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ta Iberoamericana 24.2 (2013): 99-118. 태양섬의잉카시조신화와통치정당성 * 우석균서울대학교라틴아메리카연구소 우석균 (2013), 태양섬의잉카시조신화와통치정당성 초록잉카시조신화는크게빠까릭땀보기원설과띠띠까까기원설로나뉜다. 두가지중어느것이옳은지밝히는것은사실상불가능해보이지만후자가훨씬더신빙성이떨어진다. 그럼에도불구하고띠띠까까기원설이좀더호소력을발휘해온것이현실이다. 또한두가지설의혼합설, 즉잉카시조들이띠띠까까에서지상에출현해빠까릭땀보를거쳐꾸스꼬에정착했다는설도존재한다. 실제로띠띠까까호수에잉카시조신화가깃든태양섬과성스러운바위가존재하고, 잉카인들이이섬에특별히관심을두어태양의신전을건축했다는전설도있다. 하지만띠띠까까기원설은잉카가 15세기에이지역을정복한뒤에통치정당성확보를위해조작한것으로보인다. 잉카이전부터태양숭배신앙이있었기에잉카시조들이띠띠까까에서처음지상에출현했다고하는편이지배를위해용이하기때문이다. 띠띠까까기원설은또한 9 대군주빠차꾸떽이태양신과잉카군주를동일시하는일종의종교개혁을단행했을때도좋은소재가되었을것으로추정된다. 빠까릭땀보설에는잉카시조들이태양신의자손이라는내용이결여되어있는것이보통이기때문이다. 핵심어잉카, 시조신화, 띠띠까까, 태양섬, 빠까릭땀보, 통치정당성, 종교개혁 * 이논문은 2008 년도정부 ( 교육부 ) 의재원으로한국연구재단의지원을받아수행된연구임 (NRF-2008-362-B00015).
우석균태양섬의잉카시조신화와통치정당성 I. 들어가면서잉카창건시점에대해서는존 H. 로우가주장한서기 1,200년경설이 (Rowe 1946, 198) 많이언급된다. 로우가잉카시대의역사적사건들에대한정확한연대를측정하려고노력한학자이며잉카연구의대가이기는하지만, 1,200년 이라는시점을두고연구자들사이에완전히합의가이루어진것은아니다. 라이너톰쥬데머같은경우는정복이후주로스페인인들이뒤늦게기록한것을토대로해서잉카역사의정확한연대를산출하려는시도자체를무의미한것으로볼정도다. 잉카의기원에대한여러가지이야기를신화로받아 들여야지역사적진실로간주해서는곤란하다는것이다. 1) 잉카창건시점도이렇듯의견이엇갈리는판이니잉카시조신화역시이설이많고, 이설들중에서어느것이역사적진실인지밝히는것도사실상불가능하다. 다만크게빠까릭땀보 (Pacariqtambo) 기원설과띠띠까까 (Titicaca) 기원설로대별되고, 빠까릭땀보설이역사적진실과좀더가까우리라는것이정설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띠띠까까설이오히려더많이확산되어있다. 이는띠띠까까호수의자연조건도영향을끼쳤을것이다. 제주도 4배에달하는엄청난크기의호수이고, 일대가다고원지대라하늘이넓게보이는데다가하늘과맞닿아있는듯한느낌을주고, 때문에태양신숭배를비롯한하늘숭배신앙이일찍부터존재했다. 하지만띠띠까까기원설은잉카군주들이띠띠까까일대의통치정당성확보차원에서조장한측면도있다. 나아가 9대군주빠차꾸떽 (Pachacútec) 은띠띠까까기원설을군주를신격화시키는종교개혁에이용하여지배를정당화시키기도했다. 잉카시조신화를다룰이글은먼저 II장에서두가지기원설에대해, III장에서는두가지기원설의혼합설에대해소개할것이다. 그리고 IV장과 V장에서는띠띠까까기원설을통치정당성확보를위해어떻게사용했는지분석하 1) 로우의시도를역사주의, 쥬데머의관점을구조주의라부른다. 이두관점은잉카연구에서상반된주요입장으로오랫동안논쟁이있었다. 이에대해서는 Burga(2005, 127-140) 와 McEwan(2006, 195-201) 을참조하라.
고자한다. II. 두종류의잉카시조신화 잉카시조신화는크게두가지종류가있다. 첫번째신화는꾸스꼬에서직선거리로 26킬로미터떨어져있는빠까릭땀보의땀보또꼬 (Tambotoco) 언덕에있는세개의혈 ( 穴 ) 에서세집단이출현했고, 이들중에서가운데혈에서출현한네명의아야르 (Ayar) 형제와네명의여인주도로이주를시작하여꾸스꼬에정착해잉카문명을창건하는데결정적인역할을했다는것을주요내용으로하고있다. 이여인들은아야르형제와남매간이라고도하고각각의부인이라고도한다. 아야르망꼬는이후망꼬까빡 (Manco Cápac) 2) 으로불리고, 그의부인이름은마마오끄요 (Mama Ocllo) 이다. 두번째신화는태양신이남매이자부부인망꼬까빡과마마오끄요를창조하여페루와볼리비아에걸쳐있는띠띠까까호수로내려보냈고, 이들이북쪽으로수백킬로미터를이동하여꾸스꼬 (Cusco) 에정착했다는것을 < 그림 1> 꾸스꼬, 빠까릭땀보와띠띠까까호수의위치. 회색부분이띠띠까까호수주요내용으로하고있다. 이다.(Urton 2004, 15) Revista Iberoamericana 24.2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00 101 2) 까빡 은 권능을지닌사람 (el poderoso) 혹은 풍요로운사람 (el rico) 이라는뜻이다. 풍요롭다고해서단지물질적부를지닌사람을지칭하는것이아니라덕이넘치는사람을가리킨다. 망꼬까빡 은또한 망꼬잉카 (Manco Inca) 로도불린다. 잉카인들은자신의나라를따완띤수유 (Tawantinsuyu) 라고불렀다. 잉카 는좁게는따완띤수유의군주, 넓게는왕족을뜻한다. 심지어왕족을배출한빠나까 (panaca) 전체를가리킬때도있다. 원래혈연공동체를뜻하던아이유 (ayllu) 중에서군주를배출한아이유가빠나까이다. 잉카 와 까빡 은따완띤수유의군주이름에자주등장한다.
