統一新羅時代의 村主位田 畓과 村主勢力의 成長 李 喜 寬* I. 머 리 말 Ⅱ. 村主位田 畓의 支給 Ⅲ. 村主位田 畓의 經營 Ⅳ. 村主位田 畓과 村主勢力의 成長 王建家門의 경우를 中心으로 Ⅴ. 맺 음 말 Ⅰ. 머리말 統一新羅時代 토지분급제도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新羅村落帳 籍은, A 合沓百二結二負四束 以其村謨畓四結 內視令畓四結 烟受有畓九 十四 結 二 負四束 以村主位畓十九結七十負 合田六十二結十負 五束 竝烟受有之 (新羅村 落帳籍 A村 8 9行, 안은 細註, 이하같음) 라고 하여, A村(沙害漸村)에 19結 70負의 村主位畓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村主位田이 설치되어 있던 村도 있었을 것이다.1)이 村主 * 湖林博物館 硏究員. 1) 村主位田이 설치된 村도 있었으리라는 추정에 대하여, 당시의 村主들에게 지급된 토지로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A村에 설치된 19結 70負의 村主位畓뿐이라는 점에 의거하여, 근본적으로 당시 村主들에게 畓만이 지급되었을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국가에서 村主에게 지급되는 토지가 자신들의 私有地(烟受有田 畓) 위에 설치되었다 는 점 이 점은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게 될 것이다 을 염두에 두면, 그러한 반론이 실제로
- 84 - 國史館論叢 第39輯 位田 畓은 당시 村主들에게 복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지급된 토지로 그들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게다가 이 토지는 통일신라시대에 국가에서 분급 한 여러 地目의 토지들 가운데 매우 특이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사료 A로 미루 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村主位田 畓은 당시 국가에서 분급한 토지인 內視令畓이나 官謨田 畓과는 달리 烟受有田 畓의 범주에 속하면서도,2) 한편으로는 그것과 구별되는 토지였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3) 이러한 측면에서 村主位田 畓에 대한 검토는 통일 신라시대 村主들의 경제적 기반과 토지분급제도의 내용 및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 한 관건이 된다고 믿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村主位田 畓에 대한 깊이있고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 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많은 학자들이 村主位田 畓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그것은 통일신라 시대의 村主나 지방통치체제 등을 논하는 자리에서 그것들과 관련하여 부 수적이고 단편적으로 언급되어 왔을 뿐이다.4) 이와 같이 村主位田 畓에 대한 연구가 부진을 면치 못해온 것은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 앞서 인용한 村落帳籍의 기 성립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된다. 이 경우, 극단적으로 烟受有田만을 소유하고 있던 村 主들의 경우는 토지를 지급받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국가에서 그와 같이 토지를 지급 했을리가 없다고 생각되거니와, 국가에서 굳이 村主들에게 畓만을 지급할 것을 고집했을 까 닭도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畓과 더불어 田도 소유하고 있던 村主들의 경우 는 畓 뿐만 아니라 田도 지급받았으리라고 믿어지는 것이다. 단 畓과 田 가운데 어느 쪽이 우선적으로 지급되었는지, 또는 양자의 비율에 맞추어 지급되었는지는 잘 알수가 없다. 단 당시 畓과 田의 단위면적당 생산량 동일한 곡물로 환산하였을 경우 이 일반적으로 2:1로 평가되었으므로, 村主들에게 토지를 지급할 때에도 이러한 평가기준이 적용되었을 것으로 생 각된다. 2) 內視令畓과 官謨田 畓은 村主位田 畓과 달리 國有地 위에 설치되었다고 이해된다. 이 점에 대 해서는 拙稿, 統一新羅時代의 官謨田 畜 ( 韓國史硏究 66, 1989) pp. 42 43 및 統一新 羅時代 官僚田의 支給과 經營 ( 新羅產業經濟의 新研究, 新羅文化祭學術發表論文集 13, 1992, 近刊)을 참고하라. 3) 村落帳籍에는 村主位畓을 烟受有畓의 항목에 기재하면서도 그 항목의 細註로 기록하여 烟受 有 畓과 구별되는 그 구체적인 차이는 뒤에서 언급하겠다 것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토지 항목의 기재방식 에 대한 것은 別稿를 마련하여 검토하겠다. 4) 村主位田 畓에 대하여 언급한 글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박시형, 신라장적 (新羅帳籍)의 연구 ( 력사과학 1957년 제 6호, 1957). 旗田巍, 新羅の村落 正倉院にある新羅村落文書の硏究 ( 歷史學硏究 226 227, 1958 1959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1972). 金鍾國, 高麗王朝成立過程の硏究 特に豪族問題を中心として ( 立正史學 25, 1961). 江原正昭, 新羅末 高麗初期の豪族ー學說史的檢討 ( 歷史學硏究 287, 1964). 림건상, 신라의 정전제에 대하여 (2) ( 력사과학 1977년 제4호, 1977). 李鍾旭, 新羅帳籍을 통하여 본 統一新羅의 村落支配體制 ( 歷史學報 86, 1980). 浜中昇, 統一新羅における均田制の存否 ( 朝鮮學報 105, 1982; 朝鮮古代の經濟と社 會,1986). 兼若逸之, 新羅 均田成册의 分析을 통해서 본 村落支配의 實態 (延世大大學院博士學位論文, 1984). 宮嶋博史, 朝鮮史硏究と所有論 時代區分についての一提言 ( 東京都立大學人文學報 167, 1984).
- 85 - 록을 제외하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통일신라시대의 村主位田 畓에 대한 이해가 당시 村主들의 경제적 기반과 나아가 토지분급 제도의 내용 및 성격을 파악하는 데 중요 한 관건이 된다는 견지에서 볼 때, 村主位田 畓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검토가 요구 된다는 것은 다시 이를 나위가 없다. 사료의 영성함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본고에서 村主位田 畓에 대한 여러가지 문제를 집중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하는 첫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 통일신라 말기에 등장한 豪族들 가운데 상당수가 촌주출신이었다는 것은 널 리 알려 진 사실이다. 우리는 촌주들이 豪族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을 정치적 사 회적 경제적 측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경제적 측 면이 주목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정치적 사회적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던 村主들이 豪族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중요한 요인 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문제가 村主位田 畓의 경영이나 농법 등의 변화과정을 추적하여 봄으로써 어느 정도 해명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 다.5) 이것이 村主位田 畓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하는 두번째 이유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본고에서 다음과 같은 통일신라시대의 村主位田 畓에 대한 몇 가지 문제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村主位田 畓의 지급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여기서는 그 지급대상, 지급액과 그 기준, 지급내용, 村主位田 畓 의 지급과 통일신라 토지분급제도와의 관계 등을 중점적으로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다음으로 村主位田 畓의 경영에 대하여 고찰해 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新羅末 村 主들의 성장, 즉 그들의 豪族化와 村主位田 畓의 관련성에 관하여 살펴 보기로 하겠 다. 이 문제는 각별히 王建家門의 경우를 중심으로 하여 고찰하게 될 것이다. 이 경 우 村主의 豪族化와 村主位田 畓의 관련성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村主의 후예로 알 려진 王建에 의한 後三國 통일의 경제적 배경에 대한 이해에도 도움이 되리라 믿어 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검토를 통하여 통일신라 토지분급제도의 성격과 新羅末 高麗初의 사회 변동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좀더 심화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Ⅱ. 村主位田 畓의 支給 5) 村主位田 畓의 경영형태나 農法 등에 주목한 연구로는 宮嶋博史, 朝鮮史硏究と所有論一時代 區分についての提言一 과 魏恩淑, 나말여초 농업생산력 발전과 그 주도세력 ( 釜大史 學 9, 1985)이 있다.
- 86 - 國史館論叢 第39輯 村主位田 畓의 지급과 관련하여 먼저 그 지급대상에 대한 문제부터 살펴보기로 하 자.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은 사람들이 村主들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당시 모든 村主들이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았을까 하는 점 에 대해서는 쉽게 단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하여 다음 기록에 주목해 보기로 하자. B-① 合畓百二結二負四束 以其村官謨畓四結 內視令畓四結 烟受有畓九 十四 結 二負四束 以村主位畓十九結七十負 合田六十二結十負 五束 竝烟受有之 (新 羅村落帳籍 A村8 9行) ② 合畓六十 三結 六十四 負九束 以其村官謨畓三結六十六負七束 烟受 有畓五 十九結 九十八負二 束 合田百十九結五負八束 竝烟受 有之 (新羅村落帳籍 B 村 10 12行) ③ 合畓七十一結六十七負 以其村官謨畓三結 烟受畓六十八結六十七負 合田五十八 結七負一束 竝烟受有之 (新羅村落帳籍 C村 8 9行) ④ 合畓廿九結十九負 以其村官謨畓三結廿負 烟受有密廿五結九十九負 合田七十七 結十九負 以其村官謨田一結 烟受有田七十六結十九負 (新羅村落帳籍 D村 8 10 行) 위 기록은 新羅村落帳籍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옮겨 놓은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 면 村落 帳籍에 보이는 4개 村 가운데 A村에만 村主位田 畓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면, 통일신라시대에는 村主가 각 村마다 있었던 것이 아니고, 몇 개 의 村을 묶어서 한사람의 村主를 두었으며, 그들에게 복무의 대가로 村主位田 畓이 지급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6) 만약 이와 같은 견지에 설 경우에는 원 칙적으로 모든 村主들이 村主位 田 畓을 지급받았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과연 그러하였을까 하는 점은 큰 의문이다. 더욱이 사료 B는 단지 A 村에 村主位田 畓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려줄 뿐, 4개 村 가운데 A村에만 村主가 있었고, 나머지 3개 村에는 村主가 없었다는 사실까지를 말해 주는 것은 아니므로,7) 6) 이제까지 旗田巍 이래로 대다수의 학자들이 이렇게 생각해 왔다. 단 浜中昇은 한 사람의 村 主가 몇 개의 村을 묶어서 관장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여러 村主들이 공동으로 한 縣 郡이나 州, 小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의 실무를 관장했다고 보았다(浜中昇, 統一新 羅の家族と村落 朝鮮古代の經濟と社會, 1986, pp. 19 21). 그리고 李鍾旭은 村主位田 畓 이 설치되어 있지 않던 村(自然村)에도 村主가 있었다고 주장하였다(李鍾旭, 新羅帳籍을 통 하여 본 統一新羅의 村落支配體制 pp. 49 50). 필자는 기본적으로 李鍾旭의 견해에 찬동하 며, 이 점을 좀더 보강하려 한다. 7) 이제까지 많은 학자들이 이 점을 간과하고 新羅村落帳籍에 보이는 4개 村 가운데 村主位畓이
- 87 - 만약 나머지 3개 村에도 村主가 있었다면 결과적으로 그들은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 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통일신라시대에는 국가에서 人口 田畓 牛馬 樹木 등을 村별로 파악하였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바로 당시에 村이 최말단 지방행정단위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와 같은 村마다 그 村의 행정을 관장하는 우두머리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예 나 지금이나 국가에서 확정한 지방행정단위에는 그 행정 을 관장할 책임자가 있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대상으로 村主를 돌려 놓고는 달리 생각하기가 어 렵다. 그러므로 A村 뿐만 아니라 나머지 3개 村에도 村主가 있었다고 믿어지는 것이 다. 자연히 村主들 가운데에는 A村에 설치된. 村主位畓의 주인공과 같이 村主位田 畓 을 지급받은 사람들과 B C D村의 村主와 같이 그렇지 못한 부류가 있었다는 이야기 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村主들 가운데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은 사람들은 어떤 부류였을까. 이 점 을 직접적으로 알려 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한 가지 자연스럽게 짐작할 수 있 는 것은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은 村主들은 그렇지 못했던 부류들과 사회적으로 예컨 대 직무나 신분 등 에 있어서 구별되는 계층이었으리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村主들 가운데 전자만이 국가로부터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은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가 곤란한 일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付主들 가운데에는 사회적 지위가 다른 두 계층 이 있었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다음 기록이다. C 外眞村主與五品同 次村主與四品同( 三國史記 33 雜志). 이 기록은 色服 車騎 器用 屋舍에 관한 王京人의 신분에 따른 여러 규정을 수록한 三國史記 33 雜志의 맨 끝부분에 덧붙여 있다. 이 기록의 첫머리에 보이는 外 는 內 즉 王京에 대응되는 의미로서 地方을 가리킨다.8) 그리고 五品과 四品이 각각 五 頭品과 四頭品 을 의미한다는 데에도 이론이 없다. 그렇다면 위의 기록은 지방의 眞 村主와 次村主의 경우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가름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는 色服 車騎 器用 屋舍 등의 규정에서 각각 王京의 5頭品과 4頭品에 준하도록 하였다는 뜻 이 된다. 이것은 곧 村主들 가운데 眞村主와 次村主라는 사회적 지위가 서로 다른 두 계층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설치되어 있던 A村에만 村主가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한 명의 村主가 여러 개의 村을 묶 어서 관장했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8) 李鍾旭, 新羅帳籍을 통하여 본 統一新羅의 村落支配體制 p. 57 및 村上四男, 新羅の村 主 ( 朝鮮古代史硏究, 1978) p. 320.
