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술지는 2016 년도한국연구재단의지원을받아출판되었음.
차례 일반논문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송휘영 7 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 죽도기사 죽도고 원록각서 를중심으로 - 이태우 41 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의국제법적해석 최철영 69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독도영유권 정태만 97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박병섭 131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41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최장근 171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일본측주장의국제법위반비판을중심으로- 나홍주 207 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의 김명기 239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곤차로프의여행기와팔라다호의항해기록을중심으로- 김영수 271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2016년일 러 북방4 도 교섭의관점에서- 이명찬 307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정갑용 361
자료소개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이태우 409 서평 불편한동해와일본해 김영원 441 독도연구 제22호편집위원회 447 논문투고규정 449 독도연구 간행및심사규정 453 獨島硏究 연구윤리규정 455
일반논문
7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 1)2) 송휘영 ** < 목차 > 1. 머리말 2. 울릉도쟁계에관한한일양국의쟁점 3. 울릉도쟁계관련사료의재해석 4. 맺음말 < 국문초록 > 본고의목적은 17세기말안용복의도일 ( 납치 ) 사건으로촉발된 울릉도쟁계 (= 죽도일건 ) 와관련하여한일간의쟁점을정리하고,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을통해몇가지쟁점의실체를밝히고자하였다. 첫째, 1693년안용복과박어둔의납치정황을검토하고, 둘째, 안용복이서계를받았는가하는점과셋째, 죽도도해금지령 (1696) 전후일본인의울릉도도해정황과마츠에번및돗토리번의독도인식을밝히고자한다. 한국의연구에서안용복일행이총검에위협당해납치된것으로하고있으나, 사실은일본인의술잔치에꾀임을당해끌려갔다. 또한안용복이받았다는서계는존재하지않으며, 당시돗토리번에억류되어있었던안용복이막부장군이사는에도로가지도않았다. 당시의일본사료를보면일본인의울릉도도해는 1695년까지확인되며 죽도도해금지령 이전마츠에번과돗토리번의울릉도 독도인식은그들의판도외즉조선의판도로보고있다는사실을밝혔다. 울릉도쟁계 관련사료는아직많은부분에서한일간에상호일방적주장을펼치고있다. 앞으로양측의사료를바탕으로객관적으로 울릉도쟁계 의실체를밝혀내는작업이필요하다하겠다. 주제어 : 울릉도쟁계, 안용복의도일, 사료의재해석, 납치, 울릉도 독도인식 ** 이논문은 2016년대한민국교육부와한국연구재단의지원을받아수행된연구임 (NRF-2016S1A5B8A02929224). ** 영남대독도연구소연구교수
8 獨島硏究제 22 호 1. 머리말 얼마전 2월 14일일본문부과학성은초중학교 학습지도요령 개정안을전격적으로발표하고지난 3월 31일고시하였다. 여기서는독도와센카쿠를 일본고유의영토 라고명시하여가르치도록의무화하고있다. 1) 현재독도교육의본보기가되는시마네현의초중고등학교독도 ( 죽도 ) 교육은거의 100% 의사회과교과서에서독도를일본고유의영토라고가르쳐왔으며, 전국적으로도거의 70% 이상의학교에서독도교육을강화해왔었다. 이번의사태는필자가누차지적해왔듯이이미깔려진로드맵위에서취해진조치지만, 우리의국정불안과부산영사관앞소녀상사태, 경북도지사의독도방문등을빌미로그시기가앞당겨진것뿐일지도모른다. 2005년 죽도의날 제정을시작으로일본의독도도발과영토교육의강화는그동안한 일간의외교적간극을틈타아주견고하게진행되어왔다. 마치근대기일본제국주의의대륙침략의시기와같이이웃나라의정치적불안등을빌미로착착군국주의의대륙침략을확장해갔던 100여년전의동아시아의정세를자꾸만되뇌게되는것은섣부른염려때문만은아닐것이다. 이러한일본의우경화행보는우리의영토주권을훼손하고한일관계의경색국면을감안하면서도서슴지않고내달리고있는것이다. 지난 2005년시마네현이 죽도문제연구회 를조직하고나서 제1기최종보고서 (2007.3), 제2기최종보고서 (2012.3), 제3기최종보고서 (2015.8) 의연구성과를내놓았고, 여기서개발된논리는거의여과됨없이그대로일본외무성의공식견해 2) 로채용되고있다. 이는문부과학성의 학습지도요 1) 이전의 학습지도요령 에서는북방영토 (= 남쿠릴열도 ) 에대해 일본고유의영토 라고하였고, 독도에대해서는 우리나라 ( 일본 ) 와한국사이에죽도 ( 독도 ) 를둘러싼주장에차이가있다는것에대해서도거론하여, 북방영토와마찬가지로우리나라 ( 일본 ) 의영토 영역에대해이해를심화시킬필요가있다 는수준에머물러있었다. 2) 竹島問題を理解するための10のポイント ( 日本外務省広報パンプレット ).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9 령 을통해초 중 고교육현장에서 죽도 ( 독도 ) 는일본고유의영토 로일반화되고있는것이다. 여기서기본틀은 예로부터일본고유의영토인죽도 ( 독도 ) 를현재한국이불법점거하고있다 는 고유영토론 의논리이다. 이미한일양국의역사연구에서독도고유영토론의논리가허구라는것은거의 7부능선까지밝혀지고있음에도불구하고이러한잘못된사실이일본의영토교육과역사교육으로초 중 고학교현장에서어린학생들에게주입되고있다는것은지난날역사적과오를되풀이하겠다는것으로밖에보이지않는다. 최근독도연구는한일양국의사료및자료를함께검토하여쟁점이되어왔던역사적사실이상당부분명확히밝혀졌다. 3) 독도의역사적문제에있어일본측주장의대부분이부정되기도했지만 4) 아직까지논란의여지를남기고있는부분이남아있기도하다. 특히 17세기말에발생한울릉도쟁계 ( 안용복사건 ) 에관한쟁점들은안용복을범죄자이자거짓말쟁이로치부하는일본측연구와안용복의공술기록을근거로막부장군으로부터울릉도 독도가한국땅이라는서계를받아온것은사실이며안용복은독도를지킨사람이라는한국측연구가여전히부합하지못한다. 최근들어 죽도기사, 죽도고, 인부연표, 어용인일기, 오야가고문서, 원록각서 등울릉도쟁계와관련되는많은일본고문서가국내에번역되어소개되었음에도그이전과별반연구성과가진행되었다고는할수없다. 왜냐하면여전히일본정부의 10포인트 등에서나타나는잘못된주장들이그대로살아있기때문이다. 3) 영남대독도연구소에서 10포인트비판 의일환으로기획된논고에서는일본외무성이주장하는 10포인트 를학술적으로명쾌하게비판하고있으며, 이에대한일본측의공식적인반론은아직없다.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2010), 독도영유권확립을위한연구 Ⅱ, 경인문화사, pp.3-104를참조. 4) 울릉도쟁계(= 죽도일건 ) 의경과와결착에관련된연구로는이훈 (1996), 송병기 (2007), 박병섭 (2009), 송휘영 (2011), 장순순 (2012) 등이있다.
10 獨島硏究제 22 호 안용복사건과관련되는것만으로도, 1 안용복은에도로갔는가? 2 에도에서막부장군의서계를받았는가? 3 귀국후안용복의진술은어디까지가진실이고어디까지가호언인가? 4 2차도일 에서 영토문제 를항의하기위해갔는가? 5 죽도도해금지령 (1696.1.28) 이후에도일본인의울릉도도해는있었는가? 하는점등해명해야할과제도많이남아있다. 본고에서는이러한안용복사건과관련하여해명해야할과제로서, 첫째, 1693년안용복과박어둔은도검에위협을당해납치되었는가하는것과, 둘째, 2차도일후비변사공초에서진술한바와같이서계를받았을가능성이있는가하는점, 셋째, 1696년 1월 28일 죽도도해금지령 이내려지는전후의시기에일본인의도해는어떠했는가하는점을규명하고자한다. 세번째점에관해서는당시 죽도도해금지령 은돗토리번의에도번저에전달되어당시에도에체재하던번주가돗토리로돌아오는 8월 1일이후오야 무라카와양가에전달되었을가능성이높다는것이다. 따라서안용복의 2차도일에서울릉도에서일본인을만났고, 5) 울릉도에서달아나는일본인을쫓아송도 ( 독도 ) 를거쳐오키섬에당도했을가능성, 즉 1696 년봄에도울릉도에일본어부가도해했다는것에대한근거가있는가를살펴보고자한다. 2. 울릉도쟁계 (= 죽도일건 ) 에관한한일양국의쟁점 1) 한일간의주요쟁점 2005년 7월 < 죽도문제연구회 > 가결성된이후시모죠마사오 ( 下條正男 ) 좌장을비롯한연구회멤버들은우선 역사적으로도죽도 ( 독도 ) 가일본고 5) 죽도문제연구회의 제 1 기보고서 등을통해 죽도도해금지령 이실제로오야 무라카와양가에전달되는것은안용복의 2 차도일로인해돗토리번주가급거에도에서돗토리번으로돌아온 8 월 1 일이후의일로밝혀졌다. 나이토세이츄 (2007), 김화경 (2010), 박병섭 (2009) 을참조.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11 유의영토 라는근거를찾는작업에집중하여그결과가 제1기최종보고서 (2007.3) 6) 로정리되었고, 여기서정리된논리는여과없이일본외무성의공식견해 죽도문제를이해하기위한 10의포인트 에서일본의 고유영토론 의근간으로자리하게되었다. 그이후 < 죽도문제연구회 > 에서 제 2기최종보고서 (2012.3) 와 죽도문제 100문 100답 (2014.3), 제3기최종보고서 (2015.8) 의성과가나왔다. 그러한가운데한일양국의역사학적연구가진전되면서일본이주장하는독도에대한역사적권원의논리가상당부분부정되고있으나여전히 고유영토론 의논리는살아남아 독도 ( 죽도 ) 가일본고유의영토 라는내용을명기하도록의무화한초 중학교사회과 학습지도요령 개정안 7) 으로학교교육현장에서가르치게되는것이다. 17세기말에울릉도영유권을두고발생한 울릉도쟁계 와관련하여, 한일양국의주장은특히서로상반되고있다. 이것은한일양국의사료가상호일치하지않은부분을많이포함하고있기때문이다. 우선신용하교수는 안용복의담판에의하여울릉도와우산도의 양도 ( 兩島 ) 조선지계로정한서계를 1693년관백이호키주태수를시켜써주었으며, 1696 년에호키주태수도양도 ( 울릉도와우산도 ) 가이미당신네나라에속했다 고인정하고울릉도에침범한일본인들을처벌했다는사실이다. 고주장한다. 8) 또한송병기교수도 안용복은옥기도를거쳐호키주로가주수 ( 州守 ) 에게울릉도와자산도는관백이서계까지발급하여인정한조선의영토임을주장하였고, 마침내전날범경한 15명의적발처벌과앞으로의 6) 정식명칭은 竹島問題に関する調査報告最終報告 島根県総務部総務課, 平成 19 年 (2007) 3 月. 7) 학습지도요령 개정안은 2017년 2월 14일오후 5시경에전격발표되어 3월 31일에고시되었다. 이번에고시된개정안은한달간의검토과정을거쳐확정되며초등학교는 2021년, 중학교는 2022년교과서에현실화된다. 즉그때쯤이면일본국내의모든초 중학교사회과교과서에서보편적으로 독도 ( 죽도 ) 는일본고유의영토 라는것을명기하여학교교육현장에서가르치게된다. 8) 신용하 (1996), 독도의민족영토사연구, p.109.
12 獨島硏究제 22 호 울릉도 자산도로의범월을금지시키겠다는등의다짐을받고 8월에양양현으로돌아왔다. 고하여안용복이에도의관백에게서계를받아울릉도 독도가조선영토임을확인받았다는견해 9) 이다. 그러나일본의연구자들은 숙종실록 의비변사에서의진술이사실이아니라고강조하고있다. 일본외무성의 죽도문제를이해하기위한 10의포인트 10) 에서도 한국측은안용복이라는인물의사실에반대되는진술을영유권의근거의하나로인용하고있습니다. 라고하면서, 안용복의진술과그의문점 이라하여다음과같이서술하고있다. 1 막부가울릉도도항을금지하는결정을내린후안용복은다시일본에건너왔습니다. 그후추방되어조선으로돌아간안용복은울릉도도항금지를어긴자로서조선의관리에게문초를받았는데, 이때의안용복의진술이현재한국의다케시마영유권주장에대한근거의하나로인용되고있습니다. 2 한국측문헌에의하면안용복은 1693년에일본에왔을때울릉도및다케시마를조선령으로한다는취지의문서를에도막부로부터받았으나, 쓰시마번주가그문서를빼앗아갔다고진술하였다고되어있습니다. 3 그러나안용복이 1693년에일본으로끌려왔다가송환된것을계기로일본과조선국사이에서울릉도출어를둘러싼교섭이시작되었기때문에 1693년의일본방문시에막부가울릉도와다케시마를조선령으로한다는취지의문서를부여할리가없으며, 실제로그러한사실은없습니다. 4 또한한국측의문헌에의하면안용복은 1696년일본에왔을때울릉도에는다수의일본인이있었다고말하였다고합니다. 그러나이일본방문은막부가울릉도로의도항을금지하는결정을내린후의일이며, 당시오야와무라카와양가는울릉도로도항을하지않고있었습니다. 9) 송병기, 재정판울릉도와독도, 단국대학교출판부, 2007. pp.85-94. 10) http://www.kr.emb-japan.go.jp/territory/takeshima/pdfs/takeshima_point.pdf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13 5 안용복에관한한국측문헌의기술은, 안용복이 1696년에국가의금지명령을범하고국외로도항했다가, 귀국후조사를받았을때진술한내용에따른것입니다. 진술내용을보면상기에언급한내용뿐만이아니라사실과일치하지않는점들을많이볼수있습니다. 한국측은사실에반하는그러한진술을다케시마영유권주장의근거의하나로인용해오고있습니다. 이렇듯일본외무성의주장은 숙종실록 (1696년 9월 25일조 ) 에기록된안용복의진술이위증이라는연구를근거로하고있는것이다. 당시안용복은해금을어기고월경한죄인으로한국의독도영유권주장은이러한범죄자의진술을근거의하나로주장하고있으나이는사실과다른것이라고한다. 일본측연구자들은 숙종실록 의이기록이거짓에지나지않은것이라고강조한다. 가와카미겐죠 ( 川上健三 ) 는 비변사에서의조사에대한안용복의진술은대단한허구와과장으로가득차있다 고하면서안용복일행이울릉도에갔을때 왜선도많이와서정박하고있었다 고진술하고있는것은명확한거짓말이라고한다. 11) 뇌헌과안용복일행이울릉도에갔던 1696년봄에는이미 죽도도해금지령 이내려진이후의일로오야 무라카와양가는어느쪽도울릉도에도항하지않았다는것이다. 또한다가와고죠 ( 田川孝三 ) 는실록에기록된안용복의진술이 과대한허구에충만한것 이라고하면서, 범죄자의진술을무비판적으로전재한것에지나지않는다고한다. 12) 그리고안용복이호키번주와대좌했다는것도말이되지않는다고부정하고있다. 13) 죽도문제연구회의좌장시모죠마사오 ( 下條正男 ) 에이르러서는안용복이 조울양도감세장 을잠칭한것과울릉도에서일본인과조우한것도, 어민들이처벌된사실도없었기때문에거짓말쟁이로치부하고있다. 강원도에착안한안용복은 11) 川上健三 (1966), 竹島の歴史地理学的研究, 古今書院, p.167. 12) 田川孝三 (1989), 竹島領有に関する歴史的考察, 東洋文庫書報 20, 東洋文庫, p.24. 13) 田川孝三 (1989), 전게논문, p.36.
14 獨島硏究제 22 호 비변사공술에서울릉도와우산도를조선영토로했다고위증하고있으며, 이러한것은날조된거짓역사라고주장한다. 14) 이와같이안용복의일부호언을빌미로삼아안용복진술을거의거짓으로몰아가고그의기록을담은관찬기록인조선왕조실록의기록까지도신빙성이없는것으로부정하고있는것이다. 안용복사건에관련된사실의진위를가려내는것은실록에나타난안용복진술의모든것을부정하는일본의논리를반증하기위해서도반드시이루어져야한다. 그러기위해서는한일양국의사료를함께면밀히대조하여분석하면서그진위를밝혀낼필요가있다. 15) 2) 관련일본사료의현황 문헌편찬시기성격내용 ( 독도관련 ) 저자번역여부공개여부 通航一覧 巻 137 朝鮮國部百十三 通航一覽 卷 129, 朝鮮國部百五 1853 년 1853 년상동 < 표 1> 울릉도쟁계 관련일본고문서 ( 주요관찬서 ) 막부의명령에따라大學頭인하야시후쿠사이 ( 林復齋 ) 가쓰시마번에의한울여러외국과의응접릉도탈취의도가나林復齋編을위한자료로편타나있음찬한에도막부의대외관계사료집 1620년막부가울릉도 ( 竹島 ) 를조선국의상동속도로기록 ( 영남대 ) ( 영남대 ) 14) 下條正男 (2007), 最終報告書, p.6. 15) 아울러, 일본측고문서 고문헌사료의분석을통해해명해야할한 일양국의 쟁점 들을정리해보면다음과같다. 1 숙종실록 등우리의관찬기록에서나타나는안용복공술의진위해명, 2 대한제국칙령제41호 의석도는독도이며, 우산도 = 석도 = 독도라는사실규명, 3 적어도 1900년이전에우리정부및연안민이독도를실효지배해왔다는구체적증거발굴, 4 1905년일본의독도편입 ( 강탈 ) 이근대국제법적으로불법적이라는사실규명, 5 근대기울릉도도해일본인들이독도를한국의판도로인식했다는추가적증거확보등이시급히해명되어야할과제들이다.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15 大日本史 卷三百八志三 隱州視聽合紀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竹島紀事 竹島考 竹島渡海禁止并渡海沿革, 鳥取藩史 第六卷, 事變志 鳥取縣史 ( 第 7 巻近世資料 ) 1657~ 1906 년 1667 년 1696 년 1726 년 1828 년 1971 년 일본의역사서로본 오키국 의기록에서기 73권, 열전 170권, 죽도 ( 울릉도 ) 와송도지 ( 志 ) 와표 ( 表 ) 154 ( 독도 ) 를일본령으로권으로전 397권 226 하고있지않음책으로구성 에도시대에마츠에일본최초로독도 ( 송번사 ( 松江藩士 ) 사이도 ) 에대한기록으로, 토간스케 ( 齋藤勘介 ) 일본영역의서북한齋藤勘介著에의해저술된오키계를오키섬까지로 = 은주 ( 隱州 ) 의지지한정 1696 년안용복스스로오키에도항했을때대관의대리들이안용복을취조한기록 안용복이울릉도및자산도가조선땅임을村上助九郞家文書주장한것등이기록 대마번의종가문서등을바탕으로 울릉안용복납치사건으로도쟁계 ( 죽도일건 ) 발생한 울릉도쟁계 의전모를기록하고의과정과조일간의있는것으로총5권교섭내용을기록으로구성 당시 인부연표 쵸죽도 ( 울릉도 ) 의연혁후지 돗토리의사료과 울릉도쟁계 관를편찬한오카지마岡嶋正義련사건의시말에관마사요시가 울릉도한기록을담고있음쟁계 의전모를기록한것임 鳥取藩史에정리되어 1695~6년에도막부와있는자료로죽도도돗토리번의울릉도및鳥取縣編해금지를내리기까지독도의판도에대한의기록협의과정을기술 1978 년돗토리현의현사 1693년및 1696년안용복도일사건을기鳥取縣編록하고있음 * 竹島考 는사찬서이나사료의중요성때문에여기에포함시켰음. ( 영남대 ) ( 영남대 ) ( 영남대 ) ( 경북도 ) ( 경북도 ) ( 영남대 ) ( 영남대 ) ( 동북아역사재단 ) ( 경북도 ) ( 경북도 ) ( 영남대 ) ( 영남대 )
16 獨島硏究제 22 호 伯耆志 문헌편찬시기성격내용 ( 독도관련 ) 비고번역여부공개여부 1858 년 伯耆民談記 卷 2 1742 년 因幡志 鳥府志 因府年表 竹嶋之書附 御用人日記 控帳 1795 년 1829 년 1842 년 1724 년 1779 년이후 1873 년이후 < 표 2> 울릉도쟁계 관련일본의향토사료및지지 권4의 會見郡 8, 米子에도후기의유학자가下 오야 ( 大谷 ) 무라카게야마슈큐 ( 景山肅 ) 가와 ( 村川 ) 양가의죽도景山肅編편찬한호키국 ( 伯耆國 ) 도해경위를기록하고의역사서이자지지. 있음 에도중기의학자이자돗토리번사였던마츠오카노부마사 ( 松岡布政 ) 가전술한호키 ( 伯耆 ) 의지지 죽도도해의및도해금지의경위와죽도 ( 울릉松岡布政著도 ) 의물산위치등을기록하고있음 ( 영남대 ) ( 영남대 ) ( 영남대 ) ( 영남대 ) 돗토리번의시의 ( 侍醫 ) 죽도도해경위와특히였던아베교앙 ( 安部恭 2차안용복도일사건庵 ) 이저술한이나바국에서안용복일행의신安部恭庵著 ( 因幡國 ) 의역사서이자상과배의깃발등을 지지. 자세히담고있음 돗토리번의번사 ( 藩士 ) 오카지마마사요시 ( 岡겐로쿠시기안용복의嶋正義 ) 가저술한돗토돗토리성에서의행적岡嶋正義著리성하 ( 鳥取城下 ) 의근을구체적으로기술하 세의역사를기록한지고있음지 돗토리번의번사 ( 藩士 ) 오카지마마사요시 ( 岡嶋正義 ) 가저술한돗토리번 ( 鳥取藩 ) 의연표 2차례에걸친안용복의도일행적이 1693년岡嶋正義著 6월조와 1695년 6월조에기록되어있음 울릉도쟁계의과정에돗토리번이죽도 ( 울릉서 1695년 12월 24일도 ) 와관련된문서를정막부가돗토리번에문鳥取藩리하여막부에제출한의한 7개조답변서 가자료수록되어있음 번주를모시는어용인안용복납치및도일사들이에도번저에서기건에서안용복의행적록한것 (1670~1779) 을담고있음 돗토리번의가신이일기식으로적은기록 (1665~1873) 안용복납치및도일사건에서안용복의행적을담고있음 ( 권오엽 ) ( 권오엽 ) ( 권오엽 ) ( 권오엽 ) ( 권정 ) ( 권정 ) ( 권오엽 ) ( 권오엽 )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17 大谷家古文書 1984 因府歷年大雜集 1854 년이후 濱田町史 鳥取縣史 9 1935 년 1930 년 17세기초무라카와가문과함께죽도도해를관찬서등공식기록에했던오야가문의울릉서없는오야가와막부, 도도해의내역과 도오야가와돗토리번사大谷文子해금지령 이후도해사이의죽도도해를둘러업을재개하기위해본싼내용을담고있음인들의활동을현창하기위한기록 1632~1854 년의진사와이사가기록되어있음 이와미사담회 ( 石見史談會 ) 가편찬한하마다지역의향토사지 안용복의 1차및 2차도일에서의행적을담岡嶋正義著고있음 제3편하마다본기 에서 1836년발생한하치에몽밀무역사건의경石見史談會위에대해구체적으로기술 메이지말부터수십년 번정시대하 에서하에걸쳐편찬한시마네마다번에서발생한 죽鳥取縣編현의역사서로총 10권도사건 의경위를다루으로편찬고있음 ( 권오엽 ) ( 권오엽 ) ( 권오엽 ) ( 영남대 ) ( 권오엽 ) ( 영남대 ) ( 영남대 ) ( 영남대 ) 최근 10여년사이에독도관련일본고문서들이한일양국에서책자로엮어지고있으며상당수번역서도간행되고있는실정이다. 충남대의권오엽명예교수와동북아역사재단, 영남대독도연구소, 경상북도사료연구회등에서기존공개된일본고문서의탈초 번역 해제본이속속나오고있는것은독도연구를위해서도매우고무적인일이라할것이다. 이들중 울릉도쟁계 의전모를살펴볼수있는 죽도기사 ( 竹島紀事 ) 의완역본이권오엽 오니시도시테루번역본과경상북도사료연구회번역본의두가지나출판되었고다른사료들도차츰차츰번역서로나오고있는실정이다. 통항일람 ( 通航一覽 ), 원록각서( 元祿覺書 ), 은주시청합기 ( 隱州視聽合記 ) 등난해한관찬사료들과 죽도고 ( 竹島考 ) 16) 등도단행본으 16) 죽도고 는돗토리번의번사오카지마마사요시 ( 岡嶋正義 ) 가돗토리번의번정자료 ( 藩政資料 ) 를편찬하면서울릉도 ( 죽도 ) 에관한것만을선별하여편찬한사찬자료이나사료의중요성을감안하여여기에함께실었음.
18 獨島硏究제 22 호 로엮어졌다. < 표 1> 에는 울릉도쟁계 관련주요관찬서, < 표 2> 에는 울릉도쟁계 관련일본의주요향토사료및지지를정리해보았다. 여기서보면주요관찬사료 9건중 6건 (66.7%) 이번역되었을뿐만아니라주요향토사료및지지 12건중 10건 (83.3%) 이이미번역되어단행본으로간행되었다. 앞으로이러한작업들이이어지겠지만일본사료를통해독도를연구할수있는기반이마련되고있다할것이며, 이는독도연구의저변확대에도일조할것이라생각한다. 이들사료는독도를둘러싼한일양국의쟁점들중에서 울릉도쟁계 와안용복진술의진위에관련된부분을많이포함하고있다. 한일간쟁점들의간극을좁히고보다객관적사실을추출해내기위해서는양국의사료들을함께검토하는작업이선행되어야한다. 그런의미에서위의사료들을꼼꼼히검토할필요가있다. 3. 울릉도쟁계관련사료의재해석 1) 안용복납치사건 (1693 년 1 차도일 ) 정황과에도행의가능성 울릉도쟁계 의계기가된제1차안용복사건에서일행이납치되는정황은다음과같다. 우선 죽도기사 에서보면, 1692년봄에무라카와가문의배가울릉도에도착하여보니상당히많은수의조선인이와서어렵을하고있었으므로그수가많음을알고고기도잡지못하고요나고로뒤돌아왔다. 이듬해도해의순번은오야가문의순번이었다. 조선인과조우할가능성에대비하여오야가문의사람들은돗토리번으로부터총포등을빌려울릉도로도해하였다. 1 그러던중 4월 17일에일본배한척이다가와서뗏목에 7~8인이타고위에말한움막에와서바쿠토라히를붙잡아뗏목에태웠으며, 뿐만아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19 니라움막에둔보따리하나까지싣고출발하려고하여안요구가그곳에가서말렸으며바쿠토라히를육지로올려보내려고뗏목에올라탔습니다. 그러자바로배를출항시켰으며두사람을모두본선에태우고즉시출항하였습니다. 17) 2 일본인이말을걸기를, 우선술잔치를한다며다케시마마루 ( 竹島丸 ) 의배안에서뱃사공들이모여, 가져온술을손에들고밥공기의잔에따르고, 너도나도하며주거니받거니하였다. 왜국 ( 倭國 ) 의예의범절로그들조선인 2명에게먹이고자몸짓을하면서그럴듯하게꾸며댔다. 조선인은크게웃으며끊임없이더달라고수긍하였다. 일본인배로불러들여취해탔을때, 작년호키국 ( 伯耆國 ) 요나고 ( 米子 ) 에서이익이야기로추궁을당했으므로그증거로데리고돌아가는수밖에없다고머리를썼다. 그러자이번에도의사는허무하게빈배로돌아가는것을한번은봐주었지만, 많은사람들에게둘러싸인배위인것이다. 나머지뱃사람은좋은생각이라며이 2명에게제정신이없을만큼마시게했다. 그자의이름을물어보니아벤테후 ( あべんてふ ), 도라헤이 ( 虎へひ ) 라고하였다. 우리 2명은너무많은술을마셨는데이것보다좋은약은없다. 나머지조선인에게도마시게해달라고하였다. 다행하게도알았다고하여배로불렀고, 모두허둥지둥널판자를다리로삼아배에올랐다. 넋을잃고국자로마신 2명의조선인이보다마셨고, 그다음섬으로올라오라고얼굴로설득하였다. 18) 그러나 죽도기사 의기록 (1) 을보면조선인과의마찰이나무기에의한위협등은보이지않는다. 조선인을꾀어예인선 ( 뗏목, 전마선 ) 에태웠으며, 안용복은이를말리기위해배에올라탔고배는바로출항을한것으로오키에서안용복은증언하고있다. 2는 장생죽도기 의기록이다. 장생죽도기 에서도앞의 죽도기사 와마찬가지로어렵을못하고돌아온무라카와가문의뱃사람으로부터전해들은오야가문의사람들은총포를준비하여울릉도로도해한것으로되어있다. 여기서는당시울릉도도해 17) 竹島紀事 1693 年 9 月 4 日條. 18) 長生竹島記 竹島渡海七番目 條.
20 獨島硏究제 22 호 를하였던오야가문의경험을직접받아적은것인데, 술잔치를벌여안용복과박어둔의두사람을일본의예인선으로유인하고있다. 가져온술을밥공기에따르고주거니받거니하면서술잔을주고받는다. 술을무척좋아했던안용복 19) 은일본어부들의계책에의해제정신이없을만큼취해있었다. 충분히술에취한두사람을싣고오야가문의배는막부에제소하기위한증질로삼아오키로돌아오게되는것이다. 이들정황으로보면안용복과박어둔은총포혹은도검에의해협박을받아납치된것이아니라, 술 ( 정종 ) 로유인하여술에만취하게한다음일본으로납치해간것이다. 다음으로안용복이에도로가서서계를받았는가하는점을검증해볼필요가있다. 그것을위해서는우선안용복은에도로갔는가하는점을검토해야할것이다. 제1차안용복사건 (1693) 이발생했을때, 안용복이에도 ( 江戶 ) 로가서관백 ( 關伯 ) 으로부터 울릉도와자산도 ( 子山島, 독도 ) 는일본땅이아니기때문에일본어민들의출어를금지하겠다 는내용의서계 ( 書契 ) 를받았는지에대해서는한일연구자사이에견해가엇갈리고있다. 하나의견해는 숙종실록 의기록처럼안용복이에도로가서서계를받았다는것이고, 다른하나는돗토리번 ( 鳥取藩 ) 의기록에서보면에도행을할시간적여유가없었으며에도로가지않았다는것이다. 권오엽교수등의연구에서는안용복이에도에가서서계를받았다고주장하고있으며, 20) 송병기교수는제2차안용복의도일에서에도에갔다고주장하고있다. 21) 일본연구자가운데다보하시기요시 ( 田保橋潔 ) 는관백이 울릉도를조선령임을인정했 으며, 안용복진술은대체로사실 이라고평가하고있다. 22) 그러나최근학계에서는안용복이돗토리번으로부터서계 19) 어용인일기 등돗토리번에서의기록에서도안용복은술을좋아하여하루에댓병한병을지급한것으로되어있다. 20) 권오엽 (2009), 독도와안용복 충남대학교출판부, pp.250-282. 21) 송병기 (2007), 울릉도와독도 단국대학교출판부, pp.75-95. 22) 田保橋潔 (1931), 鬱陵島그發見과領有, 靑丘學叢 3호, pp.19-20.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21 를받았을가능성은있으나, 에도막부에가서서계를받았을가능성은낮다고보아야한다. 한일양국의관찬기록을비교하여공통되는사실들을정리해보면안용복의에도행의가능성이낮다. 만약그가서계를받았다면, 돗토리성에서번주 ( 藩主 ) 로부터받았을수는있다. 인푸년표 ( 因府年表 ) 등에서돗토리번에서의안용복의행적을보면그가에도로갈시간적여유가거의없다. 요나고 ( 米子 ) 에서에도까지는약 710km( 약 178 里 ) 정도의거리이고, 돗토리에서에도까지는약 650km정도된다. 에도중기일반인의 1일이동거리는약 32~40km라고한다. 그중간치를잡아 36km의속도로돗토리에서에도로이동한다면 18일이걸리고, 왕복으로 36일이나소요된다. 빠른걸음으로왕복하였다고하더라도적어도한달은소요된다. 만일안용복이에도에갔다면돗토리번에서의그의행적기록에서적어도 30일정도의공백이있어야한다. 참고로에도시대파발꾼인히캬쿠 ( 飛脚 ) 가교토 ( 京都 ) 에서에도까지 3~4일, 돗토리성에서에도까지는 5~6일정도걸렸다고한다. 23) 당시돗토리번에서안용복의행적을추적할수있는사료로써 인푸년표 ( 因府年表 ), 인부역년대잡집 ( 因府歷年大雜集 ), 히카에쵸 ( 控帳 ) 등에서날짜별로그의행적을추적해보자. 우선오야 ( 大谷 ) 가의선원들에게납치된안용복과박어둔은 1693년 4월 20일오키국 ( 隱岐國 ) 도고 ( 島後 ) 후쿠우라 ( 福浦 ) 에도착했다. 그이후도젠 ( 島前 ) 을거쳐 4월 27일요나고 ( 米子 ) 에도착, 오야가 ( 大谷家 ) 에머물며외출이금지된다. 다시 5월 11일마치카이쇼 ( 町會所 ) 24) 에서조사를받았으며, 5월 16일에도막부로부터육로로나가사키 ( 長崎 ) 에보내라는지시가내려졌다. 5월 29일아침요나고를출발하여 6월 1일저녁에돗토리에도착한후아라오야마토 ( 荒尾大和 ) 댁 23) 이것은파발마를타고빠른걸음으로달렸을경우를말하는것임. 24) 일종의마을회관같은것으로우리의동사무소처럼행정적기능을가지고있었다고함.
22 獨島硏究제 22 호 에머문다. 돗토리성하 ( 城下 ) 에서조회를받은다음, 6월 7일오전에돗토리를출발하여같은달 30일나가사키에도착한다. 돗토리번의요나고와돗토리에머문 2개월 10일동안안용복의행적에 10일이상의공백이보이지않는다. 따라서안용복이 1차도일에서에도에갔을가능성은매우낮다. 서계를받은것이사실이라고하더라도에도쇼군 ( 將軍 ) 의서계가아니라돗토리번주에게서받았을것이다. 승려뇌헌일행과건너간안용복의 2차도일에서도에도행이이루어졌을가능성은낮다. 제2차도일에서는그는에도관백은물론돗토리번주조차도만나지않았다. 안용복이에도에가서쇼군의서계를받았을가능성은거의없다는것이다. 숙종실록에있는안용복공술에서서계를받았다는것이사실이라하더라도제1차도일에서돗토리번주에게서받았을수는있다. 그러나돗토리번주가서계를발급할수있는입장에있는가하는점, 그리고돗토리번주가서계를발급하였다면돗도리번의공식기록에남아있어야하나, 이러한기록은존재하지않는다. 만일에도행의사실을돗토리번에서의도적으로삭제했다면그만큼의동기나이유가있어야한다. 이러한점들이규명되어야할것이다. 2) 원록각서 ( 元祿覺書 ) 속안용복의행적재론- 안용복의 2차도일의목적은무엇인가? 잘알려진바와같이, 안용복의 2차도일은오키섬 ( 隱岐島 ) 을거쳐 조울양도감세장 ( 朝鬱兩島監稅將 ) 을잠칭하여철립포를걸치고 조선팔도지도 ( 朝鮮八道之圖 ) 를소지한채호키의아카사키항 ( 赤埼灘 ) 으로입항한다. 때는 1696년 6월 4일의일이다. 그런데울릉도에서독도 ( 송도 ) 를거쳐오키섬으로건너가는데, 원록각서 의진술에서보면 5월 15일다케시마를출선하여같은날마츠시마에도착하였고, 동 16일마츠시마를나서서 18일아침에오키섬내의니시무라 ( 西村 ) 의바닷가에도착, 동 20일에오쿠무라 ( 大久村 ) 에입항하였다고합니다. 니시무라의바닷가는거친바닷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23 가이므로, 다음 19일에나와서같은날밤에오쿠무라안에가요이포구에배를댔다가, 20일오쿠무라에와서배를정박시키고있습니다. 라고적고있다. 이것을보면안용복일행이울릉도를떠나자산도 ( 독도 ) 에서하룻밤을묵고난다음날, 일본으로출발하여오키섬 ( 隱岐島 ) 에도착하는데 2일이걸렸음을알수가있다. 여기서오키국 ( 隱岐 ) 의다이칸 ( 大官 ) 에게취조를받게된다. 당시다이칸고토츠노에몽 ( 後藤角右衛門 ) 의부하들이보고하는바를보면, 5월 20일조선배한척이해안에닿았으므로그자세한내용을물어본바, 이전에그나라의배 32척이다케시마 ( 울릉도 ) 에도해하여그가운데한척이호키국에소송을위해서도해했다고말했는데, 아마도그배가아닐까한다. 는진술 25) 을하고있는것을보면, 안용복의도일이어떤분명한목적성을가지고건너간것을의미하는것이다. 1. 안용복이말하기를내가타고온배에는 11인이호키주 ( 伯耆州 ) 에왔는데, a 돗토리호키노카미님에게양해를얻을일이있었다고합니다. 순풍을만나서당지 ( 當地 ) 에오게되었습니다. 순차로호키주에도해 ( 渡海 ) 하고자합니다. 5월 15일다케시마를출선하여같은날마쓰시마 ( 松嶋 ) 에도착하였고, 동 16일마쓰시마를나서 b 18일아침에오키노시마 ( 隱岐島 ) 내의니시무라 ( 西村 ) 의바닷가에도착, 동 20일에오쿠무라 ( 大久村 ) 에입항하였다고합니다. 니시무라의바닷가는거친바닷가이므로, 같은날나카무라 ( 中村 ) 에입항, 이항구는처음인연고로, 다음 19일에나와서, 같은날밤에오쿠무라안에가요이포구에배를대었다가, 20 일오쿠무라에와서배를정박시키고있습니다. 1. c 다케시마 ( 竹嶋 ) 와조선사이는 30리이고, 다케시마와마쓰시마 ( 松嶋 ) 사이는 50리라고말하고있습니다. 1. 안용복과도라베 2인은 4년이전계유년 ( 癸酉年 ) 여름에다케시마에서호키주 ( 伯耆州 ) 의배에붙잡혀왔었는데, 그도라헤도이번에데리고 25) 岡嶋正義, 竹島考 下, 元祿 9 年 6 月 4 日條.( 정영미역, 죽도고상 하, 경상북도, pp.242-245.)
24 獨島硏究제 22 호 와서다케시마에남겨두었다고합니다. 26) 특히호키국 ( 伯耆國 ) 의태수에게소송할일이있어서왔다는안용복의답변은 원록각서 와 죽도고 등에서도공통적으로기록되어있다. 안용복은 조선팔도지도 8장짜리지도를소지하여갔는데, 당시지도의취급이국가적기밀자료에해당하는점을생각하면, 호키주태수즉돗토리번주에게아주강력한소송을하기위해간것임은분명하다. 1693년납치사건으로동래부에서공초를당하고죄수취급을받아유배형을받는다. 그후풀려난지얼마되지않아지도까지지참하여건너간것이다. 그 조선팔도지도 에는함경도, 평안도, 강원도등의 8도가그려져있고, 독도가자산도 ( 子山島 ) 라고적혀있었다. 27) 또한그의진술에서 다케시마 ( 竹嶋 ) 에서조선까지는 30리 (= 약 120km) 이고, 다케시마와마츠시마 ( 松嶋 ) 사이의거리는 50리 (= 약 200km) 라고말하고있는데조선본토에서울릉도까지의거리를정확히파악하고있었다. 장생죽도기 ( 長生竹島記 ) 와 죽도고 등에서 1693년납치되어도일했던후쿠우라항 ( 福浦港 ) 을목표로들어온것은그곳에서불과직선거리로 2~3km밖에떨어지지않은니시무라 ( 西村 ) 로당시의항해술로는매우정확한위치로도일했던것이다 ( 앞의자료밑줄부분참조 ). 그렇다면무슨소송을위해건너왔는가하 26) 一安龍福申候ハ私乗参候船ニハ拾壱人伯州江参鳥取伯耆守様江御断之儀在之候越申候順風總布候而当地ヘ寄申候順 ( 風欠カ ) 次第ニ泊州江渡海可仕候五月十五日竹嶋出船同日松嶋江着同十六日松嶋ヲ出十八日之朝隠岐嶋之内 西村之礒ヘ着同二十日ニ大久村江入津仕候由申候西村之礒ハ荒礒ニ而御座候ニ付同日中村江入津是之湊初て故翌十九日波所出候而同日晩ニ大久村之内かよひ浦と申所ニ舟懸リ仕廿日ニ大久村江参懸リ居申候一竹嶋と朝鮮之間三十里竹嶋と松嶋之間五十里在之由申候一安龍福ととらべ弐人四年已前酉夏竹嶋ニ而伯州之舟ニ被連まいり候その其とらべも此度召連参り竹嶋ニ残置申候 27) 기록에지도 8장을소지하고있다는것을보면, 각도별지도 8장으로된지도첩을소지하고갔을것이다. 이지도에는우산도 ( 于山島 ) 가아닌자산도 ( 子山島 ) 라고적힌것으로설명한것으로보아, 천하도 와같은부류의지도였을것이다.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25 는점인데, 다음의기록을보면보다명확해진다. 1. 스님의종파 5인이같이한종파인가다른종파인가무슨종파인가물으니, 뇌헌 ( 雷憲 ) 이그물음의답서에답을썼으나, 그것이불분명한것같이들리었습니다. 이에따라다음 21일에종지 ( 宗旨 ) 와이름, d 하쿠슈 ( 伯洲 ) 에가고자하는이유, 짐등에대해글로써물으니, 병자 ( 病人 ) 이비원 ( 李裨元 ) 이써서내놓은글이있어올립니다. 1. 안용복이말하기를 e 대나무섬 ( 竹嶋 ) 을다케시마라고말하는데, 조선국강원도동래부 ( 東萊府 ) 안에울릉도라는섬이있는데, 이것을대나무의섬이라고합니다. 곧 8도의지도에적혀있는것을가지고있습니다. 1. f 마쓰시마 ( 松島 ) 는위의도 ( 右道 ) 안의자산 ( 子山 ) 이라는섬이있는데, 이것을마쓰시마라고합니다. 이것도 8도의지도에적혀있습니다. 28) 안용복은본인이지참한 조선팔도지도 의 강원도지도 를펼쳐보이면서 (ef), 지난번납치사건때건너간죽도 ( 다케시마 ) 는조선국강원도안에속하는울릉도라는섬이고이는팔도지도에도확연히적혀있다 (e). 그리고이지도에는울릉도옆에자산도 ( 子山島 = 음독으로소우산도 ) 라는섬이있는데이것이일본에서말하는송도 ( 마쓰시마 ) 라고하였다 (f). 1696년안용복의 2차도일목적이 1 1차도일때쓰시마번에서홀대를받은대마도주를막부에고발하여항의하기위한것인지, 2 자신의독점적어장으로판단했던울릉도에서의일본인을배제하기위해소송하러갔는 28) 一沙門宗派五人共ニ一宗可又別宗可何宗たと尋候ヘハ雷憲其問ノ書付ニ答ヲ書記申候然共其分ケ不分明様ニ相聞ヘ申候依之翌廿一日ニ宗旨名伯州ヘ参候王け荷物等之儀書付相尋候ヘハ病人李裨元筆者ニテ書出ス書付有リ則差上申候ウンコンタワ一安龍福申し候ハ竹嶋ヲ竹ノ嶋とと申候朝鮮国江原道東莱府ノ内ニ欝陵嶋と申嶋御座候是ヲ竹ノ嶋と申由申候則八道ノ図ニ記之所持仕候 ソウサン一松嶋ハ右同道之内子山と申嶋御座候是ヲ松嶋と申由是も八道之図ニ記申候
26 獨島硏究제 22 호 지는명확하지않으나울릉도 ( 죽도 ) 와독도 ( 송도 ) 가우리조선의지계임을주장한것은맞는판단이다. 이것은그가미리준비해서간 조울양도감세장 을잠칭하여강원도동래부에서두섬을관장하는관리 ( 안동지, 감세장 ) 라고하였고, 원록각서 의 지도기록 에서도나타나듯이울릉도 ( 죽도 ) 와독도 ( 송도 ) 는조선의영토임을주장한것이다. 이렇게보면 1차도일의납치사건에서 우리의영역울릉도에건너간것임에도오야가문에의해일본으로납치된것 과 돗토리번에서받은서계와은화등을몰수당하고죄인취급을받은것 에대한항의를위해도일한것으로보아야할것이다. 1차도일에서그를극진히대접하면서우대해주었던호키주의번주에게는에도막부에의소송과호키번주에의답례를겸하여호키의아카사키로건너갔을것이다. 이점은 원록각서 의다음과같은진술에서도엿볼수있다. 1. 조선을출선할때쌀 5말 3되들이열가마니를실어왔으나. 13척의배에함께나누어주었으므로지금은밥쌀이부족하게되었다고합니다. 1. g 호키주 ( 伯耆州 ) 의용무를마친다음다케시마 ( 竹嶋 ) 로돌아가, 12 척의배에짐을고쳐싣고, 6 7월경에귀국하여상관 ( 殿 ) 에게드릴예정이라고합니다. 1. h 다케시마 ( 竹嶋 ) 는강원도동래부 ( 東萊府 ) 의안에있고, 조선국왕의이름구모시앙인데, 세상에서의명칭은주상 ( 主上 ) 이며, 동래부영주의명칭은한도 ( 道 ) 의방백 ( 方伯 ) 이고, i 동소 ( 同所 ) 의지배인명칭은동래부사 ( 東萊府使 ) 라고말합니다. 1. 4년이전 j 계유 ( 癸酉 ) 11월일본에서주었던것을적은장부한권을내놓았는데, 곧사본입니다. 29) トホン 29) 一朝鮮出船之節米五斗三升入 十表積参候得共十三艘之者共給申候ニ付只今者飯米貧ク成候由申候. 一伯州用事仕思竹嶋江戻リ十弐艘之舟ニ荷物ヲ積世改仕六七月之比帰国仕リ殿江も運上ヲ上ケ申筈之由申候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27 1. 11인중이름과나이를말하지않았고, 더욱이또종파 ( 宗派 ) 의일로각자바라는바를적고 k 호키주 ( 伯耆州 ) 에서소송을할이유를적어내달라고하였는데, 처음에는알아들을것으로말하더니, 22일아침이되어그일을적어줄수가없고호키주에가서상세히말하겠다는뜻과더불어그물은일은쓸데없다는뜻을적어보내왔기에, 여기에보내드립니다. 30) g에서보면호키주에서일을마치고다시울릉도로돌아가울릉도에서의수확물을싣고귀국하여상관에게드릴것이다. 쌀을열가마니싣고왔으나, 1개월간울릉도에체재하면서함께울릉도에건너간다른 13척의배에나누어주었으므로쌀이부족하다고했다. h와 i를보면마치국왕의명령으로동래부사의허가를받아건너온것처럼행세하고있는데, 이것은본인의소송에대한권위를높이고자한것일것이다. 그런데여기서주목할것은 j의기록이다. 3년전에받았던문서의사본을지참해갔다고하는것은서계가실재했을가능성을나타내는것이다. 그러나안용복은에도에가지않았고막부의서계가아니라호키노카미로부터일정의문서를받았을것이다. 그러나그것을대마도주에게빼앗겨버렸으므로이 ( 문서의 ) 사본을만들어대마도주의난폭성을소송하고자했을것이다. 하지만이사본은막부가써준것 31) 이아니라돗토리번주가건 カンウンタウ一竹嶋は江原道 トナイフチウシャン東莱府之内ニ而朝鮮国王之御名クモシヤン天下ノ名主上 東莱府 イルトハンバイ殿ノ名一道方伯 フシ同所支配人之名東莱府使ト申由申候 一四年以前癸酉十一月日本ニ而被下候物共書付之帳壱冊出シ申候則写之申候. 30) 一拾壱人之内名歳知レ不申外猶又宗門之儀銘々ニ願ハ書記伯州ヘ訴訟之王け書付出シ候様ニと申候得者始ハ心得候由申候處廿二日朝ニ至リ其事共書出スニ不及候伯州ヘ参委細可申上由重而ハ其問事無用ニ可仕由書付出申候則指上ケ申候 31) 비변사의공초기록에서안용복은막부관백의서계를받았다고진술한다. 그러나에도의관백이아닌호키노카미에게어떤종류의서계를받았을가능성이높다. 그러나이문서의사본은기록에남기고있지않다. 당시오키노시마는막부의직할지였고, 안용복이오키의대관소에서서계의내용을공개하지않았던것은이런정황을이해하고있었던때문일수도있다. 그리고돗토리번의기록에
28 獨島硏究제 22 호 네준것일가능성이높다. 왜냐하면안용복의 1차도일 ( 납치 ) 에서안용복은에도로가지않았고적어도막부의관백을만나지못했기때문이다. 비변사공술에서 막부관백의서계를받았다 는안용복의진술은과장된것이었다. 당시안용복을납치하여온것을에도막부에파발꾼 ( 飛脚 ) 을통해보고하고있기는하나, 당시그의행적과파발꾼의움직임을통해보면에도로부터서계를받았을가능성은매우낮다. 3) 오야 무라카와양가의죽도도해와판도인식 다음으로 울릉도쟁계 벌어지던시기에오야 무라카와양가가언제까지죽도도해를했었는가와이들이죽도도해를하면서죽도 ( 울릉도 ) 와송도 ( 독도 ) 의판도를어떻게인식하였는가를살펴보기로하자. ᄀ죽도로어렵하러가는시기는 2~3월경으로요나고를출선하여매년도해하고있습니다. 그섬에서강치어렵을하는배는대소 2척이갑니다. 32) ᄂ 4년전임신년 (1692) 에조선인이그섬에왔을때, 뱃사공 ( 船頭 ) 들이만났던일은이전에말씀드렸습니다. 이듬해계유년 (1693) 에도조선인들이와있었기때문에우리뱃사공들이만난조선인 2명을끌고돌아왔습니다만, 그일도보고하여나가사키로보냈습니다. 갑술년 (1694) 에는난풍을만나그섬에착안하지못하였다는것을보고드렸습니다. 올해 (1695) 도도해하였는데, 이국인이많이보였기때문에착안하지못하고돌아오는길에송도 ( 독도 ) 에서전복을조금잡았습니다. 위의내용을보고합니다. 33) 서도문서를건네주었다는기록이없는데, 당시호키노카미의입장에서보면그런서계를써줄입장에있지아니하므로, 상황을나쁘게하지않기위해기록을남기지않았을수도있다. 32) 竹嶋江漁採参候時節は 二月三月頃米子出船毎年罷越候 於彼嶋蚫 みちの魚獵仕候船数大小二艘参候事, 竹島之書附 元禄八年三號. 33) 四年以前申年, 朝鮮人彼嶋江参居候節, 船頭共参相候儀, 其節御届申上候 翌酉年も朝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29 ᄃ겐로쿠 ( 元祿 ) 연간에죽도에조선인이건너가기시작하여이사실을보고했습니다. 일본이단속을해서조선에통보한후에종래대로도해하라고명하셨으므로 1693, 1694, 1695년까지도해했지만매년조선인들이많이건너와있었습니다. 34) 오야 무라카와양가의죽도도해는 2~3월의시기를선택하여그들의출항지요나고 ( 米子 ) 를출발하여죽도 ( 울릉도 ) 로건너갔다. 이때크고작은배두척으로건너가는데이즈모국 ( 出雲國 ) 의구모즈 ( 雲津 ) 에서 2~3명을인부또는수부로고용하여태우고, 오키국 ( 隱岐國 ) 후쿠우라 ( 福浦 ) 에서는 8~9명의사람을추가로고용하여약 20여명의규모로갔었다. 울릉도쟁계 가진행되고있었던시기양가의도해사실을확인해보면, 1692 년무라카와가문의배가건너갔으나수많은조선인이먼저도해하여어렵을하고있었으므로수적으로열세에있어서어렵을하지못하고되돌아왔다. 1693년에는총검류를싣고건너가안용복과박어둔을배로유인하여인질로써납치해왔다. 그로인하여조일간에울릉도영유권을두고 울릉도쟁계 가촉발되어서계의교환을통해교섭이진행되고있었다. 그런와중에양가의배는 1694년에도건너갔으나난풍을만나울릉도에착안을하지못하였고, 1695년에도도해하였으나조선인이많이건너와있었기때문에착안하지못하고다만송도 ( 독도 ) 에서전복을조금잡아돌아왔다고한다. 1696년 1월 28일 죽도도해금지 가내려지므로오야 무라카와양가의문서에서도 1696년의도해기록은보이지않는다. 鮮人参居申内, 先頭共罷逢, 朝鮮人二人連候而米子江罷帰, 其段も御届申上, 長崎江相送申候 戌年は遭難風, 彼嶋着岸不仕段尾届申上候 当年も渡海仕候処, 居国数多見江申ニ付, 着岸不仕罷帰候節, 松嶋ニて蚫少々取申候 右之段御届申上候事, 竹島之書附 元禄八年三號. 34) 元禄年中, 右竹島へ唐人相渡り初申候故御注進申上候, 依之段々日本之御仕置を以朝鮮国江被仰遣, 其上唯今迄之通渡海可仕旨被為仰付候故, 元禄六七八年迄渡海仕候得共, 年々唐人大勢相渡り申候委細之儀者別札ニ奉書上候通ニ御座候, 大谷九右衛門竹島渡海由來記拔書控 九右衛門勝房條.
30 獨島硏究제 22 호 안용복의 2차도일 (1696.5.15) 에서울릉도와독도에서일본인을쫓아오키섬까지갔다는것은일본사료에서는나타나지않는다. 그러나 1696년 1 월 28일에내려진 죽도도해금지 가돗토리번저를거쳐오야 무라카와양가에전달되는것은 8월 1일의일로 7개월간의시차가존재한다. 5월중순에도해했던안용복이울릉도와자산도 ( 독도 ) 에서만난왜인을쫓아냈다는것이기록된 숙종실록 의내용은사실일개연성이크다. 매년 2~3월에이루어지는요나고어민의죽도 ( 울릉도 ) 도해는 죽도도해금지 의사실을모른채예년처럼이루어진것으로보아야한다. 1625년막부로부터 죽도도해면허 가내려져그이듬해인 1626년부터 1696년까지도해를했다고한다면오야 무라카와양가의울릉도도해는 71년간이루어진것이된다. 그렇다면당시울릉도도해를했었던오야 무라카와양가의독도인식이어떠했는가는 죽도도해금지 가내려지기직전, 에도막부가송도 ( 독도 ) 에대해돗토리번 ( 鳥取藩 ) 과마츠에번 ( 松江藩 ) 에게내린질의에대한답변을통해확인할수있다. 막부가최종적으로 죽도도해금지 를내리기전에우선돗토리번에대해 죽도이외에도인백 ( 因伯 ) 양주에부속한섬은있는가? 또한, 양국 ( 두지역 ) 의사람이고기를잡으러간것인가? 라고묻자, 죽도 ( 울릉도 ) 와송도 ( 독도 ) 는양국에부속된섬이아닐뿐만아니라다른부속섬도없다고대답했다. 여기서갑자기송도 ( 독도 ) 에대한말이나왔으므로, 1696년 1월 25일막부는돗토리번의에도루스이 ( 留守居 ) 를불러송도에대해조회한것으로보인다. 막부가구두로물었기때문에그질의서는존재하지않으나송도까지의거리와소속, 송도 ( 독도 ) 및죽도 ( 울릉도 ) 도해의정황에대해질의한것이다. a 죽도, 송도그외양국에부속된섬은없습니다. 35) b 1. 송도 ( 松島 ) 까지호키국 ( 伯耆國 ) 으로부터바닷길 ( 海路 ) 120 리정도 35) 竹島, 松島其外両国江附属の島無御座候事, 鳥取藩史 第六卷, 事變志, 1971 年 11 月.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31 됩니다. 1. 송도 ( 松島 ) 에서조선까지는 80~90리정도된다고들었습니다. 1. 송도 ( 松島 ) 는어느쪽나라 ( 國 ) 36) 에도속하는섬이아니라고들었습니다. 1. 송도 ( 松島 ) 에어렵을하러가는건은죽도 ( 竹島 ) 로도해할때지나가는곳이므로잠시들러어렵을합니다. 다른영지 ( 他領 ) 로부터어렵을하러오는일은들은적이없습니다. 그렇지만이즈모국 ( 出雲國 ), 오키국 ( 隱岐國 ) 의사람들은요나고 ( 米子 ) 사람과같은배를타고갑니다. 이상. (1696년) 1월 25일 37) c 호키국 ( 伯耆國 ) 요나고 ( 米子 ) 의죠닌 ( 町人 ) 오오야규에몽 ( 大屋九衛門 ), 무라카와이치베에 ( 村川市兵衛 ) 가부리는뱃사람 ( 船子 ) 들이외에영지 ( 領國 ) 의사람이죽도에도해하는일 ( 儀 ) 은없다고합니다. 물론다른영지 ( 他領 ) 의사람이도해하는일또한없다고합니다. 오오야규에몽 ( 大屋九衛門 ), 무라카와이치베에 ( 村川市兵衛 ) 는몇년전부터죽도도해의건에대한면허를받아건너가고있으나다른곳에서가는일은결코없었습니다. 이들뱃사람은죽도에어렵을하러건너갈때이즈모국과오키국의어부 ( 獵師 ) 들을고용하여요나고뱃사람과같은배로건너갑니다. 인원수는매년다릅니다. 이즈모국으로부터건너가지않은적도있습니다. 대략이즈모국 ( 出雲國 ) 에서 2~3 명오키국 ( 隱岐國 ) 에서 8~9명정도고용하여건너간다고합니다. 이상. (1696년) 1월 25일 38) 36) 일본의영주국 = 지방의단위로여기서는호키국 ( 伯耆國 ) 과이나바국 ( 因幡國 ) 을지칭함. 37) 一. 松島江伯耆国より海路百弐十里程御座候事 一. 松島より朝鮮江は八九十里程も御座候様及承候事 一. 松島は何れの国江附候島にても無御座由承候事 一. 松島江猟参候儀 竹島江渡海の節道筋にて御座候故 立寄猟仕候 他領より猟参候儀は不承候事 尤出雲国 隠岐国の者は米子のものと同船にて参候事 以上正月廿五日, 鳥取藩史 第六卷, 事變志. 以上正月二十五日, 鳥取藩史 第六卷, 事變志. 38) 伯耆国米子の町人大屋九右衛門 村川市兵衛船子共より外は領国のもの竹島江渡海仕候儀成不申候 尤他領の者渡海の儀猶以成不申候 大屋九右衛門 村川市兵衛儀は先
32 獨島硏究제 22 호 여기서송도 ( 독도 ) 까지의거리는호키국 ( 伯耆國 ) 에서약 120리이지만, 송도에서조선까지의거리는그보다훨씬가까운 80~90리정도라는것과송도가이나바 ( 因幡 ) 와호키 ( 伯耆 ) 어느지역에도속하지않는다. ( 일본의 ) 다른지방에서죽도나송도로도해하는일은없다는것과죽도도해는어디까지나오야 무라카와양가사람에의해고용되어건너간다고대답하였다. 조선까지의거리인식을보면이들은죽도 ( 울릉도 ) 와송도 ( 독도 ) 가자신들의영역이아닐뿐만아니라, 일본의다른어느지방에서도도해하는일은없기때문에조선의영토라고인지하고있었다. 이에막부는그다음날인 1월 26일송도의존재에대해, 당시선원으로 2~3명의이즈모국 ( 出雲国 ) 사람과 8~9명의오키국 ( 隠岐国 ) 사람이고용되어도해하였기에마츠에번 ( 松江藩 ) 에대해질의를한다. d 1. 운슈 ( 雲州 ), 인슈 ( 隱州 ) 사람들은스스로돈벌이를위해의죽도 ( 礒竹 ) 에건너가는일은없다고합니다. 그렇지만최근의상황은모릅니다. 1. 하쿠슈 ( 伯州 ) 요나고쵸닌 ( 町人 ) 무라카와이치베 ( 村川市兵衛 ), 오야규에몽 ( 大屋九右衛門 ) 이운슈 ( 雲州 ) 구모즈 ( 雲津 ) 포구에서바로의죽도 ( 礒竹 ) 로도해하지는않습니다. 오키국 ( 隠岐國 ) 까지배로가서그곳에서의죽도 ( 礒竹 ) 로도해한다고들었습니다. 1. 죽도의건은운슈 ( 雲州 ) 에서는의죽 ( 礒竹 ) 이라고합니다. 1. 운슈 ( 雲州 ), 인슈 ( 隠州 ) 에서의죽도로바닷길이험난하기때문에위의양국사람은요나고사람과동선하여건너가기를좋아하지않지만이치베 ( 市兵衛 ), 규에몽 ( 九右衛門 ) 의뱃사공들이매년고용하여건너간다고합니다. 1. 위와같습니다만, 스스로기죽도에도해하는일은결코없습니다. 年より竹島渡海の儀被遊御免罷越候付 外より参候儀は決て無御座候 右の船子とも竹島に猟罷越候節 出雲国隠岐国の猟師共雇候て米子の船子同船にて罷越候 人数は年々相違御座候 山雲国よりは不参儀も御座候 大かたは出雲国より二三人 隠岐国より八九人程も雇候て罷越由御座候 以上正月二十五日, 鳥取藩史 第六卷, 事變志.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33 그러나인슈 ( 隠州 ) 에대해서는최근대관소 ( 代官所 ) 가되었기때문에자세한것은모릅니다. 1. 자세한것에대해물어보신다면, 영지 ( 國元 ) 에말하여조사하도록할것입니다. 이상. (1696년) 1월 26일마츠다이라데와노카미 ( 松平出羽守 ) 39) 이것은막부에대한마츠에번에도루스이 ( 留守居 ) 의답변이다. 죽도를운슈 ( 雲州 ) 즉이즈모국 ( 出雲國 ) 에서는 이소타케 ( 礒竹 ) = 의죽이라부르며, 운슈 ( 雲州 ), 인슈 ( 隠州 ) 에서는단독으로건너가는일은없다. 의죽도 ( 이소타케시마 ) 로가는항로가험하기때문에요나고의양가사람들과함께죽도로가는일을좋아하지는않지만, 양가의뱃사람에의해고용되어건너갈뿐, 독자적으로건너가는일은없다고했다. 그리고이즈모국에서보다더많은사람이고용되는오키국 ( 隱岐國 ) 에대해서는막부직할지로대관소가설치되어있는관계로자세한사항에대해서는마츠에번의영지에조회를해봐야알수있다는것이다. 이로써막부는죽도와송도방면으로의도해는오직돗토리번요나고의쵸닌 ( 町人 ) 무라카와이치베 ( 村川市兵衛 ), 오야규에몽 ( 大屋九右衛門 ) 가주도적으로도해하고있다는것과두섬이이들양가가소속된돗토리번의부속이아니라어렵을위해매년건너갔을뿐이라는사실을재삼확인하게되었고 2일후인 1월 28일 죽도도해금지령 을하달하기에이른다. 여기서이답변을통해보면오야 무라카와양가와돗토리번그리고마츠에번까지도자신들의판도로인식하고있지않다는것이고, 그답변을통해막부가죽도 ( 울릉도 ) 와송도 ( 독 39) 一雲州, 隠州之者為自分働, 礒竹江致渡海候之儀, 不及承候, 乍然, 隠州近年之様子不存候, 一伯州米子町人村川市兵衛, 大屋九右衛門雲州雲津浦より直ニ礒竹江者不致渡海, 隠岐國迄乗船, 彼地より礒竹江渡海仕候由承候, 一竹嶋之儀雲州ニ而者 礒竹と申候事, 一雲州, 隠州より礒竹江海路難所ニ而候処, 右両國之者, 米子之者ニ同船仕参候儀望不申候得共, 市兵衛九右衛門舩子共年々雇申候付罷越候事, 一右之通候故, 自分として礒竹江渡海之義決而無之候, 乍然, 隠州之儀者近年御代官所ニ成候故, 委細不存候事, 一委細之儀御尋被遊候者, 國元江申遣吟味可仕候已上正月廿六日松平出羽守, 磯竹島事略 元綠九年正月二十六日條.
34 獨島硏究제 22 호 도 ) 를포함한 죽도도해금지령 을내렸다는것을확인할수있다. 4. 맺음말 최근국내에서많은독도관련사료들에대한번역작업이제법진척되고있으며, 일본문헌자료의분석을통해독도영유권문제에접근하는연구가늘어나고있다. 따라서이러한관심을가진독도연구논문도비교적양산되고있는점은무척다행스런일이라할수있다. 하지만독도연구의양적성장이반드시그질적향상을담보하지못하고있다는점에서아쉬운측면또한많다. 그럼에도불구하고독도의역사적 진실 에대한해명이상당부분이루어지고있는점은고무적이라하겠다. 이제는한일양국의연구자가서로자국중심의사관에서벗어나객관적인잣대로양국의사료들을함께검토하여역사적사실을사료에근거하여객관적으로고증하고이를논증하여야할때가된것같다. 본연구에서는 울릉도쟁계 의과정에서한일양국의쟁점이되고있는사항들가운데몇가지점들에대해명확히밝히고자하였다. 특히당시의사료로써 죽도기사, 죽도고, 원록각서 등의사료의분석을통해안용복사건의진위의일단을해명하고자했다. 여기서검토된것들을정리하는것으로본고의마무리에가름하고자한다. 첫째, 우리의연구결과를비롯한여러자료에서안용복과박어둔은총검에의해일본으로납치되었다고보는견해가많다. 즉오야가문의무력에의해일본으로납치됐다고보고있다. 그러나본연구의결과를보면안용복과박어둔은술에의해일본배에유인되어술잔치를벌인결과그대로일본배로연행되어갔다는것을알수있다. 둘째, 안용복의 1차도일에서에도로가서막부의장군으로부터서계를받았는가하는점이다. 우선한일양국의기록을대조해보면안용복이에도로갔을가능성은매우낮다고할수있다. 또한에도막부의장군으로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35 부터서계를받았을까하는의문에관한것이다. 본고에서분석한결과에의하면안용복의에도행은없었으나, 서계는받았을가능성이있다는것이다. 그렇다면그서계는누구에게서받았는가하는점이다. 가능성으로서는돗토리번주로부터일종의확인으로서서신 ( 서계 ) 을받았을가능성이있다. 그러나그서계는쓰시마에서빼앗겼던것이다. 이에대해서는쓰시마에서의기록을바탕으로보다세밀한검토를요한다할것이다. 셋째, 1696년 1월 28일 죽도도해금지령 이내려진이후오야 무라카와양가가그해에도죽도 ( 울릉도 ) 도해를했었는가하는점이다. 아쉽게도지금까지검토한일본사료를통해서는양가의죽도도해는확인되지않는다. 그러나당시정황에의해돗토리번측이기록에서삭제하였을개연성이크다. 안용복의진술에서울릉도에서일본인과조우한것은사실이며, 이들을쫓아일본으로건너간것또한사실이라하기위해서는보다세밀한검토가추가적으로필요하다. 만일일본인들이도해해있었던것이사실이라면, 무라카와가문의어부들이 1696년봄울릉도 ( 죽도 ) 에서어로활동을하고있었을것이고, 그들의뒤를쫓아안용복과뇌헌일행은오키섬과돗토리성으로건너갔을것이다. 넷째, 울릉도쟁계 의진행과정에서오야 무라카와양가와돗토리번및마츠에번의울릉도 독도에대한판도인식을보면, 명확히자신들의판도 (= 영역 ) 이아니라는것을밝히고있다는점이다. 이즈모국이나오키국에서는독자적인죽도도해를하지않았고, 양가가속한돗토리번에서조차양가이외에죽도도해를하는사람은없었다. 울릉도 독도가명백히자신들의지방에부속되는섬이아님을인지하고있었고저쪽나라즉조선의판도라고인식하고있었다. 때문에이들의조회를바탕으로막부가 죽도도해금지 를내리게되는것이다. 본고에서는 울릉도쟁계(= 죽도일건 ) 와관련된안용복의행적에대해그일단면을해명해보고자했다. 한일양국의사료를함께검토함으로써일본측이주장하는 안용복은호언장담하며, 거짓말쟁이 라는것이일정
36 獨島硏究제 22 호 부분사실과다르다는것을밝히고자했다. 하지만충분히과제를해명하지못하였다. 보다안용복공술의객관성을논증하기위해서는진실된부분과더불어, 일정부분그의진술에당시해금의죄를면하기위한임시방편의거짓과호언이함께존재한다는것을구체적으로입증할필요가있다. 그래야만 거짓말쟁이 로치부되어안용복사건의전체를부정하는일본의논리가타당하지못하다는것을고증할수있는것이다. < 참고문헌 > 김화경, 안용복진술의진위와독도강탈과정의위증, 민족문화논총 44집, 영남대민족문화연구소, 2010, pp.71-113. 나이토세이츄 ( 内藤正中 ), 죽도문제보유 - 시마네현죽도문제연구회최종보고서비판, 독도연구 제3호, 2007, pp.37-80. 박병섭, 안용복사건과돗토리번, 독도연구 제6호, 2009, pp.281-341. 송휘영, 울릉도쟁계( 竹島一件 ) 의결착과스야마쇼에몽 ( 陶山庄右衛門 ), 일본문화학보 제49집, 2011, pp.263-286., 일본고문서에나타난일본의독도인식, 일본근대연구 제50집, 2015, pp.383-406. 이훈, 조선후기독도 ( 獨島 ) 영속시비, 독도와대마도, 지성의샘, 1996. 장순순, 조선후기對馬藩의조선교섭과 1693년울릉도영속시비, 동북아역사논총 37호, 2012, pp.189-232. 신용하, 독도의민족영토사연구, 지식산업사, 1996. 김호동, 독도 울릉도의역사, 경인문화사, 2007. 송병기, 재정판울릉도와독도, 단국대학교출판부, 2007. 川上健三, 竹島の歴史地理学的研究, 古今書院, 1966. 内藤正中, 竹島 ( 鬱陵島 ) をめぐる日韓関係史, 多賀出版, 2000. 內藤正中 朴炳渉, 竹島 = 独島論争, 新幹社, 2007. 池内敏, 竹島問題とは何か, 名古屋大学出版会, 2012., 近世日本の西北境界 史林 90-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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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獨島硏究제 22 호 <Abstract> Reinterpretation of Historical Materials on Ulleungdo Jaenggye Song, Hwi-Young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define the discussions on conflict between Korea and Japan concerning Ulleungdo Jaenggye =Takeshima-Ikken which raised by Ahn Yongbok's cross the sea to Japan(so forth kidnapping) in 17th century, and visualize some disputes about the historical materials. First, this paper describe the situation of kidnapping of Ahn Yongbok and Park Eodun in 1693, secondly discuss about the official letter which had been insisted by Ahn Yongbok received from Japan government. Thirdly, this paper review the recognition of Japanese who have lived in Matsue Bun and Dottori Bun on Dokdo around 1696 when Japan announced Order of Prohibition Sail to Takeshima and the Japanese sailing to Ulleungdo. Many researches from Korea described Ahn Yongbok and the group were kidnapped by force in threat with sword and gun but he was mentally cheated in drunken state by Japanese fishers in reality. Also there was no official letter to Ahn Yong-bok during his detention in Dottori Bun from Japan government and no trip to Edo Bafuku as well. Japanese historical materials confirm that Japanese sail to Ulleungdo sea area was limited until 1695 and the recognition of Japanese prior to Order of Prohibition Sail to Takeshima revealed Ulleungdo and Dokdo area was out of Japan boundary and belonged to Choseon
울릉도쟁계 관련사료의재해석 39 boundary. The historical materials concerning Ulleungdo Jaenggye still disputed between two countries in many points of view. I suggest more realistic and objective research activity about the Ulleungdo Jaenggye on the basis of historical materials is necessary. Key words: Ulleungdo Jaenggye, Ahn Yongbok's sail to Japan, reinterpretation of historical materials, kidnap, recognition on Ulleungdo and Dokdo 이논문은 2017 년 5월 25일에투고하여 2017 년 6월 3~25 일에심사하여 2016 년 6월 26일에게재 결정됨
41 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 지리적인식 * - 죽도기사 죽도고 원록각서 를중심으로 - 1)2) 이태우 ** < 목차 > 1. 머리말 2. 죽도기사 ( 竹島紀事 ) 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3. 죽도고 ( 竹島考 ) 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4. 원록각서( 元祿覺書 ) 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5. 맺음말 < 국문초록 > 이논문의목적은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에대한지리적인식을중심으로그들이말하는다케시마 ( 울릉도 ) 와마쓰시마 ( 독도, 우산도, 자산도 ) 가한국의영유임을재확인해보는것이다. 일본이 17세기고유영토설의근거사료로삼고있는 죽도기사 의곳곳에서이미울릉도와우산도가조선의역사지리서에기술되고있음을인정하고있음을볼때, 일본은이미 17세기이전부터울릉도와독도를조선이영유하고있었음을인식하고있었다. ** 이논문은 2016년대한민국교육부와한국연구재단의지원을받아수행된연구임 (NRF-2016S1A5B8A02929224). 이논문은 2017년 2월 17일영남대독도연구소 춘계학술대회 에서발표한발표문을수정 보완한것이다. 논문의문제점을상세하게논평해주신박지영 박경근박사께감사드린다. 또한논문제목과내용수정에조언을해주신장순순박사께도감사드린다. **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연구교수
42 獨島硏究제 22 호 죽도고 에서도역시오야와무라카와집안이 80년간울릉도에서불법적인어로활동을한사실만을가지고자신들이되찾아야할섬으로주장하고있는것은잘못된인식으로지적할수있다. 왜구의노략질로고통받던울릉도주민들을보호하기위해섬을비워둔것을사람이살지않는폐도라고하면서, 잠시동안그곳에서어로활동한것을핑계로자신들이되찾아야할섬이라고강변하고있다. 이것은일본외무성홈페이지의 다케시마문제를이해하기위한 10가지포인트 중 < 포인트 3> 의 17세기고유영토확립설 주장과같은맥락에서이해할수있다. 원록각서 ( 元祿覺書 ) 에서안용복일행이타고온배에걸린 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기 ( 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 ) 라고쓰여진깃발은중요한의미가있다. 바로안용복이울릉도 독도가조선의영유임을일본측에선포하는강력한의지가담긴글이라고할수있다. 조선의울릉도와우산도 ( 자산도 ) 양도의감세장을칭하며죽도 ( 울릉도 ) 의조선영유를당당히확인하기위해도일한것임을가시적으로표현한것이라할수있다. 근세울릉도 독도관련일본사료에나타난지리적인식의특징을보면, 조선에서울릉도 독도까지거리를실제보다훨씬더가까운것으로인식하고있음을알수있다. 이는 원록각서 와 죽도기사 에서안용복의진술을통해확인할수있다. 죽도고 를편찬한오카지마는오히려조선에서울릉도 독도까지의거리가더가까운것으로인식하고있음을확인할수있다. 이러한사실은울릉도 독도가조선영토라는사실을이미알고있었기에공간적거리보다인식적거리가훨씬가까웠음을보여주고있는것이다. 근세일본의사료에대한검토, 특히 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에대한검토는일본측의 17세기다케시마고유영토설주장 을비판하기위한단서를제공한다는점에서중요한의미가있다 주제어 : 울릉도, 독도, 근세일본의사료, 지리적인식, 죽도기사 ( 竹島紀事 ), 죽도고 ( 竹島考 ), 원록각서 ( 元祿覺書 ), 안용복 1. 머리말 일본시마네현 < 죽도문제연구회 > 는 죽도기사, 죽도고, 원록각서 등의근세일본의사료를소위 17세기 고유영토확립설 을주장하는근거로삼고있다. 안용복의도일과울릉도쟁계 ( 죽도일건 ) 의과정을기술하고있는이세사료들은공통적으로울릉도 ( 당시의죽도 ) 와독도 ( 당시의송도 ) 의영유에대한일본측의인식 태도등을잘보여주고있으며, 특
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43 히울릉도 독도에대한지리적인식을통해서도잘드러나고있다. 물론각각의사료마다울릉도 독도를다루는기본입장이같지는않다. 죽도기사, 죽도고 가일본측입장에서안용복과울릉도쟁계, 울릉도 독도를주관적으로기술하고있다면, 원록각서 는상대적으로좀더객관적인관점에서이문제를기술하고있다는점에서사료에대한신중한접근이필요할것이다. 그렇다면근세일본의사료를통해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에관한연구가필요한이유는무엇인가? 물론 17세기한 일간울릉도 독도영유권을둘러싼안용복의활동과울릉도쟁계의타결과정을이해하고, 결정적으로독도가한국의영토임을밝히는데중요한의미를가진다는데이견이있을수없을것이다. 그러나무엇보다일본의 17세기고유영토설비판의열쇠가된다는점에서중요한의미를가진다고할수있다. 잘알고있듯이일본외무성은독도에대한영유권주장을대내외적으로홍보하고강화하기위해서 10가지포인트를그근거로제시하고있다. 특히 < 포인트 3> 에서 일본은 17세기중반에는이미다케시마 ( 독도 ) 의영유권을확립하였습니다. 라고주장하면서그근거로서 1618년돗토리번의오야와무라카와집안의 죽도도해면허 취득을들고있다. 즉죽도 ( 울릉도 ) 에서어렵활동을하기위한 항행의목표지점으로서, 중간정박지로서또한강치나전복잡이의장소 로독도를이용해왔기때문이란것이다. 그러나결국 2차에걸친안용복의도일과조 일양국정부의 울릉도쟁계 타결과정에서 죽도도해면허 가취소되고 죽도도해금지령 이내려짐으로써울릉도 독도에대한영유권논쟁은종결되게된다. 이러한일련의과정은 죽도기사, 죽도고, 원록각서 등근세일본의사료를통해확인할수있다. 따라서이들근세사료에대한검토, 특히 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에대한검토는일본측의 17세기다케시마고유영토설주장 을비판하기위한단서를제공한다는점에서중요한의미가있다고생각한다. 1)
44 獨島硏究제 22 호 이하에서는 죽도기사, 죽도고, 원록각서 에나오는죽도 ( 울릉도 ) 와송도 ( 독도 ) 에관한지리적인식과이해를중심으로 17세기고유영토확립설 의문제점을비판해보고자한다. 2. 죽도기사 ( 竹島紀事 ) 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죽도기사 는 1726년 12월쓰시마번사 ( 藩士 ) 인고시쓰네에몬 ( 越常右衛門 ) 이편찬한책이다. 울릉도쟁계 ( 죽도일건 ) 사건당시쓰시마번가로 ( 家老 ) 였던오우라리쿠에몬이집필했다. 이책은사건발생으로부터멀지않은 1726년에교섭당사자인쓰시마번에의해작성된공식기록이라는점에서의미가있다. 그러나일본과조선정부사이에서외교교섭의창구역할을했던쓰시마번이죽도 ( 울릉도 ) 에대한욕심을버리지못하고에도막부와조선조정사이에서왜곡된정보로의도적기만을기도함으로써약 3년간교착상태에빠지게하였다. 죽도기사 는이러한전후맥락속에서 울릉도쟁계 의전개과정을읽고사실을파악할필요가있다. 죽도를둘러싼조 일간의외교교섭과정을기술하고있는 죽도기사 에서는죽도 = 다케시마 ( 당시울릉도 ) 와송 1) 울릉도 독도의영유권과관련한일본의 17 세기 다케시마고유영토설 비판에대한선행연구로는다음의자료를참조. 손승철, 17 세기말안용복사건을통해본조일간의해륙경계분쟁, 한일관계사연구 42, 2012.8, 229-265 쪽 ; 송휘영, 일본의독도에대한 17 세기영유권확립설 의허구성 - 일본외무성의죽도홍보팸플릿의포인트 3, 4 비판, 민족문화논총 44, 2010.4, 35-70 쪽. 송휘영, 울릉도쟁계 ( 竹島一件 ) 의결착과스야마쇼에몽, 일본문화학보 49 집, 2011.5, 264-286 쪽 ; 송휘영, 일본의독도에대한 17 세기영유권확립설 의허구성, 민족문화논총 44. 35-70 쪽 ; 송휘영, 일본고문서에나타난일본의독도인식, 일본근대학연구 50 호, 한국일본근대학회, 2015. 387-410 쪽 ; 원연희, 일본사료해석을통한울릉도, 독도연구 - 기봉행소 ( 崎奉行所 ), 대마번 ( 對馬藩 ) 에서의안용복의진술을중심으로, 온지논총 37 호, 온지학회, 2013. 154-189 쪽 ; 장순순, 1696 년안용복의도일과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한일관계사연구 49, 2014.12, 353-391 쪽.
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45 도 = 마츠시마 ( 당시우산도또는자산도 ) 에대한언급이여러번등장한다. 죽도기사 에는 우산도 라는명칭의사용과함께울릉도 독도에대한지리적인식이나타난다. 첫번째는쓰시마번에서심문을받았을때안용복이울릉도에서 우산도 를두번보았다고하고있고, 두번째는 여지승람 의기록을들어우산도와울릉도는별개의섬인것처럼보인다고하였다. 먼저첫번째 우산도 관련언급은안용복이쓰시마번에서심문을받는과정에서나온것이다. 이번에간섬의이름은알지못합니다. 이번에간섬에서북동쪽에큰섬이있습니다. 그곳에머물러있는동안겨우 2번정도보였습니다. 그섬을아는사람은우산도라고부른다고들었습니다. 결국가보지는못했지만대략 [ 울릉도에서 ] 뱃길로하룻길정도걸리는것처럼보였습니다. 2) 쓰시마도주가다다요자에몬 ( 多田與左衛門 = 橘眞重 ) 에게보낸답신에서안용복의구술을옮긴것이다. 1693년 3월 27일울릉도에도착한후 4월 18일일본어부에게납치당하기까지 21일간안용복은 우산도 를두번보았다고증언하고있으며, 거리로는울릉도에서 우산도 까지약하루정도가걸리는것으로인식하고있음을알수있다. 세종실록지리지 (1454) 에는 우산 ( 독도 ) 과무릉 ( 울릉도 ) 두섬이서로멀지않아날씨가맑으면바라볼수있다 는기록이있고, 고려사지리지 (1451) 와 신증동국여지승람 (1531년), 만기요람 (1808년) 에서도울릉도와우산도는모두우산국의땅이라고기록돼있다. 안용복의진술은 세종실록지리지 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사료에서이미언급되고있는사실을확인해주고있는것이다. 죽도기사 에서는울릉도와우산도가우르친토와부룬세미로도불려졌다는것을알수있다. 그러나당시의일본인들은명칭만들었을뿐이에대한정확한지리적인식을가지고있지못했다. 2) 죽도기사 1권, < 원록 6년 (1693년) 12월 5일자답서 >, 경상북도독도사료연구회역, 51쪽 ( 이하 죽도기사 로표기함 ).
46 獨島硏究제 22 호 죽도를조선에서는부룬세미라고부른다고전해왔습니다. 울릉도라고하는섬이있습니다. 일본에서는울릉도를기죽도라고부릅니다. 울릉도와부룬세미는다른섬입니까? 3) 부룬세미는다른섬입니다. 자세하게알아본결과우루친토 ( 울진도 = 울릉도 ) 라고부르는섬이있는데, 부룬세미는우루친토보다북동쪽으로희미하게보인다고들었습니다. 우루친토의크기는한바퀴도는데하루반정도걸린다고합니다. 원래높은산으로전답과큰나무등이있다고들었습니다. 4) 엔하와이 ( 영해 ) 와죽도사이는 50 리정도가될것이라고기억합니다. 5) 1693년안용복납치당시 죽도기사 Ⅰ권에나오는죽도의지리관련언급이다. 울릉도는돗토리이나바에서 160리 (296km) 6) 떨어져있으며, 울릉도 = 기죽도로인식하고있지만, 부룬세미라고불리는섬과동일섬인지는의문을가지고있다. 그러나확인결과울릉도 = 우르친토라는섬이고, 크기는한바퀴도는데하루반정도걸리고, 높은산과전답, 큰나무등이있는걸로들었다고한다. 울릉도북동쪽으로희미하게보이는섬이있는데부룬세미 ( 우산도 ) 라고하며, 또한동해안의영해와죽도사이의거리는약 50리 (92km) 로인지하고있음을알수있다. 울릉도쟁계 ( 죽도일건 ) 당시막부와조선조정과의사이에서교섭을담당한쓰시마번은울릉도가오랫동안폐도로방치되어있었고, 자신들이울릉도해역에서어업활동을해왔다는이유를들어울릉도가일본영토임을주장하였다. 이러한태도는 죽도기사 의곳곳에서잘나타나고있다. 특히울릉도와죽도가 1도2명설 ( 一島二名說 ), 즉한개섬을서로다른명칭으로불러서생긴문제라는주장과관련해서일본은자신들에 3) 죽도기사, 19쪽. 4) 죽도기사, 20~21쪽. 5) 죽도기사, 35쪽. 6) 일본의해상거리단위 1리 ( 浬 )=1.852km로적용.
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47 게유리한주장만을일방적으로요구하였다. 조선의어민이일본죽도에갔다는것을듣고놀랐습니다. 늘바닷가에사는자에게는우리나라안일지라도먼곳에는가지말도록하라고지엄하게분부해두었지만, 아랫사람들의일인지라법을어기고폐를끼쳤을것이라고생각합니다. 이번에법을어긴자들은모두처벌하겠습니다. 라는내용으로회답을해주시면될것이라고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울릉도를언급하신다면사자가수령하지않을것이라고생각합니다. 7) 조선변경지역의사람이국경을넘어일본죽도로건너갔다는것을자세히듣고놀랐습니다. 향후로는지엄하게가지못하도록규율집행을분부할것입니다. 라는내용으로우리가납득이되면해결될일입니다. 울릉도를적어넣은것은필요없는것이아닙니까? 8) 나아가쓰시마측은설혹울릉도가조선땅이라하더라도오랫동안관리하지않고폐도로방치해두었기때문에현재이섬을이용하고있는자신들의것이라고억지주장을펼치고있다. 울릉도를일본에서죽도로부르게된것도임진왜란이후조선에서지금까지버려두어, 일본에서오랫동안지배해왔기때문으로울릉도라고하더라도조선국에서는할말이없을것입니다. 국토변동은일본과조선에만한정되는것이아닙니다. 이전에타국의땅이었을지라도오랫동안이쪽에소속되어있었다면이쪽의땅입니다. 9) 주인이잠시비워놓은집에타인이들어가서살면그집은타인의집이된다는논리다. 이어서두번째울릉도 독도에대한지리적인식은 여지승람 의기록을들어우산도와울릉도는별개의섬인것처럼보인다고언급한부분에서나타나고있다. 7) 죽도기사, 65쪽. 8) 죽도기사, 68쪽. 9) 죽도기사, 50~51쪽.
48 獨島硏究제 22 호 여지승람 의기술내용에따르면우산도와울릉도는별도의섬인것처럼보입니다. 하지만일설로는본래한섬이라고하므로다른섬인지분명하지않습니다. 지봉유설 등에는시대에따라이름이바뀌므로필경우산도와울릉도가한섬인것처럼보입니다. 朝鮮繪圖 에는두섬으로그려져있습니다. 바로본떠서보내드립니다. 10) 쓰시마도주는 여지승람 의기술내용에따르면우산도와울릉도는별도의섬인것처럼보인다 고하였고, 朝鮮繪圖 에도두섬으로그려져있어서바로본떠서보낸다고하였다. 즉우산도와울릉도가별도의섬이라고보기도하고본래부터하나의섬으로보기도한다는것이다. 이부분도역시울릉도와독도는별개의섬이기때문에 죽도도해금지령 은죽도 ( 울릉도 ) 에만해당될뿐, 독도에는해당되지않는다고 죽도문제연구회 나일부일본학자들이문제로삼을수있을것이다. 그러나울릉도와우산도 ( 독도 ) 는모도와자도, 모도와속도라는관계에서보면일본학자들의왜곡된주장은저절로해소될수있다. 한국의고문헌과고지도, 일본의고문헌과고지도, 그리고서양의자료들에도모두울릉도와독도는떼려야뗄수없는관계로나타나있다. 동서양의모든학자, 일반인, 해군장교들모두그렇게인식했다. 따라서울릉도의영유나소속이밝혀지면, 독도는자연히그에따라가는것으로생각하면된다. 요약하면울릉도가한국영토이므로독도또한한국영토라는것은당연하고도자연스러운논리인것이다. 11) 일본이 17세기고유영토설의근거사료로삼고있는 죽도기사 의곳곳에서이미울릉도와우산도가조선의역사지리서에기술되고있음을인정하고있음을볼때, 일본은내색하지는않고있지만울릉도와독도가이미 17세기이전부터조선의영유였음을인식하고있음을알수있다. 근본적으로 17세기에일본인들은독도를일본땅이라고생각하지않았 10) 죽도기사, 51 쪽. 11) 이진명, 독도, 지리상의재발견, 28 쪽.
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49 다. 이것은 1667년마쓰에번 ( 松江藩 ) 의번사인사이토도요노부가지은 인슈시청합기 ( 隱州視聽合紀 ) 에오키도의약도가있는데울릉도및독도가부속도서로그려져있지않은것에서자명하다. 1667년당시는오야와무라카와집안의울릉도도해가왕성한시기였는데도빠져있는것이다. 즉자신들의영토로생각하고있지않았던것이다. 따라서울릉도에와서조업을한행위는자신들의섬으로알고했던착오에의한행위가아니다. 조선이왜구들의침탈을우려하여섬에사는백성들을육지로쇄환한틈을타서몰래울릉도에들어와서고기를잡아갔던명백한불법행위인것이다. 이처럼 17세기당시조 일양국어민들이울릉도해역에서뒤얽혀조업행위를함으로써일본측에도움이되지않았으며, 특히안용복의도일활동으로문제가야기되자일본이스스로울릉도도항을금지했던것이다. 자기들스스로 울릉도근변독도, 울릉도관내독도, 울릉도 독도는일본의어떤번에도속하지않는다 라고하며이를근거로독도에대한역사적권원을확립했다고주장하는것은어불성설인것이다. 12) 3. 죽도고 ( 竹島考 ) 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죽도고 는 1828년돗토리번번사 ( 藩士 ) 오카지마마사요시 ( 岡嶋正義 ) 가편찬한책으로울릉도 ( 다케시마 ) 영유권에관한생각을당시의문서와기록, 구술등을토대로정리한책이다. 안용복의도일사건이후약 130 여년이지난시점에서쓴책이기에내용의정확성이떨어질뿐만아니라, 기본적으로울릉도 독도가일본영토라는시각에서기술하고있기에왜곡되고편향된견해가많이포함되어있다. 언젠가빼앗긴다케시마를되찾아와야한다는오카지마의생각은이책의서문에잘나타나있다. 12) 김병렬, 고유영토를새삼스럽게영토로편입하는나라가어디에있는가?, 죽도문제 100 문 100 답 에대한비판, 경상북도독도사료연구회편, 2014. 45~46 쪽.
50 獨島硏究제 22 호 다케시마는풍요의땅이기는하나오랫동안폐도 ( 廢島 ) 였다. 에도중기에호키국에서그섬을열고배로왕래한지이미오래되었다. 그런데오랫동안우리에게속했던땅을다른나라의간악한어부들이멋대로빼앗았으니뜻있는자라면누구나그일을애석해하지않으랴. 이로서자신의고루함을망각하고다른사람의손가락질도개의치않고망녕되이그일의전부를기록하여훗날보는이들을위한준비를하였다. ( 중략 ) 다시커질때를얻어재차다케시마로배를보내려는움직임이있을때, 이책에서한구절이라도취할만한곳이있어국가를위한조금의도움이라도된다면, 나의영원한행복이될것이다. 13) 이러한저자의기본입장을전제로 죽도고 를분석해야할것이다. 오카지마는서문에이어 다케시마총설 에서다케시마가오키국에서약백여리 ( 약 200km) 떨어진조선국동해안에있는고도라고하면서울릉도도해허가와취소과정을이야기한다. 게이쵸와겐나때오키의요나고성에는나카무라호키노카미님이계셨다. 그때주민중에오야진키치와무라카와이치베라는선장이있었다. 그전에다케시마를지나다가사람이살지않는섬으로서산물이매우많은것을보고매년왕래하면막대한이윤을얻을수있을것이라고생각했지만, 이것이다른나라가까이에있는절도이므로그의멋대로는할수없는일이었기때문에잠시미루어두고시간을보냈는데, 겐나 ( 元和 ) 중에이유가있어막부의면허를받아연년도해하여어업을하게되었고, 나중에는그들의영지처럼왕래하게되었는데그것이이미 80여년이되었다. 14) 그러던중조선어선들이다케시마에도해하여어로를하는수가점점늘어나서결국안용복납치사건으로이어졌으며, 막부로부터우리번주에게앞으로는호키국에서다케시마로도해하는것을금지시키라는내용의명령을하였으므로지금에이르기까지그일은단절되어있었다. ( ) 혹시다케시마에다 13) 죽도고 상 하, 정영미역, 경상북도독도사료연구회, 2010. 11~13쪽 ( 이하 죽도고 로표기함 ). 14) 죽도고, 19~21 쪽.
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51 시도해할수도있을지모른다는말이사람들사이에구구하였으나끝내아무런소식도없이끝났다고한다. 15) 오카지마는다케시마가 조선의동해안에있는사람이살지않는섬 이란것을잘알고있었다. 다케시마는풍요한땅으로그나라에서멀리떨어져있지않다고는하나, 우리나라배가왕래하는바다에있는고도이므로그나라사람이오래전부터살해당할것을두려워하여살지않았고, 또, 마음편하게도해할수도없었기에폐도라고만알려져있었다. 16) 산물이풍부해많은이윤을얻을수있다고생각한오야와무라카와집안이죽도도해면허를허가받아 80여년간어로활동을하였지만결국안용복사건으로인한조선과의충돌로막부로부터죽도도해면허가취소되었다는것이다. 오카지마의술회에는다케시마에대한아쉬움과안타까움이가득하다. 그러나이미이술회속에서 1 다케시마가조선의동해안에있다는점, 2 조선정부의쇄환정책으로섬을비워서사람이살지않고있는섬이라는점, 3 따라서다케시마가조선의영유라는점을인정한것이라볼수있다. 죽도고 에서는다케시마 ( 울릉도 ) 뿐만아니라마쓰시마 ( 독도, 우산도, 자산도 ) 도조선에속하는것으로보고있음을알수있다. 최근에편찬된아베씨의 이나바지 에 울릉도이를다케시마라하고자산도이를마쓰시마라한다 고기록되어있다는데맞는말인가? 라는물음에 < 삼국통람 > 의 여지로정지도 에조선국강원도해상에섬하나가있고, 또오키와조선국간의바다한가운데에다케시마가있는데옆에 조선국것이다. 이섬에서은주가보이고또조선국도보인다 는주 ( 註 ) 가있고그섬의동쪽에작은섬하나가그려져있다. 아마마쓰시마일것이다. 17) 라고하고있다. 15) 죽도고, 23~25 쪽. 16) 죽도고, 47 쪽. 17) 죽도고, 81~83 쪽.
52 獨島硏究제 22 호 오카지마는 죽도고 에서다케시마 ( 울릉도 ) 와마쓰시마 ( 독도, 자산도 ) 가조선에속하는것으로보고있는데, 이러한생각은 죽도고 上권의 다케시마총설 에나오는 竹島考圖說- 竹島松島之圖 에도잘나타나있다. 이지도를보면송도 ( 독도 ) 가오키섬에서는 70리, 죽도 ( 울릉도 ) 에서는 40리떨어진것으로, 지리적으로도조선에더가까운것으로그리고있음을알수있다. 18) < 그림 1> 죽도고도설다케시마와마쓰시마지도 18) 죽도고, 26 쪽참조.
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53 오카지마는 죽도고 에서조선에대한부정적인식을보여주고있으며, 심지어다케시마도조선에빼앗겼다는인식을가지고있다. 그나라사람의성품이우유부단하여위 ( 威 ) 로서다스릴때에는심히두려워하지만, 베푸는덕과은혜에대해서는느끼는바가적다. 따라서중국에대해서도대대로배반을하여매번정벌을당하였다. 호타이코 ( 豊太閤 ) 의조선의역이후에도청나라로부터정벌을당하여두번이나도성을떠나강화라는섬에도망가서숨었고, 우리나라의간분때, 매년조공을바치기로청나라조정과약속하여지금까지도신하로서복종하고있다. 그이후청나라를등에업고거만해지고동해가평화로운것을빌미로, 이전에우리나라가오랫동안폐도 ( 發島 ) 였던섬을열고다년간도해하여막대한이윤을얻고있는것을시기하여, 겐로쿠 ( 元祿 ) 때이런저런간계를부려우리배를막았고결국에는다케시마를빼앗아오랫동안자기속지로만들었다. 19) 그나라의거만이하루아침에이에이른것이아니라는것을깨달아야한다. 은혜를잊고덕을배신함이심하니미워할만하지아니한가? 다른나라의일이라고할지라도사람으로서국난이일어나기를바래서는안되지만시대의운은예측하기어려운것이다. 그나라에혹시내란이라도일어나서삼한시대와같이분열되던가, 혹적국이일어나국세가위기에처하게되면반드시예전과같이우리나라에무릎을꿇을것이다. 20) 혹그러한조짐이보이면원래다케시마는호키국의속도 ( 屬島 ) 였으므로재빨리이를다시찾을계획을세워야할것이다. 21) 오카지마가조선에대해얼마나부정적인식을가지고있었는지잘알수있다. 나아가조선이내란이나분열, 위기에처하게되면다케시마를되찾을계획을세워야한다는것이다. 19) 죽도고, 97~99 쪽. 20) 죽도고, 101 쪽. 21) 죽도고, 103 쪽.
