투어거두어들여그릇을만들고있어민가의그릇이날로줄어들고있음 을염려했다. 62) 홍자번은지방관들이백성의유동을거두어들여민가의그릇이줄어들고관리들의그릇이늘어나고있음을지적하고있는데, 이기록은민가에서동기가널리이용되고있었고그것을관리들이빼앗아새로그릇을제조하지못하도록지방에있는유동장 59) 원간섭기여원무역에대한연구에의하면여원관계가안정화되는 13 세기말이후원은고려를가혹하게수탈하지않았다. 원간섭기여원무역에대해서는 이강한, 13~14 세기고려 - 원교역의전개와성격,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2007 을참조. 60) 고려사 권 39 세가공민왕 11 년윤 9 월무신일. 61) 고려사 권 110, 열전 23, 이제현 62) 고려사 권 84 형법직제충렬왕 22 년 5 월

38 石堂論叢 51 집 을개경으로돌아오도록건의하였던것이다. 이상의기록에서확인되듯이고려후기기록을면밀히검토해보면통설과달리고려에서는동기가비교적널리사용되었다. 이러한문헌기록은 14세기고려분묘에서다수의동기가출토된것과일치한다. 그렇다면왜 14세기에이런현상이나타났을까? 2) 동기유행의배경과그결과 14세기고려분묘에서동기의출토가증가하게된배경은무엇일까? 14세기고려에서동의산출이증가한사례가확인되지않고 63) 조선세종때일본으로부터동을수입한사례등을고려해보면 64), 고려내생산량의증가가소비의증가를결과했을가능성은낮다. 따라서동기사용의증대는외부로부터의동유입과유관할터이다. 당시고려와교역이활발한곳으로는일본과원을들수있다. 이들과의교역규모가어느정도였는지를보여주는자료는현전하지않는다. 다만당시일본은동의수입국이었으므로일본의동이고려로수입되었을가능성은높아보이지않는다. 그러므로시선은원에집중된다. 당시고려와원관계와관련하여우선언급해야할것이원의수탈문제이다. 통상원의과도한수탈로인해원간섭기고려의경제는매우어려운지경에이른것으로알려져왔다. 예컨대원의과도한금은징수가고려국내의금 은의부족을초래하였다는것이다. 65) 하지만최근연구에의하면, 13세기후반의경우원의과도한수취가관철되었지만원이남송지역을정벌해비옥한강남지역을장악한후원과고려의 63) 이정신, 앞의글참조. 6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2, 397~398 쪽. 65) 전병무, 고려시대은유통과은소, 한국사연구 78, 1992; 이정신, 고려시대금은채굴과금소 은소, 역사와담론 75 집, 2010.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39 경제적관계는일방적수탈이행해졌다고보기어렵다. 66) 14세기는여원사이의교역, 원과일본사이의교역이매우활발히진행된시기였고당시동아시아의물질적부는세계최고의수준이었다. 67) 따라서원의존재를수탈로만간주하는것은재고의여지가있다. 그럼어떤이유에서원의동이일본과고려로유입되었을까? 원의동수출과관련하여주목되는점은중국화폐제도의변화이다. 북송에서건남송에서건송나라는오래동안銅錢을기축화폐로이용해왔다. 화폐경제가발달한송에서기축화폐였던동전의주조는국가경제에서매우중요한문제였다. 68) 북송에서동전의주조는神宗의재위기간인熙寧년간 (1068~1077) 과元豊년간 (1078~1084) 에집중되었는데당시화폐의주조는王安石과같은신법당의개혁정치에힘입어크게증가했다. 69) 하지만신종이사망한후동전의주조는점차감소하였다. 감소의이유는동의부족이었다. 기본적으로원풍년간이후송에서동의산출량은감소했고당시송조정은부족한동을확보하기위해연금술을활용하기도했으나큰효과를보지는못했다. 70) 하지만이미확보된동도상당하였으므로동의생산량이감소한다고이것이곧장동의부족을결과했다고말할수없다. 당시동의부족은원풍년간에올린張方平의간언에서잘드러난다. 장방평은당시동부족의이유를두가지로지적했다. 71) 66) 이강한, 앞의논문. 67) 제닛아부 - 루고드, 앞의책 ; 안드레군데프랑크지음, 이희재옮김, 리오리엔트, 이산, 2003. 68) 중국송대동전에대해서는펑신웨이 [ 彭信威 ], 중국화폐사 ( 상해인민출판사, 1988.) 를참조. 펑신웨이는송대주로동전과철전이병행되었음을언급하면서동전이송대기축화폐로서가진중요성을언급하고있다. 69) 펑신웨이, 앞의책, 455 쪽. 70) 펑신웨이, 앞의책, 464 쪽. 71) 송사 권 180, 지 133 식화하 2 전폐. 장방평의간언. 장방평의화폐에대한사고는 장방평, 論錢禁銅法事, 樂全集 권 26( 사고전서 ) 에서보다자

