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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항소이유의 요지 가. 사실오인 및 법리오해 피고인이 피해자와 공사도급계약을 체결할 당시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공사대금을 지 급할 의사와 능력이 있었으므로 피고인에게 사기죄의 유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에는 사 실을 오인하거나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어 부당하다. 나.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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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식별PDF용 0502

Transcription:

朝鮮後期 地方統治制度硏究 鄕廳의 機能을 중심으로 李 羲 權* Ⅰ. 序 言 Ⅱ. 朝鮮前期의 鄕廳 1. 鮮初의 留鄕所 2. 復立留鄕所의 성격과 기능 3. 京在所와 留鄕所 4. 16세기 향청의 성격과 기능 Ⅲ. 朝鮮後期 鄕廳의 성격변화 1. 京在所 혁파와 鄕廳의 변화 2. 鄕廳의 地方行政機構化 Ⅳ 朝鮮後期 鄕廳의 기능 1. 향청의 구조와 鄕任 2. 향임의 기능 3. 수령 읍리와 향임의 관계 Ⅴ. 結 語 Ⅰ. 序 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선왕조의 지방행정편제는 기본적으로 군현제도였는데, 군현제도는 중앙에서 파견되는 왕권대행자인 守令을 매개로 하여 지방민 지배를 실현하는 제도였다. 조선왕조에 있어 군현의 통치자였던 수령은 군현의 유일한 官人이었으며, 그가 평상적으로 담당하던 실질적 임무는 군현의 행정실무를 담당하던 읍리들을 지휘 감독하고, 그들이 수 행하는 행정업무를 검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령들은 원칙적으로 吏職에 경험이 없는 文臣 武臣이었던 점, 임용상의 本鄕回避 任期制 등과 같은 제도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吏務 와 지방실정에 어두웠고, 또 자주 교체되었으므로, 조선전기 이래 읍리를 감독 규찰하고 그 들의 행정실무를 검찰하던 기능은 실제로는 향청에 의해 수행되고 있었으며, 조선후기에 오면 향청의 기능은 더욱 확대 강화되는 추세에 있었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 지방통치행정 상에서의 향청의 기능은 수령의 그것을 대행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향청을 주제로 한 연구는 매우 부진하였으며,1) 최근 향촌사회 * 全北大學校 史學科 敎授. 1) 향청을 주제로 한 연구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周藤吉之, 鮮初に 於ける 京在所と 留鄕所に 就いて ( 加藤還曆紀念東洋史集說, 1941). 李泰鎭, 士林派의 留鄕所復立運動 상 하( 진단학보 34 35). 金龍德, 鄕廳硏究 (1978). 管野修一, 朝鮮後期の 鄕所に ついて (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8, 1981).

- 74 - 國史館論叢 第22輯 와 향촌사회조직을 해명하려는 연구의 일환으로 향청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시도되고 있는 실정이다.2)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향청 연구에서 제기되는 문제점은 첫째, 조선후기 지방통 치 행정체계상에서의 향청의 기능을 구조적으로 해명하려는 연구가 없었다는 점, 둘째로 모든 향청관계 연구자들이 조선후기 향청까지도 지방자치 기구였다고 공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향청을 규제하던 경재소가 혁파되고, 守令權(국가권력)이 강화되며, 상품화폐경제 체제로 경제구조가 변동되고, 상하 신분질서가 동요되는 조선후기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 에 불구하고 향청이 과연 지방행정기구와는 별개의 조선전기적인 자율적 향촌지배기구로 남아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필자는 향촌자율기구였던 조선전기의 향청이 16 7세기를 거쳐 19세기에 이르는 동 안, 시대적 변화에 따라 어떻게 그 성격이 변화되어 가고 있었는가, 조선후기 지방민 지배 에 있어서의 향청의 기능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어, 지방통치행정체계 상에서의 향임과 수령, 향임과 읍리 관계를 구조적으로 고찰하여 조선후기 지방민 지배의 실체를 해명하고자 한다. Ⅱ. 朝鮮前期의 鄕廳 1. 鮮初의 留鄕所 유향소(鄕廳, 鄕射堂)는 여말 선초에 在地士族들에 의하여 설치되었다. 이들 재지사족 중에 는 여말에 첨설직 同正職 軍功 科擧 등을 통하여 吏族에서 士族化한 부류들이 많았고, 이들은 왕조교체기와 선초의 정변을 계기로 本鄕이나 外鄕 妻鄕 등에 낙향하여 중소지주로서의 경제 적 기반을 다지는 등 在地的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3) 이들 중에는 신왕조에 복속하기를 싫 2) 향촌사회와 향촌사회조직 연구물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李泰鎭, 조선전기의 향촌질서 ( 동아문화 13, 1976). 田川孝三, 조선전기 지방의 자치적 조직과 民政 ( 東洋學 8, 1978). 金仁杰, 조선후기 鄕權의 推移와 지배층의 동향 ( 한국문화 2, 1981)., 조선후기 향안의 성격변화와 재지사족 ( 김철준화갑기념논총, 1983)., 조선후기 향촌사회의 변동 ( 변태섭화갑기념사학논총, 1985). 申正熙, 鄕案硏究 ( 大丘史學 26, 1984). 朴翼焕, 조선전기 鄕規와 鄕規約考 ( 사학연구 38, 1984)., 咸興鄕憲 鄕規考 ( 한국사연구 53, 1986). 鄭震英, 조선전기 安東府 재지사족의 향촌지배 ( 대구사학 27, 1985). 安秉旭, 조선후기 自治와 저항조직으로서의 鄕會 ( 성심여대논문집 18, 1986)., 19세기 임술민란에 있어서의 鄕會와 饒戶 ( 한국사론 14, 서울대, 1986). 李樹健, 조선후기 지방통치와 향촌사회 ( 대구사학 37, 1989).

- 75 - 어하여 자의적으로 官界를 떠났던 부류도 있었고,4) 과거를 통하지 않고 관계에 진출했던 첨 설직자들에 대한 선초 정부의 도태정책5)에 의해서 타의적으로 관계를 떠나 낙향한 부류도 있 었을 것이므로, 이들은 일반적으로 반정부적 반집권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 들 재지사족들이 이른바 유향품관 前銜품관들로서 토호적 성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자의적이건 타의적이건 간에 권력체계에서 이탈해 있던 이들의 일차적인 관심은 재지적 기반을 기초로 향촌에서의 지배권을 장악하여 지방지배계층으로서의 立地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향촌 지배권을 이미 장악하고 있던 향리 세력과의 마찰이 불 가피하였으므로, 향리들로부터 향촌 지배권을 탈취하기 위해서는 鄕論을 주도할 만한 충분 한 힘을 결집하여야 했다. 선초 재지사족들이 자발적 자의적으로 유향소를 설치하였던 이유 와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유향소를 설치했던 목적과 의도가 향리들 이 주도하던 향촌사회를 재지사족들이 주도하는 향촌사회로 바꾸려는 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6) 그러나 재지사족들의 유향소 설립 목적과 의도가 전적으로 향촌주도에 만족하려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향촌 주도력을 확보한 뒤에 이를 담보로 조선정부로부터 지방민 지 배상에 있어서의 일정한 특권을 획득 향유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재지사족들의 유향소 설치를 통한 향촌 주도권 획득운동은 조선정부가 국초로부 터 추진하던 군현개편 원악향리법제정 등 향리억압정책의 추진과 발맞추어 추진되었던 것 이다. 麗代 이래 중앙집권을 저해하는 요소였던 향리세력을 억압하려던 조선왕조의 정책지 향과 향촌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향리세력을 제패해야 했던 재지사족들의 입장이 일치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선초정부의 향리억압정책에 힘입어 사족들의 향권장악은 용이하 게 진행될 수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반집권적 성향이 농후하였던 재지사족들의 유향소 활 동이 조선정부의 중앙집권적 통치에 협조적일 수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선초에 이미 재지 사족들이 수령을 詆毀하고 백성들을 侵漁하는 작폐가 時弊를 이루고 있었으므로,7) 정부도 자연히 유향소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종 6년에 조선 정 부가 유향소를 혁파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선초의 유향소는 재지사족들이 자발적 자의적으로 설치하였던 향회의 사무기 구로서 자율적 성향이 강하였고, 지방통치 행정체계에서 일탈해 있어 수령권에도 장악되지 않았으므로, 이 시기의 지방통치 행정에 전혀 기능하지 못하였다. 3) 정진영, 위의 논문 참조. 4) 掾曹龜鑑 의 不服臣罰定錄 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5) 태조실록 1년 9월 임인조, 一. 諸州鄕吏登科立功外 本朝通政以下 前朝奉翊以下 竝還本役 上 皆從之. 6) 이수건 이태진 정진영 등이 대체로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7) 대사헌 許應 등이 올린 時務 7조 중, 其四 州府郡縣 各有守令 鄕愿好事之徒 置留鄕所 無時群聚 詆毀守令 進退人物 侵漁百姓 甚於猾吏 乞皆革去 以除積弊 ( 태종실록 6년 6월 정묘조)에서 이 를 알 수 있다.

- 76 - 國史館論叢 第22輯 2. 復立留鄕所의 성격과 기능 태종 6년에 그 作弊를 이유로 유향소를 혁파하였지만, 행정조직이 강화되지 못하였던 선 초 정부로서는 재지사족들의 지지없이 자주 遞代되는 수령만으로는 지방통치의 실효를 기 대하기란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유향소를 혁파한 뒤 各邑에 在地品官들로 申明色을 삼 아 수령을 보좌토록 하였던 것이다.8) 그러나 신명색도 그들이 지니는 강한 토호적 성향때 문에 태종 말기에 혁파되었고, 뒤이어 세종 2년에 品官 吏族들의 守令告訴禁止法을 제정하 여, 수령권의 강화를 통하여 재향품관들을 억제하려 시도하였으나, 이 시기에 정부가 시도 한 어떠한 정책도 재향품관들을 억제하는 데에는 주효하지 못하였다. 수령고소금지법을 시 행한 이후에도 품관 이족들의 수령농락은 여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향소 혁파 이후에도 그 기능상 유향소와 표리 관계에 있는 경재소가 여전히 존 립했던 점9)으로 미루어 재지사족들의 유향소 활동도 계속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토 호적 향리들의 불법 또한 여전하였다.10) 이런 상황하에서 조선 정부는 재지사족들에 대한 일방적인 억제보다는 저들을 포섭하고 회유하여 그 지지와 협조를 유도하는 것이 중앙집권 적 지방지배를 달성하는 방안임을 알게 되었고, 재지사족들의 지지와 협조를 유도하기 위 하여 정부는 저들에게 지방지배상의 일정한 참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종 10년(1428)에 유향소복설마련절목 을 제정하고 유향소의 복설을 허용하였던 이유가 바 로 재지사족들의 지방통치상의 협조와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선초 정부의 대 지방정책의 전환에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는 유향소복설마련절목 의 내용을 통하 여 조선 정부의 향촌세력 규제 및 敎化 방향을 엿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다음은 유향소복설마련절목 의 내용이다. ① 留鄕品官 府以上五人 郡四人 縣三人爲等如差定爲乎矣 令京在所擇定. ② 留鄕設立本意段 專爲糾察惡吏 以正鄕風爲白去乙 品官等 不顧本意 假仗權威 反爲作弊 今 後乙良 所在官守令及京在所 嚴加痛禁 必有犯罪者 報觀察使科罪 這這改差.11) ①은 모든 外邑에 유향소를 설치하고 유향품관(향임)을 차정함에 있어 府 이상의 행정구 획에는 5명, 군에는 4명, 현에는 3명을 차정하되 경재소가 택정한다는 것이다. 유향소의 설치를 승인하고, 鄕任의 수를 법제적으로 公定하며, 향임택정권을 경재소에 부여하는 내용 8) 田川孝三, 鄕案に ついて ( 山本還曆記念東洋史論叢, 1973) 참조. 9) 다음의 유향소복설마련절목 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다. 10) 세종실록 10년 6월 정해조, 左司諫金孝貞啓 近者驛吏陵轢朝官 常民打陽守令 不唯是耳 大 相之妻 見辱於村民 舊官之子 受挫於鄕吏. 11) 鄕憲 ( 조선시대사회사연구자료총서 2, 보경문화사, 1986).

- 77 - 이다. 결국 유향소의 복설을 승인은 하되 향임수의 公定과, 지방세력규제를 위해 관인들로 구성한 경재소의 향임택정을 통하여 유향소를 정부의 강력한 통제 안에 흡수한 것이다. ②는 국가에서 유향소를 설립하는 본 뜻이 오로지 악리를 규찰하고 鄕風을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인데 유향품관들이 본의를 망각하고 권위를 빌어 도리어 작폐하니 이후로는 본읍 수령과 경재소가 이를 금할 것이고, 죄를 범한 자는 반드시 관찰사에 보고하여 치죄하고 모두 개차하라는 것이다. 향임의 기능을 규정하고, 관찰사 수령 경재소와 향임의 位相을 설 정한 내용이다. 재지사족들에게 유향소의 설립을 승인하고 유향소를 통하여 악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교 정하는 등 지방통치상의 일정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참여를 인정하는 반면, 반집권적 성향의 재지사족들을 관찰사 수령 경재소에 장악시켜서 점차 이들을 중앙집권적인 지방 통 치질서 속에 포섭하기 위한 능동적인 정책전환이었던 것이다. 세종대에 그 설립이 공인되었던 유향소는 작폐를 이유로 세조 말에 다시 혁파되었으며, 그 뒤 유향소 복립을 둘러 싸고 훈구 사림 간의 오랜 논란이 계속되다가 성종 19년(1488) 에야 그 복설이 허용되었다. 유향소의 복설을 주장한 사람들의 진의가 어디 있던지 간에 그들의 주장은 대체로 첫째, 간활한 향리들의 불의를 막고, 둘째, 수령을 우롱하는 자들을 제지하며, 셋째, 백성을 침어하는 자들을 징계하여 향풍을 규정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12) 훈구들이 유향소에 합당한 인재를 얻지 못하면 그 작폐가 도리어 猾吏의 그것보다 심하 다는 이유를 들어 유향소의 복립을 강력히 반대하였으므로, 복립주장자들이 유향소의 지방 통치상에 있어서의 이점과 필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수령을 우롱하는 자들을 제지하고, 백성을 침어하는 자들을 징계하는 책임과 의무까지를 유향소의 기능으로 확대 강화하였던 것이다. 성종 19년의 유향소 복설은 중앙 집권적 지방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아직은 재지사 족들의 지지와 협조를 필요로 하고 있었던 조선전기 정부와, 향촌지배계층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고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방통치행정상에서의 일정한 책임과 의무를 감수하면서 그 활동근거인 유향소의 복설을 승인받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던 재지사족들 간의 묵 시적 잠정적인 타협의 소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유향소는 정치적 사회적인 변화에 따라 재지사족들의 志向이 변하면서 그 성격이 변할 수 있는 것이었고, 조선정부의 집권화 의 강화에 따른 대 향청정책의 변화에 따라 그 성격의 변화가 예상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여하간에 복설 유향소의 기능과 성격은 이전의 그것에 비하여 크게 변화하였던 것이고, 복립유향소의 기능확대는 재지사족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유향소의 위상을 높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율적 성향이 강하였던 유향소를 수령의 행정 보조기 12) 성종실록 15년 5월 계사조 金宗直의 啓, 동 17년 10월 병신조 大司諫 金首孫 등의 상소, 동 19년 4월 병진조 柳子光의 上言 등이 참조된다.

