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사고본실록의보존과관리 1) 이상찬 * 1. 머리말 2. 전주사고본실록의원형과보존노력 1) 전주사고본실록의원형 2) 전주사고본실록의이동 3) 이동과정에서의피해발생가능성 4) 복본간행과정 3. 병자호란으로인한피해와보수 1) 1636년발생한실록의피해상황 2) 피해실록의수리와보수 4. 전주사고본실록의 江華府史庫 보관 1) 摩尼山史庫 說검토 2) 강화부사고의실체 5. 맺음말 초록 : 이글은 1592년까지전주사고에소장되었던실록 805권 576책에대해 1592년이후에가해진변화의양상을정리하려고한다. 실록의보존처리, 수리복원, 재현복제, 보관관리등의실무분야에도움을주기위해서이다. 태조 ~ 명종실록은원래 806권 577책으로쪽염색비단표지에내지를밀랍처리하였고모두 4질이있었다. 1600년이전에이미 1권이없어져서 805권 576책이되었다. 1592년에 3질이불타고전주사고본 1질만남았고안전한곳을찾아서몇번이나옮겨다녔다. 몇번을옮겨다니긴했어도물에젖거나진흙에오염되지않았고겉모습도 1636까지는간행당시의원형을그대로가지고있었다. 1636년청군의방화로인해 211권이책전체가없어졌고, 책장이떨어지고찢어지거나표지가떨어져나간것이 435권이었다. 전체 805권중 159권만이원형그대로였다. 또한건물밖에서비에젖어부패되거나진흙에오염되었다. 이러한피해는 1664~6년에수리보수되었다. 그결과전주사고본실록은원형을그대로유지하고있는형태, 원래표지에떨어져나간책장을베껴넣은형태, 표지만바꾼형태, 표지를바꾸고낙장을베껴넣은형태, 떨어져나간책장을그대로두고권차에서제외한경우, 남아있는낱장을한데묶 * 서울대인문대국사학과 213
214 奎 章 閣 39 은 형태 등 여러 가지 모습을 갖게 되었다. 빗물로 인한 부패와 훼손은 1640년대 이후 지금까지도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 부패와 훼손의 시기와 원인을 알게 되었으므로 밀랍본 실록의 보존처리 연구에도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전주사고본 실록은 1606~60년 강화의 마니산 사고에 보관되었다고 알려 져 있다. 그러나 마니산 사고의 설치가 자료를 통해 확인되지 않고 마니산 사고터로 알려진 장소가 사고를 두기에 적당하지 않다. 마니산보다는 강화 부 안에다 건물을 마련하여 사고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핵심어: 실록, 전주 사고, 마니산 사고, 수리 보수, 보존 처리 1. 머리말 현재의 규장각 소장 자료는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사고를 비롯하여 중앙 각 관청과 감영 등의 서고에 보존되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사고와 서고 는 원형이 남아있지 않다. 사고와 서고의 원형은 남아있지 않더라도 규장각으로 편입되기 이전 각 사고별, 서고별 소장 현황을 원형대로 복원한다면 현재 규장각 소장 도서의 유래를 알 수 있고 도서의 보관, 관리에 대해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 과 유용한 정보를 얻게 될 것이다. 사고의 경우 한양의 춘추관 사고와 충주 사고가 있다가 1439년(세종 21)에 성주 와 전주 사고가 신설되었다. 성주 사고의 실록은 1538년(중종 33) 화재로 모두 불 탔고, 1589년에 춘추관 사고본 실록을 저본으로 하여 세종실록과 성종실록은 활 자로 간행하고 나머지는 등서하였다.1) 1592년 4월에는 일본군대가 한양의 춘추관 사고와 충주, 성주의 사고를 불태웠다. 이로 인해 임진왜란 이전의 사고 소장자료 는 전주 사고 소장 기록만 남게 되었다. 전주 사고 소장 기록은 임진왜란 중에는 해주부와 강화부, 묘향산과 영변부로 옮겨 다녔다.2) 전주 사고 소장 기록은 내장산으로 옮겨졌다가 1593년에 해주로 옮겨졌고 1595년 강화부로, 1597년에는 영변부로, 1603년에 다시 강화부로 옮겨 졌다. 정족산 사고로 옮겨가는 1660년까지 전주 사고 소장 기록은 강화부 사고에 1) 中宗實錄 중종 33년 11월 13일 癸未조, 11월 16일 丙戌조, 34년 6월 15일 辛亥조. 2) 申奭鎬, 1964 <朝鮮王朝實錄의 編纂과 保管> 한국사료해설집 13-82.
전주사고본 실록의 보존과 관리 215 서 소장, 관리하였다. 영변부에 있는 동안에도 묘향산 보현사와 영변부 객사를 전 전하였다.3) 1606년 오대산과 태백산에 사고를 신설하면서 춘추관 사고, 강화부 사고, 영변 부 사고를 합쳐서 모두 5 곳에 사고를 두었다. 무주의 적상산 사고의 실록각은 1614년(광해군)에 세워졌고 1618년에 실록의 일부를 봉안하였다.4) 실록 일부만 옮겼기 때문에 청의 침략 위험으로 인한 영변 부 사고의 안전성 문제가 대두되어 영변부 사고의 실록을 모두 무주 적상산으로 옮겨 보관하자는 건의가 세 차례나 있었다. 필요성은 인정되었지만 이전 비용 문 제로 인해 옮기지를 못하였다.5) 1633년 비로소 묘향산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 록을 모두 적상산 사고로 옮기게 되었다.6) 춘추관 사고는 경복궁이 임진왜란으로 불탄 이후 재건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1606년 재간행된 실록 중 춘추관에 봉안할 실록은 임시로 병조에 보관하였다.7) 그런데 춘추관 사고는 1624년 이괄의 난으로 다시 소실되었고, 잔존 기록은 강화 부 사고로 옮겼는데 소실되고 남은 실록 역시 강화부 사고로 옮겨졌다.8) 1660년에는 정족산 사고를 신축하여 강화부 사고의 소장 자료를 옮겨 갔다. 1603년 이후 강화부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기록들은 병자호란으로 상당량이 소실 되거나 훼손되었기 때문에 보다 안정적으로 자료를 관리하기 위해 정족산 사고를 신축하여 전등사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강화 정족산, 평창 오대산, 봉화 태백산, 무주 적상산 등 네 사고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네 사고의 건물은 현재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사고 터만 확인하여 그 터에다 최근에 사고 건물을 복원하였다. 3) 丸龜金作, 1938 <朝鮮全州史庫實錄の移動と宣祖の實錄複印> 史學雜誌 49篇 6號(東京帝 國大學 文學部 史學會). 4) 赤城誌 (奎 1708) 卷5 古蹟조. 이에 의하면 璿源閣은 1641년(인조 19)에 설치되었다고 한 다. 奎章閣資料叢書 地理誌篇 全羅道邑誌 10(2004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231~2쪽 참조. 5) 仁祖實錄 인조 6년 7월 18일 丁丑조, 7년 3월 8일 甲子조, 9년 11월 1일 庚午조. 6) 仁祖實錄 인조 11년 1월 23일 乙卯조. 1633년에 적상산 사고로 옮긴 실록은 崇禎三年十二月二十四日香山實錄形止案 (奎9687) 참 조. 이 형지안은 1630년 묘향산 사고의 실록 소장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7) 宣祖實錄 선조 39년 4년 28일 丙寅조 및 12월 28일 壬戌조. 8) 강도(江都)의 변으로 춘추관이 옮겨 놓은 實錄과 時政記가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仁祖實錄 15년 2월 27일 丁酉조.