40 石堂論叢 51 집 동이부족한이유는해외이출때문이었다. 북송인종년간西夏와의전쟁등으로막대한물자가소요되자인종은慶曆초동의해외이출을금지하면서그처벌조항을강화했다. 72) 이금령은왕안석의신법시행과더불어폐지되었는데, 왕안석의신법에반대하던장방평은신법의결과북송에동이부족하게되었음을지적하면서과거의금령을부활할것을간언했다. 장방평의간언은결국신법당이패배하고철종이즉위한뒤에야채택되었다. 정치적입장이달랐으므로장방평의간언을곧이곧대로받아들일지에대해서는고민의여지가있다. 그러나이후동전의주조량이감소하고악화인大錢이자주주조된것으로보아중국에서동의해외이출과동의부족은서로무관하지는않았다. 한편동의부족은내적요인도있었다. 당시민간에서동전을녹여다른용도로동을사용하기도했다. 동은화폐의재료이기도했으나器皿과佛像을만드는재료이기도했다. 따라서언제든지상황에따라기명과불상은동전으로, 동전은다시그것으로전환될수있었다. 太平興國년간 (977~983) 에사천지방에서동전의가치가상승하자백성들은무덤을파내고불상과그릇을녹여동전을주조하기도했다. 73) 반대로동전을기명으로만들기도했다. 동전을녹여기명을제조하는행위는 5배의이익을남긴다는기록 74) 을통해볼때동전으로기명을만드는행위가상당히성행했음을확인할수있다. 75) 때문에송은민간에서의 세히확인할수있다. 72) 慶曆初闌出銅錢視舊法第加其罪錢千爲首者抵死.( 송사 권 180, 식화 2 하전폐 ) 73) 或發古冢毁佛像器用纔得銅錢四五 ( 송사 권 180, 식화 2 하, 전폐 ) 74) 10 전을녹이면정동 1 량을얻을수있고이것으로그릇을만들어 5 배의이익을얻는다 ( 銷鎔十錢得精銅一兩造作器用獲利五倍 ). 송사 식화지, 장방평의간언. 75) 당시동전을녹여그릇을제조하고있던사정은김영제, 송대의물가와양세부담, 동양사학연구 91, 2005 를참조. 김영제는동전을녹여기명을만드는행위의원인에대하여동전의액면가격이동의실물가치보다낮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41 私鑄를엄금하였다. 동전을녹여기명을제작하는행위는동의부족을더욱가중시켰을터이고북송정부는이를금할수밖에없었던것이다. 그러나정부의노력에도불구하고북송말년동의부족은만성적현상이었고이는남송에까지지속되었다. 남송은동의해외이출을강력하게금지할뿐아니라, 동전보다는철전과지폐의사용하여그문제를해결해나갔다. 76) 이러한사정은몽고족이남송을정벌한후원을건국한후부터변화하기시작했다. 원대에도민간에서동전이널리유통되고있었지만, 국가는동전이아니라기축화폐로寶鈔를발행했고보초는은으로지불이보증되었다. 따라서원대동전은송대와같은기축화폐로서의지위를상실하고민간거래에서보조화폐로유통되었다. 동을중시하지않는원의정책은동의유출로이어졌는데, 원대동의주수입국가운데하나는일본이었다. 일본은몽고와의전쟁이종식되지않은시기에도원으로부터동을수입하려했고이는원정부에의해허가되었다. 77) 14세기일본의중국동전수입은신안선에서도확인된다. 신안선은다수의중국자기와함께상당량의금속기와동전, 금속괴를적재하고있었다. 78) 신안선은일본과원의교역을보여주지만이를통해고려와원의교역양상도추론할수있다. 일본과원의교역에서고려는중간기착지였고이런측면에서보면원과고려의교역이왕성하게진행되었을가능성이높다. 그렇다면 14세기고려에서동생산이감소했음에도불구 았기때문에나타나는현상으로이해하였다. 그러나동전이그릇으로주조되었다는점등을고려해보면당시銅器의수요가미치는영향역시적지않았을터이다. 76) 펑신웨이, 앞의책, 483~487 쪽. 77) 至元十四年, 日本遣商人持金來易銅錢, 許之 ( 원사 권 208, 열전 95 外夷日本 ) 78) 문화재청국립해양유물전시관, 신안선속의금속공예, 2007.

