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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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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회보 5월

한국전쟁소고내지(0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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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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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史館論叢第 26 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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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史館論叢第 26 輯

國史館論叢第 26 輯

國史館論叢第 26 輯

國史館論叢第 26 輯

國史館論叢第 26 輯

國史館論叢第 26 輯

- 19 - 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요컨대 귀족관료들의 대토지 소유의 결과는 국가재정의 궁 핍을 초래시켰음은 물론이고, 권력과 재력을 배경으로 왕권쟁탈을 둘러싼 叛逆과 政爭을 격화시켜 이에 시달린 농민들은 경향 각지에서 농민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성립에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2) 貴族層의 享樂과 民心離反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각 왕조 멸망의 징후는 지배층의 권력욕에 따른 분열과 사 치와 향락으로 윤리 도덕성이 무너지면서 나타났다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신라의 경우 도 역시 그러하였다. 특히 사치와 향락은 반드시 불합리하게 쟁취한 권력과 富의 축적에 서 나타난 것이었다. 신라시대 왕공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은 삼국통일 후 왕권의 안정과 문화의 전성기에서도 엿볼 수 있으나 하대의 정치 사회적 혼란기에 더욱 극성, 신라 쇠퇴의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우선 중대의 경우 왕공귀족의 과소비생활의 일면을 보면, 신문왕이 一吉湌 金欽運의 어린 딸을 부인으로 맞이 할 때(682)의 納幣가 幣帛 15수레,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식혜가 135수레, 벼가 150수레였다80)하니 백성들의 눈에는 분명 지나친 과소비요 사치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성덕왕은 成貞王后를 궁중에서 내보낼 때 그 사유는 알 수 없지만 위자료조로 彩段 500필, 田 200結, 租 1만석, 저택 一區를 주었다.81) 이러한 경우는 원성 왕이 前王妃 具足王后를 外宮으로 내 보낼 때(785) 그에게 租 3만 4천석을 주었다고 하 니 당시 왕실의 윤리적 비도덕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하대 왕공귀족의 거점이던 수도의 면모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수도의 면모와 왕공귀족들의 부패적 실상을 암시해 주는 사료를 열거, 음미해 보 기로 하자. ① 신라 전성시대에는 서울(경주)에 178,935戶, 1,360坊, 55里(洞), 35金入宅이 있으니 南 그 내용을 보면 지난날에 신라의 政事가 쇠하여지니 群盜가 다투어 일어나 民庶는 사방으로 흩어 져 해골이 荒野에 드러내었다 (中略) 왕의 친척이나 권세가들이 방자하고 사납게, 약하고 고 달픈 나의 編氓을 짓밟고 있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나는 한몸으로 어찌 능히 집집마다 가서 눈 으로 볼 수 있으리요. 小民들은 이러므로 호소할 데가 없어 저 蒼天에 울부짖을 것이다. 마땅히 너 희들 公卿將相으로 國祿을 먹는 사람들은 내가 民을 자식같이 사랑하는 뜻을 생각하여 너희들 祿邑 의 編戶之氓을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다. 만약 家臣의 無知한 무리를 녹읍에 보내어 그들이 오직 聚斂만을 일삼고 마음대로 割剝한들 너희들이 또 어찌 이를 능히 알 수 있으리요(下略) ( 高麗史 太祖世家 17년 5월조)라고 한 詔書는 太祖 왕건이 신라와 궁예의 정권하에서 녹읍이 갖는 경제적 해독성을 체험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정치적 신념이었을 것이며, 그의 애민적 위민정치는 국민 적 단합과 호응을 받게 된 것이다. 80) 三國史記 권8, 신문왕 2년조. 81) 三國史記 권8, 성덕왕 15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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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史館論叢第 26 輯

- 24 - 國史館論叢 第26輯 여103) 앞날을 예기치 못할 상태였기 때문에 당에서 安住코자 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 러한 판단은 金可紀가 당에서 귀국했다가 현실적 불만에 적응치 못하고 당으로 다시 돌 아간 例를 보거나104) 당에서 귀국하여 존왕적 입장을 견지했던 崔致遠 역시 가야산으로 은둔하는 등 6두품계층들이 反社會的 동향을 취했다는 점에서 족히 알 수 있다. 어쨌든 하대에, 당에서 귀국한 6두품계층의 활동을 볼 때 亂世期의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은 퍽 다양하였다. 이들의 정치적 활동은 진골만능의 고위직 독점과 신분적 제약에 따라 外職과 文翰職 등에 임용되어 그들의 능력을 발휘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는 유학과 학문의 보 존은 물론 사회 사상분야의 개발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 그 수준을 한차원 높게 보급하여 중세 사회로의 성장을 지향하는 지성을 성립시켰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골품제도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한 인사정책의 모순을 지적하고 그 시정을 촉구한 점, 왕권강화 및 왕도정치의 방향을 제시한 것105) 등이다. 좀더 언급하면, 헌덕왕 때 執事侍郞을 역임한 祿眞은 上大等 忠恭에게, 102) 渡唐留學生으로 唐의 官職을 받은 자는 아래와 같다. < 人名 金雲卿 裵光 崔致遠 金文蔚 金裝 金頴 唐 의 官職 充兗州郡都督府司馬 淄州長史 光祿主簿兼監察御史 宣州漂水縣尉 承務郞侍御史內供奉 工部員外郞 沂王府諮議參軍 海州縣刺史 守定邊府司馬 표 > < 典據 三國史記 권11 문성왕 3년조 三國史記 권11 경문왕 4년조 三國史記 권46 최치원전 三國史記 권12 효공왕 10년조 東文選 권47 普照神師碑銘 / 표 > 103) 9세기 전반기의 경우, 애장왕 살해(809), 김헌창(822)과 김범문(825)의 난, 金均貞과 金悌隆의 왕 위쟁탈전(836), 金明과 利弘의 반란으로 희강왕 자결(838), 金祐微과 金陽의 반란으로 민애왕이 살해된(839) 사건 등이 그것이다. 104) 太平廣記 권35, 金可紀조. 105) 申瀅植,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일조각, 1984) p. 452.

