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원논문집 ( 인문 사회과학편 ) 제 51 집 2 호 (2012) 25-57 일제강점기하천개수의식민지적성격 허수열 * 초록.,.,...,,,, 1/3,.,.., 95.5%, 98.3%. - 25 -
2 허수열.,. 3.4.. 1925, 1926,,,,. -,,.. :,,,, 차 례 Ⅰ - 26 -
일제강점기하천개수의식민지적성격 3-27 -
4 허수열 Ⅱ 일제강점기하천개수사업의전개 - 28 -
일제강점기하천개수의식민지적성격 5 [ 그림 1] 일제강점기의하천조사및하천개수정책개요 - 29 -
6 허수열 - 30 -
일제강점기하천개수의식민지적성격 7 [ 그림 2] 치수관련조선총독부예산액 - 31 -
8 허수열 이와 같이 1925년 이후 조선총독부가 상당히 큰 규모의 치수사업비를 투하하여 하 천개수에 착수하면서 조선의 하천도 크게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하천개수 시공방법상으로는 치밀한 조사를 토대로 각 하천별로 가장 적합한 공법이 적용되었다. 압록강 하류부분이나 청천강과 대령강의 하류부분 개수사업의 경우에는 수 제공(水制工)이나 배할제(背割堤)와 같이 하천의 흐름을 통제하는 방법이 대대적으로 채택되었다. 이 중 청천강과 대령강 하류부분의 개수사업을 살펴보면 [그림3]과 같다. [그림3] 청천강 및 대령강 하류부의 배할제와 호안수제 <주> 그림 속의 기호는 다음을 의미한다. ① 고덕면 호안수제 ② 대흥동 호안수제 ③ 가남면 폐쇄공(締切工) ④ 배할제(背割提) ⑤ 노안리 사석수제 ⑥ 우도 사석도수제(捨石導水堤) ⑦ 중흥리 호안수제 ⑧ 장도 사석수제 ⑨ 덕안면 호안수제 ⑩ 유초동 호안수제 <자료> 조선총독부 토목과 문서철 (관리번호 CJA0014957, 538쪽) 나중에 살펴 볼 만경강 개수사업과는 달리 축제공사 혹은 호안공사는 일부에 그치 고 수제공들이 광범하게 설치되는 것에 특징이 있다. 특히 대령강이 청천강에 합류하 는 지점에 설치된 배할제는 어느 한쪽의 강물이 크게 불어나 다른 하천으로 역류해 들 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수제공이다. 이러한 각종 수제공의 설치와 더불어 유심 (流心)이 그림의 점선과 같이 제어됨으로써 하안(河岸)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하천개 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 32 -
일제강점기 하천개수의 식민지적 성격 9 그러나 위와 같은 수제공에 의한 하천개수는 다소 예외적이고, 축제공사와 호안공 사에 의해 하천을 개수하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다. 앞으로 살펴 볼 만경강개수가 전형 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하천의 사행(蛇行)이 심한 만경강과 같은 하천에 대 해서는 범람을 막기 위한 축제공사와 더불어 개수된 하천 중 침식이 예상되는 지점에 호안석축이 설치되었으며, 직강화(直江化)를 위한 첩로(捷路, shortcut) 공사 방법이 대대적으로 채택되었다. 또 제방 곳곳에 배수문과 양수장 및 잠관(潛管)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배수문이나 잠관 등과 같은 특수시설은 대부분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졌고, 문짝은 철제로 제조되었다. [그림4] 드래그라인 굴착기와 서련식 굴착기 <자료> 朝鮮總督府, 朝鮮直轄河川工事年報 1928년판의 화보에서 가져 왔다. 공사는 인력으로 굴착하고 지게로 나르는 재래적 운반법이 널리 사용되었지만, 동 시에 근대적인 기계와 기구를 사용하는 방법이 도입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굴착의 경 우에는 드래그라인(dragline)이나 서련식(鋤鏈植) 굴착기가 도입되고, 운반에는 미국 위트콤(Whitcomb)사의 가솔린 기관차나 디젤기관차 등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림 4]의 왼쪽은 재령강개수에서 사용된 드래그라인 굴착기이고, 오른쪽은 낙동강개수에 서 사용된 서련식 굴착기이다. 만경강개수의 경우에도 초기에는 드래그라인 굴착기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 인력으로 굴착한 경우라도 레일 위에서 토운차(土運車, 즉 토 사운반차)로 운반하는 방법이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이 모두가 조선의 재래 토목기술 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근대적 공사방법이었다. - 33 -
