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I 북한경제리뷰 K D I R eview of th e N o rth K o rean E con om y 2013. 4
KDI 북한경제리뷰편집진 편집위원 이석 연구위원 ( 편집위원장 ) 고일동 선임연구위원 전홍택 선임연구위원 조병구 선임연구위원이종규 부연구위원김은영 전문위원 편집이원경 연구원한영은 연구원전소영 연구원박조아 연구원유재승 연구원전은경 연구행정원김미영 인턴연구원 KDI 북한경제리뷰는북한경제의실태및남북한경제협력과관련한주요이슈를분석 정리하여정책당국자, 학계및업계등의이해를높이고정책방안을도출하는데도움을드리고자월별로발간되고있습니다. 본보고서의내용은출처및집필자를명시하는한자유로이인용할수있습니다. 전화번호 958-4355 팩스번호 958-4090 본자료는 KDI 홈페이지 (http://www.kdi.re.kr) 로 접속하시면보실수있습니다.
목차 동향과분석 3 < 좌담회 > 북한경제연구 20 년 : 회고와전망 권태진, 김원배, 성채기, 최수영, 고일동, 전홍택 23 한국의대북정책과남북경협 : 회고와전망 이석 43 남북관계와대북정책의변화 김형기 연구논문 67 접경지역단동에대한현지조사 정은이 북한경제연구협의회 95 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에서의북한경제와한국경제 신범철, 이석기, 김영훈, 정우진, 김중호, 이석, 조병구 경제자료 119 김정일이후의한반도 : 도전과기회 Katharina Zellweger 부문별주요기사 (3 월 16 일 ~4 월 15 일 ) 147 대내경제, 농업및식량, 대외경제, 남북경협
동향과분석 < 좌담회 > 북한경제연구 20 년 : 회고와전망 권태진, 김원배, 성채기, 최수영, 고일동, 전홍택 한국의대북정책과남북경협 : 회고와전망 이석 남북관계와대북정책의변화 김형기
동향과분석북한경제연구 20 년 : 회고와전망 북한경제연구 20 년 : 회고와전망 KDI 북한경제팀은 2013년 3월 28일에권태진한국농촌경제연구원선임연구위원, 김원배중앙대학교교수, 성채기국방연구원책임연구위원, 최수영통일연구원선임연구위원을초청하여 북한경제연구 20년 : 회고와전망 이라는주제로협의회를개최하였다. 본협의회에서는지난 20여년간의북한경제연구의발전과정을시기별로나누어회고해보고앞으로보다바람직한북한경제연구를위한방향에대해논의하였다. 본문에서는금번협의회에참여한전문가들의동의를얻어이들의토론내용을간략히정리 제공한다. < 북한경제연구 20년 : 회고와전망 > 일시 : 2013년 3월 28일 ( 목 ) 15:30~18:00 사회 : 전홍택 (KDI) 패널 : 권태진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 김원배 ( 중앙대학교 ), 성채기 ( 국방연구원 ), 최수영 ( 통일연구원 ), 고일동 (KDI) 3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1. 발제 전홍택 : 북한경제연구협의회를시작하도록하겠다. 오늘협의회의주제는 북한경제연구 20년 : 회고와전망 이다. 새정부출범에즈음해서과거를정리해보고새로운출발을준비하는의미에서북한경제연구 1세대라고할수있는전문가분들을초청하여협의회를진행하게되었다. 지난 20여년동안의북한경제연구에대해서생각하는바를정리해보고, 앞으로어떠한방향으로진행하면좋을지방향제시를부탁드린다. 김원배 : 북한연구의과거와미래를바라볼때우선적으로떠오른생각은우리가그동안북한, 특히북한경제라는주제를두고어떠한접근을시도해보았느냐는것이다. 이러한시도들은연구환경의변화에따른변천과더불어시기또는시대별변천을겪어왔기때문에시간적 공간적인지범위를설정하고그안에서북한연구의성격을분류해볼수있겠다는생각이들었다. 우선연구의방법론을놓고볼때, 북한경제연구역시현상기술대분석적연구, 실증적대규범적연구, 비교연구대내재적연구, 단면적연구대통시적연구, 단층적연구대중층적연구로형태별대조구분이가능하다고본다. 이러한관점에서그동안에실질적으로진행된북한연구의궤적을그려보면크게는 1990 년대이전, 1990~2000 년대그리고 2010 년이후의모습들을살펴볼필요가있다. 1990년대이전에는북한의현재와과거에대한연구, 즉북한자체의모습을파악하려는노력이이루어졌다. 개념적틀을가지고지난 20 년간의연구를정리할필요가있어 대표적인연구자로하와이대학교에재직했던서대숙박사와같은사람들이있는데, 이들은주로북한의체제나특성에대한연구를한바있으며지금도이러한연구는계속되고있는것으로안다. 이러한접근은공간적으로도한정적이고시간축상으로도미래에대한고민보다는현상또는과거에국한된연구였다. 1990년대이후에서 2000년대중반까지는주로미래, 4
동향과분석북한경제연구 20 년 : 회고와전망 즉통일을전제로했을때북한이어떻게변할것인지혹은어떻게변해야한다는식의접근이많이이루어지기시작했다. KDI에서도당시체제전환과관련된연구, 즉비교연구적관점에서독일이나루마니아의경험등을분석한바있는것으로안다. 당시는공간적으로보면북한자체라기보다는한반도라는것을상정하고, 또본인을포함한다수의사람들은동북아라는공간내에서북한내지는한반도가어떻게될것인가에대한고민을주로했다고여겨진다. 이러한연구추세는 2010 년이후다시거꾸로돌아간것같다. 즉, 북한의실상또는실태에대한연구가더많이진행되어온것같다는얘기다. 이는물론남북관계의경색에서비롯되기도했겠지만, 실질적으로과연우리가과거 1990 년대에생각했던북한이지금현재의북한인지를되짚어보는, 일종의시간축을두고비교할수있는계기를제공하지않았나생각된다. 앞으로의북한연구는한시간단면에만집착할것이아니라통시적으로도봐야할필요가있다고생각된다. 또한북한자체의실상을파악하는것도매우중요하지만, 이와더불어한반도를위한연구를한다는인식이필요하다. 실증적연구와미래지향적연구가서로분리된상태로진행되는것이아니라서로통합된형태로이루어지는것이바람직해보인다. KDI 가북한경제와관련된그간의연구를정리할계획을가지고있다고이야기하였는데, 그러한측면에서본다면어떠한틀을가지고정리하는것이필요하다. 단순히그동안의연구를유형별로분류하는것이비교적쉽게이루어질수있겠지만, 그것보다는앞서예시한것과같은개념적틀을염두에두고지난 20년간의연구를정리하는것도좋을것같다. 비단그것이북한경제에만국한될필요도없다고본다. 이러한연구성과정리에는평가가뒤따라야할것이다. 평가를하기위해서는평가자의시각과관점이있어야하며, 이런점들을서론에서서술할필요가있을것이다. 1990 년대초에서대숙교수가본인에게개인적으로충고를해준바있는데, 북한의앞날에대해이야기하기보다는과거나현재의정도만이야기하라는것이었다. 앞날이어떻게될것이라고예측하는것은전문가로서의생명에악영향을미칠뿐이라고얘기해주었다. 즉, 예측이틀릴가능성은 99퍼센트고맞을확률은 1퍼센트라는것이다. 이는예측이어렵다는얘기도되지만, 결국거꾸로해석하면정확하게북한의실상을파악하고있는사람이없다는얘기도된다. 실상파악이가능하다면이를토대로추세의연상선상에서좀더정확한예측을할수있을텐데결국은실상을모른다는말이다. 경제성장이나관련수치를한두개정도안다고해서실상이파악되는것은아니기때문에앞으로이러한실증연구를좀더깊이있게할필요가있다고생각한다. 그동안소위당위적연구를많이진행해왔던것같다. 예를들면한반도가어떻게되어야하겠다든지북한이개혁개방을한다면이렇게진행되어야 5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한다는등우리가가고자하는지향점을고민한연구가많이이루어졌다. 그런데지난 20년을되돌아보면참허망하고자괴감이드는것도사실이다. 이러한관점에서볼때, 앞으로는정책의실효성을담보하기위해서도실증연구가토대가되어야하며동시에북한만볼게아니라한반도, 나아가동북아를보는연구가이루어져야앞으로한반도를어떤모습으로그려갈것인지에대한비교적개연성높은구상이나올수있을것이라고생각된다. 우리가바라기만한다고해서그방향으로미래가끌려가지도않았으며앞으로도끌려갈것같지는않기때문이다. < 참고 > 시공간축에서본북한연구의궤적 자료 : 김원배, 북한경제연구협의회 4 월정례협의회, 3 월 28 일발표자료. 전홍택 : 김원배교수께서북한연구성과평가의큰틀을제시해주었다. 시간축과공간축의틀에서그동안의북한연구의궤적을설명해주었으며, 특히앞으로북한연구를시간축에서보다통시적으로볼필요가있고, 공간축에서도중층적으로보자는의미있는제안을하였다. 또한물론 1990 년대이전이나이후에도트렌드와다른연구도있었겠지만과거연구에있어서큰트렌드를정확하게짚어주었다. 1990년대에는소련의붕괴, 김일성사망, 고난의행군등의사건으로인해미래지향적, 규범적성격의연구가많을수밖에없었지않았나생각된다. 그러나정책이라는것은사실증거가기반이되는것이필요하다. 2010년이후에북한에관한, 특히경제분야에있어서실증연구가많이나타난다는것은그만큼북한연구의깊이가 6
동향과분석북한경제연구 20 년 : 회고와전망 심화되었다고볼수있겠다. 앞으로도이러한것들이더객관화되어야하고종합적으로 볼필요가있다는지적은의미가있다. 최수영 : 지난 20여년간의북한경제연구의흐름을보면일단북한경제의연구는 1990 년이전하고이후가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이후부터북한경제연구가시작되었다. 그이유로첫째, 1980 년대말사회주의권이붕괴되면서북한의경제변화나체제전환의가능성이제기됨에따라북한경제에대한연구필요성이대두된점을들수있다. 또한 1980 년대말에사회주의권의변화가예견되는가운데한국의경제적국력이높아졌고, 올림픽개최를계기로자신감이상승되었다. 노태우정부시절 7 7선언을계기로해서북한에대한본격적인대비가필요해졌다. 그전까지는군사에치중된연구가주를이루었다면, 이때부터본격적으로북한의변화를생각하면서경제적인측면에서준비가필요하다는인식이맞물려국내에서북한경제연구가진행된것이아닌가생각된다. 실제로 1990년대이전에논문을작성할때참고할만한국내자료는거의없었다. 통일부에서정리한북한경제자료와북한연구소에서나오는 북한경제론 정도를참고할수있었지만논문형태의자료는거의없었던것으로기억된다. 대체로해외자료를사용했는데, 해외자료중에서도본격적으로북한경제를다루는것은거의없었고, 정치경제에포함되는곳에서발췌해인용하고는하였다. 신진연구자의유입이중요한시점 북한경제연구가시작된또다른이유는 1990년대에들어서면서남북간경제교류협력이시작되고북한경제연구에대한수요가늘어났기때문이다. 이것은최근에비추어보아도충분히납득할수있다. 남북관계가경색되면다른분야는몰라도특히북한경제분야는크게논의되지않는다. 그야말로수요와공급이그대로적용되는것이다. 남북관계분위기가좋은시기에는논의도많이이루어지고이와같이북한경제연구도활발해지는데, 그렇지않을경우에는침체되는경향이있다. 이전에북한경제연구가시작될때에도남북관계의분위기에따라서북한경제연구도진행되어왔다고볼수있다. 주제적측면에서볼때초기의연구는북한의변화가어떻게진행될것인가와함께북한체제와관련해중점을둔것같다. 북한체제의특성이나이행그리고북한이어떻게변해가는 7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것이우리에게유리한지에대한연구가많이이루어졌다. 북한경제에대한보다깊이있는연구보다는비교사회주의적측면에서사회주의경제체제에대해초점을맞춘연구가이루어졌다. 1990 년대중반북한의고난의행군시기를지나면서북한경제연구방향이변화한듯하다. 탈북자가늘어나면서탈북자의증언을바탕으로하여북한내부의실상에접근하려는시도가늘어난것이다. 그러나탈북자의증언이라는것이체계적으로이루어지지않았기때문에특정탈북자의이야기가과장되어포장되는등한계가많았다. 물론탈북자의증언이특정지역, 특정분야에서는개연성이높을만한부분도있으나전체북한경제라는측면에서본다면이는한정되어있고일부분에지나지않는다. 이를확대해석하여북한경제에대해논하기에는무리가있는인용이많았다. 이를체계적으로잘종합해서활용한다면의미있는연구성과를낼수있겠다. 전체적으로보면기본적으로자료의한계에봉착하였지만그래도연구가많이이루어졌다. 실제로북한경제를연구하는전문가들이그렇게많지않은데상대적으로연구는많이이루어졌다고할수있겠다. 여기에는국책연구기관들중북한경제에특화된기관들이상당한역할을했다고생각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한국개발연구원, 농촌경제연구원, 산업연구원, 에너지경제연구원, 교통연구원, 국토연구원, 한국은행등의기관들이각특성에맞게연구를많이진행해왔다. 경제를연구하는데있어서자료와함께중요한것은전문가인데, 신진연구자가유입되지않고있다. 이는굉장히큰문제로신진연구자양성이필요하다. 또한남북관계가경색되는경우에는북한경제연구는후순위로밀릴수밖에없다. 그러한면에서남북관계의개선이굉장히중요하다. 이것이이루어져야지만북한경제연구에대한수요도늘어나고그에대한연구도진전될것이다. 전홍택 : 1990 년대이전에는북한연구가정치 군사분야를중심으로, 그리고국내보다는해외에서이루어졌기때문에국내북한경제연구는불모지였는데, 국내적으로는 7 7선언, 국제적으로는 1980 년대말사회주의권의붕괴를계기로북한경제연구가시작되었다는말씀잘들었다. 전두환정권시기에북한에서보낸수재민구원물자를받아들이고그후속경제회담을계기로북한경제연구, 남북경협연구수요가늘어난점도영향이있지않을까생각된다. 그리고그동안사실자료, 데이터문제가매우심각함에도불구하고상당한양적성과가있었다는점을지적해주었다. 외부성이높은북한경제연구는공공재의성격을가지고있어서국책연구소들이상당한역할을했던것같다. 앞으로도신진연구자가민간에서많이나오기는어렵기때문에국책연구소의신진연구자역할이기대된다. 8
동향과분석북한경제연구 20 년 : 회고와전망 권태진 : 주로농촌경제연구원에서하고있는북한경제연구중에서북한의농업연구에관한흐름을짚어보도록하겠다. 북한농업관련연구는우리연구원 ( 농촌경제연구원 ) 에서많이하였다. 1989 년남북한간에교역재개가시발점이되어북한에대한관심이높아지게되었다. 우리연구원같은경우 1980년대에도북한에대한연구가진행되기는하였다. 그때는주로북한의토지개혁과같은중요한사건에대한방대한자료를수집하는데초점이맞추어졌다. 수복지역에대해실시한농촌조사자료를바탕으로분석하는연구를진행하였다. 당시에는북한과관련된정보를수집하는것자체가연구의중요한부분이라는인식이있었다. 북한이식량난을겪고아사자가발생한 1990년대중후반부터는북한의실상에대해더욱깊이있는연구가진행되었다. 북한연구는남북한관계와관련자료를얼마나활용할수있는지에영향을받는데, 1990 년대말부터국제기구로부터활용가능한자료가나오면서분석적인연구를시도할수있었다. 자료를모으는수준에서모은자료를바탕으로초보적인수준이나마분석을해보는시도가 1990 년대말부터 2000 년대까지이어져왔다. DJ 정권이들어서면서남북한교류협력문제가집중적으로부각되면서여기에초점을맞춘연구가증가하였다. 북한또는남북한만을볼것이아니라 동북아의안보나평화의관점으로이해할필요가있어 우리연구원같은경우 1999년에연구비를확보하면서 KERI 북한농업동향 을발간하기시작하여지금까지 15년째계간지를발간하고있다. 여기에는북한에서간행되는농업관련원전등을모아서다른기관에서도이용할수있도록자료를제공하고나름대로분석한내용을싣고있다. 이것이도화선이되어북한농업분야에대한연구가좀더활발해지면서다양한자료들이축적되고이를활용할수있게되었다. 주로북한신문, 다른기관에서발표하는자료, 정부와의협력을통해유엔이나국제기구에서가지고있는공개및비공개자료를입수하여축적하였으며, 이를통해좀더분석적인연구를할수있게되었다. 북한전역에대한상세한인공위성영상자료를확보하여축적하고필요한부분을메우면서새로운방법론으로접근해보기도하였다. 그동안자료의이용및활용면에서크게발전하였다고평가할수있다. 9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한편, 남북협력이활발히추진되면서북한과의교류협력을어떤식으로발전시킬것인지에대한연구도하면서다른한쪽에서는북한이붕괴될경우를대비한연구도동시에추진되었다. 2000 년대에는농업분야의연구가매우활발하게이루어졌다. 2002 년 7 1 경제관리개선조치이후엔북한에시장이생겨나고시장에대한정보들이무수하게흘러들어오면서북한의시장상황에대한다양한정보를축적할수있었다. 이러한정보는공식적인자료는아니었지만가격정보와같은비공식적인자료들을바탕으로시장을통해북한의내부를들여다볼수있게해주었다. MB 정권이후남북관계가소원해지면서북한연구는더이상큰진전은이루어지지않았다. 그당시까지북한에대한지원, 남북경협및교역등다양한교류협력연구를주제별로수행하였는데, 정권이바뀌면서실행되지않은부분이많이나타났기때문에지금까지의연구가잘못된게아닌가하는반성의기회도가졌다. 최근에는새로운주제의연구를시도하기보다는과거에했던연구가정책에어떻게반영되었으며어떤점을간과하였는지되돌아본다는점에서, 그리고연구가확장되지는않았지만깊이를더해가는계기를마련하였다는점에서의미가있다고본다. 지금까지의연구를되돌아보면북한경제연구는단순히경제적관점에서만한정해서는해답을찾기힘들며국제관계나북한국내정치와연계하여접근해야만현실성을가질수있다는교훈을얻는다. 특히최근북한이우리와의관계가소원해지고중국과의관계가밀접해지면서북한연구에있어서도북한만을또는남북한만을보아서는안되고, 동북아의안보나평화라는관점에서다각적으로볼필요가있겠다는생각이든다. 앞으로는지금까지해왔던연구를검증해보고활용가능한자료를더많이확보하여분석적인틀을가미하면서좀더실증적인연구를많이할필요가있다고생각한다. 국내학자들과국외학자들사이의교류를확대하고, 국내학자중에서경제학자와인접학문분야의서로다른접근방법과시각을가진전문가들이지식을공유하면서북한에대해좀더통섭적인연구를해야만의미있는결과를도출할수있다고판단된다. 전홍택 : 1990 년대가북한경제연구의태동기였다면, 2000 년대초에는정보의수집과함께방법론상의진전및활성화가이루어졌으며, 2000년후반에와서다소침체기를맞이하게되었다고지적해주었다. 특히앞으로의방향에대해서조금더연구를국제화하고인접분야와협력할필요가있다는말씀에공감한다. 성채기 : 저는주로군사 안보적관점에서북한경제 ( 즉군사경제 ) 를연구해온국방연구원의 10
동향과분석북한경제연구 20 년 : 회고와전망 그간의연구들을소개차원에서먼저회고해보고, 그다음북한경제연구일반의관점에서몇가지얘기를해보겠다. 우선, 앞서다른분야는남북관계가좋아져야북한연구에대한수요가많이늘어난다고했는데, 우리연구원에서의북한연구는남북관계가경색되었을때에도그초점이바뀔뿐연구필요성은계속있어왔다고할수있다. 그에따라 30여년에걸친국방연구원의연구성과나실적은꽤많은편이다. 하지만많은경우기밀로분류됨으로써외부에많이알려져있지않은것이아쉬운점이다. 우리가주로연구하는분야인북한군사경제는군사재정, 군수산업, 군사연구개발등군사와경제의성격을동시에갖는분야외에도, 경제와군사의상호작용관계일반을연구대상으로포괄하는분야이다. 북한군사경제에관한연구는, 우선북한이가용자원의약 1/3에이르는방대한규모를군사부문에투입하고있기때문에경제연구에서있어서빠져서는안될중요한분야라할수있다. 더욱이북한군은그산하에많은기업소와농 목장, 무역회사, 금융회사등다양한경제조직을운영하고있고, 나아가민간경제부문과는비교가되지않을정도의정치적, 경제적특권을부여받고있다. 이때문에군사경제를빼고는북한경제의실상과전모를제대로파악하기어렵다고할수있다. 구심점의역할을할수있는연구기관이중요 그간의북한군사경제와관련한연구들의시기별특징을파악해보면, 1980 년대는군사경제의기본분야에대한기반구축의시기였다고할수있는데, 주로은폐부분까지고려한실제군사비규모와그구성내역, 경제의군비부담능력, 전쟁지속능력등에대한연구가이루어졌다. 1990 년대에는경제위기와군비증강의상호관계, 그리고북한의개혁 개방가능성과군사적의미등에대한연구가비교적많이수행되었다. 2000년대는여러가지통계추정들이정교화되는시기라할수있다. 예를들면최근수년간에는정보기관이보유한일부중요정보, 자료가이용가능해짐으로써북한의구매력 (PPP) 환율시리즈를추정할수있게되었는데, 이를통해 2002년 7.1조치이후의 환율적용문제 를극복할수있는기반이마련되기도하였다. 다음에는북한경제일반에대한연구의추세와방향등에대해몇가지의견을제시해보겠다. 먼저 1970년대중반까지는북한경제연구가활성화되지못한것으로파악된다. 이는 11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당시까지북한경제가남한경제에비해서상당히나은상황에있다보니북한경제연구가금기시되는정치 사회적분위기가작용한것이첫번째요인이아닌가생각된다. 또당시에는정보공개가극히제한될수밖에없었던것도북한경제연구가활성화되지못한또다른이유일것이다. 이러한이유들로인해이시기의북한경제연구는주로일본, 유럽등외국의일부학자들에의해이루어지지않았나생각된다. 예를들면영국경제학자존로빈슨 (Joan Robinson) 과같은일부진보적학자들이 - 북한이선전차원에서제공한자료들을바탕으로 - 성공적인성장케이스로서북한경제의실상을부각시킨연구를내어놓기도하였다. 1970 년대후반부터 1980 년대에는남한경제가고속으로성장한반면북한경제는상대적으로쇠퇴국면으로접어들었다. 경제성장면에서우리가조금자신감을갖게되면서정치 사회적분위기가바뀜과동시에일부중요한북한원전자료들이나타나기시작했다. 예를들면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가북한건국이래의중요한문건들을집대성한 북한연구자료집 을 1960년대후반부터 1980년대까지발간하였는데, 이들이북한연구활성화에크게기여하였다고생각된다. 그러나이때까지의연구들은현상들에대한서술적분석이거나문헌추적을통해역사적사실을확인, 정리한것이대부분이었다고판단된다. 북한경제연구를발전단계별로나누는문제에대해서는, 연구중점분야의변화, 정보이용가능성의변화, 연구자나연구기관등연구저변의확대추이등세가지관점에서살펴볼수있겠다. 우선중점분야의변화는크게보아앞서설명한군사경제분야와대동소이하다고할수있다. 자료정보의이용가능성측면에서보자. 정보이용가능성은 1980년대말의민주화이전과이후가많이달라졌다. 민주화가이루어지자북한관련정보공개요구가비등해지기시작하였고, 이에부응하여국방부에서는 국방백서, 통일원에서는 북한최고인민회의자료집, 조선로동당대회자료집 등이발간되어나왔다. 88올림픽을개최하고동구권국가들과수교를하게된것도정보공개의폭이확대된요인이다. 1990 년대는동구공산권이붕괴되고남북한이유엔에동시가입하는등정보획득여건이획기적으로변화함에따라북한연구가질적, 양적으로크게발전하는단계로진입하게되었다. 특히 1992년북한의유엔가입은북한으로하여금좋든싫든국제기구에대해경제통계등정보공개폭을크게확대할수밖에없는상황을만들었다. 그간북한이유엔과그산하기구들에제공한적지않은정보중에는왜곡된것들도꽤있었지만, 그런속에서도그동안보지못한양적인확대와질적인변화가있었던것이확인되고있다. 2000년대의연구활성화배경에는이런정보이용가능성의대폭적인증대가있었음이분명하다고생각된다. 다음연구자와연구기관의규모변화측면에서보자. 1990년대사회주의권이붕괴되고 12
동향과분석북한경제연구 20 년 : 회고와전망 북한경제가위기에빠져들어통일에대한관심이높아지면서북한연구의필요성이크게높아졌다. 그결과특히정부출연연구소들안에서각분야별로북한연구의필요성이제기되었고분야별로연구가이루어질수있는저변이확대되었다. 물론남북관계의경색여부나정권에따라북한연구에대한수요가변화하긴하였지만전반적으로는북한연구가분야별로미시적 거시적으로크게확대되었다. 그결과대략 2000년대이후부터현재까지는이러한분야별연구기관들과학계의연구실적이축적, 공개되고통계정보가확대되면서북한연구에있어서시너지효과가본격화되어왔다고판단된다. 따라서 2000 년대이후부터지금까지는북한경제연구의심화발전기, 또는발전기로넘어가는중요한과도기라할수있을것이다. 북한연구에있어서의그동안의성과와한계에대해간단히의견을제시해보겠다. 다양한성과중먼저통계의양적, 질적개선에힘입어과거의서술적, 역사적분석중심에서한걸음더나아가실증적연구가상당한정도진전된점이중요한성과가아닌가생각된다. 연구저변의확대도중요하다. 남북관계가좋아졌을때연구인력이증가한다고앞서언급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남북관계가경색되었을때에도과거보다는북한연구자들및기관들이많이늘어났다고판단된다. 물론이러한성과에도불구하고여전히한계도많다. 통계와정보가여전히부족하다는것이핵심적인한계이고, 또하나는북한연구에있어서정치 이념적요소가너무많은영향을미치는점이라생각된다. 그동안북한연구는정권의변화또는이념적성향에따라서많은영향을받아왔다. 학계나연구권에있어서도정치적, 이념적요소가적지않게작용해왔고, 연구자들속에서도권력 정치지향적인분위기가지금도상당히존재하고있다. 좀더순수하게연구하는분위기, 이를존중해주는풍토가아쉬운것이다. 또북한이공개하는자료정보들에대해서어떤부류는맹신하고, 다른한편으로는전혀쓸모없는선전에지나지않는것으로치부하기도하는자세와방법론상의문제도있다. 우리가수십년간자료들을추적하고선전이나왜곡을걸러낸바에따르면, 북한의공식발표자료들에는매우귀중한정보들이담겨있음을확인할수있었다. 마지막으로북한연구의앞으로의방향과교훈역시자료와정보를어떻게잘활용할것인지에달려있다고생각된다. 그간연구과정에서정부부처나유관기관들이보유, 축적하고있는북한관련정보는의외로많음을알수있었다. 문제는이러한정보들이각부처및기관들의폐쇄성으로인해공유되지않고있는데있다. 또가지고있는자료를데이터베이스화함으로써보유정보항목들의존재여부를확인하고공유할수있는시스템도매우미흡한실정이아닌가여겨진다. 또한연구기관간의정보교류도많이필요하다. 그러기위해서는 13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KDI 와같은구심점역할을할수있는기관이필요하다. 전홍택 : 당초했던질문에대한답뿐아니라알기어려웠던 80년대부터지금까지계속해서있어왔던군사경제에대한연구를소개해주었다. 북한경제연구의회고와전망에있어서자료정보이용가능성의주요구분시점의기준의하나로보았는데상당히공감이된다. 1980년대말민주화이후, 7 7선언, 국방정책등이맞물리면서자료공개가확대된것이북한연구에공급이수요를창출하는효과를나타낸것같다. 특히앞으로자료공개확대와교류협력을통해서북한연구가심화 확대하기를기대해본다. 고일동 : 북한경제연구와관련해서평소에생각했던것몇가지를말씀하고싶다. 회고보다는참회에조금더가깝다고생각이든다. 순전히개인적시각으로보면, 북한경제에관한연구가한계에봉착하고있는것이라는생각이든다. 왜그렇게생각하는지몇가지사례를들어보도록하겠다. 우선본인이 1990년대독일에가서경험했던사례가있다. 당시동독의 GDP 와같은경제부문을평가하는몇몇독일학자들과교류한적이있는데, 1991년이되고나니전부자취를감추고말았다. 그이유는과거에추정했던동독의경제가통일이된이후실제로살펴보니완전히어긋나있었다는것이다. 단순히외부추정에의존해동독과같은폐쇄된경제의실태를파악한다는것은불가능했다는것이다. 또하나사례를들어보자. 1997 년 7월홍콩이중국으로반환될당시까지만해도홍콩에서는중국전문가들이상당히많이활동하고있었으나홍콩반환을기점으로그들의존재감은사라지고말았다. 즉, 중국에대한정보가보편적지식이되어버린순간이를연구하던학자들의역할도크게줄어들었다는얘기다. 20 년간똑같은가정으로북한을연구하며실수를반복. 그러므로북한경제의구조와실태에대한연구와남북교역을 어떻게끌고갈것인지에대한고민이필요 우리에게도북한학이라는분야가있다. 그러나이분야역시북한이충분한정보를제공할 수있을정도로개방되거나변화를겪는다면옛서독의학자들이나홍콩의중국전문가들이 14
동향과분석북한경제연구 20 년 : 회고와전망 그랬던것처럼위험한처지에직면할수도있겠다는우려가든다. 문제는기본적으로북한연구라는것이다분히폐쇄적으로이루어져왔기때문이라는생각이든다. 그리고연구활동의많은부분들이체계화된지식보다는당시의현상에대한단편적정보에의존해온점도문제라고할수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눈에보이는것들에대해서는많이축적을해왔다. 장마당소식과같은정보는현재북한을연구하는데있어서도유용하게쓰이고있기때문이다. 그러나구조적인문제, 즉시스템에관한고민은충분히발전되지못한채대략적인얼개만만들고있는것은아닌지우려스럽다. 제2경제부문이나북한의전반적인계획경제부문, 또는공정이나인력운영체계, 북한의기업소구조등의요소들이구체적으로어떠한순환구조를이루고있는지가확실하지않다. 비교적파악이수월하다고평가되는대외무역부문도그러하다. 단순히물건을구하기위해서무역을필요로하는건지, 아니면북한내부에서자원과같은수입원을가지고있으면서도얻어들인소득에대한교환성보장이어려워무역을하는건지충분히고민하지못했다. 이러한시스템에대한검증은오늘날북한경제연구에있어여전히커다란도전과제로남아있다고생각된다. 다음으로정치적레토릭 (rhetoric, 수사학 ) 의영향을짚고넘어가야하겠다. 그동안북한과관련하여객관적인연구나주제혹은그결과로도출되는연구자의결론이정치적레토릭과뒤섞이는바람에구분이어려워지는경향마저보여왔다. 이러한추세가계속된다면결국연구자로서의객관성이다분히퇴색되어버릴수도있겠다는우려가든다. 이러한인식속에서앞으로의연구가다룰수있는북한경제이슈는, 우선북한경제의구조와실태에대한연구가있겠으며, 이를토대로북한이향후최소한중기적인관점에서는어떻게변화할것인가에대한고민도이루어져야할것이다. 두번째로는경협혹은우리가필요로하는형태의협력이나교역을어떻게끌고갈것인지를따져보는대북경제정책연구가있겠다. 그리고통일이나통합이이루어질경우그형태나구조는어떤모습일지통시적관점에서멀리내다볼줄아는연구도이루어져야할것이다. 이러한연구를발전시키려면북한뿐만아니라북한과유사한국가들에대한이해도필요하다. 과거의중국이나구소련등과같은북한사회구조의원형에대한선행연구도이루어져야한다는말이다. 그리고앞서정치적레토릭의영향을언급한바있는데, 여기에덧붙이자면우리가북한문제를바라볼때너무희망사항에만치우쳤던것은아닌지도되짚어볼필요가있다. 통일이라는주제가특히그렇다. 어떻게보면그동안우리는방향이나지향해야하는특정목표를미리설정해두고나머지는거기에맞춰나가는접근을취해왔다고볼수있다. 지난대선전국내에체류중인해외학자들과세미나에참여했는데, 이때주요의제로북한의개혁개방 15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가능성을논의하였다. 이주제는과거수년간무슨일이일어나거나조짐이있는것으로보일때마다이루어졌던논의이다. 본인도 20년전밤새도록북한의개혁개방가능성에대해이야기를했던기억이난다. 그로부터 10년후북한에서 7 1조치가있었을당시에도또한번북한의개혁개방을가늠하는논의가활발히진행됐다. 시기마다같은주제로비슷한고민을반복적으로해왔다는말이다. 이것은북한이결코쉽게변하지않는다는얘기가될수도있지만이를뒤집어생각해보면우리가주제나시각을처음부터잘못잡은측면도있는것이다. 예를들어북한의변화를기정사실화하기보다는북한이변할수밖에없는요소들은무엇이며이를토대로북한경제가앞으로어떤방향으로발전할것인지를고민해보는등의노력이필요했을지모른다. 또한북한에있어서경제만을따로떼어놓고볼수있는지도고민해볼문제다. 상호보완적으로관계되는북한의정치 경제 사회구조를이해해야만그체제가존재할수있는근본적인원인도파악할수있는것이고, 그러한복합적인구조의영향하에경제부문도효과적으로설명할수있을것이기때문이다. 거시적관점에서북한경제를논하기위해서는이처럼통섭적인접근이불가피하다. 정경분리라는개념은정치적관점에서는충분히수용가능한이야기이지만, 실질적으로남북간의정치 군사적관계아래에종속되어있는경제관계를연구하면서도이러한원칙을객관적으로내세운다는것은학문적으로도문제가있다고본다. 마무리하자면, 북한경제연구라는것이워낙에자료나정보가부족하다보니마치공룡의뼈하나를가지고그공룡의생김새나모양, 심지어는무게까지도알아맞히려는어려운환경에처해있는것과같다는생각이든다. 이러한한계를목도하고있노라면어느정도자괴감이드는것은부정할수없는사실이다. 2. 토론 전홍택 : KDI도 1991년초에북한경제연구센터를만들면서공식적으로북한경제연구를시작하였다. 그이전에는 1985년남북경제회담이시작되고원장으로있던김기환박사가남북경제회담대표가되면서북한경제에대한연구의필요성을제기하여연하청박사가북한연구를시작하게되었다. 또하나의계기가된것이독일통일이다. 정부에서독일통일조사단을대규모로보냈었는데고일동박사가여기에참여하게되었고, 그것을바탕으로독일통일의경제적현상과문제점, 앞으로이를대비하는연구에대한수요가생겨, 남북 16
동향과분석북한경제연구 20 년 : 회고와전망 경제교류와더불어북한체제전환에대한연구가시작되었다. 북한경제연구는공공성이크고민간에서하기어려운연구이기때문에척박한환경이지만결국에는국책연구기관이주로수행할수밖에없었던것같다. 북한경제가주체를내세우면서도중국경제에대한의존도가더높아지고있는데, 향후북한경제를연구하려면북한경제의시장화와더불어대외경제특히중국과의관계에대한연구가필요해보인다. 연구의바탕이되는자료가부족한것으로알고있는데앞으로자료를공유하고분석하기위해서는어떠한노력이필요한지, 또지금까지는그러한문제를어떻게해결해왔는지의경험에대해말씀해주기를바란다. 권태진 : 우리연구원도지금까지북한농업에대한연구를수행하면서중국을통해서자료를얻기위해노력하였으며부분적으로성과도있었다. 북한연구를하면서우리는정량적인자료뿐아니라정석적인정보도필요로한다. 중국과북한의교역에있어서는정량적인자료의확보가가능하지만, 소문이나분위기를통해정성적인정보를파악할수도있다. 수치자료를잘공개하지않는중국의특성상당분간중국을통한정량적인자료의수집은크게기대하기어려울것으로예상되지만정성적인자료의수집은우리의노력에따라더많이확보할수있다고본다. 중국의성단위에있는일부사회과학원은중앙단위의연구기관에비해북한과의공동연구가좀더용이하기때문에이들기관을통해북한이관심을갖고있는부분이무엇인지포착하거나북한사람들과접촉을가졌던중국사람을만나간접적인방범으로나마북한의관심을파악해보는방법도있다. 또다른방법은언론기관에서중국에특파원으로파견나간전문기자를통해관찰한정보를얻고사실여부를확인하는방법이다. 중국전문기자들을많이접촉하게되면중국내부의변화를포착하여이를연구자료로이용할수있다. 우리연구원같은경우에는베이징에중국사무소를두고있는데중국전문가, 공무원, 기타관련된사람들과의교류를통해우리가포착하기어려운정보를확보하고있다. 주로북한사람들이많이활동하는연변지역이나심양지역에는북한에다녀온사람들이많으니이들이보고들은것을우리가간접적으로나마확인하는방식으로활용할수도있을것이다. 거점을두고지속적으로관찰을해가면서정보를수집하고정보를쌓아나간다면의미있는정보의축적이가능할것이다. 또농업분야의경우정보의양은적지만가치가높은정보를국제기구가많이확보하고있기때문에중국에거점을두고있는사무소나이를파견한본부와의협력및교류가필요하다. 이렇게다각적으로접근하다보면체계적으로정리된정보는아닐지라도빠진부분들을서로보완해나갈수있기때문에유용할것으로생각된다. 북한연구를추진할때중심을잡아주는곳이있어야하는데 KDI와통일연구원이그러한 17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일을해주었다고본다. 통일연구원의북한문제연구협의화와 KDI 의북한경제연구협의회를 통해다른기관에서는어떠한연구를하고있는지어떻게정보를수집하고있는지정보를 교류할수있어많은도움이되고있다. 전홍택 : 아무래도통일연구원은언급한대로북한연구가목적이지만다른연구원은북한 관련연구가전체연구의일부분이기때문에어려운점들이많았을것으로생각된다. 김원배 : 본인도중국관련공동연구사업에관여한바있는데, 이러한사업이우리에게필요한유익한방법으로진행되지도또한효율적으로진행되지도못하는실태를보고낙담한적이있다. 중요한문제점은이러한사업을총괄적으로담당해주는기관이없다는것이었다. 한편, 정부부처로부터의연구지원이나상호간의교류도연구의실효성을극대화하는데있어매우중요한부분인데, 이역시그동안미진했던부분들이있었던것으로보인다. 이러한점들은각연구기관뿐만아니라정부와의소통을통해하루빨리개선시킬필요가있다. 향후북한의변화를예상해볼때, 중요한것은중국의입김을뿌리치기가힘들것이라는사실이다. 이러한환경속에서우리나름의위상을갖추기위해서는지금부터북한에대해잘알아야되지만또한편으로는중국이북한을어떻게이용하는지를이해할필요도있다. 즉, 중국이어떠한전략적관점에서북한을보고식량등의지원은또어떠한판단을통해이루어지는지알아야한다는얘기다. 이는결국현장밀착적인한중공동연구를통해가능하리라고본다. 그리고우리는그러한교류를통해단순히북한에대한정보를획득하는것이아니라그이면에서작동하고있는중국의의도를파악할필요도있다는점을염두에둘필요가있다. 중국못지않게북한에대한정보와자료를가지고있는나라로러시아를꼽을수있다. 특히지리학분야에서는러시아가상당히많은자료를가지고있는것으로안다. 이러한기회를충분히활용하고자한다면한 중, 한 러협력을통한북한에대한자료수집과더불어그들의전략과의도를읽어내는노력이필요할것이다. 통일연구에있어중국과러시아의의도를파악하고자하는노력은매우중요한과제이기때문이다. 이러한관점에서국가차원의체계적인국내외연구기관간교류관계구축도중요하다고본다. 권태진 : 중국을통한북한연구에있어중국이가지고있는정보를수집하는방법은두 가지가있는데, 하나는사람과의관계를통하는방법이고하나는공동연구를통해필요한 정보를수집하는것이다. 중국은아직까지정보공개의폭이좁고정보를강하게통제하고 18
동향과분석북한경제연구 20 년 : 회고와전망 있기때문에정보의가치가상대적으로높다. 중국과공동연구를하거나인적교류를통해정보를얻으려면다른나라에비해더많은비용이소요된다는뜻이다. 개별적인차원에서는중국으로부터좋은정보를확보하는데한계가있을수밖에없기때문에전략적인접근이필요하다. 김원배 : 그래서한때본인도경제 인문사회연구회에중국의사회과학원과단순한형식적인협정이아닌실질적협정을체결해서산하국책연구기관들과효율적으로교류할것을제안한바있다. 이런사업을진행하려면어디선가총괄역할을해줄수있는조직이있어야하는데, 만약 KDI가그런역할을해줄수있다면연구기관간에북한에대한파악과더불어서우리의전략에대한심도있는공동연구를해나갈수있을것으로보인다. 전홍택 : 연변이나중국내북한관련연구자들도한정되어있는데, 국내에서는그러한교류를통해정보를얻고자하는연구자나기관들은많아서어떻게보면협력이중복적으로이루어지고있다. 언급한것처럼공동으로교류를한다면보다적은비용으로정보를공유할수있어좋지않을까하는생각이든다. 최수영 : 다알다시피연변, 심양, 단둥등에북한경제를연구하는사람의수가매우적다. 지난해에연변대경제관리학원의네명의학자와연구를하나진행하였는데, 일부교수들은비슷한주제를가지고 KDI 와이미연구를진행을하고있는등이중삼중으로일이진행되고있다. 연초에모여서어떠한계획및주제를가지고중국학자들과연구할계획을가지고있는지공유한다면연구비를좀더효과적으로운용할수있을것이라고생각한다. 또한북한연구관련해서지난연구성과를정리하려한다면, 각연구기관별로북한경제연구성과를모아서분류하는작업을한다면좀더쉽게할수있을듯하다. 어느분야에서연구가더필요한지도볼수있을것이다. 앞으로의연구방향에대해서이야기하자면미시적인연구가필요하다. 다만, 자료가부족하다는한계점을가지고있는데, 예컨대북한공장기업소에대한이야기가많이있지만실제로어떠한방식으로작업하는지는알지못한다. 북한의특정기업이나공장에대한사례연구가필요해보인다. 그리고회고의차원에서이야기한다면, 과거연구를되돌아보았을때지금에와생각해보면어떤부분은단순히정보나자료가부족해서인부분도있지만, 방법상에서잘못판단했던부분, 또는정부의수요나요구사항에 19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결론이영향을받은경우도있었다. 이러한부분에대해서연구자들스스로또는함께생각해 볼필요가있다. 성채기 : 중국이갖고있는북한정보의양과이를어떻게활용할것인지에대해몇말씀드려보겠다. 작년에연변대학에서일정기간지내면서중국이북한경제와관련하여정보를많이가지고있는가에대해회의적느낌을가지게되었다. 정보를확보하고있음에도공개하지않는부분도분명히있겠지만, 중국도우리가기대하는만큼정보를갖고있지않을가능성이높다는생각이든다. 중국정부나학계, 특히동북3 성지역의조선족전문가들이대북무역회사나세관등의인맥을통해서우리가접하기어려운생생한정보들을갖고있는경우도적지않겠으나, 기본적으로우리가확보하기어려운정보를많이가지고있을것이라고기대하기는어렵다고생각된다. 따라서중국쪽에많을걸기대하기보다우리가갖고있는정보를최대한활용하는노력이더중요하다고본다. 이와관련, 탈북자들을통해정보를얻는방법을보다진지하게추진해야한다. 물론탈북자들이제공하는정보중에는자기가직접경험했던것이나자신이관리했던정보가아닌, 사람들사이에서들었거나이미국내에서나돌던얘기를적당히꾸며서제시하는경우가적지않다는한계점이있기는하지만, 이들은잘만선별하고관리하면가장중요한정보소스의하나임이분명하다고본다. 전홍택 : 해외에얼마나정보가있는지도의심스럽지만거기에눈을돌리기전에국내의가용자원을최대한활용하고탈북자들을체계적으로활용하면자료의양이나질이지금보다는개선될수있을것이다. 냉전시기에소련에서이스라엘이나외부세계로나간, 특히유태인들을중심으로인터뷰를하여구소련의정치 경제 문화 사회상을체계적으로정리한국무성프로젝트가있었다. 우리도북한사회전체를보기위한체계적인탈북자인터뷰프로젝트를진행하면좋을듯싶다. 권태진 : 통일부에서이러한종류의프로젝트를진행을하고있는것으로알고있다. 탈북자들을대상으로북한대학원대학교와몇몇기관이함께연구를진행하고있는것으로알고있다. 효과적인정보수집이되려면각분야의전문가들이투입되어질문사항을체계적으로정리하고진행해야하는데, 프로젝트에참여하고있는소수사람들의관심분야에대해서만질문을설계하고진행할뿐그외의사람들은참여시키지않아좁은범위의정보만수집된뿐이다. 많은탈북자들을대상으로조사할필요없이적은숫자를대상으로심층인터뷰를하는것이 20