우석균태양섬의잉카시조신화와통치정당성 그렇지만, 전세계의수많은시조신화들이그렇듯, 잉카시조신화에도수많은이설이있다. 빠까릭땀보설의경우등장인물이 8명이나되다보니각자의이름, 역할, 위상등이무수히엇갈린다. 엔리께우르바노 (Henrique Urbano) 에따르면 1542년에서 1653년사이에기록된것만해도 40여가지종류라고한다 ( 재인용, Urton 2004, 29). 가령, 아야르망꼬와마마오끄요가아니라아야르망꼬와아야르아우카두형제가핵심인물로등장하는설이빠까릭땀보설에서대표적인이설이다. 띠띠까까설도망꼬까빡과마마오끄요가하늘에서내려왔다는부류의이야기들과바위혈 ( 穴 ) 을통해지상으로나왔다는부류의이야기들로대별된다. 그렇다면빠까릭땀보설과띠띠까까설중에서어느것이역사적진실일까? 확실한것은띠띠까까설은신빙성이현격히떨어진다는점이다. 이를입증할만한고고학적증거가사실상존재하지않기때문이다. 비록잉카가르실라소는 잉카왕실사 Comentarios Reales de los Incas (1609) 에서 3대군주요케유빵끼 (Lloque Yupanqui) 때부터잉카인들이띠띠까까일대를복속시켰다고말하지만 (Garcilaso de la Vega 1995, 112-114), 띠띠까까일대의잉카건축물들은 15, 16세기의것이다. 그래서잉카인들이제8대군주인비라꼬차 (Viracocha) 때부터띠띠까까일대를넘보기시작해, 9대빠차꾸떽잉카유빵끼 (Pachacútec Inca Yupanqui) 와 10대뚜빡잉카유빵끼 (Túpac Inca Yupanqui) 를거치면서이지역의통치를확고히하였다는주장이 (Mesa et al. 2005, 58-61) 훨씬더설득력있다. 잉카시조들이띠띠까까를떠나꾸스꼬에정착했다가후대에다시띠띠까까를정복한것이아니라면띠띠까까설은전혀설득력이없는것이다. 그렇다고빠까릭땀보설이훨씬더신빙성있는것은아니다. 빠까릭땀보설의주요연구자인게리어튼은현재꾸스꼬에서남쪽으로직선거리로 26킬로미터정도떨어진빠까릭땀보마을을비롯해인근의마우까약따 (Maukallaqta), 뿌마우르꾸 (Pumaurqu), 땀보또꼬 3) 유적지들을조사한끝에오늘날의빠까릭 3) 게리어튼은땀뿌또꼬 (Tamputoco) 로표기함.
땀보마을은 1571년만들어졌으며, 잉카시대에는마우까약따와뿌마우르꾸가각각빠까릭땀보설속의빠까릭땀보와땀보또꼬와흡사하다고말한다 (Urton 2004, 44-50). 어튼은빠까릭땀보마을의유지인로드리고수띡까야삐냐 (Rodrigo Sutiq Callapiña) 가자신이망꼬까빡의후손이라는증언을 1569년에한적이있다는내용을담고있는 1718년서류도발굴한다. 그리고그와마을사람들몇사람이뻬드로사르미엔또데감보아 (Pedro Sarmiento de Gamboa) 가똘레도 (Francisco de Toledo) 부왕의명으로 잉카역사 Historia de los Incas (1572) 를집필할때정보제공자로참여했다는점도밝힌다 (Urton 2004, 13). 아마도이들은사르미엔또데감보아에게자신들이망꼬까빡의후손으로대대로그마을에살았다는이야기를되풀이했을것이다. 하지만어튼은사르미엔또데감보아이전의그어떠한기록에도빠까릭땀보라는지명이언급되지않는다는점도지적한다 (Urton 2004, 13). 로드리고수띡까야삐냐의증언도고작해야사르미엔또데감보아의 잉카역사 집필몇년전일이고, 그나마 1718년서류에담겨있으니 잉카역사 가잉카의발상지를구체적으로지목한가장오랜현존기록인셈이다. 그래서어튼은사르미엔또데감보아가이책을쓸무렵에현재의빠까릭땀보가잉카의발상지로둔갑했을가능성을배제하지않는다. 잉카의발상지를최초로확인한사람이되고싶었던사르미엔또데감보아의명예욕과망꼬까빡의후예임을내 < 그림 2> 오늘날의빠까릭땀보마을과땀보또꼬. 어튼은세워식민질서속에서도이두장소가아니라좀더북쪽에위치한마우까약따와뿌마우르꾸가잉카시대의빠까릭땀보일말의특혜를누리고자와땀보또꼬라고보고있다.(Urton 2004, 43) Revista Iberoamericana 24.2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02 103