42 石堂論叢 51 집 하고동기의사용이증가한것은원과의교역이가져온결과로보아야할것이다. 즉원의동은일본에만수출된것이아니라고려에도수출되었고이것이고려에서동기의유행을가져온하나의이유일것이다. 한편원이일본에동을수출한것은동이가진화폐로서의기능을상당부분상실하였기에가능하였을터이다. 그리고화폐로서의중요성상실은동을다른용도로사용할수있도록허락했는데, 그용도가운데하나가바로器皿이었다. 민간에서나라가동전을사용하지않는것을보고, 동전을축장하고있던집들이해외의상선에판매하고대장간에그것을팔아그릇을만들고있다는당시문집의기록은동전이해외로이출되거나기명으로주조되고있던상황을잘보여준다. 79) 銅의활용은靑銅匙箸의출토양상에서도확인된다. 고려분묘에서출토된청동시저을검토한연구에의하면, 고려에서청동시저는 13세기후반부터그사용이증대하여 14세기에는그출토빈도가늘어난다. 80) 당연히경제적상황만이동기유행을결과하지않았다. 취향의변화도동기유행의요인이었다. 당시원의지배층들은도자기보다는금속기를선호하였다. 81) 오래동안유목생활을했던몽고족지배자들이선호한기명은금속기였다. 당시이름난銅匠들이祭器와각종器皿을제작하고있었다. 82) 물론주지하듯원대에서민간에서자기는여전히기명으로널리애용되고있었다. 하지만송대처럼국가에서화폐를주조하기위해동을적극적으로관리하지않았고민가에서상대적으로동을원활하게주조할수있는상황에서동기의제작은이전보다수월했 79) 民間見公家不用銅錢, 所在凡有窖藏錢寶之家往往充私立價販賣與下海商船及爐冶之家銷鑄爲器.( 雪樓集 권 10 銅錢 ) 80) 정의도, 한국고대청동시저연구 - 고려시대, 석당논총 38, 2007,3. 정의도는고려후기청동시저사용의증대를북방음식문화의유입과유관한것으로설명한바있다. 81) 왕챠오원 [ 王朝聞 ] 주편, 중국미술사 7 원대, 2000, 289 쪽. 82) 왕챠오원 [ 王朝聞 ] 주편, 중국미술사 7 원대, 2000, 333 쪽.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43 을터이다. 이러한원의정서는고려에도적지않은영향을미쳤을것이다. 원간섭기고려와원은정치적, 경제적으로매우밀착되어있었고원으로부터적지않은영향을받았다. 고려의국왕들은유년시절부터원에서생활했고많은고려귀족의자제들이원에서숙위해야했다. 또고려고관들은원의고관들과혼인관계를맺고있었다. 따라서금속기를선호하던원의분위기는고려에많은영향을미쳤을터이다. 83) 요컨대원대화폐정책과동의해외유출, 원문화의영향등을고려하면원간섭기고려에서동기가유행하였을가능성이높다. 실재금속기와자기는器皿으로서서로밀접한관련이있다. 자기는금속기를모방하고금속기에영향을받아왔다. 84) 따라서 14세기동기의유행은자기의변화에일정정도책임이있다. 그럼분묘에서양자의관계는어떠할까? 박미욱의연구에따르면고려토광묘에서출토된유물가운데 10~11세기는자기가 80% 이상을차지하며 12~13세기전반기에는 30% 이상을차지하다 14세기대에이르면자기는전체출토품중 20% 대를차지하여 14세기에자기의출토량은감소한다. 85) 자기의출토량에비해질그릇의출토량이상대적으로증가한것에주목할필요가있다. 즉 14세기에는銅器와질그릇이다른시기에비해다수출토되고있는것이다. 이러한현상은문헌기록과일치하는것인데 모든기물은鍮銅과瓦器로만들어土風에순응하게하라 는공민왕 6년司天少監于必興의상소는당시동기와질그릇이널리사용되고있었음을시사한다. 83) 자기器皿에서원문화가미친영향에대해서는이미자세하게연구된바있다. 여기에대해서는김윤정, 앞의글, 2006 을참조. 84) 고려청자와금속기와의관계에대해서는윤희봉, 고려청자에보이는금속기명의영향, 홍익대학교대학원미술사학과석사학위논문, 2005. 85) 박미욱, 앞의글.

44 石堂論叢 51 집 물론무안도리포해저유적에서발견된다수의 14세기청자와正陵名청자의존재, 紀年名 官衙名청자의등장, 鍮銅과자기와질그릇이함께사용되었다는이제현의상소등을통해당시청자가적잖게사용되었음을확인할수있다. 86) 그러나자기가금속기를모방하였다는점을간과하지않는다면, 銅器의광범위한사용은자기산업에일정정도영향을미쳤다고보아야한다. 특히 14세기지배층은몽고문화의영향아래있어동기를선호했을가능성이높다. 그렇다면 14세기고급자기의쇠퇴문제와관련하여우리는자기의수요변화에더주목할필요가있다. 즉고급자기의생산에서조질자기의생산으로의변화는자기생산체계의변동보다는수요의변화, 즉원의영향아래있던고려의지배층들이자기가아닌금속기를선호하게되면서발생한현상일가능성도배제할수없다. 