동향과분석북한경제연구 20 년 : 회고와전망 효과적일때도있으므로조사방법을달리해가면서진행하는것이좋을텐데하는아쉬움도 있다. 성채기 : 통일부에서도하겠지만, 군안에서와관련정보기관에서도마찬가지로진행하고 있는것으로알고있다. 그런데그런자료들이있는데도불구하고공개가되지않고있으며, 많은부분은아직디지털화가미흡하여관리도어렵고제대로이용하지못하고있는실정이다. 전홍택 : 가지고있는자원을잘정리해서학자들에게공급만해준다면연구에훨씬도움이될텐데아쉬운점이많은것같다. 연구자들이라도기회가된다면쉽지는않겠지만프로젝트를같이기획해서한정된예산을효율적으로활용하고, 거기에서데이터가생성된다면같이공유하는일을하면좋을것같다. 김원배 : 대통령이부처간칸막이가많다고했는데회의석상에서없어질칸막이가아니다. 결국은자리와돈의문제인데, 우리나라가결코돈이없는나라는아니다. 낭비도많은것이사실이다. 그러나어디에서누가총괄을할것인지를논의하다보면작동하기가상당히어렵다는문제에봉착하고는한다. 위계적구조를감지하는순간그사업에적극적으로참여하려는유인이줄어들고말기때문이다. 위원회와같은수평적구조속에서협업할수있는환경이주어진다면실효성있는공동연구가이루어질수있을것이다. 성채기 : 부처간벽을낮추자는말씀은아주적절하고중요한지적이지만, 한마디말만으로끝내면결국마찬가지가될뿐이다. 이것에대해드라이브를걸고모니터링을계속해서모멘텀을유지할수있는메커니즘을만들어내는것이중요하다생각한다. 범정부차원에서관리하거나, 국회를통해대북정보를융합하는기구혹은위원회를만들필요가있다. 그리고관료주의의벽, 비밀의벽을낮추어야한다. 종합적으로분석하고판단해서드라이브를걸고나갈기구가있어야하며, 그런기구에실질적인힘을뒷받침해주지않으면그런벽들을뚫고나갈수가없다고생각한다. 전홍택 : 두가지문제가있는것같다. 여기저기퍼져있는정보를융합해서체계적으로 공급해주는체계를만드는문제가있고, 자료의공개나투명성못지않게위원회같은기구에서 수평적협력이잘이루어지는것이필요하다. 연구야말로그러한수평적협력수준에서집단적인 21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지혜를만들어야하는데융합하려는협력과소통능력을개선해보려는노력이중요할듯하다. 많은이야기가나왔는데마지막으로앞으로의연구방향에대한제안및마무리발언부탁한다. 김원배 : 그동안의북한연구에대해정리프로젝트를기획한다면, 최종보고서를작성하기전에세계에서소위북한전문가들이라고하는사람들을모아서국제세미나를하는것이어떨까하는생각이든다. 해외북한전문가들로하여금한국의북한연구의전반적인수준을알릴수있고, 또한이를통해그들이새롭게제시해줄수있는부분도있을것이기때문이다. 최수영 : 북한경제연구를정리한다면북한경제와관련된중국에관한연구를같이포함해서정리하는것도좋을것같다. 또한분류방법에있어서도내용을중심으로할것인지아니면다른방법이있는지대해서도잘생각해보아야하겠다. 단순히기술적으로서술만하지말고북한경제학자의측면에서분석적으로연구하는방법도생각해볼필요가있다. 성채기 : 북한경제연구의핵심걸림돌은역시정보와자료문제이다. 상황이많이개선되기는했으나여전히그한계를극복하는데많은노력이필요하다. 지금은연구결과들을많이공개하게되었는데, 앞으로도북한연구자와연구기관이연구성과를서로공유하여시너지효과를극대화하는노력을한층강화해야한다. 이점에서 KDI가꼭필요한구심점역할을잘해왔고앞으로도지속될것을기대한다. 권태진 : 북한경제연구결과전체를분야별로모아서서로상충되는부분과일치되는부분을분야별로나누어정리하면좋을듯하다. 상충되는부분에대해서는앞으로연구가더필요한부분이므로연구의방향을제시할수있을것이다. 또하나는지금까지연구한결과를혼자서정리해보려고했는데쉬운작업이아니었다. 북한을연구하는기관들이함께모여각자의연구결과를정리하여함께모아정리하는작업도의미가있어보인다. 참여한기관들이이들정보를서로공유한다면앞으로의북한연구를위해큰의미가있을것이다. 전홍택 : 긴시간동안북한경제연구를정리하고앞으로의연구방향에대한좋은제안을 해준토론자들에게감사한다. 22
동향과분석한국의대북정책과남북경협 : 회고와전망 한국의대북정책과남북경협 : 회고와전망 * 이석 한국개발연구원북한경제연구팀장 suklee@kdi.re.kr Ⅰ. 머리말 지난 15 년간한국의대북정책을상징해온낱말은바로남북경협이었다. 매시기한국 대북정책의변화를이끌어온것이바로남북경협이었으며, 동시에이러한변화로부터가장 커다란부침을겪은것도또한남북경협이었기때문이다. 실제로 1990 년대후반부터 2000 년대 중반까지한국의대북정책은변화와도전의시기였다. 이제까지의대립되고단절된남북관계를 변화시키고자하는열망이그어느때보다강하였고, 이러한변화의토대위에한반도의 평화와발전이라는남북한의공통목표를달성하려는도전의지역시그어느때보다강했던 시기였다. 그리고이러한변화의열망과도전의의지를불러일으킨것이바로당시까지는 맹아적인상태에불과했던남북경협이었다. 비록아직까지는미미한수준이지만, 남북경협을 무한히확장하여북한으로하여금그과실을향유하게만든다면, 남북간의평화는물론 북한의변화와궁극적인통일역시전혀불가능한일만은아닐것이라는믿음이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믿음을토대로이후남북경협은급속히발전해왔고, 멀게만느껴졌던남북관계 역시그어느때보다도긴밀하고친근해져왔다. 반면, 2000 년대중반이후현재까지한국의대북정책은원칙의시기로돌아섰다. 당시까지 가까워지고있을것이라고만느꼈던남북한의관계에핵과미사일, 서해에서의군사적 충돌과같은균열이발생했고, 그결과무언가잘못되고있는남북관계를바로세울원칙의 확립이그어느때보다도중요해졌다. 그리고이러한원칙은그직접적대상을남북경협에서 * 본고는 Suk Lee, ROK Policy on North Korea and Inter-Korean Economic Cooperation: Prospects and Analyses,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Unification Studies, Vol. 21, No. 2, 2012 를우리말로수정 보완한것이다. 23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찾았다. 남북관계가무언가잘못되고있다면, 그원인은당연히남북경협에있을것이고, 따라서그치유책또한남북경협에있을것이라는믿음때문이었다. 이로인해남북경협에는원칙에의한통제라는채찍질이가해졌고, 그것의부작용으로오늘날남북경협은과거의번성했던모습은찾아보기힘들정도로거의야위어버렸다. 그러나이러한부작용에도불구하고여전히한국사회는대북정책에서의원칙을버리지않고있다. 이러한원칙이바로설때에만비로소남북경협역시올바로번성할수있고, 남북관계역시한국사회가바라는것처럼정상적으로발전할수있다는믿음때문이다. 그렇다면지난 15년간한국의대북정책에있어남북경협은왜이처럼중요했던것일까? 그리고한국의대북정책과남북경협은왜이처럼시기별로극심한부침을거듭했던것일까? 본고의목적은향후한국사회가지향해야할보다바람직한남북경협의모습을논의하기위해이러한질문들에답하고자한다. 이제까지남북경협이걸어왔던길을알지못한다면앞으로그것이나아갈방향역시알수없을것이기때문이다. 보다구체적으로이글에서우리는다음과같은세가지작업을수행한다. 첫째, 1990 년대후반이후각시기별로한국의대북정책체계속에서남북경협이어떠한위치를점유하고있었는지를검토한다. 둘째, 이러한대북정책으로인해남북경협은실제로어떻게진행되었고어떤결과를가져왔으며또한어떠한논란을불러일으켰는가를살펴본다. 셋째, 이상의두가지작업을토대로향후한국사회가지향해야할바람직한남북경협의모습을구상한다. 본고의구성은다음과같다. 먼저제2장에서는 1990년대후반부터 2000년대중반까지의남북경협을대상으로대북정책과의관계및그것의실질적인성과그리고그에따른논란들을검토한다. 1) 그리고제3장에서는 2000 년대중반이후 2012 년까지의시기를대상으로남북경협의성과를평가한다. 제4장에서는이상의논의를토대로향후한국사회가지향해야할바람직한남북경협의모습을검토한다. 마지막으로제5장에서는이제까지의논의를정리하는것으로결론을대신한다. 1) 1990 년대후반이후현재까지한국사회에는세가지서로다른정부가존재해왔다. 김대중, 노무현그리고현재의이명박정부가바로그것이다. 그런데본고에서는편의상김대중정부와노무현정부를하나의시기로묶어검토한다. 비록김대중정부와노무현정부의대북정책이그세세한측면에서는차이가난다고해도, 그것의전반적인방향성과기조에있어서는사실상동일하기때문이다. 24
동향과분석한국의대북정책과남북경협 : 회고와전망 Ⅱ. 한국식대북개입정책과남북경협 : 1998~2007 년 남북관계있어경협의중요성이부각되기시작한것은 1990년대후반의일이었다. 당시한국사회는대북정책과관련한일종의패러다임의변화에직면해있었고, 이러한변화에있어가장중추적인역할을담당한것이바로남북경협이었기때문이다. 실제로 1998년에등장한김대중정부는이제까지와는다른시각으로북한을인식하고있었고, 이를토대로기존의대북정책역시남북경협을위주로하는새로운정책체계로변모시키고자하였다. 1. 한국식대북개입정책의구조와특징 무엇보다도김대중정부는현존하는북한체제를하나의현실로받아들여야한다고보았다. 비록북한이경제적으로피폐하고정치적으로고립된사회주의국가라고할지라도, 가까운장래에그것이붕괴하거나또는어떤근본적인변화에돌입할것이라고가정하는것은비현실적이라는뜻이다. 북한체제가 1990년대중반의극심한경제위기와기근가운데스스로를유지하였고, 또한여전히북한전역을효율적으로통제하고있다는사실자체가이러한가정이비현실적임을잘말해준다는것이다. 또한김대중정부는이처럼현존하는북한체제에한국이개입 (engagement) 하는일이충분히가능하다고보았다. 물론당시까지의남북관계는결코우호적이지않았고, 또한과거북한은이러한한국의개입에대해매우부정적인태도를취해온것이사실이다. 그러나오늘날의북한으로서는이러한한국의개입가능성을받아들이고감내할만한유인이존재한다고판단한것이다. 왜냐하면현재의북한체제가생존하기위해서는해외로부터의경제적지원이필수적이고, 이러한경제적지원을수행할수있는국가는한국이외에는별달리존재하지않기때문이다. 따라서만일한국이 잘설계된경제적지원 을토대로북한을설득하여북한문제에개입하기를시도한다면, 북한으로서도과거와같이이를무작정반대할수만은없을것이라고본것이다. 이러한인식들은 1990년대후반한국의대북정책을크게변모시켰다. 우선대북정책의목표가변화하였다. 현존하는북한체제를하나의현실로인정하는한, 대북정책의최우선목표를통일에두고이를실현하기위해노력한다는것은결코현실적이지않았다. 그보다는오히려현존하는북한체제를대상으로평화와공존을추구함으로써한국사회가당면한 25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북한리스크 를적절히관리하는일이더욱현실적인목표로부상하였다. 물론대북정책의목표에서통일이제외되는것은아니었다. 다만, 통일을위해서우선은남북한간의화해와협력을통해평화를정착시키고, 이를토대로북한을점진적으로변화시켜궁극적으로는남북한사이에존재하는사회경제적격차를해소시키는일이더욱중요하다고강조되었다. 대북정책의직접적이고도당면한목표가남북한사이의평화공존이라면, 이의궁극적이고도장기적인목표가평화공존및북한의점진적변화를통한남북통일로설정된것이다. 2. 남북경협의목표와역할 이와같은대북정책의목표를달성하기위한정책적수단이바로남북경협을통한북한에대한경제적개입이었다. 이미언급한것처럼남북경협은북한으로서도거부하기힘든경제적편익을가져다주는것이었다. 더욱이남북경협은이러한경제적편익이외에도남북한사이의평화공존이나북한의변화, 궁극적으로는남북한의사회경제적격차를해소시켜통일로나아가는가장유력한수단으로인식되었다. 북한이남북경협을통한경제적편익을얻기를원한다면, 이를위해서라도남북한사이의정치적 군사적긴장을스스로완화시키고자노력할수밖에없고, 경협의과정에서시장경제를접촉하게되면스스로의변화를도모하지않을수없으며, 그결과북한경제가발전한다면궁극적으로는현재와같은극심한남북한의격차역시자연스럽게해소될수있을것이기때문이다. 이러한측면에서 1990년대후반을기점으로한국의대북정책은사실상남북경협에대한정책으로변모하게되었다. 또한이러한측면에서당시의남북경협은다음과같은몇가지기본개념들을중심으로전개되었다. 첫째, 남북경협의긍정적외부성 (positive externalities) 이라는개념이다. 남북경협은비록상업적거래의형태를보이지만, 이러한상업적인목표를뛰어넘어한반도의평화유지와북한의변화, 남북한의사회경제적격차해소를통한통일에의기여와같은커다란외부효과를창출하는경제행위라는뜻이다. 둘째, 따라서남북경협은비록그것이민간에의해상업적인목적을위해추진된다고하더라도그효과는한국사회전체의후생에영향을미친다는개념이다. 다시말해한국사회의입장에서보면남북경협이일종의준공공재 (semi-public goods) 라는뜻이다. 셋째, 남북경협이준공공재적성격을갖고있는한, 시장에서결정되는남북경협의수준은언제나사회적으로바람직한최적 (optimal) 수준을밑돌수밖에없다. 따라서정부는남북경협이사회적인최적수준에도달하도록정책적으로이에대한지원을수행해야만한다. 다시말해남북경협에대한정부지원의필요성이라는개념이다. 26
동향과분석한국의대북정책과남북경협 : 회고와전망 마지막으로남북경협 ( 경제 ) 과남북관계 ( 정치 ) 의분리라는개념이다. 이미언급한것처럼남북경협은한반도의평화유지및북한의변화와같은긍정적외부성을갖지만, 이러한효과는언제나장기에걸쳐발현될수밖에없다는특징이있다. 반면, 남북간의정치적 군사적관계는다양한요인들에의해단기적으로도부침을거듭하는것이특징이다. 따라서만일남북경협이단기적인남북관계의부침에영향을받는다면이를통한대북정책의수행자체가어려워지는문제가발생한다. 이러한어려움을해결하는유일한수단이바로남북한의정치와경제의분리, 즉단기적인남북관계의변화에도남북경협은지속적이고도변함없이추진하는것이다. 이러한개념들로인해 1990 년대후반이후남북경협은남북간의정치적 군사적긴장관계나북한핵문제와같은국제적정세의변화에도불구하고꾸준히증대하였다. 그리고이를반영하여한국사회에서는 남북경협은언제나좋은것 (always good) 이라는인식이자리를잡았다. 3. 남북경협의성과 < 표 1> 은이러한현실에서성장한남북경협의모습을몇가지수치로제시하고있다. 우선 1998년 2억2천만달러에불과하였던남북교역액은 2008년에는 18억 2천만달러로 8배이상증가하였다. 이기간중남북교역액의증가를연율로환산하면그수치는무려 25.5% 에달한다. 더욱이이기간동안남북한은금강산관광과개성공단사업을비롯하여각종정부및민간차원의다종다양한경협사업을발전시켰고, 그결과남북경협은북한이수행하는대외거래가운데가장복잡하고다양한형태의경제행위로자리를잡았다. 이러한남북교역의증대와함께한국은막대한규모의인도적지원역시거의정기적으로북한에제공하였다. 예를들어, 2000년대들어한국은매년 30~50만톤 (MT) 에달하는식량과이에상응하는규모의비료를정부차원에서북한에지원하였다. 또한한국정부는한국의민간단체가수행하는인도적대북지원을일종의매칭펀드형식으로지원하였고, 이는한국사회전체의대북지원을활성화하는계기가되었다. 그결과 1990년대후반국제사회의대북지원가운데약 10% 정도에불과했던한국의비중은 2000 년대중반에는최대 40% 를차지할정도로크게상승하였다. 27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 표 1> 남북교역액추이 ( 단위 : 천달러 )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반출 129,679 211,832 272,775 226,787 370,155 434,965 439,001 715,472 830,200 1,032,550 888,117 반입 92,264 121,604 152,373 176,170 271,575 289,252 258,039 340,281 519,539 765,346 932,250 계 221,943 333,437 425,148 402,957 641,730 724,217 697,040 1,055,754 1,349,739 1,797,896 1,820,366 이러한남북교역의중요성은북한경제의측면에서보면더욱분명해진다. 예를들어 1990 년대이후북한의대외거래규모를나타내고있는 < 표 2> 를살펴보자. 이에따르면 2000년대들어북한의대외교역은매우빠르게증가하는데, 이러한증가세는한국과중국이라는두나라와의교역을통해서만이루어지는것으로나타난다. 실제로 2008 년의경우북한의전체대외거래에서한국및중국과의무역이차지하는비중은 32% 와 49% 로이들두나라의교역비중을합치면그수치는무려 81% 에달한다. 이는 2000년대이후북한의대외교역은거의전적으로한국과중국에의존하고있다는사실을의미한다. 1990 년대중반남북교역이북한의전체대외거래에서차지하는비중이불과 12% 정도에불과했다는사실을상기하면이후남북교역이얼마나빠른속도로늘었는지는쉽게짐작할수있을것이다. < 표 2> 북한의주요상대국별무역추이 ( 단위 : 백만달러 ) 1990 1995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1. 수출액 1,745 959 718 822 1,008 1,066 1,278 1,338 1,467 1,683 2,062 1,997 2,557 3,702 대중국 125 64 37 167 271 395 586 499 468 582 754 793 1,188 2,464 대한국 12 223 152 176 272 289 258 340 520 765 932 934 1,044 914 대일본 301 340 257 226 234 174 163 131 78 0 0 0 0 0 2. 수입액 2,438 1,380 1,680 1,842 1,894 2,049 2,276 2,718 2,879 3,055 3,574 3,095 3,528 4,328 대중국 358 486 451 571 467 628 800 1,081 1,232 1,392 2,033 1,888 2,278 3,165 대한국 1 64 273 227 370 435 439 715 830 1,033 888 744 868 800 대일본 176 255 207 249 135 92 89 63 44 9 8 3 0 0 3. 무역총액 4,183 2,339 2,398 2,664 2,902 3,115 3,554 4,057 4,346 4,738 5,636 5,092 6,085 8,031 대중국 483 550 488 737 738 1,023 1,385 1,580 1,700 1,974 2,787 2,681 3,466 5,629 대한국 13 287 425 403 642 724 697 1,056 1,350 1,798 1,820 1,679 1,912 1,714 대일본 477 595 464 475 370 265 253 194 122 9 8 3 0 0 주 : 북한의수출입총액은 KOTRA가파악한북한의대외무역에남북교역을합산한것임. 자료 : KOTRA, 북한의대외무역동향, 각호 ; 한국무역협회통계데이터베이스 (stat.kita.net). 28
동향과분석한국의대북정책과남북경협 : 회고와전망 더욱이 1990 년대후반이후남북교역은북중무역의확대를가능하게해주는역할을수행하였다. 실제로이기간중북한은스스로에게필요한거의모든물자를중국으로부터수입하는모습을보여왔다. 그결과한편으로중국은북한의제1 교역상대국으로부상한반면, 다른한편으로는북한의대중국무역적자가지속적으로확대되는부작용이나타났다. 만일북한이이러한무역적자를해소하지못했다면, 이기간중북중무역은이렇게빠른속도로늘어나지못했을것이다, 그런데주목해야할점은이러한대중무역의적자를해소해주는역할을수행한것이바로남북교역이었다는사실이다. 예를들어, < 표 3> 에나타나있듯이, 2000 년대중반북한은남북교역을통해막대한경화를획득하였다. 북한은실질남북교역에서항상적인무역흑자를기록하는동시에, 금강산이나개성공단등과같은경협사업에서도지속적인경화수입을획득한것이다. 그리고이러한경화가바로북한의대중국무역적자를해소하는주요한수단으로기능한것이다. < 표 3> 북한의대중무역적자및남북교역에서의경화수입추이 ( 단위 : 백만달러 )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대중무역적자 상품적자 414 406 197 232 214 582 765 811 실질교역흑자 61 111 197 169 168 221 326 500 남북교역에서의경화유입 금강산입산료 0 37 22 13 15 14 12 20.3 개성공단임금 0 0 0 0 0 3 7 13.9 계 60 147 218 180 180 233 341 534.2 주 : 1) 대중무역적자는 < 표 1> 에나타난북중무역에서의수출 입차를의미함. 2) 한국으로부터의경화유입에는금강산입산료이외의제지급금, 북한방문자서비스수입료, 탈북자및한국인들의대북송금등은고려하지않았음. 자료 : 이석, 남북교역의변화와남북관계경색의경제적배경, KDI 정책포럼제212호, 2009. 4. 불거지는논란들 요컨대, 1990년대이후남북교역은단기적인남북관계의부침에도불구하고지속적으로확대되었으며, 그결과 2000 년대중후반에는북한의대외교역전체를좌우할수있을정도로성장하였다. 따라서언뜻보면 1990 년대후반이후한국의대북정책은상당히성공적이었다고평가할수밖에없을것이다. 당시의대북정책이추구해온것이바로이처럼급속한남북경협의확대였기때문이다. 그러나매우역설적으로당시의한국사회에서는이러한대북정책을둘러싸고끊임없는논란이지속되었다. 여기에는적어도세가지의이유가있었다. 29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첫째, 당시의대북정책이주장해온남북경협의긍정적외부효과가과연존재하는지에대한의문이지속적으로제기되었기때문이다. 이미언급한것처럼당시의대북정책은남북경협이확대될경우한반도의평화및남북관계의개선과같은비경제적효과역시나타날것이라고믿었다. 그리고남북경협은북한경제의유지에없어서는안될수준으로까지확대되었다. 그렇다면응당이에상응하여한반도의긴장도더욱완화되고남북관계역시크게개선되어야마땅할것이다. 그러나현실은이와달랐다. 북한은남북경협이급속도로팽창하는과정에서도한국에대한군사적도발을멈추지않았고북한의핵과미사일문제는더욱악화되었으며남북관계에대한북한의고압적태도역시전혀개선될기미가보이지않았던것이다. 이에따라남북경협의긍정적외부성이실제로존재하는가에대한논란이시작되었고, 이는곧당시의대북정책전반에대한회의론으로연결되었다. 둘째, 이러한외부성에대한논란은곧바로남북경협에대한정부의지원여부또는지원수준에대한논란으로연결되었다. 만일남북경협을통해기대했던긍정적외부성이존재하지않는다면왜정부가국민의세금으로이를지원해야하는가하는의문이바로그것이었다. 남북경협역시여타의경제행위와마찬가지로시장에서결정되도록놓아두는것이합리적이라는것이다. 여기에정부가개입하게되면, 남북경협의수준은시장에서결정되는사회적최적수준보다과잉공급되는것은물론, 그것의추진방식역시정부주도형으로변질됨으로써비효율성을초래한다는것이다. 셋째, 남북경협과관련하여정치와경제를과연완전히분리하는것이옳은가에대한논란이다. 예를들어, 북한이서해상에군사적도발을감행하여한국사회가상당한피해를입은경우, 이때에도여전히북한에대한경제적지원을계속하는것이옳은가하는것이다. 오히려이경우, 당시의대북정책이주장하는남북경협의긍정적외부성이존재한다면, 역으로북한에대한경제적지원을중단하거나축소함으로써북한이더이상군사적도발을하지못하게끔압박하는것이현실적이지않은가하는반문이다. 이러한논란으로인해비록 1990 년대후반이후남북경협은매우빠른속도로발전했지만그에대한평가는극명하게엇갈리는상황이초래되었다. 한편에서는이러한경협의발전을통해한반도에평화및화해분위기가조성되는등남북관계가더욱우호적으로변모했다고긍정적으로평가하는반면, 다른한편에서는남북경협이정부의과다한개입으로 진실한남북관계 를반영하지못한채과잉성장함으로써오히려한국사회에짐이되고있다고부정적으로평가하는것이다. 한국의대북식량지원을한가지예로들어보자. 한편에서는 1990년대후반이후한국이매년약 30~50 만통 (MT) 의대북식량지원을수행함으로써, 북한내부적으로는식량부족에고통받는우리의동족을지원하고남북간에는정기적인이산가족상봉이나 30
동향과분석한국의대북정책과남북경협 : 회고와전망 당국간고위급대화의상설화와같은긍정적변화가나타났다고본다. 그러나한편에서는정부가무리하게북한의뜻대로식량을지원하는데에만초점을맞춤으로써, 지원된식량의분배에대한모니터링을소홀히하였고, 그결과한국사회의인도적지원은고통받는북한주민들에게돌아간것이아니라오히려북한정부의체제유지능력을강화시키는부작용만을가져왔다고보고있다. Ⅲ. 이명박정부의대북정책과남북경협 : 2008~12 년 남북경협을둘러싼이러한논란은 2008년에등장한이명박정부의대북정책에커다란영향을미쳤다. 실제로이명박정부는기존의대북정책에비판적인태도를보이는경향이있었으며, 특히남북경협에대해서는이제까지와는매우다른정책을실시하였다. 그결과 2000년대후반을기점으로남북경협또한이제까지와는전혀다른모습을보이게된다. 1. 보수화된대북정책과원칙화된남북경협 물론이명박정부가추구한새로운대북정책이기존의정책과어떻게다른지를명확히구분하기는쉽지않다. 이명박정부가스스로의대북인식및대북정책의목표그리고남북경협과같은정책수단들에대해어떠한생각을가지고있는지를분명하게드러내지않았기때문이다. 실제로이명박정부는기존의대북정책에서사용하던용어와패러다임을거의그대로차용하였다. 예를들어대북정책의목표를남북간의평화와공존에두고이를통해궁극적으로점진적이고도평화적인통일을달성한다는입장을분명히하였다. 물론이명박정부에서는이른바북한의급변사태와같은예기치못한상황에대한대비책 (contingency), 또는앞으로다가올지도모를통일에대한 한국사회의준비 를강조하는경향이있었다. 그러나이것은기존의대북정책에대한전면적패러다임의전환이라기보다는기존정책에서미처고려하지못했던부분에대한보완의성격이크다. 이렇게보면이명박정부의대북정책이기존과는다른새로운패러다임의변화를수반한것이었는지는여전히불분명한셈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한가지분명한사실은남북경협에관한한이명박정부는기존과는 31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매우다른태도를취했다는점이다. 이러한이명박정부의태도는통상 원칙있는대북정책 이라고불리는데, 이는남북경협을추진하는데있어 상호성 과 정상성 (normality) 이라는두가지의개념을강조하는것을말한다. 우선이명박정부는남북경협에있어서의완전한정경분리가결코현실적이지도또한현명하지도않다고본다. 북한이한국을상대로군사적도발을지속하는상황에서도여전히대북경제지원에나서는것은국민의여론을수렴할수밖에없는민주국가인한국의입장에서는현실적으로쉽게선택할수있는정책이아니라는것이다. 더욱이이경우북한은 어떠한군사적도발에도불구하고한국은북한에경제지원을할수밖에없다 는잘못된인식을갖게될것이므로전략적으로도결코현명한선택이아니라는의미이다. 이에따라이명박정부는비록남북경협이단기적인남북관계의부침으로부터일정정도자유롭게진행되어야한다고하더라도양자가전혀별개의것으로진행될수는없다고본다. 한국의입장에서는필요할경우중대한남북관계의변화에상응하도록남북경협을일종의레버리지로이용할수밖에없다는뜻이다. 또한이명박정부는남북경협의정상성역시강조한다. 각각의남북경협은그것의본래의목적에부합하는형태로추진되는것이옳다는의미이다. 예를들어대북식량지원을생각해보자. 한국의입장에서보면이는응당인도주의적지원이다. 따라서그것이의미가있기위해서는지원되는식량이고통받는북한주민들에게직접분배되도록유도해야하며, 이를위해서는일정수준이상의모니터링이필수적이다. 만일이러한모니터링이불가능하다면, 적어도인도주의적인목적에서의대북식량지원은하지않는것이옳을것이다. 그런데기존의대북식량지원에는이러한인도주의적목적이외에다양한요인들이함께포함되었다. 남북간의장관급회담이나이산가족상봉, 더욱유연한남북관계의관리와같은여타의다양한목적들이대북식량지원에개입되었고, 그결과인도주의적목적의관철을위한모니터링에는상대적으로소홀해질수밖에없었던것이다. 이명박정부의입장에서보면이러한대북식량지원은결코정상적인인도주의적지원이아니다. 따라서만일한국이진정으로북한에대해인도주의적식량지원을하기를원한다면, 이제까지여기에개입되어있었던여타의목적들을배제하고인도주의적목적에맞는정상적인형태로지원의형식을변화시켜야한다는뜻이다. 2. 남북경협의전개와성과 이러한이명박정부의태도는 2000 년대후반남북경협의모습을크게변모시켰다. 무엇보다 도먼저이명박정부는이제까지관행적으로유지되어왔던대북식량지원의형식을변화시키고 32
동향과분석한국의대북정책과남북경협 : 회고와전망 자하였다. 당시까지한국의대북식량지원은한국이먼저지원의사를공개적으로피력하고북한이이를받아들이는형식을취하였다. 또한한국은이를인도주의적인지원이라고생각하고있었지만, 북한은이를남북당국간회담이나이산가족상봉과같은여타의남북간현안해결을위한한국의성의표시정도로이해하는경향이있었다. 이에따라지원의형식도무상이아닌차관의형식을취했고, 이에대한모니터링문제역시크게거론되지않았다. 그러나 2008년등장한이명박정부는이러한식량지원을순수한인도주의적지원이라고규정하였다. 따라서국제관례상동지원이이루어지기위해서는이를받아들이는북한이먼저그필요성을한국에설명하고지원을요청해야만한다고주장하였다. 이렇게해야만비로소인도주의적지원에필수적인모니터링의문제를새롭게제기할수있었기때문이었다. 그러나북한은이러한이명박정부의주장을묵살하였고, 그결과 2008 년을기점으로한국의대북식량지원은전면중단되게된다. 당연하지만이러한식량지원의중단은북한으로하여금남북당국간대화를전면거부하게만드는요인이되었다. 이미언급한것처럼북한은한국의식량지원을당국간대화나이산가족상봉등을위한일종의성의표시로이해하는경향이있었기때문이었다. 그리고이러한당국간대화단절은한국정부가주도하는공적차원의남북경협에즉각적인영향을미쳤을뿐만아니라한국정부의지원을받는민간차원의남북경협에도부정적인영향을미쳤다. 정부차원의대북지원이일거에사라진것은물론민간이주도하는남북경협에대해서도정부의지원이갈수록줄어들었기때문이었다. 더욱이여기에 2008년중반금강산을관광중이던한국인가정주부가북한군인의총에피격당해숨지는사건이발생하였다. 이에대해남북경협의상호성을강조하는이명박정부로서는금강산관광자체를중단시키지않을수없었고, 그결과전반적인남북경협의위험도가급격히상승함으로써전반적인남북경협의수준자체가정체에빠지는악순환이거듭되었다. 이러한남북경협의정체는북한경제에도타격을주었다. 이미언급한것처럼 2000년대중반이후북한경제는중국으로부터필요물자를수입하는대신, 이로부터발생하는대중무역적자를한국으로부터획득한경화로결제하는방식으로유지되어왔다. 그러나 [ 그림 1] 에서보듯이 2008 년이명박정부의등장으로북한이남북경협을통해한국으로부터획득하는경화의규모가급격히줄어드는상황이벌어졌다. 이는단순히남북경협이위축된다는의미를넘어서북한의대외거래전체, 나아가북한경제자체를유지할수있는가의문제와도연결된것이었다. 북한은이러한경제적어려움에직면하여남북관계를위기상황으로몰고가는전략을 33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구사하였다. 2009년부터개성공단의폐쇄를포함하여남북경협전체를중단할수도있다고공공연히위협하는가하면, 2010 년에는급기야천안함과연평도사태등같은군사적도발을감행하기에이르렀다. 남북경협의상호성을강조하는이명박정부로서는응당이에대해경제협력의중단이라는선택을내릴수밖에없었고, 그결과한국정부는 2010년 5 24 대북제재조치를계기로개성공단을제외한모든남북경협을중단하는단안을내리게된다. [ 그림 1] 남북교역에서의실질무역흑자추이 자료 : 통일부, 월간남북교류동향. 요컨대, 이명박정부에서의남북경협은, 1 대북식량지원등제반남북경협의정상성을회복하기위한이명박정부의노력, 2 이에대한북한의반발과당국간대화채널폐쇄, 3 그로인한정부차원의남북경협중단, 4 금강산관광객피격등남북경협의위험도상승에따른민간경협의위축, 5 북한으로의경화유입축소와이에대한북한의정치 군사적반발, 6 천안함및연평도사태의발생에따른한국의대북경제제재조치실시, 7 개성공단을제외한모든남북경협의중단의순으로매우극적으로전개되어왔다. 그리고그결과현재의남북경협은개성공단에서의생산을제외하고는사실상모두사라진상태에놓여있다. 34
동향과분석한국의대북정책과남북경협 : 회고와전망 3. 불거지는또다른논란들 이처럼지난 2000년대중반이후북한대외거래의거의 40% 를차지할정도로급속히팽창하던남북경협은이명박정부가출범한이후약 3~4년사이에개성공단을제외하고는사실상전면중단될정도로급격히위축되었다. 물론앞서살펴보았듯이이러한현상이이명박정부가실제로의도한것인지아니면남북한의상황이예기치못한돌발변수들에의해급속히악화되면서벌어진일종의우연인지는불분명하다. 그럼에도불구하고과거남북관계에서거의절대적인영향력을행사했던남북경협이어느날갑자기실종되었다는사실은그자체가한국사회의논란거리로등장할가능성이충분한것이었다. 실제로한국사회에서는이러한남북경협의실종과관련하여상당한우려의목소리가나타났으며, 이러한우려의목소리의대부분은곧바로이명박정부의대북정책에대한비판으로이어졌다. 무엇보다도먼저남북경협의실종은북한에대한한국의개입수단을완전히사라지게함으로써남북문제에대한한국의대처를불가능하게만들고있다는우려가제기되었다. 과거한국은남북경협을매개로북한과의다양한대화채널을보유할수있었고, 이를토대로설사남북관계가경색되더라도이것이위기상황으로까지악화되지않게끔방지할수있었다. 반면, 이명박정부하에서는이러한남북경협과그에따른대화채널이모두증발됨으로써남북간의갈등이곧바로위기상황으로발전하는악순환이초래되었다는것이다. 그리고이러한악순환은현재와미래의남북한모두에부담이되고있다는비판이다. 남북경협의중단으로인해현재여기에종사하는수많은한국기업이고통을받고있으며, 동시에한국의지원이중단됨에따라북한주민의고통역시배가되고있다는뜻이다. 또한이러한과정에서남북관계는더욱멀어지는반면북한에대한중국의영향력은더욱상승함으로써미래의한반도통일가능성에까지부정적여파가미칠것이라는지적이다. 그러나문제는이러한악순환을초래한것이남북경협에대한이명박정부의잘못된인식과대처에기인한것인가하는점이다. 이와관련하여한국사회일부에서는남북경협에대한이명박정부의인식은완전히잘못된것이라고판단하는경향이있었다. 이들은이명박정부하에서나타난남북경협의실종과남북관계의악화라는악순환이야말로 남북경협의긍정적외부성 을매우역설적인방식으로입증하는것이라고믿는다. 다시말해남북경협이야말로남북간의평화증진을위한지름길이라는사실이바로현재와같은현실에의해증명되고있다는것이다. 그리고이명박정부는바로이러한남북경협의특징을간과하고이를여타의경제행위와동일시했기때문에오늘날과같은남북관계의악화를불러왔다는비판이다. 이렇게 35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보면향후한국사회가남북관계를발전시키는방법은매우분명하다. 과거와같이우선은남북경협을복원시키고이를토대로북한에다시 ( 경제적 ) 개입을시도하는것이다. 그러나다른한편에서는남북경협에대한이명박정부의인식은결코틀린것이아니라고믿는다. 이들은현재와같이긴장된남북관계가불편하다고해서향후무작정남북경협을복원시키려한다면, 그결과는이명박정부가들어서기이전과같은남북경협을둘러싼혼란과논란이재연되는것뿐이라고본다. 따라서현재와같은남북관계의불편은, 이명박정부가주장하듯이보다정상적이고발전된남북관계를형성하기위한일종의과도기적현상임을인식하고, 고통이따르더라도이를지속적으로추진하는것이옳다고보는것이다. Ⅳ. 향후남북경협에대한전망 : 형식과구조 이상에서살펴본것처럼 1990년대후반이후한국사회는남북경협과관련하여두가지의서로다른접근법을모두사용해보았다. 한편으로는북한에대한개입가능성을증대시키기위해정부가주도해서라도남북경협을매우빠른속도로증대시키는정책을실시하였으며, 다른한편으로는이과정에서불거진사회적논란을불식시키기위해남북경협의형식을보다원칙에맞게재편하려는시도가이루어졌다. 그러나안타깝게도그결과는만족스러운것이아니었다. 전자의경우, 남북경협의규모는크게늘었으나북한의변화는예상만큼이루어지지않았고, 남북관계역시불안정한모습을벗어나지못했다. 또한후자의경우에는남북경협을정상화시키려는한국의노력에북한이정치 군사적으로반발함으로써남북경협자체가중단되고, 남북관계역시더욱경색되는악순환이초래되었다. 그렇다면향후남북경협은어떠한모습을가지게될까? 1. 경협의재개가능성 : 긍정적전망 물론현재의입장에서보면이러한질문이조금은이상하게들릴지도모른다. 2013년한국사회에박근혜정부가등장한시점을전후하여북한이한반도에서의전쟁가능성을운운하며공공연히위협하는등그어느때보다도도발의강도를높이고있기때문이다. 당연히이러한상황에서는남북경협이재개될가능성보다는오히려위축될가능성이더욱 36
동향과분석한국의대북정책과남북경협 : 회고와전망 높다. 실제로지난이명박정부에서도조업이중단된적없었던개성공단이최근들어북한의통행차단으로위기를맞고있다는사실이이를잘말해준다. 따라서향후남북경협의발전가능성은무엇보다남북관계에대한북한의태도에의해크게좌우될것으로보인다. 그런데이와관련하여한가지주목할필요가있는것은, 북한으로서도남북관계의완전한파국을원하지않는다면, 언젠가는남북경협을재개하는방향으로정책을선회할수밖에없다는사실이다. 이미지적한것처럼그간북한은남북경협을지렛대로중국을비롯한해외국가와의교역을늘릴수있었고, 이러한교역의확대가바로북한경제의유지를가능케하는원동력이되었기때문이다. 현재와같은남북교역의중단은북한으로서도견디기힘든상황이라는뜻이다. 물론북한은남북교역의중단에맞서북중교역을확대시키는방식으로활로를모색하고있다. 그러나이러한방식은중국에대한북한의일방적인경제적의존을더욱심화시킨다는점에서, 이른바주체의나라를표방하는북한으로서는결코장기간감내할수있는것이아니다. 따라서북한의입장으로서도. 북중무역의과도한영향력을상쇄할수있는거의유일한대안인남북경협을장기간포기하기란사실상매우어렵다고보아야할것이다. 이러한이유에서향후일정기간이지나남북관계가현재와같은대립적관계에서벗어날기미가보일경우, 남북경협역시자연스럽게새로운발전방향을모색하게될것이라고예측해볼수있다. 그렇다면향후에전개되는남북경협은과연어떠한모습을하고있을까? 우선생각해볼수있는가능성은과거 1990 년대후반과같은형식의남북경협이다시금추진되는상황이다. 남북경협이한반도의평화및남북관계의발전과같은긍정적외부효과를가지고있다고가정하고, 정부주도로이를적극적으로재개한다는뜻이다. 그런데이러한가능성이현실화될경우, 남북경협은또다시한국사회의논란거리로등장할가능성이높다. 무엇보다도지난 1990 년대후반이후의경험에서알수있듯이이러한경협의긍정적외부효과는현실에서관찰하기가힘들고, 그결과정부가주도하는경협의효율성과관련한불필요한논쟁이반복될것이기때문이다. 또한현재남북경협이중단된근본적인원인은바로북한의지속된정치 군사적도발때문이다. 따라서이러한북한의도발에대한응징이이루어지지않은상황에서또다시한국정부가평화를위해서는남북경협을재개해야한다고주장한다면, 이는자칫한국사회내부의이념논쟁으로비화되어이른바 남남갈등 을더욱부추기는요인이될지도모른다. 그렇다면이러한불필요한논란을없애고보다효과적으로남북경협을발전시키는방법은없을까? 37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2. 비상업적정부주도경협 vs. 상업적민간주도경협 조금의외일지도모르지만이와관련된한가지방법은바로남북경협이가지는본연의경제적성격을강조하는것이다. 이미지적한것처럼지난 20여년간한국사회는남북경협의외부성에많은관심을기울여왔다. 한편에서는남북경협이남북간의평화증진과북한의바람직한변화그리고남북간의격차해소를통한통일비용절감과같은긍정적외부효과를갖는다고말하고, 다른한편에서는이러한외부효과가존재하지않거나아주미미하다고믿었던것이다. 이러한의견의차이는곧바로남북경협을둘러싼이념적인논쟁으로비화되어, 그에대한국민적합의를이루기가매우어려운실정이었다. 그러나남북경협은기본적으로, 이러한외부효과의존재유무와는상관없이, 상업적인이익을추구하는경제행위이다. 그리고이러한상업적인경제행위는시장경제에서는매우자연스럽고본질적인것이다. 한국사회가시장경제를유지하는한남북경협이라는경제행위역시당연히존중되고보호받아야마땅한대상이라는뜻이다. 향후한국사회가남북경협을발전시키면서도이와관련된불필요한논란을방지하는한가지방법은바로이러한경협의본질적성격을강조하는길이다. 남북한의정치 군사적관계가어떻게변화하든, 시장경제를유지하는한국사회로서는북한을대상으로상업적이익을추구하려는남북경협역시자연스러운경제행위로받아들여야한다는뜻이다. 이처럼남북경협의상업적성격을강조하게되면그것의주체는당연히민간이맡게되며정부는이에대해일정한규칙을제공하는심판의역할을수행하게될뿐이다. 그리고이러한민간주도의남북경협은이를둘러싼불필요한논란을방지할수있다는장점이있다. 이제까지남북경협을둘러싼한국사회의모든논란은정부가 경협의긍정적외부성 을내세워국민의세금으로이를지원하는것이정당한것인가하는문제로부터유래하였다. 따라서만일향후의남북경협이민간의주도로상업적인동기에의해좌우된다면, 남북경협을둘러싼제반논란역시그만큼수그러들것이분명하다. 3. 민간주도경협에서정부의역할과기능 물론이처럼민간이주도하는남북경협을강조한다고해서그에대한정부의역할을완전히배제하는것은아니다. 실제로향후한국정부는이러한민간주도의남북경협에있어서도그와는차별되는두가지의본질적인역할을수행해야만할것이다. 우선정부는북한주민을대상으로하는인도주의적지원과같이비경제적동기에의해수행되는남북경협에적극적이어 38
