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관논총_29집.hwp

Similar documents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152*220

º´¹«Ã»Ã¥-»ç³ªÀÌ·Î

- 2 -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012~031)223교과(교)2-1

연구노트

178È£pdf

나하나로 5호

기본소득문답2

....pdf..

041~084 ¹®È�Çö»óÀбâ

DocHdl2OnPREPRESStmpTarget

¾ç¼ºÄÀ-2

레이아웃 1

ÃѼŁ1-ÃÖÁ¾Ãâ·Â¿ë2


#7단원 1(252~269)교

¹ßÇ¥¿äÁö

41호-소비자문제연구(최종추가수정0507).hwp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¹é¹üȸº¸ 24È£ Ãâ·Â

hwp

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0.筌≪럩??袁ⓓ?紐껋젾 筌

* pb61۲õðÀÚÀ̳ʸ

<B1DDC0B6B1E2B0FCB0FAC0CEC5CDB3DDB0B3C0CEC1A4BAB82E687770>

allinpdf.com


(연합뉴스) 마이더스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Çѹ̿ìÈ£-197È£

**09콘텐츠산업백서_1 2

5 291

Jkafm093.hwp

ITFGc03ÖÁ¾š


¼øâÁö¿ª°úÇÐÀÚ¿ø


<B9AEC8ADC0E7C3A2766F6C2E31325FBDCCB1DB2E706466>

CC hwp

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CR hwp


CC hwp

120~151역사지도서3

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2013_1_14_GM작물실용화사업단_소식지_내지_인쇄_앙코르130.indd

hwp

750 1,500 35

<C3E6B3B2B1B3C0B C8A32DC5BEC0E7BFEB28C0DBB0D4292D332E706466>

2013unihangulchar {45380} 2unihangulchar {54617}unihangulchar {44592} unihangulchar {49328}unihangulchar {50629}unihangulchar {51312}unihangulchar {51

<312E20C0AFC0CFC4B3B5E55F C0FCC0DAB1E2C6C720B1B8B8C5BBE7BEE7BCAD2E687770>

ÀÚ¿øºÀ»ç-2010°¡À»°Ü¿ï-3

coverbacktong최종spread

금강인쇄-내지-세대주의재고찰

ÆÞ¹÷-Æîħ¸é.PDF

¾Æµ¿ÇÐ´ë º»¹®.hwp


2016년 신호등 4월호 내지A.indd

2015년9월도서관웹용


어린이 비만예방 동화 연극놀이 글 김은재 그림 이 석

국사관논총_29집.hwp

2저널(11월호).ok :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

hwp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01¸é¼öÁ¤


단양군지

141018_m

내지-교회에관한교리

4-Ç×°ø¿ìÁÖÀ̾߱â¨ç(30-39)

p529~802 Á¦5Àå-¼º¸í,Ç×ÀÇ

[NO_11] 의과대학 소식지_OK(P)

µ¶¸³Á¤½Å45È£

할렐루야10월호.ps, page Normalize ( 할 437호 )

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³»Áö_10-6

쌍백합23호3

01Àå

16-27( 통권 700 호 ) 아시아분업구조의변화와시사점 - 아세안, 생산기지로서의역할확대

È޴ϵåA4±â¼Û

±³À°È°µ¿Áö

A 목차

Ä¡¿ì_44p °¡À» 89È£

통신218-진행

ok.

~

1 경영학을 위한 수학 Final Exam 2015/12/12(토) 13:00-15:00 풀이과정을 모두 명시하시오. 정리를 사용할 경우 명시하시오. 1. (각 6점) 다음 적분을 구하시오 Z 1 4 Z 1 (x + 1) dx (a) 1 (x 1)4 dx 1 Solut

View Licenses and Services (customer)

- 89 -

(중등용1)1~27

<3034BFEDC0CFBDC2C3B5C7CFB4C2C1DFB1B9BFECB8AEC0C7BCF6C3E2BDC3C0E52E687770>

1

01.내지완완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Transcription:

高麗前期의 對外關係史硏究 日本과의 관계를 中心으로 羅 鐘 宇* Ⅰ. 머리말 Ⅱ. 高麗 以前의 兩國關係 1. 新羅下代의 兩國關係 2. 後百濟 甄萱의 對日通使 Ⅲ. 使節의 來往과 漂流民의 送還 1. 使節의 來往 2. 漂流民의 送還 Ⅳ. 麗 日 兩國의 通商關係 1. 高麗 以前의 韓 日貿易一般 2. 高麗 貿易의 性格 3. 麗 日 貿易과 進奉船 Ⅴ. 맺는말 Ⅰ. 머 리 말 우리나라와 日本은 大韓海峡과 日本海를 사이에 두고 마주 대하고 있어서 일찍이 四群 時代부터 東亞國際의 해상교통은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행하게 되어 있었다.1) 그러나 우 리와 일본과의 관계는 항상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는 개념이 늘 지배해 왔다. 이런 개념은 지리적 사정이나 경제의 상태, 민족의 성격, 문화의 성질 등의 차이와 정치적 정세라는 상황에 따라 일본은 항시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는 침략자라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고려시대의 일본과의 관계는 고려전후의 시대에 비하여 정치 무역 경제 외교 군사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침체했던 시대이며 부진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에 대하여 日本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相結(서로 결합하려 것)하려는 힘과, 相離(서로 멀리하려는 것)하려는 힘과의 相剋을 중축으로 전개되었으며 고려시대는 相離하려는 힘 이 압도적으로 우세를 지속한 시대다.2)라고 말하여 이 시대의 兩國관계가 소원했음을 말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이 시대를 전후한 470여 년간의 양국관계는 완전히 별천지 * 圓光大學校 史學科 敎授. 1) 三國志 魏書 東夷傳 30 倭人傳. 2) 靑山公亮, 日麗交涉史の硏究 (明治大學, 1955) pp.3 4 참조.

- 157 - 에서 전개되었다3)고까지 말하였다. 물론 高麗時代의 韓 日 關係는 앞서 언급한 대로 전 후시대에 비하여 침체되었던 것은 사실이라 할 지라도 日本측에서 말하는 것처럼 별개의 세계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이 기간에도 보편적은 아니지만 前期에는 通交貿易 中心으 로 兩國關係는 이어졌고, 後期에는 倭寇로 대표되는 武力行使로 계속되었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사실들이 일본측에서 볼 때는 通交貿易은 후술하겠거니와 일본측의 저자세가 드 러나며, 왜구는 침략자라는 점에서 거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高麗가 건국되던 918년경의 東亞의 국제정세는 중국에 있어서는 五代의 혼란기였고, 일본에서는 醍醐天皇의 延喜年間이었다. 당시 일본은 이미 遣唐使가 폐지되어 중국과 국 교가 끊긴 시대로서 외국문화의 수입이 어려운 시대였다. 한편 우리나라의 입장은 고려는 건국되었지만, 아직도 신라는 미약하나마 존속하고 있으며, 견훤은 후백제를 칭하며 자립 하여 고려와 맞서고 있던 때였다. 이와 같이 新羅下代 이후에 나타났던 여러 가지의 어려 운 상황들이 고려에 의해 수습은 되어지고 있었으나 아직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지는 못 한 때였다. 이처럼 10세기 초의 東亞의 국제정세는 각국의 국내사정 등으로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公 私 간 완전히 단절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麗 日關係의 본질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고려라고 하는 시대의 특수사정과 그 시대가 안고 있는 특수문제를 구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高麗王朝는 470여 년 동안 100여년을 제외하는 항상 끊임없이 이민족과의 마찰을 계속 해 왔다. 이러한 고려의 異民族觀은 단순한 血緣 文化的 차이에서가 아니라 그 문화의 우 열을 깊이 인식하는 가운데 族的 구분을 더욱 심화시켰다.4) 따라서 高麗時代 前期의 고 려의 對外交流狀况은 대상국가에 따라 달랐다. 예컨대 宋에 대하여는 매우 적극책으로 대 하였으나, 女眞에 대해서는 人面獸心 5)이라 하여 야만시하였으며, 日本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고려와 일본과의 관계를 고찰하고자 할 때는 대체적으로 전기의 通交貿易을 중심으로한 使節의 來往 등과 후기의 倭寇를 중심으로 한 武力行使로 크게 구분할 수가 있다. 고려말의 왜구를 중심으로 한 麗 日관계는 필자가 이미 밝힌 바 있거 니와6) 본고에서는 고려전기의 麗 日관계를 밝힘에 있어 通商關係를 주로하여 進奉船과 交易狀况, 그리고 漂流民의 送還과 使節의 來往 등을 특히, 고려전기 麗 日무역의 성격을 지금까지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私貿易이라는 관점 보다7) 公貿易的인 성격면에 3) 靑山公亮, 위의 책 p.4. 4) 金光洙, 高麗前期 對女眞交渉과 北方開拓問題 ( 第6回 東洋學學術會議 講演鈔, 단국대부설 동양학연구소, 1976) p.4. 5) 高麗史 권2, 太祖 14년 夏 11월조. 6) 羅鐘宇, 高麗末期의 麗 日關係 ( 全北史學 4, 1980).

- 158 - 國史館論叢 第29輯 중점을 두어 고찰하고자 한다. 일본인 학자들이 이 시대의 麗 日무역을 私的 通交라고 강 조하는 까닭은 進奉船이라는 용어때문에 나타난 고려에 대한 일본의 低姿勢를 감추려는 의도에서라고 본다. 또 하나 본고에서 살피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麗 日關係는 시종일관 모든 면에서 고려가 일본에 대하여 제한적이고 거절적인 태도로 일관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고려초의 정치적 관계는 고려가 일본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문호개방을 요구했고 일본은 수동적 자 세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신라말의 9세기와 고려초의 10세기의 2世紀동안의 한 일 관계는 지금까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우리의 빛나는 海洋史를 읽을 수 있는 좋은 시대라는 점이다. 본고에서 다루는 시대구분상의 고려전기의 下限은 毅宗 24년(1170)으로 잡았지만8) 글 전체의 형편상 위로는 新羅下代에 대하여 약간의 언급을 덧붙였으며 아래로는 毅宗 이후 에 나타나는 한 일 양국관계의 기사를 조금 인용하였다. Ⅱ. 高麗 以則의 兩國關係 1. 新羅下代의 兩國關係 고려시대의 양국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前時代인 신라하대의 양국관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신라와 일본과의 관계는 663년 百濟援軍次왔던 倭軍이 그해 8월에 錦江전투에서 패배 한 이후 활발한 접촉이 진행될 수 없었다. 8세기의 양국관계는 일본이 신라에 사절단을 15회, 신라는 일본에 21회 파견할 정도였으나 전반적으로 양국관계는 소원해졌다. 그 이유는 당시 한 일 양국의 국내사정에 따른 것이다. 먼저 신라의 경우는 713년 발해가 건국되어 북쪽에 대한 경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어 聖 德王 20년(721)에는 장정 2천명을 징발하여 북평에 장성을 쌓았으며9) 남쪽의 倭寇의 침 입에 시달려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毛伐城을 쌓기도 하던 때였다.10) 그러나 계속하여 왜 7) 李丙燾, 韓國史 中世(震檀學會 編, 1961) p.404. 森克己, 鎌倉時代の日麗交涉 ( 朝鮮學報 34, 1965) p.68. 靑山公亮, 앞의 책 p.8 등에서 이 시대를 私的通交時代, 그리고 貿易을 私貿易 또는 私獻貿易으로 표현하고 있다. 8) 高麗期를 細部區分하는 데는 여러 학설이 있으는 본고에서는 이러한 학설들을 검토하여 정리한 박 용운 교수의 高麗時代史 (上)의 학설을 취하였다. 9) 三國史記 권8, 聖德王 20년 7월조. 10) 三國史記 권8, 聖德王 21년 10월조에 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 라고 하였다.