216 奎 章 閣 39 그동안 조선 후기의 네 사고(태백산, 오대산, 적상산, 정족산)에서의 기록관리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내용은 밝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별 자료의 상황으로 들어가면 구체적인 내용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경우가 더러 있는데, 실록 특 히 전주사고본 실록이 대표적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주사고본 실록은 임진왜란 중에 해주, 영변, 강화 등지를 전전하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마니산 사고를 거쳐 정족산 사고에 보관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주사고본 실록 576책이 원형 그대로 정족산 사 고에 보관되었다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전하는 정족산 사고 본 실록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크기, 표지, 인쇄 등의 구체적인 내용에서 매우 다 양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 즉 임진왜란 이후에도 전주사고본 실록에 다양한 변 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임진왜란 이후 전주 사고본 실록에 가해진 변화의 양상을 정리함으로 써 전주 사고본 실록의 보존 처리, 수리 복원, 재현 복제, 보관 관리 등의 실무 분 야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쓰여졌다. 2. 전주 사고본 실록의 원형과 보존 노력 1) 전주 사고본 실록의 원형 조선시대 실록의 전체 책수는 몇 책일까? 간행당시의 원본을 각 왕대별로 합한 숫자를 전체 책수로 보아야 할지, 현전하는 사고별 소장 상황을 정리한 것을 전체 책수로 보아야 할지, 기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아직 정확하게 파악된 적이 없 다. 사고별 소장 상황을 정리하면 정족산 사고본 실록은 1,187책9)이고 태백산 사 고본 실록은 848책이며 오대산 사고본 실록은 788책이다. 실록의 전체 책수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전주사고본 실록이 임진왜란,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간행 당시의 分卷, 分冊이 9) 정족산 사고본 실록 1,187책에는 춘추관 사고본 잔존분이 합쳐져 있다. 또한 병자호란으로 인해 발생한 낙권(落卷)을 춘추관 사고본 잔존분으로 보충하였기 때문에 전주사고본의 경우 원래의 분책과 많이 달라졌다. 따라서 전주사고본 실록은 책 보다는 권 으로 통계를 내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217 전주사고본 실록의 보존과 관리 <표 1> 전주사고본 실록의 각 왕별 책수와 권수 태조 정종 태종 15 6 36 세종 목 1163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 중종 인종 명종 13 14 49 8 94 37 297 63 105 2 34 합계 577책10) 806권 흐트러졌는데 이를 정확하게 추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주 사고본 실록은 <표 1>에서 보듯이 원래는 577책이었다.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성종실록과 연산군일기만 권과 책이 일치하지 않고 나머 지 실록은 권수와 책수가 일치한다. 이 577책의 실록은 표지가 쪽염색을 한 비단, 내지는 모두 밀랍으로 처리되었다. 태조, 정종, 태종 실록은 필사본이었고, 세종 이후 실록은 활자로 인쇄되었다. 양성지는 태조, 정종, 태종 실록은 4건을 만들어서 춘추관과 외3사고에 봉안하였 고 세종실록 과 문종실록 은 각각 1건만 만들어서 춘추관에 봉안하였다고 하 면서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을 작은 활자 로 가볍게 3건을 더 만들어서 외 사고 에 보관할 것을 건의하였다.11) 1473년(성종 4) 세조와 예종 실록을 인출할 때 세종 실록과 문종실록을 함께 인출하였다.12) 춘추관 실록각에 보관되었던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은 1454년(단종 2)과 1455년(세조 1)에 인출한 것으로13) 1592년에 불타 없어졌기 때문에 전주사고에서 보관하였던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은 1473년에 간 행된 것이다.14) 원래 577책이었던 전주사고본 실록은 1600년 576책으로 확인되었다. 1592년 이 전에 이미 문종실록 한 책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1600년 8월 예문관 대교(待 10) 배현숙은 단종실록 부록 1권을 포함시켜서 구 전주사고본 실록을 578책이라고 하였다. 裵賢 淑, 2002 朝鮮實錄硏究序說 (도서출판 태일사) 205~6쪽. 그러나 단종실록 부록은 숙종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전주사고본 실록은 아니다. 11) 世祖實錄 세조 12년 11월 17일 乙酉조. 12) 成宗實錄 성종 4년 6월 8일 丁卯조. 13) 端宗實錄 단종 2년 3월 30일 辛巳조, 世祖實錄 세조 1년 11월 10일 辛巳조. 14) 1454년과 1455년에 간행된 두 실록이 중대(重大) 하다고 하였는데 1473년에 간행된 두 실록 이 양성지의 건의 대로 경편(輕便) 하고 작은 활자 로 간행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 만 현전하는 태조, 정종, 태종 실록은 종이가 두껍고 좋은데 비해 세종, 문종 실록은 종이가 얇다.
218 奎 章 閣 39 敎) 권태일(權泰一)과 기사관(記事官) 홍익준(洪翼俊)이 묘향산 사고에서 실록을 열람하던 중 문종실록 제11권 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였다. 표지에는 제11권 이라고 쓰여 있었으나 실제로는 제9권의 내용으로서 9권은 따로 또 있었고 11권 은 아예 없었다고 한다.15) 2) 전주 사고본 실록의 이동 일본의 침략으로 전주 사고본 소장 자료 역시 위험해지자 전라 감사는 일단 도 내의 험준한 곳(내장산)에 전주 사고 소장 자료를 옮겨두었다. 그 후 일본군이 호 남지역을 침범하려 하자 1593년 7월 태조어진과 실록을 행재소 근처로 옮기자는 전주부윤의 건의를 받아들여 곧바로 춘추관 대교 조유한(趙維韓)을 파견하여 실 록과 함께 고려사 동국통감 여지승람 동문선 을 실어오게 하였다.16) 해 주로 실어온 실록은 임시로 보관하다가 1595년에야 해주부 동루(東樓)를 수리하 고 근처의 집들을 철거한 후 봉안하였다.17) 해주에 보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임 시였고 깊은 산의 큰 사찰로 옮겨 승인(僧人)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여 궁극적으로는 영변으로 옮기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18) 그러나 해주부의 실록 보관 건물이 집이 낮고 좁아서 실록을 간직할 곳이 못되 고, 집들이 연이어 있어서 화재의 폐단도 염려되므로 실록을 해주부에 두는 것이 15) 文宗實錄 제11권이 없어진 것에 대해서 권태일은 처음에 인쇄하여 나누어 보관할 때 권질 이 잘못되어 서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宣祖實錄 선조 33년 8월 29일 己亥 조. 또 다른 기록에는 文宗實錄 제1권이 두 책, 제9권이 두 책이라고 하였다. 제11권이 없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권태일과 같은 의견이었다. 宣祖實錄 선조 39년 4월 28일 丙寅조. 文宗實錄 제9권은 현재 규장각에는 밀랍본 2책이 있다. 16) 宣祖實錄 선조 26년 7월 9일, 10일조. 실록과 함께 전주 사고에 소장되었던 자료가 전부 해주로 옮겨졌다. 1591년의 萬曆十九年 辛卯八月二十八日全羅道全州史庫曝曬形止案 (奎10002)과 1594년의 萬曆二十二年甲午八月 十六日黃海道海州史庫曝曬形止案 (奎10006의 1) 참조. 그런데 萬曆二十二年甲午八月十六日黃海道海州史庫曝曬形止案 에는 고려사 등을 조유 한이 別冊籠 4개에 담아 운반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주사고에 있었던 실록樻와 天字~ 辰字 樻와 별도로 조유한이 운반한 別冊籠 을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서 실록은 조유한이 운 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17) 宣祖實錄 선조 26년 7월 29일 辛巳조 및 28년 9월 9일 戊寅조. 18) 위의 책, 선조 27년 7월 20일 丙申조.
전주사고본 실록의 보존과 관리 219 합당하지 않으니 실록을 배로 실어다 강화에 옮겨 영구히 보존할 것이 논의되었 다.19) 이에 따라 1595년 11월 강화부 관청 건물을 수리하도록 하여 실록을 해주에 서 강화로 옮겼고 이조판서를 보내어 봉안절차를 관리하게 한 후 사관을 파견하 여 관리하도록 조치하였다.20) 정유재란의 징조를 감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1596년 선조는 실록을 강화에서 묘향산으로 옮길 것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실록을 1597년 9월 묘향산 보현사의 별전(別殿)으로 옮겼다.21) 난이 끝나면서 서울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장소 가 마땅치 않으니 그냥 묘향산에 두자고 결정이 되었다.22) 다만 보현사 별전이 집들이 지붕이 잇닿아 있고 부엌이 너무 가까와서 뜻밖의 재변 이 있을 지도 모 르고 실록을 등서할 때 불편하기 때문에 영변부(寧邊府) 안에 집 1채를 별도로 선정하여 그곳으로 즉시 옮겨 봉안 하기로 하여 영변부 객사로 실록을 옮기게 되 었다.23) 실록을 영변부 객사에 두고 사관을 파견하여 등서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는 이유로 1602년 8월에는 강화로 다시 옮기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강화에다 옮겨 놓고 실록 등서는 서울에서 하되 실록을 한꺼번에 서울로 옮기지 말고 차례로 가 져다 등사하면 편리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선조는 1603년 봄 중국 사 신 접대를 먼저 처리하고 중국 사신이 다녀간 뒤에 거행하도록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1603년 5월 춘추관 사관이 영변으로 가서 실록을 강화로 옮겨왔다.24) 이 때 에도 한여름 장마철에 대비하여 운반도중 비에 젖지 않도록 우비(雨備)를 준비하 고 강화에도 봉안할 곳을 미리 수리하고 청소를 하는 등 신중하게 대처하였다. 1603년 7월과 8월에 걸쳐 실록 100권이 등서를 위해 서울로 옮겨졌고25) 이후 등서 작업의 진전에 따라 차례대로 서울로 옮겨졌다. 19) 위의 책, 선조 28년 10월 24일 癸亥조 및 28년 11월 3일 辛未조. 20) 위의 책, 선조 28년 11월 7일 乙亥조 및 11월 18일 丙戌조. 21) 위의 책, 선조 29년 11울 7일 己亥조 및 31년 2월 3일 戊午조. 22) 위의 책, 선조 32년 7월 11일 戊午조. 23) 위의 책, 선조 34년 1월 13일 壬子조 및 35년 8월 19일 戊申조. 24) 위의 책, 선조 35년 8월 19일 戊申조 및 36년 5월 23일 戊寅조. 25) 위의 책, 선조 36년 8월 3일 丙戌조.