- 26 - 國史館論叢 第26輯 이 발생하는 등 돌이킬 수 없는 병든 나라 가 되자 이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양위 할 뜻을 밝힌 글이다. 위 一句에서 水 는 백성을, 舟 는군왕을 뜻하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군왕은 백성의 분 노를 사지 않도록 애민적 왕도정치를 구현해야만 王位가 건재할 수 있다는 정치이론인 것이다. 즉 이러한 정치이론이 王政에 반영, 謝嗣位表 에 수용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反新羅的 육두품계층과 제휴된 지방호족들에게도 그 이론이 인식되어 반사회적 활 동에 커다란 작용을 하였다고 보겠다.109) 이러한 판단은 진성여왕 때 전국 각지에서 草 賊 赤袴賊의 무리가 들끓고 농민반란이 일어나자 이들 세력을 규합한 지방호족들이 끝내 반신라적 기치를 내걸고 신라분열에 결정적 타격을 주어 드디어 후백제(견훤 : 900) 후고 려(궁예 : 901)가 탄생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110) 한편 최치원과 함께 3崔라 일컫는 崔彥撝(仁渷 愼之) 崔承祐111)는 대표적인 반신라적 인물이다. 崔彥撝는 唐에 유학(890), 과거에 급제(893)한 후 귀국하여 관직이 執事侍郞 瑞 書院學士가 되었으나 고려로 망명하여 翰林院大學士平章事가 되었다. 崔承祐의 경우도 당 에 유학, 과거에 급제한 뒤 귀국하였으나 후백제로 망명, 견훤을 위하여 왕건에게 보내는 檄書를 쓴 이였다.112) 이러한 동향은 진골귀족들의 정치적 부폐와 골품제도의 모순을 타 파하려는 뜻이 실패하자 끝내 반신라적 의식으로 전환된 것을 의미한 것이다. 이들의 의 지는 渡唐留學을 통하여 학문적으로 체득한 지식과 唐 社會에서 체험한 역사인식과 사회 적 역량에 대한 자각에 힘입은 것이다. 그리고 羅末 당에서 귀국한 승려 道義 梵日 道允 無染 洪陟 惠哲 利巖 등은 敎宗의 전 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九山의 종파를 설악산과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개창하였다. 이들의 활동 역시 지방의 호족과 결합하여 중앙귀족에 반발하는 경향을 나타냈는데, 이에 6 6두품 출신의 승려(朗慧和尙 眞鑑禪師 등)들이 가담하였으니 이 역시 신분적인 체념에 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단인 것이다.113) 어쨌든 선종 승려들도 호족세력들의 독립적 기반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여114) 반신라적 지방세력 확대에 영향을 끼쳤다. 결론적으로 당에서 귀국한 6두품계층은 반사회적 집단이 되어 羅末 사회 사상의 변동 에 주역을 담당하였다. 그들의 활동에서 본 공통적 특징은 네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그들은 유학과 한문학을 한 차원 높게 발전시켜 중세사회로의 성장을 지향하는 109) 崔根泳, 統一新羅時代의 地方勢力硏究 pp. 81 82. 110) 崔根泳, 위의 책 p. 82. 111) 太子寺 朗空大師碑 後記( 朝鮮金石總覽 上, 1919) p. 188. 112) 三國史記 권46, 列傳 설총전. 113) 李基白, 앞의 책(1975) p. 59. 114) 金杜珍, 王建의 僧侶結合과 그 意圖 ( 韓國學論叢 4, 1982) p. 129.

- 27 - 지성을 성립시켰다. 둘째, 그들은 신분적 제약으로 外職 文翰職 外交職115) 등 하위직에 임명되자 폐쇄적 골 품제도에 대한 모순과 진골위주의 정치체제에 반발, 그 秕政에 대한 비판세력이 되었다. 셋째, 그들은 禪宗佛敎와 儒 佛 仙의 사상적 결합,116) 풍수지리 도참사상에도 깊은 관 련을 맺은 다음 羅末 정치적 혼란과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귀족문화에 대하여 반발했다. 넷째, 유교사상의 보급과 인재본위의 관리등용, 특히 애민적 왕도정치의 방향 등을 제 시하는 등 반신라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곧 그들이 당에서 학문적으로 체득한 지식과 당에서 체험한 역사적 경험을 통한 자각으로 나타난 것이다. 요컨대 이들의 반신라적 활동은 호족세력의 등장과 신라분열에 커다란 변수로 작용되었고, 그들의 정치이념은 고려 건국의 정치이념으로 수 용되어 왕권안정과 유교정치 구현에 이바지하였다.117) Ⅲ. 遠因的 條件 -濟 麗遺民의 歸巢意識신라의 삼국통일은 羅 唐聯合으로 濟 麗의 정복과 그후 唐軍 축출(676)에 따른 대동강 원산만 이남 지역의 확보로 이룩되었다. 이로써 분할되었던 민족이 최초로 통합, 민족 문화 발전의 공동의 장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신라 中代社會는 전제왕권의 확립과 더불어 고대문화를 총체적으로 정리하여 민족문화의 기준을 마련하고 그 기반 위 에 당 등 외래문화를 수용, 한문학 유학 기술학 건축 공예 등 찬란한 민족문화의 질적 향 상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一統三韓의 민족사는 240년을 채 넘기지도 못하고 옛 濟 麗의 땅에서 후백 제118)(900)와 후고려119)(후고구려 : 901)가 각각 등장, 또 다시 삼국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115) 崔賀( 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銘, 朝鮮金石總覽 上, p. 117), 崔致遠( 三國史記 권 46, 列傳 : 893년 祗召爲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파견되지 못함), 金槿( 東文選 권19), 崔元 ( 東文選 권33) 등이 외교사절로 활약했다. 116) 崔致遠의 鸞郞碑序 참조( 三國史記 권4, 진흥왕 37년조). 117) 주 116) 참조. 118) 後百濟 라는 칭호( 三國史記 권50, 견훤전)는 후대에 붙인 것이다. 高厲史 世家 太祖조에 보면 叛附百濟 ( 高麗史 권1, 世家 太祖 원년 8월 癸亥조), 於是 百濟諸城守皆降附 (같은 책 太祖 15년 6월 丙戌조), 百濟將軍 龔直來降 (같은 책 太祖 15년 6월 丙寅조)의 표기를 보아도 현 재 우리가 칭하는 後百濟 를 百濟로 칭하였고, 중국의 册封文에도 百濟國 으로 표시되어 있다. 119) 현재 後高句麗라 칭하는 국호도 초기는 高麗 라 칭했다( 三國遺事 王曆 第 1에 辛酉稱高麗 라 했다). 고구려와 고려는 각기 다른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구별없이 기록하였다. 예컨대 국보 119호인 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 과 국보 205호인 中原高句麗碑 등의 銘文에는 당시 고구 려인들이 국호를 高麗라고 표기하였고, 중국의 사서인 隋書 宣和奉使高麗圖經 明史

