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복음 도마복음 읽기(5) 한 석 진(목사, 원주 진리와자유교회) [제27장]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세상에 대해 금식하지 않 으면 하늘나라를 발견하지 못하리라. 너희가 안식일을 안식일로 지키 지 않으면 너희는 아버지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금식한다는 것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잡아먹는 것이다. 나의 육체를 잡아먹고 나의 욕망과 죄를 잡아먹고 세상을 향한 나의 마음 을 잡아먹는 것이다.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끊고 나 자신을 살펴보고 나를 찾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나의 욕심을 버리고 세상 관심과 욕망과 유혹을 끊고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혀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려는 것이 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빠지지 말아야하고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 참 자유한 사람이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예수께 서 말씀하시니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노예도 아닌데 왜 진리로 자유하라고 말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예수께서는 쉬고 싶으면 쉬고 먹고 싶으면 먹는 다고 해서 자유가 아니라 죄를 짓는 사람은 모두 죄의 노예라고 말씀하신 다. 참 자유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자신을 이길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라는 말이다. 먹고 마시고 취할수록 정신은 황폐해지고 돈과 명예와 탐욕으로 146 농촌과목회 제65호
인하여 세상에 빠져들수록 인생은 오히려 더 초라해진다. 그런데 사람들 은 금식기도를 한다며 밥을 굶고 밤새워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한 다. 세상과 욕망 속에 빠져있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금식이란 단순히 빵이나 밥을 굶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에 취하고 세상에 빠진 자신의 마음을 버리는 것이 바로 금식이다. 세상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이 올바른 금식이다. 세상 을 탐하고 세상에 홀려 정신없이 세상에 취해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무엇 을 위해서 살아가는지 무엇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지 조차도 잊고 내가 무엇인지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런 마음을 쉬는 것이다. 나를 내려놓 고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참 나를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안식이 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전에는 참된 평안이 없나이다. (어거스틴) 주일 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죄 없는 본래의 깨끗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참된 안식이다. 그것이 참으로 쉬는 것이요 참된 평안이다. 본래 모든 날이 안식일이다. 하루하루가 모두 참 좋은 날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제28장]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 한가운데(중심)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에게 육신으로 나타났다. 나는 사람들 모두 가 취해있음을 알았고 그들 어느 누구도 목말라 하지 않음을 알았다. 내 영혼은 사람의 아들들 때문에 마음 아팠다. 그들은 마음의 눈이 멀어 보지 못하고 공허하게 세상에 와서 공허하게 세상을 떠나려한다. 그러 나 지금 당장은 그들이 취해 있지만 그들이 술에서 깨어나면(술을 흔들 어 버릴 때) 비로소 그들은 그들의 의식을 바꿀 것이다. 예수님은 갈릴리 시골 출신이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처럼 꾸민 것 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메시아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꾸며낸 말이다. 메 시아는 다윗의 후손이어야 하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등의 예언 도마복음 읽기(5)ㆍ한석진 147
일이다. 그들이 세상에 취해있는 동안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눈앞에 죽음이 닥쳐올 때나 그들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또는 큰 병이나 사고로 죽음을 마주하게 될 때, 그들은 비로소 그들 이 이제까지 보고 살아온 세상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이 생각한 세상은 욕망의 허상이요 꿈처럼 한순간의 환상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이 술에서 깨어나고 세상이라는 허상에서 깨어난다면 그때 비로소 그들은 생각을 바꿀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참 나 는 무엇이 냐고? 물을 것이다. 사막에서 갈급한 목마름으로 생수를 찾듯이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도 빵이 아니라 진리를 찾을 것이다. 생명을 다해서라도 진정으로 갈급히 진리를 찾을 것이다. 이제까 지 허상을 쫓아 헛된 생을 살았노라고 비로소 뉘우칠 것이다. [제29장]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육신이 영혼으로 인하여 존재하게 되 었다면 그것은 기적이다. 