- 159 - 구의 침입은 신라를 귀찮게 하였으니 731년에는 신라를 침범한 倭船 300척을 격퇴한 기 사가 보인다.11) 이러한 이유 등으로 신라와 일본과는 不和가 계속되었으니 742년에는 일 본의 사절이 왔지만 받아 들이지 않았으며,12) 753년에는 일본 사신이 왔으나 그들이 오 만하고 무례하여 접견하지 않고 돌려 보냈다.13) 이 무렵의 일본과의 불화는 대체적으로 聖德王 34년(735) 신라와 당의 관계개선이 되 면서부터 심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으니 三國史記 에 보면 이때에 金義忠이 당에 들어가 賀正을 했고, 副使 金榮在가 唐에 있다가 죽자 光祿少卿의 벼슬을 추증했으 며, 義忠이 돌아올 때 浿江이남의 땅을 준다는 칙사를 내렸다는 기사가 보인다.14) 즉, 이 때부터 新羅는 唐으로부터 浿江 이남의 땅을 公認받게 됐으며, 불편했던 당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던 것이다. 당과의 관계개선이 되던 바로 그해 935년부터 일본측기록에는 신라와 日本과의 不和內容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고 있으며15) 이후의 記事內容 중 신라와 일본 과의 관계가 현저하게 멀어지고 있는 사실들을 볼 수 있는데,16)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의 양국관계가 당사국뿐만 아니라 주변국들의 동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전개되어짐을 의미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8세기의 일본 국내의 사정은 율령 체제의 강화가 급선무였었다. 따라서 국내의 분열 대립을 극복하여 지배체제를 굳게하기 위해서는, 대외적인 긴장 관계를 조성하는 것 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737년 신라에서 돌아온 사절이 냉대를 받았다고 보 고하자 일본의 지배층 안에서는 신라를 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17) 이러한 주장에 의 하여 신라에 대한 출병 계획이 대대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니 양국관계는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속에 760년에는 일본에 건너간 신라의 사자를 받아들이지 않음 과 동시에18) 신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3 4년간의 준비를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그 예를 살 펴보면 같은 해인 760년 11월에는 舍人 6명을 大宰府에 보내어 당시 唐으로부터 兵法을 배워 돌아온 大貳吉備眞備에게 兵法을 습득토록 했으며19) 이듬해인 761년에는 美濃 武藏 의 소년 각 20명에게 新羅語를 습득토록 함과 동시에 西海道 7國에 軍器의 제조를 명하 였고, 또한 南海 東海 西海諸道의 선박과 군사를 검열하여 戰術의 훈련을 하도록 하였으 며, 3년간의 田租를 면제하는 등 신라를 침략하기 위한 준비를 해 나갔던 것이다.20) 이러 11) 三國史記 권8, 聖德王 30년 4월조에 日本國兵船三百艘 越海襲東邊 王命將出兵大破之 라 하였다. 12) 三國史記 권9, 景德王 원년 10월조. 13) 三國史記 권9, 景德王 12년 8월조. 14) 三國史記 권8, 聖德王 34년조. 15) 續日本紀 권12, 天平 7년 2월조. 16) 續日本紀 권13, 天平 9년 2월 4월조, 10년 정월 6월조 참조. 17) 續日本紀 권13, 天平 9년 2월조. 18) 續日本紀 권23, 天平寶字 4년 9월조. 19) 위의 책 동년 11월조.

- 160 - 國史館論叢 第29輯 한 신라침략의 준비는 당시 일본의 국내사정 즉, 恵美押勝의 亂 21) 등으로 인하여 중지되 었다. 결국 신라에 대한 출병 소동은, 대외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함으로써 정권장악을 확고히해 보자는 藤原仲麻呂 등의 책동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은 기아와 질병이 만 연하였으며 蝦夷라고 불리는 오늘의 關東地方에 대한 지배가 어려워져 율령체제가 동요 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러므로 신라에 대한 출병계획은 신라와의 긴장 관계를 조성함으 로써 일본의 국내지배체제, 즉 율령체제를 강화하자는 의도였던 것이다.22) 이러한 양국관계는 양국의 국내사정으로 779년 이후 公的으로는 일단 단절되게 되었다.23) 9세기에 들어서면 양국관계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다름아닌 신라는 보다 적극적 으로 일본에 진출을 꾀하고 있는데 반해, 일본은 신라의 진출을 저지하려는 태도로 바뀌 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9세기 전반에 걸친 100여 년동안 계속되어지고 있으며, 이후 양 국관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9세기의 이러한 양국관계를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사료들이 국내의 사료가 아닌 일본측 사료이므로 그 표현방법은 일 본 위주의 표현으로 되어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811년 12월에 新羅船 20여 척이 대마도 근해에 나타난 기사가 처음으로 보이며,24) 813 년에는 五島列島의 値賀島에 新羅船 5척에 110인이 일본에 나타난 기사가 보인다.25) 이 와 같은 신라의 적극적인 일본 진출은 이듬해인 814년에 이르면 政府間의 교섭을 완전히 단절시키게 된다.26) 이것은 779년 이후 공적관계가 단절되었지만 일본의 견당사 등으로 약간은 통하던 양국관계가 정부 간에는 완전히 두절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835년에 일본은 壹岐國에 330인의 군사를 따로 주둔시켜 신라에 대비토록 하고 있는 27) 데 이는 계속되는 신라의 진출에 일본이 그들의 국내사정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 문이라고 본다. 869년 5월 22일 밤에는 신라의 선박이 大宰府의 外港 博多에 다다르게 되는데28) 이때 에는 신라의 선박을 막을 임무가 주어진 大宰大貳藤原元利가 신라와 통하여, 이듬해에 謀 20) 續日本紀 권23, 天平寶字 5년 정월 7월 11월조. 21) 奈良時代의 政治的인 藤原仲麻呂가 淳仁天皇에 의해 惠美押勝이란 姓名을 받았다. 그는 760년에 太政大臣이 되어 전횡을 하다가 孝謙天皇의 총애를 받은 導鏡에 의해 제거되자 764년 9월에 난 을 일으켰다 22) 李進熙, 韓國과 日本文化 (1985) pp.87 88. 23) 續日本紀 권36, 寶龜 11년 2월조. 24) 日本後紀 권22, 弘仁 3년 정월조. 25) 日本紀略 前篇 14, 弘仁 4년 3월조. 26) 靑山公亮, 앞의 책 p.10. 27) 續日本後紀 권4, 承和 2년 3월조. 28) 三代實錄 권16, 貞觀 11년 6월조.

- 161 - 叛을 일으켰다고 하였다.29) 그런데 이때 건너간 신라의 선박을 해적선이라 하고 있는데, 이들과 大宰府가 통하여 모반했다고 한 것은 무리이며, 이들 선박은 신라의 무역선이었을 것이며, 당시 일본정부에서 금하고 있는 무역거래를 大宰府가 행하여 일본정부의 명을 거 역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같다. 여하튼 이후로 일본에서는 신라인의 일본진출에 무척 긴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876년에는 松浦의 値賀島에 島司를 두고, 878년에 는 山陰 山陽地方의 要地에 수비병을 두었으며,30) 880년에는 山陰諸國에 연안감시를 엄중 히 하도록 명하고 있다.31) 그러나 신라의 일본진출은 그 뒤로도 여전히 계속되어 894년 4월과 9월에도 대마도에 나타나고 있는 기사가 보인다.32) 894년 이후 일본정부는 814년 에 폐지한 大宰府의 弩師를 부활시켰으며, 대마도에도 弩師를 두었다.33) 당시 신라의 일본진출은 대단한 것이었으며, 일본정부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의 사정으로 고심하였다. 9세기 말에 이르러 일본의 遣唐使의 폐지도 여기에 기인한다고 하겠으며, 日本政府는 西邊의 諸國에 四天王像 各 1鋪를 보내어 신라의 출입을 막아달라 고 기원하는 등 신앙에까지 의지하기에 이르렀다.34)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9세기의 한 일 양국의 관계는 신라의 일방적인 일본진출과 이에 따른 일본의 거절적 태도로 나타났다. 당시 일본에 나타난 新羅船을 일본인들은 해적선이라 부르고 있지만 사실은 신라의 商船 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일본학자들도 간접적이지만 긍정 적인 표현을 보여 주기도 하고 있다. 森克己의 논문에 보면, 긴박한 양국관계에 있어서도, 신라商人이 9세기 처음부터 일본에 모습을 나타나게 되 었다. 그것은 新羅의 地方官이나 地方豪族이 파견한 무역선이었다35) 고 하여, 일본에 나타나고 있는 배가 무역선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唐의 山東 揚州 明州 楚州 등에는 신라인의 居留地가 있고, 이를 新羅坊이라 불리웠으며, 일본의 견당사들이 돌아올 때는 新羅商船에 태워서 일본에 인도되기도 하였고, 또한 일본의 入唐僧들의 당으 로의 왕래나 당에 있는 동안 日本과의 연락에 신라의 상선을 이용할 때가 많았다.36) 그 리고 일본에 來航한 신라상인에 대하여는 비교적 융화책으로 民間의 무역이 허락되었다. 따라서 羅 日의 공적 관계는 완전히 냉각되었지만 民間무역을 통한 양국관계가 조금씩이 29) 위의 책 권16, 貞觀 12년 10월조. 30) 위의 책 권33, 元慶 2년 6월조. 31) 위의 책 권37, 元慶 4년 6월조. 32) 扶桑略記 권22, 寬平 6년 9월조. 특히 9월에는 45척이라는 많은 신라의 선박이 대마도에 출입하였다. 33) 續日本後紀 권19, 嘉祥 2년 2월 조. 34) 三代實錄 권14, 貞觀 9년 5월조. 35) 森克己, 日麗交涉と刀伊賊の來寇 ( 朝鮮學報 37 38) p.99. 36) 위와 같음.