- 28 - 國史館論叢 第26輯 즉 후삼국의 분열은 후백제 후고려라 칭한 국호에서 시사하듯이 옛 백제와 고구려 부흥 을 목적으로 탄생한 것을 고려하면, 신라에 정복된 濟 麗 유민이 갖는 歸巢的 國系意識이 크게 작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濟 麗 유민들이 삼국통일 후 240여년이나 지나도록 歸巢的 國系意識이 내심에 작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요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통일 후, 신라 지배층의 배타적 보 수성으로 인하여 민족융화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120) 본 장은 그 사실 을 후삼국 성립의 遠因的 條件으로 보고 규명코자 하는 것이다. 고대 삼국은 始祖와 율령 및 정치체제를 서로 달리하면서 700여 년간이나 분립되어 국 익에 따라 친선과 반목을 되풀이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따라 문화인류학적으로 문자 언 어 종교 등이 동일한 문화권속에서도 독자적 발전의 길을 모색, 삼국의 사회와 문화는 서 로 다른 특색을 갖게 되었다. 예컨대 지금의 경주(신라) 부여와 공주(백제) 집안과 평양 (고구려)지방에서 볼 수 있는 분묘 석탑 불상이나 이들 지역에서 출토되는 토기 공예품 등의 형태와 질을 비교해 보아도 삼국간의 전통적 문화양상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 다.121) 이같은 결과는 삼국이 700여 년간이나 각기 분립하여 國權을 유지해 왔기 때문에 異質化된 것이다. 그러면, 통일 후 무엇보다도 신라가 가장 먼저 취해야 할 과제는 삼국통합에 따른 율 령 정치체제의 정비와 특히 濟 麗 유민과의 조화성 동질성 회복을 위한 정책을 창출하는 일, 즉 민족융화를 위한 개방정책을 추구, 구각을 벗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통일 후 그들 의 정책을 보면, 진골만능의 관직독점과 濟 麗民에 대한 신분적 차별을 가하는 보수적 배 타적 정책을 폈다. 요컨대 민족적 통합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바탕마저 봉쇄한 것이 특징이 었다.122) 그 시책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地方統治組織 改編의 限界性 地方統治組織의 기본이 되는 것은 州 郡 縣이다. 州의 개편은 통일전의 경우에서 보면 영토의 확장에 따라 그때 그때 설치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濟 麗를 멸한 뒤 새로이 편입 된 지역을 포함하여 약 3배로 늘어난 국토를 9州로 정비한 것은 신문왕 5년(685)이었 다.123) 당시 州의 성격은 그 長의 명칭이 軍主라 칭한 것에서도 시사하듯이 그 비중이 무 등에서도 고려를 고구려와 연결된 復興國으로 기술 인식하고 있다. 120) 崔根泳, 8 10世紀 地方勢力形成의 諸要因 ( 溪村閔丙河敎授 停年紀念 史學論叢, 1988) pp. 75 124. 崔根泳, 앞의 책(1990) p. 13. 121) 崔根泳, 앞의 책(1990) pp. 18 19. 122) 盧泰敦, 三韓에 대한 認識의 변천 韓國史硏究 38, 1982) pp. 140 141. 123) 三國史記 권8, 신문왕 5년조.