- 78 - 國史館論叢 第22輯 구로 전락시켜서 재지사족들이 점차 수령에게 장악되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복립유향소의 성격이 이처럼 많이 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재지사족들의 사무기구 요, 대변기구였던 유향소의 자율적 성향은 여전히 강하여 수령에게 장악되지 아니하였으므 로, 조선정부는 이들 사족들을 견제하고 지방통치를 효율화 하기 위하여, 관찰사 수령 읍 리 중심의 통치행정체계와 계열을 달리하는 경재소 향청 읍리로 이어지는 지방행정 보조 체계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토착세력을 재지사족과 향리세력으로 분열하여 지방인 을 지방인으로서 견제케 하는 以夷制夷的 지방통치정책이기도 한 것이며, 한편으로는 왕권 대행자인 수령을 보호해야 하면서도 수령권의 지나친 비대나 전제화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중앙정부의 이율배반적인 苦心의 산물이며 시도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유향소는 경재소의 보호와 통제를 받으면서 관리들의 불의를 막고, 수령을 우 롱하는 자들을 제지하며, 백성을 침어하는 자들을 징계하는 등 향풍 糾正을 그 핵심 기능 으로 하는 경재소의 하부기구였으며, 아직은 지방행정실무를 실제적으로 관장한다거나 혹 은 수령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지방통치행정기능은 거의 담당하지 아니하였고 여전히 향 촌자율기구적인 성향이 농후한 그런 것이었다. 3. 京在所와 留鄕所 경재소가 언제 설치되었는 지에 대하여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경재소 기사가 최초로 발견되는 것은 태종 17년(1417)의 일이다.13) 그리하여 留鄕所復設磨鍊節目 이 제정되 었던 세종 10년(1428) 이전에 모든 邑에 경재소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며,14) 세종 17년(1435)에는 경재소원들의 兼邑制가 규정되고, 경재소 구성원이 座首 1명, 參上別監 2 명, 參外別監 2명으로 公定되었다.15) 당초 유향소가 재지사족들에 의해 설립되었던 데 비 하여 경재소는 정부 주도하에 정책적으로 설치되었던 기구였던 것이다. 그러면 京在所의 설치 의도는 무엇이며, 경재소와 유향소의 관계는 어떤 것이며, 지방통치상에서의 경재소의 기능은 어떤 것인가?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조선정부의 지방통치정책을 이해하는 데 있어, 또 중앙 권력과 유향소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다. 다음 記事들은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를 주는 자료들이다. ① 吏曹正郞李復善上書曰 若於窮村僻巷之中 頑嚚不逞之輩 干犯邦憲 恣行無忌 而朝綱有所未到 則何以明正其罪 以制鄕人 以振鄕風乎 又況鄕吏奸猾之徒 操權舞文 漁利無厭 而吏于土者 亦不 能制之者乎 擇老成正大者 不過三人 稱爲留鄕所品官 錄其姓名 定其額數 使之訪其疾苦 采其風 13) 태종실록 17년 2월 경진조 참조. 14) 유향소복설마련절목 참조. 15) 세종실록 17년 9월 기사삭.

- 79 俗不得假威而生弊 憑公而營私 如有違者 痛繩以法 則分京在所之設 亦是正風俗之一端也.16) ② 辛鑄 李約東議 內而京在所 外而留鄕所 相與隨所聞糾察 以抑制猾吏 而維持鄕風 其於移 風易俗之機 不爲無助 且今之留鄕所 卽古之事審官 復之爲便.17) ①은 성종 15년에 李復善이 유향소의 복설을 주장하는 글로서, 僻村窮巷의 완악하고 不 逞한 무리들이 국법을 어기고 방자한 행동을 멋대로 자행해도 국가권력이 미치지 못하므로 鄕人을 제어하여 鄕風을 진작시킬 수 없으며, 간활한 향리들이 권세를 잡고 문서를 제멋대 로 고쳐서 무한정 사리를 탐하여도 이를 제어할 수 없으니, 유향소로 하여금 저들이 위세 를 빌어 폐단을 일으키거나 公을 빙자하여 私를 도모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들 을 엄히 다스리게 하면 分京在所(유향소)의 설치는 풍속을 바로 하는 端緒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유향소 복설의 필요성을 토호와 향리들의 견제에서 구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 는 것은 유향소를 분경재소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分京在所란 경재소의 分所 支所라는 표현으로서, 경재소가 중앙의 本所라면 유향소는 지방의 支所로서 本所에 딸려 있으면서 본소의 지배를 받으며 같은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는 기구라는 표현이다. 이와 같이 경재소 는 유향소의 上位기구였다. ② 또한 성종 19년에 辛鑄 李約東 등이 유향소의 복설을 주장하던 내용으로서, 중앙의 경재소와 지방의 유향소가 간활한 향리들을 억제하고 향풍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이 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유향소를 고려시대의 事審官制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다만 유향소만을 사심관제의 유제로 언급하고 있지만 경재소와 유향소는 그 설치 목적과 기능이 같으므로 경재소도 사심관제의 유제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우리 는 사심관제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경재소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고려시대의 사심관제의 정치 사회적 중요한 역할은 지방사회 통제였다. 강력한 土豪 세 력의 존재로 말미암아 중앙권력의 직접적인 지방통제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그 지역 출신 혹은 연고권자를 사심관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을 연결시킴으로써, 중앙권과 지방세력을 적 절히 조정하여 지방통제를 실현해 갔던 지방지배방식이었다. 이는 사심관의 출신지역 혹은 연고지의 연고권을 이용한 간접적인 지방통제책으로서, 중앙의 사심관과 在地의 호장층으 로 하여금 지방세력 통제상의 역할을 분담케 한 제도였다. 이 시기의 지방통치체계는 外官 鄕吏 農民으로 이어지는 지배체계와, 事審官 鄕吏 農民으로 이어지는 지배체계의 二 重 체계였다.18) 경재소제를 택하였던 鮮初의 정치 사회상황도 麗初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토 호적 在地土族과 향리 세력이 건재하였고 수령권은 직접적인 지방통제를 원만히 실현할 만 16) 성종실록 15년 12월 갑술조. 17) 성종실록 19년 5월 을해조. 18) 旗田巍, 高麗 事審官 ( 朝鮮中世社會史硏究, 彰文閣, 1979). 李純根, 고려시대 事審官의 기능과 성격 ( 고려사의 제문제, 三英社, 1986) 참조.

- 80 - 國史館論叢 第22輯 큼 강화되어 있지도 못하였다. 때문에 조선정부는 경재소를 설치하여 그 지역 출신 혹은 그 지역 연고권자를 경재소관원으로 삼아 연고권을 이용하여 그 지역의 토호세력을 견제하는 지방통제책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유향소를 승인하여, 관찰사 수령 읍 리 농민으로 이루어지는 지배체계 외에, 경재소 유향소 읍리 농민으로 이어지는 별계의 지방지배체계를 수립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전기의 지방지배체계가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었 으나, 전자가 지방통치 행정체계였던 데 비하여 후자는 통치행정과는 거리가 있는 주로 지 방세력 통제에 주안점을 둔 지방통제체계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경재소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도 鄕所를 택정하고, 향소와 함께 奸吏를 규찰하여 풍속을 유지하며,19) 향청을 보 호 통제하고,20) 견제 통할하는 것21)이었으며, 수령의 지방통치에 간여할 수 없었다.22) 4. 16세기 향청의 성격과 기능 유향소는 조선사회의 정치 사회적 상황변화에 따른 재지사족들의 志向 변화에 따라서, 또 조선정부의 집권화의 진전에 따른 대 향청정책의 변화에 따라서, 그 성격과 기능의 변 화가 예상되는 것이었다. 양 측면으로부터 이러한 변화가 16세기 전엽에 이미 나타나고 있 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에서 조선정부가 향청으로 하여금 지방행정을 관장하도록 대 향청 정책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領議政尹殷輔 左議政洪彥弼 右議政尹仁鏡 禮曹判書金安國 左贊成柳灌 右贊成梁淵 左參贊權 橃 兵曹判書李芑 右參贊李彦迪議 自今戶籍磨鍊時 京則五部官員 外則留鄕所別監 各以其面分授 檢擧各戶生產之數 憑閱隣保 詳加捜刷 俾無漏丁 傳曰知道.23) 위 기사는 중종 36년(1541)의 중앙정부 결정으로써, 이후로 호적을 작성할 때면 서울은 五部 관원이, 지방은 유향소 별감이 각 호의 출생 인구를 자세히 조사 파악하여 정남이 누 락되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결정으로 인하여 이제 유향소가 지방의 호적 작성업무를 관장하게 된 것이다. 이는 분명한 유향소의 기능확대요, 향임권의 강화로써 사 족주도의 향촌지배권 확립에 일정한 진전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중앙정권이 재지사족을 지 방통치력에 흡수해 가는 예정된 과정의 진행이기도 하였다. 16세기 중엽에 중앙정권이 이같은 정책전환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15세기 말엽 이후 향론을 주도하던 사람들이 중앙정치세력화하면서 선초 반체제적이고 반집권적이었던 사림 19) 성종실록 13년 1월 신묘조. 20) 眉最日記草 무진 5월 11일조, 希春趣進曰 設立京在所者 所以檢擧關通留鄕所也. 21) 광해군일기 4년 1월 기미조 註記, 京在所者 以在京士大夫 提領州縣留鄕所之事. 22) 세종실록 17년 9월 기사삭, 每鄕京在所議定座首一員 以掌鄕中公務 毋得干與於本鄕守令政 治違者糾理 從之. 23) 중종실록 36년 11월 정미조.

- 81 - 들의 성향이 체제옹호적이고 집권지향적인 것으로 변하여 있었고, 이러한 변화와 짝하여 정부로서도 지방통치상에서 구사할 비교적 강력한 힘을 이미 보유하였던 때문으로 이해된 다. 유향소가 지방행정기구화하는 제 1보라고 할 변화가 홍언필 김안국 권발 유관 이언적 등 사림이 정권을 장악한 시점에서 시도되었다는 그 점이 이를 시사해 준다. 선초의 재지사족과 16세기의 재지사족들의 性向이나 志向이 동일할 수는 없다. 정치 사 회적 변화와 경제적 변동에 따라서 그들 스스로 변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6세기 전 엽에 시도된 중앙정부의 향청정책의 전환도 이와 같은 재지사족들의 성향변화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음에서 16세기 전엽에 재지사족들의 성향이 상당 부문 변모하여 있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參贊官金光準曰 留鄕京在所之設 本爲禁戢痼弊 糾正鄕風 而有關五倫之任也 守令或使留鄕所 出納官倉之物 則爲守令耳目 略不羞愧 樂於操權 吏民恐其見惡 待之亞於守令 爲弊不可勝言.24) 위는 중종 37년(1542) 참찬관 김광준이 향소의 시폐를 지적한 내용으로서, 수령이 향소 로 하여금 창고에 저장된 물건의 출납까지를 관장케 하여도 수령의 耳目인 향소들이 이를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도리어 권세잡은 것을 좋아하며, 吏民들은 향소들의 미움을 살까 두 려워하여 향소들을 亞守令으로 禮待하였다는 것이다. 재지사족들 중에서 선임된 향소들이 수령에 의하여 부림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樂於操權 한다는 世評에서 재지사족들의 性向 변화를 볼 수 있으며, 선초 자율적 성향이 강하였던 향 청이 이제 그 원래의 모습은 퇴색되고 스스로 국가권력(수령)에 장악되어 가고자 하는 경향 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재지사족들의 성향이 정치지향적이었다는 일반적 속성 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애당초 유향소를 설치하려던 재지사족들의 궁극적인 목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되며, 정치 사회 경제적 변동이 변화의 촉매제가 된 것이라 이해된다. 향소들이 수령의 耳目으로 비유되고 있고, 吏民들의 눈에 亞守令으로 비쳐지고 있으며, 호적의 작성이나 창고 출납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면, 이 시기의 향청은 이미 지방자율기 구의 단계를 벗어나 지방행정기구로의 변신에 상당히 깊이 진입하였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향청의 변모는 이 시기의 鄕規約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향규약은 향 촌세력을 규제하고 향민을 일정한 방향으로 교화하려는 중앙 정부의 志向과 鄕士族들의 기 대 및 향촌의 사정을 절충 조화하여 立定한 향촌의 자율적 규약이었으므로,25) 향규약의 조 목을 통하여 당시의 향촌 사정의 변화를 엿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선조 12년(1579)에 율곡이 立定한 향규약인 海州一鄕約束 중에서 過失相規 조의 일부 조목을 摘示한 것이다. 24) 중종실록 37년 3월 을미조. 25) 朴翼焕, 조선전기 鄕規와 鄕規約考 ( 사학연구 38, 1984) 참조.

- 82 - 國史館論叢 第22輯 上罰 제 4조 : 干求鄕任 潜行請託者. 제12조 : 留鄕所監官 憑公營私者. 제13조 : 收糴時 私受賄賂 害及生民 汚毀鄕風者. 제14조 : 私用公儲之物者. 次上罰 제 9조 : 不能謹蔵公債之物 因致減縮者. 제12조 : 收糴時 不能檢察多數不實之穀 減縮斗數者. 上罰 조부터 검토해 보면, 제4조는 향임을 원하여 몰래 청탁하는 자는 상벌에 처한다 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16세기 후엽에 이미 재지사족들 중에는 향임을 맡고자 청탁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때 향임이란 제12조에 보이는 감관을 말하며 수령에게 청탁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향소의 선정은 경재소에서 하고 있었으나, 그 외의 향임은 수령 들이 선임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제12조는 유향소 감관으로서 公을 빙자하여 私 를 도모하는 자는 상벌에 처한다는 규정으로써, 16세기 후엽의 유향소 임원에 감관이 등장 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종 10년의 유향소복설마련절목 에는 좌수 별감 이외의 향임이 등장하지 않았던 점을 상기할 때 이는 분명한 기구의 확대이며, 유향소의 기구확대는 필연적으로 유향소가 허다한 지방행정업무를 담당하는 등 그 기능이 확대된 결 과였을 것이다. 제13조는 환곡을 收捧할 때 사사로이 뇌물을 받고 生民에 해를 미치어 향 풍을 더럽히는 자를 상벌에 처한다는 것으로서 여기서 우리는 향임들이 조적업무를 담당하 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14조는 公共 儲置物을 私用한 자를 상벌에 처한다는 규정인데, 이것은 公庫(官庫)의 物貨를 사용하는 데에 대한 규제규정으로써, 향임들이 관청에 저치한 물화의 관리에 대한 일정한 책임이 있었음을 시사하여 준다. 次上罰 조의 제9조는 公債之物을 잘 간수하지 못하여 그 양이 감축되게 한 자는 次上 罰에 처한다는 규정으로써, 여기서 公債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26) 그것이 官庫에 저치한 公儲之物임에는 틀림이 없다. 上罰 조의 제14조가 官物을 私用한 자에 대한 규제규정인데 비하여, 본조는 官物을 잘 간수하지 못한 향임에 대한 규제규정으 로써, 향임들이 창고 행정업무를 관장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제12조는 환곡을 거두 어 들일 때 좋지 않은 곡식을 잘 살피지 못하여 양을 감축시킨 자를 차상벌에 처한다는 규 정으로써, 상벌 조의 제13조와 함께 향임들이 환곡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상의 鄕規約의 검토를 통해서 海州의 경우 16세기 후엽이 되면 향청의 기구가 확대되 고, 향임들이 환곡의 출납업무 창고업무를 관장하고, 官庫의 公貨를 관리하는 등 향청의 구 조와 기능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향청은 이어 향촌 지배권 보유나 촌민의 교화 26) 田川孝三은 公債를 환곡으로 이해하였으며, 朴翼焕은 鄕約會의 사업을 위해 公儲한 모든 物貨일 것으로 이해하여 견해가 서로 다르다.

