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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南密陽 近代敎育의 搖籃 正進學校 硏究 李炳憙의 思想과 그 一門의 創學理念에 關聯하여 金 成 俊* Ⅰ. 序 言 Ⅱ. 舊韓末 嶺南地方의 近代敎育 實況 Ⅲ. 李炳憙의 思想과 그 一門의 新舊併進運動 Ⅳ. 華山義塾에서 正進學校로 Ⅴ. 正進學校의 民族敎育과 受難 Ⅵ. 結 言 Ⅰ. 序 言 1876년 2월 일본과 江華島修好條規를 체결하여 釜山(1876. 10) 元山(1880. 4) 仁川 (1883. 1)을 개항하고, 이어서 美國(1882. 5)을 비롯한 西洋列强에게 차례로 문호를 개 방함에 따라 새로운 국제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하게 되자, 開化思想의 물결이 밀어 닥치 고 近代敎育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열강에 대한 문호개방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挑戰에 직면하게 되고 이에 효과 적으로 對應하기 위하여 무엇 보다도 먼저 요구된 것은 近代敎育의 개발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날 자료에 나타난 최초의 근대학교는 開港場 元山에 개설된 元山學舍(學校) 로 알려지고 있다.1) 그 뒤를 이어 漢城에 官學으로 同文學(일명 通辨學校, 1883)과 育英 公院(1886. 9)이 설립되고, 基督敎學校로서 培材學堂(1885. 8) 梨花學堂(1886. 5) 등을 비롯하여 京鄕에 여러 근대학교가 설치된다. 그리고, 甲午更張을 계기로 하여 1895년 2 월에 반포된 敎育詔書는 近代敎育을 活性化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교 육은 國家中興의 要請로서 虛名을 물리치고 實用을 취하는 것이 부강하고 개명한 나라를 건설하는 길임을 천명하고 교육의 3大 綱領으로 德育 體育 智育의 三育을 들고 있다. 따 라서 신교육의 목표는 종래의 전통적 儒學敎育에서 탈피하여 실용교육을 바탕으로 한 신 학문의 수용에 力點을 두려고 했던 것이다. * 水原大學咬 史學科 敎授. 1) 愼鏞厦 우리나라 最初의 近代學校設立에 대하여 ( 韓國史硏究 10, 1974) p. 192.

- 108 - 國史館論叢 第23輯 정부는 敎育詔書에 나타난 교육입국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하여 1895년 4월과 7월에 우선 교원양성을 목표로 하는 漢城師範學校官制 및 規則을 공포하게 된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近代式學校法規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어서 外國語學校(1895. 5) 成均 館(1895. 7) 小學校(1895. 7) 醫學校(1899. 3) 中學校(1899. 4) 商工學校(1899. 6) 農 商工學校(1904. 6)의 관제 및 규칙을 차례로 공포하고, 이에 이어 漢城師範學校(1895. 4) 水下洞小學校(1895. 8) 漢城中學校(1900. 10) 등 各級官公立學校를 설립하였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교육조서에 자극을 받아 民間人 有志2)들에 의하여 서울에 興化 學校(1895)를 비롯한 여러 私立學校가 건립되고 釜山에 基督敎系의 日新女學校 (1895.10), 釜山에 民間人의 開成學校(1896. 2), 密陽에 開昌學校(1897) 등이 설립된 것이다. 이와 같이 1890년대는 교육조서의 반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近代敎育史上 획기적인 敎 育指標가 설정된 중요한 시기이므로 甲午更張 이전에 개항과 때를 같이 하여 설립된 元山 學舍 育英公院 培材學堂 등은 우리나라 近代學校의 先驅者的 역할을 담당한 것은 사실이 지만, 근대교육의 실질적인 성립 시기는 90년대에 敎育詔書가 반포되고 各種 官公立學校 와 民間人 私立學校가 京鄕各地에 설립되면서부터라고 하겠다. 그렇게 볼 때 개항 후 乙 巳條約을 거쳐 日帝强占期와 光復에 이르는 동안 근대교육의 消長을 시대구분하면 다음과 같이 4期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1기 開港 甲午更張前 近代敎育의 萌芽期 2기 甲午更張 乙巳條約前 近代敎育의 啓蒙期 3기 乙巳條約 8. 29國難前 敎育救國運動期 4기 8. 29國難 光復前 日帝奴隸敎育期 근대교육의 중요성은 먼저 獨立協會의 활동과 독립신문 등 여러 신문이 벌인 계몽 운동으로 민중에게 차츰 인신되어 갔다. 당시 徐載弼을 비롯한 新知識人(開化思想家)은 개화와 自强之術만이 국가의 힘을 기를 수 있고, 그 힘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과 산 업을 일으켜야 된다고 강조하며 의무교육과 愛國愛族의 민족교육을 제창한 것은 近代敎育 의 啓蒙期에 애국단체나 언론이 한결 같이 내세운 주장이었다. 이와 같은 민중계몽운동은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國民意識을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고, 이는 뒷날 乙巳條約으로 국가운명이 百尺竿頭의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맹렬하게 타오른 敎育救國運動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2) 韓末에 민간인유지들이 세운 학교를 다만 私立學校 또는 民間人學校라고 흔히 일컬어 왔으나, 근래 民族系私立學校 民立學校라고 쓰는 사람도 있다. 민간인유지의 성분을 보면 前職官吏 現職 官吏 儒林 社會有志 政治社會團體 日人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의 私學은 地主層 의 출신으로 일정한 지식을 가진, 즉 地主知識層의 주동으로 추진된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本稿에서 서술할 正進學校도 마찬가지다.

- 109 - 乙巳條約 후 교육구국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수없이 설립된 사 립학교는 재정이 빈약하여 비록 규모는 적고 시설은 형편없는 것이 많았지만 오직 구국의 一念을 갖고 자제교육에 힘을 기울였으니, 그들의 創學精神3)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1906년부터 1910년 사이는 民族主義에 입각한 사립학교가 전국에 많이 세워져 韓國敎育 史上 敎育熱이 가장 고조되었던 특기할만한 시기이다. 당시 교육열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 은 平安道가 으뜸이고 다음이 黃海道, 咸鏡道 순으로 나타나 있다. 日帝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1908년 현재 전국의 학교 수는 5,000여교이고 학생 수는 20여 만명에 이르렀다 고 한다.4) 日帝는 팽창하는 사립학교를 탄압하기 위하여 1908년 8월 私立學校令을 공포하였는데, 이에 의하여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學校數는 1910년 5월 현재 2,250개교에 달하였다. 그 중 民間人學校는 1,402개교이고 宗敎系學校는 823개교였다. 이때 慶南은 104개교 (4.6%), 慶北은 150개교(6.7%)로서 下三道 중에서는 그래도 제일 많았지만, 西北地方 외 平南 417개교(18.5%), 平北 367개교(16.3%), 黃海 251개교(11.2%) 보다는 훨씬 적었다.5) 이처럼 사립학교가 방방곡곡에 林立하여 한결 같이 구국운동에 邁進하고 있는 것을 보 고 大韓每日申報 는 讃韓國之向學 이란 論說에서 新條約(乙巳條約)이 억지로 성립되자 많은 사람의 憤激은 노한 潮浪에 휩싸인 것 같이 怒氣가 충천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民智 를 계발하고자 사방에 학교를 세우기에 여념이 없으니, 3백여 주 군에 學舍가 林立하여 인재가 배출하고 있는 것을 찬양하였던 것이다.6) 본고에서 다루려고 하는 正進學校 硏究는 慶南 密陽郡 退老里의 驪州李氏一門이 3 1운 동 직후에 民族敎育을 목표로 하여 설립한 학교이지만, 그 建學精神은 1890년대로 소급 하여 영남의 마지막 性理學者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省軒 李炳憙의 新舊併進運動에서 비 롯된 華山義塾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아직 保守的 性向이 강했던 영남지방에도 이 시기에 서서히 개화의 물결과 위기의식이 밀려 오기 시작하였다. 영남의 保守的 儒林들의 분위기 속에서 일찍이 近畿實學의 前進的 思考를 지니고 있던 省軒과 그 一門은 시대의 변화에 步調를 맞출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儒學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여기에 新舊併進 의 교육원칙이 표방 되고 보수와 개혁의 調和 속에 1899년 密陽退老里에 嶺南近代敎育의 搖籃이라고 할 수 있는 華山義塾이 설립되었고, 8 29 國難 직후에 일시 폐쇄되기는 하였으나 그 學脈은 夜 學을 통하여 계승되어 내려가 3 1운동 직후에 正進義塾(뒤에 正進學校로 고침)으로 復設 3) 金祥起, 韓末私立學校의 敎育理念과 新敎育救國運動 ( 淸溪史學 1) p. 69, 私立學校 設立 趣旨分析을 통해 開明 富强 三育 國權恢復 네 가지를 들고 있다. 4) 朝鮮の保護及併合 (朝鮮總督府, 1918) p. 378 ; 金祥起, 앞의 논문 p. 71 再引用. 5) 俵孫一, 韓國敎育ノ現況 (學部, 1910) p. 49. 6) 大韓毎日申報 1906년 9월 16일자 社說.

- 110 - 國史館論叢 第23輯 되었다. 그 후 正進學校는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며 민족교육의 場으로서 영남지방의 근대 교육에 공헌한 바 컸으나, 1939년 4월 日帝의 탄압으로 폐교되고만 것은 韓國近代敎育史 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면을 장식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Ⅱ. 舊韓末 嶺南地方의 近代敎育 實況 高宗 32년(1895) 2월에 敎育詔書를 공포하고 이에 따라 官公立學校의 官制 및 規則이 제정되어 師範學校 小學校 中學校 등 近代式各級學校가 차례로 설립되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民間有志들이 京鄕各地에 興化學校 漸進學校(1899) 등 私立學校를 건립함으로써 근 대교육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이 구축되었다. 그러나, 官公立學校는 정부의 노력에 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정치적 경제적 취약성 때문에 不振을 면치 못하였지만, 民間人 有 志가 설립한 私立學校는 개화사상의 擴散에 힘입어 뒤에 말하는 것처럼 관공립학교보다 훨씬 활발하게 추진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近代敎育을 향한 강한 의지는 일찍부터 書堂敎育을 통해 馴致된 잠재적 향학 의식을 자극한 데다가 독립신문 을 비롯하여 죠션그리스도인회보 (1897. 2) 京 城新聞 (1898. 2) 일신문 (1898. 4) 데국신문 (1898. 8) 皇城新聞 (1898. 9) 등 여러 신문과 獨立協會가 전개한 愛國啓蒙運動으로 말미암아 서민층에까지 교육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함으로써 국민들 사이에 점차 向學意識이 높아가기 시작한 것 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이 점은 당시 교육입국을 통해 近代化 意識의 啓蒙이라는 측 면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개화사상은 일본의 開化文明, 중국의 自强運動을 수용하여 퍼지기 시작한 것 으로서 어느 것이나 외국 선진기술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케 하고 文明化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개념으로 쓰여진 것이다. 당시 新知識人(開化思想家)들은 개화사상을 널리 펴기 위하여 啓蒙運動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 사립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의 진 흥을 도모하였다. 또 이 시기에 기독교가 개화사상 보급과 근대학교설립에 많은 공헌을 한 것은 물론이다. 基督敎會는 처음부터 民族敎會로 성장해 나갔으므로 민간인의 사립학 교처럼 민족적 내지 민족주의적 교육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이 시기에 민족의 독립과 民權의 확립을 위하여 정치활동을 강도있게 전개하고 있던 독립협회는 俄館播遷을 겪으며 제국주의 세력에게 많은 이권이 침탈당하고 있는 현 실 속에서 조국을 다시 일으켜 개화된 自主獨立國家를 건설하는데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西洋近代敎育과 학문을 폭넓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독립협회가 제창 한 교육이념은 徐載弼이 오랫 동안 미국생활을 하며 그 곳에서 신교육을 받은 만큼, 그가 추구한 교육방식은 서양적 근대교육을 바탕으로 한 民衆敎育運動이었다. 민중교육이란 한 마디로 人民義務敎育을 말한다. 독립협회는 俞吉濬이 西遊見聞 에서 開化 半開化 未開

- 111 - 化라는 개화등급론을 내세운 것처럼 현금의 東西各國은 文明國 開化國 半開化國 野蠻國으 로 구분할 수 있는데, 조선은 겨우 半開化國에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7) 개화를 성취함에 있어서 민중의 自覺이 필요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아무리 훌륭 한 지도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 지도를 받고 있는 각성한 민중이 존재하지 않으면 개화정 책의 진전은 바라 볼 수 없다. 독립협회는 人民은 國家成立의 기초이며 교육은 國民養成 의 藥石8)이라는 인식 위에, 조선을 半開化國에서 끌어 올려 세계에 자랑할 만한 강국을 만들 수 있는 길은 오직 교육 뿐이라 하고, 정녕 교육이야말로 歷史變革의 주체인 인민을 육성하고 自主自强을 달성하는 유일한 武器라고 강조하였다. 독립협회는 이러한 관점에 서서 근대교육의 전면적 실시 즉 의무교육을 政府에 요구하였던 것이다.9) 개화파가 의무교육을 주장한 것은 이미 甲申政變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하여 있다가, 고 종 25년(1888) 고종에게 개화를 거듭 주장하는 상소를 하면서 개화의 뜻인 就新自立 의 성취와 인민의 개화 방법으로 小 中學校의 설립과 6세 이상의 男女가 모두 입학하는 의무 교육실시를 건의한 일이 있다.10) 정부는 甲午更張 때 교육조서를 공포하고 高宗 32년 (1895) 7월 19일 勅令 제 145호로 발표한 小學校令에서 이미 만 8세로부터 15세까지의 8년간을 學齡期로 정하고, 각 府 郡은 그 관내의 학령아동을 취학시킬 公立小學校를 세우 도록 하였다. 또 同令에서는 尋常 高等 2과로 편제하여 남녀를 똑같이 취학케 한다 고 규 정하여 남녀에게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였다. 이는 國民敎育制 實施를 의미하는 것 으로서 西洋的 近代學制에 의한 초등교육와 義務敎育化를 뜻하고 있다.11) 그러나, 정부의 國民敎育制는 한낱 口說로만 그치고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것은 정부의 재정곤란에 도 이유가 있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誠意不足 때문이었다. 그래서 독립신문 은 대한 금일 졍을 보면 쇽이 답답 야 나라 일이 아니되 것을 보면서도 호소 무쳐라 정부에 말 여야 들은 테도 아니 고 라며 성의부족을 개탄하고 있다.12) 官公立小學校의 예를 보더라도 1896년 서울에 10개교, 지방에 24개교였는데 乙巳條約이 체결되기 전까 지 서울에 10개교, 지방에 50개교 밖에 설립하지 못하는 不振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 다.13) 당시 官公立小學校가 數字나 施設에 있어서 극히 빈약했던 것은 學校豫算面에 있 7) 독립신문 1899년 2월 23일자 뇬셜. 8) 大朝鮮獨立協會會報 7호 1897년 2월 28일자 p. 6. 9) 尹健次, 朝鮮近代敎育の思想と運動 (東京大學出版部, 1982) p. 127. 10) 朴泳孝, 開化에 대한 上疏 ( 近代韓國名論說集, 新東亞 1966년 1월호 부록). 11) 孫仁銖, 韓國近代民族敎育의 理念硏究 (文音社, 1988) p. 151. 12) 독립신문 1898년9 월 13일자. 13) 官公立小學校의 숫자에 대하여는 기록에 약간 차이가 있어서 이를 바로 잡아 보면, 1895년 서 울에 官立으로 水下洞小學校를 비롯하여 莊洞(뒤에 梅洞) 貞洞 齋洞 養士洞 등 5개교, 1896년 校洞 渼洞 養賢洞 鑄洞 安洞 등 5개교를 설립하여 10개교가 되고, 이 시기에 지방에는 公立으 로 觀察府 所在地인 水原 公州 忠州 全州 光州 晋州 大邱 春川 海州 平壤 寧邊 咸興 鏡城 등 13 개교, 學部의 지정지로 설치된 소학교가 開城 江華등 24개교로서 모두 37개교를 설립하였다. 1901년 1월 24일자 皇城新聞 에 學部에서 各 府郡公立小學校 50處에 訓令을 내린 기사를

