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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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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8세기의 新羅와 日本의 關係 金 恩 淑* Ⅰ. 머리말 Ⅱ. 8세기의 新羅와 日本과의 관계 1. 7세기 후반의 羅 日관계 2. 孝昭王代(692 702年) 3. 聖德王代(702 737年) 4. 孝成王代(737 742年) 5. 景德王代(742 765年) 6. 惠恭王代(765 780年) Ⅲ. 맺는말 Ⅰ. 머 리 말 한국에 있어서 통일신라의 대외관계에 관한 연구는 주로 중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 루어져 왔다. 이는 삼국사기 의 대외관계기사가 거의 대부분 중국관계기사로 채워져 있는 상황에서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해 있던 신라는 일본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음은 고고학적 발굴결과와 일본측의 문헌사료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즉 일본의 사서인 日本書紀 續日本紀 등에는 신라와의 관계 를 말해 주는 기사가 상당수 존재한다. 본고는 통일신라와 일본과의 대외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績日本紀 의 신라관계기사에 초점을 맞추어 7세기 말 8세기 의 羅 日관계의 실상을 명백히 함을 목적으로 한다. 주지하다시피 8세기의 羅 日관계에 대해서는 일본학자들을 중심으로 많은 연구가 축적 되어 왔다. 그러나 종래의 연구는 일본측의 사료에 입각하여 일본측의 시각으로 일본 고 대사의 문제로써 羅 日관계를 보려는 경향을 짙게 보여줌으로써 신라측의 사정에 대한 검토가 불충분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1) * 韓國敎員大學 歷史敎育科 敎授. 1) 8세기의 羅日관계에 대해서는, 續日本紀 의 신라관계기사에 대해 정력적인 연구를 한 鈴木靖民 ( 奈良初期の日羅關係 養老期の日羅關係 天平初期の日新羅關係 奈良時代における對外 意識 日羅關係と遣唐使 이상 同氏 著의 古代對外關係史の硏究, 1985에 소수)의 연구가 기 초가 된다. 한편 濱田耕策은 신라 내정의 추이와의 관련속에서 신라의 대일본외교의 전개를 살펴본

- 104 - 國史館論叢 第29輯 물론 국내에서도 羅 日관계에 관하여 주목한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2) 그 성과는 미약할 뿐이며, 또한 삼국사기 에만 의존하였기 때문에 일본학자들이 받았던 비판을 모면하기 어렵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7세기 말부터 8세기 말까지의 羅 日관계를 살펴봄에 있어서 삼국사기 와 續日本紀 의 기사를 중심으로 양국의 왕래와 그 속셈을 파악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 결과는 일본학자들이 밝혀 놓은 객관적인 외교형식 과 다를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Ⅱ. 8세기의 新羅와 日本과의 관계 1. 7세기 후반의 羅 日관계 먼저 7세기 후반의 양국관계에 대해 개관해 보기로 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여러 차례 파견한 것은 당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3) 日本書紀 에 의하면 신라와 일본은 활발히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문무왕대에는 일본과의 관계가 재개된 668년부터 681년까지의 13년 간에 일본에 사신 을 12회 파견하였다. 다음 신문왕대에는 681년부터 692년까지에 8번 사신을 파견하였다. 효소왕은 692년부터 702년까지 5번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 시기에 신라와 당의 관계는 소 원하여 675 700년의 25년 간에 신라가 당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675, 686, 699년의 3회 뿐이다. 당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도 681, 692, 693년의 3회이다. 신라의 사절은 668 년(문무왕 8) 이후는 대부분 사죄사에 그쳤고 672년을 최후로 당과의 정식국교를 마감한 다. 신형식은 신문왕 효소왕대에 거의 대당조공이 없었으므로, 668년 이후 703년(성덕왕 2)까지 35년간은 사실상 당과의 국교단절상태였다고 보고 있다.4) 그러나 신라와 당 사이에는 한편으로 조심스럽게 교섭이 재개되었다. 681년 신문왕이 점에서 주목되며( 新羅 聖德王代の政治と外交 朝鮮歷史論集 上, 1979. 新羅の中 下代の內政 と對日外交 學習院史學 21), 石井正敏의 연구( 八 九世紀の日羅關係 日本前近代の國家と對 外關係, 1987)는 8세기 중엽 이후의 신라의 사신파견의 목적이 경제적 목적에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연구는 續日本紀 에 기술된 신라관계기술에서 신라를 조공 국으로 취급한 것 을 그대로 양국관계를 말해주는 것으로 보고 있는 점에서 續日本紀 의 사료의 성격에 대한 철저 한 문헌비판이 결핍되어 있다. 2) 홍순창, 7 8세기에 있어서의 신라와 일본과의 관계 불교문화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 한 일고대문화교섭사연구, 1974) 및 신형식, 통일신라의 대일관계 ( 통일신라사연구, 1990) 참조. 3) 池內宏, 高句麗滅亡後の遺民の叛亂及び唐と新羅との關係 ( 滿鮮史硏究 上世, 第二册) 및 古 畑徹, 七世紀末から八世紀初にかけての新羅 唐關係 ( 朝鮮學報 107, 1985) 참조. 4) 신형식, 한국고대사의 신연구 (1984) p.327.

- 105 - 즉위하자 당 고종은 사신을 보내 신문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는데, 신라는 이에 대해 사은사를 파견하지 않았으며 조공도 하지 않았다. 686년(신문왕 6) 신라는 禮典과 文章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하여 吉凶要禮 文館詞林採其詞渉規誡者 를 받아오면서 양국관계의 개선을 꾀한다. 692년(신문왕 12)에는 당 중종이 사신을 보내 무열왕의 묘호를 태종이라 한 것을 참칭이라 비난하여 다시 양국관계는 얼어붙었으나, 북쪽의 돌궐이 격화되자 당은 신라에 대한 자세를 점차 완화하였다.5) 일본측 사료는 신라와 당이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이 시기에 일본과 신라가 빈번히 사신 을 교환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즉 日本書紀 의 천지 천무 지통조에 따르면 668년부터 697년까지 신라는 23회의 사신을 파견하고 있으며 일본은 9회 파견하고 있다. 續日本 紀 에서는 697년부터 700년까지 신라가 2회, 일본이 1회의 사신을 각각 파견하고 있다. 또 이 시기에 신라가 대일외교를 중시하였음은 전보다 고위의 견일사가 파견되고 있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675년의 김충원, 687년의 김상림, 695년의 김양림 등 왕자 가 사신으로 파견되고 있는 것이다. 8세기에 있어서 김태렴의 경우(752년)가 유일한 왕자 파견의 예로서 신라의 대 일본태도의 변화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시기에 일본은 사신의 위계를 종 5위하로 통일하는 등 신라와의 외교형식을 급속히 제도화하였다. 續日本紀 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일본의 신라사에 대한 접대형식은 신 라를 藩國 으로 놓고 신라사신을 번국의 사신으로서 접대하는 방식이다.6) 일본율령국가는 동이의 소제국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로 제번 을 필요로 했는데 8세기의 율령국가에서는 신 라 발해가 諸藩 이었다. 일본율령국가가 신라 발해를 실제로 번국, 조공국 으로 의식하여 스스로의 소제국구조를 충족시켰던 것은 일본조정의 외교형식을 통해 확인된다. 이러한 외교형식은 694년 藤原京이 완성된 후 7세기 말의 文武조에 이르러 정비되었 다. 즉 신라사신을 筑紫에서 해륙양도로 맞아들이고, 입경시에는 의장기병을 편성하며, 賀 正의식에 참가시켰던 것이다. 이는 의례를 중시하게 된 것으로 일본의 국풍을 과시하려 한 것이었다. 번객에게 관위와 녹을 주고 연회를 베풀어 풍속가무를 연주하는 것은 贺正 의식과 함께 당의 번국 에 대한 외교형식의 모방이었다.7) 그런데 이와 같은 외교형식은 실제적으로는 일본보다 훨씬 우월한 국제적 지위를 가지고 있던 당의 사신을 맞이하는 영접의례에도 적용된 것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8) 즉 일본조정에서의 외교형식이 외 국사신을 번국 사신으로 접대하는 형식이었다고 해서 이를 양국 간의 객관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5) 古畑徹, 七世紀末から八世紀初にけけての新羅 唐關係 (앞의 책). 6) 平野卓治, 山陽道と藩客 ( 國史學 135, 1988). 7) 石母田正, 天皇と 諸藩 ( 日本古代國家論 Ⅰ, 1973). 田島公, 日本の律令國家の 賓禮 ( 史林 68-3, 1985)과 外交と儀禮 ( 日本の古代 7, 1986). 8) 石母田正, 天皇と 諸藩

- 106 - 國史館論叢 第29輯 표 1 7세기 말 8세기의 新羅의 遣日本使 * 번호 1 3은 日本書紀, 4 25는 續日本紀 의 기사를 참고로 하여 작성한 것.

표 2 7세기 말 8세기의 日本의 遣新羅使 - 107 - * 번호 1 3은 日本書紀, 4 20은 續日本紀, 표는 三國記史 의 기사를 기초로 하여 작성한 것임. 績日本紀 에 보이는 일본의 신라사신 접대기사는 크게 신라사가 입경하여 빈례 를 받은 경우와 빈례를 받지 못하고 추방당한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빈례 란 입경 을

- 108 - 國史館論叢 第29輯 허락하여 조당에서 원일조하의 의 등에 참가시키며 獻方物 의 의와 연회를 베풀어 授位, 賜祿하고 국서와 답신물을 사신에게 주는 것이다. 賓禮 를 받는 것은 일본이 요구하는 조공국 으로서 외교형식을 갖춘 사신의 경우이며,9) 그렇지 못한 경우 返却 放還 放却 却廻 등을 당하였던 것이다.10) 종래의 연구에서는 번국 사신에 대한 접대방법으로 신라사가 접대받은 사실을 가지고 신라가 8세기 전반까지는 일본에 대해 조공국으로서 행세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續日本 紀 의 표현에 주의하지 않은 결과이다. 續日本紀 를 자세히 살펴보면 8세기 전반까지 도 신라가 스스로를 일본의 번국으로 인정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일본사신도 신라에서 번국 사신에 대한 접대방법으로 접대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11) 신라는 진덕왕대에 당제를 본따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는데, 따라서 외국사신 영접의례도 당풍화하였을 가능성 이 있기 때문이다.12) 본고에서는 續日本紀 와 삼국사기 를 위주로 羅 日관계를 재 검토하여 종래의 일본 학계의 통설이 일본 중심의 것임을 증명함으로써 8세기 羅 日관계 의 참모습을 밝히려 한다. 서술의 편의상 7세기 말부터 8세기 말까지 신라의 역대왕 치세 별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표 1 표 2 참조). 2. 孝昭王代(692 702年) 효소왕대 전기의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주로 日本書紀 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 日本書紀 는 주지하다시피 상당히 일본중심적인 서술을 하고 있으므로 이의 사용에는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신라사신의 관위와 이름이 구체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점에 서 양국의 사신왕래는 전혀 허구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를 사용할 때 주의 할 점을 살펴보자. 日本書紀 에서는 신라로부터의 사신파견을 來朝 朝貢 進調 로 표 현하고 있다. 내조 조공 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주변국가로부터의 사신파견을 번국 으 로부터의 조공 으로 표현한 중국사서의 예를 그대로 따른 것이므로, 이것이 실제의 조공 관계를 말해주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한편 進調 나 貢調 는 일본측의 특수한 표현이 나,13) 이 調 는 方物 과 같은 의미로14) 조공 국의 공물을 말한다. 이는 국가 간의 교섭시 9) 酒寄雅志, 七 八世紀の大宰府 ( 國學院雜誌 80-11, 1979). 10) 일본에서는 방환 이 추방 의 의미로 한정되어 사용되었음은 石井正敏( 第二次渤海遣日使に關す る諸問題 朝鮮歷史論集 上, 1979)이 밝힌 바 있다. 11) 내정기관의 內省에 소속하는 倭典에서 일본사를 접대하였다는 점에서 신라측에서 일본사를 조공 사로 응접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李成市, 正倉院寶物氈貼布記を通して見た八世紀の日羅 關係 ( 朝鮮史硏究會會報 67, 1982). 12) 濱田耕策, 新羅の迎賓機構 ( 古代文化 42, 1990). 13) 調 란 일본율령국가의 국내세제의 용어이나, 일본은 신라의 외교교섭시의 물건을 일본국내세제용 어인 調 로 표기하고 있다. 일본에서 調 를 외교교섭시의 물건에 쓰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石上