그러나 영혼이 육체로 인하여 존재하게 되었 다면 그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다. 진실로 나는 이 위대한 부요함이 어떻 게 이처럼 빈곤함 속에 거하게 되었는지 참으로 놀랍도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육체와 영혼의 관계! 창조냐 진화냐, 과학이냐 종교냐 하는 문제로 말도 많았고 논쟁도 끊임이 없다. 예로부터 초자연적인 전능한 신이 아니면 도저히 이런 엄청난 세상 과 우주를 생겨나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신이 이 세상과 우주 를 창조했다 고 믿어왔다. 고대 근동지방에도 창조에 관한 설화가 많이 있었고 동양에도 창조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듯이, 이스라엘 사람들 도 이 세상과 우주가 어떻게 처음에 생겨나게 되었을까? 라는 물음에 대답 을 하였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이렇게 답을 내렸고, 2장에서는 또 다르게 답을 내렸다. 물론 각기 다른 사람이 또는 다른 시대에 다른 답을 내린 것이겠고 후대에 여러 설화 중에서 가장 나은 것 두 가지만 채택되어 기록 에 남았을 수도 있다.(물론 학자들은 이것마저도 이집트 창조설화를 모방 도마복음 읽기(5)ㆍ한석진 149
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롬 8:19-22) [제30장]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 신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은 신이 다. 둘 또는 하나의 신이 있는 곳에 나는 그와 함께 하노라. (콥트어 사본) 예수께서 가라사대, 세 명이 있는 곳에 그들은 신과 함께 하지 못한 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만 있는 곳에, 나는 말한다, 내가 바로 그 한 사람과 같이 하리라 3. 돌을 들어보아라! 너는 거기서 나를 발견하리라. 장작을 쪼개보아라! 나는 거기에 있느니라. Jesus says, "Where there are three, they are without God, and where there is only one, I say, I am with that one. 3. Lift up the stone, and you will find me there. Split the piece of wood, and I am there."(옥시린쿠스, 희랍어사본) 30장은 콥트어사본이 아니라 희랍어 사본이 내용상 맞게 생각되므로 희랍어 사본의 내용을 해설하겠다.(3절 이하는 제77장에서 해설함) 스승에게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고 수행하는 것은 여럿이 함께 할 수 있지만 진리를 깨닫는 길은 결국 홀로 가는 것이다. 진리를 말씀이나 비유로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도 진리의 핵심에 관한 질문이나 문답은 제 자들 각기 개별적이다. 열매가 무르익은 만큼 성숙하기 때문이다. 질문을 보면 얼마나 무르익었는지를 안다. 신앙은 큰 물음을 묻는 것이다. 도저히 삼킬 수 없는 큰 물음을 끈질기게 물어뜯듯이 의심(懷疑)하고 묻고 또 물어가노라면 스스로 애벌레가 되어 나무를 기어오르고 번데기가 되어 세상을 단절하고 마음을 끊고 곰곰 겨울잠을 자듯 오로지 하나를 붙들고 사생결단을 내야 할 때가 온다. 그때 목숨을 각오하고라도 홀로 자기 자신 과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 한다. 그리고 번데기가 껍질을 벗고 나비로 날아 올라야 한다. 스승은 그런 제자를 기뻐한다. 도마복음 읽기(5)ㆍ한석진 153
[제31장]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지자는 아무도 자신의 마을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 의사는 아무도 그 의사를 아는 자들을 치료하지 않는 다. 훌륭한 의사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에게 처방을 하지 않는다. 환자는 돌팔이가 아니라 진짜 의사를 찾아야 하고 진짜 명의(名醫)에게 절대적 신뢰를 가지고 자신을 내 맡겨야 한다. 진리의 스승은 자신을 알아 보지 못하고 절대적 신뢰를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가르침도 줄 수가 없다. 아무런 가르침도 주어서는 안 된다. 명의와 환자 사이에 절대적 신뢰와 보살핌이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치유하듯이, 제자는 진리의 참 스승을 찾아야 하고 진리의 참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절대적 신뢰와 믿음이 야 말로 알이 병아리로 깨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번데기가 껍질을 벗고 나비가 되고, 알이 깨어 병아리가 되는 것은 오로지 믿음만이 이룰 수 있는 위대한 기적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신앙의 길은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제32장]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높은 산 위의 요새처럼 견고하게 마을은 무너질 수 없고 또한 숨겨질 수도 없다. 인생은 많은 것이 있는 것 같지만 살면 살수록 없고, 진리는 없는 것 같지만 살면 살수록 있다. 그러므로 진리에 기초를 두고 삶을 살아가면(집 을 지으면) 세상살이에 중심을 잡을 수 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漲水)가 나고,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 에 놓은 연고니라(마7:24-25). 진리의 말씀을 굳게 실천하는 제자 개개인 의 삶이나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수행하는 제자들의 (공동체)삶은 진리 의 반석위에 인생이라는 집을 짓기 때문에 그 뜻이 높고 의(義)와 신념이 견고하여 무너지지 않고 진리를 향한 열정과 내면의 빛은 숨겨질 수 없다. 154 농촌과목회 제65호