우석균태양섬의잉카시조신화와통치정당성 했던원주민들의이해관계가맞아떨어졌다는것이어튼의추측이었다 (Urton 2004, 44-50). 하지만그는빠까릭땀보설이완전히날조된것이라고보지는않는다. 빠까릭땀보가 1571년이전에어딘가에실제로존재했을가능성보다는그저신화속의지명이었을가능성에더무게를두기는하지만, 잉카의시조들이꾸스꼬가까운곳에서이동한것은사실이라고본다. 그리고정복이전부터자신들의거주지를잉카의발상지로믿었던꾸스꼬인근주민들중에서현재의빠까릭땀보를잉카의발상지라고주장한집단이나왔으리라는것이다 (Urton 2004, 147-150). III. 혼합설과태양섬빠까릭땀보설도띠띠까까설도확실한증거는없는셈이다. 하지만학계에서는잉카시조들이꾸스꼬인근에서왔을개연성을훨씬더타당하게받아들인다. 그럼에도불구하고띠띠까까설은끈질기게생명력을이어왔으며, 심지어더선호되는경향이있다. 여기에는여러가지원인이작용한것같다. 첫째, 4) 띠와나꾸문명은페루중부안데스에서볼리비아안데스에이르는지역에서는최초의문명이다. 안데스지역에서, 그리고나아가남미에서가장오래된문명으로는기원전 900~200 년사이의차빈 (Chavín) 문명을꼽아왔다. 전성기에는페루북부안데스를거점으로해서해안지대까지다스렸다고한다. 하지만리마북쪽 200 킬로미터지점에서발견된유적지연구를통해남미최초의문명은 5,000 년전까지거슬러올라간다는주장이 1990 년대말부터대두되었다. 이주장대로라면메소아메리카문명보다오랜것이고, 소위인류최초의 4 대문명의기원과시기적으로비슷하다. 이에대해서는 Shady Solís(2005) 를참조하라. 현재로서는띠와나꾸문명이까랄과차빈의영향을직접받았다고보지는않는다. 띠와나꾸문명의주요유적지는라빠스에서약 45 킬로미터떨어진곳에있으며, 띠띠까까호수가지척이다. 이문명의기원, 발전, 멸망등에대해서는이설이많지만, 띠와나꾸연구에평생을바친카를로스뽄세산히네스에따르면기원전 16 세기에띠띠까까일대에촌락이형성되고, 오늘날남은유적지를중심으로 BC 2 세기 ~AD 2 세기사이에국가로성장했으며, 4 세기에서 8 세기사이에는띠띠까까호수일대를장악하고, 그이후에는제국으로부를수있을정도로번영을누리다가 12 세기말에멸망하였다 (Ponce Sanginés 2002, 49). 전성기때는페루남부안데스와볼리비아여러지역으로팽창하여그영토가고대이집트와맞먹는 275,000-600,000km 2 에달했을것으로추정된다 (Ponce Sanginés 2002, 116).
뒤에서상세히다루겠지만페루중부안데스에서부터볼리비아안데스를통틀어최초의문명인띠와나꾸 (Tiwanaku) 문명이 4) 태양을숭배한흔적이있고잉카에도어느정도영향을끼쳤다는점이잉카의띠띠까까기원설확산을조장했다. 둘째, 빠까릭땀보는특별한매력이없는작은마을에불과하고접근가능성도떨어진다. 그래서항상중요한지역이었고성스러운분위기마저감도는띠띠까까호수가잉카의발상지로더어울린다는비합리적인생각이개입된측면도있다. 셋째, 빠까릭땀보가꾸스꼬에서너무가깝다는점이오히려호소력을경감시킨측면이있는듯하다. 전세계의수많은시조신화가그렇듯이, 잉카의시조들도인간세계를구원하러온문화영웅으로설정되어있다. 그리고신화속영웅들은먼길을곧잘떠나고, 그길은고난의길이되어야한다 ( 조셉캠벨 1992, 246). 직선거리로꾸스꼬에서 26킬로미터밖에되지않는빠까릭땀보는고난의여정을운운하기에는너무나가까운거리이다. 아마도이런측면때문에빠까릭땀보설과띠띠까까설이혼합된신화가생겨난듯하다. 다음은 잉카왕실사 에등장하는혼합설이다. Revista Iberoamericana 24.2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04 105 우리아버지태양께서는이런영 ( 令 ) 과함께두자식을이곳에서 80 레구아 5) 떨어진띠띠까까호수로내려보냈단다. 그리고그들에게어느곳이든원하는곳으로가고, 마음내키는곳에멈추어먹고잘것이며, 증거이자징표로내린 1/2 바라 6) 길이와손가락두배굵기의황금막대를땅에꽂아보라고했다. 단번에땅에꽂히는곳이바로그들이정착하여조정 ( 朝廷 ) 을꾸릴곳이라는것이었다. [...] 우리아버지태양께서는두자식에게이렇게자신의뜻을천명하시고는, 그들을떠나보내셨단다. 그들은띠띠까까에서출발해북쪽으로길을갔지. 길을가는내내멈추는곳마다황금막대를땅에꽂으려고했지만, 결코꽂히지않았단다. 그리하여어느객주혹은조그만방에들게되었는데, 이도시 [ 꾸스꼬 ] 남쪽으로약 7~8 레구아떨어진곳으로오늘날에는빠까릭땀보 ( 동이트는객사 [ 客舍 ] 혹은잠자리 라는의미 ) 라고부르는곳이지. 동이틀무렵에그객사에서나왔기때문에잉카께서그렇게이름을붙이셨단다. 빠까릭땀보는군주께서후에마을을세우라고명한여러마을중하나로, 오늘날그곳주민 5) 레구아 (legua). 약 5.5 킬로미터. 6) 바라 (vara). 76.8~91.2 센티미터.