54 獨島硏究제 22 호 죽도고 에는다케시마의도해과정과지리, 산물등에대해설명하고있다. 매년 2, 3월경배를준비하고요나고에서오키국으로가서, 4월상순경까지순풍이불고조류가바뀌기를기다렸다가돛을펴고먼저마쓰시마 ( 독도 ) 라고하는작은섬에배를대고어로에착수하고, 거기에서다케시마로가는데, 그간할일을하고가을이지나면돌아온다고한다. 또, 그섬에서주로나는것은전복, 강치의두종이다. 강치는미치라고도하는데해변가암석으로올라오는것을노려총을쏘아잡고껍질을벗겨기름을낸다고한다. 22) 다케시마의지리적환경에대해서는다음과같이설명하고있다. 다케시마는우리나라와조선국바다가운데에외떨어져있는섬이다. 주위가약 10리이고산이높고험하며계곡이깊고나무로빽빽이뒤덮여있으며대나무가울창한곳으로서세갈래의큰강이흐르고있다. 그곳의흙은비옥하고산물이많으며, 우리나라에선아주멀리떨어진바다에있는데조선국에서는매우가깝다. 날씨가좋으면늘그조선국땅이보인다고한다. 또, 삼국통람 에는다케시마에서오키국이보인다고기록되어있다. 미덥지못한말이다. 여기에예를들어보면, 우리번에서오키국까지는 40리바닷길이채못되는데이따금하늘이개어맑은날이아니면그섬을보기힘들다. 그러니아득히백여리나떨어진먼바다에있는작은오키도가보인다고하는것은매우믿기힘든말이다. 또다케시마는옛날에는사람이살지않는폐도였으나에도중기부터호키국에서도해를하기시작하였다. ( 중략 ) 또, 마쓰시마는오키국과다케시마사이에있는작은섬이다. 작은해협하나를사이에두고두섬이이어져있는섬이다. 이해협길이는 2정이며폭은 50간정도된다고한다. 어떤지도에서본바로는섬의넓이는길이가 80간, 폭이 20간정도가되는듯했다. 두섬이모두크기가같은것같다. 23) 22) 죽도고, 111 쪽. 23) 죽도고, 125~129 쪽.
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55 산이높고험하며대나무가울창한다케시마는조선국에가깝고, 마쓰시마는오키국과다케시마사이에있는데작은해협하나를사이에두고두섬이이어져있으며, 두섬이모두크기가같다고묘사함으로써송도 = 독도임을확인할수있다. 또일본요나고에서출발하여다케시마까지가는항해과정과거리관계도묘사하고있는데 다케시마까지의거리는호키국요나고에서이즈모국구모쓰까지해상 9리 < 육로 7리반 5정 >, 구모쓰에서오키국지부리까지 18리, 지부리에서도고의후쿠우라까지 8리인데, 여기에는구모쓰번의파견소가있어늘지나다니는배를조사하고있다. 또다시후쿠우라에서순풍이불기를기다리다가돛을펴고북서쪽을향해 70여리를가면마쓰시마 ( 독도 ) 에도착한다. 거기에서또 40리를가면다케시마 ( 울릉도 ) 에착안한다. 호키국에서다케시마까지는약 150~160리의바닷길에불과하다. 24) 오키섬에서독도까지 70리, 독도에서울릉도까지 40리, 오키섬에서울릉도까지는 110리로오늘날과비교해서어느정도거리상의오차는있으나독도와울릉도가조선의동해안에더근접해있다는사실은충분히인식하고있음을알수있다. 그러나오카지마가 죽도고 에서오야와무라카와집안이 80년간다케시마에서불법적인어로활동을한사실만을가지고자신들이되찾아야할섬으로주장하고있는것은잘못된인식으로지적할수있다. 왜구의노략질로고통받던울릉도주민들을보호하기위해섬을비워둔것을사람이살지않는폐도라고하며잠시동안그곳에서어로활동한것을핑계로자신들이되찾아야할섬이라고강변하고있다. 이것은일본외무성홈페이지의 다케시마문제를이해하기위한 10 가지포인트 중 < 포인트 3> 의 17세기고유영토확립설 주장과다를바없다. 24) 죽도고, 133~135 쪽.
56 獨島硏究제 22 호 4. 원록각서 ( 元祿覺書 ) 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원록각서( 元祿覺書 ) 의원제목은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25) 이다. 원록 9년조선배도착에따른최초보고 라는뜻으로 1696년안용복의 2차도일때일본측에서기록한문서로총 8매로구성되어있다. 1696년 5월 18일안용복일행이오키노쿠니도고에도착한후, 나카세단우에몬과야마모토세이우에몬이세키슈어용소 ( 御用所 ) 의다이칸 ( 代官 ) 고토가쿠우에몬의지시를받고 5월23일조사 작성하여기록한것이다. 이문서에는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과영유권에관한중요한내용들이진술되어있다. 물론안용복과그일행에대한조사와심문을통해나온기록으로, 도해후최초진술을기록한것이다. 때문에저자의주관적견해를포함하고있는 죽도기사 나 죽도고 와달리비교적사실에입각해서보고서형식으로기록하고있다. 이문서의첫번째기록에보면 무명으로된깃발 2개뱃머리에다는것 26) 이라고나온다. 안용복일행이타고온배에걸린깃발로서그중 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기 ( 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 ) 라고쓰여진깃발은중요한의미가있다. 바로안용복이울릉도 독도가조선의영유임을일본측에선포하는강력한의지가담긴글이라고할수있다. 조선의울릉도와우산도 ( 자산도 ) 양도의감세장을칭하며죽도 ( 울릉도 ) 의조선영유를당당히확인하기위해도일한것임을가시적으로표현한것이라할수있다. 원록각서( 元祿覺書 ) 에는깃발그림과글의내용에대한구체적설명은없지만이후에나온안용복 2차도일관련일본사료에는그림과글의내용이수록되어있다. 27) 25)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독도연구 창간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역, 2005. 233~300쪽 ( 이하 원록각서 로표기함 ). 26) 원록각서, 290 쪽.
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57 < 그림 2> 안용복이타고간배의깃발 ( 죽도고 하 254 쪽참조 ) 또한안용복일행은 조선8도 의그림을소지하고있었다. 안용복, 뇌헌, 김가과 3인에게감시인이입회하였을때조선8도의지도여덟장으로된것을가지고있는것을내놓았습니다. 즉 8도를각각베껴그리고, 조선말로적었습니다. 28) 당시지도는이를이용한외국의침략을우려하여국가기밀로관리하고있었기때문에안용복일행과같은일개어민이소지할수있는물건 27) 안용복 2 차도일시깃발그림수록일본고문서자료 ( 연도순 ) 자료명 발간연도 저자명 진사록 1731년이후 오카지마마사요시 ( 岡嵨正義, 1784~1858) 이나바지 ( 因幡志 ) 1795 아베교안 ( 安部恭庵,1734~1808) 죽도고 1828 오카지마마사요시 증보진사록 1830년이후 오카지마마사요시 인부연표 1842 오카지마마사요시 인부역년대잡집 1854~1858년사이 오카지마마사요시 28) 원록각서, 292 쪽.
58 獨島硏究제 22 호 이아니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조선의팔도가각각 1개도씩상세하게그려진지도를안용복일행이내놓았다는것은안용복일행이울릉도와독도의영유권을주장하기위하여의도적으로 조선팔도 의그림을휴대하고도일하였음을의미하는것이다. 29) 특히이그림지도와문서에기록된울릉도 독도의지리에대한설명은안용복과그일행의영토의식을분명히보여주고있다. 안용복이말하기를대나무섬 ( 竹嶋 ) 을다케시마라고말하는데, 조선국강원도동래부안에울릉도라는섬이있는데, 이것을대나무의섬이라고합니다. 곧팔도지도 ( 八道之圖 ) 에적혀있는것을가지고있습니다. 30) 마쓰시마 ( 松嶋 ) 는우도 ( 右道 ) 안에자산 ( 子山, 소우산 ) 이라는섬이있는데, 이것을마쓰시마라고합니다. 이것도팔도지도 ( 八道之圖 ) 에적혀있습니다. 31) 안용복의진술에따르면죽도는바로조선의섬인울릉도이며그것은자신이휴대한 조선지팔도 ( 朝鮮之八道 ) 에그렇게표기되어있다고하였다. 따라서당연히죽도 ( 울릉도 ) 는조선영토라는것이다. 또한송도 ( 독도 ) 역시같은강원도안에있는자산 ( 子山 ) 이라는이름으로불리는섬으로 조선지팔도 에죽도 ( 울릉도 ) 와함께표기되어있다고진술했다. 이것은안용복이당시울릉도와독도가조선의영토임을명확히인식하고있었다는증거라고할수있다. 29) 김병렬 나이토세이츄, 한일전문가가본독도, 다다미디어, 2006. 42 쪽. 30) 원록각서, 292~293 쪽. 31) 원록각서, 293 쪽.
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59 < 그림 3> < 원록각서 > 조선지팔도 그림에 강원도, 이도안에죽도 ( 울릉도 ) 와송도 ( 독도 ) 가있다 고명시되어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22년 9월 25일조에도안용복이 2차도일후심문을받으면서 근년에내가이곳에들어와서울릉도 자산도등을조선의지경으로정하고, 관백의서계까지있는데, 이나라에서는정식 ( 定式 ) 이없어서이제또우리지경을침범하였으니, 이것이무슨도리인가? 라고힐문했다는기록을볼때울릉도 독도가조선의영토임을주장한안용복의인식은확고한것이었다. 또한이 원록각서 에서안용복일행이 소송을하려는한두루마리 의문서를가지고왔다고했고, 다케시마라고부르는울릉도와마쓰시마라는자산도가그려진지도를지참하였다는것은그가울릉도와자산도가조선의땅이라는것을인정받으려고도일했다는것을말해주고있는것이다. 32) 또한안용복은자신이독도를거쳐항해했으며, 울릉도와독도, 오키까지의거리관계를비교적정확히인식하고있었음을보여주고있다. 32) 김화경, < 겐로쿠 ( 元祿 ) 9병자 ( 丙子 ) 년조선배착안한권의각서 > 해설, 독도연구 창간호, 2005. 305쪽.
60 獨島硏究제 22 호 5월 15일다케시마를출선하여같은날마쓰시마에도착하였고, 동 16일마쓰시마를나서 18일아침에오키도내의니시무라 ( 西村 ) 의바닷가에도착, 동 20일에오히사무라 ( 大久村 ) 에입항하였다. 33) 당시육지에서울릉도까지항해하는데이틀이걸렸음을감안할때울릉도에서독도까지는하루정도가걸렸음을알수있다. 그런데안용복은정확하게울릉도를출발한지하루만에독도에도착했음을진술하고있다. 그리고다시독도에서일본의오키도까지사흘이걸렸다고진술함으로써안용복이인지하고있었던자산도또는송도가오늘날의독도임을분명히보여주고있다. 안용복은죽도와조선과의거리가삼십리이며, 죽도와송도간의거리는오십리라고하였다. 이진술을통해서도일본 < 다케시마연구회 > 나 < 외부성 > 이주장하는자산도 ( 우산도 ) 가울릉도옆의죽도 ( 죽서도 ) 가아님을다시한번확인할수있다. 다케시마와조선사이는 30리이고, 다케시마와마쓰시마사이는 50리라고말하고있습니다. 34) 비록안용복이진술한거리가오늘날의거리개념에정확히부합하는것은아니지만안용복이독도를분명히인지하고있었음을입증해주는것이다. 이진술은가와카미겐조나시모죠마사오의주장, 즉우산도는울릉도이거나울릉도옆의죽도라고하는주장을일거에반박해주고있다. 35) 33) 원록각서, 293 쪽. 34) 원록각서, 294 쪽. 35) 김병렬 나이토세이츄, 한일전문가가본독도, 다다미디어, 2006. 42~44 쪽.
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61 5. 맺음말 이상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에대한지리적인식을중심으로다케시마 ( 울릉도 ) 와마쓰시마 ( 독도, 우산도, 자산도 ) 가한국의영유임을확인해보았다. 우선일본이 17세기고유영토설의근거사료로삼고있는 죽도기사 의곳곳에서이미울릉도와우산도가조선의역사지리서에기술되고있음을인정하고있음을볼때, 일본은내색하지는않고있지만울릉도와독도가이미 17세기이전부터조선의영유였음을인식하고있음을알수있다. 죽도고 에서도역시오야와무라카와집안이 80년간다케시마에서불법적인어로활동을한사실만을가지고자신들이되찾아야할섬으로주장하고있는것은잘못된인식으로지적할수있다. 왜구의노략질로고통받던울릉도주민들을보호하기위해섬을비워둔것을사람이살지않는폐도라고하며잠시동안그곳에서어로활동한것을핑계로자신들이되찾아야할섬이라고강변하고있다. 이것은일본외무성홈페이지의 다케시마문제를이해하기위한 10가지포인트 중 < 포인트 3> 의 17세기고유영토확립설 주장과다를바없다. 원록각서 ( 元祿覺書 ) 에서안용복일행이타고온배에걸린 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기 ( 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 ) 라고쓰여진깃발은중요한의미가있다. 바로안용복이울릉도 독도가조선의영유임을일본측에선포하는강력한의지가담긴글이라고할수있다. 조선의울릉도와우산도 ( 자산도 ) 양도의감세장을칭하며죽도 ( 울릉도 ) 의조선영유를당당히확인하기위해도일한것임을가시적으로표현한것이라할수있다. 특히안용복이소지한 조선지팔도 와울릉도 독도의지리에대한설명은안용복과그일행의영토의식을분명히보여주고있다. 즉죽도는
62 獨島硏究제 22 호 바로조선의섬인울릉도이며그것은자신이휴대한 조선지팔도 에그렇게표기되어있다고하였다. 따라서당연히죽도 ( 울릉도 ) 는조선영토라는것이다. 또한송도 ( 독도 ) 역시같은강원도안에있는자산 ( 子山 ) 이라는이름으로불리는섬으로 조선지팔도 에죽도 ( 울릉도 ) 와함께표기되어있다고진술했다. 이것은안용복이당시울릉도와독도가조선의영토임을분명히인식하고있었다는증거라고할수있다. 근세일본의사료인 죽도기사, 죽도고, 원록각서 에대한분석을통해근세의울릉도 독도에대한지리적인식을확인할수있으며, 나아가울릉도 독도에대한영유권이어디에있는지확인할수있다. 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각지역간거리관계 서명 ( 자료명 ) 연도조선 울릉도 원록각서 1696 죽도기사 1726 죽도고 1828 현재거리 2017 30 리 (55.6km) 50리 (92.6km) 40리 (74km) 130.3km ( 죽변기준 ) 울릉도 ( 죽도 ) 독도 ( 송도 ) 50 리 (92.6km) 뱃길하루 40 리 (74km) 오키 울릉도오키 독도 110 리 (203.7km) 70 리 (129.6km) 87.4km 244.9km 157.5km 일본의해상거리단위 1 리 ( 浬 )=1.852km 로적용하였음. 비고 안용복진술 안용복진술 오카지마 위의도표에서보듯이근세울릉도 독도관련일본사료에나타난지리적인식의특징을보면, 조선에서울릉도 독도까지거리를실제보다훨씬더가까운것으로인식하고있음을알수있다. 이는 원록각서 와 죽도기사 에서안용복의진술을통해확인할수있다. 오카지마가편찬한 죽도고 에는오히려조선에서울릉도 독도까지의거리가더가까운것으로인식하고있음을확인할수있다. 이러한사실은울릉도 독도가조선영토라는사실을이미알고있었기에공간적거리보다인식적거리가훨씬가까웠음을보여주고있는것이다.
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63 1693년울릉도에서안용복이일본어부들에게납치되면서 (1차도일) 발생한 울릉도쟁계 는국가간의외교분쟁으로확대되어상호간의논쟁으로이어졌지만, 1696년 1월일본막부에의해죽도가한국의울릉도임을인정하고 죽도도해금지령 을내림으로써일단락되었다. 즉 1618년돗토리번의오야와무라카와집안에게내린 죽도도해면허 는취소되고 죽도도해금지 가결정된것이었다. 그러나조-일외교창구역할을했던쓰시마번의고의적지체로 죽도도해금지령 이조선에전달되기전에안용복의 2차도일사건이발생하게된다. 그결과안용복은다시추방되고 죽도는조선에서가깝고호키 ( 伯嗜 ) 에서먼섬이므로거듭해서이쪽 ( 일본 ) 의어민이도해하지않도록하라 는 죽도도해금지령 을재삼확인하였던것이다. 이렇게안용복도일사건을계기로조선과일본간에벌어진 17세기말영토경계분쟁은막을내리게된다. 36) 이렇게함으로써일본외무성홈페이지에게재된 다케시마문제를이해하기위한 10의포인트 에서 < 포인트 3> 의 일본은 17세기중반에는이미다케시마 ( 독도 ) 의영유권을확립하였습니다. 라는주장은허구임이밝혀졌다. 그러나일본은다시 10의포인트 중 < 포인트 4> 에서 일본은 17 세기말울릉도도항을금지했습니다만, 다케시마 ( 독도 ) 도항은금지하지않았다 라고주장하면서독도의영유권을주장하고있다. 하지만이주장도역시 원록각서 와 죽도기사, 죽도고 등근세일본의사료에대한지금까지의논의에서도살펴보았듯이거짓임을확인하였다. 더구나 1876 년 태정관지령문 에서도 일본해내다케시마외일도를판도외로정한다 고규정하였기에더이상논란의여지가없는주장이라하겠다. 36) 손승철, 17세기말안용복사건을통해본조일간의해륙경계분쟁, 한일관계사연구 42, 2012.8. 258~260쪽.
64 獨島硏究제 22 호 참고문헌 죽도고, 정영미역, 경상북도독도사료연구회, 2010. 죽도기사Ⅰ Ⅱ, 경상북도독도사료연구회탈초및번역, 지성인, 2013. 원록각서, 권오엽 오니시토시테루역주, 제이엔씨, 2009.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독도연구 창간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역, 2005. pp. 289-310. 김병렬 나이토세이츄, 한일전문가가본독도, 다다미디어, 2006. 김병렬, 고유영토를새삼스럽게영토로편입하는나라가어디에있는가?, 죽도문제 100문 100답 에대한비판, 경상북도독도사료연구회편. 2014. 김화경, < 겐로쿠 ( 元祿 ) 9병자 ( 丙子 ) 년조선배착안한권의각서 > 해설, 독도연구 창간호, 2005. 백인기, 울릉도와독도에관한지리학적연구, 성신여대대학원박사학위논문, 2009. 손승철, 17세기말안용복사건을통해본조일간의해륙경계분쟁, 한일관계사연구 42, 2012.8. 송휘영, 일본의독도에대한 17세기영유권확립설 의허구성- 일본외무성의죽도홍보팸플릿의포인트 3, 4 비판, 민족문화논총 44, 2010.4., 울릉도쟁계( 竹島一件 ) 의결착과스야마쇼에몽, 일본문화학보 49집, 2011.5., 일본의독도에대한 17세기영유권확립설 의허구성, 민족문화논총 44., 일본고문서에나타난일본의독도인식, 일본근대학연구 50호, 한국일본근대학회, 2015. 원연희, 일본사료해석을통한울릉도, 독도연구 -기봉행소( 崎奉行所 ), 대마번 ( 對馬藩 ) 에서의안용복의진술을중심으로, 온지논총 37호, 온지학회, 2013. 이진명, 독도, 지리상의재발견, 삼인, 2005. 장순순, 1696년안용복의도일과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한일관계사연구 49, 2014.12.
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65 <Abstract> Geographical recognition of Ulleungdo and Dokdo in the modern Japanese historical materials - Focusing on Jukdogisa( 竹嶋記事 ), Jukdogo( 竹島考 ), Wonrokgakseo( 元祿覺書 ) Taewoo Lee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affirm that Takeshima(Ulleungdo) and Matsushima(Dokdo, Usando, Jasando), as which Japan refers to, belong to Korea, judging from their geographical recognition in modern Japanese historical materials. Japan had already recognized that Chosun had been possessing Ulleungdo and Dokdo before the 17th century, as Japan acknowledged the fact that Ulleungdo and Usando were already described in the historio-geographical materials of Chosun, in various parts of Jukdogisa ( 竹嶋記事 ) which is the basis of Japanese Inherent Territory Theory on Dokdo since 17th century. It is unreasonable to claim Dokdo, only based on one fact that Ojiya Murakawa families had been illegally engaged in fishing in Takeshima for 80 years in 17th century. Japan is strongly claiming Dokdo back, misleading the fact that Chosun evacuated the inhabitants from Ulleungdo in order to protect them from Japanese pirates, left the island uninhabited. Japan argues that Dokdo was uninhabited and unowned, while Japanese engaged in fishing there. This can be understood in the same context as the point 3( Inherent Territory
66 獨島硏究제 22 호 Theory on Dokdo since 17th century) in the 10 Points for Understanding the Takeshima Problem of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Japan. In Wonrokgakseo( 元祿覺書 ), the phrase 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 written on the flag of the ship, on board of which Yongbok An s party was has an important meaning. It contains Yong-bok An s strong will to declare to the Japanese authority that Ulleungdo and Dokdo belong to Chosun, because Yong-bok Ahn called himself an official who was responsible for collecting tax in Chosun s Ulleungdo and Usando. It can be said, thereafter, that Yong-bok An s visit to Japan is an manifest expression of the fact that Ulleungdo and Dokdo belong to Chosun. According to the characteristics of geographical recognition of Ulleungdo and Dokdo in the Japanese modern literature, It is obvious that the Japanese perceived the distance from Chosun to Ulleungdo and Dokdo as much closer than they actually were. This can be confirmed by Yong-bok An's statement in Jukdogisa( 竹嶋記事 ), Wonrokgakseo( 元祿覺書 ). Obviously, Okajima who compiled Jukdogo( 竹島考 ) recognized that the distance from Chosun to Ulleungdo and Dokdo is closer than from Japan. The fact that the Japanese already knew that Ulleungdo and Dokdo belonged to Chosun, led them to think cognitively that the distance between Chosun and Ulleungdo Dokdo was much closer than in reality. A careful review of Japanese modern historical materials, especially Japanese geographical awareness of Ulleungdo Dokdo, is very important in that it provides clues to convincingly refute Japan s claim Dokdo on the ground of the Inherent Territory Theory on Takeshima since 17th century. Key words: Ulleungdo, Dokdo, Geographical recognition, Japan, historical materials, Jukdogisa( 竹嶋記事 ), Jukdogo( 竹島考 ), Wonrokgakseo ( 元祿覺書 ), Yong-bok Ahn
근세일본의사료에나타난울릉도 독도의지리적인식 67 이논문은 2017 년 5월 25일에투고하여 2017 년 6월 3~25 일에심사하여 2016 년 6월 26일에게재 결정됨
69 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의국제법적해석 * 1) 2) 최철영 ** < 목차 > 1. 울릉도쟁계와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2. 죽도기사 죽도고 원록각서의국제법절차법상증거로서의의미 3. 죽도기사 죽도고 원록각서와국제법상영토주권의권원 4. 국제법상영토주권판단법리에주는의미 < 국문초록 > 원록각서 ( 元祿覺書 ), 죽도기사 ( 竹嶋記事 ) 그리고죽도고 ( 竹嶋考 ) 는모두울릉도쟁계를주제로일본측에의하여작성된역사적문서들이다. 한국과일본양국모두에울릉도및독도와직접관련된역사문서가매우희귀한현실에서이들역사적문서들이담고있는내용의광범성, 정확성, 객관성, 풍부성등은한국의독도영토주권을뒷받침하는역사적권원의존재를밝혀주는문서로서결정적가치를부여할수있을것이다. 이들역사적문서들은조선이울릉도와독도에대하여명확하게자국의영토로인식하고있었으며, 조선이지리적근접성에따라울릉도주변의바다와섬들에대하여포괄적인주권활동을하였고당시한일간에는지리적근접성을영역결정의기준으로수용하고있었음을기록하고있다. 한편국제증거법의측면에서이들문서는각기그증명력에있어차이가있지만증거능력은모두인정된다할것이다. 원록각서는공적조서로서일본의국내적공문서의지위를가지고있기때문에그내용에대하여일본이부정할수없는구속력을부여할수있다. 죽도고는울릉도쟁계당시일본이조선에게울릉도와독도의영유권이있음을인정했다는원록각서와죽도기사의내용에신빙성을부여할수있는정황증거로서간접증거의지위를갖는다. 특히죽도기사는조선과의외교업무를담당하는쓰시마번주의 ** 이논문은 2016 대한민국교육부와한국연구재단의지원을받아수행된연구임 (NRF-2016S1A5B8A02929224). ** 대구대학교법과대학교수
70 獨島硏究제 22 호 명령에의하여공직자인편찬자. 집필자, 검수자들이작성한외교공문서로서지위를갖기때문에적극적으로확대해석하면울릉도및독도에관한한일양국간유일한국제합의문서의집성으로서의미를가진다고할수있다. 주제어 : 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영토획득, 증거능력, 지리적근접성, 역사적권원 1. 울릉도쟁계와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1648년웨스트파리아평화조약을통해새롭게형성된패러다임으로서근대국제법은한국가의영역을당해국가의주권이실효적으로행사되는지리적범위로정의하고있다. 1) 국제법은한국가의배타적인지배권이행사되는공간적한계로서인정되는국가영역에대하여당해국가의영토적완전성 (territorial integrity) 을인정하고타국의침략을 2) 금지하고있다. 국가의영토적완전성이인정되는지리적영역을획득하는현대국제법에의한권원으로는역사적권원에기초한선점, 시효, 첨부, 병합, 할양, 정복등이인정되고있다. 3) 실제에있어서도국제사회의많은영토분쟁 1) Lea Brilmayer, Natalie Klein, Land and Sea: Two Sovereign Regimes in Search of a Common Denominator, New York University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 Politics, Spring 2001, vol. 33, p. 703. 2) 침략행위란한국가가다른국가의주권, 영토적일체성또는정치적독립에반하여무력을행사하거나또는 UN 헌장에위배되는방식으로무력을행사하는것을말한다. 정인섭, 신국제법강의, 2016, 963쪽. 3) 이러한분류는 D.P. O'Connell, International Law, 1965, pp. 465-511 참조. 이외에영역분쟁에대한국제중재법정의결정 (adjudication) 을별도의영역획득권원으로인정하는주장이있으나이는영유권을확인하는 2차적법률효과발생의근거일뿐이며독립적이며원초적인별도의권원이라고볼수없을것이다. Peter Malanczuk, Akehurst's Modern International Law, 1997, p.151. Malcolm N. Shaw는첨부, 할양, 정복을각각별개의권원으로보고, 선점과시효에의한권원의획득은실효적지배의행사라는개념으로묶을수있다고한다. Malcolm N. Shaw, International Law, 1997, p.342. 하지만영역의취득방법중정복에의한영역취
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의국제법적해석 71 들은국가영역획득의근거로서소위고유영토론에기초한역사적권원또는무주지에대한선점을이유로발생하고있다. 4) 예컨대일본은외무성의홈페이지를통하여한국의영토인독도에대하여한국영토로서의완전성을위협하는근거로서역사적사실에기초한고유영토론과무주지선점론을내세우고있다. 5) 일본시마네현의죽도문제연구회가발간한제 2기죽도문제에관한조사연구최종보고서또한기왕의고유영토론과무주지선점론을전면적으로내세우고있다. 6) 이와관련하여자주거론되는역사적문서가원록각서 ( 元祿覺書 ), 죽도기사 ( 竹嶋記事 ) 그리고죽도고 ( 竹嶋考 ) 이다. 이들역사적문서들은모두 1696년안용복의 2차도일과관련된울릉도쟁계의문제를 7) 주제로일본측에의하여유럽에서웨스트파리아평화조약에의한새로운국제법체제가형성된이후에작성된역사문서라는공통점이있다. 8) 우리나라의울릉도및독도와관련된이들일본의역사문서중작성시기가가장앞선문서는 2005년 2월에 9) 무라카미스케쿠로사저에서발견 득은국제연합헌장하에서사실상사문화된것으로간주된다. 4) Sookyeon Huh, Title to Territory in the Post-Colonial Era: Original Title and Terra Nullius in the ICJ Judgement on Cases concerning Ligitan/Sipadan(2002) and Pedra Branca(2008), European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vol. 26, Aug. 2015, p. 710. 5) http://www.mofa.go.jp/mofaj/area/takeshima/index.html. 竹島は, 歴史的事実に照らしても, かつ国際法上も明らかに日本固有の領土です 6) 송휘영, 일본학자가보는독도의역사학적연원, 2013, 7면. 일본은이에추가하여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일본이포기해야할영토에서독도가명시되어있지않기때문에독도는여전히일본의영토로남아있으며한국은 1950년이후독도를무력으로불법점거하고있다는 불법점거론 을주장하고있다. 7) 울릉도쟁계의경과에관하여는송휘영, 울를동쟁계 ( 竹嶋一件 ) 의결착과스야마쇼에몽 ( 陶山庄右御門 ), 일본문화학보제49집, 2010, 참조. 8) 물론당시아시아에서웨스트파리아조약체제에대한인식은존재하지않았기때문에유럽국제법에서의영토획득법리 (law of acquisition of title to territorial sovereignty) 가그대로아시아에적용될수는없다. 9) 권오엽,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와安龍福, 일본어문학 39권, 2008, 412쪽 ; 김화경은 2005년 3월에일본의시마네현오키도오치군아마정에거주하는무라카미죠쿠로의집에서발견되어, 5월에공표 되었다고한다. 김화경,
72 獨島硏究제 22 호 되어 2005년 5월 17일에공개된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 이하원록각서 ) 이다. 이문서는 1696년돗토리번 ( 藩 ) 으로도해하다표착한안용복일행이진술한것과일행을관찰하여기록한것이다. 10) 원록각서 의기록에의하면조선숙종때에안용복이현재일본이영유권을주장하는독도에대하여조선 ( 한국 ) 의영토라는사실을명확히진술하고있었음을확인할수있다. 안용복일행이일본에건너가서이와같은진술을한것은 1696년 ( 숙종 22년 ) 이었다. 당시에일본의에도막부는요나고정의오야가 ( 家 ) 와무라카와가 ( 家 ) 에게울릉도도해금지령을내린바있으나, 조선정부에는아직통고되지않고있었다. 더욱이원록각서는일본에서말하는다케시마는강원도에속하는울릉도이며, 마쓰시마 ( 독도 ) 가같은강원도에딸린자산도라고부르는섬으로안용복이이것을증명하는지도를가지고일본에왔다는사실을지도의내용을글로분명하게풀어서기재하여확인하고있다. 죽도기사 는 1693년에발생한 울릉도쟁계 ( 일본명칭은 죽도일건 ) 를계기로조선과쓰시마번사이에일어난울릉도를둘러싼외교적영유권교섭에관한내용을기술한책으로, 1693년 5월부터 1699년 10월까지를담고있다. 11) 에도막부가죽도도해금지령을내리게된경위와조선으로의전달을둘러싼문제, 안용복의 2차도일에대한쓰시마번의대처, 죽도도 < 겐로쿠 9( 병자 ) 년조선배착안한권의각서 > 해설, 독도연구창간호, 301 쪽이하참조. 10) 산인츄오신보 의보도, 이고문서의보관자인무라카미는시마네현의회가 < 다케시마의날 > 조례안을가결하기전, 무엇인가다케시마 ( 독도의일본식이름 ) 와관련을가지는자료가있었던것같은생각이들어 자기집창고를뒤지다가다케시마와마쓰시마라는문자가적힌것을발견했다는것이다. 고문서에정통한마쓰에시사이카정에거주하는히노도시하루를찾아가서해독을하였는데, 이것은둘이서로얼굴을마주보고 공표를해도좋을것인가 하고, 놀랄정도의내용이었다고한다. 그이유는다케시마의영유권을다투고있는한 일두나라에서한국에유리하게작용할수도있는자료였기때문이라고한다. 김화경, 위의글, 참조. 11) 경상북도독도사료연구회, 죽도기사, 2013, 머리말.
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의국제법적해석 73 해금지령을구두로전한쓰시마번의의도와관련된내용을파악할수있다. 12) 죽도기사를기초로당시조선과일본간에오고간외교문서를현대국제법상교환공문으로인식하고이를기초로일본이조선의독도주권을인정했다는주장도있다. 13) 죽도고 는돗토리번의녹봉을받는번사 ( 藩士 ) 오카지마마사요시가 1828년 ( 일본연호문정 11년 ) 에편찬한책이다. 상, 하두권으로되어있으며주로다케시마 ( 울릉도 ) 에관한돗토리와그주변지역에서전해내려져오는기록및일본과조선, 중국등의문헌을들어울릉도영유권에대한자신의생각을전개시키는내용으로구성되어있다. 14) 상권은죽도고의편찬취지와과정에대해기록한 서문, 오야와무라카와의다케시마 ( 울릉도 ) 에도해가시작될때부터끝날때까지의경과를개괄한 총설, 다케시마 ( 울릉도 ) 가그려진지도를소개하고분석한 도설, 다케시마 ( 울릉도 ) 에관한통설을들고이에대한문제점을지적하면서자신의견해를피력하는 혹문, 1724년 ( 일본연호 9년 ) 막부가오야와무라카와의다케시마 ( 울릉도 ) 도해의경위에관해조사하였을때제출된자료에의거하여도해선단규모, 울릉도산물등을기술한 도해준비및 12) 위의책. 13) 1693 년및 1696 년안용복등의 2 차에걸친도일활동및대마도주의울릉도에대한야심으로촉발된 울릉도쟁계 과정에서당시조 일간확립된외교관행에따라조선조정과일본막부가 1694 년 8 월 ( 상기 II.1) 과 1697 년 2 월각각교환한왕복문서는현대국제법상 교환공문 (Exchange of Letters) 의법적성격 지위를가지며, 조선의 1698 년 4 월회답공문및막부의 1699 년 1 월최종확인공문은기존합의를확인하기것이다. 즉 1694 년 8 월조선의공문과 1697 년 2 월막부가대마도주를통해동래부에전달한서한은양국간합의를기초로체결된국제협정 (international agreement) 이며, 약식조약 (treaty concluded in simplified form) 을구성한다., 박현진, 17 세기말울릉도쟁계관련한 일 교환공문 의증명력 : 거리관습에따른조약상울릉 독도권원확립 해상국경묵시합의, 國際法學會論叢第 58 卷第 3 號, 2013, 141 쪽. 하지만죽도기사는그러한교환공문의존재와내용을기술한것이지교환공문그자체가아니기때문에이를기초조약법상의논리를전개하는데는무리가있다. 14) 정영미, 竹嶋考上 下, 경상북도안용복재단, 2010.
74 獨島硏究제 22 호 물산 및지리, 해로등을기술한 다케시마와마쓰시마 의지리의총 6편으로구성되어있다. 하권은, 오야와무라카와의다케시마 ( 울릉도 ) 도해가시작될때부터끝날때까지의주요사건을시대별로정리해놓은것 (9편) 과일본으로떠내려간울릉도향나무를화재로삼은이야기 (2편) 로구성되어있다. 원록각서, 죽도기사와죽도고등의일본측사료는공통적으로안용복의 2차도해와관련된기록을풍부히담고있으나, 그사료의작성시기와주체, 그리고형식이다르고그내용에있어서도일부상이한부분이있어역사문헌에대한깊은분석과검토가필요하다. 이하에서는울릉도쟁계와관련된이들일본측사료를증거법으로서국제절차법적측면과영토획득의권원으로서국제실체법적측면에서고찰해보고자한다. 국제절차법적측면에서는이들사료의작성시기와주체그리고형식이라는관점에서국제법적으로어떠한증거가치를가지고있는지를검토하며, 국제실체법적측면에서는이들사료의내용을기초로국제법상영토경계획정의권원과영토주권판단의법리라는관점에서이들역사문서의내용이어떻게우리의독도영토주권을국제법적으로어떻게뒷받침할수있는지살펴보고자한다. 2. 죽도기사 죽도고 원록각서의국제법절차법상증거로서의의미 1) 증거법상증거능력과증명력의개념 영토해양경계관련분쟁에서제출되는공적인문서는당사국의권리주장을뒷받침하는객관적증거 (evidence) 로서의법적지위와가치에그중요한기능이있다. 분쟁당사국이제출한증거자료로서공적인문서의가장두드러진기능은당해문서를편찬하여발행한국가를구속하는것
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의국제법적해석 75 이다. 15) 법률용어로서증거는 법원혹은배심원이자신의청구를신뢰하도록하려는목적으로소송당사자의일정한행위에의해소송상법률적으로제시되는모든종류의입증력있는증언, 기록, 서류, 증거서류, 유형물 을말한다. 16) 사법절차에서입증책임, 사법심사수리가능성, 증거로서관련성, 그리고일정한증거의증거력내지는증명력등을규율하는규칙과원칙들의총체로서증거법에따르면증거능력이란어떤자료가당사자의주장이나사실을입증하거나증명하는법률상의자격이있음을법원이받아들일수있는가여부 (admissibility of evidence) 에관한문제이며, 17) 영유권관련쟁송사건에서법적입증자료에는국내입법을통한국경선에관한기술이나언급, 정부또는고위관리의일방선언, 정책선언이나입장천명 성명, 문서보관소의자료, 토지또는측량관련정부기관의행정보고서, 국가실행내지행정부의실행, 그리고묵인의증거등이포함된다. 18) 증거로서의지위가인정된증거들은다시일정한사실내지는주장을입증할수있는가치 (value of evidence) 의보유정도에따라증명력이부여된다. 즉문제의자료가어떤사실을실제로입증또는확립하거나, 입증에기여하거나, 또는입증에필요한것을제공하는가치를가지거나또는입증하는높은개연성을가지는경우에이를당해자료의증명력이라한다. 19) 다른차원에서증거는입증방식 (methods of proof) 을기준으로직접증거와간접증거로구분된다. 직접증거란계쟁사실에대하여별도의추론 15) Charles C. Hyde, Maps as Evidence in International Boundary Disputes, AJIL, vol. 27, 1933, p. 311. 16) Black s Law Dictionary, 10th ed., West Group, 2014. 17) 박현진, 독도영유권과지도 해도의증거능력 증명력, 국제법학회논총제52권제1호, 2007, 92쪽. 18) 위의논문. 19) 위의논문, 94쪽.
76 獨島硏究제 22 호 을거치지않고계쟁사실을직접추론할수있는사실을입증 증명하는증거를말한다. 간접증거내지정황증거는계쟁사실의입증에필요한일정한사실에관한정황이나정보를제공하는자료이다. 즉간접증거는통상적 합리적경험칙등에의하여계쟁사실을간접적으로추론하게하거나추론할수있도록유도하는입증자료이다. 하지만직 간접증거란입증 증명의수단과방식에관한것이며, 증거의가치에관한것은아니다. 따라서직접증거라고하여반드시그신빙성이높은것을의미하는것은아니다. 국제재판소의경우 국가가그주권에기하여배타적관할권을확립 행사한객관적사실을입증하는증거, 특히정부기관이작성 제작 간행한공적기록 문서등영유권관련사실을입증할수있는 1차적서면증거를최선의증거 (best evidence) 로평가한다. 20) 1차적문서증거로서국가가편찬한소위관찬문서는증거능력을가지지만증명력은문서가자국내의국내문서인지아니면상대방국가에게보낸문서인지또는양국간의합의사항을기록한문서인지와그내용의정확성 (accuracy) 기준에따르게될것이다. 21) 2) 원록각서의증거법상가치 원록각서는안용복이도해했을당시일본의관리에의하여공적인목적으로작성되었다는측면에서증거법상공적조서 ( 公的調書 ) 에해당한다. 공적조서란공무원이나공무소가조사한사실을적은공적문서로서어떤사건이나소송절차의경과및내용을공증하기위하여작성하는문서이기때문에국가기관이기록으로서 1차적증거능력이있다. 원록각서는 20) D.V. Sandifer, Evidence Before International Tribunals (rev. ed., Charlottesville: Virginia University Press, 1957), p.208, 나홍주, 독도의영유권에관한국제법적연구, 2000, p.49 에서재인용. 21) 이태규, 국제재판상지도의증거력 : 카시킬리 / 세두두섬관련사건을중심으로, 국제법학회논총, 제57권제2호 (2012), 175쪽.
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의국제법적해석 77 일본돗토리번에표착한안용복일행이자진해서오키의대관소에출두하여표착하게된연유와도해목적을설명하며협조를요구했고대관소는요구에응하여편리를제공하는한편이들일행의도해에관한것을기록하여이와미노쿠니및돗토리번등에보고한보고서의일부이기때문이다. 22) 31단으로나눌수있는원록각서는조선인이진술한내용과일행을관할한내용, 일행이대관소와교류한내용을일본의관리가상세히기록했다는점에서내용의객관성과정확성을인정할수있을것이다. 원록각서는마지막부분에서 우 ( 右 ) 는이번에조선인한권의글귀와함께조선인이제출한글귀목록을여기에적어서야자우에몽이지참하는구상서로보고하겠습니다. 이상. 나카세단우에몽 5월 23일이외미주야마모토세이우에몽사무실 로되어있어공적조서로서의성격을입증한다. 이는원록각서가안용복이표착한현장에서일본인관리에의하여공적으로작성되어있음을보여주는것이다. 우치다후미에 ( 内田文恵 ) 의다음과같은글또한이를뒷받침한다. 원록각서의소장자무라카미 ( 村上 ) 가문은, 시마마에 ( 嶋前 ) 의오래된가문이다. 시마마에의공문이며, 해운업을생업으로하고있던집으로서이조선으로부터의내방자에관한정보는귀중한, 한편흥미를당기는사건이었다고생각된다. 문서에는, 배의화물 ( 積荷 ) 에대해상세한기재가있어, 승무원의복장, 소지하고있는물건이기록되고있는것, 오키에도달할때까지의항로, 일정에대해서도써내고있는것, 승려가다섯명승선하고있지만, 그종파가무엇인가를일본측은문제삼아묻고있는것등, 쇄국 ( 정책과 ), 기독교금지 ( 정책 ) 하의일본에있어서, 공무원이다른나라로부터의내방자에대해서어떠한시각에서질문하고있었는지를엿볼수있어흥미롭다. 또한내방자에대해서할수있는도움을실시했던것을행간으로부터알수있다. 따라서내방자가말하는일을그대로 22) 권오엽,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와安龍福, 일본어문학 39권, 2008, 412쪽.
78 獨島硏究제 22 호 기재한것도분명하다. 이문서가한가지의일만을거론하는것이아니라, 이문서가작성된시대를감안하여읽는것도필요하다고생각된다. 23) 일본이조선은 1904년까지독도를인식하지못했다고주장하는상황에서, 1696년에안용복이 조선팔도지도 ( 朝鮮八道地圖 ) 를보이며울릉도와자산도가일본이말하는죽도와송도라고설명한내용이있고일본측공적문서에조선팔도지도를글로옮겨적으면서명시적으로마쓰시마 ( 독도 ) 를조선의강원도에속하는섬으로표시하고있어독도가조선의영토라는증거사실을직접추론하도록하는직접증거로서의지위에있다. 이는당시에조선이독도 ( 죽도 ) 를인식하지못하고있었다는일본의주장이성립할수없음을입증할수있는 1차적직접증거로서의미도있다. 물론원록각서가당시일본국의정부인에도막부에의하여작성된것이아니기는하지만직접증거는대외적의사표시를관장하는정부기관은물론기타정부기관이작성한기록 문서 지도를포함하는것으로해석되기때문에, 24) 원록각서는일본이독도의영토주권이조선에있음을인정한 1차적직접증거로서의미가있다. 3) 죽도기사의증거법상가치 죽도기사는 1693년에발생한이른바 울릉도쟁계 를계기로조선과쓰시마번사이에일어난울릉도를둘러싼영유권교섭에관한내용을기술한책으로 1726년 12월쓰시마번사인고시쓰네에몬이편찬했다. 집필자는사건당시쓰시마번의공직인가로 ( 家老 ) 의지위에있던오우라리쿠에몬이며아메노모리호슈가교열했다. 25) 당시조선과일본사이에주고 23) 内田文恵, 村上家所蔵 元禄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巻之覚書 解読について, 島根県竹島問題研究会島根県総務部 (2006) 特集. 24) 박현진, 앞의논문, 94쪽각주 14. 25) 이책은사건으로부터멀지않은 1726년에교섭당사자인쓰시마번에의해작성된공식기록이라는점에서의미가있다. 경상북도독도사료연구회, 죽도기사,
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의국제법적해석 79 받은외교문서는최고통치자간에주고받는국서 ( 國書 ) 와막부로부터대조선교섭을위임받은쓰시마번의로쥬 ( 老中 ) 와조선의예조, 동래의외교실무자간에주고받은서계 ( 書契 ) 가있다. 외교문서인서계는일본에서는쓰시마번만이작성하여조선과주고받을수있었다. 죽도기사의편찬주체가당시조선과외교업무에관한권한을막부로부터위임받은쓰시마번의관리라고하는측면에서죽도기사는쓰시마번의외교문서를정리하는업무를담당한관리가작성한직무상의공문서로서법적인가치를갖는다. 증거법상으로도공무원또는공무소가직무에관하여작성한문서를공문서라고한다. 26) 공문서의지위가부여되기위한중요한요건은작성주체가공무원또는공무소이야한다. 공무원또는공무소가작성한문서인한그직무권한이반드시법률에근거가있어야하는것은아니다. 현대적인법리에의하면공무원또는공무소가아니라하더라도어떤단체, 기관, 개인등이형법기타특별법에의해공무원또는공무소로의제되는경우라면그가작성한문서는공문서가된다. 법률기타특별법이그에게공무원또는공무소로서의권한을주었기에공무원그리고공무소로의제되는것이다. 27) 죽도기사는쓰시마번과조선정부사이의왕복서한, 에도막부의최고고위직인로주 ( 老中 ) 에게보낸렌조 ( 연명서 ) 와고죠쇼 ( 구술서 ), 나가사키봉행등에게보낸죠 ( 서장 ), 사자에게내려진가키쓰케 ( 문서 ), 사자로부터의우카가이쇼 ( 질의서 ) 와오보에가키 ( 각서 ), 죠비카에 ( 서장사본 ), 닛쵸 ( 일지 ) 등의사료를원용하고있다. 이와같이죽도기사는그자체가 1차적외교문서들을기초로작성되었고이를확인하기위한다양한문서를포함하고있으며, 외교기록의보존및보관을위해공무원인번사에게편찬의 2013, 머리말. 26) 형법제225조. 27) 다만, 어떤단체, 개인등이계약등에의해공무 ( 公務 ) 를일부대신해서수행하는경우공무원또는공무소라할수없다.
80 獨島硏究제 22 호 책임이부여되고집필자와교열을담당한자도공무원인가로 ( 家老 ) 라는측면에서증거능력을갖는 1차적직접증거로서의미를부여할수있다. 4) 죽도고의증거법상가치 죽도고 는돗토리번번사오카지마마사요시가 1828년 ( 일본연호문정 11년 ) 에편찬한책이다. 상 하두권으로되어있으며주로다케시마 ( 울릉도 ) 에관한돗토리와그주변지역에서전해내려져오는기록및일본과조선, 중국등의문헌을들어울릉도영유권에대한자신의생각을전개시키는내용으로구성되어있다. 28) 죽도고의머리말에는 ( 전략 ) 오랫동안우리에게속했던땅을다른나라의간악한어부들이멋대로빼앗았으니뜻없는자라면누구나그일을애석해하지않으랴. ( 중략 ) 대개사물은반드시그수가정해져있다. 아니기울어질때는즉커질때이다. 그것이곧이치이다. 다시커질때를얻어재차독도 ( 죽도 ) 로배를보내려는움직임이있을때, 이책에서한구절이라도취할만한곳이있어국가를위한조금의도움이라도된다면나의영원한행복이될것이다. ( 하략 ) 라고서술하고있어당해사료의집필의도가매우주관적임을확인하고있다. 죽도고는집필의주체가관리이기는하지만자신의직무와관련하여공적으로작성한문서라기보다독도와관련한자신의의지를반영하기위하여사적으로작성한문서이다. 따라서공문서가아닌사문서로서의미를갖으며, 그내용또한사적 ( 私的 ) 으로듣고모은자료를기초로하고있기때문에그객관성을인정받기어려워증거법상증명력이강한증거문서로인정되기어려울것으로판단된다. 그러나울릉도쟁계와관련하여조선과일본간의주장과입장을입증할수있는일정한사실에관한정황이나정보를제공하는문서로서간접증거내지는정황증거로이용될 28) 정영미, 竹嶋考上 下, 경상북도안용복재단, 2010.
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의국제법적해석 81 수있을것이다. 죽도고는통상적 합리적경험칙등에의하여울릉도쟁계에서언급된사실들을간접적으로추론하게하거나추론할수있도록유도하는입증자료라고할수있다. 직접증거라고하여반드시그신빙성이높은것을의미하는것은아니기때문에간접증거로서죽도고를통하여원록각서와죽도기사에포함된 1차적직접증거들의진정성을입증 증명할수있다면신빙성이낮은직접증거보다더욱효과적으로당시조선의독도영유권사실을증명할수있을것이다. 5) 공식외교문서로서죽도기사 - 페드라브랑카판례의법리 국제사법재판소 (ICJ) 는 2008년 5월 23일싱가포르와말레이시아도서영유권분쟁사건에대해페드라브랑카 (Pedra Branca) 는싱가포르에, 미들락스 (Middle Rocks) 는말레이시아에, 사우스레지 (South Ledge) 는두나라의영해획정결과에따르는것으로결정했다. 29) 페드라브랑카사건은말레이시아가 1979년페드라브랑카섬의영유권을주장하면서국제분쟁으로비화되었다. 실질적으로싱가포르가관할하고있던페드라브랑카섬은싱가포르해협의선박통항로에있었다. 두나라는이문제를해결하기위해양자간협상을지속했으나합의도달에실패하고, 2003년 7월 24일 ICJ에이사건을정식으로제소했다. 말레시아는이섬들에대한조호르지역술탄 (Sultan of Johor) 의시원적권원을주장했지만당해지역술탄이나그승계자들이실질적으로주권적권능을행사했다는증거는거의없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ICJ는조호르의술탄에게페드라브랑카섬에대한시원적권원이있다는고유영토론을지지하고조호르술탄이 1512년이래자신의주권하에주권국가로서존재하고있었다고선언하였다. 30) 그러나타국이 주권자의자격 으로 29) Case Concerning over Pedra Branca/Pulau Batu Puttteh, Mille Rocks, and South Ledge(Malaysia/Singapore)(Pedra Branca Case), Judgement, 23 May 2008, ICJ Reports(2008) 12,
82 獨島硏究제 22 호 행한영유권의명시적표명에대응하지않을경우, 특별한사정하에서영유권이양도될수있다는법리를취했다. 싱가포르는페드라블랑카주변수역에서발생한해난사고에대한조사를하고, 말레시아의공무원들이당해섬에방문하는경우싱가포르의허가를받도록하였으며, 군사통신장치를설치하는등의 평온무사한실효적지배 를하였지만말레이시아는싱가포르의이러한행위를오랫동안묵인했다는것도아울러지적했다. 31) ICJ는특히섬의소유권을부인한말레이시아의공문을 결정적증거 로삼았다. 1953년싱가포르는영해경계획정과관련해페드라브랑카섬의법적지위에대해말레이시아에게질의한바있는데, 이때말레이시아가페드라브랑카의소유권 (ownership) 을주장하지않는다는회신을보낸것을 ICJ는영유권 (sovereignty) 의포기로간주했다. 페드라브랑카사건은역사적권원이말레시아의조호르지역술탄에게있음을인정하면서도당해술탄이싱가폴에보낸공식문서를근거로페드라브랑카의영토주권이싱가폴에귀속된다는판단을사례로서죽도기사가울릉도를조선의영토로공문서를통해공식적으로인정한문서이며, 조선의영토로서울릉도는독도와 하나의세트 라는 32) 인식을전제로그러한내용을대조선외교업무를전담하는쓰시마번에의하여작성된외교문서의형식으로통보하였음을입증하는문서로인정할수있도록하면 ICJ의페드라브랑카사건의증거법상법리를준용하여일본이독도의조선영유권을인정한근거로주장할수있을것이다. 30) Ibid., paras 53-59. 31) Phoebe Ganal, Shifting Winds in the East : A Legal Analysis and Case Comparison of the Diaoyu/Senkaku Island Dispute, Southern California Interdisciplinary Law Journal, 2016, Summer, pp. 708-709. 32) 송휘영, 일본의독도에대한 17세기영유권확립설 의허구성, 민족문화논총제 44집, 2010, 62쪽. 이에더하여 일본의명칭죽도 송도는 송죽매 라는전통적일본명칭으로보아결합된것으로인식 되었다고한다.
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의국제법적해석 83 3. 죽도기사 죽도고 원록각서와국제법상영토주권의권원 1) 역사적권원 (historic title) 영토획득의법적근거로서역사적권원의개념은역사적문서에근거한권원이아닌근대국제법의확립이전에형성된권원을의미하며법이전의권원으로서역사적사실에대한일반적평가나의견의증거에대한신뢰에의해인정되는권원이다. 33) 역사적권원은일련의행위와행위의유형이생성된후오랜세월의경과를통해서일정지역에지속된점유현상이국제법상시효, 묵인등의과정을통하여공고화되는경우그자체로충분한영유권의근거가된다. 34) 이러한이유로국제법상영토에대한역사적권원의성질과법적지위는영역취득근거로서시효에대한올바른평가없이이해될수없다. 역사적권원개념은계속성과함께시효와마찬가지로시간의경과를핵심적요소로한다는점에서역사적이다. 35) 원록각서와죽도기사그리고죽도고는한국이독도에대하여정상적인영토관리차원에서실효적으로지배하고있는근거를역사적으로뒷받침하는역사적권원을입증하고있다. 특히죽도기사에서 당초에울릉도를빼앗은것은아니니, 지금이섬을돌려준다고말할수는없고오직일본인의울릉도에의고기잡이들어감을금지하기만하면되므로이를명령하니이를조선정부에알리도록하라 고언급한것은독도에대한조선의역사적 시원적권원을재확인하고, 당시독도에대하여막부가영유의사나권원이없었음을입증하는것이다. 36) 33) 김명기, 국제법상 대한제국칙령제41호 에의한역사적권원의대체, 독도연구저널, 2010. 9호, 59면. 34) Artur Kozlowski, The legal Construct of Historic Title to Territory in International Law-An Overview, Polish Yearbook of International Law, vol. 30, 201, p. 90. 35) Eritrea-Yemen Arbitration, Award of the Arbitral Tribunal in the First Stage, 1998. 36) 박현진, 앞의논문, 143쪽.
84 獨島硏究제 22 호 Minquiers and Ecrehos 사건에서 37) ICJ는이사건의성격에대해영국과프랑스가분쟁을 ICJ에의뢰하기위해체결한특별협정제1조에근거하여이사건이당해도서에대한양국의아주오래된권원또는시원적권원주장에관련된분쟁이라고판단하고, 38) 이러한영유권분쟁의해결에있어결정적으로중요한것은 중세의사건들로부터추론되는간접적인추론이아니라당해도서의점유에직접적으로연관된증거 라고판시하여역사적권원보다실효적지배를중시하였다. 39) Palau Ligitan섬사건에서도 ICJ는모호한역사적권원과실효적지배를비교형량하여판단하였다. 40) 역사적권원의주장은역사적우선권또는소유의기간에근거한다. 역사적권원은특정지역에대하여최초로영토주권을행사하였음을근거로주장하는것으로시간의경과에의하여더욱보강된다. 역사적권원은영토주권을주장하는당시에당해지역을실질적으로소유하고있는가와관계없이영토에대한주권주장의근거가된다. 41) 따라서가장일반적인영토주권주장의근거이다. 타국의역사적권원주장에의하여자국의영토주권이훼손된국가가타국의주장에대응하지않는경우상대방국가의역사적권원을묵인하는것으로간주되며향후상대방국가의역사적권원이동의되지않았음을이유로거부할수있는근거를잃게된다. 42) 37) Minquiers and Ecrehos Case, 앞의주 8) 참조. 38) Ian Brownlie 는영역취득의유형을점유와첨부등원시적 (original) 인유형과할양과같은파생적 (derivative) 유형으로구분하는것이실질적가치를갖지못한다고주장한다. 왜냐하면파생적영역취득권원으로서할양도당해영역을취득하는국가의입장에서는당해영역에대한원시적권원이라고할수있기때문이다. Ian Brownlie, op. cit, p. 130. 39) Minquiers and Ecrehos Case, 앞의주 8) 참조. 40) Sovereignty over Pulau Ligitan and Pulau Sipadan(Indonesia v. Malaysia), 2002 ICJ 684(Dec. 17). 41) Surya P. Sharma, Territorial Acquisition, Disputes and International Law(Martunus Nijhoff), 1997, p.31. 42) Brian Taylor Sumner, Territorial Disputes at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Duke
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의국제법적해석 85 분쟁의대상이된지역의문화적중요성이클수록이에대한역사적권원주장이강해지기때문에역사적권원은종종문화적영토주권주장과연계된다. 역사적권원은문제의지역에대하여더이른역사적언급이이루어졌으며, 그기간이장구하면서거주자와문제지역간의공생관계가형성되어있을때강력해진다. 43) 영토주권을주장하는국가국민들의역사와분쟁영역이당해국가의정체성을구체화하는경우당해영역은영토주권을주장하는국가국민들과운명공동체가되며영토주권주장에생물학적합법성을부여하게된다. 역사적근거는실제로발생한사건에근거하거나의도적으로만들어진신화에근거할수도있다. 이때당해지역과영토주권을주장하는국민들간의정체성은상승작용을하게된다. 44) 2) 지리적근접성 (proximity) 법리와판도이론 우리나라의독도영유권을입증하는역사적권원의근거는서기 512년하슬라 ( 강릉 ) 의군주인이사부가우산국을복속하였으며우산국의거점인울릉도의복속은지리적으로근접하여 45) 우산국사람들이어로활동을 Law Journal, vol 53, 2004, p.1789. 43) Land and Maritime Boundary (Cameroon v. Nigeria), 2002 I.C.J. 303.(Oct. 10); Andrew Burghardt, op. cit., pp.232. 44) Brian Taylor Sumner, op. cit., p.1789. 45) 현대국제법에서지리적근접성 (geographical contiguity) 은그자체로독도에대한우리의영유권주장에큰도움이되지않는다. Palmas 섬사건의부수의견에서후버판사는지리적근접성의권원 (title of contiguity) 은국제법상영토주권의권원으로인정되지않는다고판시하였다. 또한 ( 지리적 ) 근접성의원칙은분쟁당사국어느나라로부터도상대적으로멀리떨어져있는도서의경우전체적인정확성이부족하고자의적결과를가져올수있다는점을유의하면서영토주권분쟁문제를해결하기위한법적수단 (legal method) 으로인정될수없다고하였다. The Island of Palmas Arbitration, 1928, United Nations Reports of International Arbitral Awards, vol. 2, 1949, p. 869. 하지만이러한후버판사의판단전제는당사국모두지리적근접성에대하여정확한인식이부족하여자의적으로자국의
86 獨島硏究제 22 호 하던활동영역의범위내에포함되는독도에대한복속을포함한다는판도이론에기초한역사적권원의승계이다. 원록각서에따르면 안용복이말하기를대나무섬을다케시마라고말하는데조선국강원도동래부안에울릉도라는섬이있는데이것을대나무섬이라고합니다. 곧팔도지도에적혀있는것을가지고있습니다. 마쓰시마는이도 ( 강원도 ) 안에자산 ( 소우산 ) 이라는섬이있는데이것을마쓰시마라고합니다. 5월 15일다케시마를출선하여같은날마쓰시마에도착하였고동 16일마쓰시마를나서 18일아침에오키도내의니시무라의바닷가에도착, 동 20일에오시사무라에입항하였다고합니다. 다케시마와조선사이는 30리이며다케시마와마쓰시마사이는 50리라고말하고있습니다. 라고기록하여독도를울릉도그리고강원도와의지리적거리를중심으로설명하고그영향권에있음을밝히고있다. 또한죽도기사에따르면울릉도쟁계와관련하여막부는돗토리번에당시의죽도 ( 울릉도 ) 나당시의송도 ( 독도 ) 에대해여러가지조회를하였고, 돗토리번은답변을했다. 이때돗토리번은 송도는 ( 호기와이나바 ) 어느쪽의나라에부속하는섬이아닙니다. 송도에고기잡이한일은죽도로가는도해의길목에있으므로들러서고기잡이를했습니다 라고막부에보고하였다. 46) 그리고 여지승람의기술내용에따르면우산도와울릉도는별도의섬인것처럼보입니다. 하지만일설로는본래한섬이라고하므로다른섬인지분명치않습니다. 조선회도에는두섬으로그려져있습니다. 그외에그방향에섬이있다고알고있는가? 라고하셔서자세히는모르지만죽도의근처에송도라고하는섬이있습니다. 고한기록도울릉도와독도가하나의이해관계에놓여있으며영향을받는판도 지리적근접성을주장하는경우를고려한것으로독도에대하여는울릉도쟁계가진행되던당시에도조선의울릉도에가까운섬이라는사실을양측이정확하게인식하고있었다. 46) 송휘영, 일본의독도에대한 17세기영유권확립설 의허구성, 민족문화논총제 44집, 2010, 57-59쪽.
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의국제법적해석 87 에속해있음을확인할수있는내용이다. 47) 특히지리적근접성에기초하여조선의해양도서에대한영토주권을인정해야한다는서술로서 저섬에오래된민가가있었을때조선에속해있었다는것은저쪽의서적에보이며특히조선에서거리가가깝고일본에서는거리가멀기때문에조선에속한다고하는것은변론할여지없이잘알려져있는일입니다. 라는기록은 48) 17세기당시해양에있어도서의영토주권획정이지리적근접성에기초하여이루어졌음을확인할수있는내용으로서중요성이있다. 이러한인식은 이러한상황에서건너가서고기잡이를해온것으로조선의섬을일본에돌려달라고말할수도없고일본인이거주하지도않습니다. 거리를물어보았더니호키에서는 160리정도이고조선에서는 40리정도의거리에있다고합니다. 그렇다면조선국의울릉도라고해도되지않겠습니까? 아니면일본인이거주하거나이쪽에서차지한섬이라면이제와서돌려주기어려운일이지만그러한증거등도없으니이쪽에서는상환하지않는것으로하면어떨까요? 라는기록이나 49) 죽도기사에기록된조선국예조참의박세준이일본국쓰시마주형부대보에게보낸문서에 울릉도가우리영토라는것은여지도서에실려있는데내용이분명합니다. 울릉도가그곳 ( 일본 ) 과멀고이곳 ( 조선 ) 과가깝다는것은물론이고경계가자별합니다 라는 50) 내용도이를뒷받침한다. 51) 47) 경상북도독도사료연구회, 죽도기사 2, 68 쪽. 48) 위의책, 42 쪽. 49) 위의책, 83 쪽. 50) 위의책, 195쪽. 51) 이는당시양국간도서영유권판단 결정에관한구속력을가진관습으로간주하고있음을보여준다. 안용복이 1693년 1차도일당시오키도주에게 울릉도에서우리나라까지의거리는하루노정이나, 일본과의거리는 5일노정이니우리나라에속한것이아니겠는가 라고 항해거리 를근거로따지자그를호키주로보내호키주태수가 울릉도는일본지역이아니다 는관백의서계를받아주었다는주장을조선정부가그대로인용한것도이를뒷받침한다. 박현진, 앞의논문, 149쪽.
88 獨島硏究제 22 호 죽도고에는 죽도고도설, 죽도송도지도 라는지도가포함되어있으며이는울릉도와독도를하나의종이에그리고있어일본측이죽도와송도를하나의판도로인식하고있었음을보여주는시각적지도에의한방증이라고할수있다. 그외에도 여러책을살펴보면종종다케시마와마쓰시마가같이기술되어있다 고서술하고있다. 52) 이러한기록은결국울릉도와독도가하나의판도에속해있음을확인하는것이므로판도이론에기초하면죽도기사의내용처럼일본이울릉도의조선영유권을인정한것은결국독도에대한조선의영유권을인정한것이된다. 페드라블랑카사건에서도 ICJ는페드라블랑카섬과같은작은섬을포함하고있는넓은지역 (the broad area) 에대한일반적영토관리의확인이있으면, 말레시아의조호르지역술탄이당해섬에대하여실질적권한을구체적으로행사하였는지를확인하지않아도영토주권의획득을인정하기에충분하다는판단을하였다. 이는 ICJ가 1512년이라는시대를고려하여문제가된작은섬인페드라블랑카에대한구체적주권행사에우선적초점을두지않고페드라블랑카섬이위치해있는싱가폴해협의일반적지리적또는역사적범위 (general geographic or historic scope) 에대하여조호르술탄이영토로서주권을행사하였는지를결정적요소로판단한것이다. 53) 페드라블랑카사건은죽도기사에서송도 ( 독도 ) 에서고기잡이를한것이죽도 ( 울릉도 ) 에가는길목에있기때문이라는진술을기록해놓은것은조선의울릉도와독도가일반적지리적범위내에있음을인식하고있는것이며일본이결국울릉도에대하여조선이주권을행사하였음을인정하는것은울릉도가위치해있는광범위한지리적범위내에있는독도에대하여주권을인정하는것으로서해석하는것을뒷받침하는 ICJ의판례이다. 52) 정영미, 앞의책, 상 129. 53) Sookyeon Huh, op. cit., p.722.
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의국제법적해석 89 3) 실효적지배 현대국제관습법은무주지에대한영역주권의획득을위한필요충분조건으로첫째, 발견과선점이라는시원적권원 (original title), 둘째, 특정영역을자국의영토로편입하겠다는영유의사 (animus occupandi), 셋째, 시간의경과를통해서나타난지속적이며평화적인그리고실제적인국가주권의행사로서실효적지배 (effective control) 를 54) 요구하게되었다. 그런데영토편입의사의존재여부는실체가없는유령과같은주관적인요소로써 55) 영토편입의사는결국객관적인행위로서실효적지배를통해서입증되어야할것이므로시원적권원과이에근거한실효적지배행위의존재가영역취득을위한핵심적요건이라고할수있다. 국제법에있어서실효적지배는강력한영토주권을주장하는데있어없어서는안되는 (sine qua non) 결정적인근거이다. 56) 하지만이러한주장을하기위해서는첫째, 당해지역이과거소유했던국가로부터포기된지역인가하는문제와둘째, 당해지역에대한행정권의행사는어떻게이루어져야하는가하는문제가해결되어야한다. 57) 실효적지배의전제조건으로서포기된지역의지위는매우논란이많은문제다. 실효적지배를위해서는당해지역이어떤국가에도소속되지않았던무주지 (terra 54) Michael C. Davis, Can International Law Help resolve the Conflicts over Uninhabited Islands in the East China Sea? Denver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and Policy, vol. 43, Winter 2015, p.137. 실효적지배는주권적행위를하려는의도또는의지와주권적권한의실제적행사또는시현 (display) 이라는두가지요건을통해성립한다. 55) H. Waldock(ed.), Brierly The Law of Nations, 1963, p. 152. 56) Brian Taylor Sumner, op. cit., p.1787. Brilmayer와 Klein은특정한지역에대한주권주장이경합하는경우당해지역에대한가장강력한 (the most important) 법적권원의유일한지표 (single indicator) 는소유 (possession) 이라고지적했다. Lea Brilmayer & Natalie Klein, Land and Sea: Two Sovereignty Regimes in Search of a Common Denominator, N.Y.U.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and Policy, vol. 33, 2001, pp.714-716. 57) Andrew Burghardt, op. cit., pp. 228-9.
90 獨島硏究제 22 호 nullius) 일것이요구된다. 과거에는새로이발견된지역만이무주지였지만현재는무주지라는용어가최소한의주권활동을유지하는데실패한지역으로서 58) 어느국가도주권을행사하지않는지역을포함하는것으로정의한다. 59) 죽도기사에따르면조선의조정이보낸서신중에서 수시로공차 ( 公差 ) 를보내왕래하며수색검사하게하였다 고기록하고있으며 삼가 82년전에폐주 ( 쓰시마도주 ) 가동래부에서신을보내어의죽도를자세히조사하겠다고알린일을살피니, 부사의답서에이르기를본섬은우리나라의소위울릉도입니다. 지금은황폐하지만어찌다른사람들이함부로점거하는것을용납하여분란의단서를열수있겠습니까? 라고한것으로기록되어있다. 60) 그외에도조선정부의쓰시마도주에게보낸답서에 간혹사신을파견하여왕래하며수색점검하게한일과우리나라여지승람에신라와고려및본조에서자주관리를섬에보낸일을자세히기록하고있습니다. 요사이사신이늘왕래하지않는것도해로에위험함이많기때문입니다. 이제예전부터기재한책은버려두고민지않은채도리어두나라사람들이섬안에서만나지못한일을가지고의심한다면이또한이상하지않겠습니까 라고 61) 하여조선의공문서인여지승람을근거로하여울릉도와독도에대한실효적지배행위를해왔음을설명하고있다. 죽도고에따르면 그나라사람의성정이유약, 우리나라해적이그나라고을을소란스럽게하니그해를당하는것이매번이었다. 무로마치때의시대적혼란을틈타 9개국의간민 ( 奸民 ) 수만명이당을만들고 58) Robert Y. Jennings, The Acquisition of Territory in International Law, Manchester Univ.. Press, 1963, p.30. 59) Norman Llewellyn Hill, Claims to Territory in International Law and Relations, Oxford Univ. Press, 1945, p.146. Hill에의하면무주지의발견은소유에의하여완성되어져야할불완전권원 (inchoate title) 을창설하는데불과하다. 60) 경상북도독도사료연구회, 죽도기사 1, 213-214 쪽. 61) 위의책, 240-241 쪽.
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의국제법적해석 91 군대를이루어중국및조선국에도해해서는마음껏노략질하고풀베듯사람을베었다. 그잔혹함이란이루말할수없는것이었다. 호타이코의조선정벌로인해살육된그나라신민이흙투성이가된채땅에굴러다녔고종묘사직은기울어질대로기울어져버렸다. 다케시마는우리나라배가왕래하는바다에있는고도이므로그나라사람이오래전부터살해당할것을두려워하여살지않았고, 마음편하게도해할수도없었기에폐도라고만알려져있었다, 다케시마에사람이살지않는것은, 왜구의난이한창이었을때에는고원절도 ( 孤遠絶島 ) 등은말할것도없고, 해변가촌락에사는사람들이모두다도망쳐양전옥답이온통쑥대밭이된탓일것이다 고 62) 하여조선이울릉도와독도에대하여소극적주권활동을하지않을수없는이유가나와있다. 이는조선이무관심으로포기한지역이아니라본토에서멀리떨어져있는작은도서에대한일본의침략과노략질에대응하여소극적인주권행위로서독도를생활권으로어업에종사하며거주하고있는울릉도주민에대하여쇄환정책을실시하고주기적인수토를하게된이유를확인할수있는죽도기사의역사적기록이라고할수있다. 4. 국제법상영토주권판단법리에주는의미 원록각서 ( 元祿覺書 ), 죽도기사 ( 竹嶋記事 ) 그리고죽도고 ( 竹嶋考 ) 는모두울릉도쟁계를주제로일본측에의하여작성된역사적문서들이다. 한국과일본양국모두에울릉도및독도와직접관련된역사문서가매우희귀한현실에서 63) 이들역사적문서들이담고있는내용의광범성, 정확 62) 정영미, 위의책, 상53. 63) 원해고도의작은섬과관련된수많은영토분쟁은공통적으로영토주권의존재를주장하는국가들의역사적권원을입증할수있는문헌의빈곤을기초로하고있다. Michael C. Davis, op. cit., p.141.
92 獨島硏究제 22 호 성, 객관성, 풍부성등은한국이통치하고있는독도의영토주권을뒷받침하는역사적권원의존재를밝혀주는문서로서결정적가치를부여할수있을것이다. 유럽에서웨스트파리아평화조약에의한새로운국제법체제가형성된이후에특정한국가에대하여국가영역의범위에관한합의가이루어졌지만영토획득의일반적법리를명시적으로규정하지는못하여국제법상영토획득의정당성은국제관습법에의하여정립되어왔다. 이런측면에서소위 역사적권원 개념이나웨스트파리아조약이후에국제사회에서인정되었던영토획득의정당성근거는아시아에서영토획득의정당성을주장하는데도움이될수있을것이다. 사실현대국제법이인정하는영토획득의정당한권원은유럽의식민지경쟁을통한팽창과정에서형성된법리에의한것이다. 15세기이전에유럽에서영토획득과관련된국제법원칙은존재하지않았으며국왕의재산으로서상속되거나, 분리처분되거나, 결혼을통해선사되거나, 평화조약등을통해영토가이전되었다. 하지만 15세기중반이후유럽의팽창과정에서유럽은식민지라는새로운영토질서에직면하게되었으며이는기존의법리로규율될수없었다. 이로써재산법이법리가아닌독립된법원칙의체계로서영토의법리가마련된것이다. 64) 국제법은영토의획득과관련하여소위시제법 (intertemporal law) 에따라획득당시의법에따를것을원칙으로하고있기때문에원록각서, 죽도고그리고죽도기사는울릉도쟁계가이루어졌던 1690년대아시아특히한 중 일의동북아시아에서영토획득의기준이되는것으로수용되었던원칙을확인할수있는중요한역사자료라고할수있다. 문제는이들역사자료를통하여확인된당시의영토획득법리를어떻게현대적으로해석하여적용할것인가하는것이다. 시제법이원칙이라고해서과거의 64) J.H.W. Verzijl, International Law in Historical Perspective, Part III: State Territory (Reprinted, 1970), Kluwer Pub., pp. 298-325.
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의국제법적해석 93 법리가명확하게문제가된사건에나타나있지않은문제에대하여과거에받아들여졌던하나의원칙적또는이념적정당화사유체계를그대로적용할필요는없다. 65) 국제법정에서도서영유권분쟁과관련된국가들은특정한지역에대한영유권분쟁이발생하면자국의주장을뒷받침하기위해일반적으로역사적권원 (historic title) 또는무주지 (terra nullius) 의발견을영토획득의기본적원칙으로인정하고이를기초로현대적영토획득법리에부합할수있는선점이후의 실제적 이며현실적인지배행위가 지속적 그리고 평화적 으로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66) 증거를근거로제시해왔다. 명확한성문의국제법규범을통해영토문제의해답을찾을수없는대부분의경우에역사적권원의기초없이실효적지배에의한권원의완성을주장할수없는것이다. 그래서영토분쟁에서역사적권원을주장하는가장보편적방식은역사적권원에기초한영유를설득하는논리적인일련의역사적사실을언급하는것이다. 67) 더구체적으로는지속적인주권의행사를통한과거의영유를입증하는사실들을기록한역사문서를통해문제의영토와영토주권을주장하는국가와의긴밀한영토적동일성을주장하는것이다. 독도영유권문제는역사적권원과같은사실 (fact) 의다툼이자과거사를어떻게보는가라는 인식 (perception) 의다툼이라는인식은이러한역사적근거에기초한입장이다. 68) 원록각서, 죽도기사그리고죽도고등은일본이작성한문서임에도불 65) J. Crawford, The Creation of States in International Law, 2006, p.271. 66) 실효적지배의기준으로서실제적, 계속적, 평화적, 충분한지배의해석에관해서는김채형, 국제사법재판소에의한실효적지배관련주요판례와시사점, 독도의실효적지배강화방안전문가간담회자료집 ( 국회입법조사처 경상북도 ), 2012. 4. 26, 23-26 면참조. 67) Surya P. Sharma, op. cit., p.31. 68) 김영수, 한일회담과독도영유권 :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과한일회담 기본관계조약 을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제42집제4호, 2008, 114쪽.
94 獨島硏究제 22 호 구하고조선의독도에대한시원적권원을확인할수있는역사적사실들을기록하고있어앞으로도역사적, 지리적그리고국제법적으로매우깊은분석과통찰이필요하다. 시제법적측면에서울릉도쟁계당시한일양국이인정하고수용하고있었던영토획득의정당화사유를이들역사문서를통해살펴보면지리적근접성과울릉도및독도와관련된조선의주권적행위가지속적으로이어져왔음을확인해주는역사적권원으로정리할수있다. 그리고일본이남긴역사문서이지만이들문서는조선이울릉도와독도에대하여명확하게자국의영토로인식하고있었으며, 조선이지리적근접성에따라울릉도주변의바다와섬들에대하여포괄적인주권활동을하였고당시한일간에는이를영역결정의기준으로수용하고있었음을확인할수있다. 한편국제증거법의측면에서이들문서는각기그증명력에있어차이가있지만증거능력은모두인정된다할것이다. 원록각서는공적조서로서일본의국내적공문서의지위를가지고있기때문에그내용에대하여일본이부정할수없는구속력을부여할수있다. 죽도고는울릉도쟁계당시일본이조선에게울릉도와독도의영유권이있음을인정했다는원록각서와죽도기사의내용에신빙성을부여할수있는정황증거로서간접증거의지위를갖는다. 특히죽도기사는조선과의외교업무를담당하는쓰시마번주의명령에의하여공직자인편찬자. 집필자, 검수자들이작성한외교공문서로서지위를갖기때문에적극적으로확대해석하면울릉도및독도에관한한일양국간유일한국제합의문서로서의미를가진다고할수있다. 다만이를위해서는향후에일본이과거에공문서작성의기준과형식을정하고있었는지그리고있었다면어떤내용인지에대한일본공문서의역사에대한연구가추가적으로필요할것이다. 또한에도막부시대에일본의각번에서공직의조직과명칭및임무등이함께연구된다면원록각서와죽도기사그리고죽도고를작성한편찬주체의공무상지위와임무를분명히하여당해역사문서들의증거법상가치를더욱확실히파악할수있을것이다.
원록각서 죽도기사 죽도고 의국제법적해석 95 <Abstract> Interpretation of Wonrokgakseo, Jukdogisa and Jukdogo in terms of International Law Cheolyoung, Choi Wonrokgakseo( 元祿覺書 ), Jukdogisa( 竹嶋記事 ) and Jukdogo( 竹嶋考 ) are historical documents which are written by Japan and recorded Ulleungdo Jaenggye( 鬱陵島爭界 : 1693-1699) regarding the disputes about Ulleungdo and Dokdo between Korea and Japan. These documents might have decisive meaning and value as documents supported the historical title of Korean territoriality of Dokdo because these document include broad, accurate, and abundant contents about 17 th century situation on Dokdo, there is very rare historic document about Dokdo though. These documents evidently reveals that Korea recognized Ulleungdo and Dokdo as its territory as well as exerted comprehensive effective control around the wide range of Ulleungdo at that time based on geographical proximity principle. As a matter of 17 th century customary international law, these document also testify that Korea and Japan accepted geographical proximity as a criteria to determine boundary of territory. In terms of international evidence law, on the other hand, all of these document have competence as evidence, although there is difference in value of evidence among these document respectively. Wonrokgakseo has legal binding force as a official document which was recorded by Japanese
96 獨島硏究제 22 호 government officials. Jukdogo may be recognized procedural legal status as circumstantial evidence supporting the credibility of the Wonrokgakseo and Jukdogo which record that Korea carried out sovereign territorial control over Ulleungdo and Dokdo. If we interpret it actively and broad, Jukdogisa, especially, can be regarded as the only international agreement between Korea and Japan because it is qualified as diplomatic document produced, written and proof-read by official according to the order of governor of Tsushima who had dealt diplomatic affairs with Korea at that time as an agent of the Shogunate in Tokyo. Key words: Wonrokgagseo, Jukdogisa, Jukdogo, acquisition of territory, admissibility of evidence, geographical proximity, historical title 이논문은 2017 년 5월 25일에투고하여 2017 년 6월 3~25 일에심사하여 2016 년 6월 26일에게재 결정됨
97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 독도영유권 * 1) 2) 정태만 ** < 목차 > 1. 머리말 2. 소곡이병위 ( 小谷伊兵衛 ) 제출죽도지회도 ( 竹嶋之絵図 ) 와죽도도해금지령 3. 기죽도약도 ( 磯竹島略圖 ) 와태정관지령 4. 연합국최고사령부 (SCAP) 관할지역도와훈령 (SCAPIN) 제677호 5. 일본영역참고도 ( 日本領域參考圖 ) 와샌프란시스코조약 6. 맺음말 < 국문초록 > 독도는지리적으로울릉도의부속섬과같은위치에있다. 역사적으로일본에서도독도를울릉도에부속된섬으로보았다. 1690 년대안용복사건은일본에도막부에서울릉도도해금지령을내림으로써종결되었는데, 그당시에돗토리번에서에도막부에제출한지도가 소곡이병위제출죽도지회도 ( 小谷伊兵衛差出候竹嶋之絵図 ) 이다. 이지도는독도가일본땅이아니라는사실을판단할때사용된지도이다. 그후명치시대에들어안용복사건당시조선 일본양국간외교교섭결과를한번더확인하여울릉도와독도가조선땅임을확인하고공시한자료가 1877년의 태정관지령 이다. 일본측에서는 태정관지령 의마쓰시마 ( 松島 ) 는독도가아니라고주장하고있으나, 2006년에공개된부속지도 기죽도약도 에의해 태정관지령 의마쓰시마 ( 松島 ) 는독도라는사실이명명백백해졌다. 광복후일본을점령통치한연합국최고사령부는관할지역과어선조업구역양면에서울 ** 이논문은 2014년대한민국교육부와한국연구재단의한국학토대기초연구지원사업의지원을받아수행된연구임 (NRF-2014S1A5B4072398). ** 인하대학교고조선연구소연구교수
98 獨島硏究제 22 호 릉도와독도를일본영토로부터분리하였는데, 관할지역에있어서는연합국최고사령부훈령 (SCAPIN) 제677호로, 독도를일본영토에서제외하고, SCAP관할지역도 로써독도가남한지역에포함됨을분명히하였다. 1948년 8월, 그관할지역그대로대한민국정부수립과함께대한민국에인계됨으로써독도문제는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일본을연합국의점령통치로부터독립시키기위한샌프란시스코조약을체결하는과정에서연합국과일본의이해관계에따라독도문제는다시불거져나왔다. 우여곡절끝에샌프란시스코조약은독도에대한언급이없이체결되었으나, 최근에공개된 일본영역참고도 는당시에일본이한국의독도영유권을스스로인정하였음을보여주고있다. 왜냐하면, 독도를한국땅으로그린 일본영역참고도 를샌프란시스코조약조인전에일본정부에서제작하여, 샌프란시스코조약비준과정에서동조약의부속지도로썼기때문이다. 역사적으로사료적가치가높고, 국제법적으로증거능력 증명력이큰공적인지도를대상으로분석하면, 에도시대부터샌프란시스코조약때까지, 일본의독도영유권판정과관련된 4개의공적지도는모두독도가한국땅임을표기하고있거나, 독도가한국땅임을보여주기위한것임을알수있다. 이중연합국점령통치기간중의 SCAP관할지역도 를제외하고, 3개의지도는일본정부스스로제작한지도로서, 일본정부스스로 3번이나독도를한국땅으로인정한근거가된다. 주제어 : 소곡이병위, 태정관지령, 일본영역참고도, 독도, 샌프란시스코조약, 독도, 일본영역도 1. 머리말 지도는시각적으로쉽게설명하는수단이되는반면에크기, 위치등에대한조작도용이하게할수있다. 그런면에서, 같은지도라고하더라도사인 ( 私人 ) 이그린지도보다는정부기관에서발간한지도가사료적가치나국제법적인증명력이더크며, 정부기관이발간한지도라고하더라도, 단순히교육이나홍보를목적으로한지도보다는영유권귀속판단과관련된부속지도가사료적가치나증명력이더크다. 또한, 자국에서자국영토라고기록한자료보다는상대국에서인정한자료가증거능력 증명력이클것이다. 1) 그럼에도불구하고, 이제까지공적인지도 (official map) 에관하여는사인 ( 私人 ) 이그린지도에비해오히려연구 홍보면에서더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독도영유권 99 소홀한점이없지않다. 본논문에서는일본에서독도의영유권귀속판단과관련하여사용된공적지도를바탕으로, 당시영유권귀속판단내용과결과에대하여살펴본다. 일본의독도지도와관련된선행연구로는이상태, 김명기, 박현진등의연구성과가주목할만하다. 2) 다만, 공적지도에초점을두지않고, 최근에공개된 일본영역참고도 가반영되지않은아쉬움이있다. 독도를포함한울릉도가조선 일본양국간의외교적분쟁의대상이된것은조선숙종대, 일본에도 ( 江戶 ) 시대원록 ( 元祿 ) 연간이다. 따라서, 본논문에서는일본에도시대부터, 2차대전종전이후, 연합국의점령통치를거쳐일본이독립한샌프란시스코조약때까지의지도를대상으로한다. 다만, 일제강점기의일본지도는분석의의미가없으므로제외한다. 3) 이러한기준에따라, 1905년이전의지도로는에도시대안용복사건당시의 소곡이병위제출죽도지회도 ( 小谷伊兵衛差出候竹嶋之絵図 ), 메이지 ( 明治 ) 시대 태정관지령 ( 太政官指令 ) 의부속지도인 기죽도약도 ( 磯竹島略圖 ), 그리고, 종전후 연합국최고사령부(SCAP) 관할지역도, 샌프란시스코조약조인직전에일본정부에서제작하여조약비준과정에서일본국회에제출한 일본영역참고도 ( 日本領域參考圖 ) 의 4개지도에대해중점적으로살펴본다. 1) 증거능력은증거로서채택될수있는자격을말하며, 증명력은증거의가치라고정의된다. 근래에들어국제판결들은증거능력과증명력을구분하는경향을보이고있다.( 박현진 (2007), 獨島領有權과地圖 海圖의證據能力 證明力, 國際法學會論叢 第 52 卷第 1 號 ( 通卷第 107 號 ), 대한국제법학회, pp.89-128) 2) 박현진 (2007), 獨島領有權과地圖 海圖의證據能力 證明力, 國際法學會論叢 第 52 卷第 1 號 ( 通卷第 107 號 ), 대한국제법학회, pp.89-128; 김명기 (2009), 국제법상지도의영토권원인정증거에관한연구, 독도연구 7,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pp.151-191; 이상태 (2011), 고지도를통해본독도의영유권, 독도연구 10, 2011.6, 7-62 (56 pages),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pp.7-62 3) 1905년일본정부에서독도를시마네현 ( 島根県 ) 에편입결정한것도, 1904년 2월러일전쟁을일으켜한반도를무력으로강제점령하고있던상황하에서이루어진것이다.
100 獨島硏究 제22호 2. 소곡이병위(小谷伊兵衛) 제출 죽도지회도(竹嶋之絵図)와 죽도도해금지령 1) 소곡이병위(小谷伊兵衛)와 죽도지회도(竹嶋之絵図) <그림 1> 소곡이병위(小谷伊兵衛) 제출 죽도지회도(竹嶋之絵図) 소곡이병위 제출 죽도지회도 (小谷伊兵衛差出候竹嶋之絵図)는 에도(江 戶) 시대 돗토리번(鳥取藩)의 에도연락관(江戸留守居役) 소곡이병위(小谷 伊兵衛)에 의해 에도막부에 제출된 죽도(竹嶋, 울릉도) 회도(繪圖)이다.4) 이 죽도지회도 (竹嶋之絵図)에는 울릉도는 기죽도(磯竹島), 독도는 송도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독도영유권 101 ( 松島 ) 로표기되어있고, 5) 독도와울릉도간거리는 40리 ( 里 ), 독도와일본오키섬간의거리는 80리로되어있다. 특히, 독도는동도 ( 東島 ) 와서도 ( 西島 ) 로비교적자세히그려져있어, 태정관지령 ( 太政官指令 ) 부속지도인 기죽도약도 ( 磯竹島略圖 ) 와거의비슷하다. 소곡이병위 ( 小谷伊兵衛 ) 는당시돗토리번 ( 鳥取藩 ) 의에도 ( 江戶 ) 연락관으로서, 에도막부의질문에대해, 후술하는바와같이, 마쓰시마 ( 松島 = 독도 ) 는일본어느지방에속하는섬도아닌것으로알고있습니다. 라고답변하여, 1696년 1월에도막부의죽도 ( 鬱陵島 ) 도해금지령을이끌어낸인물이다. 이 죽도지회도 ( 竹嶋之絵図 ) 의제작연대는, 당시돗토리번이울릉도 독도에대한막부로부터의문의에답하여제출한것인점과, 소곡이병위가에도연락관인기간에작성된것인점에서, 1692~1696년간 ( 元禄 5~9년간 ) 으로추측된다. 6) 2) 안용복사건과에도막부의죽도 ( 울릉도 ) 송도 ( 독도 ) 조선령확인 1693년울릉도에서조업중이던안용복과박어둔이일본호키주 ( 伯耆州 ) 어부에의해일본으로납치되는사건이발생하자, 울릉도영유권을둘러싼외교교섭이시작되었다. 이를통상안용복사건또는울릉도쟁계 ( 鬱陵島爭界 ) 라하며, 일본에서는다케시마잇켄 ( 竹島一件 ) 이라한다. 그런데, 조선 일본양국간울릉도영유권을둘러싼외교교섭이교착상태에이른 1695년 12월, 에도막부와돗토리번과의문답과정에서울릉도뿐만아니라독도도일본땅이아니라는사실이밝혀지고또한확인되었 4) 三田清人 (2007), 鳥取県立博物館所蔵竹島( 鬱陵島 ) 松島( 竹島 / 独島 ) 関係資料, 竹島問題に関する調査研究 最終報告書 ( 平成 19 年 3 月 ), 竹島問題研究会, 2007.3, p43 5) 당시일본에서는울릉도를 다케시마 ( 竹島 ) 또는 이소다케시마 ( 磯竹島 ) 로, 독도를 마쓰시마 ( 松島 ) 로불렀다. 그후 1905년에독도를 다케시마 ( 竹島 ) 라고이름붙이고시마네현에편입결정하였다. 6) 三田清人 (2007), 위의글, p43; 小谷은, 元禄 2~13 年 (1689~1700) 에걸쳐서, 鳥取藩의聞役 ( 江戸留守居役 ) 으로근무했다.