동향과분석한국의대북정책과남북경협 : 회고와전망 야만할것이다. 현재한국의헌법은북한주민역시한국국민으로인정하고있으며, 따라서남북한전체국민의후생을고려해야만하는한국정부로서는이러한비경제적동기의남북경협이야말로당연히수행해야할의무가있기때문이다. 또한한국정부로서는남북간의현안해결에필요한남북경협역시적극수행해야만할것이다. 예를들어, 남북간의이산가족상봉이나납북자및국군포로문제해결, 북한강의수해방지와같은현안해결을위해북한에경제적지원이필요하다면, 이를수행할주체는한국정부이외에별달리존재하지않기때문이다. 이렇게보면향후의남북경협은민간이주도하는상업적동기의경제협력을위주로하는가운데, 한국정부가남북간의현안해결및북한주민들의후생증대와관련된비상업적동기의경협을담당하는일종의역할분담이이루어지는것이바람직할것으로예상된다. 그리고만일이러한역할분담이효율적으로이루어진다면, 이는남북경협을둘러싼오랜논쟁의하나인이른바 정경분리의문제 를해결하는주요한수단이될수도있을것이다. 4. 정경분리와상호주의의조화 지난 15년동안한국사회에서는남북관계의변화에따라남북경협의형태와속도를어떻게조절할것인지가커다란논쟁거리중하나였다. 한편에서는남북경협을남북관계와완전히분리하여추진해야한다는 정경분리 의원칙을주장하였고, 다른한편에서는남북관계의변화에따라일정정도남북경협의추진을연동해야한다는, 이른바 정치와경제의상호성 의원칙을옹호하였다. 그리고현실에서는그때그때의상황에따라이두가지원칙가운데하나또는그중간을채택하는방식으로정책이수행되었고, 그결과남북관계와남북경협의연계정도가언제나논란이되었다. 그런데앞에서와같은방식으로남북경협의형태가분화되고또한이에대한민간과정부의역할이분리될경우, 이러한정경분리의문제는상당히해소될지도모른다. 왜냐하면남북관계의변화에책임이있는당사자는궁극적으로정부이며, 이러한정부스스로가담당하는남북경협이따로존재하기때문이다. 따라서남북관계의변화에따라정부가담당하는남북경협의속도와형태를우선적으로조절하는대신여타민간이추진하는남북경협은상대적으로이와무관하게발전하도록허용하는경우, 정경분리 와 상호성 의원칙모두를일정정도동시에충족시키는일이가능해진다. 예를들어, 현재한국이다음과같은방식으로북한에식량을제공하고있다고가정하자. 우선한국정부와민간이연계하여순수한인도주의적 39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목적으로 A만큼을무상으로지원하며, 한국정부는이에더해남북간이산가족상봉을위한대가로 B만큼을무상으로, 그리고남북한장관급회담등안정적인남북관계관리차원에서 C만큼을차관의형태로제공하는것이다. 그런데이경우북한의정치 군사적도발이발생하여한국이이에항의하는차원에서식량제공의규모와속도를조절하고자한다면어떻게될까? 아마도이경우한국은장관급회담등남북관계의안정적인관리를위해제공하던 C의차관에대해서만속도조절에나서는것이합리적일것이다. B의경우이산가족상봉이라는남북모두의인도주의적사안에관계가있으며, A의경우에는그야말로순수한인도주의적지원이므로개념상이러한남북관계의부침에영향을받아서는안되기때문이다. 만일한국이이와같은정책을취한다면, 그것은한편으로는북한의도발에대해남북경협을통해대응하는효과를보면서도, 다른한편으로는여전히남북경협을지속적으로추진할수있는여지를마련하는것이될것이다. 요컨대, 향후한국사회가추진하는남북경협은지난 20여년과는상당히달라져야만할것이며또한달라질것으로예상된다. 무엇보다도새롭게재개되는남북경협은본질적으로민간이상업적인수익을얻기위해추구하는경제행위가주가되어야할것이다. 따라서정부역시이러한경제적동기에의한민간주도의경협이활성화되도록유도해야만할것이다. 다만, 정부는이러한민간주도경협이담당할수없는비경제적목적에의한경협이필요할경우이에대해서만주도적역할을담당하는것으로스스로의역할을제한해야할것이다. 이처럼남북경협을둘러싼정부와민간의역할분담이이루어진다면, 한편으로는남북관계의변화에대응하여정부가추진하는비경제적목적의경협속도를조절하면서도, 다른한편으로는여전히경제적동기에의한민간경협또한그대로동시에발전시키는일역시완전히불가능한일은아닐것이다. V. 결론 본고에서는지난 15년간한국사회의대북정책과남북경협이어떻게변화하여왔는지를살펴보는것으로부터시작하여이명박정부하에서의남북경협을간단히평가하고향후바람직한남북경협의미래는어떠한것인지에대해서도논의하였다. 이러한과정을통해도달한결론을요약하면다음과같다. 첫째, 남북경협이비약적으로발전하기시작한것은 1990 년대후반의일로, 당시한국사회는 40
동향과분석한국의대북정책과남북경협 : 회고와전망 대북정책과관련한일종의패러다임의변화를경험하고있었다. 통상 햇볕정책 으로불리는새로운대북정책의패러다임은, 1 현존하는북한체제에대한인식변화를토대로, 2 대북정책의최우선적인목적을남북한의평화와공존에두었으며, 3 이러한목적을달성하기위한구체적수단으로남북경협의확대를제시하였다. 둘째, 이러한새로운대북정책의패러다임으로인해남북경협은 2000 년대중반까지급속히발전하였다. 1990 년대후반에비해남북경협의절대적규모가 5배이상증가하였으며, 북한의대외거래에서차지하는남북경협의비중이최대 40% 에육박할정도로성장하였고, 개성공단과금강산등경협의형태역시크게다변화되었다. 특히남북경협으로부터북한에제공되는경화는북중무역을비롯한북한의전체대외거래를유지하는원동력이되었다. 셋째, 그러나한국사회에서는이러한남북경협의확대를둘러싸고논란이끊이지않았다. 이러한논란은과연남북경협이한반도의평화나북한의변화와같은긍정적인외부효과를가지고있는가하는문제로부터시작하여, 정부가국민의세금으로경협을지원해야하는가, 그리고북한이도발을지속하는가운데에서도과연경협을지속적으로확대하는것이옳은가에이르기까지당시의대북정책전분야에걸쳐빚어졌다. 넷째, 이명박정부의대북정책은이러한기존의대북정책에대한논란으로부터출발하였다. 그리고이를배경으로이명박정부는소위 원칙있는대북정책 을천명함으로써기존의정책과스스로를차별화시켰다. 이명박정부의대북정책은남북경협에있어 상호성 과 정상성 이라는두가지개념을강조하는것이었다. 전자는남북관계의부침에따라남북경협역시일정한속도조절이필요하다는것을의미하였으며, 후자는남북경협역시일반적인경제행위의기준에부합하는형태로추진될필요가있음을강조하는것이었다. 예를들어인도주의적지원은그목적에맞게적절한모니터링이수반되는경우에한해추진되어야한다는것이었다. 다섯째, 그러나북한은이러한이명박정부의대북정책에반발하였고, 그결과남북관계는크게악화되었다. 이에따라 2000년대후반을기점으로남북경협또한, 1 먼저정부가지원하는공적남북경협이감소하고, 2 순차적으로이에영향을받는민간차원의남북경협이감소하는가운데, 3 천안함및연평도사태를계기로한국이대북제재에나서면서개성공단을제외한모든경협이중단되는상황을맞이하였다. 여섯째, 이처럼지난 20여년간의남북경협은반드시성공적이라고만은할수없는것이었다. 그리고만일이러한과거의경험에서배운다면, 향후한국사회가추진하는남북경협은크게다음과같은모습을보일전망이다. 1 비록현재북한이남북관계에대해위협적인언사를거듭하고있지만, 남북관계를완전히파국으로끌고가지만않는다면북한의입장으로서도 41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언젠가는남북경협을복원하는방향으로정책을선회할수밖에없을것이다. 2 향후새롭게전개되는남북경협은과거의정부주도형으로부터탈피하여민간의상업적경제행위를더욱강조하는방향으로발전할가능성이더욱크다. 3 남북경협과관련된정부의역할은한편으로는이러한민간주도의상업적남북경협을지원하고다른한편으로는민간이담당할수없는비상업적경협을추진하는것으로국한하는방향을고려해볼수있다. 4 이처럼남북경협을둘러싼정부와민간의역할분담이이루어진다면, 비록남북관계의변화로인해정부가추진하는비상업적경협이영향을받을지라도민간이주도하는상업적경협은이에영향받지않고꾸준히발전하는일역시완전히불가능하지는않을것이다. 42
동향과분석남북관계와대북정책의변화 남북관계와대북정책의변화 : 대결과협력은선택인가? 김형기 연세대학교국가관리연구원연구교수, 전통일부차관 khyungk532@naver.com Ⅰ. 머리말 2013 년은남북에별개의정부가들어선지 65년, 전쟁을치르고정전협정을맺은지 60년이되는해이다. 또한남북이마주앉아대화를시작한지도 32년이되었다. 하지만남북관계는아직도대결과협력의틈바구니에서제자리걸음을하며맴돌고있다. 남북관계사를돌아보면남북간상호불신과긴장속에대립과대결을지속했던기간이대부분을차지한다. 상호신뢰의바탕위에서대화와협력을추구한기간은짧고단속적이다. 현재까지남북간회담이 606회개최되었지만, 그빈도는특별한시기를중심으로쏠려있다. 다시말해남북간에처음으로대화가시작되던 1971년부터 1975년사이에 93회, 1989년에서 1992년사이에 155회, 그리고 2000년이후 2007년까지 238회이다. 몇몇해를제외하고나머지연도에는회담이아예없거나한자릿수에불과했다. 1970년대의대화는밀려오는세계적데탕트의물결에남북한이각기적응하는방식에서공통분모가찾아졌기때문에이루어졌다. 그때까지서로상대방의실체를인정하지않았던남북한이각기다른의도를갖고대화라는출로를선택한것이다. 따라서이시기의회담에서는양측이경직되고비타협적인행태를보였으며, 관계개선을위한합의도출의필요성도없어서그저 대화를위한대화 에그칠수밖에없었다. 그러나적어도남북이마주앉았다는사실자체가이미사실상상대방의실체를인정하는결과를가져왔다는점에서의미가크다. 1990년대초반의대화는주로남북총리간의회담, 즉남북고위급회담과그틀안에서 43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진행된회담을말한다. 세계사차원에서탈냉전이진행되면서북한은체제생존에매달려야했고수세적이고방어적인입장에서게되었다. 따라서 남조선혁명론 에입각한냉전시대의논리를현실상황에맞추어재조정하고정당화해야했다. 북한은유엔에가입하여그들이주장해오던 하나의조선 논리에대한타격을감수해야했고, 남측당국으로부터불가침을보장받아야했으며, 정치 군사문제우선해결 입장을수정하여교류협력에나서야만했다. 핵문제의야기로남북기본합의서등의합의가실천단계의문턱에서사문화되고말았지만, 이시기의대화를통해쌍방은남북관계를특수관계로규정하고평화공존을지향해나가자는의사를확인했다. 2000년대의대화는정상회담과 6 15 공동선언 의이행차원에서이루어졌다. 회담은다기화되고전문화되었으며, 합의도출을위해타협과절충이뒤따랐다. 뿐만아니라남북간의합의가과거처럼합의에그치지않고실천에옮겨지기시작했다. 북한이냉전시대의논리에집착하지않고공존의논리를수용함으로써진보정권 10년동안남북관계는화해와협력의큰흐름을만들었으며, 남북간대결의시대는종료된듯이보였다. 물론대화의형식을빌린다고해서남북간에대결관계가해소되고긴장상태가사라지는것은아니다. 그러나대화를하고있다는사실만으로긴장을어느정도완화할수있고상대방의진의를확인할수있다. 대화는확실히남북간에신뢰를축적하고화해와협력의분위기를조성하는유효한수단임에는틀림없다. 더구나남북관계를안정적으로관리하고북한이변화의방향으로움직여나갈수있는환경을조성해야하며, 통일을지향하여민족공동체의미래를설계해나가야할우리로서는남북간의대화는필수적이다. 여기에서우리가생각해야할것은대화의필요성을운위하는자체가남북관계는기본적으로대결관계가지배하고있다는사실을바탕으로하고있다는것이다. 해방과함께국제적분단요인과민족내부의좌우대립이 1948년남북한에각기정부가수립되는결과를불러왔다. 두정부는상대방을국가로뿐만아니라그실체도인정할수없었다. 상대방에대한인정은곧자기체제의존재이유를부인하는것이었기때문이다. 여기에 6 25전쟁과국제적냉전구조의고착으로남북한은서로가서로에게적이자타도대상이되었다. 각기명분으로삼은통일은자기체제의일원론적확장을뜻했다. 이로부터남북간에는정통성확보를위한치열한대립관계가자리잡을수밖에없었다. 말하자면남북한의대결관계는태생적이라고할수있다. 그런데쌍방의공유목표이자체제지속의명분인통일은또한편으로는상대방의실체를인정하고서로를대화의일방으로삼도록만들었다. 남한은 선건설, 선평화 를추구하기 44
동향과분석남북관계와대북정책의변화 위해게임의룰을바꾸고자했고, 북한은자주와민족대단결의기치아래민족내부적성격을강화하고자했다. 대화가각기의전략목표를달성하기위한수단에불과했다하더라도여하튼남북관계에서대결의축과함께대화의축도작동하게만들었던것이다. 남북한은바로이이원적구조속에서주도권을확보하기위해노력해왔으며, 시기에따라대결과대화의마당이번갈아형성되어왔다. 지금까지의대북정책이란이이원적구조속에서어떤선택을해나가느냐하는대립적문제였다. 다시말해북한을상대로우리의안전을확보하는과제와북한을통일의목적지로데려가기위한과제를동시적으로충족시키기어렵다면어떤비중으로조율해나가느냐하는문제였다. 여기에는북한을어떤대상으로보는가하는시각문제도개입된다. 이를둘러싸고우리사회에는의식의혼란이따르기도하고왕왕남남갈등이라고일컬어지는극도의의견대립양상이빚어지기도한다. 또한정부의정책도대북압박 강경정책으로나타나기도하고유화정책으로나타나기도한다. 본고에서는역대정부의대북정책과남북관계의변화를비교고찰하면서한반도에주어진대결과대화, 혹은안보와협력이라는제약된이원적구조를벗어날수는없는것인지, 그리고새로운남북관계를형성하기위한우리의정책적대안은무엇인지에대해서검토해보고자한다. 비교의의미성과기술의편의문제를고려하여본고에서는검토대상을 1998년이후역대정부의대북정책에한정하였음을밝혀둔다. Ⅱ. 김대중정부의대북정책 1. 포용정책의의의와특성 (1) 추진배경과의의 1998 년에출범한김대중정부는우리정치사에서처음으로수평교체를이룬진보정권이다. 전세계적으로냉전질서가해체된가운데미국이압도적인국력의우위로세계질서를주도해나가던시기였다. 한편으로는한반도문제에대한주변국들의개입력이상대적으로감소한시기이기도했다. 김대중정부는이러한여건을활용하여그동안지속해오던남북간대결관계를화해와협력의새로운방향으로틀고자했다. 그리고북한을점진적으로변화시켜나가되 45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강압에의해서가아니라북한스스로변화를선택하도록여건을조성하고자했다. 그러나이러한배경하에추진된대북포용정책은처음부터여러가지장애와난관에부딪쳤다. 우선정치적으로자민련과의연합정권이불안정한데다가거대야당의비협조로정국운영의주도권을쥘수없었다. 또한국정운영의어젠다 1순위는국가적외환위기사태를극복하는일이었다. 이때문에김대중정부가출범초기부터기존의대북정책을전환하여과감하게포용정책을펴나가기는어려웠다. 더구나유훈통치기간을마치고김정일체제의가동에들어간북한은체제안정이최대관심사였고대남관계에서는경색국면을지속시키면서시간벌기에나섰다. 따라서남측의초기대화및교류제안들은다거부하였으며, 당국간회담에있어서도 국가보안법철폐, 외세와의공조파기, 합동군사훈련중지 등을개최의선행조건으로내걸었다. 1998 년 3월에베이징에서비료지원문제를둘러싸고당국대표회담이열렸지만, 우리측이비료지원을통해북한이남북관계개선문제협의에호응해나오도록연계하는 상호주의 를관철시키려함으로써일회성으로끝났다. 북한은포용정책에대해서도반북 반통일대결정책으로낙인찍고비난으로시종일관하였다. 북한은포용정책을두고 미국의평화적이행전략의변종으로, 화해와협력의미명아래우리를개혁 개방으로유도하여자유민주주의체제에흡수통일하려는모략책동, 원래남북관계에서포용이란있을수없으며, 이말을쓰는것자체가겨레의지향에대한우롱이자모독 이라고반발했다. 북한은당시미사일협상, 미군유해발굴등미국과의협상에전력을쏟으면서북미관계의진전을앞세우고자하는측면도있었지만, 사실남한의어떠한제안도그진정성을의심하여선뜻손을잡지못하는불안정상황에있었던것이다. 이처럼안팎의제약으로포용정책의추진동력이떨어지기는했지만, 남북관계사에서그것이갖는의미는컸다. 포용정책은한마디로남북간의대결구조를대화와협력의구조로바꾸자는것이다. 그것도잠정적 임시적이아니라항구적제도화로나아가자는것이다. 어떤의미에서는남북관계에서대결의축하나는지워버리고이원적구조에서벗어나려는도전이었다. (2) 특성포용정책은그원칙에서무력도발불용, 북한흡수통일배제, 화해협력적극추진을내걸었다. 사실무력도발불용은보수세력의견제완화, 흡수통일배제는북한의우려해소에무게가실려있었고, 핵심은교류와협력을실행하여호혜적관계를구축하고공동체를회복해나가자는것이었다. 46
동향과분석남북관계와대북정책의변화 포용정책의당면목표는평화공존이었다. 서로상이한이념과제도를갖고적대적관계를지속해온남북한이단기간에법적 제도적 정치적통일을실현하기는어렵다는현실을인정하고, 우선은평화를확고히한토대위에대화와교류및협력을늘리자는것이었다. 이러한점에서보자면역대정부의정책목표와통일방안의경로를전혀이탈한것이아니다. 다만, 과거 선건설, 선평화 라는소극적평화공존에서평화를위협하는요소들을근원적으로제거하여평화를적극창출해나가려는적극적평화공존으로변화했을뿐이다. 이에따라화해협력단계의설계도만그리고있을게아니라선제적양보를통해서라도신뢰를창출하고북한의변화를유도하는등보다과감한대북접근을통해화해협력구조를실현시키려했다. 실천적측면에서우리가주목해야할것은정경분리를정책기조로삼았다는점이다. 이것은과거의정부와분명한차별성을갖는부분이다. 남북간의경제협력이나북한에대한인도적지원을정치적종속변수로부터털어낸것이다. 김대중정부시기에이정경분리원칙이일관성을갖고지속되었는지에대해서는의문을제기할수있다. 1999년 6월에발생한금강산관광객억류사건시정부는관광객의신변안전이보장될때까지관광사업을전면중단하는조치를취한바있다. 또 2002년금강산관광사업의운영지속을위해특별대상에한해관광경비를일부보조한바있다. 하지만서해교전이나제주해협무단통과등남북간에발생한여러가지돌발적변수에도불구하고원칙적으로이러한입장이견지되었다는점은평가할수있다. 2. 포용정책과남북관계의변화 (1) 남북정상회담과화해협력에의진입남한의공격적접근을외면해오던북한이김대중대통령의 베를린선언 을계기로비공개접촉을통해정상회담에호응해나왔다. 북한이태도를바꾼이유에대해서는당면한경제적애로타개와실리획득, 포용정책에대한신뢰, 대미관계개선에유리한분위기조성등의분석이가능하다. 남북관계사상처음으로정상회담이개최되었지만본질적문제에대한의견차이가클수밖에없었고, 북측이열위적위상을보상받기위해여러가지난관을조성하기도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6 15 공동선언 이합의됨으로써적어도평화구축문제의진전과공동번영을위한협력에기대를가질수있게해주었다. 이로부터남북간에는다양한분야에서지속적으로회담이개최되었고, 인적 물적교류가급증했으며, 철도 도로연결등의협력사업들이전개되었다. 2000년이후김대중정부 47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기간동안 72회회담이진행되었으며합의서나공동보도문이 47건나왔다. 남북간의회담은제반현안문제의중심협의체로서의장관급회담을비롯하여군사, 경제, 사회 문화, 인도분야로다기화되었다. 또한금강산관광이육로관광으로확대되었으며, 경의선 동해선철도 도로연결사업이착공되고개성공단개발사업이본격적으로추진되었다. 특히남북경제협력위원회는의제에따라필요한하부회의체들을실무협의회또는실무접촉형식으로계속해서늘려나갔는데, 철도 도로연결실무협의회, 개성공단건설실무협의회, 임진강수해방지실무협의회, 해운협력실무접촉, 전력협력실무협의회, 경제협력제도실무협의회등이그것이다. 투자보장, 이중과세방지, 청산 결제, 상사분쟁해결절차등경협 4대합의서도채택되었다. 남북교역액은 5년간 20억달러를넘어섰으며, 왕래인원이연평균 7,514명으로증가하였다. 과거에비해 28배가증가한것이다. 이같은남북관계의변화는경제관리개선조치등북한이대내외에걸쳐실용주의적태도를갖게하는데에도기여하였다고본다. 그러나북미관계는이러한남북관계발전에연동되지않았다. 2000 년후반조명록차수가방미하여공동코뮈니케를발표하고올브라이트국무장관이북한을방문하였다. 그연장선상에서클린턴대통령의방북이추진될때만해도북미간의관계개선에대한전망을내다볼수있었다. 하지만 2001 년부시행정부가출범하자사정은달라졌다. 대북정책에대한전면재검토에들어간것이다. 더구나 9 11 테러사건이후미국은북한을 악의축, 선제타격대상 으로규정하고대화의문을닫아버렸다. 이로인해약 9개월간남북간에는회담이중단되는등경색국면이초래되기도했다. 남북관계가복원된것은 2002년 4월임동원특사가김정일위원장을면담한후였다. 그나마 2002년 6월서해교전으로심각한위기가있었지만북측의즉각적인사과와재발방지약속으로사태악화를막고당국간회담을이어갈수있었다. 2002년은남한의대선정국이었고보수세력은그동안포용정책이남긴부작용들을호재로삼았는데, 북한측이오히려남북간화해무드로반전시키는데집중적인노력을보여주었다. 북한은 2002년후반기에부산아시안게임에대규모의선수단을참가시키고경제시찰단을보내왔으며, 통일축구경기와이산가족상봉등의공동행사들을연달아개최하였다. 북한은당시 2차핵위기와제네바합의의파기라는상황에서대미본격협상에대비하여남북관계를안정상태로두고자했으며, 남측차기정부의대북정책이지속성을갖기를바랐던것으로보인다. 48
동향과분석남북관계와대북정책의변화 (2) 포용정책의한계대북정책은추진주체의의사도중요하지만북한측이어떻게받아들이느냐에따라추진력의유무가가름되기도한다. 그런의미에서포용정책은일관성있는추진을통해진정성을확인시켜줌으로써북한측의호응을유도할수있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정상회담이후에도북한측은대내외환경변화에따라남북관계를이에종속시키고자했으며, 대결구조에의존하는과거의행태를드러내고는했다. 특히미국과의핵문제협상진전여부를남북관계향방의중요요인으로삼았다. 포용정책의추진으로남측은접촉점을늘리고분단을평화적으로관리하는데에는성공하였지만, 대내적으로남남갈등과 퍼주기 비판을넘어서지못했으며, 미국등국제사회의협력확보가불충분했다고본다. 이는 포용 이수단이아닌목적인것으로비쳐진데다가핵문제해결과남북관계진전의연관성에대한설득과정이미비했기때문이다. 또한전략면에서북한집권층을과도하게의식했다거나북한의안보불안을경제적유인위주로해소하려했다는지적도받고있다. 포용정책은평화와통일을선후관계로인식한것이었기에교류협력의확대가평화의단계에만머물고통일과의연계고리를형성하지는못했다고할수있다. 김일성사후남북간의대화조차회피하는북한을대화의자리에앉히고새로운신뢰를축적하기위해서일단필요한접근방법이었지만당초목표로했던한반도의냉전구조해체를달성하기에는역부족이었다. Ⅲ. 노무현정부의대북정책 1. 평화번영정책의의의와특성 (1) 추진배경과의의노무현정부는변화와개혁을앞세웠지만남북한이평화공존의바탕위에서공동번영을추구해나간다는역대정부의기본적인대북정책방향에서벗어날수는없었다. 여기에 6 15 공동선언 등남북간의기존의합의와성과를존중하고계승한다는입장도밝혔다. 그럼에도불구하고노무현정부는포용정책을발전적차원에서조정하여김대중정부와차별성을부각시키고자했다. 49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노무현정부가제시한것은평화번영정책이었다. 노무현정부는우선포용정책추진과정에서제기되었던 퍼주기 와 북한에끌려다닌다 는논란과국민여론의분열을크게의식했다. 이에따라광범위한국민참여와초당적협력그리고법과제도를중시하는투명한정책추진을통해국민적지지를받고정책추진의정당성을확보하고자했다. 그러나이부분에는다분히정치적고려가가미되어있었다. 당시대북송금의혹문제가불거지고있었는데노대통령은특검법안을그대로수용하였고, 특검이진행되는동안민주당이분당되고친노직계를중심으로 2003년 11월에 열린우리당 이새로창당된것이다. 또한안보와협력의균형적발전, 동북아경제중심국가건설을이루기위한통합전략속에서의남북관계라는데서차별성을찾았다. 김대중정부에서는교류협력이활성화되기는했지만군사분야에서의실질적인성과가따르지못했고시야를남북관계에국한함으로써평화의불안정상태가지속되고있다고본것이다. 이에따라평화번영정책은두가지목표를설정하고있는데, 하나는 한반도평화증진 이고또하나는 남북공동번영실현및동북아공동번영추구 이다. 그러나북한핵문제가다시불거지고미국부시정부의북한에대한예방적선제공격가능성이제기되는시점에출범한노무현정부는, 자주외교와동북아균형자역할을표방하기는했지만당면한핵문제해결을우선과제로삼을수밖에없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남북관계발전의중간목표로평화체제구축에대한방향을제시하고그시야를남북관계를넘어동북아까지로확대하고자했으며, 대북정책을국가발전전략의핵심요소로끌어올린데서그의의를찾을수있다고하겠다. (2) 특성평화번영정책은명칭자체가대북정책추진의방법론을말하는것이라기보다는목표지향형이다. 평화와번영은사실대북정책에만국한된목표가아니며국정운영전반에걸쳐진상위목표인것이다. 그래서공간적으로는동북아를포괄하고있고내용면에서는평화와협력의부분이뒤섞여있다. 또한국제사회와의공조와남북관계, 안보와협력이선순환된다는것만을상정해놓고있다. 이로인해현실상황에서는각기의가치들이그우선순위에서상호충돌할소지를안고있었다. 평화번영정책은추진전략에서 1단계우선적과제로핵문제해결을내세우고이것이완결되어야다음단계로넘어갈수있다는인상을주었다. 물론실제로는핵문제선결의입장에서있지않았으며, 핵문제해결을위해남북대화의모멘텀을유지하면서화해협력관계를 50
동향과분석남북관계와대북정책의변화 지속적으로발전시키고자했다. 그러나그같은단계별목표는스스로의한계가되었다. 평화번영정책은포용정책과본질적으로는차이가없다고할수있다. 다만, 추진방식및절차에서강조점이다를뿐이다. 맥락을달리하는부분이있다면첫째, 동북아에서의국가위상과역할이라는비전을제시하고이를위해남북관계를발전시켜야한다는당위를도출함으로써남북관계를발전시켜동북아지역의평화와번영에기여하자는기존논리를비틀었다. 둘째, 포용정책이협력을선행하여평화가따라오게하는느슨한연계였다면평화번영정책은협력과평화를동시적내지균형적으로추진한다는데명분을두었다. 2. 평화번영정책과남북관계의변화 (1) 그늘속의남북관계와 2차정상회담 2003년초반에노무현정부는대북정책을적극적으로추진할여건에놓여있지않았다. 2차핵위기의파고가거세지면서 3자회담, 6자회담의새로운다자회담틀이만들어진데다세계적반테러전쟁이남북관계를위축시켰다. 또한계속이어지는국내정치현안에대한대처과정에서국민들이국정운영에불안감을느낄만큼혼선을빚었다. 그연장선상에서 2004년 3월에탄핵소추안이가결되어대통령의권한이정지되는사태까지초래되었다. 북한은노무현정부의포용정책승계에기대를걸었으나대북송금특검, 이라크전쟁파병, 김일성사망 10주기조문불허, 탈북자대량입국등다소민감한사안이이어지고미국이대통령선거기간에들어가자 2004년하반기부터당국간대화를회피하기시작했다. 그러한가운데서도남북간인적 물적교류는꾸준한증가세를보였고경협사업들도지속되었다. 경의선 동해선의철도를연결하였으며, 개성공단개발을위한착공식을갖고시범단지내공장건설에들어갔다.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에북한선수단이참가하고아테네올림픽개 폐막식에남북한이공동입장하는등다양한분야에서화해분위기가조성되었다. 북한은핵문제를둘러싼강한메시지를전달하면서도남북관계의기본틀은유지하려했다. 남북관계가악화될경우남한의현실적지원과대미협상에서의역할을기대할수없게되고, 6 15공동선언 의정신을스스로훼손하는결과가되기때문이었다. 북한이 1년가까이중단되었던당국간대화에응해온것은 2005년 5월이었다. 이어김정일위원장이특사자격으로평양에간정동영통일부장관을면담한후 6자회담복귀의사를밝히면서남북관계가경색국면을벗어났다. 9 19 공동성명 이나온것도이시기였다. 그러나방코델타아시아 (BDA) 불법계좌동결과 2006 년 10월의핵실험으로새로운난관이조성되어 51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남북관계의진전을어렵게했다. 2007 년에와서야 공동성명 의이행을위한조치들이타결되고북한핵문제는해결의궤도에들어서는듯했다. 이와같은대외적여건과함께노무현정부의리더십약화와여당내부의갈등및분화로대북정책은동력을잃어버렸다. 회담은남북관계개선을위한실질적인성과를이루지못하고기존합의사항을관리하고확인하는수준에머물렀으며, 중단사태가빚어지기도했다. 노정부는핵실험에묶여식량과비료지원중단, 교사및학생들의금강산관광지원중단, 개성공단분양보류, 민간차원의교류협력사업규제등을시행했다. 부시정부의대북정책전환으로핵문제가실마리를찾게된 2007 년에와서야남북관계도풀리기시작했다. 북한은대미관계개선을서두르는한편, 당시남한에서보수정권이차기정부를인수할가능성을고려하여대북정책이계승될수있도록못박아두고자했다. 2차남북정상회담이개최되고 10 4 선언 이채택된것은그일환이라고볼수있다. 우선 10 4 선언 은 40여개의구체적인세부항목으로되어있다. 그리고임기말불과 4개월기간에회담과접촉이 30회개최되고합의서가 20건채택되었다. 또한장관급회담을총리회담으로격상하고산하에경제협력공동위원회,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추진위원회, 국방장관회담, 사회문화교류협력추진위원회와부문별분과위원회들을두기로하여회담체계를굳혀놓았다. (2) 평화번영정책의한계노무현정부의대북정책은실제로는포용정책을계승한것이었음에도불구하고정치적역학구도와핵문제등으로방향타를놓친탓에한계를드러내고말았다. 남북간에대화와교류협력의증가등현상적진전은있었다. 노무현정부기간동안 169회의회담과접촉이진행되었으며, 2007년에남북왕래인원은 16만명에육박했고교역액은 18억달러정도에이르렀다. 그렇지만전반적으로보아기존의성과를관리하는차원에머물렀으며, 남북관계를실질적이고새로운차원으로발전시키지는못했다고평가할수있다. 평화번영정책은평화가협력과균형을이루어야한다는강박관념에서군사분야의회담개최와그성과창출에집중했다. 그러나군사분계선지역에서선전활동을중지하고선전수단을제거키로한것외에는경제협력사업을위해필요한군사분야의보장을받는데그쳤을뿐이었다. 또한노무현정부는미국과보수세력의우려를의식하여미래전략구상에따른한미관계의재조정과동북아균형자론추진에따른부담을덜고자했다. 이라크전쟁파병, 김일성사망 10주기조문불허, 탈북자대거입국, 북한의미사일발사및핵실험에대한강경대응등이이에해당한다. 52
동향과분석남북관계와대북정책의변화 노무현정부는초기에핵문제를선결과제로삼아남북관계를핵문제의하위변수로두었다. 이때문에임기내내핵문제를둘러싼상황이바뀌는데에따라남북관계가부침을거듭하는양상을보였다. 대체로 2005년미국부시대통령의 2기정부가출범하여북한을 폭정의전초기지 로규정하고북한이핵무기보유를선언하는과정에서남북관계는경색국면을맞이했다. 북한이 6자회담에돌아와 9 19 공동성명 이나오면서남북관계가다시복원되었다가, BDA 불법계좌문제로인한금융제재가진행되는동안침체상태로갔고, 2007년 2 13 합의 가나오고미국의대북정책이전환되면서남북관계도풀리기시작했다. 이와같이남북관계는핵문제의진전여부에따라갈지자걸음을계속했다. 이것은노정부의대북정책이표방하고있는것과는달리남북관계를발전시키는데그다지능동적이고적극적인입장에있지는않았다는반증이다. 노무현정부는임기말에제2차남북정상회담을개최하고남북관계진전의모멘텀을살려놓고자했지만그구체적실행은사실상차기정부의몫으로남겨지게되어불확실성에그칠가능성을내포하고있었다. 이같이평화번영정책은상황변화를리드하지못하고설계도와다른집을짓는결과가되었다. Ⅳ. 이명박정부의대북정책 1. 상생공영정책의의의와특성 (1) 추진배경과의의 2007년의한국사회는전반적으로보수성향의물결이강세를이루었다. 국민들은정책혼선과내부분열을거듭해온진보정권에등을돌렸으며, 대북정책과관련해서도불만과우려를나타내기시작했다. 새로출범한이명박정부는이러한정치상황에따라국정전반에걸쳐과거정권과확실한차별성을보이고자했으며, 특히대북정책에있어서는중장기적전략과향후남북관계의운용방향을제대로설정하기도전에보수층지지기반에부응하는정책제시와발언을앞세우게되었다. 사실이명박정부는 2008 년임기초기에남북관계를중요국책어젠다로삼아본격적으로검토할여유가없었다. 4월 19일한미정상회담하루전에쇠고기협상을타결하여수입을 53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전면개방하기로한것이도화선이되어장기간촛불시위가이어졌다. 이로인해내각이총사퇴하고대통령이국민에게사죄하는사태가벌어지는등정치적타격을입었다. 그러한가운데서제시된대북정책이상생공영정책이었다. 실용과생산성에기초해서상생과공영의남북관계를발전시키고평화통일의실질적토대를확충시켜서평화공동체, 경제공동체, 행복공동체를실현해나간다는것이다. 상생 이평화의제도화를의미하고 공영 이경제공동체의형성을의미한다는측면에서보자면상생공영정책도결국역대정부가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입각해일관되게추진해온화해협력정책의연장선상에있었다고할수있다. 그러나구체적추진내용은전혀다르게나타났다. 6 15 공동선언 과 10 4 선언 등기존의남북간의합의는무시되고 실용 과 진정성 이라는이름하에북한의태도변화가협력관계를지속시키기위한선행조건이되어버렸다. 이전정부에서남북간에운용되었던회담체계는가동되지못했으며, 경협은북핵문제진전, 경제적타당성, 재정부담능력, 국민적합의의원칙에걸려실제로는위축되고중단되기시작했다. 당시북한은부시정부의대북정책전환에기대어핵불능화를위한 10 3 합의 를이행하는과정에있었다. 신고목록작성에서줄다리기는있었지만핵신고서제출, 영변 5MWe 원자로냉각탑폭파가진행되었고, 미국은북한에대한적성국교역법적용을종료하고테러지원국해제절차에착수하였다. 북한은북미관계정상화를목표로하는 3단계협상의진입에유리한환경을조성하고남한으로부터경제실익을지속적으로확보하기위해남북관계에갈등요인이초래되는것을바라지않았고, 이명박정부의 실용 정책에기대를걸기도했다. 그러나상생공영정책은실제로는 비핵 개방 3000 이라는슬로건으로나타났다. 북한이핵을포기하고개방정책으로전환하면남북경제협력과지원을통해 10년내에북한주민의 1인당소득이 3천달러수준에이르도록하겠다는것이었다. 결국남북관계의모든사안이핵문제의해결에연계되는 선핵포기 의입장을선택한것이다. 북한은남한정부가적대적대결정책을지향한다고보고이에반발하는강경대응으로맞섰지만이것이오히려남북관계를풀기어려운악순환과정에빠지게하였다. (2) 특성상생공영정책은 비핵 개방 3000 에서드러난바와같이북한핵문제가해결되지않고서는남북관계의실질적발전이한계에부딪칠수밖에없기때문에대북정책의최우선과제를북한의비핵화실현에두겠다는것이었다. 이로인해남북관계는핵문제가해결되지않은상황에서는한걸음도나아가지못하게되었다. 54
동향과분석남북관계와대북정책의변화 이같은핵문제해결우선입장은국제사회와의공조강화와대북강경압박정책으로연결되지않을수없었고, 이를뒷받침하는논리로 북한붕괴론 이원용되었다. 이명박대통령이취임사에서남북관계를 실용 의잣대로풀어가겠다고했지만여기에는 실용 이적용될공간이남아있지않았다. 또한북한이먼저변해야한다는조건도역대정부가대화와교류협력을통해신뢰를쌓으면서북한의변화를촉진시켜나간다는기조를견지해온것과는궤를달리하는것이었다. 이같은변화에대한주문에는북한이남북관계에서수혜를받는입장이며대화와교류협력은남한의시혜로이루어지는것이라는전제가깔려있었다. 한편이명박정부는남북관계의특수성을인정하기보다는국제적보편성을적용하고자했으며북한이국제사회의성원으로서자격을갖출것을요구하였다. 대북정책또한이에기초하여추진해야한다고믿는것은당연했다. 이명박정부는군사적긴장이고조되고남북관계가악화일로를걸으면서임기후반에는 통일항아리 로표상되는 통일을위한준비 쪽으로방향을전환하여각계의의견을규합하고국민적합의기반을마련하려고했다. 이로써대북정책은추진력을잃어버렸고상생공영정책의실질적내용이무엇이었는가에대한의문만남겨놓았다. 2. 상생공영정책과남북관계의변화 (1) 대화와협력이차단된남북관계이명박정부의일부인사들에게서대북선제공격론이나개성공단사업의핵문제연계등의발언이나오면서북한은남북경협협의사무소인원철수와당국간대화거부등의조치로응대하고대통령에대한직접비난에나섰다. 이같은탐색과견제과정에서남북관계가미처제대로설정되기도전에 2008 년 7월금강산관광객피살사건이발생했다. 이명박정부는즉각관광사업을중단하고북한의책임있는조치를요구했다. 이문제를추스르기도전에김정일건강이상설, 급변사태설, 전단살포, 유엔총회북한인권결의안공동발의등이연달아쟁점을형성해나가자, 북한은이는그들체제에대한정면도전이고용납못할도발행위라고비난한데이어군사분계선을통한육로통행을차단하고판문점직통전화를단절했다. 이와함께핵문제도북한의기대대로순탄하게풀리지않았다. 검증의정서채택이불발된것이다. 북한은제3기김정일체제의출범을전후하여대내결속을더욱강화할필요도있었다. 이러한요인들이북한으로하여금 전쟁접경 을운운할정도로 55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대남강경대응을취하게하였다. 그러나실제에있어북한은극단적인상황으로몰고가지는않았으며정세변화를들여다보면서정교한계산하에움직였다고할수있다. 북한은 핵없는세계 를내걸고 2009년에출범한미국오바마정부에큰기대를갖고있었으나북핵문제는미국의국정과제에서우선순위가되지못했다. 북한은장거리로켓발사와핵실험을강행하였고, 6자회담은영원히끝났다. 고공언하였다. 이명박정부는 기다리는것도전략 이라며 원칙과유연함 을내세웠을뿐남북관계를풀어가는데소극적이었다. 사태는점점악화되어당국간대화의문은닫히고교류협력사업들도더욱위축되어갔다. 북한은개성공단까지도임금재조정등을요구하며존폐여부를압박했다. 이같은긴장분위기는 2009 년후반에누그러드는조짐을보였다. 김정일위원장이 6자회담복귀의사를비치는가하면보즈워스미국대북정책특별대표가방북하여핵문제협상을위한단초를마련했다. 북한은남북관계에도유화적태도를보이기시작했다. 김정일위원장이현대아산현정은회장을면담하여금강산관광재개등에긍정적신호를보냈고, 김대중전대통령서거에특사조문단을파견하였다. 이시기에남북정상회담개최문제를협의하는비공개막후접촉이진행되었고금강산 개성관광관련당국간실무회담이열리기도했다. 이러한사태진전을이명박정부는북한의이중적태도로보고이에미온적이고소극적인입장을보였으며, 당국회담에대한북측의직접제의요구와관광재개를위한 3대조건을고수했다. 북측의인도적지원요청에옥수수 1만톤제공의사표시를하여북측이요청을다시거두어들인일도있다. 그러나 2010년 3월 26일천안함피침과 11월23일연평도포격사건은이러한해빙의기회까지도날려보냈다. 5 24 조치 로인해대북지원과교류협력이전면중단되었고, 남북간에는군사적충돌가능성에대한우려가커져만갔다. 2011년들어북한이남북대화를연이어제의하면서국면전환을시도하였다. 북한이당국회담, 적십자회담, 금강산관광재개회담, 개성공단회담등대화공세를해온데대해남측은진정성이없다고보고천안함 연평도사건에대한책임있는조치와비핵화에대한진정성확인을위한당국간대화가선행되어야한다는입장을견지하였다. 그연장선상에서남북고위급군사회담개최를위한실무회담이진행되었지만관계악화의책임공방으로결렬되었다. 북한은다시대남비난과위협을강화하고 남측과상대하지않겠다 고주장하는가하면, 남북간의비공개접촉내용까지일방적으로공개하여남북관계개선전망을어둡게하였다. 이명박정부는 2011 년하반기통일부장관의교체를계기로다소완화된입장으로대처하였으나, 12월 17일김정일위원장의사망에따라분위기전환노력은무위로끝나고말았다. 56