220 奎 章 閣 39 3) 이동과정에서의 피해발생 가능성 전주사고본 실록은 전주를 떠나서 내장산으로 옮겨지고 다시 해안가로 나와서 뱃길로 해주에 이르렀고, 해주에서 배에 실려 다시 강화로, 강화에서 다시 뱃길과 육로로 묘향산 보현사로, 보현사에서 영변부 객사로, 영변부 객사에서 강화부 객 사로 여러 차례에 걸쳐 옮겨졌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습기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폭 넓은 조사를 통해 모든 가능성을 다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주사고본 실록의 봉안 상황을 알 수 있는 형지안을 우선 조사하였는데, 조사대상 형지안은 다음과 같다. ① 萬曆十六年戊子九月初一日全羅道全州史庫曝曬形止案 (奎10004, 1588년) ② 萬曆十九年辛卯八月二十八日全羅道全州史庫曝曬形止案 (奎10002, 1591년) ③ 萬曆二十二年甲午八月十六日黃海道海州史庫曝曬形止案 (奎10006의 1, 1594년) ④ 萬曆二十七年己亥九月二十七日平安道寧邊地香山史庫曝曬形止案 (奎10003, 1599년) ⑤ 萬曆二十九年辛丑九月初十日平安道寧邊府史庫曝曬形止案 (奎10005, 1601년) ⑥ 萬曆三十一年癸卯十月十八日京畿道江華府史庫曝曬形止案 (奎9485, 1603년) ⑦ 萬曆三十四年丙午六月初三日京畿道江華府史冊奉安形止案 (奎9467, 1606년) ⑧ 萬曆三十九年辛亥五月初二日京畿江華府史庫曝曬形止案 (奎9664, 1611년) ⑨ 萬曆四十五年丁巳二月十五日京畿江華府史庫曝曬形止案 (奎9661, 1617년) ⑩ 崇禎二年己巳四月十五日江華府史庫曝曬形止案 (奎9443, 1629년) ⑪ 崇禎六年癸酉七月二十六日史庫曝曬形止案 (奎9443, 1633년) ③번 자료에는 1594년 해주 사고에서의 포쇄 상황이 정리되어 있다. 1593년 7월 내장산에서 해안가로 나가서 뱃길로 해주에 옮겨진 후 1595년 11월 강화로 옮겨 질 때까지 전주사고본 실록이 해주에 있었고 1594년 8월 포쇄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 형지안에 특기할 만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전주에서 해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실록이 특별한 피해를 입지는 않은 것같다. 전주사고본 실록은 1595년 11월 강화부로 왔다가 1597년 9월 묘향산 보현사 별 전으로 옮겨갔는데 보현사 별전에 있을 때의 실록 포쇄 상황을 정리한 것이 ④번
전주사고본 실록의 보존과 관리 221 자료이다. 여기에도 실록 자체에 대해 특기할 만한 내용은 없고 다만 27궤(연산군 일기 제11책), 제36~38, 40궤(중종실록 권 64~71, 72~79, 80~87, 95~100) 등 실록 보관함 5개가 없어져서 기름종이 주머니 油紙帒 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새 로 파악된 내용이었다. 1601년 실록은 보현사에서 영변부 객사로 옮겨졌고 옮겨 진 직후의 실록 포쇄 상황을 정리한 것이 ⑤번 자료이다. 여기서는 ④번 자료에 기재되어 있던 無樻只用油紙帒 라는 표현이 없어지고 있다. 1599년 이후에 실록 보관함을 다시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1603년 실록을 인출하기로 결정하고 영변부 객사에서 강화부로 실록을 옮겨왔 는데 이 때는 특히 장마철이라서 운반과정에서 비에 젖을 우려가 있어서 우비를 준비하는 등 신중하게 진행하였다.26) 강화부로 옮겨온 직후 실록만 포쇄를 한 듯 ⑥번 자료에는 실록 포쇄 상황만 정리되어 있는데 전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장 마철에 이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준비한 결과 무사히 옮겼던 것으로 보 인다. ⑦번 자료는 실록 인출이 끝나고 전주사고본 실록을 다시 강화부에 봉안할 때 의 상황을 정리한 형지안이다. 이후 강화부 사고에서 1611년, 17년, 29년, 33년 네 차례에 걸쳐 포쇄한 상황을 정리하고 있는데, ⑦~⑪의 자료에서도 실록의 변화는 전혀 기록되고 있지 않다.27) 전주 사고본 실록이 여러 차례, 해로로, 심지어는 장마철에 옮겨졌음에도 불구 하고 습기에 의한 피해는 거의 입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636년 이전에 전주사 고본 실록에 피해가 발생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 4) 복본 간행 과정 1질밖에 남지 않은 전주사고본 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보관장소를 물 색하고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한편, 1593년부터 실록을 등사하자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1593년 9월 비변사는 해주 산성을 쌓고 그곳에 사고를 짓는 것도 좋 지만 여의치 않을 것이므로 몇 건을 등사하여 각처에 나누어 보관하면 환난을 모 면할 것이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선조는 가볍게 등사하는 것은 불가하 26) 宣祖實錄 선조 36년 5월 23일 戊寅조. 27) 1629년과 33년은 춘추관 사고본 실록 잔존분이 강화 사고로 옮겨진 이후임에도 ⑩번과 ⑪번 자료에는 춘추관 사고본 실록에 관한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222 奎 章 閣 39 다고 하였다.28) 1년 후인 1594년 9월에는 춘추관에서 해주부 동루에 실록을 봉안하는 것과 함 께 1595년 봄부터 사관을 보내어 실록을 등서, 성책할 것을 건의하였다.29) 1597년 2월에는 강화부에 실록을 두는 것이 매우 위험하므로 실록을 등사할 필 요가 있다는 건의가 있었다. 즉 강화가 바다 가운데의 외딴 섬으로서 혹시 적에게 점령당한다면 그곳에 비치된 실록이 전부 없어지게 되니 급히 문신 약간 명을 보 내 등서하게 하되 두 질을 더 등사하여 한 질은 금강산에, 한 질은 묘향산에 비치 하자고 하였다.30) 이에 대해 겸춘추 관원 10명으로 하여금 등서하라는 지시가 내 려졌고, 7월에는 10명은 경비가 많이 들어가니 5명으로 하자는 춘추관의 건의가 있었다.31) 1598년에는 보현사에 실록을 보관하면 승려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고 그로 인해 승려들이 뜻밖의 환란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속히 등서해야 할 것이라는 경 고도 있었다.32) 그동안 여러 차례 실록의 등사 문제가 논의되었지만 소요 비용과 담당 사관의 부족 등의 이유로 등서하는 일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었던 듯하다.33) 그러다가 전 란으로부터 점차 안정을 찾아가면서 1601년 1월에는 영변부에 둔 임시 관원을 춘 추관 사관으로 대치하고 서둘러 등서하여 영구히 보존할 것을 사헌부가 건의하였 고, 이어서 9월에는 물자가 부족해서 등서를 못한다고 하지만 종이와 붓, 먹만 있 으면 되는 일이므로 서둘러 등서에 착수하여 각도 명산에 나누어 보존하는 방안 도 건의되었다.34) 1602년 8월에는 춘추관이, 실록을 보관하고 있는 영변부 객사로 겸춘추 10명이 가서 등서하는 일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므로 강화로 실록을 옮기고 서울에 사국(史局)을 설치하여 전주사고본 실록을 베껴야 한다고 건의하였고 이에 대해 선조가 1603년 봄 중국사신이 다녀간 후에 거행하라고 지시하였다는 것은 이미 28) 宣祖實錄 선조 27년 9월 5일 庚辰조. 29) 위의 책 28년 9월 9일 戊寅조. 30) 위의 책 30년 2월 12일 癸酉조. 31) 위의 책 30년 7월 11일 庚子조 및 7월 24일 癸丑조. 32) 위의 책 31년 2월 3일 戊午조. 33) 위의 책 33년 3월 9일 壬子조. 34) 위의 책 34년 1월 9일 戊申조 및 9월 11일 乙巳조.