다만고급자기의쇠퇴와동기의유행과관련하여유의해야할점이있다. 正陵銘청자의존재에서확인되듯이고급자기는주로왕실이나고려최상위지배층이사용하였다. 이에반해본고에서논증한고려분묘들은지방에위치하고있고이들분묘의피장자들은지방유력자정도로판단된다. 따라서분묘와문헌을통해확인된銅器의유행이고급자기의쇠퇴를곧장결과했다고보기에는무리가있다. 고려최상류층이사용하던고급자기의쇠퇴문제를논증하기위해서는 14세기고려왕릉이나고려의고위관료분묘의부장품에대한분석이진행되어야한다. 그러나두가지이유에서이는현실적으로불가능하다. 우선고려왕릉과고위관료의무덤은도굴을피할수없었고현재보고된일부왕릉역시도굴된이후조사되었다. 설사도굴되지않은분묘가존재한다하더라도왕족과고급관인의무덤은현재휴 86) 앞서살펴본것처럼개별분묘를중심으로편년해보면 14 세기자기의수요가감소하였다고보기는어렵다. 다만자기에비해질그릇과동기의사용은확실히증대하고있다. 위의표 -19 를참조.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45 전선이북에있어조사가불가능하다. 따라서이문제는추론적접근만이허용된다. 단편적인사료에입각하면고려왕실과고위관료들의경우銅器보다銀器를주로사용한것으로추정된다. 충렬왕대의권신이었던金方慶이충렬왕과제국대장공주를위해잔치를열면서잔치에쓸은그릇을새로만들었고잔치가끝난후내탕에바쳤다는 고려사 의기록 87) 은왕실에서銀器를널리사용하고있었음을시사한다. 물론왕실에서의은기사용은이시기만의특징은아니다. 그럼에도잔치에사용될모든그릇으로새로주조된은기를사용했다는기록은왕실이은기를선호했음을보여준다. 이러한은기의선호는제국대장공주의존재와무관하지는않았을것이다. 앞서언급한것처럼, 14세기고려는원으로부터강력한문화적영향을받고있었고왕족을비롯한다수의고위층자제들이원나라에서宿衛했다. 이런분위기에서 14세기금속기의선호는하나의문화적경향이었을것이다. 이경향에서지방유력자도예외일수없었다. 다만지방유력자들은은기와같은고가품을사용할수없어대신동기를널리사용하였던것은아닐까? 요컨대화폐로서銅의기능이상실되어이전보다수월하게구입할수있는동의존재와새로운문화즉금속기를선호한원문화의유입은지배층의식탁에서자기가감소하고금속기가늘어나게되는주요한요인이었을것이다. 88) 87) 嘗享王及公主, 皆用新鑄銀器, 宴罷, 納于內帑.( 고려사 권 104, 열전 17, 제신김방경 ) 88) 윤희봉은 14 세기자기에서금속기의영향이사라지고있으며금속기를모방하던단계를답습하고있음을지적한바있다. 이러한변화역시어쩌면자기가금속기를대체할필요가사라지게되자발생한현상일가능성이높다.( 윤희봉, 앞의논문, 89~101 쪽 )

46 石堂論叢 51 집 4. 맺음말 14세기는격동기였다. 정치적으로원의간섭이시작되어정치세력의교체가빈번했고, 문화적으로그어떤시기보다원의직접적인영향하에놓이게되었다. 때문이이시기에고려의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격변했다. 그격변의가운데에는고려청자의변화도있었다. 간지명청자의등장, 도식화된문양등은청자변화의구체적실례였다. 청자변화의원인은주로생산체계의변화, 소비의확대로이해되었다. 그러나최근구제발굴로조사가급증한고려분묘에대한연구에의하면, 14 세기들어청자의출토량은이전시기와감소하거나큰변동은없다. 대량생산에도불구하고분묘에서의소비는크게증가하지않게되는것이다. 따라서이문제에대한면밀한검토가필요하다. 이에본연구는고려시대분묘유적의출토품을검토하였다. 지역성과시기를고려해상주청리, 청주용암, 진안수천리, 부산덕천동, 안산대부도육곡, 단양현곡리, 경주검단리, 청도대전리, 고양더부골고려분묘유적을조사하여다음과같은결론을내릴수있었다. 첫째, 같은시기라고하더라도지역에따라청자가주로출토되는지역과청동기가비교적다수출토된지역이있었다. 상주청리는청자만주로출토된반면, 청주용암유적에서는다수의동기가출토되었다. 이러한차이는지역적차이일가능성이높다. 둘째, 지역적차이에도불구하고전체적으로 11~13세기중반까지분묘의부장품에는청자가다수를차지하고동합 동발 동접시등이공반출토되고있었다. 셋째, 13세기후반이후동기의출토가급증하였다. 