동향과분석남북관계와대북정책의변화 북한은김정은체제의안정적구축이최대의과제가되었으며, 이를위해남북관계를더욱경색시키고한반도긴장을극대화하는쪽을선택한것이다. 유엔의대북제재결의에도불구하고북한은장거리로켓을계속발사한데이어 2013년 2월 12일 3차핵실험을강행했고, 그후속공방이지금까지이어지고있다. 결국남북협력사업의상징으로마지막까지남아있던개성공단도기한없는가동중단에들어갔다. 이명박정부는신뢰가무너지고군사적충돌의위험성마저배제할수없는남북관계를새로출범한박근혜정부에게넘긴셈이다. 이로써남북간에향후협력의축이가동할수있는여지가크게줄어들었다. (2) 상생공영정책의한계상생공영정책은한마디로구체전략이불분명했다. 북한의태도변화, 즉핵문제선결과개방정책으로의전환을걸어놓기만했지어떻게그것을달성하겠다는것인지방법론은부재했다. 핵문제를해결하고북한의변화를이끌어내는것은대북정책을추진한결과로서얻어지는것인데, 이를대북정책추진의조건으로만들면대북정책을고심할이유가없어진다. 이러한도치된구상의밑바탕에는과거진보정권과의차별성을부각시키려는정치적수요와함께명분과원칙으로북한을지속적으로압박하면굴복을받아낼수있다는자신감이깔려있었다. 이에따라이명박정부는기존의합의사항과회담틀을무시하고초기단계에서부터기선을제압하여북한으로하여금남북한이이른바 갑을관계 임을확인시키고자했다. 이러한배경하에신중하고치밀한전략적고려가없는발언들이나오게되었고, 북한은남한정부가대결국면을지향하며북한길들이기에나섰다고보고이를차단하기위해강경대응으로반발하였다. 이것이남북관계에냉기류가형성된원인이되었으며, 금강산관광객피살사건은그촉진제가되었다. 한편, 남북간에는상황변화에따라체면손상없이입장을바꾸어야할필요성을고려하여협상가능영역을남겨두는것이통례이다. 그러나이명박대통령은직접진두지휘로금강산관광중단과재개조건을밝히고 5 24 조치 를취했다. 따라서남북관계가계속악화일로를걷는속에서도퇴로를마련할수가없었다. 남북간에일종의기싸움으로인해상황악화가점차구조화되어갔지만이를멈출수있는기제가없었던것이다. 어떤면에서는북한측이남북관계를전환시키려는신호를몇번보내왔지만이명박정부는이를무시하거나원칙중시의대북정책이성과를거두는조짐으로보고더많은양보를요구하며압박하기도했다. 여기에서상생공영정책은그명분적내용에도불구하고실천적측면에서제대로작동조차하지못하고말았다. 57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더구나 선핵포기 내지 핵문제와관련한북한의선진전된태도 요구는남북관계를더악화시키는요인이되었을뿐아니라 6자회담의개최를가로막는요인도되었다. 선핵포기 의조건으로인해남북관계와핵문제의선순환은기대할수없게되었고, 결국남북관계도, 핵문제해결도다같이한계에부딪치고말았다. 그기간동안개성공단과남북간의철도 도로연결사업, 금강산관광사업등 3대경협사업은모두중단되었고, 북한의핵능력은크게제고되었다. Ⅴ. 맺음말 1. 대북정책과남북관계의상관성 1998년이후역대정부대북정책의배경과의의, 특성, 남북관계변화에미친영향과그한계를알아보았다. 어느정권이나스스로밝히고있는기조나원칙또는정책방향은크게다르지않다고할수있다. 그때그때의상황변화를감안하여강조점을달리하고당면목표에차이점을보였지만한반도에평화를정착시키고남북관계를화해협력관계로전환시켜통일의토대를마련하려는데목적을두고있다는점은공통적이다. 그것은점진적 단계적으로통일의과정을밟아나가면서민족공동체를회복한다는데에대해국민적합의를이루고있기때문이다. 그러나이를실제현실에적용하여운용하는과정에서는차이를드러냈다. 이러한차이로인해남북관계는대결적기류와협력적기류가번갈아전선을형성하는양태를보였다. 김대중정부는한반도의냉전구조를해체하는데목표를두고적극적인대북접근정책을추진했다. 이를위해선제적양보를해서라도우선화해와협력을진전시켜북한이변화할수있는여건을조성해보자는것이었다. 핵문제도이과정에서자연스럽게해소될수있다고보았다. 말하자면북한의변화도, 핵문제의해결도화해와협력의구조를진척시킨후에얻어지는후행성과물로본것이다. 그러나이러한정책을추진하는데서언제라도발목을잡을수있는것이북한의군사적도발이었다. 남북간의대결적요소를무시하고유화일변도로갈경우, 국민들의안보불안감도고려하지않을수없었고, 정책추진자체가좌초될가능성이있었다. 그래서안보와협력을 58
동향과분석남북관계와대북정책의변화 병행한다는것을기조로삼았지만, 사실은안보는안보의영역으로두고협력을이와분리하여추진하고자했다. 두차례의서해교전과금강산관광객억류사건, 북한선박의제주해협무단통과사건등이있었지만, 이때문에남북관계를개선하는노력을멈추지는않았다. 2000 년남북정상회담이후남북관계는냉전시대대결일변도의구조를벗어났으며, 전반적으로화해협력의새로운흐름이형성되었고그것을실질적으로유지했다고할수있다. 노무현정부는전임정부의정책기조와성과를계승하여남북관계를심화 발전시키고자했지만 북한에퍼주기만했다, 북한의변화도, 핵문제해결도얻은것이없다 는비판에서벗어나고싶어했다. 그래서 평화 를전면에내세우고핵문제해결을우선적과제로설정했으며군사분야의진전을중시했다. 또한 공동번영 과호혜주의를내세워북한을지원만하는것이아니라는것을강조했다. 그리고우리가추구해온민족공동체건설작업은 동북아속의한반도 라는차원에서운용되어야한다며, 평화번영정책이단순히북한만을대상으로한것이아니라보다범위를넓혀동북아의큰틀에기반을둔것임을부각시켰다. 그러나그실제적의도와관계없이임기초반의여러가지요인들로인해남북관계는현상유지의관리차원에머물렀다. 핵문제해결과관련하여 한국의적극적인역할 을원칙으로밝혔지만핵문제는 6자회담이라는새로운틀에서다루어지게되었다. 오히려국제적성격만강화된것이다. 전임정권과차별성을둔것과는달리군사분야에서북한의진전된조치도얻지못했고, 경협에서새로운사업의전개도없었다. 인적 물적교류는꾸준히증가세를보였고이산가족상봉과기존합의에따른공동행사들이지속되었지만남북관계를새로운단계로끌어올리지는못했다. 이에는노무현정부가핵문제와남북관계, 자주외교와한미동맹, 인도적지원에대한입장등에서일관성을보이지않은데대한북한의불신이작용한측면도있었다고할수있다. 여기에다가노무현정부가정치적리더십을발휘하기어려운정치적역학구도와보수세력의견제로남북관계는더이상진전되지못했다. 비록임기말에정상회담이이루어지고대북화해협력정책의지속을위한장치들이셋업되었지만, 남북관계가복원력을가질수있는지의여부는불확실해졌다. 이명박정부는전임정부의노선과성과를부정하는입장에있었으므로대북정책의전환에부담을가질필요가없었다. 오히려기존의합의와성과를무시하고남북관계를새롭게출발시키고자하였다. 북한이그러한관계설정에호응해오면좋고, 호응해오지않더라도급박하고아쉬운쪽은북한이라는입장이었다. 이것은이명박정부가남북관계발전에그다지우선순위를부여하지않은것으로비쳐질수있게했다. 그러나어떤측면에서보면남북관계에서국민들의 59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지지를받을수있는성과를만드는데더조바심을내었다고할수있다. 북한이핵만포기하면경제발전에전적인지원과협력을하겠다고공언했으며, 그와맥락을같이하는 그랜드바겐 을제안하기도했다. 그러나이는마차뒤에다가말을묶고달리게하는것과같았다. 특히 원칙의단호함 으로인해북한이보내오는국면타개의메시지를긍정적으로받아들이지못하였으며스스로의출로까지막는결과가됨으로써관계개선에실기하고만사례도있다. 중단된대화를재개할경우에도대화를해서 진정성 을갖도록만들어가기보다는사전에 진정성 을판단하여재개여부를결정하고자했다. 북한으로서는이명박정부의이러한입장이북한의굴복을요구하는적대와압살정책으로볼수밖에없었고, 이에맞선도발과위협이관계악화를더욱부채질하는결과를가져온것이다. 이로인해남북관계는이명박정부내내 돌이킬수없는파탄상태 로에스컬레이트되어갔다. 여기서우리는대북정책과남북관계의상관성을짚어볼필요가있다. 포용정책의경우남북관계는일관성있게화해와협력의흐름을잡았다고할수있다. 노무현정부의평화번영정책은같은진보정권을계승한다고하였으나, 그기간동안의남북관계는겉으로는화해의분위기가살아있었지만실제로는진척과심화가이루어지지않았으며, 주로핵문제라는국제적사안의영향력에따라굴곡을그렸다. 이명박정부는상생공영을내세웠으나이것이핵문제의종속변수임을분명히한데다상황을제대로관리하지못해남북관계가악화상태를벗어나지못했다. 그러나진보정권은협력관계를, 이명박정부는대결관계를지향한것은아니다. 보수정권이나진보정권이나이미공유하고있는목표를어떻게달성하느냐하는방법론에서차이가있었을뿐이다. 그런데이방법론의차이를확장시켜나가면결국남북관계의이원적구조라는원초적문제에도달하게된다. 대결구조의축에서만바라본다면평화가중요한가치이며, 이를위한안보역량강화가우선적과제이다. 그래서안보위협요소가되는핵과군사면에서북한의변화를앞세운다. 대화는이를위한수단이될수있다. 통일의과정은북한의변화가선행됨으로써실질적으로시작된다고본다. 반면에협력구조의축에서만바라본다면통일이중요한가치이며, 이를위해남북간에교류협력을늘리고민족공동체완성을위한토대를마련하는것이시급한과제이다. 이러한과정에서북한의변화도선도할수있고핵문제의해결도가능해진다. 대화는이를위한필수적인수단이다. 진정한평화는이렇게함으로써북한의도발의지가사라질때가능해진다고본다. 60
동향과분석남북관계와대북정책의변화 이러한의견대립은평화와통일을이분법으로나누어하나의가치에만함몰된데서비롯된다. 기실은평화없는통일이나통일없는평화는다같이무의미하다. 우리국민들은절대평화가깨지면안된다는것과통일은반드시이루어야한다는데각기합의를이루고있는데, 이것을상충되는것으로보아서는안될것이다. 문제는이두명제를대북정책이라는한보따리에섞어놓을때이다. 그렇게되면우선순위를가려야하고답을찾기가매우어렵게된다. 앞에서본바와같이역대정권은모두안보를대북정책안에끌어와화해협력과무게중심을견주었으며, 그에따라정책기조와방향을조정하고그것이남북관계의흐름에큰영향을주어왔다고할수있다. 2. 대북정책에대한새로운이해 대북정책과관련하여한반도의이원적구조의축을다시검토할필요가있다. 물론두개의축은서로배척하는것으로보여질수있다. 대결의축은안보우선을요구하고협력의축은화해를중시한다. 그러나이두축은또한상보적이다. 어느쪽이플러스든마이너스든좌표를이동하면다른쪽을함께견인할가능성이크다. 그럼에도그동안의대북정책은이두축사이에서선택을강요당해왔다고할수있다. 그런데대북정책에서이대결의축을따로떼어놓고본다면우리의시야는달라진다. 안보는현재의남북분단상태가아니더라도, 그리고북한의실체와상관없이우리의생존을위해최우선으로고려되어야한다. 그러나대북정책은통일의명제를충족시키기위해북한을어떻게상대하고관계를형성해가느냐하는문제를다룬다. 따라서대북정책과안보정책을분리하는것이타당하다. 물론북한과관련한안보환경의변화는직접적으로대북정책에영향을미치겠지만안보정책자체가성격과지향점을달리하는대북정책을대체할수는없는것이다. 북한이도발하거나파괴 전복활동을해올경우에는안보차원에서다루면된다. 이러한인식의구분은다른나라와의일반적인외교관계에서도마찬가지이다. 이렇게본다면대북정책은협력의축에관련해서만의미를갖게되며, 대결의축을선택대상으로삼지않는다. 기본적으로대북정책이란통일정책의한영역이기에통일의목표지점까지도달하기위한우리의노력에북한이호응해나오도록하는전략적방안을찾는일만남는다. 따라서대북정책이강경이냐유화냐하는것에초점이맞추어져야할이유가없어진다. 다시말해대북정책에서대결이냐협력이냐하는것이선택의문제가되지않는다는것이다. 우리가대북정책안에서안보대협력으로보는것과안보정책대대북정책으로보는것은다르다. 61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전자의경우는통일의목적지향성을쉽게잃어버릴수있지만, 후자의경우에는적어도대북정책의영역에대한본질적인침해는쉽게일어나지않는다. 우리는주변정세와전반적인안보상황을보면서협력의대상과폭, 속도등을조정하고가장효율적인길을선택하면되며, 여기에대결의축에연유한문제를끌고와협력의축을흔들어서는안될것이다. 또그렇게함으로써정권변화에따른대북정책에서의일관성문제나우리사회의이념적갈등문제도해소할수있을것이다. 그동안의남북관계사를보면진보정권이나보수정권이나바로안보와협력을선택하는문제에서자유롭지못했다는것을알수있다. 선택의문제가아닌것을선택의대상으로삼았기때문이다. 진보정권은이러한논란을피하기위해 안보와협력의병행 이라는기조를내세웠고, 이명박정부는사실상안보우선의입장을앞세워협력을제어했다. 이모두우리사회에대북정책에대한개념이명확히자리잡지못한데서비롯된것이라고하겠다. 이제우리는냉전시대의이념적틀에갇힌혼돈된시각에서벗어날때가되었다. 동북아에서정치적리더십이모두바뀌고새로운역학관계가형성되는전환기에서대북정책의의미가무엇인지그리고그내용을어떻게담아낼것인지새롭게검토할필요가있다. 2013 년새정부출범과함께찾아온한반도위기상황은협력의축이약화된사정과무관하지않다. 그동안협력의축이약화됨으로써북한에대한우리의개입력이현저히약화되었다. 대북개입력의약화는한반도문제에서국제적성격을강화시켰으며, 이것은다시우리로하여금외교 안보적측면의딜레마에빠지게했다. 남북한체제경쟁의의미가상실된상황에서당위적으로나역량면에서나우리가남북관계를주도해나가야하는데현실은그렇지못했다. 오히려북한이상황을주도적으로만들어나가고한반도문제와관련한이슈를선점해왔다는점을부인할수없다. 한반도의평화와안정그리고통일의여건을만들어나가기위해협력의축은지속적으로강화되는것이바람직하다. 앞으로의대북정책은여기에초점을맞추어일관성있게추진되어야할것이다. 다행히보수정권이든진보정권이든남북간에대화가지속되어야한다는점에서는서로일치한다. 어떤형식으로든대화가이어져야신뢰를쌓을수있고북한을협력의장에묶어둘수가있다. 남북관계사는대화의빈도가높을수록화해와협력의흐름이대결구도를약화시켰다는것을실증해주고있다. 이와함께협력의축을강화시키기위해서는우리가가진자산을적극적으로활용해야할것이다. 남북관계에서경제력은북한이가지지못한우리만이쓸수있는훌륭한카드이다. 어차피통일의길은경제공동체를지향해나갈수밖에없다. 또그것이선진강국으로도약하려는 62
동향과분석남북관계와대북정책의변화 남한의국가발전전략에도부합하는길이다. 협력의축을강화하려는우리의전략목표에따라, 그리고우리스스로의필요에의해서남북간에경제협력을확대하고인도적지원을늘리는것을두고북한의위협에굴복했다고폄하할필요는없을것이다. 향후의대북정책은우리의통일정책의바탕위에서협력의축을강화하는방향으로지속적이고일관성있게추진되어야한다. 그렇게함으로써북한이대결의축에집착하지않게할수있을것이며남북관계도우리가주도해나갈수있을것이다. 그동안남북관계가화해와대결국면을오가고대화의중단을반복한것은대북정책에대결의축이함께작동했기때문이다. 이로인해정권에따라대북정책이강압과유화를오가는편차를보였다. 대북정책에서대결의축을걷어내고대결이냐협력이냐하는불필요한선택에서벗어난다면새로운남북관계를형성하는길이마련될수있을것이다. 63
연구논문 접경지역단동에대한현지조사 정은이
연구논문접경지역단동에대한현지조사 접경지역단동에대한현지조사 정은이 에리나경제연구소 eunlee7512@daum.net Ⅰ. 접경지역단동과한반도 본고는단동지구와한반도의관계에대한연구노트성격이며, 분석적연구논문이아니다. 이와더불어필자는단동지구에대한관심을고취시키는것을목적으로간략하게이지역현황을설명하도록한다. 중국은방대한영토로되어있으며, 약 17개국과국경을마주하고있다. 요녕성단동은중국의국경도시 [ 邊境城市 ] 중최대의도시이며, 가장아름답고번영하고있는국경도시로소개되고있다. 북중국경은약 1,280km 인데, 단동지구는압록강을사이에두고북한과 306km에걸쳐접하여북중국경의약 1/3을점하고있다. 1) 단동의면적은약 1.5만290 m2로남한면적의약 1/6 정도의규모이고, 2) 2012년인구는 248만명이고, 그중조선족은지속적으로증가하고있다. 그중조선족은약 1만3,610 명정도이다. 3) 역사적으로동만지구는우리민족의터전이어서, 북중교류및남북교류가연변을매개로이루어졌다. 그러나한중수교이후연변조선족자치주와조선족사회가급속하게해체되고있다. 또한북한, 중국동북지역, 러시아극동지방을중심으로하는두만강개발계획및나진 선봉특구개발이진전되지않으면서북중교류및남북교류의매개지역으로서의연변조선족자치주의위상이추락하고있다. 1990년대중반이후한국인이가장선호하는백두산관광도기존의한국-연변- 백두산루트에서단동을경유하는루트로이동하면서단동이호황을맞기도했다. 이와더불어중국의개혁개방이후북중소규모무역이활성화되고, 더불어 1) 육지국경은약 45km 이고대부분은하천으로국경이나누어져있다. 그러나압록강의경우퇴적으로하천국경이축소되면서육지국경이확장되고있다. 2) 단동 ( 丹东 ) 은 3 개시 ( 丹东市 东港市 凤城市 ) 와 1 개자치현 ( 宽甸满族自治县 ) 으로구성되어있다. 그중단동시는 3 개의구 ( 振兴区, 振安区, 元宝区 ) 로이루어져있으며단동시만의면적은 941 m2이다. ( 丹东统计年鉴. 2001, p. 2) 3) 그중단동시 ( 振兴区, 振安区, 元宝区 ) 만의인구는 78 만 8346 명이다. ( 丹东统计年鉴. 2001, p. 10) 67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한중수교이후한국인이단동지구에진출하면서단동이주목받기시작했다. 그러나 2009 년이후한국정부의대북제재조치에따라단동지구한국인의경제활동이위축되면서남북교류도축소되고있다. 역사적으로특히단동과신의주의관계는상호보완적으로발전하였다. 단동은북한여행을위한중심지역할을했다. 특히단동은신의주, 평양, 판문점등의관광, 지하경제무역, 정치, 학술등전방위로중국과한반도의교류창고가되고있다. 다시표현하자면, 단동과신의주는북경과평양의현관문역할을하고있다. 대표적으로북중육로무역의약 70% 가단동-신의주를통과하고있다. 이중약 70% 는밀무역이라는주장도있다. 이와더불어압록강, 두만강일대에서는밀무역이활발하고, 특히단동의랑터우 ( 浪头 ) 지구주변에서는매우활발히이루어지고있다. 한편단동은한국전쟁시기북한으로의병참수송을위한거점역할을하였고, 항미원조기념관이있다. 냉전시기에는중국과북한지도부간에비밀회담장소로단동, 대련, 신의주등을주로이용하였다. 중국과북한지도자이외에북한과중국에서장기간망명생활을한캄보디아의시아누크도단동과신의주를빈번하게통과하였다. 4) 2000년대김정일위원장이중국을방문하며신의주-단동을기차로통과하면서더욱주목을받는지역이되었다. 무엇보다중국단동에가면한족식당을비롯해조선족, 북한화교, 남한, 북한식당등에서다양한조선음식맛을체험할수있다. 또한북한과중국양측접경지역주민들이하나의공간에잘어우러져사는모습을관찰할수있다. 그들은북한사람들을마치이웃과같이이야기한다. 한반도는남북으로분단되어공백과단절의역사를가지고있지만, 단동지구를매개로남북의사람, 물건, 돈, 정보의왕래가끊이지않고있다. 이상과같은분위기속에서여러나라의연구기관, 기업, 대학, 정보기관, 선교사등이단동지구에대한연구를진행하고있다. 대표적인연구성과는요동학원대학조선반도연구소가매년주최하는 압록강포럼 ( 鴨綠江論壇 ) 이라는국제학술회의형태로정리되고있다. 필자가참여한경험으로보자면한국, 중국, 일본, 타이완, 홍콩, 미국, 오스트레일리아등의학자가단동지구연구를하고있으며, 한국, 홍콩등의기업이이를후원하고있다. 평양, 신의주등에서장기간체류하거나북한현지조사경험이풍부한연구자들이상당수있다. 중국에서는요녕사회과학원조선반도연구소김철연구원 ( 소장 ) 및단동에위치한요동학원 ( 대학 ) 조선반도연구소의만하이펑소장 ( 교수 ) 등이연구를수행하고있다. 일본에서는필자가소속된에리나경제연구소 (Economic Research Institute for Northeast Asia, Japan) 의미무라연구원, 4) 예를들어후야오방이 1982 년 4 월 26 일과 1984 년 5 월 4 일조선을방문하면서단동과신의주를통과하였다. 胡耀邦与丹东, 档案资政, 丹东市档案局,2011, pp. 200~203. 68
연구논문접경지역단동에대한현지조사 주영호연구원등이연구를진행하고있다. 한국의경우, KDI, 삼성경제연구원, SK, 인천발전연구원, 통일연구원, 국토연구원등이연구를진행하고있으며, 개인연구자로는경상대학교사회교육학과박종철교수가연구를진행하고있다. < 표 1> 단동과신의주의개황 신의주 면적 180 km2 (2008 년 ) 526km 2 인구 행정구역 산업시설 도로 철도 국제교량 국제열차 ( 단동 - 신의주경유 ) 항만 공항 359,341 명 (2008 년 ) 화교, 조선족등이상당수 ( 몇백명수준으로추정 ) 32 개동 12 개리 북중무역, 고난의행군이전 : 화학, 제지, 방직, 기계, 수산기지 1 급도로 2 개 ( 평양 - 신의주 - 박천 ) 평양 - 순천 - 개천 - 신의주평양 : 222km 평의선 ( 전철 : 230km, 평양 - 신의주 ) 참고 :( 평양 - 북경철로 : 2,347km) 덕현선 (50km, 남신의주 - 덕현 ) 백마선 (40km, 염주 - 남신의주 ) 단동 인구 : 248 만명 (2012 년현재 ) 조선족 : 1 만 5 천명화교 : ( 불명확 ) 조교 : 30 명정도로추정한국인 : 현재 2 천명추정 (2000 년대중반최대 1 만명으로추정 ) 3 구 2 시 1 민족자치현 (1994 년확정 ) ( 东港市, 凤城市, 振兴区, 振安区, 元宝区, 宽甸满族自治县 ). 북중무역, 관광 ( 압록강, 신의주등 ), 온천, 기계, 전자, 방직, 식품, 건축자재등 국, 성도로 6 개통과대련 : 350km 심양 : 270km 동항 : 30km 압록강단교 (1950 년폭격, 북한측상판파괴 ) 중조우의교 : 철도편도및도로편도 ( 노후로인한중간지점 : 5km) 신압록강대교 : 2011 년초기공식, 2014 년완공예정 베이징, 모스크바국제철도통과 3 개지선및 35 갈래의전용선 단심간선 ( 단동 - 선양 ) 단대선 ( 단동 - 대동항 ) 봉상선 ( 펑청 - 상하구 ) 1954 년 4 월 1 일부터정기적여객및상품운송개시 ( 평양 - 베이징, 모스크바, 동유럽 ) 평양 - 베이징 : 1,347km 1983 년여객열차운행개시, 주 4 회에서 2013 년 1 월 1 일부터매일왕복 1 회로증편 신의주항 - 200 톤급접안시설 - 부두연장 : 600m - 하역능력 : 1,500 톤 / 일 - 토사퇴적으로접안능력감소 용암포항 - 조선수리용도 순안공항 동항 - 10,000 톤급접안시설 4 개하역능력 : 215 만톤 / 년 기중기 : 10 톤급 5 대, 20 톤급 2 대 - 50 개국항로개설추진 한반도 - 단동 - 인천정기화객선및화물선 - 단동 - 평택부정기화물선 - 단동 - 신의주 / 남포정기화물선 일본월 2 회컨테이너선 단동공항 ( 군용 / 민용 ) ( 국제규격, B7373/MD-82 기종이착륙 ) 국내항공노선상하이, 선전 (2013 년 1 월 ) 자료 : 필자가작성함. 69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Ⅱ. 역사적형성과정 : 일제의침략거점에서북중교류와협력 의중심으로 1. 일제의조선에서만주방향으로의침략거점 근대이후단동은요동의중심지역할을했다. 단동지구는 1388년 5월이성계의위화도회군문제로한반도역사에서유명한곳이다. 청조건국이후, 단동은한족의정착을금지하는봉금지역에속하여 180여년동안개척되지않은지역이었다. 또한이지역은작은포구가있어황해에서압록강상류로올라가는외부의침입을막기위한작은국경수비대가거주했던작은마을로 16세기중엽까지요동인과조선인의통행로에위치했던한적한어촌이었다. 이러한단동은 19세기중반부터조선인에의하여개척되기시작하였다. 1874 년에는청나라는전면해금을단행하고 1887 년에안동현 ( 安東縣 ) 을설치하였다. 1882 년에는청정부는동강 ( 東港 ) 을개항하여조선과의통상무역을개시하였다. 1894 년중일전쟁이후일본의단동침략이본격화되었다. 1903년안동항은대외개항지로압록강수운의발달에따라물산집산지로발전했다. 1904 년러일전쟁후일본은만주침략을위하여철도건설을시작하며단동역을건설하였고, 안동항 ( 현재의동강 ) 을개항하였다. 압록강변을중심으로단동과신의주두도시가침략거점으로본격적으로개발되기시작하였다. 이후일제는조선에경부선, 경의선, 경인선을건설하기시작하여 1905년 1월에 261km의경부선이개통되었다. 5) 1909년러일전쟁을위해건설한군용철로안봉선 ( 安奉線, 현재의심단선 : 선양-단동 ) 을표준철도로변경하였다. 1908 년에착공하여 1911 년에 944m 의압록강대교 ( 鴨綠江斷交 ) 를완공하였고, 안봉선과경의선을연결하였다. 즉, 한반도와만주가철도로연결되면서신의주와단동은일본의만주침략의거점도시로급성장하게되었다. 이후신의주와단동은국제무역도시로성장하였고, 특히일제의만주침략의전진기지역할을하게끔일제에의해건설한신생도시였다. 6) 1931년일제는만주사변을일으키고 5) 이와더불어경의선 ( 한성 - 신의주 ) 과경부선 ( 한성 - 부산 ) 을잉커우 ( 만주영구 ) 로연장하려는목적으로, 경부선을제안했던다케우치 ( 竹內岡 ) 는일본내각의영의선 ( 영구 - 신의주 ) 건설을제안하였다. 6) 丹东历史上的地理区位优势, 档案资政, 丹东市档案局,2011, pp. 23~24. 70
연구논문접경지역단동에대한현지조사 즉시단동지구를점령하였다. 일본관동군과만주군을결성하며, 1934년만주국안동성을신설하고안동현을성도로정했다. 1937 년 12월에는안동성안동현에서안동시를분리 승격하였다. 이시기에많은일본기업과더불어서방의영사관및기업이진출하였다. 1937 년에는경부선과경의선을복선화하였고단동에압록강철교 ( 中朝友誼橋 ) 를추가로건설하였다. 1944 년수풍발전소가완공되었다. 신의주-단동철교를중심으로일제는만주를침략하였다. 2. 냉전시기북중우호의상징 1945년 8월만주에서일본이패망한이후, 7) 만주국안동성의성장은국민당장제스에게투항을희망하였고, 공산당은지하활동을하였다. 9월 10일에국민당당지부 ( 당부 ) 를설립하였고, 당일소련적군 39집단군직할 44탱크여단이안동에진주하여군사관계를실시하였다. 국민당이단동을장악하면서, 공산당은 12월에통화로도주하였다. 8) 1947 년 1월에는수풍댐전력을나누는문제가대두되었다. 9) 1947 년 6월에중국공산당이안동 ( 安东 ) 을점령했고, 10) 1949 년 5월 9일에는동북행정위원회 ( 东北行政委员会 ) 가동북대구 ( 东北大区 ) 를폐지하고만주지역각성시를재편하면서, 안동성 ( 安东省 ) 을폐지하고요동성 ( 辽东省 ) 을설치하며, 단동에성회 ( 省会 ) 를설치했다. 11) 1950 년 9월부터 1953 년 7월까지의한국전쟁 ( 韓國戰爭 ) 시기에는중국인민지원군의 60% 가단동- 신의주를통과하여한반도에진입하였다. 1950 년 10월 13일에중국인민지원군이단동을통하여도강을시작했다. 미군은인천상륙작전성공이후, 단동과관디옌만족자치현 ( 宽甸满族自治县 ) 등을월경하여정찰비행을하였다. 미군은중국인민지원군의한반도도하를저지하기위하여, 압록강대교 ( 鴨綠江段桥 ) 등을폭격하였다. 미공군은압록강뿐만아니라단동시내와수풍댐이위치한관디옌만족자치현까지도폭격하였다. 12) 1954년 4월 1일평양과베이징, 모스크바, 동유럽을연결하는국제열차가개통되었는데, 단동과신의주의중조우의교를통과하는국제철도노선이건설되었다. 1954년 6월 19일, 중앙인민정부위원회 ( 중앙인민정부위원회 ) 는요서성 ( 辽西省 ) 과요동성 ( 辽东省 ) 을합병하며 7) 1932 년일본관동군은만주국건국이후, 1932 년만주국과국제육로교 ( 國際陸路敎 ) 협정을체결하고두만강중하류를중심으로압록강과두만강에패망시기까지약 20 여개의연결통로를건설하였다. 8) 安东解放的前前后后, 档案资政, 丹东市档案局,2011, pp.162~166; 길림성지방지참조. 9) 1946 년 12 월에국민당으로. 공산당은통화로도주하였다. 1947 년 1 월에수풍발전소문제가대두되었는데, 소련군의중재 ( 신의주의소련군사령관 ) 로국민당과북한이협상하였다. 신의주에서협상전에신의를보이라고제안하면서, 협상의전제조건으로국민당은 112 통의가오량을제공하면서, 국민당의중국인들은매우낙담하였다. 신의주에서만나서수풍댐전력회의를하였는데, 조선전력회사와안동상공회의소가참여하여, 안동전력회사 ( 대표 : 양카이장군 ) 에발전량 3000kW( 킬로와트 ) 를국민당에주는조건으로가오량을 1.5 톤신의주에제공하기로결정하였다. 10) 安东解放的前前后后, 档案资政, 丹东市档案局,2011, pp. 162~166 11) 关于中划东北行政区划并任命各省主席副主席令발표 ( 동북해방에따른각조치및행정개편등 ) 동북행정위원회 (1949 년 4 월 21 일 ) 12) 박승준, 한국과중국 100 년 : 격동의외교비록, 기파랑, 2010, pp. 108 71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요녕성 ( 辽东省 ) 을설치하고, 성회 ( 省会 ) 를선양 ( 沈阳 ) 에설치하였다. 13) 1965 년 3월에 단동 이라는지명을확정했는데, 일편단심으로동방의나라와친선관계를맺는다 는의미이다. 14) 1962~1964 년국경협상에따라압록강과두만강유역그리고백두산의경계가결정되었고, 단동지구와평안북도사이에위치한섬들의국경이결정되었다. 15) 국경협상의일환으로 1965 년 국경지구의통행질서를수립, 유지하는업무를수행하기위한회의 에서국경지역의 14개지점을국경출입처로지정하였다. 2001 년 북중국경통과지점및그관리제도에관한협정 을체결하였는데, 15개지점을지정하였다. 특히단동지구의중조우의교및단동- 신의주수로 ( 단즈 : 丹紙에서랑터우浪头부두로이동하여운용중 ) 는북중무역에서중심적역할을하고있다. 해방이후중국정부가방어에불리한국경지역에산업시설을건설하지않는전략을취함에따라단동은낙후를면하지못했다. 개혁개방이전까지단동은명주, 제지공업등전통가공업위주로낙후되었고, 신의주에는수풍댐을배경으로화학, 제분, 제련, 방직, 기계등의대형공장이많았다. 또한 1962 년에는북한최대규모의신의주화장품공장이건설되었다. 따라서단동경제는북한의신의주에의존하였다. 16) 3. 중국개혁개방이후단동의부상 한국전쟁시기, 반우파투쟁시기와문화대혁명시기에조선족및중국인들이북한으로건너갔는데, 개혁개방이후이들은북중국경지역에서무역에종사하고있다. 1970년당시의북한화교는약 7천여명정도로추정되며신의주를중심으로거주하고있었다. 중국의개혁개방이후단동에서는경공업, 북중무역등이발달하기시작하였다. 1980 년대초반북한도제한적개방을추진하면서신의주-단동지구의소규모무역이활성화되었다. 1983 년중조우의교를통과하는평양- 베이징국제여객열차가운행을시작하였다. 중국정부는 13) 丹东地区历史沿革, 辽东省行政区划沿革, 档案资政, 丹东市档案局,2011, pp.1~3. 14) 1950 년중반부터북한잡지에서고구려사문제등이거론되어중국과의역사문제가표출되고있었고, 또한흐루쇼프의 ( 대국주의적 ) 역사관을비판하며중국역사학자의역사관을우회적으로비판하기시작했다. 1962 년 6 월최용건과류사오치에국제공산주의운동을둘러싸고반수정주의에대하여공동의혁명을벌일것에대한공동성명을발표하였다. 그직후 6 월 28 일저우언라이총리가조선과학원대표단과회견에서중국학자들이대국, 국수주의관점에서역사를서술하는것을비판하는담화를발표하였다. 周恩来, 周恩来总理谈中中朝关系外事工作通报, 1963. 10, ; 서길수 ( 자료해설과번역 ), 주은래총리의중국 - 조선관계담화, 1963. 6. 28; 주은래총리가조선과학원대표단을접견할때말한중국 - 조선관계, 고구려발해연구, 제 27 권, 2007 에서재인용하였다. 1963 년 11 월 6 일에중공중앙서기처서기캉성 ( 康生 ) 은선전간부회의의연설에서중국사학계에북한학자들이소련과학원에서편찬한 세계통사 에대한비평논문을추천하면서중국역사학계에만연한 맹목적인쇼비니즘 을질타하였다. 이어요녕성 ( 遼寧省 ) 개평 ( 蓋平 ) 현은고구려연개소문을소탕한것을기념하기위해지어진이름으로, 연개소문은조선의민족영웅 이지만, 중국은도리어중국의동쪽 ( 고구려 ) 을정벌한설인귀 ( 薛仁貴 ) 가영웅이라고말하였다고하며, 북경대학역사학과에는단한명의마르크스주의자는없고, 그들은북한에서발표한논문에적잖은불만을갖고있다. 고덧붙였다. 陸健東, 陳寅恪的最後二十年 ( 천인커의마지막 20 년 ), 三聯書店, 1995, pp. 364~370. 1950 년대후반부터 1960 년중반까지의북중역사논쟁의 1964 년백두산경계확정과더불어중국의대국주의적역사관을반성하며마무리되었다. 15) 다음논문을참조할것. 선즈화저, 박종철역, 중 북국경문제해결 에대한역사적고찰 (1950~1964), 아태연구, 제 19 권제 1 호, 2012. 16) 이옥희, 북중접경지역 : 전환기북중접경지역의도시네트워크, 푸른길, 2011, pp. 150~152. 72
연구논문접경지역단동에대한현지조사 단동을연해개방도시로지정하였고, 1992년에는변경경제합작구가설치되었다. 1992년한중수교이후한국인관광객이팽창하고있다. 한국의햇볕정책시기에단동에한국의무역상이대거진출하며단동경제를견인하였다. 고난의행군이후이들은현재단동, 신의주, 평양을중심으로무역에종사하며북한경제에서큰역할을하고있다. 1990 년중반에고난의행군을거치면서단동경제가신의주를지배하고있다. 북한시장물품의약 90% 가중국제라고한다. 중조우의교는북중공식육로무역의 70~80% 정도를점유하고있다. 현재단동의중심지가압록강철교에서동항지역으로팽창되면서압록강변에고층건물이펼쳐지고있는데, 신의주는북한최대의무역도시중하나임에도불구하고시내중심부의호텔등을제외하고는야간에전깃불이비치는곳이거의없는실정이다. 2002 년에단동- 선양, 2005 년에단동-대련고속도로가개통되었고, 2012 년에는단동-선양, 단동-대련고속철도가개통되었다. 신압록강대교가건설되면서북중무역이활성화되고있으며, 2004 년에단동- 평양국제여객버스가신설되었다. < 표 2> 평안북도와단동지구의접경지역 북한 중국 도시 군현급시, 현성시 평안북도 (1 시 6 군 ) 신의주시, 신도군, 용천군, 의주군, 삭주군, 창성군, 벽동군 관뎬만족자치현, 동강시, 단동시직할구 ( 振兴区, 振安区, 元宝区 ) 요녕성단동시 자료 : 필자가작성함. Ⅲ. 황금평개발의난제 : 신의주특구와요녕개발계획의경 험을중심으로 1. 신의주특구의경험 2000 년대초반중국중앙정부는북한의신의주개발움직임에대하여첫째, 북중국경지역의민감성이라는지정학적특성, 둘째신의주에산업간접시설이전혀구비되어있지않아서북한내부로의파급효과가매우제한적이라는점, 셋째, 중국기업의투자만이아니라한국, 일본등의관계국기업의투자가어려운지역이라는점, 넷째국경지역에마약, 도박, 자금세탁, 73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위폐, 매춘등이범람할가능성이있다는점을들며김정일총서기가중국을방문했을때, 주룽지 ( 朱鎔基 ) 총리가신의주개발을둘러싸고신의주개발보다도남북군사경계선상에공업단지를설치하도록권유했다고한다. 따라서 2000 년 10월 4일주룽지총리는한국의 중앙일보 와의회견에서 방중한김정일총서기와의사이에공업단지선정의문제도있었다. 라고발언하며, 간접적으로신의주에반대하고있다는것을인정했다. 2001 년 1월김정일위원장이방중하여신의주개발에대해설명하였지만중국은개성등남북교류가가능한지역을제시하였다. 1992년 4월양상쿤국가주석의북한방문이후 9년만에 2001년 9월 3~5일동안장쩌민국가주석이방북했다. 이는한중수교이후처음이다. 덩샤오핑이래중국은북한의개혁개방을위하여남북관계의중요성과교류를강조하였는데, 이자리에서도장쩌민은이를강조하였다. 이후북한은러시아와교류를강화하였고북한외교관들은중국의태도를비난하였다. 17) 이상과같은북중지도부간의이견속에김정일위원장은신의주특별행정구역을추진하였다. 북한은 1991 년나진 선봉지역을자유경제무역지대로설정하고개발을시도했으나이계획도중국의견제와국제사회의무관심속에사실상실패했다. 2002 년 9월 12일김정일위원장은일방적으로특별포고령을통해신의주를특별행정구역으로지정하고, 별도로 신의주특별행정구기본법 ( 제6장 101조 ) 을제정해신의주를국제적인금융 무역 상업 공업 첨단과학 오락 관광지구로개발한다고발표하였다. 그러나 10월에중국정부가신의주특별행정구초대행정장관인네덜란드국적의양빈을전격적으로부패혐의로구속하면서이계획은실패하였다. 18) 중국중앙정부와달리단동시 ( 丹東市 ) 측은신의주의경제특구계획에관하여호의적이었다. 2000년대초반단동시에는북한과관련된기업이약 300개정도있었다. 북한이개방되면필요한물자는모두단동에서운반될것이라고생각했기때문이다. 당시장쭤용 ( 姜作勇 ) 단동시시장은 우리들은조선의개방과신의주특구건설을지지한다. 고발언했다. 북한과단동지방정부는여전히신의주, 황금평등의개발계획을원하고있다. 2009 년 1월김정일총서기가방북한중국공산당중앙대외연락부왕자루이 ( 王家瑞 ) 부장과회담할때, 신의주에있는두개의섬을 자유무역지대 로하는제안을했지만, 중국측은명확한답변을해주지않았다. 더불어 2010~11 년김정일의다섯차례의방중과정에서도중국지도부는김정일위원장에게개성등을확대할것을제안했고, 서해지대등남북 17) 김하중, 중국이야기 2: 영원한이웃, 끝없는도전 : 한국과중국, 비전과리더십, 2013, pp. 267~269. 18) 관산저, 황의봉역, 김정일과양빈, 두우성, 2004 년 ; 김하중, 중국이야기 2: 영원한이웃, 끝없는도전 : 한국과중국, 비전과리더십, 2013, pp. 268~269. 74
연구논문접경지역단동에대한현지조사 교류와해외투자가용이하고, 평양등북한경제에파급효과가좋은입지를추천했다. 그러나단동시를중심으로신의주개발을적극적으로추진하고있으며, 특히한국의연구자및중국의조선족학자와동북지역학자들이신의주및황금평개발의중요성을주장하고있다. 북경지역학자들의경우남북교류를바탕으로한단동-신의주개발을주장하고있어, 비교적중국정부의입장이대체로일치하고있다. 2. 2009 년이후요녕개발계획과단동 2009년 5월제2차북핵실험, 2010년 3월천안함침몰과 11월연평도포격, 2011년 12월김정일사망, 2013년 2월제3차북핵실험을둘러싸고한반도에군사적긴장이고조되었다. 한반도위기를둘러싸고북중경제협력은지속되었다. 제2차북핵실험직후인 2009년 6월이후북중고위급인사의상호방문과더불어지방정부의개발계획 ( 동북진흥계획 ) 이국무원 ( 중앙정부 ) 의승인을받으며, 한국학계는동북진흥계획과북중접경개발의연계가능성에대하여주목하게되었다. 2002 년 11월중국공산당제16차전국대표대회에서 동북지역등노후공업기지의진흥을추진한다. 는요지의국가균형발전계획이발표되었다. 2003년 10월중국공산당제16기 3중전회에서 동북지역등노후공업기지진흥전략실시에관한의견 ( 关于实施东北地区等老工业基地振兴战略的若干意见, 일명 11호문건 ) 이공식발표되었다. 이후 2004~05 년에는동북진흥계획과관련하여대외개방의확대및주변국가와의경제협력을강화하였다. 이와관련하여국무원판공청은 2004년 4월 동북지역등노후공업기지진흥사업요점에대한통지 와 2005 년 6월 동북노후공업기지대외개방확대촉진실시의견 ( 东北老工业基地进一步扩大对外开放的实施意见, 일명 36호문건 ) 을발표했는데, 북한접경의도로, 항만, 구역의일체화내용이포함되었고또한북중협력과대북투자가다루어졌다. 2007 년 5월동북진흥판공실 ( 国务院振兴东北地区等老工业基地领导小组办公室 ) 은 동북진흥 3년평가보고 를개최하였고, 이를토대로 8월에는동북지역의발전계획을담은 동북진흥계획 ( 东北地区振兴规划 ) 을발표하였다. 중국의동북진흥계획이한국에서더욱주목받게된것은시기적으로제2차북핵실험직후 2009 년 7~8 월에북한과국경을맞대고있는중국요녕성 ( 遼寧省 ) 과길림성 ( 吉林省 ) 의경제개발프로그램이국무원 ( 중앙정부 ) 의승인을받고국가프로젝트로서채택되었기때문이었다. 후진타오지도부는낙후된동북지역개발을국가중점사업으로확정하고이지역의대도시와 75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공업지대를중심으로대규모인프라투자를진행했다. 국무원승인을둘러싸고한국의북한학계에서는북한개혁개방을둘러싼논쟁과더불어중국의대북개입을우려하는논쟁이진행되었다. 이와관련하여중국학자우영자는지정학적으로요녕성과길림성은북한과접하고있어이두성의경제개발전략은북한과밀접한관계를갖고있다고주장하며, 중국동북지역의전면적발전을위해서는북한과의경제협력이필수적이라고분석하고있다. 19) 2009년 7월 1일요녕성의 요녕연해경제벨트지역발전계획 ( 辽宁沿海经济带发展规划是指导辽宁沿海经济带 ) 이승인되었다. 이프로젝트는 2009 20 년을대상기간으로하는국가급장기경제발전계획이다. 요녕성의입장에서는선양과대련을중심으로하며단동이포함되어있는계획이다. 한국학계에서주목하는대목은이프로젝트에황해연안의도시이자, 신의주맞은편의중국최대의국경도시인단동시가포함되어있다는점이다. 이후 2011년 6월에는단동과신의주사이의북한영토인황금평및위화도의개발착공식이개최되어요녕성프로젝트는더욱주목받게되었다. 8월 30일국무원이길림성의 창지투 ( 長吉圖 ) 를개발개방선도구로하는중국두만강구역합작개발계획강요 ( 中國圖們江區域合作開發計劃綱要以長吉圖先導地域開發計劃 ) 를승인했다. 이프로젝트역시 2009 20 년을대상기간으로하는국가급장기경제발전계획이다. 이계획의중심지역인창춘시와지린시를통합 ( 일체화 ) 하여요녕성의성장의배후지로개발한다는내용이다. 이계획은두도시를중심으로창춘에서두만강지역에이르는광범위한경제발전을기반으로내몽고, 북한북부, 극동러시아의새로운성장거점으로삼겠다는것이다. 10월 3일부터 3일간, 원자바오 ( 温家宝 ) 총리의방북으로양국의관계회복은절정을맞이했다. 20) 10월 4일에중국과북한은경제기술협력협정서를체결했다. 이협정서에는북중국경에압록강대교를설치하는내용과함께무상경제원조, 기술교육분야의지원협정, 관광사업관련협정등이포함되어있다. 21) 2009년하반기중국의요녕개발계획과창지투계획, 그리고북중간의물류를연결하는신압록강대교의건설, 또한북한김정일위원장의나선시방문및특별시로의승격에따라북중경협과접경지역개발에대한낙관론이높아지게되었다. 이와관련하여이희옥교수는 19) 박종철, 중국의대북경제정책과경제협력에관한연구, 동북아논총, 제 62 호, 2012. 20) 2003 년이후 6 년만의중국총리의방북이었다. 중국총리자격으로써는 18 년만의방북이고, 중국지도부의방북은 2005 년 10 월후진타오 ( 胡錦濤 ) 국가주석의방북이후 4 년만이다. 21) 2009 년 12 월 16 일에김정일위원장이나선시를방문하고무역회사를시찰했다. 2010 년 1 월 4 일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정령을통해나선시가 특별시 로지정되는동시에 1 월 27 일에는 나선경제무역지대법 이개정되었고, 사업유형에투자와관광이추가되었다. 이지대법에따라서한국기업의투자도허용하였다. 나선지역을수차례방문조사한일본에리나 (ERINA) 의미무라박사와의면담 (2011 년 7 월, 중국 ) 에의하면, 나선경제무역지대법 은북한국내에의투자의창구로서역할을할가능성이있다고했다. 또한나선지역을북한당국은기업창설의심의, 승인권한을나선에부여하여 1993 년에 라진 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법 을만들당시와같이나선에대한통제가또다시느슨해진분위기라고한다. 그러나 2008 년의숙청등지방의경제관료에대한숙청이과거에수차례있었기때문에 2010 년이후에도이지역관료들은경제개혁개방에대하여매우신중하고소극적이라고한다. 76