102 獨島硏究제 22 호 다. 당시에도막부의 울릉도 ( 竹島 ) 는언제부터돗토리번땅이되었는가?, 울릉도 ( 竹島 ) 이외에돗토리번에소속된섬이있는가? 하는질문에대해, 돗토리번에서는 울릉도 ( 竹島 ) 는돗토리번에부속된섬이아니다 라고답하고, 에도막부에서묻지도않은독도를포함하여 울릉도 ( 竹島 ) 와독도 ( 松島 ), 그외에도돗토리번에소속된섬은없다 라고답했기때문이다. 7) 독도 ( 松島 ) 에대해돗토리번이돗토리번땅이아니라고답변하자, 에도막부는다시독도에대해질문했는데, 1696년 1월 25일자답변내용은 소곡이병위제출죽도지서부 ( 小谷伊兵衛差出候竹嶋之書附 ) 에의하면다음과같다. 각서 ( 중략 ) 一후쿠우라 ( 福浦 ) 로부터마쓰시마 ( 松島 ) 에 80리 8) 一마쓰시마 ( 松島 ) 에서다케시마 ( 竹島 ) 에 40리이상 (1696년) 1월 25일 7) 박병섭 나이토세이추 (2008), 독도 = 다케시마논쟁, 보고사, pp. 16-22.; 당시鳥取藩은伯耆州와因幡州를관할했다. 질문과회답은다음과같다. 江戶幕府의鳥取藩에대한질문 ( 磯竹島事略 元禄 8년 (1695) 12월 24일 ) 因州伯州江附候竹嶋者, いつの頃より両国江附属候哉 [ 因幡州 伯耆州에부속하는울릉도는언제부터因幡州 伯耆州에부속되었는가?] 竹島之外兩國江附属之嶋有之候哉 [ 울릉도외에因幡州 伯耆州에부속하는섬이있는가?] 右之返答松平伯耆守 ( 幕府의질문에대한鳥取藩松平伯耆守의회답, 磯竹島事略 元禄 8년 (1695) 12월 25일 ) 竹嶋者因幡伯耆附屬ニ而者無御座候 [ 울릉도는因幡州 伯耆州에부속하는섬이아니다.] 竹嶋松嶋其外兩國江附屬之嶋無御座候事 [ 울릉도 독도는因幡州 伯耆州에부속하는섬이아니고, 그외에도부속하는섬은없다.] 8) 福浦는일본오키도에있는지명이다. 따라서 磯竹島事略 과 竹嶋之書附 에서오키도- 독도 (80 里 ), 독도-울릉도 (40 里 ) 거리는 太政官指令 에서의거리와정확히일치한다는것을알수있다.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독도영유권 103 별지一마쓰시마 ( 松島 ) 에호키국 ( 伯耆國 ) 으로부터해로 120리정도입니다. 一마쓰시마 ( 松島 ) 에서조선에는 80~90리정도되는것으로알고있습니다. 一마쓰시마 ( 松島 ) 는 ( 일본 ) 어느지방 ( 國 ) 에속하는섬도아닌것으로알고있습니다. 一마쓰시마 ( 松島 ) 에어렵 ( 漁獵 ) 을가는것은다케시마 ( 竹島 ) 에도해할때길목에있기때문에들러서어렵합니다. 타지방에서어렵을가는것은없는것으로알고있습니다. 이즈모 ( 出雲國 ) 오키도 ( 隱岐國 ) 사람은요나고 ( 米子 ) 사람과동선 ( 同船 ) 하여갑니다. 9) 이와같이, 일본중앙정부는독도가돗토리번땅이아니라는것을단순히인식만한것이아니라문서로공식확인한것이다. 한편에도막부는마쓰에번 ( 松江藩 ) 에대해서도관할지역민의울릉도 ( 竹島 ) 도해에대해조회하여 1월 26일자회답서에서오키 ( 隱岐 ) 이즈모 ( 出雲 ) 사람은울릉도 ( 竹島 ) 도해에적극적인관련이없음을확인했다. 10) 9) 小谷伊兵衛差出候竹嶋之書附覺 ( 중략 ) 一福浦より松嶋江八拾里程一松嶋より竹嶋江四拾里程以上子正月卄五日別紙一松嶋江伯耆國より海路百貳拾里程御座候事一松嶋より朝鮮國江は八, 九拾里程も御座候樣及承候事一松嶋は何れ之國江附候嶋ニても無御座候由承候事一松嶋江獵參候儀, 竹嶋江渡海之節道筋ニて御座候故立寄獵仕候. 他領より獵參候儀は不承候事. 尤, 出雲國, 隱岐國之者は, 米子之者と同船ニて參候事以上 ( 竹島之書附 元禄 9 年 (1696) 1월 25일 ).; 鳥取藩松平伯耆守의에도연락관小谷伊兵衛가제출한것으로되어있다. 10) 池内敏 (2009), 江戸時代における竹島および松島の認識について, 독도연구 6,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p. 184.; 정태만 (2014), 17세기이후독도에대한한국및주변국의인식과그변화, 단국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p.37
104 獨島硏究제 22 호 에도막부가공식적으로확인한것은울릉도와독도모두일본땅이아니라는것과당초부터조선땅이라는것이었다. 11) 이에대하여는 1877년 태정관지령 부속문서 제1호구정부평의의지의 ( 旨意 ) 라는제목으로첨부되어있는 1696년 1월 28일자문서에서가장명쾌하게설명하고있다. 동문서에는에도막부의로쥬 ( 老中 ) 12) 가대마도주에게울릉도 ( 竹島 ) 도해 ( 渡海 ) 금지를시달한내용및그도해를금지하는이유에대해실무자에게자세히설명하고, 조선에전달할것을지시한내용이포함되어있다. 1호병자년 1696년 ( 元禄九年 ) 1월 28일다케시마 ( 竹島, 울릉도 ) 는원래확실히모른다. 호키주 ( 伯耆 ) 에서도해해고기잡이해왔던까닭에대해마쓰다이라 ( 松平 ) 호키주태수에게물어보니이나바주 ( 因幡 ) 호키주 ( 伯耆 ) 에부속하는것도아니라고한다. ( 중략 ) 위와같은경위로도해하여고기잡이를해왔을뿐이고조선의섬을일본에취하고자한것은아니다. 일본인은거주하지않는다. 거리를물어보니호키주에서 160 里 ( 해리, 필자주 ) 정도라고한다. 조선에서는 40 里정도라고한다. 그러면조선의울릉도가아닌가? 그리고원래일본인이거주하든가이쪽에서취한섬이라면지금에와서 ( 조선에 ) 넘겨주기어려운것이지만이같은증거도없으니까이쪽에서는관여하지않는것이어떤가? ( 중략 ) 원래취한섬이아니기때문에돌려준다고하는것도사리에맞지않는다. 13) 11) 정태만 (2014), 17세기이후독도에대한한국및주변국의인식과그변화, 단국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p.37. 12) 최고권력자인쇼군 ( 將軍 ) 의보좌역이다. 13) 一号丙子元禄九年正月二十八日 ( 중략 ) 竹島元シカト不相知事ニ候伯耆ヨリ渡リ漁イタシ来リ候由ニ付松平伯耆守殿ヘ相尋候處因幡伯耆ヘ附属ト申ニテモ無之候 ( 중략 ) 右ノ首尾ニテ罷渡リ漁仕来候マテニテ朝鮮ノ島ヲ日本ヘ取候ト申ニテモ無之日本人居住不仕候道程ノ儀相尋候ヘハ伯耆ヨリハ百六十里程有之朝鮮ヘハ四十里程有之由ニ候然ハ朝鮮國ノ蔚陵島ニテモ可有之候哉夫トモニ日本人居住仕候カ此方ヘ取候島ニ候ハハ今更遣シカタキ事ニ候ヘトモ左様ノ証據等モ無之候間此方ヨリ構不申候様ニ被成如何可有之哉 ( 중략 )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독도영유권 105 이와같이, 안용복사건발생이전에도막부는, 다케시마 ( 竹島 ) 에대한인식에있어서, 조선땅울릉도인줄모르고호키주어부들이새로발견한섬으로착각하고있었다. 에도막부는그섬 다케시마 ( 竹島, 울릉도 ) 에대해잘모르고도해면허를내주었고, 나중에안용복사건이후에알고보니조선땅울릉도이므로, 원래부터다케시마 ( 竹島, 울릉도 ) 는일본땅이아니라는것이다. 3) 에도막부의일본인죽도도해금지령 에도막부는울릉도와독도모두일본땅이아니라는것을공식적으로확인한후, 1696년 1월 28일일본인의죽도 ( 울릉도 ) 도해금지령을내렸다. 그러나도해금지령은즉시일본어부와조선조정에통보되지않고지체되고있었다. 1696년 5월에는안용복과순천승뇌헌등일행 11명이독도와일본오키섬 ( 隠岐, 玉岐島 ) 를경유하여일본호키주 ( 伯耆州 ) 에가서 조울양도감세장 ( 朝鬱兩島監稅將 ) 을가칭하고울릉도와독도의영유권을주장하는사건이발생함으로써, 서둘러조선조정에통보되었다. 그후양국간의외교문서의교환과정을거쳐독도를포함한울릉도의영유권분쟁은 1699년마무리되었다. 울릉도와그부속섬인독도가원래부터일본땅이아니었다면, 1625년부터 1693년까지약 70년간일본호키주 ( 伯耆州 ) 의어부들이울릉도에도해하여어렵을한행위를어떻게규정할것인가? 나이토세이추 ( 內藤正中 ) 는이에대해명쾌한답을내놓았다. 나이토세이추는호키주요나고 ( 米子 ) 어민들이무인도에서도해 ( 渡海 ) 어업을계속해온것은 주인없는빈집에들어가귀중품을들고나오는것 에비유하면서, 이러한도적질을일본외무성홈페이지에서실효적지배에근거한영유권확립이라고할수는없는것 이라고결론을내리고있다. 14) 元取候島ニテ無之候上ハ返シ候ト申筋ニテモ無之候 ( 太政類典 제 2 편 2A-9- 太 -318)
106 獨島硏究제 22 호 그런데도일본제국서원 ( 帝國書院 ) 의중학교역사교과서에서는 17세기 ( 에도시대초기 ) 부터일본은영유권을확립하였다 고주장하면서 소곡이병위제출죽도지회도 ( 小谷伊兵衛差出候竹嶋之絵図 )( 돗토리현립박물관소장 ) 를제시하고있다. 15) 전술한바와같이, 소곡이병위는돗토리번에도연락관으로서독도가돗토리번땅이아님을주장한인물이며, 소곡이병위제출지도는그때제출된지도이다. 따라서, 소곡이병위제출지도는일본의독도영유권을입증하는지도가아니라일본의독도영유권을부인하기위해제작된지도이다. 16) 이지도가에도시대에일본의독도영유권확립의근거자료라는것은어불성설이다. 3. 기죽도약도 ( 磯竹島略圖 ) 와태정관지령 1) 태정관지령 의송도 ( 松島 ) 는독도임을명백히밝힌 기죽도약도 기죽도약도 ( 磯竹島略圖 ) 는 1877년독도가일본의고유영토가아님을공식적으로확인하고공시한 태정관지령 의부속지도이다. 태정관지령 ( 太政官指令 ) 은오랫동안일본측에의해은폐되어오다 1987년호리가즈오 ( 堀和生 ) 의논문에의해공개되었고, 그부속지도인 기죽도약도 가공 14) 內藤正中 (2005), 竹島は日本固有領土か, 世界 2005 年 6 月號, 岩波書店, p. 56.; 정태만 (2014), 17 세기이후독도에대한한국및주변국의인식과그변화, 단국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p.38 15) 김영수, 한국과일본중학교역사분야교육과정과역사교과서의독도관련내용비교, 독도연구 19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p.331. 16) 6 소곡이병위 ( 小谷伊兵衛 ) 제출죽도지회도 ( 竹嶋之絵図 ) 막부 ( 幕府 ) 의도해면허에관한문의에대 ( 對 ) 하여제출하였다고생각되는죽도회도 ( 竹嶋絵図 ) 이다. 소곡이병위 ( 小谷伊兵衛 ) 는, 막부 ( 幕府 ) 와의섭외 ( 涉外 ) 를담당한문역 ( 聞役 )( 에도留守居 ) 로근무한인물이다. 작성년대는, 막부로부터죽도 ( 竹島 ) 도해 ( 渡海 ) 에관한문의가있은, 원록 ( 元祿 )9년(1696년) 경이라고추측된다 ( 三田清人 (2007), 鳥取県立博物館所蔵竹島( 鬱陵島 ) 松島 ( 竹島 / 独島 ) 関係資料, 竹島問題に関する調査研究 最終報告書 ( 平成 19 年 3 月 ), 竹島問題研究会, p28)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독도영유권 107 개된것은 2006년우루시자키히데유키 ( 漆崎英之 ) 에의해서이다. 태정관지령 은 울릉도와독도를시마네현의지적에올려야하는가? 하는시마네현의질의 ( 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 ) 가발단이되었다. 이질의에대해약 6개월간검토를해서, 그이듬해인 1877년 3월 29 일, 당시일본의최고국가기관인태정관 ( 太政官 ) 17) 은울릉도와독도는 ( 竹嶋外一嶋 ) 일본과관계없는섬임을유념하라는내용의지령을아래와같이내려보냈다. 메이지10년 (1877년) 3월 20일별지내무성이질의한일본해내竹島外一島지적편찬건, 右는원록 5년 (1692년) 조선인입도이래, 구정부와해당국과의외교교섭결과, 일본 ( 本邦 ) 과관계없다고하여신립 ( 申立 ) 해온바, 질의의취지를받아들여, 左와같이지령을내리는이건에대해품의합니다. 지령안 : 질의한竹島外一島건은일본 ( 本邦 ) 과관계없다는것을유념 ( 心得 ) 할것. 18) 그런데도불구하고, 일본에서는 태정관지령 을인정하면독도영유권주장논리전체가무너지기때문에 태정관지령 과독도와의관련을부인하는데온힘을쏟아붓고있다. 그래서생각해낸것이 태정관지령 에나오는섬 송도 ( 松島, 마쓰시마 ) 는독도가아니라고잡아떼는것이었다. 특히 2006년 태정관지령 의부속지도인 기죽도약도 ( 磯竹島略圖 ) 가일 17) 태정관 ( 太政官 ) 은일본명치초기내무성, 외무성을비롯한 8개성을관할하던최고국가기관으로서, 1885년내각제도발족과함께폐지되었다. 18) 明治十年三月卄別紙内務省伺日本海内竹嶋外一嶋地籍編纂之件右ハ元禄五年朝鮮人入嶋以来旧政府該國ト往復之末遂ニ本邦関係無之相聞候段申立候上ハ伺之趣御聞置左之通御指令相成可然哉此段相伺候也御指令按伺之趣書面竹島外一嶋之義本邦関係無之義ト可相心得事 ( 公文錄 內務省之部一, 明治十年三月, 2A-10- 公 -2032); 품의는 3월 20일, 최종결재는 3월 29일이다.
108 獨島硏究제 22 호 본가나자와 ( 金沢 ) 교회목사에의해발견 공개된이래, 시마네현다케시마문제연구회를중심으로 태정관지령 ( 太政官指令 ) 에관해, 거기에나오는섬송도 ( 松島 ) 는독도가아니라고하는억지주장을하기에급급하다. < 그림 2> 태정관지령 부속지도인 기죽도약도 19) 와실제지도의비교 그러나, 태정관지령 에나오는섬, 송도가독도인지아닌지는 태정관지령 에자세하게기술되어있고, < 그림 2> 와같이, 그부속지도인 기죽도약도 에도분명하게그려져있다. 기죽도약도 를보면삼척동자도알수있을정도로, 태정관지령 에나오는섬 송도 가독도임은명명백백하다. 기죽도약도 는섬의명칭, 모습, 거리등대부분이전술한소곡위병위지도와비슷하다. 울릉도동북쪽 2km 지점에있는현재의댓섬 ( 죽도 ) 도 마노도 ( まの嶋 ) 라하여대략비슷한위치에그려져있다. 요컨대, 기죽도약도 는 태정관지령 에서일본땅이아니라고한섬송도가독도임을분명히밝혀주는결정적인자료이다. 19) 公文錄, 內務省之部一, 明治十年三月, 2A-10- 公 -2032, 일본国立公文書館소장.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독도영유권 109 2) 독도논쟁에있어서 태정관지령 의중요성 태정관지령 은당시총리급 1명과장관급 3명이지령안 ( 指令按 ) 결재품의서에날인하여확정한일본정부의총체적의사결정의결과물이다. 또한, 태정관지령 은단일의문서가아니라, 최고국가기관인태정관의결재품의서, 시마네현과내무성의질의서등 14개의문서와 기죽도약도 를포함하는여러개의문서 지도의집합체이다. 그중에서 태정관지령 을대표하는가장핵심적인문서는최고국가기관인태정관 ( 太政官 ) 20) 우대신 ( 右大臣 ) 과당시일본의장관급 3명이날인한 태정관지령 결재품의서이다. 태정관지령 은 1877년당시일본정부는독도를조선땅으로판단한근거를그당시보다최소한 180년이전으로소급하여, 1690년대안용복사건당시의조선과일본간의외교교섭결과 에두고있으므로, 독도가원래부터일본영토가아닌것, 즉일본의고유영토가절대로아니라는사실도확인한것이다. 또한, 그내용을당시관보성격의문서인 태정류전 ( 太政類典 ) 에공시까지했다. 21) 태정류전 에서는 일본해내울릉도와독도를일본영토외로정함 ( 日本海內竹島外一島ヲ版圖外ト定ム ) 이라는제목을새로이붙였다. 태정관지령 의중요성은아무리강조해도지나치지않을것이다. 오카다다카시 ( 岡田卓己 ) 는 태정관지령 에대해 한일시민의우호를위해역사가준훌륭한선물 이라고표현하였다. 22) 독도의영유권귀속을명백히하여갈등의소지를없앨수있는결정적인문서로본것이다. 23) 20) 태정관 ( 太政官 ) 은관직명이아니라합의체기관인관청명이다. 21) 일본의관보는 태정관지령 (1877년 ) 이후메이지 ( 明治 ) 16년 (1883년) 에창간되었다. 22) 岡田卓己, 1877 年太政官指令 日本海內竹島外一島ヲ版圖外ト定ム 解説, 독도연구 12호 (2012년 6월 ),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p.199. 23) 정태만 (2014),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및 태정관지령 과독도, 獨島硏究 제 17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p.20
110 獨島硏究제 22 호 태정관지령 은일본의양심적인학자에의해공개된이래, 주로일본계학자들에의해서연구가많이된반면에, 국내에서의연구는상대적으로부족한편이다. 연구부족뿐만아니라근거자료로서의가치도저평가되고있다. 24) 태정관지령 은첫째, 일본정부에서독도가조선땅이라고공식적으로확인한것이며, 둘째, 그판단근거를조선숙종때의안용복사건에두고있으므로일본의고유영토가아니라고확인한것이며, 셋째, 관보성격의문서인 태정류전 에공시한문서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고유영토가아니라고확인한것과, 태정류전 에공시한것은많이알려져있지않다. 그만큼저평가되고있는것이다. 태정관지령 을최초로공개한호리가즈오는 독도는조선땅 이라는것이 태정관지령 에의해 선언 되었다고주장하는반면에, 국내연구자는 태정관지령 은안 ( 案 ) 에불과하다라든가, 내부문서에불과하다는주장을하기도하고, 25) 일부연구기관에의하여도그러한취급을받고있는것은아이러니한일이다. 26) 다케시마 ( 竹島 ) 문제연구회에서 태정관지령 에나오는섬이독도가아니라고거짓된주장을하는데온힘을쏟아붓고있는것과는대조적으로, 일본외무성에서는 태정관지령 에대해오로지침묵으로일관하는것은시사하는바가크다. 독도문제에대한역사적논쟁은 태정관지령 을얼마나잘활용하느냐에따라그성패가달려있다고해도과언은아닐것이다. 국제법적인논쟁에서도크게다르지않을것이다. 27) 24) 정태만 (2014),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및 태정관지령 과독도, 獨島硏究 제17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p.36 25) 이동원, 독도문제이대로좋은가, 법률신문, 2012.7.23. http://www.lawtimes.co.kr/lawnews/news/newscontents.aspx?serial=65826, 2015.10.5 열람 ) 26) 동북아역사재단은내무성의질의서를 태정관지령 을대표하는문서로전시하고있으며, 태정관지령 을 1870 년일본외무성의내부보고서인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보다더작은크기로전시했다 (2016.5.17 현재 ). 27) 정태만 (2014), 위의논문, pp.36-37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독도영유권 111 4. 연합국최고사령부 (SCAP) 관할지역도와훈령 (SCAPIN) 제 677 호 1) 연합국최고사령부 (SCAP) 훈령에의한독도분리 독도는카이로선언 (1943년 12월 1일 ) 에서규정하는 폭력과탐욕 (violence and greed) 에의해일본이빼앗은섬에해당한다. 그러므로, 연합국이카이로선언에서일본에요구한조건을그대로이어받은포츠담선언 (1945 년 7월 26일 ) 을성실히이행할것을약속한항복문서에일본이서명 (1945년 9월 2일 ) 한시점에, 한반도와함께반환되었어야할국제법적의무가발생하였다. 그러나그절차의이행은즉시이루어지지않았다. 2차대전종전후, 일본을점령통치한연합국최고사령부는훈령 (SCAPIN) 677호 (1946.1.29) 로독도를통치권적 행정적으로일본으로부터분리하고, 또한, SCAPIN 1033호 (1946.6.22) 로일본의어업허가구역을공포하여, 독도로부터 12마일이내에일본선박의접근을금지했다. 독도는통치권적 행정적관할구역및어선조업구역의양면 ( 兩面 ) 에서일본으로부터완전히분리되었다. 28) 이는포츠담선언을수락한항복문서 (1945.9.2) 에근거한구일본영토의분할을, 통치권적 행정적조치로서뒷받침한것이다. 즉, 일본이 폭력과탐욕 에의해빼앗은영토에대한반환과, 추가적인조치로서일부 작은섬 들에대한일본으로부터의분리가이루어진것이다. 이중한국주변의섬들에대하여는 SCAPIN 677호제3항의 (a) 에서울릉도, 독도, 제주도를일본으로부터명시적으로제외했다. 29) 28) 어선조업구역은연합국최고사령부훈령에의해약간의변경을거쳤으나, 통치권적 행정적관할구역은독도에관한한샌프란시스코조약발효시까지전혀변함이없었다 ; 정태만 (2015), 일본영역참고도와대일평화조약, 독도연구 19 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p.210. 29) 정태만 (2014), 17 세기이후독도에대한한국및주변국의인식과그변화, 단
112 獨島硏究제 22 호 < 그림 3> 연합국최고사령부 (SCAP) 관할지역도 1946년 1월 29일연합국최고사령부훈령제677호 (SCAPIN 677) 제 3, 4항제목 : 일정일본외곽지역에대한통치권적, 행정적분리 3. 이지령의목적을위하여, 일본은 4개본도 ( 홋카이도, 혼슈, 큐슈, 시코쿠 ) 와약 1천개의더작은인접섬들을포함하는것으로정의 ( 定義 ) 되며, ( 일본에 ) 포함되는것은대마도및북위 30도이북의류큐제도 ( 구치노시마제외 ) 이고, ( 일본에서 ) 제외되는것은 (a) 울릉도, 독도 (Liancourt Rocks, Take Island), 제주도, ( 중략 ) 4. 또한, 일본제국정부의통치권적, 행정적관할권으로부터특별히제외되는지역은다음과같다. (a) 1914년의세계대전이래, 일본이위임통치그외의방법으로탈취또는점령한전태평양제도. (b) 만주, 대만, 펑후 ( 澎湖 ) 열도. (c) 한국 (korea) 및 (d) 사할린 30) 국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p.117. 30) GENERAL HEADQUARTERS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독도영유권 113 SCAPIN 677호는제3항과 4항에서구 ( 舊 ) 일본영토를통치권적 행정적으로분할하는동시에, 분할하고남은영토를일본으로정의 ( 定義 ) 하고있다. 또한, 제5항은이러한일본의정의 (the definition of Japan) 는그이후로도계속적용된다는것을분명히했다. 31) 1946년 1월 29일연합국최고사령부훈령제677호 (SCAPIN 677) 제5항 5. 이지령에규정된일본의정의 (the definition of Japan) 는달리규정하지않는한본연합국최고사령부에서발하는금후의모든지령 각서 명령에도적용된다. 32) SCAPIN 677호는, 한국과의영토문제에만한정하여생각하면,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제외한것을일본 (Japan) 으로정의하고있다. 이에대응하여, 한국 (Korea) 의경우에는울릉도, 독도, 제주도를포함한것을한국 (Korea) 으로정의하고있는것으로볼수있다. 이정의 ( 定義 ) 는독도문제에관한 POWERS (29 January 1946) (SCAPIN 677) SUBJECT: Governmental and Administrative Separation of Certain Outlying Areas from Japan 3. For the purpose of this directive, Japan is defined to include the four main islands of Japan(Hokkaido, Honshu, Kyushu and Shikoku) and the approximately 1,000 smaller adjacent islands, including the Tsuima Islands and the Ryukyu(Nansei) Islands north of 30 North Latitude (excluding Kuchinoshima Island); and excluding (a) Utsryo(Ullung) Island, Liancourt Rocks(Take Island) and Quelpart(Saishu or Cheju Island),[...] 4. Further areas specifically excluded from the governmental and administrative jurisdiction of the Imperial Japanese Government are the following: (a) all Pacjfic Islands seized or occupied under mandate or otherwise by Japan since the beginning of the World War in 1914, (b) Manchura, Formosa and the Pescadores, (c) Korea, and (d) Karafuto. ( 국사편찬위원회 (2008), 독도자료 I 미국편, p. 1) 31) 정태만 (2014), 17세기이후독도에대한한국및주변국의인식과그변화, 단국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p.118 32) 5. The definition of Japan contained in this directive shall also apply to all future directives, memoranda and orders from this Headquarters unless otherwise specified therein. ( 국사편찬위원회 (2008), 앞의책, p. 1)
114 獨島硏究제 22 호 한, 그후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체결 발효시까지변함없이유지되었다. 33) 2) 독도가남한지역에속함을분명히보여주는 SCAP 관할지역도 연합국최고사령부관할지역도 (SCAP Administrative Areas: Japan and South Korea) 는연합국최고사령부가 1946년 1월 29일의연합국최고사령부훈령 (SCAPIN) 제677호에의한영토분할내용을지도로써보다시각적으로나타낸것이다. 연합국최고사령부 (SCAP) 는 SCAPIN 제677호와함께이지도를발간했는데 34), 연합국최고사령부의간접통치지역인일본과, 직접통치 ( 미군정 ) 지역인한국 (South Korea) 을구분하면서, 울릉도와독도, 제주도는한국에소속시켰다. SCAPIN 제677호에는울릉도, 독도, 제주도를일본에서제외한다고만되어있는데, 이지도에의해독도의소속이한국이라는것이보다분명하게되었다. 35) < 그림 3> 과같이, 울릉도는 ULLUNG 로, 독도는일본명다케시마의 TAKE 로표기되어있고, 한일간관할구역경계선은직선으로내려오다가독도부근에서반원곡선으로그려져, 독도가한국 ( 당시는하지중장에의한미군정 ) 관할구역임을분명히하고있다. 독도의동편에반원을그려, 한국영역에표기하는방식은그후 1951년의 일본영역참고도 에도그대로이어졌다. 위치관계도독도는울릉도의부속섬적인위치에있음을나타내고있다. 당시맥아더원수는일본정부를그대로둔채로일본을간접통치하고, 하지 (John Reed Hodge) 중장은남한지역을직접통치했기때문에, 단순히연합국최고사령부내부의관할구역설정이라는것보다는훨씬더큰의 33) 정태만 (2014), 17세기이후독도에대한한국및주변국의인식과그변화, 단국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pp.118-119 34) 신용하편 (2000), 독도영유권자료의탐구 제3권, 독도연구보전협회, p. 256. 35) 정태만 (2014), 위의논문, p.120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독도영유권 115 미를가진다. 36) SCAPIN 677호와 SCAP관할지역도 에의한독도한국령공포조치는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체결 발효시까지연합국에의해변경됨이없이그대로유지되었다. 독도에관한한, 연합국에의해이와는다른내용이공포된적이없을뿐만아니라, 일본정부가제정한총리부령, 대장성령 37) 등의법령에의해서도받아들여졌다. 38) 3) 대한민국정부수립과독도관할권인수 1948년 8월 15일, 종전후주한미군에의한통치를받은지만 3년만에한국은역사적인자체정부를수립하게된다. 이승만대통령은 한 미간의통치권이양및미군철수에관한협정 39) 에의해주한미군사령관하지 (John Reed Hodge) 중장으로부터관할지역의통치권을이양받았다. 40) 이협정은 1948년 8월 9일및 11일이승만대통령과주한미군사령관하지 (John Reed Hodge) 중장사이에각서교환으로체결되었다. 41) 36) 정태만 (2014), 17세기이후독도에대한한국및주변국의인식과그변화, 단국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p.120 37) 이는최근에공개된일본대장성령제4호 (1951.2.13) 와총리부령제24호 (1951.6.6) 를통해서도알수있다. 38) 정태만 (2014), 위의논문, p.120 39) 8 월 11 일자교환각서의명칭은 대한민국정부와아메리카합중국정부간의대한민국정부에의통치권이양및미국점령군대의철수에관한협정 (Agreement Between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Concerning the Transfer of Authority to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Withdrawal of United States Occupation Forces) 로되어있다 ( 외무부방교국편 (1948-1961), 조약집 : 양자조약 1, pp. 234-237.;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981), 國防條約集 第 1 輯, pp. 30-33). 40) 김진홍 (2006), 일본에의한독도침탈과정과연합국에의한독도분리과정에관한고찰, 독도논총 제 2 호, 독도조사연구학회, p. 60.; 이대근 (2002), 해방후 1950 년대의경제, 삼성경제연구소, p. 155. 41) 정태만 (2014), 위의논문, p.127.
116 獨島硏究제 22 호 당시독도는연합국최고사령부훈령 (SCAPIN 677호 ) 에의해한국 (Korea) 에포함되어있었으며, 주한미군 ( 미군정 ) 의통치하에있었다. 따라서대한민국정부수립으로, 독도를포함한한국 (Korea) 의통치권을합법적으로이양받은것이다. 대한민국은 1948년 12월 12일국제연합 (UN) 에의해서도국제법상합법적정부로공인되었다. 42) 카이로선언에서규정하는 폭력과탐욕 에의해빼앗은땅에해당하는독도에대하여는, 일본의항복문서서명 (1945.9.2) 으로반환의무가발생했고, SCAPIN 677호 (1946.1.29) 에의해구일본제국으로부터분리되었으며, 대한민국정부수립 (1948.8.15) 으로그반환절차가종료된것이다. 43) 1948년 8월대한민국정부수립당시연합국의훈령 (SCAPIN 677) 에의해정해진영토범위대로, 즉독도를포함한통치권을인계받는데는어떠한조건도명시된바없었고, 어느나라의항의도받은적이없었다. 당시한국에서는당연히독도를한국영토로인식하고있었다. 대일평화조약이체결 (1951.9.8) 되기 3개월전인 1951년 6월 20일주한미8 군부사령관존쿨터 (John B. Coulter) 중장은대한민국의장면총리 44) 에게독도를미공군의폭격훈련장으로사용할수있도록허가해달라는내용의문서를보내고장면총리는 7월 7일이를허가했다. 이는독도를포함한남한지역을 3년간통치한주한미군이독도를완전히한국에인계했다는것을증명하고있다. 45) 그러나, 같은시기에연합국최고사령부는임의로독도를폭격훈련장으로다시지정 (SCAPIN 2160, 1951. 7. 6) 하여으로혼선을빚게된다. 46) 독도영유권귀속문제는대한민국정부수립과함 42) 정태만 (2014), 17세기이후독도에대한한국및주변국의인식과그변화, 단국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p128. 43) 정태만 (2014), 위의논문, p128. 44) 내각책임제하의국무총리가아니라, 이승만정권하의국무총리를말한다. 45) 정병준 (2011), 앞의책, pp. 931-933.; 정태만 (2014), 위의논문, p.128 46) 川上健三는 SCAPIN 2160호 (1951.7.6) 에의한독도폭격훈련장지정이 1950년 7 월 6일 에있었던것으로서술하고있는데 ( 川上健三 (1966), 竹島の歴史地理的研究, 古今書院, pp. 252-253), 이는오류이다. 국내연구자도川上健三의책을인용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독도영유권 117 께대한민국영토로일단락된것이다. 그러나, 그후대일평화조약작성과정에서다시이슈화된다. 5. 일본영역참고도 ( 日本領域參考圖 ) 와샌프란시스코조약 1) 해상보안청에의한 일본영역참고도 제작과그용도 일본영역참고도 ( 日本領域參考圖 ) 는그동안은폐되어오다, 2014년에국내에서처음으로공개되었다. 47) 일본영역참고도 는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 48) 조인직전에해상보안청에의해제작되어, 조약조인후비준과정에서일본국회에제출되어조약의부속지도로쓰인지도이다. 일본영역참고도 에는 < 그림 4> 및 < 그림 5> 와같이일본열도를둘러싸고있는 어선조업허가구역 의경계선이독도바로위를지나고있고, 경계선오른쪽에명칭 ( 竹島, Take Shima, Liancourt Rocks) 이기록되어있어서, 언뜻보면독도를일본의영역으로표기한것처럼보이지만, 독도동쪽에분명하게별도의반원을그려독도를한국영역으로표기하고있다. 49) 이점에서 일본영역참고도 는 1946년의 SCAP관할지역도 와표기방식이같다. 하여 1950 년이라고서술하는경우가적지않다. 47) 일본영역참고도 공개직후동북아역사재단은검증해봐야한다고하여, 중요한자료의신뢰도를떨어뜨렸다.( 샌프란시스코조약당시 ' 독도는한국땅 ' 인증한일본지도발견, 중앙일보 2014.8.24 ) 48) 영문명칭은 'Treaty of Peace with Japan' 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조인되었으므로통상 샌프란시스코조약 으로불린다. 이하본논문에서는 샌프란시스코조약 이라한다. 49) 그런데, 일본영역참고도 에독도가일본땅으로그려져있다고속기록을잘못번역한책자가동북아역사재단에의해발간되어, 이에대한연구에혼란을초래하였다 ( 동북아역사재단편 (2009), 일본국회독도관련기록모음집 I부, p.43).
118 獨島硏究제 22 호 < 그림 4> 일본영역참고도 일본영역참고도 는일본해상보안청수로부에의해 1951년 8월에제작되었다. 50) 이는지도의우측하단난외에 소화26년 8월해상보안청수로부調製 라고명기되어있는것을통해알수있다. 51) 샌프란시스코조약이 1951년 9월 8일에조인되었으므로, 조약조인직전에일본정부에의해제작된것이다. 다케시마문제연구회는 일본영역참고도 의국회제출사실은인정하면서도, 일본영역참고도 는 어선조업허가구역 을나타낸것에불과하다는주장을하고있다. 52) 그러나, 이는다음의 4가지점에서설득력이없다. 53) 50) 国立国会図書館憲政資料室所蔵芦田均関係文書 ( 寄託 )380-18.; http://1953fevtakes hima.hatenablog.com/(2014.6.20. 열람 ) 에서재인용. 51) 일본해상보안청은국토교통성산하기관이다. 52) http://www.pref.shimane.lg.jp/admin/pref/takeshima/web-takeshima/takeshima08/iken-c. html(2015.9.30 열람 )
에도시대 이후 일본의 공적 지도에 나타난 독도 영유권 119 <그림 5> SCAP관할지역도 (1946년, 좌)와 일본영역참고도 (1951년, 우)의 비교 첫째, 일본영역참고도 는 영토에 관한 조약을 비준승인54)하기 위한 국회에, 영토에 관한 조약의 부속지도로서 제출된 것이며, 둘째, 지도의 명칭에서도 영역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셋째, 어선조업허가구역 은 영역과 전혀 관계없이 설정된 것이 아니라, 영역을 고려하여 어선조업허 가 구역을 설정한 것이다. 어선조업허가구역의 바깥은 일본영역이 아니 라는 취지에서 그 바깥으로는 일본어선의 조업을 금지한 것이다. 넷째, 실제로도 거의 대부분 일본영역참고도 에 표기된 그대로 일본영역이 되 었다.55) 53) 54) 55) 정태만(2015), 일본영역참고도와 대일평화조약, 독도연구 19호,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 pp.219-220 일본헌법상 국회는 조약비준에 대한 승인권 을 가진다. 한국헌법에는 주요조약 은 국회의 비준 동의 를 받게 되어있다. 북위 29도선 아래는 샌프란시스코조약에 의해 신탁통치 대상이 되었다가, 그 후 일본영역참고도 에 표기된 북위 24도선 이북의 섬들은 모두 일본에 반환되어 일본 영토가 되었다. 오키노 도리시마(沖の鳥島)만 북위 24도선 보다 남쪽에 위 치한다. 일본에서는 일본의 최남단은 오키노 도리시마라고 하는데, 북위 20도에 위치하며, 섬으로서의 지위에 논란이 있다.
120 獨島硏究제 22 호 요컨대, 일본영역참고도 에서동해에그려진한일간의경계선은일본어선조업의경계선을나타내기위한것이아니라, 영역 의경계선을나타내기위한것임은명백하다. 56) 2) 샌프란시스코조약비준시 일본영역참고도 의국회제출과부속지도로사용일본정부는샌프란시스코조약비준과정에서조약조인직전에제작 (1951년 8월 ) 한 일본영역참고도 를일본국회에부속지도로제출 (1951년 10월 ) 하였다. 중의원 평화조약및일미안전보장조약특별위원회 에서는 1951년 10월 11일부터 10월 25일까지 9차에걸쳐샌프란시스코조약이심의되었고, 10 월 26일중의원본회의에서승인의결되었다. 일본영역참고도 는 10월 22 일중의원특별위원회 6차회의에서논의되었다. 참의원특별위원회에서는 10월 18일부터 11월 17일까지 21차에걸쳐심의되었고, 11월 18일참의원본회의에서승인의결되었다. 독도에대한논의는 32차에걸친중의원 참의원회의중중의원 6차회의에서단한차례만언급되었을뿐이다. 일본헌법상조약의비준권자는내각이며, 57) 중의원및참의원은조약비준시승인권을가진다. 일본중의원은총리지명, 예산의결, 조약승인에서참의원에대해우월적지위가인정되고있다. 58) 1951년 11월 19일 천황 이비준서를인증하고, 11월 28일에는미국정부에비준서가기탁되었다. 샌프란시스코조약은 1952년 4월 28일미국이비준절차를마침으로 56) 부수적으로어선조업허가구역도나타내고있을뿐이다. 57) 每日新聞社圖書編集部編 (1952. 5.), 對日平和條約, 每日新聞社, p.273.; 일본헌법제73조제3호참조. 58) 총리지명, 예산의결, 조약의승인에서참의원에서중의원과다른의결을한경우, 양원협의회를열어도의견이일치하지않을때, 또는참의원이중의원의의결로부터일정기간안에의결하지아니한때에는중의원의의결을국회의의결로한다 ( 일본헌법 60조 2항, 61조, 67조 2항 ).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독도영유권 121 써발효되었다. 59) 일본영역참고도 가샌프란시스코조약의비준과정에서 부속지도 로쓰였다는사실은 1953년 11월 4일의중의원회의록에의해증명된다. 당시가와카미 ( 川上 ) 의원이 평화조약을비준할때국회에제출한부속지도라는것이있다. 그부속지도를보아도다케시마는분명히제외되어있다. 라고, 주장한데대해, 고다키 ( 小瀧 ) 정부위원은전혀반론을제기하지않았다. 이는곧 일본영역참고도 가부속지도로쓰였다는것을사실상인정한것이다. 60) 일본영역참고도 를 일본에서부속지도로썼다 는것은 부속지도이다 라는것과는다른의미이다. 일본영역참고도 는일본과조약에서명한 48개연합국모두에게공통적으로배부된부속지도는아니다. 61) 일본영역참고도 는조약상대국인 48개연합국과는직접적인관련없이일본정부에서자체적으로제작하여조약의부속지도로서 62) 비준승인을위한국회에제출한것이다. 63) 59) 정태만 (2015), 일본영역참고도와대일평화조약, 독도연구 19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p.229 60) 이에대하여는 일본영역참고도 라고되어있기때문에 부속지도 로쓰였다고할수없다는주장도있을수있다. 그러나, 설사국회에서는 참고지도 로쓰였다고하더라도독도를한국령으로표기한지도의정부제작과국회제출만으로도 독도를한국령으로인정한것 이라고해석할수있는근거는충분하다고본다.; 정태만 (2015), 일본영역참고도와대일평화조약, 독도연구 19 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pp.229-230 61) 대일평화조약은초기에는일본령인섬이름을일일이열거하고첨부지도에의해경계선을그어명확히하는방식이검토되었지만, 최종조약에서는두루뭉실하게조약을체결하기로해서부속지도를만들지않았다. 62) 국회역사왜곡대책특위에서동북아역사재단은, 일본영역참고도 에대한입장을묻는특위위원의질의에대해 일본영역참고도 는샌프란시스코조약의부속지도가아니라고판단했다 는동문서답식답변을했다. ( 대한민국국회 (2015),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회의록 제 333 회 (35 차, 2015.5.15), 제 19 대국회회의록, 특별위원회, p.11.) 63) 정태만 (2015), 일본영역참고도와대일평화조약, 독도연구 19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p.230.
122 獨島硏究제 22 호 3) 샌프란시스코조약의간략화와 일본영역참고도 의중요성 일본영역참고도 가중요한것은샌프란시스코조약이간략하게규정되어독도영유권귀속에대해명시하고있지않기때문이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조약체결당시, 소련과의분쟁대상이된하보마이 ( 歯舞 ) 군도나미국의신탁통치대상이된태평양상의섬들과달리, 독도에대하여는일본의영유권주장도없었으며, 미국의공개적인입장표명도없었다. 그런데, 조약조인후비준과정에서일본정부는독도를한국영역으로표기한 일본영역참고도 를조약의비준승인을위한국회에제출했다. 그리고, 일본국회는샌프란시스코조약조문과독도를한국영역으로표기한 일본영역참고도 를부속지도로하여조약의비준을승인했다. 조약비준과정에서일본정부와국회는의도했든안했든간에 독도한국령 을인정한것이다. 64) 따라서일본이한국 (Korea) 에대한모든권리등을포기할것을규정한조약제2조 (a) 항의해석상으로도 독도는한국령 이된다. 65) 일본영역참고도 를가지고독도를한국땅으로인정했다고할수없다는주장이있는데, 66) 일본외무성이 독도는일본땅 이라고신문에낸것이나, 조약비준을위한국회에서그렇게갑론을박한것은, 당시일본정부의독도에대한속마음을드러낸것에불과하다. 증거능력 증명력면에서, 독도를한국땅으로표기한지도를평화조약비준을위한국회에제출한법적행위 에우선할수는없다. 64) 정태만 (2015), 일본영역참고도와대일평화조약, 독도연구 19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p.228 65) 샌프란시스코조약의해석상독도를한국영토로볼수있는논리는이이외에도몇가지더있다. 66) 박병섭 (2015),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전후일본의독도정책, 독도연구 19 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pp.254-259; 박병섭 (2016),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서독도가누락된경위와함의, 독도연구 21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pp33-38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독도영유권 123 또한, 독도이외에다른지역이그지도에어떻게표기되어있으며, 그다른지역이그후에어떻게되었는지하는것도독도문제와는직접적으로는관계없는일이다. 왜냐하면그다른지역은각각의사정이있고독도와는사정이다르기때문이다. 예를들면, 일본영역참고도 에일본영역밖으로그려져있는하보마이섬 ( 歯舞島 ) 의경우에는 67)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일본대표가일본땅임을주장했으나, 독도의경우에는연합국을상대로일본이영유권을주장한사실이전무하다. 그러므로, 하보마이섬의경우 일본영역참고도 에근거하여서는일본영토바깥 ( 소련영토 ) 이라고주장할수없다 는논리도있을수있다. 그러나, 독도의경우에는사정이다르므로 일본영역참고도 에근거하여한국영토라고주장할수있는것이다. 일본정부에서 독도한국령 을인정했다는것은, 조약발효직후에제작된또다른지도, 마이니치 ( 毎日 ) 신문사의 일본영역도 ( 日本領域圖, < 그림 6>) 에의해서도간접적으로증명된다. 조약발효직후인 1952년 5월마이니치 ( 毎日 ) 신문사는 대일평화조약 이라는책자를발간했는데, 그안쪽표지에독도를한국령으로그린 일본영역도 를게재하였다. 이지도에도 < 그림 6> 에서보는바와같이독도는 ' 竹島 ' 라는이름으로분명하게한국영역으로표기되어있다. 67) 하보마이섬 ( 歯舞島 ) 은일본영역밖인것으로경계선이그려져있으나, 섬의명칭을기재하지않아애매하게되어있다. 이와는대조적으로시코탄섬 ( 色丹島 ), 구나시리섬 ( 国後島 ), 에토로후섬 ( 択捉島 ) 은명칭도경계선밖에기재되어있다.
124 獨島硏究제 22 호 < 그림 6> 일본영역도 6. 맺음말 태정관지령 은일본의최고국가기관인태정관 ( 太政官 ) 이내무성의건의를받아들여독도를조선땅으로공식적으로확인한문서이며, 그내용을당시관보에해당하는 태정류전 ( 太政類典 ) 에공시했으므로단순한내부문서와는근본적으로다르다. 일본측에서는 태정관지령 에나오는섬마쓰시마 ( 松島 ) 는독도가아니라고하지만, 2006년에공개된 기죽도약도 에의해 태정관지령 에서일본영토가아니라고한섬은독도임이명명백백해졌다. 또한, 일본땅이아니라고판단한근거를약 300년전인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독도영유권 125 1690년대안용복사건때의외교교섭결과에두고있으므로, 독도가절대로 일본의고유영토 가아니라는것을일본메이지 ( 明治 ) 정부스스로가인정한것이된다. 또한, 그안용복사건때울릉도와독도가일본땅이아님을에도막부가확인한기록이바로, 소곡이병위가제출죽도지서부 ( 小谷伊兵衛差出候竹嶋之書附 ) 이며, 당시이를좀더분명히하기위해돗토리번에서에도막부에제출한지도가 소곡이병위제출죽도지회도 ( 小谷伊兵衛差出候竹嶋之絵図 ) 이다. 2차대전종전후, 일본을점령통치한연합국최고사령부는훈령 (SCAPIN) 677호 (1946.1.29) 로독도를통치권적 행정적으로일본으로부터분리하고, 연합국최고사령부관할지역도 (SCAP Administrative Areas: Japan and South Korea) 로써독도가주한미군관할하의남한지역에속함을분명히했다. 또한, SCAPIN 1033호 (1946.6.22) 로일본의어업허가구역을공포하고, 독도로부터 12마일이내에일본선박의접근을금지했다. 독도는통치권적 행정적관할구역및어선조업구역의양면 ( 兩面 ) 에서일본으로부터완전히분리되어있었다. 이러한상황하에서, 대한민국정부수립 (1948.8.15) 과함께, 주한미군으로부터 SCAP관할지역도 에표기된그대로독도를포함한남한지역의관할권을인계받음으로써독도문제는일단락되었다. 대한민국정부수립은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체결 (1951.9.8) 이전에이미국제연합 (UN) 과세계각국의승인을얻었다. 대한민국정부수립으로독도문제가일단락된후, 대일 ( 對日 ) 평화조약초안작성과정에서일본과연합국의이해관계에따라독도문제는다시불거져나왔다. 우여곡절끝에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은조약의간략화방침에따라개별섬들의영유권귀속을명확히하지않은채조인되었다. 미국전권대표덜레스 (John Foster Dulles) 는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이를공개적으로밝혔다. 이에따라독도와같은작은섬은그영유권의귀속이조약에일일이명시되지않았다.
126 獨島硏究제 22 호 그런데, 일본해상보안청은조약조인직전 (1951년 8월 ) 에 독도를한국령 으로표기한 일본영역참고도 ( 日本領域參考圖 ) 를제작했다. 일본영역참고도 는한일간을가로지르는경계선과는별도로독도의동편에반원 ( 半圓 ) 을그려, 독도를한국령으로표기하고있는점에서그이전의 SCAP 관할지역도 와비슷한형태이다. 샌프란시스코조약조인후조약비준과정에서일본정부는다시 일본영역참고도 를조약의부속지도로일본국회에제출하고 (1951년 10월 ), 일본국회는 일본영역참고도 를부속지도로하여조약을승인했다. 조약비준과정에서일본정부와국회는, 의도했든안했든국제법적으로 독도한국령 을인정한것이된다. 일본정부에서 독도한국령 을인정했다는것은, 조약발효직후인 1952년 5월제작된또다른지도, 마이니치 ( 毎日 ) 신문사의 일본영역도 ( 日本領域圖 ) 에의해서도간접적으로증명된다. 일본영역도 에도 독도는한국령 으로표기되어있음은물론이다. 역사적으로사료적가치가크고, 국제법적인증거능력 증명력이큰공적지도에대한분석을통해, 에도시대부터샌프란시스코조약때까지, 일본의독도영유권판정과관련된 4개의공적지도는모두독도가한국령임을표기하고있거나, 독도가한국령임을확인하기위한것임을알수있다. 또한일본정부는안용복사건 (1696년) 과 태정관지령 (1877년 ), 그리고샌프란시스코조약비준 (1951년 ) 때의 3번에걸쳐독도의영유권이한국에있다는것을스스로인정했다는사실도밝혀졌다. 참고문헌 박현진 (2007), 獨島領有權과地圖ㆍ海圖의證據能力ㆍ證明力, 國際法學會論叢 第 52 卷第 1 號 ( 通卷第 107 號 ), 대한국제법학회. 김명기 (2009), 국제법상지도의영토권원인정증거에관한연구, 독도연구 7,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독도영유권 127 이상태 (2011), 고지도를통해본독도의영유권, 독도연구 10, 2011.6, 7-62 (56 pages),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三田清人 (2007), 鳥取県立博物館所蔵竹島( 鬱陵島 ) 松島 ( 竹島 / 独島 ) 関係資料, 竹島問題に関する調査研究 最終報告書 ( 平成 19 年 3 月 ), 竹島問題研究会. 박병섭 나이토세이추 (2008), 독도 = 다케시마논쟁, 보고사. 池内敏 (2009), 江戸時代における竹島および松島の認識について, 독도연구 6,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정태만 (2014), 17세기이후독도에대한한국및주변국의인식과그변화, 단국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김영수, 한국과일본중학교역사분야교육과정과역사교과서의독도관련내용비교, 독도연구 19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岡田卓己 (2012), 1877 年太政官指令 日本海內竹島外一島ヲ版圖外ト定ム 解説, 독도연구 12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정태만 (2014),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및 태정관지령 과독도, 獨島硏究 제 17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정태만 (2015), 일본영역참고도와대일평화조약, 독도연구 19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신용하편 (2000), 독도영유권자료의탐구 제3권, 독도연구보전협회. 외무부방교국편 (1948-1961), 조약집 : 양자조약 1.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981), 國防條約集 第 1 輯. 김진홍 (2006), 일본에의한독도침탈과정과연합국에의한독도분리과정에관한고찰, 독도논총 제2호, 독도조사연구학회. 이대근 (2002), 해방후 1950년대의경제, 삼성경제연구소. 정병준 (2011), 독도1947, 돌베개. 川上健三 (1966), 竹島の歴史地理的研究, 古今書院. 동북아역사재단편 (2009), 일본국회독도관련기록모음집 I부. 박병섭 (2016),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서독도가누락된경위와함의, 독도연구 21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每日新聞社圖書編集部編 (1952. 5), 對日平和條約, 每日新聞社. 대한민국국회 (2015),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회의록 제333회 (35차, 2015. 5.15), 제19대국회회의록, 특별위원회. 박병섭 (2015),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전후일본의독도정책, 독도연구 19호,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pp254-259.
128 獨島硏究제 22 호 <Abstract> Sovereignty over Dokdo in the official maps of Japan since the Edo period Chung, Taeman Dokdo is the attached island of Ulleungdo geographically. Historically, Japanese also regarded Dokdo as an island attached to Ulleungdo. In the 1690s, the An Yongbok Incident ended with Japanese prohibition of fishing in Ulleungdo by the Japanese Edo shogunate. Kotani Ihei Map was submitted to the Edo Shogunate from Tottori Prefecture at that time to explain that Dokdo was not Japanese territory. Since then, after confirming the result of diplomatic negoti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at the time of the An Yongbok Incident, Japanese Meiji Government confirmed that Ulleungdo and Dokdo were Chosun's territory once again by 1877 s Dajyoukan directive. Japan claims that Matsushima in Dajyoukan Directive is not Dokdo. However, the fact that Matsushima in Dajyoukan Directive is Dokdo has been clarified by the Isotakeshima Map, subsidiary map of Dajyoukan Directive, which was published in 2006. The Supreme Command of the Allied Powers, which ruled Japan after the end of World War II, separated Ulleungdo and Dokdo from Japanese territory on both sides of the jurisdictional area and the fishing area. In August 1948, the Dokdo issue was concluded, as it was transferred to the Republic of Korea along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에도시대이후일본의공적지도에나타난독도영유권 129 However, in the process of drafting the peace treaty to make Japan independent from the occupation of the Allied Powers, Dokdo issue came out again due to the interests of the Allied Powers and Japan. At the end of the twists and turns,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was concluded without reference to Dokdo, but the recently published Japanese Territory References Map shows that Japan had recognized Korea's sovereignty over Dokdo at that time. Japanese government had produced a map of Dokdo in Korea before signing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and it was used as an attached map to the treaty in ratifying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Four Japanese official maps related to Japan's sovereignty over Dokdo from the Edo period to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are showing Dokdo as a Korean territory or intended to show Dokdo as a Korean territory. Of these, except for the SCAP Map during the Allied Power's occupation, the three maps proves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has recognized Dokdo as Korean territory. Key words: Kotani Ihei, Dajoukan Directive, Japanese Domain Reference Map, Liancourt Rocks, Treaty of Peace with Japan, Dokdo, Japanese domain Map 이논문은 2017 년 5월 25일에투고하여 2017 년 6월 3~25 일에심사하여 2016 년 6월 26일에게재 결정됨
131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 박병섭 * < 목차 > 1. 머리말 2. 일본의해적어법및약탈어업 3. 약탈어업에대한각국의대응 4. 약탈어업에대한한국의대응 5. 이승만라인의정당성을둘러싼논쟁 6. 일본정부성명의 자발적조처 7. 맺음말 < 국문초록 > 일본에서는이승만라인 ( 평화선 ) 및독도에관한오해가심하다. 특히이승만라인선포는그당시 공해자유의원칙 에어긋난불법행위였다는이해가거의일본인의공통된인식으로되고있다. 이글은최신일본자료를활용하여그런오해나이승만라인이선포된배경과경위, 경과등을검증한다. 제2차세계대전이전세계각국은일본의해적어법및약탈어업의피해를입었다. 이때문에미국은일본의약탈어업을염두에두고대전후곧트루먼선언을발표함과동시에일본어업을맥아더라인안에제한했다. 이런정책은각국으로부터환영을받았으며, 각국은어업관할수역을설정하는세계적인조류를만들었다. 이흐름을타고한국은맥아더라인폐지에대비해이승만라인을선포했다. 이런움직임에대해일본의대응은이중적이었다. 일본은소련이나중국등대국이선포한어업관할수역이나, 혹은일본어선에게만제한조항이있는미 캐 일어업조약등은순순히받아들였지만 약소국 인한국에대해서는일체어업관할수역을인정하려하지않았다. 이런태도는 1940년당시에일본이어업을하지않았던보존어장에서는자발적으로조업을억제한다는일본자신의공약에반한것이다. 그당시일본은조선연안에 총독부라인 을긋고보존어장을설치하고있었는데, 이는 * 일본독도 = 竹島연구넷대표
132 獨島硏究 제22호 이승만라인과 비슷한 것이었다. 주제어: 트루먼선언, 어업관할수역, 맥아더라인, 이승만라인, 총독부라인 1. 머리말 1952년 1월 한국 정부가 선포한 이승만라인(평화선)1) 즉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 ( 해양주권선언 으로 약칭)에 관해서는 일본에서 오해가 심 하다. 특히 독도와 관련된 오해는 한국에도 확산되고 있다. 최근 화제의 인물이 된 박유하는 저서 화해를 위해서 에서 일본의 [이승만라인] 주장 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 즉 독도 때문에 일본인이 사살 되기도 했고 한국이 어선을 나포했으며 반환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고 썼다.2) 박유하는 시모죠 마사오(下條正男)의 저서 다케시마는 일 한 어느 쪽 의 것인가 3)를 참고로 하여 이렇게 썼는데, 시모죠 자신은 결코 독도 때 문에 사살 사건이나 나포 사건이 일어났다고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박유하가 그렇게 오해한 것은 일본에서의 이승만라인에 대한 오해 가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많은 일본인은 독도 주변에서 일본 어선들 이 많이 나포되었고, 독도 근처에서 나포된 어선 중에는 사살당한 사람도 있었다고 믿고 있다. 언론도 그런 보도를 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사설 (2006.4.20)에서 일찍이 [한국은 독도 주변에서] 조업하는 일본 어선을 많 1) 2) 3) 한국에서는 해양주권선 에 대해 주로 용어 평화선 을 사용하지만, 본고에서는 다른 국제적 규제선과 표기 방식을 맞추기 위해 주로 이승만라인 이라는 용어 를 사용한다. 한편 본고 인용문에서 ( ) 안은 원문대로이며 [ ] 안은 필자의 주다. 朴裕河, 和解のために, atプラス 14号, 2012, 94쪽; 박유하, 화해를 위해서, 뿌리와이파리, 2005, 175쪽 朴炳渉, 竹島 独島漁業の歴史と誤解(2), 北東アジ ア文化研究 34号, 2011, 24쪽. 下條正男, 竹島は日韓どちらのものか, 文春新書, 2004.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33 이나포한일도있었다 고주장했다. 또한 주간포수토 는독도문제에어민사살사건을관련시켰다. 4) 이런기사들에대해시마네현 ( 島根縣 ) 다케시마문제연구회 후지이겐지 ( 藤井賢二 ) 는 다케시마문제때문에일본인이살해됐다고하는, 사실에어긋난이런기사의논조는바람직하지않다 고비판했다. 5) 이런일본인의오해내지선입관을이용했는지일본외무성이나시마네현은독도에관한팸플릿에반드시이승만라인 ( 리라인 ) 을기술하고있다. 외무성팸플릿 다케시마를이해하기위한 10의포인트 (2008) 및이를개정한 다케시마문제 10의포인트 (2014) 에서는 [ 한국은 ] 이른바이승만라인을국제법에반하여일방적으로설정하고, 그라인안에다케시마를포함시켰습니다 라고썼다. 또한시마네현팸플릿 다케시마, 돌아오라섬과바다 (2006) 는오키 ( 隱岐 ) 도민들의예로부터의강치잡이등이 갑자기리라인설정으로인해상황은돌변, 1965년에일 한어업협정이맺어질때까지 300척을넘은일본어선들이한국측에의해나포되었다. 이중에서시마네현어선은 11척이며승무원 114명이연행당했다 고썼다. 이글을읽은독자는아마 (A) 리라인의설정으로인해오키도민들이강치잡이를중단하지않을수없었으며, (B) 다케시마 [ 독도 ] 주변에서많은일본어선들이나포당했다고이해할것이다. 그러나 (A) 강치잡이가중단된것은전쟁때문에어민들이스스로어렵을포기한것이며이승만라인과는무관하다. 6) (B) 시마네현이말하는어선 11척이나포된곳은모리스가즈오 ( 森須和男 ) 7) 및다케우치다케시 ( 竹内猛 ) 8) 등의연구에의하 4) 竹島はなぜ韓国に実効支配されてしまったのか, 週刊ポスト, 42(43), 2010.10.22 호, 52쪽. 5) 藤井賢二, 島根県の漁業者と日韓漁業紛争, 第 2 期 竹島問題に関する調査研究 中間報告書, 2011, 88-89쪽. 6) 朴炳渉, 前掲 竹島 = 独島漁業の歴史と誤解 (2), 23쪽. 7) 朴炳渉, 前掲 竹島 = 独島漁業の歴史と誤解 (2), 26쪽. 8) 다케우치다케시 ( 竹内猛 ), 독도 = 죽도문제 고유영토론 의역사적검토 Ⅱ, 선인, 2010, 203-204쪽.
134 獨島硏究제 22 호 면, 한국남해등이며독도근처에서나포된어선은 1척도없었다. 따라서 독도때문에 일본어선이나포됐다고하는박유하의주장은잘못되었다. 이렇듯일본정부나시마네현의책략혹은아사히신문이나박유하등의오해가만연하게된이유는이승만라인을침범해나포당하고한국에서억류생활을보낸어민들의고난및 불법이승만라인 을선포한한국정부의 폭거 가일본언론에의해널리주지되어이승만라인안에넣은 독도때문에 나포나사살사건이일어날수도있다는예단이일본국민에게정착됐기때문이다. 일본이이승만라인을불법이라고단정하는배경에는오로지 공해자유의원칙 을믿고, 제2차세계대전후트루먼선언에서시작된어업질서의변화를보지않으려는자세가있다. 또한그런변화를초래한것은대전전일본어업에원인이있다는것에는눈을감으려한다. 대전전일본어선들은선진적인기술을가지고 공해자유의원칙 을내세워세계각지의어장에서마구잡이어업을했다. 그런일본어업은각국에서경계를받아때로는 해적어법 ( 海賊漁法 ), 약탈어업 이라는오명을받았다. 9) 그런데 해적어법 이란어떤것인지이에관한설명이나연구는거의없으며, 그실태는분명하지않는다. 본고는그실태를살펴보고또한해적어법 약탈어업에대해각국이어떻게대처했는지밝히고자한다. 그런세계적인관점에서한국이선포한이승만라인을각국의대처와비교검토한다. 또한이승만라인및클라크라인의경위와경과에관해 2007년이후일본외무성이순차적으로공개한문서나일본신문기사, 문헌등을활용해재검토한다. 일본외무성이공개한문서를이용한어업문제의선행연구로서최영호, 후지이겐지등의연구를들수있다. 최영호의연구는 1952년 2월부터시작된제1차한 일회담어업협정교섭에임하는일본측의기본방침을밝히는것이었다. 10) 후지이의연구는 이승만라인선언은 영해 3해리, 9) 朝日新聞 社説, 1965.12.13, 日韓条約と日本の漁業の進路.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35 공해자유 를원칙으로하는그당시의해양법을현저하게일탈한것 이라는입장에머물고있어발전적인내용은거의볼수없다. 11) 2. 일본의해적어법및약탈어업 제2차세계대전전일본어업은세계각국에게위협이었다. 크고작은어선 35만척이조업하고있었으며, 그어장은일본주변을비롯해태평양, 인도양, 남극해, 대서양까지미치고있었다. 그러나당시기술로서는좋은어장은포경등을제외하면연안가까이에한정되었다. 이때문에일본은어업에유리하도록영해를 3해리로좁게주장하고, 그이외는공해이므로자유로운어업이가능하다고주장하고있었다. 이런명분으로일본은각국연안의좋은어장에출어하여각국으로부터경계를받았다. 게다가일본은트롤어업등물고기를모조리잡아가는가차없는어법과타국의권리나이익을가볍게보는태도로인해국제적인반감을사고있었으며, 12) 약탈어업 이라는오명을받았다. 또한일본어업은때로는무력을배경으로한것이었다. 그런해적어법의전형적인예를소련연안어업에서볼수있다. 1920년대소련은 12해리를주장하고있었는데일본어선은이를개의치않고소련연안 3해리까지접근하여연어및송어를남획했다. 이를발견한소련감시선이일본어선을잡으려하면, 일본의해군군함이나타나소련감시선을위압하여쫓아냈다. 군함은어업자들의협력으로아오모리현 ( 青森縣 ) 오미나토 ( 大湊 ) 항을근거지로삼아오호츠크해에서일본어선을호위한것이 10) 최영호, 한국과의어업협정교섭을위한 1952년일본측기본방침에관한연구, 동북아역사논총 50권, 2015. 11) 藤井賢二, 韓国の海洋認識 李承晩ライン問題を中心に,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11 巻, 2011. 12) 天川晃 [ ほか ] 編, GHQ 日本占領史 ( 第 42 巻 ) 水産業, 日本図書センター, 2000, 13쪽.
136 獨島硏究제 22 호 다. 일본어업자의증언에따르면, 일본어선들은 소련감시선등이와서조금이라도일본어선을괴롭히면곧우두머리 ( 해군 ) 에게일러바친다 고했다. 13) 또한게잡이어선의경우, 무력을배경으로한해적어법은더욱뚜렷하다. 당시일로 ( 日魯 ) 어업회사관계자인후지타이와오 ( 藤田巌 ) 는다음과같이증언했다. 그것 [ 해군의호위 ] 이없었으면옛날에는할수없었지요. 특히게가공선등은캄차카서해안에서하고있었습니다만, 이는가능한한연안에근접하지않으면그당시의기술로는그물을칠수가없었어요. 그러면이것은영해 3해리를침범했다고하여 [ 소련감시선이 ] 잡으러오거든요. 그것을이쪽의구축함에알리면, 금방출동하여 너희들은왜붙잡느냐? 라며위협해요. 그러면저쪽은항만안으로도망쳐버립니다. 나오면혼내준다고해군이버티고있기때문에잡으러나올수가없지요. 붙잡힌경우는바로석방하도록교섭하였지요. 그렇기때문에그당시는매우활기차게했습니다. 14) 이처럼일본어선은해군무력을배경으로소련영해안에서게잡이를했던것이다. 이윽고일본어선들은 1920년대후반에들어서자소련근해에회유하는연어 송어를잡기위해모선식 ( 母船式 ) 유망 ( 流網 ) 어업기술을발전시켜연어 송어를공해에서대대적으로남획하기시작했다. 이어법은남획및혼획 ( 混獲 ) 문제때문에현재는유엔에의해대형선은금지되고있는만큼수산자원을쇠퇴시킨다. 이런대규모유망어업때문에연어 송어어획량이한계에이르자, 일본어선들은다음어장을개발하기위해 1930년대에는미국알래스카근해에진출했다. 일본정부도이를지원하기위해농림성 ( 農林省 ) 은 1936년부터연어 송어시험어업을브리스톨 (Bristol) 만에서시작했다. 그당시알래스카주는예산세입의 50% 를 13) 日本農業研究所, 農林水産省百年史 中巻, 日本農業研究所, 1980, 759-761 쪽. 14) 위의책, 761-762 쪽 ; 다케우치다케시, 앞의책, 58 쪽.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37 연어 송어어업에의존하고있었으며, 브리스톨만이그중심이었다. 15) 그만큼중요한어장에일본어선들이들어왔기때문에미국어업단체는맹렬히반발했다. 1937년에는일본의중국침략전쟁에따른남경 ( 南京 ) 대학살사건등과아울러브리스톨사건이보도되어대일감정이급속히악화되었다. 16) 이때문에일본은알래스카에서의어업을포기하지않을수없었다. 이사건은미국인에게일본은어업침략국이라는낙인을깊이새기는결과가되었다. 이처럼일본은소련, 미국근해에서해적어법, 약탈어업을저질렀는데하물며대국이아닌나라의근해에서는가차없는약탈어업을저질렀음은말할나위도없다. 선진적인기술, 어선, 어구등을구사하여극동은물론호주, 동남아, 혹은지구반대편인남미까지트롤어선이진출하여약탈어업을했다. 그뿐만아니라일본은국제적인어업질서를어지럽히는존재이기도했다. 일본은 국제포경단속조약 (1931) 에가입하지않고자기마음대로남극해에서포경을했다. 또한일본은국제조약에가입했다가조약을파기시킨일도있었다. 1911년일본은미국, 캐나다, 러시아등 4개국사이에서 물개보호조약 을맺었는데, 1940년에이를파기하는통고를하고조약을실효시켰다. 이런일본의행동이패전후에엄한반격을받았다. 3. 약탈어업에대한각국의대응 1) 맥아더라인 대전전일본의약탈어업을문제삼은미국은 1945년 9월일본어업에대한중요한두가지정책을발표했다. 하나는후술하는트루먼선언이며, 15) 川上健三, 戦後の国際漁業制度, 大日本水産会, 1972, 85 쪽. 16) 다케우치다케시, 앞의책, 22-23 쪽.
138 獨島硏究제 22 호 또하나는 27일에발표한제1차맥아더라인이다. 이라인은일본을통치하는연합군이일본정부에지령 (FLOTLOSCAP-80) 을내렸는데일본어선의조업허가구역을제한한것이다. 이구역은다음해 6월 22일 SCAPIN-1033 에의해확장되었다. 이는제2차맥아더라인이라고불리는데한국근해에서는제주도남쪽에있는좋은어장을일본에개방하는것이었다. 한편독도근처에서는제1차맥아더라인과거의같으며독도위를지나가고있었다. 17) 다만일본선박은독도에서 12해리안으로들어갈수없다. 이처럼맥아더라인을확장해도이를침범하는어선이속출했다. 그원인의하나로일본정부가무모하게어선건조를허가하고또한건조하도록융자해준사실을들수있다. 18) 이때문에어선이과잉건조되었고, 일본연안은과당경쟁으로인해어민들의수입이점점줄었다. 특히고등어건착망 ( 巾着網 ) 어업자나저인망 ( 底引網 ) 어업자는도산하기일보직전의상황에있었다. 19) 곤경에빠진이들어업자들은살아남기위해나포될것을각오하고결사적으로맥아더라인을침범한것이다. 맥아더라인은 SCAPIN-1033/1(1948.12.23) 및 SCAPIN-2046(1949.9.19) 에의해확대되었고, 1950년 5월에는다랑어어업이 SCAPIN-2097에의해남쪽적도까지확대되었다. 그러나이는고등어나전갱이등을잡는어업자에게는도움이되지않았다. 정책의잘못을알게된일본정부는 5월 수산자원고갈방지법 을제정하고감선 ( 減船 ) 정리나조업구역축소등조처를취하고보상금을지불하고어업허가를취소했다. 그러나이는근본적인해결책이될수없었으며여전히맥아더라인을침범하는어선들은끊이지않았다. 그런데일본어선이맥아더라인을침범해도일본정부는물론 SCAP도단속을거의하지않았다. 이때문에일본주변국들은맥아더라인을침범 17) 박병섭, 일본영역참고도 와일본외무성의독도정책모색, 영토해양연구 13호, 2017, 51쪽. 18) 朴炳渉, 前掲 竹島 = 独島漁業の歴史と誤解 (2), 29쪽 ; 최영호, 앞의글, 171-172쪽. 19) 朴炳渉, 앞의글, 竹島 = 独島漁業の歴史と誤解 (2), 29쪽.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39 하는일본어선들을독자적으로단속할수밖에없었다. 주변국이나포한일본어선은맥아더라인이철폐되기 2개월전인 1952년 2월 20일까지소련이 151척, 한국이 89척, 중국이 77척, 다이완이 44척이었다. 20) 2) 미국및캐나다의대응일찍이 브리스톨사건 에서일본의어업침략을문제삼았던미국은 1945년 9월 28일트루먼 (Harry S. Truman) 대통령이일본어업을염두에두고대륙붕과수산자원보존수역에관한두가지선언, 이른바 트루먼선언 을공표했다. 이선언의의의를국무부는다음과같이발표했다. 이새정책이확립된결과미국은예를들어가장중요한어장인알래스카에서연어 송어를유효하게보호할수있다. 고생을되풀이한보존노력과과학적경영에의해, 미국은알래스카의연어 송어를높은수준으로유지하는것에뛰어난진보를보여왔다. 그러나연어 송어는성숙하기까지상당한세월을외양에서지내기때문에미국국민혹은다른나라사람들, 어느쪽사람이든외양에서의무제한어업활동은연어 송어어업에끊임없는위협이되는것이다. 21) 위의글에서 다른나라사람들 은실질적으로일본인을말하는것이며, 가와카미겐조는 이선언은단적으로말하면미국근해어장을일본어업의진출로부터지키려는데그최대의주안점이있었다고말할수있다. 환언하면강화후의일본어업에대한대책으로서가장이른시기에취해진하나의중대한포석이라고단정해도결코과언이아니다 고주장했다. 22) 20) 水産庁編, 水産業の現況 1952 年版, 324쪽 ; 朴炳渉, 前掲 竹島 = 独島漁業の歴史と誤解 (2), 30쪽 21) Press Release, Concerning the Presidential Proclamation No.2668, 28 Sept.1945. (Department of the State Bulletin", Vol.13, 1945); 川上健三, 前掲書, 82-83 쪽에서재인용함. 22) 위의책, 83 쪽.
140 獨島硏究제 22 호 이선언은공해의자유를인정하는당시의국제법으로보아의문점이많았으나, 일본어선을배척하려는세계각국은미국을비난하기는커녕이를환영했다. 다음달아메리카대륙에서는멕시코가대륙붕선언을선포하고어업자원보존수역을설정한것을비롯하여 1950년말까지아르헨티나, 파나마, 칠레, 페루,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에콰도르, 브라질등많은나라들이잇따라공해상에최대 200해리에달하는어업관할수역을설정했다. 아시아에서는사우디, 필리핀, 파키스탄, 이즈라엘, 호주등이대륙붕선언을선포했다. 이들중에서아르헨티나및파키스탄은관할수역에대한주권을주장했다. 23) 이런흐름은 1955년해양법회의를거쳐공해의자유를제한하고연안국의경제수역관할권을인정하는새국제법의확립을향했다. 이것이현재 200해리배타적경제수역 (EEZ) 확립으로이어졌음은말할것도없다. 트루먼선언후미국은대일강화조약발효에따라맥아더라인이폐지될것에대비하여미국서해안어장을일본어선으로부터지키려고애썼다. 덜레스 (John F. Dulles) 는대일강화 7원칙 (1950.11.24) 에서 일본은마약및어렵에관한다수국가간조약에가입할것에동의한다 는항목을넣었다. 이에대해일본수상요시다시게루 ( 吉田茂 ) 는다음해 2월, 공해라할지라도어장의보존과발전을도모할필요가있으므로일본은미국이걱정하는태평양동쪽이나베링해에서의보존어장에서일본이 1940 년에조업하지않았던어장에서는자발적으로억제한다는것과일본이주권을회복한후어장의발전과보존을위해각국과속히어업교섭을할것을덜레스에게약속했다. 24) 일본은이런약속은미국뿐만아니라세계각국에대해서도적용된다는정부성명을 7월 13일발표했다. 25) 이에대해서는후술한다. 또한요시다시게루는미국이우려하는물개의해상 23) 緑間栄, 海洋開発と国際法, 近代文芸社, 1995, 59-64 쪽. 24) 每日新聞社, 対日平和条約, 每日新聞社, 1952, 302-320 쪽. 25) 위의책, 427 쪽.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41 포획에관해서도자발적으로억제할것과주권회복후에는조약가입교섭을할것을약속했다. 이처럼일본은대전전처럼 공해자유의원칙 이통용되지않을것임을인식하고있었다. 일본은미국및캐나다에대해서는대일강화조약이발효되는 5개월전부터어업교섭을시작하여한달후에가조인했다. 게다가 1952년 4월 28 일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발효되자 10일후미 캐 일어업조약 ( 북태평양의공해어업에관한국제조약 ) 을조인했다. 이조약은일본이각국과앞으로행할어업교섭의기초가되므로한국을비롯하여세계각국이주목했다. 이때문에일본은 공해자유의원칙 및 평등의입장 에집착했다. 조약은전문에서 주권국으로서국제법및국제관습의원칙을바탕으로공해의어업자원을개발할각자의권리에비추어행동한다 고규정했다. 일본정부는이글을강조하여, 공해자유의원칙 이인정됐다고설명했다. 그러나제1조 2항은 본조약은어떠한규정도영수 ( 領水 ) 의범위또는연안국의어업관할권에관한체약국의주장에불리한영향을주는 ( 주권을해치는 ) 것으로해석해서는안된다 고규정했으며, 연안국의어업관할권을존중했다. 26) 또한조약부속의정서는일본은자발적으로 < 그림 1> 1과같이서경 175도동쪽에서연어, 송어, 청어, 넙치 (halibut) 잡이를억제한다고규정했다. 이규정때문에일본에서는 이조약은훗날공해자유의원칙에반한다고하는철폐논쟁으로발전했다 고한다. 27) 실제로이규정에대해 공해에있어서의어업을어떤특정국의실질적인독점하에놓는것이며불공평하고또한공해자유의원칙에반한다 는비판이있었다. 28) 게다가일본어선에게만적용되는규제는조약이말하는 국제위원회를설치하여과학적연구를실시하고이결과에따라필요한 26) 日米加漁業條約全文, 水産界, 809 号, 1952, 60 쪽 ; 지철근, 어업관할수역 ( 평화선 ) 과최근각국어업조약의국제적동향 국제법학회논총 제 2 호, 1957, 107 쪽. 27) 日米加三国漁業会議最終本会議における日本代表部の挨拶, 前掲 水産界, 135 쪽. 28) 抑止原則とは ( 日米加漁業条約の改定問題にからんで ), 時の法令 478 号, 1963, 34 쪽.
142 獨島硏究제 22 호 보존조치를결정 한결과가아니라아무조사도없이처음부터일본어선에적용되었다. 그러나교섭에참가한일본대표자는 조약에서는공해어업자원의개발은모든국가에평등한기초에서개방된다 는일본측의견이충분히양해됐다고평가했다. 29) 이발언이대표자의강변이라는것은누구에눈에도뚜렷했다. 이런불평등조약에대해일본국회에서는맹렬한비판이있었다. 비판중에는앞으로가질외국과의어업교섭에영향을미치며, 이승만라인에핑계를줄수있다는지적도있었다. 실제로한국정부는이교섭에주목하고, 주일대표부 ( 현재대사관 ) 를통해정보를수집하여회담내용을파악했으며, 30) 이조약을어업관할수역에관한주장에이용했다. 3) 중국및다이완 1950년에들어서자일본어선들은맥아더라인을침범해황해나동중국해까지출어하게되었다. 이에대처해 12월중국정부는연안에 기선저인망 ( 機船底引網 ) 어업 금지구역및발해만에 군사규제구역 을설정하고일본어선 5척을나포했다. 이들구역 < 그림 1> 6은일본에서 화동 ( 華東 ) 라인 이라고불리는데이폭은최대 60해리에달한다. 31) 또한화동라인남쪽은경계가명시되지않는군사작전구역이며역시출입금지구역이었다. 29) 日米加三国漁業会議最終本会議における日本代表部の挨拶, 水産界 809 号, 1952, 67쪽. 30) 외무부공개자료, 제2차한일회담 (1953.4.15-7.23) 어업관계자료. 31) 片岡千賀之, 日中韓漁業関係史, 長崎大学水産学部研究報告 87 号, 2006, 20쪽. 화동라인은 毛沢東라인 이라고도불린다.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43 < 그림 1> 일본어선에대한규제선 32) 중국정부는화동라인을침범한일본어선을 1951년에 55척, 1952년에 46척그후에는 < 그림 2> 와같이나포했다. 이런화동라인을공해 3해리설을주장하는일본정부는받아들일수없었으나, 일본정부는어선이나포되어도중국정부에거의항의하지않았다. 일본정부는 화동라인은어디까지나중공 ( 中共 ) 의국내법규이며일본은이에구애되지않는다는것이공식견해 라고주장했는데 실제로는이라인을묵인하여, 이라인안을저인망어업의조업허가구역에서제외 하고있었다. 33) 일본정부의허가라는것은 민간어업협정 에따라출어하는어선들에대해내린것이다. 민간어업협정은중 일양국간에국교가없어정부간어업협정을맺을수없었기때문에중 일양국민간단체가맺은것인데, 이협정은화동라인규제를그대로인정했다. 훗날이협정을위반한일본어선들이속출하고민간어업협정의존속이위태롭게되자, 일본정부는일본어선들이협정을위반하지않도록감시선을파견하고, 34) 적극적으로화동라인의규제를지켰던것이다. 32) 朴炳渉, 竹島 = 独島漁業の歴史と誤解 (2), 2 쪽을개정. 33) 朝日新聞 1962.12.25, 華東ライン読者応答室から. 34) 朝日新聞 1965.6.13, 中国側 強く抗議.
144 獨島硏究 제22호 <그림 2> 주요국에 의한 일본 어선의 연도별 나포 35) 한편 다이완은 1948년부터 맥아더라인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의 나포를 시작했다. 다이완도 영해 밖으로 방위수역 을 설정했는데 규제 구역의 범 위는 군사 기밀이므로 공표하지 않았다.36) 이 수역에 출어한 일본 어선이 괴선(怪船) 으로부터 총격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1954년 11월 22일 나 가사키현(長崎縣) 어선 2척이 다이첸도(大陳島) 동쪽 농림(農林) 554구에 서 총격을 당해 침몰하고 불행히도 2명이 죽었다.37) 괴선 은 간첩선을 단 속하는 다이완 혹은 중국 선박이라고 생각된다. 4) 소련 1952년 일본의 모선식 연어 송어잡이 선단(船団)이 패전 후 처음으로 소련 근해에 출어했다. 이 해와 다음 해는 3선단이었는데, 1954년에는 7선 단, 1955년에는 14선단, 1956년에는 19선단으로 늘었다. 일찍이 일본의 해 적어법에 쓴 맛을 본 소련은 이런 추세에 대응하여 일본 어선의 규제에 35) 36) 37) 海上保安庁, 海上保安庁30年史, 1979, 434-435쪽을 바탕으로 작성. 夕刊山陰, 1953.10.6, 国府も防衛水域. 山陰新報, 1954.11.22, 漁船二隻が沈没.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45 나섰다. 1956년 3월캄차카반도주변공해에 < 그림 1> 3과같은이른바불가닌라인을설정했다. 이수역에서의조업은소련정부의특별허가가필요했다. 이조처는소 일어업협정이체결될때까지의잠정조처이며, 일본어선들의남획을방지하는동시에소 일어업교섭및국교정상화교섭을촉진시키려는목적이있었다. 이직후소 일간어업교섭이진전되고 5월에어업조약 서북태평양공해에서의어업에관한일본국과소련과의조약 이조인되었다. 이결과일본어선에대한규제구역은 < 그림 1> 단선 2와같이확대되었다. 38) 이런규제선이일본정부가주장하는 공해자유의원칙 에어긋남은말할것도없지만일본은이를순순히받아들인것이다. 5) 호주 제2차세계대전중일본군에의해폭격피해를입은호주는대전후에는 스스로를태평양의주요국 을자임하고태평양안보문제나대일문제에깊이관여했다. 호주는일본을통치하는연합군극동위원회회원국이된다든지, 영연방제국을대표해 SCAP에조언을하는대일이사회 ( 対日理事会 ) 회원국이되는등활약했다. 39) 이렇듯일본사정을숙지한호주는이른시기에맥아더라인폐지대책을세웠다. 대일강화조약조인직전호주정부는일본외무성에구상서 (1951.8.14) 를보내, 호주는대전전에근해어장에서 일본의약탈행위를입었기때문에 강화조약 9조에따라일본과어업협정을체결할때까지남획을막기위해근해어장에서의일본어선의조업을금지하기로하는서간을교환하고싶다고제의했다. 40) 38) 川上健三, 前掲書, 411-421쪽. 39) 菊池努, オーストラリアの対日講和外交, 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 東京大学出版会, 1986, 193쪽 ; 朴炳渉, 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条約と千島 竹島 = 独島問題 (2), 北東アジア文化研究 39 号, 2014, 40쪽.
146 獨島硏究제 22 호 이는종전이전일본의아라푸라 (Arafura) 해에서의진주조개채취를염두에둔것이다. 이제의에대해일본정부는호주의 새원칙 을바탕으로하는제의에대한검토는시간이상당히걸린다고회답하여제의를사실상거부했다. 8월 27일호주정부는 제안은새로운혹은기본적인원칙에관한것이아니며다만편의적으로대륙붕이라고불리는일정지역에서일본어부들을배제하기위한잠정적인협정을목표로한것일뿐이며, 말하자면맥아더라인규정의잠정적인연장이다 라고주장했다. 41) 호주는일본과의어업협정이맺어질때까지맥아더라인의잠정적인연장이필요하다고생각한것이다. 이에대해일본정부는 임의로공해의일정구역을구획하여특정국가의어선의항행혹은어업을제한하는것같은조처에는원칙적으로동의하지못한다 고주장하고, 호주국내법에따라호주국민과평등하게일본어민들의어업을제한할것을제안했다. 그러나호주정부는 9월 7 일자서간으로잠정기간을 12개월로변경했을뿐여전히일본어선의조업금지를주장했다. 1952년 3월호주는 진주조개어업법 을개정했고, 영해에접속하는공해에서의진주조개채취를규제하기로했다. 이는곧바로효력이생기는것이아니라장차선언에의해유효하게된다. 이때문에 4월 25일에맥아더라인이폐지됐을때는아직법적효력이없었다. 따라서 25일이후일본은아라푸라해에서진주조개를채취할수있었다. 그러나일본정부는호주의요청을받아들여일본어민들의출어를허가하지않았다. 일본은자발적으로어업을억제한것이다. 양국간어업교섭은 1953년 4월부터시작되었는데 8월에는결렬되었다. 9월 10일호주는 대륙붕주권선언 을선포하고호주및신탁통치하에있는뉴기니대륙붕을대상으로적용했다. 또한 10월에는 진주조개어업법 을개정하고대륙붕에서의진주조개 40) 川上健三, 앞의책, 284-286 쪽. 41) 위의책, 286 쪽.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47 채취를규제했다. 42) 이런조처는모두일본을염두에둔것이었기때문에일본정부는호주정부에항의하는한편, 이문제를국제사법재판소에공동제소할것을호주정부에제의했다. 43) 호주도이에동의하고양국은최종판결이나올때까지의잠정조처를 1954년 5월에결정했다. 그러나국제사법재판소로의공동제소는최종합의를얻지못했기때문에재판은실현되지않았고 1958년에 제네바 4개해양법협약 의성립을보게되었다. 앞에서언급한, 일본의항의구상서는 공해의어업자원은만민의개발, 이용을위해개방되어야할공유재산이며, 그자원의지속적최대생산성유지를위한규제는그개발, 이용에대한참가국민에게평등하게적용되어야한다 고주장했으며, 44) 직접 공해자유의원칙 을주장하지않았다. 일본은이미미 캐 일어업협정에서 공해자유의원칙 이통용되지않음을알고있었으므로호주에대해서는처음부터이를주장하지않았던듯하다. 또한주목해야할것은일본은호주가동의하지않는한출어를자발적으로억제했다는사실이다. 6) 각국에의한일본어선의나포 대전후일본어선은세계각국에서영해나어업규제선을어겼으므로나포당했다. 이승만라인이철폐되는 1965년까지각국이나포한일본어선은소련이가장많으며 1,146척, 한국이 320척, 중국이 187척, 미국이 53 척, 다이완이 51척, 인도네시아가 23척, 필리핀이 13척, 북한이 9척, 파키스탄이 4척, 호주 에콰도르가각각 3척, 스페인 멕시코가각각 1척이며모두합쳐 1,814척이었다. 이들중에주요국에의한연도별나포추세는 < 그림 2> 와같다. 45) 42) 위의책, 6 쪽. 43) 緑間栄, 前掲書, 70 쪽. 44) 위의책, 70 쪽.
148 獨島硏究제 22 호 4. 약탈어업에대한한국의대응 1) 해양주권 ( 이승만라인 ) 선언 1950년후반기한국전쟁으로인해한국의맥아더라인경비가소홀하게되자일본어선들이남해에대거출어하게되었다. 이에위기감을가진한국정부는 1951년에들어와단속을강화하고일본어선을 3월에 10척, 4월에 23척나포했다. 46) 4월에나포된어선이많았던것은연합군해군함정이군집한일본어선을만나이들을나포했기때문이다. 47) 이런집단적인일본어선들의불법행위에분격한한국국민은이순신장군생일인 4월 8일맥아더라인폐지에반대하는국민대회를부산에서열었다. 한국어민들의반일감정이높아지자, 7월주미한국대사양유찬은덜레스에게심각한한일간어업문제를설명하고대일강화조약에맥아더라인존속을명시할것을요청했다. 48) 그러나덜레스는복잡한어업문제때문에강화조약조인이늦어지게되는것을원하지않았으며, 강화조약에서어업문제를분리하는대신조약 9조에서일본은어업교섭을원하는연합국과속히교섭을시작해야한다고규정했다. 맥아더라인의존속이어렵게되자, 10월한국은한 일회담예비회의에서강화조약 9조에따라어업교섭을시작할것을일본측에제의했다. 한국은조약 9조가말하는연합국은아니지만, 한국에도 9조등이적용된다고 21조에서규정되어있었다. 그러나일본은회담준비가되지않았다고만말하고회담의전망을제시하지않았다. 또한한국이어업협정이이루어질때까지일본은맥아더라인을지킬생각이있을지를질문했으나 45) 朴炳渉, 前掲 竹島 = 独島漁業の歴史と誤解 (2), 34쪽. 46) 森須和男, 李ラインと日本船拿捕, 北東アジア研究 28 号, 2017, 91-92쪽. 47) 日韓漁業協議会, 日韓漁業對策運動史, 日韓漁業協議会, 1968, 58쪽. 48)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1, Vol.6, pp.1205-1206.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49 일본은명확한회답을하지않았다. 일본의태도를보고외무부김동조는 일본은평화조약의비준에의해맥아더라인이사라지기를기다렸다가그후에실력행사에나서려는저의를가지고있는것이아닌가 라고의심하고, 미 캐 일어업조약을분석한바 일본측이미국 캐나다등과의관계에서는문제없으나한국과의관계에서는 공해자유의원칙 이필요하다고주장하고있다 는것을알게되었다. 49) 게다가 1952년 1월에들어서일본수상요시다시게루가맥아더라인의조기철폐를 SCAP 총사령부와교섭한다는뉴스가자주있었기때문에한국정부는일찍부터검토중이던해양주권선언을급히 18일에선포했다고한다. 50) 한국연해에서는맥아더라인을침범하고나포된일본어선이앞에쓴바와같이 1952년 2월까지 89척에달했는데이중에서 5척은좌초한어선들이었다. 51) 이들은너무육지나섬에접근했기때문에좌초한것이며, 이는명백한영해침범이었다. 바로약탈어업의전형적인예다. 일본정부도일본어선의영해침범이많은것을인식하고있었으며, 제2차한일회담어업위원회 (1952.6.29) 에서 일본어선의한국영해침범이많다고하므로이런사태의방지를위해특별조치를취한다 는취지를포함하여 일 한어업협정요강 을제출할정도였다. 52) 한국영해조차자주침범하는일본어선의마구잡이어업에대책을세우지않을경우한국어장이머지않아쇠퇴할것은자명한일이었다. 이때문에한국은자위조처로서해양주권선언을선포한것이다. 해양주권선언의성격은호주처럼일본과의어업협정이맺어질때까지맥아더라인의잠정적인연장을도모한것 49) 浅野豊美 吉沢文寿 李東俊, 日韓国交正常化問題資料 第 1 期 7 巻, 現代史料出版, 2010, 47쪽. 50) 浅野豊美 吉沢文寿 李東俊, 日韓国交正常化問題資料 第 1 期 7 巻, 現代史料出版, 2010, 47쪽. 51) 水産庁編, 前掲書, 324쪽 ; 朴炳渉, 前掲 竹島 = 独島漁業の歴史と誤解 (2), 29-30쪽. 52) 浅野豊美ほか, 前掲書, 基礎資料編第 1 巻, 17쪽.
150 獨島硏究 제22호 이며, 동시에 어업 협정 체결의 촉진을 노린 소련 불가닌라인과 비슷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3> 평화선(이승만라인), 맥아더라인, 클라크라인 53) 53) 최종화, 현대 한일 어업 관계사 23쪽.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51 해양주권선의범위는 < 그림 3> 와같이한 일간에서는제1차맥아더라인과거의같다. 한국은제2차맥아더라인에불만이많았기때문에제1 차맥아더라인을기준으로한것이다. 다만해양주권선은독도를포함하도록구획되었다. 당초수산국초안에서는독도주변해역은어업가치가높지않으므로독도는해양주권선안에포함되지않았지만외무부가독도영유권을공고히하기위해독도를포함하도록수정한것이다. 54) 이해양주권선언에대해일본정부는 공해자유의원칙 에어긋난다고반발하고한국정부에항의했다. 이는중국화동라인을묵인한자세와전혀다르다. 게다가항의문은독도에관해 한국측은다케시마 [ 독도 ] 로알려진일본해 [ 동해 ] 의소도에영유권을주장하고있는것처럼보이는데일본국정부는한국의이런참칭 ( 僭称 ) 혹은요구를인정하는바가아니다 라고주장했다. 이처럼구상서에독도를넣도록제안한자는가와카미겐조이다. 55) 한편일본정부는소련이나한국등에의한일본어선의나포대책으로 5월 나포사건대책 을세웠다. 한국에대한대책은일본어선들이 한국영해 에들어가지않도록감시, 지도하고, 더불어어선을보호하기위해상시순시선 2척을배치한다는계획이었다. 이중점수역으로 A, B, C라인을정했다. C라인은전라도와제주도와의한가운데를지나는직선, B라인은 C라인에이어경상남도와쓰시마 ( 對馬 ) 와의한가운데를지나는직선, A라인은 B라인에이어북쪽으로북위 38도까지가는직선이다. 이대책은해양주권선을어기고나포되는어선을보호하기위한것이었다. 한편일본정부는어민들에게 이승만라인을개의치않고나가라 고지도했으므로어민들은 위험을각오하고속속출어했다 고한다. 56) 그러나한국정부는일본어선의해양주권선침범을묵과하지않았다. 54) 金東祚, 韓日の和解, サイマル出版会, 1993, 11쪽 ; 朴炳渉, 前掲 竹島 = 独島漁業の歴史と誤解 (2), 32쪽. 55) 外務省, 日韓国交正常化交渉の記録 XV, 竹島問題 ( 公開文書番号 910), 15-52쪽. 56) 朝日新聞, 1952.11.16, ラチのあかぬ 防衛水域.
152 獨島硏究제 22 호 8월 14일제주도동남쪽에서제5 시치후쿠마루 ( 七福丸 ) 를나포, 9월 12일제주도남쪽에서제28 가이호마루 ( 海鳳丸 ), 제2 및제5 쇼주마루 ( 松寿丸 ) 를나포했다. 57) 이즈음일본이자국어선들을보호하기위해 9월 20일부터순시선이순회한다는방송뉴스가한국에전해졌다. 앞의 나포사건대책 의실시다. 이를알게된한국정부는 21일국방 외무 법무관계자가긴급회의를열어 해양주권을고의로침입하는일본어선에대처하는해군당국은무장경비정을요소요소에배치하여초계중이며유사시에는발포할태세를갖추고있다 고발표했다. 58) 이를계기로한 일관계는급속히악화되었다. 이를우려한주일미국대사머피 (Robert D. Murphy) 는 24일일본외상오카자키가쓰오 ( 岡崎勝男 ) 에게 나포사건대책 중 C라인을제주도남쪽으로이동할것을권고했다. 이유는이승만대통령이 C라인에격분하여 일본에게선전포고한다 고말했기때문이라고한다. 59) 머피는매주정기적으로유엔군사령관클라크 (Mark W. Clark) 와회담을하며한 일간마찰을진정시키기위해노력했다. 60) 일본정부는미국해군이일본어선을보호해줄것을요청하고머피의권고를따르기로했다. 2) 방위수역 ( 클라크라인 ) 이승만대통령의 일본에선전포고한다 라는강경한발언에서볼수있듯이해양주권선문제는한 일간에서심각한단계에이르렀다. 그러던중클라크는이승만대통령과상의하여공산군간첩의침투를막기위 57) 朝日新聞, 1952.10.9, 韓国海軍, 日本漁船再び捕獲 ; 日韓漁業協議会, 前掲書, 44 쪽. 58) 東亜日報, 1952.9.23, 主権線侵犯時発砲. 59) 外務省, 日韓国交正常化交渉の記録 総説 Ⅲ( 第 6 次日韓会談文書公開, 文書番号 1915), 46쪽. 60) Robert Murphy, Security information, RG 84, Records of the Foreign Service Posts of the Department of State, Entry 2846, Korea, Seoul Embassy, Classified General Records, 1953-55, Box. 4.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53 해 < 그림 3> 와같은방위수역 ( 클라크라인 ) 을선포했다. 이선포는해양주권선을둘러싼한 일간충돌을막기위한목적도있었을것이다. 방위수역의범위는해양주권선보다약간좁다. 한국은울릉도와독도를방위수역안에넣도록클라크에요청했으나, 이는전시를감안한일시적인봉쇄선이라는이유로받아들여지지않았다. 61) 유엔군은방위수역선포당시특히 일본어선도그활동이중요하지않다고간주되는경우는적용을받는다 고발표했다. 62) 그렇다면일본어선은방위수역내에서조업을할수없기때문에한국어민들은이를환영했으며한국군은나포체제를강화했다. 10월 4일한국정부는대통령긴급명령제12호에의한포획심판령및대통령령제703호로써고등포획재판소를개설하여이승만라인을침범하는일본어선에대해강력한단속활동을전개했다. 63) 실제로단속하는해양경찰대도내무부에서해무청으로이관하고단속체제를강화했다. 10월 13일제주도동쪽에서방위수역을침범한일본어선 40 수척에대해한국군함 3척이총격을가하여규슈 ( 九州 ) 지방어선제2 고헤이마루 ( こうへいまる ) 를포획했다. 그러나한국군은이어선을곧석방했다. 64) 또한 25일에는제주도남쪽에서일본순시선이키 ( いき ) 를총격, 정지시키고임검했다. 65) 이당시일본수산청의조사에의하면, 일본은방위수역안에서어선 1,753척, 어부 31,961명이출어하고연간어획고 74억엔을올리고있었다. 66) 만약이들이출어하지못하면심각한사회문제를야기한다. 외무성이주일미국대사관에방위수역으로의출어가가능한지를문의했으니, 유엔군군사행동의수행을저해할요소가된다고생각되면퇴거하도록 61) 水友會, 現代韓國水産史, 水友會, 1987, 1161쪽. 62) 日韓漁業協議会, 前掲書, 44쪽. 63) 최종화, 현대한일어업관계사, 세종문화사, 2000, 26쪽. 64) 朝日新聞, 1952.10.15, 三隻は韓国軍艦. 65) 森須和男, 前掲論文, 93쪽. 66) 参議院法制局, 李承晩ラインと朝鮮防衛水域, 1953, 40쪽.
154 獨島硏究제 22 호 경고한다 는회답이 14일에있었다. 이로써외무성은출어가가능하다고판단하고, 미국대사관에일본어선에증명서를발급하고표지를붙여출어시킬것을전했다. 또한 한국측불법행위의단속 을피하기위해미국정부및유엔군사령관에주선을당부했다. 67) 그러나머피는 20일외무성에 일본어선은작전상무해 ( 無害 ) 통항선으로인정할수없다 는이유로방위수역안의출입을금지한다는뜻을전했다. 68) 이때문에방위수역에출어하는어선은 1/3로줄었다고한다. 69) 이런혼란에대해아사히신문은 일본어선은별로다른나라어선과차별대우를받을것없이출어가가능하며, 암암리에유엔군이그점에대해이해하고있다 는것처럼외무성은설명했으며, 어선에 출어확인교부증 ( 出漁確認交付証 ) 을발행하여일장기및표지를붙이고출어하도록지도했는데, 그렇게일본정부가인정한배라도유엔군에의해강제적으로방위수역외로쫓겨났다라고보도하고, 외무성판단이잘못된것을비판했다. 70) 실제로나가사키현 ( 長崎縣 ) 사세보 ( 佐世保 ) 에주둔하는유엔군해군관계자도방위수역에들어가지않도록일본어선에경고하고있었으므로 71) 외무성의지도는너무무모했다. 아사히신문은방위수역으로의출어문제에대한 외무당국의실태 에대해 어업문제를통해드러난그무능함은국민을너무나실망시켰다 고엄히비판했다. 72) 3) 다이호마루 ( 大邦丸 ) 사건 외무성의방위수역에관한자의적인해석이불행한다이호마루 ( 大邦丸 67) 外務省, 앞의책 日韓国交正常化交渉の記録 総説 Ⅲ, 3 51. 68) 朝日新聞, 1952.10.23, 出漁は認められず ; 日韓漁業協議会, 前掲書, 48쪽. 69) 朝日新聞, 1952.11.16, ラチのあかぬ 防衛水域. 70) 朝日新聞, 1952.12.26 社説, 出漁問題に対する外務当局の失態. 71) 朝日新聞, 1953.2.20, 韓国に厳重抗議. 72) 朝日新聞, 1952.12.26 前掲社説.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55 事件 ) 사건원인의하나가되었다. 1953년 2월 4일후쿠오카 ( 福岡 ) 시를본거지로하는제1 및제2 다이호마루가제주도서쪽에서방위수역을침범했다. 한국순시선이이들에게정선을명했다. 순시선에는해군헌병이동승하고있었으나유엔군관할에있지않았다. 곧제2 다이호마루는명에따랐는데제1 다이호마루는도주했기때문에순시선이총격하고승조원 1명이부상했다. 제1 다이호마루도정지했으므로순시선은이들을나포했다. 73) 순시선은다이호마루 2척을제주도로연행하고부상자를병원에옮겼으나부상자는사망했다. 사건의처리를보면, 사세보주재 조선연안봉쇄호위사령관 이나 한국주재무관 등의주선으로다이호마루는석방되고, 16일유엔군에호위되어사세보로돌아왔다. 이배는이틀후사세보미군기지에서석방되었다. 74) 한국에서석방될때다이호마루는유엔군 방위수역봉쇄사령관 으로부터 앞으로일본어선은일체방위수역에서조업할수없다. 만약조업할경우나포하고어선은반환하지않겠다 고언도되었다. 75) 역시방위수역으로의출어가가능하다고장담한외무성의설명이크게잘못된것이었다. 방위수역은출입금지이며, 따라서나포도있을수있었던것이다. 다이호마루선주는유엔군고급장교에게손해배상의청구를하지않겠다고약속했다. 76) 다이호마루는들어가면안되는곳에침입했고정지명령을받았음에도이를따르지않고도주했으므로사건이일어난것이었으므로도저히손해배상을청구할수있는입장이아니었다. 그러나일본정부의생각은달랐다. 일본외무성은한국정부에 1 불법행위에대한 73) 나포지점은 2 월 25 일자 朝日新聞 에따르면, 제주도서북쪽 10 마일 ( 농림 274 구 ), 日韓漁業協議会의앞의책 71 쪽에따르면, 제주도서쪽 20 해리 ( 농림 283 구 ), 한국정부공보처발표에따르면, 동경 126 도 6 분, 북위 33 도 29 분이지만어느것도방위수역안에있다. 74) 森須和男, 前掲論文, 113 쪽. 75) 日韓漁業協議会, 前掲書, 72 쪽. 76) 위의책, 77 쪽.