전주사고본 실록의 보존과 관리 223 앞에서 말한 바 있다.35) 1603년 5월에는 실록 4부를 등서하여 각처에 나누어 보관하자는 춘추관의 건의 를 선조가 받아들여 드디어 실록 등서에 착수하게 되었다.36) 선조는 등서작업에 필요한 인력의 규모와 작업 기간 등을 계획하도록 요구하였고 이에 대해 춘추관 은 겸춘추 20명으로 하여금 등사하게 할 경우 한 달에 30권, 2년에 1질을 등서할 수 있고 활자로 간행할 경우 5년 안에 3질을 인출할 수 있다고 하면서 활자로 간 행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선조는 강화에 사국을 두고 활자로 간행하 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하였다. 강화에다 사국을 설치하는 것을 고려하라는 선조의 전교에 대해 춘추관은 강화보다는 남별궁이나 병조에 사국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 였다. 사국은 서울에다 두되 실록은 서울에다 전부 옮겨두지 말고 강화부에 두고 등서 순서에 따라 일부를 가져다 등서하자고 하여 선조가 이를 받아들였고 실록 3건을 인출하라고 명령하였다.37) 이에 따라 호조에서는 실록 인출에 소용되는 종 이의 공급 계획을 마련하였다.38) 1603년 5월 실록 인출 작업에 착수하여 1606년 5월 인출 작업을 끝낼 수 있었 다. 새로 인출된 실록은 모두 3질로서 춘추관 사고, 묘향산 사고(후에 적상산으로 옮김), 태백산 사고에 각 1질씩 보관하였다. 교정지는 폐기하는 것이 보통이었지 만, 이 때는 폐기하지 않고 책으로 묶어서 오대산 사고에 보관하였다.39) 3. 병자호란으로 인한 피해와 보수 1) 1636년 발생한 실록의 피해 상황 1606년 5월 인출 작업이 끝났을 때 실록은 모두 5질이 되었다. 이 5질의 실록은 다음과 같이 3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35) 위의 책 35년 8월 19일 戊申조. 36) 宣祖修正實錄 선조 36년 5월 1일 丙辰조. 37) 宣祖實錄 선조 36년 5월 15, 16, 19, 23일조. 38) 위의 책 36년 5월 23일조. 39) 처음에는 4부 를 등서하기로 결정하였지만, 종이 수급이 여의치 않았던 듯하고 그에 따라 1부는 교정지를 제본하여 처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24 奎 章 閣 39 ① 전주 사고본 576책: 청색 비단 표지, 밀랍처리, 크기 大 ② 태백산, 적상산, 춘추관 사고본: 259책. 크기 中. 능화문 표지. 생지본40) ③ 오대산 사고본 259책: 교정쇄본.41) 크기 小. 능화문 표지. 생지본42) 5질 중 4질은 1질당 576책이 아니라 259책이었고 표지, 판형, 분책 등이 전주사 고본 실록과 전혀 달랐다. 실록 복간이 완료된 1606년 시점에서 보면 표지, 분책, 판형, 크기 등이 달라지긴 하였지만 명종 때까지의 실록의 내용을 여러 벌 만들어 서 보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원래 분책대로 576책으로 만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1질밖에 남지 않았던 전주사고본 실록이 병자호란으로 인해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고, 병 자호란으로 인한 피해를 수습할 때 판형과 분책이 달라진 복간 실록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예 없어진 실록은 간행당시의 원래 모습대로 복원할 수 없었다. 간행 당시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전주사고본 576책은 인출 작업을 위해 1603년 영변부 객사에서 강화부로 옮겨졌고, 인출 작업에 따라서 몇 번에 걸 쳐 서울로 옮겨져 베껴졌고, 인출 작업이 끝난 1606년 5월 강화부 사고 에 다시 봉안되었다. 그로부터 30년 후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전주사고본 실록은 병자 호란으로 인해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었다. 전주사고본 실록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637년이었다. 1636년 청군이 강화에 들어가서 강화부 사고의 실록과 시정기를 사고 밖으로 꺼 내서 버렸는데 서리 한 사람이 일부를 수습하여 사고 안에 다시 넣어두었다고 하 였다. 실록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청군이 다시 강화에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정확한 피해 내역을 확인하지는 못하였다.43) 1644년에 이르러서야 340여권이 남아 있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인조의 지시에 40) 춘추관은 새로 인출할 실록의 종이 수급 계획에 대해 下三道에서 각각 300권씩 공납하도록 하되 白紙 중에서 조금 나은 종이를 가려서 쓰겠다고 하였다. 宣祖實錄 선조 36년 5월 23 일조. 41) 宣祖實錄 에서는 傍本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宣祖實錄 선조 39년 5월 7일 갑술조. 42)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사고에 봉안할 실록에 쓰인 백지 중에서 조금 나은 품질의 종이 에 비해 오대산 사고본 실록의 종이는 그 품질이 많이 떨어진다. 43) 仁祖實錄 仁祖 15年 2月 27日.
전주사고본 실록의 보존과 관리 225 의해 강화부에 파견되어 실록의 상태를 확인한 沈世鼎은 역대 국왕의 실록과 노 산군일기, 연산군일기가 모두 1천 25권인데 완전히 없어진 것이 1백 48권이고 책 장이 떨어져 나간 것이 1백 67권이고 光海君日記 는 완전히 없어진 것이 65권, 책장이 떨어져 나간 것이 2권인데 1621년 이후는 전부 없어져서 몇권이 없어졌는 지 알 수 없다 고 보고하였다.44) 병자호란으로 인한 실록의 피해 상황이 형지안으로 정리된 것은 1654년이 처음 이었다.45) 이 형지안에는 병자호란으로 인한 피해를 수습하기 이전 당시의 실록 상태를 조사, 정리하고 있다. 이 형지안의 내용은 1660년 정족산 사고로 실록을 옮겼을 때의 형지안,46) 1663년 정족산 사고의 포쇄형지안47) 등에도 거의 같은 내 용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 형지안에서는 낙권(落卷)은 권수를 기록하지 않았고 낙권 중 춘추관 사고본으로 보완한 경우는 춘추관사고본 실록의 권수를 표시하였 다. 또한 표지가 떨어지거나 찢어진 것[無衣, 衣破], 책장이 떨어져 나가거나 찢어 진 것[落張, 破張], 진흙이 묻은 것[泥汚], 빗물 등으로 부패한 것[雨腐, 雨漏破腐], 화재 흔적, 글자 판독 불능 등을 표시하고 있다.48)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지만, 이들 형지안의 기록은 다소 부정확하 다. 병자호란 때 입은 실록의 피해 내용은 이 글 맨 뒤에 실린 <표 2> 전주사고본 실록의 현재 상황에 정리되어 있다. <표 2>를 각 왕별로 통계를 내면 다음 <표 3>과 같다. 전체 805권 중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실록이 159권, 밀랍 청장이지만 낙 장이 있는 실록이 19권, 밀랍본으로 표지만 떨어져 나간 실록이 224권, 밀랍본으 44) 仁祖實錄 仁祖 22年 8月 27日 壬午조. 45) 順治十一年十月日實錄奉安後形止案 (奎 9545). 1653년 강화 사고에 불이 나서 실록 두 권과 의궤 여러 책이 다 불탔고 사관을 파견하여 점 검하게 하였다고 한다( 孝宗實錄 효종 4년 11월 6일 戊戌조). 이 화재로 인해 1654년에 실 록을 다시 봉안하면서 위의 형지안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46) 順治十七年十二月初三日實錄移安新設史閣後形止案 (奎 9592) 47) 康熙二年九月二日實錄曝曬時形止案 (奎 9564) 48) 1654년 형지안에 빗물로 인한 부패가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636년 직후 실록을 제대 로 건조하지 않은 듯하다. 현재의 실록 상태를 보면 밀랍을 거의 다 걷어낸 경우도 있는 것 으로 보아 건조와 세척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 밀랍 제거와 보존처리 연구에서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226 奎 章 閣 39 <표 3> 전주사고본 실록의 현재 상황 통계표 왕 밀랍 靑粧 전체 밀랍 黃粧 落卷 권수 落張無 落張有 落張無 落張有 태조 15 2 1 4 1 7 정종 6 2 0 1 0 3 태종 36 15 0 8 5 8 세종 164 33 1 48 53 29 문종 12 6 0 6 0 0 단종 14 5 1 6 1 1 세조 49 13 2 15 3 16 예종 8 0 2 1 2 3 성종 297 66 0 79 50 102 연산군 63 0 0 21 24 18 중종 105 14 11 19 37 24 인종 2 0 0 2 0 0 명종 34 3 1 14 15 1 805 159 19 224 191 212 로 표지가 떨어져나가고 낙장이 있는 실록이 191권, 낙권으로 처리한 실록이 212 권이었다.49) 2) 피해 실록의 수리와 보수 강화 사고 소장 자료에 청군이 피해를 입힌 1636년 당시에는 피해 보수는 커녕 정확한 피해 규모도 파악하지 못하였다. 1644년에는 두 건의 실록(춘추관 사고본 잔존분과 강화사고본 실록)을 서로 보 충하면 완질을 만들 수 있으니 배로 실어다 춘추관에 소장하자는 건의가 있었고 이에 대해 인조는 사관을 보내어 포쇄하고 두 건의 실록 중에서 없어진 책을 베껴 넣어 소장하도록 지시하였다.50) 49) 落卷은 1권 전체가 없어진 경우를 말하는 것인데 <표 2>의 밀랍 낱장이 남아 있는 실록 에 서 보듯이 낱장이 남아 있는데도 1권 전체를 필사하거나 춘추관본으로 대체한 경우도 이 글 에서는 낙권으로 처리하였다. 50) 仁祖實錄 仁祖 22年 8月 6日 辛酉조.