연구논문접경지역단동에대한현지조사 2009년하반기부터 제재속의대화 를추구하는한미양국의인식과 대화속의제재 를추구하는중국의인식사이에차이가나타나고있다고분석하며, 중국의대북유연성이발휘되고있다고분석하고있다. 22) 앞서언급한바와같이 2009 년 5월의제2차북핵실험, 2010 년의 3월천안함침몰과 11월연평도포격, 2011년 12월김정일사망, 2013년 2월제3차북핵실험을둘러싸고한반도에군사적긴장이고조되었다. 한반도위기를둘러싸고북중협력은지속되었고, 2010 년한미군사훈련과더불어 5월에후진타오 -김정일회담이개최되었다. 이를배경으로 5월 24일한국정부는개성공단사업을제외한북한과의모든경제거래를중단한다고선언하며 (5 24 조치 ), 남북경협을대폭축소하며북한에제재를가했다. 그결과단동의한국무역상들은더욱위축되었고, 북중무역이더욱활발해졌다. 8월에후진타오 -김정은정상회담이다시개최되었는데, 후진타오국가주석은 고위층의지속적인교류유지와경제무역협력의추진, 전략적소통의강화등을건의하며양국관계의강화 에대하여제안하였다. 후진타오중국국가주석은정상회담에서상호이익을공동으로도모하는경제협력을확대및추진하는것은양국인민의근본이익에부합된다고지적하면서 정부주도, 기업위주, 시장운영, 호리공영 ( 政府主導, 企業爲主, 市場運作, 互利共嬴 ) 의북중경협의새방침을제안하였다. 앞에서설명한바와같이 2010 년이후북중경협은중국정부주도로대북경제정책이수행되고있다. 더불어후진타오의대북경제원칙을중심으로향후북중지도부간의경제협력논의와김정일등북한지도부의경제시찰을주목해서분석할필요가있다. 9월 2일에는북중간의 동북아경제협력고위층포럼 등에서중국지린성 ( 吉林省 ) 창지투 ( 長吉圖 ) 지역개발과나선 ( 나진 선봉 ) 경제무역특구개발사업의연계발전구상등과같은경협확대전략이소개되었다. 23) 9월에는노동당제3차당대표자대회가개최되었고, 김정은이권력의중핵이되었으며, 김정일-김정은공동통치가공식화되었다. 11월연평도포격으로남북대치가고조되는상황에서 12월 31일북중양국은중국단동시 ( 丹東 ) 에서 신압록강대교 ( 中朝新鴨綠江大橋 ) 착공식을가졌다. 24) 신압록강대교 는 17억위안 ( 약 2천억원 ) 이넘는대형규모이고, 중국의비용부담을전제로하고있다. 22) 이희옥, 2010 년 : 중국과한반도, 동아시아브리프, 제 5 권제 1 호, 2010, p. 50. 23) 박종철, 중국의대북경제정책과경제협력에관한연구, 동북아논총, 제 62 호, 2012. 24) 압록강대교는 4 차선교량으로중국국가규격 1 급고속도로가건설되고, 총건조비는약 22 억위안, 건설기간은 3 년예정이다. 대교는총길이 3,026m 이고, 중국측구안 ( 세관 ) 에서북한삼교천북쪽장서리를종점으로하는전구간길이는 12.7km 이다. 임진강, 여름 12 호, 임진강출판사, 2011, pp. 7~11. 임을출, 최근북중경협현황및시사점 : 황금평및나선경제특구를중심으로, 학술대회발표논문, 2011.12 월. 이상의발표에의하면나선지역과황금평, 위화도개발을위한 MOU 가북중간에체결되었다고한다. 77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3. 황금평개발계획의난제 2009년 7~8월국무원의승인을받은중국국가급동북진흥개발계획인요녕개발계획및창지투개발계획과 2011 년 6월황금평 위화도개발과나선개발계획을연계하여, 한국에서는북중접경개발에대한관심이증폭되었다. 2009 년이후중국정부주도의북중경제협력과원조가활성화되고있고, 이는 2010 년 8월후진타오주석의북중경협방침을통해서도확인되었다. 또한 2010년하반기이후남북의군사적긴장이고조되는상황에서중국정부는후계자승계를인정하며, 2011년 12월이후김정은집단지도체제의안정화에기여하고있다. 또한김정일위원장의중국방문직후남북해빙무드가깨졌다는측면에서남북경제협력의필요성이감소할정도로 2010 년 5월이후네차례의김정일위원장의방문이결실을맺었다고해석할수있다. 2011년 6월에중국공산당이중심이되어신의주-단동, 나선-훈춘지역의북중경제협력착공식이개최되었다. 25) 중국상무부천더밍 ( 陈德铭 ) 부장과북한노동당장성택중앙행정부장은각기요녕성과길림성에서공동으로 북중나선경제무역지대및황금평 위화도경제지대개발협력연합지도위원회 제2차회의를개최하였고, 구체적프로젝트와관련한착공식을거행하였다. 6월 8일에는북중양국정부고위관계자가대거참여하여중국단동시에서 황금평 위화도경제구부분협력프로젝트가동식 ( 黃金坪威化島經濟區部分合作項目啓動儀式 ) 을가졌다. 26) 북중양국은이경제구를북중경제협력의시범구역으로건설할뿐만아니라세계여러나라들이경제협력을하는장으로건설하겠다는의지를표명하였다. 다음날 6월 9일에는중국훈춘시에서양측고위관계자들이대거참석한가운데 중 북나선경제무역구공동개발 공동관리프로젝트가동식 ( 中朝公同開發和公同管理羅先經濟貿易區項目的啓動儀式 ) 을개최하였다. 착공식에서장성택노동당행정부장은나선경제무역구를 세계적인경제특구로건설 할것임을밝히고천더밍 ( 陳德銘 ) 중국상무부장도 하나의새로운시대가우리를맞이하고 25) 한국의북한연구자들은 2010 년 12 월에황금평개발관련협력 MOU 가체결되었는데, 정부차원에서양국공동관리위원회가설치되었고더불어민간차원에서대기업이참여했다고주장하고있다. 또한 2011 년 4 월하순에민간기업을중심으로황금평을측량하고민간영역의개발계획을구상하기시작했다고주장하고있다. 예를들어다음과같은주장이있다. 임을출, 최근북중경협현황및시사점 : 황금평및나선경제특구를중심으로, 학술대회발표논문, 2011. 이상의발표에의하면, 2011 년 4 월에될북중공동관리위원회와관련기업에의하여황금평과위화도에대한측량조사등의개발준비가진행되었다고한다. 26) 황금평 11.45km 2, 위화도 12.2km 2 이다. 황금평은 50 년간매년중국에서사용료 10 억달러, 위화도는무상제공하기로약속되었다. 그러나협상초기국면부터입지문제로중국지도부가만류하여실제로사업초기국면에서무산될상황에있었다. 중국지도부는노무현정부시기에합의된 서해평화지구 등을김정일에게재차권유한것으로전해지고있다. 황금평은상습침수구역이며신의주와는격리되어있다. 더욱큰문제점은황금평개발의초석이며배후지역인단동신개발구의개발이진전되지않고있으며, 정부계대기업등이황금평으로의입주를희망하지않고있다. 2011 년도단동의관련지역부동산이급락했다. 그러나필자의주장과는달리황금평개발이진전되고있다고주장하는학자도적지않다. 현재연구자마다중국이북한에지불하기로약속한사용료를다르게보고있다. 예를들어일본세이난학원대학의오가와교수는 2012 년 1 월필자에게중국이북한당국에 50 년간매년황금평 3 억달러, 위화도 5 억달러를지불하기로했다고주장하기도했다. 78
연구논문접경지역단동에대한현지조사 있다. 라는외교수사의낙관적발전전망을내놓았다. 27) 그리고나선특구공동개발에는원정리 - 나선도로보수공사가포함되어있다. 28) 황금평개발은지속적으로정체되고있다. 긍정적요인김정일 김정은등의북한지도부, 단동시정부의개발의지그리고요녕개발계획을들수있다. 창지투개발과요녕개발의주요거점으로단동- 신의주, 특히황금평개발을주목하고있다. 한국의기업, 한국학자와조선족학자및접경지구중국학자들도개발의중요성을주장하고있다. 부정적요인중국지도부 (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 는개성공업지구, 서해 5도지역을중심으로남북교류를바탕으로한북중경제협력을선호하고있다. 더불어국경지구에황금평개발이후카지노, 매춘, 위폐, 마약문제등의확산도우려하고있다. 북경지구학자들이중국지도부와비교한반응을보이고있다. 황금평지구는인프라미비 ( 단동의신개발지구, 남신의주지구모두인프라미비 ), 상습침수구역 ( 비옥한토지 ) 임에따른제방건설의필요성, 높은개발비용, 중국 ( 국영 ) 기업의투자기피, 신의주- 황금평연결교량미비등의문제점이지적되고있다. Ⅳ. 단동지역의국경교류현황 1. 남북한의중계항로로서단동의동항 ( 东港 ) 과랑터우항 ( 浪头港 ) 단동과평양은약 200km 이고단동과서울은약 420km 이다. 단동과한국간에일시적으로 항공기가이용된적이있었으나, 군용공항인단동공항이협소하여해운을통하여연결되어 있다. 27) 2011 년 7 월 19~23 일, 9 월 7 일, 베이징에서황금평을둘러싼인프라구축에대한논의가진행되고있다는주장도있다. 심지어한중합작형태로한국기업의진출가능성도있다고한다. 그러나한국학자의주장과는달리중국측주장이신중한편이다. 실제적으로 2011 년이후무산탄광의철강이나진항을통하여바오강제철소로, 훈춘지역의석탄이남방으로운반되고있고, 또한북한당국이 함남의불길 즉함경도중심의경재재건을시도하면서나선지역이 2012 년이후더욱활성화될것으로전망된다. 28) 2012 년상반기현재나진 - 원정리다리 [ 橋梁 ] 는비가오면통행이불가능한상태로 2011 년 12 월에새로운다리가완공될예정이었으나중단되었다. 2012 년봄에공사가재개되어서 2012 년하반기내에완공될예정이다. 임을출, 앞의논문, 2011. 이상의발표에의하면, 7 월 19~23 일, 9 월 7 일에베이징에서구체적인개발계획을수립하는회의가개최되고있다고한다. 79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단동과인천은 245 해로이며해운회사에의하여 1998 년에는항로가개통되어있다. 초기에는주 2~3회왕복운행하는화객선 ( 최대인원 600명, 화물 110톤 ) 이운행되었다. 2011년부터일본에서중고화객선을도입하여매주정기적으로왕복 3회운행하고있다. 인천에서매주월, 수, 금오후에출항하여단동에다음날오전에도착하고, 단동에서는매주화, 목, 일에출항하여인천에는다음날오전에도착한다. 최대승객은 800명으로확정되었다. 중국설날이후 2주정도배의점검및수리를위하여휴무하고있다. 이와더불어인천과단동은주 2회의화물선 ( 컨테이너선 ) 이운행되고있으며부정기적으로평택항과단동항에화물선이운행되기도한다. 단동항에는신의주 / 남포항로가개설되어있어인천과신의주 / 남포를잇는중계항역할을하고있다. 단동과신의주 / 남포항로가 10일간격으로선박화물영업을하고있다. 2011 년의경우, 약 30회정도왕복운항되었다. 2013 년현재는주 1회운항하고있다. 따라서단동항에북한의인공기를게양한화물선이정박한경우가많고, 한국의대북물자가단동항을경유하여북한으로반입되는경우도많다. 또한랑터우지역을중심으로공식무역과밀무역이성행하고있다. < 표 3> 압록강상의평안북도- 단동지구의국경통로 연결통로위치특징 육로 압록강철교 * 신의주방적동 - 단동단교 ( 한국전쟁 ) 중조우의교 * 신의주방적동 - 단동 육로, 철로 1 차선, 균열로중앙통과 5km/h 제한속도길이 946m 여권, 통행증, 관광 신압록강대교단동 - 신의주 2014 년완공예정 황금평관리위원회단동 - 신의주황금평예정 후산 ( 虎山 ) 제방 ( 일명이부쿠와 ( 一步跨 )) 삭주 - 타이핑완 ( 太平灣 ) 타이핑완 ( 太平灣 ) 제방도로 청성교 / 단교 ( 한국전쟁 ) 청성 - 상허커우철교 수풍댐제방도로 평북의주군의주읍 - 단동관뎬만족자치현후산진 평북삭주군방산리 단동관뎬만족자치현타이핑완진 평북삭주군방산리 단동관뎬만족자치현타이핑완진 평북삭주군청성노동자구 - 단동관뎬만족자치현창뎬 ( 長甸 ) 진하구 평북삭주군청성노동자구 - 단동관뎬만족자치현창뎬진 평북삭주군수풍노동자구 - 단동관뎬만족자치현창뎬라구샤오 ( 拉古硝 ) 후산장성맞은편퇴적에의한육지화 여권 댐의제방길 수풍댐제방도로 80
연구논문접경지역단동에대한현지조사 연결통로위치특징 육로 위원댐제방도로자강도위원군 - 지안시위린 ( 楡林 ) 진위원댐제방도로 위원 - 라후샤오 ( 老虎硝 ) 수로 만포 - 지안철교 * 운봉 - 칭스 ( 靑石 ) 교량, 댐길 / 중단 자강도위원군 - 지안시위린진 자강도만포시 - 지안시위린진 자강도자성군운봉노동자구 - 지안시칭스진 교량없이쇠줄로연결선박으로도강, 여권 북중 3 대통로여권, 통행증 운봉댐제방도로중단 / 수로연결 중강 - 린장도로교 * 자강도중강군중덕리 - 바이산시린장시여권, 통행 수로 신의주 - 랑터우 ( 浪頭 ) 항 신의주 - 단동 신의주 - 단즈 ( 丹紙 ) 항신의주 - 단동폐쇄 청성 - 창뎬하구 * / 중단 초산 - 지안수로 * / 폐쇄 평북삭주군청성노동자구 - 단동관뎬만족자치현창뎬진하구 자강도초산군연풍리 - 지안시하이관 ( 海關 ) 개축공사 주 : * 는 1965 년북중국경회의에서합의한국경출입처 자료 : 이옥희, 북중접경지역 : 전환기북중접경지역의도시네트워크, 푸른길, 2011. pp. 119~120 에서필자가수정함. 2. 국경통과지점과교량현황 단동의상징은 압록강단교 ( 鴨綠江斷橋, 944m) 인데, 1950 년미군의폭격으로중북간의교량이중간에파괴되었다. 당시의모습을그대로보존하고있는데, 그곳에이교량이위치하고있다. 단교를마주보며바로옆에는압록강대교 ( 중조우의교, 中朝友誼橋, 943m) 가있는데, 북중교류가주로이대교를통해서이루어지고있다. 그러나중조우의교는폭이좁아서차량이일방통행밖에할수가없다. 따라서매일양국이 2시간씩교대로차를일방통행방식으로보내며상대국으로물자를운반하고있다. 중조우의교를통해서단동에서신의주로운반되는물동량은하루에 8~10톤트럭으로 20대남짓하다. 29) 29) 다리중앙지점은균열로제한속도가 5km/h 이다. 81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 표 4> 압록강의평안북도및단동국제교량현황 압록강 일제침략기 청수 - 상허커우철교 (1911 년 )* 압록강단교 (1911~1951 년 )* 중강 - 린장도로교 (1935 년 ) 만포 - 지안철교 (1939 년 ) 운봉 - 칭스 ( 靑石 ) 철교 (1940 년대 ) 청성단교 (1942~51 년 )* 신의주 - 단동철교, 중조우의교 (1943 년 ) 건국이후 혜산 - 창바이 ( 長白 ) 도로교 (1985 년 ) 신압록강대교 (2014 년완공예정 ) 주 : 1) * 는운행중단을의미함. 2) 신압록강대교는 2011 년초에기공식을가지고 2014 년에완공될예정임. 단동시내에서약 20 분거리의신개발구에위치함. 자료 : 이옥희, 북중접경지역 : 전환기북중접경지역의도시네트워크, 푸른길, 2011. p. 117. 에서필자가수정함. Ⅴ. 경제무역 단동지역주민과인터뷰를해보면중국의한족들조차북한사람들과무언가경제적 사회적연계를형성하고있으며무역, 외화벌이라는용어를그들의입을통해자연스럽게들을수있다. 30) 중국단동에서는북중무역의 80% 가이루어지고있다. 오전에단동세관은중국에서북한으로나가기위해짐을실은트럭들로교통혼잡을이룬세관주변상인들에의하면북한으로나가는트럭이적을때에는 50대, 많을때에는 150대정도가된다고한다. 이때트럭 150대가중국에서북한으로나간다는말은기차와배로는더많은짐들이북한으로실려나가는것을의미한다고상인들은증언하였다. 왜냐하면신의주로통하는압록강철교로트럭과기차가다니는데, 트럭한대는 15분정도면신의주에도착하며이때트럭한대가실을수있는짐의무게는 20톤내지 30톤정도이다. 40분정도면신의주에도착하는국제열차에는한칸에화물이 60톤정도실리기때문이다. 배의경우이보다훨씬더많은짐이실린다. 현재신압록강대교가건설되고있는데 2013년 2월에갔을때에는 2/3가량완공되었다. 대북사업을하고있는단동거주조선족에따르면이다리가건설되면기존에일방통행으로가야하는불편이해소되고신의주에서바로고속도로로평양과연결되어물동량이더욱늘어날전망이라고한다. 따라서이지역의아파트가격이상당히올랐으며완공되면더욱더 30) 북한내최고직업은단동 - 신의주간운행하는트럭운전사및북경 - 평양간국제열차의승무원으로, 밀수가가능하기때문이다. 북한관련무역은이윤이많이남지만, 사기가많아서위험요소가크다. 또한북중상호간에시장을이해하지못해이윤이많이남아서머저리무역, 멍청이무역이라고했다. 그러나 2009 년이후북중무역이활발해지면서, 북한사람이중국에매우정통하여북중무역에서이윤을남기기가어려워지고있다. 82
연구논문접경지역단동에대한현지조사 오를것이라고증언하였다. 단동에는북한을상대로하는중국무역회사가많이밀집되어있다. 접경지대조사에따르면중국에지사를둔무역회사가약 150개정도가있는데, 그중 80개이상이단동에있다. 따라서단동세관주변에는중국상품을판매하는무역회사 ( 대리점 ) 들이셀수없을정도로밀집되어있는데, 그이유는북한을대상으로물건을팔기위해서이다. 필자가조사한바로는이러한대리점에는중국단동뿐만아니라전국각지에서온회사들이많았다. 단동에대리점을내야만북한무역대상을잡을수있기때문이라고한다. 이들에게대북무역에대해질문하면북한무역은매력적이라고답한다. 북한무역상들은신용장을개설하지않고현금으로물건을대량으로구입하기때문에북중무역은위험도크지만일만잘처리되면많은이윤을남길수있어 10번중한번만성사되어도유지될수있다고한다. 물론그만큼후불도많기때문에리스크가높다. 이때북중무역에서신용장을개설하지않는이유는대북경제제재등여러가지가이유가있겠지만조사에따르면북한무역회사들이거래금액을공개적으로처리하기를꺼리기때문이라고한다. 그렇게되면이들에게떨어지는이윤이없으며, 특히무역회사이외에물건을살수있도록도와준제3자, 즉스폰서의이윤이없어지기때문이라고한다. 이러한무역대리점들은결코작은자본을움직이는존재가아니다. 보이지않는중국회사의창고에서무수히많은상품들이북한으로나가고있기때문이다. 이곳대리점들은북한의수입오퍼상들을잡기위해혈안이되어있다. 이러한대리점은북한무역상들에게정보수집의통로로서도큰역할을하고있다. 최근북한무역상들은중국에나와인터넷을통해가격을비롯한상품에대한정보를수집및조사한후제품을수입해가지만단동에입지한무역대리점을방문하여직접제품에대한상담을받고팸플릿등을얻어자료를수집 분석하여본국으로들어가알려주기도한다. 예를들어필자가입수한자료에따르면북한무역대표들은일반승용차를비롯하여트럭, 식량, 정교한기계에이르기까지셀수없이많은품종들을상담하고북한으로그결과를들여가고있었다. 특히북한사람들에게명품은우리가의미하는루이비통등의명품이아니라한국상품이라고한다. 따라서쿠쿠밥솥, 디오스냉장고등에서한국홈쇼핑에서광고하는제품에이르기까지무역상담을하며문의하고있다. 심지어최근에는북한노동자들이북한무역회사를통해중국으로많이유입되고있다. 중국은이미노동집약산업인섬유산업에있어노동력부족에직면한상태이다. 따라서조사에따르면섬유산업이집중된중국남방회사의사장들은양질의북한노동자들을들여오기 83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위해중개인에게미리브로커비용을지불하고고용예약을해놓을정도였다. 이러한현황은세관주변의대리점을보아도쉽게파악할수있다. 이곳의대리점앞에서는 북한노동자구함. 이라는문구를찾을수있으며최근에는북한이노동자및원료를제공하고중국측이건물과각종수속을대행하여북중합작을하는회사들이중국에많이진출하고있다. 예를들면기존에들쭉술은평양무역회사소속평양공장에서만만들어중국에수출하였으나최근에는이회사가노동력과원자재를중국에들여와단동의중국회사들과합작으로상품을만들어중국에판매하고있다. 수산물또한마찬가지이다. 기존에는중국회사들이북한에서수산물을수입해와가공하여팔았다면현재는북한의수산물수출회사가중국회사와합작하에수산물과북한노동력을들여와가공하여현지에서팔고있다. 이와같이북한무역상들이상품을구입할때에는반드시점조직과같이신뢰가확보된중국무역회사를통해서만구입한다. 바꿔말하면북한무역회사가처음중국에나와영업활동을하기위해서는스폰서와같이이미정해진중국무역회사가법적으로있어야만한다. 이를 대방 이라고하는데, 이들대방은무역상들의개인생활까지보장해주는밀접한관계에있다. 계약서를쓸때에도실질적인계약서와교환되는현금이다르다. 따라서북한무역상들은어떠한대방을만나느냐에따라영업실적및자기의이윤이결정되기도한다. 따라서이들중국대방을통해수출과수입이이루어지며이들간거래상품은특정품목으로전문화되어있지않은것이특징이다. 예를들어필자가입수한제안서를보게되면, 미꾸라지에서이중섭의그림에이르기까지여러가지품목이있음을알수있다. 또한문화재교류기관임에도불구하고석재가공기계의구입까지도문의하고있다. 그런데인터뷰조사결과, 북한회사가물건을팔때에제시하는제안서는굉장히상세하지못하다. 그이유는북한에서수출하는상품은주로광물, 수산물, 농수산품등 1차산품에집중되어있으며이는중국에서수요에비해공급이적은상품이어서얼마든지바이어를찾을수있기때문이라고한다. 그런데처음에는북한무역대표부들이중국대방에게제품을상담할때필요한물건을구입할것처럼가격등을문의하다가결국은이에대해투자할사람을찾는경우가많다. 즉, 단동에나와있는많은북한무역상들, 대표들의주목적은바로북한의공장기업소에투자를유치할대방을찾는일이다. 필자가입수한제안서중에도처음에는물건을구입한다고가격문의를중심으로제안서를보내지만결국은본인이속한무역회사의생산단위에필요한기계등에투자를부탁하는경우가많았다. 따라서역으로북한무역대표부들은돈이되는것은모두다중국에와서팔려고한다. 84
연구논문접경지역단동에대한현지조사 이러한북중무역의연락은인터넷, 팩스도있지만안전등을고려하여인편을통해서이루어지는경우도많다. 입수된계약서를보아도전문화되어있지못하고한무역회사에서취급하고있는상품이여러가지임을알수있다. 이는북한무역회사가수출을할때든수입을할때는언제나갑의위치에있으려고하기때문이다. 이러한양상은대북한무역제재가반드시효력을발휘하지는않음을뒷받침한다. 천안함사건이후 2010 년에 5 24 조치가취해진이후로중국단동의남한대북사업가들은대북제제로손해를본주체가북한도중국도아닌남한기업이라고불만을토로한다. 상품이국제시장가격으로거래되기때문에북한은남한에팔았던상품을중국에팔수있어대북제제가그다지큰영향을받지않는다고증언하였다. 오히려중국무역업자들이중간에서큰이익을보고있다. 필자의인터뷰에응한조선족대북사업가는남한정부가대북무역제제정책을유지하기희망한다고하였다. 특히남한대북사업가들은중국에서에이전시비용및관세등을물어울며겨자먹기식으로기존보다 30% 이상높은비용으로중국산으로둔갑한북한산수산물을수입하고있는실정이어서손해가더욱크다. 또한북중접경지역에서밀무역이성행하고있으나중국당국이제지하기어려운상황이다. 밀무역은일반적으로비공식루트뿐만아니라압록강철교등공식루트를통해서도많이이루어지고있다. 그러나접경지역관계자들은북중무역의 70% 이상이밀무역이라고증언한다. 중국당국이이를막게되면산업기반시설이없는접경지역주민들의대량실업이예고되기때문이다. 북한고위층과철저히한관계라고할수있다. 이러한북중경제관계, 북한경제의내부변화는무역이라는외부적요인을떠나서는생각하기어렵다. 더욱이무역통계만으로는국내주민경제와대외경제와의연결고리 (link) 및이끈을연결시켜주는내부동력을찾기어렵다. Ⅵ. 에너지교류 1. 중국의대북원유제공과중조우의관 중국의원조원칙은 1950 년대마오쩌둥의혁명노선에의거하여구상되었다. 1954 년저우언 라이총리가인도와미얀마를방문했을때발표한공동성명에서밝힌평화공존 5 원칙 31) 에 85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의거하여, 1964 년 1월에저우언라이총리가 대외경제원조 8개항원칙 을발표했다. 32) 표면적으로는 중국은대국으로서가난하고낙후된국가들의경제발전을도울의무가있다. 고했지만, 중소대립을배경으로전략적성격을내포하고있다. 중소대립과정에서마오쩌둥은국제사회에제3세계라는공간을확보한다는마오쩌둥의중간지대론또는제3세계전략에서의원조의중요성을강조했고, 이는덩샤오핑의 국제경제신질서 의이론적배경이되었다. 북한에지원하는원유는중국동북부의다칭유전 ( 大慶油田 ) 에서단동 ( 丹東 ) 으로연결된송유관을통하여북한에반입되고있다. 현재북한의주요화력발전소에서사용하는원유는거의대부분중국으로부터의수입에의존하고있다. 33) 중국의대북원유수출은 1971년중요물자상호공급협정 ( 重要物資相互供給協定 ) 이체결되면서시작되었다. 1972년닉슨대통령의방중시북한에대한배려였다. 1975년진황다오 ( 秦皇島 ) 에서베이징까지 350km의파이프라인이완공되었다. 1975 년말이송유관에서분기된송유관이북한쪽을향하는 중조우의관 ( 中朝友誼管 ) 도완공되어 1976 년 1월에통유 ( 通油 ) 기념식을북한에서거행했다고한다. 북중우호의시기에중국은매년 100 만톤에서 150 만톤의석유를북한에공급하고있다. 그것은북한이필요로하는석유의약 30% 를충당할수있는분량이다. 그리고중국은 1950~1960 년대에북한에제공한차관의미결제분을면제해주었다. 그러나 1997년부터석유공급량이 40~50만톤정도로감소되었다. 중국의대북원유제공은전략적성격이내포되어있는데, 1970 년대말중국 베트남전쟁시기에중국은베트남지원원유를북한으로전용하여대폭제공량을증가시켰었다. 북한에제공하는원유의저장시설은단동시내로부터북동쪽교외지역 ( 丹东蛤蟆塘镇星光村 ) 에있다. 이회사는 중조우의수출석유가스공사 ( 中朝友谊输油气公司 ) 라는간판이있고, 이회사의모회사인 중국석유천연가스집단공사 ( 中国石油天然气集团公司, CNPC) 의로고도같이표기되어있다. 34) 중조우의수출석유가스공사 ( 中朝友谊输油气公司 ) 는최근 송유관단동수출석유가스공사 ( 管道丹東輸油分公司 ) 로개명했다. 송유관은중국측이 27km, 북한측이 150km이고, 직경은약 40cm이다. 설계당시의송유능력은최대연간 400만톤이었다. 단동의중유비축시설에는철도노선이연결되어있어화물차도출입하고있다. 다칭에서단동까지의 31) 첫째, 주권과영토의상호존중의원칙, 둘째상호불침범의원칙, 셋째내정불간섭의원칙, 넷째평등호혜, 다섯째평화공존의원칙이다. 32) 첫째, 중국정부는일관되게평등호혜의원칙에따라대외원조를제공한다. 둘째, 원조를받는국가의주권을엄격히존중하여어떤부대조건이나특권을요구하지않는다. 셋째, 이자를붙이지않거나저리의이자를받거나필요한경우기한을연장해주며, 원조를제공받는나라의부담을줄여준다. 넷째, 중국정부가대외원조를제공하는목적은원조를받는국가들의중국에대한의존도를높이기위해서가아니며, 수원국이자력갱생할수있도록해주고경제적인독립과발전의길을갈수있도록해주기위해서이다. 다섯째, 중국정부의원조제공사업항목은저투자, 고효율, 수원국정부가수입을늘리고자금을축적할수있는항목들을선택한다. 여섯째, 원조의설비와물자는품질이가장좋은것을국제시장가격으로제공하며품질이떨어질경우반환할수있도록한다. 일곱째, 중국정부가대외적으로기술을제공할때에는수원국의인력을충분히운용할수있도록보증한다. 여덟째, 중국정부가수원국에기술자를파견할때는파견된중국기술자는수원국의기술자들과같은조건의대우를받으며, 어떤특권도향유하지않는다. 33) 고미요우지저, 박종철. 정은이역, 중국은북한을멈출수있을까 : 북중애증의 60 년, 코인미디어, 2011. 34) 주소丹东蛤蟆塘镇星光村. 단동시내로부터자동차로약 20 분정도거리이다. 86
연구논문접경지역단동에대한현지조사 송유관은노후화되어일부를제외하고는대부분사용되지않고있고, 열차운송을하고있다고한다. 이회사는중국석유천연가스집단공사의자회사이며, 송유관건설을담당하는중국석유천연가스관공사 ( 中国石油天然気管道公司 ) 의홈페이지에는북중간단동에서맞은편의북한을연결하는매우짧은송유관만이게재되어있지않다. 우호의상징 인다칭에서의송유관은대부분폐쇄되어있어, 중국당국이여러가지이유로송유량을통제할수있다고한다. 35) 비축시설은압록강변에위치한 83유류저장소 ( 八三油類貯蔵所 ) 인데, 은빛파이프에는 중국석유송유관 ( 中国石油管道 ) 이라는로고가새겨져있다. 이시설은 파이프라인부스터 (Pipeline Booster, 압송장치 ) 이다. 지하에고온 고압 가열 폭발성의송유관이있다 는경고가있고, 또한주변에깊이뿌리를내리는나무와식물을심지말것과도로는지하의송유관에서 1m 이상쌓아올린흙둑으로통과하도록경고하고있다. 은색의두꺼운파이프가몇개정렬되어있고, 또한큰파이프도있다. 다칭의중유에는파라핀 (paraffin) 이라는불순물이많아서저장시설에서지하송유관을통하여운반된원유를가열 가압하여북한으로송유하고있다. 이시설은보안시설이며, 북중양국인원이공동으로관리하고있다. 36) 평안남도안주시근교와두만강중류의함경북도훈계 ( 訓戒 ) 서쪽약 5km의두곳에정유시설이있다. 중국에서운반된원유는거리가가깝고규모가큰안주시의제유시설로운반된다. 안주시의제유시설에서는이를가솔린 디젤유등으로정유하며, 제유된석유는화력발전소로운반되어발전에사용된다. 북한에는구소련의지원으로건설된화력발전소가평양 선봉 청진 선창 ( 先倉 ) 에있다. 선봉화력발전소는나선시에위치한최초의중유전용화력발전소이며, 발전량은 20만kW( 연간원유 50만톤 ) 규모로, KEDO( 조선반도에너지개발기구 ) 에서지원하는중유를사용하고있다. 현재는가동중지상태이다. 1980년대까지북한은연간 250만톤에서 100만톤정도의원유와석유제품을수입했었다. 그중 100만톤은중국, 100만톤은구소련, 나머지 50만톤은중동에서공급받았다. 소련이붕괴되고나서러시아로부터의수입은이전과비교하여 10% 대로급락했다. 1994년북미기본합의서에서연간 50만톤의중유지원을약속받았지만실행되지않았다. 다른한편, 중국의대북원유수출량은 1996년까지연간 100만톤을초과했지만 1997년이후 40~50 만톤정도에머물렀다. 그리고러시아가북한에 40~50 만톤의석유제품을수출하고있다. 그러므로최근북한은가까스로 100만정도를확보하고있다고추정되고있다. 중국의대북원유수출가격은원조를시작했을때는국제가격의약 1/7에서 1/3 정도였는데, 1991년이후국제가격과비슷하거나혹은조금저렴한정도로공급하고있다. 37) 35) 고미요우지저, 박종철. 정은이역, 중국은북한을멈출수있을까 : 북중애증의 60 년, 코인미디어, 2011. 36) 고미요우지저, 박종철. 정은이역, 중국은북한을멈출수있을까 : 북중애증의 60 년, 코인미디어, 2011. 87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 표 5> 중국의대북한원유수출 북한으로수출량 ( 만톤 ) 북한으로수출액 (100 만달러 ) 북한가격 ( 달러 / 톤 ) 국제가격 ( 달러 / 톤 ) 북한수출총액 (100 만달러 ) 원유비중 (%) 1988 120 74 62 97 345 21.5 1989 - - - - - - 1990 106 68 64 153 358 18.9 1991 110 148 134 130 525 28.1 1992 102 123 121 128 541 22.7 1993 104 134 129 122 602 22.3 1994 105 122 116 111 424 28.7 1995 102 131 128 119 486 26.9 1996 93.6 118.6 127 137 497 23.9 1997 50.6 64.6 128 138 535 12.1 1998 50.4 48.4 96 99 356 13.6 1999 31.7 31.0 98 107 329 9.4 2000 38.9 75.6 194 207 451 16.8 2001 57.9 108.8 188 183 573 19.0 2002 47.2 76.5 162 169 468 16.4 2003 57.4 121.0 211 204 627.7 19.3 2004 53.2 139.3 262 241 799.5 17.4 2005 52.3 197.7 378 334 1,081.1 18.3 2006 52.4 246.9 471 432 1,232.3 20.0 2007 52.3 282.0 539 435 1,392.5 20.3 2008 52.9 414.3 783 709 2,032.4 20.3 2009 52.0 238.6 459 425 1,886.9 12.6 2010 52.8 325.8 617 543 2,278.5 14.3 2011 1~9월 40.7 397.2 979 2,374.3 16.7 자료 : 일본세이난학원대학 ( 西南學院大學 ) 오가와 ( 小川雄平 ) 교수가작성함. 2. 수풍댐 수풍댐은일제침략기에조선총독부와만주국정부가건설비용을절반씩부담하였다고한다. 수풍댐은 1937년착공되어, 1941년부터전기생산을시작했다고한다. 저수량은당시세계최대규모였다. 1945 년종전때, 진주해온소련군이발전시설의일부를가지고갔다고한다. 한국전쟁 (1950~53 년 ) 중에도미군이공습을했지만엄청난피해는면했다. 북중양국은 1955 년에댐공동이용협정을체결해서연간 36억 8천만 kwh 의전력을절반씩나누어사용하고있다. 38) 북한은수풍댐의전력을단동에수출하고있다. 37) 고미요우지저, 박종철, 정은이역 중국은북한을멈출수있을까 : 북중애증의 60 년 ( 코인미디어, 2011). 38) 고미요우지저, 박종철, 정은이역, 중국은북한을멈출수있을까 : 북중애증의 60 년, 코인미디어, 2011. 88
연구논문접경지역단동에대한현지조사 < 표 6> 중국과북한의전력무역현황 중국 북한 ( 천 kw) 수풍댐금액 ( 천달러 ) 창바이현 ( 長白縣 ) 북한 중국 ( 천kW) 단동 금액 ( 천달러 ) 1999 115.2 6.9 - - 2000 - - 22,656.0 547.5 2001 63.3 7.6 36.289.4 582.7 2002 8,845.9 565.2 9,979.2 132.6 2003 11.107.1 789.1 31,838.4 769.3 2004 8,646.7 672.8 83,349.8 2,014.1 2005 657.1 62.7 90,145.9 2,365.9 2006 1,1178.8 122.7 141,129.0 3,810.6 2007 1,710.4 203.2 168,502.5 4,756.6 2008 17,937.3 1,666.3 143,535.0 4,400.0 2009 7,841.3 778.6 128,886.4 4,150.7 2010 3,345.2 403.1 151,710.0 4,911.2 주 : 중국은지린성창바이현세관에서수출하고, 단동세관을통해서수입하고있음. 수풍발전소는중국측이관리하고있으며, 북한은관리 비를현물 ( 전력 ) 으로지불하고있음. 북한은발전비용의절반을부담하는데, 비용을현물 ( 전력 ) 로지불하고있음. 수풍댐의발전량은 64 만 ~80 만 kw 로추정됨. 자료 : 일본세이난학원대학 ( 西南學院大學 ) 의오가와 ( 小川雄平 ) 교수가작성함. Ⅶ. 남북 북중교류및협력의중심으로서단동과신의주 의번영 단동지구와신의주는일제가만주침략을위하여개발한거점지역으로, 중국과한반도의역사의아픔이공동으로남아있다. 이와더불어한국전쟁시기주요병참기지로서우리민족의아픔을상징하는지역으로기억되고있다. 냉전시기에는중소대립에따라서마오쩌둥이국경개발을제한하면서, 신의주에의존하는지역이었다. 그러나개혁개방이후북중소규모변경무역이활성화되면서조선족, 화교등이단동- 신의주를중심으로번성하고있다. 한중수교이후, 특히 1998년에서 2008년까지남북화해의시기에남북교류가활성화되면서단동을경유한인적 물적교류가급증하였고단동지구는번성하였다. 고난의행군이후북한은중국에생존을의지하고있으며, 북한민중이의존하는지하시장상품의경우, 90% 이상이중국에서반입되고있다. 북한정권의생존에필수적인식량, 원유, 무기등도단동을경유하고있다. 특히 2009년신정부수립과제2차핵실험이후북한의중국의존은강화되고있다. 북중관계가김정은정권의생존에필수적인요소가되면서단동과신의주는양국의현관문역할을강화하고있다. 그러나남북관계가악화됨에따라단동을경유한남북교류에서화교가두각을나타내면서, 한국의대북사업가가몰락하고조교, 조선족등이상당히위축되고있다. 최근에는북한에서시장이급속히확대되면서, 북한무역상 89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들이중국상황을매우잘알면서단동-신의주무역이더욱격화되고있다. 2000년대에한국언론에자주등장했던신의주의제한적개방과단동개발은후진타오지도부가개성공업지구, 서해지구등의남북교류를중심으로북한개방을촉구하면서진전되고있지않고있다. 2014 년말에완공이예정되어있는신압록강대교는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북중관계를더욱심화시킬것으로예측되고있다. 필자는단동과신의주의번영은남북관계의종속적이라는후진타오 -시진핑지도부의전략적사고가한반도안정에도움이된다고생각한다. 2009 년이후남북경색과동시에진행되는북중관계의심화라는한반도질서는기형적이며, 남북관계와북중관계의동시발전속에서단동과신의주의안정과번영그리고황금평의개발이이루어져야한다고생각한다. [ 사진 1] 단동-황금평출입문 주 : 2013 년 4 월사진임. 90
연구논문접경지역단동에대한현지조사 [ 사진 2] 단동의황금평관리위원회설명문 주 : 2013 년 3 월사진임. [ 사진 3] 중조우의교의균열 ( 중간지점시속 5km) 91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 사진 4] 신압록강대교건설현장 주 : 2012 년 8 월사진임. 주 : 2013 년 2 월사진임. 92
북한경제연구협의회 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에서의 북한경제와한국경제 신범철, 이석기, 김영훈, 정우진, 김중호, 이석, 조병구