우석균태양섬의잉카시조신화와통치정당성 들은그이름을대단히자랑스럽게생각하는데, 우리의잉카께서붙인이름이기때문이란다. 그와우리의왕비이신부인께서는그곳으로부터이꾸스꼬계곡에당도하셨는데, 당시에는전체가험한산으로이루어져있었단다.(Garcilaso de la Vega 1995, 41-42) 7) 잉카가르실라소는이대목에서띠띠까까호수의어느장소에서잉카시조가출현한것인지는말하고있지않다. 그러나나중에띠띠까까에얽힌신화, 태양섬 (Isla del Sol), 이섬에있었다고전해지는태양의신전등에대해서자세히소개하면서 (Garcilaso de la Vega 1995, 199-202) 오늘날볼리비아영토인태양섬이잉카의시조들이출현했다는신화가얽혀있는장소임을언급한다. 실제로태양섬북쪽에는잉카의시조망꼬까빡과마마오끄요가출현했다는신화가깃든 성스러운바위 (Roca Sagrada) 가존재한다. 이바위의혈 ( 穴 ) 에서잉카의시조들이출현했다는것이다. 띠띠까까일대에많이거주하는아이 < 그림 3> 성스러운바위의혈 ( 필자사진자료 ) 마라인들은이바위를 퓨마바위 라는뜻을지닌 띠띠까까 라고도불렀다 (Milligan 2001, 60). 띠띠까까호수의명칭이이바위에서유래한셈이다. 다만성스러운바위에대한이러한이야기는위의인용문과일치하지는않는다. 우선잉카가르실라소가잉카의시조들이하늘에서내려왔다고말하고있다는점에서차이가난다. 하지만띠띠까까설도잉카의시조들이하늘에서내려왔다는종류의이야기와이처럼혈에서나왔다는이야기두종류로대별되기때문에심각한불일치라고볼수는없다. 또다른차이는잉카가르실라소는 띠띠까까 가 납으로된산맥 이라는 7) 번역은우석균 강성식의미출간 잉카왕실사 의것임.
뜻이라고말한다는점이다 (Garcilaso de la Vega 1995, 199). 하지만잉카인들과아이마라인들의언어가각각께추아어와아이마라어이기때문에어원의차이도그러려니받아들일수도있는상황이다. 아무튼잉카인들은태양섬에태양의신전 (Templo del Sol) 을만들었다고전해진다. 섬북쪽의몇몇유적지가태양의신전터로거론된다. 까사빠따 (Kasapata) 유적을신전터로지목하는의견도있고, 성스러운바위지척에있는친까나 (Chincana) 를비롯한일련의유적지를지목하는의견도있다 (Bauer and Stanish 2003, 210-211). 문제는태양의신전이라고볼만한확실한고고학적증거가나온유적은없다는점이다. 반면, 태양의신전의존재를언급하는역사적기록은많다. 1548년띠띠까까일대를돌아본시에사데레온이그의저서 페루연대기 (1553) 에서잉카인들이아주중요하게여기고금은보화가넘쳐났다는태양의신전이띠띠까까호수에존재했다는기록을남긴이래 (Cieza de León 1995, 280-281) 이와유사한기록이수없이되풀이되고있다. 심지어잉카가르실라소는태양섬의태양의신전이꾸스꼬의태양의신전꼬 Revista Iberoamericana 24.2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06 107 < 그림 4> 띠띠까까호수의태양섬, 달섬, 꼬빠까바나위치. 점선오른쪽이볼리비아, 왼쪽이페루영토이다 (Bauer and Stanish 2003, 39).
우석균태양섬의잉카시조신화와통치정당성 리깐차 (Coricancha) 에비견될정도로잉카인들에아주중요한신전이었다고말한다 (Garcilaso de la Vega 1995, 202). 하지만오늘날태양섬의유적들을보면규모가큰신전의흔적은없다는점이문제이다. 또한스페인인들이태양섬에서태양의신전을보고그규모나화려함에놀랐다거나, 이를약탈, 파괴했다는구체적인기록도남아있지않다. 가령, 바우어와스태니쉬는프란시스꼬삐사로 (Francisco Pizarro) 가꾸스꼬를장악한후정찰을위해파견한두사람의스페인이돌아와태양섬에신전이있고, 사람들이신전에금은보화를바치고, 600명이상의인원이신전에서일한다고보고했다는기록에대해서도직접방문해서얻은목격담이아니라는결론을내린다 (Bauer and Stanish 2003, 72). 위에언급한시에사데레온의기록에도의문을표한다. 시에사데레온의 페루연대기 의두드러진특징이생생하고자세한묘사인데, 태양섬과태양의신전이있다고서술하면서도이에대한구체적인묘사가전혀없는것으로미루어볼때직접방문했다고보기힘들다는것이다 (Bauer and Stanish 2003, 75). 이런이유로해서태양의신전이태양섬에진짜로존재하기나한것인지, 그것이사실이라해도신전의규모, 호화로움, 중요성등이과장된것은아닌지하는의혹이제기되어왔다. IV. 잉카의팽창과통치정당성확보의필요성태양의신전의존재자체나규모에대한의구심에도불구하고잉카시대에태양섬은물론인근의달섬 (Isla de la Luna) 까지도아주중요한장소였던것은틀림없는사실로보아야할것같다. 특히달섬에관해서는주목할만한가치가있는기록이있다. 뻬드로삐사로 (Pedro Pizarro) 의 페루여러왕국의발견과정복보고서 Relación del descubrimiento y conquista de los reinos del Perú (1571) 에상반신은금으로되어있고하반신은은으로되어있는실물크기의여인상이달섬에서운반되어까하마르까에머물고있던스페인인들에게아따왈빠의몸값일부로넘겨졌다는기록이다 ( 재인용, Bauer and Stanish 2003,