10 허수열 Ⅲ 만경강개수공사개요 - 34 -
일제강점기하천개수의식민지적성격 11 [ 그림 5] 만경강개수공사평면도 - 35 -
12 허수열 < 표 1> 만경강개수사업의주요공사내역 - 36 -
일제강점기하천개수의식민지적성격 13 < 표2> 만경강개수비 (1925 35년합계, 단위 : 엔 ) - 37 -
14 허수열 45,000 40,000 35,000 30,000 25,000 20,000 15,000 10,000 5,000 0 4 월 5 월 6 월 7 월 8 월 9 월 10 월 11 월 12 월 1 월 2 월 3 월 [ 그림 6] 직영공사용역인부월간출역수 -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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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허수열 Ⅳ. 이리토목출장소의 직원 만경강개수공사는 이리토목출장소에서 담당하였는데, 이 출장소의 직원명단은 만 경강개수공사지에서 알 수 있다. 단 여기서 직원이라 함은 技師, 技手, 屬, 雇員에 한 정되며, 사무계와 공사계로 양분되어 기재되어 있다. 만경강개수 공사지에 나오는 직 원들 중에서 공사계만 뽑아서, 1939년에 발간된 조선기술가명부 와 연결하여 그 출 신학교에 대한 정보를 덧붙여 작성한 것이 <부표2> 이리토목출장소 공사계 직원 명부 이다.14) 이 표를 보면 공사계 직원은 1925년 25명이던 것이 점차 증가하여 1935년에는 34 명이 된다. 소장은 기술계 직원인 기사가 맡았는데, 1925 32년에는 카와사와 아키마 사(川澤章明), 1933 35년에는 타케이 군지로(武居軍次郞)였고, 모두 동경제대 출신 이었다. 공사주임 역시 기사로서 마치다 요시토모(町田義知, 1925 27년), 반 카쿠오 (伴格夫, 1928 31), 츠지카와 카츠오(辻川勝雄, 1932 33), 카츠바라 코우조우(勝 原享三, 1934 35) 등이 역임하였는데, 마치다 요시토모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제 국대학(東京帝大, 京都帝大) 출신이었다. 동경제대 혹은 경도제대 출신은 처음부터 기수로 입직하여 3년 후에는 기사로 승진 하였다. 예컨대 1925년에 경도제대를 졸업한 伴格夫는 1927년까지 경성토목출장소의 기수였지만, 1928년 기사로 승진하여 평양토목출장소를 거쳐 이리토목출장소로 전근 해 왔다. 또 1929년에 동경제대를 졸업한 辻川勝雄는 1932년에 평양토목출장소에서 기사로 승진한 후 이리토목출장소로 전근해 왔으며, 1929년에 동경제대를 졸업한 키 쿠치 신키치(菊地新吉) 역시 1929년에 기수로 임관되어 이리토목출장소로 전근되어 왔다가 1932년에 기사로 승진하여 평양출장소로 전근 나갔다. 소장이나 공사계주임은 기사 보직이기 때문에 기수에서 기사로 곧장 승진해 올라갈 수 있는 제국대학 출신자 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제국대학 이외의 대학졸업자와 고등공업학교 졸업자들은 기수보다 한 단계 낮 은 고원으로 입직하여 기수로 승진해 나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컨대 일본대 출신인 14) 朝鮮工業協會 編, 朝鮮技術家名簿, 1939. 이하 본문에서 언급되는 개인의 이력 정보는 국사편 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에서 가져왔다. 원 자료는 다음과 같다.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 각 연도판 ; 大韓民國 蹇國十年誌刊行會 [編], (大 韓民國) 建國十年誌, 1956 ; 대한연감사, 大韓年鑑 1955년판 ; 國會公論社 編, (大韓民國)行 政幹部全貌, 1960. - 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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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허수열 Ⅴ 청부제도 - 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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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허수열 이 전부였다. 