세 / 미 / 나 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과북한경제와한국경제 KDI 북한경제연구팀은 2013년 4월 11일 KDI 중회의실에서 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에서의북한경제와한국경제 라는주제로협의회를개최하였다. 본협의회에서는조병구한국개발연구원선임연구위원의사회를시작으로신범철국방연구원책임연구위원, 이석기산업연구원선임연구위원, 김영훈한국농촌경제연구원연구위원, 정우진에너지경제연구원선임연구위원, 김중호한국수출입은행선임연구원, 이석한국개발연구원연구위원이차례로발표하였다. 토론자로는권태진한국농촌경제연구원선임연구위원, 안병민한국교통연구원연구위원, 이상준국토연구원한반도동북아연구센터장, 조남훈국방연구원책임연구위원, 최수영통일연구원선임연구위원, 탁성한국방연구원연구위원외에도관련정부부처에서참석하여다양한의견을나누었다. 본문에서는금번협의회에참여한전문가들의동의를얻어이들의토론내용을간략히정리 제공한다. 일시및장소 2013 년 4월 11일 ( 목 ) KDI 중회의실사회조병구 (KDI) 발표신범철 ( 국방연구원 ), 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 : 실태와전망이석기 ( 산업연구원 ), 최근북한산업동향김영훈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 최근북한의식량수급현황정우진 ( 에너지경제연구원 ), 최근북한의에너지 자원동향김중호 ( 한국수출입은행 ), 개성공단등남북교류현황과함의이석 (KDI), 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에서의북한경제전망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1. 발제 조병구 : 북한경제협의회를시작하도록하겠다. 오늘은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에서의북한경제와한국경제에관해서토론하는자리이다. 먼저신범철박사에게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의실태와전망에대해발제해주기를부탁한다. 이어각분야별로북한경제및한국경제의현황과전망에대해서이석기박사, 김영훈박사, 정우진박사, 김중호박사, 이석박사순으로발제한후, 패널들의토론을이어나가도록하겠다. 신범철 : 남북간의긴장고조와관련해서사회에서많은이야기가나오고있는것같다. 오늘발표하려는주제는북한의도발이고, 세간의주요관심사도남북간긴장고조와안보에있는듯하다. 이러한흐름이왜그리고어떻게전개되는지알고자한다면무엇보다도북한의경제상황을알아야한다. 그래야만북한의향후행태까지도예측이가능하다고보기때문이다. 북한은현재한반도를둘러싼긴장을전례없이고조시키고있다. 북한이이렇게상황을끌고나감에있어서두가지분석이가능하다. 하나는북한이정말로자신감이있어서상황을지금과같이끌고나간다는것이다. 작년 12월미사일발사성공에이어 2월핵실험성공뿐만아니라경제적으로도무역, 노동자수출, 식량생산량증대등에힘입어이번만큼은국제사회가아무리자신들을압박해도버틸힘이있다고생각해서자신들이원하는것을얻겠다고밀어붙이고있다는분석이다. 다른한편으로는새로출범한박근혜정부를압박하면서, 미국으로부터는핵보유국의지위를얻어내겠다는전략이라고볼수있겠다. 그런데이러한북한의행태를정반대로해석할수도있다. 즉, 실제로는북한의경제상황이정말어렵고사회통제가어려워져김정은과장성택, 최룡해등의엘리트들이위기의식을갖고이러한상황을돌파하기위해오히려대외적으로더강하게밀어붙이고있는것이아니냐는해석이다. 이러한상반된해석을평가하려면과연북한의경제상황이어떠한지제대로파악이이루어져야한다고본다. 북한의경제상황분석은경제, 국방, 외교, 통일등의각분야에서의사결정을내리는데기초가되는중요한일이라고본다. 남북한의군사적대치상황을중심으로해서그것이지니는의미와거기에대한우리정부의기본적인접근방향에대해얘기해볼텐데, 차후에북한경제에 96
북한경제연구협의회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에서의북한경제와한국경제 대한여러발표자들의발제도주의해들어보아야겠다. 확전가능성이농후한상황에서국지도발은북한군전체의대비태세를두고봤을때가능성이낮다고판단된다. 북한과의군사적대치상황이고조되고있는지금북한의언어적인도발보다한단계더나아가군사적충돌이임박한상황은아니라는평가와함께오늘이야기를시작하고자한다. 오늘준비한주제는남북한의군사적대치상황의실태와전망이다. 특히북한의도발에대해우리는어떻게대응하고있으며그상황은어떠한지얘기해보고자한다. 먼저도발의개념을명확히이해할필요가있다. 요즘이와같은주제로다양한논의가이루어지고있는데잘못된정보와오해도많은것같다. 그만큼도발또는군사도발에대한개념도확실하지못한것은아닌지모르겠다. 도발, 그중에서도군사도발이란군대, 군비, 전쟁으로상대국의국민, 재산, 영역에위해를가하는일체의행위를일컫는다. 지금북한이말폭탄과같은형태로언어적인도발을감행하고있는데, 이러한행위는엄밀히따져보면군사도발은아니지만일반적의미의도발로간주할수있기때문에이후부터지칭하는도발행위에대해서는북한의군사도발을포함한광의의개념을사용하도록하겠다. 북한은지난 12월 12일장거리미사일발사실험이후유엔안전보장이사회결의 2087호가통과되었음에도올해 2월 12일에핵실험을감행했다. 이에대한새로운안전보장이사회결의 2094 호가통과된이후에는 3월한미연합군사훈련을핑계로 말폭탄 을통해군사적긴장을고조시켜왔으며, 이제는개성공단까지위협하는행태를보이고있다. 개인적으로는북한이미사일을발사한지난 12월부터현재까지일련의전개과정을염두에두고이미세워둔계획에따라움직이고있다고생각한다. 군사행동을감행할때에는단순히하나의행위만을목표로그때마다행동으로옮긴다기보다는이후의파급효과와더불어그다음단계에서의수위조절여부까지고려한계획을세울것이기때문이다. 즉, 김정은이지난 12월 12일미사일발사에대한결심을내릴때에는그다음단계로유엔제재가가해질것을예상했을것이고, 이에다시핵실험으로대응해나가면서연례적으로벌어지는한미연합군사연습시기에맞춰긴장국면을유지하며분위기를끌어간다는모종의계산을했을것이라는얘기다. 최근도발양상을보면핵이가장중요한요소라는생각이든다. 최근들어군사도발가능성이주목을받으면서핵문제에대한위협인식이수그러들고있는분위기이다. 물론국지적군사도발의경우에는그에상당한위험이존재하지만우리의능력으로충분히제압가능하다고본다. 문제는북한이이제부터는핵을뒤에두고군사도발을할수있다는사실이며, 이경우에는우리가효과적으로대응하기어렵다. 계산법에따라실질적인폭발력은다르지만북한이 2월핵실험을통해자신들의핵능력을지속적으로향상시켜왔다는것만큼은분명한사실이며, 앞으로머지않아우리나라를포함한국제사회에다가올엄청난위협이라는측면에서 97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볼때이에대한전략적대비를반드시해나가야한다고본다. 다만북한의핵능력은현재실전배치에는미치지못하는초보적인수준에머무르고있다고평가된다. 이때문에비록말폭탄을통한핵공갈전술로우리나라를핵인질로삼고자하는의도는읽히지만실체적위협으로다가오고있지는않다. 무력도발에기초한전쟁개시위협의경우도북한의움직임이나능력을고려할때언어적도발의일부라고생각한다. 한편, 북한이최근내세운 정전협정백지화 주장과같은것은우리정부각부처에서주의깊게지켜봐야할대목이다. 이들이주장하는일련의내용들이상당한일관성을띠고있기때문이다. 이를테면북한은지금정전협정이제대로작동하고있지않기때문에한반도평화의틀이깨졌으며핵무기를개발하는것은외부의압살정책에대응한조치라는것이다. 따라서이러한불안정한상태를극복하기위해서는평화협정을통한새로운체제를만들어야하는것이고, 그렇게하기위해서북한이다양한형태로도발을함으로써현정전협정체제의불안정성을제대로보여줄수밖에없다는식의논리이다. 이를통해북한은궁극적으로평화협정체제와핵보유국지위를얻어낼수있다는생각을하고있는것은아닌지모르겠다. 여기서북한에있어핵보유국의지위라는것은, 지금의비확산체제 (NPT) 속에서핵보유국으로인정을받는것이아니라핵무기를가지고있으면서제재를받지않는상태라고이해하는것이옳다고본다. 북한은핵무기를개발함으로써처음에는제재를받지만이를잘버텨내다보면국제정세가바뀌어제재가풀리게되고, 남아있는핵무기를통해자연스럽게사실상의핵보유국이된다는인식을하고있을것이라고생각한다. 이러한관점에서북한은지금위협을극대화하고있지만, 다행히도북한의전쟁지속능력이나전력자체가이러한위협을뒷받침해주지못하고있기때문에우리가당장크게우려하지는않아도된다고본다. 가장최근북한이감행한도발로개성공단사업잠정중단및폐쇄위협이있는데, 그가능성에대해서개인적으로는조금회의적이다. 물론일부에서는북한이 144달러라는임금에만족하지못해다른생각을하고있다는얘기도나오고, 당장우리기업들과그곳에서근무하는우리근로자들, 그리고가족들의생계문제등다양한측면에서의우리정부에대한압력인것은분명하다. 그렇지만공단폐쇄로비롯될북한측의피해도만만치않기때문에본사태가어떻게전개될지는지켜봐야할것이다. 지난 4월 4일북한의총참모부대변인담화는이러한일련의상황을잘정리하고있는것같다. 담화에서북한은한반도가전쟁폭발전야라고하면서미국은심사숙고해야한다고했는데, 이를통해우리는실제로전쟁을수행할능력은없는북한이전쟁을들먹이면서도자신들이보내는메시지의대상은우리가아닌미국을겨냥하고있다는것을알수있다. 한반도의긴장상황에대한책임은백악관과펜타곤에있다고밝히는대목에서도북한은 98
북한경제연구협의회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에서의북한경제와한국경제 위협의화살을미국에돌리고있는것이다. 이러한관점을평가해보면북한은한국과미국의대북정책이바뀌지않고있다는점을불쾌히여기면서현상을타파해야만하는열세의입장에놓여있음을인지하고있는것같다. 이때문에자신들이원하는것을얻어내기위해서는공세적으로나올수밖에없는것이다. 다만, 그러한노력의일환으로보이는각종위협들이아직은수사적위협의수준에머물러있다고보는것이합리적이라고생각된다. 현재불거지고있는북한의미사일실험발사가능성도이러한긴장고조의일환이라고여겨지는데, 결국은이러한행보를통해미국을압박함으로써자신들이원하는무언가를얻어내려하고있는것은아닌지모르겠다. 자신들이의도하는목표를이루기위해북한이계속움직일것인지, 아니면미국이어느정도양보를할것인지는최소한 5월은되어봐야좀더명확해지지않을까한다. 미국이최근대륙간탄도탄실험발사계획을연기한것이하나의신호라면, 북한도무수단급의장거리미사일이아닌노동이나스커드미사일만발사함으로써긍정적인화답차원의메시지를전할수있을것으로보인다. 만약무수단급의미사일을쏜다면결국상황악화가지속되다가 5월한미정상회담이후에나상황전환이가능할것이라고본다. 다음으로북한의도발의도와향후행동전망을간단히살펴보자. 요즘언론이나각종분석의내용들을보더라도현재북한의도발행태에는분명내부요인이존재한다고여겨진다. 북한은핵을보유한채자립경제로버텨보겠다는생존전략을추구하는데, 이것이성공한다면아마김정은정권은안정적으로유지가능해보인다. 또한북한의관점에서전혀무모한전략도아닌것같다. 핵문제가풀리면충분히가능한발전방향이기때문이다. 북한이핵을갖고싶어하는이유는여러가지가있다. 그중국제사회가인권문제등을가지고정치적개입을시도할가능성을상정한다면북한의관점에서북한이버틸수있는힘은핵무기라는것이다. 심지어는내부에서대량학살이자행되더라도핵무기가있다면쉽게들어가지못한다는인식을북한은갖고있는것으로보이며, 그것만인정받는다면나름대로자력갱생할수있다는확신을가지고있는것같다. 그다음으로북한은경공업과농업분야를지속적으로강조하고있는데, 이는북한이개혁개방을단행하여주민들의생활수준을향상시키지않는한지금의내부적상황을타개하기위한방책의일환이라고평가된다. 하지만올해예산반영분을보면경공업과농업에는예산평균증가율 5.9% 에도못미치는투자를하고있는반면국방비에는평균이상의투자를하고있어, 북한당국이주민생활의근간이되는경공업과농업부문에대한현재의언행들에비해실제취하고있는행동은미미하다는점을지적하고싶다. 북한의향후행동전망을얘기하자면우선은대외강경책이지속될것이라고본다. 앞서언급한자신감과위기의식이라는두가지가능성을가정하더라도북한은도발을할수밖에없는방향으로 99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간다는얘기다. 그렇다면우리는어떻게될것인가? 냉정하게현실을직시한다면북한의도발앞에우리는미국에의존적인입장에처하게된다. 자체적으로북한의위협에충분히대응할수있는능력이없기때문에미국의전력지원은절실할수밖에없고, 미국의입장에서도국내의자체핵무장론과같은강경책을억제하기위해서라도확장억제의효용성을보여줄필요가있을것이기때문이다. 결국북한이기필코도발을감행한다면우리는미국과의공조가중요하게되는것이고, 또미국의정책전환에대한저항력도어느정도떨어질수밖에없을것이다. 군사적충돌가능성도배제할수없는요소다. 실제로김격식, 김영철과같은북한의군부강경파가전면에나오고있는것을보면전반적인정책흐름역시강경한방향으로흘러가는듯한인상을주고있다. 이러한움직임은김정은의이익과도부합하는것이고북한권력의핵심에있다는장성택의영향력에서도비교적자유로운것같아서향후귀추가주목되기는하나, 앞서얘기했듯이북한의전쟁수행능력을전체적으로고려할경우군사적충돌발생가능성이다른방식보다는낮다고판단된다. 이러한국면속에서주변국의반응은아직명확한것이없는것같다. 앞서언급했듯이 5월이후에는어떻게될지지켜봐야겠다. 사실가장흥미로운주변국반응은중국이라고하겠다. 현재중국내부에서북한에대한다양한목소리가나오고있다. 중국이당장하루아침에입장을바꾸지는않아도최소한그저변에서는기존과다른관점들이제시되고있다는것이며, 이는우리에게는긍정적요소라고할수있다. 향후 10~20년의장기적관점에서중국의대북인식변화가일어난다면우리에게유리한전략환경이조성될수도있을것이다. 북한의도발행위를치킨게임에비유한다면과거쿠바미사일사태나판문점도끼만행사건에서알수있듯이, 원칙을갖고일관성있게나가는측이이기는것같다. 그런면에서현정부의확고한억제와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좋은접근이될수있을것이다. 기회가있을때는끌어들이고상대방에게신뢰를주는식의접근이야말로앞으로의남북관계가진전할수있는토대이기때문이다. 각정부부처는서로간에한반도신뢰프로세스에대한조율을거치는것과더불어국가안보실과같은컨트롤타워를통해이를효과적으로시행할필요가있다. 끝으로북한의핵문제에대한근본적인대응책마련이필요하다는것을강조하고싶다. 현재북한의위협이국민들이생각하는것보다는덜한것이라면, 북한이핵무기를실전배치한다음에가해오는도발위협은실체가있는위협이기때문이다. 즉, 확전우세 (escalation dominance) 가북한한테넘어간다는말이다. 핵무기를세워놓고재래식군사도발을해왔을때과연우리가열배, 백배의응징을할수있을까? 그만큼우리는지금부터핵문제를풀어나가야하고, 그러기위해서는경제 군사 외교각분야를통틀어대응방안을마련하는지혜가필요하다. 100
북한경제연구협의회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에서의북한경제와한국경제 조병구 : 신범철박사의발제에이어북한경제의산업동향에대해이석기박사, 농업및식량에대해서김영훈박사, 북한의에너지및자원동향에대해서정우진박사, 개성공단등남북교류현황과함의에대해서김중호박사, 그리고북한경제전반에대해서이석박사순으로발제해주기를부탁한다. 이석기 : 북한의산업은구체적인관찰이어려워현재의상황과연결시키기어려운점이있다. 북한경제에대해서논하려면일단데이터가필요하나부족한상황이다. 여기에서는공식통계를내는한국은행의자료를바탕으로 2000 년대후반북한산업동향을살펴보고, 2000년대후반산업동향과산업정책을되짚어보겠다. 또한김정은등장이후의경제상황을보고 2013 년동향을점검해보겠다. 한국은행의북한 GNI 추계에의하면북한경제는 1990 년대의극심한경제위기이후북한경제는 1999년부터 2005년까지완만하게회복되었으며, 2006년경부터정체내지는후퇴한것으로나타나고있다. 산업별추이를살펴보면첫째, 농업부문은기후조건등에따라등락이심하기는하지만 2000 년대내내회복세를지속하고있는유일한부문이다. 둘째, 비농업부문중건설업은 2005년까지북한경제의회복을주도하였으며, 2006년과 2007 년수축기에다소위축되었다가, 2008 년이후에는전반적인경제위축상황에서도여타산업에비해활발한생산활동이이루어지고있다. 셋째, 전기 가스 수도업, 광업, 제조업부문은 2002 년을제외하고는 2005 년까지비교적빠르게회복하였으며, 2006 년이후북한경제의전반적인정체에도불구하고 2008년경까지는소폭이나마성장세를지속하였다. 2009년이후에는전기 가스 수도업과제조업은위축이지속되고있으며, 광업도사정이크게좋지는않은것으로나타나고있다. 특히, 2009년이후에는전기 가스 수도업과제조업부문이북한경제부진의기본적인원인이되고있는데, 이중에서도전력생산량의감소가비농업부문의정체및후퇴를촉발시키고있는것으로보인다. 한편, 건설업은 2008 년이후플러스성장을지속하고있는데, 이는평양 10만호주택건설등주거용건설활동, 간석지개발등의토목공사등이 2000년대후반에꾸준히추진되었기때문인것으로추정된다. 이렇게 2000 년대에북한의산업이전반적으로 1990 년대와는달리부분적인회복세를보였지만, 화학공업과금속공업의회복은산업전반의회복세보다뒤처지는것으로추정된다. 특히석탄 화학공업은상당기간동안사실상방치되었다. 경공업및농업에원부자재를공급하는화학공업의몰락으로경공업및농업의회복에어려움이있으며, 경공업생산은수입소비재에 101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크게의존하게되었다. 북한은 2000년대후반화학공업에대한대규모투자를통하여석탄및전력에서석탄 화학공업그리고경공업및농업으로이어지는산업연관구조를복구하려고시도한것으로보이지만, 아직성과는나타나지않고있다. 한때주체섬유 ( 비날론 ), 주체철 ( 코크스를사용하지않거나적게사용하는제철법 ), 주체비료 ( 석탄가스화를통한비료생산 ) 등주체공업이강조되었으나이역시가시적인성과가없었으며, 김정은등장이후폐기된것으로보인다. 김정은등장이후의설명은희망이다소섞인추측이기는하지만, 김정은집권첫해인 2012 년에는중화학공업에대한투자가상대적으로줄어들었을가능성이있으며, 신년공동사설에의하면 2013 년에도이러한추세가이어질가능성이있다. 다만, 화학공업에대한투자는계속되고있는것으로추정된다. 중화학공업부문의상대적인감소와함께농업및경공업이계속강조되고있으며, 상업및유통부문도강조되고있다. 이러한투자동향이정책의전환인지아니면집권초기의과도기적인현상인지는지속적인관찰이필요하다. 이러한자원배분정책은긍정적인측면이있으나, 체육이나유희시설등비생산적인건설부문에대한강조는자칫대규모자원낭비를초래할수있어보인다. 2013 년에는핵개발과경제건설을함께추구하겠다는정책이천명되었으며, 경공업중시정책의일환으로 10년만에경공업대회를개최하기도하였다. 박봉주와함께리무영화학공업상이재등장한이후의화학공업의역할과관련된투자동향도주목할필요가있다. 김영훈 : 북한의식량문제와관련하여가장신뢰도높은자료를발표하는곳은국제기구인유엔산하세계식량계획 (WFP) 과식량농업기구 (FAO) 이다. 이두기관의자료는실사단이직접북한을방문하여조사한결과를바탕으로하며, 많은내용을포함하고있다. 이에두기관의자료를바탕으로북한의식량수급현황을살펴보도록하겠다. 우선조곡을기준으로한북한의곡물생산량을살펴보면, 2012/13 년에는약 580만톤이생산되어 527만톤가량이생산된 2011/12 년에비해 10% 정도증가하였다. 이는최근 3년간이어진꾸준한증가추세의결과로, 옥수수재배면적의증가와쌀의수량증가에주로기인한다. 한편, 2012 년봄의큰가뭄으로이모작작황은하락추세를보여왔으나, 올해의경우봄의기온변화가심하지않고가뭄또한심하지않았기때문에평년작수준을유지할것으로예상된다. FAO 와 WFP 평가단은 2012/13 년의정곡기준북한의곡물총소요량을 543만톤으로추정하였다. 이중국내생산량은 492만톤으로, 수급균형을이루기위한곡물수입소요량은 50만톤으로추정된다. 이부족량 102
북한경제연구협의회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에서의북한경제와한국경제 중북한당국이표명한대로 2012/13년곡물수입량을 30만톤으로가정하면, 최종적으로 2012/13 년곡물순부족량은 20만톤이된다. 이는과거에비해크게감소한수치이다. 일부연구자들은국내생산량이과대포장되었을가능성을제기하기도한다. 이를배재할수는없지만또한반대로이를증명할증거도없다. 오류여부를확실히판단할수는없지만, 알려진자료를바탕으로시장의상황을살펴볼필요는있다. 오늘날북한에서는배급또는공식적분배방식을떠나시장을통한식량조달비중이높아진상태로, 시장가격상황이국내의식량수급실태를가장잘보여주고있다. 2009년 8월부터 2013년 3월까지의평양의쌀시장가격추이를살펴보면북한원화로표시한시장가격은최근들어서도급격히상승하고있다. 즉, 2012 년 3월 2,900 원수준이었던시장가격이 2013 년 3월 6,775 원까지상승하였다. 하지만이러한시장가격의상승이북한내식량부족을의미한다고는볼수없다. 이러한시장가격의상승은북한의통화증발때문에빚어진현상이다. 달러화로환산한쌀시장가격의장기추세는국제식량의곡물가격, 특히중국동북지역쌀가격의장기추세와크게차이가나지않는다. 이를통해볼때 2009 년부터 2013 년현재까지북한의식량상황은크게나빠지지않았음을알수있다. 오히려작황의호조로인해물량적으로본식량의수급상황은예년에비해더좋아졌다고할수도있다. 물론시장화에따른양극화로인해, 취약계층을고려한질적차원에서의식량부족상황은더악화되었을것으로추정된다. 현재이러한측면이북한식량상황의문제가아닌가싶다. 달러화로표시한평양의쌀실질가격추이를살펴보면, 식량가격이꾸준히상승하고있는데, 2013 년 1~3월의가격은 2012 년 1~3월의가격에비해낮아졌음을확인할수있다. 지금까지는시장가격이상승하고있음에도불구하고북한의식량상황이나쁘지않다고평가를해왔으나, 오히려가격이떨어지는현상을보인다는것은작년및재작년에비해북한의식량사정이좋아졌음을의미한다. 그러나여기서주목해야할점은환율및북한원화로표시한식량가격이 2012년 3월에비해 2013년 3월에모두 2배로상승하는등인플레이션추세가이어지고있다는것이다. 과거북한은이와같은통화팽창문제를크게두차례에걸쳐해결한경험이있다. 2002년 7월경제관리개선조치를통해공공배급가격을크게인상시킴으로써한번해결하였으며, 2009 년에는 100 대 1 화폐개혁을통해통화팽창을해결한바있다. 문제는더이상이러한문제를해결할방법이마땅치않다는점이다. 현재북한은진퇴양난의상황에빠져있는것으로보인다. 재정의파탄을통화증발에의존하는데에는한계가있고단기적으로다른수단도없기때문이다. 103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정우진 : 북중간의에너지와자원교역을중심으로최근동향과북한의에너지및자원의상황을살펴보았다. 에너지와광물자원부문은다른부문과마찬가지로신뢰할만한데이터가부족한데, 북한과중국의자원교류데이터를발표하고있는중국해관의통계를바탕으로북한의사정을확인해볼수있다. 일단북한의석탄수출이 2010 년부터급격히늘어난다. 그전에는북한의대중국석탄수출이통상 1~3억달러수준이었는데, 작년에는 12억달러정도로 3~4배증가했다. 이같이북한의대중석탄수출이크게늘어난것은북한의대일석탄수출이막히면서이물량을한국으로수출하다가 2008~09 년경부터한국으로의수출길도막히면서이것이중국으로전환된것으로보인다. 북한의석탄수출이늘어난또하나의이유는에너지경제연구원김경술박사에의하면북중간구상무역방식의석탄교역이급증한결과로도분석된다. 국경지대중국기업들이북한에탄광설비와자금을제공하면북한이석탄을생산하여석탄으로변제하는방식의교역이크게증가한것이다. 또한작년에북한과의교역을위하여북한을많이오고갔던한사업자에게들은바에의하면북한당국은개인의상업적석탄생산및수출을일부허용했다고한다. 북한당국이일정분의조세만지불하면개인의생산및수출을허용함에따라많은석탄사업자들이활동하고있다는것이다. 이때문에북한의전체석탄생산량이증가했을가능성도점쳐지고있다. 한편, 작년에는상반기때석탄수출이크게증가한반면 8월이후에는석탄수출이크게줄고있다. 2011년에도하반기때에는수출이줄어드는경향을보였지만 2012년하반기에는더큰폭으로떨어지고있다. 여기에는석탄수출을늘리는데에있어서북한자체의한계도있을것으로보인다. 화력발전소의석탄공급이제대로이루어지지않거나개인생산에대한규제강화또는장비및부품도입의문제등으로추정할수있겠다. 북한이중국과중요하게교역하는것중하나가석유인데, 북한의석유수입은군사적인문제뿐아니라경제적인문제와도크게관련이있다. 석유수입량은월별로는진폭이있으나연단위로보면큰차이가없다. 다만, 최근에북한의미사일발사와관련하여북한의금년 2월석유수입이없었다는보도가있었으나이것은통계상의오류로보이며, 전반적으로아직은북한이중국으로부터제재를받는다고볼수는없는상황인것같다. 전력공급은특별히통계자료가없어최근의상황을파악하기어렵다. 다만, 30만kW 발전가능한희천발전소가작년부터가동됨에따라전력사정이다소좋아졌을것으로추정한다. 부실공사라는등희천발전소를두고논란이많으나, 최근 2단계건설에착공한것으로봐서는어느정도이것이가동되고있을것이라고생각한다. 2010년부터석탄및광물자원수출이 104
북한경제연구협의회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에서의북한경제와한국경제 크게늘어나면서부터북한의수출은 2009년 4~7억달러정도에서 2012년에는 24억달러수준으로증가하게된다. 예전보다 4~5배많은외화가유입된것인데, 이것이북한경제와상당한관계가있을것으로보인다. 광물자원사정을보면 2009년통계상의오차도있을것을감안했을때 2010~12 년광물자원수출규모는과거에비해 3~4배수준으로늘어난다. 그중에서도철광석및선철수출이전체광물자원수출액에서약 75% 를차지하고있다. 이는수출물량의증가뿐만아니라자원가격이상승하면서광산장비를마련할자금도모아지는등선순환되면서광물자원생산을늘리는계기가되었다. 다만, 2012 년에들어서 2011 년보다광물자원수출이다소감소하지만이것은가격효과를포함한것으로, 물량의축소폭은이보다는작을것으로추정하고있다. 전반적으로중국과북한은자원광구투자유치를위해많은투자상담회를열고있으나실제투자는부진한상황으로보인다. 지난 1월북한은최근도로, 호텔등각종기반시설을건설해주는중국기업에광산개발권을부여하는새로운투자방식을중국기업에제안한바있다. 그이전 2012 년 9월에는북한합영투자위원회와중국해외투자연합회가 30억위안 (5,400 억원 ) 의대북광산투자펀드를조성한다고발표했으나이후추진상황에대한보도는없는것으로보아잘진행되는것같지는않다. 한편, 중국완샹그룹이투자한북한혜산청년광산은적자가계속되는등문제가지적되지만이러한것들이크게개선되고있지않아중국의대북투자는아직까지는많지않은것으로판단된다. 전쟁분위기로중국이북한석유수입등에제재를가한다고하지만아직까지그러한동향은전혀보이지않고있다고말할수있겠다. 김중호 : 남북간의긴장이고조되고있는상황에서북한은평양주재외국인들그리고서울주재외국인들에게대피하라는심리전을펼쳤는데, 역으로우리입장에서는북한정부가해외에체류하는북한사람들을자국으로송환하고있는지를주시할필요가있다. 확인한바에의하면해외에있는북한사람들은전혀송환되지않고있다. 북한이과연전쟁을할준비가되어있는가에대해그렇지않다고본다. 북한의관심은여전히외화벌이에있으며, 해외로인력을송출해계속해서돈을벌어들이는것에관심이집중되어있다. 중국이대북제재국면에서고민하고있는카드하나가북한의인력을다시돌려보내는것인데, 북한이이에민감하게반응하고있다는생각이다. 최근에조선무역은행이대북제재리스트에포함되었는데, 조선무역은행은북한의외환과관련된모든것을취급하는기관이므로이곳에제재를가하면마치파이프라인의 105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밸브를잠그는것과같은효과가기대되고있다. 이는금융거래의숨통을조일수있는사전조치를취한것으로해석이된다. 사실 2005년 BDA 사건이후북한은금융거래를금융전상망을통해서하지않고있다. 대부분가차명계좌를사용하고있고외국국적을취득한북한인들을통해서금융서비스를활용하고있다. 또한대부분현금을가지고거래계약을하거나물건을사고있다. 그렇기때문에당장조선무역은행제재효과는별로없을것으로보이지만, 미국에서는이를안전장치로마련한게아닌가생각된다. 정확한데이터를제시하기는어렵지만몇몇기관에서보유하고있는수치에따르면, 북한내에서유통되는달러규모는 5~6 억달러에서많게는 8억달러로추정되고있다. 김정은제1비서가관심을두는것은권력교체이후세대교체와더불어서이권재분배를통해북한내에서유통되고있는달러들이어떻게자신의통치자금과연계될수있을것인가라고말할수있다. 그동안우리의금융시장은북한의도발이있을때마다안정적인모습을보이고는했는데, 몇몇전문가들은그이유를굳건한방위태세또는정치체제의성숙도등으로설명해왔다. 하지만금융적인측면에서본다면조금다른설명이가능하다. 금융시장이라는것은향후예측가능성이있느냐에따라반응하게된다. 북한이도발하더라도그것이예측이가능하다면금융시장은크게요동치지않는다. 북한의미사일발사및핵실험그리고이에대한국제사회의대북제재등일련의작용- 반작용과정이어느정도예측가능한상태에서는금융시장이크게영향받지않는다고볼수있다. 그러나최근의상황처럼 3월초부터한달이넘도록북한의위협적인발언들이계속해서쏟아져나와공포가확산되고갈등해소의실마리가보이지않는상태가계속되다보니코스피지수하락이나선물시장의위축현상등금융시장의작은동요가감지되는것이다. 대부분의민간투자가들이태양절 (4월 15일 ) 이라는북한의주요시점을긴장국면의전환점으로주목하기때문에금융시장은생각보다크게동요하지않고있다. 지난달말북한이당중앙위전원회의를통해 경제 핵무력건설병진노선 을채택했는데, 이노선의주요과제중눈에띄는것은 대외무역의다각화 다양화를통한투자활성화 이다. 이는북한이관심을두고지속적으로추진하려는핵심과제들중의하나가바로외화를끌어오는것임을재확인하게해준다. 이를통해북한은북중간의경협을추진할뿐만아니라남한과 EU로부터의외화투입을기대할것이다. 당면과제는미국, 일본등과의관계를푸는것이라고하겠다. 북한이대남 대미대결상황에서박봉주경제사령탑을재출범시킨것은현재의체제피로감을완화시키려는조치로이해된다. 정치 안보입장과더불어경제적관심을대내외에홍보하려는조치인듯하다. 개성공단과관련해서북한은폐쇄한다는발언은하지않고 잠정중단 한다고하면서단지이후의상황에대해서는남측정부가하기에달려있다고하여재개의여지를 106
북한경제연구협의회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에서의북한경제와한국경제 남겨두고있다. 남측정부가폐쇄시키겠다는발언을하면남측정부를비난하며책임을전가할것이고, 유화적인입장을표명하면북한도뒤로한발빼면서상황을수습해명분을챙기려는것으로보인다. 개성공단에서의생산수준은 5 24 조치이후에상당히상승되었다. 보통 5 24조치로인해서남북경협이다무너졌다고하는데, 숫자만으로본다면위탁가공주문이개성공단으로몰리면서여기서생산한것으로남북교역액을대체하는상황이발생했다. 개성공단은남한에서북한으로현금이들어가는유일한공식창구인데, 매년 8~9천만달러에달하는현금유입이결코무시할만한것은아니라고본다. 북한이체제의자존심이나사상적인우월성을중시하여이를포기할가능성도있겠지만, 본인은개성공단을둘러싼협상이조만간다시시작되지않을까기대해본다. 개성공단은남북간에처음시도된경제협력특구이다. 과연개성공단을이대로두어야할것인가, 이를유지해야한다면어떻게발전시켜야할것인가, 만약폐쇄한다면이후새로운경협을시도할때에어떠한모델을가지고나가야할것인가등에대해다양한고민이본격적으로시작되고있는데, 본인은이러한진통이의미가있다고생각한다. 이석 : 현재북한경제가어떠하냐에관해서는지난해말부터시작해서여러사람들의논의가있었다. 어느쪽이맞는지를여러시나리오를놓고보고있는상황인것같다. 그래서오늘은특별한말을하기보다는그러한이야기를쭉해서지난 1, 2, 3월에본인이작성한메모를종합하여한국경제를제외한북한경제만을이야기해보겠다. 북한경제에대해그간의논의를살펴보면극단적인두개의대립적인시각으로나누어져있다. 부정적인시각은 5 24 조치를기점으로 2012 년하반기를기점으로나타나기시작했는데, 2013년박근혜정부가들어서면북한이상당히어려워질것이라고보는시각이다. 5 24 조치이후북한입장에서는이전보다돈이안들어오니까이를해결하는방법으로중국에대한수출을많이늘렸다. 한국에팔던물건을대중수출로전환시킨것이아니라, 대표적인전략물자인무연탄과철광석수출을늘렸다. 2011 년과 2012년을보면, 북한의대중국수출증가량의 70% 가무연탄과철광석두가지품목이다. 북중무역의수출입은 2012년 6, 7월하반기를기점으로마이너스이다. 이것을그림으로보면이시점을기점으로하여추세가역전됨을알수있다. 또수출이수입을끌어내리는것을알수있는데, 이는무연탄과철광석의영향임을알수있다. 이는물리적인한계에부딪혔다는것을의미한다. 북한이그동안임시방편으로해왔던것이끝났다는것을알수 107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있다. 이렇게되면달러유입에문제가생긴다. 북한은화폐발행즉시물가가높아진다. 북한은달러가없으면재정집행이어렵다. 살펴봤더니이기간에는환율이높아지게된다. 이러한상태가계속될것이라고보는것이북한경제에대한부정적인시각이다. 반대로긍정적인시각은, 북한주민의중국으로의출국자수에대한그림에서볼수있듯이 2009년대비 2012년출국자가 2배가까이늘었다. 이들은중국에가서돈벌이하는사람들이다. 이에따라 2010 년이후무연탄과철광석수출이급격히줄어들어도중국에나가있는북한주민의수가급격히증가하여달러가많이들어오므로문제가없다는시각이다. 현재의북한경제는 5 24대북제재조치의영향권에서완전히벗어나남북교역없이도새롭게정상화된상태로진입하고심지어는북한식경제개혁의움직임도시작되며더욱활성화될전망으로보는것이다. 그근거로는 2011년이후대외거래에서의비상품교역활성화및이로인한달러유입, 평양의경제활성화, 호전되는식량사정을들수있다. 이렇게해석하게되면상당히긍정적이다. 이는 5 24 조치의영향력에서벗어난새로운시스템이들어와서내구성이있다고보는시각이다. 다음으로남북관계요인을보겠다. 북한이남북관계에대해어떠한태도를취하고있는지를살펴보는것이다. 북한은사실상의핵보유국으로볼수있는데, 현재북한이핵문제에대해충분히여유가있다면유화적인태도를보일것이다. 이는북한의비뚤어진자신감으로볼수있다. 반대로북한이위기가턱밑까지왔다면곧바로협박을할것이다. 어떻게해서든지한국을굴복시키려고할것이다. 이는협박과대결로볼수있다. 현재나타나는사실은북한이매우급하고협박을하기시작했으며그협박의속도가이상할정도로매우빠르고강하다는점이다. 중국도북한이핵무장으로가면통제가안될것이라고생각하는것같다. 왜냐하면그렇게되면중국의레버리지라는것이없어지기때문이다. 만약북한이완전한핵보유국이되어한국이이에대해굴복했다고가정하면북한은중국의말을듣지않고미국의입장을따라갈것이다. 북한은급하고초조한상황에서한국, 미국, 중국이가만히있는태도를취하여북한이항복하면좋을것이라고보는데, 앞으로의상황은잘모르겠다. 신범철 : 정리를해본다면소위북한의 4대선행부문은별로개선된것이없어보이고, 식량부문은나쁘지않은, 광물및에너지자원은좋지않은상황인것같다. 그리고개성공단은최악의상황이라고봐야할것같은데, 처음에본인은북한의경제상황이나쁘다는가정하에개성공단상황을좀더끌어가도될것같고봤는데, 생각했던수준과는다르게최악이라고하니어느정도결론을바꿔야할지도모르겠다. 그러나개인적으로는북한이 5월을전후하여 108
북한경제연구협의회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에서의북한경제와한국경제 입장을바꾸고평화공세나대화공세, 경제협력공세를할수있다고보는데, 그럴경우좀더정확한우리의입장을마련하기위해서라도지금우리가먼저나서기보다는당분간관망세를유지하는것도나쁘지만은않을것같다는생각이다. 물론관계악화의위험은따른다. 다만, 군사도발의경우아직섣불리나올가능성은없다고보며오히려일부에서상당한경제적어려움을겪더라도상황을그대로타개 (muddle through) 하려는모습을보일것으로예상된다. 2. 토론 조병구 : 발표자들의발제를들어보았으니토론을부문별로나누어진행해보는것이 어떨까한다. 먼저농업부문에대해권태진박사에게토론을부탁한다. 권태진 : 현재정부에서미국, 중국, 러시아등과다양한외교적접촉을시도하고있는듯하다. 이러한움직임으로볼때우리정부는북한의책동이군사적행동으로이어질것이라고는보지않는것같다. 현재의위기를완화시키기위해일차적으로주변국들의북한에대한외교적압박을통해문제를해결코자하는것같다. 북한이취할수있는경제적조치로는개성공단의폐쇄가맨마지막수단이지만여기까지는가지않고개성공단의잠정적휴업선에서마무리되지않을까예상한다. 북한의도발행위를북한의식량문제와연관하여생각해보자. 금년봄의식량상황은최근 10년중가장좋을것으로예상된다. 현재북한이취하고있는여러가지행동들도지난해의비교적좋은식량작황에기인한것으로볼수있다. 아직은외부로부터식량을지원받지않더라도좀더버틸수있을것으로본다. 그렇지만북한이충분한식량을확보하고있는것은아니다. 이제춘궁기에접어들었고 5월이면식량부족을걱정해야할시점이다. 유엔을비롯한국제사회의북한에대한식량지원이이루어지지않고중국으로부터의식량수입에문제가생길경우상황은달라질수있다. 국제사회의식량지원은북한에있어굉장히중요한문제이다. 지난해북한에대한중국의상당한식량지원및교역이이루어졌으나, 현재의분위기속에서는중국이작년과같은태도를취하지는않을것으로예상된다. 아직까지국제사회가대북식량지원에대한결정을명확히내리지않고있으며이미내린결정도 109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실행을지체시키고있는상황이기때문에 5월이후북한의식량사정은달라질수있다. 북한내부에서도식량가격이움직이기시작했으며일부지역에서는식량부족의징후가나타나고있다. 이러한점때문에북한도현재의상황을길게가져가지않고가능한한빨리마무리지을가능성이높다고판단된다. 앞에서언급된석탄부문에있어서도북한의실제상황이여러국내전문가들의의견과는다를수있다고본다. 북한고위급탈북자들의이야기를들어보면북한에는석탄매장량이많지만대량생산이어렵다고한다. 석탄층이얇은데다가단층이많아기계를통한채탄이어렵기때문에사람이일일이채굴해야하는상황이라는것이다. 이러한한계로인해북한내석탄을주요수출품으로삼기에는문제가있다. 그리고북한은주체철, 주체섬유, 주체비료등석탄을기초로한 3대주체공업을강조하고있다. 모두북한지역에풍부한석탄자원을기초로공업화를추진한다는목표이다. 만일북한지역에매장된석탄을대량으로손쉽게생산하지못한다면 3대주체공업은발전에한계가있을수밖에없다. 한편, 북한의곡물생산은중국으로부터의비료수입과도연관이높다. 북한내비료생산에한계가있고에너지상황또한좋지않기때문에, 비료수요량의 10% 정도만이북한에서생산될뿐이며나머지는중국으로부터수입하거나지원에의존하고있는상황이다. 지난해는중국이북한에적기에비료를공급하였기때문에북한의가을작황은비교적좋았다. 그러나지난해와는달리금년에북한이중국에서필요한양의비료를적기에수입하지못한다면올해농사는장담하기어렵다. 최근북중간에는미묘한기류가감지되고있어북중간식량이나비료의교역이원만치않을수도있다. 이러한측면에서북한은현재의상황을조기에마무리지으려고할것이다. 한가지추가하자면, 최근북한은군사적긴장상태를고조시키면서한편으로는박봉주를전면에내세우는인사를단행하였다. 여기에는지난해에논의된 6 28 조치와같은개혁성향의경제정책을북한이추진할가능성도있다고생각한다. 원래농업부문의관리체계개선에이어기업소의개선이그다음으로계획되었으나, 양쪽의개혁을동시에추진하는정책을의외로빠른시기에도입함으로써지지부진한경제부문의발전을시도할수도있다. 이때필요한것이자본이다. 자본이확보되지않은상황에서의농업개혁은실패할것이분명하다. 중국, 한국등외국기업의대북투자를유도하여개혁을성공적으로이끌어내기위한차원에서도북한은현사태를조기에마무리해야할필요성이있다. 110