- 83 - 를 담당하는 등의 선초의 자율적 성향에서 벗어나 그 성격이나 기능이 지방행정기구화의 방향으로 크게 변하여 있었다. 향청의 이러한 변화는 재지사족의 세력이 다른 지역보다 강 하였던 安東 지역에 있어서도 시기적으로는 조금 뒤지지만 나타난다. 安東府 士族들의 향촌지배 원리를 제시하고 있는 安東府 鄕規인 鄕規舊條 와 新定十條 의 비교에서 확인된다. 1588년에 제정된 鄕規舊條 에는 治民 조항이 없으나 1605년 제정된 新定 十條 에는 禁非違 治吏民 均徭役 등 治民조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27) 이것은 향 청 성격의 시대적 변화의 추이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로써, 재지사족의 향촌 지배권의 강 화이기 보다는 재지사족들이 정부권력에 장악되어 점차 지방행정에 참여의 폭을 확대해 가 는, 점진적으로 행정기구화하는 경향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이해된다. 이와 같이 16세기 이후에 재지사족들의 性向이나 志向이 변화하고, 향청의 성격과 기능 에 변화가 있었지만, 지방사회통제의 역할이 기대되고 경재소가 상위기구로서 존재하고 있 었으므로, 향청이 아직은 완전히 지방행정기구화 할 수도 없었고, 따라서 鄕任들이 수령의 屬僚化하지도 않았다. 다음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丙子年(1576) 具忭除牧使 (姜)世雲請爲吏房於權 (轍) 權嘱於牧使 其時座首姜彥平 以世雲不 足於上壇牢拒 蓋鄕吏有上中下三壇 而吏房之任 鄕所必以上壇吏擇之.28) 즉 具忭이 진주목사로 있을 때 강세운이 당시 영상이었던 권철에게 청하여 진주목사 구 변에게 강세운을 진주목의 吏房으로 택정해 줄 것을 부탁했으나, 당시 좌수이었던 강언평 은 강세운이 上壇吏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방으로 택정하는 것을 거절하였다는 것이다. 좌 수가 수령이 요구하는 吏房의 擬望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향소 택정권이 경재소에 있 었고, 유향소가 경재소의 보호와 통제 견제와 통할하에 있었으며, 향소들이 수령과 직접적 인 상명하복관계에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향청의 완전한 성격 변화는 경재소가 혁파 된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었다. Ⅲ. 朝鮮後期 鄕廳의 성격변화 1. 京在所 혁파와 鄕廳의 변화 경재소를 혁파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초의 일이었다. 경재소가 풍속을 규정해야 하는 본래의 기능은 하지 못한 채 人吏에 침해가 많다는 것이 논의의 요지였다.29) 그 27) 永嘉誌 5, 향사당조. 28) 晋陽誌 4.

- 84 - 國史館論叢 第22輯 러나 경재소의 폐단에도 불구하고 정책담당자들은 향리와 豪强을 믿고 방자히 구는 자들을 제어 하기 위해서는 경재소가 존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30) 16세기 초의 시점에 있어서는 토호 적 세력들이 아직도 경계를 늦출 수 없을 정도의 세력으로 온존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은 많은 정치 사회적 변화를 맞게 된다. 향촌사회에 지배기반을 확립 한 士林들이 중앙정치세력으로서의 우위를 점하게 되는 시기였고, 향리들이 향촌지배세력 으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하여 간 시기였으며,31) 재지세력이 儒 鄕으로 分岐하기 시작하면서 그 세력이 약화되는 시기였고,32) 수령권이 강화되고, 재지사족들의 성향이 협조적 타협적 인 것으로 전환되어 간 시기였다. 향청이 지방행정에 참여하게 되면서 鄕任에 監官이 등장 하는 등 향청의 기구도 확대되었고, 향임들이 수령에게 장악되어 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리하여 16세기 후엽의 사회는 지방사회통제를 위하여 경재소제도를 채택해야 했던 鮮初의 사회와는 질적으로 변화된 사회였다. 다시 말하면 이제 경재소를 계속 존속 시켜야 할 만 큼 지방사회의 통제에 어려움이 따르는 사회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南邊의 守令들이 治所를 떠나 오랜 기간 戰陣을 헤매는 동안 守令들은 邑의 모든 행정업무를 전적으로 鄕所와 監官에게 위임할 만큼,33) 재지사족 들은 이미 중앙권력(수령)이 통제를 염려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다음은 선조 28년(1595)에 제정된 咸興留鄕所規 의 일부이다. 제 7조 : 鄕外之人 乘間冒參鄕任者 掌議有司齊會鄕員 告官駁遞 許入人并罰. 제11조 : 留鄕所於大小任事之人 時加警責 使不得弄權作弊 不聽約束者 報官治罪. 제16조 : 各處監官 一年相遞 如有甘任作弊者 一鄕齊會 告官駁遞. 제18조 : 凡鄕員 以私嫌凌侮時任鄕所者 告官治罪. 위에서 제7조와 제16조는 鄕案에 入錄되지 아니한 자로서 鄕任이 된 자와 監官으로서 폐단을 일으키는 자를 官에 보고하여 遞差 한다는 규정인데, 여기서 官은 수령을 가리킨다. 제11조는 大小任事之人으로서 弄權作弊하는 자를 수령에 보고하여 治罪 한다는 규정이며, 大小任事之人이란 鄕任을 맡은 자(鄕任)로 이해된다. 제18조는 時任鄕所를 능멸한 鄕員을 수령에게 고하여 벌로 다스린다는 규정으로서, 鄕員은 鄕會 구성원, 즉 재지사족을 의미하 였다. 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변화는 향임에 대한 遞差權 治罪權을 수령이 행사하게 되 었다는 것이며, 아직 경재소가 있었으므로 향소의 택정은 혹 모르더라도 향소 이외의 향임 29) 중종실록 12년 12월 무오조 및 동 14년 6월 을해조 참조. 30) 위의 책 14년 6월 을해조 참조. 31) 이태진, 향청과 향약 ( 한국사연구입문 ). 정진영, 조선전기 안동부 재지사족의 향촌지배 참조. 32) 16세기 후엽에 이미 儒 鄕 간의 대립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咸山誌 鄕射조 및 眉巖日記草 신미 2월 7일조, 동 계유 10월 2일조 참조. 33) 선조실록 27년 10월 정미조, 司諫院啓曰 南邊守令 長在舟師及陣所 官家百務 專委於鄕所監 官之手 極爲寒心.

- 85 - 의 택정권 또한 수령에게 있었던 것이라고 이해된다. 지역 차는 예상되지만 지역에 따라서 는 이처럼 16세기 말에는 士族이 수령에게 이미 장악되었던 것이다. 선조 36년(1603) 亂 후에 民力이 蕩竭하고 列邑이 피폐하며 경재소의 작폐가 심하다는 이유로 경재소가 혁파되었지만,34) 실은 경재소의 역할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사회의 변 화에 그 혁파의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경재소가 혁파된 직후에 경재소를 복설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8道에 그 便否를 물은 결과 반수 이상이 경재소의 복설을 반대하였던 것 으로 나타났던 것35)이 이를 증언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詢問에 응한 사람들이 란 外官과 재지사족들이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들의 다수가 경재소의 복설을 반대하였 기 때문이다. 수령의 지방통치에 경재소의 지방통제가 꼭 필요한 것이었다면 경재소의 작 폐에도 불구하고 경재소의 복설을 요청하였을 것이다. 사심관제의 存廢가 고려 왕조의 지방통치상의 필요 여부에 의해서 이루어졌듯이, 경재소 의 存廢도 조선 정부의 지방통치상의 필요 여부에 의해서 단행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경재 소의 혁파는 수령 읍리 농민, 경재소 향청 농민의 二重構造였던 지방지배 체계를, 수령 향청 농민, 수령 읍리 농민으로 변화시킨 것으로서, 향청을 수령예하기구로 轉化하게 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경재소 혁파는 재지사족을 매개로 하는 종래의 지방통제정책에서 탈피 하여, 지방민에 대한 국가권력(수령)의 직접지배의 시도로써, 중앙정부의 지방지배정 책의 일대 전환이며 전진이었다. 1603년의 경재소 혁파는 16세기 이래의 정치 사회적 변화의 귀결이었으며, 동시에 이것 은 17세기 이후의 향청의 변화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음의 기사가 이를 말해 준다. 吾鄕素稱南方雄府 文獻之盛 風俗之淳 甲于一道 而經亂以後 卿宰所廢 士大夫賤惡其執鄕權 凡 百論議 全不可否 故無識無恥之徒 縱恣妄行 以鄕籍爲發身之私券 以鄕任爲起家之大槖 奔競雜亂 罔有紀極鄕籍之再焚 鄕任之非人 職由於此.36) 위 기사는 校理 李尙馨이 인조 18년(1640)에 撰한 南原府 鄕廳完議의 일부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남원은 본래 문헌이 성하고 풍속이 淳厚하기가 전라도에서 으뜸이었는데, 난 리(왜란)를 겪고 京在所가 혁파된 이후로 사대부들이 鄕權잡는 것을 천하게 여기고 일체의 논의에 언급을 회피하는 까닭에 무식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들이 鄕籍을 發身을 위한 사사로운 문서로 알고, 향임을 家門을 일으키는 돈 주머니로 여겨서, 엽관운동의 난잡함이 더할 수 없이 심하여 鄕籍이 두 번씩이나 불타고 무적격한 사람들이 향임으로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매우 시사적이어서 깊이 음미해 볼 만한 주장이다. 34) 선조실록 36년 1월 갑신조. 35) 광해군일기 4년 10월 경인조. 36) 龍城誌 향사당 完議.

- 86 - 國史館論叢 第22輯 위에서 사대부들이 鄕權잡는 것(鄕任에 나아가는 것)을 천히 여기게 된 동기가 적어도 문맥상으로는 경재소가 혁파되었다는 데에 있다. 士族들이 향임에 나아가는 것을 꺼리는 이유가 경재소 혁파 이후의 향청의 변화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경재소 혁파 이후 향청 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첫째로 鄕案入錄者의 선정권 鄕任差任權이 守令의 권한사항으로 되었다. 다음은 減山 誌 의 내용이다. 嘉靖四十四年乙丑(1565) 本府生員朱世鳳 一依京在所舊規 增錄舊案子弟八十餘人 以廣其額 作爲座目 行之幾紀 鄕外人金自潤等 密議作黨 竊取襲目 火燒之 其時一鄕齊奮 罪自潤等如律 更 爲謄來京所座目 留置鄕中矣 萬曆十九年(1591) 辛卯月日 朱世鸞全應禮等 改書謄來案 至今傳守 其後京在所報望之規廢而稟本府以差 仍爲恒例.37) 즉 16세기 후엽에 작성되어 오랫 동안 전해오던 咸興府의 鄕案 座目을 金自潤 등이 작 당하여 이를 불살라 버렸으므로 경재소에 보관 중인 座目을 謄書하여 鄕中에 보관하여 왔 는데, 그 뒤 鄕案入錄者의 望單을 경재소에 제출하여 확정받던 경재소 報望의 規式이 폐지 되면서 本府(함흥)에 품하여 擇定하는 것으로 恒例를 삼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뒤란 경 재소 혁파 이후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경재소 혁파 이후 향안 입록이 수령의 승인 사항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1640년대에 議定한 南原府의 鄕射堂 約束條目이다.38) ① 一. 凡鄕老鄕長鄕有司之員 則勿擬鄕任 或有自圖鄕任者 則相議削名勿許主論之列 違公議妄 擬薦望者 論罰事. ② 一. 鄕任之員 或有所失 或有作弊者 則主論之員 隨聞見出文 告于城主 改遞. ①은 鄕老 鄕長 鄕有司 등은 향임에 擬薦하지 못하며, 혹 스스로 향임이 되고자 도모하는 자는 삭명하고 主論之列을 허락치 말며, 公議를 어기고 의망하면 論罰 한다는 내용인데, 경 재소가 혁파된 뒤이므로 이때 향임의 천망이 수령에게 행해지는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 다. 더구나 ②는 향임에 잘못이 있거나 作弊하는 자 있으면 主論之員들이 듣고 본대로(이 를 적어) 성주에게 告하여 改遞 한다고 하고 있어서, 향임택정권이 수령에게 있었음을 시 사하고 있으므로 향청의 薦望을 받아 수령이 향임을 差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대 적으로 조금 뒤진 18세기 중엽의 일이긴 하지만 補民廳 修理廳 등과 같은 기구들을 수령이 임의로 설치하고, 監官과 色吏를 정하여 報狀의 傳通과 修理役을 專管케 하였던 데에서도 수령의 향임택정권이 확인된다.39) 이러한 변화는 南原府에 앞서 전주 나주 영암 등 전라도 일원에 일어났었는데,40) 지역에 따라 시간차는 있을 수 있지만 변화의 방향은 전국이 같았 37) 咸山誌 通紀 祠宇 鄕射조. 38) 龍城誌 公署 鄕射堂조. 39) 鳳城誌 公署 補民廳조, 甲子(1744) 完議 및 修理廳조, 庚午(1750) 謄錄序 참조.