사실상 일본인 청부업자가 전부 다 납품하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만경강개수공사의 경우, 청부공사에서도 또 공사용 각 종 기계기구의 구입이나 공사용 각종 재료의 납품에서도 조선인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 다. 전형적인 이중구조 경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Ⅵ. 만경강개수와 민족별 수혜 하천개수는 홍수방지, 관개개선을 통해 농업생산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수륙교 통을 향상시키는 등 하천인근의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보통이다. 만경강 개수사업 역시 그러하였다. 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 는 전주평야에 대해, 전라도 중에서 가장 큰 평야로서 만 경, 부안 두 강 및 그 지류의 연안지방 즉 고산, 익산, 전주, 옥구, 임피, 고부, 부안, 김제의 여러 군에 걸쳐, 만경강 유역에 43,772정보 (답 36,491.6정보, 전 7,280.4정 보), 부안강 유역에 21,730정보 (답 14,859.4정보, 전 6,870.6정보) 의 경지가 있으 며 요컨대 이 평야는 남한에서 주요한 농업지로서 각종 작물의 재배에 적합하고 수륙운수 역시 편리하다 고 하였다.16) 이러한 대농장경영에 유리한 입지적 조건에 주목하여 노일전쟁 이후 일본인 농사경 영자들이 대거 진출해 오게 되고, 수리조합 설립 움직임도 활발해지게 된다. 1906년 에는 수리조합조례 가 제정되었고, 1908년에는 수리조합설립요령 및 수리조합 모범 규약 이 제정되어 수리조합 설립에 따르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고 그 설립을 유도하였 다. 이 과정에서 처음으로 인가 받은 수리조합은 1908년에 설립인가된 옥구서부수리 조합이었다. 1909년에는 임익, 임피중부, 임익남부수리조합이, 1910년에는 전익수리 조합이, 그리고 1911년에는 임옥수리조합이 만경강 북안을 따라 삼례로부터 만경강 하구에 이르는 구간 전체에 걸쳐 설립되었다. 1920년에 임익남부수리조합과 임옥수리 조합이 합병되어 임옥수리조합이 되었고, 1941년에는 이들 모든 수리조합이 전북수리 조합이라는 거대 수리조합으로 통합된다. 한편 만경강 남쪽 즉 만경강과 동진강 사이의 지역에서는 1925년에 동진수리조합 이 설치되었다. 동진수리조합은 섬진강 상류에 댐을 막아 운암저수지(현재의 옥정호) 16) 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 ; 慶尙道 全羅道, 民俗苑(영인판), 1992, 173-174쪽. - 44 -
일제강점기 하천개수의 식민지적 성격 21 를 축조하여 거기에서 취수한 물을 동진강 쪽으로 흘려보냄으로써 수원 문제를 해결하 였다. 한편 동진수리조합이 설립되기 이전인 1916년에 동진강 지류인 고부천에 고부 수리조합이 설치되었다. 고부수리조합, 동진수리조합 그리고 1930년에 설치된 영원수 리조합은 1942년 동진수리조합으로 통합된다. 이리하여 1940년대 초가 되면, 만경강 북쪽의 평야지대에는 전북수리조합, 남쪽 평야지대는 동진수리조합이라는 양대 수리 조합이 자리 잡게 된다. 이처럼 호남평야 특히 만경강 연안 지역은 일찍부터 일본인 농사경영자들을 중심 으로 수리조합 설립 움직임이 활발하던 곳이었다. <표3>은 1931년말 현재의 전라북도 의 수리조합 명단이다. 익옥, 동진 등의 수리조합은 몽리면적이 1만 정보를 상회하는 거대수리조합이었다. 고부와 임익도 그 몽리면적이 3천 정보를 넘어서고 있었다. 만경 강 연안에 설치된 수리조합은 옥구서부수리조합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인 소유지의 비 율이 80%에 육박하는 사실상 일본인 수리조합이었다.17) 만경강 남쪽의 동진수리조합 과 고부수리조합에서도 조선인 소유지의 비율은 36%와 21%로 매우 낮았다. 