북한경제연구협의회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에서의북한경제와한국경제 최수영 : 북한은현재국방과경제, 이두가지를동시에추진하려한다고보아야할것이다. 그러나역사적으로보면두가지를동시에추진하면실패하는사례가많았다. 북한은나름대로시나리오를가지고있는것으로보인다. 경제적으로는굉장히많은자본을투입하면어느정도의수준에올라오겠지만, 채산성이안맞는현실적문제가있게되어어려움이있을것으로예상된다. 북한은박봉주등이중심이되어경제부문에서변화를주겠다고생각하고있는것같다. 결론적으로북한은전체적인시나리오를가지고있는것으로보인다. 북한의생각을추측해본다면핵개발을하여실용화되든안되든국제사회에서큰자본을얻어내겠다는계획인것같다. 이것이통할지안통할지는모르겠다. 북한은핵개발을통해국제사회에서크게거래하여경제문제를회복하겠다는것인데, 그것이가능할지는앞으로계속지켜봐야할것이다. 이상준 : 작년에김정은이 4월에발표했던국토관리담화를살펴보면, 북한국토개발에대한방향을제시하면서지하자원 광물에대해언급하며중국은광물을수입하여가공해서부가가치를올리는데북한은그러지못하여팔고만있어이에대한통제가필요하다는언급이있었다. 그이후 6월, 7월부터수출이조절되었던거같다. 앞에서언급한물리적한계, 노동력수출과맞물려서일관된정책이집행되었다는것을확인할수있었다. 우리가생각해봐야할점중하나는북한의출구전략이어떻게될것인가하는것이다. 북한이원하는것이파국이아니고지금의행동은자신들이원하는것을얻기위한것이라면, 우리가퇴로를열어두어서어떻게북한이경착륙이아니라연착륙하도록유도할것이며 5월이후의상황변화에어떻게준비할것인지가우리에게주어진고민거리라는생각이든다. 물론최악의시나리오에대한대비도필요하겠다. 또하나지금의남북간의상황이최악인가에대해서개인적으로의문이든다. 예를들어 1994년미국은북한을폭격하겠다는의도를실제로가지고있었는데, 이는지금과상황이다른것이라고생각된다. 지금우리나북한모두선제공격을할가능성이낮아보여서과연지금의상황이우리가경험해보지못한최악의상황인것인지의문이든다. 111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안병민 : 최근북한에다녀온사람의말을들어보면김정은집권이후북한은각종대형공사가한창이라고한다. 김일성옆에김정일동상을새로건설하고있으며, 수만개의영생탑글귀에도김일성에김정일을추가하는작업이대부분완료되었다고한다. 그비용을충당하기위한엄청난재정적수요가발생하였을것이며, 북중교역수입의상당부분이이러한공사비용으로투입된것으로보인다. 최근의북한과중국간의교역을보면중국이높은수준의통제를하는것같다. 중국에취업하고있는북한근로자들의 3개월짜리비자갱신을해주지않거나절차를복잡하게하는등기존과다른엄격한기준을적용하고있어중국체류북한사람들의상당수가귀국하는사태가발생하고있다. 그리고북한에서필요로하는물자조달 수송 통관업무를주로하고있는중국주재북한기업인들은, 북중간무비자인중국관용여권이아닌, 중국기업에취업한형태로북중국경도시에체류하고있었다. 하지만현재까지북중간에관례로여겨왔던탈법 편법조치들이일체불허되는사태가발생하여, 이들에대한체류자격변경혹은불법체류금지조치로인해중국주재북한기업인중개형태의북한물자조달구조가유지되기어려워지고있다. 게다가북한접경중국도시지역에여러가지형태 ( 주로북한음식점이나소규모상점 ) 로취업하고있는사람들에대해강력한불법취업금지조치가시행되고있다. 본인은북중간접경지역인신의주와단동, 남양과투먼을육상으로통과한바있다. 북중세관에서자주볼수있는것은, 공적인수송보다도개인이갖고다니는수화물량이엄청나다는사실이다. 그런데중국은이러한수화물의수와양을엄격히제한하는조치를취하고있는것으로알려져있다. 이러한조치는북한에상당한압박이될것으로보인다. 또하나말씀하고싶은것은개성공단문제이다. 개성공단사업이중단되면개성지역에중국기업이입주할수있는지에대한문제제기로서, 본인의견해는불가능하다는것이다. 중국기업이개성공단에들어간다고할경우우리가북한으로보내는송전이모두끊길것인데, 안정적인전력송전이보장되지않는상황에서공장을가동하는것은불가능하다. 또다른문제로는원자재조달, 완제품수송를위한물류시스템이경쟁력을확보하기불가능하다는점이있다. 북한에서원자재및제품수송과관련된물류시스템은매우초보적인수준으로, 소요되는비용과시간이엄청나다. 예를들면개성공단의주요반출입항만으로활용가능한항만은해주항과남포항이다. 그런데이곳을통해중국기업이물자를반출입한다면, 중국현지에서개성공단까지의수송일수는 13~15 일이상소요될것으로보인다. 현재중국항만에서미국서부의로스앤젤레스나샌디에이고까지화물수송을할경우 13일정도가소요되는것을볼때, 개성공단의취약한수송구조를쉽게파악할수있다. 또한도로수송시스템의 112
북한경제연구협의회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에서의북한경제와한국경제 구조적인문제점이있다. 북한에서는고속도로를통한화물차운행이제한되고있다. 현재중국단동에서신의주를거쳐평양까지의화물수송은주로 1급도로를이용하고있으며, 개성까지의예상소요일수는평균 3~5일로보인다. 이러한전반적인시스템을감안한다면, 중국에있어서개성공단은전혀강점이없다는것이다. 탁성한 : 북한경제는일반민수경제와군수산업으로이루어진이중경제 (dual economy) 이다. 학자에따라다르지만대개북한경제의 50% 정도는군사경제라고도이야기된다. 오늘의토론을토대로추론해보면, 현재북한은다급하기도하지만여력도있는상황이라고보인다. 여기서여력의원천은농업적측면을바탕으로하며, 군수산업분야에서의자신감도있는것으로보인다. 작년 4월, 북한의미사일발사를계기로본북한의군수산업평가에관한발표를한적이있다. 당시미사일발사비용을추계함에있어 4~5 억달러, 시설비와인건비등을제외하고도적어도 1~2억달러는소요될것이라고예상하였다. 더불어미사일발사와핵실험이동시에이루어진사례가여러차례있었으나, 북한의군사적행동이더심화될것이라고보지는않았던것과달리, 북한은해당연도 12월에핵실험을강행하는등의행동을취하였다. 이러한여력이어디서나오는가하는의문이든다. 통계에잡히지않는부분인군사분야에서의무기수출을고려해보아야한다. 국정원자료등을통해파악가능한북한의무기수출액은 1~2억달러정도이다. 과거북한경제의상황이좋았던 1987~88 년에는 7~8억달러가량을수출하기도하였다. 참고로 2010~11 년북한의총수출액이 25억달러이다. 이러한경제규모의국가에서무기수출액이 7~8억달러라는것은엄청난수치이다. 북한의경우여러제재로완성장비형태로의무기수출은불가능하나, 부품형태로의수출액은우리가짐작하는것보다훨씬많을것으로예상된다. 그렇다면북한으로서는현재이러다말아도충분히많은효과를보았을것이다. 즉, 자신들이수출할수있는상품의광고를효과적으로했다는것이다. 미사일발사로당분간은국제제재를받더라도 1~2년후에는무기수출증가가이루어질것이다. 더불어시기적문제와관련하여현재의일촉즉발의상황이어떻게전개될지는예측하기어려우나, 보통 3~4월은각종훈련으로인한설전이오가는등관계가좋지않았던시기로평가되어왔다. 그러나그렇다고하여이번에도상황이무난히종료될것이라고전망하는것은위험하다. 현상을주시하며조심할필요가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도이러한행태는반복될것으로예상된다. 113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조남훈 : 중요한논점이많이나온것같다. 긴장고조국면에관한최근의여론을살펴보면일부희망적인관측들도나오고있는듯하다. 즉, 북한은긴장국면을지속시킬경제적여력이없어서긴장국면이곧마무리될것이라든지또는북한군의능력으로는전면전을수행할수없을것이라는의견들이바로그러한것들이다. 사실이러한의견들은국민에게안도감을주고있어서나름대로긍정적인역할을하는것같다. 하지만본인개인적으로는현재의긴장국면은조금더오래지속될것이라는생각이든다. 북한은나름대로뭔가를얻으려는심산으로긴장국면을조성하고있다. 기업활동으로비유한다면북한은긴장국면조성을통해서이윤을얻으려고한다고할수있다. 이윤이란총수익에서총비용을제한것이다. 그런데북한이이윤을얻으려면총수익이반드시총비용보다커야한다. 사실북한은긴장국면을조성하는데에이미많은비용을소모하였다. 미사일생산및발사비용, 개성공단중단에따른소득감소, 해외송출노동자감소에따른외화유입감소및유엔제재에따른교역감소등이바로그러한것들이다. 북한이이윤을창출하기위해서는이러한비용들을능가하는상당한수익을얻어야하는데현재로서는북한이얻는것은아무것도없는실정이다. 따라서북한은앞으로수익을얻으려고노력할것이다. 그런데그수익은 2 29 합의때미국이약속한것이상이어야한다. 북한이 2 29 북미합의를깬것은그것이만족스럽지못했기때문이다. 따라서북한은좀더큰수익을얻기위해서현재와같은긴장국면을지속하려고할것이다. 한편, 북한의경제상황때문에긴장국면이오랫동안지속되지못할것이라는예측도사실이아닐것이라고생각된다. 북한의경제상황이좋지않은것은사실이나돈과관련하여북한의정책방향에더많은영향을주는것은북한의내부경제사정보다는통치자금의규모라고생각된다. 북한은긴장국면의지속에대비하여상당액의통치자금을비축해놓았을가능성이있다. 그렇다면문제는이처럼비축된통치자금을이용하여언제까지긴장국면을조성할것이냐하는것인데, 본인의생각으로는현상황이북한이핵탄두소형화 경량화능력을보여주는지경까지도이를수있다고생각된다. 북한의핵능력에대해서는많은이론이있으며그누구도확고한답을제시해주지못하고있다. 하지만북한의핵능력, 특히소형화및경량화기술은거의완성단계에도달했을가능성이상당하다. 중국이 1950년대핵실험이후핵탄두를소형화 / 경량화하는데에 3년이걸렸다. 그런데북한의최초핵실험이후 3년이라는기간이이미경과하였다. 따라서북한의핵탄두소형화 경량화는거의완성단계에이르렀다고생각하는것이합리적일것이다. 한편, 최근북한이시험발사하려는무수단급미사일은은하 3호와는달리핵탄두 114
북한경제연구협의회남북한군사적대치상황에서의북한경제와한국경제 탑재가가능한 ICBM 으로추정된다. 따라서북한이무수단급미사일의시험발사에성공하고이후미국의해커박사와같은인물을초청하여그들의핵능력을보여준다면한반도정세는완전히달라질것이다. 그때에는중국의대북레버리지는무력화될가능성이높으며북한은그들이원하는것을얻기위해서한미양국을더쉽게협상테이블로불러들일수있을것이다. 결론적으로만약북한의핵능력이거의완성되었고북한이이를진정으로한국과미국에과시하려고계획하고있다면금번긴장국면은앞으로도상당기간동안지속될것으로보인다. 조병구 : 오랜시간토론해준발표자들과토론자들에게감사한다. 115
경제자료 김정일이후의한반도 : 도전과기회 Katharina Zellweger
경제자료김정일이후의한반도 : 도전과기회 김정일이후의한반도 : 도전과기회 1) Katharina Zellweger Stanford University, Pantech Fellow in Korean Studies kzellweger@stanford.edu 카타리나젤웨거 (Katharina Zellweger) 는지난 5년간스위스개발협력청 (SDC) 평양사무소장으로북한에거주하면서스위스정부의대북지원사업을총괄했으며, 현재는미국스탠포드대학교아시아태평양연구소방문연구원으로대북인도주의적지원사업에대한연구를하고있다. 본자료는작년가을까지북한을방문하면서경험했던북한내부의모습을알리고김정일사망이후들어선김정은체제하의북한을조망하고자그녀가칠레카톨릭대학컨퍼런스에서발표한자료이다. 저자의동의를얻어국문번역본과원고본문을함께싣는다. * 본지에수록된내용은집필자의개인적인견해이며, 당연구원의공식적인의견이 아님을밝혀둔다. 번역 : 유재승연구원 (jryu01@kdi.re.kr) 1) 본문은 2012 년 11 월 7-8 일, 칠레가톨릭대학컨퍼런스에서발표된내용으로써저자의동의를얻어번역한것이다. 119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전세계에서 북한 이라는단어를언급했을때즉각적으로돌아오는반응은핵무기, 기아, 빈곤이다. 그러면서그곳에살고있는 2천400만의평범한사람들과그들이매일매일먹고살기위해고군분투하거나지극히평범한삶을살고있다는사실을쉽게잊어버리고는한다. 본인은 1995년부터북한에대한인도주의적지원과개발원조에관여하면서 2006년부터 2011년까지는스위스개발협력청 (SDC) 평양사무소장으로 5년간평양에거주한바있으며지난 2012년 10월에는스위스대표단과함께다시한번북한을방문할수있었다. 북한을방문한것만큼한국을방문한적도많지만, 오늘의발표는분단된한반도의북쪽얘기에집중하고자한다. 북한내부에서의생활과북한을상대방으로두고일했던본인의경험을오늘이렇게이야기할수있어기쁘다. 1. 2008 년유엔의북한인구조사주요결과 평범한북한가정이가지고있는가장큰네가지걱정거리는식량, 주거, 건강, 그리고 아이들교육이다. 북한사람들에게이러한기본적인요소들은한때주어졌지만이제는생존과 직결된문제로전락하고말았다. 조사항목총인구인구구조기대수명도시인구가구구성혼인여부문명률노동참여율주요산업 내용 24,052,231 명. 북한은이렇다할만한소수민족이없는단일민족사회지만소규모의중국인들이북부지방에서활동하고있으며북한사람과결혼한수백명정도의일본인배우자 ( 특히여성 ) 들도존재한다. 65세이상인구가전체의 8.7% 를차지한다. 북한의 1993년당시인구구조가젊었다면 2008년에는고령화된모습을보이기시작했다. 한편, 한국의경우전체인구의 9.3% 가고령층에속하며, 가장고령화된국가는이탈리아와일본으로이들은각각 65세이상인구가전체의 20% 를차지하고있다. 남성은 65.5세 (1993년당시 68.4세 ), 여성은 72.2세 (1993년당시 76세 ) 로한국인들이북한사람들보다평균적으로 12년더사는것으로나타난다! 전체인구의 60.6% 로 1993년이후거의변화가없다. ( 중국도시인구비중의경우 1990년 26% 에서 2010년 50% 로급격히증가 ) 590만가구로구성되어있으며가구당평균가구원은 3.9명이다. 전체가구의약 31.5% 가평균 3인으로구성된핵가족인것으로나타난다. 거의대부분의사람들이결혼하는반면이혼사례는드문것으로보이며, 초혼중간연령은남자가 28.4세, 여자가 25.6세인것으로집계된다. 10세이상문명률은거의 100% 로나타나며이는남녀학생들에게제공하는 11년무상의무교육의결과로보여진다. 한편 2차이상의고등교육부터는교육성취도의보편성이떨어지기시작하며특히 3차교육을받을수있는기회는적은것으로나타나며 16세이상북한남성 7명중 1명, 여성 12 명중 1명만이대학교육을받는것으로집계된다. 또한학력을소지한북한사람들은대체적으로도시지역에거주하고있는것으로보인다. 16세이상의북한사람중 174만명이민간인인것으로나타나며이중 70% 가기업소, 협동농장, 공공기관에서근무하고있는것으로나타나다. 은퇴인구는약 300만명에달하며대부분여성들로이루어진 100만명정도의북한사람들이가사를전담하고있는것으로보인다. 노동인구의 36% 가농림수산업에종사하고있으며 24% 가제조업, 6% 가공공행정분야에종사하고있다. 출처 : DPR Korea 2008 Population Census, UNFPA, UNCBS ( 저자의요약 ) 120
경제자료김정일이후의한반도 : 도전과기회 한편, 평양을제외한나머지북한지역과평양간의편차는극명한대조를이루고있으며그간격이점점벌어지고있다. 자원의대부분을평양이누리고있는가하면빈부간의격차가심화되어더많은사람들이빈곤과직면하면서미미한사회안전망사이로떨어져나가고있는것으로보인다. 2. 김정일사망이후의북한 세상은 2011 년 12월 17일김정일이사망한이후며칠동안눈물바다에뒤덮인북한사람의모습을 TV를통해보면서충격에휩싸였다. 즉각적으로북한의붕괴, 남한과의충돌, 개혁개방, 심지어는통일까지다양한추측이나오기도했다. 가족, 당, 군부와함께집단지도체제 (collective leadership) 를형성했다는전제조건이있으나, 현재김정은은권력을손에쥐고있다. 이러한지도체제는김정일의건강이악화되었던 2008년부터이미나타나기시작했으며만에하나북한의엘리트집단내에갈등의소지가있다하더라도정권생존이파벌주의 (factionalism) 보다우위에있을것이라고생각한다. 평양지도부는그들의앞날이연속성과안정성의기치아래확고히자리하기를희망하고있다. 게다가북한정권은비록몇몇요소들에제한을두거나동결조치를취할가능성을염두에두고서라도생존을위해서라면핵개발프로그램은유지시켜야한다는믿음을깊이간직하고있다. 핵억지력 (nuclear deterrent) 이갖춰지면북한정권은안전하다는느낌을더받을것이기때문에중국의지원내지는압박속에서느린속도의경제개혁을향해서서히나아가고자하는마음또한커질수도있다. 그러나동시에내부사정, 지역, 국제정세에따른북한의도발가능성도배제할수없다. 하지만북한에게있어매우중요한국가인중국이안정을추구하며자국으로의대량난민유입과같은사태는원치않는다는것또한주지의사실이다. 이러한분위기속에서바라본북한은현재까지권력세습이대체적으로원활하게진행되어왔다고본다. 그러나김정은이과연얼마나정권을장악하고있는지는차후에나알수있을것으로보인다. 121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3. 인도주의적지원과개발원조의필요성 가. 북한의식량안보현황과식량지원 북한은 1995 년부터인도주의적지원과약간의개발원조를받아왔다. 이를통해많은사람들의목숨을구할수있었으며, 식량안보, 보건, 식수, 위생등의분야에서뚜렷한개선이이루어졌다. 그럼에도현재의식량사정은취약하다. 기근이아니라만성영양실조와곳곳에서발생하는극심한빈곤과기아가문제이다. 섭취영양소도탄수화물을기반으로한곡물류에집중되어단백질, 지방, 비타민과같은요소들은찾아보기힘들다. 북한에는아직도굶주린사람들이많이있다는얘기이다. 지난가을에북한의 1인당하루평균식량배급량은 400g 또는약 1,400kcal 정도였다 ( 백미 100g 당 363kcal, 옥수수 100g당 320kcal 기준 ). 약 67% 정도의북한사람들이이러한공공배급제 (Public Distribution System) 를통해식량을공급받고있으며이들대다수는노동자계층이다. 다시말해이들은북한당국으로부터자신들의주식을배급받고있다는의미이다. 하지만배급제자체는이제더이상제대로작동하지않고있다. 비록완전히폐기된제도도아니지만, 배급제를통한식량조달이북한전체인구에고르게미치지못하고있기때문이다. 유엔의세계식량계획 (WFP) 은북한에있는약 350 만명의취약계층에게식량지원을제공하는것을목표로삼고있다. 구체적으로는여성및영 유아, 학생들을비롯하여가뭄기북한동북지방에거주하고있는고령층등에대한지원등이있다. 다양한모니터링활동도벌인다. 예를들어지난 5월, WFP는약 350회에걸쳐북한의 9개도, 65개군에대한방문조사를실시한바있다. 그러나예산부족문제로인해때로는이미계획된활동을제대로수행하지못하는경우도있었다. 식량지원이불러오는파급효과를생각한다면결코수혜자들을쉽게줄이지못할텐데말이다! 가뭄이나홍수와같이다양한형태의자연재해는매년추수활동과주민들의안정된생활에영향을주기때문에걱정거리가아닐수없다. 국지적으로발생하는재난일지라도취약계층에게는더욱더큰피해를주기마련이다. 식량지원을포함한인도주의적지원이아직도매우필요한이유는무엇인가? 그답은분명하다. 사람들이생존하기위해필요한기본적인요소들로부터자유로울때비로소서서히 122
경제자료김정일이후의한반도 : 도전과기회 자신들이처한상황을가늠해보고평가할수있는시간과에너지가생겨나기때문이다. 생활여건의개선은닫혀있는사회를여는데기여한다는말이다. 물론, 인도주의적지원이장기적인구조의문제를풀어나갈수있는해답은아니다. 북한당국은분명주민들에게더잘하고더많이베풀수있다고생각한다. 그러나정말그럴까? 지원된식량이군부로흘러가거나, 시장에서팔리거나, 비축되는등도달해야할사람들에게가지못할가능성은없는가? 이러한질문은비단북한뿐만아니라전세계에서활동하고있는지원기관들이가지고있는고민거리다. 결국모니터링의문제인데, WFP 가지난 15년간쌓아온경험으로미루어보아북한에서도충분히효과적인방식으로수행가능하다고본다. 의심이지원을보류하는이유가되어서는안된다. 북한의어린이들을돕는것은미래에대한투자일뿐만아니라무엇보다도인도주의적행위이기때문이다. 나. 개발협력은왜필요한가? 본인은스위스정부의대북협력사업을관장하며지난 2006년부터 2011년까지평양에거주했다. 북한의식량상황을개선하기위해벌인사업들로는경사지관리사업, 옥수수와배추에대한해충퇴치사업등이있었다. 역량개발프로그램 (Capacity Development Program) 을통해서는북한내에서수많은워크샵을개최했으며매년 80~100명의북한주민들에게해외연수의기회를제공하기도했다. 후자의경우북한의젊은외교관들을대상으로한최장 3개월동안의스위스유학, 법률, 금융, 재무, 평화중재등다양한분야에걸친단기연수, 농림업분야에대한중국장기연수, 기타컨퍼런스참가등의활동을벌인바있다. 본인이경험했던가장인상적인교류활동으로는평양경영학교 (Pyongyang Business School) 와의협력사업이떠오른다. 총 4회에걸쳐매회 12개의월례세미나를개최했으며이를위해매번각종기업소와단체에서 30~35 명의중간급관리자들이 3일간에걸친각각의세미나에참석하기위해몰려들었다. 강사들은홍콩경영협회 (Hong Kong Management Association) 로부터지원받아데려왔으며강의는소규모 MBA와비슷한형태로진행됐다. 이제북한사람들사이에서는시장경제가어떻게작동하는지에대한관심이훨씬많이생겼다. 경영학교에서제공했던과정들에대한피드백은대체적으로긍정적이었다. 참가자들은제공된교육이유용하고적절했다고여겼으며강사들역시이보다더열심히수업에임하는학생들을보지못했다고한다. 북한당국도이러한우리의활동에사의를표했으며 123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스위스정부는북한사회에소중한기여를했다고여긴다. 역량개발을통해북한사람들은개인, 단체, 사회와의협력을통해인적, 조직적역량을강화시켜자신들의업무를더잘관리할수있는방법을배웠다. 이러한활동은인간을개발사업의중심에두고그들의사고체계에영향을미칠수있는방법을찾아내는것이핵심이다. 4. 북한은변하고있는가? 평양에 5년동안있으면서본인에게종종들려왔던질문은북한사회에어떠한변화가있었냐는것이다. 최소한 5가지의변화를목격했는데, 본인은이를 5 M으로부른다. 오늘날의북한에서는시장 (Markets) 과돈 (Money) 이평범한주민들의일상에훨씬더큰역할을맡고있다. 통신수단으로휴대전화 (Mobile phones) 가널리쓰이고자동차 (Motorcars) 의숫자도늘어났으며, 평양에서는중산층 (Middle class) 이형성되고있는조짐이보인다. 이러한변화는최근의방북을통해서도다시한번확인할수있었다. ( 한편본인의친구는또다른 5M을얘기한다. 고통 (Misery), 영양실조 (Malnutrition), 위협 (Menace), 열광 (Mania), 그리고미사일 (Missiles) 이그것이다. 그리고아마미키마우스 (Mickey Mouse) 도추가해야할것같다.) 5. 2012 년 10 월방북당시의북한 평양중심부는김정은의할아버지인김일성의탄생 100주년이되는 2012 년을기해추진된도시개발사업으로꽤나변화된모습이었다. 현대식고층아파트, 새로운극장과컨퍼런스건물들, 수입품으로가득찬상류층슈퍼마켓등이들어섰으며만수대언덕은새롭게세워진김일성과김정일의거대한동상이매일수천명의방문객을맞이하고있었다. 비록지방몇몇곳에서도새로운정착촌이나마을이건설되었지만최근의개발로가장큰혜택을누린곳은평양이었다. 북한전체인구의약 8분의 1 또는 300만에달하는평양시민과나머지북한주민들사이의격차는벌어지고있었으며도시와농촌사이의격차도심화되고있었다. 평양을벗어나북한의다른지역들을찾아가보면쉽사리눈에띄는것이빈곤이다. 평양에서는승용차, 버스, 트럭등다양한이동수단이늘어난반면지방에서는자전거가 124
경제자료김정일이후의한반도 : 도전과기회 사람과물건을실어나르는주요수단으로자리잡고있었다. 하지만평범한북한주민들은여전히매일무거운짐을들고몇시간동안을걸어야한다. 방문당시는추수기간이었기때문에대부분의사람들이농사기계없이농사일에매진하고있는모습을볼수있었다. 아이들과노인들은어려운시기를대비해이삭을한톨한톨줍고있었다. 서방언론들에서보도된북한의농업개혁여부는확인할수없었지만그렇다고향후정책의변화나조정가능성을완전히배제할수도없었다. 시장활동에대한각종규제는약간느슨해진것으로보였다. 주민들이물건을사고팔거나물물교환을통해추가적인돈을벌거나연명하는데좀더수월해진모습이다. 북한에는이제 100만명에달하는휴대전화사용자가있다. 휴대전화를갖는것은모든북한사람들의꿈이되었지만평범한이들에게기기구입이란아직쉬운일은아니다. 휴대전화나카메라가있다면소규모사업체를꾸릴수있다. 물건을한군데서다른곳으로수송하거나, 자전거수리, 신발및옷수선가게를차리거나, 물건을판매하는것과같은소규모영세사업을차리는데유용하기때문이다. 이러한북한의전반적인분위기는좀더편해졌다는느낌이다. 여성들은시장에나가거나일과를마치고돌아오는길에서서로담소를나누고아이들은김일성광장이나고려호텔앞에서롤러블레이드를타며즐거운한때를보내고있었다. 개중에는팔꿈치와무릎보호대를착용한이들도있다. 젊은여성들의패션은밝은색계통의옷과하이힐등최신유행을따라가는듯한모습이었고몇몇은귀걸이나금줄에달린펜던트와같은장신구도착용하고있었다. 북한당국은스위스방북단에게지난 9월발표된새로운교육정책에대해서도알려줬다. 아이들은이제유치원 1년, 초등교육 5년, 중등교육 6년등 12년의무료의무교육을받게되며기술및직업훈련, 정보기술, 외국어와같은분야에대한수업에집중하게된다. 본인이북한을방문한지난수년간단한번도읽고쓰거나기초적인셈을못하는북한주민을본적이없는데, 이러한튼튼한인적자본이야말로북한사회가빠르게변할수있는긍정적신호라고확신한다. 또하나흥미로웠던점은기존의선동적수사가줄어들었다는점이다. 공식회담을비롯하여기존의북한동료들을만나거나관광지를방문할때, 선군정치에대한언급을전혀듣지못했다. 여기서생각해볼것한가지는 2012년에한국으로들어온북한주민들의숫자가감소했다는사실이다. 그해 1~9 월동안한국으로들어와정착한북한이탈주민수는 1,086 명이었다. 2012년전체로따져보면아마 1,382명이들어왔던 2005년당시와비슷한수준이 125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될것으로보인다. 이러한북한이탈주민의한국행은 2009년 2,900명으로그정점을찍게된다. 유입되는북한사람들의숫자가줄어든이유는무엇일까? 김정일사망이후북한과중국의국경지대에대한통제가강화돼서그런것일까? ( 기존에도이미철저하게감시되고있었다는점을감안했을때어떻게통제를더강화시켰을지는불분명하다.) 중국내에체류하고있는것으로알려진수천또는수십만의북한주민들에게무슨일이생겼나? 남한에서북한으로다시들어간박정숙씨의사례와같이북한의선전선동이효과를발휘한걸까? 아니면젊은지도자인김정은에대한새로운기대와희망이북한에존재하기때문인가? 또하나의새로운현상은북한사람들의해외활동이활발해졌다는것이다. 일정요건만갖춘다면친지방문을위해중국을방문할수있게되었으며많은근로자들이중국과러시아를비롯하여아프리카와중동에까지정부간협정을통해파견되고있었다. 또한북한을방문하는관광객의수도증가하고있다. 대부분이중국인관광객들이지만다른국가의관광객들도점차늘어나고있었다. 전반적으로중국이북한에영향력을발휘하고있다는느낌이강력하게들었다. 대부분의투자가중국으로부터들어오고있었으며 ( 예를들어채광부문 ), 시장에비치된물건들이나지원또는특혜수입으로들여온식량도중국산이었다. 북한과접경한중국의국경도시단동바로옆에위치한두개의조그마한섬 ( 황금평, 위화도 ) 에는경제특구가만들어지고있으며이들은단동시개발계획에포함되어중국의첫경제특구인선전지구의개발모델을따르고있었다. 그럼에도북한과비즈니스를한다는것은매우복잡한일이다. 게다가대부분의서양기업가들은유엔과미국의경제제재를받고있는북한을기피하고있다. 우리는북한을중국의품으로밀어넣은것이다. ( 한국의대중국무역은미국과일본과의무역을합한것보다많다. 이는한국이미국과중국사이에서균형을잡기가점점어려워진다는것을의미하며한국에게는중국과의관계가비단북한때문만이아니어도더욱중요하게부상할것이다.) 6. 북한의내수시장 북한의농촌시장은 10일장의형태로오랫동안존재해왔다. 물건을사고팔거나물물교환하는행위가시장활동의대부분을차지하고있다. 이제는모든대도시와마을에상설시장이들어섰다. 이중가장큰시장은평양에있는통일시장으로이곳에는외국인들도출입할수있다. 시간만있다면시장에서거의모든물건을구할수있다. 음식, 옷, 신발, 주거용품, 126
경제자료김정일이후의한반도 : 도전과기회 가구, 전자제품등이있으며몇몇북한산물품을제외하고는대부분이중국과몇몇동남아국가에서들여온물건들이다. 곡물거래는금지되어있다. 결제화폐로는북한돈을사용하지만외국인들을위해여러가게와레스토랑에서는유로화, 미국달러, 중국위안화등을받고있었다. 지난 4월중국돈 1위안은북한돈 635 원에교환할수있었고 10월에는 920원에거래되고있었다. 1유로는공식적으로는북한돈 137 원에교환되지만거리에서는최고 8,000 원까지거래되고있었다. 북한주민들의임금은쉽게가늠하기어려웠다. 북한원화로받는금액과더불어공공배급제를통한식량, 국영상점으로부터의물품또는야채식용유쿠폰이나레스토랑식사권과같은다양한방식이산재해있기때문이다. 최근에는평양에싱가포르와합작하여수입품으로가득한 CJ 선라이즈시장과레스토랑, 그리고대형놀이동산과수영장이문을열었다. 분명돈이있는북한사람들은더높은생활수준을영위하고있었다. 7. 주요질문들 가. 돈은어디서들어오고있는가? 이러한일체의새로운변화를뒷받침하는자금은여러경로를통해유입된다. 중국과의무역, 채광및자원채취사업, 밀수와부패행위, 해외파견근로자들의송금 ( 북한근로자들은러시아, 말레이시아, 중국, 아프리카, 중동등지에서일하고있으며러시아파견근로자의경우매달 300 달러를개인소득으로가져갈수있다.), 한국에정착한북한이탈주민들로부터의송금, 4만명에달하는 (2013 년현재는약 5만4000 명 ) 개성공단근로자들의수입, 각종국영기업소들의활동등이사적인경제행위에관여하고있다. 나. 왜북한정권은이러한활동을허용하나? 북한의신년사설을보면인민의생활을향상시킨다는내용이종종들어가있음을알수 있다. 김정은은이러한부문에대한지속성을강조하고있는것으로보인다. 나아가대중의 분노에대한걱정도일부반영된것같다. 2009 년 12 월에실시됐던화폐개혁의실패는주민들로 127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부터강력한반발을불러일으켜정책전환을가져온바있다. 이제북한당국은정치적으로 중요해진평양주민들의적대심유발을두려워하게되었으며정권에대한직접적인위협으로 작용하지않는경제활동에대해서는허용하는분위기다. 다. 아니면경제개선에초점을맞춘전략의전환이이루어지고있는가? 강성대국 이라는구호는북한사람들에게우리는강하다는인식으로다가온다. 우리는핵무기가있기때문에이제경제에집중할수있다는것이다. 북한은이제대외경제에더많은강조점을두고있다. 중국, 러시아, 동남아일부국가들과의국제경제관계등이그것이다. 김정일이중국을방문하고돌아와주민들에게전한메시지는중국의경제적성공을배우라는것이었다. 중국이북한에서투자와시장활동에더많이관여하게될것이며우리는이들과협력해야한다는얘기다. 8. 마치며 대다수의북한주민들에게삶이란여전이힘들다. 식량사정또한취약하다. 유엔은 2012 년 6월발간한보고서에서북한주민 2천400 만명중 1천600 만명이만성적인식량난과영양실조, 그리고뿌리깊은경제적문제로부터고통을받고있다고밝혔다. 동시에사람들은더이상당국의시책에의존할수없으며스스로가살아갈방도를찾아야한다는것을깨닫게된것같다. 북한의미래에는도전과기회가공존하고있다. 본인이북한에거주하면서, 그리고북한과함께일했던경험을되돌아볼때, 고립을통해변화를강제하려는노력은북한에통할것같지않다. 오히려사람간의접촉이매우중요하다. 북한의변화는먼저교육이나정보에대한접근등주민들이기본적으로필요로하는것들에대한지원과시장활동, 교역, 상업, 관광을통해촉진될수있다고생각한다. 인구구조를살펴보자. 한국은거의 5천만명에달하는인구를가진세계에서 25번째로큰나라다. 북한은 2천400만명으로 48위에머무르고있다. 통일된한반도는 7천400만의인구로독일바로다음인 17번째로가장큰나라가될것이며동아시아의강력한민주주의국가로발돋움할가능성이충분하다. 128
경제자료김정일이후의한반도 : 도전과기회 지난 60년동안한반도는정의, 평화, 화해, 공존, 그리고상호간의존중에기반한영속적인합의를갈망해왔다. 만일우리가평화로운해결책을원한다면우리는벽을쌓는것이아니라다리를놓아야하며이는소프트파워를통해서가능하다. 그러기위해서는관여 (engagement) 와격려 (encouragement), 사람간의접촉, 교류, 통신뿐만아니라끈기와인내가필요하다. 지금까지의접근은성공과실망의부침속에서효과적으로작동하지못했다. 평화로운해결책은찾기위해서는한국과북한이함께노력하는것이가장중요하다. 국제사회도이러한과정을지원함으로써한반도의더낳은미래를위해함께나아갈수있다고생각한다. 129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The Korean Peninsula after Kim Jong Il: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Katharina Zellweger Stanford University, Pantech Fellow in Korean Studies kzellweger@stanford.edu Say North Korea and the average reaction around the world is to immediately think of nuclear weapons, hunger and misery and to easily forget that there are 24 million ordinary people who live there and who are struggling, day by day, to make ends meet or to simply live an ordinary life. I have been engaged in humanitarian aid and development assistance to North Korea since 1995. For five years, from 2006 to 2011, I resided in Pyongyang, heading the office of the Swiss Agency for Development and Cooperation. In October 2012 I had the opportunity to visit the DPRK again, this time accompanying an important Swiss delegation. Although I have been to South Korea many times as well, the focus of my presentation is on the northern part of the divided peninsula; I am pleased to talk to you today about my experience with and within the DPRK. 1. Key findings from the 2008 Population Census The four big worries of an ordinary North Korean family are: do we have enough to eat and a warm house; is everybody healthy; and are the children getting schooling? Basic needs - that should be and once were covered - are now issues of survival. 130
경제자료 The Korean Peninsula after Kim Jong Il: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Category Total population Population structure Life expectance at birth Urban Household composition Marital status Literacy rate Work participation Dominant industries Findings 24,052,231. This is a homogeneous society with no significant minority groups, but with, in the northern part of the country, a small Chinese community and a few hundred Japanese spouses (particularly wives) of Koreans. 8.7% are 65+; thus, the population changed from young in 1993 to old in 2008. In comparison, South Korea s older population is 9.3%. The two oldest populations are Italy and Japan with about 20% in the age group of 65+. Male 65.5 (68.4 in 1993) / Female 72.2 (76.0 in 1993) People in South Korea live on average 12 years longer! 60.6%, almost unchanged since 1993. (China s urban population in 1990 was 26% and in 2010 already 50%) 5.9 million households with an average size of 3.9 persons, about 31.5% of all households consist of a nuclear family with, on average, 3 members Almost everybody gets married, with very few divorces; the median age for the first marriage is 28.4 for males and 25.6 for females. Among those 10 years old and over literacy is nearly 100%, thanks to 11 years of free and compulsory education for boys and girls. Educational attainment is not universal at higher levels, particularly tertiary education. One of every 7 men, while only one of every 12 women above the age of 16, has received university education. People with an academic background tend to reside in urban areas. 17.4 million are civilians above the age of 16. Of these, about 70% work in state enterprises, cooperative farms, or government institutions. Over 3 million are retired and 1 million, mostly females, reported doing housework as their regular activity. 36% of the workforce is in agriculture, forestry, and fisheries; 24% is in manufacturing and 6% in public administration. Source: DPR Korea 2008 Population Census, UNFPA, UNCBS (Author's summary) The contrast between Pyongyang and the rest of the country is stark and growing. The capital seems to benefit most from resources, and the gap is widening between haves and have-nots, with more people falling through an already weak social safety net. 2. The DPRK after Kim Jong Il s death On 17 December 2011, a bombshell dropped: the announcement of Kim Jong Il s death. The world was stunned to witness, through television broadcasts, an incredible outpouring of grief over many days. Immediately speculations predicted anything from collapse, to more clashes with South Korea, to reform, or even unification. Now young Kim Jong Un is in power, although a common assumption is that there is a collective leadership in place with central figures including the family, the party, and the military. This structure 131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of leadership was already demonstrated during the many months Kim Jong Il was ill in 2008. And even if there are frictions within the North Korean elite, regime survival will be valued above factionalism. The leadership in Pyongyang hopes that the future will solidly remain under the banner of continuity and stability. Moreover, the North Korean regime deeply believes that for its survival it needs to maintain its nuclear program, albeit perhaps with a possible willingness to freeze or cap some elements. With the nuclear deterrent, the regime feels more secure and therefore also more inclined to gradually move forward, with China s assistance or pressure, in a slow economic reform process. However, provocations by North Korea can never be quite ruled out, whether because of internal dynamics or regional or international issues. But China, a major player in North Korea, also wants stability, not a flow of refugees and problems in the Northeast. Overall, so far the succession is going well, but to what extend Kim Jong Un is really in charge will only be known later on. 3. The need for humanitarian aid and development assistance A. The food security situation and food aid North Korea has been receiving humanitarian aid and some development assistance since 1995. Many lives have been saved, and improvements are clearly noticeable in terms of food security, health services, water, and sanitation provisions. The present food situation remains fragile. It is not a famine, but chronic malnutrition with pockets of extreme poverty and hunger. The diet is unbalanced, with a strong focus on cereals/carbohydrates and hardly any proteins, fats, or micro nutrients. There are still a lot of hungry people in North Korea. In autumn, the cereal rations from the Public Distribution System were on average around 400 grams per person per day, consisting of a mixture of rice and corn, 132