- 87 - 을 것으로 생각된다. 향안의 入錄과 향임의 差任이 수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면서 향청은 수 령의 侍女로 전락되어 가는 추세에 놓이게 된 것이다.41) 경재소 혁파 이후의 또 하나의 변화는 향청이 급속도로 행정기구화하고 있었다는 것이 다. 順天의 경우 17세기 초에 향청의 기구가 확대되어, 座首와 別監 외에 斗米廳感官 官廳 監官 軍器監官 등 여러 감관들이 향임으로 차정되고 있고,42) 또 군대의 결원을 기한 내에 充定하지 않을 경우 향소를 1년의 徒刑에 처한다는 군사업무에 관한 향소의 公罪 규정이 이 시기에 비로소 법전에 등장하게 되는데,43) 이것은 향청이 행정기구화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향청의 기구확대는 향청이 지방행정업무를 관장하게 되면서 방대한 업무수행 상 필요했던 것이었고, 鄕所의 公罪를 규정한 것은 일정한 행정업무를 향소의 직임으로 법 제적으로 승인하고, 그 직임을 수행하지 못하였을 때 그 행정적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 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향청이 행정기구화하는 과정에서 新 舊鄕에 상이한 반응이 일어났다. 신향들이 향임 획 득에 甘心하여 다투어 향임에 진출하는 반면, 구향들은 신향을 천히 여기고 향임에 나아가 는 것을 멀리 하였던 것이다. 신향(이른바 無恥之徒)들이 향임을 가문을 일으키는 돈 주머 니로 알고 다투어 진출할 때, 士大夫들은 향권 장악하기를 꺼려했다는 17세기 중엽의 남원 의 사정은, 이러한 향청의 성격 변화에 따른 사족들의 향임기피현상을 묘사한 것으로써, 17세기 후엽까지에는 이미 전국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고 여겨진다. 근래 향소를 公廉 하고 학식이 있는 자로 택정하지 않고 또 지극히 천대하기 때문에, 다소 염치를 아는 사람 이면 죽기로 향소를 고사하는 까닭에 어리석고 비루하고 무식하여 사류들이 허여하지 않는 자들이 향소를 맡아함으로, 수령들이 저들을 천대할 뿐만 아니라 조금만 화가 나도 형틀을 채우고 笞杖을 가했다는 17세기 후엽의 반계수록 의 기사44)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2. 鄕廳의 地方行政機構化 지금까지는 향청의 성격이 변화하여 지방행정업무를 담당해 가는 배경과 과정을 살펴 보 았다. 이제 향청이 단순히 지방행정업무를 담당하였던 단계를 넘어 지방행정기구화 하였음 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증명해 보기로 하자. 40) 龍城誌 향사당조, 完議文 참조. 41) 김인걸도 경재소 혁파 이후의 유향소를 수령에게 장악되어 가는 과정으로 파악하였다( 조선후 기 향촌사회 구조의 변동 변태섭화갑기념사학논총, p. 778참조). 42) 李睟光 撰(1618) 昇平誌 鄕任조 참조. 43) 受敎輯錄 兵典 軍制조, 歲抄不及期限 守令推考降資 鄕所徒一年 色吏徒二年充軍(萬曆乙巳 承傳). 44) 반계수록 補遺 郡縣制 各邑鄕官조, 一. 各邑鄕官(俗稱鄕所) 擇公廉有學識爲衆所推者一人 爲 座首 (今不擇鄕所 待之至賤 故稍知廉恥者有死不爲 乃得庸鄙無識 不齒士類者爲之 守令相接 不賜 之坐 少有喜怒械辱之 笞杖之 ).

- 88 - 國史館論叢 第22輯 다음은 受敎輯錄 刑典 濫刑조에 실려 있는 1673년(康熙 壬子)의 제정 규정이다. 各邑軍官鄕所監官有司約正之類 有犯答杖殺人之罪者 先論其公私之分 若出於私事而元非官長分 付則斷之以法 若出於公事 則覈其濫刑與否 酌其輕重而論罪 至於色吏 則不可用笞杖 勿論公事 一 依平人相殺例處之. 즉 각 읍의 군관 향소 감관 유사 약정 등으로서 杖殺罪를 범한 자가 있으면, 먼저 그 杖刑 이 공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사적인 것이었는지를 논하여, 만일 사적인 것이었으며 官長(수 령)의 분부가 없었던 것이면 법대로 처벌하고, 만일 공적인 것이었으면 濫刑 여부를 밝혀 그 경중을 참작하여 논죄하며, 색리들은 笞杖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公事였음에 관계없이 平人 의 相殺例에 쫓아 처단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는 향소 감관 등 향임의 임무가 公務이 며, 향임들은 笞와 杖의 사용이 허용된 公務 수행자였음을 알 수 있었다. 향임은 色吏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태형 장형의 집행이 허용된 색리보다 상위의 공무수행자였다. 그렇기에 한 읍 에서 준행해야 할 행정 규식을 준행하지 않았을 때 일차적으로 향소와 색리가 斷罪되고 있었 던 것이며,45) 惡漢들이 境內에서 날뛰는 데도 이를 즉시 체포하지 못하면 당해 수령과 討捕 使를 定罪함은 물론 좌수도 刑杖을 가하여 推問하고 유배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46) 17세기 후엽에 오면 향임들에게 지방행정상의 새로운 직임들이 확대 부여된다. 법전들에 등장하는 새로운 公罪 규정의 확대가 이를 말해 준다. 이에 의하면 戶籍을 작성할 때 漏丁 과 漏戶가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이며,47) 税穀을 기한 내에 상납하고,48) 漕轉을 책임질 領船監官을 差定하는 일,49) 宜松山을 巡山하여 火田을 作耕하는 것을 금하는 일50) 등이 모두 향임의 관장업무였다. 이것은 17세기 후엽에 향청이 호적 조전 禁松 등 제반업 무를 관장하는 지방행정관청화 하였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향청의 성격 및 기능 변화는 향청의 위치 변화에서도 확인될 것으로 믿는다. 향청이 일 반적으로 다른 관아들과 함께 邑基에 건립 되었느냐 아니면 邑基에서 먼 景觀이 좋은 곳에 건립되었느냐 하는 것은 향청의 성격 및 기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조선전기 향청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지극히 적은 예에 지나지 않는다. 1530년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忠州의 향사당은 西門 밖에 45) 赤城誌 古蹟 1674년의 陞府事目, 一. 本府旣已陛(陞)號 所屬之邑 具書目牒呈 以存體統爲 白守(乎)矣 如有不遵其令者是白去等 輕則鄕所色吏 即爲推捉決棍 五十度以下自斷 重則守令并以 報監司處置爲白齊. 46) 刑典事目 購捕事目 肅宗 戊辰(1688) 定式조, 獷悍大倘發於境內而不即譏捕 則當該守令及討 捕使 拿問定罪 座首刑吏討捕將等 刑推定配 (吳甲均, 조선시대 守令職의 사법적 기능 조선 시대사연구 주 57에서 재인용). 47) 수교집록 戶典 호적조, 康熙 丙午(1666) 事目 및 同 강희 갑자(1684) 호적사목. 48) 위의 책 호전 漕轉조, 강희 기유(1669) 조전사목. 49) 위의 책 호전 조전조, 강희 기사(1689) 漕轉改定式事目. 50) 위의 책 刑典 禁制조, 강희 갑자(1684) 備局事目.

- 89 - 있었고, 安東의 향사당은 府城의 서편 밖에 위치하였으며, 醴泉의 향사당은 郡治의 서편 二 里 지점에 있었고, 星州의 향사당은 龍興廢寺 지점에 있었다. 위에서 星州의 龍興寺가 邑城의 북문 밖에 위치하였었음이 확인되므로,51) 위 4개邑의 향사당은 공통적으로 官衙가 있던 읍성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 건립된 향청들이 관아와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은 이 시기의 향청이 지방행정 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官衙와 긴밀 한 협조가 필요한 기구였다면 東軒과 衙舍 客館 등이 모여 있는 城內에 위치하는 것이 합 리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론은 적어도 16세기 이전의 향청이 지방행정을 담당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수령에게 장악되거나 수령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는 기구도 아 니었다는 이해의 충분한 근거가 되리라고 믿는다. 邑城 밖에 건립되었던 향청이 어느 시기부터인가 邑城 內에 移建되기 시작하였다. 그리 하여 1650년대 말에 작성된 東國輿地志 宮室조에서 확인되는 향청의 위치를 보면 거 의 전부가 邑城 內의 客館에 근접해 있었고, 아니면 衙舍에 근접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 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 확인되는 향청의 위치가 모두 읍성 밖이었던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향청이 客舍 衙舍 東軒 作廳 등이 群集해 있는 읍성에 移建되 는 변화는 향청이 지방행정기구화하는 변화와 軌를 같이 할 것이므로, 이러한 변화는 다소 의 지역차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16세기 후엽 이후에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향청의 성격 변 화에 결정적 계기를 이루는 경재소 혁파 이후의 시기에 급속히 진행되었으며, 17세기 중엽 까지에는 대체로 일단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향청의 위치 변화를 통해서도 우리는 조선후기 향청의 성격 변화 즉 지방행정기구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조선후기 향청의 성격변화는 향청 건립 주체들의 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 다. 조선전기 향청의 건립 주체들은 鄕의 父老들이었다. 永嘉誌 鄕射堂조 正統 丙寅 (1446)년의 權孟慶 立寶記에는, 予在京中 有人告曰 鄕之父老 設鄕射堂于府之西郊 라 하여 鄕의 父老들이 향청을 건립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고, 壬亂 때 소실된 향청을 광해 2년(1610)에 重修한 것으로 되어 있는 商山誌 향사당 重修記에, 堂 故邑人韓知縣順 所創 이라 되어 있어, 官人이 아닌 邑人 韓順에 의해 향청이 건립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또 輿地圖書 醴泉郡 鄕射堂조, 權五福(1451 1498)記에는, 51) 東國輿地志 星州牧 宮室조 참조.

- 90 - 國史館論叢 第22輯 鄕父老共出力陶瓦鳩材 太守李公箴亦助以材 始攻於壬子(1492) 斷手於癸丑(1493) 董其役者 鄕人某與某也 라 기록하고 있어, 鄕父老들이 향청을 건립했을 뿐만 아니라 건립자재의 염출이며 역사의 감독까지 향인들이 하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咸州誌 향사당조에도, 正德庚午(1510)秋 有李座首趙別監李別監諸丈 始奮然共諗于鄕中諸員 令各出米布 鳩工聚材 建立之越明年辛未春而斷手 라 기술하고 있어 향인들이 향청건립에 필요한 자재들을 염출하여 건립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조선전기의 향사당 건립 목적이 慶弔의 일이 있을 때 酒饌을 갖추어 마시고자 하나 雨雪 을 피할 만한 곳이 없어 이를 해결코자 하는 동기에서 였으며,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모여 獻壽의 禮를 행하고 習射를 통하여 德을 보이며 燕席에서의 序齒의 禮를 통해 長幼의 別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永嘉誌 향사당조의 기사나, 一鄕의 사족들이 모 여 一鄕의 일을 의논하고, 혹 활쏘기를 익히고, 혹 禮를 講하기 위해 향청이 필요했다고 기 술하고 있는 咸州誌 향사당조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전기의 향청은 鄕民의 敎 化를 일차적 목적으로 한 향촌의 자율적 기구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향청의 건립이 鄕의 父老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향인들이 그 건립비용을 염출하였으며, 향인들의 감독하에 향청 이 건립되고 있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 건립되는 향청들은 모두 수령들에 의하여 건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많은 예를 발견할 수는 없지만, 興陽誌 관우조 鄕射堂註記에 의하면 향사당이 성내에 있는데, 1630년대에 흥양현감이었던 黃㦿가 창건했다고 되어 있으며, 私撰邑誌 東萊府誌 廳舍조 鄕廳註記에 의하면 동래부 향청은 客舍 남쪽에 있는데, 인조 7년 (1629)에 府使 柳汝恪이 건립했고, 숙종 1년(1675)에 부사 魚震翼이 重創했으며, 숙종 32년(1706)에 부사 黃一夏가 將官廳의 터에 옮겨 다시 중창했다고 되어 있다. 조선전기의 향청이 鄕의 父老들에 의해서 건립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선후기의 향 청이 수령들에 의해 건립되거나 중창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조선후기의 향 청이 지방행정기구화 했다는 그 이외의 것에서는 찾을 길이 없다. 향청의 성격 변화는 향청에 대한 사회인식의 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1650년대에 편 찬된 동국여지지 에는 향청을 공서조가 아닌 궁실조에 재록하고, 관원조에는 수령 판관 교수 훈도만을 재록하고 있다. 그러나 1699년에 편찬된 용성지 에서는 향청을 作廳과 함께 공서조에,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 에서는 향청을 작청과 함께 廳舍조에 기록하 고 있으며, 1760년 경에 편찬된 輿地圖書 의 官職조에는 수령 외에 座首 別監 軍官 衙 前 知印 使令 官奴婢까지를 재록하고 있고, 鄕射堂을 客館 衙舍 軍官廳 人吏廳 등과 함께 公

- 91 - 廨조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公廨는 公務를 집행하는 聽舍를 의미하므로, 18세기 후엽의 일반적인 인식이 향청을 衙舍나 人吏廳 등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公務를 담당하는 지방 관아의 聽舍로 이해하였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향청의 임원인 좌수 별감 등 향임들도 읍의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衙前이나 邑의 유일한 통치권자인 수령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지방행 정 담당자로 同一視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당해 사회의 실정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 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지리지 편찬자들의 향청 향임에 대한 이해였으므로 향청의 변화에 관한 가장 정확한 이해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향청이 행정기구화 하였음은 향청의 구조 변화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좌수와 별감으로 구성되어 있던 조선전기의 향청이 17세기에 들면서 향청의 기능이 확대됨에 따라 邑의 행 정업무를 분담하는 허다한 名色의 監官 都監이 증설되는 등 향청의 기구가 확대되었음은 이미 살핀 바와 같거니와, 1699년에 편찬된 용성지 에 의하면 향청에 통인 공생 구종 사령 등 官屬들이 배치되어 있고,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 에서는 15 6명씩의 書 員 小童 등이 향청의 구성원이었음이 발견된다. 그리하여 19세기에 이르면 邑에 따라 다소 의 차이는 보이지만 所吏 通引 書員 貢生 小童 使令 駆從 등 많은 官屬들이 있었다. 所吏는 향청의 田畓을 관장하고 향청의 일용품을 責當하는 등의 향청 내의 일을 관장하던 향청의 吏(胥)였으므로52) 吏族 중에서 선임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지방관아의 通引은 수령이 행 차할 때 陪行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하고,53) 혹은 印章과 文貼, 수령의 사무를 거드는 일 등을 관장하기도 하였는데,54) 通引色(吏)이 설치된 읍이 있는가 하면,55) 통인의 首職인 都通引을 吏房으로 차출하던 읍이 있었던 것56)으로 미루어 통인도 吏族들이 담당했던 직 임으로 여겨지며, 향청의 통인도 적어도 신분상으로는 같았을 것이다. 書員은 지방이서 집 단의 일원으로서 田畓의 踏驗과 田税 징수 등을 관장하던 面書員과 鄕校와 향청의 서원 등 이 있었는데, 19세기에는 면서원이 戶長 吏房 등과 交互換差되고 있었으므로,57) 면서원도 향리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되며, 향청의 서원도 같았을 것으로 생각 된다. 貢生은 향리 자손으로서,58) 아직 직임을 맡지 않은 額外의 吏胥들이며, 때로는 임시로 직 임을 맡기도 하였고, 기회가 오면 額內의 吏胥로 승격되어 吏職을 담당할 부류들이었다.59) 小童은 나이 어린 잔심부름꾼이 아니었던가 생각되며, 使令 또한 관아에서 심부름하던 하 52) 光陽縣各所事例册 ( 한국지방사자료총서 8, 여강출판사, 1987, 所收) 향청조. 忠州牧邑誌 邑事例 향청조 참조. 53) 위의 책 통인청조 참조. 54) 高敞縣邑誌 邑事例. 55) 商山邑例 ( 한국지방사자료총서 9, 여강출판사, 1987, 所收). 56) 용성지 公署 鄕射堂조, 癸酉 完議 참조. 57) 慈仁叢瑣錄 咸安叢瑣錄 ( 한국지방사자료총서 17 18, 所收)의 人吏換房記事 참조. 58) 掾曹龜鑑 吏職名目解. 59) 김필동, 조선후기 지방이서집단의 조직구조 ( 한국학보 28) 참조.