조선인 이 주축이 되는 수리조합은 그 규모가 훨씬 작은 것들이었다. <표3> 전라북도의 수리조합 조합명 옥구서부 임익 전익 고부 익옥 용진 적성 동진 왕궁 영원 조촌 망우 광석 설립 연도 1908 1909 1910 1916 1920 1922 1925 1925 1930 1930 1930 1931 1931 1931년 몽리면적 490 3,343 1,445 4,323 10,108 170 150 18,500 373 148 199 48 30 (1931년말 현재, 몽리면적 단위 : 정보) 면적 비중(%) 1935년 일본인 조선인 불량정리 34 60 35 20 56 24 35 21 53 13 13 76 을 36 64 64 36 12 88 <주> 회색으로 표시한 수리조합은 모두 만경강 북쪽에 위치하는 수리조합이다. <자료> 朝鮮總督府, 朝鮮土地改良事業要覽 1931년판에서 작성. 17) 대부분의 수리조합에서 일본인소유 비중과 조선인소유 비중을 합해도 100%가 되지 않는 까닭은 회사나 공동으로 소유하는 경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경지 중에서 일본인소유지가 얼마나 되 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일본인 농장들이 1930년대가 되면 개인농장을 회사형태로 전환시 키는 사례가 많았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 차이는 대부분 일본인소유토지라고 보아도 좋을 것 이다. - 45 -
22 허수열 또 1925년 현재 만경강 연안의 김제, 옥구, 익산, 전주 등의 4개군에서 30정보 이 상의 토지를 소유하는 일본인지주의 경지면적을 군별로 집계해 보면 <표4>와 같다. 일 본인지주의 소유지 면적은 약 2만 6천 정보에 달하였는데, 그 중 82%에 해당하는 2만 1천정보 가량이 논이었다. 그리고 일본인 소유지는 이들 4개군 중에서도 특히 익산군 과 전주군에 집중되어 있었다. <표4> 만경강 연안 4개군의 일본인지주의 소유면적 군별 합계 (단위 : 정보) 김제군 옥구군 익산군 전주군 합계 답 4,171.8 3,015.6 5,821.3 8,414.2 21,422.9 전 524.6 114.0 626.7 876.6 2,141.9 소계 4,696.4 3,129.6 6,448.0 9,290.8 23,564.8 <주> 30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는 지주를 대상으로 집계하였다. <자료> 朝鮮總督府, 朝鮮の農業 1925년판에서 작성. 기타 345.3 480.8 1,029.5 661.5 2,517.1 합계 5,041.7 3,610.4 7,477.5 9,952.3 26,081.9 1927년 2월 23일자 김제군의 참상 이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김제군에 서는 지난 20일 오전 10시부터 동 군청 회의실에서 면장회의를 열고 신임 군수 李基 枋씨 사회 하에 각 면장의 관내 상황 보고가 있었는데, 그 보고의 내용을 들으면 대개 가 궁농의 생활상황이 실로 참담하다는 것 인 바, 이 기사 중에서 만경강을 끼고 있는 면의 사정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백구면장(白鷗面長) : 주민의 약 85%가 소작농인 바, 소작료가 실제로 5할 내지 6 할에 달하므로 그들 대부분은 소작료를 납부하는 날 곧 절량이 되는 형편이며, 특히 음료수가 부족하여 큰 문제입니다. 공덕면장(孔德面長) : 군내 17면 중에서 극빈면인 동시에 面內人의 소유지가 25% 에 불과함으로 1개 소작면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私塾이 있습니다마는 유지 방침이 서 지 못한 까닭에 아동교육에 큰 유감입니다. 청하면장(靑蝦面長) : 우리 면 公普校(공립보통학교)의 학년 연장이 못된 것이 유감 입니다. 그러나 생활난으로 배우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퇴학생이 생겨서 걱정입니다. 진봉면장(進鳳面長) : 경지면적 2천 여 정보 중 7할 이상이 多木農場의 소유이며, - 46 -