- 109 - 의 선물을 의미하는 土毛 國信 과는 다른 의미이다. 본고에서는 조공 진조 등을 조공 관계를 나타내는 것15)이 아니라, 정치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국가권력 간의 경제적 교통 내지는 물자의 수수를 동반한 정치적 교통을 의미하는 것16)으로 본다. 이상과 같이 日本書紀 를 비롯한 일본측 사료에서 일본중심적인 표현을 신중히 제 거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측 사료를 보충해주는 자료로 활용한다면 이제까지 알 려진 것보다 더 많은 사실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고 본다. 日本書紀 의 692년(持統天皇 6) 11월조에 따르면 신라가 급찬 朴億德 등을 보내 進 調 하였다 한다. 이는 효소왕이 즉위한 후 이를 일본에 알리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일본측도 이에 대해 사신 直廣肆(후의 종5위하 상당) 息長眞人老 등을 파견하고 있다. 아 마도 효소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신이었을 것이다. 息長眞人老가 언제 일본에 귀국하였 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693년 2월 신라로부터 신문왕의 상을 고하고 사신으로 사찬 金江 南 등이 파견되었을 때에도 조문사절로 신라에 파견되었다. 695년 3월에 다시 신라로부터 왕자 金良琳 등이 파견되어 奏請國政 하고 進調獻物 하 였다. 奏請國政 을 보통 일본학자들은 신라의 국정을 일본에 보고하고 일본의 의견을 물 었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17) 이는 日本書紀 의 일본중심적인 표현으로 사실은 신 라가 일본율령국가 형성에 필요한 지식을 전해준 것으로 보아야 한다. 進調獻物 은 양국 의 외교 의전상 필요한 선물증정으로 보아야 한다. 동년 9월 일본으로부터도 直廣肆 小野 朝臣 毛野와 務大貳 伊吉連博德 등이 파견된다. 이들의 파견 목적 및 귀국일자에 대해서 는 日本書紀 에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伊吉連博德은 신라유학을 경험한 사람으로 서,18) 續日本紀 에서 대보율령의 편찬자 중의 한 사람으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따 라서 대보율령의 편찬 이전에 신라로부터 귀국하였을 것이며, 이들이 신라에 파견된 것도 대보율령편찬을 위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697년 10월 하순에 신라가 일길찬 김필덕 등이 파견되어 다음해 정월 하정의식에 참가 하여 調物 을 바치고 2월 초 귀국하였다. 이는 697년 8월 초 지통천황의 양위로 문무천황 이 즉위한 후 최초의 신라사파견이다. 아마도 문무천황의 즉위를 축하하는 경축사절이었 을 것이나 체류기간에 따라 하정의식에도 참가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 에는 698년 3 월에 일본으로부터 사신이 파견되어 효소왕이 숭례전에서 맞아들였다고 한다. 아마도 문 英一, 古代における日本の税制と新羅の税制 ( 古代朝鮮と日本, 1974)의 연구가 있다. 14) 709년의 신라사 김신복의 경우는 방물 을 바쳤으나, 이에 대해 일본은 김신복 등을 빈례 로 대우 한다. 779년의 경우는 신라의 방물 을 받아들인다. 15) 石母田正, 國家成立史における國際的契機 ( 日本の古代國家, 1971). 16) 山尾幸久, 日本國家の形成 (1977) p.92. 17) 鈴木靖民, 日本律令制の成立 展開と對外關係 ( 古代對外關係史の硏究 ). 18) 關晃, 遣新羅使の文化史的意義 ( 山梨大學學藝學部硏究報吿 6, 1955).

- 110 - 國史館論叢 第29輯 무천황 즉위축하사절에 대한 답례사절이었을 것이나 속일본기 에는 이에 관한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699년 2월 신라는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이는 효소왕대의 견당사로서는 유일한 경우이며, 이로써 당시 신라는 당과의 관계보다 일본과의 관계를 중 시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700년 봄 일본은 대보율령을 만들기 시작한다. 동년 8월에 찬수작업이 거의 끝나게 될 대보율령 제정작업이 진행되는 중간, 일본은 5월 중순에 佐伯宿禰麻呂 등을 신라에 파견 하였다. 이들은 10월 중순에 환국하여 공작 등 진기한 물건을 천황에게 바쳤는데, 좌백숙 예마려는 후에 備後國의 장관(守)이 되고 종4위하까지 관위가 올라간다. 佐伯宿 禰麻呂를 파견한 목적은 확실하지 않다. 목적의 하나로 濱田耕策은 신라사의 하정의례 참가권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19) 이는 하정의례에 신라사신을 참석시키는 것이 율령국가 일본 의 외교의례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관점에 선 견해이다. 사실 중국에서는 하정의례가 조공국의 주요한 외교의례의 하나였다.20) 그러나 신라에서도 이미 651년경에 하정의례가 시작되었다. 즉 삼국사기 진덕왕 5년 春정월조에 의하면 왕이 조원전에서 백관의 정 월축하를 받았다. 하정의 예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라고 있다. 그런데 표 2 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의 견신라사의 경우 정월을 끼고 신라에 체류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 이 703, 705, 706, 712, 718, 724, 736년의 사신의 경우이다. 이는 귀국일자가 명기되어 있 는 12예 중에서 반이상이다. 표 1 2 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당시 신라와 일본의 사신교 환은 체류 중간에 정월을 낀 경우가 많다. 따라서 견신라사의 파견이 굳이 하정의례 참가 를 권유하기 위한 것이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신의 파견 목적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는 대보율령 찬수작업과 관련된 사신파견이 아니었을까. 대보율령은 당을 모델로 한 것이었으나 여기 에는 여전히 신라의 율령제의 영향이 남아 있다.21) 이는 당시 중국과 직접 교류를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본이 신라를 통하여 대보율령제정의 관계자료를 구했을 가능성을 말 해 주는 것이다. 신라가 효소왕의 모후이며 섭정이었던 신목황후의 사망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22) 11월 상순에 파견한 살찬 金所毛는 다음해 정월 하정의식에 참여하였다. 이는 일본에서 대보율 령이 찬수된 이후 최초의 신라사 파견기사이다. 속일본기 에서는 김소모가 참가하였을 701년의 하정의식을 묘사하면서 이로서 일본에 文物의 儀 가 정비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데, 하정의식에 외국사신이 좌우에 정렬하는 것은 이후 외국사절이 원단에 체류하고 있는 19) 濱田耕策, 新羅 聖德王代の政治と外交. 20) 田島公, 日本の律令國家の 賓禮. 21) 鈴木靖民, 日本律令制の成立 展開と對外關係 참조. 22) 皇龍寺金銅舍利函銘 (허홍식 편, 韓國金石全文, 1984)에 의하면 700년 6월 1일에 사망하였다.

- 111 - 경우의 항례가 된다. 김소모는 1월 중순에 일본에서 사망하였는데 일본정부는 이에 부물 을 주고 그 외의 신라사신들에게 녹을 주었다. 이들의 귀국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나 녹 을 받은 직후 출발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701년 정월에는 일본의 견당사 파견이 결정된다. 이에 관해서 종래의 통설에서는 일본 이 신국가의 형성을 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 견당사 파견을 결정하였다고 하지만23) 이 견해는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부족하다. 필자는 이를 오히려 대보율령을 만든 일 본 지배층의 불안감 및 신라와의 경쟁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모방과 시행 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신문물을 신라를 통해서 받아들이던 일본이 당의 체제도 역시 신라를 통해서 모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당으로부터 시행에 관한 지식을 직접 배울 필요를 절감하였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효소왕대(692 702)에는 신라와 일본은 각각 당에 사신을 한번 파견한데 비해, 양국 간에는 5번씩 교환하였다. 효소왕의 즉위 직후 신라로부터 사신이 파견되어 이에 대한 답례로 일본으로부터 사신이 파견되는 형식으로 양국 간에 거의 동등하게 사 신 교환이 이루어졌다. 특히 신라는 대일본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일본측에게 신라의 율령제를 설명해 주는 奏請國政 을 위한 사신을 파견하였다. 또 문무천황의 즉위에 축하 사신을 보내고 하정의식에도 참가시켰으며, 효소왕의 모후의 상을 알리는 등 일본과 긴밀 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편 일본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율령체제성립에 필요 한 여러 지식을 수입하는 한편,24) 효소왕 말기에 669년 이후 단절되었던 당과의 외교를 재개한다. 702년 6월 집절사 粟田眞人 등을 견당사로 파견한다. 일본은 왜 견당사를 파견 했는가. 집절사가 대보율령편찬에 관여한 사람인 점, 또 이때 처음으로 당에 대해 일본 이란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점 등을 통해, 이들의 파견 목적은 전술한 바와 마찬가지 로 당을 모범으로 하여 신라에 우월한 법률적 정치적 상부구조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 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당과의 직접 교류를 원하였다는 사실은 견당사가 취한 항로를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이때부터 8세기의 견당사는 종래의 북로 대신 새로 남로를 개척하여 당과 접촉 하였던 것이다. 특히 8세기의 첫 견당사가 한반도 서해안을 경유하는 종래의 북로를 취하 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하북도에서 요동반도에 걸쳐 변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설25) 과 신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26) 필자는 일본이 남로를 취한 23) 早川庄八, 日本の歷史 4(1974) p.124. 및 石母田正, 天皇と 諸藩 과 山尾幸久, 遣唐 使 ( 東アジア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 6, 1982) 참조. 24) 關晃, 遣新羅使の文化史的意義. 25) 山尾幸久, 遣唐使 26) 森克己는 신라와의 관계 악화는 이미 698년에 남도로가 개척될 때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森克己, 遣唐使 ).