- 92 - 國史館論叢 第22輯 인배로서, 邑 村에 드나들면서 官令을 전달하고 公錢을 관리하기도 하였으며,60) 驅從은 말 을 기르고 벼슬아치를 모시고 다니는 官奴들이었다.61) 이와 같이 그 出自가 吏族이며, 지방행정실무를 담당하던 향리계열로 추정되는 所吏 通 引 書員 貢生과 관노계열인 小童 使令 驅從 등이 17세기 말엽에 이미 향청에 배치됨으로써, 향청은 지방행정관청으로서의 면모를 온전히 갖추게 되었던 것이며, 향임도 18세기 후엽의 지리서나 19세기 邑誌들의 관직조에서 확인되듯이 지방관리로서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후기 향청의 경제적 운용 역시 향청이 행정기구화 하였음을 엿보게 해 준다. 즉 조 선후기에 오면 향청원들의 급료와 향청의 경상비가 지방관서로부터 지급되고 있었다는 것 이다. 다음은 영조 42년(1766) 경에 작성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는 安東 鄕廳事例謄錄 중 재정관계 조항의 일부이다. ① 官用火粟肆拾石移捧本所 添補日用 而掌務二人粟二石 其外有司通引書員各粟漆斗五刀式 其 他下人 隨所有參酌例下事. ② 鄕會時 外村假属處 每名壹錢式收捧 以補日用饌價 此則鄕會錢未區劃前擧行者 而鄕會錢旣 已措劃 假屬處一錢收捧 勿爲擧行事. ①은 官用 즉 安東府의 재정운영에 충당될 火粟(火田에서 收稅한 粟) 40석을 향청에 주 어 경비에 보태어 쓰도록 하되, 掌務 2인에게는 2섬, 有司 通引 書員에게는 각각 7말 5되 씩을, 그 밖의 하인에게는 남아있는 화속을 참작하여 定例에 따라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여 기서 우리는 안동부가 향청의 장무 이하 관속들에게 料米를 지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데, 이것은 執務에 대한 반대급부로써 지불된 給料에 해당되는 것이었으며, 향청이 지방행 정 관서로서 승인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②는 鄕會를 열 때 外村假屬處에서 매인당 一錢씩을 거두어 당일의 경비와 觀價에 충당토 록 하였으나, 이것은 鄕會錢이 마련되기 이전의 일로써 지금은 향회전이 이미 府의 재정 중 에서 마련되고 있으니 外村假屬處에서 거두는 일이란 그만둔다는 내용이다. 外村假屬處란 除役村인 契房村 또는 募入洞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로 이해되며,62) 鄕會錢은 향회를 개최 하는데 소요되는 경비를 위해 지방관서의 재정 중에서 지출되는 定例金이었다고 생각된다. 조선후기 사회는 지방관서의 재정제도가 불비해서, 지방관서의 財政補填策으로써 鄕校 鄕 廳 將官廳 官奴廳 使令廳 등의 관서나, 비록 관서는 아니라도 조선정부에서 祀賢과 인재양성 을 위해 그 존립을 승인하고 있는 書院 등에 募入洞을 인정하여, 烟戶雜役을 면제하여 주는 대신 牟租를 거두어 이를 經常費로 사용토록 하기도 하였고,63) 혹은 향청을 비롯한 지방관 60) 高敞縣邑誌 邑事例 各校吏所掌 참조. 61) 목민심서 吏典 馭衆조. 62) 田川孝三, 李朝の 鄕規に ついて ( 조선학보 81) 참조. 63) 用中錄 ( 朝鮮民政資料 所收) 諸般可據조 참조.

- 93 - 서에 契房村을 인정하여 계방촌에 환곡과 軍簽 기타 요역 등을 면제하여 주고 그 대신 그로 부터 일정한 금액을 거두어 관서의 경상비로 사용케 하고 있었던 것이다.64) 이러한 지방관 서들의 재정구조는 전 근대사회의 산물이었으며, 향회 때 外村假屬處에서 매 인당 1전씩을 거두었다는 安東府 鄕廳事例도 그 시기의 사회 경제단계의 반영이었다고 볼 때, 鄕會錢이 지 방관서로부터 지출되게 된 것은 지방관서의 재정구조상 한 단계의 발전이었다고 생각되며, 한편으로는 향청이 완전히 지방관서로서 승인되었음에 따른 변화였다고 이해되기도 한다. 18세기 말엽 求禮縣에서도 官用의 환곡 落庭米와 山城米落庭米 需米色條 중에서 향임들 에게 料米를 지급하고 있었음이 발견되는데,65) 이것은 비단 安東이나 求禮의 경우만이 아 니고 이미 列邑에 통용되는 規例이었음을 알 수 있다.66) 19세기 후엽에 작성된 邑誌들의 邑事例에는 官廳으로부터 지출되는 향청의 재정실태가 비교적 소상하게 수록되어 있다. 예 컨대 전라도 靈巖郡의 경우, 관청에서 매월 4鄕所에게 甘藿 9册(丹?) 醢 9되 鹽 9되 眞油 1되 2홉을 지급하고, 향청에 醬太 1섬 鹽 1섬을 춘추로 나누어 지급하였으며, 上下廳에서 매월 4향소에게 料米 1섬 1말 8되 점심 쌀 6말, 軍器監官料米 4말 2되 점심 쌀 1말 5되를 지급하였으며, 郡司에서 4향소에게 飯木 90丹 점심 飯木 30丹 그 외에 馬料와 谷草 혹은 靑草 등을 향청에 제공하였다. 그리고 경상도 淸河縣의 경우는 官廳에서 향청 임원들에게 매월 매인당 料米 5말 메주 9 말 소금 4말 5되씩을 지급하고, 饌物代로 時驛面 鹽稅를 향청에 수급하였고, 縣司는 향청 에 燒木을 제공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향청 경상비를 위해 保가 지급되기도 하였고,67) 전답이 주어지기도 하였다.68) 이와 같이 향임들에게 지방관청의 官需米 중에서 料米(급료) 가 지급되고, 향청의 需用이 지방관청으로부터 지급되며, 保와 전답이 향청에 지급되었던 것은 향청이 이미 지방행정관서로 승인되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조선후기의 향청이 지방행정기구였음을 논증하였는데, 그렇다면 향청이 확고히 지방행정기구화한 시기는 언제 쯤일까? 이에 대하여 필자는 지역차는 있었다 하더라도 대 체로 17세기 말엽으로 보고자 한다. 앞에서 검증한 바와 같이 17세기 후엽까지에는 ① 향 임차출권이 수령에게 장악되어 있었고, ② 향청의 기구가 확대되었으며, ③ 법전에 호적 창 고 조운 군사 등 광범한 행정업무에 향임의 公罪 규정이 제정되며, ④ 향청이 邑基에 移建 되고, 그 건립주체가 鄕의 父老에서 수령으로 변하였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전엽에 이미 座首가 守令權을 대행하여 邑務를 摠察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1738년 충청도 林川 64) 牧民心書 戶典 平賦 참조. 65) 鳳城誌 丙辰(1796) 完文 節目 참조. 66) 위와 같음, 顧諸列邑鄕廳 皆有所用. 67) 慈仁縣邑誌 邑事例 下納秩 鄕廳支供保 陸拾名 및 善山府邑誌 事例成册 軍額 鄕廳保 壹 百參拾名 등이 그것이다. 68) 熊川縣邑誌 邑事例 鄕廳조 및 光陽縣各所事例册 鄕廳조 참조.

- 94 - 國史館論叢 第22輯 郡에서 군수가 공석 중이자 향청이 將校를 지휘하여 절도를 체포케 하고 있으며,69) 1745 년 대에 경기도 高陽郡守가 향소로 하여금 水害 현황을 조사케 하는가 하면,70) 議送 사건 화한 伐木 실태를 향소를 파견하여 조사케 하였으며,71) 고양군수가 공석 중인 동안 향소가 郡內의 일을 兼邑 수령에게 보고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72) 이것들은 좌수가 수령권을 대 행하여 邑務를 총찰하였다는 구체적인 실례들이다. 이때 향청을 향촌자치기구라고 한다면 吏廳 역시 관청이 아니고 향촌자치기구였다고 할 수 없는 한 吏房 戶長 등 수리들로 하여 금 수령권을 대행시키지 않고 한 邑의 통치행정을 좌수에게 총찰케 한다는 일은 있을 수도 이해되지도 않는 일이다. 그러나 누구도 吏廳을 향촌자치기구였다고는 주장할 수 없을 것 이다. 따라서 향청도 이청과 함께 다 같이 지방행정관청이었다는 그 이상의 설득력 있는 주장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좌수의 수령권 대행이야말로 향청이 지방행정관청화 한 결정 적인 단서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鳳城誌 公署조에 의하면 적어도 18세기까지는 향청이 거의 완전한 자격을 갖춘 행정기구로 인식되고 있었다. 鄕廳 乃是一邑 亞官之所 而百務參佐之任. 위 기사는 봉성지 공서조 丙辰(1796) 完文의 일부로서, 향청은 곧 한 고을에서 수 령 다음 가는 관리의 公所(관청)이며, 鄕所는 수령의 屬僚 또는 下僚로서 군현의 일체의 公務에 참석하여 수령을 보좌하는 직임이란 내용이다. 一邑亞官이란 표현은 수령의 지방통 치를 보좌하는 鄕所 吏房 戶長 등 모든 관리를 망라한 중에서 좌수가 수령 다음의 관리라는 표현이다. 향임들이 적어도 지방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읍리류의 지방관리와는 대등한 지방 관리로 이해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 향청이 지방행정기구화 하였음을 증명해 주는 이상의 사료 중 몇몇은 18세 기 또는 19세기 향청재정과 구조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어서, 17세기 말엽에 향청이 행정기 구화하였다는 논지를 약하게 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료들이 18세기 후엽이나 19 세기의 것이었다고 해서 향청의 재정상의 변화나 구조상의 변화가 18세기 후엽 내지 19세 기에 나타난 변화라고는 생각치 않으며, 향청이 지방행정기구화 한 17세기 말엽 이후의 점 진적인 변화였던 것을 사료의 제약상 후대의 사료를 통해 조명하게 된 것이라고 보아도 좋 으리라 생각한다. 69) 嘉林報草 무오년 7월 29일조. 70) 麾事摠要 ( 朝鮮民政資料 牧民篇 下, 所收) 28조항. 71) 위의 책 41조항. 72) 위의 책 46조항.

- 95 - 한편 향청이 행정기구화 한 이후 18세기에 이르면 사회 경제적 변동에 따라 향임계층의 신분에도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 역시 향청이 지방행정기구화 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현상 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의 사회 경제적 변동이란 양반들 중에서는 오랫동안 官界 와 유리되어 몰락하는 신분적 하강이 일어났는가 하면, 혹은 富農 富商들 중에서 納粟이나 매관매직을 통해서 신분 상승을 이룬 계층들이 발생하기도 하여 신분제가 동요되었고, 大 同法 均役法의 실시와 화폐의 전국적 유통으로 상품화폐 경제시대로 돌입하는 등의 변화가 그것이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변동과 함께 향임은 지방 지배신분 획득을 위해서, 免役의 방편73)으로 인식되어 賣鄕의 風이 일반화하여 갔다. 한 번 鄕族에 들기만 하면 평생을 편히 놀며 지낼 수 있었으므로, 良役을 부담해야 할 사람들이 賄賂와 賣任율 통하여 앞을 다투어 향임을 점유하여 갔다.74) 그리하여 18세기 이후에는 향임이 饒戶富民들의 專有物처럼 되어 갔다.75) 이들 新鄕들은 상품화폐경제의 전 개, 토지소유 관계에 변동을 초래한 지주제 전개과정에서 財富를 축적한 饒戶富民들 즉 良 民軍保類들로서, 수령권이 강화되어 鄕案入錄을 좌우하게 되고, 향청이 지방행정기구화한 이후 禮錢 賂任 등을 통하여 향안에 대거 입록되고 또 향임을 독점하여 갔던 것이다. 賣鄕이 일반화 하는 추세에 있고 賣鄕의 주체는 수령이었으므로, 수령과 신향들의 관계 는 밀착되게 마련이었다. 수령들은 新舊鄕 중에서 富力을 가지고 있으면서 보다 협조적이 고 장악이 용이한 新鄕을 지방통치상의 동반자로 택하였던 것이며, 그리하여 빈발하는 鄕 戰에서 정부나 수령들은 으레 신향을 옹호하는 경향성 마저 보이고 있었다.76) 儒鄕分岐와 신향들의 향임점유는 중앙권력의 지방통제와 중앙정부가 지향하는 행정조직의 확대강화를 한층 용이케 하는 상대적 효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유림들은 향청에서 발을 돌 려 그 활동무대를 서원으로 옮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73) 정조실록 11년 4월 계축조, 兩西暗行御史李崑秀復命 經鄕任軍任者 陞鄕案校案者擧皆免軍 丁兼又免徭役 邊塞鎭堡之人 絕無操弓之類 家產稍饒者 百計行賂 或陞鄕或陞校 一經校鄕 數世免 役. 74) 영조실록 48년 7월 경자조, 掌令李師曾上疏 論三水府邑弊民瘼 其五 一得鄕名 終身閑遊 奔競之弊 去而益甚 土民之可合軍官將校及良丁軍保之類 併皆行賂 冒入於鄕任. 75) 정조실록 14년 3월 갑진조, 關西暗行御史李冕膺復命 許 (氵+近) 廣開賂門 鄕任之帖 都 歸富戶. 76) 충청도 儒學 金濈 등이 沔川 군수 鄭潤先이 신향을 옹호하고 士族을 陷害한다고 죄줄 것을 청하 자 영조는 疏頭를 귀양 보냈으며( 영조실록 7년 9월 정묘조), 定州前牧使 吳大益이 富戶 400여 인을 향안에 입록시키자 원향들이 감영에 가서 호소했으나 감사가 原鄕을 定配하고 있는 데서( 정조실록 14년 4월 경신조) 이를 엿볼 수 있다.