- 88 - 國史館論叢 第39輯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 두 계층의 구체적 대상으로 각각 앞서 언급한 村主의 두 계층, 즉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은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을 떠올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한다. 眞村主와 次村主가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色服 車騎 器用 屋舍에서 차별되었다면, 양자는 의당 村主들 사이의 지위의 높고 낮 음을 반영하는 또 다른 기준이 되었을, 국가로부터 職田인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을 수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점에서도 구별되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 론이 허용된다면, 결국 村主位 田 畓의 지급대상은 村主들 가운데 眞村主에 한정되었 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9) 여기에서 村主들 가운데 眞村主들만이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게 된 까닭이 무엇일 까 궁금해진다. 이 점은 신라 촌락지배체제의 변화과정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어느 정도 해명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신라의 촌락지배체제가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中古時代에 들어와서였 다고 할 수 있다. 村主도 그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村主에 임명된 사람들은 村으로 편제된 지역을 지배해오던 首長層이었다고 이해되고 있 다.10) 당시 국가는 지방통치력이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라의 영역에 들어온 지 역의 首長層을 村主로 임명하여 국가의 통치체제 안에 편입시킴으로써 그들의 지배 아래에 있던 人民들을 지배하고자 하였다고 헤아려진다.11) 이들에 대해서는 토지의 지급 등과 같은 국가의 경제적 배려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12) 그것은 직무에 대 한 반대급부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村主가 된 爵首長들에 대한 회유의 의미도 내 포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지급된 토지들이 당시에 村主位田 畓으로 불리워졌 을지는 알 수가 없지만, 아무튼 그것은 통일신라시대 村主位田 畓의 모태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이들 村主들은 중앙에서 파견한 道使 등과 더불어 村을 통치하였다.13) 하지 만 이 시기의 村은 新羅村落帳籍에 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村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 었다. 그것은 여러 개의 자연촌락으로 구성된, 통일신라시대의 村보다는 훨씬 규모가 9) 李鍾旭도 村主位田 畓이 眞村主에게만 지급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李鍾旭, 新羅帳籍을 통 하여 본 統一新羅의 村落支配體制 pp. 41 42 및 p. 51). 한편 본고의 주제는 村主位田 畓과 그 것의 지급대상자인 眞村主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次村主라고 특별히 명기되지 않 은 村主는 모두 眞村主를 가리키므로 이 점 혼동이 없기를 바란다. 10) 木村誠, 新羅郡縣制の確立過程と村主制 (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3, 1976) p. 19 참조. 11) 李鍾旭, 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의 地方統治體制 («歷史學報 64, 1974) p. 50 및 木 村誠, 新羅郡縣制の確立過程と村主制 p.19 참조. 12) 물론 이것이 國有地의 지급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그 지급의 실제적 내용은 기왕에 首長들이 소유해 온 토지를 국가에서 지급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지속적으 로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었으리라 여겨진다. 13) 中古時代에 村에 파견된 지방관이 道使였다는 점은 李鍾旭, 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 의 地方統治體制 pp. 37 39 참조.
- 89 - 큰 것이었다.14) 이와 같은 中古時代의 村은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어 郡縣制가 확립되면서 縣으로 개편 되었다.15) 이에 따라 자연히 村主도 縣司의 구성원이 되어 縣政에 참여하는 사 람으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16) 그리고 중고시대에 村을 구성하던 자연촌락들이 새 로이 村으로 편제되었다. 이와 같이 郡縣制 아래에서 새로운 村이 최말단 지방행정 단위로 등장하게 됨에 따라 국가에서는 의당 이 村들의 행정을 담당할 책임자를 임 명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통일신라시대의 村의 행정을 관장하는 새로운 村主가 탄생 되었다고 생각된다. 眞村主와 次村主의 구분은 이와 같은 촌락지배체제의 변화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즉 이에 따라 중고시대 村主의 맥을 이은 자들로서 縣政에 참여한 村主들은 眞村主로,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村制의 변화에 따라 새로이 村主에 임명되어 村政 을 맡은 자들은 次村主로 되어, 각각 王京人의 5頭品과 4頭品에 준하는 사회신분층 으로 편성되었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村主들 가운데 眞村主만이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고 次村主들이 그 지급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기본적으로 이제까지 살펴본 양자의 계통 직무 신분 등의 차이와 그에 따른 국가의 토지분급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즉 국가에서는 중고시대 村主의 맥을 이은자들로서 縣政에 참여한 眞村主들에게는 전통에 따라 토지 村主位 田 畓를 지급했지만, 통일신라에 들어와 새로 村主가 되어 村의 행정을 관장하게 된 次村主들까지 국가의 토지 분급대상에 포함시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는 次村主들 에까지 토지분급을 확대할 경우의 국가재정상의 손실을 우려한 때문이기도 하였겠지 만, 한편으로 그들에게 村主位田 畓을 지급하지 않고도 그들을 부려 村을 통치할 수 있을 정도로 강화된 지방통제력의 바탕 위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村主들 가운데 眞村主들만이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았지만, 그들 모두가 동일 한 면적의 田畓을 지급받았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즉 그들은 일정한 기준에 따라 차등 있게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17) 이것은 村主들 사이 에도 지위의 높고 낮음이 있었으리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충분히 납득이 될 수 있는 일이 아닐까한다. 그렇다면 그 기준이 된 것은 무엇일까. 이 의문을 푸는 데 다음 기 록이 퍽 시사적이다. 14) 木村誠, 新羅郡縣制の確立過程と村主制 pp. 20 21 참조. 15) 李鍾旭, 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의 地方統治體制 pp. 47 48, 木村誠, 新羅郡縣制の 確立過程と村主制 pp. 20 21, 李宇泰 新羅의 村과 村主 ( 韓國史論 7, 1981) p. 120 참조. 16) 浜中昇, 統一新羅の家族と村落 ( 朝鮮古代の經濟と社會», 1986) p. 21.에서 가능했을 것 이다. 17) 浜中昇과 兼若逸之도 村主位田 畓이 일정한 기준에 따라 차등있게 지급되었을 것으로 추정 하였다(浜中昇, 統一新羅における均田制の存否 p. 98 및 兼若逸之, 新羅 均田成册의 分析 을 통해서 본 村落支配의 實態 p. 292).
- 90 - 國史館論叢 第39輯 D 節縣令含梁营榮 時都乃 聖安法師 上村主三重沙干堯王 第二村主沙干龍河 第三村主乃干貴珍 及午 大匠大奈末梁 溫衾 (黄壽永 編, 韓國金石遺文, 1976, p. 290 新羅竅興寺鐘 ) 위 기록에는 9세기 중엽 竅興寺鐘을 조성할 때 관여한 사람들이 보이는데,18)이들 가운데 우리가 각별히 주목해 보아야 할 사람들은 堯王 龍河 貴珍 등이다.19) 이들은 당시 村主의 직을 맡고 있었는데, 모두 眞村主들이었다고 이해된다.20) 즉 이들은, 구체적인 지역은 알 수 없지만, 縣令 萱榮이 통치하던 縣의 縣政에 참여하던 村主들 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당시 이들 村主들에게는 上 第二 第三과 같은 서열이 있 었다. 이들의 官位가 각 각 三重沙干 沙干 及干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그들의 서열이 관위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縣司 내에서의 그들의 지위가 그 서열에 의해 결정되었으 리라는 점만은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지위는 각 村主들에게 지급 되는 村主位田 畓의 크기를 결정하는데 무엇 보다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보 아서 좋을 듯싶다. 村主位田 畓 자체가 村主들이 縣政에 참여하는 데 한 반대 급부로 지급된 것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縣司에서의 그들의 지위가 村主位田 畓 의 지급시에 그 기준으로 고려되었으리라고 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서 여겨 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村主位田 畓은 上 第二 第三村主와 같은 그들의 서열에 따라 차등있게 지급되었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村主들의 서열에 따른 村主位田 畓의 구체적인 지급액이 각각 얼마였는지 는 분명하지 않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기록은 村落帳籍에 보이 는 A村 출신의 村主가 19結 70負의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았다는 것이 유일한 것인 데, 이 村主가 어느 서열에 있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점이 더 이상의 추론을 가 로막고 있다. 그러므로 서열에 따른 村主位田 畓의 구체적인 지급액에 대해서는, A村 출신의 村主의 경우로 미루어, 대략 20結 전후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두는 선에서 만 18) 新羅發興寺鐘의 銘文에 따르면, 이 종은 大中年間(847 860)에 조성 되었다(黃壽永 編, 韓國 金石遺文 p. 289). 19)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부분에 결자가 있기 때문에 이들의 정확한 이름은 알 수가 없다. 하 지만 이 점이 논지의 전개상 큰 지장이 되지 않으므로 편의상 堯王 龍河 貴珍이라고 한 것 이다. 20) 李鍾旭, 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의 地方統治禮制 p. 63.
- 91 - 족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村主位田 畓의 구체적인 지급내용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에 관심을 돌릴 차례가 되었다. 이 의문에 대한 해명의 열쇠도 역시 사료 A가 쥐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A村에 설치된 村主位田 畓은 內視令畓이나 官謨畓의 경우와 달리 新羅 村落帳籍의 토지항목에 烟受有畓의 세부 내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村主位田 畓이 기본적으로 村民들의 私有地로 이해되는 烟受有田 畓의 범주에 속하는 토지였 음을 의미하는 것이다.21)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보면, 村主位田 畓으로 지급된 토지는 烟受有田 畓이 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여기에서 먼저 村主들이 누구의 烟受有田 畓을 村主位田 畓으로 지 급받았는가 하는 점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村主位田 畓의 지급내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 두가지 경우를 상정할 수 있을 것 이다. 첫째는 村內의 他人의 烟受有田 畓을 지급받았을 가능성이고, 둘째는 村主 자신의 烟受有田 畓을 지급받았을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는 그 烟受有田 畓의 소유권 자체를 村主에게 지급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국가라고 하더라도 타인의 烟受 有田 畓의 소유권을 강제로 빼앗아 村主에게 지급했으리라고는 좀처럼 생각하기 어 렵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경우는 국가가 특정한 村主에게 지급할 村主位田 畓의 면 적에 해당하는 만큼 타인의 烟受有田 畓에 대한 收租權을 村主에게 지급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도 村主의 烟受有田 畓의 所有權과 耕作權은 본래 村主가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자연히 村主位田 畓의 실제적인 지급내용도 첫번째 상 정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收租權에 한정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실제적 인 지급내용은, 국가가 村主들의 烟受有田 畓에 대하여 행사해 오던 收租權 가운데 村主位田 畓의 몫에 해당하는 그것을 村主에게 양도한, 다시 말하면, 免租權을 지급 한 것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하고 村主位田 畓의 실제적인 내용을 살펴보았지만, 그것이 양자 가운데 어느 쪽이었는지는 의연히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서 우리가 각 별히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 A村 출신의 村主가 지급받은 村主位畓의 면적이 19 結 70負였다는 점이다. 사실 19結 70負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토지분급액으로는 자 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22) 후대의 田柴科體制나 科田法體制 하에서도 국가에서 개 인에게 토지를 지급할 경우 복잡한 負 단위가 아니라 예외없이 간단한 結 단위로 하 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면 A村 출신의 村主가 그와 같이 복잡한 단위의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은 상 21) 이 점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22) 浜中昇도 19結 70負라는 복잡한 結負수는 국가가 정한 村主에 대한 토지지급액 그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하였다(浜中昇, 統一新羅における均田制の存否 p. 98).