- 112 - 國史館論叢 第29輯 것은 신라의 영향을 받지 않고 당의 문물을 직수입하고자 하는 의지에서였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이 효소왕대의 羅 日관계는 양국이 활발히 왕래하는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그 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상호 경쟁심 내지 상대에 대한 경계심을 가진 채 당과의 직접 교류를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3. 聖德王代(702 737年) 효소왕 사후 당이 책봉한 성덕왕대는 모두 43회의 대당조공이 있을 정도로 활발한 대당 외교가 전개된 시기이다. 이에 따라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점차 소원해짐을 알 수 있다. 성덕왕은 703년 1월 당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27) 살찬 김복호 등을 일본에 보내 효소왕 의 상을 알렸다. 이는 702년 7월 말 사망한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최초로 일본에 보낸 사신이다. 일본정부는 이 告喪使 김복호를 향응하고 그에게 조문의 부물을 주었다. 10월 하순 일본은 波多朝臣廣足 등을 파견하여 성덕왕에게 錦과 시를 선물로 보냈는 데, 이들은 다음해 704년 8월 초에 귀국하였다. 삼국사기 에는 신라가 7월에 총 204인 의 일본국사신을 맞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위와 같은 사건일 가능성이 크다.28) 波多朝臣廣足은 701년 좌대신 多治比眞人嶋의 사망시 太政官의 右辨官局의 3등관 少辨으 로 葬儀 감독을 맡았던 사람이다. 일본은 효소왕의 죽음을 애도하고 성덕왕의 즉위를 축 하하는 사신을 파견한 듯하다. 또한 이들은 대보율령의 제정 후 최초로 신라에 파견된 사 신인 점에서, 이들이 신라에 대보율령의 제정을 전하면서 신라의 조공 을 요구하는 사신 이기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29) 그러나 이들의 규모와 신라 체류기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204명이 약 9개월 간 신라에 머물렀던 근본적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이 단 순히 정치적 목적만을 위하여 파견되지 않았음은 수자상의 중요성과 함께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들이 오랜 기간 체류한 이유는 견당사처럼 신라의 문물을 배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기간 중, 이들이 신라측 하정의례에 사신의 자격으로 참가하였을 가능성을 비 록 직접적 사료가 없다고 하나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라측의 사신이 하정의례에 참 가하였다고 해서 종래의 통설대로 신라가 일본의 조공국이었다고 믿을 근거란 없다. 일본은 704년 10월 상순에도 幡文通을 견신라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는데, 그는 다음 해 705년 5월 하순에 귀국하였다. 幡文通에 대해서는 견신라사로 임명된 후 幡文造性을 賜姓받고 신라로부터 귀국한 후 종5위하가 된 것 이외에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다. 濱田 耕策은 幡文通을 파견한 이유에 신라의 하정사를 권유하기 위한 것이 있었다고 하나 이 27) 삼국사기 성덕왕 2년 춘정월조. 28) 濱田耕策, 新羅 聖德王代の政治と外交. 29) 濱田耕策, 위의 논문.

- 113 - 주장도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30) 이는 일본측이 견당사 파견의 성공 적 결과를 신라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31) 왜냐하면 일본이 702년 6월에 파견한 견당사 의 일부가 704년 7월 역시 남로를 통하여 무사히 귀환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신라의 도 움을 받지 않고도 당과 직접 교류를 하게 된 것을 신라에게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러나 신라사의 규모가 크고 체류기간이 긴 점에서 율령국가체제 운용을 위한 제기술을 신라로부터 배우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본다. 705년 10월 말 신라는 공조사 金儒吉 등을 파견하여 조 를 바쳤다. 일본은 11월 중순 제국에서 기병을 모집하여 신라사를 맞을 준비를 하였으며, 김유길 등은 12월 하순 입경 하여 다음해 706년 하정의식에 참가하여 조 를 바치고 향응과 관위수여 및 선물을 받았 다. 여기서 관위수여가 있었던 것은 일본이 신라를 번국으로 놓으려는 의식이 확고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사신에 대한 관위수여는 이를 제번 에 대한 수여로 상징화한 점에 주 의해야 하는데, 신라사신에게 관위가 수여된 것은 705년, 752년, 779년의 사신이다.32) 1월 중순 김유길 등이 귀국할 때에 천황은 신라왕에게 국서를 보냈다. 국서의 내용은 신라의 조공 을 기뻐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11월에도 美努連淨麻呂를 보내 성덕왕에게 국서를 보 냈다. 이 국서도 김유길에게 보낸 국서와 마찬가지로 신라를 조공 국으로 여기는 것이었 다. 일본은 신라 사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본국에 대해서도 율령체제를 인정시킴으로 써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고 싶어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신라가 어떤 반응을 보 였는지에 대해서는 자료부족으로 알 수 없다. 美努連淨麻呂는 707년 5월 하순 학문승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들의 체류시기로 보아 일본 사신도 신라의 하정의례에 참가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일본국서에 대한 신라측 태도를 추측해 볼 수 있겠다. 즉 신라가 일본 사신을 6개월씩 체류하도록 하 였다는 점을 통하여 일본의 국서를 인정하였거나, 국서를 접하지 못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으나, 羅 日관계가 성덕왕대에 점차 악화되어 간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으로 보아 그 단 서를 이 시기의 일본국서에서 찾을 수 있을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신라는 709년 3월 중순에 金信福 등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입경하여 방물 을 바쳤다. 濱田耕策은 김신복의 관위가 명기되어 있지 않은 점, 또 방물 을 바친 점 등을 들어 김신 복이 신라가 정식으로 파견한 사신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33) 績日本紀 에서 방물 은 조 와 같은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관위가 30) 濱田耕策, 위의 논문. 31) 鈴木靖民, 奈良初期の日羅關係. 32) 平野卓治는 諸藩 에게 위계를 수여하는 것은 수여하는 측에 의의가 있었던 것으로 이를 통해 천 황과 5위 이상의 신하는 일체가 되는 일본지배층의 공동체의식의 고양의 장을 마련하였다 한다 ( 律令位階制と 諸藩 日本古代の政治と制度, 1985). 33) 濱田耕策, 新羅 聖德王代の政治と外交.

- 114 - 國史館論叢 第29輯 없는 점에서 濱田耕策의 견해를 따르는 필자는 일본이 왜 의심스러운 사신을 환대했는가 하는 점을 더욱 주목한다. 일본은 이들을 위하여 조당에서 향응을 베풀고 녹과 신라국왕 에게 보내는 선물을 주었으며, 당대의 최유력자였던 右大臣 藤原不比等도 이들을 영접하 였던 것이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일본이 705년 신라에 대해 국서를 전달한 이후 첫 신라인을 맞이하면서 대단히 기뻐했다는 사실이다. 김신복에 대한 환대를 통하여 일본 이 그동안 신라의 냉담한 태도에 대해 가졌던 어떤 두려움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은 712년 10월 道君首名 등을 신라에 파견하였다. 그는 다음해 8월 상순 귀국하였 다. 속일본기 에 의하면 道君首名은 대보율령편찬자 중의 한 사람으로(문무천황 4년 6 월 갑오조) 701년에는 大安寺에서 僧尼令을 강의하는 등 율령에 밝은 사람이었다(대보 원년 6월 임인삭조). 그의 파견 목적은 역시 율령체제 운용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 해서인 듯하나, 한편으로는 705년 이후 두절된 신라사의 파견을 권유하는 목적도 있었던 듯하다. 714년 11월 중순 신라는 중아찬 김원정 등을 파견하여 朝貢 하였다. 일본은 기내 7도 에서 기병을 징발하여 입조의식을 준비하고 사자를 筑紫에 보내 신라사를 맞아들였다. 신 라사는 12월 입경하여 1월 1일 하정의식에 참여하였으며, 1월 중순에는 향응 선물을 받 고, 2월 하순 귀국시에는 眞綿 5,450근과 배 한척을 선물로 받아 간다. 일본은 668년(천지 7년)에도 신라사신에게 배를 선물로 주었다. 김유신에게 1척과 신라 문무왕에게 調 를 싣 을 배 1척을 보내고 있다. 따라서 김원정에게 배를 보낸 것은 신라의 調 를 요구한 것임 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718년까지 약 4년 간 양국 간의 교섭은 없으나 일본에서는 715년 9월 元明천 황이 양위하여 元正천황이 즉위하였다. 717년 3월에는 총원 557인의 견당사가 파견된다. 견당사에는 학문승 유학생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신의 목적은 平城京 건설을 당에 보고하고 새로 養老律令의 편찬에 필요한 중국의 전적과 자료를 수집하는데 있었다고 한 다.34) 養老律令의 편찬사업은 715년부터 721년경까지에 걸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되 고 있다.35) 養老律令과 大寶律令의 차이점은 양로율령이 보다 철저히 당풍화된 율령이라 는 점이다. 따라서 양로율령의 편찬사업은 신라율령 내지 신라적 율령국가에 대한 우위성 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는 평가가 내려질 수 있다.36) 이때에도 견당사가 취 한 항로는 남로였다. 718년 3월 중순 일본은 小野朝臣馬養을 견신라사로 임명하여 5월 하순 파견하였다. 704년 최초로 경운을 발견하여 일본에서 연호를 경운으로 고치게 한 사람이다. 708년 1월 34) 利光三津夫, 養老律令の編纂とその政治的背景 ( 續 律令制とその周邊 ). 35) 鈴木靖民, 日本律令制の成立 展開と對外關係. 36) 鈴木靖民, 위의 논문.

- 115-11일 화동이란 연호로 고치게 된 날도 그는 관위가 올라가게 되는데 祥瑞災異사상가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대검료장관, 조평성경사차관, 부장군으로 하정의식에 참가, 황족의 장례감독, 안찰사로 지방감독이 된다. 그는 다음해 2월 상순 귀국하였는데 그의 임무도 신라의 율령제 운용에 대한 지식흡수와 신라사의 파견을 권유하는 것이었을 듯하다. 719 년 5월 상순신라사 급찬 金長言 등이 내조 하여 윤7월 상순 調物 과 조랑말 한쌍을 헌상 하였다. 동월 중순 향응과 선물을 받고 김장언 등은 귀국하였다. 김장언의 귀국시에 함께 견신라사로 白猪史廣成이 임명되어 동년 8월 상순 출발하였으나 귀국에 대한 기사는 보 이지 않는다. 白猪史廣成에 대해서 이 외에는 별자료가 없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720년 8세기 초의 대신라외교를 추진하였던 藤原不比等이 사망한 후 일본의 신라사 접대방법은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한다. 즉 721년 12월 신라의 공조사 일길찬 金乾安 등이 대 재부에 來朝 하였으나 元明태상천황 사망을 이유로 大宰府에서 본국에 返却 되었다. 그런데 720년의 藤原不比等의 죽음을 계기로 일본조정에서는 황친세 력의 반격이 계획되고 있었는데,37) 이를 알게 된 원명천황은 721년 병상에서 근시의 사 람과 5부의 무관은 경계를 엄히하여 불려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유언을 한다. 원명천황이 죽자 그 즉시 삼관을 폐쇄하여 경계를 엄히 한다. 따라서 신라사를 맞이하기에는 어려움 이 있었을 듯하나, 이를 이유로 신라사를 돌려보낸 것은 한편으로는 신라측에 대한 경계 심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38) 722년 5월 하순에는 일본으로부터 정7위하 式部大錄 津史主治麻呂가 견신라사로 파견 되어 12월 하순에 귀국하였다. 이 사신은 정월 이전에 귀국하고 있어 신라의 하정의례에 참석하지 않으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津史主治麻呂에 대해서도 이 이외는 기록이 없다. 式部省은 문관의 인사와 조정의 예의를 관장한 부서였으며,39) 식부대록은 식부성의 4등 관이었다. 정7위하는 일반적인 견신라사의 관위에 비하면 낮다. 삼국사기 聖德王 21 년 冬10월조에 의하면 모벌군성을 쌓아 일본적로 를 막았다고 있는데, 이는 모벌군성의 축성이 완성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40) 신라는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다. 모벌군성은 일본사신이 경주로 가는 도중에 있는 것으로 津史主治麻呂의 보고로 일본조정도 이 사실 을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41) 723년 8월 상순에는 신라사 한내마 金貞宿 등이 파견되어 공물을 바쳤다. 그는 입경하 여 조당에서 향응을 받고 하순에 귀국하였다. 체재기간이 상당히 짧은 점에서 특별한 정 37) 早川庄八, 日本の歷史 4(1974) p.247. 38) 日本書紀 에 의하면 天智天皇의 사망시에 당의 사신이 일본에 있었던 경우가 671년에 있었는 데, 이때에는 筑紫에 머무르면서 일을 보고 돌아갔다. 39) 律令 職員令 式部省조. 40) 鈴木靖民, 天平初期の日羅關係. 41) 濱田耕策, 新羅の迎賓機構 ( 古代文化 42, 1990).