14세기로편년되는분묘에서는청자와함께다수의청동기가공반출토되고있었다. 따라서분묘의출토양상으로보자면 14세기에동기가유행하였다. 당시동기의유행은문헌을통해서도확인할수있다. 홍자번의상소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47 등여러문헌에의하면, 원간섭기고려에서는동기가상당히유행하고있었다. 동기확산의배경에는중국화폐제도의변화와지배층의취향이자리잡고있었다. 원은고래의銅錢을기축화폐로사용하지않고은으로지불보증된보초를기축화폐로삼았다. 기축화폐의변화는동을다른용도로사용할수있도록허락했다. 그결과이전보다자유롭게동을이용해동기혹은銅像을주조할수있었다. 물질적배경이외에문화적변화도있었다. 새롭게중국의지배층이된몽고족은유목민의전통에따라자기보다는금속기를선호했고고려역시이영향으로부터자유로울수없었다. 이런분위기에서고려에서는자기가아닌동기를선호하게되었던것이다. 그리고이것이자기산업의쇠퇴와자기의질하락을가져온한배경이었을것이다. 이논문은 2011 년 9 월 23 일에투고되어, 2011 년 10 월 13 일부터 10 월 31 일까지심사위원의심사를거쳐, 2011 년 11 월 17 일편집위원회에서게재결정된논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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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51 Abstract The fashion of bronzeware and the meaning, in 14th century : focusing on grave goods in remains of Koryo tumb. Shin, Eun-Jae Hur, Sun-Young In 14th century, as a lot of students know, Koryo celadon got some distinguished characters, the advent of celadon with the manufactured date( 干支銘靑瓷 ), the poor patterns. Students have regarded reasons of the characters as the changes of system of production and the expanded consumption. However, according to results of recent researches of the Koryo graves, in the 14th century, the use of celadon was reduced. This deference have me to study celadon's changes in 14th century. In this article, I'd like to study the excavated celadon from the Koryo graves. For study, I have nine remains of Koryo tumb, in regards of time and space. There are a lot of grave goods in nine remains of Koryo tumb, celadon, bronzeware, bronze spoons, and so on. From the examination of excavation reports of them, I get some conclusions. First, even same period, there is deference between grave goods as to the province in which graves were located. Some provinces of them have more celadon than bronzeware, but the