- 162 - 國史館論叢 第29輯 나마 계속되었다.37) 이와 같은 기사들을 통하여 보더라도 이 시기에 일본에 나타난 신라 선박들은 新羅의 貿易船이 틀림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9세기는 신라의 장보고 가 東亞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신라의 海上勢力이 크게 떨치던 때이며 이와 같은 힘을 바 탕으로 9세기 100여 년간의 양국관계는 신라우위의 일방적인 진출의 시기였던 것이다. 2. 後百濟 甄萱의 對日通使 신라가 무너지고 고려가 건국되어지는 시기 전후의 한 일관계상 중요한 사건의 하나는 後百濟王 견훤의 使者가 日本에 갔던 일이다. 여기에 대한 기사가 삼국사기 에는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아 일본측의 사료에 의해서 고찰해 볼 수밖에 없는 한계성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양국사정을 고려해 볼 때 유추는 가능하다고 생각되어 진다. 이미 알려진 대로 견훤은 신라말의 혼란한 틈을 이용, 스스로의 힘을 축적하여 백제의 故土를 회복하고 의자왕의 원한을 갚겠다고 표방하고 자칭 後百濟王이라 칭하며 完山에 도 읍하고 設官分職하였다. 당시 견훤으로서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 하였다. 하 나는 내적인 문제로 민심을 얻기 위한 것인데, 이는 그가 일어난 지역의 역사적 연고를 이용하여 전술한 대로 후백제왕이라 칭한 것을 둘 수 있다. 또 하나는 외적인 문제로 인 접국으로부터의 승인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吳越에 使者를 파견하고,38) 이어서 일본에도 使者를 파견하였던 것이다. 견훤이 일본에 사자를 파견한 것은 전시대인 삼국시대부터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가 비교적 잘 이루어져 왔으며, 후백제가 백제를 이었 다는 역사성을 내세워, 당시 어수선한 후삼국의 상황에서 국내외적으로 정통성과 정당성 을 부여받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견훤의 후백제 使者는 두차례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였다. 첫번째의 사자는 922년에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견훤의 사 자는 輝嵒이란 자로서39) 牒狀과 聘物을 가지고 대마도에 도착했다고 하였다.40) 견훤의 사자의 도착은 바로 島司에 의하여 大宰府를 거쳐 京都에 보고되었다. 京都에서는 여러 가지 논의를 거쳐 그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하고 菅原淳茂로 하여금 返牒을 작성토록 하였다.41) 그런데 당시 일본에서 견훤의 사절을 新羅人到來 42)라 하고 그 返牒도 주 41) 37) 위와 같음. 38) 三國史記 권50, 甄萱傳. 39) 扶桑略記 延長 7년 5월조. 40) 扶桑略記 延喜 22년 6월조.

에서처럼 신라에 답하였다. 이에 대하여 中村榮孝는, - 163 - 오랫동안 신라의 통치가 계속되고, 그 땅의 사정에 어두웠던 시대였지만 이보다 앞서 견원이 吳越의 책봉을 받아 新羅西南都統 指揮兵馬制置 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 行全州 刺史兼御史中丞 檢太保 後百濟王 43)이라고 칭하였으므로 신라의 지방관에 의한 遣使로 받 은 것에 틀림없다 고 하였다.44) 또한 返牒의 글 가운데 都統甄公 이라 하는 것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하였다.45) 그러나 吳越의 책봉 文案에도 분명히 後百濟王 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그 이 전에 신라의 지방관리가 독자적으로 他國에, 특히 일본에 使節을 파견한 예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견훤의 사자를 신라의 사절로 보았다는 것은 무리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 당시 일본에서 한반도의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하더라도, 견훤의 사자를 통하여 한반도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며, 後百濟王이란 칭호에 대하여도 알아 보았을 것이고, 使臣자체도 그 자신이 새로 건국한 後百濟의 사절임을 밝혔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견훤의 사자를 신라의 사절로 보아서 거절하기 보다는 당시의 일본국내사정에 의하여 거절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일본은 遣唐使도 폐지되고, 遠來의 客이 있어도 所惠土宜 有憚容納 旣恐交於境外 何留物於掌中 然而遠志難拒 忍而依領 46)이라 하여, 통교의 거부에 다다르는 道程이었으며, 쇄국의 情態였던 것이다.47) 두번째의 사신파견은 929년에 행하여졌다. 이때 張彥澄 등 20인이 大宰府와 對馬島守 經國에게 보내는 書狀과 信物을 가지고 갔다. 이때는 특히 그해 정월에 대마도에 표류한 표류민을 일본측에서 돌려보내준 데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아울러 1차 때와 마찬가 지로 국교를 희망하였던 것이다.48) 그러나 일본에서는 역시 견훤을 신라인으로 보고 그 의 사자를 거절하였다고 하였다.49) 그러나 견훤이 2차의 사신을 파견하기 전에 표류민을 호송하고 왔던 일본사신 가운데 하나가 먼저 일본에 도착하여 당시 견훤을 만났던 사정 을 보고하는 가운데 全州王甄萱 撃并十州 稱大王 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일본내에 서는 이미 한반도의 사정과 견훤의 입지를 알 수 있었을 텐데, 1차 때와 같은 이유로 거 41) 本朝文粹 권12, 牒 答新羅返牒. 42) 扶桑略記 延喜 22년 6월조. 43) 三國史記 권50, 甄萱傳. 44) 中村榮孝, 日鮮關係史の硏究 上(1965) p.131. 45) 위와 같음. 46) 本朝文粹 권7, 書 爲淸愼公報吳越王書. 47) 中村榮孝, 앞의 책 p.128. 48) 위의 책 pp.132 133. 49) 위와 같음.

- 164 - 國史館論叢 第29輯 절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그때까지 계속된 일본국내의 사정때문 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Ⅲ. 使節의 來往과 漂流民의 送還 1. 使節의 來往 高麗 太祖가 일본에 사신을 보낸 기록은 견훤과 마찬가지로 우리측의 기록은 전혀 보이 지 않고, 일본측의 기록만 간단하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의 東亞의 정세로 보아서 가 능한 일이라고 본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에게 중요한 일은 국내정세의 안정이었으며, 이 를 위한 방편의 하나는 인접국과의 외교관계를 통한 평화유지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접국과의 관계도 대상국에 따라 약간은 달리하고 있었다. 중국에 대해서는 건국 처음부터 문화수입이라는 측면에서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었다. 그래서 人的교류도 비교적 활발하였다. 건국 다음해인 919년에는 中國五代의 한 국가인 吳越의 文士 曾彥規가 來投 하였으며,50) 923년에는 역시 같은 吳越의 文士인 朴巖이 來投하였다.51) 927년에는 吳越의 使臣 班尚書가 國書를 고려에 가지고 와서 드디어 양국의 국교가 정식으로 맺어지게 되었 다.52) 이처럼 중국에 대해서는 건국초부터 선진문물의 수입과 무역이라는 점이 강조되었 지만 日本에 대해서는 정치적 문제에 더 관심을 두었다. 다시 말하면 새로 건국한 고려왕 조의 국내 불안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이 없어야 되므로 불가피 한 외교관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아래 고려는 신라를 통합해 명실공히 후삼국을 통일한 후 그 이듬해인 937년에야 일본에 첫사신을 파견하였다.53) 이때의 기록으로는, 左 右大臣以下着左仗 開見高麗國牒等 이라는 간단한 기사만이 남아 있다. 이 기사만을 가지고는 사신의 목적 등은 알 수 없고 다만, 당시 일본 좌 우 대신 이하 모두를 모이도록 하여 高麗의 牒狀을 열어보고 심의한 것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후대의 기록인 1080년(高麗 文宗 34, 日本承曆 4)의 기사를 미루어 추측해 본다면 당시 牒狀의 내용은 修好를 希望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54) 50) 高麗史 권1, 太祖 2년 9월조. 51) 위의 책 太祖 6년 6월조. 52) 위의 책 太祖 10년 12월조. 53) 日本紀略 承平 7년 8월조. 54) 帥記 承曆 4년 閏 8월조.

- 165 - 이러한 고려의 요청에 일본정부는 신중히 검토하여 修好요청을 거절하기로 하고 939년 2 월에 攝政太政大臣 藤原忠平은 고려에서 온 첩장을 大江朝綱에게 주어서 고려에 보낼 返 牒을 작성토록 하였다.55) 그리하여 이때 작성된 返牒은 다음달인 3월에 大宰府로부터 고 려에서 온 사신을 통하여 고려의 廣評省에 보내어 졌다.56) 그런데 당시 外國의 國書에 대한 日本政府의 태도에 대하여 森克己는 세 가지로 말하 고 있는데, 첫째는 외국의 國書가 왔을 때 아예 묵살하고 전혀 회답을 않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중앙정부에서 회답을 하는 경우이며, 세번째는 중앙정부에서 大宰府에 명하여 간 접적으로 回答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57) 그리고 당시에 고려에 보낸 返牒은 세번째 경우에 해당하여 文章의 작성은 大宰府에서 고려의 廣評省앞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위의 경우는 중앙정부에서 문장작성을 하였다 고 하였다.58)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 이 返牒이 1년 8개월이나 걸린 후에 작성된 점이라든가, 또한 返牒의 작성을 忠平이 大江朝綱에게 의뢰한 점, 그리고 중앙정 부가회 답을 취하지 않고 大宰府로 하여금 回答토록 한 것 등이다. 이에 대하여 返牒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당시 日本朝廷의 廟議가 대체적으로 슬로우모션(Slow motion)이 고, 또한 遣唐使 폐지 이후 외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返牒의 작성 을 朝綱에게 의뢰한 것은 그가 大江善人의 孫으로 父祖의 업을 이어받아 박학하고 名文 章家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大宰府가 회답한 까닭은 일본정부가 완곡히 거부하 는 표시였다고 하였다.59)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일본은 平安朝의 國風文化에 취해 있어 서 외국의 요구에 냉담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하였다.60) 그러나 이러한 이유보다는 前章에 서 기술한 바, 9세기 전반에 걸쳐 신라로부터 무역압력 등으로 시달려 온 일본으로서는 신라를 병합하고 건국한 고려, 특히 해상세력을 쥐고 있는 왕건의 요구에 상당히 고심했 기 때문에 매사에 신중을 기하고 名文章家까지 찾아 回答書를 쓰기도 하였다고 본다. 두번째의 太祖의 國書는 일본정부의 返牒이 고려에 도착한 이듬해인 940년에 보내어 졌다. 이 국서는 그해 6월에 大宰府로부터 中央政府에 보고되었다. 일본정부는 이 국서를 大江朝綱과 維時 등의 학자에게 보내어 살펴보도록 하였다. 그 내용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전후사정이나, 大江 등에게 보낸 것으로 미루어 전과 같이 수호를 요구한 것이었 을 것이며 일본정부는 이것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55) 貞信公記抄 天慶 2년 2월조. 56) 日本紀略 後篇 권2, 天慶 2년 3월조에 大宰府牒高麗廣評省 却歸使人 이라고 하였다. 57) 森克己, 日麗交涉と刀伊賊の來寇 p.100. 58) 森克己, 위의 논문 p.101. 59) 위와 같음. 60) 井上秀雄 上田正昭 編, 日本と朝鮮の二千年 1(1970) p.145.