- 92 - 國史館論叢 第39輯 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먼저 염두에 떠오르는 것은, 만약 국가가 村內 타인의 烟受有田 畓에 대한 收租權을 이 村主에게 지급했다면 그러한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희박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경우 굳이 간결한 단위의 구 체적으로 말하면 結 단위의 烟受有田 畓에 대한 收租權을 돌려 놓고 그와 같이 복잡 한 단위의 그것을 지급했을 리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村主 자신의 烟受有田 畜에 대한 收租權을 지급했을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 다. 물론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을 村主가 규정된 지급액 보다 넓은 면적의 烟受有田 畓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앞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9結 70負와 같은 복잡한 단위 의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작다고 생각된다. 국가는 그가 소유한 烟受有田 畓 가운데에서 간결한 結 단위로 규정된 村主位田 畓의 지급액에 해당하는 免租權을 그에게 지급하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村主가 규정된 村主位田 畓보다 작은 면적의 烟受有田 畓 을 소유하고 있었을 경우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村主들은 어쩔 수 없이 규정된 村主 位田 畓의 지급액에 미달되는, 자신이 소유한 총 烟受有田 畓에 대한 免租權만을 지 급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23) 그리고 이 경우에는 복잡한 단위로 된 면적의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았다고 하여도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村主들이 본래부터 소유해 온 烟受有田 畓이 국가에서 일률적인 면적으로 구획해 준 것이 아 닌 이상, 그것이 복잡한 단위 負 또는 束단위까지로 되어 있었다는 점은 오히려 매 우 자연스러운 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문제의 A村 출신의 村 主는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 사람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상의 추론이 허용된다면, 우리는 A村 출신 村主의 경우로 미루어 당시 村主들은 바로 자신들의 烟受有田 畓을 村主位田 畓으로 지급받았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 다. 물론 이때 그 지급의 실제적인 내용이 그 토지에 부과된 納租 의무를 면제받을 권리, 즉 免租權이었음은 다시 말할 나위가 없다.24) 아울러 국가에서 타인의 烟受有 田 畓에 대한 收租權을 지급하지 않고, 村主 자신의 烟受有田 畓에 대한 免租權을 지 급한 것은, 전자의 방식을 택했을 경우에 벌어질 수 있는, 村主의 收租權을 매개로 한 그 밖의 수탈이나 겸병 등을 제도적으로 방지하고자 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 된다. 23) 혹 村主位田 畓의 부족분을 村內 타인의 烟受有田 畓으로 지급받았을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실제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만약 부족분에 해당하는 타인의 烟受有田 畓을 지급받았다면, A村 출신의 村主와 같이 19結 70負와 같은 복잡한 단위의 村主位畓을 지급받는 상황이 일어났을 가능성 이 희박하기는 앞의 두 경우 와 마찬가지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24) 박시형 李鍾旭 浜中昇 등도 村主位田 畓의 실제적인 지급내용이 免租權이었을 것이라고 간단 히 언급한 바 있다(박시형, 신라장적(新羅帳籍)의 연구 p. 16, 李鍾旭, 新羅帳籍을 통하여 본 統一新羅의 村落支配體制 pp. 41 42, 浜中昇, 統一新羅における均田制の存否 p. 98).
- 93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은 모든 村主들이 각자가 가지고 있던 烟受有田 畓 전체에 대하여 免租權을 지급받은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 이, 그들은 서열에 따라 村主位田 畓의 지급액이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A 村 출신 村主의 경우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던 烟受有田 畓의 면적이 지급받을 수 있 는 村主位田 畓의 규정액보다 작거나 또는 같은 경우는 그 烟受有田 畓 전체에 대한 免租權을 지급받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유한 烟受有田 畓의 면적이 村主位田 畓의 규정액 보다 큰 村主의 경우는 원칙적으로 그 가운데 村主位田 畓의 규정액에 대해 서만 免租權을 지급받고,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규정된 烟受有田 畓의 收租率에 따라 국가에 租를 물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보면 국가에서 규정한 村主位田 畓 의 지급액은 사실상 그 지급액의 上限額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 이다. 여기에서 村主位田 畓의 지급내용을 같은 시기에 골품귀족관료들에게 지급된 官僚 田의 그것과 비교하여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村主位田 畓과 官僚田 은 그 지급 대상자는 달랐지만, 양자가 모두 국가에 대한 복무의 대가로 지급된 토 지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러한 비교는 당시 토지분급제 도의 특성을 밝히는 데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당시 官僚田은 國有地로써 지급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25) 그리고 그 구체적 지급 내용은 그곳으로부터의 수확물의 1/2을 租로서 수취할 수 있는 권리였다고 이해된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견해에 따라 당시 烟受有田 畓의 收租率이 1/10이었다고 하면,26) 결과적으로 村主位田 畜의 收租率 실제적으로는 免租率 은 官僚田의 그것의 1/5에 불과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村主位田 畓과 官僚田이 모두 국가에 대한 복무의 대가로 지급된 것이었음에도 불 구하고, 그 지급내용에 있어서 그와 같은 차이가 있었던 이유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지급대상자 村主와 관료 의 국가에 대한 복무내용이 달랐다는 점도 그 한가지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후자가 국가의 관료조직 에 속한 관료로서 일정한 임무를 수행했던 반면, 전자는 관료조직에 속하지 못한 채 지방관의 아래에서 그의 명령에 따라 지방의 행정실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러한 점도 국가의 토지분급시 어느 정도 고려되었음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유 가운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지급대상자의 신분과 관 련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 아는 바와 같이 당시 官僚田을 지급받은 관 료들은 모두 골품귀족 출신들이었다. 반면에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은 촌주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방의 유력자로서 5頭品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지만 골품귀족은 25) 官僚田에 대해서는 拙稿, 統一新羅時代 官僚田의 支給과 經營 을 참고하라. 26) 統一新羅時代의 收租率에 대해서는 金基興, 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 사회변동과 관련하여 (1991) pp. 177 186을 참고하라.
- 94 - 國史館論叢 第39輯 아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骨品制의 테두리 밖에 위치하고 있던 평민신분이었던 것이다. 비록 村主나 관료나가 모두 국가에 대한 복무의 대가로 토지 村主位田 畓과 官僚田를 지급받았지만, 평민 출신의 村主가 귀족관료들과 동일한 내용의 경제적 대 우를 받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골품귀 족들 내부에조차도 신분에 따른 보수체계상의 차별이 엄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27) 이렇게 보아 오고 나면, 村主位田 畓의 지급내용이 官僚田의 그것과 비교하여 열등 했던 주된 이유는 국가가 그 피지급자의 신분에 따라 지급내용을 달리 규정했기 때 문이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것은 통일신라의 토지분급제도도 그 밖의 정치 사 회제도와 마찬가지로 골품제라는 강고한 신분제적 기반 위에서 운용되었음을 의미하 는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村主位田 畓의 지급문제를 통하여 분명하게 확인한 셈이 다. Ⅲ. 村主位田 畓의 經營 우리는 앞장에서 村主位田 畓의 지급과 관련된 문제들을 살펴 보았다. 그 결과 村 主位田 畓의 지급대상이나 지급액, 그리고 지급의 실제적 내용 등이 어느 정도 분명 해지지 않았나 한다. 이제 본장에서는 이와 같은 검토를 바탕으로 하여 村主位田 畓 의 경영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에서도 A村에 설치된 村主位畓의 경우 를 중심으로 하여, 그 밖의 村民들의 烟受有田 畓의 경영형태와 비교하여 가면서 논 의를 진행시켜 나갔으면 한다. 村主位田 畓은 기본적으로 烟受有田 畓의 범주에 속하 는 토지였으므로 양자의 비교를 통하여 村主位田 畓의 경영상의 특징을 좀더 분명히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村主位田 畓의 경영형태와 관련하여 우리는 먼저 그 토지가 村主 자신의 烟受有 田 畓 위에 설치되었다는 앞서의 지적을 잘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양자가 비록 地目은 달랐지만, 국가에 대한 부담의 측면을 제외하면,28) 전혀 동일한 성격의 토지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村主位田 畓의 경영형태도 기본 적으로 그 밖의 촌민들의 烟受有田 畓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 이기도 하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村主位田 畓이 村內의 농민들에 의 해 공동경작되었으며, 그 수확은 고스란히 村主의 몫이 되었을 것이 라고 주장하였다.29) 이 견해에 따르면 결 27) 拙稿, 新羅의 祿邑 ( 韓國上古史學報 3, 1990) pp. 123 125. 28) 烟受有田 畓이 국가에 1/10租를 무는 토지였고, 村主位田 畓은 그 의무를 면제받은 토지였다 는 점은 이미 앞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 95 - 과적으로 국가가 村主位田 畓의 경작을 책임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것은 烟受有田 畓의 경우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烟受有田 畓은 그 경작이 소유주인 각 촌 민의 책임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30) 이와 같이 村主位田 畓이 공동경작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 村主들의 촌락사회에서의 위치를 염두 에 두고 주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들이 그 사회에서의 유력자로서 村의 수취 전반에 관여하면서 村民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점을 떠을리면, 그 들의 村主位田 畓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경작되었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 상정할 수 도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러하였다고 보기에는 적지 않은 의문이 따른다. 이와 관 련하여 무엇보다도 村主位田 畓의 지급내용과 관련된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村主位田 畓의 실제적인 지급내용은 村主位田 畓의 지급액만큼 村 主 자신의 烟受有田 畓에 대해 納租의무를 면제해 준 것이었다. 즉 村主가 국가로부 터 지급받은 것은 그 토지에 대한 免粗權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이 점을 중시할 경 우, 村主位田 畓의 경작의 책임이 국가에 있었다고 볼 이유가 없다고 생각된다. 村主 位田 畓과 관련된 국가와 村主 사이의 지급 피지급의 관계는 단지 免租權을 매개로 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村主位田 畓 자체가 烟受有田 畓의 범주에 속하는 토지였 으므로 국가의 입장에서도 그 토지의 경작에까지 관여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村主位田 畓이 실제적으로 촌민들에 의해 공동으로 경작되었을 가능 성은 희박하다고 믿어진다. 아울러 설사 일부 村主 들이 촌민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村主位田 畓을 경작한 경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법적인 것으 로 보아야 옳지 않을까 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경우와 같이 村主位田 畓의 경우도 烟受有田 畓의 경우와 마찬 가지로 국가가 그 경작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그 토지가 自家經 營되었을 가능성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에는 일반적으 로 烟受有田 畓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경영되었다고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결론으로 단정짓기에 앞서 또 한가지의 경영방식이 채택되 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바로 村主位田 畓이 佃戶制의 방식으로 경영되었을 가능성이다. 당시에도 이미 일부 전답은 佃戶制의 방식으로 경 영되고 있었다고 여겨지며,31) 또한 村主의 경우 유력자로서 村內에서 토지를 집적하 29) 野村忠夫, 正倉院より發見された新羅の民政文書K ついて ( 史學雜誌 62-4, 1954) p. 67, 金哲埈, 新羅 貴族勢力의 基盤 ( 人文科學 7, 1962 ; 韓國古代社會研究, 1975) p. 236 및 新羅의 村落과 農民生活 ( 한국사 3, 1976 ; 韓國古代史硏究, 1990) p. 116, 림건상, 신라의 정전제에 대하여(2) p. 45, 李鍾旭, 新羅帳籍을 통하여 본 統一新羅외 村落支配體制 p. 42 참조. 30) 姜晋哲, 新羅統一期의 土地制度 高麗田柴科制度의 理解를 위하여 ( 高麗土地制度史硏 究, 1980) pp. 3 11.