일제강점기 하천개수의 식민지적 성격 23 소작료가 비싼 관계로 소작인은 능히 생활을 保持키 어렵습니다. 이처럼 만경강 연안의 평야지대는 일본인대지주를 중심으로 소작제도가 고도로 발 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지주들에 의한 만경강개수 노력도 일찍부터 활발했다. 만경강 개수에 관한 계획이 수립되기 직전인 1923년 동아일보 기사(7월 29일자)에 의하면 전북 익산군을 중심으로 한 만경강개수동맹기성회(萬頃江改修同盟期成會) 대표자 영 원방언(永原邦彦), 길뎐죽차(吉田竹次), 도뎐염뎐(高田稔錢) 등 진정위원은 총독부로 정무총감과 내무국댱을 방문하고 여러 가지로 진정하엿은대 당국에서도 대개 량해를 하엿슴으로 진정위원은 깃분 얼골로 도라갓다더라 고 하였다. 永原邦彦은 호소가와후 작(細川侯爵) 조선농장의 주임이고, 고전염뎐(高田稔錢) 은 高田稔의 오자로 판단되는 데 그는 右近商事株式會社 남선출장소 지배인이었다. 호소가와후작 조선농장은 익산 군 대장촌에 사무소를 두고 그 일대 약 2천 정보의 답을 소유하고 있던 대지주였고, 右近商事 역시 전주, 부안, 정읍, 익산군에 약 2천 정보의 답을 소유하고 있는 거대지 주였다. 히로세 테이조(広瀨貞三)의 연구에 의하면, 萬頃江改修期成同盟의 회원 명단과 그 들이 몽리구역 내에 소유하는 면적 등은 <표5>와 같다. 한결같이 만경강개수에 의해 큰 혜택을 받을 농장들인데, 모두 일본인농장이었다. <표5> 만경강개수기성동맹의 회원 명단 (1925년 12월) 1 2 3 4 5 6 7 8 9 10 농장명 今村農場 井上農場 東山農場 田坂農場 細川農場 大橋農場 伊藤農場 三重農場 華星農場 佐伯農場 합계 지주, 대리인의 성명 一次郞 一 郞 田 三郞 原 夫 山 郞 一 田 治 今村 井上正 朴基順 德弘威太 坂佐 永 邦 崎增平 小林宗十 洪鍾柱 阿波榮 靑 竹 佐伯紀淸 金和炯 몽리구역내 소유면적(정보) 120.2 98.5 67.5 744.0 57.1 767.7 368.9 68.0 42.4 94.2 156.9 78.5 106.6 2770.5 매수될 면적(정보) 35.7 46.0 5.4 62.5 20.0 146.2 42.1 0.1 4.5 11.6 77.4 12.7 25.9 500.1 <자료> 廣瀨貞三, 植民地朝鮮における萬頃江改修工事と土地收用令, 福岡大學硏究部論集, 2010, 11쪽. - 47 -
24 허수열 Ⅶ 맺음말 일제강점하하천개수사업의식민지적특징 - 48 -
일제강점기 하천개수의 식민지적 성격 25 만경강개수공사 중 외부에 발주하는 청부공사의 경우, 각 토목출장소의 공사지에서 청부공사 시행 일람표 를 보면 그 내역을 소상히 알 수 있다. 국가기록원 소장문서는 당시 조선 각지에 있던 토목출장소의 공사지를 거의 빠짐없이 소장하고 있어, 어느 지 역에서 어떤 공사가 직영으로 이루어졌고 어떤 공사가 청부로 이루어졌는지 일목요연 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예컨대 만경강개수 1928년 공사의 경우, 신정 및 남상 배수통관공사 등 모두 10개 공사 합계 약 20만 엔의 청부공사가 발주되었는데, 익산, 전주 및 경성의 일본인 청부업자가 공사를 시행하도록 결정되었다. 한편 1935년의 조선 청부업에 대한 설명을 보면, 조선인으로서 청부업에 종사하는 자는 조선 전체를 통털어 겨우 몇 명에 불과하다고 하였다.19) 이러한 조선청부업계의 상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하천개수와 관련된 청부공사의 경우, 모든 청부공사는 예외 없이 일본인 청부업자가 맡아서 하도록 되어 있었다. 각종 개수공사지의 청부공 사 부분에서 조선인 청부업자가 시공한 공사는 단 한 건도 발견할 수 없었다. 청부공사가 한결같이 일본인 청부업자에게 돌아 간 것과 마찬가지로 공사에 사용된 각종 재료 역시 전적으로 일본인 공급자에 의해 조달되었다. 만경강개수지에서 도출된 결론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이었다는 것은 만경강 이외의 다른 하천의 개수공사 지에서 보더라도 명백하다. 지면관계상 구체적인 언급은 생략하겠지만, 각종 개수공사 지에서 조선인이 기계기구나 재료품 공급을 청부받은 경우는 극소수의 예외적인 것이 었다. 조선의 모든 하천개수공사장의 기계기구와 재료품의 공급은 사실상 거의 전부 가 일본인 상업자들의 몫이었다. 하천개수공사에서 조선인이 끼어들 수 있는 부분은 오로지 노동력 공급을 통해서인 데, 이 부분에서도 민족별로 현저한 임금격차가 존재하였다. 