- 29 - 거운 것이었다. 그런데 통일 후 州를 정비한 시기는 唐의 세력을 반도내에서 축출한 시기 (676)로 보아도 10년이 경과된 후의 일이다. 이같이 지방통치조직의 개편이 늦어진 이유 는 당과의 7년전쟁으로 인한 영향과 신문왕(681 692) 원년 金欽突의 亂으로 枝葉(餘黨) 까지도 샅샅이 찾아서 모두 誅滅하는124) 왕실내의 정치적 혼란 등으로 볼 수도 있다. 어 쨌든 지방통치조직의 개편이 늦어진 것은 통일정부로서의 확고한 민족통합정책의 목표와 이념이 수립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며, 광역화된 지방행정을 통어할 수 있는 탄력성 을 초기부터 상실하고 만 것이 된다. 그 대표적 예를 지적하면, 浿江地方을 들 수 있다. 패강지방은 고구려유민이 건국한 발 해와의 접경을 이루는 인접지역으로서 고구려 멸망 직후 劍牟岑이 載寧에서 安勝을 왕으 로 추대, 부흥운동을 전개한 근거지였으며, 白氷山(白水城 : 재령) 韓始城(대동강 하류) 馬 邑城(대동강 하류) 瓠瀘河(임진강 연안의 長湍) 등지는 당군과의 투쟁에서 인적 물적 희 생이 컸던 지방이었다. 그리고 고구려 발해 말갈 여진족 등 여러 종족이 혼거하는 등 잠 복성 불안요인이 있던 지역이었다. 특히 676년 唐軍을 축출한 후 성덕왕 34년(735)에 비로소 당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영유권을 신라가 공인받았기 때문에125) 패강지역은 60여 년간이나 중앙의 통치력이 작용 하지 못하여 지방세력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이 되었고 고구려 유민의 國系的 귀소의식 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이 되었다. 그 사실은 경주중심의 편협하고 배타적 의식을 갖는 중 앙의 진골관료들이 8 9세기에 걸쳐 패강지대의 유민과 자생하는 지방세력을 철저하게 통어, 신라 통치권내로 묶어들이려는 시책을 강구했던 것으로도126) 알 수 있다. 그러나 124) 三國史記 권8, 신문왕 1년조.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의 경우를 보면, 그는 후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全州에 安南都護府를 설치하여 주변 12개 郡縣을 내속시켜 통제를 가하였다.( 高 麗史 권57, 地理志2 全州牧조). 이러한 조치는 후백제 지역민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여 반란의 소 지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한 강화책으로 간주할 때 삼국통일 후의 신라의 정책과는 대조적인 사실 이다. 이러한 예는 남원을 정복한 직후 府가 설치된 것도 같은 성격일 것이다. 125) 三國史記 권8, 성덕왕 34년조. 126) ① 聖德王 20년(721) 7월에 何瑟羅道의 장정 2천을 징발하여 北邊에 長城(咸南 永興의 古長城과 泉井郡(德源) 관 내로 비정하는 2說이 있음)을 쌓았다( 三國史記 권8, 聖德王 20년조). ② 聖德王 35년(736) 11월에 이찬 允忠 思仁 英述을 보내어 平壤(北漢山郡) 牛頭(春川) 2州의 지세를 檢察케 하였 다( 三國史記 권8, 聖德王 35년조). ③ 景德王 7년(748) 8월 아찬 貞節 등을 시켜 북변지방을 시찰케 하고 大谷城(平山郡) 등 14군현을 처음 두었다 ( 三國史記 권9, 景德王 7년조). ④ 宣德王 2년(781) 7월에 사자를 파견하여 패강 이남의 주군을 안무하였다( 三國史記 권9, 宣德王 2년조). ⑤ 宣德王 3년(782) 2월 王이 漢山州에 순행하여 民戶를 패강진으로 옮기었다( 三國史記 권9, 宣德王 3년조). ⑥頭上大監(鎭의長官)은1인이니宣德王3년(782)에처음으로두었고 ( 三國史記 권40, 雜志9 外官浿江鎭典조). ⑦ 宣德王 4년(783) 1월에 아찬 體信을 大谷鎭(平山)의 軍主로 삼았다( 三國史記 권9, 宣德王 4년조). ⑧ 憲德王 18년(826) 7월 牛岑(金川)太守 白永에게 명하여 漢山 이북의 諸州郡의 백성 1만을 징발하여 패강(예성 강) 長城 300里를 쌓았다( 三國史記 권10, 憲德王 18년조). 앞의 史料①,② 경우는 정복전쟁에 힘쓴 발해 武王 (719 737)代와 전성기의 宣王(820 830)代의 시책이었다는 점과 신라가 발해에 790년 812년 양차에 걸처 사신을 파견한 점을 고려하면, 위의 시책은 발해의 남진 등을 고려, 서북지역에 대한 국방수비책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

- 30 - 國史館論叢 第26輯 그들의 시책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예컨대 통일 후 신라인을 중앙에서 패강지역(平山)으로 사천시켜 그곳 주민을 견제하 고자 했던 朴守卿(? 946)의 家系에서 보듯이 이 지역은 신라의 통치를 받는 지역임에도 9 10세기 초까지 大模(毛)達 127)이란 고구려의 武官職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朴 氏一家(直胤 遲胤 守卿)는 그곳에 정착, 지방세력가로 변신하여 끝내 高麗 太祖 王建의 세 력과 제휴한 例가 그것이다.128) 그리고 흥덕왕 3년(828) 漢山州 瓢川縣 妖術人이 速富之術을 폈다는 말을 왕이 듣고 그를 엄히 다스려 섬으로 귀양보낸 사실과 왕건의 선대가 禮成江口를 중심으로 開城 貞 州 延安 白川 平山 江華 및 임진강 한강 중하류 등지를 거점으로 개성지방 제일의 세력으 로 등장하였던 것도 하나의 예가 되며,129) 특히 궁예의 경우를 보면, 진성여왕 때 北原에 서 起兵, 반신라적 기치를 내걸고 유독 溟州 麟蹄 華川 金化 鐵原 등 10여 郡縣을 장악한 뒤130)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 계승자임을 주장, 국호를 後高麗라 칭했다. 즉 후고 려의 등장 역시 통일 후 중앙에서 지방세력을 통어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초기부터 미비했던 점과 濟 麗유민을 차별한 시책이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2. 首都遷都의 失敗 -同質性 恢復의 失敗통일 후 전제왕권을 추진한 신문왕이 신라 고구려 백제의 옛 땅을 기준으로 각기 3개 의 주를 설치한 것은 삼국민 융합정책을 의식한 의도적 인 것으로 볼 수 있다.131) 그리고 신문왕은 동왕 9년(689) 수도를 達句伐(대구)로 천도고자 한 일이 있었다. 그 의도는 진 골귀족의 토착적 본거지를 벗어나려는 그의 전제주의정책에서 작용한 일면도 있겠고, 영 토확장에 따라 수도가 동남우에 치우쳐 행정상의 불편을 시정키 위한 의도 등 복합적 요 인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문왕의 천도계획은 진골귀족들의 반대로 좌절되 고 말았다.132) 한편 신문왕은 천도론을 주장하기 이전부터 수도가 동남우에 치우친 결함 을 보충하고 피정복민을 회유, 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5소경을 정비하였다. 5소경 지방은 中原小京과 南原小京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가 정복한 국가의 諸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27) 朴景山碑銘 ( 韓國金石文追補, 1968) p. 143. 128) 高麗史 列傳 88 后妃1 夢良院夫人전 참조. 129) 朴漢卨, 王建世系의 貿易活動에 대하여 ( 史叢 10, 1965) p. 286. 130) 三國史記 권11, 진성여왕 5년 및 9년조. 131) 李文基, 統一新羅의 地方官制硏究 ( 國史館論叢 20, 1990) p. 9. 132) 韓百謙은 그의 東國地理志 新羅조에서 唐兵의 철수 후에 곧 도읍을 국토의 중앙으로 옮겨 사 방을 통제하였다면 고구려의 옛 땅을 찾을 수 있어 遼 瀋 扶餘의 땅도 우리 영토가 되었을 것이 다 라고 개탄하였다.