- 112 - 國史館論叢 第23輯 어서 당시 軍事豫算이 100萬 달러이었는데 비하여 敎育費는 2만 달러에 불과하였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14) 그러므로, 獨立協會는 민중교육에 대하여 독립신문 의 논설을 통해 국민교육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女子敎育과 兒童敎育이라 하고 정부와 인민은 외국처럼 소학교를 전국 도처에 확장해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민의 교육을 넓히 야 지식을 양 랴면 동몽교육과 녀인교육이 시급 니, 첫 사 마다 어렷을 에 호 것이 쟝성 후에 호 것 보다 쉽고 쇽 며 젼국 들을 잘 인민이 급히 쇼학 쳐 노흐면 젼국 인구가 다 교육이 될터이니, 챵창하다 지 말고 졍부와 교를 도쳐에 확쟝 야 교육의 긔쵸를 삼 것이 죠켓스며, 일본과 다른 화 나라를 보면 다 쇼학교의 큰 힘과 돈을 들이니 만일 리롭지 아니 면 엇지 이리 리요.15) <첨자> </첨자> 이러한 민중교육운동은 독립협회나 독립신문 뿐 아니라 이 당시에 발간된 신문 잡지 나 저서들도 한결 같이 주장하고 나섰으니, 가령 皇城新聞 은 광무 3년(1899) 1월 9 일자 논설에서 나라가 富强하기 위해서는 관제를 인민을 위한 것으로 개정해야 할 것을 제기하면서 그 所管內에 각긔 學校를 設 야 聰秀子弟로 야금 本國學을 均敎 야 實力 踐行케 것 을 주장하였으며, 俞吉濬은 그의 저서 西遊見聞 에서 각국의 의무교육제 도에 대하여 언급하며 學校마다 政府가 先生을 寘 야 就學 者 敎誨 게 호 一 切 浮費 人民에게 稅를 受 야 擔當케 니 16) 하고, 또 보통교육은 國家存立을 위 한 바탕이 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西遊見聞 第3編 邦國의 權利 p. 8). 그러나, 의무교육제도는 신문이 자주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완고한 양반들이 四書三經만 읽으 며 舊學에 연연할 뿐만 아니라 인민은 몽매하여 子女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고 하여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 전국 인구 수와 비교해 보면 5천명에 한 사람밖에 되지 않으며, 더 욱이 계집아이들은 당초에 사람으로 치지 아니하여 교육을 아니 시키므로17) 실현이 막막 하였지만, 독립협회와 신지식인이 전개한 대중계몽운동에 힘입어 관공립소학교에 비하여 그래도 민간인이나 종교계에서 세운 학교는 많이 생긴 편이어서 근대교육을 통한 민중 교 육운동은 어느 정도 실효는 거둔 셈이었다. 싣고 있는 것을 보면, 1900년까지 지방공립소학교는 50개교로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 나, 그 후에는 乙巳條約 前까지 서울이나 지방에 관공립 학교를 증설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 고 있어서 여러 연구자가 다 서울에 10개교, 지방에 50개교가 있었던 것으로 일치된 숫자를 들고 있다. 이와 같이 官公立小學校의 설립이 극히 부진했던 것은 뒤에 나오는 것처럼 국내 발 행의 신문 잡지 등에서 뽑은 통계로서 1895 1905년에 걸쳐 私立學校가 漢城에 226개교, 京 畿道 등 13道에 1,416개교에 달한 것을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14) H.B. Hulbert, The Passing of Korea))(London) p. 167 ; 金鎮逸, 韓國近代敎育의 成立 ( 韓國史學 2, 1890) p. 66 再引用. 15) 독립신문 1898년 9월 13일자 녀인교육. 16) 西遊見聞 제9편 敎育 制度 (東京 : 交詢社, 開國 504년) p. 233. 17) 독립신문 1896년 9월 5일자 뇬셜.

- 113 - 그러면, 開港後 乙巳條約 前까지 영남지방의 近代學校設立狀況은 어떠하였을가. 먼저 全國의 상황을 보면 1895년 2월의 敎育詔書頒布와 독립협회 및 독립신문 등 언론의 활발한 계몽으로 개화사상이 번짐에 따라 京鄕에 사립학교가 많이 설립되었지만, 현재 남 아 있는 자료를 가지고 정확한 數字를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宗敎系學校는 宣敎會의 보고서가 남아 있는 것이 있어서 그 숫자를 약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改 新敎는 1902년의 한 보고에 의하면 北長老派의 初等學校는 63개교, 北監理派는 28개교 (그 중 여학교는 16개교)18)였고, 天主敎는 朝鮮敎區年末統計報告書를 보면 1893년에 21 개교였던 것이 1904년에는 87개교로 증가하였다고 한다.19) 그래도 舊韓末에 槪略이나마 전체적인 사립학교 수를 알 수 있는 자료는 日帝의 손으로 작성된 것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뒤에 詳述하는 바와 같이 敎育救國運動이 絶頂에 이르 렀을 때인 1908년 현재 전국에 5,000여 교(公私立 포함)가 있었다 하고,20) 또 私立學校 令에 의하여 인가된 사립학교 수는 1910년 5월 현재 2,250개교(民間人系 1,402개교, 宗 敎系 823개교)21)라고 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인가신청을 낸 학교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밝히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認可學校數를 道別로 통계를 내고 民間人系와 宗敎系學校 數字 및 宗敎系學校의 교파별 숫자를 밝힌 것은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다. 다음 嶺南地方의 近代學校 설립에 관하여는 이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곳이기는 하지만, 이 시기에 開化의 물결에 힘입어 상당수의 사립학교가 설립된 사 실이 전문연구서와 논문에 꽤 많이 밝혀져 있고, 또 신문 잡지 및 기타 자료와 道誌 道敎 育史 郡誌 등에서도 어느 정도 이를 수습할 수 있으나, 역시 자료의 未備로 만족할 만한 표를 만들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경상도의 民間人學校와 宗敎系學校를 교명이 확실한 것을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乙巳條約前 嶺南 民間人私立學校 <표> 設立年代 1896.2 1897.11 1898 1899 1899.7 1899 </표> 學校名 課 程 開成學校(釜山商校前身) 小學校 中學校 開昌學校 小學校 東萊府學校 初等科 華山義塾(正進學校前身) 初等科 達城學校(1909년 協成學校 尋常科 高等科 로 개칭, 慶北高校 전신) 興化學校安東支校 設立者 所在地 朴琪宗 李乃玉 裵文華 邊翰 草梁顔洲洞 敬 李命端 孫貞兹 密陽 耆英會 東萊 李翊九 李柄憙 密陽退老里 發起人 崔昌克 등 10인 大邱 柳琓 安東 18) 金鎬逸, 韓國近代敎育의 成立 ( 韓國史學 2,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 p. 67 再引用. 19) 金洽東, 舊韓末天主敎會의 學校敎育 ( 司牧 47 48, 1976). 20) 주 4)와 같음. 21) 俵孫一, 韓國敎育ノ現狀 (學部, 1910) p. 49.

- 114 1899 1899 1899 1900 1900 1900 1902 1903 1904 國史館論叢 第23輯 興化學校大邱支校 開成舊館支校 開成釜山鎭支校 開進學校 密陽開昌支校 東萊日語學校 私立咸明學校 開揚學校 機張日語學校 央語 算術 地 崔處圭 誌 歷史 初等科 開成學校 初等科 開成學校 開成學校 日語 孫貞鉉 耆英會 郡守 朴晶圭 紳士 盧斗鉉 小學校 日語 開成學校 開成學校 표 2 乙巳條約前 嶺南 宗敎系私立學校 <표> 設立年代 1895.10 1902 1902 1902 1903 1903 1903 1905 1905 1905 1905 大邱 草梁 釜山鎭 馬山浦 密陽 東萊 咸陽 東萊 機張 </표> 學校名 日新女學校(東萊女 中高 前身) 大南男子小學校 信明女子小學校 養性學校 彰聖學校 善明學校 邑內里學校 永明學校 廣成學校 啓東學校 進明學校 課 程 初等科, 후에 高等 科併設 小學校 小學校 小學校 小學校 小學校 初等科 小學校 小學校 小學校 小學校 設立者 閔之使(濠洲長老會) 아담스(美國長老會) 부르엔(美國長老會) 松川敎會(北長老會) 竹院洞敎會(北長老會) 槐平敎會(北長老會) 天主敎 習禮敎會(北長老會) 路山敎會(北長老會) 新基敎會(北長老會) 黃金町敎會(北長老會) 所在地 釜山鎭(뒤에 東萊) 大邱 大邱 金泉 善山 善山 大邱 善山 善山 慶山(安心) 金泉 慶尙道의 근대학교로서 가장 먼저 설립된 학교는 표에 보이는 바와 같이 1895년 濠洲 長老敎宣敎會가 釜山鎭에 세운 日新女學校이다. 그것도 남학교가 아닌 여학교라는 것이 보수성이 강한 영남지방이라는 데서 더 경이적인 사실로 비칠지도 모르지만, 進取的인 기 독교계학교라는 점에서 볼 때는 아무 이상할 것이 없다. 濠洲長老敎宣敎會가 부산지방을 宣敎地區로 정식 인정받아 맥카이(J.H. Mackay) 목사가 부산에 도착한 것은 1891년 12월이었으며 이때 데리고 온 사람 중에 여자전도사 맨지스(B. Mengies, 한국명 閔之 使) 양이 있었다. 그리하여 1892년에 草梁敎區, 1893년에 釜山鎭敎區를 차례로 열게 됨 으로써 濠洲宣敎會의 선교활동은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유교적 보수성이 강했던 영남지방에서의 선교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그들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통한 선교활동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1892년 閔 之使가 먼저 3명의 고아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글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학교설립

- 115 - 의 모태가 되었으며, 그 후 소녀들이 많이 모여 들게 됨에 따라 1895년 10월 釜山鎭 佐 川洞에 조그마한 초가집을 얻어 주간학교를 차리고 私立日新女學校라고 이름 붙혔다. 閔 之使가 초대교장이 되어 처음에 초등과(3년제)만 운영 하였으나 1909년에는 3년제 고등 과를 병설하였다. 이와 같이 日新女學校는 개화기에 영남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근대학교 이며, 그 후 東萊高等女學校로 발전하는 동안 일제의 갖은 탄압을 받기도 하였지만, 오늘 날까지 특히 영남여자교육의 발전에 끼친 공로는 말할 수 없이 컸던 것이다.22) 濠洲長老敎의 선교활동이 차츰 궤도에 올라 다음으로 馬山에 상륙한 것은 1902년이다. 이때 최초로 파견된 선교사가 바로 昌信學校의 초대교장이었던 아담슨(R.S. Adamson) 목사이다. 昌信學校의 전신은 1906년 5월 신도 李承奎가 城山 城湖里敎會(현 馬山文昌敎 會) 안에 讀書塾이란 이름으로 신식학교를 개설한 것이 始初로서 馬山 最初의 사립학교이 다. 布敎에 학교설립이 필요한 것을 切感하고 있던 손안로목사는 대단히 기뻐하여 호주의 어떤 독지가로부터 매월 10원의 성금을 받았을 만큼 열심히 도왔다 한다. 讀書塾은 1908 년 8월에 공포된 사립학교령에 의하여 새로 설립인가를 받을 때 昌信이라는 교명과 학교 체제를 남녀공학으로 정하고 손안로목사를 교장으로 추대하였으며, 학교경영권을 교회로 넘겨 기독교정신과 애국사상의 함양을 교육이념으로 삼았다.23) 영남에서 민간인이 세운 가장 오래된 학교는 日新女學校 보다 1년 뒤인 1896년 2월에 설립한 開成學校이다. 開化官僚인 監理署 警務官 朴琪淙(1839 1907)이 李乃玉 裵文華 邊翰敬 李命潤 등과 의논하여 각각 3백원을 갹출해서 草梁瀛洲洞에 개성학교를 세워 3년 제 초등과와 4년제 중등과를 설치하였다. 朴琪淙은 부산의 상민출신으로 일찍부터 일본어 에 능통하여 1876년 5월 제 1차 일본수신사 金綺秀의 譯官으로 따라간 것이 인연이 되어 귀국한 후에도 계속하여 각종 관직을 거치면서 釜山監理署의 警務官에까지 올랐다. 그는 일본 시찰 때 신문화교육의 振興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다가, 때마침 부산에서 日本陸軍 豫備尙武學校 교사를 지낸 荒浪平治郎과 交流하며 기술교육이 시급함을 통감하고 開成學 校를 세우게 된 것이다. 부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開港場이었으므로 일본을 비롯한 帝國主 義勢力의 침투에 대항하기 위해 실력양성의 차원에서 元山學舍보다 먼저 近代學校를 세웠 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으나 현재로서는 資料를 발견할 수 없어 斷言하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開成學校의 설립은 年數가 좀 뒤지기는 하지만 이 지방에 근대학교의 탄생을 알리 는 첫 구체적인 자료로서 역사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개성학교는 그 후 발전을 거듭하여 1899년 3월에 支校로서 草梁에 舊館支校, 釜山鎭에 釜山鎭支校를 세우고, 1900년에 補助校로서 동래에 開揚學校, 마산에 開進學校, 밀양에 開昌學校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開成學校는 1909년에 공립부산일어학교로 개편 되었다가 1911년 11월에는 부산공립상업학교로 개칭하였으며, 오늘날은 부산상업고등학 22) 東萊學園八十年誌 (東萊學園八十年誌編纂委員會, 1975). 23) 昌信學校 60年史 (1968).