156 獨島硏究제 22 호 사과, 2 책임자의처벌, 3 손해배상, 4 재발방지를요구했다. 당연히한국정부는총격이합법적이었다고반론하고요구를거부했다. 77) 이사건에대해앞에쓴바와같이박유하가오해하여 독도때문에 사살사건이일어났다고썼지만, 사살사건은유엔군방위수역에서일어난것이며독도와는무관하다. 결코 독도때문에 사건이일어난것이아니다. 한편박유하가참고로한시모죠마사오의저서는 1월 12일이승만대통령이 평화선 안에출어한일본어선의나포를지시, 2월 4일에는일본의제1 다이호마루가나포되고어로장 ( 漁労長 ) 이사살되는사건이일어났다 고적었다. 78) 시모죠는사건이방위수역안에서일어났다는사실을언급하지않았는데이는사건의본질을왜곡하는것이다. 한국은이즈음부터 해양주권선 대신에 평화선 이라는용어를사용하기시작했다. 79) 한편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휴전협정이맺어졌다. 이에따라 8월 27일유엔군은방위수역의운용을정지했다. 방위수역의존속기간은 11개월이었는데이사이에나포된일본어선은 1952년 12 월에 3척, 다음해 2월에 3척, 3월에 3척, 모두 9척이었다. 80) 4) 이승만라인수호 1953년 8월 27일에방위수역의운용이정지되자, 다음날에는일본어선들이대거이승만라인안으로들어갔다. 남해에서는고등어의성어기인지라일본어선 60척이발견되었기때문에순천경찰대가현장에출동했다. 81) 한국군경은일본어선을 9월 6일에 1척, 7일에 2척을나포하여이 77) 위의책, 73쪽. 78) 下條正男, 前掲書, 145쪽. 79) 박창건, 한일어업협정전사 ( 前史 ) 로서의 GHQ-SCAP 연구, 日本硏究論叢 39호, 2014, 49쪽. 80) 森須和男, 前掲論文, 93쪽. 81) 京郷新聞, 1953.9.5, 警察隊現地出動.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57 승만라인을단호하게지킨다는의사를표시했다. 또한군함 115호는제주도부근을순회하고있던일본수산청감시선제1 세이요마루 ( 成洋丸 ) 에대해, 7일 24시를기해이승만라인안으로일본어선이출입하는것을엄중히금지하므로부근에있는어선들에게시급히연락하도록통고했다. 82) 8일내무부치안국장문봉제는이승만라인과영해를침범하는어선을발견하면즉시나포할것이며정선명령에응하지않고도주하는선박에대해서는발포할방침이라고말했다. 83) 이런경고에도불구하고일본어선중에는 [ 한국감시선을 ] 두려워하여도할수없다고각오를단단히하여조업하고있는배도있다 고한다. 이런일본어선에의해제주도근해는 100척을넘은어선들의어화 ( 漁火 ) 로 불바다 를이르고있다고한다. 84) 해군은이런어선을 9월에 32척, 10 월에 13척, 11월에 3척나포했고, 9월 27일에는일본수산청감시선제2 교마루 ( 第 2 京丸 ) 를나포했다. 85) 12월한국정부는 어업자원보호법 을시행하여위반자에게는 3년이하의징역 금고혹은 50만원이하의벌금을부과하고어선 어구 어획물등을압수하는벌칙을정했다. 나포된일본어선의추이는 < 그림 2> 와같다. 또한이시기는독도분쟁이격화된시기였다. 일본정부는독도를탈취하기위해 6월부터 12월까지순시선을 17번파견하였고, 독도에일본영토표지를 4번이나세웠다. 이런일본의침략에한국측이반발하여 7 월에는독도에침입한일본순시선 헤쿠라 ( へくら ) 를문책하고도망가는헤쿠라를총격했다. 86) 이런독도분쟁및이승만라인문제로인해한 일관계는극도로악화되었다. 82) 朝日新聞, 1953.9.7, 李ライン追出通告 ; 日韓漁業協議会, 前掲書, 82쪽. 83) 東亜日報, 1953.9.9, 日漁船領海侵犯斷念視. 84) 每日新聞, 1953.9.9, 豊漁 夜は火の海の盛漁. 85) 森須和男, 前掲論文, 93-96쪽. 86) 박병섭, 1953년일본순시선의독도침입, 독도연구 17호, 2014, 209쪽.
158 獨島硏究제 22 호 5. 이승만라인의정당성을둘러싼논쟁 이승만라인문제가한 일간에본격적으로논의된것은 1953년 10월 8 일부터시작된제3차한 일회담때였다. 이회담의계기는일본어선의대량나포였다. 이회담의어업위원회에서일본측은이승만라인에관해다음과같이주장했다. 87) 1 공해를일방적으로구획하고외국선이나외국인에관할권을미치게하는것은국제법 국제관습법에반한다. 따라서거기서국내법규로서강제조처를행하는것은중대한국제법위반이다. 2 어족보호를위해서는관계국간에과학적근거를바탕으로하여보존조처를취하는것이효과적이며, 그선례도있다. 일방적인관할권설정은불가하다. 3 어업능력의차이등혹은분쟁의방지라는것은관할권설정의근거가될수없다. 4 양국어업의공존공영을도모하는구체적인조처에관해서는일본측에도고려한것이있다. 이에대해한국측은다음과같이반론했다. 반론속에서한국측도이승만라인을 리라인 이라고부르고있었다. 88) 1 1951년 10월한국은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따라어업문제교섭을일본에제의했으나, 일본측은조약발효에따라맥아더라인이사라지면한국연안의한국이보존하고있는어장에서자유로운조업을할수있다고예상하고교섭에성의를보이지않았고, 준비가되지않았다고하며응하지않았다. 또한어업문제가해결될때까지는존중해야할맥아더라인을무시하여이를침범하는등일본측성의는의문이었다. 이때문에한국은부득이 1952년 1월에리라인을선포했다. 2 어업기술이발달된까닭에자원이감소하고있다. 이는한국측자료가말하는바이다. 자원의고갈을막고어족을보호육성하고, 어업자 87) 外務省, 日韓交渉報告 ( 再八 ), 1953.10.14, 日韓会談公開文書番号 177. 88) 외무부공개자료, 제 3 차한일회담 (1953.10.6-21) 어업위원회회의록.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59 원의계속적개발을가능하게하는것은연안국의권리이며의무이다. 일찍이한국은융희 ( 隆煕 ) 시대로부터총독 [ 일제 ] 시대, 전후에는맥아더라인이나리라인, 클라크라인에따라한국만이계속해서어업자원의보존이나개발을했다. 3 트루먼선언이말하듯이실질적으로연안국일국만이이해관계를가지는수역에대해서는연안국이일방적으로어업관할수역을설정하는것이가능하다. 한국은앞으로어족의보호를도모하고어업능력에차이가있는한 일어민들의어업교착 ( 交錯 ) 이나일본어민들의남획으로인해생길수있는분쟁을방지할목적으로리라인을선언했다. 4 선언에서주권이라는말을쓰고있으나이는제4항에서항해의자유를인정하고있는것으로알수있듯이선언은영해를확장시키는것이아니라어업의관할권을주장한것에지나지않으며기본취지는트루먼선언과다름이없다. 한국측주장에대해일본측은다음과같이반론했다. 89) 1 1951년당시일본은일 미 캐어업회의준비에바빠서한국과의교섭을시작할수없었던것이며일본은결코교섭을연기하려고했던것이아니다. 실제로다음해 2월평화조약발효전임에도불구하고일 한회담에서어업문제를다루었다. 2 트루먼선언에관한한국측해석은완전한오해다. 3 한국의리라인강제조처에관한실제행동은어업목적에한하지않으며주권의전면적발동과다름이없다. 4 맥아더라인은연합군이일본의점령정책상행한것이며동라인이사라지면일본어선이공해에서자유롭게조업할수있는것은당연하다. 이처럼일본정부는 공해자유의원칙 을출발점으로삼았는데이에대해한국정부는남미등국제적인선례를바탕으로 어업관할수역 의설정을출발점으로하였다. 실제로세계각국은일본의선진적인어업기술을구사한약탈어업에서연해어업을지키려는경향이강해져, 세계적으로 89) 外務省, 前掲 日韓交渉報告 ( 再八 ).
160 獨島硏究제 22 호 공해 3해리설 로부터트루먼선언을거쳐, 어업발전도상국을중심으로대륙붕을보호하기위한움직임에로이동하고있었다. 이런경향은이윽고공해를 12해리, 배타적경제수역 (EEZ) 을 200해리로하는새로운해양질서에도달했는데그당시는과도기에있었다고볼수있다. 즉한 일간어업대립은어업의신질서와구질서의대립이었다. 한 일양국의기본적인입장차이는너무나컸다. 게다가양국민의상대국에대한나쁜감정이겹쳐서이승만라인및어업교섭은난항을겪었다. 그러나양국은교섭의결렬을피하고다음회의에서는어족보존구역등구체적인안을내기로했다. 그러나다음회의는재산 청구권위원회에서의구보타간이치로 ( 久保田貫一郎 ) 망언탓으로결렬되고말았으며, 이후 5년동안회담이중단되었다. 그사이한국은앞의 어업자원보호법 을성립시키고이승만라인을침범한일본어선을계속나포했다. 6. 일본정부성명의 자발적조처 일본정부가맺은미 캐 일어업조약은어업관할권에관한체약국의주장을해치는것으로간주하면안된다고규정하고체약국의어업관할권을존중하고있었다. 게다가일본은자발적조처로서경 175도동쪽의연어잡이등을억제한다고약속했으므로 공해자유의원칙 을스스로포기했다. 이처럼일본이자발적조처로서공해에서의어업을억제한예는이것이처음이아니다. 일제강점기에일본은 내지 ( 内地 ) 및 외지 ( 外地 ) 근해공해상에어업관할구역을설정하고자원을고갈시킬우려가있는어업을억제하고있었다. 구체적으로말하면 외지 인조선에서는조선총독부가 1929년에어업령시행규칙을정하여트롤어업을 < 그림 4> 의구역에서, 90) 저인망어업을 < 그림 5> 의구역 ( 이들을 총독부라인 으로약칭 ) 에서금지했다. 90) 지철근, 한일어업분쟁사, 한국수산신보사, 1989, 41 쪽.
일본의 해적어법 약탈어업과 평화선 독도에 대한 오해 <그림 4> 1929년 어업령 시행규칙에 의한 트롤어업 금지 구역 161 <그림 5> 1929년 어업령 시행규칙에 의한 저 인망어업 금지 구역 한편 일본은 앞에 기술한 바와 같이 정부 성명(1951.7.13)에서 각국과 어업 교섭을 하는 동안 국제적 혹은 국내적으로 이미 조처된 모든 수역 에 있는 현 보존 어장에서, 그리고 일본 국민 혹은 일본 등록 선박이 쇼와 (昭和)15년[1940]에 조업하지 않았던 어장에서는 자발적 조처로서, 다만 일본이 가지는 국제적 권리의 포기를 의미할 것 없이, 일본 거주 국민 및 일본 등록 선박에 대해 어업 조업을 금지할 것을 다시 명언한다 고 약속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자발적 조처로서 총독부라인을 지킬 의 무가 있었으며 맥아더라인이 사라지면 일본 어선은 공해에서 자유롭게
162 獨島硏究제 22 호 조업할수있다 는발언은일본자신의공약을깨는것이다. 일본정부는이총독부라인을한 일회담이시작되기직전에확인하고있었다. 1951년 1월 31일 일 한어업교섭제4회사전협의 에서수산청해양2과과장마스다 ( 桝田 ) 가식민지조선의 보호수역라인은지금의리라인과대체로비슷한데동쪽에서는조금좁다 고보고하고, 리라인이당시것과관련이있다면당시의생각을반박하는재료를모아야한다 고발언했다. 91) 그는한국측이이승만라인을총독부라인과관련시킬것을걱정했다. 이걱정은적중했다. 회담에서일본이이승만라인철폐를들고나왔을때한국측은그정당성을바로일본인들이설정했던트롤어업금지구역설정의배경을인용반박자료로서사용했던것이다. 92) 이총독부라인은일본에게는문제가많았다. 총독부라인안에있는제주도북쪽은좋은어장이기때문에일본이 자발적조처 로어업을억제하는것은원하지않았다. 앞의사전협의에서수산국차장나가노 ( 永野 ) 는 현재제주도북부해면을모두 [ 금지 ] 구역으로하는것은좋지않다 고밝혔다. 이처럼일본은앞의정부성명에서약속한의무를수행할자세를보이지않았고, 한국에대해서는일체관할수역을인정할수없다는주장을고집했다. 이런일본의자세는미국같은대국에대한경우와는전혀다르다. 일본은소련이나중국이어업관할수역을설정하고일본어선을나포해도거의항의하지않고묵인했는데, 한국이설정한어업관할수역에대해서는심하게반발했다. 이런차이는일본의한국에대한국민감정으로부터나오는것이다. 한국에대한일본인의감정에관해자유당국회의원사사키모리오 ( 佐々木盛雄 ) 는국회에서 나라가패배했다고하나이지구상하나의약소국인한국으로부터일본이 [ 독도나나포문제에서 ] 이런굴욕을받고도꼼짝도못한다, 참으로추태가아니냐 고노골적으로발언했 91) 浅野豊美ほか, 前掲書, 第 1 期 7 巻, 8-9 쪽. 92) 지철근, 앞의책, 41-42 쪽.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63 다. 93) 사사키는소련같은대국에는순순히복종했지만, 약소국인한국에의한나포는굴욕이며용납할수없다는이중적인태도를솔직히말했다. 그러나이는특별한견해가아니다. 마이니치 ( 每日 ) 신문은사설 (1953.9.9) 에서 리라인의일방적인조처 나 다케시마 [ 독도 ] 의불법점거 등 한국의잇따른모일적 ( 侮日的 ) 폭거에관해국민은분노하기시작했다 고쓰고, 한국이일본을모멸하고있다고보았다. 이처럼이승만라인이나독도문제에관해서는 나쁜자는한국이라는것이정부, 야당을포함하여이미일본인전체의공통인식 으로되고있었으며, 94) 일본의이중적인태도나어업의새질서등을냉정하게보는목소리는거의없었다. 7. 맺음말 제2차세계대전이전일본은 공해자유의원칙 을명분으로세워세계각지의좋은어장에서 마구잡이어업 을벌였으므로 약탈어업 이라는비난을받고있었다. 그뿐만아니라소련에서는일본해군의무력을배경으로하여소련영해안에서게잡이등을했다. 이런해적어법이나약탈어업의피해를입은세계각국은대전후일본어선에엄한눈을돌려그대책에나섰다. 미국은영해에접속하는공해에어업관할수역을설정한다는트루먼선언을발표함과동시에연합군최고사령관 (SCAP) 을통해일본어선의활동범위를맥아더라인안으로제한했다. 남미나아시아여러나라는트루먼선언을환영하여잇따라대륙붕선언을발표하고공해에어업관할수역을설정했다. 세계적으로어업의새질서가형성되어가고있었다. 한편식량부족에시달리는일본에서는정부의무모한어선건조허가와융자로인해어선이과잉으로되었고, 과당경쟁에서일본어민들의수 93) 衆議院外務委員会, 1953.10.28. 94) 加藤晴子, 戦後日韓関係史への考察, 日本女子大学紀要 文学部 28 号, 1978, 27 쪽.
164 獨島硏究제 22 호 입이급격히줄었다. 어민들은필연적으로맥아더라인을침범하게되었고, 한국남해, 오호츠크해, 황해, 동중국해등으로출어했다. 그러나일본정부나 SCAP은이를거의단속하지않았다. 부득이소련을비롯한극동각국은독자적으로단속을시작하여 1952년 2월까지 350척에달하는일본어선을나포했다. 이런상황에서일본이독립하고맥아더라인이사라지게되면일본의약탈어업이재개될것이분명했으므로각국은대책을세웠다. 중국은공해상에화동라인 (1950) 을설정하고일본어선의나포를시작했다. 한국도공해상에해양주권선 ( 이승만라인, 1952) 을설정하고계속해서일본어선을나포했다. 미국은트루먼선언을실시하는대신에미 캐 일어업조약 (1952) 에서서경 175도동쪽에서일본이연어 송어잡이등을자발적으로억제하도록규정했다. 호주는대륙붕선언 (1953) 을선포하는등일본의진주조개채취를막았다. 소련은불가닌라인 (1956) 을선포하고일본어선의조업을제한해놓고곧어업조약을맺었다. 이런각국의정책에대해일본정부는이중적인태도로대처했다. 미 캐 일어업조약은훗날일본에서 공해자유의원칙 에어긋난다고하여철폐논쟁이일어났는데, 그런조약을일본은감수했다. 게다가일본정부는훗날의한 일어업교섭등을고려하여이조약에서 공해자유의원칙 이인정됐다고강변했다. 또한중국의화동라인에대해서는항의하지않고묵인했다. 게다가화동라인을인정하는중 일민간어업협정을지원하고때로는화동라인을일본순시선이지켰다. 소련에대해서는불가닌라인을인정해어업교섭을시작했고, 결국은불가닌라인보다훨씬넓은어업규제선을받아들였다. 호주에대해서는어업관할수역에항의는했지만아라프라해에서의진주조개잡이를자발적으로억제했다. 이처럼일본은대국이제시한어업관할수역을순순히받아들였거나혹은자발적으로어업을억제했지만, 한국에대해서만은 1950년대에는 공해자유의원칙 을강력히주장하고어업관할수역을일체받아들이려하지않았다.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65 그러나한국에대한주장은일본자신의공약에반한것이었다. 일본은 1940년당시일본이조업하지않았던국내외보존어장에서는조업을자발적으로억제하겠다는정부성명 (1951.7.13) 을발표했다. 그렇다면일제강점기에일본은조선주변공해에어업관할수역인총독부라인을설정하고트롤어업등을금지하고있었으므로공약에따라일본은당연히그어업관할수역을존중해야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일본정부는한국에대해서만일체어업관할수역을인정하려하지않았다. 이런강경한자세의배경에는일본의이중적인국민감정이있었다. 대국이설정한어업관할수역에대해서는순순히복종하고어선이나포당하더라도가만히받아들였지만, 일본의식민지였던 약소국 한국이어업관할수역을설정하고일본어선을나포한다는것에대해서는도저히참을수가없다는태도를보였다. 심지어는이승만라인이나다케시마 [ 독도 ] 문제에관해서는모두한국이나쁘다는의식이일본인전체의공통인식으로발전했다. 이런일본인의공통인식의잔재를이용하여외무성이나시마네현등은독도에관한팸플릿에서반드시이승만라인을넣어기술한다. 특히시마네현팸플릿 다케시마, 돌아오라섬과바다 는이승만라인의설정으로인해다케시마 [ 독도 ] 에서시마네현민의강치잡이가중단하지않을수없게되었고, 이섬주변에서많은일본어선이나포당했다는오해를줄만한내용을기술하고있다. 이런영향을받았는지언론에서는아사히신문까지다케시마 [ 독도 ] 주변이승만라인에서일본어선이다수나포당했다는기사를쓰게되었다. 이런오해는일본인뿐만아니라박유하같은한국지식인까지도 독도때문에 일본인어부가사살되었다고믿게만든것이다. 이런이승만라인이나독도에대한오해는하루라도빨리불식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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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67 朴炳渉, 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条約と千島 竹島 = 独島問題 (2), 北東アジア文化研究 39 号, 2014., 竹島 = 独島漁業の歴史と誤解 (2), 北東アジア文化研究 34 号, 2011. 朴裕河, 和解のために, atプラス 14 号, 2012. 森須和男, 李ラインと日本船拿捕, 北東アジア研究 28 号, 2017. 水産庁編, 水産業の現況 1952. 外務省, 日韓交渉報告( 再八 ), 1953.10.14, 日韓会談公開文書番号 177., 日韓国交正常化交渉の記録 総説 Ⅲ( 第 6 次日韓会談文書公開, 文書番号 1915)., 日韓国交正常化交渉の記録 ⅩⅤ, 竹島問題 ( 公開文書番号 910). 日本農業研究所, 農林水産省百年史 中巻, 日本農業研究所, 1980. 日韓漁業協議会, 日韓漁業對策運動史, 日韓漁業協議会, 1968. 参議院法制局, 李承晩ラインと朝鮮防衛水域, 1953. 川上健三, 戦後の国際漁業制度, 大日本水産会, 1972. 浅野豊美 吉沢文寿 李東俊, 日韓国交正常化問題資料, 現代史料出版, 2010. 天川晃 [ ほか ] 編, GHQ 日本占領史 ( 第 42 巻 ) 水産業, 日本図書センター, 2000. 片岡千賀之, 日中韓漁業関係史, 長崎大学水産学部研究報告 87 号, 2006. 下條正男, 竹島は日韓どちらのものか, 文春新書, 2004. 海上保安庁, 海上保安庁 30 年史, 1979.
168 獨島硏究제 22 호 <Abstract> Japanese pirate fishing method and plunder fishery and misunderstandings for the Peace line and Dokdo Byoungsup Park There are serious misunderstandings about the Peace line (Lee Seungman line) in Japan. It is Japanese common understanding that a declaration of the Lee Seungman line is illegal against principle of free on the high seas. Utilizing recent Japanese official documents and materials, this paper clarifies such misunderstandings and studies details, background and history of the Lee Seungman line. Before the World War Ⅱ, many countries suffered from Japanese pirate fishing method or plunder fishery. Soon after the World War Ⅱ, keeping them in mind, USA announced Truman declaration and restricted Japanese fishery within the MacAthur line. These policies are welcomed by many countries and made worldwide trend to set exclusive fishery zone. Also, Korea declared it, Lee Seungman line to prepare for abolition of the MacArthur line. For these measures, Japanese correspondence was double standard. Japanese government accepted exclusive fishery zones decided by power countries such as USSR or China, also accepted a fishery treaty between USA, Canada and Japan, which posed restriction to Japanese fishermen only. But they never accepted exclusive fishery zone by the lesser power, Korea. This stance is contrary to Japanese pledge to avoid fishery of their own accord at preserved fisheries
일본의해적어법 약탈어업과평화선 독도에대한오해 169 in and out Japan which Japanese did not fish in 1940 at. At that time, there was the preserved fishery off Korea. It was the regulated line by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similar to the Lee Seungman line. Key words: Truman Declaration, MacArthur line, the Lee Seungman line, the preserved fishery, the regulated line by Governor-General of Korea. 이논문은 2017 년 5월 25일에투고하여 2017 년 6월 3~25 일에심사하여 2016 년 6월 26일에게재 결정됨
171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 41 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1) 최장근 * < 목차 > 1. 들어가면서 2. 조선어사전 의 독( 獨 ) 에대한사실날조 3. 고문헌상의 獨島 와 칙령41호 와의관계성부정 4. 고지도로보는 우산도 = 석도 = 독도 의고증 5. 시모조의칙령 41호의 석도 = 독도 에대한날조 6. 맺으면서 < 국문초록 > 죽도문제연구회의좌장격인시모조마사오 ( 下条正男 ) 는비논리적인주장으로칙령41호의 울릉전도, 죽도, 석도 ( 石島 ) 에서석도는독도가아니고지금의 관음도 라고하여사실을날조했다. 첫째, 조선어사전 에서 독( 獨 ) 이돌 ( 석 ) 의사투리로사용되기도했다는내용이있음에도불구하고이러한올바른해석을일부러피하고, 단독( 單獨 ) 이라는의미로사용되는부분을적용하여칙령의석도는독도가될수없다고비논리적인주장을한다. 둘째, 시모조는일본의고문헌니이타카호 ( 新高号 ) 군함일지에는 1904년울릉도에서는독도라고기록하고있다고한것에대한논증을거부하고 1904년경에울릉도사람들이독도에들어가서강치를잡았는데, 그때의울릉도사람들은일본인에게고용되어처음으로독도에들어갔다고사실을날조했다. 셋째, 시모조는광여도와청구도가지금의죽도를우산도로잘못되게비견하고있는것을바탕으로 1900년에발령된칙령41호의 울릉전도, 죽도, 석도 에서 석도 는지금의 관음도 라고주장한다. 그는광여도와청구도가수토사박석창이잘못그린 울릉도도형 을바탕으로하고있다는사실을논증하는것을일부러피하고비논리적으로함부로사실을날조했다. 넷째, 1900년에발령된칙령 41호의 석도 는울릉도사투 ** 대구대학교일본어일본학과교수
172 獨島硏究 제22호 리로 돌섬을 독섬 라고 하는 것을 문헌상 표기로 독도 라고 기술하였다는 것은 1904년 의 일본군함 니이타카호가 증명하고 있고, 심흥택 군수가 1906년 본군 소속 독도(獨島) 라고 표기했던 것으로 명확하다. 그런데 시모조는 침략적인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정당화 하여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비논리적으로 사실을 날조했다. 이처럼 죽도문제연구회 가 독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영토내셔널리즘에 의한 침략행위이다. 주제어: 죽도문제연구회, 독도, 석도, 칙령41호, 조선어사전 1. 들어가면서 과거부터 한국측 동해에는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 두 개의 섬이 존재했다. 그래서 한국측에서는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이전부터 동해의 2섬에 대해 영유권 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해의 두 섬은 지 금의 울릉도와 독도뿐이다. 조선조정은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성종실 록, 숙종실록, 동국문헌비고, 만기요람(군정편) 등 조선시대 내내 동해의 두 섬에 관해 영토로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서 관할해왔다는 증거이다. 특히 1454년 세종실록 지리지 이후 한 국영토로서 우산도(지금의 독도)와 울릉도 두 섬이 존재한다고 인식했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일본의 오키섬 동북쪽에 두 개의 섬이 있다고 기록하 고 있다. 즉 1667년에 저술된 은주시청합기 이후 조선측의 동해에 조선 영토로서 죽도(竹島; 지금의 울릉도)와 송도(松島; 지금의 독도) 1)라는 명 칭으로 두 개의 섬이 존재한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두 섬은 정통한 일본의 고문헌이나 고지도에서 조선의 영토로서 기록되어 있고, 일본영 토라고 기록한 증거는 없다. 일본이 근세 에도시대에 시작된 해금정책을 파기하고 대외적으로 문호 를 개방한 근대에 들어와 서양지도의 영향으로 1880년대에 종래 죽도(竹 1) 은주시청합기 에는 일본의 서북경계는 오키섬으로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大西俊輝(2007) 続 日本海と竹島-隠視聴会合紀を読む-, pp.3-388.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 41 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173 島 ) 라고불리었던울릉도를송도 ( 松島 ) 로잘못비견하는오류를범하여울릉도, 독도의명칭에대해혼란을겪게되었다. 그래서이섬의명칭은일본영역이아니었기때문에지리적무지에의해다양하게등장했던것이다. 요컨대분명한것은근대이전한국에서는동해 2섬이 우산도( 지금의독도 ) 와울릉도 라고명칭으로불리었고, 일본에서는 송도와죽도 라는명칭으로불리었다는사실이다. 그런데근세시대에해금정책으로조선조정이울릉도나우산도에사람의접근을금지하였기때문에해금정책이파기된근대에들어와서두섬에대한섬명칭의혼란이생겼던것이다. 예를들면한국측에서는 죽도 2) 를 우산도( 독도 ) 라고표기한다든가, 일본축에서는울릉도를송도 ( 지금의독도 ) 라고표기한것들이다. 그런데시모조는 석도=독도설의오류와문세영 3) 씨의 조선어사전 4) 이라는제목으로칙령41호에서울도군의행정관할구역으로정해진 울 2) 이섬은울릉도본섬에서 2km지점에위치한섬으로서 1882년이규원이울릉도를조사하였을때 죽도 ( 竹島 ) 라는이름으로 울릉도외도 에처음으로등장한명칭이다. 3) 조선어사전에대해, 최초의뜻풀이 ( 주석 ) 국어사전인 조선어사전 은문세영 ( 한국전쟁때행방불명 ) 이 1917년부터추진을시작해 1929년조선어사전편찬회를조직한뒤이윤재 한징등의도움을받아 20여년만인 1938년약 10만어휘를정리해풀이해놓은역작이다. 최현배의 우리말본 (1937년), 김윤경의 조선문자급어학사 (1938년) 와함께우리말관련 3대중요도서로선정된책이다. 최근국내한고서점에서 조선어사전 을입수한이훈석우리문화가꾸기회상임이사 ( 세미원대표 ) 는 우리나라지명이나고유명사중에소리나는대로표기한한자가많고, 돌 = 독 = 석 으로쓴사례는무수히많아굳이설명할필요조차느끼지못하지만, 지금껏일본은문헌근거가없다는이유로우리쪽주장을무시해왔다 고말했다. 하지만일제의통제속에서조선어사전간행회주도로박문서관에서펴낸 조선어사전 초판본에서분명하게용례를밝혀놓은만큼 일본쪽 억지 에반박할수있는소중한자료 라고그는평가했다. 라고했다. 독도 = 석도 입증할 조선어사전 초판본찾았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 758755.html#csidx1482988413327e49d5c73c49a790971( 검색일 : 2017년 5월 4일 ). 4) 下條正男, 第 48 回石島 = 独島説の誤謬と文世栄氏の 朝鮮語辞典 (2016 年 9 月 9 日掲載 ), 実事求是 ~ 日韓のトゲ, 竹島問題を考える ~, Web 竹島問題研究所, http://www. pref.shimane.lg.jp/admin/pref/takeshima/web-takeshima/( 검색일 : 2017년 4월 26일 ).
174 獨島硏究제 22 호 릉전도, 죽도, 석도 (= 독도 ) 에대해비논리적으로 석도 = 독도 가아니라고사실을날조했다. 5) 일반적으로교수가연구한것은모두진실일것이라고믿는경향이있는데, 시모조는다쿠쇼쿠대학교수라는직함을악용하여사실을날조하고있다. 근대문호개방이후고종황제는일본의울릉도와독도침입이본격화되는것을우려하여칙령41호로울도군을설치하고행정관할구역으로 울릉전도, 죽도, 석도 ( 독도 ) 를명확히했던것이다. 시모조의주장처럼 울릉전도, 죽도, 석도 ( 관음도 ) 라고한다면 1454년세종실록지리지에서볼수있듯이조선건국이후선조대대로계승해온독도영토를포기했다는말이된다. 고종은동해의영토인울릉도와우산도 ( 지금의독도 ) 를수호하기위해일부러울도군을설치한것이었다. 6) 본연구는많은선행연구 7) 에서석도가독도라는사실을규명했음에도 5) 경상북도독도사료연구편 (2014) 죽도문제10문100답 에대한비판 경상북도, pp.99-102. 下條正男 (2004) 竹島日韓どちらのものか, 文春新書, pp.105-133. 下條正男 (2005) 竹島その歴史と領土問題 竹島北方領土返還要求運動島根県民会議, pp.74-113. 6) 나이토우세이쭈우저, 권오엽, 권정역 (2005) 獨島와竹島 제이앤씨, pp.116-212. 송병기편 (2004) 독도영유권자료선 한림대학교아시아문화연구소, pp.9-252. 송병기 (1999) 울릉도와독도 단국대학교출판부, pp.184-207. 신용하 (2011) 독도영유권에대한일본주장비판 서울대학교출판부. pp.163-186. 内藤正中, 朴炳涉 (2007) 竹島独島論争 新幹社, pp.152-165. 内藤正中, 金柄烈 (2007) 史的検証竹島独島 新幹社, pp.77-100. 7) 선행연구로서다양한연구가진행되고있지만, 특히 국내학계에서는지금껏 석도 = 독도 를간접적으로나마입증하기위해다양한문헌기록조사와연구작업을벌여왔다. 국립중앙도서관이기봉고서전문원의 순한국말지명과한자표기의관계를통해본석도 독도고찰 (2012 년 문화역사지리 제24권 ) 논문이가장최근의대표자료에속한다. 이논문에서는특히한자어인 독도 ( 獨島 ) 의 독 이구한말울릉도일대이주민의대다수를차지했던전라도지방에서 돌 ( 石 ) 을뜻하는단어로널리쓰였다는사례를일제가펴낸 조선지지자료 (1911 년 ) 와남한모든지역을망라한 한국지명총람 (1966~86년) 등전국지명조사자료를비교분석해밝히고있다. 특히 1979년나온 한국지명총람 7 ( 경북편 Ⅳ) 의울릉군울릉읍도동리에 독도 ( 獨島 ) 독섬 으로나와있다. 순우리말지명의첫번째글자에서 돌 ( 석 ) 과동일한의미로사용된 독 의사례로모두 3 19개나확인됐고, 이가운데 독 이 돌 과같음을분명하게보여주는 한자석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 41 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175 불구하고, 죽도문제연구회는이를부정하기위해억지로논리를날조하고있기때문에그오류를지적하여독도영유권의본질을규정하려고하는것이다. 2. 조선어사전 의 독 ( 獨 ) 에대한사실날조 1) 대삼국지도 ( 大三国之図 ) 에의한 독도 = 한국영토 해석부정 시모조는칙령41의 석도( 石島 ) 해석에대해 한국측에서는지금까지 1900년 10월 25일자 칙령제41호 ( 제2조 ) 에울도군의행정구역이 울릉도전도, 죽도, 석도 라고명기되어있음을근거로그석도를독도라고해석하여독도는 1900년에한국영토가되었다고해왔다. 이번에발견된문세영씨의 조선어사전 은그석도가독도임을 증명 하는증거이라는것이다. 8) 라고한국측의논리를비판했다. 또한 이책을발견한사단법인우리문화가꾸기회에따르면 조선어사전 ( 朝鮮語辞典 ) 에는 독[ 명 ], 돌 ( 石 ) 의사투리, 석 ( 石 ) ( 돌은명사로서돌의사투리이고, 石 을의미한다 ) 이라는기술이있고, 그것은 당시석도 ( 石島 ) 가독도 ( 獨島 ) 의다른명칭이었다는것을나타내는명백한증거이라고한다. 9) 라는내용도부정했다. 그렇다면다양한형태로전개하고있는시모조의날조사실에대해살펴보기로한다. 으로표기된사례도 68개나된다 고이고서전문원은분석해놓았다. 이런연구결과는 시모조마사오등일부일본학자들이일본어발음이비슷하다는이유로 석도 = 깎세섬 이라고주장하는것도논리적오류란사실을확인시켜준다 고했다. 한겨레신문, 2017년 9월 2일,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 758755.html#csidx1482988413327e49d5c73c49a790971( 검색일 : 2017년 5월 4일 ). 8) 下條正男, 第 48 回石島 = 独島説の誤謬と文世栄氏の 朝鮮語辞典 (2016 年 9 月 9 日掲載 ) 참조. 9) 下條正男, 第 48 回石島 = 独島説の誤謬と文世栄氏の 朝鮮語辞典 (2016 年 9 月 9 日掲載 ) 참조.
176 獨島硏究 제22호 시모조는 우리문화가꾸기회 에 대해 평가하여 그것은 우리문화가꾸 기회 관계자의 독단이다. 사단법인 우리문화가꾸기회 는 지난해 7월에도 하야시 헤이(林子平; 1738~93) 가 제작한 1802년판 대삼국지도(大三国之 図) 가 독도를 조선령(朝鮮ノ持也 )이라고 해서 사실무근의 발언을 한 전 력이 있다. 10)라는 식으로 독도관련 역사를 날조하는 단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오히려 시모조가 하야시 시헤이의 지도에 독도가 한국영토라고 하는 부분이 없다고 하는 것이 사실을 날조하는 것이다. 하야시의 대삼 국지도 에는 동해바다에 2개의 섬을 그리고 있고, 한쪽은 죽도(울릉도), 다른 한쪽은 송도(독도)라고 표기하고 있다. 17세기 이후 에도시대의 일 본에서는 한국령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죽도(竹島)와 송도(松島) 로 표기 해왔다. 여기에 조선의 것 이라고 표기하여 죽도(울릉도) 와 송도(독 도) 가 조선의 영토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11) 따라서 우리문화가꾸기회 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고 한 것은 올바른 해석 이다. 그런데 시모조 마사오는 하야시 시헤이 지도는 독도와 무관한 지도 라고 사실을 날조했다. 10) 11) 下條正男, 第48回 石島 独島説の誤謬と文世栄氏の 朝鮮語辞典 (2016年 9月 9日 掲載) 참조. 1802년 일본 지도 독도는 조선 것, http://joongang.joins.com/article/937/18258937. html?ctg=1700&cloc=joongang article hotclick(검색일: 2017년 5월 17일), 중앙일보 2015.07.17.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 41 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177 2) 조선어사전 에의한 석도 = 독도 의해석부정 시모조는 우리문화가꾸기회 의 석도 = 독도 라는주장에대해 이번칙령41호의 석도 에대해서도하야시의 대삼국지도 를잘못해석하는것과같은오류를범하고있다. 12) 라고하여사실을날조했다. 조선어사전 의같은페이지에 독 ( 独 )[ 名 ]; 단독( 単独 ) 약자 ( 独은명사単独의약자이다.) 라는기술이있기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문화가꾸기회 식으로해석을하면 독 ( 独 ) 은단독 ( 単独 ) 의약자이다. 이때문에독도 ( 独島 ) 는단독 ( 単独 ) 으로존재하는섬이라는의미에서독도 ( 独島 ) 라고표기되었다. 따라서이 독( 独 ) 은독도 ( 独島 ) 가울도군 ( 欝島郡 ) 의행정구역에포함되어있지않고석도 ( 石島 ) 가아니었다는 명백한증거 이다. 같은 조선어사전 의기술을근거로해서정반대로해석을할수있는것은 독 [ 명 ]; 돌( 石 ) 이변화된것. 석 ( 石 ) 에는석도 ( 石島 ) 를현재의독도 ( 独島 ) 라고하는증거능력이없다는것이다. 13) 라고사실을조작했다. 그러나사실은다르다. 사전을찾으면한단어에는여러가지의의미를갖고있는말들이있다. 바로 독 이라는말에도여러가지의미를갖고있다. 조선어사전에는 독 이여섯가지의의미가있다고설명하고있다. 첫번째의 독 은그릇에관한설명, 두번째의독은 돌 이라는의미, 세번째의 독 은 독약 의준말, 네번째는 단독 의줄인말, 다섯번째는 주독 의준말, 여섯번째는 둑( 纛 ) 과관련되는말 이라고되어있다. 여기서시모조는 6개의 독 의의미중에서왜 단독 의줄인말이되는지에대한이유를설명하지않았다. 주장이성립이되려면확실한논증이있어야한다. 시모조의주장에는객관적인논증은없고비논리적인주장만존재한다. 지금의 독도( 獨島 ) 는돌로된섬이다. 돌섬을독도 ( 獨 12) 下條正男, 第 48 回石島 = 独島説の誤謬と文世栄氏の 朝鮮語辞典 (2016 年 9 月 9 日掲載 ) 참조. 13) 下條正男, 第 48 回石島 = 独島説の誤謬と文世栄氏の 朝鮮語辞典 (2016 年 9 月 9 日掲載 ) 참조.
178 獨島硏究 제22호 島)라고 칭하는 사례가 많다.14) 또한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는 돌 을 독 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고인돌을 고인독 이라고 불렀 고,15) 독옷 이라고 하여 바위에 붙은 해초를 두고 돌이 옷을 입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16) 따라서 6개의 독 의 의미 중에 가장 관련성이 있 는 의미는 두 번째의 독 인 돌의 사투리 라는 말이다. 그런데 시모조는 네 번째의 독 인 단독(單獨)의 줄인 말 이라고 하여 지금의 독도가 칙 령41호의 석도(石島) 와 무관하다고 사실을 날조했다. 3. 고문헌상의 독도(獨島) 와 칙령41호 와의 관계성 부정 1) 일본 고문헌의 독도(獨島) 에 대한 해석 날조 시모조는 칙령41호의 석도(石島) 가 독도가 아니라고 사실을 조작하 고 있다. 1904년 일본군함일지에 니이타카호가 이미 울릉도에서 독도(獨 島) 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사실을 날조한 다. 14) 15) 16) 이기봉(2012) 순한국말 지명과 한자 표기의 관계를 통해 본 석도 독도 고찰, 문화역사지리 제24권, 조선지지자료 (1911년), 한국지명총람 (1966~86년), 한국지명총람 7(경북편 Ⅳ) (1979) 참조. KBS1 한국인의 밥상 제311회(진도 편) 참조.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제349회(깡깡한 독[돌] 혹은 고인독) 참조.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 41 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179 즉, 다케시마를불법점거하는한국측에서는지금까지도비슷한궤변을늘어왔지만, 칙령제41호 의석도를독도라고말하기위해서는 칙령제41호 의성립과정부터분명히할필요가있다. 그것은석도가어떤섬인가가아니라울도군 ( 欝島郡 ) 의행정구역이정해진역사적경위를명확히하는것이다. 게다가독도가문헌상에나타난것은 1904년 9월군함 니이타카 ( 新高 ) 호 의항해일지에 한국인은이것을독도 ( 獨島 ) 라고쓴 ( 書 ) 다 라고기록된것이최초의사례이다. 울릉도의한국인이현재의다케시마 ( 竹島 ) 주변에서어로활동에종사하게된것은일본인에게고용되어출어한 1904년경이다. 그독도가 석도가되었다 고하는것은무리 17) 라는것이다. 군함니이타카 ( 新高 ) 호는동해바다의두섬주변을왕래하던일본인들이전통적인송도 ( 松島 ; 독도 ) 와죽도 ( 竹島 ; 울릉도 ) 의섬명칭에혼돈을일으켜서울릉도를송도 ( 松島 ) 라고칭하게되어이를확인하기위해울릉도와독도를조사했던것이다. 이때에니이타카호는울릉도에서는이미 독도( 獨島 ) 라는표기를하고있다고확인한것이다. 기록으로확인했다는것은공문서를의미하는것으로당시의울릉군청이었을것으로판단된다. 18) 당시울릉군청에서 독도 ( 獨島 ) 라는명칭을사용하고있었음을확인해주는것이다. 명칭이표기되었다고하는것은우선주민들이먼저 독도 라는호칭했다는것이고, 그것이 독도( 獨島 ) 라고표기되었던것이다. 그렇다면니이타카호 19) 가 1904년에조사하였으므로이미그이전에울릉도사람들은독도라고호칭하고있었다는것이다. 1904년에확인된것이므로거슬러올라가서 1900년 칙령41호의 석도 = 독도 라고생각하는것은아주자연스러운것으로전혀모순적이지않다. 17) 下條正男, 第 48 回石島 = 独島説の誤謬と文世栄氏の 朝鮮語辞典 (2016 年 9 月 9 日掲載 ) 참조. 18) 독도 ( 獨島 ) 라는명칭으로표기한다고하는것이울릉도의어떤문서에서확인하였는지에대해서는구체적으로밝히고있지않기때문에논증이필요하다. 19) 1904 년 9 월 군함新高號행동일지 참조.
180 獨島硏究제 22 호 그런데시모조는이와같은본질적인규명을피하고, 한국어의반절차음 이라는전혀관련이없는문법적인것을갖고와서사실을날조한다. 즉 1904년경에울릉도사람들이일본인들에게고용되어처음으로독도에갔기때문에울릉도에서독도 ( 獨島 ) 라는명칭을사용하게된것은일본의영향이라는주장이다. 20) 이것또한설득력이전혀없는날조된비논리이다. 1904년에나카이요사부로가울릉도에서강치잡이를했다는기록이있다. 21) 1903년 ( 明治 36) 시점에독도에서강치잡이를한것과 1904년의울릉도행정문서에 독도( 獨島 ) 라고기록 ( 書 ) 하고있다 는것과는아무런상관관계가없다. 2) 한국고문헌의 독도 ( 獨島 ) 에대한해석날조 시모조는한국문헌에등장하는독도 ( 獨島 ) 명칭에대해서도사실을날조했다. 즉, 대한제국관계자가독도에대해언급한것은 1906년. 그것도울도군수 ( 欝島郡守 ) 심흥택 ( 沈興澤 ) 이 본국소속 ( 本邦所属 ) 독도 ( 独島 ) 가먼바다백여리 ( 外洋百余里 ) 밖 ( 外 ) 에있다 고한것이시작이다. 하지만그발언에는큰문제가있었다. 울도군수라면당연히행정구역이 울릉도전도 ( 欝陵島全島 ) 와죽도 ( 竹島 ) 석도 ( 石島 ) 가어떠한섬인지그사실을잘알고있었을것이기때문이다. 그것을죽도 ( 竹島 ) 도석도 ( 石島 ) 도아니고, 독도 ( 独島 ) 를본방소속 ( 本邦所属 ) 이라고한것은독도가 칙령제41 호 에서정한울도군의행정구역외에단독으로존재하고있었기때문일것이다. 따라서울도군수심흥택의보고를받은대한제국정부도혼란스러웠다. 참정대신이다시독도의 형편 ( 상황 ) 을보고하도록요구한것은울도군의행정구역외에새롭게출현한독도에대해중앙정부가그존재 20) 下條正男, 第 48 回石島 = 独島説の誤謬と文世栄氏の 朝鮮語辞典 (2016 年 9 月 9 日掲載 ), 実事求是 ~ 日韓のトゲ, 竹島問題を考える ~, Web 竹島問題研究所, http://www. pref.shimane.lg.jp/admin/pref/takeshima/web-takeshima/( 검색일 : 2017 년 4 월 26 일 ). 21) 田村清三郎 (1965) 島根県竹島の新研究 島根県総務部総務課, pp.40-66.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 41 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181 를파악하지않았다는증거이다. 22) 라는것이다. 심흥택군수가 본국소속독도 ( 獨島 ) 라고한것은울도군에서 독도 ( 獨島 ) 라는명칭으로문헌상으로기록하여관할하고있었다는증거이다. 이것은 1904년니이타카호의조사에서도밝혀졌다. 그섬의명칭은 1882 년개척당시울릉도에개척민이정착하기시작할때부터울릉도민들로부터 독도 ( 獨島 ) 라고호칭되었음을알게한다. 그런데시모조는울도군수가칙령41호의 울릉전도, 죽도, 석도 에서 석도 라는섬의위치를잘알고있었을것인데, 석도 라고하지않고 독도 라고호칭했다는것은석도는독도가아니라는것이다. 시모조는심흥택울도군수가반드시 석도가독도가아님을잘알고있었을것 이라고단정했다. 이처럼시모조는논증되지않은비논리적주장으로사실관계를날조했다. 중앙정부의행정문서인칙령41호는분명히한자어로문헌을표기하는것이다. 그러나울도군에서는주민들에의해속칭으로불리어진것을 독도 ( 獨島 ) 라고표기했던것이다. 울도군수심흥택이 본방( 本邦 ) 소속독도 ( 獨島 ) 라고한것은당시울도군에서는그섬을 독도( 獨島 ) 라고호칭하고표기하고있었기때문이다. 심흥택군수가중앙정부가작성한칙령의표기인 석도 라는명칭을도민들에게반드시사용하도록하고울도군의행정문서에반드시동일하게석도 ( 石島 ) 라고표기해야할이유가없다. 그런데 1900년의칙령41호를작성할시점에서는독도가외양바다에 단독 으로존재했기때문에알지못했다고하는시모조의주장은비논리적인사실의날조이다. 독도는울릉도본섬에서배로전방으로 20km 이상을진행하거나, 23) 해발 100m 이상의높은지점에올라가면보이는섬이 22) 下條正男, 第 48 回石島 = 独島説の誤謬と文世栄氏の 朝鮮語辞典 (2016 年 9 月 9 日掲載 ), 참조. 23) 가와카미겐조는 날씨가맑은날독도로부터 27마일 떨어진위치에서섬이보이기시작했다 고한다. 그는독도가울릉도에서보이지않는다는것을주장하기위한것이기에신뢰성이떨어진다. 그래서정확한재검증을요한다. 川上健三저, 權五曄역 (2010) 일본의독도논리-죽도의역사지리학적연구 백산자료원,
182 獨島硏究제 22 호 다. 24) 울릉도에서독도가보이지않기때문에독도의존재를알지못했다는주장은비논리적인날조행위이다. 시모조는심흥택군수가일본에의해 본국소속독도 ( 獨島 ) 가일본에의해침탈당했다 는사실을알렸을때, 참정대신이 독도의형적을보고하라 라고한것은독도가한국영토가아니었기때문이라고주장했다. 그것은사실이아니고, 중앙정부의참정대신이울릉도의외양바다 100리밖에있는당시의독도에대해일본의침략상황에대해더자세하게보고하라는의미였다. 이처럼시모조의비논리적인행동은독도가한국영토라는것을부정하는날조행위이다. 4. 고지도로보는 우산도 = 석도 = 독도 의고증 1) 섬의위치순으로보는고증 시모조는별도의논증없이칙령41호의 울릉전도, 죽도, 석도 에서석도가지금의독도가아니라고사실을날조하고있다. 그렇다면, 1900년이전에제작된다양한지도에서 울릉전도, 죽도, 석도 가어떠한섬을두고말하는지논리적으로설명해보기로한다. 먼저, 현재의울릉도지도 25) 를보면서섬을위치적으로볼때칙령41호의 울릉전도, 죽도, 석도 가어떠한섬인지를확인해보면, 316-320. 24) 상동. 25) 울릉도관광지도, http://cafe.daum.net/yeosasa/dde6/6?q=%bf%ef%b8%aa%b5% B5%20%C1%F6%B5%B5&re=1( 검색일 : 2017년5월10일 ), 위의지도에서울릉도에서독도까지의거리는 92km라고되어있는데, 정확하게는 87.4km이다. 또한울릉도주변에는관음도와죽도를제외하고공암, 딴바위, 삼선암, 북저바위가있음을확인할수있다.
죽도문제연구회의 칙령41호 石島 獨島 날조에 대한 논증 183 울도군의 행정관할구역 울릉전도, 죽도, 석도 중에서 울릉 전도 라 는 것은 칙령41호에 제시된 죽도 를 제외한 그 내측에 산재하는 울릉도 주변의 모든 섬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따라서 울릉 전도 는 위의 울릉도 지도에서 울릉도 본섬을 포함하여 그 주변의 관음도(과거 명칭은 도항)와 4개의 작은 암초들이 포함된다. 죽도 라는 명칭은 1882년 이규원 관찰사 가 울릉도외도 에 표기하여 죽도 라는 명칭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울릉 도 본섬에서 2km지점에 위치하여 상시로 보이며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섬26)을 말한다. 그리고 석도 라는 섬은 죽도 27)보다 거리적으로 더 멀 리 있고, 크기 면에서도 더 크지 않으면서도 영토로서 반드시 관리해야 하는 섬을 말하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의 독도임에 분명하다. 2) 동국여지승람의 동람도 유형 현재의 독도를 나타내는 고지도의 변천사28)는 단순한 한 가지 형태가 26) 27) 28) 실제로 이 섬에는 한 가정의 거주민이 살고 있다. 이아러브울릉도. http://dd1.co.kr/board/bbs/board.php?bo_table=mboard02&wr_id= 31(검색일:2017년 5월6일), 울릉도와 독도를 표시한 조선지도 목록, http://blog.naver.com/cms1530/1003324 1907(검색일:2017년 5월6일), 이 지도목록은 독도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184 獨島硏究제 22 호 아니다. 크게는 4가지형태로구분된다. 첫째가동국여지승람의 동람도인팔도총도유형, 둘째는수토사들의경험에의해작성된 광여도유형, 셋째는수토사들이광여도를참고로하여그린 청구도유형, 넷째는 19 세기에들어와서일본인과조선인이울릉도에거주하기시작하면서독도의위치가명확해지면서그려진 대조선국전도유형 이있다. 동국여지승람동람도인팔도총도 29) 유형은 우산도-울릉도 형식으로나열되어우산도가울릉도에서쪽에위치하고, 또한우산도도울릉도와같이사람이거주하는섬으로인식되었던것이다. 이렇게인식하게된배경은조선조정의쇄환정책으로울릉도에사람의거주가금지되어있어서실제로지금의독도인우산도를확인할수있는기회가없었기때문이다. 그래서단지동해에 2개의섬이영토로서있다고인식만존재했던것이다. 이동국여지승람이 1531년에작성되어동해에우산도와울릉도 2개의섬을그리고있기때문에 1900년의칙령41호에행정관할구역으로정하고있는 울릉전도, 죽도, 석도 라는명칭이없기때문에칙령41호와는전혀무관한지도이다. < 동국여지승람 - 동람도 ( 東覽圖 )- 팔도총도 ( 八道總圖 ), 1531> 29) 울릉도와독도를표시한조선지도목록, http://blog.naver.com/cms1530/10033241 907( 검색일 ; 2017년 5월 17일 ).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 41 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185 3) 박석창의수토지도, 울릉도도형 ( 鬱陵島圖形 ) 1711년 ( 숙종 37) 수토사삼척영장박석창 30) 이울릉도수토를바탕으로 울릉도도형( 鬱陵島圖形 ) 31) 을제작했다. 울릉도도형 은섬의여러가지사정에관해서상세히표기한것으로볼때현지를답사하여직접그린것임을알수있다. 지금의죽도 ( 竹島 ) 에대해 소위우산도 라고이름을붙였다. 소위 라는말은 말하자면 이라는추측의의미를갖고있어서 사실이분명하지않을때 하는표현이다. 즉다시말하면박석창은수토사로서 울릉도와우산도 를수토할임무를명받았지만, 우산도 를발견하지못하고지금의죽도를 소위우산도 라고표기하여 이섬이우산도일수도있다 고추측하여표기했던것이다. 따라서박석창이말하는 소위우산도 라는섬은 동국여지승람 에서말하는 우산도 가아니다. 실제의 우산도 ( 독도 ) 를찾지못하여추측으로 죽도 에 소위우산도 라고잘못표기한것이다. 따라서이시기에는 1882년 울릉도외도 가작성될때명명된 죽도 라는섬의명칭이없었기때문에 소위우산도 라고잘못명명되기시작했던것이다. 따라서이지도에는칙령41호의 석도 를확인할수있는증거자료가될수없다. 30) 有政 兵批, 同知梁益命, 文兼吳勣, 同知崔萬尙, 全羅左水使李壽民, 文兼朱恒道, 景福宮假衛將具文行, 文兼洪錫九, 部將趙德基, 忠壯衛將金泰雄, 三陟營將朴錫昌, 五衛將李徵瑞,..., 승정원일기, http://sjw.history.go.kr/inspection/insp_result.jsp?mode=k&sjwid =SJW-D36090270-00500( 검색일 ; 2017년 5월 17일 ) 숙종 36년 ( 무오 ) 원본456책 / 탈초본24책 (5/5) 康熙 ( 淸 / 聖祖 ) 49년. 31) 울릉도도형 은비변사에소장된기밀본이다. 辛卯五月十四日自倭舡倉移舟待風所拙書一句以標日後 ( 刻立卯岩木於方上 ) 萬里滄溟外將軍駕桂舟平生伏忠信履險自無漫搜討官折衡將軍三陟營將兼水軍僉節制使朴錫昌軍官折衡朴省三金壽元倭學朴命逸 ( 신묘 (1711) 5월 14일왜선창에서대풍소 ( 待風所 ) 로배를옮겨서툰글한마디표기하다. 뒷날 ( 方上에묘암목을세워새겨넣었다 ). 만리푸른바다밖장군계수나무배에오르다. 평생을충신 ( 忠信 ) 에기대어험난함이스스로사라진다. 수토관척위장군삼척영장겸수군첨절제사박석창, 군관절충박성삼 김수원, 왜학박명 ), 한글번역 ; 한마음님, 울릉도와독도를표시한조선지도목록, http://blog. naver.com/cms1530/10033241907( 검색일 ; 2017년 5월 17일 )
186 獨島硏究 제22호 <울릉도도형(鬱陵島圖形), 1711, 박석창(朴錫昌)> 4) 광여도 유형의 울릉도 광여도32)의 울릉도 지도33)에는 소위 우산도 라고 표기된 섬이 있다. 이것은 박성창의 울릉도도형처럼 현지답사를 바탕으로 상세한 지형은 그 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박석창의 지도를 참고로 하여 단지 울릉도 주변의 6개섬만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광여도는 울릉도에 속하는 부속 섬만 을 표기하여 소유의식을 담은 지도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 지도의 소위 우산도 도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우산도 의 위치를 잘 알지 못하여 추측성으로 박석창의 울릉도도형 을 그대로 옮겨놓은 잘못된 지도라고 하겠다. 동국여지승람의 동람도에서는 동해에 두 개의 섬을 표기하여 영 토의식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광여도에서는 우산도를 울릉도 의 일부에 포함시켜서 6개의 부속 섬 중의 하나로 표기하여 동해에는 유 일한 섬으로 울릉도만 존재한다고 잘못 표기한 지도이다. 32) 33) 광여도-울릉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1737-1776. 울릉도와 독도를 표시한 조선지도목록 http://blog.naver.com/cms1530/10033241907 (검색일: 2017년 3월 15일).
죽도문제연구회의 칙령41호 石島 獨島 날조에 대한 논증 187 5) 청구도 유형 청구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주변에 6개를 그린 것은 광여도의 영향 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청구도의 특징은 광여도의 소위 우산도 에 대 해 단순히 우산 이라고 변경한 점이 특징이다. <광여도-울릉도> <청구도-울릉도> 또한 우산 에 나무가 있는 것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광여도를 토 대로 하여 산의 표시 로 우산 이라고 하여 섬의 새로운 정보를 추가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서 우산 을 현지답사34)로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는 우산 표시는 종래 우산도와 울릉도 2섬의 인식이 아니고, 동해에 울릉도뿐인 1개의 섬 인식으로서 울릉도 주변에 수목이 없는 5개의 암초와 나무가 자라는 우산 35)을 울릉도의 부속섬으 34) 35) 당시 울릉도를 답사한 사람은 수토사들이었기 때문에 수토사들에 의한 정보로 추측된다. 일본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대동여지도 의 필사본에는 목판본과 똑같이 그려 진 울릉도 외에 그 동쪽으로 그보다 작게 우산 으로 표기된 섬이 있고, 청구도 와 마찬가지로 조최수의 오류에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다. 라는 것은 대동여지 도와 청구도는 동일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산 에 두 개의 산봉우리가 표시된 점은 곧 현재의 독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188 獨島硏究제 22 호 로표기하고있다는점이특징적이다. 하지만청구도 36) 의 우산도 는지금의 죽도 이다. 수토사들이실제의우산도 ( 지금의독도 ) 를확인하지않고, 기존동해바다의울릉도와우산도두섬의인식을변경하여죽도에다 우산 이라는명칭을붙인것이다. 사실많은수토사들이동해에영토로서 2개의섬이존재한다는인식을갖고있으면서도울릉도에서 87.4km에위치하고있는우산도 ( 지금의독도 ) 를발견하지못했기때문에생긴오류였던것이다. 청구도에는 우산 아래쪽에 영조 11년 (1735) 에강원도감사조최수 ( 趙最壽 ) 가장계를올려 울릉도는땅이넓고토지가비옥하며, 사람이거주한터가있다. 또그서쪽에우산도가있는데, 역시광활하다. 고말하였는데, 이른바서 ( 西 ) 자는이지도의동쪽에있는것과서로맞지않는다. 는설명을부연하고있다. 37) 여기서청구도를그린김정호는 1735년에제작된조최수의 울릉도지도 를참고로했는데, 그서쪽에우산도가있는데, 역시광활하다 라고표기한것은 1531년에제작된 증보동국여지승람 동람도 의 2섬인식에기인한것이다. 죽도에 우산 이라고표기한것은조최수의 울릉도지도 에 그서쪽에우산도가있는데, 역시광활하다 라고표현한것을바탕으로마침지금의 죽도 가사람이살수있는섬이라는것을확인하고그곳을 우산 이라고표기하였던것이다. 김정호는실제로 우산도 가울릉도의동쪽어디에있다는사실을알고 다. ( 울릉도와독도를표시한조선지도목록, http://blog.naver.com/cms1530/1003 3241907( 검색일 : 2017 년 1 월 5 일 )) 라는설명은잘못이다. 산봉우리라고하는표기는바위가아니고수풀이자라고있다는표기이다. 36) 김정호 ( 金正浩 ) 청구도 ( 靑邱圖 ) 는 1834년김정호가전국을동서로 22판, 남북으로 29층으로나누어제작한건 곤 2책의지도책이며, 청구요람 ( 靑邱要覽 ) 혹은 청구선표도 ( 靑邱線表圖 ) 라고도부른다 ( 울릉도와독도를표시한조선지도목록, http://blog.naver.com/cms1530/10033241907( 검색일 : 2017년 2월 12일 )). 37) 조최수의장계는김정호가저술한 여도비고 ( 輿圖備考 ) 와 대동지지 ( 大東地誌 ) 에도실려있다., 울릉도와독도를표시한조선지도목록, http://blog.naver.com/ cms1530/10033241907( 검색일 : 2017년 2월 12일 ).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 41 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189 있었지만, 실제의 우산도 를확인하지못했기때문에 서쪽 를 동쪽 으로방위만수정하여 우산 이라는지명으로표기하여울릉도의부속섬으로표기하고말았다는것이다. 따라서김정호는실제의 우산도( 지금의독도 ) 가정확하게어디에있는지에관해사실관계를확인하지못했던것이다. 김정호는조최수의오류를지적하여우산도가울릉도의동쪽에위치한다는사실을명확하게밝히려고했다. 그러나김정호도우산도의위치를정확하게파악하지못하고안용복사건이후 죽도 를 이른바우산도 혹은 우산도 라고오류를범한수토사들의잘못된보고서를토대로오늘날의 죽도 에 우산 라고표기했던것이다. 따라서이시기에도 죽도 라는명칭이없었기때문에 1900년의칙령41호의 석도 의진실을확인하는데는부적절한지도이다. 6) 대조선국전도 유형 대조선국전도( 大朝鮮國全圖 ) 의강원도 ( 江原道 ) 38) 지도는 19세기말에제작된것으로 1876년 조일수호조규 가체결됨으로써, 사람의거주를금지하고있는울릉도에조선인들과일본인들이내왕하여거주하기시작했기때문에울릉도와독도의위치가잘알려진시기에그려진지도이다. 따라서울릉도와독도의위치가대체로정확하다. 그런데 대조선국전도-강원도 지도도 울릉도 - 우산 이라는형태로표기된것으로볼때, 동국여지승람의팔도총도와같이동해에우산도와울릉도로이루어진 2개의섬인식이아니고, 우산 을 울릉도 의부속섬으로해서동해에 1개의섬만이존재한다고그린지도이다. 이지도도청구도의인식의영향을받았다고할수있으나울릉도주변의 5개의암 38) 울릉도와독도를표시한조선지도목록, http://blog.naver.com/cms1530/10033241 907( 검색일 : 2017년 5월 1일 ).
190 獨島硏究 제22호 초를 그리지 않고 우산 만 그렸다는 사실로 볼 때는 이 우산 은 지금의 독도를 가리키지만, 울릉도가 아닌 또 다른 별개의 섬, 즉 2개의 섬이 동 해에 존재한다는 인식은 아니다. 그 이유는 1882년대 이전에 안용복 및 일부 수토사를 제외하고 실제의 독도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산 이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그려졌다고 하겠다. 또한 이 지도에는 대마도 를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대동여지도39)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40) 따라서 이 시기에도 죽도라는 명칭의 섬이 없었기 때문에 칙령41 호의 석도 를 고증하기에는 부적절한 지도이다. 대조선국전도-강원도(大朝鮮國全圖-江原道), 19세기말, 독도박물관 소장 39) 40) 대동여지전도 영인본, 1861~1865, 숭실대학교 소장, 대동여지도는 고산자 김정 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총22첩으로 구성됨. tapclass (2011년6월), http://topclas s.chosun.com/board/print.asp?catecode=&tnu=201106100007(검색일: 2017년 5월 17 일)에서 인용. 대동여지도는 1861년에 제작되었는데, 대마도를 조선영토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를 볼 때 대동여지도도 조선조정의 영토인식을 전적으로 반영한 지도가 아님 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독도는 한국영토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 41 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191 요컨대, 조선조정이지금의독도에대해영토인식은갖고있었지만그위치에대한인식은시대에따라달랐다. 울릉도와독도로도항이금지되지않았을때는울릉도와독도의위치를정확히알고있었지만, 17세기이후울릉도와우산도 ( 독도 ) 도항이금지되었던쇄환시기에는독도의위치를정확히확인할수있는기회가많지않았기때문에우산도 ( 지금의독도 ) 의위치를두고논란이많았다. 1882년이후울릉도가개척되어울도군수가관할하던시기에는독도의존재가거주민들에의해명확해짐으로써독도라고불리는섬 ( 고지도의우산도, 지금의독도 ) 에대해 1900년의칙령41호에서는공식문서표기인한자표기로 석도( 石島 ) 라고했던것이다. 그런데시모조는칙령41호의 울릉전도, 죽도, 석도 에서석도가독도라는사실을부정하기위해현재적관점에서울릉도와독도간의거리가멀리떨어져있었기때문에독도의위치를정확히알지못했다는논리를날조하여지금의거리 41) 인식을바탕으로석도가지금의독도가아니라고부정했다. 위에서도살펴보았듯이 19세기말에제작된 대조선국전도- 41) 울릉도 - 독도간의거리, http://4.bp.blogspot.com/_fydurep3tl0/ttbxccsckfi/a AAAAAAAAAQ/2w8-i0vVWJE/s640/img_158.jpg( 검색일 : 2017 년 3 월 2 일 ).
192 獨島硏究제 22 호 강원도 ( 大朝鮮國全圖 - 江原道 ) 에서는동쪽에위치해있는독도의존재를확인했던것이다. 따라서칙령 41호가발령되었던 1900년시점에서는이규원검찰사의조사에의하면이미 1882년시점에울릉도에한국인 140여명과일본인 78명이이미거주 42) 하고있었기때문에울릉도에서보이는거리에있는독도의존재를파악하지못했다고하는시모조의주장은사실을날조한것이다. 5. 시모조의칙령 41 호 석도 = 독도 에대한날조 1) 칙령 41 호 에서의울도군영역에대한사실날조 칙령41호의범위는구체적으로수치로서밝혀져있지는않았지만, 지금의독도까지를범위로삼았던것이다. 그런데시모조는 칙령제41호 에서정한울도군의행정구역범위는어디까지였는지, 지금까지한국은 본방소속독도 를석도라고어원론을중심으로열심이었기때문에역사연구가부족하다. 그러나 칙령제41호 는 1900년 6월울릉도에서한일공동조사를행한우용정 ( 禹用鼎 ) 청의서 ( 請議書 ) 가바탕이되어성립된것이다. 43) 라고사실관계를날조한다. 그런데시모조는이를수치로표기하여 석도는지금의독도가아니다 고사실을날조하고있다. 즉, 그때, 우용정스스로 울도기 ( 欝島記 ) 에서울도군이되는울릉도의강역 ( 疆域 ) 를 섬둘레 140~150리 라고명기하고있다. 게다가울릉도 둘레를 140-150리 라고한것은 1882년에울릉도를답사한검찰사이규원 ( 李奎遠 ) 이다. 이규원은 계본초 ( 啓本草 ) 에서울릉도를 둘레대략 140~150리 라했고, 울릉도검찰일기欝 ( 陵島検察日記 ) 42) 신용하 (1996) 독도의민족영토사연구 지식산업사참조. 43) 下條正男, 第 48 回石島 = 独島説の誤謬と文世栄氏の 朝鮮語辞典 (2016 年 9 月 9 日掲載 ) 참조.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 41 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193 에서는 이섬의바다둘레는수로 140~150리정도 이라고했다. 또한이규원은이때울릉도의전모를유연고 ( 劉淵示古 ) 에게그리게하여 울릉도외도 를그렸다. 그 울릉도외도 는현존하고, 그것을확인하면울릉도의부속섬으로죽도 ( 竹島 ) 와도항 ( 島項 ) 이그려져있지만, 독도는그려져있지않다. 44) 라고하여독도가울도군에포함되어있지않다고날조하고있다. 여기서울도군의범위는 울릉전도와죽도, 석도 를포함한여러섬을말한다. 시모조가지적하는 울도기 ( 欝島記 ), 계본초 ( 啓本草 ) 에서는울릉도의둘레 ( 周廻 ) 가 140~150리 ( 一百四五十里 ) 라는것이고, 울릉도외도 는울릉도의외측그림지도이다. 따라서이들수치는 울도군 의범위를나타낸것이아니고울도군의일부에해당하는 울릉도 의범위를나타낸것이다. 시모조는울릉도와울도군의범위를동일시하여울릉도의범위를언급하면서 울도군 의범위로해석을날조하여독도가울도군에포함되어있지않다고사실을조작했다. 울도군의범위는 울릉도와죽도, 그리고석도 ( 독도 ) 를포함하는것이다. 조선조정이울도군의범위를정한것은영토수호차원에서이루어진것이다. 따라서당시는섬에대한영유권인식은존재했지만, 바다에대한영유권인식이존재하지않았기때문에울도군의범위를바다건너독도까지를수치로나타내지않았다. 시모조는수치를활용하여울도군에독도가포함되지않는다는비논리로사실을날조했다. 시모조는동해바다에한국영토로서울릉도이외에독도는없다고하는증거로서 울릉도외도 를지적하고있다. 즉 이규원의 울릉도외도 는이후울릉도의강역 ( 疆域 ) 인식의기본이되었고, 일본측에서도그것을답습하고있었다. 1883년울릉도로건너갔던내무소서기관 ( 内務少書記官 ) 히가키나오에 ( 檜垣直枝 ) 의 복명서 ( 復命書 ) 45) 에첨부된울릉도지도에는 44) 下條正男, 第 48 回石島 = 独島説の誤謬と文世栄氏の 朝鮮語辞典 (2016 年 9 月 9 日掲載 ) 참조.
194 獨島硏究 제22호 죽도(竹島)와 도항(島項)이 그려져 있지만, 독도는 없다. 46)라는 것이다. 울릉도외도 에는 울릉도의 외도 에 관한 것으로 독도에 관한 것이 아니 다. 독도는 동해바다에 울릉도와 또 다른 1개의 섬이기 때문에 당연히 울 릉도외도 에는 독도가 있으면 안 된다. 히가키 나오에 복명서(復命書) 아카즈카 쇼스케 울릉도 보고서 시모조는 울릉도의 범위에 관해서도 1900년 6월 한일 공동울릉도조사 가 실시되었을 때 조선 측에서는 우용정(禹用鼎)이 시찰관으로 임명되었 고, 부산의 일본영사관에서 사무 대리 영사 관보 아카츠카 쇼스케(赤塚正 助)47) 등이 참여했고 해관세무사 프랑스인 라뽀테(羅保得; Laporte)가 동 행했다. 그 모두가 울릉도의 위치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아카츠카 쇼스케는 동경 130도 2분, 북위 37도 5분 이며 라뽀테는 울릉도의 위치를 북위 37도 30분, 동경 131도 라고 했다. 이것은 둘레 140-150리 범위 내 에 있다. 48)라는 것이다. 시모조는 1900년 한일공동으로 울릉도를 조사한 45) 46) 47) 48) 히가키 나오에(檜垣直枝) 복명서(復命書) 에 수록된 지도 (1883년). 下條正男, 第48回 石島 独島説の誤謬と文世栄氏の 朝鮮語辞典 (2016年 9月 9日 掲載) 참조. 아카즈카 쇼스케(赤塚正助) 울릉도 보고서(欝陵島報告書), 삽도(挿図)1900년. 下條正男, 第48回 石島 独島説の誤謬と文世栄氏の 朝鮮語辞典 (2016年 9月 9日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 41 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195 결과, 울릉도에독도가포함되어있지않았다는것이다. 그것은당연한것이다. 왜냐하면독도를조사한것이아니고울릉도를조사한것이었기때문이다. 다시말하지만독도는울릉도의일부가아니고별도의섬이었기때문에당연히울릉도의일부에포함되면안되는것이다. 이때 황성신문 은한일합동조사단의조사내용에대해 울릉도사항 이라는제목으로 가장두드러진섬은우산도죽도 49) 라고하여우산도와죽도가동일한섬으로 1개의섬인식을하고있다. 시모조는우산도에관해서언급하지않고있다. 여기서 도항과죽도 가별도의이름으로표기되어있기때문에광여도유형의 소위우산도 와청구도유형의 우산도 의잘못된부분을수정하여위에서도언급했듯이 19세기말의 대조선국전도유형 에서지금의독도로인식되는변화가있었기때문에여기서 우산도 는바로지금의독도를가리킨다. 시모조는칙령41호의 울릉전도, 죽도, 석도 와아카츠카쇼스케가그린 울릉도지도 와의관련성에관해언급하고있다. 즉, 사실, 아카츠카쇼스케가남긴울릉도지도는부속섬으로공도 ( 空島 ), 도목 ( 島牧 ), 죽도 ( 竹島 ) 3섬을그렸다. 이가운데공도 ( 空島 ) 는공암 ( 孔岩 ; 섬 ) 을한국어음에맞게한자로표기한것이고, 도목 ( 島牧 ) 역시도항 ( 島項 ) 을한국어음을차음하여한자로표기한것이다. 나머지죽도 ( 竹島 ) 는울릉도동쪽약 2킬로미터에위치한죽도 ( 竹島 ) 로서울도군의행정구역에기록된죽도 ( 竹島 ) 이다. 도항 ( 島項 ) 은울릉도의동북에있고, 공도 ( 空島 ) 는울릉도의북쪽에있다. 모두독도와는관계가없다. 라고하여독도에관해서는아무런언급이없었다는것이다. 칙령41호의 석도 에관해서는언급을하지않았다. 이번울릉도조사의목적은울릉도에서벌채문제로다툼을해결하기위한것 50) 으로독도영유권을다투기위해조사한것이아니다. 그래서 掲載 ) 참조. 49) 울릉도사항, 皇城新聞 1899 년 9 월 3 일자. 최장근 (2014) 우산도가석도로전환되는과정의고찰, 한국영토독도의고유영토론 제이앤씨, 105-159. 50) 최장근 (2014) 우산도가석도로전환되는과정의고찰, 한국영토독도의고유
196 獨島硏究제 22 호 울릉도만을조사한것이다. 그런데시모조는독도와무관한울릉도조사에관해소개하면서독도를조사하지않았기때문에칙령 41호는독도와무관하다고주장한다. 즉, 울릉도조사후시찰관우용정이울릉도를군으로승격시키기위해청의서를제출한것은 1900년 10월 22일이다. 그것은 10월 25일 칙령제41호 가되었고, 군의행정구역도 울릉도전도 죽도 ( 竹島 ) 석도 ( 石島 ) 로정해졌다. 하지만우용정등의조사는 5일정도의짧은기간으로조사범위도외륜선 ( 外輪船 ) 으로울릉도를일주한것뿐이다. 당연히, 울릉도에서동남쪽으로 90 킬로미터나떨어져있는독도에건너가지않았다. 이때시찰관이용정이인식하고있던울릉도의강역 ( 疆域 ) 은둘레 140-150리 의울릉도한개의섬이었다. 이것은울릉도에대한이규원의강역인식을계승한것으로그둘레 "140-150리" 로서현재독도는포함되지않았다. 라는것이다. 울릉도에서독도까지실제거리는 200 여리이지만, 1906년 2월심흥택군수는 먼바다 100리밖에본국소속독도가있다 라고했다. 51) 시모조는 1905년이후에도독도는한국영토에서제외되어있었다고주장한다. 즉, 그실태는다케시마 ( 독도 ) 가일본영토에편입된후에도변함이없었다. 대한제국이 1909년에간행한 한국수산지( 韓国水産誌 ) 는울도군의부속섬으로죽도 ( 竹島 ) 와서항도 ( 鼠項島 ; 도항島項 ) 를들고있기때문이다. 독도가시마네현오키도사소관이되었어도울릉도의부속섬은여전히죽도 ( 竹島 ) 와서항도 ( 鼠項島 ; 도항島項 ) 뿐이었다. 이것은울도군의행정구역인 울릉도전도와죽도 석도 에서현재의다케시마 ( 독도 ) 는포함되지않았다고하는것이다. 라는것이다. 우선 1909년의 한국수산지 52) 는이미 1905년일본에외교권을수탈당하고 1907년군대도해 영토론 제이앤씨, 105-159. 51) 各觀察道案 第 1 冊, 報告書號外, 신용하편저 (1999) 독도영유권자료의탐구 제2권독도영토보전협회, 172. 52) 韓国水産誌 (1909), http://www.geocities.jp/tanaka_kunitaka/takeshima/koreanfisheries -1909/( 검색일 :2017년5월 12일 )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 41 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197 산되고내정권도장악당하여대한제국이의지대로지도를제작할수있는정치적상황이아니었다. 이미편찬을주관한부서는농상공부수산국이었고, 발행인은후지따켄이치 ( 䕨田謙一 ) 로서일본인들이수산국을장악하고있었다. 53) 그런데시모조가대한제국이 1909년울도군의행정구역을정하면서일부러독도가한국영토가아니었기때문에제외시켰다고하는주장은옳지않다. 이것이사실의조작행위이다. 2) 한국어반절차음론 으로사실날조 시모조는칙령41호의 석도 가독도가아니고, 관음도라고주장한다. 그이유에대해 한겨레신문 ( 전자판 ) 은한국측연구자의발언으로 시모조마사오등일부일본학자가일본어발음이같다고해서 석도 = 관음도 라고주장하는것은논리적으로오류라는사실을확인했다 고말하지만그것은거짓말이다. 사실본인 ( 시모조 ) 도결과적으로는 석도 = 관음도 라고하지만, 그것은관음도가울릉도의부속섬인도항 ( 島項 ) 이기때문이다. 관음도는일본측호칭으로서한국측에서는도항 ( 島項 ) 이라고부른다. 게다가내가 일본어발음이같다는이유로석도 = 관음도 라고주장은하지않는다. 상대방의주장을곡해하여논란거리로만드는수법은한국측의독도연구자에게서흔히볼수있는것이다. 자신들의주장에맞지않다고판단하는연구에대해서는상대방의논지를마음대로해석하고그논란을반박했다고착각하는것이다. 내견해를 " 일본어발음이같다고하는이유운운 ' 하는것은그상징적인사례이다. 54) 라는것이다. 석도가 관음도 가되는이유로서도항이울릉도의속도이고, 그도항이일본명칭으로관음도이기때문이라고주장한다. 시모조는아무런논증없이주장만한다. 그렇게주장을하려면논리적인논증이필요하다. 53) 히가키나오에 ( 檜垣直枝 ) 복명서 ( 復命書 ) 에수록된 지도 (1883 년 ), 동상. 54) 下條正男, 第 48 回石島 = 独島説の誤謬と文世栄氏の 朝鮮語辞典 (2016 年 9 月 9 日掲載 ) 참조.
198 獨島硏究제 22 호 둘째로단지관음도가울릉도의부속도이기때문에착령41호의석도가관음도라고주장하는것은논리성이없다. 왜석도가지금의독도가아니고관음도인가에대해논리적으로논증해야한다. 시모조는아무런논증없이단지부속도서이기때문에관음도가석도라는주장이다. 게다가관음도가 울릉도전도 에서제외될수밖에없는이유에대해서도논증해야한다. 따라서시모조의칙령41호의석도가관음도라는주장은비논리적인주장에불과하다. 칙령41호의석도가관음도라고하는시모조의논리는다음과같다. 즉, 관음도라고도불려온도항 ( 島項 ; 섬목 ) 은이규원의 울릉도검찰일기 등에따르면, 형태가소목덜미같다 ( 形如臥牛 ) 라는점에서 소의목덜미 를의미하는차자 ( 借字 ) 에서 1909년간행의 해도 306호 ( 竹邊灣至水源端 ) 에서는한국어음에따라 SOMOKU-SUM 이라고영문표기를하고 서항도 ( 鼠項島 ) 라고한자표기를하고있다. 죽도 ( 竹島 ) 와서항도 ( 鼠項島 ; 도항島項 ) 를울릉도의부속섬이라고하는것은 1909년간행의 한국수산지 도마찬가지다. 내가 석도 = 도항 ( 島項 ; 서항도鼠項島 ) 라고한것은서항도 ( 鼠項島 ) 를한국의전통적읽는법에따라반절차음 ( 反切借字 ) 으로읽으면 SOMOKU-SUM 이 SOKU ( 돌 )- SUM ( 섬 ) 으로 석도 라고도읽을수있다는것이고, 일본어발음이같다고해서 라고한적은없다. 55) 라는것이다. 첫째는 1909년간행의 해도 ( 海図 _306호 와 한국수산지 에서관음도라고불리는도항 ( 島項 ) 은울릉도를검찰한이규원이 소의목과같은형태 라고하여한자음을빌려서서항도 ( 鼠項島 ) 가되었다는것이다. 둘째는시모조가석도 ( 石島 )=도항( 島項 ; 서항도鼠項島 ) 이라고한것은반절차자로읽으면, SOMOKU SUM 이 SOKU ( 石 )- SUM ( 島 ) 으로읽을수있다고주장한다. 그러나사실한국어에서 섬목섬 이 석도 로변할가능성은전혀없다. 이런시모조의논리는사실을날조한아주비논리적주장이다. 55) 동상.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 41 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199 검찰사이규원이울릉도를검찰하고 울릉도외도 를작성할때지명에대해시모조는 이규원의 울릉도외도 를비롯해당시울릉도의지명에는한자어뿐만아니라한국어에서유래한지명이차자 ( 借字 ) 에의해한자표기로된것도많이있었다. 56) 고하여도항에관해 한국어로 소목덜미 를의미하는도항도차자 ( 借字 ) 하여한자표기한것이다. 라고하여 소의목 이 섬목 이되었다는주장이다. 여기서도항의위치가 섬의목 과같은위치에있기때문에 섬목 이되었다고한다면다소납득이가지만, 소목덜미와섬목은서로아무런상관관계가없는비논리적주장이므로사실날조에해당한다. 칙령41호의 석도 에대해시모조는 칙령제41호 가공포될때한국어적인표현이었던도항 ( 島項 ) 이 " 반절차음 ( 反切借字 )" 에의해한자어로표기되면석도 ( 石島 ) 가된다. 석도가 칙령제41호 에서울도군의행정지역으로된것은 1882년이규원검찰이후부터울릉도의강역 ( 疆域 ) 이되었다. 거기에는도항 ( 島項 ) 이나죽도 ( 竹島 ) 는있어도독도는없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황당한어원론을만들어석도 ( 石島 ) 를독도라고말해대는것은아전인수식의견강부회 ( 牽強付会 ) 적설명 이라는것이다. 56) 동상.
200 獨島硏究제 22 호 첫째, 시모조는칙령41호의 석도 가독도가아니고, 지금의관음도라는논리를만들기위해울릉도사람들이 서목도 를 반절차음 하여 석도 라고불렀다고주장한다. 지금의관음도를석도라고불렀다거나기록되었다는증거는어디에도없다. 완전히비논리적인사실날조행위이다. 둘째, 시모조는칙령41호의석도는 1882년이후에전라도에서울릉도에이주한사람들이사투리로독도라고불렀다고하는한국측의논리에대해아전인수격의황당무계한논리라고부정한다. 그것은시모조가한국말의연구가없고무지해서하는말이다. 1904년일본군함니이가타호의군함일지에기록되어있듯이울릉도주민들이돌로된섬을 독도 라고표기했다고하는기록이울릉도에있었고, 57) 중앙정부가 울도군 을설치하는행정조치를하면서행정문서를작성할때한자음으로돌섬을 석도 라고표기했다고하는것은아주논리적이고타당하다. (3) 시모조의논리조작방식 칙령 41호의석도가지금의독도라는한국측의논리에대해시모조는 앞으로한국측이 칙령제41호 의석도를독도라고하기위해서는최소한울릉도의강역 ( 疆域 ) 이 둘레 140-150 이아니었다는사실을밝혀내야하고, 또한 칙령제41호 가공포되기이전에, 석도가독도라고칭하고있었다는확증을문헌으로보여주어야한다. 그것이안되면 칙령제41호 의석도를독도라고할수없다. 더불어 조선어사전 에 독 [ 명 ]; 돌 ( 石 ) 의사투리. 石 이있다고해서그것을근거로 칙령제41호 의석도가지금의독도라고하는것은역사를무시한망언 58) 라는것이다. 시모조의주장의모순점은다음과같다. 57) 신용하 (2011) 독도영유권에대한일본주장비판 서울대학교출판부. pp.175-178. 58) 下條正男, 第 48 回石島 = 独島説の誤謬と文世栄氏の 朝鮮語辞典 (2016 年 9 月 9 日掲載 ) 참조.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 41 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201 첫째, 울릉도와독도는별개의섬이다. 울릉도의둘레가 140-150리라고하는것에는독도가포함되어있지않다. 왜냐하면울도군이울릉도만으로구성된것이아니고, 울릉전도, 죽도, 석도 로서 울릉전도 와 죽도 거기에다가지금의독도인 석도 를포함하고있다. 시모조는독도가한국영토인것을부정하기위해울릉도와울도군의범위가동일하다고하여칙령41호의 석도 는지금의관음도로서지금의독도가아니라고사실을날조하고있다. 둘째, 시모조는 1900년이전에지금의독도를 석도 라고불렀다는확실한문헌을제시하면동의하겠다는것이다. 모든역사가직접적인증거자료가있어야만올바른해석이라는주장은역사학자로서의자격이없다. 시모조자신은본인이행하고있는직접적인증거자료도아니고, 간접적인증거자료도아니고전혀상관없는것을갖고와서논리를날조하는행위와는사뭇다른주장이다. 셋째, 우리문화가꾸기회 가제시한 조선어사전 에 독 [ 명 ]: 돌( 石 ) 의사투리, 석 ( 石 ) 으로울릉도사람들이돌섬이기에 독도 라고불렀다는논리에대해아전인수격의황당무계한비논리라고주장하는것은설득력이전혀없다. 독도가한국영토라는사실을부정하는시모조의성향을보면, 이번 조선어사전 을발굴하고 이것은당시 ( 칙령 41호의 ) 석도가독도의다른이름이었음을보여주는명백한증거 라고한사단법인 우리문화가꾸기회 관계자에게감사하고싶다. 그이유는 칙령제41호 제2조의석도가한국영토독도가아니고일본영토다케시마 ( 한국명칭독도 ) 라는사실을다시한번확인하는기회를제공했기때문이다. 59) 라고하는것처럼, 시모조는아무리객관적이고논리가정연하여도무조건적으로사실을부정한다. 이처럼본연구에서는독도가한국영토라는사실을날조하는죽도문 59) 下條正男, 第 48 回石島 = 独島説の誤謬と文世栄氏の 朝鮮語辞典 (2016 年 9 月 9 日掲載 ) 참조.
202 獨島硏究제 22 호 제연구회의대표격인시모조마사오의사실날조방식에대해고찰할수있었다. 6. 맺으면서 죽도문제연구회가칙령41호의 울릉전도, 죽도, 석도 ( 石島 ) 에서석도가독도가아니라고주장한다. 특히시모조마사오는석도를관음도라고주장하면서비논리적으로석도가독도라는사실을부정하는논리를날조했다. 본연구에서는시모조의사실날조에관해서구체적인사례를들어비논리성을규명했다. 첫째, 조선어사전 에는 독( 獨 ) 자가 6가지의의미로사용된다고그예를제시하고있다. 특히 독( 獨 ) 이돌 ( 석 ) 의사투리로사용되기도했다는내용이있다. 그런데시모조는이러한올바른해석을일부러회피하고, 일부러 독( 獨 ) 이 단독( 單獨 ) 이라는의미로사용되는부분을인용하여 칙령의석도는독도가될수없다 는비논리적인주장으로사실을날조했다. 둘째, 일본의고문헌니이타카 ( 新高 ) 호군함일지에는 1904년울릉도에서는독도 ( 獨島 ) 라고기록 ( 書 ) 하고있다고적고있다. 이를볼때 1904년이전에이미울릉도거주민들은오늘날의독도명칭에대해 독도 라고명칭하고있었고, 문서기록상으로도 독도( 獨島 ) 라고표기하고있었음을알수있다. 그런데시모조는이에대한논증을거부하고 1904년경에울릉도사람들이독도에들어가서강치를잡았기때문에울릉도사람들은일본인에게고용되어처음으로독도에들어갔다는주장으로고문헌상의 독도( 獨島 ) 와 칙령41호 석도 와의관계성을부정했다. 셋째, 시모조는 1900년에발령된칙령41호의 울릉전도, 죽도, 석도 에서 석도 는지금의 관음도 라고주장한다. 한국측의고지도에는원래 우산도 가지금의독도로서존재했던것이다. 그런데수토사박석창이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 41 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203 울릉도도형 을그릴때, 지금의독도인우산도를확인하지않고함부로지금의죽도에 소위우산도 라는형태로비견했다. 이잘못된것이바탕이되어 광여도 에서그대로답습하여 소위우산도 라고했고, 청구도 에서는 우산 이라고답습하여울릉도의부속섬처럼표기했다. 이런형식은그후검찰사이규원이직접답사하기전까지답습되었다. 이규원은이런잘못된형식을완전히파기하고새롭게울릉도주변의섬들에대해구체적으로이름을지어도항, 죽도라고표기했다. 우산도라는지명은울릉도부속섬의지명으로서사라졌다. 그것은이규원이지금의독도인우산도를발견하지못했기때문이었을것이다. 따라서조선시대의관찬지도에서 우산도, 칙령41호에서는 석도, 울릉도의속칭으로는 독도 라고호칭되었음에분명하다. 넷째, 1900년에발령된칙령 41호의 석도 는울릉도에서돌섬의사투리인 독섬 을문헌상표기로 독도 가되었다는것은 1904년의일본군함니이타카호가증명하고있고, 1906년의심흥택군수가 본방소속독도 ( 獨島 ) 라고표기했던것으로명확하게확인된다. 따라서칙령41호의 석도 는 독도 가맞다. 그런데시모조는만일칙령41호의석도가독도라면 1905년에일본이독도를침략하기위해편입조치한 시마네현고시 40호 의효력이없어지기때문에칙령 41호의 석도 는지금의독도가될수없다고비논리적인주장으로사실을날조했다. 이상과같이독도는칙령41호에서울도군의관할구역으로지정되었다는사실이명확해졌기때문에일본의독도에대한영유권주장은영토내셔널리즘에의한타국영토에대한침략행위가되는것이다.
204 獨島硏究제 22 호 참고문헌 나이토우세이추우저, 권오엽, 권정역 (2005) 獨島와竹島 제이앤씨, pp.116-212. 송병기편 (2004) 독도영유권자료선 한림대학교아시아문화연구소, pp.9-252. 송병기 (1999) 울릉도와독도 단국대학교출판부, pp.184-207. 신용하 (2011) 독도영유권에대한일본주장비판 서울대학교출판부. pp.163-186. 최장근 (2014) 한국영토독도의고유영토론 제이앤씨, 105-159. 大西俊輝 (2007) 続日本海と竹島 - 隠視聴会合紀を読む -, pp.3-388. 川上健三저, 權五曄역 (2010) 일본의독도논리- 죽도의역사지리학적연구 백산자료원, 316-320. 경상북도독도사료연구편 (2014) 죽도문제10문100답 에대한비판 경상북도, pp.99-102. 下條正男 (2004) 竹島日韓どちらのものか, 文春新書, pp.105-133. 下條正男 (2005) 竹島その歴史と領土問題 竹島北方領土返還要求運動島根県民会議, pp.74-113. 田村清三郎 (1965) 島根県竹島の新研究 島根県総務部総務課, pp.40-66. 内藤正中, 朴炳涉 (2007) 竹島独島論争 新幹社, pp.152-165. 内藤正中, 金柄烈 (2007) 史的検証竹島独島 新幹社, pp.77-100. 한겨레신문, 2017년 9월 2일,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758755.html# csidx1482988413327e49d5c73c49a790971( 검색일 : 2017년 5월 4일 ). Web 竹島問題研究所, http://www.pref.shimane.lg.jp/admin/pref/takeshima/web-takeshima/ ( 검색일 : 2017년 4월 26일 ). 韓国水産誌 (1909), http://www.geocities.jp/tanaka_kunitaka/takeshima/koreanfisheries- 1909/( 검색일 : 2017년 5월 1일 ). 울릉도와독도를표시한조선지도목록, http://blog.naver.com/cms1530/1003324190 ( 검색일 : 2017년 5월 14일 ). topclass (2011년 6월 ), http://topclass.chosun.com/board/print.asp?catecode=&tnu=20110 6100007( 검색일 : 2017년 5월 14일 ). 울릉도관광지도, http://cafe.daum.net/yeosasa/dde6/6?q=%bf%ef%b8%aa%b5%b 5%20%C1%F6%B5%B5&re=1( 검색일 : 2017년 5월 10일 ). 중앙일보 2015년 7월 17일, http://joongang.joins.com/article/937/18258937.html?ctg= 1700&cloc=joongang article hotclick( 검색일 : 2017년 5월 17일 ). 이아러브울릉도. http://dd1.co.kr/board/bbs/board.php?bo_table=mboard02&wr_id=31 ( 검색일 : 2017년 5월 6일 ).
죽도문제연구회의칙령 41 호 石島 = 獨島 날조에대한논증 205 <Abstract> The Untruth of Takeshima Issues Research Study on Seokdo = Dokdo of Emperor Statute No. 41 Choi, Jangkeun Masao Shimozo, chairperson of the Takeshima Issue Research Study, speculated on the illogical claim that Seokdo was not Dokdo in Ulleungdo, Jukdo, and Seokdo of Emperor Statute No. 41. First, in spite of the fact that Dok was used as a dialect of the stone in the Korean Language Dictionary, it avoided this correct interpretation and applied the part used in the meaning of "solitary" And that the Seokdo of edict can not be Dokdo. Secondly, Shimozo refused to argue that the Japanese Niitakako naval ship history journal records as the name of Dokdo in Ulleungdo Island 1904, and Ulleungdo people entered Dokdo Island in 1904, and the Ulleungdo people were hired by the Japanese. It faked the fact that it entered Dokdo for the first time. Thirdly, Shimozo claims that the Seokdo is the present Ganumdo in Ulleung-dong, Jukdo, and Seokdo of the edict 41 issued in 1900 based on the comparison of the present Jukdo with the Usando. It was the fact falsified by Kwangyeodo and Cheongudo. But Shimozo are avoiding the argument of the fact be based on the misrepresentation of Park Seok Chang 's Ulleungdo Shape.