- 116 - 國史館論叢 第29輯 치적 목적을 위해 파견된 사실일 것으로 추측된다. 즉 721년 이후의 양국관계의 악화속에 서 급히 파견된 사신인 듯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724년 8월 하순 土師宿禰豊麻呂를 견신라사에 임명 하였는데 그는 다음해 5월 하순 귀 국하였다. 토사숙예풍마려의 직책은 알 수 없어 그의 파견의 성격을 알 수 없으나, 이는 724년 2월 성무천황 즉위 후의 최초의 사신파견기사로 성무천황의 즉위를 신라에 알리는 일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일본은 신라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듯, 724년 大宰府는 那大津의 동쪽 粕屋郡 香椎에 香椎宮을 세웠다. 祭神은 日本書紀 에서 신라를 쳐서 조공하게 만들었다는 전승을 가진 神功皇后이다. 香椎宮의 창사를 통해 부각되는 것은 신라를 조공국으로 놓으려는 의식이며 신라와의 관계가 원만히 진행되지 않음을 걱정하는 의식이다. 726년 5월 신라사 살찬 金造近 등이 파견되어 調物 을 바쳤다. 즉위 후 2년만에 첫 신 라사신을 맞은 聖武天皇은 이들을 위하여 조당에서 향응하고 녹을 주었으며 귀국시에 이 찬 김순정을 기리는 새서와 부물을 주었다. 이에 신라사는 金順貞의 죽음을 보고하였는 데, 이때 일본천황은 가장 믿을만한 신하를 잃어버렸다고 특별한 애도를 표명하였다. 이 를 통하여 신라의 권력층 내부에 친일세력과 반일세력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다. 聖武天 皇이 각별히 애도한 김순정은 724년 천황 즉위 후의 첫 견신라사를 각별히 접대한 인물 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견신라사의 보고를 통하여 김순정의 친일적 태도를 알게 된 聖武 天皇으로서 신라의 친일세력을 잃게 된 일은 대단히 애석한 일이었던 것이다. 續日本紀 에 의하면 김순정은 725년에 사망하였으나 당시 上宰 의 벼슬에 오를 정도 로 유력한 귀족이었다. 상재 란 재상과 같은 의미로서 이는 제도상의 직책은 아니나, 상대 등이나 시중에서 병부령 또는 私臣을 겸하는 사람으로 당시의 정치적 실권자를 말하는 것 이다.42) 상재 의 지위에 대해서는 이를 왕권을 보좌하는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견해 와43) 당시의 성덕왕과 상대등을 능가할 정도로 전권적인 지위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44) 삼국사기 에서 김순정에 대한 기록은 경덕왕 즉위조에서 비는 이찬 순정의 딸이 다 라는 구절 외에는 언급이 없다. 일본에서 신라의 권력자로 알려진 김순정의 활약상이 삼국사기 에는 보이지 않는 점에 의문이 가나, 딸을 성덕왕의 아들에게 시집보낸 점에 서 성덕왕대의 유력자였음을 알 수 있다. 김수태는 그가 죽은 뒤 딸인 삼모부인이 경덕왕 의 왕비가 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순정의 영향력과 그와 관계된 세력이 상당하였을 것 으로 짐작하였다.45) 42) 신형식, 신라사 (1985) pp.135 136. 43) 鈴木靖民, 金順貞 金邕論 ( 古代對外關係史の硏究 ). 44) 木村誠, 新羅の宰相制度 ( 人文學報 118, 1977)와 濱田耕策, 新羅 聖德王代の政治と外交 참조. 45) 김수태, 통일신라기 전제왕권의 붕괴와 김옹 ( 역사학보 99 100, 1983).

- 117 - 한편 후대의 기사이지만 續日本紀 에서는 반일적인 외교자세를 취한 사람으로 신라 효성왕과 대부 思恭 등을 들고 있다. 사공에 관한 삼국사기 의 기록을 보면 718년 1월 부터 720년 7월까지 中侍였다. 이후 약 8년 간의 공백기간을 거쳐 728년 7월에 상대등이 되었으며, 732년 12월에는 貞宗 允忠 思仁 등과 함께 장군이 되어 성덕왕을 보좌한 인물 이다. 상대등은 한번 임명되면 신왕의 즉위 때에나 교체되었으므로46) 사공은 728년 이후 737년 효성왕의 즉위시까지 계속 성덕왕을 보좌하였을 것이다. 효성왕대의 상대등은 이찬 정종이었으나, 續日本紀 에서는 그를 효성왕대의 대부라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효성왕 대에도 원로귀족으로서 왕권을 보좌하였을 가능성 이 크다.47) 績日本紀 에서는 사공과 효성왕을 반일본적 외교정책을 추진한 사람으로서 보고 있 으나 사실은 성덕왕대에 반일본적인 외교가 이미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공이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성덕왕대이며 일본과의 외교가 악화되는 것도 성덕왕대이다. 722년 의 모벌군성을 쌓은 것과 731년의 일본국 병선의 격퇴, 734년의 신라사의 왕성국 자칭, 736년의 견신라사에 대한 신라측의 냉대 등은 모두 성덕왕대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濱田 耕策은 성덕왕대에는 신라의 외교정책의 확립을 둘러싸고 두 가지 방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즉 당과의 외교관계를 최우선으로 보아 이를 강화하려는 방향과 대일외교를 종래의 관계대로 유지하려는 방향이다. 전자는 성덕왕과 상대등 사공이, 후자는 상재 김 순정이 중심이었다고 보았다. 濱田耕策은 삼국사기 에서 사공이 중시직에서 물러나고 文林이 시중이 된 성덕왕 19년(720)부터 김순정이 사거한 성덕왕 24년(725)까지 상재 김순정이 정권을 장악한 기간 으로 보았다.48) 이는 사공을 반일본적인 외교를 수행한 대표로 보고 續日本紀 에 보 이는 725년의 김순정의 사거기사와 관련시켜 얻은 결론이다. 726년의 신라사 파견 이후 732년까지 양국 간에는 사신의 파견이 없어 양국관계가 악화 되어 간 듯하다. 이 사이에 발해와 일본 간의 국교가 개시되었다. 727년 발해는 일본에 사 신을 파견하여 국교가 개시되었는데 대당관계의 긴장 및 신라와 당과의 관계진전 등의 정 세에 대응하여 일본과의 동맹을 의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49) 그러나 일본지배층은 발해 의 일본통교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발해가 조공해 온 것으로 이해하였다.50) 727년에 시작된 발해와 일본 간의 교섭은 8세기에만도 발해에서 11회, 일본에서 9회 사신이 파견 되었다. 한편 발해와 당과의 관계는 735년 발해가 당에 조공을 재개함으로써 회복되었다. 삼국사기 에는 731년 4월 일본국 병선 300척이 동변을 침입한 것을 무찔렀다 는 46) 이기백, 上大等考 ( 역사학보 19, 1962). 47) 濱田耕策, 新羅 聖德王代の政治と外交 48) 濱田耕策, 위의 논문. 49) 酒寄雅志, 八世紀における日本の外交と東アジアの情勢 ( 國史學 103, 1977). 50) 石井正敏, 第一回渤海國書について 日本歷史 327, 1975).

- 118 - 國史館論叢 第29輯 기사가 보인다. 續日本紀 에는 이와 관련된 기사가 없다. 따라서 津田左右吉은 이 기 사의 신빙성을 의심하였지만,51) 鈴木靖民은 일본국병선은 대한해협쪽을 경비하던 大宰府 나 山陰道제국의 선박으로 이들이 신라배를 만나 쌍방 간의 마찰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52) 그렇다고 하나 율령국가에서 지방에서의 충돌이라도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으므로 속일본기 에서 신라와의 충돌기사를 누락시켰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즉 천황은 번국 의 조공 을 받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는 속일본기 에서 번국 을 침입하여 패퇴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꺼렸을 것이다. 732년(성무천황 천평 4년, 성덕 왕 31년) 1월 종5위하 角朝臣家主를 견신라사로 임명하 여 2월 말 이들이 출발하여 8월 11일 귀환하였다. 속일본기 에 의하면 그는 귀국한 후 능묘를 관리하는 諸陵寮의 장관에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726년의 신라사의 파견 이후 양국 간의 최초의 외교교섭으로 731년의 양국의 군사충돌 후의 화의교섭을 위한 遣 使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신라에서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신파견이 있게 되는데, 732년 3월 초에 신라사 한내마 金長孫이 대재부에도착, 5월 중순 입경하여 조정에서 여러가지 재물과 앵무 구곡 蜀의 개 사냥개 나귀 등을 바치고 3년 1도 의 내조년기를 요구하였다. 일본은 이를 조당 에서 향응하고 내조년기 를 허락하고 신라왕에게 보내는 선물을 주었다. 726년의 신라사 의 파견 이후 6년만에 외교관계가 재개된 것이다. 3년 1도 의 사신파견을 신라측에서 요 구한 것은 사실상 성덕왕대의 전반기와 같은 교섭을 계속하자는 것으로, 국교의 단절을 막아보자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53) 신라가 이런 요구를 한 것은 북쪽에서 신라 에게 위협이 되었던 발해를 의식해서였다. 신라사는 6월 말경에 귀국한다. 그러나 732년의 양국사신파견으로 양국관계가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732년 8월 일본 은 신라를 치기 위한 절도사를 임명하였다. 신라는 12월 角干 思恭과 伊飡 貞宗 允忠 思 仁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신라가 일본의 침략을 경계하여 신라왕조의 요로에 있는 인물 을 선정하여 장군으로 삼아 군대를 편성하려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54) 신라는 733년 당과의 공동작전을 결행한 이후 당과의 관계가 안정적이 된다. 즉 발해 가 732년 당의 등주를 공격하자, 733년 당은 신라에게 발해를 남쪽으로부터 공격하도록 요구하였는데, 신라는 이에 응하여 당과의 공동작전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성덕왕은 종 51) 津田左右吉, 新羅征討地理考 ( 津田左右吉全集 11). 52) 鈴木靖民은 三國史記 에는 일본국 병선으로 나와 있지만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중앙관청의 국가적 의사와는 관계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天平初期の日羅關係 ). 53) 신라가 3년 1도 의 사신파견을 요구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즉 양국간 의 관계악화의 징조로 보는 견해(濱田耕策, 新羅の中 下代の內政と對新羅外交 學習院史學 21, 1983)와 이를 신라의 대일본접근외교로 보는견해(鈴木靖民, 天平初期の日羅關係, 石井正 敏, 八 九世紀の日羅關系 日本前近代の國家と對外關系, 1987)가 있다. 54) 鈴木靖民, 天平初期の日羅關係.