전주사고본 실록의 보존과 관리 227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실록의 피해가 의외로 커서 전주사고본과 춘추관 사고본 잔존분을 서로 보완하여 완질을 만들 수가 없었다. 이에 1647년 9월 춘추관은 사 관 2인을 적상산 사고에 파견하여 적상산 사고본 실록을 베껴 올 것을 요청하였 고, 인조는 흉년으로 인한 경비 조달의 어려움을 이유로 하여 1648년 가을부터 착 수하도록 지시하였다.51) 흉년이 이어져서 경비를 조달하기가 어려워 1648년에도 적상산 사고본 실록을 베끼는 일은 착수하지 못하였다.52) 1660년대에 들어서서 피해 실록의 수리와 보수가 이루어졌다. 1664년 가을 靑 粧 표지가 떨어져 나간 실록에 대해 黃粧衣 표지로의 개장이 이루어지고 겨울에 는 원래의 청색 비단 표지를 가지고 있는 실록의 제본 실을 교체하였다.53) 그러나 형지안에는 제본 실을 교체[改絲]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현재는 황장 표지로 되어 있는 실록이 있다. 1664년 개사 당시에는 청장 표지였는데 이후 상태가 좋지 않아서 황장 표지로 교체한 것으로 보인다.54) 등서작업을 하기 위해 1665년 9월 우선 실록의 상태를 파악하였고55) 10월에는 적상산 안국사에 사국을 설치하여 낙권, 낙장 실록을 등서하였다. 이상진(李尙眞) 과 최후상을 적상산 사고로 파견하여 실록 등서 작업을 관리하였고, 사수(寫手)로 삼남 지역 유생 300명, 교열에 삼남지역의 邑宰 와 郵官 31명이 동원되어 1665 년 10월 21일부터 12월 19일까지 계속되었다.56) 낙권을 등서한 때에는 밀랍 처리 를 하지 않았지만 낙장을 등서한 경우에는 밀랍 처리하였다.57) 이 때의 작업분량 51) 仁祖實錄 仁祖 25年 9月 2日. 52) 顯宗實錄 현종 5년 11월 23일 경술조. 53) 康熙三年十一月初日實錄曝晒及改樻時形止案 (奎 9550) 康熙三年九月初四日實錄曝晒及改粧時形止案 (奎 9544) 康熙三年十二月日實錄改絲時形止案 (奎 9713) 54) 1664년 改絲, 현재 황장 표지는 문종 권13, 세조 권17, 중종 권32 권65 권66 권89 권92, 명종 권18 권22 권26 권28 등 11권이다. 이 11권의 황장 표지는 1664년도의 개장 황장 표지와도 다르다. 개장 시기는 현재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 11권은 <표 3>에서 밀랍 청장 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일단은 밀랍 황장 으로 분류하였다. 55) 康熙四年九月日實錄落卷落張謄出時形止案 (奎 9552) 참조. 56) 顯宗實錄 현종 5년 11월 23일 경술조 및 7년 1월 9일 경인조 및 赤城誌 (奎 1708) 卷5 赤裳山城實錄謄校同苦錄記序. 赤裳山城實錄謄校同苦錄記序 는 奎章閣資料叢書 地理誌 篇 全羅道邑誌 10(2004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245~8쪽 참조. 赤城誌 의 赤裳山城實錄謄校同苦錄記序 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박용만 박사가 알려준 자료이다. 박용만 박사에게 감사드린다.
228 奎 章 閣 39 은 낙권 등서가 280권, 낙장 등서가 1,389장이었다고 한다.58) 낙권, 낙장 실록은 춘추관본 실록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경우에는 우선 춘추관본 실록으로 대체하고 춘추관본 실록으로 대체하지 못할 경우 적상산 사고의 실록을 등사하였다. 또한 표지를 개장, 개사하였던 1664년까지 낙권으로 파악하였다가 1665년 낙권 낙장 실록을 등서하면서 찾아낸 실록도 있었다.59) 세종실록 권149와 권155는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1665년에 필사하고 장정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책 크기는 전주사고본과 같은 것으로 보아 전주사고본을 필 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전주사고본이 남아있었고 글자를 판독할 수 있는 상태라서 전주사고본을 베낀 것으로 보인다. 전주 사고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등서작업과 함께 장정도 이루어졌고 실록의 권차를 정리하여 1666년 1월 정족 산 사고에 봉안하였다.60) 전주사고본 실록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록의 권 차에서 제외한 경우는 다음과 같다. ① 태종 권12 ② 세종 권34 권 119 권159 권163 ③ 세조 권27 권32 ④ 예종 권5 권6 권8 ⑤ 성종 권59 권62 권63 권81 권96~99(1책) 권271 권278 ⑥ 연산군 권7 권17 ⑦ 중종 권30 권61 권62 권77 권78 권91 ⑧ 명종 권8 권16 57) 현재 실록에서 낙장 등서를 조사한 결과 成宗實錄 39권까지는 補瀉 부분을 밀랍처리하였 고, 그 이후는 밀랍 처리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준비한 밀랍을 다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된 다. 58) 앞의 赤裳山城實錄謄校同苦錄記序 참조. 낙권 280권에는 전주사고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춘추관본으로 대체하거나 또는 새로 등사한 경우와 宣祖實錄, 光海君日記를 포함시키고 있 기 때문에 전주사고본 실록의 낙권 통계와는 다르다. 59) 세종 권96 권99 권125 권129 권135, 명종 권1. 이들은 1654년 이후 1664년 9월의 형지안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가 康熙五年正月十八日實錄謄出奉安後形止案 (奎 9689)에 처음으로 기 록되고 있다. 이들의 표지는 1664년 개장 표지와도 다르다. 60) 康熙五年正月十八日實錄謄出奉安後形止案 (奎 9689) 참조.
전주사고본 실록의 보존과 관리 229 세종 권119와 성종 권96~99는 전주사고본 실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등사 하였다. 세종 권119는 1665년 당시에는 부패와 오염이 심했고 성종 권96~99는 화 재로 인한 글씨 결락이 있었으며 명종 권8은 전권이 부식으로 파손[盡爲腐破]되 어 있었기 때문이다.61) 성종 권63은 전체 16장이 모두 남아 있는데, 산엽본 속에 합철되어 있다. 나머지는 낙장을 보사하면 되는데도 춘추관본으로 대체하거나 새로 등사한 경 우이다. 예를 들어 전주사고본 예종실록은 8권 8책으로 병자호란 때 권2, 권4, 권7 이 없어지고 권5, 권8은 낙장이 발생하였으며 권6은 표지가 떨어져 나가고 낙장이 발생하였다. 춘추관본 예종실록은 8권 3책(권1~2, 권3~5, 권6~8)으로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거치고도 전체가 남아 있는 경우로서 춘추관본으로 대체하는 것이 가 능하였다. 1665년 등서 작업 시 권1은 낙장을 보사하여 실록 권차에 편성하고 권 5, 권6, 권8은 낙장을 보사하지 않고 춘추관본 권3~5, 권6~8 각 1책씩을 실록 권차 에 편성하였다.62) 전주사고본 실록은 현재 황장 표지가 여러 가지이다. 개장 시기가 다르다는 것 을 보여주는 것으로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병자호란 때 표지가 떨 어져 나간 것을 1664년에 개장한 표지가 가장 많고, 등사 작업 때 새로 찾아내서 1665년에 개장한 경우(세종 권96 권99 권125 권129 권135, 명종 권1)가 있으며, 1664년에는 청장이었는데 이후 황장으로 개장한 경우가 있다. 화재나 오염으로 책 가장자리가 파손되어 책 크기를 줄이기도 하였다. 1664년 에 黃粧 표지로 개장한 성종실록과 명종실록이 대표적인 것으로 원래 크기보다 성종실록은 세로 5cm 정도, 명종실록은 세로 7cm 정도 작다. 1665년 등서 작업 때 새로 찾아낸 세종실록은 세로 2cm, 가로 1cm 정도 원래 크기보다 작다.63) 61) 세종 권119는 현재 실록 권차에서 빠져 있는데 현재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도서번호를 조정하여 다시 실록 권차에 넣어야 할 것이다. 성종 권96~99는 글씨 결락이 다소 있기는 하 지만 수리복원을 통해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명종 권8은 부패와 파손 상태가 현재에도 매우 심각하다. 62) 권1은 15장의 낙장을 보사하였다. 권5와 권6은 1장씩, 권8은 4장의 낙장만 있는데도 낙장을 보사하지 않았다. 특히 권5와 권8은 청장 밀랍본이다. 권5, 권6, 권8은 낙장을 보사하여 원형 을 살리고 실록 권차에 다시 편성해야 할 것이다. 63) 세종 권96, 99, 125, 129, 135. 명종 권1은 1665년에 새로 찾아낸 경우이지만 원래 크기이다.