123-124). 그렇다면태양섬의금은보화역시스페인인들이수색하기전에이미아따왈빠의몸값으로사용되었을가능성이존재한다. 그렇다해도수색대가태양의신전에대한구체적인기록을남기지않았다는것은여전히의문이지만말이다. 태양섬과달섬의중요성에대해서는, 띠띠까까지역에대한가장중요한식민지시대기록을남긴인물로꼽히는알론소라모스가빌란 (Alonso Ramos Gavilán) 과베르나베꼬보 (Bernabé Cobo) 8) 의기록도남아있다고한다. 이들은태양섬과달섬이잉카시대때에세번째로중요한성소였다고주장한다 (Bauer and Stanish 2003, 26-27). 태양섬과달섬을세번째로꼽은것은꾸스꼬의꼬리깐차 (Coricancha) 와리마인근의빠차까막 (Pachacámac) 다음가는성지라는뜻이다. 그리고바로빠차까막숭배야말로태양섬과달섬이잉카시대에중요한섬이었고태양섬에실제로태양의신전이있었으리라는중요한단서가될수있다. 빠차까막은리마에서약 31킬로미터남쪽바닷가에위치해있다. 일종의오아시스지대라서서기 2세기부터 1533년스페인인들에의해약탈, 파괴될때까지계속해서중요한주거지였다. 9) 전체가다모래사막인페루해안에서빠차까막일대는문명이발생할수있을만한곳이었다. 중부해안지대전체를놓고보아도거주조건이좋은편에속했기때문이다. 그래서빠차까막은일찍부터중요한경제적, 군사적요지로성장하였다. 께추아어가빠차까막에서사용된언어인데이를잉카인들이제국의공용어로삼았다는설이있을정도이며, 이 Revista Iberoamericana 24.2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08 109 8) 페루와망가 (Huamanga, 오늘날의아야꾸초 ) 출신인라모스가빌란은 1618 년에태양섬과 1 킬로미터거리인꼬빠까바나반도의중심지꼬빠까바나 (Copacabana) 에왔으며, 1621 년 꼬빠까바나의누에스뜨라세뇨라성전이야기 Historia del Santuario de Nuestra Señora de Copacabana 를발간했다. 꼬보는 1616 년띠띠까까일대에와서, 적어도스페인인들이달섬의황금을다시찾아나선이듬해까지는호수일대에머물렀다. 그리고 1653 년 신세계역사 Historia del Nuevo Mundo 를발간했다. 두사람모두태양섬을방문한적이있으나이에대한꼬보의기록은라모스가빌란이남긴기록을상당부분그대로수용하였다고한다 (Bauer and Stanish 2003, 64). 9) 빠차까막문명에대해서는빠차까막박물관의웹사이트 (http://pachacamac. perucultural.org.pe/) 를참조했다.
우석균태양섬의잉카시조신화와통치정당성 도시와동명의신인빠차까막은페루중부해안에서대단히중요한신으로이름을떨쳤다 (Rostworowski de Diez Canseco 1988, 42-43). 스페인인들은까하마르까에서아따왈빠를생포한후빠차까막의엄청난부에대해서듣고급히부대를파견했다. 그리고그곳에서실제로엄청난규모의신전을발견했고상당한양의금은보화를얻었다 (Cieza de León 1995, 213-215). 이와관련해주목할만한점은잉카인들이빠차까막을정복한뒤에도빠차까막신에대한숭배를없애지않았다는점이다. 다만태양의신전을세우게만들었을뿐이다. 이에대해잉카가르실라소는빠차까막신앙이잉카인들에게서유래했기때문이라고주장한다 (Garcilaso de la Vega 1995, 392-393). 즉, 원래잉카인들이믿었던신이기때문에굳이근절할필요가없었다는것이다. 하지만앞서언급했듯이빠차까막신앙은잉카인들이출현하기훨씬이전부터존재했으며빠차까막신은빠차까막일대의지역신이었다. 그러다가서기 650 년경페루중남부안데스의와리 (Wari) 문명이빠차까막을점령했을때안데스에도전파된것으로추정된다. 10) 따라서잉카가르실라소의주장은그의특유의잉카중심주의에서비롯된것이라고볼수있다. 그렇다면잉카시대에도빠차까막이여전히중요한신으로남아있을수있었던이유는무엇일까? 무엇보다도잉카가종교에관한한관용적이었기때문에가능한일이었다. 태양숭배와같은국가차원의공식종교가존재했지만, 공식종교를거부하지만않는다면지역신숭배와의공존도허용했다 (McEwan 2006, 137). 그리고이런원칙은피정복민에게도동일하게적용되었다. 특히잉카인들은빠차까막을정복한뒤에태양의신전만세운것이아니라빠차까막신전을새로단장하고규모도키웠다고한다. 빠차까막신은대지모신이지만해안지대에서는조물주의지위를부여받고있었다는점에서안데스고지대의비라꼬차신 ( 위라꼬차라고도부름 ) 과성격이겹친다는점을감안하면이례적인결정이었다 (McEwan 2006, 147). 물론 조물주 라는개념이지극히서구적시각의산물 10) 와리문명에대해서는 González Carré et al.(1997, 57-111).