- 96 - 國史館論叢 第39輯 여 그와 같은 방식으로 경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보다도 큰 사람들이었다고 믿 어지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村主가 지급받은 村主位田 畓의 면적과 그가 보유하고 있던 家 內勞動力의 크기를 살펴 보고, 그것을 일반 촌민들의 경우와 비교하여 봄으로써 어 느 정도 밝힐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만약 당시 村主位田 畓이 佃戶制의 방식으로 경 영되었다면, 村主들은 자가경영을 하던 일반 촌민들의 경우와 비교할 때 그가 보유 하고 있던 가내노동력에 비해 佃戶制의 방식으로 경영한 만큼 넓은 면적의 村主位 田 畓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32) 그러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유 일한 실례인 A村 출신 村主의 경우를 통하여 이 점을 살펴 보기로 하자. 먼저 그 관 계기록을 제시 하면 다음과 같다. E 當縣沙害漸村見內山 地周五千七百廿五步 合孔烟十㊀ 計烟四余分三 此中仲下烟四 下上烟二 下下烟五 合百卅 二 此中古有 ㊆ 人三年間中產幷合人百卅五以丁廿九 以奴一 助子七 以奴一 追子十 一 小子九 三年間中產小子五 除公一 丁女卅㊁ ㊁ ㊉ 以婢五 助女子十一 以稗一 追女子九 小女子八 三年間中產小女子八 以稗 一 除母 一 老母一 三年間中列加合人二 以追子一 小子一 ㊁ 合馬廿五 以古有廿二 三年間中加馬三 合牛廿ニ 以古有十七 三年間中加牛 五 合畓百二結二負四束 以其村官进謨畓四結 內視令畓四結 烟受有畓九 十四 結二 負四束 以村主位畓十九結七十負 合田六十二結十負 五束 竝烟受有之 (新羅 村落帳籍 A村 1 9行) 위 기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A村 출신 村主가 지급받은 村主位田 畓의 총면적은 村主位畓 19結 70負였다. 이것이 그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의 전부였을 것이라는 점 31) 당시 촌내의 토지 가운데 內視令畓과 官謨田 畓은 佃戶制의 방식으로 경영되었다고 생각된 다 (拙稿, 統一新羅時代 官僚田의 支給과 經營 및 統一新羅時代의 官謨田 畓 pp. 42 45 참조). 한편 오장환도 촌의 토지 가운데 일부가 佃戶制에 의해 경영되었을 것으로 보았 다(오장환, 신라장적에서 본 9세기 전후 우리나라의 사회경제 형편에 대한 몇 가지 문제 력사과학 1958년 제 5 호, 1958, p. 77). 32) 물론 村主의 가족들이 전혀 농업경영에 가담하지 않은 경우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 만 村主와 그의 가족들도 기본적으로 농민 출신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그들도 역시 농 업경영에 참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97 - 은 이미 앞서 실명한 바 있다. 그리고 A村의 경우 村主의 孔烟(戶)을 제외한 일반 촌민들의 孔烟은 10개 였고, 그 孔烟들이 소유하고 있던 烟受有田 畓의 총 면적은 136結 42負 9束으로, 각 孔烟의 평균 烟受有田 畓의 면적은 13結 64負 3束이었다. 그 러니까 A村 출신 村主는 이것의 약 1.4배 정도가 되는 면적의 村主位田 畓을 보유하 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사료 E를 통하여 A村 출신 村主가 보유하고 있던 가내노동력의 크기를 구 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거기에는 인구가 孔烟 별로 파악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村단위로 집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촌의 孔烟과 인구와의 관계를 비교하여 봄으로써 그 크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는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료 E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A村에는 11 개의 孔烟이 있었는데, 그 구 체적 내역은 仲下烟이 4개, 下上烟이 2개, 下下烟이 5개였다. 물론 A村의 유력자인 村主의 孔烟이 그 촌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仲下烟에 속해 있었으리라는 데에는 이 론이 없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성과를 보면, 각 孔烟의 등급편성은 丁과 丁女의 수를 기준으로 한 것이며, 그 수가 丁女를 기준 丁 1人은 丁女 2人으로 간주함으로 환산 하여 7人 이하일 경우를 下下烟으로 편성하고 1등급이 올라갈 때마다 1人씩 증가하 였다고 한다.33) 이 견해에 따를 경우, 경작연령층을 일단 丁(丁女)에 한정시켜 놓고 보면, 村主의 孔烟이 보유하고 있던 노동력은 丁女를 기준으로 하여 10人(仲下烟)이 된다. 그리고 그 밖의 10개의 孔烟이 보유한 노동력은 83人(丁女 기준)이었으므로, 평균노동력의 크기는 丁女기준으로 8.3人이었다고 할 수 있다. 村主의 가내노동력의 크기는 그 밖의 孔烟들의 평균노동력의 크기의 약 1.2배였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 다. 이상에서 A村 출신 村主의 村主位田 畓의 면적과 가내노동력의 크기를 살펴 보았 는데, 그는 일반촌민들의 평균 烟受有田 畓 보유 면적의 약 1.4배에 해당하는 村主 位畓을 보유 하고 있었으며, 가내노동력 丁 丁女로 구성된 에 있어서도 약 1.2배 우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 村主는 일반 촌민들의 경우와 비교할 때 가내 노동력에 비해 보유토지 村主位畓一의 면적이 약간 넓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큰 차이는 없었던 셈이다. 이 정도의 미미한 차이가 村主位田 畓에서 佃戶制에 의한 경영방식이 채택되었음을 뒷받침해 줄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A村에 있던 경작 가능 연령층의 노비 가운데 상당수는 村主의 소유였으리라는 점이나,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村主가 일반 촌민들에 비해 훨씬 많은 가축노동력 牛 소유 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까지 염두에 두고 보면, 실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 村主의 가내노동력 에 대한 경작토지 村主位畓 의 면적이 일반 촌민의 경우보다 작았다고 33) 安部井正, 新羅村落文書に見える九等戶區分について ( 朝鮮學報 133, 1990) pp. 8 11 참조.
- 98 - 國史館論叢 第39輯 보는 것이 아마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A村 출신의 村主가 자신의 村主位 그 전부든지 설부든지 을 佃戶制의 방식으로 경영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는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러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된다. 이 村主의 경우도 촌내 일반 烟受有田 畓의 소 유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村主位畓 19結 70負를 자가경영했다고 믿어지는 것이 다. 물론 A村 출신 村主한 예의 분석만을 토대로 하여 당시 村主들이 모두 그와 같 은 방식으로 村主位田 畓을 경영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村主들 가운데 많은 토 지를 집적한 사람들은 村主位田 畓을 佃戶制의 방식으로 경영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A村 출신 村主가 살던 9세기 초는 아직 村 主들에 의한 대토지집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이전이었다는 점을 중시하면,34) 대부분의 村主들은 일반 촌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村主位田 畓을 자가경영했다고 보아서 좋지 않을까 한다. 한편 村主位田 畓의 경영과 관련하여 우리가 각별히 주목해 보아야 할 것으로 소 (牛)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35)다 아는 바와 같이, 당시 소는 전답의 경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村落帳籍을 보면, 村主位田 畓이 설치되어 있던 A村 에는 그렇지 않았던 나머지 3개촌에 비해서 훨씬 많은 소가 있었다는 점이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이다. 이 점은 각 촌의 소의 수를, 그 소들이 경작했을 전답의 면적과 비교해 볼 때 분명히 드러난다. 즉 표 1 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A村의 소 1마리당 전답의 면적은 B C D村의 그것의 약 1/2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 꾸어 말하면, 전답의 면적을 기준으로 하여 볼 때 A村에는 B C D村에 비하여 약 2 배의 소가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표 1 소의 수와 전답 면적의 비교 村 소의 수 전 답 의 면 적 소 1 마리당 전답의 면적 164結 12負 9束 7結 46負 A 22 182結 70負 7束 15結 22負 6束 B 12 C 11 129結 74負 1束 11結 70負 5束 D 8 106結 36負 13結 29負 5束 <표> </표> 34) 이 토지집적온 뒤에서 살펴 보겠지만, 그들의 豪族化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 라서 이러한 현상은 신라말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된다(본고 제Ⅳ장 참조). 35) 村落帳籍에 보이는 소에 주목한 논문으로는, 李泰鎭, 新羅 村落文書의 牛馬 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 碧史李佑成敎授 停年退職紀念論叢 上, 1990)가 있다. 여기에서 氏는 村落 帳籍에 보이는 4개 村이 모두 왕실직속지라 보고, 각 村의 소 가운데 상당수는 그 직속지의 경작을 위하여 왕실 소유의 소를 제공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4개 村이 왕실직 속지가 아니라, 국가의 郡縣制적 지배가 실현되던 일반적인 村들이었다고 보는 입장이므로 氏의 견해에 따르지 않는다. 村落帳籍에 보이는 4개의 村의 지배체제에 대해서는 別稿를 마 련하여 검토할 예정이다.
- 99 - 이와 같이 A村이 B C D 村보다 전답의 면적에 비하여 매우 많은 소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단순히 우연의 결과로 돌리기가 어렵다. A村을 제외한 B C D村 사이에 는 소 1 마리당 전답의 면적에 있어서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더욱 그러하다( 표 1 참조). 결국 거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 는데,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소가 무엇보다도 전답의 경작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는 점을 떠올리면, 우리는 A村의 전답 구성상의 특징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해명 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지 않을 까 생각된다 新羅村落帳籍에 보이는 地目으로는 烟受有田 畜, 官謨田 畓, 內視令畓,村主位畓 등 이 있다. 이 가운데 烟受有田 畓과 官謨田 畓은 4개 村에 공통으로 있던 地目이었다. 반면에 內視令畓과 村主位畓은 A村에만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 地目 가운데 4개 村에 공통으로 있던 烟受有田 畜과 官謨田 畓의 경우는 촌에 따라 약간의 차이 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것들의 경작에 이용한 소의 수가 대체로 그 토지의 면적에 비례하였다. 우리는 촌내의 전답이 烟受有田 畓과 官謀田 畓만으로 구성된 B C D村 의 소 1마리당 전담의 면적을 통하여 이 점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표 1 참조). 그렇다면 우리는 4개 村 가운데 각별히 A村에 전답에 비해 많은 수의 소가 있었던 원인을 烟受有田 畓과 官謨田 畓이 아닌, A村에만 설치되어 있던 內視令畓이나 村主 位畓과의 관련속에서 살펴보아야 될 것이다. 그런데 內視令畓은 內視令이라는 관료에게 지급된 官僚田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 리고 그 토지는 國有地 위에 설치되었으며 佃戶制의 방식으로 경영되었다고 여겨진 다.36) 그러므로 이 토지의 경영은 원척적으로 佃戶의 책임 아래에서 이루어졌겠지만, 그 지급대상자가 骨品官僚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勸農의 차원에서 각별히 그 佃戶에 게 소가 지급되었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 도 그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內視令畓 자체가 A村 총전답의 3%에도 미 치지 못하는 4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결국 A村이 B C D村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소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19結 70負의 村主位畓의 경작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37) 여기에서 A村에 있던 22마리의 소 가운데 村主位畓의 경작에 부림을 당한 소는 구체적으로 몇마리 정도였을까 궁금해진다. 이 의문은 거꾸로 각 촌의 전답의 대부 분을 차지하고 있던 烟受有田 畓과 官謨田 畓의 경작에 몇마리의 소가 이용되었는지 를 밝힘으로써 풀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36) 拙稿, 統一新羅時代 官僚田의 支給과 經營 참조. 37) 宮嶋博史와 魏恩淑도 별다른 논증없이 A村에 소가 많았던 것이 村主位畓의 경작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 바 있다(宮嶋博史, 朝鮮史硏究と所有論一時代區分についての一提言 p. 46, 魏恩淑, 나말여초 농업생산력 발전과 그 주도세력 p. 34).