[제33장]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귀로 듣는 것을 너희 지붕 위에 서 전파하라. 어느 누구도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 두지 않으며 그것을 숨겨진 자리에 두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등경 위에 걸어두어 들어 오고 나가는 모든 사람이 그 빛을 보게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교가 이미 썩고 타락하여 더 이상 진리를 담을 수 없는 낡은 가죽부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숨기지 않으신다. 내놓고 유대교 지도 자들과 맞서는가 하면 공공연하게 그들을 꾸짖고 책망하신다. 종교가 낡 고 타락하면 억지 교리로 사람을 구속하고 온갖 위선과 가식만 가득하여 사람을 속이며 제물만 강요하는 미신으로 전락한다. 종교가 진리에 이르 는 올바른 길을 인도하고 참 자유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속박하고 구속하는 감옥이 되기 때문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아래 두는 사람은 없듯이 진리의 빛을 찾은 사람은 진리의 불을 밝힌다. 진리를 감출 수도 없고 거짓을 보고 침묵할 수도 없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가르침을 지붕위에서 모든 사람이 듣 고 알게 되도록 선포하라고 한다. 왜 그럴까?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거짓된 교리와 부패한 종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고발한 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하나를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 이다. (마23:15) 예수께서는 조금도 두려움 없다. 담대히 진리를 선포하신 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 고 당부하신다. 복음서 곳곳에도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 앞 에서 의연히 그들의 위선과 거짓된 가르침을 책망하고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든 것에 분개하신다. 그것이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 일일지라 도 거짓으로 사람들을 미혹케하는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에 맞서는 것이 도마복음 읽기(5)ㆍ한석진 155
다.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 다. (요10:18)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는다. (요 18:37)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작정이시다. [제34장]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 에 빠지리라. 사자나 호랑이에게 돌을 던지면 사자나 호랑이는 돌을 던진 사람에게 달려든다. 주체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에게 돌을 던지면 개는 돌을 던진 사람이 아니라 돌을 향하여 달려들고 돌을 물어뜯는다. 주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는 어리석은 것이다. 또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 하는데 가리키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면 이 또한 어리석은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 침도 마찬가지다. 진리를 가리키는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사람은 모두 어리석은 소경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 진리의 세계는 준엄하고 예리한 것이다. [제35장]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라도 강한 자의 집에 쳐들어가 그 집을 늑탈하려면 그의 손을 결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손을 결박한 후에야 그의 집을 구석구석 약탈할 수 있으리라. 육체의 욕망과 돈이나 물질에 대한 탐욕 그리고 명예와 권력을 향한 야욕은 맹수의 이빨처럼 강하고 발톱처럼 날카롭다. 그것을 제압하고 능 히 부드럽게 할 수 있는 강한 정신과 의지가 없으면 인간의 바탕 깊숙이 숨겨진 거룩한 보화를 얻을 수 없다. 온 천하에 가장 존귀한 보물이 있다면 인간의 근원 바탕에 숨겨진 거룩한 형상, 즉 온 세상 만물과 비교할 수 156 농촌과목회 제65호
없는 가장 존귀한 신적인 형상이다. 존귀한 보물을 얻으려면 강한 야수의 손발을 결박하고 제압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잡아먹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태어났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 분 자신에게 숨겨진 신적인 형상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동 물에 지나지 않는 그저 초라한 인간으로 늙고 죽어간다. 인간의 가장 존귀 하고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육체적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서 평생 벗 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너희의 율법에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였다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 을 신이라고 하셨다. 또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 (요10:34-35) 육체적 자아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것이 허상이라는 진실을 깨달아야 하고, 죽어야 한다. 