- 96 - 國史館論叢 第22輯 Ⅳ. 朝鮮後期 鄕廳의 기능 1. 향청의 구조와 鄕任 조선전기에만 해도 하나의 지방자율기구였던 향청이 17 8세기를 거쳐 19세기에 이르러 서 는 완전히 하나의 지방행정 관청으로 변모하였음을 우리는 앞에서 고찰하였다. 조선후 기의 향청은 지방통치 행정상에 있어서 일정한 행정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당시에 이 들 향청 임원들의 지방행정상의 직임을 鄕任이라고 하여 國任과 구별하였다.77) 향임이란 국임에 대한 對稱 개념으로써, 국임이 국왕의 명으로 담당하게 되는 직임, 즉 국왕의 落點 을 받아 임명되는 관직임에 대하여 향임은 왕권과는 무관하게 수령에 의해 차임되어 수령 지휘하에 지방통치 행정만을 담당하였던 직임을 의미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향임 이 관직이 아니었음은 물론이지만, 그 중요성에 있어서는 국임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면 향청의 구조는 어떠하였으며, 향임의 범주는 어떠하였는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세기의 향청은 鄕所라고 불리우는 좌수 별감과 약간의 監官 都監, 그 외에 일반적으로 所吏 通引 書員 貢生 小童 使令 駆從들 중 일부로 구성되어 있었 다. 그리고 향청의 구조는 감관 도감 이상의 上層部와 所吏 이하의 下層部로 구분해 볼 수 있으며, 상층부인 향소와 감관 도감은 法典類나 邑誌類의 邑例에 그 책무가 규정되어 있어, 직접 수령의 통치행정을 보좌하며 군현의 행정업무에 참여하여 일정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 었으며, 하층부를 이루고 있는 소리 통인 서원 공생 등은 향리 계열로서 향청 내의 대 소사 를 관장하였고, 소동 사령 구종 등은 官奴 계열로서 역시 향청 내의 잡역에 종사하는 등 하 층부 구성원들은 邑務와는 구별되는 향청 자체의 존립과 유지를 위하여 일정한 봉사를 담 당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뿐만 아니라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는 향소와 감관 도감 사이에도 현격한 직능상의 구별 이 있었다. 향소는 邑格에 따라 縣과 郡 府 이상의 邑으로 대별하여 각각 3명 4명 5명으로 그 수가 달랐으며, 邑吏들이 수행하는 일체의 행정업무를 分掌하고,78) 수령의 邑政에 참여 하여 수령의 지시에 따라 邑務를 수행하였다.79) 반면에 감관 도감은 직임에 비하여 보다 세분된 단일한 직임을 담당하여,80) 형식상 향소의 상위기능에 대하여 하위기능에 속하는 77) 安義邑誌 鄕射堂重修記, 任無大小 鄕國一體 鄕之積者 爲國任之所而可大 未有能任於鄕 不能 任於國者矣. 78) 金堤郡邑誌 향청조 및 忠州牧邑誌 邑事例 향청조 참조. 79) 향소가 朝仕에서 수령의 지시를 받아 邑務를 수행하고 있다( 固城叢瑣錄 계사 4월 16일조 참조). 80) 分賑廳都監 西倉監官 軍器鹿監官 등이 이를 말해 준다.

- 97 - 직임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더구나 향소 중 좌수는 향청의 首任으로서 邑務 를 徳察하였고,81) 감관 도감 등을 擇差 하였으며, 감관 도감 등의 不正이나 비위가 발견되 면 좌수도 같이 치죄되고 있었던 점82)으로 미루어 향소에게는 감관 도감 등을 감독하고 검 찰할 책임이 부여되어 있었을 것이 분명하므로, 향소의 기능이 감관 도감의 그것에 비하여 상위기능이었던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향소와 감관 도감의 직임은 다만 직능상의 구분일 뿐, 그 직임 자체에 위계상의 상하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향임이 官人이 아니기도 하였거니와 향임에 일정한 昇級의 원칙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鄕望에 의해서 향임이 차출되었으며, 한번 향임 에 차출되었다 해서 계속 여러 향임을 역임하는 것도 아니었고, 또 邑例에 의하면 특정한 감관에는 좌수 별감을 역임한 사람을 차출하고 있었던 점,83) 좌수 별감이 특정한 감관이나 도감직을 겸하도록 하고 있었던 점84) 등이 강력하게 이를 시사해 준다. 향소와 감관 도감 직이 상하위직의 관계라고 한다면, 상위직자인 향소가 하위직인 감관 도감을 겸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또 전일에 좌수 별감이었던 사람을 후일에 감관 도감으로 차출할 수 있도 록 邑規를 만드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향소와 감관 도감은 직능상의 구분 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면 鄕廳의 구성원 중 어느 범주까지를 鄕任이라고 하였는가? 향임조가 설정되어 있 는 19세기 邑誌들을 보면 향임조에 좌수 별감과 약간의 감관 도감, 그 밖에 風憲까지를 향 임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고,85) 혹은 좌수 별감과 감관 도감 외에 都將을 향임으로 기록 하고 있어86) 위 향청 구성원들 중 소리 이하 구종 등이 향임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짐작 되나, 이것만으로 향임의 범주를 속단할 수는 없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향임의 설치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다음 기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國家之設鄕所而置鄕任者 蓋有以重其所係也 分九重憂 牧一境民者 邑主也 而邑主瓜期有限 遞局無常 常爲新眼之人 不免有失序之措 雖最留意於民事 莫暇檢詳於經遠 故必令各鄕 擇其忠勤諸熟之人 屬以 一鄕之綱 使之居其所 而察其任 然後邑主依之爲耳目 境民恃之爲樞紐 然則居其堂者 不可愼其任乎87). 81) 충주목읍지 읍사례 향청조 참조. 82) 南原縣牒報移文成册 ( 한국지방사자료총서 1, 여강출판사, 1987, 所收) 丁巳(1737) 1월 일조 節目, 擇人之道在首任 監官差出之際 若循私苟充 差定非人是如可 有所逋欠之弊 則其 時座首 當報使重治 및 要覽 ( 조선민정자료총서, 여강출판사, 1987, 所收) 換房조, 座 首吏房千把摠等首任 各別擇其人而久任 則其下所任換差 亦自擇人 下輩有過 非但罪其當者 亦罪其 首任頭目 則自下飭束 亦自鮮犯科 가 참고된다. 83) 남원현첩보이문성책 정사 1월 일조 節目, 各倉監官 勿論曾經座首別監千摠別將 必以可堪 者極擇差出. 84) 예컨대 康津현에서는 戶籍都監을 향소 중에서 차출했고, 南原府에서는 좌수가 司倉監官을 겸하 였고, 淳昌군에서는 좌수가 都廳監官을, 별감이 大同廳監官을 겸하였다(위의 책 읍사례 참조. 85) 順天府邑誌 鄕任조 참조. 86) 扶安志 향임조 참조.

- 98 - 國史館論叢 第22輯 요컨대 향청을 설치하고 향임을 둔 것은 국왕의 근심을 나누어 지고 一境의 백성을 다스 리는 자가 수령인데, 수령은 임기가 한정되어 있고 그 교체가 빈번하여 원대한 經綸이 어 려웠던 까닭에 忠勤하고 境內의 실정에 밝은 사람을 향임으로 택하여 향청에 머물면서 일 정한 소임을 살피게 함으로써, 수령의 耳目의 기능을 담당케 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향임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함에 있어 耳目처럼 의지하던 향청의 임원들을 지 칭하였다. 따라서 향임은 향청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던 감관 도감 이상의 직임을 지칭하 는 것이었으며, 향청 자체의 존립과 유지를 위한 향청 내의 대소사나 잡역에 종사하였던 所吏 이하의 구성원은 포괄하지 아니하는 개념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향소 가 향청의 상위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좌수와 별감을 지칭하는 표현일 때, 향임은 향소에 감관 도감까지를 포괄하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邑誌에 따라서는 面任(風憲 : 尊位) 都將까지도 향임에 포함하 고 있고, 또 이들의 직임이나 신분이 향(읍)리의 그것과는 구분될 뿐 아니라,88) 尊位 約正 등이 읍지들의 향청조에 기록되어 있으며,89) 일반적으로 面任과 約正은 향청에서 수령에게 薦望하여 차출되고 있었으므로90) 廣義의 향임에는 面任 約正 都將 등도 포함되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한다. 2. 향임의 기능 조선후기 향임들에게는 지방통치 행정상의 일정한 법제적 권한과 책임이 부여되어 있었 다. 이러한 근거를 우선 조선왕조의 법전류에서 발견되는 향임의 公罪 규정에서 찾을 수 있 다. 향임의 공죄 규정은 17세기 초에 이미 나타나며 후대로 올수록 그 규정이 확대되는 데, 이는 향임의 기능확대로 풀이된다. 법전류에 규정하고 있는 향소 감관 등 향임들의 公罪 규 정을 통하여 추출해 본 향임들의 권한과 책무들을 예시하면, 향임은 戶籍 사무를 관장하여 호적을 작성할 때 漏丁이나 虛戶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91) 堤堰內의 起耕을 금하고 堤堰을 修治해야 하며,92) 留庫穀에 虛錄이 없도록 검찰해야 했다.93) 收税 업무도 관장하여 魚鹽稅를 기한 내에 납부케 해야 했고,94) 田結을 作夫(8結을 1夫로) 할 때 作奸을 막아야 했으며, 陳田과 墾田을 엄히 조사하여 陳 墾의 혼잡이 없게 하고, 災實 보고에 差錯이 없도 87) 旅軒先生文集 7, 鄕射堂記(김용덕, 향청연구 p.44 재인용). 88) 面任(風憲 : 尊位)과 約正은 士人 중에서 선출하였다( 牧民大方 吏典之屬 擇任吏조 참조). 89) 興陽縣邑誌 留鄕所조 및 順天府邑誌 鄕任조 참조. 90) 목민심서 吏典 用人조, 風憲約正 皆鄕丞薦之. 91) 受敎輯錄 戶典 호적조. 92) 속대전 戶典 田宅조. 93) 위의 책 호전 倉庫조. 94) 위의 책 호전 魚鹽조.

- 99 - 록 해야 했다.95) 漕運 업무도 관장하여 稅穀을 기한 내에 상납케 하는 일이며, 領船監官을 선임하는 일 등을 맡아 수행하였다.96) 또 軍務를 담당하여 軍簿를 작성할 때 脫漏나 年齡의 加減, 身役의 移定 등 不法을 막는 일이며,97) 軍籍을 작성할 때 黃口나 兒弱으로 充定하는 것을 방지하는 일,98) 軍器의 亡失을 방지하는 일99) 등이 향임의 책무였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의 법전들이 民政 軍政상의 제반 邑務에 있어 향임의 公罪를 규정하 고 있었던 것은 지방통치 행정상에 있어서의 향임의 책무를 중앙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이며, 이것은 중앙정부가 의도하던 중앙권력의 확대강화정책에 의한 행정조직의 확대강 화 현상이었다고 이해된다. 그런데 문제는 향임들이 관장하던 민정 군정상의 제반업무들이 대부분 일차적으로는 읍리들이 담당하던 업무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수령이 수행해야 할 지 방통치 행정업무들이었다는 것이다. 다음을 보자. ① 漏十戶至五十戶者 次知色吏鄕所監官 杖一百充軍 部官守令永不叙用.100) ② 歲抄脫漏十人以上守令罷職 三人以上降資 二人以下杖八十 監色一人以上 杖一百徒三年.101) ①은 호적을 작성할 때 家戶를 누락한 경우에 대한 색리 향소 감관 수령의 刑量을 규정한 것으로써, 이는 호적사무가 수령 향임 색리 모두의 책무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②는 軍 簿를 작성할 때 軍丁을 누락한 경우에 대한 감관 색리 수령의 형량을 규정한 것으로써, 역 시 군부작성업무가 수령 향임 색리의 책무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지방행정상에서 향임이 담당하던 직임(기능)의 실체는 무엇인가? 金堤郡邑誌 향청조에는 향소의 직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座首次知房掌 史房 戶房 司倉色 牙兵色 束伍色 軍器色 民庫色 補役色. 一別監次知 戶長 官廳色兵房 禮房 禁衛色 大同色 都書員 戶籍色 均役色 御營色. 二別監次知 工房 刑房 漕軍色 新選色 承發. 위에서 3향소가 전 읍리들이 分掌하고 있는 일체의 행정업무를 분담하여 관장하고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읍리들이 군현의 행정실무담당자들임을 이미 알고 있다. 따라서 읍리들이 군현의 행정실무를 담당할 때, 향소들은 읍리를 감독하고 읍리들이 담당 하는 행정실무를 검찰하며 그 부정을 방지하는 소임을 담당했을 것임을 우리는 쉽게 유추 할 수 있다. 향소와 읍리가 동일 행정체계상의 상하위직이 아니었으므로 동일업무를 향소 와 읍리가 공동으로 담당하였다고 볼 수 없는 이상, 향소의 직임으로 감독과 검찰 그 이외 95) 위의 책 호전 收稅조. 96) 위의 책 호전 漕轉조. 97) 위의 책 兵典 名簿조. 98) 대전통편 兵典 成籍조. 99) 속대전 병전 軍器조. 100) 수교집록 호전 호적조. 101) 속대전 병전 명부조.

- 100 - 國史館論叢 第22輯 의 직임을 상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은 治郡要法 의 撰者가 예시한 향소의 직임이다. 座首裳吏兵房之務 上別監掌戶禮房之務 次別監掌工刑房之務 皆眼同檢察. 즉 좌수는 이 병방의 업무를 관장하고, 상별감은 호 예방의 업무를 관장하며, 차별감은 공 형방의 업무를 관장하여 부정을 못하도록 점검하고 살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향소의 직임은 군현의 일체의 행정업무를 관장하되, 직접적인 실무의 담당이기 보다는 읍리들을 감독하고 그들이 담당하는 행정에 부정이 없는지를 감찰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감관이나 도감들의 직임은 어떤 것인가? 다음의 忠州牧邑誌 의 邑事例 향청조 기사를 보자. ① 座首一員 摠察邑務 各倉社首各面風憲隨闕出代 軍器 禁御 領軍 陞戶 選武 守御 牙兵 結錢 四 山烽臺 次知申飭. ② 一別監一員 還穀及邑大同監捧 各當騎兵 申飭督捧上納. ③ 官廳別監一員 需米監捧 砲保申飭督捧上納. ④ 工房別監一員 刑獄看察 永丁監捧 水軍新選 新余丁 奴牙兵 工匠 禁雜色 申飭督捧上納 ⑤ 年分都監一員 田政踏驗考給 作夫 申飭. ⑥ 戶籍都監一員 毎式年差出 各面統記及戶籍單子情錢 申飭收捧. ⑦ 田稅監官一員. ⑧ 大同監官一員. 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연분도감 호적도감 전세감관 대동감관 등의 관장업무는 앞 의 4향소가 관장하는 그 외의 별도의 것이었다. 감관 도감 등은 수령은 물론 향소들로서도 직접 관장하기 힘드는 일정한 업무를 분담시키기 위하여 설치된 임원들이었다. 이때 도감 감관들의 직임도 申飭 이라는 표현에서 감독 검찰 기능임을 알 수 있다. 邑誌의 邑事例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災實踏驗이나 田結을 作夫하는 일은 書員의 직임이었고, 호적사무는 호적 색이 담당하는 업무였다. 충주목의 경우 年分도감은 서원의 업무를 감독 감찰하였고, 호적 도감은 호적색의 업무를 감독 감찰하였다는 표현이 된다. 本文에는 田税감관과 大同감관의 관장업무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각각 전세와 대동세에 관한 收税 업무를 관장하였을 것 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남원현첩보이문성책 에는 감관의 설치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公門百務 酬應多端 各處倉庫糶糴去來大小諸節 長官不能朝夕遍察 設置監官 使之監守防奸 意 非偶然 爲監官者 不得盡其 職任 致有色吏之偸食逋欠 則監色宜被同罪.102) 즉 官家의 일에 수령이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各處의 조적출납을 비롯한 온갖 크고 102) 남원현첩보이문성책 정사 1월 일조 下帖各面 節目.