- 166 - 國史館論叢 第29輯 940년 이후 30여 년간 양국의 公的通交에 관해서는 어느 쪽에서도 보이지 않다가 광종 23년(972)에 하나의 기사가 나타나게 된다. 즉 이때에 고려의 南京府使가 對馬島에 도착 했는데, 大宰府에서 중앙정부에 보고했다는 것이다.61) 또한 光宗 25년(974)에는 日本 藏 人所의 出納인 國雅가 交易使로 고려로부터 交易貨物을 가지고 日本中央에 歸任한 사실 이 보인다.62) 그 뒤로는 상당히 오랫동안 양국관계의 기사는 보이지 않다가 文宗代에 이 르러 활발히 전개되어짐을 볼 수 있다. 양국의 交易使에 관한 것은 뒤에 상세히 밝힐 것 이며 주목되는 것만 살펴보면, 우선 문종 10년(1056)에 日本의 藤原朝臣賴忠 등 30인이 國使로서는 처음으로 金州(金海)에 건너 온 일이 있다.63) 직접적인 사절파견과는 조금 다르지만 日本商賈 王則貞을 통하여 文宗의 病患(風痺症) 을 치료코자 의사를 초청한 간접적인 使行代行方法도 있었다. 문종 34년(1080)에 고려 禮 賓省에서 문종의 風疾을 치료하기 위하여 倭商 王則貞에게 牒을 주어 일본에 의사파견을 의뢰한 일이 있었다.64) 문종의 병세에 대하여는 이보다 2년 전인 문종 32년(1078)에 宋使 安燾를 通하여 宋帝(神 宗)에게 醫官과 藥材를 請하매,65) 이듬해에 송으로부터 醫官과 百種의 藥材를 보내 온 일이 있었다.66) 그러나 큰 효험을 보지 못하였던지 다시 일본에 의사를 요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의 의뢰를 받은 일본정부는 의사의 파견 여부를 廟議에 붙여 검토하였는데 보내자 는 의견과 보내지 말자는 의견이 대립되었다. 權中納言源經信은 고려가 지금으로서는 일 본을 침략할 의사가 보이지 않으므로 의사를 파견하자고 주장하여 한 때는 丹波忠康이나 同後通 두 의사 가운데 한 명을 보내기로 결정되었다.67) 그러나 參議源俊實은 보내는 것 은 좋지만 치료의 효과가 없다면 일본에 욕되는 일이니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반대 의견을 내세우니 參議源俊明도 지지하여 보내지 않기로 하였다. 다만 보내지 않으려면 적 당한 구실이 필요했고 그 답은 의사가 너무 늙어서 곤란하다는 것을 고려에 보내는 返牒 에 기재하기로 하였다.68) 여기에서 잠깐 살펴 볼 것은 文宗代에 日本政府가 고려의 요구에 매우 신중하고 어려워 하고 있는 것을 살필 수가 있다. 무엇때문에 의사를 보낼 수 없는 구실까지 만들어 牒狀 에 써넣는 상황까지 이르렀을까. 이 점을 알아보기 위하여는 광종 25년(974) 일본의 교역 사가 고려를 다녀간 이후부터를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측의 기록에 보면 61) 日本紀略 後篇 6, 天祿 3년 9월조. 62) 日本紀略 後篇 6, 天延 2년 閏 10월조. 63) 高麗史 권7, 文宗 10년 10월조. 64) 朝野群載 권20, 異國조. 65) 高麗史 권9, 文宗 32년 7월조. 66) 위의 책 文宗 33년 7월조. 67) 水左記 承曆 4년 閏 8월조. 68) 위와 같음.

- 167-997년(高麗成宗 16, 日本 長德 3)에 고려인이 九州를 침략하게 되어 일본측의 고려에 대한 태도는 더욱 硬化 되었다고 하였다.69) 그런데 같은 해 6월에 고려는 大宰府의 일본인을 시켜서 3통의 牒狀을 전달하였다. 즉 日本國宛 對馬島司宛 對馬島宛이 그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일본정부는 이 牒狀의 文言이 전과는 다른 대단히 非禮이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이때 보낸 첩장의 내용은 일본이 고려와 수호관계를 맺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때 고려의 첩장을 접한 일본정부는 大宰府에서 신청한 4개 조항을 서둘러 지시하였던 것이다. 즉, 九州各國司로 하여금 武器 武具를 수리 보수하고, 大宰府管 內諸神의 位一階昇級, 香椎廟에 封戶二十五戶增進, 對馬守高橋仲堪은 文武智略이 부족하므 로 大宰大監平中方으로 교대시켜 섬을 경비토록 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토록 하였다. 또 한 北陸 山陰에 太政官符를 보내어 방비를 엄하게 하였다.70) 당시에 일본의 고려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사실은 그해 가을에 일어난 奄美島人의 大宰管內諸國亂入사건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그해 10월 1일 朝廷의 南殿에서 天皇이 참석하고 左右內大臣이하 의 朝臣이 참석하여 의식이 끝나고, 연회가 시작될 때 左近陣官이 큰 소리를 지르며 高麗 國人이 對馬 壹岐를 침략하여 肥前國에 도착하여, 여기도 침략할려고 한다고 하였다. 이때 上下가 모두 놀래고 三大臣도 정신없이 先例도 잊은 채 동쪽계단에서 내려왔다71)고 하였 다. 이말은 일종의 고려가 일본을 침략하려고 한다는 유언비어였던 것이다. 고려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으면 유언비어를 확인도 해보지 않고 모두가 정신을 잃을 정도였는 가 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고려의 요구에는 응하기보다, 거절적인 방법을 택하고, 수 비에 급급하므로 얼마가지 않아서 무력으로서 시위를 했고, 그들은 그 사실을 고려인이 九州를 침략했다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그 무렵의 고려의 군사력은 매우 막강하였 으니 1019년(高麗 顯宗 10, 日本 寬仁 3)에는 고려 兵船 1000여 척이 고려연안에 숨어있는 여진적을 격멸하기도 하였던 것이다.72) 이와 같이 고려의 국력이 일본에 알려지게 되자 일본인 가운데서는 항시 불안한 생활보다 고려에 親附하려는 자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穆 宗 2년(999)에 道要彌刀 등 20戶가 來投하니 利川郡에 살도록 編戶하기도 하였으며,73) 앞 에 언급한 王則貞의 姓名도 高麗에 親附하려는 마음에서 고친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王을 姓으로 한 것은 고려의 國姓을 따른 것으로 본다는 金庠基의 견해에 수긍이 간다.74) 고려에 대하여 두려움과 불신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은 후술하게 될 현종 10년의 포로송 환 이후, 그 두려움을 풀기 시작하여 문종대에 이르러는 비교적 활발한 사절의 입국이 계 69) 百練抄 長德 3년 10월조. 70) 森克己, 日麗交涉と刀伊賊の來寇 p.102. 71) 森克己, 위의 논문 p.103. 72) 森克己, 위의 논문 p.106 및 小右記 寬仁 3년 8월조 참조. 73) 高麗史 권3, 穆宗 2년 10월조. 74) 金庠基, 東方史論叢 (1974) p.457.

- 168 - 國史館論叢 第29輯 속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使節의 入國도 대개 사절이라고 하지만 商人活動으로 나타나는 交易使的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 기록에 보이는 日本使節의 칭호를 階層 別로 간추려 보면 日本國使, 幕府將軍使節, 九州探題使, 大內使節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한편 高麗史 에 보이는 일본측 遣使者의 名儀를 살펴보면 예종때 日本國進柑子, 高宗 때 日本國獻文物 등 日本國이란 명칭이 보인다. 또한 곳곳에 地方政權에 관한 기사 로 壹岐島勾當官, 對馬島勾當官이 보이며 그 외에 地方豪族이 보낸 商人使節도 많이 보이 고 있다. 여하튼 일본은 고려가 침략하지 않으리라는 두려움을 씻은 뒤로(新羅下代에서부터 高 麗 初 이후)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使節파견에 임하였으며, 특히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가 장 근접해 있고, 古來로 우리나라를 통하여 식량문제를 해결하였던 만큼, 항상 사절을 보 내어 進貢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금 후대의 기사지만 高宗 14년 5월 14일 全羅州道擦使 가 日本大宰府에 보낸 牒狀에 彼國對馬 (山+馬)人 古來 貢進邦物 歲修和好 75)라는 기 사가 보인다. 2. 漂流民의 送還 고려시대의 대일관계는 정치적으로 볼 때 전후시대에 비하여 매우 疎遠하여 進奉貿易 정도가 창구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進奉貿易 정도라도 가능하게 했던 것 은 漂流民의 送還과 앞에서 기술한 使節의 來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표류민의 송환에 관한 기사로 10세기 이후 처음 보이는 것은 929년의 일이다. 일본측 의 기록을 보면 신라인이 耽羅國(濟州島)에 海藻를 交易하다 표류하여 929년 정월 13일 에 대마도의 下縣郡에 漂着하였는데, 이때 島守坂上經國은 표류민을 보호하고 식량을 주 어서 擬通事長岑望通과 檢非違使秦滋景을 파견하여 書狀을 가지고 金州(金海)에 보냈다는 것이다.76) 물론 이때 이 지역 관할은 견훤에게 있어서 使者들은 견훤에게 보내어졌다. 표류민의 송환으로 기록상 가장 많은 수이며 고려시대로서는 처음 보이는 것은 顯宗 10년(1019)에 高麗의 鎭溟船兵都部署 張渭男 등이 海賊(女眞) 八艘를 잡아 취조한 결과 해적선 중에서 일본인 남녀 259명의 生捕가 있음을 알고, 고려정부에서 供驛令 鄭子良을 시키어 그들을 본토에 송환한 일이다.77)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하여 일본측의 사료에는 조 금 자세히 나와 있다. 즉 1019년 4월에 여진적이 對馬 壹岐와 博多까지 육박하였는데 퇴 각할 때 많은 포로를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이 여진적은 고려를 습격한 후 일본에 왔던 75) 靑山公亮, 앞의 책 p.27. 76) 中村榮孝, 앞의 책 p.136. 77) 高麗史 권4, 顯宗 10년 4월조.