공사에는 굴착기에 의한 굴착과 기관차에 의한 운반과 같은 이른바 기계화도 이미 보여지고 있었지만, 대부분 의 공사는 인력으로 굴착하고 인력으로 운반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하천개수에는 많 은 노동력이 투입되었는데, 그 중 조선인 노동자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95.5%였고, 이 조선인 노동자의 98.3%는 인부 였다. 식민지적 고용구조가 만경강개수공사장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것이 확인되며, 그 결과 일본인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2.12엔 으로 조선인 노동자의 평균임금 0.62엔의 3.4배에 달하게 되었다. 하천개수는 국고 혹은 지방비에 의해 이루어진 사업이다. 따라서 이들 사업에 필요 19) 朝鮮經濟日報社, 朝鮮請負年鑑 1935년판, 1935, 1쪽. - 49 -
26 허수열 한 재원은 결국 조세를 통해 조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천개수는 수혜대 상이 민족별로 현저한 격차를 갖는 것이었다. 만경강개수가 주로 일본인대지주들의 이 해관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음은 본론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지만, 나머지 하천의 개수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부도1>에서 볼 수 있듯이 재령강개수공사의 경우에는 재령강 하류와 그 지 류인 서강, 그리고 서강의 지류인 척서천 등에서 하천개수가 있었는데, 그 인근에는 안녕수리조합과 재신수리조합이 있었다.20) 안녕수리조합은 일본인들이 절반에 가까 운 토지를 소유하는 수리조합이었고, 재신수리조합은 몽리면적 3,556정보인 거대 수 리조합이면서 동시에 일본인 소유지가 더 많은 일본인 수리조합이었다. 1926년부터 개수공사가 시작된 낙동강 하류부분도 일본인 지주들의 이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역이었다. <부도2>를 보면, 낙동강 하구에서 상류로 올라가면서, 김해, 대저, 하동, 양산, 밀양, 하남, 동면, 대산, 초동, 북면, 도천, 영남, 함안 등의 수리조 합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들 13개의 수리조합 중에서 하남수리조합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일본인수리조합이었다.21) 이들 수리조합은 대부분 낙동강이 범람하여 만들어 진 충적평야지대에 설치된 것이기 때문에 홍수기 낙동강 범람과 경지 내에 쌓인 물을 배수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각 수리조합은 한결 같이 낙동강에 제방을 쌓고 배 수문을 만들어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지만, 낙동강의 범람은 그 후에도 계속 이 어졌고 이들 수리조합은 파괴된 제방을 보수하는데 많은 비용을 들여야 했다. 이에 따 라 이들 낙동강 연안의 수리조합들은 거의 대부분 경영상태가 상당히 나쁜 수리조합이 되어 버렸다. <부도2>에서 수리조합 이름 뒤에 표기되어 있는 을 과 병 기호가 경영상 태가 나쁜 수리조합임을 의미한다. 1926년부터 시작된 낙동강 하류부분 개수공사는 수리조합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도2>를 보면 개수 공사가 일차적으로 이들 수리조합이 있는 곳에서 시작된 것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1926년부터 개수에 들어간 한강의 경우 시가지 개발과 관련된 용산, 마포, 영등포 20) 재령강개수에 대한 기록은 내무국 평양토목출장소에서 작성한 內務局沙里院土木出張所工事誌-載寧 江改修工事 (제4편 제8편), 西江治水事務所工事誌 (제1편) 등 합계 6편의 개수공사지에 수록되 어 있다. 국가기록원의 관리번호는 다음과 같다. CJA0014403 CJA0014406, CJA0013819. 21) <부도2>의 수리조합 이름 뒤의 분수가 그것을 표시한다. 분자는 일본인소유지의 비율을, 그리고 분모는 조선인소유지의 비율을 각각 의미한다. 양자를 합해 100%가 되지 않는 것은 회사나 집단 적 소유로 민족구분이 불명확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이 불명확한 부분 중 대부분이 회사형태로 소 유된 것이고, 따라서 거의 대부분 일본인소유지였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조선인 소유비율이 50%를 넘지 않는 것은 일본인수리조합이라고 해석하면 될 것이다. - 50 -