- 101 - 작은 일들을 수령이 두루 살필 수 없었던 까닭에 監官을 설치하여 감관으로 하여금 監守케 하여(色吏들의) 부정을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였다. 감관의 직임은 수령이 수행해야 할 검찰 기능의 일부를 맡아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상의 고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향소와 감관 도감 등 향임의 핵심적 책무는 읍리 들을 감독 단속하며, 읍리들이 담당하는 일체의 행정실무를 검찰하는 것이었다. 이는 지방 통치 행정상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였다. 그렇기에 商山錄 에서는, 各邑之設置鄕任者 乃所以佐邑長 而出治者也 라 하여, 향임을 수령을 보좌하여 (吏民을) 다스리는 직임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읍리를 감독하고 읍리들이 수행하는 행정실무를 검찰하는 것만이 향임의 직임은 아니었으며, 읍리들이 수행할 수 없는 향임 고유의 직임도 수행하고 있었다. 좌수가 邑務를 摠察하였던 일이며, 창고의 곡물대장인 籍記에 잘못이 없는지 확인하여 좌수 감관이 서명하 고, 창고문을 열고 곡식을 거두어 들일 때 창고에 들인 곡식을 계산하여 감관이 매일 수령 에게 보고하며, 곡식을 나누어 줄 때 分給册을 수정하여 좌수와 감관이 着名하는 일, 창고 의 색리를 擇差함에 있어 不合한 자를 감관이 수령에게 보고하여 改差하였던 일,103) 사망 자를 향임이 覆檢하던 일104)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수령이 공석 중인 경우에는 좌수가 수령권을 대행하여, 兼任 수령이나 討捕營 혹 은 관찰사에게 보고되는 일체의 행정보고를 좌수가 담당하였으며, 민정 군정상의 일체의 통 치행정업무를 좌수가 수행하였다. 다음에서 그 실례를 찾아 보기로 하자. 다음은 향소가 수령을 대신하여 邑內의 雨量을 보고하는 내용이다. ① 報巡營(新昌兼任時 同縣農形牒報事) 原註 爲牒報事 同縣農形段 卽見留鄕所馳報 則十二日四更量始雨 翌日巳時乃止 而不過爲二犂之 雨 緣由并以牒報爲臥乎事 合行.105) 위에서 우리는 충청도 禮山 현감이 新昌현감을 겸임하고 있을 때, 수령이 공석 중이던 신창현의 강우상황을 향소의 보고를 받아서 예산현감이 이를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農事形止나 雨澤形止의 보고는 수령의 책무였는데 수령이 공석일 때 그 직임은 吏房이나 戶長이 아닌 향소가 대행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향소가 將校를 지휘하여 도적을 체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② 去六月分 紙谷面俞生員家逢賊後 賊徒等隱接於其近處是如 因其呈狀 自鄕廳招致矣身(將校高 長金 ; 필자)及刑差 使之捕捉亦爲白去乙 矣身率刑差 直往俞生員家 問其賊徒隱接處後.106) 103) 위와 같음. 104) 烏山文牒 기묘(1756) 11월 12일조 참조. 105) 위의 책 경진(1760) 5월 16일조.

- 102 - 國史館論叢 第22輯 위 기사는 韓山군수가 林川군수를 겸임하고 있을 때 討捕營인 前營에 보고하는 첩보문의 일부인데, 林川郡에 사는 俞생원 집에 도적이 들었다는 보고를 듣고 향청이 將校와 刑差에 게 명하여 도적을 체포케 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이것 역시 수령권의 대행인 것이다. 그 리하여 적도나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좌수가 중죄로 다스려지고 있었다.107) 다음은 空官時 향소가 公納 업무를 관장하고 그 징수 상황을 兼邑 수령에게 보고하고 있 었음을 보여 준다. ③ 除朝仕發行(密陽 : 필자) 座首以下校吏并等待 余(吳宖默 ; 필자) 分付曰莫重公納不可一刻暫 緩無論三班與百姓 如有頑拒者 卽當捉來咸安郡 嚴懲督刷矣 以此惕念 自鄕所 間五日來報.108) 위 기사는 함안군수 오홍묵이 密陽 군수를 겸임하고 있을 때, 밀양을 떠나면서 公納을 독려하고 5일마다 그 상황을 보고할 것을 향소에게 분부하는 내용이다. 뿐만 아니라 범인 의 나포와 行刑을 향소가 행하였다. 다음을 보자. ④ 爲媒報事 縣監以秋夕節日參祭事 往于公州地山所矣 今月十五日本縣留鄕所馳報內 士吉呈 狀內元三光金春太 突入內庭 凌辱矣上典之事 昨已仰訴是白在果 矣內上典 以此不勝憤慨 昨 夜自決是如乎 事極驚駭 金春太元三光兩漢 着枷嚴因 元告所志二張 留鄕以待處分 緣由馳報 亦爲有等以 縣監聞極驚駭 當日還官後 各人等處 發問目取招爲如乎 相考處置敎事.109) 이는 禮山縣에서 충청도 감영에 보고하는 牒報文으로써, 원삼광 김춘태가 士吉의 上典을 능욕하자 분을 이기지 못한 사길의 안 上典이 자결하였으며, 이를 보고 받은 향소가 원삼광 김춘태를 나포하여 칼을 씌워 가두어 두고 公州에 가 있던 예산현감에게 이를 보고하였고, 현감은 사건의 중대함을 인식하고 즉시 예산현으로 돌아와서 사건의 경위를 取招하여 관찰사 에게 보고하며 그 처리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보는 바와 같이 수령이 공석 중인 동안 범인을 체포 수금하는 등의 중요한 사건의 처리들을 이방이나 호장 형방이 아닌 향소가 담당하였다. 다음은 좌수가 哨官인 수령을 대신하여 군대의 點檢을 대행하는 경우이다. ⑤ 所屬各邑鎭聚點段置 亦以同日設行之意 前期發關 各別嚴飭爲白有如乎 右司後哨官寶城 郡守申錫源 以邑務面議事 本道監營至發行是如 報來爲白有等以 該郡聚點段 使其座首曺重 振替行 詮次善啓向敎是事.110) 위 기사는 전라좌수사가 국왕에게 올리는 啓文으로써, 좌수영 소속의 각 邑과 鎭의 水軍 을 취점하도록 公文을 발하였는데, 때마침 右司 後哨官인 보성군수가 公務로 감영에 가고 106) 嘉林報草 무오(1738) 7월 29일조 報前營. 107) 義興縣公事 경진(1700) 6월 11일조 참조. 108) 咸安叢瑣錄 경인(1890) 4월 18일조. 109) 오산문첩 신사(1761) 8월 11일조. 110) 全羅左水營啓錄 同治 5년(1866) 3월 25일조.

- 103 - 없어서 좌수로 하여금 대행케 하고 국왕에게 보고하는 내용이다. 空官時 좌수의 수령권 대 행은 국왕으로부터도 승인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空官時의 일로 생각되지만 刑事 사건의 처리를 관찰사가 좌수에게 지시하고, 관찰 사의 지시에 따라 좌수가 이를 수행하고 직접 관찰사에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다음의 예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⑥ 海州 代陳坊崔完鎭呈狀內 矣妹同生喪夫 依居矣身 而安君五許照永朴石仁金石坤金萬永等數 十輩乘夜突入 破碎門戶 老少家屬 結縛歐打 劫奪寡妹 衣件錢物 亦爲偸去 右漢等稱以義同生 列名成册作弊閭里 嚴査嚴勘事據 題辭內 發遣主人 并捉囚報來向事. 留鄕 同日111) ⑦ 海州座首 朴宗侑手本內 上項諸漢推捉 則安君五金石坤金萬永三漢 已爲逃躲 許照永朴石仁兩人 捉來嚴囚事據題辭 內 自中營爲先査實向事. 同日112) 위 인용문은 황해도 감영의 소송사건 기록인 海營訟案 의 기사로써, ⑥은 海州牧 代陳 坊에 사는 崔完鎭이 남편을 여읜 누이가 자기 집에 의탁해 살고 있는데, 安君五 許照永 등 수십 인이 밤을 틈타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누이를 겁탈하고 재물을 훔쳐 갔다면서 엄히 치 죄해 줄 것을 訴請함에 따라, 황해 관찰사가 해주 향청에 지시하여 안군오 등을 잡아 가두 고 보고하도록 조처하는 내용이며, ⑦은 관찰사의 지시에 따라 座首 朴宗侑가 허조영 등을 잡아가두고 관찰사에게 보고하자 이에 관찰사가 中營에 지시하여 사실을 조사하도록 조처하 는 내용이다. 이처럼 수령 부재시 좌수의 수령권 대행은, 수령의 양해나 邑規에 의한 것이 아니고 국왕이 승인하고 관찰사에 의해서 공인된 제도적 내지는 정책적 차원의 것이었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향임은 邑吏의 감독과 읍리들이 수행하는 행정 실무의 검찰 외 에, 邑務의 摠察, 籍記의 서명, 창고에 반입 반출되는 곡물의 파악, 色吏의 改差제청, 사망 자의 覆檢 등 고유의 중요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특히 수령 不在時의 모든 읍무는 좌수가 수령을 대신하여 집행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 향임의 직임은 지방통치 행정상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3. 수령 읍리와 향임의 관계 조선후기 지방통치 행정체계는 군현의 행정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읍리 계열과 읍리를 감 111) 海營訟案 ( 各司謄錄 26, 所收) 갑인(1854) 3월 15일조. 112) 위와 같음.

- 104 - 國史館論叢 第22輯 독 규찰하고 읍리들이 분담하는 행정실무를 검찰하며, 동시에 자기 고유의 일정한 행정상의 직임을 담당하는 향임계열로 二元化 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지방통치 행정에 대 한 명확한 이해, 지방통치 행정상에서의 향임의 기능에 대한 명쾌한 이해를 위해서는 향임 과 수령 향임과 읍리의 관계에 대한 구조적 해명이 선행되어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수령과 향임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우리는 앞에서 조선후기 향청이 지방행정기구화 하였음을 알았으며, 향임의 설치 이유가 수령이 수행해야 할 邑吏 감독기능의 일부를 맡아 수행케 하려는 것이었음도 알았다. 뿐만 아니라 평소 座首가 邑務를 摠察 하였음도, 수령 不在時의 일체의 邑務는 좌수가 代行하였 음도 알았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향임이 수령을 보좌하며, 수령의 지휘 감독하에 수령의 지시에 따라 지방행정업무를 담당해야 할 수령 隸下의 지방관속이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수령과 향임의 이러한 관계는 비록 향청의 望報가 전제되기는 하지만 향소를 수령이 차출하고 있었고, 수령이 향소들에게 差帖을 발급113)하고 있었던 사실에서 구체적으로 확 인된다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있어 향임의 기능이 배제된 지방행정이란 사실상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향임들은 매일 관청에 나아가 수령의 지시에 쫓아 읍무를 수행하였던 것이라 여겨진다. 다음에서 그러한 단면을 발견할 수 있다. ① 朝仕 余(吳宖默 ; 필자) 語於留鄕公兄等曰 從玆以往 凡務之切於民生者 一并矯革 至於公 錢捧納之際 第當親捧 樻封後印尺施行 至於結政 最是災歲民生之大關係者也 自明日 親往各 面各洞 田畓之被災與洞樣稍饒尤甚者 及各洞戶首 并皆一一親審 然後必當殫心力竭智慮 思得 其效而措處 以此知悉別定知事公正一吏 使之隨行.114) ② 朝仕 以內院寺事 招問鄕所及公兄 則果有是事云 故使之詳查以稟事 分付.115) ①은 慈仁현감 오홍묵이 朝仕에서 향소 공형 등에게 지시한 내용으로써, 앞으로는 公錢 은 친히 捧納하고 印尺(수령증)을 발급할 것이며, 田政에 있어서도 災實의 실상을 친히 審 檢하여 조처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일에 능한 공정한 읍리를 한 사람 따로 정하여 수행케 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② 또한 固城 군수였던 오홍목이 朝仕에서 향소 공형들에게 內院寺 의 일을 묻고는 이를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있는 내용이다. 여기서 朝仕란 지방관청의 官屬들이 아침에 출근하여 일과를 시작하기에 앞서 수령에게 인사를 올리던 참 모회의와 같은 것이었다. 이들 두 사료에서 우리는 향소들이 공형과 함께 매일 수령의 집 무처에 나아가 施政方針을 듣고 혹은 행정상의 지시를 받아 이를 수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향임이 완전히 수령의 官屬化 하였음을 의미한다. 수령과 향임의 관계가 이러하였으므로 향임은 수령의 감독과 지시를 받으며 邑務를 수행 113) 李樹健, 慶北地方古文書集成 (영남대출판부, 1981) p. 804 留鄕別監差帖 참조. 114) 慈仁叢瑣錄 무자(1888) 9월 20일조. 115) 固城叢瑣錄 ( 한국지방사자료총서 18, 여강출판사, 1987, 所收) 계사(1893) 4월 16일조.

- 105 - 하고 읍무수행 중 비위나 부정이 발견되면 향임은 수령에 의해 治罪되었다. 1783년 경기도 陽智縣 座首 尹宗茂가 倉監官을 겸하고 있으면서 還穀 1920여 석을 反作하였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현감으로부터 問招와 杖刑을 받았던 例116)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수령은 비가 온 뒤의 수해현황을 관찰사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향소를 파견하여 이를 조 사케 하는가 하면,117) 山訟을 처리하기 위하여 향소를 파견하여 그 경위를 조사케 하는 등118) 읍리들이 수행하던 단순 반복업무 외의 對民 업무들을 향임에게 지시하여 수행하였 으며, 때로는 수령 자신이 담당해야 할 사건의 처리를 향임에게 위임하여 처리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음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③ 西面南松丁化民崔達鉉狀以 首刑吏子斗昱 民之馬一匹 丙寅春折價三十兩持去 而至今不報事 推給事 題內 果如所訴 則金吏之行事 無乃賊汗乎 嚴査推給事. 鄕廳.119) ④ 昆一面白也里金元一狀以 矣身牛一隻 以禾利喂養於吾白里朴春石家矣 城底人金順成 稱有債 錢於朴民 牛隻奪去 推給事 題內 査實推給後 形止來稟事. 鄕廳.120) 위 ③은 전라도 靈巖郡 西面 南松丁에 사는 崔達鉉이 首刑吏의 아들 斗昱에게 30냥을 받기 로 말 한 필을 판 뒤 아직껏 돈을 받지 못했으니 찾아 달라고 官家에 청원하자, 영암 군수가 엄히 조사하여 사건을 해결할 것을 향청에 위임하는 내용이며, ④는 영암군 昆一面 白也里에 사는 金元一이 朴春石에게 禾利로 맡겨 기르던 소 한 마리를 박춘석의 채권자인 金順成이 빼 앗아 갔으니 찾아 달라고 訴請하자, 영암 군수가 사실을 조사하여 해결한 뒤에 보고하라고 향 청에 위임하는 내용으로서 양자 모두 수령이 사건의 처리를 향임들에게 위임한 경우이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향임은 지방통치 행정상에 있어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였던 수령 을 대신하여 읍리들을 감독 규찰하였고, 매일 수령의 집무처에 나아가 수령의 지시를 받아 행정업무를 수행하였으며, 民家의 爭訟 문제를 비롯한 허다한 對民 업무를 수령으로부터 위임받아 처리하는 등 실로 지방통치 행정상에 있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던 수령 예하의 非官人的 属僚들이었다. 이제 향임과 읍리의 관계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기로 하자. 前述한 바와 같이 조선후기의 지방행정체계가 향임계열과 읍리계열로 兩大別되어 있고, 향임의 핵심적 책무가 읍리를 감 독 규찰하고 읍리들이 수행하는 邑務를 검찰하는 것이었으며, 읍리들의 핵심 임무가 邑內 일 체의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것이었으므로, 향임과 읍리의 관계는 감독하고 감독 받으며, 검찰 하고 검찰 받는 관계였음이 자명하다. 그러나 행정체계가 二元化 되어 있었으므로 향임과 116) 京畿道監營狀啓謄錄 ( 各司謄錄 1, 所收) 계묘(1783) 12월 5일조 참조. 117) 麾事摠要 28조항 참조. 118) 위의 책 59조항 참조. 119) 靈巖郡所志謄錄書册 ( 한국지방사자료총서 12, 여강출판사, 1987, 所收) 무술(1838) 7 월 25일조. 120) 위의 책 무술 7월 30일조.