- 169 - 것으로 고려에서는 이들의 귀로를 기다려 1000여 척의 병선으로 격멸시켜, 이들이 다섯군 데로 나누어 수용한 일본인 포로 중 3개소의 300여 인을 탈회하여 먼저 송환하고 나머지 포로도 모두 모아 송환키로 하고, 6월에 정자량으로 하여금 259명을 송환케 했다는 것이 다.78) 여기에서는 高麗海軍이 여진적을 격멸하는 포로를 탈취한 때를 5월이라 하였고, 다 음달인 6월에 정자량이 송환해 왔다고 했는데 高麗史 의 기록은 4월에 이미 이 포로 들을 일본에 압송토록 했다고 했으니,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책에는 그 다음해에 포로를 송환시켰다고 했으니, 이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79) 여하튼 이때의 포로송환에 대하여 일본정부는 매우 고마워하여 鄭子良에게 祿과 일본의 位階를 수여할 것 등의 우 대법이 논의되기도 하고80) 실제로 귀국시에 감사의 返牒과 더불어 祿物을 주었다.81) 이 때 받은 祿物은 大貳金 300兩이었다고 하였다.82) 이 현종 10년의 포로송환 이후로 양국관계는 상당히 가까워진 것이 사실이다. 현종 20년(1029)에는 耽羅民 貞一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83) 이에 대하여 森克己 는 일본의 大宰府에서 표류민을 송환한 것으로 보았는데84) 高麗史 에 살펴보면 탈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貞一 등 21인이 항해 중에 바람에 밀리어 極遠島에 표착하여 7개월동안 억류를 당하다가 貞一 등 7인만이 몰래 小船을 타고 那沙府(長崎)를 거쳐 生 還하였다고 하였다.85) 德宗 3년(1034)에는 對馬島主가 일본 大隅지방에 표류한 고려인을 송환하였다.86) 靖宗 2년(1036) 7월에도 일본에서 우리의 표류인 謙俊 등 11인을 돌려보냈다.87) 文宗 3년(1049) 11월에는 日本 對馬島官이 首領 明任 등을 보내어 우리의 飄風人 金孝 등 20인을 金州(金 海)에 보내왔다고 東南海船兵都部署司가 奏하니 明任 등에게 예물을 차등있게 주었다.88) 표류인의 송환과는 조금 다르지만 당시에 일본과의 관계가 상당히 개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기사로는 문종 5년(1051) 7월에 일본 대마도에서 使人을 보내어 被罪逃人 良 漢 등 3인을 押還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89) 문종 14년(1060) 7월에는 東南海船兵都部署 가 奏하기를 대마도에서 우리의 飄風人 禮成江 백성 位孝男을 보내왔다고 하니, 그 使者 78) 小右記 寬仁 3년 8월 조 및 森克己, 日麗交涉と刀伊賊の來寇 p.105 참조. 79) 井上秀雄 上田正昭 編, 앞의 책 p.150. 80) 小右記 寬仁 3년 8월조. 81) 左經記 寬仁 4년 4월조. 82) 주 79)와 같음. 83) 高麗史 권5, 현종 20년 7월조. 84) 주 78)과 같음. 85) 주 83)과 같음. 86) 日本紀略 後篇14, 長元 7년 3월조. 87) 高麗史 권6, 靖宗 2년 7월조. 88) 高麗史 권7, 文宗 3년 11월조. 89) 위의 책 文宗 5년 7월조.

- 170 - 國史館論叢 第29輯 에게 예물을 후하게 주었다.90) 문종 32년(1078) 9월에는 일본에서 耽羅의 飄風民 高礪 등 18인을 송환하였다.91) 또한 문종 33년(1079) 9월에는 일본에서 우리 나라의 飄商風人 安 등 44인을 돌려 보내왔다.92) 이상의 표류민 송환을 통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첫째로 표류민 송환이 대체로 7월에서 9월사이에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 특히 태풍이 많았던 계절 때문에, 그 시기에 표류민 송환이 집중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는 高麗海商의 활동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에서의 고려상인 활동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데, 이상의 기록을 미루어 고려 상인의 활동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 다. 지금까지 일반적인 통설은 고려는 전시기를 통하여 일본에 대하여 수동적으로 제한적 이고 거절적인 태도만을 견지해 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문종 이전까지는 고려가 적극적 으로 일본에 진출을 시도했으며, 일본이 당시로서는 정치적 불안정, 경제 문화적 후진으 로 그리고 군사적 두려움 때문에 고려에 대하여 문호개방과 修好에 거절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Ⅳ. 麗 日 兩國의 通商關係 1. 高麗 以前의 韓 日貿易一般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무역은 기록에 의한다면 三韓時代부터라고 볼 수 있다. 三國 志 魏志 東夷傳에는 弁辰에서 鐵이 생산되어 韓人(辰 馬)과 東濊人 倭人 등에게까지 공 급하였으며 철은 마치 중국에서 鑄貨를 사용하듯이 거래시에 교환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93) 이러한 사실은 日本史書인 古事記 에 이른바 韓鋤劒 韓锻名 의 이 름에서도 살필 수 있으며, 또한 續日本紀 의 養老 6년(722) 3월 10일 조에 보이는 韓 鍛治 를 비롯하여 日本書紀 의 神代紀에 韓鄕之島 是有金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三國時代에 접어들면 삼국은 모두 대륙과의 관계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과의 큰 접촉이 없었다. 또한 이 시기의 대일관계는 경제적인 것보다 文化傳播的인 요소가 컸었다. 新羅統一期에는 국교단절이 상당기간 있었지만 私贸易관계는 꾸준히 계속되었다. 일본 90) 高麗史 권8, 文宗 14년 7월. 91) 高麗史 권9, 文宗 32년 9월조. 92) 高麗史 권9, 文宗 33년 9월조. 93) 魏書 東夷傳에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 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이라는 기사가 보인다.

- 171 - 의 對馬島 壹岐島 平戶島 長門(下關) 博多의 交關地(무역소)에는 이 국교단절기간에도 신 라상인의 私貿易에 대비하였고, 그들의 天皇大宰府(九州)에서는 入關된 신라물품을 교환 하기 위하여 新羅商人이 즐기는 綿(繭綿) 7만여 톤을 보내어 분배된 것을 볼 수 있는 데,94) 이는 당시 신라와 일본 간의 무역의 왕성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신라 哀莊王 4년(803) 이후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되고 난 뒤 비교적 활발한 公 私의 교역 관 계가 있었다. 이때의 양국 무역이 왕성했음을 알 수 있는 사실의 하나로는 대마도에 新羅譯語를 增 置하여 통역사들을 양성한 데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95) 842년에는 일본이 신라인의 입국을 막아, 국교가 두절되니 이때부터는 다시 사무역의 형태로 양국관계가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私的貿易이 가능하고 또 활발했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은 張保皐 의 활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장보고의 대일무역의 첫 시도는 文聖王 2년(840)이었는데, 당시 일본측 기사를 보면, 太宰府言 藩外新羅臣張保皐 遣使獻方物 卽從鎭西 追却焉 爲人臣無境外之交也96) 라 하였다. 즉 人臣無外交 라는 당시의 관례에 따라 九州의 大宰府(당시는 日本政府를 代 表한 外交機關)가 먼저 거부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표면적인 외교문제에 관 하여는 관례에 어그러진 것이라 하여 시종 거부하였지만, 장보고의 사절이 가지고 간 馬 鞍 등 무역품에 관하여는 민간인들과의 자유로운 교역을 하였으며, 특히 공정가격을 지켜 서 일본인들이 家產을 탕진하지 못하도록 경계한 것을 보면97) 당시의 물품이 많았고, 수 출액도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뒤 청해진의 세력상승과 해상권장악 등으로 장보고의 무역사절은 사실상 개인적 성 격을 떠나 일종의 公的性格으로 바뀌게 되었으니, 이같은 것은 일본에 파견한 사절을 回 易使 라고 칭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98) 新羅統一期의 對日貿易品을 살펴보면 대체로 民衆의 생필품은 별로 없고, 귀족의 사치 품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일본에 8세기 경부터 나타난 莊園制가 상당히 발 달되었고, 이에 따라 귀족들이 사치에 빠져 舶來品에 대한 욕구가 고조되었기 때문이라고 도 볼 수 있을 것이다.99) 그리고 특이한 것은 신라통일기의 수출품 가운데는 東南亞 열 94) 續日本紀 권29, 神護景雲 2년 10월조 95) 日本後紀 권22, 弘仁 3년 정월 3월, 弘仁 5년 10월, 弘仁 6년 정월조. 96) 續日本後紀 권9, 承和 7년 2월조. 97) 續日本後紀 권10, 承和 8년 2월조. 98) 續日本後紀 권11, 承和 9년 정월조. 99) 中村榮孝, 앞의 책 p.17.

- 172 - 國史館論叢 第29輯 대지방에서 산출되는 香料와 染料가 포함되었는데, 이것은 중국의 중계로 수입된 것으로 보여진다100) 신라말기에 가면 동아시아의 무역권이 형성되어 중국과 신라의 해상활동은 활발하여 지는 데 반해 일본정부는 매우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일본이 한 중 양국에 비 해 뒤떨어진 조선술, 문화 등의 열등감과 일본 국내사정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2. 高麗 貿易의 性格 고려의 대외관계 가운데 무역에 관해서는 대상국가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했다. 예컨 대 對宋貿易에는 적극책을 폈으며, 아라비아 상인들까지도 내왕하여 무역할 정도로 활발 하였지만, 근접국가인 日本에 대해서 정치적 관계는 적극적이었지만, 무역에 관해서는 소 극적이고 수동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이유는 삼국이래로 왜구의 침입, 약탈 등으로 우리에게 귀찮은 존재로 느껴졌으며 일본의 문화수준이 우리보다 얕다고 보는 데 서 경제적으로 상대하는 것을 꺼린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제 麗初의 주변국가에 대한 고려의 대외정책, 특히 무역정책을 살펴봄으로써 당시의 對日貿易性格을 규명하고자 한다. 무역정책이란 것은 국가의 對外經濟 交通을 規律하는 모든 정책을 말하는데, 이때 정책은 현실속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의 의미, 성격을 통찰하며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이고 어떻게 대처했었는가를 알아보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麗初의 대외관계(무역관계도 마찬가지)를 살피는 데는 우선 중국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적인 문화 특히 그 政治文化(예컨대, 政治制度와 科擧制 등)가 한반 도에 있어서 문화의 根底가 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왕조 초기 이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 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의 對宋관계도 정치적인 관계보다는 경제적 문화적 관계가 더욱 뚜렷했다고 볼 수 있다.101) 그렇다면 당시 고려 무역의 성격은 역시 선진문물에 깊은 관 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麗 宋관계는 경제 문화적 요소가 늘 함께 변수로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일본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었던 것도, 고려가 일본에 대하여 소극책을 유지했던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려가 중국과 처음 접촉한 것은 太祖 6년(923)의 일로서, 이때 고려의 사신은 後梁에 서 五百羅漢像을 가져온 일이 있다.102) 100) 韓國貿易協會 編, 韓國貿易史 (1972) p.24. 101) 全海宗, 高麗와 宋과의 關係 ( 第6回 東洋學學術會議 講演鈔 高麗期, 檀國大附設 東洋 學硏究所, 1976) p.30. 102) 高麗史 권1, 太祖 6년 6월조.