- 116 - 國史館論叢 第23輯 교로 존속되고 있다.24) 한편, 東萊에는 1898년 耆英會員 辛明錄이 중심이 되어 公立東萊 府學校(初等科)를 세우더니 校舍 문제로 1904년 開揚學校에 병합되고 말았다. 그러나, 1907년 耆英會는 다시 三樂學校(私立)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1909년에 開揚學校를 흡수하여 교명을 東明學校라 고치고 초등과와 고등과를 병설하였다가 1916년 사립동래고 등보통학교로 인가 받았지만, 1922년 다시 공립으로 개편되어 오늘의 동래고등학교(공 립)로 발전하였다.25) 그리고, 대구에는 부산보다 늦게 1899년 7월에 達城學校라는 근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1899년 4월에 공포된 中學校官制에 의하여 경상북도 감영 안에서 개교하였는 데, 발기인은 崔昌克 등 10인으로서 심상과와 고등과를 병설한 사립학교로 출발하였다. 達成學校는 개교 이래 구한국 정부로부터 10원의 보조를 받았으나 乙巳條約 후에는 일제 의 간섭으로 학교운영에 여러모로 제약을 당하였다. 즉 심상과는 1905년 8월에 관립대구 보통학교로 이관되고, 고등과는 1909년 3월에 대구향교강당(교동)으로 옮겨 私立協成學 校라 개칭하였다. 이 학교는 평양의 大成學校와 더불어 남북의 兩成으로 불리울 정도로 경북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만든 民族學校였지만, 일제강점기인 1916년 5월에 재정된 고 등보통학교관제에 의하여 공립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이에 흡 수되고 말았다.26) 이와 같이 개화기에 영남근대교육을 장식한 민간인이 세운 사립학교가 기독교계의 日新女學校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립학교로 전환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도 있었지만 자체 내의 모순, 다시 말하면 財務構造의 劣惡, 사학 으로서 建學理念의 박약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경상북도의 본격적인 개신교 전파는 1893년 1월에 長老敎公議會가 조직되어 처음에는 북장로회와 호주선교부가 같이 부산을 근거지로 선교사업을 벌이던 것을 공의희에서 상의 한 결과, 洛東江以南에서는 호주선교부가 포교하고 洛東江 以北은 북장로회 선교부가 맡 기로 결정함에 따라 경상남도는 호주선교부, 경상북도는 북장로회가 宣敎를 담당하기로 하였다.27) 그리하여 북장로회에서는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을 개시하여 1896년에 처음으 로 남성동교회가 설립되었고, 1899년 경북지방에 敎人數가 25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1905년에는 교회수 42개소, 교인수 1,917명이라는 급속도의 증가를 보게 되었다.28) 이 와 같이 대구지방에 1890년대 후반부터 발을 붙치기 시작한 북장로회는 선교의 지반을 확실히 굳히기 위하여 1902년에 아담스(J.E. Adams, 安義窩) 牧師가 大南男子小學校, 그의 부인 부르엔(Bruen M.S. 馬太)이 信明女子小學校를 세웠고, 각지에 교회가 증설됨 24) 釜商八十年史 (釜山商業高等學校八十年史編纂委員會, 1975). 25) 慶南敎育史 (慶南道敎委, 1982) p. 101. 26) 慶尙北道誌 下(慶尙北道誌編纂委員會, 1983) p. 791. 27) 곽안전, 韓國敎會史 (大韓基督敎書會, 1961) p. 67. 28) 곽안전, 위의 책 p. 83.

- 117 - 에 따라 1902년 金泉松川敎會 안에 養性學校, 1903년 善山竹院洞敎會 안에 彰聖學校, 善 山槐平敎會 안에 善明學校, 1905년 善山習禮敎會 안에 永明學校, 善山路山敎會 안에 廣 成學校, 慶山(安心)新基敎會 안에 啓東學校, 金泉黃金町敎會 안에 進明學校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다.29) 후술하는 바와 같이 1905년 현재 신문 잡지 등에서 뽑은 私立學校의 道別統計를 보면, 慶北은 7개로 나와 있어서(金丁海, 1895 1910 私立學校의 設立과 運營 歷史敎育 論集 11, 1987, p. 134) 위의 8개교보다 오리려 적은 형편이지만(天主敎系외 2, 3개교 를 합하면 더 적어짐), 이는 당시에 慶北地方의 근대학교설립이 아직 微微하였음을 잘 입 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乙巳勒約 후 1910년 2월 현재 統監府의 통계이기는 하지만 전국의 종교계 학교는 801개교로서 長老敎 501개교, 監理敎 158개교, 宗古聖敎會 4개교, 降臨布敎敎會 2개교, 各敎派合同 1개교, 天主敎 46개교, 基督敎宗派未詳 84개교, 佛敎 5 개교로 나뉘어지는데 경북은 74개교이며, 신문 잡지 등에서 뽑은 것은 1909년 현재 70교 로 나와 있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경북지방에도 교육구국운동이 다른 지방 못지 않게 활발하게 전개 된 것을 雄辨하고 있는 것이다. 天主敎는 1896년 5월 朝佛條約의 체결로 어느 정도 전도활동에 대한 자유가 외교적으 로 확보됨에 따라 원주에 있던 臨時神學院을 1897년 서울 龍山(현 龍山區 山泉洞)에 옮 겨 예수 聖心神學校라 개칭하고30) 교역자의 양성에 힘쓰는 한편 전도와 신교육기관의 설 치에 노력하였다. 개신교에 비하여 교육사업이 다소 소극적이었으나 1893년 朝鮮敎區年 末統計報告書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21개교에 학생수는 209명이었던 것이 1904년에는 학교수 87개교에 학생수 678명에 달하는 상당한 발전을 보게 되었으며, 乙巳條約 후 敎 育救國運動이 크게 번지고 있을 때인 1910년에는 124교에 학생 수는 2,783명으로 대폭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31) 학생 수로 보아 규모는 비록 10명 이내의 작은 학교가 대부분 이었을 것 같으며, 학교의 설립자는 거의 신부들로서 이른 바 교회 내 학교 의 성격을 갖 고 있었다. 영남지방에 있어서의 천주교계학교를 보면, 1890년 대구에는 로베르(A.P. Robert) 신부(1890년 처음으로 경상도지방의 전교를 담당)가 2개의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0명 가량의 학생이 있었다고 하였으나32) 학교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 1900년대 초에 29) 慶北敎育史料 (慶北道敎委, 1982) p. 238. 30) 天主敎神學校의 矯矢는 1855년 프랑스인 메스트르(Maistre) 신부가 忠北 提川郡 鳳陽面 九鶴 里에 세운 배론聖요셉神學堂으로서 초대교장으로 쁘르띠에(Póurthie) 신부가 취임하였으나, 丙寅敎難으로 교장 이하 많은 敎徒가 순교하게 됨에 따라 폐교되었다가, 20년 후인 1885년에 강원도 원주군 부흥골에 다시 임시신학원이 설립되어 메론신학당을 계승하였다가 예수聖心神學 校로 발전한 것이다. 31) 金治東, 舊韓末天主敎會의 學校敎育 ( 司牧 47 48, 1976). 그러나, 1910년 2월 統監府 가 조사한 基督敎系學校 總數 801개교 중 天主敎系는 46개교(佛人 25, 韓人 21)로 되어 있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俵孫一, 韓國敎育ノ現狀 學部).

- 118 - 國史館論叢 第23輯 는 이름이 확실치 않는 邑內里學校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학생수가 130명이었다 고 한다.33) 1900년대에 들어 와서 종전에 10명 내외의 규모가 작은 학교 뿐이었던 것이 이와 같이 백명이 넘는 꽤 큰 규모로 발전한, 학교가 생긴 것은 1904년에 학생 30명 이 상의 학교가 5개교에 불과하던 것이 1910년에는 29개교로 늘어난34) 사실이 이를 잘 뒷 받침해 주고 있다. 이러한 數値는 天主敎에서 경영하는 학교가 改良書堂的인 교육기관에 서 正規學校로 정비 발전해 나간 것을 立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邑內里學校 가 어떤 학교였는지 알 수 없는 것은 유감이다. 혹 1908년에 로베르金神父가 세웠다고 하는 聖立學校를 지칭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再考를 요한다. 한편 여기서 집고 넘어 가야 할 것은 여자 교육이다. 天主敎의 여학교 설립은 改新敎보 다 훨씬 늦어서 190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서울을 비롯하여 인천 황해도 등지에서 修 女들에 의하여 시도되어 성공을 거둠으로써 차츰 여러 곳의 천주교회에 넓혀가기 시작하 였다고 하지만, 이 시기에 대구에 女兒를 위한 학교를 세웠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공식적인 기록은 聖立學校의 女子部로서 1910년 3월에 창설된 曉星女子普通學校가 그 처 음이다.35) 개신교가 1902년에 세운 信明女子小學校보다 늦은 것은 천주교의 교육활동이 개신교보다 약한 때문일 것이다. 영남지방의 근대교육을 고찰함에 있어서 떼놓을 수 없는 곳은 密陽이다. 밀양은 본 논 문의 주제가 되는 正進學校의 소재지이므로 앞으로 상세한 논급이 있겠지만, 이 지방에 민간인 학교로서 가장 먼저 설립된 開昌學校에 대하여 일언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이 학 교는 密陽誌 에 의하면, 1897년 11월 밀양의 유지 聞山 孫貞鉉이 密陽邑 內一洞에 설 립한 소학교이다. 그러나, 설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01년 11월에 公立開昌學校로 개 편되었다가 1908년 4월에는 다시 甲種密陽公立普通學校로 승격하였다고 한다. 孫貞鉉은 密陽에서 알려진 甲富였다고 하는 바 私立學校를 왜 갑자기 公立學校로 轉換하였는지 그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앞서 살펴 본 부산 開成學校의 支校로서 1900년에 개교하였다는 자료는 위의 의문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가 될 것 같기도 하다. 邊勝雄의 論文에 의하면,36) 開昌 學校는 光武 4년(1900)에 孫貞鉉이 설치하고 日語와 각 과정을 가르친 것으로 되어 있으 나 開成學校의 지교로서 개교하였다는 언급은 없다. 생각컨대, 開昌學校의 설립은 密陽 誌 에 1897년으로 되어 있지만37) 당시 時務敎育으로 중요시 된 일어를 併課하기 위하 32) 金治東, 위의 논문. 33) 李元淳, 韓國天主敎敎育事業의 敎育史的 意義 ( 司牧 64, 1979) P. 19. 34) 李元淳, 위의 논문. 35) 慶尙北道誌 中(慶尙北道誌編纂委員會, 1983) p. 226. 36) 邊勝雄, 大韓帝國初期의 私立學校 設立運動 (建國大 大學院碩士學位 請求論文, 1982). 37) 開昌學校를 1897년에 설립하였다는 확실한 物證은 현재 密陽國民學校 校庭에 서있는 孫貞鉉先 生紀念碑 이다. 이 비는 건립된 연대를 잘 알 수 없으나 학교를 內一洞에서 현재의 三門洞으로

- 119 - 여 日語敎育으로 정평이 있던 開成學校에 자청하여 1900년 그 支校가 됨으로써 日語敎師 의 지원을 얻게 된 것이 1900년에 개교한 것 같이 수록한 것으로 보여진다. 開成學校의 발전과 더불어 支校로 설치된 학교는 開昌學校 뿐만 아니라 舊館支校(草梁) 釜山鎭支校 (釜山鎭) 開揚學校(東萊) 開進學校(馬山) 등이 있었다. 支校라고는 하지만 개중에는 독립 적인 경영을 유지하면서 교사파견 등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형식적인 지교관계를 맺기도 하였는데, 開成학교는 이런 경우에 해당하였으며 역시 1899년 安東과 大邱에 세운 興化 學校支校도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보여진다. 일찍이 省軒이 聞山에게 보낸 편지에 요사이 듣건대 여름 동안 배를 타고 日東諸域에 遠遊하고 돌아 왔다 라는 내용이 보이는 데,38) 이 편지를 언제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편지 끝에 初秋以來 家親이 毒腫을 몇달 동안 앓아 찾아 뵙지 못하여 죄송하다는 文句가 있는 것으로 보아 혹 1900년 경의 편지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 볼만 하다. 어쨌든 그 는 日東諸域을 여러 번 여행한 일이 있는 開化人이었음에는 틀림 없고, 그러는 동안 開成 學校의 교장 荒浪平治郞과도 知面이 생겨 支校의 교섭이 이루어진 듯 싶다. 그러나, 開成 學校와의 관계가 원활히 진행되지 못해서인지 밀양에 공립소학교의 설립이 절실한 때이기 도 하여 곧 學部의 指定校로서의 公立開昌學校로 전환해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1895년에서 1905년 10월(乙巳條約勅成前)까지 국내 신문 잡지 등에서 私立學校 의 설립 기사를 뽑아 道別로 정리한 것을 보면,39) 漢城 77개교, 京畿 35개교, 忠南 7개 교, 忠北 2개교, 慶南 12개교, 慶北 7개교, 全南 5개교, 全北 2개교, 江原 3개교, 黃海 9 개교, 平南 18개교, 平北 8개교, 咸南 14개교, 咸北 4개교로서 모두 193개교이다. 이들 사립학교의 지방별 건립 추세는 한성부를 제외하면 경기도에 가장 많이 설립되었는데, 이 는 이 지역이 한성부와 인접해 있어서 신교육에 대한 인식이 타지역보다 앞섰기 때문이 다. 다음으로 평남과 함남지방에 많이 설립된 것은, 평남의 경우 일찍부터 기독교의 布敎 活動이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이었고, 함남의 경우는 元山港의 개항으로 인해 최초의 근대 학교인 元山學舍(學校)가 설립된 곳으로서 이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리고, 경상도는 충북과 전북에 비하면 그래도 많은 편이지만 한성부와 경기도보다는 훨씬 적었다. 그런데, 釜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開港한 곳이지만 근대학교의 설립은 元 山보다 늦어서 1895년 基督敎系의 日新女學校, 1896년 民間人系의 開成學校, 1897년 밀 양에 開昌學校, 1899년 대구에 達成學校 등이 설립되었으나, 원체 보수성이 강한 지역이 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하여 근대교육이 활발히 진행되지 못하였다. 1905년 11 월 乙巳條約의 勒成으로 敎育救國運動이 전국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게 확장, 이전한 후 舊址에 남아 있던 것을 1922년 새 校庭에 移建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舊韓 末 甲種密陽普通學校로 승격된 후에 세웠을 것 같다. 38) 省軒集 권4, 與孫議官貞鉉, P. 73. 39) 金丁海, 1895 1910 私立學校의 設立과 運營 ( 歷史敎育論集 11, 1987) p. 134.