- 106 - 國史館論叢 第22輯 읍리의 이러한 관계는 기능적 구분에 의한 것일 뿐, 단일한 지배체계상의 상하 관계에 있었 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모든 읍리와, 官奴婢 使令들을 檢束하던 行首는 首吏인 吏房과 戶長이 거느리고 검찰하며, 이방과 호장은 향청으로 하여금 규찰토록 하고 있었다.121) 향청과 吏廳(作廳)은 수령 예하의 兩大 지방행정기구였으며, 운영체계는 향청의 首任인 座首와 作廳의 首任인 吏房으로 하여금 각각 향임과 읍리를 통솔케 하는 兩頭체제였었다. 그러면서도 기능적으로 구분하여 향임으로 하여금 읍리들을 감독 규찰하고 읍리들이 수행 하는 행정실무를 검찰케 함으로써, 향임의 기능을 읍리의 그것에 비하여 상위 기능으로 구 조화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행정체계의 구조화는 원래 향임설치의 의도가 수령 혼자서 검 찰할 수 없는 邑務를 향임으로 하여금 監守케 하여 作奸을 방지하려던 것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국초 이래 조선정부가 꾸준히 추구하여 오던 士族優位의 지방통치 행정체계의 확립을 위해 고안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조선왕조가 지배계층인 사족에게 사회적으로 천 시되던 吏職을 담당시킬 수도 없었거니와 그렇다고 체제유지의 기반을 사족에게 두고 있으 면서 재지사족을 배제한 읍리주도형의 지방행정체계를 지향할 수도 없었으며, 또 재지사족 의 참여 없는 지방민 지배란 사실상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에 사족을 향임으로 편성하여 지 방행정 체계상에서 읍리에 대하여 상위기능자로서의 일정한 기능을 승인한 것이라고 이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一邑一官주의 정책의 보완이며, 지방하부 행정조직에의 중앙 행정력의 확대이며 조직화였다. 다만 조선정부가 향청을 지방행정기구화 한 조선후기 단계 에서 향임이 士族 아닌 요호부민(新鄕)으로 대체되었던 것은 상품화폐 경제의 전개와 신분 제의 동요 등 조선후기 사회 경제적 발전의 결과였다. 향임과 읍리의 관계는 향임이 읍리를 감독 검찰하는 등 읍리의 그것에 비하여 상위기능 을 수행하고 있고, 좌수가 邑務를 총괄하였으며, 이방이 읍리를 차출할 때 먼저 향청에 의 론케 하고 吏房이 차출한 읍리 중에 죄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향청으로 하여금 수령에게 고하여 이방을 파면케 하는 등122) 향임의 우위는 인정되고 있었지만, 二元的 행정체계의 유지상 향임과 읍리들의 업무를 불완전하게나마 구분하여 일정한 직능 이상의 상호 영역의 침범은 규제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사를 우리는 洪良浩와 정약용이 수령들 에게 당부했던 다음 말에서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⑤ 內而鄕任軍校吏隸 各分職掌 各立統屬 不相侵混.123) ⑥ 牧宜私爲約束曰 鄕廳笞不過十度 止於邑民(外村之民 勿許之) 吏廳笞不過十度 止於官屬(凡 民勿許之) 犯者嚴治.124) 121) 治郡要訣 ( 朝鮮民政資料 牧民篇 上, 所收) 26조항, 28조항 참조. 122) 商山錄 ( 한국지방사자료총서 3, 여강출판사, 1987, 所收) 기축(1745)년 節目, 一. 各色差出之際 吏房極擇可合者 先議於鄕廳後 備望告官 以爲受官差出貼之地爲乎矣 所差任掌 中 若有犯科 則當初不善薦望之吏房 不可無罪 使鄕廳告官汰去. 123) 牧民大方 ( 朝鮮民政資料 牧民篇 上, 所收) 吏典之屬.

- 107 - 즉 ⑤는 鄕任과 軍校 吏隸들에게 각각 직무를 분장하고 통솔할 下屬을 정하여 서로 침범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며, ⑥은 향청의 治罪權은 邑民에 한정하고(外村民에 대하여는 허 락치 말라는 註記의 외촌민이란 누구를 의미하는지 필자로서는 확실한 이해를 가지지 못하 고 있다) 吏廳의 치죄권은 관속에 한정하고 관속 이외의 民에는 허용치 말며 이를 어기면 엄히 다스리라는 것으로써, 여기서 우리는 향임과 읍리 간에 직무를 구분하여 영역의 침범 을 규제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으며, 막연하게나마 향임은 그 수행업무의 핵심영역이 對民 이며 읍리들의 핵심적 수행업무는 관청내에서의 행정실무였음을 알 수 있다. 二元的 행정체계는 상호간의 유기적인 협조와 함께 이질적인 계열 상호간의 견제기능도 동시에 기대했던 의도적 소산으로 이해되며, 균형을 이루는 二元體系를 유지하려는 수령 (정부)의 노력은 朝仕에 향소와 公兄을 同參케 하였던 데에서도 엿볼 수 있거니와, 민소를 사안에 따라서 향소가 아닌 읍리들에게 그 처리를 지시하거나 위임하였던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⑦ 昆二面龍池金召史狀以 家夫沈雙同官匠保當納矣 今月初身死填代事 報來向事. 該色 面任.125) ⑧ 住(巖)朴平孫呈以 本面昨年書記處 災結七負八束 推給事 訴 則卽刻推給向事. 吏房.126) 題內 自該面 査實 題 查實後 果如所 위 ⑦은 영암군 곤이면에 사는 김소사가 남편 심쌍동이 죽었으니 官匠保를 다른 사람으 로 지정해 달라고 요청하자 군수가 邑吏와 面任에게 사실을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며, ⑧은 順天府 住巖面에 사는 박평손이 작년 주암면 서기로부터 災結 7부 8속을 찾아 줄 것을 요청하자 府使가 사실을 조사하여 처리하도록 이방에게 그 처리를 위임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民訴들 중에서 행정적 청원이나 행정소적인 訴는 수령이 읍리에게 지시 또는 위임하여 처리하고 있었다. 이는 앞에서 살펴 본 바 있는 地方民의 범죄의 재판과 처 벌, 지방민 간의 분쟁해결 등 사법상의 民訴들을 향소에 위임하여 처리하던 것과 좋은 대 조를 이루는 것이다. 향임과 읍리는 수령을 정점으로 그 좌 우익을 이루고서, 감독하고 감독받으며 검찰하고 검찰 받는 관계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능적 구분에 의한 것일 뿐 서로의 영역침범은 규제되었으며, 상호 견제와 협조를 유지하면서 수령의 지시를 받아 지방통치행정을 유기적 으로 수행하여야 했던 관계였다. 이와 같이 향청을 행정기구화 하여 지방행정체계를 二元化한 것은 향임과 읍리 간의 협 조와 견제를 통한 효과적인 지방민지배의 실현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실효에 대하여는 124) 목민심서 吏典 用人조. 125) 영암군소지등서책 무술(1838) 7월 20일조. 126) (順天) 民訴抄槪册 ( 한국지방사자료총서, 所收) 기축(1889) 12월 8일조.

- 108 - 國史館論叢 第22輯 이에 관한 별도의 글이 요구되기는 하지만 회의적이라 할 수 있다. 監官이 色吏와 더불어 탐학하고127) 좌수가 읍리와 결탁하여 수령을 속이고 은폐하며,128) 읍민이 관가에 호소하 고자 하는 억울한 일들이 대개는 권세 있는 아전이나 간사한 좌수와 관련되어129) 있었을 만큼 향임 읍리 간의 결탁과 향임의 타락과 부패가 극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향임의 타락과 부패의 일차적 원인은 향임을 官職化(國任化) 하지 못하였던 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17 19세기에 걸쳐 柳馨遠을 비롯하여 魏伯珪 丁若鏞 등 여러 실학자들이 鄕任을 관직화 할 것을 주장130)하였던 것이, 중앙정부 행정력의 확대 강 화와 함께 향임들의 신분과 지위의 상승을 제도화 함으로써 그 善治意志를 고무하려는 공 통인식의 결과였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Ⅴ. 結 語 선초의 留鄕所는 在地士族들의 향촌자율기구였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지방민지배에 있어 재지사족들의 협조가 필요하였고 또 장차는 이들을 국가권력에 포섭코자 하는 것이 그 정 책 志向이었으며, 재지사족들도 사족이 주도하는 향촌사회를 건설하고 나아가서는 지방민 지배상에서의 일정한 참여를 기대하였으므로, 후대로 오면서 鄕任들은 필연적으로 지방통 치 행정상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향청은 점차 수령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진행이 비록 완만하였지만 사족주도의 향촌사회 재편이 완성된 16세기 후엽에 이르면 鄕所가 호적 창고 업무를 비롯 조적 업무까지를 관장하여 지방통치 행정에 폭 넓게 참여하게 되는데, 이는 鄕任들이 守令에게 장악되고, 향청이 지방행정기구화해 가는 추이를 들어낸 것이며, 17세기 초의 京在所 혁파도 실은 재지사족들이 수령권에 장악되어 더 이상 경재소가 필요 없게 된 사회적 변화의 결과였다. 경재소 혁파는 향청의 성격 변화에 결정적 사건이었다. 향임 차출권이 수령에게 장악되 고 향청의 기능확대와 함께 監官 都監이 신설되는 등 그 기구가 확대되며, 법전에 향임들의 公罪 규정이 제정되는 등 향청에 일대 변신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7세기 중엽까지에는 127) 정조실록 5년 11월 기해삭 具修溫 상소 참조. 128) 목민심서 解官 乞宥조, 今賤族奸民 乃爲座首 與吏朋奸 欺蔽萬狀. 129) 목민심서 刑典 廳訟조, 每見村野小民 欲訴其寃 乃其事根 或抵權吏 或抵奸丞 恐其觸忤 不 敢明說. 130) 유형원은 좌수를 典正(종 9품)으로 바꿀 것을 주장하였고( 반계수록 補遺 郡縣制), 위백규 는 좌수를 丞, 별감을 主簿로 고쳐 入仕路로 삼을 것을 주장 하였으며( 存齋全書 政鉉新譜 관직조), 정약용은 좌수를 鄕大丞, 별감을 左右副丞으로 하여 관인화 할 것을 주장하였다( 목 민심서 吏典 用人조),

- 109 - 향청이 모두 邑基에 移建되고, 향청의 설립주체가 鄕의 父老에서 수령으로 변하게 되며, 17세기 말엽에는 향임이 호적 창고 漕轉 巡山 군사업무 등 일체의 읍무를 관장하게 되고 17세기 말엽에는 通引 貢生 驅從 使令 등 관속이 향청에 배치되는 향청의 구조적 변화와 公署조에 향청이 作廳과 함께 기재되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는 17세 기 말엽에 향청이 이미 지방행정기구화 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7세기 말엽에 향청이 행정기구화 하였음을 시사하는 결정적인 단서는 18세기 전엽에 좌수가 수령권을 대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향청이 행정기구화 하면서 18세기 후엽 실은 자료를 발굴하지 못해서 일 뿐 그 이전의 일로 생각되지만 향소가 수령 군관 아전들과 함께 관직으로 인식되고 있 었으며, 향청 구성원들의 급여와 향청의 경상비가 지방관청의 관곡으로 지출되며, 19세기 에는 향청에 保와 전답이 배정되고 있다. 조선후기 향청이 지방행정기구였음은 하나의 엄 연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조선왕조의 지방통치에 대한 政策志向은 지방 하부사회조직을 행정조직화하여 가는 것이 었으며, 국가권력이 미약했던 시기에 자율에 일임했던 향촌사회조직에 국가권력을 침투 확 대하여 포섭하여 가는 것이었다. 이것은 필연적인 국가권력의 신장과정이었으며, 이러한 역 사의 진행은 현대적 자치의 요구가 증대되는 어느 시기까지 궤도 수정 없이 계속되는 것이 었다고 생각된다. 향청이 국가권력에 현저히 포섭되어 가던 17 19세기에 있어서 마저 사 회개혁의식이 투철하고 미래지향적이었던 실학자들조차 향소의 官人化를 주장하였던 것은 그 시기의 역사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조선후기 향청의 구조는 지방통치행정에 참여하는 좌수 별감 감관 도감 등 上層部와, 향 청자체의 존립유지에 봉사하던 所吏 통인 서원 공생 小童 사령 구종 등의 下層部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鄕任은 좌수 별감 감관 도감을 이르는 호칭이었다. 향임 중에서도 좌수 별감은 鄕所라 하여 구별하였으며, 그 기능도 감관 도감과는 달랐다. 향소가 전체 읍리들의 행정실 무를 감독 검찰할 때, 감관 도감은 특정의 단일 업무를 관장하여 그 업무를 수행하는 읍리 를 검찰하였으며, 그들 역시 향소의 검찰을 받았다. 향임은 읍리를 감독 검찰하는 외에도 여러 가지 고유의 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籍記에 서명하던 일, 庫穀의 출입을 수령에게 보고하던 일, 사망자를 覆檢하던 일, 面任을 천거하 던 일 등을 비롯하여, 請願이나 訴訟을 처리하는 일, 수령부재시 수령권을 대행하여 일체의 邑務를 처리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향임의 직임은 읍리의 직임에 비하여 상위 기능에 속하는 것이었다. 조선후기의 지방통치 행정체계는 수령을 정점으로 향임계열과 읍리계열로 직능적으로 二 元化 되어 읍리들이 일반 행정업무를 담당할 때, 향임은 읍리들이 수행하는 업무를 감독 검 찰하는 것을 그 핵심업무로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향청과 作廳을 수령 예하의 이대 행정 기구로 하여 향청의 首任인 좌수와 작청의 수임인 吏房이, 각각 향임 면임과 읍리 관속들을