- 173 - 그리고 宋이 건국한 2년 후인 962년에 고려 光宗이 李興祐를 사신으로 보낸 뒤부터 중 국과 朝貢形式의 교역과 문물의 교환이 계속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고려의 대외접촉이 정치적 관계보다, 경제 문화적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 高麗 商人의 활동과 대일무역에 있어서의 소극책, 그리고 일본의 태도 등에 대하 여 살펴보고자 한다. 高麗商人의 대외무역은 陸 海 양면으로 병행되었다. 서북으로는 遼 金과 互市를 행하 고, 서남해로로는 宋나라에, 동남해로로는 日本에 통하였다.103) 고려의 무역활동은 太祖 때부터 행하였다는 것은 잠시 앞에서도 언급했거니와, 역시 太祖 8년 7월에 고려의 상선 이 後唐 登州(山東)에서 市易을 행한 것과 동년 10월에 고려의 使船이 後唐에 건너가 靑 州(山東)에서 무역을 행한 것도 살펴 볼 수가 있다.104) 그리고 宋代에도 고려의 海船이 자주 明州 登州에 표착하였다는 기사를 볼 수도 있다.105) 당시에 고려 무역정책이 대륙방 면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은 이 외에도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려의 禮成 港은 당시 首都 開京의 관문이고, 大陸船路의 기점으로서 使節 商賈의 출입이 빈번하였던 것은 禮成江曲의 가곡까지 생긴 것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106) 한 가지 고려 무역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고려전기의 대외무역은 주로 公貿易(朝貢) 형태로 이루어 졌다는 점이다. 新羅末期의 대단히 활약했던 해상세력의 무역활동은 고려 시대로 넘어와서는 매우 미약해졌다. 문헌에 보이는 것도 神宗 2년(1199)의 고려 일본의 상인이 銅錢을 아무데서나 함부로 교환하는 일을 금하는 사료가 하나 보이는 정도다.107)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당시의 고려와 宋의 국내사정 그리고 고려 의 실리외교가 더욱 적극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고려는 신라말의 地方分權的 인 상황에서 그들을 연합하여 건국하고 난 뒤,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펴기 위하여 는 그 전시대처럼 지방호족들의 독자성의 인정이라든가, 또는 독자적인 무역으로 해외에 선박을 보내는 일을 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 귀족들은 자기들의 욕구충 족을 위하여는 개인에게 富의 勢力을 키워주는 私贸易보다는 朝貢貿易을 통하여 욕구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고려에서 宋에 건너간 사절의 수와 회수가 많아서, 宋 은 고려사절이 지나가는 沿道 州縣의 官民들이 피로에 곤란을 느끼며 국고의 부담이 과 중될 뿐만 아니라, 北敵에의 군사상의 기밀누설까지도 문제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北宋의 정책은 고려와 결합하여 契丹, 遼를 挟撃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高麗使 節의 入朝를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宋에 대한 고려의 사절파견은 대단히 적극적이 103) 續文獻通考 권25, 市糴考 市舶互市조. 104) 册府元龜 권999, 互市조. 105) 宋史 高麗傳에 明州登州屢言 高麗海船 有風漂至境上者 詔令存問 給度海糧 遣還仍爲著例 라 하였다. 106) 高麗史 권71, 樂志 2 참조. 107) 宋史 권37, 寧宗慶元 5년 7월조.

- 174 - 國史館論叢 第29輯 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朝貢貿易을 통하여 새로운 문물과 귀족들의 필요한 물건 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宋의 입장을 생각하여 고려는 실리외교 를 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宋 商人의 私獻貿易을 통하여 고려 귀족들이 필요한 書物 新註華嚴註板 香藥 花木 孔雀 水銀 大蘇木 등을 수입할 수 있었다. 결국 고려의 상인이 宋에 渡航하여 무역할 수 있는 여건과 기회를 고려정부 스스로 막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고려전기의 중앙집권확립이라는 정책과 무관하지는 않 으리라고 본다. 그러면 일본과의 무역은 왜 소극적이었을까 하는 문제는 자명해진다. 즉 앞에서 언급한 대로 고려의 대외정책은 文物수입에 중점을 두었고, 이의 충족은 宋으로부터의 조공무역, 사헌무역으로 충당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과는 조공관계가 성립될 수도 없거니와, 文物의 수입이라는 관점에서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데에 기인한다 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래 고대 우리나라의 외국문화의 需要는 주로 王廷을 중심으로 한 귀족사회에 있던 것이거니와, 고려에서의 이런 충족은 대개 앞서 언급한 朝貢實利貿易 과 宋商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런 까닭으로 고려는 중국에 대하여 문호를 개방한 상태 였고, 이에 따라 宋商의 적극적인 활동은 고려 상인의 활동을 소극적으로 만든 하나의 요 인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외국에 대한 貿易門戶 개방이 경제적 관계 뿐 아 니라 문화적 관계에서도 당연히 고찰되어야 된다고 본다. 이 점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면 太祖때부터 女眞과도 교역을 행하면서도 對女眞交易은 일찍부터 일정한 통제를 가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文宗代의 기사를 보면, 문종 35년 2월에 西女眞의 추장 遮亶 등 이 와서 방물을 바치므로 그들에게 衣帶와 綵帛을 차등있게 내려주고 制하기를, 무릇 東西 酋長들이 와서 謁見하고자 하거든 兵馬使가 申報하여 指示를 받은 뒤에 赴 闕을 허락하도록 할 것을 永制로 하라 고 하였다.108) 위의 기사에서 보면 入貢에 대하여 미리 허락을 얻도록 하고 있는데, 이러 한 기사를 통해서 볼 때도 고려의 태도는 소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고, 고려가 통제를 가 할 정도로 많은 여진의 入貢은 곧 그들의 고려에 대한 문화적 경제적 욕구가 컸던 것을 의미하며, 이런 예는 대일관계에서도 똑같은 현상이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고려의 대외 무역의 성격이 문물의 수입에 주목적이 있었다는 기사를 高麗史 에서 찾아보면 文宗 12년 8월조에, 王이 耽羅와 영암에서 재목을 베어 큰 배를 만들어 장차 宋나라와 交通하고자 하매 內 108) 高麗史 권9, 文宗 35년 2월조.

- 175 史門下省에서 아뢰어 국가가 北朝(거란)와 和好의 관계를 맺어 변방에는 위급한 일이 없 고 백성은 그 生을 즐기니 이는 나라를 안보함에 있어 上策이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文物禮樂이 흥행한 지 이미 오래며 장사배가 끊임없이 출입하여 珍寶가 날로 들어오니 실로 중국에 자뢰할 것이 없습니다. 만일 거란과 끊지 아니하려면 宋나라와 사신을 통하 는 것이 마땅치 못한 일입니다 하니 이를 좇았다109) 라는 기사에서 보이는 바 문종시대에 이르러서는 고려의 문물이 크게 갖추어 지고 상선 이 날로 출입하므로 문물을 수입하려는 목적 아래서 행하던 宋나라와의 공적인 통교도 필요하지 않게끔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宋나라와 통하려는 文宗의 본 뜻이 宋나 라로부터 문물을 수입하려는 데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고려의 宋에 대한 기사는 많이 보이고 있으나, 고려정부나 상인의 일본방면에 대한 활동의 기사는 별로 보이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당시 고려는 宋을 상대로하여 교역을 크게 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보다 문화수준이 낮은 일본에 대하여 는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아니하였던 까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역선의 내왕이나 商人 使節의 내왕도 宋에 대해서는 직접 開京과 通交를 하면서도 일본에 대해서는 宋과 차별을 두고 있다. 高麗史 元宗 4년 4월조의, 일본에 대하여는 金州(金海)에 客館을 설치하여 每年 1회 2艘의 進奉船을 파견하는 約定을 한, 기사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일본에 대해서는 제한적이고 거절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110) 따라서 자연적으로 고려상인의 일본에서의 활동은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고려 해상활동의 소극 적인 태도에 대하여 일본학자들은 고려는 遼 金 元에 계속하여 압박을 당하는 형편이어서 元氣를 잃어서 그렇게 됐다111)고 하며 또한 고려의 항해 기술의 퇴보에 기인한다고 하고 있으나112) 이는 다같이 고려에 대한 아쉬운 입장에서 적극적인 무역활동을 했던 자신들 의 입장을 숨기려는 의도에 불과한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일본조선술의 부진에서 오 는 遠距離 왕래의 불편 등 지리적인 연관 관계에서 일본상인들이 비교적 적극성을 띠면 서 入國貿易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기록인 朝野群載 에 商人往反高麗國古今之 例 라고 한데서도 짐작할 수가 있다. 따라서 麗 日貿易관계는 모두가 일본의 來往貿易으 로 일관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항시 고려의 태도에 민감했고 고려의 호감을 사려고 노력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문종 30년 10월에는, 日本國 僧俗 25人이 靈光郡에 도착하여 告하기를 國王의 聖壽를 祝願하기 위하여 佛像 109) 高麗史 권8, 文宗 12년 8월조. 110) 高麗史 권25, 元宗 4년 4월 조. 111) 內藤雋輔, 朝鮮史硏究 (1961) pp.365 366. 112) 森克己, 日 宋と高麗との私獻貿易 ( 朝鮮學報 14) pp.554 555.

- 176 - 國史館論叢 第29輯 을 雕成하였으니 서울에 나가 바치기를 청하나이다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고 하였다.113) 또한 文宗 33년 11월에는 일본 商客 藤原 등이 와서 法螺 30枚, 海藻 300束 을 與王寺에 施與하고 왕을 위하여 祝壽하였다고 하였다.114) 이처럼 일본은 고려에 대하 여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는데 특히 문종 때에 더욱 컸던 것은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 다. 일본의 기록을 보더라도 장수를 기원하든, 쾌유를 비는 것이든, 외국의 왕을 위하여 불상을 만들거나 절에 시주하는 일은 다른 왕의 경우는 예외가 없다. 당시의 일본 상인들 이 文宗 개인과 고려에 친근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115) 그러나 또한 이때는 고려 불교의 융성기로서 名僧 義天이 문종의 아들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僧俗 25 인이 문종을 祝壽하러 온 것도 단지 商人의 來往이 아니고 고려 佛敎에의 渴仰이라 할 것 이다116)라고 한 것을 볼 때 고려의 불교문화를 흠모하는 것도 매우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불교와 일본전수는 상당한 것이었으며 일본승의 고려 불교에 대한 求法心도 대단 했 었다. 大覺國師 義天이 완성한 續蔵經이 당시에 일본에도 기증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東大 寺에는 그 속장경의 印本 일부와 目錄인 新編諸宗敎藏總錄 이 전하고 있다. 이 목록이 전해진 뒤에 일본에서 珍重한 것으로 되어 이 義天의 속장경도 이때 일본에 들어가 일본 불교에 상당한 자극을 준 것은 틀림없다고 보고 있다.117) 이에 관하여 일본학자의 견해를 조금 더 살펴보면 東大寺藏 弘賛傳奥書 에 宋人 蘇景이란 자가 고려에서 일본으로 聖 敎를 奉渡했다 라고 되어 있다. 이때는 대체적으로 義天死後 20년이 되는 예종 때인데, 聖 敎라고 한 것은 契丹이 침입한 무렵에 刻成한 대장경을 의미하는 것인지, 의천이 집대성 한 속장경을 말하는 것인지 또는 여러가지의 전부인지 일부인지는 알 수가 없다. 만약 전 부라면 이것이 일본불교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118)라고 하였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고려에 대하여 경제적 문화적 욕구 때문에 적극성을 띠고, 고려에 대한 호감을 표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의 일본에서의 활동은 使節目的 즉 정치적인 목적을 제외한 상업목적을 위한 활동이라든가 기타 다른 활동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고려의 대일무역이 소극적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고려사회의 경제구조와 무역과의 관 계에서도 살펴 볼 수가 있다. 당시의 수도 開京은 官人貴族都市였음에 대하여 농촌은 지 배를 받는 농민이나 천민집단이었다. 농업생산을 위주로 한 자급자족의 경제생활은 무역 을 통한 상품수입 등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귀족층의 필요한 사치품은 앞에서도 잠시 113) 高麗史 권9, 文宗 30년 10월조. 114) 高麗史 권9, 文宗 33년 11월조. 115) 井上秀雄 上田正昭 編, 앞의 책 p.152. 116) 위와 같음. 117) 위의 책 p.147. 118) 위의 책 pp.147 148.