- 120 - 國史館論叢 第23輯 되자, 영남지방에도 즉각 그 영향이 미쳐 와서 근대교육운동이 어느 지방 못지 않게 활발 하게 일어났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衛正斥邪運動에 적극 참가한 일이 있는 保守性理學者 중에 사상변화를 일으켜 애국계몽운동에 뛰어 들어 新式學校를 설립한 사람 이 나오게 된 것이다. 安東사람 東山 柳寅植(1865 1928)과 石洲 李相龍(1858 1932) 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東山은 乙未義兵 때 保守斥邪의 기치를 들기도 하였으나 러일 전쟁을 계기로 하여 申采浩 등의 영향을 받아 애국계몽운동가로 변신하여 1907년에 一松 金東三과 함께 安東川前洞에 協東學校를 세워 서슴없이 단발을 하고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이 지방의 儒林開化 民衆開化의 요원을 양성하는 큰 구실을 했다. 石洲도 역시 乙未義兵 과 乙巳義兵에 가담한 일이 있는 衛正斥邪論者였으나 의병투쟁이 실패로 끝나자, 스스로 의 한계를 느끼고 사상전환 후 1909년에 大韓協會 安東支會長이 되어 애국계몽운동가로 전환하였다. 8 29國難 직후인 1911년에는 西間島로 망명하여 李始榮 등과 더불어 新韓村(海外基 地) 건설과 新興武官學校 설립을 추진하는데 노력하였다.40) 그리고, 心山 金昌淑은 義兵 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을사조약이 勒約될 때 스승 李承熙와 함께 請斬五賊疏 를 올린 영남의 전통유학자의 한 사람이었고, 일찍이 大韓協會 星州支部를 조직하여 애국계몽운동 에 참여하고 계급타파를 부르짖기도 했다. 1910년 斷煙同盟會의 기금으로 私立星明學校 를 만들었으나 日警이 기금을 압수해 가는 바람에 결국 학교는 문을 열지 못하고 말았 다.41) 그 후 3 1운동 때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130여 명의 連名으로 한국독립을 호소 하는 진정서(巴里長書)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파리에서 개최된 萬國平和會議 에 우편으로 전달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開化와 救國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영남지방에도 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는 것은, 이러한 先覺者들의 영향 뿐만 아니라 1907년 1월 대구에서 힘차게 깃발이 오르기 시작한 國債報償운동, 1908년 3월에 결성된 嶠南敎育會의 활동이 많은 자극을 주었겠지 만, 또한 基督敎北長老會가 다른 교파보다 다 적극성을 갖고 활동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 나, 영남지방은 한성부와 경기도 및 서북지방에 비하면 월등히 적었다. 이를 밝히기 위하 여 앞서 참고한 金丁海의 논문에 보이는 1909년42) 까지의 통계를 다시 道別로 摘記하면 한성 226개교, 경기 211개교, 충남 94개교, 충북 41개교, 경남 104개교, 경북 70개교, 전남 41개교, 전북 45개교, 강원 44개교, 황해 172개교, 평남 194개교, 평북 241개교, 함남 102개교, 함북 37개교로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에 學校數가 앞서의 경우(1895 1905)보다 전반전으로 크게 증가한 것은 乙巳條約 후 敎育救國運動이 활발하게 전개된 40) 趙東杰, 安東儒林의 渡滿經綠와 獨立運動上의1 性向 ( 大丘史學 15.16, 1978) p. 416. 41) 金昌淑 (心山思想硏究會, 1981) p. 188. 42) 여기서 1909년으로 限定한 것은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사립학교 설치에 대해서 1910년은 신문 잡지의 어느 자료에도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 121 - 데 근본원인이 있다. 이번에도 경상도는 한성부 경기도에 비해 學校數가 훨씬 적은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으나, 한편 평남과 평북에 비해서도 엄청난 차이가 난다. 경남과 함남 은 거의 비슷하지만 이를 영남과 관북으로 나누어 비교해 보면, 영남이 174개교, 관북이 139개교로서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많은 것은 보수성이 강한 경북이 그래도 북장로교의 열성으로 학교설립이 활발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평안도가 435개교로서 한성부와 경기도를 합한 437개교와 거의 비슷하게 될 만큼 을사조약 이후 많은 사립학교가 건립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처럼 평안북도가 1위에 올라선 것은 경탄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그만큼 關西地方의 교육구국운동이 어느 지역 보다 왕성하게 이루어진 것을 實證 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 近代敎育史上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관서지방에 사립학교가 가장 많이 설립된 것은 기독교의 영향, 신교육을 통한 지위향 상 도모, 西洋文物受容의 지리적 호조건 등이 작용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43) 학교 설 립이 부진했던 영남, 특히 경북과 전남북 충북 등의 지역은 조선후기 이래 保守性理學의 전통이 가장 강한 지역이었으며, 한말부터는 斥邪衛正의 본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바 탕으로 한 의병항쟁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新學에 대한 거부반응이 가장 강한 지역으로 남 아 있었다. 이로 인해 이 지역에서는 지도급 인사였던 儒林, 書堂의 訓長 등이 新學이 興 旺하면 舊學이 쇠퇴해 진다고 하여 사립학교의 신설을 강력히 반대하였던 것이다.44) 이를 다른 자료에서 살펴 보면, 1908년 8월 日帝가 사립학교를 탄압하기 위하여 제정 한 사립학교령에 따라 정식으로 인가된 학교는 다음과 같다. 표 3 1910년 5월 私立學校 認可一覽表(道別)45) <표> 學校別 普 高 實 各 宗 累 道別 通 等 業 種 敎 計 漢城 1 1 2 66 24 94 </표> 京畿 忠南 忠北 慶南 慶北 全南 全北 江原 黃海 平南 平北 咸南 咸北 計 2 3 3 1 4 2 16 1 2 1 1 3 7 136 73 41 82 72 31 42 37 104 189 279 194 56 1,402 64 16 7 18 75 4 31 6 182 254 121 21 823 200 91 48 104 150 36 77 43 286 443 218 218 59 2,250 이 시기에 설립된 사립학교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 다만 日帝의 調査자료에 따르 43) 金祥起, 앞의 논문 pp. 75 76. 44) 大韓毎日申報 1906년 12월 28일, 心山이 1910년 斷煙金을 財源으로 하여 鄕里에 私立星 明學校를 설립하려고 할 때 新敎育을 반대하는 鄕中 및 道內의 완고한 유림들이 떼지어 일어나 서 공격한 것은 그 좋은 한 事例라고 하겠다( 金昌淑 p. 187). 45) 俵孫一, 韓國敎育ノ現狀 (學部, 1910) p. 49.

- 122 - 國史館論叢 第23輯 면, 1908년 현재 전국의 학교 수는 漢城의 100여 교를 비롯하여 총 5,000여 교에 달하 며, 학생 수는 20여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여 개략적인 숫자를 들고 있을 뿐이다.46) 5,000여 교의 학교 중 學部에 인가 신청서를 얼마나 냈는지 알 수 없지만, 정식으로 學 部의 인가를 받은 학교는 1910년 5월 현재 2,250개교에 달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컨대, 당시 사립학교가 學部에 인가 신청서를 낼 수 있고 또 승인 받을 정도의 학교라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기반과 교육시설, 敎師陣 및 학생 수의 확보가 이루어진 학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인가를 받지 못한 학교가 많았을 것은 틀림없 는 사실이며, 오히려 審査에서 脫落된 학교보다 처음부터 인가신청을 포기한 학교가 더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47) 5,000여 교는 결코 많은 숫자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여기서 한성을 예로 들면, 국내의 신문 잡지에서 뽑은 道別統計에서는 226개교에 달하여 13道 중 1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학부의 設立認可表에는 94개교로 학교 수가 격감하고 있는 것은 인가신청을 내지 않았거나 심사에서 탈락한 학교가 많았을 것을 반증하는 好箇 의 자료라고 하겠다. 2,250개교의 인가학교 중 民間人學校는 1,402교이고 宗敎系學校는 823개교에 이르렀 으며, 도별로는 한성부 94개교, 경기 200개교, 경남 104개교, 경북 150개교, 황해 280 개교, 평남 443개교, 평북 401개교로서 앞에서도 본 것처럼 평남(19.2%)과 평북 (17.8%)이 가장 왕성하고 황해도(I2.7%)가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는데, 평남 평북 황해 3도가 전체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 경남(4.6%)과 경북(6.7%)은 2도를 합해도 아 직 전체의 11.3% 밖에 되지 않는 不振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경북이 경남을 앞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성(94개교)보다도 훨씬 上廻하고 있는 사실이다. 한성의 學校數가 격감한 것은 앞서 잠간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 기서는 접어 두기로 하고, 경북은 국내 신문 잡지의 道別 統計에서는 70개교였던 것이 學 部의 設立認可表에는 150개교로서 학교수가 무려 2배 이상으로 激增하고 있지만, 경남은 이상하게도 增減이 없는 것이다. 경북의 학교수가 이처럼 격증한 것은 앞서 잠깐 언급은 했지만, 특히 宗敎系의 학교가 크게 증가한 때문이라고 본다. 1910년 2월 현재 경북의 종교계학교 74개교 중 장로회의 경우 미국인 설립이 53개교, 韓人 설립이 8개교로서 61개교에 이르고 있는 것을 보아도 長老派(北)의 열성적인 활동 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13개교는 天主敎 2개교, 宗派未詳의 基督敎 10개교, 佛敎 1개교로 되어 있다. 이를 他道와 비교하면 평남 261개교, 황해 183개교, 평북 121개교에 이어 4위를 차지하는 盛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경남은 17개교 뿐인 46) 주 4)와 같음. 47) 韓國敎育ノ現狀 (p. 66)에서 學務次官 依孫一은 私立學校令 발표 이전에 평북 宣川郡은 약 100교가 있었으나 지금은 2 30교로 적어진 것은 設立請願을 하지 않고 이미 廢校로 돌아간 학 교가 적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 123 - 不振을 보이고 있는데 영국인(長老敎會)이 5개교, 미국인(장로교회)이 3개교, 宗派未詳의 基督敎 6개교, 佛敎 3개교로 나뉘어 있다.48) 여기의 영국인(장로교회) 5개교는 앞서 日 新女學校의 경우에서 본 濠洲長老敎宣敎會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이 1910년 5월 현재 정식으로 學部의 인가를 받은 2,250개교의 사립학교는 8 29國難 후 日帝의 모진 간섭과 탄압에 이기지 못하고 공립학교로 전환하거나 폐교하는 일이 속출하게 된다. 1911년 8월의 朝鮮敎育令, 1911년 10월의 私立學校規則, 1915년 3월의 改正私立學校規則 등은 奴隸敎育을 강요하기 위한 악법으로 유명하였기 때문에 그 桎梏을 벗어나 존속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3 1운동이 일어나는 1919년의 私立學校統計를 보면, 民間人學校 444개교, 宗敎系學校 298개교, 계 742개교라는 약 1/3로 감소하는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당시의 私立學校統 計를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표 4 私立學校 統計表49) <표> 年 度 </표> 學校種類 1910 1911 1912 1913 1914 1915 1916 1917 1918 1919 1920 1921 1922 1923 1924 1925 一 般 1,227 1,039 817 796 769 704 624 518 621 441 410 356 352 376 364 347 宗敎系 746 632 545 487 473 450 421 350 317 298 279 279 262 273 271 257 計 1,973 1,671 1,362 1,283 1,242 1,154 1,045 868 778 742 689 635 614 649 635 604 우리는 위의 통계표에서 日帝强占期의 私立學校의 消長에 관하여 몇가지 특징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는 1910년에 1973개교로 나와 있는 것은 認可數 2,250개교보다 277개교가 감소하고 있는데, 이는 8 29 國難 후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즉 1910년 5월 전후부 터 이미 감소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로 감소가 가장 심한 시기 48) 俵孫一, 韓國敎育ノ現狀 (學部) 基督敎學校ノ現況 (1910) p. 54. 49) 朝鮮敎育要覽 (總督府學務局, 1928) 吳天錫, 韓國新敎育史 (現代敎育叢書出版社, 1964) p. 273 再引用.