- 119 - 래의 관호 위에 開府義同三司領海軍使 를 더하여 당으로부터 책봉받았으며, 이후 신라는 매년 당에 견사조공을 계속하여 왕이 교체될 때마다 신왕은 영해군사 로 책봉되었다. 신 라는 당의 동방의 안전을 보장하는 중요한 입장을 부여받은 것이었다.55) 735년 당은 신 라에게 대동강 이남의 영유권을 인정해줌으로써 나당전쟁 후의 양국관계의 장해요인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이와 같은 신라의 대당관계의 변화는 신라의 대일외교에 영향을 미쳤 을 가능성이 크다. 734년 말에 파견된 신라가 급벌찬 金相貞 등은 다음해 2월에 입경하였으나 사절의 목 적을 묻는 중납언 多治比眞人縣守에게 신라사는 스스로 국호를 王城國 이라 칭하여 일본 측을 불쾌하게 하여 방환 되었다. 속일본기 에 신라가 외교적으로 고자세를 취한 것이 기록된 최초의 기사이다. 이를 종래의 연구에서는 신라가 대일외교에서 조공형식을 버리 고 대등관계인 항례를 채용하였기 때문으로 보았다.56) 더 나아가 왕성국 이란 신라를 종 주국으로 하여 주변제국을 번국으로 하는 중화사상의 구체적 체현자인 신라왕이 거주하 는 도성이 있는 나라 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일본에 대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일본 을 번국 으로 놓으려는 의식이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57) 濱田耕策은 734년의 신라 사가 왕성국을 칭한 배경에는 이러한 신라의 외교를 둘러싼 두 세력 간 중 대일외교를 중시하는 세력이 퇴조한 결과라고 보았다.58) 736년에는 일본에서 신라에 파견한 사신이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즉 736 년 4월 17일 阿倍朝臣繼麻呂 등이 신라에 파견되어 737년 1월 말경에 귀국하였다. 이 사 신은 신라에서 천연두에 걸려 귀국 도중 대사 阿倍는 對馬에서 사망하였으며, 부사 大伴 宿 三中도 이 병으로 입경하지 못하였다. 737년 2월 부사가 입조하여 신라가 상례를 버리 고 일본측의 사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보고하였다. 이에 천황은 관인들을 內裏에 불러 의견을 물었는데,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그 이유를 알아보자는 것과 군대를 일으 켜 신라를 정벌하자는 것의 두 가지 의견이 나왔다. 이 가운데 어떤 의견을 택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천황이 伊勢 神宮 등지에 사신을 보내 신라의 무례함을 보고하였다는 사실을 통하여 일본 지배층이 신라의 태도를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 績日本紀 의 기사를 위주로 성덕왕대의 羅 日관계를 살펴보았다. 성덕왕대 대 일본 외교는 성덕왕이 자신의 즉위와 효소왕의 상을 일본에 알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55) 西嶋定生, 六 八世紀の東アジア ( 岩波講座 日本歷史 2, 1962). 56) 즉 신라가 8세기 초에는 배후에서는 견제하면서 외면상으로는 극히 평온히 일본측의 조공 요구에 호응 하는 외교형식을 바탕으로 관계를 맺어 왔다고 보았다(鈴木靖民, 奈良初期の日羅關係 養老期の日 羅關係 天平初期の日羅關係, 友寄隆史, 養老 神龜期における新羅使の來朝について 史正 5). 57) 酒寄雅志( 古代東アジア諸國の國際意識 歷史學硏究別册 東アジア世界の再編と民衆意識, 1983) 는 이를 신라가 일본을 번국 으로 놓으려 하는 중화사상 을 성숙시켜 일본의 중화사상 과 정면으로 충돌한 결과로 보고 있다. 58) 濱田耕策, 新羅 聖德王代の政治と外交.

- 120 - 國史館論叢 第29輯 721년 이전에는 양국 모두 6회씩 3년에 한번 꼴로 사신을 파견하고 있다. 신라는 국상 및 신왕의 즉위를 알리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는 등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 편 일본은 이 시기의 일본사신의 신라체류기간은 5개월 내지 9개월로 긴 편이며 귀국일 자가 명기된 5회 모두 정월을 끼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따라서 이들이 신라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외국의 손님으로서 신라의 하정의례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의 일 본사신의 규모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사기 에 의하면 703년에는 204인이 파견된 적도 있다. 이 시기에 일본이 견신라사를 파견한 이유에 대해서 續日本紀 에 언급은 없으나, 706년의 경우 학문승과 함께 귀국하고 있는 점에서 이 시기의 견신라사의 파견 목적은 신라의 문물을 배우기 위한 문화적 목적이 강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러나 721년의 원명천황의 죽음을 전후로 하여 양국관계는 점차 멀어져 간다. 이후 성덕왕대 말까지 사신파견 횟수는 양국 모두 4회씩으로 4년에 한번 정도이다. 이처럼 신라와 일본과의 관계가 점차 소원해가는 배경은 ① 양국의 친선외교를 담당하 였던 세력이 퇴조한 것과 ② 신라와 당과의 관계개선 및 일본과 발해의 교섭개시를 들 수 있다. 일본의 친신라외교를 이끌던 등원불비등이 720년 죽었으며, 신라에서는 친일외 교를 담당하던 김순정이 725년 죽었다. 성덕왕 후기에 상대등 사공의 정권은 외교정잭에 있어서 당에 대한 견사조공을 중시하여 이를 강화하여 갔다. 그리고 이 대당외교에 대응 하여 대일외교에서는 일본측의 외교형식에 반발하였다. 신라에게 발해가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710년대 후반에 발해가 남진하면서부 터이다.59) 일본은 727년 발해와 교류를 개시하여 신라를 견제하는 동맹국을 얻었으며, 733년 견 당사를 파견하여 당을 통해서 율령국가 형성에 필요한 여러 문물을 흡수하였다. 이러한 국제정세속에서 羅 日관계의 악화를 볼 수 있는 것이다. 4. 孝成王代 (737 742年) 일본에서 천연두가 아직 유행하고 있을 때인 738년 1월에 신라사 급벌찬 金想純 등 187인과 송사가 39명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입경하지 못하고 大宰府에서 향응을 받고 돌 59) 古畑徹, 七世紀末から八世紀初にかけての新羅 唐關係 ( 朝鮮學報 107, 1983). 송기호는 신라와 발해와의 관계를 크게 다섯 시기로 나누어 보고 있다. 즉 ① 大祚榮시기(698 719), ② 大武藝시기 (719 737), ③ 大欽武시기(737 784) 이후, ④ 大仁秀시기(818 830), ⑤ 大諲譔시기(906 926)이다. 이 중① ③시기는 신라와 발해가 서로 친선교류하던 시기이며, ② ④는 양국이 대립하던 시기, ⑤는 발해가 거란의 침입을 막고자 후삼국과 연결하던 시기라고 보았다( 발해사연구의 몇가지 문제점 季刊京鄕, 1987년 여름호). 신라는 당과의 공동작전을 수행한 후 735년에는 대동강 이남의 땅의 영유를 인정받아 당과의 관계가 안정적이 된다.

- 121 - 아갔다. 이는 737년 2월 효성왕이 즉위한 후 최초로 일본에 파견한 사신이다. 효성왕은 당에도 737년 12월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일본에 사신이 도착한 시기가 738년 정월인 점 에서 737년 12월경에 당에 파견한 사신과 함께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신라 사신 의 입경을 거절한 이유는 명기하고 있지 않으나, 신라가 736년 일본사신을 홀대한 것에 대한 대응 조치 또는 천연두의 유행때문으로 볼 수 있다. 739년 7월 발해로부터 부사 雲麾將軍 己珍蒙 등이 일본의 견당사 平群廣成 등과 함께 일본에 파견된다.60) 이는 727년에 사신을 파견한 이후 제2회의 발해사신 파견이다. 平群 廣成은 733년에 당에 파견된 견당사의 일원으로 734년의 귀로에 조난하여 崑崙에 표착하 였다. 735년 당에 돌아가 발해로를 통해 귀국하는 방법을 찾던 중 허가받아 738년 5월에 발해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마침 발해왕 大欽武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는 편에 함께 귀 국한 것이다. 발해사의 파견 목적은 738년에 즉위한 대흠무의 즉위보고와 일본과의 교린 관계의 확인에 있었다. 발해가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한 이유는 당과의 관계긴밀화를 꾀하 고 있던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61) 일본은 다음해 1월에는 大伴犬養을 견발해사로 임명하여 5월경 발해사의 귀국시에 함께 파견하였다. 大伴犬養은 10월 초 귀국하였다. 740년 3월 중순 일본은 견신라사로 외종5위하 紀朝臣必登 등을 임명하여 4월 초 파견 하였다. 이들은 9월에 귀국하는데 견사의 목적 및 이에 대한 신라측의 태도 등은 자세하 지 않다. 紀朝臣必登은 후에 종5위하까지 올라간다. 742년 2월 초에는 신라사 사찬 金欽英 등 187인이 大宰府에 도착한다. 신경(恭仁京)이 초창되어 궁실이 완성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大宰府에서 향응해서 放還 하게 하였다. 恭仁 京으로 천도한 것은 藤原廣嗣의 난의 직후로 聖武天皇은 741년 정월의 하정이 있은 후 천도사실을 발표하였다. 이후 743년 말까지 恭仁京의 조영사업이 계속된다. 恭仁京에서 다시 平城京으로 돌아간 745년까지 5년 간 천황은 恭仁京 紫香樂宮 등을 전전하게 된다. 742년은 藤原廣嗣의 난이 진압된 직후로 난을 피해 궁궐도 없던 恭仁京에 임시로 거처하 고 있던 일본조정으로서는 신라사를 맞아들일 형편이 아니었다. 신라는 효성왕 재위 6년 간(737 742) 당에는 2번 조공사를 파견하였고 일본에 2회 사 신을 파견하였다. 이 시기는 735년의 대동강 이남의 영유를 당이 인정한 이후 신라와 당 과의 관계가 안정되어 간 시기이기도 한다. 한편 일본은 신라에 1회 사신을 파견하였는 데, 이 시기에 당과는 교섭이 없었으며 발해와는 사신을 한번씩 교환하여 신라를 견제하 는 입장을 확인하였다. 발해는 견당사의 귀국을 도움으로써 당과 일본과의 중계 역할도 하게 된다. 일본에 파견된 신라사는 2회 모두 200명 전후의 대규모의 사신단이었는데 大 60) 續日本紀 天平 11년 11월 辛卯조에 의하면 원래 대사는 忠武將軍 胥要德이었으나 도일 도중 사망하였다고 한다. 61) 石井正敏, 第二次渤海遣日使に關する諸問題 ( 朝鮮歷史論集 上, 1979).