- 31 - 州郡의 民戶를 강제로 이곳에 사천시켜 살게 하였고,133) 또한 수도의 귀족들도 이주시켜 거주케 하였다.134) 이에 따라 소경지역은 그들간에 갈등의 소지가 있게 되었고, 또한 소 경인들은 王京人에 비해 신분적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소경지방은 오히려 학문 종교 예 술 등이 발달하여 지방 문화의 중심지로 되었고, 진골귀족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형 성, 경계의 대상지역이 된 것 같다.135) 그 사실은 5소경 지방에서 등장한 호족( 표 6 참조)들이 신라 분열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는 것과 궁예가 청주는 땅이 기름지고 사 람들은 호걸이 많아(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했다 136)는 사실, 904년 청주의 민가 1천호를 鐵原으로 옮겨137) 그의 새로운 인적자원으로 삼았던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요컨 대 5소경 설치의 결과는 오히려 濟 麗유민의 國系的 귀소의식을 자극시켜 후삼국 태동에 커다란 변수로 작용했던 것이다. 표 6 5小京地方의 豪族 人名 地名 現地名 劉兢達 中原 忠州 劉權說 金仁匡 金官 金海 蘇忠子 蘇律熙 淸 吉 中原 西原 忠州 淸州 莘萱 陳瑄 西原 淸州 宣長 堅金 弓裔 北原 原州 梁吉 <표> </표> 號稱 豪族 將軍 知府 領事 賊帥 將軍 向背 王建에 歸依(900년경) 蘇忠子가 몰아냄 蘇律熙가 代를 이음 王建에게 投降한 것으로 보임(927년경) 弓裔에 투항(900년) 王建에 歸依(918) 將 軍 후고려 건국(901) 群 雄 지방반란 133) 예컨대 中原小京의 경우 대가야계인 强首 金生 于勒이 옮겨 살았고, 南原小京은 고구려의 승려 法 鏡이 거주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林炳泰, 新羅小京考, 歷史學報 35 36, 1967, pp. 84 94). 三國史記 권8, 신문왕 5년조 참조. 134) 三國史記 권40, 職官志 下 外位조에 文武王十四年 (中略) 以六徒眞骨 出居於五京九州 別稱官名 이라 한 기록과 龍頭寺幢竿記 ( 朝鮮金石總覽 上)에 보이는 西原地域의 최고 지 배 집단인 金芮宗 金希一 등은 문무왕 때 수도로부터 西原小京으로 사천된 귀족으로 보여진다. 135) 혜공왕 6년 1월(770) 왕이 친히 서원경을 순행하여 經路州縣의 죄수를 특사하고 3개월 동안이나 서원경에 체재한 뒤에 환도한 것은 단순한 민정시찰을 넘어선 정치적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닌 가 싶다( 三國史記 권9, 혜공왕 6년조). 136) 高麗史 권1, 太祖 원년 6월 戊午조. 137) 청주의 민가 1천호를 철원으로 사천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필자가 統一新羅時代의 地方勢力硏 究 (1990) pp. 120 125에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 32 - 國史館論叢 第26輯 통일 후 수도의 진골귀족들의 동향을 보면, 그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피정복민에 대 한 정책이 배타적으로 일관되어 수도를 중심으로 안주했을 뿐 소백산맥 외각지대를 벗 어나지 못했다. 지엽적인 것이나 그 예를 들면, 통일 후 국가의 수호를 기원하는 뜻으로 三山 五岳 이 하 名山大川을 나누어 大 中 小祀에 대한 대상을 확대 정비하였는데 그 大祀의 대상인 三山과 中祀인 五岳(吐含山 八公山 太白山 智異山 鷄龍山)을 선정한 대상을 보면,138) 옛 백제 영역의 계룡산을 제외하고는 수도 중심과 신라의 옛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 한 처사는 신라 중심의 지역적인 구분의식에서 탈피 하지 못한 실증적 예인 것이다. 이 러한 시책은 새로이 편입된 濟 麗의 고토를 통치함에 있어서 성공을 거들 수 없었다.139) 그리고 九誓幢의 경우를 보면, 誓幢은 삼국통일 이전부터 있어 온 왕의 직속부대로 서140) 신라 국군의 중추를 이루는 가장 종합적인 부대였다.141) 그 편성을 보면, 통일 후 백제 고구려 보덕국(고구려계) 말갈인 등 피정복민을 끌어들여 신문왕 7년(687)에 九誓幢 이 설치되었다( 표 7 참조).142) 그 편성이 신라계 3, 고구려계 3, 백제계 2, 말갈계 1 로 구성된 것을 보면, 주로 피정복민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이에 편성된 군인이 징 병 또는 포로병 귀화민143)중 어느 것이든 간에 피정복민을 끌어들여 九誓幢을 설치했다 는 것은 분명 민족화합을 위한 동질화정책으로 볼 수 있다.144) 표 7 九誓幢의 構成 誓幢名 設置年代 衿色 構成集團 誓 幢 綠衿誓幢 眞平王 5년(583) 眞平王 35(613) 綠 紫 新羅民 郞 幢 紫衿誓幢 眞平王 47년(625) 文武王 17(677) 紫 綠 新羅民 白衿誓幢 文武王 12년(672) 白 靑 百濟民 長槍幢 排衿誓幢 文武王 12년 孝成王 2(738) 排? 新羅民 黃衿誓幢 神文王 3년(683) 黃 赤 高句麗民 黑衿誓幢 神文王 3년 黑 赤 靺鞨民 碧衿誓幢 神文王 6년(686) 碧 黃 報德城民 赤衿誓幢 神文王 6년 赤 黑 報德城民 靑衿誓幢 神文王 7년(687) 靑 白 百濟民 <표> </표> 그러나 좀더 넓게 보면, 誓幢이 國系別로 편성된 점이나 부대의 표시마저 衿의 색깔로 138) 三國史記 권32, 雜志1 祭祀조. 三山은 奈歷(狼山 : 경주), 骨火(永川과 경주 사이의 金剛山), 穴禮(淸道와 密陽 중간에 있는 鳧山)으로 비정한다(李丙燾, 國譯三國史記 pp. 498 499). 139) 李基東, 新羅의 風土와 그 歷史的 特性 ( 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85) p. 261. 140) 李基白, 新羅私兵考 (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5) p. 272. 141) 末松保和, 新羅停幢考 ( 新羅史の諸問題, 1954) p. 359. 142) 三國史記 권40, 雜志9 職官 下 武官조. 143) 白南雲, 朝鮮社會經濟史 (1933) p. 336. 144) 邊太燮, 三國의 鼎立과 新羅統一의 민족사적 의미 ( 韓國史市民講座 5, 일조각, 1989) p. 10.