이라안데스의종교체계를설명하기적합하지않은면도있지만, 어쨌든잉카의신이아니었던빠차까막이잉카에서때로는태양신보다우위에있는신으로여겨지던비라꼬차와대등한지위를부여받았다는것은분명놀라운일이다. 이는잉카가종교적관용을넘어해안지대의통치정당성확보를위해빠차까막숭배를이용했기에가능한일이었다. 태양섬과달섬의성지화도마찬가지로통치정당성확보를위한방편이었을가능성이농후하다. 이두섬은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특별한가치가없었다. 당시이지역의강자였던꼬야인 (los collas) 들과루빠까인 (los lupacas) 들의중심지는각각아뚠꼬야 (Hatun Colla) 와추꾸이또 (Chucuito) 였다. 따라서잉카인들입장에서는태양섬과달섬보다는이두지역이현실적으로훨씬더중요했다. 그런데도불구하고잉카인들이두섬에많은건물을지었고, 태양섬의경우도로정비에도힘을기울였다. 그때문에잉카군주들, 특히뚜빡잉카유빵끼와연관된수많은전설이태양섬과관련해서생겨났다. 스페인인들이두섬에탐험대를여러차례파견할정도로성지로서의명성이높았던이유는태양섬과달섬은물론호수가의꼬빠까바나라는곳이잉카인들이지배하기훨씬전부터성스러운장소로여겨져순례행렬이끊이지않은곳이었기때문이다. 특히꼬빠까바나는심지어식민지시대에도가톨릭신앙과결합되어안데스남부에서가장중요한종교중심지로떠올랐을정도로지역주민들에게는의미심장한곳이었다고한다 (Bauer and Stanish 2003, 76). 즉, 잉카인들입장에서꼬빠까바나는빠차까막사례처럼피정복민의종교를전유하여통치기반을확고히하는데좋은재료였을것이다. 가령, 띠띠까까 라는이름의기원이된퓨마바위, 즉성스러운바위는띠와나꾸전성기인서기 400~1,100년사이어느순간부터띠띠까까일대에서널리숭배되기시작했다 (Bauer and Stanish 2003, 178). 따라서잉카가통치정당성확보를위해태양섬에태양의신전을건축했을가능성은충분하다. 그리고태양의신전이있었다면잉카시조신화에부합되는혈이있는성스러운바위주변에있었을가능성이가장크다. 성스러운바위근처의띠까니 (Tikani) 봉능선에두개의구조물흔적이있 Revista Iberoamericana 24.2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10 111
우석균태양섬의잉카시조신화와통치정당성 고, 6월동지때태양이이구조물사이로정확히진다는점도 (Bauer and Stanish 2003, 246-247) 이가능성을뒷받침한다. 일출을상징하는성스러운바위앞에비교적넓게펼쳐진평지에서일몰을보며거행하는태양숭배의식은성스러운바위숭배를전유하여태양숭배로전환시킴으로써띠띠까까통치의정당성을확보하는데유효한수단이되었을것이다. 11) 앞서소개한 잉카왕실사 의혼합설에대한잉카가르실라소의해석도이를뒷받침하고있다. 그는그일대원주민들이띠띠까까호수와태양섬을성스러운장소로여기는것을본망꼬까빡이이혼합설을만들어냈다고말한다 (Garcilaso de la Vega 1995, 200). 망꼬까빡때이미띠띠까까일대에대한통치정당성확보문제를생각했다는주장은받아들일수없지만, 현지인들의신앙과잉카시조신화를결합시키려했다는주장은후대의잉카군주들이실제로시도한것으로추정할수있다. V. 태양섬과잉카의종교개혁잉카의태양숭배는띠띠까까일대의피지배자에게는낯선것이아니었기때문에잉카에게정복당한지역주민입장에서도크게거부감을느끼지는않았을것이다. 앞서잠시언급한것처럼이미띠와나꾸문명이태양을대단히중요한신으로여겼다. 띠와나꾸문명이남긴대표적인유물인태양의문 (La 11) 달섬에는이냑우유 (Iñak Uyu) 라는신전이있다. 아이마라어로 이냑 은 여인들 (mujeres) 을 우유 는 울타리 (cerco) 를의미한다. 이신전은달숭배와관련이있으며, 태양과달을모시기위해특별히간택된처녀들의처소이기도했다. 흥미로운점은가운데광장을둘러싸고 3 면에건물이들어선 U 자형건축이잉카건축에는아주드문데, 꾸스꼬남쪽에위치해있으며빠까릭땀보기원설의무대로지목되는마우까약따유적이이런형태를보이고있다는점이다 (Bauer and Stanish 2003, 154). 그렇다면잉카인들이태양섬의 성스러운바위 로띠띠까까기원설을조작해낸반면, 달섬의이냑우유를통해서는진짜그들의기원이었던빠까릭땀보를기렸다는가설도성립된다. 그러나이냑우유가마추삐추를제외하면가장보존상태가좋다는잉카시대신전임에도불구하고그같은가설을입증할만한증거를찾아내기힘들정도로훼손되어있다.