- 124 - 國史館論叢 第23輯 는 1911년과 1912년 두 해 사이로서 무려 611개교가 격감하고 있는데, 이는 정치적 사상 적 탄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셋째는 改正私立學校規則이 발표되는 1915년부 터 1917년까지 3년 사이에 374개교나 크게 줄고 있는 것은 이 법에 의한 사립학교의 통 제가 加重된 때문일 것이다. 넷째는 3 1운동 전후의 몇 년 동안은 감소가 둔화되다가 1923년에는 異例的으로 前年보다 오히려 24개교나 증가하고 있는 것은, 民族更生運動의 확산으로 인한 向學熱의 고조로 신설학교가 많이 증가한 점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Ⅲ. 李炳憙의 思想과 그 一門의 新舊併進運動 李炳憙의 본관은 驪州, 자는 應晦(初字 景晦), 호는 省軒이다. 哲宗 10년(1859) 恒齋 李翊九의 장자로 密陽郡 丹陽面 武陵里에서 출생하여 1938년 80세를 일기로 同 府北面 退老里에서 서거하였다. 어려서부터 부친의 엄격한 訓導 아래 학문의 기초를 닦았으며, 家狀( 省軒集 17, 附錄 p. 201)에 庚午 聞國家收富民錢 以作宮室 草擬疏萬餘言 見者 謂與賈太傅 上疏同意 時方十二歲也 라고 보이 듯이 12세 때 大院君이 돈을 강제로 징수하 여 궁궐을 지으므로 그 부당함을 들어 상소문 형식의 긴 글을 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어린 시절 부터 時事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며 학업에 沈潜하였다. 高宗 27년 (1890) 31세 때 부친을 따라 일가가 退老里에 이거하게 된 것이 驪州李氏一門이 이곳에 정착하여 正進學校 설립 등 많은 사업을 벌이는 機緣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다음해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였으나 때는 개항한 지 15년이 지난 무렵이기도 하여 개화의 물결이 도처에 번지고 있는 데다가, 정계는 混濁하여 벼슬을 팔고 사는가 하 면 뇌물이 횡행하고 있음을 보고 한탄한 나머지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단념하고 고향에 되돌아 오고 만다. 家狀에 恒齋公亦知其素志 不復强之焉 이라 한 것을 보면 본래 과거를 보려고 한 것은 부친의 권유에 따랐던 것 같으며, 부친도 아들의 본뜻을 알고 또 다시 강 권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말기적 현상을 보며 외세의 침략 앞에 無力을 들어 내고 있는데 어떻게 국권을 수호할 것인가 하는 걱정을 안은 채 과거를 보아 官人으로 출 세하려던 생각을 깨끗이 떨쳐 버린 그의 비장한 심정을 넉넉히 짐작할 만하다. 이에 省軒 은 학자로서 일생을 보낼 것을 굳게 결심하고 고향에 파묻혀 80평생을 오직 林下에서 저 술과 講學으로 일관된 생애를 보냈으며, 부친이 星湖學派로부터 이어 받은 이른바 實學이 라고 일컬어지는 새로운 儒學의 씨앗을 영남학계에 깊이 심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의 새로운 儒學은 한편 당시 도도하게 흐르고 있던 개화사상과 깊이 연결되고 있었던 것을 또한 주목하고자 한다. 원래 驪州李氏一門은 驪州李氏退老家譜에 의하면, 여주의 舊族으로 李仁德을 始祖로 하 여 戶長 校尉 등 鄕職에 종사하다가 고려중기로부터 開京에 진출하여 벼슬하는 官人層이

- 125 - 되었고, 고려 말에 田制改革疏로 유명한 李行(호 騎牛子)은 藝文館大提學으로 문명이 있어 騎牛子集 을 남겼으나, 고려가 망하자 신왕조에 벼슬을 하지 않고 平山 醴泉洞으로 은 퇴하였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은 한양에 옮겨와 벼슬살이를 하는 한편 長孫 孜는 讓寧大 君의 딸 載寧郡主에게 장가 들어 王室과 婚姻하는 有數한 가문이 되기도 하였다. 燕山朝에 들어와 騎牛子의 玄孫 師準의 弟 師弼이 士禍를 피해서인지 멀리 密陽에 내려와 世居하게 되면서, 翰林 承旨 등 몇몇 淸宦이 나왔고 仁祖反正 以後에는 그것마저 끊어졌으나 대대로 資產과 文翰은 乏絶되지 않았다. 退老里에 정착한 후의 家系를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영남지방은 일찍부터 性理學이 크게 발전하고 保守性向이 유달리 강한 곳이다. 仁祖反 正 이후 서인이 득세함에 따라 차츰 仕宦의 길에서 멀어져 온 것은 嶺南士林의 공통된 처 지였지만, 그런대로 驪州李門은 자산과 문한이 이어져 내려 왔으며 畿湖의 사대부들과도 先代로부터 聲氣를 상통해 왔다. 특히 同宗 가운데 近畿實學의 宗師인 星湖 李瀷의 一家 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어, 星湖의 조카 惠寰 李用休(李家煥의 父)와 星湖의 제자인 順庵 安鼎福50) 등이 先代로 부터 文字의 왕래가 잦았다. 이러한 연유로 부친 恒齋는 일찍 부 터 성호의 학풍을 尊慕하게 되었고 近畿實學의 嫡傳인 性齋 許傳을 찾아가 스승으로 섬기 게 되었다.51) 부친 恒齋의 학문을 충실하게 계승한 省軒은 과거와 仕進을 단념하고 집에 <그림>000000075794_0130.j pg</그림> 50) 驪州世稿 중의 하나인 掇感錄 의 序文을 安鼎福이 지은 것과 掇感錄 中의 碑誌를 李用 休가 지은 것 등은 그 好箇의 事例이다. 51) 恒齋集 解題(李佑成) 1977. 李翊九가 許傳에게 師事한 것은 그가 일찍이(1850년대말) 과 거를 보려 상경하던 중 水原 客舍에서 判書 尹宗儀(坡平尹氏, 老論)를 만나 許傳의 학문을 칭

- 126 - 國史館論叢 第23輯 돌아와 있다가 학문을 넓히기 위하여 33세 때인 1892년에 영남일대의 유학자들을 두루 심방하면서 자신의 공부에 매진하였다. 특히 高靈에 있던 晚求 李鍾杞와 居昌의 俛宇 郭 鍾錫 두 선배와는 학문적으로 접촉이 깊었다. 이 시기에 그들과 교환한 禮說 및 太極說의 問答( 省軒集 2, pp. 37 58)은 학문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특히 郭俛宇와는 太 極說을 가지고 長文의 질의응답을 교환하였는데, 그는 우주와 인생의 심오한 원리를 다루 는 省軒을 크게 칭찬해 마지 않았다.52) 郭俛宇는 恒齋보다 8년 연하이고 省軒에게는 13 년 연상으로서 집안 간이 가깝게 지내고 학문적 유대가 깊었다.53) 뿐만 아니라, 俛宇은 영남의 전통적 儒敎가문에서 태어나 寒洲 李震相의 門人이 되어 성리학을 공부했지만, 진 보적인 성향이 강하여 젊은 시절에 道家와 佛家의 경전을 섭렵하고 老壯年代에는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교리까지 탐구하여 心即理說을 심화시킴으로써 主氣論 쪽에서는 물론, 安東 을 중심으로 한 合理氣論 쪽으로 부터도 異端視 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또한 지리 농업 산학 병법에 남다른 조예가 있었고, 독립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성헌에게 간접 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 같다.54) 省軒은 영남일대를 순방하고 돌아와서 時局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지면서 原士 大臣論 吏治 ( 省軒集 9, 雜著 pp. 194 199) 등을 집필하였다. 이것은 俛宇 를 위시한 嶺南先輩學者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기본적으로는 近畿學統의 思想을 계 승한 데에서 나온 것임이 틀림 없다. 먼저 原士란 士(선비)의 몸가짐을 유교적인 입장에 찬하는 말을 듣고, 漢陽에 올라가 찬물내골(冷泉洞)로 許傳을 찾아가 만났으나 그냥 귀가하고 말았다. 그후 性齋가 金海府使로 내려와 있을 때(高宗 1년 3월 동 3년 7월, 性齋文集 年譜 참조), 다시 찾아가 정식으로 師事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참고삼아 당시의 嶺南學統關係를 살펴 보면 退溪學派는 西厓學統 鶴峯學統 寒岡學統으로 나눌 수 있는데, 寒岡學統은 眉叟 許穆 을 거쳐 星湖 李瀷에게 傳受되어 近畿學統을 형성하였으며, 이는 다시 性齋 許傳을 거쳐 영남 에서는 恒齋 省軒에게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恒齋는 肯庵 李敦禹 定軒 李鐘祥 止軒 崔孝述 등을 비롯한 많은 영남유림과 접촉하였으나 師弟관계를 맺을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으며 오직 근기학통인 性齋에게 師事하게 된 것이다. 이는 省軒도 마찬가지였다. 省軒家狀에 嘗曰 吾於 晚求俛宇兩先生 縱未曾執贄受業 而平生依仰之深 則謂之門人 亦無不可矣 라고 한 바와 같이 晚 求 李鍾杞 俛宇 郭鍾錫에게 깊은 學緣이 있기도 했으나 省軒은 家學關係로 근기학통 속에 위치 를 굳히고 만 것을 알 수 있다. 52) 省軒集 解題(李佑成) 및 俛宇集 권45, 庚子年(1900) 答李景晦別紙 如非體驗眞切 曷 能有此說 不任傾服之至. 53) 俛宇는 恒齋의 墓碣을 짓고( 恒齋集 권9, 附錄 p. 163), 恒齋集 을 校勘하기도 하였으 며( 省軒集 권7, 與曹仲謹 p. 130), 省軒이 俞水絃(鎭相)에게 보낸 答狀에는 俛宇之喪 吾 嶺之所共嗟惜而憲則自少從遊 契誼自別於人 ( 省軒集 권7, p. 133)이라 보인다. 54) 8 29 國難(庚戌國恥)를 전후하여 亡國을 눈 앞에 보는 유학자의 태도는 亡命 起義 自靖의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데(李正奎, 從義錄 獨立運動史資料 1), 俛宇는 넓은 의미에서 自靖 論者라고 할 수 있다. 自靖論은 즉각의 죽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잃은 죄인으로서 自 重苦行하며 깨끗한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그는 乙巳條約 때 張錫英 李承熙와 함께 五賊 을 斬하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한 때 의병장으로 추대되기도 하고 중국망명을 제의 받기도 했으 나 모두 거절하였다. 俛宇는 國難을 맞게 되자 居昌 茶川에 옮겨 蟄居하고 있다가, 3 1 운동 때에는 巴里長書의 민족대표로서 투옥되어 2년형을 받고 병을 얻어 풀려났으나 곧 죽었다.

- 127 - 서 설명한 것이다. 일찍이 恒齋도 이와 꼭같은 제목으로 글을 남기고 있다. 恒齋는 여기 서 士(선비)는 農工商과 더불어 四民의 하나이면서 士가 首位에 처하게 된 이유는 선비가 출세 여부에 관계 없이 修齋治平의 이념과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오늘날 세상이 크게 달라져서 사회교육 실업교육이 강조되고 農學 工學 商學 등의 학문이 확장되 어 천하가 그리로 쏠리고 있는데, 窮理 誠身 즉 성리학적 교양만으로 세상을 외면하고 자기를 孤立시켜서 되겠는가고 하였다.55) 당시 다른 지역보다 보수성이 강했던 영남유학 자로서는 놀라울 만큼 진취적인 사상을 가졌던 것을 볼 수 있다. 항재의 이러한 진보적인 사상은 實學時代 以來의 전통적 견해를 바탕으로 하여 開化時代에 적응해 나가려는 19세 기 후반의 전환기에 처한 우리나라 유학자의 진보적 견해를 보여 주는 것이면서, 한편 어 디 까지나 유학자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士(선비)의 기본입장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서56) 주목할 만하다. 이것으로 보면 19세기 후반에 개항과 더불어 밀어 닥치기 시 작한 개화사상의 물결이 이미 密陽郡 退老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을 넉넉히 짐작 할 수 있다. 부친으로부터 家學을 충실히 계승한 省軒은 역시 原士 라는 글을 지어 士(선비)를 세 가지 類型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즉, 道德에 뜻하는 자는 功名에 매이지 않고, 功名에 뜻하는 자는 富貴에 군색스럽고 구구하게 하지 않고, 富貴에 뜻하는 자는 恥辱을 가볍게 보지 않아야 한다 고 하여, 첫째는 道德志向的 人間이고, 둘째는 功名志向的 人間이고, 셋째는 富貴志向的 人間57)이라 하여 그 특징을 잘 抽出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道가 盛하면 德이 충 만하고, 덕이 충만하면 功을 이루게 되고, 공을 이루면 이름이 드러나게 되고, 이름이 드 러나면 장차 부귀를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온다고 하였다. 요컨대 道와 義를 완전하게 하 기 위하여 선비는 모름지기 理財의 길에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되지만, 결코 그것이 道와 義에 우선해서도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恒齋처럼 四民에 대한 거론은 하지 않 았지만, 이같은 그의 士(선비)에 대한 분석은 恒齋의 사상을 이어 받아 실학의 바탕 위에 서서 조선 왕조 말엽의 커다란 시대적 전환 속에 선비(지식인)의 자각과 자기위치 설정을 55) 恒齋集 권3, 雜著 原士 p. 45, 天生萬民各授之職曰士農工商 惟士有大焉 然則學之 如何 亦曰窮理 以致其知 反躬以踐其實 精粗表裏 豁然有貫通之妙 進德修業 孜孜有日新之効 體有 以立 而用有以行 則近而修身齊家 遠而治國平天下 擧右於施措之間 沛然莫之禦也 方今時多事 實業爲本原 如農學商學工學之類 莫不漸次擴張 天下風靡趍之 若不及士生 變 往往以社會爲敎化 斯世 豈可但守吾學規 規於窮理誠身 踽蹈爲獨行之士哉 使天下之爲四民者 不唯各專其業 而能 各善其身 漸染乎孝悌之化 優游乎仁壽之域 同歸於吾敎 則固善之善也 若不然而不相爲謀 則寧抱吾 道 以獨善其身而已 豈可苟趍時好 以喪吾之所以爲士者耶. 56) 恒齋集 解題. 57) 省軒集 解題. <첨자> 자> </첨

- 128 - 國史館論叢 第23輯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 날카로운 암시를 던져 준 것이라 하겠다.58) 그는 또 1893년에 나 이 34세 때 大臣論 을 지었다. 이 시기는 大院君이 완전히 실각한 후 閔氏政權이 失政 을 거듭하여 나라 살림이 파산 상태에 이르렀던 때였으며, 국정이 대신들에 의하여 좌우 되고 있다고 본 그는 대신들이 꼭 지켜야 할 두 가지 일을 開陳한 것이다. 첫째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인사정책에 관하여 賢者를 천거하여 임명하는 것은 국가의 先務라 하고, 만일 천거될 사람이 많고 임명된 사람이 마땅하여 안으로 卿大夫 百 執事와 밖으로 方伯守令이 모두 그 사람을 얻게 되면 대신된 자는 팔장 끼고 앉아서 太平 을 누릴만큼 국가가 편안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둘째는 해이해지고 문란한 국민의 정 신 풍토를 振作시키기 위해서는 賞罰을 엄하면서 공명정대하게 내려야 한다면서, 옛날 舜 이 堯의 대신이 되어 四兇을 죽이고, 孔子는 魯의 대신이 되어 小正卯를 죽이고, 周公은 周의 대신이 되어 管叔과 蔡叔을 죽였는데, 이를 보고 천하가 畏服한 것은 四凶은 대신이 고 小正卯는 이름이 알려져 있고 管叔 蔡叔은 至親이지만, 그들을 대표적으로 과감하게 다스려 一罰百戒의 효과를 거둔 때문이다라고 하였다.59) 요컨대 大臣의 職은 첫째로 擧賢分職에 있다는 것과 둘째는 상벌을 嚴明히 해야 된다는 것이었지만, 당시 優柔不斷한 高宗의 자질로 보아 어떠한 대신이라 해도 有終의 美를 거 두기가 어려울 것 같았으므로 마지막에 格君心 을 강조하고 끝을 맺었다.60) 그는 大臣論 에 이어 35세 때인 1894년에는 탐관오리에 의해 과중한 세금이 긁혀 나가고 지방행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塗炭에 빠진 것을 개탄하며 다시 吏治 라는 글을 지어 일선 행정 책임자인 守令들에게 警鐘이 되게 하였다. 즉 州縣吏의 患部에 세 가지가 있으니, 그 첫째는 서민들의 생활이 궁핍하여 부과된 祖賦를 낼 수 없다 하고, 둘째는 민 간의 獄訟이 복잡하여 그르고 옳은 것을 분별하기 어렵다 하고, 셋째는 狡猾한 아전이 법 을 업신여겨 國庫 축내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하였다.61) 吏治 는 문자 그대로 수령 의 治道 즉 수령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꼭 마음에 적어 두어야 할 三患을 들고, 이 三 患에 대해 마땅한 措處를 취하지 못하면 비록 仁民의 마음과 일을 종합하는 지혜가 있어 도 장차 그 政事를 시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吏治 는 조선왕조 말엽에 蠧國病 民의 최대 원인의 하나가 수령의 무능과 부패에 있었으므로 당시 수령이 알아야 할 가장 큰 문제를 세 가지로 요약하여 그 대책과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62) 58) 省軒集 解題. 59) 夫擧賢而任之者 國家之先務也 苟擧之之多而任之之當 使內之卿大夫百執事外之方伯守令 皆得其 人則爲大臣者 將拱手指麾而坐享太平矣 昔舜之相堯也 誅四凶而已 孔子之相魯也 誅小正卯而已 周公之相周也 誅管蔡而已 誅者少而天下莫不畏服 其故何也 四凶大臣也 小正卯聞人也 管蔡至親 也 刑之所甚難而刑之 天下之人 以爲不避大臣如此 况小者乎 不宥聞人如此 况不肖者乎 不私其親 如此 况疎者乎 如是則 天下之人 孰敢爲惡乎 至於賞亦然. 60) 省軒集 解題. 61) 嘗觀州縣之吏 其患有三 黎民窮乏而租賦莫之出也 獄訟蕃滋而曲直莫之辨也 黠吏侮法而逋負莫之 禁也.