52 石堂論叢 51 집 other is not. Second, though the deference between provinces, I could find a important point. As a whole, there are more celadon than bronzeware in grave goods which were constituted during 12~13th century. Third, in the second half of 13th century, the circumstance was changed. The rate of bronzeware in grave goods got higher. In fact, there are a lot of reference to the fashion of bronzeware in Koryosa( 高麗史 ). Why bronzeware were fashioned in 14th century Koryo Dynasty? It is passible to answer the question in two ways, economy and culture. The fashion of bronzeware should based on the increase of supply of bronze. According to the study of bronze product, the bronze product in Koryo was reduced during 14th century. Though the reduce of bronze product, at that time the fashion of bronzeware was due to the importation of bronze from Yuan( 元 ) Dynasty. Until collapse of Dynasty, Song( 宋 ) government continued to prohibit the exportation of bronze, in order to get the coin bronze. After the foundation of Yuan( 元 ) Dynasty, the circumstance was changed. Yuan( 元 ) Dynasty used the currency of Bo-chao( 寶鈔 ) which was guaranteed in silver. Then Yuan( 元 ) Dynasty didn't need to use the much bronze than Song( 宋 ). The surplus bronze in Yuan( 元 ) Dynasty was exported to Koryo and Japan, the supply of bronze got grown, in Koryo. On the other hand, the cultural preference effected the fashion of bronzeware. Mongol as nomadic tribes prefer the matalwares to celadons or ceramics. The upper class in Koryo Dynasty was heavily affected by Yuan( 元 ) Dynasty, politically and culturally. They prefered the matalwares, especially bronzeware to celadon. The fashion of bronzeware brought about the fall of

14 세기銅器의유행과그의미 / 신은제 허선영 53 celadon's product, it resulted the relative decline of the celadon's quality. Key Words : Celadon, Bronzeware, System of currency, Koryo tumb, the coin bron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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