- 122 - 國史館論叢 第29輯 宰府까지만 갔다. 이때 이들의 정치적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이들이 교역을 하고 돌아갔을 가능성은 크다.62) 5. 景德王代(742 765年) 경덕왕대에는 재위 24년 간 당에 11번 사신을 파견한 데 반해 일본에는 5번 사신을 파견 하였다. 경덕왕대 초기의 대일관계는 효성왕대부터의 양국관계 악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경덕왕대의 羅 日 양국관계는 일본으로부터의 사신파견으로 시작된다. 삼국사기 에 의하면 742년 10월 신라에 파견된 일본사신이 사명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간다( 삼국사 기 의 742년 동10월조). 이는 동년 2월에 신라사를 반각 한 후 최초의 일본사신 파견기 사이다. 또한 경덕왕이 동년 5월 즉위한 후의 최초의 일본사신이다. 따라서 경덕왕의 즉 위를 축하하고 양국 간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양 국 간의 외교형식 문제로 교섭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삼국사기 에는 不納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라가 743년에 사신을 파견한다. 도일한 신라사 金序貞 등은 공물을 調 로 부르던 것을 土毛 로 바꿨다는 이유로 대재부에서 放却 당했다. 743년은 恭仁京 건 설작업이 계속 추진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입경이 어려웠을 것이나, 일본측은 放却 의 이유로 신라사의 외교형식을 문제로 삼고 있다. 土毛 란 토지에서 생산되는 야채와 곡물 을 의미하는 것으로63) 일본의 양로율령의 賦役令에 土毛 조가 보이는데, 여기서 土毛 란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말한다.64) 신라가 일본과의 외교관계에서 土毛 란 말을 사 용한 것은 의외이다. 아마도 신라의 산물이란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였을지도 모른다. 그 러나 신라사가 調 를 土毛 로 바꿨다는 것은 단지 용어의 문제로 끝나는 것만은 아니었 다. 즉 일본측에서 신라의 선물을 조공 국의 調 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한 신라측 이 이것이 調 가 아님을 주장한 것이다. 742년의 일본사신의 신라조정에서의 태도를 통해 일본측의 대신라외교 형식을 확인한 신라측의 공식적인 태도표명이라 할 수 있다. 742년 743년의 기사들은 양국 간의 외교형식을 둘러싼 분쟁을 말해주는 것으로, 일본에 서는 이러한 대결상황을 배경으로 746년 4월에 鎭撫使가 東海 東山 北陸 山陰 山陽 西海 南海의 諸道에 설치되었다.65) 그러나 이 진무사는 동년 12월에 폐지되고 747년 9월부터 62) 長洋一, 新羅と博多 ( 古代の都市 博多, 1989). 63) 諸橋轍次, 大漢和辭典 3, p.118. 64) 古記에 當國所生 皆是土毛耳 라고 있다. 65) 이것도 대신라관계의 위기를 계기로 하였다고 한다(石母田正, 國家成立における國際的契機 日本の古代國家, 1971).

- 123 - 東大寺 大佛주조가 시작된다. 743년부터 신라사의 파견이 재개되는 752년까지는 양국 간의 국교단절상태였다. 신라는 747년 1월 이후 755년 4월까지는 당과도 교섭이 없었다. 이 시기에 일본은 750년에 견당사 를 한번 파견했을 뿐, 발해와는 사신의 왕래가 없었다.66) 율령국가 건설에 필요한 서적 등 문물의 수입에 이 견당사의 주요목적이 있었으며 견당사는 왕복 모두 남도로를 취했다. 743년의 신라사 반각 이후 단절되었던 양국 간의 교섭은 752년의 일본측의 사신 파견 으로 재개된다. 752년 1월 하순에 정 7위하 山口忌寸人麻呂가 견신라사에 임명되었다. 이 는 749년 7월의 효겸천황 즉위 이후 최초의 대 신라교섭기사이다. 績日本紀 에 이들에 관한 이후의 기사는 없어 사신의 목적 및 이에 대한 신라측의 대우에 대해서는 알 수 없 으나 東大寺 대불완성에 즈음하여 신라사의 파견을 권유한 듯하다. 과연 동년 윤 3월, 9년만에 신라사의 파견이 재개된다. 신라 왕자 金泰廉이 일행 700여 인을 동반하고 7척의 배로 일본을 방문한 것이다. 일본은 이를 빈례 로서 맞아들인다. 김 태렴은 조 를 바치고, 우리나라와 일본조정과는 예부터 끊임없이 배를 보내 친교를 계속 해 왔다 라는 말을 신라국왕의 말로 전했다. 일본조정에서는 이를 신라가 조공국으로서의 공식적인 외교자세를 표명한 것으로 이해하고 관위를 수여하고 향연을 베풀었다. 또 조서 를 내려 신라가 신공왕후 이후 일본의 번병으로서 예를 취해 왔음을 말하고 孝成王과 思 恭시대에 신라가 일본에 예를 결하였음을 비난하고 있다.67) 김태렴 일행은 동년 7월 귀 국한다. 그런데 김태렴이 과연 왕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68) 즉 삼국사 기 삼국유사 등에 경덕왕 17년(758)에 최초로 왕자가 탄생하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가 가짜왕자를 대표로 세워 700여 인이나 보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69) 삼국사기 에 성덕왕의 조카로 金志廉의 이름이 나온다( 삼국사기 성덕왕 32년 冬 12월조). 金泰廉은 金志廉과 형제간일 가능성이 있는데,70) 만약 이 가정이 맞는다면 金志 廉은 성덕왕의 조카이며 경덕왕은 성덕왕의 아들이므로 金泰廉은 경덕왕과 사촌이 된다. 일본측에서는 김태렴이 경덕왕의 사촌인 왕족이라는 점에서 왕자 라 불렀을 가능성이 있 다. 또한 삼국사기 에 의하면 경덕왕대에는 오랜동안 왕자가 탄생하지 않았는데, 경덕 왕 4년(745)에 동궁을 수리하였다는 기사가 보이고, 또 752년 8월에도 동궁아관을 두었다 66) 750년 9월 효겸천황대의 견당사로 藤原淸河가 임명되어 752년 윤3월에 4척의 배로 604인이 출발 했다(山尾幸久, 遣唐使 ). 67) 그러나 경덕왕대에도 마찬가지 태도를 보였음은 경덕왕 원년(742) 10월에 일본국 사신이 무례하 다고 돌려보낸 것, 743년의 사신이 調 를 土毛 로 바꾼 점 등을 통해 추측된다. 68) 和田軍一, 淳仁朝における新羅征討計劃について 史學雜誌 35-10 11), 鈴木靖民, 正倉院佐波 里加盤付屬文書の基礎的硏究 ( 古代對外關係史の硏究 ), 濱田耕策, 新羅中 下代の內政と外交. 69) 石井正敏, 八 九世紀の日羅關係. 70) 신라시대 왕족 중에 형제간에 돌림자를 쓴 경우로 김법민이 있다.

- 124 - 國史館論叢 第29輯 는 기사가 있다. 즉 왕자탄생 이전에 동궁으로서 책립된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을 크게 한 다. 효성왕 3년에도 아들이 없던 효성왕이 아우를 봉하여 태자를 삼은 것이 삼국사기 에 보인다. 따라서 續日本紀 에 신라 왕자로 등장하는 김태렴이 경덕왕대 초기에 동궁 으로 있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신라측이 金泰廉 등을 파견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이를 정치적인 목적이 강한 견사로 보는 酒寄雅志는 북변경영에서 발해와의 충돌 및 일본과 발해의 협격을 우려 한 신라가 일본의 중화사상 에 영합하여 조공 을 한 것으로 보았다.71) 한편 이를 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일본의 초청에 응해 東大寺의 대불개안을 축하하는 사절이었다고 보는 견 해도 있다.72) 이때의 사신단은 700여 인이라는 대대적인 것으로, 이들은 아라비아방면에서 동남아시아에 걸쳐 산출되는 향료와 약품, 당의 공예품, 신라의 특산품 등을 다량으로 가지 고 갔다. 이들이 가져간 물건은 당시의 동아시아의 무역품을 거의 망라한 것으로, 당으로부 터 신라에 전해진 것이 다시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따라서 東野治之는 이때의 신라사신에 게 調 를 위장한 무역의 목적이 강하였음을 지적하였다.73) 石井正敏은 김태렴 이후의 신라 의 사신파견은 무역을 추진하기 위한 공사파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였다.74) 즉 사신이라면 일단 체재는 보증받아 입경하지 못하더라도 무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 다. 필자도 김태렴 등의 목적이 무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본다. 한편 752년 9월에 발해로부터도 세번째 사신 慕施蒙 등이 파견되나 발해왕의 국서의 내용이 무례하다는 이유로 일본조정의 비난을 받게 된다. 이는 일본측이 율령적인 외교형 식을 더욱 고수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752년의 신라사의 파견으로 일본조정은 양국관계가 조공 피조공 의 관계로 안정되었 다고 착각하였던 듯하다. 753년 2월 상순 일본은 종5위하 小野朝臣田守를 견신라사에 임 명한다. 그후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續日本紀 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삼국 사기 경덕왕 12년(753) 秋8월조에서 일본국 사신이 교만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신라 의 경덕왕에 의해 돌려 보내진다고 있어 小野朝臣田守와 같은 사건으로 추측된다. 반각 당한 이유는 慢而無禮 라는 구절로 보아, 신라를 조공 국으로 대하는 태도를 취하였기 때 문일 것이 짐작된다. 小野朝臣田守에 대해서는 續日本紀 에 많은 기사가 있다. 이에 의하면 그는 종5위하로 749년부터 大宰府의 少貳75)에 임명되었던 사람이다. 그는 신라로 부터 귀국한 후에는 754년에 다시 大宰府의 少貳가 된다. 그후 성무천황 장의의 山作司, 71) 酒寄雅志, 八世紀における日本の外交と東アジアの情勢 渤海との關係を中心として ( 國史學 103). 72) 濱田耕策, 新羅聖德王 景德王代の外交 73) 東野治之, 正倉院文書からみた新羅文物 ( 日本のなかの朝鮮文化 47, 1980). 74) 石井正敏, 八 九世紀の日羅關係. 75) 大宰府에는 장관 帥 밑에 차관으로 大貳 1명과 少貳 2명이 있었으며 그 밑에 判官으로 大監 2명 과 少監 2명이 있었다.