일제강점기 하천개수의 식민지적 성격 27 인근의 축제 호안공사를 제외한 나머지 공사 지역은 대규모 수리조합이나 동척 같은 일본인대지주가 소재하던 곳이었다. 영등포 서쪽의 평야지대에는 양동수리조합, 양천 수리조합, 부평수리조합 등의 수리조합이 존재하였는데, 이 중 양동 수리조합은 일본 인 소유지의 비중이 73%를 차지하는 일본인 수리조합이었고, 부평 수리조합의 경우 에도 일본인 소유지의 비율이 44%에 달하였다. 양천수리조합의 경우에만 조선인 소 유지의 비중이 82%에 달하였다. 장안평의 경우에는 동척소유지가 존재하던 곳이었다. 둑도(현재의 뚝섬)와 장안평 개수공사지역에는 약 450 정보에 달하는 東拓 長安坪農 場이 소재하고 있었다. 직할하천 뿐만 아니라 지방하천 혹은 준용하천의 개수공사가 이루어진 지역의 수리 조합을 보면 일반적으로 일본인 소유지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곳이었다. 수리조합이 존재하지 않는 지역의 하천개수에 대해서는 하천개수가 민족별로 어떤 영향을 주었는 지 설명해 줄 수 있는 체계적인 자료는 없다. 그러나 몇몇 개수공사에서는 하천의 流 路를 바꾸기 위해 사유지를 매입하게 되고, 이 때 사유지의 지번과 소유자의 성명을 알려주는 地籍圖 資料가 주어지는 경우가 있어, 하천개수 공사 인근지역의 민족별 토 지소유관계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 국가기록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런 자료를 보 면, 거의 대부분의 자료에서 일본인 토지소유자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부분적 이기는 해도, 중소하천의 경우에도 일본인 토지소유자에게 수혜가 크게 주어지는 지역 을 중심으로 하천개수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의 하천개수 사업은 조선의 하천의 지형을 바꾸는 거대한 프로젝트였고, 그 유산이 해방 후로 이어지면서 한국의 치수의 근간이 되었던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개수공사는 일본인에 의해 일본인 위주로 시행된 것이었기 때 문에 조선인들에 대한 파급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천개수에 의해 일본인 지주 들이 더 큰 혜택을 입음으로써 민족별 경제적 불평등은 가중되어 갔다. 또 개수공사의 설계와 시행 및 공사에 관한 모든 기계기구 및 재료품의 조달 역시 일본인이 담당함으 로써 하천개수 기술이 조선인에게 파급되기도 어려웠다. 해방 후 얼마동안 한국의 치 수사업은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수리시설을 유지하고 운영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까닭 도 바로 이런 식민지적 하천개수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51 -
28 허수열 <부표1> 傭人出役員數賃金表 (단위 : 인원수=명, 임금=엔) 직종 工場雇 工夫 運轉手 助手 常夫 圍工 人夫 水車 소지 인부 牛馬車 소지 인부 선박 소지 인부 페인트공 鍛冶工 鳶夫 大工 石工 經具師 測夫 합계 인원수 일본인 조선인 12,830 1,741 18,483 4,934 15,071 2,697 5,242 3,147 52,637 7,259 1,406 28,818 2,974,754 180 20 10,796 603 145 481 4,517 54 2,655 7,646 9,478 185 1,209 8 22 270 141,475 3,025,813 임금 총액 일본인 조선인 28,787 2,628 53,297 11,468 54,589 5,623 11,070 5,590 93,874 9,804 2,362 37,446 1,766,055 181 66 34,995 1,491 177 1,088 6,562 51 2,777 19,604 14,449 531 1,728 21 39 376 300,424 1,866,304 <주> 숫자는 1925 35년 11년간의 