그래야 내 안에 깊이 묻혀있는 신적인 보물을 찾고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내 속에 묻힌 보물을 찾고 참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일생에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일이다.(一 生之大事) 이 일은 절대 미룰 수도 없고 남에게 양보할 수도 없는 것이다. 때로는 스승을 도둑 이라고 비유한다. 자신에게 숨겨진 보물을 스승님께 서 먼저 발견하셨으니 나도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뜻으로 당신이 바로 진리의 스승이십니다! 라는 존경의 표현이다. [제36장]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또 저녁부터 아 침까지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콥트어 사본)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밤낮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 하지 말라. 백합은 실을 잣지도 않고 길쌈을 하지 않아도 (아름답다.) 너희는 백합보다 더욱 귀하다. 너희들에게 옷이 없다면 무엇을 입겠느 냐. 누가 너희의 키를 크게 하겠느냐. (너희를 기르시는) 바로 그분이 그대들에게 입을 것을 주실 것이다. (옥시린쿠스, 희랍어 사본) 이 말씀은 인간의 삶에 가장 기본적인 밥, 옷, 집 등 현실적인 삶과 생존 문제를 등한시하거나 무책임하게 포기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인류가 도마복음 읽기(5)ㆍ한석진 157
살아가는 의식주의 문제를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도 아니다. 진리의 길은 현실의 삶과 가는 방향이 다르다. 하나는 올라가야 하고 다른 하나는 내려 가야 한다. 다른 차원의 문제일 뿐이다. 밥이 없어서 굶고 병든 사람에게 밥은 곧 진리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는 진리가 따로 있고 삶이 따로 있고 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방향이 다를 뿐이다. 밤낮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는 이 말씀은 분명히 진리를 찾아 산을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당부하는 경계의 말씀이 요, 진리의 길을 가는 제자들과 수행자들에게 주는 스승의 말씀이다. 진리 를 찾는 제자들에게 일체의 육체적인 문제에 대한 집착은 금물이다. 가장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자아가 나 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야하기 때문이다. 진리에 모든 마음과 열정을 집중해야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사람이 산다는 것은 한 송이의 백합이나 풀처럼 그냥 있는 그대로를 사는 것이며, 나무나 백합처럼 자기집착이나 자기-의식 없이 그냥 존재하는 절대 자유를 사는 것이다. [제37장]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말씀드리기를 언제 당신은 우리에게 드러나게 됩니까? 그리고 언제 우리가 당신을 보게 됩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어린 아이들처럼 부끄럼 없이 옷을 발가벗고 그 옷을 들어 발아래 둘 때 비로소 너희들은 살아 있는 자의 아들을 볼 것이며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 질문은 예수님의 참모습, 즉 스승의 진면목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이 다. 언제 어떻게 당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이다. 물론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의 모습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마치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요14:9절)고 말씀하실 때 겉모습이 아니 라 속사람, 즉 참 자아(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한다. 단순히 부끄럼 없이 옷을 벗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온전히 거듭난 참자 158 농촌과목회 제65호
아가 되어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참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죄의 행위 뿐만 아니라 죄의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여 아무 걸림이 없이 깨끗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안에 내가 있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참자유의 삶을 창세기는 신화적으로 에덴동산이야기로 표현하고 있다. [제38장]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러 번 너희는 내가 지금 너희에게 하는 이 말씀들을 듣기를 간구하였다. 그리고 나 외에 너희에게 이런 말씀들을 들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희들이 나를 찾겠지만 나를 찾지 못하는 날들이 있을 것이다. 정말로 진리를 깨달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 분을 만나는 것은 엄청난 은혜요 하늘의 은덕이요 축복이다. 진짜 스승은 존귀하고 찾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진짜 스승을 만나려면 진짜 진리를 깨달은 스승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진짜 스승을 만나면 내가 반드시 이 생애를 마치기 전에 스승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거듭나고 진리를 깨달아서 참 나 를 찾겠다. 