- 100 - 國史館論叢 第39輯 烟受有田 畓과 官謨田 畓 이외의 토지가 설치되어 있던 A村의 경우는 일단 돌려놓 고, B C D村의 경우만 놓고 보면 이 3개의 村의 烟受有田 畓과 官謨田 畓의 총면적 은 418結 80負 8束이었다. 그리고 그 촌들이 보유하고 있던 소는 31마리였다. 그러니 까 원칙적으로 소 1마리가 평균 약 13結 51負의 烟受有田 畓과 官謨田 畓을 경작했 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A村에는 총 140結 42負 9束의 烟受有田 畓과 官謨田 密이 있었다. 이 전답 의 경작에도 B C D村의 경우와 같은 비율로 소가 이용되었다면, 그 수는 약 10마리 가 된다. 그렇다면 자연히 A村이 보유하고 있던 22마리의 소 가운데 12마리는 烟受 有田 畓과 官謨田 畓 이외의 전답, 즉 內視令畓과 村主位畓의 경작에 이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內視令畓의 경작에 부림을 당한 소는 그 가운데 소수에 불과했다고 믿어지므로, 결국 그 소들의 대부분은 村主位畓 의 경작에 이용되었다고 보아 좋을 줄 안다.38) 물론 이 경우 그 소들은 A村 출신 村 主의 소유였을 것이다.39) A村에 설치된 19結 70負의 村主位畓을 경작하는데 대략 10마리 정도의 소가 이용 되었다고 볼 경우, 소 1마리당 경작면적은 약 2結이 된다. 이와 같은 소의 이용율은 일반 촌민들에 의해 경작된 烟受有田 畓이나 官謨田 畓에서의 그것 소 1 마리 당 약 13結 51負 보다 약 7배나 높은 것이다. 이는 村主들의 토지경작이 일반 촌민들 의 그것보다 훨씬 집약적이었음을 의미한다. 그 밖에도 전자는 施肥에 있어서도 후 자보다는 유리하였을 것이다. 소들은 노동력 뿐만 아니라 畜冀이라는 훌륭한 비료의 공급원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당시의 村主들은 일반 촌민들과 비교하여 농업 경영상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A村 출신 村主의 경우를 들어 이미 9세기 초반경에 村主들은 농업 경영에 있어서 일반 촌민들과는 다른 차원의 농법단계에 있었다는 견해가 제출되었 다. 이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당시 일반 촌민들은 休耕農法단계에 있었으나 A村 출신 村主와 같은 사람들은 선구적으로 休閑農法을 실현해가고 있었다는 것이고,40)또 다른 하나는 일반 촌민들은 休閑農法단계에 머물 38) 魏恩淑은 B C D村의 戶당 소의 소유가 대략 1마리였다는 점을 들어 村主戶는 무려 10여 마 리 이상의 소를 소유했을 것으로 주장하였다 (魏恩淑, 나말여초 농업생산력 발전과 그 주 도세력 pp. 33 34). 39) 당시 소는 村落帳籍에 合无去因白牛 以賣如白牛一 廻去烟牛 死白 (新羅村籍帳籍 D村 18 行) 이라고 한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매매할 수도 있고 이주(廻去)시에는 가지고 갈 수도 있었다. 이것은 소가 村民들의 소유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明石 一紀도 각 村의 소들이 村民들의 사유물이었을 것으로 보았다(明石一紀, 統一新羅の村制 について 日本歷史 322, 1975, p. 28). 이러한 견지에서 A村의 村主位畓의 경작에 부림 을 당한 소들도 村主의 소유였다고 생각된다. 40) 宮嶋博史, 朝鮮史硏究と所有論一時代區分についての一提言 pp. 52 56. 한편, 休耕農法과 休閑農法의 개념에 대해서는 姜晋哲, 麗代의 陳田에 대한 權利門題 ( 震檀學報 66,
- 101 - 고 있던 반면에 村主의 경우는 常耕農法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주장이다.41) 이 가운데 첫번째 견해에 대해서는 당시의 農法수준을 너무 저급한 단계로 잡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앞선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 기록을 눈여겨 볼 필 요가 있다. F 凡田品 不易之地爲上 一易之地爲中 再易之地爲下 其不易山田一結准平田結 一易 田二結准平田一結 再易田三結准平田一結( 高麗史 78, 食貨志1 經理 文宗 8년 3 월 判). 사료 F는 高麗初의 田品과 山田 平田의 환산에 대한 규정이다. 山田과 平田의 개 념 및 양자의 환산 규정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으나, 위 기록에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田品에 대한 규정이다. 위의 사료에 따르면, 고려 초의 田品은 歲易의 정도에 따라 세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常耕하는 不易之地가 上等田으로, 1 년 경작하고 1년을 휴한하는 一易之 地가 中等田으로, 1년 경작하고 2년을 휴한하는 再易之地가 下等田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규정은 田(旱田)이나 畓(水田)에 모두 적용되었을 것이다. 이 점 은 사료 F에 보이는 文宗 8년 3월의 判의 첫머리에 田과 畜의 구분없이 凡田品 이라 고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의심의 여지가 없다.42) 그런데 여기에서 본 논의와 관련하여 각별히 주목해 보아야 할것은 不易之地, 즉 常耕田 이 上等田으로 규정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당시의 전체 전답 가운데 常耕 田이 어느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田品을 구성할 정도였다면, 이미 고려초에는 적지 않은 常耕田이 존 재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첫번째 견해, 즉 新羅村落帳籍이 작성될 당시 815년경 에 일반 촌민들은 休耕農法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村主와 같은 사람들만이 休閑 農法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선뜻 찬동하기가 어렵다. 왜냐하 면 만약 실제에 있어서 신라 하대에 해당되는 9세기 경에 이와 같은 농법단계에 있 었다면, 그와 같은 단계가 그때로부터 고려초에 이르는 길지 않은 기간에 갑자기 적 지 않은 전답에서 常耕農法이 구현되는 단계로 발전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첫번째 견해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면, 우리는 당시의 농법단계를 1988 ; 韓國中世土地所有研究, 1989) pp. 234 235 참조. 41) 魏恩淑, 나말여초 농업생산력 발전과 그 주도세력 pp. 25 35. 42) 필자는 별고를 마련하여 사료 F를 중심으로 통일신라 및 고려초기의 田品制와 山田 平田의 환산규정에 대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 볼 생각이다.
- 102 - 國史館論叢 第39輯 한 단계 높혀 본 두번째 견해를 따르는 것이 온당해 보일지도 모른다. 이 경우는 일 반 촌민들이 休耕農法보다 한 단계 발전한 休閑農法의 단계에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 이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당시 A村 출신의 村主와 같은 자들이 과연 常耕農法 단계로 접어들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서는 당시 村主들이 常耕農 法을 가능케 하는 제요건을 갖추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休閑農法의 단계에서 常耕農法단계로 이행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전 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常耕이 가능하도록 地力을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점과, 경 작하는 중간에 어떻게 꾸준히 잡초를 제거할 수 있는가 하는 점 (中耕除草)이었다고 알려져 있다.43) 당시 村主들은 이 두 가지 전제 가운데 전자는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대량으로 소유하고 있던 소를 이용하여 深耕함으로 써 보다 쉽게 地力을 회복시킬 수 있었으며, 또한 그것들로부터 얻은 畜糞이라는 훌 륭한 비료를 施肥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8세기 말에서 9세기에 걸친 시기에 水利事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44) 畓의 경우 이를 통한 灌漑水의 안정적 인 공급도 地力의 유지에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灌激水는 작물의 성장에 필요 한 영양분이 상당량 용해되어 있기 때문이다.45) 우리나라에 일찍 부터 산록지에 畓 이 발달한 것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46) 문제가 되는 것은 두번째 전제, 즉 村主들이 中耕除草를 꾸준히 행할 수 있었겠는 가 하는 점이다. 中耕除草과정에서는 소의 노동력을 이용하기가 매우 곤란하다는 것 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47) 즉 그 과정은 거의 전적으로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해야 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따른 과중한 除草노동력의 소요는 休閑農法단계로부 터 常耕農法단계로의 진입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요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 다.48) 이는 바꾸어 말하면, 당시대량으로 필요한 제초노동력의 확보여부가 村主들이 休閑農法단계에 있었는지 常耕農法 단계에 있었는지를 가능하는 매우 중요한 관건이 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이 점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형편이 지만, A村 출신 村主의 경우를 통하여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43) 魏恩淑, 나말여초 농업 생산력 발전과 그 주도세력 pp. 23 24 참조. 44) 李基白, 永川 菁堤碑 貞元修治記의 考察 ( 考古美術 102, 1969 ;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p. 286 참조. 45) 金相昊, 李朝前期의 水田農業硏究 粗放的 農業에서 集約的 農業으로의 轉換 ( 1969年 度 文敎部學術硏究助成費에 의한 硏究報告書 別册, 1969) p. 10. 46) 金相昊, 李朝前期의 水田農業硏究 粗放的 農業에서 集約的 農業으로의 轉換 pp.4 8. 47) 宮嶋博史, 朝鮮史硏究と所有論一時代區分についての提言一 p. 55. 48) 金相昊도 常耕農法에서는 대량의 除草勞動力이 필요하다고하여, 과중한 제초노동력이 常耕 農法을 가로막는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시사한 바 있다(金相吴, 李朝前期의 水田農業硏究 粗放的 農業에서 集約的 農業으로의 轉換一 p. 10 참조). 한편 宮嶋博史는 休耕農法단계 에서 休閑農法 단계로 나아가는 데에도 대량의 제초노동력의 확보가 관건이었다고 하였다 (宮峰博史, 朝鮮史硏究と所有論時代區分についての一提言 pp. 55 56 참조).
- 103 - 만약 A村 출신 村主가 자신이 보유한 전답을 常耕하였다면, 그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거기에 필요한 인간노동력을 확보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常耕을 위해 서는 休閑農法 단계에서보다 어느 정도의 노동력이 더 필요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대체로 2배 이상의 노동력이 요구되었다고 보아서 좋을 듯싶다.49) 그런데 村落帳籍을 보면, 당시 休閑農法단계에 있었다고 믿어지는 일반 촌민들의 경우, 전답 1結을 경작하는데 丁女를 기준으로 하여 평균 0.526人의 노동력이 투여되 었다( 표 2 ). 그러므로 이 전답을 常耕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結당 평균 1.052人 (丁女기준)의 노동력이 필요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표 2 田畜 1 結을 경작하는 데 필요한 勞動力(休閑農法의 경우) 勞動力 田畓 1結을 경작하는 데 필 구분 田 畓 村 (丁女기준) 요한 勞動力 (丁女기준) 144結 42負 9束 83人 0.575人 A 182結 70負 7束 76人 0.525人 B C 129結 74負 1束 50人 0.385人 D 106結 36負 67人 0.630人 합 563結 24負 7束 296人 0.526人 <표> </표>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볼 경우, 村主位畓 19結 70負를 常耕하기 위해서는 산술적으 로 계산하여 20.744人(丁女기준)의 노동력이 요구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A村 출신 村主의 戶가 보유하고 있는 丁 丁女의 노동력은 丁女를 기준으로 하여 그 절반 에도 미치지 못하는 10人에 불과하였다. 즉 당시 그는 常耕을 가능케 할 만한 인간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던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아직 일반 촌민들과 마찬가지로 休閑農法단계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村主의 경우도 村主位畓 1 結을 경작하는 데 투여된 노동력이 丁女 기준으로 0.508人으로 休閑農法단계에 있던 일반 촌민들의 경우(0.526人)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 이를 더욱 뒷받침해 준 다. 흑 村主가 부족한 노동력을 일반 촌민들의 노동력으로 메꾸어서 자신의 村主位田 畓을 常耕했을 가능성을 상정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경우도 실제적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村主位田 畓은 자가경영되었 49) 산술적으로 보아도 一易田을 常耕하기 위해서는 당장 경작면적이 2배로 늘었으므로 2배의 노동력이 필요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地力을 유지 회복시키기 위한 별도의 노력을 해야하므로 사실상 2배 이상의 인간노동력이 소요되었다고 보여진다. 더구 나 再易田을 常耕할 경우, 거기에 2배 이상의 인간노동력이 요구되었으리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 104 - 國史館論叢 第39輯 으며, 설사 불법적으로 일반 촌민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와 같이 아직 국가의 지방 통제력이 강하게 작용하던 시기에 村主가 항상적으로 그들을 동원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50) 요컨대 당시 村主들이 일반 촌민들보다 농업경영상으로 우위에 있었던 것은 분명 하지만, 농법상으로는 아직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休閑農法단계에 머물러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들이 常耕農法을 실현하여 보다 많은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中耕除草를 위한 대량의 노동력의 확보라는 전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Ⅳ. 村主位田 畓과 村主勢力의 成長 王建家門의 경우를 中心으로 우리는 앞장에서 A村의 출신 村主의 경우를 중심으로 하여 村主位田 畓의 경영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그 결과 村主位田 畓의 경우는 畜力의 이용이나 施肥의 용이함 등으로 말미암아 일반 촌민의 烟受有田 畓의 경우보다 농업경영상 우위를 점하고는 있었지만, 9세기 초반경까지도 후자와 별 다름없이 休閑農法으로 자가경영되고 있었 다는 점 등을 알 수 있게 되지 않았나 한다. 그런데 村主들 가운데 상당수가 統一新 羅末期에 이르러 豪族으로 등장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면 村主들 은 이러한 村主位田 畓을 바탕으로 어떻게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고 나아가 豪族으로 성장하게 된 것일까. 이것이 본장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村主位田 畓에서 채택되어 온 농법의 변화에 대한 문제를 떠 올릴 수 있다. 村主가 좀더 발전된 농법으로 村主位田 畓을 경작하여 富를 축적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통일신라 말기에 대량으로 발생한 流民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51) G ①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叛附相半 遠近群盜蜂起蟻聚 善宗謂 乘亂聚衆 可以得志 以眞聖王即位五年大順二年辛亥 投竹州賊魁繁萱( 三國史 記 50, 弓裔傳). ②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竪嬖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 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於是萱竊有覦心 嘯聚徒侶 行撃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 50) A村 출신의 村主가 살던 9세기 초반경은, 村落帳籍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국가의 수취와 관련된 내용을 매우 치밀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 미루어 보아도, 아직 국 가의 통제력이 村 내부에까지 강하게 미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51) 필자는 유민의 발생과, 그들이 당시의 사회 경제 전반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별고를 마련하 여 구체적으로 검토할 예정이다.