- 129 - 이와 같이 省軒은 在野學者의 한 사람으로서 한 때 原士 大臣論 吏治 등을 지으며 時務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으나 그 당장 어떤 효과가 날리는 없었다. 그의 남 다른 고민은 이런 곳에서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省軒은 부친 恒齋로부터 星湖의 실학 사상을 전수받았고 이미 개화사상과 근대교육의 바람이 영남지방에도 미쳐 오고 있어서 1897년에는 聞山 孫貞鉉이 開昌學校를 설립하기도 했지만, 영남유림은 특히 성리학의 전 통이 강한 곳이어서 그들의 頑固함과 철저한 보수성 때문에 성헌은 孤獨한 유학자의 입장 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실학을 바탕으로 진취적 기상을 갖고 있던 성 헌은 지나치게 보수성이 강한 영남유림 속에서 자신의 뜻을 살리기가 어렵다고 판단, 그 가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서 전력을 다하기로 작정하기에 이른다.63) 省軒은 40세 때 부친이 退老里 西쪽 기슭에 지은 西臯精舍(1898년 여름께 落成)에 들 어 앉아 저술과 강학을 시작하는 한편 부친이 이루어 놓았거나 혹은 계획한 일을 이어 받 아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게 된다. 西臯精舍에 관하여는 그가 지은 西臯精舍記 가 省軒集 (p. 204)에 실려 있다. 약칭 西臯亭이라고도 하여 조용하고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일종의 別莊 겸 書堂이다. 그로부터 30여 년간 西臯精舍는 성헌이 이룩한 많은 업적의 산실이 된 것이다. 그는 1899년 西臯精舍 건너편 서남쪽 언덕 위에 있는 惜陰齋 안에 부친의 뜻을 받드러 華山義塾을 세워 新舊併進 의 뜻을 펴려고 하였으나 保守的 雰 圍氣를 갑자기 극복하기 어려웠음인지 실현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1907년 대구에서 불 붙기 시작한 國債報償運動에 鄕里에서 聞山과 같이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타고 난 病弱한 체질과 高齡인 父親侍下에서 그 이상의 時代的 激流 속에 뛰어 들지 못하고 그 대로 눌러 앉아 가정을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큰 자극을 받은 성헌은 敎育救國 運動의 일환으로 과감하게 日人敎師와 기술자를 초빙하여 華山義塾에서 신식교육을 실천 에 옮겼다. 그는 8 29國難을 당하고 54세가 되던 1912년 7월(陰)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 고 3年服喪을 마치고 나서는 이미 장자 世衡에게 家事를 맡긴 뒤인지라 다시 西臯精舍에 들어 앉아 강학과 저술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그는 항상 나라(國家)는 한 때 망할 수 있어도 겨레와 文物은 망할 수 없다 64) 라고 하며 國故文獻의 정리와 후진의 양성을 자기 의 사명으로 여겼다. 이 시기에 성취한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星湖集의 간행과 朝鮮 史綱目 의 집필 및 正進義塾의 재건이었다. 星湖集은 省軒이 자기 학문의 淵源關係로 일찍부터 중시하고 있던 차에 마침 牙山傍孫 李德九(星湖의 第 3兄인 剡溪 潛의 7代孫)의 箱篋 속에 들어 있던 방대한 遺稿(修堂 李 南珪의 手校本 27册)를 입수하여 退老里로 운반해 두고 영남을 비롯, 경기 호서의 여러 인사들과도 연결하여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木板으로 간행하게 되니,65) 이것이 오늘날 62) 省軒集 解題. 63) 釜山日報 1986년 3월 19일자 韓國知性의 뿌리 ⑫ 省軒 李炳憙. 64) 省軒集 解題.

- 130 - 國史館論叢 第23輯 알려져 있는 退老版 星湖先生文集 (50권 27책)이다. 退老里에서 星湖集을 간행한 것 에 관하여는 省軒集 에, 刊役은 丙辰冬에 시작하여 丁巳夏에 준공하니, 비용과 힘이 많이 들었다. 비록 艱 星湖集의 窘을 겪었지만 그것을 성공에 이르게 한 것은 遠近에 있는 많은 인사들의 힘에 의한 것이다.66) <첨자> </첨 자> 라고 한 것을 보면 丙辰冬 부터 丁巳夏 즉 1616년 겨울부터 1917년 여름까지 불과 9개 월 만에 완공하고 있으니 급속도로 간행을 진행시킨 것을 알 수 있다. 星湖集을 될 수 있 는 데로 빨리 간행하려는 省軒의 정성과 노력이 대단하였는 데다가 경기 호서 영남의 멀 고 가까운 유림들이 성원하고 비용의 일부를 염출해 준 힘이 크게 도움이 된 것이다. 비 용을 여러 인사들이 出捐한 것은 鄕里諸友가 27책 중 12 13책의 간행비를 自擔한 것으로 도 그 일단을 짐작할 수 있지만67) 한편 방해도 또한 만만치 않았다. 省軒이 崔直夫(羽東)에게 보낸 答書를 보면, 星湖集의 刊行事는 많은 艱險을 거쳐 요지음 겨우 工役이 끝나가고 있다. 그러나, 財政이 不敷하여 積債를 갚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 紙價가 또한 뛰어 올라 印册을 아직 바꾸지 못하여 여러 가지로 흠을 찾고 여러 사람이 惡談을 하는 더욱 悶歎이 대단하다. 그런데 傍觀者가 68) 것이 무섭다. 그간의 曲折을 어찌 먼 곳에서 다 알 수 있겠는가 <첨자> </첨 자> 라고 하여, 星湖集을 간행함에 있어 두 가지 어려움을 들고 있다. 하나는 재정이 넉넉치 못한 데다가 紙價가 올라 어려움이 많다는 것과 또 하나는 刊行을 비방하는 자가 악담을 늘어 놓는 것이라고 하였다. 간행비에 대하여는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 는 간행을 비방한 무리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그런데, 비방도 두 가지 측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첫째는 京城의 야심적인 일부 儒林으로서 東人 金孝元의 宗孫인 金鎬承이 주동이 된 것 이었다. 한 지방에서 방대한 星湖集을 간행하려는 것은 無理에 가까운 일이며, 이런 중요 한 큰 사업은 마땅히 京城에서 수행해야 된다는 것이었지만, 이는 李聖五(準九)에게 보낸 65) 省軒集 解題. 始於丙辰之冬 竣於丁巳之夏之夏 費鉅力絀 雖備經艱窘 而及其成功 則莫非遠近多士 66) 星湖集刊役 之力也 ( 省軒集 권9, 答金相七 p. 127). 67) 省軒集 권5, 與金仁叔 p. 98, 近世湖儒 又删定爲二十七册 而鄙鄕諸友之所出力自擔者 僅十 二三册耳. 여기서 湖儒란 修堂 李南珪를 말한다. 또한 河復卿(載華)에게 보낸 答書(권 4, p. 87)에는 此聲(星湖集刊事)一播 遠邇響應 傾囊竭槖 隨力捐助 但寒素本色 鷺股無可割 經年閱月 零星湊合 僅辦得二十-册之費矣 라 하여 遠近의 人士가 傾囊竭槖하고 隨力捐助하였다 는 기록도 보인다. 68) 省軒集 권7, P. 124, 星湖集刊事 備經許多艱險 近纔訖工 然財政不敷 積債未償 紙價又翔 百般求疪 積毀消骨 這間曲折 豈遠外可悉哉. 印册姑未易 殊切悶歎 然而 傍觀者 <첨자> </첨 자> <첨자> </첨자>

- 131 - 書翰에도 지적되어 있듯이 앞서 京鄕儒生이 屢次 會議하여 발간하려고 했으나 未遂로 끝 난 전례도 있고 하여69) 그들의 주장은 다분히 虛勢로 시종한 감을 주고 있다. 둘째는 星 湖를 異端으로 비방하고 있는 점이다. 星湖의 理論은 朱子와 退溪의 本旨에 맞지 않는 것 인 데다가,70) 利瑪竇를 論하고 西洋書에 언급하고 있는 것 등을 들어 異端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을 개탄하며, 憙(炳憙)는 일찍이 밤새도록 자지 않고 여러 가지로 생각을 거듭하여 未然에 患難을 방지 하려 하셨으나 善策을 얻지 못했다. 今番 續集의 간행을 외람되게 청하여 인정케 한 것은 不 得已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비록 이는 막고자 해도 그를 어찌 다 살필 수 있겠는가. 다만 팔장을 끼고 天命을 기다릴 뿐이다71) 라고 한 것은, 그의 悲壯한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당시 유림 중에는 아직 보수적이고 옹색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 았지만, 다행히 영남을 비롯한 호서 경기의 진보적인 유림이 성원을 아끼지 않아 많은 어 려움을 극복하고 그 役이 끝나가고 있는데 대하여 省軒은 張千可(永駿)에게 보낸 答書(p. 86)에서, 星湖集의 刊行事는 지금 겨우 工役이 끝나가고 있다. 또 湖中의 章甫 및 都下一二諸公에 배제하여 점차 妥帖에 이르게 되니, 어찌 斯文의 大幸이라 하지 않 게 의뢰하여 힘써 異論을 겠는가 <첨자> </첨 자> 라고 하였다. 여기서 力排異論 이라 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히 밝 히고 있지 않으나, 京城의 일부 儒林과 벌인 星湖集 刊行의 先取權에 대해 소송으로까지 이르렀다가 退老里側이 勝訴함으로써 앞서 李德九로부터 입수한 27册의 刊行權을 확실히 보장 받게 된 것도 포함되었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星湖를 이단으로 비방하는 보수세력 이 星湖集 發刊을 방해하려는 움직임을 전국의 여러 유림이 都會를 열어 退老里를 성원하 69) 省軒集 권4, p. 73, 그리고, 退老里에서 星湖集刊行이 진행되고 있는 데도 今此役未半, 而 假使自京中 別刊他書 則無乃同室異釁 首尾不相應 而互相防礙乎 ( 省軒集 권8, 答京城士林 p. 146)라고 보이는 것처럼 京城에서는 여전히 별도로 星湖集을 간행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어 마 음을 몹씨 불편하게 하였다. 70) 例를 들면 四七論은 星湖가 退溪 栗谷을 종합적으로 비판 검토하예 自己見解를 수립한 것이었 으나(四七新編), 결과적으로는 退溪에 대한 栗谷의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嶺南의 一部 儒者들은 오히려 退溪를 비방한 것으로 잘못 인식한 것이다. 71) 省軒集 권5, 答李聖簡(靖植) p. 101. 한편 江右士林에게 보낸 書翰(p. 147)에는 先生之 書 沈晦久矣 先生之道 否塞甚矣 然而道無屈而不伸 理無陂而不平 今於二百載之下 顧此 窮鄕晚生 敢倡大論 鼓發彝衷 이라 하여 先生의 書가 沈晦됨이 오래이고, 先生의 道가 否塞됨이 심하였지 만, 지금 200년이 지난 이 마당에 감히 大論 즉 星湖集 印行을 倡導하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132 - 國史館論叢 第23輯 여 막은 것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은 물론이다. 특히 星湖集 刊行의 소식을 들은 韋庵 張 志淵이 정중한 서신으로 수백 년 동안 이루지 못했던 學問的 事業이라 칭송하고 또 직접 密陽에까지 찾아와서 성원하였던 것이다.72) 그리고, 근래에 湖論이 京議를 크게 배척하였 다는 소식도 들려오는73) 등 事勢는 退老里에 유리하게 돌아감으로써 점차 妥帖의 기운74) 이 감돌아 星糊集 發刊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간 것은 지극히 다행한 일이었다. 星湖集發刊을 갖고 京鄕에서 한참 論難이 벌어지고 있을 때 省軒은 그 타협책의 하나로 江右士林에게 書翰을 보내어, 만일 혹 京城諸公이 僿說等書를 別刊하고 原稿는 우리 영남에게 讓與하면 우리들은 비록 孱劣하더라도 먼저 原稿를 刊行하고 다음으로 續集 別集을 간행할 계획이다75) 라고 말한 일이 있다. 여기서 原稿라고 한 것은 星湖의 從後孫 李德九가 退老里에 운반해 온 이른 바 星湖集이라고 일컬어진 것이다. 金鎬承을 중심으로 한 京城의 一部儒林이 먼 저 간행하겠다고 고집하는 星湖集을 깨끗이 영남에 양보하고 그 대신 僿說等書를 別刊하 겠다고 하면 退老里에서는 원고를 먼저 간행하고 다음에 續集 別集을 간행하겠다는 것이 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金鎬承 등이 星湖集을 발간한다고 누차 회의만 거듭하다가 虛勢 로 끝난 일이 있고 그 다음에는 반대하기 위한 반대로 시종되었지만, 결국에는 訟事까지 벌어진 끝에 發行權이 완전히 退老里로 넘어 오게 됨으로써 1917년 여름에 退老版 星 湖先生文集 (50권, 27책)으로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약속된 續集 別集은 그 후 續刊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은 이 부분이 星湖의 새로운 思考와 見解를 많이 담고 있어서 보수유림의 반발이 또다시 일어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朝鮮史綱目 은 書名이 뜻하고 있는 대로 조선시대의 역사를 綱目體로 엮은 것으로서 조선왕조 건국에서 시작하여 肅宗 6년(1680)까지 389년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지만, 아깝게도 미완성으로 끝난 역사서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序文은 물론 凡例와 引據書目 을 부치지 못한 것 같다. 退老里驪州李氏一門과 학문적 인연이 있던 順庵 安鼎福의 東 史綱目 이 고려시대까지로 끝났기 때문에 그 뒤를 이어 조선시대의 綱目體史書로서 엮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東史綱目 의 체제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 발견된다. 더욱이 주 목을 끄는 것은 이 책의 내용이 조선 뿐만 아니라 中國 日本 등 隣接한 나라는 물론, 印 度 土耳其 등 아시아 諸國과 나아가서 歐美阿諸國의 史實을 고루 수록하여 일종의 朝鮮을 72) 韋庵文稿 권3, 答李應晦(炳憙) p. 130. 73) 省軒集 권4, 答河復卿(載華) p. 88, 近聞湖論甚激 大斥京議. 74) 이 점은 韓箕則(商源)에게 보낸 答書에도 星湖鋟役 備經艱險 幸至竣功 而近日京議已歸一 鄕論 亦帖息 吾黨之幸. ( 省軒集 권6, p. 112)라 보인다. 75) 省軒集 권8, p. 145, 如或京城諸公別刊僿說等書 而原稿讓與吾嶺 則鄙等翔孱劣 亦當益奮蟷 臂策進駑步 先刊原稿 次刑續集別集計矣.