206 獨島硏究제 22 호 Fourth, Seokdo in the Edict No.41 of 1900 describe by Chinese characters a dialect of stone island in Ulleungdo. It was described as Dokdo in the Japanese naval ship Nitaka of 1904. It is clear that the executive of Shim Heung-Taek labeled Dokdo belonging to our nation. However, Shimozo is falsifying facts illegally to justify invasive Shimane Prefecture. Thus, it is the territorial aggression by territorial nationalism that the Takeshima Issues Research Study claims the sovereignty over Dokdo. Key words: Takeshima Issues Research Study, Dokdo, Seokdo, Emperor Statute No. 41, Korean Language Dictionary 이논문은 2017 년 5월 25일에투고하여 2017 년 6월 3~25 일에심사하여 2016 년 6월 26일에게재 결정됨
207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 일본측주장의국제법위반비판을중심으로 - 1) 나홍주 * < 목차 > 1. 소위 독도문제 개황 2. 독도가한국영토란역사적및국제법적주요근거일별 3. 일본측의 고유한자국영토 ( 독도 ) 론 에대한비판적고찰 4. 독도 수호책 5. 결론 < 국문초록 > 독도는역사적, 국제법적및그실효적관할상엄연히대한민국의영토이며, 아무런문제가없다. 다만, 근거없이일본정부가 독도는자국땅 이란부당한주장만하고있을뿐이다. 특히아베정부에이르러독도왜곡이더욱심화되어, 일본중 고교교과서에 다케시마 ( 독도 ) 는일본의고유한영토인데한국이불법점거하고있다 는거짓내용을실어서, 학교에서가르치고있다. 이는역사적사실에비추어거짓내용일뿐만아니라여러국제법위반사항임을지적할수있다. 2차세계대전전에는 1699년 1월당시조선국정부와일본막부정부간외교서계교환을통하여합의한 울릉도와독도 에대한조선국의영토주권에대한위반임을지적할수있다. 2차대전후에는, 포츠담선언8) 후단규정, 스카핀 (SCAPIN) 677(1946.1.29.), 샌프란시시코평화조약제2조 (a) 및동조약제19조 (d) 를위반한것을지적할수있다. 또한, 전기일본교과서에게재한 일본의고유영토인독도를한국이불법점거 하고있다는내용은 독도 재침탈을위한일종의 위협 으로볼수있다. 이는 영토는타국의위협이나무력사용으로인한탈취의대상이될수없다 는유엔총회결 ** 전주미대사관해무관, 흥사단독도수호본부공동대표
208 獨島硏究제 22 호 의 2625호 (1970.10.24) 와정면으로충돌되는것으로규탄을받지않을수없을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우리학계일부의 독도 영토주권에관한논조가애매모호한것이있음을부인하기어렵다고할것이다. 일본정부의헛된주장에따른국제법위반사항을포함하여이모든것들은각종학술발표회를통하여검증되고사안에따라퇴출되고또규탄되어야마땅할것이다. 주제어 : 독도, 한국독도영유권, 일본의독도영유권주장의불법성 1. 소위 독도문제 개황 - 우리국민에게독도는완전한국권회복의상징이다... 한 일관계와동아시아평화에대한일본의의지를간음하는시금석이다. ( 노무현전, 대통령, 2006.4.25) - 일본이독도침탈을꾀하는것은한국침략을의미하는것이다. ( 변영태전외무부장관, 1954.10.28) 독도는역사적및국제법상우리영토이며, 우리관할하에있다. 우리나라의그영토주권에아무런문제도없다. 소위 독도문제 란존재하지아니한다. 다만, 독도에대한일본의탐욕 ( greed ) 에따른부당하고근거없는그들주장이각종매체 1) 를통하여전파되어국내외에서회자되고있을뿐이다. 일본의아베정부출현이후우리독도영유권에관한왜곡이더욱심화되어가고있으며, 특히동일본정부가자국중 고등학교교과서에 다케시마 ( 독도 ) 는일본고유영토인데한국이불법점거하고있다 는왜곡내용을게재하여교육시키고있음은오늘날무엇보다심각한사안이라할것 1) 일본정부는외교청서, 국방백서등공문서와공공기록물 (10 Issues of Takeshima: 2007. 12 월 10 개국어로번역국내외배포, 등포함 ) 을통하여그간독도왜곡내용을국내외에홍보하여왔음.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209 이다. 2) 아직판단능력과역사인식능력이미숙하고감수성이예민한어린학생들에게 독도 에관한이런왜곡된내용을학교에서가르침은미래한 일세대간일종의시한폭탄과같은것이될수있을것이란우려를금할수가없을것같다. 이런견지에서우리교육부가일본교과서상동독도왜곡내용에관하여 日잘못된역사교육에동북아평화위태 제하의성명 3) 을그때 (2015.4.6) 즉각발표한것은매우정확한지적이라말할수있을것이다. 더나아가서최근에, 일본의집권당이 민간분야의영토주권수호운동지원을위하여 2017년예산에 5억엔 ( 약 50억원 ) 증액을일본정부에요구 (2016.10) 하였다 고국내언론 (YTN) 이보도한바있다. 어떤어려움이있더라도오늘을살고있는우리세대는합심단결하여 독도영토주권 을온전히수호하여후대에남겨주어야할역사적사명을다하여야마땅할것이다. 독도와관련한이러한엄숙한현실하에서도, 우리정부는여전히소위 조용한외교 에서벗어나는기미를현재찾기어렵고, 오늘날우리학계일부도일본의이러한독도왜곡행태와근거없는주장에대하여학문적연구 조사를통한통렬한비판을가하는것과는거리가먼애매하고미온적입장에서벗어나지못하고있다는지적을피하기어려울것같다. 따라서본고는독도가한국영토란제근거, 일본의불법 부당한독도 2) 일본정부는 2015.4.6. 중학교교과서에 다케시마 ( 독도 ) 는일본의고유영토인데한국이불법점거하고있다 는왜곡내용을실어, 학교에서교육시키고있으며, 2016.3.18. 그같은왜곡내용을고등학교교과서에도반영하였다. 또한, 초등학교학생들에게 다케시마 ( 독도 ) 가일본땅 이란교육의무를규정키로결정하였다 (YTN뉴스자막보도 : 2017.3.31). 3) 日잘못된역사교유에동북아평화위태 - 일본문부과학성이대한민국의고유영토인 독도 를자국영토라하고, 한국이불법점거하고있다 는거짓된내용을수록한교과서를검정합격시켰다. 역사적인식능력과판단능력을가추지못한학생들에게역사나영토에대한잘못된인식을심어주는내용을가르치도록하는것은미래동북아지역의평화를위태롭게할수도있는매우비교육적인행위로규탄받아야마땅하다. ( 서울신문, 2015.4.7. 보도 ).
210 獨島硏究제 22 호 영유권주장, 우리의현실적대응방안, 우리학계일부의 독도 영토주권에관한모호하고미온적논조및향후학문적과제등에관하여일별하여보고자한다. 2. 독도가한국영토란역사적및국제법적주요근거일별 1) 역사적근거 가. 삼국사기 ( 김부식, 1145년 ); 신라지증왕 13년 ( 서기 512년 ), 우산국 ( 울산도와울릉도로구성 ) 이신라에복속. 나. 세종실록지리지 (1454, 于山武能二島在縣正東海中二島相距不遠風日晴明卽可望見新羅時稱于山國一云鬱陵島 ). 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531): 권 45 蔚珍縣部于山島鬱陵島條 ; 二島在縣正東海中二島風日晴明歷歷可見風便卽二日可到一說于山武陵本一島地方百里, 八道總圖 ( 于山島와鬱陵島도시 ). 참고. 본동국여지승람에포함되어있는 八道總圖 가특히중요함. 국제중재재판에서조약, 공문서및공공자료등이최고의증거력을가지나, 지도는기본적이아니라부차적인증거력을갖는다. 그러나본문과함께있는지도는그본문과같은증거력을갖는다. 4) - 1698.4월 : 조선국예부참의이선부 ( 李善傅 ) 명의의서계 ( 요지 ): 일본에서 4) Durward V. Sandifer, Evidence Before the Tribunals, Challotsville, UVA Press, 1975) : Generally speaking, an official document or a public record is the best of the facts or rights it purports to record and is always admissible in international, as it generally is in municipal proceedings. p.208. The principles applicable to the use of maps in international arbitral proceedings constitutes a collateral rather a principal, part of the best evidence rule as defined in the foregoing sections....it is only in occasional instances in which maps are made an integral part of the agreement to which they are attached. pp.229-30.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211 말하는죽도 ( 竹島 ) 가 1도 2명임을알고있으며, 그땅이동국여지승람과 八島總圖 에실려있다. - 1699.1월 ( 일본측회신 ), 일본대마도 ( 형부십유 ) 평의진 ( 平義眞 ) 명의의서계 ( 요지 ): 조선의서계를막부동무 ( 東武 ) 에게보고했으며, 잘되었음. ( 필자주. 수용 ). 이로써, 조선국과일본간수년에걸친소위 울릉도쟁계 는외교교섭을통하여국제법적으로종결되었다. 즉, 울릉도와그속도인독도에대한조선국의영토주권이양국정부간합의로최종적으로국제법상완결되었던것이다. 국제간합의는당사국간에는바로법이되기때문이다. 5) 또한, 이와같이국제간최종적으로확정된영토주권은소유국가가이를포기한다는의사표시가없는한그영유권은계속유Cl지된다는국제판례가있다. 6) 조선국은독도를포기한적이없다. 독도 가조선국영토라는것은다음의일본정부최고기관인태정관 ( 太政官 ) 지령과태정류전 ( 太政類典 ) 이증명하고있다. - 태정관지령 (1877.3.29): 질의한일본해 ( 동해 ) 내죽도외 1도는본방 ( 일본 ) 과관계없음을명심할것. ( 수신 : 일본내무성 ). 참고. 동태정관지령검토서중에, 기죽도 ( 磯竹島 ) 약도가있음이 2005년일본인목사 우루시자키히대유키 ( 漆琦英之 ) 에의거일본공문서관에서발견되었으며, 동약도에 독도 는울릉도의속도로서 송도 ( 松島 ) 란일본이름으로그려져있다. 즉, 태정관지령중 죽도외 1도 가 독 5) J.L. Brierly, The Law of Nations, (Oxford: Clarendon Press, 1968), p.57. 6) Victor Emmanual, Clipperton Island Case, 1931, Vol.26, American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p.394: There is no reason to suppose that France subsequently lost her right by derelictio since she never had the animus of abandoning the island and the fact that she has not exercised her authority there in a positive manner does not imply the forfeiture of an acquisition already definitely perfected.
212 獨島硏究제 22 호 도 임이증명된것이다. 그러나일본정부는동약도의유무에관하여오늘날침묵만지키고있다. - 태정류전 ( 太政類典, 1877.3.29.): 제목 : 일본해 ( 동해 ) 내竹島외 1도를판도 ( 영토 ) 외로정함 하에, 전기태정관지령내용이공포되었다. 동태정류전은관보 ( 官報 ) 의전신이었다. 즉, 독도 가일본영토가아님이관보를통하여국내외에공포된셈이다. 참고. 1699.1월의일본서계에의하여, 울릉도및독도 의조선국영토주권이합의됨으로써, 국제법상 독도 영유권문제는결정적으로종결된것이다. 그후역대일본정부는 200여년간 (1905년러 일전쟁중의일본정부가불법적으로은밀히국제법을위반하며 독도 를무주지란억지를내세워일본에편입할때까지 ) 독도 에대한조선국의영토주권을존중하였던것이다. 동일본정부의 독도 일본편입조치가국제법을위반하였다함은국제간합의는당사국간에는법 7) 인데, 1699.1월일본서계에의한합의를위반한것이요, 국제법상반금언원칙 (principle of Estoppel) 을위반한것으로원천무효에해당한다. 또한, 1905년당시일본정부가 독도 를무주지 (terra nullius) 란구실로불법적으로일본에편입한것은 1905년전에는 독도 가일본과는아무런관계가없었음을입증하는것으로서오늘날일본정부가 독도 를 고유한 일본영토라고주장하는것이자가당착임을웅변하다. 이와비슷한지적은미국의저명한국제법학자벤다이크 (Jon M. Van Dyke) 교수의국제학술회의발표문에서도찾을수있다. 8) 7) J.L. Brierly, The Law of Nations,(Oxford: Clarendon Press, 1968, p.57: Treaties as a source of law. Agreement is a law for those who make it, which supersedes, supplements, or derogates from the ordinary law of the land. Modus et conventio vincunt legem...treaties then are clearly a source of law for the parties to them, of special or particular law. 8) Jon M. Van Dyke, Dokdo, Chapter III, Addressing and Resolving the Dokdo Matter, (Historical and International Justice, Edited by Sokwoo Lee and Hee Eun Lee, (London Boston: Martinus Nijhoff Publishers,2011), p.29: Japan claimed sovereignty over Dokdo on January 28, 1905, stating that this territory was terra nullius...there being no evidence of its being occupied by any country. This Japanese statement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213 - 일본시마네현고시제40호 (1905.2.22) 에의한 독도 의일본편입고시 : 전술한바와같이, 국제법상원천무효인일본정부의 독도 불법편입각의의결 (1905.1.28.) 에기반을둔시마네현고시제40호역시국제법상원천무효임을지적하지아니할수없다. ( 또한, 무주지편입에관한고시주체는지방현이아니라중앙정부가국제사회를대상으로하는것이국제관례이기도하다.) 라. 만기요람 ( 萬機要覽, 軍政編, 1808): 우산은곧일본이말하는송도 ( 松島 ) 이다 ( 與地志云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卽, 倭所謂松島也 ). 마. 증보문헌비고 ( 增補文獻備考軍政編, 1908): 여지지에이르기를울릉과우산은모두우산국땅이며, 우산은곧일본이말하는송도 ( 松島 ) 이다 ( 輿地志考 : 輿地志云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卽倭所謂松島也 ). 바. 고종환제칙령 ( 勅令 ) 제41호 (1900.10.25): 울릉도를울도로개칭하고, 도감을군수로개정한건. 제1조 :... 제2조 : 군위치난태하동 ( 台霞洞 ) 으로하고, 구역은울릉전도와죽도, 석도 ( 石島 ) 를관할할사. 제3조 :... 사. ( 일본 ) 은주시청합기 ( 隱州視聽合記, 1667): 일본의건지 ( 乾地, 서북쪽땅 ) 는은주 ( 隱州 ) 로한한다.(... 隱州在北海中古隱岐島... 自子之卯無可住地戌亥間行二日夜一日有松島... 又一日丁有竹島 ( 俗言磯竹島多竹海鹿 ) 然卽日本之乾地以此州爲限矣 ). that Dokdo was terra nullius (referring to land that is unclaimed by any country) is significant, because it serves as anacknowledgement that Japan has no meaningful claim to Dokdo based on historical activities prior to January 1905.
214 獨島硏究제 22 호 2) 임진왜란후, 19c 일본의한반도재침략행태일별 일본정부가 독도 를불법적으로침탈한것은군사력을배경으로일본이 19c 말-20c 초한반도침략과정에서발생한것이므로 9) 당시일본정부의그역사적침략행태를일별할필요가있을것이다. 16c 임진왜란후우리의동해상한 일국경선은상당기간일본어민들의불법월경어업으로혼란상태에떨어졌었다. 그과정에서안용복사건등이발생하였으며, 당시조선국과일본막부간외교협상으로 1699. 1월 독도 의조선국영토주권이최종적으로국제법상완성되었던것이다. 그런지 200여년후일본정부는러 일전쟁중군사력을배경으로, 불법적으로, 은밀히 독도 를 무주지 란구실하에일본에펀입조치를취하였다. 따라서, 19c 말일본내 정한론 ( 征韓論 ) 의맥을있는 20c초일본의한반도재침행태에관하여살펴보는것도필요할것이다. 역사학자이태진교수는 근대일본초슈 ( 長州 ) 번벌의한국침략-법과윤리의실종 (2010.8.23., 동북아역사재단대회의실발표 ) 에서다음과같이지적했다. 1856년에요시다쇼인 ( 吉田松隱 ) 이하키 ( 萩 ) 에소규모학교를열어초슈의젊은이들을교육하면서, < 정한론 > ( 征韓論 ) 을가르친이래 1910년한국강제병합을거쳐 1919년 1월에고종황제가독살될때까지 63년간에걸친명치일본국가의한국침략사를초슈번벌세력의 정한 의실현이란각도에서정리해본것이다. 이웃나라의왕과왕비를살해하면서까지목적달성하려한것은용서받기어려운인륜의문제... 무사사회의 9) Harry B. Scheiber, professor, U.C., Berkely, op. cit. supra note 8), pp.16-17:...to accept Japan s argument based on unilateral annexation and the duration of subsequent control is indeed difficult, for it requires that we should set aside as irrelevant the actual historic context in which it acted-that is, that this seizure of control in Dokdo occurred at the very moment in history when Japan was coercibly depriving Korea of its sovereignty and more over, that this was but the first subservient to exploitive and often cruel Japanese rule. Hence, Korea was deprived of effective means of asserting its nation-based claim in a diplomatic arena.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215 전통이저지른과오라고하더라도이해하기어려운문제... 왜이런일까지당하는역사가일어나게했던가에대한민족적수치심이밀려들어오기때문이다 고끝을맺었다. 이런비극적역사속에서 독도 가제1먼저일본에게탈취당한것이었다. 우리국민에게독도는완전한국권회복의상징이다 고말한고노무현대통령의지적의미를알것같다. 미국하바드대학죠지산타야나 (Jeorge Santayana) 교수는 과거를기억하지못하는자는저주받아서그과거를되풀이하게된다 (Those who do 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고갈파하였다. 우리가 독도 를재침탈당하지아니하기위해서도우리는그당시의역사를살펴볼필요가있다. 제폭구민 ( 除暴救民 ) 과척왜척양 ( 斥倭斥洋 ) 의기치를든동학농민군이 1894.5.30. 전주성을점령하자, 조정은이를진압하기위하여초토사홍계훈 ( 洪啟薰 ) 을전주지방에파견함과동시청나라에원군을청했다. 우리조정의요청을받은청나라군대가동학을진압하기위하여동년 (1894) 6월 11일아산만에상륙하였다. 그러나불청객인일본군은칩략군으로서, 동학은남쪽의호남에있는데그보다앞서 6월 9일서울의문호인인청항에불법상륙하였다. 그리고주한일본공사오도리 ( 大鳥義昌 ) 는 조선정부의철군요구에도불구하고인천에와있는 6척의군함에서 420명의해병을차출하고대포1 문을이끌고동년 6월 10일서울에입성했다. 뒤이어, 일본군 1개독립대대 (1,050명 ) 가동년 6월 12일인청항에상륙후서울을향하여진격하였다. 동년 6월 16일에는일본군혼성여단 (2,673명, 馬 186두 ) 이인천항에상륙한후일본인거류지에숙영하였다. 이러한일본군의상륙은불법부당할뿐만아니라병자수호조규 ( 제1조 ) 위반임은재언을요치아니한다. 일본측은천진조약에근거한것임을내세우나그것은조선국과는아무런관계가없는중 일양국간의문제일뿐이다. 척왜척양의기치를들고봉기하였던동학군은일본군의인천상륙소식에접하자동년 6월 10일초토사홍계훈 ( 洪啓勳 ) 과전주화약 ( 全州和約 )
216 獨島硏究제 22 호 을맺고해산하였다. 동년 6월 10일서울에입성한불법상륙일본군은동년 7월 23일경복궁을무력점령후청나라에전쟁을도발하였다. 경복궁무력점령사태를합법화하고군작전상의편의를핑계로일본은조선정부에한협상안을제시하였다. 조선정부는한동안동협상에불응하였으나, 일본측강요와일본군의경복궁철수를조건으로동년 8월 20일합의하였으니, 이것이잠정합동조관 ( 暫定合同條款, 7조관 ) 이다. 10) 일본측의강요로동년 8월 26일또하나의협상안이체결되었으니, 이것이한 일맹약 ( 韓 日盟約 ) 이다. 11) 일본군은경복궁을점령한후아산만으로향하던중동년 7월 26일조우한청나라군대를공격하였고, 8월 1일청 일양국은공식적으로선전포고를하였다. 동전쟁은익년일본군의승리로 1895년 4월 17일시모노세키 ( 下關條約 ) 강화조약의체결로끝났다. 청일전쟁에승리한일본의조선국내정간섭은극심하여갔으며, 1895년 10월 8일미명의명성황후시해사건은그절정에이른것이었다. 다른한편으로, 러시아는시베리아철도가우라디보스톡으로연결되고, 러시아가청나라와체결한천진조약에의거요동반도의여순항 (Port Arthur) 을조차하여이를러시아해군의요새로하였다. 러시아의태평양진출과그연해에미칠러시아의영향을우려한일본의야마가다아리도모 ( 山縣有朋 ) 는 1898.5.24. 부터로마노프와형상을하였으며, 그제시안은조선을분할점령 (38 선을기준 ) 하자는것이었다. 그러나러시아측이이를거절하였다. 12) 이대목을영국의해군전략가베라드제독 (G.A. Ballard, Vice-Admiral) 은다음과같이서술하고있다. 10) 이광린, 한국사강좌 ( 근대편 ), ( 서울 : 一潮閣, 1984), p.330( 94.7.27. 대궐근처양국군충돌불문등 ). 11) Ibid. p.331. ( 일본은청국에전쟁을담당, 조선국은일본군의진퇴와그식량준비등편의제공등 ). 12) Ibid. p.390.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217 러시아가 1898년중국으로부터여순항 (Port Arthur) 을포함한요동반도를조차하여태평양진출의기반을구축하게되자, 일본은러시아의만주진출을양해하나그이상은불가하고, 조선 (Korea) 을일본의진출영역으로인정할것을요구하였으나, 러시아가이것을거부하자, 일본은전쟁을택할수밖에없었다. 13) 일본은 7년 14) 이란장구한노력끝에, 1902.1.30. 영일동맹조약 (Anglo-Japanese Alliance Agreement) 체결에성공했다. 더나아가서일본내각은러시아와의개전을대비하여 1903.12.30. 대한방침 ( 對韓方針 ) 을의결하였으니, 이는 20c에들어와서도여전히들어낸정한론 ( 征韓論 ) 에이은또하나의명백한한반도침략정책이었음이들어났으니, 동내용은다음과같다. 韓國에관해서는어떠한경우에臨하더라도이를我의權勢下에두지않으면아니되는것은물론이나, 될수있는한名義가서는것을택함 13) G.A. Ballard, Vice Admiral, U.K..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London: John Murray, Abemarle, St. W., 1921),pp.188-91:...and on this part lay the fine natural harbour of Vladivostok, the Headquarters and Supply Base of the Russian Pacific Fleet. But as already observed, this was not an ice-free port, and the Russian Authorities constantly kept their eyes towards, the Yellow sea farther to the South. Especially on its eastern arm extending between Korea and Liao-Tung Peninsula. To establish a footing on its shores, they began in 1898 by obtaining from Peking, under practical compulsion, a lease of part of Liao-Tung peninsula itself, which included Port Arthur.(p.187)....In their endeavors to settle the matter peacefully by compromise, the Japanese went so far as to propose a convention whereby they would pledge themselves to recognize Manchuria as being outside their legitimate sphere of influence, the Russians would meet them half-way by agreeing to recognize that Korea was outside of Russia....but Russia was to be subject to no pledges or restrictiions as regards Korea... and the last word had apparently been said on the Russian side, a siyuation arose which nothing but war could end, should neither nation be afraid to face the ordeal. 14) 영일동맹조약 : 제1조 ( 요약 ); 일본은조선애상업적, 산업적으로뿐만아니라특유할정도로 (in a peculiar degree) 정치적이해관계를갖고있으므로, 이특별한이해관계를보호키위하여필요불가결한조치강구를이해한다.
218 獨島硏究제 22 호 이得策이기때문에혹은往年의淸日戰爭에있어서와같이攻守同盟혹은다른保護的協約을체결하면便宜할것이다. 15) 미국의저명한법학자쉬아이버 (Harry B. Scheiber, Professor, U.C., Berkeley) 교수도독도에관한일본의영유권주장은일본이한국침략과정에서탈취한그역사적사건들의정당화가곤란함을다음과같이자적하고있다. 일본이독도가자국땅이라주장하는결정적증거로서, 1905년일방적으로독도를편입하여 Ⅱ차세계대전말까지점령관리를유지한것을내세우고있지만, 그시기에일본이협박으로조선 (Korea) 의주권을빼앗고, 조선국민의전체생활과사회를일본의착취와잔인한통제하에두어서조선 (Korea) 이외교경로를통한국가적항의의수단마저박탈당한때에 독도 를일본에편입했던것이어서일본의주장을수용하기어렵다. 16) 미국의저명한국제법학자죤벤다이크 (Jon M. Van Dyke) 교수도이와비슷한지적을하고있다. 일본이독도청구에대한지지를얻기위하여서는자국의독도편입이조선 (Korea) 을자국에예속시키고그조선국민들에게엄청난재앙의원 15) 이광린전각주 10) p.474. 16) Harry B. Scheiber, professor, U.C., Berkely, Perspectives from Law and History in War Guilt In Relation to the Dokdo Island (Historical Appraisal and International Justice, Edited by Seok Woo Lee & Hee Eun Lee, (Leiden, Boston: Martinus Nijhoff Publishers,2011),pp.16-17:...To accept Japan s argument based upon unilateral annexation and the duration of subsequent control is indeed difficult, for it requires that we should set aside as irrelevant the actual historic context in which it acted that is that, this seizure of control in Dokdo occurred at the very moment in history when Japan was coercibly depriving Korea of its sovereignty, and moreover, that this was but the first subservient to exploitive and often cruel Japanese rule. Hence, Korea was deprived of effective means of asserting its own nation-based claim in a diplomatic arena.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219 천이되었던... 팽창주의군사활동의한부분이아니었다는것을다른국가들이믿게해야할것 ( 인하대, NAHF공동주최국제학술대회 2007년, 그랜드힐튼호텔 ) 이런견지에서, 고, 노무현대통령의오늘날소위 독도문제 에관한다음지적은그정곡을찌른것이라할것이다. 우리국민에게독도는완전한국권회복의상징입니다. 야스쿠니신사참베, 역사교과서문제와더불어과거역사에대한일본의인식, 그리고미래의한일관계와동아시아의평화에대한일본의의지를간음하는시금석입니다. 일본이잘못된과거를미화하고, 그에근거한권리를주장하는한, 한 일간의우호관계는결코바로설수가없습니다. 어떤경제적인이해관계도, 문화적교류도이벽을녹이지는못할것입니다. 일본이한반도침략의야욕을채우기위하여, 청일전쟁을일으켰고 (1894), 러일전쟁에대비하여, 병력및함정등증강뿐만아니라영일동맹조약체결 (1902) 과대한방침 (1903) 수립등만반의태세를가춘후, 마침내일본의소함대가 1904년 1월 28일 (Gregorian 동년 2월 9일 ) 11:45 인천항에있던러시아순양함발야그 (Varyag) 함과포함커리예쓰 (Koreyets) 함에포격을가함으로써양국간전쟁이한반도에서발생하게되었다. 이러일전쟁발발 1주년이되던 1905년 1월 28일당시일본정부는과거일본막부정부가 1699년 1월 울릉도와그속도인독도 가조선국영토임을인정한이래 200 여년간존중하여왔던 독도 에대한조선국영토주권을부정하고 무주지 (terra nulius) 라며. 국제법원칙 ( 금반언원칙, the principle of Estoppel) 을위반하고, 은밀하게, 불법적으로일본에편입결정을함과동시그동안일본인들이호칭하여왔던명칭인 마쓰시마 ( 松島 ) 대신에 다케시마 ( 竹島 ) 로개칭한것이오늘날소위 독도문제 가된것은누구도부정할수없는엄연한역사적사실이다. 즉, 일본은한반도를수중에넣기위하여벌린러일전쟁중 1905년에제일먼저 독도 를블법적으로탈취하여갔던것이
220 獨島硏究제 22 호 나, 일본이 Ⅱ차세계대전에패배한후포츠담선언 (8) 에근거하여 독도 가다시 1946.1.29( 연합국최고사령관훈령 677호, the Directive, SCAPIN 677) 한국땅으로원상대로귀속되었던것이다. 따라서소위 독도영토분규 란존재하지아니한다. 다만, 근거없는일본측의만부당한주장만이허공에서메아리칠뿐이다. 대한사람들은그관할권행사만철저히하면되는것이지, 결코 독도 에관한일본측의헛된 자국땅 주장에현혹되어서는아니될것이다. 3. 일본측의 고유한자국영토 ( 독도 ) 론 에대한비판적고찰 앞에서살펴본바와같이, 독도는역사적, 국제법적및그실효적관할상엄연히대한민국의영토임에도불구하고, 독도에대한탐욕 ( greed ) 을버리지못한일본정부가그동안여러가지로독도가소위 자국땅 이란근거없는주장을하여왔다. 이런일본정부의주장은아베정부에이르러더욱심화되어왔다. 급기야아베정부는중학교교과서에 다케시마 ( 독도 ) 는일본의고유영토인데, 한국이불법점거하고있다 고 2015.4.6. 아직판단력과역사인식이부족한일본어린이들에게학교에서가르치고있고, 고등학교교과서에도그같은 독도 에관한거짓내용을싣기로 2016.3.18. 결정하여가르치고있디. 오늘날소위 독도문제 중가장심각한것은바로이일본의 독도왜곡 교과서에서찾을수있다. 그것은영국과알헨티나간포그랜드전쟁 (the Battle for Falklands) 원인의하나로지목된일핸티나의 1955년교과서개정내용 : Malvinuas(Falklands에대한알헨티나명칭 ) 는알헨티나땅인데영국이감점하고있다. 을학교에서가르친결과, 1세대후포크랜드전쟁발생원인중하나가되었다는것이다. 일본측교과서상 독도 왜곡도이를반면교사로삼은것인지도모를일이다. 특히, 알핸티나교과서에도없는일본측독도왜곡내용중특히한국이 불법 점거란용어는내셔날리즘이강한일본어린이들에게더욱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221 심각한영향을줄수있을것이란우려를배제하기어려울것같다. 이런견지에서, 전기일본교과서상독도왜곡내용이역사적사실왜곡은말할것없지만, 본고에서는 국제법상 위반사항만을고찰하여보고자한다. ⑴ 1699.1월조선국정부와일본막부정부간 울릉도와독도 가당시조선국영토란국제합의위반. 국제간합의는당사국간일종의법 17) 이며, 국제간합의된영토주권은영유국이포기하지않는한그영유권은유지된다. 18) ⑵ 포츠담선언 (Potsdam Declaration (8)) 조건위반동 (8): 카이로선언조건은시행한다. 일본의주권은혼슈, 혹카이도, 규슈, 시코크와우리 ( 연합국 ) 가결정하는소도서들에국한한다. (The terms of Cairo Declaration shall be carried out, and Japanese sovereignty shall be limited to the islands of Honshu, Hokkaido, Kyushu, Shikoku and such minor islands as we determine.). 일본의영토주권은 4대도서 ( 혼슈, 혹카이도, 규슈, 시코크 ) 와우리 ( 연합국 ) 가결정하는소도서들로국한한다고규정되어있다. 그러나연합국이 독도 를일본의소도로결정한바가없다. 그런데도불구하고오늘날일본정부는 독도 가자국땅소위 다케시마 라고주장하고있다. 따라서, 17) J.L. Brierly, op. cit., supra note 5) p.57: Agreement is a law for those who make it, which supersedes, supplements or derogates from ordinary law of the land, Modes et conventio vincunt legem. p.325: The general rule is that treaties creates rithts and duties only for the parties to them. 18) Victor Immanual, Clipperton Island Case, 1931, Vol.26, American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p.394: There is no reason to suppose that France subsequently lost her right by derelictio since she never had the animus of abandoning the island and the fact that she has not exercised her authority there in a positive manner does not imply the forfeiture of an acquisition already definitively perfected.
222 獨島硏究제 22 호 이러한일본정부의주장은포츠담선언 (8) 후단의일본영토규정을명백히위반하는것임을지적하지않을수없는것을매우유감으로생각한다. ⑶ 스카핀 (SCAPIN) 훈령 ( 지령 ) 677(1946.1.29.) 위반동스캎 ( 연합국최고사령관 ) 훈령발령근거는포츠담선언 (8), 일본의항복문서 (The Instrument of Surrender, 2 Sept. 1945), 일본항복후초기미국의일본에대한정책 (United States Initial Post-Surrender Policy for Japan, 26 August 1945, approved 6, September 1945) 및일본항복후일본점령과통제에관한연합국최고사령관에하달된처음기본훈령 (Basic Initial Post-Surrender Directive to 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for the Occupatioon and Control of Japan, 3 November 1945) 을들수있다. 특히, 전기 처음기본훈령 에서연합국을대표한미국대통령이스캅에부여한다음최고권한을간과해서는아니될것이다. : * 일본에대한귀권한과권위의근거는미국대통령에의한스캎 (SCAP) 지명. * 일본왕이수용한항복문서 (The Instrument of Surrender) 등 ( 위 2 문서는포츠담선언에근거함.) 이들문서에근거한 귀하 (SCAP 으로서 ) 의권한. : ⑴ 이항복집행목적상최고 (supreme for the purpose of the carrying out the surrender.) ⑵ 적국군사점령관의재래의권한에추가하여, 포츠담선언조건과이항복을집행하기위하여귀하가적당하고권고할만하다고고려하는어떤단계적조치도취할권한 (In addition to the conventional powers of a military occupant of enemy territory, you have the power to take any steps deemed advisable and proper by you to effectuate the surrender and provisions of the Potsdam Declaration., 2. The Basis and Scope of Military Authority, Part I. General and Political of the Basic Initial Post_Surrender Directive)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223 #1. 스카핀 677(1946.1.29.) 의 3., 4. 및 6. 고찰 ⑴ 3. 규정 ( 발췌 ) : 본훈령의목적상, 일본은일본의 4개도서 ( 혹카이도, 혼슈, 큐슈및시코크 ) 와대마도를포함한약 1,000개의인접한보다작은도서들과북위 30 의북쪽유구 ( 난세이 ) 열도 ( 구치노시마포함 ) 로국한하며, (a) 울릉도, 리앙코드암석 ( 다케시마, 독도 ) 및퀠파트 ( 사이슈도또는제주도 ), (b) 북위 30 이남유구 ( 난세이 ) 열도 ( 구치노시마포함 ), 이즈...(c)... 등을제외한다. (For the purpose of this dirctive, Japan is defined to include the four main islands of Japan (Hokkaido, Honshu, Kyushu and Shikoku) and the approximately 1,000 smaller adjacent islands, including the Tsushima islands and the Ryuku (Nansei) Islands North of 30 North Latitude(excluding Kuchinoshima Island), and excluding (a) Utsuryo (Ullung) Island, Liancourt Rocks (Take Island) and Quelpart (Saishu or Cheju) Island, (b)...... 본규정 3. 의중요성 : 독도 가명문으로일본에서제외 (exclude) 된것이며, 그후변경된바가없음에있다. 동 독도 제외규정을상쇄시킬목적으로, 일본이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초안작성시 일본에 독도 가포함된다 (Japan comprises... Liancourt Rocks (Take Island) 는 19) 규정을포함코자적극적로비를했으나실패하였다. ⑵ 4. 규정 ( 발췌 ) : 일본제국정부의통치적및행정적관할로부터특별히제외되는추가적지역은다음과같다. ⑴... ⑵... ⑶코리아 (Korea)... ⑷ 화태 ( 가라후토 ). 19) 해양수산부, 바다는왜파란가?, (1998), p.174, 우리나라전도서의수 : 4,198개도서 ( 남한 : 3,153개섬, 북한 : 1,045개섬 ).
224 獨島硏究제 22 호 본규정 4. 의중요성 : 코리아 (Korea) 는한반도와총 4,198개의도서 ( 남북합계 ) 로구성되어있는바, 일본에서 코리아 (Korea) 제외규정을별도로둠으로써통치적및행정적으로총체적으로 코라아 가일본에서제외된것이다. ⑶ 6. 규정 ( 발췌 ) : 본훈령 ( 지령 ) 내의어떤것도 포츠담선어 (8) 에언급된작은도서들에관한최종적결정에관련된연합국정책의표시로서고려되어서는안된다 (Nothing in this directive shall be construed as an indication of the Allied Policy relating to the ultimate determination of the minor islands referred to in Article 8 of the Potsdam Declaration.) 본조항의중요성은일본측이전기규정 3. 에의거 독도 가일본에서제외조치된것에대하여, 동제외조치가임시적인것이며, 최종적제외조치는별도로있어야한다는잘못된주장의근거로이용하는경우가있기때문이다. 본규정 6. 의본뜻은 일본의영토는전기 4대도서와연합국이결정하는소도서로국한한다 는전기포츠담선언 (8) 후단의규정에근거하여일본의소도서들에관한연합국의결정을스캎 (SCAP) 훈령 ( 지령 )677호로시행하는것이지만, 이것이최종적인소도서에관한결정이라기보다는추후새로또결정이있을수있다는개연성이있음을말하는것이지, 동훈령 677호로결정한소도서들이 임시적 인것이란뜻은결코아님을저적하여둔다. 뿐만아니라 독도 는연합국에의하여일본의소도서로결정된바가없고, 도리어일본주권에서 제외 (exclude) 되었기때문에, 독도 가자국땅이란주장을하는일본은국제특별법시행령격인스카핀 (SCAPIN) 677(1946.1.29.) 을위반할뿐만아니라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제19(d) 20) 20) Article 19(d), Peace Treaty, SanFrancisco: Japan recognizes the validity of all acts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225 규정 ( 일본은점령당국에의한조치효력인정 ) 을위반하는것임을지적하지않을수없다. #2. 평화조약제2조 (a) 상소위 독도누락론 비판일본측일부학자들은동제2조 (a) 규정상 울릉도 에그속도인 독도 가포함되어있는데도불구하고, 독도 가빠져있다고주장하며, 마치오늘날소위 독도문제 의발생원인으로돌리는경향이있다. 심지어이는샌프란시스코평화체제로인한결과물이란터무니없는주장까지거리낌없는말을주저치안는다. 소위 샌프란시스코평화체재 란실재를부인할수는없을지라도, 독도 와는무관한사항이다. 독도 는전술한바와같이포츠담선언 (8) 의카이로선언조건시행차원에서동평화조약체결 (1951) 보다 6년전 에, 동평화조약을주관했던죤포스터덜레스미국대표가연설 (1951.9.5) 을통하여지적했던것처럼, 연합국의일본점령당국 (the Occupation Authority) 에의거이미시행되었었기때문이다. 동평화조약제2조 (a) 규정내용을검토해보면, 다음과같다. ⑴ 제2조 (a) 규정 ( 발췌 ): 일본은코리아 (Korea) 의독립을인정하며, 제주도, 거문도및울릉도를포함한코리아의모든권리, 권원및청구를포기한다. (Japan, recognizing the independence of Korea, renounces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Korea, including the islands of Quelpart, Port Hamilton and Dagelet). ⑵ 검토 가일반사항 - 누락 : * 한반도 * 4,198개주변도서 - 문제 : 동규정상실제로 코리아 (Korea) 에서누락된것은위두개사 and ommissions done during the period of occupation under or in consequence of directives of the Occupation Authorities or authorized by Japanese law at that time, and...
226 獨島硏究제 22 호 항이라볼수있으나, 이는조약법에관한비엔나협약 (The Vienna Convention for the Law of Treaties) 제32조 (Supplementary Interpretation) 규정에의거보충적해석이가능하므로문제될것이없다. 나구체적검토평화조약을시종주관했던미국대표덜레스 (John F. Dulles) 는동조약체결 3일전연설 (1951.9.5) 에서동조약체결여건성숙과정과관련, 연합국의점령당국이그간만족스러울정도로포츠담선언의항복조건규정을사전성취함으로써이제 평화조약 체결단계에이르게되었음을언급하면서, 일본이포츠담선언항복조건상영토규정을 6년전에기시행하였음과금반동조약체결로공식적으로 (formally) 이를비준하게되었음을설명했던것이다. 특히, 그는동제2조 (a) 의일본이포기하는내용은포츠담선언 (8) 의 일본의주권은혼슈, 혹카이도, 큐슈, 시코크및연합국이결정하는소도서들로국한되어야한다 는영토조항과엄격히일치한다는것을강조하였다. 이는곧스카핀 677(1946.1.29.) 에의거, 일본에서 독도 가제외된것을함축한다. 뿐만아니라연합국이 독도 를일본의소도서로결정한바가없기때문에, 일본정부가 독도 가자국땅이라고함은포츠담선언 (8) 후단규정을위반하는것이다 (What is the territory of Japanese sovereignty? Chapter II deals with that. Japan formally ratifies provisions of Potsdam surrender terms, provisions, which so far as Japan is concerned, were actually carried into effect 6 years ago. The Potsdam Surrender Terms constitutes the only definition of the peace terms to which and by which Japan and the Allied Poers as a whole are bound...therefore, the Treaty embodies Article 8 of the Surrender Terms which provided that Japanses sovereignty should be limited to Honshu, Hokkaido, Kyushu, Shikoku and some minor islands. The renounciations contained in Article 2 of Chapter II strictly and scrupulously conform to that Surrrender Terms. ).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227 #3. 한 일기본관계조약 (1965.6.22.) (The Treaty On the Basic Relations Between Republic of Korea and Japan). * 14년간의긴협상 (1951-1965): 한 일과거사등난제중시종 독도 문제가특히난항초래 (1965년서명식때까지 ). * 동조약서명식때의양해각서파동 : 일본측은 1965.6.22. 17:00에있었던동조약서명식때예상치못했던한장의 양해각서 를우리대표단앞에내밀고, 서명을요청했다. 그안에는조약시행과정에서 독도문제 를포함하여, 조약문해석문제등이있을때우선외교계통등을통하여해결할것을담고있었다. 우리대표단이그각서내용중 독도문제 삭제를요구하며, 서명을완강히거부하자, 일본측은그회의를중단하고, 비상각의를열어서 독도문제 를삭제하였고, 그문자삭제후에우리대표는동기본관계조약에서명하였던것이었다. 21) 이는 독도 와관련하여국제법상매우중요한의미를가진다. 일본정부가 독도 에대한한국의영토주권을수용하여공식적으로묵인 (acquiecence) 한것이되고, 독도 에관한동기본관계조약해석상 조약법에관한비엔나협약 제32조 ( 보충적해석 ) 의규정이적용될수있을것이다. 22) 위와같은견지에서, 한 일기본관계조약은 독도 가한국영토임을일본정부가국제법상묵인 (acquiesence) 한것으로써, 오늘날 독도 가자국땅이라고주장하는일본정부는동기본관계조약을위반한것임을지적할수있을것이다. 21) 김동조, 냉전시대의우리외교, ( 김동조, 전외무부장관회고록, 회상 80년 ), ( 서울 : 주 ) 문화일보 2000), p.198. 22) Jon M. Van Dyke, Addressing and Resolving the Dokdo matter, (Dokdo: Historical Appraisal and International Justice edited by Seokwoo Lee and Hee Un Lee, Matinus Nijhoff Publishers, 2000), p.30: Dokdo was never listed as official agenda item for discussion during the protracted negotiations that produced this Treaty, and the issue is ignored in the Treaty. Japan s willingness to enter into normalizing treaty without pressing its claim to Dokdo might be seen as a waiver by Japan of its claim and acceptance of (for acquiescence to) Korea s sovereignty over Dokdo.
228 獨島硏究제 22 호 #4. 유엔결의 2625호 (1970.10.24.) 위반 ( 독도 가자국땅이란일본의주장 ). * 결의내용 : 국가의영토는다른나라의협박이나무력사용으로취득할수있는대상이아니다. 협박과무력의사용결과로취득한어떠한영토도합법적인것으로인정되어서는아니된다. 23) 일본정부는그간근거없이 독도 가자국땅이란불법적주장을하여왔으며, 특히이배정부에이르러서 독도 왜곡은더욱심화되어갔으며, 마침내일본중학교교과서에일률적으로 다케시마 ( 독도 ) 는일본의고유한영토인데, 한국이불법점거하고있다 는왜곡내용을실어 (2015.4.6) 학교에서교육을시키고있다. 더나아가서일본정부는그같은 독도 왜곡내용을 2016.3.18. 고등학교교과서에도실었다. 아직판단능력이나역사인식능력이부족한어린일본학생들이이런잘못된교육을학교에서배운다면장차그들이성장하여일본을지도해나갈때미래한국세대에큰위협이우려된다. 당시우리교육부의대변인의다음성명은이런우려를잘보여주고있다. = 日잘못된역사교육에동북아평화위태 = : 일본문부과학성이대한민국의고유영토인 독도 를자국영토로표기하고 한국이불법점거하고있다 는거짓된내용을수록한교과서를검정합격시켰다. 역사적인식능력과판단능력을갖추지못한학생들에게역사와영토에대한잘못된인식을심어주는내용을가르치도록하는것은미래동북아지역의평화를위태롭게할수도있는매우비교육적인행위로규탄받아야마땅하다. 24) 23) UNGA Declaration of Principles of International Law Concerning Friendly Relations and Cooperation Among States in accordance with the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Res. 2625, 24 October 1970. [Adrew Clapham, Brierly s Law of Nations, (Oxford Univ. Press 2021].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229 역사적, 국제법적으로, 그리고그실효적관할상엄연히대한민국의영토인 독도 를일본정부가 한국이불법점거하고있다 고거짓내용을일본중 고교교과서에게재하여, 어린학생들에게가르치도록하고있는것은 독도 재침탈을꾀하는 위협 으로서, 영토는타국의위협이나무력사용으로취득할수있는대상이아님 을선언한 유엔총회결의제2625 호 (UNGA Res 2625, 1970.10.24) 를위반한것임을지적하지아니할수없다. 일본정부는즉각동교과서상 독도 왜곡을철회해야마땅하다. #5. 일본영역참고도 ( 일본영역참고도 ) 상울릉도의속도 독도 미국의저명한국제법학자센다이퍼 (Durward V. Sandifer, professor, U.V.A.) 교수는그의역저 국제중재재판에서의증거론 (Evidence Before the International Tribunals, Revised Ed., Charlottsville:U.V.A. Press, 1957) 에서, 최고의증거력은조약, 정부문서, 공공기록등이나, 지도의증거력은독자적인것이아니라부차적인것이다. 그러나본문과함께있는지도는그본문과같은증거력을가진다고설파했다. 일본정부는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체결한후의회에비준요청 (1951.10) 시 일본영역참고도 ( 日本領域參考圖 ) 를함께보냈다. 동영역참고도상 독도 는울릉도의속도로서, 일본국경선밖의한국영역에들어가있다. 일본중의원심의과정에서 독도 의위치관계로일본정부위원과국회의원간에질의응답중논란이있었으나, 동참고도상 독도 가한국령에속해있는것에대한어떤부정적조치도없이그대로비준되었다 ( 중의원 : 1951.10.26., 참의원 : 동년 11월 18일, 참의원에서는동참고도를배포하다가돌연배포중단됨 ). 이는일본정부뿐만아니라그의회도공식적으로 독도 가한국의땅임을인정한것이고, 1699. 1월완성되었던당시조선국의 독도 영토주권이국제법상재확인된것이라고말할수있을것이다. 그런대도불구하고소위 독도가일본땅 이란일본정 24) 서울신문보도, 2015.4.7.
230 獨島硏究제 22 호 부주장은국제법을위반하는것임을지적할수있다. 참고. 일본의회의동비준관계속기록 ( 발췌 ). * 중의원속기록 (1951.10.22. 비준심의시질의응답발췌 ) 야마모토 ( 山本 ) 위원 ( 질의 ): 이번우리가받은일본영역참고도를보면,... 이다케시마가이지도에서보면, 우리의영토인가혹은울릉도에부속조선등에옴겨지는지... 이기회에확실히하여주시기바람. 구사바 ( 草葉 ) 정부위원 ( 답변 ): 현재점령하의행저구획에는다케시마가제외되어있습니다만, 이번평화조약에있어서는일본에들어온다고... 생각합니다. * 제17회중의원외무위원회회의속기록 (1953.11.4.) 발췌. 가와가미간이치 ( 川上貫一 ) 위원 ( 질의 ): 처음부터이것은애매한형태로남아있었습니다. 첫째로이평화조약비준당시제출한그지도, 뒤에정부가서둘러취소했습니다만. 그지도에일본영역참고도 ( 일본領域參考圖 ) 라고쓰여있습니다. 영역 이라고쓰여있는이지도에분명하게 竹島 는제외되어있습니다. 그런데이것은참의원위원회에는제출되지않았고, 중의원위원회에는제출되었습니다. 왜, 배포를하다가중단되었을까요? 이는미국이태도를분명히보여주고있지않다는것의반증입니다. 그렇기때문에오가다 ( 小紡 ) 부총리께서노농당의질문에대해평화조약에의해서 竹島 는일본영토라고대답하지못하고, 국제법에딸아우리 ( 일본 ) 영토라고대답하셨던것입니다. 평화조약에확실히정해져있었다면그렇다고답해도되지않았을까요? 더이상말씀드리지않겠습니다. 일본정부는평화조약상에서 竹島 가일본의영토임을증명한자료를제시해야함에도불구하고아직제출하고있지않아서제출을다시한번촉구하는바입니다. [ 자료 ( 동북아역사재단 ): 일본국회독도관련기록모음집 I 부 (1948-1976)] 본일본국회속기록발췌본은 독도 가평화조약상한국영토임을반증한다.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231 ## 기타 : 국내학계일부의 독도영토주권 에관한애매모호한논조비판. 우리의 독도 영토주권은역사적, 국제법적및그실효적관할상아무런문제가없다. 본시 독도 는지난날일제의한반도침략과정에서제일먼저불법적으로침탈된우리영토로서해방후다시 우리품 에돌아온땅이다. 오늘날일본정부의소위 독도가자국땅 이란주장은아무런합당한근거가없을뿐만아니라여러국제법을위반한불법주장으로서 독도 재침탈을노린일종의 위협 이며, 영토는타국의위협이나무력사용으로인한침탈의대상이될수없다 는유엔총회결의 2625호 (1970.10.24.) 에정면으로상충되는불법적주장이다. 그런대도불구하고국내일부학계의 독도영토주권 에관한애매모호한논조는우리국민의 독도 에대한올바른인식을하는데지장을줄수있을뿐만아니라 독도 수호를위한국민적단합과그수호의지를저하시킬우려도배제할수없기때문에이이상더간과할수도없는지경에이르렀음을지적할수있다. 이런견지에서, 그러한논조들은앞으로각종학술회의를통하여학술적연구의자유를해치지않는범위내에서철저한검증을통하여이사회에서퇴출되어야마땅할것이다. 더구나이런논조들이정부예산지출과관련된논문에서나온것이라면그것은더욱참담한일이라할것이며, 이점정부예산의적정사용여부를살피는것을그직무로하는정부관계기관의각별한관심이요구된다. 다음과같은논조들이학술적검증대상이될수있을것같다. - 일본측은독도가일본땅이란주장을할수있는자료가잘정비되어있지만, 한국측은그러하지못하다. - 영토문제란정치적으로해결되는것이지, 국제법적으로해결되는것은아니다. - 영토문제란정치적으로해결되는것이지, 국제법적으로해결되는것은아니다.
232 獨島硏究제 22 호 - 일본은정치적으로독도문제를해결하기위하여미국과긴밀히협의를으로독도문제를해결하기위하여미국과긴밀히협의를한다. 한국도그래야할것이다. - 러시크서한 (1951.8.10.) 은독도가일본측에유리하게기술되어있다고만소개하는것 ( 그 2년후, 이내용에부정적인 John F. Dulles 장관의주 일미국대사앞전보 (1953.12.9.) 는소개함이없이.) - 한 일간독도분규에있어서, 미국은일본편에있다고볼수있다. 그것은미국의러스크차관보서한 (1951. 8. 10) 으로보아그렇다. - 한국이독도실효지배강화를위하여독도에시설을하다가일본과물리적충돌이생겨서, 유엔안보리가개입하여, 독도문제를국제사법재판소 (ICJ) 에회부결정을권고결의할경우한국은그권고결의에따르지않을수없을것이다. - 영토문제에관한당사국간쌍무협상은경직성이있어서성사되기어렵다. 그러므로당해지역관계국가들간집단적으로협의결정하는것이좋다. - 영토주권은분할이불가능한것이므로관계국이공동개발하여수익을배분하자는일부일본시민들의주장 (2012년 9월 ) 을언급하며, 국내학자가보인 영토분쟁푸는동아시아공동체구상 운운. - 스카핀 (SCAPIN) 677호 (1946.1.29.) 에의한 독도 등의일본주권에서제외조치는잠정적인것. - 일본영역참고도 는일본정부가평화조약비준요청서를일본의회에송부할때함께보냈으나, 후에철회했다운운등. - 한 일간안보및경제적협력관계상독도문제는상호원만한타결이바람직할것이다. - 독도문제는 ( 과거일본의한반도침략에따른 역사적문제 이다.) 영토분규가아닌데도, 국제법상 결정적일자 (critical date) 가 1905년또는, 1952년인가로논란하는행태.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233 - 대마도 가옛날우리땅이므로일본측에청구해야한다는주장 ( 국제법상현재는합법적주장근거부재인데도 ). - 일본이독도의육지는한국의땅으로인정하되, 그주변바다는해양과학조사를위하여국제사회에개방하자는일본학자의제안에동조하는행태. - 기타독도관련일본자료를번역함에있어서, 객관성이결여되거나원문에없는내용을첨가하여원문의뜻이왜곡되어지는것. 4. 독도 수호책 1) 우리의 독도 관할권행사철저 - 독도방파제즉각착공성수기 1일 2,000명이상의독도방문객운송여객선의독도선착장접안안전확보. 현재약 30% 의여객선이강한파도로접안을못하고귀환한다. -독도어민의집 (4층건물 ) 에약7세대 ( 부부기준 ) 입주허용 : 소득발생시과세, 분규발생시사법권행사. 2) 독도 관련일본정부의국제법위반사항규탄강화 - 국제학술회의 ( 국내외 ) 등을통하여, 독도 관련일본측의국제법위반사항을적극적으로부각시키고, 독도 재침탈행태를규탄함으로써, 일본에의한독도재침탈저지. 3) 독도 관련정부부서조직강화 - 외교부주. 유엔대표부조직일부강화 : 독도실 ( 참사관급 ) 신설. 일본정부는소위 독도문제 10개사항 (10 Issues of Takeshima) 이란소
234 獨島硏究제 22 호 책자를제작하여 10개외국어로번역하여 2007.12월경부터국제적으로배포하고있으며, 아베정부에들어와서는내각에 영토관계특별협의회 를구성하여, 독도 문제를내각수준에서다루고있음에비추어, 우리나라의경우는이와는다르다고할수있다. 우리정부의경우는외무부영토해양과가 독도 문제를전담하고있으나, 인력및제도적측면에서일본에비하여매우빈약하다고말할수있으며, 일본이 독도 를재침탈하려는지속적각종행태에현실적으로, 효율적으로대응이용이치않으리라는것을능히짐작할수있을것같다. 예를들면, 외교부영토해양과직원들은소위 독도문제 를검토 처리함에있어서수년간의직무수행끝에능력을제대로발휘할만큼되면인사제도상 독도 와전혀관련없는해외로전보되고, 새로보직받은직원이또그같은과정을반복하고있는것이현실이라말할수있을것같다. 그러나소위 독도문제 는그렇게단순한문제는아니다. 따라서, 강화되고있는일본정부의제도적 독도 왜곡심화와 독도 왜곡국제홍보강화에효율적으로대응하고우리정부의독도관계업무수행인력의보다전문화를기하기위하여, 주. 유엔우리대표부에가칭 독도실 ( 참사관급 ) 을신설하여, 유엔을중심으로일본측의국제홍보에효율적으로대응하고, 영토해양과와가칭주. 유엔대표부 독도실 과의인력교류기반을마련할필요가있을것이다. 5. 결론 일본정부가우리영토 독도 를자국영토라고주장함은앞에서살펴본바와같이무엇보다도국제법을위반한근거없는것임을지적할수있다. 우리의효율적대응책은우선 독도 에대한우리의배타적관할권의철저행사에서찾을수있을것이므로, 즉각 독도방파제 를착공하여야마땅할것이다.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235 일본측의전기 독도 관련국제법위반사항들은특히, 지속적국제학술회의를통하여철저히검증하고, 규탄하여국제사회에서근거없는일본의 독도 관련왜곡이좌절되도록하여야할것이다. 국제학술회의는가급적포츠담선언상의연합국 ( 미 중 영 러 ) 출신학자들이많이참여토록독려하고, 국제학술회의에현장 ( 독도 ) 회의도부분적으로포함시키는것이좋을것같다. 그들제3국인들도 독도 현장을보면, 그땅이뉘땅인지보다진솔한느낌도경험할수있을것이기때문이다. 끝으로, 오늘날일본정부의근거없는소위 독도가자국땅 이란주장과그내용의일본교과서상반영과교육은특히일종의 위협 으로서오늘날유엔총회결의 2625( 영토란타국의위협이나무력사용으로취득할수있는대상이아니다 ) 에위반할뿐만아니라, 과거한반도침략을위한 제국주의침략전쟁에의한점령지권리, 나아가서는식민지영토권을주장하는것 으로서우리는단호하고지속적인대응이필요하므로, 정부관계부서의제도적보강이필요하다는견지에서, 전술한주. 유엔우리대표부에가칭 독도실 ( 참사관급 ) 이조속히신설될것이요망된다. 참고문헌 신용하, 독도의민족영토사연구 ( 서울 : 지식산업사, 1997). 이광린, 한국사강좌 ( 근대편 ) ( 서울 : 일호각, 1984). G.A. Ballard, C.V., Vice-Admiral,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London: Jonn Murray, Albamarle St. W. 1921). F.A. Mackenzie, the Tragedy of Korea, (London:Hodder & Soughton). J.L. Brierly, the Law of Nations, (Oxford: Clarendon Press, 1968) Andrew Clapham, Brierly s Law of Nations, (Oxford Univ. Press, 2012). Durward Sandifer, Evidences Before International Arbitrary Tribunals(Charlottesville: University of Virginia Press, 1975).
236 獨島硏究제 22 호 <Abstract> A View on How To Protect Korean Territorial Sovereignty over Dokdo - In Appreciation of the Fact that Japanese Claim over Dokdo Can not Stand without Violating International Law Concerned - Hongju Nah Dokdo is the Korean islets in light of history, international law and Korean exclusive jurisdiction over the Islets without any controversy. However, Japanese government has tried to lay a claim over the Korean islets without any reasonable eveidence. In particular, the Japanese Abe government has continuously distorted truth on the Korean territorial sovereignty over the Dokdo, reflecting on Japanese Middle and High School textbooks with such wrong information as that Takeshima (or Dokdo) is Japanese ancient island, but it has illegally been occupied by Korea. Such kind of Japanese government distortion on the Korean sovereignty over Dokdo can not be made without violating various provisions of international law and agreement, that is the international agreement between the government of Korean kingdom and that of Japanese Shogun in Jan. 1699 over Korean sovereignty over Ullung island and Dokdo (Wusan), and Potsdam Declaration (8), SCAPIN 677(Jan. 29, 1946), Article 2(a) and Article 19(d), Peace Treaty, SanFrancisco, In addition to them, such Japanese government action as to reflect its wrong claim over Dokdo on Japanese textbooks may be a kind of threat falling in the
독도영토주권수호고찰 237 purview of UN Res. 2625. In this light of view, all the above mentioned potential violations of international law and agreement by Japanese government s distortion about Dokdo reflected on its textbooks should be strictly screened and rebuked. Some part of Korean articles appears to be ambiguous to Korean sovereignty shall also be put into strict examinations so that those articles be rebuked and expelled from Korean society. Key words: Dokdo, Japanese claim on Dokdo, Japanese textbook distortion on Dokdo. 이논문은 2017 년 5월 25일에투고하여 2017 년 6월 3~25 일에심사하여 2016 년 6월 26일에게재 결정됨
239 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의 1) 김명기 * < 목차 > 1. 서론 2. 선제적연구 3. 연구내용상의기본방향제의 4. 연구방법상의기본방향제의 5. 결론 < 국문초록 > 독도연구의기본방향은독도연구에참여하고있는학자의학문분야마다다를수있고, 또특정학술분야에소속되어있는학자마다다를수있다고본다. 더나아가독도연구소마다각기다른연구방향이제시될수있다고본다. 그러나여기서저자가의미하는독도연구의기본방향은개별학자와전문가의전공분야와학문분야를초월해서, 각독자연구소의설립목적을초월해서대한민국이라는국가의입장에서포괄적, 총체적인독도연구의기본방향으로정의하기로한다. 그러나이렇게하면독도연구의기본방향의제시는국가의과제에속하는것이되고, 민간대학연구소로서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의범위를넘게된다. 따라서저자는독도연구의기본방향을제시한다기보다그간독도를연구하면서느낀소박한소감을토로하여향후한국의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시에미호의참고가되었으면하는과욕을가져본다. 저자는국제법전공자이므로결국이소감의토로도국제법의영역에서의편파적소감이라는비판을받을수있다는것을자인한다. 그러나국제법학자이외의독도연구학자, 특히사학자에게친국제법연구를권고해보려는것이저자의솔직한심정이다. 이하선제적연구로 독도연구에서국제법과사학의관계, 국제법의법원, 역사적권원의대체, 지도의증명력 그리고 지리적접근론 에관해논술하기로한다. 그리고연구방법상의제의에서 학제연구, 연구결과의보급 그리고 독도연구소의특성화연구 ** 명지대학교명예교수
240 獨島硏究제 22 호 에관해논술하기로한다. 마지막으로독도에대한학제연구의필요성과독도연구결과의대중화필요성을제의해본다. 주제어 : 독도연구, 전공분야, 학문분야, 국제법, 사학, 법원, 권원의대체, 학제연구, 특성화, 대중화 1. 서론 독도연구의기본방향은독도연구에참여하고있는학자의학문분야마다다를수있고, 또특정학술분야에소속되어있는학자마다다를수있다고본다. 더나아가독도연구소마다각기다른연구방향이제시될수있다고본다. 그러나여기서발표자가의미하는독도연구의기본방향은각학문분야를초월해서학자와전문가의전공분야를초월해서각독자연구소의설립목적을초월해서대한민국이라는국가의입장에서포괄적, 총체적인독도연구의기본방향으로정의하기로한다. 그러나이정의에의하면독도연구의기본방향의제시과제는국가의과제에속하는것이고독도연구소나학자, 전문가의과제는아니니국가가이기본과제를직 간접적으로제시한바없으므로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 ( 이하 독도연구소 라한다.) 가독도연구의기본방향을제시하려는시도는독도연구소가국가적인과제를대행하는것으로참으로중차대한의의있는일이라고생각된다. 발표자는독도연구의기본방향을제시한다기보다그간독도를연구하면서느낀소박한소감을토로하여독도연구소의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시에미호의참고가되었으면하는과욕을가져본다. 발표자는국제법전공자이므로결국이소감의토로도국제법의영역에서의편파적소감이라는비판을받을수있다는것을자인할수밖에없음을용인하면서국제법학자이외의독도연구학자, 특히사학자에게친국제법연구를권고
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의 241 해보려는것이발표자의솔직한고백이다. 이하선제적연구로 국제법과사학의독도연구관계 사학자 지리학자 정치학자 사회학자 ( 이하 사학자 라한다 ), 국제법의법원 에관해고찰하고친국제법연구를위해 역사적권원의대체, 지도의증명력 그리고 지리적접근론 에관해논술하기로한다. 그리고연구방법상의제의를 학제연구, 연구결과의보급 그리고 독도연구소의특성화연구 에관해논급하기로한다. 결론으로독도에대한학제연구의필요성과독도연구결과의대중화필요성을제의해보려는것이이발표의핵심이므로이에관해서상술하고이이외의영역에서는항목을열거하는정도로대하기로한다. 2. 선제적연구 1) 국제법학과사학 지리학 정치학 사회학등과의관계 독도영유권을연구하는국제법학자의임무는연구에의해제시되어진확정된역사적사실에국제법을적용하여독도의영유권이한국에귀속된다는결론을도출하는것이다. 그러므로사학자들의연구에의해확정된사실없이국제법학자들은어떠한연구도판단도할수없는것이다. 국제법의적용 (application of international law) 은확정된특정사실 (fact) 에국제규범 (norm) 을정합 ( 整合, combine) 하여결론 (conclusion) 을도출하는논리적추급작용이다. 이는국제법을대전제 (major premise) 로하고확인된사실을소전제 (minor premise) 로하여이들을결합하여결론 (conclusion) 을도출하는 3단논법 (syllogism) 의과정을거치게된다. 소전제인사실의인정을 사실확인 (establishment of fact) 이라한다. 예컨대, 백기주태수 ( 白著州太守 ) 가안용복에게 독도는한국의영토이다 라는서계 ( 書契 ) 를써주었다는 사실 을여러문헌과기타사료를근거로입증하는것을말한다. 이확정된사실 ( 소전제 ) 에영토주권의승인에관한 국제법 ( 대전제 )
242 獨島硏究제 22 호 을정합하여 독도의영유권은한국에귀속된다. 라는 판단 ( 결론 ) 을도출하는것이다. 그러므로사학자들의연구에의해제시된역사적사실의확정을전제로만국제법의적용이가능한것이다. 그렇다고역사적사실의확정만으로독도의영유권이한국에귀속된다는결론을내릴수없는것이다. 확정된역사적사실에국제법을적용하여서만 독도의영유권이한국에귀속된다. 는결론의도출이가능하다는것이다. 흔히사학자에의한역사적사실의확정만으로독도의영유권이한국에귀속된다고사학자들이주장하는경우를접하게된다. 이사학자들의속단은명백한법적과오라아니할수없다. 예컨대, 독도를한국의영토로표지한영국의저명한지리학자가제작한지도를발견하고이지도를근거로독도의영유권이명백히한국에귀속된다고주장하는경우, 이주장을조약과같은법적문서에첨부된지도가아니면지도는제1차적증명력이인정되지아니한다는국제판례법 ( 국제관습법 ) 을 1) 이지도에의해확정된사실에적용하면명백히법적타당성이없는것이다. 2) 국제법의연원 가. 국제법의연원의의의 (1) 일반적의미의국제법연원일반적으로국제법의연원이란법의존재형식 (existence in certain forms) 의의미로, 2) 즉국제법규칙의창설방법 (methods of creation of 1) Shabtai Rosenne, The Law and Practice of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Vol.3, 3rd ed. (Hague: Martinus, 1997), pp. 1280-81; D.V.Sandifer, Evidence before International Tribunals re.ed. (Chicago : Chicago University. Press. 1975),p. 203 ; G. Weissberg, Maps as Evidence in International Boundary Disputes, AJIL, Vol.57, 1963, p.785; C.C.Hyde, Maps as Evidence in International Boundary Disputes, AJIL, Vol.27, 1933, p.315; PCIJ, Series B, No.8, 1923, pp.32~33. 2) Alf Ross, A Text Book of International Law(London : Longmans,1947), p.79.
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의 243 international legal rules) 의의미로사용되며 3) 이를 전통적국제법의법원 (traditional sources of international law) 이라한다. 그런의미의법원에는성문법인국제조약과불문법인국제관습법이있다. 4) (2) 국제사법재판소의재판준칙국제사법재판소규정제38조제1항에의하면재판의준칙으로 (ⅰ) 국제조약, (ⅱ) 국제관습법, (ⅲ) 법의일반원칙, (ⅳ) 사법적재판 (Judicial decisions) 과학설을들고있다. 이것은곧국제사법재판소의규정이라는조약의당사자가국제사법재판소에서재판을받을경우에국제법의법원을표시한것이다. 따라서국제사법재판과정의당사자가아닌국제법의주체에대해서는법의일반원칙, 판례등은국제법의법원이될수없다고보아야할것이다. (3) 사법적재판의법원성 국제사법재판소규정 제38조제1항은사법적재판의적용에관해다음과같이규정하고있다. 법칙결정의보조적수단으로서의사법적재판및가장우수한국제법학자의학설, 다만, 제59조의규정에따를것을조건으로한다 (subject to the provisions of Article 59, judicial decisions and teachings of the most highly qualified publishers of the various nations, as subsidiary meas for the determination of rules of law). 3) Michael Virally, The Sources of International Law,in Max Sorensen(ed.), Manual of Public International Law (New York : Macmillan, 1968),p.120. 4) Mark W. Janis, An 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Law(Boston : Little Brown, 1988), p.4 : Ross, supra n.2, p.79 : Robert Jennings and Arthur Watts(eds.), Oppenheim s International Law, 9th ed., Vol.1(London : Longman, 1992), p.23.
244 獨島硏究제 22 호 위의규정중 사법적재판 (judicial decisions) 에는국제재판과국내재판을포함하며, 5) 국제재판에는국제사법재판과국제중재재판을포함하며, 6) 국제사법재판에는분쟁사건에대한재판과권고적의견을포함하며, 7) 재판에는판결이외에명령등기타재판을포함한다. 8) 법칙결정 (determination of rules of law) 중 법칙 은국제조약 ( 제1항 ), 국제관습법 ( 동 ), 법의일반원칙 ( 동 ) 의규칙을뜻하며 9) 가장일반적으로는국제관습법을뜻하게된다. 10) 보조적수단 (subsidiary means) 이란법칙의존재와사용을지정하는수단 (means of indicating the existence and content of rules of law), 11) 즉적용하여야할법의애매성을명백히하는수단 (means of clarifying ambiguities in the law which is to be applied) 을의미하며, 12) 제2차적수단 (secondary means) 을뜻하는것이아니라 13) 국제법의간접적법원 (indirect source of international law) 이란의미인것이다. 14) 그러므로사법적재판은그자체법칙, 즉국제조약, 국제관습법, 법의일반원칙의규칙이아닌것이다. 따라서국제법상 선례구속의원칙 (principle of precedent) 은적용되지아니하는것이다. 5) Jennings and Watts, supra n.4, pp41-42 ; G. Schwarzenberger and E.D. Brown, 1976, Manual of International Law, 6th ed. (Milton : Professional Books), pp.29-30. 6) Ian Brownlie, Principles of Public International Law(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5th ed., 1979, p.21; Rosenne, supra n.1, p.20. 7) Rosenne, supra n.1, pp.22-23. 8) Rosenne, supra n.1, p.1609. 9) Hans Kelsen, The Law of the United Nations (New York : Praeger, 1950) p.523 : Rosenne, supra n.1, p. 1607. 10) Rosenne, supra n.1, p.1608. 11) Virally, supra n.3, p.150. 12) Hons-Jurge Schlochauer, 1981,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EPIL,, Vol.1, p.81. 13) Virally, supra n.3, p 152. 14) Jennings and Watts, supra n.4, p.41.
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의 245 나. 사법적재판의사실상법원성을인정하는학설과판례 (1) 학설 ( 가 ) Peter Malanczuk Malanczuk 는국제법상보통법체계에서인정되는선례구속의원칙은없으나국제재판소는재판의일관성을유지하고편견을피하기위해선재판을따라재판한다고명시적으로선례구속의원칙을인정하고있지않으나간접적으로이를인정하여결국판례의법원성을간접적으로인정하고있다. 그의기술은다음과같다. 사법재판과중재재판은관습법의증거로될수있다. 그러나보통법체계에서알려진바와같은공식적인선례구속의원칙은없다. 국제법상국제재판소는선재판을따라야할의무가없다. 그러나국제재판소는선재판을고려한다. 재판관역시새로운법을참조할수있다는것은아마도진실인것이다. 이점에서국제재판소는특별한의미를갖는다. 동재판소의많은재판이후속적으로일반적인수락을가져온국제법의혁신을유도했다. 국제재판소가후의사건에있어서그러한재판을따를높은개연성이있다. 왜냐하면사법적일관성은편견의비난을피하는아주명백한수단이기때문이다. 15) 15) Judicial and arbitral decisions can be evidence of customary law. There is no formal stare decisis doctrine, as know in common law system. In international law international courts are not obliged to follow previous decisions, although they almost always take previous decisions into account. It is probably true to say that judges can also create new law.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is particularly important in this respect. Many of its decision introduced innovation in to international law which have subsequently won general acceptance. There is strong probability that international court follow such decisions in later cases, since accusations of bias. Peter Malanczuk(ed.), Akeburst s Modern 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Law, 7th ed(london: Routledge), 1997, p.51.
246 獨島硏究제 22 호 ( 나 ) Shobtai Rusenne 16) ( 다 ) David H. Ott 17) ( 라 ) Valerie Epps 18) ( 마 ) Mark W. Janis 19) ( 바 ) Robert Jennings and Arthur Watts 20) ( 사 ) Ian Brownlie 21) ( 아 ) Malcolm N.Show 22) ( 자 ) Hans- jurgen Sehlochauer 23) ( 차 ) H. Thirlway 24) ( 카 ) Stephen Allen 25) 등에의해서도수락되어있다. (2) 판례사법적재판의 사실상 법원성은판례에의해승인되고있다. 중요판례를열거하면다음과같다. 16) Rosenne, supra n.1, p.1610. 17) David H. Ott, 1987, Public International Law in the Modern World(London: Pitman), p.29. 18) Valerie Epps, 2009, International Law, 4th ed.(druhorn : Carolina Academic Press), p28. 19) Mark W.Janis, 1998, An 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Law(Boston : Little Brown), p.69. 20) Jennings and Watts, supra n.4, p.41. 21) Brownlie, supra n.6, p.19. 22) Malcolm N. Shaw, International Law, 4th ed.(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p.86. 23) Hons-Jurge Schlochauer, supra n.12, pp.80-81. 24) H. Thirlway, 1990, The Law and Procedure of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1960-1989, BYIL, Vol.61, pp.3-127. 25) Stephen Allen, 2013, International Law(London : Pearlson), p.31.
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의 247 ( 가 ) Anglo-Iranian Oil Co. Case(1952) Anglo-Iranian Oil Co. Case(1952) 에서국제사법재판소는사법적재판은재판의기초가된다고다음과같이판시한바있다. 규정제38조는명령이며임의가아니다. 이는재판소에게법칙결정을위한보조적수단으로서사법적재판을적용할것을요구하고있다. 사법적재판 이라는표현은확실히이재판소와상설국제사법재판소의법리학을포함하고있다. 본인은재판소의재판의기초로의재판소에의해적용된원칙을포함한다고의심하지아니한다. 26) ( 나 ) Barcelona Traction Case(Second phase)(1970) 27) ( 다 ) Polish Postal Service in Danzig Case(1928) 28) ( 라 ) Lotus Case (1927) 29) ( 마 ) Eastern Greenland Case(1933) 30) ( 바 ) Nottebohm Case(1953) 31) ( 사 ) Gulf of Maine Case(1984) 32) ( 아 ) Chorzow Factory Case(1927) 33) ( 자 ) Fisheries Case(1951) 34) 26) Article 38 of the Statutes is mandatory, and not discretionary. It requires the Court to apply judicial decisions as a subsidiary means for the determination of rules of law. The expression judicial decisions certainly includes the jurisprudence of this Court, and of Permanent Court. I have no doubt that it includes the principles applied by the Court as the basis of its decisions. ICJ, 1952, Reports, p.143. 27) ICJ, 1970, Reports, p.40. 28) PCIJ, 1925, Series B, No.11, p.30. 29) PCIJ, 1927, Series A, No.10, p.26. 30) PCIJ, 1933, Series A/B, No.53, pp.45-46. 31) ICJ, 1953, Reports, 1953, p.119. 32) ICJ, 1984, Reports, pp.302-303. 33) PCIJ, 1927, Series A, No.(1927), No.9, p.31. 34) ICJ, 1951, Reports, p.131.
248 獨島硏究제 22 호 ( 차 ) Reparation Case(1949) 35) ( 카 ) Genocide Case(1951) 36) ( 타 ) Corfu Channel Case(1949). 37) 3. 연구내용상의기본방향제의 1) 친국제법연구 가. 역사적권원 (1). 역사적권원의의의 ( 가 ). 권원의의의영토주권의권원 (title to territorial sovereignty) 이란타국가에대한영토주권의주장근거 (the validity of claims to territorial sovereignty against other states) 를의미한다. 38) ( 나 ). 역사적권원의의의영토에대한주권의현시 (display of sovereignty), 즉실효적지배 (effective control) 가요구되는것은 권원의대체 (replacement of title), 권원의취득 (acquisition of title) 또는 권원의유지 (maintenance of title) 를위해서이다. 영토주권의권원은시간의경과의축에서구분해볼때, 현대국제법상권원 과그이전의 역사적권원 으로구분된다. 그중역사적권원 (historical title) 은고전적권원 (ancient title), 본원적권원 (original title), 봉건적권원 (feudal title) 등현대국제법이전의영토주권의타당근거를말한다. 역사적권원은전법적주권 (pre-legal sovereignty) 의권원, 즉국제법 35) ICJ, 1949, Reports, p.174. 36) ICJ, 1951, Reports, p.15. 37) ICJ, 1949, Reports, pp.4-21. 38) Ian Brownlie, Principles of Public International Law, 5th e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p.121.
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의 249 이전의권원을뜻한다. 39) 따라서역사적권원은엄격한의미에서법적권원이라할수없다. 물론역사적권원이성립할당시에타당한현대국제법이전의규범으로관렴하면역사적권원도법적권원이라할수있으나그것은현대국제법상권원이라고는할수없다. 현대국제법은 1648년웨스트팔리아조약 (Treaty of Westphalia) 이후에성립된것으로보는것이일반적인견해이므로 40) 결국역사적권원은 1648년이전근대국가성립이전의권원을의미한다고할수있다. 이는특정국가가국가로서성립한이후에후속적으로증가된 (subsequent increase) 권원과구별된다. 41) (2) 역사적권원의대체 ( 가 ) 역사적권원의대체의의의시제법 ( 時際法, intertemporal law) 상권리획득시의법과권리존재시의 39) G. Schwarzenberger and E. D. Brown, A Manual of International Law, 6th ed. (Miton : Professional Book, 1972), p.96. 40) Stephan Verosta, History of Law of Nations, 1648 to 181 EPIL,Vol.7, 1984,pp. 160-62; B. S. Chimni, International Law and World Order (London : Sage, 1993), p.226; John Westlake, International Law (Cambridge: CUP, 1895), p.59; Triggs, Infra n.14, p. 10; D. P. O'connell, A Cause Celebre in the History of Treaty Making, BYIL, Vol.42, 1967, pp.71-90; Antonio Cassesse, International Law (Oxford : Oxford University Press, 2001),p.19; John O'Brien, International Law (London : Cavendish, 2001), p. 15; Turan Kayaglu, Legal Imperialis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pp.14,27; Steven Wheatley, The Democratic Legitimacy of International Law (Oxford : Hart, 2010), p. 124; Leo Gross, The Peace of Westphalia 1648-1948 AIIL, Vol.42, 1948,pp.20, 29; J. R. Strayer, On the Medieval Origins of Modem State (Princeton : PUP, 1979), pp.9-10; Mark W. Zocher, The Territorial Integrity Norm, in B. A. Simmons and R. H. Steinberg(eds.), International Law and International Relations (Cambridge : CUP, 2006),p.260; Alind Kaczorowska, Public International Law, 4th ed. (London : Routledge, 2011), pp. 11-12; Rechard Joyce, Westphalia : Event, Memory, Myth, in F. Johns, R. Joyce and S. Papahuja (eds.),events : The Force of International Law(London : Routledge, 2011), pp.55-56; Paul F. Diehl and Charlatte Ku, The Dynamic of International Law (Cambridge : CUP, 2012), p.28. 41) Antonio Tores Bernordez, Territory, Acquisition, EPIL, Vol. 10, 1987, p.498.
250 獨島硏究제 22 호 법은다른것이다. 권리의취득에관해서는그취득당시에타당한법이적용되는것이며권리의존재에관해서는오늘평가시에타당한법이적용되는것이다. 권원의대체 란역사적권원을현대국제법에의해타당한다른권원 (another title valid by modern International law) 으로대체 (replacement) 하는것을말한다. 42) 즉역사적권원이그후의역사적발전의효과에의해대체 (superseded) 되는것을뜻한다. 43) 요컨대, 고전적권원, 본원적권원, 봉건적권원등역사적권원을현대국제법에의해타당한새로운권원으로변경하는것을역사적권원의대체라한다. 이를 권원의교체 (supersede of title), 권원의변경 (change of title) 또는권원의변형 (transformation of title) 이라고도한다. 권원의대체는새로운권원을취득하는 권원의취득 과구별되고, 기취득한권원의현상을유지하는 " 권원의유지 " 와구별된다. ( 나 ) 역사적권원의대체의효과 1) 대체된권원의발효역사적권원의대체로효력이인정되지않았던역사적권원은대체된당시의법에따라새로운권원이성립 발효되게된다. 즉역사적권원이근대국제법상권원으로대체되어근대국제법에의해효력이인정되게된다. 2) 역사적권원의실효역사적권원의대체로역사적권원은법적으로실효되게된다. 그러므로역사적권원은대체이후법적권원으로주장될수없게된다. 따라서대체이후역사적권원을주장하는것은법적으로무의미한것이되고만다. 42) ICJ, Reports, 1953, p.56. 43) David H. Ott, Public International Law in the Modern World (London : Pitman, 1987), p. 109.
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의 251 (3) 역사적권원의대체를인정한판례와학설역사적권원을현대국제법상타당한새로운권원으로대체하지아니하면현대국제법상효력이없으며, 역사적권원은대체된이후에는법적효력을상실하게된다는것은판례와학설에의해일반적으로승인되어있다. 그판례와학설을보면다음과같다. ( 가 ) 판례 (ⅰ) The Island of Palmas Case (1928) 44) (ⅱ) Minquiers and Ecrehos Case (l953) 45) (ⅲ) Western Sahara Case (1975) 46) (ⅳ) Land, Island and Maritime Frontier Dispute Case (1992) 47) (ⅴ) Territorial and Maritime Dispute in the Carbean Sea Case (2007) 48) (ⅵ) Pedra Branca Case (2008) 49) (ⅶ) Rann of Kuch Arbitration (1968) 50) ( 나 ) 학설역사적권원은대체되지아니하면현대국제법상효력이없고, 대체된이후에는법적효력이없다는것이학설에의해서도일반적으로수락되어있다. (ⅰ) Gillian D. Triggs 51) (ⅱ) Richard K.Gardiner 52) 44) UN, RIAA, Vol.2,1949,p.839. 45) ICJ, Reports, 1953,p.56. 46) ICJ, Reports, 1975, p. 39. 47) ICJ, Reports, 1992,paras. 343-44. 48) ICJ, Reports, 2007,para.259. 49) ICJ, Reports, 2008, para.48. 50) ILR, Vol.50,P.494. 51) Gillan D. Triggs, International Law (Australia: Butterworth, 2006),p.225.
252 獨島硏究제 22 호 (ⅲ) David H. Ott 53) (ⅳ) Santiago Terres Bernardez 54) (ⅴ) Peter Malanczuk 55) (ⅵ) Georg Schwarzenberger 56) (ⅶ) Ian Brownlie 57) (ⅷ) P. C. Jessup 58) (ⅸ) F.C. Wade 59) (ⅹ) R. Y. Jennings, 60) (ⅺ) M. N. Shaw 61) (ⅻ) D. H. N. Johnson 62) 나. 지도의증명력지도는문서증거의하나이고모든문서증거는국제재판소에제출되었을때 증거능력 이있는것이며, 그의 증명력 의평가는재판소의자유판단에의하게된다. 국제소송법상재판소의증명력판단에관한구체적인 52) Richard K. Gardiner, International Law (London Longman, 2003),p.177. 53) Ott, supra n.6, p.109. 54) Antonio Tores Bernordez, Territory, Acquisition, EPIL, Vol. 10,1987, p.499. 55) Peter Malanczuk(ed.), Akehurst s Modern 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Law, 7th ed.(london : Routledge, 1987), p.155. 56) Schwarzenberger and Brown, supra n.2, p.96. 57) Brownlie, supra n.1. p. 129. 58) P. C. Jessup, The Palmas Island Arbitration, AJIL, Vol.22, 1928, pp.739-40. 59) E. C. Wade, The Minquiers and Ecrehos Case, Grotius Society transactions for year 1954, Vol.40, 1954, pp.98-99. 60) Robert Y. Jennings, The Acquisition of Territory in International Law (Dobbs Ferry : Oceana, 1963), pp.28-31. 61) Malcolm N. Shaw, International Law,4th ed.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p.347. 62) D. H. N. Johnson, Acquisitive Prescription in International Law, BYIL, Vol.27, 1950,p.332.
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의 253 명시적규칙이규정으로성문화되어있지아니하다. 63) 재판소에의한증거에대한증명력의판단은결국직접적증거이냐간접적증거이냐의판단으로되고, 이판단의기준으로학설과판례에의해일반적으로 인증성 (authenticity) 과 정확성 (accuracy) 이제시되고있다. 64) 이하재판소의증거에대한증명력판단의기준으로이양자에관해논하기로한다. (1) 인증성조약 (treaties) 과재판 (decisions) 과같은법적문서 (legal instruments) 에부속되어그법적문서의불가분의일부를구성하는지도는직접적증명력이인정되고그이외의지도는간접적증명력만이인정되는데불과하다. 이와같이법적문서에부속된지도를 인증지도 (authenticated maps) 라하고, 65) 이러한지도의특성을 인증성 (authenticity, authentic character) 이라한다. 66) 이 인증지도 에는법적문서의불가분의일부를구성하는지도뿐만아니라서명된지도와같이지도그자체가법적문서인지도도포함된다. 67) 63) J.F.W., Rules of Evidence in International Proceedings BYIL, Vol.Ⅳ, 1929, pp.220-21. 64) 증명력판단의기준으로 인증성 (authenticity), 정확성 (accuracy) 이외에 원본성 (originality) 이논의되고 (D.V. Sandifer, Evidence before International Tribunals, re ed.(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75, p.236), 공정성 (impartiality) 이논의된다 (Charles Cheney Hyde, Maps as Evidence in International Boundary Disputes, AJIL, Vol.27, 1933, p.314). 65) Opinion and Award of Guatemala-Honduras Special Boundary Tribunal, January 23, 1933.9.8; Charles Cheney Hyde, Maps as Evidence International Boundary Disputes, AJIL, vol27, 1933, p.313; G. Weissberg, Maps as Evidence in International Boundary Disputes, AJIL, Vol.57,1963, p.782. 66) Monastery of Sant-Naum Advisory Opinion, PCIJ, Series B, No.9, 1924, p.21; A. O. Cukwurah, The Settlement of Boundary Disputes in International Law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67), p.219. 67) PCIJ, Series B, No.9, 1924, p.21; Weissberg, supra n.3, p.784.
254 獨島硏究제 22 호 인증지도 는국가기관이발행한지도인 공식지도 (official maps) 와구별된다. 공식지도 는 국가기관 이발행한지도이외에국가의찬조 (auspiece) 또는취지 (purporting) 로발행한지도를의미한다. 68) 인증지도 는직접적증명력이인정되나 공식지도 는간접적증명력이인정되는데불과하다. 그러나 공식지도 는승인, 묵인, 금반언의효과가인정되는점에특색이있다. 69) 공식지도는국가가생각하는영역의한계를표시하는것으로인정되기 (represented what that state deemed the limits of its domain) 때문이다. 70) 지도의인증성을인정한학설과판례를보면다음과같다 : ( 가 ) 학설 (ⅰ) Durward Sandifer 71) (ⅱ) Charles Cheney Hyde 72) (ⅲ) Guenter Weisberger 73) (ⅳ) A. O. Cukwurah 74) ( 나 ) 판례 (ⅰ) The Misiones Boundary Arbitration between Argentined and Brazil 75) (ⅱ) Timore Island Arbitration 76) 68) Hyde, supra n.3, p.315. 69) Weissberg, supra n.3, p.803. 70) Hyde, supra n.3, p.315. 71) Sandifer, supra n.2, pp.141-142. 72) Hyde, supra n.3, p.142. 73) Weissberg, supra n.3, p.143. 74) A. O. Cukwurah, supra n.4, pp.143-144. 75) The Misiones Boundary Arbitration, John Bassett Moore, International Arbitration, Vol.2(Washington, D. C.: U.S. GPO, 1898), pp.144-145. 76) Arbitral Award Rendered in Execution of the Compromise Signed at Hague, April
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의 255 (ⅲ) Jaworzina Advisory Opinion, Polish-Czechoslovakian Frontier advosory Opinion 77) (ⅳ) Monastery of Saint-Naoum, Advisory Opinion 78) (ⅴ) Palmas Island Arbitration 79) (ⅵ) Guatemala-Hondras Boundary Arbitration 80) (ⅶ) Case Concerning the Frontier Dispute-Burkina Faso/Rupublic of Mali 81) (ⅷ) Case Concerning Sovereignty over Pulau Ligitan and Pulau Sipitan 82) (ⅸ) Case Concerning Sovereignty over Pedra Branca 83) (2) 정확성지도가증거의역할을하기위해요구되는첫째의요건은지리적정확성 (geographical accuracy) 이다. 지도가인증지도이든아니든, 공식지도이든아니든불문하고그것이권원인정의증명력을갖기위해서는 지리적정확성 을가져야한다. 84) 이 지리적정확성 을 정확성 (accuracy) 이라한다. 85) 특정장소의이름의철자의차이 (difference of spelling of place names), 그리고이름의차이 (difference of place name) 는언어감정인의진 3, 1913, between the Netherlands and Portugal Concerning the Subject of Boundary of a Part of their Possessions in the Isand of Timor, AJIL, Vol.9, 1915, p.145. 77) Jawerzina, Advisory Opinion, PCIJ, Series B, No.8, 1923, p.146. 78) Monastery of Saint-Naum, Advisory Opinion, PCIJ, Series B, No.9, 1924, p.147. 79) Palmas Island Arbitration, AJIL, Vol.22, 1928, p.148. 80) Guatemala-Hondras Boundary Arbitration, Opinion and Award of Guatemala-Hondras Special Boundary Tribunal, January 23, 1933.9.8. p.148. 81) Case Concerning the Frontier Dispute-Burkina Faso/Republic Hali-, ICJ, Reports, 1986, para.54. 82) Case Concerning Sovereignty over Pulau Ligitan and Pulau Sipitan, ICJ, Reports, 2002, para.88. 83) Case Concerning Sovereignty over Pedra Branca, ICJ, Judgement, 23 May 2008, para.270. 84) Hyde, supra n.3, p.314. 85) Ibid; Cukwurah, supra n.4, p.219.
256 獨島硏究제 22 호 술로설명될수있으므로이들은지리적정확성이없는것이아니다. 86) 지도의증명력을판단하는기준의하나로지도의정확성을제시한학설과판례를살펴보면다음과같다. 지도의정확성은학설과판례에의해승인되어있다. ( 가 ) 학설 (ⅰ) Charles Cheney Hyde 87) (ⅱ) Guenter Weisberger 88) (ⅲ) A. O. Cukwurah 89) ( 나 ) 판례 (ⅰ) The Misiones Boundary Arbitration between Argentina and Brazil 90) (ⅱ) Walfisch Bay Arbitration between Great Britain and Germany 91) (ⅲ) Palmas Island Arbitration 92) (ⅳ) Guatemala-Hondras Boundary Arbitration 93) (ⅴ) Case Concerning Sovereignty over Pulau Ligitan and Pulau Sipitan 94) (ⅵ) Case concerning Territorial and Maritime Dispute between Nicaragua and Honduras in the Caribbean Sea 95) 86) Ibid., p.220. 87) Hyde, supra n.3, p.142. 88) Weissberg, supra n.3, p.143. 89) Cukwurah, supra n.4, pp.143-144. 90) Ibid., pp.143-144. 91) Ibid., pp.143-144. 92) Ibid., pp.143-144. 93) Ibid., pp.143-144. 94) Ibid., pp.143-144. 95) Ibid., pp.143-144.
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의 257 다. 지리적접근성의원칙 (1) 지리적접근성의원칙의의의지리적접근성의원칙 (principle of contiguity) 은지리적접근의사실이영토권원의실질적근거또는기초로될수있다는국제법상원칙을말한다. 이를계속성의원칙 (principle of continuity) 또는근접성의원칙 (principle of contiguity) 이라고도한다. 국제법상지리적접근성의원칙은국제법상영토권원의근거로인정되어있지아니하다. 이원칙을규정한국제협약은없다. 그러나이원칙은학설과판례에의해일반적으로승인되어있다. (2) 지리적접근성의원칙을부정한학설과판례지리적접근성의원칙을부정한학설과판례를보면다음과같다. ( 가 ) 학설 (ⅰ) Gerald Fitzmaurice 96) (ⅱ) C.H.M. Waldock 97) (ⅲ) H. Lauterpacht 98) (ⅳ) K. Narayana Rao 99) (ⅴ) Malcolm N. Shaw 100) (ⅵ) Robert Jennings 101) 96) Gerald Fitzmaurice, The Law and procedure of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1951-4, BYIL, Vol.32, 1955-6, p.72. 97) C.H.M. Waldock, Disputed Sovereignty in the Falkland Islands Dependencies, BYIL, Vol.25, 1948, p.342. 98) H. Lauterpacht, Sovereignty over submarine Area, BYIL, Vol.27, 1956, p.438. 99) K. Narayana Rao, The Problem of Goa, Indian yearbook of International affairs 1996; 952, p.54. 100) Malcolm N. Shaw, International Law, 4th ed.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p.355.
258 獨島硏究제 22 호 (ⅶ) Malanczuk 102) (ⅷ) Ian Brownlie 103) (ⅸ) Santiago Torres Bernardoz 104) ( 나 ) 판례 (ⅰ) British Guiana Boundary Case(1904) 105) (ⅱ) Palmas Island Case 106) (1928) 107) (ⅲ) Minquievs and Ecrehos Case 108) (1953) 109) (ⅳ) Case Concerning Sovereignty over Certain Frontier Land 110) (1959) 111) (ⅴ) Land, Island and Maritime Frontier Dispute Case(1992) 112) (ⅵ) Case Concerning Sovereignty over Pedra Brancel 113)114) (2008) 115) 101) Robert Jennings, Acquisition of Territory in International Law(Dobbs Ferry : Oceana, 1963), p.73. 102) Peter Malanczuk(ed.), Akehurst's Modern 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Law, 7th ed.(london : Routledge, 1987), pp.157-58. 103) Ian Brownlie, Principles of Public International Law, 5th ed. (Oxford :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p.147. 104) Santiago Torres Bernardez, Territory, Acquisition, EPIL, Vol.10, 1987, pp.501-502. 105) British and Foreign State Papar, Vol.99, 1904, p.930; Fitzmaurice, supra n.1, p.75, n.1;brownlie, supra 15, p.147, n.154. 106) UN, RLAA, Vol.2, 1949, p.854. 107) Ibid., p.855. 108) ICJ, Reports, 1953, p.102. 109) Ibid. 110) ICJ, Reports, 1959, p.257. 111) Ibid. 112) ICJ, Reports, 1992, p.579, para. 281. 113) ICJ, Reports, 2008, para. 280. 114) Ibid., para. 281. 115) Ibid., para. 290.
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의 259 라. 고유영토론 독도는역사적, 지리적그리고국제법적으로한국의고유영토라는것이한국정부의기본입장이다. 고외무부홈페이지에표기되어있다. 그러나 고유영토 의의미, 역사적으로 의의미, 지리적으로의의미 그리고 국제법적으로 의의미에관해서해석이없다. 독도를연구하는많은학자가 독도는한국의고유영토이다. 라고주장하면서그의미에관해서는논급이없다. 고유영토 란국가가성립할당시그국가의성립기초인영토를의미한다. 신라지증왕 13년에우산국이신라에승복되어그때부터독도는신라의고유영토, 즉한국의고유영토라고논한다. 이는분명히전후가모순되는주장이다. 한국을신라로보면이는모순되나한국을통일신라로보면독도는한국의고유영토라고표현할수있다. 대부분의독도연구한국학자는독도는신라지증왕 13년에취득한신라의고유영토라고주장한다. 고유영토의지리학 정치학의정의를연구하여한국의독도에적용해야할것이다. 마. 해양의명칭과도서의영유권국제법상해양의명칭과그해양내에위치한도서의영유권은전혀무관한것으로해양의명칭은지리학적의미를갖는데불리한것이다. 국제법상공해자유의원칙이적용되며공해의명칭에따라공해가그명칭과관련되어있는국가의공해로되는것도아니고그공해내에있는도서와그명칭과관계되어있는국가의영토로귀속되는것도물론아니다. 2) 한국정부의독도정책비판연구 가. 한일어업협정 한일어업협정 은독도주변에중간수역을선정하여한국의독도의영
260 獨島硏究제 22 호 해 배타적경제수역과영토를훼손하는협정이므로이는폐기되어야한다. 나. 독도유인도화정책정부의독도유인도화정책은 유엔해양법협약 제121조제3항의 인간의거주 의요건을충족하여독도를배타적경제수역과대륙붕을갖는해양지역으로조성하기위한것같으나, 인위적인유인도화는 안정적인간공동체 라고볼수없으므로독도의인위적인유인도화는독도를배타적경제수역과대륙붕을창출하는해양지형으로조성하는효과는발생하지아니한다. 다. 접안지원센타 해양과학기지독도에접안지원센타, 해양과학기지건설은 유엔해양법협약 상해양지형은 자연적능력 이라는요건을구비하지못하여독도를배타적경제수역과대륙붕을창출하는해양지형의형성을저해한다. 3) 한국정부의일본의독도영유권주장비판보완연구가. 다케시마 10포인트 2008년의일본정부의 다케시마 10포인트 에대한동북아역사재단, 한국해양수산개발원독도연구소의비판은반 ( 半 ) 국가기관의비판으로는수준이하이다. 특히난해한부분에대한비판은없다. 논리적 체계적비판의보완이요구된다. 나. 교과서 일본정부의교과서에독도는일본의영토라고표기하고있다. 이에대한한국정부의대책은무대책이다.
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의 261 다. 방위백서 위교과서의경우와같다. 4) 일본정부의일방적제소에대한대응방안연구가. 예상되는제소유형별대책연구일본정부는국제사법재판소, 국제해양법재판소, 상설중재재판소중어느재판소에일방적으로제소할가능성이있는지에관한연구와그에대한대책의연구가요구된다. 나. 매뉴얼과답변서초안연구 예상되는일본정부의제소에대해대처방안에관한매뉴얼을작성하여일본정부의일방적제소에대한답변서초안을사전에준비하여야한다. 4. 연구방법상의기본적제의 1) 학제연구 흔히독도는사학적연구의대상으로관념하기쉬우나사학 지리학 정치학등이연계되어풀수있는종합과학인것이다. 그러므로필히학제연구가요구된다. 이를위해동일주제에대한공동연구, 공동학술회의가요구된다. 2) 지역단체와의컨소시움결성 독도연구소의경우경상북도, 울릉군과컨소시움을결성하여이론과실무에부합되는연구를추구하고있고연구와사업의중복을회피할수있다.