- 105 - 月之間 衆至五千人( 三國史記 50, 甄萱傳). 위 기록은 후에 각각 泰封과 後百濟를 건국하는 弓裔와 甄萱이 신라에 반기를 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사료 G①은 신라 말기에 정치가 어지럽고 백 성들이 흩어졌으며 도처에서 도적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다고 당시의 상황을 묘사 하고 있다. G②도 이와 거의 흡사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위 사료의 내용 가운데 백성들이 흩어졌다 는 대목은 바로 流民의 발생을 뜻한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전통사회에서 流民은 주로 국가나 개인의 가혹한 수탈이나52) 기 근 등과 같은 경제적인 이유로 발생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G② 참조). 그러므로 정 도의 차이는 있지만 流民의 발생은 어느 때나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료G에 이 사실이 특기된 것은 이 시기에 각별히 많은 流民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대부분 생계의 유지조차 어려운 절박한 상황에서 고향을 떠난 이들 流民 가운데에 는 유리걸식하며 그날 그날 목숨을 부지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생계 를 도모하기 위한 좀더 적극적인 방편으로 草賊이 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는 三國史記 에, H 飢荒 盜賊遍起( 三國史記 10, 新羅本紀 興德王 7년 8월) 라고 한 기록을 통하여 그러한 사정을 알 수가 있다. 즉 이때 일어난 도적들의 대다 수는 바로 기근과 흉년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流民들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流民들의 대다수는 他村에 들어가 다시 토지경작에 종사함으로써 생계를 도모했을 것이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이유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갈아먹던 농토를 떠났지만 기본적으로 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경작의 터전을 마련한 경우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토착 촌민들의 토지를 佃作하거나 傭作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개간의 어려움 을 염두에 두고 볼 때,53) 보다 많은 流民들이 후자에 속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 리고 좀더 나아가 당시 村主位田 畓을 비롯한 촌민들의 토지가 대부분 자가경영되어 왔다는 점을 떠올리면, 佃作과 傭作 가운데에서도 후자의 경우가 좀더 일반적인 것 이었다고 보는 것이 아마 보다 더 사실에 가까우리라 믿어진다. 여기에서 佃作이나 傭作의 길을 택한 流民들이 누구의 토지를 경작하였을까 하는 52) 高麗史 1, 太祖 원년 6월조 참조. 53) 일찍이 朝鮮後期의 實學者인 鄭尙驥도 가난한 농민들의 경우 재정상의 이유 등으로 개간에 어려움이 많았음을 지적한 바 있다(鄭尙驥 著 李翼成 譯, 農圃問答, 실학사상독본 4, 1992, p. 63).
- 106 - 國史館論叢 第39輯 점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점을 알려줄 만한 직접적인 단서는 찾을 수가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되도록이면 경작의 여건이나 조건이 유리한 사 람의 토지를 경작했으리라는 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村落帳籍에 보 이는 A村을 대상으로 놓고 볼 경우, 그들은 그 촌에 있던 여러 地目의 토지 가운데 이제까지 우리가 검토의 대상으로 삼아온 A村 출신 村主의 村主位畓을 우선적으로 경작하려 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앞서 살펴본바 같이, 그는 일반 촌민들과는 비교 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소를 보유하고, 아울러 비옥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54) 뿐만 아니라 그 토지를 경작할 경우, 그들은, 그들이 流民이 되게 된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인 국가의 과중한 수탈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그 村主는 지방관의 밑에서 그러한 일들을 실제 적으로 수행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도 流民들이 村主位畓의 경작을 선호하 게 된 또하나의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헤아려진다. 물론 이것은 新羅村落帳籍에 보 이는 村의 경우이지만, 村主位田 畓이 설치되어 있던 그 밖의 촌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流民들의 村主位田 畓 경작에의 참여는 전통적인 休閑단계에 있던 그 농법상에 커 다란 변화를 유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55) 流民들의 참여로 이제까 지 村主位田 畓의 常耕化를 가로막고 있던 가장 큰 요인인 中耕除草 노동력의 부족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이 시기부터 村主位田 畓 은 점차 休閑農法단계를 벗어나 常耕化의 길을 밟아가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常耕化 의 장애요인이 해결된 이상 후진적인 休閑農法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 이다. 그리고 流民의 이입에 따른 인구압력의 증가도 村主位田 畓의 常耕化를 촉진시 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56)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이 시기에 村主位田 畓 常耕化의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던 것은 무엇보다도 流民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流民들을 받아들인 村主들 54) 이 점은 A村 출신 村主가 일반적으로 생산력이 畓에 비해 떨어지는 田은 소유하지 않고 생 산력 이 높은, 즉 비옥한 畓 村主位畓 19結 70負 만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다. 55) 경우에 따라서는 村內의 토착 영세농민들이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村主位田 畓의 경작에 참여함으로써 그것이 村主位田 畓의 常耕化에 어느 정도 기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영세농민은 어느 때나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 村主位田 畓에서 常耕化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설사 그들의 참여가 있었하고 하더라도 그것이 常耕化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 직접적인 계기는 통 일신라말기에 대량으로 발생하여 노동력을 제공하고, 아울러 인구압력을 가한 流民들이 그 田畓의 경영에 참여한 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6) 金相吴는 농업발전의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 인구압력이라고 하였다(金相昊, 李朝前期의 水 田 農業硏究 粗放的 農業에서 集約的 農業으로의 轉換 pp. 23 28 참조). 이로 미루어 당시 流民의 이입에 따른 인구압력의 중가와 村主位田 畓의 常耕化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 107 - 은 村主位田 畓을 常耕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流民들이 빠져나간 지역의 村主들의 경우는 그 村主位田 畓의 경작이 여전히 休閑農法의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었을 것 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유추될 수 있는 일이지 만, 전자는 村主位田 畓의 常耕化를 바탕으로 부를 축적하여 豪族으로 성장할 수 있 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던 반면에, 후자는 사실상 그러한 길을 걷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村主들이 村主位田 畓의 常餅化만을 통하여 豪族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어 느 정도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村主位田 畓 자체의 면적이 20結 전후로 일반 촌민들이 소유한 烟受有田 畓 A村의 경우 烟당 평균 13結 64負 3束의 경우와 비교하여 보아도 그다지 크다고 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村主들 가운데 豪族으로 성장한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한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먼저 규정된 村主位田 畓보다 넓은 烟受有田 畓을 소유하고 있던 村 主들의 경우, 免租權이 주어진 村主位田 畓 뿐만 아니라 그 나머지 烟受有田 畓에 대 해서도 그와 같은 권리를 누리려했을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불법적 인 것이었지만, 통일신라말기 국가의 지방통제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에서는 村主들 이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富를 축적해 나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 다. 그리고 이미 村主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상실한 국가도 어쩔 수 없이 그것 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사실상 村主位田 畓의 지급상한액이 무의미해지고 村主가 소유하고 있던 烟受有田 畓이 모 두 村主位田 畓으로 인정되는 결과가 초래된 셈이다. 이것은 村主位田 畓의 실제적인 확대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村主들은 일반 촌민들의 烟受有田 畓을 매입하기도 하고, 촌 내외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경작지를 확대하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가 村主의 경작지 확 대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57) 이 당시 촌 내외에는 많은 미개 간지가 존재했으며, 村主들은 그것을 개간하는 데 누구보다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고 할 수 있다. 그는, 앞서 살펴 본 경우와 같이, 개간에 투입할 수 있는 많은 소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의 아래에 유입된 流民의 노동력도 이용할 수 있었기 때 문이다. 이와 같이 확대된 경작지는 적어도 국가의 힘이 강하게 미치지 못하던 지역에서는 사실상 村主位田 畓의 명목으로 免租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확대된 사실상의 村主位 田 畓에서는 이제 촌주의 자가경영이나 그것에 기반을 둔 傭作制의 방식보다 는 佃戶制의 방식으로 경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村主位田 畓이 A村 출신 촌주의 그것처럼 그다지 넓지 않았을 경우에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전자가 일반적인 방 57) 당시 村主들에 의한 황무지의 개간과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金鍾國, 高麗王朝成立過程の 硏究 特に豪族問題を中心として pp. 20 21 참조.
- 108 - 國史館論叢 第39輯 식으로 채택되었겠지만 그 토지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그와 같은 방식으로 경영하는 데에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村主들은 이렇 게 확대된 村主位田 畓을 주로 佃戶制의 방식에 입각하여 발달된 常耕農法으로 경작 함으로써 많은 경제적 富를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豪族으로 성장하여 갔을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다. 이 점은 後三國을 통일한 王建 가문의 경제적 성장과정을 검토해 봄으로써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1 ① 弓裔據高句麗之地 都鐵圓 國號泰封 世祖時爲松嶽郡沙粲 乾寧三年丙辰 以郡歸 于裔 裔大喜 以爲金城太守( 高麗史 1, 太祖世家 前文). ② 元昌生四男 長曰龍建 後改隆 宇文明 是爲世祖 貌魁偉 美鬚髥 器度宏大 有幷呑 三三韓之地 嘗夢見一美人 約爲室家 後自松嶽往永安城 道遇一女惟肖 遂與爲婚 不知所 從來 故世號夢夫人 或云以 其爲三韓之母 遂姓韓氏 是爲威肅王后 世祖居松嶽舊第有年 又欲創新第於其南 即延慶宮奉元殿基也 是桐裏山祖師道訪 入唐得一行地理法而還 登白 頭山 至鵠嶺 見世祖新構第曰 種稌之地 何種麻耶 言訖而去 夫人聞而以吿 世祖倒屣追 之 及見如舊識 遂與登鶴嶺 究山水之脈 上觀天文 下察時數曰 此地脈自壬方白頭山水母 木幹 來落馬頭明堂 君又水命 宜從水之大數 作字六六 爲三十六區 則符應天地之 大數 明年必生聖子 宜各曰王建 因作實封 題其外云 謹奉書百拜 獻書于未來三韓統合之主大 原君子足下 是唐僖宗乾符三年四月也 世祖從其言 築室以居 是月威肅有娠 生太祖( 高 麗史 高麗世系). ③ 作帝建 幼而聰睿神勇 年五六問母曰 我父誰 曰唐父 盖未知其原故耳 及長才兼六 藝 書射尤絕妙 年十六 母與以父所遺峻矢 作帝建大悅射之 百發百中 世謂神弓 於是欲 觀父 寄商船 行至海中 雲霧晦瞑 舟不行三日 舟中人卜曰 宜去高麗人 作帝建執弓矢 自 投海 下有巖石立其上 霧開風利 船去如飛 俄有一老翁拜曰 我是西海龍王 (中略) 翁以 長女翥旻義妻之 作帝建賚七寶將還 龍女曰 父有楊杖與販 勝七寶 盡請之 作帝建請還七 寶 原得楊杖與豚 翁曰 此二物吾之神通 然君有請 敢不從 乃加與豚 於是乘漆船 載七寶 與豚 泛海倏到按 即昌陵窟前江岸也 白州正朝劉相晞等聞曰 作帝建娶西海龍女來 實大 慶也 率開貞鹽白四州 江華喬桐河陰三縣人 爲築永安城 營宮室 龍女初來 即往開州東北 山麓 以銀盂掘地 取水用之 今開城大井是也 居一年 豚不入牢 乃語豚曰 若此地不可居 吾將隨汝所之 詰朝豚至 松嶽南麓而臥 遂營新第 即康忠舊居也 往來永安城 而居者 三 十餘年 龍女 (中略) 復化龍入井 不復還 作帝建晚居俗離山長岬寺 常讀釋典而卒 後追 尊爲懿祖景康大王 龍女爲元昌王后( 高麗史 高麗世系). 위의 사료들은 각각 王建의 父와 祖父인 龍建(隆)과 作帝建에 대한 기록이다. 사료 Ⅰ①에 따르면, 王建의 父인 世祖(龍建)는 乾寧 3년(896)에 자신이 沙粲으로 있던 松 獄郡을 들어 弓裔에게 귀부하였다. 沙粲은, 다 아는 바와 같이, 본래 신라의 17官位
- 109 - 가운데 제8위의 관위를 가리키지만, 여기에서는 관위가 아닌 官職을 의미한다. 이 당 시에는 縣政에 참여하던 眞村主들을 그들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위인 沙粲을 따 서, 그러한 명칭으로 불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58) 나아가 그가 자의적으 로 松獄郡을 들어 弓裔에게 귀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松獄郡의 최고유력자 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59) 여기에서 우리는 王建의 가문이 이미 龍建代에는 松獄郡에서 가장 유력한 村主출신의 豪族으로서 그에 걸맞는 상당한 경제적 부를 축 적하고 있었으리라는 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龍建과 作帝建의 행적을 전하는, 高麗史 高麗世系에 인용된 編年通錄 의 기록인 I ② ③에는 그와 같은 王建가문의 경제적 측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전혀 없다. I ②는 다만 龍建의 결혼, 移居 그리고 王建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를 전 하고 있으며, I ③도 作帝建의 결혼과 이별, 移居와 구거주지에의 왕래, 그의 말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高麗史 高麗世系에 인용된 編年通錄 의 또다른 내용 가운데에서 王建가문의 경제적 측면에 대한 의문, 각별히는 그러한 경제적 부 의 형성과정에 대한 의문을 푸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그것을 접할 수가 있다. 다음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J ① 康忠體貌端嚴 多才藝 娶西江永安村富人女 名具置義 居五冠山摩訶岬 ② 時新 羅監干八元 善風水到扶蘇郡 郡在扶蘇山北 見山形勝而童 告康忠曰 若移郡山南 植松使 不露巖石 則統合三韓者出矣 於是康忠與郡人 徙居山南 栽松遍嶽 因改名松嶽郡 遂爲郡 上沙粲 ③ 且以摩詞岬第 爲永業之地 往來焉家累千金 生二子( 高麗史 高麗世系). 이 기록에 보이는 康忠은 編年通錄 에는 王建의 먼 조상으로 되어 있지만, 그가 실존인물이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미 지적된 바 있듯이, 그가 실존인물 이었다고 하더라도 위 기록에 보이는 康忠외 행적은 그가 살았을 시대보다는 훨씬 후대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60) 그런데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사료 J에 보이는 康忠 의 행적이 바로 앞서 살펴 본 龍建과 作帝建의 그것들과 흡사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 다. 즉 康忠이 三韓을 통합할 자식이 태어날 것이라는 風水地理說에 따라 移居하였 다는 점 (J②),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자식을 얻었다는 점 (J③) 등은 龍建의 경우와 58) 李佑成, 高麗時代의 村落과 百姓 ( 歷史學報 14, 1961 韓國中世社會硏究», 1991) pp. 41 42, 金光洙, 羅末麗初의 豪族과 官班 ( 韓國史研究 23, 1979) p. 126. 59) 이런 의미에서 龍建이 松嶽郡의 沙榮 가운데 가장 서열이 높은 上沙粲이었을 것이라는 견해 는, 설득력이 커 보인다(李佑成, 高麗時代의 村落과 百姓 p. 42, 鄭淸柱, 新羅末 高麗初 豪族硏究 全北大大學垸 博士學位論文, 1991, p. 116). 60) 河炫綱, 編年通錄 과 高麗王室世系의 性格 ( 韓國中世史硏究», 1988) pp. 12 13 참 조.