- 33 - 구분해 놓았다는 것은 피정복민의 식별과 통제를 간편하게 한 조치가 아니었나 싶다. 즉 하대 왕권이 약화되면서 九誓幢이 유명무실한 존재가 된 이유는, 이에 관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통일 후 삼국민 간의 조화성과 동질성 회복이 요구되었던 시대적 상황에 서 보면, 國系別로 편성된 9서당은 중앙군단으로 존속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통일 후 중앙귀족들이 수도를 고수하면서 피정복민의 사천, 지방민의 차별 등 배타적 정책을 고수하여 결국 濟 麗유민의 內心에 작용하는 國系的 歸巢意識을 결집 케 하는 자극제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5소경지방 등에서 성장한 토착세력들은 행정 군사 재정권을 갖는 반신라적 집단을 형성, 신라 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되었다. 이러 한 판단은 견훤과 궁예가 옛 濟 麗의 땅을 거점으로 신라로부터 차별받은 아픈 상처를 헤집으면서 濟 麗의 부흥을 표방, 그들의 호응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한 것이다. 3. 濟 麗遺民의 身分的 差別 먼저 백제인에 대한 신분적 차별정책을 보면, 문무왕 13년(673)에 규범을 정하여 신라 의 京職과 外職을 주도록 하였다. 주어진 官等의 次序는 백제 16관등의 고하에 준하되 아래의 표에서 보듯이 신라 5두품에 속하는 大奈麻 이상의 관등은 허용하지 않았다.145) 이 규범에 따르면 백제인은 京職의 경우 각부의 長(令) 次官(侍郞)은 물론이고 지방관직 의 州의 장관(都督)이나 小京의 長(仕臣) 및 지방군(停)의 지휘관인 將軍으로도 임명될 수 없었다.146) 표 8 百濟遺民에게 주어진 新羅官階 百濟官階 新羅官階 官階 官階名 官階 中央官階名 地方官階 地方官階名 2 達率 10 大奈麻 4 貴干 3 恩率 11 奈麻 5 選干 4 德率 12 大舍 6 上干 5 扞率 13 舍知 7 干 6 奈率 14 吉士 8 一伐 7 將德 15 大烏 9 一尺 <표> </표> 145) 三國史記 권40, 雜志9 職官 下 外官조. 146) 그러나 백제가 멸망된 직후의 경우를 보면, 신라에 투항한 장군들에게도 그 재능에 따라 관등을 주었다. 例를 들면, 佐平(1관등)인 忠常 常永, 連率인 自簡에게는 6두품에 해당하는 一吉湌의 관등 을 주어 摠管의 職에 임명하였다( 三國史記 권5, 무열왕 7년 11월조). 초기 이러한 배려는 고 구려와의 전쟁 및 唐세력을 의식, 백제인을 회유 결합할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 다. 이에 근거하면, 신라의 통일과업이 유리하게 진전되어 가면서 피정복민에 대한 회유적인 관 용책은 배타적인 면으로 바뀌어져 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34 - 國史館論叢 第26輯 백제인에게 大奈麻 이상의 관등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은 權悳永씨가 癸酉銘阿彌陀佛 三尊四面石像 (673년 : 문무왕 13년 추정)147) 癸酉銘三尊千佛碑像 白紙墨書華嚴經 寫經 三國史記 三國遺事 등의 자료에서 百濟系人으로 추정되는 34명의 관등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관등별로는 舍知(5명) 大舍(17명) 奈麻(12명)의 관등이 발견될 뿐 大奈麻 이상의 관등을 소지한 사람은 한 사람도 발견되지 않는다.148) 이를 미루어 보아도 백제계인의 관등진출의 한계는 5두품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三國遺事 권5, 憬興遇聖조에 보면, 신문왕은 憬興을 國師로 임명하라는 父 王의 고명을 받고도 그를 國師로 봉하지 않고 國老 라는 명칭을 주었다. 이 역시 그의 출 신이 백제 熊川州(공주)人인 까닭에 차별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상호 간의 불신과 대립의식을 조장, 동질성 회복을 저해한 요인이 되었다. 고구려인에 대한 신분적 차별을 보면, 백제의 경우와 같이 멸망 직후에는 고구려 將士 로써 공이 있는 자는 都督 刺史 縣令을 삼아 행정에 참여시키는 관용책을 썼다. 그러나 전제왕권의 확립을 추구한 신문왕은 동왕 6년(686)에 아래의 표와 같이 규범을 정하여 차별 하였다. 즉 고구려인에게 주어진 관등의 次序는 고구려 14관등의 고하에 준하되 신 라의 17관등 중 6두품에 해당하는 一吉湌(7관등)까지만 허용하였고, 특히 外職에는 임명 치 않았다. 표 9 <표> 官階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高句麗遺民에게 주어진 新羅官階 高句麗官階 新羅官階 官階名 官階 中央官階名 鬱折 7 一吉湌 太大使者 8 沙湌 皀衣頭大兄 9 級伐湌 大使者 大兄 10 大奈麻 收位使者 上位使者 11 奈麻 小使者 小兄 12 大舍 諸兄 13 舍知 先人 14 吉士 自位 15 大烏 </표> 147) 黃壽永, 韓國金石遺文 (일지사, 1976) pp. 246 249. 148) 權悳永, 新羅 官等 阿湌 奈麻에 對한 考察 ( 國史館論叢 21, 1991) pp. 54 55 표 5 참조.