는 굳은 결심과 의지 로 스승을 사랑하고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참 스승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소홀히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요 세월이 오히려 후회를 할 것이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 들이 참스승을 찾고 진리를 목말라하고 가르침(말씀)을 듣고자 하였으나 그런 참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태어 나서 참스승을 만나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은혜 라고 한다. 아무 때나 누구한테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진리에 갈급한 사람이라면 천금보다 귀한 말씀이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고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보고 듣는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이다. 그런데 유대교지도자들은 시기와 감시와 교활한 계책으로 예수님을 죽 이려 하고 제자들은 아직 진리의 말씀을 알아들을 귀가 열리지 않았다. 도마복음 읽기(5)ㆍ한석진 159
시간이 많지 않다. 너희는 다른 사람에게서 이런 가르침을 들을 수 없고, 너희가 나중에 나를 찾더라도 내가 항상 너희 곁에 머물 수는 없다는 말씀 에서 스승의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제39장]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지식의 열쇠를 차지하고 숨겨 버렸다. 그들은 스스로 들어가지 않았고 또한 다른 원하는 자들이 들어가도록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과 예언서의 맥(핵심) 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눈이 멀어서 예수님의 영적 깨달음과 깊이를 알아 보지도 못하고 그저 앵무새처럼 모세와 예언자의 이름과 율법만을 되풀이 할뿐이었다. 모세가 전설적인 지도자라고 해도 그 정신을 이어받지 못하 면 아무리 그 가르침을 되풀이해도 죽은 말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리 모세 의 율법이라도 살아있는 말이 되지 못하면 죽은 교리가 되고 만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르침 속에 들어있는 살아있는 정신은 잃어버리고 전설이 된 모세나 엘리야라는 이름만 떠들어댄다. 빈껍데기뿐인 이름(虛名)이요 죽 은 말이다. 그리고 전설적인 이름과 죽은 말이 권위가 되고 전통이 되어 이제는 오히려 시대에 맞지 않고 사람을 옭아매는 족쇄가 된다. 율법이니 전통이니 하면서 온갖 족쇄를 씌운다. 사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율법과 예언서를 성심으로 깊이 탐구하 여 핵심정신과 가르침을 하나로 꿰뚫는 깨달음만 얻는다면 모세와 예언자 들의 가르침인 율법과 예언서가 죽은 말이나 교리가 아니라 살아있는(溫 故知新) 말씀이 된다. 그런 탐구와 지식의 자료들(열쇠)이 오랜 유대교의 역사 속에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대교 지도자들이 돈에 눈 멀고 명예나 권력에 마음이 이미 완고해져서 외면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들도 그런 살아있는 영적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하나님과 모세나 예언자의 이름을 팔아 부귀와 160 농촌과목회 제65호
권세를 누리는 자로 전락한 것이다. 죽은 자들이 산 자를 옭아매고 그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너희는 말한다.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내게서 받으실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제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너희는 관습을 빌미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한다.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너희를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나에 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마15:5-9)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그리고 도둑이요 강도라고 욕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혜롭고 순결하여야 한다. [제40장]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포도나무 한 그루가 아버지 밖에 심어 졌다. 하지만 튼튼하지 못하므로 그것은 뿌리째 뽑히어 소멸될 것이 다. 다른 것은 몰라도, 종교의 가르침에 있어서 거짓과 위선은 올바른 진리 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도 아니고 진리에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튼튼히 자랄 수도 없고 나중에는 뿌리째 뽑혀서 없어질 것이다. 악(惡)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요 그 존재근거이지 만, 악의 근거도 하나님인 것은 아니다. 악은 스스로 그 존재성이 없고 다만 선의 결핍일 뿐이다. 마치 가라지의 비유처럼, 하나님은 어두움(악) 을 만들지 않았는데(하나님은 빛을 비추시는 것뿐인데) 어떻게 어두움이 생겨났는가? 어두움은 존재성이 없으므로 스스로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없어지면 나타날 뿐이고 따라서 빛을 비추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 다.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빛이 없을 뿐이다. 아버지 밖에 심겨졌다. 그러나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존재성(본질)이 없다. 진리를 왜곡하여 가르치는 자들의 가르침이나 교리도 그런 것이다. 애초부터 그 뿌리(존재) 가 제대로 올바른 토대위에 심겨진 것이 아니기에 결국에는 거짓과 위선 이 드러나고 없어질 것이다. 도마복음 읽기(5)ㆍ한석진 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