累計値이다. <자료> 朝鮮總督府, 朝鮮直轄河川工事年報 1935년판에서 작성. 1인당 임금 일본인 조선인 2.24 1.51 2.88 2.32 3.62 2.09 2.11 1.78 1.78 1.35 1.68 1.30 0.59 1.00 3.29 3.24 2.47 1.22 2.26 1.45 0.95 1.05 2.56 1.52 2.87 1.43 2.68 1.75 1.39 2.12 0.62 <부표2> 이리토목출장소 공사계 직원 명부 성명 川澤章明 武居軍次郞 町田義知 伴格夫 辻川勝雄 勝原享三 菊池新吉 宮城圓吉 磯崎安治 內藤一郞 能井長雄 大坪千年 栗田捷夫 三木光五郞 19 19 19 19 19 19 19 19 19 25 26 27 28 29 30 31 32 33 사 사 사 사 사 사 사 사 사 사 사 사 사 사 사 사 사 사 수 수 수 수 수 (사)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고 수 19 34 사 사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19 35 사 사 수 수 수 수 수 고 고 고 고 수 수 수 수 수 - 52 - 출신학교 일본대 졸업연도 1917 1919 1925 1929 1931 1929 1928 경성고공 1925 일본대 1927 동경제대 동경제대 경도제대 동경제대 경도제대 동경제대
일제강점기 하천개수의 식민지적 성격 성명 山義 松 三 一郞 安 勝雄 雄 田 廣次郞 田 本萬 地成義 治 居 田半吉 本 本 田貞 田貞雄 次 瀨 次 原 夫 里 三郞 一 三 治 田勝 郞 一 松本 松山義雄 安養寺豊 入江滋次 齊藤實 竹谷政太郞 仲淺太郞 中村外雄 增淵菊次 淺沼順一 最勝寺保 衫 德 尾廉 矢野眞鄕 神谷榮 容熙 黃程哲 遠藤 伊藤恒 中秋太 早坂 蛭 作之助 平 之進 厚 加藤愛 附睦男 高野仁士 高 久保淸繁 臼 市兵衛 臼 幸藏 臼 男 溝 德永榮 藤 德 米 保 繁 光 衫謙 重正 上 太 小野瀋 久男 19 25 19 29 수 고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고 고 19 26 19 27 29 19 28 수 고 수 고 수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수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19 30 수 수 수 19 31 19 32 19 33 19 34 19 35 출신학교 수 수 수 수 수 수 경성고공 고 고 고 고 수 수 수 경성고공 고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수 남만주공전 수 수 수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경성고공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고 경성고공 졸업연도 1921 1928 1926 1921 1932 <주> 고=고원(雇員), 수=기수(技手), 사=기사(技師)를 각각 의미한다. 그리고 경성고공은 경성고등공업학교, 동경제대는 동경제국대학, 경도제대는 경도제국대학의 약어이다. <자료> 이리토목출장소, 만경강개수공사지, 제1편 제11편에서 작성. - 53 -
30 허수열 <부도1> 재령강 및 그 지류에 대한 개수공사 평면도 <자료> 朝鮮總督府, 朝鮮窮民救濟治水工事年報, 1933년판. - 54 -
일제강점기 하천개수의 식민지적 성격 31 <부도2> 낙동강 개수공사 평면도 <주> 하단의 일/조는 수리조합구역내 민족별 경지소유면적 비율을 의미한다. <자료> 수리조합에 관한 자료는 朝鮮總督府, 朝鮮土地改良事業要覽 1931년판에서 작성하였 고, 불량수리조합에 관한 자료는 朝鮮總督府, 經營困難ナル水利組合ノ整理計劃要綱, 1934, 1 16쪽에서 작성하였다. 갑은 불량의 정도가 매우 심해 해산대상이 되는 수리 조합이고, 을은 추가적인 지원으로 갱생시킬 대상이 되는 수리조합을 의미한다. - 55 -
32 허수열 ABSTRACT Colonial Characteristics of River Improvement in Korea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with a Focus on Improvement Works on the Mangyung River Soo-youl Huh* 22) - 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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