- 110 - 國史館論叢 第39輯 거의 다를 바가 없다(I② 참조). 그리고 그는 松獄郡으로 이주하였으며 (J②) 移居한 후에도 구거주지를 왕래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J③), 사료 I ③에 따르면 공교롭게 도 作帝建도 그러한 행적을 남긴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編年通錄 에 龍建과 作帝建의 행적이 康忠의 그것에 중복해서 나타난 현상은, 이미 지적된 바 있듯이,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先代의 행적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이해된다.61) 다시 말하면, 거의 알 려져 있지 않던 康忠의 행적을 구성하면서 당시 그보다는 그 행적이 훨씬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던 龍建과 作帝建의 그것을 대본으로 삼았던 결과로 여겨지는 것이 다.62) 編年通錄 에, K (作帝建) 居一年 豚不入牢 乃語豚曰 若此地不可居 吾將随汝所之 詰朝豚至 松嶽 南麓而臥 遂營新 第 即康忠舊居也 ( 高麗史 高麗世系) 라고 한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康忠이 이주하여 거처한 것으로 되어 있는 곳이 바로 후에 作帝建이 이주하여 第宅을 지은 장소였다는 점이 그 단적인 근 거가 되지않을까 한다. 요컨대 사료 J에 보이는 이른바 康忠의 행적은 후대의 龍建과 作帝建의 경우를 소급 적용하여 구성한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볼 경우, 사료 J에 보이는 내용 가운데 康忠이 風水地理說에 따라 移居 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은 사실상 龍建의 행적을 반영한 것이고 그가 松獄郡에 移居하였다는 점과 移居한 후에도 구거주지를 왕래하였다는 점 등은 作帝建의 행적 으로부터 재구성한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료 J에 보 이는 康忠의 행적을 통하여 거꾸로 龍建과 作帝建의 행적을 살필 수가 있을 것이 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료 J에 다사 주목해 보기로 하자. 사료 J 에 따르면, 康忠은 扶蘇山의 남쪽에 移居한 후에 摩訶岬에 있던 舊第를 永業之地 로 삼아 왕래 하였는데, 그 후 집에 千金 을 축적하고 두 아들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 보이는 康忠의 행적에 대한 서술이 龍建과 作帝建의 그것을 대본으로 한 것이었다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 이야기의 실제적인 주인공은 龍 建과 作帝建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이 대목은 王建의 가문이 경제적 부를 축적해 나간 과정을 밝히 61) 河炫綱, 編年通錄 과 高麗王室世系의 性格 p. 22. 62) 이와 같은 관점에서 編年通錄 의 기록 가운데 적어도 龍建과 作帝建에 관한 것은, 설화적 으로 미화되고 또한 허황되게 과장된 내용을 제외한 대체적인 줄거리는 역사적 사실로 믿 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李康沃도 編年通錄 의 서술자가, 龍女와 결혼한 이후의 作帝建의 행적과 龍建의 그것에 관해서는 그 사실성을 입증하려고 매우 애썼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 다(李康沃, 고려국조선화 高麗世系 에 대한 신고찰 韓國學報 48, 1987, pp. 110 111 참조).
- 111 - 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앞뒤 문맥 으로 보아 이 대목에 보이 는 永業之地 가 그 부의 축적과 깊이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永業之地 는 대대로 갈아먹을 수 있는 토지를 의미한다. 통일 신라시대에 이러한 성격의 토지가 烟受有田 畓으로 파악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 이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舊第를 永業之地로 삼았다는 것은 舊第 주위의 烟受有 田 畓을 그렇게 했다고 이해해야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舊第를 갈 아먹었다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摩訶岬의 舊 第를 왕래한 것도 자연히 그곳에 있던 烟受有田 畓의 경영을 위해서였다고 보아야 온당할 것이다. 王建 가문이 이 烟受有田 畓을 확보한 것은 龍建이나 作帝建대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編年通錄 에 따르면 그들의 조상 가운데 康忠 寶育 伊帝建 등이 그 烟受有田 畓이 있던 永安村 摩訶岬에서 산 것으로 되어 있고,63) 作帝建도 松獄郡 으로 이주하기 전에는 이 지역에 거주했다는 점으로부터 이와 같은 추측이 가능하다 ( I③ 참조). 그러나 그 烟受有田 畓을 갈아먹었을 作帝建 이전의 조상들의 경제적 지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王建 가문이 경제적으로 본격적 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作帝建대부터였다고 생각된다.64) 사료 J에 따르면 王建가문이 千金을 축적한 것이 松獄郡으로 이주한 후의 일로 되어 있는데, 앞서 살 펴 본 바와 같이, 그 이주의 장본인이 바로 作帝建이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성장과 짝하여 作帝建의 사회적 지위도 상승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康 忠이 松獄郡으로 이주한 후에 드디어 그 郡의 上沙粲이 되었다는 대목이 그러한 추 측을 가능케 해준다. 누차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은 실제적으로 作帝建대의 일이었 기 때문이다. 따라서 늦어도 作帝建대에는 王建 가문이 眞村主 가문으로 등장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의 長子인 龍建도 眞村主였다는 앞서의 지적을 떠올리면, 이것은 사실로서 믿어도 좋다고 생각된다. 眞村主가 된 作帝建은 의당 규정액의 한도 내에서 자신의 烟受有田 畓을 村主位 田 畓으로 지 급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村主位田 畓의 몫 뿐만 아니 라 그 밖의 烟受有畓에 대해서도 그것에서와 같은 권리 免租權 를 누리려 했을 것 으로 생각된다. 그가 村主로 있던 松獄郡이 당시 국가의 지배력이 비교적 강하게 미 치지 못했을 변경지역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더욱 그러하다. 아울러 타인의 토 지를 매입 또는 점탈하거나, 앞서 살펴 본 이 시기의 촌주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대량으로 소유하고 있었을 소와 당시 빈번하게 발생 한 流民들의 노동력을 이용한 63) 高麗史 高麗世系 참조. 64) 李基白도 王建가문이 이때 크게 성장했다고 보았다(李基白, 太祖 王建과 그의 豪族聯合政 權 韓國의 人間像 2,1965 高麗貴族社會의 形成, 1990, p. 13).