262 獨島硏究제 22 호 3) 지역단체와의연구협약체결 이는위컨소시움을보완하는수단이된다. 4) 연구결과의보급독도연구소의연구결과인 독도연구 는독도연구소의업적이고동시에이는한국의독도연구의업적이다. 이업적을국내외에확산 보급하는것은차후의연구를위해필수적인것이다. 그러므로예산이허용되는한 독도연구 의배포선을적극확대하여야한다. 이는독도연구소의위상제고를위해서도요구되는바이다. 5) 독도교육표준교재의제작독도교육의내용은담당자가누구냐에따라천차만별이며, 독도연구소가표준교재를제작하여독도의실상과연구의결과를정형화하여이를연차적으로보완해나가는것이요구된다. 독도연구소가바람직한표준교재를제작할때다른독도연구소도이를이용할것이다. 아직바람직한독도교재는출간된바없다. 6) 연구소의특성화연구가. 연구소의특성화연구한국에독도연구소와유사연구소 ( 예컨대영토연구소, 영토해양연구소 ) 가다수존재한다. 독도연구소가이들연구소보다상대적우위의위상을제고할필요가있다. 독도연구의제분야에서독도연구소가모두우위의위상을점하려는의도는독도연구소의발전을위해바람직한것이아니라고본다. 어떤분야에중점을두어발전해야할것인지는소장과소속연구원의진지한논의와검토로정하여야할것이며그간의연구소의업적, 타연구소의업적등의분석 검토도독도연구소의특성화연구의방
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의 263 향설정에도움이될것이다. 독도연구소의역량은한정적이다. 한정적역량을극대화하기위해서는다국적연구보다는특징적연구의집중적연구로연구소의특정화가요구되며그결과로연구소의정체성을확립할수있다고본다. 나. 연구소의연구원의특성화연구연구소의연구원들이전공분야가각각다르므로연구원의특성화는연구소의특성화에비해오히려용이하다고본다. 연구원의특성화가결국연구소의특성화로발전될수있다고본다. 7) 독도연구소의홍보 어떤사업도그것이대외적이해와지지없이는성공적으로수행해나갈수없다. 가. 학술회의독도연구소는연구소이므로연구결과를학술회의를통해반포하는것은독도연구소의위상제고를위해중요한기능을한다. 학술회의의참여자의범위를확대하고토론의기회를충분히제공한다. 나. 뉴스레터발간배포 독도연구 이외에월간으로뉴스레터를발간하여독도연구소의연구활동을널리보급한다. 다. 독도강의독도연구소가제작한표준교재로독도강의를하여독도연구소의역할을널리알린다. 월 1회정도독도행페리에서 1시간정도선상강의로하는것을검토할필요가있다고본다.
264 獨島硏究제 22 호 5. 결론 위에서여러가지잡다한제의를했으나독도연구소는연구기관이므로무엇보다더연구중심으로운영되어야하며, 그러기위해 독도연구 를계속간행하고특집으로학제연구를도모하도록하고독도연구소소속연구교수의연구의욕고취를위해연구업적을평가하여매년 1명의우수연구교수를선발하여학술상을수여하고그의명예를기리기위해그명의로독도총서를발간할기회를제공하는것은바람직하다고생각된다. 학술상수여자는총장또는독도연구소장이될수도있고대통령이될수도있다. 또는전국적으로우수연구학술상을독도연구소장의명의로수여하는방안도검토 고려해볼수있다.
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의 265 참고문헌 ICJ, Reports, 1949. ICJ, Reports, 1951. ICJ, Reports, 1952. ICJ, Reports, 1953. ICJ, Reports, 1959. ICJ, Reports, 1970. ICJ, Reports, 1975. ICJ, Reports, 1984. ICJ, Reports, 1986. ICJ, Reports, 1992. ICJ, Reports, 2002. ICJ, Reports, 2007. ICJ, Reports, 2008. UN, RLAA, Vol.2, 1949. PCIJ, eries B, No.11, 1925. PCIJ, Series A, No.10, 1927. PCIJ, Series A/B, No.53, 1933. PCIJ, Series B, No.8, 1923. PCIJ, Series B, No.9, 1924. A. O. Cukwurah, The Settlement of Boundary Disputes in International Law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67). Alf Ross, A Text Book of International Law(London : Longmans,1947). Alind Kaczorowska, Public International Law, 4th ed. (London : Routledge, 2011). Antonio Cassesse, International Law (Oxford :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B. S. Chimni, International Law and World Order (London : Sage, 1993). D.V.Sandifer, Evidence before International Tribunals re.ed. (Chicago : Chicago University. Press. 1975). David H. Ott, Public International Law in the Modern World (London : Pitman, 1987). E. C. Wade, The Minquiers and Ecrehos Case, Grotius Society transactions for year 1954, Vol.40, 1954. G. Schwarzenberger and E. D. Brown, A Manual of International Law, 6th ed. (Miton : Professional Book, 1972). G. Schwarzenberger and E.D. Brown, Manual of International Law, 6th ed. (Milton : Professional Books), 1976. Gillan D. Triggs, International Law (Australia: Butterworth,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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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獨島硏究제 22 호 <Abstract> Suggestions of Basic Direction of Dokdo Study in Korea Mungki KIM The basic direction of Dokdo study can be different for each academic field of scholars participating in Dokdo research, and it may be different for scholars belonging to specific academic fields. Therefore, the basic direction of Dokdo study that the author suggest here, is defined as the basic direction of comprehensive Dokdo studies from the standpoint of the Republic of Korea which transcends the fields of study and disciplines of individual scholars and experts, and beyond the purpose of establishing of each independent research institute. However, this suggestion or presentation of the basic direction of Dokdo research in Korea is eventually linked to the national task, and it goes beyond the scope of Dokdo Institute Yeungnam University as a private research institute. Therefore, the author intends to express his simple feelings while having studied Dokdo, rather than presenting the basic direction of Dokdo study. The author also hopes that this will be a reference for the future directions of Dokdo research in Korea. The author acknowledge that he himself can be criticized for having a bias in international law because the author s major is international law. However, it is the author's sincerest desire to recommend Dokdo research scholars other than those in the field of international law, especially historians, to study Dokdo in connection with the international law.
독도연구의기본방향제의 269 In the following, as preliminary studies to suggest, will be discussed the relations between international law and history in Dokdo research, the sources of international law, the replacement of historical title by modern International law, Maps as Evidence, and the principle of contiguity. In addition, interdisciplinary researches, promotion and dissemination of Dokdo research results, and specialization of researches of Dokdo institute will be proposed by the author. Finally, the necessity of interdisciplinary research on Dokdo and the necessity of popularization of Dokdo study results will be hopefully proposed. Key words: Dokdo Study, Direction, Academic Field, International Law, Historians, Interdisciplinary Researches, Specialization, Popularization. 이논문은 2017 년 5월 25일에투고하여 2017 년 6월 3~25 일에심사하여 2016 년 6월 26일에게재 결정됨
271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 곤차로프의여행기와팔라다호의항해기록을중심으로 - 1) 김영수 * < 목차 > 1. 머리말 2. 팔라다호의구성과운영및곤차로프의항해이유 3. 발트해-보닌제도와나가사키-시베리아항해과정 4. 러시아함대의울릉도 독도발견 5. 맺음말 [ 국문초록 ] 기존연구는팔라다호소속장교의인명, 팔라다호의출발과도착의항해과정, 곤차로프의출발이유등에대해서초보적인연구를진행하였다. 그이유는선행연구가대체로조선에초점을맞추었기때문이다. 필자는팔라다호의이동을중심으로전체적인탐사과정을주목하였다. 그과정에서독도와울릉도의발견과정을추적하였다. 러시아황제니꼴라이 1세 (НиколайⅠ) 는 1852년청국과일본과의개항을추진하기위해서러시아제독뿌쨔찐 (Е.В. Путятин) 을특사로임명하였다. 팔라다호는 1852년 10월 7일끄론쉬따트 (Кронштат) 를출항했고, 1853년 8월 10일일본의나가사키 ( 長崎 ) 에도착하였다. 제독뿌쨔찐은전함팔라다호 (Фрегат Паллада), 캄차카함대소속코르벳함 ( 군함 ) 올리부차호 (корвет Олибуца), 스쿠너범선보스톡호 (шкуны Восток), 수송선공작멘쉬꼬프호 (транспорт Князь Меньшиков) 으로함대를구성하였다. 뿌쨔찐은소령꼬르사꼬프 (Корсаков) 를추천하여스쿠너범선보스톡호의함장으로임명하였다. 팔라다 ** 동북아역사재단연구위원
272 獨島硏究제 22 호 호는함장소령운꼽스키 (Унковский) 를비롯하여장교 22명과승무원 439명으로구성되었다. 이중에서보스톡호에승선할장교 6명과수병 37명도포함되었다. 알렉산드르넵스끼수도원 (Alexander Nevsky Lavra) 아바꿈 (Аввакум) 신부는중국어통역을맡았다. 뿌쨔찐은 1855년 1월 26일일본정부와시모다조약 (Treaty of Shimoda, 下田条約 ) 을체결하였다. 팔라다호는일본과의외교수립, 해군부의탐사지시에따른실행등주어진업무를수행하였다. 하지만팔라다호는 1854 년 3월발발한크림전쟁의여파로서방국가들과관계가단절되어, 미국에있는러시아식민지를방문하지못했고, 오호츠크해해안을조사하지못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4월 2일부터 4월 7일까지거문도에정박했고 1854년 4월 20일조선연안에도착해서 5월 11일까지동해안조사를시작하였다. 곤차로프는거문도를직접답사하였다. 그과정에서서양최초로독도의서도와동도를명명한국가는러시아였다. 팔라다호소속올리부차호는독도를발견하면서서도를올리부차 (Оливуца), 동도를메넬라이 (Менелай) 라고명명하면서, 실측에기초하여최초로정확하게좌표에기입하였다. 그후러시아태평양함대는동해에서울릉도를경유하며해상훈련을실시하였다. 태평양함대사령관알렉셰예프는동해에서전략적인거점으로울릉도를주목하였다. 이것은러시아가 1896년 9월두만강 압록강 울릉도의삼림채벌권을획득하여한국에경제적 군사적영향력을실행한것과밀접하게연결되었다. 주제어 : 팔라다호, 곤차로프, 뿌쨔찐, 태평양함대, 독도 1. 머리말 곤차로프의 전함팔라다호 는 19세기중엽세계여행기라는측면에서문학적으로주목받았다. 팔라다호는젊은시절안톤체홉 (А.П. Чехов) 을비롯한여행을동경하는당대사람들의베스트셀러였다. 팔라다호는영국, 일본등의식탁을소개해주는 식유기 ( 食遊記 ) 라는점에서도주목을받았다. 1) 러시아속담에따르면, 남을위해구덩이를파는자는자기자신이그구덩이에빠진다. 1) Лотман Ю. и Погосян Е. Великосветские обеды. Спб. 1996. С.37 ; 석영중, 오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273 곤차로프 (И.А. Гончаров) 는 1812년 6월 6일 ( 러시아력 ) 심비르스크 (Сим бирск) 에서부유한상인의아들로태어났다. 곤차로프는 1820년사제트로이츠키가운영하는기숙학교에입학하여독일어와프랑스어를배웠다. 곤차로프는 1822년모스크바상업학교에입학했고, 1831년모스크바국립대학교문학부에입학하였다. 당시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는게르첸, 레르몬또프, 뚜르게네프등이다녔고, 곤차로프는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뿌쉬킨을직접만날수있었다. 곤차로프는 1834년대학을졸업하고심비르스크현의관리로임명되었다. 곤차로프는 1847년장편소설 평범한이야기 를발표하였다. 1849년잡지 현대인 에 오블로모프의꿈 을발표하였다. 곤차로프는제독뿌쨔찐 (Е.В. Путятин) 의비서 (секретарь) 로전함팔라다호를탔고, 1852년 10월 7일러시아를출발해서 1855년 2월 13일뻬쩨르부르크로돌아왔다. 곤차로프는항해중일지를작성하고편지를보냈다. 여행기는 1855-57 년사이 전함팔라다호 라는제목으로발표되었고, 1858년 2권의책으로발간되었다. 곤차로프는 1855년 12월검열관이되었지만 1860년 2월사직하였다. 곤차로프는 1859년 10년전부터준비한 오블로모프 를완성하였다. 곤차로프는 1862년 7월신문 북방우편 의편집장을, 1863-67년사이출판과관련된위원직을맡았다. 곤차로프는 1869년소설 절벽 ( 단애 ) 을 20년만에완성하였다. 곤차로프는 1870-80년대 안하는것보다는늦는것이낫다, 백만의고통, 벨린스키라는인물에대한단상 등의몇몇비평만썼다. 곤차로프는 1891 년말년에쓴모든작품, 편지, 단상을소각했고, 1891년 9월 15일 80세의나이로사망하였다. 2) 블로모프의맛없는음식, 러시아문학연구논집 35, 2010, 65쪽. 이논문의러시아표기는이미굳어진표기만제외하고러시아원음에가깝게표기하였다. 예를들면페테르부르크를 뻬쩨르부르크 로표기하였다. 또한이논문의날짜는러시아역을채택하였다. 2) Русские писатели. 1800 1917: биографический словарь. Советск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274 獨島硏究제 22 호 전함팔라다호 (Фрегат Паллада) 는일찍이한국과러시아관계사의연구자가주목하였다. 박보리스 (Б.Д. Пак) 는팔라다호의주요인물과함대구성, 조선항해이유, 조선동해안조사일정등에관한기초적인정보를제공하였다. 박보리스는팔라다호가거문도에서만난김유의해상기문정보, 1854년 5월 8일뿌쨔찐이조선정부에보낸문서까지조사하였다. 박보리스의연구는팔라다호의조선관련포괄적인정보를제공하였다는사실만으로큰의미를갖는다. 박보리스에따르면 1854년 2월크림전쟁의가능성이높아지자팔라다호는안전한장소로거문도를선택하였다. 3) 영국과프랑스연합군은 1854년 10월러시아크림반도세바스타폴을공격했고, 1855년러시아흑해함대기지인세바스타폴을함락하였다. 박태근은팔라다호의출발배경, 청국과일본과의교섭과정, 거문도와동해안탐사의구체적인일정과지명에대해서러시아와한국사료를교차하며조사하였다. 박태근에따르면팔라다호는청국 5개항의통상권교섭, 러시아와일본의수교를위해서출발하였다. 하지만청국양광총독 ( 兩廣總督 ) 엽명침 ( 葉名琛 ) 은 1853년 6월 18일팔라다호의 5개항무역교섭을거절하였다. 팔라다호는 1853년 8월 10일일본나가사키에도착했지만일본은소극적인자세를취하며협상을지연시켰다. 박태근은팔라다호의조선동해안탐사일정과지명을구체적으로조사하였다. 박태근에따르면팔라다호는 1854년 4월 20일부터 5월 11일까지강원도초산만 ( 울산만 ) 부터함경도두만강까지실측하였다. 1854년 4 월 21일북위 36도앙일만상륙, 4월 24일강원도초진통과, 4월 26일강원도금란진정박, 4월 27일함경도와강원도사이송전만 ( 라자레프항 ) 에정박하였다. 4) Т.1. М. 1989. С.628 ; 최윤락, 곤차로프와그의장편소설오블로모프, 오블로모프, 2권, 문학과지성사, 2002, 351-356쪽 3) 박보리스, 러시아와한국, 동북아역사재단, 2010, 124-144쪽. 4) 박태근, 러시아의동방경략과수교이전의한러교섭, 한러관계100년사,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275 박보리스와박태근의연구는팔라다호의조선동해안조사에관한개략적인정보를주었다는점에서큰의미를갖는다. 하지만팔라다호의조선동해안조사에관한세부적인정보까지는제공하지못하였다. 무엇보다도조선만주목했기때문에팔라다호의전체적인항해과정과기록자인곤차로프의시선에관한정보를알수없었다. 2000년이후곤차로프의팔라다호는조선에관한러시아인의시선이라는주제로다시주목을받았다. 기존에조선과러시아관계사라는측면에서팔라다호가주목받았다면이번에는팔라다호에비친조선의모습과사람이라는측면이부각되었다. 이영은은러시아의조선탐사와인식이라는측면에서곤차로프의팔라다호를살펴보았다. 이영은은조선관련곤차로프의개인적인설명과관찰에관한조선내용을상세히설명하였다. 5) 이희수에따르면곤차로프는 대식가에게으르며거친성격, 침묵하며척박한환경과궁핍한생활에순응하는모습 등으로한국인을묘사하였다. 이희수는곤차로프의팔라다호에관한텍스트분석도소개하였다. 예를들면곤차로프가일부러항해과정의탐사활동과외교협상내용을누락시켰다는것이다. 또한곤차로프가구조적완결성을위해탐사과정의일부를제외시켰다는것이다. 6) 선행연구의성과에도불구하여팔라다호소속장교의인명, 팔라다호의출발과도착의항해과정, 곤차로프의출발이유등에관한연구는초보적인상황이다. 그이유는선행연구가대체로조선에초점을맞추었기때문이다. 1984, 34-37쪽. 5) 이영은, 근대전환기러시아인의조선인식, 성균관대학교박사논문, 2011. 6) Тюнькин. К. Примечание//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и.а. Гончарова в 6 Томах. М. 1956. Т. 3. С. 371; Знгельгардт Б.М. Фрегат Паллада//Избранные труды. Спб. 1995. СС. 225-269; 이희수, 교류초기러시아인의한국인식, 대동문화연구 61집, 2008, 20-21쪽
276 獨島硏究제 22 호 이논문은기존연구와달리사료적인측면에서개인과국가의기록을교차하는차별성을제공할것이다. 필자는팔라다호제독뿌쨔진의항해관련공식적인정부의기록을토대로, 뿌쨔진의비서로참여한곤차로프의항해관련개인적인여행기를상호보완하여, 팔라다호함대의전체적인항해와탐사과정을보다생동감있게전달할것이다. 그것은국가와개인의목표에대한동질성과이질성을동시에살펴볼수있는기회를제공할것이다. 무엇보다도필자는팔라다호소속올리부차호의독도발견이후러시아가어떻게울릉도와독도에대해서한국영토로써인식했는지도함께살펴볼것이다. 이를위해서 19세기후반러시아함대의독도와울릉도관련기록도함께살펴볼것이다. 그것은러시아가한국과일본의역사갈등인독도를어떻게파악했는지를객관적으로보여줄수있기때문이다. 2. 팔라다호의구성과운영및곤차로프의항해이유 러시아황제니꼴라이 1세 (НиколайⅠ) 는 1852년청국과일본과의개항을추진하기위해서러시아제독뿌쨔찐 (Е.В. Путятин) 을특사로임명하였다. 뿌쨔찐은 1852년 8월스쿠너범선 ( 보스톡호 ) 을구매하기위해서민간증기선을타고영국으로출발하였다. 팔라다호는 1852년 10월 7일끄론쉬따트 (Кронштат) 를출항하여, 영국에서구입한스쿠너범선 보스톡 (Восток) 호와함께극동으로항해하였다. 7) 이들은 1851년극동함대소속코르벳함 ( 군함 ) 올리부차 (Олибуца) 호및수송선 공작멘쉬꼬프 (Князь меншков) 호와합류하여 1853년 8월 10일일본의나가사키 ( 長崎 ) 에도착하였다. 8) 7)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С.1-2.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277 제독뿌쨔찐 (Е.В. Путятин) 은 1852년함대를구성하였다. 전함팔라다호 (Фрегат Паллада), 캄차카함대소속코르벳함 ( 군함 ) 올리부차호 (корвет Олибуца), 스쿠너범선보스톡호 (шкуны Восток), 수송선공작멘쉬꼬프호 (транспорт Князь Меньшиков) 등이다. 제독은소령꼬르사꼬프 (Корсаков) 를추천하여스쿠너범선보스톡호의함장으로임명하였다. 팔라다호는함장소령운꼽스키 (Унковский) 를비롯하여장교 22명과승무원 439명으로구성되었다. 이중에서보스톡호에승선할장교 6명과수병 37명도포함되었다. 알렉산드르넵스끼수도원 (Alexander Nevsky Lavra) 아바꿈 (Аввакум) 신부는중국어통역을맡았다. 9) 전함팔라다호 (Палада) 에승선한인원은다음과같았다. 소령 (капитан-лейтенант) 운꼽스끼 (И.С. Унковский) 는함장으로전함팔라다호 (Палада) 를지휘하였다. 소령뽀시예트 (К.Н. Посьет) 는제독뿌쨔찐의전속부관이었다. 대위꼬르사꼬프 (В.А. Pимский-Корсаков), 부따꼬프 (И.И. Бутаков), 찌흐멘예프 (П.А. Тихменев), 끄리드네르 (Н. Криднер), 틔르꼬프 (С. Тырков), 사비치 (Н.Н. Савич), 쉬바르츠 (С.П. Шварц), 벨라브네츠 (И. Белавнец), 쉴리뻰바흐 (А.Е. Шлипенбах) 등이승선하였다. 또한소위안주 (П. Анжу), 볼찐 (А.А. Болтин), 꼴로꼴리쩨프 (А.А. Колокольцев), 질료뉘이 (П. Зеленый) 등이참가하였다. 포병대위로세프 (К.И. Лосев) 와하레조프 (А.А. Халезов), 중위뽀뽀프 (Л. Попов) 와이스또민 (Я. Истомин), 소위모이세예프 (И. Моисеев), 의사아레피예프 (А. Арефьев) 와베이리흐 (Вейрих), 통역관고쉬께비치 (О.А. Гошкевич) 등이승선하였다. 또한 4명의해군소위후보생 8)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20 9)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2
278 獨島硏究제 22 호 (Гардемарины), 1명의육군사관학교생도 (юнкер), 32명의하사관 (унте р-офицеры), 365명의수병 (рядовые), 30명의비전투장병 (нестроевые), 26명의악사 (музыканты) 등이승선하였다. 10) 팔라다호에승선한장교와수병은러시아정교에따라규칙적인예배생활을수행하였다. 뿌쨔찐에따르면장교와수병은영국에서시작하여일본에도착할때까지일요일과명절에는예배를가졌다. 팔라다호의장교는탐험과항해관련서적을보면서지식을습득할수있었다. 해군사관학교생도는승선한장교를통해서과목을이수하면서, 영국에서구입한육각기를이용하여천문을관측하였다. 러시아정부는천문관찰도구와다양한교과서등을해군사관학교생도에게제공하였다. 11) 팔라다호의장교와수병은대포와무기를이용한군사훈련을매일실시하였다. 팔라다호는장교를위한공동도서실이준비되었고, 모든수병은각자가필요한자료를준비하였다. 팔라다호는장거리항해를위한식량을준비하였다. 러시아해군부는소금에절인돼지비계, 건빵등빨리상하지않는식품을제공하였다. 나머지식품은기회가있을때마다보충되었다. 대부분의식품은오랫동안저장할수있는통조림이었다. 팔라다호의장교와수병은육지에서먹던음식을바다에서도먹을수있어서괴혈병을피할수있었다. 12) 곤차로프는 1852년 10월 7일항해과정을기록하기위해서제독뿌쨔찐 (Е.В. Путятин) 의비서 (секретарь) 로전함팔라다호를타고출발하였 10)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57. С.627 11)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6. 12)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7.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279 다. 13) 곤차로프는공식적으로항해기록을위한비서신분이었지만자신의비공식적인목표도있었다. 곤차로프는 자신이아주필요할때가아니면자신의편안한방에서나오지않았다 고언급하였다. 그런데곤차로프는도시생활과습관을버리고 출렁이는대양의수면으로돌진 한이유를다음과같이기록하였다. 곤차로프는항상여행을꿈꿔왔다고밝혔다. 그는학교에서선생님이손가락으로가리킨적도와극지방, 열대지방을직접가보고싶었다. 그는 여행을떠난다는생각이술기운처럼내머리를흐리게만들었다 고표현하였다. 곤차로프는자신의삶은둘로나뉘었다고주장하였다. 하나는제복을입은평범한관리였다. 나는상관의시선앞에어쩔줄몰라하고, 감기걸리는걸두려워하고, 수십명의제복들과함께사방의벽에갇혔다. 보고서와통보서, 명령서등을손질하고있다. 또하나는미지의탐험에나선모험여행가였다. 나는밀집으로된모자에하얀외투를걸치고입에는껌을씹으면서그루지야의심연을따라금빛양털을찾으러간다. 매달기후와하늘과바다와나라를바꾸어가며여행한다. 항해를노래한다. 곤차로프는여행을떠나기직전자신의고민도토로하였다. 어떻게이런다른삶을견뎌낼수있을까, 다른세계의시민이될까? 13)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С.1-2.
280 獨島硏究제 22 호 몰입하면할수록위협적인환영까지그에게나타났다. 과연나같은식견을지닌여행자가나의동포들과사회에지게될의무는무엇일까하는것이었다. 지금나에게부과된일은세계일주를하고, 그것을지루하지않고, 초조하지않게이야기를경청하게끔말해주는것이다. 14) 제독뿌쨔찐이청국과일본과의개항을추진하기위해서 450명이넘는인원을조직하고함대를구성하고있는사이에, 작가곤차로프는지식인으로사회적의무와작가적능력을고민하면서팔라다호에승선하였다. 곤차로프는모든장소들에애정을확장하는강인한사람을꿈꾸었다. 3. 발트해 - 보닌제도및나가사키 - 시베리아항해과정 곤차로프는 1852년 10월 7일전함팔라다호가러시아끄론쉬따트 (Крон штат) 를출항하는그순간을기록하였다. 나는출발과함께매순간의움직임과걸음들, 인상들이이전과다르게시작되었다. 곤차로프는스웨덴동쪽의발트해에위치한고틀란드 (Gotland) 를통과하면서기록하였다. 거기서나는바다의미신하나를들었다. 이섬을통과하는배는이섬을지키는영혼에게폭풍없이무사히지나가기위해동전을던진다. 14)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57. СС. 11-35.Ⅰ. От Конштадта до мыса Лизарда.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281 하지만팔라다호는덴마크에도착하기도전에콜레라가발생했고 3명의장례식을치렀다. 팔라다호는스웨덴과덴마크의젤란드섬사이에있는순드 (Sund) 해협, 덴마크남쪽카테가트 (Kattegatt) 해협, 노르웨이남쪽스카게라크 (Skagerrak) 해협을항해하였다. 팔라다호는 1852년 10월 20일경영국남부포츠머스 (Portsmouth) 에도착할것으로예상하였다. 하지만팔라다호는맞바람이부는바람에열흘동안이나영국해협 (English Channel) 으로들어설수가없었다. 팔라다호는영국동남부항구도시도버 (Dover) 를지났고, 곤차로프는 흐릿한회청색을띤, 울퉁불퉁하고가파른 프랑스의해안을보았다. 팔라다호는와이트섬 (Isle of Wight) 과포츠머스요새사이에있는스피트헤드 (Spithead) 정박지에닻을내렸다. 15) 제독뿌쨔찐은전함팔라다호의정비, 스쿠너범선보스톡호건조, 그리고강력하고거친바람때문에 1853 년 1월 6일까지영국에서머물렀다고기록하였다. 16) 1852년 11월 20일곤차로프는장기간체류한영국인상을다음과같이기록하였다. 자선이사회적의무의수준으로승화되었다. 이도덕적인국민은일요일마다딱딱한빵을먹는다. 당신이포르테피아노를방에서연주하거나거리에서휘파람을부는것을허락하지않는다. 현명하고실무적이고종교적이며도덕적이고자유로운영국의평판에대해깊이생각해보시길! 17) 15)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 11-35.Ⅰ. От Конштадта до мыса Лизарда 16)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4. 17)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 11-35. Ⅰ. От Конштадта до мыса Лизарда
282 獨島硏究제 22 호 곤차로프는 동물을사랑한다 는영국인이 아프리카에서총과화약을수출한다 며영국의이중성을비판하였다. 총과화약이아프리카에없다면영국인은한번의전쟁으로아프리카의약탈을멈출수있다. 영국인은자국을위해화약을아프리카에실어날랐다. 정말끔찍이도나쁜상업적민족이다. 18) 팔라다호는 1853년 1월 6일아바꿈수도원장이진행한예배를마친후포츠머스를출항하였다. 영국해협에서폭풍우를만나 1월 11일겨우대서양으로나갈수있었다. 19) 팔라다호는 1853년 1월 12일과 13일항해도중거친바람을만났다. 팔라다호는스페인북서부해안비스케이만 (Bay of Biscay) 을통과했고, 스페인서쪽끝에위치한피니스테레 (Finisterre) 곶에도달하였다. 1853년 1월 18일, 영국을출발한지 8일째되는날, 아침 9시대서양북쪽포르투갈령마데이라 (Madeira) 섬을지나갔다. 20) 1853년 1월 22일팔라다호는북회귀선을지났다. 곤차로프는 1853년 2월 3일적도를통과하는그순간을기록하였다. 우리모두는갑판위로쏟아져나와서의심스럽다는듯이사방을둘러보았다. 마치지구의허리를둘러싼적도라는이름의나무테두리를보기라도할듯말이다. 21) 18)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 149-166. Ⅹ. Шанхай 19)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4. 20)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 35-47. Ⅱ. Атлантический океан и остров Мадера. 영국에서마데이라까지거센북풍이불어서 7 일이걸렸다. 뿌쨔찐은보스톡호에게식량을확보할것을명령하였다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 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4.). 21)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 47-53. Ⅲ. Плавание в Атлантичес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283 팔라다호는 1853년 3월 9일남아프리카희망봉동쪽폴스만 (False Bay) 을지나갔다. 팔라다호의일부승무원은케이프타운인카프스타드 (Kaapstad) 로떠났다. 하지만곤차로프는배에서머무르며갑판을산책하며시간을보냈다. 책을읽으려하였으나, 읽지못했고, 뭘쓰고싶었으나쓸수가없었다. 사흘, 나흘그렇게날들이지나갔고, 타성은계속되었다. 22) 제독뿌쨔찐은희망봉에서홍콩으로출발할것을보스톡호에게지시하였다. 뿌쨔찐에따르면홍콩은필요한모든시설과보급품을갖추어정박지로편리하며, 동인도와홍해를통하여유럽과연락할수있었다. 뿌쨔찐은희망봉에서영국의우편선으로부터뻬쩨르부르크에서보낸지시서를받았다. 지시서는러시아외무부에서전령 2명을미국을경유하여파견하였다는내용이었다. 뿌쨔찐은새로운임무를전달할전령과의만남장소를일본인근에위치하는보닌제도를지정하였다. 그와동시에뿌쨔찐은올리부차호와공작멘쉬꼬프호에게보닌제도로입항할것을통보하였다. 23) 곤차로프는 1853년 4월 12일남아프리카폴스만을출발한이후항해의어려움을기록하였다. ких тропиках 22)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 53-55. Ⅳ. На мысе Доброй Надеж ды. 팔라다호는 1853년 3월 10일폴즈만에닻을내렸다. 팔라다호는영국에서 6,000 마일을항해하였고, 59일걸렸다. 보스톡호는 3월 15일에폴즈만에도착하였다. 보스톡호는장거리항해에적합했으며파도도잘견뎠다.(Путятин Е.В. Вс 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 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8.). 23)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11.
284 獨島硏究제 22 호 인도양은대서양보다도더나쁘게우리를맞아주었다. 대서양에서는바람이거셌지만그래도순풍이었는데, 여기는바람도거세고또역풍이었다. 그리고그바람은폭풍으로변하였다. 팔라다호는 1853년 5월 17일자카르타의인근마을안예르 (Anyer) 의정박장에도착하였다. 곤차로프는정박직후마닐라로병력을실어나르는스페인수송선을목격하였다. 24) 뿌쨔찐은팔라다호가인도양항해를통해서장거리항해에취약하고불안전하였다고기록하였다. 뿌쨔찐에따르면팔라다호의갑판위로물이올라왔고, 팔라다호상부의고정장치에서흔들림이발견되었다. 뿌쨔찐은팔라다호대신에아르한겔스크 (Архангельск) 에서새로건조한프리깃함디아나 (Диана) 호로교체해줄것을해군부에게요청하였다. 25) 팔라다호는유럽과정기우편선이있는싱가포르로항로를결정하였다. 이항로는청국해안을향해가는직선노선에서크게벗어나지않았다. 팔라다호는 1853년 5월 21일시속 3마일까지빨라지는해류를만났고, 5월 25일싱가포르항구에입항하였다. 26) 곤차로프는싱가포르의도착한선원의기쁨과싱가포르의자연을생생히묘사하였다. 늘전함에감돌던긴장과그지역에대한세밀한조사, 선원들의부산한움직임은태평한휴식으로바뀌었다. 24)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55-59 Ⅴ. От мыса Доброй Надежд ы до острова Явы 25)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12. 26)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13-14.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285 여기의하늘은아무리읽어도지겹지않는책과같다. 이곳의하늘은마치땅과더가까운듯이더열려있고더선명하다. 밤마다밝게빛나는샛별, 특히불꽃처럼빛을내며가끔씩온갖방향으로하늘에지나간자국을내는혜성들을감상하였다. 나는대위끄리드네르 (Лейтенант Н. Криднер) 와오랫동안당직용긴의자위에함께서있었다. 27) 뿌쨔찐은싱가포르에서부따꼬프대위가영국의우편선을타고갈수있도록조치하였다. 그이유는부따꼬프대위를통해서본국정부에보고서를보내려고했기때문이었다. 팔라다호는보급품을보충한후 1853년 6월 1일싱가포르에서홍콩으로출항했습니다. 팔라다호는 12일동안의순항끝에홍콩에입항해서, 하루반전에도착한보스톡호를만났다. 28) 곤차로프는팔라다호가홍콩에도착한이후단상을적었다. 해는천정 ( 天頂 ) 에걸려있었고, 햇볕은직선으로내리쬐었다. 영국이홍콩에돌을다듬어벽을쌓고흉벽 ( 胸壁 ) 을만들어서대포를설치하였다. 29) 뿌쨔찐은페리 (M.C. Perry) 제독이미국함대를이끌고류큐제도에서일본해안을향해출항하였다는소식을듣고홍콩에서의출발을서둘렀다. 30) 팔라다호는 1853년 6월 26일홍콩에서출발하였다. 하지만역동풍 27)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59-61. Ⅵ. Сингапур. 28)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15. 29)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61-63. Ⅶ. Гон-Конг. 30)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17. 미일조약에대해서는다음의논문참조. 정하미, 미국표류민학대문제와맥도널드의경험 : 미일화친조약의전야, 일본연구 17, 2012.
286 獨島硏究제 22 호 ( 逆東風 ) 을만나 7월 5일까지겨우 300마일정도만항해하였다. 곤차로프는홍콩에서서태평양보닌 (Bonin Is. 오가사와라 ) 제도까지총 1600마일이고순풍을만나면 7-8일정도걸린다고기록하였다. 팔라다호는 1853년 7월 7일인도네시아바탄 (Bataan) 섬으로접근하였다. 곤차로프에따르면팔라다호는영국해군장교벨처 (Edward Belcher) 의표시처럼닻을내릴장소가있어야했지만거대한절벽과사방에서해안을때리는물결의하얀테두리만보았다. 팔라다호는태평양으로출발하였다. 곤차로프는태평양의바람과파도때문에항해가지체되었다고기록하였다. 저녁무렵신선한바람이불기시작하였다. 나는글을써보려했지만헛수고였다. 잉크병도, 촛불도탁자에서있질못했고, 종이는손아래에서미끄러떨어졌다. 몇자쓴다고해도, 뒤로자빠지지않으려면바로손을뒤로뻗쳐벽에기대야하였다. 바람은울부짖고있었다. 파도는꼭대기부분을편평하게만들고, 그파도를마치채를통해뿌리듯이대양에뿌리고있었다. 파도위에는물분말이구름을이루었다. 광란에싸여서로를갈기갈기찢고있는사자와호랑이등의야생동물같았다. 곤차로프는 1853년 7월 16일보닌 ( 오가사와라 ) 제도까지여전히 500마일정도남았다며항해의어려움을토로하였다. 일주일내내 70마일정도만갔다. 폭풍이지나간다음무풍이왔다. 이게무슨농담이란말인가? 태평양은우리를결정적으로우롱하였다. 이제태평양은그가정말로태평하다는걸증명하기로마음을먹었다. 거대한구름덩어리들이움직이면서수평선을보여주었지만, 우리에게속도를붙여주지는않았다. 무더웠고, 대기에움직임은없었다. 31) 31)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63-71. Ⅷ. Острова Бонин-Сима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287 팔라다호는 30일을넘는항해끝에 1853년 7월 26일보닌 ( 오가사와라 ) 제도로이드항구 (Port Lloyd) 에정박하였다. 팔라다호는보닌제도에서올리부차호, 홍콩에서하루전날출항한보스톡호, 그리고전령을태워하와이제도를경유한공작멘쉬꼬프호를만났다. 끄로운 (Кроун) 대위와보디스꼬 (Бодиско) 비서는공작멘쉬꼬프호를타고왔으며, 일본에서지켜야할추가명령서를가져왔다. 공작멘쉬꼬프호는팔라다호에공급할양식을실어왔다. 팔라다호는 8월 4일 3척의함정과함께나가사키로출항하였다. 32) 곤차로프는다음과같이기록하였다. 보닌제도는청국어나일본어로 사람이살지않는섬들 이다. 여러국가의포경선들이끊임없이출몰한다. 그중제일많은것은미국포경선이다. 33) 추가명령서를전달받은뿌쨔찐은일본과의협상원칙을정하였다. 뿌쨔찐은일본과의교류에서친절과우정을우선시하고, 러시아의권위를훼손하지않는범위내에서일본의법규와풍습을최대한수용하며, 침착한자세로러일협상을진행하기로결정하였다. 34) 팔라다호는 10개월의항해끝에 1853년 8월 9-10일사이나가사키항구에정박하였다.( 일본 1차방문 ) 뿌쨔찐은신비한미지의땅인일본의해안을바라보게되었다고기록하였다. 뿌쨔찐에따르면일본의관료는나가사키에입항하기전에항구에서수마일밖으로마중나와국적을확인했 32)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19. 33)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63-71. Ⅷ. Острова Бонин-Сима 34) 그후뿌쨔찐은일본정부와장기적이고두터운관계를구축하여목표를달성하였다고보고하였다.(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а вое 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 ⅩⅣ. No.10. Спб. 1856. С.21.)
288 獨島硏究제 22 호 고, 항구입구에정박할것을요구하였다. 35) 뿌쨔찐은나가사키정박이후의보고서를우편으로보내고, 식량을구입하기위해서공작멘쉬꼬브호를상하이에보내기로결정하였다. 사할린섬과아무르강인근에서러시아의소식을입수할목적으로보스톡호를타타르해협으로보냈다. 36) 곤차로프는일본의첫인상을기록하였다. 바로여기가열쇠를잃어버리고굳게닫혀있는보석함이다. 이제껏한번들여다보기위해보람없는노력을들인그나라. 황금이나또는무력으로또는간교한정치로서로의만남을이끌어내려는나라다. 팔라다호는한달간의협상끝에 1853년 9월 9일나가사키영주를접견하였다. 팔라다호는일본의협상지연때문에 1853년 11월 5일식료품등을보충하기위해서상하이로떠날것을결정하고 11월 11일출발하였다. 37) 사실 1853년 9월 14일공작멘쉬꼬프호는터키, 프랑스, 영국과의관계단절에관한소식을입수하였다. 38) 그럼에도공작멘쉬꼬프호는아직상하이 35)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20. 곤차로프는나가사키에 8 월 10 일도착, 뿌쨔찐은 8 월 9 일도착이라고기록하였다. 36)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22. 37)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 149-166 Ⅸ. Русские в Японии. 뿌쨔찐에따르면일본인은교활하고미꾸라지같은자신들의성격을이용하여외국인과의관계에서예전부터내려오는권리와풍습을지키려고노력하였다.(Пут 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 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21) 38)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289 항구입항이위험하지않으며, 상하이에주둔한적군의군사력이러시아의선단보다우월하지않았다고보고하였다. 팔라다호는상하이에서신용장을현금화하고석탄, 항해물품, 양식을구입해야할필요성이있었다. 39) 곤차로프는상하이로출발하는순간또다시항해하는심정을표현하였다. 물에떠다니는삶, 또다시바람의의지대로움직이거나바람의자비에따라평온해지겠지. 지금바람은얼마나울부짖고또얼마나차가운지! 나는석달동안바다가낯설었다. 팔라다호는 1853년 11월 14일 450마일가량을항해해서상하이인근새들군도 (Saddle Islands) 에정박하였다. 뿌쨔찐은보스톡호의손상된부분 ( 잠수부위도장등 ) 을정비시키고, 유럽과청국에대한정보를입수하고, 항해준비에필요한것을준비하도록지시하였다. 뿌쨔찐은새들군도에서동인도우편으로보내온해군부의통지서를받았다. 그통지서는디아나호 (Диана) 가팔라다호를대체하기위해서 1853년 10월끄론쉬따트에서출항했고, 미국을경유하여하와이제도로항해했다는내용이었다. 40) 팔라다호는 1853년 11월 23일스쿠너범선보스톡호를만났던순간을기록하였다. 보스톡호는상하이에서야채, 살아있는황소들, 닭, 오리들, 말그대로신선한식료품과새로운소식들. 하지만신선하지않은, 즉지금은 11월인데 8월자소식들을가지고왔다.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29. 39)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31. 40)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31-32.
290 獨島硏究제 22 호 팔라다호는상하이근처새들군도 (Saddle Islands) 를출발하여 4일동안항해한이후 1853년 12월 24일나카사키에정박하였다.( 일본 2차방문 ) 곤차로프는다시도착한나가사키를묘사하였다. 그런날을잊기는힘들다. 하늘과바다는하나의푸른덩어리가되었다. 공기는따뜻했고움직임이없었다. 나가사키는얼마나좋은지, 그리고햇볕을듬뿍받은무언가훌륭해보였다. 갈색의언덕들사이어딘가에서쌀, 밀, 채소가새롭게파종되고새싹이올라와서선명한파란색을띄고있다. 바다를쳐다보면그것은끝없이펼쳐진감청색휘장이었다. 41) 뿌쨔찐은 1853년 12월초끄로운 (Кроун) 대위를전령으로홍콩과동인도를거쳐보고서를본국에보내기로결정하였다. 뿌쨔찐은탐사관련자료와지도, 사할린섬의석탄매장지발견등을보고서로작성하였고, 청국물품등을견본으로보냈다. 42) 곤차로프는 1854년 1월 1일나가사키에도착한일본전권대표를만났다. 이특별한날의감정을곤차로프는기록하였다. 1월 1일입니다. 항상그렇듯모여서늘했던대로춤을추고떠들고카드놀이를하고자정에싸움을기다리면서여러번하품을하고결국고대했던순간을맞이해서잔을잡았겠죠. 생애처음으로나는지난해의마지막날을다르게, 이전과는다르게보내는일이발생하였다. 나는이날일본귀족집에서식사를하였다. 43) 이날곤차로프와함께소령운콥스끼 (И.С. Унковский) 와나지모프 41)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 149-166. Ⅹ. Шанхай. 42) 뿌쨔찐은 12 월 17 일네척의함정을이끌고나가사키로출발하였다 (Путятин Е. 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35.). 43)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 166-210. Ⅺ. 1854 год.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291 (Н.Н. Назимов), 대위꼬르사꼬프 (В.А. Pимский-Корсаков) 와끄리드네르 (Н. Криднер), 소령푸루겔름 (И.В. Фуругельм), 청국어통역관고쉬케비치 (О.А. Гошкевич) 등이참석하였다. 44) 일본전권대표는 1854년 1월 4일답방으로팔라다호를방문하였다. 45) 뿌쨔찐은 1854년 1월말나가사키의팔라다호에서일본전권대표와함께고별오찬및우호에관한공동성명을발표하였다. 뿌쨔찐은봄에사할린섬남단아니바 (Анива) 해협에서러일협상을계속하기로약속하였다. 46) 팔라다호는러시아와일본의수교협상이지연되자 1854년 2월 15일마닐라만에도착하였다. 곤차로프는마닐라에도착한순간을다음과같이묘사하였다. 우리는항로로조용히, 조심스럽게다가갔으며바람은잠잠하였다. 밤이왔다. 당신은빛이없이도밝고따뜻하며짧고고요한열대의밤을모를것이다. 바람한점, 소리하나없이별들이떨고있다. 나는도시의불빛을쳐다보았다. 주의의모든것은저녁노을속으로사라졌다. 나의머릿속에서호기심이란즐거운감정이피어올랐다. 가톨릭을믿는남쪽의그림과형상들이망각의잔해들에서떠올랐다. 47) 팔라다호는 1854년 4월 2일부터 4월 7일까지거문도에정박하였다.( 한국 1차방문 ) 4월 6일팔라다호소속군함올리부차호가독도를발견하는사이에, 곤차로프는거문도의인상을기록하였다. 44) И.С. Уньковский, капитан-лейтенант Римский-Корсаков, Назимов и Фуругельм, лейтенант барон Криднер, переводчик с китайского языка О.А. Гошкевич. (Гонч 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57. С.401. Ⅺ. Русские в Японии). 45)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 166-210. Ⅺ. 1854 год. 46)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39. 47)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 210-230. Ⅻ. Манилла.
292 獨島硏究제 22 호 여기저기조선인의농가가다닥다닥붙어있었다. 보이는것은초가지붕뿐이었고, 드물게주민이보였다. 모두들마치수의를입은것처럼흰옷을입고있었다. 곤차로프는거문도를직접답사했고, 필담으로조선주민과대화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4월 9일나가사키에정박했고, 곤차로프는그순간을기록하였다.( 일본 3차방문 ) 나가사키까지의이동은마치강에서배를항해하듯훌륭했고정숙하였다. 일본인은우리가그렇게빨리도착한것을믿으려하지않았다. 48) 제독뿌쨔찐은일본전권대표와면담을요청하는문서를나가사키영주에게전달한다음조선동해안의조사를결정하였다. 49) 팔라다호는 1854년 4월 18일쓰시마섬을통과하였다. 50) 팔라다호는 1854년 4월 20일조선연안에도착해서동해안조사를시작하였다.( 한국 2차방문 ) 팔라다호는 1854년 4월 25일위도 39도의조선동해안을측량했고, 5월 5일위도 41도의동해안을측량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5월 9일두만강에서 6마일거리에정박하였다. 팔라다호는 4월 20 일부터 5월 11일까지 22일간초산만 ( 울산만 ) 에서북위 42도 31분 ( 두만강하구 ) 지점에이르는동해안전역을실측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5월 17일스쿠너범선보스톡호를만났다. 스쿠너범선보스톡호는유럽의소식과편지를가져왔는데, 프랑스와영국이러 48)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57. СС. 505-539. ⅩⅢ. От Маниллы до бе регов Сибири. 1 49)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3 50)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57. СС. 505-539. ⅩⅢ. От Маниллы до бе регов Сибири.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293 시아와외교관계를단절하였다는비공식적인정보를전달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5월 18일시베리아와사할린섬을가르는타타르해협 (Tatar Strait) 에들어섰다. 팔라다호는 1854년 5월 20일만주해안에배를정박하였다. 곤차로프는시베리아퉁구스족을만났고길랴크 (Gilyak, Nivkh) 족에대해기록하였다. 길랴크족은바람에부러져떨어진나뭇가지무더기아래서영하 36도에도살아간다고한다. 심지어는젖먹이아이들을데리고있는엄마들도그렇게산다고한다. 몸을녹이고싶으면모닥불을피우고, 송어와곰마늘 ( 마늘의한종류 ) 을먹는다. 51) 팔라다호는북위 42도 34분포시에트 (Посьет) 만까지탐사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5월 22일시베리아동해안에서공작멘쉬꼬프호를만났다. 뿌쨔찐은데카스트리해협 (залив де-кастри) 에주둔시키고, 동시베리아총독무라비요프 (Муравьев) 의지시를받으라는러시아황제의명령을받았다. 총독무라비요프 (Муравьев) 는 1854년 6월 22일팔라다호의정박지에도착하여, 팔라다호가임무를마쳤기때문에타타르해협 (Tatar Strait) 을경유하여북쪽으로항해할것을지시하였다. 뿌쨔찐은북쪽에가서팔라다호를아무르강으로끌어들여빙하와적군으로부터안전한곳에보관하는작전을세웠다. 팔라다호는아무르강의하구에서 40마일떨어진라자레프곶까지이동하였다. 결국팔라다호는 1854년 8월시베리아연안에닻을내렸다. 52) 51)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57. С.539. ⅩⅣ.Обратный путь через Сиб ирь 52)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47-48.
294 獨島硏究제 22 호 곤차로프는바다에서육지로내려야하는자신의심정을다음과같이표현하였다. 사람은참으로이상하다. 육지에가고싶지만, 전함을떠나는것도아쉽다! 하지만이배가얼마나아름답고우아한지, 이배에타고있는사람들이어떤이들인지여러분들이아신다면, 내가억지로팔라다호를떠난다는것에놀라지않으실것이다. 53) 팔라다호의장교와수병은 1854년 9월니꼴라예프검문소로파견되었다. 팔라다호는 1854년 9월 26일정박하여전함의무장해체를진행하였다. 제독뿌쨔찐은 1854년 10월 3일러일협상을마무리하기위해서전함디아나호 (Диана) 를타고다시일본으로출항하였다. 54) 그후전함디아나호는 1854년 12월나가사키에서지진의여파로난파당하였다. 디아나호의난파에도불구하고뿌쨔찐은 1855년 1월 26일일본정부와시모다조약 (Treaty of Shimoda, 下田条約 ) 55) 을체결하였다. 뿌쨔찐은 1855년 4월 26일가벼운남서풍이불자새로건조한범선헤다호 (Хе да) 를타고일본시즈오카건너편헤다항구를출발하였다. 헤다호는뽀시에트중령과로세브중령, 뻬슈로브준위, 꼴로꼴쪼브대위, 세묘노브준위, 사관생도 2명과수병 40명등이승선하였다. 뿌쨔찐은 1855년 6월 5일라자레프곶에도착하였다. 56) 한편, 곤차로프는오호츠크연안아얀 (Аян) 에상륙했고, 야쿠츠크 (Якутск) 53)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57. СС. 505-539. ⅩⅢ. От Маниллы до бе регов Сибири. 54)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50. 55) Treaty of Commerce and Navigation between Japan and Russian( 日露和親条約 ). 56)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71, 75, 77.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295 와이르쿠츠크 (Иркутск) 를거쳐 1855년 2월 13일뻬제르부르크 (Петербург) 에돌아왔다. 제독뿌쨔찐은팔라다호가일본과의외교관계수립, 해군부의탐사지시에따른실행등주어진업무를성실히수행하였다고스스로평가하였다. 다만뿌쨔찐은 1854년 3월발발한크림전쟁의여파로서방국가들과관계가단절되어, 아메리카대륙에있는러시아식민지를방문하지못했고, 오호츠크해해안을조사하지못한한계를기록하였다. 57) 그런데작가곤차로프는항해과정에서도착한국가에대한자연과풍경및인간과민족에대한특징을포착하면서, 대양과대륙을넘나들며인간의삶과죽음의공존을생생히기록하였다. 그는대양에있는단단한범선보다도시의소란스러운거리가더안전하지못하다는사실을깨달았다. 4. 러시아함대의울릉도 독도발견 서양에서울릉도를최초로발견한것은, 1787년 5월 27일프랑스의장- 프랑소아갈로라페루즈 (Jean-Francois de Galaup Laperouse, 1741-1788) 탐험대에의해서이다. 울릉도를가장먼저목격한천문학자다줄레 (Dagelet) 의명칭을사용해서 다줄레 라고명명하였다. 당시함대는새로건조한두척의호위함인부솔 (Boussole) 과아스트롤라브 (Astrolabe) 로구성되었다. 58) 57)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б. 1856. С.84. 58) 이진명, 1998, 독도지리상의재발견, 삼인, 27, 32쪽. 1787년 5월 27일. 북북동에어떤지도에도나타나있지않은섬하나를발견하였다. 이섬은조선의해안으로부터약 110km 떨어진것으로보였다. 나는이섬에접근하려고했으나, 섬은바람의방향과꼭같은방향에있어어려웠다. 다행히도밤사이에바람의방향이바뀌었다. 1787년 5월 28일. 해가뜰무렵섬을측정하기위해섬쪽으로향하였다. 나는이섬을제일먼저발견한천문학자다줄레의이름을따서 다줄
296 獨島硏究제 22 호 러시아함대도동해에서울릉도와독도를발견하며기록하였다. 뿌쨔찐제독은 1854년 4월타타르해협에서빙하와안개를만날가능성을예상하고한국의동해안탐사를결정하였다. 그래서팔라다호는 한반도동해안남동쪽부터만주와국경을접하는두만강까지, 그리고만주연안을따라몇십마일더먼곳에이르기까지등의동해안지역을조사하고사진을찍었다 고기록하였다. 팔라다호는라자레프만 ( 송전만 ) 등을측량했고, 날씨가좋은날잠수도구를이용하여수중지형까지조사하였다. 59) 팔라다호의소속함정중올리부차호는 1854년 4월 6일대한해협을지나북쪽의타타르 (Татарский) 해협으로항해하던도중독도를발견하고, 서도를 올리부차 (Оливуца), 동도를 메넬라이 (Менелай) 라고명명하였다. 아침에발견한 2개의높은바위는반나절동안시야에있었으며, 이제명확해졌다. 2개의제법높고예각의발가벗은바위는약 300사젠 (642 미터 ) 떨어져있었다. 이들중서쪽섬은북위 37-13도, 동경 131-55도에위치하고있다. 이들중더높은서쪽섬을 올리부차 라명명하였다. 동쪽섬을현재는발틱함대그후에캄차트카전단으로소속되기전에 1846년까지흑해함대소속이었을때함정의최초이름을기념하여 메넬라이 라고불렀다. 올리부차 에서북서쪽으로 2마일가량물위에나타난암초였다. 올리부차및메넬라이섬을청명한일기상태의 30마일거리에서발견하였다. 1854년 4월 6일 ( 양력4.18) 우리함정은올리부차서쪽 4마일해상에서반나절동안머물렀다. 60) 레 라명명하였다. 섬의둘레는 17km밖에안되었다. 우리는섬에서 1.9km 떨어져서섬을거의한바퀴돌았지만깊은곳을찾지못하였다. 섬의북동첨단부는북위 37도 25분, 동경 129도 2분이었다. (La Pérouse, Voyage autour du monde, Vol.2(Paris, 1797), pp.390-392.) 59) РГАВМФ. Ф.296. Оп.1. Д.75. ЛЛ.219-223. 1854.5.25/6.6 60) РГАВМФ. Ф.870. Оп.1. Д.7208. ЛЛ.87-88. Шханечный Журнал Корвета Олибуца (1854년올리부차호의항해일지 ) : 최명복, 독도와러시아, 해양전략 102, 1999, 217쪽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297 팔라다호는 1854년 4월 20일부터 5월 11일사이에한국동해안의북위 35-30도지역에서부터북위 42-30도, 동경 131-10도지역까지약 600마일의해안을조사하였다. 그결과를러시아해군지 1855년 1월호에게재하였다. 다젤레트 (Дажелет) 는보스톡호가북위 37-22도, 동경 130-56도에서관측했는데, 둘레 20마일크기의원형모양이고, 해안은협소하며, 거의접근할수가없었다. 다젤레트 최고봉의높이는 2,100피트이다. 아르고나트섬은존재하고있었는가의심스럽기만하다. 그섬은보이지가않는다. 해조의배설물로뒤덮여있으며, 서로상당히떨어져있는섬은올리부차호가북위 37-14도, 동경 131-57도에서발견했으며, 메넬라이및올리부차도라불렀다. 이섬의발견은항해에적지않은도움을준다. 이들섬은근접한섬들로부터분리되어떨어져있어서동해북방으로항해하는선박의십자로에위치하고있다. 61) 그후러시아해군부수로국은 1857년 조선동해안지도 를발간하여독도를한국의영토로공식적으로인정하였다. 현재까지러시아해군부수로국의 조선동해안지도 는 1857년판본, 1868년판본, 1882년판본이국내에알려졌다. 1857년판본은 1854년올리부차호가메넬라이와올리부차를처음발견했다고소개되었다. 그런데 1860년러시아해군항해부대소속지휘관세르게예프중령 (Подполковник Сергеев) 은독도에대한지형의측량을실행하였다. 1868년판본은세르게예프의독도측량을지도에소개하면서, 다양한방향에서바라본세르게예프의독도측량그림을포함시켰다. 1882년판본은 1861년부터 1880년까지의러시아조사에기초하여, 올리부차호의독도발견및세르게예프의독도측량을동일하게수록하였다. 62) 이것은팔라다호함대소속올리부차호의독도발견이 61) Описание Восточного берега Полуострова Кореи, Морской Сборник( 해양선집 ), Т.14. N.1, 1855, СС.34-35
298 獨島硏究제 22 호 러시아해군부수로국을통해서러시아정부의공식지도에정착되는과정을보여준다. 결국러시아정부는 19세기후반러시아해군부수로국의지속적인지도발간을통해서, 독도가한국의영역이었다는사실을입증해주었다. 그후러시아함대는동해를경유하면서울릉도를기록으로남겼다. 1886년 8월포함시부치 (Сивуч) 호는진해 (Bate Crichton 북위 34.2, 동경 128.18) 군도를탐사하면군사적방어시설및저탄소의기능을관찰하였다. 63) 그후시부치 (Сивуч) 호는 1887년 4-5월사이두만강을정밀하게측량하였다. 시부치호는 1887년 4월나가사키-히케-타케-울릉도등을경유하여두만강에도착하였다. 4월 7일오전 8시 3개의증기기관을보유한시부치호는나가사키정박지에서닻을올렸다. 이오시마 (Иво-Сима) 등대를벗어나면서나침반으로항로를결정했으며, 그후북서쪽 65도방향으로항로를잡고 7노트의속력으로항해하였다. 오전 11시 30분히케 (остров Хике, 이키壹岐 ) 섬옆을지나면서항로를북서쪽 29도방향으로설정하였다. 정오가지나면서초속 3-4미터북풍이불기시작하였다. 오후 3시 10분타케 (камень Таке, 타케시마 ) 암초를지나면서북서쪽 15도방향으로나아갔다. 오후 8시동쪽의조선해협 (Восточный Корейский пролив, 대한해협 ) 에도달하여항로를북쪽 62) Карта восточного берега полуострова Кореи сост. с описи, произвед. офицерами на фрегате Паллада. Грав. В. Поляков. Вырез. слова Д. Комов. [СПб.] Гидрогр. Деп. Мор. М-ва. 1857.(РНБ К3-ВАз/4-51) 일본해군성수로국은 1876년 조선동해안도 를발간했는데, 여기에독도의명칭이러시아해군이명명한명칭인 오리우츠 ( 올리부차 ) 와 메네라이 ( 메넬라이 ) 를채택했다.( 김영수, 근대독도와울릉도명칭문제를둘러싼논쟁과그의미, 독도와한일관계, 2009, 180쪽 ) 한철호에따르면일본해군성수로국의 조선동해안도 는 1875년초판이발간되었다.(Han Cheol-Ho, The Japanese Hydrographic office`s publication, revision, and Chart of East Coast of Korea and Recognition of Dokdo, Korea Journal, Vol.57-1, Korean National Commission for UNESCO, 2017, pp.36-47) 63) РГАВМФ. Ф.417. Оп.1. Д.206. ЛЛ.64а-64б. 1886.8.29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299 27도방향으로변경하였다. 4월 8일오전 6시에는북쪽 11도방향으로항로를설정하였다. 이항로는다젤레트 (остров Дажелет) 섬서쪽 6마일을지나는것이었다. 그곳으로부터북서쪽 15도방향으로항로를변경하여볼틴 (Болтин) 곶방향으로향하였다. 64) 여기서주목할점은 타케 (камень Таке, 타케암초 ) 라는명칭이다. 히케는이키 ( 壹岐 ) 로대한해협과나카사키중간에위치하였다. 시부치 (Сивуч) 호의항해기록에나오는 타케 는독도가아니었다. 왜냐하면 타케 를거쳐한국해협에도달했기때문이다. 시부치호함장은울릉도 다젤레트 를항로로이용하면서동해를탐사하였다. 태평양함대사령관알렉셰예프 (Е.И. Алексеев) 는 1896년 1월한국의주요항구를조사하면서전략적가치에관한탐사보고서를러시아해군부에제출하였다. 알렉셰예프는거제도를기점으로한국의주요항구중제물포-부산-원산-울릉도까지의거리를표시하였다. 알렉셰예프는동해안의전략적인거점으로울릉도를주목하였다. 65) 태평양함대사령관길테브란트 (Я.А. Гильдебрандт) 는 1899년 11월 20 일블라디보스톡소속러시아호, 류릭호, 파먀티아조프호, 아드미랄꼬르닐로프호등의순서로블라디보스톡을출발하였다. 태평양함대는울릉도 (Остров Дажелет) 서쪽으로 5마일지점부터시작되는나가사키로항로를잡았다. 66) 결국러시아함대도울릉도와독도를발견하며전략적가치를파악하였다. 올리부차호는독도를관찰하면서서도를올리부차 (Оливуца), 동도를메넬라이 (Менелай) 라고명명하면서, 실측에기초하여최초로정확하게좌표에기입하였다. 태평양함대는동해에서울릉도를경유하며해상훈련 64) РГАВМФ. Ф.417. Оп.1. Д.257. ЛЛ.57-79. 1887.5.23. 65)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0. ЛЛ.375-392, 1896.1.21. 66) РГАВМФ. Ф.417. Оп.1. Д.2011. Л.22-72об. 1900.7.9.
300 獨島硏究제 22 호 을실시하였다. 태평양함대사령관알렉셰예프는동해에서전략적인거점으로울릉도를주목하였다. 이것은러시아가 1896년 9월두만강 압록강 울릉도의삼림채벌권을획득하여한국에경제적 군사적영향력을실행한것과밀접하게연결되었다. 5. 맺음말 러시아황제니꼴라이 1세 (НиколайⅠ) 는 1852년청국과일본과의개항을추진하기위해서러시아제독뿌쨔찐 (Е.В. Путятин) 을특사로임명하였다. 팔라다호는 1852년 10월 7일끄론쉬따트 (Кронштат) 를출항했고, 1853년 8월 10일일본의나가사키 ( 長崎 ) 에도착하였다. 제독뿌쨔찐은전함팔라다호 (Фрегат Паллада), 캄차카함대소속코르벳함 ( 군함 ) 올리부차호 (корвет Олибуца), 스쿠너범선보스톡호 (шкуны Восток), 수송선공작멘쉬꼬프호 (транспорт Князь Меньшиков) 으로함대를구성하였다. 뿌쨔찐은소령꼬르사꼬프 (Корсаков) 를추천하여스쿠너범선보스톡호의함장으로임명하였다. 팔라다호는함장소령운꼽스키 (Унковский) 를비롯하여장교 22명과승무원 439명으로구성되었다. 이중에서보스톡호에승선할장교 6명과수병 37명도포함되었다. 알렉산드르넵스끼수도원 (Alexander Nevsky Lavra) 아바꿈 (Аввакум) 신부는중국어통역을맡았다. 작가곤차로프는 1852년 10월 7일항해과정을기록하기위해서제독뿌쨔찐의비서로전함팔라다호를타고함께출발하였다. 곤차로프는항해과정에서도착한국가에대한자연과풍경및인간과민족에대한특징을포착하면서, 대양과대륙을넘나들며인간의삶과죽음의공존을생생히기록하였다. 그는발의청결과절의풍습에관한동양문화를설명하였고, 속담을통해동양과서양의문화교류도인정하였다. 그만큼곤차로프는동양을이해하는학습과노력이남달랐다. 곤차로프는공식적으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301 로항해기록을위한비서신분이었지만개인적인목표도있었다. 그는지식인으로사회적의무와작가적능력을고민하면서팔라다호에승선하면서, 모든장소들에애정을확장하는강인한사람을꿈꾸었다. 그는대양에있는단단한범선보다도시의소란스러운거리가더안전하지못하다는사실을깨달았다. 67) 그것은국가의목표와는달리자신의정체성을찾아가며인간성회복을꿈꾸는개인의표상을보여주었다. 결국뿌쨔찐은 1855년 1월 26일일본정부와시모다조약 (Treaty of Shimoda, 下田条約 ) 을체결하였다. 팔라다호는일본과의외교수립, 해군부의탐사지시에따른실행등주어진업무를수행하였다. 하지만팔라다호는 1854 년 3월발발한크림전쟁의여파로서방국가들과관계가단절되어, 아메리카대륙에있는러시아식민지를방문하지못했고, 오호츠크해해안을조사하지못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4월 2일부터 4월 7일까지거문도에정박했고 1854년 4월 20일조선연안에도착해서 5월 11일까지동해안조사를시작하였다. 곤차로프는거문도를직접답사하였다. 그과정에서서양최초로독도의서도와동도를명명한국가는러시아였다. 올리부차호는독도를발견하면서서도를올리부차 (Оливуца), 동도를메넬라이 (Менелай) 라고명명하면서, 실측에기초하여최초로정확하게좌표에기입하였다. 그후러시아해군부수로국은 1857년 조선동해안지도 를발간하여독도를한국의영토로공식적으로인정하였다. 현재까지러시아해군부수로국의 조선동해안지도 는 1857년판본, 1868년판본, 1882년판본이국내에알려졌다. 1857년판본은 1854년올리부차호가메넬라이와올리부 67) 먼여행을돌아온곤차로프는전함팔라다호에자신이깨달은진실들을쏟아부었다. 예를들면, 그는절대악의비판과처벌에관한이중성을꼬집었다. 천개의돌을던져보아소용없던악에또하나의작은돌을쓸데없이던져야할까? 일은논쟁의여지가없이분명하다. 비난받는쪽은죄를인정하면서침묵한다. 재판은선고를내렸지만선고를이행하는사람은아무도없다.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СС. 149-166. Ⅹ. Шанхай).
302 獨島硏究제 22 호 차를처음발견했다고소개되었다. 1882년판본은 1861년부터 1880년까지의러시아조사에기초하여, 올리부차호의독도발견및세르게예프의독도측량을동일하게수록하였다. 이것은팔라다호함대소속올리부차호의독도발견이러시아해군부수로국을통해서러시아정부의공식지도에정착되는과정을보여준다. 결국러시아정부는 19세기후반러시아해군부수로국의지속적인지도발간을통해서, 독도가한국의영역이었다는사실을입증해주었다. 그후러시아태평양함대는동해에서울릉도를경유하며해상훈련을실시하였다. 태평양함대사령관알렉셰예프는동해에서전략적인거점으로울릉도를주목하였다. 이것은러시아가 1896년 9월두만강 압록강 울릉도의삼림채벌권을획득하여한국에경제적 군사적영향력을실행한것과밀접하게연결되었다. 참고문헌 김영수, 근대독도와울릉도명칭문제를둘러싼논쟁과그의미, 독도와한일관계, 2009. 박보리스, 러시아와한국, 동북아역사재단, 2010. 박태근, 러시아의동방경략과수교이전의한러교섭, 한러관계100년사, 1984. 석영중, 오블로모프의맛없는음식, 러시아문학연구논집 35, 2010. 이영은, 근대전환기러시아인의조선인식, 성균관대학교박사논문, 2011. 이진명, 독도지리상의재발견, 삼인, 1998. 이희수, 교류초기러시아인의한국인식, 대동문화연구 61집, 2008. 정은상, 곤차로프의전함빨라다호에나타난조선과조선인, 인문논총 37집, 2015. 정하미, 미국표류민학대문제와맥도널드의경험 : 미일화친조약의전야, 일본연구 17, 2012. 최명복, 독도와러시아, 해양전략 102, 1999.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303 최윤락, 곤차로프와그의장편소설오블로모프, 오블로모프, 2권, 문학과지성사, 2002. Han Cheol-Ho, The Japanese Hydrographic office`s publication, revision, and Chart of East Coast of Korea and Recognition of Dokdo, Korea Journal, Vol.57-1, Korean National Commission for UNESCO, 2017. Тюнькин. К. Примечание//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и.а. Гончарова в 6 Томах. М. 1956. Т. 3. Знгельгардт Б.М. Фрегат Паллада//Избранные труды. Спб. 1995.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57. Гончаров И.А. Фрегат Паллада. М., 1940. Путятин Е.В. Всеподданнейший отчет о плавании отряда военных наших судов в Японию и Китай, за 1852-1855 гг.//морскойсборник. Т.ⅩⅩⅣ. No.10. Сп б. 1856. Описание Восточного берега Полуострова Кореи//Морской Сборник( 해양선집 ), Т.14. N.1, 1855. Карта восточного берега полуострова Кореи сост. с описи, произвед. офицерами на фрегате Паллада. Грав. В.Поляков. Вырез. слова Д. Комов. [СПб.] Гидрогр. Деп. Мор. М-ва. 1857.(РНБ К3-ВАз/4-51) РГАВМФ. Ф.296. Оп.1. Д.75. ЛЛ.219-223. РГАВМФ. Ф.870. Оп.1. Д.7208. ЛЛ.87-88. РГАВМФ. Ф.417. Оп.1. Д.206. ЛЛ.64а-64б. РГАВМФ. Ф.417. Оп.1. Д.257. ЛЛ.57-79. РГАВМФ. Ф.417. Оп.1. Д.1340. ЛЛ.375-392. РГАВМФ. Ф.417. Оп.1. Д.2011. Л.22-72об.
304 獨島硏究제 22 호 <Abstract> Russia's maritime exploration and the discovery of Dokdo and Ulleungdo in the Age of Modern Young-Soo Kim Ivan Alexandrovich Goncharov(1812 1891) was a Russian novelist best known for his novels A Common Story (1847), Oblomov (1859), and The Precipice (1869). He also served in many official capacities, including the position of censor. Goncharov was born in Simbirsk into the family of a wealthy merchant; as a reward for his grandfather's military service, they were elevated to gentry status. He was educated at a boarding school, then the Moscow College of Commerce, and finally at Moscow State University. After graduating, he served for a short time in the office of the Governor of Simbirsk, before moving to Saint Petersburg where he worked as government translator and private tutor, while publishing poetry and fiction in private almanacs. Goncharov's first novel, A Common Story, was published in Sovremennik in 1847. Goncharov's second and best-known novel Oblomov was published in 1859 in Otechestvennye zapiski. His third and final novel The Precipice was published in Vestnik Evropy in 1869. He also worked as a literary and theatre critic. Frigate Pallada is a book by Ivan Goncharov, written in 1854-1857 and based on a diary that he kept as a secretary for Admiral Yevfimy Putyatin
근대러시아의해양탐사와울릉도 독도발견 305 during his 1852-1854 around-the world expedition on board Frigate Pallada. In the autumn of 1852 Goncharov received an invitation to take part in the Admiral Putyatin-led around the world expedition through England, Africa, Japan, and back to Russia. The flotilla, led by Frigate Pallada under the command of Admiral Ivan Unkovsky, included also corvette Olivutsa, schooner Vostok and Knyaz Menshikov, a small merchant vessel. The mission's objective was to establish trade relations with Japan, then a closed and, as far as Russia was concerned, mysterious country. As it was successfully completed, Pallada, unable to enter the Amur River because of her draft, had to overwinter in Imperatorskaya Gavan. Goncharov returned to Saint Petersburg on 25 February 1855, after traveling through Siberia and the Urals, this continental leg of the journey lasting six months. Key words: Frigate Pallada, Goncharov, Putyatin, Olivutsa, Dokdo 이논문은 2017 년 5월 25일에투고하여 2017 년 6월 3~25 일에심사하여 2016 년 6월 26일에게재 결정됨
307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 2016 년일 러 북방 4 도 * 교섭의관점에서 - 1)2) 이명찬 ** < 목차 > 1. 서론 2. 북방영토문제와일 러관계 3. 일 중간센카쿠제도 ( 중국명 : 댜오위다오 ) 분쟁 4. 동아시아영토문제와동북아국제정치 5. 결론 < 국문초록 > 2016년일러수뇌회담은일러양국의영토문제해결을위한것이목적이었지만, 더나아가아베수상이러시아를끌어들여중국에대한포위망을강화하고자하는회담이었으며, 동북아국제정치의큰판의움직임을염두에둔아베수상의의도가엿보이는중요한회담이었다. 그러나북방4도의반환이거의불가능에가깝게느껴진다. 그이유는북방영토문제의미해결은많은부분일본정부의책임으로보이기때문이다. 일본정부의 4도일괄반환 주장과 2도선행반환 주장이어지럽게교차하는잦은 골대이동 이북방영토해결을무산시키는주요요인이었다. 물론일본정부의그러한결정에미국정부의부정적영향력행사의산물이거나, 미일동맹정책의대가임도부정할수없을것이다. 본논문을통해, 동아시아영토문제는대국간힘의전이현상이배경에있어복잡한정치역학이작용하는극히어려운문제라는것이명백하게밝혀진다. 그리고일본정부가주장하는고유영토론에대한러시아인의인식을살펴보면, 북방4도 ** 일본의관점에서분석하는관계로쿠릴열도남단 4도를 북방4도 로표기한다. ** 동북아역사재단연구위원
308 獨島硏究제 22 호 에대한일본정부의 고유영토론 주장이얼마나공허한것인지명확해진다. 일본의 고유영토론 은독도에대한주장에서도어김없이등장하는데, 그주장의공허함이같은이유에서오버랩되고있음을숨길수없다. 주제어 : 영토분쟁, 쿠릴열도, 일본, 러시아, 고유영토론, 독도 1. 서론 아베총리와푸친대통령은 2016년 15일과 16일, 야마구치현나가토시에서일러정상회담을개최하였다. 이번회담에서일본측이가장주목하고있던것은북방영토문제였다. 그러나반환에관해서는아무진전이없었다. 북방영토문제에진전이없었음이밝혀지자, 국민은물론자민당내에서도불만의소리가표출되었다. 니카이토시히로 ( 二階俊博 ) 간사장은 16일, 해결전망이설것같은보도가계속되었는데아무진전도없이이대로끝난다면도대체그예고는무엇이었는가, 이에대해일본의외교당국은설명하지않으면안된다 라고불만을털어놓았다. 한편, 일본미디어의책임에대한비판의목소리도높았다. 하카마다시게키 ( 袴田茂樹 ) 니이가타현립대학교수는 12월정상회담에서의푸친의강경자세를 예기치못한밥상엎기 ( 주간아사히 ) 라든가, 푸친의표변 ( 문예춘추, NHK 해설위원기사 ) 등으로보도하였지만, 무지의소치가아니라면, 미디어가오랜세월흘려보낸낙관론의책임을대통령에전가하는것이라고비판하였다. 지금까지일본에서는수상관저도, 많은러시아전문가나미디어도, 무승부 ( ヒキワケ ) 라든가, 상호의타협, 또는 평화조약체결은중요 라는등의푸친의감언에끌려다녔다. 그리고미디어는 경제협력을진행시켜도영토에서의양보는하지않는다 라는푸친의발언 (2016년 9월 ) 이나, 2도반환도있을수없다는것은백퍼센트확실하다 고한정권관계러시아전문가의말등의강경론은단순한협상기술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09 이라고무시하고보도하지않아, 수상관저나정치가, 국민등에게환상을계속안게했다는것이다. 1) 미디어를비롯한여론의비판에도불구하고, 러시아전문가들은이번푸친의일본방문은성공이었다고평가한다. 러시아전문가인아비루다이스케 ( 畔蒜泰助 ) 는다음과같이평가한다. 2) 일러관계에는 2개의면이있는데, 하나는북방영토문제의해결을포함한평화조약의체결이다. 이에대해서는확실히큰진전은없었다. 또하나의면은, 중장기적으로대중국관계에있어서러시아에전략적중립을유지하게하는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일 러의관계의긴밀화가불가결한데, 이번정상회담에이르는프로세스가그과정이며, 그러한의미에서는성공적이라고주장한다. 아비루는북방영토의반환과평화조약의체결에관한중요한사실로서세가지측면을제시한다. 제1은, 해결한다고해도, 1956년의일소공동선언이베이스가되는것이다. 즉, 인도의대상은하보마이군도 ( 歯舞群島 ) 와시코탄섬 ( 色丹島 ) 만이라는것이다. 구나시리 ( 國後 ) 와에토로후 ( 擇捉 ) 두섬은되돌아오지않는것을각오하고교섭을진행시키지않으면안된다. 제2는, 일정한신뢰를쌓아올리지않으면앞으로나아갈수없다는것이다. 푸친대통령은러시아의전문가가매년항례로모이는바르다이회의장소에서, 중국과의사이에영토문제를해결할수있던것은전례가없는수준의협력관계를구축할수있었기때문이다 라고발언하였다. 일본과의관계를개선하기위해서는이와같은협력관계가필요하다는것을시사한것이다. 제3은, 하보마이군도와시코탄섬을미일안전보장조약의적용외로해야한다는것이다. 러시아의안전보장과직결되기때문이다. 하보마이군도와시코탄섬이만일인도되더라도, 일본이주권혹은시정권을가지게 1) 袴田茂樹 6 月 1 日, プーチン大統領は北方領土めぐり 重大発言 不可解すぎる官邸の対露政策 産経新聞 2017 年 6 月 13 日. 2) 森永輔, 畔蒜泰助インタビュー 北方領土と日ロ平和条約 次の勝負は2018~21 年 日経ビジネスONLINE 2016 年 12 月 19 日.
310 獨島硏究제 22 호 되어미군이주둔하는일이있으면러시아의안전을위협하게되기때문에러시아에있어서받아들일수없다는것이다. 일본의여론은, 이번정상회담을보고 푸친대통령에게북방영토를인도할의사는없다 푸친대통령은거짓말을했다 라고의심하는목소리도있었다. 그러나위에언급한세가지측면을전제로지금까지의경위를되돌아보면, 러시아측의발언은일관하고있었다. 러시아의외무성은 일러간에영토문제는존재하지않는다. 있는것은평화조약체결에관한문제뿐이다 라고계속말해왔다. 푸친대통령은 무승부 라고말했을뿐그내용은알려져있지않았는데, 이표현에일본측이과잉기대를가졌을수도있다. 이야기를정리하면, 일본의대러시아외교에는, 북방영토문제의해결을포함한평화조약체결에관한면과중국과의관계에있어서러시아에게전략적중립을유지시킨다, 라고하는두개의면이있다. 전자는, 국내정치의관점으로부터, 보다짧은시간축으로결론을내는것이요구되고있지만, 후자는, 보다중장기적인시야에서진행된다. 전자에대해큰진전은없기는했지만, 우선은, 전도민의보다간소한형태로의북방영토방문에의길이열렸다. 동시에, 북방 4도에서, 특별한제도 아래에서행하는공동경제활동에관해구체적인검토개시에합의했다. 후자에대해서는, 3000억엔상당한경제협력안건에합의함과동시에, 안전보장분야에서 2+2를재개하는것에합의했다. 아베총리는특히 공동경제활동 에대해서 평화조약체결을향한중요한한걸음 이라고하고있다. 그리고푸친도아베총리의주장에동의했다. 3) 그렇다면성과는없었다거나, 아베수상이너무양보했다고하는비판은맞지않는다는것이다. 4) 결국, 푸친의일본방문의의미는중국과러시아를분단하는데성과가 3) 北野幸伯 北方領土 進展なし でもプーチン来日が成功だった理由 DIAMONDonline 2016 年 12 月 19 日. 4) 森永輔, 畔蒜泰助インタビュー 北方領土と日ロ平和条約, 次の勝負は2018~21 年 日経ビジネスONLINE 2016 年 12 月 19 日.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11 있었다는것이다. 이를뒷받침하듯, 중국국영신화사통신은일러회담에관한논평으로 아베수상은러시아를끌어들여중국에대한포위망을강화하고싶은생각이지만, 중 러관계의토대를흔드는것은어렵고, 계획은기대를벗어날것이다 라고반발하였다. 게다가 ( 아베씨의 ) 사익만을추구한제멋대로인외교적사고는, 일본이이웃나라로부터의신뢰를얻는것을틀림없이곤란하게할것이다. 단순한일방적인망상이다 라고비판했다. 5) 그렇다면아베수상이 러시아를끌어들여중국에대한포위망을강화하고싶은생각 을하게된이유는무엇일까? 그것은바로센카쿠제도를둘러싸고중 일간에벌어진갈등, 즉, 2010년의중국선박나포사건이나, 2012년센카쿠제도국유화를둘러싼일중간갈등이현재까지그강도를더해가고있는현실을염두에둔것임은주지의사실이다. 2016년에는, 하기우다코이치 ( 萩生田光 ) 관방부장관이 6월 29일의기자회견에서, 중국군기가 17일에일본을향해남하하여항공자위대기가긴급발진 ( 스크램블 ) 하였다고밝혔다. 복수의정부관계자에의하면, 양비행기는서로의배후로접근하려고서로추적하는 공중전 과같은상태에한때빠져있었다고한다. 6) 자위대의고노카츠토시 ( 河野克俊 ) 통합막료장은동년 6월 30일기자회견에서, 올해 4~6월에일본영공에접근한중국전투기에대한항공자위대전투기의긴급발진 ( 스크램블 ) 의회수가작년의동시기에비해 80회이상증가한것 이라고말했다. 자위대는 4분기마다의긴급발진회수를정기적으로공표하고있지만, 통합막료장이회견에서발표하는것은이례라고할수있다. 2015년 4~6월의중국기에대한스크램블은 114회에과거최다였다. 2016년은그 1.7배이상인약 200회가된다. 7) 5) 時事通信 2016 年 12 月 16 日. 6) 時事通信 2016 年 6 月 29 日. 7) 産経新聞 2016 年 7 月 1 日.
312 獨島硏究제 22 호 아베총리가이번일러수뇌회담에서얻고자한것은, 북방영토문제의해결을포함한평화조약체결에관한것이 1차목표였지만, 센카쿠제도를둘러싸고갈등을일으키고있는중국과의관계에있어서러시아에게전략적중립을유지시킨다, 라고하는 1차못지않게중요한 2차목표가있었다. 이번회담은일러양국의영토문제해결을위한움직임에서, 더나아가동북아국제정치의큰판의움직임을염두에둔일본의의도가엿보이는중요한회담이었다. 필자는본논문을통해일본의영토정책을검토하면서, 특히쿠릴열도를둘러싼일러양국의주장에대한검토를통해, 일본정부가주장하는고유영토론이얼마나허구적인지새삼깨닫게되었다. 일본정부의북방4 도에대한고유영토론의허구성에대해서는이미많은선행연구를통해확인할수있음은물론이다. 8) 본논문은, 제2장에서 2016년일러수뇌회담의개최경위및의의에대해고찰한다음, 그배경에대한이해를위해북방영토의현상과국경교섭의역사적과정을살펴본다. 제3장에서는센카쿠제도를둘러싸고진행되었던중 일간갈등의실상을이해하기위해, 먼저양국갈등의촉발요인이었던 2010년 9월센카쿠제도주변해역에서의어선충돌사건과, 2012 년 9월 11일센카쿠세개섬을일본정부가국유화하는과정을살펴본다. 다음으로, 센카쿠제도에대한미일동맹의역할과그한계성에대해알아본다. 제4장에서는일본이주변국과안고있는영토문제의국제정치적함의에대해분석한다. 그리고결론에서는분석결과를몇가지시사점으로 8) 김인성, 러시아의쿠릴열도 ( 북방 4 도 ) 정책, 남상구, 남쿠릴열도영토분쟁의역사적경위와현황, 고봉준 이명찬 하도형외 동아시아영토문제와독도 ( 동북아역사재단, 2013 년 ). 윤영미 (2006), 탈냉전기러 - 일영토분쟁 : 남쿠릴 4 개섬에대한러시아의국가안보적접근과인식 현상과인식 봄 여름호. 이영형 (2006), 쿠릴열도에대한 소유 와 반환 의지정전략 한국시베리아연구 제 9 집 6-1 호. 손기섭 (2008), 북방 4 도와센카쿠열도해양분쟁의특성 일본문화연구 제 27 호등이있다.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13 정리하고자한다. 2. 북방영토문제와일러관계 1) 북방영토의현상과교섭과정 (1) 2016 년 12월 15일일러수뇌회담개최경위 9) 2016년 5월 7일에아베수상이러시아의소치를비공식방문하여푸친대통령과약 3시간 10분에걸치는정상회담을실시했다. 당시, 아베수상은, 2도반환을할지말지만을논하는것으로는결말이나지않기때문에, 새로운어프로치로평화조약의교섭을하자 라고푸친대통령에제안했다. 새로운어프로치란일본이러시아와경제협력을하여, 북방영토에서 공동경제활동 을실현한다는것이다. 게다가, 일본측은과감히대형의경제협력을진심으로할의향을나타냈다. 이에대해푸친대통령은매우만족하고받아들였다. 그리고 9월 2일의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일러정상회담으로는한층더이야기가진행되었고, 9월의내각개조로경제산업대신세코우히로시게 ( 世耕弘成 ) 를러시아경제분야협력담당대신으로임명했다. 그리고아베수상은 일본은공동경제활동을구체적으로진행시켜나가려고생각하고있기때문에, 러시아로부터도마음껏제안했으면좋겠다. 라고했다고한다. 이회담이끝난단계에서아베는북방영토문제에큰자신을가지고있었고, 12월 15일의일러정상회담에서는푸친대통령으로부터 2도반환 이라는말이나오지않을까, 라고말했다. 9) 이절은다음의글을근거로기술하였다. 田原総一朗 安倍 トランプ プーチン連携で狙う新世界秩序の行方 nikkeibpnet(2016.12.22). http://www.nikkeibp.co.jp/atcl/column/15/100463/122100097/( 검색일자 2016.12.23).
314 獨島硏究제 22 호 그런데, 11월 19일의페루의수도리마에서의일러정상회담에서갑자기러시아의태도가일변했다. 푸친대통령이 공동경제활동을하는경우, 러시아의주권하에서실시한다 라는태도를나타냈던것이다. 당시의기자회견에서, 아베수상의표정이굳어있던것이인상적이었다. 왜, 러시아측의태도가돌연냉엄해졌는가. 여러가지억측이있지만, 하나는미국의대통령선거에서도널드트럼프가승리한것이다. 트럼프는푸친대통령을높게평가하고있었다. 트럼프는차기국무장관에엑슨모빌 CEO인렉스틸러슨을임명했는데, 그는푸친대통령과지극히사이가좋다. 우크라이나문제에서도트럼프는러시아의크리미아침공에이해를나타내고있었다. 이와같이, 트럼프는러시아에매우우호적인발언을반복하고있었던것이다. 그때까지러시아는세계로부터고립되고있었다. 오바마대통령을비롯한서방제국은러시아의크리미아침공을계기로러시아를 G8로부터제외했다. 시리아문제에서도아사드정권을지지하는러시아에대해미국은반정부세력을지지하고, 간접적인전투상태를초래하고있었다. 오바마대통령은걸핏하면푸친대통령과대립하여미국과러시아는최악의관계였던것이다. 푸친대통령이본심을털어놓아서로이야기할수있는상대는일본밖에없었다. 10) 그래서아베는 12월 15일의정상회담은잘될것이라고자신을가지고있었다. 그런데, 트럼프가차기대통령으로정해짐으로써단번에미국과러시아관계가회복되었다. 푸친대통령은고립된입장으로부 10) 알렉산더파노프전주일러시아대사의다음발언이이러한사실을말해준다. 아베수상은 서방측의단결을흩트리지말라 고하는미국의조언을거부하고, 러시아를방문하여푸친대통령과의회담을거듭하고있다. 아베씨의말이나행동은일본이서방측의대러시아제재망으로부터사실상이탈하였음을말해준다. G7 에서는일본뿐이다. 러시아와전면적인협력관계를발전시키고자하는일본의계획은대단히구체적으로, 각성청의조정역을담당하는대신포스트도신설되었다 朝日新聞 2016 年 10 月 5 日.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15 터벗어날수있었던것이다. 이렇게해서러시아는이제일본에다가갈필요가없어졌기때문에일본에대한태도를경화했다고하는견해이다. 그런데러시아가영토문제로강경하게된배경에대해서, 푸친자신이 16일의공동기자회견에서설명했다. 블라디보스토크와그북부에는기지가있다. 거기로부터우리는태평양지역으로출항한다. 일미안보조약으로일본과미국이어떻게대처할지우리는모른다. 일본의여러분은, 러시아측이느끼고있는불안을이해해주었으면한다. 즉, 푸친은, 두개의섬이일본의주권하로복속되는순간, 일미안보조약에근거해미군이군사연습을하는것은아닌가, 러시아를견제하는것은아닌가, 라고우려하고있다. 11) 2도반환문제에관해서, 일본기자가 56년의일소공동선언에서, 소련측이하보마이 시코탄의두개의섬을반환한다고하지않았는가? 라고묻자, 푸친대통령은 우선국교회복을선행시켜평화조약을체결한후, 하보마이 시코탄을어떤형태로반환할것인지교섭한다, 라고만정해진것이지구체적인이야기는아무것도정해져있지않다 라고말했다. 즉, 두개의섬을반환한다고하더라도주권을어떻게할것인지, 어떤형태로반환할것인지, 아무런조건을달지않았다는것이다. 푸친대통령은한층더놀랄만한말을했다. 게다가, 그후일본은일소공동선언을부정한것이아닌가 라고. 앞에서도언급한것처럼, 일본이일소공동선언을부정했던시기는고이즈미내각때이다. 그이전의하시모토내각, 오부치내각, 모리내각까지는, 일러사이에일소공동선언에 11) 덧붙여서, 러시아가 크리미아병합 을결의한것은우크라이나에탄생한친구미신정권이, 크리미아로부터러시아흑해함대를쫓아내고, NATO 군을받아들이겠다. 라고선언했던것이원인이었다. 러시아국민은크리미아병합후, 항상 미국과전쟁중 이라고하는의식으로살고있다. 그러니까, 4 개섬이사실상미군의지배하에들어가는것 을푸친이무서워하는것은당연하다. 北野幸伯 北方領土 進展なし でもプーチン来日が成功だった理由 DIAMONDonline 2016 年 12 月 19 日.