Puerta del Sol) 에그자취가뚜렷이남아있다. 현재볼리비아의띠와나꾸유적지에있으며, 1794년발견된태양의문은춘분이나추분때태양이떠오르면최초의빛이상인방 ( 上引枋 ) 바로아래를통과하도록배치되어있다. 그리고상인방가운데 < 그림 5> 띠와나꾸유적지의태양의문 ( 필자사진새겨진인물부조는마치햇살자료 ) 이퍼져나가는형상을하고있어서태양신의모습이라는것을쉽게유추해낼수있다. 그리고뽄세산히네스는양손에지배자의홀을들고있다는점을들어태양신인동시에띠와나꾸의군주를형상화한것이라고말한다 (Ponce Sanginés 2002, 110). 이는띠와나꾸가잉카처럼태양신과군주를동일시하는신정일치사회였을수도있다는것을시사한다. 그런데의미심장한점은이군주-태양이일반적으로뚜누빠 (Tunupa) 로통했다는점이다. 뚜누빠는띠와나꾸문명과그이후띠띠까까일대의꼬야인 ( 오늘날의아이마라인들의선조 ) 들사이에서최고의신성중하나였다 (Mesa et al. 2005, 25). 앞서언급한비라꼬차의지위를지닌셈이다. 그러나비라꼬차와뚜누빠의경계는종종허물어져서같은신으로여겨진다. 예컨대, 질좋은옥수수가생산되어잉카군주의직영농장이있었던꾸스꼬인근의오얀따이땀보 (Ollantaytambo) 에사람형상을한바위가있는데이바위가비라꼬차혹은뚜누빠로불리는사례를들수있다 (Elorrieta Salazar y Elorrieta Salazar 2002, 83-91). 그런데뚜누빠-비라꼬차가인간을창조한곳이바로띠띠까까였다는주장이어느순간부터안데스의전반적인믿음이되었다 (McEwan 2006, 145). 그리고잉카군주들은때로는비라꼬차를태양신보다상급의신으로여기기도하고, 또때로는태양신에게비라꼬차의지위를부여하기도했다 (McEwan 2006, 139). 나아가잉카군주는때로는태양신의아들로, 때로는태양신으로숭배되었다. 띠와나꾸문명에서뚜누빠-태양신-군주의동일시 Revista Iberoamericana 24.2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12 113
우석균태양섬의잉카시조신화와통치정당성 되었듯이잉카시대에도비라꼬차- 태양신-군주의동일시된것이다. 군주와태양신을동실시하는신격화작업이벌어진시기는잉카의급속한팽창을이끈 9대군주빠차꾸떽시대였다. 빠차꾸떽은비라꼬차를태양신의상급신으로숭배하기를택했다. 비라꼬차와태양신을동일시하지는않았던것이다. 하지만잉카시대에가장중요한태양의신전이었던꼬리깐차의태양숭배홀에잉카군주들의조각상도같이두었다는점에서태양신과잉카군주를동일시하는일종의종교개혁도단행했다 (Rostworowski 2011, 145-146). 그런데잉카시조들의띠띠까까기원설은띠띠까까일대에대한통치정당성확보차원에서도필요했지만, 빠차꾸떽이주도한이러한군주의신격화차원에서도필요했던것으로보인다. 빠까릭땀보설의경우 잉카왕실사 에서볼수있듯이잉카의시조들이태양의자손이라는직접적인언급은존재하지않는것이보통이다 (Garcilaso de la Vega 1995, 46-48). 즉, 빠까릭땀보설에는군주와태양신을동일시할만한근거가결여되어있는것이다. 반면띠띠까까기원설의경우는태양섬이라는구체적인장소에근거하고있고, 태양신이잉카의시조들을지상에내려보냈다고말하고있으며, 태양신과창조주의경계가희미하다. 게다가 띠띠까까 라고불리던섬이름이세월이지나면서 태양섬 으로개명되어태양과잉카군주의관계를더욱밀착시키는역할을했다. 잉카군주를신격화하거나태양신과동일시하는작업에더욱좋은재료가띠띠까까설이었던것이다. VI. 나가면서지금까지잉카시조신화에대한소개와이신화가잉카군주들의통치에어떻게활용되었는지를보았다. 사실본연구자로서는한계가있는글일수밖에없다. 띠와나꾸, 와리, 빠차까막문명과이들과관련된종교체계까지두루언급하기에는지식이모자라는것도문제지만잉카에대한연구자체도여러가지로한계가많다. 아무래도잉카문명에문자가없었다는점이가장큰한계이
다. 게다가정복과식민지시대초기에전쟁, 전염병, 강제이주등으로원주민인구가 10분의 1까지감소되는과정에서잉카왕실에대한기억이상당부분소실되어서연구의어려움을가중시킨다. 또한잉카시조신화를기록한이들이주로스페인인들이어서언어장벽, 세계관의차이, 문화적차이등으로원주민정보제공자들의이야기에대한이해도가떨어지는경우가많았으니그들이남긴기록을전적으로신뢰하기어렵다. 승자의기록이라는점만문제가되는것이아닌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명백한사실이몇가지가있다. 첫째, 띠띠까까기원설이빠까릭땀보기원설보다더큰호소력을발휘했다는점이다. 둘째, 성스러운분위기를풍기는띠띠까까의자연조건으로인해이지역에뚜누빠-비라꼬차숭배와태양신숭배가잉카이전부터존재했다는점이다. 셋째, 잉카시대에도이신앙은여전히유지되었고, 잉카인들이태양섬처럼현실적으로별로중요하지않은곳도특별히관리했다는점이다. 비록전설속태양의신전처럼대규모신전이있었던것으로단정지을만한확증은없지만말이다. 이세번째사실때문에잉카군주들이그들의시조신화를띠띠까까일대에대한통치정당성확보차원에서이용했으리라는추론이가능하고, 나아가태양신과군주를동일시하는빠차꾸떽의종교개혁에이용했을개연성도충분히존재한다. 정복직후시기에대한연구들을보면잉카군주의죽음이원주민들에게는우주적혼란이었다는점을강조하고있다 (Ossio A. 1973, 157; Wachtel 1976, 71). 물론이런현상을일반화시킬수는없다. 잉카가 14세기중반부터워낙급속하게팽창하여, 스페인인들이정복에착수했을때마음으로복속하지않고있던부족들도많았기때문이다. 하지만적어도잉카인들에게잉카군주의죽음이지배자교체이상의의미를지니고있었던것은분명하다. 빠차꾸떽때단행한종교개혁으로잉카군주가신격화되면서천상과지상을잇는유일한매개자로인식되기시작했기때문이다. 이신격화과정에서띠띠까까기원설을내용으로한잉카시조신화가어떤식으로든작용을한것으로추론되며, 그때문에띠띠까까기원설의신빙성이빠까릭땀보설보다떨어지는데도불구하고 Revista Iberoamericana 24.2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14 115
우석균태양섬의잉카시조신화와통치정당성 훨씬더호소력을발휘하는결과를야기한것으로보인다. 참고문헌조셉캠벨 (1992), 신화의힘, ( 빌모이어스와의대담, 이윤기옮김 ), 고려원. 빠차까막박물관, http://pachacamac.perucultural.org.pe/ Bauer, Brian S. and Charles Stanish(2003), Las Islas del Sol y de la Luna: ritual y peregrinación en el lago Titicaca, (trad. de Javier Flores Espinoza), Cuzco: Centro de Estudios Regionales Andinos Bartolomé de Las Casas. Burga, Manuel(2005), La historia y los historiadores en el Perú, Lima: Fondo Editorial Universidad Nacional Mayor de San Marcos y Fondo Editorial Universidad Inca Garcilaso de la Vega Cieza de León, Pedro(1995), Crónica del Perú, primera parte, 3a ed., 2 tomos, Lima: Fondo Editorial de la Pontificia Universidad Católica del Perú. Elorrieta Salazar, Fernando y Edgardo Elorrieta Salazar(2002), Cusco y El Valle Sagrado de los incas, Lima y Cusco: Tanpu S.R.L. Garcilaso de la Vega, Inca(1995), Comentarios Reales de los Incas, 2 tomos, reimpresión, (edición, índice analítico y glosario de Carlos Araníbar), México D.F.: Fondo de Cultura Económica. González Carré, Enrique et al.