- 177 - 언급한 대로 宋商 등을 통하여 들어왔으므로 우리보다 문화수준이 낮았던 일본에 대해서 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여하튼 麗 日 간의 무역은 시종일관 고려에서는 제한적이고 거절적인 태도로 일관했으 며 따라서 무역의 성격은 進獻下賜의 무역이 주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麗 日 貿易과 進奉船 일본상선의 최초의 高麗入國은 기록상으로는 文宗 27년(1073) 7월에 보인다.119) 그 뒤 계속된 려 일 무역은 고려정부와 당시 일본정부를 대 표하는 大宰府의 약정에 의하여 일 본의 進奉船 파견으로 이루어졌다. 이 약정에 의하면 일본은 매년 1회 2艘의 진봉선을 파 견하도록 되어 있었다.120) 이때 고려에서는 金州(金海)에 客館을 설치하여 그들을 맞았는 데 宋 商人들이 직접 開京에 왔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일본은 중국과 차등을 두어 고려에 서 대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어쩌면 侵略性이 강한 그들에게 제한적이고 거절적인 태 도로 국내의 사정을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기록은 高麗史 에 倭寇에 대한 기록으로 倭寇金 州 121)라는 기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金州에는 客館이 설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고려의 지리 가운데 가장 잘 아는 곳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참고할 수 있는 일본측의 기록을 살펴보면 1206년(高麗 熙宗 2, 日本 建永 1)에 고려의 金州防禦使가 일본 대마도에 보낸 牒狀을 살펴볼 수가 있다. 이 牒狀에 따르면, 高麗國金州防禦使牒 日本國對馬島 當使准 越今年正月有四日 貴國使介明賴等四十人 乘 船三艘來泊于州南浦 使譯語問其所以來者 號稱進奉 兼歡文牒 122) 라는 기사가 보인다. 11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전반까지의 麗 日 貿易의 주종은 진봉선에 의하여 이루어 졌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선 高麗史 世家의 기록으로 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19) 高麗史 권9, 文宗 27년 7월조에 王則貞 松永年 등 42인이 입국한 사실과 臺岐島勾當官이 藤 井安國 등 33인을 보낸 기록이 보인다. 120) 高麗史 권25, 元宗 4년 4월조에 自兩國交通以來 歲常進奉一度 船不過二艘 라 하였다. 이 기사는 元宗朝 때의 기사이기 때문에 조금뒤의 기사이지만 양국이 通交한 以來로 운운한 것을 볼 때 처음부터 그렇게 約定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21) 高麗史 권22, 高宗 10년 5월조. 122) 平戶記 仁治 원년 4월 17일조.

- 178 - 國史館論叢 第29輯 ① 文宗 27년(1073) 7월 日本國人王則貞 松永年等四十二人來 請進螺鈿 鞍橋 刀 鏡匣 硯 箱 櫛書案 畫屏 香爐 弓箭 螺甲等物 臺岐島勾當官 遣藤井安國等三十三人 亦請献方物 東宮及諸令公府 制 許由海道 至京 ② 同 28년(1074) 2월 日本國 船頭 重利等三十九人 來献土物. ③ 同 29년(1075) 閏 4월 日本商人 大江等十八人 來獻土物. ④ 同 29년(1075) 6월 日本人 朝元 時經等十二人 來獻土物. ⑤ 同 29년(1080) 秋 7월 日本商五十九人來. ⑥ 同 34년(1080) 閏 9월 日本國 薩摩州遣使献方物. ⑦ 同 36년(1082) 11월 日本國 對馬島 遣使欲方物. ⑧ 宣宗 원년(1084) 6월 日本國 筑前商客信通等 獻水銀二百五十斤. ⑨ 同 2년(1085) 春 2월 對馬島勾當官 遣使進柑橘. ⑩ 同 3년(1086) 3월 對馬島勾當官 遣使獻方物. ⑪ 同 4년(1087) 3월 日本商重元 親宗等三十二人 來獻土物. ⑫ 同 4년(1087) 秋 7월 日本國 對馬島 元平等四十人 來獻眞珠 水銀 寶刀 牛馬. ⑬ 同 6년(1089) 秋 8월 日本國 太宰府 商客來獻 水銀 眞珠 弓箭 刀劔. 이상은 高麗 全時代를 통하여 麗 日關係가 가장 좋았다고 할 수 있는 文宗 宣宗 때의 중요한 몇 가지 예를 들었다. 文宗(1046 1083)에서 毅宗(1146 1170)까지의 11세기 후반 에서 12세기 후반까지의 일본인 高麗入國을 高麗史 의 기록에서 보면 文宗代 14회, 宣 宗代 6회, 睿宗代 1회, 毅宗代 2회 총 23회의 숫자를 볼 수 있다. 이것을 같은 기간(文宗 毅宗)의 宋 商舶의 高麗來航과 비교해 보면, 宋商의 來航은 문종대 43회, 선종대 6회, 헌종 대 5회, 숙종대 12회, 예종대 5회, 인종대 4회, 의종대 20회 총 95회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우선 在位年數에 비교해서 外國船의 渡航數가 가장 적었던 睿宗 과 仁宗 두 시기가 주목된다. 예종때는 끊임없는 女眞의 침략으로 尹瓘에 의해 女眞征伐 이 단행되는 등 북방 이민족에 대한 경계를 계속하던 때이며, 인종 때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 귀족내부의 상호항쟁으로 국내상황이 매우 어수선 했으므로 外國船의 渡來 가 적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종 때의 日本에 관한 직접적인 기사는 예종 11년(1116)에 二月丙寅 日本國進柑 子 123)라는 하나의 기사가 보일 뿐이며, 의종 때의 기사로는 의종 원년(1147)에 八月甲辰 日本都綱黄仲文等二十一人來 124)라는 기사와 同王 23년조에 丁亥에 奉香里離宮에 행차하 여 群臣을 향연하고 인하여 宋 商人과 日本國이 進上한 玩物을 賜하였다 125)라는 기사가 123) 高麗史 권14, 睿宗 11년 2월조. 124) 高麗史 권17, 毅宗 원년 8월조. 125) 高麗史 권19, 毅宗 23년 정월조.

- 179 - 보이고 있다. 의종 때는 일본선의 來航이 이처럼 2회 보이고 있는데 이는 宣宗 10년(1093) 이후 80 여년 동안에 3번의 횟수가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의종 때는 宋船의 來航이 갑자기 많아져 20회나 보이고 있는데 이는 왕이 사치와 향응을 좋아했으며, 이에 따라 진 기한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주 125)의 기사에도 연 회석상에서 진상한 물품을 받았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宋 日이 다같이 고려와의 관계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文宗 때인데 무슨 연 유인가 알아볼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당시 고려는 국세가 왕성하고 문물이 빛나 宋과의 公的인 通交까지도 그다지 필요하지 않던 때이다. 따라서 이때에 일본인의 출입이 빈번했 던 것은 고려의 문물이 갖추어졌을 뿐만 아니라, 宋商의 來航도 빈번하여 국제무역이 성 행했으며, 이런 것이 일본상인들에게 자극을 주었다고도 생각된다. 한편 문종대의 일본에 관하여 알아보면, 당시 일본은 白河天皇(1072 1086) 때인데 정 권은 藤原賴通의 攝關政治에서 院政으로 넘어가던 과도기다. 莊園은 귀족계급의 경제적 기반으로서 귀족들에게 부를 더하여 주었으며, 귀족들은 해외의 珍貨에 대하여 욕구가 강 했었다. 그 결과 莊園의 領主나, 博多 등의 豪商들은 수동적인 무역에 만족하지 않고 스 스로 貿易船을 만들어 해외에 파견하는 적극적인 해외무역까지 행하던 시기였다. 다른 한 편으로는 당시 일본에서는 大宰府鴻臚館의 公設市場에서 大宰府의 감독을 받아 해외에서 들여온 珍貨는 우선적으로 公定價格의 京都의 궁정에 買上되고 있던 때였다.126) 그러나 당시의 일본의 造船術은 조잡하였으므로 지리적 자연적 조건이 비교적 좋은 고려에 많이 왔던 것이다.127) 이 무렵의 일본의 조선술 항해술은 매우 빈약했다. 일본인들 가운데는 일찍부터 遣唐使(遣唐使船에 관한 일본측 기록은 847년부터 보이고 있다)를 중국에 파견 할 정도로 일본의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이때의 일본의 조선기술 이라고 하는 것은 형편없는 것이었다. 遣唐使船 一隻의 인원이 120명에서 160명이란 大船 임에도 불구하고, 그 구조는 脆弱해서 조그만 폭풍에도 두 조각이 되어버릴 정도였다. 뿐 만 아니라 항해술에 있어서도 당시 아라비아 상선이나 중국상선에 의해 크게 이용되던 계절풍조차도 모르고 逆風이 불기라도 하면 조난을 당한 때도 많이 있었다. 이와 같이 당 시 일본의 국가적 사업으로 했한 10數回나 파견된 遣唐使船의 기술조차 이 정도였다고 할 때, 견당사가 폐지되고 그 위에다가 一般日本人들의 海外渡航이 금지된 뒤로부터 백수 십년이 경과된 11세기 후반기에 있어서 일본의 조선술이나 항해술이 遣唐使시대 보다 퇴 보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128) 126) 森克己, 鎌倉時代の日麗交涉 p.64. 127) 森克己, 日 宋と高麗との私獻貿易 p.550. 128) 森克己, 鎌倉時代の日麗交涉 pp.64 65.