316 獨島硏究제 22 호 대한이야기를하고있었지만, 고이즈미내각시대에외무대신으로취임한다나카마키코가 일러관계는 1973년에행해진다나카가쿠에이수상과브레즈네프공산당서기장과의회담에서발표한일소공동성명으로돌아간다. 라고하고, 지금까지의이야기를모두부정해버렸다. 73년의일소공동성명에서는, 56년의일소공동선언으로부터한층더나아가, 북방영토문제를하보마이군도와시코탄섬의두개섬뿐만이아니라, 구나시리, 에토로후섬도추가한네개섬을대상으로하는대신에경제지원을실시한다고하는것이었다. 게다가, 다나카의뒤를이은가와구치요리코 ( 川口順子 ) 외상도그것을긍정해버렸다. 이렇게하여 4도반환을전제로하자일러교섭은다시단절됐던것이다. 푸친대통령은이것을상기시키고 러시아에영토문제는없다 라고했던것이다. 이러한과정에대한이해를돕기위해일본과러시아의국경의변천에대해살펴보자. (2) 일본과러시아의국경의변천 (1855~1945) 일러간에처음법적으로국경을결정한 1855년의 일노통호조약日魯通好條約 ( 러일화친조약 ) 에서, 가라후토 ( 樺太 ) 를양국민이함께거주하는땅으로하고, 쿠릴열도의에토로후섬과우루프섬사이에국경선을정하고에토로후섬이남을일본령, 우루프섬 ( 得撫島 ) 이북을러시아령으로결정했다. 그러나 20년후인 1875년, 가라후토는러시아령, 대신에우루프섬이남을포함한전쿠릴열도를일본령으로하는 가라후토/ 치시마교환조약 을일러간에주고받았다. 12) (< 그림 1> 참조 ) 왜, 이러한영토의교환이있었을까? 12) なぜ樺太放棄した? 面積だけでは測れない 樺太千島交換条約 の真意 The PAGE (2016.11.30), https://thepage.jp/detail/20161129-00000009-wordleaf( 검색일 2016 년 12 월 2 일 )
동아시아 영토분쟁과 동북아국제정치 317 <그림 1> 일본과 러시아의 국경의 변천 출처: 知っていますか 日本の北方領土 (北方領土の日啓発実行委員会) 팸플릿에서 인용. 일노통호조약 체결 후, 가라후토는 마쓰마에번(松前藩)령으로부터 에도 막부의 직할지로 바뀌었다. 그 후, 메이지정부의 성립에 따라, 1869년에는 태정관 직속의 개척사 소관이 되었다. 한편, 양국민 공동거주의 땅으로 결정한 러시아는 크리미아 전쟁 종결 후 가라후토 개발에 나서자 종종 양 국 간의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로 인해, 양국 간에 가라후 토의 국경선을 결정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신정부에는, 가라후
318 獨島硏究제 22 호 토섬전체혹은반으로경계선을그어남반을일본의것으로한다고하는의견과원격지인가라후토를방기하고, 홋카이도개척에주력한다고하는 2개의의견이있었는데, 결국가라후토방기론이우세하게되었다. 교섭은 1874년부터, 러시아의쌩페테르부르크에서행해졌는데, 약 1년가까운교섭끝에 가라후토 치시마 ( 千島 ) 교환조약 을체결하게되었다. 메이지신정부가재정력에서도방위력에서도광대한가라후토를통괄할힘이없었다고는하지만, 면적면에서보면, 7만 6400평방킬로미터인가라후토를방기하고, 총면적 1만수천평방킬로미터밖에안되는쿠릴열도와의교환은격이맞지않아보인다. 그러나러시아의해양진출을경계하고있던영국정부의어드바이스도있었고, 지정학상오호츠크해와태평양을나누는쿠릴열도는해양전략상중요한지점이라고하는인식을메이지정부가가지고있었다고보인다. 또쿠릴열도는남북으로약 1200킬로로길게늘어져있어수산업에큰의미를가졌다. 13) 이러한국경선은제2차세계대전을거치면서다시변경이이루어진다. 제2차세계대전말기인 1945년 8월 8일, 소련은일소중립조약 (1941년 ) 을파기하고, 일본에선전포고, 만주 한반도에침공했다. 동월 9일에는, 40 년전인 1905년포츠머스조약으로일본령이된남가라후토에침입, 18일에는쿠릴열도최북단인캄챠카섬에가장가까운슈무슈섬에상륙, 마츠아섬, 우루프섬을차례차례제압하고, 9월초까지, 에토로후섬을시작으로한북방 4개섬모두를점령한다. 일본은 51년 9월, 전쟁상태를종결시키는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조인하고, 치시마열도 를방기했다. 소련은동조약에조인하지않아일소평화조약체결문제가남게되었다. 그후, 초점이되었던북방영토문제의귀속을둘러싸고양국의교섭은난항을거듭했다. 14) 13) 가라후토 치시마교환조약 의문면을보면, 일본에양도되는우루프섬이북의 18 개섬의명칭은있지만, 에토로후 구나시리 시코탄 하보마이의북방 4 도는포함되어있지않다. 14) 本田良一 北方領土の現状と交渉の経過 CHUOKORON January 2017. pp.42~43.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19 일본은몰랐던 얄타회담 의밀약 15) < 그림 2> 일소중립조약을파기하고시작한소련의침공 소련의북방영토침공 ( 내각부북방대책본부홈페이지참고 ) 기습으로보인소련의참전과북방영토침공의배경에는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얄타에서미국의프랭클린 루즈벨트대통령, 영국의처칠수상, 소련의스탈린수상에의해개최된비밀정상회담인 얄타회담 이 15) 突然の北方領土占拠 千島 がほしいソ連に口実を与えた ヤルタの密約 ThePAGE (2016.12.6), https://thepage.jp/detail/20161205-00000006-wordleaf, ( 검색일 : 2016 년 12 월 8 일 )
320 獨島硏究제 22 호 있다. 거기서결정된것이, 남가라후토와쿠릴열도의소련영유권으로이양등을조건으로한, 독일패전후 2~3개월이내의소련군의대일참전이었다. 일소중립조약을맺고있던소련은어떻게얄타협정에임하게되었을까? 1875년, 가라후토 치시마교환조약 으로러시아는광대한가라후토의영유권을손에넣은대신에, 전쿠릴열도를일본에건네주었다. 그러나스탈린은오호츠크해로부터태평양으로의입구가되는쿠릴열도가지정학적으로요충인것을강하게인식하고있었고, 얄타협정은절호의기회로받아들였다. 현재의러시아도북방영토주권의근거의하나로서 얄타협정 을언급한다. 이에대해일본은얄타회담은당시의연합국수뇌사이에전후처리방침을서로합의한것에지나지않으며, 회의에참가하지않았던일본은본협정에구속되지않는다는견해이다. 16)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과일러국경획정 17) 제2차세계대전패전으로부터 6년후의 1951년 9월, 미국샌프란시스코에서강화회의가열려일본과연합국각국사이에평화조약이조인되었다. 이조약으로연합국에의한점령이종료되고일본은주권을회복하였다. 그리고영토나배상에대해서도결정할수있었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은북방영토에관해, 일본은쿠릴열도및일본이 1905년 9월 5일의포츠머스조약의결과로서주권을획득한가라후토의일부및이것과근접하는제도에대한모든권리, 권원및청구권을방기한다. 라고기술하고있다. 문중의 가라후토의일부 는포츠머스조약으로취득한 북위 50 도이남의남가라후토 이다. 그렇다면 쿠릴열도 란어디를가리키는것일까? 16) 상동. 17) ソ連は調印を拒否日本が主権回復した サンフランシスコ平和条約 の裏側 ThePAGE (2016.12.8), https://thepage.jp/detail/20161208-00000002-wordleaf ( 검색일 2016년 12 월 10일 ).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21 일러간의교섭을되돌아보면, 처음으로법적으로국경을결정한 1855 년의 일노통호조약 에서, 에토로후섬이남은일본령으로, 우루프섬이북의쿠릴열도는러시아령으로되었다가, 1875년 가라후토 치시마교환조약 으로전쿠릴열도가일본령이되었다. 그후, 제2차세계대전패전까지, 전쿠릴열도가일본의영토였지만, 일본정부는한번도러시아령으로되어있지않은역사적인근거등에서, 이에토로후이남의북방 4개섬은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말하는 쿠릴열도 에는포함되지않는일본령이다, 라고주장하고있다. (3)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후북방영토교섭과정 (1951~2015) 1956년일소공동선언직전, 영토반환에압력을가한 덜레스의공갈 18) 일본이주권을되찾은 1951년의샌프란시스코에서강화회의가열린 5년후, 일소간의국교가회복되었다. 그것이 60년전의 일소공동선언 이다. 55년 6월에시작한일소교섭에서, 일본은당초, 하보마이, 시코탄두섬반환을방침으로하였다. 그런데, 소련이두섬반환을제시하자일본은갑자기 4도반환으로방침을전환하고교섭은중단되었다. 하토야마수상이 56년 10월에방소하고, 영토문제를뒤로미루는형태로일소공동선언에조인하여국교정상화를실현시켰다. 선언은평화조약체결후, 하보마이, 시코탄두섬을일본에넘겨주는것을명기했지만, 구나시리, 에토로후양섬에대한언급은없었다. 일소공동선언 (1956년) 으로국교는회복했지만평화조약체결에이르지못했고, 후에탄생한러시아와도아직주고받지못했다. 19) 18) 2 島か, 沖縄か 日ソ共同宣言直前 領土返還で圧力かけた ダレスの恫喝 ThePAGE (2016.12.12), https://thepage.jp/detail/20161209-00000007-wordleaf, ( 검색일 2016년 12월 14일 ) 19)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기술된 쿠릴열도 가어디를가리키는지명기되어있지않은것이해석을애매하게하여, 일러간의북방영토문제를어렵게하고있는요인이라고말해지지만, 일본정부는소련이조약에서명하지않았던것으로
322 獨島硏究제 22 호 어째서일본은일소공동선언을주고받을필요가있었는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발효된 1952년, 일본은독립을완수하고즉시유엔에의가맹을신청했다. 그러나안전보장이사회의심의에서소련의거부권에의해가맹이부결되었다. 또당시, 시베리아에는일본군등약 2000명이억류되고있었다. 동서냉전의선동으로,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조인을거절한소련과의국교회복은일본에게매우중요한문제였다. 또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조인한요시다시게루내각이대미협조를중시하고있던것에대해, 1954년에취임한하토야마내각은 독립중시 의 대미자주외교 를전개하였고, 소련측도그전년인 1953년 3월에미소대결자세를강하게한독재자스탈린의사망으로, 권력을이어받은공산당제일서기흐루시초프가평화공존노선으로전환을도모하는등, 일소양국에서정권내에풍향의변화가있었다. 그러나하보마이 시코탄 2개섬으로결착하는것에대하여는미국의덜레스국무장관으로부터도간섭이들어왔다. 2개섬반환으로강화조약을체결할경우엔오키나와를일본에돌려주지않겠다는것을시사한, 이른바 덜레스의공갈 이다. 동서냉전을배경으로, 일소간이접근하는것에대한경계를나타냈던것이다. 20) 결국, 시베리아억류자의귀국을최우선과제로한하토야마수상은 영토는몇년경과하더라도없어질것은없지만, 사람의생명에는한계가있다 라고하고, 우선은국교정상화하는것을결단하고, 영토문제에관한교섭은후일계속하여실시하는것으로마무리하였다. 이 애매모호 부터, 이 조약상의이익을주장할수없다 라고주장하고있다. 20) 이러한주장에대해 Gilbert Rozman 은, 러시아인과일부의일본인은 1956년에영토문제를해결하지않고평화조약을체결할수없었던것은일 러의접근을방해하고, 일본의미국에대한의존을유지시키기위한미국의방책이었다고주장한다. 이에대한미국의대답은, 1956년의진정한문제는소련이미일안보조약을저지하고일본의중립을확보하고자했던것에있다 고반론한다. Gilbert Rozman, 日ロ首脳会談に向けたロシアと米国の視点 CHUOKORON January 2017. p.52.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23 한결착으로, 일본은 1956년 12월 18일의국제연합총회에서 80번째의가맹국으로서만장일치로승인되었다. 그리고 60년-. 국교회복을우선하면서보류되었던 북방영토문제 는해결되지않고있다. 냉전후협상과정일본은여러번영토문제해결의찬스를놓쳐버렸다. 25년전의소련붕괴전후, 그당시가일본에게최대의찬스였다. GDP는세계 2위로미국을급속히따라잡고있어일본의국력은절정기였다. 게다가중국의대두도아직없었기때문에북방영토교섭에일본이주력할수있는국제체제였다. 당시의러시아는소련붕괴직후에시장경제가혼란하고있어, 일본측은일본의경제력을살릴수있을찬스였다. 그러나일본은이기운을잘살리지못했다. 러시아의식자들은, 일본은 90년대에러시아가괴로워하고있었을때에아무것도해주지않았다 는불만이많다. 그중에서도절호기를놓친것이, 1992년러시아로부터제시된북방영토에관한비밀제안이다. 일본측의관계자인도고가즈히코 ( 東郷和彦 ) 전외무성유라시아국장에의하면다음과같다. 21) 1992년 3월, 도쿄에서행해진일러외상회담에서, 당시의코즈이레스 러시아외상이와타나베미치오 ( 渡辺美智雄 ) 외상에게평화조약체결이전에하보마이군도, 시코탄섬을일본에인도한다고하는내용의비밀제안 ( 코즈이레스제안 ) 을하였다. 이제안은옐친대통령의이해는얻지않았지만, 만약일본측이타진해오면정식제안하겠다고하는함축이있었다. 제안은당시와타나베외상과코즈이레스외상과의회담석상에서구두로행해졌다. 러시아측은, (1) 하보마이, 시코탄을인도하는수속에대해협의한다, (2) 하보마이, 시코탄을인도한다, (3) 하보마이, 시코탄문제 21) 高橋洋一 日ロ首脳会談が 4 島返還にこだわりすぎてはいけない理由 DIAMOND online 2016.12.15
324 獨島硏究제 22 호 의해결에따르는형태로구나시리, 에토로후양섬의취급을협의한다, (4) 합의에이르면평화조약을체결한다고하는것이었다. 이것은, 하보마이, 시코탄의반환을먼저진행한다고하는점에서 1956 년의 일소공동선언 과는다른내용이다. 나아가협의의행방에따라서는구나시리, 에토로후의반환의가능성도남겼으므로확실히지금까지의러시아제안으로는최대한으로양보한것이다. 그러나이제안에대해서, 러시아의최대한의양보인것을인식하지못하고, 좀더러시아가타협해올것이라는근거없는희망적예상을하고수락을진지하게검토하지않았다. 또하나모리요시로 ( 森喜朗 ) 전수상이 2001년 3월, 러시아의극동이르쿠츠크에서개최된수뇌회담에서푸친대통령에게제안한 병행협의 가있다. 모리수상은 2001년 3월, 푸친대통령에게하보마이, 시코탄두섬의반환조건등과, 남은두섬의귀속문제를협의하는 병행협의 를제안했다. 1 1965년의일소공동선언에서평화조약체결후, 인도가결정되었던하보마이, 시코탄두섬에대해, 반환조건이나스케줄등을협의한다. 2 동시에다른테이블에서구나시리, 에토로후의귀속문제, 누구의영토인가를협의한다. 그리고 12의협의가종료된후에평화조약을체결한다. 이러한제안이었다. 구나시리, 에토로후의귀속처는협의의결과결정한다. 목표는네개섬반환이지만, 네개섬반환을전제조건으로하지않았다. 22) 병행협의를제안한이르쿠츠크수뇌회담다음달, 모리수상은퇴진하고, 고이즈미준이치 ( 小泉純一郎 ) 로정권이발족했다. 계속해서고이즈미정권하의동년 10월, 푸친씨는동의했지만일본은그후, 네개섬반환을전제로한종래방침으로되돌아가, 병행협의 를사실상철회하여교섭은정체하게된다. 23) 고이즈미내각의외상다나카마끼꼬 ( 田中真紀子 ) 22) 森喜朗 交渉秘話 これが, 森喜朗元首相の 遺言 だ CHUOKORON January 2017. p.31.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25 는 ( 아버지다나카가쿠에이 ( 田中角榮 ) 가건재했던 ) 당시는 4도일괄반환이었는데, 도중에 2도선행반환으로방침이전환된것으로느껴진다. 고비판했다. 다나카의이러한태도변화에러시아도강경해졌다. 고이즈미수상은 2001년 10월에상해에서있었던푸친과의수뇌회담에서병행협의를다시금제안하였고푸친도동의했다. 그러나그후, 일본측이제안을사실상철회하고병행협의는사라졌다. 24) 병행협의가폐기된이후한동안일러교섭은정체했다. 98년 4월, 하시모토료타로수상이 러시아가 4도에대한일본의주권을인정해준다면, 당분간러시아의시정권을인정한다. 라고하는가와나제안 ( 川奈提案 ) 을제시하였다. 4도반환을전제조건으로했던종래방침틀속에서최대한의양보였지만러시아측은거부했다. 일본은네개섬, 러시아는두개섬 이라고하는대립속에, 일본은네개섬반환을전제조건으로하지않는유연한노선으로변경하였다. 다시움직이기시작한것은당시수상인푸친이대통령에복귀하는대통령선거 3일전인 2012년 3월, 기자회견에서밝힌 무승부 발언이계기가되었다. 모리는 2013년 2월수상에복귀한아베신조의친서를갖고푸친과회담했다. 2014년 2월러시아남부소치에서아베와푸친이회담을 23) 고이즈미정권발족보름후, 모리씨는텔레비전방송에서병행협의를제안했다는것을밝혔다. 모리전수상과대담한혼다료이치 ( 本田良一 ) 는수뇌회담의의사록표지에 극비무기한 이라는도장이찍혀있었으며, 모리씨가방송에서극비인내용을밝힌것은병행협의가사라질위기감이있었기때문이라고했다. 森喜朗 交渉秘話 これが, 森喜朗元首相の 遺言 だ CHUOKORON January 2017. p.31. 24) 모리는그책임이외무성에있다고했다. 4도일괄반환이아니면안된다는원칙론을주장하는사람들이 ( 병행협의를 ) 폐기해버렸다. 일본외무성에는 절대로 4도 라고주장하는사람과 어느지점에서타협해야한다 고하는사람이있다. 이상황은러시아도마찬가지이다. 푸친이전향적인이야기를하면라부노프외상이반드시반대의견을말한다. 러시아의외무성중에도반일파와친일파가있다. 森喜朗 交渉秘話 これが, 森喜朗元首相の 遺言 だ CHUOKORON January 2017. p.32.
326 獨島硏究제 22 호 했고, 푸친의가을방일에합의했다. 그직후우크라이나문제가발생했다. 유럽과미국이대러제재를가하는상황에서일본이러시아와의관계개선을추진하는것에미국이반대하여일러교섭이정체되었다. 2) 북방영토문제와경제협력 (1) 4개섬일괄반환 의실현이어려운이유 4개섬일괄반환 의실현이왜어려운것일까? 러시아측이북방영토문제를어떻게파악하고있는지가그답이될것이다. 일본외무성의홈페이지에는북방영토문제에대해다음과같이설명하고있다. 소련은일소중립조약을깨고대일참전했다. 포츠담선언수락후인 1945년 8월 28일부터 9월 5일까지북방 4도를점령했다. 그래서일본측은 불법점거다! 라고파악하고있다. 그러나러시아측의의식은일본과완전히다르다. 키타노요시노리 ( 北野幸伯 ) 는 러시아인과이야기하면서느끼는것은그들은 고유의영토 라고하는말의의미를모른다고하는것이다. 라고술회한다. 25) 이어지는러시아측의의식에대한그의술회가다소길지만인용한다. 러시아인은 영토라고하는것은전쟁할때마다바뀔것 이라고하는의식이다. 이것은, 러시아의역사와깊게관련되고있다. 러시아의기원은 882년경에성립한키예프대공국이다. 수도는키예프였지만, 현재는우크라이나의수도가되어있다. 러시아의기원인도시가외국에있는것에주목할필요가있다. 키예프대공국은 1240년, 몽골에의해서멸망했다. 그후, 모스크바대공국 (1263년 ~1547년 ) 러시아 짜르국 (1547년 ~1721년 ) 러시아제국(1721년 ~1917년 ) 으로발전했다. 이와같이, 러시아는동서남북을정복하고영토를넓혀마침내극동에까지도달했다. 즉, 25) 北野幸伯 北方領土 2 島先行返還 は日本にとって損か得か? DIAMONDonline 2016 年 10 月 3 日. http://diamond.jp/articles/-/103394 ( 검색일자 2016.10.12).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27 러시아령의대부분은역사적으로반복된영토분쟁에의해서획득한 정복한토지 이어서, 이른바 고유의영토 는비율적으로매우작다. 이런역사를가지는러시아에게, 고유의영토니까돌려줘! 라고해도, 고유의영토란무엇인가? 라고반대로질문이들어온다. 그러니까, 북방영토에대해 러시아( 소련 ) 는일본과의전쟁에서승리했다. 결과, 북방 4 개섬은러시아 ( 소련 ) 의영토가되었다 라고하는의식이다. 전문가들의논리는더치밀하다. 1875년, 가라후토 치시마교환조약으로가라후토는러시아령, 치시마는일본령으로결정되었다. 그런데일 러전쟁뒤, 이긴일본은남가라후토를빼앗았다. 러시아가남가라후토를돌려달라고계속말한다면, 일본은반환해주었을것인가? 라고질문받는경우가있다. 필자는 돌려주지않았을것이다 라고정직하게대답한다. 게다가 일본은청일전쟁에서승리하고대만을빼앗았지만, 청이돌려주라고계속주장하면돌려주었을것인가? 라고계속한다. 필자는 돌려주지않았을것이다 라고또대답한다. 그러면, 러시아의인텔리는 일본은전쟁에이겨서빼앗은영토를대화로는돌려주지않는다. 그러나자신이졌을때는 고유의영토이니까돌려주라! 고한다. 공평하지않은게아닌가? 라고한다. 일소중립조약을깬건이나, 포츠담선언수락후에북방 4개섬을점령한건에대해서는 1945년 2월의얄타회담에서결정된것으로미영도승인하고있다 라고반론한다. 즉, 러시아는 미영이소련의참전을요구했다. 그담보로서남가라후토, 치시마는소련령이되는것을인정했다 라는것으로, 완전히 나쁜일을했다 라고하는의식이없다 ( 덧붙여서일본은, 북방 4개섬은치시마는아니라고하는입장을취하고있다 ). 26) 이런역사적국민의식이있는가운데, 아무리푸친의지지율은높다하더라도 4개섬일괄반환 을발표하면, 푸친의인기가급락하고정권의안정이무너질지도모른다. 정치적으로도 4개섬반환은간단하지않은것이다. 26) 北野幸伯 北方領土 2 島先行返還 は日本にとって損か得か? DIAMONDonline 2016 年 10 月 3 日. http://diamond.jp/articles/-/103394 ( 검색일자 2016.10.12).
328 獨島硏究제 22 호 (2) 2개섬반환 의명암그렇다면 2개섬선행반환론 은실현가능인것일까? 사실을말하면 2개섬반환 은 법적기반 이있으므로양수뇌가결단하면실현은가능하다. 법적기반 이란 1956년의일소공동선언이다. 이선언은, 일소양국의국회에서비준되어있어 법적구속력 을갖고있다. 그리고일소공동선언에대해서는러시아에서도널리알려져있다. 즉, 푸친이이것을근거로 2개섬을반환하더라도큰반대운동은일어나지않는다. 그러나 2개섬반환 에는문제도있다. 27) 2개섬반환후다. 일본은반환대상외의나머지 2개섬에대해서는 계속협의 라고하고있다. 이것이, 선행반환 (= 먼저 2개섬을돌려받고나중에나머지 2개섬을돌려받는다 ) 의의미다. 그런데, 러시아는 2개섬반환 으로 확정 하고싶어한다. 즉, 하보마이, 시코탄은일본령, 에토로후, 구나시리는러시아령으로최종결말짓고, 후에이야기를되풀이하지않을생각이다. 러시아측은, 최근수십년간 북방영토이야기밖에하지않는 일본에게진절머리를내고있다. 4개섬돌려준다고해도 2개섬돌려준다고해도, 현상으로는러시아에 대손해 이기때문이다. 일본이주장하는 2개섬선행반환론 을인정하면, 앞으로도영원히 에토로후, 구나시리를언제돌려줄겁니까? 라고계속말할것 이라고생각하고있다. 그런데, 일본측은 2섬에서끝낼수없다. 러시아와의평화조약체결은 역사적 이지만, 그것이선인지악인지는알수없다. 2개섬선행반환 이라면, 2개섬을되찾은것으로아베총리는 역사적위업 을완수했다고칭찬될가능성이있다. 그러나 2개섬반환으로 끝 이되면, 나머지 2 개섬을잘라버린것이되어반대로 국적 이라고비판받을리스크도있다. 이부분을어떻게조정할것인가? 러시아는국민에게 최종결말을지었습니다 라고설명하고, 일본정부는국민에게 2개섬은되찾았습니다. 27) 北野幸伯 北方領土 2 島先行返還 は日本にとって損か得か? DIAMONDonline 2016 年 10 月 3 日. http://diamond.jp/articles/-/103394 ( 검색일자 2016.10.12).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29 나머지 2개섬은계속협의중입니다 라고보고할것인가? 이와같이 2개섬반환은, 일소공동선언 이라고하는 법적근거 가있으므로실현은가능하다. 그러나큰문제를남긴채로처리하는수법이다. (3) 신뢰양성을위한경제협력일본에게 러시아 라고하면, 우선제1이 북방영토문제 이며, 제2가 석유, 가스 이다. 일러경제관계는 2013년, 아베총리의강한의욕으로강력하게발전하기시작했다. 그러나 14년 3월의 크리미아병합 으로모든것이불투명해져버렸다. 일본은구미의 대러시아제재 에참가했으므로, 러시아와 경제이야기 를할수없게되어버렸다. 그후, 원유가격이 1 배럴 110 달러에서 30 달러대까지급락하면, 러시아가가지는 석유, 가스 에대한관심도급속히희미해져갔다. 그결과, 일본정부고관이러시아정부고관에게하는이야기는 오로지북방영토문제 가되어러시아측은분개하고있었다. 28) 러시아정부고관들은당시, 일본정부의인간과만나면, 매번 섬을돌려주라! 고만말한다. 일본정부관계자를만나도아무것도좋은것이없다고혐오감을노골적으로나타내고있었다. 그러나아베총리는 16년 5 월, 소치에서푸친과만났을때, 8항목의협력계획 을제안하자상황이일변했다. 드디어일본측도 4도이야기만하면미움만받을뿐아무진전도없다 는것을눈치채고러시아가바라보는 경제협력 에대한이야기를시작했던것이다. 양국관계는여기서부터바뀌기시작했다. 이번푸친의일본방문으로 북방영토문제 는거의움직이지않았다. 그러나경제협력은크게움직이고있다. 29) 28) 北野幸伯 北方領土 進展なし でもプーチン来日が成功だった理由 DIAMONDonline 2016 年 12 月 19 日. 29) 경단련의발표에의하면, 이번, 정부간에 12건, 민간레벨에서 60건을넘는협력안건에합의하여, 일본측의투융자는총액은 3000억엔규모가된다.
330 獨島硏究제 22 호 다만, 북방4도에서의공동경제활동이라하더라도문제가되는것이주권이다. 어느쪽국가의주권하에서활동할것인가, 라는문제는영토문제에큰영향을주게되기때문이다. 이러한이유로, 아베는 12월 15일의공동기자회견에서 공동경제활동을특별한제도하에서실시한다 라고말하기시작했다. 러시아의주권하도일본의주권하도아닌, 특별제도아래에서한다. 말하자면, 경제특구와같은것을만든다는것이었다. 30) 그런데, 그후의매스컴발표에서는 특별한제도아래에서 라고하는부분이사라져버렸다. 정말로푸친대통령과합의가있었는지도불분명하다. 결국어떻게하는지알수없다. 게다가, 문제가되고있는두개섬이만일일본의주권하에놓였을경우, 일미안보조약이장해가된다는것을푸친대통령은재차표명했던것이다. 또한러시아는일본과의쿠릴열도 ( 일본명북방영토 ) 공동경제활동에러시아법이적용돼야한다고주장해이를영토반환의첫단계로삼으려던일본측기대에찬물을끼얹었다. 일본지지통신은지난 18일일본도쿄에서열린쿠릴열도공동경제활동관련첫러일공식회담에서이고리모르굴로프러시아아태지역외무차관이 러시아의법률을위배하지않아야한다는조건에기초해공동경제활동을실현해야한다. 고강조했다고보도했다. 이에대해일본측은 양국의법적입장을해치지않는다는원칙에서평화조약체결이라는공통목표를향해전진하겠다. 며양국의기존법이아닌새로운법을제정해야한다는기존입장을재확인했다. 31) 지난해아베신조일본총리와블라디미르푸틴러시아대통령은 특별한제도 에근거해양국의주권을해치지않는공동경제활동에나서기 로합의했지만 특별한제도 에대한명확한정의가없는상황에서러시아 30) 田原総一朗 安倍 トランプ プーチン連携で狙う新世界秩序の行方 nikkeibpnet (2016.12.22) http://www.nikkeibp.co.jp/atcl/column/15/100463/122100097/( 검색일자 2016.12.23). 31) 변재현 러 쿠릴열도에우리법적용해야 서울경제 2017.3.19.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31 가자국법을적용하겠다고요구한것이다. 이날첫협의에서도양국간공동경제활동의근간이될 특별한제도 에대한논의는없었다고일본언론들은전했다. 향후쿠릴 4개섬반환을위해서라도러시아지배를공식화하는러시아법단독적용을막아야한다는일본과쿠릴열도가러시아영토임을못박기위해자국법을적용하겠다는러시아입장이평행선을달리면서추후협상에난항이예상된다. 교도통신은 러시아의생각은 공동경제활동이 ( 영토반환을위한 ) 평화조약체결의한걸음 이라는일본인식과다르다 며 일본의투자를받아내려는속셈 이라고분석했다. 양국정부는다음협상을러시아모스크바에서열기로합의했으나일정은정해지지않은상태다. 3) 일 중간센카쿠제도 ( 중국명 : 댜오위다오 ) 분쟁 1) 분쟁의경과 32) 2010년 9월 7일오전, 센카쿠제도주변의일본영해내에서불법조업의혐의가있는중국어선에대해, 해상보안청은어업법에근거하여출입검사를하고자무선등으로여러차례정선을요구하였고어선은계속도주하다다른순시선인 미주기 호에선체로충돌하였다. 해상보안청은이를의도적인해상보안관의출입검사방해로보고공무집행방해혐의로어선선장을체포하여일본국내법에근거하여기소하였다. 중국은 9월 16일까지 9일간다섯차례나주중일본대사를불러항의하고여덟차례성명을발표하는등일본에대해전례가없는압박을가하였다. 9월 19일선장에대한구속기간연장이발표되자중국정부는일본 32) 이부분은이명찬, 2011년여름, 2010년 9월일 중간센카쿠제도분쟁과독도, 국제문제연구 제11권제2호 ( 통권 42호 ) 에서부분인용.
332 獨島硏究제 22 호 경제에대한 압력 행사로, 외환시장에서의엔고 ( 円高 ) 유도, 중국으로부터의일본관광억제, 중국국내에서의일본기업에대한사업인가의지연, 중국국내의인프라개발사업에서일본기업배제, 일본제품의불매운동등을전개하였다. 이에더하여, 아이팟과하이브리드자동차, 미사일등첨단제품의필수재료인희토류의일본수출을금지시켰다. 중국정부의이러한압력행사에못견디고일본은 24일나하지검의차석검사가돌연처분보류로중국어선선장을석방하였고, 석방에대한이유를설명하는기자회견에서 일본국민에대한영향, 일 중관계등을고려한판단 이라고발표하였다. 중국외교부는 25일선장의석방에도불구하고 중국의영토와주권, 중국국민의인권을현저하게침해한것에대해강렬한항의를표명한다. 라고성명을발표하였고, 나아가일본측에사죄와배상을요구하였다. 나하지검의발표가있고나서, 일본여론으로부터 이후의일중관계에대한고려 라는외교적표현에대해비판이쏟아졌다. 33) 일본여론은일개지방의검사가이러한고도의정치적판단을하는것이과연가능하며, 바람직한것인가? 라고의문을제기하며, 정치적배경에대해의혹을제기하였다. 센고쿠요시토 ( 仙谷由人 ) 당시관방장관은 검찰이수사를한결과, 처분보류라는현재의판단으로신병을석방하겠다는보고를받았는데그것을그대로승인했다. 고말하고, 지검의판단으로석방을결정하고정부는그것을추인했을뿐이라고답했다. 2010년 9월의사건이후센카쿠제도주변해역에서끊이지않던중일간의마찰은 2012년 9월 11일에일본정부가사유지였던센카쿠제도 3개의 33) 이사건과관련하여조셉나이 (Joseph S. Nye) 교수는 일본은잘대처했다고생각한다. 동시에클린턴국무장관이일본을지지하는성명 ( 센카쿠제도는미일안보조약의대상범위라는취지 ) 을낸것에대해서도만족한다. 이건에대해일본이사죄나배상등을할필요는전혀없다고생각한다. 라고일본의대응을지지하였다. Richard Armitage Joseph S. Nye Jr. 日米同盟 vs. 中国 北朝鮮 ( 文春親書, 2011). 44 쪽.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33 섬 ( 우오쓰리섬, 기타코섬, 미나미코섬 ) 을구입하여국유화하면서새로운장으로진입했다. 이시하라신타로 ( 石原慎太郎 ) 동경도지사는일본정부가센카쿠제도를매입해야한다고제안한바있는데, 중국과대만을화나게한이발언은일본의국익을위해서가아니라자신의정치적목적에의한발언이었다. 34) 이시하라의의도는첫째, 영토문제로중 일간을긴장시켜중국의위협을부추겨 평화바보 ( 平和ボケ ) 가된일본인에게방위의식 을각성시키는것이었다. 둘째, 내정상의목적으로오오이 ( 大飯 ) 원자력발전의재가동이나소비증세등긴급의테마들을억누르고영토문제가국회의관심만이아닌여론에서비등해지면, 하시모토도루 ( 橋本徹 ) 시장때문에존재감이희미해진자신에게도드디어포스트라이트가비칠것이라는계산이있었다. 10월 25일그가신당결성을위해도지사를사직한것이이를증명한다. 센카쿠와신당은자신의정치적야망을충족시키기위한자동차의양바퀴이었던것이다. 경제불황이계속되고정당정치가막다른상황에서, 종신고용과연공서열이라는전통적인사회질서가붕괴하고젊은이들을중심으로장래불안이엄습하는등폐쇄감이만연하고있는이러한때에이시하라가들고나온것이 적대형내쇼날리즘 이었다. 35) 이시하라동경도지사는우오쓰리섬 ( 魚釣島 ) 을구입한후피난항건설과등대정비등인프라건설에나설의향을피력했다. 이에대해일본정부는해당제도를구입하더라도현상황을변화시킬의향이없음을명백히표명하고, 정부의의향에대해, 정치 외교쌍방의채널을통해중국측에전달했다. 국유화를향해노다총리의등을떠민것은다음의두가지상황이었다. 첫째, 동경도에기부금이 10억엔에임박하자 절박감 이나왔다. 둘째, 이시하라가사게되면되돌릴수없는상황이된다 고하는메시지가북경으로부터전달되었다. 결국국유화하는편이중국측의 34) 2012 년 8 월 15 일브루킹스연구소에서리챠드부시와인터뷰한내용이다. 35) 岡田充 尖閣諸島問題 (2012, 蒼蒼社 ) p.19
334 獨島硏究제 22 호 반발이적을것이라는판단이작용한것으로보인다. 36) 동경도에의한센카쿠제도취득보다는일본정부에의한국유화쪽이중국이받아들이기쉬울것으로외무성은생각했다. 이전망이근본적으로잘못된것이었다. 37) 일본은도서의매입이합당하다고보았으며국내의부분적거래라고여겼다. 또한민주당은국내적비판을원하지않았기에시진핑취임전에분쟁을해결하고자하였다. 그러나중국지도층의큰변화와함께전례없는수준의정치적불확실성이형성되었던시점인제 18차공산당회중에이러한움직임이일어났고, 결과적으로양국의의사결정과정에상이한논리와국내정책에대한이해의부재가초래되었다. 38) 국유화는올바른선택이었지만시간에대한오산이있었다. 먼저, 도지사에게맡겨두면시간이너무오래걸린다. 도의소유물로하는경우는다양한절차를거쳐 2013년 3월말에구입이된다. 하지만중국은그전에몇개의중대한이벤트가있다. 당대회, 전인대, 그리고다양한국제회의가있다. 그렇게되면그동안중국의반일여론이어디까지확대될지예상을불허한다. 그래서단기간에처리해버리고싶어서국가가신속하게구입해버렸다. 39) 8월말국유화를설명하러북경을방문했던야마구치츠요시외무부대신은 9월 13일기자회견에서국유화에대해중국측에사전설명이부족했음을인정했다. 신뢰관계의결여에더하여설명부족으로상대측을화나게했다는점은명확해보인다. 2012년 9월 9일러시아극동의블라디보스토크에서노다수상과중국의후진타오국가주석이약 15분간선채대화를나누었다. 그자리에서후진타오는노다총리에게센카쿠제도의국유화에대해강하게항의했다. 36) 岡田充 尖閣諸島問題 (2012, 蒼蒼社 ) p.22 37) 佐藤優 新 帝国主義の時代 中央公論 2012 年 11 月号. 107쪽. 38) 우드로윌슨센터 중일대화 : 영토분쟁을넘어 39) 五味洋治 偶発 と 英雄行動 が招く戦闘突入の危険性 日本の領土問題の 今 と 未来 がわかる本 p.56.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35 9월 20일의 NHK뉴스에의하면후진타오국가주석이 섬의구입은어떠한형태이든위법 무효이며우리는강하게반대한다. 노다총리에게대국적인관점에서잘못된판단을하지않기를바란다. 고언급한것에대해, 노다총리는 센카쿠제도는역사적으로도국제법적으로도우리고유의영토이며우리는이를실효지배하고있다. 고대응했다고한다. 후진타오가섬의구입에강하게반대한다고언급한다음날 10일, 일본정부는관계각료회의를열고센카쿠제도의국유화를결정했다. 그리고 11일에는우오쓰리섬등세섬의구입과정부에의한관리가각의결정되었다. 일본외무성은국유화에의해, 센카쿠제도의현재상황이변화없이당분간유지될것이므로중국측의반발을최소한으로억누를수있을것으로생각했다. 그러나이는오산이었다. 중국측에서보면국가원수인후진타오주석의요청을노다수상이완전히무시한것이되었다. 40) 센카쿠제도국유화를둘러싼中 日간갈등및중국인들의反日시위가격화되고있는가운데, 9월 19일노다일본총리는 이번센카쿠제도매입에따른중국측의반응이나상호갈등을어느정도예상하긴했으나, 당초예상보다격렬한반응을보였다 며자신의판단에오류가있었음을인정하였다. 노다총리는또 중국과소통할수있는여러채널들을모색하고이를통한사태안정화방안을강구할것 이라고언급하였다. 41) 민주당정부에서자민당정부로정권이이양된후출범한아베정부는더욱강경한어조로센카쿠제도의영토주권수호의지를피력하고있다. 아베총리는 2013년 2월방미를앞두고워싱턴포스트 (Washington Post) 에실린인터뷰에서, 반일감정을부추기는중국의애국심교육과센카쿠제도에대한영유권주장을원색적으로비난했다. 그는중국의교육정책에서반일감정을배양하는애국심교육이개혁개방정책보다우선하고있 40) 佐藤優 新 帝国主義の時代 中央公論 2012 年 11 月号. 109 페이지. 41) 노다 ( 野田 ) 日총리, 중국측반응에대해언급 環球時報 2012년 9월 20일. http://world.huanqiu.com/exclusive/2012-09/3130976.html.
336 獨島硏究제 22 호 다고지적했다. 42) 그는중국이자원확보를위해해양진출을강화하면서동중국해와남중국해에서강압과협박을일삼고있고이런행위가중국국민의지지를받고있다면서이는애국심을중시하는교육시스템에서비롯된것이라고주장했다. 아베총리는 가장중요한것은중국이다른국가의영토나영해를강압과협박으로취할수없다는것을깨닫는것 이라면서 우리가그들 ( 중국 ) 에게강압과협박으로목적을관철하는것이불가능하다는것을인식하도록하는것이긴요하다 고강조했다. 2) 판단보류 에대한엇갈린인식 43) 2010년 6월 8일간나오토총리는중일국교정상화이후역대총리대신중처음으로 센카쿠제도를둘러싸고해결해야할영유권문제는본래존재하지않는다. 라는답변에서명했다. 2010년 9월어선충돌사건을처리하는과정에서, 간나오토정권은센카쿠제도에영유권문제는본래존재하지않으며, 판단보류 ( 棚上げ ) 합의역시존재하지않는다고공식입장을표명하였다. 마에하라외무장관 ( 당시 ) 도 2010년 10월 21일 중의원안전보장위원회 에서의답변에서 판단유보 론을전면부인하였다. 마에하라는 27일중의원외무위원회에서도 판단유보 에대해 과거경위를상당히상세하게조사해봤지만암묵의이해도없었다. 라고전면부정했다. 44) 그러나중국은 1972년의관계정상화과정에서당해도서에대한대화를보류하자는합의가있었다고주장하였다. 사실중 일간에는 72년국교 42) 연합뉴스 (2013. 2. 21). 43) 이부분은이명찬, 센카쿠제도를둘러싼중 일간갈등과일본의대응, 고봉준 이명찬 하도형외 동아시아영토문제와독도 ( 동북아역사재단, 2013 년 ) 의제 3 장 pp.102~5 에서부분인용. 44) 岡田充 尖閣諸島問題 (2012, 蒼蒼社 ) p.97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37 정상화, 78년평화우호조약체결시, 센카쿠영유권문제를 판단보류 하는것에암묵의합의가있었다. 먼저 1972년의일 중국교회복시에는주은래가 센카쿠제도문제에도언급할필요가없다 이번에는말하고싶지않다 라고말했다. 다음으로, 중국이문화대혁명의혼란을수습해가던 1978년가을등소평부수상 ( 당시 ) 이일본에방문하였을때, 센카쿠열도의문제는다음세대, 또는그다음세대에게넘겨서해결하는것이좋겠다. 고했을때일본정부도그것을진지하게받아들여중국을자극하지않도록유의하였다. 일본매스컴도대환영하였고일본국민들에게강한인상을남겼다. 현상유지에대한일 중양국간에암묵의이해가성립됐던것이다. 이후중국은 개혁개방 의신정책하에공산당의권력을유지하면서오로지경제발전에전념하였다. 양국에게있어센카쿠문제를전면에내세울이유가없었다. 그러나등소평이권력을강화시켜가던 1992년 2월에중국은전국인민대표대회상임위원회 (7기24회) 에서, 중국인민공화국영해및인접법 ( 영해법 ) 을제정하고, 센카쿠제도 ( 중국명 : 조어도 ) 를자국영토라고처음으로명기했다. 동법제2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의영해는중화인민공화국의육지영토와내해에인접하는일대의해역으로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육지영토는중화인민공화국의대륙과그연해의도서, 대만및그에포함되는센카쿠제도와그에부속하는각섬, 팽호열도, 동사군도, 서사군도, 중사군도, 남사군도및그밖의일체의중화인민공화국에속하는도서를포함한다. 라고주장하고, 영해침범자를실력행사로퇴거시킬수있는권한을군에부여한것도일본측을자극했다. 중국의영해법제정에대해외무성고관은 판다유보, 판단유보라고말하지만그것을어긴것은영해법으로제정한중국측이다. 라고비판하였다. 45) 중일쌍방은일찍부터불의의사고를피하기위해센카쿠제도주변을포함한어업협정을체결하였다. 중국배가위반조업을하면일본측은조업중지를요구하고, 그지역으로부터중국배를퇴거시키며, 위반처리는중 45) 岡田充 尖閣諸島問題 (2012, 蒼蒼社 ) p.110
338 獨島硏究제 22 호 국측에통지하여, 중국측에처리를요구한다 를주요내용으로하고있다. 2000년중일어업협정은명백히센카쿠제도주변지역을대상으로하며, 서로자국어선만단속하게되어있었다. 46) 어업협정의기본철학은자국선박에대해적절하게지도하거나감독하고, 위반사건을처리하는것이다. 당해체약국은상대방체약국에위반사건처리결과를신속히통보하고 (1975 년협정제3조 ), 상대국어선과직접접촉하지않는다는것이다. 상대국의공권력과접촉하면불필요한마찰이발생할위험이있으므로이를방지하려는것이다. 2010년 9월, 일본이중국어선에중지명령을내리고임검한것은명백히중일어업협정의합의내용에반하는행동이었다. 47) 2010년 9월, 당시일본정부는 판단보류, 중일어업협정 등기존의원칙을하나둘씩깨트려버렸다. 중국어선에대해일본정부는중일어업협정에근거하여처리하지않고국내법으로처리함으로써, 1992년에센카쿠제도를중국령으로포고하였던중국도 국내법으로엄정하게대응 할수있는길을열어준결과가되었다. 3) 중 일간센카쿠분쟁의요인 48) 중 일간센카쿠문제는 1968년진행된 아시아근해지역광물자원공동탐사조직위원회 (CCOP) 의조사결과가발표되면서갈등이촉발되었다. 1968년에 UN이연구한바에따르면이도서에석유가매장되어있을것으로보이기때문에이분쟁의시작과격화에서석유가중요한역할을하였다. 46) 중일어업협정에는 1975 년협정외에 1997 년에조인되고 2000 년 6 월에발효된 2000 년협정이있다. 2000 년협정에는북위 27 도이남협정수역에서는기존의어업질서를유지한다고되어있다. 마고사키우케루, 일본의영토분쟁 ( 메디치, 2012 년 ), 93 페이지. 47) 마고사키우케루, 일본의영토분쟁 ( 메디치, 2012년 ), 95쪽. 48) 이부분은이명찬, 센카쿠제도를둘러싼중 일간갈등과일본의대응, 고봉준 이명찬 하도형외 동아시아영토문제와독도 ( 동북아역사재단, 2013년 ) 의제 4장에서부분인용.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39 센카쿠제도분쟁의근본적인이유는주변해저의막대한석유및천연가스자원을둘러싼 해양자원확보 경쟁인것이다. 일본에따르면이것이중국이센카쿠제도의소유권을주장하게된주된이유이다 49). 동아시아해역을둘러싸고영토영해분쟁이최근들어격화하고있는것은 1994년에발효한국제연합해양법조약이그배경에있음을염두에둬야한다. 단적으로말하면이조약에의해 바다에대한국가의권리 즉, 해양권익 이인정되게되었다. 나아가대륙붕에대한해저자원의개발도인정되었다. 전세계의국가들이해양에있어서의권익의획득을목표로추구하기시작했다. 섬을기점으로하여바다까지의이권을추구하는것이국제적인조류가되었다. 그러나최근에는경제수역과영토주권에대한국가적자존심이분쟁으로이어져문제를더욱악화시키고있다. 50) 센카쿠제도문제는더이상사실의문제나상호이익의문제가아닌중일양국가의명예에관한문제가되어버렸다. 51) 2010년 9월센카쿠제도를둘러싸고중일간외교문제가증폭하게된경위에는당시국토교통성장관이었던마에하라세이지 ( 前原誠司 ) 의친미반중적인개인의정치적성향이크게작용한것으로보인다. 사건발생당시, 그는국토교통성장관으로서나름의영향력이있었다. 당시중국인선장은꽤취한상태였으며, 중국이이전에는보이지않았던거친행동 ( 선체충돌 ) 을한것은분명했다. 지금까지일본은이런상황에온건하게대처해왔다. 그러나마에하라를비롯한지도자들은중국선장의이런행위를그냥놔둘수없다고판단했고, 당당히대처하기위해국내법에따라처벌한다는식으로대응했다. 49) 우드로윌슨센터, 중일대화 : 영토분쟁을넘어 50) 우드로윌슨센터, 중일대화 : 영토분쟁을넘어. 센카쿠제도해저의석유매장량은이라크석유매장량에버금간다는주장도있다. 51) 2012년 8월 15일미브루킹스연구소에서동북아정책센터리처드부시국장과인터뷰한내용이다.
340 獨島硏究제 22 호 2010년센카쿠제도를둘러싸고충돌이일어났을때중국과일본어느쪽에서도양국의감정을염두에두고관계개선에나서는사람이없었다. 자민당정권시절에는중국과수많은비공식채널을유지했다. 그러나민주당이정권을잡은뒤, 특히센카쿠사건직후에는물밑협상이나비공식외교채널을통한대화가진행되지못한것으로보인다. 52) 4) 센카쿠제도와미일동맹 (1) 대등한미일관계 론의허구국경분쟁은내정과연동하기쉬운데국내권력투쟁을유리하게전개하고자대외관계를의도적으로긴장시키는그룹이나타난다. 일본은장기적경기침체에더하여동일본대지진과후쿠시마원전사고로인해불안한사회분위기가지속되고있는가운데, 중국의부상에대한열등감과불안감등을바탕으로내부지향적국수주의화가심화되었다. 53) 2009년 8월 30일에실시된일본중의원선거에서압도적인다수의석확보로집권함에따라하토야마총리는일본이미국과의동맹을소홀히하고중국과의관계를중시하면서미국을배제한동아시아공동체구상을추진하려고했다. 하토야마의 동아시아공동체구상 의핵심목표는 동북아시아비핵화 와 아시아공동통화 의실현이며, 이를위해서는한국, 중국등과신뢰관계형성을가로막고있는 역사인식문제의해결 이필요하다는입장이었다. 민주당정권은전후장기간집권당이었던자민당이일본외교의요체로여겨왔던 요시다노선 에서벗어나고자했다. 54) 하토야마유키오 ( 鳩山由 52) 문정인 서승원 일본은지금무엇을생각하는가? ( 삼성경제연구소, 2013 년 ). 87 쪽. 53) 이명찬, 센카쿠제도를둘러싼중 일간갈등과일본의대응, 고봉준 이명찬 하도형외 동아시아영토문제와독도 ( 동북아역사재단, 2013년 ) p.110. 54) 이명찬, 센카쿠제도를둘러싼중 일간갈등과일본의대응, 고봉준 이명찬 하도형외 동아시아영토문제와독도 ( 동북아역사재단, 2013년 ) pp.113~14. 민주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41 起夫 ) 총리는미국과보다대등한동맹관계를지향하는 신시대의일미동맹 을주장하였다. 신시대의일미동맹 이표방하는주요내용은 주체적인외교전략을구축하고일본의주장을명확히 하며, 솔직한대화를나누고대등한파트너십을구축 하며, 일미지위협정의개정을제기하고미군재편과주일미군기지의실태등에대해서도계속해서재평가를실시한다. 라는것이었다. 하토야마총리는 대등한미일관계 를지향한대표적인실행계획으로후텐마미군기지의오키나와현외로의이전을공표했다. 후텐마의미국해병대기지를오키나와현의다른곳으로이전하도록요청한건일본정부였다. 하지만그뒤로일본정부는이를실현하고자어떤일도한것이없고, 그리하여이젠이전가능성이매우희박해졌다. 이로인해후텐마기지가 고정화 될가능성이커졌다. 이문제는기지반대운동의상징으로서앞으로도정치적쟁점이되는것은물론, 나아가미일동맹의억지력을약화할위험성이있다. 이문제가없었다면미일간에훨씬생산적이고전략적인대화가오갔을것이다. 이런점에서후텐마문제는미일관계에매우부정적변수로작용했다. 특히민주당이집권한지난 2년동안, 부적절한전술적움직임이있었고그것이미일관계를악화시켰다. 워싱턴은국가안전보장문제와관련해일본의민주당정부를그리진지하게상대하지않았다. 중국의대두, 북한의새지도체제와향후노선, 미국과유럽의국가부채, 세계적디플레이션등새로운문제가많다. 그런데일본은동맹국미국과의관계를긴밀히하는것마저실패했다. 55) 미일동맹의미국측핵심적지지자인아미티지와조셉나이교수는하토야마총리의 대등한미일관계 론에대해신랄히비판하였다. 아미티지 당은 07 년도메니페스토에서 미국에추종, 미국이하라는대로 라는표현을동원하는등자민당정권의대미정책을강하게비판하고미일관계의전면적인재조정을시사하였다. 55) 문정인 서승원 일본은지금무엇을생각하는가? ( 삼성경제연구소, 2013 년 ). p.170.
342 獨島硏究제 22 호 는 대등한미일관계 주장에대한첫인상은 하토야마총리가미일동맹을제대로이해하지못하고있구나라는것이었다 고한다. 왜냐하면미국이유지하고있는국방비의규모와군사력, 그리고세계최대의경제력이라는점을생각해보면미일관계는대등하지않기때문이다. 56) 대등한미일관계 론의허구성에대한나이교수의다음의지적은핵심을찌른다. 정말로대등한관계를만들기위해서는일본은현재처럼 GDP 1% 가아닌 4% 를방위비에충당하지않으면안될것이다. 그리고핵무기를독자적으로개발하고, 독자적인외교를실현하겠다는결단을내리지않으면안된다. 그렇지만나는일본이독자의핵을개발하고방위정책에있어서완전한자주자립을추구한다고는생각지않는다. 물론그런의미에서이파트너십에는어느정도의불평등이있는것이사실이다. 왜냐하면미국은핵을보유하고있는초대국이고, 일본은그렇게되지않겠다고결정했기때문이다. 57) 하토야마총리는 대등한미일관계 론을주창하며후텐마미군기지의오키나와현외로의이전문제로미국정부와심각한마찰을빗다가결국총리의자리에서물러나게되었다. 하토야마에이어서총리에오른간나오토정권에서는미일동맹의복원이주요과제가되었다. (2) 센카쿠제도와미일안보조약센카쿠문제로중일간외교전이뜨거워지자, 힐러리클린턴미국무장관은 센카쿠제도는미일안보조약의대상 58) 이라고언명하였고, 크로리미국무차관보는 2012년 8월 16일기자회견에서 (1) 센카쿠제도는일본의 56) Richard Armitage Joseph S. Nye Jr. 日米同盟 vs. 中国 北朝鮮 ( 文春親書, 2011년 ), 34쪽. 57) Richard Armitage Joseph S. Nye Jr. 日米同盟 vs. 中国 北朝鮮 ( 文春親書, 2011년 ), 35쪽. 58) 이와는달리, 빌클린턴대통령시대의먼데일주일미대사는 적용되지않는다. 라고답변하였었다. 산케이신문 2010. 9. 28.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43 시정아래있고, (2) 미일안보조약 5조 59) 는일본의시정하에있는영역에적용된다는견해를표명하고, 따라서조약이센카쿠제도에적용된다고언급하였다. 60) 미국은 1971년 6월 17일의오키나와반환협정과이와관련한 합의된의사록 에의해센카쿠제도가일본에게시정권을반환하는지역의일부임을인정했다. 그러나동시에미국은센카쿠의최종적인영유권을둘러싸고일본, 대만, 중국사이의대립에대해서는공식적인입장을표명하지않고, 이문제가당사국들사이에평화적으로해결되기를바란다는것만표명하는것에그쳤다. 다시말하면, 센카쿠제도는일본의시정하에있지만, 그영유권에대해서는여전히계쟁이있다는것이미국이취한정책상의입장이었다. 61) 센카쿠문제에관한미국이취한입장이부당했던것은말할필요도없다. 이러한미국의입장은 1960년체결된미일안전보장조약에서미국이일본의시정하에있는영역의방위지원을의무화한사실에의해더욱더문제를산출했다. 즉, 센카쿠제도가제3국으로부터공격을받은경우, 미일안전보장조약조문대로해석하면, 혹미국이센카쿠제도에대한일본의영유권을인정하지않더라도미국에게는 자국의헌법상의규정및절 59) 미일안보조약제 5 조 ( 공동방위 ) 에는이렇게기술하고있다. 각조약국은일본국의시정하에있는영역에있어서어느일방에대한무력공격이자국의평화와안전을위태롭게한다고인정하고, 자국의헌법상의규정및절차에따라공통의위험에대처하도록행동할것을선언한다. 주의를요하는것은 자국의헌법상의규정및절차에따라 행동을결정한다고하고있다. 미국의헌법에는교전권은의회가장악하고있다. 따라서개전을할것인가말것인가는의회의결의에따라결정한다는약속밖에안보조약은규정하고있지않다.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에서는 무력공격이행해진경우에는그에필요한것으로생각되는행동 ( 병력의사용을포함한 ) 을즉시시행한다. 고규정하고있으며, 미일안보조약과는다르다. 日本の領土問題の 今 と 未来 がわかる本 p.62 60) 이명찬, 센카쿠제도를둘러싼중 일간갈등과일본의대응, 고봉준 이명찬 하도형외 동아시아영토문제와독도 ( 동북아역사재단, 2013 년 ) pp.81~83. 61) ロバート D エルドリッヂ 尖閣問題の起源 ( 名古屋大学出版会, 2015) p.4
344 獨島硏究제 22 호 차에따라공통의위험에대처하도록행동한다. 는의무가발생하는것이다. 뉴욕타임스의니코라스크리스토프기자는 62), 이와같이앞뒤가맞지않는상황에대해, 2010년이사건직후에, 현장에서 '("On the Ground") 라는제목의자신의블로그에서이하의의견을개진했다. 우리들은센카쿠제도가의문의여지없이일본것이라고하는입장에동의하지않으면서센카쿠제도를둘러싼전쟁에서일본을지원해야하는의무를지고있는바보같은입장에처해있다. 63) 니코라스기자는 2010년 9월 10일자칼럼에서는 1972년에미국이오키나와시정권을일본에게반환함으로서, 센카쿠제도문제에일본을도와야하는입장을취하게되었다. 미국은핵전쟁의위험을무릅쓸리가없으며, 현실적으로안보조약을발동할가능성은제로 이며, 확실한답은알수없지만, 내감각으로는중국에게설득력이있다. 라고주장하였다. 확실히일본에대한안보조약상의언급이유사시에이행될것인지아닌지에대해서는명확하지않다. 센카쿠에관한미국의자세는 미국정부가일본영토의방위를과연지원할것인가 를알기위한 성실성의테스트 로서인식되고있다. 1996년의위기시에도그이전에도이 테스트 에대한미국의답은명확하지않았다. 미국정부는당사국에의한평화적해결을요구하는한편, 영유권문제에관해서는반복해서중립의입장을말해왔다. 그리고이입장은과거 25년이상에걸쳐미국의정책이되어왔다. 64) 2009년 1월에오바마민주당정권이탄생하고힐러리클린턴국무장관이취임한후에센카쿠문제가재연하자일본에서는관심과우려가높아졌다. 민주당의힐러리는중국중시파라고알려졌기때문이다. 마찬가지 62) 크리스토프기자는뉴욕타임즈동경지국장의경험이있으며, 미국져널리즘계에서최고의명예로인정받는퓨리쳐상을두번이나받았다. 63) ロバート D エルドリッヂ 尖閣問題の起源 ( 名古屋大学出版会 2015) p.5 64) ロバート D エルドリッヂ 尖閣問題の起源 ( 名古屋大学出版会, 2015) pp.7~8.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45 로중국중시로알려졌던하토야마민주당정권이 50년이상자민당지배를종식시키고발족하여 1년이지난 2010년 9월초순, 중국어선이해상보안청의순시선에충돌하여어선선장을체포하였다. 그직후부터일본의정부당국자와기자들은일중간의군사충돌이발생할경우미국의입장이무엇일지에대해의문을제기하기시작했다. 65) 충돌발생으로부터수주간이지난 9월 23일, 클린턴국무장관은마에하라세이지 ( 前原誠司 ) 외상과의회담에서미국정부는사건에대한일본정부의대응을이해한다고설명함과동시에미일안보조약제5조는센카쿠에적용된다고강조하였다. 클린턴의이러한단언에의해전의민주당정권시대에발생했던혼란을불식되어, 미국의민주당과공화당은센카쿠에관한미국의입장에대해생각을공유하고있음을알수있게되었다. 그러나 제5조가센카쿠에적용된다 라는것이실제로무엇을의미하는지에대해서는많은의문이남아있다. 그근저에는센카쿠가미국의재산과자원 ( 특히오키나와본도에주류하는젊은해병대원의목숨 ) 을들여전쟁할만큼가치가있는가? 라고하는문제이다. 66) 사토마사루 ( 佐藤優 ) 는, 센카쿠문제에서명확해진것처럼일본에게정치적, 경제적으로군사적으로도공격적인중국의영향은대단히큰데, 중국에대해카드로사용할수있는것은오로지러시아밖에없다고한다. 미국은미국채를가장많이보유하고있는중국과싸우지않을것이다. 그렇다면중국의횡포로부터일본을지킬수있는것은러시아밖에없다는것이다. 67) 그리고그는 지정학적으로생각해보면앞으로일 러가접 65) ロバート D エルドリッヂ 尖閣問題の起源 ( 名古屋大学出版会, 2015) p.11. 66) ロバート D エルドリッヂ 尖閣問題の起源 ( 名古屋大学出版会, 2015) p.11. 67) 佐藤優 北方領土問題が握る対中外交の突破策 日本の領土問題の 今 と 未来 がわかる本 p.46 사토는러시아를카드로만들기위해다음과같은구체안을제시한다. 러일관계를좋게하기위한대책으로서예를들면쿠니시로섬의수산가공공장을구체적으로제안하여 100% 일본출자로건설에서운영까지실행한다. 출입국은비자없이교류의확대라는형태로인정하고, 현지인을적극고용한다. 현재섬에사는대부분의사람들이생활이윤택하지못하다. 그렇다면일본
346 獨島硏究제 22 호 근하여북방영토문제가해결될가능성은충분히있다 고예견하고대중러시아카드를제안한다. 2016년 12월의일러정상회담은이러한측면에서일본에게의미있는회담으로평가받고있다. 4. 동아시아영토문제와동북아국제정치 1) 동아시아에서의세력전이 (power shift) 21세기들어서미국이시작한전쟁과 2008년이후의경제위기를경험하는과정에서중국의부상이명확해지고일련의세력전이적상황이관찰되면서, 미국은아시아로의회귀를선언할수밖에없었다. 지역내에서중국의부상을견제하지않는다면안정성이저해될것이라는견해가지배적이었기때문이다 68) 미국의동아시아에대한관심은 1951년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의해제도화된측면이있다. 이체제의주요특징은미국의태평양동맹에일본을편입시켜최근까지 바퀴축과살 (hub and spokes) 체제로유지되었다는것이다. 즉미국은한국, 일본, 필리핀, 대만, 호주, 뉴질랜드등의국가들과양자간비대칭동맹을체결하고해당국가내에미군기지를설치하여정치및경제적협력의강화로중국과러시아등적대국과의관계를배제하는것이샌프란시스코체제의핵심적구도였던것이다. 69) 인과손을잡는것이득이라고주민들이생각하도록하는것이좋다. 장래는일본땅이되는것이좋겠다고생각하도록하는틀을만드는것이네개섬이돌아오게하기위한포인트이다. 어떻게든일본인이북방 4 도에진출하지않으면안된다. 68) 이런상황을세력전이론의입장에서분석하는연구로는 David Sobek and Jeremy Wells(2013), Dangerous Liaisons : Dyadic Power Transitions and the Risk of Militarized Disputes and Wars, Canadian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Vol. 46, No. 1 참조. 69) 고봉준, 동아시아해양영토분쟁과미국, 고봉준 이명찬 하도형외 동아시아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47 빅터차 (Victor D. Cha) 에따르면동아시아에서미국이유럽의다자주의적동맹과는다른양자동맹구조를구축하려했던데에는이유가있다. 미국이당시에동아시아에구축하려했던비대칭양자동맹은소련을봉쇄하기위한전략적목표외에동맹국들의공격적인행동의결과로미국이원하지않는전쟁에연루되는것을회피하기위함이었다는것이다. 70) 미국은동아시아해양영토분쟁과관련해서여러차례공식적입장을정리한바있다. 먼저 1990년대중반중국이산호도 (Mischief Reef) 를점령한이후미국국무부는해양분쟁과관련한미국의입장을정리하여정례브리핑에서발표하였다. 여기에서강조된원칙적입장은크게다섯가지로분쟁의평화적해결, 평화와안정, 항행의자유, 분쟁에서의중립성, 국제적원칙의존중이다. 이어 2010년 7월 ARF(ASEAN Regional Forum, 아세안지역포럼 ) 에서클린턴 (Hillary Rodham Clinton) 미국국무장관은 1995년에제시된원칙에대해항행의자유가미국의국가이익이고, 관련당사자일방의무력사용이나위협에반대하며, 미국은분쟁에서중립을지킨다는점을강조함으로써이원칙을재확인한바있다. 71) 이런원칙적입장에따라미국은 1990년대중반에는센카쿠열도와관련해서도어느일방의입장을지지하지는않는다고언급했었는데, 2010년센카쿠사태이후에는미 일안보조약 5조의적용대상이라고공개적으로언급하는등일견태도의변화를보여주고있다. 한편, 지난 10년간중일양국은커다란파워시프트 (power shift) 속에있었는데, 최근의센카쿠제도문제도기본적으로는파워시프트속에서일어나는분쟁이다. 겅신 ( 庚欣 ) 일본JCC신일본연구소부소장은, 국교정상화 40주년이되는해에中 日양국이전에없던진통을겪고있는이유 영토문제와독도 ( 동북아역사재단, 2013년 ), p.40. 70) Victor D. Cha(2009), Power Play : Origins of the U.S. Alliance System in Asia, International Security, Vol. 34, No. 3, pp. 158~159 71) 고봉준, 동아시아해양영토분쟁과미국, 고봉준 이명찬 하도형외 동아시아영토문제와독도 ( 동북아역사재단, 2013년 ), pp.46~7.
348 獨島硏究제 22 호 는中 日관계가 100여년만에역사적인전환점을맞이했기때문이라고분석한다. 센카쿠제도를둘러싼일중간의최근의사태는중국과일본이각각동시에 대국화 ( 大國化 ) 를추진하는가운데새로운中 日관계및동아시아질서형성과정에서겪는 진통 이라고할수있다. 청일전쟁부터 2차세계대전까지일본은中 日관계의주도권을잡고있었다. 그러나지난 20여년간中 日양국이각각 대국으로의변모 를꿈꾸며양국간에갈등이발생하기시작했다. 특히중국이정치 경제적으로부상하면서, 중국은일본이 2차세계대전이후수립된전후질서및성과를부정하고군사화를추진하는데있어가장크고직접적인적수가되었다. 이에일본은고의적으로중국의국가이미지를훼손시키고미국을끌어들이게된것이다. 72) < 環球時報 > 는사설에서, 최근일본이한국 러시아와각각해양영유권을놓고갈등하고있는가운데, 일본이한국과러시아로인해난화를센카쿠제도문제에풀가능성이있어우려된다고언급하였다. 73) 사설은, 영토문제에있어한국과러시아측입장을지지하고그들과함께일본에대응해야한다. 韓 日간독도분쟁은좀처럼해결될기미를보이지않고있으며, 독도분쟁으로인해韓 日양국의단결이더욱어려워지고있다. 이는지정학적측면에서볼때중국에매우유리한상황이다. 중국은센카쿠제도문제에있어양안과의협력, 한국 러시아의지지, 미국의중립적태도를이끌어내야하는동시에큰틀에서의전략이얼마나중요한지를잊어서는안된다고주장하였다. 72) 겅신 ( 庚欣 ) 일본JCC신일본연구소부소장, ( 中 日관계 ) 中전문가, 중국은일본과의 진통 에마주할용기가져야 新華網 2012년 10월 11일. http://mil.huanqiu.com/ observation/2012-10/3178128.html 73) [ 사설 ] 일본이한국 러시아에당한화를센카쿠제도에푸는것막아야 [ 環球時報, 8.11] http://opinion.huanqiu.com/1152/2012-08/3015156.html.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49 2) 대중전략으로서의러시아정책 한편, 2013년 12월, 아베정권은일본최초의 국가안전보장전략 을각의결정했다. 이중에러시아에대한다음과같은구절이있다. 동아시아지역의안전보장환경이일층엄중함을더해가고있는중, 안전보장및에너지분야를비롯하여여러분야에서러시아와의협력을추진하여, 일러관계를전체적으로높여나가는것이우리국가의안전보장을확보하는데있어서지극히중요하다. 밑줄친부분이주로중국의동지나해나남지나해에서의확장주의적인활동을의미할것이다. 즉, 현재아베정권의대러시아외교의배경에는그의대중전략이있다. 그렇지만, 러시아가대중국에서미일동맹진영에합류하는것은있을수없을것이다. 다만일본이목표로할수있는것은러시아의가능한한중립을지키도록하는것이다. 74) 이와관련하여, 키타노의대중전략으로서의대러시아정책에대한다음의기술은흥미롭다. 중국은, 일본에는센카쿠뿐만이아니라오키나와의영유권도없다! 라고공언하고센카쿠강탈을향한포석을순조롭게진행하고있다. 센카쿠유사 때, 일본 미국 vs 중국 이면일미는반드시승리할수있다. 그러나 일본 vs 중국, 즉, 미국을뺀일대일대결이되면일본은질것이다. 통상병기의싸움으로는이길수있을지도모르지만, 마지막에핵으로위협받으면어쩔수없다. 75) 그러니까일본은, 필승패턴 일본 미국 vs 중국 의형태를유지하기위해서어떤일이있더라도트럼프신대통령과양호한관계를쌓아올리지않으면안된다. 그리고 센카쿠유사 에는중요한역할을완수할가능성이있는나라가하나더있다. 그것이러시아다. 만약, 일본 미국 vs 중국 러시아 의싸움이되면어느쪽이이길지모른다. 게다가, 74) 畦蒜泰助 なぜ今, 領土交渉なのか 対中国政策にはロシアの戦略的中立化が鍵 CHUOKORON January 2017. p.46. 75) 北野幸伯 北方領土 進展なし でもプーチン来日が成功だった理由 DIAMOND online 2016 年 12 月 19 日.
350 獨島硏究제 22 호 일본의섬을지키기위해서, 중국 러시아와싸울수있을까! 라고미국이뒷걸음질칠가능성은높다고생각된다. 그리고최악의패턴은, 일본 vs 중국 러시아 의싸움이되는것이다. 이렇게되면, 일본에승산은 1% 도없고센카쿠는확실히빼앗길것이다. 그래서일본은미국과의관계를강고하게유지하는것과동시에, 중국과러시아를분열시켜, 러시아를중립에세워두는것이매우중요하다. 키타노의주장은, 일미관계가호전되면될수록중국은센카쿠침략이어려워지고일본은보다안전하게되고, 일러관계가개선되면될수록그만큼중국은센카쿠침략이어려워진다는것이다. 76) 그러나우크라이나위기가발발하여미 러관계가극적으로악화되고, 일본도 G7국가들과의결속을중시하는입장에서미국, 유럽국가들에의한러시아경제재재의스크럼에합류하자, 러시아는일련의대러시아경제제재와는일선을그은중국과의관계를급진전시켰다. 특히일본이염려했던것은중 러의안전보장면에서의급접근이었다. 2016년 9월, 러시아는남중국해에서중국과처음으로공동군사훈련을실시했다. 러시아는우크라이나문제, 중국은남중국해문제로미국과의대립하던중, 중 러는서로접근을연출하는것으로미국에게전략적메시지를보냈다고보는것이타당할것이다. 아베정권이이러한중 러의전략적접근의흐름에강한경계감을가지고있었음에는틀림이없다. 77) 미국과러시아관계가악화되고있는상황에서일러가안전보장분야에서관계를강화시키는것에는일정한한계가있다하더라도, 일본은중국에대해서중립을유지하도록러시아를설득할수있는관계를쌓아올릴필요가있다. 센카쿠제도의주권을둘러싸고, 러시아가중국의주장을지지하는일이있으면, 일본에있어서는매우귀찮은것이된다. 그러한 76) 北野幸伯 北方領土 進展なし でもプーチン来日が成功だった理由 DIAMOND online 2016 年 12 月 19 日. 77) 畦蒜泰助 なぜ今, 領土交渉なのか 対中国政策にはロシアの戦略的中立化が鍵 CHUOKORON January 2017. p.47.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51 일이일어나지않도록, 러시아와의관계를쌓아올려둘필요가있다. 미오바마정권의반대에도불구하고아베수상이이타이밍에러시아와의관계를강화하는프로세스의재개를단행한배경에는이와같은전략적판단이있었을것이다. 2016년 5월에아베수상이제안한 8개항목의경제협력플랜은푸친의희망에화답한것이다. 78) 모리전수상은 지금중국은가장까다로운국가가되고있다. 우리와가치관이다르다. 러시아와일본이사이가좋아지면중국을포위하는것이된다. 아베수상도 50% 이상의지지율이있으며, 푸친의지지율은 80% 나된다. 전략적판단을내리어도좋겠다. 서로가힘이있을때협의하여해결할수있는최대의찬스이다. 79) 3) 대중봉쇄정책의무위 대두하는중국을억제하기위해일본이전략적으로러시아와손을잡자는주장에대해견해를달리하는주장도만만치않다. 오자와는이렇게말한다. 일본은미국과, 그리고다음으로중국과잘지내지않으면안된다. 러시아는세번째이다. 러시아는일본이상으로중국공산당과의친교가깊고길다. 일본이생각하는것처럼중국포위망의일원이된다는것은있을수없다. 80) 길버트로즈만 (Gilbert Rozman) 도오자와의생각에가깝다. 그는 미국은푸친이중국과장기적인관계를강화하고자하고있으며, 일본은이에대해영향력을행사하지못할것 이라고생각한다. 북한문제에서일본과러시아가협조한다든지, 중국의패권을봉쇄하기위해일러가공동이해 78) 森永輔, 畔蒜泰助インタビュー 北方領土と日ロ平和条約, 次の勝負は2018~21 年 日経ビジネスONLINE 2016 年 12 月 19 日. 79) 森喜朗 交渉秘話 これが, 森喜朗元首相の 遺言 だ CHUOKORON January 2017. p.37. 80) 小沢一朗 ロシアは一筋縄ではいかない CHUOKORON January 2017. p.41.
352 獨島硏究제 22 호 를모색한다는등의발상은단지희망적인관찰일뿐이다. 아베가러시아와의관계개선의결과로서지정학적인보상을기대한다면, 러시아는그러한일은있을수없다고반응할것이다. 오히려러시아측에서보면, 푸친과의신뢰관계를구축하고자한다면, 구나시리와에토로후의군사기지를인정하고탄도미사일방어준비를지금이상추진하지말고중 러간의무기거래나합동군사훈련을용인해주는것등푸친의지정학적어젠다에찬성해야한다고하는것이다. 81) 러시아는일본이미국으로부터이탈할지도모른다고확신할수있을때까지, 일본과의관계를본격적으로진전시키고자하지는않을것이다. 러시아의신중한전문가들은일본은미국편에서있으며, 결국은중 러관계가강화되어가는것을멈출수없을것으로파악한다. 82) 미국은러시아국내에일본과의관계개선지지파가많다고생각하지않는다. 미국에서는중 러관계가진전되고있고, 이러한흐름은일본으로부터영향을받지않을것이라고보고있다. 미국이보다우려하는것은일본의러시아제재가약화되는것이다. 일러간에강력한경제관계가형성되는것은 G7에의한제재정신에반할뿐만아니라, 유럽이나중동에서질서를위협하고있는러시아에대해국제사회가일치하여대항하고있는노력을손상시킨다는것을의미한다. 83) 5. 결론 이상의검토를통해다음의몇가지사항을결론으로정리하고자한다. 81) Gilbert Rozman, 日ロ首脳会談に向けたロシアと米国の視点 CHUOKORON January 2017. p.53 82) Gilbert Rozman, 日ロ首脳会談に向けたロシアと米国の視点 CHUOKORON January 2017. p.54 83) Gilbert Rozman, 日ロ首脳会談に向けたロシアと米国の視点 CHUOKORON January 2017. p.55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53 첫째, 북방4도의반환이아베정권시기에이루어지는것은거의불가능에가깝게느껴진다. 러시아의관계자다수는평화조약체결이나영토문제의타개이전에먼저경제적인대가가중요하다고주장한다. 북방영토문제를해결하고평화조약을체결하려면신뢰관계가필요하다. 그리고거기에는시간이걸린다. 일 러의양정권은이 시간 을어떠한시간축으로생각하고있을까? 아베수상은 우리의세대, 우리의손으로종지부를찍지않으면안된다 라고호소했다. 일 러의정권이가지는시간축은공통되고있는부분과그렇지않은부분이있다. 공통되고있는것은 2018~2021년이다음승부의타이밍이되는것이다. 아베수상은자민당총재임기를 3기 9년으로연장하는것을모색하고있다. 84) 2017년 3 월에열리는자민당대회에서이것이실현되어아베가 2018년 9월에재선되면, 2021년 9월까지임기가연장될가능성이있다. 한편, 푸친대통령은 2018년에대통령선거를앞에두고있다. 재선되면 2024년까지의임기가된다. 즉, 양자가재선되면 2021년까지교섭기간이있게된다. 그러나이러한시간축으로북방영토문제가해결될것으로보이지않는다. 그렇게느껴지는것은두번째이유때문이다. 북방영토문제의미해결은많은부분일본정부의책임으로보인다. 본론에서살펴보았듯이, 일본정부의 4도일괄반환 주장과 2도선행반환 주장이어지럽게교차하는잦은 골대이동 이북방영토해결을무산시키는주요요인이었다. 물론일본정부의그러한결정에미국정부의부정적영향력행사의산물이거나, 미일동맹정책의대가임도부정할수없을것이다. 셋째, 동아시아영토문제는대국간동북아국제정치의복잡한역학이작용하는극히어려운문제임이명백하다. 일본이북방영토문제의해결 84) 아베수상주변에의하면, 내년 9 월의총재선거에출마하여 2021 년 9 월까지의임기를확실히하여, 할아버지 ( 기시노부스케 ) 의비원인헌법개정과대숙부 ( 사토에이사쿠 ) 가수상한노벨평화상을진심으로노리고있다 라고한다. 安倍首相はノーベル賞狙い? 北方領土返還, 日ロ平和条約締結で強気 AERAdot 2017 年 6 月 8 日.
354 獨島硏究제 22 호 을위해서는러시아와의신뢰양성이필수적이라는사실을깨닫는데에 70년가까이소요되었다는것은, 일본의대러경제협력이러시아의신뢰를얻기까지앞으로결코짧지않은시간이소요될것임을말해준다. 또한그결과가반드시일본이기대하는결과를산출한다는보장도없다는것이냉정한현실이라하겠다. 넷째, 러시아인의고유영토론에대한인식을살펴보면서, 북방4도에대한일본정부의 고유영토론 주장이얼마나공허한것인지명확하게느껴졌다. 일본의 고유영토론 주장은독도에대해서도어김없이등장하는데, 그주장의공허함이같은이유에서오버랩되었다면, 필자만의생각일까? 참고문헌 [ 단행본 ] 고봉준 이명찬 하도형외 동아시아영토문제와독도 ( 동북아역사재단, 2013년 ). 마고사키우케루 일본의영토분쟁 ( 메디치, 2012년 ). 문정인 서승원 일본은지금무엇을생각하는가? ( 삼성경제연구소, 2013년 ). Richard Armitage Joseph S. Nye Jr. 日米同盟 vs. 中国 北朝鮮 ( 文春親書, 2011). 岩下明裕 日本の国境 いかにこの 呪縛 を解くか ( 北海道大学出版会, 2010). 国境誰がこの線を引いたのか ( 北海道大学出版会, 2006). 浦野起央 尖閣諸島 琉球 中国 ( 三和書籍, 2010). 工藤隆哉 尖閣諸島と亡国の憲法第九条 ( 創栄出版, 2010). 小沢隆一丸山重威 民主党政権下の日米安保 ( 花芸社, 2011). 岡田充 尖閣諸島問題 ( 蒼蒼社, 2012). 島本順光外 尖閣諸島が危ない ( 防衛システム研究所, 2010). 高橋和夫 河島淳司 日本と世界の領土問題 ( 日本文芸社, 2011). 東郷和彦 保阪正康 日本の領土問題 北方四島, 竹島, 尖閣諸島 ( 角川書店, 2012). 中村秀樹 尖閣諸島沖縄海戦自衛隊は中国軍とこのように戦う ( 光人社, 2011). 西尾幹二 青木直人 尖閣戦争 米中はさみ撃ちにあった日本 ( 祥伝社,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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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 獨島硏究제 22 호 <Abstract> East Asian Territorial Disputes and Northeast Asian International Politic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2016 Japan-Russia negotiations on Kuril islands- Myungchan Lee The 2016 Japan-Russia summit meeting was aimed at solving the territorial problems of both countries; however, Prime Minister Abe was in talks to attract Russia and strengthen its foothold in China. Also, it was an important meeting that showed the intention of PM Abe, in view of the movement of large-scale edition of Northeast Asian international politics. However, the return of the northern 4 islands seems almost impossible. The reason is that the unresolved issue of the northern territory seems to be largely the responsibility of the Japanese government. The frequent "goal shifting" of the Japanese government's claim of 'four islands return' and 'two islands return first' was the main factor that disrupted the resolution of the Northern Territories. Of course, it would be a product of the US government's negative influence on such a decision of Japanese government, or the price of the US-Japan alliance policy will not be denied. Through this paper, it is clear that the problem of East Asian territory is a difficult problem that complicated political dynamics work in the background of the transition of powers between the Great Powers.
동아시아영토분쟁과동북아국제정치 359 When you look at the Russians' perception of the inherent territory theory Japanese government claims, it becomes clear how empty the claim of the Japanese government's inherent territory theory on the northern four islands is. Japan's 'inherent territory theory' appears in the claim to Dokdo, we can not hide that the emptiness of the claim is overlapping for the same reason. Key words: Territorial Problems, Kuril islands, Japan, Russia, Inherent Territory Theory, Dokdo 이논문은 2017 년 5월 25일에투고하여 2017 년 6월 3~25 일에심사하여 2016 년 6월 26일에게재 결정됨
361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 1)2) 정갑용 ** < 목차 > 1. 서언 2. 분쟁의개관 3. 재판경과및주요내용 4. 중재판정의주요쟁점 5. 결어 < 국문초록 > 남중국해에막대한양의석유및천연가스가매장되어있는것으로알려지면서남중국해의연안국들간의분쟁이본격적으로시작되었는데, 필리핀과중국간에분쟁이본격화된것은석유가천연가스가많이매장되어있다고밝혀진리드뱅크 (Reed Bank) 에서의충돌사건때문이었다. 필리핀은 2013년중국을상대로해양법협약이규정및동부속서 Ⅶ에근거하여동사건을국제상설중재재판소에제소하였고 2016년 7월 12일에최종적으로판정이내려졌다. 동판정이가지는쟁점별의미는다음과같다. 첫째, 재판관할권과관련된문제로중국은필리핀과의분쟁이해양에관한국가주권과관련된문제이고해양법협약이정하는 협약의적용및해석에관한분쟁 이아니며중국이 배제선언 을통하여해양분쟁을강제적관할권에서제외하기로하였다는점에서동분쟁에대한재판관할권을부정하고중재재판에참석하지도않았다. 그러나재판소는필리핀의청구내용을중심으로동분쟁이남중국해의해양지형에대한영유권의귀속에관한문제가아니며중국이자국의권리가미친다는해역은다른국가들의주장이중복되고해양경계가아직해결되지않는해역이라고전제하였다. 이에따라, 동 ** 본논문은영산대학교의 2015년 ~2016년교원역량강화연구년제 사업으로수행된것임. ** 영산대학교교수, 법학박사 ( 국제법 )
362 獨島硏究제 22 호 분쟁은해양법협약이규정하는섬의법적지위, 배타적경제수역및대륙붕등에관한해석및적용에관한문제이어서필리핀의청구내용에서일부에대한재판관할권이인정된다고판단하였다. 둘째, 중국은동분쟁이국가주권과관련된다는주장에대한근거로남중국해에대한역사적권원을주장하며, 소위 9단선 이내의해역은중국의역사적수역이며 다툴수없는중국의권원 이있다고주장하였다. 재판소는중국이남중국해에대한역사적권리를주장하는것에대하여주권문제를결정할수있을정도로강력한증거력이없다고판단하였다. 셋째, 남중국해의해양지형들의법적지위에관한것으로, 해양법협약이규정하는바에의하여분쟁해역의해양지형들은그자체의배타적경제수역이나대륙붕을가질수없는 저조고지 에해당된다고하였다. 넷째, 중국이남중국해에인공섬을건설하는것에대하여, 재판소는해양법협약이나국제법원칙에의하면해양에인공섬을건설하는것은인정되지만인근국가들에피해를주지않아야하고해양생태계에중대한위협을주지않아야한다고판단하였다. 이와같은재판소의판정은특히재판관할권, 영유권에관한역사적권원, 해양지형의법적지위, 인공섬의건설등과관련하여우리나라의독도문제에보여주는법적, 정책적시사점이크다고하겠다. 주제어 : 남중국해분쟁, 국제중재재판, 해양법협약, 재판관할권, 9 단선, 분쟁해결제도 1. 머리말 본래, 남중국해의바다는인접한연안국들이서로간에평화적으로이용하는공간이었는데불과 1세기전만하더라도남중국해의자원을이용하는것은오로지수산자원에한정되어있었고동력선이없던이시대에어민들은주로자국의가까운연안에서조업활동을하였을뿐이어서오늘날과같은국가들간의분쟁을있을수가없었다. 이당시만해도남중국해의연안국들은섬, 바위섬, 저조고지, 사주, 산호초, 해저산등여러형태의해양지형들에대하여그동안그다지중요하지않고별로쓸모없는것으로여겨왔으나, 남중국해해저에막대한양의석유및천연가스가매장되어있는것으로알려지면서 1) 남중국해의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63 연안국들간의분쟁이본격적으로시작되었다. 2) 남중국해의분쟁에서필리핀과중국은석유탐사와어로활동을둘러싸고서로격한대립을겪어오다가필리핀이 2013년 1월 22일일방적으로국제중재재판소에소송을제기하고 3년여가흐른 2016년 7월 12일에최종적으로판정이내려졌다. 이논문은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해양분쟁에관한 2016년 7월 12일자국제중재재판소의판정에대한국제법적쟁점에대하여살펴보고자하는바, 그러한분쟁의배경, 중재판정의내용을정리하고중재판정에관한국제법적인주요쟁점을분석함으로써, 우리나라해양정책의수립및집행에일조하고자한다. 2. 분쟁의개관 1) 각국의점거현황 남중국해의북부해역은남중국해海盆 (the South China Sea Basin) 과팔라완海溝 (Palawan Trough) 로이루어져있고수심은 1,000미터이상으로보다깊은수심이지만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및필리핀의비교적얕은수심의대륙붕으로둘러싸여있는특징을지니고있다. 남사군도는약 150개의수중암초, 수중모래톱및간출지등으로구성되어있는데, 중국이 1974년에무력을동원하여베트남의세력을몰아내고서사군도의 12개해양지형들을점거하고있고, 남사군도에서 1) Zhu, Ningzhu, China urges against Vietnamese interference in territorial water exploration. Xinhuanet(7 May 2014). 2) 남중국해의분쟁원인에대하여이와같은해양자원에관한이해관계뿐만아니라중국의급격한경제성장과패권주의가또다른원인이라는지적도있다. 이정태, 중국의남중국해인공섬건설과국제상설중재재판소판결, 대한정치학보 제24집제4호 (2016.11), 164쪽.
364 獨島硏究제 22 호 는 7개의해양지형들 (Subi Reef, Gaven Reefs, Hughes Reef, Johnson Reef, Mischief Reef, Fiery Cross Reef, Cuarteron Reef) 을점거하고있다. 중국뿐만아니라, 남중국해의다른연안국들도남사군도를점거하고인공섬을건설하였데, 베트남은남사군도의 28개해양지형들을점거하고있고, 필리핀은 9개의해양지형들에대하여점거를하고있고, 말레이시아는 5개의해양지형들을점거하고있고, 대만은태평도 (Itu Aba Island) 1개를각각실질적으로점거하고있다. 3) 2) 분쟁해역 남중국해에서필리핀과중국간에분쟁이되고있는해역은 스카보러沙洲 (Scarborough Shoal), 세컨드토마스沙洲 (Second Thomas Shoal), 리드뱅크 (Reed Bank) 및남사군도를이루는 다양한해양지형들 (a variety of features in the Spratly island chain) 의동남부해역이그것이다. 4) 스카보러沙洲 (Scarborough Shoal) 는영어명칭인데필리핀은 파나탁沙洲 (Panatag Shoal), 중국은 황암도 ( 黄岩岛, Huangyan Dao) 라고부르는데, 5) 그둘레가약 46km로다양한산호와암석이삼각형모양을이루고있으며그면적은약 150km2에달하고가장높은바위인 사우스록 (South Rock) 은만조에해발 1.8m의높이를이룬다고한다. 스카보러沙洲는필리핀연안서부에서약 120해리및중국으로부터 350해리이상떨어져있고만조시해수면위에있는암석의 6개의작은돌출부를포함하고있다. 6) 3) 이상의설명에대한것은, CSIS(Center for Strategic & International Studies), Asia Maritime Transparency Initiative. in https://amti. csis. org/ island -tracker/( 방문일자 ; 2017. 4. 1). 4) Mark E. Rosen, Philippine Claims in the South China Sea: A Legal Analysis, A CNA Occasional Paper (International Affairs Group Centet for Strategic Studies) (August 2014), p.1. 5) Aning, Jerome, PH plane flies over Panatag Shoal, Philippine Daily Inquirer(May 5, 2012).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65 스카보러沙洲는필리핀연안에서 200해리이내에위치하지만, 중국의배타적경제수역의범위와는많이떨어져위치해있는해역이나중국은소위 9단선 이내의해역임을근거로자국의권리를주장하는해역이다. 세컨드토마스沙洲 (Second Thomas Shoal) 는영어명칭이며필리핀은 아윤진沙洲 (Ayungin Shoal), 중국은 인애초 ( 仁爱礁 ) 라고부르는데남사군도의북동쪽해역에있으며남북으로길이가약 20km인가느다란산호초로. 현재는필리핀이점유하고있으나다른연안국들도권리를주장하고있다. 리드뱅크 (Reed Bank) 는남중국해에있는가장큰어장이며그면적은 8,866 km², 깊이는 9~45m이며해저에석유와천연가스의매장량이풍부하다고알려져있으며핀리핀은 1970년에탐사를시작하여 1976년에천연가스를발견한바있다. 7) 이외에도남사군도를이루는다양한해양지형들에대하여필리핀과중국뿐만아니라베트남, 말레이시아등은다양한해양지형들을점유하고인공도를건설하고각종시설물을설치하는등의각축을꾀하고있다. 3) 분쟁의경과 필리핀과중국의분쟁이발생한직접적인원인은필리핀은일찍부터스카보러沙洲인근해역에서석유탐사활동을하여왔는데, 이와같은해저석유나천연가스에대한국가간의분쟁뿐만아니라, 영토를확장하겠다는국가적야심, 인근해역의수산자원의확보, 항행의자유및상공비행의자유를보장하려는국가들간의마찰때문에비롯된것이라고볼수있다. 6) Zou, Keyuan, Scarborough Reef: a new flashpoint in Sino-Philippine relations?, IBRU Boundary &Security Bulletin(University of Durham), Vol. No.2(1999), p.11. 7) Laude, Jaime, China raring to seize oil-rich Reed Bank Golez, The Philippine Star(March 20 2014).
366 獨島硏究제 22 호 1970년대에들어서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등이남사군도의해양지형들에대한권리를주장하기시작하였는데, 1978년 6월 11일에는필리핀의마르코스대통령은대통령령제1596호를통하여카라얀군도 (the Kalayaan Island Group) 를필리핀의영토라고선포하였다. 8) 필리핀은 1970 년에팔라완 (Palawan) 서부해역에서해양자원의탐사를개시하였고 1976 년에는리드뱅크 (Reed Bank) 에서천연가스를발견하였으며, 1984년 3월에는팔라완인근해역에서석유를찾아내었다. 1988년에서 1989년에는남사군도의여러해양지형들을점거하기위하여대규모의군사활동을전개하였으며, 9) 1995년 2월에는필리핀과중국간에미쉬프礁 (Mischief Reef) 를둘러싸고군사충돌에벌어진바있다. 10) 1997년 4월에는필리핀해군이스카보러인근해역에서조업하는중국어선들을퇴거시켰으며필리핀어부들이중국이세운표지석을제거하고필리핀국가를게양한사건이발생하였다. 11) 1998년 1월에필리핀해군이 22명의중국어부들을스카보러인근해역에서체포하였으며, 1999년 5월과 7월에는중국어선이동해역에서필리핀군함과충돌하여침몰한사건이발생하였다. 2000년대이후에도크고작은충돌이잦았는데, 2000년 2월에는필리핀군함이스카보러해역에서중국선박에접근하지말것을경고하는사격을가하였고이사건으로필리핀은중국의외교적항의를받는바있으며, 2000년 5월에필리핀군인들이중국어부들에게사격을가하여 1명이사망하고 7명이체포되는사 8) Presidential Decree No.1596 Declaring Certain Area Part of the Philippine Territory and Providing for their Government and Administration. Chan Robles Law Library (11 June 1978). 9) Keith Jacobs, China's Military Modernization and the South China Sea. Jane's Intelligence Review, Vol.4, No.6(June 1992), pp.278~281. 10) John M. Van Dyke & Dale L. Bennett. Islands and the Delimitation of Ocean Space in the South China Sea. Ocean Yearbook, Vol.10(1993), p.59 11) US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Analysis Briefs, South China Sea (March 2008).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67 건이발생하였다. 2011년 2월에중국군함이 Jackson Atoll 인근해역에서동해역이중국의영해이므로경고사격을하고 3척의필리핀어선을퇴거시킨사건이발생하였고, 2011년 3월에리드뱅크 (Reed Bank) 인근해역에서중국의순시선이필리핀의과학조사선을퇴거하려한것에대하여필리핀이 2대의항공기를급파하여충돌직전까지이른사건이발생하였다. 2011년 5월에는필리핀이점유하고있는남사군도의해역에서중국의해양조사선과인공섬을구축하는물자를실은화물선이목격되었고, 2012년 4월에스카보러인근해역에서중국어선의조업에관하여필리핀과중국의군함들이출동하는사건이발생하였다. 2014년 12월에서 2015년 5월사이에중국해양경비선이세컨드토마스沙洲 (Second Thomas Shoal) 인근해역에서조업하는필리핀및베트남어선의조업을방해하였으며스카보러인근해역에서는중국해양경비선이필리핀의어선에대하여물대포를쏘며조업을방해하였다. 2015년 4월 19일에는중국의프리깃함이수비礁 (Subi Reef) 인근해역을정찰하는필리핀의공군기에대하여중국의군사보안구역을침범하였으므로즉시퇴거하라는사건이발생한바있다. 12) 이와같이그동안필리핀과중국간에크고작은충돌사건이끊이지않고발생하였지만, 양국간에분쟁이본격화된것은석유가천연가스가많이매장되어있다고밝혀진리드뱅크 (Reed Bank) 에서의충돌사건때문이었다. 동사건은 2011년 3월 1일중국의순시선 Zhongguo 71 및 Zhongguo 75 가남사군도의 리드뱅크 (Reed Bank) 인근 GSEC101 해역에서필리핀의석유탐사를위한활동을하고있는싱가포르선적의 M/V Veritas Voyager 에게동해역은중국의영해이므로그활동을중지하고퇴거할것을요구하면서동탐사선을추적하는등탐사활동을방해한사건이다. 13) 12) Boston Global Forum, Recent Trends In the South China Sea Disputes. Report of the Boston Global Forum(June 2015), pp.22~24.
368 獨島硏究제 22 호 2011년 3월 2일에필리핀은외교서한을통하여중국의순시선들이 리드뱅크 (Reed Bank) 인근필리핀해역에서필리핀이허가한탐사선의활동을중지하고즉각퇴거하도록요구하였다는것은필리핀의주권및해양관할권을침해하는중대한행위라고항의하였다. 14) 이와같은 리드뱅크 (Reed Bank) 사건은에너지와수산자원과해양자원에관하여남중국해연안국들과의분쟁에서제한적인무력행사를하고자하는의도를파악할수있었던사건으로, 이후에필리핀은남중국해에대한중국의권리주장에대하여보다강경한노선으로돌아서기시작하였으며필리핀의군사력도적극적으로강화하기시작하였다. 15) 1999년필리핀은중국과의영유권다툼문제를해결해줄국제재판소설치를제안하였으나중국의반대로무산된바있으며, 2013년에는필리핀이일방적으로국제중재판을청구하여동사건에대한국제중재재판이시작되었다. 3. 재판경과및주요내용 1) 소의제기 필리핀은 2013년 1월 22일에해양법협약에서규정하고있는분쟁의강제적해결제도의하나인국제중재재판소 ( 이하에서는 재판소 라줄임 ) 에중국과의남중국해해양분쟁을해결해줄것을청구하였다. 필리핀이소송을제기한재판소는 1899년 국제분쟁의평화적해결에관 13) PCA, Award(July 12, 2016), para.656. 14) Note Verbale from the Department of Foreign Affairs of the Republic of Philippines to the Embassy of the People s Republic of China in Manila, No. 110526(2 March 2011). 15) Ian Storey, China and the Philippines: Implications of the Reed Bank Incident, China Brief(The Jamestown Foundation), Vol.11, No.8(16 May 2011), p.1.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69 한헤이그협약 에의해설치된상설중재재판소 (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 PCA) 인데, 1899년과 1907년의협약당사국에의해지명된재판관명부를갖추고있는것으로분쟁사건이발생하면재판관명부에서재판관을선임하여중재재판소를설치하는방식으로, 홀수로구성되는중재재판관으로구성되는합의체적법정이다. 16) 2013년 7월 11일에네덜란드헤이그에서중재재판과재판규칙을정하기위한중재재판관들의첫번째회의를개최하여, 동사건에대한재판장으로 Thomas A. Mensah( 가나 ), 재판관으로는 Jean-Pierre Cot( 프랑스 ), Stanislaw Pawlak( 폴란드 ), Alfred Soons( 네덜란드 ) 및 Rüdiger Wolfrum( 독일 ) 를지명하였다. 중국은 2013년 8월 1일자의외교서한에서동중재재판을받아들이지않으며재판과정에도참여하지않을것이라는입장을밝혔다. 17) 이와같은필리핀의재판청구는대부분의국가들이깜짝놀랐을정도로전격적인것이었으며분쟁의타당당사국인중국은제소에서판정이내려지기까지재판과정에참여하지도않았으며재판결과를받아들이지않겠다는입장을고수하여왔는데, 3년 6개월에걸쳐서많은우여곡절끝에 2016년 7월 12일에최종적으로재판소의판정이내려졌다. 2) 소송의경과 2013년 7월 11일에네덜란드헤이그에서중재재판과재판규칙을정하기위한중재재판관들의첫번째회의가개최되었는데 18), 2013년 8월 27 일자로제1차재판절차에관한명령에의거하여, 본안뿐만아니라동재 16) 이석용, 국제중재재판과도서및해양분쟁해결 사회과학연구 제13집 (2004), 117~118쪽. 17) PCA, Arbitration between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and the People s Republic of China: Arbitral Tribunal Establishes Rules of Procedure and Initial Timetable, Press Release, August 27, 2013. in http://www.pca-cpa.org.( 이하의각주에서는 PCA, Press Release( 월, 일, 년도 ) 로표시함 ). 18) PCA, Press Release(August 27, 2013).
370 獨島硏究제 22 호 판소의관할권및수리가능성에관한문제까지포함한필리핀의 提訴書 (Memorial) 를 2014년 3월 30일까지제출하도록기한을정하였다. 동재판소는재판절차규칙을채택하기이전에필리핀과중국에그초안에대한의견을요청하였다. 2014년 5월 14일 ~15일에는중재재판과재판규칙을정하기위한중재재판관들의두번째회의가개최되었는데 19), 2013년 8월 27일자의제1차재판절차에관한명령에의거하여 2014년 3월 30일에필리핀이 提訴書 (Memorial) 를제출하였고, 제1차재판절차에관한명령에의하며중국의 答辯書 (Counter-Memorial) 를 2014년 12월 15일까지제출하도록하였다. 이와관련하여중국이 2014년 5월 21일자외교서한에서필리핀이제소한동중재재판을받아들이지않을것이며동서한이재판과정에참여하는것으로간주되어서는안된다는입장을밝혔다. 2014년 12월 17일에네덜란드헤이그에서중재재판과재판규칙을정하기위한중재재판관들의세번째회의가개최되었는데, 중국이 答辯書 (Counter-Memorial) 인 2014년 12월 15일까지제출하지않고 2014년 12월 7 일에중국의입장에관한서한을발표하였다. 재판소는제3차재판절차에관한명령에서양국에게보완된서면서를요구하였으며, 필리핀은 2015년 6월 16일에보완된서면서류를재판소에보냈다. 한편, 재판소는 2014년 12월 5일에베트남이동재판절차에관한자국의입장에관한성명서를받았다. 2015년 4월 22일에중재재판소는 2015년 7월에동사건에대한관할권과관련한구두변론절차를열기로결정하였으며재판절차에관한명령제4호에의거하여재판에참여하지않은중국이발표한성명등을동재판에대한중국의항변인것으로하기로하였다. 2015년 7월 7일 ~13일에네덜란드헤이그에비공개의구두변론절차를개시하였으며,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및일본은옵서버로 19) PCA, Press Release(June 3, 2014).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71 참가하였다. 20) 2015년 7월 13일에관할권및수리가능성에관한비공개의구두변론절차를개시하였다. 21) 필리핀은외교부, 국방부, 법무부, 대법원, 법률자문가및기술전문가등 60여명의대표단이참석하였으며,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및인도대표단이옵서버로참관하였다. 중국은동구두변론절차에참여하지않는다는성명을발표한바있는데 22), 동재판소는이를중국의공식적인입장으로결정하였다. 2015년 11월 24일에본안심리에서의비공개구두변론절차가개최되었다. 23) 본구두변론절차에호주, 인도네시아,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및베트남이옵서버로참관하였으며, 구두변론절차는 2015년 11월 30일에끝내기로하였다. 재판소는 2015년 11월 30일에본안심리의비공개구두변론절차를완료하였다. 24) 구두변론절차는 2015년 11월 24일에시작되었는데, 50명으로된필리핀대표단이참석하였다. 동구두변론절차에는전문가증인으로 Professor Clive Schofield and Professor Kent Carpenter가참석하였으며, 2015 년 7월 7일 ~13일에개최된관할권및수리가능성에관한구두변론절차를마치고 2015년 10월 29일에판정을내렸다. 2016년 6월 29일에재판소는 2016년 7월 12일에최종판정을내리기로기일을정하였다. 25) 동재판에서, 호주, 인도네시아,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및베트남이옵서버로참관하였다. 영국이옵서버로참관을신청하였으며철회하였으며미국이옵서버를신청하였으나해양법협약의당사국이아 20) PCA, Press Release(July 7, 2015). 21) PCA, Press Release(July 13, 2015). 22) http://www.fmprc.gov.cn/mfa_eng/zxxx_662805/t1217147.shtml.( 방문일자 : 2016. 4. 2). 23) PCA, Press Release(November 24, 2015). 24) PCA, Press Release(November 30, 2015). 25) PCA, Press Release(June 29, 2016).