230 奎 章 閣 39 4. 전주사고본 실록의 江華府史庫 보관 1) 摩尼山史庫 說 검토 1606년 실록 재간행이 끝나고 전주사고본 실록은 강화부 사고에 봉안하였다. 이에 대해 명종실록은 부록에 藏于江華之摩尼山 이라고 하고 있다.64) 마니산 사 고를 언급한 유일한 기록이다. 이 기록 이외에는 강화부 사고에 대해 摩尼山 을 명기한 기록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마니산 사고에 대해 제일 처음 언급한 연구자는 신석호였다. 임진왜란으로 전 주사고본 실록 한 질만 남아있는 상태에서 1603(선조 36)년 7월부터 1606년 3월까 지 태조대부터 명종대까지의 실록 804권을 3부씩 활자로 출판하여 춘추관, 태백 산, 묘향산 사고에 봉안하고 오대산 사고에 그 교정본을 분장하였으며 마니산 사 고에 전주사고본 실록을 봉안하였다고 하였다.65) 그러나 논문에서는 마니산 사고 에 대한 근거 자료를 제시하지 않았다. 배현숙은 마니산 사고에 대해 임진왜란 후 선조39(1606)년 적상산 사고, 태백 산 사고, 오대산사고와 함께 신설된 사고라 하나 그 설치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어 구체적인 설치시기와 장소를 찾기 어렵다. 고 하였다.66) 그러면 서도 강화의 마니산에 사각을 건립하고 봉안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마니산 사 고의 구조에 대해서는 기록도 사진도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전혀 알 수 없다. 고 하였다.67) 국사편찬위원회는 사고지 조사를 진행하여 마니산 사고 터가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덕포리 1334, 1335, 1336번지 일대(시내말)라고 하였다.68) 구체적인 64) 萬曆壬辰之變 春秋館及星州忠州分藏先朝實錄 盡爲兵火所焚 獨全州所藏獲免 移安于海州 又 移安于寧邊 又移安于江華 上命春秋館 依此本印出三件 舊件則藏于江華之摩尼山 新件則分藏 於春秋館及安東之太白山寧邊之妙香山 草本一件則藏于江陵五臺山 65) 申奭鎬, 1964 <朝鮮王朝實錄의 編纂과 保管> 한국사료해설집 21쪽. 66) 裵賢淑, 1979 <江華府史庫 收藏本考> 奎章閣 3(서울대학교 도서관) 85쪽. 67) 裵賢淑, 2002 朝鮮實錄硏究序說 118쪽 참조. 여기서 배현숙은 1605년 10월 경기감사 李廷龜가 도내를 물색하여 사각 건립 후보지가 5,6 처 있다고 보고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사각 건립 후보지에 대한 보고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록의 기사 내용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주사고본 실록의 보존과 관리 231 지번까지 명기한 유일한 조사보고이다. 이 조사보고서는 이곳이 마니산 사고지라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시내말이라는 동네가 서재곡 또는 서재꼴 이라고 하였고 실록을 보관 하였던 집이 있었다는 주민의 증언을 제시하였다. 둘째, 마니산의 齋宮이 이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태종대 이후 비어 있었 던 齋宮을 사고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태종 때 齋宮을 사고로 사용했던 예 가 있었고 전후 국가재정이 어려워서 사고를 신축하기보다는 기존건물을 이용하 였을 것이라는 이유를 들고 있다. 여기에다 지표 조사에서 조선시대 토기파편이 다수 발견되었기 때문에 마니산 사고지로 보아도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 조사보고서에 마니산 사고지 위치가 표시 된 지도, 마니산 사고지 돌담 사진 1장, 마니산 사고지 초석 사진 1장도 함께 싣고 있다.69) 그러나 강화군 화도면 덕포리 1334, 1335, 1336번지 일대 에 마니산 사고가 있 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문헌기록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를 토대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우선 화도면 덕포리 시내말에 마니산 齋宮이 있었다는 것은 추측일 뿐,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설령 재궁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태종 때에 높은 지대로 옮겨갔다면 200년 가까이 비어 있었을 것인데 200년 가까이 비어 있던 목조건물 68) 鄭泰憲, 1986 <江華史庫의 沿革과 史庫址現況> 史庫址調査報告書 (국사편찬위원회) 74~ 90쪽. 2004~5년 몇 차례의 현지 답사 끝에 확인한 마니산 사고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18번 군도로 길상면 온수리에서 화도면 사무소(마니산 국민관광지 입구)를 향해서 가다가 德浦里 라는 이정표가 나오는데 이곳을 지나 50미터 쯤에서 좁은 포장 농로로 좌회전해서 조금 들어가면 구 마니산초등학교(현 한국강화문화예술원) 오른쪽이 된다(덕포리 이정표에서 좌회전해서 구 마니산초등학교를 찾아 들어가도 된다.). 마니산초등학교가 끝나는 지점에서 농로가 세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오른쪽 길을 따라 가야 한다. 서재꼴 또는 서재곡이라는 동네를 지나 서 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에 벽돌 양옥이 나오고 거기서 왼쪽으로 비포장도로를 따라 가서 하얀 목조 2층집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반파된 2층 붉은 벽돌 건물과 삽살개가 지키고 있는 민가 한 채가 나오는데 민가 왼쪽에 요즘 만든 마니산 사고지 라는 엉성한 팻말이 세 워져 있다. 69) 지표조사 외에도 발굴 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현재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전주사고본 실 록 중에는 병자호란 때의 피해로 추정되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간혹 흙 이 묻어있 는 경우도 있다. 이 흙과 덕포리 1334, 1135, 1336번지의 흙의 성분을 비교 분석하여 같은 흙인지를 파악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는 잘 모르겠다.
232 奎 章 閣 39 이 과연 사고로 쓸만 하였을지 의문이다. 비어있는 재궁이 사고로 쓸 만한 건물이 었다고 하더라도 단 한 질밖에 남지 않은 전주사고본 실록을 사관이 관리하기가 매우 불편한 외진 곳에 보관한다는 것을 납득하기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서재곡 이라는 동네의 이름을 한자로 書齋谷 으로 표기하고 이 서재곡에 書齋 가 있었 던 것으로 추측하면서 書齋 를 사고의 또다른 표현으로 이해하고 있다. 현지 주 민들이 서재곡 또는 서재꼴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한자로 書齋 라고 썼을지는 의 문이다. 재궁이 있는 서쪽 동네 라는 의미에서 西齋谷 으로 썼을 가능성이 더 크 다. 무엇보다도 마니산 사고를 신축하였다는 기록이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국 사편찬위원회의 조사보고서는 전후 재정 궁핍 때문에 마니산 사고를 신축하지 않 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재간행된 실록을 보관할 오대산과 태백산 사고를 신 축하면서, 1질밖에 남지 않은 실록 원본을 보관하는 강화부 사고는 200년 넘게 비 어있던 건물을 수리해서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신축하지 않고도 사고로 쓸 수 있는 건물로 사관이 관리하기 편리한 위치에 강화부 사고 를 두었 을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2) 강화부 사고의 실체 해주에서 강화로 실록을 옮겨온 1595년에는 강화부 객사 또는 관청 건물을 사 고로 썼던 것으로 보인다.70) 1603년의 강화부 사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아직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 고의 서책을 강화에서 운반해오는데, 실록 100권이 우선 올라오고 그 나머지는 본 부에 남아 있다. 고 하였고 또한 강화에 수직하는 사관이 있다고 한 실록 기사가 있다.71) 마니산 사고 라는 표현은 전혀 쓰지를 않고 강화 또는 본부 라는 표현 을 쓰고 있는 것, 그리고 사고를 수직하는 사관이 파견된 것으로 보아 1603년에도 이전처럼 강화부 객사를 사고로 썼을 가능성이 크다. 1606년 실록 인출이 끝나고 각 사고에 실록을 봉안할 때의 기록을 보면 강화사 고에 대해서만 江華史閣 또는 江華 로 표현되고 다른 지역의 세 사고는 모두 70) 宣祖實錄 선조 28년 11월 3, 7일조. 71) 위의 책 선조 36년 8월 3일 丙戌조.