- 35 이에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신라가 백제인을 고구려인보다 홀대한 것과 고구려인을 외직에 임명치 않은 점이다. 신라가 양국을 차별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원인을 밝힘에 있어서는 관계 문헌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삼국간의 갈등과 전쟁관계에서 얽힌 관계를 살펴보면 어렴풋이나마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나 싶다. 신라와 백제와의 관계는 羅 濟攻守同盟을 체결(433 553)하여 120여 년간이나 친선관 계를 유지하면서 고구려의 세력을 견제하였다. 이에 고구려 장수왕(413 491)은 백제의 漢城을 침공하여(475) 개로왕(455 475)을 살해하고, 남진을 계속하여 牙山灣으로부터 鳥 嶺 竹嶺을 거쳐 동해의 盈德.平海를 잇는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후 신라 진흥왕은 백제 성왕과 연합(551)하여 장수왕이 차지했던 竹嶺 이북 高峴 이 남의 한강 상류 10군을 탈취하였다. 이 때 백제가 회복한 한강 하류의 6군을 신라 진흥왕 이 그마저 탈취함으로써 羅 濟攻守同盟은 파기되고(553), 뒤이어 管山城(옥천) 전투에서 성왕이 살해되었다(554). 이를 계기로 신라에 대한 복수심은 돌이킬 수 없는 적대관계로 격화되었다. 이후 7세기 신라의 입장을 보면 백제와 고구려의 치열한 공격을 받았다.149) 7세기 신라의 對百濟觀을 보면, 신라가 大耶城 싸움에서 백제 允忠軍에게 都督 金品釋 과 그의 妻 및 竹竹 龍石 등이 전사하자(642) 선덕여왕은 이를 국가적 비극으로 승화시 켜150) 그 보복을 결심하게 되었고, 이에 원수를 갚기로 자청한 김춘추는 백제를 長蛇 封 豕라 일컬었고,151) 진덕여왕 때 唐 太宗에게 구원을 요청할 때 그는 그 흉악한 놈을 없 애 주지 않으면 우리의 人民은 다 그에게 사로잡혀 梯航述職은 다시 바랄 수도 없다 152) 라고 극단적 표현을 쓰고 있다. 그리고 문무왕은 동왕 8년(668) 11월 5일 왕이 俘虜 7천 명을 이끌고 入京하여 6일에 文武 諸臣과 함께 先祖廟에 배알할 때도 濟 麗를 元凶으로 칭했다.153) 이같은 표현은 곧 양국간의 투쟁과정에서 잉태된 적대의식이 굳어진 결과일 것이다. 한편 濟 麗가 멸망된 후 그들의 부흥운동과 삼국통합 후의 동향을 보면, 이들 역시 신 라정부에 순응치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면 백제 멸망 후 唐은 扶餘隆을 熊津都督으로 임명(665), 제사를 받들게 하는 한편 신라 문무왕과 熊津城 就利山에서 화친을 맺고 백제유민을 安集케 하였으나 그는 149) 신라가 700여 년간에 걸쳐 백제와는 55회, 고구려와는 17회에 걸쳐 전쟁을 하였고, 단 7세기에 국 한하여 보면, 백제와는 24회, 고구려와는 8회로써 7세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申瀅植, 三國史 記硏究, 일조각, 1981, p. 117, 148 참조). 150) 申瀅植, 統一新羅史硏究 (1990) p. 17. 151) 三國史記 권5, 선덕왕 11년조. 152) 三國史記 권5, 진덕왕 2년조. 153) 三國史記 권6, 문무왕 8년조.

- 36 - 國史館論叢 第26輯 신라의 세력이 두려워 동년 唐의 長安으로 귀순하였다.154) 그리고 日本書紀 에 근거하 면, 백제 부흥운동이 종식된 후 665년 2월부터 685년 5월까지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인은 무려 3,123명이나 된다.155) 이러한 현상은 백제부흥운동을 후원하는 등 과거부터 친연적 연고가 있는 일본으로의 망명이 신라보다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을 것이다. 당시 일 본에서의 움직임을 보면,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던 주류성이 함락되자 일본의 國人 사이 에는 이제부터 조상의 墓地를 다시 볼 수 없다 고 하는156) 애절한 한탄의 소리를 주고 받았다는 것은 곧 백제계인의 정신적 문화적인 귀소적 의식으로 볼 수 있다.157) 앞에서 본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신라는 濟 麗와의 전쟁과정에서 백제로부터의 피해가 더 컸던 것이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보다 백제를 홀대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고구 려인을 우대한 이유는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이 컸던 일 면도 작용했을 것이나 고구려의 영토가 완전히 신라에 통합되지 못한 점을 고려하면, 그 들의 환심과 귀부를 유도하기 위한 회유책이 아닌가도 싶다. 그들을 외직에 임명치 않은 것은 지방세력 대두를 의식한 일련의 조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신라가 통일 후 濟 麗人을 차별한 것은 결과적으로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하고 國系的 귀소의식을 유도시킨 자극제가 되고 만 것이다. 예를 든다면, 고구려의 중 丘德은 나라가 망한 지 159년이 지난 흥덕왕 2년(827)에도 그를 고구려인으로 칭하고 있 다.158) 三國史記 의 저자인 김부식이 그를 고구려인이라고 표기한 것은 그가 피정복민 의 차별에 대한 의도적 표기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아마도 丘德 스스로가 자신을 고 구려인이라고 칭한 기록에서 근거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忠南 燕岐郡 碑岩寺에서 발견된(1960) 癸酉銘阿彌陀佛三尊四面石像 記에 보면, 백제의 관등인 達率(2관등)을 그대로 쓰고 있는 1명(身次)이 보인다.159) 이 達率의 표기는 石像의 제작연대(673년)로 보면 사용할 수 없는 시대이다. 그가 達率을 그대로 표시한 이 유는 신라의 관직을 거부했거나 나타내기를 꺼려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160) 어쨌든 達率 의 표기는 백제인의 자긍심에서 나타난 歸巢的 의식임은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백제지역의 경우 고려 초기에 건립된 庇仁五層石塔(舒川) 長蝦里三層石塔(부여) 등은 부여 定林寺塔이 가지는 백제탑의 전통적 양식을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다.161) 이 점은 백제인의 후예라는 강인한 전통적 문화의식이 존속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154) 舊唐書 권199, 上 列傳149 上 百濟전. 155) 崔根泳, 앞의 책 p. 41. 156) 日本書紀 권27, 天智天皇 2년 9월 조. 157) 邊麟錫, 七世紀中葉 白江口戰의 硏究史的 檢討 ( 釜山史學 2, 1986) pp. 6 11. 158) 三國史記 권10, 흥덕왕 2년조. 159) 黃壽永, 韓國金石遺文 (1976) p. 247. 160) 權悳永, 앞의 논문 p. 54. 16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76) p. 195.