(1997), Ayacucho: San Juan de la Frontera de Humanga, Lima: Banco de Crédito del Perú. McEwan, Gordon F.(2006), The Incas: New Perspective, New York and London: W. W. Norton & Company. Mesa, José de et al.(2005), Historia de Bolivia, 5a edición actualizada y aumentada, La Paz: Editorial Gisbert. Milligan, Max(2001), Realm of the Incas, New York: Universe Publishing. Ossio A., Juan M.(ed.)(1973), Ideología mesiánica del mundo andino, 2a ed., Lima: Ignacio Prado Pastor. Ponce Sanginés, Carlos(2002), Tiwanaku y su fascinante desarrollo cultural, La Paz: CIMA. Rostworowski de Diez Canseco, María(1988), Estructuras andinas del poder: ideología religiosa y política, 3a ed., Lima: Instituto de Estudios Peruanos. Rostworowski, María(2011), Pachacutec, 1a reimpresión, Lima: Instituto de Estudios
Peruanos. Rowe, John H.(1946), Inca Culture at the Time of the Spanish Conquest, Julian H. Steward(ed.), Handbook of South American Indians, Vol. II, Washington, D.C.: Bureau of American Ethnology. Shady Solís, Ruth(2005), Caral-Supe y su entorno natural y social en los orígenes de la civilización, Investigaciones Sociales, Año LX, No. 14, pp. 89-120. Urton, Gary(2004), Historia de un mito. Pacariqtambo y el origen de los inkas, (trad. de Alberto Miori), Cuzco: Centro de Estudios Regionales Andinos Bartolomé de Las Casas. Wachtel, Nathan(1976), Los vencidos: los indios del Perú frente a la conquista española(1530-1570), trad. Antonio Escobotado, Madrid: Alianza Editorial. Revista Iberoamericana 24.2 이베로아메리카연구 116 117 우석균서울대학교라틴아메리카연구소 wsk65@snu.ac.kr 논문투고일 : 2013년 7월 27일심사완료일 : 2013년 8월 16일게재확정일 : 2013년 8월 19일
우석균태양섬의잉카시조신화와통치정당성 The Incas Myth of Origin in relation to the Island of the Sun and the Governing Legitimacy Suk Kyun Woo Institute of Latin American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Woo, Suk Kyun (2013), The Incas Myth of Origin in relation to the Island of the Sun and the Governing Legitimacy Abstract The Incas myth of origin is generally divided into two versions. One indicates Pacariqtambo as the place of origin and the other, Lake Titicaca. It is practically impossible to know which is correct. But the Lake Titicaca version is less convincing. However, this version has prevailed until today. There was even a version that combines both, but indicating the Lake Titicaca as the place of origin and Pacariqtambo as the place of passage. In Lake Titicaca, Sun Island with a sacred rock, indicated as the place of Incas origin. It is said that the Incas paid special attention to the island and built a temple of the sun. However, it seems that these events were conducted to gain political legitimacy after the conquest of that region. Titicaca version could also be a suitable material for a kind of religious reformation carried out by Pachacutec, since the Pacariqtambo version dosen t mention clearly that the founders of the Inca were sent by the Sun. Key words Inca, Myth of Origin, Titicaca, Island of the Sun, Pacariqtambo, Governing Legitimacy, Religious Re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