- 180 - 國史館論叢 第29輯 문종대에 해당하는 11세기 후반의 일본은 전술한 것처럼 拙劣한 기술과 자연적 현상의 제약으로 莊園領主나 博多商人의 商船의 진출방향은 자연스레 고려로 무역할 것을 정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11세기 후반에 시작된 일본상선의 해외활동은 먼저 고려무역을 목 표로 고려로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129) 일본의 입장에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라도 고려와의 무역을 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 서 고려와 宋과의 무역추이에 따라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宋船이 고려에 많이 渡 航한 시기에는 일본에서도 비례하여 많이 출입하고 있는 것은 위에서 살펴 본 바다. 그런 데 일본인의 來航에 주목할 만한 하나의 사실은 일본의 官民 모두가 고려에 와서는 方物의 진헌을 청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고려의 입장에서는 마지못해, 거절할 수 없어서 응하는 것이며, 일본에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나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文宗에 대한 李齊賢의 史賛에 東에서는 倭人이 바다를 건너 보배를 바쳤다 130)는 기사 를 볼 때 이를 더욱 증명하고 있다. 獻宗에서 毅宗 때까지 5代에 걸쳐 일본선의 渡航數는 불과 3회 뿐이며 그 중 전혀 없던 王代도 셋이나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고려 국내의 사정이 일본의 進奉船에 신경을 쓸 수 없었던 까닭이라고 일본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는데131) 이는 일본인들의 잘못된 견해라고 본다. 오히려 당시 일본국내의 사정에 기인 한다고 보아야 옳을 것 같다. 당시의 일본은 12세기 초부터 시작된 궁정 내부의 上皇과 天皇의 사이에, 藤原氏와 院의 近臣사이에, 또는 藤原氏 내부에 세력다툼이 심하여져 保 原의 亂(1156)과 平治의 亂(1159) 등이 있던 때였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던 獻宗에서 毅宗까지의 5代에도 중국과는 매우 활발한 교역관계를 유지하여 46회의 宋船의 渡航回數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의 상황이 고려의 국내사정보다는 앞서 언급한 대로 일본의 국내사정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毅宗 이후로는 양국의 교역 관계는 거의 두절되다시피 되었는데 明宗에서 元宗까지 (1170 1274) 약 100년간에는 麗 日 간의 교역에 관계되는 기사는 겨우 두 곳에 보일 뿐 이다. 하나는 高宗 30년 9월에 日本國이 方物을 바치고 우리 漂風된 사람을 돌려 보냈 다 132)라는 기사와, 또 하나는 元宗 13년 7월 倭船이 金州에 이르거늘 慶尙道按察使 曹子 一이 通交하는 일이 발각되어 元으로부터 譴責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가만히 환국케 하였 는데 洪茶丘가 듣고 子一을 엄하게 鞫問하고 驛馬로 달려 帝에게 奏聞하였다133)하는 것 이 그것이다. 129) 森克己, 위의 논문 p.65. 130) 高麗史節要 권5, 文宗 37년 8월조. 131) 靑山公亮, 앞의 책 p.19와 森克己, 鎌倉時代の日麗交渉 p.66 참조. 132) 高麗史 권23, 高宗 30년 9월조. 133) 高麗史 권27, 元宗 13년 秋 7월조.

- 181 - 당시 고려는 明宗 이후 특히 13세기에 이르러서는 국내문제가 매우 복잡해지고 高宗 때는 몽고의 침략을 받게 되었으므로 이러한 정세아래 麗 日 交易은 자연히 어려웠으리 라 짐작할 수 있다. 이제 進奉船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측 기록인 元宗 世家의 기록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거니와, 일본측 기록을 살펴보면 1205년(高麗 熙宗 2, 日本 元久 2) 8월 對馬國人 恒平 등 11인이 고려에 와서 牒狀과 進奉物을 고려정부에 진상하 였지만 고려에서는 文牒이 讒諛라고 하여 牒狀과 進奉物을 모두 却下하고 受納하지 않았 다134)라는 기사가 있다. 또한 그 다음 해인 1206년(高麗 熙宗 3, 日本 建永 원년)에도 對 馬國使介明賴 등 30인이 3艘의 배에 타고 고려의 표류자와 함께 고려의 金州 南浦에 入 港하고 進奉이라고 칭하여 牒狀과 進奉物로서 圆鮑二斤帖 黑蚫二斤果 鹿皮三十枚를 고려 정부에 진상하였지만 그 牒狀의 문장이 擾雜하고, 또한 예의 절차가 進奉의 체재를 갖추 지 않았다고 하여, 이 牒狀을 검열한 金州廉察使가 그 뜻을 중앙정부에 보고하니 고려정 부는 受理하지 않고 牒狀과 進奉物을 却下했다는 기사도 볼 수 있다.135) 그 뒤 34년이 지 나 1240년(고려 高宗 27, 日本 仁治 원년) 고려의 牒狀이 일본에 갔을 때 大宰府에서 이 를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이에 대하여 評議를 갖게 되었으며 그때 牒狀 가운 데 기록된 進奉船이라는 것이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136) 여하튼 11세기 후반기부터 행하 여져 13세기까지의 麗 日 貿易은 일본인들의 고려왕에 대한 특산품 등을 헌납하고 고려 왕은 回賜를 주었다는 進獻下賜의 무역이 행하여 졌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進奉船에 의한 무역을 일본학자들은 私獻貿易이라 칭하며 이 시기를 私 的 通交時代로 규정짓고 있는데137) 이는 앞서 언급한 대로 일본인들이 자기들의 저자세 를 감추려는 의도이며 과연 그렇게만 보아 넘길 수 있는 것인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우선 일본인들은 특히 대마도와 고려와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쓰면서 일본의 한 부분 인 대마도와 조선과의 관계는 엄중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138) 그러나 뒤에 서 언급하겠지만 당시 대마도도 엄연히 일본정부의 감독아래 놓여 있었으며, 사실 삼국시 대부터 이 섬을 중심으로 행하여진 해적행위도 따지고 보면 일본정부의 묵인아래 행하여 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일본측 기록으로 10세기부터의 일본의 무역 관리를 살펴 보고자 한다. 일본정부는 10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대외적으로 극히 봉쇄적이었으며, 무역의 관리권 을 大宰府에 위임했다.139) 11세기에는 大宰府의 官營貿县이 보다 유리하여서 博多 平戶 134) 平戶記 延應 2년 4월조. 135) 위와 같음. 136) 주 134)와 靑山公亮, 앞의 책 p.22 참조. 137) 주 7) 참조. 138) 靑山公亮, 앞의 책 p.5.

- 182 - 國史館論叢 第29輯 坊津 敦賀 등의 항구가 붐비었다140) 고 하여 당시의 무역이 상인개인에 의한 私的貿易보 다 官營貿易이 主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 흥미롭고 당시의 무역을 사적무역 으로 볼 수 없는 기사는, 12세기부터 大宰府의 官人들이 職權을 이용하여 무역선을 고려 와 거란 등에 파견하였다는 기사이다.141) 13세기에 들어서 鎌倉政權의 贸易管理方針은 大宰府로부터 九州支配와 貿易管理權限을 접수 하였는데142) 때에 따라서는 막부 자신이 무역선을 보내기도 하였다.143) 이상에서 살펴볼 때 麗 日 贸易은 13세기 이전까지 대개 고려정부와 대재부당국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졌고 進奉船에 대한 약정도 여기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때, 적어도 倭寇창 궐 이전까지의 麗 日 무역은 단순한 사무역, 私獻貿易으로 보는 것보다는 오히려 공무역 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이제 이 시대의 교역상황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進獻下賜의 무역관계가 시작되는 文宗 27년 이후로 일본인들의 進上物品에 대하여는 高麗史 등의 기록에서 비교적 자 세히 찾아 볼 수 있으나 하사품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렇지만 시대로는 조 금 뒤떨어진 일본측 기록과144) 李鉉淙의 글145)을 통해서 약간 더듬어 볼 수 있다. 이제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일본의 進獻品과 고려의 下賜品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일본에서 고려에 진상한 물품(輸入品)을 보면 螺鈿 鏡匣 櫛箱 硯箱 書案 畵屏風 日 本扇 香爐 弓箭 水銀 眞珠 硫黃 螺甲 刀劔 牛馬 海藻 法螺 彩材 龍頭頭器 甲胄 劍 長劍 柑 橘 柑子 彩緞 등으로써 原料品 美術工藝品 武器類 食物類 家畜 織物 등 실로 다양하며, 특 히 흥미로운 것은 당시 일본은 중국이나 南方과도 교역을 하고 있었으므로 남방산물인 胡椒 丹木 沈香 犀角 蘇木 같은 것이 보이는 점이다. 이 외에도 高麗史 에는 물품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方物, 土物 등의 용어가 있는 것을 보면 상당한 물품이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러한 진상품에 대한 고려의 하사품(輸出品)을 살펴 보면 人 蔘 麝香 紅花 虎豹皮 線紬 麻布 綿布 등과 大藏經 典籍같은 文化遺產的인 것, 米豆같은 穀 物類도 중요한 품목이었으며 宋에서 수입된 華綿 大綾 中綾 등이 하사품으로 수출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39) 中村榮孝, 앞의 책 p.17. 140) 위와 같음. 141) 위와 같음. 142) 위의 책 p.27. 143) 위의 책 p.19. 144) 東京大出版部 編, 講座日本史 3(1970) pp.168 169. 145) 李鉉淙, 高麗와 日本과의 관계 ( 第6回 東洋學學術會議 講演鈔, 단국대부설 동양학연구소, 1976) p.23.

Ⅴ. 맺 는 말 - 183 - 고려시대의 麗 日關係는 대체적으로 세 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가 있다. 첫째는 前 期의 兩國關係로서 이 시기는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상반된 특징을 지닌 시기다. 둘째 로는 13세기의 소위 麗 蒙연합군의 일본원정의 시대이며, 셋째로는 倭寇로 일컬어지는 일 본 해적집단의 고려침입시기다. 본고에서는 고려전기의 대일관계를 고찰함에 있어서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인식되어진, 시종일관 고려는 일본에 대하여 제한적이고 거절적인 태도로 일관했다고 하는 점을 정치 적 경제적 관계로 나누어서 서로 다른 점을 살펴보았다. 정치적인 면에서 보면 고려전기 는 고려의 적극적인 수호의 희망과 일본에의 진출에 대하여 일본은 쇄국적이고 고려의 사신에 거절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당시 상황은 고려는 신라하대부터의 강력한 海洋力을 바탕으로 자신감을 가지 고 양국관계의 주도권을 행사하려고 하였던 반면에, 당시 일본은 국내사정으로 수동적인 태도를 벗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전기의 양국의 무역관계는 고려의 제한적이고 거절적인 태도로 계속되었다. 이러한 고려의 태도에 대하여 고려 이전부터 우리나라를 통하여 문물을 수입해 가던 일 본은 당황하여 進奉船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貿易交流가 정치적 관계에서 소원 했던 당시의 맥락을 유지하여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려전기의 麗 日 貿易의 성 격은 進獻下賜로 나타났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저자세를 취하면서 적극적으로 進奉船貿易 을 존속시켜 주도록 노력한 것은 고려왕의 下賜品에 대한 실리를 노린 것이며, 이러한 일 본인에 대하여 고려정부는 후에 이르르면 進奉 그 자체도 달갑게 여기지 않게 되었던 것 이다. 이러한 전기의 進奉貿易도 점차로 고려국내의 사정과 일본자체내의 南北朝혼란에 편승하여 進奉船에 대한 약정도 준수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많은 선박이 來往하고, 무력행 사적인 倭寇도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전기의 進奉형식의 평화통교관계는 깨어지게 되 었던 것이다. 결국 고려는 전혀 이득을 기대할 수 없는 일본에 대해 경계의 대상으로 상대했으며, 일본은 문물수입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고려에 귀찮은 존재로써 계속적인 무역요 구를 해왔다고 볼 수 있다. 국제무역이란 상대국 서로의 이득을 위한 관계로 발전되는 것 이 바람직하지만 麗 日 貿易은 대등한 관계보다는 進獻下賜라는 변칙적 방법 때문에 고 려의 제한적이고 거절적인 수동적 태도와 일본의 적극적 태도로 균형이 맞지 않는 특이 한 通商체제를 형성하며 맥락을 유지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