전주사고본 실록의 보존과 관리 233 太白, 五臺, 香山 등으로 표현하여 구체적인 산 이름을 쓰고 있다.72) 물론 명종 실록 부록에서 舊件則藏于江華之摩尼山 이라고 기록하고 있긴 하지만, 선조실록 에서는 舊件則仍藏于江華 이라고만 하였다. 이보다 앞선 1605년 10월 강원감사 윤수민은 실록을 봉안하기 위해 오대산 지 역을 조사하여 상원사에 임시 봉안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73) 이 기사에서도 五臺 山 과 上院寺 라는 표현을 확인할 수 있다. 경상감사 유영순은 太白山則立峯之 下 幽邃之地 에 사고를 짓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다.74) 이에 비해 강화부 사고 는 1605년에 기존 건물을 수리하였다고만 하고 마니산 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 다. 강화,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등지에 4개의 史庫를 둔 1606년 이후에도 강화 사 고 형지안에 마니산 이라는 산 이름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정족산 사고 이 전 강화부 사고의 형지안은 모두 7건으로 摩尼山史庫 라는 표현은 한번도 나오 지 않고 江華府史庫, 江華史庫, 史庫 라는 표현만 나온다.75) 정족산 사고의 경우 42개 형지안 중 35개 형지안의 표지에 鼎足山 이라는 표 현이 나타난다.76) 강화부 사고 보다는 정족산 사고 라는 생각이 더 강하였음을 72) 江華史閣 上年已爲修建 太白五臺及香山等處史閣 亦幾畢云( 宣祖實錄 선조 39년 4월 28일 丙寅). 實錄今已奉審分類 舊件則仍藏于江華 新印三件 分藏春秋館及平安道香山 慶尙道太白山 傍本 一件 卽是草本 而今無地庫可藏 虛棄可惜 藏於江原道五臺山宜當( 宣祖實錄 선조 39년 5월 7일 甲戌조) 73) 宣祖實錄 선조 38년 10월 8일 己酉조. 74) 宣祖實錄 선조 38년 10월 13일 甲寅조. 75) 萬曆三十一年癸卯十月十八日京畿道江華府史庫曝曬形止案 (奎9485, 1603년) 萬曆三十四年丙午六月初三日京畿道江華府史冊奉安形止案 (奎9467, 1606년) 萬曆三十九年辛亥五月初二日京畿江華府史庫曝曬形止案 (奎9664, 1611년) 萬曆四十五年丁巳二月十五日京畿江華府史庫曝曬形止案 (奎9661, 1617년) 崇禎二年己巳四月十五日江華府史庫曝曬形止案 (奎9443, 1629년) 崇禎六年癸酉七月二十六日史庫曝曬形止案 (奎9443, 1633년) 順治十一年十月日實錄奉安後形止案 (奎 9545, 1654년) 76) 해당 형지안의 규장각 도서번호와 연도는 다음과 같다. ① 史閣: 奎9544(1664년), 奎9601(1677년), 奎9421(1728년) ② 史庫: 奎9283(1698년), 奎9365의 2(1699년) ③ 정족산, 정족산성, 정족산사각, 정족산성사고 등: 奎9607(1691년), 奎9616(1706년), 奎 9359(1709년), 奎9619(1712년), 奎9614(1717년), 奎9493(1721년), 奎9615(1724년), 奎9307(1742 년). 이하 1742년부터 1906년까지의 형지안 27종은 표지에 모두 정족산 표현이 들어 있다.
234 奎 章 閣 39 알 수 있다. 이외에도 1629년 宗簿寺는 실록에 못지않게 중요한 璿源錄이 단지 1건만 江華 府 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면서 선원록을 더 등사하여 江陵 이나 太白山 에 소장 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77) 이 건의에 의해 선원록 필사작업이 7월에 끝나자 종부 시는 寶牒 도 등사하여 五臺 와 太白 에 분장할 것을 건의하면서 寶牒 의 정 본 1건이 江華 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였다.78) 강화,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에 4개 의 지방 사고를 둔 시점에서도 마니산이라고 쓰지 않고 그냥 강화라고 쓰면서 다 른 지역은 산 이름을 쓰고 있다.79) 다른 사고의 형지안에 鼎足山, 五臺山, 太白山, 赤裳山 등의 표현이 있음 에 비해 1606~60년 시기의 강화 사고의 형지안에서 마니산 이라는 표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실록 등의 자료에서도 마니산 재궁을 수리하여 사고로 썼다 는 기록도 나오지 않고 1603년, 또는 1606년에 강화부에서 마니산으로 사고를 옮 겼다는 기록도 없다. 반면 영변의 경우 짧은 동안이지만 묘향산 보현사와 영변부 객사에 사고를 두 었는데 당시의 실록형지안은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1599년의 실 록포쇄형지안의 권두에는 平安道寧邊地香山 이라고 표기하고 있고, 1601년의 형 지안의 권두에서는 平安道寧邊府 라고 표기하고 있다.80) 형지안의 권두 서명에 서 묘향산과 영변부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형지안은 사고의 위치를 비교적 정확하게 표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화의 경우 1606년 마니산에 사고를 두었다고 한다면 1606년, 1611년, 1617년, 1629년, 1633년, 1654년의 형지안에 강화부 대신 마니산 등의 표기가 들어있어 ④ 지명 또는 사고 표시를 하지 않은 형지안: 奎9550(1664년) ⑤ 江華 : 奎9353(1687년) 77) 仁祖實錄 인조 7年(1629) 閏4月 7日 壬戌조. 78) 仁祖實錄 인조 7年 7月 21日 甲辰조. 79) 규장각에 남아있는 오대산과 태백산 사고의 포쇄형지안 중 1660년 이전 형지안을 보면 오대 산 사고 형지안 15건 중 5건을 제외한 10건에 오대산 이라는 표기가 들어 있다. 태백산 사고 형지안은 14건 중 1건에만 慶尙道奉化太白山 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오대산과 태백 산의 경우에는 실록 등 다른 자료에서 이미 오대산과 태백산에 사고를 신축한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강원도 사고, 경상도 사고 등으로 표기한다고 해도 자연적으로 오대산 사고, 태 백산 사고를 의미하게 된다. 80) 奎10003(1599년), 奎10005(1601년)
전주사고본 실록의 보존과 관리 235 야 할 것이다. 1606~60년 시기 마니산 사고로 표기되지 않은 강화부 사고를 구태 여 마니산 사고로 볼 이유가 없다. 읍 소재지 강화부의 관청 건물을 사고로 썼을 가능성도 있다. 1595년 해주에서 실록을 옮겨왔을 때 객사 등에 보관하였던 사실 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5. 맺음말 전주사고에 소장되었던 실록 으로 시각을 맞춘 결과 태조~명종 실록에 대해 몇 가지 새로운 서지학적 내용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전주사고본 실록은 806권 577책이었지만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1권이 없어져서 805권 576책으로 쪽염색 비단 표지에 내지를 밀랍처리하였다. 임진왜란 때 3질이 불타 없어지고 1질만 남았지만 1636까지는 간행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가지고 있 었다. 임진왜란 당시 난리를 피해서 안전한 장소로 몇 번이나 옮겨 다녔지만 물에 젖거나 진흙에 오염되거나 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건물 밖으로 내팽개쳐져 불태워지면서 낙권, 낙장, 파장, 표지 결락 등의 피해를 입었고 빗물로 인한 부패, 진흙의 오염 등으로 훼손되었다. 전주사고 본 실록 805권 중 159권만이 낙권, 낙장, 파장, 표지 결락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 고, 19권은 낙장, 224권은 표지 결락, 191권은 표지결락과 낙장 등의 피해를 입었 다. 212권은 낙권으로 처리되었다. 낙권, 낙장, 표지 결락 등은 1664~6년에 수리 보수되었다. 그 결과 전주사고본 실록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모습을 갖게 되었다. ① 청장 밀랍, 낙장 無: 159권 ② 청장 밀랍, 낙장 보사: 16권 ③ 청장 밀랍, 낙장 有: 3권 ④ 황장 밀랍, 낙장 無: 224권81) ⑤ 황장 밀랍, 낙장 보사: 172권82) 81) 224권에 포함된 성종 권63은 현재 낱장 묶음에 들어 있으므로 표지가 없는 셈이다. 82) 성종 권39까지는 보사한 낱장도 밀랍으로 처리하고 그 이후는 처리하지 않았다.