- 133 - 중심으로 한 世界史 의 성격을 지니고76) 있는 점이다. 省軒이 朝鮮史綱目 을 언제부터 집필하기 시작하였는가는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 만, 부친의 3年服喪을 마치고 다시 西臯精舍에 蟄居하게 되면서 곧 착수한 것 같다. 이는 그가 曺仲謹(競燮)에 보낸 書翰 중에, 炳憙는 杜門하여 홀로 살고 있지만 계획을 세운 바는 없었다. 한가한 중에 國朝史를 열람 하다가 傳記 野乘에 흩어져 있는 것이 혼란하고 번잡하여 서로 詳略이 있음을 보고 망녕되게 一書를 편성하고저 하여 綱目 형식을 취하면서 編年體의 체제를 모방하였다 蒐集과 抄錄으로. 또한 外國史를 첨부하게 되니 用力은 甚苦한데 收功은 기약하기 어렵다77) <첨자> </첨 자> 고 한 말이 보인다. 이 편지에 계속하여 근래 내가 鄙鄕士友와 같이 星湖集刊行의 계획을 세우고 지난달 星湖의 傍孫 李德九가 修堂 李南珪의 手校本 27책을 갖고 退老里에 오게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朝鮮史綱目 의 집필은 星湖集 刊行計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의 杜門索居 는 省軒이 부친의 3年服喪 을 마치고 西臯精舍에 다시 蟄居하게 된 것을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와 같이 省軒이 1915년 경 國朝史(朝鮮史) 편찬에 관심을 갖고 그 체제를 綱目體로 결정하고 내용은 우리나라 역사 뿐만 아니라 外國史도 같이 넣음으로써 朝鮮을 중심으로 한 世界史 의 역사서를 만들 것을 처음부터 계획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첫째, 近畿實學의 전통이 性齋 許傳과 恒齋 李翊九를 통하여 그에게로 연결됨으로써 변혁하는 역사적 현실 을 直視할 수 있는 안목이 넓어졌고, 둘째는 구한말에 주권이 위협받고 있을 때 향리에서 國債報償運動에 적극 참가한 경험을 갖고 있는 그로서는 亡國의 恨을 품고 할 수 없이 왜 적의 治下에서 살고는 있지만 세계사적인 안목으로 민족사를 정리하여 후손에게 傳受해야 되겠다는 것에 대해 굳은 사명감을 갖고 있었으며, 셋째는 恒齋가 저술한 西臯讀史箚 記 의 영향을 받고 있는 점이다. 이 저서는 中國史에 관한 史論集으로서 戰國時代부터 唐宋五代까지 1,300여 년 동안의 歷代君主 各樣人物 事件 政制 등을 들어 儒者의 입장에 서 포폄을 가한 것이다. 그 체제는 跋文에도 보이는 것처럼 朱憙의 資治通鑑綱目 에 의거하였으며 시대가 五代로 끝난 것도 이를 따른 때문이다.78) 당초의 계획은 우리나라 역사도 삼국시대부터 고려말까지 같은 방법으로 다루어서 讀史箚記 의 후편으로 삼으 려고 했으나 착수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79) 그러므로, 성헌이 史書의 범위를 조선시대로 잡은 것은 일찍이 恒齋가 계획한 바 있던 고려이전시대를 避하고, 또 綱目體로 정한 것도 76) 姜萬吉, 朝鮮史綱目 解題. 77) 省軒集 권7, p. 132, 炳憙杜門索居 無所猷爲 閒中閱國朝史 見其散出於傳記野乘者 淆亂狵雜 互有詳略 妄欲裒蒐抄錄 編成一部 提綱挈目 略倣編年之體 又附以外國史 用力甚苦 而收功難期. 78) 閔斗基, 西皐讀史箚記 解題. 79) 恒齋集 解題.

- 134 - 國史館論叢 第23輯 다분히 讀史箚記 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省軒이 朝鮮史綱目 의 저술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던가는 許景懋(採)에게 보낸 書 翰에, 孤齋(西臯亭)에 살며 外人의 방문이 아주 없어서 오직 날마다 國史를 초하였다80) 고 한 것으로 잘 엿볼 수 있다. 그가 朝鮮史綱目 의 저술동기에 대해 柳畯睦에게 보낸 答信을 보면, 近日에 한가로이 잘 지내며 無事할 때 國朝史를 열람하면서 매양 痛恨함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렸다. 오백년 동안의 서책과 秘閣 名山의 장서가 海外로 흘러 나가고, 그 밖에 하찮 은 野乘과 傳記類도 또한 흩어져서 참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靑野漫錄 朝野會通 등의 書籍을 구하는 데로 모두 기록하여 책으로 엮어둠으로써 考閱에 편하게 하고저 할 따름이다81) 라고 하여, 倭賊이 朝鮮王朝實錄 을 비롯한 중요한 역사사료를 자기 나라로 반출하고 있는데 충격을 받은 省軒은, 星湖集을 간행하고 靑野漫錄 朝野會通 등의 文籍을 베껴 책으로 만들어 두고 이들을 자료로 하여 朝鮮史綱目 을 저술하게 되면, 이는 곧 민족의 학문적 자산과 역사기록을 보존하는 길이 된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료를 구득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密陽物語 도 널리 支那 日本 數萬卷 을 수집하고 혹은 印刷機를 구입하여 古代文獻의 인쇄를 도모하 朝鮮의 古典良書 였다 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에는 물론 家藏의 문적이 많았겠지만, 東史의 編錄을 위 해 저자의 서한에 나오는 것만 보아도 李明夫(啓焕)로부터 丙子錄 南漢日記 辛 壬錄 本朝日記草 를 借覽하고,82) 또 安鎔仲(瑛珠)에게서는 靑野漫錄 를 빌리고 있다. 安鎔仲에게 보낸 편지 중에 緣書籍不備 方極力四求83)라고 보이는 것과 같이 당시 의 사정으로 국내 자료를 구해 보기도 어려웠는데, 하물며 중국 일본을 비롯하여 西洋書 籍을 구한다는 것은 정말 至難한 일이었을 것이다. 본서의 外國史記事는 어디서 인용되었 는지 引據書目이 없어서 잘 알 수 없으나 次孫 李佑成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岡谷繁實의 日本編年史, 賴山陽의 日本外史 및 日本政記 그리고, 明綱目 聖武記 皇淸開國方略, 그 밖에 雪樵外史의 西史綱目 및 各國史로서 英吉利史 俄羅 斯史 法蘭西史 등이 모두 이용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위의 책들은 그대로 성헌의 故宅 李家墨莊 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위의 책들 외에 아마도 중국에서 간행 <첨자> </첨 자> 80) 省軒集 권5, p. 91. 81) 省軒集 권3, p. 67. 82) 省軒集 권4, p. 77. 擬彙成一部東史 而緣籍不備 方極力四求 年 83) 省軒集 권7, p. 126, 近於閒中 編輯朝野之乘 前見貴藏 有靑野慢錄全帙 故玆以傳仰 雖千難百難 幸於此便惠借 則當覽畢完計耳. <첨자> </첨 자>

- 135 - 된 西洋史關係書籍들이 더 많이 인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省軒은 자료의 捜求, 編史의 합리적인 구성, 綱目體가 갖는 기술적 배열의 難點 등 많은 문제를 일일히 극복해 가며 朝鮮朝一代의 全史를 엮을 생각을 갖고 抄史에 전력 을 기울였으나, 肅宗 6년(1680)으로 붓을 놓고 1931년에 西臯精舍를 철수하여 집에 돌 아 오게 된다. 집필을 시작한 지 16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보냈으나 끝내 완성을 보지 못 한데 대하여 高柄翊교수는 朝鮮史綱目 序에서 隨得隨錄 해 나가느라고 시일이 걸리 尤當審愼 (河謙鎭 撰의 고, 더구나, 肅宗以後에 와서는 黨議益分裂 國是無定 㩵 實褒貶 行狀, 省軒集 권17, 附錄, p. 290) 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一理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성헌이 崔諒夫(正愚)에게 보낸 答信에서 생애를 회고하며, <첨자> </첨 자> 炳憙는 賤陋하고 卑劣하여 하나도 다른 사람과 같지 못하다. 少年時에는 功令에 골몰하고, 中年에는 또 家務와 世上의 속된 일에 묶이게 되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晚年에는 山齋에 蟄伏하여 갖가지 悔恨이 다 모였다. 외람되게 舊業을 尋理하고저 하였으나 疾病이 차츰 더해 지고 志氣가 衰盡한 데다가 밖으로 强輔의 警戒가 끊기고 안으로 存省의 工이 없어 마치 尸身 처럼 지내고 있는 형편이다84) 라고 한 것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기서 少時에 功令에 골몰하였다고 할 것은 科擧공부에 열중하였음을 말한 것이고, 中年에 家務와 세상의 속된 일에 묶이게 되었다고 한 것은 31세 때인 1880년에 과거 길에 올랐다가 허망하게 집에 돌아와서는 한동안 영남 의 先輩儒林을 찾아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으며, 40세 때인 1899년에는 西臯精舍에 들어 앉아 저술과 강학에 힘썼으나 이 무렵에는 오히려 우국충정이 분출하여 國債報償運動에 적극 참가하는 한편 新舊併進 의 목표 아래 華山義塾을 세워 신식교육을 실천해 나간 시 기를 말한다. 그리고, 晚年에 다시 山齋에 蟄居하여 舊學에 몰두하려고 하였으나 疾病이 차츰 더 했다고 한 것은, 부친의 3년상을 마친 후 57세가 되던 1915년 경 다시 西臯精舍 에 파묻혀 舊學에 전념하며 星湖集의 간행, 朝鮮史綱目 의 집필, 正進義塾의 재건 등 많은 사업을 벌이게 되는데, 家事는 長子 世衡에게 일임하였고 다른 時務는 여러 從弟에 게 맡기고 당신은 朝鮮史의 집필에만 전념하였지만, 어려서부터 虛弱한 체질로 질병이 잦 아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은 文集에 자주 언급이 되고 있다. 省軒이 李聖典(章植)에게 보낸 答信에, 炳憙는 賦質이 虛嬴하여 본디 질병이 많아 藥餌의 靈驗에 힘입어 근근히 끌고가 六十甲을 지냈다.85) 84) 省軒集 권5, p. 99. 85) 省軒集 권7, p. 123, 炳憙賦質虛嬴 素多疾病 賴藥餌之靈 僅僅捱過了六十甲.

- 136 - 國史館論叢 第23輯 하고, 또 張致億에 보낸 答書에는, 山齋에 살며 양병하였는데 木偶와 같이 오뚝 앉아 있어 門外의 일을 거의 모두 살피지 못 했다86) 고 한 것을 보면, 본래부터 몸이 허약하여 多病이었으나 이제 六十甲에 이르러서 山齋(西 臯精舍)에서 養病하고는 있지만, 한낱 木偶와 같은 身勢가 되어 집필이 뜻과 같이 진첩되 지 않고 있음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還甲을 넘기게 되면서는 건강이 더 악 화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朝鮮史의 집필을 계속해 나간 것은 어떻게 보면 초인간적인 강 인한 의지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가 16년간이나 계속한 朝鮮史綱目 을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중단하고만 것 은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았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더욱 불 행했던 것은 1931년 그가 73세 되던 해에 장자 世衡의 先歿에 큰 충격을 받아 아주 西臯 精舍를 철수하고 집에 내려와 자리에 눕게 되며 朝鮮史綱目 의 續修를 從弟 炳鯤(退修 齋)에게 遺託한 채87) 아주 未完으로 끝나고 말았다. 肅宗 초로 일단 끝난 本書는 日帝强 占期에 평생을 林下에서 산 진보적인 영남유림이 이해한 朝鮮王朝時代史이지만, 그 서술 방법이 國內外 史實의 평면적 수록에 그치지 않고 저자의 역사가로서의 관점과 주장이 좀 더 선명하게 들어 났더라면,88) 오늘날 우리 역사학에 좀 더 많은 공헌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만일 이 책이 어떤 형태로던 간에 완성이 되었더라면, 특히 舊韓末과 日帝强占期의 역사적 사실이 反日思想이 강했던 嶺南儒林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가 생각하 면, 梅泉野錄 이나 騎驢隨筆 등과는 비록 편재가 달랐지만, 이들과는 다른 차원에 서 史料的 價値가 많았을 史書로 나오지 못하고만 것이 무척 아쉽다. 마지막 正進義塾의 재건에 대해서는 章을 달리 하여 詳述할 예정이므로 여기서는 생략 한 다. 그러나, 여기서 正進義塾의 전신인 華山義塾에 대하여 하나 집고 넘어 가야 할 것 은 華山義塾이 학생에게 가르킨 과목으로 보아 近代學校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은 틀 림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신학문과 기술교육만을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다. 華山義塾의 교육이념은 유학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新學을 교육한 것이 큰 특징이 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省軒은 儒學 즉, 舊學과 新學을 함께 취해야 한다는 이른바 新舊併進 의 교육사상을 갖고 華山義塾을 세웠던 것이다.89) 86) 省軒集 권7, p. 117, 齋居養病 兀坐如木偶 渾不省門外事. 87) 省軒集 권17, 附錄(p. 293) 墓碣銘(李明翔撰)에 嘗撰國朝外史 不幸喪慽 疚懷之餘 添風 庳數載未克卒業 臨終 託其從弟炳鯤踵成之 庶見其完編矣 라 보인다. 그러나, 退修齋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결국 續撰하지 못하고 말았다. 88) 姜萬吉, 앞의 책 解題.