경제자료 The Korean Peninsula after Kim Jong Il: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or approximately 1400 kcal. (100 grams white rice uncooked: 363 kcal; 100 grams maize uncooked: 320 kcal). Some 67% of North Koreans mainly workers - are public distribution system recipients. They should receive their staple food rations from the government. However, although the system has never been abolished, it does not function properly anymore, and rations are no longer evenly allocated across the whole population. The United Nations World Food Program (WFP) aims to provide targeted food aid to some 3.5 million vulnerable people: nutritional support for women and children, support to school children, and food assistance to other vulnerable groups (such as the elderly) in the Northeastern provinces, especially during the lean season. WFP conducts many monitoring activities: for example, in May, they orchestrated some 350 visits to 65 counties in 9 provinces. Among the food aid monitors there are now also some speakers of Korean. However, resources are the big problem for the WFP, and often the intended program has to be curtailed because of lack of funding. Cutting beneficiaries off is tough and not an easy decision when you know the impact food aid makes! The various natural disasters droughts and floods occurring year by year are always of concern, and have an impact on the harvests and the well-being of the people. Local disasters affect vulnerable people disproportionately. Why is humanitarian aid, including food aid, still very much needed? To cover basic needs is a prerequisite for progress so that the general population can be freed from daily struggles for survival and therefore gradually have the time and energy to assess their own situation. Improving people s lives contributes also to opening up a closed society. Admittedly, nowhere is humanitarian aid the solution for addressing long-term systemic problems. No, doubt, the North Korean government could do more, could do better. But will it do so? Will the food go to the military, be sold in the markets, be hoarded, or otherwise not reach the people it should reach? These are questions aid agencies have been grappling with for many years, and not just in North Korea. The issue of monitoring must be addressed, and it can be addressed much more effectively now since WFP 133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has over 15 years of experience in implementing food aid programs in North Korea. Mistrust should not be the reason for withholding aid. To help North Korean children is an investment for the future, but above all it is a humanitarian act. B. Why also development cooperation? I lived in Pyongyang from 2006 to 2011 and worked for the Swiss government, managing development cooperation projects. We addressed food security issues with a sloping land management project; another project was in biological pest control for maize and cabbage. We also ran a Capacity Development Program, for which we organized many workshops in the country, as well as sent every year about 80 to 100 persons abroad for training. The latter included sending young diplomats to study for up to 3 months in Switzerland; a wide variety of short-term programs (in the legal field, in banking & finance, or peace mediation); long-term studies in agroforestry in China; or other relevant conferences and activities. One of the most fascinating aspects of my experience was our program with the Pyongyang Business School. Four cycles were conducted, each one with 12 monthly seminars consisting of 3 days for 30 to 35 middle managers from different companies and organizations. Lecturers were flown in from the Hong Kong Management Association and the curriculum resembled a mini-mba. There is now a much bigger interest among North Koreans to learn how the market economy functions. Feedback about the business school course was generally positive: the participants found the training useful and appropriate; the lecturers said that they could not have had more eager students;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expressed appreciation; and we, the Swiss government, felt that we had made a valuable contribution. In the capacity development arena you work with individuals, organizations, and societies to strengthen human and organizational capacities so that they can better manage their own affairs. Keys are putting people at the center of development and finding ways to influence their mindsets. 134
경제자료 The Korean Peninsula after Kim Jong Il: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4. Is North Korea changing? I am often asked if anything changed during my five years in Pyongyang. I call the changes the 5 Ms: Markets and Money are playing a much bigger role in the daily lives of ordinary North Koreans; Mobile phones have become a common form of communication; Motorcars have increased; and in Pyongyang there are signs that a Middle class is developing. After my recent visit, all I can say is that this is still very much the case. (Although let me add that a friend of mine quickly developed another set of 5 Ms: Misery, Malnutrition, Menace, Mania, and Missiles, and perhaps we should also add Mickey Mouse.) 5. Other observations from the October 2012 trip Central Pyongyang looks quite different with new, tall and modern apartment buildings, a new theatre complex, conference halls, and also an upscale supermarket with mostly imported goods all part of urban development projects promoted in 2012, the centennial of the birth of state founder Kim Il Sung, the grandfather of Kim Jong Un. Mansuedae Hill now features two giant bronze statues, one of Kim Il Sung and one of Kim Jong Il, visited by thousands of people every day. Although in the countryside some new villages or settlements have been built, the capital Pyongyang is the big beneficiary of recent developments. The gap between Pyongyang citizens - approximately 3 million people or 1/8 of the total population and other North Koreans is widening, as is the gap in general between urban and rural populations. The poverty becomes quickly visible once you leave Pyongyang for other parts of the country. Vehicles of all kinds - passenger cars, buses, and trucks - have increased in number in the capital, while in the countryside bicycles are common for transporting goods and people. But ordinary North Koreans walk every day for hours, carrying heavy loads. 135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The rice harvest was ongoing with people working hard and with hardly any agricultural machinery available. Children and elderly were gleaning the harvested field, collecting individual rice grains or maize kernels in preparation for hard times. Western press reports about reforms in agricultural policy could not be confirmed, but the possibility of some adjustments or changes in the future were not ruled out. The rules and regulations for market activities seemed to have been relaxed somewhat, making life for people easier for selling, buying, and bartering - all important means to earn extra money and to make ends meet. There are now one million mobile subscribers in the DPRK. To have a mobile phone is the dream of every North Korean, but for ordinary people purchasing the handset is still out of reach. With a mobile phone or a camera, small businesses can be established. For example, more such small scale operations could be observed: transporting goods from A to B with a small cart; bicycle or shoe repair stations; sewing jobs; and of course selling goods. Overall, the mood seemed more relaxed: women chatted with each other on the way to the market or at home after work; teenagers, boys and girls - some wearing helmets and elbow and knee patches had fun rollerblading in Kim Il Sung Square or in front of the Koryo Hotel. Young women s fashion is trendier, with more bright colors and high-heeled shoes and some wearing a bit of jewelry, earrings or a small pendant on a gold chain. Government officials also informed the Swiss delegation of a new educational policy announced in September: Children will now receive 12 years of free education with 1 year of kindergarten, 5 years of primary and 6 years of secondary schooling (3 years lower-level and 3 years higher-level) with a strong focus on technical and vocational education, information technology, and foreign languages. In the many years I have been going to North Korea, I have never met a North Korean who cannot read and write or do basic math. This is a reason to be optimistic because there is a good foundation of human capital, and changes can take place fast. 136
경제자료 The Korean Peninsula after Kim Jong Il: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Also interesting was the fact that the usual rhetoric was toned down at official meetings, when chatting to former North Korean colleagues, or when visiting tourist spots. The military-first policy was not mentioned at all. This year the number of North Koreans reaching South Korea has dropped: from January to September, 1,086 people arrived in the South. For the whole year the number will probably be similar to that of 2005, when 1,382 North Koreans reached Seoul. At the peak, in 2009, the figure stood at 2,900. Why this drop? Have the border controls on both sides (i.e., in North Korea and in China) been tightened after the death of Kim Jong Il? (It is not clear how they could be further tightened, given how very strict they already were.) What has happened to the thousands or hundreds of thousands of North Koreans reported to be in China? Has North Korean propaganda worked, with an example being Pak Jong Suk, who returned from the South to the North? Or is there a fresh wind and hope in the DPRK with young Kim Jong Un now in power? Another new development is that North Koreans can now go for family visits to China if they fulfill certain conditions, and, furthermore, more workers are going on special government-to-government programs to China and Russia, as well as to African countries and the Middle East. In addition, the number of tourists visiting North Korea is also increasing; many are from China, but also increasingly from other countries. Overall, China s influence in North Korea is strongly felt. Most investments are Chinese (e.g., in mining), and so are the goods in the markets as well as aid or preferential food imports. Right now, two new special economic zones on two small islands are being established right next to the Chinese border city of Dandong; in fact, they are included in Dandong s development plans and are following the China model of Shenzhen, the first SEZ of China. Doing business with North Korea is nevertheless extremely complex; moreover, many Western businesspeople shy away from a country that is under strong UN and U.S. sanctions. In short, we pushed North Korea into the arms of the Chinese. (China s trade with South Korea is now more than that of the U.S. and Japan 137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combined; thus, it is becoming quite a challenge for South Korea to position itself between the U.S. and China. Good relations for South Korea with China will become even more important, not only with regard to North Korea.) 6. Domestic markets in North Korea Farmers markets have existed for a long time and take place every 10 days. Selling, buying, and bartering are the dominant activities. By now, all big cities and towns have also established proper daily markets. The biggest is the Tongil Market in Pyongyang, where foreigners are allowed to go. With enough time, almost anything can be found in the markets: food, clothing, shoes, household items, furniture, electronics some local products, but otherwise mostly goods from China and some from Southeast Asian countries. Grain is not allowed to be traded in these markets. Payment is in NK Won, but there are also many hard currency shops and restaurants, mainly for foreigners, where Euro, U.S. dollars, or RMB yuan are used. In April, a Chinese Yuan traded for 635 NKW; in October it was 920 NKW. 1 Euro is officially NKW 137 and at the street rate up to NKW 8,000. Salaries of North Koreans are difficult to assess: they consist of a cash payment in NKW, plus cereals from the Public Distribution System, subsidized goods from State Shops, and in-kind grants, such as vegetable oil and coupons for meals in restaurants. Recently a joint-venture with Singapore - the CJ Sunrise Marketplace and Restaurant, filled with imported goods - opened, as well as a big amusement park and a new swimming pool. Obviously, in Pyongyang those with money are benefiting from a higher standard of living. 138
경제자료 The Korean Peninsula after Kim Jong Il: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7. Key questions A. Where is the money coming from? The funding for these new developments flows from several sources. These include trade with China; the mining business or mineral extractions; some smuggling and corruption, from North Koreans working abroad, in Russia, Malaysia, China, Africa, and the Middle East (40,000 North Koreans are in Russia and more are being recruited; they are allowed to keep $300/month of their earnings), or remittances from defectors in South Korea; earnings from the Kaesong Industrial Park, which has over 40,000 North Korean workers; and many North Korean units that, despite being state-owned, are heavily involved in what amounts to private business. B. Why is the regime allowing such activities? Improving people s livelihoods has been included in several New Year s editorials; these are a sort of annual policy address and are published at year s end in the leading North Korean papers. Kim Jong Un seems to emphasize continuity of this focus. Furthermore, there is a certain worry about further public anger. The response to the failed currency revaluation of December 2009 was so strong it forced reversal. Now the regime, fearful of antagonizing the politically important population of Pyongyang, allows certain economic activities that do not pose a direct political threat. C. Or is there a shift in strategy and a focus on improving the economy? The slogan strong and prosperous nation means for the North Koreans that we are strong; we have nuclear weapons; now we can focus on the economy. 139
KDI 북한경제리뷰 2013 년 4 월호 Greater emphasis is now being placed on international economic engagement, especially with China, Russia, and some Southeast Asian countries. The message from Kim Jong Il after his visit to China was basically that we should learn from China s economic success; Chinese will be getting more involved with investments and the buying and selling of goods; we should cooperate with them. 8. In closing Life remains hard and the food security situation fragile for most North Koreans. The United Nations said in a report published in June 2012 that 16 million of North Korea s 24 million people continue to suffer from chronic food shortages, malnutrition, and deep-rooted economic problems. However, people seem to have realized that they can no longer depend on handouts from the government and that they have to fend for themselves. For the future, I see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Based on my experience in working with, and in, the DPRK, I believe that isolation as a way to force change does not work in North Korea. People-to-people contact is extremely important. Transformation can be stimulated by supporting, first, the basic needs, including education and access to information, and also through market activities, trade, commerce, and tourism. Consider demography: South Korea today has almost 50 million people, the 25th largest country in the world in terms of population size. North Korea has 24 million and ranks number 48. A united Korea would have 74 million people and become, right after Germany, the 17th most populous country potentially a strong, democratic power in East Asia. For 60 years, the Korean peninsula has longed for a lasting settlement based on justice, peace, reconciliation, coexistence, and mutual respect; but the suffering, division, and threats continue. If we favor a peaceful solution, we need to build bridges and not walls, thus the use of soft power: engagement, encouragement, people-to-people contact, exchanges, communication, but also persistence and 140
경제자료 The Korean Peninsula after Kim Jong Il: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a lot of patience. This engagement is hard work, with successes and disappointments. Ultimately, the people on both sides of the Korean peninsula will have to make it work, but we the international community can support the process and work together toward this goal. 141
부문별주요기사 3 월 16 일 ~4 월 15 일 대내경제농업및식량대외경제남북경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