236 奎 章 閣 39 ⑥ 황장 밀랍, 낙장 有: 20권83) ⑦ 밀랍 낱장 묶음 낙장이 있지만 보사하지 않은 실록 23권은 지금이라도 보사하여 원형을 살릴 필요가 있다. 밀랍 낱장 묶음의 경우에도 복제 시 원래의 판형을 복원하는 데 유 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낙권 211권은 적상산 사고 실록을 등사하여 보충하거나 춘추관본으로 대체하였 기 때문에 이 211권은 전주 사고본으로 볼 수 없다. 빗물로 인한 부패와 훼손은 1640년대 이후 지금까지도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 부패와 훼손의 시기와 원인을 알게 되었으므로 밀랍본 실록의 보존처리 연 구에도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전주사고본 실록이 강화도로 옮겨진 이후 그 보관처가 강화부 객사, 마니산 사 고, 정족산 사고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마니산 사고의 설치가 자료를 통해 확 인되지 않을뿐더러 마니산 사고터라고 보고된 장소가 사고를 두기에 적합하지 않 은 것으로 보아 마니산 사고설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마니산보다는 강화부 안에다 건물을 마련하여 사고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83) 이 20권에는 문종 권9를 포함시켰기 때문에 ①~⑥을 합하면 806권이 된다. 문종 권9는 현재 2책이 있는데 1책은 낙장을 보사한 황장 밀랍본이고 1책은 낙장이 있는 황장 밀랍본이다.
237 전주사고본 실록의 보존과 관리 <표 2> 전주사고본 실록의 현재 상황 밀랍 靑粧 왕 落張 없음 태 1,3 조 밀랍 黃粧 落張 있음 6 落張 없음 4,9,14,15 落張 있음 12 2,5,7,8,10,11, 13 정 4,6 종 5 2,3,8,10,14,15, 태 17,23,24,25, 종 26,27,34,35,36 1,7,9,19,20,21,30,33 5,12,13,31,64 4,6,11,16,18,2 2,2932 4,7,10,14,16,18,22,32,35,37,38,39,42,45,47,48 세,49,53,57,63,66 36 종,68,70,73,74,13 7,141,143,148, 151,154,160,16 1, 3,9,11,12,13,15,17,19,20,21,23,24,25,28,29,31,33,40,41,46,54,59,60,62,64,71,72,93,104,105,107,1 09,114,119,122,126,127, 133,136,138,139,140,14 2,145,147,150,152,153 8,34,43,44,50,51,52, 55,61,65,67,69,75,77,80,85,92,94~97,99~ 103,106,108,111,112,116~118,120,121,12 3~125,128~132,134, 135,144,146,157,159,162,163 목, 1,2,5, 6,26,27,30,56, 58,76,78,79,8 1~84,86~91,9 8,110,113,115,149,155,156, 158 문 2,3,5,6,10 종 1,4,7,8,9,12,13 단 4,5,8,12,14 종 3 2,6,9,10,11,13, 비고 (밀랍 낱장이 남은 실록) 落卷 1,2,3 52,56,61,67,69,75, 76,77,80,92,94,95, 97,98,100,102,106, 108,111,115,116,1 20,123,124,125,12 9,130,131,132,134, 135,136,146,158. 권수 불명 8장. (34,159,163) 9(파장 14장) 1 7 1 3,7,8,11,31,34, 세 35,41,42,43,44, 2 조 47,48 1,4,5,9,10,12,14,16,27,3 13,17,27,32 6,37,38,39,40,46,49 6,15,18~26,28 13,15,17,19,23,25 ~30,33,45 예 종 3 1,6 2,4,7 2,7 4~10,16,17,18,29,32, 39,44,48,51,52,55,56,59,62,74,81,82,143~ 149,163,173,174,182,205,225,226,227,24 0,262,264,265,271,2 78,280,285~288 11~15,20,21,2 2,30,34,35,40 ~43,46,49,50, 64~67,69,80,9 1~95,100~13 1,156,157,160,161,162,175, 176,177,190~ 198,206~211, 228,229,254,2 55,256,263,27 2,273,274,277,279,281~284, 292,293,294 목,4,15~7,22,29, 30,35,40,44,46,47, 50,69,80,91~94,14 4,173,175,240,263, 272,273,277,278,2 79. (63) 5,8 57,58,77,78,79, 83,84,88,89,90, 136~142,158,1 59,170,171,172 성,178,179,180,1 종 84~189,199~20 4,212~217,230 ~233,241~253, 266,267,268,29 5,296,297 1,2,3,19,23,24~28,31,33,36,37,38,45,47,53,54,60,61,63,68,70~73,75,76,8 5,86,87,96~99,132~135, 150~55,164~169,181,18 3,218~224,234~239,257 ~261,269,270,275,276,2 89,290,291 연 산 1,4,7,8~13,15,16,17, 3,5,6,14,20,27 3,5,6,7,12,13,19,20 2,18,23~26,32~36,44,50 19,21,22,37,45,46,48 ~31,38~43,47,31,51,53,54,57,58,59,61,62,52,,49,55,56,60,63
238 奎 章 閣 밀랍 靑粧 왕 落張 없음 39 밀랍 黃粧 落張 있음 落張 없음 落卷 落張 있음 비고 (밀랍 낱장이 남은 실록) 2,4,6,7,10,16,24,27,3 9,13,2 1,3,8,14,15,17 0,35,37,43,44,45,50, 5,68,7,21,22,23,26,3 5,18,20,32,36,40,41,47,4 11,12,19,28,29, 7,14,16,24,61,75,7 51,53,54,55,57,59,61 2,85,9 중 1,42,49,56,73, 8,58,60,64~66,88,89,92, 33,34,38,39,46, 9,86,103,62,69,70,71,74,77,7 1,97,9 종 75,79~82,86,8 93,102 52,63,67,76 8,83,84,90,94,95,96, 8,99,1 7,100,105 103,104 01 인 종 1,2 명 15,21,25 종 9 3,6,12,17~20,22,24,27,2 1,2,4,5,7,8,10,11,13, 23 8,30,31,34 14,16,26,29,32,33 4,8,13,23,33 밀랍 낱장이 남아 있는 실록은 왕별로 한 책씩 묶여 있다. ( )의 실록은 낱장이긴 하지만 비교적 장수가 많이 남아있는 경우로서 성종 권63은 16 장 전체가 남아 있다. 논문투고일(2011.10.31), 심사일(2011.11.27), 게재확정일(2011.11.30)
전주사고본실록의보존과관리 239 Abstract The Preservation and Management of the Veritable Records from the Jeonju Repository Lee Sang-chan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investigate the changes the copies of the veritable records (sillok) that up until 1592 had been stored in the Jeonju repository underwent after that date. Information about these changes will be helpful for the conservation, restoration, reconstruction and preservation of the veritable records. The veritable records spanning the periods from King Taejo to King Myeongjong s reigns originally comprised four sets, each containing 806 fascicles in 577 volumes, with silk covers dyed indigo and pages covered in wax. By 1600 already one fascicle had disappeared, leaving 805 fascicles in 576 volumes. In 1592 three sets were completely destroyed, leaving only the Jeonju repository set, which had to be moved several times in search of a safe storage place. Despite being moved several times, the books were not damaged by water or mud, and until 1636 remained in the same condition as at the time they were published. In 1636, because of a fire started by the invading Qing armies, 211 fascicles were completely destroyed while 435 fascicles had missing or torn pages or missing covers. Only 159 fascicles out of 805 maintained their original condition. Also, this time many volumes were affected by mud damage and decay after some books had been stained by rain. This damage was repaired between 1664 and 1666. As a result, the volumes of the veritable records from the Jeonju repository after 1666 exist in many different states: some retained their original form, some had missing pages copied and reinserted, some had only their cover repaired, some had the cover repaired and missing pages copied and reinserted, and in some cases the missing pages were not replaced but simply left
240 奎章閣 39 out of the fascicle order with the remaining loose pages simply bound together. Damage and decay because of rainwater has not been adequately treated from the 1640s till the present. Now that the time and cause of damage and decay has been ascertained, it is expected that this will contribute towards the research on the conservation of the wax-covered veritable records. It is known that the veritable records from the Jeonju repository were stored at the Mani-san repository on Ganghwa island between 1606 and 1660. However, the layout of the Mani-san repository cannot be ascertained through records, and the place that is nowadays thought to be its original location is not suitable for the establishment of a repository. It is more likely that a building inside the Ganghwa prefecture seat was used as a repository. Keywords: Veritable records (sillok), Jeonju repository, Mani-san repository, restoration, conserv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