- 125 - 刑部少輔 등을 역임한 후 758년 9월에는 견발해사로 파견되어 신라와 발해의 신라정토계 획의 추진에 활약한다. 小野朝臣田守의 사건을 통해 추측하건대, 신라가 김태렴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행하였 던 조공 의 예를 갑자기 다음해에 바꿨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김태렴이 일본조정에 서 행한 예는 신라측의 공식 입장이라기보다는 신라사가 일본측의 요구에 호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그는 대규모 교역사절단의 대표로서 교역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 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또한 신라 지배층내부에서 대일외교에 대한 다양한 목적 이 나타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754년 1월 말 견당사 大伴宿禰古麻呂의 귀국보고로 753년의 당정에서의 신라사신과의 자리다툼이 알려진다( 績日本紀 天平勝寶 6년 春정월 丙寅조). 753년의 일본사신의 반 각 이후 754년의 大伴宿禰 古麻呂의 당정에서의 신라사와의 자리다툼 보고 등으로 일본 조정내에는 반신라적인 분위기가 고조된다. 이후 양국 간의 교섭은 소원해지면서 일본과 발해와의 교섭은 활발해진다. 언제 파견되었는지 기록에는 없으나 758년 12월 일본사신 小野朝臣田守가 발해사신들과 함께 귀국하고 있다.76) 758년 12월 발해는 일본의 사신 小野朝臣田守의 귀국시에 輔國大 將軍 楊承慶 등 23인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小野朝臣田守는 전술한 바 753년에 신라에 파 견되었다가 무례하다고 하여 돌려보내진 바로 그 사람이다. 그의 파견은 신라정토계획과 관계가 있는데,77) 그는 발해에서 알게 된 당의 안사의 난에 관한 소식을 일본조정에 보고 하였다. 당에서는 755년 11월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 후 763년까지 혼란기가 계속된다. 발 해사 楊承慶은 다음해 1월 초 淳仁天皇과 대면하여 聖武天皇의 죽음에 대해 발해국왕 大 欽武의 애도의 뜻을 전하고 있다. 발해가 양승경을 파견한 목적은 약 6개월 후에 개시되 는 신라정토계획과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78) 양승경은 다음해 2월에 귀국하는데, 이때 일 본은 高元度 등을 파견한다. 즉 高元度는 752년에 파견된 견당사 藤原河淸을 맞이하기 위 한 사신이었는데, 그는 발해로를 통해 당에 가서 761년 8월에 남로로 귀국하였다. 이 시기 부터 견당사의 목적이 궁정교역형태에 의한 교역이라는 경제적 목적이 강해진다.79) 759년 6월부터 藤原仲麻呂의 주도하에 신라정토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759년부타 762년까지 仲麻呂정권의 동요속에서 추진된 것이다.80) 759년 6월에는 대재부에 行軍式 즉 동원계획을 입안시켰으며, 8월에는 大宰帥 三品 船親王을 香椎廟에 보내 신라를 칠 것 을 보고하였다. 9월에는 구주지방에 거주하는 신라로부터의 도래인에게 본국에의 귀환을 76) 발해사신들이 聖武天皇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으로 보아 756년 5월의 聖武天皇의 사망 이후가 될 것이다. 77) 鳥山喜一, 渤海史上の諸問題 5장 2절(風間書房, 1968). 78) 鳥山喜一, 渤海史上の諸問題 5장 2절과 山尾幸久, 遣唐使 참조. 79) 山尾幸久, 遣唐使 참조. 80) 和田軍一, 淳仁朝における新羅征討計劃について ( 史學雜誌 35-10 11).

- 126 - 國史館論叢 第29輯 허가한다는 포고가 나왔으며 각도에 명령하여 배 500척을 건조하게 하였다. 10월에는 다 시 발해로부터 輔國大將軍 高南申이 파견되어 다음해 3월에 귀국한다. 高南申은 藤原河淸 의 글을 휴대하고 왔다. 760년 9월에는 신라가 金貞卷 등을 파견하여 朝貢 하였다. 이는 753년 일본의 사신이 신라에 파견되어 무례하다는 이유로 사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간 후 7년만에 신라로부터 파견된 사신이다. 일본은 당시 조정의 권력자인 藤原仲麻呂의 아들 종4위하 藤原朝獦을 파견하여 신라사의 來朝 이유를 물었다. 김정권은 신라왕의 調 와 함께 일본 어를 배울 사람을 파견하였다고 하였다. 일본측은 753년의 일본사신에 대한 신라측의 결 례를 질책하였는데, 이에 대해 김정권은 자신은 신분이 낮으므로 잘 모르는 일이라고 대 답하였다. 이를 일본측은 불쾌히 여기고 그를 빈객으로 대접할 수 없다고 하여 却廻 하였 다. 여기서 김정권은 관위가 급찬이었으므로 8세기의 다른 신라사신에 비해 특별히 낮은 관위는 아니었다( 표 1 참조). 따라서 관위가 낮다는 것만이 却廻 의 이유는 아니었던 듯하다. 일본측은 김정권에게 앞으로의 신라사신은 다음의 네 가지를 갖추도록 신라에 돌 아가 전하기를 요구하였다. 즉 책임을 가지고 대응할 수 있는 사신(專對之人), 성의가 있 고 거짓이 없는 예(忠信之禮), 예로부터의 조(仍舊之調), 명확하고 근거가 있는 말(明驗之 言)이다. 이를 통하여 일본이 외교형식에서 신라를 조공국으로 놓으려 하는 확실한 결의 를 읽을 수 있다. 일본의 신라정토계획은 762년 겨울까지 계속되는데 이 계획이 추진되던 중간에 신라사 가 파견되었던 것이다. 신라는 九州지방에서 귀국한 신라계 도래인들로부터 일본측의 침 략 계획을 알게 됨으로써 일본의 내정을 살펴보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을 가능성이 크 다. 양국 간에는 전쟁을 회피하기 위한 교섭이 있었을 듯하나 신라정토계획을 중지시킬 정도까지는 교섭이 진행되지 않았던 듯하다. 761년 정월 일본은 신라정토를 위해 美濃 武 藏 2국의 소년 20인씩에게 신라어를 배우게 하였으며, 11월에는 동해 남해 서해삼도의 절 도사가 임명되어 선박 병원 수주 등의 배비도 결정되었다. 동해도 남해도 서해도 절도사에 藤原朝獦 百濟王敬福 吉備眞備가 각각 임명되었다. 762년 정월 大宰府에 새로 면옥과 주 를 다량 만들도록 명령이 있었다. 762년 10월 발해로부터 紫綬大夫 王新福 등 23인이 파견된다. 일본의 견발해사 高麗大 山일행을 따라 파견되었던 이들은 발해가 일본의 신라정토계획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 다는 의사를 알리는데 있었다고 한다.81) 즉 762년 발해의 대흠무는 발해국왕 으로 책봉을 받고, 또한 신라와 동등한 檢校太尉 를 받았는데, 이로써 신라에 대해 적대하던 것을 버 리고 당에 대한 접근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82) 81) 石井正敏, 初期日渤交涉における一問題 新羅征討計劃中止との關連をめぐって ( 史學論集 對外關係と政治文化 1, 1974).

- 127-11월 일본은 다시 香椎廟에 제사를 지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대 신라외교관계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神功皇后를 제신으로 하는 香椎廟에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그 러나 이후 신라정토계획에 관한 기사를 볼 수 없는데, 신라정토계획이 중단된 이유로 ① 762, 763년의 기근 역병 물가등귀 등의 사회불안, ② 仲麻呂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의 악 화, ③ 762년의 발해측의 대당사정변화에 의한 방침변경 등을 들 수 있다. 발해로부터의 사신 왕신복이 平城京에 머무르고 있던 763년 2월 신라는 급찬 金體信 이하 211인을 보내 朝貢 했다. 일본은 종5위하 大原眞人今城 등을 보내 760년의 金貞卷과 의 약속에 대해 질문하였다. 김체신은 국왕의 명령으로 단지 調를 바칠 뿐 이라 주장하 였는데, 이에 대해 일본은 이번 사신만은 빈객으로 대우하겠다 하며, 그러나 앞으로는 왕 자 또는 정치를 담당한 고관을 입조시키도록 국왕에게 보고하도록 요구하는 한편, 평성경 에 불러 항례대로 대우한다. 이때의 신라사는 조 를 바치러 왔다고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 지나 일본측의 외교형식에 맞춰 다른 외교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명목에 불과한 것으로 신라사의 목적이 그것만은 아니었을 듯하다. 당시 신라정토계획은 거의 중지된 상태에 있 었다. 즉 순인천황과 효겸태상천황사이의 불화로 762년 6월부터 정치의 주요사항을 효겸 태상천황이 맡게 되었다. 따라서 순인천황을 배경으로 권세를 누리던 藤原仲麻呂의 세력 이 약화되었다. 신라정토계획은 등원중마려가 자신의 전제권력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서83) 藤原仲麻呂의 세력약화에 따라 점차 흐지부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사가 파견된 것은 신라정토계획의 추진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일본 측은 藤原仲麻呂의 실각에 따른 대신라정책의 전환을 알리기 위해 신라사를 입경시켜 빈 례로서 대우한다. 당시 신라는 경덕왕 22년으로 시중은 金邕이었다.84) 김옹은 대일본외교 를 추진하였던 최고위급의 사람이었다. 급찬 김체신은 혜공왕대인 771년에는 聖德王神 鐘銘 에 검교사 김옹 김양상과 함께 검교부사로 이름이 보인다. 양상은 764년(경덕왕 23) 에 중시에 임명되었으며, 774년에 상대등이 된다. 김양상은 그후 혜공왕을 시해하고 선덕 왕으로 즉위하였는데, 김체신은 선덕왕 때인 783년에는 아찬으로 大谷鎭軍主까지 되었다 ( 三國史記 선덕왕 4년 春정월조). 김체신과 일본정부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 지 불확실 하나 양국관계 개선의 계기가 된 듯하다. 763년 8월에는 山洋 山海 양도의 절도 사가 정지되어 신라정토계획은 완전히 정지된다. 신라는 다음해 764년 7월에도 대내마 金才伯 등 91인을 일본에 파견한다. 이들은 唐의 칙사의 의뢰로 당에서 일본에 귀국한 중 戒融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서 일본에 왔다고 82) 石井正敏, 위의 논문 및 酒寄雅志, 渤海國家の史的展開と國際關係 (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6, 1979) 참조. 83) 和田軍一, 淳仁朝における新羅征討計劃について ( 史學雜誌 35-10 11)와 大坪秀敏, 藤原 仲麻呂政權下の百濟王氏 ( 日野昭博士還曆記念論文集 歷史と傳承 ) 참조. 84) 760년 시중이 된 이후 경덕왕 후기 및 혜공왕대에 걸쳐 최고 권력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 128 - 國史館論叢 第29輯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은 신라가 일본에 대비하는 병을 모아 경비를 하고 있다는 소 문의 진위를 물었다. 신라사는 당의 해적에 대 비한 것이라 대답하였다. 이 교섭에서 특 징적인 것은 신라의 최고관부인 집사부가 대재부와 첩을 교환하고 있는 점이다. 대재부는 신라 집사성에 대해 戒融의 소식에 대한 회답의 牒을 보냈다. 이는 신라가 평성경의 중앙 귀족을 상대로 하는 대일교섭을 기피하고 창구로서 대재부의 중요성을 의식하고 있었음 을 말해 준다. 그런데 신라사의 파견 목적이 석연지 않다. 단지 입당유학승에 지나지 않는 戒融의 일 본 귀국 후의 소식을 알아내어 당의 칙사에게 알려 주기 위해 신라가 91명이나 되는 사 신을 파견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신라사의 파견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는 戒 融을 내세우면서까지 일본에 91명이나 파견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면 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교역을 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경덕왕 재위 24년 간(742 765) 5번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는데 입경하여 빈례 를 받은 것은 2차례 뿐이다. 또한 일본으로부터는 3번 사신 파견이 있었는데 이 중 2번은 무례함 을 이유로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본국에 돌아갔다. 사신파견 빈도도 줄어들고 외교형식 문제로 양국 간에 분쟁이 많았으며, 그 결과 일본에서는 신라원정계획이 추진되기도 하여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양국 간의 교섭이 국가 간의 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적 성격을 띠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6. 惠恭王代(765 780年) 혜공왕 즉위 후 초기에는 일본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 혜공왕대에는 재위 16년 간 당에는 조공 하정 사은사 등으로 10번 사신을 파견한다. 일본에 대해서는 3회에 걸쳐 사 신을 파견하고 일본사를 1회 맞이하였다. 769년 11월 신라는 급찬 金初正 등 187인과 송 사 39인 등 대규모의 사신단을 파견하였다. 신라사는 來朝 이유를 견당사 등원하청이 신 라 왕자 金隱居의 귀국시 보낸 서신을 보내 일본에 전달하고 土毛 를 바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였다. 일본측은 신라사가 調 를 土毛 로 칭했기 때문에 빈객으로서 대우하지 않았 다. 그러나 이들이 당국정세보고와 등원하청의 서신을 보내왔으므로 대재부에서 향연을 베풀고 국왕 및 사신들에게 선물을 주도록 하였다. 사신들이 입경하여 빈례에는 참석하지 못 하였으나 대재부에서 교역을 하고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이 신라사가 調 라 하지 않 고 土毛 란 말을 일부러 쓴 이유는 입경 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서 주목 할 점은 일본의 중앙귀족이 신라국사가 가지고 온 물건을 博多에서 사교역에 의해서 입 수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768년에 일본의 좌우대신 이하에게 신라의 交關物