- 137 - 본래 舊學과 新學의 사상적 갈등은 개항 후 개화사상의 전파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일 어나기 시작하였다. 신학은 물론 舊韓末에 새로 수용된 서양의 근대학문과 사상을 가리킨 다. 신학은 수용과 동시에 구학을 견지하던 衛正斥邪論者들로부터 우리를 금수의 나라로 떨어뜨리는 사상으로 지목되어 심한 공격을 받았고, 심지어 東道西器論者 마저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甲午更張의 개혁입법과 獨立協會의 활동을 통해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신학을 받아 들이게 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이제는 반대로 新學이 舊學에 대 하여 맹렬히 공격을 가하게 되고, 이에 대해 구학도 가만히 있지 않고 反論을 제기함으로 써 구학과 신학의 논쟁이 본격화하게 되었던 것이다.90) 新舊學의 논쟁을 역사적으로 규명해 보면, 구학에 대해 처음으로 비난을 가한 것은 開 化黨派에 의해서이다. 金玉均을 중심으로 한 開化黨派는 유교를 기반으로 한 당시의 지배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고 생각하였으므로 孔 孟의 유교사상에 비판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는 衛正斥邪派들의 세력이 드세어 신학이 사회 속에 깊이 침투하 지 못하고 있던 중 甲申政變이 실패로 돌아가자 開化派의 구학에 대한 공격은 더 이상 계 속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開化派의 구학에 대한 본격적인 배격은 獨立協會運動을 주도 한 徐載弼에 의해서였다. 그가 독립협회를 통해 국민을 계몽하면서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 하고 구학을 공격한 것은 독립신문 건양 1년(1806) 12월 22일자 논설에 四書三經을 버리고 實狀敎育을 배울 것을 주장 한 것에서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實狀敎育이라 함은 말할 것도 없이 新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91) 세 번째는 1905년 11월 乙巳條約이 체 결되고 국가 운명이 百尺竿頭의 위기에 서게 되자, 敎育救國運動이 크게 일어나 전국 방 방곡곡에 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됨에 따라, 지식인들 사이에 新學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소리가 높게 일어남과 함께 舊學을 맹렬히 공격하고 나섰던 것이다. 新學의 맹렬한 공격에 대하여 舊學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지만, 여기서는 이를 문제 삼 을 여유가 없으므로 新舊併進 과 관련이 있는 東道西器論과 新舊折衷論에 대해서 간단히 논급하려고 한다. 東道西器論은 문자 그대로 旣往의 우리 사상은 고수하되 서양의 학문과 기술만은 받아 들이자는 주장이다. 동도서기론의 淵源은 崔漢綺 朴珪壽 등에서 찾아 볼 수 있지만, 1880년대에 들어와 동도서기론을 유학의 개념인 道와 器에 의거하여 논리적 으로 제기한 사람은 金允植과 申箕善이다. 金允植(1835 1922)은 젊어서는 畿湖의 대표적인 학통인 吳熙相 俞華焕의 主氣論的 인 학풍에서 문장을 학습하고 뒤에 朴珪壽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발탁으로 文科에 급제하 여 관료로 진출하였으며, 이로부터 東道西器論者로 변신하였다. 高宗은 壬午軍亂의 해결 책으로 1882년 8월 5일에 敎書를 공포하였는데, 이 교서는 軍亂으로 淸에서 한 때 귀국 89) 주 63)과 같음. 90) 李光麟, 舊韓末 新學과 舊學과의 論爭 ( 東方學志 23 24, 1980, p. 1). 91) 李光麟, 앞의 논문 p. 3.

- 138 - 國史館論叢 第23輯 한 金允植이 高宗의 지시를 받아 군란의 수습책으로 개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을 약속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金允植이 교서의 형식을 빌어 자신의 東道西器論을 개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申箕善(1851 1922)도 역시 洪直弼 任憲晦로 이어지는 畿湖의 正統學統에 속해 있다가 1876년에 스승과 동료의 반대를 무릅쓰고 문과에 급제하 고, 후에 金玉均 朴泳孝 등의 개화파와 교유하며 사상의 전환을 가져와 1880년대 초에 東 道西器論者로 立身하게 된다. 申箕善은 개화파인 安宗洙가 저술한 農政新編 (1881)의 서문에서 東道와 西器는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공존할 수 있다는 論理를 폄으로써92) 주 목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東道西器論은 金玉均 俞吉濬 등의 개화사상가와는 그 논리를 달리 하였 다. 즉 동도서기의 논리구조는 위정척사론자 및 개화사상가의 西洋對應論理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외세대응의 방법론이었다. 그들은 개화파가 孔 孟의 道를 반대하고 깎아 내려 서 양의 도로써 우리의 도를 바꾸어 나가고자 한 것을 반대하여 동도와 서도의 조화를 이루 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서양과학기술의 수용은 결국 정치 경 제 사상 등 다방면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어서 西器의 수용은 西道의 측면도 隨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동도서기론자의 논리적 약점이었다. 한편 新舊折衷論93)은 石洲 李相龍(1858 1932)이 주장한 것이다. 그는 安東의 유력한 在地家門에서 태어나 退溪學統(鶴峰學統)의 正脈을 계승한 定齋 柳致明(1777 1861)의 제자 李銓 金興洛 金道和 등의 훈도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1880년대 초의 衛正斥邪運動에 참여하기도 한 石洲는 일제의 침략에 직면해서는 무력항쟁으로 까지 발전하여 1895년과 1905년 두 차례에 걸쳐 反日 反開化의 의병투쟁에 直 間接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石洲 는 의병투쟁이 실패로 끝나자 스스로의 限界性을 인식하고 새로운 國權回復運動方法을 모 색하였다. 그 결과 1909년에는 大韓協會 安東支會를 조직하고 同會支會長으로 활동함으 로써 自强運動家로 전환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였다. 그가 時局에 대한 새로운 인식 과 반성을 절감하고 동서의 新書籍을 구입하여 읽게 되면서 사상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은 받은 신서적은 梁啓超의 飮氷室文集 이었다. 李相龍이 사상 전환 후에 내세운 新舊折衷論은 한 마디로 可革者革之 可采者采之 參酌 新舊 94)라고 한 句節에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는 西歐思想受容에 있어서 전면적으로 이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新舊를 절충하여 필요한 사상을 선별하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石 92) 權五榮, 東道西器論의 構造와 그 展開 ( 韓國史市民講座 7, 一潮閣, 1990) p. 87. 93) 金基承, 韓末儒敎知識人외 思想轉換과 理論 ( 民族文化 4, 漢城大民族文化硏究所, 1989) p. 153. 그는 李相龍이 사상전환 후 서구사상을 수용함에 있어서 주장한 論理를 新舊參酌論이 라고 命名하였으나, 李相龍이 이 과정에서 자주 쓴 말은 酌古參今 외에 新舊折衷이란 말도 쓰고 있어서 필자는 오히려 新舊折衷論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아 이렇게 이름을 붙혀 본 것이다. 94) 與姜碧梧文(運熙) ( 石洲遺稿, 高麗大出版部, 1973) p. 71.

- 139 - 洲는 서양사상의 참 모습을 유교와의 관련성 위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통해 그의 유교사상 도 일정한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고, 서양사상도 유교적 논리에 의해 이해되었다. 결국 그 의 사상적 전환은 유교적 전통을 바탕으로 한 서양사상의 수용이라는 특징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國權回復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놓고, 예컨대 서양근대의 國家論을 수용함에 있어 理氣論 大同思想 道德觀 등 유교적 전통에 준거하여 立憲君主論이라고 할 수 있는 國家有 機體說을 주장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95) 이와 같이 東道西器論과 新舊折衷論은 19세기 후반에 개화사상의 확산과 더불어 생긴 주 장으로서 李炳憙의 新舊併進運動과는 그 성격을 달리 하지만, 모두 新學과 舊學의 뜻 을 포함한 상호공존의 개념을 담고 있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다. 3者의 특징을 구분한다면 東道西器論은 서양사상을 수용함에 있어서 道와 器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東道보다 西器를 더 강하게 내세웠고, 新舊折衷論은 구학을 신학보다 높이 평 가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독립운동가가 국권회복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국가건설에 있어 서 유교전통을 바탕으로 신학 즉 서양사상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주로 추구하 고 있다. 한편 新舊併進 은 서구사상의 수용이라는 관점에서 신구 문제를 다룬 것이라기 보다는 華山義塾의 敎育理念을 설정하며 신학과 구학을 병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지만, 유 학의 전통이 더 강하게 풍기고 있는 것을 보면 新舊折衷論에 좀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新舊併進 은 省軒의 독창적 사상은 아니고 부친 恒齋로부터 이어 받아96) 발전시 킨 것이며, 在野儒學者로서 일제 강점기인 1938년에 80세로 작고하기까지 志慨를 굽히지 않고 堅持해 나간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그의 文集에는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 없다. 다만 그 片麟으로 舊學 新學에 대하여 한 두 군 데 간단히 보일 뿐이 다. 孫壻 鄭範鎬에게 보낸 편지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은 비록 時務俗尙에 緊切할 지라도 사람되는 방편으로 要緊한 것은 가만히 생각함에 新學 오로지 舊學에 있으므로 小學 四書와 같은 것을 읽지 않을 수 없으니 여러모로 留意해야 할 것이다.97) <첨자> 자> </첨 <첨자> </첨 자> 孫壻 鄭範鎬는 장가오는 날 공교롭게도 丈人어른(世衡)이 별세하는 불행을 겪었다고 하 95) 金基承, 앞의 논문 p. 156. 96) 新舊併進論은 書經에 나오는正德利用厚生과 星湖의 近畿實學 및 西洋思想에 대한 이해가 결집 되어 恒齋가 일찍이 居士 를 쓸 때부터 舊學은 물론 확실히 지켜나가야 되겠지만, 앞으로는 新學도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省軒이 1899년에 惜陰齋에 華山義塾을 병설함 으로써 구체화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는 앞으로 언급할 正進學校의 創學綱領인 明倫正 德利用厚生 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如小學四 97) 省軒集 권9, p. 155, 竊念 新學 雖切於時務俗尙 而喫緊爲人之方 則專在於 舊學 書不可不讀也 幸千萬留意焉. <첨자> </첨 자> <첨자> </첨 자>

- 140 - 國史館論叢 第23輯 므로98) 이 편지는 1931년 9월(陰) 전후에 쓰여진 것임이 확실하다. 당시 서울에서 신학 을 공부하던 鄭範鎬에게 편지로 보낸 喫緊爲人之方 則專在於舊學 이라고 하며 小學 四學 을 읽을 것을 勸勵하고 있다. 이 글이 풍기고 있는 뉘앙스로 보아 구학을 신학보다 우위 에 놓고 있음이 확실하지만, 신학은 時務俗尙에 緊切하고 구학은 爲人之方으로 要緊하다 고 하며 7旬의 老齡에 이르러서도 新舊併進思想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새로운 유학을 통해 진보사상을 갖고 華山義塾과 正進學校를 세워 근대교육을 지향하면서 도 자신은 모든 家業을 자제에게 맡기고 30여 년간 西臯精舍에 파묻혀 저술과 강학에 전 념하며 오로지 구학을 지킨 孤高한 유학자의 한 단면을 잘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성헌은 자신은 끝까지 儒學者라는 긍지를 갖고 구학에 대한 志槪를 끝까지 지 켰지만, 시세의 변화는 막을 길이 없어 다시 鄭敬機在哲(範鎬의 父)에게 보낸 서한 중에, 胤君은 軒昻 活潑하여 대인의 風度가 있어 만일 잘 교도를 하게 되면 반드시 大器를 이룰 을 보고 것이다. 그러나, 讀書問學을 오로지 留意하지 않고 있다. 대개 近來에 年少輩가 舊學 頑固 腐敗 등의 文字로서 指目하고 있으니, 常套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두려울 뿐이다. 이들 은 時運의 推移이므로 누가 금할 수 있겠는가99) <첨자> 자> </첨 라고 하여, 요즘 젊은이들이 舊學을 가리켜 완고 부패 등의 말로 빗대고 있음을 개탄하고 이를 時運에 돌리를면서도 子弟에게 講書問學 즉 구학을 신학과 겸해서 힘쓰게 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省軒이 新舊併進 을 몸소 끝까지 실천한 것은 正進學校를 세워 신학을 교육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子弟들 중에서 選別하여 家學으로 구학을 공부하게 한 생생한 자료를 접할 수 있다. 省軒의 장자 世衡은 아들이 없었으나 차자 載衡은 翼成 佑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 두 손자는 正進學校에 보내지 않고 西臯精舍에서 舊學을 전공토록 하여 가학(유학)을 계승하게 한 것이다.100) 이에 대하여는 李佑成교수의 회고문이 있어서 많은 참고가 되었 다. 翼成은 1917년생으로 증조부가 건립한 西臯精舍에서 舊學을 硏修하고 漢學者로서 1987년에 작고하였다. 佑成은 1925년생으로 조부의 명으로 家兄과 같이 舊學을 공부하 다가 광복을 맞게 되자, 부친으로부터 민족이 독립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舊學 新學의 구 분에 구애받지 말고 마음대로 행동해도 좋다는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한 끝에, 아직 나이 가 젊으므로 新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成均館大學 國語國文學科에 진학하였다 한다. 그는 대학을 마친 후 東亞大를 거쳐 母校에서 교수로 오래 봉직하고 있다가 1990년 8월 98) 李佑成敎授證言(1990년 12월 31일 서울 江南區 大時峙 所在 實是學舍에서 對談). 99) 省軒集 권8, P. 141, 胤君軒昻活潑 有大人之風度 苟善爲敎導 則必成大器 然讀書問學專不 目之以頑固腐敗等字 恐不脫出窠臼 此等時運之推移 有誰禁之哉. 留意蓋近來年少輩視 舊學 100) 그의 家狀에 以家學之無傳爲憂 及佑成就學 愛其才性頗聰慧 遂敎以經學 而朝夕檢督獎進不已 ( 省軒集 권17, p. 285)라고 한 것은 가학 즉 구학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心慮하고 있 었던 가를 잘 전하고 있다. <첨자> 자> </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