- 37 - 어떠튼 통일 후 신라가 濟 麗人에 대한 차별정책은 國系的 귀소의식을 고무시킨 요인 이 되고 말았다. 濟 麗유민의 귀소의식은 하대 정치적 혼란이 야기되자 이에 편승, 반신 라적 기운을 조성시켰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김헌창의 반란은 공주지역에서 작용하던 반신라적 민심에 편승한 것이며, 견훤과 궁예 역시 옛 濟 麗의 땅인 全州와 開城에서 각 기 후백제 후고려를 건국한 것도 그곳에서 자생한 반신라적 지방세력의 호응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즉 후삼국의 등장은 곧 통일 후 濟 麗人의 차별에 따른 후유증 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 사실은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시책 중 최우선의 과제 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를 요약하면 첫째, 왕건은 전국 각 지방에 군림하는 호족들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重幣卑辭의 禮로 써 그들을 회유, 융화적인 타협책을 썼고, 三韓이라는 국가의식을 갖고 三韓功臣을 제정 하였으며, 호족과의 융화적인 타협책으로 각지에서 귀복한 호족들에게 관작을 제수하였 고, 그가 맞이한 王后 6명의 출신지를 보아도 지역적 안배를 고려했던 것이다.162) 둘째, 후삼국을 통일한 후 민족단일의 광장을 마련키 위하여 그는 고구려계승의식을 앞세우면서도 신라 경순왕을 사심관으로 임명 경주를 식읍으로 주는 등 신라의 귀족을 우대,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였고, 후백제 견훤 역시 尙父로 대우 양주땅을 식읍으로 주었 다. 그리고 발해민들의 고려로의 귀부를 적극적으로 환영, 유도하는 등 그는 三韓一統의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고자 했던 것이다. 셋째, 그리고 즉위 원년 6월 辛酉의 詔書를 보면, 民을 평안하게 하는 데에는 賢人을 뽑는 일이 급한 것이다 라고 한 인재등용정책은 곧 신라 하대 골품제도의 모순을 극복하 고자 한 점 등이 그것이다. 앞에서 본 왕건의 시책은 신라가 분열되고 궁예정권이 단명으로 끝난 여러 요인을 몸 소 체험한 결과 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Ⅳ. 結 言 한 국가의 國力은 정치 군사 경제 교육 문화 사상 종교 등이 시대적 정세의 변화에 따 라 민족의 예지로 상호보완적 작용으로 나타날 때 강화되는 것이나 국력에 따른 국가의 홍망성쇠는 단기간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 열된 배경을 보면 近因的 요인과 遠因的 조건으로 대별된다. 먼저, 앞에서 살펴본 近因的 요인을 요약하면, 첫째, 통일 후 下代(780 935)에 접어들 162) 崔根泳, 앞의 책 pp. 114 116.

- 38 - 國史館論叢 第26輯 면서 나타난 커다란 변화는 왕위의 계승이 정치적 배경과 무력의 우열에 따라 결정되는 왕위의 쟁탈전이 빈번하게 나타난 점이다. 즉 이에 따라 律令制를 바탕으로 한 중앙의 통 치질서가 붕괴되고 지배층의 정치 사회적 윤리 도덕성마저 상실, 마침내 정치 경제 사회 사상 종교 등의 분야에 수습하기 어려운 난제들이 쏟아져 나오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국력쇠퇴의 말기적 현상이 나타나게 된 1차적 요인은 곧 무력에 의한 왕 위의 쟁탈전이다. 이리하여 왕권이 약화되고, 계층간의 분열과 갈등으로 政爭과 반역사건 이 심화되었다. 당시 고위직의 겸직제와 복수제 등 진골만능의 중앙귀족들은 私兵을 소 유, 권력을 유지하였으며, 왕권의 유지도 사병을 배경으로 지탱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정치적 열세에 처했던 불평세력과 지방세력가들에게도 자극이 되어 이들 역시 사병으로 무장하는 형편이 되었다. 둘째, 下代에 접어들면서 누적되어 온 정치적 퇴폐상은 진성여왕의 亂政과 연이은 천 재지변으로 사회혼란이 더욱 가중되어 신라분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즉 진성여왕의 실정은 流民의 파동, 草賊 赤袴賊의 발생, 농민반란이 초래되어 중앙의 권력은 지방의 통 어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틈을 탄 지방의 호족들은 이들 무리를 끌어들여 반독자적 세 력을 형성, 끝내는 신라분열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예컨대 옛 濟 麗의 땅을 무대로 등 장한 견훤과 궁예 왕건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셋째, 중앙의 귀족과 지방의 세력가들이 갖는 大土地所有에 따른 富의 축적도 말기적 현상으로서, 신라의 쇠망에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즉 진골귀족 등 지배층은 토지를 점탈, 그 경제력을 배경으로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면서 지나친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이에 국가 재정은 궁핍되고, 특히 사치와 향락은 계층간의 위화감을 조성, 民心을 離反하여 농 민반란이 일어나는 사회 혼란이 가중되어 신라 분열의 한 요인이 되었다. 넷째, 六頭品階層의 반사회적 활동도 후삼국 등장의 변수로 작용되었다. 당시 6두품계 층은 唐에서 수학한 학문과 경륜을 바탕으로 골품제의 모순과 진골위주의 정치체제 및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귀족문화에 반발, 그 秕政에 관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를테면, 유교사상의 보급과 인재본위의 관리등용, 反骨品的 통치질서의 구축 등 애민적 왕도정치 의 방향을 진언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뜻이 용납되지 않자 끝내는 반신라적 입장을 견 지함으로써 호족세력의 기반구축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다음 遠因的 조건의 경우를 보면 첫째, 신라가 濟 麗를 멸한 뒤 전국의 지방통치조직을 개편함에 있어서 그 시기가 오랜 기간이 지난 신문왕 때 개편됨으로 해서 패강지역의 지 방 세력 등장에서 보았듯이 지방세력 등장의 조건이 되었다고 보겠다. 이러한 시책은 고 려 太祖 王建이 후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후삼국 통일의 대응책으로 全州에 安南都護府를 설치하여 주변 12개 郡縣을 내속시킨 시책과는 대조를 이루는 점이다. 둘째, 達句伐 천도론이 좌절되고, 5소경을 정비, 문화의 도시로 발전한 것이 끝내는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