372 獨島硏究제 22 호 니라는이유로거절되었다. 3) 판정의구성및내용 재판소는만장일치로 2016년 7월 12일에동사건에대한최종판정을내렸다. 동판정은 479페이지에이르는방대한분량으로모두 10개의장, 1203개의항으로구성되어있다. 본문은 Ⅰ( 서언 ), Ⅱ( 재판경과 ), Ⅲ(RELIEF REQUESTED AND SUBMISSIONS), Ⅳ( 선결문제 ), Ⅴ( 남중국해에대한중국의역사적권리및 9단선 ), Ⅵ( 남중국해해양지형의법적지위 ), Ⅶ( 남중국해의중국활동 ), Ⅷ( 분쟁의악화 ), Ⅸ( 당사국들의향후행동 ). Ⅹ( 최종판정 ) 으로되어있다. 26) 동판정에서다루어진주요내용은다음과같다. 첫째는재판관할권에관한것으로선결문제로 재판관할권및수리가능성 에관한판정 27) 과최종판정에서다루어졌는데, 재판소는남중국해에대한역사적권리와해양권원의근거에대한재판관할권이있다고판시하였다. 28) 둘째는궐석재판에관한것이다. 재판소는필리핀과중국이모두해양법협약의당사국이므로해양법협약에서규정하는분쟁해결절차에대하여일반적으로예외가될수없으며중국이동재판에궐석하여재판소의관할권이성립하지않는것은아니라고판단하였다. 29) 셋째는남중국해에산재해있는해양지형들의법적지위에관한것이다. 재판소는해당해양지형이만조시에도바다위로나온것인지여부를평가하여, 만조시에도바다위로나온해양지형은 12해리영해를가지지 26) PCA, Award(July 12, 2016), paras.17~25. 27) PCA, Award(October 29, 2015). paras.398~412. 일부에대하여는본안심리로보류. 28) PCA, Award(July 12, 2016). paras.398~412. 29) Ibid., paras.143~144.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73 만, 만조시에도바다아래에있는해양지형은그러한해양관할권을갖지못한다고판시하였다. 30) 넷째, 재판소는중국이행한활동들에대한적법성여부에대하여판단하였다. 중국이남중국해에서필리핀의어업및석유탐사를방해하고, 인공섬의건설및중국어부들의불법한조업활동등을통하여필리핀의배타적경제수역에서필리핀의주권적권리를침해하여왔다고보았다. 31) 다섯째, 중국이해양환경에대한위해를야기하였는가의문제이다. 중국이남중국해의 7개해양지형들에대하여대규모의매립을하고인공섬을건설하였는데, 이는環礁에중대한환경적위해를초래하였으며깨지기쉬운해양생태계를보존하고보호한의무를위반하여토착종및멸종위기의종에대한고갈, 위협을초래하였다고판단하였다. 32) 여섯째, 재판소는중국이필리핀이중재재판을청구한이후에분쟁을악화시키는행동을하였다고판단하였다. 33) 마지막으로, 필리핀과중국이모두계속적으로해양법협약을준수하고 신의성실 (good faith) 로써의무를이행하며그들의행동을자제할것을지적하였다. 4. 중재판정의주요쟁점 동사건에서국제법적으로보아유의미한주요쟁점은, 재판관할권, 궐석재판, 역사적권원, 해양지형의법적지위및인공섬의건설에관련된문제들이라고보아지며, 아래에서는이들문제에대한필리핀과중국의주장, 판정내용및평가의순서로기술한다. 30) Ibid., paras.333~384. 31) Ibid., para.716. 32) Ibid., para.757. 33) Ibid., para.1181.
374 獨島硏究제 22 호 1) 재판관할권 국제법에서 관할권 (Jurisdiction) 이라함은넓은의미에서는사람의행위를관리, 지배하며각종의재산을처분하는국가의주권적권리를말하며, 좁은의미에서는국가의사법상, 재판상의권능을표현하는것으로, 34) 본글에서는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해양분쟁에관한국제중재재판소의재판관할권을의미한다. (1) 양국의주장필리핀은동사건이남중국해의수역, 해저및해양지형에관한당사국들의권리와의무가해양법협약에의해규율되는지여부, 9단선 및역사적권리에근거한중국의주장이해양법협약에위반되는지여부, 남중국해의특정해양지형이해양법협약에의해어떠한권한을부여하는것이가능한지여부, 중국이남중국해서필리핀의주권적권리를침해하는지여부에관한것이므로, 이는해양법협약에서정하는강제적분쟁해결절차에속하므로동재판소의재판관할권이있다는것이다. 필리핀은특히, 중국은해양법이인정하는권원너머의해양, 해저및하층토에대한 역사적권리 를갖지않으며, 중국이주장하는소위 9단선 내에서역사적권리를가진다는중국의주장은국제법의근거가없는것이다. 이에대하여, 중국은국제중재재판을비롯한국제재판소의관할권은해당국가들이동의하여야인정되는것이며, 국제판례 35) 에서보는바와같이이러한국가의동의는아주엄격하게해석되어야한다는것이중국의기본입장이며, 36) 그것은해양법협약의강제적관할권의밖에있다는 34) 이한기, 국제사법재판소의강제관할권 선택조항의법률적구조를중심으로한일반적고찰 -, 법학법학 ( 서울대법학연구소 ) 제 6 권제 2 호 (1964), 1964, 5 쪽. 35) Nuclear Tests(Australia v. France), 1974 ICJ Report, pp.472~473, para.47. 36) Stefan Talmon and Bing Bing Jia,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 -A Chinese Perspective-, (Oxford and Portland, Oregon, 2014), p.25.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75 것이다. 37) 중국이동사건에대한재판관할권을부정하는또하나의법적근거로중국이행한 2006년의 배제선언 을들고있는데, 중국의 2006년 배제선언 에속하는문제로서동재판소는관할권이없으며, 동재판절차에참여하지않는다는중국의입장은국제법에확고한기초를두는것이고주장하였다. 이와같은주장은중국외교부대변인의정례기자회견에서도나타나고있는데, 2012년 7월 16일의외교부성명, 2013년 4월 26일자중국외교부대변인성명, 2013년 7월 12일자중국외교부대변인의정례기자회견및 2013년 8월 29일자중국외교부조약법제국장 (Huang HuiKang) 의인터뷰에서도이와같은중국의입장을되풀이하고있다. 38) (2) 판정내용재판소가관할권의존재여부에대한판단에서전제로한것은, 관할권판단의선결문제, 분쟁의존재여부및성격, 제3국의재판참가가능성, 관할권의법적전제조건및관할권의제한및예외사유에관한것이다. 39) 첫째, 재판소는관할권판단의선결문제로필리핀과중국의해양법당사국으로서의법적지위, 중국의궐석문제, 재판절차의적정성을검토하였다. 둘째, 필리핀과중국간에분쟁이존재하는지여부와분쟁의성격에관한것이다. 셋째, 제3국의재판참가가능성여부에관한것이다. 넷째, 관할권의법적전제조건이다 37) Ibid., pp.26~27. 38)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Foreign Ministry Spokesperson Hua Chunying's Regular Press Conference(12 July, 2013) 39) PCA, Award on Jurisdiction and Admissibility(29 October 2015), paras.106~412
376 獨島硏究제 22 호 다섯째, 관할권의제한및예외사유에관한것이다. 위와같은점을먼저검토한다음에재판소는필리핀이청구한 15개사항에대하여 8개사항 (No.1, No.2, No.5, No.8, No.9, No.12, No.14, No.1 5) 40) 는선결적문제의판단에서보류를하고그결정을본안판결로미루었으며, 7개사항 (No.3, No.4, No.6, No.7, No.10, No.11, No.13) 41) 에대하여는선결적문제의판단에서재판소의관할권을인정하였다. 본안판결에서는필리핀이청구한 No.14의 (a)-(c) 와 No.15에대하여는재판소의관할권을인정하지않았으며나머지 13개의청구사항에대하여는재판소의관할권을인정하였고, 결과적으로필리핀의승소판정을내렸다. 42) (3) 평가재판소가동사건에대한재판관할권을갖는가의여부는다음과같이분류하여생각할수있을것이다. 첫째, 중재재판소가동사건에대한인적관할권을갖는가는중재재판소의설립근거가되는해양법협약에필리핀과중국이가입을하고있는가? 즉인적관할권이성립되는가의문제로어느일방이해양법협약에가입하지않거나양국이모두동협약에가입하지않는경우에는인적관할권이성립되지않기때문이다. 이와관련하여, 필리핀은 1984년 5월 8일에해양법협약에가입하였고중국은 1996년 6월 7일에가입하였으므로 43) 양국은모두해양법협약의당사국이고일응동분쟁사건에관한중재재판소의인적관할권이성립 40) Ibid., para.413 H, J. 41) Ibid., para.413 G. 42) 김원희, 필리핀과중국간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법적분석과한국에대한함의, 국제법학자대회자료집 (2016. 10. 21), 64쪽. 43) in un.org/depts/los/convention_agreements(2017년 4월 20일방문 ).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77 한다고볼수있다. 둘째, 해양법협약의당사국들간의분쟁은 해양법협약의적용및해석에관한분쟁 에해당되는경우에물적관할권이성립되는데, 44) 동분쟁이해양법협약에서정하는 해양법협약의적용및해석에관한분쟁 에해당되는경우에물적관할권이성립되는가의문제이다. 이와관련하여, 소를제기한일방당사국이동사건이해양법협약에서규정하는분쟁이라고단순히주장함으로써분쟁으로인정되는것은아니며, 마찬가지로타방당사국이동사건이해양법협약의해석및적용에관한분쟁이아니라고주장한다고해서그러한주장이인정되는것은아니다. 즉, 중재재판소로서는소를제기한당사국이선택한분쟁해결제도를고려하여해양법협약이규정하는법규칙과기준에기초한객관적인근거에따라합리적으로분쟁이존재하는지의여부를결정하므로, 45) 동분쟁이 해양법협약의해석및적용에관한분쟁 인지의여부는동중재재판소의결정 46) 에달려있다고해야할것이다. 셋째, 동분쟁을중재재판소에의해해결하는것이해양법협약에서정하는 선택선언제도 에의해인정되는가의문제이다. 해양법협약은제298 조에서관할권의선택적예외사항을포함하고있는데, 해양경계획정과관련된분쟁 또는 역사적만또는권원과관련된분쟁, 군사활동에관한분쟁 및 법집행활동 과관련된분쟁, 유엔헌장에따라안보리가수행중인임무와관련된분쟁에대하여이를강제적분쟁해결절차에서배제한다는것을서면으로선언할수있도록하고있다. 47) 해양법협약의당사국은서면선언의방법으로동부속서 Ⅶ의중재재판을포함하여열거되어있는분쟁해결수단을하나또는그이상선택할 44) 동협약제288조제1항. 45) Stefan Talmon and Bing Bing Jia, op.cit., p.30. 46) 동협약제288조제4항. 47) 동협약제298조 1항 c호의단서.
378 獨島硏究제 22 호 수있으며선택선언을하지않은분쟁당사국은부속서 Ⅶ의중재재판소에의한분쟁해결절차를수락한것으로본다. 48) 넷째, 중국이행한 배제선언 이해양법협약에서정하는분쟁의강제적해결절차의예외에해당되는가? 중국의입장은해양법협약에의하면연안국들이자국의대륙붕에서천연자원을탐사하고이용할주권적권리를가지는것이며, 이들대륙붕의해양지형들에인공도를건설하거나시설물들을설치하는것은그연안국의배타적인권리에해당되고, 더욱이인공도의건설이나시설물의설치가중국의인민해방군 (the People's Liberation Army; PLA) 이라는중국군대의활동이므로해양법협약제298조에서규정하는강제적분쟁해결절차의적용하는예외적사유에해당되므로동중재재판소의재판관할권이없다고주장한다. 이와관련하여필리핀은동사건을제소하면서 해양경계획정 이나 해역에대한권원 등 주권문제 를명백하게주장하지는않았는데, 이는해양법협약에대한중국의배제선언을무력화하여동사건이중재재판의물적관할에속한다는결론에이르기위한조치라고볼수있다. 2) 궐석재판 궐석재판 ( 闕席裁判 ) 은국제재판에서분쟁당사국의일방이출석하지아니한상태에서하는재판을말하며주로분쟁당사국의일방이동분쟁사건에대한재판소의관할권이없다는것을이유로고의로재판에불참하는것을의미한다. 동분쟁사건에서중국은필리핀과의중재재판에참여하지도않았고그판정도거부할것임을밝힌바있다. 48) 동협약제 287 조.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79 (1) 중국의입장 2013년 1월 22일필리핀은중국과의분쟁을중재재판소제소하였는데, 필리핀의제소에대하여중국은 2013년 1월 31일자, 2013년 2월 19일외교서한에서재판참여를거부하였으며, 이후부터중국은중재재판을수락하지않으며참여하지않는다는입장을견지하였는데,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해양분쟁에관한중재재판에있어서중국은지속적으로동재판에불참할것임을표명하여왔다. 특히중국은 2014년 12월 7일자의입장서 (Position Paper) 49) 에서필리핀의일방적인제소가양국의합의에위배되며해양법협약을위반한것이고국제중재재판의일반적인관행에반하는것이므로동중재판정소는재판관할권이없다고주장하였다. 2015년 10월 30일자중국외교부성명 50) 등에서중재재판소가동사건에대해관할권을가지지않는다고주장하는한편중재재판을수락하지않고참여하지않는다는입장을밝혔다. 중국이동중재재판절차에참여하지않은사유는 2016년 7월 12일에중국정부가발표한성명에서잘나타나있는데, 51) 영유권및해양경계획정에관한문제이므로해양법협약의규율대상이아니며, 필리핀의일방적인청구는분쟁해결절차와수단을자체적으로선택할수있는해양법협 49) The Position Paper of the Govern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on the Matter of Jurisdiction in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 Initiated by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7 December, 2014). in http://www.fmprc.gov.cn/ mfa_eng/ 50) Statement of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on the Award on Jurisdiction and Admissibility of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 by the Arbitral Tribunal Established at the Request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30 Ocotber, 2015) in http://www.fmprc.gov.cn/ mfa_eng/ 51) Statement of the MFA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12 July 2016(Statement of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on the Award of 12 July 2016 of the Arbitral Tribunal in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 Established at the Request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12 July 2016). in http:// www.fmprc.gov.cn/mfa_eng/.
380 獨島硏究제 22 호 약의당사국인중국의권리를침해하는것이고중국과필리핀이협상을통하여동분쟁을합의에의해해결한다는약속에위배된다는것이며, 2002년남중국해당사국들의행동선언 (2002 Declaration on the Conduct of Parties in the South China Sea; DOC) 에서국가간협상을통해관련분쟁을해결하기위한합의에위배된다는것이다. (2) 판정의내용재판소는, 불참국이충분히자국의입장이나주장을변호하지못함으로인하여불참국에게재판절차나결과가불리하게작용할수있다는점과다른한편불참으로인하여재판절차가지연될수있다는점을고려하여중국이재판에참여하지않았음에도불구하여재판절차가진행되는것이정당하다고판단하였다. 재판소는국제재판에서궐석재판이이루어진판결을검토하였는데, 2016 년필리핀과중국의중재판정, 2014년러시아와네덜란드의 Arctic Sunrise 사건 ( 중재재판 ) 52), 2013년러시아와네덜란드의 Arctic Sunrise 잠정조치신청사건 53), 1978년그리스와터키의잠정조치신청사건 54), 1974년영국과아이슬란드의잠정조치신청사건, 1973년프랑스와호주의핵실험사건 55) 등이다. 재판소는해양법협약부속서 Ⅶ의제9조에규정하는공정한재판절차, 즉궐석국의결정에의해재판절차가방해받지않도록재판참가국을보호하는동시에재판참여국이제출하는증거와주장을단순히인정하지않음으로써궐석국의권리를보호하기위한다음과같은조치들을검토 52) 이용희, Arctic Sunrise 호 사건에대한국제해양법적쟁점에관한고찰, 해양환경안전학회학술발표대회논문집 (2013), 22~25쪽. 53) Arctic Sunrise(Kingdom of the Netherlands v. Russian Federation), Provisional Measures, Order of 22 November 2013, ITLOS Reports, 2013. 54) Aegean Sea Continental Shelf(Greece v. Turkey), Judgment, ICJ Report 1978. 55) Nuclear Tests(Australia v. France), Judgment, ICJ Report 1974.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81 하였는데, 56) 궐석국인중국의권리를보호하기위한조치로재판소에대한모든의견교환및자료를검토하고, 중국이답변할수있는적정하고대등한시간을부여하고, 제반재판절차에서중국이참여하여발언토록하는등재판절차에서중국의권리를보장하기위한조치를검토하였다. 57) 또한재판소는특정문제에대하여재판소의의사결정에양분쟁당사국이설명할기회를보장하기위한다양한장치를고려하였다. 58) 재판소는재판참가국인필리핀의절차적권리또한확보하도록조치를검토하였는데, 재판절차규칙제10조에의거하여재판절차의불필요한지연, 과도한재판경비의주출을회피토록하고분쟁을공정하고효율적으로처리할것을고려하였다. 59) (3) 평가궐석재판에대한중국의기본입장은해양법협약은다루기힘든영토문제를해결하기에적합하지않은체제라는것이분명하며, 필리핀이해양법협약의규정들을일방적으로해석하고권리를남용하는경우와같이해양법협약의신뢰성과지속성이문제가되고있다고지적하는견해가있으며, 필리핀이의도적으로동사건을 해양법협약의해석및적용 과관련되는것으로포장하였으므로부당하며해양법협약을악용하여남중국해에서의도발적이고대결적인군사행동들이계산착오및사고발생을초래한다는것이다. 60) 물론, 이와같은주장은일응타당한측면이있다고보는데, 국제사회 56) PCA, Award(12 July, 2016), para.119. 57) Ibid., para.121. 58) Ibid., para.124. 59) Ibid., para.123. 60) Xiaoqin Shi, UNCLOS and China s Claim in the South China Sea, Indo-Pacific Strategic Papers(Center for Defence and Strategic Studies, Australian Defence College)(October 2015), p.4.
382 獨島硏究제 22 호 는국가들의주권평등을기초로형성된사회로서국제관계의거의대부분에서국가의동의는필수적인요소로볼수있다. 일반적으로국제재판도관계국가의동의에입각하는데, 이는주권적국가가같은지위에서병존하는국제사회에서해당국가의동의없이관할권을행사할수는없는것이다. 61) 그러나, 국제재판에서분쟁당사국의 동의 는이를세분화하여검토해야한다. 즉특정분쟁의국제재판에대한국가의 동의 는소송자체에분쟁당사국들이 동의 ( 합의 ) 할수있고, 소를제기하기이전이나이후에국가의 동의 가있는것으로볼수있는경우가있다. 소를제기하기이전에국가의 동의 가있는것으로볼수있는경우는재판조항이나재판조약에그국가가 동의 한경우이고, 소송을제기한후에타당이그소송에 동의 한것으로그국가가일방이제기한소송에자발적으로참여하는경우를말한다. 동분쟁사건에서재판소는중국의재판절차에서의권리를보장하기위하여동중재재판소에대한모든의견교환및자료를검토하였고, 필리핀이제출한서한에중국이답변할수있는적정하고대등한시간을부여하고, 제반절차에중국이참여하여발언토록하는등의공평한기회를부여하였다. 한편, 재판소는필리핀의절차적권리또한확보하도록조치를취하였으며, 궐석으로인하여재판절차가지연되는것을방지하기위하여불필요한재판의지연및과도한재판경비를회피토록하고분쟁을공정하고효율적으로처리하였다고본다. 이상에서본바와같이, 동분쟁사건에서재판소는중재재판의일반적인관행과분쟁의평화적해결을촉진하기위한해양법협약의목적과의도를고려하면서도영유권문제를회피하면서재판절차의공정성을최대한확보하였다고평가할수있다. 61) 이한기, 앞의논문, 7 쪽.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83 3) 역사적권원 (1) 양국의주장필리핀은청구번호 1번에서남중국해에대하여필리핀뿐만아니라중국의남중국해권원도해양법협약이명백하게허용하는범위를넘을수없으며, 중국이주장하는소위 9단선 내의남중국해해역에대하여 역사적권리 를가진다고주권적권리를주장하는것은협약을위배하는것이며, 협약이명백하게허용하는범위를지리적이나실질적으로넘어서는주장으로그법적효력이없다는것이다. 62) 중국의주장은그동안중국이발표한성명서, 외교서한등에서그내용을알아볼수있다. 중국은자국이주장하는 9단선 이오랜역사를가진권리라고주장하는데, 63) 중국은 1948년에소위 11단선 이나타낸지도를간행하였으며, 1958년에는 12해리의영해와남사군도를포함한일정한도서들에기점을부여하는중국의 영해법 이발표되었다. 64) 1947년에들어중국은남중국해의도서들에대한이름을다시정리하여 남중국해지리지 (The Location Map of the South China Sea Islands) 를발간하였는데, 이지도에서는 11단선 으로동사군도, 서사군도, 남사군도및 Macclesfield Bank가포함되어있었다. 65) 중국이주장하는 9단선 이국제사회에처음으로공식화된것은 2009년 5월 7일자중국의외교서한 (Note Verbale) 에소위 9단선 지도를첨부하여것이다. 중국은남중국해의 9단선 내에대한주권, 권리및관할권은풍부한 62) PCA, Award(July 12, 2016), para.169, para.188, para.191. 63) Ibid., para.186. 64) Melda Malek, A legal assessment of China s historic claims in the South China Sea, Australian Journal of Maritime and Ocean Affairs, Vol.5, No.1(2013), p.29. 65) Ibid., p.30.
384 獨島硏究제 22 호 역사적및법적증거에의해증명된다고주장하였다. 66) (2) 판정의내용재판소는동판정에서는필리핀이청구한청구번호 1번 ( 중국이주장하는남중국해에대한역사적권원이해양법협약에의거한것인지 ) 과 2번 ( 중국이주장하는 9단선 내에대한중국의역사적권원의효력이있는지 ) 을제4장에서합쳐서심리하였다. 재판소는중국이재판과정에참여하지않은관계로분쟁사국인중국으로부터직접관련자료를제출받지는않았고, 중국은그동안 9단선 의기원이나법적근거에대하여공식적인설명을하지않고있다. 67) 동사건에서재판소는중국의국내법령, 선언, 그동안의행동들로부터중국의주장및입장을도출하였는바, 재판소는중국의남중국해에대한역사적권원을살피기위하여우선중국의해양에대한권원에관련한선언및법령을검토하였다. 재판소가검토한것은, 1930년대중국의 3해리영해법제, 1958년 9월 4 일에중국 ( 그당시중공 ) 의 영해선언, 1992년 2월 25일의 배타적경제수역및대륙붕법, 1996년 6월 7일의해양법협약에대한비준, 1998년 6월 26일의중국의배타적경제수역및대륙붕의범위를규정한 배타적경제수역및대륙붕법 의발효등이다. 중국은 배타적경제수역및대륙붕법 에서 육지의자연연장 원칙에의거하여대륙붕의범위를정하되對向하거나인접한국가간에권리주장이중복되는수역은그국가와합의에의해결정한다고하였다. 다만, 동법에서중국이과거로부터향유하는권리는영향을받지않는다고규정하였다. 68) 66) PCA, Award(July 12, 2016), para.185. 67) Melda Malek, op. cit., p.28. 68) 동법제 14 조.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85 재판소는우선중국이필리핀의청구 1, 2에대하여중국의모호한입장을취하였으며, 중국이결코역사적권리의본질및그범위를명백하여설명한적이없다고보았다. 69) 해양법협약이성립하기이전에남중국해는모든국가들이자유롭게항해하며조업할수있었던 공해 (high sea) 이었다고판단하였는데, 재판소는중국이역사적으로남중국해에서행해온항해및조업활동은 역사적권리 가아니라 공해의자유 에해당되는활동들이며, 중국이남중국해를배타적으로지해하여왔거나다른국가들의해양자원이용을금지한것으로보이지않는다고판단하였다. 재판소는비록중국의항해자나어부들이다른국가들의그것과같이남중국해의섬들을역사적으로이용하였다하더라도, 중국이역사적으로그해역이나해양자원들을배타적으로이용하여왔다는증거는없다고판단하였으며, 결론적으로동재판소는중국이주장하는 9단선 내에서해양자원에대한역사적권리를주장하는것은법적근거가없다고결론지었다. (3) 평가육지영토나도서의영유권귀속에관한문제는결국국가의경계에관한문제로, 국가경계는국가주권이특정한영토에귀속되는것으로각기구분되는장소를의미하며그에따라국민, 영토, 국가기관의귀속이결정되는기초가된다. 70) 국제법의영토취득이론에의하면영토의취득방법은발견 (Discovery), 실효적지배 (Effective control), 승계 (Cession), 선점 (Pre occupation), 시효 (Prescription), 할양 (Cession), 매매 (Purchase), 첨부 (Accession, Accretion), 정복 (Conquest, Subjugation) 등이있는데, 71) 이러한영토취득이 69) PCA, Award(July 12, 2016), para.180. 70) Alison Kesby, The shifting and multiple border and International Law, Oxford Journal of Legal Studies, (Spring, 2007), pp.110~111.
386 獨島硏究제 22 호 론은영유권분쟁에있어서그권원을찾아서영유권이어느국가에게귀속되는가를결정하는경우에매우중요한역할을한다. 72) 남중국해의도서나여러해양지형들대한영유권이어느국가에게있는가에관한다툼은국제법에의하여어느국가가정당한 權原 을가지고있는가, 어느국가가해당영토에대하여자국의주권을실질적으로행사하여왔는가에의하여해당영토에대한영유권귀속의문제가해결될것이다. 일반적으로, 일정한영토에대하여어느국가가자국의주권을실질적으로행사하여영유권을확립하였다는것은그국가가해당영역에대해평화적이고충분하게, 또한계속적으로국가주권을행사하는것을의미하는데, 73) 분쟁당사국들이어느시기에서어느시기에까지실질적으로지배를행해왔는가에관한시기의문제가있다. 이러한시기는영토분쟁에서그러한분쟁이 결정화 된시점, 즉 결정적기일 (Critical Date) 을기준으로그시점이전에서행해진국가행위만을검토하게된다. 중국은남중국해의거의전체지역에서산호초등의지형에대해자국의영유권을주장하고있는데, 1948년에중화민국의내무부에서발간한책자에서최초로 11단선 이등장하였는데, 1953년에발간된지도에는통킹만의 2개선이삭제되어 9단선 으로되었다. 중국은소위 남해구단선 내에위치한남중국해의 70% 인 194만평방킬로미터의해역및이해역의해저지형에대한 주권 및 주권적권리 를주장하고있는데, 9단선' 의의미를명확하게설명하지않고있다. 중국은 2009년 5월 7일유엔사무총장에게보낸서신에서처음으로 9단 71) Andrew Clapham, Brierly's Law of Nations(Oxford University Press, 2012), p.169. 72) Benjamin K. Sibbett, Tokdo or Takeshima? The Territorial dispute between Japan and the Republic of Korea, Fordham International Law Journal, Vol.21(April 1998), pp.1621~1624. 73) Island of Palmas case(the Netherlands vs. United States), Reports of International Arbitral Award (RIAA) Vol.Ⅱ(1928), p.867.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87 선 을공식적으로언급하였는데, 이외교서한에서중국은지도에서첨부한남중국해 9단선 내의도서에대하여다툴수없는영유권을가지며그러한도서들의해저및하상토뿐만아니라인근해역에대한관할권을가지고있다는것을주장하였다. 74) 즉, 9단선 내에존재하는모든해역, 모든해저및모든산호초등에대하여중국의주권 ( 주권적권리 ) 이미치는지역이라는것이다. 중국은 9단선 을남중국해에그어진전통적인해양경계선이라고하지만, 왜이런선을그려야하는지, 어떤목적으로선을그려야했는지에대한설명이없으며, 중국정부도공식적인입장도아직이에대한권리주장을포기하지않고있다. 75) 중국이 1947년및 1948년에 11단선 이나타나있는지도를간행한것에대하여국제사회에적절하게고지를하였는가도의문이며, 어떻게지도가그려졌는지가분명하지않으며지도로서인정받기위한측지기준도없고, 단선으로되어있는데그러한연결선이없는해역은어떻게설명할것인지, 또한그동안중국은 9단선 의법적의미와본질에대하여공식적으로설명한바도없으며 76) 미국국무성에서검토한바에의하면, 중국자신이주장하는 1947년의 11단선 과 2009년의 9단선 이서로일치하지도않는다. 이와같이볼때에, 중국이남중국해에대하여권리를주장하는근거가중국이제시하는옛날기록들이불완전한것이어서정기적점유나국가주권을시현하여왔다는객관적이고설득력있는증거를제공하지못하고있는것이다. 74) CML/17/2009, New York, 7 May 2009. 75) Zou Keyuan, South China Sea Studies in China: Achievements, Constraints and prospects, Singapore Year Book of International Law and Contributors, Vol.11(2007), pp.88~89. 76) Melda Malek, op. cit., p.30.
388 獨島硏究제 22 호 4) 해양지형의법적지위 (1) 양국의주장남사군도의해양지형들에대하여각국이점거를시작한것은 1946년에대만이 태평도 (Itu Aba) 에기지를건설하고 10년후에동섬을점거한것이최초이고, 1970년대에베트남, 필리핀과말레이시아가다수의해양지형들을점거하였으며, 1988년에중국이가장마지막으로남사군도의해양지형들을점거하기시작하였다. 77) 필리핀은중국아점거하고있는남중국해의여러해양지형들은그자체의배타적경제수역이나대륙붕을가지는 섬 에해당되지않는다고한다. 오히려해양법협약제121조제3항의 바위섬 이거나 低潮高地 이거나썰물시에도바다아래에있는해저지형에해당한다. 78) 따라서, 어느것도영해 12해리를넘어선권원을주장할수없으며, 어떤지형들은영해를포함한어떤권원도가질수없는것이다. 최근에중국이이들해양지형들에행하는대규모의매립활동들이이들해양지형들의원래의본질및특징을변경할수없다는것이다. 한편, 필리핀에의하면해양법협약에의한해양지형들의지위와이들이해양권원을가질수있는가의문제를위하여그해양지형에대하여어느국가가주권을가지는가를먼저결정하여야하는것은아니라는것이다. 그러므로재판소는필리핀의청구를심리하는때에주권에관한것을고려할필요는없으며그해양지형이어느국가에속하는지는관계없이그법적지위만을고려해야한다고주장하였다. 79) 77) Mira Rapp-Hooper, China Responds to Reclamation Reports (26 February 2015), p.1. in https://amti.csis.org. 78) PCA, Award(July 12, 2016), para.292. 79) Ibid., paras.293~295.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89 (2) 판정의내용재판소는먼저중국이권리를주장하는해당礁해를모두검토하여만조시에도바위위로나온것인지를평가하였다. 80) 만조시에도바다위로나온해양지형은 12해리영해를가지지만, 만조시에도바다아래에있는해양지형은그러한해양관할권을갖지못한다. 동재판소는이들암초들이매립과축조를통하여그형상이크게변한것에주목하며, 해양법협약이해양지형의자연적조건과역사적자료에의거하여해양지형들을분류하는것을상기하였다. 해양법협약은그제121조제1항에해당되는 섬 에대하여는배타적경제수역및대륙붕을가지며, 그제3항에해당되는 인간이계속거주할수없고자체의경제생활을영위할수없는 바위섬 은배타적경제수역과대륙붕을갖지못한다. 재판소는해양법협약의이들규정이해양지형의객관적인크기, 자연적조건, 안정적인인간공동체나경제활동의여부에달려있으며그해양자원이나자연에서추출할수있는정도에달려있는것은아니라고결론지었다. 재판소는현재많은해양지형들이공무원들이거주하고있는것은외부로부터지원을받는것이며그해양지형의수용능력을반영하는것은아니라고보았다. 재판소는역사적증거로남사군도는역사적으로여러작은그룹의어부들이이용하여왔으며일본의수산업회사및구아노채취회사가있었는데, 그러한과도기적인해양의이용은인간공동체가안정적으로살았다거나역사적으로경제활동이이루어졌다고볼수없다고보았다. 따라서, 재판소는남사군도의어떠한섬이나남사군도전체도확장된해양관할권을가질수없다고결론지었다. 80) Ibid., paras.284~290, paras.334~384.
390 獨島硏究제 22 호 (3) 평가해양지형의법적지위를검토하기위하여는해양법협약에서규정하는섬에대한정의와조건을살펴보아야하는바, 배타적경제수역이나대륙붕을가지기위한 섬 에해당되기위하여는 자연적으로형성된것, 육지지역일것, 만조시에바다위로노출된것 의조건을충족하여야한다. 81) 남중국해의연안국들이점거하고있는해양지형들은인공적인매립이전의해양지형들의자연적조건, 지리적및수리학적특징들은그들이 바위섬 이나간조시에만바다위로드러나는 여 ( 礖 ) 또는간조시에도바다아래에있는 海底高地 에해당되므로, 해양법협약의규정에의하여그자체에대하여배타적경제수역이나대륙붕을가질수없다. 뿐만아니라, 중국을포함한이들연안국들은자국이점거하고있는해양지형들에영해를선포하고 통항의자유 나 상공비행의자유 를제한, 금지하고있는데, 이는공해에해당되는남중국해를여러국가들이국제법이허용하는권리를불법적으로제한, 금지하고있으므로이역시국제법에위배되는것이다. 동사건에서해양지형들의법적지위를논리하는과정에서남중국해의여러해양지형들에대한전문가의의견, 여러사료나자료등을검토하여볼때에그어느것도오랜동안사람들이거주하여왔다거나그자체의경제생활을영위하여온적이없다는점을들어가장큰섬인 太平島 (Itu Aba Island) 를포함한모든해양지형들이그자체의배타적경제수역이나대륙붕을가질수있는 섬 에해당되지않는다고하였다. 재판소가남중국해에서가장큰섬이면서비교적많은사람들이거주하는태평도도배타적경제수역이나대륙붕을가질수없는섬 ( 해양법협약제121조제2항 ) 이나바위섬 ( 해양법협약제121조제3항 ) 으로보지않고단순한해양지형 ( 저조고조 ) 으로판단했다는것은해양법협약이섬의크 81) 이석용, 남중국해중재판정의국제해양법상도서제도에대한영향, 영토해양연구 Vol.12(2016), 114~117쪽.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91 기나인구의거주등에관한명백한기준이없으므로이를통일적으로판단하기위한고육지책으로보인다. 5) 인공섬의건설 중국은 2013년 10월부터남사군도의 7개해양지형에인공섬을건설하기시작함으로써주변국을비롯한미국과첨예한갈등이시작되었다. 82) (1) 양국의주장필리핀은동재판에서수리학전문가, 여러위성사진및영상사진을동원하여중국이건설하였거나건설중인인공섬의현황및형상에대하여설명하였다. 이에의하면, 중국은스카보러沙洲 (Scarbough Shoal) 북서부지역에있는존슨礁 (Johnson Reef, Chigua Jiao, Mabini Reef), 쿠아르테론礁 (Cuarteron Reef, Huayang Jiao, Calderon Reef), 피에리크로스礁 (Fiery Cross Reef, Yongshu Jiao, Kagitingan Reef) 등만조에수면위에일부가드러나는礁에대하여중국은인공적으로보강하여군용기가이착륙할수있는군용비행장, 군사용안테나, 접안시설, 군사요새등을건설하였고 83), 이러한행위들은해양환경에대하여심각한훼손을가한다고주장한다. 필리핀은남중국해에서필리핀의배타적경제수역을포함한環礁 (coral reefs) 에대한매립, 파괴적이고해로운조업행위및멸종위기에처한종의포획등으로그지역의해양환경을돌이킬수없도록피해를입혀온것은해양법협약을위배한것이라고주장하였다. 82) 구자선, 남중국해인공섬관련갈등분석, 주요국제문제분석 No. 2015-22 (2015. 8. 20), 1쪽. 83) Robert Beckman, The UN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 and the Maritime disputes in the South China Sea, 107 American Journal of International Law(January 2013), pp.143~144.
392 獨島硏究제 22 호 (2) 판정의내용재판소는이들해양지형들에대하여수리학전문가, 아시아해양투명성구상센터 (The Asia Maritime Transparency Initiative) 가연구한남중국해해양지형들에대한조사결과를바탕으로중국이행해온인공섬건설을다음과같이정리하였다. 중국이수비礁 ( 영어는 Subi Reef, 중국은 Zhubi Dao( 渚碧礁 ), 베트남은 Đá Xu Bi, 필리핀은 Zamora 라고부름 ) 를 1988년부터점거하고있으며 2014년까지대규모의매립을하여남사군도에서두번째로큰활주로를건설하였다. 84) 미시프礁 ( 영어로 Mischief Reef, 중국은 Meiji Jiao( 美济礁 ), 베트남은 Đá Vành Khăn, 필리핀은 Panganiban reef라고부름 ) 는필리핀의팔라완으로부터 129해리떨어져있는데, 매립을통하여미시프礁의입구를넓히고해군기지를건설하고있다. 85) 존슨礁 ( 영어로 Johnson Reef, 중국은 Chigua Jiao( 赤瓜礁 ), 베트남은 Đá Gạc Ma, 필리핀은 Mabini Reef라고부름 ) 는남사군도의유니온뱅크 (the Union Banks) 에 2014년초부터매립을하기시작하여작은규모의비행장과여러시설을짓고있다. 86) 허거스礁 ( 영어는 Hughes Reef, 중국은 Dongmen( 东门礁 ), 베트남은 Đá Tư Nghĩa라고부름 ) 는존슨礁와같이남사군도의유니온뱅크 (the Union Banks) 안에위치하다. 중국은 2014년에콘크리트방벽을쌓고방공타워등여러시설을짓고있다. 87) 가븐礁 ( 영어는 Gaven Reefs, 중국은 Nanxun Jiao( 南薰礁 ), 베트남은 Đá 84) Jingya, Mei, China installed radar on Zhubi Reef: Philippine media. Sina English News(2012. 7. 19). 85) China's New Spratly Island Defenses,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2016. 12. 13). 86) China fishing fleet arrives in Spratlys, Philippine Inquirer(2012. 7. 17). 87) China's New Spratly Island Defenses. op. cit..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93 Ga Ven, 필리핀은 Burgos Reefs라고부름 ) 는남사군도의티자아드뱅크 (the Tizard Banks) 에속하는것으로중국이 2014년부터매립을하여방공타워등여러시설을짓고있다. 88) 피어리크로스礁 ( 영어는 Fiery Cross Reef, 중국은 Yongshu Reef( 永暑礁 ), 베트남은 Đá Chữ Thập, 필리핀은 Kagitingan Reef라고부름 ) 는중국이점거하고있는남사군도의해양지형인데, 2014년 8월에매립하기시작하여 3,000미터가넘는활주로와부두시설등대규모의매립공사를하고있다. 89) 쿠아르테른礁 ( 영어는 Cuarteron Reef, 중국은 Huayang Jiao( 华阳礁 ), 베트남은 Bãi Châu Viên, 필리핀은 Calderon Reef라고부름 ) 는남사군도의런던環礁내에위치하고있으며, 중국은복합구조물과헬리콥터이착륙장, 군사시설및인공위성안테나등의시설을짓고있다. 90) 특히, 남중국해에서대규모의매립이이루어지고있는곳중에서심각한환경피해가우려되는해역이대규모의매립이행해지고있는해역인, 피어리크로서礁 (Fiery Cross Reef), 휴거스礁 (Hughes Reef), 피시프礁 (Mischief Reef), 수비礁 (Subi Reef), 쿠아르테론礁 (Cuarteron Reef), 가븐礁 (Gaven Reef), 南존슨礁 (Johnson South Reef) 등인데, 91) 재판소도거의같은의견으로이들해양지형들의해양환경에대한 돌이킬수없는 위험이있다는것을인정하였다. 최근에중국이남중국해의 7개해양지형들에대하여대규모의매립을하고인공섬을건설하였는데, 특히깨지기쉬운해양생태계를지닌環礁주변해역에중대한환경적위해를초래하였으며보존하고보호한의무를위반하여토착종및멸종위기의종에대한고갈, 위협을초래하였다고판 88) Gaven Reefs Tracker, in https://amti.csis.org/gaven-reefs/. 89) Fiery Cross Reef Tracker, in https://amti.csis.org/fiery-cross-reef/. 90) Cuarteron Cross Reef Tracker, in https://amti.csis.org/cuarteron-reef/. 91) Youna Lyons and Wong Hiu Fung, South China Sea: Turning Reefs into Artificial Islands?, RSIS Commentary, No.104(30 April 2015), p.1.
394 獨島硏究제 22 호 시하였다. 또한, 재판소는중국당국이자국어부들이멸종위기에처한바다거불, 산호초및자이언트대합을실질적인대규모로어획하는것은알고서도이를저지하지않았다점을인정하였다. 92) (3) 평가남중국해의해양지형물은그형상이서로다르고국제해양법적인지위나효력이차이가나지만, 그러한해양지형들에대하여건설장비를통원하여인위적으로매립하는방법은거의비슷하다. 즉, 우선적으로해양지형의둘레에콘크리트방벽을쌓은후에준설토를부어서수분을뺀다음, 쇠파일을박거나바위등으로바닥층을다시안정화하는방법이다. 또연안국들이건설한인공섬에는활주로, 레이더안테나, 대공요새기타군사시설및이들을지원하는인력들이거주할수있는복합시설및부두를건설하는것이보통이다. 남중국해에서의환경피해는 1980년대말까지만하더라도이전의군사시설을건설, 파괴적인조업방법등에의해발생되었다고하지만그러한피해는미미한것에그쳤고전체적인환경피해를초래한것은아니었다. 1990년대이후에발생한대규모의매립으로인하여해당해양지형뿐만아니라인근해역으로부터수십 km에이르기까지, 해당해역의하층토에까지피해를초래하고있다. 즉, 인공섬에서발생하는토사나부유물로인하여얕은해역의해초 ( 海草 ) 가죽어가고있으며海底山 (Seamount) 이토사물로덮혀져그고유한생태학적기능이떨어짐으로인하여해양생태계의파괴가심각하게드러나고있다. 93) 이와같이볼때에, 중국이점거하고있는남사군도의해양지형들에인공섬을건설하고있는것에대한법적평가는다음과같다. 첫째, 중국의인공섬건설이이들해양지형들에대하여중국이주장하 92) PCA, Award(July 12, 2016), para.649. 93) Youna Lyons and Wong Hiu Fung, op, cit., p.2.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95 고있는영유권을강화하는것은아니라는것이다. 94) 둘째, 해저산 에해당되는것에인공섬을건설한다고하여그것이해양법협약에서규정하는 섬 으로그법적지위가변경되는것은아니다. 왜냐하면해양법협약이규정하는 섬 은 밀물때에도사방이바닷물로둘러싸인 것이어야하기때문이다. 셋째, 해양법협약에규정하는 바위섬 에인공섬을건설한다고하여그것이해양법협약에서인근해역에배타적경제수역이나대륙붕을인정하는 섬 으로그법적지위가변경되는것은아니다. 왜냐하면해양법협약이규정하는 섬 은 자연적으로형성된 것이어야하기때문이다. 넷째, 중국이대규모의인공섬을건설하는것은돌이킬수없는환경파과를초래하므로해양법협약이나기타환경보호에관한국제규범을위반하는것이다. 다섯째, 중국이남사군도에서인공섬을건설하는해역은필리핀이나베트남등인근국가가권리를주장하는해역과중복되는해역이므로아직해양경계획정이해결되지않은상태에서일방적으로인공섬을건설하는것은부당하고불합리한행위라고볼수있다. 여섯째, 중국이남사군도에인공섬을건설하고군사시설이나요새를구축하는것은인근연안국들에대한위협을야기하여남중국해의해양안보질서를흔들어지역 안보에중대한위험요인으로작용하게될것이다. 일곱째, 중국이남사군도에인공섬을건설하고군사시설이나요새를구축하는것은항해하는선박들의자유항해를방해하여국제해양항로를위태롭게하므로전통적으로인정되어온 항행의자유 를침해하는것이다. 마지막으로, 중국이인공섬의건설이군사적목적이아니라고하면서 94) Robert Beckman, "Large-Scale Reclamation Projects in the South China Sea: China and International Law", RSIS Commentary, No.213(29 October 2014), pp.1~2.
396 獨島硏究제 22 호 도군사시설이나요새를구축하고인공섬건설과관련된정확한정보를인근국가들에게고지하지않은것은 신의성실 에위배되는부당한행위라고볼수있다. 5. 결어 필리핀이중국을상대로해양법협약이규정및동부속서 Ⅶ에근거하여동사건을국제상설중재재판소에제소한것에대하여일반국제사회뿐만아니라국제법을연구하는학자및연구자들에게주목받는사건이었으며, 동사건이주로중국의 역사적권리 및 9단선 에관한것이어서 영토주권 의문제와밀접하게관련되므로처음에는과연재판소가동사건에대한재판관할권을인정할것인가가관심이었던것이다. 판정의결과는일부주권문제와관련이있는사안을제외하고는동사건에대하여재판소의관할권이있다는것과중국이주장하는남중국해에대한 역사적권리 와 9단선 에대한객관적인증거가없다고그권리주장을부정하였다. 아래에서는, 위에서논의한바를기초로동판정이가지는쟁점별의미와특히우리나라와관련되는문제를다음과같이정리할수있다. 첫째, 동사건이지닌주권문제와의관련성에도불구하고재판소는동사건에대한재판관할권이있다고인정한점이라고생각된다. 재판관할권의근거로재판소는중국이주장하는해양자원에대한역사적권리주장과해양법협약이규정하는권리와해역을세부적으로국가들에게분배하고자하는규정들인해양관할권제도와양립할수없으며, 오히려해양법협약이어떠한권리주장보다도우월하다고판단한것에근거하고있다. 동판정의결과는우리의 독도문제 에도많은시사점을보여준다고생각하는바, 독도주변의해양과학조사, 독도인근해역의해저지명, 동해중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397 간수역에서의어업자원관리, 독도주변의해양환경보호등의문제에대하여일본이소송을제기하면서그선결문제로독도의영유권귀속문제를청구하는경우를생각할수있을것이므로, 95) 우리나라도동중재판정의원인, 전개과정, 판정결과, 앞으로의영향및대응방안등입체적이고체계적인대비를해야한다고본다. 둘째, 재판소는중국이남중국해에대한역사적권리를가지는가를결정할수있는역사적기록들을검토하였는데, 재판소는다른국가들의그것과같이남중국해를역사적으로이용해온중국의항해자들이나어부들에관한증거가있으나, 그것들이남중국해의도서들에대한주권문제를결정할수있을정도로강력한증거력을가진것은아니라고판단하였다. 이러한판정의결과도역시우리의 독도문제 에도많은시사점을보여준다고생각하는바, 앞으로우리는객관적인기준에근거하여독도에관한자료및사료를수집, 연구, 분석하고우리의주장논리, 일본의반응및그에대한대응논리등을장기적으로, 체계적으로준비해야한다고본다. 셋째, 동사건에서해양지형들의법적지위를전문가의의견, 여러사료나자료등을검토하여오랜동안사람들이거주하여왔다거나그자체의경제생활을영위하여온적이있는지에관한사료나자료를검토하고, 이들해양지형들의자연적조건들을토대로남중국해의모든해양지형들이그자체의배타적경제수역이나대륙붕을가질수있는해양법협약제 121조제1항의 섬 에해당되지않는다고하였다. 이와같은재판소의판단은, 우리나라의 독도문제 및 이어도 대하여시사점을준다고본다. 우리나라는그동안일본과한일어업협정을체결하면서일본과의동해해양경계를 중간선원칙 에의하여획정하되그기준점을울릉도로함으로써결과적으로독도를 바위섬 으로인정한듯한느낌을주고있다. 물론, 한일어업협정이나동협정에서나타난양국의기본입장이양국의 종국적인해양경계획정 과는관계가없으므로당장은 95) 정갑용, 독도문제에관한국제법적쟁점연구, 경인문화사 (2011), 78~79 쪽.
398 獨島硏究제 22 호 문제가없다고본다. 앞으로일본과동해의해양경계획정을하는경우에과연독도를 바위섬 으로인정할것인가에관한문제는여러시나리오를만들어우리나라의국익이최대한확보될수있는방안을다시검토해야할것이다. 한편, 우리나라는 이어도 에대하여 중간선원칙 을주장하여인근해역이우리나라에속하지만그자체에대한해양관할권을주장한적이없으며다만 해양과학기지 만을두고있을뿐이다. 이에대하여, 중국은 육지의자연연장원칙 을기준으로이주변해역이자국에속한다고주장한다. 96) 중국이주장하는 육지의자연연장원칙 은이어도인근해역의대륙붕에관한중국의관심을나타내는것이고앞으로인근해역에서중요한해양자원이발견된다면중국이 육지의자연연장원칙 을근거로전적으로중국의권리가있다거나, 적어도 공동개발 을주장할것이므로, 이에대한경우를대비해야한다고본다. 넷째, 동사건에서인공도와그해양환경에대한피해에관한것으로해양지형의법적지위는해양법협약의관련규정에의해판단해야하며, 인공섬을건설하면서해양생태계에피해를주지않아야한다는것이다. 일본은남태평양에있는아주조그만암초인 오끼노도리시마 에컨크리트방벽을쌓고그주변해역에영해및배타적경제수역을주장하고있는데, 97) 동판정을근거로일본이아주조그만암초인 오끼노도리시마 에영해및배타적경제수역을주장하는것을배척할수있고, 일본에대하여깨뜨려지기쉬운태평양의環礁에대하여 돌이킬수없는 해양생태계의파괴행위를방지하도록주장할수있는객관적이며법적인근거가될것이다. 96) 이어도 in wikepedia.org( 검색 ; 2017. 4. 15). 97) 이끼노도리시마 in wikepedia.org( 검색 ; 2017.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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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403 <Abstract> A Study on Legal Issues of the Award of PCA between Philippines and China Gap-Yong Jung The dispute between the Philippines and China began for the huge amounts of oil and natural gas were found buried in the South China Sea, especially Reed Bank and its adjacent waters. The Philippines filed a lawsuit against China in 2013 with the International 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 on the basis of the provisions of the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 and its Annex VII, and a final award was reached on July 12 2016. The meaning of the issues in question are as follows; First, the Court found that the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 was superior to any claim of rights. As a matter of court jurisdiction, China insisted that it should be decided to exclude it from the jurisdiction and denied the jurisdiction of the dispute and did not attend the arbitration trial. In China's view, this dispute with the Philippines is on the issue of national sovereignty over the South China Sea and is not a "dispute on the application and interpretation of the Convention" set by the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 However, the Court pointed out that the dispute is not a matter of the claim of the sovereignty of the South China Sea on the basis of the claims of the
404 獨島硏究제 22 호 Philippines, and that the claims of China and other countries are duplicated and overlapped. In this reason, the Court decided that this dispute is a matter of interpretation and application of the legal status of the islands, the exclusive economic zone and the continental shelf, which are prescribed by the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 so that the jurisdiction on this dispute is recognized in the claims of the Philippines. Second, China insists on the historic titles on the South China Sea as a basis for the claim that the dispute is related to national sovereignty and claims that the area within the so called "9 line" is China's historic waters and have 'indisputable right'. The Court found that China had no strong evidence to determine the issue of sovereignty over its claim to the historical rights on the South China Sea. Third, As regards the legal status of the maritime features of the South China Sea. The Court said that the maritime features of the disputed waters, as provided for by the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 falls under the sea(low tide elevation), could not have its own exclusive economic zone or continental shelf. Fourth, With regards the construction and reclamation of artificial islands in the South China Sea, the Court concludes that, according to the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 and the International Law, the construction of artificial islands in the South China Sea is acceptable but should not cause harm to neighboring countries and should not pose a serious threat to marine ecosystems. This award of PCA, especially in relation to the jurisdiction of the jurisdiction, historic titles or rights, the legal status of the marine features, the construction of the artificial island, there are a great deal of legal and policy implications on the problem of Dokdo Issues in Korea.
필리핀과중국의남중국해국제중재판정의주요쟁점 405 Key words: South China Sea Dispute, 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 1982 UNCLOS, Jurisdiction, Nine dashed Line, Dispute Settlement System 이논문은 2017 년 5월 25일에투고하여 2017 년 6월 3~25 일에심사하여 2016 년 6월 26일에게재 결정됨
자료소개
409 자료소개 해방이후울릉도 독도조사및사건관련자료소개 1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 1)2)3) 해제 : 이태우 ** 자료전사 윤문 : 김은령 김도은 *** < 해제 >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1952 년, 내무부 ) 1. 문서의성격과내용이문서는 1952년내무부보존기록물로, 1948년미군비행기의독도폭격사건당시어민들의피해상황및대책관련보고서이다. 그러나내무부기록물로보존되어있지만울릉도 독도를관할하는경상북도가작성한 1948년 1차독도폭격사건의전말을외무부장관에게보고한것으로되어 *** 이자료는국가기록원보존자료 ( 관리번호 : BA0182403-2-1) 이다. 자료제공과이용에많은도움을준국가기록원에감사드린다. 이자료는인터넷사이트 http://terms. naver.com/entry.nhn?docid=3342958&cid=57618&categoryid=58159 [ 네이버지식백과 (2017.6.9. 검색 )]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1952년, 내무부 ) 에서도검색가능하지만, 화질이낮고한자어로작성되어있어자료의학술적이용과일반인의해독에제약이따른다. 이에 1 자료원문 2 1차전사문 3 현대한국어윤문의과정을거쳐독자의가독성을최대한높일수있도록했다. ***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연구교수 *** 영남대학교독도연구소연구원
410 獨島硏究제 22 호 있다. 표지를보면경상북도에서이문서를기안하여보고한날짜가 1952 년 9월 20일로되어있음을알수있다. 이날짜는 1952년 9월 15일미군에의한제2차독도폭격사건이일어난지 5일후이다. 즉 1차폭격사건에이어서 2차폭격사건이발생하자중앙행정부처인외무부와내무부가이에대응하기위하여독도를관할하고있는경상북도에 1차독도폭격사건의전말을보고하도록지시하였고, 이에대해경상북도가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을보고한것으로보인다. 이보고서에는독도영유권문제, 독도폭격사건발생경위와전개과정등의내용이포함되어있다. 보고서제목이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으로되어있어 1948년독도폭격사건 과다른사건으로생각할수도있으나, 내용을보면독도폭격사건에관한보고서임을알수있다. 경위보고에기술한내용에는 1. 독도의위치와형태 2. 독도영유문제 3. 독도 ( 폭격 ) 사건발생개황 4. 구호개황 5. 배상및유족원호개황 6. 위령제거행 7. 위령비건립취의등의순서로되어있다. 특히이보고서는그동안언론기사자료를통해서만접했던당시의피해상황을정부의공식문서를통해서그피해규모나구호상황, 위령비건립등독도영유권수호를위한정부의대응과정을확인할수있다는점에서중요한의미가있다고할수있다. 2. 1948년독도폭격사건의피해상황독도폭격사건은 1948년 6월8일과 1952년 9월15일에있었던독도에대한미군의폭격사건으로, 특히 1948년폭격사건은많은인명과재산손실을초래한사건으로전국민의슬픔과공분을자아낸사건이었다. 이사건은아직까지그진상이명백히규명되지않은부분이많을뿐아니라피해자들에대한보상도제대로이루어지지않았다. 1) 1) 1 차독도폭격사건의경과와발생배경은이태우, 1948 년독도폭격사건의경과와발생배경, 독도연구 20 호, 영남대독도연구소, 2016.6. pp. 121~141 참조.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411 당시신문들은 1차독도폭격사건의피해상황을다음과같이보도하고있다. 폭격사건을처음보도한 조선일보 는 6월 8일오전 11시반경국적불명의비행기가독도에폭탄을투하하고기총소사를가해울릉도 강원도어선 20여척이파괴되고, 어부 16명이즉사하고, 10명이중상을입었다. 2) 고보도했다. 동아일보 는 독도에서어선이폭격을받아 20여명이사상한사건이일어났다. 미역을채취중이던어선 15척이작업하던중상공에나타난비행기로부터폭탄과기관총공격을받아 11척이침몰하고사망 9명, 실종 5명, 중상 2명, 경상 8명이라는큰희생을냈다 3) 고보도하고있다. 같은날 경향신문 은 정체모를비행기울릉도어선폭격 이란제목으로 15척의어선에 45명의어부가독도근해에서미역을채취하던중정체모를비행기아홉대가날아들어폭탄과기관총사격을받았으며, 9 일구호선을출동시켜구호작업을하는중 4) 이라고전하고있다. 신문보도외에도그날의참상은잡지를통해보다상세히알려졌다. 5) 최근 대구일보 취재기사에따르면, 당시생존한 3명의어부는김태홍 (22), 최만일 (33), 최춘삼 (44) 씨로, 이들은 7일독도에도착해미역을따고있었고, 이튿날 8일오전 11시30분께정체모를비행기 6대가날아와어선으로 10여개이상의폭탄을던졌다 고전했다. 또 폭탄이터지면서일어난파도로어선은침몰됐고, 당시부근해상에는약 20~30척의어선이있었다. 결국발동선 2척과전마선 2척이겨우귀환했다. 며 같이간일행중에는행방불명된자가 2명이며, 김동술 (39) 씨는기관총의탄환을맞고사망했다 고당시상황을전했다. 당시언론보도에따르면폭격으로 2) 조선일보, 1948.06.11자기사. 3) 동아일보, 1948.06.12자기사. 4) 경향신문, 1948.06.12자기사. 5) 조춘정, 독도폭격사건의진상, 민성 8월호 ; 한규호, 참극의독도 ( 현지레포- 트 ), 신천지 7월호 ( 통권27호 ).
412 獨島硏究제 22 호 사망한사람이십수명이라보도됐지만, 생존자들의증언에의하면 30여척의배에 200여명의어부가사망했을것이라는추측이나오고있다. 6) 국내의언론매체들은앞다투어당시의참상을소개하고있음을알수있다. 이사건으로인해독도에대한우리국민들의관심은크게높아졌으며, 또한독도가우리의영토라는인식이더욱확고해진계기가되었다. 그러나문제는위의신문보도기사에서보듯이당시의상황들에대한파악이정확하지가않다는점이다. 애초에공습을가한국가와비행기의정체는그후미국의폭격기로밝혀졌지만, 서둘러피해조사와보상을마친관계로사건의실체와원인규명, 피해규모, 사후보상등이제대로이루어지지못하게되었다. 따라서세월이갈수록이사건에대한의혹은증폭되어왔다. 언론보도 정부보고 구분 < 표 1> 1 차독도폭격사건피해상황언론사및정부발표집계 인명피해 재산피해 사망 / 실종자부상자침몰선박파손선박피해액 일자 조선일보 16명 중상 10명 20여척 1948.06.11 동아일보 14명 (9/5) 중상2/ 경상8 11척 4척 1948.06.12 경향신문 14명 (9/5) 중상2/ 경상8 11척 4척 500만원 1948.06.12 민주일보 14명 (3/11) 중상 3명 19척 4척 1948.06.13 자유신문 9명 중경상 36명 11척 500만원 1948.06.12 한겨레신문 150명 80척 2척 1999.10.11 대구일보 200명 30척 2015.02.06 경상북도 14 명중경상자 6 명 4 척 94 만원 1952.9.20 이밖에도월간 신천지 1948년 7월호에는사망 16명 ( 중상 3명 ), 침몰선박 23척으로, 1952년울릉도 독도학술조사단은사망자를 30명으로집계했다. 특히 푸른울릉 독도가꾸기모임 과한국외국어대독도문제연구회 6) 대구일보, 2015.02.06자기사 1948년미공군폭격연습표적 어민 150여명무고한희생.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413 는 1995년생존자 3명의증언을종합하여 150~320명의사망자가발생한것으로추산하기도했다. 위의표에서보듯이사건당시언론보도와정부문서를보면피해규모에큰차이가없는것으로나타난다. 그러나 2000년을전후해서피해자와유가족을상대로한조사에서는피해규모가 10배이상큰것으로나타난다. 피해규모가이렇게큰차이를보여주는이유는무엇일까? 여러가지이유가있겠지만우리가추정해볼수있는이유는일단다음과같은몇가지로제시해볼수있을것이다. 첫째, 단편적인언론보도와몇몇피해자의진술외에는당시사건현장을재구성할수있는자료가현저히부족하다는사실이다. 둘째, 지리 교통적여건으로사건현장에대한보존이나상황파악이지체되었다는점이다. 셋째, 따라서제대로된피해상황조사가이루어지지못했으며, 넷째, 미군정체제하에서사건의실체를파악하기위한과도정부의신속한조사나대응이부족하였다는점이다. 다섯째, 특히아쉬운점은피해가족들의실종신고등이부족하여정확한피해규모의파악이어려웠다는점이다. 이상과같이여러언론기관의보도기사와연구논문, 시민사회단체조사내용등을종합해보면현재까지인명피해와재산피해는당시미공군기의폭격으로인한사망 / 실종자가약 200명내외, 침몰선박이약 50척내외일것으로추산된다. 피해규모의많고적음을떠나명확한진상규명의차원에서민 관 학 3자로구성된진상조사가필요하리라본다. 3. 독도폭격사건에대한한국 ( 과도 ) 정부의대응 1948년 6월 8일에일어난 1차독도폭격사건당시는민정장관안재홍이이끄는 남조선과도정부 가통치하던시기로공식적인한국정부가수립되기전이었다. 때문에한국정부가공식적인항의나대응을하기에는한계가따를수밖에없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과도정부는미군에의한독도폭격사건을적극적으로항의하고책임규명과재발방지를위한노력을
414 獨島硏究제 22 호 기울였다. 1948년 8월 15일대한민국정부수립후에도이러한노력은이어져 1950년 4월 25일미국제5공군에독도폭격사건을조회하여항의하였다. 미국제5공군으로부터같은해 5월 4일자로 당시독도와그근방에출어가금지된사실이없었으며, 또독도는극동공군의연습목표가되어있지않았다 는요지의회답을받았다. 그후한국전쟁기간에독도가미 일합동위원회에의하여미국공군의연습기지로선정되었다는정보가한국에입수되었다. 대한민국정부는이를미국공군에항의했는데, 미국공군사령부는 1953년 2월 27일자로 독도가미국공군을위한연습기지에서제외 되었다는공식회답을대한민국정부에보내어왔다. 이러한사실들은대한민국정부가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이후 독도 에대하여주권을행사해서미국공군사령부와항의문서를교환했으며, 미국공군사령부도 독도 를한국영토로인정하여이에회답하고승복했음을잘나타내는것이다. 7) 1948년 1차독도폭격사건에이어서 1952년 2 차독도폭격사건에서도대한민국정부의독도영유권에대한인식과대응은확고하게나타나고있음을알수있다. 7) 신용하, 독도영유의진실이해,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2. p. 277.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415 < 자료소개 >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Ⅰ. 현대한국어윤문 경북제 273 호결재 1952 년 9월 23일시행 1923 년 9월 24일년월일접수정서교합발송발송상의주의 1952년 9월 20일기안주 印 지사 ( 知事 ) 산업국장 ( 産業局長 ) 수산과장 ( 水産課長 ) 과원 ( 課員 ) 기안자 ( 起案者 ) 印印印印印 건명 ( 件名 )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 外情제1318 호 1952.9.5. 일자 ) 외무부장관지사名위와같은사건의내용과진행에관한총괄적자료 ( 사본 ) 를별지 ( 別紙 ) 와같이제출합니다. 경상북도 경위보고 1. 독도의위치와형태독도는울릉도 ( 鬱陵島 ) 남동 (SE) 약 61리 ( 浬 ) 지점에있는크고작은두섬과약간의암초로형성된절벽이깎아세운듯이우뚝솟은무인도입니다. 이섬은나무숲이없고다만잡초가무성할따름이며, 음용수가전혀없는까닭으로사람이살아가기에는부적당합니다. 그러나그주위와암초에는어족 ( 魚族 ) 의회유 ( 廻遊 ) 8) 와물개의서식과미역의번식이풍부함
416 獨島硏究제 22 호 으로이러한해산물을잡거나채취할목적으로여름철에는어선의왕래가빈번하고, 평소에는난파선의피난처로이용됩니다. 2. 독도영유문제독도는지리적으로토질및식물이울릉도와서로같으며, 역사적으로한일병탄 ( 韓日倂呑 ) 전까지한국의영토로서어획 ( 漁獲 ) 을독점 ( 獨点 ) 하였음을한국수산지 ( 韓國水産誌 ) 에명확한증명이있고, 울릉도에거주하는 90세의노인인홍재현 ( 洪在現 ) 씨의진술한바에의하면 70년간울릉도에서의생활을통하여빈번한미역채취의사실과광무10년 (1906) 에일본의오키도사 ( 隠岐島司 ) 일행 10여명이울릉도항구에들어와서독도가일본의영토임을주장함으로당시고을의장 ( 長 ) 인전재항 ( 田在恒 ) 외다수의노인이잘못됨을지적하고즉시정부에보고한사실등옛날부터양국의사이에사소한시비가있었으나한일병탄후에는독도의소속문제는논의의필요가없이되어있었던것입니다. 그러나해방후에독도에서일본어민들의불법어업행위때문에울릉도민은독도의수산물을채취함에있어어려움을겪고있었습니다. 이에당시울릉군수는독도의영유확인을정부에신청하여 1946년 6월 22일자로연합국최고사령관 1033호각서 ( 覺書 ), 일본제국정부 ( 日本帝國政府 ) 경유, 과도정부 ( 過渡政府 ) 도쿄 ( 東京 ) 중앙연락청 ( 中央連絡廳 ) 에송달된 일본인의고기잡이및포경어업조업 ( 捕鯨漁業操業 ) 에관한승인된구역 나항에기재된 일본인의선박및인원은이후독도까지 12해리이상접근하지못하며또는독도에는어떠한접촉도못한다. 9) 라는정확하고분명한 8) 물고기등이한서식지에서다른장소로떼를지어서일정한경로로이동하는일을말한다. 9) 원문에는 1946년 6월 21일자로연합국최고지휘관 800.217각서 ( 覺書 ), 일본제국정부 ( 日本帝國政府 ) 경유, 과도정부 ( 過渡政府 ) 도쿄 ( 東京 ) 중앙연락청 ( 中央連絡廳 ) 에송달된 일본인의고기잡이및포경어업조업 ( 捕鯨漁業操業 ) 에관한승인된구역 나항에기재된 일본인의선박및인원은이후독도까지 12미터 ( 米 ) 이상접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417 글로써공표 ( 公表 ) 되어한국영토임을명확하게밝혀놓았으나, 근래까지일본의오키도 ( 隠岐島 ) 에거주하는어떤사람이자기소유라고주장한다는말이있음으로이기회에다시밝혀서우리나라의어부가안심하고고기잡이를할수있게할필요가있는것입니다. 3. 독도 ( 폭격 ) 사건발생개황 1948년 6월 8일 ( 단기 4281년6월 8일 ) 울릉도사람윤영도 ( 尹永道 ) 이하 22명강원도묵호사람옥만룡 ( 玉萬龍 ) 이하 12명강원도죽변사람이도순 ( 李道順 ) 이하 18명강원도평해후포리사람김동술 ( 金東述 ) 이하 7명합계 59명은태영호이하기선 ( 機船 ) 7척과범선 ( 帆船 ) 11척에나누어타고근거지울릉도를출범하여풍어기 ( 豊漁期 ) 의미역을채취하고자독도에고기잡이를나갔습니다. 그날은서남풍이강하게불었음으로, 대개가북쪽편의섬그늘에서해안에선박을대고 300m 이내에정박하고어부일부는섬에상륙하여채취한미역의건조작업에종사하고혹은채취에종사하고있던중, 오전 11시 40분경남동 ( 南東 ) 방면으로부터비행기의폭음이들려왔다고합니다. 하지만섬의그늘이드리워있고파도소리가심한탓으로폭음을모르고있던사람도많았으며또폭음을들은사람은우리를도우는미군의비행기라고여겨경계하기보다도리어기쁜마음으로작업을계속하고있었다고합니다. 생존자의말에의하면비행 근하지못하며또는독도에는어떠한접촉도못한다. 로기술되어있지만, 1946 년 6 월 22 일연합국최고사령관지령 1033 호의오기로보이기에바로잡는다. * 연합국최고사령관지령, 즉스캐핀 (SCAPIN) 1033 호는 1946 년 6 월 22 일연합국총사령부최고사령관이선포한 일본의어업및포경업허가구역 에관한지령을가리킨다. 동지령은일본의어업, 포경업및유사활동들을일정경계선내부의구역으로제한하면서, 그제 3 항 ( 나 ) 에서는특히독도와관련하여 일본의선박및승무원은차후북위 37 15, 동경 131 53 에위치한독도에대하여 12 해리이내로진입하지못하며, 또한이섬과여하한접촉도못한다. 고명시하였다.
418 獨島硏究제 22 호 기 14기가주로선박이많은북쪽편에폭탄을투하하기시작하고약 2~30분간에걸쳐기관총을발사한후애초에나타났던방면으로돌아갔다고합니다. 극도의위험과공포에휩쓸려서어민들은우왕좌왕하며대피할장소를찾다가, 독도에서멀리떨어져있는선박외에는거의다사격대상이되어침몰하고크게파손되었고, 두섬일대는피비린내나는생지옥을이루었다고합니다. 폭격이끝난후생존자들은사건후의수습에온힘을다하였다고하나행방불명 14명, 크게파손된선박 4척을확인하고크게중경상자 6명만을구조하여간신히울릉도까지회항 ( 回航 ) 하였던것입니다. 생환자는울릉도사람윤영도 ( 尹永道 ) 이하 45명이고, 행방불명자는묵호사람김중선 ( 金仲善 ), 울릉도사람최덕식 ( 崔德植 ), 김태현 ( 金泰鉉 ), 고원호 ( 高元鎬 ), 김해도 ( 金海道 ), 김해술 ( 金海述 ), 채일수 ( 蔡一洙 ), 후포리사람김동술 ( 金東述 ), 죽변사람권천이 ( 權千伊 ), 김경화 ( 金慶化 ), 이천식 ( 李千植 ) 외에성명미상 3명등합계 14명이며, 이후 3차례의구호선 ( 救護船 ) 을파견하여그때에발견된시체는김중선 ( 金仲善 ), 최덕식 ( 崔德植 ), 성명미상 1명등합계 3명뿐이며, 중상자 ( 重傷者 ) 는울릉도사람장학상 ( 張鶴祥 ), 이상주 ( 李相周 ), 죽변사람권진문 ( 權進文 ) 등 3명이고, 그외 3명의경상자가있었으며, 침몰한선박은기선 ( 機船 ) 태영호 ( 泰榮丸 ), 도하호 ( 稲荷丸 ), 경양호 ( 慶洋丸 ), 제오행정호 ( 第五幸正丸 ) 등 4척으로서손해금액이약 94만원 ( 萬圓 ) 에이르렀다고합니다. 4. 구호개황 1) 제1차구호 6월 9일, 기선 2척에경찰관 2명, 선원 19명이나누어타고출범 ( 出帆 ) 하여탐색하였으나시신 2구를발견하였을뿐이었다고합니다. 2) 제 2 차구호 6 월 10 일, 다시기선 2 척을동원하여짙은안개를무릅쓰고, 종일탐색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419 하였으나아무소득없이빈배로돌아왔다고합니다. 3) 제3차구호 6월 14일, 이사건이도 ( 경상북도 ) 10) 에보고되자그진상을조사하고자본도수산과 ( 水産課 ) 의기사 ( 技士 ) 문영국 ( 文英國 ) 과미국인 CIC, 해안경비원 6명이본도소유경비선계림호로울릉도에출장하여다음날인 16일울릉도수중구조대원 11명과묵호에사는어부 7명, 후포리어부 2명, 합계 28명이많은수의기선을동원하여독도일대를대수색하는한편그현장조사를하였으나시신 1구를발견하였을뿐이었고, 반쯤부서진선박은그후재차의폭격연습이있었는지생환자의눈에는사건당시보다도더욱심한파괴를당했더라고합니다. 이상, 3차의구호작업에도남은 11명의행방을찾을길없이 50여만원의비용만허비하는결과를내어울릉도민전체의눈물겨운노력도헛수고가되었고 11) 짙은슬픔이동해바다에먼지처럼떠다녔던것입니다. 5. 배상및유족원호개황 1) 미군의사과 6월16일, 미군장교여러명이울릉도에출장하여행정관및유지 ( 有志 ), 조난자유가족, 중상자가족등을찾아마음깊은사과의뜻을표시하고배상금으로 2,125,520원 ( 円 ) 을지급하고돌아갔다합니다. 2) 구호금모집서울수산경제신문사 ( 水産經濟新聞社 ), 부산산업신문사 ( 産業新聞社 ), 대구남선경제신문사 ( 南鮮經濟新聞社 ) 에서는서로호응하여국내동포에 10) 경상북도 11) 원문에는 도로 ( 徒勞 ) 에귀 ( 敀 ) 하고 로되어있음. 귀 ( 敀 ) 는歸 ( 귀 ) 와같은글자임.
420 獨島硏究제 22 호 게사건의진상을알리고, 유가족의억울함을달래는기금을모집하는한편도내수산단체, 공무원등이궐기하여총액 649,269원 80전을모집하여나누어주었던것입니다. 6. 위령제거행 [1950년] 12) 7월 27일경북어업조합연합회주최로조난어민위령제를독도에서거행하고자하였으나마침날씨가나빠서출범하지못하고, 울릉도어업조합에서관원과주민이다수참석한가운데에성대히거행하였다고합니다. 7. 위령비건립취의독도조난어민의억울한처지를돌이켜생각할때에뜻밖에당한재난에훌륭한산업일꾼을잃고그영령 ( 英靈 ) 을현지에서위로하여수중깊이잠겨있는원혼을건져주는 13) 한편독도가우리나라영토임을정당하게다시밝혀서어업상및군사상기초를탄탄하게하여두고, 또이를공보처및미국공보원의영사기로촬영하여영유 ( 領有 ) 문제를국제적, 국내적으로널리소개하기위하여사건발생 2주년을기 ( 期 ) 하여중앙과지방의중요인사및귀빈과유가족, 기타관계가있는관원과주민을모시고경상북도조재천 ( 曺在千 ) 지사가정성껏친필로쓴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건립하고제막식과위령제를거행하게되었습니다. 12) 원문에는연도가없으나 사건발생 2주년 이라는내용을볼때 1950년으로추정함. 13) 원문에는 수부 ( 水府 ) 의원굴 ( 寃屈 ) 을파여주는 으로되어있음.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421 Ⅱ. 원문전사본 ( 傳寫本 ) 경북지제 273 호 ( 慶北地第二七三號 ) 년월일접수 ( 年月日接受 ) 4285 년 9 월 20 일기안 (4285 年 9 月 20 日起案 ) 건명 ( 件名 ) 정서 ( 淨書 ) 결재 4285년 9월 23일시행 85년 9월 24일 ( 決裁 ( 施行八五年九月二十四日 ) 四二八五年九月二三日 ) 主 교합 ( 校合 ) 발송 ( 發送 ) 印 지사 ( 知事 ) 印산업국장 ( 産業局長 ) 印수산과장 ( 水産課長 ) 印과원 ( 課員 ) 印기안자 ( 起案者 ) 印 발송상 ( 發送上 ) 의주의 ( 注意 )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 외정제 1318 호 4285.9.5. 일자 ) ( 獨島沿海漁船遭難事件顚末報告의件 )( 外情第 1318 号四二八五年九月五日字 ) 외무부장관 ( 外務部長官 ) 지사 ( 知事 ) 수제 ( 首題 ) 의사건 ( 事件 ) 전말 ( 顚末 ) 에간 ( 干 ) 한총괄적 ( 總括的 ) 자료 ( 資料 ) 사본 ( 寫本 ) 을별지 ( 別紙 ) 와여 ( 如 ) 히제출 ( 提出 ) 하나이다. 慶尙北道 경위보고 一. 독도 ( 獨島 ) 의위치 ( 位置 ) 와형태 ( 形態 ) 독도 ( 獨島 ) 는울릉도 ( 㭗陵島 ) 남동 ( 南東,(SE)) 약 ( 約 ) 61리 ( 浬 ) 지점 ( 地點 ) 에있는대소 ( 大小 ) 두섬과약간 ( 若干 ) 의암초 ( 岩礁 ) 로형성 ( 形成 ) 된단애절벽 ( 斷崖絶壁 ) 이흘립 ( 屹立 ) 한무인도 ( 無人島 ) 입니다. 이섬은수림 ( 樹林 ) 이없고다만잡초 ( 雜草 ) 가번무 ( 繁茂 ) 할다름이며음료수 ( 飮料水 ) 가전무 ( 全無 ) 한까닭으로인류 ( 人類 ) 의주거 ( 住居 ) 에는부적당 ( 不適當 ) 합니다.
422 獨島硏究제 22 호 그러나그주위 ( 周圍 ) 와암초 ( 岩礁 ) 에는어족 ( 魚族 ) 의회유 ( 廻遊 ) 와해구 ( 海狗 ) 의서식 ( 棲息 ) 과화포 ( 和布 ) 번식 ( 繁殖 ) 이풍부 ( 豊富 ) 함으로이것을어로 ( 漁撈 ) 채취 ( 採取 ) 할목적 ( 目的 ) 으로하계 ( 夏季 ) 에는어선 ( 漁船 ) 의내왕 ( 來往 ) 이빈번 ( 頻繁 ) 하고, 평소 ( 平素 ) 에는난파선 ( 難破船 ) 의표기처 ( 漂寄處 ) 로됩니다. 二. 독도영유문제 ( 獨島領有問題 ) 독도 ( 獨島 ) 는지리적 ( 地理的 ) 으로토질 ( 土質 ) 및 ( 及 ) 식물 ( 植物 ) 이울릉도 ( 㭗陵島 ) 와합치 ( 合致 ) 하며역사적 ( 歷史的 ) 으로한일합병 ( 韓日合倂 ) 전 ( 前 ) 까지한국 ( 韓國 ) 영토 ( 領土 ) 로서어획 ( 漁獲 ) 을독점 ( 獨点 ) 하였옴는한국수산지 ( 韓國水産誌 ) 에명확 ( 明確 ) 한증명 ( 證明 ) 이있고, 울릉도 ( 鬱陵島 ) 에거주 ( 居住 ) 하는 90세 ( 歲 ) 노옹 ( 老翁 ) 홍재현 ( 洪在現 ) 씨 ( 氏 ) 의진술 ( 陳述 ) 한바에의 ( 依 ) 하면 70년간 ( 年間 ) 울릉도 ( 㭗陵島 ) 생활 ( 生活 ) 를통 ( 通 ) 하여빈번 ( 頻繁 ) 한화포 ( 和布 ) 채취 ( 採取 ) 의사실 ( 事實 ) 과광무10년 ( 年 ) 에일본 ( 日本 ) 은기도사 ( 隠岐島司 ) 일행 ( 一行 ) 10여명 ( 余名 ) 이鬱陵島 ( 㭗陵島 ) 에내항 ( 來航 ) 하여독도 ( 獨島 ) 가자국 ( 自國 ) 영토 ( 領土 ) 임을주장 ( 主張 ) 함으로당시 ( 當時 ) 향장 ( 鄕長 ) 전재항 ( 田在恒 ) 외 ( 外 ) 다수 ( 多數 ) 부로 ( 父老 ) 가그비 ( 非 ) 를지적 ( 指摘 ) 하고즉시 ( 卽時 ) 정부 ( 政府 ) 에보고 ( 報告 ) 한사실 ( 事實 ) 등 ( 等 ) 고래 ( 古來 ) 로부터양국 ( 両國 ) 의사이에사소 ( 些少 ) 한시비 ( 是非 ) 가있었으나한일합병 ( 韓日合倂 ) 후 ( 後 ) 에는독도 ( 獨島 ) 소속 ( 所屬 ) 문제 ( 門題 ) 는논의 ( 論議 ) 의필요 ( 必要 ) 가없이되어있었던것입니다. 그러나해방 ( 解放 ) 후 ( 後 ) 鬱陵島민 ( 㭗陵島民 ) 은본도 ( 本島 ) 의소속 ( 所屬 ) 이불분명 ( 不分明 ) 함으로서어획상 ( 漁獲上 ) 주저 ( 躕躇 ) 함이었음으로당시 ( 當時 ) 도사 ( 島司 ) 는본도 ( 本島 ) 영유 ( 領有 ) 확인 ( 確認 ) 을정부 ( 政府 ) 에신청 ( 申請 ) 하여 1946년 ( 年 ) 6월 ( 月 ) 21일자 ( 日字 ) 로연합국최고지휘관 ( 聯合國最高指揮官 ) 800,217 각서 ( 覺書 ), 일본제국정부 ( 日本帝國政府 ) 경유 ( 經由 ), 과도정부 ( 過渡政府 ) 동경 ( 東京 ) 중앙연락청 ( 中央連絡廳 ) 에송달 ( 送達 )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423 된 일본인 ( 日本人 ) 의포어 ( 捕魚 ) 및 ( 及 ) 포경어업조업 ( 捕鯨漁業操業 ) 에관 ( 關 ) 한승인 ( 承認 ) 된구역 ( 區域 ) 나항 ( 項 ) 에기재 ( 記載 ) 된일본인 ( 日本人 ) 의선박 ( 船舶 ) 및 ( 及 ) 인원 ( 人員 ) 은금후 ( 今後 ) 죽도 ( 독도 )( 竹島 ( 獨島 )) 까지 12미 ( 米 ) 이상 ( 以上 ) 접근 ( 接近 ) 하지못하며우 ( 又 ) 는동도 ( 同島 ) 에는여하 ( 如何 ) 한접촉 ( 接觸 ) 도못한다. 라는적확 ( 的確 ) 한명문 ( 明文 ) 이공표 ( 公表 ) 되여아국영토 ( 我國領土 ) 임이천명 ( 闡明 ) 되였으나근년 ( 近年 ) 까지일본 ( 日本 ) 은기도 ( 隠岐島 ) 모 ( 某 ) 개인 ( 個人 ) 이자기 ( 自己 ) 소유 ( 所有 ) 라고주장 ( 主張 ) 한다는말이있음으로차제 ( 此際 ) 재천명 ( 再闡明 ) 하여아국 ( 我國 ) 어부 ( 漁夫 ) 가안심 ( 安心 ) 하고출어 ( 出漁 ) 하도록할필요 ( 必要 ) 가있는것입니다. 三. 독도사건발생개황 ( 獨島事件發生槪況 ) 단기 4281년6월 8일 ( 檀紀四二八一年六月八日 ) 울릉도인윤영도이하 22명 ( 㭗陵島人尹永道以下二二名 ) 강원도묵호인옥만룡이하 12명 ( 江原道墨湖人玉萬龍以下一二名 ) 강원도죽변인이도순이하 18명 ( 江原道竹辺人李道順以下一八名 ) 강원도평해후포리인김동술이하 7명 ( 江原道平海厚浦里人金東述以下七名 ) 합계 59명 ( 合計五九名 ) 은태영환 ( 泰榮丸 ) 이하 ( 以下 ) 기선 ( 機船 ) 7척 ( 隻 ) 과범선 ( 帆船 ) 11척 ( 隻 ) 에분승 ( 分乘 ) 하고근거지 ( 根據地 ) 울릉도를출범 ( 出帆 ) 하여풍어기 ( 豊漁期 ) 의화포 ( 和布 ) 를채취 ( 採取 ) 코저독도 ( 獨島 ) 에출어 ( 出漁 ) 하였읍니다. 동일 ( 同日 ) 은서남풍 ( 西南風 ) 이강 ( 强 ) 하게불었음으로, 대개 ( 大槪 ) 가북측 ( 北側 ) 의섬그늘에서선박 ( 船舶 ) 을거안 ( 距岸 ) 300미내 ( 米內 ) 에정박 ( 碇泊 ) 하고어부 ( 漁夫 ) 일부 ( 一部 ) 는상륙 ( 上陸 ) 하여채취 ( 採取 ) 한화포 ( 和布 ) 의건조 ( 乾燥 ) 작업 ( 作業 ) 에종사 ( 從事 ) 하고혹 ( 或 ) 은채취 ( 採取 ) 에종사 ( 從事 ) 하고있든중 ( 中 ) 오전 ( 午前 ) 11시 ( 時 ) 40분경 ( 分頃 ) 남동 ( 南東 ) 방면
424 獨島硏究제 22 호 ( 方面 ) 으로부터비행기 ( 飛行機 ) 의폭음 ( 爆音 ) 이들니여왔으나섬의그늘이되여있고파도 ( 波濤 ) 노래가심 ( 甚 ) 한탓으로폭음 ( 爆音 ) 을몰으고있든자 ( 者 ) 도많았으며또폭음 ( 爆音 ) 을들은자 ( 者 ) 는우리를도우는미군 ( 美軍 ) 의비행기 ( 飛行機 ) 거니하야경계 ( 警戒 ) 보담도로혀기뿐마음으로작업 ( 作業 ) 을계속 ( 繼續 ) 하고있었다고합니다. 생존자 ( 生存者 ) 의말에의 ( 依 ) 하면비행기 ( 飛行機 ) 14기 ( 機 ) 가주 ( 主 ) 로선박 ( 船舶 ) 이많은북측 ( 北側 ) 에투탄 ( 投彈 ) 을시작 ( 始作 ) 하고약 ( 約 ) 2~30분간 ( 分間 ) 에긍 ( 亘 ) 하여기관총 ( 機關銃 ) 소사 ( 掃射 ) 를가 ( 加 ) 한후 ( 後 ) 당초 ( 當初 ) 출현 ( 出現 ) 방면 ( 方面 ) 으로퇴거 ( 退去 ) 하였다고함니다. 극도 ( 極度 ) 의위험 ( 危險 ) 과공포 ( 恐怖 ) 에휩쓸녀서어민 ( 漁民 ) 들은우왕좌왕 ( 右往左往 ) 대피 ( 待避 ) 할장소 ( 場所 ) 를찾다가, 독도 ( 獨島 ) 에서원거리 ( 遠距離 ) 에있는선박외 ( 船舶外 ) 에는거이다사격 ( 射擊 ) 대상 ( 對象 ) 이되어침몰대파 ( 沈沒大破 ) 하고두섬일대 ( 一帶 ) 는피비린내나는생지옥 ( 生地獄 ) 을일우웠다고함니다. 폭격 ( 爆擊 ) 이끝난후 ( 後 ) 생존자 ( 生存者 ) 들은사후 ( 事後 ) 수습 ( 收拾 ) 에전력 ( 全力 ) 을다하였다고하나행방불명 ( 行方不明 ) 14명 ( 名 ) 선박대파 ( 船舶大破 ) 4척 ( 隻 ) 을확인 ( 確認 ) 하고중경상자 ( 重輕傷者 ) 6명 ( 名 ) 만을구조 ( 救助 ) 하여간신 ( 艱辛 ) 히울릉도 ( 㭗陵島 ) 까지회항 ( 回航 ) 하였든것입니다. 생환자 ( 生還者 ) 는울릉도민 ( 㭗陵島民 ) 윤영도 ( 尹永道 ) 이하 ( 以下 ) 45명 ( 名 ) 이고, 행방불명자 ( 行方不明者 ) 는묵호 ( 墨湖 ) 김중선 ( 金仲善 ), 울릉도 ( 㭗陵島 ) 최덕식 ( 崔德植 ), 김태현 ( 金泰鉉 ), 고원호 ( 高元鎬 ), 김해도 ( 金海道 ), 김해술 ( 金海述 ), 채일수 ( 蔡一洙 ), 후포리 ( 厚浦里 ) 김동술 ( 金東述 ), 죽변 ( 竹辺 ) 권천이 ( 權千伊 ), 김경화 ( 金慶化 ), 이천식 ( 李千植 ) 외 ( 外 ) 에성명미상 ( 姓名未詳 ) 3명 ( 名 ) 합계 ( 合計 ) 14명 ( 名 ) 이며기후 ( 其後 ) 3차 ( 次 ) 의구호선 ( 救護船 ) 파송 ( 派送 ) 시 ( 時 ) 에발견 ( 發見 ) 된시체 ( 屍體 ) 는김중선 ( 金仲善 ), 최덕식 ( 崔德植 ), 성명미상 ( 姓名未詳 ) 1명 ( 名 ) 합계 ( 合計 ) 3명 ( 名 ) 뿐이며중상자 ( 重傷者 ) 는울릉도 ( 㭗陵島 ) 장학상 ( 張鶴祥 ), 이상주 ( 李相周 ), 죽변 ( 竹辺 ) 권진문 ( 權進文 ) 등 ( 等 ) 3명 ( 名 ) 이고, 기외 ( 其外 ) 3명 ( 名 ) 의경상자 ( 輕傷者 )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425 가있었으며침몰 ( 沈沒 ) 선박 ( 船舶 ) 은기선 ( 機船 ) 태영환 ( 泰榮丸 ), 도하환 ( 稲荷丸 ), 경양환 ( 慶洋丸 ), 제오행정환 ( 第五幸正丸 ) 등 ( 等 ) 4척 ( 隻 ) 으로서손해액 ( 損害額 ) 약 ( 約 ) 94만환 ( 萬圜 ) 에달 ( 達 ) 했다고합니다. 四. 구호개황 ( 救護槪況 ) 1. 제1차구호 ( 第一次救護 ), 6월 9일 ( 六月九日 ) 기선 ( 機船 ) 2척 ( 隻 ) 에경찰관 ( 警察官 ) 2명 ( 名 ) 선원 ( 船員 ) 19명 ( 名 ) 이분승 ( 分乘 ) 하고, 출범 ( 出帆 ) 탐색 ( 探索 ) 하였으나시신 ( 屍身 ) 2체 ( 体 ) 를발견 ( 發見 ) 할뿐이고 2. 제2차구호 ( 第二次救護 ), 6월 10일 ( 六月十日 ) 다시기선 ( 機船 ) 2척 ( 隻 ) 을동원 ( 動員 ) 하여농무 ( 濃霧 ) 를무릅쓰고, 종일탐색 ( 終日探索 ) 하였으나아무소득 ( 所得 ) 없이공환 ( 空還 ) 하였다고함니다. 3. 제3차구호 ( 第三次救護 ), 6월 14일 ( 六月十四日 ) 본 ( 本 ) 사건 ( 事件 ) 이도 ( 道 ) 에보고 ( 報告 ) 되자그진상 ( 眞状 ) 을조사 ( 調査 ) 코자본도 ( 本島 ) 수산과 ( 水産課 ) 기사 ( 技士 ) 문영국 ( 文英國 ) 미인 ( 美人 ) C-C 해안 ( 海岸 ) 경비원 ( 警備員 ) 6명 ( 名 ) 이본도 ( 本道 ) 소유 ( 所有 ) 경비선 ( 警備船 ) 계림환 ( 鷄林丸 ) 으로울릉도 ( 㭗陵島 ) 에출장 ( 出張 ) 하여익 ( 翌 ) 16일 ( 日 ) 울릉도 ( 㭗陵島 ) 구조수부 ( 構造水夫 ) 11명 ( 名 ) 과묵호 ( 墨湖 ) 어부 ( 漁夫 ) 7명 ( 名 ), 후포리 ( 厚浦里 ) 어부 ( 漁夫 ) 2명 ( 名 ), 합계 ( 合計 ) 28명 ( 名 ) 이수척 ( 數隻 ) 의기선 ( 機船 ) 을동원 ( 動員 ) 하여독도 ( 獨島 ) 일대 ( 一帶 ) 를대탐색 ( 大探索 ) 하는일방 ( 一方 ) 실지 ( 實地 ) 조사 ( 調査 ) 를하였으나시신 ( 屍身 ) 1체 ( 体 ) 를발견 ( 發見 ) 하였을뿐이였고, 반침 ( 半沈 ) 선박 ( 船舶 ) 은기후 ( 其後 ) 재차 ( 再次 ) 의폭격 ( 爆擊 ) 연습 ( 演習 ) 이있었는지생환자 ( 生還者 ) 의안목 ( 眼目 ) 에는사건 ( 事件 ) 당시 ( 當時 ) 보담더욱심 ( 甚 ) 한파괴 ( 破壞 ) 를당 ( 當 ) 했드라고함니다. 이상 ( 以上 ) 3차 ( 次 ) 의구호 ( 救護 ) 공작 ( 工作 ) 도남은 11명 ( 名 ) 의행방 ( 行方 ) 을찾을길없이 50여만환 ( 余萬圜 ) 의비용 ( 費用 ) 만허비 ( 虛費 ) 하는결과 ( 結果 ) 를내여울릉도민 ( 㭗陵島民 ) 전체 ( 全體 ) 의눈물겨운노력 ( 努力 ) 도도로 ( 徒勞 ) 에귀 ( 敀 ) 하고무거운애수 ( 哀愁 ) 가동해 ( 東海 ) 에표불 ( 漂拂 ) 했
426 獨島硏究제 22 호 든것입니다. 五. 배상및유족원호개황 ( 賠償及遺族援護槪況 ) 1. 미군 ( 美軍 ) 의진사 ( 陳謝 ) 6월16일 ( 六月十六日 ) 미군장교 ( 美軍將校 ) 수명 ( 数名 ) 이울릉도 ( 㭗陵島 ) 에출장 ( 出張 ) 하여행정관 ( 行政官 ) 및 ( 及 ) 유지 ( 有志 ) 조난자 ( 遭難者 ) 유가족 ( 遺家族 ), 중상자 ( 重傷者 ) 가족 ( 家族 ) 등 ( 等 ) 을차어심심 ( 深心 ) 한사과 ( 謝過 ) 의뜻을표 ( 表 ) 하고배상금 ( 賠償金 ) 으로 2,125,520엔 ( 円 ) 을지급 ( 支給 ) 하고도라갓다합니다. 2. 구호금 ( 救護金 ) 모집 ( 募集 ) 서울수산경제신문사 ( 水産經濟新聞社 ), 부산 ( 釜山 ) 산업신문사 ( 産業新聞社 ), 대구남선경제신문사 ( 南鮮水産經濟新聞社 ) 에서는상호 ( 相互 ) 호응 ( 呼應 ) 하여국내 ( 國內 ) 동포 ( 同胞 ) 에게진상 ( 眞狀 ) 을알니고유가족 ( 遺家族 ) 원호 ( 援護 ) 기금 ( 基金 ) 을모집 ( 募集 ) 하는일방 ( 一方 ) 도내 ( 道內 ) 수산단체 ( 水産團體 ), 공무원 ( 公務員 ) 등 ( 等 ) 이궐기 ( 蹶起 ) 하여총액 ( 總額 ) 64만 14) 9천 269환 ( 圜 ) 80전 ( 錢 ) 을모집 ( 募集 ) 반급 ( 頒給 ) 하였든것입니다. 六. 위령제거행 ( 慰靈祭擧行 ) 금년 ( 今年 ) 7월 ( 月 ) 27일 ( 日 ) 경북 ( 慶北 ) 어업조합 ( 漁業組合 ) 연합회 ( 聯合會 ) 주최 ( 主催 ) 로조난 ( 遭難 ) 어민 ( 漁民 ) 위령제 ( 慰靈祭 ) 를독도 ( 獨島 ) 에서거행 ( 擧行 ) 코저하였으나마츰일기 ( 日氣 ) 가불순 ( 不順 ) 하여출범 ( 出帆 ) 치못하고, 울릉도 ( 㭗陵島 ) 어업조합 ( 漁業組合 ) 에서관민 ( 官民 ) 다수 ( 多數 ) 참석하 ( 參席下 ) 에성대 ( 盛大 ) 히거행 ( 擧行 ) 하였다고함니다. 14) 원문에는 64 로되어있어 만 자가빠진것으로보임.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427 七. 위령비건립 ( 慰靈碑建立 ) 독도 ( 獨島 ) 조난 ( 遭難 ) 어민 ( 漁民 ) 의억울 ( 抑鬱 ) 한처지 ( 處地 ) 를회상 ( 回想 ) 할때에횡액 ( 橫厄 ) 에훌융한산업 ( 産業 ) 투사 ( 鬪士 ) 를일코그영령 ( 英靈 ) 을현지 ( 現地 ) 에서위로 ( 慰勞 ) 하여수부 ( 水府 ) 의원굴 ( 寃屈 ) 을파여주는일방 ( 一方 ) 독도 ( 獨島 ) 가아국 ( 我國 ) 영토 ( 領土 ) 임을정당 ( 正當 ) 히재 ( 在 ) 천명 ( 闡明 ) 하여어업상 ( 漁業上 ) 및군사상 ( 軍事上 ) 기초 ( 基礎 ) 를공고 ( 鞏固 ) 히하여두고, 또차 ( 此 ) 를공보처 ( 公報處 ) 및미국 ( 美國 ) 공보원 ( 公報院 ) 의영사기 ( 映寫機 ) 로촬영 ( 撮影 ) 하여영유 ( 領有 ) 문제 ( 問題 ) 를국제적 ( 國際的 ), 국내적 ( 國內的 ) 으로광범 ( 廣汎 ) 히소개 ( 紹介 ) 하기위 ( 爲 ) 하여사건 ( 事件 ) 발생 ( 發生 ) 2주년 ( 周年 ) 을기 ( 期 ) 하여중앙지방 ( 中央地方 ) 요로귀빈 ( 要路貴賓 ) 과유가족 ( 遺家族 ) 기타 ( 其他 ) 관계관민 ( 關係官民 ) 을메시고본도 ( 本道 ) 조재천 ( 曺在千 ) 지사 ( 知事 ) 님에정사 ( 精謝 ) 껏친필 ( 親筆 ) 로쓴독도 ( 獨島 ) 조난 ( 遭難 ) 어민 ( 漁民 ) 위령비 ( 慰靈碑 ) 건립 ( 建立 ) 하고위령제 ( 慰靈祭 ) (4283년 6월8일 ( 四二八三年六月八日 ) 독도 ( 獨島 ) 에서 ) 를거행 ( 擧行 ) 하였음니다.
428 獨島硏究제 22 호 Ⅲ. 원문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429
430 獨島硏究제 22 호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431
432 獨島硏究제 22 호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433
434 獨島硏究제 22 호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435
436 獨島硏究제 22 호
독도연해어선조난사건전말보고의건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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