- 129 - 즉, 무역품을 살 수 있도록 大宰府의 면이 지급된 바 있다. 이는 太政官의 상층부가 무역 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기 위한 것으로 그 대상이 되는 것은 부정기적인 사절이 아니라 신 라의 민간 상인이었다. 이즈음 사절에 의하지 않는 민간의 무역 상인이 나타났다고 보아 야 한다.85) 민간상인의 내항이 빈번해지면서 신라의 사절의 도일은 寶龜 10년(779)에 끝 나게 된다. 신라는 大宰府에서 교역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平城京까지 가서 여러 가지 복 잡한 의례에 참석하지 않아도 좋았던 것이다. 이처럼 혜공왕대에 새로 나타난 대일본외교 의 특징은 신라가 일본과의 교역에 치중하는 한편, 그 교역을 맡을 견일본사의 구실를 확 보하기 위하여 일본의 견당사와의 연락을 맡아주었다는 점이다. 신라는 774년 3월, 5년만에 신라국사로 예부경 사찬 金三玄 이하 235인을 일본에 파견 하였다. 이는 770년 10월에 광인천황이 새로 즉위한 이후 최초의 신라사신 파견이었다. 일본은 신라사의 방문목적이 舊好를 닦고 서로 빙문하기를 청하며 신물과 藤原河淸의 서신을 전달하는데 있다는 말을 듣고, 請修舊好 毎相聘問 은 冗禮之國 간에 쓰는 말로 貢職之國 간에 쓰는 말로는 적합지 않으며 또 調 를 國信 으로 고친 이유는 무엇인가를 질문하였다. 신라사는 請修舊好 毎相聘問 은 김순정의 손자 김옹이 김순정을 이어 일본을 성심으로 받들기 때문이며, 調 를 國信 으로 고친 것은 자신은 貢調之使 가 아니기 때문 이라고 하였다. 일본은 이를 구례에 어긋난다고 하여 放還 하게 하였다. 신라가 760년의 김정권에게 요구한 일본측의 조건을 일부러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나온 것은 어떻게 해 석해야 할까. 예부경이 신라사로 파견된 것은 신라의 공식적 태도를 말해 주는 것 같으나 관위가 낮은 사찬이 예부경이라는 점은 또 다른 의심을 낳게 한다. 鈴木靖民은 이를 신라 의 정치적 혼란기에 왕족 김옹이 독자적으로 파견한 사신으로 보고 있다.86) 이것이 김옹 이 파견한 것인지 혜공왕이 파견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신라는 새로 즉위한 천황 과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원했던 새로운 관계라 함은 조공관계가 아닌 인대국 관계였으나 일본측은 거부하였던 것이다. 779년 2월 중순 일본은 大宰府의 삼등관 少監(대재부의 判官) 정6위상 下道朝臣長人을 견신라사로 파견하였는데, 이는 753년의 견신라사가 무례를 이유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지 26년만의 일이다. 이 사신도 753년의 견신라사와 마찬가지로 大宰府의 관리였 다. 그는 후에 외종5위하로 大和國의 차관이 되었다. 이 사신의 목적은 당으로부터 귀로 에 탐라에 표착하여 억류되어 있던 견당판관 海上眞人三狩 및 당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 한 것이었다. 신라는 이들의 귀국시에 貢調使 金蘭蓀을 파견한다. 신라가 779년에 일본 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당시 사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암의 이야기로서 삼국사기 에도 보인다( 삼국사기 권43, 金庾信傳 下). 85) 石井正敏, 八 九世紀の日羅關係. 86) 鈴木靖民, 日羅關係と遣唐使.

- 130 - 國史館論叢 第29輯 779년 10월 17일 신라의 貢調使 는 唐의 사신들과 함께 입경하여 方物 을 바치고 주상 한다. 주상 내용은 신라가 오랜동안 조공을 해 온 나라라는 것과 賀正貢調와 일본의 견당 판관의 배웅을 위해 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은 칙으로 신라의 조공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실을 비난하면서 이번의 신라사파견을 기뻐하고 있다. 일본은 신라사 접대의례 에 당의 사신을 참석시키고 있는데, 이는 당의 사신 判官 高鶴林이 참석한 장소에서 신라 의 위치를 확인시키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난손을 파견한 사람은 혜공왕 이라기보다는 상대등 김양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혜공왕은 친당정책을 추진하여 특히 재위 16년에 김양상의 쿠데타에 의해 시해당하기까지 견당사를 수시로 파견하였다. 따라 서 혜공왕 15년의 김난손 파견은 혜공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김양상의 친일정책의 발로 라고 추측되고 있다.87) 과연 이때 김난손이 보여준 태도는 일본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정도였다. 이것이 혜공왕대 전기 2회 견일본사와 두드러지게 다른 점이었다. 신라사가 일 본이 요구하는 외교형식을 따르고 있는 점에서, 이들이 특수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었 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은 대사 살찬 김난손에게 정5위상을 수여한 것을 위시 하여 대판관 소판관 대통사에게 종5위하를, 그 외 사람들에게 6위 이하의 관위를 수여하 였다. 김난손의 귀국시에 일본은 신라왕에게 국서를 보내는데 그 내용은 신라의 조공 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770년 宣德王으로 즉위한 김양상은 이후 친당정책으로 전환하였 음을 알 수 있는데, 772년 당에 조공하여 775년에는 당의 책봉을 받았다. 신라와 일본 간 의 사신파견은 없어진다. 공식적인 교섭이 끝난 이유는 신라가 일본측이 요구하는 외교형 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신라지배층은 공적인 사신파견을 통한 궁정 교역을 포기하고 민간상인에 의한 교역을 통해 경제적인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고 볼 수 있다.88) 이상과 같이 헤공왕대 일본과의 관계는 3회 사신을 파견하고 1회 일본사신을 맞았다. 이 중 신라사가 빈례를 받은 것은 마지막의 1회 뿐으로 2회는 외교형식문제로 大宰府에 서 교역하고 귀국하였다. 신라의 사신의 규모는 커지고 있는데, 이는 신라측이 일본측의 외교 형식을 어겨 빈례 를 받지 않고 大宰府에서 교역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이 시기에 나타나는 신라의 외교의 특징은 일본과 당의 중계역할을 하고 있다 는 점이다. 즉 일본의 견당사의 서신을 전달해 주거나 표착한 일본사신을 보내주면서 대 규모의 사신을 파견하는 것이다. 일본은 같은 기간 동안 777년과 779년에 각각 견당사를 파견하였다. 이에 비해 발해와 는 교섭이 활발하여 발해로부터의 사신을 4회 맞이한 대신 3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였 87) 이기백, 신라혜공왕대의 정치적 변혁 ( 사회과학 2, 1958) 및 김수태, 신라중대 전제왕권 과 진골귀족 (1991) p.135 참조. 88) 石井正敏, 八 九世紀の日羅關係.

- 131 - 다. 일본의 발해와 가겼던 교류의 성격은 762년의 신라정토계획 중지 이후 변질되었다. 즉 정치적 군사적 목적의 관계에서 경제적 교류에 치중하는 관계로 바뀐 것이다.89) 그리 고 일본에 있어서 대신라외교상의 새로운 현상은 大宰府의 관리가 사신으로 파견되는 일 이었다. 이는 대 신라 외교가 더 이상 일본 지배층의 최대 관심사가 될 수 없었음을 말해 준다. 다시 말해서 양국의 교섭은 사신을 매개로 하는 정부 대 정부의 교섭이 아니라, 민 간상인에 의해 주도되는 교류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 Ⅲ. 맺 는 말 이상과 같이 7세기 말부터 8세기 말까지의 신라와 일본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본고 에서 다룬 문제는 외교형식보다는 실질적인 왕래에 관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본고는 이제까지 알려진 신라와 일본의 외교관계와는 다른 모습을 보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신라와 일본의 국제관계를 규정한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정세속에서 羅 日 관 계의 모습을 더듬어 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양국관계의 객관적인 실태, 즉 외교형식에 관한 문제는 양국의 왕권 간 의 교섭의 모습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이를 확인해 주는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사료 로서는 국왕 간의 국서가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신라국왕의 국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 본측 사료는 주로 조공 에 관한 기사를 싣음으로써 외교적 형식을 다루고 있는데, 본고 에서는 두 나라의 관계는 이러한 표면상의 관계만으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음을 밝히 고자 한 것이다. 續日本紀 와 삼국사기 를 통해서 재조명해 본 羅 日 관계에서 얻은 결론은 다 음과 같다. 첫째, 續日本紀 에 신라가 調 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여 신라가 일 본의 조공국이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신라가 일 방적으로 일본의 하정의례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일본도 신라의 하정의례에 참가했을 가 능성이 크다. 둘째, 일본이 요구하는 외교형식에 신라가 응하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전적 으로 신라측의 사신의 파견 목적에 따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라는 점차 경제적 목적 을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게 되었으며, 이를 위하여 일본의 율령체제적 외교형식을 교묘 히 이용하였다. 89) 石井正敏, 初期日渤交涉における一問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