- 112 - 國史館論叢 第39輯 개간으로 실질적인 村主位田 畓의 확대를 꾀했을 가능성도 크다. 여기에서 王建의 가문이 作帝建과 龍建대에 두 차례나 이주하였다는 사실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이 이주가 두 사람에 의한 村主位田 畓의 실제적인 확대과정과 무관 하지 않았을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編年通錄 에 따르면, 王建의 가문은 作帝 建대에는 대대로 살아온 永安村에서 松獄郡으로, 龍建대에는 松獄郡 내에서 한 번씩 이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토착성이 강한 당시에 王建가문이 兩代에 걸쳐 두 번이나 이주한 데에는 무슨 중요한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編年通錄 에는 作 帝建대에는 西海龍王으로부터 받은 豚이 드러누은 곳으로 이주한 것으로 되어 있고, 龍建대에는 三韓을 통합할 인물이 태어나리라는 道詵의 말에 따라 이주한 것으로 되 어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설화적인 내용을 사실로 믿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면 王建 가문이 이주한 실제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의문을 푸는 데 사료 J 의 내용이 퍽 시사적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康忠이 永安村 摩訶岬에서 松獄郡으로 이주할 때 郡人 이 함께 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이 주가 康忠이 아니라 作帝建 에 의해 이루어졌음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때 함께 이주한 郡人 으로 표현된 사람들이 다. 사료 J②에 는 이들에 대한 설명이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 는지 단정지어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비교적 토착성이 약하 고, 이주의 주인공인 作帝建에 대한 예속성이 강한 사람들이었으리라는 점이다. 그렇 게 보지 않을 경우, 이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던 곳을 뒤로하고 作帝建을 따라 다른 곳으로 이주한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러한 처지에 있던 사람들로 당시 대량으로 발생한 流民들을 떠올릴 수 있다. 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토착해 살던 고향을 떠나 타향에 거처하던 사람들로, 村 主들과 같은 유력자들의 아래에서 佃作이나 傭作에 참여하던, 地主에의 예속성이 강 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郡人 으로 표현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作帝建의 아래에서 그의 토지 경작에 참여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流民들이었다고 보 아서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이주한 후에도 이들 流民들의 처지가 갑자기 변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그들은 여전히 作帝建의 토지를 갈아먹는 佃戶나 傭作人의 처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은 이주한 곳에 그들이 경작할 수 있는 作帝建의 토지가 있었음을 뜻한다. 作帝建은 이 경작지를 매입 또는 점탈했거 나, 자신의 소와 자신을 따라 이주한 流民 등의 노동력을 투입 하여 개간하였을 것 이다. 그리고 이 토지 역시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村主位田 畓의 명목으로 免租되 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作帝建이 이주한 실제적인 주된 이유는 사실상의 村主位田 畓의 확대와
- 113 - 그 토지의 경작을 위해서였다고 보아서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龍建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作帝建과 龍建대의 이주는 村主位田 畓의 확대와 짝하여 이루어졌을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다.65) 이와 같은 상황 아래에서 그들의 村主位田 畓의 경영방식도 변화하였을 것으로 추 측된다. 크게 확대된 그 토지 전체를 自家經營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신거주지로부터 떨어져 있던 구거주지인 永安村(城)에 있던 村主 位田 畓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적어도 이러한 토지는 佃戶制의 방식으로 경영되었 을 것이다. 사료 I ② ③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作帝建과 龍建이 구거주지를 왕래한 것은 아마도 佃戶制에 의한 그곳 村主位田 畓의 경영을 관리하기 위해서였으 리라고 생각된다. 한편 우리는 앞에서 당시 村主位田 畓이 농법상 전통적인 休閑農法단계에서 보다 발달된 常耕農法단계로 나아가는 추세에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龍建과 作 帝建의 村主位田 畓이 常耕農法으로 경작되었는지의 여부를 구체적으로 가리기는 어 려운 실정이지만 당시의 경작여건으로 볼 때, 常耕農法 단계로 진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 않을까 한다. 사료 J를 통하여 살펴 본 바와 같이, 이들의 경우 이미 作 帝建대에 많은 流民을 받아들임으로써 常耕農法으로 나아가는 데 최대의 장애요인이 었던 中耕除草 노동력의 부족문제를 해결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王建 가문의 경우 늦어도 作帝建대부터는 眞村主가 되어 村主位田 畓을 지 급받아 그것을 확대하고 나아가 常耕農法으로 경작하여 많은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 다고 생각된다. 編年通錄 에서 千金을 축적하였다 고 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 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村主位田 畓을 통한 王建 가 문의 경제적 성장은 作帝建대에 그치지 않고 龍建대로 이어졌으며, 그의 대에는, 사 료 I ①을 통하여 살펴 본 바와 같이, 드디어 松獄郡에서 제일 유력한 豪族으로 등장 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상에서 우리는 통일신라말기에 村主들이 村主位田 畓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여 豪族으로 성장해 나간 과정을 살펴 보고, 그것을 왕건 가문의 경우를 통하여 구체적 으로 확인한 셈이다. 물론 王建의 가문이 당시 이와 같은 과정을 밟아 豪族으로 등 장한 전형적인 예라고 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구체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지 리적인 위치 등으로 미루어 그의 가문이 村主位田 畓의 경영 뿐만 아니라 海上貿易 을 통하여 부를 축적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66) 하 65) 編年通錄 에서 龍建과 作帝建대의 이주가 비중이 크게 기록된 실제적인 이유도 이와 같 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66) 이제까지 王建가문의 경제적 성장 과정에 대하여 언급한 글로는, 金鍾國, 高麗王朝成立過程 の硏究 特に豪族問題を中心として pp. 23 25, 金哲按, 後三國時代의 支配勢力의 性 格 ( 李相佰博士回甲紀念論叢, 1964 ; 韓國古代社會研究, 1975) pp. 261 263, 朴漢
- 114 - 國史館論叢 第39輯 卨, 王建世系의 貿易活動에 對하여 ( 史叢 1C, 1965) pp. 255 285, 李龍範, 處容說話의 一考察 唐代 이슬람商人과 新羅 ( 震檀學報 32, 1969 ; 韓滿交流史研究, 1989) pp. 29 31, 河炫綱, 編年通錄 과 高麗王室世系의 性格 pp. 15 21, 鄭淸柱, 新羅末 高麗 初 豪族研究 pp. 110 117, 閔賢九, 韓國史에 있어서 高麗의 後三國 統一 ( 歷史上의 分裂과 再統一, 1992) pp. 34 35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河炫綱의 논문을 제외한 나머지 연구에서는 編年通錄 에 보이는 王建의 先代의 행적과 王建의 海軍活動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거의 예외 없이 그의 가문이 海上貿易을 통하여 富를 축적했을 것으로 추측 하였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제시된 주요 근거는 대략 다음의 세 가지를 꼽을 수 있 는데, 이 점을 자세히 살펴 보면 거기에는 수긍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첫째, 編年通錄 에 王建의 먼 조상으로 나오는 康忠의 가문을 과연 海上勢力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海上勢力을 당시 海上貿易을 통하여 富를 축적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력이 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金哲 埈과 朴漢卨 및 鄭淸柱는 康忠이 禮成江口(永安村)의 富人의 딸과 혼인하였다는 編年通 錄 의 기록을 근거로 당시 康忠 가문이 禮成江口의 海上勢力과 연결을 맺고 있었으며, 이 점으로 미루어 康忠 가문 또한 海上勢力으로 이해한 것 같다(金哲埈, 後三國時代의 支配 勢力의 性格 p. 262, 朴漢卨, 王建世系의 貿易活動에 對하여 pp. 268 270, 鄭淸柱, 新 羅末 高麗初 豪族硏究 p. 113 참조). 그러나 編年通錄 의 관계기록을 자세히 살펴 보면, 康忠의 妻家가 海上勢力이었다는 구체적인 단서는 찾을 수가 없다. 설사 그의 장인이 禮成 江口에 거주한 富人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 가문이 해상활동을 했을 가능성을 상정한다 고 하여도 이 점으로부터 康忠의 가문이 海上勢力이었을 것으로 본 것은 지나친 억측이라 고 생각된다. 오히려 編年通錄 의 기록을 보면, 康忠의 父로 나오는 虎景은 수렵을 생업 으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鄭淸柱, 新羅末 高麗初 豪族硏究 p. 111 참조), 康忠 자 신도 永業之地 즉 私有地의 경영을 통하여 千金 으로 표현된 富를 축적한 것으로 되어 있 다는 점(사료 J 및 본고 Ⅳ장 참조)으로 미루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둘째, 王建의 祖父인 作帝建의 海上活動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이제까지 대 다수의 연구자들은 作帝建이 그의 父로 되어 있는 唐 肅宗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西海의 龍王을 만나고 龍女와 결혼하여 돌아온다는 編年通錄 의 설화적인 이야기가 作帝建이 海 上貿易에 종사했음을 시사한다고 이해하였다(金鍾國, 高麗王朝成立過程の硏究 特に豪族 問題を中心として p. 24, 金哲埈, 後三國時代의 支配勢力의 性格 p. 262, 朴漢卨, 王 建世系의 贸易活動에 對하여 pp. 272 277, 鄭淸柱, 新羅末 高麗初 豪族硏究 pp. 113, 閔 賢九, 韓國史에 있어서 高麗의 後三國 統一 p. 34 참조).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작 근거가 되는 作帝建과 龍王 및 龍女와 관련된 이야기가 실제적인 作帝建의 행적 을 토대로 하여 구성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그 이야기는 주인공만 作帝建으로 대치하였을 뿐, 三國遺事 2, 紀異2 眞聖女大王 居陀知條에 보이는 居陀知說話를 약간 變 改하고, 거기에 이른바 龍孫神話의 내용을 덧붙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李康沃, 고려국 조신화 高麗世系 에 대한 신고찰 pp. 105 109 참조). 단, 作帝建의 행적을 서술하는 데 바다와 관련된 요소 龍 航海 등 로 구성된 이야기를 대본으로 삼은 것은 그의 활동무대 가 바다와 인접한 松嶽地方이었다는 점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作帝建의 실제적인 행적을 토대로 하지않은 編年通錄 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그를 海上貿易에 종 사하던 사람으로 간주한 기존의 견해에는 찬동하기 어렵다. 셋째, 王建의 海上活動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王建이 弓 裔의 밑에서 海軍活動을 전개한 것도 그 가문의 海上貿易活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 하였다(金鍾國, 高麗王朝成立過程の硏究 特に豪族問題を中心として p. 24, 金哲埈, 後三國時代의 支配勢力외 性格 pp. 262 263, 朴漢卨, 王建世系의 貿易活動에 對하여 pp. 281 285, 閔賢九, 韓國史에 있어서 高麗의 後三國 統一 p. 35 참조).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海上貿易活動이 海軍活動의 전제가 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王建이 海軍活動을 전개한 사실로부터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것
- 115 - 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왕건 가문이 松嶽郡 제일의 豪族으로 성장하는 데 村 主位田 畓이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면, 그 가문의 예가 적어도 우리가 앞서 살펴 본, 당시 村主들이 村主位田 畓의 경영을 통하여 豪族으로 성장해 나간 과정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된다. 村主들은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豪族으로 성장하였다. 豪族이 신라말기 이른바 후삼국시대 의 사회주도세력이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향방 은 당시 후삼국의 세력판도에 있어서 가장 큰 변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豪族 들 가운데 상당수가 바로 村主 출신들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후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건국한 高麗의 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앞 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그가 村主位田 畓의 경영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성장한 村主 가문의 출신이었다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선 당시의 주도세력이자 후삼국 세력 판도의 열쇠를 쥐고 있던 豪族들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한 村主 출신들이 일반적으로 후삼국의 여러 왕들 가운데에서 자신들과 경제적 사회적 성장 배경이 가장 흡사한 王建에 대한 지지성향이 높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王 建 자신도 자신의 경쟁자들보다 그들의 생리를 잘 파악하여 자신의 세력권 안에 끌 어들이는 데에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王建이 자신과 성장배경이 유사한 사람들이 사회지배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당시에 후삼국의 통일에 있어서 최후의 승자가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여겨지는 것이다. 은 그 가문이 바다와 인접한 松嶽地方에서 여러 代에 걸쳐 거주한 관계로 말미암은 바다와 의 친근성 정도가 아닐까 한다(李基白, 太祖 王建과 그의 豪族聯合政治 p. 14 참조). 이상의 검토를 통하여 볼 때, 王建의 가문이 海上貿易을 통하여 富를 축적했다는 기존의 견 해를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제시된 근거들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의 연구자들이 이 견해에 대하여 거의 의심을 품 지 않았던 것은 王建 가문이 대대로 살아온 松嶽이 이 무렵 무역활동이 번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禮成江口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었다는 점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리적 조건이 기존의 견해를 뒷받침해 주는 구체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필자는 王建 가문의 경제적 성장과정을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는 여러 代 에 걸쳐 村主의 職을 이어온 그 가문의 농업경영 구체적으로는 그 가문의 村主位田 畓의 경영 의 측면에 좀더 주목해 보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松嶽지역이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 에 있는 기름진 평야지대였다는 점이나, 구체적으로 作帝建이 村主位田 畓의 경영을 통하여 상당한 富를 축적했다는 앞서의 지적을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를 견 지할 때, 그 대다수가 농업경영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던 村主 출신의 호족들이 사회지 배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당시에 王建이 후삼국 통일의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좀 더 자연스럽게 이해, 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아울러 王建이 즉위한 직후부터 무엇보 다도 앞서 일반 농민들의, 경제적 안정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나아가 구체적인 조치들 예컨대 什一税法의 실시 등 을 취한 것도 그의 주요 경제적 성장 기반이 농업에 있었음 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보아 서 좋을 듯싶다.
- 116 - 國史館論叢 第39輯 Ⅴ. 맺 음 말 지금까지 통일신라시대의 村主位田 畓과 村主勢力의 성장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 제 이 글을 통하여 알 수 있게 된 몇가지 사실들을 요약함으로써 맺음말에 대신하고 자 한다.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은 사람은 村主 가운데 眞村主들이었다. 즉 次村主들은 그 지 급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그것은 국가가 재정상의 손실을 우려한 때문이기도 하였 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의 강력한 지방통제력의 바탕 위에서 가능하였다. 그리고 眞村 主들은 각자의 서열에 따라 규정된 액수의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았는데, 그 실제적인 지급내용은 村主 자신의 일정한 烟受有田 畓에 대한 免粗權이었으며, 그 지급액은 사 실상 지급의 上限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지급내용은 骨品貴族이 지급받 은 官僚田의 그것과 비교하여 매우 불리한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토지분급제도가 骨品制라는 강고한 신분제적 기반 위에서 운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村主位田 畓은 일반 烟受有田 畓과 마찬가지로 自家經營되었는데, 村主들은 일반 村民들보다 훨씬 많은 소를 소유하는 등, 농업경영상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하 지만 농법에 있어서는 中耕除草勞動力이 확보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 촌민들과 마 찬가지로 休閑農法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이와 같은 村主들은 신라말에 이르러 流民의 이입을 계기로 休閑農法단계를 벗어 나 常耕農法을 실현해 가는 추세에 있었다. 그리고 실제적인 村主位田 畓의 확대를 통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해 갔는데,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後三國을 통일한 王建의 가문의 경우를 통하여 확인하였다. 즉 王建 가문은 늦어도 作帝建대에 眞村主로 등 장하여 村主位田 畓을 지급받아 확대하고 그것을 常耕農法으로 경작하여 막대한 경 제적 부를 축적함으로써 龍建대에는 松獄郡에서 가장 유력한 豪族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王建이 후에 후삼국을 통일한 것은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성장배경과 깊은 관련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